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악산(紺岳山, 674.9m)

 

산 행 일 : ‘23. 10. 21()

소 재 지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 남면, 연천군 전곡읍의 경계

산행코스 : 출렁다리주차장출렁다리범륜사묵밭쉼터악귀봉장군봉임꺽정봉감악산(비봉)까치봉묵밭쉼터(복귀)출렁다리주차장(소요시간 : 6.78km/ 4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파주와 양주, 연천의 경계에 놓인 산으로 예로부터 화악산(가평송악산(개성관악산(안양운악산(포천)과 더불어 경기 5의 하나로 신령스러운 산으로 일컬어졌다. 이름에 자가 들어간 산은 대개 험한 편이다. 등산이 어렵고, 오른다 해도 꽤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파주의 감악산만은 예외로 봐도 되겠다. 원래는 높고 깊고 가파른 산이지만 탐방로 공사를 잘 해놓아서 비교적 쉽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세 지자체가 서로 경쟁하듯이 시설물들을 설치한 것이 오히려 번잡스러운 흠으로 보였다고나 할까.

 

 산행들머리는 감악산 시설지구(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세종·포천고속도로 안락 IC를 나와 신평화로를 타고 의정부시와 양주시를 통과한 다음, 회암교차로(양주시 회암동)에서 56번 지방도, 상수교차로(양주시 남면)에서 371번 지방도로 옮겨가며 달리다, 설마교차로(파주시 적성면)에서 설마천로로 빠져나오면 잠시 후 감악산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네비게이션에 감악산출렁다리 주차장을 찍고 오면 편하다. 하나 더, 시설지구에는 두부 만드는 집이 즐비했다. 이 고장 특산물인 장단콩으로 만든 손두부·순두부·두부전골·두부부침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황태구이·감자전·능이닭백숙 등 다양한 먹거리를 맛볼 수 있다.

 지도(청색 선)처럼 진행했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범륜사 입구’.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 묵밭쉼터에서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 악귀봉·장군봉·임꺽정봉을 차례로 거쳐 정상에 오른 후 이번에는 왼쪽 능선을 이용해 묵밭쉼터로 내려섰다. 이후는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10 : 05. 출렁다리주차장(출구)에서 데크 계단을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숫자는 헤아려보지 않았지만 버겁다 싶을 정도로 긴 계단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입구의 안내판 정도는 살펴보도록 하자. 감악산을 둘러싼 20km 정도의 순환형 둘레길과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주요 등산로가 그려져 있다. 참고로 둘레길 각 코스의 이름은 지역 학생들이 지었다고 한다. 청산계곡길·손마중길·천둥바윗길·임꺽정길·하늘동네길 등 생경하지만 정겨우면서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민족상잔의 아픈 상처도 한번쯤 보듬어보자. 이곳 설마리 일대는 6.25전쟁 당시 서울 사수를 위한 마지막 요충지였다고 한다. 당시 이곳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 글로스터 부대원들은 중공군의 총공세에 맞서 최후의 한 명까지 싸웠고,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3일간이나 늦출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설마리에 기념공원이 세워졌고, 감악산 출렁다리는 글로스터 영웅의 다리(The Gloucester Heroes Bridge)’라는 닉네임까지 얻었다.

 10 : 12.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이면 정자에 올라선다. 쉼터에 전망대를 더한 다목적 정자이다. 그러니 출렁다리의 전경을 카메라 프레임 안에 넣고 싶다면 잠시 들렀다 갈 일이다.

 정자는 뛰어난 뷰 포인트이다. 난간에 서면 감악산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출렁다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출렁다리 뒤로 펼쳐지는 감악산 전경은 보너스라 하겠다.

 출렁다리 주변(힐링파크에서 운계폭포까지 약 1Km 구간) ‘신비의 숲에서는 야간경관조명이 펼쳐진다고 했다. LED 투광등과 동물조명 등으로 밤하늘의 자연과 동물을 등산로 곳곳에 조형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고보조명·영상·음향 등을 가미해 산 이름인 감악(紺嶽)에 얽힌 스토리를 보다 재미있게 연출한단다.

 요즘은 흔하디흔한 게 출렁다리. 그렇다고 짜릿한 스릴까지 흔해지겠는가. 거기다 산악지형에 설치한 현수교로는 가장 긴 편에 속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다리는 70kg기준 900명이 동시에 올라가도 끄떡없이 지어졌단다. 초속 30m 강풍과 진도7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단다. 하지만 길이가 150m나 되는데 어찌 출렁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움직임에 몸을 내맡기고 맘껏 즐겨보자.

 다리는 36m나 되는 허공에 매달려 있다. 덕분에 출렁거림 속에서도 설마리, 설마천계곡 등 다리 주변의 풍경들을 눈에 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다리 건너. 범륜사로 올라가는 진입로는 상당히 가팔랐다.

 10 : 28. 범륜사(梵輪寺)에 이른다. ! 올라오는 도중 운계폭포로 내려가는 길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냥 지나쳤다. 오래전이긴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폭포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절간 뒤 샛길로 가면 운계전망대가 나온다. 감악산 산행의 필수코스라지만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감악산 중허리에 터를 잡은 범륜사는 한국불교태고종 종단의 사찰이다. 옛날 감악산에는 감악사·운계사·범륜사·운림사 등 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세월의 풍화와 전쟁 등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의 범륜사 1970년 금봉이라는 스님이 옛 운계사(존재했다는 문헌만 있을 뿐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터에 다시 세운 것이란다.

 사찰 앞에 세워놓은 세계평화 빗돌이 눈길을 끈다. 이 사찰의 점심 공양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점심 공양과 저들이 원하는 세계평화가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 더, 절간 뒤 백옥으로 만들었다는 높이 7m 관세음보살상도 볼만하다. 중국 하북성의 아미산 백옥으로 현지에서 만들어 1995년 이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산이 그렇듯, 감악산 역시 방문 목적은 등산이다. 산행은 범륜사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널찍한 데다 바닥까지 야자매트로 깔려있어 산행기분은 나지 않는다.

 작은 돌멩이들이 바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오가는 사람들이 행운을 빌며 붙여놓은 것 같은데, 이게 흡사 자철석이라도 되는 양, 떨어지지 않고 처음 그대로 찰싹 붙어있다.

 10 : 45. 탐방로는 개울을 건너기도 한다. 징검다리가 놓여있지만 여름철 집중 호우 때는 통행이 불가능할 듯. 그렇다고 우회로가 따로 나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개울을 건너자마자 상황이 확 바뀌어버린다. 넓고 반반하던 길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칠기 짝이 없는 너덜길로 바뀐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복원된 숯가마 터(이정표 : 묵은밭 0.2km/ 범륜사 0.6km)에 닿았다. 숯은 참나무로 구워낸 것을 상품(上品)으로 친다. 이는 감악산에 아름드리 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11 : 00-11 : 05. 고역이라 할 수 있는 너덜길의 끝. ‘묵밭 쉼터가 길손을 맞는다. 올라오느라 고생한 이들을 위한 배려로 쉼터용 정자를 배치했다.

 이정표(감악산 정상 1,350m/ 까치봉 1,000m/ 범륜사 800m)는 길이 둘로 나뉨을 알린다. 그렇다고 고민하지는 말자. 어느 코스를 선택하더라도 정상에 이르기는 마찬가지, 그저 한 바퀴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11 : 08. 우리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정상 방향을 선택했다. 물기 없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모양새이다. 이어서 벤치가 놓여있는 곳(‘만남의 숲이 아닐까 싶다)에서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붙는다. ‘악귀봉부터 시작되는 바윗길을 제대로 타보기 위해서이다. 알다시피 바윗길이란 게 올라갈 때가 제멋 아니겠는가.

 지능선이어선지 시작부터 가파르다. 뭔가에 의지하지 않고는 못 올라갈 정도로 깔딱인 곳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런 어려움을 지자체도 알았나보다. 밧줄난간을 세워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다.

 11 : 35.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는 암봉에 올라선다. 수십 길 낭떠러지 위, 풍상에 시달리다 못해 몸을 비비꼬아대는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암봉의 자랑거리는 따로 있었다. 나무 사이로 파주의 산하가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북한산이 그 걸출한 자태를 자랑한다.

 내려오는 길은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가득했다. 그렇다고 소름끼칠 듯이 위험하지는 않으니 약간의 스릴을 즐기면 되겠다.

 감악산의 또 다른 특징은 단풍나무라 할 수도 있겠다. 설악산이나 내장산만큼은 아니지만 굵고 튼실한 단풍나무들이 능선을 뒤덮고 있었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감악산 정상/ 청산계곡 1,420m/ 법륜사 1,570m)에서는 직진한다. 오른편은 보리암 돌탑을 거쳐 출렁다리로 연결되는 감악능선계곡길로 끄트머리에서 청산계곡길(감악산 둘레길)’로 합류된다.

 감악산에 ()’자가 그냥 들어갔겠는가.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곳곳에서 바위지대를 만나게 된다. 그러다보니 곳곳에 저런 나무계단을 놓았다. 오래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밧줄에 의지해서 오르던 구간들이다.

 단풍이 한층 더 무르익었다. ‘가을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올해 들어 처음 만나는 단풍이니 서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핏빛에 풍덩 빠져보면 어떨까?

 11 : 52. 계단을 올라서면 악귀봉(616m)’. 바위봉우리로 돼지바위라고 부른다고도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정상석은 파주시와 양주시가 공동으로 세웠다. 참고로 양주시와 파주시, 연천군 등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감악산은 비봉·임꺽정봉·장군봉·악귀봉이 양주시와 파주시가 어깨를 맞대고 있고, 형소봉은 오롯이 양주시 차지다(대신 까치봉은 파주시 차지다).

 암봉의 특징대로 악귀봉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양주와 파주의 산하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능선은 험상궂기만 하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탐방로는 바위 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가면서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젠 장군봉을 오를 차례이다.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야 할 길이 이어지는데, 초입의 삼거리(이정표 : 장군봉 0.3km/ 감악산약수터 1.6km/ 악귀봉 0.1km)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가을 풍경을 눈요기 삼아 오르면 될 일이다.

 암릉답게 눈만 들면 구경거리가 달려온다. 그 첫 번째 만남은 통천문이다. 하늘로 통하는 문답게 반대편은 천애의 낭떠러지다. 지리산이나 고성의 통천문처럼 통과해볼 생각을 버리라는 얘기다.

 오른편에는 방금 올랐던 악귀봉의 능선이 놓여있다. 악귀봉에서 시작되는 암릉은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다리가 떨릴 정도이다. 그러나 일단 오르면 떠나기를 망설일 정도로, 소나무 등 주변 풍광과 어우러지는 암릉이 한 폭의 그림처럼 수려하기 펼쳐진다. 어쩜 임꺽정은 저런 봉우리들에서 개성과 한양을 호령할 기개를 키웠을지도 모른다.

 앗 곰이다 호들갑을 떠는 집사람의 손가락 끝에 곰 한 마리가 비스듬히 누워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양주 들녘을 지긋이 내려다보면서...

 이즈음 저 멀리 임꺽정봉의 거대한 암벽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아찔한 절벽에는 잔도가 걸렸다. 오래 전, 중국의 산을 오르내리면서 잔도는 험산을 끼고 사는 중국인들의 전유물인줄 알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도 잔도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이젠 웬만한 바위산마다 잔도 하나쯤은 보통이 되어버렸다.

 잠시 흙길로 변했던 능선이 장군봉의 턱밑(이정표 : 장군봉 0.1km/ 형소봉 0.2km/ 감악산주차장 4.7km)에 이르자 다시 한 번 용트림을 한다. 거대한 암벽으로 변해 앞을 막아버린 것이다. 반대 방향으로 우회하여 올라야하겠건만 다행이도 지자체에서 나무계단을 설치했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오른쪽 발아래서 솟아오른 저 암봉은 형소봉일 것이다.

 계단은 바윗길로 바톤을 넘긴다. 오른쪽은 천 길 낭떠러지, 능선이 칼날처럼 생긴 탓에 왼쪽으로 당겨 걸을 수도 없다. 그저 철제난간을 붙잡고 조심조심 오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구간을 감악산 산행의 백미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허공을 걷고 있는 듯한 짜릿한 스릴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 : 10. 암릉의 화룡점정(畵龍點睛) 장군봉(652m)’이 찍고 있었다. ··남으로 시야가 뻥 뚫리면서 양주와 파주의 산하가 거침없이 달려온다. 시선을 조금 올리자 이번에는 도봉산과 북한산의 헌걸찬 바위봉우리가 우뚝 솟아오른다.

 장군봉을 내려서면서 위험구간은 대충 끝난다. 편안해진 길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안부(이정표 : 임꺽정봉 0.1km/ 감악산 정상 0.5km/ 장군봉 0.1km)에서 임꺽정봉을 거치지 않고 곧장 감악산(정상)으로 가는 길이 나뉜다.

 올라야 할 임꺽정봉이다. 양주 쪽 산자락은 천애의 바위벼랑이지만, 파주 쪽은 부드러운 육산의 모양새이다. ‘도적 의적으로 나뉘는 임꺽정에 대한 평가를 닮았다고나 할까?

 배낭걸이 대라고 한다. 산이 좋아 전국의 산을 20년 이상 누비고 다녔지만, 내 기억에 저런 시설을 처음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임꺽정봉의 턱밑(이정표 : 임꺽정봉 0.1km/ 얼굴바위 쉼터 0.3km/ 장군봉 0.1km)에서 신양저수지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12 : 21. 제법 긴 계단을 올라서면 임꺽정봉을 코앞에 둔 삼거리(이정표 : 임꺽정봉 50m/ 감악산 0.4km/ 장군봉 0.2km)’. ‘임꺽정봉의 기상을 흉내라도 내려는 듯 커다란 바위 하나가 위세를 자랑한다.

 양주시에서 세운 안내판이 자기네 땅도 한번 들러보라고 유혹을 보낸다. 천애의 바위절벽에 길은 내놓았으니 스릴을 즐겨보라는 것. 하지만 파주 쪽에 차량을 세워놓은 탓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12 : 23. ‘임꺽정봉에 올라선다.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 중 하나인 임꺽정이 이곳 양주 출신이어선지 그 흔적으로 임꺽정봉과 임꺽정굴을 이곳에 남겨놓았다. 실존 인물인 임꺽정은 명종 14(1559) 임금의 명으로 임꺽정에 대해서 대책을 논의했고 명종 17(1562)에 되어서야 임꺽정의 무리를 소탕할 수 있었다. 그 기간(아니면 그 이전) 중 감악산에 머물렀을 수도 있겠다. 하나 더. 조선시대의 임꺽정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홍명희 작가의 대하소설 임꺽정 덕분이다.

 옛 이야기는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해 감악산의 깊고 험한 산속 동굴에 기거했다고 전한다. 그 동굴이 있는 바위 정상이 지금의 임꺽정봉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임꺽정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무척 호쾌했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장군봉의 암릉과, 남쪽의 절벽단애 아래로 펼쳐지는 신암저수지와 널따란 뜰이 자못 시원시원하다.

 12 : 26. 그리도 뛰어난 조망이건만 막상 오래 즐기지는 못했다. 가뜩이나 좁은 정상이 등산객들로 붐볐기 때문이다. 아무튼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감악산으로 향한다.

 12 : 32-13 : 32.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점심상을 차렸다. 그리고 못다 한 얘기로 회포를 풀다 가기로 했다. 산꾼들이라기 보다는, 만나는 것 자체가 좋고, 그저 산에 드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수다로 한껏 여유를 즐기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주요 포인트 중 하나인 어름골재로 올라선다. 이정표(감악산 120m/ 범륜사 2.290m/ 장군봉 220m/ 임꺽정봉 160m)는 이곳이 사거리임을 알려준다. 곧장 고개를 넘으면 묵밭 근처의 만남의 숲’. 왼편은 장군봉과 임꺽정봉의 중간에서 만났던 삼거리로 연결된다. 감악산의 정상은 물론 오른편으로 가면 된다.

 12 : 33. 몇 걸음 더 걸으면 정자에 닿는다.

 이곳도 조망의 명소 중 하나다. 양주벌판을 가운데 두고 동두천의 칠봉산과 양주의 천보산, 도락산, 불곡산(이 산에도 임꺽정봉이 있다) 등이 불쑥 솟아올랐다. 더 멀리로는 남성미를 물씬 풍기는 도봉산과 북한산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13 : 46- 13 : 54. 출렁다리 주차장에서 길을 나선지 2시간 45분 만에 감악산 정상에 도착했다. 웬만한 운동장이 부럽지 않을 만큼 널따란 정상에는 정상석과 감악산비, 고롱이 미롱이 마스코트, 각종 안내판 등 파주시·양주시·연천군에서 서로 경쟁하듯이 만들어놓은 시설물들로 가득하다. KBS중계소와 강우레이더 같은 공공시설도 들어서 있었다.

 정상의 북쪽 가장자리,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어른 키 정도 되는 빗돌 하나를 앉혔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은 그 유래가 알려지지 않는데, 비석에 새겨진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아 몰자비’(글자가 죽은 비)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아예 글자를 새기지 않은 무자비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설인귀비나 빗돌대왕비(‘비석대왕비라는 뜻으로 비석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된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으로 보인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1982년 학술조사가 이루어지도 했으나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순수비와 비슷하다는 정도만 파악됐을 뿐이다.

 정상석은 양주시와 파주시가 공동으로 만들었다. 연천군이 감악산의 공동 소유권자이긴 하지만 그 영역이 정상까지는 이르지 못했음이리라.

 정상에 어깨를 걸치지 못한 연천군은 군 마스코트인 고롱이 미롱이 감악산 숲길 안내도만 달랑 세워놓았다. 고롱이와 미롱이는 동아시아 최초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된 구석기유적지(전곡리)를 품은 연천군에서 만든 원시인 캐릭터이다.

 조망은 전문가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감악산 등산의 최고 기쁨은 뭐니 뭐니 해도 정상에서 만나는 스카이라인과 납작한 마을들 모습, 그리고 멀리 삐죽삐죽 올라와 있는 한국의 산 풍경이다. 남쪽으로는 동두천시 칠봉산, 양주시 도락산, 서울시 도봉산, 서울시와 고양시를 이어주는 북한산 등이, 북으로는 북한 개성시의 송악산까지 볼 수 있다. 물론 날씨가 도와줘야 가능한 시계이지만, 그야말로 하늘과 공중과 산과 마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광활한 풍경인 것이다.>

 그건 그렇고 북쪽(연천)에서 뜬금없는 풍경이 잡힌다. 산꼭대기에 성모마리아상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요것조것 뒤적여 봐도 누가 왜 만들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저 평화·통일의 마음을 담은 조형물로 유추해 볼 따름. 성모님의 시선이 북녘 땅을 응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임진강, 한탄강 등 접경지역에 내리는 비를 관측할 수 있는 5층 높이의 대형 강우레이더도 들어서 있었다. 태풍·기상변동 등을 목적으로 하는 기상레이더와 달리 반경 125km 이내에서 지표에 근접하게 내리는 비의 양을 면적 단위로 집중 관측해 홍수예보에 활용한단다.

 명자나무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봄에 피어야 할 꽃이 그것도 이 늦가을에 말이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로 시작되는 시조를 읊었다. 뒤이어 나오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똥말똥하여라라던 문구가 떠오르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13 : 54. 하산을 시작한다. ‘까치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인데, 이정표에는 감악산둘레길 중 손마중길로 적혀있었다. 레이더기지의 서쪽 울타리에 기대어 내놓은 데크로드를 따르면 된다.

 13 : 56. 몇 걸음 걷지 않아 멋진 전망대를 만났다. 시야가 툭 트이는 곳에 데크로 대를 만들어놓았다.

 난간에 서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파평산, 천덕산, 덕물산 진봉산 등 수많은 산들이 드넓은 들녘 곳곳에서 솟아올랐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물굽이를 이루며 흘러가는 임진강과 이를 가로지르는 장단교가 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에서 송악산과 극락봉 등,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북녘의 산들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탐방객들을 위해 배려도 잊지 않았다. 조망도를 세워 실물과 대조해보는 재미를 더하게 했다.

 13 : 59. 또 다른 조망처에는 아예 정자까지 들어앉혔다. 하지만 올라가보지는 않았다. 조금 전 들렀던 전망대와 똑 같은 풍경이 펼쳐질 것 같아서이다.

 팔각정(이정표 : 까치봉 600m/ 객현리/ 정상 150m)에서는 까치봉 방향으로 간다. 정자를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길고 긴 나무계단.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지만 곳곳에서 조망이 틔기 때문에 눈이 호사를 누리며 내려갈 수 있다.

 14 : 18. 운계능선을 탄지 19분 만에 토끼봉에 올라섰다. 바위와 소나무가 잘 어우러지는 멋진 산봉우리이다.

 정상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 흔한 이정표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현 위치를 까치봉으로 표시해놓은 감악산 둘레길 안내도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할 따름이다. 그게 서운했던지 누군가가 안내도에 까치봉이라고 큼지막하게 적어놓았다.

 까치봉 역시 멋진 조망처였다. 아까 정상 근처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풍경이 낮아진 고도만큼만 좁아졌다고나 할까?

 이후로도 나무계단은 한참이나 더 계속된다.

 14 : 51. 삼거리 안부(이정표 : 손마중길 740m/ 묵은밭 120m/ 감악산 정상 1,380m)에 내려선다. 직진의 운계능선은 운악산둘레길의 손마중길로 연결된다. 우리는 무릎이 불편한 집사람을 핑계 삼아 묵밭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탈출로도 만만치만은 않았다

 가파른 나무계단을 100m이상이나 내려간 뒤에야 묵밭에 이를 수 있었다이후부턴 아까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된다.

▼ 15 : 50. 똑 같은 길을 걸어야 하는 무료함을 견뎌가며 걷길 25분 드디어 출렁다리 주차장에 이르면서 산행이 종료된다오늘은 4시간 30분을 걸었다핸드폰의 앱이 6.78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하긴 집에 돌아온 집사람이 앞으로 산행은 사양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에필로그(epilogue), 주차장에서 짐을 챙기다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악사(紺嶽祠)라는 사당이 없어졌다니 말이다. 내 나라 강산을 짓밟은 당나라, 그 군대를 이끈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모신다니 이를 말인가. 하긴 세상이 하 수상한데 무슨 꼴인들 못 보겠는가. 올 여름인가? 언론은 어느 얼간이가 광복절날 일장기를 문간에 내걸었다고 전했었다. 그러니 설인귀를 모시는 게 문제가 아니라,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토착 왜구가 스스럼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서해랑길 39코스(답동마을-법성포)

 

여 행 일 : ‘23. 10. 28()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백수읍 및 법성면 일원

여행코스 : 답동 버스정류장가자봉노을전시관영광대교백제불교 최초도래지법성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6.3km, 실제는 노을카페부터 16.28km 4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9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여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코스 대부분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백수해안도로를 따른다. 덕분에 동해를 닮았다는 서해바다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다. 하지만 해거름이 아니어서 백수해안도로의 하이라이트인 노을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들머리는 답동마을 버스정류장(영광군 백수읍 홍곡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 신평교차로(영광읍)에서 805번 지방도로 옮겨 백수읍까지 온다. 대전리교차로에서 우회전 77번 국도를 따라 올라오면 잠시 후 답동마을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영광38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근처에 세워져 있다.

 이번 구간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 중 아홉 번째라는 백수해안도로를 주축으로 한다. 그저 초반 4.5km를 해안도로 대신 구수산의 능선으로 바꾸고, 후반부에 백제불교최초도래지를 구경시키는 정도라고나 할까? 길이는 16.3km, 4.5km가 산길인 점을 감안하면 다소 부담스러운 거리다. 난이도가 별이 4(5개 가운데)나 되는 이유일 것이다.

 오늘 걷게 될 백수해안도로 1회 대한민국 경관대상에서 자연경관 최우수상을 받았단다. 이름조차 낯선 상인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4개 유형(시가지역사문화농산어촌·자연)의 뛰어난(건축물·공공공간·주변환경 등이 종합적으로 잘 어우러진) 경관을 발굴·홍보하기 위해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에서 기획한 행사라고 했다.

 동해 같은 서해의 최고 해안길이란다. 동해의 파도, 청청한 남해, 서해의 끝없는 갯벌로 대변되는 우리네 바다는 어디가 더 좋다고 평할 수 없을 만큼 각자의 매력을 갖고 있다. 그러니 서해바다는 쓸쓸한 갯벌이 질펀하고, 사연을 간직한 섬들이 곳곳에 널려있어야 하며, 안내판에서 저런 표현은 사라져야만 한다.

 11 : 50. 트레킹은 백암 해안전망대에서 시작했다. 영광에서 노을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 중 하나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39코스 시점에서 77번 국도(홍농 방향)를 따라 2km쯤 가다 ‘Cafe 노을로 내려가면 된다. 참고로 이곳 백수(白岫)’는 아흔아홉 개의 산봉우리를 이르는 지명이다. 그런 특징을 직접 느껴보라는 듯 39코스의 초반은 구수산 줄기인 가자봉과 뱀골봉을 오르내린다. 하지만 난 산길 대신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이미 답사를 마친 길을 또 다시 걷기보다는 백수해안도로의 명소들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포장 공사가 한창인 도로를 건너자 ‘Cafe 노을이 나온다. 테라스에 앉아 마시는 커피가 일품으로 알려진 곳이다. 서해바다를 마당삼은 덕분에 최고의 오션 뷰를 보여준단다.

 맞다. 카페에서의 조망은 일품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영화 마파도의 촬영지인 동백마을’. 바다를 내려다보며 밭일을 하던 장면 등이 저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절벽 같은 길을 내려가면 만나는 마을은, 어느 집에서나 문을 열면 비경의 바다와 바로 마주할 수 있단다. 영화촬영지가 된 이유일 것이다.

