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청도(於靑島)
여행일 : ‘17. 5. 7(일)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길 95-7
산행코스 : 선착장→당산→목넘고개 팔각정↔등대 왕복→공치산→목넘쉼터→안산→검산봉→돗대봉→선착장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군산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72㎞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섬(1.80㎢의 면적에 해안선 길이가 고작 10.8㎞에 불과) 어청도(於靑島)는 1914년 일제하의 행정개편으로 옥구군에 편입된 섬이다. 중국의 산둥반도와는 30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라고 한다.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기상악화 때에는 배들의 피항(避港)으로 유명하며 조선시대에는 귀향지로 이용되었다. 특히 어청도는 등대가 유명하다. ’어청도 등대(등록문화재 제378호)‘는 청일전쟁 후 중국 항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일제(日帝)에 의해 축조된 시설물로, 상부로 갈수록 좁아 드는 단면 등이 주변의 바다 풍광과 잘 어우러진다. 특히 불을 밝히는 등명기(燈明機)를 수은 위에 뜨게 하여 회전시키는 ‘중추식 등명기(목제의 덕트 시스템)’의 흔적 등 초기(初期) 등대의 구성 요소가 잘 남아 있다. 바닷가 풍경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동쪽해안의 해식애는 그 어느 유명섬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공치산 근처에서 바라볼 때 나타나는 한반도의 모형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아무튼 눈이 시릴 만큼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어청도는 섬 전역이 볼거리일 만큼 빼어난 매력 덩어리다. 참고로 어청도의 ‘청’은 맑을 청(淸)이, 아닌 푸른 청(靑)자를 쓴다. ‘서해의 고도인 만큼 물 맑기가 거울과 같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란다. 다른 한편으론 이 섬을 처음 발견한 전횡장군이 ‘아! 푸르다,’라고 감탄하면서 섬의 이름으로 감탄사 '어'(於)와 푸를 '청'(靑)을 쓰게 되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전해져온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치동묘를 설명할 때 거론하겠다.
▼ 찾아오는 방법
어청도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군산항 연안여객터미널까지 와야 한다. 어청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어청도까지는 고속선이 운항하는데 성수기에 한해 1일 2회(8:00와 14:00) 운행된다. 참! 이 배에는 차량을 실을 수 없으니 참조한다.
▼ 배의 출항시간까지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 겸암동의 철길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경암동 철길은 페이퍼 코리아 공장과 군산역을 연결하는 총 연장 2.5㎞의 철도 주변에 형성된 마을을 가리키는 말이다. 1944년 일제 강점기에 개설된 이 철도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동네를 이루었고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경암동 철길마을’이란 이름은 이 마을이 위치한 행정구역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주택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기차가 다니던 이곳은 지난 2008년 기차운행이 중단된 것을 계기로 폐(廢) 철로를 활용한 탐방로(探訪路)로 조성되면서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다시 태어났다. TV.와 신문을 통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탐방객들의 대부분은 인터넷 신문이나 포털 사이트를 통해 알고 개인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이다. 참고로 경암동 철길은 일제 강점기인 1944년에 신문 용지 재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최초로 개설되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 ‘북선제지 철도’로 불린 이래 ‘고려제지 철도’와 ‘세대 제지선’, ‘세풍 철도’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세풍그룹이 부도나면서 새로 인수한 업체 이름을 따서 현재는 ‘페이퍼 코리아선’으로 불린다.
▼ ‘경암동 철길마을’은 ‘진포 사거리’에서 ‘연안 사거리’까지의 철길 약 400m 구간을 말한다. 철길 한쪽에는 70년대에 건축한 낡은 2층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다른 한쪽에는 부속 건물인 듯한 작은 창고들이 연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철길과 침목도 그 모습 그대로 있다. 지금은 기차 운행이 중단됐지만 2008년까지는 마을을 관통하는 기차가 하루 두 번 운행됐다고 한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기차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이색적인 풍경 때문에 한때 사진가들의 단골 출사 지역으로 명성을 누렸다. 기차 운행 중단 이후로 잠시 먹거리촌으로 북적거렸으나 무허가 음식점, 포장마차들을 모두 정리하고 ‘추억의 거리’로 재탄생했다. 철길 변 벽 곳곳에는 화물차의 풍경, 꽃그림 등 옛 생각이 절로 나는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데이트 명소답게 아기자기한 가게들도 눈길을 끈다. ‘의상대여 숍’에서는 교련복과 한복, 각설이복 등과 소품을 빌려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폴라로이드 사진’ 촬영을 해 주는 곳도 있어 연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추억의 불량식품, 쥐포 등 먹는 재미도 빠질 수 없다.
