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토) - 20(일)
일 정 :
○ 3.13(일) : 두바이
○ 3.14(월) : 스위스(루체른)
○ 3.15(화)-19(토)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소렌토, 폼페이, 나폴리, 베니스, 볼로냐)
여행 다섯째 날 오전 : 세계 가톨릭의 본향,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특징 : 성 베드로 대성당(라틴어: Basilica Sancti Petri, 이탈리아어: 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은 바티칸 시국 남동쪽에 있는 대성당을 말한다. 바티칸 대성당(Basilica Vaticana)이라고도 부른다. 성지 가운데 하나이자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거대한 교회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개신교를 제외한 기독교의 전승(애초에 개신교는 전승을 인정하지 않는다)에 따르면, 서기 67년에 순교한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로마의 초대 주교, 즉 교황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성 베드로의 시신이 대성당의 제대 아래에 묻혀 있는 까닭에 옛날부터 교황이 선종하면 그 시신을 제대 아래에 안치해오고 있다. 대성당은 그 종교성과 역사성, 예술성 때문에 세계적인 순례 장소로 유명하다. 또한 르네상스부터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계의 거장들이 주임 건축가 직책을 계승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건축 작품으로서 당대의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 여겨진다. 로마의 모든 초창기 성당들처럼 대성당 역시 입구가 동쪽에 있으며 후진(後陣)은 서쪽 끝에 있다.
▼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에 흠뻑 빠져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바티칸의 중앙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St Peter’s Basilica)‘이 보인다. 현지 발음으로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니 참조한다. 로마 가톨릭의 총본산인 이 성당은, 베드로의 무덤 자리에 세워진 성당이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한 성인으로,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이었으며, 기독교 초대 주교이자, 제1대 교황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하늘나라 열쇠를 주며 그에게 반석이라는 의미인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고, 기독교의 반석이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를 상징하는 것이 열쇠라고 한다.
▼ ‘시스티나 성당(라틴어: Aedicula Sixtina)’은 바티칸 시국에 있는 교황의 관저인 사도 궁전 안에 있는 성당이다. 건축 양식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전하며,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산드로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이 그린 프레스코 벽화가 구석구석에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오 2세의 후원을 받으면서 1508년에서부터 1512년 사이에 성당의 천장에 12,000점의 그림을 그렸다. 성당의 이름은 1477년에서 1480년 사이에 기독교의 오래된 옛 대성당(Cappella Magna)을 복원했던 교황 ‘식스토 4세(SiXtus IV)’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식스토 4세의 치세(治世)이래,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이 종교적·직무상의 활동을 하는 장소로서의 소임을 해 왔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의 추기경들이 모두 모여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종교적 의식인 콘클라베(Conclave)를 여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보다 일반적인 용도로는 교황이 직접 미사를 집전하는 성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 벽면에 부착된 석상들을 눈여겨보면서 광장으로 나온다. ‘성모 마리아’와 ‘성 베드로’의 상(像)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349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순교한 베드로가 묻혀 있던 자리에다 거대한 바실리카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대성당의 기원으로 보면 되겠다. 이후 1506년 율리우스 2세 교황에 의해 지금의 대성당이 지어지게 된다. 대성당 공사는 120년 동안 지속되었고, 당대 최고의 천재들이 모여 만들었다. 처음 착공은 브라만테(Donato d' Aguolo Bramante)가 했고, 이후 상갈로,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등이 합류해 당대 최고의 성당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성당의 길이는 187m이고, 내부에는 11개의 예배당이 있다.
▼ 광장에는 줄을 맞춰 의자가 놓여있다. 무슨 행사라도 있는 모양이다.
▼ 광장에 서면 ‘성 베드로 대성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장 거대한 기독교 성당에 속하며, 바티칸 영토를 포함하여 2.3헥타르(5.7에이커)의 넓이를 가졌다. 그리고 최대 6만 명 이상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 내부에는 500개에 달하는 기둥과 400개가 넘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따로 분리된 44개의 제대(祭臺)와 10개의 돔(dome)이 있으며, 1300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다. 눈에 들어오는 외관을 살펴본다. 대성당의 정면 중앙부 상단에는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만든 13개의 조각상이 있다.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을 중앙에 놓고 11명의 사도들을 그 둘레에다 배치했다. 그리고 정면 양쪽 끝에는 종탑(Campanile)을 배치했다. 그중 왼쪽의 종탑은 1931년부터 전자식(시계)으로 작동하고 있단다.
