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베트남(Viet Nam)

 

여행일 : ‘16. 1. 25() - 29()

여행지 : 하노이, 하롱베이

 

여행 둘째 날 : 육지의 볼거리를 찾아서, 하롱베이 시가지 투어

 

특징 : 하롱베이(Ha Long Bay)는 베트남 동북부 중국 국경 근처 1,553의 만을 이르는 명칭이다. 중심 해역 434km²는 천혜의 경관으로 1994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됐다. 석회암 지대에 2억 년간 화학적 용해와 침식이 반복돼 만든 풍경으로 매년 100만 명의 외국인을 불러 모으는 명소다. 그 여행객들은 대부분 하롱베이에서 1박을 한다. 개중에는 크루즈에서 1박을 하면서 하롱베이만을 유람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롱베이 시가지에서 머무른다. 호텔과 식당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얼마 후에는 유원지까지 생긴다니 가까운 시일 내에 명실상부한 일류 관광지로 발돋움하지 않을까 싶다.


 

하롱베이 선상(船上) 투어를 끝내고 돌아온 시가지, 커다란 타워(tower)가 길손을 맞는다. 유원지(遊園地) 시설을 만들고 있다고 하던데, 그 공사현장이 아닐까 싶다.



첫 번째로 들르는 곳은 커피박물관이다. 말이 박물관이지 커피를 파는 상점으로 보면 된다. 물론 패키지여행 상품에 포함된 옵션(option)이고 말이다. ‘패키지여행에서의 쇼핑(shopping)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저렴한 가격에 맞춰 여행상품을 설계하다보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싼 가격으로 여행을 따라 나섰으니 그 정도쯤은 감수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한두 가지 쯤 사주어야 하는 센스(sense)도 필요하다.



안으로 들면 커피에 대한 설명과 함께 금방 만들어낸 커피가 제공된다. 여러 종류가 나오는데 그 맛이 약간씩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양하지 말고 마셔보는 게 좋다.





베트남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커피생산지라고 한다. 그래선지 다양한 종류의 커피들을 판매하고 있다. 베트남의 커피는 쓴맛이 강해 연유(쓰어)를 타서 달게 마시는 카페 쓰어다(ca phe sua da)’가 인기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다람쥐똥커피이다. 다람쥐가 커피 체리를 먹고 배설한 파치먼트(parchment, 커피열매의 껍질)를 가공한 커피를 말한다. 그러니 대량생산이 불가능할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당연히 가장 비싼 커피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난 서슴없이 주워들고 본다. 그것도 여러 개이다. 선물용으로 이만한 것이 없을 것 같아서이다.



다음은 무아로이누옥(Mua Roi Nuoc)’이라는 수상인형극 관람이다. ‘무아로이누옥은 그 기원을 10세기 델타의 홍강(Red river)에 둔 독특한 예술이다. 이 지역의 농부들은 주변자연 환경에서 찾을 수 있는 자연재료를 이용해 이 예술의 행태를 바꾸어 갔다. 옛날에는 수확을 끝낸 후의 연못과 논둑이 이 즉흥쇼의 주요 무대였다고 한다. 이러한 예술형태는 북부베트남의 고유한 형태이며, 전 세계에서도 유일하게 베트남에서만 찾아볼 수 있단다. 하노이에 있는 탱롱극단(Thang Long puppet troupe)’이 가장 널리 알려진 극단이라고 하니 참조한다.



오늘날 수상인형극은 물이 고인 무대가 있는 곳에서 극이 행하여진다. 인형을 조정하는 배우들은 무대 뒤에서 긴 대나무 막대와 수면 아래 숨겨진 끈으로 인형을 조종한다. 꼭두각시 인형은 나무로 조각되고, 어떤 것은 무게가 15킬로그램에 이른다. 전통 베트남 오케스트라가 배경음악을 연주해주고, 우리나라의 창()처럼 북베트남에 기원을 둔 전통오페라 체오(Cheo) 가수가 꼭두각시의 얘기를 하는 행동에 맞춰서 노래를 한다.



수많은 인형들이 물이 고인 무대를 끊임없이 들락거린다. 어부와 배, , 물고기, 수달, 오리, 선녀, ()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리고 귀엽고 능숙하게 잘도 움직인다. 하지만 이쯤해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지금이야 조명(照明)과 드라이아이스(dry ice)는 물론이고 불꽃 효과까지 만들어가며 분위기를 띠우고 있다지만, 논밭의 물웅덩이에서 공연을 했다는 옛날에도 과연 저런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가 궁금해진다는 얘기이다. 아마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공연을 보는 것 자체가 고역이 아니었을까?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는가마는 지금보다야 재미가 없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오늘의 공연은 어부와 뱀의 물고기 쟁탈전, 어부와 그의 아내가 오리를 수달로부터 지키는 이야기, 물고기 잡이, 수영하는 아이들 등의 일상적인 소재와 팔선녀(八仙女)의 춤과, 사신(四神)의 춤 같은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죄다 베트남어로 공연을 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에 적은 내용은 그저 지레짐작으로 정리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다른 이의 글을 잠시 빌려본다. <()의 주제는 시골생활이며 베트남 민요가 짙게 묻어난다. 소극에서는 시골의 일상생활과 조부모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베트남의 민화들을 그려낸다. 작물을 수확하는 얘기들, 고기를 잡는 얘기들, 온갖 축제에 대한 얘기들이 주요 하이라이트이다. 전설과 역사 또한 이 단막극을 통해 등장한다. 특히 일상생활을 그린 많은 소극들은 우리나라의 탈춤처럼 풍자와 위트를 연출한다.>







수상인형극이 끝나니 시간이 제법 됐다. 배가 출출해졌다는 얘기이다. 저녁식사는 파라다이스호텔 2층에 위치한 한식뷔페이다. ‘뭐야! 한국에 돌아온 거 아냐?’ 누군가의 호들갑스런 외침이 꼭 아니더라도 식당은 온통 한국 음식 천지다. 그 종류도 다양하다. 국내에서는 예식장에나 가야 대할 수 있는 한식뷔페이지만, 그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는 얘기이다. 거기다 또 하나, 와이파이까지 잘 터진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걸치면서 국내에 남겨진 지인들과 노닥거리기에 딱 좋다.




배가 불렀으면 이젠 슬슬 자리를 옮길 차례이다. 서서히 걸어서 마사지샵으로 이동한다. 하루 종일 걷느라 고생했을 발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 범위는 발을 지나 전신으로 넓힌다. 보너스인 셈이다. 향기 나는 물에 발을 담근 채로 어깨를 풀고, 다음은 누운 채로 발과 다리에 기름과 크림을 문지르며 마사지를 한다.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찜질도 한다. 그리고 어깨와 팔을 스트레칭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조금 아픈 감은 있었지만 그동안 받아본 마사지 중에서 가장 뛰어난 편이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열대과일들을 샀다. 한국 관광객들이 많은 탓인지 한글로 적혀있는 가게의 간판들도 보인다. 그리고 가게 주인과 흥정하다 보면 몇 마디 정도는 우리말이 통하기도 한다. 아무튼 과일을 고르는 집사람의 손길은 부지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과일을 위주로 고르는데, 그중에는 냄새가 고약한 두리안도 들어있었다.



이틀 밤을 머물렀던 스타시티 호텔, 4성급 호텔이지만 깔끔한 것이 일류호텔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가장 큰 장점은 세면도구가 모두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헤어드라이기도 구비되어 있다. 아시아지역에서만이 누릴 수 있는 서비스가 아닐까 싶다. ! 와이파이가 잘 터진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자 이젠 낮에 찍어온 하롱베이의 비경을 고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보낼 시간이다.



호텔에서는 하롱베이 시가지가 잘 내려다보인다. 현재 짓고 있는 중이라는 유원지의 공사현장도 보인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수영장도 갖추고 있다.



여행지 : 베트남(Viet Nam)

 

여행일 : ‘16. 1. 25() - 29()

여행지 : 하노이, 하롱베이

 

여행 둘째 날 : 또 다른 하롱베이를 만나는 티톱(Titov)섬 전망대

 

특징 : 한 폭의 풍경화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베트남의 하롱베이. 하노이에서 180킬로미터 떨어진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3000여개의 환상적인 섬들로 이루어진 자연 풍경은 베트남 최고의 절경일 뿐만 아니라 세계 8대 비경으로 꼽힌다. 영화 '인도차이나'로 우리에게 알려진 곳으로 1994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하롱베이의 '하롱'은 용이 바다로 내려왔다는 뜻을 갖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한 무리의 용들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했고,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내뱉은 보석들이 섬이 되었다고 한다. 그 섬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티톱섬 전망대이다. 전망대에 서면 수많은 섬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도 하나 같이 범상치 않게 생긴 섬들이다. 하긴 이 정도는 되었기에 '인도차이나'나 로빈 월리암스의 '굿모닝 베트남' 같은 영화의 촬영지가 되었지 않았을까 싶다.


 

뱃놀이로 낮술이 깰 때쯤이면 유람선은 티톱섬의 선착장에다 여행객들을 내려놓는다. 바위절벽 아래에다 인공(人工)으로 만들었는데도 널따란 광장(廣場)으로 되어 있다.




광장의 중앙에는 커다란 동상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러시아의 유명한 우주비행사인 티토프(Gherman Titov, 1935~2000)라고 한다. 그는 호치민이 러시아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머물 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귀국 후 호치민은 신세도 갚을 겸해서 티톱을 베트남으로 초대했다고 한다. 월남전을 대비하여 소련의 원조 및 비행술을 지원받기 위해 러시아 최고의 비행사였던 티토프를 초대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하롱베이에 반한 티톱이 그를 안내하던 호치민에게 3000여개의 섬 중에서 하나를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자 호치민은 얼마든지 주고 싶으나 이 모든 것은 베트남 인민들의 소유이기에 그럴 수가 없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단다. 대신에 이름을 붙여줄 테니 섬 하나를 골라보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티톱이 유일하게 해수욕장이 있는 이 섬을 고르게 되었고 말이다. 그리고 1962620일부터 티톱섬이라 불러오고 있단다.




전망대로 가기 위해서는 해안을 따라가야 한다. 해안가는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티톱섬의 해수욕장은 원래 모래가 적은 조그만 해수욕장에 불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규모가 제법 크다. 외지의 모래를 가져다 부어놓았기 때문이다. 천연해수욕장이 인공해수욕장으로 변한 셈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다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정상까지는 430여개의 계단으로 연결된다. 꽤 많은 숫자이다. 거기다 경사까지 가팔라 오르는 게 만만찮다. 하지만 이를 극복해야만 한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있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뜻으로 달리 말하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뜻이 된다. 이곳 티톱섬 전망대에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다. 15분 정도의 고생길이 끝나야만 아름다운 경관을 구경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계단을 오르면서 바라보는 하롱베이의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바다는 잔잔하기만 하다. 호수(湖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곳 하롱베이에는 갈매기가 살지 않는다고 한다. 갈매기들도 호수로 착각을 했었나 보다.





숨이 턱에 차고서야 정상에 올라선다. 섬의 맨 꼭대기에는 팔각정이 지어져 있다. 이곳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여행 상품에 티톱섬 전망대라는 이름이 올라올 정도이니 그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망대에 서면 눈앞이 훤해진다. 상상으로 그려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 전망대를 일러 하롱베이 관광의 하이라이트(highlight)라고 하는가 보다. 웬만큼 몸이 아픈 사람들까지도 꼭 올라봐야 하는 이유이다.



누군가 그랬다. 3천여 개의 섬들이 흡사 은하수를 닮았다고.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저런 풍경은 사람의 손으로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언젠가 조도(鳥島)에 간 일이 있었다. 진도군에 속한 작은 섬이다. 그리고 거기서 바다에 흩뿌려진 수많은 섬들을 보았었다. 마치 모이를 주어먹으려고 모여드는 새때들처럼 말이다. 왜 하필이면 조도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일까. 어쩌면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당시의 풍경과 많이 닮아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돌아온 하롱베이 시가지, 바다구경은 이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이젠 육지에서의 눈요깃거리를 찾아 길을 나선다.



여행지 : 베트남(Viet Nam)

 

여행일 : ‘16. 1. 25() - 29()

여행지 : 하노이, 하롱베이

 

여행 둘째 날 : 하롱베이 유람선 투어

 

특징 : 하노이의 동쪽에 위치한 하롱베이 국립공원은 그 미려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3,000개 이상의 섬들이 보여주는 장관은 스펙터클(spectacle) 그 자체이다. 하롱(Halong, 下龍)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이 바다로 내려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설에 따르면 한 무리의 용들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했고,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 내뱉은 보석들이 섬이 되었다고 한다. 하롱베이의 비경들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유람선을 타야만 한다. 하루만 투자하면 아름다운 하롱베이 풍경을 가슴 깊숙이 새길 수 있다. 여유로운 일정이라면 12일 크루즈를 이용해 수상촌 구경과 카약, 수영을 함께 즐겨도 된다. 참고로 이 국립공원의 역사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는다. 베트남에서 일어났던 전쟁들이 문화를 보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문화 보존 노력은 도만카(Mr. Do Manh Kha)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복무 중에도 동료들의 도움으로 많은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다. 이런 노력은 이 국립공원 안에 박물관을 짓는 것으로 이어졌고, 베트남 전쟁 중인 1962년 마침내 그의 꿈이 실현되었다.


 

동굴을 둘러보고 나와 다시 유람선에 오른다. 그리고 본격적인 선상(船上) 투어가 시작된다. 잠시 후 식탁에는 과일이 차려진다. 가이드가 제공하는 것이란다. 하지만 풀 옵션을 선택했으니 그 안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음식으로는 다금바리회에다 선상 씨 푸드(sea·food)’, 그리고 투어용으로 나룻배와 모터보트를 넣었다. 물론 저녁에는 전통마사지도 기다리고 있다.



배가 움직이자 풍경이 다가온다. 섬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진다. 그리곤 이내 멀어져 간다. 물론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다. 문득 섬과 내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릇 여행자란 이동(移動)이라는 개념을 근본으로 한다. 그렇다면 다가왔다가 멀어져가고 있는 저 섬들이 여행자가 된다. 그리고 난 그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섬이었던 셈이고 말이다.




혹자는 하롱베이를 일러 바다의 계림(桂林, Guilin)’이라고 한다. 그 말이 옳은 표현인지는 몰라도 몇 년 전에 들렀던 계림을 연상시키는 것만은 분명하다. 벌판에 점점이 솟아올랐던 산들이 이번에는 바다에서 솟아오르고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호수같이 잔잔한 해면과 그 위에 살포시 떠있는 섬들, 용섬, 원숭이섬, 거북섬 등, 섬들은 그 형상에 어울리는 별명들까지 갖고 있단다.









얼마쯤 갔을까 기묘하게 생긴 바위가 나타난다. 하롱베이에서 가장 유명한 키스바위란다. 그러고 보니 바위 두 개가 서로 키스라도 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실제로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키스바위라는 이름은 한국 관광객들이 붙인 것이라고 하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이번에는 마을이 보인다. 그런데 그 터가 상상을 초월한다. 육지(陸地)가 아니고 바다인 것이다. 절벽만이 즐비한 ‘V'자 모양의 카르스트(karst) 지형은 섬 위의 삶터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찾아낸 삶의 터가 섬과 섬 사이에 있는 바다의 위였던 모양이다. 이곳 사람들은 낚시를 하거나 굴 양식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간다고 한다. 오늘 점심으로 나올 요리의 재료는 이곳에서 공수된다.



잠시 후 배 한척이 다가온다. 그리고 점심상에 올라오게 될 생선 몇 마리가 건네진다. 물론 팔딱팔딱 뛰고 있는 싱싱한 것들이다.




횟감을 사고 난 배는 다시 길을 나선다. 하롱(下龍)이란 지명은 용이 내린 곳이라는 뜻이다.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옛날, 용이 내려와 적을 물리쳤고, 당시에 용이 내뱉었던 보석들이 기암이 되었다는 것이다. 푸르고 깊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바다에는 그러한 전설과 잘 어울리는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얼마 후 싱싱한 해산물로 만든 해선식(海鮮食)이 나온다. 아침에 배에 오르면서 주문해 두었던 것들이다. 다금바리회를 비롯해 새우, 게 등 유람선에서 맛보는 싱싱한 선상 만찬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물론 장소가 밑받침 되었겠지만 말이다. 거기다 가이드의 배려로 독주(毒酒)까지 테이블 당 한 병씩 제공된다. 이젠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만 남았다. 이런 걸 두고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즐기는 신선놀음이라고 하는가 보다.






사람들의 얼굴이 불콰해진다.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올랐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자 케이크가 공수된다. 팔순을 맞이한 어머님을 모시고 여행을 나온 가족들에 대한 가이드의 배려이다. 간단한 세리머니(ceremony)를 마친 후에는 여흥이 시작된다. 노래방 기계가 가장 사랑을 받게 되는 시간이다. 물론 나라고 빠질 수는 없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앙코르 송(encore song)’을 두 곡이나 더 불러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내 노래 솜씨도 제법 되나 보다.



유람선에서 내려 나무배로 갈아탄다. 그리고 향하는 곳은 죽기 전에 한번은 꼭 가봐야 한다는 항루원(Hang Luon)’, 원숭이섬이다.



항루원은 작은 배를 타야만이 들어갈 수 있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섬 한쪽에 낮고 좁은 구멍이 있는데, 큰 배는 그곳을 통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안쪽에 들어서면 섬 사이에 호수처럼 넓고 둥그런 공간이 나오는데 안쪽 절벽에는 원숭이들이 모여 살고 있다.




나룻배는 터널을 지난다. 아니 동굴이라고 해야 될 것 같다. 하지만 아까 둘러봤던 천궁동굴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아까는 석회암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동굴이었던 반면에 이곳은 오랜 시간 동안 바람과 파도에 깎여 형성된 동굴이다.