▼ 군산항을 빠져나온 배는 2시간 10분을 넘기고 나서야 어청도항에 도착한다. 그것도 중간 기착지(寄着地)인 연도(煙島)를 들르지 않아서 조금 단축된 것이란다. 그렇지 않았다면 2시간30분을 훌쩍 넘겨야 한단다. 아무튼 배에서 내리는 승객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축 늘어진 모습들이다. 오는 내내 ‘너울성 파도’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배가 껑충껑충 뜀뛰기를 하다시피 하는데, 만일 그런 상황에서도 멀미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 산자락으로 난 긴 나무계단을 오르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계단의 들머리는 여객선의 매표소를 겸하고 있는 신흥상회(게스트하우스)의 오른편에서 찾으면 된다.
▼ 계단의 끝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어청도항은 물론이고 어청도 마을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전망대에는 사각의 정자(亭子)까지 지어놓았다. 느긋하게 조망을 즐기면서 쉬어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하지만 늦게 온 여행객에게는 그럴만한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비박(野營, Bivouac)을 하는 사람들이 이미 점령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아까 선착장 근처에서 비박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붙어있는 것 같았는데 이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 계단을 올라가는 길에 바라본 ‘어청도 마을(於靑島里)’, 어청도에서 유일한 취락마을이나 언제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정착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대중국의 초나라 초패왕 항우가 한의 고조에게 패하자 항우의 부장 전횡이 종신 500인과 어청도에 망명하여 이곳에서 입절 자살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아무튼 이 섬은 조선 후기까지는 충청남도 보령군 오천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라북도 옥구군으로 이관되었다. 1995년에 군산시와 옥구군이 통합되면서 군산시 옥도면(沃島面) 어청도리가 되었다.
▼ 전망대에 서면 어청도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 방향으로 문을 연 ‘ㄷ’자형의 널따란 만(灣)을 만들고 있다. 그 안의 수심(水深)이 20m 내외라니 어항으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덕분에 1971년에는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으며 태풍이 불 때는 원거리 조업을 나온 어선들의 대피항으로 이용되고 있다.
▼ 전망대를 지났다싶으면 울창한 산죽군락지가 나오고, 이어서 널따란 헬기장이 길손을 맞는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6분만이다. 헬기장에서 길은 반대편 왼쪽에서 열린다. 이어서 산길은 서서히 오름짓을 시작한다.
▼ 그렇게 6분쯤 진행하면 벤치가 놓인 능선 고갯마루(이정표 : 당산쉼터→ 0.7Km/ 밀밭금 쉼터↑ 0.7Km/ 심목여 종점← 0.7Km)에 올라선다. 좌측은 심목여종점이고 직진으로 넘어가면 밀밭금쉼터가 나온다. 당산은 물론 오른편 능선방향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이동통신사(KT)의 중계탑이 길손을 맞는다.
▼ 왼편 바닷가에 너른 바위지대가 내려다보인다. ‘불탄여’란다. ‘여’란 본디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파도가 높을 때 물속에 들어가는 바위까지 포함된다니 단어에 너무 집착하지는 말자. 아무튼 저 갯바위는 낚시꾼들의 놀이터로 안성맞춤일 것 같다. 섬에는 쉼이 있는가 하면 맛이 있고, 거기에 더해 놀이도 있다. 그 놀이 중의 하나는 물론 낚시이다. 가끔 세상을 등지고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낚싯대를 던지며 세월이라도 낚아보고 싶은 사람들이 찾기에 딱 좋겠다는 얘기이다.
▼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이 능선은 걸음을 멈추면 멈추는 곳마다 전망대가 된다. 고개만 들면 어김없이 바다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장쾌하기 짝이 없는 바다이다. 저 바다에 섬이라도 한두 개 떠있었더라면 싶다. 화룡점정처럼 말이다.
