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靑山島)여행 #2 : ‘슬로길’ 걷기
산행일 : ‘17. 4. 22(토)
소재지 : 전남 완도군 청산면
걷기코스 : 범바위→말탄바위→권덕리→낭길→구장리→고인돌길→서편재길(당리)→도청항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청산도는 더딘 풍경으로 삶의 쉼표가 되는 섬이다. 푸른 바다와 푸른 산, 구들장논, 돌담장, 해녀 등 느림의 풍경과 섬 고유의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청산도는 이제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1981년에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 12월 1일에는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선정되었다. 청산도 마을을 잇는 길 이름도 ’슬로길‘이다. 국제슬로시티연맹은 2011년 청산도 슬로길을 세계 슬로길 1호로 공식 인증했다. 걷기 여행자에게 필수 방문지가 된 섬은 미역 줄기처럼 이어지는 슬로길 11개 코스를 갖췄다. 영화 ‘서편제’ 촬영 무대로 유명한 당리 언덕길, 구불구불한 옛 돌담으로 채워진 상서마을 등은 대표적인 슬로길 코스다. 신흥마을 풀등해변, 해송 숲이 어우러진 지리해변 역시 슬로길이 지나는 청산의 아름다운 해변이다. 또한 전통 어로(漁撈)인 휘리체험, 슬로푸드 체험 등 느림이 곁들여진 다양한 경험은 슬로시티 청산도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오늘은 ‘슬로길’ 5코스의 일부구간과 4코스 전구간, 그리고 1,2,3코스의 일부구간을 걸어보기로 한다.
▼ 슬로길 걷기의 시작은 범바위(완도군 청산면 읍리)
범바위에서부터는 ‘슬로길’을 따른다. 걷기 여행자에게 필수 방문지가 된 청산도는 슬로길 11개 코스를 갖췄다. 길마다 걸맞은 풍경이 어우러지고 사연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길이다. 총 42km에 이르는 슬로길 전체를 걸으려면 최소한 이틀은 잡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3시간이다. 꼭 둘러보고 싶은 곳만 추려서 들러봐야 하는 이유이다. 참고로 청산도는 2007년 신안 증도, 담양 창평 등과 함께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돌멩이로 투박하게 쌓아 올린 담장, 바다와 어우러진 다랭이논, 얕은 바다에 그물을 친 뒤 줄다리기라도 하듯 전통 방식으로 고기를 잡는 휘리, 제주에서 건너와 정착한 해녀의 미소 등은 청산도의 자연과 사람이 모두 슬로시티로 지정된 배경이다. 섬이 지향하는 슬로건 역시 ‘삶의 쉼표가 되는 섬’이다. 느림의 종, 쉼표 조형물 등 느림을 형상화한 조각물이 곳곳에 있다. 뭍에서 청산도를 오가는 여객선 이름도 ‘아시아 슬로시티호’ ‘슬로시티 청산호’다.
▼ 내려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권덕리가 내려다보인다. 마을 앞 바다에는 양식시설들이 질서 있게 도열해 있다. 파도가 높은 망망대해를 맨몸으로 맞고 있으니 전복 양식은 아닐 것이다. 미역양식 시설쯤 되지 않을까 싶다.
▼ 잠시 후 안부에 내려서면 길이 세 갈래(이정표 : 말탄바위↑ 150m/ 권덕리→ 700m/ 장기미해변← 1.5Km/ 범바위↓ 400m)로 나뉜다. ‘슬로길’의 2코스인 ‘범바위길’과 또 다른 둘레길인 명품길이 ‘十’자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명품길’은 권덕리 말탄바위에서 청계리 장기미해변까지의 2.5㎞ 구간에 작년(2016년)에 새롭게 조성됐다. 기존의 슬로길(42.195㎞)이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인문학적인 길인데 반해, 명품길은 태고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자연이 만들어낸 길이라고 한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멀리 여서도와 제주도까지 볼 수 있으며, 해안 절벽에 소금처럼 부서지는 파도와 기암괴석, 그리고 탁 트인 바다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단다.
