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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궁산(時宮山, 514.9m)

 

산 행 일 : ‘23. 4. 15()

소 재 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일원

산행코스 : 묵리마트임도(쉼터)시궁산383.2수녀원 갈림길임도묵리마트(소요시간 : 4.88km/ 2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용인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으로 용인 남부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산행은 옆에 있는 삼봉산(414m)과 연계하여 종주하는 코스가 많은데, 거문정을 기점으로 하여 애덕고개를 거쳐 시궁산과 삼봉산 순으로 등반하고 굴암마을로 내려오거나, 반대로 굴암마을에서 시작하여 거문정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주로 이용된다. 교통편이 좋고 서울에서 불과 60 떨어진 곳이라 부담 없는 당일 산행지로 추천할 만하다

 

 산행들머리는 묵리마트(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

수도권 제2순환고속도로(화성-광주) 서용인 IC에서 내려와 국도 42호선을 타고 이천방면으로 달리다 대촌교차로(처인구 남동)에서 45번 국도로 옮겨 안성·평택 방면으로 간다. 원천교차로(이동읍 천리)에서 빠져나와 318번 지방도(백암방면)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묵리마트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우리는 잠실역에서 5600번 광역버스를 타고 용인버스터미널까지 온 다음, 택시를 이용해 묵리마트까지 왔다.

 시궁산의 들머리는 보통 애덕고개(또는 거문정)나 굴암교가 이용된다. 어느 한곳에서 시작해 시궁산과 삼봉산을 연계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우리처럼 코스를 줄이고 싶은 경우에는 묵리마트에서 시작해 곧장 시궁산으로 오르면 된다.

 도로 건너 산자락으로 파고들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초입에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만일 승용차를 몰고 왔다면 안내도 앞의 공터에 주차시키면 된다.

 현재 위치를 출발점으로 삼는 안내도는 등산코스를 5개로 나눈다. 시궁산 정상까지 일단 오른 다음, 어디로 갈지를 놓고 코스를 구분했다. 등산 마니아들은 삼봉산이나 갈미봉을 연계시키면 되겠고, 우리처럼 나들이 삼아 오른다면 임도를 낀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산길은 고운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이 경사까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숲이 온통 연록색이다. ’연록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얘기도 있지 않는가.

 명색이 산인데 마냥 편히 오를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맞다. 산길은 오래지 않아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해버린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경사진 곳에는 침목계단을 놓고, 그래도 힘들다 싶으면 밧줄난간을 매어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다.

 산행을 시작한지 20. 임도에 올라서니 쉼터가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산행 시작부터 쉬어갈 이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오른다. 임도를 내면서 생긴 절개지에 침목계단이 놓여있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계단을 오르다) ‘묵리(墨里)’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자연 마을로 굴암(窟岩묵방(墨防장촌(長村한덕(閑德) 등을 두었는데, 먹을 만들던 곳이라 하여 먹 묵()’자를 지명으로 쓴다고 한다. 옛날에는 묵방이 또는 묵뱅이로 불리기도 했다.

 계단 위 능선에는 석포 숲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2대에 걸쳐 수집한 고서화를 국가에 기증해 화제가 된 손창근 선생이 200만 평이나 되는 사유지를 국가에 기부했다는 것이다. ‘석포(石圃)’ 1974년 서강대에 양사언필 초서’(보물 제1624) 등 고서화 200점을 기증했던 손세기 선생의 아호이다. 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아들인 손창근이 50여 년간 사유림 662( 200만평)에 잣나무·낙엽송 200만 그루를 심어 가꿔오다 2012년 식목일에 산림청에 기부했다.

 안내판이 전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니 장촌(長村)’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장씨 성을 가진 이들이 터를 잡았다는 마을인데, 잘 지어진 집들로 꽉 들어차있다. 하긴 석포숲이라는 명품 공원을 끼고 있으니 저만한 전원주택 단지도 없겠다. 참고로 석포 숲 공원 2018 북부지방산림청 Vista Point 10 중 하나로 선정된 바 있다. 또한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1호 탄소 중립의 숲으로 선정돼 시민 참여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임도를 지나면서 산길은 많이 가팔라진다.

 그렇다고 버겁다는 얘기는 아니다. 능선이 온통 진달래 꽃밭으로 이루어진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화사하게 피어난 진달래꽃이 눈웃음을 지어오는데 버겁다는 느낌쯤이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길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꽃으로도 막지 못할 정도로 가파른 구간이 나타났다. 산길은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고도를 높여간다.

 두어 곳에서 만난 돌탑이 그 증거라 하겠다. 볼품없는 생김새지만 저건 간절한 소망의 발현이다. 얼마나 버거웠으면 신의 힘까지 빌어보려 했겠는가.

 그게 안타까운 지자체도 한 수 거들었다. 밧줄 난간을 설치해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다.

 그래도 버겁다면 잠시 쉬었다 가란다.

 심기일전 해 다시 길을 나선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나는 급경사 오르막이 기를 확 죽여 버린다.

 오르막길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길고 가파른 오르막에 짧고 완만한 내리막이 반복된다.

 시궁산은 전형적인 육산이다. 그렇다고 바위지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 위로 길이 나있기도 했다.

 뒤돌아본 바위지대.

 고사목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아 원시의 숲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벤치라고 다 같은 벤치가 아니다.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자연스런 멋을 더했다.

 산길이 마냥 가파른 것만은 아니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잠시지만 완만한 구간이 나타기도 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20. 드디어 정상에 올라섰다. 2020년의 등산로 정비사업 덕분에 요즘은 전망데크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시궁산은 용인 남부지역의 최고봉이다. 그래선지 정상에 광장 수준의 전망데크를 만들어놓았다. 35(112)이나 되는 넓이에 데크를 깔고 한가운데 정상석을 모셨다. 여러 개의 벤치를 놓아 쉼터의 기능까지 더하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옛날, 그러니까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이곳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보통 연못이 아니라 하늘나라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했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연못이었단다. ! 누군가는 하늘나라에 있는 여러 궁() 중 선녀들이 목욕하는 곳을 시궁(時宮)이라 부른다고 했다. 이 산의 이름이 시궁이 된 이유라면서...

 시궁산과 영욕을 함께 해오던 옛 정상석은 전망데크 아래로 옮겨놓았다. 그런데 높이가 513m로 적혀있는 게 아닌가. 조금 전의 것은 분명 514.9m이었는데도 말이다. 전망데크를 만들면서 1.9m 높이의 지지대를 세웠는지도 모르겠다.

 정상의 삼각점(용인 507)은 놓치기 딱 좋겠다. 데크 바닥에 4각의 작은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모셔두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봉우리 세 개가 뚜렷한 삼봉산(414.7m)은 물론이고, 저 멀리 어비리의 이동저수지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시 중심부에 있는 석성산과 수지구의 광교산, 모현읍의 정광산 등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정표(애덕고개 2.3/ 삼봉산 1.7/ 묵리 1.4)는 정상으로 올라오는 길이 세 곳임을 알려준다.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삼봉산 방향인데 몇 걸음 걷지 않아 헬기장을 만날 수 있었다. !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전망데크 아래서 30분을 머물기도 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잦아들었다. 이슬비보다도 더 가는 는개로 변해 우산이 필요 없게 됐다. ! ‘종주산행의 왕(‘월간 산에서)’이라는 신경수씨는 이 산줄기를 한남쌍령시궁단맥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한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쌍령지맥의 문수봉(용인시 이동면·원삼면·양성면의 경계에 있는 390m)에서 서쪽으로 분기해 갈미봉(338m)·묘봉(228.6m)·시궁산·삼봉산(413m)·능골산(190m) 등을 일구고 신창마을(용인시 이동면)의 진위천변에서 숨을 다하는 약 10km의 산줄기란다.

