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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오백리길 13구간(한반도 길)

 

여행일 : ‘23. 2. 18()

소재지 : 충북 옥천군 안남면과 안내면 일원

여행코스 : 안남면사무소독락정금정골둔주봉한반도전망대점촌고개화인마을염수재(걸포마을)신촌교(거리/시간 : 13km, 실제는 13.89km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열세 번째 구간인 한반도길(13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둔주봉이라는 산봉우리 하나를 오롯이 넘는다. 대신 금강의 물줄기가 만들어낸 절경, 즉 한반도 모양의 지형을 눈에 담게 된다. 구간 브랜드로까지 굳어진 이유이다.


 들머리는 안남면사무소(옥천군 안남면 연주리)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상주) 보은 IC에서 내려와 37번 국도를 타고 옥천방면으로 12km쯤 내려오다 인포교차로(옥천군 안내면 인포리)에서 575번 지방도(안남로)로 옮겨 5km쯤 들어오면 안남면소재지인 연주리에 이르게 된다.

 한반도길이란 이름처럼 대청호의 상류, 즉 금강 물줄기가 꿈틀대면서 빚어놓은 한반도 모양의 지형을 눈에 담는 구간이다. 대신 전망대가 있는 둔주봉(384m)’을 오롯이 넘게 된다. 이밖에도 200m 내외의 능선을 두 곳이나 더 넘어야만 한다. 구간 거리가 13km에 불과한데도 쉽지 않은 코스로 분류되는 이유이다.

 오백리길 13구간의 얼굴마담은 한반도 지형이다. 하지만 그 만남을 위해서는 둔주봉(또는 등주봉)이라는 산봉우리부터 올라야만 한다. 면사무소 앞에 산행안내도를 세워놓은 이유일 것이다. 오백리길은 독락정에서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다 금정골에서 정상을 향해 치고 오른다.

 안남초등학교 앞(남쪽)으로 걸어가며 트레킹이 시작된다. 참고로 오늘 걷게 될 안남면과 안내면은 신라의 아동혜현(阿冬兮縣)’에서 시작된다. () ()’의 뜻이고 동() (), 또는 고을의 뜻을 지녔으니 고대부족국가의 통치자가 있었던 고을,  왕읍(王邑)’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그러다 고려 초(940) 안읍현(安邑縣)으로 이름을 바뀌어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옥천군 안내면과 안남면이 되었다.

 학교 앞 이정표는 직진 방향의 독락정으로 가란다. 하지만 반대편에 위치한 인포리도 함께 제시한다. 막 되먹은 탐방로(그만큼 거칠었다)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 즉 둔주봉에서 한반도지형을 살펴본 다음 이곳으로 되돌아와 도로를 따라 인포리로 가라는 안내일지도 모르겠다.

 도로변의 옛 우물은 지붕까지 올려 보존하고 있었다.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까지 겸한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으로 살짝 덧씌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 ‘독락정(연주2)’에 이르니 거대한 당산나무가 길손을 맞는다. 초계주씨 집성촌으로 마을 옆 정자에서 이름을 따왔다. 아니 정자를 세운 독락옹(獨樂翁)의 정신을 계승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주몽득은 임진왜란 때 추령에서 왜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고, 1607(선조40) 사답사(四答使)로 일본에 건너가 포로 1000명을 소환해오기도 했다. 1624(인조2)에는 이괄(李适)의 반란을 진압하는 공도 세웠단다.

 내일은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雨水), 하지만 농사일을 시작한다는 춘분(春分)은 한 달이나 남았다. 그런데도 부지런한 농부는 이미 논을 갈고 있었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저 농부의 올 농사는 틀림없이 풍년일 것이다.

 잠시 후 금강의 물줄기가 보이는가 싶더니 비탈진 언덕에 걸터앉은 독락정(獨樂亭, 충북 문화재자료 제23)’이 얼굴을 내민다. ‘영묘사  3개의 건물이 나란히 늘어섰는데, 인근 유생들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등 서원 구실을 했다는 독락정은 맨 끝에 있다.

 정자 주변은 초계주씨세거지비와 시조인 한림학사 주황의 위령비, 독락옹 주몽득의 송덕비 등을 위시해 초계 주씨(草溪 周氏)’ 가문의 여러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시조인 주황(周璜)은 주나라 왕손의 후예로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를 지냈다고 한다. 오계지란(五季之亂) 때인 907(효공왕 11) 신라로 건너와 초계에 정착했단다.

 독락정은 1607(선조 40) 절충장군·중추부사 벼슬을 지낸 주몽득(周夢得)이 세운 정면 2(1965년 개축하면서 양쪽에 툇마루를 설치 3칸이 되었다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다. 정면에 당시 군수였던 심후(沈候) 독락정이란 현판이, 마루에는 송근수(宋近洙)의 율시기문(律詩記文)을 비롯한 10여 점의 기문액자가 걸려 있다.

 독락정을 살펴본 다음 다시 길을 나선다. 도로변에 위치한 양수장의 축대에는 민화가 그려져 있었다. 강변에 둘러앉아 물고기를 관찰하는가 하면 남자아이들은 물고기를 잡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

 이제 오백리길은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강물을 왼편 옆구리에 차고 걸으니 강변산책로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강 건너는 한반도길(13구간)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낸 지형(한반도 모양의 )이다. 그 끄트머리 백사장을 바라보며 옛 선비들이 느꼈을 풍취를 이입해 본다. ‘맑게 흐르는 강물은 십리 길의 깨끗한 모래 위에 거울처럼 열려있네라는 독락정의 상량문에 적혀 있던 글귀를 떠올리면서...

 강변에 기대어 쉬고 있는 나룻배 한 척이 한가롭기 짝이 없다. 겨울철 긴 가뭄은 대청호 수위를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덕분에 대청호의 얼굴마담인 호숫가 모래사장이 속살까지 보여주건만, 저 배는 무심한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 하릴없이 낮잠만 잔다.

 굽이굽이 흘러온 금강은 도중에 지류를 품으면서 몸집을 한껏 부풀렸고, 그 큰 덩치 덕분에 낚시꾼까지 품었다. 저 낚시꾼은 세월을 낚았다는 강태공이 부럽지 않을 것 같다. 옥천 제일의 경관을 찌 너머에 두었으니 입질이 조금 없다고 무슨 대수겠는가.

 길은 차도에 가까울 정도로 넓다. 아니 지나다니는 차량이 제법 되는지 바퀴자국까지 나있다. 하지만 이 구간은 비가 많이 올 때는 진입이 통제된다. 대청호의 수위가 높아지면 물에 잠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른편 산비탈은 온통 칡넝쿨로 덮여있다. 공생(共生)이라는 산림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주범이다. 하지만 역사의 바늘을 조금만 거꾸로 돌려보면 칡은 정말 고마운 식물이었다. 뿌리·줄기··꽃 모두 요긴하게 쓰였다. 뿌리는 흉년에 부족한 식량을 대신했으며, 질긴 껍질은 삼태기를 비롯한 생활용구로 널리 이용됐다. ‘동의보감은 칡꽃에 대한 효능도 적고 있다. 칡꽃과 소두화(팥꽃)를 같은 양으로 가루를 내어 먹으면 술을 마셔도 취할 줄 모른단다. 술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효능이 아닐까 싶다.

 강변의 산자락은 전형적인 육산, 하지만 물줄기가 휘돌아가는 곳에서는 암벽이 돌출되기도 한다. 그게 조화로웠던지 금강을 둘러싸고 있는 풍광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렇게 25분쯤 걸었을까 양봉 농가가 나온다. 벌통 수십 통을 뒤꼍에 두고, 앞마당에는 큰 평상과 경운기까지 놓여있다. 농가의 틀을 갖춘 모양새인데, 부업으로 고기까지 낚는지 강가에 고무보트도 한 척 묶여있었다.

 주인장은 자연인처럼 살아가는 모양이다. 양봉의 규모가 제법 큰데도 천막집에서 살고 있었다. 굴뚝의 온기에 몸을 의탁하던 새 한 마리가 사람 소리에 놀라 후다닥 날아올랐다. 하지만 하릴없을 게 뻔한 주인장은 인기척도 내지 않는다.

 몇 걸음 더 걸으면 고성삼거리’. 오른편은 금정골까지 에돌아가는 게 귀찮은 이들이 곧장 등주봉으로 치고 오르는 지름길이다. 아니 아까 마을(독락정)에서 만난 주민은 마을에서도 등주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있다고 했었다.

