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수) - 6.5(수)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둘째 날 : 벨리코 투르노보(Veliko Turnovo)
특징 :
① 벨리코 투르노보(Veliko Turnovo) : 불가리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3000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제2 불가리아 제국 시기인 1187-1393년에는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는데, 당시 이름은 ’투르노보‘였다. 이후 도시의 가치를 기념하기 위해 '위대한'이라는 뜻을 지닌 형용사 ’벨리코‘를 붙였단다. ’이반 아센 2세(Ivan Asen II)’ 치하의 최 전성기에는 비잔틴 제국을 압도하고 발칸반도 대부분을 지배했던 적도 있다. ‘제3의 로마’로 불리던 시기이다. 그러나 아센 왕이 죽자 쇠퇴하기 시작해 숙적인 비잔틴 제국에 굴복 당했다. 1398년에는 오스만 왕조와 3개월에 걸친 수도 공방전 끝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투르노보는 다시 각광을 받게 되는데 이는 500년에 걸친 터키 지배에서 벗어난 신생 불가리아 왕국의 첫 국회가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1878년 베를린조약에 따라 승인된 불가리아 공국은 이곳을 수도로 삼았고, 1879년 4월 17일에는 최초의 불가리아 의회가 이곳에서 소집되었으며, 이때 불가리아 최초의 헌법이 제정됐다. 이 헌법은 불가리아의 수도를 소피아로 이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소피아는 지금도 불가리아의 수도로 남아 있다.
② 차레베츠 성(Tsarevets Fortress) : ’투르노보‘의 과거는 ’차레베츠 성(요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잔틴 시대 5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건립된 성은 864년 동방정교를 국교로 택한 이후 1396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기 전까지 협곡 위의 요새였다. 성곽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으나 그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현재까지 400개 이상의 주택, 18개의 교회, 여러 개의 수도원, 상점, 성문과 타워 등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 투르노보의 투어는 ‘차레베츠 성(Tsarevets Fortress)’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 광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구시가지와 접한 곳이라서 고풍스런 건물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그보다는 붉은 항아리로 만든 화분이 더 눈길을 끈다. 고고학박물관에서나 만날 법한 모양새로 생겼기 때문이다. 이 도시의 오랜 역사를 나타내려는 아이디어가 아닐까 싶다.
▼ '장미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카잔루크’는 ‘벨리코 투루노보’로 오는 도중 차창을 통해 엿볼 수밖에 없었다. 여행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 장미 생산량의 80%가 이곳에서 생산된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특히 5월이면 방문의 최적기가 아니겠는가. 만발한 장미꽃으로 인해 마을 전체가 장미 향기로 가득 찰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일정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패키지’니 어쩌겠는가. 그저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장미가 심어진 꽃밭들이 바라보며 위안을 삼아볼 따름이다.
▼ 버스에서 내리자 거대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차레베츠 성’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꼭대기에는 ‘성모 승천교회’가 자리 잡았다. ‘차레베츠 성’은 자연이 빚어놓은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지은 요새다. 성문 앞은 해자(垓字)로 차단되어 있다. ‘얀트라 강(Yantra river)’이 해자이다. 도개교(跳開橋 : 몸체가 위로 열리는 구조로 된 다리)처럼 성 안에서 줄을 잡아당기면 외부와 차단되었다. 성으로 들어가는 외길의 양쪽이 천혜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가히 철옹성이라 하겠다.
▼ 성의 입구에 이르자 ‘차레베츠 성’의 문장이 새겨진 방패에 앞발을 얹고 있는 사자상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조형물 아래에는 ‘1186-1393’이라는 숫자가 새겨져있다. 벨리코 투르노보가 1185부터 1393년까지 ‘제2차 불가리아제국’의 수도였으니 당시에 사용하던 문장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1393년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되면서 파괴되었던 요새는 현재 복원 중에 있다.