 하산 길도 가파르기는 매한가지였다. 침목계단을 놓았으나 두텁게 쌓인 낙엽으로 인해 무척 미끄러웠다. 올라올 때보다도 더 스틱에 힘을 주었다고나 할까?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 펴라는 속담이 있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산길은 저런 허접한 돌탑까지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등장시킨다.

 하산 길이라고 해서 마냥 내려가는 것만은 아니다. 작은 봉우리 두엇을 올라야하기 때문에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만나기도 한다.

▼ 하산을 시작한지 25. ‘383.2m에 올라서니 식탁을 겸한 벤치가 놓여있다그러니 어찌 지나칠 수 있겠는가준비해 온 음식들을 펼쳐놓고 만찬을 즐겼다지난 달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챙겨온 전통주 우조를 꺼내놓았음은 물론이다(치약 냄새가 난다며 모두들 고개를 내둘렀지만).

▼ ‘383.2m의 이정표는 삼봉산이 0.9km 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려준다그게 마음이 놓였던 모양이다간식 삼아 둘러앉은 자리가 1시간으로 늘어나버렸다하긴 지난 가을 만난 게 마지막이었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 다시 길을 나선다길은 아까보다도 더 가팔라졌다그런데도 계단이 놓여있지 않으니 문제다그렇다고 겁낼 필요까지는 없다밧줄 난간을 만들어놓았으니 이를 붙잡고 내려오면 된다.

▼ 행여나 미끄러질세라 조심조심 내려서다보면 어느덧 능선안부에 이른다안부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는데썩 편치 않은 구조물도 눈에 띈다오토바이 진입 방지 볼라드(bollard)’를 설치해놓은 것이다이곳 역시 오토바이의 산길 훼손이 심했던 모양이다.

 이정표(삼봉산 0.5/ 시궁산 1.0)는 양쪽 능선만 가리킨다.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을 찾아낼 수 있다.

 삼봉산 쪽으로도 볼라드(bollard)’가 설치되어 있었다. 밧줄 난간도 보인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 일행은 이쯤에서 삼봉산과의 종주산행을 그만두기로 했다. 는개로 변했던 비가 언제부턴가 이슬비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산이 어디로 가겠는가. 다음에 오르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영보수녀원을 거쳐 용인레저스포츠로 내려가는 길인데 가파르기 짝이 없는 내리막이 한참동안 이어진다.

 이런 길은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빗줄기 속에서 물기를 흠뻑 머금고 있는 산비탈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저런 가느다란 밧줄이 고마운 이유일 것이다.

 고행에 가까운 내리막길이 오래지 않아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후부터 산길은 물기 한 점 없는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하면 임도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오른쪽으로 방향으로 틀어 임도를 따른다. 참고로 반대편(왼쪽) 임도를 따르면 굴암고개로 연결된다. ‘굴암교를 들머리로 삼아 삼봉산을 오를 경우 들르게 되는 고갯마루이다. 영보수녀원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 자세히 찾아보지 않았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S’자를 그려가며 이어지는 임도는 휘도는 자체만 갖고도 아름다웠다. 거기다 하늘을 찌를 듯이 뻗어 오른 잣나무와 낙엽송이 운치를 더해준다. 시궁산의 산허리를 휘돌아가는 명품 트레킹코스 석포 숲 테마임도가 새로 개설되었다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었는가 보다.

 가끔은 조망이 트이기도 한다. 산자락에는 작은 마을이 들어앉았다. 산이 산에 기대고, 사람들은 그 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모양새이다.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들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누군가의 작은 정성이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25분쯤 걸었을까 길이 차단봉으로 막혀있다. 일반 차량의 진입을 막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곳에서 임도가 둘로 나뉘고 있었다. 오른편은 아까 산을 오르면서 만났던 데크쉼터로 이어진다. 걸었던 길을 다시 걷지 않으려는 우리는 물론 왼쪽 방향, 즉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테마임도 종점(0.76km)으로 간다.

 이정표는 임도가 석포 숲 공원까지 연결됨을 알려준다. 6.14km를 더 걸어야 하니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 하겠다.

 낙엽송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길을 10분 남짓 더 걷자 또 다른 차단봉이 가로막는다. 이번에는 오른쪽에 샛문을 내놓는 친절함을 베풀었다.

 차단봉을 지나자 펜션처럼 생긴 주택단지가 나온다. kakaomap 펜션여행으로 적고 있으나, 입간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아 자세한 정보는 알아낼 수 없었다.

 산행날머리는 묵리마트(원점회귀)

펜션을 빠져나오면 318번 지방도(이원로)가 나오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50m쯤 더 걸으면 묵리마트가 나오면서 시궁산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은 2시간 4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이 4.88km을 찍고 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무릎이 시원찮은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서해랑길 15코스(당포버스정류장-달도교차로)

 

여행일 : ‘23. 4. 29()

소재지 : 전남 해남군 화원면 및 산이면 일원

여행코스 : 당포버스정류장월하마을마천마을마산제별암마을금호갑문금호마을달도교차로(거리/시간 : 13.6km/ 14.13km 3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5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해남·영암 구간의 여덟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그동안 임시 구간(2개 코스)으로 운영해오다 2022 12 솔라시도 대교가 개통되면서 3개 코스로 새롭게 포장해 개통했다. 아무튼 이 코스는 금호방조제와 화원반도의 구릉지를 걷는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눈요깃거리가 없다. 그저 들길과 마을길을 걸으며 지역 주민들의 삶을 기웃거려보는 게 다라고나 할까?

 

 들머리는 당포버스정류장(해남군 화원면 월호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49번 지방도를 타고 화원반도로 들어온다. 구지교차로(해남군 화원면 영호리)에서 국도 77호선(매월리 방면)으로 옮기면 오래지 않아 당포마을에 이르게 된다. 77번 국도변에 있는 버스정류장이 15코스 들머리이다.

 새롭게 단장된 15코스는 인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자주 걸어야한다는 편치 않은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선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위험표시 교통표지판을 지도에 그려 넣었다. ‘느낌표가 들어간 지점이 도로와 만나는 지점이니 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자.

 서해랑길(해남 15코스) 안내도는 당포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다. 시작점 표지판은 그 옆의 전봇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월호정미소의 맞은편으로 난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도로를 따를 경우 양화마을로 가버리니 주의한다. 화원반도와 인근의 섬 주민들이 땅끝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송지면의 땅끝이 위도 상으로 한반도(육지)의 최남단이라면 화원반도의 땅끝은 인간이 걸어갈 수 있는 육지의 가장 끝이란다. 실제 금호방조제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해남읍에서 버스로 1시간이나 소요되는 외진 곳이었다.

 바다를 향해 일직선의 수로가 나있다. 꽤 너른 것이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간척지 또한 그만큼 넓다는 얘기일 것이다.

 좌우로 펼쳐지는 들녘이 그 증거다. 푸름으로 덧씌워진 농경지가 바다를 향해 끝 간 데 없이 뻗어나간다. 넓다는 들판도 저 멀리 산이 막아서는 이 땅에서는 흔치 않는 풍경이라 하겠다. 저런 풍경, 즉 소실점으로 모아드는 아득한 직선로가 우리에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현실에서 그런 광경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해랑길은 월하마을을 빙 돌아 관광로(국도 77호선)’로 연결된다. 이때 양배추로 한가득인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 해남은 월동배추로 유명하다. 전국의 대도시로 비싼 값에 팔려나간다. 주민들에게 고소득을 안겨주는 고소득 작물의 대열에 요즘은 양배추가 낀 모양이다.

