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발칸반도 및 동구유렵
여행일 : ‘14. 10. 19(일) - 30(목)
여행국가 :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체코(7개국)
여행 여덟째 날 오후-아홉째 날 오후 : 체코의 수도 프라하(Praha)
특징 : 블타바강(江:몰다우강) 연변, 라베강(江:엘베강)과의 합류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체코의 수도이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도시이다. BC 4000년경부터 프라하(Praha) 분지(盆地)에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슬라브인(人)이 들어온 것은 5·6세기, 그리고 성(城)은 9세기 말에 축조되었다. 12세기에는 이미 중부유럽 최대 도시의 하나로 발전하였으며, 14세기 카렐 4세 때에는 인구 4만 명에 이르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후로도 성장을 거듭하다가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한 이래 수도가 되어왔다. 1968년 1월의 ‘프라하의 봄’으로 부르는 자유화운동이 소련 등 바르샤바 조약군(軍)의 침입으로 짓밟힌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했으며, 1993년 1월 1일에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면서 체코의 수도가 되었다. 참고로 먹을거리로 스미호프의 맥주와 프라하 햄이 유명하니 한번쯤 맛을 봐야할 일이다.
▼ 프라하에 도착한 것은 어둑어둑해질 무렵, 숙소에 여장(旅裝)을 풀어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우린 호텔이 아니라 시내로 향한다. 프라하의 야경(夜景)을 보기 위해서이다. 누군가 그랬다. 세계의 야경을 논하면서 체코의 프라하를 빼는 것은 ‘팥 없는 빙수’ 꼴이라고 말이다. 사실 프라하의 야경은 부다페스트의 국회의사당, 파리의 에펠탑과 함께 유럽의 3대 야경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곧바로 호텔에 들지 않고 시내로 들어가는 이유이다. 야경을 보지 않고서 어찌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겠는가.
▼ 시가지로 들어서마자 멋들어지게 지어진 옛 건물들이 길손을 맞는다. 그것도 화려한 불빛으로 치장을 하고서 말이다.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양식 등 시대별 예술사의 변천을 담은 건물들이라는데 미술에 문외한(門外漢)인 내 눈엔 그저 아름답게 느껴지기만 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슴이 뭉클할 정도라면 그 아름다움은 지극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 구시가는 프라하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들을 품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아르누보 양식을 대표하는 '프라하 시민회관'이다. 이곳은 '프라하의 봄'과 떼려야 뗄 수 없다. 1912년 지어진 이 건물은 체코인의 자긍심 그 자체다. 연주회장과 전시장, 레스토랑이 공존하는 복합문화공간인 동시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선언(1918년 10월 28일)된 역사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당시 독립이 선언된 '스메타나 홀'은 수용인원 1,200명의 거대한 홀로 100여 년 전의 실내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매년 5월 열리는 체코의 음악제 '프라하의 봄'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으로 축제의 막을 연다고 한다.
▼ 시민회관의 옆에는 오랜 세월을 그대로 간직한 '화약탑(Powder Tower)'이 있다. 높이 65m의 고딕식 탑으로 1475년 지금의 구(舊)시가지를 지키는 13개 성문(城門) 가운데 하나이자, 대포 요새(要塞)로 건설되었다. 이후 총기 제작공이자 종(鐘) 주조공인 야로스(Tomas Jaros)의 거처 겸 작업실로 개축되었다가, 루돌프 2세 때인 17세기 초에 연금술사들의 화약창고 겸 연구실로 쓰이면서 화약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화약탑은 프라하의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화려한 장식과 다양한 색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달리 어둡고 칙칙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옛날에는 왕과 여왕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소이자, 외국 사신들이 프라하성(城)으로 들어올 때는 꼭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이용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1960년대부터는 연금술이나 종 주조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화약탑은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각각 시작되는 곳이다.