▼ 대성당 앞에는 ‘성 베드로 조각상(Statue of St. Peter)’이 있다. 광장에서 봤을 때 정면부 왼편이다. 1462년 교황 ‘비오 2세(Pius II)’ 때 ’파올로 디 마리아노(Paolo di Mariano)‘와 그의 공방이 조각했던 것을, 교황 ‘비오 9세’가 더 크게 조성한 것이란다. 베네치아 출신 조각가 ‘주세페 데 파브리스(Giuseppe De Fabris)’가 1840년에 제작했는데, 4.91m 높이의 좌대(座臺) 위에 올려져있으며 조각상의 높이만 5.55m에 이른다. 조각상의 오른손은 베드로의 지물인 천국의 열쇠 한 쌍을 들고 있으며, 왼손에는 두루마리를 쥐고 있다. 늘어뜨려진 두루마리에는 라틴어로 'ET TIBI / DABO / CLAVES / REGNI / CAELORUM'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마태오 복음서 16장 19절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성 바오로 조각상(Statue of St. Paul)’도 있다. 정면부의 오른편이다. 볼로냐 출신의 조각가 ‘아다모 타돌리니(Adamo Tadolini)’가 1838년에 제작했으며 조각상 높이는 5.55m이다. 조각상의 오른손은 바오로의 지물인 칼을 비껴들고 있으며, 왼손에는 두루마리를 펼쳐들고 있다. 늘어뜨려진 두루마리에는 히브리어로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4장 13절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가 새겨져 있다.
▼ 입구 회랑에서 성당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모두 다섯 개가 있다. 그중 맨 오른쪽에 있는 청동 문이 ‘거룩한 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성년의 문(Porta Santa)’이다. 1950년 성년을 기념해 스위스의 신자들이 제작하여 기증한 이 문에는 열여섯 편의 성경 이야기가 부조되어 있다. 원래는 100년마다 문을 열었으나 그 간격이 50년으로, 다시 25년으로 줄었다. 25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의 첫 날, 교황이 은망치로 벽돌벽을 두들겨 이 문을 열고 순례자들이 출입할 수 있게 한다. 가장 최근에 개폐된 일시는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가 자비의 희년을 기념하여 개문한 2015년 12월 8일이다. 그 덕분에 우린 ‘거룩한 문’으로도 불리는 성년의 문을 통해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참고로 나머지 4개의 문은 죽음의 문(Door of Death)과 선악의 문(Door of Good and Evil) 그리고 필라레테 문(The Filarete Door), 성사의 문(Door of the Sacraments) 등이다.
▼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지켜야할 것이 있다. 복장에 관한 것인데, 모자를 써서는 안 되고, 슬리퍼도 안 된다. 끈으로 묶는 슬리퍼는 되지만 해변용 슬리퍼는 안 된다. 여자든 남자든 너무 노출이 심한 옷 역시 안 된다. 반바지와 면(綿)티에다 운동화가 가장 무난할 것 같다. 이 규정은 가톨릭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98년 사도회법을 통하여 강화된 것이라고 한다.(원칙적으로 남성의 경우 반바지도 입장 불가이지만 여행자의 경우 양해가 된다.)
▼ 성당 내부로 들어서자 나도 몰래 눈이 휘둥그레진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했기 때문이다. 과연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위대한 교회’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다.
▼ 오른쪽 복도에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의 유명한 걸작 ‘피에타(Pieta)’를 만난다. 미켈란젤로가 불과 25세에 만든 작품으로, 성모 마리아께서 십자가에 묶여 죽임을 당한 예수님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다. 예수의 늘어진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애절한 슬픔이 묻어 나온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서명을 새겨 넣은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이름을 마리아의 어깨띠에 새겨 넣었다고 한다. 참고로 ‘피에타’가 제작되기 전, 의뢰인(프랑스의 추기경인 ‘장 드 빌레르’)은 미켈란젤로에게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로마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을 만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피에타’가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조각들마저 압도한다는 찬사를 받았으니 결국 의뢰인과 맺은 계약조건을 이행한 셈이다.
