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선비순례길 5코스(왕모산성길)
여행일 : ‘24. 10. 5(토)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가송마을 버스정류장→고산정→맹개마을→백운지→단천교(실제 출발지)→항골 입구→칼선대→왕모당→원천교(거리/시간 : 12km, 실제는 4.95km를 2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 트레킹 들머리는 가송마을 버스정류장(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로 영주까지 옵니다. 가흥교차로에서 36번 국도(봉화방면으로 19km), 금봉교차로에서 918번 지방도(청량산방면으로 15km), 도천삼거리에서 35번 국도로 옮겨 11km쯤 내려오면 ’가송리(佳松里)‘에 이르게 됩니다.
▼ ‘고산정’에서 낙동강을 따라 ’내살미‘ 마을까지 내려가는 12km짜리 여정이랍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 낙동강은 왕모산을 넘지 못했고, 강을 건너지 못한 주변 산줄기들은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면서 맹개마을·단사마을 등 곳곳에 기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왕모산성길은 이런 기이한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걷는 여정이랍니다.
▼ 차에서 내리자 강 건너에 위치한 ‘고산정(孤山亭)’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옵니다. 안동팔경의 하나인 가송협의 단애 아래에 터를 잡았습니다. ‘금남수’처럼 유유자적하기에 딱 좋은 자리라고나 할까요? 저곳은 최고 시청률 18.1%를 기록한 이병헌·김태리 주연의 24부작 tvN드라마 ‘미스터션샤인(2018년)’의 촬영지이기도 하답니다. 주인공 애신(김태리 분)과 유진(이병헌 분)이 배를 타고 오가던 아름다운 나루터 장면이 바로 고산정의 전경이랍니다.
▼ 고산정은 정유재란 때 안동 수성장(守城將)으로 활약하여 좌승지에 증직된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지은 정자입니다. 금난수는 이황(李滉)의 제자로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는 데 힘썼으며,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봉화현감 등을 지냈습니다. 35세 때. 당시 선성현(宣城縣, 예안현의 별칭) 제일의 명승이던 가송협(佳松峽)에 고산정을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 한 채 유유자적하였다는 선비입니다.
▼ ‘삼 칸 겹집’의 팔작지붕인데 3m 가량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자연석을 가공 없이 주춧돌로 사용)를 놓고 기둥을 세웠습니다. 조선시대 정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더군요.
▼ 낙동강의 상류인 가송협의 건너에는 송림과 함께 고산(孤山)이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룹니다. 그 아름다움에 푹 빠진 퇴계선생이 문인들과 함께 여러 차례 찾아와 영시유상(詠詩遊賞)을 즐겼다더군요.
▼ 이 일대는 ‘도산구곡’ 중 8곡인 ‘고산곡(孤山曲)’입니다. 협곡 모양새를 보여 ‘가송협(佳松峽)’으로도 불린답니다. 고산정 주인장 금난수의 ‘봉화금씨(奉化琴氏)’ 세거지인데, 퇴계의 후손인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 1755-1831)은 ‘도산구곡가’에서 <팔곡이라 옥거울 같은 물가에 홀로 선 산(八曲山孤玉鏡開)/ 또렷또렷한 심법이 이 물가에 맴도는구나(惺惺心法此沿洄)>라며 그 아름다움을 읊었습니다.
▼ 5코스(왕모산성길)는 ‘고산정’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대형버스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마을 앞 버스정류장에서 종암종택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잠수교’를 건너면서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하나 더. 우리 부부는 다리를 건너는 대신 산악회 버스를 이용해 ‘이육사문학관’으로 이동합니다. 2주 전의 4코스(퇴계예던길)에 불참해서 3코스(청포도길)의 후반부를 못 걸었었거든요, 그 구간을 마치면 5코스의 중간쯤인 ‘단천교’에 이르기 때문에 5코스의 전반부는 답사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별 수 없이 몽중루 작가님과 허총무님 등 다른 도반들의 사진과 얘기를 종합해 빠뜨린 구간을 완성했습니다.
▼ 다리를 건너면 가송리(佳松里)의 또 다른 자연부락. 이곳에서 왼쪽으로 400m쯤 올라가면 5코스(왕모산성길)‘가 시작되는 ’고산정’입니다. 하지만 5코스의 잔여 구간이 오른쪽으로 나있으니 고산정을 둘러본 다음 되돌아와야 하겠지요?
▼ 이후부터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갑니다. 고산구곡 중 ‘고산곡’을 이웃하며 걸을 수 있는 기분 좋은 구간이지요. 그런 길을 400m남짓 걸으면 ‘월명정’이란 정자가 나옵니다. 2020년에 지은 정자인데, 월명담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곳이라는 뜻이겠지요.
▼ 이정표(칼선대 9.7km/ 고산정 0.8km)가 가리키는 ‘칼선대’ 방향, 그러니까 낙동강의 강변으로 내려섭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深淵), 월명담(또는 월명소)은 그 푸른 색깔에서 조차 깊이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월명담 뒤의 저 절벽으로 길이 나있다는 점입니다.
▼ 월명담(月明潭). 강물이 산줄기에 막혀 ‘ㄷ’자 형태로 돌면서 벼랑 아래에 깊은 소(沼)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보름달이 밝게 비춘다고 해서 월명담·월명소·월명당이라 했다나요? 용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가뭄이 들면 고을 수령이 기우제를 올렸다고 전해옵니다.
▼ 월명담은 낙동강 상류의 명승 중 하나로 꼽히는데, 퇴계는 달빛 쏟아지는 월명담을 비가 오게 하는 연못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윽한 늪이 있는 골짜기는 수려하고 맑은데(窈然潭洞秀而淸)/ 음침한 그 속엔 나무와 돌로 만든 진혼비가 있다네(陰嘼中藏木石靈)/ 열흘 동안 수심 겨운 여름 장마가 그치고 말끔히 개고(十日愁霖今可霽)/ 석양빛을 안고 집에 돌아와 누우니 달빛이 그윽하다네(抱珠歸臥月冥冥)>
▼ 길은 강가 바위절벽을 따라 나있답니다. 바위절벽인데도 길을 낼만한 공간은 있었나 봅니다. 그렇다고 안전까지 확보할 수는 없었겠지요. 위태위태한 곳이 하도 많아 바윗길이 끝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니까요. 이런 길을 ‘벼룻길’이라고 한다나요? 아래가 강가나 바닷가로 통하는 벼랑길을 그렇게 부른다고 하네요. 아무튼 안전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지만 눈의 호사 또한 만만찮은 구간이랍니다.
▼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일대는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는 지형입니다. 때문에 물이 휘돌아나가는 곳마다 수십·수백 길의 단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길을 내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강안(江岸)의 바위절벽에 저렇게 ‘벼룻길’을 거쳐 놓았답니다. 치솟은 바위 벼랑을 에돌아가는 길로 딱 한사람이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랍니다.
▼ 이즈음 벽력암(霹靂巖)과 학소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했습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편 절벽이 학소대, 그리고 왼쪽은 벽력암인데 저곳에는 전망대가 있답니다.
▼ 벼룻길이 끝나면 다시 위로 올라가야만 한답니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5코스 최고의 전망대 중 하나인 ‘벽력암 전망대’를 만나기 위한 수고로움이니 참아야하겠지요?
▼ ‘벼룻길’은 벽력암 위에 만들어놓은 ‘전망대’에서 화룡점점(畵龍點睛)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가 하면, 거기에 강 건너 ‘농암종택’이 더해진다고 하네요. 농암종택은 원래 분천마을에 있었습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분천마을이 수몰되면서 저곳으로 옮겨졌다는군요. 그때 다른 곳에 있던 사당과 긍구당(肯構堂)도 함께 옮겨왔으며, 2007년에는 분강서원(汾江書院)도 재이건되었다고 하네요.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었음은 물론이지요.
▼ 농암(聾巖)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호입니다. 연산군 시절 귀양을 갔다가 처형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죽음을 면했고, 중종반정으로 복직한 이후 주로 지방 수령으로 관료생활을 했습니다. 가끔은 중앙보직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지방 수령으로 봉직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는데, 중종 임금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를 탔는데 고작 화분(花盆) 몇 개와 바둑판 하나가 전부였다는 일화는 나 같은 공직자(은퇴했지만)들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 ‘농암종택(聾巖宗宅)’. 안채·사랑채·대문채·별채·긍구당·명농당·사당 등 농암선생의 명성만큼이나 거대한 등치를 자랑합니다. 그중에서도 별당인 ‘긍구당(肯構堂)’이 눈길을 끄는군요. 농암이 서경의 한 구절에서 취해서 ‘당호’를 지었는데, ‘조상들이 이루어놓은 훌륭한 업적을 소홀히 하지 말고 오래도록 이어 받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1542년 공직에서 물러날 때 경복궁과 한강의 제천정에서 전별연을 열어주었을 정도로 존경과 신망을 받던 자신을 닮으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조 유일의 정계은퇴식이었다니까요.
▼ 분강서원(汾江書院). 1699년에 후손과 사림이 농암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2007년 현재 위치로 이건했는데, 강당(흥교당)과 동·서재 외에도 한속정사의 안채와 바깥채, 농암의 위패를 모신 사당(숭덕사) 등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있습니다. 서원의 왼편에 있는 작은 건물은 ‘농암 신도비’입니다. 농암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명종 20년(1566년)에 신남리의 농암 묘소 앞에 세웠는데, 2006년 현재 위치로 이전됐다고 합니다. 신도비란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으로 무덤 앞에 있는 게 보통입니다.
▼ 맨 왼쪽에는 ‘애일당(愛日堂)’이 있습니다. 2코스(도산서원길) 답사 때 지도만 보고 잘못 찾아갔던 그 ‘문화재’입니다. 아무튼 농암은 1512년 부모를 위해 저 별당을 지었습니다. 분강마을의 집에서 400m쯤 떨어진 곳에 ‘귀먹바위’가 있었는데 농암이 이름을 한자로 옮겨 자신의 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살아계신 나날을 아낀다는 의미의 ‘애일당’을 지었습니다. 농암은 1533년에 당시 94세였던 부친을 포함해 9명의 노인을 모시고 저곳에서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를 열었습니다. 농암 자신이 67세의 노인이었는데 더 연로한 분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때때옷을 입고 춤을 췄다고 합니다.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 것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강각(江閣)’인데 설명은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 ‘벽력암 전망대’에서 내려선 길은 ‘맹개마을’로 이어집니다. 거칠게 내려오던 강줄기가 학소대를 돌아 완만해지면서 흙을 실어 놓는 곳에 맹개마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이 강 쪽으로 툭 밀려 나온 안쪽은 흡사 육지 속의 섬과도 같습니다. 그곳에 가족펜션인 ‘소목화당(小木花堂)’이 있답니다. 휘돌아가는 낙동강 물길의 안쪽 예쁜 펜션이자, 주인 부부가 공들여 술을 담는 곳이랍니다. ‘진맥소주’라는 브랜드의 전통주가 이곳에서 나온다더군요. 참! gpx트랙을 살펴보니 월명담에서 맹개마을까지의 거리가 2.5km로 나타나고 있었답니다.
