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나들길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 길)

 

여행일 : ‘22. 10. 9()

소재지 :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선원면 일원

여행코스 : 용흥궁중앙교회청하동약수터남장대호텔 에버리치남산리찬우물약수터철종외가(거리/시간 : 11.7km/ 실제는 10.98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 불리는 강화도에는 우리 민족의 수많은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강화 나들길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와 산과 벌판, 산골마을과 갯마을, 그리고 갯벌과 철새 서식지를 잇는 310.5Km(20개 코스) 길이의 역사·문화·자연 트레일이다. 그러니 나들()’란 이름처럼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들듯이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을 담아가면 되겠다. 오늘은 열네 번째 코스인 강화도령 첫사랑 길을 걷는다. 강화의 아픈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강화도령 원범(철종)과 봉이 처자의 애잔한 러브스토리를 스토리텔링 해 만들었다.

 

 들머리는 용흥궁주차장’(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05)

88올림픽도로로 김포까지 온 다음, ‘국도 48호선으로 갈아타고 강화대교를 건넌다. 강화대교교차로에서 빠져나와 강화읍내로 들어서면 강화군청에 이어 용흥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버스에서 내려 철종의 잠저(潛邸, 왕이 보위에 오르기 전 살던 집) 용흥궁부터 들러본다.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에서 시작해 철종의 외가가 있는 냉정리(선원면)에서 끝을 맺는 11,7km짜기 구간.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란 별칭처럼 강화나들길 20개 코스 중 가장 로맨틱한 코스로 꼽힌다. 첫 번째 러브스토리는 철종과 봉이가 처음 만난 장소로 추정되는 청하동 약수터’. 데이트 코스였을지도 모르는 강화산성 남장대를 거쳐 철종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았던 외가까지 이어진다.

 용흥궁(龍興宮)은 조선의 25대 왕 강화도령 철종이 11세부터 19세까지 살던 곳이다. 철종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이다. 은언군은 역모 사건에 연루돼 강화도로 유배됐고,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는 이유까지 덧붙여져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인 철종도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빈농으로 살다가 1849년 정치적 상황이 바뀌면서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한다.

 용흥궁은 말이 궁이지 아담한 기와집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원래는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강화도령이 왕위에 오른 뒤 기와집으로 개축했다는 것. 1853년 철종이 보위에 오르고 4년 뒤 강화 유수 정기세가 한옥을 짓고 용흥궁(용이 흥하게 되다)’이라 했으나, 작은 공간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들인 살림집 수준이라 다소 초라하다. 강화도령의 팍팍한 삶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나 할까?

 용흥궁을 빠져나오자 시멘트가 벗겨지고 철근이 드러난 낡은 굴뚝이 우뚝 서 있다. 옛날(1947-2005) 이곳에 있던 심도직물의 굴뚝이라고 한다. 한때는 종업원이 1200명도 넘었다지만, 지금은 용흥궁공원으로 바뀌어 옛 영화는 추억 속에서나 더듬어 볼 수 있다. 30m도 넘었다는 굴뚝이 5m만 남았으니, 추억도 그만큼 사라져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남쪽 방향, 그러니까 남산으로 연결되는 북문길을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4분쯤 걸어 만나게 되는 강화중앙시장은 현대식 건물이지만 전통적인 재래시장이다. 탐방로는 시장 앞 사거리에서 직진이다. 오른쪽은 첨화루(瞻華樓, 남한산성 서문)’로 연결된다. 주어진 시간에 쫓겨 포기해야했지만 강화의 핫블레이스인 조양방직도 그쪽에 있다. 이 공장은 지난 20-30년 정도 폐공장으로 방치되다가 미술관 카페로 변신했다. 낡은 공장을 미술품·고가구·골동품으로 채워 신문리 미술관이라고도 불리며 강화의 관광명소이자 이색카페로 유명하다. 엠제트(MZ)세대의 뉴트로(새로움과 복고를 합친 신조어) 성지로도 주목받는다.