▼ 화약탑을 둘러본 후에는 카를 다리(Charles Bridge)로 향한다. 프라하 야경의 백미(白眉)는 뭐니 뭐니 해도 카를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은 카를다리 교탑(橋塔) 옆 광장이 아닐까 싶다. 광장의 강변에 서면 탁 트인 강 건너편 언덕 위에 웅장하게 터를 잡은 프라하 성과 고풍스러움이 넘쳐흐르는 옛 시가지가 나타난다. 은은한 조명용 불빛이 그 고풍스러움을 한결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만일 야경으로 유명한 다른 도시들처럼 불빛이 휘황찬란했다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지금만 훨씬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프라하의 야경을 두고 프랑스의 에펠탑이나 부다페스트의 국회의사당 야경보다 화려한 맛은 없지만 초연한 빛을 띠고 있다고 평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이것을 두고 다른 나라는 따라 할 수 없는 프라하만의 스타일과 개성이라고 했다.
▼ 눈앞에 펼쳐지는 야경은 차라리 몽환적(夢幻的)이다. ‘프라하에 갔다면 먹지도 자지도 말고 야경부터 보라’는 어느 글이 실감난다. 아마도 이런 꿈을 깨는 데 꽤나 오랜 세월이 필요할 것 같다.
▼ 광장에서 프라하성의 야경을 실컷 바라봤다면 이젠 카를다리를 걸어볼 차례이다. 구시가와 프라하 성을 잇는 이 다리는 겹겹이 쌓인 오랜 세월에 감히 그 어떤 예술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다리 밑을 흐르는 블타바 강(Vltava River)에 비추는 노란 달빛조차 황홀하다고 했을 정도이니 두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유럽의 가장 아름다운 교량 중 하나로 꼽히는 카를다리의 하이라이트는 야경이라 할 수 있다. 조금 전 광장에서 보았던 프라하성의 아름다운 야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지는 것은 물론이고, 다리 좌우에 세워진 30개의 성자상(聖者像)들이 조명용 불빛에 은은하게 나타나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볼거리이다.
▼ 프라하는 낮보다 밤이 더 화려하다. 비투스 대성당 첨탑 너머로 해가 지고 프라하 성이 은은한 불을 밝히면 색색의 물감을 풀어놓은 듯 블타바 강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분위기에 홀린 ‘프라하의 연인’들은 길을 가다가도 서로를 포옹한 채 그윽한 눈길을 교환한다. 그 ‘연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카를다리라고 한다. 그들은 다리 위에서 마치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것이다.
▼ 카를 다리에서의 야경을 구경하고 다시 구시가로 향한다. 가는 길에는 갖가지 상점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보석가게이다. ‘유리는 체코 역사의 일부이며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체코의 소중한 예술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올 초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빛의 예술, 보헤미아 유리’ 특별전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헬레나 코에닉스마르코바 프라하장식미술관장이 했던 말이다. 그의 말처럼 유리는 동유럽 국가 체코를 대표하는 산업이자 예술이며, 보헤미아 지역은 유리의 주산지로서 유럽의 유리문화를 주도해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크리스털 유리가 유명하다. 시가지를 걷다보면 보석가게 들이 자주 눈에 띄는 이유이다.
▼ 카를 다리까지 둘러봤다면 이번에는 천문시계탑이다. 프라하를 찾는 방문객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꼭 찾아본다는 곳이다. 천문시계가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1490년에 만들어진 이 시계는 매시 정각마다 예수님과 12제자의 목각인형을 보여준다. 정각이면 시계의 위쪽에 있는 두 개의 문이 열리는데, 이때 목각(木刻)인형들이 회전하면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 구시가 광장에서는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건물 등이 다양한 시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틴 성당, 구시청사, 천문시계, 얀 후스 동상까지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는 곳이다. 때문에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곳인 만큼 밤늦게까지 매우 혼잡하다. 특히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소매치기도 많은 편이란다. 거기다 음식점이나 길거리 상인들도 조금 높은 가격으로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 많다고 한다. 이를 염두에 두고 식당에 들어간 우리 부부는 눈을 뻔히 뜨고도 당해버렸다. 식사를 마친 후 식대와 맥주 값까지는 계산을 잘했으나, 남은 현지 화폐로 계산을 치르는 과정에서 바가지를 쓰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확인해보니 적정 환율보다 40%정도를 더해서 지급했던 것이다. 식당 종업원의 환율에 따른 결과이다. 괘씸했지만 어쩌랴 이 또한 여행의 추억인 것을.