 이정표(금정골 1.0/ 등주봉 1.9/ 독락정 2.2)가 지시하는 금정골 방향으로 직진한다.

 누군가의 불행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될 수도 있는 모양이다. 기생식물로 몸살을 앓는 나무들이지만, 우리 같은 나그네들에게는 강물과 어우러지는 멋진 풍광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17분쯤 더 걸어서 닿은 금여울 농원에서는 주인장의 풍류를 엿볼 수 있었다. 금강을 마주하는 아름다운 풍광을 농원의 이름에 담았다. ‘錦江 금여울’. 누가 봐도 우리말의 한판승이다.

 주인장의 멋은 솟대에서도 느껴졌다.

 조금 더 걸으면 마지막 농가. 일구어놓은 텃밭이 제법 너른데도 움막에서는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풍광이 좋아 나 역시 홍천에다 농장을 마련했었다. 그게 벌써 20년이 되었고 틈틈이 일군 과수원도 틀을 갖췄다. 하지만 놀러 다니기 바쁜 난 고작해야 일 년에 열흘 정도 쉬다 올 따름이다. 내 나이 아직은 젊었음이리라.

 이곳에서 길은 혼란스러워진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농가의 맞은편 텃밭을 지나기만 하면 탐방로가 선연하게 나타난다.

 길은 나있지만 편치는 않다. 무정한 잡목은 길까지 잠식해버렸고, 그것으로도 부족했던지 넝쿨식물이 발목을 휘감기도 한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강변 풍경이 고와선지 고달프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렇게 5분 남짓 진행하자 또 다른 갈림길,  금정골삼거리가 나온다. 곧장 직진하면 피실로 연결된단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동이면 석탄리의 피실’, 즉 대청호로 인해 지금은 물에 잠겨버렸다는, 수몰을 피한 곳에 오토캠장(옥천 팜랜드)을 조성해놓았다는 그 마을과는 어떻게 다를까?

 이정표(등주봉 정상 1.3/ 피실 1.4/ 독락정 3.2)는 등주봉 정상을 향해 오른편 능선을 치고 오르란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직선으로 치고 오르는 산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1.3km를 오르는 동안 고도를 300m 이상이나 끌어올리려면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가끔은 금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산길로 들어선지 18. 땀을 한바가지가 흘렸는데도 이정표(등주봉 정상 0.7/ 금정골 0.6)는 아직 절반도 못 올라왔단다.

 이후에도 숨이 턱에 걸리도록 치고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오르막길은 속도를 조금 떨어뜨리는 게 상책이다. 수행자가 참선하듯이 마음을 비우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더디게 옮겨본다.

 구호지점표지판의 변신? 탐방로의 주요 지점에는 안심위치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구조재난이 주목적인 여느 산들과는 달리 등산로 범죄예방의 기능을 더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코스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경사가 더 가팔라졌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을 일러 코에서 땅 냄새가 난다고 했었다. 경사가 오죽 가팔랐으면 땅에다가 코를 박다시피 하며 오르겠는가.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둔주봉(屯駐峰, 또는 등주봉)에 올라설 수 있었다. 하지만 정상(384m)에서는 고진감래라는 고사성어도 남의 집 얘기일 따름이었다. 그 고생을 하며 올라왔건만 서너 평 남짓한 공터에 정상표지석(재경안내산악회에서 세웠는데 登舟峯으로 적고 있었다. 요 아래서 모여 사는 초계주씨들 족보에 그렇게 쓰여 있단다) 하나만 외로웠기 때문이다. 한 곳으로만 트이는 조망도 잡목이 아랫도리를 잘라먹어 버렸다.

 정상에서 한 단을 내려와 이정표(전망대 0.8/ 금정골 1.3)가 가리키는 전망대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 또 다른 이정표는 이곳에서 피실로도 내려갈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금정골 방향 10m 지점에서 둔주봉 산성이라는 또 다른 표석을 만날 수 있었다. 정상 주위에 150m 길이로 쌓았다는 삼국시대 토성이다. 산봉우리에는 봉수대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토성은 물론이고 봉수대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산 길은 안전용 밧줄을 매어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밧줄구간이 끝나는 안부에서 삼거리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정표(등산로입구 1.6/ 고성 1.9/ 둔주봉정상, 피실 0.9)는 오른편이 고성에서 올라오는 길임을 알려준다. 비가 많이 올 때는 이 구간의 진입을 금한다는 안내판도 보인다.

 삼거리를 지나서도 위험성은 가시지 않았다. 벼랑에 가까운 산비탈을 횡으로 째며 난 오솔길이 벼룻길처럼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한눈을 팔다간 자칫 큰 사고를 부를 수도 있겠다.

 하산을 시작한지 18. ‘한반도전망대로 올라선다.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고 둔주봉정(屯駐峰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운치를 더했다. 벤치를 놓아 쉼터까지 겸하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우린 잠깐이지만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독락정에서 금강의 풍광을 바라보면서 시를 짓고 술잔을 나누었을 옛 선비들의 여유를 소환시켰음은 물론이다. 마침맞게, 둘레길 도반이자 갑장인 유사장이 육회까지 준비해 왔다. 옛 선비들이 바라봤을 풍경에 그들이 나누었을 술과 안주까지 갖췄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난간에 서자 금강의 물길이 U자를 그리며 휘돌아나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런데 강 건너 물길 안에 갇힌 땅이 영락없는 한반도가 아닌가. 하지만 그동안 보아오던 한반도 지형들과는 많이 다르다. 동과 서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는데, 이런 지형은 전국의 한반도지형 중 이곳이 유일하단다.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떠나 다른 곳과 다르다는 특이성이 사람을 불러 모은다고나 할까?

 상황을 설명해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지형의 길이는 1.45km, 실제 한반도를 ‘980분의 1’로 축소시킨 크기라고 한다. 다만 동·서가 바뀌었을 따름이다. 아무튼 저런 상황에 아름다운 경관이 더해지면서 옥천 제1이 되었다.

 정자 앞에는 마법의 볼록거울이 세워져 있었다. 거울을 통해서 보면 동서가 제대로 된 한반도가 눈에 들어온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산맥에 해안선까지 한반도를 쏙 빼다 닮았다.

 비경에 쏙 빠져 있다가 아쉬운 듯 발걸음 옮긴다. 점촌고개로 내려가는 길은 그야말로 비단길이다. 울창한 침엽수림이 떨구어놓은 솔가리가 수북이 쌓여,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느낌으로 걷게 된다.

 솔향기가 물씬 풍기는 숲길 곳곳에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운치 있는 소나무 숲속에서 노닐며 힐링까지 얻어가라는 모양이다.

 점촌고개에 내려서기 직전 길은 침목계단으로 변한다. 요리조리 방향을 틀면서 만들어내는 곡선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전망대를 출발한지 17, ‘점촌고개로 내려섰다. 제 구실을 못하는 이정표(안남면사무소 1/ 피실나루터/ 한반도전망대 0.8)가 오히려 길 찾기를 더 헷갈리게 만드는 지점이다. 양 방향 어디에서도 13구간의 표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대체 어디로 가란 것일까?

 핸드폰에 깔아놓은 gpx트랙을 따르기로 했다. ‘피실 나루터 방향으로 3분쯤 내려가자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가란다. 수몰되기 전 읍내 장과 연결시켜주던 피실 나루터는 직진이다. kakaomap은 요 아래 점말골(‘안피실로도 불릴 게다)’과 동이면(석탄리) 피실이 금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두어 채의 농가가 전부인 꼬맹이 마을(‘점촌마을이 아닐까 싶다)을 지난다. 개가 세 마리나 지키고 있지만 오랜만에 만난 길손이 반가운지 짖지도 않는다. 아니 오히려 꼬리까지 흔들어준다.

 애국심은 저런 마음에서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면서도 빈 집에 태극기를 게양해놓았다. 어디에 살던지 애국심까지 변할 게 있느냐는 듯이...

 조금 더 올라 만나게 되는 대나무 숲은 많은 이들이 헷갈려하는 지점이다. 오백리길은 이곳에서 왼쪽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비슷한 풍경이어선지 오른편으로 들어섰다는 후기가 의외로 많았다.