 강화나들길에 들인 강화군청의 열정을 심심찮게 느낄 수 있었다. 여행자들을 위한 쉼터(팔각정 등)를 곳곳에 조성했는가 하면, 진전(眞殿, 왕의 어진을 봉안하는 곳)의 제사 때 정한수로 사용했다는 솔터우물 같은 옛 시설들도 새롭게 단장 해 여행자들에게 내놓았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길을 나서기 전 여행할 곳의 정보를 미리 알아두어야 하는 이유다. 요즘은 SNS나 관련 인터넷홈페이지 등 많은 정보가 넘쳐난다. 그러나 현지에서 물어물어 정보를 알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강화군에서도 발 벗고 나섰다. 중앙시장 뒤 1914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옥을 개량해 관광안내소를 만들어 놓았다.

 110년 전통의 강화중앙교회도 스치듯 지나간다. 거대한 몸집을 빼놓으면 특별한 게 없지만, 국민일보에서 본 옛날 사진은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치 창에 르네상스 건축의 특징인 가는 탑이 3층 높이로 솟구치는데, 특이한 점은 탑머리로 팔작 한옥지붕을 얹고 있다는 점이다.

 성산아파트 근처에서 잠시 헷갈렸지만,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 덕분에 무사히 길을 찾아나갈 수 있었다. 아파트 담벼락에 매달린 나들길 리본을 참조해도 되겠다.

 오르막 골목을 지나 능선으로 오른다. 남산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나온 지릉인데 탐방로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강화 사람들에게 남산은 동네 뒷산이다. 산책삼아 마실 나오기 딱 좋은 곳이라는 얘기다. 산자락 곳곳에 근린공원을 들어앉힌 이유일 것이다.

 탐방로는 무척 잘 닦여있다. 보드라운 흙길은 널찍했고 경사까지 완만했다. 약간이라도 가팔라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남산의 특징을 잘 살린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잣나무·진달래·자작나무 등 군락지들을 지명으로 삼았다. 그런데 건강의 숲 아이의 숲은 뭘 의미하는 걸까?

 어제가 한로(寒露),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절기이니, 가을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나 보다. 가을비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저 구절초 꽃들이 그 전령이고 말이다. <물결들이 밀려오는 강기슭에는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었습니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김용택 시인의 구절초꽃에서’>

 트레킹을 시작한지 40. 계단을 올라 청하동약수터(淸霞洞藥水)’에 다다른다. 1801년 낙향한 은언군(철종 할아버지)이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약수터다. 또한 강화도령 원범(元範)이 왕으로 오르기 전 강화도 처녀 봉이(鳳伊)’와 만나 사랑을 키워가던 곳으로도 알려진다. 이 약수터에서 만나 남장대 자락을 지나 찬우물약수터까지 걸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한다.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라는 14코스의 아명을 만들어낸 명소로 보면 되겠다.

 홍보용인지 강화도령과 봉이를 이미지화한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나들길 14코스의 지도를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란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시골스런 옷차림의 처녀총각이 더 눈길을 끈다. 기념사진 한 장 남기기에 딱 좋은 포토죤이라고나 할까?

 남산은 나지막한 산이다. 약수터는 그런 산의 7부 능선쯤에 들어앉았다. 그런데도 시원하고 담백한 물이 꽤 많이 흘러나온다. 하긴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었다는데 어련하겠는가. 하지만 옛날만은 못한 듯, 족탕으로 여겨지는 맞은편 물줄기는 물이 마른지 오래였다.

 약수터를 만난 나들길은 지금껏 이어온 임도를 버리고 산길로 들어선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는 오솔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버겁다싶을라치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잠시 후 웬만한 집 한 채 크기인 거북바위가 나타난다. 거북이를 닮은 이 바위는 어가를 탄 채 강화도를 떠나는 원범, 이제는 왕이 된 철종의 행렬을 바라보며 그의 무사와 안녕을 빌던 봉이의 일화가 남아있는 곳이다. 철종이 떠난 이후로도 매일처럼 이 바위에 올라 물을 떠 놓고 빌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얘기를 간직한 서글픈 바위지만, 간절히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입소문을 타면서 요즘은 많은 무속인들이 기도처로 삼곤 한단다. 제단으로 여겨지는 흔적들이 곳곳에 널려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우물도 눈에 띈다. 한 곳은 물이 고여 있고, 다른 한 곳은 초와 향을 키울 수 있는 아궁이다. 상부에 제기까지 놓여있는 걸 보면 이곳 또한 기도처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것도 영험한... 하긴 어떤 이는 요 아래 약사사 스님의 입을 빌어 우물의 영험함을 설명하고 있었다. 물의 양이 기도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난다나?