▼ 14분쯤 지나자 ‘봉수대(烽燧臺 : 군산시향토문화유산 제9호)’가 나온다. ‘조선보물 고적자료(朝鮮寶物古蹟資料)’에 ‘청도리 봉수대’로 기록되어 있는 봉수대이다. 그런데 이 봉수대가 낯설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원래의 봉수대가 어청도의 주봉(主峯)인 당산의 정상부에 위치했던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정상을 군부대에서 차지하고 있는 탓에 이곳에다 복원해 놓았나 보다. 원추형의 2층 석축으로 높이 2.1m에 지름이 3.6m인 이 봉수대는 고려 의종 3년(1148)에 서해로부터 오는 외적의 감시 및 경계를 목적으로 세워져 조선 숙종 3년(1677)에 운영상의 문제로 폐지(增補文獻備考에 기록)될 때까지 맡은바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의 봉수(烽燧)가 대개 남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왜구(倭寇)에 대비한 시설이었음을 감안할 때 색다른 특징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런 봉수대는 인근 도서인 외연도에도 있었다. 두 봉수는 녹도와 원산도를 경유하여 연안의 보령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이루었을 것이다.
▼ 봉수대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당산쉼터’에 이른다. 사각의 정자를 지었는데 정자의 위는 서까래만 놓고 지붕은 덮지 않은 채로 그냥 놓아두었다. 그렇다고 미완성으로 놓아둔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넝쿨식물들이 위를 둘러쌀 것을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는 얘기이다.
▼ 조금 더 걸으니 철조망에 둘러싸인 시설물이 나타난다. 당산의 정상을 점령하고 있는 해군의 레이더기지로. 서해를 지키는 해군부대의 필수 시설물일 것이다. 산길은 이 시설물을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을 오른편에 끼고 이어진다. 그리고 철조망이 끝나면 산길은 급하게 아래로 떨어진다. 곧이어 오름길이 다시 시작되지만 말이다.
▼ 그렇게 10여분을 진행하면 ‘목넘고개’에 내려서게 된다. 고갯마루에는 팔각정이 지어져 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어청도 포구와 주변 외연도의 풍경을 느긋이 즐겨보라는 모양이다. 팔각정 공터에는 어청도 안내판과 함께 주요 포인트별 거리표시판도 세워져 있다. 아무튼 이곳에서 직진하면 목넘쉼터를 거쳐 돗대쉼터로 이어진다. 이따가 우리가 걸어야 할 코스이다. 어청도 등대를 둘러보고 난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정표(어청도 등대 0.7Km)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으니 길 찾기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후부터는 시멘트포장 도로를 따른다. 특별한 볼거리는 없지만 가끔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고사목(枯死木)들과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침식해안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 15분 조금 못되게 걸어 산굽이를 돌자 저만큼에 ‘어청도 등대(於靑島燈臺)’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등대는 등탑과 등롱(燈籠)으로 이루어진 탑 모양의 건축물이다. 등탑 주위의 모든 구조물을 아울러서 등대라고 부른다. 아무튼 이 등대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3월에 지어졌다. 서해의 외딴 섬 어청도에 인천 팔미도등대에 이어 두 번째로 등대가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진출 야망 때문이란다. 중국 만주 진출을 위해 오사카와 다롄을 연결하는 정기항로를 개설하면서 어청도를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현재는 서해안과 군산항을 오가는 선박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어청도등대는 그 자태가 극히 아름답다고 소문나 있다. 상부 홍색의 등롱과 하얀 페인트를 칠한 등탑, 그리고 돌담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그 모습이 바다와 너무 잘 어우러진다는 것이다. 특히 해질녘 등대 주변의 해송과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은 직접 본 사람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할 정도로 환상적이란다. 참고로 이 등대는 근대기에 조성된 대표적인 등대인데다 최초 건립 당시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2008년 국가등록문화재(제378호)로 지정되었다.
▼ 본관(어청도 항로 표지관리소) 앞은 작은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벤치 몇 개와 정자(亭子) 말고도 ‘어청도 등대’라는 제목의 조형물을 배치했다. ‘풍랑의 피난처, 중국 산동반도 닭소리가 들리는 곳’이라는 부제(副題)를 달았는데 좌대(座臺)의 위에는 돌고래 형상을 조각해 놓았다. 등대주변이 고래어장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청도는 한때 포경선이 가득한 섬이었다. 동해에서 사는 고래가 봄에 새끼를 낳기 위해 어청도 근해로 오면 포경선도 따라 이동해 왔다고 한다. 1960~1970년대에는 포경선이 정박하여 고래의 해체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포경 사업의 금지로 어획량이 감소하면서 현재는 폐쇄되었다고 한다.