▼ 밤이 깊어가는 데도 광장에는 사람들로 붐빈다. 매 시각마다 보여주는 천문시계의 퍼포먼스가 끝났는데도 말이다. 구경꾼들이 있는데 어찌 거리의 악사가 빠질 수 있겠는가. 낮에 비해 구경군의 숫자는 비록 떨어지지만 그의 흥은 식을 줄을 모른다.
▼ 오늘은 모처럼 늦은 아침을 먹을 수 있는 날이다. 거의 온종일을 프라하에서 보내기 때문에 다른 날 같이 이른 아침부터 서두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버스는 카를다리에서 1Km쯤 떨어진 블타바(Vltava) 강변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어젯밤을 머무른 탑호텔(Top Hotel)이 프라하시의 외곽에 있는 것이 버스를 이용해 이곳까지 온 이유이다. 호텔의 설비나 식사 등은 그동안 돌아다녔던 다른 도시들의 호텔보다 뒤떨어지지 않았지만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개인여행자들에게는 불편할 것 같다.
▼ 투어가 시작되는 카를다리까지는 블타바(Vltava) 강변을 따라 걸어본다. 이곳 또한 여유로운 일정이 가져다준 또 다른 호사일 것이다. 가는 길 강변에 정박해있는 배가 보인다. 숙박이 가능한 배란다. ‘크루즈(cruise)’의 축소판(縮小版) 쯤으로 생각해도 될 듯 싶다.
▼ 카를다리 교탑(橋塔)의 아치형으로 된 문 안쪽으로 들어서기 전 오른편 광장에 잠시 멈춘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여기가 프라하 성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 중 하나라는 것은 두 눈이 먼저 알았다. 이곳저곳에서 ‘우와’ 하는 탄성이 들려오는 것을 보면 누구나 보는 눈은 같은 모양이다. 푸른 하늘과 붉은 지붕의 대비, 그리고 예리하게 우뚝 솟은 첨탑의 아름다운 조화는 글로 표현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대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 광장에는 ‘카를 4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848년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카를대학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프라하에 기증한 것이란다. 그 동상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이곳 카를교의 교탑(橋塔) 앞에 세웠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교탑이 있는 다리 이름도 ‘카를다리’로 불리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카를 4세(Karl IV)는 룩셈부르크가(家) 출신의 독일 및 보헤미안왕(1346~1355)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1355~1378)이다. 국내적으로는 제국의 체제를 견고하게 정립하였고, 상공업 육성 ·시민층의 보호 ·학예의 장려(1348년 프라하대학 창립)에 힘썼다. 또한 1377년 아비뇽에서 유수(幽囚) 중인 교황을 로마로 귀환케 함으로써 독일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 카를다리는 프라하성과 구시가를 오가는 시간여행의 통로다. 그 사연과 역사가 천 년을 넘어선다. 9세기 초(初) 나무로 지어졌던 다리는 홍수로 여러 차례 유실됐고. 현존하는 카를교의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보헤미아의 왕인 카를 4세 때다. 50년의 공사과정을 거쳐 1406년에 완공됐다. 이 교량은 621미터 길이에 10미터 폭이고 아치가 16개이다. 그리고 다리 위에는 30개에 이르는 조상(彫像)이 줄을 지어 있는데, 모두 체코 최고 조각가들이 17세기 후반부터 250년에 걸쳐 제작한 것들이란다. 런던에 타워 브리지가 있다면 프라하에는 카를교가 있다 할 정도로 프라하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이 다리는 흔히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량 중 하나로 꼽힌다.