 그 옆에서는 보리가 익어간다. 호사가들은 사시사철 푸르른 들녘을 화원반도의 특징으로 꼽는다. 월동배추가 끝나면 보리가 초록빛 바다를 연출하고, 연이어 감자와 고구마 순이 돋아나며 화원반도는 일 년 내내 녹색의 꿈이 익어간다는 것이다. 그 같은 초록빛깔의 향연을 감상하는 게 화원반도 여행의 매력이란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0. ‘월하(月下)’마을로 들어선다. 3개의 자연부락(당포·월하·수동)으로 이루어진 월호리(月湖里)의 으뜸가는 마을로 다라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민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는데, 쌀농사보다는 배추와 양파를 더 많이 재배한단다.

 마을을 지나서도 주변 풍광은 변하지 않는다. 배추밭과 보리밭이 탐방로 좌우로 펼쳐지는 들녘을 꽉 채운다.

 들녘의 트랙터는 빗줄기가 반가운가 보다. 시름없이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쉬고 있다. 하긴 비가 내려야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운명이니 어쩌겠는가.

 그렇게 5분쯤 걸어 국도 77호선(관광로)’에 올라선다.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12/ 시점 1.5)와 마을 표지석이 이곳이 월하마을의 입구임을 알려준다.

 이후부터는 인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따른다. 스치듯 지나가는 차량을 피해 걸어야하는 위험스런 구간이다. 이 구간에서 우린 우측통행이라는 정부의 지침을 비웃으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지침에 따르면 달려오는 차량을 뒤에 두고 걸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교통사고가 잦은데 달려드는 차량이 보여야 피해볼 시도라도 해볼 게 아닌가.

 주변 풍광까지 삭막한 건 아니다. 스위스의 산간지방에서나 볼 법한 목가적인 풍경이 좌우로 펼쳐진다.

 월하마을에서 15. 월호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수동(水洞)’마을 입구에 이른다. 그렇다고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저 멀리서 눈인사만 하고 슬그머니 지나친다.

 위험천만인 도로를 꽤 오래 걸어야 했다. 조바심 때문에 하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서해랑은 도로를 따라 1,7km나 이어지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진한 향기가 코끝을 스쳐가는 게 아닌가. 도로 개설 때 생긴 절개지가 온통 등나무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그게 연자줏빛 꽃을 피워내면서 진하면서도 향긋한 향기를 보내온다. 덕분에 비로 인해 찌뿌둥해진 심신이 한결 나아질 수 있었다.

 그렇게 20분쯤 걸었을까 고갯마루(이정표 : 종점 10.4/ 시점 3.2)에 올라선 탐방로가 도로를 벗어난다.

 저 이정표는 대체 뭘 알리고 싶었을까? 하단의 서해랑길 안내도(종점 10.4/ 시점 3.2)가 무색하게도, 상부는 서해랑길과는 무관한 방향표지판을 매달고 있다.

 서해랑길은 이제 마산리로 들어선다. 그리고 임도를 따라 마천마을로 간다. 법정 동리인 마산리(馬山里)를 구성하는 2개 자연부락(마천·마산) 중 하나로, 마천(馬川)이란 지명은 마을 지형이 말의 형국이고, 마을 앞으로 하천이 흐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엄청난 크기의 노거수 한 그루가 시선을 꽉 채워버린다. 마천마을의 역사가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같은 화원반도라고 해서 보여주는 풍경이 다 같지는 않았다. 그동안 걸어왔던 황산면이나 문내면은 산다운 산이 없는 구릉지 일색이었다. 그런데 반도의 끝자락인 화원면은 곳곳에서 산봉우리가 솟아올랐다. 그중에서도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추락했던 운거산은 318m에 이를 정도로 높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 만에 마천(馬川)’마을에 들어섰다. 탐방로는 월호마을처럼 마을을 관통해버린다. 이처럼 15코스는 만나는 마을마다 관통하고 있었다. 여기서 주의사항 하나, 서해랑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주민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그러니 마을을 지날 때는 주민들에게 피해가 없도록 주의해가며 걷도록 하자.

 ! 마천마을을 그냥 벗어나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18년 전, 그러니까 1993년 발생했던 아시아나항공 추락사고 현장이 이 마을 부근(운거산)이기 때문이다. 당시 주민들은 진입로가 없는 가파른 산중턱까지 올라 부상자를 구했다. 항공유 유출로 2차 폭발이 예상됐지만 주민들은 부상자를 구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의 기억은 마천숭의관(馬川崇議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항공기 사고 이후 세간의 이목은 마천마을로 집중되었고, 주민들은 청와대로부터 초청을 받기도 했다. 에이스침대 창업자 고 안유수 회장이 지어준 저 건물도 그 헌신에 대한 보답이다. 에이스침대는 이후에도 건물의 유지(보수관리(운영비)를 지원해오고 있단다.

 당시 사고는 탑승객 116(승객 110명과 승무원 6)  68명이 사망하고, 44명이 중상을 입었다. 저 위령비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탑승객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졌다.

 신한국의 표상, 사랑의 마천마을이란 대형 빗돌도 보인다. 사고 때 헌신적인 인명구조 활동을 벌였던 주민들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여기서 신한국은 김영삼 대통령의 캐치 프레이즈 신한국 창조에 나오던 신조어, 항공기 사고가 김영삼 대통령 재직 때 일어났다는 얘기일 게고 말이다.

 박경완 기자 산화불망비는 기자단체에서 세운 빗돌이다. 사고 당시 광주(무등일보)에서 근무하던 그는 자원해서 사고현장으로 달려왔고, 다음 날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던 도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광주전남사진기자회는 매년 추모제를 갖고 박경완보도사진상을 제정 기자정신이 돋보이는 후배기자들을 표창해 오고 있다.

 마천마을이 낳은 서정시인 박성룡(1934-2002)을 소개하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대표 시 풀잎을 그의 약력과 함께 적어놓았다. 참고로 1930년 이곳 마천마을에서 태어난 박성룡 시인은 이한직·조지훈 시인의 추천을 통해 문학예술지에 등단하였으며, 풀잎·화병정경·과목 등 유려한 작품을 다수 남겼다. 자연을 제재로 깊이 있는 통찰의 시를 추구하며 자신만의 조어를 동원해 시의 깊이와 상상력을 더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네들의 헌신을 살펴본 다음 다시 길을 나선다. 15구간의 특징 중 하나는 관광로(국도 77호선)를 반복해서 오르내린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곧장 가지를 않고 조선소길까지 에둘러서 가고 있었다.

 농로를 따라 6분쯤 걸어 조선소길(이정표 : 종점 8.9/ 시점 4.7)’에 올라선다. 화원반도의 끝자락을 따라 내놓은 도로로 화원 조선산업단지를 지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탐방로는 이제 조선소길을 따라 관광로로 간다. 2차선이지만 지나다니는 차량이 드물어서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 이곳에서 집사람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3km쯤 전방에서 출발했음을 감안하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따라잡았다. 나물을 뜯느라 더뎌진 집사람의 발걸음 덕분일 게다.

 마산저수지는 구경만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쓰레기 투척이나 시설의 무단사용은 물론이고, 물놀이나 고기잡이도 금지한다는 해남군수의 날선 경고판이 세워져 있었다.

 10분쯤 더 걸어 또 다시 관광로로 올라선다. 탐방로는 왼쪽, 그러니까 목포 방향으로 간다. 하나 더, 이곳은 그동안 걸어오던 마산리가 끝나고 영호리가 시작되는 지점(이정표 : 종점 8.4/ 시점 5.2)이기도 하다.

