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25코스(매당마을-신안젓갈타운)
여행일 : ‘23. 3. 11(토)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해제면과 신안군 지도읍 일원
여행코스 : 매당노인회관→매안마을→큰부수막들방조제→황토펜션→명양마을→해제·지도연륙교→봉황산임도→신안젓갈타운(거리/시간 : 17.8km/ 17.99km를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25코스를 걷는다. 10개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해제반도의 구릉지와 해안을 이어 걷는다. 덕분에 무안을 상징하는 드넓은 갯벌과 특산물(양파·마늘·양배추)로 덧씌워진 들녘, 그리고 신안의 다도해 풍광을 실컷 눈에 담게 된다. 주요 볼거리로는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串) ‘배암 혓바닥’과 신안의 새로운 볼거리로 등장한 ‘거북섬’을 꼽을 수 있다.
▼ 들머리는 매당마을(무안군 해제면 창매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신안(지도·임자도) 방면으로 내려오다 천장교차로(해제면 천장리)에서 왼편 창매로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매당 마을’에 이르게 된다. 초입에 있는 노인회관이 25코스의 시작점이다. 참고로 법정 동리인 ‘창매리’의 3개 취락(聚落 : 창산·매당·매안) 중 하나인 매당마을은 풍수지리상 명당에 해당된다고 했다. 명당이 와전되어 맹당(孟堂)으로, 이후 ‘맨댕이’로 불리다가 한자화하면서 매당(梅堂)으로 고쳐졌단다.
▼ 해제면 매당마을(창매리)에서 시작해 지도읍 신안젓갈타운(읍내리)에서 끝나는 17.8km짜리 코스로 해제반도(海際半島)의 구릉지와 해안, 그리고 지도(신안군)의 해안과 임도를 따라 걷는다. 오늘은 우리 부부의 출발지를 따로 잡아봤다. 시점에서 4km쯤 전방에 위치한 ‘황토골휴게소’에서 집사람을 출발시키고, 시점에서 출발한 내가 뒤를 쫓는 형식을 취했다.
▼ 마을회관을 빠져나오자마자 길이 나뉜다. 서해랑길은 도로(창매로)를 놓아두고 바닷가를 향해 내려간다. 25코스가 시작됨을 알리는 ‘시작점’ 표지판은 이정표(황토골휴게소 4.4㎞, 종점 16.7㎞) 옆의 전신주 기둥에 매달려있다.
▼ 서해랑길을 제켜놓고 도로를 따라본다. 동네 수문장을 자처하고 있는 노거수를 만나보기 위해서다. 매화정이란 정자까지 품은 저 팽나무(군의 보호수이다)는 수령이 29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나무 앞에 ‘선돌’까지 모셔놓은 걸 보면 마을에서 당산나무로 모신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당산나무로 모시던 버드나무가 태풍에 쓰러지자 나무 옆에서 수호신처럼 서있던 바위를 이곳으로 옮겨놓았단다.
▼ 50m쯤 더 걸으면 ‘광산김씨삼강려’라는 제각도 만나볼 수 있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배출한 忠·孝·烈의 삼강행실(三綱行實)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원래는 각각 다른 시기에 정려로 포상 되었으나 1946년에 하나로 합쳤다고 한다. ‘호은처사광산김공경모비’와, ‘회산처사김공강학비’, ‘효자김공치선실적비’, ‘창와김선생유적비’도 눈에 띈다. 이 마을에서 학문이 뛰어난 이들을 배출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정면 3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 제각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럼 병자호란 때 전사한 김득남(金得男, 1828년에 정려)의 충의(忠義)와 1891년에 정려를 받은 김성경 및 김철현의 효행(孝行), 김득남 의처 밀양김씨(1870년에 정려)의 열행(烈行)은 어디서 엿볼 수 있다는 말인가. 혹시나 해서 제각 곁에 세워놓은 빗돌을 살펴봤으나 관련 내용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제각까지 살펴본 다음 서해랑길로 합류한다. 이때 매당마을 앞바다에 떠있는 ‘머우섬’이 눈에 들어온다. ‘개구리섬(蛙島)’으로도 불리는데, 동백나무가 무성해서 한때는 마을 사람들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유지로 변해버렸다나?
▼ 탐방로는 이제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串), ‘배암 혓바닥(또는 뱀머리)’을 바라보며 간다. 매당마을 앞바다에 떠있는 ‘와도(蛙島)’ 쪽으로 뻗어나간 지형이 마치 뱀이 개구리(섬)를 잡으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란다.
▼ 갯벌은 온통 푸른 해초로 뒤덮여 있다. 매당마을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고마운 색깔이라 하겠다. 저 갯벌(‘정챙이’이란 지명을 지녔다)에서 채취되는 감태가 무안에서 가장 질이 좋다니 말이다. 한때는 한 사람이 하루에 20동 이상씩 따오기도 했단다. 그밖에도 무안에서 가장 질 좋은 석화와 낙지를 잡아 높은 수익을 올린다고 했다.
▼ 방조제를 따라 100m쯤 걷다가 매안마을로 향한다. 이때 ‘허천들’이란 들녘을 걷게 되는데 물이 하도 귀해서 비가 내려도 물을 쑥 빨아들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마을이라고 해서 하등 다를 게 없었단다. 공동우물의 수량이 적어 늘 줄을 서서 사용해야 했고, 가뭄이라도 들면 십리나 떨어진 창산 마을 뒤까지 가서 양동이로 물을 길러 와야 했단다.
▼ ‘허천들’에서도 무안의 특산품인 마늘과 양파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한겨울 맹추위를 굳건히 버텨낸 양배추는 수확이 한창이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2분. ‘매안’ 마을회관 뒤 도로(이정표 : 종점 15.4㎞/ 시점 1.3㎞)에서 특이한 표석을 만났다. 매안마을과 매당마을을 함께 담음으로써 경계석을 겸하게 했다.
▼ 매안마을을 빠져나와 구릉지 위를 걷는다. 이때 하늘이 반, 나머지 반은 바다나 땅이 채워준다는 해제반도의 독특한 풍경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 20분 정도 걸어 매안마을 구간을 빠져나오면, 탐방로는 또 다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고 방조제 위를 걷는다. 그런데 어디서 난데없는 경고방송이 들려오지 않겠는가. CCTV가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쓰레기 버릴 생각을 일찌감치 버리란다. 하긴 바닷가라고 해서 무단투기를 하는 못난 놈들이 없겠는가.
▼ 길고 긴 방조제를 걷다보면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만큼은 얘외다. ‘배암 혓바닥’이라는 신비로운 풍광을 계속해서 옆구리에 끼고 가기 때문이다.
▼ 오른쪽으로는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널따란 들녘(‘큰부수막 들’과 ‘노갱이 들’이 잇따라 나온다)이 펼쳐진다. 그 끄트머리에는 창매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창산(蒼山)’마을이 철마산(지형이 말 형상으로 생겼단다)을 배경삼아 들어섰다. 어촌이었을 마을은 이 방조제가 쌓이면서 이젠 산촌으로 변해버렸다.
▼ 서해랑길은 둘레길 나그네만의 것은 아닌가 보다. 라이더 한 명이 지도로 들어가는 연륙교에 이를 때까지 나타났다 사라기지를 반복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방조제를 1km쯤 걸었을까 ‘무안한옥리조트’라는 커다란 펜션단지가 나타난다. 서해랑길은 바닷가에 접해있는 이 숙박시설의 앞마당을 횡단한다.
▼ ‘참새골황토펜션’으로도 불리는 이 숙박시설은 전통 한옥의 고풍스러운 멋을 지닌 데다, 바닷가에 접해있다는 특이성으로 인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는 중이라고 했다. 노래방, 찜질방 바비큐장은 물론이고 널따란 수영장까지 갖췄다.
▼ 펜션 앞 바다에 물이 빠져나가면 드넓은 갯벌은 체험장으로 변한다고 했다. 갯벌을 향해 길게 뻗어나간 저 길은 체험 참여자들을 위해 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잡아온 해산물은 바비큐 장에서 구우면 되고, 반주 삼아 마신 술에 얼큰해졌다면 부대시설인 노래방이라도 찾아볼 일이다.
▼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배암 혓바닥’이 얼굴을 내민다. 사두(蛇頭)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최근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집을 지어 거주하고 있단다.
▼ 참새골펜션에서 8분. 탐방로는 24번 국도로 올라선다. 그리고 잠시지만 이 도로(해제·지도로)를 따른다.
▼ 국도에서 만나게 되는 휴게소의 이름도 역시 ‘황토골’이다. 해제반도를 걷다보면 심심찮게 눈에 띄는 낱말인데, ‘황토’가 무안의 자랑거리로 굳어졌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힐링이 세간의 화두로 굳어지면서 황토의 건강 효용성 또한 부각됐고...
▼ 휴게소에서 우린 무안의 내로라는 자랑거리를 엿볼 수 있었다. 초의선사 탄생지와 노을길 등 서해랑길을 걸어오면서 만난 명소들은 물론이고, 밀리터리테마파크와 전통생활문화테마파크, 도리포, 식영정 등에 대한 자랑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 탐방로는 휴게소를 왼편에 끼고 돈다. 그리고는 임도를 따라 또 다른 해안으로 나아간다. 이 구간에서도 우린 ‘해뜰목황토펜션’이란 꽤 그럴 듯한 숙박시설을 만날 수 있었다. 지역 브랜드(황토)로도 모자라 ‘해뜰목’이라는 의미(해돋이)를 추가시켰다.
▼ 임도를 지나서 다시 만난 바다도 역시 ‘탄도만’이다. 보여주는 풍광 또한 대동소이하다.
▼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배암 혓바닥’이 노리고 있는 게 ‘개구리섬’이 아니라 ‘탄도’인 것이다. 뱀이 삼키기에는 너무나 큰 섬일 텐데도...