 기도터부터는 생태체험 숲으로 조성된 잣나무 숲을 걷는다. 10년은 족히 넘었음직한 커다란 잣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찼는데, 탐방로는 그 사이를 요리조리 헤집으며 위로 오른다.

 청하동약수터에 10. ‘남암문(南暗門)’에 올라선다. ‘암문이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비밀 출입구이다. 성안의 필요한 물품을 운반했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는 구원을 요청하거가 적을 역습할 때 이동통로로 사용했다. 그러니 문이 자그마했을 것은 당연.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문은 마차가 지나다녀도 될 만큼 컸다. 이는 강화산성 규모가 대량의 물자수송이 필요했을 정도로 컸다는 증거이리라.

 나들길 이정표는 15코스만 남장대로 가라하고 14코스는 곧장 직진하란다(나들길은 남산에서 14코스와 15코스가 상당히 겹친다). 하지만 난 15코스인 남장대부터 올라보기로 했다. 강화산성의 성벽이 남산의 산자락을 따라 이무기처럼 아찔하게 이어진다. 강화산성은 고려산성으로도 불리는 데, 1232년에 축성돼 39년간 몽골의 침략에 맞섰다. 당시엔 내성·중성·외성으로 겹겹이 쌓아 섬을 옹위했다 하나 지금 남은 것은 내성뿐이다. 그 둘레는 약 7.1km.

 오르다 힘이 들면 가만히 뒤를 돌아보면 된다. 막힐 것 없이 탁 트인 강화의 풍경이 그동안의 고생을 한눈에 씻게 해준다. ! 이 부근은 MBC 월화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에서 촬영지로 이용되기도 했단다. 여주인공(은산)과 남주인공(왕린)이 말을 타고 지나가던 아름다운 배경으로 성곽길과 진달래꽃이 노출됐었다.

 성벽의 가장 높은 지점인 남산의 정상에 도달하면 강화산성의 3개 장대 중 유일하게 남은 남장대가 우리를 맞아준다. 흔히 보는 정자와는 뭔가 다른 포스를 보여주는데, 몽골 침략 당시 지휘부가 머문 곳으로, 사방에 장대가 있었다지만 남은 곳은 이 곳뿐이다.

 남장대는 조선시대 서해안 방어를 담당하던 진무영(鎭撫營)에 속한 군사 시설로 감시와 지휘소 역할을 하던 곳이다. 누각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허물어졌다가 2010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장대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염하 건너 김포 땅은 물론이고, 날씨가 좋으면 북한의 개성 땅까지 바라보인다고 한다.

 강화군의 배려도 돋보인다. 방향마다 전경 안내도를 세워, 실물과 대조해가며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나들길은 이제 서남쪽 능선을 따른다. 길을 가로막는 성벽은 망루를 이용해 넘는다. 산불감시초소로 여겨지는 망루를 가운데 두고 성안·밖으로 나무계단을 놓았다.

 오래가지는 않지만 능선을 탄다. 우리야 나들길을 걸을 때나 만날 수 있는 강화산성이지만 이곳 주민들에게는 산책코스로 사랑받는 동네 뒷산이다. 길이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음에도 불구하고 널찍하면서도 또렷한 이유일 것이다.

 이곳에서도 울창한 잣나무 숲을 만날 수 있었다. 남산에 조성된 여덟 개의 생태체험 숲(건강의 숲, 단풍나무 숲, 남산 약수터, 아이의 숲, 자작나무 숲, 잣나무 숲, 사랑의 숲, 바위정원) 중 하나인 잣나무 숲이다.