▼ ‘술도가’. 주인장이 직접 재배한 100% 유기농 통밀로 소주를 만든다고 하네요. 자연 숙성실인 저 토굴로 들어가면 특유의 술 내음과 함께 오크통, 옹기 등에 담긴 술들이 한 눈 가득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 ‘진맥(眞麥)’은 밀의 옛말이랍니다. 그러니 ‘진맥소주’는 ‘맹개술도가’에서 만든 소주의 브랜드이자, 유기농 밀로 만든 증류식 소주라는 자랑이기도 합니다. 가장 오래된 조리서로 알려진 ‘수운잡방’에 술 빚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 전통이 깊다고 합니다. 53도짜리가 자랑거린데, 미국 샌프란시스코 세계 증류주 대회에서 더블골드를 획득했을 정도라는군요.
▼ 강 건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학소대(鶴巢臺)’라고 합니다. 건지산(577m)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로, 물길이 크게 휘어지는 바깥에 수직의 암벽으로 솟아있습니다. 예로부터 천연기념물인 오학(烏鶴. 먹황새)이 날아와 새끼를 치고 살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가로 줄무늬 퇴적층이 선명한 절벽에 학까지 날아들었으니 ‘학소대’라는 이름과 꼭 어울립니다.
▼ 경암(景巖). 퇴계는 학소대와 맹개마을 사이에 우뚝 솟은 바위를 ‘경암’이라 부르면서 버릇대로 시 한 수를 읊었다고 합니다. 거센 물결 속에서도 천년 동안 변함없는 바위를 보면서 말이지요. <격한 물살 천년인들 다할 날 있으련만(激水千年詎有窮)/ 물살 가운데 우뚝 서서 기세를 다투누나(中流屹屹勢爭雄)/ 인생의 발자취란 부평초 줄기 같은지라(人生蹤跡如浮梗)/ 그 누군들 여기 서서 버틸 수 있으랴(立脚誰能似此中)>
▼ 경암은 위가 상처럼 네모지게 평평한 바위입니다. 바위 주위로는 옥색 강물이 흐릅니다. 하지만 몽중루 작가님의 성에는 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특이할 게 없는 외모에 왜소하기까지 해서 퇴계선생님의 풍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 ‘맹개마을’은 육지 속의 섬 같은 오지입니다. 산태극수태극의 지형이 마을 양옆을 수백 길 단애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농암종가에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네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소목화당의 주인에게 전화를 걸면 차고를 올려 튜닝한 SUV를 끌고 나오거나 트랙터에 손님을 실어 나른답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유인촌장관이 타고 있는 모습도 얼핏 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마저도 안 되면 배로 강을 건너게 해준답니다. 하나 더. 우리 도반(道伴)들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는 벼룻길을 통해 들어갈 수도 있기는 하답니다.
▼ 맹개마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답니다. 늦은 여름에서 초가을이 특히 아름답다고 하더군요. 마을이 온통 매밀 밭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때쯤이면 하얀 메밀꽃이 소복이 피어나기 때문이랍니다. 그게 세외선경을 보는 듯 하다나? 맹개마을에서는 11월에 밀을 심어 이듬해 7월 수확하고, 밀을 수확한 땅에 메밀을 심어 가을에 수확하고 있다더군요.
▼ 이렇게 고운 곳을 사람들이 그냥 놓아둘 리가 없습니다. 숙박예약이 힘들 정도로 인기랍니다. 하긴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이병헌과 김태리, 예능 ‘인더숲’의 세븐틴, 아마존TV ‘버터플라이’의 대니얼 대 킴 등도 촬영차 찾았다가 한 눈에 반했다는데 어련하겠습니까.
▼ 백운지로 넘어가는 길도 만만치가 않았던 모양이더군요. 끝없이 이어지는 통나무계단이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확 질려버립니다.
▼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요렇게 위험스런 벼랑길도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농암종택을 통해 맹개마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 산자락을 빠져나온 길은 자연스럽게 ‘백운지(白雲池)’로 이어집니다. 맹개마을에서 1.6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또 다른 오지마을이지요. 이곳은 몽중루님의 표현을 잠시 빌리겠습니다. ‘청량산을 내린 낙동강이 도산(陶山)에 이르러 큰 물굽이로 휘돌며 펼치는 작은 들녘 마을’이라네요. 제방 따라 늘어선 대추와 밤나무 밭엔 붉은 대추와 알밤들이 툭툭대고, 모래땅 넓은 무밭에는 회전식 스프링클러가 돌며 연신 물을 뿌리고 있더라는 군요.
▼ 백운지의 옛 이름은 백운동(白雲洞). 흰 구름이 넘나들며 청산과 녹수까지 세속의 기운을 넘어서버리게 만든다는 곳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흰 구름 대신 무의 푸른 잎으로 뒤덮여있습니다. <청산과 녹수는 이미 세속의 기운을 넘어섰고(靑山綠水已超氛)/ 그 사이로 희고도 흰 구름이 또 다시 밀려오네(更著中間白白雲)/ 고향의 소리 씻어내고 타고난 성품으로 돌아 가렸더니(爲洗鄕音還本色)/ 지령이 그 뜻을 알고 흔쾌히 허용하더라(地靈應許我知君)>
▼ 백운지에서 1.5km쯤 걸어 나오면 ‘단천교’에 이릅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단사와 백운지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제가 5코스의 출발지로 삼은 지점이지요. 그래서 이후부터는 제 사진과 느낌, 기억으로 글을 적어가겠습니다.
▼ 12 : 02. ‘단천교’를 건너면서 ‘5코스(왕모산성길)’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단천교’ 앞에서 길이 둘로 나뉘는데, 다리를 건너면 ‘5코스(왕모산성길)’, 즉 공민왕 어머니가 피신했다는 왕모산성으로 가는 길로 연결되고, 왼쪽은 4코스(퇴계예던길)로 퇴계가 13세 때부터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 1469-1517)에게 학문을 배우러 청량산으로 다니던 길입니다.
▼ 퇴계 오솔길은 ‘예던길’이라고도 하는데, ‘예(曳)’란 신발과 지팡이를 끌며 다니던 곳이란 뜻이라 하네요. 퇴계가 청량산에 가던 낙동강변의 길이기도 한데, ‘산태극수태극’이란 말처럼 산이 굽이치는 형세에 따라 물도 S자로 굽이친다고 하네요.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학소대·월명담·고산정 등 수려한 풍경이 퇴계의 ‘그림 속(畵圖中)’이란 표현처럼 한 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한다고 알려집니다. 아쉽게도 저는 그런 풍경을 가슴은커녕 눈에조차 담지를 못했네요. 언젠가 다시 한 번 찾아와야 하는 이유이지요.
▼ 다리를 건너다 바라본 상류쪽 풍경입니다. 백운지 근처이니 저 어디쯤에 ‘미천장담(彌川長潭)’이 있을 것입니다. 고산을 지난 낙동강이 S자를 그리며 돌아가는 곳에 만들어진 깊은 못을 말하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험하고 물이 깊어 물고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퇴계가 어린 시절 낚시하던 때를 떠올린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이곳에서 낚시하던 때를 돌이켜 보니(長憶童時釣此間)/ 삼십년 세월동안 벼슬 때를 묻히며 살았네 그려(卅年風月負塵寰)/ 이제 돌아와 보니 산수의 옛 모습을 알겠네 그려(我來識得溪山面)/ 그렇지만 산수는 내 늙은 얼굴 알란가 몰라(未必溪山識老顔)>
▼ 반대편, 그러니까 하류쪽 풍경이겠네요. 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 ‘왕모산’이고 그 아래 산자락을 ‘고산구곡’ 중 ‘단사곡’이 때리며 지나갑니다.
▼ 12 : 06. 다리 건너는 ‘묵시골 입구’입니다. ‘급행버스’가 다니는지 버스정류장에 노선도와 시간표까지 붙여놓았습니다.
▼ ‘예던길’ 이정표인데 이름 모를 새가 방향을 알려줍니다. 옆에는 갓을 씌워놓은 ‘선비순례길’ 이정표(왕모산주차장 4.9km/ 고산정 7.0km)도 세워져 있습니다.
▼ 안동도 사과가 특산물인 모양입니다. ‘정일품(正一品)’이란 브랜드에서 그 자부심이 잔뜩 묻어납니다.
▼ 탐방로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갑니다. 강변에 바짝 붙어서 길이 나있는데 ‘항골’로 연결된다고 해서 ‘항곡길’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 12 : 13. 강변을 떠나 산골짜기로 파고듭니다. ‘왕모산’의 뒤쪽에 위치한 오지마을(몇 가구 살지 않는 ‘항곡마을’일 것입니다)로 들어가는 길이랍니다. 이왕에 왔으니 왕모산에 대해 살펴볼까요? 1361년 겨울, 중국 원나라가 쇠퇴하여 기울어갈 때 생겨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와 수도 개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려 말기 공민왕 시절인데, 왕은 알콩달콩 사랑을 엮어가던 원나라 출신 노국공주와 어머니를 모시고 추위를 견디며 멀고 먼 후방 지역인 안동까지 피난을 오게 됩니다. 이때 모후(母后), 그러니까 공민왕의 어머니가 머물던 곳이라고 해서 ‘왕모산(王母山)’이란 이름이 붙었답니다.
▼ 몇 걸음 걷지 않아 꼬맹이 마을을 만났습니다. 두어 세대쯤 되는 규모인데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 12 : 19. ‘항곡길’과도 헤어졌습니다. 이제 산길이 시작된다는 얘기겠지요.
▼ 이정표는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인 ‘칼선대’까지 2.7km가 남았다고 하네요. 아까 3코스를 걸어오면서 눈여겨보았던 풍경, 즉 깎아지른 산줄기와 낙동강 물줄기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놓은 수묵담채화의 그윽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퇴계선생 말마따나 ‘그림 속’으로 표현해도 나무랄 데가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곧 나타난답니다.
▼ 임도는 가파르게 산속으로 파고듭니다. 꽤 힘들지만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조금만 속도를 떨어뜨리면 되니까요. 그런 다음 퇴계의 마음이 되어 걸어보면 어떨까요. 이곳은 ‘퇴계선생님’의 고향이니까요.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새벽 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내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은 오솔길로 변합니다. 이후부터는 순수한 산길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지자체에서 정비를 잘 해놓아 보드라운 흙길이 널찍하기까지 합니다.
▼ 탐방로가 산자락을 헤집으며 나있기 때문에 심심찮게 작은 골짜기를 건너기도 합니다. 하지만 목교가 놓여있어 장마철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 이곳은 산속. 위급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그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답니다. 곳곳에 ‘국가지점번호판’을 설치해놓아 신고전화만 하면 금방 찾아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 아무리 쉬워보여도 산길은 산길이랍니다. 그러니 체력이 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선지 곳곳에 벤치도 놓아두었군요.
