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수) - 6.5(수)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셋째 날 :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Bucharest)
특징 : ① 루마니아(Romania) : 발칸 반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갖고 있는 국가로 BC 1세기 경 다치아(Dacia)인에 의해 트란실바니아·왈라키아·몰다비아를 통일하여 강력한 제국을 형성했다. AD 105년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정복당했고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이때 로마의 정착민들과 다키아인들 사이에 결혼하는 이민족간의 혼합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새로운 민족이 생성되었단다. ‘로마인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토지’라는 의미의 ‘루마니아(Romania)’는 이를 근거로 한단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 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받았으며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반도 진출 때에는 그들의 지배도 받게 된다. 1877년이 되어서야 러시아ㆍ투르크의 7차 전쟁의 결과로 마침내 독립국가를 이루고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트란실바니아 지역과 불가리아의 도브루자 지역을 획득해 루마니아 최대의 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1944년 소비에트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고, 1948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그러다가 1989년 12월의 유혈 시민혁명으로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셰스쿠’가 처형당함으로써 공산정권은 막을 내렸다. 이어서 1990년에는 보통선거가 실시되었고 ‘루마니아 공화국’으로 거듭난다.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2007년에는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이 되었다. 참고로 루마니아는 한반도의 1.1배쯤 되는 국토에 2천1백만 명 남짓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717달러란다. 석탄·석유·천연가스 등의 천연자원이 풍부한 덕분이다. 종교는 정교(Orthodox)가 86.7%로 지배적이며 가톨릭 4.7%, 개신교가 3% 이다. 또 하나 동유럽에서 유일한 라틴 계열의 민족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② 부카레스트(Bucharest) : 루마니아의 수도로 자국 언어로는 ’부크레슈티(Bucresti)‘, ‘행복이 가득한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단다. 부쿠레슈티가 기록에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1459년이다. 중세 이래 왈라키아 공국의 수도가 되어오다가 1861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합방으로 루마니아가 성립되자 그 수도가 되었다. 그 이후 부쿠레슈티는 급속도로 성장, 동쪽의 파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거리를 자랑했다는 애기이다. 하지만 지금은 구 시가지의 일부만 옛 자취를 유지하고 있고 오래된 건물과 교회는 독재를 이어온 공산당의 손에 산산이 파괴되었다. 대신 공산당 본부와 인민의 궁전 같은 엄청나게 거대한 건물만 눈길을 끈다. 제1차 세계대전 승리 기념으로 프랑스 파리를 본떠서 부카레슈티 개선문을 만들었고 승리의 광장을 중심으로 8거리가 있고 공원 등 녹지 시설이 풍부하다.

▼ 부카레스트 여행은 ‘혁명광장(Piata Revolutiei)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곳은 1989년 시민혁명 당시 독재자 차우셰스쿠(Ceausescu,N.)의 명령에 따라 시위대에게 무차별 사격이 이루어졌던 장소이며, 또한 그가 공산당 본부 건물에서 황망히 헬리콥터로 탈출하는 장면을 TV로 본 세계 시민에게 낯익은 곳이기도 하다. 루마니아 혁명은 사실 구 유고연방 TV를 볼 수 있었던 서쪽 티미쇼아라에서 먼저 시작돼 며칠 후 부카레스트로 번져왔다. 당시 이란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차우셰스쿠는 12월21일 부카레스트에서 친위시위로 맞불을 놓아 권력을 과시하려 했다. 그러나 혁명광장에 모인 친정부 군중까지도 반정부·반공산당 시위대로 변한다. 시위의 규모는 계속 커져 12월22일에는 루마니아 국영 TV를 장악하고 혁명의 승리를 선포하게 된다. 루마니아의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시민들의 피와 눈물로 얼룩진 장소인 셈이다. 그래서 ‘공화국 광장’이라는 이름도 ‘혁명 광장’으로 바뀌었단다.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도 광장 어디선가 혁명의 함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참고로 시민혁명에 놀란 차우셰스쿠는 공산당사 옥상에서 헬리콥터로 급히 탈출했으나 몇 시간 후 체포되고 성탄절에 총살당했다.

