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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加波島)

 

여행일 : ‘22. 3. 28(월)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도리

산행코스 : 상동선착장→상동마을→소망전망대→일주도로(고냉이돌)→가파포구(하동마을)→소망전망대→상동포구(거리 및 시간 : 자그만 섬이라서 의미 없음)

 

함께한 사람들 : 가족나들이

 

특징 : 모슬포항에서 5.5km쯤 떨어진 작은 섬(30만 평으로 제주도의 부속섬 중에서는 네 번째로 크다)으로 우리나라 최남단 섬 마라도와 제주도 본섬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섬 속의 섬’이라는 얘기이다. 가파도의 가장 특징은 해발 20.5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작은 섬이라는 점이다. 덕분에 평상 같이 평평한 섬 안으로 조금만 들어서면 어디에서든 탁 트인 조망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바다 건너에는 가장 키가 큰 한라산(1,950m)이 우뚝 솟았고, 반대편에서는 최남단의 섬 마라도가 한걸음 달려오라며 손짓한다. 트레킹도 쉽다. 해안 일주도로를 위시해 길이 사통팔달로 나있지만 해안선 길이가 4.2㎞에 불과해 여유롭게 걸어도 2시간이면 족하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돌아보면 된다.

 

▼ 여행의 시작은 운진항(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가파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운진항(모슬포 남항)으로 와야만 한다. 이곳에서 가파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운항한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마지막 2항차(15:20, 16:00)를 이용했을 경우 섬을 둘러볼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가파도에서 나오는 배편이 16시 20분에 끊기기 때문이다. 참! ‘청보리축제(4월-5월)’ 기간에는 매 30분 간격으로 배편을 늘린다는 것도 참조한다.

▼ 우리를 태워다 준 ‘블루레이 3호’. 199톤 크기의 자그마한 배지만, 294명이나 태운다니 여객선용으로 특화되었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저 ‘Blue Ray’라는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설마 14.5knots의 속도를 빛살처럼 빠르다고 우기지는 않았을 테고, 또 다른 번역어인 ‘가오리’를 나타내는지도 모르겠다.

▼ 운진항에서 출발한 배는 넉넉잡아 10분이면 ‘가파도(상동 포구)’에 도착한다. 제주도 본섬의 서남쪽에 위치한 가파도는 섬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지명이다. 가오리를 닮은 섬의 생김새에다 먼 바다의 특징인 ‘파도’를 더했다. 참! 덮개 모양을 닮아 ‘개도(蓋島)’라 부르던 것이 가파도로 굳어졌다는 설도 있으니 기억해 두자.

▼ 배에서 내리니 물질 삼매경인 해녀가 눈에 들어온다. 얕은 곳에서 작업을 하는 걸로 보아 ‘하군’쯤 되지 않을까 싶다. 아니 가파도를 오가며 사진작가로 활동하다, 이주에 이어 어촌계장까지 겸하고 있다던 기사 속의 초보 해녀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해녀는 기량의 숙달 정도에 따라 상군(上軍)·중군(中軍)·하군(下軍)으로 나뉜다.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제주 해녀문화’로 등재되었다.

▼ 포구의 방파제는 광고판을 겸한다. 카페와 민박집도 있지만 대부분은 식당. 한정식에 중식, 심지어는 아이스크림 가게까지도 눈에 띈다.

▼ 배에서 내리면 상동마을이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선지 마을은 이미 관광지로 변했다. 식당과 카페에 마트, 민박 등 육지의 여느 관광지에 못지않은 풍경을 보여준다.

▼ 길을 나서기 전에 기념촬영부터. 이번 여행은 칠순을 맞은 집사람에게 바치는 내 선물이다. 부부만의 한갓진 여행을 계획했다가, 집사람이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 같아 부랴부랴 계획을 바꿨다. 하지만 막내 처제는 코로나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 이번 여행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다.

▼ 아래 사진처럼 가파도에는 제주올레길(10-1코스, 4.2km)이 나있다. 하지만 올레길 순례자가 아니라면 일부러 이를 따를 필요는 없겠다. 정중앙에 위치한 소망전망대에서 해안 일주도로를 향해 사통팔달로 길이 뚫려 있으니 섬에 머무는 시간을 감안해 둘러볼 코스를 정하면 된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2시간이면 족하다.

▼ 해안선을 버려두고 마을 안 고샅길로 들어섰다. 가파도의 삶을 먼저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아이들이 학교가고 주민들이 매일같이 마실 다니는 길이니 가파도의 모든 것이 담겨있지 않겠는가.

▼ 그런 내 선택을 옳았다. 그 길에서 나는 가파도의 풍광을 눈과 가슴에 오롯이 담을 수 있었다. 특히 벽화 거리는 가파도 관광의 ‘화룡점정’이다. 벽마다 가파도의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이야기해주는 벽화가 그려져 있으니 별도의 해설자도 필요 없다. 그러고 보니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도 섬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 그냥 벽화가 아니라 가파도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여기서 우스갯소리 하나. ‘가파도(갚아도) 좋고 마라도(말아도) 좋고’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는 두 섬이 빚을 돌려받기가 어려울 정도로 외진 곳에 있다는 데서 유래한 제주도 속담이란다. 하지만 두 섬은 요즘 전국에서 가장 핫한 관광지 중 하나로 변했다.

▼ 가오리에 파도를 더한 게 ‘가파도’인줄 알았는데, 주민들은 ‘가고픈 섬’이라서 가파도라며 우겨댄다.

▼ ‘가장 제주다운 섬’이란다. 맞다. 봄이면 섬이 온통 초록빛으로 물드는데다, 돌담이나 밭담도 잘 보존되고 있어 토속적인 제주의 멋을 가장 잘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행정안전부에서 선정한 ‘10대 명품섬’에 포함된 이유란다.

▼ 요건 아예 집을 통째로 화폭으로 삼아버렸다. 관광객의 눈높이에 맞췄다고나 할까? 예전의 가파도는 이웃 섬인 마라도를 가면서 그냥 지나가거나 잠깐 들르는 섬이었다. 별 볼일 없던 섬이었단 얘기다. 하지만 올레길이 생기고 청보리가 알려지면서 마라도와 우도처럼 사시사철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단다. 이젠 별 볼일 많은 섬으로 변했다고나 할까?

▼ 가장 ‘가파도’다운 풍경이라 하겠다. 주변 바닷가에서 주워 온 듯한 조약돌과 특산물인 뿔소라와 전복, 고동으로 집과 담을 치장했다. 가파도의 예술가로 소문난 이춘자 할머니의 작품이라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당시 기사는 그녀가 10년 넘게 정성으로 꾸몄다고 했다. 그게 이제 가파도 명소가 되었다.

▼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카페도 눈에 띈다. 개구리 모양의 화분을 벽에 매달은 건물의 외형이 지극히 이국적이고, 뜻은 모르겠지만 ‘꼬막꼬막 걸으멍’이란 이름까지도 예쁘다.

▼ 가파도의 돌담은 본섬(제주도)의 것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제주의 담이 검은 현무암인 것과 달리 가파도 돌담은 색이 제각각이다. 바닷물에 깎이고 닳은 마석(磨石)을 써서 그렇단다. 하지만 기능은 똑 같다. 크기가 다른 돌을 성기게 쌓아 틈으로 바람이 잘 빠진다. 오랜 세월 섬에 적응하며 얻은 생활의 지혜라서 허술해 보이지만 강한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단다.

▼ 미술관에서나 볼 법한 설치미술도 엿볼 수 있었다. 그물과 소라 등 섬마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소재를 이용해선지 지극히 향토적 감성을 자극시켜준다.

▼ ‘발상의 전환’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밋밋할 수밖에 없는 돌담에 소품 두어 개를 더하자 이렇게 변했으니 말이다.

▼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던가. 가파도를 두 번째 고향으로 삼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도회지로 떠나는가 보다. 무너져가는 집 마당에는 사람 대신 선인장만 가득했다.

▼ 뒤돌아본 상동마을. 십년이면 강산도 변하다고 했던가? 마파도의 집들도 변화의 물결을 탔나보다. 거센 바람을 피해 담장 아래 웅크리고 있던 집들이 언제부턴가 고개를 내밀었다. 몸 하나 가릴 것 없음은 예나 다름없지만, 태풍도 무서워하지 않는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해 집을 지었음이리라.

▼ 마을을 지나 ‘소망전망대’로 향했다. 가파도의 길은 해안가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돌 것이냐, 아니면 나처럼 섬 한가운데를 가로지를 것이냐에 따라 두 갈래로 나뉜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가도 섬 경치를 즐기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볼 일이다.

▼ ‘가파도’하면 사람들은 먼저 ‘청보리’를 떠올린다. 요즘은 ‘유채꽃’을 더했다. 하지만 ‘갯무꽃’도 이에 못지않았다. 지중해가 원산지라는데 일부러 파종해놓은 듯 작지 않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참고로 갯무는 ‘바닷가에서 자라는 무(갯+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처럼 무우꽃과 비슷하게 생긴데다 뿌리와 잎 모두 식용이 가능하단다. 하지만 밭에서 재배하는 무우와는 달리 뿌리가 작고 잎이 질기다고 한다.