▼ 프라하성을 향해 카를다리를 건넌다. 다리 위는 빼곡하게 구경꾼들이 채우고 있다. 다리 양 옆에는 현악기로 버스킹(busking : 행인들로부터 돈을 얻기 위해 길거리에서 노래와 연주를 하는 행위)을 하는 이들부터 초상화나 캐리커처를 그리는 화가들, 그리고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들이 즐비하다. 체코 출신 감독인 카렐 바섹(Karel Vacek)은 카를다리를 일컬어 ‘프라하성과도 바꿀 수 없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체코 국내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들까지 앞다퉈가며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시킨다고 하니, 그의 말이 허언(虛言)이 아니었나 보다.
▼ 카를교의 미학적인 가치는 다리 위에 놓인 동상들 덕분에 더욱 도드라진다. 다리의 난간 양쪽에는 성서 속 인물과 체코의 성인 등 30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 동상들은 각자의 개성과 사연을 지니며 카를교의 볼거리가 됐다. 그중 예수 수난 십자가상이 다리 위 동상 중 최초로 세워졌다고 한다.
▼ 30개의 동상(銅像)들 중에서 가장 인기 높은 조각상은 성 요한 네포무크(St. John of Nepomuk)의 상이다. 동상 아래 부조에는 바람을 핀 왕비의 비밀을 밝히지 않아 혀를 잘린 채 강물에 던져지는 요한 네포무크 신부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이 동상 밑 동판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행운이 깃든다는 전설 때문에 그 부분만 반질반질하게 퇴색돼 있다. 그러나 집사람은 미신(迷信)이라며 만지는 것을 거부한다. 할 수 없이 ‘성 요한 네포쿠크’을 만지는 것은 포기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라며 그 옆에 있는 동판에 손을 대보게 했다. 이것 역시 소원을 이루어지게 해준다는 전설이 있기는 매한가지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판과 오른손을 대도록 되어 있는 동판 아래 십자가가 반질반질한 것을 보고도 내말에 속아준 집사람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난 집사람 모르게 살짝 눈을 감아본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먼 미래를 기약하며 말이다.
▼ 카렐다리를 건너면 프라하성(Prague Castle)과 만날 수 있다. 프라하 성까지는 ‘황금소로’라 불리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 올라가는 것이 관광객들 단골 코스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작업실로 쓰던 집은 물론이고, 당시 금은 세공사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거리이다. 그러나 우린 다른 코스를 선택한다. 동유럽 여행의 또 다른 재미인 트램(tram)을 이용해 프라하성까지 가기로 한 것이다. 트램이란 일반 도로에 깔린 레일 위를 달리는 노면 전차(street car)이다. 19세기 말(末) 처음으로 실용화시킨 미국에서는 기동성이 뛰어난 버스에 밀려 이미 옛 추억이 되어버렸으나, 독일을 위시한 유럽에서는 전차의 고성능화 및 궤도의 전용노선화 과정을 거쳐 버스를 능가하는 대중교통 수단으로 사랑받고 있다. 위례신도시에도 설치(5호선 마천역에서 8호선 우남역까지)된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도 트램을 볼 날이 머지않을 것 같다.
▼ 트램(tram)에서 내려 성(城)으로 향한다. 프라하성(Prague Castle)은 1989년의 '벨벳 혁명(Velvet Revolution : 공산당 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시민혁명으로 피를 흘리지 않았다고 해서 ‘평화로운’이라는 형용사 ‘벨벳‘을 썼다)' 이후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프라하성(Prague Castle)은 체코를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이자,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성이다. 길이 570m에 너비는 128m이며, 9세기 이후 통치자들의 궁전으로 사용된 로브코위츠 궁전 외에 성(聖)비투스대성당과 성조지바실리카, 성십자가교회 등 3개의 교회와 성조지수도원 등 다양한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건설될 당시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3세기 중엽에 초기 고딕 양식이 첨가되고, 이어 14세기에는 프라하 출신인 카를 4세에 의해 왕궁과 성십자가교회 등이 고딕 양식으로 새롭게 건축되면서 이 때부터 체코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그 뒤 블라디슬라프 2세 때 후기 고딕 양식이 가미되고, 1526년 합스부르크왕가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다시 르네상스 양식이 도입되었다. 그러다 바로크시대인 1753년부터 1775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는데, 시작에서 완성될 때까지 900년이나 걸렸다.