▼ 이번에도 방조제를 따른다. 이렇듯 무안의 해안은 해남과 함께 간척사업의 명소로 꼽힌다. 덕분에 들쭉날쭉해야만 할 리아스식 해안이 직선으로 변해버렸다. 혹자는 자연스러운 멋이 사라져버렸다며 아쉬움을 토로하지만 그 또한 삶의 한 방편이었으니 어쩌겠는가.
▼ 양월리로 들어선 탐방로가 아까와는 또 다른 풍경을 선보인다. 창매리 해안을 장식해오던 ‘와도(개구리섬)가 사라진 대신, ‘밤섬(栗島)’이 새로운 풍경화의 화룡점정으로 들어앉았다. 물이 들면 밤송이처럼 보인다는 꼬맹이 섬인데, 풍수적으로는 자물쇠의 형국을 하고 있단다.
▼ 율도를 향해 쭉 뻗어나간 저 길도 노두(路頭)라 부를 수 있으려나? 갯벌에 놓은 어민들의 작업도로 말이다.
▼ 방조제를 10분쯤 걷다가 ‘명양마을(이정표 : 종점 10.6㎞/ 시점 6.1㎞)’로 들어간다. 해제반도의 끝에 위치한 마을로 ‘명양’이란 지명은 마을 옆을 흐르는 해협(지도와의 사이)의 물살이 거센데서 유래됐다. 물살이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돌목처럼 커서 ‘울두’ 또는 ‘울띠’라 불리다가 한자화하면서 명양(鳴洋)이 되었다.
▼ 마을을 관통해 ‘해제·지도로’로 올라섰다. 이 구간에서 우린 ‘산들밥상’이라는 소고기 샤브샤브전문점을 만날 수 있었다. 무안지역에서는 맛집으로 소문났다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꽤 많은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 이곳 해제반도는 전형적인 구릉지. 농사를 지을 물이 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그 방편으로 만들어진 게 ‘둠벙’, 얼마나 물이 절실했으면 한 방울의 물도 아까워 바닥에 비닐까지 깔았을까 싶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5분. 모퉁이를 돌아서자 해제반도와 지도를 잇는 연륙교(내 눈에는 방조제로 보였다)가 얼굴을 내민다. 1975년 저 다리가 놓이면서 무안군과 신안군이 서로의 어깨를 맞대게 됐다. 300m 길이의 다리 2개가 놓였는데, 해안 쪽 다리(제방)는 농·어민의 생활도로로 쓰이며 안쪽은 국도가 지나간다.
▼ 우리가 건너고 있는 이 해협은 ‘제2의 울돌목’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물살이 거셌다고 한다. 좁은 해협으로 칠산바다와 목포앞바다의 물이 서로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난파사고가 자주 일어났고, 물살이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는 해제면소재지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나? 그게 이 연륙교가 놓이면서 이젠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 건너편의 또 다른 연륙교로는 국도 24호선이 지나간다. 참! 반대편 연륙교도 이곳처럼 둑으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이름만 다리이지 실제는 방조제인 것이다. 그런데도 둘 사이의 공간을 객토를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한 평의 땅이라도 더 만들고 싶었을 텐데...
▼ 물살이 거세다는 것은 물길이 깊다는 증거다. 그래선지 썰물 때인데도 불구하고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자동선착장(진변마을 쪽에 하나가 더 있다)의 배들도 하시라도 떠날 채비를 마쳤다. 참!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자동선착장에는 임자-지도-목포항을 운항하는 여객선이 들렀다고 했다. 300m 거리의 무안 해제를 연결하는 나룻배도 수시로 다녔단다. 하지만 세월의 뒤안길에 선 지금은 어민선착장으로 겨우 항구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 지도로 들어서니 팔각정이 잠시 쉬어가란다. 진변마을 주민들을 위한 쉼터겠지만, 둘레길 순례자들에게도 최고의 쉼터가 되겠다.
▼ 다리 건너 진변마을에 이르면 길이 둘로 나뉜다. 직진은 지도읍시가지로 가는 길, 서해랑길은 태천마을 방향(왼쪽)의 ‘동천길’을 따른다. 하나 더, 삼거리 오른편에는 지도체육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 300m쯤 걷다가 다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고 효지방조제를 따라 ‘누동마을’ 쪽으로 간다.
▼ 둑길을 걷다가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밤섬’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매령산과 바다를 향해 쭉 뻗어나간 ‘배암 혓바닥’을 배경삼은 풍경이 아까보다 훨씬 고와졌다. 섬의 주위를 푸른 바닷물로 덧칠해놓은 덕분이지 싶다.
▼ 옥색 바다에 떠있는 ‘가두리양식장’도 잠깐의 눈요깃거리가 된다. 행여나 바람이라도 거세질세라 주민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는 근심의 근원이기도 한 시설이다. 섬사람들에게 바람은 곧 풍파다. 어떤 삶에 풍파가 없으랴.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바람에 맞서 싸우기보단 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풍요를 가져오게 되었고 말이다.
▼ 오른쪽으로는 간척사업이 빚어놓은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즈음 우린 중산동과 효지마을 등 ‘자동리’에 속한 자연부락과 함께, 봉황산과 선봉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서해랑길은 두 산의 사이로 난 임도를 따른다.
▼ 눈이 호사를 누리며 600m쯤 걷다가 효지2저수지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바다와 헤어져 내륙으로 파고든다.
▼ 마을(‘쩍골마을’이 아닐까 싶다)을 가로지르다 지극히 예스런 풍경을 만났다. 돌과 흙으로 벽을 쌓아올린 다음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다. 장식이라곤 틀도 없는 문이 전부, 그 소박함이 어릴 적 추억을 소환해줬나 보다.
▼ 마을을 빠져나와 또 다시 ‘동천길’로 올라선다. 이어서 ‘누동마을’ 방향(왼쪽)으로 70m쯤 걷다가 임도로 들어선다. 이후부터 서해랑길은 3km쯤 되는 임도를 따른다.
▼ 봉황산(165.5m)과 선봉산(121.5m) 사이로 난 임도는 순하기 짝이 없었다. 정비가 잘 되어 있는데다 경사까지 완만했기 때문이다. 하긴 임도의 길이가 3.1km나 되는데 반해, 가장 높은 지점의 높이가 101m에 불과하니 서둘러 고도를 높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 심지어는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느낌까지 준다. 솔가리가 수북하게 쌓여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 또 다른 즐거움도 있다. 곳곳에서 트이는 조망 덕분에 다각적으로 펼쳐지는 지도의 풍경을 두루두루 눈에 담을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농업회사 법인인 ’하늘애‘. 그 뒤로 보이는 게 ‘선봉산’인데 121m 높이의 산답지 않게 우뚝 솟아올랐다.
▼ 태천리 해안에 설치된 풍력발전기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그 뒤로는 다도해가 펼쳐진다. 비파섬과 선도, 병풍도일 것이다. 봉황산 임도는 이렇듯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 내륙에는 ‘오룡마을’이 있다. 법정 동리인 ‘자동리’를 구성하는 5개 자연부락(자동·자서·효지·오룡·중산동) 중 하나로, ‘오룡(五龍)’이란 지명은 마을 지형이 용 다섯 마리의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깨어 꿈틀거린다는 경칩(驚蟄)이 지난지도 벌써 5일이나 됐다. 남녘땅으로부터 꽃소식이 전해진지도 이미 오래, 산수유축제와 매화축제는 이미 시작됐고, 다 다음 주쯤이면 벚꽃축제도 열릴 것이다. 그러니 길가에 들꽃 하나쯤 눈에 띄지 않을 수 있겠는가.
▼ 40분이나 걸어서야 봉황산 임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내려선 도로변 텃밭에는 양배추가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수확이 한창인 농부 앞에서 우린 부부싸움까지 할 뻔했다. 트레킹을 마치려면 아직도 5km 이상 걸어야하는데 양배추 한 포기 얻어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귀경해서 가장 질 좋은 양배추를 사드리겠노라며 달랬지만 자칫 무거워진 배낭을 짊어지고 쩔쩔 맬 뻔했다.
▼ ‘이 뭣꼬?’ 갈대처럼 생겼는데 꽃은 영 딴판이다.
▼ 400m쯤 도로(동천길)를 따르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해안으로 내려선다. 이어서 길고 긴 ‘오룡방조제’의 둑길을 걷는다.
▼ 이때 ‘천사섬 신안’의 진면목을 살짝 엿볼 수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섬들이 바다에 늘어섰다. 소도·연도·마산도·고이도·매화도 등등 그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숨이 차오른다.
▼ 오른편에는 오룡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생겨난 간척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들녘의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오룡마을의 앞에 펼쳐져 있으니 ‘오룡 들판’쯤으로 해두자.
▼ ‘농자천하지대본’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나 보다. 들녘의 많은 부분을 태양광발전소가 차지하고 있었다. ‘식량 안보’가 남의 나라 얘기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멀쩡한 농경지에 저런 시설이라니...
▼ 하지만 옛 사람들은 한 평의 땅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었다. 그러다보니 일직선으로 뻗어나갔어야 할 방조제가 저렇듯 바다를 향해 배불뚝이처럼 밀고 나갔다.
▼ 방조제와 들녘 사이에는 수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들녘 곳곳에는 저수지도 들어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가 보다. 길고 긴 가뭄은 논바닥을 저렇듯 거북이 등껍질로 만들어버렸다.
▼ 반대편의 갯벌에는 또 다른 문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지도 주변의 갯벌은 ‘농게’가 주인이라고 했다. 그러니 저 갯벌은 농게 가족의 ‘삶의 현장’이자 ‘삶의 흔적’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10분, 배불뚝이처럼 튀어나온 광정리 ‘백양들’을 지나자 종점인 지도시가지가 더 또렷해졌다. 이제 종점이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갯길’이 또렷해졌다. ‘생명의 땅’ 갯벌을 보듬은 실핏줄로, 바닷가 사람들은 갯벌과 마을,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저 실핏줄을 통해 자연과 소통해왔다.
▼ 신안의 갯벌은 ‘생명의 땅’으로 알려진다. 그만큼 많은 식생을 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저 갈매기들도 그중 일부분을 담당할 게고 말이다.