▼ 해발 고도 61m의 위치에 세워진 이 등대는 15.7m 높이의 백색 원형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37㎞ 거리에서도 등대의 불빛을 볼 수 있다. 주 출입구는 박공지붕(pediment) 형태로 처리하고, 전망대 부분에는 난간을 설치하고 하부를 조형적으로 처리하였으며, 상부의 등롱은 붉은 색으로 도색하였다. 등탑 내부 가운데에는 수직으로 중추식 등명기를 회전시키기 위한 중추 통로인 목재 트렁크가 설치되어 있고 주물로 만들어진 사다리는 2단 나선형으로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참고로 해풍에 부식(腐蝕)된 초기의 철제 등롱은 렌즈를 수은 위에 띄워 중추를 이용 회전시키는 프랑스에서 제작한 잔스식 등명기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1977년 8월에 610m/m등명기로 교체하였으나 등명기의 성능이 좋지 않아 1983년 12월 철거 보관하고 있던 ‘중추식 등명기(목제의 덕트 시스템)’를 보수하여 다시 사용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 등대에 서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식애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 건너편 벼랑 위에는 구유정(鳩遊亭)이 아슬아슬하게 올라앉아 있다. 꼭 가봐야 할 곳이니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들머리는 ‘어청도 항로 표지관리소’ 본관의 앞에서 열린다. 정자까지의 거리는 500m, 비탈진 오름길까지 끼어있어 다녀오는 길이 결코 수월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구유정에 이르면 그 정도의 고생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다. 그만큼 뛰어난 눈요깃거리를 제공한다는 얘기이다.
▼ 산 허릿길을 잠시 돌아 목제데크길을 내려가면 정자에 이른다. 정자에 오르면 좌측으로는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어청도 해안이 내려다보이고 우측에는 등대가 그림 같은 자태를 보여준다. 누군가 이 정자에 앉아있으면 시가 저절로 나온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만큼 눈앞에 펼쳐지는 전경이 아름답다는 얘기이다.
▼ 구유정에 이르면 또 다른 모습으로 등대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모양새이다. 그렇다고 바다의 풍경이 사라져버린 건 아니다. 오히려 서슬 시퍼런 해식애(海蝕崖)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바다와 해식애, 거기다 푸른 하늘을 배경삼은 등대가 함께 어우러지며 그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다. 과연 국내 10대 아름다운 등대 중 하나로 꼽힐만하다.
▼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북서풍의 바닷바람이 만들어낸 해식애이다. 저 멀리 벼랑의 아래에 뭔가가 보인다. ‘영해 직선기점(어청도) 영구시설’로 대한민국의 영해(領海)가 시작되는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서 설치된 시설물이란다. 영구시설은 첨성대를 형상화했다는데 아무래도 저 시설물이 수행하는 일이 옛날 첨성대에서 했던 것과 비슷함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저 시설은 바닷물의 높이와 정밀위치, 기상 등 각종 관측을 수행한다. 다른 한편으론 이곳으로부터 12해리(약 22Km)까지의 외측해역이 우리나라의 영해란다.(안내판의 글을 참조해서 씀)
▼ 팔각정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 능선을 탄다. 입구에 진행해야할 능선(목넘쉼터(1.2Km)-샘넘쉼터(1.9Km)-돗대쉼터(2.7Km)-둘레길종점)의 코스별 거리(종점까지는 2.9Km)를 적어 놓았다. 이로보아 어청도에도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는 모양이다. 맞는 말이다. 아까 당산을 거쳐 이곳까지 걸어왔던 능선은 다른 여느 둘레길보다도 훨씬 더 잘 가꾸어져 있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러 가지 색상의 철쭉들을 심어 산상화원(山上花園)으로 만들어놓았다.
▼ 13분 후 이름표가 없는 산봉우리에 올라선다. 공치산(118m) 정상일 것이다. 정상에는 벤치 두 개를 놓아두었다. ‘해막넘쉼터’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망원경도 보인다. 그만큼 조망(眺望)이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 망원경이 아니어도 시야는 넓기만 하다. 어청도항이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다. ‘ㄷ’자 모양으로 나타나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U’자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끄트머리 양쪽으로 방파제를 쌓으니 그 안에 갇힌 너비 0.5㎞에 길이가 1㎞인 넓은 만(灣)은 천혜의 항구로 바뀌어 있다.
