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아르메니아  게하르트 수도원(Geghard Monastery)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게하르트 수도원(Geghard Monastery) :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위대한 정신적·문화적 유산으로 꼽힌다. 4세기경 아르메니아를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개종시킨 성 그레고리우스(St, Gregorius)가 기도하러 왔다가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동굴을 파서 수도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절벽을 깎아 만든 교회, 동굴 안에 만든 교회, 벽을 쌓아 만든 교회, 절벽 안 깊은 곳에 만든 교회 등 다양한 형태의 교회가 지어졌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차에서 내리니 신선이 산다 해도 믿을 만큼 수려한 골짜기가 나타난다. 그 골짜기 깊숙한 곳에 게하르트 수도원이 있다. 덕분에 우린 한참을 걸은 뒤에야 수도원을 만날 수 있었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 세반호수(세반 수도원), 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 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 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수도인 예레반에서 35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당일치기 투어가 가능하다. 7k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가르니 신전 주상절리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골짜기로 들어가다 보면 수도원에 이르기도 전부터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깊은 산속, 높은 바위산에 둘러싸인 풍경 때문이지 싶다. 그런 느낌은 잠시 후 동굴교회에서 정점을 찍는다. 바위굴을 깎아 교회를 만든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심과 절벽에 석굴을 깎아 절을 만든 불교도들의 신앙심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깎아지른 듯한 저 바위절벽은 수도승들의 기도처였다고 한다. 사다리나 밧줄로만 닿을 수 있는 수많은 동굴에서 거주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단다.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기념품 말고도 토피 사탕처럼 달고 쫀득한 건살구를 파는 노점상들이 있었다. 동그란 모양에 장식이 된 달콤한 빵 가타(Gata)’가 쌓여 있고, 길게 엮은 호두를 젤리가 될 때까지 포도 시럽에 담가 초의 심지처럼 땋은 긴 줄 모양의 수죽(Sujukh)’도 여러 뭉치 놓여있다. ‘아르메니아식 스니커스(snickers, 초콜릿 바)’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런 것들이 아르메니아 여행의 전형적인 길거리 간식이 되어준다.

 이곳도 하츠카르(Khachkar)’가 먼저 길손을 맞아준다. 수도원 입구 외벽을 따라 수많은 하츠카르를 세웠다. 이렇듯 아르메니아에서는 하츠카르를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다. 어딜 가나 있다. 교차로에도 서 있고, 도시의 공원을 수놓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무덤에 세워지기 때문에 교회 주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하츠카르는 마을의 이정표나 기념비가 될 수도 있고, 사람들의 기도를 실질적으로 가시화시켜 놓은 징표가 될 수도 있다.

 수도원의 아치형 정문. 이곳도 역시 성곽을 연상시킨다. 수도원을 둘러싼 높은 축대는 성벽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유일한 통로에는 두텁고 높게 성벽을 쌓고 작게 문을 냈다.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온 나라들의 전형적인 건축 스타일이라 하겠다.

 입구에 건물 배치도가 들어간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1. 카토히케 교회(Katoghikeh church). 2. ‘카토히케 교회의 가비트(Gavit). 3. 아바잔 동굴교회(Avazan cave church) 4. 프로시안 묘지교회(Proshian chapel-sepulcher) 5. 성모교회(St. Astvatsatsin‘Proshian’ church), 6. 상부 가비트. 파팍과 루주칸의 묘역(Papak & Ruzukan Gavit-sepulcher). 7. 루사보리치 동굴교회(Lusavorich cave church). 8. 구내시설(Service premises). 9. 주교관(Residence). 10. 사제관(Parsonage). 11. 식당(Refectory). 12. 성모 동굴교회(St. Astvatsatsin cave church)

 투어를 시작하기 전, 행운이 있는지부터 시험해보자. 입구 바위벽에 동전이나 돌멩이를 던져 바위 구멍이나 경사진 턱에 안착하면 행운이 온다니 말이다.

 수도원 전경. 뒤쪽 커다랗게 돔을 올린 건물이 카토히케 교회(Katoghikeh church)’이고, 앞부분의 펑퍼짐한 건물은 카토히케 교회의 가비트(Gavit, 전실)’. 참고로 게하르트 수도원의 역사는 4세기 초 성 그레고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수도원은 교회와 수도원, 순례자를 위한 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8세기부터 이슬람의 탄압을 받았고, 923년에는 아르메니아 지역 통치자인 알 나스르(Al Nasr)’에 의해 대대적으로 파괴됐다. 건물은 물론이고 성경과 필사본 등 중요한 서적까지 불태워졌단다. 그러다 타마르 여왕 때 재건이 시작됐고, 1215년 중심 건물인 카토히케 교회가 완성되었다. 13세기 후반에는 이 지역 영주였던 프로시(Prosh Khaghbakian)’의 경제적 도움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당시 7개의 교회 건물에 40개의 제단이 있었단다.

 반대방향에서 본 수도원. 수도원은 네다섯 개의 교회와 그 앞의 넓은 홀(narthex)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동굴교회인데, 거대한 바위를 파내고 안을 세심하게 조각해 만들었다. 사람의 힘으로 들 수 없는 무거운 돌덩이를 쌓고 깎은 것으로도 모자라 암벽을 파내기까지, 신심이 이끌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해를 돕기 위해 나무위키에서 얻어온 사진을 올려본다.

 수도원이니 그 중심이 교회 건물들일 것은 당연, 그밖에도 학교, 필사실, 도서관, 그리고 성직자들의 주거시설들이 교회를 빙 둘러싸고 있다.

 카토히케 가비트(Katoghike church Gavit)’ 입구. 문안의 전실(Gavit)은 본당 말고도 북쪽(왼쪽)으로 아바잔교회, 프로시안 예배묘당, 성모교회와 연결된다.

 가비트(Gavit, 전실)’란 서양 교회의 나르텍스(Narthex)와 비슷한 개념으로, 교회 정면 입구와 본당 사이에 꾸며 놓은 공간을 말한다. 즉 주교좌 교회인 카토히케로 들어가기 전 만나는 공간으로 신자들의 기도공간이자 성직자의 설교공간으로 사용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성당에 들어오자마자 (교회에서)구입한 초를 꽂고 기도를 드린다. 초를 꽂아야만 기도가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 하나를 더 지나면 본당인 카토히케 교회(Katoghike church)’. 투르크로부터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을 되찾은 타마르 여왕의 장군인 자카레(Zakare)와 이반(Ivane) 형제의 후원으로 1215년 세워졌다. 고전 아르메니아 양식의 십자가 형태 건물로, 건물 중앙에 거대한 기둥 4개가 중심을 이루고, 그 위에 톨로베이트(Tholobate: 돔이 세워진 건물의 직립 부분)와 돔을 얹었다. 돔형 천정에 구멍이 있어 빛이 은은하게 들어오지만 전체적으로 어두운 편이다.

 반원형 제대 벽면에는 천사들의 축복을 받는 성모자상이 모셔져 있다. 성모자 양쪽에서 세례 요한 성 그레고르가 성모자를 축복해준다. 이들의 양쪽 벽면 아래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과 승천하는 예수상이 그려져 있다.

 전실에서 북측 왼쪽으로 난 문으로 들어가면 아바잔 동굴교회(Avazan cave church)’를 만난다. 바위에 동굴을 파서 만든 예배당인데, 정교하게 조각된 제대와 하치카르가 눈길을 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샘에 쏠리고 있었다. 성 게오르그가 발견하고 수도원을 짓기로 결심했다는 그 전설의 샘이 아닐까 싶다. 암벽에서 물이 졸졸 흘러나오는데, 이 물이 웅덩이에 모였다가 예배당 바닥을 수로삼아 밖으로 흘러나간다. 하나 더. 이곳 어딘가에 건축가 갈작(Galdzak) 40년 동안 이 동굴수도원을 지었다는 명문이 적혀있다는데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내부는 무척 어두웠다. 동굴 속이라서 빛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천장을 뚫어 예르디크(Yerdik)라고 부르는 구멍을 만들었다. 이 구멍이 환기와 더불어 내부를 밝히는 역할까지 한다. 참고로 아르메니아의 수도원은 묵직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어두운 내부를 비추는 것은 신과 만나기 위해 뚫어놓은 천장 구멍과 창으로 들어오는 빛, 그리고 촛불뿐. 화려하게 장식된 유럽 대도시 성당과는 다른 단정하고 신성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다.

 다음은 프로시안 예배 묘당(Proshian chapel-sepulcher)’이다. 수도원 복구에 막대한 후원을 했던 프로시안 왕자를 위한 동굴 예배당 겸 그의 묘가 안치된 곳이다. 그래선지 예배당 안에 프로시안을 상징하는 동물을 조각해 놓았다(가문의 문장이라고 했다). 맨 위쪽은 뿔을 가진 숫양(ram)이 고리를 입에 물고 두 마리 사자를 조종하고 있다. 고리와 줄 아래 두 마리 사자 사이에는 독수리가 반쯤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한다. 독수리는 두 발톱으로 어린 양(lamb)을 잡고 있다. 상단의 숫양은 죽은 자들을 관장하는 하늘나라의 저승사자로, 낮과 밤이라는 두 마리 사자를 조종하면서 세월을 관장한단다. 주님의 어린 양인 인간은 이 세월의 흐름을 거역 못하고 죽는데,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주는 독수리의 도움을 받아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나?(내 사진이 흐려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이들 교회를 둘러보고 나서 카토히케 교회(Katoghikeh church)’의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이층에 있는 성가대실로 올라가기 위해서이다. ! 사진은 없지만 성모교회도 둘러봤고, 내부에서는 하츠카르와 인물 및 동식물 벽장식을 만날 수 있었다.(어두웠던 탓에 사진은 한 장도 못 건졌다)

 본당 파사드는 부조로 새겨진 화려한 문양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맨 위와 유리창 오른쪽에 보이는 둥근 모양의 장식은 영생을 의미한단다. 조금 내려오면 사자가 황소를 공격하는 부조가 있는데, 수도원 재건을 적극 지원한 자칼리안(Zakarian) 가문의 프로시안 왕자를 용맹함을 상징하는 사자에 비유하고 있단다. 조금 더 내려가서 만나는 공작새 두 마리는 왕실을 상징하는데, 수도원 재건에 주도적으로 지원한 왕실에 대한 예우란다. 맨 아래는 포도나무로 장식했다. 조지아보다 먼저 와인을 만들었다는 암묵적 주장이 아닐까 싶다.

 2층으로 올라 상부 가비트(Upper Gavit)’로 간다. 안내도는 파팍과 루주칸의 묘역(Papak & Ruzukan Gavit-sepulcher)’이라 적는다. 수도원 재건에 큰 후원을 한 프로시안 가문의 왕자들 유해가 묻혀있다고 한다. ‘자마툰(zhamatun)’이라고도 불린다는데, 벽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1288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단다.

 이곳은 성가대실로도 이용된다고 했다. 때문에 구조가 음향을 고려해서 지어졌을 것이라며, 여러 명이 함께 성가를 부르면 그 소리가 더욱 웅장하게 들린다고도 했다. 실제 소리를 내보면 돔과 벽에 소리가 울려 증폭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천장의 저 예르디크(Yerdik)’도 음향효과를 감안해 뚫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곳에서 아카펠라 중창단의 공연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동굴의 울림이 가미된 음은 이곳이 천상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름답다고도 했다. 하지만 때를 못 맞췄던지 실제로 들어볼 수는 없었다.

 바닥에도 구멍이 하나 뚫려있었다. 이곳에서 부르는 성가대의 노래를 아래층에 있는 프로시안 묘지교회(Proshian chapel-sepulcher)’로 흘려보내기 위해서란다. 하나 더. 성가대실을 2층에 둔 것은 노래를 잘 부르는 여성들을 성가대에 포함시키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다. 옛날에는 여성이 성가대원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안 보이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게하르트 수도원의 유래를 알려주는 그림이 눈에 띈다. 이 수도원의 원래 이름은 동굴 사원을 뜻하는 아이리방크(Ayrivank)’였다고 한다. 그러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 병사가 찌른 창을 뜻하는 게하르트(Gehard)로 변경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유대인 사도였던 타데우스(Thaddeus)가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로마 병사의 창을 아르메니아로 가져왔다고 한다. 현재 이 창은 에치미아진 교회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다.

 게하르트 수도원이 들어간 코인도 주조하는 모양이다. 소정의 대가를 지불하면 저 구멍에서 코인이 나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정문 앞에서 또 다른 유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안내도에 성모교회(St. Astvatsatsin cave chapel)로 표기된 지점이 이 부근이었기 때문이다.

 비탈길을 잠시 오르니 수도사들이 은거하며 묵상과 기도를 드리던 수많은 암혈기도처들이 나타났다. 성모교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춘 건물도 있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주어진 시간이 다되어간다는 집사람의 채근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부로 들어가려면 조금 더 올라가야 한다. 문을 낼 수 있는 공간이 그쪽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보기만 해도 아찔한 저런 곳에서 세속의 즐거움을 모두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고자 했던 수도승들의 헌신에 경의를 표해본다.

 집사람의 채근에 쫒기면서도 살짝 들여다본 어느 동굴. ! 내가 잘못 봤나?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들이 꽉 차있는 게 아닌가. 덕분에 골짜기를 들어오면서 느꼈던 감정이 이곳에서 대미를 장식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사람 사는 것은 똑 같다는...



여행지 : 아르메니아  코르비랍 수도원(Khor Virap Monastery)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아라라트((Ararat) : 아라스강(Aras River) 유역으로 BC 2세기-AD 5세기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다. 비옥한 평야와 동서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접하고 있어 아르타샤트(Artashat)’가 수도로 번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산조 페르시아·우마이야왕조·셀주크 터키·몽골 등 강대국의 지배를 받으며 도시가 파괴되고 폐허로 변했다. 1813년에는 러시아와 이란 사이에 굴리스탄(Gulistan) 조약이 체결되어, 아라스강이 아르메니아와 튀르키예의 국경이 되었고,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는 아라라트 평야의 절반을 잃게 되었을 뿐 아니라 민족의 성산인 아라라트 산으로의 접근도 불가능해졌다.

 

 예레반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성산인 아라라트 산을 보다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다(예레반에서도 볼 수는 있다). 그렇다고 산으로 가는 것은 아니고, 튀르키예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호르비랍 수도원으로 가서 아라라트 산을 눈, 아니 가슴에 담는다. 아라라트 산이 튀르키예에 속해 있어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주차장에 이르자 나지막한 언덕에 걸터앉은 호르비랍 수도원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성지이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 세반호수(세반 수도원), 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 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 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수도원은 나지막한 산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어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야 한다.(사진은 내려오면서 찍은 것이다)

 무릎이 시원찮은 사람들은 도로(특별한 경우에만 통행이 허락되는 듯)를 따라 올라가면 된다. 나는 도로를 선택했다. 산자락에 들어서있는 공동묘지를 곁눈질로라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공동묘지는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특이한 돌 십자가 하츠카르(Khachkar)’의 용도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 하치카르 십자가의 아래는 현세의 지상을 뜻하고 위는 천상의 세계를 뜻한다고 했다. 이 땅에 살다가 하늘나라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도구인 셈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었을 때 노잣돈 개념으로 하치카르를 만들기도 했다. 공동묘지에 널리다시피 한 수많은 하치카르들이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잠시 후 이른 수도원 담벼락은 하츠카르(Khachkar)’의 전시장으로 만들어놓았다. 문양이나 하단의 문구(읽을 수는 없었지만)가 제각각인 하치카르가 열 손가락으로는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많이 도열해 있었다.

 정문에 이르면 코르비랍(Khor Virap)’이 수도원(monastery)일 뿐만 아니라 방어를 위한 성채(fortress)’용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의 높이가 6-8m에 두께도 2-3m나 된다니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라 하겠다.

 성문 앞 공터는 전망대 노릇을 톡톡히 수행한다. 드넓게 펼쳐지는 평원 너머의 아라라트 산이 지척으로 다가와 마주선다. 조지아를 달리는 카프카스가 신화의 땅이라면 아르메니아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카프카스는 성서의 땅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낳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시발점이자 노아가 방주를 댔다는 성지이기도 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종탑과 돔이 있는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1662년에 지어진 성모교회로 수도원의 본당쯤으로 보면 되겠다. 이곳에 그레고리우스(St. Gregorius, 이하 그레고르’)를 위한 교회가 생긴 것은 네르세스 3(Nerses )’ 때인 642년으로 추정된다. 지하감옥 위에 대리석 건물을 짓고 네르세스 교회로 부른다. 그 후 1,000년 동안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다 1662년 현재와 같은 수도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성모교회로 불리는 저 건물이 폐허 위에 세워졌고, 수도원, 식당, 사제관 등이 만들어졌다.

 수도원의 역사는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를 기독교로 만든 성 그레고르가 이곳의 지하 감옥에 13년 동안 갇혀 있던 데서 시작된다. 그레고르의 아버지인 아낙은 페르시아가 고용한 자객으로 아르메니아 왕을 죽인다. 때문에 어린 그레고르는 카파도키아(튀르키예)에서 자라며 기독교 사제가 된다. 이후 이교(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아르메니아로 돌아와 기독교를 전파하다 티리다테스 3(Tiridates )’에게 잡힌다. 왕은 아버지를 죽인 죄와 이교를 전파한 죄를 물어 전갈과 뱀이 우굴 거리는 땅굴에 가두었다고 한다. 이곳이 깊은 또는 지하 감옥이라는 뜻의 코르비랍으로 불리는 이유다. 당시 왕은 자신과의 혼인을 거부하는 흐립시메를 비롯한 33명의 수녀를 죽이는(이때 유일하게 살아남아 조지아로 도망간 수녀가 니노라는 설도 있다) 등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었다. 그레고르를 구원해 준 것은 티리다테스의 여동생 호스로비둑트(Khosrovidukht)’였다. 그녀는 꿈에서 그리고르를 풀어주라는 계시를 받았고, 그것을 오빠에게 말해 그리고르를 석방시켰다고 한다. 호스로비둑트와 왕비인 아쉬켄(Ashkhen)이 이미 기독교 신자였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석방된 그레고르는 티리다테스의 병을 고쳐 주었고, 이를 계기로 세례를 받은 티리다테스가 301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된다. 세계 최초의 기독교 왕국이 탄생한 것이다.

