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도(長古島)
여행일 : ‘17. 12. 3(일)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장고도리)
트레킹코스 : 대머리선착장→소나무 숲길→명장섬해수욕장→당너머해수욕장→데크전망대→장고도리→등대선착장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오천면(보령시) 해안에서 서쪽으로 17.4㎞ 떨어진 태안반도 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주위에는 안면도를 비롯하여 고대도와 삽시도, 원산도 등이 있다. 섬의 모양이 장구와 같다 하여 장구섬 또는 장고섬·외장고도 등으로 불리다가, 1910년부터 장고도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섬은 일부에 구릉지(丘陵地)가 있을 뿐 대부분이 평지로 이루어졌다. 해안선은 비교적 단조로우며 간석지(干潟地)가 발달해있을 뿐이고, 관광객들의 눈요깃거리인 해식애(海蝕崖)는 일부 해안에서만 보인다. 명장섬과 몇 개의 여(暗礁,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제외하고는 크게 내세울만한 볼거리들이 없다는 얘기이다. 대신 이 섬에는 등바루와 진대서낭제, 용왕제, 등불써기 등과 같은 다양한 민속놀이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중 처녀들이 조개를 채취하며 땀을 흘린 뒤 휴식과 오락을 즐기는 놀이인 ‘등바루’는 선착장 앞에 안내판까지 세워놓았을 정도로 이 섬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다.
▼ 찾아오는 방법
장고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대천여객선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섬으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매일 3회(7:40, 12:00, 15:00)씩 운항하는데 시간은 대략 1시간20분 정도가 걸린다. 이 배는 장구도에 이르기 전, 삽시도에 먼저 들르니 안내방송을 잘 들어야만 한다. 되돌아 나올 때는 고대도를 찍고 대천항으로 나간다. 이들 고대도, 장고도, 삽시도 세 섬은 편의상 ‘장고도권역’으로 묶인다. 이 장고도권역은 지난 2010년 행정안전부에 의해 ‘대한민국 명품섬 베스트 10’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장고도까지 가는 승선권(10,100원)을 사서 선착장으로 들어가니 ‘가자 섬으로’라는 꽤나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페리호가 기다리고 있다. 세상이 변하다보니 이젠 배의 이름까지 젊은이들의 입맛에 맞추어 가는가 보다. 그나저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한고속페리호’가 다닌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혹시 배를 잘못 타는 게 아닐까 하고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최근에 새로 투입되었단다. 새 배이니 그만큼 안전성의 높아졌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울부짖다시피 하고 있는 엔진 등의 소음을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 말이다.
▼ 선실 안에서 1시간 이상이나 뭉그적거리는 것이 지루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갑판으로 나오면 된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매점에 들러 새우깡 한 봉지를 사가지고 나오라는 얘기이다. 거기다 캔맥주까지 챙긴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밖으로 나오면 갈매기들이 시끄럽게 울어댄다. 사람들이 주는 과자에 길들여진 갈매기들은 힘차게 날개를 저어가며 장고도까지 동행을 해준다. 갈매기들과 장난이 시들해질 수도 있다. 이때는 챙겨 나온 맥주 한 잔 들이키며 뱃길 주변의 풍광에 푹 빠져볼 일이다.