▼ 피에타는 유리 막으로 차단되어 있다. 테러(terror)에 대한 보호 조치라고 한다. 이 걸작은 1972년 엄청난 수난을 겪었다. 정신병 환자인 한 청년이 자신을 예수라고 칭하면서 이 작품을 망치로 12번이나 찍어내려 성모마리아의 왼팔과 얼굴이 손상되고 말았다. 일부 파편들이 사라졌지만 바닥에 떨어진 미세한 가루까지 찾아내 정성스럽게 복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사건 후 피에타는 유리 막 너머로만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나저나 대단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엄청나게 큰 대리석을 깎아내 조각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매끈하고 아름다운 굴곡과 따스함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정말 불가사의하다. 그래서 ‘모세상’, ‘다비드상’과 함께 미켈란젤로의 3대 걸작중 하나로 꼽히는가 보다.
▼ 어느 것 하나 예술품이 아닌 것이 없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천장도 그중 하나이다.
▼ 13세기 ‘아르놀포 디 캄피오(Arnolfo di Cambio)’가 제작한 ‘성 베드로의 청동상(Statue of St. Peter)’이다. 이 청동상은 대성당을 방문하는 신자들이 동상의 발을 만지면서 기도하기 때문에 발이 반질거린다. 성 베드로의 이름이 반석(盤石)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의 발을 만지면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성당의 베드로상 뿐만 아니란다. 다른 성당에서 만나게 되는 ‘베드로상‘들도 너나할 것 없이 발이 반질거린다고 한다. 하긴 기도가 이루어진다니 어느 누군들 만지지 않고 배기겠는가. 하지만 내 눈엔 성인의 발보다도 그의 손가락이 더 흥미로워 보인다. 승리의 표시인 알파벳 ’V'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만들었는지가 늘 궁금했었다. 그런데 그 범인이 베드로성인이셨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Christ여 영원하라!’를 외치기 위해서 말이다. 참고로 청동상의 위쪽에는 살레시오 수도회의 설립자 성 요한 보스코(Giovanni Melchiorre Bosco)와 1857년 임시 희년을 선포하면서 이 청동상의 발에 입을 맞춰야 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한 교황 복자 비오 9세(B. Pius IX)의 모자이크 초상화가 장식되어 있다. 성 베드로의 축일인 6월 29일에는 금실로 수놓은 제의를 이 청동상에 입히고 미사를 집전한단다.
▼ 대성당의 한가운데에는 중앙 제대(祭臺, 제단의 옛말)가 있다.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곳이다. 그 위를 닫집 모양의 발다키노(Baldacchino)가 덮고 있는데, 그 높이가 꼭대기의 황금 십자가 부분까지 무려 29m나 되며 무게는 자그마치 37,000kg에 달한다.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의 작품인 이 발다키노는 1625년 ‘우르바노 8세’의 명령에 따라 1633년 6월 29일 성 베드로의 축일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 발다키노(Baldacchino)는 높은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제작 당시에는 과다한 청동 사용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판테온 내부 천장에서 수십 톤의 청동을 떼어 와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이곳은 전통적으로 새로 임명된 주교 또는 로마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세계 각국의 주교단들이 자신들이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아울러 교회제도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이나 갱신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통은 6세기경부터 생겼다. 중앙 제대 밑에는 성 베드로를 포함한 역대 교황의 시신이 안치된 지하 묘지가 있다.
▼ 발다키노(Baldacchino)의 지붕을 받치는 네 개의 나선형 기둥은 마치 소용돌이치듯 감겨 있는 모양을 띠고 있는데 이는 사람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내부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빛을 뿜어내는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고, 위쪽으로 네 명의 천사가 화관을 하늘로 끌어올리고 있다. 또 다른 작은 천사들은 삼중관과 열쇠, 칼과 복음서를 들고 있다. 삼중관과 열쇠는 성 베드로를, 칼과 복음서는 성 바오로를 상징하고 있다. 참고로 발다키노는 천개(天蓋)라고도 불리며, 교황 우르바노 8세가 20대 청년 베르니니에게 명해 1625년부터 1633년까지 8년에 걸쳐 청동을 주재료로 금박을 입혀 제작된 바로크 양식의 걸작이다.