▼ 마침 위병(衛兵)들의 교대 의식(儀式)이 이루어지고 있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는 궁전을 지키는 위사들인 모양인데, 그 의식이 화려한 것을 보면 관광 상품의 하나로 정착시킨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참고로 프라하성은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대통령 관저로 쓰기 시작했으며, 성의 일부는 지금도 대통령 집무실과 영빈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성안으로 들면 프라하 주교좌(主敎座, cathedra) 성당인 ‘성 비투스 성당(St. Virtus's Cathedral)’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성당의 기원은 925년, 벤체슬라우스 1세(바츨라프) 공작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받은 성물인 ‘성 비투스’의 팔을 보관하기 위해 교회를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1060년 이 성당은 로마네스크양식으로 한 차례 증축되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당당한 고딕 양식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1344년(카를 4세 시대)에 접어들어서였다. 건물은 아라스의 마티아스라는 건축가에 의해 프랑스 고딕 양식으로 설계되었는데, 1352년 그가 사망한 후에는 독일 건축가 페테르 파를러가 감독을 맡은 가운데 작업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에도 성당은 완공되려면 먼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으로 몇 군데 증축되기는 했어도 이 성당은 19세기까지 미완성 상태였다. 1844년, '성 비투스 대성당 완공을 위한 조합'이 탄생해 성당을 고딕 양식으로 완성시키고 고딕 양식이 아닌 장식부를 제거해 버린다는 목적을 세웠다. 진행 과정은 더뎠으며, 성당은 1929년이 되어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처음 성당을 짓기 시작한지 무려 1천년이 지나서야 완공을 보게 된 것이다.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듯 싶다. 전체 길이 124m에 너비 60m, 높이 33m의 건물은 프라하 성 안에서 가장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건물은 두 개의 뾰쪽 탑을 거느리고 있는데 남쪽 탑은 96.5m, 서쪽 탑은 82m 높이를 자랑한다.
▼ 대성당의 백미(白眉)는 뭐니 뭐니 해도 체코가 자랑하는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로 만든 환상적인 벽면이 아닐까 싶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내뿜는 형형색색의 빛이 마치 세례를 받는 듯한 성스러움을 자아내게 만든다. 따스한 기분이 들 정도로 강렬한 빛. ‘프라하의 봄’은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 ‘성 비투스 성당’ 앞에 있는 대통령궁을 부르는 가슴 아픈 이름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악의 꽃'이다. 이런 이름이 있는 이유는 ‘비투스 성당’을 감싸고 있는 건축물 때문이란다. 1700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을 때, 오스트리아인들은 프라하에서 가장 높은 산에 있는 대성당의 좋은 기운이 프라하로 내려가는 것을 원치 않아 성당의 주변을 막을 수 있도록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일본이 우리나라에 쇠말뚝을 박았던 것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그때 만들어진 건물이 바로 대통령궁이란다. 현 체코 대통령은 아직도 그 대통령궁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고 두 번 다시는 이런 일들을 격지 말자’라는 이유에서란다. 이것이 아픈 역사를 받아들이는 체코인들의 마음, 동병상련(同病相憐)을 겪었던 우리도 그냥 흘려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 대통령궁 앞 광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오늘은 독립기념일(10월28일),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 기념식을 대통령이 주관하는데 오늘 이곳에서 열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다. 넘쳐날 것이 뻔한 인파도 문제겠지만 그보다는 대통령의 경호를 위한 보안이라도 강화될 경우에는 이곳을 벗어나기조차 어려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밝을 때 다시 찾은 화약탑, 왼편이 화약탑이고 오른편이 ‘프라하 시민회관’이다.