 대나무 숲을 지나자 잡목만이 가득한 야산이 나타난다. 길의 흔적을 찾기가 힘든 구간이다. 그런 흔적조차도 고도를 높여갈수록 더욱 약해져갔다. 그저 나뭇가지에 매달린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를 등대삼아 오를 따름이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gpx트랙과 일치하는 걸 보니. 그도 같은 앱을 다운받아 왔나보다.

 갈 길을 방해하는 잡목은 그나마 양반이라 하겠다. 복분자(覆盆子)같은 가시넝쿨들이 들어찬 곳은 진입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을에 소주 몇 병만 챙겨오면 한겨울 넘기기는 일도 없겠다는 일행의 농담까지 썰렁하게 만들어버리는 고약한 풍경이라 하겠다.

 깊은 산골 옹달샘. 멧돼지가 파놓은 작은 물웅덩이도 만난다. 산속에서 멧돼지와 만나면 어떻게 대응하라고 했더라?

 대충 방향을 잡아가며 길 없는 길을 찾아나간다. 그렇게 올라선 능선(앱은 높이를 243m로 찍는다).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오백리길 표지판이 얼굴을 내미는 게 아닌가. 반갑다. 오백리길 정비에 소홀하기 짝이 없는 옥천군청도 그냥 손 놓고 놀고 있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20(농가주택에서) 조금 못되어 오른 능선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5분쯤 능선을 타다 이번에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산을 내려간다.

 하산 길도 역시 희미하다. 길안내를 해주는 낡은 산악회 표지기가 드문드문 보인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그중에는 대전발전연구원에서 매달아놓은 오백리길 표지기도 들어있었다. 옥천구간을 걸어오면서 처음으로 만났으니 이 아니 반가울 손가.

 그렇게 6분쯤 내려오니 잘 가꾸어진 김녕김씨 묘역이 나타난다. 그런데 묘비만 가득할 뿐 봉분이 없다. 요즘 권장되고 있는 평장(平葬)인가 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5. 묘역을 빠져나오면 임도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잘 닦인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이때 이따가 통과하게 될 인포리가 시야에 잡힌다. 장령지맥의 끝자락 장계교와 멀리 금적지맥길이 아스라하다. 이 부분은 다른 이의 표현을 살짝 빌려왔다. 

 12분쯤 내려오자 갈림길 모서리에 오대임도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가 오대임도를 걸어왔던 모양이다. 아니면 앞으로 걷게 될 임도(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간다)가 오대임도라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이후부터는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온다. 구불구불 틀어대는 곡선미에 더해 단풍나무로 여겨지는 가로수까지 심어 운치를 더했다.

 그 길에는 오지빌리지라는 캠핑장이 있었다. 이름처럼 오지마을에 꼭꼭 숨어있는 모양새이다. 하지만 간이 수영장까지 갖춘 품격 있는 캠핑장이었다.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논두렁밭두렁 따라 꼬불꼬불 휘어지는 곡선미로 한껏 멋을 부린 전형적인 시골길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35. 화인마을(안내면 인포리)에 도착하니 3층으로 지어진 안내중학교가 우뚝하다. 그나저나 안내중학교의 학부모들은 마음이 놓이겠다. 외딴 곳에 지어진 탓에 땡땡이를 칠 수가 없어 보이니 말이다.

 화인마을 앞 도로(575번 지방도)와 만나는 화인삼거리로 내려선다. 법정 동리인 인포리를 구성하는 3개의 자연부락(화인·걸포·관골) 중 하나인 화인(化仁)’에서 이름을 따왔다. 참고로 화인마을에는 고려 때부터 역()이 있었다고 한다. 출장 중인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던 화인원(化仁院)도 있었단다. 화인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연유이다.

 삼거리에는 마을유래비와 함께 관골 표지석도 세워놓았다. 조금 전 스치듯 지나온 작은 마을이 관골(官谷)’이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옛날 찰방(察訪)이 살았었다는 마을이다.

 이정표(걸포리 1.2/ 인포리 대청호반 0.7)가 가리키는 걸포리 방향(동쪽)으로 향한다. 300m쯤 걷다가 만나는 다른 삼거리에서는 왼쪽 임도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정표(걸포리 0.8/ 한반도전망대/ 장계대교)는 한반도전망대 방향에도 13구간의 표시를 해놓고 있었다. 한반도를 둘러본 다음 안남면사무소로 되돌아갔다가 도로를 따라 이곳으로 와도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경관 좋은 화인마을도 이농의 추세를 벗어날 순 없었던 모양이다. 도로변 농가가 줄줄이 비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임도로 들어선 오백리길은 고개 하나를 오롯이 넘는다. 그러다보니 꽤나 가파르게 올라설 수밖에 없었다.

 해발 168m까지 치고 올랐던 오백리길이 능선을 넘더니 아래로 향한다. 길 좌우로 빼곡하게 들어찬 옻나무단지가 두려울 수밖에 없는 오싹한 구간이다. 염색약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연약한 피부를 가졌으니 어쩌겠는가.

 트레킹을 시작한지 4시간 5, 고개 너머 걸포(傑浦)’ 마을에는 염수재(念修齋)’라는 옥천육씨(沃川陸氏)’ 시조를 모시는 재실이 들어서 있었다. 참고로 걸포라는 지명은 갈대가 우거진 포구를 끼고 있었다는데서 유래됐다. ‘갈포라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걸포가 되었단다.

 걸포마을을 빠져나오면 37번 국도를 만난다. 이어서 도로를 따라 안내교차로로 간다. 4차선 도로인데다 보행로가 따로 없으니 가드레일에 바짝 붙어서 걸을 일이다.

 도로 아래로는 대청호가 드넓게 펼쳐진다. 하지만 긴 가뭄 탓인지 허옇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안내교차로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신촌교로 가는 575번 지방도의 오른편에는 안내습지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안내천의 하류 3의 부지에 습지를 만들고 갈대·애기부들·고마리·창포 등의 수생식물을 심었다. 인근 유역에서 배출되는 오염물질을 이곳에서 정화해 대청호로 방류하는 시스템이다.

 날머리는 신천교(옥천군 안내면 현리)

안내천을 가로지르는 신천교를 건너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13구간이 끝나고 14구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3.89km, 가파른 산길과 임도가 대부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은 셈이다.

 오백리길 14코스 장고개구불길은 이곳에서 강변으로 내려간다.

서해랑길 23코스(운남정류장-봉오제마을)

 

여행일 : ‘23. 2. 11()

소재지 : 전남 무안군 운남면·망운면·현경면 일원

여행코스 : 운남(삼거리) 버스정류장저동마을두곡마을성동마을송현마을조금나루낙지공원송정마을봉오제마을(거리/시간 : 19.5km/ 실제는 송현교차로부터 13.77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23코스를 걷는다. 6로 이루어진 목포·무안남부구간의 마지막 구간이기도 하다. 무안군의 서쪽 들녘과 해안을 이어 걷는데 중간에 조금나루라는 명소를 지나게 된다. 운남면(왼편)과 현경면(오른편) 사이에 놓인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을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이때 끝 간 데 없이 너른 바다를 양옆에 끼고 걷는다. 낙지와 조개류가 지천으로 널려있다는 황금어장이라니 운 좋으면 신선한 해산물을 맛볼 수도 있겠다.

 

 들머리는 운남(삼거리) 버스정류장(무안군 운남면 연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를 빠져나와 77번 국도를 따라 신안(압해도) 방면으로 내려오다 팔학교차로(운남면 동암리)에서 내려오면 곧이어 운남면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면사무소 다음의 버스정류장(삼거리) 23코스의 출발지점이 된다.

 운남면사무소에서 시작해 망운면을 거쳐 현경면(봉오제)에 이르는 19.5km짜리 둘레길로 초반부는 주로 들길, 후반부는 해안길을 걷게 된다. 이중 후반부(조금나루부터)는 무안의 명품 둘레길인 노을길로 포장되어 있다.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초반부를 생략해버린 이유이다. 거리가 너무 짧은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송현교차로(조금나루에서 3km쯤 전방)에서 시작하는 지혜로 대신했다.

 23코스의 안내도와 이정표(종점까지 19.7km)는 버스정류장(삼거리) 뒤편 공터에 세워져 있다.

 실제 출발지는 송현교차로(무안군 망운면 송현리), 오늘도 집사람에 대한 배려가 먼저이다. 불편한 무릎을 핑계 삼아 초반부를 생략하고 출발지(운남면사무소)에서 6km쯤 떨어진 송현교차로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77번 국도를 타고 무안방면으로 나가다 조금나루 방향으로 빠져나오면 된다.