▼ 공치산을 넘자 기이한 그림 하나가 그려진다. 그런데 그 그림이 무척 눈에 익은 게 아닌가. 한반도(韓半島)를 쏙 빼다 닮은 것이다. 누군가 어청도에 가면 바다에서 바라보는 한반도의 모형 중에서 가장 잘 생긴 놈을 만나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틀렸다. 내가 보기에는 육지에서도 이만큼 잘 생긴 놈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동고서저(東高西低)인 본래의 한반도가 아니라 그 반대의 모양새를 보여준다는 게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겠다.
▼ 왼편은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건너온 전횡이 이곳 어청도에다 터를 잡고 해적노릇을 했다더니 능히 그럴만한 지형이라 하겠다. 전횡은 어청도, 외연도 일대를 거점 삼아 어부들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서방산 정상에 올라 쇠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지나가는 배를 어청도로 유인해 선박을 탈취했다고 한다. 해적의 삶을 이어간 셈이다. 이따가 들르게 될 치동묘에는 전횡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으며 고래잡이와 풍어를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좌우로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푸른색이다. 명상(冥想)하는 사람들의 투명한 마음자리가 바로 저런 색깔이지 않을까 싶다. 오른쪽 바다에는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농배섬이 떠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섬은 주변 바다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그림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것도 잘 그린 산수화이다.
▼ 섬의 바깥쪽 해안은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져 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절벽이 바닷바람에 오랜 세월 풍화되어 예인의 손길로 그려진 한 폭의 그림 같다. 둘레길은 그 위로 나있다. 빼어난 주변 풍광에 빠져 넋을 잃고 걷기에 충분한 길이다.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목넘쉼터’(이정표 : 샘넘쉼터 0.8Km/ 팔각정)가 나온다.
▼ 목넘쉼터에 이르면 화산 분화구(噴火口) 같은 거대한 협곡을 만난다. 항아리 같은 이 협곡은 웅덩이가 아니라 바닷물이 들어오는 거대한 해벽이다. 보기에도 아찔할 정도의 절벽 끝에서 바닷물이 들어오는 장면을 내려다본다. 앗뿔싸! 한가운데에 폐어구(廢漁具)가 수북이 쌓여있는 게 아닌가. 하늘이 내려주신 선경(仙境)을 덜 깨인 인간들이 망쳐버렸다.
▼ 쉼터에 이르자 다시 한 번 농배섬이 나타난다. 아까 보았던 풍경화가 호(號)의 숫자를 키우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한층 더 아름다워졌다.
▼ 둘레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와진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침식해안, 짙푸른 바다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런 풍경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모양새가 갈수록 더 기이해지는 것이다. 초여름의 잡풀들이 웃자랐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을 바라보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주지 못한다.
▼ 15분 후 ‘해돋이전망대’로 알려진 안산(129m)에 올라선다. 능선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조망(眺望)이 환상적이다. 저절로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또한 이곳에서는 날씨가 좋을 경우 멀리 외연도는 물론이고 황도까지도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 해무(海霧)로 인해 어렴풋하게 나타날 뿐이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외연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아들인다. 그러자 산행으로 지친 피로와 함께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편안함을 찾는다.
▼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어청마을을 감상하며 5분쯤 진행하면 정자가 지어진 ‘샘넘쉼터’(이정표 : 돗대쉼터 0.8Km/ 백사장 0.4Km/ 샘넘길 0.2Km)에 이른다. 능선안부인 샘넘쉼터에 이르면 길이 둘로 갈라진다. 오른편은 데크탐방로를 거쳐 어청도마을로 연결되므로 검산봉과 돗대봉으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 한다. 그리고 두 봉우리를 답사한 뒤에는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이곳이 마을로 내려가는 마지막 길이기 때문이다.
▼ 돗대봉으로 향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돗대쉼터’방향이다. 이 구간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풍경과는 또 다른 멋을 보여준다. 원시의 숲이 나타나는 것이다. 언제 우리가 침식해안의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 위를 걸어왔던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이 구간에서는 고사목들이 널려있다시피 한다.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소나무 고사목들이다. 그중에 어떤 것들은 송악(Hedera rhombea)에게 둘러싸여 신비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 이색적인 풍경에 취해 걷다보면 15분 후에는 삼거리를 만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동방파제로 연결된다. 돗대봉은 능선을 따라 조금 더 진행해야 한다. 참! 깜빡 잊을 뻔 했다. 중간에 있는 검산봉(106m)을 놓쳐버린 것을 말이다. 오는 길에 벤치 두 개를 놓아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아닐까 싶다. 지도를 보면 ‘돗대쉼터’일 것도 같고 말이다.