▼ 나타나는 풍경들이 왠지 눈에 익다. 인근의 도시들은 몇 곳 방문해봤지만 프라하만큼은 초행길인데도 말이다. 이 낯설지 않은 분위기는 무엇 때문일까? 필요 없는 궁금증에 골머릴 썩히다가 문득 하나의 이유를 떠올린다. 그래 내가 즐겨보는 영화들의 배경이 바로 프라하였다. ‘아마데우스’ ‘미션 임파서블’ ‘트리플X’ ‘블레이드2’... 극장에 앉아 가슴을 졸이며 봤던 장면들을 바로 여기서 촬영했던 것이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2005년 가을에 방영되었던 SBS-TV의 인기 주말드라마 ‘프라하의 봄’의 배경 또한 여기였었다. 당시 난 ‘솔직 담백한 외교관과 용감무쌍한 말단 형사가 엮어가는 특별한 사랑 이야기’에 심취했었으니 어찌 그 분위기를 잊을 수 있었겠는가. 프라하의 거리 풍경이 낯설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 바츨라프광장(Wenceslas Square)으로 걸음을 옮긴다. 거리의 이름을 낳게 한 ‘바츨라프 기마상’을 시작으로 800m 정도 뻗은 이 광장에서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의 투쟁은 무력으로 침공한 소련군의 탱크에 짓밟혔다. 슬픈 역사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만큼 지금 바츨라프 광장은 평화롭기만 하다. 바츨라프 광장에서는 번화한 프라하 시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름은 광장이지만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와 같은 모습이다. 광장 양편으로 상점과 레스토랑 호텔들이 줄지어 있어 프라하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가까이서 엿볼 수도 있다. 또 하나, 이곳에는 세계 10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프라하 국립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짬을 내어 한번쯤은 들러볼 일이다.
▼ ‘거리의 악사’도 프라하의 명물 중 하나고 꼽을 수 있다. 프라하성이나 카를다리는 물론 거리를 돌아다니다보면 곳곳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악사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는 제각각, 악기에 어울리는 곡을 골랐는지 연주곡 또한 제각각이다. 거리의 악사들이 가득한 프라하의 거리를 걷다 보면 마음속에 음악이 가득 차게 된다. 꼭 음악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 어찌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나 보다.
▼ 바츨라프광장에 다녀오는 길에 들른 하벨시장(Havel's Market), 장터는 길의 양 옆과 중앙에 길게 꾸려져 있다. 그곳에는 항상 사람들로 넘친다. 물론 생필품을 사려는 현지인들이겠지만 내가 보기엔 여행객들의 숫자가 더 많을 것 같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가장 근접하게 보고 싶은 여행객들이 가장 들러보고 싶어 하는 곳이 바로 전통시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 작은 기념품과 인형, 시계, 그림 등 선물용 상품들은 물론이고, 꽃이나 과일 등 다양한 상품들을 팔고 있다. 맥주의 최대소비국 중 하나답게 예쁜 맥주잔도 여러 가지 스타일로 진열되어 있으니 선물용으로 하나쯤 골라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만일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체리와 딸기 등 여러 가지 작은 과일들을 하나의 컵에 골고루 담아놓은 것이 좋을 테고 말이다.
▼ 골목길을 걷고 있는데 행위예술가가 보인다. 온몸에 페인팅(painting)을 하고 마치 석고상처럼 꼼짝 않고 서있다. 집사람의 뒤를 따라 걷고 있던 난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다. 그리고 그 예술가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녀를 놀래주라는 신호이다. 물론 손가락으로 돈의 모양을 만들어냈음은 물론이다. 과연 내 작전은 대 성공이었다. 그리고 효과도 만점이었다.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던 집사람이 이어지는 익살스런 그의 연기에 마냥 즐거워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분 좋아진 나도 ‘원 플러스 원’으로 보답했다. 1유로(EURO)만 주어도 될 것을 감사의 표시로 하나 더 준 것이다.