▼ 잠시 후, 이번에는 지도읍의 또 다른 명물로 자리를 굳힌 ‘거북섬’이 눈에 들어온다. 본도와의 간극을 없애버린 긴 목교가 눈길을 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35분. 신안젓갈타운에 도착했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아가면 25코스의 종점이다. 하지만 그 전에 ‘거북섬’부터 둘러보자. 신안군의 새로운 명소로 등장했다는데 거를 수야 없지 않겠는가.
▼ 거북섬은 해상탐방로가 놓임으로써 관광지로 변했다. 썰물 때, 그것도 갯벌에 무릎까지 빠질 각오를 해야 들어가 볼 수 있었던 섬이, 마법 같은 나무다리를 놓아 밀물 때도 섬을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500m쯤 되는 거리를 부담스러워 할 필요도 없다. 중간 중간에 만들어놓은 쉼터에서 쉬어가면 될 일이다.
▼ 인생샷을 원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갯벌의 한가운데, 그것도 바닷물에 최대한 다가간 곳에 그네를 설치해 푸른 바다를 배경삼아 그네를 타는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갯벌 차지가 됐다. 밀물 때가 가까워졌는지 움푹 팬 갯고랑 사이로 조금씩 물이 차오르면서 농게와 짱뚱어가 부산하다. 또 다른 풍경도 보인다. 무리를 지어 말라비틀어진 저 식생들은 대체 뭘까? 무안·신안의 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칠면초’는 분명 아닌데...
▼ 6분 남짓 걸어 ‘거북섬’에 이른다. 눈에 들어오는 섬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거짓말 좀 보태면 주먹만 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품은 내력만큼은 심상치가 않았다. 탐방로 전체에 식생매트를 깔았음은 물론이고, 해양생물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편안한 쉼터도 만들어두었다.
▼ 길 끝에서 만난 섬은 귀여운 거북이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실제로 거북이가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던지 거북이 조형물에다 섬의 지도를 그려 넣었다. 거북섬에도 탐방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기본은 277m 길이의 순환코스(해안을 따를 수도 있다)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 정상에 올라앉은 정자에 들러 피톤치드를 들이키며 힐링을 만끽할 수도 있다.
▼ 거북섬에서의 조망도 거침이 없다. 다도해의 수많은 섬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지며 한 폭의 수묵화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 부근은 특히 해넘이가 곱다고 소문났다. 밀물 썰물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풍광이 연출된단다. ‘놀멍’ 때리기 딱 좋다나? 그래선지 해변에 저런 의자를 꽤 여럿 놓아두었다.
▼ 관광지로 육성했으니 어찌 포토죤이 빠지겠는가. ‘천사섬’이란 신안군의 브랜드처럼 수많은 섬들을 액자 속에 담을 수 있도록 했다.
▼ 거북섬을 빠져나오자 ‘신안젓갈타운’이 잠시 들렀다 가란다. 전국 최대의 젓새우 생산지이자, 국내 최초의 천일염 생산지인 신안군에서 만들어놓은 젓갈 전문시장이다. 젓갈 등 수산물 판매장 20개소와 젓갈의 저장·숙성을 위한 저온저장시설, 전시·홍보관 등이 갖춰져 있다.
▼ 젓갈타운 앞에는 신안 갯벌의 상징인 농게를 형상화한 대형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저 ‘붉은 발 농게’는 한쪽 집게발이 자신의 몸집만큼 커다란 게 특징으로 농발이, 황발이 등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암컷은 양쪽 집게의 크기가 똑같지만 매우 왜소하다. 수컷은 한 쪽 집게는 암컷과 같지만 다른 쪽은 거대하여 갑각 길이보다도 더 길다.
▼ ‘지도갯벌’ 글자조형물과 ‘신안갯벌’의 표석도 보인다. 신안 하면 역시 갯벌이다. 다도해형 갯벌로 불리는 신안갯벌은 1,100.86㎢ 면적의 갯벌이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1981년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을 시작으로 국내외를 비롯한 수많은 보호지역 지정을 통해 갯벌을 보호·관리해 왔다. 제1호 도립공원·습지보호지역·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람사르습지 등등. 이를 알리고 싶었음이리라.
▼ 날머리는 송도교(신안군 지도읍 읍내리)
몇 걸음 더 걸으면 지도와 송도를 잇는 연도교인 ‘송도교’가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7.99km이니 꽤 빨리 걸은 셈이다. 4km이상 앞에서 출발시킨 집사람을 따라잡으려 서둘렀던 게 원인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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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선비문화길
여행일 : ‘23. 2. 1(수)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서하면 및 안의면 일원
산행코스 : 거연정→군자정→영귀정→동호정→람천정→경모정→황암사→농월정→월림마을→구로정→광풍루(소요시간 : 12.21km/ 3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영남 유림은 ‘左 안동 右 함양’으로 나뉘기도 한다. 이중 안동은 중앙 권력에 진출한 선비들을 많이 배출했고, 함양은 주로 재야에서 활동하는 기개 높은 선비들로 유명했다. 그래선지 함양 땅에는 유독 많은 누각과 정자가 남아 있다. 누정(樓亭)이 자연을 벗 삼아 수양하던 선비들의 휴식처이자 만남의 광장이었기 때문일 게다. ‘비단처럼 아름다운 하천(錦川)’이라는 ‘화림동계곡’에도 그런 누정 여덟이 들어서 있는데, 함양군청에서 이 계곡을 ‘선비문화 탐방로’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 들머리는 거연정휴게소(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대전-통영고속도로 서상 IC에서 내려와 국도 26호선(안의·함양 방면)을 타고 8km쯤 내려오면 봉전마을에 이르게 된다. 버스정류장 부근 ‘거연정휴게소’가 트레킹의 들머리가 된다. 초입에 ‘화림동계곡’이라는 거대한 빗돌이 세워져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화림동(花林洞) 계곡은 용추계곡이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한 심진동계곡, 거북바위로 유명한 원학동계곡과 더불어 ‘안의삼동(安義三洞)’으로 꼽힌다.
▼ 탐방로는 2개 구간으로 나뉜다. 하지만 1구간(선비문화탐방관↔농월정, 6km)과 2구간(농월정↔광풍루, 4.1km)을 합쳐도 10.1km에 불과해 노약자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또한 구경거리가 계곡을 따라 일렬로 늘어서있으니 양쪽 끝인 거연정과 광풍루 중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만 선택하면 된다.
▼ 길을 나서기 전 ‘다볕자연학교’부터 들러보기로 했다. 1999년 폐교(1944년 개교)된 봉전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숙박·연수시설인데 이 학교의 교정에서 몇 점의 문화재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 교정으로 들어가기 전 ‘삼강동(三綱洞)’이란 빗돌부터 눈에 담는다. 거연정을 세운 전시서(全時敍)의 증손인 전우석의 충의(忠義), 아들 전택인의 효행(孝行), 손부 분성허씨의 열행(烈行) 등 3대에 걸친 忠·孝·烈의 삼강행실(三綱行實)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자연석이다. 군자정 근처 노변에 있었으나 훼손이 염려되어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 영·정조 때 선비인 전세량(全世樑)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각(孝子碑閣)’도 눈에 띈다. 효자성균생원전세량지려(孝子成均生員全世樑之閭), 효우문행위세추중(孝友文行爲世推重). 성균관 생원 전세량이 효성과 우애, 문장과 행실로 세상에서 추중을 받았다는 내용의 빗돌이 모셔져 있다. SNS에서 어머니가 병들자 단을 짓고 쾌차를 하늘에 빌었더니, 호랑이가 노루를 물어 던져주었다는 그의 효행도 찾아볼 수 있었다.
▼ 운동장 측면에는 삼강정(三綱亭)이란 정자도 지어져 있었다. 새로 지은 티를 풀풀 풍기는 게 흠이지는 하지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함양의 140여 개 정자들 중 가장 크다고 했다.
▼ 화림동계곡으로 되돌아오니 선비길 초입에 화장실이 들어서 있었다. 길을 나서기 전 홀가분하게 비우고 선비걸음으로 느긋하게 걸어보라는 배려겠지만, 손님맞이 첫 풍경치고는 썩 편치 않아 보이는 그림이다.
▼ 들머리의 안내도를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는 말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덕유산 자락의 수려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화림동 계곡’은 8개의 정자와 8곳의 못이 있다고 해서 ‘八亭八潭’이라고도 불리어왔다. 계곡 곳곳에 고풍스런 정자들이 저조차도 풍경인 양 고즈넉이 앉아 있다는 것이다.
▼ ‘봉전교’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아치형의 교각이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앗! 길을 잘못 들었다. 첫 번째 볼거리인 ‘거연정(居然亭)’은 하천 중앙의 바위섬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정자로 연결시키는 나무다리가 반대편(탐방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으로 놓여있었던 것이다. 어쩌겠는가. 시작부터 어수선해져버렸지만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 ‘거연정’은 이름 그대로 ‘자연(然)과 더불어 살고(居)’싶은 뭇 사람들의 바람이 담겨 있는 정자이다. 그래선지 풍경 좋은 곳의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자연을 바라보는 형태인 여느 정자들과는 달리 풍경 한가운데에 들어앉아 자신도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정자가 감상의 대상인 물길과 하나가 되어버린 모양새다 . 그것도 아주 깊은 소(沼)에서. 수심이 너무 깊어 한 번 빠지면 항아리처럼 패어있는 소를 헤어나지 못해 익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 ‘거연정’은 조선중기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가 억새로 정자를 지어 머무르던 곳이라 한다. 울퉁불퉁한 천연 암반 위에 주초석(柱礎石)과 누하주(樓下柱)를 굴곡에 맞춰 깎아 절묘하게 높이를 맞춘 형태를 하고 있다. 마치 정자와 암반이 한 몸처럼 붙어 있는 듯하다. 금천 한가운데에 터를 잡은 이 정자는 연암 박지원 등 조선 선비들의 극찬을 받은 명소이기도 하다. 거연정을 중심으로 바위와 담수, 소나무가 조화를 이룬 광경을 보고 감탄의 글을 남겼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거연정이란 이름은 ‘한가히 내 자연(개천과 돌)을 즐기다’라는 뜻을 지닌 주자의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이라는 시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 정자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화림재 전공 유적비(花林齋全公遺蹟碑)’가 눈에 띈다.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국치를 당하자 낙향하여 서산서원과 함께 거연정(억새로)을 지었다는 인물이다.