▼ 삽시도에 이어 장고도의 ‘대머리선착장’에 도착한다. 대천항을 출발한지 정확히 1시간20분만이다. 선착장에는 ‘어촌체험마을 방문객센터’를 지어놓았다. 탐방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라고 보면 되겠다.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대합실(待合室)도 만들었다. 매점 등의 편의시설은 보이지 않지만 널찍하면서도 여간 깔끔한 게 아니다. 그만큼 잘 관리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화장실도 보인다. 장고도에서 유일하게 만난 화장실다운 화장실이었으니 참조한다. 참! 조금 못미처에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그 뒤에는 안내판의 설명을 보완이라도 해주려는 듯 돌담까지 둥그렇게 쌓아놓았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전승 민속놀이인 ‘등바루놀이’에 대한 유래와 놀이의 순서를 적어놓은 안내판과 돌담이다. 등바루라는 어원(語源)은 ‘등불을 밝힌다’, ‘등불을 켜 들고 마중 나온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력 정월 대보름이나 4월 초파일을 전후로 해당화 만발한 시점에 초경을 지낸 규수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등불을 밝히고 노래를 부르며 굴 캐기 경연을 벌인다. 7년쯤 전엔가 보도된바 있는 ‘등바루놀이’ 재연(再演) 행사에 관한 기사를 옮겨본다. <‘등바루놀이’는 장고도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처녀들의 집단놀이로 원래는 마을처녀들이 하루 전날 바닷가에 둥근 돌담(등바루)을 쌓는데, 돌담 안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바다 쪽을 향해 넓이 1m 정도를 터놓는다. 놀이 날이 되면 처녀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조개 등 어물잡기 경합을 벌이고 점심때가 되면 이긴 편과 진 편을 가린 후 돌담 안에서 한복을 차려입고 동그란 원을 만들어 앉아 점심식사를 하고 노래와 춤을 추면서 놀이를 하는 일종의 성년식(成年式) 성격을 보이는 놀이다.>
▼ 화장실의 오른편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예쁘장하게 생긴 ‘장고도 표지판’ 옆에 세워진 ‘해안탐방로 1구간’ 이정표(해안탐방산책로 0.15Km/ 방파제선착장(마을) 2.6Km)가 가리키는 ‘해안탐방산책’로 방향이다.
▼ 산책로 끄터머리에 가면 또 다른 이정표(명장섬 해수욕장← 1.25Km/ 대머리선착장↓ 1.25Km)가 기다린다. 이곳에서 탐방로는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그리고 50m쯤 전진하다 이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경사가 조금 가파르나 통나무계단을 놓아 오르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2013년 여름엔가 장고도의 ‘생태탐방로’가 조성되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당시 기사는 대머리선착장에서 명장해수욕장까지 1㎞정도 되는 구간을 해안길을 따라 산책할 수 있도록 소나무숲길을 만들면서 자연자원의 훼손을 최소화했다는 자랑을 하고 있었다. 4년이 지났는데도 주변이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는 것이 그동안 관리를 잘 해온 모양이다.
▼ 탐방로는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널따랗게 만든 것도 모자라 조금만 경사가 심하다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만들었다. 쉴만한 곳에 벤치를 놓아두는 건 기본, 심지어 어떤 곳에는 평상까지 깔아놓았다. 거기다 비탈 쪽에는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안전성까지 확보해 두었다. 탐방로를 가꾸는데 심혈을 기울인 지자체의 노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시가 일절 없다는 것이다. 이정표의 숫자를 조금 더 늘리면서 그 이정표에다 현재의 지명을 적어 넣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 좌우로 소나무숲이 울창한 길을 따라 얼마쯤 진행했을까 첫 번째 조망처를 만난다.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웃자란 조릿대 숲으로 둘러싸인 공터인데, 바다방향으로 조그만 틈새를 터놓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로 널디 너른 바다가 내다보인다. 그리고 그 바다에는 명장섬이 두둥실 떠있다.
▼ 명장섬해수욕장 가기 직전에 멋진 전망대 하나가 나타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해식애(海蝕崖)가 잘 발달되어 있는 곳이다. 해식애의 위 구릉지(丘陵地)에다 데크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 갯바위에서 바다낚시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곳 장고도가 바다낚시의 명소라고 하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 전망대에 서면 널따란 서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바다건너에는 육지(陸地)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섬 하나가 길게 누워있다. 안면도일 것이다. 그 왼편에 보이는 자그만 섬은 외도일 게고 말이다.
▼ 전망대에서 ‘명장섬해수욕장’까지는 해안선을 따라 길을 내놓았다. 차량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널따란 산책로이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해수욕장의 너른 백사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썰물 때면 그 넓이가 2km나 될 정도로 드넓은 해수욕장이다. 파도가 세지 않고, 수심이 깊지 않으며, 물이 따뜻하고, 동해를 방불케 할 정도로 깨끗해서 해수욕하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또한 조개나 맛살 등을 잡아볼 수 있는 자연체험장으로도 적당하다니 가족여행지로 괜찮을 듯 싶다.
