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19구간(청남대 사색길)
여행일 : ‘23. 5. 20(토)
소재지 :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일원
여행코스 : 상산마을→곰실고개→곰실봉→철책초소→청남대2관문→좌골삼거리→피미숲길→작은용굴→괴실삼거리→노현리 습지공원(거리/시간 : 14km, 실제는 13.26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는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과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리’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을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열아홉 번째 구간인 ‘청남대 사색길(14km)’을 걷는다. 청남대(옛 대통령 별장)로 이어지는 드라이브 길(인도가 따로 없다)을 걷는 게 다소 부담스럽지만, 호젓한 대청호 풍광에 더해 선사시대 유적이라는 ‘작은 용굴’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 들머리는 하산마을 버스정류장(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산덕리)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상주) 문의 IC에서 내려와 32번 지방도를 타고 문의·대전 방면, 문의사거리(문의면 미천리)에서 회남·문의로(청남대 방면), 상장삼거리(문의면 상장리)에서 509번 지방도로 옮겨 회남·보은방면으로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하산마을에 이르게 된다. 19구간의 시점은 상산마을이나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해 출발지를 변경했다.
▼ 대통령 별장이던 청남대로 이어지는 호젓한 드라이브 길(주말에는 교통체증도 생긴다)이 포함된 구간, 상산마을에서 청남대2관문까지 곰실봉(326m) 구간(3km)을 제외하면 대부분 평지를 걸으며 아름다운 대청호 풍광과 마주한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피미숲길, 대청호반에 기대어 아름다운 산책로를 조성했다. 하지만 청남대로 연결되는 도로는 인도가 따로 없으니 안전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 하산마을 쉼터에 세워진 안내판. 19구간(청남대 사색길)의 초반부는 ‘초록감투마을 산책로’와 상당부분 겹치는 모양이다. ‘곰실봉’으로 가면서 만난 이정표도 대부분 초록감투마을에서 세운 것들이었다. 참고로 ‘초록감투마을’이란 산덕리 일대에 조성된 농촌휴양체험마을이다. 마을에 머물면서 ‘손두부·장아찌·과실청’만들기 등의 체험은 물론이고, 마을에서 생산되는 마늘·버섯·과일·효소 등을 로컬매장을 통해 구입할 수도 있다. 얼마 전 16구간 때 만났던 ‘벌랏한지마을’과 같은 형태의 체험마을로 보면 되겠다.
▼ 서쪽, 그러니까 상산마을로 연결되는 ‘산덕길’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시간에 쫓겨(집사람은 3km쯤 전방에서 걷기 시작했다) 답사를 포기했지만 왼편의 야트막한 봉우리에는 태실(충북 기념물 제86호)이 있다. 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인성군’의 태를 봉안한 곳이다.
▼ 10분쯤 걸으면 ‘상산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산덕리(山德里)’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로, 그 가운데 가장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상산(上山)이란 지명이 붙여졌다.
▼ 18구간과 19구간의 경계임을 알리는 이정표(19구간 청남대 4㎞/ 18구간 염치리 4.5㎞)는 상산마을 어귀의 쉼터(정자) 앞에 세워놓았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청남대 방향으로 들어서면서 19코스가 시작된다. 십여 호쯤 될까 한 작은 마을을 관통한다고 보면 되겠다.
▼ 마을길에서 만난 이정표(거리나 방향표시가 조금 전 마을 어귀에서 본 것과 같다)가 이제 그만 마을을 벗어나란다. 그런데 청남대 방향의 표지판을 뒤집어 놓은 건 무슨 이유일까?
▼ 내일이 소만(小滿).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절기다. 그래선지 농부는 모내기에 한창이었고, 마을 앞 들녘은 모내기를 이미 끝낸 논들도 상당히 보였다.
▼ 작고 외진 산골마을이지만 그 역사만큼은 오래인가 보다. 저렇게 큰 은행나무가 우릴 배웅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마을 어귀에서는 이보다 더 큰 느티나무도 만났었다.
▼ 은행나무 옆 제각이 눈길을 끌기에 다가가 봤다. 충효각이나 열녀각쯤 되겠거니 하며. 하지만 안에 묘비를 모시고 있었다. 부인이 숙부인(淑夫人)이니 본인은 조선시대 정삼품 당상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묘비는 중추부사(종이품 벼슬로 처에게 ‘정부인’의 작호를 내렸다)라 적었다. 앞뒤에 적힌 벼슬은 더 이상하다. 직장(直長, 종칠품)과 현령(縣令, 종오품)이란다. 아서라. 남의 가문 빗돌에 왈가왈부해서 뭐하겠는가.
▼ 농로였던 길이 산자락에 들어붙은 후부터 임도로 변했다. 오르막길이지만 경사가 완만해서 걷기에 딱 좋다. 웃자란 잡초가 심심찮게 발목을 휘감기는 했지만...
▼ 그렇게 15분쯤 걸어 ‘곰실고개’에 올라선다. 월굴봉과 곰실봉을 잇는 능선의 안부로, 이정표(정상전망대← 0.42㎞/ 2코스 초록감투마을→ 2.0㎞/ 초록감투마을↓ 1.5㎞)는 이 구간이 초록감투마을산책로와 겹침을 알려준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전망대 방향, 그러니까 곰실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따른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심심찮게 나타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밧줄난간을 매어놓았기 때문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0분(곰실고개에서 15분). 19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곰실봉(328.2m)’에 올라섰다. 높이가 300m를 겨우 넘기는 나지막한 봉우리지만 남쪽 산자락에 아름다운 청남대를 품었으니 명산의 반열에 놓아도 손색이 없겠다. 그런 점을 높이 샀던 모양이다. 꼭대기에 멋진 데크 전망대를 지어놓았다.