 반대편에는 가자골이 있다. ‘백수해안공원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해안전망대라는 이름을 낳게 한 정자는 바다와 맞닿은 벼랑 가장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다가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자를 에워싼 잡목들이 서해바다에 대한 조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망은 카페 주변에서 실컷 즐기도록 하자.

 12 :00. 전망대를 빠져나온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가재골(백암리1)’에 이른다. 영화 황해에서 하정우가 살인청부 받은 인물의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만을 들고 버스를 기다리던 시골 버스승강장이 이곳일 것이다.

 12 : 00-12 : 10. 가재골(입구에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던 부부의 슬픈 이야기를 담은 백수해안공원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기잡이 나갔다가 왜구에게 붙잡힌 어부를 기다리다 죽어 바위로 변했다는 모자바위도 있다.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을 지나자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난간에 서면 칠산도와 안마도, 송이도 등 칠산 앞바다의 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이곳은 전설이 빚어놓은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어부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자 그의 부인이 아이를 등에 업고 촛대를 들고 나가 바닷가에서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돌이 됐다. 바다에서 익사한 남편은 거북이가 됐고, 촛불을 보고 바닷가로 돌아와 돌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보라! 거북이 한 마리가 촛대처럼 생긴 바위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지 않는가.

 벼랑에 걸치듯 내놓은 계단도 놓치지 말자. 조금 힘들기야 하겠지만 고두섬 같은 또 다른 볼거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안공원의 얼굴마담격인 모자바위(母子岩)’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를 업은 엄마의 형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무학대사는 부처와 돼지의 눈을 빌어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했다. 공자는 나이 70이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종심(從心)이라 했다. 하지만 칠십에 이른 나에게 도란 아직도 남의 얘기일 따름인가 보다.

 12 : 18.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걸어 대리골(백암리1)’에 이른다.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인데, 대나무를 다리로 착각해서 교동(橋洞)’으로 불리기도 한다나?

 이곳은 영화 황해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하정우가 하룻밤을 묵어갔던 민박집인데 지금은 동명(황해)의 펜션으로 변해있다. 그저 영화 초반 스치듯 지나가던 고두섬만이 옛 모습 그대로라고나 할까? 퀭한 얼굴로 아침밥을 먹던 하정우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사진은 사라져버린 울주횟집(현 황해펜션) 대신 고두섬을 배경삼은 프로방스 펜션&글램핑을 게재했다.

 바다 건너 송이도에 고두섬 끝이라는 지명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송이도에 삼천갑자 동방삭을 능가하는 고두섬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이곳 백수해안에서 뜀박질 한 번으로 송이도에 이를 정도로 도력이 엄청났다나?  고두섬을 당시 그가 발판으로 삼았었을 지도 모르겠다.

​▼ 명품 드라이브코스로 입소문을 탄 백수해안도로는 연간 방문객이 76만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그러니 주차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일 것이다.

 안내판은 칠산갯길 300  2코스인 노을길이 이곳으로 지나감을 알려준다. 법성포터미널에서 출발 영산성지·모래미해수욕장·열부순절지 등을 거쳐 동백마을에 이르는 23.39km의 둘레길이다.

 12 : 24. 이번에는 순아골이란다. 백암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다.

 12 : 32. ‘Farm Voree(‘rural convergence industry’로 포장했지만 카페가 옳다)’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백수해안도로는 정말 아름다웠다. 바다를 끼고 언덕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도 그렇거니와 앞바다도 거칠 것 하나 없이 탁 트여 파란 수평선만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게 약간은 흠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커피 향 가득한 작은 도서관 뭉클이란다. 1층은 카페와 도서관, 2층은 테라스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커피 향을 즐기며 독서를 즐겨보라는 듯. 하지만 난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2.5km쯤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이 이제나저제나 내가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쩌겠는가.

 12 : 40. 덕산마을 앞 삼거리에 이른다. ‘홍농읍으로 연결되는 77번 국도는 직진, 백수해안도로는 이곳에서 왼쪽으로 간다.

 이곳은 구수산의 산줄기를 넘어온 서해랑길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도로로 내려서는 지점에 구수산등산로 안내판과 함께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11.8km/ 시점 4.5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하나 더, 산길 대신 해안도로를 따라 걸은 내 트랙에는 3.68km가 찍혀 있었다.

 서해랑길은 덕산마을(대신리)을 거쳐 정유재란열부순절지(旌酉再亂烈婦殉節地)’로 간다. 그렇다고 트랙을 꼭 따를 필요는 없겠다. 곧장 순절지로 내려가는 데크계단이 놓여있는데 구태여 돌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건 그렇고 붉은 양귀비가 매혹적이라던 주변이 온통 황량한 풍경으로 변해있는 게 아닌가. 꽃이 시들자 내년을 기약하며 밭을 갈아엎었나 보다.

 사적비를 기웃거리다 도해문(蹈海門)’으로 들어가니 모열사(慕烈祠)가 반긴다. 칠산바다에 투신한 아홉 열녀를 기리는 사당이다. 정유재란 때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등에 살던 동래정씨(東萊鄭氏진주정씨(晋州鄭氏) 문중의 부인들이 전쟁을 피해 지금의 묵방포(墨防浦)까지 왔으나 결국 왜적들에게 잡히자 대마도로 끌려가 치욕을 당하느니 의롭게 죽을 것을 결심하고 모두 칠산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고 전해진다.

 1681(숙종 7) 나라에서는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상을 주고 정려(旌閭)를 내려 이들의 정절을 기렸다. 비각(碑閣)은 팔각의 돌기둥 4개를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형 옥개석을 올렸다. 바다를 배경으로 오른쪽에 8열부의 비각, 왼쪽에 정등(鄭燈)의 처 밀양박씨의 비각이 같은 규모로 배치되어 있다.

 열부순절지(이정표 : 종점까지 11.5km)에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런 다음 데크 로드를 따라 스카워크로 간다. 줄을 지어 늘어서있는 검붉은 갯바위에 걸치듯 길을 내놓았다.

 험상궂지 않다고 해식애가 아니겠는가. 천년 세월 모진 풍파를 견디다보니 영험함까지 띠게 되었나 보다. ()라도 받으려는 듯 푸짐하게 상까지 차려놓은 무당이 뭔가를 열심히 빌고 있었다.

 12 : 48. 다시 올라선 도로(해안로). 도로변 공터에서 주말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지역 특산물로 여겨지는 농산물을 팔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힘이라도 실어주려는 듯 천빛예술봉사단이 공연으로 흥을 돋운다.

 12 : 50. 스카이워크 형식으로 지어진 노을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스카이워크의 끝은 끝없는 사랑(Endless Love)’이라는 멋진 조형물이 장식하고 있었다. ‘칠산바다의 상징인 괭이갈매기(천연기념물 제389)의 날개를 형상화한 최고의 포토 스팟이다.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아름다운 사랑과 백년해로의 기원을 담았다니 조형물을 배경으로 인생샷 하나 건져보면 어떨까.

 난간에 서자 일망무제의 풍경이 펼쳐진다.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어선지 시선이 수평선과 일직선이다. 문득 아까 혀를 차게 만들던 동해바다답다는 표현이 떠오른다. 하지만 내 주장도 틀리지는 않았다. 안마군도의 섬들이 아스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시야를 가리는 섬 또한 서해바다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가야할 방향의 언덕은 카페와 펜션으로 한 가득이다. 이곳 백수해안도로가 그만큼 유명세를 탔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언덕을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영광의 아름다운 노을 풍경을 전시하고 있는 노을전시관이 놓여있다.

 노을전시관 부근 바닷가, 갯바위에 걸터앉은 대신등대는 빼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낭만적인 노을을 볼 수 있는 해넘이 명소다. 곁에 노을전시관을 두었을 만큼 낙조가 아름다워 관광객뿐만 아니라, 등대를 배경으로 노을 사진을 찍으려는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13 : 05-13 : 10. 노을전시관은 저녁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전시관이다. 노을의 원리부터, 노을 사진, 노을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 등을 모두 보여주는 오로지 노을을 위한, 노을에 의한 공간이다.

 노을이 생기는 원리는 물론이고, 노을을 테마(사진·음악·문학)별로 나누어 전시했는가 하면, 빛의 색·성질·산란 등에 관한 내용도 전한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영광 노을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빛의 과학적 이해를 도와주는 학습장이라고나 할까?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2)도 만들어놓았다. 탁 트인 칠산바다에 가라앉는 붉은 해를 비롯해 주변 경관을 구경하기 딱 좋겠다.

 전시관 앞.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로 널리 알려진 가수 조미미의 노래비가 있었다. 뒷면은 대표 앨범 3장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았다. 조미미는 1947년 영광에서 태어났고, 1965년에 가수로 데뷔했다. 남진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가수였으며, 후덕한 외모와 맑은 목소리로 '바다가 육지라면' '단골손님' '서산 갯마을' '해지는 섬포구' 등 섬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근처 광장에서 후배 가수들이 버스킹을 열고 있었다. 저 젊은이들은 조미미에 대해 얼마쯤 알고 있을까?

 13 : 15. 노을전시관부터는 데크로드를 걷는다. 그리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노을 종을 만났다. 노을이 되어 어머니 곁을 지키는 효심을 담은 종이다. 구전에 따르면 먼 옛날 도음소도에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 날, 비바람이 심한데도 아들은 소금가마를 지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굵은 빗줄기에 소금이 녹아버렸고, 아들은 다른 방법으로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하느라 며칠을 더 바깥에서 머물게 된다. 이를 알지 못하는 어머니는 급기야 아들을 찾아 나섰고, 바위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대로 돌이 되고 말았다. 며칠 후 약을 지어 돌아오던 이들이 돌이 돼버린 어머니를 발견하고 구슬프게 울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후 사람들은 해질녘이면 아들이 붉은 노을을 등에 지고 어머니 곁으로 온다고 믿는단다.

 한 번 치면 웃을 일이 생기고, 두 번 치면 사랑의 감정이 찾아들고, 세 번 치면 행복할 일이 생긴다는 스토리를 입혔다. 다만 칠 때마다 맥놀이를 들어야 한단다. 여기서 맥놀이는 몸으로 종의 진동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사랑의 자물쇠도 눈에 띈다. 노을종을 친 다음 소원을 담아 사랑의 자물쇠를 걸어놓으면, 웃음·사랑·행복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나?

 오랜만에 보는 멋진 안내도이다. ‘백수해안 노을 길 지도를 바탕삼아, 꼭 찾아봐야 할 주요 포인트는 사진까지 게시했다. 다음 행선지의 거리를 하단에 적음으로써 이정표의 기능까지 더했다.

 ! 벌통이다 이를 본 동갑네기 도반은 벌통을 따겠다며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아서라. 오래전 일이지만 산청의 석대산에서 말벌에 쏘였었고, 고통과 염증에 시달리던 난 식사까지 거른 채 산청의료원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탐방로는 너무 높지 않은 해안절벽을 따라 만들어졌다. 그 길을 걸으며 바라보는 서해바다는 차라리 생경스럽다. 저 멀리 서너 개의 작은 섬이 수평선을 갉아먹고 있을 뿐 갯벌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동해바다와 서해바다의 중간쯤이라고나 할까?

 13 : 28- 13 : 46. 모처럼 만난 전망대. 하지만 누군가의 돗자리가 다가가는 걸 부담스럽게 했다. 하긴 우리 역시 간식을 먹느라 벤치 하나를 독차지해버렸지만...

 칠산정(백수해안도로 최고의 전망대라는데 가보지는 않았다) 아래 설치된 목책산책로인 건강365계단 1 365일 건강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오르는 계단의 숫자가 많을수록 건강해진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바닷가 벼랑을 따라 잔도처럼 길을 냈다. 바위절벽은 아니어도 내려다보는 풍경이 아찔하다. 이 구간의 자랑거리는 길에서 바라보는 황금빛 노을이다. 하지만 바닷가에 널린 기암괴석들도 그에 못지않은 매력을 준다. 일상에 지친 가슴을 뻥 뚫어지게 만든다고나 할까?

 산책로는 생태탐방로를 겸한다. 길이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기 때문에 숲속에서 자라는 여러 식물을 눈에 담을 수 있다.  털머위 꽃도 그중 하나이다.

 이 길은 백수해안 노을길로 불린다. 곳곳에서 석양이 만들어내는 진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두어 곳에 바다로 내려가는 길과 함께 해안 절벽 끝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14 : 03. ‘도음소도(주민들은 돔배섬이라고 한다)‘를 마주보는 모퉁이를 돈다. 이어서 법성포로 연결되는 내만(內灣)으로 들어서자 바다 건너 금정산 자락이 해안풍경과 함께 조망된다. 참고로 도음소도는 도 닦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란 뜻을 지녔다고 한다. 마라난타가 백제로 들어올 때 불상을 처음 내려놓았던 곳으로 알려진다.

 내만이어선지 파도가 일렁이지 않는 바다는 마치 호수 같다. ‘서해답지 않게 놀라울 만큼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그 위에 떠 있는 돔배섬(왼쪽에서 살짝 머리만 내미는 곳)과 괭이섬(가운데), 쥐섬(작은 바위섬)까지, 곱디고운 풍광에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다.

 14 : 09. 천천히 바다 풍광을 즐기며 걷다보면 어느덧 삼미랑 어촌체험관에 닿는다. 카페와 펜션을 함께 운영하는 휴식 공간이다. 하나 더. 길에서 만난 둘레길 나그네의 말에 의하면 서해랑 카페를 겸하기 때문에 두루누비 회원이 들르면 5천원 상당의 커피를 제공한다고 했다.

 14 : 10-14 : 15. 70m쯤 더 걸어 도착한 8주차장’. 바다를 향해 전망데크를 만들어놓았다. ‘포토 죤도 세 개나 배치했다. 눈앞에 펼쳐질 풍경을 믿고, 바라보고, 사진 찍어가라는 얘기일 것이다.

 전망대 아래는 방파제 등대(칠산타워를 형상화했단다)가 있는 대신항이다. 대신마을 어민들은 저 포구에서 배를 타고 칠산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는다. 늦봄부터 여름까지는 민어와 백합, 가을에는 꽃게와 새우가 잡힌다고 했다. 일부 어민들은 낚싯배를 운영해 짭짤한 소득을 올리기도 한단다.

 난간에서면 두고두고 꺼내볼만한 빼어난 풍경이 펼쳐진다.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온 작은 물굽이()가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내보여준다. 대신항 너머로 나타나는 영광대교는 차라리 덤이다.

 대신항으로 내려서면, 탐방로는 또 다시 데크 로드로 연결된다. 호리병처럼 내륙으로 파고든 칠산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14 : 26. 데크로드와 이별을 고한다. 이후부터는 도로(해안로)를 따른다.

 14 : 30. 잠시 후 도착한 대초마을 앞 삼거리. ‘옥당박물관이 잠깐 들렀다가란다. 아주 오래된 토기와 석기가 전시돼 있으며, (동국·해동)통보에서부터 1·5원짜리 지폐까지 화폐의 역사도 함께 엿볼 수 있단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 영광의 얼굴을 빛낸 사람(수은 강항, 소태산 박중비, 공옥진)에 대한 기록도 만날 수 있다나?

 편액 없는 제각을 지나 고갯마루를 넘으면. 이후부터는 영광대교를 마주보며 걷게 된다.

 영광대교는 영광군 백수읍과 홍농읍을 잇는다. 저 다리가 놓임으로써 두 읍간의 이동시간이 20분 이상이나 단축되었다고 한다.

 영광대교 부근은 도로 확·포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 다리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모래미해수욕장이 있었다. 해안선이 짧은데다 폭까지 좁지만, 백사장의 모래가 곱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철이 아니기에 들러보지는 않았다.

 다리 남단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영광대교 표지돌과 기념조형물(영광의 속뜻인 신령스러운 빛을 형상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박경숙 시인의 영광대교를 적은 시비를 세워놓았다.

 14 : 51. 2016년에 준공했다는 영광대교를 건넌다. 주탑과 주탑 간 거리인 주경간격이 320m에 달하는 현수교이다.

 15 : 00. 북단(이정표 : 종점까지 4.5km)에서 빠져나와 국도 아래 굴다리를 통과한다. 이어서 숲속을 헤집는 데크 로드를 따른다.

 15 : 08. 목맥마을(木麥, 홍농읍 칠곡리)  목넹기 방조제로 내려선다. 1925년 전남농장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해서 전남방조제로도 불리는데 둑 위로 도로(칠곡로)가 나있다. 탐방로는 버스정류장(이정표 : 종점까지 4.1km) 앞에서 도로를 횡단해 습지로 내려선다.

 탐방로는 목맥마을과 자갈금마을(법성면 진내리)을 잇는 목넹기 방조제를 따른다. 아니 둑 아래, 그러니까 제방과 유수지 사이에 보행로를 따로 내놓았다.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만들어진 모래등 들에는 갈대가 한가득인 유수지가 들어섰다. 고창 땅에서 흘러온 구암천이 방조제에 막히면서 만들어진 인공호수이다. 범위도 무척 넓었다. 그런 장점을 지자체가 놓칠 리가 없다. 데크 탐방로가 갈대밭 사이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유수지에는 꽤 많은 철새들이 노닐고 있었다. 담수호와 넓은 농경지가 풍부한 먹이를 제공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15 : 17. 제방 끝(이정표 : 종점까지 3.5km)에는 선착장이 있었다. 자갈금 어민들이 사용하는 선착장일 것이다. 참고로 오래 전, 고깃배 선단이 들어오면 법성포 물길의 입구이던 목넹기에 파시가 선다고 했다. 그 목넹기가 이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탐방로는 이제 데크 로드를 따라 백제불교 최초도래지로 간다.

 15 : 27. 잠시 후 백제불교 최초도래지에 이른다. 법성포(法聖浦) 불법(佛法)을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의미다. 백제 침류왕 원년(서기 384)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중국)에서 해로를 통해 이곳 법성포에 발을 디디며 불교를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테마파크를 조성해놓았다.

 도래지에는 고대 인도의 탁트히바히 사원 주탑원을 본떴다는 탑원((塔園)을 비롯해 간다라유물관(2~5세기 불상·불전도·부조 등을 전시), 간다라 양식의 사면대불상, 부용루(참배 및 조망용 누각) 등이 들어서 있다. 찬란한 간다라 불교 예술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탐방로는 탑원의 뒤 언덕(이정표 : 종점까지 2.6km)을 넘는다. 그리고는 숲쟁이 꽃동산을 헤집으며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꽃과 나무 사이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걸으면서 법성포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감상 할 수 있는 구간이다.

 15 : 43. 울창한 숲과 꽃, 거기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포구를 눈에 담다보면 어느덧 주차장(이정표 : 종점까지 2.2km)이다. 아니 온갖 이름 모를 꽃들로 단장된 것이 꽃동산의 연장이라 함이 더 옳겠다.

 15 : 47. 주차장을 지나 잠깐이지만 숲속으로 난 데크로드를 따른다. 이어서 법성진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정표 : 종점까지 2.1km)으로 들어선다. 물론 주차장 사잇길이나 메인도로(백제문화로)를 따라도 된다.

 몇 걸음 더 걸어서 만난 법성사의 담벼락은 다양한 바닷속 풍경을 담았다. 절간답게 부처님도 빼놓지 않았다. 하나 더, 이곳(법성진성 조형물이 세워진 지점)에서 법성진성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뉜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들머리에 법성진성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함께 세워놓은 조형물이 조금 이상하다. ()이 아니라 포구를 드나들었음직한 돛단배를 형상화했다.

 길이 왜 이따위야?’ 오솔길의 형편은 고창에서 왔다는 둘레길 나그네의 한마디로 대변된다. 이정표 등의 특별한 표식이 없는 들머리는 찾기조차 힘들었고(‘두루누비의 트랙을 따라가는 사람이야 문제없겠지만), 정비되지 않은 산길은 웃자란 잡초 때문에 걷는 게 영 사나웠다.

 15 : 53. 오솔길을 빠져나오니 전망대를 겸한 이층의 누각이 반긴다. 그 앞에 이정표(종점까지 1.9km) 법성진성 안내판을 세웠다. 진성(鎭城)은 지방의 각 진영을 성벽으로 둘러싼 방어용 시설이다. 법성진성은 전라도 일대의 세곡을 모으던 법성창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 중종 9년인 1514년에 축조했다. 내부에는 동헌, 객사 등 관아시설뿐만 아니라 세곡 수납과 관련된 창고시설도 있었다고 한다.

 법성진성(전라남도 기념물)의 성곽을 따라간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이 성벽에는 축성에 동원된 전라도 관내 군·현의 이름과 쌓은 길이, 그리고 축성책임자·재정담당자 등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했다. 하나 더, 300m도 채 되지 않는 성벽을 걷는데 12분이나 걸렸다. 주위가 온통 달래 밭이었기 때문이다. 서방님께 달래장을 만들어 올리겠다는데 어쩌겠는가.

 16 : 08. 수백 년은 족이 묵었음직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자라고 있는 숲쟁이(이정표 : 종점까지 1.5km)’로 내려선다. ‘숲쟁이란 숲정이의 사투리이다. 남도에서 쟁이 ’, 다시 말해 성()을 뜻하는 어휘로도 쓰였다. 그러니 숲으로 된 성으로 보면 되겠다. 맞다. 숲쟁이는 1514년 법성진성을 축조할 때 법성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인공 숲으로, 법성진성의 북벽과 연결되어 동쪽으로 이어진다. 남도의 대표 숲으로 인정받아 1988년 전라남도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명승 제22로 승격되었다.

 숲쟁이는 방풍림의 역할을 수행한다. 포구와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관은 덤이다. 2006년에는 한국의 10대 아름다운 숲에 지정되기도 했다. 그래선지 단오제(국가중요무형문화재 123, 2009년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등 각종 민속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진내리의 고샅길을 걷는다. ‘서해랑길의 특징은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스마트폰 조작 실수로 두루누비(코리아둘레길) 앱을 활용할 수 없었던 나는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었다. ‘서해랑길 리본을 확인하며 걷다가 삼거리와 마주쳤는데, 갈려나가는 골목의 초입에 있어야 할 리본이 직진방향에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100m남짓 걷다가 되돌아오기는 했지만(리본이 보이지 않아서) 소중한 경험이었다.

 더덩실 더덩실, 벽화 속 주민들은 풍물놀이 삼매경이다. 조선 중기에 시작되었다는 법성포 단오제, 그 행사의 한 장면을 그려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16 : 18. 골목을 누비다가 비석군(碑石群)’을 만났다. 이곳 법성진성을 다스리던 관리(수군절제사나 첨사였을 것이다)들을 칭송하는 빗돌인데, 앞에 주인공의 약력과 공적을 적어놓은 게 특이했다. 부근에는 독립운동가인 고경진선생의 생가 터도 있었고, 법성진성이 축성된 지 500년이나 되었음을 알리는 빗돌도 눈에 띄었다.

 굴비의 본고장답게 셀 수 없이 많은 굴비판매장과 굴비식당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법성1를 건넌다. 갯고랑 건너는 갯벌을 메워 만든 인공 섬이다. 현재 뉴타운이 들어서 있다.

 이곳 법성포는 예로부터 호남지방을 드나드는 배들의 관문이었다. 고려시대에 이미 조창(漕倉)이 개설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호남지방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을 서울의 마포나루까지 실어 나르던 배와 중국대륙까지 가는 배들이 이곳 법성포나루를 거쳐 갔다고 한다. 조창과 조운(漕運)의 기능은 이 마을을 수군이 주둔할 정도로까지 번성시켰다. 하지만 근대식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가 늘어나면서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저런 작은 어선들만이 정박해있을 따름이다.

 반대편으로 빠져나와 이번에는 바다와 맞닿은 도로를 따른다. 뉴타운답게 굵직굵직한 건물들이 도로변에 들어서 있다.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온 법성포 앞바다는 호수를 연상케 한다고 해서 대서호(大西湖)’로 불린다고 했다. 또한 중국의 동정호에 버금가는 풍광을 보여준다고 해서 소동정(小洞庭)’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하지만 수심이 낮아진 지금은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없게 되었다. 매어있는 배들이 하나같이 작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억새꽃이 가을이 무르익었음을 알린다. 맞다.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이 10일 밖에 남지 않았다.

 법성포 조형물은 굴비 두름을 담았다. 황금빛 조기들이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굴비로 새롭게 변신하는 고장. 문헌에 나오는 법성포의 내력들도 함께 적어 넣었다. 하나 더. 굴비라는 이름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 인종 때 법성포로 귀양 온 이자겸이 그 맛에 반해 임금에게 바쳤다고 한다. 하지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된 도리로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비겁하게 굴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녀 굴비(屈非)’라고 불렀다고 한다.

 16 : 35. 법성 버스정류장에 이르면서 39코스 걷기가 종료된다. 서해랑길(영광 40코스) 안내판은 터미널 왼쪽 벽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오늘은 4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16.28km를 찍고 있으니 조금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도 되겠다.

 누군가 그랬다. 영광 법성포에서 거시기 해지면 굴비에 잎새주 한 잔을 하라고. 술을 마시지 않는 여자들도 멜랑꼴리해진 마음이 중화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난 그러지를 못했다. 볼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주어진 시간이 다 되어서야 종점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미안함을 글로서나마 집사람에게 전해본다.