▼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무척 사나워진다. 산길은 그 흔적이 희미하다. 거기다 쓰러져 있는 나무기둥 아래를 기어갈 수밖에 없는가 하면 바윗길을 통과하기도 한다. 진행하는 게 쉽지 않다는 얘기이다.
▼ 하지만 그 보상은 훌륭하다. 10분쯤 후에 이르게 되는 돗대봉(93m)에 올라서면 멋진 경관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 능선에는 죽은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솔껍질깍지벌레’의 피해를 입은 탓이란다. 빽빽하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저런 모습으로 고사(枯死)하면서 ‘철새들의 낙원’이라는 명성 또한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섬은 배뿐이 아니라 새들도 쉬어가는 곳이다. 남북으로 이동하는 철새들의 정거장과 휴게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새들은 지친 날개를 오므리고 이 푸른 바다에 발을 담그고 한가로이 노닐다 다시 먼 길을 떠난다. 새들이 이동하는 경로 상에 위치한 어청도는 한때 국내의 대표적 철새 정거장으로, 철새 110종을 비롯해 전체 330종이 관찰됐다. 그래서 새를 탐조하려는 국내외 조류 전문가들이 매년 수백 명도 넘게 찾았고 조류탐방 방문자지원센터까지도 생겼다. 하지만 소나무가 죽은 후부터는 철새들의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으로 향한다. 어청도항의 동방파제로 이어지는 길이다. 내려가는 길은 엄청나게 가파르다. 데크로 계단을 만들면서도 부지런히 갈지(之)자를 써야만 아래로 내려설 수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이다. 이는 구태여 내려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된다. 그 고생을 해가며 내려가 봐야 눈에 담을 만한 풍경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고작 방파제 위에 세워진 등대와 어청도마을이 조망될 따름이다. 그런 정도야 산위에서도 실컷 바라봤으니 여기까지 내려올 필요가 없겠기에 거론해 봤다.
▼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은 동백나무 숲을 뚫고 나있다. 산행을 해오는 동안 동백나무가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 여겼는데 그 아쉬움을 달래라도 주려는 모양이다. 늦부지런을 떨며 이제야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나무들도 보인다. 바닥에 떨어진 꽃들은 그중에서는 조금 서두른 놈들일 게고 말이다. 동백꽃은 양면성을 갖고 있는 꽃이다. 그중 하나는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이라는 이미자와 다른 하나는 ‘선홍빛 피의 애처로움’이다. 옛날 선비들은 후자가 주는 이미지 더 강했던 모양이다. 귀양을 간 곳에 동백나무라도 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고 한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자신의 목이 댕강 떨어지는 것을 연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떨어진 꽃송이 몇 개를 모아보았다.
▼ ‘샘넘쉼터’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백사장 방향으로 내려선다. 잠시 완만하게 이어지던 산길은 상어이빨처럼 험악하게 생긴 바위해벽을 만나면서 데크계단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데크산책로를 만난다.
▼ 계단을 내려서면 해안 데크길이 나온다. 어청도항의 북쪽 해안을 따라 놓은 탐방로인데, 포구 전경을 조망하면서 해변을 산책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산책로는 아기자기하고 아름답다. 길이도 꽤 길다. 중간에는 정자쉼터도 만들어져 있고 오른편에는 능선으로 오르는 사잇길도 보인다. 이 부근은 물이 빠지면 해수욕장으로 바뀌니 수영을 즐길 수도 있고, 고니 서식지로 유명한 농배섬까지는 갯벌이 드러난다. 이때는 바지락이나 게 등을 잡을 수도 있단다. 데크 아래로는 거울처럼 맑고 투명한 물이 나타난다. 탁한 서해바다 답지 않은 바다이다.
▼ 산책로는 농배섬 옆으로 나있다. 사이좋게 서 있는 두 섬 농배섬은 고니의 서식처다. 희귀조류가 많아 조류학자 닐 무어스 등 유럽 철새탐조 여행객들에게 더 유명한 섬이기도 하다. 참고로 어청도는 붉은배새매와 새매, 소쩍새, 솔부엉이, 멸종위기종인 매, 비둘기조롱이, 희귀종인 흰날개해오라기, 검은바람까마귀, 흰배뜸부기, 흰털발제비, 흰꼬리딱새 등 야생조류가 서식하는 새들의 천국이다. 지난 2006년 5월23일에는 우리나라 조류도감에는 기록되지 않은 희귀조인 붉은부리찌르레기가 발견되어 촬영에 성공했다고 학계에 보고되었다. 군산철새생태관리과에서 발표한 이 새는 주로 중국 남부와 필리핀, 일본 일부지역에만 서식하는 새이다. 그래서 어청도에는 영국과 일본에서 조류연구가들이 자주 찾아오기도 한다.