▼ 여섯 달 만에 돌아온 해남, 이 지역 특유의 이정목이 반가워 카메라에 담아봤다. 시점과 종점, 그리고 근처 주요 포인트를 가리키는 방향표시가 한 면을 장식한다. 다른 한 면은 시점과 종점의 거리를 적었다.

 이번은 도로를 따르지 않는다. 50m쯤 걷다가 농협창고 옆에서 농로로 들어선다.

 길가에는 무화과 농원이 꽤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옆 고을인 영암의 특산물이지만, 이곳 해남에서도 재배지를 늘려가는 추세라고 한다. 하긴 여왕의 과일(클레오파트라가 즐겨 먹었단다)’로 까지 불리는 과일이니 어디 지역을 가려가며 재배하겠는가.

 오랜만에 보는 담배 밭이 옛 추억을 소환시킨다. 옛날에는 동네마다 가득가득 논과 밭을 채웠던 담배다. 우리 집은 물론이고 옆집 순이네도, 뒷집 철수네도 모두 담배농사로 먹고 살았다.

 농로(저상길) 저상마을(양짓몰)’을 스치듯 지나간다. 법정 동리인 영호리(靈湖里)를 구성하는 4개 자연부락(구지·장재·저상·별암) 중 하나로. ‘저상이란 지명은 예전에 마을에서 모시를 많이 심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천가를 걸으며 올려다본 저상마을.

 농협창고에서 저상마을 쪽으로 들어선지 15. ‘저상길 농로를 벗어나 2차선 도로인 영호길로 올라섰다. 마을 표지석과 버스정류장이 저상마을의 입구임을 알려준다.

 영호길은 별암마을(영호리의 자연부락 중 하나) 앞에서 오른편으로 간다. 하지만 탐방로는 마을을 거쳐 가도록 나있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또 다시 영호로이다. 이와는 별도로 4차선인 관광레저로가 별암선착장을 향해 시원스럽게 달려간다.

 군인들이 사용하던 콘센트막사를 닮은 저 건물은 자연과 사람들이라는 카페다. 차와 식사를 파는데, 함께 운영하고 있는 펜션(뒤로 보이는 건물)은 뛰어난 뷰로 입소문을 타는 중이란다.

 이곳은 바닷가. 자동차 보다 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가 보다.

 화원 조선산업단지로 가는 산단로의 아래를 지나자 별암선착장’, 화원반도의 끝자락이자 금호방조제의 남쪽 끝에 위치한 선착장(이정표 : 종점 5.3/ 시점 8.3)이다. 저 선착장은 목포에 근접해있던 이곳 사람들에게는 더 큰 세상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당시는 사람과 농수산물을 실은 배가 하루에도 수십 척씩 드나들었다고 한다.

 목포행 여객선이 드나들던 선착장은 금호방조제가 생기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방조제를 따라 4차선 도로가 뻥 뚫렸으니 여객선이 다닐 이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고깃배는 여전히 드나들고 있으며, 그 덕분에 횟집과 낚시가게들이 포구의 명맥을 근근이 이어간다.

 금호방조제(錦湖防潮堤)를 걷는다. 해남군의 화원면과 산이면을 연결하는 방조제로 이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금호도는 육지로 다시 태어났다. 방조제는 2개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서해랑길은 1방조제(별암마을산두마을)부터 먼저 걷는다.

 영산강 하구로 나아가는 바다에는 수많은 배들이 떠있다. 금호방조제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저 바다는 우리나라 최대의 낙지 산지였다. 주민들은 아침마다 양동이에 가득 담아 공판장에 내다 팔았고, 그 돈으로 쌀을 사고 자식들의 학비를 댔다.

 방조제의 끝은 금호갑문이다. 바다를 막아 생긴 호수, 금호호의 인공 물길인 갑문이다.

 금호갑문을 지나면 금호1교차로’. 탐방로는 이곳에서 4차선 도로(관광레저로)를 건넌다. 이런 곳에서의 안전은 나그네 몫이다.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으나 이를 지키지 않는 인간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란 신호를 보고 건너던 우리 앞을 속도도 떨어뜨리지 않은 채로 지나가는 못된 놈이 있었다.

 도로 건너에는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방조제공사가 마무리 된 것을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 금호호라고 적힌 빗돌을 세워놓았다. 참고로 금호호는 따뜻한 기온과 넓은 갯벌로 인해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공간이다. 이러한 요건은 다양한 새들을 모여들게 한다. 겨울이면 수많은 철새들이 따듯한 남쪽나라로 가기 위해 기착지 삼아 이곳에 들른단다.

 서해랑길은 산두버스정류장(‘산두마을 표지석도 눈에 띈다)에서 도로(관광레저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산두마을 방향으로 50m쯤 들어가다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농로를 따른다.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밋밋한 구간이다. 단지 고속도로처럼 씽씽 달려대는 자동차들이 부담스러워 에둘러가며 길을 내놓았지 않나 싶다.

 반원(半圓)을 그리던 탐방로가 다시 도로변(관광레저로)으로 나온다. 그리고는 풍림농산이라는 특산물판매점 앞에 데려다 놓는다. 당도가 높기로 소문난 해남의 꿀 고구마라도 사가라는 모양이다. 최근 수확량을 늘려가고 있는 무화과까지 끼워서...

 천년초 송편도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 토종 선인장인 천년초는 면역력 향상과 세포 활성화 작용을 하는 페놀성분과 항산화항염의 플라보노이드 성분이 풍부해 관절염 등 염증성질환 개선에 큰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나처럼 관절이 시원찮은 노인들에게 안성맞춤이니 어찌 관심이 쏠리지 않겠는가.

 가게를 기웃거리게 만든 탐방로는 또 다시 도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섬의 중앙에 들어앉은 금호마을로 향한다.

 도로와 헤어지고 10. 고개 하나를 넘자 금호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금호리(錦湖里) 2개 자연부락(금호·산두) 중 하나로 원래 이름은 속금(束金)’이었다. 목화를 생산하여 돈을 묶는다는 뜻이란다. 그러나 100년쯤 전 마을의 부흥을 예언한 어느 학자의 말에 따라 바다경치가 비단자락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답고, 물결이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의미의 금호(錦湖)’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탐방로는 마을을 관통하며 지나간다. 이때 이 마을의 터줏대감이었을 정미소가 고즈넉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수십 년 동안 마을의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을 정미소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옛 추억을 소환해주기에 충분했다.

 2018년에 폐교되었다는 금호분교(산이 서초등학교)는 뭔가(체험 또는 복지시설)를 위해 새롭게 태어났다고 한다. 덕분에 책 읽는 소녀 반공소년 이승복의 동상은 옛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이 마을은 여성 전용 경로당을 따로 운영하고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의 옛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성추행의 여파가 이곳 섬마을까지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겠다.

 보건진료소도 들어서 있었다.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저 들녘 너머, 호수 반대편에는 공룡들의 땅이 있을 것이다. 방조제 축조로 물높이가 낮아지면서 새롭게 드러난 공룡·익룡·새 발자국 화석산지다. 우항리(황산면)에 위치한 그 화석산지에는 세계 최초·최고·최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세계 최초로 동일 지층에서 여러 종의 화석이 발견되었고, 20~35에 이르는 익룡의 발자국 크기도 세계 최대다. 830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생성년도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로 꼽힌다.

 금호마을에서 나오면 또 다시 관광레저로, ‘금호2교차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금호2방조제로 올라간다.

 오늘은 사슴과 구름이라는 아호를 쓰는 저 둘레길 도반과 함께 걸었다.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열정을 갖고 있는 분, 그녀는 15구간에 이어 16·17구간을 내일까지 마치겠다며 트레킹을 이어가고 있었다.