▼ 마을을 빠져나오자 드넓은 보리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일손이 부족해 심기 시작했다는 가파도의 보리는, 이제 가파도를 넘어 제주도의 명물이 되었다. 섬 면적의 3분의 1에 이르는 땅이 보리밭이라니 보리밭을 빼놓고 어찌 가파도를 묘사할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사방이 청보리의 푸른 물결로 장관을 이루는데, 여기에 돌담과 바다가 덧붙여지면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다. 매년 봄 ‘청보리 축제’가 열리는 이유일 것이다.

▼ 드넓은 보리밭 사이를 걷다보면 둥그렇게 쌓아올린 돌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 안에 무덤이 들어있으니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경계인 셈이다.

▼ 가파도의 보리는 ‘향맥’이라는 제주도의 재래종이란다. 바닷일로 바쁜 주민들이 생각해 낸 대체작물이다. 키가 1m를 훌쩍 넘기지만 씨만 뿌려 놓으면 잘 자라기 때문이다.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그게 지금은 관광 상품이 되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보리물결이 넘실대는 게 장관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푸른 바다에 돌담까지 더해지니 이런 풍경을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 마을 근처에는 ‘상동우물’이라는 샘도 있었다. 150년 전에 판 우물이라는데 식수 및 빨래터로 사용할 수 있어서 당시는 주민 대부분이 상동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하동에 공동우물과 빨래터가 신설되자 대다수 상동주민들이 하동으로 옮겨가 지금은 하동이 섬의 중심이 되었다. 아무튼 가파도는 제주도 유인도 중 유일하게 물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 청보리밭을 지나자 이번에는 유채꽃이 길손을 맞는다. 청보리밭의 초록 파도를 기대한 상춘객에게는 뜻밖의 광경이겠지만 유채꽃 풍경은 이미 마파도의 또 다른 자랑거리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우리처럼 4월에 찾아올 경우 청보리의 초록 물결과 유채꽃의 노란 물결을 동시에 담아갈 수 있다.

▼ 제주도의 봄은 노란색이다. 가파도도 같은가 보다. 유채꽃이 가파도의 들녘을 온통 샛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가파도의 유채꽃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게 올해는 더 늘어났단다. 그에 반해 청보리 재배면적이 부쩍 줄어들었음은 물론이다.

▼ 유채꽃은 제주도의 봄을 알리는 얼굴마담이다. 2월 무렵 꽃망울을 열기 시작해 4월이면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노란빛꽃 구름에 안긴 인생 사진을 찍기에 딱 좋은 시기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어찌 카메라 앞에 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청보리와 유채꽃, 그리고 멀리 보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걷다 보면, 가파도 최고 높이(해발 20.5m)의 ‘소망 전망대’가 나온다. 소망 전망대는 가파도서 제주 본섬은 물론 마라도, 푸른 바다와 청보리밭을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는 최적의 명소다.

▼ 전망대에 오르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바다 건너의 제주 본섬. 샛노란 유채꽃밭 너머로 투구를 쏙 빼다 닮은 산방산이 그림처럼 솟아오른다. 참! 전망대 아래에는 ‘게르’를 닮은 초가움막도 지어져 있었다. 제주도가 몽고마의 방목지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전망대 부근에도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상동과 하동의 중간지점이니 ‘중동(농담이다)이라고나 할까? 정체불명의 조그만 동네지만 초등학교와 전화국, 발전소 같은 중요 시설들이 들어서 있으니 가파도의 중심지인 셈이다.

▼ 유채꽃 일색인 서쪽 방향도 막힘이 전혀 없다. 가파도는 이렇듯 시야를 가로막는 게 없다. 심지어는 그 흔한 전봇대조차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푸른 바다건너 산방산과 한라산이 손에 잡힐 듯 한눈에 들어오는가 하면, 먼 바다 쪽에서는 마라도가 한 발짝 더 다가오라며 유혹한다.

▼ 남쪽 바닷가로 향한다. 겨울에 저장해놓았던 얼음을 꺼내 쓰기 시작한다는 춘분(春分)도 이미 지났다.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뺨을 스쳐가는 바람결은 포근하기만 하다. 그게 좋아 사람들을 피해 코로나19의 주홍글씨처럼 따라 붙는 마스크를 내리자 막힌 가슴이 뻥 뚫린다. 이런 게 가파도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싶다.

▼ 커다란 풍력발전기가 2대나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면 가파도에서도 ‘청정에너지 자립’을 꿈꾸고 있나보다. 아까 배에서 내리는 우리를 맞아주던 빗돌의 ‘친환경 명품 섬’은 그 홍보문구이고 말이다. 바람을 브랜드 상품으로 전환한 대표적 사례라고나 할까?

▼ 마라도 방향의 바닷가로 내려서니 일주도로가 나있다. 시멘트로 포장된 무장애 길이다. 그러니 나처럼 쉬엄쉬엄 걸을 수도 있고, 포구 앞에서 빌려주는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밟아도 좋다. 어느 방법을 선택하더라도 풍경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간다.

▼ 먼 바다 이어선지 파도가 제법 높다. 이처럼 바람이 잔잔한데도 저렇다면 바람이라도 거셀라치면 어떨까 싶다. 하긴 오죽했으면 ‘헨드릭 하멜’이 타고 온 네덜란드 선박 스펠웰호가 이곳에서 난파당했겠는가. 그 덕분에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서양에 소개되었지만 말이다.

▼ 바다 건너에는 대한민국 최남단의 섬 ‘마라도’가 있다. 먼 바다에서 몰아쳐온 거친 파도와 강한 해풍이 깎아 만든 기암절벽이 절경을 자랑하는데, 여기에 난대성 해양 동식물까지 더해지면서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42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 잠시 후 ‘고냉이돌’이란 커다란 바위를 만났다. ‘고냉이’는 고양이의 제주도 방언. 폭풍에 생선이 떠밀려오기를 기다리던 고양이가 굶주림에 지쳐 바위가 되었다는 설화를 지녔다. 하지만 요리조리 살펴봐도 고양이가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무학대사는 부처와 돼지의 눈을 빌어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했다. 지천명(知天命)을 넘긴지 스무 해나 지났건만 아직도 내 수양은 멀었나보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하동마을이 나온다. 가파도에 들어선 두 개의 마을 가운데 하나로 아래쪽에 위치한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참고로 원래 무인도였던 가파도는 1842년 이후부터 사람들이 들어가 살게 되었다. 200명 남짓의 섬 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하며 연안에서 해녀들이 김, 굴, 해삼, 전복, 소라 등을 채취한다.

▼ 입구의 안내판은 주민들이 신성시 여기는 두 곳을 소개하고 있다. ‘상동 할망당’에서 갈라져나온 ‘하동 할망당’은 하동 주민(특히 해녀)들을 보호해주는 신당이고, 까마귀를 쏙 빼다 닮았다는 ‘까마귀돌(동산)’도 주민들이 신성시 여기는 바위라고 한다. 이밖에도 가파도에는 제단(짓단), 어멍아방돌, 보름바위(큰왕돌), 고인돌 등의 바위들이 볼거리로 제공된다.

▼ 하동포구의 방파제는 튼튼하게도 만들어놓았다. 먼 바다에서 몰아쳐오는 높은 파도를 막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참고로 가파도 근해는 ‘벵에돔 자판기’라고 불릴 정도로 입질이 좋은 핫플레이스로 알려져 있다. 그래선지 ‘물반, 고기반’의 어장을 찾아온 낚시꾼들을 기다리는 낚싯배 십여 척이 포구 안에서 한낮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 물양장에 앉아있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손길은 바쁘기만 하다. 물질해서 따온 해산물을 손질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파도 해역은 물살 흐름이 빨라 물질하기에 썩 편치는 않다. 하지만 전복, 소라 등 패류는 물론이고 고등어, 방어, 자리돔 등이 씨알이 굵어서 제주에서도 고품질 상품으로 각광받는다.

▼ 가파도의 중심은 하동마을인가 보다. 마을회관은 물론이고 치안센터와 보건진료소도 이곳에 들어서 있다.

▼ 포구에는 ‘가파도 개경(開耕) 12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 빗돌을 세운 시기가 올해(壬寅年)란다. 아니 아직 돌아오지도 않은 12월(음력)에 세웠다고 적고 있으니, 한 갑자(甲子) 전 그러니까 180년 전에 마을이 세웠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무인도였던 이 섬은 소와 말을 방목하는 국유 목장지가 되면서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40년(헌종 6년) 영국 선박이 침입해 소를 잡아가는 사건이 발생(이로 인해 목장이 폐쇄됐다)했고, 1842년 폐목장지에 개경 허가를 해주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게 벌써 180년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 하동마을에도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서 있었다. 하긴 먹을거리(제주도 최고의 낚시터에 농사지을 땅까지 더했다)로 넘친다는 가파도, 그중에서도 가장 큰 마을에 어찌 음식점 한둘 없겠는가. 마라도가 해물자장면 하나로 맛 지도를 완성하고, 비양도는 보말죽이 대세를 이루지만, 물산이 풍부한 이곳 가파도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맛난 음식이 많다고 한다.