문갑도(文甲島)

 

여행일 : ‘23. 10. 6()

소재지 :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문갑도리

트레킹 코스 : 문갑도선착장당너머갈림길처녀바위깃대봉중이절골 갈림길농막문갑마을문갑도선착장(소요시간 : 4.89km/1시간 55)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덕적군도(德積群島)의 중심 섬인 덕적도에서 남서쪽으로 8km 지점에 있는 면적 3.49에 해안선 길이가 11km쯤 되는 작은 섬이다.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섬의 생김새가 선비의 문갑과 같다 하여 문갑도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평평한 문갑(文匣)과는 달리 섬 전체가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구릉의 기복이 심하고 경지 면적이 귀하다. 이로보아 투구를 쓴 장수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독갑도(禿甲島)’가 오히려 설득을 얻을 듯. 때문에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한다. 연근해에서 꽃게를 비롯한 조기·새우·민어·갈치 등이 많이 잡히며, ··조개류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찾아오는 방법

덕적도를 가는 뱃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고속훼리(코리아나호 또는 스마트호)를 타거나 대부도(화성시)에 있는 방아머리선착장에서 차도선(車渡船)을 이용하면 된다. 산악회에서는 운임이 싼 방아머리선착장을 출발지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개별 도착일 경우에는 바람직하지 않을 듯. 주차시설이 협소해서 차량 댈 곳을 찾다가 타고가야 할 배편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싣고 갈 대부 고속페리 3’. 400명의 승객(구명복 숫자. 차량은 별도)을 태울 수 있는 차도선으로 덕적도까지 하루 2(8:00, 12:30) 운항하며 요금은 성인 기준 11,700원이다. 하나 더, 선내에 매점이 있어 라면이나 간식, 주류, 음료 등을 구매할 수 있다. 참고로 문갑도는 덕적도(진리항)에서 다른 배로 갈아타고 들어가야 한다.

 덕적도(진리항)까지는 꼬박 2시간이 걸렸다. 예정보다 20분이나 늦은 셈이다. 먼 바다로 나오면서 배의 피칭(pitching)이 심해지더니 파도가 높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데려다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다. 풍랑이나 해무(海霧) 등 수시로 변하는 바닷길 사정은 종잡을 수 없는 게 보통인데도 무사히 도착했기 때문이다. 사실 작년에는 안개가 짙다는 이유로 배가 뜨지 않아 덕적도에서 빈둥대다가 돌아간 일도 있었다.

 오늘은 문갑도를 찾아볼 계획이다. 8개의 유인도와 33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덕적군도(德積群島)’에 속한 자그만 섬이기 때문에 본섬인 덕적도(진리항)에서 출발하는 다른 배로 갈아타고 들어가게 된다.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도착이 늦어진 대신, 타고 온 배와 타고 갈 배가 바톤 터치를 하는 이점도 있었다. 덕분에 우린 부두를 방황해야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덕적도 선착장에서 다시 한 번 승선권을 사야만 했다. 우리가 타고 갈 배는 나래호(대부고속훼리와 같은 차도선이다). 이곳 진리항을 출발, 홀수일 기준 문갑도·굴업도·백야도·율도·지도·문갑도 순으로 덕적군도를 한 바퀴 돌아온다. 짝수일은 반대방향으로 도니 참조한다. 하나 더, 문갑도는 갈 때는 물론이고 돌아올 때도 들른다. 둘의 간격은 2시간 30. 하루 일정으로 왔다면 이 시간 안에 문갑도 트레킹을 끝마쳐야 한다.

 나래호는 여러 명품 섬을 들른다. 특히 용아장성이 부럽지 않다는 바위섬 백아도(白牙島)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연상시키는 개머리언덕으로 유명한 굴업도(掘業島)’는 덕적도 여행의 백미로 꼽힌다. 그러니 트레커나 백패커들로 붐빌 것은 당연. 연휴인 7~9일은 표가 이미 매진되었다는 저 안내판이 증거이다.

 11 : 40. 문갑도에 도착했다. 문갑도(文甲島)는 선비의 책상인 문갑(文匣)을 닮았다는 섬이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문갑(文甲)으로 변했다나? 섬은 물갑도란 별명도 갖고 있단다. 비탈진 산이 대부분이나 계곡에 물이 많기 때문이란다. 예전에는 논농사까지 지었다고 하나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하긴 인력이 부족해 계절노동자까지 들여오는 요즘 누가 논농사를 짓겠는가.

 문갑도를 둘러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등산이고, 다른 하나는 산자락을 헤집으며 내놓은 둘레길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면서 해안의 명소들을 눈에 담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다 보기 위해서는 2일 정도의 시간이 요구된다.

 배에서 내리자 화유산 능선이 실루엣처럼 펼쳐진다. 300m에도 못 미치는 섬 산인데도 우람하면서도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다. 처녀바위(231m)를 왼쪽에 두고 가운데가 깃대봉(277.6m), 그 오른쪽에 왕재봉(248m)인데, 오늘은 처녀바위를 거쳐 깃대봉 정상에 오른 다음 마을로 내려올 것이다. 시간이 충분할 경우 왕재봉까지 다녀올 것이고.

 마을표지석이 반기는 선착장. 그 옆에는 어루정이라는 정자도 있었다. 덕분에 우린 스틱을 펴는 등 편하게 산행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정자 뒤, 사람 얼굴을 쏙 빼닮은 갯바위가 눈길을 끈다.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 큰 바위 얼굴(Great Stone Face)’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헐크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11 : 45. 문갑마을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선착장 초입에는 나그네 쉼터인 여행자센터가 들어섰다. 문갑도의 특산물인 무화과쥬스와 한월리 모래로 끓인 샌드커피 등을 판매한다고 했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이왕에 국민의 혈세를 들여 지어놓았으면, 취지에 맞게 잘 운영해 주었으면 좋겠다.

 선착장에서 100m쯤 떨어진 데크 계단을 오르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문갑도에서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두 시간. 섬 전체를 둘러보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니 둘레길을 따라 해안 경관을 보던가. 아니면 화유산 등산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내 결정은 화유산 깃대봉(277.6m)이었고, 이곳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참고로 화유산은 문갑도 유일의 산이고, 깃대봉은 화유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했다. 감기가 아직 낫지 않았는데도, 내 곁을 지켜주겠다며 부득부득 따라나섰다. 하지만 집사람의 체력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고, 겨우겨우 깃대봉 정상에 올라설 수는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초죽음 상태가 되어있었다.

 데크계단이 끝나자 이번에는 침목계단이 상당히 가파르게 이어진다. 3분이면 능선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길은 곱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갈림길이 나와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12 :00, 좌우로 길이 나뉘는 첫 번째 포인트를 지난다. ‘어루재라는 고갯마루로 오른쪽은 문갑마을, 왼쪽은 어루너머해수욕장으로 연결된다. 참고로 어루너머(넘어)해수욕장은 아주 작은 모래해변이라고 한다. 나만을 위한 비밀의 해변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은밀하고 예쁘단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이정표를 만났다. 방향표시는 기본, 하단에 문갑도 해안누리길 지도를 그려 넣은 다음 현재 위치를 표시했다.

 잠시 후 만난 또 다른 이정표는 아예 소화기함까지 매달았다. ‘라이터 등 화기휴대·취사·흡연 금지라는 경고판도 눈에 띈다. 주요 기점의 이정표마다 소화기함을 매달아놓았는데, 산불예방 차원이겠지만 다른 섬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라 하겠다.

 모노레일도 설치되어 있었다. 마을과 화유산의 산자락에 들어앉은 엄나무 농장(마을기업에서 공동으로 운영한단다)을 잇는데, 인력이 귀한 섬의 애로를 해소하기 위한 시설이란다. 아무튼 500Kg의 적재량은 물론이고 사람도 3명이나 탈 수 있다니 섬 주민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겠다.

 능선이 상당히 가팔라졌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거운 짐을 이고 진 농부들이 이 능선을 오르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저 모노레일이 그들을 대신한다.

 능선 곳곳에는 모노레일의 수혜 대상인 엄나무 농장이 들어서 있었다. 매년 봄 우리네 식탁에서 마주하는 벙구나물(또는 개두릅)’은 저 엄나무에서 채취된다.

 염소 서너 마리가 초지에서 노닌다. 그런데 하나같이 목줄을 하고 있다. 얼마 전 불법 방목된 염소들이 식생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농작물까지 해친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이곳 문갑도는 그런 걱정이 필요 없겠다.

 농장 덕분에 시야가 뻥 뚫렸다. 바다에는 마치 조물주가 공기놀이하다 던져 놓은 것처럼 올망졸망한 섬들이 사방으로 분산하고 있다. 그 빼어난 풍경에 나도 몰래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농장지대를 지난 탐방로는 또 다시 짙은 숲속으로 들어선다. 농장을 지났는데도 길은 말끔히 단장되어 있었다. 지난주가 추석, 조상님 묘역 벌초하듯이 정성들여 탐방로를 정비했던 모양이다. 주민들에게 글로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우리가 오르고 있는 깃대봉 300m에도 못 미치는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해수면에서 산행이 시작되므로 그 높이만큼 오롯이 올라야 한다. 가파른 오르막 구간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12 : 10. 두 번째 포인트인 당너머해변 갈림길에 이른다. 오른쪽은 마을, 그리고 왼쪽은 당너머 해변으로 연결된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갈림길. 이정표는 문덕뿌리 낚시터로 연결됨을 알려준다. 하나 더, 이곳이 해누리길 1코스와 2코스, 5코스가 나뉘는 당너머 분기점이 아닐까 싶다. 첨부된 지도는 이 부근에 당너머분기점을 표시하고 있지만, 조금 전의 당너머해변 갈림길과 이곳을 빼고는 다른 갈림길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문갑도 해누리길 1코스 및 5코스를 걷게 된다. 문갑도의 둘레길이라 할 수 있는 해누리길은 총 15.14km로 조성됐다. 여객선을 타고 온 탐방객들을 위한 당일치기 코스(4.25km, 선착장을 기점으로 깃대봉과 마을을 거치는 1시간 30분짜리 노선으로 첨부된 지도의 자색과 진녹색 선으로 칠해진 부분)과 문갑도를 크게 한 바퀴 돌 수 있는 5시간짜리 노선(12.55km)으로 구분해 조성했다. ! 사자바위 같은 명품 경관들을 잇는 4개의 연계코스가 나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갈림길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서서히 가겠다며 자신을 떨쳐놓고 가라 했을 정도로 버거워했던 구간이다. 오르는 도중 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이정표 ; 깃대봉 0.9km/ 마을/ 선착장 1.6km)을 만나기도 한다.

 12 : 18. 멋진 바위전망대를 만났다. 전망 좋기로 유명한 처녀바위로 오인 했을 정도로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바위에 오르면 굴업도, 가도, 각흘도, 선갑도, 백아도, 부도, 지도 등 덕적군도의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박씩을 투자해가며 굴업도와 백아도는 다녀왔다. 다음 차례로 꼽는 건 선갑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배경이 되었다는 무인도이다.

 길은 가파름의 연속이다. 감기로 인한 체력저하로 힘들어하는 집사람으로서는 죽을 맛이고...

 12 : 25. 이정표(깃대봉 0.5km/ 마을/ 등산로) 문갑풍월이란 팻말을 달았다. 섬의 외형이 글을 읽는 선비의 책상을 닮았다는 문갑도(文匣島). 당연히 글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을 게고, 이는 문갑풍월(文匣風月)’이란 사자성어를 만들었다.

 방향표시야 없지만 왼쪽으로 샛길이 하나 나있다. 초입에는 처녀바위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나들이 갈만한 곳이 없던 섬 처녀들이 이곳으로 소풍을 와서 색동치마를 입고 춤추며 놀았다나? 다른 얘기도 전해진다. 처녀들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 총각들이 거센 풍랑을 이겨내며 잘 돌아오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저 바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깃대봉 제일의 핫 플레이스인 처녀바위 20m쯤 위에 있었다. 바위는 소문난 조망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아름다운 덕적군도의 바다를 배경삼아 인생샷이라도 한 장 건지고 싶은 모양이다.

 집사람이라고 해서 그 대열에서 빠지겠는가. 모두 빠져나간 뒤에 한 컷...

 총각을 기다리는 처녀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 북쪽 깃대봉 방향을 제외한 동서남쪽 바다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올라오는 도중 만났던 두 곳의 조망처에서 바라보던 풍경을 합쳐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아래 사진은 올망졸망한 섬들이 몰려있는 덕적군도의 풍경이다.

 반대편은 덕적도와 소야도로는 모자란다는 듯. 자월면의 수많은 섬들이 빈 여백을 가득 메운다. ·소이작도, ·하승경도, 승봉도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 탐방을 마친 섬들이다. 특히 대이작도는 처가댁 형제들의 가족모임을 겸해서 다녀온 곳이기도 하다. 

 북쪽은 바다 대신 깃대봉이 조망된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나 혼자서 오르기로 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집사람이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며 혼자서 정상을 다녀오라 했기 때문이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따라 하산하겠다는 것이다.

 12 : 32. 문갑마을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사거리 안부에 이른다. 이정표(깃대봉/ 중이절골/ 마을/ 처녀바위)는 왼쪽으로 내려가면 중이절골에 닿음을 알려준다. ! 홀기재로 내려가는 하산 길이 막히다시피 한 탓에 이곳으로 되돌아와 문갑마을로 내려갔다는 점도 기억해두자.

 중이절골이 어디를 이르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해누리길 순환코스와 연결된다는 것쯤을 알겠다. 그렇다고 내려가 볼 생각은 없다. 시간도 없지만 월간 산의 기사를 이미 섭렵했으니 말이다. 대신 해당 글을 옮겨본다. <이중삼중으로 덤불이 앞을 막다가도 다시 걸을 만한 길이 되길 반복했다. 엄나무가 특산인 섬답게 도깨비 방망이의 무자비한 가시가 난무했다. 땅바닥엔 간간이 뱀이 있어 긴장감은 갈수록 절정으로 치달았다. ‘100m 걷기가 이토록 힘들 줄이야 싶었으나, 되돌아가기엔 늦었다. 둘레길치곤 오르내림이 커서 최대 100m 이상 고도를 올렸다 내리기도 했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정상에서의 환희를 맛보려면 턱 밑의 오르막길에서 땀 좀 흘려야 한다. 하나 더, 이 구간의 또 다른 특징은 나무가 하나같이 검게 그을린 채 가지만 앙상하다는 점이다. 2021 8월 일어난 산불 탓이란다. 산행대장 말로는 어느 등산객이 버린 담뱃불 탓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12 : 38-43. 드디어 깃대봉 정상에 올라섰다. 깃대봉은 문갑에서 가장 높다. 때문에 섬을 세부측량하면서 이곳에 깃발을 꽂았고, 사람들은 자연스레 깃대봉이란 이름을 붙였다.

 정상은 현재 전망대로 꾸며졌다. 시야를 넓히려는 듯 일단은 대를 올렸다. 그런 다음 바위에 걸터앉은 정상석을 가운데 두고 데크로 빙 둘러 난간을 만들었다. 그나저나 난 블랙야크 섬& 100 인증 챌린지가 싫다.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이들로 인해 부지하세월로 순서를 기다려야만 하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들 덕분에 집사람이 정상까지 올라올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문갑 제일봉답게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다. ‘황해 제일경으로 꼽힌다는 소문처럼 덕적군도의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0년여 전에 들른 조도(鳥島). 하도 섬이 많아 새 때가 몰려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었다. 이곳 깃대봉도 그에 못지않은 풍경을 보여준다. 선갑도, 울도, 지도, 백야도, 각흘도, 굴업도 등등...

 반대편 바다도 온통 섬. 섬의 천국인 덕적군도로도 모자라다는 듯, 이번에는 자월면의 크고 작은 섬들이 바다를 수놓는다. 덕적도, 소야도, 흑도, 자월도, ·소이작도 등등...

 지자체의 배려도 돋보인다. 양 방향에 조망도를 세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그림과 대비해가며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하산을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정표(누적바위/ 홀기재)가 가리키는 홀기재 방향에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웃자란 잡초가 길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냥 진행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자칫 길이라도 잘못 들 경우 돌아가는 배를 타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12 : 47. ‘중이절골 갈림길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문갑마을 쪽으로 내려간다. 산길은 가파르게 떨어진다. 하지만 흙길에다 폭까지 넓어 부담 없이 내려설 수 있다.

 12 : 50. 잠시 후 삼거리를 만났다. 이정표는 세워놓지 않았지만 홀기재에서 내려오는 길이지 싶다. 그런데 길이 의외로 또렷한 게 아닌가. 아까 깃대봉 정상에서 약간의 모험을 감행했더라면 별 어려움 없이 내려왔겠기에 하는 말이다.

 12 : 55. 가파른 내리막길은 농막을 만나면서 끝난다. 이후부터는 산자락을 옆으로 째며 서서히 고도를 낮춘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가세요’. 초청이 내심 반가웠지만 배를 타야 한다는 핑계로 그냥 지나친다. 충분히 배를 탈 수 있다며 다시 권했지만 소심한 우리 부부는 고맙다는 인사만 드리고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산행대장의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배가 10~20분 정도 빨리 들어올 수도 있고, 그렇다고 고지된 출항시간까지 기다리는 것도 아니라니 어쩌겠는가.

 이후부터는 경사가 거의 없이 평탄하게 이어진다. 중간에 갈림길(이정표 : 문갑마을/ 처녀바위/ 홀기재)을 만나기도 한다.

 이 구간의 볼거리는 돌탑이다. 누군가가 작은 돌탑 수십 기를 길가 곳곳에 쌓아 놓았다.

 13 : 05. 그렇게 10분쯤 걸어 임도로 내려선다. 이후부터는 포장길을 따라 마을로 간다. 이 구간에서도 갈림길(이정표 : 선착장/ 2코스 분기점/ 깃대봉)을 만난다.

 13 : 10. 5분쯤 더 걸으면 문갑마을에 이른다.

 마을 뒤 삼거리에서는 오른쪽으로 갔다. ‘윗말이 아닐까 싶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뜬금없는 풍경을 만났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린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던 나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디다 버려야 할지로 고민해도 모자랄 소라껍질이 멋진 조형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누가 저런 기발한 발상을 했을까?

 궁금증에 이끌려 소라껍질을 따라가 봤다. 그리고 갯일을 하는 아낙네들로 벽면을 가득 채운 민가를 만났다.

 문간에 서니 문갑도 아! 옛날이여라는 현판이 반긴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들어갈 수야 없는 노릇. 마실 나온 이웃 주민에게 내부 구경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봤더니(동네 박물관쯤으로 생각했기 때문). 친절하게도 주인장을 불러 내 의중을 전해주신다. 주인장도 맘껏 둘러보라고 했음은 물론이다.

 집안은 옛 물건들로 가득했다. 농기구나 가구는 물론이고 학용품까지 우리네가 써오던 추억의 물건들이다. 옛 추억을 소환하는 사진도 몇 점 걸었다. ‘문갑도 역사박물관이라고나 할까?

 문갑도 아 옛날이여’, ‘문갑도의 추억’, ‘가난한 어부의 아들 등 주인장의 솜씨로 여겨지는 작품도 몇 점 걸려있다. 귀경해 검색해보니 옹진군 갈매기소식지 옹진 그리고 사람 코너에 실렸던 글이다. 아무래도 집주인이 김용준씨가 아니었을 까 싶다. 아무튼 멋진 주인장 덕분에 소중한 옛 추억을 불러올 수 있었다.

 13 :15. 미몽에서 깨어나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양짓말에 이른다. 아래 사진은 문갑마을 전경이다.

 주민이라고 해봐야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자그만 섬이지만 있을 것은 다 있었다. 행정지원센터, 경찰파출소, 물류보관소(우체국 대신) 등등...

 마을 앞 방파제는 문갑도의 역사를 담았단다. 하지만 그림이 적어 그 내용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민박 및 식당(운영은 않는 듯)을 겸한 매점은 전화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모양이다. 캔 맥주로 목이라도 축일까 해서 들어갔으나 인기척이 없었다. 내 낌새를 보고 뒤쫓아 온 산행대장이 주인장은 조개 잡으러 갯벌에 나갔단다. 산행대장에게 돈을 치루고 맥주를 건네받았지만, 자칫 전화로 주인장을 부를 뻔했다.

 마을 앞 문갑해수욕장은 길이 700m에 너비가 50m나 되는 고운 모래사장을 갖고 있었다. 끝자락의 언덕을 넘으면 한층 더 뛰어난 한월리해수욕장이 나온단다. 단단한 모래질 해변으로 유명한 곳인데, 이 해수욕장들의 인기가 높아 덕적군도의 5개 나래호 항로 중에서 굴업도 다음으로 많은 여행객이 문갑도를 방문한단다.

 인천시 토탈디자인 빌리지 조성사업(마을 단위의 종합적인 경관 조성)’의 지원을 받아 동네를 단장하는 과정에서 태어났다는 예쁘장한 연못(유수지공원이라나?)’도 눈에 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천주교 문덕공소이다. ! 섬에는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감리교회도 있다고 했다.

 13 : 20. 주변 풍광에 빠져 있다가 선착장으로 간다. 마을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눈앞에 펼쳐지는 다도해 풍광을 눈에 담으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저 수조의 물은 해수욕장을 찾은 피서객들을 위한 담수일까, 아니면 갯벌에 일 나갔다가 돌아오는 주민들을 위한 바닷물일까?

 바닷가를 따라 난 길은 곡선미가 무척 고왔다.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있는 바다는 물론이고, 담쟁이넝쿨로 뒤덮인 바위벽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도로 개설 때 생긴 생채기 곳곳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화분이 만들어졌다.

 조잡하지만 의젓한 삭도(索道). 절벽을 처마삼아 제비집처럼 둥지를 튼 절간이나, 강원도의 석탄광(지금은 사라졌지만)에서나 볼법한 풍경이, 초라한 모습으로 변신해 여행객들의 눈요깃거리가 되어준다.

 제법 큰 해식동굴도 눈에 띈다. 저 안에 호랑이라도 한 마리 앉히고, 스토리텔링으로 포장하면 멋진 관광 상품이 될 텐데...

 13 : 35. 선착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1시간 55분을 걸었다. 앱은 4.89km를 찍고 있다. 산행인데다 집사람의 컨디션이 엉망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문갑도의 볼거리는 문갑8으로 집약된다. 한얼리해변·처녀바위전망대·문턱뿌리사자바위·병풍바위자연조각공원·진모래·할미염전망대·당공바위·벼락바위 등 수억 년의 세월이 빚고 파도와 바람이 만든 자연의 걸작들이다. 그런데 내가 본 것은 고작 처녀바위전망대가 전부다. 다시 한 번 문갑도를 찾아와야 할 이유가 아닐까 싶다.

 에필로그(epilogue) : 주민들은 문갑도의 옛날을 풍요와 인심으로 꼽았다. 어족자원이 풍족하고 마을에 장사꾼이 찾아오면 먹던 밥그릇을 내줄 정도로 인심 넘쳤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풍부하던 어족자원은 사라졌고, 대신 펜션에 민박, 행정기관까지 들어섰다. 하지만 넘치는 인심은 조금도 변치 않았나 보다.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커피 한잔 권하는 게 스스럼없었고, 뜨내기 불청객인데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집안을 둘러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시 한 번 찾아와야 할 또 다른 이유다. 하룻밤 머물며 문갑팔경을 꼼꼼히 둘러보고, 주민들이 개발했다는 열흘밥상까지 받아본다면 이 아니 좋을손가. 섬의 특산물인 벙구나물, 빨간감자, 고사리, (고동) 등으로 만들었다니 얼마나 맛있겠는가.

강원도 평화누리길 12코스(양구 펀치볼길)

 

여행일 : ‘23. 10. 8()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일원

여행코스 : 돌산령터널(해안입구)DMZ자생식물원만대리오유리해안면사무소양구통일관후리(백두대간트레일 시점)양구·인제경계453번 지방도 다릿골시험장입구(거리/시간 : 14km, 실제는 만대리부터 다릿골시험장 입구까지 13.31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들머리는 해안입구(양구군 해안면 만대리)

중앙고속도로 춘천 IC에서 내려와 46번 국도를 타고 양구읍까지 온다. 송청교차로(국토중앙면 죽리)에서 31번 국도(양구·해안방면), 임당삼거리(동면 임당리)에서 453번 지방도(해안방면)로 옮기면 돌산령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12코스 시점인 해안입구에 이르게 된다.

 해안면의 입구(돌산령 터널)에서 시작해 양구(해안면)와 인제(서화면)의 경계에 이르는 길이 14km의 구간. 해안면의 산하를 오롯이 횡단한다고 보면 되겠다. 문제는 종점인 양구·인제 경계에 버스가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최소 453번 지방도의 다릿골시험장 입구까지 3.6km를 더 걸을 수밖에 없다.

 실제는 시점(돌산령 터널)에서 3km쯤 떨어진 만대리(萬垈里)’ 마을회관 앞에서 출발했다. 인근 북녘 땅에 들어선 선전마을에 대응하기 위해 주택 20여 채를 지으면서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1972년의 일인데, 전선 방어에 기여하기 위한 재건촌이라고나 할까? 때문에 모두가 북향이었고, 마을 한가운데에는 북쪽에서 항상 볼 수 있도록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기도 했단다.

 만대리는 들녘이 넓어 만호(萬戶)가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동네다. 이는 옛사람들의 이상향이 만들어낸 지명이 아닐까 싶다. 50년대 라때만 해도 한 집에 대여섯의 자녀는 기본. 부모까지 합치면 호()마다 최소 일곱 명(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빼고도)이 된다. 마을 하나에 7()이라니 그게 꿈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10 : 20. 2차선 도로인 만대로를 따라 현리(해안면소재지) 방향으로 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산행대장은 마을회관 앞 샛길로 들어가 평화누리길과 만나라고 했다. 하지만 우린 만대로와 겹치는 ‘DMZ평화의길을 따르기로 했다. 볼거리가 더 많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오늘은 찬이슬이 내린다는 한로(寒露). 아침 공기가 많이 차가워졌고, 더 추워지기 전에 추수를 마쳐야 하는 부지런한 농부는 눈코 뜰 새가 없다. 벼 베기가 끝난 저 들녘이 그 증거라 하겠다.