▼ 금호2방조제는 동금달도(naver map에 적힌 지명이다)’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둑을 펼쳐놓은 모양새이다이 방조제에 금호1방조제와 영암방조제를 더하면 영암·금호방조제가 된다영암군 삼호읍과 해남군 화원면을 연결하는 4.3km 길이 방조제로 농경지와 수자원 확보를 위해 1985년에 착공하여 1996년에 완성되었다.

 저만치 앞 바다에 흐릿한 섬(신도)의 흔적이 가물가물 가라앉은 듯 보인다. 마치 수반 위에 놓인 운치 있는 자연석 수석(壽石)처럼 고요한 바다 속에 잠겨 있다.

 동금달도를 지나갈 때 인도가 따로 없는 도로변을 걷기도 한다. ‘코리아 둘레길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는 상황이랄까? 고속도로처럼 속도를 내며 스칠 듯 지나가는 차량들이 너무 무서웠기에 하는 말이다.

 방조제는 산이반도로 연결된다. 영암호와 금호호 사이에 끼어 있는 지역이다. 그나저나 이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여름철이면 방조제 앞이 강태공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것이다. 떼를 지어 올라오는 갈치를 잡기 위해서다. 호수에서 자란 회류성 어류들은 8월이면 바다로 나간다. 이때 배수 관문에서 빠져나오는 치어를 먹이삼아 갈치가 떼를 지어 올라온다고 한다. 먼 바다로 나가야 만날 수 있는 갈치를 제방에 앉아 낚는 장면은 전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란다.

 바다 건너 거대한 시설단지는 현대삼호중공업이 아닐까 싶다.

 방조제의 끄트머리는 달도갑문이 장식한다. 금호호의 또 다른 물길이다.

 날머리는 달도교차로(해남군 산이면 구성리)

달도갑문을 지나면 곧이어 달도교차로’, 트레킹은 교차로 건너 광장에서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4.13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임시노선이었을 때의 15코스는 달도교차로에서 곧장 영암방조제로 가도록 되어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선보인 15코스는 횡단보도를 건너 산이반도로 들어온다.

 산이반도는 솔라시도(Solarseado)’라는 기업도시로 새롭게 태어나는 중이라고 했다. 보성그룹이 전라남도·전남개발공사와 함께 친환경 미래형 도시로 개발하고 있다나? 데이터센터 유치가 계획대로 이뤄지면 아시아를 대표하는 데이터센터 파크로 자리매김 될 전망이란다.

 서해랑길(해남·영암 16코스) 안내도는 교차로에서 솔라시도CC로 들어가는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 28코스(증도면사무소-증도관광안내소)

 

여행일 : ‘23. 4. 22()

소재지 : 전남 무안군 증도면 일원

여행코스 : 증도면사무소상정봉오산마을검산마을해저유물발굴기념비방축마을구분포저수지증도관광안내소(거리/시간 : 16km/ 16.43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27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다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증도의 절반 정도를 느리게 둘러보는 코스다. 문준경 전도사 순례길을 따라보는가 하면, 해저유물인양지에서는 700년 전의 못 이룬 항해를 아쉬워해본다. 거기에 드넓은 갯벌과의 한판 씨름은 덤이다. 물 빠진 갯벌도립공원은 짱뚱어·농게·칠게 등의 향연이 펼쳐지고, 반대편 간척지에서는 왕새우가 팔짝팔짝 하늘을 향해 뛰어오른다. 단 슬로시티라는 슬로건에 맞게 천천히 걷는 것은 필수. 그래야 숨겨진 보물들을 챙겨갈 수 있으니까.

 

 들머리는 증도면사무소(신안군 증도면 증동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로 들어온다. 지도사거리(지도읍 읍내리)에서 805번 지방도로 옮기면 송도 사옥도를 거쳐 증도로 들어간다. 곧이어 만나는 소금특산물판매소 앞 삼거리에서 문준경길로 직진하면 잠시 후 증도면사무소에 이른다. 서해랑길(신안 28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면사무소의 왼편에 설치되어 있다.

 증도는 느리게 둘러보는 섬이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섬답게 모든 것이 더디게 흘러간다. 초반의 상정봉 구간을 제외하면 나머지 전부가 평지길이니 그처럼 걷기에 딱 좋은 코스라 하겠다. 드넓은 갯벌과 다도해의 섬들을 눈에 담으며 느릿느릿 걸어볼 일이다.

 서해랑길 안내도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면사무소의 뒷산인 상정봉으로 오른다고 보면 되겠다. 해발이 127m 밖에 되지 않는 야산이지만 증도의 주산이라니 무시하지는 말자. 참고로 증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돈대봉(墩臺峰, 137m)이라고 한다.

 60m쯤 들어갔을까 느티나무 아래로 오솔길이 나있다. 초입에 상정봉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초입의 산죽지대를 벗어나자 시야가 확 트인다. 이곳 증도는 슬로시티, 걷기 편하다고 무작정 걸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왼편에 펼쳐지는 풍경이 사뭇 빼어나기 때문이다. 너른 들녘의 안쪽 귀퉁이에 증동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들녘 너머에는 우전해수욕장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조금 더 올라 임도를 만났다싶으면 곧이어 상수원 물탱크가 나오고, 이곳에서 염산(또는 광암)으로 가는 길이 오른쪽으로 나뉜다.

 갈림길을 지나면서부터 산길은 급경사로 변한다. 그러나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통나무계단을 놓고 길가에다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힘이 들 경우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2. 나무계단이 끝나면 쉼터를 겸하고 있는 널따란 헬기장이 나온다. 남쪽 방향에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뛰어난 조망을 보여주는 장소라는 증거일 것이다. 상정봉에서, 아니 증도에서 가장 뛰어난 전망대이니 서둘지 말고 조망을 즐겨볼 일이다.

 전망대에 서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갯벌에 놓인 짱뚱어다리. 그 너머로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태평염전과 한반도 모양의 숲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허리가 잘리지 않은 통일된 한반도다. 우전해변의 배후 숲이 한반도를 빼다 닮은 것이다. 그 고즈넉한 풍경이 언젠가 사진전에서 눈길을 끌던 작품을 빼닮았다. 아름답다는 얘기다.

 조망을 즐기다가 메모지를 꺼내든다. 구간별 소요시간을 적기 위해서다. 그러다 문득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배낭 속에 넣어 버린다. 이곳은 슬로시티, 모처럼 느림보의 미학을 이행해 볼 기회였던 것이다. 대신 문준경 전도사가 순교 직전 드렸다는 기도문을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본다. 다행이도 그 기도문엔 내가 할 수 없는 행동,  원수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난 역사인식도 제대로 못하는 대통령이 아니니까.

 느긋하게 조망을 즐기다가 정상으로 향한다. ‘기도바위 가는 길의 방향표시를 따르면 된다. ! 문준경 전도사의 제자인 이판일 장로(한국전쟁 때 순교했다)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읽어보는 게 좋겠다.

 평평한 능선길을 잠시 걸으면 문준경 전도사(1891~1950)’의 기도터가 나온다. 암태도에서 태어난 그녀는 17세에 지도읍 정씨가문으로 시집갔다. 이때 목포 북교동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1931년에는 서울의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해 사역자의 길에 들어섰으며 1933년 임자도의 진리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신안군 21개 섬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다 한국전쟁 때 좌익세력에 의해 순교했다.