▼ 마을에 돌아와 치동묘(淄東廟 : 군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4호)를 찾아본다. 입도 시조로 여기는 전횡(田橫)장군의 사당(祠堂)이다. 자연석 담장에 둘러싸인 사당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9개의 사각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사당 안으로 들어서니 썰렁하다는 느낌부터 든다. 마당에는 잡풀이 어른 키를 넘었고, 여닫이문을 열고 내다본 사당의 내부는 신(神)의 흔적도 사람의 흔적도 느낄 수 없었다. 대신 누가 버리고 간 것인지 쓰레기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전횡장군의 영정이 초라하게 보이는 건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머나먼 중국 땅에서 쫓겨 이곳까지 온 처량한 신세 탓일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전횡은 누구일까? 그는 중국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의 부하 장수였다. BC 202년경 중국의 한고조(漢高祖)가 초(楚)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후 패왕 항우가 자결하자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전횡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설(說) 중에서 등주의 해도(海島)로 도망갔다는 설을 빌려온 모양이다. 아무튼 그는 돛단배를 타고 서해를 목적지 없이 떠다니던 중 중국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이 섬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날은 쾌청한 날씨였으나 바다 위에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갑자기 푸른 산 하나가 우뚝 나타났다고 한다. 전횡은 이곳에 배를 멈추도록 명령하고 푸른 청(靑)자를 따서 어청도(於靑島)라 이름 지었단다. 참고로 치동묘는 백제 시대에 어청도에서 같은 이름의 사당을 짓고 마을의 안위와 풍어를 비는 제사를 지낸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청도 치동묘 제사는 1970년대 이후 중단되었다.
▼ 식사를 마치고나서는 오른쪽 해안선을 둘러보기로 한다. 끄트머리에 괜찮은 볼거리가 있다는 귀띔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담을만한 것이라곤 바위벽에 올라앉은 폐그물이 전부였다. 아니 방파제의 아래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기는 했다. 섬 전체가 바다낚시 포인트인 어청도에서도 이 근처가 서해안 참돔의 메카라고 하더니 이를 노린 강태공들인 모양이다. 아무튼 실망을 하면서 돌아오는데 오른편에 전망대 비슷한 건물이 지어져 있는 게 아닌가. 다가가보니 안전을 위해 올라가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그러나 내 호기심을 누르기에는 그 문구가 약했던가 보다. 조심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올라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설의 위로 오르면 어청도항의 모든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초(楚)나라 출신 전횡장군이 터를 잡았다는 어청도마을은 물론이고 ‘ㄷ’형의 널따란 만(灣)을 천혜의 항구로 만들어 주고 있는 동서 두 개의 방파제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지근거리에는 해군의 선박도 두 척이나 정박되어 있다. 보안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사진 게재는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 에필로그(epilogue), 어청도에는 생각보다 많은 식당이 있다. 민박(民泊)을 겸하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주요 메뉴는 백반인데 인근 바다에서 잡힌 자연산 해산물이 한상에 가득히 올라온다고 한다. 횟감이라고 없을 리가 없다. 우럭과 숭어, 갑오징어, 붕장어 등 자연산 해산물에 입이 호사를 즐긴다. 하지만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사전예약이 필수라는 점을 말이다. 그걸 몰랐던 우리 일행은 해산물로 가득한 백반이 아니라 김치찌개로 점심을 때울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지 않은 식당들은 차지하고라도 문을 연 식당들까지 밥이 떨어졌다며 손사래를 쳤기 때문이다.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산에서 내려왔는데 그때까지 놓아둘 밥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횟감도 역시 똑 같다. 회를 뜰 사람이 밖에 나갔다니 어쩌겠는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버린 김치찌개마저도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먹지를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4시 20분에 출발하는 배에서 2시간 30분 동안을 시달린 후에야 군산에 도착해 요기를 할 수 있었다. 즐거워야할 섬 여행이 짜증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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