▼ 잠시 후 첫 번째 성문을 만난다. 성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이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양 옆이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곳에 길을 만들고 그 입구에다 성문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될 때까지 ‘난공불락의 요새’로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천혜의 지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 오른쪽 산자락에 자리한 건물군은 ’투르노보 대학교(Veliko Tarnovo University)‘라고 한다. 세상을 품을 듯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동상이 이색적이다. 성 에프티미(Св. Евтимий)로 제2차 불가리아제국 정교회의 마지막 대주교였다고 한다. 그는 ’투르노보 인문학파‘를 만들어 불가리아 문화도 진흥했다고 해서 불가리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주교라고 한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두 번째 성문이다. 이곳도 역시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이 요새는 현재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옛 영화를 복원하는 일이라 하겠다. 흔히 벨리코 투르노보를 불가리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라고 부르는데, 그 저변에는 위대한 시절에 대한 향수도 한 축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참고로 요새의 성곽은 두 번째 성문에서 좌우로 퍼져나간다.
▼ 안으로 들어서자 성벽에 뭔가가 적혀있다. 요새의 문장과 함께 1965-1972‘라는 숫자도 보인다. 하지만 키릴문자라서 그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 성문 옆의 건물터는 문지기 병사들을 위한 시설이 있던 자리가 분명할 것이다.
▼ 건너편 산등성이도 하얀 띠를 두르고 있다. 하지만 저건 인간이 쌓아올린 성벽이 아니고 자연이 빚어놓은 암벽일 따름이란다. 천연의 성벽인 셈이다.
▼ 한때는 집이었을 터엔 이젠 관광객들의 발걸음만 분주하다. 길재가 읊조렸던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싯귀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또 다른 아쉬움도 있다. 귀족들 집터와 왕궁 터 등 유적들이 사방에 널려있으나 대부분 흔적만 남아있을 뿐 그에 대한 안내판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옛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일상까지 가슴에 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 서쪽으로 난 작은 문에는 망루가 설치되어 있다. 모양새로 보아 정탐과 수비의 기능을 겸했을 게 분명하다. 참고로 성곽에는 정문 외에도 2개의 성문이 더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문(little gate)과 동쪽에 있는 ’프랑크족 문(Frankish Date)’이다. 이 외에도 성에는 4개의 높은 탑이 있었고, 정교회 성당도 5개나 있었다고 한다.
▼ 타워도 올라가 볼 수 있었다. 오래된 소품들로 장식해 놓은 내부가 중세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단두대(斷頭臺)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앞에 놓인 광주리의 용도가 궁금하다. 설마 자른 목을 담았던 것은 아니겠지?
▼ 망루에 오르자 시야가 확 트인다. 주위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최상이었겠다. 하긴 그래서 이곳에 망루를 만들었지 않았겠는가. 성의 아래에는 붉은색 지붕의 마을이 자리 잡았다. 성과 마을 사이에는 얀트라강이 흐르는데 여간 평화로워 보이는 게 아니다. 불가리아는 세계 최장수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저렇게 평화로운 곳에서 사니 어찌 장수를 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성벽은 난공불락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높으면서도 견고했다. 하지만 과거의 화려했던 왕조는 이슬처럼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난공불락으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적에게 무너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리 견고한 성일지라도 지키는 데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그것을 지켜낼 만한 힘이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얘기도 있지 않는가. 참! 무섭게도 성벽에는 어떤 안전장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최소한 중상 아니면 사망이다. 물론 올라가지 말라는 표지판이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나온다. 그렇다고 그만둘 사람이야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성벽 자체에 두께가 있어서 바람이 세게 불지만 않으면 안전해 보이긴 했다.