 외벽에 그려진 저 문양은 해시계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성모자상이 반긴다. 돔 아래, 반원형의 벽면에 제단을 만들고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모셨다.

 아르메니아에서 만난 여느 교회들처럼 이곳도 돔에 뚫어놓은 창을 통해 빛살이 들어온다. 하지만 별도의 조명시설을 해놓아 다른 곳보다 훨씬 밝았다.

 제단 앞 양옆으로 두 개의 벽화가 걸려 있었다. 왼쪽은 아라라트 산을 배경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두 사도 바르톨로메우스(St. Bartholomaeus)’ 타데우스(St. Thaddeus)’. 오른쪽은 아르메니아에 기독교가 뿌리내리도록 한 두 사람,  성 그레고르 티리다테스 3이다.

 그밖에도 몇 점의 성화가 더 걸려 있었다. 그중 하나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는 예수님을 그렸다.

 요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일 것이다.

 북서쪽 모서리에는 바실리카 양식의 성 그레고르교회가 자리한다. 동방정교의 특징이랄 수 있는 돔이나 십자가가 없는 건물은 얼핏 교회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예배당을 만날 수 있다.

 파사드의 하츠카르’. 뭔가도 적혀있으나 알아 볼 수는 없었다. 이곳은 그레고르 성인의 땀과 피가 스며있는 신성한 장소다. 대충 그런 얘기가 적혀있지 않을까?

 예배당의 제대에는 이콘 형식으로 그려진 성모자상을 모셔놓았다.

 주교 복장을 한 그레고르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참고로 그레고르는 아르메니아에서 사도교회의 불을 밝힌 사람(the Illuminator) 또는 개척자로 불린다고 한다. 현재의 에치미아진(Echmiadzin) 교회 자리에 순교자 묘지를 만들었고, 이게 나중에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모태교회로 발전했기 때문이란다. 이후 314년까지 왕과 사도교회를 위해 봉사하다가 328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다.

 다른 그림은 그레고르가 티리다테스 왕을 치료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이들 옆에서 호스로비둑트 왕비가 치료를 돕고 있었다.

 예배당 옆, 바닥에 뚫린 구멍이 눈에 띈다. 그레고르가 13년 동안이나 갇혀 지냈다는 지하 감옥이다. 감옥은 철제계단을 이용해 내려갈 수 있다. 한 사람이 겨우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통로다. 그러니 동시에 오르내리는 교차 이동은 불가능하다. 내려가거나 혹은 올라오는 사람들이라도 있을라치면 반대편 사람들은 그 이동이 끝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한다.

 계단은 사다리에 가깝다. 그것도 수직으로 서있다시피 한다. 그러니 여성이라면 치마를 입은 채로 내려올 일은 아니다. 내려오는 행렬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아래쪽 사람들의 눈에 민망한 꼴을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치마를 입고 내려오는 여성이 있었기에 거론해 봤다.

 지하 감옥은 6m 깊이에 폭이 4.4m라고 한다. 내부는 무척 단순했다. 제대를 만들고 하츠카르 십자가를 안치해 놓았을 뿐이다.

 한쪽 벽에는 성 그레고르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조금 전 그레고르교회의 제대 옆에 걸려있던 초상화처럼 주교의 복장을 하고 있는데, 오래 전에 그린 듯 색상이 변해있다.

 성 그레고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따르는 기독교 신자들이 밤마다 몰래 도왔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저 구멍을 통해 먹고 마실 것을 넣어주었다고 한다.

 수도원은 두 교회 말고도 꽤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성직자들의 숙소로 여겨지는 건물은 물론이고 기념품판매점도 눈에 띈다.

 암굴형의 기도처도 만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초상화가 프레스코 기법으로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감실에는 성모자상을 모셨다. 다른 감실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과 기도를 하고 있는 성인의 그림 등을 넣어두었다. 가톨릭 성당에서 흔히 만나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연상시키는데, 수도승들이 그렸는지 그림 솜씨는 엉망이었다.

 튀르키예와의 국경 쪽 성벽 위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세반호수와 함께 아르메니아를 상징하는 아라라트 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조금 더 자세히, 그리고 조금 더 편안히 보라는 듯, 망원경에다 벤치까지 설치해 놓았다. 하긴 하나님의 집으로 묘사되는 신화의 고향이자 아르메니아의 아이콘으로 적극 활용되는 신성한 산이니 어련하겠는가. 참고로 아라라트 산은 홍수가 끝난 뒤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 내려온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이 노아의 홍수 이후 이 세상에 나타난 최초의 민족이라고 믿기에 아라라트 산을 신성시한다. 또한 아르메니아가 세계 기독교 국가의 최초라는 자부심이 아르메니아인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성벽에 오르자 광활한 대지 너머로 아라라트 산(Mt. Ararat)’이 보인다. 만년설로 덮여 있는 이 산은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곳이라 전해진다. 국가 문장 가운데에 그려놓을 만큼 아르메니아인들이 어머니로 여기는 신성한 산이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눈앞에 두고도 가볼 수 없는 비운의 상징이다. 원래는 아르메니아 땅이었으나 지금은 터키 영토에 편입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중국을 통해서나 오를 수 있는 것과 꼭 닮았다.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아라라트 산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른쪽을 대 아라라트(5,165m : 튀르키예어로는 뷔위크아리다이’), 그리고 그보다 조금 낮은 가파른 원추형의 왼쪽을 소 아라라트(3,896m : 튀르키예어로는 퀴취크아리다이’)’라 구분하여 부른다고 한다.

 수도원 바깥 멀지 않은 곳으로 아르메니아-터키 사이의 철조망 국경선이 지난다. 인적 하나 없는 국경은 적막하고 긴장감마저 돌아 우리나라 DMZ에 버금가는 비감함이 느껴진다. 그나저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처럼,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아라라트 산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의 상징이다. 코르비랍의 하늘을 유난히도 많은 독수리들이 날고 있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 싶어 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염원을 아라라트 산에 전해주기 위해.

 마지막으로 수도원 뒤편의 산꼭대기로 간다. 조망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게 어디 나만의 생각이겠는가. 수도원을 찾은 관광객들 대부분의 발걸음도 산꼭대기로 향하고 있었다.

 정상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작은 깃대에선 아르메니아 국기가 펄럭인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아라라트 산은 성스러운 산이자 국가의 상징이라고 했다. 국기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국가 문장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단다. 지폐의 도안으로도 활용된다. 하지만 그런 영산(靈山)은 현재 아르메니아의 영토 밖 튀르키예 땅에 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1813년에 있었던 굴리스탄 조약 탓이다.

 고개를 돌리니 조금 전 둘러본 코르비랍 수도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높고도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게 영락없는 성채(fortress)’. 그만큼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왔다는 얘기일 것이다.

 수도원 뒤쪽(남쪽, 산꼭대기에서 바라봤을 때 아라라트 왼쪽)으로 펼쳐진 평원 뒤로는 노아가 정착했다는 뜻을 가진 나히체반(Nakhichevan)’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제르바인잔 영토이라서 육로로는 들어갈 수 없단다.

 이곳에서도 아라라트 산을 조망할 수 있다. 아니 조금 전의 전망대보다 높아진 고도만큼이나 더 가까이 다가온 아라라트 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아라라트 산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날씨만 맑으면 어느 지역에서든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중에서도 이곳 코흐비랍은 가장 가까이서, 가장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산자락에는 커다란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었다. 신비로운 아라라트 산과 대비되며 살아도 한 평 죽어도 한 평, 땅속에 묻히는 인간의 비애가 느껴진다.

 투어 중 만난 안내판은 코르비랍에 대해 적고 있었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길이가 10km 이상이나 되었다나? 아르메니아의 옛 수도 아르타샤트(Artashat)’를 얘기하는 듯. 아무튼 성벽은 두께 2.6-3.5m에 높이가 20-25m나 되었단다. 엄청난 규모라 하겠다. 그중 한 언덕에서 발견되었다는 유적은 안내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시타델과 궁전의 잔해, 광장, 그리고 우주에서 찍은 위성사진으로도 볼 수 있는 주요 거리, 사이드 스트리트, 빌딩 기초가 있다. 건물에는 주거용 건물과 대장장이 겸 작업장이 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것은 3000개의 겨드랑이 창, , 단검, 대리석 조각상과 조각들, 도자기, 유리 작품, 장식용 금속 조각들 그리고 다른 공예품들이었다.>



여행지 : 아르메니아  세반, 세반 호수와 세바나 반크(수도원)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세반(Sevan) : 아르메니아 중부에 위치한 세반호수의 북서쪽 호안에 있는 작은 도시. 세반은 도시의 소란에서 벗어나 자연 속으로 떠나기에 딱 좋은 곳으로 꼽힌다. 세반호의 주변을 병풍처럼 두른 아름다운 산과 호수 주변의 싱그러운 초목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고 한다.

 

 두 번째 방문지인 세반 호(Lake Sevan)’로 간다. ‘딜리잔에서 높은 고개를 넘으면 환경이 크게 바뀐다. 이어서 진행방향 저만큼 호수가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인구 2만의 소도시 세반에 이른다. 호수 주변의 마을 중 교통이 가장 좋고 사람의 통행이 가장 번화한 곳이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 세반호수(세반 수도원), 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 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 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세반은 세바나 반크’(Sevana vank)’  세반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우린 유람선(꼬맹이 어선을 개조했다)부터 타기로 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부터 먼저 살펴본 다음, 수도원의 속살을 들여다봐야 은밀한 속사정까지 알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세반은 호수물이 흐라즈단강으로 흘러드는 지점에 형성된 도시로 세반호수 관광의 중심지라고 했다. 캠핑이나 수영은 물론이고 제트스키, 윈드서핑, 요트 등의 수상레포츠를 즐길 수 있단다. 유람선을 타고 세반호수 일부를 둘러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유람선은 호수를 향해 툭 튀어나간 반도(peninsula)’를 한 바퀴 돌아온다. 1930년대에 시작된 산업화 과정은 흐라즈단 강에 발전소를 만든다. 그게 숫자를 늘리면서 1949년에는 세반호에 도수터널을 뚫어 발전용수를 공급한다. 하지만 그때부터 세반호의 수위가 매년 1m씩 낮아지기 시작했고. 수면 위에 떠있던 섬은 저렇게 반도로 변해버렸다. !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아르메니아 정부가 아르파-세반, 보로탄-세반 등의 도수터널을 새로 만들면서 수위가 다시 올라가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세반반도의 호안에는 비치는 물론이고 호텔과 레스토랑, 캠핑장 등이 줄줄이 들어서 있었다. 반도의 언덕에는 세반수도원의 고색창연한 두 건물이 걸터앉았다. 1,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원으로,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에 저항해 사도교회를 지키려던 아르메니아인들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6월인데도 호수 건너 산은 눈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즈다하크 산(Mt. Azhdahak, 3598m)’이 아닐까 싶다.

 버스를 이용해 세반반도 안으로 들어간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수위가 낮아지면서 섬은 반도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제 배 대신에 걷거나 차를 타고 들어간다. 그리고 수도원을 보기 위해 산 위로 올라간다. 경사가 제법 가파르나 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어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아니 세반호수와 주변 마을 등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다보면 힘들다는 느낌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다.

 교회는 4-5m 높이의 축대 위에 지어져 있었다. 그 입구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본 다음 안으로 들어가면 어떨까? 최소한 건물이나 유적의 이름 정도는 알아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안내판은 건물배치도와 함께 세바나 반크의 역사를 적고 있었다. 수도원은 305 그리고르 루사보리치(Grigor Lusavorich)’가 세반 섬에 있는 이교도 신전 꼭대기에 에르미타주 교회와 성 하루티언 교회를 세우면서 시작된다. 874년에는 슬룬크의 바사크 가부르 왕자의 부인 마리암 공주의 후원으로 성 아라켈로츠(거룩한 사도)’ 성 아스타바트사친(신의 성모)’ 교회를 세운다. 안내판에는 없지만 전설도 있다. 10세기 아쇼트 2(Ashot II)’는 아랍 침략자들과 싸우면서 이 섬에 야영을 한다. 당시 아르메니아 군대는 아랍인들에 비해 수적으로 훨씬 열세였다. 하지만 현지 어부로부터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전투를 벌이라는 조언을 들었고, 그 결과 태양에 눈이 먼 아랍인들은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전사한 병사들의 군복과 피로 호수가 검붉게 변하자 아르메니아어로 검은을 뜻하는 세브를 이름에 붙였다나?

 수도원의 건물배치도. 1. 성 사도교회(St. Arakelots church) 2. 승려 숙소 및 학술원 유적(monk cell and academy ruins) 3. 성모교회 전실 유적(St. Astvatsatsin gavit ruins) 4. 성모교회(St. Astvatsatsin church) 5. 성 하루티언교회 유적(St. Harutiun church ruins)

 입구의 저 조형물은 대체 뭘까? 정박(碇泊)을 의미하는 닻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1872-1946’이란 숫자도 적혀있다. 1949 세반호에 도수터널을 뚫어 발전용수를 빼내간 이래 수면이 19.01m나 내려갔으니, 그 이전에 이곳에 항구가 있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안으로 들어가니 세반수도원(Sevana vank)을 구성하는 비잔틴 양식의 두 교회가 반긴다. ‘성 사도교회(St. Arakelots church, 앞쪽)’ 성모교회(St. Astvatsatsin church, 뒤쪽)’, 두 교회 모두 십자가 형태의 건물 위로 팔각형의 톨로베이트(Tholobate: 돔이 세워진 건물의 직립 부분)와 돔을 올렸다. 참고로 세바나 반크는 지명인 세반의 아르메니아어인 세바나(Sevana)’와 수도원이란 반크(vank)’의 합성어라고 한다. 그러니 세반호수의 호반에 있는 수도원(Monastery)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성스러운 사도라는 뜻의 아라켈로츠 교회(St. Arakelots Church)’는 바르톨로메우스(St. Bartholomaeus)와 타데우스(St. Thaddeus)에게 봉헌된 교회다. 입구 철문에 예수상과 사도상이 조각되어 있다.

 제대 뒤 감실에는 성모자상이 모셔져 있었다.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인데, 두 분의 얼굴이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생김새가 아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알려진다. 열일곱이 넘는 세기가 흘러오면서 많은 부분이 토착화가 되었나 보다. 맞다. 6년 전쯤 들른 멕시코에서도 현지인들을 쏙 빼닮은 성모상을 만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성모라는 뜻의 아스트바츠신 교회(Surp Astvatsatsin Church)’는 말 그대로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교회이다. 사도교회와 거의 비슷한 외관이지만 조금 더 크게, 그리고 조금 더 높은 곳에 지어져있다.

 교회 입구에는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하치카르(Khachkar)’를 진열해 놓았다. 저 하치카르에 새겨진 십자가의 아래는 현세 지상을 뜻하고 위는 천상의 세계를 뜻한단다. 이 땅에 살다가 하늘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도구인 셈이다. 사람이 죽었을 때 노잣돈의 개념으로 하치카르를 만들기도 했단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좌대 위에 세우는 특별 대접을 받는 것도 있다. 그나저나 저 안경은 대체 누구의 것일까? 세반호수와 어우러지는 수도원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안경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자리를 떴을까?

 안으로 들어가면 제대 가운데 십자가와 성모자 그림이 모셔져 있다.

 이곳의 성모자상도 사도교회처럼 현지·토착화가 되어있었다.

 이색적인 풍경이 눈에 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제대가 아닌 벽화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한두 사람이 아니다. 너나없이 제대는 곁눈질만 주고 벽화 앞으로 가버린다.

 그곳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가운데 놓고, 열두 제자로 여겨지는 성인들이 여섯 명씩 양쪽에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조금 이상하다. 난데없는 몽골풍, 그러니까 머리를 땋아 길게 늘어뜨리는 변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이드는 몽골의 침입 때 수도원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살짝 꼼수를 부린 것이라고 했다. 일종의 애교작전이라고나 할까?

 그 아래는 변발을 한 예수님을 아예 하츠카르로 만들어 놓았다. 아무튼 저런 노력 덕분에 몽골군들이 자기네 장군을 숭배한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나무로 된 조각품도 눈길을 끈다. 예수님과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바르톨로메우스 타데우스상라고 들은 것 같은데, 내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예수는 왼손에 책을 들고 오른손을 들어 올려 설교하는 모습이고, 두 명의 사도는 고뇌하는 듯한 진지한 표정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형상이다.

 검은색 돌인 응회암으로 지어진 교회는 고색창연했다. 한줄기 빛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내부의 검은 돌에 반사돼 신심이 더욱 깊어진다.

 세반수도원은 아르메니아의 대표적 순례교회라고 한다.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후 세운 최초의 교회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등재된 아흐파트 수도원보다도 더 많은 신자와 봉헌용 촛불이 눈에 띈다.

 두 교회를 모두 둘러보고 나면 발길은 자연스레 교회 뒤쪽으로 향한다. 수도원은 물론이고, 수도원이 걸터앉은 세반반도를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세반호수를 조망하기 위해서이다.

 아르메니아 왕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성 그레고리우스는 이곳에 2개의 교회를 세운다. 그중 하나가 성 하루티운 교회인데 지금은 폐허로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아르메니아 특유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3개의 본당이 있는 돔형 대성당이었단다. 하나 더. 전설은 마리암 공주가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세상을 떠난 남편을 기리기 위해 30개의 교회를 짓는 임무에 착수했다고 전한다. 12사도가 호수를 가로질러 날아가 그녀가 지어야 할 곳을 알려주는 꿈을 꾼 후 위치를 특정했단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수도원 풍경. 들꽃에 파묻히다시피 한 수도원이 세반호수를 배경삼아 한 폭의 잘 그린 풍경화로 그려진다. 참고로 세반 검은(Sev, 아르메니아어)’ (van, 튀르키예 남동쪽에 위치한 호수)’의 합성어라고 한다. 예전에는 튀르키예의 동부지역도 아르메니아 영토였다고 한다. 그곳에 (van)’이라는 호수가 있는데, 호수 근처에서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이곳으로 옮겨왔던 모양이다. 그리고 검은 빛을 띠는 저 호수에 반 호수를 겹쳐보면서 향수병을 달랬다는 것이다.