▼ 짬뽕과 짜장이 전문인 저 식당은 원조라 우기는 걸로 보아 이곳 가파도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모양이다. 맛은 SBS의 ‘불타는 청춘’과 KBS의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증명해 준단다. 그밖에도 뿔소라구이와 문어숙회, 소라·홍해삼회들 서브메뉴로 내걸고 있으니 뱃시간에 쫓기지 않는다면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 하동마을의 담장도 역시 아름답게 치장됐다. 느림의 미학을 한껏 즐기며 읽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하멜’에 대한 이야기도 보인다. 가파도를 ‘게파도’라는 이름으로 서양에 소개한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 하멜이 암초에 걸려 배가 파선되자 이곳 가파도에 상륙했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등대를 세웠다는데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일부 담벼락은 ‘가파도 새싹보리’의 광고판으로 변했다. ‘새싹보리’란 보리의 새순을 말한다. 씨앗이 2일의 발아과정과 10일의 성장과정을 거치면 잎이 10cm쯤 자라는데, 이때 잎을 수확하여 먹는다.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변비에 효과적이며 고혈압이나 빈혈, 당뇨 등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 바닷가에서 오르다 보면 ‘불턱’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일종의 탈의실인데 해녀들이 물질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거나 불을 쬐며 쉬는 공간이다. ‘불’은 글자 그대로 불씨를 뜻하며 ‘덕’은 ‘불자리’를 뜻한다니 ‘화톳불’ 정도로 여기면 되겠다.

▼ 근처에는 ‘돈물깍’도 있었다. 바닷가의 샘 끄트머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돈물’은 담수를 일컫는 제주지역의 사투리. 바닷물 즉 짠물과 대비되는 말인데, 바닷가 마을에는 소금기 없는 담수가 드물지만 바닷가에 용출하는 샘이 몇 개는 있게 마련이어서 제주지역 바닷가 어디서나 사용하는 명칭이기도 하다.

▼ 마을을 빠져나와 ‘소망전망대’로 향했다. 마을 주민이 상동포구로 나가는 지름길이라고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뱃시간에 맞추느라 미리 포구로 나간 집사람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찌 서두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튼 이 구간은 느린 걸음이 가장 잘 어울리는 길이었다. 아름다운 풍광이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자꾸만 붙잡았기 때문이다.

▼ 상동포구로 되돌아 나오는 길. 본섬인 제주도가 환상적인 풍광으로 다가온다. 제주에서 보는 가파도가 아닌 가파도에서 바라보는 제주의 모습은 낯설다. 거기다 가장 낮은 곳에서 바라보는 가장 높은 한라산은 차라리 경이롭다. 그 앞의 산방산과 송악산도 덩달아 높은 풍경으로 다가온다.

▼ ‘당신이 필요해요. 눈으로만 봐주는 당신’이라는 팻말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제발 밭으로 들어가지 말아달라는 애절한 부탁인데, 아까 사진을 찍으면서 유채꽃밭 속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이다. 길이 나있기에 무심코 들어갔었는데, 이제 보니 외지인들의 무단침입으로 인해 생긴 상처였던 모양이다.

▼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은 덕분에 청보리밭과 유채꽃밭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행운도 누렸다. 그나저나 마파도의 자랑거리는 이제 유채꽃이라 할 수 있겠다. 청보리밭보다도 유채꽃밭의 면적이 압도적으로 넓어 보이니 말이다.

▼ ‘제주 올레길’의 길라잡이도 눈에 띈다. 파란색은 정방향 표시로 제주의 쪽빛 바다를 상징하며, 주황색은 역방향(거꾸로 걸을 때) 표시로 제주의 특산물인 밀감을 나타낸다. 그러니 나는 지금 올레길을 거꾸로 걷고 있는 셈이다.

▼ 앗! ‘친환경 명품 섬’이라던 빗돌에 어울리지 않게 내연발전소라니... 이유는 간단했다. 가파도의 이국적 풍경이 입소문을 타면서 관광객의 숫자가 몇 배로 늘어났고, 이로 인해 음식점이나 민박집 같은 편의시설들이 더불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전력수요의 폭증을 불러왔고, 그 부족분을 디젤발전기를 돌려 메꾸고 있다는 것이다.

▼ 아까 상동우물을 거론하면서 가파도는 물 걱정이 없는 섬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 또한 불가능해졌던 모양이다. 아래 사진처럼 바닷물을 민물(淡水)로 바꾸는 ‘해수담수화 시설’이 들어서있는 걸 보면 말이다.

▼ 소망전망대 앞에서 상동마을로 내려간다. 아까 지나왔던 길이기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니 배의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주변 풍광에 신경쓸 겨를도 없다. 제주 본섬이나 유채꽃밭을 배경으로 삼을 경우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져 올릴 수 있을 텐데도 말이다. 참고로 가파도에서는 눈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포토존이다. 벽화마을 벽에 기대어 한 컷, 제주본섬을 뒤로 하고 한 컷, 소망전망대에 올라 한 컷. 스마트폰과 여행객만 있으면 그 어디나 인생샷 스팟이 된다.

▼ 다시 돌아온 상동마을의 포구. 아까는 못 보았던 ‘상동 할망당(제주도에서는 여신을 ‘할망’이라 부른다)’이 눈에 띈다. 가파리 주민들을 수호해 주는 해신당(海神堂)으로, 1년에 한 번씩 집안과 객지로 나간 가족들의 무사안녕과 풍어를 기원해오고 있단다. 참고로 가파도에는 동쪽 해안에 마을 제단이 있고, 북쪽과 남쪽 해안에 상동할망당인 ‘대부리당’과 하동할망당인 ‘뒷서낭당’이 있다. 마을 제단은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남자 주민대표들이 천제를 지내는 곳이다. 반면 ‘당’은 여자들이 주도하여 어부와 해녀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곳이다.

서해랑길 19코스(용해동사무소-청계면사무소)

 

여행일 : ‘22. 12. 10()

소재지 : 전남 목포시 용해동·석현동·대양동과 무안군 삼향읍·청계면 일원

여행코스 : 용해동사무소삼향동사무소마동마을마갈마을복룡마을월호마을도림천청계면사무소(거리/시간 : 16km/ 실제는 초의선사유적지부터 13.52km 3시간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9코스를 걷는다. 6로 이루어진 목포·무안남부구간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목포의 도심에서 출발하는 이 구간은 무안의 바닷가와 드넓은 들녘을 지난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하지만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초의선사라는 걸출한 선승의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다. 은은하게 우러나는 다향을 바닥에 깔고서...

 

 들머리는 용해동 행정복지센터(목포시 용해동 981)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TG를 빠져나와 국도 1(2)호선을 타고 고하도 방향으로 10km쯤 내려오다 산정교차로(목포시 연산동)에서 용당로로 옮겨 2.2km정도 들어오면 용해동 행정복지센터에 이른다. 서해랑길(무안 19코스)의 안내도는 주차장 가장자리에 세워놓았다.

 목포시의 북서쪽 외곽과 무안군의 남부 해안을 걷는 코스이다. 이 코스의 특징은 다도해의 멋진 풍광과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드넓은 들녘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거기다 다리품을 조금 더 팔면 초의선사유적지와 오승우미술관이라는 보너스까지 받아들 수 있다. 우리 부부는 도심구간을 생략하는 대신 초의선사유적지를 꼼꼼히 둘러보는 방법을 선택했다.

 실제 출발지는 초의선사유적지(무안군 삼향읍 왕산리에 위치하며 입장료는 없다)

식상한 도심구간을 생략하고, 탐방로를 살짝 비켜난 초의선사유적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초의선사의 출생지인 왕산리 봉수산 자락에 생가를 비롯해 그와 관련된 유적(일지암·용호정)과 전시시설(박물관·기념관), 다성사(사당) 등을 세워 다인들의 순례성지로 자리매김 시켰다. 그나저나 주차장에서 바라본 봉수산(烽燧山 204.4m)이 여간 범상한 게 아니다. 옛날에는 저 암봉 위에 봉수대, 그 아래에는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암자의 스님이 물에 빠진 초의선사를 구해줬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투어는 대각문(大覺門)’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헌종이 내린 사호(賜號)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선사에서 따왔다. 이곳에 온 사람들 모두가 깨달음을 얻으라는 격려도 담았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탐방로를 가운데 두고 소박한 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분을 기리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차밭을 지나면 초의선사의 동상, 그냥 지나치지 말고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게송(偈頌)으로 전한바 있는 선사의 기풍을 살짝 엿보고 가자. <두륜산 마루턱에서 주먹을 불끈 세우고/ 푸른 바다 비탈에서 코를 비비네/ 홀로 무외(無畏)의 광명을 크게 베풀며/ 달을 가리켜 모든 어둠을 깨뜨리누나/ ()의 땅이건 고통(苦痛)의 바다이건 가리지 않고/ 한 부처님의 마음을 죄다 가졌네/ 정명(正明) 보살의 말없는 게송이여!/ 허공을 때리는 법계(法界)의 소리여!/ 부처에 들고 또 다시 마군(魔軍)에 드니/ 다만 자기만 아는 웃음소리/ 살 고양이, 쥐잡는 지혜처럼/ () ()이 서로 어우러져/ 봄바람 한 소식에 온갖 꽃이 피어/ 밝고 밝음이 오늘에 이르렀구려>

 일지암(一枝庵)은 해남 대흥사의 것을 본떴다고 한다. ‘풀 옷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검소함과 간결함, 선사의 깊은 삶의 자세까지 배어 있는 암자다. 그런데 현판에 암자 암()’이 아닌 뚜껑 암()’자를 쓴 이유는 뭘까? 하나 더, 암자 옆에는 어린 초의선사가 또래 아이들과 놀았다는 초의암(草衣岩)’도 있었다. 해변에서 잡을 물고기를 말리거나 조개를 구워먹던 놀이터였단다.