▼ 전망대에 올라서자 대청호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울창한 숲이 시야를 가로막아 완벽하지는 않다. 시야를 높이기 위해 대를 만들었지만 숲 위까지 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 정상석은 세워져 있지 않았다. 이정표(학바위전망대 2.7㎞/ 초록감투마을 2.0㎞)에 매달린 정상표지판이 그 아쉬움을 달래준다.
▼ 하산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학바위전망대’ 방향이다. 시작부터 급하게 내려서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이는 기우였다. 그 가파름은 오래지 않아 끝나고, 이후는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순탄한 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 얼마쯤 걸었을까 산봉우리를 향해 치닫는 방향표지판과는 달리 오백리길은 산의 허리께를 째며 옆으로 간다. 초록감투마을등산로와 헤어지는 지점이지 싶다.
▼ 오백리길은 대부분의 산봉우리를 피해 우회한다. 그러다보니 가파른 오르막길은 거의 만나지 않는다. 그저 피톤치드를 듬뿍 보내주는 기분 좋은 소나무 숲길을 걷는다고나 할까?
▼ 하산을 시작한지 15분. 시멘트로 지어진 초소(첨부된 지도에는 ‘대공초소’로 나타난다)가 눈에 띈다. 청남대가 대통령 별장으로 사용되던 시절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군인들이 보초를 서던 곳이다.
▼ 초소를 지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곰실봉 구간에서 경사가 가장 심할 듯. 거기다 이곳에는 밧줄도 매어놓지 않았다. 그 가파름이 오래지 않아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싶다.
▼ 4~5분쯤 더 걸어 능선 안부(첨부된 지도의 ‘철책초소’)로 내려선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청남대로 연결되는 맞은편 능선이 철조망으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 내려오는 도중 대청호와의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진다. 대청호가 그 아름다운 자태를 살짝 드러낸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0분. 청남대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에 내려섰다. 이정표(작은용굴 6㎞/ 청남대 1.5㎞)는 이곳을 ‘청남대 입구’로 적고 있었다.
▼ 이곳의 정확한 지명은 ‘청남대 제2관문’이다. 저 길을 따라가면 전두환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별장으로 사용하던 청남대에 이르게 된다. 1983년에 지어져 역대 대통령들의 별장으로 사용되다, 2003년 민간에 개방됐다. 하지만 사전예약은 필수, 또한 소정의 입장료를 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 이후부터는 ‘청남대길’을 따른다. 해를 등진 채 왼쪽으로 대청호를 옆에 끼고 북쪽(문의면소재지 방향)으로 걸어 올라간다. 이 구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청남대가 대통령 별장이었던 만큼 길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며, 왼쪽에 대청호수가 펼쳐져 있어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준다.
▼ 이 부근은 ‘산딸나무’ 군락지인 모양이다. 길의 양옆이 온통 새하얀 산딸나무 꽃으로 뒤덮였는데, 일부 기독교인들은 저 꽃을 성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신 십자가를 산딸나무로 만들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거기다 묘하게도 넉 장의 꽃잎이 십자가를 쏙 빼닮지 않았겠는가.
▼ 대청댐 건설로 고향을 떠난 이들이 세운 ‘망향비’가 눈에 띈다. 대청호가 생기면서 수많은 마을들이 물속에 잠겼고, 대청호 주위 곳곳엔 실향민들의 마음을 달래는 망향비가 들어섰다.
▼ 굵직한 가로수를 친구 삼아 천천히 걷다가 호수 방향으로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대청호가 보여주는 풍광에 흠뻑 빠져본다.
▼ 그렇다고 너무 빠져들지는 말자. 이 구간은 인도가 따로 없는 2차선 도로라서 길 한쪽에 붙어 걸어야 한다. 평일은 어쩐지 몰라도 오늘 같은 주말에는 오가는 차량이 많아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호숫가 가까이 산책로를 따로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인근 지자체에 전해본다.
▼ 도로로 내려선지 40분. 청남대 관람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제1문’이 나온다. 차량통행을 막을 때 사용되는 바리게이트가 놓여 있는 게, 이곳에서 차량이나 사람의 통행을 제한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 청남대를 오가는 이 길(청남대길)은 좌우로 도열해 있는 가로수가 멋지다고 해서 ‘청남대 가로수길’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울창함이 드리운 숲길은 새어드는 햇살도 살갑고 파고드는 바람도 상쾌하다. 2004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 입상했는가 하면, 2005년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꼽힌바 있다.
▼ 조금 더 걸으면 정문. 방문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에 적힌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이곳에서 시작되는 ‘청남대가로수길’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풍광은 물론이고 숲이 보내주는 청정한 기운으로 넘치는 길...
▼ 정문을 벗어나자 여행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저 민박집은 커피에 라면까지 판단다. ‘매점’에 들러 시원한 맥주라도 하나 챙겨볼까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피미마을에 이미 도착해있다는 집사람으로부터 아직도 안 온다는 전화를 두 번이나 받았으니 어쩌겠는가.
▼ ‘이병의’란 사람의 효행비가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부모를 향한 효성이 지극해 성균관장의 표창을 받았단다. 2000년에 받았다니 최근, 사라져버린 줄만 알았던 효자가 아직도 존재했었던 모양이다. 참! 옆에는 이병걸이라는 사람의 추모비도 세워져 있었다.