노를 젓는 뱃사공의 물길소리를 들으며 기암괴석 아래로 진입하면 시공간이 딱 멈춘 듯한 묘연한 바위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거울처럼 잔잔한 바다 속 호수가 나타난다. 섬 안의 호수인 셈이다.



준비해 간 사과 조각을 던지면 원숭이들이 가까이 다가와 먹이를 먹는다. 물결은 잔잔하고 기암절벽과 그 위로 푸른 나무들이 아름답다. 원숭이를 보러 들어가지만, 섬의 중심에 들어가 잔잔한 바다 위로 떠가는 경험이 더 이채롭다. 중앙쯤에서 박수를 치면 그 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온다. 바닷물의 수위가 올라가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란다.




나룻배는 좌에서 우로 딱 한 바퀴를 돈다. 여기저기 바나나를 먹기 위해 원숭이들이 절벽과 나무를 타고 내려오며 관광객들과 밀당을 하기도 한다. 이런 게 바로 신선놀음이 아니고 뭐겠는가. 세외(世外)의 비경(秘境) 속에서 원숭이들과 나누는 밀당은 오래 묵은 그림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한다.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향루언에는 숨막히는 더위까지 잠재워버리는 아우라(Aura)가 있다. 옛 사람들이 즐거 그리던 그림 중에 무릉도원도(武陵桃源圖)가 있다. 신선들이 노닌다는 장소를 화폭에다 옮겨 놓은 그림이다. 향루언을 배경 삼아 그릴 경우 그런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바다는 흡사 호수를 닮았고, 억겁의 시간이 빚어낸 석회동굴 속에 갇혀 있는 듯 평화롭기 그지없다. 이곳에서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사이로 하늘을 쳐다보면 답답함보다는 오히려 묘한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호수에서 느끼는 고졸한 느낌도 색다른 경험이 된다.



나룻배 투어가 끝나면 이번에는 쾌속정으로 갈아탄다. 그리고 섬과 섬 사이를 누비는 쾌속의 여행이 시작된다. 스릴 만점의 항해이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거세게 몰려오는 물보라에 눈을 뜨기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섬들을 곁눈질로 볼 따름이다.





쾌속정 투어가 끝나면 유람선은 티톱섬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도 역시 섬들의 향연은 계속된다. 당연한 일이다. 아직까지 우린 하롱베이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빗줄기는 그쳤지만 그렇다고 맑아지진 않았다. 희뿌연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수묵화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날카롭게 깎아지른 듯한 바위 섬, 돛단배나 연꽃처럼 생긴 섬, 사람의 얼굴이나 동물을 닮은 섬 등 다양한 크기와 모양을 지닌 섬들이 바다 위에 흩어져 있다.



여행지 : 베트남(Viet Nam)

 

여행일 : ‘16. 1. 25() - 29()

여행지 : 하노이, 하롱베이

 

여행 둘째 날 : 하롱베이(Ha Long Bay) 천궁동굴(Thien Cungg Cave)

 

특징 : 베트남 최고의 관광지로 손꼽히는 하롱베이는 약 3,000개의 크고 작은 섬들과 희귀한 석회암 바위들이 도열한 곳이다. 이색 카르스트 지형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고 한때는 제주와 함께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혹자는 봉우리들이 현란하게 솟은 중국 계림과 견주기도 하지만 두 지역은 배경과 아웃라인이 다름을 알아야 한다. 하롱베이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용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언뜻 보면 섬들의 모양새가 구불구불한 용의 등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하롱베이의 구경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기기묘묘하게 생긴 수많은 섬들이다. 하지만 하롱베이의 비경은 단순히 외양에만 그치지 않는다. 곳곳에 석회암동굴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띠엔꿍 동굴은 하늘의 궁전 같다하여 천궁동굴이라 불린다. 하롱베이의 동굴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진 이 동굴은 태초의 외경스런 분위기로 사람을 압도하는 데가 있다. 곳곳의 용암 종유석에 색색의 조명을 밝혀 놓아 신비함까지 더해 놓았다.



 

버스는 우리를 선착장의 매표소 앞에다 내려놓는다. 반듯하게 지어진 현대식 건물이다. 밖엔 비가 내리고 있다. 그것도 제법 많은 양이다. 일부러 우기(雨期 : 하노이의 우기는 여름철이다)를 피해 여행일정을 잡았는데도 이 모양이다. 마땅찮아 하는데 가이드가 넌지시 말을 건네 온다.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에 불만은 확 달아나버린다. ‘지난주에 왔던 팀은 하롱베이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답니다.’ 비에다 바람까지 거세게 불어 배를 띠울 수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비를 맞고라도 하롱베이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를 드리라는 모양이다. , 압니다. 알다마다요.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공연이 한창이다. 역시 세계적인 관광지는 뭐가 다르더라도 다른 모양이다. 때에 관계없이 많은 관광객들이 오가기에 저런 공연이 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건물을 통과하면 선착장이다. 손가락으로는 헤아릴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많은 유람선들이 뒤엉켜 있다. 저렇게 많은 배들 중에서 용케도 우리가 타고 갈 배를 찾아내는 가이드가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그나저나 이곳은 먼저 다녀온 사람들이 얘기하던 바이치이 선착장이 아닌 모양이다. ()머리가 달려있다는 목선(木船)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우리가 타고 갈 배 또한 신형(新型)의 배이다.




배에 올라탄 가이드는 노래방 기계부터 켠다. 그리고 안내가 시작된다. 오늘의 일정과 하롱베이에 대한 설명이다. 그의 안내는 이번 여행에서 필요한 옵션에다 방점(傍點)을 찍는다. 하지만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이미 우린 하롱베이를 만난다는 기대와 설렘으로 들떠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그가 들먹이는 옵션은 무조건 OK가 될 수밖에 없다. 까짓 하롱베이까지 놀러 와서 돈 몇 푼 아끼려고 아등바등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배가 출발을 하면 따뜻한 차()와 과일이 제공된다.



배는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위로 나아간다. 그리고 하롱베이가 만들어내는 비경 속으로 느릿느릿 빠져 들어간다. 잠시 후 바닷물에 깎이고 비바람에 녹아 생긴 수많은 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빗줄기 속에서 흐릿하게 나타나는 게 숫제 그림이다. 그것도 잘 그린 한 폭의 수묵화(水墨畫)이다.



바다를 가르기를 1시간 여, ‘하늘의 궁전이라는 천궁(天宮), 현지어로 띠엔꿍 동굴(Thien Cungg Cave)’을 품고 있는 섬에 도착했다. 천궁동굴은 최근에 발견된 석회석 동굴로 하롱베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굴로 손꼽히는 곳이다.



돌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선다. 천궁 동굴이 있는 섬은 석회암이 녹아서 형성되었다. 카르스트(karst) 지형으로 이루어진 섬답게 온통 기암괴석(奇巖怪石)들로 둘러싸여 있다.




섬에 들면 가파른 돌계단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100개나 되니 오르는 게 쉽지만은 않다.



계단의 끝에는 동굴이 있다. 작은 틈새로 도망가는 원숭이를 잡으려고 쫒아가다 발견한 동굴이란다. 동굴 안에 들어서면 좁은 입구와는 달리, 웅장한 동굴 내부가 드러난다. 간간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과 잘 꾸며진 내부 조명으로 인해 동굴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억겁(億劫)의 세월 동안 만들어진 기상천외한 모습들이 펼쳐진다. 동굴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지하수가 고드름 모양으로 자란 종유석과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동굴 바닥에 닿으면서 탑 모양으로 쌓인 석순, 그리고 종유석과 석순이 맞닿아 생긴 석주 등이 색다른 구경거리다. 일반적으로 동굴 내부가 서늘한 것에 반해 이곳은 건조해 후덥지근하게 느껴진다.







가장 신기한 것은 관광객들이 들락거리는 출입구 외에 또 다른 출입구가 있다는 것이다. 하도 높아서 그 넓이가 과연 얼마나 될지는 헤아려지지 않는다. 다만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마치 신천지(新天地)로 가는 관문 같다. 더 신기한 것은 아치 모양의 문이 있는데 이름이 하늘무늬란다. 여기로 보면 저 높은 곳에 뚫린 출구가 보인다. 그래서 이름이 하늘 문이 되었단다.








동굴 안에는 물을 끌어다 분수(噴水)도 만들어 놓았다,



동굴에는 억겁의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엄청난 규모의 종유석과 바위 터널이 숨어 있고, 이들은 내부를 장식한 푸른 조명과 어울려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길지 않은 동굴 투어를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전망대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탁 트인 하롱베이의 풍광이 한 폭의 담백한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세상에 신선계(神仙界)가 존재한다면 하롱베이가 그 비밀의 문이 아니었을까. 동굴 밖에서 펼쳐진 하롱베이의 장엄함은 그렇게 일상에 찌든 인간들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있었다.





여행지 : 베트남(Viet Nam)

 

여행일 : ‘16. 1. 25() - 29()

여행지 : 하노이, 하롱베이

 

여행 첫날 오후 : 하노이 바딘광장(Quang Truong Ba Dinh)과 한기둥 사원(一柱寺)

 

특징 : 인도차이나반도의 동부에 남북으로 가늘고 긴 S자 모양을 띠고 있는 베트남(Socialist Republic of Vietnam)은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수도를 하노이(Hanoi)에 두고 있다. 국토 면적은 332378지만 이 가운데 75%는 산악지대다. 1960~1970년대에 발발했던 미국과의 전쟁 및 캄보디아와의 전쟁으로 갖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국내총생산(GDP)이 매년 6~8%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나라다. 전체인구 9434만 명의 90%에 이르는 베트남족은 북부 하노이와 중부의 후에, 다낭 지역, 그리고 남부의 호찌민에 고루 분포돼 있다. 하니족을 비롯한 나머지 54개 소수민족은 대부분 산악지대에 살고 있다. 다양한 민족이 섞여 다채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만큼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참고로 베트남의 국명인 비엣남(Việt Nam 越南)은 베트남 북부에서 중국 남부에 이르렀던 기원전 2세기의 고대 국가 남비엣에서 유래하였다. 비엣(Việt, )은 백월(Bách Việt, 百越)족을 뜻하는 말이다. 비엣남이란 낱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 베트남의 시인 응우옌 빈 키엠의 시 삼짱찐(Sấm Trạng Trình, 讖狀程)이다. 이후 비엣남은 점차 베트남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어, 1905년 베트남의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가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월남의 식민지화에 대해 나눈 대담은 월남망국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비엣남은 1945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베트남 민주공화국이후 공식적인 국명이 되었다. 비엣남이 맞는 명칭이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식 발음인 베트남을 국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베트남에서의 첫발은 노이바이 국제공항(Noi Bai International Airport, 베트남어로는 Sân bay quốc tế Nội Bài/ ?飛國際內排)에서 시작된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있는 국제공항으로 시내 중심부로부터 45Km정도 떨어져 있다. 베트남의 첫 인상은 공항관리들의 얼굴이 매우 엄격하고 딱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신속하게 입국심사를 해줬다.





여행의 시작은 바딘광장(Quang Truong Ba Dinh)에서 부터이다. 호치민(Ho Chi Minh , 胡志明)의 묘()가 우뚝 서 있는 바딘 광장 주변은, 호치민의 생애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호치민 테마파크(theme park)'나 마찬가지다. 바딘 광장은 한마디로 단순하고 군더더기가 없다는 느낌이다. 호치민의 분위기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나라의 최고 책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 한 채가 없었을 정도로 청렴한 분위기 말이다. 아무튼 광장에는 유해가 안장된 묘를 비롯해 그가 살던 집과 외국 사절단을 맞던 주석궁이 '세트 메뉴'처럼 줄지어 있고, 그가 타던 자동차와 침대, 책상, 문구류까지 옛 모습 그대로 전시돼 있다.



넓이가 35000ha나 되는 드넓은 바딘광장은 베트남이 100년에 가까운 프랑스의 오랜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던 곳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천부의 권리를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았다.’ 194592일 호치민(Ho Chi Minh , 胡志明)이 이곳에서 읽어 내려갔던 독립선언문의 서문(序文)이니 참조한다. 아무튼 호치민은 우리나라로 치면 '백범 김구'같은 존재였다. 한편 호치민이 독립선언문을 읽던 그날은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을 조인(調印)한 날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베트남을 침략했던 일제가 패망하자 베트남 역시 우리나라처럼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나중에 당사국(當事國)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것까지 합친다면 완전한 판박이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그들은 이미 통일이 되어 있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대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938년 박당 전투에서 응오 왕조의 시조인 응오꾸옌(베트남어: Ngô Quyền/ 吳權)이 오대십국(五代十國 : 당나라가 멸망한 때부터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의 10개 나라)의 하나인 남한(南漢, 909~971)과 싸워 이겨 독립하였다.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18581954)와 일본(2차 세계대전 기간)의 식민 지배를 받아오다가, 194592일 이곳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이어서 이를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렀고,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군이 철수를 한 뒤에야 독립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이때부터 남북의 대결이 시작된다. 이후 도미노 이론을 내세운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였으나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전 세계와 미국 내의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도 이 전쟁에 참전하였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점령하였고, 19767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전쟁 후 베트남은 전후 복구와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통한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이웃나라와의 전쟁 등으로 순탄치 못하다가 1986년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 머이(Doi Moi)’로 시장 경제를 도입하였고, 2000년에는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었다.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건물은 주석궁이다. 주석궁은 3층의 노란색 건물로 옛 프랑스 총독의 관저였다고 한다. 호찌민은 대통령이었으나 주석궁에서 살지는 않았다. 그저 외빈 방문시 영접하는 공간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사치스럽다는 이유에서란다. 가족이 없이 혼자였던 그는 대신 근처 프랑스의 전기 수리공이 살던 작은 집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참고로 주석궁 한켠에 작은 가로수길이 있다고 한다. 호치민이 망고를 따면서 아이들과 놀아주었다고 해서 '망고 로드'라 불린단다. 그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자상한 동네 아저씨였던 것이다. 그래서 베트남 국민들이 대통령인 호찌민을 '박 호(Bac Ho)', 즉 우리말로 '호 아저씨'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오직 국가와 국민만을 위해 헌신했던 지혜롭고 깨끗한 호치민과 같은 지도자를 우리도 가졌으면 좋겠다. 아니 얼마 안 있어 갖게 될 것이다. 다만 국민들의 올바른 선택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광장의 중앙에 있는 호치민 기념묘가 보이기 시작한다. 기념묘는 갈색의 대리석으로 밑단을 깔고 다시 20개의 주홍색 대리석 기둥을 세운, 40m 높이의 거대한 사각형 건물이다. 대리석 기둥은 전통 마을공동체의 회관이나 연꽃을 연상하도록 지어졌다고 한다. 갈색의 대리석은 베트남 중부 다낭의 유명한 대리석산에서 옮겨왔고, 건축에 사용된 석재는 베트남의 각 지방에서 운반하여 왔다. 참고로 호치민(Ho Chi Minh , 胡志明)은 누구나 알고 있듯 베트남 국민들이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하는 인물이다. 베트남 독립에 기여했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젊은 인재들을 육성했으며 무척이나 청렴하여 평생 자신의 집 한 채가 없었다. 그런 그가 늘 곁에 두고 즐겨 읽던 책이 바로 정약용선생의 목민심서(牧民心書)’였다고 한다. 그가 지표로 삼았을 정도로 훌륭한 인물을 조상으로 둔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호치민 기념묘의 문 앞에는 빳빳한 흰색 제복을 입은 위병이 근엄한 표정으로 보초를 서고 있다. 하지만 묘()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베트남 공산당 창립기념일(Communist Party of Viet Nam Foundation Anniversary)’을 앞두고 행사를 준비하느라 개방을 하지 않는단다. 아니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게 금()줄을 쳐 놓았다. 하지만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저 안에서 잠자고 있을 호치민과 인사를 나누는 것보다, 차라리 그의 사상을 한번이라도 더 되새겨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이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애용했다는 자유와 독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구절을 떠올려본다. 그의 유언에 따르지 않은 채로 남겨진 그의 미라(mirra)에게 눈인사를 건네는 것보다야 이 한마디를 되새겨 보는 게 백번 나은 것 같다.



집사람이 옷이 두툼하다. 하노이의 기후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쌀쌀했기 때문이다. 두툼한 겉옷을 챙겨가는 게 좋을 거라는 여행사의 안내에 반신반의 했는데 이제야 실감이 난다. ‘패딩 점퍼(padding jumper)’를 입고 나서야 추위가 가셔졌기 때문이다. 맞다. 베트남은 특수한 지형을 갖고 있는 나라이다. 국토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데 그 길이가 장난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북부·중부·남부가 각기 다른 기후 현상을 보인다고 한다. 남부는 사시사철 따뜻한 반면에 북부는 비록 또렷하지는 않지만 사계(四季)가 구분이 될 정도라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엄동설한(嚴冬雪寒)이다. 그렇다면 이곳 하노이 역시 쌀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노이의 겨울은 우리나라의 늦가을 날씨와 비슷하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공산국가들은 오래 전부터 지도자들의 시신(屍身)을 방부(防腐)처리해 전시해 왔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건설한 블라디미르 레닌을 시작으로 그의 후계자 이오시프 스탈린’, 중국의 국부 마오쩌둥도 미라(mirra)가 되어 후손들을 만나고 있다. 호찌민도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저렇게 거대한 건축물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의 시신은 영구 보존을 위해 초빙된 외국의 전문 기술자들에 의해 관리된다고 한다. 그리고 시신을 관리하는 데만 매년 수십 만 달러가 들어간단다. 막대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의 유언(遺言)이 지켜지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결과이다. 그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거나 따로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자신의 유해 때문에 단 한 푼의 세금도, 단 한 뼘의 농지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란다. 또 화장한 후 유해를 통일된 베트남의 북부와 중부, 남부 지방에 나눠 뿌려달라고 호소했다.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웠으나 끝내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지도자다운 유언이었다. 하지만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못했다. 유언대로 유해를 태워 흩뿌리기에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남긴 그의 족적이 너무나 컸던 모양이다.