 불그스레 익어가는 사과도 가을을 재촉한다. 그런데 작고 귀여운 게 우리가 익히 아는 사과와는 많이 다르다. 나도 모르게 능금이란 단어가 툭 튀어나온 이유일 것이다. 어린 시절 달지만 너무 강한 신맛에 얼굴을 잔뜩 찡그려가며 먹던 추억 속의 과일이다.

 가을의 전령이라는 구절초(낙동구절초)도 한 몫을 거든다.

 들녘은 온통 인삼밭에서 세운 차양막을 뒤덮였다(농경지의 60%를 차지한단다). 예로부터 인삼 하면 개성이었다. 한국전쟁 후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가 금산에 자리를 잡더니, 세월이 흘러 다시 북상, 이곳 펀치볼에 새 둥지를 틀었나 보다.

 10 : 28. 가을 풍경에 도취되어 걷다보면 어느덧 만대리 3’. 법정 동리인 만대리의 자연부락(산촌·평촌·내동·운전) 중 하나인데 어느 부락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새마을이라는 마트의 상호가 옛 추억을 소환해 줄 따름...

 버스정류장에는 양구군 관광안내도가 붙어있었다. 그런데 관할 읍·면이 5개뿐이다. 접경지역 지자체들의 일반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10 : 33. 453번 지방도(펀치볼로)로 올라섰다.

 코너에 농산물가공지원센터가 들어서 있었다. 전처리실과 증숙실, 세척실, 포장기 등 시래기 레토르트(retort) 작업을 위한 장비를 갖췄다고 한다. 저 시설을 거처 펀치볼 시래기가 브랜드화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양구군은 시래기 수요 확대를 위해 시래기 순대, 시래기 불고기, 시래기 만두, 시래기 막걸리 등의 개발도 병행한단다.

 ‘DMZ평화의길 이정표는 우리가 ‘28코스를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평화누리길(12코스)에서는 벗어나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해안면소재지에 있는 여러 명소(통일관, 전쟁기념관 등)를 둘러보려고 일부러 ‘DMZ평화의길을 따랐다. 펀치볼 분지의 들녘을 가로지르는 평화누리길은 면소재지를 에두르며 나있기 때문이다.

 10 : 36. 몇 걸음 더 걸으면 오유리(五柳里)’에 이른다. 오리나무가 많다고 해서 오류동 또는 오릿골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운천리(雲川里)를 병합하여 오유리가 되었다.

 펀치볼 하우스라는 브랜드를 쓰는 농가는 펀치볼 시래기의 장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었다. 천혜의 자연조건(깨끗한 땅과 가을철 높은 일교차)에서 길러 높은 하늘 바람에 말려냈다는 것이다. 참고로 식감이 부드러운 시래기는 비타민 B·C와 미네랄, 철분, 칼슘, 식이섬유 등이 풍부해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겨울철 웰빙 식재료다. 그런 시래기를 말리는데 이곳 펀치볼 만한 곳이 없다고 한다. 고산분지 지형으로, 일교차가 크고 바람이 분지 안에서 맴돌기 때문이란다.

 ‘DMZ펀치볼 둘레길’ 4개 노선 중 하나인 평화의 숲길도 이곳을 지나는 모양이다. ‘평화누리길 ‘DMZ평화의길’, ‘DMZ펀치볼 둘레길까지, 펀치볼은 가히 둘레길 세상이라 하겠다.

 10 : 45. 오유 1·2리를 지났다싶으면 해안면 소재지인 현리(縣里)가 마중 나온다. 원래 해안소(亥安所)가 있었던 곳(지명에 자가 들어간 이유가 아닐까 싶다)으로 춘주(춘천)부에 딸려 있다가 조선 세종 6(1424) 양구군으로 이속되었다. 191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자월·상평 등을 병합해 해안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초입에서 만난 해안중학교 앞에는 외솔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옛날 이곳에는 수령이 1,000쯤 되는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 또한 외솔백이였다나? 2005년 새농촌운동을 추진하면서 나무가 있던 자리에 저 쉼터를 조성하고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해안면사무소. 이곳 해안면은 엄격한 통제를 받던 지역이었다. 까다로운 입주심사를 거친 후에도 기본적인 자유가 제한되었다. 1996년 해안면의 출입제한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는 출입증 없이는 오갈 수도 없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시골 면소재지 치고는 꽤 번화한 모습이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숙박업소, 식당, 마트, 상점 등 웬만한 편의시설을 다 들어서 있었다. 참고로 여의도 면적의 여섯 배쯤 되는 해안면은 펀치볼(Punch Bowl)’과 궤를 같이 한다. 미군 종군기자의 눈에 화채를 닮는 그릇으로 보였다는 분지(盆地)가 통째로 해안면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까지 해안(海安)으로 불리던 마을은 뱀이 들끓어 바다 '()'를 돼지 '()'로 바꾸고, 집집마다 뱀과 상극인 돼지를 기르면서 뱀이 사라졌다고 한다.

 시래기·사과 축제의 입점 부스를 모집하는 현수막이 눈길을 끈다. 해안면은 고지대(해발 400-500m)의 분지다. 그러니 고랭지채소가 잘 자랄 것은 당연, 주민들은 실한 가을무에서 수확한 무청으로 시래기를 만든다고 했다. 그게 펀치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우리네 식탁에 올라올 것이고...

 해안면의 인구는 1,200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천주교는 공소가 아닌 본당이 들어서 있었다. 규모도 제법 크다. 가톨릭의 교세가 그만큼 실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메인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중학교를 시작으로 면사무소, 우체국, 119지역대, 파출소, 농협 등을 차례로 지나게 된다. 하나 더, 이곳 해안면은 무주지(無主地)로 골머리를 앓던 곳이다. 전후 입주한 주민들이 고생해서 땅을 일궈도 주인이 나타나면 빼앗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이번에 해결되었다고 한다. 정부에서 감정평가를 실시한 뒤 평가금액에서 개간비를 뺀 나머지 금액으로 토지를 주민들에게 매각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해안재건비(亥安再建碑)’란다. 해안면은 ‘6.25 전쟁 최대의 격전지이다. 70여 년 전, 참혹한 고지전(高地戰)을 치르면서 폐허가 됐던 곳이 새롭게 태어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마을 앞 텃밭은 무가 주인이다. 맞다. 전쟁이 끝난 뒤, 펀치볼 마을로 이주한 사람들은 남겨진 지뢰를 피해가며 척박한 땅을 옥토로 만들었다. 그 밭에서 지금 무와 배추 등이 자란다.

 11 : 01. ‘현리교 앞 이정표. 엉터리니 그냥 지나치기로 하자. 지시대로 가면 엄청나게 돌게 되니 말이다. 우리 일행은 이정표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80m쯤 가다 되돌아왔다.

 다리 건너에는 성황지(城隍池)’가 조성되어 있었다. 인공호수를 파고 호반을 따라 산책코스를 만들었다.

 성황지는 흙탕물 저감을 위한 침사지. 그간 이곳 펀치볼 지역은 한강수계 수질오염의 범인 중 하나로 꼽혀왔다. 강우 때마다 많은 양의 흙탕물이 하천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성황천에 가동보(성황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11 : 08. 몇 걸음 더 걸으면 회전교차로’. ‘DMZ평화의길 2시 방향의 453번 지방도(해안서화로)를 따른다.

 초입에 펀치볼 시래기광장으로 들어가는 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안에는 시래기 오픈갤러리도 조성되어 있단다.

 하지만 보건지소와 복지회관을 양옆에 낀 힐링하우스만 보일 뿐, 특별히 눈에 담을 볼거리는 없었다. 하나 더, 힐링하우스는 외국인 계절노동자를 위한 숙소이다. 타국에 와 열심히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해결하기 위해 건립했단다.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농촌이 유지될 수 없다는 요즘 현실이 반영된 시설이라 하겠다.

 다음은 ‘DMZ펀치볼 둘레길의 안내센터. 국토정중앙 최북단이라는 상징성과 전쟁과 평화에 관련된 주제로 조성한 73.2km의 숲길이다. 4개 코스(평화의숲길·오유밭길·만대벌판길·먼멧재길)로 이루어져 있고, 2021년 지리산둘레길·백두대간트레일·대관령숲길과 함께 국가숲길로 지정됐다.

 하나 더, 이 길은 민간인 출입통제지역 안에 조성된 숲길로, 미확인 지뢰지역과 인접하기 때문에 반드시 안전문제 동의서 작성 및 숲길등산지도사의 동반과 안내에 따라야 한다. 또한 1 2, 하루 200(선착순, 2인 이상)만 탐방 허용하고, 단체 예약은 전화 상담 우선, 숲밥 신청은 일주일 전 전화 예약이 필수이다.

 평화의 길 표지석. 이곳 펀치볼 분지가 천지(天地 : 하늘과 땅)를 품었고, 천지(天池 : 백두산 산정에 있는 자연 호수)를 닮았단다.

 11 : 15. 진열된 무기를 기웃거리다 전투전적비를 만났다. 도솔산지구와 펀치볼지구 전투를 함께 기념한단다. 맞다. 이곳 양구는 6·25전쟁 당시 동북방 최대 격전지였다. 전쟁 전에는 북한 지역이었으나 국군과 연합군이 38선을 돌파하면서 비로소 자유 대한민국 품으로 편입됐다. 국군은 양구지구 9개 전투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여 연전연승을 거뒀는데, 특히 해안은 도솔산·대우산·가칠봉·펀치볼 등 4개 전투가 벌어졌을 정도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도솔산지구전투(6.4-6.20)는 귀신 잡는 무적해병 신화를 창조했다. 미 해병대가 성공하지 못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를 우리 해병대가 교체 투입돼 탈환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도솔산을 방문해 목숨을 걸고 고지를 탈환한 해병대에 무적해병이라고 쓴 친필 휘호를 하사했다. 펀치볼지구전투(8.31-9.20)는 한미 해병대가 휴전회담이 제기된 이후 전투력을 재정비한 북한군2군단을 격퇴하면서 펀치볼과 주변 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전투다.

 11 : 19. 이어서 양구통일관이 길손을 맞는다. 통일에 대비하여 국민에게 북한 실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통일의지를 고취시키는 등 통일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한 시설이다. 평화지역 국가지질공원 사무실과 을지전망대·4땅굴의 매표소도 같은 건물에 들어서 있었다.

 을지전망대·4땅굴의 매표소는 휴관이란다. 관련 자료라도 얻을까 해서 들어가니 뜬금없다(휴관 중인데 왜 들어왔냐는 듯)는 얼굴로 직원이 맞는다. 자료도 청춘양구라는 양구군의 관광용 팸플릿이 전부였다.

 통일전시관은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통일교육을 강화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건전한 안보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내가 본 전시관은 20%쯤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북한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생활용품과 수출품, 사진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네 60-70년대 것들이라고나 할까? 실제로 그런지가 궁금해 전시관에 대한 팸플릿이 있는가 물어봤지만 없다는 대답이다. 그럼 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남북관계의 현실은 물론이고, 그동안의 정책 변화 등도 알리고 있었다.

 윤석열 정부의 통일·대북 정책도 소개하고 있었다. 이를 강조하고 싶었음인지 사진까지 첨부했다. 통일정책은 그동안 몇 차례 큰 변화를 거쳤다. 당시 변화의 중심에 있던 대통령들의 사진도 함께 게시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북한말 따라잡기, 북한 그림 짝 맞추기 등의 체험공간도 만들어져 있었다.

 통일관 앞의 그리팅맨(greeting man)은 오늘도 고개 숙여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사한다. 유영호 작가의 작품이라는데, 그는 2011년 지구 반대편인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를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15도로 고개 숙인 초대형 알루미늄 조각상 그리팅맨을 설치해 왔다. 그리팅맨은 문화와 인종, 시간을 초월해 인사를 건네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단다.

 11 : 25. 양구전쟁기념관은 9개 전투를 상징하는 기둥(상징탑)을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공사가 한창이라며 금줄을 쳐놓았기 때문이다. 2000년 개관한 양구전쟁기념관은 한국전쟁 때 치열한 격전을 벌인 양구지역의 9개 전투(도솔산·피의능선·펀치볼·백석산·가칠봉·대우산·크리스마스고지·949고지·단장의능선)의 전쟁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건립했다.

 기념관은 9개의 전시 공간으로 나누어졌다고 한다. 전쟁 발발부터 휴전협정까지의 과정 설명·전사자 명단과 함께 참전 군인들의 개인 유품·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고, 도솔산전투 디오라마·영상실·생존자 증언코너 등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통일관 광장에는 ‘DMZ평화의길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28코스의 종점이자 29코스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11 : 28-44 : 전쟁기념관 우측에 있는 ‘DMZ조이나믹 체험관은 놀이형 체험시설이라고 한다. 트렘펄린, 모험놀이, 터널놀이, 네트 놀이대, 조합 놀이대, 곡선형 짚와이어 등의 체험시설을 갖췄단다.

 준비해 온 간식으로 요기를 때운 뒤, 다시 길을 떠난다. ‘평화의길은 체험관 앞 광장을 가로지른다. 이어서 산비탈에 기대놓은 데크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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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44. 하지만 하시라도 빨리 평화누리길과 만나고 싶었던 우린 계속해서 453번 지방도를 따르기로 했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도열해 있는 길은 한마디로 예뻤다. 샛노란 옷으로 갈아입는 가을이면 또 하나의 눈요깃거리가 되겠다.

 길가 벌통은 지극히 한산하다. 벌들도 가을준비를 마치고 휴식기에 들어 갔나보다.

 해안면의 쥬키니 호박은 철이 가는지도 모르나보다. 한로가 지났는데도 튼실한 열매를 키워내고 있었다. 최근 양구상회의 호박찐빵이 입소문을 타고 있던데...

 12 : 01. 그렇게 16분쯤 걸으면 작은 공원이 있는 삼거리’. 평화누리길은 이곳에서 지방도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임도를 따라 산자락으로 들어간다. ! 오는 도중 우측에서 오는 만대벌판길과 평화누리길을 만나기도 했다. ! 산행대장 말로는 지방도를 따라가도 된다고 했다. 조금 멀기는 하지만...

 이곳에도 토사유출을 저감시키기 위한 인공호수가 만들어져 있었다. 만대천을 막아 침사지를 만들고, 그 주위에 산책로를 조성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아까 조이나믹체험장에서 헤어졌던 ‘DMZ평화의길이 다시 합쳐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나 더, 체력을 감안해야 한다며 간식도 거른 채 조이나믹체험장을 지나쳤던 80대 노익장 도반을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15분이나 쉬다가 온 우리보다도 더 늦게 도착했다함은 그만큼 에둘러 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12 : 09-18. 침사지 호반을 따라 내놓은 산책로. 신경 써서 조성한 것 같으나. 내가 보기엔 10%쯤 부족한 듯. 쉬어갈 수 있는 벤치가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이곳에서 평화의길로 진행하신 도반도 기다릴 겸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그것! 당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입니까?’ 경고판의 문구가 심상치가 않다. 미확인 지뢰와 불발탄이 산재한 곳이니 산나물 채취나 동식물 포획, 불법 개간 등을 한답시고 철조망을 넘지 말라는 것이다.

 백두대간트레일 안내판도 눈에 띈다. 후리(後里) 시점에서 논장교까지의 1구간(평화염원길, 21km)이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참고로 백두대간트레일은 양구 후리에서 홍천 불발령까지 총 10개 코스 159.5km로 조성돼 있다. 2021년 산림생태적·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숲길로 지정됐다.

 물골교로 만대천을 건넌다. 펀치볼(해안면 분지)에 떨어지는 빗물은 모두 저 물길을 따라 인북천으로 빠져나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물골이라 부른다.

 12 : 25. 150m쯤 더 걸었을까(물골교에서) 또 하나의 삼거리가 나온다. 평화누리길 종합안내판과 위험지구임을 알리는 경고판 등 번거로울 정도로 많은 안내판들이 이곳이 중요 기점임을 알려준다. 이정표도 평화누리길(인제 경계 2.5km/ 돌산령 8.5km) DMZ평화의길, 백두대간트레일 등 3개나 세워놓았다. 하나 더, 이 구간은 ‘DMZ펀치볼둘레길  먼멧재길과도 겹친다고 했다.

 왼쪽으로 올라서서 숲길을 탄다. 울창한 숲속을 구불구불한 임도가 헤집으며 지나간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길 양옆으로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그 철조망에 걸린 지뢰 표지판은 이곳 해안면에 미확인 지뢰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음을 나타낸다.

 12 : 30. 차단기(이정표 : 인제군경계 2.0km/ 돌산령 9.0km)가 차량은 출입 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엄중함을 알리려는 듯 초소도 세워놓았다. 군사시설보호지역, 지뢰 매설지역 등을 알리는 경고판도 서너 개나 된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산림유전자원보호지역’. 신갈·찰피·들메나무 등 희귀식물 자생지이자 유용식물 원생지라고 한다.

 길은 미확인 지뢰로 뒤덮인 지역을 헤집으며 나있는 모양새다. 덕분에 길 주변은 희귀 동식물의 낙원이 되었단다. 천연기념물 금강초롱을 비롯한 희귀식물과 산양·독수리·하늘다람쥐 등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12 : 40. 걷기 여행자들에 대한 지자체의 배려도 돋보인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오르막길임은 분명하니 쉬엄쉬엄 가라는 듯 정자를 지어놓았다.

 차량 한 대가 겨우 갈 수 있는 비포장 길은 구불구불 나있다. 구절양장 같은 이 길은 쉽게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길을 일러 인제로 넘나들던 해안 주민들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했다.

 자연석으로 만든 도로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상황이 바뀔 때 천천히라는 글씨나 화살표로 나타난다. 시쳇말로 라때는 표지판이 다 저랬는데...

 13 : 00. 두 번째 정자. 준비해 온 간식이라도 먹으라는 듯 식탁까지 놓아두었다.

 이 뭣꼬?’ 드럼통을 방호벽처럼 쌓아올렸다. 그것도 겹으로. 아무러면 어떤가. 삭막한 드럼통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예쁜 들국화를 피워 올렸다.

 13 : 02. 잠시 후 만난 사거리. 인제군과 양구군의 군계(郡界)란다. 좌우로 나뉘는 임도(평화누리길은 왼쪽 임도를 따른다) 외에도 맞은편 산자락을 치고 오르는 산길이 하나 더 나있다. 펀치볼둘레길의 먼멧재길이다.

 이정표(양구·인제 경계/ 돌산령 11.0km)의 방향표시가 없는 지명이 이곳이 두 지자체의 경계임을 알려준다.

 먼멧재길 이정표는 이곳을 숲밥 쉼터로 적고 있었다. 펀치볼의 자랑거리로 입소문을 탄 숲밥은 지역민이 재배하고, 정성껏 준비한 다양한 산채 음식 등을 탐방객이 있는 숲길까지 찾아가서 뷔페식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로, KBS ‘한국인의 밥상에서 강원도의 맛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지역특산물인 시레기·인삼·머위·우산나물·두릅 등 10여 가지의 찬이 제공되는데, 탐방 일주일 전 신청하면 주민들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시간에 맞춰 갖다 준다고 했다. 하나 더, 20인분 이상만 가능하기 때문에 개인 여행에서는 맛볼 수 없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평화누리길 12코스인 펀치볼길은 이곳 양구·인제 경계에서 끝을 맺는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13코스인 서화길을 따른다.

 13 : 20. 먼멧재(멧돼지가 많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 삼거리에 이른다. ‘DMZ평화의길 접경권 평화누리길의 안내판들이 이곳이 중요 기점임을 짐작케 해준다, 이정표도 평화누리길(원통 36km/ 군시설/ 양구 1km)과 백두대간트레일(양구 후리 3.5km/ 홍천 광원리 109.5km)에서 따로 세웠다.

 대암산으로 가는 임도는 자바라 문을 쳐놓았다. 이정표는 그 쪽에 군사시설이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출입을 통제하던 초소는 군인들이 떠난 지 이미 오래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요즘은 핵심 시설만 출입을 통제하고 있나보다.

 평화누리길 12·13코스의 경계는 인제·양구 경계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안내판(13코스인 서화길) 1km쯤 더 걸어야 하는 이곳 먼멧재 삼거리에 세워져 있었다. 이유가 뭘까?

 이후부터는 숲길이 아닌 시멘트포장 임도가 이어진다. 길 중간 중간에 평화누리길 안내판 서있고 자전거도로 표시와 시그널도 보인다.

 지자체도 그늘 하나 없는 딱딱한 시멘트길이 미안했던 모양이다. 중간에 파고라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하지만 내리막이라서 조금도 부담이 없다. 그저 진행방향에 펼쳐지는 백두대간(설악산 구간) 능선을 볼거리삼아 걸으면 된다.

 13 : 53. 다릿골시험장(국방기술품질원) 진입로가 갈려나가는 지점에도 자바라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8분 전쯤 사격장 입구에서도 자바라 문을 만났었다). 문 앞에는 라이더들을 위한 쉼터도 마련했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자전거를 둘러메고 옆으로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겠다.

 길가 빗돌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새겼다. 박정희 대통령이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던 사자성어다. 뒷면은 초전필승(初戰必勝, ‘라때는 초전박살이라 했던 것 같은데)을 넣어 군에서 만든 것이란 걸 입증시킨다.

 도로를 폐쇄하겠다는 공고문. 도로를 내면서 사유지가 들어간 모양인데 보상이 안 됐나 보다. 라이더들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14 : 15. 인북천에 놓인 다리(후평교)를 건넌다.

 인북천(麟北川, 인제의 북쪽에 있다는 뜻)은 가까이는 해안면(펀치볼), 멀리는 백두대간의 향로봉, 무산봉을 지난 도솔지맥 분기봉인 북한의 매자봉 1174m에서 내려온 물길이다. 이 물은 소양강과 한강을 거쳐 서해로 흘러든다.

 14 : 17. 잠시 후 453번 지방도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초입에 다릿골시험장의 입구임을 알리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3.31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해안면소재지의 통일관련 시설물 등 볼거리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도로변의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쉬운 길(지방도 이용)과 어려운 길(우리가 걸어온 길)로 나누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을 경우 3.78km쯤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는 점을 적었다.

주금산(鑄錦山, 813.6m)

 

산 행 일 : ‘23. 8. 19()

소 재 지 : 경기도 남양주시(수동면)과 포천시(내촌면) 가평군(상면) 일원

산행코스 : 불기고개(수동고개)시루봉몽골문화원(독바위) 갈림길선바위전망대주금산 정상불기고개(소요시간 : 5.15km/ 3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한북정맥의 수원산(水源山) 서파고개에서 남쪽으로 가지 쳐놓은 산줄기(사람들은 이를 천마지맥이라 부른다)에서 첫 번째로 솟구친 산이다. 옛 이름은 비단산’. 비단을 펼쳐놓은 듯 아름답다 칭송받는 산이다. 최근에는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고 입소문을 탔다. 주금산(鑄錦山)이란 이름처럼 비단을 녹여 풀어놓은 듯 아름답다나? 주금산은 수도권의 알려지지 않은 명산으로 분류된다. 잘난 산세에다 서울에서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은 있지만, 대중교통의 이용이 썩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춘선이 전철화 되고, 마석역에서 몽골문화원까지 시내버스가 40~50분 간격으로 다니면서 접근성까지 좋아졌다. 최근 찾은 이들이 부쩍 늘어난 이유일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불기고개(가평군 상면 상동리)

서울-양양고속도로 화도 IC에서 내려와 387번 지방도를 타고 현리(가평) 방면으로 들어가면 몽골문화촌(남양주시 수동면)을 지나 불기고개(또는 수동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남양주와 가평의 시·군 경계인 고갯마루에 간이식당과 작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주금산 산행은 원점회기가 가능한 몽골문화촌(남양주시 수동면)이나 내리(포천시 내촌면)에서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 상동리(가평군 상면)와 베어스타운(포천시)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 우리처럼 정상만 찍고 되돌아오려면 불기고개에서 시작하는 게 최선이다.

 09 : 00. 건너편 산자락으로 들어붙으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이때 도로를 횡단하게 되므로 오가는 차량을 조심해야 한다. 첩첩산중이던 옛날 늑대나 여우를 살펴가며 고개를 넘었듯이 말이다. 오죽했으면 산 아래 마을의 이름이 돌아우마을이었겠는가. 혼자 고개를 넘는 선비를 돌아오우, 돌아오우하고 애타게 불렀으나 그냥 넘다가 짐승 밥이 되었다나?

 정상까지 거리는 2.5km. 주금산의 등산코스 중 가장 짧은 코스이다. 높여야 할 고도(高度)도 가장 적다. 핸드폰의 고도계가 389m를 찍고 있으니 앞으로 400m 남짓만 더 높이면 된다.

 산길은 시작부터 무척 가파르다. 거짓말 좀 보태 코에서 흙냄새가 느껴질 정도라고나 할까?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통나무계단을 놓았는가 하면, 그래도 버거운 사람들을 위해 밧줄 난간까지 매어놓았다.

 09 : 05. 숨이 턱에 차오른다. 5분 만에 지능선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거기다 잣나무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가 심신까지 맑게 해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광활하지는 않지만 잣나무 숲이 펼쳐진다. 하지만 국내 잣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가평의 본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저 나무에서 채취되는 잣 또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가평군이 타 지역보다 일교차가 큰 탓에 이곳에서 생산되는 잣 또한 타 지역의 것보다 더 고소하면서도 영양이 높기 때문이란다.

 능선에 올라섰는데도 산은 사나운 기세를 누그러뜨릴 줄 모른다. 그 기세에 눌린 산길은 왔다갔다 갈 지()’자를 써가며 겨우겨우 고도를 높여간다.