▼ 맞은편 능선으로 오르면 바윗길이 나타난다. 왼편은 수십 길의 해벽(海壁)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금 전 안부에서 만났던 이정표로 미루어보아 이쯤이 ‘말탄바위’인 모양인데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모르겠다.
▼ 이제부터는 아름다운 해안가의 비경(祕境)을 보면서 ‘슬로길’을 걷게 된다. 말탄바위의 바윗길을 타고 내려오는 이 길은 서슬 시퍼런 해벽이 바다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바닷바람이 만들어 놓은 비경이다. 청산도의 푸른 하늘과 바다, 그리고 산이 조화를 이룬 절경이 눈의 호사(豪奢)를 시킨다.
▼ 앞바다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 상도가 떠있다. 범바위 부근 해역(海域)은 자기장(磁氣場)이 세다고 소문나있다. 근처를 지나는 배들은 조심을 해야겠다. 하긴 범바위 부근을 지나는 어부들은 아예 나침반을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안개라도 짙게 끼일라치면 어부들은 이 지역의 진입을 삼가고 먼 바다로 돌아갈 정도란다. 해도(海圖)에도 이 지역에다 '자기장 이상 지역'으로 표시하고 있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참고로 청산도에서 1.3Km 떨어진 저곳 상도와 권덕리 마을 끝, 그리고 범바위에 삼각선을 그은 안쪽 지점은 ‘한국판 버뮤다 삼각지대’로 통한다. 이 지역 해도(海圖)에도 ‘자기장 이상 지역’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배에 달고 다니는 나침반이 그 안에서는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는 배들은 GPS고, 나침반이고 간에 계기에 의지하지 않는단다. 시계비행(VFR)처럼 그저 눈만 믿고, 눈으로 바닷길을 헤쳐 나간단다.
▼ 깎아지른 해안 절벽 아래를 오가는 파도는 잔잔하다. 한껏 자세를 낮추었다. 내 마음도 절로 파도처럼 잔잔해지고 있다. 그렇게 찾아온 여유는 자신도 모르게 ‘슬로길’의 느림에 맞춰져 있다.
▼ 바윗길이 끝나면 ‘슬로길’은 시멘트포장 농로(農路)를 따른다. 가는 길에는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밭을 심심찮게 만난다. 한마디로 꽃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길이다. 참고로 슬로길은 옛 사람들이 마을 간을 오갈 때 이용하던 이동로(移動路)다. 이 길을 걷다보면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저절로 발걸음이 늦어진다고 해서 ‘슬로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그렇게 잠시 진행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권덕리마을’이 나타난다. 청산도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은 1740년(영조 16년) 무렵에 읍리에서 살던 ‘제주 양씨’가 이곳으로 이주해오면서 생겨났다. 범바위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호암동’으로 불리다가 고종 37년에 권덕포(권득게)로 이름이 바뀌었다. 탁 트인 바다를 끼고 있어 일출과 일몰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처럼, 어릴적 술래잡기의 추억이 떠오르는 섬마을의 풍경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안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 삼거리에서는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오른편이 더 널찍하다고 들어설 경우에는 읍리를 거쳐 도청항으로 이어지니 주의한다. 하긴 슬로길의 이정표들이 잘 정비되어 있어 조금만 주의한다면 길을 잘 못 들어설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곳에서 ‘슬로길’은 4코스로 바뀐다. 그리고 이 길은 ‘낭길’이라는 이름으로 구장리까지 이어진다.
▼ 어떤 길이든 길은 길과 연결된다. 그러니 어떤 길로 가야할지를 놓고 고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주요 포인트마다 이정표를 세워 두었기 때문이다. 이정표의 종류도 다양하다. 방향과 거리표시를 위주로 한 이정표들이 대부분이지만 지도(地圖) 위에다 현재의 위치를 표시해 놓은 것도 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길바닥에다 방향표시를 그려놓기도 했다. ‘트레킹 마니아(trekking mania)’들의 로망(roman)인 ‘산티아고 순례길( Camino de santiago)’의 화살표를 벤치마킹(bench marking)한 모양으로 색깔도 역시 같은 노란색이다.