 기도터에는 보혈이라는 시() 한 수가 적혀있었다. 덧붙인 문구로 보아 전망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바위에서 문준경 전도사가 기도를 드렸던 모양이다. 참고로 보혈(寶血)이란 인류의 죄를 구속(救贖)하기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린 피를 말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그녀의 순교를 그만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나 더, 증도는 주민의 80%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토테미즘이 강한 일반적인 해안지방과 분위기가 사뭇 다른 특징이다. 이게 다 한국 최초의 여성 기독교 순교자라는 문준경 전도사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문준경 전도사의 제자이자 이판일 장로의 아들이라는 이인재 목사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헬기장과 대동소이하다)을 즐기다보면 어느덧 상정봉(上正峯, 127.7m) 정상이다. 정상은 의외로 허접했다. 봉우리의 한가운데에 박혀있는 삼각점과 이정표(짱뚱어다리 1.9Km/ 염산 3.0Km/ 면사무소 1.1Km)만 보일뿐 정상표지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산세(山勢)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하긴 구릉지 비슷한 산에서 특별한 볼거리를 찾는 것 자체가 잘못일 것이다.

 낮다고 해서 옛이야기 하나 갖고 있지 않을 리가 없다. 옛날 세상이 홍수로 뒤덮였을 때 이곳 증도도 물속에 잠겼는데 오로지 상정봉 정상만이 덜 잠겼다고 한다. 그때 물위에 드러난 정상의 모습이 상여(喪輿)를 닮았다고 해서 상정봉(喪頂夆)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정봉(上正峯)으로 불리고 있다. 상여의 뜻을 내포한 산의 이름이 주민들의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아까 헬기장에서 보던 조망이 다시 한 번 펼쳐지기 때문이다. 아니 서쪽 방향의 조망은 헬기장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증도에 들어오기 전, 지인으로부터 꼭 둘러보라고 추천받은 명소가 서너 곳 있다. 이곳 상정봉도 그중 하나다. 증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이유에서다. 특히 한반도 모양으로 생긴 우전해변의 해송 숲은 절대 놓치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다.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검산마을, 서해랑길은 보물섬길로 연결되는 왼쪽이다. 하산 길 또한 곳곳에서 조망이 트인다. 우전해변의 해송 숲이 심심찮게 나타나지만 그보다는 점점이 흩어져 있는 다도해의 풍광이 더 눈길을 끈다. 다만 가파른 내리막길이 무릎이 시원찮은 이들을 괴롭히는 구간이기도 하다.

 가파른 계단길만 지나면 길은 고와진다. 잔디로 뒤덮인 산길이 폭신폭신하기만 한데 거기다 경사까지 거의 없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하면 보물섬길에 내려서게 되고, 탐방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포장도로를 따른다. ‘모실길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구간이라 하겠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런 길은 꽤 오랫동안 계속된다.

 도로를 따라 7분쯤 걷다가(중간에 방축리로 가는 도로가 나뉘기도 하지만 무시한다) ‘희망민박을 끼고 차도를 벗어나 해안으로 간다. 왼쪽 방향이다.

 잠시 후 이른 바닷가에는 오산(吾山)’마을이 들어앉았다. 법정 동리인 방축리를 구성하는 4개 자연부락(방축·검산·오산·염산) 중 하나로, 예전에는 수문개로 불리었다. 마을 앞에 배가 드나드는 수문개가 있었다고 해서다. 그러다 집이 다섯 채인데다 길까지 다섯 갈래로 나뉜다고 해서 오산으로 바꾸었다.

 바다는 밀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증도의 갯벌은 물이 완전히 빠져도 표면이 촉촉하게 젖어 있다고 한다. 때문에 찰기로 윤이 나는 갯벌에 주변의 산과 마을, 하늘빛까지 고스란히 투영된단다.

 마을을 지나 썬 코스트 리조트로 간다. 이어서 리조트 후문으로 들어선 다음 숙소 지역을 관통해버린다. 리조트로 봐서는 고개를 내두르기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주인이나 투숙객들 모두 시도 때도 없이 지나다니는 트레커들을 좋아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리조트를 벗어나자 정자까지 갖춘 멋진 해변이 얼굴을 내민다.

 해변의 규모는 작았다. 하지만 잔잔한 파도나 모래의 질만큼은 여느 유명 해수욕장에 뒤질 게 없었다. ‘썬 코스트 리조트가 유명세를 타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저런 멋진 해변을 자기 것처럼 품고 있는 리조트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해변에는 리조트에서 만들어놓은 그네가 차오르는 바닷물에 아랫도리를 적시고 있었다. 가히 환상적인 풍경이라 하겠다.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그 위를 둥둥 떠다니는 그네, 거기에 어여쁜 여인이라도 걸터앉는다면 인생샷 한 장쯤은 너끈하지 않겠는가.

 홍보용 입간판이 배웅하는 리조트의 초입에서 아까 헤어졌던 보물섬길 차도를 다시 만난다. 이어서 세목섬이 들어앉은 다도해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검산마을로 향한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야자수가 이국적인 멋을 선사하는 멋진 구간이다.

 텅 빈 선착장 너머로 보이는 섬은 세목섬’. 특별한 볼거리나 이야깃거리가 없는 밋밋한 섬이다. 그저 조수간만의 차로 인해 바닷길이 매일 열린다는 것 말고는...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모퉁이를 돌아 검산(劍山)’마을로 들어선다. 아까 지나왔던 오산마을처럼 방축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래 이름은 만들이었다. 마을 앞바다에 고기떼가 가득하다는 뜻이란다. 그러다 해적과 도둑으로 인해 마을이 피폐해지자 시주 나온 중의 의견에 따라 검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단다.

 탐방로는 마을을 스치듯 지나간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동구 밖(‘프롬 휴 펜션 방향)에 세워진 비석 하나가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임신방액석(壬申防厄石)’, 돌에 새겨진 대로 액을 막기 위해 임신년에 세운 빗돌이다. 마을에 도둑떼의 출몰이 잦자 노승의 제안으로 마을 이름을 바꾸면서 저 빗돌을 세웠다는 것이다.

 탐방로로 되돌아와 노인 회관으로 간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해저유물을 최초로 발견·신고한 최형근씨 집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집 앞에는 검생이의 달이란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검생이의 달 1990 KBS-2TV에서 방영된 드라마로 1976년 당시 해저 유물 발굴이 이루어진 검산(일명 검생이) 마을에서 보물과 관련된 마을 사람들 사이의 소동을 다룬 작품이다. 보물 소동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인 탐욕과 애증을 그려냈다.

 검산마을에서의 마지막 투어는 검산항이다. 증도에서 가장 큰 포구인데다 보여주는 풍경까지도 빼어나다니 어찌 거를 수 있겠는가. 해넘이가 무척 고운 곳으로도 입소문을 탔다고 한다. 밀물 때는 바다가 붉게 물들고 썰물 때는 갯벌이 깨진 거울 파편처럼 황홀하게 반짝인단다. 때문에 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진작가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나?

 항구는 자그만 돌섬까지 방파제를 쌓고 그 안쪽에 선착장을 만들었다. 파도가 거친 날 어선의 피항지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파시가 열리지 않았을까? 유홍준 작가가 소개한 목넹기가 이 부근이라고 했었는데... ‘목넹기 갈보야 뛰지 마라. 우네기(조기잡이 배) 떠나면 너나나나..’로 시작되는 그 목넹기 말이다.

 저 사진작가는 뭘 기다리고 있을까? 일몰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니, 서해바다로 떨어지는 해가 오메가라도 그려주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신안군 소속의 문화관광해설가 이종화씨는 바다로 떨어지는 해가 오메가 글자처럼 반사되어 보이는 현상을 오메가 일몰로 표현하면서 선택받은 자만이 볼 수 있다고 적고 있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0. ‘신안 해저유물 발굴해역에 이른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방축반도로 불러야할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해저유물발굴기념비 낙조전망대’, ‘700년 전의 약속(소단도의 카페·해저유물전시관)’ 등이 들어서 있다.