▼ ‘청남대가로수길’을 벗어나서도 길은 여전히 고왔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풍성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아무튼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가로수길’은 기산사 갈림길에 이르면서 끝난다. 참고로 기산사(箕山祠)는 경술국치로 순절한 이재 조장하(趙章夏, 1848~1910)선생의 항일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지방유림에서 건립한 사당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0분(청남대길로 내려서서는 50분). 기산사 입구를 지나 ‘좌골삼거리(이정표 : 작은용굴 1.5㎞/ 청남대 6㎞)’에 이르면 ‘청남대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나뉘는 1차선 도로로 들어간다.
▼ 마을(상장2리) 표지석이 ‘피미마을’로 들어가란다. ‘작은 용굴’까지 도로를 따라 곧장 갈 수도 있지만, 피미마을까지 에둘러가면서 ‘피미숲길’이라는 명품 산책로를 걸어보라는 것이다.
▼ 4분쯤 더 걸어, ‘길모퉁이’란 민박집(카페)을 지나자 길이 다시 둘로 나뉜다. 탐방로는 도로를 벗어나 들길로 내려선다.
▼ 초입에 ‘피미마을 숲길’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피미마을의 숲길 산책로는 대청호 호반을 따라 한 바퀴 돌아 마을 뒤 언덕으로 오르는 마을단위 둘레길이다. 수변산책길·명상숲길·전망대·가족쉼터 등 1.3㎞ 숲길을 조성해 온 가족이 자연을 느끼며 숲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
▼ 몇 걸음 더 걸어 만난 이정표는 기산사(아까 좌골삼거리에 이르기 직전 왼편으로 들어가는 길이 갈려나가고 있었다)에서도 이곳으로 곧장 올 수 있음을 알려준다.
▼ 탐방로는 도로(청남대길) 아래, 물 빠진 호숫가를 따른다. 대청호에 물이라도 넘실거리면 통행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 잠시 후 ‘가족쉼터’란 안내판이 맞는다. 선착장 근처를 가족단위 휴식공간으로 만들어놓았단다. 버스정류장은 ‘그리운 그 시절’이라는 소재의 벽화로 채웠다. 머리에 고속도로가 뚫린 소년은 울상이고, 이를 지켜보는 다른 소년은 자기도 걸릴세라 가슴만 두근거린다.
▼ 선착장은 텅 비었다. 손님을 기다리다 지친 사공은 이미 떠나버렸고, 고철로 변한 나룻배 한 척이 한가롭기 짝이 없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대청호의 물도 많이 줄었다. 호숫가는 풀밭으로 변했고, 저 배는 어즈버 태평연월을 그리며 하릴없이 낮잠만 잔다.
▼ 시야가 툭 트이니 전망대가 빠질 리 없다.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대청호와 함께 포토박스에 담아 인생샷이라도 건져보라는 모양이다.
▼ 난간에 서자 대청호가 성큼 다가온다. 바다처럼 드넓은 호수와 우람한 산줄기, 그 경계에 자리 잡은 마을까지 한데 어우러져 멋지다는 표현으로 부족할 정도다. 일상에 지친 마음에 호수만큼 넓은 여유를 품는다.
▼ 가족쉼터 뒤는 ‘피미마을’이다. 지형이 키(箕, 곡식을 까불러서 쭉정이 등을 걸러내는 기구)처럼 생겼다 해서 ‘치뫼(箕山, ‘치’는 키의 방언형이다)’로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피미(皮味)’로 변했다는 산골마을이다. 마을 대부분이 대청호에 수몰되고 현재 몇 집만이 남아있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수변산책로로 들어선다. 이때 관광지로 탈바꿈한 피미마을의 현재를 살짝 가늠해 볼 수 있다.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저런 예쁜 집들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참!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우리 피미 갈래?’가 유행이라고 했다. 여기서 ‘피미’는 미세먼지를 피한다는 뜻으로 통한단다.
▼ ‘명상숲길’이란다. 핑크 뮬리(Pink muhly)로 치장된 구간이라는데 때를 못 맞추어선지 아름다운 꽃은 물론이고, 그 줄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여름에 자라기 시작해 가을에 분홍색이나 자주색 꽃이 핀다고 하지 않았던가.
▼ 명상숲길이 끝나면 물가를 따라 난 숲길 ‘수변산책길’이 이어진다. 호숫가를 따라 산책로를 만들었다. 바닥을 야자매트로 깔아 장마철에도 질퍽거리지 않게 했고, 곳곳에 벤치를 놓아 방문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 조금 더 걷자 ‘숲길종점’ 안내판이 이별을 고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이 부근에서 길이 둘로 나뉘는데, 앱이 가리키는 왼쪽 방향에 ‘사유지’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팻말이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이를 무시하고 앱의 지시를 따랐으나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100m쯤 걸으면 두 길이 다시 만나는데, 오른쪽 길이 더 가까울 뿐 아니라 길의 상태도 더 좋았기 때문이다.
▼ 다시 뭉친 탐방로는 이제 산속으로 파고든다. 아니 임도로 변해 산자락을 헤집는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 이때 대청호가 살짝 얼굴을 내민다. 대청호에 물이 담기면서 인공호수엔 기이한 해안선이 곳곳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서해안의 해안선보다도 더 복잡한 선들이 구불구불 윤곽을 드러낸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0분, 10분 정도 임도를 타던 오백리길은 다시 청남대길로 내려선다. 이 도로를 따라 6분쯤 더 걷자 도로로 올라오는 자전거 마니아 몇이 눈이 띈다. 저 어디쯤에 뭔가 볼거리가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 그런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50m쯤 들어가자 ‘작은 용굴’이라는 선사시대 유적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유적의 성격이나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안쪽에 널찍한 광장이 있어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공간으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참! 4만 년 전의 유골인 흥수아이와 짐승 뼈가 발견된 청원 ‘두루봉동굴’이 인근에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용굴’이라는 이름처럼 이 굴에는 용(龍)에 관한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 이무기들의 수도장에서 머물던 10마리의 이무기 중 탈선한 한 마리의 이무기가 옥황상제의 벌을 받아 죽게 되고 수도에 전념한 9마리의 이무기는 용으로 승천했다는 전설이다.