▼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다싶으면 바닷가에 이르게 되고, 길은 맞은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 길가에 ‘바다정원’이라는 주막(酒幕)이 있음을 알려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막걸리 한 병에 해초전을 끼워서 만 원짜리 한 장에 모시겠단다. 시원하다는 홍보문구에 이끌려 들어가 보려다가 이내 마음을 바꾸고 만다.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지 못한 탓이다. 아니 그보다는 조금 전 범바위에서 쉬면서 집에서 준비해온 얼음막걸리로 목을 축였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솔직한 표현이 되겠다.
▼ 잠시 후 산자락으로 놓인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청산도의 남쪽 해안은 10m에서 20m쯤 되는 높이의 해식애(海蝕崖) 즉 해안 절벽이 발달해 있다. 4코스는 이 해안의 낭떠러지 위로 나있다. '낭길'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슬로길’ 안내판에 표기해 놓은 ‘낭떠러지 길로 하늘에 떠있는 듯, 바다에 떠있는 듯, 모호한 경계선’이라는 문구를 보면 말이다.
▼ 이곳을 지나면 슬로길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숲과 바다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길을 걷게 된다. 해안가 절벽 위로 오솔길처럼 고운 길,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 향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걷는 길이 나타난다. 그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탓에 가는 길을 멈추고 바다로 눈길을 한번 씩 주어야만 걸을 수 있는 그런 길이다.
▼ 바다 속에서부터 솟아 오른 가파른 절벽 옆으로 난 낭떠러지 길을 지나갈 땐 아찔한 고도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바다 방향에 튼튼한 동아줄을 난간 삼아 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저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스릴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만일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발아래로부터 들려오는 철썩철썩 파도소리에 귀 기울여 볼 일이다.
▼ ‘슬로길’을 걷다보면 가벼운 배낭을 맨 여행객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1코스에서 시작해서 코스의 순서대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싶다. 그렇다면 그들은 꽤나 먼 거리를 걸었을 게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없다. 하나 같이 모두 여유롭고 행복한 표정들이다. 피로를 느끼지도 못할 만큼 아름다운 길이었다는 증거이리라.
▼ ‘슬로길’은 느림의 길이면서 또한 호젓한 사유(思惟)의 길이다. 수시로 변화를 주는 주변 풍경들을 눈여겨 살펴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 덕분인지 길을 걷는 도중에 어여쁜 꽃들이 많이 눈에 띈다. 특히 절벽 길에서 자주 마주칠 수 있었던 홍자색 꽃 '자란'은 그 중에서도 최고로 예뻤다. 남도지방의 양지쪽에서 자라는 난초과의 '자란'은 수줍은 듯 발그레한 꽃잎의 얼굴도 고왔지만, 경쾌하고 날렵하게 피어난 꽃잎의 자태도 일품이었다.
▼ 건너편에 바다를 향해 길게 누워있는 해식애(海蝕崖)가 펼쳐진다. 저 벼랑위로도 ‘슬로길’이 나있다고 한다. 제1코스의 한 구간인 ‘사랑길’이다. 젊은이들이 데이트 삼아 걷기에 딱 좋은 길이란다.
▼ 1시간 남짓을 걸어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구장리이다. 길고 넓은 농토가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구장리라고 불리는데, 1914년 읍리에서 살던 ‘제주 양씨’가 이곳으로 이주해오면서 생겨난 마을이란다. 바닷가로 내려서면 잘 지어진 정자가 여행객들을 맞는다. 낭떠러지 위를 걸으면서 긴장했던 마음을 잠시 진정시켜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이곳에는 정자 말고도 ‘슬로길 안내도’와 슬로길에 대한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4코스인 낭길과 3코스인 고인돌길이 서로 맞교대 하는 지점이어서 일 것이다. 참고로 이곳 구장리는 2009년엔가 청산도의 전통 장례(葬禮)인 초분(草墳)이 치러졌던 곳으로 유명하다. 초분이란 일종의 풀 무덤으로, 시신 또는 관을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짚이나 풀 등으로 엮은 이엉을 덮어 두었다가 2~3년 후 남은 뼈를 씻어 땅에 묻는 것을 말한다. 고기잡이 나간 상주가 임종을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일단 초분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한 뒤 상주가 돌아오면 장례를 치루는 것도 자연에 순응하는 방법이었으리라.