 세반호수와 성모교회가 찰떡궁합을 이룬다. 세반호수는 바다가 없는 아르메니아에서 보석 같은 존재다. 용수·전기·물고기 같은 유형의 자원뿐 아니라 관광·레저·생태 같은 무형의 자원을 이 지역 사람들에게 제공해준다.

 성모교회 앞은 터만 남아있었다. 원래는 성모교회의 전실(gavit)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1956-1957년 교회가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전실의 기둥 등 일부 유물은 예레반 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세반호수의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가히 아르메니아의 진주라 불릴 수 있을만한 풍광이다. 세반호수와 함께 아르메니아의 상징으로 꼽히는 아라랏 산의 폭발로 생겨 난 호수라는데, 아르메니아에서 아니 코카서스 지역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940평방미터로 제주도와 맞먹는 크기라고 한다. 하도 넓어서 수평선이 보일 정도라나? 하나 더. ‘검은 ()호수라는 이름은 물빛이 검어서가 아니라 호수에 구름의 그늘이 져서 검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도원은 야생화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이 가슴에 매력적으로 스며드는 곳이다. 그런 꽃밭 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다 발걸음을 멈춘다. 또렷하지 않는 길을 따르는 것보다는 발아래로 펼쳐지는 세반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에 풍덩 빠져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이다.

▼ 언덕은 이름 모를 노란 꽃무리가 호수와 어우러지며 장관을 이룬다. 평생을 꽃띠로 살고 싶다는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냉큼 꽃밭으로 들어가 포즈부터 잡고 본다.

 세반수도원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소문났다. 특히 해질 무렵이면 세반 호수를 바라보며 서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에 비해 관리가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낙서판으로 변한 저 안내판이 그 증거이다.



여행지 : 아르메니아  알라베르디, 아흐파트 수도원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알라베르디(Alaverdi) : 조지아와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공업도시로 한때 아르메니아 최대의 구리광산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폐광 수준이라고 한다. 이 지역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흐파트 수도원 사나힌 수도원이 있다.

 

 아르메니아에서의 첫 방문지는 아흐파트 수도원(Haghpat Monastery)’이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남쪽으로 50km쯤 떨어진 국경도시 사다클로(Sadakhlo)’ 바그라타쉔(Bagratashen)’에서 간단한 짐만 챙겨 출·입국 수속을 밟은 뒤 아르메니아로 넘어왔다(‘Debeda’강이 국경 노릇을 한다). 이어서 50분쯤 더 달려 알라베르디에 위치한 아흐파트 수도원을 찾았다. ! 아르메니아의 첫 인상은 무척 좋았다. 입국심사장에서 만난 젊은 관리로부터 불편하겠지만 즐겁고 행복한 시간 보내다 돌아가라는 인사를 들은 덕분이다. 뜻은 고사하고 읽기조차 불가능한 언어를 가진. 또 다른 낯선 나라에 발을 디디자마자 만난 호의가 그 나라의 대한 이미지를 확 굳혀버린 것이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 세반호수(세반 수도원), 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 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 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안내판은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아흐파트 사나힌 마을에 위치한 두 수도원(Monasteries of Haghpat and Sanahin)은 비잔틴 양식의 수도원으로, 10-13세기에 번성했던 키우리크 왕조의 중요 교육기관이었다. 특히 사나힌은 역사적으로 장식가와 서예가의 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두 수도원은 중세시대 아르메니아 종교건축의 걸작으로, 비잔틴 양식의 토대 위에 아르메니아 지역의 전통 건축양식을 가미한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건물배치도(규모가 큰 수도원이었음을 알려준다)

1. 성 십자가교회(St. N‘shan Church) 2. 성 십자가교회 집회실(St. N’shan Gavit) 3. 성 그레고리 교회(St. Grigor Church) 4. 성모 예배당(Astvatsatsin Chapel) 5. 회랑(Gallery & Academy) 6. 서적 보관소(Book depository) 7. 하마자습 교회(Hamazasp Church) 8. 종탑(Belfry) 9. 식당 및 사무실(Dining room & service building) 10. 우카난츠 가족묘(Ukanants family sepulcher)

 아흐파트 수도원은 10-13세기 사이 조성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수도원이다. 중세 바그라티(Bagrati) 왕조의 아쇼트 3(Ashot III)’ 때인 976년 왕비 호스로바누이시(Khosrovanuysh)의 후원으로 성 십자가교회(St. N’shan Church)‘를 짓기 시작해 숨바트 2(Sumbat )’ 때인 991년 완공했다. 이후 성 그리고르 교회 등의 건물들이 지어진다. 하지만 지진과 외세 침략으로 여러 번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걸 재건·확장하면서 원형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덕분에 아르메니아에서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수도원이 되었다. 이웃하고 있는 사나힌 수도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이다.

 수도원에서 가장 큰 건축물은 성 십자가를 봉헌하기 위해 지어진 본당 성 십자가 교회(St. N‘shan Church)’이다. ‘아쇼트 3의 아내인 호스로바누이쉬에 의해 976년 착공, ‘숨바트 1에 의해 991년 완공된 10세기 아르메니아 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외벽의 4개 기둥 위에 중앙 돔이 놓여있는데, 11세기와 12세기 한두 차례 소규모 복원작업이 있었으나 원래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단다.

 본당인 성 십자가교회의 파사드(facade)는 단조로운 편이었다. 예술품에 가까운 조각품들로 장식되어 있는 로마가톨릭의 교회들에 비하면 여염집 느낌이라고나 할까?

 대신 하치카르라 불리는 석조 십자가가 벽면을 비롯하여 교회의 내부와 외부에 가득했다. 그것이 예배의 중심을 이룬다고 했다.

 아르메니아의 교회는 조지아의 것과 흡사하다고 했다. 십자가 모양의 구조에 가운데에 둥근 모양의 탑이 솟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상황이 확 바뀐다. 조지아와는 달리 초입에 가비트(Gavit)’라고 하는 널따란 방이 있기 때문이다. 서양 교회의 나르텍스(Narthex)와 비슷한 개념으로, 교회 정면 입구와 본당 사이에 꾸며 놓은 공간을 말하는데 회의나 교습, 장례의식이 행해졌다고 한다.

 예배당은 그 안쪽에 따로 만들어져 있다. 문 하나를 더 지나야 이르게 된다.

 안으로 들어가면 통로 양쪽으로 나무 의자가 놓여 있다. 앞쪽 돔 아래로 제대가 있고, 그 안쪽에 하츠카르(Khachkar)’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역사가 9-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하츠카르는 아르메니아 특유의 십자가다. 십자가를 보석처럼 정교하게 가공하고 조각한 예술작품이다.

 하츠카르 뒤쪽 반원형의 벽면과 천정에는 색깔이 바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 가장 위쪽은 예수 그리스도의 차지다. 우주의 지배자로서 그리스도를 묘사한 듯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의 호위를 받으며 앉아 있다. 그 아래로 예수의 삶과 관련된 그림, 그리고 줄을 바꿔 십이사도로 여겨지는 성인들이 창을 중심으로 양쪽에 여섯 명씩 서있다. 그림은 흐릿한 게 전문가가 아니면 내용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 역시 전문가의 글을 많이 인용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 받는 성화가 걸려있는 장소는 세례 받는 장소라고 했다. 제대 앞 서쪽 벽면에는 최근에 그려진 성모자상도 걸려 있었다. 하지만 조지아처럼 많지는 않았다. 또한 조지아에서처럼 이콘에다 키스를 하거나 이콘을 향해 예배드리는 신자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가장 남쪽에 있는 성 그레고리 교회(St. Grigor Church)’ 1005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남쪽 벽에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있는 게 눈에 띈다. 벽의 끝까지 발이 땅에 닿지 않고 건너가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믿음에서라고 한다. 전설 같은 얘기에 귀가 솔깃해진 집사람도 도전해봤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맞다.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기에 찾아갔더니 행복은 그 다음 산 너머에 있더라고 하지 않았던가.

 파사드는 본당보다도 더 단조롭다. 그저 벽면에 뚫어놓은 작은 구멍(조명용 창)들이 눈길을 끈다고나 할까?

 내부는 더 단조로웠다.

 본당 왼쪽의 작은 건물은 성모의 예배당(St. Astvatsatsin)’이라고 했다.

 북쪽 끄트머리에는 본당의 측실이랄 수 있는 하마자습 교회(Hamazasp Church)’가 있다. ‘하마자습은 아흐파트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이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고 해서 안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다.

 본당(성 십자가교회)과 하마자습 교회 사이에 회랑이 있다. 이 회랑에 수도원에서 가장 유명한 하츠카르(Khachkar. 십자가가 새겨진 기념 비석)’가 있다. ‘1273년에 세운 구세주 하츠카르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십자가 죽음에 이르는 생애가 새겨져 있단다.

 그림은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했다. 아랫부분의 둥근모양은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세를 상징하고, 가운데 공간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그리고 맨 위는 하느님의 공간인 천국을 나타낸다. 하늘과 땅이 있는 것은 십자가위의 예수님이고 예수님 양 옆으로 제자들이 있다. 원래, 아르메니아의 하츠카르는 예수를 새기지 않는데 이 조각물에는 독특하게도 예수의 형상을 새겨 놓았다.

 회랑 뒤쪽 깊숙한 곳은 학술원이라고 했다. 뒤로 보이는 저 단에 서서 강의도 하고 음악 연주도 했단다. 지금도 그런 행사가 열리는지 알쏭달쏭한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experience the magic’ 마법을 경험해 보란다. ‘ARLOOPA(컴퓨터 생성 콘텐츠와 실제 환경을 실시간으로 완벽하게 결합하는 대화형 경험을 얘기하는 것일까?)’라는 어플로 스캔까지 떠보란다. 대체 뭘 전하고 싶은 것일까?

 서적 보관소는 1200년대 완벽하게 재건되었다고 했다. 도서관의 땅바닥에는 커다란 항아리들이 묻혀 있었다. 구세주 하츠카르와 함께 이 항아리는 다른 수도원에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제대로 관리가 안 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 항아리는 원래 와인과 유제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외침 때는 양피지에 기록된 아르메니아의 기록물을 은폐하는 곳으로 쓰였다고 한다. 때문에 습도와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 지붕을 제외하고 모든 부분을 흙으로 덮어 놓았단다.

 교회는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했다. 이를 천장을 뚫어 해결했는데, 세련된 기하학적 무늬 조각이 놀랍다. ‘예르디크(yerdik, 연기가 나가도록 지붕에 낸 구멍)’라고 하는데 이 구멍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은 물론 내부의 공기를 환기시키는 역할도 했단다.

 십자가가 없는 저 건물은 빵을 굽고 밥을 먹던 식당이라고 한다. 1248년에 지어졌단다.

 안내도는 요 어림을 우카난츠 가족묘(Ukanants family sepulcher)’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그래선지 무덤과 비석들이 많이 보인다.

 요것도 하츠카르(Khachkar)? 이렇듯 수도원은 건물 안팎에 돌을 새겨서 만든 하치카르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하치카르를 파는 법도 이곳 아흐파트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참고로 하츠카르는 9-11 세기 바그라트 왕조(Bagratid Dynasty) 때 저런 돌에 십자가와 꽃문양을 새기는 아르메니아 전통양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수도원 뒤쪽으로 가면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가 드러난다. 건물의 지붕 아랫부분까지 흙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흙을 제거하지 않은 채로 건물을 지었는지. 아니면 일부러 흙을 채워 넣었는지는 몰라도 전문가들은 건물 내부의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적고 있었다.

 교회 북동쪽에 있는 3층짜리 종탑은 1245년에는 지어졌다. 하나 더. 아흐파트 수도원은 요새화된 대규모 수도원 단지였다. 당시 저 종탑은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루의 역할까지 수행했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고 했다. 맨 위가 원통형으로 솟아 끝이 뾰족하거나 돔양식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특징. 건물 중앙부는 별다른 장식 없이 직사각형 형태를 유지하며 좁고 긴 창문이 위치한단다.

 누군가는 아흐파트 수도원의 건축물을 장식 없이 단순 질박함 그 자체라고 적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스스로의 격을 갖고 있단다. 굵은 기둥, 묵직한 천장, 그러면서도 요소요소에 디테일이 살아있는 양각 조각은 육중함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나?

 사랑꾼인 집사람에게는 낯선 나라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모양이다. 앉으나 서나 카메라 앞에만 서면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오느라 여념이 없다.

 두 번째 방문지인 세반호수로 가는 도중 딜리잔 국립공원 부근에 있는 작은 고을에 들렀다. 화장실이 급한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의 배려였다.

 화장실이 급하지 않았던 나는 호수를 한 바퀴 돌아봤다. 호숫가를 따라 산책로를 내는 등 공원처럼 잘 꾸며 놓았다.

 호숫가 레스토랑의 벽면을 장식한 벽화. 그라피티의 수준을 넘어섰다.

 어느 카페 앞 조형물에서는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을 받아가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아르메니아는 사막 기후도 나타나는 건조한 지형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물 부족 국가가 아닌 그 반대이다. 나는 손바닥으로 떠서 마셔봤다. 특별한 맛은 없으나 청량해서 좋았다. 이곳 아르메니아처럼 어디에서나 안전하게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과연 몇 나라나 있을까.



여행지 : 조지아 - 시그나기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시그나기(Sighnaghi) : 시그나기는 과거 조지아에서 무역과 상업의 거점도시 역할을 해왔다. 18세기 초, 당시 왕이었던 헤라클리우스 2(Heraclius)가 약탈을 일삼는 주변 부족들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쌓아 올리고 23개의 망루를 설치하면서 지금의 도시 형태가 갖춰졌다.

 

 조지와의 첫 만남인 라고데키(Lagodekhi) 국경검문소.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을 뒤로 하고 기독교의 나라, 와인의 나라 조지아로 들어간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로 가는 길은 고단했다. 국경에서 차에 탄 사람은 짐을 다 가지고 내려야 한다(운전기사와 차량은 따로 검사와 절차를 밟는다). 승객은 비행기 탑승하듯 여권과 짐을 확인받아야 한다. 자신의 모든 짐을 자기가 챙겨가야 함은 물론이다. 아제르바이잔의 조그만 건물을 통과하자 눈앞에는 경사가 높은 좁은 계단길이 나타났다. 그곳을 각자 짐을 가지고 올라가면 그 위쪽에 조지아의 건물이 있다. 뜨거운 날씨에 짐을 들고 길을 올라가 다시 한 번 절차를 밟고 나서야 드디어 조지아에 입성했다.

 이번 여행은 코카서스 3(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여행사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마지막에 흑해 연안의 바투미(조지아 제2의 도시)’도 들렀다. 그리고 튀르키예의 리제로 넘어가 이스탄불(환승)을 거쳐 귀국했다.

 카헤티(Kakheti province)’ 지역의 라고데키(Lagodekhi municipality)’에 있는 와인 저장고(wine cellar)부터 들른다. 와이너리 투어 겸 점심을 먹기 위해서이다. 점심은 빵 안에 야채를 넣은 므흐르바니, 소고기, 스프, 힌칼리(Khinkali)가 와인 1리터와 함께 제공된다. 참고로 힌칼리는 만두피가 두툼하고 육즙이 가득한 고기만두다. 육즙이 쏟아지지 않게 먹는 게 요령이기도 하다. 꼭지는 먹지 말라는 가이드의 조언도 있었으나 시험 삼아 먹어봤고, 다음부터는 가이드의 말을 무조건 믿기로 했다.

 키라말라 와어너리(Chateau Kiramala)’쯤 되겠다. 유럽연합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조지아 농촌개발모델 강화사업의 대상 사업장이고.

 농장 안으로 실개천이 흐르고, 그 옆에 상당히 넓은 레스토랑이 있다. 조경도 사진 찍기 딱 좋게 꾸며놓았다.

 저건 야외 테이블? 두셋이 단출하게 왔을 때 이용하면 딱 좋겠다.

 식사를 마치고 지하의 와인 저장고로 들어가 10분 정도 조지아 전통 크베브리 양조법, 와인 양조에 사용되는 기구, 땅 속에 묻힌 크베브리 등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설명이 끝나면 입구에 차려진 시음대로 자리를 옮겨 시음에 들어간다. 투명한 노란빛을 띠는 화이트와 검은빛에 가까운 레드 등 주어지는 서너 종류의 와인은 하나같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향긋한 과일향과 꽃향이 풍부했고 상쾌하면서도 뒤로 갈수록 묵직한 맛을 내는 것이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크베브리(kvevri)’가 묻혀있는 와인 저장고.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크베브리 양조법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했다. 카헤티 지방에서는 사츠니헬리(압착기)에서 압착한 포도즙과 차차(포도껍질·포도줄기·씨앗)의 혼합물을 크베브리의 85%정도 채운다. 자연적으로 발효되도록 뚜껑을 뚫고 통을 저어주다가 3주가 지나 발효가 되었다싶으면 뚜껑을 점토나 실리콘으로 밀봉한 뒤 다시 6개월 정도 숙성시킨다. 이후 숙성된 포도주를 와인병이나 다른 항아리로 옮기는데, 항아리의 둥근 벽이 침전물이 바닥에 잘 가라앉도록 만들어주는 덕분에 따르기가 쉽다나?

 크베브리는 조지아 전통양조의 역사이다. 조지아 전역에서 크베브리 양조법에 의해 와인이 만들어지는데, 특히 이곳 카헤티지역은 대표적인 생산지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마당까지 따라 나온 크베브리 두 개가 손님을 배웅하고 있었다.