광장은 국회의사당 등 관공서로 보이는 여러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기념관에서 조금 더 나가면 널따란 길이 오른편으로 나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노이의 명소인 일주사(一柱寺)로 가는 길이다. 기념관을 오른편에 끼고 돈다고 보면 된다.



일주사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작은 공원(公園), 바딘광장은 각종 공공건물들과 공원들로 둘러싸여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잠시 후 베트남의 국보 1호이자, 가장 오래된 사찰이라는 일주사(一柱寺), 기둥이 하나인 사원을 만나게 된다. 못꼿 사원( 베트남어: Chùa Một Cột)으로도 불리는데 하노이, 아니 베트남에서 꼭 들러봐야만 하는 명소(名所) 중의 명소이다.



현지인들이 녙트탑(一柱塔)’이라고도 부르는 일주사는 1028에서 1054년까지 재위했던 리 왕조2대 왕인 리 타이 쭝1049년에 세운 사찰(寺刹)이다. 지름 1.25m인 한 개의 돌기둥 위에 불당(佛堂)을 얹어 지은 일주사는 순수의 상징인 연꽃을 형상화한 것인데, 정방형의 연못위에 떠 있는 자태는 자못 우아하다. 현재의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1954년 프랑스가 하노이를 포기하면서 건물을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 문명인이라고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법당(法堂)은 사람들로 붐빈다. 위에서 말한 전설 때문이란다. 아이를 점지하는데 대단한 효험이 있다고 소문이 나있어, 요즘에도 아들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고 한다.



일주사는 이름에 걸맞게 기둥 하나가 사찰(寺刹)을 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그 주변은 물로 차 있고 네 귀퉁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한 개의 기둥 위에 불당(佛堂)을 올리게 된 사연은 이렇다. 혼인을 한지 14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왕은 어느 날 꿈속에서 아이를 안은 관음보살이 연꽃 위에 앉아있는 꿈을 꾸었고, 이 모습을 본떠 일주사를 만든 후 왕자를 얻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베트남 사람들은 일주사를 두 바퀴 돌고 나서 불당의 관음보살에게 기도하면 아이를 점지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사찰의 주변은 공원처럼 잘 다듬어 놓았다. 사람들까지 많다보니 유원지(遊園地)의 냄새가 물씬 풍길 정도이다. 작은 가게들도 몇몇 보인다. 과일과 음료수, 기념품들을 팔고 있다. 간단한 주류도 파는 것은 물론이다.




가의도(賈誼島)

 

여행일 : ‘16. 2. 28()

소재지 :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가의도리

산행코스 : 북항선착장구둣말삼거리큰말신장벌은행나무전망대큰산 정상솔섬남항선착장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근흥면 안흥항으로부터 서쪽 5지점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섬이다. 면적 2.19에 해안선 길이가 채 10도 못되니 자그만 섬(2011년 기준 71명 거주)이라 할 수 있다. 섬의 유래는 옛날 중국의 가의(賈誼)란 사람이 이 섬에 피신하여 살았던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이 섬이 신진도에서 볼 때 서쪽 가에 위치한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지명(地名)은 후자에 해당하는 서쪽 가의 섬을 취음(取音)한 것으로 유추된다. 섬은 대체로 산지(山地)로 이루어져 있고, 농경지와 취락은 섬의 중앙에 남북으로 형성된 저지대에 분포되어 있다. 논은 아예 없고, 그나마 있는 밭마저 얼마 되지 않는다. 거기다 바닷바람과 안개 등 기후조건까지 열악하기 짝이 없단다. 때문에 주민들 대부분은 고기잡이와 해삼, 전복 등의 양식업을 주업으로 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이곳 가의도는 전국에서 가장 좋은 육종마을의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뭍에서 멀리 떨어진 탓에 토양의 세균 감염이 적은데다가 열악한 기후조건을 견뎌내며 자생력이 강한 종자(種子)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란다. 또한 가의도는 일부에서 사빈해안(沙濱海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바위 절벽이 많은 암석해안을 이룬다. 덕분에 독립문바위와 돛대바위, 솔섬 등 볼거리가 많은 편이다. 참고로 6백여 년 전 가의의 유배 당시 수행원으로 주()씨가 따라왔는데 현재에도 주씨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찾아오는 방법

가의도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안흥외항까지 와야 한다. 가의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배는 하루 3(830, 1330, 1630) 운항하는데 가의도까지는 30분이 조금 못 걸린다. 운임은 편도 3,100. 여름에는 출항시간이 다르니 출발하기 전에 미리 확인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참고로 안흥항은 내항과 외항으로 나뉜다. 내항과 외항은 신진대교를 사이에 두고 위치한다. 육지 끝의 정죽리에는 내항이, 다리 건너 신진도에는 외항이 있다. 항구의 기능은 외항이 생겨난 뒤 내항에서 외항으로 중심이 옮겨갔다.



정기여객선 대신에 우린 유람선을 이용하기로 했다. 48명의 뱃삯에다 조금만 더하면 유람선을 대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우린 출항시간에 맞춰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줄일 수가 있었다. 이 모든 게 청마산악회 운영진들의 고심(苦心)과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안흥항을 빠져나온 유람선은 채 30분이 되지 않아 가의도선착장(북항)에 도착한다. 안흥에서 5.5밖에 떨어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선창(船窓) 밖 풍경은 생각보다는 뛰어나다. 죽도, 부엌도, 목개도, 정족도 등의 섬들은 물론 사자바위와 독립문바위, 거북바위 등 빼어난 자태의 바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가의도는 뭍사람들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곳보다 더 뛰어난 경관을 지닌 곳들이 태안반도에 널려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안흥항이 개발되고 정기여객선이 운행됨에 따라 새로운 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곳 가의도 역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때가 묻지 않은 신선한 섬 여행지로 부각된 것이다.



선착장에 내리면 가의도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둥그스레한 담벼락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담벼락 중간쯤에 육종마늘 원산지라는 메모를 적고, 양쪽 가장자리에는 벤치를 놓았다. 광고판과 쉼터의 기능까지 겸한 종합시설인 셈이다.




선착장 왼편에 있는 아담한 몽돌해변이 여행객들의 시선을 끈다. ‘찰싹 찰싹, 파도가 작은 몽돌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만으로도 마음에 여유가 깃든다.



선착장을 빠져나오면 깔끔하게 지어진 화장실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투어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볼일을 보고 길을 나서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화장실에 들어간 이들을 기다리다 관광안내판을 살펴본다. 섬 전체가 나온 지도(地圖)에다 중요 포인트를 사진과 함께 표기해 놓았다. 이로 미루어보아 신장벌과 독립문바위, 송장너미, 솔섬 등이 가의도에서 손꼽히는 경관인 모양이다. 하지만 송장너미는 눈에 담을 수가 없었다. 가는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이정표에도 나와 있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구둣말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에 이르는 2백여m의 진입로에는 흡사 카페트(carpet)라도 깔아놓은 듯 초록색 도로포장이 눈에 띈다. 이어서 나타나는 마을 풍경은 마치 고향에라도 온 것처럼 아늑하기만 하다. 옛날 처음으로 이 섬에 발을 디딘 가의(賈誼)와 그의 수행원 등 입도자(入島者)들도 저런 점을 보고 이곳에 정착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가()씨는 되돌아갔고 수행해왔던 주()씨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는 주씨와 고씨, 김씨들만이 각각 13대째 살고 있단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을 걷다보면 온통 마늘밭 천지이다. 무엇보다도 가의도는 전국에서 가장 좋은 육종마을의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가의도에서 마늘농사가 잘되는 이유는 토양의 세균 감염이 적은데다가 바닷바람과 안개 등 악조건을 견뎌내며 자생력 강한 종자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란다.



마을회관을 지나면 길은 두 갈래(이정표 : 신장벌 1.9Km/ 전망대 0.5Km, 작은작돌 1.5Km)로 나뉜다. 가의도의 유일한 사빈해변인 신장벌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신장벌을 둘러본 뒤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우리를 싣고 나갈 배가 정박해 있는 남항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신장벌로 방향을 틀어 언덕에 오르면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섬에는 40가구 7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중 20여 가구는 민박(民泊)을 치고 있단다. 그런데 주민들이 눈에 띄지 않는 가의도는 적막하기만 했다. 섬을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이라곤 우리 일행뿐인 것이다. 일요일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주말이면 낚시꾼들과 관광객들이 100명에서 많을 경우에는 200명 까지도 몰려든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여름철에나 해당되는 말인가 보다.



작은 언덕을 넘어가면 또 다시 민가(民家) 몇 채가 길손을 맞는다. 큰말이라는데 농경지(農耕地)도 보인다. 아니 조금 전에 지나왔던 마을회관 근처보다 오히려 더 넓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가의도의 농경지와 취락은 모두 섬의 중앙에 남북으로 형성된 저지대에 분포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는 마을회관 부근과 이곳, 그리고 남항 근처를 이르는 말인가 보다. 이곳도 역시 마늘밭이 즐비하다. 가의도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특산물은 뭐니 뭐니 해도 마늘이다. 6쪽 마늘의 종구(種球, seed bulb)가 생산되는 섬으로 유명하다. 종구란 마늘의 씨앗에 해당하는 것으로 6쪽 마늘을 한 개씩 분리해 땅속에 심으면 이듬해에 구슬 같은 한쪽 마늘이 생기는데 이를 종구라고 한다. 종구를 다시 한 번 심으면 비로소 3년이 되는 해에 6쪽 마늘로 자라 수확할 수 있게 된다.



마을 아래에는 큰말장벌이라는 해수욕장이 있다고 한다. 해안가의 암벽과 파도가 어우러진 풍경이 나름대로 빼어나다고 하지만 내려가 보지는 못했다. 주어진 시간에 쫒기다보니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마을을 지나서도 길은 임도 수준으로 넓다. 길가에 경계석까지 설치한 것으로 보아 관공서에서 특별한 목적을 갖고 조성해 놓은 길이지 싶다.



마을을 지나 건너편 산등성이에 올라서면 가의도 관광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나를 궁금하게 하는 것은 이 안내판이 아니다. 안내판 옆에다 만들어 놓은 낯선 시설물이다. ‘지적도근점(地積圖根点)’이란다.



도근점(圖根點, supplementary control point)이란 지적측량 시 필지에 대한 수평위치 측량 기준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국가기준점, 지적삼각점, 지적삼각보조점 및 다른 지적도근점을 기초로 하여 정한 기준점을 말한다. 그동안 삼각점(三角點, triangulation point)이나 수준점(水準點, benchmark) 등은 보아왔지만 도근점은 처음이기에 낯설다는 표현을 썼다. 참고로 삼각점이나 기준점은 둘 모두 측량의 기준이 되는 삼각좌표점인 것은 같다. 하지만 삼각점은 보통 산 위의 정상에 있고, 도근점은 산의 아래 즉 주택지구에 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도근점은 삼각점에서 파생된 측량기준점이라는 것이다.



산모퉁이를 돌면서 길은 오솔길로 변한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트레킹이 시작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산길은 좁다. 하지만 걷기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그저 미끄러지는 것만 조심하면 된다.



잠시 후 맞은편 산등성이에 올라선다. 길은 이곳에서 둘(이정표 : 신장벌 1.0Km/ 생태탐방로 1.3Km/ 생태탐방로 0.9Km)로 나뉜다. 오른쪽에 보이는 생태탐방로는 무시하고 그냥 신장벌로 향한다.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도 이 길은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다지 상태가 좋아 보이지도 않는 길로 들어서야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의도의 산길을 걸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복수초·노루귀·산자고 등 길가에 지천으로 널린 야생화에 눈길은 맞출지언정 채취만은 결코 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더덕이나 방풍 등 몸에 좋다는 것들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이를 어겼을 경우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만 한다. 가의도가 국립공원에 속해 있기 때문이란다.


갈림길을 지나면서 길은 더욱 좁아진다. 그러다가 잠시 후 소사나무 숲길에 이르러서는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하기까지 한다. 자칫 짜증날 수도 있으나 잠시 후에 만나게 될 비경을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참아낼 만 할 것이다.



소사나무 숲길을 빠져나오면 섬의 북단 도두랑이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가의도의 진경(珍景)이 시작되는 셈이다. 저 멀리 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누군가 도두랑이 못 미쳐 왼쪽으로 돌면 넙배가 나온다고 했다. 아까 지도에서 보았던 송장너미의 또 다른 지명이지 싶다. 하지만 가보지는 못했다. 이런 정보를 섬을 다녀온 후에야 알게 되었던 탓이다. 하긴 알았다고 해도 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기론 왼편으로 난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자락이 온통 말라죽은 신우대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 말했다. 무릇 생명체란 죽기 전에 자손을 남기기 위한 그 무엇인가를 하게 된다고. 그러면서 그는 대나무의 그런 행위는 꽃을 피우는 것이라고 했다. 대나무가 꽃을 피우는 것은 60년을 묵은 후에나 가능하다는 내 말을 반박하면서 말이다. 신우대로 다가가 본다. 그러나 꽃이 피었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잎이 말라 비틀어졌을 뿐 아직 죽지는 않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잠시 후 신장벌에 내려선다. 길이가 400m쯤 돼 보이는 신장벌 백사장은 파도에 마모된 돌멩이들이 모래와 뒤섞여 있다. 해수욕장으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겠다. 하지만 주변에 아무런 편의시설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로 보아 해수욕장은 분명히 아니다. 그럴 만도 하다. 접근성이 없는 이런 곳까지 해수욕을 하겠다고 찾아올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래사장 위를 걷는다. 여름철에 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맨발로 걸으면 딱 좋겠기에 하는 말이다. 신장벌 좌우는 기암괴석들이 병풍을 쳤다. 멀리 안면도 등 태안의 섬들은 걸개그림으로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이곳을 일컬어 서해의 하와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생겨난 모양이다.



눈앞에 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기괴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고개를 돌린 사자를 신기할 만큼 빼다 닮았다. 그래서 이름까지도 사자바위인데 멀리 중국 땅을 바라보며 태안반도를 지켜주는 바위란다. 태안반도의 수호신인 셈이다. 사자바위 뒤의 작은 바위는 거북바위이다. 사자를 졸졸 따라다니는 형상이다.



이곳 신장벌흔장벌이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몽돌이 많은 곳을 사투리로 장부리라고 하는데, 그 앞에 흐옇다는 뜻의 이 붙어 이뤄진 지명이란다. 하여튼 물 빠진 여(수중 바위)밭에는 굴이 지천이다. 더하고 뺄 것 없이 딱 갯바위 반 굴 반이다. 오죽했으면 같이 간 형우군이 가의도에서 가장 빼어나다는 코끼리바위를 구경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굴을 따먹고 있었겠는가. 날물 때면 섬 아낙들이 이곳까지 굴을 따러 다닌다고 하던데 지청구라고 듣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모래사장의 끄트머리로 나아간다. 바위들이 길게 도열해 있다. 돛대처럼 솟은 바위 등 바위들마다 하나같이 기괴하게 생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것은 코끼리를 빼다 닮았다는 코끼리바위이다. 길게 코를 늘어뜨리고 있는 형상인데 밀물 때 바닷물이라도 들어온다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겠다.








코끼리바위의 구멍을 통과해 반대편으로 나아간다. 뒤돌아보니 코끼리바위가 어디론지 사라져버리고 난데없이 아치형으로 생긴 문() 하나가 새로 생겨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바위를 일러 독립문바위라고 한단다. 하나의 바위가 보는 방향에 따라 코끼리와 독립문 등 각기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또한 이 바위는 '마귀할멈바위'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름의 유래가 재미있다. 오래전 마귀할멈이 조류 거세기로 악명 높은 부근의 간장목을 건너다 속곳이 젖자 홧김에 소변을 봤는데, 그때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뚫렸다는 구멍이 바로 저 구멍이고 말이다.



누군가 그랬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동심(童心)으로 돌아가게 만든다고. 그렇다면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 분명하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들뜬 모습으로 웃고 떠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맞다. 이곳 가의도가 바로 태안팔경 중의 제6경이었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전망대로 향한다. 아직도 인적은 찾아볼 수 없다. 잠시 후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우람스런 것이 흡사 마을의 수호신이라도 되는 것 같다. 하여간 낯가림이 심한 가의도에서 낯선 이를 맞아들이는 유일한 생명체가 아닐까 싶다.



수령(樹齡)470년이나 된 이 나무는 태안군의 보호수(379)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 은행나무는 모태(母胎) 솔로(solo)이다. 은행나무란 본디 암·수간에 수정이 되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이 은행나무는 평생 동정(童貞)을 지켜 왔단다. 한마디로 불쌍한 숫처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섬 안에 수나무가 없기 때문이라니 어쩌겠는가. 그러나 그런 악조건도 좋은 점으로 작용할 때가 있는가 보다. 서방에게 시달리지 않았던 탓인지 47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쌩쌩해 보이기 때문이다.



은행나무를 지나 50m쯤 더 올라가면 남항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이정표 : 전망대 0.5Km, 작은작돌 1.5Km/ 작은작돌 1.4Km)에서 오른편으로 길 하나가 나뉜다. 가의도에서 가장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산길 입구이다. 일단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전망대로 향한다. 어차피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를 싣고 섬을 떠날 배가 남항에 정박해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는 또렷하다. 그리고 10분 정도면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만들어 놓았다는 전망대에 올라설 수 있다.