 초의선사기념관은 차의 성인(茶聖)’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 근처 숲속에는 세심헌(洗心軒)’이란 초가도 있었다. 안내판은 초의선사가 말년에 온갖 번뇌를 다 놓아버리려고 지은 쾌년각(快年閣)’을 본떴다고 적었다.

 안에는 선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업적과 활동상황을 살펴 볼 수 있도록 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해놓았다.

 다성사로 오르려면 빗돌에 인사부터 드려야 한다. 왼편의 ‘13대 초의대종사(十三代 艸衣大宗師)’는 대흥사의 13대 대종사였다는 뜻, 오른편의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종사(大角登階普濟尊者 草衣大宗師)’ 55(1840) 때 헌종으로부터 받은 사호(賜號)라고 한다.

 돌계단을 오르면 다성사(茶聖祠)’. 초의선사의 상()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선사가 탄생한 음력 45일을 기해 헌다제(獻茶祭)’를 모신다. 열반한 8월 초2일에도 헌다제를 봉행한단다. 사당은 개방되어 있었다. 일반 추모객들에게도 헌다의 예를 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안에는 선사의 상()과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초의선사는 1786(정조10)에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출가한 후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40여 년간 수행하면서 선()사상과 차에 관한 저술에 몰두하여 큰 족적을 남겼다. 그로 인해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대선사이자 명맥만 유지해 오던 한국 다도를 중흥시킨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당 오른편에는 동다송 비(東茶頌 碑)’를 세웠다. 초의선사가 지은 31( : 한시의 여섯 형식 중 하나) 동다송은 차의 역사·유래·전설, 차를 만들고 마시는 법, 차를 마신 사람들 이야기, 차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았다. 하나 더, 사당 왼편에는 초의선사 추원비(草衣禪師 追遠碑)를 세웠다. 이밖에도 유적지 경내에는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조선 차 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 차에 대한 문화를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는 차 전문 박물관이다. 참고로 초의선사는 우리 차를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중국 다경요채를 초록, 차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다신전(茶神傳)’을 썼고, 이어서 이 책의 일부 오류를 바로잡고, 우리 풍토와 기후에 맞게 쓴 글()을 추가해 동다송(東茶頌)’을 지었다.

 안에는 조선시대 사용하던 차 도구를 시대별(조선 이전, 조선 전기, 조선 중기, 조선 후기)로 전시하고 있다. 중국의 차 도구와 조선시대 차 문화를 기록한 도서도 전시했다.

 용호백로정(蓉湖白鷺亭)은 용산(서울)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는 추사의 정자로 용호(蓉湖)란 용산의 옛 지명이다. 백로가 오락가락 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백로정이란 이름을 붙였다. 정자의 터도 사라지고, 그저 기록으로만 전하던 것을 이곳에 복원해 놓았다. 초의선사는 용호정에서 두 해나 머물렀다고 한다.

 교육관인 초의선원(草衣禪院)은 밖에서 보면 1층이지만 내부는 2층으로 되어있다. 1층은 인간세상을 나타내고, 2층의 다실공간은 하늘나라를 의미한다. 1층에서 2층의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은 구름계단으로 33천의 하늘나라를 의미해서 구름무늬를 조각했다. 그밖에도 선사의 생애를 나타내는 문양들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 초의선원 마당의 차 따르는 조형물은 한번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일여(一如)의 미()’ 禪茶一如(선다일여)’로 귀결된다. 선과 차가 하나로 귀결되니 참선을 모르면 은은한 다향(茶香)의 맛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차로 마음을 씻어내듯 고요히 생각에 잠겨보자. ()의 경지는 몰라도 살짝 엿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마당에는 투호놀이, 지게지기, 절구치기, 고리던지기 등 전통놀이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놓았다.

 선사의 생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지었단다. 당사자가 살아생전에 이미 폐허가 되어버렸다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선사는 저 집에서 열다섯 살 때까지 살다가 나주 운흥사로 출가했단다.

 보제루(普濟樓)는 초의선사의 차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의 보제는 헌종이 선사에게 내려준 호인 대각등계 보제존자에서 따왔다고 한다. 초의선사 탄생 222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2층을 합한 면적을 222평으로 지었다나?

 다음 방문지인 오승우 미술관으로 이동하는데, 방금 전 둘러봤던 전각들에 뒤지지 않는 전통 한옥이 눈에 띈다. 간판을 내걸지 않아 용도는 모르겠지만 하룻밤 묵어가기 딱 좋겠다.

 유적지 입구에는 오승우 미술관이라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마련되어 있다. 서양화단의 원로이자 한국판 르느와르(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로 불리는 오승우 화백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그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십장생 시리즈’, ‘한국의 100산 시리즈’, ‘동양의 원형 시리즈 등 오 화백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단다.

 미술관 앞 공터에는 그의 아들인 오상욱이 조각한 천축 가는 길이 세워져 있었다. 미래를 향하여 먼 길을 떠나는 구도자의 걸음에는 미래의 희망이 있다나? 참고로 오 화백의 부친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상주의 화가로 알려진 오지호(고향인 화순에 미술관이 있다) 화백이다. 거기에 아들인 오상욱까지 조각가의 길을 걸으면서 3대가 한국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또 다른 작품은 사진 찍기 딱 좋게 만들어 놓았다. 다만 얼굴 큰 남자들은 사양. 조그만 구멍에 꽉 차버릴 테니 말이다.

 미술관에서 나오면 도로가 둘로 나뉜다. 정답은 오른편, 1km쯤 떨어진 바닷가에서 서해랑길과 만난다. 하지만 난 반대방향을 선택했다. 19코스의 유일한 항구인 마동항을 눈에 담아보기 위해서이다.

 내륙의 국도(1호선) 방향으로 200m쯤 걷자 그린빌리지로 이어지는 삼거리. 방향만 보고 들어섰다가 금방 되돌아 나왔다. 숯불구이 촌닭으로 소문난 조선시대라는 식당이 서해바다 뷰가 좋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는 정보만 부여안고서...

 200m남짓 더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 ‘삼연기업의 건물을 기점 삼아 오른편 마동길로 들어선다. 진행방향의 산마루에 마을(‘그린빌리지라는 전원주택단지) 하나가 걸터앉아 있다면 길을 제대로 찾은 셈이다.

 ! 한적한 바닷가에서 히든싱어를 보게 되다니. ‘히든싱어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와 그 가수의 목소리부터 창법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창능력자가 노래 대결을 펼치는 신개념 음악 프로그램이다. 각 편에서 주인공을 이겼던 모창가수들이 이젠 콘서트까지 열고 있는 모양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 마동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왕산리(旺山里) 7개 자연부락(평산·왕산·금동·마동·마갈·동뫼·덕산) 중 하나로 바다를 끼고 있어 어촌으로 분류된다. 거기다 방조제 축조로 들녘까지 드넓어지면서 요즘에는 풍요의 상징으로 변했다. 참고로 마동(馬洞)’이란 지명은 삼향읍의 주산인 봉수산에서 내려다봤을 때 마을의 지세가 말의 형국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바닷가로 나오니 기다란 둑이 건너편 목포시(대양동)를 연결시킨다. 혹자는 중등포방조제라 불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전국의 마룻금을 손바닥 읽듯 하는 그는 또 월산동마을과 중반마을(표석은 분명 마동마을이었다)을 잇는다면서 그 안쪽도 중등포 들녘(들녘 안쪽에 중등포마을이 실제 존재한다)’이라 부르고 있었다.

 이후로는 마동길을 따른다.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두둥실 떠다니는 다도해의 멋진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명품 해안길이다.

 이때 코스모스악기 연수원이 눈에 띈다. 세계적 브랜드의 악기와 부품 등을 독점 수입·판매하는 회사인데, 자체브랜드(Kingstone, Harrison )로 제작도 한다더니 그 생산 공장이 목포지역에 있는가 보다.

 마동항은 곁눈질, 즉 지나는 길에 살짝 엿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촌정주어항(어촌의 생활 근거지가 되는 소규모 어항)치고는 엄청나게 많은 어선이 정박되어 있었다. 인근에 항구다운 항구가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른 방조제. 서해랑길 나그네들은 저 방조제에 복구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복구마을 앞 바다를 막았다는 의사표시일 것이다.

