여행지 : 추자도(楸子島)

 

여행일 : ‘14. 8. 23() - 24()

 

전체 여행 일정

8. 23() : 추자도올레길(제주 올레길 18-1구간) 트레킹

8. 24() : 유람선 투어

 

소 재 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

함께한 산악회 : 온라인산악회

 

특징 : 행정구역상 본섬(母島)인 제주도(濟州道)가 섬()이니 추자도는 섬 속의 섬이라 부른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추자도라는 이름은 섬의 모습이 흡사 바다 한가운데에 가래나무(추자) 열매를 흩뿌려 놓은 것 같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추자도와 추포도,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有人島)와 무인도(無人島) 38개 등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추자군도(楸子群島)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완도와 제주도의 딱 중간쯤에 위치한 추자도는 행정구역은 제주도에 속해있지만 말투부터 생활문화까지 제주 본섬과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전라도에 더 가까운 것이다. 섬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들려오는 귀에 익은 전라도 사투리가 이를 증명한다. 아마 오랫동안 전라도 땅으로 지내왔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추자도는 후풍도(候風島)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남 해남이나 강진에서 사흘 뱃길이던 시절, 바람을 피해 잠시 머물며 순풍을 기다린다 하여 후풍도라 했다고 한다. 실제로 1271년 삼별초의 난이 났을 때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폭풍우를 피해 추자도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추자도 가는 길

추자도로 가기 위해서는 전남 목포나 완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거나, 제주에서 추자행 쾌속선을 타는 방법이 있는데 온라인산악회에서는 완도항을 이용해서 추자도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진도의 벽파진으로 나오는 배편을 이용했다. 완도항에서 추자도(하추자도 신양항)로 들어가는 배편은 한일카페리 3가 매일 오전 8시에 1회씩 운행한다. 참고로 이 배는 제주도에 들렀다가 다시 완도항으로 돌아가는데 하추자도에서 오후 440분에 출발한다. 운임(運賃)은 편도 3등실 기준으로 17,300원이다.

 

 

 

추자도 여행 : 하추자도 올레길 트레킹

 

코스 : 신양항모진이 몽돌해안황경한의 묘신대산전망대예초리석장승돈대산 정상묵리교차로정수장추자대교

 

선착장을 빠져나와 신양리의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서 올레길 트레킹(trekking)이 시작된다. 제주 올레길 18-1코스인 추자도 구간을 걷게 되는 것이다. 추자 올레는 제주 올레 21개 코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코스라고 한다. 해발 고도는 100m대로 야트막하지만, 산봉우리와 산봉우리로 이어지는 길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산책이라기보다는 등산에 가깝기 때문이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 얼마간 걷다가 오른편 샛길로 빠져나가면 모진이 몽돌해안이 나온다. ‘추자십경(楸子10)’의 여섯 번째 비경인 장작평사(長作平沙)’가 바로 이곳이다. 작고 둥그런 자갈로 이루어진 해안(海岸)은 해수욕장을 겸하고 있다. 이런 곳에서는 몽돌에 바닷물이 부딪히는 소리에 집중해 보고 싶다. 그러나 하늘빛을 닮은 바다를 한 번 더 바라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길을 나서고 만다. 이제 겨우 투어를 시작했을 따름이니 아직도 갈 길이 먼 것이다.

 

 

 

모진이 몽돌해안에서 다음 행선지인 황경한의 묘까지는 시멘트포장 도로로 연결된다. 만일 포장도로가 싫은 사람들이라면 도로의 왼쪽 언덕 위로 올라가면 된다. 도로와 멀어지지 않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산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황경한의 묘()’가 나온다. 황경한은 19세기에 추자도에 살던 한 어부(漁夫)의 이름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깔끔하게 단장을 하고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 위업(偉業)은커녕 선행(善行)도 딱히 전하는 게 없는데도 말이다. 그의 무덤은 성지처럼 꾸민 것은 천주교 제주교구라고 한다. 교구차원에서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조성한 것이다. 묘비(墓碑)에는 순교자 황사영 신앙의 증인 정난주의 아들 황경한의 묘라고 적혀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이 황사영 백서 사건의 당사자 황사영(17751801)의 아들이란다. 그렇다면 황사영의 아들이 어쩌다 이런 절해고도(絶海孤島)에 묻혔을까. 남편 황사영이 서울에서 처형된 후 그의 아내 정난주는 두 살 아들 경한을 안고 제주로 유배를 갔다. 정난주는 배가 추자도를 지날 때 섬 동쪽 갯바위에 아기를 내려놓고 떠났다. 아들만큼은 죄인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정난주는 제주 대정에서 관노로 38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기는 어미의 바램대로 예초리 어부 오씨가 거둬 제 자식처럼 키웠다. 경한이 성년이 되자 오씨는 꼭꼭 숨겨뒀던 내력을 들려줬다고 한다. 그렇지만 모자(母子)는 평생 재회(再會)하지 못했단다. 뒤늦게라도 화를 입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묘역(墓域)의 옆에는 샘터가 하나 있다. ‘황경한의 눈물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 우물은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애끓는 소망에 하늘이 탄복하여 내린 선물이란다. 그 때문인지 사시사철 마르는 날이 없다고 한다.