▼ 탐방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누빕니다. 향긋한 소나무 향기가 코끝을 스쳐갑니다. 그 속에는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가 가득할 것입니다. 조금도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저 정도로 소나무가 울창하니 틀림없이 송이버섯이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산길을 따라 줄지어 붙어있는 저 ‘입산금지’ 표시가 그 증거입니다.
▼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숲속에 들어가는 것은 삼가고 대신 길가에서 만날 수 있는 야생버섯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고사목이 심심찮게 나타났고, 그때마다 버섯들이 눈에 띕니다. 이 ‘말발굽버섯’도 그중 하나입니다. 혈당조절과 콜레스테롤 감소, 면역력 강화, 암 예방에 효능이 있다는 버섯입니다. 물론 눈에만 담아갑니다.
▼ 요건 버터애기버섯? 가을철이면 눈에 띄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네요. 식용이라지만 이 또한 채취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12 : 49. 이런 첩첩산중에 웬 민가?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지 마당 아니 집 전체가 웃자란 잡초에 파묻혀 있습니다.
▼ 이후부터는 ‘데크 로드’를 따릅니다. 산길이니 계단이 주를 이룸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계단을 두지 않고 경사만 주는 곳도 많습니다. 길을 낼 말한 처지가 아니다보니 어쩔 수 없이 통째로 ‘데크 로드’를 만들었나 봅니다. 흡사 다리처럼 말입니다.
▼ 가끔은 비탈진 산자락을 헤집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길고 가파른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길이 오솔길로 변합니다. 비탈지지만 길을 낼만은 했던지 통나무계단을 깔아놓았습니다.
▼ 13 : 05.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다리 모양의 ‘데크 로드’로 변해버립니다. 그만큼 왕모산의 사면이 비탈지다는 얘기겠지요.
▼ 13 : 16. 데크로드에서 오솔길 갈려나가고 있습니다. ‘왕모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랍니다.
▼ 이곳에는 이정표 대신 안내지도를 세워놓았습니다.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는 모두 4개인데, 이곳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1코스’로 출발지는 ‘원천교’라는군요.
▼ 13 : 18. 몇 걸음 더 걸으면 오른편으로 작은 봉우리 하나가 나타납니다. ‘칼선대’로 오르는 길이니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20m쯤 더 가면 또 다른 입구가 나타나고, 그곳에는 이정표까지 세워져 있어 무심코 지나칠 일은 없겠습니다.
▼ 왕모산 능선이 내려와 낙동강으로 떨어지며 폭이 약 1km쯤 되는 병풍바위를 빚어 놓았습니다. 그 바위능선의 위, 한 지점에 ‘칼선대’가 놓여있습니다. 봉긋한 봉우리가 ‘칼끝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갈선대’라고도 부르더군요. 갈선(葛仙)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신선이 된 갈현(葛玄)을 말합니다. 도교에서는 갈선공(葛仙公)이라 존칭하며 태극좌선공(太極左仙公)으로 높여 부르는 인물이랍니다.
▼ ‘칼선대’는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집니다.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 너머로 건지산과 청량산의 축융봉이 한꺼번에 펼쳐집니다. 발아래로는 단사마을의 들녘이 깔려있습니다. 예천의 ‘회룡포’나 안동의 ‘하회마을’ 만큼은 아니어도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신선하면서도 아름답기 짝이 없습니다.
▼ 갈선대 아래로는 ‘단사협(丹砂峽)’이 흘러갑니다.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이 그 신비함을 묘사하기 위해 도교까지 끌어들인 곳이랍니다. <칠곡이라 휘감아 도는 한줄기 여울물(七曲縈迴一水灘)/ 갈선대와 고세대를 다시 돌아서 보네(葛仙高世更回看)/ 만 섬의 붉은 단사 하늘이 감춘 보배네(丹砂萬斛天藏寶)/ 푸른 절벽에 구름 일어 찬물이 서리네(靑壁雲生相暎寒)>
▼ 하류 쪽 풍경입니다. 강 건너 저 능선에는 이육사가 ‘광야’의 시상을 떠올렸다는 윷판대가 있을 것입니다. 낙동강은 그 아래를 휘돌면서 속도를 확 떨어뜨린 다음 안동호로 들어갑니다.
▼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왕모산(王母山)’이 성큼 다가옵니다. 높이는 648.2m.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경사가 매우 급해 천연의 요새로 알려지는 산이랍니다. 천혜의 피난처라고나 할까요?
▼ 전망대에는 이육사의 ‘절정(絶頂)’ 시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곳까지 올라 절정의 시상을 가다듬었나 봅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13 : 22: 다시 산행을 이어갑니다. 잠시 데크 길을 따르는가 싶더니 이내 흙길로 변하는군요.
▼ ‘통행금지’ 안내판도 눈에 띄더군요. 안전을 위해 바위 벼랑 안쪽으로 길을 내놓았지만, 바위벼랑 위를 지나 칼선대로 올라가려는 무모한 사람들도 있었나봅니다.
▼ 길이 무척 가팔라졌습니다. 침목계단이 놓여있지만 집사람처럼 무릎이 시원찮은 사람들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구간입니다.
▼ 13 : 29 – 13 : 41. 지자체도 그게 미안했던 모양입니다. 안부삼거리(이정표 : 왕모산주차장 0.79km/ 천곡지 1.53km)에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덕분에 우리 부부도 준비해간 치즈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답니다. 그러다 문득 이게 ‘임하막걸리’였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더군요. 안동쌀과 밀, 누룩으로 빚는다는 막걸리의 맛이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임하양조장은 무려 10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술을 빚어 왔다고 하지 않던가요.
▼ 13 : 41. 선비순례길 이정표(왕모산주차장 1.1km/ 고산정 10.8km)가 가리키는 왕모산 주차장 방향으로 갑니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임도를 만납니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왕모당’에서 제사를 올린다고 하더니, 제물 등을 운반하기 위해 놓은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13 : 44. 공민왕의 어머니를 모시는 ‘왕모당(王母堂)’이랍니다. 이 일대는 공민왕계 신을 모시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청량산 꼭대기에 좌정한 ‘공민왕’을 중심으로 내살미의 공민왕 어머니, 북고리와 높은데의 부인, 가송리와 정자골, 등자다리의 딸, 새터의 사위와 같이 청량산 일대 20여 개 마을에서 공민왕계 신을 동신으로 모시고 있답니다. 이 중에서도 내살미·가송리·산성마을은 공민왕 신앙의 핵심지역이라고 합니다.
▼ 왕모당은 공민왕의 어머니가 기거하던 터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내살미왕모당’이나 ‘공민왕어머니당’으로도 불리는데, 내살미마을(원천리)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기 위해 공동으로 동신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그래선지 당집 안에 신체로 남녀 목신상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 탐방로는 왕모당 뒤쪽 산봉우리로 올라갑니다.
▼ 이 봉우리를 중심으로 ‘왕모산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1361년 고려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왔을 때 축성했다는 전설 속의 성(城)입니다. 하지만 성은커녕 돌무더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전설은 그저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13. 50. 왕모산 등산안내도가 국가지점번호판과 함께 세워져 있네요. 뭔가 특이한 점이 있는 모양입니다.
▼ 아니나 다를까 시야가 툭 트이더니 낙동강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네요. 강폭을 한껏 넓힌 낙동강은 요 아래 ‘내살미’마을에서 안동호로 숨어듭니다.
▼ 길이 또 다시 가팔라졌습니다. 어찌나 가파른지 그냥 떨어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면서 고도를 낮추어갑니다.
▼ 울창한 숲 사이로 ‘원천교’가 내려다보이네요. 원천리의 단사마을과 내살미마을을 잇는 다리랍니다.
▼ 이후로도 산길은 한참이나 계속됩니다. 하지만 길이 고와서 걷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아니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걸을 수 있는 기분 좋은 솔숲 길이랍니다.
▼ 14 : 06. ‘내살미’ 마을에 내려섭니다. ‘천사미(川沙美)’라고도 불리는데, 말 그대로 내(川)의 모래(沙)가 아름다운(美)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川)는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얘기하고요. 중간의 모래 사(沙)자만 억양이 들어가서 살이라는 말로 변하여 ‘내살미’가 되었답니다.
▼ 14 : 08. 왕모산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됩니다. 주차장은 지자체에서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대학병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화장실에 유압식 흙먼지털이기까지 설치되어 있더군요. 이정표와 안내판은 기본이구요. 아무튼 오늘은 3코스 후반부와 5코스 후반부를 함께 걸었습니다. 소요시간은 3시간 10분. 트랙이 8.96km를 찍고 있으니 느긋하게 걸었나봅니다. 아니 절반이 산길이었음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 주차장에 ‘왕모산 등산로안내도’가 세워져 있기에 게재해 봅니다. 5코스를 답사하면서 왕모산까지 다녀오시고 싶은 분들이 참조하면 되겠습니다.
▼ 집사람의 표정이 오늘따라 더 활짝 피었습니다. 전 구간을 저와 함께, 거기다 느긋하게까지 걸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더 웃고, 더 떠들고, 그로 인해 더 행복했으니 그 표정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트레킹이라기보다 등산에 가까운 인고의 길, 안동선비순례길 8코스(마의태자길) (2) | 2024.1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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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비순례길 3코스(청포도길)
여행일 : ‘24. 9. 7(토) 및 10. 5(토)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퇴계종택→수졸당→이육사문학관(10월5일 출발지)→목재고택→단천리경로당→단천교(거리/시간 : 6.3km, 실제는 7.89km를 2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 트레킹 들머리는 퇴계종택(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산악회의 코스 조정으로 인해 3코스 중 일부(이육사문학관까지)를 2코스에 보태서 걷기로 했다. 나머지 구간은 2주 후, 4코스를 걸을 때 추가해서 걷게 된다. 참고로 ’퇴계종택(退溪宗宅)‘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살던 집이다. 원래의 종택은 동암(東巖) 이안도(李安道)가 한서암 남쪽에 세웠고, 1715년 정자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을 별도로 지었다. 이후 10세손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이 구택의 동남쪽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어 옮겨 살았다. 그러나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고, 지금의 퇴계종택은 1926-1929년 13세손 하정(霞汀) 이충호(李忠鎬)가 새로 지은 것이다.
▼ ‘퇴계종택’에서 시작되는 ‘3코스(청포도길)’는 이육사의 고향 원촌마을을 지나간다.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떠올리게 만드는 포도밭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으며, ‘윷판대’에 이르면 육사의 또 다른 시 ‘광야’를 연상시키는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거기에 퇴계묘역, 수졸당 등 퇴계와 관련된 유적들을 함께 둘러보며 걷는 여정이다.
▼ (9월7일) 15 : 18. ‘토계천’의 강변길을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 15 : 20. 몇 걸음 걷지 않아 ‘상계1교’에 이른다. 선비순례길은 이곳에서 다리를 건넌다. 하지만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 100m 남짓만 더 걸으면 또 하나의 귀한 유적을 만날 수 있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15 : 22. 잠시 후 ‘계상서당’에 도착했다. 퇴계가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선생이 머물던 ‘한서암’을 중심으로, 우측 아래 계상서당, 좌측 아래는 기숙사로 사용한 ‘계재(溪齋)’가 복원되어 있다. 하나 더. 문하생들의 숫자가 늘어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할 수 없게 되자,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에 ‘도산서당’을 새로 지었으나, 퇴계는 이곳을 없애지 않고 겨울이면 바람 센 도산서당을 떠나 이곳’으로 왔단다.