 09 : 20, 15분쯤 더 걸어 폐 헬기장에 올라선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산길은 사나웠던 기세를 많이 누그러뜨린다.

 10 : 35 : 불기고개 코스는 서너 곳에서 갈림길을 만난다. 첫 만남은 몽골문화원이 있는 비금계곡(남양주시 수동면)’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몽골문화원에서 원점산행을 할 경우, ‘독바위쪽으로 올라 정상을 찍은 다음 하산하면서 저 길로 내려간다. 참고로 비금계곡은 옛날 선비들이 이 산에 놀러왔다가 거문고를 숨겨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인데, 갈수기에도 물소리가 화려한 암반계곡이다.

 이정표(정상 1.53km/ 몽골문화촌 3.14km/ 불기고개1.1km)는 친절하게도 위도와 경도까지 적고 있었다.

 삼거리 조금 못미처에는 행선지를 알 수 없는 갈림길이 나있었다. 행여 길이라도 잘못 들어설세라 누군가가 나뭇가지로 막아두는 친절을 베풀었다.

 지자체의 배려도 엿볼 수 있었다. 곳곳에 쉼터를 만들어 지친 다리를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아직도 길은 평탄하다. 하지만 걷는 게 만만치만은 않다. 삼복더위가 물러갈 줄 모르고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엊그제 내린 비가 습도까지 잔뜩 높여놓았다.

 편안하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황이 변해버린다. 통나무 계단을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길이 가팔라져버린 것이다.

 두 번째 이정표(정상 1.3km/ 수동고개 1.2km) 근처에서는 커다란 바위도 만날 수 있었다. 전형적인 육산에서 보는 바위라선지 더 반갑다. 아니 주금산은 육산답지 않게 바위가 많았다. 특히 독바위는 주금산의 백미로 알려지지 않았겠는가.

 길을 갈수록 더 사나워진다.

 그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겨우 고도를 높여간다. 그렇다고 멈출 수야 없는 노릇. 밧줄 난간에 의지해 쉬엄쉬엄 올랐다.

 구름이 낮게 갈아 앉은 게 비가 오려나 보다. 맞다. 기상청은 오후 2시 무렵 소나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9 : 55.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두 번째 삼거리에 이른다. 이정표(정상 1.1km/ 상동리 1.0km/ 수동고개 1.4km)는 오른쪽이 수동리(가평군)의 주말농장에서 올라오는 길임을 알려준다.

 이정표 뒤, 언덕처럼 생긴 봉우리가 시루봉(585m)’이다. 하지만 쉼터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하나 더, 언제부터 시루봉이란 이름이 붙여졌을까? 10년여 전, 주금산을 답사하기 위해 사전조사를 하던 때만 해도 시루봉이란 이름은 없었다.

 아무튼 정상은 텅 비어 있었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표지기(정상석이 없을 경우 산꾼들이 인증용으로 매달아 놓은)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게 서운했던지 누군가가 밧줄 난간 기둥에다 시루봉이라고 적어놓았다.

 아무리 밋밋해도 시루봉은 산봉우리였다. 내려가는 길이 저렇게 가파른 걸 보면 말이다.

 오가는 이들이 안전 산행을 기원하며 하나 둘 쌓아올린 돌탑이 눈에 띈다. 소박한 바람만큼이나 엉성한 돌탑이다.

 또 다시 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고온다습한 날씨 탓에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다. 그러니 저런 오르막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이즈음 바윗길도 만나게 된다. 힘은 들지만 요리조리 피하다가 넘는 맛이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10 : 20. 또 다른 쉼터, 이번에는 통나무를 세워 의자를 만들었다.

 이정표를 겸한 안내판도 눈에 띈다. 자연생태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산림을 보호하잔다.

 이때 울창한 숲 너머에서 거대한 암벽이 살짝 얼굴을 내민다. 산꾼들 사이에서 선바위로 불리는 명물이다.

 또 다시 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이번도 역시 밧줄 난간을 매어놓아야 했을 만큼 가파르다.

 요런 폐 벙커도 눈에 띈다. 얼마나 많은 우리네 아들들이 저 속에서 힘든 인고의 시간을 보냈을꼬?

 10 : 35. 세 번째 갈림길은 몽골문화원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이곳에서 왼쪽(비금리)으로 가면 주금산 산행의 하이라이트라는 독바위가 나온다. 하지만 우린 정상으로 간다. 되돌아오다가 들러도 되니까. 그게 삼복더위에 지쳐 깜빡 해버렸지만...

 이정표(정상까지 0.48km)는 왼쪽과 우리가 올라온 길의 최종 목적지를 몽골문화원으로 적고 있었다. 내리(포천시)에서 올라오는 길을 빠뜨린 것이다. 남양주시에서 만들었다고 자기 지역의 등산로만 표시하다니 해도 해도 너무했다.

 주금산 숲길 안내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진입로 표시라도 해두었으면 좋았으련만, 자기 관내만 쏙 뽑아 그려 넣었다. 때문에 불기고개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주금산의 명물인 독바위를 놓쳐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정표나 안내도만 살펴볼 게 아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야가 열리기 때문이다. 아까 쉼터에서 살짝 얼굴을 내밀던 선바위가 거칠게 없다는 듯이 성큼 다가온다. 그 오른편으로는 가평의 산하가 펼쳐진다.

 몇 걸음 더 걷자,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샛길이 어렴풋이 나타난다. 물론 주 등산로는 아니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는 일은 없도록 하자. 멋진 전망대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올라선 선바위(혹은 조망돌뼈)’ 상부는 폐자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전망이 좋은 곳이니, 군부대의 망루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조망도도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2%가 아니라 20%쯤 부족한 듯. 마을 이름은 몰라도 눈앞에 펼쳐지는 산 이름이라도 적어놓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아쉽게도 조망은 허락되지 않는다. 구름을 잔뜩 머금은 날씨가 시야를 가로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주금산 정상은 물론이고, 수원산에 개주산, 철마산, 그리고 천마산으로 흐르는 천마지맥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데 말이다.

 이후부터는 천마지맥(天摩枝脈)’을 탄다. 한북정맥이 운악산을 지나 수원산에 오르기 전 명덕삼거리에서 남쪽으로 가지를 친 천마지맥(도상거리 49.4km)은 이곳 주금산을 지나 철마산·천마산·백봉·예봉산을 일군 다음 팔당호에서 숨을 거둔다.

 정상으로 가는 도중 바윗길을 타기도 한다. 모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곳도 있다. 거대한 바위가 날카롭게 서있기 때문에, 크랙을 붙잡고 통과해야만 한다.

 잠시 후 만난 또 다른 갈림길, 암봉으로 연결되는 샛길은 아까처럼 희미하다. 하지만 걸러서는 결코 안 된다. 조금 전 올랐던 선바위보다 훨씬 더 나은 조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주금산 정상. 그 오른편에 지난 해 답사했던 개주산이 있고, 당시 눈여겨 본 바 있는 가평 베네스트 골프장도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올라온 불기고개(수동고개)의 뒤로는 화채봉과 서리산, 축령산이 줄을 잇는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주금산의 두 명물이 성큼 다가온다. 왼쪽의 수직절벽은 선바위, 그 오른편에서 독바위가 솟아올랐다. 항아리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지 않나 싶다. 하나 더, 예전에는 덕암(德岩)’으로 불렸다는 얘기도 있다. ‘어진 덕()’자가 왜 붙었는지는 몰라도, 그게 덕바위를 거쳐 독바위가 되었다나?

 선바위에서 정상까지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짧고 완만한 내리막에 길고 가파른 오르막으로 보면 되겠다.

 명색이 정상인데 그리 쉽게 정복을 허락하겠는가. 막바지에 만나는 오르막은 상당히 가팔랐다.

 10 : 55.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55. 헬기장에 올라선다. 웃자란 잡초가 무성하지만 ‘H’자 보도블럭은 최근에 칠한 듯 하얀색으로 빛난다. 산악 안전사고를 대비해 관리해오고 있는 것 같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주금산 정상이다. 정상은 주금(鑄錦)’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도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없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탓에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육산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그저 두 개나 되는 정상석이 눈길을 끈다고나 할까?

 주금산은 포천시와 가평군의 경계(남양주시에서는 약간 빗겨나 있다)에 놓여있다. 정상석이 두 개인 이유일 것이다. 인증 사진은 잘 생긴 포천시의 것을 제켜두고 말뚝 모양의 가평군 것을 배경으로 삼았다. 삼각점(일동 20)까지 포함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아서이다.

 포천시라고 해서 남양주시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이정표의 방향표시에 남양주시나 가평군의 지명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등산안내도도 마찬가지. 포천시에서 만든 듯 자기 관내만 그려 넣었다. 망국의 지름길일 수도 있는 지역 이기주의가 언제쯤 사라질까?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차량을 이용해서 왔으니 불기고개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 때문에 하산 기록은 생략. 대신 걷다가 만난 버섯 몇 컷을 올려본다. 첫 만남은 느타리버섯 식용에다 채취한 양도 꽤 되어 우리 집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흰둘레줄버섯’. 항암효과(특히 자궁암)가 있다지만 사진만 찰칵.

 식용인 뽕나무버섯으로 여겨지지만 확실하지 않아 그냥 패스.

 꽃으로 오인하기 딱 좋을 정도로 잘생긴 버섯도 한 컷.

 마지막으로 먹음직스런 산머루 열매도 한 컷. 그나저나 오늘은 왕복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5.15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삼복더위로도 모자라 습기까지 잔뜩 머금은 날씨가 발길을 붙잡았던 모양이다.

서해랑길 37코스(합산마을 버스정류장-하사6구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3. 9. 23()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염산면 및 백수읍 일원

여행코스 : 합산마을 버스정류장월평항두우리 염전당두마을상정마을창우항하사6구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9.7km, 실제는 15.35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7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대부분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방조제를 걷는다. 장점은 볼거리로 넘친다는 것. 칠산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작은 섬들은 기본,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염전과 드넓은 갯벌을 가득 채운 풍력발전기는 양념이다. 거기에 백바위해변의 빼어난 경관이 방점을 찍는다.

 

 들머리는 합산마을 버스정류장(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22번 국도와 808번 지방도, 77번 국도를 갈아타고 들어오다 양일마을 경로당(염산면 봉남리)’ 앞에서 칠산로5로 옮기면 잠시 후 합산마을에 이른다. 서해랑길(영광37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염산방조제와 칠산로5길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이번 구간도 간척사업과 인연이 깊다. 방조제의 둑길이 아니면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염전이나 들녘을 횡단한다. 거리는 다소 긴 19.7km, 그게 부담스러운 나는 택시를 불러 5km(집사람은 7.5km)를 이동(같은 코스로)했다. 하지만 5만원이란 거금을 지불했으니 권장할만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실제 출발지는 운곡마을(雲谷, 염산면 야월리) 앞 방조제(첨부된 지도에서 야월리 서쪽 해안의 툭 튀어나온 지점). 37코스의 시점에서 4.87km쯤 떨어진 지점이다. ‘월평항에서 2.5km쯤 더 나간 지점이기도 한데, 칠산갯길 300(천일염길)의 탐방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나 현 위치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안내판 너머로 검붉은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사리 때는 10km나 떨어진 각씨도까지 경운기를 타고 가는 재미를 즐길 수 있단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간척사업이 빚어놓은 전형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물 빠진 갯벌에 바둑돌처럼 놓인 비작도를 위시한 작은 섬들, 그 섬들을 잇는 방조제가 바둑판의 선이라도 그리는 양 여백을 가득 채운다.

 칠산바다 갯벌은 지금 가을빛으로 물든 칠면초로 한가득이다. 그 뒤로는 작은 섬들이 둥둥. 이게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는다. 저 그림을 보기 위해 접근성이 떨어지는 이곳까지 왔다. 집사람을 핑계 삼아 생략해도 될 것을 5만원의 거금까지 들여가면서 말이다.

 11 ; 47. 방조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가음산(206.2m)을 정면에 두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염산면의 해안은 간척사업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앞바다의 작은 섬들을 줄줄이 방조제로 이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때 생긴 들녘은 대부분 염전. 이게 또 경제성을 잃으면서 대하양식장으로 업종을 바꿨다.

 왼편은 칠산바다의 갯벌, 그런데 바다의 폭이 100m도 채 되지 않는다. 항아리처럼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염전에서 사용할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한다.

 가음산 자락의 농경지. 누렇게 익은 벼가 게으른 농부를 애타게 부른다.

 바둑판처럼 반듯반듯 한 염전이 뒤를 잇는다. 가을볕 아래 소금 알갱이가 알알이 영글어간다. 영광의 대표적 풍경의 하나라 하겠다. 참고로 영광 앞바다에 펼쳐진 갯벌은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라고 했다. 생산되는 소금도 미네랄이 풍부해 질 좋은 소금으로 정평이 나 있단다.

 12 : 09. 내만처럼 파고들던 바다가 방조제(이정표 : 종점 12.9km/ 시점 6.8km)를 만나면서 끝난다. 저 둑을 경계로 야월리에서 두우리로 넘어간다.

 방조제 안쪽은 바닷물을 가두어두는 저수지다. 저 물은 염전에 생명수로 공급된다.

 저수지에서 턴을 한 탐방로는 다시 방조제를 따른다. 바다를 향해 되돌아오는 모양새라고 하겠다.

 둑길을 200m쯤 걸었을까, 오른편으로 방향을 트니 두우리의 염전 단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지명(地名) 자체가 이미 소금 산(鹽山)’인 곳, 얼마나 소금밭이 컸으면 칠산 바닷물이 70리길을 들고 난다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첫 만남은 영백염전이다. ‘1회 전국 염전콘테스트에서 영예의 대상까지 수상한바 있는 50년 전통의 전통갯벌염전으로 소금 모으기, 운반하기, 수차 돌리기 등 염전 체험도 가능하단다.

 소금은 4월부터 10월까지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매일 생산되는 건 아니고, 소금 알갱이가 영글어야 거두어들일 수 있다. 소금밭 두렁을 서성이는 저 염부는 그 때를 헤아리고 있을 게고...

 염전이 단지를 이루다보니 군내버스도 정기적으로 다닌다. 하지만 이용하는 사람이 드문 듯 버스정류장은 오토바이 차지가 되어버렸다.

 길 양옆으로 소금밭이 도열해 있다. 염전이 단지를 이루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화학물질 오염원인 농지와 거리를 둘 수 있어 친환경 소금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야 칼슘·칼륨·마그네슘 등 필수 미네랄 함량이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다는 한국산 천일염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튼 음식의 깊은 맛을 위해서는 국산 천일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그게 저 소금밭에서 염부들의 노력을 보태가며 얻어지는 것이다.

 이 지역의 염전은 바닥을 타일이나 옹기로 깐 장판염이라고 한다. 햇빛과 바람으로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생산하는 천일염 염전은 크게 저수지와 증발지, 결정지로 구분된다. 염도 35(퍼밀·1000분의 1)의 바닷물이 각 구획을 거치면서 물이 증발되고 염도는 높아진다, 결정지에 이르면 200 이상의 염도를 지닌 바닷물에서 소금 결정이 생성된다. ‘꽃이 핀다고 표현되는 이 단계까지 오는 데 약 1개월이 걸린단다.

 비작도 쪽으로도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저런 풍경은 사진작가들에게 훌륭한 낚시감이 된다. 해가 뜨고 질 무렵 염전 풍경을 렌즈에 담고 있는 사진작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이유이다.

 양 옆구리에 염전을 낀 길은 1.4km나 이어진다. 하도 길다보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맞다.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영광은 신안에 이어 지역 대표 천일염 생산지 중 하나다. 천일염 전국 소비량 기준 약 17~18%가 생산된다. 오죽했으면 면의 이름까지 소금 산(鹽山)이 되었겠는가.

 12 : 32. 정자 둘이 나란히 서있는 둑에 올라섰다. 정자 뒤, 길게 뻗어나가는 방조제 끄트머리에는 비작도가 놓였다.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로 변한 꼬맹이 섬이다. 그 오른편으로는 칠산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함평만을 벗어난 바다는 썰물이 한창인지 갯벌이 하늘 끝에 닿았다. 간척지도 망망한 염전. 저절로 가슴이 시원해진다.

 저 갯벌은 국내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고 했다. 해양수산부 등이 매기는 갯벌 평가에서 매년 1위를 차지한단다. 겨울 북풍이 불 때 격한 파도가 치면서 바다 밑 뻘을 모두 쓸어가고, 다시 봄부터 새로운 뻘이 내려앉는 지형적 특징 덕분이라나?

 방조제를 따라 당두마을로 간다. 소금밭과 갯벌을 양옆에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두우리의 저 싱싱한 갯벌은 영양가 높은 플랑크톤이 풍성해서 고기 떼가 몰려오고, 어패류도 쑥쑥 자란다. 봄에는 실뱀장어, 여름~가을엔 숭어와 새우 꽃게, 가을부터 늦겨울까진 김장용 새우가 잡힌다.

 생태계 복원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도 보인다. 모래 날림으로 인한 염전 피해와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해 퇴사울타리와 대나무 방풍책을 설치했다. 자생 수목인 해송으로 방풍림도 조성했다. 그런 노력이 인정받아 산림청 주최 전국 우수 산림생태복원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간척지 방향은 옷을 바꿔 입었다. 소금밭을 지나자 진초록 대파 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생명력 넘치는 푸른빛이다.

 당두마을로 가는 방조제는 꽤 길었다. 덕분에 우린 서해바다를 실컷 보게 된다.

 서해바다는 다도해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을 보여준다. 섬 십여 개가 군데군데 보일 뿐 나머지는 일직선의 수평선이다. 그 많던 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은 풍요로움을 위해 섬과 섬을 연결했고, 그 결과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잃었다.

 12 : 53. 배수갑문을 지나 두우리 어촌마을체험관에 이른다. ‘두우리 8km나 되는 해안선을 자랑한다. 바닷물이 많이 빠지면 7~12km나 걸어 나갈 수 있는 갯벌도 자랑거리다. 그러니 많은 주민들이 어촌계를 중심으로 갯벌을 부치며 살아갈 것은 당연. 그런 삶은 1973 KBS TV 연속극 두우리 녀석들로 소개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체험관은 문이 닫혔다. 그 이유는 안내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마을 앞 갯벌에서 갯벌양식장 환경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합의 지속적인 자원관리를 위해 무단출입을 금한다니, 어찌 체험객들을 받을 수 있겠는가.

 체험관 앞,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9.9km/ 시점 9.8km) 37코스의 반을 걸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난 5km를 택시로 이동했다. 그러니 이제 시작인 셈이다.

 12 : 56. 200m 남짓 더 걸었을까 삼거리가 나온다. ‘칠산갯길 300 이정표는 두우리해수욕장까지 1.07km 밖에 남지 않았다며 곧장 가란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당두마을’. 천일염으로 유명한 두우리(斗牛里) 3개 자연부락(당두·상정·창우) 중 하나로, 마을 뒷산이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닭머리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당두(堂斗)’로 변했다. 그 왼쪽은 상정마을이다. 마을이 높은 곳에 위치하며 정자와 같다고 해서 상정(上亭)’이란 지명을 얻었다.

 13 : 00. 77번 국도로 올라서 상정마을을 관통하는데 이때 원불교 마크가 눈에 띈다. 맞다. 영광은 원불교의 발상지다. 박중빈 대종사의 생가인 구호동 집터를 비롯해 기도터였던 마당바위, 그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노루목대각지까지 모두 영광에 있다.

 시골 마을치고는 제법 번화한 모양새이다. 펜션과 민박에 식당, 마트까지 갖출 것은 다 갖췄다. 백바위해수욕장과 인접해있다는 지리적 요건이 작용했을 것이다.

 상정마을 버스정류장. ‘실뱀장어 채포 허가권에 대한 해양수산부 답변이 붙어있었다. 민물에서 사는 뱀장어는 연어와 달리 바다에서 산란한다. 때문에 장어 양식장에 공급할 치어(실장어)를 바다에서 잡아야 하는데, 이때 사용하는 그물(낭장망 어구)의 합법성 여부에 대한 답변이다. 아무튼 실장어잡이는 불법이 성행한다고 했다. 실장어 가격이 장난이 아니라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이 모기장 같은 극도로 촘촘한 그물을 사용해 실장어뿐 아니라 모든 치어를 깡그리 잡아버린다는 것이다.

 상정마을 정자는 칠산바다에 대한 조망이 뛰어나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칠산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그렇다면 자리를 잘못 잡았다. 도로 건너의 바닷가 언덕에 얹어놓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상정마을을 지나 백바위 해변까지는 기분 좋은 산책로였다. 77번 국도(칠산로)의 갓길에 나무데크를 깔았다.

 중간에 전망대까지 만들어두는 세심함도 엿보인다. 칠산바다를 눈에 담아보라는 배려인 듯, 하지만 웃자란 잡목이 풍경화의 아랫도리를 잘라먹어버렸다.

 13 : 14. 빼어난 경관으로 입소문을 탄 백바위해수욕장에 이른다. 입구의 울창한 노송 숲은 자랑거리, 백사장도 제법 넓은데다 모래 입자가 무척 곱다. 덕분에 모래사장이나 갯벌에서 씨름·닭싸움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갯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 아이들도 좋아한단다. 영광군에서 천일염·갯벌축제를 연다니 일부러라도 한번쯤 들러볼만 하겠다.

 해수욕장의 자랑거리는 아름다운 경관만이 아니다. 모래사장 너머의 갯벌은 호미로 헤집는 자리 어디서든 백합과 고둥이 나올 만큼 생태가 건강하다고 했다.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저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그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해변은 자동차 캠핑족들로 붐볐다. 그동안 서해랑길을 걸으며 이렇게 많은 인파는 처음 보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칠산바다가 그만큼 곱다는 얘기가 아닐까?

 백사장 너머,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바위가 눈길을 끈다. ‘백바위(白巖)’라는 지명을 낳게 한 풍경이다. 해안가에 거대한 흰 바위 무리가 갯벌 쪽으로 길게 뻗어 나가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백바위 끝에 올라앉은 정자가 풍치를 더해준다. 이곳 백바위해안은 낙조의 명소라고 했다. 정자와 한데 어우러지는 낙조의 색감도 훌륭하지만, 인적을 드물어서 감동적인 낙조풍경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란다.

 백바위는 예쁘장한 나무다리로 연결되고 있었다. 조형미 넘치는 아치를 배경삼은 사진을 남겨보는 것도 괜찮을 듯. 참고로 백바위는 무슨 특별한 전설이 있는 게 아니다. 바닷가에 둘러싸여 있는 바위가 하얀색을 띠고 있어 그런 이름을 얻었다.

 13 : 24. 또 하나의 다리(조금 전보다 한참이나 작다)를 건너자 백암정(白巖亭)’이란 정자가 반긴다. 쉼터는 기본, 낙조를 바라보는 전망대를 겸했다. 거기에 뒤로 물러설 경우 낙조 풍경의 중심이 된다니 이만하면 다목적 정자라 하겠다.

 정자에 오르면 저 멀리 크고 작은 섬들이 아스라하다. 맞다. 두우리 앞바다는 크고 작은 섬들이 볼거리다. 마을 앞 10~20km 안에 영광굴비가 잡히는 칠산도, 한국관광공사가 아름다운 섬으로 꼽은 송이도, 영화 마파도 촬영장소인 각이도 등 20여개의 유·무인도가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일곱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나타난다. 영광 앞바다는 산처럼 보이는 일곱 개의 저 섬들이 있다하여 칠산바다가 되었다. 그 바다는 조기들의 고향이었다. 3월에서 4월 무렵, 산란을 위해 회유하는 조기 떼들로 바다는 넘실거렸고, 전국의 어선들이 몰려들어 성시를 이루었다. 그야말로 물 반에 고기 반, 사흘 동안 조기를 잡아 평생을 먹고 산다는 '사흘칠산'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정자를 빠져나온다. 하지만 다리 건너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커다란 백바위를 우회해 숲속으로 들어선다.

 13 : 30. 잠시 후 임도(이정표 : 종점까지 8.3km)로 올라 뒷산(81.6m)을 에도는 해안도로를 탄다. 이때 칠산바다의 고운 풍광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마침 오가는 차량도 없으니 실컷 눈에 담으면 될 일이다. 오죽 안 다녔으면 칡넝쿨이 도로 가운데까지 퍼졌을까.

 호젓하고 편안한 길은 주변까지 꽃밭으로 만들었다. 노란 금계국과 하얀 들국화가 더미를 이룬다. 그게 아스라이 펼쳐지는 바다와 함께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는다.

 저게 바로 칠산이란 지명을 낳게 한 섬들이다. 그런데 섬이 여섯 개 뿐이다. ‘마음씨가 고운 사람에게만 일곱 개로 나타난답니다.’ 젊은 도반이 너스레를 떤다. 그럼 난 마음씨가 썩 좋은 편은 아닌가 보다.

 고개를 돌리자 백암정이 눈에 들어온다. 백바위 해변은 노을이 없는데도 충분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 무리의 하얀 바위가 넓은 모래사장과 어우러져 흡사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뒷산 자락의 바닷가, 나 홀로 외로운 등대도 잠깐으로 볼거리로는 충분하다. 높이 11.5m(직경 1.8m)의 흰색 원형강관조로 인근을 항해하는 어선의 주·야간 항행지표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13 : 45-59. 뒷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 끝자락에 정자가 걸터앉았다. 칠산바다와 백수읍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쉼터 겸 전망대이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가져온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망중한을 즐길 수 있었다.

 칠산바다 조망, 하늘과 바다를 반반으로 나누는 선, 그 위에 고만고만한 섬 여섯 개(정확히는 일곱 개)가 놓여있다. ‘! 피라미드처럼 생겼네?’ 코로나의 만연으로 입국 여부가 불투명하던 시절, 우리부부는 이집트를 여행 중이었다. 당시 기자지역의 사막에서 바라보던 피라미드가 문득 떠올랐나 보다.