전망대의 높이는 해발 183m에 불과하다. 하지만 섬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다. 거기다 복층(復層)으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조망을 돕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배려까지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눈발이 날리는 탓에 시야(視野)가 열릴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겨우 무인산불감시탑이 있는 맞은편 봉우리만이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맞은편 봉우리로 향한다. 그렇다고 이곳보다 더 높아보여서 하는 행위는 아니다. 그저 저런 시설물을 세워 놓았다는 것은 뭔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내 생각은 맞았다. 잠시 후 올라선 산봉우리에는 무인산불감시탑 말고도 삼각점(근흥 21)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삼각측량의 기준점인 삼각점(三角點, triangulation point)은 본디 인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로 보아 무인산불감시탑이 있는 이곳이 가의도에서 가장 높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곳이 큰산의 정상일 것이고 말이다.



올라온 방향과 반대편에 해안 쪽으로 난 길이 하나 보인다. 진행할 경우 작은 작돌이라는 또 하나의 비경을 만날 수 있다. 내려가는 길도 생각보다는 또렷한 편이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발길을 돌리고 만다. 왕복 2Km에 가까운 거리를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배의 출항시간에 맞추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럴 경우 나 하나 때문에 일행 전체가 기다려야만 하는 민망함을 배겨낼 만한 염치가 내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삼거리로 돌아와 이번에는 남항선착장으로 향한다. 남항선착장은 비교적 최근에 건설된 탓에 북쪽에 있는 가의도선착장보다는 규모도 훨씬 크고 잘 정비되어 있다. 가의도에서 유일한 편의점도 이곳에 있다. 비록 문이 열려 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선착장 앞에는 직경 50m도 안 돼 보이는 조그만 섬이 하나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섬인데, 머리에다 소나무 몇 그루를 이고 있어 여간 멋스러운 게 아니다. 가의도가 자랑하는 멋진 경관인 솔섬이란다.




오른편은 해안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트레킹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저 끄트머리에 있는 또 다른 절경인 작은작돌을 못 보는 아쉬움은 너무나 크다. 아까 올랐던 정상에서 반대편 해안 쪽으로 1Km 조금 못되게 더 내려가면 작은작돌이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된 출항시간에 맞추기에는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epilogue), 가의도의 바닷물은 서해답지 않게 투명하고 바닥까지 다 들여다보일 정도 맑다. 낚시꾼들이 줄줄이 모여드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그다지 달갑지 않은 추억으로 남았다. 자칫 바다 속으로 빠질 뻔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건 간만(干滿)의 차가 심한 서해바다의 특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눈보라와 돌풍 때문에 약정된 시간보다 조금 먼저 섬을 떠나려 했던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바닷물이 덜 차있어 선착장에 배를 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억지로 배를 대려다 보니 선착장과 배의 사이에 임시 사다리를 걸칠 수밖에 없었고, 하필이면 내가 사다리를 내려가고 있을 때 돌풍으로 인해 배가 선착장에서 떨어져 나가버린 것이다. 그러다보니 난 사다리에 매달려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자칫 고정되어 있지 않은 사다리가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엔 꼼짝없이 바닷물 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행들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는 면했지만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팁(tip) 하나, 가급적이면 유람선(遊覽船) 보다는 덩치가 큰 정기여객선을 이용하라는 얘기이다. 특히 오늘 같이 파고(波高)가 높을 때에는 권장사항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다지 높지도 않은 파도에 맞춰 춤을 추는 배를 타본 사람이라면 내 말에 실감이 날 것이다.

윤선도의 이상향 보길도(甫吉島), 그리고 보족산(195m)

 

여행일 : ‘16. 1. 1()

소재지 : 전남 완도군 보길면

트레킹 코스 : 노화도선착장보옥리보족산보옥리세연정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보길도는 섬 전체가 주변 바다와 함께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보길도 12이 있고 섬 안에 있는 윤선도 선생의 유적지인 부용동에만 부용동 8이 있을 정도로 작은 섬 안에 무수한 절경을 안고 있는 곳이다. 또 천연기념물만 해도 5(예송리의 상록수림, 예송리 앞섬 예작도의 감탕나무 군락, 여항리의 후박나무, 정자리의 황칠나무, 선창리의 상록수림)이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보너스로 산행까지 즐길 수 있게끔 괜찮은 산들을 보유하고 있다. 보길도의 최고봉인 격자봉(格子峰)은 섬 중앙에 자리 잡은 부용동의 남쪽에 솟아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황소가 드러누운 듯 산세(山勢)가 완만하지만 주능선에 올라서면 암봉이 줄지어 나타나며 시원한 조망(眺望)을 즐길 수 있어 산행하는 재미가 남다르다. 또한 격자봉은 산 전체가 온통 상록수인 동백나무로 우거져 있다. 하지만 보족산을 빼놓아서는 결코 안 된다. 산의 아랫도리에 있는 울창한 상록수림은 물론이려니와 산의 윗부분은 생각만 해도 아찔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격자봉에 뒤지지 않을 산세(山勢)를 자랑한다고 할 수 있다. 하여간 두 산 모두 동백꽃으로 붉게 물드는 봄철에 찾아보는 것이 가장 제격일 것이다.

 

찾아오는 방법

보길도로 들어오는 방법은 완도의 화흥포항과 땅끝마을에서 차도선(車渡船)을 타야만 한다. 하지만 우린 소안도선착장에서 배를 탔다. 이번 여행이 소안도와 보길도를 한꺼번에 엮어서 다녀오는 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흥포항과 소안도를 왕래하는 선박의 중간 기착지인 동천항이 마침 보길도의 대문역할을 하고 있는 항구이다. 화흥포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고 나가다 동천항에서 내리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보길도는 노화도와 보길도를 잇는 연도교(連島橋)인 보길대교를 건너면 된다. 그런데 그 거리가 제법 되기 때문에 여행객들은 배에다 차량을 싣고 건너는 게 일반적이다. 청마산악회 역시 배에다 버스를 싣고 왔다. 참고로 보길도에도 청별항이라는 선착장이 있다. 하지만 보길대교가 놓인 뒤로는 육지에서 좀 더 가까운 노화도까지만 운항한다고 한다. ‘맑을()’자에 이별()’자를 쓰는 청별항이라는 이름은 윤선도가 이곳에서 찾아온 손님을 떠나보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트레킹의 시작은 보길도청정식품옆 주차장(보길면 부황리 보옥마을)

보족산 산행은 보길도청정식품 곁에 있는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어민후계자가 운영하는 직판장이란다. 미역, 멸치 다시다, 김 등 각종 건어물을 팔고 있으니 산행이 끝난 뒤에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품질도 괜찮은데다 가격도 비교적 저렴하기 때문이다. 우리부부는 돌김과 자연산미역, 그리고 멸치까지 바리바리 사가지고 왔다.

 

 

 

직판장 뒤편으로 70~80m정도 걸으면 뾰쪽산 민박이 나온다. 산행들머리는 민박집 오른편으로 나있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마을의 이름은 보옥마을이다. 지나는 길에 잠깐 마을이름의 어원(語源)을 살펴볼까 한다. 혹시 보석 같은 갯돌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어원은 보리수나무란다. 보옥리는 순 우리말로 뽀래기뽀리기로 불렸는데 이는 보리수나무를 뜻한단다. 이 말들이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보옥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민박집을 옆구리에 끼고 왼편으로 돌면 납작한 돌판을 깔아 놓은 산길이 나타난다. 들머리에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할 경우에는 격자봉으로 갈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린 망설임 없이 보족산으로 향한다. 격자봉은 지난 해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윤선도선생의 유적지까지 빠짐없이 둘러보면서 말이다.

 

 

안내도를 보면 왜 뾰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금방 이해가 간다. 산의 생김새가 스위스의 마터호른(Matterhorn)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뾰쪽하게 생긴 것이다. 마치 나무 옷을 걸친 수석(壽石)을 본 듯하다. 이게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보죽산으로 변한 것이다.

 

 

산행은 시작부터 동백나무 숲 터널 속이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이 들어찬 동백나무숲 속은 산새들의 소리뿐 한적한 산책길이다. 아니 지금은 겨울, 그 산새들까지도 울지 않는 계절이다. 당연히 한적하다 못해 외롭기까지 할 지경이다.

 

 

 

동백나무들은 여린 나무들에서부터 오래 된 것은 족히 몇 십 년은 묵었을 만큼 굵다. 흐드러지게 꽃이 피는 계절에라도 찾아온다면 저 숲은 동백꽃 터널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제철을 맞추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 남짓 지나면 슬랩(slab)이 나타나면서 서슬 시퍼런 바윗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안전을 위해 만들어 놓은 난간 너머에서 뾰족산이 고개를 내민다. 그 자태가 자못 빼어나다. 하긴 보길도 십경(十景) 중 보옥첨괴암(甫玉尖怪岩)이 바로 이곳 보족산을 두고 하는 말일지니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그만큼 암봉의 자태가 뛰어나다는 증거일 테고 말이다. 참고로 십경의 나머지 구경(九景)은 고산유적지(孤山遺跡地), 우암탄시암(尤庵嘆時岩), 예송흑명석(禮松黑鳴石), 중리백정사(中里白靜沙), 월봉망원설(月峰望遠雪), 큰기미절벽(絶壁), 부용동백림(芙蓉冬栢林), 복생풍란향(卜生風蘭香), 월송광기암(月松廣奇岩) 등이다.

 

 

바윗길을 오르다가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보옥리 마을과 몽돌해안이 발아래에 펼쳐진다. 한 폭의 잘 그린 그림 같다. ‘보옥리는 보길도가 숨기고 있는 보석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이유로 산자락에 들어앉은 수백 년 묵은 동백나무 숲을 꼽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공룡알 해변으로 알려진 뽀래기 갯돌밭이 한 수 위가 아닐까 싶다. 엉덩이만한 것에서 주먹만 한 것까지 크기가 다양한 갯돌들에 밀물이라도 들라치면 갯돌을 쓸면서 내는 '자그르르'하는 소리가 참으로 신비롭다고 소문나있기 때문이다. 어떤 타악기도 이처럼 환상적인 음색을 표현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바윗길은 험하다. 그리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은 곳에는 어김없이 나무계단이나 안전로프를 설치해 놓았다. 다만 낡은 곳을 보수하지 않은 듯 보이는 게 조금은 꺼림칙하지만 말이다.

 

 

 

올라가면서 뒤돌아본 풍경, 발아래 보이는 섬은 불무섬이다. 사진에는 하나로 보이지만 사실은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뒤에 있는 섬의 이름은 치도이다. 불무섬의 뒤는 망망대해(茫茫大海)이다. 물론 그 바다에는 추자도와 제주도가 있을 것이다. 날씨가 좋을 때에는 한라산까지 보인다고 하지만 오늘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한라산은 고사하고 추자도와 제주도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윗길은 험하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위험한 곳에 놓인 나무계단 탓만은 아니다. 가장 큰 원인은 눈이 누리는 호사에 흠뻑 빠져 위험하다는 것까지도 잊어버린 탓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바윗길은 멈추면 쉼터가 되고, 앉으면 전망대로 변한다. 그러고 그 때마다 발아래에 있는 불무섬은 물론이고 보옥마을과 격자봉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참으로 멋진 풍광이다.

 

 

 

서슬 시퍼런 바윗길이 끝나면 산길은 의외의 상황을 연출한다. 크고 작은 돌들이 섞여있긴 하지만 엄연한 흙길로 변해버린 것이다. 사방이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으로 둘러싸인 산의 정상이 흙으로 이루어졌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덕분에 바위산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은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키 작은 소사나무가 주종이라서 빽빽하게 우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울창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나면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그저 지나가는 길목이라는 느낌이 강한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정표도 없다. 다만 ·라는 아호(雅號)를 쓰고 있는 최남준씨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부산지역의 유명한 산꾼인 그가 어느새 이곳까지 다녀갔던 모양이다. 하여간 고마운 일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인증사진도 못 찍고 내려올 뻔 했다.

 

 

 

정상에서 북쪽으로 오솔길이 나있다. 무턱대고 들어서 본다. 그리고 몇 걸음 걷지 않아 바위벼랑 위에 있는 멋진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비록 조잡하긴 하지만 돌탑까지 쌓아올려 쉼터로서의 구색까지 갖추어 놓았다.

 

 

 

전망바위에서 서면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망월봉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그 왼쪽 아래에 보이는 도로가 바로 대풍구미에서 보옥마을에 이르는 해안도로인 일몰도로이다. 그리고 그 길은 보길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둘러봐야 할 곳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일몰도로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정도로 낙조(落照)의 풍광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거기다 하나 덧붙이자면 이왕에 일몰도로를 탔다면 중간쯤에 있는 천연전망대인 망끝 전망대도 한번쯤 들러보는 것이 좋다. 코앞에 보이는 갈도, 미역섬, 상도 등 작은 섬들이 아기자기하다. 그 바다에 해라도 질라치면 푸른빛이 불그스레한 빛으로 바뀌면서 수평선이 해를 삼킨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를 실은 버스는 그냥 지나쳐버렸다. 낙조 시간 때가 아니라서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망월봉 뿐만이 아니다. 보길도에서 가장 놓은 격자봉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산자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어촌마을은 물론 보옥마을이다.

 

 

마침 먼 바다로 나가는 배 한 척이 보인다. 이곳 보길도는 해옹(海翁 : 孤山의 또 다른 ) 윤선도가 머물렀던 고장, 그가 당시에 봤던 풍경은 지금과는 사뭇 다르겠지만 문득 그가 지었다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가 머릿속에서 맴돈다. 느낌만이라도 그를 따르고 싶어서일 게다. ‘앞개에 안개 걸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이 밀려가고 밀물이 몰려온다./ 강촌이 온갖 꽃이 먼빛이 더욱 좋다

 

 

정상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으로 나아가본다. 조금 전의 바위전망대와는 반대방향이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바위벼랑이 나타나면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벼랑의 끄트머리는 또 다른 멋진 전망대이다. 발아래에는 주먹 만한 크기의 불무섬이 웅크리고 있고, 그 너머는 남해의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보죽산을 설명할 때 수평선 너머 멀리 제주도와 추자도가 아스라하고, 날씨라도 맑을 경우에는 한라산까지 보인다는 표현을 쓴다. 그런 풍경이 보인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정상에 있는 두 곳의 전망대를 다 둘러봤다면 이제는 산을 내려가야 할 차례이다.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면 된다. 산꾼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상황이겠지만 어쩌겠는가. 보족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오로지 외길뿐이니 말이다.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관을 실컷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내려설 일이다.

 

 

 

 

뾰족산 산행을 마친 후에는 세연정으로 이동한다. 보길도에 가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 1587~1671)의 이상향(理想鄕)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자연과 세상을 깨끗하게 씻는다.'는 세연정(洗然亭)을 중심으로 들어선 원림(園林)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 시조문학의 황금기를 주도한 윤선도는 조선 인조 15(1637)에 세상을 등지기 위해 제주로 향하다 우연히 들른 보길도에 정착했다. 당시 고산의 나이가 51세였다. 고산은 자신의 정착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칭하고, 모두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호남을 대표하는 대부호였던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으로, 재산이 넉넉했기에 가능했었을 것이다. 이 가운데 격자봉 기슭에 살림집인 낙서재(樂書齋), 낙서재 건너편 산중턱에는 동천석실이라는 휴식공간을 지었다. 이와는 별도로 부용동의 초입에 세연정을 지었다. 참고로 고산은 부용동 원림을 경영한 1647년부터 1671년까지 34년 동안 두 차례의 귀양과 서울 벼슬길, 해남 금쇄동 등 다른 은거지에서 지내기도 하면서, 보길도는 일곱 차례를 드나들며 통틀어 13년을 생활했다

 

 

연못 앞에 서면 과연 '조선최고의 별서조원(別墅造園)'이라는 평가를 듣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연지의 집채 만한 바위들이 방문객을 맞고, 무희들이 춤췄던 동대와 서대의 주변에서는 동백나무가 하늘거린다. 보길도는 한 개인의 낙원이고 유토피아(Utopia)였다. 그는 이곳(현재는 보길초등학교 담너머)에다 그의 꿈을 집약시킨 부용동 원림(園林)’이라는 정원을 만들었다. 논에 물을 대듯 개울물을 막아 세연지(洗然池)라는 연못을 만들고, 그 한가운데에다 섬을 만들었다. 세연지는 커다란 바위들을 스치고 자연 계곡처럼 흐르는 못이고, 그 물길을 이어서 장방형으로 만든 인공(人工) 못이 회수담이다. 후박나무, 동백나무, 감탕나무, 가마귀쪽나무 등이 늘 푸른 활엽수 숲을 이루는 이곳은 낙원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3,000여 평에 이르는 세연정은 계곡 물을 담은 계담(洗然池), 계담의 물을 끌어들인 인공연못인 회수담(回水潭), 그 사이에 있는 인공섬에 정자인 세연정을 짓고 비홍교를 만들어 건너다녔다. 연못바닥은 깨끗한 암반(巖盤)으로 되어 있고 수초가 무성한 연못에는 사투암, 혹약암 등 7개의 큼직한 바위(칠암)이 놓여 있고 연못 주변에는 야외 무대격인 동·서대(·西臺)와 입석과 판석에 구멍을 뚫어 꿰어서 만든 판석보(板石洑 : 일명 굴뚝다리) 등이 있다. 특히 판석보는 우리나라 정원유적(庭園遺跡) 중에서 유일한 석조보(石造洑)로 세연지의 저수(貯水)를 위해 만들었다. 평소에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雨期)에는 폭포가 되어 수면(水面)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고산은 이곳으로 친지를 불러 자주 연회(宴會)를 열었다고 한다. 풍악이 울려 퍼지면 동대와 서대에선 곱게 차려입은 기생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연지에는 배를 띄웠다고 하니 그야말로 별천지(別天地), '그만의 왕국'이었던 셈이다. 그런 연유로 세연정은 휴식공간인 동천석실, 그리고 거주공간인 낙석재와 대비되는 놀이공간으로 분류된다.