▼ 퇴계의 공부방인 ‘계상서당(溪上書堂)’.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퇴계선생과 젊은 율곡의 만남이 이뤄졌던 곳이다. 1558년 약관 23세의 율곡은 58세의 퇴계를 찾아와 한껏 존경을 담은 시를 지어 바쳤고 퇴계도 화답했다. 두 사람은 사흘을 계상서당에서 함께 지냈고, 퇴계는 떠나는 율곡이 가르침을 청하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줬다고 한다.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이 귀하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일 만들기를 좋아함을 경계해야 한다(持心貴在不欺 立朝當戒喜事)>
▼ 퇴계 선생이 기거하던 ‘한서암(寒栖庵)’, 선생이 만년에 기거하다 숨을 거둔 곳이다. ‘퇴계(退溪)’라는 시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몸이 물러나니 내 분수에 편안하지만/ 학문이 퇴보하니 노년이 걱정스럽네/ 계상에 비로소 거처를 정하고/ 흐르는 물 보면서 날마다 성찰하네>
▼ 15 : 25.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다리(상계1교)를 건넌다. 그리고는 928번 지방도(백운로)를 따라 남·동진 한다.
▼ 다리에서 내려다본 ‘토계천(土溪川)’. 도산면 북쪽 끝에 있는 월오현과 투구봉 아래서 시작되는 물이 모여 태자리 부근에서부터 토계천을 형성한다. 도산면 소재지를 거쳐 토계리에서 낙동강에 합류되는데, 하천을 따라 퇴계 이황의 태실·종택·묘역 등 선생과 관련된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퇴계천(退溪川)’이라고도 불리는 이유이다.
▼ ‘청포도길’이란 브랜드답게 곳곳에서 포도밭을 만난다. ‘침대는 과학입니다’. 요즘은 포도밭도 과학이다. 과목 위에 비닐 천정을 씌우는 등 모든 과정을 과학적으로 하고 있다.
▼ 15 : 29. 다리를 건너자마자 고성이씨 탑동파 파조 이적의 추모 공간인 ‘산천정사’로 들어가는 샛길이 왼쪽으로 나뉜다(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고계정(古溪亭)’으로 들어가는 샛길이 역시 왼쪽으로 갈려나간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고계정’을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고계(古溪) 이휘령(李彙寧, 1788-1862)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했다. 퇴계의 10대 종손으로 1816년(순조 16) 생원에 급제 호조좌랑·동복현감·영천군수·동래부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러니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향토문화대전은 또 건물이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라고도 했다.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는데, 1977년 안동댐에 물이 차면서 현재 위치로 이건했단다. ‘고계산방(古溪山房)’이란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써줬다나? 하지만 건물의 크기가 우선 달랐다. 위치도 이곳(도산면 토계리)이 아닌 온혜리(같은 도산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는 향토문화대전이 가리키는 ‘고계정’과 이곳은 ‘이름은 같으나 건물은 다른 정자(同名異亭)’라는 얘기일 것이다.
▼ 건물은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멋스런 정자가 맞다. 거기다 학식 높은 선비가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딱 좋아 보인다. 그러니 선비문화수련원 안내도에 ‘정자(고계정)’로 표시해 놓았겠지? 그나저나 이런저런 궁금증은 해소할 수가 없었다. 안내판도 없는데다, 물어볼만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겠는가. 그저 퇴계종택의 부속건물쯤 되나보다 하며 발길을 돌렸다.
▼ 오늘은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해진다는 ‘백로(白露)’. 고된 여름 농사를 다 짓고 추수까지 잠시 일손을 놓고 쉬는 때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길가 벼가 고개를 숙여가고 있다.
▼ 15 : 33. ‘토계마을 쉼터’는 걷기여행자들에게도 자신의 품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 나무도 오래 묵다보면 신끼(神氣)를 띠는 법. 토계마을의 느티나무 노거수(老巨樹)는 서낭당의 신목이 되었다.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보장해주는...
▼ 작은 연못을 만들고 물레방아까지 배치했다. 요즘처럼 비가 잦은데도 돌지 않는, 아니 돌지 못하는 물레방아가 되었지만 말이다.
▼ 15 : 45. ‘하계마을’에 이를 즈음, 도로변에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 들어가 보니 ‘퇴계예던길 안내판’과 함께 ‘퇴계선생 묘소’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退溪先生墓下’라고 쓰인 돌 말뚝도 눈에 띈다. 퇴계 이황의 무덤(墓)이 이 산자락 어디쯤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초입의 이정표는 ‘퇴계선생 묘소’까지 150m쯤 떨어져 있다고 했다. 이까짓 것쯤이야 하기에 딱 좋은 거리다. 하지만 우습게 볼 상황은 아니었다. 서있다시피 한 급경사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야만하기 때문이다.
▼ 15 : 48. 첫 번째 무덤은 퇴계의 며느리인 ‘봉화 금씨(奉化琴氏)’ 것이다. 그녀가 남긴 유언(시아버님 살아계실 적에 내가 모시는데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사후에 다시 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내가 죽거든 나의 시체는 반드시 아버님 묘소 가까운 곳에 묻어 주기 바란다)에 따른 것이란다. ‘봉화 금씨’는 선생이 돌아가신 이듬해인 1571년 2월에 죽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불과 2개월만이다.
▼ 퇴계의 무덤은 이곳에서도 100m쯤 더 올라가야 한다. 계단은 더 가팔라진다.
▼ 15 : 52.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퇴계의 무덤에 올라설 수 있었다. 건지산(搴芝山)의 남쪽 봉우리 중턱쯤이다. 선생은 70세 되던 1570년(선조 3)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퇴계집(退溪集)’ 연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신축일 유시, 정침에서 돌아가다. 이날 아침에 모시고 있는 사람을 시켜서 화분에 심은 매화에 물을 주라 하였다. 유시 초에 드러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되어 일어나 앉아서 편한 듯이 운명하였다>
▼ 무덤에는 묘비(墓碑) 대신 묘갈(墓碣)이 세워져 있었다.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란다. 예장(禮葬)을 사양할 것이며,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다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후면에는 간략하게 향리와 조상의 내력과 지행(志行)·출처(出處)를 쓰라고 했다나? 참고로 묘비와 묘갈은 경계가 모호하지만 네모진 것이 비이고 둥근 것이 갈로 보면 된다. 비의 체재를 웅혼전아(雄渾典雅 : 기운차고 원숙하며 고상함)하고, 갈의 체재는 질실전아(質實典雅 : 소박하고 고상함)하다는 학자도 있다. 하나 더. 당대(唐代)에 와서 관직이 4품 이상은 귀부이수(龜趺螭首)인 비를 세울 수 있고, 5품 이하는 방부원수(方趺圓首)인 갈을 세우도록 규제했다니 갈이 비보다 하대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퇴계는 갈(碣)을 고집한 것이다. 이기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이 배워야할 점이 아닐까 싶다.
▼ 무덤은 건지산(搴芝山) 남쪽 자좌오향(子坐午向 : 정남향)의 언덕에 써져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곳을 명당이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울창하게 자란 소나무 숲이 앞을 가려버린 것은 흠으로 보인다. 명당의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것이 더 좋다면 몰라도 말이다.
▼ 묘역에서 내려오는 길. ‘수졸당’이 내려다보인다. 요 어디쯤의 언덕에 ‘양진암고지(養眞庵古址)’가 있을 것이다. 퇴계가 46세가 되는 1546년 벼슬에서 물러나 작은 집을 짓고 살며 ‘양진암’이라 이름 지었다는 곳이다. 빗돌까지 세워져 있다고 했는데, 시간에 쫓겨 발걸음을 서두르다 그만 놓쳐버렸다.
▼ 16 : 00. ‘수졸당(守拙堂)’은 진성이씨 하계파의 종택이다. 퇴계 이황의 손자인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 1559-1637)가 분가하면서 지어 ‘하계종택’ 또는 ‘동암종택’이라고도 하나 동암의 장자 수졸당 이기(李技 1591-1654)의 호에서 이름을 따 ‘수졸당’이 되었다. ‘ㅁ’자 형의 본채와 정자,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퇴계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은 이영도는 임진왜란 때 안동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웠으며, 전쟁 중 군량미를 조달함으로써 큰 공을 세웠다.
▼ 종택답게 현재도 종손이 기거하면서 동암선생의 불천위를 포함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단다. 별채에서는 한옥체험도 가능하다고 했다. 참! 수졸당은 KBS 다큐멘터리 ‘누들로드’에 소개되기도 했었다. 전통을 한결같이 지켜가는 제례 행사와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성으로 차려지는 종가음식들이 소개됐었다. 하지만 체험객들에게 제공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였다.
▼ 16 : 04. 수졸당 앞 삼거리. 이정표(단천교 4.7km/ 퇴계공원 1.6km)는 하계마을 쪽으로 가란다. 법정 동리인 ‘토계리(土溪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퇴계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사는 마을이다. 마을로 내려가다 능선을 타고 ‘윷판대’를 거쳐 이육사문학관으로 넘어오라는 것이다.
▼ 삼거리의 ‘독립운동기적비’. 퇴계는 제자들에게 늘 배움과 실천을 함께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가르쳤다. 나라가 어려울 때 분연히 일어나 싸우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이 바로 선비정신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퇴계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하계마을에는 구한말 의병활동과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한 독립유공자가 25명이나 나왔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기적비’를 세워놓았다.
▼ 그들의 애국충정에 동조라도 하려는 듯 주변의 무궁화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 16 : 05. 계속해서 ‘928번 지방도(백운로)를 따르기로 했다. 폭염에 시달리느라 고갈된 현재의 체력으로는 ’윷판대‘ 능선을 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선답자의 gpx트랙도 백운로를 따르라는데 고민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 16 : 09. 길가에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 안쪽에는 애국지사 이동봉(李東鳳)의 묘비가 있었다. 하계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이동봉은 1919년 3월 17일 면민들과 함께 일본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주동자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병세가 악화되어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20년 순국했다.
▼ 도로 건너 이정표(건지산 3.5km/ 수졸당 0.4km)는 산속으로 들어가란다. ’퇴계 예던길‘의 안내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안동선비순례길을 걷다보면 코스와 맞지 않는 이런 이정표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두 길을 하나로 통합시키든지 아니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두 길에 차이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고갯마루를 넘자 데크 길이 이제 그만 탐방로로 올라오란다. 도로변에 보행자 전용의 탐방로를 별도로 내놓았다.
▼ 이정표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윷판대‘를 다녀오란다. 이육사가 ’광야‘의 시상을 떠올렸다는 곳이다. 하지만 지친 내 육신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있었다.