▼ 백사장 가에는 오래 묵은 해송(海松)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그 아래에는 돌의자와 간이식탁, 그리고 평상 등을 놓아두었다. 휴가철에 찾아온 피서객들에게 넉넉한 해가림막이 되어 주기에 충분할 것 같다.
▼ 중간에 해수욕장을 벗어날 것을 지시하고 있는 이정표(소나무숲길← 0.67Km/ 해안탐방산책로↓ 0.25Km)가 나오나, 이를 무시하고 집단시설지구 방향으로 향한다. 해수욕장에는 민박집들이 들어서 있다. 펜션 등이 주류를 이루는 다른 해수욕장들보다 훨씬 더 정겨운 느낌이 드는 풍경이다. 아무래도 우리네 어린 시절의 바닷가 추억을 되살려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건물 벽에는 이생진 작가의 ‘장고도’라는 시(詩)가 적혀있다. 서산 출신인 그는 ‘섬 시인’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평생 섬을 찾아다니며 섬에 대한 시집을 많이 펴냈다. 약 30여권의 시집 중에서 10여권이 섬을 주제로 한 시집이란다.
▼ 명장섬은 장고도 최고의 명물이다. 해안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떠 있다. 마치 태안반도 꽃지해수욕장의 ‘할미·할아비바위’처럼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두 바위 사이에 초의 심지처럼 작고 가는 또 하나의 바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명장섬이 특별한 것은 물이 빠지면 걸어서 갈 수 있다는 데 있다. 모세의 기적처럼 썰물이면 바다가 갈라지면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자갈길이 열린다. 물때만 잘 맞추면 조개와 고동, 낙지 등 여러 해산물들을 직접 채취해 볼 수 있는 색다른 경험도 할 수 있다니 참조할 일이다.
▼ 명장섬해수욕장 일대는 저물녘이 되면 멋진 풍경을 선보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명장섬 뒤로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인다는 것이다. 이 때면 모든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해안을 따라 일렬종대로 늘어선 소나무 아래에 앉아 그 풍경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고 한다.
▼ 명장섬해수욕장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바다와 맞닿아있는 산자락 아래로 나있다. 자칫 방심해서 내려딛기라도 할 경우 바닷물에 풍덩 빠져버릴 정도로 바다와 가깝다. 그 바다의 파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문득 아까 해수욕장에서 보았던 이생진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평평한 수평을 잡아당긴 섬과 바다, 평행을 유지하기 위해 찢어지도록 긴장해 있다.> 그의 눈에 비쳤던 긴장감이 극에 달했나보다.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다.
▼ 바닷가를 따라 난 길을 따르는 진행이 더 이상은 불가능해졌다. 마지막 모퉁이를 마저 돌지를 못하고 산자락으로 올라선다. 어른의 키로 한 길을 훌쩍 넘기는 벼랑을 혼자서 오르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서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연인들에게 딱 좋은 구간이 아닐까 싶다. 아래서 밀어주고 위에서 끌어주다 보면 사랑은 이미 무르익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일행들끼리 서로 돕지 않고는 결코 올라설 수 없는 험난한 구간이다.
▼ 벼랑(깎아지른 듯 높이 서 있는 가파른 지형)을 올라섰다고 해서 길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길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잡목은 물론이고 명감나무 등 가시넝쿨까지 우거진 능선을 직접 길을 만들면서 진행할 수밖에 없다. 이때 주의할 게 있다. 능선을 따르지 말고 고개를 넘듯이 그냥 넘어가라는 얘기이다. 조금만 고생하면 당너머해수욕장으로 연결되는 제대로 된 길을 만날 수 있다. 능선을 고집할 경우엔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중간에서 되돌아 나와야만 하는 불상사를 겪게 될 것이다.