 

 

 

고산(孤山)은 이곳을 자신의 왕국으로 삼아 말년을 보냈다. 그는 세연정에 풍악을 울리게 하고 색동옷을 입은 아이들을 나룻배에 태워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부르게 했다고 한다. 무희(舞姬)는 세연정에서 10분 거리인 옥소대에서 춤을 추게 해 그림자가 연못에 비추게 했다니 임금보다 호사스럽다. 그가 풍류를 즐겼던 세연정은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국내 최고의 정원으로 꼽히는 우리 건축사의 백미(白眉)이다. 세연정은 당시에는 바로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지만 지금은 이 일대가 간척사업으로 뭍으로 변해 옛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다.

 

 

고산은 자연못과 인공못 사이에 팔작지붕을 얹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우아한 세연정 건물을 들어 앉혔다. 그리고 속세(俗世)의 티끌을 씻어낸다는 뜻으로 세연정(洗然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음 심()자 모양으로 된 3개의 연못과 세연정이 어울리는 풍경은 한마디로 절경(絶景),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5년에 걸쳐 조성했다는 이 정원은 한 개인의 낙원(樂園)이라는 수준을 벗어나 버렸다. 그 결과 명승 제34호이자 사적 제3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경궁 후원 그리고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국내 3대 아름다운 정원'으로 꼽힐 정도이니 명승으로 지정됨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항일운동의 성지 소안도(所安島), 그리고 가학산(駕鶴山, 368m)

 

여행일 : ‘16. 1. 1()

소재지 : 전남 완도군 소안면

트레킹 코스 : 소안도선착장물치기미쉼터맹선재해도정가학산정상학운정잔디밭쉼터물바위골입구 해안도로미라리해안항일운동기념관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완도의 남쪽, 뱃길로 40여리 떨어진 소안도(所安島)는 소안군도의 중심을 이루는 섬이며 주위에는 청산도, 보길도, 노화도, 대모도 등이 있다. 면적이 23,016로 크지는 않다. 하지만 소안면이라는 행정구역(行政區域)의 본섬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작지도 않은 섬이다. 흔히 완도하면 사람들은 보길도와 청산도를 떠올린다.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 선생님의 유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청산도는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온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소안도도 그에 못지않은 섬이다. 가학산을 오르내리며 즐기는 다도해(多島海)의 조망은 잠시라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특히 일출과 일몰은 이미 세간(世間)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거기다 역사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20명의 서훈자(敍勳者)를 배출했을 정도로 민족의 혼이 서려 있는 항일(抗日)의 고장인 것이다. 관광만 하는 게 아니라 아팠던 우리네 역사까지 함께 둘러볼 수 있으니 이 보다 더 나은 관광지가 또 어디 있겠는가. 참고로 1018(고려 현종 9) 이래 달목도라는 이름으로 영암군에 속했던 소안도는 임진왜란으로 비워 두었으나 김해 김씨동복 오씨가 월항리에 들어와 다시 촌락을 형성하였고, 그 후 각 마을에 여러 성씨들이 입주하여 정착하였다. 1627년 이진진이 설치되면서 이후 제주를 왕래하는 관원(官員)들에 의해 소안도로 도명이 자연스럽게 개명되었다고 한다. 물결이 거친 바다를 처음 접한 관원들이 공포에 시달리며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다 소안도에 상륙하면 안심이 된다고 해서 안심이 되는 곳소안(所安)’이라고 외친데서 생긴 이름이라는 것이다.

 

찾아오는 방법

소안도로 들어가는 방법은 완도의 화흥포항과 땅끝마을에서 차도선(車渡船)을 타야만 한다. 완도로 가든 아니면 땅끝마을로 가든 해남 땅을 가로지르기는 매한가지이다. 우리는 완도의 화흥포항에서 운항(運航)하는 카페리호를 이용했다. 화흥포항으로 오는 방법은 영암-순천간고속도로 강진무위사 I.C에서 내려와 18번 국도를 타고 해남쪽으로 달리다 55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완도대교(大橋)까지 온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해안도로를 들어오면 화흥포항에 이르게 된다. 화흥포항에서는 1시간에 1대꼴로 카페리호를 운항하고 있으니 출항(出港)시간에 맞추어 승선하면 될 일이다. 참고로 소안도를 오가는 차도선의 이름은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이다. 아마 소안도가 충혼의백(忠魂義魄)의 땅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여행의 주요 목적은 신년(新年) 해맞이이다. 사실 난 몇 해 전부터 일출산행을 삼가 해왔다. 캄캄할 때에 산에 오르는 것이 싫어서이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떨어져가는 시력(視力)이 더 큰 부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마침 청마산악회에서 선상(船上)에서 일출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기다 해맞이 후에는 소안도의 트레킹까지 계획되어 있단다. 마침 내가 가보지 못한 섬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따라나섰다. 그런데 이게 조금 묘하게 되었다. 배에서 일출을 본다면 응당 망망대해(茫茫大海)의 수면(海水面) 위로 떠오르는 해를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타고 있는 배가 정기 여객선(旅客船)이다보니 손님들 마음대로 움직여 줄 리가 없다. 시간에 맞추어 행선지로 달릴 뿐이다. 그 덕분에 우린 수면위로 떠오르는 해가 아닌 산봉우리 위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뭔 대수겠는가. 병신년(丙申年) 새 해 새 아침에 새로운 해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 해에다 내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클 소망을 빌어본다. 우리 가족과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를 보낼 수 있기를 말이다. 거기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도 빌어보지만 글쎄다. 그런 것까지 기대할 만큼 공덕을 쌓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안항에 내리자마자 커다란 빗돌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라고 적혀있다. 이곳 소안도는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20명의 서훈자(敍勳者)를 포함해 독립운동가 89명을 배출한 항일의 땅이자 민족혼(民族魂)’이 서려 있는 고장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리기 위해 빗돌을 세운 모양이다. 그리고 저 빗돌에는 소안도 사람들의 긍지가 담겨있을 것이고 말이다. 이런 자부심은 빗돌뿐만이 아니다. 일주도로변에 가로수로 심어진 무궁화와 거리에서 사시사철 힘차게 나부끼고 있는 태극기들 또한 그들의 자부심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트레킹들머리는 물치기미전망대

트레킹은 서중리해안도로에 있는 물치기미쉼터에서 시작된다. 가학산을 오르기 위해서이다. 하긴 산악회를 따라나선 여행이니 어찌 소안도에서 가장 높다는 가학산 산행을 거를 수 있겠는가. 하루짜리 일정의 투어에서 물치기미전망대까지 걷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선착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서 걷는데 시간을 투자하다보면 전체적인 일정을 망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섬내를 운행하는 군내(郡內)버스를 이용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인솔한 청마산악회에서 배에다 버스까지 한꺼번에 싣고 간 덕분에 큰 고민 없이 들머리에 이를 수 있었다.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에 데크(deck)에 올라본다. 쉼터에 전망데크를 만들어 조망(眺望)을 즐길 수 있도록 해놓았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남해의 너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그 위를 돛단배마냥 떠다니는 당사도와 복생도, 솔섬, 기섬 등 소안군도(所安群島)의 크고 작은 섬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그 오른편에 보이는 커다란 섬은 물론 보길도이다. 날이 좋으면 저 멀리 추자도까지 보인다고 하니 전망 좋은 곳으로 꼽힐 만 하겠다. 거기다 이곳은 낙조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소안도를 찾아온 연일들이 데이트 삼아 꼭 들르는 곳이란다. 참고로 소안군도(所安群島)란 해남반도의 남단에서 남동쪽으로 약 20지점에 위치한 군도로서, 소안도(所安島)를 비롯하여 노화도(蘆花島보길도(甫吉島횡간도(橫看島자개도(自開島) 등과 이 밖에 50여 개의 작은 부속 도서로 구성되어 있다.

 

 

산행들머리는 쉼터에서 150m쯤 떨어져 있다. 선착장에서 쉼터로 왔던 방향이다. 들머리에 등산로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들머리에서 산길은 곧장 위로 오르지를 못하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가파른 경사를 배겨내지 못한 것일 게다. 그리고 물치기미쉼터의 바로 위까지 온 다음에야 위로 향한다. 그러고 보니 쉼터가 능선의 끝자락 이었나보다. 일단 위로 향한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게 변한다. 섬에 있는 산 치고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가파르다.

 

 

다행이도 그 가파름은 오래지 않아 끝을 맺는다. 10분 후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기세(氣勢)를 뚝 떨어뜨리는 것이다. 반면에 눈은 호사를 누리게 된다. 심심찮게 시야가 터지면서 주변 바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오른편으로 진산리 해안의 멋진 풍경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조망을 즐기면서 걷다보면 10분 후에는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왼편에 길이 하나 보이지만 이정표(맹선재0.2Km/ 파고라0.8Km/ ??)에는 지워져 있다. 방향으로 보아 맹선리가 아닐까 싶다.

 

 

삼거리에 세워진 이정표를 보면 파고라란 지명(地名)이 보인다. 아마 퍼걸러(pergola)의 일본어가 아닐까 싶다.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에 들렀던 물치기미전망대에서 퍼걸러시설을 보았기에 하는 말이다. 퍼걸러란 휴게시설의 일종으로 사방이 트여있고 골조가 있는 지붕이 있어서 햇볕이나 비를 가릴 수 있으며 앉을 자리가 있는 시설물을 말한다. 이를 일본인들은 파고라라고 읽고 있는 것으로 안다.

 

 

삼거리에서 잠깐 내려서면 돌탑이 있는 곳에서 또 다른 이정표(팔각정 1.0Km/ 파고라 1.1Km)를 만난다. 삼거리에서 보았던 이정표로 미루어보아 이곳이 맹선재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정표에는 좌우로 나뉘는 길을 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길의 흔적 또한 보이지 않는다. 아마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지 이미 오래인 모양이다.

 

 

 

맹선재를 지난 능선은 오름짓을 계속한다. 그렇다고 작은 내림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짧게 내려섰다가 길게 오르면서 이어진다는 얘기이다. 길은 경계석 같은 낮은 돌담장이 쌓인 곳을 지나기도 하고, 소사나무 군락지도 지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밋밋하고 특징이 없는 길이다.

 

 

 

휘감아 돌아가는 산허리길 가의 빨갛게 익은 청미래(일명 '맹감') 열매가 예쁘다. 얼마 전에 다녀온 신지도에서도 청미래가 참 많은 섬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곳 소안도에서도 역시 심심찮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완도 인근의 섬들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넝쿨식물인 모양이다.

 

 

맹선재에서 15분 남짓 걸으면 어느덧 해도정(解濤亭)이라는 정자에 올라서게 된다. ‘큰 물살을 가르다는 정자의 이름답게 일렁이는 파도를 가르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잘 조망되는 곳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이 글을 쓰면서 난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곳 출신의 어느 인사가 쓴 글에서 해도(解濤)’가 이 정자를 세운 이곳 소안도 출신 군수(郡守)의 호()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는 독립운동가의 혼을 이어받아 어려운 난관에 부딪혀도 뚫고 이겨나가 세계로 향하는 웅지를 펼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했지만 글쎄다. 자기의 호를 꼭 붙여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자에 올라서면 가깝게는 소안도의 상수원인 소안저수지와 아부산이 보이고, 조금 더 눈을 들면 청산도와 불근도, 대모도 등이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짙은 연무(煙霧)로 인해 또렷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해도정을 지난 능선은 급격히 고도(高度)를 낮춘다. 그리고 3~4분 후 안부에 이른 다음에는 나무계단을 이용해 다시 위로 향한다. 계단 근처에 수원지삼거리라고 쓰인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소안저수지로 연결되는 길인 모양이지만 길의 흔적이 희미한 것을 보면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코스인 모양이다.

 

 

 

나무계단을 지나면서 동백나무 숲이 시작된다. 이후 햇살 한줌 들어오지 않는 빽빽한 난대림이 계속된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궁금했었다. 남쪽 섬들의 특징인 동백나무 숲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해답을 한꺼번에 보여주려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숲이 울창한 것을 보면 말이다.

 

 

부지런한 나무들은 벌써부터 꽃을 피웠다. 아니 이미 시들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것들도 보인다. 동백꽃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중 하나는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이라는 이미지와 다른 하나는 선홍빛 피의 애처로움이다. 옛날 선비들에게는 후자가 주는 이미지가 더 강했던 모양이다. 귀양을 간 곳에 동백나무라도 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니 말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자신의 목이 댕강 떨어지는 것을 연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난 선비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나 보다. 나무에 매달려 있어야할 꽃들은 마치 수줍기라도 하는 양 모두 다 숨어버렸고, 바닥에 흩어져 있는 시들어가는 꽃들만 눈에 띄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해도정을 출발해서 15분쯤 지나면 만나게 되는 가학저수지갈림길’(이정표 : 수원지삼거리(가학산 정상)0.15Km/ 가학저수지/ 팔각정0.8Km)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난다. 등산안내도와 이정표 외에도 벤치까지 놓인 의젓한 쉼터이다. 조금 전 삼거리에서 만났던 이정표에 수원지삼거리라고 표기했던 지점인 모양이다. 하지만 실제는 사거리(이정표 : 가학산 정상0.5Km/ 가학마을1Km/ 미라마을1.3Km/ 맹선팔각정0.35Km)이니 참조한다.

 

 

사거리에서 2~3분쯤 더 오르면 너덜지대가 나타나고, 곧이어 거대한 바위들이 줄을 지어 나타난다. 하나 같이 뛰어난 조망을 보여주는 전망바위들이다. 첫 번째 바위에 오르면 왼편으로 소안도의 명물인 사주(砂洲)’가 나타난다. 하지만 서둘러 눈을 맞출 필요까지는 없다.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더 뛰어난 조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학산의 뷰 포인트(view point)’는 뭐니 뭐니 해도 남과 북의 섬을 하나로 연결하는 사주(砂洲, sand bar)’의 비경(秘境)이다. 황금빛 사주의 아름다운 모습 때문이다. 퇴적된 토사가 파도와 연안 해류에 의해 해안과 평행하게 된 것을 사주라 한다. 바람에 의해 운반된 모래는 황금빛이다. 이곳 소안도의 사주 역시 같은 유형이지만 많은 민가(民家)들이 들어차 있어 온전한 아름다움은 보여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이 살아가는 게 더 우선이지 않겠는가. 참고로 이러한 사주들은 다른 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제주도 성산일출봉, 인천 팔미도, 옹진 선재도, 통영 비진도 등이다.

 

 

그 외에도 다도해의 수많은 섬들이 나타나지만 짙게 낀 연무(煙霧)로 인해 어디가 어디인지는 분간하기가 어렵다.

 

 

전망바위를 지나서 조금은 수월해진 능선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돌탑과 무인산불감시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편의상 돌탑봉으로 부르면 어떨까 싶다. 올라오면서 보았던 조망(眺望)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아니 이번에는 가학산의 정상까지 내다보이니 한 수 위라고 보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돌탑봉에서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한 번 치고 오르면 드디어 가학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30분 만이다.

 

 

서너 평 남짓한 공간만이 허락되고 있는 정상에는 어른의 허리께나 차는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앉을 자리는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정상어림에 보이는 몇 개의 바위들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쉼터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참고로 가학산은 산의 생김새가 학을 닮았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신선(神仙)이 학을 타고 내려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다른 설도 있다. 원래는 학산(鶴山)이었는데, 학이 날아 가버리면 땅의 기운이 빠진다 하며, 학산에 멍에 가()’를 붙여 가학산(駕鶴山)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학()과 인연이 깊은 곳임에는 틀림없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바라본 돌탑봉, 그 자체만으로도 괜찮은 생김새인데, 좌우로 다도해의 섬들까지 거느리고 있어 한층 더 멋진 경관을 만들어 낸다.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에서의 시야(視野)는 거칠 것 없이 사방으로 열린다. 그리고 숨 막히는 조망이 펼쳐진다. 이곳까지 올라오면서 즐겼던 풍경들이 다시 한 번 펼쳐지지만 그 넓이는 아까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크고 작은 섬들이 먼 바다까지 수도 없이 널려있다. 왜 이곳을 다도해라고 부르는지 금방 이해가 간다. 비록 희미하긴 하지만 희뿌연 연무 속에서 그 섬들이 품고 있는 산들 또한 나타난다. 완도 상황봉과 청산도 매봉산, 생일도 백운산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북쪽 방향에 솟아있을 두륜산과 달마산은 그 형태조차 찾아볼 수 없다.

 

 

 

정상에 서면 또 다시 사주(沙洲)가 내려다보인다. 아니 정상까지 오는 동안 계속해서 나타났다고 보면 된다. 장고처럼 보이는 생김새 또한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그 장고는 정상에 이르면서 완벽한 모양새를 만들어낸다. 높은 만큼 더 넓게 보인 탓일 것이다. 소안도는 원래 남쪽과 북쪽의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너비 500m, 길이 1.3정도 되는 사주(沙洲)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섬이 되었단다. 그 사주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흡사 잘 그린 그림처럼 아름답다. 소안도가 그려내는 갖가지 풍경화들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왔던 방향의 반대편, 즉 잔디밭쉼터 방향이다. 정상에서 잠깐 가파르게 내려서면 학운정(鶴雲亭)’이란 정자(이정표 : 잔디밭쉼터 0.4Km/ 가학산 정상 0.4Km)가 나온다. 정자의 이름은 소안팔경(所安八景) 중의 하나인 '학령귀운(鶴嶺歸雲)‘에서 따왔다고 한다. ‘학령귀운이란 봄비가 내린 후 가학산에 걸린 구름을 뜻하는데, 가학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내력과 대비시켜 보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가 된다. 그러지 않아도 신선이 내려올 정도로 그 자태가 빼어난 산인데, 거기다 구름에 둘러싸여 있기까지 하다면 그 경관은 가히 환상적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팔경(八景) 중 제5경의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구름이 끼지 않은 탓에 그런 빼어난 경관을 구경할 수가 없다. 아쉽기는 하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는 데야 난들 어쩌겠는가. 참고로 나머지 7경은 제1경 금성명월(錦城明月 : 금성산(錦城山)에 비치는 밝다 못해 파르르한 달빛)과 제2경 내동장천(內洞長川 : 웃골에서부터 흘러 비자리 동네를 굽이쳐 흐르는 시내). 3경 귀하파성(龜河波聲 : 과목 바닷가에 부딪쳐 흩날리는 파도소리), 4경 이령목적(梨嶺牧笛 : 배난골(이목리) 고개의 목동이 부는 피리 소리), 6경 미포어화(美浦漁火 : 미라리포 내의 멸치잡이 배의 불), 7경 은곡창송(隱谷蒼松 : 깊은 골(소진, 부상골)의 푸르른 소나무 숲), 8경 백포귀범(白浦歸帆 : 석양빛을 받고 돌아오는 백도와 맹선 사이의 돛단배) 등이다.