 이곳은 송현마을. 집채보다도 더 큰 빗돌이 남도낙지1번지라며 너스레를 떤다. 맞다. 이곳 송현마을 주변 갯벌은 남도 최대의 낙지어장으로 꼽힌다. 특히 타 지역의 낙지와는 달리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게 일품이라나?

 조금나루길을 따라 200m쯤 걸으면 송현보건진료소’, 송현마을 주민들의 건강을 챙겨주는 곳이겠지만, 나에게는 서해랑길과의 첫 만남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계속해서 조금나루길을 따른다. 송현4리의 자연부락인 유종동(儒宗洞, 오른쪽)과 성동(왼쪽)을 양옆에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성동(星洞)’ 마을회관 앞을 지난다. 원래 이름은 서은동(鼠隱洞), 마을 지형이 쥐가 숨어있는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송현교회 앞마당의 물렛(문랫)도 눈여겨볼만 하다. 한때는 마을에서 제사까지 지내오던 신석(神石)이었다니 말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3. 탐방로는 도로(조금나루길)’를 벗어나 농로로 들어선다. 초입에 신창맹씨 세장비(新昌孟氏 世葬碑)’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맹씨의 유래와 이 마을 입향조 맹윤창의 사적을 기술했는데, 맹씨는 김해김씨(마을에는 통훈대부김진관유허비도 있다)와 함께 송현마을의 양대 성씨이다.

 송현마을로 가는 길, 해남의 화원반도와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전체가 구릉지인 것이다. 하지만 배추 일색이던 해남과는 달리 이곳은 사방이 온통 마늘과 양파 밭 일색이었다.

 마늘과 양파는 무안의 양대 특산물이다. 황토의 게르마늄과 바닷가 해풍, 온난한 겨울철 등 삼박자가 어우러지면서 명품 구를 만들어내는데, 이게 크고 튼실한 것은 물론 고유성분도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단다.

 현대인의 삶은 경제를 바탕에 둔다. 농민이라고 해서 남의 집 불구경이겠는가. 농작물의 전유물이던 땅을 서서히 잠식해가고 있는 저 잔디밭이 그 증거라 하겠다.

 그렇게 10분쯤 걷자 송현(松峴, 송현4)’마을에 이른다. 송현(솔고개 또는 솔재)이란 지명은 소나무가 많은 고개 아래의 동네라는 데서 유래했다. 경작지 확장을 위해 나무를 베어버린 탓에 지금 민둥이 되어버린 마을 뒤 고개에 소나무가 울창했다는 것이다. 그림자만 해도 200평이 넘었다는 마을 앞 소나무는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고 한다.

 마을을 빠져나온 다음 이번에는 마을 앞 해안을 따라 조금나루로 간다. 시와 그림으로 도배된 방파제를 끼고 걷는 멋진 구간이다. 이때 송현마을을 대변하는 문장 하나 항상 맑으면 사막이 된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야만 비옥한 땅이 된다.

 마을 앞 선착장에는 낙지잡이 삼매경인 어부를 그렸다. 송현마을은 앞뒤가 바다라는 게 특징이다. 이 바다에 물이 빠지면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드러난다. 배를 몰지 못하는 때다. 그렇다고 어부들이 놀 리가 있겠는가. 어부들은 이때도 바다에 나가 촉촉한 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낙지를 잡는다.

 조개잡이는 동네 아낙들 몫인가 보다. 조개잡이에 한창인 그녀의 뒤로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마을의 특산물인 낙지는 시()로도 얼굴을 내민다. 황성신 시인의 작품이라는데, 그는 노을’, ‘바다 등 갯마을 풍경에 어울리는 작품들을 여럿 적어놓았다. 불경에 나오는 명심보감용 문구들도 심심찮게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마을 앞은 넓디너른 갯벌이다. 그러나 예전엔 모래사장이었다고 한다. 물이 빠지면 거대한 모래 운동장으로 변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주었고 주민들은 모래밭에서 공을 차고 씨름도 했단다. 그게 건축자재로 모래를 퍼가면서 이제는 코앞까지 펄이 됐다. 지형은 변했어도 갯벌은 여전히 풍성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갯벌 곳곳에 흩어진 어선들은 물이 차오르기만 기다린다. ! 평평하게만 보이는 갯벌에도 높낮이는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 갯고랑(전남 지역에서는 개웅이라 한다)이다. 어부들은 그 고랑을 용케도 찾아내고, 이제는 길이 된 고랑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

 조금나루는 방파제(주민들이 해모가지라 부른다는 제방일지도 모르겠다)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맞다. 예전의 조금나루는 조금 때는 육지와 연결되지만 평시에는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작은 섬이었다고 했다. 그러다 방파제가 놓이면서 이제는 의젓한 육지가 되었다.

 바다는 이제 양옆으로 펼쳐진다. 운남면 앞바다 일색이던 조금 전과는 달리 오른편에서 탄도만이 새로운 풍경으로 추가된다.

 초입의 표지석이 조금나루에 들어왔음을 알린다. 조금나루는 현재 유원지로 개발되어 외지인들을 유혹한다. 여름철에는 피서객들로 붐비기도 한단다. 아니 옛날에도 여긴 사람들로 붐볐다고 했다. 조선시대는 징수한 세곡을 영광목관으로 보내던 주요 항구였고, 조금 때면 칠산바다의 고기잡이배들이 들어와 쉬어가던 곳이었단다.

 서해랑길은 이제 조금나루의 해안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돈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왼쪽의 갯벌 너머는 운남면(같은 무안군 소속)이다. 이 구간에서 우린 운남반도의 북쪽, 내리에서 동쪽으로 휘도는 해안 풍경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5. 조금나루의 중간쯤에 들어선 송현항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2020 어촌뉴딜 300사업에 선정되어 현재 정주여건 개선공사(선착장·선양장 정비, 부장교 설치)가 진행 중이란다. 참고로 어촌뉴딜 사업은 가기 쉬운 어촌’, ‘찾고 싶은 어촌이라는 주제로 낙후된 어촌과 어항 300개를 현대화해 어촌의 경쟁력을 새롭게 키우는 정책이다.

 현대인들은 조그만 낭비도 허용하지 않는다.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까지 한 점도 놓치지 않겠다며 만들어놓은 저 풍력발전기(운남면 내리)가 그 증거다.

 모퉁이(근처 이정표 : 시점 9.5/ 종점 10)를 돌자 이번에는 조금나루 선착장이 나온다. 너른 선착장에는 대합실까지 들어서있었다. 탄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루에 한 차례 왕복하지만 물때에 따라 유동적이란다)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공사가 한창이어선지 문은 열고 있지 않았다.

 이곳도 역시 중장비가 바쁘게 움직인다. ‘송현항과 같은 공사가 한창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어울림-송현과 자연을 잇다라는 catchphrase로 추진되고 있는 이 공사는 마을+주민, 주민+방문객의 어울림을 기본으로 한단다. 삶의 근간인 마을과 바다를 주민들의 쉼터 및 쾌적하고 안전한 일터로 만들어나가겠다는 것이다.

 안내판은 조금나루에 대해 알려준다. ‘조금나루에서 조금(반대어는 사리이다)’은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적은 때인 음력 초여드레와 스무사흘을 이르는 순 우리말이다. 그런 조금에도 이곳에서는 나룻배를 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난 주민은 조금 때 물이 빠지면 마을 앞 섬인 탄도와 선도로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는 데서 유래를 찾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무안의 명품 둘레길인 노을길을 따른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도 확 달라진다. 탄도만을 북쪽으로 휘돌아가는 해안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코앞에 있는 탄도는 물론이고 신안의 선도와 지도까지 눈에 들어옴은 물론이다.

 조금나루의 해안사구 해송 숲, 소나무 숲 사이로 여기저기 캠핑을 즐기는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들어앉았다. 가족단위 여행지로 이미 입소문을 탔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썩 넓지는 않지만 모래사장에서 해수욕을 즐길 수도 있으며, 갯벌에서는 게 고동 낙지 등을 잡는 갯벌체험도 가능하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모래 유실로 시달리는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갯고랑 너머로 낮고 길쭉한 섬 하나가 보인다. 무안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인도인 탄도. 조금나루에서 2.5km쯤 떨어진 작은 섬으로 50여 명이 살고 있단다. ‘숯섬이라는 의미로 탄도(炭島)라 표기하지만, 무안문화원은 여울섬을 뜻하는 탄도(灘島)가 더 적합하다고 지적한다. 섬의 크기로 봤을 때 숯을 만들 만큼 나무가 많았다고 보기 어렵고, 서해로 이어지는 물목이어서 예전부터 여울도로 불렸기 때문이란다.