▼ ‘군자정’도 ‘봉전교’를 건너기 전에 만날 수 있었다. 다리로 가는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거연정의 반대편에 자리한다. 군자정도 울퉁불퉁한 바위에 걸터앉은 탓에 정자를 받치고 있는 지지대가 들쭉날쭉하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본연 모습 그대로 지켜나가려는 선인들의 지혜가 엿보인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쉽게도 정자 주변에 큰 도로가 나고 식당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고즈넉한 정취는 느끼기가 어렵다.
▼ 군자정(君子亭)은 ‘해동의 군자’로 불리던 조선 성종 때 성리학자 ‘일두 정여창(1450~1504년)’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봉전마을에 처가가 있던 그가 이곳을 찾아 시를 읊고 강론을 펼쳤다는 인연에서다. 안음현감 재직 때는 고을 사람들을 괴롭히던 조세정책을 새롭게 하는 선정을 베풀기도 했단다. 정자 하나쯤은 능히 얻을 수 있는 흔적 아니겠는가.
▼ 봉전교 건너에도 탐방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거연정·동호정·군자정·영귀정·경모정·람천정·농월정·구로정... 정자에서 노닐던 풍류를 일러 ‘선비문화’라 하는 걸까? 아무튼 탐방로는 계곡의 물길을 따라 내려간다. 산비탈에 나무로 다리모양의 길을 냈다.
▼ 300m쯤 내려오면 ‘영귀정(詠歸亭)’을 만난다. 하지만 안내판이 없어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지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이름대로 어느 낙향한 선비가 시나 짓고 살자며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휴촌마을(함양군 병곡면)에 있다는 또 다른 ‘영귀정’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단종 때 충신 ‘이지활’의 손자 송계 이지번(李之蕃)이 수안군수 시절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었다는 휴촌마을의 그 정자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 영귀정 옆 부지에는 정자보다도 더 잘 지어진 한옥이 들어앉았다. 잔디가 깔린 정원도 잘 꾸며졌다. 돈 많은 누군가가 금천의 비경 속에서 호사를 누리며 살아가는가 보다.
▼ 선비길은 화림동계곡의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여정이다. 계곡길이지만 데크로드 등 탐방로가 잘 가꾸어져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그러니 비단처럼 아름답다는 계곡과 그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정자들을 눈에 담기만 하면 된다.
▼ 가끔은 물가로 내려가는 요런 계단을 만나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서슴없이 내려가 볼 일이다. 시간에 여유라도 있다면 탁족을 즐기면 될 것이고.
▼ 들쑥날쑥한 바위를 타고 흐르는 화림동계곡은 ‘금천(錦川)’으로도 불린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물이 비단같이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맞다. 발아래로 흐르는 물빛이 그랬다. 비취색을 띤다. 하지만 밤꽃 향이 풍기는 농사철에는 흙 부유물이 흘러들어 비취빛이 탁해진다고 한다.
▼ 현판조차 없는 정자도 만날 수 있었다. 탐방로를 정비하면서 쉼터용으로 지어놓은 듯한데, 이름 하나 지어주지 않은 무관심이 왠지 아쉽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8분. ‘다곡교’에 이르니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다산정(茶山亭)’이란 정자까지 배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예로부터 화림동계곡은 ‘팔정팔담(八亭八潭)’으로 불리어왔다. 8개의 정자와 8곳의 소(沼)나 못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저런 새로운 정자들이 들어서면서 ‘팔정팔담’은 이제 이름을 바꿔야 할 신세가 되어 버렸다.
▼ 처음 온 사람들이 오해할만한 안내판도 보인다. ‘1구간(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만 소개해놓은 안내도인데, ‘화림계곡 선비문화 탐방안내’라는 이름표를 버젓이 달았다.
▼ 이후부터는 도로를 따른다. 200m쯤 걷다가 만나는 ‘대전-통영고속도’에서는 ‘대황마을(대봉산·계관봉 등산로가 열리는 곳이다)’로 가는 굴다리 아래를 통과한다. 원래는 개울가를 따르도록 길이 나있었는지, 탐방로가 폐쇄되었으니 우회하라는 안내판이 굴다리 앞에 세워져 있었다.
▼ 150m쯤 들어가면 삼거리. 이정표(동호정 1.1㎞)가 왼쪽으로 가란다. 2차선 도로에서 1차선의 농로로 들어선다고 보면 되겠다.
▼ 200m남짓 더 걸어 길이 홱 돌아가는 지점에서 탐방로는 도로를 벗어난다. 그리고 고속도로 아래로 나있는 데크길을 따라 내려간다. 탐방안내도가 이정표를 대신하고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냇가에 이르니 요런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물론이고, 그에 대한 내력까지 상세하게 적었다. 고객을 위한 기발한 발상이라 하겠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 화림계곡의 얼굴마담이랄 수 있는 ‘동호정(東湖亭)’에 이른다. 엄청난 너럭바위 지대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곳. 너럭바위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정자 사이로는 푸른 바람이 흐른다. 그런 기운을 즐기기 위해 세운 정자가 동호정이라고 한다.
▼ ‘동호정’은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한 면모를 자랑한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의주 피란길에서 왕을 등에 업고 환란을 피한(그렇게까지 해서 목숨을 살릴 가치가 있었을까?) 동호(東湖) 장만리(章萬里)를 기리기 위해 1895년 그의 9대손에 의해 세워졌다. 장만리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자연을 벗 삼아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 통나무에 홈을 파서 만든 계단이 이채롭다. 발판을 도끼로 쪼은 듯한 통나무 두 쪽을 정자에 걸쳐 놓았다. 투박하면서도 멋이 있어 보인다.
▼ 정자에는 꽤 많은 편액(扁額)이 걸려 있었다. 자연을 벗 삼아 묵향 흩날리며 일필휘지 시구(詩句)를 적으며 노래하던 선인들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 천막처럼 넓고 큰 바위’를 뜻하는 차일암(遮日巖)과 수정처럼 맑은 물을 담고 있는 옥녀담(玉女潭) 등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낸다. 그런데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저게 놀이터로 보였던가 보다. 움푹움푹 패인 차일암의 웅덩이에 술을 부어놓고 조롱박으로 떠 마시며 풍류를 즐겼는가 하면, 옥녀담에서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수양한다는 철학적 의미를 핑계 삼아 탁족을 즐겼다고 한다.
▼ ‘금적암(琴笛岩)’은 악기를 연주했다는 바위다. 그래선지 요즘도 이곳에서 국악이 연주되기도 한단다. 한국국악협회 함양지부에서 가야금을 반주 삼아 민요를 불러준단다. ‘금적암’과 ‘영가대’라는 이름에 걸맞는 퍼포먼스라 하겠다.
▼ ‘영가대(詠歌臺)’는 노래를 불렀다는 곳. 선비들은 차일암에 둘러앉아 술을 마셨을 터, 그렇다면 인근에서 호출해 온 기생들이 가무(歌舞)’로 그들의 흥을 돋우었을 게 분명하다.
▼ 탐방로와 동호정은 징검다리로 연결된다. 큰 바위 여러 개를 놓았는데, 장마철에는 이게 물에 잠기기도 한단다. 신발을 벗고 건널 수도 있으나 물이 불어나면 길이 막히는 수도 있으니 길을 나서기 전에 미리 알아볼 일이다.
▼ 의외의 풍경(하천의 한가운데에 소나무로 가득한 섬이 있다)을 제쳐두고 징검다리를 다시 건넌다. 벼랑에 가까운 산비탈에 제비집처럼 매달린 데크로드가 멋져보였기 때문이다.
▼ 데크길을 지나면 계단식 논이 펼쳐진다. 논 옆으로 너른 박석이 깔려 있다. 박석을 따라 동쪽으로 향한다. 이 구간에서 우린 함양의 산골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함양의 특산물인 사과밭이 좌우로 도열하고, ‘다랭이 논’에서는 양파 파종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이밖에도 함양은 산양산삼과 여주, 곶감 등이 많이 나는 고장이다.
▼ 과수원을 지나 ‘호성(虎城)’ 마을에 다다른다. 마을 앞의 산 모양이 호랑이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호성’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 마을과 초현동(招賢洞)이 합쳐져 법정동리인 ‘황산리’가 되었는데, ‘황산(黃山)’이란 황석산의 관문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 마을 앞, 화림동 계곡을 가로지르는 ‘호성교’ 아래를 지난다. 이때 썩 좋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강변의 큼지막한 바위에다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자신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과시욕의 결정판이라고나 할까?
▼ 조금 더 걸으니 ‘경모정(景慕亭)’이 나타난다. 경모정은 고려 개국공신인 배현경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지은 정자로, 화림동 계곡의 정자들이 대부분 19세기 말에 지어진데 비해 비교적 근래(1978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아니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최근에 다시 지은 모양이다. 단청도 하지 않은 채 손님을 맞고 있었다.
▼ 길은 다시 나무데크로 변했다. 이 구간은 계곡 쪽으로 숲이 울창하지 않아 계곡을 보면서 걸을 수 있다. 가끔은 나무의자에 앉아 쉬어갈 수도 있다.
▼ 잠시 후 이번에는 ‘람천정’을 만난다. 하천 가장자리에 초석(礎石)을 세우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렸다. 어느 작가는 화림동 8정(亭) 중에서 가장 소박하다고 적고 있었다. 한글로 된 현판을 ‘람천정(藍川亭)’으로 해석한 그는 작은 규모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드러나는, 그래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겸손하면서도 늠름했기 때문이란다.