 그 초입은 주차장 차지다. 하지만 ‘700년 전의 약속이 공사 중이어선지 널디 너른 주차장은 자동차 대신 어망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4km쯤 앞서 출발한 집사람을 이곳에서 따라 잡았다. 아니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해풍과 햇볕에 말라가고 있는 생선이 욕심이라도 났던 모양이다. 그녀의 관심이 온통 건정에 쏠려있는 걸 보면 말이다. 참고로 우럭··참조기 등을 손질하고 염장한 다음 해풍과 햇볕에 말리면 건정이 된다.

 대단도와 증도 사이 해협에 꽂혀있는 저 지주들은 독살이 아닐까 싶다. 명덕섬과 대단도 사이로 들어온 바닷물이 독살을 지나 소·대단도 사이로 빠져나가는데, 함께 들어온 물고기가 저 독살에 갇히게 된다고 한다. 주민들은 그 물고기를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나? 참고로 독살이란 바닷가에 돌을 쌓거나 대나무 등을 엮어 만든 발을 설치하고, 밀물 때 물을 따라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여 물고기를 잡는 전통 어로방식이다. 증도에서는 갯벌에 대나무로 만든 독살을 일자로 길게 설치하는 방식을 사용한단다.

 건너편 소단도에는 특이한 외모를 지닌 이층 건물이 들어섰다. 유물과 함께 발견된 송·원대의 무역선, 즉 보물을 실었던 선박을 본 떠 지었다고 한다. 건물은 보물섬(Treasure Island)’이란 명찰을 내민다. 아니 서두에 적힌 ‘700년 전의 약속이 본명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특이한 외모의 건물을 머리에 인 섬이 그림처럼 고운데, 거기에 작은 섬들까지 합쳐지면서 그 자태는 한층 더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승화한다.

 건물은 일층은 카페, 이층에는 자그마한 박물관을 만들어 놓았다. 당시 보물선 안에는 도자기 2661, 동전 28018kg, 금속제품 729, 석제품 43점 등이 실려 있었는데, 이중 170여 점이 이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단다. 박물관에는 유물들 외에도 보물선 인양 당시의 사진들도 전시해 놓았다.

 박물관 옆에는 배의 갑판(甲板, deck) 모양으로 생긴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돛대(mast)까지 갖춘 의젓한 갑판이다. 갑판에 서면 유물을 건져 올렸다는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그 왼편에는 대단도와 내갈도, 외갈도 등 비슷비슷하게 생긴 작은 바위섬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진입로 보수공사가 한창인 ‘700년 전의 약속은 들어가 볼 수 없었다. 8년 전 모실길을 답사하면서 찍었던 사진을 게시한 이유다. 그 아쉬움은 공사현장의 가림막을 살펴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림으로 소개하고 있는 ‘1004섬 신안 보물섬(Treasure Island) 증도의 풍경들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소단도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700年 前의 약속이라는 거대한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소단도에 들어선 보물선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원나라 상인이 일본에 전해주기로 한 약속. 지켜지지 못한 그 약속이 우리에게는 어부지리가 되었지만...

 조금 더 걸어 만난 갈림길에서는 바다를 향해 간다. 서쪽 끝의 바닷가 벼랑 위에 해저유물 발굴기념비가 세워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작정 빗돌 앞에 서는 우()는 범하지 말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나서 역사의 현장에 이르러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마침 초입에 어디서 어떤 유물들이 발견되었는지, 또 그 유물을 실은 배는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초입에 신안 섬 자전거길(증도 구간은 2코스이다)’의 안내도와 스탬프 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관광안내소에서 시작해 원점으로 돌아오는 회귀형 코스(48km, 4개 인증센터)로 증도의 얼굴마담인 갯벌과 소금꽃 핀 염전, 보물선을 건져 올린 해저유물발굴지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청정의 공기를 마시며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해서 아름다운 자전거길 100에 선정되기도 했다.

▼ 해저유물발굴비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바닷가 풍경, 해식애로 이루어진 바위벼랑이 제법 볼만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발굴된 유물의 중요성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빗돌의 크기도 대단했다. 참고로 신안해저유물은 1975년 도덕도 앞바다에서 한 어부의 그물에 중국도자기가 걸려 올라오면서 최초로 발견됐다. 이후 청자·백자·동전·생활용품 등 23천여 점에 달하는 해저유물이 1984년까지 발굴됐다. 이 신안해저유물 발굴은 동양문화사 연구에 길이 빛날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발굴된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발굴해역도 국가사적 제274호로 지정됐다.

 해저유물 매장해역 안내판 옆에는 슬로시티 보물찾기 호핑투어에 대한 안내판이 스탬프통과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증도에서 발견된 700년 전 보물들을 찾아 8개 숨은 명소를 관광한다는 컨셉으로 진행되는 스탬프 투어다. 느리게 보고, 천천히 걷고, 즐거운 체험을 하면서 보물을 찾아보라는 모양이다.

 빗돌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먼저 와있던 서해랑길 도반들이 바닷가로 더 나가보란다. 천애의 바위절벽 위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는데, 그곳에서 빗돌이 명시하고 있는 유물 발굴지가 어디쯤인지를 직접 가늠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망대에 서자 서해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 바다에는 청자 모양의 부표 하나가 떠있었다. 청자화병 등 23,00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된 지점임을 알리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이란다.

 눈길을 살짝 돌리면 이 지역 해안선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난다. 침식을 마친 리아스(Rias)식 해안절벽이 보기만 해도 아찔한데, 그 아래 갯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하얀 파도가 자신도 보아달라며 울부짖는다.

 소단도·대단도·내갈도·외갈도 등 꼬맹이 섬들이 일렬로 늘어선 반대편 풍경도 만만찮다. 바위투성이 섬에서 자라는 생명체는 차라리 경이. 작달막한 해송이 갖은 풍파를 다 이겨내며 꿋꿋이 자라고 있는 모습에서 생명의 강인함을 느끼게 된다.

 도로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해안일주도로를 따른다. 증도의 자랑거리인 모실길’ 1코스인 노을이 아름다운 사색의 길이기도 한데, 이름 그대로 고즈넉한 해안 길을 걸으며 사색하기 딱 좋은 코스로 알려져 있다.

 몇 걸음 더 걷자 또 하나의 전망대가 나온다. 나무로 만든 전망대가 바닷가 벼랑에 기대듯 매달려있다. kakaomap에서 낙조전망대로 적고 있는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주워 담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어 보이니 말이다.

 지금은 대낮. 해 떨어지는 시간에 맞추지 못했음을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대신 먼 바다로부터 몰려온 거친 파도가 빚어놓은 절경을 눈에 담으면 되니 말이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곶()이 온통 깎아지른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손색이 없다.

 이 구간은 두어 곳에서 산길이 갈려나가고 있었다. 이정표(글자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았지만)는 물론이고 초입에 쉼터용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맞다. 증도펜션민박 홈페이지는 이종화 문화관광해설가의 말을 빌려 바다 위에 흩뿌려져 있는 수많은 섬들, 산 위에서 보이는 수려한 풍광, 황금빛 노을과 서해낙조 등 아름다운 경관을 보유한 멋진 등산로라고 적고 있었다.

 두어 개의 작은 해수욕장도 눈에 띈다. 증도 주민들이 하트해변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목넘어·가운데·옥송구지 등 3개의 장불(‘장불은 썰물 때 드러나는 모래밭(또는 갯벌)’의 전라도 방언이다)이 그려내는 선이 영락없는 하트()’라는 것이다. 모래사장 위쪽에 민물이 있는가하면, 썰물 때는 갯벌에서 낙지나 소라·고동 등을 잡을 수 있어 가족 단위 피서지로도 그만이라고 한다.