 방조제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오른편, 방조제가 만들어낸 들녘 너머로 삼각뿔을 쏙 빼다 닮은 봉수산이 솟아올랐다. 이름처럼 저 산에는 1898(고종 35)까지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반대편에서는 조형미 뛰어난 압해대교가 바다를 가른다. 목포와 압해도(신안군청이 새로 들어섰다)를 연결하는 닐센아치(다리 상판을 케이블로 매달아 하중을 아치에 전달) 형식의 연륙교이다.

 복구(福口)’ 마을은 스치듯 지나친다. 그러다 다 쓰러져가는 폐가 두어 채를 만났다. 서해바다 뷰가 뛰어난 왕산리는 전원주택지로 입소문을 타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불편함이 싫어 도시로 떠나가는 사람 또한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꽃까지 떠났겠는가. 서리 맞은 산국이 떠나버린 가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복구마을을 빠져나오면 크고 작은 섬들로 가득한 다도해 풍광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그 오른편 산자락은 최근 들어선 듯한 전원마을 차지다.

 마동마을에서 15, ‘825번 지방도(왕산로)’로 올라섰다. 아까 오승우미술관 앞에서 헤어졌던 도로인데, 복구마을의 진입로 역할을 하는 듯, 삼거리에 버스정류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50m쯤 걸었을까 이정표(종점 9.3/ 시점 7.5)가 도로를 벗어나란다. GPX트랙은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도 된다는데, 굳이 돌아가라는 이유는 뭘까? 그것도 짧다고는 하지만 오르막길일진데...

 100m쯤 올라갔을까 새로 들어선 듯한 전원주택단지가 얼굴을 내민다. 허투루 지어진 게 하나도 없을 정도로 하나하나가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 무안군에서 저 마을(도로변 버스정류장은 마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을 구경을 마친 서해랑길은 다시 도로(왕산로)로 내려선다. 하지만 100m도 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도로를 벗어나버린다.

 그렇다고 눈요깃거리까지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이 지점은 서해바다의 뷰가 가장 아름다운 곳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발아래로 꼬맹이 닭섬이 새벽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목을 세우고, 그 뒤의 갓섬(사유지라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단다)’은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압해도가 나타난다. 이게 오른편의 가란도 그리고 왼편의 압해대교를 품으면서 아름다운 풍경화로 승화된다.

 825번 지방도와 헤어진 탐방로는 이제 왕산로(1차선 도로)’를 따라 마갈마을로 간다.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평범한 시골길이다.

 그렇다고 다도해의 멋진 풍광까지 사라질 리가 있겠는가. 아까 도로가에서 보았던 경관이 다시 한 번 펼쳐지는데, 지대가 높아진 탓인지 닭섬과 갓섬이 훨씬 더 또렷해졌다.

 이곳 무안은 영암과 어깨를 맞댄 형세다. 그래선지 영암의 주요 특산물인 무화과가 눈에 띄기도 했다. 하긴 초록동색(草綠同色)’이란 사자성어도 있지 않겠는가.

 12분쯤 걸어 왕산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마갈마을로 들어섰다. 마갈(馬葛)이란 지명은 좀 엉뚱한 데가 있다. 지형이 갈마음수(渴馬飮水)’, 즉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형국인데서 유래됐다. 그러다 말이 목이 말라 죽었다는 속설로 인해 한때 목마를 갈()’ 대신 칡 갈()’ 자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다시 목마를 갈()’을 사용한다나?

 마을을 관통한 탐방로는 나지막한 고개(kakaomap 검동재라 적고 있었다)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 ‘마갈마을에서 19코스의 후반부가 시작된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마을회관 앞 이정표(종점 8.5/ 시점 8.3)가 딱 중간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검동재(‘마갈 잔등이라 부르기도 한단다)’에 올라서자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봉수산으로 연결됨을 알리는 이정표가 초입에 세워져 있었다. 아까 초의선사유적지에서도 봉수산 등산로가 보였었는데...

 검동재 너머는 지산리(복룡마을)’이다. 봉수산의 북쪽 자락에 들어앉은 삼향농공단지로 대변되는 곳이다. 무안군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농공단지로, 연간 생산액이 800억 원에 이르는 등 지역경제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단다.

 길가 제이러브 팜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사랑 catchphrase로 내건 체험농장이다. 강냉이·호박·고추·완두콩 등의 재배나 수확, 가공에 대한 체험은 물론이고 수확된 농작물의 구매도 가능하단다.

 복룡마을은 법정 동리인 지산리(芝山里)’를 구성하는 6(복룡·월호·지산·곽단·노재동·장곡) 자연부락 중 하나다. 복룡(伏龍)이란 지명도 역시 지형에서 유래됐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지맥이 바다를 향해 뻗어나가는데 그 형상이 마치 용이 엎드리고 있는 듯 했단다.

 옛 이름은 마장촌(馬場村)’. 옆 마을인 월호 마을과 함께 특수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복룡마을에서 말을 기르고 관리했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마을 표석에도 말이 쉬어가는 곳이라고 적혀있었다.

 복룡마을을 빠져나오니 월호저수지가 반긴다. 월호앞뜰(‘해지안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아니 간척사업으로 만들어진 더 넓은 들녘에 물을 대기 위해 쌓은 저수지이다.

 월호저수지 아래. 잘 가꾸어진 양 갈래의 길이 산뜻한 인상을 준다. ‘행복 홀씨 안내판도 눈에 띈다. 주민들 스스로 마을을 아름답게 가꿔 민들레 홀씨처럼 행복을 퍼트리자는 의미의 행복 홀씨 입양사업에 동참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지산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월호(月湖)’ 마을은 이름부터가 서정적이다. 하지만 원래 이름은 한인촌(漢人村)이었다고 한다. 한나라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단다. 그러다가 하인촌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지형적 특성을 따 월호로 바꾸었단다. 간척사업이 있기 전, 밀물 때가 되면 마을 앞 넓은 들에 물이 차 마치 호수처럼 보였는데, 거기다 동산에 달이라도 떠오를라치면 아름다운 풍경화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마을가꾸기 사업의 흔적인 듯 월호마을의 담벼락도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농자천하지대본 깃발을 내걸고 사물놀이가 한창이다. 월호리가 신명나는 마을임을 알려주려 했다나? 맞다. 이 마을은 명절날 곱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 강강수월래 놀이를 하는 풍습이 전해진다고 했다.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금동마을로 연결되는 도로(지산길)를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이때 눈에 익은 풍광이 펼쳐진다. 해남구간의 화원반도를 걸으면서 만났던 이색적인 풍경, 즉 구릉지가 이곳에서도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해남은 푸른 배추가 한 가득이었는데, 이곳은 텅 비어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작은 소류지도 만날 수 있었다. ‘둠벙에서 소류지로 크기만 달라졌을 뿐. 이 또한 해남에서 눈여겨봤던 익숙한 풍경이다. 다만 메마른 구릉지에 물을 대던 해남과는 달리 이곳은 요 아래에 있는 논에까지 물을 대느라 몸집을 부풀렸을 것이다. 아무튼 큰 덩치 덕분에 세월을 낚는 강태공까지 덤으로 품었다.

 저수지 아래로 내려서자 꽤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지금이야 옥토로 변했지만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만 해도 이곳은 바닷물이 넘나들었다. 이 일대에서 나던 금동머리 감태는 전국적으로 유명해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뽑히기도 했단다.

 이후 300m는 들녘의 가장자리를 따른다. 농경지와 산자락 사이로 농로(중산길)가 나있다. 그러다 지산천을 만나면 쌍 다리 중 하나를 건너면 된다.

 탐방로는 이제 지산천의 제방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이런 둑길은 19코스의 종점인 도림리까지 계속된다.

 오른편으로는 지산리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요 아래 도림천의 하구둑이 축조되면서 생겨난 저 들녘은 지산리를 넘어 청계리까지 이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큰 지산천이 그보다 더 큰 도림천을 만나면, 물길은 아예 호수처럼 넓어져버린다. 아니 도림천 하구에 쌓아올린 복길방조제가 만들어놓은 인공호수일지도 모르겠다.

 두물머리를 지나면서부터는 도림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승달산에서 발원 ‘S’자로 굽이굽이 흐르며 드넓은 들녘을 적셔온 도림천은 이곳 복길리(청계면)와 왕산리(삼향읍) 사이에서 몸집을 크게 부풀린 다음 서해바다로 흘러든다.

 이 일대는 갈대가 장관이다. 하천 양쪽 둔치를 따라 길고 넓게 분포되어 있다. 금강(신성리)의 갈대숲만은 못해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바람에 속도가 붙었던지 갈대밭이 서걱서걱 소리를 낸다. 이리저리 춤추는 갈대 너머로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은 물결이 은은한 빛을 내며 일렁인다. 그저 말없이 걷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힘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들녘은 호남고속철도 2단계(고막원-목포 구간) 공사가 한창이었다. 건설역군들에게는 휴일조차 없나보다.

 중간에 청계천(도림천으로 합수되는 지점)을 만나 가로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도림천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저 오른편 제방에서 왼편 제방으로 옮겼다는 것만 다를 뿐.