▼ 탐방안내도는 ‘람천정’ 앞에서 다리(이정표 : 황암사 1.4㎞/ 경모정 0.4㎞)를 건너라고 했다. 장마 때는 물에 잠기는 잠수교다. 하지만 우린 경관이 나아보이는 우회로를 선택했다. 덕분에 우린 요런 소나무 숲속을 거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에 취하다보면 여정은 어느새 행복감으로 충만해진다.
▼ 또 다른 볼거리도 있었다. ‘회룡포(回龍浦)’를 일러 ‘육지 안에 있는 아름다운 섬마을’이라고 했던가? 비록 회룡포만큼은 아니어도 그에 못지않은 풍광을 만나기도 한다. 유유히 흐르던 하천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둥글게 원을 그리는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0분. 눈의 호사를 누리며 걷다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놓인 ‘황암사’가 얼굴을 내민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3,500여 호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사당의 뒤에서 머리를 삐쭉 내밀고 있는 산은 당해 전투가 벌어졌던 ‘황석산(1,192m)’이다. 저 산에 바위봉우리와 계곡의 지형을 이용해서 만든 황석산성이 있다.
▼ 호국 영령들에 묵념이라도 드리고 싶다면 ‘서하교’를 건너야 한다. 그런 다음 길고 긴 계단을 올라가는 고생을 추가로 감수해야만 한다.
▼ 홍살문과 출입문인 충의문(忠義門)을 연이어 지나면 사당인 황암사(黃巖祠)가 나온다. 자료에 따르면 1597년 왜군 2만7천명이 황석산성을 3일 동안 공격했다. 안의현감 곽준, 함양군수 조종도, 그리고 거창·초계·합천·삼가·함양·산청·안의에 사는 사람들이 관군과 함께 왜적에 맞서 싸웠으나 음력 8월18일에 황석산성은 함락됐다. 숙종 임금 때 이곳에 사당을 짓고 황암사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사당을 헐고 추모제도 금지했다. 1987년에 황석산성이 사적(322호)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지역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2001년 호국의총(護國義塚)을 정화하고 사당을 복원했다.
▼ 순국영령의 혼이 모셔져 있는 의총은 사당의 뒤편에 있었다. 하나 더, 사당 좌우에는 황석산성순국선열충혼비·황암사중건기념비·황석산성순국사적비를 세워놓았다.
▼ 묘역은 오죽(烏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가슴 깊이 묻은 아픈 일들, 밖으로 배어나와 까맣게 탄다’던 박영옥 시인의 싯귀처럼 조국을 지키다가 스러져간 영혼들의 애달픈 마음을 담아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 황암사를 둘러본 다음 다시 ‘서하교’를 건넌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왼쪽으로 굽어지며 이어져 있는 구(舊)도로로 들어선다.
▼ 옛길의 모퉁이에 들어앉은 ‘농월정 쉼터’는 문이 닫혀 있었다. 새로운 신작로가 뚫리면서 오가는 차량이 함께 끊겼을 게고, 손님이 찾지 않는 휴게소는 하릴 없이 낮잠만 잔다.
▼ 조금 더 걸으면 신작로 만나지만, 그에 조금 못미처에 냇가로 내려가는 데크계단이 놓여있다. 초입에 이정표(농월정 0.6㎞/ 황암사 0.4㎞)를 세워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데크길은 천변을 따라 이어진다. 하지만 우린 물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이렇게 경관이 좋은데, 거기다 긴 겨울 가뭄에 목마른 내(川)가 길까지 내어주고 있는데 일부러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내려선 계곡은 풍경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계곡 전체가 하나의 바위고 그곳에서 바위절벽이 솟아난 형국이다. 너럭바위나 안반바위라는 낱말로는 그 풍경을 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 환호성을 쏟아낼 수밖에 없다. 수백 명이 올라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옥빛 물살은 요리조리 굽이치며 장쾌하게 바위 사이를 흐른다.
▼ 계곡을 뒤덮은 너럭바위, 그 위로 쉴 새 없이 맑은 물이 흐른다. 그리고 고풍스러운 정자와 그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선 울창한 나무들까지. 옛 선비들도 이런 풍경에 홀딱 마음을 빼앗겼나 보다. 하긴 TV 드라마 ‘환혼’에까지 등장했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여자 주인공 무덕이의 몸으로 환혼한 ‘살수’ 낙수가 어릴 때 기문이 막혀 술법을 배우지 못한 남자 주인공 장욱에게 최고의 술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집수·유수·치수’ 단계를 설명하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단다.
▼ 솜씨 좋은 조각가가 한껏 실력을 발휘한 듯, 물살은 암반 곳곳을 깎고 부드럽게 다듬어 기묘한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 농월정(弄月亭)은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 1571-1639)가 머물며 세월을 낚던 곳. 그는 병자호란 때 굴욕적인 강화가 맺어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은거하며 정자를 지었다. 지금의 정자는 새로 지은 것이다. 원래 정자는 2003년 방화로 인해 소실됐고, 10년 동안 방치되다가 2015년 기록사진과 도면을 토대로 복원했다. 참고로 정자 이름 농월(弄月)은 ‘달을 희롱한다’는 뜻. 정자 앞 너럭바위는 달이 연못에 비치는 바위 ‘월연암(月淵岩)’으로 이름에도 옛 선비들의 풍류가 잘 담겼다.
▼ 농월정 앞 넓게 펼쳐진 반석 지대는 ‘월연암’ 혹은 ‘달바위’로 불린다. 그 바위에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之所)’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농월정을 지은 지족당 선생이 지팡이 짚고 놀던 곳이란다. 달을 희롱하면서 말이다.
▼ 시간에 쫓겨(판독할 능력도 부족했다) 이해도 못한 채 그냥 지나쳤지만, 누군가의 한시도 적혀 있었다. 참고로 농월을 즐겼다는 박명부는 옳고 그름, 나아감과 물러감을 분명히 하는 선비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곽재우·김성일 휘하에서 군무를 도왔고,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 유폐에 대한 부당함을 직간하다 파면되었으며, 병자호란 때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자 이곳으로 낙향해 은둔 생활을 했다.
▼ 썩 좋지 않은 풍경도 눈에 띈다. 그 너른 반석 곳곳에 자신의 허울 좋은 이름을 드러내려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낙서들이 가득했다. 심지어는 참봉(參奉) 등 자신의 관직까지 적어놓은 조선시대 놈들도 있었다. 무릉의 선계에다 이름이나마 두고 오고 싶었던 모양이다.
▼ 선계에서 노닐다가 왼편 냇가를 따라 농월정을 빠져나간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터널처럼 오솔길이 나있다.
▼ 농월정 앞은 유원지가 들어서 있었다. 작심하고 조성해놓은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식당이 밀집해 있다는 정도랄까?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5분. 유원지가 들어선 방정마을(안의면 월림리)에서는 ‘종담서당(鍾潭書堂)’을 만날 수 있다. 지족당 박명부가 농월정과 함께 세운 서당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아니 박명부가 낙향하여 지었다니 조선 중기쯤 되겠다.
▼ 문이 잠긴 탓에 담 너머에서 기웃거리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정문과 ‘二’자 형태로 배치된 정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서당치고는 화려해서일까 함께 걷던 구우(舊友)는 사당 느낌이 난다고 했다.
▼ 다시 길을 나선다. 농월정은 1구간과 2구간의 경계. 그러니 방정마을에서 2구간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2구간 초입에는 ‘농월정오토캠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길을 걷다보면 길게 늘어선 한옥펜션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밖에도 25개의 사이트와 카라반이 있단다. 뛰어난 경관에 각종 편의시설까지 갖춰 캠핑마니아들에게는 또 하나의 성지로 알려진다.
▼ 탐방로는 이제 금천(남강)의 둑길을 따른다. 굴곡이 없는 평평한 길이다. 선비문화탐방로의 대부분은 이렇듯 평평한 길의 연속이다. 덕분에 무릎에 무리가 적다. 그래서 다리가 조금 불편한 노약자도 걸을 수 있다. 대신 등산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이 길이 지루할 수도 있겠다.
▼ 그렇게 15분쯤 걸었을까 탐방로가 도로(육십령로)로 올라선다. 하지만 금방 도로를 벗어나 ‘월림(月林)’ 마을로 들어간다. 물레방아에서 물이 내려온다는 함양의 5개 ‘물내리마을(율림·안심·두항·월림·봉산)’ 중 하나로 30여 가구가 오순도순 모여 사는 정겨운 마을이다. 참! 물이 맑고 깨끗하다고 해서 ‘다수(多水)’마을로 불린다는 것도 알아두자.
▼ 이곳에서 우린 ‘월소정(月沼亭)’이란 정자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화림동계곡의 ‘팔담팔정(八潭八亭)’에는 끼지 못하고, 그저 동네 쉼터로 이용되고 있었다. 월소정이란 이름은 옛 지명에서 따왔지 않나 싶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월소동과 황대동·후암동의 일부를 합쳐 ‘월림리’가 되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이번에는 금천을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하류로 내려간다.
▼ 목교 너머는 ‘솔숲 쉼터’라고 한다. 금천의 물굽이가 만들어낸 ‘섬 아닌 섬’이다. 소나무들은 어쩌다가 저런 곳에 무리를 지어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하천의 한가운데서 숲을 이루고 있는 솔숲이 경이로우면서도 반갑다.
▼ 금천의 물줄기를 끼고 가는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가로수 삼아 벚나무를 심었는가 하면, 예쁘게 단장된 쉼터도 심심찮게 보인다. 길가에는 작은 꽃밭도 만들었다. 월림마을의 또 다른 특징이 특용작물 재배라고 했으니 제철이라도 만나면 약초나 감국의 꽃을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0분. 8번째 정자인 ‘구로정(九老亭)’에 이른다. 1854년에 태어난 선비 9명이 수계를 하여 풍류를 즐겼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 후손들이 1955년에 건립한 팔작지붕 정자다. 참! 이들에 내한 내력이 궁금하다면 정자로 올라 구로정기(九老亭記)라도 읽어볼 일이다.