 시그나기(Signagi)로 가는 길. 양 옆으로 포도농장이 줄을 잇는다. 맞다. 이곳 카헤티(Kakhet)’는 조지아 와인을 상징한다. 전체 조지아 와인 생산량의 60% 이상이 생산되는 최대 와인 산지이며, 조지아 와인의 맛과 양조방식의 전통을 지켜온 곳이다. 카헤티의 와인산지는 알라자니라는 강을 끼고 형성되어있어, 영양분과 수분이 풍부하며 배수가 잘되는 토양에서 포도를 수확할 수 있다. 여기에 흑해의 따스한 바람과 시리아 고원의 햇빛이 더해져 조지아 와인만의 특별한 맛을 얻을 수 있다.

 조지아에서의 첫 방문지는 보드베(Bodbe) 수도원이었다. 하지만 보드베 수도원은 홍수피해로 인한 진입로 보수공사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단다.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Nino)’가 묻혀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본다. 참로고 성녀 니노(St. Nino)는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래한 인물로 조지아 정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로 꼽힌다. 전설에 따르면 카파도키아 출신인 니노는 신의 계시를 받고 조지아로 건너와 죽어가는 아이를 소생시키고 병자를 낫게 하는 기적을 행한다. 이런 소문은 조지아 왕비에게까지 전달됐고 불치병을 앓고 있던 왕비는 니노에게 자신의 병을 치료해 주길 부탁한다. 니노의 기도로 병이 완치된 왕비는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고 니노는 기독교로 개종해 줄 것을 청한다. 선교를 위해 평생을 힘쓴 니노는 보드베 계곡으로 돌아와 은수자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후에 수백 명의 장정이 그녀의 유해를 므츠헤타(Mtskheta)로 옮기려 했지만 유해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이곳에 영원히 잠들게 됐다.

 시그나기 관광의 시작과 끝은 버스주차장. 보드베수도원을 걸른 채 곧바로 시그나기로 향했다. 역사성(시그나기 주변지역은 역사지구로 지정되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으로 인해 카헤티(Kakheti)주의 관광명소가 된 인구 2,500명의 작은 마을이다.

 시그나기는 주변 평야지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 전쟁 때 피난지로 삼기위해서다. 그러니 관광 포인트로 가기 위해서는 잠시지만 경사로를 올라가야 한다. 참고로 시그나기는 1762년에 피난용 성곽마을이 조성됐고,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후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였으나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마을의 규모가 줄어들어 농업 위주의 작은 마을로 퇴락했단다.

 당나귀를 탄 왕진 의사(Doctor Benjamin)’. 이곳 출신의 천재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의 그림 속 인물을 조형물로 제작했다. 이밖에도 시그나기에는 그의 그림에서 나오는 장면들을 본뜬 조형물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시청으로 올라가다 만난 분수. 크베브리(Qvervri) 항아리 위에서 귀여운 사슴이 노닐고 있다.

 결혼등록소(예식장)’라고 했다. 24시간 이용이 가능한데, 공증인과 하객 앞에서 신랑신부가 사인을 하면 부모가 참석하지 않아도 결혼으로 인정한단다. 시그나기가 사랑의 도시가 된 주요 근원 중 하나라나?

▼ 앞마당에는 장미 꽃다발을 든 소녀상이 세워져 있었다. ‘백만 송이 장미를 의미하는 조형물일지도 모르겠다일화에 의하면 이곳 출신의 천재화가 니코 피로스마니는 시그나기에 머물던 프랑스 여배우 마르가리타에게 첫눈에 반해 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 재산을 털어 100만 송이의 장미를 가득 실고 그녀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했단다그의 사랑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이후 시그나기는 사랑의 도시가 되었다참고로 심수봉이 불러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백만 송이 장미는 러시아의 국민가수인 푸카초바가 불러 대 히트를 쳤는데그 가사 주인공이 바로 니코 피로스마니라고 한다.

 시그나기 시청사(Signagi Municipality administration). 결혼식 장소로도 유명하다니 시티센터 웨딩하우스쯤 되겠다. 아무튼 유명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곳 시그나기 사랑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결혼하려는 커플들이 몰려온다나? 이쯤에서 아재개그 하나. 결혼 등록비용은 우리 돈으로 7,500. 오늘 7,500원 내고 결혼하고, 다음날 7.500원만 더 내면 이혼도 가능하단다.

 시그나기 극장(Signagi theater)이라고 했다.

 시그나기 박물관으로 올라가다 니코 피로스마니(Niko Pirosmani, 18621918)’의 흉상을 만났다. 원초주의라 불리는 독특한 화풍으로 조지아의 전통과 자연, 사람들의 삶을 그린 화가다. 그는 정규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고, 상점 간판이나 초상화 등을 그려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사후에 유명해졌으며, 피카소와 같은 유명한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하나 더. 니코 피로스마니는 짝사랑의 노래 백만송이 장미의 주인공이다. 혹시 그가 살아생전에 유명한 화가였다면 여배우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1959년 문을 연 시그나기 박물관은 리노베이션을 거쳐 2007년도에 현대적인 운영체계를 갖춘 뮤지움으로 재탄생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조지아의 5대 국립박물관에 들 정도로 내실 있는 박물관이다. 2009년에는 조지아 최초로 피카소 전이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카헤티 지역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물론이고, ‘니코 피로스마니의 작품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시그나기 박물관 뜨락의 깐지를 든 타마다’. 조지아에도 우리처럼 전통 건배 문화인 타마다(Tamada)’가 있다. 타마다는 저녁식사 혹은 연회를 뜻하는 말로, 수르파(Surpa)에서 건배를 제의하는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이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에 만든 깐지라고 부르는 각배(角盃)를 들고 건배를 제의하는 타마다상이 발견됐는데, 이는 조지아가 와인의 발원지임을 알려주는 유물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박물관 주변에는 여러 개의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지아 학생들은 언제보아도 명랑해 보인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함께 사진찍자는 주문이 심심찮게 들어온다.

 박물관 뒤 테라스는 뛰어난 뷰 포인트이다. 주황색 주택 지붕과 멀리 코카서스산맥의 웅장함, 그 아래로 펼쳐지는 알라자니 평원의 풍경이 숨이 턱 멎을 정도로 아름답다.

 옆은 솔로몬 도다슈빌리(Solomon Dodashvili) 공원으로 조지아의 역사를 보여주는 부조가 있다. ‘World War  Memorial 기념공원으로도 불린다고 했다.  부조는 포도농장에 일하는 농부들을 그리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러 나가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평화를 바라는 염원을 올리브나무와 비둘기로 표현하기도 했다.

 전사의 벽에는 2차 세계대전 때 소련에 강제적으로 징집되어 전사한 사람들의 이름이 깨알같이 새겨져 있다. 그 옆의 글귀는 죽어가는 병사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라고 가이드가 귀띔해준다. 그루지아어를 알지 못하니 내용은 모르겠고, 대충 ‘Be Sad, mother I am dying give me the light of your love’쯤 되지 않을까?

 소련에 대항하여 트빌리시에서 벌어졌던 시위 때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리는 ‘49일 비라고 했다. 참고로 ‘4 9일의 비극(트빌리시 대학살, 트빌리시 비극으로도 알려짐)’ 1989 4 9일 그루지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트빌리시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의 반-소비에트 시위는 소련군에 의해 해산되었고, 20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4 9일은 국가 통일의 날로 기억되며, 조지아에서는 공휴일이라고 한다.

 솔로몬 도다쉬빌리(Solomon Dodashvili, 1805-1836)’의 동상. 시그나기 태생의 문학가이자 역사학자, 계몽주의 철학자로 니코 피로스마니와 함께 시그나기의 자랑으로 여겨지는 사람이다.

 공원에서 만난 또 다른 이의 흉상. 그루지아어를 모르니 누구인지는 모르겠고.

 사랑의 도시답게 결혼식을 막 끝내고 나온 신혼부부도 눈에 띈다. 신랑신부와 하객들이 공원에서 흥겨운 춤판을 벌이고 있었다.

▼ 고개 너머 성곽으로 가는 길. 시그나기는 광장을 중심에 두고 마을이 길쭉하게 형성되어 있다. 바삐 서두르는 게 미안할 정도로 거리는 잘 꾸며져 있었다. 집들은 예쁘고, 마당과 테라스에는 어김없이 꽃들이 자란다. 이런 길은 걷는 것 자체가 힐링이 된다.

 경사진 박공지붕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동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방식인데, 이곳 코카서스도 동유럽 문화의 영향권에 놓여있지 않나 싶다.

 잠시 후 성곽에 이른다. 시그나기는 4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이다. 약탈을 일삼은 주변 다케스탄 부족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1762년 헤라클리우스 2(Heraclius)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한다. 성곽은 주변을 살피기 위해 23개나 되는 레이스 모양의 둥근 망루와 6개의 성문을 세웠다고 한다. ‘시그나기라는 이름도 터키어에서 온 대피소, 피난처(Shelter)에서 유래되었단다.

 마을을 아늑하게 에워싼 기다란 성벽과 파스텔 톤의 가옥들이 줄지어 선 삐뚤빼뚤한 골목들,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워 누운 돌담의 풍경은 언뜻 서유럽의 작은 성벽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관광지답게 골목에는 기념품 판매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소박한 공예품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사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아직은 여행의 초반. 가급적 짐을 줄여야만 한다.

 성 조지교회(St. George basilica)’. 시그나기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1793년 아르메니아 교회로 만들어졌다. 1920년대 이후 조지아정교회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벽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성 스테판교회는 찾아보지 못했다.

 성문은 빈약하다는 느낌을 준다. 성문을 부수려고 공성기를 앞세워 쳐들어오는 적들을 과연 막아낼 수 있었을까? 이들에게 활을 쏘아야 할 병사들이 올라설만한 지지대가 안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젠 성벽의 위를 걸어볼 차례이다. 성벽의 길이는 4km쯤 되지만 공개된 구간이 한정돼 있으니 쉬엄쉬엄 걸어보면 되겠다.

 성벽 길. 처마에 매달린 제비집처럼 성벽 상단에 잔도(棧道)를 매달아놓았다. 이런 길을 20분 정도 걷게 된다.

 위태한 난간을 따라 성벽 위를 걷는다. 그러자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의 형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성벽도 조망의 명소다. 알라자니 평원이 드넓게 펼쳐지는가 하면, 그 뒤로는 가프카스 산맥이 동서로 이어진다. 누군가는 저 풍경, 즉 카헤티 지방의 황홀한 전경을 피로스마니가 그린 동화적인 색채의 원천이라고 했다.

 느긋하게 걷다보면 망루가 나타난다. 조망이 괜찮다는 가이드의 귀띔에 홀려 일단을 들어가고 본다.

 나무 계단을 밟고 망루의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올라오는 게 편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보수를 안했는지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날 뿐만 아니라, 판자가 떨어져나간 곳이 눈에 띈다. 방심하다간 자칫 사고가 날 수도 있겠다는 얘기다.

 망루에라도 오를라치면 능선을 따라 할머니의 가르마처럼 뻗어나간 성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관광객들은 성곽을 따라 걸으며 발아래로 펼쳐지는 대평원과 멀리 코카서스 산맥을 바라본다. 주위의 풍경이 워낙 빼어나 걷다보면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성곽 위는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마을 외곽을 둘러싼 성곽은 과거 평원과 마을을 가로막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단절됐던 것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면서 여행객들을 불러들인다. 그래서일까?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낀 성곽이 지극히 평화스러워 보이는 것은...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자 우직한 자태로 서 있는 성문이 모습을 드러내고, 성벽 투어는 끝을 맺는다. 성곽 전체를 공개하지 않아 일부만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여행지 : 셰키 역사중심지와 칸의 궁전 그리고 아르메니아교회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 이란 및 러시아와 접한 카스피 해 연안의 국가.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데 경제의 상당 부분을 석유와 천연가스가 지탱하고 있어 불의 나라로 불린다. 동유럽권에 속해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까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 달리 아제르바이잔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에 서아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점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동유럽권으로 보는 이유는 19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영향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셰키(Sheki) : 아제르바이잔 북서부에 위치한 인구 7만의 작은 도시. 기원전 6세기부터 존재했으며, 후에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가 되었다. 오늘날의 시가지는 1772년의 진흙 홍수로 인해 본래의 마을이 파괴된 이후 재건되었으며 높은 박공지붕을 얹은 집들이 이때 생겨났다. ‘칸의 궁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참고로 셰키라는 지명은 기원전 4세기에 흑해(黑海)에서 살던 사카족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됐다.

 

 셰키에서의 첫 일정은 알바니아교회 탐방이다. 교회는 키쉬(Kish)라는 작은 동네에서 내려 4륜구동의 승용차로 갈아타고 올라간다. 산자락에 있는 교회로 가는 길이 좁고 가파르기 때문이다. 조그만 하천을 건너고 마을을 지나면 이윽고 교회. ‘키쉬의 알바니아 교회(Kish Alban Mabadi)’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코카서스 3(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여정이다. 첫 번째로 들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수도인 바쿠와 고부스탄, 샤마흐, 셰키(‘쉐키 또는 섀키’)를 방문하도록 일정이 짜여있다.

 아치형 문을 지나면 단순하면서도 고색창연한 교회가 반긴다. 육면체 형태의 2층 건물에 원통형 3층이 얹혀 있는 모양새이다. 지붕은 6각형의 빨간 기와로 끝이 뾰족하게 만들어졌다. 참고로 교회의 역사는 20세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단다. 당시(BC 1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 카프카스 지역에 콜키스(서부) 왕국과 이베리아(중부) 왕국, 알바니아(동부) 왕국이 있었는데, 이곳에 있던 알바니아 왕국이 지금과는 달리 기독교를 믿었던 모양이다. ! 여기서 말한 알바니아는 현재 발칸반도 서부에 있는 알바니아 공화국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도 알아두자.

 뒷마당에서 바라본 교회. 장미꽃이 만발한 꽃밭에 둘러싸인 건물은 창이 무척 작았다. 춥고 바람이 많은 산악지역의 건물이 지니는 특징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알바니아 왕국은 1세기 무렵 기독교가 전해졌다고 한다. 타데우스(Thaddeus)의 제자인 엘리세우스(Eliseus)에 의해서였다. 이후 조지아정교 계열의 교회를 거쳐, 8세기경에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계열의 교회로 변한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신도가 없어지면서, 이 교회도 카프카스 알바니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외부 담벼락은 전시장으로 꾸몄다. 감실 모양의 작은 방을 만들고 그 안에 교회의 변천과정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키쉬의 알바니아 교회가 로마교회 계열의 바실리카 양식과 정교회 계열의 비잔틴 양식을 결합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나?

 후기 중세시대 때 도자기를 굽던 가마라고 한다. 그 위에는 당시를 재현이라도 하려는 듯 도기들을 놓아두었다.

 바닥의 우물처럼 파인 곳은 성직자들의 무덤이라고 했다.

 출토된 인간의 유골도 전시해 놓았다. 안내판은 전기 중세시대의 무덤이라고 적고 있었다.

 이젠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에 제대와 촛대모양의 십자가가 놓여있다. 천정의 돔과 제대 뒤로 난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빛줄기가 어둠을 밝혀준다.

 천정의 돔과 샹들리에. 톨로베이트(tholobate, 둥근 천장을 떠받치는 하부 구조) 위 흰색 돔에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샹들리에에는 세 마리 새가 장식되어 있었다.

 촛대 모양의 십자가.

 교회 내부에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신도는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그러니 신도가 없는 교회가 박물관으로 바뀌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종교용으로 사용하던 도기와 생활용 도기, 화폐, 장신구 등이 벽을 따라 전시되어 있다. 도기는 BC 2~3세기에 사용되던 것이란다.

 놀랍게도 유리로 덮인 바닥에 유골이 놓여있었다. 키가 2m에 달하는 이 유골은 유전자가 노르웨이인과 일치한단다. 이 지역에 노르웨이인들이 최초로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이다. 그래선지 교회를 복원할 때 노르웨이에서 자금을 댔다고 한다.

 안내판은 붙어있지 않았지만 요건 카펫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아니다. 이 건물은 10세기에는 조지아정교회 교회, 18세기에는 이슬람 사원, 19세기에는 기독교 교회 등 시대에 따라 용도가 바뀌었다고 했다. 그러니 아라베스크 문양이 남아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곳은 알바니아교회’. 그러니 코카서스 알바니아 건축양식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빠듯해서 읽어보는 것까지는 사양했다.

 밖으로 나오니 기념품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알바니아교회를 찾는 관광객들의 숫자가 만만찮다는 증거일 것이다.

 돌아오는 길, ‘키쉬강을 건너는데 차가 움직일 줄 모른다. 목장에서 노닐어야 할 소들이 다리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전기사는 이런 풍경에 익숙해져있는지 천하태평. 그저 빨리빨리가 일상화 되어있는 우리네만 툴툴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들르게 될 왕의 여름궁전은 5km나 떨어져 있고, 궁전의 문이 닫힌다는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셰키 여행의 시작은 도심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칸의 여름궁전이다. 궁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성벽을 통과해야만 한다. 방어용의 육중한 성곽을 예상했으나 막상 눈에 들어오는 성벽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성문(·북문 중 북문일 것이다)이 더 초라한 것을 보면 외세의 침입이 별로 없었지 않나 싶다.

 조금 더 들어가면 담장에 둘러싸인 궁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화려함의 극치라는 칸의 여름궁전(Khan Xan Sarayi)’이다. 궁전은 1762년 칸의 집무실로 건축됐는데 주변에 겨울궁전과 가족 거주지, 하인의 집 등 건물 40여 채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여름궁전만 남아 있다.

 앙증맞은 매표소. 더 귀여운 기념품판매소가 같은 건물에 들어서 있다.

 이곳은 셰키 역사중심지와 칸의 궁전(Historic Centre of Sheki with the Khan’s Palace)’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019)되었다. 셰키 역사지구는 18세기 후반 건축된 전통적인 도시 형태를 유지해 왔으며 여러 문화가 조화된 건축적 앙상블이 뛰어난 예라고 한다. 1790년 건설된 도시 방어용 성채와 칸의 궁전, 공공건물과 상점, 장인의 공방, 실크 공장 및 협동조합건물, 개인 주거용 건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칸의 궁전이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셰키 성채의 지도도 눈에 띈다. 칸의 여름궁전을 중심으로, 주립미술관, 역사·민속박물관, 수공예가들의 집, 원형 사원, 섀배캐 공방 등이 들어서 있단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머릿속에 담아두고 투어를 시작해보자. 패키지여행을 따라온 나는 다음 방문지로 향하는 가이드의 꽁무니를 쫓기에 바빴지만...