 송현마을 입구 삼거리(이정표 : 유종동 1.5/ 송현/ 조금나루)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유종동 방향)으로 간다. 참고로 조금나루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30분이 걸렸다.

 낙지와 어패류가 지천이라는 갯벌은 생태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주민에게는 물론 삶의 현장이다. 초입의 안내판은 낙지산란장에 대해 적고 있었다. 하지만 게시된 그림처럼 생긴 시설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안내판이 위치를 잘못 잡은 듯하다.

 관광안내도 앞에는 어르신용 보행기가 세워져 있었다. 갯벌로 내려가는 시멘트길 끄트머리에는 그보다 많은 보행기가 머무른다. 조개잡이 나온 어르신들이 몰고나온 모양인데, 어촌 역시 고령화되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도로변 방파제에는 염생식물인 칠면초를 그려놓았다. 칠면초(해마다 색깔이 7번 변한다는 바다의 단풍)가 널리다시피 한 인근 갯벌을 나타내고 싶었음이리라. 칠면초가 붉은 옷으로 갈아입는 예쁜 가을철에 다시 찾아오라며...

 어장 근처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다. 왼쪽은 해안길. 하지만 도로공사가 끝나지 않은 탓인지 서해랑길은 구릉지 위를 걷는다. 무안 북쪽에서 탄도만을 향해 바늘처럼 솟은 작은 반도의 등허리를 밟는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노을길 도로변은 해당화 꽃밭으로 가꾸고 있었다. ‘국화인 무안군 군화를 해당화로 바꾸기라도 하려는 걸까?

 낮은 구릉지를 넘다가 팽나무 숲을 만났다. 매년 정월 대보름 당산제를 모시는 숲으로, 이때 송현마을의 입향조가 정착할 때 심은 팽나무가 신목(神木)이 된단다.

 다시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 갯벌과 하늘이 반반이다. 땅도 바다만큼 낮아 어디를 둘러봐도 하늘이 절반이다. 노을길에서는 어디를 둘러봐도 저런 풍광이 펼쳐진다.

 어촌뉴딜 300사업과는 다른 공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무안 유일의 유인도인 탄도의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사로, 해저 암반층을 굴착한 다음 3,090m나 되는 상수도관을 묻는다고 한다.

 잠시 후 낙지공원(이정표 : 시점 12.3/ 종점 7.2)’에 이른다. 무안의 특산물인 낙지를 알리고자 조성된 캠핑 공원으로 전망대와 무인카페, 카라반, 야영데크 등으로 이뤄진 일종의 유원지이다. 밤에는 공원 전체가 은은한 경관조명으로 물들기도 한단다. 참고로 송현교차로(트레킹 출발지)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30분이 걸렸다.

 공원 한가운데는 14m 높이의 낙지 모양 전망대가 자리한다. 낙지 머리를 흐느적거리는 여섯 개의 다리가 받치는 형상이다. 그나저나 계단을 타고 올라 잔잔한 서해를 바라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니 한번쯤 올라볼 일이다.

 바다생물 모양의 창밖으로 탄도만의 광활한 풍경이 펼쳐진다. 유리창의 얼룩이 시야를 방해하는 건 약간의 흠, 하지만 해안선과 나란히 늘어선 모래사장과 그 안쪽으로 펼쳐지는 갯벌은 자랑거리다.

 여섯 개의 다리 가운데 두 개는 미끄럼틀로 만들었다. 조망을 즐긴 다음 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며 동심으로 돌아가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일 것이다.

 낙지전망대를 오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인 듯, 데크 전망대를 따로 만들어놓았다. 물위를 걷는 듯한 스릴까지 덧대놓은 전망대에 서자 탄도만의 광활한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그네 비슷한 놀이기구는 물론이고, 바닷가를 암시하는 듯한 조형물도 여럿 세워두었다. 그런데 저 조형물은 대체 뭘 나타내고 있을까? 갯벌로 소문난 무안의 바닷가이니 조개나 낙지를 잡는 어부들을 형상화했을지도 모르겠다.

 쉼터도 낙지모양으로 만들었다. 내부는 무인카페로 운영되고 있었다.

 야영장에는 선인장(백년초) 꽃밭도 조성되어 있었다. 조금나루의 모래사장에 지천으로 널려있었다는 선인장 군락을 재현해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낙지공원 양쪽으로는 해송 숲과 백사장이 길게 이어진다. 일몰 시간에 맞추면 숲속에 앉아 낭만적인 일몰도 감상할 수 있단다. 그 노을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둘레길 브랜드(노을길)로 굳어졌다는 설도 있으나 믿거나 말거나이다.

 노을길에 대한 안내도도 보인다. 조금나루 해변에서 출발해 현경면의 봉오제에 이르는 8.9km짜리 해안길이란다. 이 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한적한 해안도로를 따라간다. 덕분에 무안의 어촌과 갯벌의 전형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노을길로 나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때 유종동(송현4)’의 마을 뒤 능선인 중구등이 오른편으로 펼쳐진다. 나지막한 구릉지이지만 망운면에서는 가장 높은 지대라고 한다.

 77번 국도에 다가간 다음 목서리로 넘어간다. 이때 대섬(竹島)이 눈에 들어온다. 원래 이름은 자라섬이었는데 섬에 시누대가 무성해지면서 대섬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참고로 목서리는 목관(목장을 관리하는 감목관이 주재하던 관청으로 현 망운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해랑길은 목서리의 6개 자연부락 중 장재·내덕·외덕 마을의 해안을 지난다.

 움푹 파인 해안선은 들어갈수록 육지는 멀어지고 갯벌은 그만큼 더 넓어진다. 바다가 땅에 갇히고 땅이 바다에 포위된 형국이다.

 갯벌을 빠져나오는 저 어부들의 어구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누군가의 입을 빌려본다. 바다는 부족하지만 궁핍의 자국은 없다고. 가지지 못해 안달하기보다는 모자라는 대로 만족하는 여유가 어부에게 배어 있다는 것이다.

 줌으로 당겨보니 섬이 둘로 나뉘었다. 기존의 대섬에다 오강섬이 추가된 것이다. 오강처럼 작은 섬이지만, 주민들이 노두(路頭)로 연결시킨 덕분에 외지에서 온 가족단위 소풍객들이 자주 찾는단다. 아무튼 두 섬의 사이로 낙지산란장이 들어서면서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무안지역의 농토는 거의가 붉은 황톳빛이다. 노을길 가꾸기 사업의 일환인지는 몰라도 그곳에 유채가 심어져 있었다. 봄이면 또 하나의 볼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맞다. 이곳은 볼거리가 많기로 소문난 둘레길이다. 해질 무렵 서정이 사무치게 아름다워 노을길로 부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2. 장재마을 갈림길(이정표 : 시점 14.3/ 종점 5.2)에 닿았다. 77번 국도의 아래를 통과하면 장재마을(목서리), 서해랑길은 국헌횟집을 향해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국헌횟집 근처 바닷가에는 장재선착장이 들어서 있었다. 꼬맹이 어선 두엇이 정박되어 있을 뿐인 작은 포구다. 그래선지 어민들의 쉼터도 컨테이너박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해안에 잇대어 내놓은 도로를 따른다. 오가는 차량이 없어 탄도만의 아름다운 풍광을 두루두루 살피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하지만 그늘이 없어 여름철에는 지옥의 행군이 될 수도 있겠다.

 대섬과 요강섬(‘오강섬이라고도 한단다)이 부쩍 가까워졌다. 그러자 대섬이 등치를 한껏 부풀린다. 맞다. 대섬은 한때 사람이 살았었고, 당시 사용하던 옹달샘도 남아있다고 했다.