▼ 다시 돌아온 구시가 광장, 골목길을 통과하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광장. 가장 먼저 구시청사 벽에 걸린 천문시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천문시계는 70m가량의 높이로 1410년에 만들어졌다. 시계가 정각을 알리면 천사의 조각상 양 옆에 있는 두 개의 창문이 열리고 종소리와 함께 12사도(Twelve disciples)들이 그 모습을 비춘다. 천문시계를 지키는 해골은 천천히 움직이며 시간을 알리고 12사도가 모습을 감추면 황금색 닭이 얼굴을 내밀고 목청껏 울부짖는다. 그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관광객들은 황금색 닭의 귀여운 포효에 박수를 보내며 흩어진다. 참고로 천문시계는 1410년 시계공 미쿨라시(Mikulas of Kadan)와 뒷날 카를 대학의 수학교수가 된 얀 신델(Jan Sindel)이 공동으로 제작하였다. 1490년 달력이 추가로 제작되고, 외관이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참고로 천문시계는 상하 2개의 큰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 시계를 칼렌다륨, 아래쪽을 플라네타륨이라고 부른다. 칼렌다륨은 천동설의 원리에 따른 해와 달과 천체의 움직임을 묘사하였다. 일반적으로 1년에 한 바퀴씩 돌면서 연, 월, 일, 시간을 나타낸다. 아래쪽 원은 12개의 계절별 장면들을 묘사하여 제작 당시 보헤미아의 농경생활을 보여준다. 매시 정각에 해골모형이 움직이는 곳은 칼렌다룸의 위이다.
▼ ‘구시가광장’은 ‘얀 후스광장’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종교개혁 하면 대부분 마틴 루터(Martin Luther)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루터보다 100년 먼저 종교개혁을 외친 사람이 바로 카를대학 교수였던 ‘얀 후스(Jan Hus)’이다. 하지만 개혁은 성공하지 못하고 공개 화형으로 죽게 된다. 화형 당하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 ‘진실을 생각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행하라’였다고 한다. 순교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그의 동상(Jan Hus Monument)이 이곳 광장에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 광장에 들어서면 70m 높이의 첨탑 두 개가 세워진 틴성당(Kostel Panny Marie Pred Tyne)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낸다. 틴 성당은 1365년 세워진 건축물로 고풍스런 외관이 인상적인 곳이다. 내부에는 성모 마리아 상과 예수 그리스도 상이 성당을 지키고 서 있다.
▼ 프라하 투어의 막바지, 떠나기 전에 꼭 눈에 담아야할 풍경이 하나 있다. 바로 프라하의 전경(全景)이다. 이런 풍경을 보기 위해 선택한 곳은 천문시계 탑의 전망대이다.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방법은 두 가지, 한가운데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거나 엘리베이터를 가운데에 두고 빙글빙글 돌면서 오르도록 되어있는 계단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아름다운 프라하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잘 그린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 고딕 양식의 탑 위에서 내려다보는 옛 시가지다. 붉은색의 지붕이 덮인 건물들과 좁은 골목길, 틴 성당과 성 니콜라스 성당 그리고 저 멀리 프라하 성까지 볼 수 있다. 중세의 건물들이 너무도 예쁘다.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양식의 건축물들이란다. 그래서 구시가가 얻게 된 또 하나의 이름이 ‘건축의 박물관’이란다. 그런 연유로 이곳 구시가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런 건축물들에 홀딱 빠졌던 사람 중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북한의 독재자였던 김일성이다. 그가 프라하를 방문했을 때, ‘한번 꼭 살아보고 여유롭게 즐기고 싶은 곳입니다’라고 했다는데, 그곳이 바로 구시가 광장 주변이었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지 말고 실행에 옮겼더라면 북한동포들의 삶은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나아졌지 않았을까 싶다. 떠나면서 국민들에게 통치권을 넘겨준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 그리고 발아래 구시가 광장에는 거리의 악사가 공연을 하고 있는 것이 내려다보인다. 그를 빙 둘러싼 수많은 인파를 보면서 과연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rak) 같은 유명한 음악가 태어날 수 있는 토양을 갖은 나라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참고로 구시가 광장(Old Town Square)은 블타바 강 오른쪽 오래된 구시가의 중심에 위치한 광장이다. 11세기 형성된 이래 오늘날까지 광장으로 쓰고 있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공화국 몰락 선언, 1968년 프라하의 봄, 1989년 벨벳 혁명이 모두 이곳에서 시작됐다. 틴 성당, 구시청사, 천문시계, 얀 후스 동상 등 다양한 볼거리가 구시가 광장 주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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