 매표소 뒤는 잔디광장, 담벼락에 셰키의 사계를 담은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입장권을 사는 동안 둘러보기에 딱 좋은 곳이다. 아니 꼭 살펴보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수도인 바쿠에서 북서쪽으로 325 떨어져 있는 셰키(Sheki). 카프카스산맥 남쪽 능선의 해발 675m에 포근하게 자리하고 있다. 작지도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인구 7만의 도시는 낮은 산과 짙은 녹음이 둘러싸고 있어 거대한 숲 속에 들어선 듯 평온하고 싱그럽다(사진은 겨울 풍경을 게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마을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풍경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2층짜리 직사각형 건물. 즉 화려함의 극치라는 칸의 여름궁전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궁전은 규모는 작지만 극도의 화려함을 자랑한다. 건물의 정면은 청록색과 황토색, 하늘색의 기하학적 무늬와 꽃 그림을 표현한 타일로 덮여있고, 창문 양쪽의 입구와 테라스는 반짝이는 은빛 아치로 설계됐다. 2층짜리 저 목조건물을 못 등을 쓰지 않고 모든 재료를 하나하나 짜 맞추었다는 점이 특히 놀랍다.

 궁전은 셰키의 왕인 하지 샬랍(Haji Chalab: 1743~1755)’에 의해 건축이 시작되어, 1762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궁전은 2층이다. 하지만 두 층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아랫층이 공식행사를 위한 공간(왕의 서재와 응접실, 집무실)인 반면, 윗층은 왕과 가족들의 주거 공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다양한 그림도 주요 볼거리다. 아랫층에는 사냥과 전투장면 등의 역사기록화, 그리고 윗층에는 문학과 전설 속의 이야기가 프레스코화로 그려져 있다. 하나 더. 건물 보호를 위해 관람인원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순서를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제 이 되어볼 차례이다. 뒷짐을 지고 한껏 거스름을 피우며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벽면이 온통 다양한 색깔의 화려한 꽃과 나무, 화병, 기하학적 무늬로 덮여 있는 것이다. 하긴 프랑스의 문호 알렉산드르 뒤마 위대한 신이시여! 이 아름답고 역사적인 유적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주소서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는데 어련하겠는가. 하나 더.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된다. 하지만 내가 본 광경이 너무 아름다웠기에 그 아쉬움을 인터넷에서 퍼온 사진으로 전해본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단연 섀배캐'(Sebeke)’라 불리는 아름다운 문양의 창문이다. 화려한 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데, 어두운 실내에서 바라보는 창문의 화려함은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5500개나 된다는 호두나무 조각을 퍼즐처럼 끼워 만든 작고 세밀한 틀에 박혀 환상적인 정취를 연출한다.

 섀배캐는 제작하는 방법도 흥미롭다. 호두나무를 4~5 크기로 잘라 틀을 만들고, 거기에 왕궁을 짓기 위해 실크와 물물교환 해왔다는 베니스의 무라노산() 색유리를 끼워 완성한다. 문양에 따라 유리의 크기와 색깔이 제각각이어서 제작에 엄청난 정교함이 요구된단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 못을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한다.

 건물 정면의 테라스 아래쪽으로는 중앙에 분수대까지 이어지는 돌길이 조성돼 있다. 그중 백미는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 건물 바로 앞에 궁전보다 200년이나 오래됐다는 플라타너스 두 그루가 우람하게 서 있다.

 내 여행기의 모델은 오늘도 집사람이다. 궁전과의 앙상블이 맞지 않아 정원을 배경삼아 테라스에 앉혔지만...

 성채를 빠져나가는 길, 길가 울타리는 홍보용으로 변했다. 셰키의 사계와 함께 주민들의 삶을 담은 사진들을 게시하고 있었다. 참고로 셰키 역사지구 1790년대 건설된 도시 방어용 성채와 칸의 궁전, 공공건물과 상점, 장인의 공방, 실크 생산 공장과 협동조합 건물, 개인 주거용 건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는 ‘Round temple’로 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지었는지는 물론이고, 현재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칸의 여름궁전 투어는 남쪽 성문을 빠져나오면서 끝난다. 그런데 성벽이 북문과는 달리 육중하게 변해있다. 하지만 공성기기로 성문을 들이받는 영화에 익숙해서인지는 몰라도 성문은 여전히 초라했다. 참고로 궁전을 둘러싼 성벽은 궁전보다 늦게 완성되었다고 한다. 길이 1.2km의 성벽은 높이 4-6m에 두께가 2m란다.

 두 번째 방문지는 카라반 사라이(caravan sarai)’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실크로드가 지나던 나라였다. 그중 셰키는 바쿠와 트빌리시(조지아 수도), 현재의 러시아 데르벤트(Derbent)를 이으며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 역할을 했다. 그러니 실크로드 대상(카라반)이 쉬어가던 카라반 사라이가 있었을 것은 당연. 건물은 도적으로부터 상인과 물품을 보호하기 위해 성()처럼 지어졌다. 출입구도 저처럼 견고하게 만들어놓았다.

 18-19세기,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은 카라반세라이'(Karvansaray)’라 부르던 숙소에 머물렀다. 실크로드 무역이 성황을 이루던 당시는 이곳 셰키에 카라반사라이가 다섯 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젠 두 곳만 남아 있는데, 칸의 여름궁전에서 구불거리는 돌길을 따라 내려가면 그중 어퍼(Upper) 카라반사라이를 만날 수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중앙에 분수대가 있는 어둠침침하고 둥근 공간이 나타난다. 오래 전, 셰키는 동서양의 정보와 물물교환의 허브이자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무역의 거점이었다. 그러니 짐을 풀고 여독을 풀기 위해 찾아온 많은 상인들이 이곳에서 입실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참고로 지역 영주들은 낙타가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인 30~40km마다 대상을 상대로 한 숙소를 만들어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면서, 대상들을 자신의 지역으로 통과하도록 했단다.

 이어서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숙소의 안뜰이 모습을 드러낸다. 카라반사라이는 2층 구조로, 상인들은 위층에서 휴식을 취하고, 타고 온 낙타와 말, 가져온 물건은 아래층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정원은 야자나무와 활엽수를 심어 그늘을 드리우도록 했다. 작은 연못 주위에는 의자를 놓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쉬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했다. 소품 삼아 진열해놓은 옛 물건들도 눈길을 끈다.

 객실이 있는 2층부터 올라가본다. 객실의 수가 300개나 된다는데, 객실 문 앞과 복도가 모두 아치를 이루고 있다. 방 앞으로 길게 복도를 나있는데, 그 복도에서 중정(中庭)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1층 창고에 보관해놓은 물건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2층에서의 조망. 직사각형의 정원을 2층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옛날, 고즈넉한 저 정원은 카라반들이 쌓인 노독을 푸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또한 식량과 물을 비롯한 여행 필수품을 공급받으며 다음 여정을 구상했을 게 분명하다.

 객실은 텅 비어있다. 그렇다고 옛 영화까지 떠올리지 못할 이유야 되겠는가. 카라반사라이는 단순히 카라반들이 하룻밤 묵고 가는 장소가 아니었다. 각지의 카라반들이 서로 만나 문물을 교환하는 교역 장소이자 오가는 카라반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징세소(徵稅所) 역할을 했다. 또한 식량과 물을 비롯한 여행 필수품을 제공하거나 파는 공급소이기도 했다.

 일부 객실은 복층으로 나누어지기도 했다. 용도는 모르겠지만... 하나 더. 지금까지 둘러본 카라반사라이는 20세기 들어 기차와 자동차가 보편화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숙박과 창고 기능에서 문화와 관광 기능으로 그 쓰임새도 바뀌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문화유산과 호텔로 카라반사라이를 찾는다.

 카라반사라이는 지역경제를 지탱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오래전부터 카라반사라이 주변에 상가가 들어서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곳에는 기념품점과 셰키 할바'(S, ki Halva)’라 부르는 과자를 만들어 파는 상점, 카페, 식당 등이 들어서 있었다. 특히 실크로드 거점도시답게 실크 카펫이 눈길을 끌었다.

 셰키 투어의 마지막은 재래시장이다. 대형마트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에게는 다소 생소한 풍경.  1990년대, 그것도 시골에서나 만날 수 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며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

 주변 농가에서 길렀을 과일이나 채소 등 진열되어있는 상품만 볼 때는 우리네 재래시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원산지 표시와 함께 가격표가 필수인 우리네와는 달리 이곳은 흥정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시장은 여자들 세상이다. 물건을 팔려는 사람들이나 사려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자들이다. 그런데도 히잡을 쓰지 않는 등 놀랍게도 이슬람 국가의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제르바이잔에서 히잡을 쓰고 있는 여성들은 100% 타 이슬람 국가의 방문객들이라고 보면 된다던 어느 기사가 문득 떠오른다. 하지만 그들은 본인이 이슬람교라는 것에 강한 자각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혼전순결, 이슬람교인 혹은 이슬람교로 개종할 사람과의 결혼, 돼지고기 금식 등을 잘 따르고 있는 편이라고도 했다.

 ! 셰키는 전통적으로 누에 번식과 누에고치 무역에 경제의 중점을 두었다고 했다. 뽕나무가 자라기에 유리한 기후 조건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양잠업이 발달했고, 실크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이를 활용한 실크카펫 직조와 자수 같은 직물 수공예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관련 공방과 상점이 늘어났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내가 둘러본 재래시장에는 그런 실크관련 제품들 보다는 화학섬유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고객들의 기호가 바뀌었나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저렴한 가격이었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을 외쳐오던 체리(cherry)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가 하면, 가격도 1kg 1달러 밖에 되지 않는다. 덕분에 너도나도 한 보따리씩 사들고 하루 종일 먹어댈 수 있었다. 현지 화폐가 없어 가이드에게 선불을 부탁했음은 물론이다.

 이동 중에 만난 푸줏간. 주렁주렁 매달린 고깃덩어리가 눈길을 끈다. ! 실크산업의 중심지였던 셰키는 현재 농업과 목축으로 경제의 중심축이 옮겨졌다고 했다. 실크공장 한 곳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반면, 농산물과 축산물 가공공장은 성황을 이루는 중이란다.

 맥주집도 눈에 띈다. 통닭과 불가분의 관계인 우리네 호프집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소시지를 안주로 내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토마토와 고추는 서브메뉴?

 하룻밤을 머문 셰키 팰리스호텔’. 4성급 호텔로 카라반사라이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넓은 욕실에 샤워부스와는 별도로 월풀 욕조가 설치되어 있는 게 특징. 지대가 높아서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이었다. 본관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가는 어려움이 옥의 티라고나 할까?

 에필로그(epilogue) : 아제르바이잔 여행을 마치고 이제 조지아로 넘어간다. 여행사는 2 3일의 짧은 일정에도 이곳저곳 열심히 안내해줬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 3대 성지 중 하나라는 아테시카 사원을 둘러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성스러운 불의 나라에 와서 불을 숭배하는 종교의 성지를 찾아보지 않았으니 어찌 서운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조로아스터교는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의 예언자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가 창시했다. 불을 숭배해 배화교라고도 한다. 그 성지인 아테시카 사원은 수백 년 동안 조로아스터교 신도들 신앙의 중심이었다. 사원 중앙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아직도 타오르고 있단다

여행지 : 아제르바이잔. 고부스탄 암각화 유적  진흙 화산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 이란 및 러시아와 접한 카스피 해 연안의 국가.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데 경제의 상당 부분을 석유와 천연가스가 지탱하고 있어 불의 나라로 불린다. 동유럽권에 속해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까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 달리 아제르바이잔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에 서아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점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동유럽권으로 보는 이유는 19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영향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고부스탄(Gobustan) :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인류 문명의 발상지로 여기는 곳. 반사막지대 바위산에 4만 년 전에 기록된 6천여 점의 암각화가 고대인들의 생활상과 문화를 보여준다. ·낙타 같은 동물과 자연현상, 사냥을 하거나 축제를 여는 사람들 등이 바위마다 빼곡히 그려져 있다. 덕분에 숨은그림찾기 하듯 그림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바쿠를 출발한지 한 시간여. 버스는 우리를 드넓은 반사막지대 언덕배기에 내려놓는다. 암각화가 있는 바위산으로 오르기 전 먼저 고부스탄 박물관부터 들러보라면서.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박물관에 들러 꼼꼼히 알아본 다음 투어를 시작해보자. 참고로 고부스탄(Gobustan)’은 돌을 뜻하는 고부(Gobi)’와 땅을 의미하는 스탄(Stan)’의 합성어라고 한다. ‘바위가 널리다시피 한 지역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코카서스 3(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여정이다. 첫 번째로 들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수도인 바쿠와 고부스탄, 샤마흐, 쉐키를 방문하도록 일정이 짜여있다.

 고부스탄 암각화박물관. 여기서 암각화에 대한 내용을 어느 정도 학습하고 현장으로 간다. 박물관은 관람객들이 바위에서 관찰이 어려운 그림에 대해 미리 확인하고, 또 암각화가 무엇인지, 왜 그려졌는지, 이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알기 쉽게 전달하고 있다. 특히 암각화가 새겨진 시대별 문화, 그림의 형태와 위치 등을 전시와 영상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해 놓았다.

 안으로 들어서면 수많은 문양을 만난다. 바위에 새겨진 여러 형태의 문양을 한데 그려 전시해 놓았다. 6,000여 개의 암각화 가운데 그림이 명확하게 관찰되는 것은 200여 개에 불과하다고 했다. 숨은그림찾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 저 그림들을 꼭 기억해 두었다가 이따가 바위산을 누비면서 활용해보자.

 그림은 당시 사람들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며 새긴 것이다. 수렵 및 채취를 하는 그림, 배를 타고 노를 젓는 사람들, 사슴·낙타·소 같은 동물, 춤추는 사람들, 창을 쥔 전사, 태양과 별 등 하나하나가 삶이고 역사이다. 덕분에 우린 이를 통해 당시의 문화와 기후, 식생 등을 이해할 수 있다.

 고부스탄 암각화의 유래부터 알아보자. 고부스탄 암각화 문화경관은 1939~1940년에 최초로 발견되었으며, 1947년부터 ‘I. M. 디자파르사드(Djafarsade)’에 의해 체계적으로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는 750개 암석에 있는 3,500개 이상의 이미지를 기록하고 분석했다. 그리고 추가 발견을 한 ‘R. 디자파르굴리(Djafarguly)’에 의해 확대됐다. ‘D. 루스타모프(Rustamov)’ 10,000년의 기간을 이해할 수 있는 깊이 2m의 지층을 발견했고, 청동시대의 판각 조각에서 의인화된 형상을 통해 대략적인 제작시기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전기 구석기시대(the upper paleolithic, 35,000-15,000년 전)와 중석기시대(the mesolithic)의 자연환경도 알려준다. 당시의 생활상과 암각화를 비교해가며 살펴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이곳에는 6천여 개의 암각화가 모여 있다고 한다. 바위지대에 사람이 살던 동굴과 무덤이 흩어져 있어, 빙하시대 말기부터 구석기·신석기를 거쳐 청동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려준단다.

 고부스탄의 암각화 컬렉션은 선사시대의 사냥, 동식물, 인간들의 생활방식, 선사 및 중세 시대의 문화적 연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암각화를 새길 당시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멧돼지·여우·사슴·표범·영양 등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전시했다. 원시인들의 삶도 재현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나무··조개껍질·사슴의 뿔 등으로 여러 가지 사냥도구를 만들고, 뼈나 뿔로 바느질을 해 만든 옷을 지어 입던 원시인의 모습에서 우리네 조상의 삶을 유추해본다.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골과 생활용품 등도 전시돼 그 시대를 짐작하게 해준다. 돌도끼 돌칼 같은 석기가 눈에 띄는가 하면, 골각기로는 바늘·빗 같은 생활도구와 목걸이 같은 장신구가 있다. 토기는 민무늬 토기로 갈색과 검은색 계열이 주를 이룬다.

 박물관 앞. 원시인의 주거지를 복원해 놓았다.

 박물관에서 바라본 바위산. 저곳에 암각화 문화유산이 있다. 유네스코는 아제르바이잔 중부의 반사막 지대, 바위투성이들의 표석(漂石) 평원으로 이루어진 3개 지역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놓았다. 빙하시대 말기의 장마부터 후기구석기, 중세까지 인간이 살던 유적(동굴·정착지·묘지)과 함께, 그들이 남긴 6,000개 이상의 뛰어난 암각화 컬렉션이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에서 암각화가 있는 바위산까지는 1km 남짓. 걸어서 가기에는 다소 먼 거리라 하겠다. 그래선지 바위산 입구 주차장까지 우리가 타고 온 버스로 이동했다.

 

 주변은 온통 바위투성이다. 바위산이 뭔가(지진일지도 모른다)의 영향을 받아 조각조각 떨어져나간 모양새라고나 할까? 저 바위틈에서 인간이 거주했고, 또 그네들의 삶을 하나하나 바위에 그려 넣었다.

 고부스탄 암각화(Gobustan Rock Art Cultural Landscape)’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세계 최고의 선사시대 유적으로 사라져 버린 옛 삶의 방식에 대한 이례적인 증거라면서. 암각화는 오늘날보다 따뜻하고 습했던 당시의 사냥과 어업에 관한 활동들을 아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옛날 이곳은 카스피 해에 잠겨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바다의 융기로 육지화 되었고, 지진으로 부서지면서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서로 얽히고설켰다. 우리네 조상들은 그 속에다 삶의 흔적들을 남겼다. 1930년대 채석장에서 일하던 인부가 그것을 우연히 발견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지구촌 나그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고부스탄 암각화 문화유산’. 이를 알리는 바위를 그냥 지나칠 집사람이 아니다. 바위에 걸터앉아 떡하니 폼부터 잡고 본다.