 길은 합쳐졌다 나뉘기를 반복한다. 강화산성이 강화읍의 사방에 울타리처럼 두른 성벽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어디서든 접근할 수 있지 않겠는가. 14코스와 15코스가 다시 만나는 지점(이정표 : 국화리공동묘지 250m/ 청하동약수터 500m/ 남장대 200m)도 그중 하나다. 이어서 몇 걸음 더 걷자 14코스와 15코스가 또 다시 나뉜다. 국화저수지로 향하는 15코스와 이별을 고한 14코스는 왼편 사랑의 숲으로 내려선다.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떨어진다. 222.5m로 고도가 높지는 않지만 남산은 꽤나 매섭고 옹골찼다. 산성의 입지조건으로는 이만한 곳도 없었겠다. 하긴 강화산성이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견뎌낸 요새라 하지 않았던가.

 남장대에서 15, 생태체험 숲 가운데 하나인 사랑의 숲을 만났다. 200평쯤 되는 공터에 사랑을 상징하는 여러 조형물들을 배치했다. 그 옛날 강화도령 원범과 봉이 처녀가 순박한 사랑을 나누었을 법한 장소지만, 그네들을 나타내는 조형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강화나들길과는 별개로 조성됐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형물은 Love 가 주를 이룬다. 사랑의 결실인 결혼반지도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키스 장면이 아닐까 싶다. 나뭇가지 모양의 선들로 키스를 하기 직전인 남녀를 그려냈다.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어떤 곳은 아찔할 정도로 가파르다. 흙길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그게 더 미끄러워질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튼튼한 밧줄 난간을 매어놓아 몸을 의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4(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20)쯤 내려서자 에버리치 호텔의 뒤편(이정표 : 종점 6.6/ 시점 3.2). 나들길은 이곳에서 왼쪽 방향이다.

 하지만 방향표식을 놓친 나는 오른쪽으로 가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덕분에 호텔의 전모를 살펴볼 수 있었지만...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알아차린 지점에서 본 선행리 들녘이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을 계속해서 가더라도 저곳에서 나들길을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난 에버리치호텔로 되돌아가 정규 탐방로를 따르기로 했다.

 호텔부터는 널찍한 도로를 따른다. 이어서 남산마을 주택가(이정표 : 종점까지 5.9km)를 횡단하듯이 통과한다. 때문에 갈림길을 여럿 만난다. 하지만 길 찾기 쉽다는 게 나들길의 장점 아니겠는가. 이정표나 리본 등 둘레길 표식을 하도 잘 해놓아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내려가는 도중 사소한 공방 다을을 만났다. 공방지기가 직접 만든 도자기에 다육식물을 심어 판매한다는 곳이다. 다기·접시·화병 등 직접 만든 공예품들로 꾸며진 내부가 볼만하다는데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월간 전원속의 내집에서까지 소개했을 정도로 가옥의 구조도 독특하다니 나중에라도 한번쯤 들어가 볼 일이다.

 남산마을을 빠져나오면 명진 컨벤션웨딩부페’. 군 단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커다란 규모를 자랑한다. 예식장말고도 컨벤션센터와 뷔페까지 겸한다니 강화도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나들길은 버스정류장(명진부페)을 코앞에 두고 왼쪽 골목(이정표 : 종점까지 5.4km)으로 들어간다. ‘태민의 담벼락을 오른쪽에 끼고 돈다면 이해가 쉽겠다.

 뒤이어 나타나는 들녘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간다. 풍요로움으로 넘치는 들녘 너머로는 남산이 오롯이 솟아오른다.

 들녘을 빠져나온 다음에는 선행천의 둑길을 따른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저 들녘의 풍요로움은 선행천이 있어 보장된다. 혈구산 동쪽기슭과 혈구산과 고려산 사이 고비고개에서 시작되는 선행천은 동락천과 합류하여 선원면과 강화읍 경계를 따라 흘러 갑곳나루 옆에서 염하를 만난다.

 선행천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붉은 색으로 정비된 둔치, 제방도로에는 벚나무가 나란히 심겨 있다. 산책하기 딱 좋게 꾸며졌다고 보면 되겠다. 걷다가 피곤해지면 둔치에 놓여있는 벤치에서 잠시 쉬어가면 될 일이고.