▼ 이후부터는 데크 로드를 따른다. 신작로를 내면서 만들어진 인공의 능선 위로 길을 내놓았다.
▼ 내려가는 길에 서낭당도 만날 수 있었다. 기도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는 듯 제단 위에 신주(神主)와 제사 용품, 그리고 소주 몇 병이 놓여있다.
▼ 16 : 20 – 16 : 31. 고개를 넘자 ’이육사문학관‘이 잠시 들렀다가란다. 이육사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길이 전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의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들을 한 곳에 모아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정신관(전시관)과 생활관(연수원), 목우당(생가)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절정(絶頂)’ 시비와 이육사(李陸史, 1904-1944). 육사는 시인이기 전에 독립운동가였다. 그것도 항일무장투쟁단체인 의열단 소속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 출신이다. 의열단에서 육사는 권총사격은 물론이고 폭탄 제조 및 투척, 심지어 변장술도 배웠다. 1927년 처음 옥살이를 한 뒤 1944년 중국 베이징의 감옥에서 쓸쓸히 숨을 거둘 때까지 무려 17번이나 감옥 생활을 했다. 하나 더. 본명은 원록(源祿). ‘육사(陸史)’는 필명이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배달사건에 연루돼 육사가 첫 옥살이를 할 때 수인번호가 ‘264’였다는 데서 연유했다.
▼ ‘민족시인 이육사’의 저항과 문학의 피는 부모 집안에서 물려받았다고 한다. 육사의 어머니 김해 허씨는 한말 의병장 허위의 조카이다. 퇴계 이황이 14대 할아버지이고, 그에게 한학을 가르친 조부 치헌 이중직은 일찍이 개화하여 노비를 풀어주고 땅을 나누어 준 사람이다.
▼ 문학관은 이육사의 생애와 문학세계, 독립운동 자취를 다양한 방법과 매체로 구성해 놓았다. 시(詩) 체험시설도 갖춰 놓았는데, 헤드폰을 쓰고 버튼을 누르면 육사의 시를 눈과 귀로 동시에 접할 수 있다.
▼ 선생의 흉상과 육필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안경,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생활 모습 등을 재현해 놓았다.
▼ 감방이 특히 눈길을 끈다. 1934년 이육사가 체포된 곳이 광화문에 있던 서울경찰국 본청이라며, 까마득한 날의 기억은 이육사의 딸인 이옥비 여사의 증언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1943년 서울에서 베이징으로 끌려갈 때 이육사가 ‘용수’를 쓰고 있었다는 그녀의 증언을 더욱 실감나게 해주고 싶었던지 죄수를 이송할 때 사용하는 ‘용수’와 수갑, 밧줄, 쇠사슬 등을 진열해 놓았다.
▼ 전시관 맞은편 언덕에 있는 목우당(六友堂). ‘여섯 형제의 우의를 지키는 집’이라는 뜻으로 복원된 이육사의 생가이다. 육사와 원기·원일·원조·원창·원홍 6형제가 태어나고 자란 저 집은 원래 청포도 시비가 세워진 ‘원천리’에 있었다. 그러다 안동댐에 물이 차면서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이건되었다. 이후 생가의 기능이 훼손되자, 현재 위치에 고증을 거쳐서 복원하였다.
▼ 문학관 앞에 서면 평야지대가 드넓게 펼쳐진다. 넓은 들녘 너머로 강물이 흐르고 멀리 왕모산이 우뚝하다. 이육사가 태어난 곳으로, 육사는 윷판대를 위시한 이곳 원천리에서 ‘광야’의 시상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 (10월5일). 10 : 00. 928번 지방도(백운로)를 따라 걸으며 트레킹을 이어간다. 산악회에서는 오늘 5코스를 안내해준다. 하지만 작은아버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4코스’ 답사에 참여하지 못했던 우리 부부는 산악회와 따로 떨어져 독자적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 10 : 05. ‘원천마을’은 ‘퇴계 이황’의 후손들이 둥지를 튼 집성촌이자 ‘이육사(이황의 14대손이란다)’가 태어난 곳이다. 본명은 이원록. 어린 시절 그는 이 마을의 전통대로 유학과 한학을 익혔다. 참고로 ‘원천’은 퇴계선생의 5대손인 원대처사(遠臺處士) 이구(李榘, 1681-1761)가 정착하면서 붙인 지명이다. 세간명리를 떠도는 구름처럼 여기고 속진과 치욕을 ‘멀리한다(遠)’는 뜻으로 ‘원촌(遠村)’이라 부른 것이 마을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 ‘초가(草家)’라는 작품이 새겨진 이육사의 시비(詩碑). 하지만 마을에는 초가집이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 이육사의 생가 터. 한때는 큰 마을을 이루었을 동네는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 지역이 되었고 시인의 생가(‘六友堂’에 대해서는 위에서 얘기했다)도 그때 헐렸다. 그 집은 현재 문학관 언덕에서 만날 수 있다.
▼ 생가 터의 ‘청포도’ 시비. 작고 둥그런 7개의 화강암 위에 올라앉았다. 청포도 알갱이를 상징하는 모양이다.
▼ 옆에는 ‘목재고택(穆齋古宅)’이 들어앉았다. 조선 후기 문신인 목재(穆齋) 이만유(李晩由, 1822-1904)의 옛집으로, 그가 영해부사를 역임하였기에 ‘영감댁(令監宅)’이라고도 부른다. 이황의 후손으로 형조참판을 지낸 이귀운(李龜雲,1681-1761)의 증손자로 영남만인소의 소두(疏頭) 이만손(李晩孫)의 친족이기도 하다. 1858년(철종 9) 전시(殿試)에서 병과로 급제한 이후 승정원 승지, 영해부사, 사간원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 고택은 문도 담도 없었다. 옛날에는 솟을대문을 가진 대문채(행랑채)가 있었지만 수몰로 유실됐다고 한다. 고택에서는 민박이 가능하단다. 안채로 통하는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 집을 관리하는 이육사 시인의 따님인 ‘이옥비’여사를 만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하룻밤 머물 계획이 없는지라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 목재고택의 오른편에는 ‘원대구택(遠臺舊宅)’이 있다. 원촌마을이란 이름을 부여한 ‘원대처사(遠臺處士)’ 이구(李榘)의 옛집이다. 이 고택 역시 대문채는 없고 정면 6칸, 측면 6칸 반 규모의 정침만 전한다.
▼ 맨 오른쪽은 ‘사은구장(仕隱舊庄)’ 차지다. 조선 정조·순조 때의 문신인 사은 이귀운(仕隱 李龜雲, 1744-1823)의 옛집이다. 이귀운은 이구의 증손으로 벼슬길에 있을 때는 의리와 신의로써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았으며,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고 한다. 이름을 드러내기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호를 벼슬길에서 숨는다는 뜻으로 ‘사은(仕隱)’이라 했단다. 1786년(정조 10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삼사 요직을 거쳐 형조참판까지 지냈다.
▼ 이 집은 이원영(李源永, 1886~1958) 목사의 생가로 더 유명하다.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1919년 3·1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인물이다. 목회자가 된 후 1930년대부터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등을 거부하면서 4차례 옥고를 치렀다.
▼ 11 : 13. 도로(백운로)로 빠져나와 몇 걸음 더 걷자 이정표(퇴계공원 3.6km)가 세워져 있다. gpx 트랙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라며 경고를 보내오는 지점이다.
▼ 도로변 언덕에 그럴듯한 한옥이 들어서있기에 올라가봤다. 그리고 ‘원호정사(遠湖精舍)’를 만났다. 퇴계의 11세손인 ‘교리(校理) 이만형(李晩鉉, 1832-1911)’과 그 형제들의 면학정신과 우애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4형제 후손들이 1977년에 지은 건물이다.
▼ 요 아래 들녘에는 ‘칠곡고택(漆谷古宅)’도 있었다고 한다. 퇴계선생 10대손인 이휘면(李彙冕, 1807-1858)의 고택인데, 2006년 안동시에서 성곡동 고건축박물관(Gurume 리조트) 경내로 이건했단다.(사료를 뒤져보다 눈에 띄기에 거론해봤다)
▼ 11 : 14. 도로를 벗어나 들녘으로 들어간다. 이때 낙동강이 한 손에 잡히고, 왕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육사가 어린 시절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던 풍경이자 자라서는 ‘광야’의 시상을 떠올리던 풍경일 것이다. 그는 이 광야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되리라 다짐하며 독립을 갈구하였다.
▼ 안동댐 수몰로 인해 들녘은 황무지로 변해있었다. 이육사의 ‘광야’를 떠올리기에 딱 맞는 풍경이라 하겠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를 쓰던 시인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독립투사였다. 그의 시는 시리고 아프지만 희망차다. 그러니 한 걸음 한 걸음 시인이 전하고자 했던 마음을 떠올리며 걸어보자.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길을 갈수록 거칠어졌다. gpx트랙이 없었더라면 헤쳐 나갈 엄두도 못 냈을 정도다. 대신 시심에 한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광야’는 대한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염원하면서 지은 시로 평가 받는다. 과거부터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고, 수많은 침략에도 굴하지 않았던 한반도가 일제의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지만 자신은 저항의 씨앗인 이 시를 남기어 훗날 일어날 대한 광복을 기다린다는 저항시이다.
▼ 새옹지마라 했던가? 한걸음 내딛기조차 힘들 정도로 길이 거칠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고왔다. 억새꽃 만발한 들녘 너머에는 왕모산, 그리고 뭉게구름 둥둥 떠다니는 파란 하늘. 이 아니 아름다울 손가.
▼ 누군가는 가을 억새꽃을 일러 그 어느 꽃보다도 아름답다고 했다.
▼ 11 : 33. 거칠기 짝이 없는 들길과의 전쟁은 농로를 만나면서 끝난다. 주변지역 농민들의 경작지가 ‘원천들’ 안에 있는지 자동차 바퀴자국이 제법 또렷하다.
▼ 11 : 36. 이번에는 도로(왕모산성길)로 올라선다. 오른편에 보이는 ‘원천교’를 건너면 5코스(왕모산성길)가 종료되는 ‘내살미마을(원천리)’이다. 3코스(청포도)는 왼쪽 ‘단천리’쪽으로 간다.
▼ 길가 야생 나팔꽃이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아침 일찍이 피었다가 낮이면 시들어버리는 불쌍한 꽃(‘morning glory’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일 것이다)이다. 그래선지 꽃말도 ‘일편단심 사랑’이란다. 탐관오리에 빼앗긴 아내를 그리다 죽은 남편의 애절한 전설까지 담았으니, 집사람을 향한 내 사랑을 쏙 빼다 닮았다고나 할까?
▼ 오른쪽으로는 왕모산 자락의 험상궂은 바위절벽이 펼쳐진다. 낙동강변과 맞물린 저 벼랑의 꼭대기에 ‘갈선대’가 있고, 저 벼랑의 안쪽으로 5코스(왕모산성길)가 지나간다.