 백수읍 갯벌에 늘어선 풍력발전기 무리도 눈에 들어온다. 광활한 들녘을 가득 메우며 단지를 이룬 규모는 어마어마하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14 : 02. 임도를 벗어나 창우마을로 들어선다. 마을이 푸른 바다(칠산바다)에 둘러싸여있다 하여 푸를 창()’자를, 소를 닮았다는 마을 뒤 한우산에서 소 우()’자를 따와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

 잠시 후 이른 창우항(이정표 : 종점까지 6.5km)’은 바다를 삶의 현장 삼아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선착장이다. 하지만 널찍한 물양장에다 크레인을 두 대나 갖춰 웬만큼 크다는 항구가 부럽지 않다. 커다란 창고와 어민회관도 눈에 띈다. 지역맞춤형 소득증대사업인 어촌뉴딜 사업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선착장에는 꽤 많은 고깃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인근 해역에 조기·꽃게·가오리·서대·새우 등 바다자원이 풍부하다는 소문이 맞나보다.

 창우항을 지나면 불갑천의 둑길을 탄다. 널따란 갯벌 위로 둑길이 뱀처럼 휘어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진다. 갯벌 사이 고인 물에 햇살이 비치자 물고기 비늘처럼 번쩍인다.

 창우항을 돌아온 갯골은 깊고 긴 물 빠진 갯고랑을 불갑산 자락까지 끌어간다. 그래서 하천의 이름까지 불갑천이 되었다. 이즈음 갯벌에서 쉬고 있는 한 무리의 흰 갈매기 때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갈대가 아니라 억새랍니다 둑길의 자취까지 지울 듯 잠식해오는 웃자란 억새를 갈대라고 했다가 집사람에게 초본(草本) 교육을 톡톡히 받았다.

 드넓은 갯벌은 온통 풍력발전기 차지다. 백수읍 하사리와 염산면 두우리의 국공유지 20여만 평에 해상풍력발전을 중심으로 에너지 융복합 산업플랫폼을 구축한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해상풍력발전이란 풍력 터빈을 호수나 피오르 지형, 연안 같은 수역에 설치해 그 곳에서 부는 바람의 운동에너지를 회전날개에 의한 기계에너지로 변환해 전기를 얻는 발전방식을 일컫는다.

 저 강태공은 시간이 아니라 운저리(‘망둥어 꼬시래기로도 불린다)’를 낚는 중이라고 했다. 36구간의 무미건조했던 대화가 떠올랐지만 호기심에 이끌려 한마디 더 건네 본다. ‘그럼요. 얼마나 맛있고 식감이 좋은데요’. 회로도 먹느냐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불갑천이 좁아지더니 소하천으로 변했다. 아니 저건 염전에서 사용할 바닷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일종의 수로이다. 아무튼 건너편에서 둘레길 도반들이 손을 흔들어준다. 출발지 부근처럼 이곳도 자 모양으로 길이 굽어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니 염전이 들어서 있는 게 당연. 소금 만들기가 끝물이어서 일까? 염전은 텅 비어있다는 느낌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저 소금밭에는 흰 소금 대신 붉은 칠면초가 자라고 있을 게다. 쓸쓸한 분위기로 대변되는 염전의 겨울 풍경...

 14 :37. ‘자형 수로의 끝(이정표 : 종점까지 4.3km)에 이른다. 저 둑을 경계로 서해랑길은 송암리(같은 염산면)’로 넘어간다.

 방조제 안쪽은 커다란 저수지가 들어서 있었다. 이곳 역시 염전에 공급할 바닷물을 가두어두는 곳. 거기에 대하양식까지 겸하고 있는 듯 통발모양의 어망이 쳐져 있었다.

 저수지를 지난 서해랑길은 이제 반대편 둑길(이정표 : 종점까지 4.1km)을 탄다.

 영광은 ‘Green Energy’의 메카다. 원자력에 풍력, 태양광까지 탈 탄소를 위한 발전시설을 모두 갖췄다. 나머지 2%는 조력(潮力)으로 채워 넣으면 완벽해지지 않을까?

 태양광발전소와 농경지 사이를 걷던 서해랑길이 다시 둑길로 올라선다. 탐방로는 풍력발전기 사이사이를 걷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다가가 본 발전기는 멀리서 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하나하나가 거대한 구조물이다. 누군가는 저 안에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불갑천 주변은 저수지나 염전, 양어장, 수로가 많다. 그래서 사방 천지가 물이다. 물에 비치는 풍력발전기의 그림자가 아름답다.

 15 :02. 탐방로가 함께 걸어온 불갑천과 헤어지잔다. 그리고 이정표(종점까지 2.5km)가 가리키는 들녘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또 다른 들녘을 횡단한다.

 15 : 14. 77번 국도(이정표 : 종점까지 1.6km)에 닿았다. 영광풍력발전() 사옥이 있는 지점이다. 영광풍력은 국내 최대 규모인 140MW(메가와트)급의 서해안 윈드팜(Wind Farm)’이다. 72천 가구가 사용 가능한 26MWh(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함으로써, 111t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단다.

 탐방로는 국도로 올라서지 않은 채 왼쪽 아래로 난 소로를 따른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었다. 그 끝에서 불갑천을 만났기 때문이다. 불갑천의 물길은 분명 좁았다. 그렇다고 건너 뛸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러니 애초부터 다리를 건너는 게 옳은 선택일 것이다.

 불갑천과 맞닥뜨린 우린 다리(불갑천교)로 올라갈만한 곳을 찾아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길을 만들었고, 가드레일을 넘어 다리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염산면과 백수읍의 경계를 이루는 다리 아래로는 불갑천(佛甲川)’이 흐른다. 불갑면 자비리의 노은재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유입되는 길이 32.5km의 물줄기이다.

 15 : 28.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난 농로로 빠져나간다. 가드레일을 잘라 통로를 만들었는가 하면, 초입에 이정표(종점까지 0.9km)까지 세워놓았다. 이럴 거라면 애초부터 다리 위로 인도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싶다.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누렇게 익은 벼들로 한껏 풍성해진 들녘을 양옆에 끼고 가는 멋진 구간이다.

 15 : 40. 하사리(下沙里)의 자연부락인 염전마을(하사6)’에 이르면서 37코스는 끝을 맺는다. 1952년 염전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하나 더, 종점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마을 노인정이 위치하고 있어 트레킹 날머리로는 이만 곳이 없었다.

 서해랑길(영광 38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농로가 백수로와 맞닿는 지점에 세워져 있었다. ‘칠산갯길 300의 안내판도 눈에 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염전길에서 백합길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에 15.35km가 찍혀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강원도 평화누리길 11코스(양구 돌산령길)

 

여행일 : ‘23. 9. 17()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동면 및 해안면 일원

여행코스 : 팔랑리대암산용늪 탐방안내소도솔산 전적지돌산령 정상해안입구(거리/시간 : 16km, 실제는 대암산 용늪 탐방안내소부터 10.7km를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들머리는 월운저수지 상부(양구군 동면 월운리)

중앙고속도로 춘천 IC에서 내려와 46번 국도를 타고 양구읍까지 온다. 송청교차로(국토중앙면 죽리)에서 31번 국도(양구·해안방면)로 옮겨 금강산 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월운저수지에 이른다. 댐의 상부에 평화누리길  ‘DMZ평화의 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팔랑리(양구군 동면)에서 시작해 해안입구(양구군 해안면)에 이르는 16km짜리 구간. 하지만 팔랑리의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서해랑길 같은 공식적인 트랙이 없음은 물론이고 선답자들의 기록도 중구난방. ‘가톨릭 팔랑리공소를 기점으로 삼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곳 월운저수지(같은 동면이지만 월운리)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아무튼 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대암산 용늪 탐방안내소 앞에서 출발하는 꼼수를 사용했다.

 평화누리길은 자전거 길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우리 같은 걷기 여행자들은 들러리인 셈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평화누리길보다 새로 개통되는 ‘DMZ평화의 길을 걸어보면 어떨까? 미 개통구간은 조금 더 기다렸다가 걸으면 될 것이고 말이다.

 이 구간은 ‘DMZ평화의 길(27코스)’도 함께 간다. 평화누리길(강원도 11코스)과 종점만 다를 뿐 시점은 같기 때문이다. 아니 월운저수지 구간은 두 탐방로가 약간 다르게 나있다고 했다.

 일단은 도로 건너에 있는 피의 능선 전투전적비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의 무한책임임과 동시에 우리네 후손들이 짊어져야 할 의무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피의능선 전투(Battle of Bloody Ridge)’ 1951 8 16일부터 9 5일까지(20일간) 벌어진 전투다.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 중 하나였던 이 전투를 기억하고, 희생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전적비를 세웠다.

 피의능선 전투는 국군이 휴전회담을 진척시키는 동시에 휴전에 대비하여 중요한 요충지(캔사스선 북방 10~20km 지역에 위치한 수리봉 일대)들을 확보하기 위해 실시한 공격작전이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의 1개 연대 규모, 그리고 북한군 1개 사단 규모의 사상자(1,480여 명이 사살되고 70여 명이 생포)가 발생하자 미군 신문(Stars and Stripes) 피의능선 전투라 이름 지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북한군은 펀치볼 북쪽 능선으로 물러난다.

 실제는 대암산 용늪 탐방안내소 앞에서 출발했다. ‘돌산령 옛 고갯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출발할까도 했지만, 경사만 가파를 뿐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생략했다. 특히 쉼터용 정자에 화장실까지 갖추었으니 출발지점으로 이만한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참고로 대암산의 1,280m 구릉지대에 형성된 용늪은 북방계와 남방계 식물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남한에서 처음 발견된 고층습원(高層濕原)으로 다양한 지연환경과 동·식물을 갖고 있어 1989년 자연생태계 보전지역, 1997년에는 국내 최초로 람사르 조약의 습지로 등록되었다.

 용늪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탓에 일정 기간에 제한된 인원에게만 탐방을 허용한다. 탐방안내소는 이곳 말고도 인제군의 서흥리(10년 전 내가 이용했던 곳이다)와 가아리가 있다. 아무튼 민간통제선 안에 자리 잡고 있어 군의 통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 저처럼 문이 굳게 닫혀있는 이유일 것이다.

 10 : 14. 돌산령 옛 고갯길(돌산령 터널이 생기기 전 양구에서 해안으로 갈 때 이용하던 지방도)을 올라가며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 구간(12.34km)은 갓길이 따로 없는 왕복 2차선 도로다. 산자락 쪽으로 파란 선을 그어 자전거 길을 구분하고 있으나 안전 확보는 라이더(보행자 포함)의 몫이다.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정표는 돌산령 정상까지 4.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11코스가 시작되는 팔랑리까지는 5km. 딱 그만큼 단축했다고 보면 되겠다.

 돌산령 정상까지는 400m 이상 고도를 높여야 한다. 하지만 길은 경사를 거의 못 느낄 정도로 평탄하다. 하긴 5km를 걸으며 400m만 높이면 되니 서두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몸이 편하면 마음까지도 여유로워지나 보다. 심심찮게 변하는 주변풍광에 눈 맞추며 걸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 절개지의 비탈진 사면에 박아놓은 락볼트(soil nailing공법). 도로개설 당시의 어려움을 대변해준다.

 길가 산비탈은 산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초여름에는 흰색의 화려한 꽃으로, 가을에는 붉게 익은 열매로 우리를 사로잡는 나무다. 그 열매가 딸기와 비슷하게 생겨서 산딸나무라 부른다. 그나저나 붉고 고운 열매가 군침을 돌게 해 따먹어 봤다. 하지만 약간 달달할 뿐 즐겨 찾을만한 과일은 아닌 것 같다.

 10 : 31. 첫 번째 쉼터(이정표 : 정상까지 3.9km)에 닿았다. 오르막길을 힘들게 올라온 이들에 대한 배려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자전거 거치대는 기본. 파고라 모양으로 만든 쉼터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지붕까지 씌웠다. 전천후인 셈이다. 그나저나 쉼터라고 해서 꼭 쉬었다 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쉼터는 있는 자체로만으로도 나그네에게 기쁨을 준다.

 옛 고갯길은 군인 통제 하에 있다고 봐야겠다. 길 양쪽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는 것은 기본. 도로도 순찰차량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다. 길섶에 핀 야생화를 촬영하는 중인데, 순식간에 차량이 나타나더니 도로를 벗어나지 말라는 경고를 내릴 정도였다.

 갖가지 경고용 현수막도 이 구간의 특징 중 하나다. 민통선 이북의 군사시설보호지역이라서 무단출입 및 채집·영농활동을 금지한단다.

 순찰차의 말마따나 철조망을 넘어서는 안 된다. 이 울타리는 또 북한에서 넘어오는 ASF(아프리카 돼지열병) 감염 멧돼지의 차단막까지 겸하고 있나보다.

 무단출입은 물론이고 사진촬영까지 금지한단다. 전적지를 안내해주던 병사는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으니 카메라나 핸드폰은 꺼내지도 말라며 겁을 주고 있었다.

 그나마 이건 부탁에 가깝다. 천연기념물 217호인 산양의 주요서식지이니 아끼고 보호해주잔다.

 가끔가다 허락되지만 조망 또한 주요 볼거리다. DMZ 방향의 산하가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지대가 높아서인지 운해로 뒤덮여 있었다.

 올 여름, 무섭게 쏟아지던 빗줄기는 이곳에도 많은 상처를 남겼다. 산사태가 도로를 덮친 곳에서는 위험을 무릅쓴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도로가 유실되다시피 한 곳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가끔은 저런 급경사 구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1,050m(돌산령 정상)까지 고도를 높여야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맞다. ‘DMZ평화의 길(27코스)’ 안내판은 이 구간을 물리적 난이도가 높다고 적고 있었다.

 10 : 55. 24분쯤 더 걸어 두 번째 쉼터를 만났다. 이정표는 정상까지 2.2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돌산령 고갯길 ·구도로가 나뉘는 삼거리에서 정상까지의 거리가 6km라고 했으니 대략 2km마다 쉼터를 만들어놓은 셈이다.

 돌산령 인근은 ‘DMZ 야생화벨트 사업이 시행된 모양이다. 청사초·김의털·비비추·꿀풀·기린초 등을 심고, 흰민들레·질경이·구절초·벌개미취 등은 씨앗을 뿌렸단다. 시간이 흐르면 동아시아 그린브릿지 연결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은 몰라도 야생화를 구경하려는 관광객들은 많이 찾아오겠다.

 이 지역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주목·분비·거제수 등을 보호하고 있단다.

 안내판에 이끌려 카메라의 초점을 야생화에 맞춰본다. 가장 먼저 잡힌 것은 개미취’. ‘들국화라 부르는 국화과 꽃의 얼굴마담이다. 참고로 들국화란 산국·감국·쑥부쟁이·개미취·구절초 등등 산과 들에 피는 국화과의 꽃들을 싸잡아 부르는 이름이다.

 생김새가 조금 다르나 이것 역시 개미취.

 요건 구절초’, 세분류하면 낙동구철초란다. 모 대학 도예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여사친 산우가 심심찮게 보내주는 차의 원료이기도 하다. 가끔 이 차를 마시는데 은은한 노란빛이 우려난 차색도 곱지만 향도 정말 일품이다. 향긋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다 되지 않을 정도로...

 블루 마거리트(Blue Marguerite)로도 불리는 블루데이지(Blue Daisy)’이다. 한국 이름은 청화국이라나?

 백공작이라고도 불리는 미국쑥부쟁이. 싸잡아서 들국화로 부르는 국화과의 꽃들은 종류도 많다. 꽃의 생김새도 구분이 불가능 할 정도로 비슷비슷하다. 작은 꽃들이 총총하게 피는 미국쑥부쟁이가 유일하게 뚜렷한 차이점을 본인다고나 할까?

 작약, 당귀, 황기, 지황과 더불어 5대 기본 한방 약재 중 하나로 꼽히는 천궁도 꽃을 활짝 피웠다.

 야산에서 피는 구절초나 개미취와는 달리 심산이나 고원에서나 만날 수 있는 체꽃(스카비오사)’도 눈에 띈다. 꽃봉오리의 모양이 구멍 뚫린 체를 닮았다고 해서 체꽃이란 이름을 얻었다. 스카비오사(Scabiosa) 이란 뜻의 라틴어, 이 꽃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11 : 29: 굽이굽이 돌산령길을 돌아올라 도솔산전적지 입구에 이른다. 하지만 군인들이 딱 막고 섰다. 그들의 안내를 받아야만 탐방이 가능하단다. 말이 안내지 전적지를 둘러싼 울타리를 넘을 것을 대비한 경계가 아닐까 싶다.

 도솔산 전적지의 입구임을 알리는 빗돌. 붉은 글씨로 적힌 무적 해병이 눈길을 끈다. 도솔산 전투의 승리를 치하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내려준 휘호라고 한다. 한편 도솔산 전투를 기리는 도솔산가라는 군가가 제정되기도 했단다.

 도솔산(兜率山, 1,148m)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도 도솔산 전적지를 가리킨다. 전적지 뒤로 길이 나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완주하면 담낭이 튼튼해진다는 양구 십년장생 길(4년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도솔산과 대암산 정상을 거쳐 양구생태식물원으로 떨어지는 4코스란다. 하지만 민통선 안이라서 통행은 불가. 길은 길이나 걷지 못하는 길인 셈이다.

 11 : 34. 전적지는 꽤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위령비를 중심으로 한때 해병대의 주력 상륙장비로 사용되던 수륙양용장갑차. 그리고 비목을 연상시키는 나무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다.

 도솔산지구전투 6·25전쟁 당시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북한 공산군 제5군단 예하의 제12사단 및 제32사단이 점령 중이었던 도솔산(1,148m)을 혈전 끝에 탈환한 전투를 말한다. 첫 공격은 1951 6 4일 시작됐다. 그리고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면 적의 공격을 받아 다시 빼앗기고, 또 빼앗는 가운데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던 24개 목표 고지를 6 19일 완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2,263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으며, 아군 또한 7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산악전 사상 유례 없는 대공방전으로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평화나무·생명나무가 눈길을 끈다. DMZ을 횡단하는 평화·생명지내 체험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는데, ‘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열고, 평화의 들판에 통일의 집을 짓는다.’는 어느 단체의 홍보문구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위령비는 나무 장승들이 지키고 있었다.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그날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양구군 각 면에서 만든 것들이란다. 하지만 난 6.25 전쟁 당시 스러져간 무명용사들의 돌무덤과 철모가 올려진 비목(碑木)을 연상한다. 저 위령비가 그리 만들었을 것이다.

 전적지에서의 조망도 뛰어난 편이다. 아까 고갯길을 올라오면서 바라보던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아니 높아진 고도만큼이나 시야도 넓어졌다.

 되돌아 나오는 길.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돌산령 정상이 고개를 내민다. 돌산령 정상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사진촬영이 금지된다.

 11 : 50. 돌산령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정상을 묘사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군부대가 나오지 않도록 도로만 카메라에 담는다.

 이곳이 돌산령의 정상이라는 표식은 일절 눈에 띄지 않았다. 그 흔한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이곳의 해발(1,050m, 내 앱은 980m를 찍고 있었다)을 적은 표지판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헬기장 너머로 보이는 저 봉우리가 도솔산(兜率山, 1,148m)’이 아닐까 싶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산, 때문에 웬만한 국내의 산을 다 올라봤지만 도솔산은 아직도 미답의 산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그 왼쪽에 있는 산의 정체는 뭘까. 도솔산보다 한참이나 더 높고, 망루까지 설치되어 있는데...

 몇 걸음 더 걷자 길이 나뉜다. 평화누리길은 계속해서 도로(돌산령 옛 고갯길)을 따른다. 왼쪽은 군의 관측기지인  ‘OP(observation post)'로 연결되니 진입하면 안된다.

▼ 왼쪽으로 가면 호국 도솔암이 나온단다. 한국전쟁 당시 여섯 번이나 주인이 바뀐 격전지 가칠봉이 인접한 최전방 군법당이다. 해발 1,070미터에 위치해 설악산 봉정암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절이란다.

 11 : 56  12 : 21. 세 번째 쉼터에 이른다. 널찍한 공간에 전망까지 좋아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우리도 준비해간 간식을 서로 나누며 여유롭게 머물다 갔음은 물론이다.

 판박이로 만들어놓았던 아까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많은 이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공간도 넓히고 벤치도 여럿 배치했다. 그래선지 많은 이들이 이곳을 전망대로 분류하고 있었다.

 발아래로 펀치볼(Punch Bowl)’이 펼쳐진다. 아니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고산준령이 기다랗게 펼쳐지는가 하면 그 봉우리들을 운해가 감싸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양구 제일의 전망대 중 하나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참고로 펀치볼은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분지를 둘러싼 모습이 화채 그릇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펀치볼 평화누리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2주 후에 걷게 될 12코스(양구 펀치볼길)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평화누리길은 공식적인 지도가 없어 답사를 위한 준비나, 답사 후 기록을 남길 때 애로가 많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전형적인 가을 풍경을 연출한다.

 12 : 33. 네 번째 쉼터에 다다른다.

 건너편에는 대암샘터라는 약수터가 있었다. 사시사철 가뭄을 타지 않는 샘이라니 돌산령 고갯마루를 넘어온 라이더나 트레커들에게 감로수가 되어주기 충분하겠다.

 그렇다고 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꺼비 조형물의 입에 파이프를 박아 물이 흘러나오게 하고 있었다.

 길은 굽이굽이 내리막의 연속이다. 그런 길을 걷다보면 요런 대전차 방어시설도 만나게 된다. 돌산령 옛길이 군사요충지라는 얘기일 것이다.

 13 : 10. 다섯 번째 쉼터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계곡 쉼터를 만난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는 게 아닌가. 산림청의 입산금지 팻말과 지정된 장소 외의 출입을 금한다는 군부대장의 서슬 퍼런 경고판도 세워져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 자물쇠를 채워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안에는 ‘DMZ펀치볼 둘레길 탐방객들이 자연을 벗 삼아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출입이 허용된 공간이라는 얘기다.

 작은 폭포가 겹겹이 쌓여있는 계곡은 머물다가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아니 족탕이나 알탕을 즐기기에도 이만한 곳이 없겠다.

 맞은편, 길 건너에 있는 야생화공원은 완벽하게 막혀있었다.

 오유밭길은 해안면의 ‘DMZ펀치볼 둘레길 4개의 노선(평화의길·오유밭길·만대벌판길·먼멧재길) 중 하나다. 바람꽃·노루귀·얼레지·제비꽃 등 북방계 야생화를 관찰할 수 있고, 전쟁의 흔적을 통해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진입로는 열쇠를 채워 출입을 막고 있었다. 안내판은 그 이유를 적었다. 곳곳에 미확인 지뢰가 있으므로 숲길 등산지도사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등산지도사를 대동할 때만 문이 개방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13 : 30. 20분쯤 더 걸으면 453번 지방도에 내려서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첨부된 지도에 해안입구로 표시된 지점이다. 오늘은 3시간을 걸었다. 앱에 10.70km가 찍혀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해발 1,050m의 돌산령 고갯마루를 넘는 게 만만찮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정표(해안면 4.9km/ 돌산령 정상 5.1km)는 지나왔거나 가야할 곳의 지명과 거리만 표시하고 있을 뿐,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11코스(양구 돌산령길)의 종점으로 알고 있는 내 앎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종점 오른편은 돌산령터널이다. 저 직선코스를 놓아두고 만산령 옛 고갯길을 에돌아왔다.

서해랑길 36코스(향화도항-합산마을 버스정류장)

 

여행일 : ‘23. 9. 9()

소재지 : 전남 영광군 염산면 일원

여행코스 : 향화도항염전(옥실리)신흥마을내묘마을설도항합산항합산마을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4km, 실제는 14.13km 3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6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방조제를 시종여일 걷는다. 이때 물때에 맞춰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갯벌을 실컷 눈에 담게 된다. 자칫 지루하다고 여길 수도 있으나 칠산바다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을 눈요깃거리로 삼다보면 트레킹은 어느새 끝을 맺는다.

 

 들머리는 향화도항(영광군 염산면 옥실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읍으로 들어온다. 신풍교차로(영광읍 신하리)에서 22번 국도(함평방면), 종산교차로(영광읍 신하리)에서 808번 지방도(염산방면), 봉전교차로(염산면 상계리)에서 77번 지방도(해제방면)를 번갈아 타며 30km쯤 들어오면 향화도항에 이른다.

 칠산바다의 해안선, 아니 방조제의 둑길을 걷는 14km 길이 코스다. 오늘은 전 구간을 다 걸어보기로 했다. 앞세운 집사람과의 거리는 3km, 조금만 재촉하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서해랑길(영광 36코스) 안내도는 칠산 갯길 300 탐방안내도와 함께 버스정류장(칠산타워) 옆에 세워져 있다.

 11 ; 28. 향화로를 따라 포구를 벗어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200m쯤 걷다가 첫 삼거리(이정표 : 종점 13.7km/ 시점 0.3km)에서 방향을 틀어 방조제로 간다.

 이때 칠산바다에 떠있는 목도가 눈에 들어온다. 바닷물이 들고 날 때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또 둘이 하나로 돌아오는 요술 섬이다.

 옥실리 앞바다, 무동력선 여러 척이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다. 바다를 삶의 현장삼아 살아가는 어부의 작업장이다.

 길이가 500m쯤 되는 대무마을(옥실리) 앞 방조제를 걷는다. 서해랑길 36코스는 이런 방조제들을 번갈아가며 걷는 여정이다.