 잠시 후, 또 다른 선착장을 만났다. 최근에 새로 만든 모양인데, 내덕마을 해안이니 내덕선착장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내덕마을 해안의 방파제도 벽화를 그려놓았다. 그나저나 노을길은 만남의 길, 자연행복 길, 노을 머뭄 길, 느리게 걷는 길 등 4개의 산책로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송림숲 공원, 낙지공원, 전망대 쌈지공원 등도 끼워 넣었단다. 그렇다면 이 구간은 어느 산책로에 포함됐을까? 이를 알리는 안내판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32. 바닷가에 조성된 쉼터를 만났다. 노을길은 이렇듯 중간 중간에 쉼터를 만들어놓았다.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풍광은 일품이다. 서해바다와 갯벌이 어우러지면서 더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런 쉼터에서 감상하는 노을과 석양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란다.

 작은 공원(이정표 : 시점 16.3/ 종점 3.2)도 조성되어 있었다. 잘 지어진 정자는 물론이고, 데크 산책로까지 보탰다. 노을길 안내도에 그려져 있던 외덕 해안공원이 아닐까 싶다.

 이 즈음 물고기가 숨어든다는 어은도(漁隱島)’가 눈에 들어온다. 이를 줄여 요즘은 엄섬으로 부른단다. 갯고랑에 그림자를 드리운 어은도를 끼고 이어지는 해안의 바위는 유암포(기름바위). 썰물 때 물이 흘러내리면 모양이 기름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외덕마을 해안을 지나 송정리로 들어간다. 망운면에서 현경면으로 넘어왔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바닥이 보도블럭으로 바뀌어 있다.

 엄섬과 대섬, 그리고 요강섬이 한꺼번에 어우러지며 한 폭의 수묵화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참고로 이 부근은 해넘이가 곱다고 소문났다. 밀물 때는 바다가 붉게 물들고 썰물 때는 갯벌이 깨진 거울 파편처럼 황홀하게 반짝인단다.

 서해랑길은 하수장마을(송정1)을 스치듯 지나간다. 원래 이름은 수장(水長), 마을 앞 우물의 수질이 좋고 양이 풍부하다는 데서 유래됐는데, 1970년대 24번 국도가 마을을 가르고 지나가면서 상수장과 하수장으로 분리되었다고 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3. 고급어종인 바리류(다금바리, 농성어 등)의 종묘양식장을 지나면 송정마을 어장이다. 바다는 한창 물이 차오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바다로 나가고 싶은 어부는 이미 배에 올라 출어를 준비한다.

 갈대밭도 눈에 띈다. 순천만이나 강진만의 갈대밭처럼 광활하지는 않지만 풍경화 한 폭을 그려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맞다. 노을길은 탄도만이 갖고 있는 저런 풍광, 즉 천혜의 갯벌과 모래해안, 송림숲 거기에 노을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조성됐다.

 탐방로는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린다. 그리고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23코스의 종점인 봉오제 마을이 불쑥 떠오른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해제반도가 눈에 들어온다. 봉오제 마을을 지난 탄도만 해안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가 오류리 검무산 아래 해안으로 쑥 물러난다. 무안의 또 다른 명소인 홀통해변은 그 해안이 다시 한 번 튀어나온 지점에 놓여있다.

 날머리는 봉오제 삼거리(무안군 현경면 용정리)

문 닫힌 낙지 전문식당 회랑낙지랑을 지나면 현해로로 올라서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봉오제 삼거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봉오제 봉대로도 불린다.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봉대산(옹산이나 봉오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래에 위치한다는 데서 유래했다.

 서해랑길(무안 24코스) 안내도는 삼거리 조금 못미처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3.77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만큼 코스가 쉬웠다는 증거일 것이다.

대청호오백리길 12구간(푸른들 비단길)

 

여행일 : ‘23. 2. 4()

소재지 : 충북 옥천군 안남면과 동이면 일원

여행코스 : 말티마을말티고개위청동아래청동가덕교(실제는 청마대교를 건넜다)평촌삼거리미산마을종미마을안남면사무소(거리/시간 : 13km, 실제는 11.27km 3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열두 번째 구간인 푸른들 비단길(13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대청호의 본류인 금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 대신 햇볕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강변길의 특성 상 여름철에는 지옥의 행군이 될 수도 있겠다.


 들머리는 말티마을 대청호오백리길 쉼터’(옥천군 동이면 청마리)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TG를 빠져나와 금강로(영동방면)’를 따라 1km남짓 내려오다 우산로2(‘보청천을 건넌 다음부터는 575번 지방도)’로 옮긴 다음 강변도로를 따라 6km쯤 하류로 내려오면 청마농장(민박)에 이른다. 농장 앞에서 청마교를 건너 500m쯤 들어가면 정자(‘대청호오백리길 쉼터라는 간판을 달았다)가 들어앉은 널따란 광장이 나온다.

 푸른들 비단길이란 이름처럼 대청호 상류 금강(비단 ’)과 그 물줄기가 꿈틀대면서 빚어놓은 푸른 들녘을 끼고 걷는 구간이다. 덕분에 호젓한 강촌마을의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거기다 상고시대 때부터 이어져오는 문화유적(청마리 제신탑)’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트레킹을 나서기 전 청마리의 랜드마크인 제신탑(祭神塔, 충북 민속문화재 제1)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가로등에 매달려 있는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올라가니 옻배움터 표지판. 제신탑은 저 옻배움터로 들어가는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조금 더 들어가자 벽화를 그려놓은 창고가 나온다. 농촌이니 풍년을 기원하는 농악쯤으로 여기겠지만 사실은 매년 정월 대보름에 열리는 탑신제의 행사장면을 그렸다. ‘탑신제란 민초들에 의해 전해져 내려오는 민속신앙으로 질병과 악귀를 쫓아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 제사(洞祭). -솟대-장승의 순으로 제사를 올리며, 제사가 끝나면 농악대가 찾아다니며 굿을 하여 마을의 풍년과 편안함을 빈다고 한다.

 제신탑은 그 맞은편에 있다. 제신탑이란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기원하던 곳으로 탑신제당(塔身祭堂)’이라고도 불리며, 그 기원이 마한(BC2-AD4)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 청마리의 신앙 유적은 원탑과 솟대, 장승, 산신당 등 복합적인 문화형태를 띤다. 탑은 절에서 흔히 보는 것들과는 달리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돌을 원추형(圓錐形)으로 쌓아올리고 그 꼭대기에 기다란 돌 하나를 세웠다. 곁의 작은 돌무더기에는 솟대(하늘과 땅을 연결하는)를 꽂아놓았다.

 장승은 길가에 세웠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나란히 서있는 게 보통인데, 이곳은 길의 양옆에 서서 수문장 역할을 자처한다. 또 다른 유적인 산신당(山神堂)은 뒷산에 있다고 한다. 소나무를 신목으로 모시는 자연신 형태를 띤단다. 하나 더, 저 장승은 4년마다 돌아오는 윤년의 정월 대보름에 새로 세운다고 한다. 새로운 민속 문화재를 만들어나간다고나 할까? 민속 문화재라는 게 본디 우리 민족이 아주 오래전부터 행해온 신앙·세시풍속·생업·의식주 등 전통 사회의 생활문화가 담긴 물건을 모두 포함하니 말이다.

 마침 동네 주민들이 윤년인 올 정월 대보름(내일)에 새로 세울 장승을 제작하고 있었다. 인터넷과 통신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는 현대, 그 이면에는 우리네 고유문화가 사라져간다는 그림자가 스며있다. 그것도 통신의 발달만큼이나 빠르게 소멸해 간다는... 그런 세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기네 전통 민속을 지켜나가는 저들이 존경스러운 건 나뿐일까?

 청마초등학교 옛터는 옻배움터로 다시 태어났다. 강의실과 전시·판매장 등을 갖췄다는데, 전국 유일의 옻산업특구(옻 재배에 최적의 자연환경을 갖췄단다)’인 옥천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긴 예로부터 옥천은 옻으로 유명했다. 옥천 공납품으로 건칠(옻나무 진을 말려 만든 약재)을 진상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에 전한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옻샘이 남아 있는가 하면, 수령이 300년 가까운 옻나무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 옻과 관련된 지명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단다.

 12구간의 출발지임을 알리는 이정표(가덕 2/ 안터마을 5.7)는 창고 옆 삼거리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진행방향(가덕)의 표시가 조금 묘하다. 오백리길 홈페이지에서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라 했는데, 이정표는 금강 쪽(청마대교 방향)으로 안내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내려 받은 선답자의 ‘gpx트랙도 이정표처럼 강변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백리길 쉼터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나간다. ‘gpx트랙이 지시하는 대로 금강을 오른편에 끼고 하류로 내려간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8. ‘마티마을 공동생활관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탐방로는 이제 후묵골로 들어간다. 완만한 경사의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진다.