▼ 혁명광장의 중앙에는 1941년에 건립된 구(舊) ‘공산당본부(Fostul Comitet Central al Partidului Comunist Roman)’가 우뚝 서있다. 1989년의 시민혁명 당시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저 건물의 테라스에서 시민들에게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요구했단다. 하지만 광장에 모인 친정부 군중까지도 반정부·반공산당 시위대로 변했고, 시위대를 진압하던 군대마저 시민들의 편이 되자 위기에 몰린 그는 저 건물의 옥상에서 부인과 함께 헬기를 타고 탈출한다. 조종사의 배신으로 불과 3일 만에 경찰에게 체포되었지만 말이다. ‘인민의 전당’으로 이전한 상원의사당이 2005년까지 사용했다고 해서 ‘세나트(Senat)’라고도 불리며, 현재는 행정과 내무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이 들어있단다.

▼ 광장에는 길쭉한 창에 타원형 조형물이 꼽혀서 피를 흘리고 있는 듯한 모양새의 탑(塔)이 세워져 있다. 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혁명 기념탑이자 위령탑이란다. 뒤편에는 1989년의 혁명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비에 새겨져 있다. 이 나라를 민주주의 탈바꿈시킨 역사의 기록인 셈이다. 그런데도 비면(碑面)은 낙서로 가득 차있다. 딱 3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위대한 사건을 벌써부터 잊은 사람들도 있었나보다. 아니 25m나 되는 창에 감자를 꽂아놓았다며 기념탑을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현지인들이 많다던데 그에 대한 반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구 공산당본부 건물의 왼편 도로 건너에는 괴상한 모양새의 건물이 지어져 있다. 아래는 중세풍인데 그 위를 높다란 현대식 건물이 올라타고 있는 것이다. 저 건물은 차우세스쿠 정권 당시 청사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비밀경찰들의 관사로 사용되던 곳이었다고 한다. 공산정권이 무너진 후 집주인이 건축허가를 신청하자 어찌됐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니 2층까지는 원래 모습을 유지하라고 해서 저런 모양새로 변했단다.


▼ 광장의 한쪽, 그러니까 북쪽의 왕궁처럼 생긴 웅장한 바로크의 건물은 ‘부크레슈티대학 중앙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1893년에 건축된 이래 여러 번의 증축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1989년 혁명 후에 일어난 화재로 크게 파괴되었으나 복원되어 2001년에 재개관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만 권이 넘는 장서 중 1/4이 타버리는 참화까지는 피할 수가 없었단다. 참고로 부크레슈티대학의 모체는 1694년 왈라키아의 통치자 콘스탄틴이 세운 ‘왕립아카데미’다. 1776년 입실란티(Alexsandru Ipsillanti)왕이 교육과정을 개혁하여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854년에는 법학분야에서 최초로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했다. 1864년 쿠자(Alexsandru Ioan Cuza)왕이 법학, 과학, 문학 분야를 통합하여 오늘날의 부크레슈티대학을 만들었다.


▼ 도서관의 앞에는 루마니아왕국의 초대 국왕이었던 ‘카롤1세(Carol I)’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오랜 통치기간(1866~81 공작, 1881~1914 왕)에 많은 군사적·경제적 발전을 이룩했으나 압도적인 농촌 인구가 안고 있는 기본 문제에 대처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알려지는 왕이다. 토지를 갈망하는 농민의 요구를 소홀히 한 탓에 1907년 1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피비린내 나는 농민반란을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통치로 행정부는 상당한 권위와 안정을 얻었으나, 기회주의적인 공작정치는 루마니아 공직사회가 안고 있는 최악의 병폐로 고질화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혁명광장의 한쪽 축은 옛 왕궁을 개조한 ‘루마니아 국립미술관(루마니아어: Muzeul Naţional de Artă al României)’이 장식한다. 한때 왕궁으로 쓰였던 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외관을 갖고 있다. 이 건축물은 1812년 부유한 상인 ‘디누쿠 골레스쿠(Dinucu Golescu)’의 저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건물을 팔았고,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거쳐 1859년부터 왕궁으로 사용되었다. 왕궁은 1948년부터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주로 루마니아 중세와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니콜라에 그리고레스쿠(Nicolae Grigorescu)의 컬렉션이 유명하단다. 동양을 포함한 국제적 소장품도 자주 전시된단다. 회화, 조각, 도자기, 직물, 자수, 은세공품 등 다양한 장르의 11만5천여 작품을 소장하고 있단다.