 고개를 돌리자 향화도항이 눈에 들어온다. 칠산대교가 놓이면서 항구는 제 기능을 많이 잃었다. 하지만 영광권역 해안의 랜드마크로 우뚝 선 칠산타워만큼은 요지부동이다. 함평만과 칠산바다가 한꺼번에 조망되는 높이 111m의 전망대에 올라보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간척사업으로 생긴 들녘은 아직도 염기가 다 빠져나가지 않은 모양이다. 웃자란 갈대가 숲을 이룰 정도로 넓게 퍼져 있었다.

 방조제가 끝나자 이번에는 산자락을 에돌아간다. 방조제는 아니지만 해안을 따라 길이 나있다.

 이즈음에서 우린 닭섬(kakaomap 닥섬으로 적었다)’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닭을 닮았다는 섬이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섬은 민닭섬이다. 등대 위로 떨어지는 일몰로 유명한 곳이다.

 11 : 40. 길이가 700m쯤 되는 두 번째 방조제는 송촌마을(옥실리) 앞을 지난다.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들녘은 염전으로 가득하다. 맞다. 영광군의 염전은 568ha로 전남 서남해안 염전(3007ha) 중 신안군 다음으로 많다. 소금도 전남 전체 생산량의 19%를 차지한다. ‘소금 염(), 뫼산()’이라는 지명을 낳게 한 근원이기도 하다.

 토판염전으로 여겨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흙판에서 소금을 만드는 친환경적인 토판염은 장판염전에서 추출한 소금보다 미네랄 등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고 염도가 낮은 데다 맛도 순해 요리에 그만이다. 그러나 장판염보다 품이 많이 들고 생산 날 수도 훨씬 짧아 수지 타산을 맞추기 어렵다고 한다.

 후쿠오카 방사능 오염수의 방류 때문에 시끄러운 요즘. 사재기로 인해 금값이 된 소금은 없어서 못 판다고 했다. 그런데도 저 소금밭은 왜 놀리고 있는 것일까? 경제성을 이유로 토판염전이 장판염 생산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했는데, 그 과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공간은 대하양식장 차지다. 오래 전, 소금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값싼 중국산 소금에 밀린 많은 염전이 문을 닫는다. 그리고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다른 업종으로 전환했다. 당시 선택했던 대체업종이 바로 저 대하양식이었을 것이다.

 왼쪽으로는 칠산 바다가 펼쳐진다. 연평도와 더불어 그 옛날 조기 황금어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11 : 50. 방조제는 장고도(이정표 : 향화도에서 2.67km)’를 만나면서 끝난다. 간척사업이 바닷가 작은 섬을 뭍으로 연결시켰다. 하지만 비탈이 심했던지 길은 신흥마을 쪽 내륙으로 에돌아간다.

 칠산 갯길 300의 탐방안내도가 눈에 띈다. 전국에 번지고 있는 걷기 열풍에 동참한 영광군이 조성한 둘레길이다. 모두 5개 코스(굴비길·노을길·백합길·천일염길·불갑사길)로 나뉘는데, 이중 불갑사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해랑길과 일치한다. 하나 더, 오늘은 4코스인 천일염길(향화도항-설도항-야월리염전-백바위해수욕장)’을 따라 걷게 된다.

 잠시 후 옥실4에 이른다. kakaomap 신흥마을로 표기하고 있으나 옥실리(玉瑟里)’를 형성하는 8개 자연부락(신옥·와룡·내묘·송정·미동·소무·송촌·대무)에는 끼지 않는다. 새로 생긴 마을일지도 모르겠다.

 마을은 꽤 넓은 담수호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 너머로 칠산대교와 칠산타워가 겹쳐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향화로2길을 따라 마을을 빠져나가다 한우사육장인 성율농장(이정표 : 향화도에서 2.9km)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마을 뒤 작은 언덕을 넘어 또 다른 방조제로 올라선다.

 꼬맹이 방조제를 지나면, 이번에는 산자락을 에돌아간다. 아니 곶부리와 곶부리를 잇는 게 방조제일지니 반대편 곶부리를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쥐섬이 눈에 들어온다. 생긴 게 쥐를 닮았는지는 몰라도, 생쥐만큼이나 작은 섬이다. 땅 투기로 뜨겁던 시절, 친구는 여수 앞바다의 무인도를 가보지도 않은 채 샀었다. 지금까지도 애물단지로 남아있다던 섬이 저런 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2 : 08. 미동마을 앞 방조제로 올라선다.

 길이가 500m쯤 되는 방조제는 꽤 너른 들녘을 만들어놓았다. 미동마을과 송정마을 등 들녘에 기대어 살아가는 마을도 둘이나 된다.

 입질은 자주 있나요?’. ‘이제 막 왔답니다’. ‘뭐가 잘 잡히는가요?’. ‘안 잡아봐서 몰라요’. 강태공의 성격 탓인지는 몰라도 무미건조한 대화가 되어버렸다. 4년쯤 전 튀르키예의 보스프러스 해협에서 만난 강태공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졌었고, 당시 난 팔뚝만한 물고기를 선물로 받기도 했었다.

 방조제가 끝나고 잠시지만 해안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잠시 후 해안에 다시 닿는다.

 12 : 20. 방조제가 끝나는 지점, ‘칠산갯길 300에서 이정표(장고도에서 2.96km)를 세워놓았다. 산자락을 향해 길이 나있는데도 서해랑길 방향표시는 오른쪽으로 가란다. 길이 끊겨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집사람을 따라잡은 기념으로 한 컷. 활짝 웃는 게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다.

 그녀 뒤로 칠산바다가 펼쳐진다. 칠산바다는 꽃게··조기·새우 등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풍부한 어족자원을 자랑한다. 이들은 아까 거론한바 있는 천일염과 만나 젓갈·굴비 등 2차 가공품으로 재탄생되어 영광 수산업의 효자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서해랑길은 바닷가와 이별을 고한다. 장고도에 이어 두 번째인데 내묘마을(옥실리)’을 향해 내륙으로 파고든다.

 썩 넓어 보이지는 않은 간척지는 갈대로 한가득이다. 아직도 염기가 덜 빠져나간 모양이다.

 잠시 후 이른 내묘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9.3km)’ 옥실리(玉瑟里)’를 형성하는 8개 자연부락 중 하나다. 마을 지형이 고양이 머리를 닮았다 하여 괴머리라 불렀으며, 그 후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묘라 부른다.

 그렇지 않아도 꼬맹이 마을인데, 두어 곳은 아예 폐가로 방치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전라도를 돌아다니면서 아름다움 인정과 풍요로운 자연을 보고 팔불여(八不如)를 말했다. 그중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영광만한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저런 풍경이라니.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일런지도 모르겠다.

 마을 뒤 고갯마루를 넘으면 또 다른 방조제가 반긴다. 길이가 1.5km나 되는 긴 방조제다.

 12 : 39-49. 둑길이 하도 길다보니 쉼터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저런 정자가 세 개나 길손을 맞고 있었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간 간식을 나눠먹으며 여유롭게 쉬다 갈 수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너머에 논농사로 업을 삼는 신옥마을과 신오마을 등 옥실리와 오동리의 자연부락들이 들어앉았다.

 일주일 후면 추분(秋分). 둑길도 가을이 무르익어간다. 가을의 전령 인 물억새, 가을이 깊어갈수록 색이 짙어진다는 갈대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KBS-2TV 건강 혁명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표지판도 눈에 띈다. 2년 제작 과정의 장기 프로젝트로, 전국에서 모집된 30여명의 당뇨 환자들이 매월 23일의 캠프를 차리고 설도항의 아름다운 해변을 걸으며, 운동법·식습관·생활습관 등의 미션 수행을 통해 당뇨를 극복하는 노하우를 공유하던 프로그램이다.

 13 : 02. 젓갈 생산지로 유명한 설도항(雪島港)’으로 들어선다. 멸치며 민어, 조기 등 수산물을 깔아놓은 좌판이 주욱 늘어서 있고 갈매기들이 자유로이 유영하는 작은 포구다. 하나 더, 설도는 원래 와도(臥島, 사람이 누워있는 모양새란다)라는 조그만 섬이었다. 1930년께 설도관문이 건설되면서 육지의 바닷가로 변했다. 이 와중에 누운섬 눈섬이 되었고, 이게 또 한자로 변환되면서 설도(雪島)로 굳어졌다.

 자그마한 포구는 선착장도 아담하다. 하지만 통통배부터 중형의 고기잡이배까지 정박하고 있는 어선의 크기나 숫자는 서해안답지 않게 컸다. 인근 어장에서 잡히는 수산물의 양이 그만큼 짭짤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설도는 가슴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6.25 전쟁 중 공산당에 의해 수많은 기독교인이 희생됐다. 그 현장에 기독교인 순교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독교인 순교탑을 세워 놓았다.

 설도항은 젓갈 생산지로 유명하다. 고만고만한 젓갈 가게들이 줄지어 섰다. 하지만 내 집에 들든 네 집에 들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호객행위가 없었다. 어느 집에 들어가 구입해도 맛과 가격이 같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여담 하나, 옛날 농사와 고기잡이를 함께 해야 하는 갯마을 어머니들에게 반찬 마련은 이중고였다. 지금처럼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니 미리 반찬을 만들어 놓을 수도 없었다. 이를 해결한 것이 젓갈이다. 새우·송어 등 재료가 흔했고, 거기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었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설도항의 명물 젓갈타운은 고깃배 모양으로 따로 지었다. 앞바다에서 잡히는 새우·꼴뚜기·조개·멸치 등 각종 수산물에 천일염으로 간한 다양한 젓갈을 팔고 있음은 물론이다. ‘잡젓도 그중 하나. 황석어젓·밴댕이젓·곤어리젓으로 잡젓을 만들고, 풋고추를 담가 석 달 정도 숙성시킨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지 밥도둑이 따로 없단다.

 수산물판매센터는 젓갈타운과 함께 설도항의 주축을 이룬다. 영광 칠산 앞바다에서 잡힌 신선한 활어와 꽃게·왕새우·낙지 등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안강망이나 닻자망으로 잡은 수산물을 수협을 거치지 않고 어민들이 직접 판매하기 때문이다.

 입주 상점들은 하나같이 영세했다. 커다란 수족관으로 치장된 다른 수산시장들과는 달리 작은 고무통들만 눈에 띈다. 그나마 수산물을 반도 채우지 못했다.

 13 : 10.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염산방조제의 둑길을 걷는다. 직진으로 뻗은 길은 차 한 대가 다닐 정도로 좁기 때문에 앞뒤로 오가는 자동차를 유의해 다니는 편이 좋다.

 이 구간은 자전거로 달려 볼 수도 있다. 염산면사무소에 비치된 약정서를 작성하고 신분증을 제시하면 자전거(안전모와 무릎보호대 포함)를 무료로 대여할 수 있다. 사전예약도 가능하단다. 참고로 자전거 둘레길은 설도항에서 봉양들까지의 방조제(7km)와 염전 및 청보리밭을 감상할 수 있는 농어촌도로(5km)를 합쳤다. 해안선을 따라 달리다 보면 어느덧 남도의 바다가 주는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젓갈과 자연산 횟집으로 유명한 설도항에서의 먹거리는 덤이다.

 오른쪽으로는 방조제를 쌓아 만든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너머 봉덕산(295.6m) 자락에는 염산면 소재지인 봉남리가 들어앉았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봉남평야가 펼쳐진다. 1930년대 설도를 사이에 두고 옥실리와 야월리 방향으로 각각 방조제를 쌓았다. 이때 저 들녘이 생겨났고, 설도는 섬에서 육지로 바뀌었다.

 봉양들로 가는 방조제를 걷는다. 바다를 향해 줄곧 달린다고나 할까? 하나 더, 이 구간 역시 건강 혁명의 촬영지이다.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길가 들녘에서 생산되는 찰쌀보리·새싹보리·보리빵과 영광의 특산물인 청보리 한우·굴비 등이 제공됐다.

 졸지에 한나라의 공주로 둔갑해 남흉노로 시집가던 왕소군은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라고 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유래다. 하지만 난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를 외친다. 여름철에 피어야할 금계국이 입추가 내일모래인데도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봄꽃인 민들레도 한 몫을 거든다. 하지만 국내 산천을 접수해버렸다는 서양민들레가 아닌 순수 토종민들레로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꽃받침(총포)이 뒤로 젖혀져 있지 않고 곧게 감싸고 있으면 토종민들레라고 하지 않았던가.

 얼마쯤 걸었을까 농경지가 끝나는가 싶더니 들녘이 온통 물 밭으로 변해버렸다. 커다란 합산제를 중심으로 고만고만한 저수지들이 줄을 이룬다. 양식시설이 집단으로 들어섰다는 얘기일 것이다.

 13 : 40. 지자체도 이때쯤이면 다리가 뻐근해질 것임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정자를 지어 잠시 쉬어가도록 했다. ! 이곳은 단축코스를 이용할 수 있는 기점이기도 하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을 에돌지 않고 간척지 들녘을 횡단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1.5km 정도가 단축된다.

 단축코스에 대한 유혹을 겨우 떨쳐내고 이정표(종점 4.8km/ 설도항 2.3km)가 가리키는 종점 방향으로 간다. 집사람은 물론 단축코스를 선택했다.

 이즈음 썩 내키지 않는 풍경이 펼쳐졌다. 드넓은 간척지에 그보다도 더 넓어 보이는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한 결정이겠지만, 원자력을 축소하면서까지 장려된 점은 분명 문제다. 이는 발전단가를 상당히 높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시선을 조금이라도 옮길라치면 저만치 눈앞에는 어김없이 칠산타워가 놓여있다. 맞다. 이곳 영광의 랜드마크는 칠산타워라 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아무리 해안 길을 빙글빙글 돌아도 눈앞에서 칠산타워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둑에 걸쳐놓은 저 시설의 용도는 대체 뭘까. 칠산바다를 실컷 구경해보라는 전망대일지도 모르겠다.

 발아래는 끝없는 갯벌, 뻘 바다에 올라앉은 어선, 너른 개펄에 놓인 통발과 행여나 통발에 걸릴까 집게발 들고 조심조심 오가는 게들을 관찰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밋거리일 것이다.

 둑길은 가고 또 가도 끝이 없다. 그나저나 가을이 무르익어가나 보다. 공활한 하늘은 푸름을 한껏 자랑하고, 쏟아지는 햇살은 화사했다. 그 푸름에 바다가 더해진다. 그러자 저 멀리 수평선 위로 흘러가는 흰 구름이 티가 되어버린다.

 간척지가 하도 넓다보니 대하양식장도 단지를 이루고 있다. 다른 지역의 양식장들과는 달리 대하를 잡는 통발 모양의 어망도 눈에 띈다.

 바다에 타워와 다리가 겹쳐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14 : 08. 드디어 바다를 향한 긴 여정이 끝을 맺는다. 서해랑길이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저곳(둘레길 자전거여행 안내도는 합산항으로 적고 있었다)을 반환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끄트머리에는 선착장(이정표 : 봉양들 3.16km/ 설도항 4.36km)이 만들어져 있었다. 쉼터용 정자도 들어섰다. ‘월봉마을 어민들을 위한 시설로 보이는데, 정박하고 있는 배는 눈에 띄지 않는다.

 바다 건너는 무안군(해제면) 도리포, 그 사이에 김 양식을 위해 세운 지주가 숲을 이룬다. 맞다. 도리포 인근 갯벌에서는 일찍부터 김 양식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지주식으로 곱창김을 생산하는데, 일반 김보다 채취 횟수가 적어 대량 생산이 어려운 반면 김 값이 훨씬 좋단다.

 이후부터는 조개산(118.2m)을 전방에 두고 걷는다. 대하양식장과 태양광발전소 등 아까 합산항으로 오면서 보았던 풍경들이 역순으로 펼쳐진다.

 집사람과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던 둘레길 도반을 따라잡았다. 80대 중반을 바라보는 연세이신데도 아직도 노익장을 자랑하신다.

 건너편에는 37코스가 지나가는 월평항이 있다.

 길은 가음방저수지와 내남저수지, 봉양저수지로 연결되는 수로형 내만의 둑길을 따라간다.

 트레킹이 막바지에 이르자 마음부터 여유로워진다. 그러자 누렇게 물들어가는 봉남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저런 들녘이 있었기에 영광이 ‘4()’의 고장으로 불렸을 게고 그 속에 쌀이 끼어 있을 것이다.

 조개산(118.2m)이 성큼 다가왔다. 그 앞이 종점인 합산마을이다. 1927년 간척지가 조성되고,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생긴 마을이다. 봉남리(奉南里)를 구성하는 6개 자연부락(동촌·내남·합산·설도·한시·봉전) 중 하나로 합산(蛤山)’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조개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했다.

 14 : 42. 합산갑문을 지나 합산마을 앞 도로(칠산로5)에 이르면 트레킹이 끝난다. 염산방조제의 끝이자 버스정류장(합산마을)에서 100m쯤 떨어진 지점이다.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GPX트랙이 14.13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영광 37코스) 안내도는 방조제와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하나 더, 시작점 표시판은 안내도 기둥에 매달려 있다.

강원도 평화누리길 9코스(양구 평화의 길)

 

여행일 : ‘23. 9. 3()

소재지 :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및 양구군 방산면 일원

여행코스 : 평화의 댐오천터널종점상회각시교금악교방산면소재지(백자박물관·직연폭포)자월교송현1백석대대송현하수처리장두타연갤러리(거리/시간 : 23.5km, 실제는 종점상회부터 송현하수처리장까지 14.80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트레킹·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들머리는 평화의 댐 주차장(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춘천과 화천을 거쳐 오는 것이 보통이나 산사태로 길이 막혀 양구 쪽으로 돌아왔다.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와 46번 국도를 이용 양구까지 온다. 이어서 460번 지방도를 타고 화천방면으로 가다보면 평화의 댐이 나온다. 댐의 상부에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오늘은 9코스를 걷는다. 4개 코스(75km)로 이루어진 양구지역의 첫 번째 구간으로 양구 평화의 길이라는 브랜드로 포장되어 있다. 공식적인 거리는 23.5km, 산행대장은 실제 거리가 30km에 육박한다며 겁부터 준다. 이에 놀란 난 출발지에서 10km쯤 떨어진 종점상회부터 걷기로 했다. 빈약한 내 체력으로는 20km 이상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평화의 댐은 북한의 수공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세워졌다. 북한이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려고 금강산댐을 건설, 무려 200억 톤의 수공을 펼쳐서 서울을 물바다로 만든다는 과장된 발표로 국민 성금을 모았었다(나도 참여했을 정도로). 그 당시 텔레비전에서는 온종일 63빌딩이 절반이나 물에 잠기는 것을 비롯해서 서울특별시의 주요 건축물이 물에 잠기는 모형을 보여주었고, 대학 교수들이 출연하여 그럴싸한 설명까지 덧붙이는 바람에 국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었다(그 교수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모든 것이 허구였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홍수 조절기능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증축되기도 했고, 화천 관광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 ① 평화의 댐  세계평화의 종  비목공원  평화의 댐 물문화관  피스스카이워크  세계평화의 종공원 / 벨 파크  염원의 종 / 댐 하류전망대  국제평화 아트파크  평화누리마당  노벨평화의 종  DMZ 아카데미  물의 정원  평화오름 길  평화의 숲  평화나래교  평화캠핑장  자유의 숲  물빛누리호 선착장  배수터널

 댐의 상류 쪽 풍경, 하단의 하얀색 부분(80m)은 전두환 대통령 때 쌓았고, 위쪽은 45m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 증축했다고 한다. 그나저나 물은 바닥이 보일 정도다. 다른 댐들과는 달리 북한의 수공을 막기 위해 쌓은 탓에 물을 채우지 않고 배수터널을 통해 화천댐으로 그냥 흘러가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란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세계 평화의 종이 반긴다. 분쟁 현장에서 사용된 탄피 1만관(37.5)에 세계분쟁 종식 및 평화의 의지를 담아 만들어진 초대형 범종이다.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 발포한 탄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간 분쟁 현장의 탄피, 국방부의 한국전쟁 유해 발굴 작업 중 수집한 탄피 120여 개 등 모두 29개국에서 모은 탄피들로 제작되었다. 1만관 중에서 9,999관으로 종을 주조하고, 나머지 1관은 통일이 되면 추가하여 완성시킨다는 큰 꿈을 가지고 있다는 미완의 종이기도 하다.

 조금 더 가면 전쟁의 상흔을 되새기는 비목공원이 나온다. 녹슨 철모를 얹은 나무 십자가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시간에 쫓긴 난 반대편 방향인 피스 스카이워크로 간다. 거대한 댐에 매달린 공중 전망대로 바닥이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 시원스런 조망과 스릴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스카이워크에서 바라본 하류의 파로호,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풍경이 평화로우면서도 그림처럼 아름답다.

 매점 옥상도 전망대로 만들었다. 아래층(cafeteria)에서 산 커피라도 마시며 주변 풍광에 푹 빠져보라는 듯 테이블까지 배치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Peace Man’이란다. 자신처럼 같이 온 이에게 사랑을 고백해 볼 것을 귀띔한다.

 이젠 댐의 하부로 내려가 볼 차례다. 산비탈을 따라 569개나 되는 나무계단이 길게 놓여있다.(안내판은 하늘 오름길로 소개하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서면 세계평화의 종 공원(bell park)’이 반긴다. 평화의 댐이 우리나라의 평화뿐만 아니라 세계평화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정이품송 장자목(長子木)’이 자라고 있었다. 천연기념물 103호인 보은의 정이품송을 아버지로 삼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수한 어미목(강원지역 금강송)을 선발해 인공 교배시켜 얻은 첫 소나무란다.

 평화와 상생을 바라는 종도 눈에 띈다. 상단은 각 대륙을 상징하는 평화의 아기천사가 지구를 감싸고 있는 형상, 중단의 첨탑은 평화와 행복을 세계로 넓히길 염원하는 화천군민의 의지를 담았다. 종을 형상화 한 하단에는 불교철학자이자 평화건설자인 이께다 다이사쿠 SGI회장의 소설 ·인간 혁명에 나오는 글귀를 담았다. 평화만큼 존귀하고, 평화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는...

 생명의 나무(수많은 생명을 품어 기르는 한 그루 나무를 통해 생명의 위대함과 소중함을 깨닫는다)와 평화의 종(분쟁과 분단을 넘어 화해와 통일을 기원한다), 어린이들의 기원(에티오피아와 한국 어린이들의 세계평화와 남북통일 소원을 담은 그림엽서를 매달고 있다)도 주요 볼거리 중 하나다.

 공원 주차장 오른편, 언덕을 향해 계단이 놓여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평화의 댐을 아래서도 올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니 망설이지 말고 올라볼 일이다.

 언덕 위에는 나무로 만들었다는 염원의 종이 매달려 있었다. 남북분단의 현실을 담은 침묵의 종이란다. 저 종이 침묵을 깨고 세계를 향해 울려 퍼지기를 기원한다나?

 댐 하류 전망대라는 이름처럼 거대한 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특히 통일로 나가는 문이라는 초대형 벽화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댐 중앙이 뚫려 하천의 물이 남과 북을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닌가. 댐 상류 700m에 있는 민간인통제구역의 풍경을 트릭 아트로 그렸기 때문이란다. 참고로 저 트릭아트는 높이 93m에 폭이 60m로 기네스 세계기록(4775.7)에도 등재됐다. 기존에 세계 최대였던 중국 난징의 트릭 아트 작품보다 2배 가까이 크다.

 다음은 국제평화 아트파크이다.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비행기를 놀이기구와 합성하여 155마일 휴전선 일부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테마파크로 DMZ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표현하며, 색색의 기원을 담은 리본들이 철조망에 있는 한 평화는 지속된다는 콘셉트를 가지고 있다.

 아트파크의 중심에는 38m 높이의 평화의 약속이라는 상징탑이 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의 땅 한반도에서 인류와 생명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한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꼭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3개의 포신은 자유·평화·사랑을, 2개의 반지는 다음 세대와의 영원한 평화의 약속을 담았다나?

 평화의 약속, 염원, 이카루스의 날개 등 다양한 조형물들이 상징탑을 둘러싸고 있다. 안보·평화·생명을 주제로 탱크·자주포·대공포·전투기·대북확성기 등 수명이 다한 폐장비류를 재활용하여 평화 예술품으로 재구성해 놓았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공간이라 하겠다.

 평화를 위한 여정은 한 사람의 백 걸음보다 백의 하나 된 걸음이 더 낫다고 한다. 그런 정신이 저 조형물의 문구(All over the world)처럼 세상으로 퍼져나간다면 전쟁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11 : 23. 실제 출발지는 종점상회. 양구군 군내버스의 오미리 종점에 위치한 상점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 버스정류장의 이름을 얻어다 썼다. 그나저나 출발지인 평화의 댐에서 이곳까지는 9.7km. 코스 길이가 30km나 된다는 산행대장의 겁 때문에 그만큼의 거리를 단축했다. 아니 그보다는 지방도를 따라 걸으며 어두컴컴한 터널을 들락거려야 하는 끔찍함을 피하려는 마음이 작용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이정표는 수입천 쪽으로 내려가란다. 그리고 중요 기점 중의 하나인 각시교까지의 거리가 3.6km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우기인 여름철에 찾아왔다면 각시교까지 곧장 도로(460번 지방도)를 따라 진행할 것을 권한다. 평화누리길을 따르다보면 수중보를 이용해 수입천을 건너야하는데, 냇물이 불어날 경우 자칫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트레킹이 시작된다. 수입천으로 내려간다고 보면 되겠다. 또 다른 이정표는 5km 전방에 파서탕(破署湯)’이 있음을 알려준다. 얼마나 물이 차고 맑았으면 물줄기가 더위를 깬다는 지명까지 붙였을까 싶다.