▼ 동굴 내부 계단을 오르면 천정에 뚫린 구멍 너머로 하늘이 내다보인다. 9마리의 이무기가 용이 되어 올라갈 때 생긴 ‘창굴’이라는데, 승천 때 마찰로 생긴 비늘 자국도 찾아볼 수 있단다.
▼ 동굴의 가장 큰 매력은 내부에서 내다보는 바깥 세상이다.
▼ 도로로 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곧이어 ‘월리사’ 갈림길(이정표 : 작은용굴 0.2㎞/ 노현습지공원 1.5㎞)을 마주한다. 표지판은 충북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라 적었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면서 본사인 법주사보다도 먼저 지었단다. 하지만 의신대사가 세운 법주사의 역사는 진흥왕 14년(55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참고로 625에 태어난 의상(義湘)은 702년까지 살았다.
▼ ‘작은 용굴’에서 8분. 느티나무가 많다는 ‘괴곡(塊谷)’마을 앞을 스치듯 지나자 ‘괴실삼거리’이다. 이정표(노현습지공원 1.3㎞/ 작은용굴 0.4㎞)는 이곳에서 청남대길을 버리고 대청호로 내려가란다.
▼ 잠시 후 습지로 내려서 ‘노현리 습지공원’을 향해 걸어간다. 대청호에 물이차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습지로, 여름에 걸으면 몸과 마음이 온통 초록으로 바뀌는 듯한 기분을 만끽 할 수 있는 싱그러운 구간이다.
▼ 이 구간의 자랑거리는 수양버들과 키 큰 갈대숲이라고 했다. 웃자란 갈대 때문에 길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지만, 가꾸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갈대밭이 싱그럽기 짝이 없었다.
▼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갈대밭은 원시의 숲을 연상시킨다. 대청호에 대한 각종 규제로 인해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덕분이다. 그게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우린 그 풍경 속으로 걸어간다. 하지만 대청호에 물이라도 차오르면 이 길은 물에 잠길 것이다.
▼ 습지공원에 가까워지면서 길이 또렷해졌다. 탐방로는 ‘품곡천(안내판은 ’노현천‘으로 적고 있었다)’을 거슬러 올라간다.
▼ ‘노현리 습지공원’은 ‘비점오염저감시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저곳은 원래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된 ‘소류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자연이 복원됐다. 수련·부들·난초 등 다양한 수생식물이 군락을 이루면서, 야생조류의 산란처·서식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단다.
▼ 품곡천이 대청호에 합류되는 지점에는 ‘청남대 만남의 광장’이 들어서 있었다. 간단한 요깃거리와 음료수를 파는 휴게소이다. 넓은 주차장과 쉴 수 있는 휴식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 해학적인 표정의 항아리들을 쌓아올린 담이 눈길을 끈다.
▼ 오백리길 19구간은 이곳에서 끝난다. 하지만 우린 문의면소재지를 향해 더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점심상이 20구간을 따라 200m 남짓 더 간 지점에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 노현교 건너 ‘품곡천’ 주변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오가는 이들의 따가운 눈총에 개의치 않고 입맞춤에 열중인 청춘남녀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라때’는 남녀가 손을 잡고 걷기도 부담스러웠는데...
▼ 마을의 번영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신탑(祭神塔)도 눈에 띈다. 왜소한데다 외모 또한 초라하지만 금줄을 쳐놓은 걸로 보아 요즘도 동제를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 날머리는 ‘노현리 습지공원’ 위 공터
문의면소재지 방향의 도로를 따라 200m쯤 더 걷자 너른 공터가 나온다. 그리고 산악회버스를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3.26km. 초반 곰실봉 구간(3km정도)이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꽤나 빨리 걸은 셈이다. 앞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으려고 속도를 냈던 모양이다.
▼ 공터는 일류의 전망대였다. 노현리 습지공원이 발아래로 펼쳐지는가 하면, 저 멀리 대청호의 분수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나른한 봄날 흐드러지게 핀 봄꽃을 희롱하다. 대청호오백리길 16구간(벌랏한지마을 길) (1) | 2023.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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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古代島)
여행일 : ‘23. 5. 13(토)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
산행코스 : 선착장→또랑산→당너머해수욕장→당산→뱅부여→귀츨라프공원→선바위→전망대→서해안컨테이너→선착장(소요시간 : 7.64m/ 3시간 10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대천항에서 북서쪽으로 14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그만(0.87㎢) 섬으로 해안선 길이도 6km에 불과하다. 하지만 풍부한 수산자원으로 인해 마한 때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마을을 형성했단다. 옛 집터가 많다고 해서 ‘고대로(古代島)’로 불리는 이유이다. 어장의 발달은 자가발전소·자체전화·상수도시설 등의 편의시설을 일찍부터 들여왔고, 주민들은 현대식주택을 짓는 등 문화생활을 누리며 부유하게 살아왔다. 물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깨끗한 청정해역은 인근 장고도와 함께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근원이 되기도 했다. 참고로 ‘고대도’는 우리나라 최초 기독교 선교가 이뤄진 섬이기도 하다. 1832년 7월 25일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 1803-1851)’선교사가 고대도에 도착, 8월 12일까지 머물렀다.