▼ 혁명광장의 앞에는 루마니아 18세기에 건설된 루마니아 정교회가 있다. 붉은 벽돌조로 지어진 이 건물은 정교회의 특징인 목이 긴 두 개의 첨탑을 가지고 있다. 1722년 귀족 ‘크레출레스쿠’와 그의 부인 ‘사프타(Safta)’의 의뢰로 지어졌다고 한다. ‘크레출레스쿠 교회(Biserica Kretzulescu)’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일 것이다. 루마니아의 독자적인 비잔틴 양식으로 건축된 건물은 1940년과 1977년의 지진 및 1989년의 혁명에도 끄떡없이 도시 한복판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입구에는 루마니아 정교회의 관례대로 죽은 자와 산 자에게 바쳐진 두 개의 촛대가 있으며, 내부로 들면 금빛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 : 이콘을 거는 칸막이)가 눈부시다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주어진 자유시간이 넉넉했는데도 말이다. 사전준비 부족으로 교회에 대한 앎이 일천했으니 어쩌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내부에 당대의 유명 화가 ‘게오르게 타타레스쿠’의 작품 ‘선악을 심판하는 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아쉬워 할 수밖에 없었다.

▼ 이동 중에 대여용으로 여겨지는 자전거 거치대도 보였다.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풍경일 수도 있으나 유럽에서는 이미 하나의 대중교통 수단으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이다.

▼ 도서관의 옆에는 ‘아테네 음악당(Ateneul Roman)’이 있다. 1888년 프랑스의 건축가 ‘알베르 갈레옹’에 의해 지어졌다는 이 건물은 부쿠레슈티를 대표하는 건축물 가운데 한 곳으로 손꼽힌다. 네오클래식과 바로크, 이오니아 양식 등 다양한 양식이 혼합된 데다 그리스 스타일의 돔 지붕을 만들었기 때문에 ‘아테네 음악당’, 즉 ‘아테네움(Athenaeum)’이라고도 불린다. 내부 또한 화려하기로 유명하단다. 화려한 조각이 장식돼 있고, 화가 페트레스쿠의 루마니아 역사를 담은 그림이 돔 천장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단다. 건물은 한때 서커스 장으로 이용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오페라나 오케스트라 연주 등 음악회가 주로 열리는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단다.


▼ 음악당은 고대 그리스의 신전을 보는 듯하다. 건물이 워낙 아름답다보니 이곳을 바탕으로 화보나 웨딩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도 웨딩사진을 찍고 있는 신혼부부들이 두어 쌍이나 보였다. 외관만큼이나 화려하다는 실내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문이 굳게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 중요 건물들의 안내를 마친 가이드는 우리에게 1시간의 자유시간을 준다. 이 근처가 ‘구시가지(Old town)이니 찬찬히 둘러보란다. 그의 말마따나 혁명광장 주변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중세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신고전주의인 ’네오클래식 스타일(Neoclassical Style)‘ 이랄까?





▼ 거리는 한마디로 멋지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역사가 오랜 멋진 건물들과 사회주의 시절 건설한 네모진 콘크리트 건물들과 마구 섞여 경관을 흉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혹시 무질서하다는 평가를 받는 서울의 건축물도 외국인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다.



▼ 조금 더 걸으니 이번엔 아예 현대식 건물들 일색이다. 그만큼 구시가지가 작다는 증거일 것이다. 공산당이 다스리던 시절 오래된 건물과 교회들이 산산이 파괴되었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 집결지인 혁명광장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생맥주를 한잔 시켰다. 집사람은 물론 커피다. 그리곤 갈증을 풀면서 사람구경을 시작한다. 약속시간에 이를 즈음 화장실까지 다녀왔으니 ‘일석삼조(一石三鳥)’인 셈이다.