 좁디좁은 입구와는 달리 골짜기 안은 꽤 널찍했다. 두세 채의 민가까지 들어섰으니 의젓한 마을이라 하겠다. 하지만 오르막길의 경사는 시간이 갈수록 가팔라진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3. 마지막 민가 앞에서 길이 뚝 끊겨버렸다. 선답자의 gpx트랙보다는 오백리길 홈페이지의 안내를 받는 게 옳다는 방증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되돌아 갈수야 없는 노릇. 주인장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앞마당을 가로지르고 본다. 그리고 주택 진출입로의 끝에서 포장 임도를 만났다. 오백리길 홈페이지의 지시대로 말티마을을 횡단했더라면 이 임도로 왔을 것이다.

 임도로 올라서니 금강이 얼굴을 내민다. 장수군의 신무산(뜬샘봉)에서 발원한 금강은 이 지역을 지나며 곳곳에서 산태극수태극을 만든다. 그리고 금강유원지를 거쳐 온 저 물줄기는 또 다시 굽이쳐 옥천1경인 둔주봉(屯駐峰)’으로 향한다.

 로버트 바크(Richard Bach)는 그의 저서 갈매기의 꿈에서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고 했다. 맞다. 지금 걷고 있는 이 임도가 그 증거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앞에 펼쳐지는 금강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니 말이다. 그러자 휘돌아가는 물굽이가 만들어놓은 모래사장과 고요하게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가 한 폭의 풍경화로 그려진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5. 임도로 올라선지 13분 만에 말티고개에 올라선다. 12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해발 267m)이다. 그러니 벤치 하나쯤 놓아두었을 법도 하련만 막상 고갯마루에는 엉덩이를 댈만한 돌멩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나 더, 이곳에서 왼쪽 능선(사진에서는 오른쪽)을 탈 경우 탑봉으로 연결된다.

 고갯마루를 넘은 오백리길은 이제 위청동에서 올라오는 임도로 옮겨간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 느긋하게 걷는데 눈에 익은 표지기(‘허총무는 오백리길을 리딩하는 청마산악회 요원이다)가 눈에 띈다. 서해랑길의 도반인 사슴과 구름님은 우리와는 다른 일정에 이곳을 다녀간 모양이다.

 완만한 경사의 내리막길을 15분쯤 걷자 위청동마을이 나온다. 옛날엔 여섯 채 정도의 집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딱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러나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는 남아있는 한 채가 더 소중하다. 농부소설가 김봉난할머니의 집이라니 말이다.

 할머니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현관문이 휑하니 열려있는가 하면, 마당은 잡동사니로 어지럽다. 어쩌면 작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포항 출신(동지여중·동지여상 졸업)인 할머니의 최종학력은 수도사범대학교(현 세종대) 국문과 중퇴다. 산골마을로 시집와 억척스런 삶을 살아오신 할머니의 바램은 소설 한 편을 제대로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위청동을 지나면서 길은 거칠어진다. 말라비틀어진 잡초는 허리춤까지 차오르고, 대나무 숲이 기존의 길을 잠식해버렸다. 마을이 사라지면서 인적이 끊겼으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던가? 앞서가는 집사람에게서 난 저수하심 (低首下心)’이란 사자성어를 배운다. 교양이 있고 수양을 쌓은 사람일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남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저 움막의 용도는 대체 뭘까? 난로까지 설치되어있으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움막 아래에 농경지가 있는 걸로 보아 농번기 때 사용하는 농막일지도 모르겠다.

 길은 물기 하나 없는 개울을 두어 번 가로지른다. 장마철에는 길이 폐쇄될 수도 있을 듯. 그나저나 김봉난 할머니는 25세 때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이 길을 올라왔다고 했다. 울면서 올라오지나 않았을까?

 그러다보니 요런 앙증맞은 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계곡은 넓지 않은 편이다. 그렇다고 일구어 먹을 땅뙈기 하나 없겠는가.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묵밭 일색이었다.

 비록 잠시지만 가파른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한다. 무릎이 시원찮은 집사람에게는 지옥의 행군이 될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 오백리길 표지기다. 트레킹을 시작하고 1시간 만에 처음으로 만났다. 오백리길 옥천구간은 앱(gpx트랙)의 도움 없이는 걸을 수 없다는 평이 난 이유일 것이다. 둘레길의 장점 중 하나는 지역경제에 대한 도움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백리길의 한 축을 맡은 대전시처럼 명품 둘레길로 가꾸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겠는가.

 말티고개에서 하산을 시작한지 32분 만에 또 다시 시멘트포장 임도로 내려설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오른편 방향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5. 잘 지어진 전원주택이 보이는가 싶더니 장승이 반긴다. 뭔가가 적혀있으나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장승에도 같은 글귀가 적혀있으니 그냥 지나치도록 하자.

 초입에는 수문장 노릇이라도 하라는 듯 아예 쌍으로 세워두었다. 글자가 좀 틀리기는 했어도 방생정계(放生淨界)’ 호법선신(護法善神)’이라는 휘호까지 품었다. 매인 것(모든 생명체)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자비를 베푸는가 하면, 불법을 수호하고 성불을 돕는 착한 신이라니 이 집이 불국정토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음지에 들어선 집에서의 삶은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을 듯...

 잠시 후 대여섯 가구가 모여 사는 아래청동의 본 마을에 이른다. ‘청마리는 예전의 갈마동리와 마티리, 청동리를 합쳐 만들어졌다. 그러니 옛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금강이 반긴다. 강 건너는 지수리(안남면), 12구간의 후반부는 반대편인 저 강변을 따라 걷는다.

 이후부터는 금강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왼쪽 옆구리에 끼고서...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5(아래청동에서 10). ‘청마2교차로에 이르면 길이 둘로 나뉜다. 오백리길은 계속해서 금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서 청마대교를 건너도 된다. ‘가덕교까지 올라간 오백리길이 다리 건너로 돌아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청마대교를 건너기로 했다. 가덕교까지 올라갔다가 반대편으로 되돌아오면서 만나게 되는 풍경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사람의 체력안배까지 감안했음은 물론이다.

 상류 쪽 풍경이다. 오른쪽 강변을 따라 가덕교까지 올라갔다가 반대편(왼쪽) 강변을 따라 다리 건너로 되돌아온다.

 하류 쪽 풍경. 다리를 건넌 오백리길은 이제 금강의 물 흐름에 발맞추며 내려간다.

 잠시지만 575번 지방도(안남·보은 방향의 안남로’)를 따른다. 이때 혜연스님의 화실이 있는 연관사를 스치듯 지나친다. 특별한 볼거리는 없으나 그림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한번쯤 들러볼 만도 하겠다.

 연관사를 줌으로 당겨봤다. 저곳은 그림을 도반 삼아 불법을 전해준다는 혜연스님이 주지로 있다. 스님은 1998년 한국화대전 초대전과 2005년 대한민국여성미술대전 특선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단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35. ‘평촌삼거리에 이르니 이정표(안남면사무소 4.8/ 가덕 2.3)가 반긴다. 오백리길은 이곳 평촌마을 앞 삼거리에서 도로(안남로)와 헤어져 강변으로 간다. 참고로 이곳은 안남면의 행정 동리인 수동리(水洞里, 지수2)’, 물가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 평촌은 물가 들녘에 위치한 마을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조금 더 걸어 강변에 이르니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오백리길 나그네들에게는 이만한 쉼터도 없겠다.

 안내판은 이곳이 KBS의 예능 프로그램인 ‘12의 촬영지였음을 알려준다. 강변에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출연자들의 사진도 함께 게재했다. ‘향수100리길을 소개하면서 이 부근 모래사장을 이용했던 모양이다.

 물가로 내려가는 길도 나있다. 지형으로 볼 때 여울(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이라도 있었을 듯. 맞다. 누군가는 이 부근에 은응댕이 여울이 있었다고 했다. 여울 근처의 은행나무를 잘랐는데 그 그루터기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음식을 먹을 정도로 굵었다나?

 이후부터는 강변길을 따른다. 왼편은 금강, 오른편은 구릉지에 가까운 나지막한 산자락을 끼고 길이 나있다. 그 사이에는 뜨락에 가까운 작은 들녘이 들어앉았다.