 유적지는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답게 잘 보존되고 있었다. 탐방로 양쪽에 금줄을 쳐 유적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했다. 그런 길이 바위 사이를 누빈다. 작은 게 집채만 하고, 큰 것은 웬만한 빌딩보다도 더 큰 바위들이 숲을 이루는데, 그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잘도 나아간다.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답게 탐방객들은 지켜야 할 게 많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위에 올라가면 안 된다는 점이다. 어디에 암각화가 그려져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담배도 피우지 말란다. 하지만 주위에는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았다. 불에 탈만한 시설물도 만들어놓지 않았다.

 손도 대지 말란다. 암각화가 마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맞다. 그림 하나하나가 그 시대를 대표한다는데 이를 말이겠는가. 가장 오래된 암각화에는 염소 사냥이나 창으로 의식 춤을 추는 장면, 반면에 나중의 그림에는 말에 오르지 않은 사냥, 집단 작업, 수확, 불 근처에 있는 여성의 이미지 등이 주를 이룬단다. 그런 암각화의 주제를 통해 인간의 진화 과정을 알 수 있다나?

 물론 금줄을 넘어가서도 안 된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겠지만, 바위산의 특징인 독사로부터 여러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또 다른 명분도 있다.

 탐방로는 몇 개의 암벽화를 둘러볼 수 있도록 꾸몄다. 그림 앞에는 전망데크와 함께 그림에 대한 설명판을 세워놓았다.

 ‘Boyukdash mountain. upper terrace, rock No.29’은 지그재그 무늬로 이루어진 암각화 20(20 petroglyphs consistion of zigzag pattern)으로 구성됐다. BC 10세기 작품으로 14명의 인간. 사슴, 보트 등이 그려져 있다. 참고로 고부스탄의 암각화는 BC 10~18세기에서 중세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단다.

 암벽화 실물

 ‘Ana Zaga shelter. stones No.29 and No.31’ 39명의 남자와 24명의 여자, 그리고 야생소, 염소, 보트 등이 그려져 있다. ! 암각화 보존을 위해 암각화마다 번호가 부여되어 있었다.

 암벽화 실물

 ‘Ana Zagha shelter. stones No.30 and 31b’. 야생소, 염소, , 인간을 찾아 볼 수 있다. 참고로 암각화에는 힘세고 중요한 존재는 크게 그리고, 약한 존재는 작게 그려져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소는 크게, 말은 작게 그렸다는 것이다. 농경시대에 접어들어 가축을 치면서부터 동물들이 사람보다 작게 나타난단다.

 암벽화 실물

 요것은 황소대피소(Okuzler(Bull) shelter)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하나 더. 75년경 로마황제 도미티아누스(Domitian)가 통치하던 때 로마의 병사들이 이곳을 통과하며 바위에 새겨놓은 글도 발견되었다는데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암벽화 실물

 지름 10-40cm, 깊이 10-20cm의 저 구멍은 ‘Cup marks’라고 했다.  움직일 수 없는 컵(unmovable cup)’은 석제 공구로 파냈단다. 고고학적 기록에 의하면 중석기 말기에서 신석기 초기까지의 과도기에 제작되었는데, 빗물 또는 제물용 피를 받거나, 식사 준비용으로 사용되었단다.

 ‘Cup marks’ 설명판

 가발 대시라는 아제르바이잔, 그것도 고부스탄에서만 볼 수 있는 천연 음악석이라고 한다. ‘노래하는 돌이라고도 하는데, 2m쯤 되는 큰 바위가 작은 돌과 부딪히자 텅 빈 울림소리가 났다. 그게 아제르바이잔어로 가발이라 불리는 탬버린 소리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암각화 지역은 어디서나 카스피 해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전망대가 된다. ‘카스피 해는 현재 줄어드는 중이라고 했다. 멀리서 보면 크고 아름다운 호수지만, 가까이서 보면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단다. 그 증거가 이곳이다. 과거에는 암각화가 있는 고부스탄 언덕까지 물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암각화에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다음은 같은 지역(고부스탄)에 있는 진흙화산이다. 세계 7대 경관 후보지 28곳에 선정된 곳으로, 불덩이 같은 용암 대신 붉은 진흙이 지면으로 솟아난 이색적인 지형을 볼 수 있는 명소이다. 오일과 가스가 함유된 짙은 회색 진흙의 기포가 터지면 가스냄새가 나기도 하는 등 작은 진흙 화산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생생한 지형 형성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진흙 화산을 보러가는 길은 마치 오지탐험을 연상케 했다. 비포장도로여서 대형 버스가 갈 수 없어 까라코사(Qarakosa)’에서 구 소련시대에 생산된 낡은 중고차로 갈아타고 비탈진 민둥산을 올라가기 때문이다. 저절로 포켓에서 지갑을 꺼냈을 정도로 운전기사의 서비스도 최고였다. 길이 아닌 산비탈을 속도감 있게 오르내리며 스릴을 느끼게 해주는가 하면, 아제르바이잔의 노래를 계속해서 틀어준다. 귀에 익은 노래도 두어 곡 섞여있는 걸 보면 우리나라에서 온 관광객의 숫자가 만만찮다는 얘기일 것이다.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언덕을 굽이돌아 도착한 곳에는 분화구 같은 나지막한 봉우리가 형성되어 있다. 진흙화산이 분출하면서 높아진 일종의 오름이다. 그 중 일부에서는 아직도 묽디묽은 진흙의 분출현상이 진행된다. 진회색 진흙을 머금고 뽀글뽀글 끓으며 톡톡 분출하고 있다.

 진흙화산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다. 가이드는 햇빛이 무척 강한데다 그늘까지 없으니 알아서 보호조치를 하란다. 하지만 선크림 바르는 걸 싫어하는 우리 부부는 카스피 해변의 따가운 햇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불그스레 잘 익어버렸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분화구가 있는 봉우리로 달려간다. 그리고는 낯선 풍경의 경이로움에 정신을 빼앗겨버린다. 분출이 강하지 않아 흙이 튈 염려도 없다. 그러니 가까이 다가가 꼼꼼히 살펴보자.

 이곳은 용암 대신 진흙이 지면으로 솟아오른다. 부글거리는 진흙의 용솟음은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가스가 섞인 진흙이 솟아오르면서 생기는 기포라고 한다. 진회색 기포가 터지면 가스냄새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지구에는 이런 진흙화산이 700개가 있다고 했다. 그중 300개가 이곳 아제르바이잔에 분포한단다. 가히 진흙화산의 천국이라 할 수 있겠다. ! 화산은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했다. 2001년과 2010년에 폭발을 일으킨 로크바탄 화산은 그 불꽃이 50m 이상 솟아올랐다고 한다.

 자그마한 화산 분화구에서 진흙이 끊임없이 부글거리는 모습은 보면 볼수록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가이드는 진흙이 미세하기 때문에 머드팩(mud pack)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 때문에 이곳을 찾는 젊은이들도 있단다. 하지만 샤워장이나 탈의실 등 이를 위한 편의시설은 전무했다.

 운전기사는 이곳에서도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고 있었다. 분화구에 대고 라이터를 켠다. 그러자 파란 불꽃이 피어났다.

 분화구 아래 광장에는 연못이 있었다. 아니 점도 높은 흙탕물에서 기포가 솟아오르는 걸 보면, 또 다른 분화구라고 보면 되겠다.

 얼핏 산상호수로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곳곳에서 기포가 솟아오른다. 과학자들은 저 진흙의 나이를 2,500만년으로 추정한단다.

 하얀 띠를 두른 곳이 보이기에 다가가 봤다. 그러자 땅이 가뭄에 찌든 논바닥처럼 조각조각 갈려져있다.

 표면의 흰색. 염분일거라는 가이드의 귀띔이 있었으나 짠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행지 : 아제르바이잔. 바쿠 신시가지 및 샤마흐 주마모스크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 이란 및 러시아와 접한 카스피 해 연안의 국가.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데 경제의 상당 부분을 석유와 천연가스가 지탱하고 있어 불의 나라로 불린다. 동유럽권에 속해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까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 달리 아제르바이잔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에 서아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점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동유럽권으로 보는 이유는 19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영향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바쿠(Baku) :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다보다 낮은 카스피 해 연안에 위치,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도라고 한다(가장 높은 수도는 볼리비아의 라파스이다). 캅카스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약 4분의 1 가량이 집중되어 있는 경제의 중심지이다. 2000년대 이후 오일 달러로 아제르바이잔의 경제가 크게 성장하면서 도시 곳곳에 마천루 등 여러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알려진다.

 

 신시가지 투어의 시작은 불바르 공원(Bulvar Park)’이다.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바쿠 구도심(올드 시티)’ 부근에 조성된 해안공원으로 드넓은 카스피 해의 아름다운 경관을 맘껏 즐길 수 있는 명소이다.

 코카서스 3(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여정이다. 첫 번째로 들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수도인 바쿠와 고부스탄, 샤마흐, 쉐키를 방문하도록 일정이 짜여있다.

 패키지여행의 특성상 샅샅이 살펴보지는 못했다. 여행사는 도심인 올드 시티(1편에서 소개)’와 신시가지에서 두어 곳을 안내해 주는 정도. 그게 분량이 적어 쉐키로 가는 도중에 들른 샤마흐의 이슬람 사원을 보태봤다.

 안으로 들어서자 카스피 해(바쿠만)를 끼고 엄청 길고, 넓은 공원이 펼쳐진다. 공원 안에는 여객선 터미널, 요트 정박장, 대형 쇼핑몰, 국립 카페박물관, 아즈네프 광장, 대형 회전관람차인 바쿠 아이’, 고급 호텔 등이 호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바다인데도 바다 특유의 짭조름한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맞다. 카스피 해는 원래 바다가 아닌 호수였다. 그러다가 호수를 접하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 공해·영해 문제가 불거지면서 바다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했다.

 카스피 해는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사이에 있는 내륙의 바다다. 남쪽으로는 이란고원이 펼쳐지고, 북쪽 러시아의 볼가강과 우랄강에서 민물이 유입된다.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은 해발 1,023m. 하지만 댐건설과 산업화로 인한 물 사용량 증가 등으로 인해 수심이 계속 낮아지는 중이라고 했다. ! 저 멀리 바다에 떠있는 듯한 건물은 카펫 박물관이라고 했다.

 공원 한쪽 끝에서 반대쪽까지 걸으려면 2시간이나 걸린단다. 그러니 시간에 제약이 많은 패키지여행자로서는 꿈조차 꾸어볼 수 없다. 연꽃처럼 지어진 쇼핑몰 등 두바이에서나 볼 법한 독창적으로 지어놓은 예쁜 건물들만 카메라에 담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또 다른 형체가 유혹한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같다 해서 불꽃 타워라 부르는 플레임 타워(Flame Tower)’가 바로 그것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인 불을 형상화한 이 건물은 푸른빛을 띤 세 동으로 이뤄져 있는데 바쿠의 또 다른 랜드 마크이다.

 카스피 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가 한 방향으로 치우쳐졌다는 숲속에는 꽤 많은 분수가 만들어져 있었다. 숲에는 공원을 만들 당시 수입했다는 희귀한 나무와 고급스런 소나무가 즐비하다. ‘꽤 많은 돈이 들어갔겠네요.’ 집사람의 말마따나 공원은 돈을 쏟아 부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뭔가에 쏙 빠져있는 저 동상은 국민가수이자 아제르바이잔 클래식 음악을 대표하는 무슬림 마고마예프(Muslim Magomayev: 1942~2008)’라고 한다. 그는 오페라 가수지만 팝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러시아의 프랑크 시나트라로 불리기도 했단다. 활동무대였던 모스크바의 차이콥스키 콘서트홀·볼쇼이 극장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에서도 공연했다. 2008년 모스크바에서 죽어 고향인 바쿠에 묻혔다. 동상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공원에는 체스 판이 그려져 있었다. 2016년 바쿠에서 세계 체스 올림피아드가 열렸다고 한다. 그게 체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회였다더니 그 영향이 아닐까 싶다. 하나 더. ‘체스 경기에 푹 빠져있던 소년이 나에게 반갑다는 손짓을 한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현지인들이 관심의 눈빛을 보내온다던 말이 헛소문이 아니었나보다. 특히 한류를 잘 아는 젊은이들이 그런 반응을 가장 적극적으로 보낸다나?

 바쿠의 아이스크림 장수는 장난꾸러기인가 보다. 달라는 아이스크림은 안주고, 줄듯 말듯 장난치다가 바닥에 떨어뜨려버린다. 아니 떨어뜨리는 흉내를 내는데 하도 리얼 해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스크림의 점도가 높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그 덕분에 바쿠의 따가운 햇살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재미있었다.

 불바르공원에서 지하보도를 건너면 로데오 거리에 이른다. 1편에서 소개한 올드 시티가 바쿠의 과거였다면 이곳은 바쿠의 현재로 들어가는 길이다. 가성비 좋은 고급 레스토랑과 블링블링(Bling Bling)한 카페, 유명 브랜드 숍들이 이어지는 보행자의 거리다. 저녁이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밤을 즐긴다는데, 인종·국적·나이·언어가 달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단다.

 이슬람 국가답지 않게 거리는 번화했다. 대부분의 식당에서 술도 판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나야 물론 생맥주로 목을 축였지만. 참고로 아제르바이잔은 코카서스 3국 중 물가가 가장 비싼 편이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2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 커피 한 잔이 3.0AZN( 2100) 밖에 되지 않는다. 경찰국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치안도 뛰어나다.

 자투리 시간에 ‘yay land fest’라는 축제장을 둘러봤다. ‘yay’가 앗싸나 야호 등 아주 기뻐서 내는 소리이니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축제장쯤 되겠다. 그래봤자 도깨비 체험관과 몇 가지 놀이시설이 전부였지만.

 축제장에서의 즐거움은 주전부리를 사먹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이곳도 역시 먹거리가 축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두 번째 방문지는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Heydar Aliyev Center)’. 버스에서 내리면 별 이상스러운 건물도 다 있구나 할 정도로 예술성이 돋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라크계 영국인 여류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해 2012년 완공한 복합건축물(박물관·갤러리 등이 들어있다) 1993년부터 2003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헤이다르 알리예프에게서 이름을 따왔다. 이밖에도 바쿠에는 국제공항 등 그의 이름을 딴 시설들이 많이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2013년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해오고 있는 아들 일함 알리예프(IIham Aliyeb)’가 효심을 발휘했지 않나 싶다. ! 왼쪽 쾌속선처럼 생긴 건물은 바쿠 컨벤션센터(Baku Convention Center)’라고 했다.

 신미래주의(Neo-futurism) 양식이라는 저 건물에서 바쿠와 서울의 공통점을 찾는 이들도 있다. 저 건물을 디자인한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서울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를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건물은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시키고 있었다. 우아한 곡선이 바람에 흔들리 듯 굽이친다. 어찌 보면 물결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느 작가는 극한의 건축물’(extreme architecture)‘로까지 표현하고 있었다.

 시티 사인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를 외치는 관광객들을 위한 일종의 보너스이다.

 무슨 행사라도 있는지 광장은 무대 설치작업이 한창이었다. 아무튼 센터는 8층 높이의 건물에 박물관, 도서관, 전시실, 공연장 등이 들어서있다고 했다. 하지만 주마간산의 패키지여행자들에게는 남의 집 불구경일 따름이다. 그저 낯선 나라에서 만난 익숙한 건축물을 배경삼아 사진 한 장 찍으면 그만이다.

 맞은편 풍경. 바쿠에는 저렇게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는 건물들이 많다고 한다. 서민들의 생활수준과는 별 상관없이 넘쳐나는 석유자본이 이뤄낸 것들이란다.

 바쿠의 야경은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화려함을 자랑한다고 했다. 해가 지면 도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놓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찾아간 곳이 순교자의 길’. 이곳에 바쿠의 야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현충원 쯤으로 보면 되겠다. 아제르바이잔 독립전쟁(1990)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분쟁(1988~1994) 때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기념공원 겸 묘지다.

 마다 당사자의 약력과 사진을 게시했다. 가이드는 반정부 시위현장에 있다가 살해당한 6개월 된 신혼부부의 가슴 아픈 사연도 전해준다.

 공원묘지의 끝에는 순교자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모뉴먼트(monument) 내부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365일 꺼지지 않는 추모의 불꽃이란다.

 기념탑을 지나면 길은 하이랜드 공원(Highland Park)’으로 이어진다. 지대가 높아 불꽃타워는 물론이고 바쿠 시내와 카스피 해 연안의 야경을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공원에서 내려다본 카스피해 연안의 야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바쿠는 한때 실크로드 대상(Caravan)들의 주요 교역로였다. 그러다 석유가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작은 항구도시에서 단숨에 동서양의 문물이 어우러진 화려한 도시가 되었다. 그게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포장되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바쿠는 카스피 해를 끼고 있어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건물 외관 LED 조명을 활용한 야경이 보는 이의 시선을 꼭 붙들어 매버린다.

 런던 아이(London Eye)를 닮은 회전관람차 바쿠 아이(Eye)’가 특히 눈길을 끈다. 밤에 핀 연꽃처럼 화사한 데니즈(Deniz) 쇼핑몰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메이든 타워가 바쿠의 과거라면, 바쿠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만큼 우뚝 솟아오른 플레임 타워(Flame Tower)’는 바쿠의 현재 그 자체다. 현대적인 도시 느낌이 물씬 나는 세 개의 불꽃 모양으로 된 독특한 외모로 유명하다. 불을 숭배한다고 알려진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Zoroaster)’의 출생지, 그리고 석유와 천연가스가 풍부한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을 상징한단다. 또 밤에는 빌딩 전체를 둘러싼 LED 조명이 형형색색으로 바뀌어 살아 있는 불꽃처럼 보인다.

 밤하늘을 밝히는 플레임 타워의 LED쇼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을 엿보게 해준다. 다양한 색상과 패턴의 조명이 건물 외관에 투사되어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바람의 도시 바쿠를 불의 도시로 바꾸었다고나 할까? 하나 더. 플레임 타워에는 호텔·아파트·오피스 등이 입주해있으며, 카스피 해와 바쿠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단다.