 

 

황경한의 묘역을 빠져나와 신대산 전망대로 향한다. 이 길도 역시 시멘트포장도로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 구간은 별도의 산길이 없으므로 따분하지만 도로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해안선(海岸線)을 이루고 있는 바위절벽들을 구경하다보면 따분함은 금방 사라져버릴 것이다. 푸른 하늘과 짙푸른 바다 그리고 해안절벽이 비현실적인 색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거기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인동초(忍冬草)는 차라리 보너스이다. 그저 찬찬히 걸으며 추자군도가 드러내는 표정들 하나하나를 담아가며 발걸음을 옮긴다.

 

 

신대산 전망대로 가고 있는데 산행대장이 부른다. 함께 가고 있던 집사람은 옆에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오른편 끝자락에 보이는 바위가 뭘 닮았느냐고 물어온다. 대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던지 그는 정답부터 알려주고 본다. 남근석(男根石)이란다. ‘물건만 실하면 됐지 생김세가 무에 그리 중요합니까.‘ 참으로 못생겼다는 내 말에 대한 집사람의 반박이다. 맞는 말이다.

 

 

 

신대산 전망대는 도로에서 우측으로 약간 비켜나 있다. 웬만한 운동장 크기의 전망대에 서면 다도해(多島海)의 풍광이 한눈에 펼쳐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은 연무(煙舞)가 이런 풍광의 발목을 잡고 있다. 때문에 추포도와 횡간도 등 제법 덩치가 있는 섬들만 시야(視野)에 들어올 따름이다. 그렇지만 날씨가 좋은 날에는 염섬과 수령섬, 악생이 검등여는 물론 저 멀리 전라도의 보길도까지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신대산전망대에서 다음 행선지인 예초리까지는 도로가 아닌 해안선(海岸線)을 따라 걷게 된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멋진 길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숲이 울창하고 심심찮게 열리는 다도해(多島海) 풍광이 빼어나다는 얘기이다. 이런 곳에서는 구태여 발길을 재촉할 필요가 없다. 서서히 걸으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화를 주고 있는 주변 풍광을 하나도 빠짐없이 가슴에 담아볼 일이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앞서가던 산행대장이 바닷가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맑디맑은 바닷물에 손이라도 담가보라면서 말이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집사람의 손놀림이 바빠진다. 저녁 술안주 감을 잡겠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꽤 많은 바다고동을 잡았지만 다음날 아침에 방생(放生)할 수밖에 없었다. 숙소에 취사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레길을 걷다보면 심심찮게 낚시꾼들을 만나게 된다. 낚시꾼들 사이에 '바다낚시 천국'으로 소문이 났다는 얘기가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추자도는 앉는 곳마다 뛰어난 낚시터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섬을 둘러싼 모든 갯바위, 어선을 타고 나가 발붙일 수 있는 무인도가 모두 낚시 포인트(point)라는 것이다. 참고로 추자도에는 봄과 가을에는 참돔과 돌돔, 여름이면 농어와 돌돔, 겨울에는 감성돔과 같은 고급 어종이 넘쳐난다고 한다.

 

 

 

 

제법 큰 포구인 예초리를 지나 얼마간 더 걸으면 왼편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벼랑 아래에 돌을 깎아 만든 장승이 하나 세워져 있다. 그래서 이름도 ()장승이란다. 그러나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승은 돌로 만들어진 게 아니고 나무로 만들어졌었다. 그래서 장승의 이름도 목()장승이었다. 아주 오랜 옛날 이곳 엄바위(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바위의 이름이 엄바위인 모양이다)에 억발장사가 살았다고 한다. 그는 엄바위 아래의 바닷가에 있는 다섯 개의 장사 공돌을 가지고 공기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앞바다에 있는 횡간도로 건너뛰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초리와 횡간도 사람들은 서로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어길 경우 청춘과부가 된다는 속설(俗說)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누군가가 억발장사를 상징하는 목장승을 깎아 세웠고, 이곳 예초리 사람들은 해마다 걸궁(제주도에서 음력 정월부터 2월까지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행하는 풍물 굿)을 할 때에는 이곳 엄바위 앞에서 한마당을 놀면서 소원을 비는 풍속(風俗)이 생겼다고 한다.