▼ 발다키노의 위에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는 대성당의 돔(dome)이 있다. 돔의 높이는 136.57미터다. 올려다보고 있으면 너무나 아득해서 실제의 높이를 가늠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데 빌딩 15층 높이쯤 된다고 한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돔이다. 돔의 안쪽 지름은 41.47m로, 앞서 만들어진 두 개의 거대한 돔들(고대 로마의 판테온, 초기 르네상스의 피렌체 대성당의 돔)보다 조금 작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가들은 어떻게 하면 이 건물이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돔으로 보이게 할지 해결책을 찾으려고 판테온과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참고했다고 한다. 돔 공사는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와 ‘폰타나(Domenico Fontana)’가 끝마쳤다. 교황 ‘식스토 5세’의 치세 마지막인 1590년이다. 새 교황 그레고리오 14세는 폰타나가 채광창을 완성한 것을 보고 식스토 5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명각을 돔 안쪽 틈에 새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 교황인 클레멘스 8세는 대성당 안에 십자가를 세우게 했다. 이 십자가의 양팔 부분은 두 개의 납 용기로, 한쪽에는 성십자가의 파편과 성 안드레아의 유골이 들어 있으며, 다른 한쪽에는 거룩한 양의 원형 초상화를 담고 있다고 한다.
▼ 대성당 내부에는 400개가 넘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아래 사진으로 첨부되어 있는 ‘피오 10세의 기념비’와 ‘베네딕토 15세의 기념비’, ‘그레고리 13세의 기념비’ 그리고 가톨릭을 위해 왕위까지 내던진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의 기념비’ 외에도 수많은 조각상들이 성당 내부 곳곳에 들어앉아 있다.
▼ 앗! 이분도 손가락으로 뭔가를 만들고 있다. 승리(Victory)를 나타내는 ‘V'자 모양이 분명하다. 아까 베드로 성인의 상을 보면서 우리가 무의식중에 만들고 있는 ‘V'의 기원을 베드로 성인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분은 베드로성인에게서 전수를 받았나 보다. 웃자고 한 얘기이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은 ‘V'자를 맨 처음 표시한 사람이 영국의 처칠 수상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이 나치에 점령당하고 영국만 홀로 싸우고 있을 때 처칠은 승리의 ‘V' 표시를 상징삼아서 희망과 비전을 제시했다. 당시 전쟁 소식을 전하던 각 나라의 신문들마다 ‘V'자 표시를 하는 처칠의 모습이 항상 헤드라인을 장식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왕에 나온 김에 ‘V'자에 얽힌 옛 얘기를 하나 더 해보자. ‘V'자의 기원이다. ‘V'의 기원은 600년 전에 일어났던 ’백년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415년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인 아쟁쿠르에서 영국의 왕 헨리5세가 이끄는 6,000명과 2만 명의 프랑스군이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활을 쏘는 영국 병사들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 프랑스군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단다. 그래서 프랑스군들이 ’전쟁에서 이기면 영국 궁수들의 두 손가락, 즉 활시위를 당기는 집게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고 경고를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전투는 영국군이 승리하게 되었고, 영국군 궁수들이 도망가는 프랑스군들을 향해 두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내 손가락은 무사하다‘고 조롱한데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V'자 표시가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으니 승리는 역시 전쟁의 산물인 모양이다.
▼ 대성당에는 따로 분리된 제대(祭臺)도 44개나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Chapel of St. Sebastian)’이 아닐까 싶다. 경당의 제대 윗부분을 장식하는 성화는 3세기 로마 제국의 군인이었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발각되어 화살형에 처해졌으나 죽지 않고 살아남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교 박해를 비판한 후 다시 처형당한 성 세바스티아노(Sebastiano)의 순교 장면을 그린 것이다. ‘도메니코 참피에리(Domenico Zampieri)’가 1628~1631년에 그림으로 그렸는데, 이를 다시 ‘피에트로 파올로 크리스토파리(Pietro Paolo Cristofari)’가 1730~1736년에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제대(祭臺)의 아래쪽에는 교황 복자 인노첸시오 11세(B. Innocentius XI)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그는 원래 대성당 지하 무덤에 안장되었지만 1956년 10월 7일 비오 12세 때 시복되면서 관을 열었는데 사후 267년이 지났음에도 유해가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55년 뒤인 2011년 5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기념해 사람들이 보다 가까이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여기에 관을 마련하고 대성당 지하 무덤에 있던 유해를 이장했다
▼ 이 외에도 '성 히에로니무스(St. Eusebius Hieronymus) 제대(아래 사진)', ‘성체 경당(Blessed Sacrament Chapel)’, 세례 경당(Baptistery Chapel), 무염시태 제대(Altar of Immaculate Conception) 등 수많은 제대들을 만날 수 있다.