 

 

 

학운정은 가학산 제1정자답게 최고의 조망을 자랑한다. 산행 내내 즐겼던 사주가 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좌우로는 노화도와 대보도, 소보도 등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너른 바다 위에 널려있다.

 

 

학운정을 지나서도 가파르기는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윗길이 끼어 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 것이다. 내려가면서 바라보는 사주(砂洲)와 대봉산을 낀 바다 풍경이 압권이다. 그리고 곧이어 가학산 전망 좋은 곳이라는 공인(公認) 전망대에 이른다. 조망안내도를 세워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을 정확히 알아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미라리 마을의 왼쪽 돌출부가 '아부산'이고, 오른쪽으로 활처럼 휘어진 만의 안쪽에는 천연기념물인 '미라리상록수림'이 있는 몽돌해변이 있다. 그리고 아부산 너머로 '여서도'가 있고, 미라리 오른족 너머에는 '제주도'가 있단다. 고맙지만 지명(地名)을 잘 못 표기한 아쉬운 점도 눈에 띈다. 맨 왼쪽에 '도봉산'이라고 표기 곳은 '대봉산'을 잘못 쓴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전망대를 지나면 또 다시 울창한 난대림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원시림에 들어선 것처럼 청섭나무(사스레피나무), 후박나무, 동백, 황칠나무 등 난대림 수종이 울창한 숲 터널을 이룬다. 잠시 후 부서진 평상(平床)이 보인다 싶으면 곧이어 널따란 잔디밭쉼터(이정표 : 물바위골 350m/ 정상 740m)’에 내려서게 된다. 이곳 쉼터는 마장터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고 한다. 옛날 소나 말을 방목하였던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중종 11) 5(1510 경오 / 명 정덕(正德) 5) 66(경인) 4번째 기사에 전 청산 현감 박지번이 왜구의 출몰로 노도·달목도의 목장을 옮길 것을 청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말을 점검하느라 노도(露島:지금의 노화도)와 달목도(達木島:지금의 소안도)를 드나드는 관원들이 왜구(倭寇)로부터 변을 당할 우려가 있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는 청을 드렸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인들이 우리네 속을 썩이기는 매한가지였나 보다.

 

 

트레킹의 물바위골 입구

쉼터는 삼거리이다. 물바위골은 왼쪽으로 10여분 정도 들어가야 한다. 바위에 귀를 대면 졸졸졸 물소리가 들린다는 물바위가 있는 곳이란다. 하지만 우린 곧장 날머리로 향한다. 그보다는 미라리해변을 둘러보고 싶어서이다. 쉼터에서 10분 쯤 걸으면 목재 테크길이 나오고 곧이어 해안도로에 내려서게 되면서 가학산 트레킹이 끝난다. 정상에서 30, 전체적으로는 2시간이 걸렸다.

 

 

산에서 나와 미라리해안에 들른다. 천연기념물(339)로까지 지정된 상록수림(常綠樹林)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길이 450m에 폭이 35m쯤 되는 이 상록수림은 해송(海松)이 가장 많은 가운데, 크게 생달나무군락지와 후박나무군락지, 그리고 구실잣나무군락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밖에도 사스레피나무와 동백나무, 보리밥나무 등이 자생한다. 바닷바람을 막아 마을과 농경지를 보호하기 위해 방풍림(防風林)으로 조성한 데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음력 정초에 마을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년, 풍어 등 어선의 무사고를 비는 제()를 올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상록수림 뿐만이 아니다. 이곳 미라리해안은 몽돌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하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는 보길도의 몽돌해수욕장보다 훨씬 작은 갯돌들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바다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깨끗한데다 주변에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한여름 휴양지로 이만한 곳도 흔치는 않겠다. 참고로 소안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히는 이곳은 미라리는 아름다운 경치가 도처에 널려 있다 하여 미라팔경(美羅八景)으로 유명하다. 鶴山歸雲(학산귀운 : 봄 기운 머금은 가학산 봉우리에 걸린 구름이), 大洞長川(대동장천 : 큰골 기슭을 감돌아 흐르는 내에 걸쳤도다), 美浦歸帆(미포귀범 : 미라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負兒望月(부아망월 : 아부산에 떠오르는 달빛과 어우러지도다), 前坊嘉林(전방가림 : 동네 앞 아름다운 숲과), 龍潭怪穴(용담괴헐 : 용이 놀던 곳의 굴은), 綱濱漁火(강빈어화 : 조강날의 챗배불과 같이 하는데), 烏山洛照(오산낙조 : 어허 까막산 저녁놀은 그 또한 가관이구나) 등이다.

 

 

위에서 작은 갯돌들로 이루어진 점을 해수욕장의 특징으로 꼽았었다. 파도에 닳고 닳은 검은 몽돌들은 강한 햇빛에 달구어져 맥반석에서 원적외선이 발생하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많은 외지인들이 찾아올 정도라는 것이다. 어떻게 감을 잡았는지는 몰라도 집사람이 몽돌밭에 벌렁 드러눕고 본다. 돌이 고이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긴 돌이 자잘한 덕분일 것이다. 하여간 지압(指壓)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여름철 피서를 겸해서 찾아볼 것을 권해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선착장으로 나가던 버스가 잠시 멈춘다. 소안도의 사주(砂洲, sand bar)가 시작되는 잘록한 허리부분이다. 그곳에 위치한 항일운동기념관을 둘러보라는 것이다. 널따란 마당에 들어서면 소안항일운동기념탑이 길손을 맞는다. 높이 8m, 높이 4m로 검정색 둥근돌과 흰색돌을 쌓아 하늘로 치솟게 하였다. 검정색돌은 일제의 탄압을, 흰색은 백의민족의 순수함을 세 갈래로 치솟은 모양은 저항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탑을 가운데에 두고 왼편에는 소안학교’, 그리고 오른편에는 항일운동기념관을 배치했다. 소안도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항일 구국의 횃불을 드높게 쳐들었던 독립운동의 성지였다. 한 사람이 감옥에 갇히면 감옥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을 정도로 소안도 사람들은 기질이 강건하였다 한다. 이들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소안면민들의 뜻을 모아 기념관을 건립하고 그 뜰에 세운 것이 항일운동기념탑이다. 소안학교는 친일 매국노 이기용으로부터 토지를 되찾은 소안도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사립학교이다. 당시 소안학교는 인근의 노화, 청산은 물론이고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이 몰려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2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던 것을 복원해 놓은 것이란다. 소안 출신의 민족지도자 송내호 선생과 선열들은 배달청년회, 소안노동대성회, 살자회, 일심단 등을 조직해 활동하였고, 1923년 설립 개교한 사립소안학교는 민족의식 고취를 통한 항일투쟁 본산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기념관으로 들면 이들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다.

 

경관이 아름다운 유배의 섬, 신지도(薪智島)

 

여행일 : ‘15. 12. 6()

소재지 : 전남 완도군 신지면

트레킹 코스 : 신지대교 휴게소축양장물하태상산(象山,352m)영주암뾰죽산등대 왕복명사십리해수욕장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신지도(新智島)는 완도에서 동쪽으로 5, 고금도에서는 남쪽으로 1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으로 원래는 지도(智島)라 칭하였으나 나주목에 지도(현 신안군 지도읍)라는 지명이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하여 나무가 많은 섬이라 하여 신()자를 붙여 신지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청산도 만호진이 옮겨오면서 새로운 군주둔지, 신둔지(新屯地)’가 되어 이후 신지로 변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신지면의 본섬일 정도로 그 규모가 작지 않은 이 섬은 옛날부터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유명했던 곳인데, 이제는 손쉽게 찾는 완도의 휴양지로 자리 잡았다. 게다가 몇 해 전 신지도의 해변을 따라 명사갯길이라는 걷기길이 만들어지며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숲과 백사장으로 연결된 아름다운 해변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여전히 산꾼들에게는 신지도에서 가장 높은 상산(象山·352m)이 인기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주변 풍광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완도 상황봉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다도해(多島海)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찾아오는 방법

신지도(新智島)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 200512월 신지대교(大橋)를 통해 완도와 연결되면서 배를 갈아타는 번거로움 없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동차로 곧장 들어올 수 있음은 물론이다. 남해고속도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2번 국도를 타고 강진방면으로 달리다가 월산교차로(강진군 성전면 월평리)에서 13번 국도로 갈아타고 완도까지 들어온다. 그런 다음 완도읍에서 신지대교를 건너면 신지도이다. 대교를 건너자마자 만나게 되는 휴게소가 이번 여행의 들머리이다.

 

트레킹들머리는 신지휴게소

휴게소는 관광안내소 외에도 단출한 특산품판매소를 운영하고 있다. 미리부터 특산품을 사봐야 짐만 될 거라며 무작정 트레킹을 나서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주차장 한쪽 귀퉁이에 관광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길을 나서기 전에 오늘 걸어야할 코스를 미리 살펴보고 떠나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신지도의 경관을 하나라도 더 담아가기 위해서 그 정도는 준비해야할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트레킹의 출발은 휴게소의 왼쪽 뒤편에서 시작한다. 들머리에 이정표(해안조망쉼터 60m, 명사십리해수욕장(명사갯길) 6.3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그런데 이정표에 명사갯길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길을 나서기 전에 사연부터 알아보자. 명사갯길이란 지역특성과 자연 경관이 어우러진 친환경 생활공간 조성을 통한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제고 및 지역공동체 활성화 도모라는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를 내걸고 행정자치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친환경 생활공간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둘레길이라고 보면 된다. 기존의 옛길을 정비해서 2012년에 개통한 명사갯길은 해안과 산길을 걸으며 바다와 섬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그림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름에는 3.8km에 달하는 명사십리 해변을 걷다가 물에 뛰어들어 해수욕을 즐길 수도 있다. 산길 옆으로 수시로 나타나는 갯바위는 낚시 포인트다. 특히 신지도는 가을철이 바다낚시의 절정기다.

 

 

산자락에 놓인 데크계단을 올라서면 역시 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 하나가 나타난다. 시작부터 전망대인 것을 보면 아마 신지도의 섬내 트레킹은 조망으로 시작되어 조망으로 끝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좋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전망대에 올라선다. 본섬인 완도항 일대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해변에 자리 잡은 완도읍의 시가지는 물론이고 뒤편에 산 위에 지어진 완도타워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아니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타위 위에서 쉬고 있는 우주선이 무심코 지르는 소리에 놀라 날아가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이다. 이곳 신지도는 청산도나 증도처럼 스로우 시티(Slow City)’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그들을 닮아가고 있나 보다. 항구를 드나드는 배들이 하나 같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바다를 선점(先占)하고 있는 양식시설을 피해 다니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만큼 이곳 완도 일대는 양식업이 흔하다.

 

 

조망을 즐기다가 바다 쪽으로 난 데크를 내려서면 도로를 만난다. 삼거리에 세워진 이정표(물아태 2.6Km/ 강독나루터 200m/ 강독휴게소 350m)해안누리길안내도가 말해주듯이 이곳에서부터 둘레길 걷기가 본격적으로 시작 된다. 안내도에 나타난 해안누리길은 해안 경관이 우수하면서도 역사·문화자원 또한 풍부해서 걷기여행에 좋은 해안길 중에서 해양관광 진흥을 위해 특별히 필요하다고 해서 해양수산부장관이 선정한 길이다. 특히 인위적으로 걷기 길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길과 이미 조성된 바닷길 중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해양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해안길을 대상으로 한 점이 특징이다. 낙후된 어촌 지역 재생과 해양 홍보 효과를 동시에 노리는 사업인 셈이다. 2010년 지자체 공모 이후 걷기길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심의위원회 심사와 현장실사를 통해 총 52개 노선(505.1)이 해안누리길로 지정되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이곳 신지도의 명사갯길도 그중 하나로 선정되었던 모양이다. 지난해에는 수도권 도보 여행객을 위해 인천 옹진군 '삼형제섬길'이 해안누리길 53번 노선으로 지정돼 현재까지 지정된 해안누리길은 전국 36개 시··53(508)에 달한다. 참고로 2012년에는 신안 해넘이길, 강화 호국돈대길, 부안 변산마실길, 경남 고성 공룡화석지해변길, 부산 영도 절영해안산책로 등을 대한민국 해안누리길 5대 대표노선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명사갯길과의 첫 만남은 아스팔트도로로 시작된다. 산자락의 사면(斜面)을 헤집으며 나있지만 차량 통행이 가능하도록 잘 닦여 있다는 얘기이다. 걷기는 편하지만 해안누리길답지 않게 인위적(人爲的)이라서 실망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너무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잠시 후 77번 국도를 만나면서 길은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고가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야트막한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들머리에는 익숙한 이정표(물하태 2.4Km/ 강독휴게소 750m) 말고도 명사갯길 안내도명사갯길 70라고 적힌 또 다른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이정표는 이곳에서 물하태까지의 길을 선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현재의 위치를 강독으로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강독마을인가 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잠시 후 숲길이 시작된다. 바다 쪽 산허리를 헤집으며 난 오솔길은 발아래로 바다가 깔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사각의 커다란 기둥도 눈에 띈다. 혹시 야간 조명(照明)을 위한 시설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파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바다를 보며 걷는 재미가 쏠쏠한 길이다.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본섬인 완도는 물론 저 멀리 고금도까지 눈에 들어온다.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10분 남짓 되었을까 바닷가를 벗어난 오솔길이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검은 장막으로 둘러싸인 시설을 옆을 지난다. 지도(地圖)축양장2’로 표기된 지점이다. 아마 우럭이나 광어를 양식하고 있는 곳이지 않나 싶다. 한때 이곳 신지도는 우럭과 광어를 길러 뭉텅이 돈을 만졌다고 알려진 곳이다. 이젠 흘러간 옛이야기에 불과하다고들 얘기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양식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축양장 앞에서 다시 도로를 만난다. 그리고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100m쯤 도로를 따르다가 또 다시 오른편 산자락(이정표 : 물하태 1.6Km/ 강독휴게소 1.6Km)으로 들어선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된다. 소나무와 참나무, 거기다 동백나무까지 함께 어우러진 울창한 숲길이다. 그리고 따뜻한 지방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길이다. 내일모래면 겨울이 무르익는 12월이 시작되는데도 길가의 나무들은 아직까지도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있기 때문이다.

 

 

단풍을 눈요기 삼아 느긋하게 걷다보면 잠시 후 또 다른 도로(이정표 : 물하태 1.1Km/ 강독휴게소 2.1Km)가 나온다. 이 고갯마루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물하태 선착장으로 연결된다. 명사갯길은 도로를 가로질러 반대편 산자락으로 연결된다.

 

 

 

맞은편 산자락에 들어섰어도 산길의 형편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흙길이 계속된다는 얘기이다. 다만 주변 나무들의 굵기가 전보다 조금 더 굵어졌고, 주변에 동백나무의 개체수가 아까보다는 훨씬 더 많아졌다는 것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일 것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산길이 돌연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 경사가 부담스러웠던지 명사갯길은 길가에 안전로프까지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이어서 나타나는 통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서면 잠시 후 도로(이정표 : 등대 3.2Km/ 강독휴게소 3.2Km)에 내려서게 된다. 도로는 오른편에 위치한 물하태선착장으로 이어진다. 신지대교가 놓이기 전만 해도 신지, 고금, 약산 주민들이 완도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북적이던 곳이다. 하지만 신지대교가 완성된 후 한적한 바닷가 선착장으로 변했다. 참고로 다리가 놓이기 전 외부에서 신지로 들어오는 뱃길은 완도읍에서 들어오는 이곳 물하태나루터 외에도 강독나루터와 청산 등 바깥 섬과 연결되는 동고나루터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삼마리의 나루터를 이용했다고 한다. 당시 삼마루에는 말을 기르던 목장(牧場)이 있었고, 인근 송곡에는 진이 설치되어 외부와 연결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했던 숲길은 물하태를 지나면서 활짝 열린다. 덕분에 지금껏 나뭇가지에 가려있던 본섬인 완도는 물론이고, 푸른 하늘과 그 빛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완도 앞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 그렇게 100m쯤 더 가면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명사갯길은 오른편으로 연결된다. 들머리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농가 진입로로 보이는 가운데는 제켜두고 왼편 포장도로를 따른다. 곧장 상산으로 오르기 위해서이다. 물론 명사갯길을 따르다 등대사거리에서 상산으로 오르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올라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는 불상사가 발행하게 된다. 그건 그렇고 아까 물하태로 내려설 때에 맞은편에 보이던 덩치 큰 산봉우리가 바로 상산이니 방향을 잡는데 참조할 일이다.

 

 

밭에다 뭔가를 씌워 놓았다. 전에 거문도에 갔을 때 이런 풍경을 본 일이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런 기상변화로부터 기르고 있는 약초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들었다. 당시 추자도에서는 약쑥을 기르고 있었는데, 이곳은 무엇을 기르는지 모르겠다.