▼ 구장리를 지나면서 ‘슬로길’은 도로를 따른다. 옛날부터 나있던 길이다. 주민들이 오가던 이동로가 지금의 '청산도 슬로길'이 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이 구간은 시멘트포장 도로와 겹친다. 하지만 자동차 한 대 보이지 않는다. 슬로길을 걷는 여행객들을 제외하면 인적까지 끊긴 한적한 길이다. 시간이 더디게 가기에 마음껏 게으름을 피워도 탓하지 않을 것만 같은 섬. 느리게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섬. 그런 청산도에 딱 어울리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이런 길을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소중한 쉼표의 해답’을 만나게 될 것 같다.
▼ 건너편 해안이 다시 한 번 눈에 들어온다. 당리에서 구장리를 잇는 해안절벽길이다. ‘슬로길’의 2코스인데 숲의 고즈넉함과 해안의 절경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길이란다. 주민들은 이 길을 '연애바탕길'이라고 부른다던데 공식 이름은 ‘사랑길’로 되어 있다.
▼ 도로를 따라 얼마간 걷다보면 왼쪽 저 멀리에 언덕이 나타난다. 그 위에는 예쁜 집 한 채가 지어져 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내 의도를 눈치 챘을 것이다. 이쯤에서 읍리로 나가는 도로를 버리고 왼편에 보이는 조금 좁아진 길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당리마을로 연결되는 곡선(曲線) 길이다. ‘슬로길’은 어느 곳 하나 직선(直線)이 없다. 그래서 직선보다는 곡선, 인공보다는 자연이 청산도의 자랑거리다. 유채꽃과 보리밭을 구경하며 구부러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논두렁과 밭두렁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들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는 말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여유를 가져본다.
▼ 아침에 보적산으로 가는 길에 보았던 ‘청산진성’이 또다시 나타난다. 반대편인 모양이다. 청산도는 옛날부터 우리나라 서남해안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 일대가 전란에 휩싸여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가 효종 때 다시 입도(入島)했다. 이 지역은 제주도와 연결되는 해로(海路)상에 위치하고 있어 끊임없이 왜구의 침입을 받아 왔다. 고려 말과 조선 태종(1409년) 때부터 왜구들은 민간인을 납치해 도주하는가 하면 약탈도 많이 했다. 이러한 왜구들의 잦은 출몰과 임진왜란으로 청산도를 비롯한 주변 도서 지역 주민이 흩어지게 되었고, 청산도 역시 공도(空島)가 되었다. 이후 해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청산도는 서남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1866년(고종 3년)에는 당리 마을 언덕배기에 청산진성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세월이 흐르면서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2010년에 다시 복원했다.
▼ 당리마을의 언덕으로 오른다. ‘서편제’와 ‘봄의 왈츠’를 촬영했던 언덕이다. 이 언덕 근처는 청산도를 대표하는 슬로길 1코스로 봄이면 청보리와 유채꽃으로 단장된다. 참고로 청산도는 임권택 감독의 한국적인 풍경으로 유명한 영화 '서편제'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런 입소문에 기름을 붓은 것이 KBS 드라마 '봄의 왈츠'와 SBS 드라마 '여인의 향기'였다. 이 드라마들이 인기를 타면서 청산도는 침체기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면 된다.
▼ 사방이 온통 유채꽃 천지다. 간간히 푸른 마늘밭도 석여있다. 그 사이로 돌담이 경계석 노릇을 하는 길이 나있다. 노란 유채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돌담을 보니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그래 바로 이곳에서 아름다운 풍경과 구성진 창으로 유명한 서편제를 촬영했었다.