▼ 밀랍인형 같은 것도 보인다. 하지만 인형이 아니란다. 교황의 시신(屍身)이란다.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에 저렇게 보존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성당들은 예배를 드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성인들의 무덤으로도 사용되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 둘러보고 있는 베드로 성당을 베드로의 무덤위에다 지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대성당은 베드로성인의 무덤 위에 지어졌다. 하지만 그의 무덤 외에도 백 개가 넘는 무덤들이 있다고 한다. 대부분 대성당 바로 밑 지하 동굴에 자리 잡고 있단다. 이곳에는 성 베드로를 시작으로 역대 교황의 대부분을 비롯하여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Sant’ Ignazio di Antiochia, St. IGNATIUS of Antioch)’,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2세 황제, 작곡가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도 매장되어 있다. 본국에서 추방당해 교황 클레멘스 11세에게 망명을 신청해 의탁한 영국의 가톨릭교도 왕족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James Francis Edward Stuart)‘와 그의 두 아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그리고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도 이곳에 묻혀 있다. 또한,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아내인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와 왕위를 포기하고 가톨릭 신앙으로 회심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도 이곳에 묻혀 있다.
▼ 눈앞이 빙빙 거린다. 너무 많은 작품들이, 그것도 너무나 뛰어난 걸작들이 끊임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모든 작품들을 몸과 마음, 눈과 머리로 받아들였지만 내 머리가 지닌 용량으로는 그 모든 것을 담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성당에서 버틸 수도 없는 일이기에 아쉽지만 성당을 빠져나온다. 베르니니가 설계했다는 바로크 건축의 걸작인 산 피에트로 광장(Piazza di San Pietro)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야가 뻥 뚫리는 기분이다. 30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다는 거대한 규모, 화려한 장식, 과장되고 극적인 분위기를 모두 다 갖춘 이 곳은 크리스마스 미사, 부활절 미사 등 큰 행사 때 마다 뉴스에서 자주 보았던 그곳이다. 성당 안에서 부딪쳤던 신선한 충격들의 여파 탓인지 아까 성당으로 들어갈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온다.
▼ 밖으로 나오니 독특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인다. ‘스위스 근위대’란다. 화려한 옷만큼이나 근위대에 얽힌 사연도 흥미롭다. 이들의 바티칸과의 인연은 1505년 ‘율리우스 2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율리우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개축하면서 스위스연방에다 용병을 요청했고, 그 결과 취리히와 루체른에서 약 200여명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에 입성했다고 한다. 그 후 모략과 술수로 교황에 오른 ‘클레멘스 7세’가 스페인 왕실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당시 살아남은 40여명의 스위스 근위병들이 교황과 추기경들을 산탄젤로성으로 대피시킴으로써 임무를 완수했다고 한다. 교황청은 그들의 용맹성에 감탄해 정식 근위대로 발탁하게 됐다는 것이다. 매년 5월 6일이면 신참 용병들의 교황과 교회에 대한 충성 서약식이 거행되는데, 옛날과는 달리 요즘엔 지원자가 점점 줄고 있다고 한다.
▼ 성 베드로 광장(Piazza San Pietro)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가 1656~1667년에 걸쳐 설계, 완성한 크고 아름다운 광장으로 최대 30만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그리고 광장에 운집한 보다 많은 군중들이 대성당 정면에 있는 강복의 발코니와 사도 궁전에서 거행되는 교황의 강복 장면을 볼 수 있도록 원 두 개를 겹친 타원형으로 평면을 만들었다. 성 베드로의 대표적인 지물이 열쇠이기 때문에 광장의 모양은 열쇠 구멍 모양이다. 로마 시내의 좁은 골목길을 지나다가 광활한 광장이 갑자기 시야에 펼쳐지게 해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 베르니니의 의도였으나, 1929년 2월 11일 체결된 라테라노 조약으로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가 화해한 것을 기념해 베니토 무솔리니가 ‘카스텔 산탄젤로’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이어진 화해의 길(Via della Conciliazione)이라는 대로를 개통하면서 그 길목에 있던 궁전과 성당 및 여러 고택들을 모두 철거해버려 베르니니의 의도가 빛을 바랬다.