▼ 잠시 후 당너머해수욕장에 이른다. 해수욕장의 뒷산 이름이 ‘당산’인 걸로 보아, 당산 너머에 있는 해수욕장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해수욕장의 크기는 명장섬해수욕장의 절반인 1km 정도가 되는데 모래가 약간 검은색을 띤다는 게 특징이란다. 아니 또 다른 특징도 있다. 숙박시설과 편의시설, 해송숲 등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있는 ‘명장섬해수욕장’과는 달리 이곳은 텅 비어있는 느낌이다.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민박집 몇이 보일뿐 다른 편의시설은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저 무늬만 해수욕장인 셈이다.
▼ 이곳 당너머해수욕장에는 ‘용굴’이라는 기암괴석(奇巖怪石)이 있었다고 한다. ‘코끼리바위’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볼 수 없은 풍경이 되고 말았다. 태풍으로 이 바위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란다. 그 흔적이라도 찾아볼까 했지만 궂은 날씨는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밀물 때인데다 파도까지 높아 해안으로의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해안을 따라 난 탐방로를 걷을 수 있는 것만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센 파도가 일고 있었다.
▼ ‘당너머해수욕장’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해안가를 따라 나있다. 자연적인 길이 아니라 해안가를 다듬어서 만든 인위적(人爲的)인 길이다. 하지만 이 길은 파도가 높을 경우 이용을 삼가야할 것 같다. 정비를 하지 않은 탓에 곳곳이 붕괴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곳은 어른의 키를 훌쩍 넘겨버릴 정도로 깊게 무너져 내린 곳도 있다. 여성분들이라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구간이다. 거기다 그런 곳은 파도가 조금이라도 높을 경우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바닷가에 맞닿아있다.
▼ 잠시 후 길은 다시 해안가로 내려선다. 작은 몽돌이 깔려있는 멋진 곳이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경관은 조금 전에 지나왔던 ‘당너머해수욕장’보다 오히려 한 수 위가 아닐까 싶다.
▼ 자갈밭의 끄트머리쯤에 이르면 왼편 언덕으로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더 이상은 해안을 따라 길을 내는 게 불가능 했던 모양이다.
▼ 계단을 올라서면 임도로 연결된다. 아니 경작지 사이로 길이 나있으니 ‘농로(農路)라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삼거리에 이른다. 왼편은 ’청룡초등학교 장고분교장‘을 거쳐 ’장고도리‘로 연결되고,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 부근에 ’장고도 해안탐방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출발하는 지혜를 발휘해보자.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은 탐방로이니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방향을 틀자마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나무계단이 보인다. 이제부터 탐방로는 산길을 따른다. 잠깐! 발길을 너무 재촉하지는 말자. 해안으로도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으니 한번쯤 내려가 보자는 얘기이다. 조금 엉성하기는 해도 바닷가의 특징이랄 수 있는 해식애(海蝕崖)를 구경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반대편에는 돛단여도 보이나 잠시 후 전망대에서 다시 만나게 되므로 사진은 생략한다.
▼ 통나무계단과 데크계단이 번갈아 나오는 탐방로를 잠시 걷자 데크로 만든 전망대가 나타난다. 벤치까지 놓아 쉼터까지 겸하도록 했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이 정도로도 감지덕지라 할 수 있겠다. 시야(視野)가 툭 터지는 곳에 전망대를 설치해놓은 것은 물론 바다 풍경을 담은 사진틀을 세워 보는 이들의 조망까지 돕도록 했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삽시도, 용내기, 대서화도, 녹도, 호도, 소·대길산도, 오도, 외연도 등 꽤나 많은 섬들이 표기되어 있다.
▼ 전망대에 서면 녹도와 호도, 외연도 등이 수평선 저 끝에 아스라하다. 그 앞에는 ‘돛단여’가 두둥실 떠있다. 이름 그대로 배에 돛대를 높이 세우고 항해를 하고 있는 형상이다. 그게 맑은 물빛과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낸다. 장고도의 뷰포인트(viewpoint)라고 알려진다.