 맞은편에서 달려온 라이더들이 반갑게 인사를 보낸다. 맞다. 이 구간은 향수100리 자전거길이기도 하다. 옥천 출신 정지용 시인의 대표 시 향수(鄕愁)’에서 이름을 따온 이 길은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해서 자전거 동호인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자전거여행 길 30선()’에 뽑히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안남면사무소에서 금강휴게소에 이르는 18.6를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꼽았다나?

 이곳 지수리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설화가 하나 있다. 진벌 앞산에 묘를 쓰면 왕비가 난다는 것이다. 그게 또 육영수여사의 외할머니가 이곳에 묻힘으로써 왕비가 난다는 명당자리임을 증명해 주는 계기가 되었단다. 그래선지 양지바른 산자락마다 반듯하게 써놓은 묘들로 한가득이었다.

 오늘은 입춘(立春). 맹추위가 떠날 줄을 모르고 기승을 부리지만 계절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길가 농경지에 심어놓은 가축용 사료가 저리도 파릇파릇해진 걸 보면 말이다.

 반면에 강물은 아직도 한겨울이다. 꽁꽁 얼어붙은 게 잘하면 도강도 가능하겠다.

 이렇듯 경관이 빼어난 곳을 가만 둘 인간이겠는가. 간판은 달지 않았지만 민박집으로 여겨지는 건물들도 눈에 띈다.

 저 헬기의 정체는 과연 뭘까? 누군가에게는 음풍농월을 즐기는 장소가 될 수도 있겠다. 박주에 소찬 놓고 시 한수 지어 곡을 부치니 이만한 풍류가 또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간이 되는 경제활동. 누군가의 이익은 누군가에겐 해가 될 수도 있다. 산림의 경제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벌목작업이 터줏대감이었던 저 나무들에게는 목숨까지 빼앗기는 아픔이 되었다.

 그렇게 25분쯤 걷자 민가 한 채가 나타난다. 100m쯤 전방에는 너덧 채의 민가가 더 있다. 첨부된 지도에 나와 있는 음지말이지 싶다.

 이곳에도 강가로 내려가는 길이 나있었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도태골 여울이 아닐까 싶다. ‘도태골이란 지명은 미산 마을 쪽 골짜기의 이름인 도태골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여울을 이용해 마을 사람들이 옥천 장에 나가기도 했고, 옥천에 볼 일을 보러 가기도 했단다.

 음지말 앞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안남면사무소 2.3/ 가덕교 4) 를 만났다. 이정표는 이곳 삼거리에서 왼쪽 들녘을 가로지르란다.

 미산(薇山)’ 마을은 그 들녘의 끄트머리에 들어앉았다. 원래 이름은 궐산’, 마을위의 산이 낮고 고사리같이 퍼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고사리 미()’자를 써서 미산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마을 앞에서 만난 이정표(안남면사무소 2.1/ 가덕교 5)가 이번에도 왼쪽으로 가란다.

 마을을 지켜준다는 선돌도 만났다. ‘수살맥이라고 부르는데 마을을 수호하는 기능을 갖고 있으며 사람의 얼굴 모습과 흡사하도록 가장자리를 손질하였다고 한다.

 몇 걸음 더 걸자 이번에는 경율당(景栗堂, 충북유형문화재 제192)이 반긴다. 영조 때인 1735, 학자인 경율(景栗) 전후증(全后曾)이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율곡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던 그는 자신의 호를 경율이라 하고, 서당 이름도 경율당이라 했단다.

 문이 잠겨있어 카메라에 건물의 외관만 담았다. 안내판은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4면에 마루를 품어 전형적인 서당 형식을 보여준다고 적고 있다.

 경율당에서 오백리길은 금강을 완전히 벗어나 버린다. ‘종배마을로 이어지는 이 구간은 인삼밭 천지였다. 인삼의 주산지인 금산군과 어깨를 맞대고 살다보니 그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30. ‘종배(從培)’ 마을로 들어선다. 그리고 마을을 관통한다. 대부분의 둘레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그러니 지역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지나가도록 하자. 낯선 나그네에게 길을 열어준 그들에게 도움은 못 줄지언정 피해까지 끼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을안길을 걷다 또 하나의 귀하신 몸을 만났다. 정비가 잘 되어있는 대전구간과는 달리 이곳 옥천에서는 가뭄에 콩 나듯이 눈에 띄니 반갑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을 뒤 작은 봉우리에는 정자가 올라앉았다. 덩치 큰 나무 아래라선지 빼어난 풍취까지 더해준다. 아니 이 마을에서 신목으로 모시는 느티나무일지도 모르겠다. ‘호무시(’호미를 놓는다는 뜻이란다)나무라 하여 보호되고 있으며 요즈음도 노인들을 중심으로 제사까지 올린다는 나무 말이다.

 저건 웬 시츄에이션? 밭에 잘 생긴 호박을 열을 맞춰 진열해놓았다. 그것도 바닥에 마분지까지 깔고서... 정부의 무한책임이 요구되는 요즘이니, 막혀버린 호박의 판로에 대한 시위일지도 모르겠다.

 동구 밖에는 마을자랑비와 함께 강릉 유씨의 효심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시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면서 서모까지 얻어주었는가 하면, 서모가 죽은 후 시아버지가 눈까지 멀자, 틈틈이 모은 돈으로 개안 수술을 시켜 주었고, 35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모셨다고 한다.

 오백리길은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린다. 안남면 소재지인 연주리를 진행방향에 놓고 드넓은 들녘을 걷게 된다. 날이 풀리면 저 들녘은 푸름으로 넘칠 것이다. 그러니 12구간의 브랜드인 푸른 비단길은 저 들녘에서 탄생했지 않나 싶다.

 12분쯤 농로를 따르던 오백리길이 575번 지방도(안남로)로 올라선다. 하지만 도로를 따르지는 않고 농로로 다시 내려서고 만다. 시쳇말로 간만 보았다고나 할까?

 농로에 이어 안남천의 제방을 걷는다.

 농기계의 재활용? 움직임이 멈춰버린 경운기가 펌프로 다시 태어났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연주교를 건너자 널따란 잔디광장이 나타난다. 안남면을 대표하는 공원으로 연주공원 또는 배바우공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배바우는 이곳 연주리(蓮舟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는 도덕리(덕실부락)에서 흐르는 냇가에 배()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서 연유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배바우는 물속에 잠기게 될 것이며, 그 앞의 넓은 들은 호수가 되어 배를 띄우게 되고, 인포리에는 포구가 생긴다고 했다. 주민들까지도 믿지 않는 전설이었지만, 대청댐에 물이 차면서 수몰선(水沒線)이 이 배바위에 이르게 되었단다. 결국 배바위가 물속에 잠기는 것이 아니고 물 위에 뜨는 형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옛말 그른 게 하나도 없다고나 할까?

 지역공동체인 안남은 상상의 배인 배바우를 형상화했다. 안남의 역사와 함께 흘러온 금강에 두둥실 떠 있는 배이다. 배 위의 소녀상은 자치와 협동의 지역공동체를 의미한단다. 하나 되어 나아가는 안남이라는 꿈을 향해 스스로 노를 저어가는 안남 주민들의 힘과 의지를 표현했다나?

 안남면을 상징하는 조형물은 무지개로 표현했다. 일곱 개 색깔의 무지개처럼 7개 마을(연주리·종미리·지수리·도덕리·청정리·화학리·도농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공원에는 제신탑(원탑)도 있었다. 청마리의 것은 본떠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데, 청출어람이랄까 본물(本物)보다도 더 잘생겼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배바우장터가 열린다고 했다. 지역에서 발행하는 배바우 화폐를 이용할 시 20% 할인된 저렴한 가격으로 안남면 지역에서 생산된 싱싱한 농산물(·호두·마늘·호박·고추 등)을 구입할 수 있다니 한번쯤 시도해 볼 일이다.

 날머리는 안남면사무소(옥천군 안남면 연주리)

장터 옆 안남면사무소에서 12구간의 트레킹을 마쳤다. 오늘은 11.27km을 걸었다. 가덕교까지 가지 않고 청마대교에서 금강을 건넌 덕분에 2km쯤 단축할 수 있었다. 소요시간은 3시간 10, 말티고개를 제외한 나머지 구간이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