▼ 광장의 중앙에는 거대한 오벨리스크(Obelisk)가 세워져 있다. 높이 25.5미터(기단부까지 합친 높이는 41m)에 무게가 무려 320톤이나 된단다. 저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30년경쯤 이집트에 있던 로마 총독 ‘코르넬리우스 갈루스(Cornelius Gallus)’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을 받들어 알렉산드리아의 ‘포룸 율리움(Forum Julium)’에 세운 것이다. 37년 칼리굴라 황제가 로마로 가져와 테베레 강 서안에 만든 개인용 전차경기장에 세웠는데, 자르지 않고 통째로 운반하기 위해 길이 105m에 넓이가 20m나 되는 대형선박까지 건조했던 일로 유명하다.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방치되어 오다 1500년 뒤 교황 ‘식스토 5세’의 명령에 따라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에 의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참고로 오벨리스크 위에 올려진 청동제 십자가 내부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후인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 성지순례 때 발견해서 가져온 성 십자가의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화려한 바로크 문양으로 장식된 두 개의 분수대(The Fountains)가 자리 잡고 있다. 대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오른쪽 분수대는 지금의 대성당 정면을 설계한 카를로 마데르노의 작품이며, 왼쪽의 것은 도메니코 폰타나가 설계한 작품이다. 이 두 분수대는 광장의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을 위해 건축했다고 하는데 종교적인 의미로 생각한다면,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물로써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욱 크다. 실제로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대성당에 순례 왔던 사람들은 모두 양쪽 분수대의 물을 손으로 떠서 머리 위에 먼저 뿌린 후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 대회랑(Colonnade)은 베르니니의 설계로 1656~1667년에 걸쳐 만들어진 광장 주변을 둘러싼 타원형 열주 회랑이다. 마데르노가 설계한 대성당의 화려한 정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기둥 양식 중 가장 단순한 도리아식 중 토스카나식을 사용했다. 16m 높이의 토스카나식 대리석 기둥 284개와 벽에서 돌출된 기둥 88개가 4개의 열을 이루며 회랑을 형성하고 있다. 대회랑 위에는 난간과 함께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제작한 역대 교황과 성인들의 3.24m 높이 조각상 140개가 늘어서 있다. 성 베드로 광장 바닥에는 '회랑의 중심(Centro del Colonnato)'이라고 새겨진 원판이 깔려 있는데 이곳에 서면 4개씩 늘어선 대회랑의 기둥들이 겹쳐져 하나로 보인다고 한다.
▼ 영화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We Have a Pope, Habemus Papam)’에서 교황성하에 선출된 ‘멜빌’은 선언 연설 직전 극심한 스트레스를 보이며 연설을 거부하고 교황청을 떠나버린다. 며칠 만에 돌아온 그는 끝내 교황직을 수락하지 않고 스스로 사퇴해버린다. 당시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의 등장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목을 빼고 바라보던 발코니는 과연 어디일까? 누군가는 자주 빛 벨벳 커튼이 쳐진 방이라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정면 2층에 있는 3개의 발코니 중 중앙부의 발코니라고 했다. 하지만 내 안목으로는 그 발코니를 찾아 낼 수가 없었다. 하여간 그때 멜빌이 섰던 그 발코니는 '강복의 발코니(Loggia delle Benedizioni)'라고 불린다. 원로 추기경단이 콘클라베에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음을 선언하는 장소이자, 새 교황이 광장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첫 강복을 하는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가 열리는 장소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매년 성탄절과 부활절 정오에 교황이 전 세계에 보내는 ‘우르비 에트 오르비(라틴어: Urbi et Orbi)’ 또한 여기서 이뤄진다.
♧ 에필로그(epilogue). 대성당의 투어는 이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든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릎을 탁 치고 만다. 그렇다. 큐폴라(cupola, 잔을 엎어 놓은 모양의 작은 dome)를 못 올라본 것이다. 성 베드로 광장과 로마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는 그 전망대 말이다. 만일 551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게 거추장스럽다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되는데도 말이다.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서두르면 다녀올 수는 있었다. 그런데도 올라가보지 못한 이유는 메모를 하지 않는 평소의 내 습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탈리아로 오기 전부터 올라가본다고 염두에 두었는데도, 막상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는 그만 깜빡해버린 것이다. 만일 메모를 하는 습관만 가졌었더라면 이런 일은 결코 생기지 않았겠기에 하는 말이다. 후회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고쳐야겠다.’ 그래야만 똑 같은 후회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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