▼ 정자에 오르면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금천이 발아래로 깔린다. 밤이 맑은 날, 이곳에 모인 선비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하늘에 뜬 달을 희롱하기에 딱 좋은 풍경이라 하겠다. 그 너머 강둑에는 성북마을이 들어앉았다. 안음현 관아 뒤 대밭산 너머 북쪽에 있었다는 오래 묵은 마을이다.
▼ 이후부터는 시멘트 포장길(후암길)을 따른다.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구간이다. 금천을 끼고 간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 ‘점풍교’를 건너면 ‘관북마을’. 용추계곡에서 흘러온 지우천(금천의 지류)의 천변에 들어앉은 마을로 ‘관북(官北)’이란 지명은 옛 안음현 청사가 있는 곳의 북쪽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임수역(臨水驛)’이 있었다고 해서 ‘역말’로도 불린다. 그만큼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얘기일 것이다.
▼ 안의대교의 교각 아래를 지나자 엄청나게 굵은 버드나무가 줄을 지어 얼굴을 내민다. 얼핏 보아도 수백 년은 묵은 것 같은데, 이게 입소문을 타다보니 ‘오리숲’이란 이름까지 얻었다. 버드나무가 오리(2km)에 걸쳐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는 300m에도 못미처 보였지만...
▼ 잠시 후 고수부지로 내려서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무리지어 늘어서있다. 금천(이 즈음에서는 남강이라 부르기도 한다)은 보를 막아 물이 넘실거리도록 했다. 지금은 얼어붙어있지만 여름철이면 풍성한 나뭇가지가 잔잔하고 푸른 수면에 비친다고 한다. ‘연암문화제’가 이곳에서 열리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한 조류인 북학사상을 선도한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봉직(1791-1795)하면서 백성을 구휼하고자 했던 이용후생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개최하는 행사이다.
▼ 날머리는 광풍루(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안의교’로 금천을 건너면 제법 규모가 큰 2층 누각이 금천을 바라보고 있다. 한때 함양과는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다는 자부심의 상징물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 당시 이안현감인 전우(全遇)가 선화루(宣化樓)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웠고, 세종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성종 25년(1494)에는 안의현감 정여창(鄭汝昌)이 중건하고 지금의 명칭인 광풍루(光風樓)로 이름을 바꿨다. 정유재란 때에 불타버린 것을 1602년(선조 35) 현감 심종진(沈宗진)이 복원하고, 3년 뒤인 1605년에 현감 장세남(張世男)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누각의 뒤에는 역대 현감들의 선정비(善政碑)가 늘어서 있었다. 불망비라고도 하는데, 선정을 베푼 관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그 덕을 기리기 위해 고을사람들이 세워주는 비석이다. 상인들이 세웠다는 ‘상무사’ 불망비와 의병대장 ‘문태서’의 기공비(紀功碑)는 일종의 보너스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2.21km, 유서 깊은 정자들을 둘러보느라 꽤나 지체했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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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24코스(봉오제마을-매당마을)
여행일 : ‘23. 2. 25(토)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현경면·해제면 일원
여행코스 : 봉오제마을→곡지마을→홀통해변→가입마을→물암마을→금산방조제→백동마을→창산마을→매당마을(거리/시간 : 20.5km/ 실제는 홀통해변부터 15.42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24코스를 걷는다. 10개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해제반도의 구릉지와 해안을 이어 걷는다. 덕분에 무안을 상징하는 드넓은 갯벌과 특산물(양파·마늘·양배추)로 덧씌워진 들녘을 실컷 눈에 담게 된다. 주요 볼거리로는 윈드서핑지로 소문난 ‘홀통유원지’를 꼽을 수 있다.
▼ 들머리는 봉오제마을(무안군 현경면 용정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를 빠져나와 77번 국도를 따라 신안(압해도) 방면으로 내려오다 용정교차로(현경면 용정리)에서 내려오면 곧이어 ‘봉오제 마을’에 이르게 된다. 마을 앞 버스정류장이 24코스의 시작점이다. 참고로 ‘봉오제’란 지명은 마을 뒤 봉대산에 있었다는 옹산봉수대(甕山烽燧臺)에서 유래했다.
▼ 현경면 봉오제마을(용정리)에서 시작해 해제면 매당마을(창매리)에 이르는 20.5km짜리 코스로 해제반도(海際半島)의 구릉지와 해안을 따라 걷는다. 오늘도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 초반 6km를 생략하고, 주요 볼거리인 홀통유원지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혼자서 완주하는 것보다 부족하더라도 함께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 버스에서 내려 ‘탄도만’부터 카메라에 담고 본다. 물 빠져나간 바다는 시커먼 갯벌이 배를 드러내놓고 있다. 물고기가 숨어든다는 ‘어은도(漁隱島)’는 졸지에 육지가 되어버렸다. 그럼 그 많은 고기는 어디로 가서 숨어있을까?
▼ 실제 출발지는 ‘홀통선착장’, 현경면의 서쪽 끄트머리에서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串)인 ‘홀통’, 그중에서도 맨 끄트머리에 축구장 크기만 한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다.
▼ 선착장에는 ‘무안군해양스포츠센터’와 초당대학교의 해양스포츠연구센터가 들어서 있었다. ‘윈드서핑대회’가 열린다는 현수막도 눈에 띈다. 탄도만의 잔잔한 물결에다 맑은 물빛, 거기에 바람까지 쉬지 않고 불어준다니 무동력 윈드서핑을 즐기기에 이만한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 바다는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물빛이다. 저리도 물빛이 고우니 원드서핑 마니아들이 어찌 찾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시선을 조금 옮기자 ‘탄도’가 눈에 들어온다. 무안에서 하나뿐이 유인도로, 그게 의미가 컸던지 만(灣)의 이름으로까지 굳어졌다.
▼ 바람이 무척 거세다. 오늘따라 인지는 몰라도 집사람이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하긴 이곳은 윈드서핑의 명소, 그렇다면 저 정도의 바람은 항시 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캠핑장 쪽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바닷가 모래사장에는 어선 몇 척이 물이 차오를 때만 기다린다. 하릴없는 어부는 지금쯤 아내가 운영하는 횟집에서 허드렛일을 돕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홀통’은 유원지로 개발되어 있다. 때문에 겨울철 비수기에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단다. 주변 해송 숲은 캠핑마니아들로 늘 붐비고, 둘레길 나그네들도 심심찮게 지나간다. 그러니 음식점은 필수가 아니겠는가.
▼ 입소문을 탄 카페도 있었다. ‘cafe water front’가 그 주인공으로 무안이나 목포지역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view’가 좋은 곳으로 명성이 자자하다고 했다.
▼ 작은 고개를 넘자 카페에 노래연습장까지 딸린 ‘홀통캠핑장’이 반긴다. 호리병 목처럼 잘록한 땅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갯벌, 반대편에는 모래사장이 형성돼 있다. 해변과 닿아있는 저 솔숲은 캠핑장으로 이용된다. 코로나에 시달리는 요즘은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공간에서 ‘프라이빗’한 여가를 즐기는 ‘(홈)캠핑’이 주목받는다고 했다. 그래선지 유원지 숲속은 가족단위 캠핑마니아들로 붐비고 있었다.
▼ 캠핑장 앞은 또 다른 선착장. 그 너머로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가족단위 캠핑마니아들의 조개잡이 체험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캠핑장의 샤워시설이 잘 되어 있으니 갯벌에 뒹굴면서 조개를 잡아도 된다나?
▼ 이때 ‘오류리’로 뻗어나가는 기다란 해안선이 눈에 들어온다. 봉오제마을에서 출발한 24코스는 곡지마을을 거친 다음 저 해안을 따라 이곳으로 온다.
▼ 이후부터는 ‘홀통길’을 따른다. 홀통해안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다 2차선 도로를 냈다. 때문에 하얀 백사장이 발아래 깔려있는데도 내려가 볼 수는 없었다.
▼ 백사장 너머로는 탄도만의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다. 반대편에는 해송 숲이 가로수처럼 도열해 있다. 누군가는 이런 풍경을 ‘남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적고 있었다.
▼ 길가 안내판은 ‘홀통’이 호리병처럼 삐죽하게 튀어 나온 땅이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적었다. 긴 백사장과 울창한 해송 숲은 휴양지로 딱 좋고. 물이 맑고 수심이 낮은데다 파도까지 잔잔해 윈드서핑 같은 해양스포츠를 즐기기에 이만한 곳이 없단다.
▼ ‘홀통해변’도 해넘이의 명소로 알려진다. 지난 번 23코스처럼 밀물 때는 바다가 붉게 물들고 썰물 때는 갯벌이 깨진 거울 파편처럼 황홀하게 반짝인다고 했다. ‘놀멍’ 때리기 딱 좋다나? 해변에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이 구간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의 3구간이기도 하다. 삽다리 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해 홀통해수욕장·가입마을·물암마을을 거쳐 무안생태갯벌센터에서 끝을 맺는 9km 길이의 둘레길인데, 그중 일부(오류동 앞 해안↔물암마을)가 서해랑길 24코스와 겹치는 것이다.
▼ 해변으로 내려서니 곱디고운 백사장이 양옆으로 끝 간 데 없이 뻗어나간다(사진은 해수욕장 방향). 이왕에 내려왔으니 모래사장을 꼭 걸어보길 권한다. 고운 모래를 밟는 느낌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직접 와서 느껴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극히 서해다웠다고나 할까?
▼ 바람이 얼마나 거셌으면 펜션의 이름까지 ‘wind’로 시작되겠는가. 하긴 ‘윈드서핑 대회’까지 열린다니 어련하겠는가. 그것도 윈드서핑·패들링·카이트보딩 등 종목별 참여 선수가 300여명이나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 ‘홀통길’은 우릴 ‘마산리 선착장’으로 데려다준다. 현경면 오류리에서 마산리로 넘어온 것이다. ‘마산(馬山)’은 조선시대에 말목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하지만 네이버의 지식백과는 마을형국이 동으로 초장(草場), 서로 방마형(芳馬形)이라는 데서 찾고 있었다.