 김 양식용 지주 너머로 도덕도(‘도둑섬으로도 불리며 오른편은 호감섬’)가 떠 있다. 지금은 빈집 한 채만이 외로운 무인도지만, 한때는 14가구가 거주하면서, 초등학교 분교와 경찰서 초소까지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목포로 연결되는 여객선이 기항했을 정도라나?

 진행방향의 나뭇가지 사이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채석장도 내다보인다. 지금은 산림복구까지 끝났지만, 저런 채석장이 있었기에 증도의 수많은 간척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처럼 생긴 모퉁이를 돌아서자 이번에는 만()처럼 움푹 들어간 해안선이 길손을 맞는다. 그곳에 푸른솔이라는 펜션이 들어서 있었다. 별장으로 지어진 것을 독채로 빌려준다는데, 여행 마니아들 사이에서 프라이빗하다는 입소문을 타고 있단다.

 이즈음 방축마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옛 이름은 방죽끼미’, 마을에 큰 방죽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러다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 섬이 많다 하여 방축으로 개명했단다. 방축·오산·염산·검산 등으로 구성된 방축리의 중심마을이기도하다.

 마을 앞 해변은 웬만한 유명 해수욕장이 부럽지 않았다. 300m 남짓의 백사장은 흡사 밀가루라도 되는 양 보드랍기 짝이 없고, 그게 울창한 송림까지 끼고 있다. 방축(防築)이라는 마을 이름에 어울리는 풍경이라고 하겠다.

 해변의 끝은 시가 있는 공원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놓았다. 하지만 풍선처럼 생긴 기구(漁具가 아닐까 싶다)만 매달려 있을 뿐, 시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시를 지어보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방축마을을 지나 임도로 들어선다. 걷는 내내 다도해의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구간이다.

 적당히 굽이치는 찻길을 따라 고도를 높이니 아기자기한 바다 풍광이 발아래 깔렸다. 도덕도·호감섬·대섬·부남섬 등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섬이 사이좋게 늘어선 모습이 무척 곱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30. ‘나룻구지라는 작은 선착장에 이른다. 이종화 문화관광해설가는 이 부근을 목넹기(모실길안내도는 향월포로 표기)’로 적고 있었다. 크고 작은 섬들로 막힌 바다가 호수를 연상시킨다면서 말이다. 맞다. 자은도와 증도를 아우르는 이 일대의 바다에는 철마다 조기·민어를 쫓는 수백 척의 배들이 오갔다고 한다. 뱃사람의 돈을 쫓아 술과 색시가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서해에 비바람이 들이치는 날이면 임자도의 타리파시와 더불어 가장 소란스럽던 항구였다고 한다. 잡아온 고기는 부산이나 시모노세키로 보내질 때까지 얼기설기 지은 생선창고로 옮겨졌고, 그물을 손질하는 사이 바다에서 먹을 쌀··땔감을 실었고, 짬이라도 나면 색시를 품었다.

 모퉁이를 돌아 임도를 빠져나오면 기다란 방조제가 반긴다. ‘장성저수지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니 장성방조제 쯤으로 기억해두자. 아니면 방축마을 곁이라는 핑계를 대며 방축방조제라 우겨도 될 일이다.

 방조제 안쪽은 대하양식장이 들어서 있었다. 탐방로는 양식장의 안쪽을 에두르며 나있다. 하지만 난 방조제 둑을 따라간다. 양식시설이 한눈에 쏙 들어오니 일부러 에둘러 갈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방조제를 선택한 덕분에 500m 정도를 단축할 수 있었다.

 왼쪽으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아니 시선의 끄트머리에 희미하게 임자도가 들어앉았다. 그 왼편에는 대섬과 부남섬. 저런 섬들이 이 지역을 둘러싸고 있기에 방축이라는 지명을 낳았고, 사람들은 저 바다를 바다호수라 부르기도 한다.

 방조제를 지나면 또 다시 임도로 올라선다.

 6분쯤 더 걸어 염산 방조제로 내려선다. 간척지의 안쪽에 들어앉은 염산마을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나저나 이 구간은 방조제로의 통행이 불가능했다. 방축마을 방조제에서의 경험을 살려 주변을 살펴봤지만 잡초만 무성할 뿐 길은 나있지 않았다. 방조제 안쪽으로 난 농로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인공 습지는 웃자란 갈대로 가득했다. 가을에 찾으면 염산마을이 자랑하는 볼거리로 등장할 수도 있겠다. 참고로 염산(廉山)’ 마을의 옛 이름은 산너머이다. 산너머에 마을이 있다 해서인데, 언제부턴가 산 좋고 밭이 기름지다 하여 염산으로 개칭했다.

 바닷가 방조제와 그 안쪽의 농로. 그 농로의 좌우로는 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둠벙과 논이 펼쳐진다. 신안에 속한 섬들이 보여주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염산방조제를 지나면 돈대봉 임도가 시작된다. 그 초입에 작은 모래해변이 형성됐는데, 주민들이 선착장으로 이용하고 있는 듯 어선 두어 척이 모래사장에 올라앉아 있었다.

 돈대봉(墩臺峰)의 허리께를 에둘러가는 임도는 길이가 2km쯤 된다. 하지만 가슴에 담을만한 특별한 볼거리는 갖고 있질 못하다. 그저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임도가 나있다고 보면 되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20. 임도를 벗어나자 구분포 방조제가 반긴다. 방조제 아래에 들어선 엄청난 규모의 대하양식장이 눈길을 끄는 지역이다. 하지만 kakaomap에서 포인트로 삼고 있는 구분포저수지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하양식장을 지나 또 다른 임도로 들어선다. 서해랑길 28코스의 대부분은 증도자전거길과 겹친다. ‘아름다운 자전거길 100에 꼽혔을 정도로 라이더들 사이에서는 입소문을 탄 코스이다. 덕분에 라이딩을 즐기는 젊은이들과 살가운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이 구간은 신안군이 자랑하는 명품 둘레길인 모실길  노을이 아름다운 사색의 길(1코스)’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길가에 돌탑을 쌓는 등 탐방로 조성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했다.

 그렇게 10분 남짓 걷다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증도대교가 얼굴을 내민다. 사옥도(沙玉島)와 증도(曾島)를 잇는 1,964m 길이의 아치형 연도교이다.

 3~4분쯤 더 걸어 광암 들녘에 내려선다. 이어서 수로 곁으로 난 농로를 따라 805번 지방도로 간다. 화사하게 피어난 유채꽃 향기가 고갈된 체력까지 보충해주는 기분 좋은 구간이다.

 농로 왼편, 그러니까 광암 방조제가 있는 쪽으로도 꽤 너른 농경지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오른편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평야지대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이곳 증도가 풍요로 넘친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눈앞에 펼쳐지는 저런 풍경은 보고 그 누가 섬이라 무시할 수 있겠는가.

 날머리는 증도 관광안내소(신안군 증도면 증동리)

10분 조금 못되게 들녘을 걷자 805번 지방도(지도·증도로)에 올라서고 곧이어 관광안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서해랑길(신안29코스) 안내도는 슬로시티보물찾기 호팅투어 스탬프 함과 함께 관광안내소 곁에 세워져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6.43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 주었다. ‘너와 나가 아닌, ‘우리이길 원하기에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현상이다. 다시 태어나도 내 아내의 남편이 되고 싶다던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처럼 그 세상이 어떠하더라도 아내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난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난 천만 번 윤회를 거듭하면서도 내 아내와 함께하고 싶다. 세상사 힘들기만 한데, 고집스런 꿈을 찾아가는 날 믿고 따라주며 그 꿈이 이루어지길 빌어주는 여자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