▼ 청산도의 산하(山河)는 봄볕이 완연하다. 유채꽃이 만발한 영화촬영지 주변은 사방이 노란색이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노란 유채꽃과 청보리 사이를 걷다보면 자연과 동화되어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모든 근심과 걱정을 털어버린 후에야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 저만큼 유채꽃밭 사이로 난 길이 보인다. 길 양쪽이 무릎 높이의 돌담이 쳐져 있는 이 길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로 유명해졌다. 아니 청산도의 전체 이미지를 높이는데 이 영화 한 편이 큰 몫을 했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서편제의 주인공들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는 장면은 느리게 흘러가는 청산도의 시간을 반영했다.
▼ 언덕에 올라서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당리를 거쳐 도청항으로 연결된다. ‘봄의 왈츠’ 촬영 세트장을 들러보고 싶어 왼편 화랑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황톳길을 따라 잠시 이동하니 돌담 너머로 하얀 집이 나온다. ‘봄의 왈츠’ 촬영지란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그림 같은 집이다. 그 앞으로 앙증맞은 돌담의 멋진 길이 길게 이어지는 그런 집이다.
▼ ‘슬로길’의 하이라이트는 유채꽃밭 사이로 난 황톳길이다. 하지만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인 ‘왈츠하우스’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구불구불 길 따라가다 보면 만나는 하얀색의 예쁜 펜션이다. 입구에는 빨간 우체통이 바다를 향해 서있고, 드라마 주인공들을 그려 넣은 보드(board)판도 세웠다. 기념사진이라도 찍어보라는 모양이다. KBS-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인기드라마의 촬영 세트장이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음은 물론이다. 옆에는 SBS-TV의 인기드라마였던 ‘여인의 향기’가 촬영됐던 곳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따로 세워져 있다. 그만큼 이 부근이 아름답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건물 내부는 드라마 때 사용했던 아름다운 소품과 가구들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평상시엔 문을 닫지만 예약을 하면 숙박도 가능하다니 시간이 날 경우에는 하룻밤 머물러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봄이면 유채꽃과 청보리가 그리고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니 말이다.
▼ 건물 앞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슬로길 축제를 맞아 열리는 이벤트인 모양이다.
▼ 세트장 옆 공터의 담벼락에 서면 도락마을 앞바다가 여행객들을 동화 속으로 이끈다. 전편(보적산 산행)에서 설명했듯이 ‘SBS-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피노키오의 배경지가 되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다른 한편으로 저곳은 ‘어촌체험마을’을 운영하는 곳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그중에서도 전통적 고기잡이 방식 중의 하나인 ‘독살체험’은 어린이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단다. 독살이란 해안에 쌓아올린 돌담장을 이용해서 고기를 잡는 어로(漁撈)의 한 형식이다. 바닷물과 함께 들어온 고기가 썰물이 되어도 못 빠져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돌담 안에 남아있는 고기를 그냥 줍기만 하면 되니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도 하겠다. 참고로 독살은 돌로 담을 쌓기 때문에 한자어로 석방렴(石防簾)이라고 부르고 서해안 지역에서는 독살 외에 ‘독장’, ‘쑤기담’이라고도 부른다. 제주도에서는 ‘원담’이다. 근래에는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데다 보수 관리에 많은 어려움이 있어 대부분 폐쇄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에서 체험코스로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다.
▼ 조금 떨어져 있는 도청항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심심찮게 배들이 들락거리고 있다. 요즘이 축제기간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이런 풍경들은 잘 그린 그림엽서처럼 한눈에 쏙쏙 담겨간다.
▼ 왈츠하우스 너머는 화랑포로 넘어가는 산책로이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이 부족한 탓에 그곳까지 둘러볼 여유는 없다. 반대편에 있는 서편제 촬영장으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 이유이다. 이 일대는 한국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의 하나로 꼽히는 ‘서편제’ 촬영지이다. 가장 한국적인 소재인 판소리로 한국인의 한과 정서를 빼어나게 표현한 서편제는 이곳 청산도의 아름다움과 절묘하게 조화되어 빛을 내었다. 돌담 사이 황톳길을 따라 유봉, 송화, 동호 세 주인공이 구성진 진도아리랑의 가락에 맞추어 한바탕 신명나는 소리판을 덩실덩실 벌이며 내려오던 장면이 바로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노랫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던 장면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애달플 정도로 예뻤던 송화(오정해)가 단단히 한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 유채꽃밭에서 추억을 남기며 환하게 웃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그 사이로 길이 나있다. 직선보다는 곡선, 인공보다는 자연이 청산도의 자랑거리다. 유채꽃을 구경하며 구부러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세트장과 유채꽃 물결, S자형 오름길과 바닷가의 갯마을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자연에 순응하면서 순리대로 사는 섬사람들의 생활이 이해된다
▼ 촬영지 옆 언덕은 작은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정자와 벤치 몇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그런데 정자 옆에 세워진 동상(銅像)이 무척 낯설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완도군수이다. 옆에는 그의 약력을 적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세운 모양인데 내 눈에는 뜬금없어 보인다. 얼마나 큰 업적을 이룩했는지는 몰라도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세우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북한도 아니고 말이다.