▼ 구(舊)도산청소년수련원을 리모델링했다는 ‘안동영화예술학교’. 미인가 영화특성화 대안학교로 영화를 주제로 시나리오 작법, 카메라의 이해 등 특별과목과 윤리·국어·수학 등 일반과목을 가르친다고 했다. 하지만 문을 닫았는지 텅 빈 운동장에는 학생들 대신 잡초만 무성했다.
▼ 단천리의 너른 들녘. 왕모산에 가로막힌 낙동강이 방향을 틀면서 만들어놓은 일종의 충적평야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이따가 ‘갈선대’에서 감상하게 된다.
▼ 11 : 43. 잠시 후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건지산 4.8km/ 칼선대 2.1km)에서 ‘왕모산성길’과 헤어져 ‘단사길’로 들어선다. ‘단천리’로 들어가는 길인데 2차선에서 1차선으로 바뀌었다.
▼ 11 : 46. 단천리 경로당. 이정표(건지산 4.7km/ 칼선대 2.2km)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낙동강 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곧장 직진하기로 했다. 다음 블록에 있는 ‘진성 이씨’의 종택에 들러보기 위해서다.
▼ 11 : 48. 네이버 지도는 ‘진성이씨(眞城李氏)’ 가문의 종택(宗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주하리(안동시 와룡면)에 있는 ‘주하동 경류정 종택’, 즉 국가민속문화재(제291호)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그 ‘진성이씨 종택’과는 어떤 관계일까?
▼ 단천리(丹川里)는 56가구 중 20가구가 ‘진성이씨’라고 했다. 그중 대부분이 이곳 ‘단사(丹沙) 마을’에서 살아간다고도 했다. 그러니 ‘토계리(진성이씨의 원래 세거지)’에서 단사마을로 옮겨 온 이후의 종가(宗家) 쯤으로 보면 되겠지?
▼ 100m쯤 떨어진 곳에는 퇴계선생의 8세손 이귀용이 지었다는 ‘계남고택(溪南古宅, 경북 민속문화재)’도 있다고 했다. 행여나 놓칠세라 두리번거리는데 주민분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알려주신다. 현재 성곡동 고건축박물관(Gurume 리조트)에서 숙박 손님을 맞고 있단다.
▼ 그는 인접해 있던 ‘서운정(栖雲亭)’에 대해서도 얘기해줬다. 헌종(憲宗) 때 이조참판을 지낸 농와(聾窩) 이언순(李彦淳, 1774-1845)이 말년에 지은 정자인데, 이 또한 성곡동 고건축박물관(Gurume 리조트)로 옮겨졌다고 한다.
▼ 11 : 51. 문화재 찾기를 끝내고 마을을 빠져나온다. 그리고는 탐방로가 있는 낙동강 쪽으로 간다.
▼ 11 : 53. 강 너머로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큼지막한 움직임이 한꺼번에 정지되어버린 듯 요지부동의 단애가 아랫도리를 물에 담그고 있다. 단애의 색깔이 붉어 보이는 것은 ‘단사마을’의 유래를 떠올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붉은 점토질 산맥이 마을 뒤로 뻗어 있고, 강가의 자갈이 연분홍빛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니 말이다.
▼ 이후부터는 제방(단사길)을 따라간다. 능수벚나무를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멋쟁이 둑길이다.
▼ 12 : 02. 단천교에 이르면서 3코스(청포도길) 트레킹이 종료된다. 3코스는 걷는데 2시간 10분이 걸렸다. 앱이 7.89km를 찍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산악회는 ‘3코스’의 길이가 짧다며 둘로 나눈 다음, 2코스(도산서원길)와 4코스(퇴계예던길)에 포함시켜 진행했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작은아버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4코스(2주 전에 진행했다)에 참석을 못했고, 때문에 3코스의 후반부를 다른 걷기 여행자들과 헤어져 단 둘이 걸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더 많은 밀어들을 속삭일 수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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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59코스(춘장대해수욕장 - 대천해수욕장)
여 행 일 : ‘24. 9. 28(토)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서면 및 보령시 웅천면·남포면·신흑동 일원
여행코스 : 춘장대해변→부사방조제→소황사구→황교리노인회관→소황리노인회관→독산해변(실제 출발지)→무창포해변→용두해변→대천해변(거리/시간 : 28.1km, 실제는 14.80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9코스를 걷는다. 8개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보령시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28km라는 거리가 우습게 보였는지 별이 2개(전체 5개)로 분류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관광공사 직원들은 날아다니는 모양이다.
▼ 들머리는 춘장대해수욕장(충남 서천군 서면 도둔리)
서해안고속도로 춘장대 IC에서 내려와 21번 국도를 타고 서천방면으로 3km쯤 내려오다 ‘비인교차로에서 607번 지방도로 옮겨 서면(춘장대해수욕장) 방면으로 7km쯤 들어오면 ‘춘장대해수욕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보령 59코스)안내도는 ‘중앙솔밭·백일 캠핑장’의 주차장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다.
▼ ‘춘장대해수욕장’에서 보령시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대천해수욕장’까지 가는 28.1km짜리 긴 여정이다. ‘소황리 공군사격장’ 등 군사시설을 피해 내륙으로 에둘러가기 때문이다. 길기만 한 것이 아니다. 코스 대부분이 해변이나 제방을 따라 나있어 여름철에는 최악의 코스로 분류된다. 하지만 곱디고운 모래사장을 걷는 재미와 서해의 작은 섬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어 걷기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코스로 꼽힌다.
▼ 산악회는 ‘소황사구(小篁沙丘)’의 입구인 ‘장안해변(이정표 : 종점 23.2km/ 시점 4.7km)’을 공식 출발지로 삼았다. 지난번 58코스 때 이곳까지 연장해서 걸었었기 때문이다. 춘장대해변에서 트레킹을 마친 우리부부는 유명 맛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그로 인해 생긴 자투리 시간을 보냈었지만...
▼ 부사방조제(扶士防潮堤) 준공기념탑. 서천군(서면) 도둔리와 보령시(웅천읍) 독산리를 잇는 3,474m 길이의 긴 방조제이다. 1997년 축조될 당시만 해도 웅천읍 일대의 농경지 보호가 임무였으나, 최근에는 낚시터로 더 각광을 받는단다. 방조제를 사이에 두고 바다낚시와 민물낚시를 동시에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 원래의 서해랑길은 ‘607번 지방도(부사로)’를 따라간다. 이어서 ‘황교리’와 ‘소황리’를 지나 ‘독산해변’으로 나온다. 하지만 산악회는 ‘소황사구’의 탐방로로 인도하고 있었다. 군사시설 때문에 평소에는 막혀있지만 주말에는 통행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 탐방로는 ‘소황사구’를 꿰뚫으며 나아간다. 생태·보전지역이선지 데크 길을 따로 만들어 자연과의 접촉을 최대한 줄였다. 하나 더. 네이버지도는 이곳을 ‘장안해수욕장’으로 적고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이나 샤워장, 취사장 같은 편의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생태·보전지역에 따른 개발제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 10 : 40. 실제 출발지는 ‘독대섬’ 입구로 ‘소황사구’의 최북단이다. 첨부된 지도에서 ‘부사호’ 위 역(逆)으로 된 ‘ㄷ’자의 상단, 뽈록하니 튀어나온 부분으로 보면 되겠다.
▼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소황사구’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탐방로를 걸으면서 관찰 가능한 동·식물들을 ‘살아있는 모래언덕’으로 포장해서 전해준다. 다만 평일 사격훈련 시간 때는 탐방로 진입이 불가능하다나?
▼ ‘독대섬’은 바다에 산 하나가 떠있는 형상이다. 섬이면서도 썰물 때는 육지와 연결되는데, 이때 맛조개와 돌게, 골뱅이 등을 잡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단다. 독대섬 앞바다에는 직언도, 황죽도가 일렬로 가지런히 놓여있다. 평소에는 독대섬까지만 물이 빠지지만, 음력 보름과 그믐 전후로 직언도까지 물이 빠져 무창포의 석대도와 함께 신비의 바닷길이 연출된다.
▼ 소황사구(장안해변). 다른 여행자들은 저 해안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참고로 소황사구는 길이 2.3km, 폭 200m, 최고 높이 17.6m에 이르는 대규모 사구이다.
▼ ‘독대섬’을 가운데 두고 반대편에는 ‘독산해수욕장(獨山海水浴場)’이 있다. 왼쪽은 소황사구, 오른쪽으로는 독산해변의 갯벌과 금빛 모래사장이 갈매기 날개처럼 좌우로 펼쳐지는 모양새이다. 해수욕장은 길이 1,500m, 폭 100m의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 ‘독산해변’ 글자 조형물. 독산해변은 바다에 홀로 있는 산이라 하여 ‘홀뫼해변’이라고도 불린다. ‘독대섬’의 생김새에서 유래된 지명이 아닐까 싶다.
▼ 10 : 42. ‘열린바다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주말이어선지 길가가 온통 주차장이다. 덕분에 우리를 실어다 준 버스가 회전을 못하고 후진으로 빠져나가느라 고생깨나 했다.
▼ 해수욕장의 배후 숲에는 무료 캠핑장이 들어서있었다.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텐트가 꽉꽉 들어차있다.
▼ 틈새를 마련 못한 사람들은 바닷가로 밀려난다. 하지만 조망만은 소나무 숲보다 한수 위다. 독산해변의 자랑거리인 낙조, 즉 잔잔한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사라지는 해를 바라보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다만 뜨거운 햇살에 고생깨나 해야겠지만...
▼ ‘모터 카약’까지 끌고 온 낚시꾼도 보인다. 그만큼 어종이 풍부하다는 애기일 것이다.
▼ 대어의 꿈은 백사장에서도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파도를 가르며 지나가는 보트까지도 끌어올리겠다는 듯 낚싯대 크기가 만만치 않다.
▼ 10 : 50. 해수욕장을 빠져나와서도 ‘열린바다로’를 탄다. 길가에 들어선 빌라나 카페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이다. 아니 ‘라바 카페’ 부근에서는 꼬맹이 섬과 여가 꾸미고 있는 빼어난 풍광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하나 더. 독산해수욕장에서 시작된 ‘열린바다로’는 해안선을 따라 용두해수욕장까지 이어진다.
▼ 서천에서 시작된 ‘배롱나무’ 가로수길은 보령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여름 꽃 배롱나무, 그 붉은 유혹에 빠져본다. 가까이 다가가면 정열적이던 꽃이, 한발 물러서자 수줍은 아름다움으로 변해버리는 이중성의 꽃이다.
▼ 11 : 04. ‘낙조공원’이란다. 바닷가 쪽으로 작은 공간을 만들고 일몰을 상징하는 조형물 두어 점을 배치했다. 떨어지는 해를 편히 감상하라는 듯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하지만 정비를 하지 않아 웃자란 잡목·잡초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 11 : 08. ‘독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편 ‘무창포해수욕장’으로 간다. 독산해변에서 무창포해변에 이르는 2km 구간도 군사시설을 피해 내놓은 우회로라고 보면 되겠다. 중간에 만났던 군의 ‘해상침투훈련장’ 안내판이 그 증거일 것이다.