▼ 구시가지 쪽의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얀트라강(Yantra river)이 살아있는 뱀이 꿈틀거리는 모양새이다. 얀트라강은 불가리아 중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발칸산맥(불가리아어: 스타라 플라니나)에서 발원해 북으로 가브로보, 벨리코 투르노보, 비얄라를 지나 도나우강에 합류한다. 총 길이는 285㎞이며 전형적인 사행천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벨리코 투르노보에서 가장 심하단다. 얀트라강은 이곳에서 S자를 세 번이나 그리면서 도시를 감싸 흐른다. 특히 사라피나 하우스 지역에서 보면 강이 마치 세 줄기로 흐르는 것 같다고 한다.
▼ 요새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에는 피라미드를 닮은 조형물도 볼 수 있었다. 뭔가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모양인데 키릴문자로 적혀있어서 그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불가리아 여행을 하다보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키릴문자는 마치 이색적인 부호 같아서 더욱 이국적 풍경을 느끼게 한다.
▼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병기들도 보인다. 관광객들의 눈요기를 위한 소품일 것이다.
▼ 뒤돌아본 투르노보 시가지, 얀트라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집들이 그림 같다. 도시는 꾸불꾸불한 얀트라 강 협곡에 거의 수직으로 솟아 있는 능선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 강으로 인해 마을은 스베타고라·차레베츠·트라페지차라고 하는 3개의 돌출지대로 구분된다고 한다. 능선의 경사가 심했던지 계단식으로 지어진 가옥들이 마치 한 채씩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 자매결연 관계였던 프라하에서 요새 복원기념으로 보내주었다는 종탑도 보인다. ‘행운의 종’ 4개를 설치하여 국가 행사시에는 4개, 위급시에는 3개를 울린다고 한다.
▼ 명색이 유명 관광지인데 기념품 가게라고 없겠는가. 다만 이곳은 이콘을 위주로 파는 노점상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이콘장터는 불가리아 국민의 신심을 엿보게 해준다. 그래선지 온갖 이콘을 가득 실은 상인들의 수레는 관광객의 주요한 촬영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 값싼 복제품이었으나 가정에 비치해 놓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 비스듬한 언덕길을 오르는데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와 조명시설들이 눈에 띈다. 어둠이 깔리면 펼쳐지는 레이저 쇼를 위한 시설이란다. ‘빛과 소리(Sound and light)라고 불리는 이 쇼는 형형색색의 레이저가 성 정상을 향해 발사되는데 이때 종소리와 구슬픈 불가리아 민속음악이 뒤섞인단다. 하지만 우린 구경을 하지 못했다. 거세어진 빗줄기로 인해 공연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 정상에 오르자 ‘성모승천 교회(Patriarchal Cathedral St. Ascension)가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성당은 11세기 말에서 12세기까지 수도원교회로 지어졌었다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것을 이반 알렉산더 대왕 때 재건축하여 불가리아를 대표하는 총대주교좌 성당이 되었지만, 오스만제국이 벨리코를 점령하면서 또 다시 교회는 파괴되었다. 이후 폐허상태로 남아있던 것을 20세기 후반 다시 건축했고 1985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단다.
▼ 안으로 들자 성화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그런데 어색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성화가 너무 현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1393년부터 500년 동안 고통을 받아왔던 피지배 민족의 과거를 현대 작가인 ’테오판 소케로프(Teofan Sokerov)‘가 그려서 이 교회의 복원 시기에 맞춰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성경속의 성인들이 아닌 불가리아 역사상 기념할만한 사건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그렸다는 것이다.
▼ 뒤에서 바라본 ‘성모승천 교회’
▼ 불가리아 왕국의 역대 대주교의 이름이 새겨진 석판.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독립국으로서의 명이 끊긴 1394년에 기록이 멈춰 있다.
▼ 교회의 바로 아래에는 ‘왕궁터’가 있다. 차르 22명이 거주했다는 곳이다. 이곳 투르노보가 한때 ‘차르(Tsarsㆍ러시아 황제)의 도시’로 불리던 이유이기도 하다.