▼ 정자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이 몇 보인다. 서편제의 삼총사, 즉 유봉과 송화, 그리고 동호로 분장한 사람들이다. 잠시 후 이들의 창(唱)을 들을 수 있었던 걸로 보아, 이번 행사를 위해 섭외된 판소리 가수들이 아닐까 싶다.
▼ 공원의 뒤에는 주막(酒幕)을 배치했다. ‘서편제 쉼터’라는데 메뉴판에는 ‘느림보의 미학 슬로장터’라고 적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초비빔밥과 오징어무침 등의 식사는 물론이고 술과 안주도 판다. 삼계탕과 오리구이 물회 등 계절음식도 준비되어 있다. 마침 경관까지 좋으니 주안상 차려놓고 망중한이라도 즐겨볼 일이다.
▼ 주막에서는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도락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가파른 언덕을 깎아 만든 다랑논에는 노란 유채꽃이 만발해 있고, 바다에는 전복 양식장들이 연병장의 군인들처럼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경화면으로 깔기에 충분한 아름다운 경관이라 하겠다.
▼ 주막을 나서니 사진판들이 늘어서 있다. 청산도의 일상을 촬영한 작품들인데, 이번 축제의 일환으로 기획된 행사인 모양이다. 그 뒤는 솔숲이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숲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는 높은 돌담에 둘러싸인 당집(신을 모셔 놓고 받들어 위하는 집)이 있다. 원래부터 있던 당집이 허물어지자 최근에 새로 고쳐 지은 것이란다. 당리라는 마을 이름도 이 당집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매년 정월에 이곳에서 제(祭)를 지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 당리를 모두 둘러봤으면 이젠 돌아갈 차례이다. 당집에서 몇 걸음 걷지 않아 아까 아침에 보적산으로 가는 길에 헤어졌던 삼거리를 만난다. 이어서 아침에 올라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면 도청항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트레킹이 끝을 맺는다. 도청항에 이르니 거리가 온통 사람들로 넘치고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그래 이 섬은 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사월 한 달 동안은 축제의 장으로 변한다. 이 기간에만 섬 주민의 30배가 넘는 7만여 명이 다녀간다고 한다.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흘러가는 ‘느림의 미학’이 청산도의 기적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 도청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2017 완도국제해조류박람회’의 성공개최를 기원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게 보인다. 2014년엔가 김, 미역, 다시마, 톳 등 해조류를 주제로 '해조류 테마 국제박람회(Seaweeds Expo)'가 열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두 번째라니 매 3년마다 열리는 모양이다. 이 또한 세계 최초라니 완도는 세계 최초가 많은 섬인가 보다. ‘슬로길’도 세계 최초였으니 말이다. 세계 최초는 다른 부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미국 CNN이 선정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33선에 포함되었으며,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99선에도 이름이 올랐다. 이 모든 게 ‘슬로길’ 덕분이다. 이 모든 것의 전제조건이랄 수 있는 ‘슬로시티’는 ‘치타슬로(cittaslow) 국제연맹’의 철저한 실사를 통해서 지정된다. 이를 위해서는 인구가 5만 명 이하여야 하고, 전통적인 수공업과 조리법이 보존되어 있어야한다. 고유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한편, 자연친화적인 농법이 사용되고 ‘속도’가 중심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는 도시가 슬로시티라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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