▼ 선착장 위는 ‘홀통교차로’이다. 이정표(종점 12.2㎞/ 시점 8.3㎞)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24번 국도를 따르란다.
▼ 다행히도 가드레일 밖으로 길이 나 있었다. 하지만 300m를 채 못가 길이 없어져버린다. 그리고 서해랑길 표식(리본)을 통해 국도를 건너도록 인도한다.
▼ 덕분에 길을 잘못 드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지레짐작으로 도로를 벗어나 오른편 구릉지로 올라가버렸기 때문이다. 흡사 고속도로라도 되는 양 오가는 차량은 씽씽 잘도 달리는데 보행로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억울할 것은 없었다. 구릉지에서 무안을 압축해 놓은 풍경, 즉 끝도 없이 펼쳐지는 채소밭을 만났기 때문이다.
▼ 무안은 한국에서 양파가 가장 많이 나는 곳이다. 전국 양파생산량의 20% 이상이 무안에서 나다보니 여기서는 소도 양파를 먹는단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양파로 만든 특수사료를 소에게 먹인다는 것이다. 덕분에 몸에 좋은 불포화지방산과 필수지방산이 일반 한우고기보다 많다고 한다.
▼ 또 하나의 특산물로 뿌리를 내린 양배추 밭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겨울철 강추위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했을 저 양배추는 출하가 가능할까? 그러고 보니 언론에 가격폭락으로 인해 밭뙈기로 계약을 했던 중간상인이 연락을 끊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었다.
▼ 해남(화원반도)처럼 이곳 무안(해제반도)에서도 심심찮게 ‘둠벙’을 만날 수 있었다. 밭농사에도 물은 항시 필요했을 게고, 조상들은 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이 웅덩이가 바로 ‘둠벙’이다.
▼ 구릉지 너머에선 함해만(또는 함평만)이 드넓게 펼쳐지고 있었다. 입구가 좁고 안쪽이 넓은 전형적인 내만(길이 17km, 최대 폭 1.8km)이다. 아무튼 바닷가에 이른 우린 서해랑길(33코스) 특유의 방향표시를 발견했고, 이 표식을 보고나서야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24코스는 북서쪽(가입마을 방향)이 분명한데도, 서해랑길 표식은 자꾸 남동쪽(마산마을 방향)으로 가라했기 때문이다.
▼ 바닷가 안내판은 ‘무안갯벌’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안내판 아래 방파제에 붙어있는 방향표시가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 함해만은 탄도만과 함께 무안갯벌의 양대 축을 이룬다. 이곳도 갯벌습지보호지역(1호) 및 갯벌도립공원(1호)로 지정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2008년에는 ‘람사르습지’로도 지정됐다. 생물 다양성을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은 덕분이다. 실제로 무안갯벌에는 칠면초·갯잔디 등 47종의 염생식물과 250종의 저서생물이 서식한다. 또한 혹부리오리·알락꼬리마도요 등 52종의 철새가 찾는 곳이기도 하다.
▼ 되돌아 온 국도. 이번에는 해제·지도 방면의 도로변을 걷는다. 둘레길 나그네들을 위한 보행로는 따로 없다. 그런데도 오가는 차량들은 고속도로처럼 씽씽 잘도 달려댄다. 목숨이 위협받는 구간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걸을 일이다.
▼ 조심조심 15분쯤 걸으면 ‘가입리 버스정류장’. 이정표(종점 10.7㎞/ 시점 9.8㎞)는 이곳에서 가입마을로 들어가란다. 계속해서 국도를 따르더라도 물암마을로 갈 수는 있다. 거리도 1km정도 단축된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도로를 피해 가입마을까지 에둘러가도록 해놓은 모양이다.
▼ 나지막한 구릉지를 넘으면 ‘가입마을’. 가입(加入)이란 지명은 조금 더 들어가야 마을을 볼 수 있다는 뜻의 ‘더드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조금 전 고개를 넘어올 때의 상황을 이른다고나 할까? 아무튼 ‘상주주씨’ 집성촌인 저 마을은 팽나무(천연기념물 제310호)로 유명하다. 입향 시조인 주근봉이 심었다는데, 수령이 400년도 넘었단다. 하지만 살펴보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가장 아름다운 팽나무라는 별호로도 모자라 삼년에 한 번씩 볏집 옷까지 해 입혀왔다지만, 2001년 수형이 크게 훼손된 데다 목질부의 부패까지 심하다는 이유로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 서해랑길은 가입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마을 앞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들어 폐교된 수암초등학교 옆 구릉지로 오른다. 참고로 저 학교는 1969년 주씨 문중에서 기부한 땅에다 ‘현경초등학교 수암분교’로 문을 열었고, 1974년에는 ‘수암국민학교’로 승격까지 했으나 주민 감소라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1996년 문을 닫았다. 현재 대안학교로 변신하기 위해 리모델링 중이란다.
▼ 갈림길 초입에는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에서 세운 이정표가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문화부가 자연경관이나 역사·문화 자원이 뛰어난 도보여행길 중 가볼 만한 곳을 지정해 지원하던 사업으로. 해남 땅끝길, 섬진강을 따라가는 박경리의 토지길, 안동 유교문화길 등 명성이 자자한 둘레길들이 이 탐방로에 포함되어 있었다.
▼ 구릉지를 넘으면 이번에는 ‘물암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유월리(柳月里)에 속한 자연부락(오류·용산·물암·언창·월암·유투) 중 하나로, 현경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해제면에 바톤(baton)을 넘겨준다. 참고로 ‘물암(勿岩)’이란 지명은 마을 앞 바닷가에 있는 ‘물바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 함해만 건너에는 영광의 랜드 마크인 ‘칠산타워’가 우뚝하다. 그 앞은 2019년에 개통한 ‘칠산대교’. 영광군(염산면 옥실리)과 무안군(해제면 송석리)을 잇는 바다 위 다리다. 길이 1.82km의 저 다리는 공사 중 무너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었다.
▼ 물암마을은 ‘당난구지’와 ‘한뿌리’로 나뉘는데, 서해랑길은 마땅히 어려움을 구할 수 있다는 ‘당난구지(當難求地)’부터 들른다. 당나라 사람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 구함을 받았다는 길지이기도 하다. 마을 안길을 지나다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하늘님을 모신 나는 스스로 조화를 정하여 평생 잊지 아니하고 하늘의 도에 맞도록 행한다’는 민족종교의 본주문(本呪文)이 벽에 적혀 있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5분. 당난구지를 지나면 물암마을회관(이정표 : 종점 9.0㎞/ 시점 11.5㎞), 물암마을(유월3리)을 구성하는 ‘당난구지’와 ‘한뿌리’는 회관 앞을 지나는 24번 국도를 가운데 두고 둘로 나뉜다.
▼ 도로를 건너면 ‘한뿌리’ 마을이다(사진은 마을을 빠져나오다 촬영했다). ‘한뿌리(一根)’란 지명은 마을 뒤 잿등(소나무가 울창했다는 언덕)의 맥이 바다를 향해 하나로 쭉 뻗었다는 데서 유래되었고 한다. 일부 주민들은 마을 지형이 한발로 찌는 방아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를 찾기도 했다.
▼ 마을을 빠져나오니 다시 만난 탄도만이 반갑다며 손짓한다. 24코스의 대부분은 이처럼 탄도만의 해안을 걷는다. 그러니 함해만과의 짧은 외도를 즐긴 후 본가로 되돌아온 셈이다.
▼ 바다에 떠있는 저 섬이 ‘물바위(水巖)’가 아닐까 싶다. 고기잡이 떠난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기다리다 지친 부인이 애기를 업은 채 돌이 되었다는 전설의 바위다. 아내의 혼이 바위가 되었다며 ‘넋바위(魂巖)’로도 불리는데, 부부간의 정이 시원찮은 아낙내들이 저 바위를 찾아가 넋두리를 하거나 쓰다듬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 서해랑길은 이제 해안선을 따른다. 탄도만을 옆구리에 끼고 걷다가 방해물이 가로막으면 내륙으로 에돌아간다. 저 앞에 보이는 마갑산(또는 마실산)이 첫 번째 장애물이라 하겠다. 해변에는 용유어촌계장이 내건 경고문도 눈에 띈다. 어업면허를 받은 어촌계 어장으로 고동·게·꼬막·바지락 등을 양식하고 있으니 사전승인 없이 채취를 금한다는 내용이다.
▼ 500m남짓 걷다가 해안을 버리고 내륙으로 들어선다. 마갑산 해안에 길을 낼 수가 없기에 국도(24번)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온다. 바다를 그리워하며...
▼ 구릉지로 오르자 생소한 모양새의 한옥 한 채가 얼굴을 내민다. ‘물바우 황토펜션’이라는데 한옥은 단층이라는 고정관념을 확 깨버렸다.
▼ 펜션을 지나자마자 24번 국도로 내려선다. 이어서 도로변을 200m쯤 걷게 되는데, 이때 무화과 가판대가 눈에 띈다. 제철이 아니어서 진열대만이 외롭지만 이곳에서도 무화과를 재배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것도 내다 팔아야 할 정도로 많이. 하긴 이곳 무안은 무화과의 본고장인 영암의 옆 고을이 아니겠는가.
▼ 잠시 후 횡단보도를 이용해 국도(해제·지도로)를 건너니 해제 8명당 중 하나라는 ‘기룡마을(용학4리)’ 입구다. 그렇다고 기룡마을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서해랑길은 국도의 우측 아래로 나있는 농로를 따른다.
▼ 이 구간에서 우린 멋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를 만난다. ‘꿈의 드라이브 코스’로 소문난 담양의 메타세쿼이아길 만큼은 아니어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금산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드넓은 들녘도 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 600m쯤 농로를 걷다가 그 끄트머리에서 국도를 건넌다. 기룡마을의 터줏대감 함평모씨의 선산인 마갑산(馬甲山)을 왼편에 끼고 에둘러가는 모양새인데, 무안만민교회의 입간판을 기점으로 삼으면 되겠다.