 플레임 타워(Flame towe)는 알로브 타워(Alov towe)라고도 불린다. 아제르바이잔어 ‘Alov’ 화염이란 뜻이다. 저게 붉은 레이저조명으로 입혀지면 영락없는 불꽃이 된다. ‘꺼지지 않는 불의 나라라는 산유국 아제르바이잔의 국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새어 나오는 천연가스에 불이 붙어 비가 내려도 꺼지지 않는다는...

 샤마흐로 가는 길, 카스피 해변에는 영화나 사진에서 많이 본 석유 시추시설로 한가득이다. 가이드는 메뚜기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지하를 뚫기만 하면 기름이 나온다고 했다. ! 아제르바이잔 석유를 처음 유럽으로 가져가 막대한 부를 쌓은 이는 노벨상으로 유명한 노벨의 형이라고 했다. 석유를 발굴하고, 정유소·송유관·원유소 등을 개발해 바쿠의 석유산업을 발전시켰단다. 경제기반을 조성해 바쿠를 카스피해 보석에서 유럽의 보석으로 업그레이드시킨 것이다.

 쉐키로 가는 도중 샤마흐(Shamakhi, ‘쉐마키로 읽는 사람들도 있다)’에 있는 주마 모스크에 들렀다. 해발 709m에 위치한 샤마흐는 한때 쉬르반 왕국의 수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자주 일어나는 지진으로 인해 왕국의 수도가 바쿠로 옮겨지면서 지금은 샤마흐주의 주도(州都)로 만족하고 있다.(‘주마 모스크는 많은 부분을 오마이뉴스의 이슬람 국가에서 고대의 교회를 살펴보다를 참조했다)

 건물은 가운데 돔을 중심으로 양쪽에 미나레트를 대칭으로 배치하고 그 밖으로 회랑을 대는 형식을 취했다.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회교 사원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도 나타난다. 작은 미나렛 네 개가 돔 사방에 설치되어 있는가 하면, 작은 돔도 정면 출입구 위에 하나, 큰 돔 양쪽으로 하나씩 만들어져 있다.

 수피파 이슬람의 성자 디리바바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살아있는(디리) 할아버지(바바)’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국민들을 위해 많은 기적을 행했던 성직자이다. 그런데 수피파라는 이름이 생소하다. 우리가 흔히 듣던 시아파나 수니파가 아닌 것이다. 맞다. 수피파는 교리나 율법보다 개인의 신앙과 각성을 중시하는 신비주의적 분파로 수니파, 시아파와 함께 이슬람의 3대 종파로 분류된단다.

 사원의 역사를 기록한 표지석. 사원은 이 지역이 이슬람 왕조인 우마이야 제국의 지배를 받던 743년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남 코카서스 지역 최초의 모스크라나? 1859, 1902년의 지진과 1918년의 아르메니아인들의 방화로 파괴와 복원을 반복하다가, 201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단다.

 모스크 밖은 작은 정원으로 조성했다. 분수(물을 내뿜지는 않았지만)를 중앙에 두고 주위를 장미 꽃밭으로 둘렀다.

 지하는 한술 더 떴다. 연못을 팠는가 하면, 꽃과 식물이 가득한 정원으로 꾸몄다. 하나 더. 가이드는 지하에 숙소도 있다고 했다. 옛날 학승들이 머물던 곳이라는데 직접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정면 입구로 들어가면 미흐라브(Mihrab, 신자들의 예배 방향을 가리키는 벽면의 오목한 곳 또는 장식 패널)과 민바르(Minbar, 미흐라브의 옆에 놓이는 설교단)가 있고, 양쪽으로 예배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모스크 내부는 외부인들의 출입이 자유로웠다. 가이드는 여자들에게 스카프를 써달라고 했으나, 스카프 대신 모자를 착용하고 있어도 별도의 제재를 하지는 않았다.

 돔과 샹들리에를 겹쳐봤다. 돔의 아랫부분에 창을 만들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게 눈길을 끈다. 돔과 미흐랍, 민바르에는 아랍어 글씨와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미흐라브와 민바르. 수피파는 흰옷을 입고 한 방향으로 계속 돌며 신과 교감하는 세마 의식을 한다고 했다. 쉼 없이 도는 수도자들은 그야말로 몰아(沒我), 자신을 잊은 채 황홀경에 빠지는 경지라고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세마는 구경할 수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봤지만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신자들만 눈에 띌 따름이었다.

 쉐키(Shaki)로 가는 길. 샤마흐를 지나 이스마일(Ismail) 지역으로 들어서면서 황량했던 사막의 모습은 사라지고 산악과 계곡, 그리고 숲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에 들어오는 산들이 점점 우람스러워지는 건 카프카스 산악지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가끔은 저런 노점상들도 만날 수 있었다. 산자락을 헤집어놓은 곳도 심심찮게 만난다. 쉐키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놓는 중이란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Arion Hotel Baku’. 5성급 호텔답게 객실은 청결했고 뷔페식 아침식사도 입에 딱 맞았다. 실내 수영장과 바/라운지, 피트니스센터도 갖추었다.



여행지 :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올드 시티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 이란 및 러시아와 접한 카스피 해 연안의 국가.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데 경제의 상당 부분을 석유와 천연가스가 지탱하고 있어 불의 나라로 불린다. 동유럽권에 속해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까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 달리 아제르바이잔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에 서아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점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동유럽권으로 보는 이유는 19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영향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바쿠(Baku) :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다보다 낮은 카스피 해 연안에 위치,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도라고 한다(가장 높은 수도는 볼리비아의 라파스이다). 캅카스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약 4분의 1 가량이 집중되어 있는 경제의 중심지이다. 2000년대 이후 오일 달러로 아제르바이잔의 경제가 크게 성장하면서 도시 곳곳에 마천루 등 여러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알려진다.

 

 아제르바이잔, 아니 바쿠에서의 첫 만남은 구시가지((Old City))이다. 버스에서 내려 잠시 걸으면 올드 시티 투어의 시작과 끝인 하드록 까페(Hard Rock Cafe)’에 이른다.

 이번 여행은 코카서스 3(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여행사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흑해 연안의 바투미(조지아 제2의 도시)’도 마지막에 들렀다. 그리고 튀르키예의 리제로 넘어가 이스탄불(환승)을 거쳐 귀국했다.

 올드시티의 주요 볼거리는 지도에 표시된 게 다라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이 지도로 찾아다니는 것은 불가능. 앱의 길 찾기 기능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대충 방향을 잡은 다음 무작정 걸으면 된다. 올드 시티의 규모가 작으니 어렵지 않게 찾아 낼 것이다.(지도는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하드록 카페 앞에 아제르바이잔 최고의 서정시인 중 한 명인 나타반(1832-1897, Khurshidbanu Natavan)’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카라바흐 칸국(Karabakh khanate)’의 마지막 통치자인 메흐디굴루 칸(Mahdiqoli Khan)‘의 딸로 인본주의·우정·사랑을 주제로 한 서정적인 가잘을 잘 썼다고 알려진다. 가잘(ghazals)이란 각 줄 끝에 은율이 있는 2행의 후렴구가 특징인 시의 한 형태이다.

 올드 시티의 주 출입구인 동쪽 성문 밖에는 아제르바이잔의 국민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니자미 간자비’(Nizami Ganjavi)의 동상이 세워진 기념 공원이 있다. 참고로 니자미 간자비(Nizami Gencevi, 1141-1209)’는 아제르바이잔 간자시 출신의 시인이다. 본명은 일야스 이븐 유시프(Ilyas Ibn Yusif). 니자미는 아호로 실로 꿰다’,  단어를 조절한다는 뜻을 갖는다. 다섯 편의 서사시 모음집인 함사(Khamsa)’로 이슬람세계에 필명을 떨쳤다고 한다. 1991년 유네스코는 니자미의 850주년을 기념해 세계 기념 인물로 선정했다.

 기념공원 바로 앞에는 니자미 문학 박물관도 있다. 이슬람식 문양과 디자인을 주로 사용한 건물이다. 건물의 전면 2층에는 유명 문인 6명의 동상이 있다. 이들 동상 때문에 박물관은 마치 성전 같은 분위기를 띤다.(화질 때문에 후면 사진 게재)

 동문으로 들어가면서 바쿠의 과거 그 자체인 올드 시티(Old City)’ 투어가 시작된다. 현대적 도시의 심장부에 위치한 올드 시티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채 7~12세기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궁전, 모스크(mosque), 탑 등을 간직하고 있다.

 옛길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이정표를 만난다. 아제르바이잔어와 함께 영어를 병기해놓아 어렵지 않게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다.

 오래된 도시답게 눈에 들어오는 건물마다 하나같이 중세풍이다. 맞다. 이곳 올드 시티는 옛 시내 중심이었고 지금도 시내 중심이라고 한다.

 이곳은 아제르바이잔이 갖고 있는 3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바쿠 성곽도시(Walled City of Baku)’를 품은 문화유적지이다. 그래선지 공사장의 가림막까지도 중세풍의 건축물을 그려 넣었다.

 시르반샤궁(Shirvanshah’s Palace)으로 가는 길, 오른편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성곽이 따라온다. 구시가지의 성곽은 12세기 메투쏘르(Menutsshochr) 왕 시대에 건설되었고, 19세기에 보수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성벽은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하지만 중세에는 카스피 해가 바로 아래까지 찰랑거렸다고 한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포루(砲樓)가 만들어져 있는가 하면, 그 안에는 옛 풍경을 떠올려보라는 듯 당시 사용하던 대포를 전시해 놓았다. 그런데 이게 성 안의 주택가를 향하고 있으니 문제다.

 아름답게 치장된 저 건물은 알리 샴시 스튜디오(Workshop Ali Shamsi)’라고 했다. 대문과 벽이 요란스럽게 치장되어있는데, 특히 사자 그림이 눈길을 끈다. 용기, 고귀함, 지혜를 뜻한다나?

 맞은편 나무는 한술 더 떴다. 가로수에 여자 얼굴을 새겨 포토죤으로 만들었는데, 환경운동가들의 먹잇감으로 이만한 게 없겠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한참을 올라가니 모스크와 궁전의 돔형 지붕이 보이고, 궁전의 정면 출입구가 나타난다. ‘시르반샤 궁은 성곽도시인 바쿠가 품은 가장 중요한 문화재 중 하나다. 시르반샤궁전과 메이든탑이 있는 바쿠 성곽도시(Walled City of Baku with the Shirvanshah’s Palace and Maiden Tower)’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000년 등재)됐다. 하지만 2003년 위기에 처한 유산으로 지적받기도 했다.

 입구의 안내판은 아제르바이잔 건축의 진주로 불리는 시르반샤 궁전(Shirvanshah’s Palace)’ 14-15세기에 지어졌음을 알려준다. 시르반샤 왕조 칼리룰라(Khalilulla) 1세와 1501년 전쟁에서 사망한 그의 아들 파루크(Faruk)의 통치 기간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18세기 러시아 해군의 폭격으로 상층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복구 작업이 진행됐다. 참고로 Shirvan 9세기경부터 1538년 이란 사파비드에 의해 병합될 때까지 이 지역에 있던 왕국이다. 12세기 이후 문화적 전성기를 누리며 도심에 성곽을 축조하는데, 이때의 건물로 메이든 타워로 남아 있다. 13세기에는 바쿠가 일한국(Il-Khante)의 여름궁전이 되어 건축이 이루어졌다. 14세기까지 바쿠 구시가지(Icheri Sheher)를 중심으로 성이 여러 번 새로 지어지고 고쳐지는데, 그 결과가 현재 쉬르반샤 궁전으로 남아 있다.

 왕궁은 부속 건물들과의 균형감 있는 조화가 자랑이라고 했다. 궁전의 단지는 여러 개의 개별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거 지역과 다반하네(Divankhane, 공식적인 회의와 연회 장소), 시르뱐샤의 묘, 첨탑이 있는 회교사원, 목욕탕(hammam), 궁중 점성술사였던 세이드 야야 바쿠비(Seyid Yahya Bakuvi)의 묘, 키구바드(Key-Gubad)의 회교사원 등이다.

 입구의 안내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둘러볼 동선 정도는 파악해두고 안으로 들어가자.

 궁전의 파사드(facade :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 이슬람의 궁전답게 아라베스크(arabesque) 문양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문자·식물·기하학적인 모티프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무늬다.

 1층은 국왕의 거주 공간이었다. 집무는 2층에서 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수습된 유적과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왕의 계보를 보여주는 표, 그밖에도 왕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박물관 형태로 전시되고 있다.

 마치 우물처럼 보이는 저 구멍은 손님이 찾아왔을 때 연회나 만찬을 준비시키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왕이 사용하던 물건들에서 이슬람 통치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주전자가 눈길을 끈다. 동서 문물의 교류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유형의 주전자다.

 황금빛의 저 화려한 장신구는 말안장이 아닐까? 벽에는 사용하기가 아까울 정도로 화려한 칼도 세 개나 걸려 있었다. 하나 더. 전통악기도 눈에 띈다. 초구르(Chogur)로 불리는 현악기, 산투르(Santur)로 불리는 줄을 쳐서 소리 내는 타현악기, 까발(Qaval)로 불리는 북이라고 한다.

 아랍어로 쓰인 책도 있다. 종교적인 서적이 아닐까 싶다.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그림.

 바쿠 구시가지의 모습을 미니어처 형태로 재현해 놓았다. 옛 서울, 그러니까 한성(漢城) 4대문 안에 궁궐과 관아, 그리고 백성의 거주지역이 함께 들어서 있었음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고궁의 전시관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도 눈에 띈다. 전임 대통령인 헤이다르 알리예프라는데, 그의 사진은 이곳 말고도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현 대통령인 일함 알리예프(Ilham Aliyev)의 아버지이기도 한데, 어느 정도 우상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헤이다르는 소련연방 시절 공산당 서기장과 정부 수반을 지냈으며, 1993년부터 2003년까지 아제르바이잔공화국 제3대 대통령을 지냈다.

 정원에는 왕의 스승이자 유명한 점술가, 과학자였던 세이드 야야 바쿠비의 묘당이 있었다. 이밖에도 궁에는 역대왕의 무덤이 있는 디반카나(Divankhana)와 왕가의 영묘도 있다고 했다.

 궁전 벽에는 시바이엘(Sabail) 섬의 요새에서 나온 장식용 패널(명문)과 건축 부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바이엘 요새는 1306년 지진에 의해 파괴되어 바닷물에 잠긴 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18세기 들어 바닷물이 줄어들면서 세상에 드러났다고 한다.

 궁전에서는 빌딩의 숲을 뚫으며 솟아오른 타워전망대와 3개의 빌딩 중 2개만 보이는 플레임 타워(Flame Towers)도 조망된다. 가이드의 말마따나 건물의 모양새가 아제르바이잔의 상징인 불꽃을 쏙 빼다 닮았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 그러니 민초들의 삶도 한번쯤은 엿봐야 하지 않겠는가. 첫 만남은 1078~1079년에 건설되었다는 모하메드 모스크(Muhammad Mosque)’. ‘손상된 탑이란 뜻의 시니갈라 모스크(Siniggala Mosque)’로도 불린다. 1723년 러시아 함대가 바쿠에 접근 항복을 요구하다 거부당하자 포격하기 시작했을 때 포탄 중 하나가 미나렛(첨탑)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강풍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함대가 먼 바다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나? 아무튼 바쿠사람들은 이것을 외국 침략자로 부터의 하나님의 보호로 인식했으며 그후 19C 중반까지 모스크의 미나렛을 저항의 상징으로 복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나갈라(손상된 탑)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궁전 앞의 소공원. 알록달록한 홍차 잔을 포개놓은 것 같은 조형물이 얼핏 탑으로도 보인다. 맞다. 이 탑은 터키, 우즈베키스탄 등 전 세계에 있는 투르크족이 세운 일곱 나라들을 상징한단다. 아제르바이잔도 그중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꿩 대신 닭이라고나 할까? 어느 여행 작가가 애국심까지 들먹거리던 무궁화는 눈에 띄지 않았고, 대신 시계꽃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나이 70을 넘기고서도 세계일주의 꿈을 이루어나가는 우리 부부의 열정(시계꽃의 꽃말)’을 대변해주는 꽃이다.

 잠시 후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이 눈에 띈다. 얼굴만 있는 이 흉상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명한 시인이자 예술가인 알리아가 바이드(1894-1965)’라고 한다. 1990년 제작된 이 조각상에는 우회적으로 표현된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과 나무줄기, 뿌리로 얽힌 모습은 가잘칸 나는 위대한 푸줄리의 후계자다라는 작가의 반문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바쿠의 구시가지 성곽인 이체리 세히르(Icheri Sheher)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얼마 남지 않은 중세 도시 중 하나라고 했다. 그래선지 미로같이 연결되어 있는 좁은 길과 밀집되어 있는 건물, 작은 정원 등과 같은 중세 도시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아시아의 서쪽 끝, 유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하지만 비치파라솔을 씌운 테이블을 야외에 놓고 손님을 받는 식당에서 이곳이 유럽에 더 가까운 문화를 지니고 있음을 실감했다.

 아기자기 예쁘게도 장식된 좁은 길을 따라 18세기 후반에 건설된 집들이 고풍스럽게 늘어서있다. 골목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허튼 데가 하나도 없다. 모두들 사무실이나. 작은 레스토랑, 작은 호텔, 오래된 개인집은 하우스 박물관(House Museum)으로 이용하고, 각종 기념품점, 홈메이드 공예품점들도 있었다.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묵었다는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는 현재 고급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물탄(Multani) 카라반세라이를 비롯해 16세기에 지어진 부카라(Bukhara) 카라반세라이 등 과거 이곳이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말해준다.

 주마 모스크(Juma Mosque)’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원래 이곳에는 배화교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1309년에 아미르 샤라프 알딘 마하무드의 명에 의해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세월이 흘러 이게 황폐해지자 1899년에 그 자리에 주마모스크를 새로 지었다고 한다.