 아치형의 예쁘장한 다리(이정표 : 종점까지 4.8km)를 건너자 나무들의 집이 잠시 쉬었다가란다. 교회의 또 다른 샘플로 잘 알려진 곳이다. 예배당을 기본으로 하지만, 평소에는 콘도(신도들을 위한)  MT형의 교육·훈련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시설의 외부공간이 개방되어 있었다. 덕분에 빗속에서 요기를 때울만한 공간을 찾던 나에게는 구제주가 되어주었고 말이다.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라는 평소의 소신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왔지만, 자리를 내어준 교회에 글로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이후부터는 선행리의 마을안길을 따른다. 이 마을은 무신정권의 최고실력자였던 최우가 세웠다는 원찰 선원사(현 충렬사 근처)’가 있었다는 곳이다. 최우는 몽고군에 의해 불탄 대장경을 다시 조성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병란을 물리치고자 1236년 강화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대장경 조판불사를 시작했다. 대장도감은 이후 선원사로 옮겨졌고, 최우의 후원 아래 16년간의 작업 끝에 1251년 재조대장경이 완성됐다.

 마을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는 시리미로(2차선 도로)’는 횡단한다. 나들길이 건너편에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조금 애매하지만 이정표(종점까지 4.1km)나 리본 등 나들길 표식이 잘 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포장까지 된 임도지만 혈구산 자락의 울창한 숲속을 헤집는 형태라서 지루하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혈구산의 맑은 공기를 실컷 마시며 걷는 기분 좋은 구간이다.

 나무들의 집에서 15. ‘찬우물약수터에 닿았다. 철종이 어린 시절 외가를 오가던 길목에 있는 약수터이다. 위치로 보아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목을 축였지 않았을까 싶다.

 약수터 고무대야에는 막걸리가 한 가득이다. 원범은 훗날 임금이 되어서도 봉이와의 추억을 잊지 못해 청하동에서 떠온 물로 막걸리를 담그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저 막걸리 하나 챙겨 당시 철종이 느꼈을 감정을 잠시나마 이입시켜 볼까나?

 약수터 주변은 어르신들이 점령했다. 동네 주민들로 여겨지는 할머니들이 좌판을 펴고 제철 체소를 팔고 있었다.

 이곳도 원범이와 봉이의 데이트 장소였다고 한다. 청하동약수터에서 함께 걸어온 청춘 남녀는 이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 걸어 온 길을 되돌아갔단다. 데이트 코스의 반환점인 셈이다. 그걸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 구간 조형물 말고도 사랑의 팻말 걸개판을 세워놓았다.

 약수터를 빠져나온 나들길은 4차선의 84번 지방도를 횡단한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원범 총각과 봉이 처자의 사랑 놀음에 동화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요놈에게 홀렸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바로셀로나의 구엘공원에서 만났던 풍경, 즉 트랜카디스기법(Trencadis : 타일과 유리, 거울 등을 깨서 모자이크화)으로 장식된 기다란 벤치(‘세상에서 가장 긴 벤치라고 했었다)를 떠올렸고, 당시를 회상하며 타일화를 감상하다 그만 길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가우디(Antonio Gaudi)’의 작품을 떠올렸으니 오죽했겠는가.

 하나하나의 파편들은 모여 원범 총각과 봉이 처자를 만들기도 한다.

 10분 남짓 엉뚱한 길을 걷다 되돌아와 이번에는 도로의 반대편 인도를 걷는다. 도로를 횡단한 다음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음은 물론이다.

 조금 걷다보면 도로표지판 아래에서 오른쪽의 야산으로 올라가는 길(이정표 : 종점까지 3.1km)이 나 있다. 14코스의 마지막 산악 구간인데, 낮고 완만한데다 그 거리까지 짧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오히려 지친 심신을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회복시켜주었다. 이곳은 울창한 잣나무 숲, 피톤치드 흠뻑 머금은 솔향기가 사방으로 넘치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일단 능선으로 오르면 산길은 더 이상의 오르막 없이 완만하게 아래로 향한다. 가끔은 표식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내려가면 다시 나타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다가 산길을 빠져나올 즈음 양봉시설을 만났다. 하지만 늦가을이어선지 벌의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는다.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냉정마을’, 나들길은 마을을 횡단하듯 지나가는데, 눈에 들어오는 주택들이 하나같이 멋지다. ‘냉정(冷井)’이 맑고 시원한 물이 펑펑 쏟아져 나오는 샘을 이르는 지명일지니, 그런 여건을 찾아 부티 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나 보다.