 

 

갈림길에서 다시 100m쯤 더 걸으면 오른편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이 나타난다. 상산으로 오르는 길인데 들머리에 이정표(상산 정상 1Km/ 물하태 200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자락으로 오르자마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오르막길은 끝도 없이 계속된다. 무척 힘든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상산의 높이는 352m에 불과하다. 그 정도를 갖고 굳이 이라고까지 할 필요가 있겠냐고 말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산을 올라본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만만치 않은 산임을 느끼게 된다. 내륙과는 달리 352m에 달하는 고도차(高度差)를 온전히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습게 봤다간 큰코다치겠네요.’ 함께 오르던 일행이 하는 말이다. 산행에 이골이 났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의 산꾼 입에서 저런 얘기가 흘러나왔다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산자락에 동백나무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푸른 빛 녹음이 다소나마 피로를 감소시켜 준다는 얘기이다. 숨이 턱에 차도록 헉헉대며 30분 정도를 오르면 한국통신의 통신탑이 나타나고, 이어서 그 기세를 많이 누그러뜨린 산길을 따라 15분 정도를 더 오르면 드디어 상산의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30분이 지났다. 상산 정상은 옛날 봉수대(烽燧臺)가 있던 자리란다. 지금은 비록 흔적조차 찾기 힘들지만 말이다.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상산의 정상은 커다란 정상표지석과 산불감시초소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은 바닥이 반반한데다 초지(草地)로 이루어져 점심상을 차려놓고 쉬어가기에 딱 좋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저곳이 사람들 천지다.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조망(眺望)을 즐기며 주거니 받거니 술잔들을 돌리느라 분주한 모습들이다. 그리고 하나 같이 불콰하게 달아올라 멋진 감탄사들을 쏟아 놓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난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李白)’을 찾아낸다. 술을 좋아했던 그가 이곳에 있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이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상산(象山)은 모양새가 코끼리의 코처럼 가로로 길게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근 주민들은 아직도 코끼리 산이라고도 부른단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가히 환상적이다. 동쪽으로 신지도의 노학산이 보이고, 남쪽으로 청산도와 모도가 보인다. 서쪽으로는 완도항과 신지대교, 상왕봉이 보인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고금도와 건설중인 장보교대교도 보이고 멀리 두륜산과 주작산까지 조망된다. 특히 완도와 고금도, 조약도 방면으로 터지는 풍광이 일품이다. 신지대교가 정면으로 보이고 그 뒤로는 완도 상황봉 줄기가 근엄한 모습으로 하늘금을 그리고 있다. 멋진 조망을 즐기다보니 피곤에 절었던 육신(肉身)은 나도 모르는 새에 새로운 활력으로 충만해져 있다.

 

 

 

정상석이 세워진 곳은 사실 정상이 아니다. MBC에서 세워놓은 무선중계소가 있는 진짜 정상은 이곳에서 약 3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송신탑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중계소 주변은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정상석을 다른 곳에다 세워놓은 이유일 것이다.

 

 

다시 송신탑 직전으로 되돌아와 하산을 서두른다. 정상에서 영주암으로 내려가는 등산로는 일자형의 가파른 등산로다. 상산으로 오르는 가장 짧은 코스이기도 하지만 미끄러워지기 쉬우니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잠시 후 영주암에 이르게 된다.

 

 

영주암은 단청(丹靑)이 안 된 법당(法堂)과 요사채, 그리고 용도 모를 컨테이너박스가 다인 자그마한 산중 암자(庵子)이다. 역사 또한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저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란 것만 알 수 있을 뿐, 누가 언제 어떤 사연을 갖고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영주암 앞에서 시멘트포장길과 만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시설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인동 장씨(仁同 張氏)의 문중묘(門中墓)라는데 모든 봉분(封墳)들마다 온통 시멘트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산짐승으로부터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잔디 대신 시멘트로 봉분을 씌운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이곳도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묘원 근처에서 커다란 물통에다 물을 담고 있는 주민이 보인다. 물맛이 좋으니 한번 마셔보라며 권하기까지 한다. 물맛은 생각보다 좋았다. 하지만 시원한 감은 다소 떨어졌다.

 

 

 

도로는 무덤 앞에서 방향을 틀어 왼편으로 향한다. 그리고 잘 닦인 포장도로를 따라 얼마간 더 내려가면 널따란 공터를 만난다. 공터의 한쪽 귀퉁이에 세워진 비석(碑石)김해 김씨(金海 金氏)’들의 문중의 묘원(墓園)이라고 적혀있다. 비석의 크기로 보아 나름대로의 내력이 있는 가문(家門)인지도 모르겠다. 이곳 신지도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배지(流配地)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이곳으로 유배를 왔던 사람들의 후손들일지도 모르겠다는 얘기이다. 아니면 그들이 양성해 낸 인재의 후손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참고로 유배지를 기록한 옛 문헌에 의하면 유배지로 수로(水路)가 멀기로는 추자도와 흑산도, 제주도 삼도를 빼면 고금도와 신지도라고 했다. 지금은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이 됐지만 예전에는 아주 멀고 외진 섬이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여간 신지도에만 45명이 유배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중에는 서예가 이광사,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 조선후기의 문신 이세보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명사십리에서 1남짓 떨어진 송곡마을에는 우두(牛痘)를 처음 들여온 지석영이 귀양을 살던 집(謫所:적소)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김해김씨 묘역 앞은 사거리이다. 사거리에 세워진 이정표(산동정 0.5Km/ 임촌마을(명사십리해수욕장) 1.1Km/ 상산 1.6Km/ 영주암 0.8Km)를 보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만다. 방금 정상에서 내려왔는데 이정표는 또 다시 정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 또한 상산의 특징이다. 상산은 산길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산을 한 바퀴 도는 원형 등산로가 있는가 하면, 주요 기점을 잇는 지름길도 나 있다. 그 덕분에 자신의 취향에 맞게 코스를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초행길인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봐야 길이 모두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거리에서 산동정 방향으로 향한다. 산동정이 있는 뾰족산을 지나 신지도등대까지 다녀올 계획이기 때문이다. 다시 오솔길 걷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산의 사면(斜面)으로 길이 나있어서 힘이 들 일은 없다. 제법 숲이 깊으니 그저 즐긴다 생각하며 걷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얼마간 걸으면 삼거리(이정표 : 산동정 0.2Km/ 상산 3.5Km/ 영주암사거리 0.2Km)가 나온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지나왔던 김해김씨 묘원 앞의 사거리 이름이 영주암사거리였던 모양이다.

 

 

또 다시 산동정으로 방향을 잡으면 잠시 후 뾰족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은 전망 좋은 곳에 산동정(山東亭)이라는 팔각정이 세워져 있고, 정상표지석은 그 앞에 자리를 틀고 있다. 전망대를 겸하고 있는 정자(亭子)에 오르면 명사십리해변과 청산도 방향이 잘 조망되니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뾰족산에서 잠시 내려서면 등대사거리(이정표 : 등대 0.7Km/ 명사십리해수욕장 1.3Km/ 물하태 1.7Km/ 산동정 0.3Km)이다. 오른편에 보이는 길은 아까 물하태에서 헤어졌던 길과 연결된다. 이곳에서 명사갯길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왼편은 트레킹이 종료되는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러나 난 맞은편 능선을 탄다. 그 끄트머리에 있는 신지도등대에 다녀오기 위해서이다. 등대를 둘러본 뒤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함은 물론이다.

 

 

등대로 가는 길은 오르막으로 시작된다. 등대가 바닷가에 있으니 응당 내려갈 것이려니 생각했는데 의외이다. 그것도 통나무 계단을 놓아야 할 정도로 제법 가파르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오르막은 오래지 않아 끝이 나고, 다시 내리막으로 변하면서 그곳에다 전망대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에 올라서면 또 다시 본섬인 완도가 눈앞에 펼쳐진다. 하지만 등대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내리막길을 타고 조금 더 내려오면 또 다른 전망대가 나온다. 신지도의 신리 남쪽 해안 돌출부라고 보면 된다. 전망대에 서면 완도 본섬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이곳에서 2Km뿐이 떨어져 있지 않은데다 중간에 시야를 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더욱 가깝게 보이는 모양이다. 이곳까지 내려오는데 들인 발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멋진 풍경이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다부지게 서 있는 등대가 나타난다. 사람이 상주하지 않는 무인등대인 신지도등대이다. 건물이 산뜻한 것을 보니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 1967년부터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던 옛() 등대가 높이가 낮은데다 등탑(燈塔)까지 노후화됨에 따라 2007년에 새로 지은 것이란다. 이 등대는 완도항으로 입항(入港)하려는 선박들에게 항로표지 역할을 해주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또 하나 인근 양식장을 관리하는 어선들이 잠시 정박할 수 있는 시설로서의 부수적 역할도 수행한다고 하니 참조할 일이다. ‘서봉각등대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이 등대에는 재미있는 설화(說話) 하나가 전해온다. 해무(海霧)가 짙게 낀 날이면 뱃일 나가는 어선에서 어구를 훔쳐와 등대 부근에 숨긴다는 등대귀신에 대한 이야기다. 상산 정상에서 이곳 등대까지는 1시간10분이 걸렸다.

 

 

다시 등대사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명사십리해수욕장 방향으로 향한다. 가끔 왼편으로 상산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열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은 없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수시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남해바다 풍경은 어디다 내놔도 뒤질 게 없기 때문이다.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선착장, 사진에는 안보이지만 인근 바다에는 수많은 부표(浮漂)들이 떠있다. 신지도 주변 바다는 청정해역이어서 김, 미역, 톳 등 해초류가 많이 난다. 그런 해초들을 기르는 양식장(養殖場)들일 것이다.

 

 

선착장이 보였다 싶으면 이내 진행방향 저만큼에 새하얀 백사장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신지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명사십리해수욕장(鳴沙十里海水浴場)이다. 우리나라에는 명사십리라는 이름의 해수욕장들이 꽤나 많은 편이다. 모래사장이 길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어김없이 그런 이름들을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신지도의 명사십리해수욕장은 다른 지역의 해수욕장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다른 곳의 해수욕장들은 밝을 명()’자를 써서 십리 길이의 백사장이라는 뜻의 명사십리(明沙十里)’라는 이름을 쓴다. 하지만 이곳은 울 명()’자를 쓴다. 해수욕장의 모래를 밟으면 우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명사(明沙)가 아닌 울모래등즉 명사(鳴沙)라고 쓴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 철종 때 세도가의 전횡을 비판하다 이곳 신지도로 유배 온 이세보의 울음소리가 밤마다 그치지 않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신지도 하면 바로 명사십리가 연상될 만큼 신지도의 명사십리는 그 모래의 질이 곱고 주변 바다의 색깔이나 섬들과 어우러지는 운치가 좋다. 또한 폭이 150에 달하는 백사장은 광활하기 짝이 없다. 길이는 3.8,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기만 하다. 하긴 그래서 울모래(鳴沙)에다 십리(十里)라는 이름을 덧붙였을 것이다. 울모래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는 의미로 말이다. 그런 모래사장의 뒤편은 소나무 숲(松林)으로 되어있어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수온이 21쯤 되는 해수욕과 산림욕을 겸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트레킹의 날머리는 신지명사십리해수욕장 주차장

백사장 걷기는 중간쯤에서 그만두기로 한다. ‘명사갯길2구간까지 연결시키지 않을 바에야 백사장 전체를 다 걸어야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간쯤에서 백사장을 빠져나오면 유원지(遊園地) 분위기 물씬 풍기는 집단시설지구이다. 하긴 매년 100만 명이 넘는 피서객이 찾아오는 남해안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꼽힌다니 이상할 일도 아니다. 또한 2004년에 개발규제가 심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서 해제된 것도 그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트레킹이 종료되는 널따란 주차장은 시설지구의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참고로 신지명사십리해수욕장은 입자가 고와서 찜질을 할 경우 신경통이나 관절염, 그리고 각종 피부질환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등대에서 주차장까지는 40분 남짓, 트레킹은 3시간30분 정도가 걸렸다. 물론 느긋하게 걸은 시간이다.

 

에필로그(epilogue), 트레킹을 하다보면 가끔 길 찾기가 걱정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명사갯길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갈림길마다 이정표가 잘 설치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구간별로 나눈 별도의 명사갯길이정표에다 곳곳에 안내지도까지 세워 놓았다. 특히 페인트를 이용해 포장도로 위에다 그려놓은 화살표시가 눈길을 끌었다. 언젠가 하페 케르켈링이라는 독일출신 방송인이 쓴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은 일이 있었다. 이 책은 작가가 스페인의 유명 순례코스인 야고보 길을 걸으며 써 내려간 일종의 여행기이다. 글을 읽다가 길가의 돌 위에다 화살표시를 그려 방향을 알려준다.’는 구절을 보고 사소하지만 멋진 아이디어라고 감탄한 일이 있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 취미와 부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화살표시를 이곳 신지도에서 보게 된 것이다.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삽시도(揷矢島)

 

여행일 : ‘15. 11. 1()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

산행코스 : 윗말선착장거멀너머해수욕장진너머해수욕장면삽지물망터황금곰솔밤섬해수욕장밤섬선착장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보령시에서 서쪽으로 13.2지점에 위치한 면적 3.98에 해안선 길이가 10.8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하지만 그다지 섬이 많지 않은 충남에서는 세 번째로 큰 섬이다. 삽시도란 지명은 섬의 생김새가 흡사 화살을 꽂은 활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지도(地圖)에 현재와 한자 표기가 다른 삽시도(揷時島)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지명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섬은 남서쪽에 비교적 높은 산지가 있지만 대부분은 낮은 구릉성 산지이며, 남쪽과 서쪽 해안에는 비교적 넓은 사빈(沙濱)이 형성되어 있다. 해식에 의해 황해안의 토사가 쌓인 탓이다. 주민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해왔으나 최근 관광객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펜션 등 서비스업으로 전환되어가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삽시도를 세상에 더 널리 알린 것은 하나의 음식이었다. 최불암씨가 진행하는 KBS-TV의 음식기행 프로그램인 한국인의 밥상에서 20149월 전국의 꽃게요리를 방영하면서 이곳 삽시도의 게장도 함께 소개했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방법

삽시도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보령시까지 와야 한다. 삽시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 있는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배를 함게 싣는 차도선(車渡船)으로 하루 3(730, 13, 16) 운항하는데 삽시도까지는 1시간이 조금 못 걸린다. 운임은 9,900. 참고로 이 배는 삽시도에 먼저 가기도 하고, 장고도·고대도에 먼저 들렀다가 가기도 하기 때문에 운항 소요시간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대천항을 출발한 신한고속페리호40분이 채 되지 않아 삽시도에 닿는다. 그리고 섬에 있는 두 개의 선착장 중 윗말선착장에 여행객들을 내려놓는다. 윗마을은 술뚱이라고도 한다. 바닷물이 빠져나가고 있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에 배를 대는 것을 보면 요즘이 조금때인 모양이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적은 조금때는 윗마을에, 그 외에는 아랫마을인 밤섬에 정박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배를 대는 선착장은 하루에도 여기저기 다르다. 섬에서 나오는 사람은 꼭 확인해야 할 일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걸어서 섬을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섬의 둘레가 고작해야 11에 불과해서 반나절만 자분자분 걸으면 섬 구석구석을 다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풍광이 뛰어난 서쪽 해안은 걸어서가 아니면 결코 눈에 담지 못한다는 것도 또 다른 요인이다. 마침맞게 해안선을 따라 둘레길까지 잘 조성되어 있다. 행정자치부가 주관하는 명품섬 Best-10’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둘레길이다.

 

 

선착장이 있는 윗마을의 앞 해변은 널따란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모래의 결이 곱지는 않지만 해수욕장으로 사용하기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겉 모습으로 봐서는 그대로 내버려둔 것 같다. 질 좋은 해수욕장이 섬의 곳곳에 널려있어서 구태여 이런 곳까지 해수욕장으로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해안도로를 따르다가 마을 안길로 들어선다. 골목길을 지나다보면 창고 하나가 보인다. 유일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건물이다. 벽면에서 노닐고 있는 바닷고기들 틈에 가보고 싶은 섬, 삽시도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이 섬에 있다는 세 가지의 보물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인사말인가 보다. 아니면 여름철 피서객들에게 전하는 말일 테고 말이다.

 

 

선착장에서 거멀너머해수욕장까지는 1~2Km 남짓, 마을 안길을 지나면 널따란 들녘이 나온다. 자그마한 섬에 있는 들녘치고는 제법 너른 규모이다. 길은 그 사이를 가로질러 간다.

 

 

들녘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언덕을 넘자마자 널따란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거멀너머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의 뒤편은 아름드리 바닷가에는 곰솔(해송)이 둘러싸고 있다. 거멀너머는 삽시도에서 가장 바람이 거세게 부는 곳이란다. 그래서 해안방재림(海岸防災林) 사업의 일환으로 심은 해송들이란다. 그게 자라서 저렇게 아름드리나무로 변했나보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길가 안내판에 현재까지도 방제림 조성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거멀너머해수욕장은 물이 맑고 경사가 완만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데리고 온 아이들을 마음 놓고 풀어 놓을 수도 있겠다. 이런 백사장은 물이 빠져나갈 경우에는 작은 구멍들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 속에 조개가 들었음은 물론이다. 자녀들과 함께 체험학습이라도 즐겨볼 일이다.

 

 

삽시도의 서쪽 해안은 모래사장 천지이다. 하지만 모래사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래사장과 모래사장의 사이는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의 차지다. 기암괴석들이 해안선을 따라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것이다.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물론이다. ‘거멀너머해수욕장과 바로 잇대어 있는 진너머해수욕장도 역시 갯바위지역으로 연결된다. 갯바위들을 오르내리며 트레킹을 이어간다. 각진 바위들의 면이 날카로워 조심스럽다. 그러나 트레킹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다. 아름다운 주변경관에 도취되어 조그만 위험정도는 잊혀버린 지 오래인 모양이다.