 이 나라도 카펫이 유명한 모양이다. 길가 수많은 상점으로도 모자라다는 듯 길바닥까지 전시장으로 삼았다. 그래선지 카펫 박물관까지 만들어놓았다는데 직접 가보지는 못했다.

 올드 시티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12세기에 지어진 메이든 타워’(Maiden Tower).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요새는 직경 16.5m에 높이가 29.5m인 원통형이며 성벽의 두께는 5m나 된다. ‘메이든이란 이름은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요새에서도 나타나는데, ‘정복되지 않는다'’ 또는 확고부동하다는 뜻을 의미한단다. 이름대로 성채는 지금까지 부서지거나 외부 세력에 정복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으나 시도해보지는 않았다.

 일명 소녀의 탑으로 불리는 이 탑은 12세기 건축된 800년 역사의 방어용 고탑으로 몇 가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설은 바쿠 왕의 딸 메이든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이곳에 감금당하자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다. 또 바쿠 왕이 감금한 여동생이 수치심으로 투신했다는 설과 바쿠성을 쳐들어온 적과 싸운 아름다운 여인의 전설도 있다.(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가이드는 메이든 타워 앞 유적을 바르톨로메오의 무덤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12 제자 중 한 분이었던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등에 포교를 하다가 잡혀 살갗이 벗겨져 죽임을 당했는데 그 장소가 이곳이라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에서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하나 더. 귀국해서 검색해보니 이곳을 하맘 목욕탕으로 소개하는 글이 더 많았다.

 저 석상의 정체는 뭘까? 저 유적지를 지켜주는 신상일지도 모르겠다. 저곳에서 52개나 되는 무덤(석관)이 발견되었다니 말이다.

 어느 레스토랑 앞에서 만난 또 다른 조형물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행운이라는 벼룩시장도 만날 수 있었다. 탐나는 물건도 눈에 띈다. 하지만 눈요기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반입을 금지한다는데 어쩌겠는가.

 자유 시간에 들러본 먹자골목(?).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 문화권이다.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이다. 하지만 거리에는 히잡 쓴 여성이 드물었다. 술집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세속주의 이슬람을 채택하면서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인 덕분일 것이다. 하나 더.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직 낯선 나라인 모양이다. 투어를 하는 동안 우리 일행 외에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2016년 중순부터는 공항에 도착해서 간단한 비자 신청서만 작성 후 20달러만 제출하면 누구나 비자를 받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거기다 물가도 조지아·아르메니아·튀르키예 등 주변 국가들에 비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비하면 월등히 싸다지 않는가.

여행지 : 메테오라(Meteora)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메테오라(Meteora)’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지방 북서부 트리칼라주 일대에 있는 거대한 사암 바위기둥 위에 세워진 수도원들을 두고 지어진 이름이다. 바위들의 평균 높이는 300m이며, 가장 높은 것은 550m에 이른다.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들이 있어 성지순례 코스에 들기도 하는 이곳은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독특한 풍광을 보여준다. 거대한 바위 위에 만들어진 수도원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과거에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밧줄과 도르래를 이용해야만 올라갈 수 있었다. 1960년대 이후 정부는 관광객들을 위해 험준한 산속까지 도로를 냈고, 수도원이 있는 높은 바위까지 계단을 만들거나 계곡의 바위와 바위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덕분에 우린 개방된 6개의 수도원을 별 어려움 없이 둘러볼 수 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메테오라에 도착했다. 아니 정확히는 메테오라의 배후도시인 칼람바카이다. 도시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기둥 모양으로 우뚝 솟은 거대한 사암(沙岩)으로 이루어진 바위산들과 그 정상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하나 더. ‘칼람바카(Ka1abaka)’ 전망 좋은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단다.

 메테오라는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400Km쯤 떨어진 테살리아 지방에 있는 UNESCO 지정(1988) 세계문화유산이다.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불가사의 건축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메테오라에는 24개의 수도원·수녀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6곳만 복원을 끝내고 손님을 맞는다. 대 메테오른 수도원(1356)을 비롯해 발람 수도원(1530), 로사노 수도원, 세인트 니콜라스 아나퍼프사스 수도원(1458), 트리니티 수도원, 그리고 유일한 수녀원인 성 스테파노 수녀원(1312)이다.

 저녁식사 전에 둘러본 칼람바카는 여느 소도시와 다를 게 없었다. 호텔, 식당, 카페, 편의점 등 웬만한 편의시설은 다 들어서 있다. 관광도시이다 보니 기념품 판매점이 유독 많다는 게 조금 다르다고나 할까?

 하룻밤 묵은 ‘KOSTA FAMISSI 호텔’. ‘칼람바카(Kalambaka)’라는 마을의 입구에 자리하는데, 3성급이지만 깔끔한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호텔은 가족가업으로 운영한다고 했다. 그래선지 벽면을 자랑스러운 마테오라의 역사를 담은 사진들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수도원을 머리에 인 메테오라의 거대한 바위봉우리들이 일렬로 늘어선다. 누군지는 몰라도 전망 좋은 곳이라는 동네 이름 한번 잘 지었다.

 여행사는 메테오라에 있는 여섯 곳 수도원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발람수도원(Holy Monastery of Varlaam)’만 안내해준다. 인상적인 건축물과 탁 트인 전망,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곳이다.

 발람수도원의 평면도, 붉은 선의 왼쪽은 수도사들의 생활공간으로 관광객의 출입이 제한된다. 수도원은 카톨리콘(예배당)과 식당, 도서관, 기숙사, 감방, 종탑,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버스에서 내리면 널따란 광장.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대문 좌우 벽감 속에 성화가 들어있다. ! 메테오라의 여섯 수도원은 일주일에 하루씩 돌아가면서 쉰다고 했다. 우리 같은 패키지여행자야 현지 가이드가 알아서 찾아가겠지만, 자유여행자들은 미리 알아보는 게 바람직하겠다.

 왕관까지 쓰고 있는 저 쌍두 독수리 문장은 뭘 의미하는 걸까? 어쩌면 비잔틴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395년 로마가 동·서로 나뉘고, 10세기 경 동로마에서 쌍두독수리의 나타나기 시작해 12세기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때는 황실의 문장으로 굳어졌다. 당시 비잔틴제국의 황제는 세속적인 권한과 동방정교회의 수장이라는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황실의 문장이 교회의 문장이 되었고, 동방정교회의 전통과 비잔틴제국의 문화를 이어받은 그리스나 동유럽의 나라들에서 교회의 상징 혹은 나라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발람수도원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삼각주였던 테살리아 평원의 칼람바카의 페네야스 계곡은 400m 이상 우뚝 솟은 험준한 바위산이다. 오스만의 종교탄압을 피해 수도사들은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저런 바위 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었다. 초기에는 암벽에 나무사다리를 세우고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러다 지상으로 연결되는 도르래를 설치하고, 밧줄에 두레박이나 그물을 매달아 수도사들이 타고 오르내리거나 생필품을 공급했다.

 수직으로 무려 373m나 끌어올리는 데 사용되던 밧줄이 수도사들의 전통적 생활 방식을 잘 보여준다. 메테오라에 수도원 건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이슬람 투르크족의 침략과 종교 박해를 피해 수도사들은 바위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높이가 수백 미터에 이르는 바위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은 당연히 없었다. 이때 누군가의 지혜로 나온 게 밧줄을 걸어 타고 올라가는 것. 다음에는 도르래를 만들어 벽돌과 흙을 운반해 일일이 손으로 다듬고 빚어 수도원을 세웠다.

 저 다리만 걷어내면 수도원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한다. 다리 건너. 바위를 톱니바퀴처럼 깎아서 만든 계단을 빙빙 돌아서 올라간다. 한쪽은 아찔한 바위절벽. 난간이 둘러져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계단이 길고 가팔라서 올라가는 게 만만치 않다. 오르면 오를수록 하늘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숨은 가빠진다. 그렇다고 안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 이왕이면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라는 느낌으로 올라가보자. ‘하늘의 기둥’, ‘하늘의 정원’, ‘땅과 하늘을 잇는 계단 같은 인간 세상이 아닌듯한 별칭이 실감날 것이다.

 고개라도 들라치면, 더 높은 곳에서 대 메테오론 수도원(The Monastery of Great Meteoron)’이 내려다본다. 메테오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원이다. 1340년에 아토스 산에서 온 아타나시오스라는 학승이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해발고도 613m의 거대한 바위덩어리에 공중에 떠있는 거대한 장소라는 뜻의 대 메테오로(Megalo Meteoro)’란 이름을 붙이고 여기에 수도원을 세웠다. 세월이 흘러 이게(메테오르) 이 지역의 거대한 바위군 및 수도원 전체를 일컫는 단어가 되었다.

 짜릿한 스릴을 즐기며 계단을 올라서면 또 하나의 문이 길손을 맞는다. 수도원 내부로 들어가려면 이곳에서 입장권(3 EUR)를 사야 한다. 하나 더, 이곳도 역시 남성은 반바지와 짧은 티셔츠 차림, 여성은 바지 차림과 소매 없는 셔츠차림은 입장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입구에서 치마 등을 빌려주기(구매한다는 얘기도 있으나 우린 현지 가이드가 다 챙겨줬다) 때문에 크게 불편한 점은 없다.

 발람수도원은 메테오라에서 두 번째로 큰 수도원이다. 1350년 은둔자 발람이 이 암봉에 올라 수행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3개의 교회와 생활공간(cell)을 만들었지만 그가 죽은 후 200년간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518 테오파네스 넥타리우스라는 두 수도사가 재건했다. 수도원이 날로 번창하면서 16세기 말에는 수도사가 35명이나 머물기도 했단다. 하지만 17세기 이후로 수도원이 쇠락하면서 많은 수도사들이 떠났고, 현재는 7명의 수도사(monk)가 머물 뿐이란다.

 수도원 건물은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직사각형 십자가 평면 위에 팔각형 돔을 얹은 건물 두 채를 이어붙인 정교회 건물(아래 사진)도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오스만 스타일의 건물(위 사진)이 들어서 있다. 이층이 앞쪽으로 약간 돌출해 있고 이 돌출부를 살짝 휜 나무지지대가 떠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 꽃이다’. 빗물로 버텨야하는 바위봉우리에서 나무가 자란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2층 높이까지 자랐는가 하면 꽃망울까지 활짝 터뜨렸다. 사람들이 천국이 연상된다며 이곳을 하늘의 정원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리스풍의 정자가 들어선 공중 정원은 발람수도원의 자랑거리다. 최고의 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난간에 서면 메테오라의 기기묘묘한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하지만 감탄해 할 수밖에 없는 저 풍광을 오스만의 종교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든 수도사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온다.

 메테오라의 바위는 6000만 년 전, 지각변동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알프스 조산대의 충돌로 드러낸 거대한 사암 바위는 풍화와 침식 작용을 거치면서 단단한 부분만 남았고, 점차 뾰족하게 솟았다. 검은 바위 위 가로로 된 단층선은 오랜 시간 진행된 침식작용의 흔적이라고 한다. 이런 표현은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도 썼었다.

 정원에서 바라본 루사노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Rousanou /St. Barbara)’. 저 수도원은 이름의 내력부터 알쏭달쏭하단다. 최초로 지어질 당시 이곳에 기거하던 은둔 수도사나 기부자의 이름을 땄을 것으로 추정될 따름이란다. 1745년경, 3세기 레바논지역의 순교자이자 성인인 St. Barbara의 유골 일부를 이곳으로 가져오면서 세인트 바바라 수도원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1930년 다리가 놓이면서 가장 접근이 쉬운 수도원이 되었다.

 이 뭐꼬?’ 정원 한쪽 귀퉁이에 수도꼭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슬람 국가를 여행하면서 흔하게 보던 시설이다. 기도를 드리러 온 신자들이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얼굴을 씻는 시설인데, 그리스 정교회도 그런 규칙이 있었나?

 이젠 건축물들을 둘러볼 차례이다. 건물은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기도 공간인 오른쪽만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왼쪽은 수도사들이 거주하는 곳이라서 출입을 막고 있다. 공개 지역으로 들어가면 전실(narthex), 이곳은 성인들의 순교 장면을 그려놓은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어떠한 고통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공간, 신앙의 자리에 나아가겠느냐고 묻는 의미란다.

 사도, 성인들의 모습이 교회를 장식하고 있는데, 아주 오래된 종교 시설 특유의 엄숙한 공기가 그 화려함을 누르듯이 내려앉아 있다.

 예배당(nave)에 들어가면 바닥과 천장의 성화, 나무로 만든 의자 등 장식 하나하나가 정교하고 조화롭다. 특히 천장의 프레스코화에선 예수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하지만 촬영은 입구의 홀까지만 허용된다.

 발람수도원을 재건했다는 테오파네스 넥타리우스 수도사가 아닐까 싶다.

 성당을 빠져나와 뒤란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옛날 수도사들의 힘겨웠던 삶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예전 수도사들이 사용했다는 우물에는 아직도 두레박이 매달려 있었다.

 그 뒤에는 거대한 오크통이 있었다. 바위봉우리에 걸터앉은 수도원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이었다. 그래서 수도원을 지을 때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물탱크를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12톤짜리 물탱크가 3개나 있는데, 만드는데 무려 18년이나 걸렸다고 전해진다.

 투어는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목조십자가, 성골함, 성화 등 수도사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아이템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다양한 기록물들과 함께 비잔틴 스타일의 성화가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 박물관을 둘러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게 하나있다. 정교회에서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성경말씀에 근거해 예수나 마리아, 성인들의 이콘(Icon)만 허용하고 가톨릭처럼 조각상은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수도나 미사집전 때 사용했을 법한 갖가지 집기들도 진열해 놓았다.

 정교회 성직자들의 의복. 정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수도사들과는 달리 평신도들의 통과의례(通過儀禮) 주관과 함께 성당에서 예배를 집전했다고 한다.

 수도사들의 삶은 어느 작가의 시선으로 살짝 엿본다. <그들의 모습은 깊은 묵상으로 이마가 넓어지고, 세상이 풍기는 냄새를 멀리하고 영성의 향기만을 맡아 코가 좁고 길쭉하며, 삶에 필요한 것만 먹는 것으로 절제의 삶을 살아서 입도 작으며 그나마 수염으로 가리고 있다. 무엇을 보았는지 놀란 눈같이 크고 또 저들의 귀는 왜 그렇게 큰지, 들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겠다고 귀를 크게 열고 있는 것이리라.>

 필경(筆耕)은 수도사들의 주요 일과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필경이 성서에서 그치지 않고 희극 같은 소설도 필사했다고 전해진다. 소설이란 본디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는 장르다. 잡념을 떨치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며 심신을 수양하는 게 수도사들의 삶일지니, 필사하면서 마음이 고생 깨나 했겠다.

 수도원의 역사를 담은 사진들도 게시되어 있다.

 박물관 근처 화장실 때문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메테오라에 대한 자세한 자료들을 게시해 놓았기에 살펴보다가 그만 시간가는 줄 몰랐던 모양이다. 나 혼자 집결장소로 가버린 걸로 오해한 집사람을 이해시키느라 고생깨나 했다.

 투어를 마친 후 야외전망대로 이동했다. 메테오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전망바위에 서자 바위 숲이 펼쳐진다. 마치 돌로 된 숲처럼 울퉁불퉁한 회색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그 뒤로 그리스를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핀두스 산맥과 메테오라 유적지의 거점도시인 칼람바카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최고의 뷰 포인트답게 메테오라의 여섯 개 수도원 가운데 네 개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밖에도 메테오라에는 두 개의 수도원이 더 있다고 한다. 가보지도, 그렇다고 눈에 담지도 못했지만 007시리즈 포 유어 아이즈 온리(For Your Eyes Only, 1981)’의 로케이션 장소로 더 유명한 성 트리니티(성삼위) 수도원(Holy Trinity Monastery, Agia Triada)’과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고 사마리아 여자, 물고기 잡이의 기적 등의 벽화가 볼거리라는 성 스테파노 수녀원(St. Stephen Nunnery)’이다.

 루사노 수도원이 발아래로 펼쳐지는데 붉은 지붕의 수도원 건물과 웅장한 바위덩어리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그 뒤에는 성 니콜라스 아나파프사스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St. Nicholas Anapausas)’이 있다. 16세기에 지어진 수도원으로 크레타 출신의 화가 ‘Theophanis Strelitzas’가 그렸다는 벽화로 유명하다.

 시선을 들자 이번에는 대 메테오론 수도원과 함께 조금 전에 다녀온 발람수도원이 얼굴을 내민다. 참고로 수도사들이 자연동굴에 처음 온 것은 9세기였다고 한다. 수도원 건물이 건축된 것은 14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이게 공동체로 발전했고, 15세기 말 스물네 채의 수도원을 포함하는 규모로 성장하기도 했다. 덕분에 오스만제국 치하에서 소멸되어 버릴 그리스의 전통과 헬레니즘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래선지 촬영용 의상까지 챙겨온 여성분들이 꽤 있었다. 하긴 장쾌하면서도 아름다운 마테오라의 풍경을 배경 삼는 일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공자는 나이 칠십을 종심(從心)’이라고 했다. 깨우칠 만큼 깨우친 이들이니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해도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그러니 인생샷 하나 건져보려는 집사람의 저 몸짓은 또 하나의 도가 분명하다.

 20대 초·중반을 외국인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난, 그네들의 습성이 몸에 배어 사진 찍는 건 좋아하지만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별로로 여긴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일 수밖에 없었다. 인생샷도 일심동체라야 제멋이라는데 어쩌겠는가.

 에필로그(epilogue), 어느 전문가는 메테오라에 수도원이 들어선 이유를 셋으로 나누고 있었다. 첫째는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다는 것. 하나님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했으니 높은 곳이라면 하나님의 소리를 조금이라도 잘들을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다음은 속세에서 은둔하기 위해서다. 세속의 번잡함을 피해 오롯이 홀로 신과 마주할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접근이 어려운 곳에 은둔처를 만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도자들이 종교 탄압으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위해 어떤 세력도 닿기 힘든 곳으로 도망간데 연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