▼ 잘 닦인 탐방로를 따라 얼마간 더 걷자 바닷가로 연결되는 데크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급하다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번쯤 내려가 보면 어떨까 싶다. 오랫동안 기억될만한 멋진 경관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바닷가 바위 위에 걸터앉은 소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저런 곳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소나무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조그만 불편에도 못견뎌하며 불평불만을 일삼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 삶과 너무 대비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 나오는 글귀 하나가 떠오른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열다섯 살에 학문(學問)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확고하게 섰고, 마흔 살에 사물의 이치(事理)에 의혹(疑惑) 갖지 않게 되고, 쉰 살에 천명(天命)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고, 일흔 살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法度)를 넘지 않았다.’는 공자님의 이야기이다. 내 나이 이미 예순 하고도 다섯이다. 그렇다면 내 삶은 과연 귀에 들은 대로 이해를 하고 있을까? 아니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주장이 먼저인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르려면 멀어도 한참이나 멀었다.
▼ 물결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바위들이 몇 보인다. 썰물 때나 그 모습을 드러내는 ‘여’이다 장고도에는 ‘여’라고 불리는 암초(暗礁)들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섬사람들은 개개의 암초마다 마녀, 진녀, 버여, 갯녀, 비파녀 등의 이름들을 지어줬다. 해안선을 따라 걸으면서 암초의 생김새와 이름을 대비시켜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밀물에다 파도까지 높아 거의 모든 ‘여’가 물속에 잠겨버렸기 때문이다.
▼ 탐방로는 한마디로 잘 닦여 있다. 조금만 경사가 심하다 싶으면 데크계단과 통나무계단을 깔았고, 심지어는 바닥에 반석을 깔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곳도 있다. 이정표까지 있었더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을 텐데 아쉽다. 6~7년쯤 전인가 이곳 장고도에 대한 개발계획을 기사로 접했던 것 같은데 당시에 만들어 놓은 시설들이지 싶다. 당시 기사는 장고도권역(장고도, 삽시도, 고대도)이 행안부의 ‘명품섬 베스트 10’에 선정돼 ‘전설과 자연이 공존하는 신비의 섬’이란 모토로 클러스터(cluster)형 도서로 개발된다고 했었다. 그중에서 장고도는 ‘전설이 있는 테마코스 조성’이었으니 이런 탐방로를 조성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 그렇게 잠시 걸으면 또 다른 데크전망대가 나타난다. 바다를 향해 불쑥 튀어나간 부분에 걸터앉듯이 만들어진 전망대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바다건너에 있던 고대도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그 뒤에서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원산도이다. 그리고 두 섬의 오른편에는 삽시도가 내가 큰형이라고 우기기라도 하려는 듯 커다란 덩치를 불쑥 내밀고 있다.
▼ 전망대를 빠져나오면서 오늘의 투어가 대충 종료되었다고 보면 된다. 잠시 후 탐방로가 산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날머리인 ‘달바위’이다. 장고리 입구의 지명인데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장고도를 모두 둘러보고 싶다면 동쪽 해안선을 조금 더 타야만 한다. 하지만 우린 이쯤에서 끝내기로 한다. 뭍으로 나가는 배편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다 둘러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세상만사가 다 저와 같을지니 너무 욕심 부리지 말 일이다. ‘행복의 조건은 만족’이라는 말도 있으니, 너무 아등바등 쫒기지 말고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관조(觀照)를 하며 살아보자.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니겠는가.
▼ 잠시 후 장고리 마을에 이른다. 장고도 주민의 대부분이 모여 사는 마을인데, 보건진료소와 해경초소가 하나씩 있다. 저 마을에는 ‘절강 편씨(浙江 片氏)’ 성(姓)을 쓰는 주민들이 유난히 많다고 한다. 외연도를 비롯한 보령의 여러 섬들이 갖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그들의 선조가 조금이라도 더 고향에 가까운 곳을 찾았던 게 원인은 아니었을까? 임진왜란 때 제독중군(提督中軍)으로 조선에 출병했다가 간신의 무고로 귀국하지 못하고 조선에 눌러 살았다는 편갈송(片碣頌)이 그들의 선조이기 때문이다.