▼ 11 : 13. 무창포해변에 도착하니 ‘비체펠리스’가 반긴다. 용평리조트가 처음 개발한 대형 해양리조트라고 한다, 참고로 ‘무창포(武昌浦)’라는 지명은 ‘무창(武昌)’의 서쪽에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세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던 갯가의 포구라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 바닷가로 나가 ‘닭벼슬섬’으로 간다. 섬까지 탐방용 보행교가 놓여있다. 섬과 육지 사이 물길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놓은 생태탐방로이다.
▼ 초입에는 갯벌생태계복원사업 안내판과 함께 ‘한국 새우양식 6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1963년 국내 최초로 이곳 웅천지역에서 새우양식이 시작되었다나? ‘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다.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배우고 간다.
▼ 다리에서 본 ‘무창포해수욕장’. 남북으로 뻗어나간 백사장 길이가 1.5km나 되는 기다란 해변을 끼고 있다. 경사가 완만한데다 물이 잔잔하고 배후에 울창한 숲까지 끼고 있어 천혜의 입지조건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인근 대천해수욕장에 비해 많이 한산하며, 주로 종교단체·교육기관·기업체나 가족단위의 야영지로 이용된다.
▼ 시선을 조금 옮기자 담장처럼 생긴 돌무더기가 드러난다. 갯벌에 크고 작은 돌을 쌓아 고기를 잡던 전통 어구인 ‘독살’이 아닐까 싶다. 독살은 돌을 이용해 반원 형태로 쌓는 게 우선이다. 다음은 중앙에 대나무를 이용해 수문(水門)을 만들어 고인 물이 빠지도록 한다. 수문 앞은 물이 빠져도 고기들이 모여 놀 수 있을 정도로 물이 고여 있어서 물때에 무관하게 고기를 잡을 수 있다.
▼ 왼쪽은 아까 지나왔던 ‘독산’쪽 해안이다. 바닷가에 널려있는 주먹만큼이나 작은 섬과 여(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들이 흡사 자갈밭을 보는 느낌이다.
▼ 탐방로는 ‘닭벼슬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낙조5경’ 중 제5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서해바다와 무창포해수욕장은 물론 무창포타워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단다. 하나 더. 혹자는 독산해수욕장과 무창포해수욕장의 경계를 ‘닭벼슬’처럼 생겼다는 곶(串)으로 삼고 있었다. 독산 쪽에서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저곳(직전 사진 참조)을 이르는 말일 게다. ‘닭벼슬섬’이라는 지명은 곶(串)의 생김새에서 따왔을 것이고 말이다.
▼ 11 : 19. 바닷가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해안을 따라간다. 백사장과 배후 숲 사이에 포장길을 내놓았다.
▼ 무창포의 빼어난 풍경화는 앞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 ‘석대도(石臺島)’가 완성시킨다. 섬의 모양이 돌로 된 좌대(座台), 즉 석대(石臺)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으로, 구전(口傳)에 따르면 아기장군이 죽었을 때 황새가 떼지어 나타나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매월 두 차례 간조 시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 무창포 ‘신비의 바닷길’은 진도와 더불어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물때가 맞지 않아선지 바닷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아쉬움을 안내판의 사진으로 달래본다.
▼ 그래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모세의 지팡이’로 달래볼 일이다.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향하자 바다가 갈라지면서 길이 나타났다는 기적이자 구원의 지팡이다. 참! 바닷가에 석대도 안내판과 함께 바닷길이 열리는 시기 및 시간을 적은 안내판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사리’ 때 열리는데, 5-6월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 11 : 27. 중앙광장의 무창포를 상징하는 조형물은 이제 막 출범하려는 범선의 역동적인 모습을 담았다. 리스본(포르투갈) 여행 때 만났던 ‘대항해 발견기념비(Padrao dos Descobr Descobrimentos)’를 축소시켜놓았다고나 할까? 대항해시대의 항해왕자 엔리케(Infante Dom Henrique)의 도움을 받은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항해를 떠난 자리에다 세운 기념물인데, 무창포의 것에는 세계를 호령했던 영웅들의 조각이 빠져있다.
▼ ‘신비의 바닷길’ 조형물은 전설 속의 ‘아기장군’을 형상화 했다. 바닷길을 걸으며 주울 수 있는 ‘해삼(굴·조개·게 등도 함께 잡힌단다)’과 함께이다. 참고로 아기장군은 석대도에서 살던 해룡과의 줄다리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했을 정도로 힘이 센 인물이었다. 하지만 역적(다른 전설들처럼)으로 몰릴 것을 우려해 석대도에서 해룡과 함께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장사였다.
▼ 무창포 해역은 ‘쭈꾸미’로도 유명한 모양이다. 맞다. 올해 3월엔가는 KBS-2TV ‘생생정보’에서 이곳의 ‘쭈꾸미 샤브샤브’를 소개한 일도 있었다.
▼ ‘물빛정원’이라는 분수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특히 스크린처럼 떨어지는 분수의 가운데를 뚫은 게 눈길을 끈다. 그 사이로 징검다리를 놓음으로써 ‘신비의 바닷길’을 연상하게 만든다.
▼ 홍완기(1932-2004) 시인의 시비도 세워져 있었다. 그의 작품 ‘무창포의 사랑’이 새겨진 빗돌, 이력과 ‘예순 살의 색신’이 적힌 또 다른 빗돌, 시비건립 취지문 빗돌이 떼지어 있다. 참고로 홍완기는 별난 이력의 소유자다. 이곳(궁촌리) 출신으로 초등학교만 마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나뭇꾼·엿장수·뱃사공·철도국(임시직원)·지방신문(견습기자)·승려 등을 전전하다 등단했다.
▼ ‘낙조5경’ 중 제1경이라는 ‘무창포타워’는 곁눈질만 하고 간다. 서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 오르면, 황홀한 일몰을 볼 수 있어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 꼽힌다. 특히 해거름에는 노을 덕에 인생 사진을 남기기에 안성맞춤이란다. 하지만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으니 굳이 올라가볼 필요까지 뭐 있겠는가.
▼ 무창포는 해마다 ‘신비의 바닷길 축제’가 열려왔다. 올해(제24회)도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무창포해수욕장 일원에서 열린단다. 체험·공연·판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니 한번쯤 찾아볼 일이다. 풀에 들어가 전어나 대하를 맨손으로 잡아보는 체험도 해보면서 말이다.
▼ 관광객들과 함께 바닷가를 누비고 다닐 ‘꼬마 열차’도 길을 나설 준비를 마쳤다.
▼ 11 : 38. 이제 ‘무창포항’으로 간다. 해안길은 중앙광장을 지나서도 한참이나 계속된다.
▼ 식당가를 끼고 나있어 구수한 음식냄새의 유혹을 참기 어려운 구간이기도 하다.
▼ 음식점의 홍보는 ‘백종원’씨가 대세인가 보다. 그가 출연했던 SBS-TV ‘백종원의 삼대천왕’에 대한 사진으로 식당 전체를 도배해 놓았다.
▼ 11 : 43. 해변 끝에서 왼쪽(무창포항 방향)으로 간다. 이어서 외항과 내항 사이에 놓인 다리를 건넌다.
▼ 동산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상화헌(尙和軒)’. 많은 이들이 죽도에 있는 ‘상화원’으로 오해하는 곳이다. 함께 걷고 있는 이석암 작가님도 이해를 못하겠다며 일단은 카메라부터 들이대고 본다. 하지만 ‘상화헌’은 ‘거품시대’의 작가 홍상화가 집필할 때 머물렀던 곳으로, 한옥 ‘애’와 ‘휴’, 그리고 만대루(안동 병산사원 것을 재현했단다), ‘작가의 집’ 등으로 구성된 일종의 ‘북 카페’이다.
▼ 11 : 47. 수산물시장 앞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널찍한 주차장, 이어서 탐방로는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내항과 외항을 나누는 경계선으로, ‘낙조5경’ 중 제3경이기도 하다. 고즈넉한 항구와 등대 3개를 한꺼번에 볼 수 있어 다채로운 풍경 속의 일몰을 줄길 수 있단다.
▼ 다리 위에서 본 ‘무창포항’. 무창포항은 원래 내만(內灣) 입구에 남북으로 방파제를 쌓아 항구를 만들고, 사구 위에 물양장(소형 선박이 접안하는 부두) 시설을 조성했었다. 하지만 간조 때 항구의 바닥까지 갯벌이 드러나 배를 댈 수가 없자, 방파제 시설을 새로 설치하고 항구를 서쪽으로 옮겼다. 덕분에 간조 때를 제외하면 입출항이 가능해졌지만 완전한 해결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현재까지 준설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 덕분에 내항은 천혜의 ‘대피항’이 되었다. 연근해에서 광어와 쭈꾸미, 갑오징어 등을 잡는 소형어선의 정박지로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 11 : 52. 배수갑문을 지나면서 ‘무창포항’과 이별을 고한다. 80m쯤 더 걸어 ‘관동교’에 이르자 이정표가 아직도 9.7km나 남았다며 속도를 올리란다. 오늘의 이벤트로 삼은 ‘해물요리’를 느긋하게 먹고 싶다면 말이다.
▼ 이후부터는 ‘열린바다로’를 따른다. 왕복 2차선의 널찍한 도로인데도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니 안전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차량통행이 뜸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11 : 58 – 12 : 14. 충남수산자원연구소 뒤. 나지막한 고갯마루에는 쉼터를 겸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덕분에 파고라 그늘에서 준비해온 간식에 막걸리 잔을 나누며 푹 쉬다갈 수 있었다.
▼ 12 : 14. 다시 길을 나선다. 이즈음 대하양식장 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방조제 안쪽 내수면에다 커다란 양식단지를 만들었다.
▼ 12 : 23.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소공원. 이번에는 정자와 벤치는 물론이고 조각품까지 배치했다.
▼ 조금은 조잡해보였지만(예술에 문외한이라서 일지도 모르겠다), 원색적으로 표현된 탓인지 많은 여행자들의 소개 글에 올라오고 있었다.
▼ 집사람이 ‘부추꽃’이란다. 선형으로 자라나는 잎사귀만 먹는 줄 알던 부추가 꽃도 피우는 모양이다. 그것도 저렇게나 예쁘게도 말이다.
▼ 12 : 28. ‘월전교(이정표 : 종점 8.1km/ 시점 19.8km)’을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용두해수욕장(龍頭海水浴場)’에 이른다. 한적하지만 해수욕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해변을 갖고 있으며, 해변 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송림에는 ‘숲속 야영장’이 조성돼 있어 해수욕과 캠핑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캠핑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보령시 근로자종합복지관(동백관)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편리하게 숙박할 수도 있다.