▼ 건너편 언덕에도 성곽이 복원되어 있다. 그 주변은 어수선한 것이 지금도 발굴 중인 모양이다. 이곳 투르노보의 또 다른 역사지역인 ‘트라페지차(Trapezitsa)’가 아닐까 싶다. 옛날 저곳에는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성직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참고로 구시가지 왼쪽의 스베타 고라 언덕에는 2차 불가리아 왕국시대(12-14세기)에 생긴 투르노보 학교가 있다. 이 학교의 연구 전통은 현재 키릴 메소디우스 대학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불가리아 어문학, 러시아 어문학, 역사, 예술 분야 전공이 유명하단다.
▼ 되돌아 내려오는데 아름다운 꽃밭을 만났다. 처음 보는 꽃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 다시 돌아온 주차장, 구시가지의 입구쯤으로 보면 되겠다. 벨리코 투르노보에는 기원전 3000년 경부터 사람이 살았다. 이후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로서 발전을 거듭할 당시에는 '제 3의 로마'라는 별명도 가졌을 정도로 급속한 발전을 거듭했으나 14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점령으로 인해 대부분의 마을과 성당이 소실된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불가리아 최고의 요새였던 차르베츠의 성벽 흔적과 조그마한 마을이 전부이다. 과거의 영광은 기록으로만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 제국의 옛 수도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거리는 한산했다. 그것도 대부분이 현지인, 관광객의 빈도는 높지가 않다. 그래선지 인사를 건네 오는 학생들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런데 하나같이 ‘곤니찌와’이다. 우리를 일본관광객으로 알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관광객들에게 이곳은 아직까지 낯선 관광지에 불과하다는 증거이다. ‘I'm from Korea’다 요놈들아! 큰소리로 돌려주지만 몇몇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눈치다. 세계 12위의 GDP(Gross Domestic Product) 대국을 몰라보다니 괘씸한 놈들,
▼ 구시가지(Old Town)를 둘러보지는 못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시내구경을 나가려고 했으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빗줄기가 거세졌기 때문이다. 투르노보의 대부분 지역이 불가리아의 역사·문화 사적지로 복구되어 고대의 건축물과 마을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아니 우리가 머문 호텔이 구시가지에 위치하고 있으니 오가며 눈에 담았던 풍경에 만족하기로 하자.
▼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경계에는 ‘어머니 광장’이 있는데, 이곳에는 전몰자 추모비인 '어머니 불가리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네 가지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라고 한다.
▼ 하룻밤을 머물렀던 ‘Hotel Premier Veliko Turnovo’
대형버스가 들어올 수 없는 외진 곳에 위치한 작은 호텔. 1대 뿐인 엘리베이터도 캐리어를 갖고 탈 경우 2명이면 끝이다. 방뿐만이 아니라 욕실도 작아 샤워도 욕조에 들어가서 해야만 한다. 그나마 간단한 세면도구와 드라이기를 갖춘 건 다행이라 하겠다. 가운과 실내화를 비치해 놓은 건 의외였고 말이다. 식사도 다른 호텔들에 비해 처지는 수준이었다.
♧ 에필로그(epilogue) : 시간 부족과 빗줄기 때문에 둘러보지 못한 명소 두어 곳을 다른 이들의 글을 빌어 소개해볼까 한다. 우선 성 키릴ㆍ메토디 거리 주변에 위치한 ‘성 니콜라 교회’를 들 수 있다. 민족 부흥기인 1836년에 완성된 교회로 외관은 소박하나 인테리어는 매우 장엄하다. 또 키릴 문자를 고안한 수도사 형제 이름을 딴 성 키릴ㆍ메토디 교회가 있는데 종루는 거장 피체프가 만들었다. 그리고 지붕이 선명한 푸른색을 가진 성 처녀 강탄 성당도 있고, 성 디미타르 교회는 제2 불가리아 왕국의 아센 왕이 비잔틴 제국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이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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