▼ 도로 건너 들녘에는 ‘드론실기장’이 들어서 있었다. 이론 수업을 마친 마니아들이 이곳에서 실습을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초당대학교(무안 소재 대학으로 백제약품 계열)의 ‘항공드론과’ 학생들에게는 최고의 실습장이 될 수도 있겠다.
▼ 몇 걸음 더 걸어 ‘금산방조제’로 올라선다. 해제면 용학리에서 시작해 죽도를 거쳐 천장리에 이르는 길고 긴 국가관리 방조제이다. 참고로 무안은 해남 못지않게 간석지(干潟地)가 발달돼 있다. 농지를 만들기 위한 간척사업도 해남에 뒤지지 않는다. 인근 지도(신안군)가 간척을 통해 육지로 연결되었을 정도인데, 이곳 금산방조제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되겠다.
▼ 둑으로 올라서니 가락회관(마실횟집)이 잠시 쉬었다가란다. 마침 요기할만한 곳을 찾던 지라 냉큼 다가가 봤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무안에서만 볼 수 있다는 귀하신 몸, ‘나무젓가락’을 만나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다. 일회용품 사용 금지와 함께 나무젓가락도 식당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산낙지를 파는 식당에서만은 예외란다. 미끌미끌 살아 꿈틀대는 세발낙지를 쇠젓가락으로 먹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 어쩌겠는가. 참! 살아 꿈틀대는 세발낙지가 징그럽다면 ‘기절낙지’와 ‘낙지 오롱구이’를 추천한다.
▼ 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대섬강’은 흐름을 멈추고 호수로 변했다. 거기에 습지까지 품게 되면서 드넓은 농경지의 젓줄이자 철새들에게는 안식처가 되어준다. 우리가 찾은 날에도 오리를 비롯한 철새가 떼를 지어 노닐고 있었다.
▼ 눈이라도 돌릴라치면 갯벌낙지의 보고라는 ‘탄도만’이 아스라하다. 오른쪽 홀통(현경면 오류리)에서 시작된 해안이 마산마을과 가입마을을 거쳐 물암마을로 이어진다. 참고로 탄도만은 무안군 운남면·망운면·현경면·해제면과 신안군의 지도읍에 둘러싸인 넓은 만(灣)으로 2008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으며, 전국 최초의 갯벌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생명의 땅이기도 하다.
▼ 금산방조제의 중간 어림에 들어앉은 ‘대섬(竹島)’에는 선착장이 들어서 있었다. 물길이 튼실해서인지 포구에 정박해있는 어선도 많았고, 그 크기도 다른 선착장들보다 월등히 커졌다.
▼ 물양장에서 낯선 풍경을 만났다. 많은 배들이 뭍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수리 목적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무척 궁금하다.
▼ 대나무가 많다는 대섬(竹島)은 풍수상 말의 구시통에 해당된다고 했다. 명당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만민교회(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교회가 아닐까 싶다)에서 울타리를 쳐놓았기 때문이다.
▼ 이정표(종점 5.6㎞/ 시점 14.7㎞)의 지시대로 반대편 방조제를 걷는다. 천장리(泉壯里)의 백동마을 방향이다.
▼ 드넓은 갯벌은 풍경 또한 걸작이다. 검은 갯벌을 옅은 초록이 뒤덮고 있다. 가을철에는 저 위로 붉게 물든 칠면초가 덧씌워진단다. 이때 만들어지는 풍경, 즉 초록과 붉은 풀밭이 무언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나?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23분. 800m쯤 더 걷다가 바다와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백동마을을 향해 구릉지로 올라간다. 이때 동구 밖에서 정자나무로 둔갑한 멀구슬나무의 멋진 풍모를 엿볼 수 있다.
▼ ‘백동(栢洞)’이란 지명은 마을에 잣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하지만 탐방로는 백동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저 스치듯 지나갈 따름이다. 때문에 한국전쟁 때 희생된 주민 148명을 기리는 ‘위령비’는 둘러볼 수 없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에 묵념이라도 드렸으면 좋았으련만...
▼ 백동마을 역시 구릉지에 걸터앉았다. 그 위를 걸어가는 나그네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 길은 또 다른 백동마을로 나있다. 백동마을이 2개의 자연부락(백동 및 가실)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는데 어떤 부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탐방로가 마을을 살짝 비켜나있어 확인해볼 수도 없었다.
▼ 아무튼 탐방로는 해안으로 곧장 내려가는 지름길을 버리고, 마을을 에둘러서 간다. 땅이 바다만큼 낮아 어디를 둘러봐도 하늘이 절반이라는, 풍경으로만 따진다면 하늘이 ‘열 일’을 한다는 무안의 이국적인 멋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 아름답다고 해서 가슴 아픈 현장이 없겠는가. 지난 해 양배추(배추 포함) 농사는 작황이 무척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생산과잉이 되면서 가격하락이 뒤따랐고, 많은 농가들은 밭을 갈아엎는 아픔을 겪었다. 저 농부는 끝까지 버텨보다 이제야 갈아엎고 있나 보다.
▼ 잠시 후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고 내륙을 향해 동그랗게 파고들어 온 창매리(蒼梅里)의 해안선을 따라 탐방을 이어간다. 아니 방조제 아래로 난 농로를 한참 걷고 난 뒤에야 해안으로 올라선다. 이 구간에서 우린 탄도만의 풍경을 새롭게 담는다. 배를 드러낸 갯벌에 누워있는 어선들, 시선을 조금 옮기면 바다 건너 홀통해변의 전체적인 풍광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다가온다.
▼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저 길도 노두(路頭)라 부를 수 있으려나? 갯벌에 놓은 어민들의 작업도로 말이다. 아무튼 바닷물에 잠겼던 길이 드러나 있기에 갯벌로 내려서봤다. 이곳이 ‘칠면초’의 군락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해살이 풀이어선지 칠면초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짭조름한 맛을 느껴보려고 했는데 아쉽다.
▼ 해안선을 따르던 탐방로가 또 다시 내륙으로 파고든다. 백동마을 앞 해안에서 1km쯤 떨어진 지점인데, 중매산으로 가는 바닷가에 길이 나있지 않은 모양이다. 이어서 200m쯤 더 걸어 ‘창산마을’ 앞 도로(이정표 : 종점 2.6㎞/ 시점 17.9㎞)로 올라선다.
▼ 창선마을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지나친다. ‘창산(蒼山)’이란 지명처럼 푸름으로 가득한 철마산(지형이 말 형상으로 생겼단다)을 배경삼아 마을이 들어섰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8분. 서해랑길은 이제 ‘창매로’를 따라간다. 24코스의 종점인 매당마을까지 이어지는 2차선 도로이다. 이 구간을 걸으며 우린 문드러져가는 배추밭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작황이 좋아도 걱정, 나빠도 걱정이라던 어느 농부의 넋두리가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 600m쯤 더 걸으면 ‘창매교회’, 이정표(종점 1.9㎞/ 시점 18.6㎞)는 버스정류장(창매리) 앞에서 도로를 벗어나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24코스 종점까지 도로가 뻥 뚫렸는데도 ‘중매산’을 에둘러가는 임도를 따르라는 것이다.
▼ 이유는 간단했다. 밭두렁을 따라 굽이굽이 휘도는 오솔길이 저리도 고운데, 삭막한 도로를 굳이 고집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탄도만을 위에서 바라보는 호사까지 누리지 않겠는가.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동그랗게 휘돌아나가는 탄도만의 끝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바닷물이 빠지고 민낯을 드러내는 저 갯벌은 어부에게는 ‘생명의 땅’이다. 대바구니를 짊어진 남정네들은 삽으로 갯벌을 파헤쳐 낙지를 잡고, 아낙들은 밭을 매듯 갯벌에 쪼그려 앉아 호미로 조개를 캔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바닷물이 밀려온다.
▼ 임도로 들어선지 20분 남짓. 중매산(또는 매령산)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양지바른 산자락에 걸터앉은 ‘매당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맹당’으로 시작해, ‘맨댕이’를 거쳐 현재는 ‘매당(梅堂)’으로 불리는 마을이다.
▼ 탄도(炭島)까지 물러났던 바닷물이 회색빛 갯벌을 야금야금 점령해오고 있다. 그러자 물이 빠지면 걸어서도 들어갈 수 있다는 꼬맹이 ‘개구리섬(蛙島)’이 바다 위로 떠오른다. 운이라도 좋으면 ‘모세의 기적’을 카메라에 담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조금 늦었나보다.
▼ 마을로 들어서니 잘 생긴 팽나무 두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팽나무는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나무다. 그래선지 서해랑길을 걷다보면 저런 팽나무를 심심찮게 만난다. 한편 팽나무는 ‘포구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이곳 매당마을도 의젓한 포구다. 그러니 정자나무 역할을 하는 팽나무 한두 그루 어찌 없겠는가.
▼ 날머리는 ‘매당노인회관’(무안군 해제면 창매리)
탐방로는 마을을 관통한다. 그리고 끄트머리쯤에 위치한 ‘매당노인회관’ 앞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참고로 ‘매당’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명당’으로 알려지면서 생겨났다고 한다. 이 마을뿐만 아니라 인근마을에서도 ‘매령산’으로 기우제를 지내러 왔다는 것이다. 하늘이 감응이 빠를 정도로 산의 기운이 좋았기 때문이란다. 그런 이유로 ‘명당’으로 불리다가, ‘맹당’을 거쳐 현재의 이름인 ‘매당’으로 굳어졌다고 전해진다.
▼ 서해랑길 안내도(무안25코스)는 노인회관 옆 민가의 담벼락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에 찍 거리가 15.42km이니 빠른 속도로 걸은 셈이다. 강풍으로 인해 떨어진 체감기온을 끌어올리려고 속도를 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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