▼ 찾아오는 방법
일단은 ‘대천 연안여객선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고대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서해안고속도로 대천 IC에서 내려와 국도 36호선(원산도 방면)를 타고 신흑동로터리까지 온 다음 대천항로로 들어서면 잠시 후 대천항에 이르게 된다. 타고 온 차랑은 공영주차장(무료)에 세워두면 된다.
▼ 고대도의 탐방로는 3개 코스로 나눌 수 있다. 선착장을 시작으로 동일교회선교센터·고대도교회·해안길·귀츨라프기념공원·선바위로 이어지는 1코스(1.4km)와 선착장에서 등대·고대도교회·당너머해변까지의 2코스(1.4km), 이 둘을 합해 운용하면 3.3km짜리 3코스가 된다. 여기에 봉화제를 보태는 탐방객도 있으나 봉 따먹기를 하지 않은 이들이라면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우리를 태우고 갈 ‘가자 섬으로 호’는 사람과 차를 함께 싣는 ‘카페리(Car ferry)’ 선박이다. 매일 3회(07:20, 13:00, 16:00) 대천항을 출발해서 삽시도(술똥선착장 및 밤섬선착장)와 장고도, 고대도 등을 들른 다음 다시 대천항으로 되돌아온다. 운임은 고대도 기준 12,300원.
▼ 40분쯤 후, 첫 번째로 들른 삽시도의 ‘술똥선착장’. 대부분의 차와 사람들이 이곳에서 내렸다. 배가 들르는 3개의 섬 가운데 가장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삽시도는 8년 전에 다녀갔기에 이번엔 들르지 않았다.
▼ 두 번째로 들르는 곳은 장고도, 장고처럼 생겼다는 섬의 모양새 보다는 앞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들이 눈길을 끈다. 장고도도 6년 전에 방문했었다.
▼ 대천항을 출발한지 1시간20분만에 고대도선착장에 도착했다. 100여 가구, 250여명이 살아가는 고대도는 섬으로 들어오는 선착장과 연결된 마을인 ‘가운데말’과 섬 아래쪽에 있는 ‘아랫말’로 나뉜다고 했다. 주민 대부분은 이곳 ‘가운데말’에 거주한단다.
▼ 배에서 내리자 ‘고대도’의 입간판이 반긴다. ‘청정해역 어촌마을’에 오신 걸 환영한단다. 맞다. 고대도는 물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깨끗한 바다가 자랑거리다. 그로인해 인근 장고도와 함께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최근에는 행정안전부와 한국섬진흥원에서 ‘이달의 섬’으로 뽑기도 했다. 참! 고대도둘레길을 소개하는 안내판도 눈에 띈다. 그러니 고대도에서 얼마동안 머무를지를 궁리해 보자. 다음 배가 14:30에 있고, 마지막 배는 16:50에 들어오니 타고나갈 배를 염두에 두고 트레킹 코스를 설계해 볼 일이다.
▼ 고대도 표지석은 ‘GOD 愛島’라는 브랜드를 달았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섬이라면서... 하긴 이곳 고대도가 우리나라 기독교의 최초 선교지라니 그럴 만도 하겠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런 꼬맹이 섬에까지 선교사를 보내주었겠는가. 그것도 다른 어느 곳보다 먼저.
▼ 몇 걸음 더 걸어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동일교회 고대도 선교센터’가 반긴다. 센터는 ‘칼 귀츨라프 선교기념’이라는 수식어로 안내를 시작한다. 우리나라에 개신교의 첫 씨앗을 뿌렸다는 선교사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를 말하는가 보다. 참고로 1832년 7월 고대도의 안항이라는 곳에 범선 한 척이 정박했다. 길이 46.5m, 깃대 높이 34.1m의 507t급 이양선 ‘로드 에머스트(Lord Amherst)호’였다.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온 영국 국적의 이 배는 폭 9m 세곡선이 고작이었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 섬 주민에겐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 내부에는 ‘귀츨라프’가 타고 왔었다는 무역선 ‘로드 앰허스트(Lord Amherst)’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휴 린제이(H. Lindsay)’가 선장인 저 배는 1832년 2월 중국 마카오를 떠나 7월에 서해안의 백령도를 거쳐 충청도 홍주목만(洪州牧彎) 불모도(不毛島)에 도착한 후 고대도의 안항(安港)에 예인되었다.
▼ 좌우 벽면은 귀츨라프에 대한 얘기로 채워 넣었다. 우리나라에 주재하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한국을 다녀간 선교사들이 더러 있었다. 선교사로 파송된 게 아니었기에 한국에 거주하면서 선교 사역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온 이들로 교회 역사에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중 한국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선교사가 프러시아계 독일인으로 의사이자 목사였던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이다. 그게 1832년이었다며 개신교의 선교 원년으로 삼아 기념하겠다는 것이다.
▼ 귀츨라프는 1803년 7월 독일 포메라니아(Pomerania) 지방의 피리쯔(Pyritz)에서 유태계 독일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 경건주의운동의 발상지였던 할레(Hall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26년 네덜란드 선교회 파송을 받고 동남아 자바 지방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이후 영국 동인도회사의 1천 톤급 무역선 ‘로드 앰허스트(Lord Amherst)’에 통역·선의(船醫)·선목(船牧)으로 참여함으로써, 한국에 오는 첫 선교사로서의 기록을 남겼다.