 찬우물약수터에서 25(트레킹을 시작한지는 2시간 25). 나들길은 또 다시 84번 지방도(이정표 : 종점까지 2.1km)로 올라선다.

 1923년에 개교해 올해 나이가 100살이나 되었다는 선원초등학교는 스치듯 지나간다. 때문에 운동장 한가운데서 자란다는 천지송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한 뿌리에서 여러 개의 줄기가 뻗어 나와 옆으로 갈라지면서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보여준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갈수록 굵어지는 빗줄기가 모든 걸 나태하게 만들어버렸으니 어쩌겠는가.

 초등학교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이번에는 드넓은 평야지대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몇 번의 이정표 안내를 받으며 냉정리 들녘을 가로지른다. 시야가 툭 트여 마음까지 넉넉해지지만, 오뉴월 뙤약볕이라도 쬐인다면 그늘이 없어 고역을 치를 수도 있겠다.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저런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고려와 조선의 권력자들이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이곳 강화도를 피난처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선원초등학교에서 30. 드디어 철종외가(哲宗外家,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8)에 도착했다.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지어진 집으로 철종의 외삼촌인 '염보길'이 살았다는 집이다. 집은 경기지역 사대부 가옥의 형태를 띠고 있다. 특이한 건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인데 가운데를 흰 벽으로 구분해 놓았다.

 조카가 왕위에 오른 후 지어져서인지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멋지기까지 했다. 사랑채의 누마루 위로 오르면 안채가 보이고, 담 너머로는 너른 들녘이 눈에 차오른다. 참고로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고 H자형 배치를 취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자형으로 연결되고 안(안채)과 밖(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담장으로 간단히 분리했다.

 스탬프보관함 옆의 무지렁이처럼 그려진 강화도령,  원범(철종)’이 눈길을 끈다. 나무를 해 팔아가며 사는 일자무식의 더벅머리 숫총각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앎이다. 철종은 1831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왕손은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으니 공부에 매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기본 소양을 갖추는 교육은 받았다. 재위 시 사가에 있을 때의 교육 정도를 묻는 질문에 소학까지 배웠다고 철종은 말한다. 그럼에도 마치 철종이 일자무식인 것처럼 시중에는 알려져 있다.

 날머리는 대장간마을 버스정류장(강화군 선원면 금월리)

철종외가는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84번 지방도까지 10분 정도를 더 걸어야만 했다. 냉정2리 마을회관 앞 도로 건너편에 버스정류장을 겸한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10.98km를 걷는데 3시간30(간식 시간은 뺐다)이나 거렸다. 남산의 오르막 산길도 속도를 떨어뜨렸겠지만, 그보다는 우산을 쓰고 걷느라 속도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epilogue), 철종(원범)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왕으로 단종·사도세자와 함께 조선 왕실의 야사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인물이다.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원범은 역모에 휩쓸려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고 나무를 베어 팔아가며 살다 현종이 급사하자 하루아침에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천자문은 깨우쳤으나 다른 학문을 닦을 여유가 없었던 삶 때문에 왕으로서의 그의 지시는 조정 권신들에게 반박 받고 무시되기 일쑤였으며 하루아침에 익숙해질 수 없는 까다로운 궁중 예법은 예전의 건강한 젊은이를 극도로 예민하게 만든다. 결국 실권 없이 방황하며 시간을 보내다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그런 비운의 삶을 살다 간 때문인지 철종은 여러 야사를 낳았다. 왕위에 오르고서도 강화에서 농사지으며 마셨던 막걸리를 잊지 못해 아내인 철인왕후 김씨가 몰래 친정에 사람을 보내 구해서 올렸다는 이야기나, 강화도에서 농민으로 살 때 연정을 품었던 봉이(’양순이라는 설도 있음)’라는 평민의 여식을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철종의 그런 지난했던 삶은 애잔했던 러브스토리가 덧입혀지면서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란 명품 둘레길로 다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