▼ 혁명광장을 떠난 버스는 우리를 ‘인민궁전(Palatul Parlamentului)’의 앞에다 내려놓는다. 인민궁전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크다.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본인의 힘과 권력을 보여주기 위해 북한의 주석궁을 본떠 지은 세계적인 규모의 궁전으로 단일 행정 건물로는 미국 국방부(펜타곤) 다음으로 크다고 한다. 건물은 총 12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방이 3천개가 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지어졌는데, 인민궁전을 짓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혈세가 엄청나게 투입된 것은 물론 문화재를 훼손하기까지 해서 원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추후 인민궁전을 계기로 혁명의 바람이 불었고, 악명 높은 독재자 차우세스쿠는 궁전이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처형당했다. 참고로 차우세스쿠가 처음부터 잘못 했던 것은 아니란다. 자동차 등의 제조업과 석유화학 등의 중화학공장을 설립하는 등 초기에는 국정을 잘 이끌어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을 세 번씩이나 방문하고 길일성을 만나면서 확 바뀌었단다. 국민은 굶겨야 말을 잘 듣는다는 등 북한의 체제를 잘못 배워왔고, 체제유지를 위해 서로가 감시하는 사회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 ‘인민을 위한 집’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건설을 시작했기에 ‘인민궁전’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은 차우세스쿠 대통령 개인을 위한 거대한 궁전이었다. 궁전을 짓기 위해 차우세스쿠는 설계 공모전을 열었고, 당시 무명이었던 건축가 ‘안가 페트레스쿠’가 선정돼 1984년 건축을 시작했다. 모든 건축 자재는 루마니아의 국산 자재만을 사용했다고 한다. 차우세스쿠는 저 건물의 발코니에서 인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싶어 했단다. 하지만 최초로 손을 흔들게 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마이클 잭슨이었다고 한다. 세상에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 보안 검색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놀라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모른다. 총 12개 층에 3000개가 넘는 방이 있는데, 내부는 3500여 톤의 수정으로 만든 480개의 샹들리에, 20만㎡의 양모 카펫, 금과 은으로 장식한 벨벳 등으로 꾸며져 있단다. 가이드는 폭 18m, 길이 150m에 이르는 회랑과 총 면적 2200m2의 대형 홀이 특히 아름답다며 설명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이 화려한 궁전은 건축 초기부터 국민의 혈세를 남용하고, 궁전의 건축을 위해 문화재를 훼손하는 등의 일로 국민들의 원성이 엄청났었다. 결국 차우세스쿠는 궁전의 완공을 지켜보지 못한 채 시민들이 일으킨 혁명으로 처형당했다. 1997년 이후 건물은 루마니아 상류 관리 청사로 쓰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루마니아 국회와 국제학회장, 결혼식 피로연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장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 건물로 빙 둘러싸인 가운데 공간에는 작은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분수까지 만들어져 있는 등 본 건물의 크기만큼이나 실내정원의 규모도 크다.

▼ 카메라의 렌즈가 작아서 건물 전경을 한꺼번에 담을 수 없었는데, 눈치 빠른 가이드가 우릴 궁전의 정면으로 안내해준다. 인민궁전을 배경으로 삼아 인증사진을 찍기에 최상인 곳이다. 그뿐 아니라 대칭으로 지어놓은 맞은편 건물들도 사진 배경으로는 그만이라 하겠다.




▼ ‘개선문(Arcul De Triumf)’은 지나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구경했다. 아래 사진은 함께 여행을 했던 의사선생님의 사진을 얻어 썼다. 저녁식사 후에 개선문까지 다녀왔다며 사진을 보내준 덕분이다. 아무튼 개선문은 1922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루마니아 용사들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단다. 처음에는 목조에 회반죽을 입혔으나 1930년대에 들어서 루마니아 조각가들이 새롭게 건축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개선문을 다녀온 의사선생의 말로는 개선문 근처에 부쿠레슈티에서 가장 큰 ‘헤라스트라우 공원(herastrau park)’이 있다고 했다. 공원 내에 루마니아 각 지방 전통 가옥을 예전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은 농촌 박물관도 있다고 했으나 호텔 근처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한 나로서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 내가 따라나선 패키지여행 상품은 보여주는 것만 볼 수밖에 없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덕분에 난 부크레슈티에서도 몇 곳의 명소를 놓쳐야만 했다. 그 가운데서도 ‘국립 역사박물관(아래 사진)’을 가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스와 로마, 헝가리, 이탈리아의 제노바 상인, 오토만 제국, 러시아의 지배를 거쳐 국민국가로 성장한 루마니아의 독특한 역사기록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이 나라 역사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자랑스러운지를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 ‘스타브로폴레오스 교회(Biserica Stavropoleos)’도 가보지 못했다. 1724년 건립된 역사 깊은 정교회 교회인데, 무려 300년 가까이 된 입구 쪽 베란다와 아름다운 프레스코화가 돋보이는 곳이다. 지진이 많았던 지역이라 스타브로폴레오스 교회 또한 많이 훼손되었고, 교회의 돔 역시 지진의 여파로 무너져 내렸지만 20세기 들어 복원되었다고 한다.