▼ 마을 입구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니 배가 출출하다면 마을에 있는 식당이라도 찾아볼 일이다. 대신 대천으로 나가는 배를 타려면 오른편에 보이는 방파제를 따라 한참을 더 걸어야 한다. 방파제의 끄트머리에 있는 등대가 여객선의 선착장 노릇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등대선착장’에서 ‘대머리선착장’까지의 약 1.5㎞쯤 되는 바다는 갯벌지대로 섬 주민들의 주머니를 두둑이 만들어주는 보물창고이다. 장고도는 ‘해삼의 섬’이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많이 잡힌다는 얘기이다. 여름이면 제주에서 해녀들을 초빙해와 해삼을 채취하는데, 절반은 해녀들 몫이고 나머지 절반은 주민들에게 분배된다고 한다. 작년에는 해삼에서 나온 소득만 가구당 1천만 원 남짓 됐다니 얼마나 많이 잡히는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해삼 양식장뿐만 아니라 바지락 양식장의 수확도 다른 섬들보다 크다. 게다가 섬에서는 홍합이나 소라도 많이 잡힌단다. SBS-TV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생방송 투데이’의 ‘식도락’코너에서 소개될 정도였으니 그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당시 방송에서는 해삼을 위시해서 바지락과 키조개, 낙지 등이 들추기만 하면 쏙쏙 나오는 광경이 방영되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논에서는 자급할 정도의 쌀도 생산된다고 한다. 자연이나 인간이 모두 복 받은 땅이라 할 수 있겠다. 수익이 많으니 자연히 고향을 떠났던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왔을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그 덕분에 두세 명까지 줄어 폐교(廢校) 지경까지 갔던 초등학교 분교가 지금은 학생이 20여명으로 늘어났을 정도란다.
▼ 방파제 끝에는 ‘항로유도등’이 만들어져 있다. 등대보다는 작지만 제법 우람하게 서 있는 하얀 구조물이다. 이 부근은 밤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낚시뿐만 아니라 해오름 뷰포인트(viewpoint)이기도 하단다. 등대 뒤편에는 ‘버여’라고 하는 바위섬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썰물 때라면 온전히 드러나 장고도의 풍광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 텐데 지금은 밀물 때라 아쉽다. 그래서 별도의 사진 첨부는 생략했다.
♧ 에필로그(epilogue), 이왕에 장고도에 왔으니 이곳에 얽힌 아픈 이야기를 하나 거론해보고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예로 삼아보고자 한다. 옛 자료들을 한참이나 뒤적거려야만 발견할 수 있는 ‘장고도사건(長古島事件)’으로 1900년 일본정부가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 장고도(長古島, 杖鼓島)에 난파한 일본 배를 조선인이 파손하였다며 조선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이다. 1900년 일본의 풍범선(風帆船) 히노데마루(日出丸)가 장고도에 좌초·난파했는데, 이때 섬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부서져 흩어진 선판 몇 조각을 습득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는 당시 조선인들이 배를 파손하였다고 주장하며 조선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섬주민 10명을 서울로 압송하여 재판에 회부하였으나, 선주와 대질 결과 일본공사의 주장이 사실무근임이 드러나 이들을 무죄로 방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2년 6월 일본공사는 이 문제를 재론하며 3,000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억지를 부렸다. 이를 조선정부가 거절하자 일본공사는 그들이 매년 납부하는 마산조계지 세금에서 손해배상금을 공제하겠다고 하였으며, 고종을 알현하고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결국 고종은 이들의 요구를 수락하고 탁지부에 지시, 3,000원을 일본정부에 지불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성을 나타내주는 사건의 하나이다. 또한 힘없는 나라가 겪을 수밖에 없는 아픔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그런 아픔이 생기지 않을 만큼 강한 나라를 만들어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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