 지산천에서 둑길로 올라선지 1시간(4.3km). 도림천을 거슬러 올라오던 탐방로는 도남교를 건너 마을로 들어선다. ! 다리를 건너다 해안길로 우회해 온 일행을 만났다. 탐방로를 벗어나 서해안을 따르다가 도림천 하구둑을 건너고, 계속해서 복길리 해안을 올라가다 남성동삼거리에서 도림리로 들어왔단다. 훨씬 유익했다는 그의 자랑을 들으며 우리 국토의 둘레를 따라가는 코리아 둘레길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기껏해야 면소재지인데 도림리(道林里)는 규모가 꽤 컸다. 길거리도 면소재지치고는 꽤 번화한 풍경을 보여준다. 어쩌면 목포대학이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풍경이지 싶다.

 도심의 대형교회에 못지않은 크기를 자랑하는 청계중앙교회를 지나면 곧이어 국도 1호선(영산로)을 만난다. 건너편은 목포대학 정문. 하지만 탐방로는 도로를 건너지 않고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날머리는 청계면복합센터(무안군 청계면 도림리 439-2)

방향을 틀자마자 청계면복합센터가 얼굴을 내민다. 19코스가 종료된다는 얘기다. 오늘은 13.52km 3시간 20분에 걸었다. 구간 전체가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초의선사유적지를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서해랑길(무안 20코스) 안내도는 복합센터 입구에 세워져 있다.

 오늘도 집사람과 함께했다. 활짝 웃는 그녀를 보다 문득 만남의 의미를 고민해본다. 정채봉 작가의 에세이 만남은 만남을 다섯으로 나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원한을 남기는 생선 같은 만남’,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지만 시들게 되면 버려지는 꽃송이 같은 만남’, 힘이 있을 때는 지키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는 건전지와 같은 만남 등등. 하지만 나에게 집사람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고 싶다.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양 축하하고 힘들 때는 땀도 닦아주는... 반면에 그녀에게 난 만나면 좋고, 함께 있으면 더 좋고, 헤어지면 늘 그리운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다.

 실제는 100m남짓 더 걸어 청계면사무소 앞에서 마쳤다.

대청호오백리길 9구간(지용향수 길)

 

여행일 : ‘22. 12. 3()

소재지 : 충북 옥천군 군북면·옥천읍 일원

여행코스 : 진걸선착장청풍정국원리마성산(실제는 성왕로 우회)교동저수지죽향초교정지용생가육영수생가향교(거리/시간 : 15km, 실제는 12.09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아홉 번째 구간인 지용향수길(15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대청호의 본류인 금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는 것이 장점이. 마성산 정상에서의 조망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하나 더, 옥천읍내에서 만나는 육영수와 정지용의 생가는 마성산을 넘어온 이들에 대한 보상이라 하겠다.

 

 들머리는 진걸선착장’(옥천군 군북면 석호리)

경부고속도로 옥천 TG를 빠져나와 지용로 매동로’, ‘성왕로를 연이어 타고 대청호 방면으로 6km쯤 올라오다, 국원리삼거리에서 석호길로 옮겨 2.5km쯤 더 들어오면 진걸 선착장에 이르게 된다.

 대청호의 상류인 금강의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이다. ‘마성산에서의 조망도 볼거리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정규 탐방로인 마성산 구간을 생략한 채, ‘국원마을에서부터는 옛 국도를 따라 옥천읍내로 들어갔다. 이미 올라본 마성산을 다시 오르기보다는 볼거리가 많은 옥천읍내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석호리에는 현재 진걸, 그리고 8구간 때 만난 석결 마을만이 수몰을 면한 채 남아 있다. 길 위에서 바라본 진걸마을은 빨강과 파랑의 원색 지붕을 얹은 고만고만한 가옥이 10여 채 늘어서 있다. 마을 앞 호숫가에 어선이 정박해 있다는 건 대청호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가는 어촌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건너편은 막지리(이곳과 같은 군북면이다)’일 것이다. 바깥나들이를 하려면 산길을 차로 1시간 넘게 돌아 나가야 한다는 곳. 옥천 5일장이라도 서는 날이면 동네사람들 전원이 배를 타고 나오는 호수 속 오지마을이다.

 버스를 타고 들어왔던 임도를 되돌아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어느 여행자는 이 마을에 머물며 아침 산책길에 밤과 호두를 한 주머니씩이나 주웠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풍경은 확연히 다르다. 그렇게나 많다던 밤나무와 호두나무는 다 어디가고 대나무만 한가득이란 말인가.

 진걸마을은 산에 막히고 물에 갇힌 마을이다. 때문에 마을로 들어가는 게 만만치가 않다. 구절양장의 임도를 굽이굽이 돌아야만 들고 날 수 있다. 더 큰 악재는 경사까지도 가파르다는 점이다. 군내버스까지도 손을 놓아버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도 대청호의 수질을 살리려는 부단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호숫가로 내려가는 길마다 차단봉을 설치해 차량의 무단진입을 막고 있었다.

 임도의 자랑거리는 ‘S-Line’이 만들어내는 곡선미이다. 하지만 은행나무 가로수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가지치기 된 지금이야 정제된 멋으로 끝나지만, 가을철 잎이 노랗게 물들라치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지 않을까 싶다.

 ! 산악회버스가 옴짝달싹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를 내려주고 되돌아가다 턱진 곳에 걸쳐버린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하긴 오죽했으면 옥천군에서 다람쥐택시라는 기발한 운송방법까지 생각해냈겠는가. 다람쥐택시란 버스노선이 닿지 않는 오지마을 주민들이 버스와 비슷한 요금을 내고 택시를 이용할 수 있는 행정서비스라고 한다.

 고개를 넘자 발아래 저만큼에 청풍정이 놓여있다.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지름길도 나있다. 하지만 사유지이니 들어오지 말란다. 지름길을 이용하지 못할 경우 한참이 돌아가야 하는데도 말이다. 이때 김삿갓의 네절인심 고약타를 떠올렸다면 나 혼자만의 오해였을까? 후렴으로 지옥가기 딱조타까지 생각해 냈는데...

 사유지라는 텃세 덕분에 300m 가량이나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7. 모퉁이를 돌아서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나지막한 언덕에 걸터앉은 청풍정(淸風亭)이 드넓은 호수와 어우러지며 진경산수화 하나를 그려놓는 것이다. 옛날 음풍명월로 유유자적하던 선비들이 딱 좋아했을 법한 풍경이겠다. 하지만 저 정자는 새로 지은 것이다. 대청댐이 준공되면서 1996년 이곳으로 이전했다. 참고로 수몰 이전의 청풍정은 금강이 굽이쳐 흐르다 절벽에 부딪쳐 소를 이루고, 휘늘어진 버드나무가 10여리를 곧게 뻗어 가슴과 마음을 훤하게 뚫어주는 천하절경이었다고 한다.

 홑처마 팔작지붕인 정자는 정면 3칸에 측면이 1칸이다. 평면은 한 칸의 온돌방과 두 칸의 우물마루로 구성됐다. 하지만 언제쯤 지어졌는지는 모른단다. 조선 후기 참봉을 지낸 김종경이라는 사람이 지었다고만 알려진다. 참봉(參奉)이라면 종9품의 최 말단직. 벼슬에 환멸을 느낀 그가 후학 양성을 위해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온돌방을 끼고 있다는 게 그 증거이고...

 청풍(淸風)이면 응당 명월(明月)이 뒤따라야지 않겠는가. 그 명월은 조선 말 개화 사상가였던 김옥균(金玉鈞, 1851-1894)이 장식한다. 정자를 왼편에 끼고 돌면 월명암이라고 적힌 깎아지른 바위절벽이 나타나는데, 이 바위의 주인공이 김옥균과 애틋한 사랑을 나누다 죽음으로 진심을 전한 명월이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자신이 주도했던 갑신정변(1884) 3일천하로 막을 내리자 옥천으로 내려와 이곳 청풍정에서 명월이란 기생과 함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명월의 마음은 편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라의 큰일을 할 장부가 자신 때문에 외진 곳에서 허송세월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강물에 몸을 던졌다니 말이다. 저 바위에 새겨진 명월암(明月岩)’이란 글자는 김옥균이 명월의 그런 애정을 잊지 못해 적어놓은 것이란다.

 대청호는 수위에 따라 잠겼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한다. 때문에 검은 색 암벽에 선명하게 물무늬 자국이 남아 있다.

 정자 앞에 서면 대청호가 한가득 차오른다. 대청호에 물을 담으면서 금강 강줄기는 더욱 선명해졌다. 대신 물줄기가 등치를 부풀린 만큼 산줄기는 가늘어졌다. 그리고 음각과 양각처럼 한 몸이 된 새로운 지형을 수면 위에 펼쳐놓는다.

 청풍정을 빠져나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길은 산길과 호숫가를 굽이굽이 돌고 돌아 외길을 따라간다. 군내버스도 포기해버린 좁디좁은 임도다. 그걸 무시한 채 운전솜씨를 자랑하던 청마산악회 황사장님은 조금 전과 같은 봉변을 당했고...