▼ 근처에 있는 방문객 센터는 텅 비어 있었다. ‘퓌리츠’라는 카페와 여객선 매표소가 들어설 예정이라는데, 칼 귀츨라프의 고향마을 ‘Pyritz(현재는 폴란드 땅이란다)’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카페는 언제 들어설지 요원해 보였고, 매표소도 이곳이 아닌 원래의 장소에서 승선권을 팔고 있었다.
▼ 섬마을에는 식당이 없다. 하지만 상점은 두 곳이나 들어서 있었다. 덕분에 트레킹을 마치고 타고 나갈 배를 기다리는 동안 시원한 캔맥주로 목을 축일 수 있었다.
▼ 오른쪽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방파제와 그 끄트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등대를 전방에 놓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 이 근처에 단면이 날카로운 ‘간단여’가 있다고 한다. 그 너머 북서쪽 끝에는 옛날 오천수영의 수군들이 가끔 드나들며 목을 지키던 ‘조구여’도 있단다. 해산물이 많이 나는 곳이라나? 여기서 ‘여’란 물속에 잠겨있는 바위를 말한다. ‘암초’의 하나로 보면 되겠다.
▼ 내연발전소가 눈에 띄는 걸로 보아, 필요로 하는 전기는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는 모양이다.
▼ 발전소 앞 해변은 질 좋은 모래사장이다.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하겠건만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위험시설을 곁에 두었다는 게 흠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 어망 손질을 하는 어부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외국인이다. 맞다. 언론은 초 고령사회라며 최근의 어촌 현실을 심심찮게 전한다. 바닷가 어촌마을이지만 배를 탈만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 공백을 이제 외국인들이 메꾸어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해안도로가 끝나는 지점의 대나무 숲에서 나무계단을 오른다. ‘또랑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또랑산과 당너머해수욕장, 당산을 거쳐 마을로 되돌아오는 코스이다.
▼ 초입에 세워놓은 ‘탐방로 안내도’를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산길은 시작부터 탐방객들의 기를 확 죽여 버린다. 또랑산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게 버거울 정도로 길지 않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하지만 나무계단이 끝나면서 산길은 한없이 고와진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거기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양쪽 옆에 밧줄 난간을 설치해 길과 숲을 확실히 구분했다.
▼ 산으로 들어선지 10분(트레킹을 시작한지는 35분). ‘또랑산’으로 가는 갈림길(이정표 : 당너머해수욕장 330m/ 또랑산 180m)을 만났다. 또랑산은 오른쪽 방향이다.
▼ 탐방로 주변을 ‘우산나물’의 군락지였다. 채취 시기는 지났지만 ‘참취’도 심심찮게 보였다.
▼ 이정표는 ‘또랑산’이 180m 전방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산길은 계속해서 고도를 낮춘다. ‘또랑산’이 산을 이르는 지명이 맞는 걸까? 결론은 ‘아니올시다’였다. 이정표가 말한 180m 전방에서 우린 바닷가를 만났기 때문이다.
▼ 그렇게 내려선 바닷가는 멋진 전망대였다. 장고를 닮았다는 섬, 장고도가 길게 누워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고, 그 오른편으로는 육지나 마찬가지인 안면도가 드넓게 펼쳐진다.
▼ 왼편, 그러니까 당너머해수욕장 쪽으로 해식애가 펼쳐진다. 길이 있을까 해서 나아가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영광의 송이도에서 저런 바위절벽에 매달려 낑낑대다가 카메라까지 사망시켜버린 아픈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당너머해수욕장’쪽으로 간다. 이어서 3분 후에는 포장길을 만나고, 길은 이곳에서 양쪽으로 나뉜다. 당산은 왼편이다. 하지만 그 당산 너머에 있다는 ‘당 너머 해수욕장’은 오른쪽이다. 그러니 해변까지 내려갔다가 되돌아 나와야 한다.
▼ 조금 더 걷자 침목계단이 해변으로 내려서란다. 주변은 솔밭, 수령이 백년을 훌쩍 넘겼을 것 같은 적송(赤松) 수십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 그렇게 내려선 해수욕장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었다. 고운 모래가 한가득인 작은 해변을 노송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게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 고대도는 풍요의 상징이라고 한다. 봄·여름·가을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갯벌에서 손쉽게 조개나 고동을 잡을 수 있고, 섬 주변의 암초에서 해삼이나 전복, 홍합도 손쉽게 채취할 수 있단다. 하지만 섬 주변이 온통 주민들의 양식장이라니 그냥 구경만 해둘 일이다.
▼ 삼거리로 돌아와 이번에는 반대편, ‘당산’ 쪽으로 간다. 이어서 몇 걸음 더 걸으면 민가(옛 도리사)가 반긴다. ‘당산’은 민가 앞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파고들어야 만날 수 있다.
▼ 당산 아래 있었다는 실상묘법연화종의 사찰 ‘도리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개에게 먹이를 주러 나오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주지스님이 돌아가신 후 폐사가 되었고, 현재는 절과는 무관한 사람이 살고 있단다.
▼ 적당히 가파른 산길을 잠시 오르자 섬&산의 인증 장소인 ‘당산(44m)’이 반긴다. 고대도에는 이곳 당산 말고도 뒷산·산끝재·봉화재 등 여러 개의 산이 있다. 이중 봉화재(길이 어설퍼서 가보지는 못했다)가 가장 높다지만 높이는 겨우 89.5m에 불과하다. 하지만 예부터 조난이 발생하거나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땐 봉화를 올렸을 만큼 중요한 장소였다고 한다.