 

 

 

 

 

석장승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왼편으로 오솔길 하나가 열린다. 추억이 담긴 학교 가는 샛길이란다. 이 길은 예초리에 사는 아이들이 신양리에 있는 학교에 다닐 때 이용하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해안을 따라 난 길을 따를 경우 너무 멀기 돌아야하기 때문에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지름길을 새로 내었던 모양이다. 지름길이어선지 시멘트로 만든 계단을 밟고 산등성이까지 올랐다가 떨어지면 금방 고갯마루에 내려서게 된다.

 

 

 

고갯마루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고갯마루를 곧장 넘어가면 신양리, 돈대산으로 오르려면 오른편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포장임도로 들어서야 한다. 입구가 간이 쉼터를 겸한 정류장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찾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임도는 큰 오르내림이 없이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그 때문에 얼마 동안은 다도해 풍광을 즐길 수 없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들꽃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특히 하얗고 노랗게 꽃을 피운 인동초가 인상적이다.

 

 

 

돈대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중간 중간 갈림길이 나타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파랑과 주황색 리본을 단 올레 시그널(signal)을 따라 정상방향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들머리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통신사(通信社)의 중계소를 지나면 포장 임도는 끝을 맺는다. 자갈 깔린 흙길에 이어 인조목(人造木)으로 만든 가파른 계단을 잠시 오르면 드디어 돈대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외에도 팔각정과 망원경(望遠鏡)을 갖춘 전망대 등 다양한 시설들을 설치해 놓았다. 정상을 아예 공원(公園)으로 바꾸어버린 모양새이다.

 

 

 

 

 

정상에 서면 남쪽으로 신양항과 고즈넉한 해안(海岸) 마을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뒤에 웅크리고 있는 섬은 아마 사자섬(수덕도)일 것이다. 그 옆으로 옛날 유배길에 오른 관원들이 관복을 벗고 평민으로 돌아가는 의식을 치렀다는 관탈섬과 청도, 절명여, 밖미역섬 등 크고 작은 섬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북쪽에도 수많은 섬들이 널브러져 있다. 하나 아쉬운 것은 한라산이 시야(視野)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글에선가 바다 건너 한라산까지도 보인다고 했지만 오늘은 연무(煙舞) 뒤로 숨어버렸다. 아무튼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해안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짙푸른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보는 이의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든다.

 

 

 

산길은 정상을 지나서도 끊임없이 눈요깃감을 제공한다. 능선에서의 조망(眺望)이 뛰어나다는 얘기이다. 산 아래 펼쳐진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올망졸망한 섬들, 그리고 깎아지른 기암절벽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조망을 즐기다가 제3담수장이 내려다보일 즈음이면 능선은 울창한 숲으로 변한다. 숲만 울창한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나무가 듬성듬성 하기라도 할양이면 어김없이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게 웃자란 풀들이 길손을 맞는다. 덕분에 길가에는 모시풀이나 망초 등 야생화(野生花)들이 그득하다.

 

 

울창한 숲길이 잠깐 열리는가 싶더니 주요 갈림길 중의 하나인 '묵리 고갯마루'에 내려선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담수장, 곧장 진행할 경우에는 능선을 타고 담수장의 상부를 지나 추자대교로 가게 된다. 좌우의 갈림길을 무시하고 곧장 능선길을 따르면 조금 후에 펜스(fence)에 둘러싸인 시설 하나가 보인다. 지도에 정수장(淨水場)으로 표기된 지점이다. 어디선가 끌어올린 물을 이곳에 저장했다가 주민들에게 공급하는 모양이다. 과거 추자도는 물이 부족해 식수의 일부분을 빗물에 의존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2012년에 담수(淡水) 정수화시설을 갖추고 난 뒤 1인당 급수량(給水量)을 하루 100리터에서 240리터로 늘릴 수 있게 됐다. 추자도 주민들로 봐서는 엄청나게 고마운 시설인 셈이다.

 

 

 

 

추자교로 내려가다 보면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의 생김새가 제주도에서 보던 것들과 비슷한 것이다. 이곳에는 말()이나 소()가 없는데 왜 묘의 주변에 돌담을 쌓았을까.

 

 

담수장을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포장도로로 올라서게 된다. 그러나 그 거리는 짧다. 50m도 채 되지 않아서 또 다시 도로와 헤어져 오른편 샛길로 내려서기 때문이다. 이어서 제법 경사(傾斜)가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15분 정도 더 진행하면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를 잇는 추자대교(大橋)에 이르게 된다. 추자대교는 기존의 다리가 붕괴(崩壞)되면서 1995년에 새로 확장 개통한 다리이다.

 

 

 

 

추자대교의 양쪽 끝은 깔끔한 공원(公園)을 만들어 놓아 추자도 올레길을 찾는 관광객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하추자도 방향의 공원에는 참조기 조형물(造形物)을 설치해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사진촬영을 하기에 딱 좋게끔 만들어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