 청풍정에서 8분 거리. 이번에는 석호정이란 정자가 길손을 맞는다. 대청호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정자지만, 둘레길 나그네인 나로서는 타고 온 대형버스가 회차(回車) 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임도는 아직도 1차선이다. 하지만 굽이가 많이 누그러졌을 뿐만 아니라 폭도 아까보다는 꽤 넓어졌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석결마을에서 넘어온 길(석호1)과 진결마을에서 시작된 석호길이 하나로 합쳐지는 삼거리에 이른다. 지난 8구간 때 날머리로 삼았던 돌거리고개이다.

 마을을 소개하는 안내판에는 사진 한 장이 삽입돼 있었다. 굽이도는 강줄기 안쪽으로 은빛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그 가장자리에는 미루나무도 두어 그루 보인다. 마을 앞을 흐르던 금강(錦江)의 본래 모습이지 싶다. 물비늘 반짝이는 맑은 강물, 눈부시게 고운 모래가 어우러진 저런 풍경이 바로 비단강이 아니겠는가.

 돌거리고개 못미처에서 다시 한 번 대청호를 만났다. 하지만 아까 사진에서 보던 모래사장은 없었다. 맞다. 대청댐이 완공된 뒤 옥천 땅의 금강에서 모래사장을 찾는 건 언감생심이 되어버렸다. 재잘거리던 강물은 호수로 변했고, 은빛 금빛 모래사장은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SEOKHORI 178’, 호기심을 자극하는 조형물이 눈에 띄기에 카메라에 잡아봤다. 대청호 뷰가 좋다고 입소문을 탄 감성펜션이라고 한다. 겸하고 있는 카페는 인근 대전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번쯤 꼭 들러봐야 할 핫플레이스로 꼽힌다나?

 잠시 후 도착한 석호리(石湖里)와 국원리(菊園里)의 경계. 마을 표지석이 나그네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한다. 마을 유래비와 함께...

 석호리 경계를 벗어나다 만나는 대청호에게 마지막 이별을 고한다. 9구간에서의 대청호 조망은 이곳을 끝으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 국원리에 이르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반긴다. 국원리는 3개의 자연마을(안말·주막말·늘티)을 두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본동이자 가장 큰 부락이라는 안말이지 싶다. 이 마을에는 눈앞의 부귀영화에 눈이 먼 농부의 얘기가 전해진다. 점심 공양을 받은 스님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명당 두 곳을 추천하더란다. ‘만대영화자리와 당대발복자리인데, 당장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농부는 당대발복을 원했다나? 이는 부를 누리는 대신 문중의 손이 끊겨버리는 결과를 초래했고.

 큰 마을답게 보건진료소까지 들어서 있었다. 얘기를 조금 더 해보자. 같은 마을에 살던 경주이씨가 귀띔으로 얘기를 전해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만대영화자리라고 알려준 곳(늘티마을 근처 야산인데 이따가 지나게 된다)에다 묘를 썼고,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자손을 두고 잘 살고 있다나?

 보건소를 스치듯 지난 석호길 성왕로(옛 국도)’를 만난다. 오백리길 이정표(마성산 3.8/ 청풍정 2.9)는 삼거리인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란다. 도로표지판이 가리키는 옥천 방향이다.

 주인장의 신심이 얼마나 깊었으면 뜨락에 성모상까지 모셨을까? 남이 볼 때는 성호 긋는 것조차 망설이는 나로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200m쯤 더 걸으면 새말(주막말)’로 여겨지는 또 다른 동네. 과거 주막거리라 불리던 곳이다. 옥천장을 다녀오는 소정리·석호리·막지리·용호리 주민들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하던 곳이란다. 하지만 대청호에 물이 차면서 발길이 끊겼고, 주막거리라는 애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새말 근처의 국원교차로는 성왕로(옛 국도)를 새로운 국도(37호선)로 연결시키는 지점이다. 그러니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길쯤은 무시하고 곧장 직진하면 된다.

 곧이어 37번 국도의 아래를 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교각을 지나자마자 오백리길이 도로로부터 갈려나가기 때문이다.

 갈림길 초입에 이름표(‘신촌이라는데 새말의 한자어이지 싶다)까지 단 이정표(마성산 3.1/ 청풍정 3.3)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생략을 한 마성산의 사진(해설 포함) 2014년 답사 때의 것을 올려본다. 정상은 두 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랫단은 헬기장, ‘장룡산악회에서 세운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윗단에 설치되어 있다.

 정상은 사방이 확 트이기 때문에 조망(眺望)이 일품이다. 팔음지맥(八音枝脈)의 산줄기와 도덕봉과 장령산, 서대산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조망은 근거리에 있는 환산과 구()옥천 시가지라 할 수 있다. 물론 동쪽에는 조금 전에 지나온 이슬봉이 바라다 보인다.

 ! 우회했던 이 구간은 자건거길을 따른다는 걸 깜빡 잊을 뻔 했다. 도로 가장자리에 하늘색 선을 그어 차도와 구분했다. ‘대청호 도선코스(길이 44.4km)’라는 명품 자전거길인데, 아까 트레킹을 시작했던 진걸선착장에서 건너편 막지리까지는 배를 타야만 한다며 이름에 도선이란 특징을 덧댔다.

 잠시 후 도착한 늘티마을(국원리). ‘향수을 전통주교육원(원장 김기엽)’이 갈길 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붙든다. 전통누룩과 찹쌀만으로 빚었다는 막걸리가 술꾼인 내 침샘을 자극시킨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 궁중술빚기 대회에서 3년 연속 수상한 이가 술을 빚는다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안으로 들어가 시음부터 하고 본다. 막걸리는 물론이고 과하주·세빚주·송손주·당귀주·석탄주(삼키기조차 아깝다는 뜻) 등 종류도 참 다양하다. 다음은 김양희 실장(안주인이지 싶다)으로부터 막걸리의 종류와 빚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덕분에 막걸리와 청주·탁주를 구분할 수 있게 됐다). 불콰해진 얼굴로 교육원을 나설 때, 내 손에는 세 종류의 막걸리가 들려있었음은 물론이다.

 몇 걸음 더 걷자 석장승 한 쌍이 늘티소류지를 배경삼아 서있다. 최근 세웠다는데 장승의 앞에 제단까지 만들어두었다. ! 마을을 떠나기 전 유래나 살펴보자. 그동안 써오던 이름은 구건리(九巾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불리어왔다. 그러다가 1995년 안말의 서당 벽면에서 국원추전(菊園秋典)’이라는 본래 지명을 발견했고, 주민투표와 군의회 의결을 거쳐 아름다운 국화동산이라는 옛 이름(국원리)을 되찾았다.

 옥천읍 관내로 들어서자 관성도예전시장이 눈에 띈다. 눈요기라도 해보려고 다가가 봤지만 문이 닫혀있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마음에 드는 소품이라도 눈에 띄면 하나 사올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는 나는 마음에 드는 소품이 눈에 띄면 망설이지 않고 사는 편이다.

 옥천 사람들은 집 놓아두고 외박만 하나?’ 줄을 잇는 무인 텔에 집사람이 놀란 눈초리다. 대전 사람들을 노린 시설일 거라며 둘러댔지만 내가 보기에도 많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궁금증 하나. 국원리는 관광도로변의 관광영농에 눈뜬 곳이라고 했다. 마을에서 제배한 참외와 메론 등을 옥천-보은간 국도에서 판매해 수익을 올린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곳까지 오는 동안 특산물판매장이 한 곳도 눈에 띄지 않는 건 왜일까?

 옛 국도의 특징은 벚나무 가로수라 하겠다. 수령이 30년은 족히 넘는 듯 굵직한 몸통을 자랑한다. 길은 우아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는 가지 아래로 나있다. 사람들은 이 구간을 금강 향수 100리길이라 부른다고 했다. 교동저수지에서 소정리까지 옛 37번 국도를 따라 이어지는 8km가량의 코스인데, 봄이 무르익을 때면 흩날리는 벚꽃 비를 맞아가며 걷는 재미가 톡톡하다나?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길은 교동저수지를 가운데 두고 둘로 나뉜다. 그렇다고 고민할 필요까지는 없다. 둘 모두 구읍으로 이어지니 마음에 드는 쪽으로 진행하면 된다. 나는 저수지 오른편으로 난 나무데크길(‘구읍 벚꽃길이라고 했다)을 따랐지만...

 교동저수지는 1960년대 초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한다. 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왔다고나 할까? 그게 최근 아름다운 변신을 했다. 다른 저수지와 다르게 옥천이 낳은 정지용 시인의 시와 그에 걸맞은 조형물들을 수면 위에 펼쳐놓았다.

 교동저수지 둑을 타자 그 끄트머리에서 지용문학공원과 이어졌다. 저수지 가장자리에는 정지용 시에 나오는 얼룩소, 얼굴, 홍시와 같은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참고로 정지용은 1902년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1918년 휘문고보에 입학했고, 1926년부터 문단 활동을 시작한 이래 120여 편의 시를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여파는 시인을 월북 작가로 묶었고 그의 시들은 공개적 언급이 금지됐다. 그러다 1988년 해금과 함께 그의 시는 우리에게 돌아왔고, 그를 기리는 이런 공간은 물론이고 문학축제까지 생겼다.