▼ 정상석 뒤는 ‘각시당’이다. 황토와 돌로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사각의 제단(祭壇)을 쌓았는데,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당제’를 지내는 공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농토가 부족했던 고대도의 주민 대부분은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에 종사했는데, 워낙 사고가 잦다보니 이곳 당산에 당집(1999년 화재로 소실됐다)을 짓고 매년 정월 초에 소를 잡아 제를 올렸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하나둘 섬을 떠나면서 한동안 중단됐다가, 1992년부터 다시 지내온다고 한다.
▼ 당산에서 내려오면 마을. 고대도의 취락은 낮은 구릉지 사이에 형성되어있다. 그 주위를 밭들이 제법 넓게 둘러싼다. 이렇듯 고대도의 마을은 원산도와 안면도를 마주하며 선착장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
▼ 해산물이 널리다시피 한 ‘고대도’는 그 덕분에 모든 게 풍요롭다고 했다. 그래선지 눈에 들어오는 집들 대부분이 서울 근교의 단독주택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지어졌다. 치장 또한 여느 전원주택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 담수화시설이 들어서 있는 걸 보면, 물은 그다지 풍족하지 않는 모양이다.
▼ 바닷가까지 나와 해안도로(고대도둘레길 1코스)를 따라 ‘귀츨라프공원’이 있는 고대도 남쪽 끝으로 간다. 지금까지는 고대도둘레길 2코스(선착장, 등대, 당너머해수욕장, 고대도교회)를 50분 동안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선교센터가 낀 선착장 주변을 돌아보는 데는 25분이 걸렸었다.
▼ 탐방로는 작은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청결했다. 곳곳에 놓인 저 빗자루가 원인이지 싶다. 주민들 스스로가 청결을 유지해나간다는 의미일 게고 말이다.
▼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 길가에는 대형 ‘고무 통’이 늘어서 있었다. 고대도의 특산품인 ‘까나리액젓’과 ‘열치(큰 멸치)젓’이 안에서 숙성되는 중이라고 한다. 숙성된 젓갈은 대천항으로 내다 파는데, 주민 소득의 한 축을 당당히 꿰차고 있다나?
▼ 머리를 제거한 채 말리는 생선도 눈에 띈다. 복어 새끼인데, 6개월 이상 바싹 말렸다가 복어의 독소가 제거되는 가을에 찜이나 지져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란다.
▼ 새로 짓고 있는 저 건물은 ‘어촌계공동작업장’이 아닐까 싶다. 예전 고대도는 고기잡이로 먹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3가구 정도만 고기를 잡고, 나머지는 바지락·낚지·소라 등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바지락 양식 농장이 있어 4월부터 12월까지는 바지락 채취에 눈코 뜰 새가 없다나?
▼ 공동작업장 앞 해변은 몽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고 귀여운 몽돌들이 조개껍질 부스러기와 함께 모래사장을 대신한다. 파도가 몰려오자 그 몽돌들이 울어댄다. 파도와 몽돌이 빚어내는 이중주다. 한 마디로 기가 막히다.
▼ 눈과 귀만 즐거운 게 아니다. 갈매기를 희롱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다. 동쪽 장벌에 바지락 양식장이 들어서 있고, 조개나 고동이 많이 잡힌다고 했는데 이를 찾아 모여든 모양이다.
▼ 바다로 시선을 옮기자, 사진 전시회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풍광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푸른 바다 위에 태안반도의 영목항과 원산도를 잇는 ‘원산·안면대교’가 두둥실 떠올랐는데, 여기에 억새섬·시루섬 등 꼬맹이 섬 두어 개가 화룡점정을 찍는다.
▼ 맞은편의 ‘원산도’는 앞에서 말한 ‘원산·안면대교’가 놓이면서 육지가 되었다. 여기에 국내최장 해저터널인 ‘보령해저터널’까지 뚫리면서 이젠 접근성까지 좋아졌다.
▼ 다리로 변신한 해안도로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바닷가를 따라 조금 더 가면 바다 위로 길이 나있다. 긴 다리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해안의 가장자리를 따라 경운기가 다닐 정도의 넓이로 길을 냈다. 갯벌에서 먹고사는 주민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바다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곳곳에 만들어 두었다.
▼ 다리 위를 걸으며 바라보는 해식해안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 해안의 굴곡을 따라 길도 곡선을 이루면서 앞으로 나간다. 그렇게 걷다보면 해안절벽이 끝나는 곳에서 다리는 다시 땅에다 낸 길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폭은 다리와 마찬가지로 좁다.
▼ 모퉁이를 돌기 바로 직전 전망대로 가는 길이 나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바닷가를 계속 따르기로 했다. 저 끄트머리 어디쯤에 전망대로 오르는 길이 나있을 것 같아서이다.
▼ 몇 걸음 더 걷자 ‘뱅부여’가 얼굴을 내민다. 돌출된 갯바위가 바다를 향해 길을 만들고 있다.
▼ 바위 속에 갇힌 물 위에는 하늘이 담겼다. 미세먼지 탓일까? 바다 건너 희뿌연 원산도가 아름다워야 할 풍경화를 망쳐버린다.
▼ 해안도로로 내려선지 20분(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40분). ‘뱅부여’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를 기념하는 자그만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가 타고 온 배가 정박했다는 고대도의 안항(安港)이 이곳인 모양이다. 1832년 7월 25일 도착한 귀츨라프는 8월 12일까지 머물렀다.