▼ 보령시 남서부 ‘남포방조제’의 남단에 위치한 용두해수욕장도 1,500m나 되는 기다란 백사장을 자랑한다. 미세한 입자의 알갱이로 이루어진 모래의 질도 뛰어나다. 거기다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까지 얕아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 여행의 정석대로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
▼ 백사장이 끝나갈 즈음 모래사장에 바위무더기가 널려있었다. 안내판이 ‘신랑바위 각시바위’임을 알려준다. 용두마을에 살던 처녀총각이 백년가약을 맺었는데, 앞바다에 살던 용이 처녀를 제물로 바치라고 했던 모양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성주사의 무염스님에게 부탁했고, 용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용을 죽이고 총각과 처녀는 각시바위, 신랑바위가 되어 영원한 사랑을 하게 되었다나?
▼ ‘장수바위’ 안내판도 눈에 띈다. 마을을 괴롭히던 탐욕스럽고 악덕한 용(龍)을 물리친 장수의 말발굽 자국이 아직도 장수바위에 남아있단다. 하지만 어떤 게 장수바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신랑바위 각시바위’와 이명동암(異名同岩)일지도 모르겠다.
▼ 12 : 37. 해변 끝에서 웃자란 잡초더미를 헤치며 오솔길로 들어선다. 바닷가에 들어선 요트경기장에 번잡함을 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 12 : 41. 오솔길을 빠져나와 ‘남포방조제(藍浦防潮堤)’ 둑길로 올라선다. 남포면 월전리와 보령시 신흑동을 잇는 길이 3.7km의 둑으로, 서해로 유입되는 남포천을 막아 보령시 남서부 해안의 너른 간척지를 만들어냈다.
▼ 시야가 툭 트이는 둑길은 일망무제의 조망을 보여준다. 조금 전 무창포 해안에서 눈여겨봤던 ‘석대도’가 요트경기장 뒤에서 고개를 내미는가 하면, 저 멀리 먼 바다에서는 호도, 녹도, 대·소화시도 등 작은 섬들이 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 오른쪽 풍경도 만만찮다. 광활한 남포평야 너머로 이름 모를 산들이 산그리메를 그리고 있다. 보령의 명산인 성주산과 옥마산, 오서산 등일 것이다.
▼ 진행방향에는 과거 섬이었으나 방조제로 인해 육지로 연결된 ‘죽도(竹島)’가 자리 잡고 있다. 죽도는 현재 섬 전체가 하나의 정원으로 꾸며졌다.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한국식 전통정원으로 조성하면서 ‘상화원(尙和園)’이란 이름을 붙였다. 섬 둘레에 조성한 탐방로(2km)를 따라 걸으며 석양정원, 한옥마을, 전통혼례식장, 하늘정원 등을 구경할 수 있다.
▼ 12 : 58. ‘상화원’의 입구(이정표 : 종점 5.2km/ 시점 22.7km)를 지난다. 섬 전체에 올곧은 대나무가 울창했다는 ‘죽도’는 조개·꼬막·굴 등을 양식하면서 사는 전형적인 섬마을이었다. 그러나 육지와 연결되면서 민자 유치를 통한 ‘죽도관광지’ 개발이 이루어져 각종 휴양시설을 갖춘 관광단지가 되었다. 2000년 죽도 섬 전체가 관광특구로 지정되었고, 2013년 3월 ‘상화원’을 개원했다. 소정의 입장료를 받고 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이게 볼만했던 모양이다. 보령시에서 ‘보령9경 더하기’ 중 제2경‘으로 뽑아 놓았다.
▼ 대천해변으로 가는 둑길은 멀고도 멀었다. 하긴 월전리에서 죽도 입구까지 걸어왔던 거리보다 배나 더 길다고 하니 어련하겠는가.
▼ 13 : 29. 방조제 끝. 둑에서 내려오니 ‘남포방조제 준공 기념비’가 맞는다. 1999년 남포간척지 공사의 일환으로 방조제가 완공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빗돌일 것이다.
▼ 배수갑문을 지나면서 ‘남포방조제’는 끝을 맺는다.
▼ 방조제에 갇힌 남포천(藍浦川)은 거의 바다 수준이다. 남포천은 보령시(남포면) 읍내리에서 발원 남포저수지와 소송리를 지나 삼현리에서 서해로 합류되는 길이 4.5km의 지방하천이다.
▼ 13 : 42. ‘갓배교차로’에서 ‘광장진입로’를 따라 500m쯤 걷다 첫 사거리(이정표 : 종점 2.4km/ 시점 25.5k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천해수욕장’으로 간다.
▼ 13 : 50. 해수욕장이 들어선 ‘신흑동(新黑洞)’으로 들어선다. 길은 충남대 임해수련원과 국군복지단 대천콘도의 사이로 난 골목을 지나 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 13 : 54. 이후부터는 해안산책로를 따라 ‘머드광장’으로 간다. 백사장과 배후 숲 사이로 포장길을 내놓았다. 하나 더. 보령시가지서 남서쪽으로 10km, 대천반도의 돌출부 끝에 위치한 대천해수욕장은 조개껍질로 덮여 있는 해안이 색다르다. 물은 그다지 맑지 않으나 수심이 얕고 수온이 알맞으며 밀썰물을 가리지 않고 어느 때나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 이때 ‘돌공원’을 지나가니 전국 각지에서 모아온 돌들을 곁눈질이라도 하면서 걸어보도록 하자.
▼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크고 작은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는 ‘다보도’부터 저 멀리 호도·녹도·삽시도·불모도까지 수많은 섬들이 흡사 돛단배라도 되는 양 파도에 밀려 둥둥 떠다니고 있다. 맞다. 보령시는 원산도, 삽시도 등 70여 개의 아름다운 섬을 가진 섬의 도시다. 법정기념일인 ‘섬의 날’ 기념행사가 충청남도 주관으로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 대천해수욕장(大川海水浴場)은 자타가 공인하는 서해안 최고의 해수욕장이다. 해변의 길이가 자그마치 3.5km를 넘는다. 해수욕장은 1932년 경남철도주식회사의 승객유치 수익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됐다. 9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서해안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해수욕장이다. 최근에는 계절별 축제와 다양한 이벤트가 개최되고 있어 사계절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2022년 8월 기준으로 연간 방문객 수가 1천 200만 명에 이른다나? 특히 1998년부터 개최된 보령머드축제는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단다.
▼ 대천해수욕장은 ‘보령9경 더하기’ 중 제1경으로 꼽혀있다. 바다를 걸으며 힐링할 수 있는 곳이자 사계절 축제의 현장이란다. ‘보령9경 더하기’의 나머지는 죽도 상화원(2경), 성주산자연휴양림(3경), 개화예술공원(4경), 무창포해수욕장(5경), 외연도(6경), 충청수영성(7경), 냉풍욕장(8경), 보령호(9경)에 플러스로 오서산을 더했다. 남들이 다하는 8경으로는 턱도 없다는 듯이 9경으로도 모자라 하나를 더 보탰다.
▼ 14 : 00. 해변을 따라 10분 남짓 걷다가 시민헌장탑이 있는 ‘노을광장’으로 올라간다. ‘구광장’인 머드광장과 대비해 ‘신광장’으로도 불리는데, 젊은 층들이 선호하는 공간이란다. 하지만 화장실과 야외샤워장만 있고 실내수영장은 없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 ‘노을광장’이란 이름에 걸맞게 바다를 향해 스카이워크도 만들어 놓았다. 편하게 앉아 노을을 감상하라는 듯 다리 아래는 관람석까지 갖추었다.
▼ 14 : 06. 이후부터는 도로변 소나무 숲을 따라간다. 해변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빼어난 해수욕장의 조건에 걸맞게 각종 휴양·편의시설, 문화예술 공간을 서해안에서는 으뜸으로 갖추었다. 최근에는 각종 서비스시설의 고급화도 병행되고 있단다.
▼ 숲이나 노변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조형물들을 들어앉혔다.
▼ 보통 송림이나 사구를 배경으로 하는 다른 해수욕장들의 자연 친화적인 경치에 비하면 대천해수욕장은 도시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해수욕장을 끼고 바로 도회지가 형성되어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아름다운 집과 높은 빌딩이 늘어서 있고, 곳곳에 광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갖가지 예술적인 조형물이 놓여 있다.
▼ 14 : 13 – 15 : 13. 아무튼 우리가 바라던 대로 주어진 시간보다 1시간쯤 먼저 ‘대천해변’에 도착했다. 그 시간은 오롯이 먹는데 사용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박주를 나누면서 회포를 풀 수 있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특히 이곳 대천해수욕장은 ‘키조개 삼합’이라는 독특한 요리로 유명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해물상회’. ‘원조’라는 수식어가 발길을 이끌어주었다.
▼ ‘키조개 삼합’은 바다와 육지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요리다. 대천 앞바다에서 잡은 키조개(관자)와 우삼겹(또는 차돌박이)에 채소를 섞음으로써 바다와 육지 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전복과 새우, 가리비 등 다른 해산물도 함께 나와 취향에 맞게 다양한 방법으로 조합해서 먹는 재미도 있다. 참고로 키조개는 아연과 칼슘, 철 등 미네랄 성분이 풍부해 피로 해소와 간장 보호에 효과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맛과 건강을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해산물이라는 얘기다.
▼ 15 : 15. 만남의 광장으로 빠져나와 종점인 ‘머드광장’으로 간다. 바닷가를 따라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조형물이 늘어서 있었다. 잘 단장된 ‘조각공원’을 구경하는 느낌으로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 덕분에 곳곳에서 사진의 배경으로 삼기 딱 좋은 조형물들을 만난다. 그러니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고 카메라 앞에 서보자. 인생샷이라도 한 장 건질 지 누가 알겠는가.
▼ 15 : 30. 구광장이라고도 불리는 ‘머드광장’에 도착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매년 열리는 ‘보령 머드축제’의 주 무대이자, 본격적인 휴가철에는 야간에도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즐기자 밤바다’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패들보드, 수상 징검다리 등 다양한 미니게임이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단다.
▼ 서해랑길(보령 60코스) 안내도는 ‘바다의 여인’ 조형물 옆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4.80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걷기 버거울 정도로 여행자들을 괴롭히던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 머드광장에서 바라본 바다. 저 멀리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보인다. 때로는 신기루 현상으로 아득한 중국대륙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오늘은 집사람 말고도 구우(舊友) 둘이 트레킹 후 소주라도 한잔 나누자며 함께 걸어주었다. 이런 게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겠는가. ‘장 바니에(Jean Vanier)’는 그의 저서 ‘희망하는 사람들, 라르슈(Porte d'esperance)’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며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했다. <내 심장이 다른 사람의 심장 박동에 따라 고동치기까지, 그리하여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기까지 나 자신을 충분히 버리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니 몇 마디 담소를, 그것도 오가는 반주에 희석되어버릴 수도 있는 얘기 몇 마디를 나누기 위해 자신들의 소중한 시간을 써버린 저 친구들은 나에게는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거론한 책에는 1964년 파리 근교의 작은 집 ‘라르슈(방주라는 뜻)’에서 정신지체 장애인 필립, 라파엘 두 사람과 함께 살기 시작한 장 바니에. 그 집이 28개 나라에 103개의 공동체로 확산되기 까지, 고통 받는 많은 이들에게 바니에가 열어준 희망의 메시지가 따뜻하게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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