 

 

삽시도는 바지락이 널려있다고 했다. 하지만 널려 있는 것은 바지락뿐만이 아닌가 보다. 갯바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새끼 조개들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삽시도의 특산품은 바지락이다. 바지락은 비타민과 칼슘, 미네랄이 풍부해 빈혈과 간장에 좋은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삽시도의 갯벌은 미네랄성분이 매우 풍부해서 이곳에서 채취되는 바지락은 타 지역의 바지락보다 크기가 월등히 클 뿐만 아니라 속이 차고 알이 굵어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바지락칼국수라도 한 그릇 먹어보고 갈 일이다.

 

 

갯바위 지역을 통과하면 진너머해수욕장이다. 이곳도 역시 곱고 드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거기다 백사장 뒤에 마을을 끼고 있어 입지조건으로는 조금 전에 지나왔던 거멀너머해수욕장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널따란 백사장을 걷는다. 그 바닷바람을 폐부 깊숙이 들이킨다. 머리가 상쾌해진다. 역시 바다는 사람들의 머리를 맑게 해주는 모양이다. 이런 재미가 있어 사람들은 바다를 찾는가 보다. 참고로 진너머해수욕장은 해넘이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섬들 사이 바다와 하늘을 황홀하게 채색하는 낙조(落照)가 장관이란다.

 

 

거멀너머보다 아늑하다. 백사장 뒤편이 언덕으로 이루어져서 그런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이곳의 백사장도 곱기는 매한가지이다. 삽시도는 해식(海蝕)에 의한 황해안의 토사(土砂)가 남쪽과 서쪽 해안에 퇴적되어 비교적 넓은 사빈(沙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질이 좋은 모래사장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거기다 물까지 맑다보니 가족 단위 피서객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단다. 거멀너머해수욕장과 밤섬해수욕장의 명성은 이미 육지 사람들에게까지 입소문을 탔다는 것이다.

 

 

해수욕장의 뒤편은 마을이다. 그러나 곧장 이어지지를 못하고 비탈진 언덕으로 연결된다. 언덕은 그 높이가 20~30m나 되는 탓에 올라서는 게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나무계단을 놓아 쉽게 오르내리게 해 놓았기 때문이다.

 

 

언덕으로 올라서면 윗마을의 뒤편이다. 이곳에서부터는 둘레길을 따른다. 삽시도의 보물을 들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면삽지와 물망터, 그리고 황금곰솔을 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둘레길은 이 세 가지 보물을 하나로 꿴다. 사부작사부작 걸어본다. 주어진 시간이 넉넉해서 구태여 서두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여유는 귀와 눈까지 여는가 보다. 자갈 굴리는 파도 소리를 벗 삼아 솔향 가득한 울창한 소나무길을 걷는 맛이 삽상하다.

 

 

둘레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길은 두 갈래(이정표 : 면삽지 1.1Km/ 진너머해수욕장 0.3Km)로 나뉜다. 포장길을 벗어나 오른편으로 접어든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면삽지 방향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공터로 이루어진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면삽지 600m)에 이르게 된다. 공터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마침 이곳에 둘레길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잠깐 쉬면서 살펴보고 갈 일이다. 이곳에서도 역시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왼편은 삽시도에서 가장 높다는 봉구댕이산으로 가는 길이지 않나 싶다.

 

 

 

쉼터를 지나면 둘레길은 산의 허리를 따라 나있다. 비탈진 사면(斜面)을 따라 난 길의 아래는 바다이다. 바다가 가까워서인지 파도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러나 지금은 산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비록 바닷가를 걷고 있지만 말이다. 나뭇가지를 스쳐가는 바람소리와 오버랩(overlap) 되는 이유일 것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만큼에 나무데크로 만든 전망대 하나가 나타난다. 잠시 후에 내려서게 될 면삽지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면삽지뿐만이 아니다. 그 너머에도 이름 모를 섬들이 여기저기 외로이 흩어져 있다.

 

 

 

계속해서 산길을 따르면 잠시 후 아래로 내려가는 길 하나가 나뉜다. 이정표(면삽지 0.3Km/ 곰솔 2.6Km/ 진너머해수욕장 1.4Km)가 가리키는 면삽지 방향으로 내려선다. 나무데크로 만든 249개의 긴 계단을 내려가면 덩그러니 섬 하나가 있다. 섬 속의 또 다른 섬인 면삽지이다. ‘기생섬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밀물 때의 면삽지는 봉긋한 무덤 같지만 썰물 때 수면 아래는 파도에 침식돼 수직이다.

 

 

면삽지는 사방이 높은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섬의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앞에서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거기다 가끔씩 본섬과 헤어지기도 한다. 하루 2번 조수(潮水)에 따라 삽시도에서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 것이다. 무인도인 면삽지는 삽시도의 첫 번째 보물이다. 속살을 보여주길 허락하지 않는 것을 보면 몸값이라도 부풀리려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참고로 면삽지란 삽시도에서 떨어져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밀물 때는 면삽지이고, 썰물 때는 삽시도인 셈이다.

 

 

면삽지 주변 갯바위에 물이라도 들어차면 이곳은 또 다른 이들의 놀이터로 변한다고 한다. 바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아까 배에서 내릴 때 낚시가방을 짊어지고 내린 사람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할 것이다.

 

 

섬의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그냥 돌아 나와서는 안 된다. 바람과 파도가 태고의 무늬로 빚어낸 절벽 아래 동굴이 하나 숨어 있기 때문이다. 썰물 때만 그 자태를 보이는 이 동굴에는 신비의 약수가 솟는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막상 샘물을 보고나면 냉큼 마시기에는 마음이 좀 걸린다. 마시고 안 마시고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둘레길로 되돌아와 또 다시 트레킹을 이어간다. 둘레길은 때로는 낭떠러지를 깎아서 만들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조망(眺望)이 터지는가 싶으면 어김없이 나무데크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 숫자를 늘리기에만 너무 급급했었나보다. 이왕에 만들었으면 주변의 잡목(雜木)들까지 정리해서 조망을 터주었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전망대의 역할을 하는 곳도 있다. 둘레길로 들어서서 처음으로 만났던 전망대, 즉 면삽지가 내려다보이던 전망대가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바로 이곳이다. 전망대에 서면 호도와 명덕도, 그리고 대··소 길산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망망대해에 두둥실 떠다니는 것이 보인다.

 

 

 

전망대에서 조금 더 가면 이번에는 사거리가 나온다. 두 방향의 거리표시를 지워버린 이정표(물망터 0.5Km/ 곰솔/ 면삽지)는 세 방향만 표시하고 있지만 왼편으로 길이 하나 더 있다. 봉구댕이산으로 길일 것이다.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침목(枕木)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 잠시 내려서면 비록 규모는 작으나 질이 좋은 모래사장이 길손을 맞는다. 삽시도의 두 번째 보물인 물망터가 있다는 해안이다. 물망터는 보통 때는 물에 잠겨 있다가 썰물 때만 모습을 드러낸단다. 그때 짜디짠 갯물을 걷어내고 상큼한 생수를 뿜어낸다는 신비의 샘이다. 그곳에서는 시원하면서도 물맛이 좋은 샘물이 샘솟는다고 한다. 한마디로 바다의 민물약수인 셈이다.

 

 

모래사장의 오른편은 바위벼랑 아래에까지 물이 차있어 통행이 불가능하다. 조금 전에 지나왔던 면삽지에서 곧바로 이곳으로 오지를 못하고 산길로 우회(迂廻)를 시켰던 이유일 것이다. 왼편 해안도 바위벼랑이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아랫부분의 갯바위들이 물 밖으로 나와 있어 어렵지만 진행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닷가를 둘러본 뒤 아까 내려왔던 삼거리로 다시 되돌아나가야 하지만 해안을 따라 트레킹을 이어간다. 바닷가 갯바위들을 넘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보고 싶은 뭔가를 포기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까 삼거리에서 보았던 이정표는 내려서는 방향을 물망터라고 표기했었다. ‘물망터란 바닷물이 들어오면 바닷물에 잠기고, 물이 빠지면 질이 좋은 육수(陸水)가 흘러나온다는 샘이다. 이정표로 보아서는 물망터가 이 부근의 바다에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둘러봐도 샘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샘물을 찾아 커다란 갯바위들을 오르내리며 왼편 갯바위 지역을 통과한다. 샘터가 있을만한 곳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갯바위들을 오르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각진 바위 면이 날카롭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부상을 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잠깐 방심으로 손가락을 베어 제법 많은 양의 피를 흘리는 불상사를 겪었기에 하는 말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고사성어가 다 옳은 것은 아닌가 보다.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물망터를 찾지 못한 것을 보면 말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린다. 근처에서 조개를 잡고 있던 지역 주민으로부터 오늘은 물이 빠진 후에도 물망터를 볼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바닷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사리때가 아니라면 바닷물이 빠져나간 후에도 샘터를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물의 효능이 좋다고 알려져 위장이 안 좋은 육지 사람들까지 일부러 찾아온다.’며 마지못해 발걸음을 돌리고 있는 우리를 위로까지 해준다. 아래 사진의 오른편(물망터 해안의 남쪽)에 우뚝 솟은 바위 하나가 보인다. ‘수리바위란다. 용이 되려고 천년을 기다리던 이무기가 독수리와 싸우다가 이무기는 비암산이 되었고, 독수리는 수리바위가 되었단다. 우람한 풍채의 거대한 수리바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이 다르게 보인단다.

 

 

수리바위 방향으로 나아가다 발길을 멈춘다.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바윗길이 험해졌기 때문이다. 별 수 없이 왼편 벼랑을 살핀다. 그리고 이내 길게 늘어진 밧줄을 찾아낸다. 아까 주민이 가급적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알려주던 루트(route)이다. 그러나 이 코스는 이용하지 않는 게 좋겠다. 낭떠러지에 가까운 사면(斜面)이 흙으로 이루어져 미끄럽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로프 외에는 의지할 만한 것도 없어 오르기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거기다 높이도 20~30m나 되니 초심자들은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좋을 듯 싶다.

 

 

낭떠러지를 올라서면 둘레길이다. 왼편으로 향한다. 봉구댕이산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 선택이 잘못되었음은 얼마 후에 알게 된다. 제대로 된 코스는 오른편으로 진행해서 황금곰솔을 본 후에 계속해서 둘레길을 타는 게 가장 쉽게 봉구뎅이산을 오를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길고 긴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오른편으로 능선이 보인다. 하지만 산길은 왼편 산허리를 헤집으며 나있다. 눈어림으로 봉구댕이산이 있음직한 방향을 짚어본다. 그리고 냉큼 능선으로 들어서고 본다. 물론 길은 없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져버리고 만다. 명감나무 등 가시넝쿨이 가득 찬 능선은 한걸음 내딛기조차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진행해버려 그냥 진행할 수밖에 없다. 이제나 저제나 정상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10분 이상을 고생한 끝에 도달한 봉우리에는 둘레길이 나있다. 어디쯤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오른편에서 올라오는 일행들이 보인다. 황금곰솔을 보고 오는 길이란다. 터덜터덜 오른편으로 내려간다(사진은 반대방향에서 찍은 것이다). 왼편으로 가야 정상이지만 삽시도의 세 번째 보물이라는 황금곰솔을 놓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잠시 후 삽시도의 세 번째 보물이라는 황금곰솔(보령시 보호수)을 만난다. 삽시도 서남쪽 끝자락, 즉 시위의 아랫부분에 해당하는 곳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삽시도는 남쪽부분에 소나무들이 많다. 바닷가의 소나무들은 보통 해송(海松)으로 부른다. 줄기껍질의 색깔이 육지 소나무보다 검은색을 띠고 있다고 해서 흑송(黑松)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도 유독 이 소나무만은 황금곰솔이라고 부른다. 일종의 변이다. 엽록소가 없거나 적어서 생기는 변이지만 희귀종임은 분명하다.

 

 

황금곰솔은 곰솔의 돌연변이다. 사철 푸르러야 할 솔잎이 황금빛을 띠고 있다. 엽록소가 없거나 적어서 생기는 특이 현상인데, 우리나라에는 세 그루만 자생하는 희귀한 소나무란다. 하지만 언뜻 봐서는 귀한 줄을 못 느낄 정도로 왜소하다. 일반 소나무들보다도 작아 푯말이 없으면 자칫 지나치기 십상일 정도이다. 참고로 이 곰솔은 솔방울을 맺지 못하는 탓에 결국 자신에서 세대를 끝내야 한단다. 비운의 소나무인 셈이다.

 

 

황금곰솔의 아래편에도 백사장이 펼쳐진다. 곱디고운 모래들이 펼쳐진 모래사장은 다른 해수욕장들에 뒤질 게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하지만 해수욕장으로 활용하고 있지는 않다.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바닷가 풍경은 어딜 가나 한적하고 서정적이다. 바다 저편에는 호도, 녹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흩뿌려져 있다. 바다를 향하면 바다향기가 느껴진다. 비릿하지만 결코 싫지 않은 느낌이다. 폐부 깊숙이 들이마셔 본다. 기분이 한결 상쾌해진다.

 

 

물망터가 있는 방향으로 나가본다. 우뚝 솟은 바위 하나가 바다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 우람한 풍채의 바위가 마치 독수리를 닮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게 독수리바위일까? ()이 되려고 수도하던 이무기와 싸웠다는 독수리가 죽어서 변했다는 바위 말이다.

 

 

다시 둘레길로 되돌아 나온다. 그리고 아까 내려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잠시 후 아까 고생 끝에 올라섰던 봉우리 위에 이른다.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봉구뎅이산이라고 쓰인 종이가 나뭇가지에서 펄럭이고 있다. 황금곰솔에 다녀오는 사이에 누군가가 매달아 놓은 모양이다. 함께 걷고 있던 일행 한분이 이름이 잘못 적었다고 지적을 해준다. 이곳은 봉구댕이산이 아니라 물구뎅이산이라는 것이다. 요 아래에 물망터라는 명소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면서 말이다. 그가 앱(app : application software)까지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사실인 모양이다.

 

 

물구뎅이산을 내려서면 사거리(이정표 : 금송사 0.3Km/ 물망터 0.5Km/ 진너머해수욕장 1.8Km/ 곰솔 0.8Km)가 나온다. 다음 행선지인 밤섬해수욕장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하지만 우린 진너머해수욕장 방향의 능선을 따른다. 봉긋 솟은 봉우리 두 개가 여인네의 젖가슴을 떠올리게 한다는 봉구댕이산(114.4m)을 올라보기 위해서이다. 봉구댕이(봉긋댕이산=큰산)은 삽시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하지만 가장 높다고 할 것까지도 없다. 동산 같은 몇 개의 산 중에서 조금 더 높은 산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잠시 후 봉구댕이산 아래에 도착한다. 하지만 둘레길은 봉우리 위로 오르지를 않고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켜버린다. 그렇다고 위로 오르는 길의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억지로라도 올라볼까 생각해봤지만 이내 발길을 돌리고 만다. 아까 알바를 하면서 고생했던 기억이 너무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면 밤섬해수욕장이 맞아준다. 밤섬해수욕장은 삽시도에서 가장 긴 백사장을 자랑한다. 이곳도 역시 거멀너머해수욕장과 마찬가지로 곰솔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밤섬해수욕장은 수루미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이곳이 물길이 끝나는 곳이라 해서 수루미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아마 이 지역의 방언인 모양이다. 전라도에서는 오징어를 수루미라고 부르는데 말이다.

 

 

래사장을 걷는다. 발자국을 남기지만 깊게 빠지지 않아 걷는 게 부담은 없다. 해수욕장의 바로 앞엔 불모도란 섬이 방파제처럼 파도를 막아 준다. 울창한 송림에 둘러싸인 새하얀 백사장과 건너편 불모도가 함께 어우러지며 멋진 경관을 만들어낸다. 참고로 불모도는 원래 무인도였는데, 10년 전쯤 누군가 펜션을 짓고 산다고 한다. 여객선은 다니지 않고 펜션에서 운영하는 보트가 수시로 운행한다고 한다.

 

 

 

밤섬해수욕장을 벗어나면서 트레킹은 끝을 맺는다. 백사장을 막 벗어나려는데 오른편에 있는 동산의 위로 오르는 계단이 하나 나타난다. 당연히 오르고 본다. 뭔가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아니 간만 못하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 5분 정도의 오르막길 끝에 위치한 전망대(展望臺)는 전망대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명색이 전망대인데도 조망(眺望)이 일절 트이지 않았던 것이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백사장을 벗어나면 아랫말이다. 마을에는 식당을 겸한 펜션이 몇 집 보인다. 동네 주민들이 그날그날 잡아 올린 횟감이나 어패류 등을 팔고 있으니 배의 출항시간에 쫒기기 않는다면 잠깐 짬을 내서 맛보고 가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일 것이다. 특히 이곳 삽시도는 바지락으로 유명한 섬이다. 하다못해 바지락을 넣고 끓인 칼국수라도 먹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다 꼬들꼬들한 바지락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바지락탕과 바지락회무침을 곁들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말이다.

 

 

마을로 나오면 또 다시 해안도로이다. 섬의 양쪽 끝에 위치한 선착장들을 잇는 도로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밤섬선착장으로 향한다. 마침 썰물이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꽤 많은 여행객들이 갯벌을 누비고 있는 것이 보인다.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조개라도 줍고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 갯벌은 펄과 모래가 섞인 혼합갯벌이라고 한다. 바지락이 서식하기 딱 좋은 환경이란다.

에필로그(epilogue), 삽시도는 여름이 제철이지 않나 싶다. 눈요깃거리보다는 싱싱한 횟감이나 어패류 등의 먹거리와 해수욕장이라는 놀거리가 더 풍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씨라도 받쳐줄 경우에는 특별한 눈요깃거리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바로 야광(夜光)바다이다. 조개에 들어 있는 인 성분 때문이라는데 밤바다에 푸른빛이 둥둥 떠다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