▼ 부쿠슈레티에서 인민궁전 만큼은 아니더라도 유명한 랜드 마크로 손꼽히는 건물은 ‘마누크 여인숙(Manuc’s INN)‘이다. 아르메니아 사업가인 ’Emanuel Mârzaian‘에 의해 1808년 처음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터키식 이름인 ’Manuc-bei‘라는 이름이 더 잘 알려져 있어서 마누크 여인숙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마누크 여인숙은 루마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인데 19세기 중반에는 부쿠레슈티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중심 건물이기도 했다. 도매점, 소매점, 객실과 술집이 한데 어우러진 요즘 말로는 주상복합 건물이라 해도 될 듯하다. 1842년에는 잠깐 동안 시청사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여인숙이라는 명칭처럼 도시의 하층민들이 머물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레스토랑과 상점이 들어있다


▼ 옛 ‘왕궁 터(Palatul Si Biserica Curtea Veche)’도 못 둘러봤다. 구시가지에 위치하고 있으니 기초상식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능히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니 이는 순전히 나의 불찰이었다 하겠다. 아무튼 이 왕궁 터는 14~18세기의 루마니아 왕들이 살았던 왕궁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 거주했던 왕 중에는 우리에게 드라큘라 백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블라드 체페슈가 있는데, 그는 15세기에 이곳에 살았다. 지금은 지진과 화재로 인해 왕궁이 거의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지만 성터 중앙에는 블라드 공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하나 더, 왕궁 터 바로 옆에는 1545년에 건설된 성 안토니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는 부쿠레슈티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고 한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왕들의 대관식이 열렸던 곳이란다.

▼ 하룻밤을 머물렀던 ‘풀만 호텔 부카레스트(Hotel Pullman Bucharest Wolrd Trade Center)’
무역센터 안에 들어있는 4성급 호텔답게 널찍하면서도 깔끔한 객실과 화장실을 보유하고 있다. 기본적인 세면도구와 드라이기도 구비되어 있다. 공용시설로는 헬스장과 사우나, 실내 수영장, 마사지, 테니스장 같은 레크리에이션장이 제공된다. 아침식사도 빵과 햄, 샐러드 등 종류가 다양해 든든히 먹을 수 있었다.

▼ 조망도 뛰어난 편이다. 커튼을 열면 부카레스트시가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나서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호텔 주변은 공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었다. 그 속에 ‘자유언론회관(House of the free Press)’이 들어앉았다. 루마니아 건축가 ‘호리아 마이쿠’가 1956년 소련 사회주의 리얼리즘 형식으로 지은 건축물이다. 모스크바 주립대학 본관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러고 보니 모스크바 여행 중에 한번쯤 본 것도 같다. 언론회관 앞 광장의 초입에는 ‘자유를 향한 날개’라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세 개의 날개가 자유를 향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데 지긋지긋한 공산주의에서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100톤의 스테인리스강으로 높이 20m의 조형물을 만들었단다. 루마니아의 조각가 ‘미하일 부크 레이’의 작품인데 솟아오른 봉우리는 공산주의에 저항하며 싸우다 쓰러져간 이들의 무덤으로 해석된단다

▼ 체육관처럼 지어진 ‘Romexpo’도 근처에 있었다. 엑스포(EXPO) 등 각종 전시회가 열리는 곳이다. 이밖에도 몇 개의 건물을 더 보았으나 사진 게재는 생략했다.

♧ 에필로그(epilogue), 루마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민족적·문화적 특징이 로마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은 주요 대륙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자리 잡은 루마니아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끊임없이 재확인되었다. 루마니아인들은 스스로를 고대 로마인과 다키아인의 후손이라고 여긴다. 고대 로마인은 AD 105년 트라야누스 황제 통치기에 남부 트란실바니아를 정복했다. 그리고 다키아인들은 도나우 평원의 북부 산악지대와 트란실바니아의 분지에서 살았다. 271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통치기에 로마인들이 철수할 무렵에는 로마의 정착민들과 다키아인들 사이에 결혼하는 이민족간의 혼합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새로운 민족이 생성되었다. 루마니아 언어의 라틴적 뿌리와 대부분의 루마니아인들이 믿는 동방정교회가 이러한 두 문화의 혼합에서 기인했다. 이후 5세기 훈족의 도래로부터 14세기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이 등장할 때까지 루마니아 사람들은 외부 침략으로 인해 역사 문헌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비잔틴왕국과 오스만제국, 합스부르크제국, 러시아 등 이웃 국가들의 야망의 격전지 역할을 할 때도 했다. 그러다가 1859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국이 통합되었고, 1877년 그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선언 직후에 루마니아는 공용어를 키릴 알파벳에서 라틴어로 바꾸었으며, 서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덕분에 유럽 근대 국가로서는 뒤늦게 출발했지만, 루마니아는 20세기에 세계적 명성을 얻은 여러 인물들을 배출했다. 그들 중에는 작곡가 게오르게 에네스쿠,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 철학자 에밀 시오랑, 종교 역사가 미르케아 엘리아데, 노벨 문학상 수상자 조지 E. 펄라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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