▼ ‘칼 귀츨라프 선교비’는 그가 타고 온 ‘로드 애머스트호’를 형상화했다. 그의 업적은 다른 빗돌을 세워 전한다. 귀츨라프의 앞은 ‘최초’라는 단어로 압축된다. 한국 개신교 선교사, 한글 주기도문 번역, 한문성경과 한문 전도서적 전달, 세계에 한글의 우수성 소개, 서양 감자 파종, 서양의 근대 의술 베풂 등이다. 첫 번째 업적으로 꼽는 선교는 1866년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 34년, 1884년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년, 1885년 입국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53년 앞서 이루어졌다.
▼ 기념비의 받침돌에는 한글의 자음 ‘ㄱ·ㄴ·ㄷ·ㄹ...’을 새겨놓았다. 왼쪽에는 영어로 Lord’s Prayer를 음각했다. 귀츨라프가 한자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려고 시도했음을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검문을 위해 앰허스트호에 올랐던 마량진 관리들이 일기불순으로 하룻밤을 배에서 머물렀고, 귀츨라프는 이들(홍주목사 이민회의 서생 梁씨)에게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준 다음 한글로 토를 달아줄 것을 부탁했다. 이것이 부분적으로나마 한글로 성경을 번역한 첫 번째 사건이다.
▼ 스페인 설치미술가 ‘후안 가라이사발(Juan Garaizabal)’이 직접 설치했다는 ‘도시의 기억 베를린(Memoria Urbana Berlin)’도 눈에 띈다. ‘보헤미아 베들레헴교회(귀츨라프를 배출한 베를린선교학교를 설립했다)’ 예배당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베들레헴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훼손됐고, 1962년 베를린 도시계획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었다. 그 후 2012년 갈라이사발에 의해 원래 교회의 위치에 31m의 철근 조형물로 재탄생했는데, 고대도의 작품은 베를린의 것을 5m로 축소시켰다고 한다.
▼ 기념공원 앞은 자갈밭 해변이다. 큰 자갈, 작은 자갈, 둥글둥글한 자갈, 납작한 자갈에 양념으로 모래와 조개가루가 섞였다. 이역만리에서 온 코쟁이들을 떠올리며, 귓가로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즐기기 딱 좋은 곳이다.
▼ 고대도의 남쪽 바닷가는 작은 바위들 천국이다. 물이 빠져나가면 사자·코뿔소·독수리 등 다양한 모양의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중에서도 높이가 15m나 된다는 ‘선바위(돛단여)’는 백미다. 고대도의 랜드 마크로 고기잡이 나가는 어부들이 하루의 무사함을 빌며 머리를 숙이고 지나간다고 해서 ‘기원바위’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 공원 부근에서 오솔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 50m쯤 올라간 지점에서 전망대로 연결되는 탐방로를 만났다.
▼ 통나무 난간을 두른 탐방로를 100m쯤 올라가자 전망대가 나타난다. 철제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데크 전망대를 올렸다.
▼ 전망대에 오르면 고대도의 랜드 마크라는 ‘선바위’가 성큼 다가온다. 아까 공원에서는 카메라의 줌을 당겨야만 했는데,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들이 선바위 주변의 풍광을 삼켜버리는 건 아쉽다 하겠다.
▼ 시선을 조금 옮기면 이번에는 장고도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 ‘어촌계공동작업장’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쪽, 그러니까 서쪽 해안으로 간다. 움푹 들어간 이 일대는 농경지가 꽤 넓게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논은 없고 밭에 고추·양파·배추 등을 경작하는 정도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35분.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멋진 해변이 나온다. 넓지는 않지만 뛰어난 풍광과 전망을 보유하고 있어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할 것 같다. 굵직한 노송이 모래사장을 둘러싸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변에 서면 장고도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 해안절벽을 따라 다리도 놓여있다. 하지만 만든 지 오래인 듯 바닥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그렇다고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떤 멋진 볼기리가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 다리의 끝은 썩어 문드러진 컨테이너박스가 지키고 있었다. 안에는 부서진 책상도 놓여있다. 길에서 만난 주민은 양식장 감시초소로 사용하던 시설이라고 했다. 이 부근에 전복과 해삼 양식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0분. 마을로 되돌아와 골목을 누벼봤다. 첫 만남은 ‘마을 복지회관’. 자그마한 섬에 비해 호화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지어졌다. 지상 2층 건물에 문화복지시설과 주민휴게시설이 들어서있단다.(부근에 있는 보건소는 생략)
▼ 귀츨라프 선교사의 역사적인 첫 걸음을 기념한다는 ‘고대도교회’는 꽤 세련됐다.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루는 세련된 외모가 돋보이는데, 십자가만 아니라면 여느 집단의 사옥으로 오해하기 딱 좋을 듯. 귀츨라프가 고대도에 복음의 씨앗을 내린지 딱 150년이 지난 198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 벽에는 한글을 영어로 번역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귀츨라프가 한자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을 형상화 한 것이란다. 당시의 번역은 일부이긴 하지만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최초의 시도로 알려진다.
▼ 고대분교(청룡초등학교) 터에는 ‘칼 귀츨라프 해양역사전시관’이 들어섰다. 고대도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거기다 멋지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완공되면 선교센터가 이곳으로 옮겨올 것이라고 한다.
▼ 날머리는 고대도선착장(원점회귀)
마을을 둘러본 다음 선착장으로 빠져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대천항으로 되돌아가는 승선권은 고대도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우린 대천항에서 이미 샀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핸드폰 앱에 찍힌 거리가 7.64km이니 무척 느리게 걸은 셈이다. 선교센터 등 볼거리가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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