 정지용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게 향수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저 얼룩소나 빨래하는 아낙들은 고향의 옛 풍경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저건 호수 1’을 형상화 한 작품일 것이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그 오른편은 오빠 오실 때 맛보이려고 남겨뒀다는 홍시일 것이고...

 지용문학공원의 중심은 구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다. ‘시비문학공원이었던 것을 2020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단다. 정지용의 시비가 주축을 이룬다는 게 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동갑내기인 김소월이나 윤동주·박용철·도종환·박목월 같은 시인들의 시비도 다수 있었다.

 시비는 단순히 시만 적혀있는 게 아니다. 종합예술을 지향하려는 듯 조각품(적힌 시에 어울리는지는 몰라도)에 새겨 넣었다. 시너지효과를 노렸다고나 할까?

 시비광장 위쪽에 있는 시인의 가벽에는 그의 일대기가 10편으로 나뉘어 새겨져 있다. 1902년 옥천면 하계리 탄생, 1918년 휘문고보 입학, 1926년 문단 활동 시작, 1950년 북한에 의해 서대문형무소 구금, 이후 월북 작가로 묶였다가, 1988년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시인의 문학도 해금됐다.

 정지용의 약력이 적힌 빗돌(도종화 시인이 썼단다)을 마지막으로 공원을 벗어난다. 그리고는 구읍 시가지를 횡단해 지용유적 제2 죽향초등학교로 간다. 도중에 향수를 닮은 집처럼 오래된 한옥들을 여럿 만나기도 한다. 하긴 고려 충선왕 때부터 20세기 초까지 옥천의 중심지였다니 어련하겠는가.

 오래된 마을에서는 찻집까지도 한옥인가 보다. 아니 내력이 있는 건물이니 그 흔한 찻집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저 집은 1910년 조선 10대 갑부로 불리던 김기태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옥천여중 교사(1944-1965)로 사용되었고, 2001년 김선기 서예가가 매입 식사대접 장소로 활용하다 지금은 그냥이란 찻집으로 전환했단다.

 정지용의 모교인 죽향초등학교 1909년 사립 창명학교(彰明學校)’로 설립됐다. 이듬해 옥천공립보통학교, 1938년 옥천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옥천죽향공립국민학교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100년 하고도 23년이나 더 되는 역사만큼이나 이름도 바뀌어 온 셈이다. 안내판은 시인이 1910년 입학, 1914년 졸업한 사실을 적고 있었다.

 시인이 공부하던 학교 건물은 1926년에 지은 근대 건축물(국가등록문화재 제57)이다. 외벽은 긴 목재를 비늘처럼 수평으로 포개 올려 비가 스며들지 않도록 했고, 지붕은 함석을 삼각형으로 단순하게 올렸다. 이는 목조교사의 일반적 형태였으나 1980년대 들어 대부분 사라졌다. 다행이 이곳은 2003년까지 교실로 사용되면서 헐리지 않고 남아 시인의 어린 시절을 전해준다.

 교육을 통해 민족을 일깨우려한 선각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범재 김규흥(凡齊 金奎興, 1872-1936)’의 기념물도 눈에 띈다. 선생이 이 학교의 전신인 사립 창명학교를 설립하고 목화밭을 기증해 학교 터로 사용하게 해 해방 후 학교에서 은수저 선물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교정에는 고려 후기 문화재(충북 문화재자료 제51) 죽향리사지 삼층석탑도 보존되고 있었다. 탑선골 절터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 육영수여사의 휘호탑도 세워져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그녀도 이 학교를 졸업(27)했단다.

 다음은 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나지막한 흙담 안에 아담한 초가(본채와 사랑채)가 들어서 있다. 하지만 지붕 이엉 교체공사로 인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상황은 다른 이의 글로 대신한다. <본채 안방에는 둥근 테 안경을 쓴 정지용의 초상화와 그의 시 할아버지가 걸려 있고, 부엌 옆에는 지용유적 제1’. 명시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1902 515(음력) 실개천가의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새집이 들어섰다는 동판이 붙어 있다.>

 생가 바로 옆에는 정지용문학관이 들어섰다. 그가 지은 시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정지용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일본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나온 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된 뒤로는 흔적이 끊겨버린다. 전쟁 후 정지용은 월북 작가로 묶였고 그의 시들은 공개적 언급이 금지돼 있었다. 그러다 김동리·박두진 등 48명의 문인과 각계인사들이 회복운동을 시작했고, 1988년 해금과 함께 그의 시는 우리에게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서면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검은 구두를 신고, 둥근 안경을 낀 시인이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 밀랍으로 제작된 인형인데 긴가민가할 정도로 생생한 모습이 방문객들을 흠칫 놀라게 만든다. 그렇다고 최고의 포토죤인 시인의 옆자리를 포기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전시실에는 시인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지용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그의 문학을 시대별, 연도별로 정리해 놓아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의미와 비중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게 했다.

 부속시설인 문학교실에서는 정지용 시어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시인의 시를 캘리그라피(Calligraphy) 기법으로 직접 써보는 자리인데, 행사에 참여한 둘레길 도반은 자신의 작품을 치켜들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만큼 유익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문학관 앞 골목길도 시인의 흔적들로 채워졌다. 옥천 여행자들에게 가장 핫한 포토죤이기도 하다. 많은 집 담벼락이 향수의 내용이 담긴 아기자기하고 예쁜 그림과 글로 완성되어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그뿐 아니다. 종달새, 호수, 홍시 등 정지용의 다른 시들도 그림으로 만날 수 있었다.

 실개천 난간에는 그의 시들이 걸렸다. 정지용시집(1948)과 백록담(1950)에 실린 시들이라고 한다. 이렇듯 향수를 비롯한 정지용의 작품들을 옥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생가의 사립문 앞에, 골목길 담벼락에, 실개천이 휘어 나가는 곳에

 방송사의 이슈 픽을 연상시키는 조형물도 눈에 띈다. 호수, 고향, 유리창, 향수 등 여러 문구가 적혀있는데, 그중에서도 첫 번째 픽은 단연 향수가 아닐까 싶다. 한가로운 고향의 따뜻하고 소박한 모습을 한 폭의 풍경화처럼 생생하게 그려낸 걸작으로, 일본 유학시절(1927) ‘조선지광에 발표됐다.

 옥천은 온통 향수로 도배됐다. 향수100리길·향수마을아파트·향수주유소·향수요양원·향수식당·향수식품 등등. 심지어는 포장마차까지도 향수를 내걸었다. 점심 때 안주 삼을 어묵을 샀던 곳이다.

 걷는 도중 옥천전통문화체험관도 만날 수 있었다. 한옥 숙박은 물론이고 다양한 체험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옥천을 전통문화와 놀이가 공존하는 체류형 관광단지로 육성하기 위해 조성했단다.

 모처럼 찾아온 옥천인데 어찌 육영수여사의 생가를 거를 수 있겠는가. 1925년 이 집에서 태어난 육영수 여사는 어린 시절을 쭉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1974년 이후 방치되어오다가 철거되어 터만 남았던 것을 2002년 생가지(生家址)가 충청북도 기념물 123호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1894년경에 지어진 집은 교동집(校洞宅)’이라 불리던 옥천지역의 명가로 1600년대부터 김··민 삼정승이 살던 곳이라고 했다. 1918년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가 매입하고 기단을 높여 개축했다고 전해진다. 99칸 집이었다는 이야기처럼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건너채·안채·뒤채·행랑·별당·후원·정자·연못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채에는 육영수여사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그녀는 우리 역사상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최고의 영부인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단다.

 생가 앞 광장에서는 청춘마이크란 야외공연을 하고 있었다. ‘청춘, 빛나는 무대로 나오다라는 주제로 각종 연주와 마술 퍼포먼스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펼쳐지고 있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옥천향교(충북 유형문화제 제97)’. 대성전과 명륜당, ·서재, 내삼문(명륜당이 외삼문을 겸한다), 홍도당(용도는 모르겠다)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성전에는 5(五聖)·10(十哲송조6(宋朝六賢)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우리나라 18(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단다.

 향교 입구에는 16기의 비석이 모여 있었다. 조선시대 옥천군을 다스리던 군수나 관찰사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인데, 그중 1958년에 세운 공적비(주인공인 한치봉은 옥천여중의 초기 교사(한옥)를 사서 기증한 분이다)가 눈길을 끌었다.

 날머리는 향교 앞 느티나무(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비석군 맞은편,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람한 등치를 자랑한다. 수령이 410년이나 된다니 1398(태조 7)에 지어진 향교와 함께 옥천을 지켜온 셈이다. 이 느티나무 아래서 오백리길 9구간 걷기를 마감했다. 오늘은 12.09km 3시간 30분에 걸었다. 코스 전체가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더디게 걸은 셈이다. 옥천의 명소들을 구경하느라 발걸음이 더뎌졌던 모양이다.

 김규흥 선생의 생가를 찾다가 놓쳐버린 사마소의 사진은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것을 빌렸다. 사마소란 조선시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지방 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이다. 효종 5(1654)에 세워진 옥주 사마소(충북 유형문화재 제157)’는 전국의 3곳 남은 사마소 중 유일하게 본래 자리에 남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