 파서탕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이정표 : 각시교 3.5km/ 피서탕 5km/ 오미종점 0.1km). 다른 지역 사람들이 내뱉었더라면 큰일 날 단어를 상호로 내건 입간판이 눈에 띈다. 강원도 지역이나 그 출신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감자바위도 강원도 사람들이 쓰면 흉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고개를 들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평화누리길은 그 산과 산 사이 협곡,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기대어 나있다. 맞다. 이곳은 방산(方山)’. 푸른 산이 사방에 널려있다는 고장이다.

 그렇다고 논이 없겠는가. 우리네 선조들은 냇가에 둑을 쌓고, 비탈진 산자락을 일구어가며 농토를 만들었다. 그 논에서 지금 벼가 누렇게 익어간다.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백로(白露)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간이화장실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둘레길 나그네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쉼터도 심심찮게 만난다. ‘평화누리길은 트레커보다는 자전거 라이더들이 주 고객이다. 쉼터마다 만들어놓은 저 자전거 거치대가 그 증거다.

 평화누리길 평화의길과 함께 간다. 평화누리길에 평화의길이 숟가락을 살짝 올려놓은 것 같은데, 두 길의 차이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뭐가 문제겠는가.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니 말이다.

 탐방로는 수입천(水入川)을 오른쪽 허리춤에 차고 간다. 수입면(양구군)의 청송령(靑松嶺)에서 발원하여 문등리와 방산면 건솔리·금악리 등을 우회하여 파로호로 유입하는 길이 34.8km의 하천이다. 접경지역이라서 개발이 덜 되었지만 두타연 등 명승지를 여럿 끼고 있다.

 건너편 산자락에도 띄엄띄엄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삶은 편치 않겠다. 장마 때 물이라도 불어날라치면 잠수교를 건너지 못할 것이고, 그네들의 집은 육지 속 섬으로 변할 테니까.

 역시 강 건너, 잘 지어진 집들이 무리지어 들어선 것이 영락없는 펜션이다.

 12 : 10. 트레킹을 시작한지 45, 난감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평화의길 방향표시는 수입천을 건너라는데, 이게 수중보를 겸한 잠수교라서 수문으로 해결을 못한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발목을 넘길 정도로 물이 차올라 건너려면 상당한 모험을 각오해야만 한다.

 최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안전 불감증의 현장이 아닐까 싶다. 해파랑길이나 서해랑길, 지리산둘레길 등 그동안 걸어온 대부분의 둘레길들은 강우기를 대비한 우회로를 따로 내놓고 있었다. 이에 대한 안내문도 붙여놓았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양구군은 위험요소를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맡은바 일을 제대로 하라며 비싼 세금을 내온 국민들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 싶다.

 앞을 가로막는 산자락을 에돌아나가는 농로가 나있음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되돌아나가는 도중 오미리(五味里)의 자연부락인 낭구미를 지나기도 한다. 참고로 오미(五味)라는 지명은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5개 반이 갖고 있는 단맛·쓴맛·싱거운맛·짠맛·매운맛 등 각각의 독특한 매력과 맛 좋은 청정 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2: 30. 400m쯤 진행하니 46번 지방도가 나온다. ‘오미리 산촌 생태체험관이 있는 곳이다. 오미리는 친환경농법(벼 사이에서 노닐고 있는 우렁이를 쉽게 볼 수 있다)으로 생산한 쌀이 자랑거리라고 한다. 오리농법으로 생산한 오리쌀이나 키토산농법으로 생산한 오대쌀로 밥을 지으면 구수한 밥 냄새가 온 동네에 퍼질 만큼 향이 좋단다. 밥맛도 대한민국 최고를 자랑한다나? 마을에서는 그런 특징들을 살려 산나물 채취·다슬기잡기·농작물 수확·썰매 만들기 등 각종 체험프로그램을 사시사철 운영하고 있단다.

 도로변에는 앞서간 이들의 후기에서 자주 소개되는 오미막국수도 있었다. 앉을 자리가 없어 그냥 지나쳤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소문난 맛집으로 꼽힌다. 그나저나 앱은 4.67km를 찍고 있다. 종점상회에서 이곳까지는 800m(460번 지방도를 따랐을 경우), 길이 끊긴 평화누리길을 고집하다가 3.8km나 더 걸은 꼴이 되어버렸다.

 속상한 마음을 길가 코스모스로 달래본다. 기상청은 오늘도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그렇다고 계절까지 속일 수 있겠는가. 가을의 전령이라는 코스모스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백일홍은 마음고생에 대한 보너스다.

 12 : 35 : 300m쯤 더 걸으면 각시교’. 평화누리길 이정표가 기점으로 삼고 있던 곳이다. 평화누리길은 잠수교(수중보)를 건너 다리 저편으로 온다. 하지만 물이 넘치는 잠수교를 건널 수 없어 빙 돌아왔다.

 다리 건너에서 만난 이정표(금악교 1.2km/ 방산면사무소 3.1km/ 평화누리길 오미리종점 3.6km/ 오미리 버스종점 1.1km)가 현재 상황을 알려준다. 아까 종점상회(오미리 버스종점)에서 도로를 따라 곧장 왔더라면 1.1km면 되었을 것을 길이 끊긴 평화누리길을 고집하느라 3배 이상을 더 걸었던 것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금악교를 향해 간다. 금악교로 곧장 가는 도로를 놓아두고 수입천의 강둑을 따라 에둘러 간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건너편의 또 다른 이정표는 직연폭포 방향으로 가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길가 비닐하우스에서는 풋풋한 오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잠시 후 도착한 물소리의 터’. 이름처럼 수입천의 강둑에 매달 듯 탐조대를 겸한 쉼터를 만들었다.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어가라며 벤치를 놓아두었음은 물론이다. 독수리·황조롱이·두루미·꾀꼬리 등 이곳에서 살고 있는 새들에 대한 설명판도 보인다. 일종의 다목적 쉼터인 셈이다.

 독수리는 아예 조형물로 만들어놓았다. 나머지 새들에 대한 조형물도 있다는데 웃자란 잡초에 묻혔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물소리의 터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팔랑개비다. 10여 개의 커다란 팔랑개비가 힘차게 돌아가는 풍경이 쏠쏠한 볼거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누렇게 물들어가는 금악리 들녘도 무척 넓었다. 심심산골인 양구 지역에 저런 들녘이 있다는 것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12 : 55. 금악교를 건너 금악리(金岳里)로 간다. 옛날 사기를 굽는 막이 있던 곳으로 초기 이름은 사기막 혹은 사금막(沙金幕),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금막(金幕) 또는 금악으로 변했다고 한다. 아무튼 탐방로는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도로를 횡단해 수입천의 둑길을 따른다.

 잠시 후 요런 무지개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중간에는 주변 풍광을 감상해보라는 듯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수입천에 바위가 늘어나면서 풍경이 한결 고와졌다. 저 물길에는 꺽지·쉬리· 탱가리·뚝지·메기 등의 민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단다. 덕분에 가족과 함께 낚시여행을 즐기기에 딱 좋다나?

 13 : 16. 460번 지방도(이정표 : 직연폭포 0.4km/ 평화의 댐 19.9km)로 다시 올라선다. 가드레일 밖으로 잔도처럼 데크길을 따로 냈다.

 ! 거북이 닷!’ 거북이 한 마리가 소를 향해 나아가는 모양새다.

 13 : 20. 방산면(方山面)의 면청소재지인 현리(縣里)’로 들어선다. 어깨를 맞대고 있는 장평리(長坪里)와 함께 방산면의 행정 중심을 이룬다. 조선시대 때 이곳에 방산현(方山縣)의 현청(縣廳)이 있었다고 해서 현리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탐방로는 수입천의 천변을 따른다. 560번 지방도와 수입천 사이에 데크로 길을 냈다. 주민들을 위한 편의시설인 듯 길가에는 정자와 파고라도 배치했다. 수입천의 청량한 물소리를 들으며 망중한을 즐길 수 있으니 쉼터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장평마을로 가는 초입, ‘조선백자 시원지라는 빗돌이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두 종류의 자기 중 조선백자가 시작된 곳(始原地)’이라는 것이다. 흔히 백자 하면 경기도의 광주·이천·여주를 떠올린다. 하지만 세종실록 등 역사서에 양구의 자기소가 언급될 정도로 양구도 빠지지 않는 백자의 고장이다. 국가에 공납품으로 들어갈 만큼 품질이 좋은 백자를 생산해왔다(금강산에서 발견된 이성계 발원 사리구가 양구에서 생산된 백자로 알려진다). 분원백자(조선시대 왕실용 자기)에 공급되던 최고 품질의 백토가 이곳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지역민들의 삶을 엿본다며 상가지역으로 들어가는 나그네들도 여럿 눈에 띈다. 하지만 난 수입천변을 따르는 평화누리길로 진행한다. 그래야 먼 거리에서나마 직연폭포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사진에 나오는 두 번째 다리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이다. 폭포전망대가 막힌 줄 알았더라면 줌으로 당겨보았을 텐데 아쉽다.

 13 : 34. 탐방로는 양구 조선백자박물관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수입천 쪽으로 간다. 하지만 난 박물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그윽하고 담백한 여백의 미로 보는 이를 매료시키는 조선백자를 구경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어찌 놓치겠는가. 참고로 양구백자박물관은 양구의 백자 제작 역사를 보존하고 조선왕실 백자의 주원료로 사용된 양구 백토 연구를 통해 현대적인 사용 가치를 모색하기 위해 지난 2006년 개관했다.

 전시실은 시대 순으로 백자가 전시되어 있다. 양구 백토에 대한 설명부터 고려·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많은 유물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첫 대면은 14~15세기 초(고려 말 조선 초기)의 백자, 불순물이 섞여 있어 약간 노르스름하고 녹색을 띤다.

 주류를 이루는 조선 중후기 백자는 백색 도는 회백색을 띠며 청화(靑畫)와 철화(鐵畵)로 그린 꽃··물고기·문자 등 다양한 문양이 나타난다. 초기에는 대접이나 접시의 겉면에 간단한 초화문(草花文)을 그려 넣었으며, 18세기로 갈수록 제기류를 비롯 다양한 기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현대백자실이다. 양구 백토로 만든 백자가 전시되고 있는데,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달항아리를 비롯해 현대 백자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그동안 박물관에서 열린 기획전을 통해 기증된 작품들과 구백자연구소에서 진행한 백자의 여름 전시에서 기증된 작품, 호주 도예가 스티브 해리슨의 작품 등이 전시되고 있단다.

 저게 백자? 하긴 예술에 문외한인 내가 현대 예술가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기획전시실에도 다양한 백자가 전시되고 있었다. 양구백토로 제작된 작품과 남북한의 원료를 합토해 만든 통일백자 등이라고 한다.

 야외도 전시장으로 활용했다. 도자기를 제작하는 전 과정을 조형물을 통해 재현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는 피노키오가 귀여워 그중 하나를 게재해 본다.

 양구 가마도 복원되어 있었다. 양구는 고려시대부터 20세기까지 600여 년간 백자가 생산되어 왔다. 양구 가마터는 1454(단종 2)에 편찬된 세종실록에서 처음 소개된다. 전국의 139개 자기소 중 2개가 양구현에 있었단다. 1530(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전국 자기소 32개소 중에 양구현이 포함된다. 139개에 달했던 자기소가 100년 만에 32개소로 축소됐지만, 양구는 도자기 생산의 요지로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 : 50  14 : 20. 15분 정도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직연정(直淵亭)’이란 정자가 잠시 쉬었다가란다. 덕분에 준비해간 간식을 서로 나누며 여유롭게 쉬다 갈 수 있었다.

 정자에서 내려와 냇가(수입천)로 간다. 아니 입구에 세워놓은 직연폭포(直淵瀑布)’안내판부터 살펴본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잠시 쉬어가는 곳인데, 폭포수가 곧바로 떨어진다고 해서 직연이란 이름이 붙었다나? 떨어진 물줄기가 잠시 멈췄다가는 ()’는 깊이가 20m나 된단다. 1922년 칠천리 김왈룡의 어린 송아지가 물에 빠졌을 때 석자 이상의 메기가 이를 잡아먹었다는 믿거나 말거나식 일화도 전해진다.

 몇 걸음 더 걸으면 폭포를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하지만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입구를 막아버렸다. 그것도 꽤 오래된 듯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국가나 지방 행정도 고객 서비스로 바뀐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도 양구군청은 저 폭포를 보려고 찾아온 관광객들의 바람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납세자인 국민에 대한 배반이라고나 할까?

 폭포는 상부에 놓인 다리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폭포는 아래서 올려다봐야 제멋이다. 그러니 반쪽자리 구경이라고 하겠다. 그나저나 물줄기가 곧바로 떨어져서 직연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와폭(臥瀑)’이 분명했다. 그저 높이 20m의 암벽이 병풍을 둥글게 세워놓은 듯한 경관이 아름답다는 설명만이 공감을 줄 따름이다.

 그 아쉬움은 상부에 있는 수중보의 물줄기로 달랠 수 있었다. 보를 넘어오는 물줄기가 나이아가라 폭포가 부러워할 정도로 멋지게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리 건너에 45m 높이의 인공폭포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물줄기가 끊긴 채 시커먼 배만 들러내고 있었다. 물이 흔한 여름철인데도 저렇다면 다른 철에는 아예 운영을 검토할 일도 없겠다.

 평화누리길은 계속해서 수입천을 오른쪽에 끼고 이어진다. 강줄기를 따라 난 산책로는 고요하고 은밀하다. 길은 잘 닦여있으나 사람의 발길이 드물기 때문이다.

▼ 14 : 33. 그렇게 10분쯤 걸으면 일차선 도로(소풍정길)로 올라서고, 곧이어 자월교로 수입천을 건넌다.

 자월교를 건넌 다음 수입천 강둑으로 올라선다. 이후부터는 수입천을 왼편에 두고 걷는다. 오른쪽으로 누렇게 물들어가는 장평리의 들녘이 펼쳐지는데 제법 넓다.

 길은 접어들수록 물 향기가 짙다. 평화누리길과 어깨를 맞대고 가는 강줄기 뒤로는 맑은 세상이 펼쳐진다.

 경관 좋은 곳에는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전망대 맞은편, 두타연갤러리로 가는 460번 지방도가 하천 건너로 지나간다.

 백색의 암벽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 위를 물줄기가 떨어지듯 흘러가며 굉음을 낸다. 양구의 또 다른 명소로 꼽아도 손색이 없겠다.

 경관이 고운데 정자 하나 없겠는가. 하천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렸다. 이정표(두타연까지 6.7km)는 직연폭포에서 2.5km쯤 걸어왔음을 알려준다.

 하천 건너로 큼지막한 건물들이 줄을 잇는다. 이곳 송현리의 규모가 제법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15 : 00. ‘송현1리 경로당을 지나 송현교로 수입천을 건넌다. 초입에 이 구간이 ‘DMZ 평화의길’ 25코스임을 알리는 이정표와 함께 평화누리길의 방산면 구간에 대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송현리(松峴里)는 웬만한 면소재지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하지만 인근 군부대의 이전 등으로 경기가 많이 침체되었다고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숙박 및 휴게 시설 등 인프라를 갖춘 캠핑장을 송현리에 조성하기로 했다나?

 송현리에서 46번 지방도를 다시 만났다. 그런 다음에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간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강원도가 무대다. 장돌뱅이인 허 생원은 우연히 만난 젊은 장돌뱅이 동이와 대화 장터로 가는 길에 밤길을 동행하게 되고, 달빛 아래 메밀꽃 밭에서 자신이 젊었을 때 물레방앗간에서 있었던 성 서방네 처녀와의 이야기를 회상한다. 이곳 역시 강원도, 그러니 어찌 메밀꽃밭 한번 지나지 않겠는가.

 지루하게 이어지는 도로, 왼편은 군부대의 연속이다. ‘백석대대라는 버스정류장까지 있을 정도다.

 여유롭게 산천경개를 즐기다보니 어느덧 후미가 되어 버렸다. 덕분에 앞질러간 일행이 매달아놓은 표지기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허총무, 사슴과 구름... 산에서도 뛰어다닐 정도로 건각을 자랑하는 여성 도반들이다.

 15 : 25. 그렇게 25분쯤 걷자 송현 하수처리장이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점심상을 차릴만한 자리를 찾던 산악회버스가 하수처리장 맞은편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9코스의 종점인 두타연갤러리까지는 30분을 더 걸어야 한다. 하지만 느긋하게 배를 채운 상태로는 걷는 게 무리, 별수 없이 산악회버스로 왔다. 그렇게 도착한 두타연갤러리는 문이 닫혀있었다. 소지섭이 영화와 드라마 촬영 때 입었던 의상과 스틸 사진으로 꾸며 소지섭갤러리로도 불린다는데... 참고로 배우 소지섭은 영화 촬영을 하며 양구군과 인연을 맺었다. 이어 민통선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 강원도 DMZ 일대를 배경으로 2010년 포토에세이집 소지섭의 길을 출간하면서 양구군과 깊이 교류하게 됐다고 한다.

 백석산지구 전투전적비에 들러 묵념을 드려본다. 백석산 전투(1951.8.18.-10.28)에서 산화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3군단에서 세운 전적비로, 격전 끝에 백석산과 그 일대를 점령하게 되었으며, 중공군은 어은산 방면으로 퇴각하고 10 25일부터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백석한 일대의 전투가 종료됐다.

 갤러리 앞 고방산교차로 중앙에는 백자조형물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 양구가 조선백자의 시원지임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기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다. 고려청자가 옥빛의 화려함으로 보는 이를 찬탄하게 한다면, 조선백자는 그윽하고 담백한 여백의 미로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서해랑길 35코스(돌머리해변-향화도항)

 

여행일 : ‘23. 8. 26()

소재지 : 전남 함평군 함평읍·손불면 및 영광군 염산면 일원

여행코스 : 돌머리해변주포항대발마을석계마을농암마을월천방조제안악해변함평항향화도항(거리/시간 : 19km, 실제는 첨단양식장부터 13.47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5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함평만의 동쪽 해안을 따라 함평군에서 영광군으로 간다. 덕분에 함평만의 아름다운 풍광을 트레킹 내내 왼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주요 볼거리로는 안악해변의 꽃밭과 칠산타워의 조망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돌머리 해수욕장(함평군 함평읍 석성리)

서해안고속도로 함평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따라 함평방면으로 2km쯤 내려오다 양림교차로(함평읍 진양리)에서 주포로로 옮겨 4.5km쯤 들어가면 돌머리해수욕장이 나온다. 서해랑길(무안 35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해수풀장 근처에 세워져 있다.

 해제반도의 동쪽 해안을 따라 걷는 19km 길이의 코스다. 오늘도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 6Km를 줄여 첨단양식장 버스정류장(첨부된 지도의 석창리)’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산악회의 배려로 중요 포인트인 돌머리해변과 주포항을 둘러봤으니 봐야 할 것들은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고 보면 되겠다.

 이동 중 들른 주포(酒浦), 옛 이름은 주항포(酒缸浦, 1865년 간행 대동지지 지명), 1900년대 초부터 주포로 부르기 시작했다. 주막이 많은 포구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주포방조제가 건설되고 구주포가 포구의 구실을 못하게 되자 신설포로도 불리었는데, 당시는 서해에서 잡은 수산물의 집산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단다. 그러니 주막이 많았을 것은 당연, 하지만 어선이 대형화 되는 1955년 이후 점차 사양화되어 폐항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다 1962년 돌머리해수욕장 개장으로 횟집이 늘어나면서 본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이곳에서만 잡히는 엽삭(곰삭은 엽삭젓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았단다)’이란 특이한 물고기가 있었다고 했다. 황실이(강달이준치·조기(칠산 앞바다에서 잡힌) 등도 주포항으로 모였단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포구는 서너 척의 어선이 매어져 있을 뿐 한적하기 짝이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싯구가 떠오를 정도로...

 쇠락한 포구의 물양장은 텅 비었다. 하지만 옛날, 특히 배가 들어온 날의 주포는 북적거렸다고 한다. 만선의 풍어를 알리는 배는 오색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고, 주머니가 두둑한 어부들로 붐비던 주포는 술과 음식이 넘쳐나고 노랫소리가 드높았단다. 주포의 이름에 술 주()’자가 박혀있는 이유일 게다.

 돌머리해수욕장이 개장된 뒤로 찾는 이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했다. 지자체가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수산물 직거래장터를 열었다. 그 옛날 주포를 먹여 살리던 뱃사람들 대신, 이젠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노린다고 보면 되겠다.

 물양장 난간에 서면 함평만의 풍광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35코스가 시작되는 돌머리 해안은 물론이고, 그 너머로 서해랑길을 답사하면서 걸었던 현경면과 해제면의 해안, 즉 곶부리로 점철되던 아름다운 해안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오른쪽에는 석창리를 에돌아가는 해안이 있다. 중앙에 보이는 산은 두류봉’, 그 왼쪽 끝을 돌꼬리(돌고지)라 부른다고 했다. 석창리의 포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포구의 오른쪽은 주포방조제다. 동쪽 깊숙이 파고든 함해만을 가로막은 방조제로 이로 인해 장교리(함평읍)과 궁산리(염산면)에 드넓은 들녘이 만들어졌다. 저 방조제는 수랑개라는 지명을 만들기도 했다. 바다를 막은 간척지의 진흙탕 즉 질흙 투성이 갯가로 발이 술술 빠지는 수렁의 갯가라는 뜻이다.  수랑개 술항개를 거쳐 주포가 되었다는데. 낭만적인 이름으로 이보다 더한 이름이 있을까 싶다.

 포구 근처에는 한옥 전원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주변의 볼거리(함평만의 황홀한 낙조)와 놀거리(돌머리해수욕장), 먹거리(식당·카페)를 연계시킨 체류형 관광단지로, 50여 동의 한옥 가운데 30여 동이 민박으로 쓰이고 있단다.

 주포방조제 끄트머리에는 함평의 명물 해수찜 마을(손불면 궁산리)이 있다. 유황이 함유된 돌을 소나무로 달구어 데운 물로 찜질을 하는 곳인데, 함평의 바닷가에서 전해 내려오던 민간요법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해수찜은 따뜻한 물이 담긴 탕에 몸을 담그는 것이 아니다. 해수에 뜨겁게 달군 유황석을 넣은 물에서 나온 증기로 몸을 데우고, 그 물에 적신 수건을 몸에 덮는 방식이다. 우리가 흔히 경험한 해수탕과는 완전히 다르다. 피부질환·신경통·당뇨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의 해수찜은 세종실록의 도자기 가마를 이용한 한증법을 계승·발전시켰다고 한다. 가열한 유황석을 쑥·삼못초·뱀딸기풀 등의 약초가 담긴 해수탕에 넣어 데워진 물로 찜질하는 것. 뒤뜰 아궁이에서 갓 구워낸 유황석을 넣은 탕의 온도는 섭씨 7080. 온도가 내려갈 때까지 수건에 물을 적셔 찜질한다. 이렇게 하면 온천과 약찜의 효능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실제 출발지는 첨단양식장 버스정류장(함평군 손불면 석창리)’이다. 돌머리해수욕장에서 811번 지방도를 타고 손불 방면으로 6km쯤 오면 나온다.

 11 : 20. 서쪽, 그러니까 함평만을 향해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정표에 적힌 첨단 양식장 300m쯤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담수어 양식단지, 첨단시설을 갖춘 입주업체들은 식품안전관리시스템인 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HACCP)’ 적용업소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위해 물질이 섞이지 않은 담수어(장어)를 시장에 내놓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닷가에는 둥근 반지 모양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양식장에서 기르고 있는 장어를 형상화했는데, ‘대지의 희망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참고로 뱀장어는 함평군의 군어이다. 함평군은 이밖에도 군 나비인 호랑나비와 은행나무·춘란·비둘기 등을 군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갖고 있다.

 줌을 당기자 돌머리해안이 성큼 다가온다. 둥그렇게 울타리를 쳐놓은 곳은 낙지 산란장(낙지목장이란 이름표를 달기도 한다)’일 것이다. 정부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갯벌낙지의 보존을 위해 낙지 산란장 조성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단다.

 서해랑길은 함평면의 해안선을 따라간다. 그리고 종점인 향화도항에 이를 때까지 한 번도 바닷가와 헤어지지 않는다. ! 앱은 서해랑길과 만나는 이곳을 시점에서 6.13km쯤 떨어졌다고 표시한다. 집사람 덕분에 오늘도 6km 정도를 단축한 셈이다.

 갯벌은 아직도 황토색이다. ‘황토 랜드라는 브랜드는 무안만의 것이 아닌 모양이다. 함평의 바다도 맑고 고운 황토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물 빠진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는 고깃배 한 척이 한가롭기 짝이 없다. 저 배는 무심한 주인이 물때를 맞춰 찾아올 때까지 하릴없이 낮잠만 잔다.

 11 : 35. 해안선을 따라 700m쯤 걸었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아니 둑길 옆에 월천항으로 가는 811번 지방도를 새로 내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왼편 둑길을 따른다.

 들녘 너머는 석계마을’. 법정 동리인 석창리(石倉里)’를 구성하는 6개 자연부락(석계·해창·대발·농암·대덕·해안) 중 하나로, 군유산과 두류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이 마을 돌꼬리로 유유히 뻗어 나가 바다에 빠져버리는 것이 시냇물 같은 형국이라 하여 석계(石溪)’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조금 더 걸으면 석창리 어민회관이 있는 돌고지 선착장이다. 35코스의 시점인 돌머리와 상대되는 지명으로 돌머리와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돌꼬리(또는 돌고지)’로 불린다고 한다. 함평의 구릉지가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두 곶(), 즉 돌머리와 돌꼬리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선착장 앞에서 도로가 둘로 나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석계마을과 농암마을을 거쳐 산남리 방조제로 연결된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공사 중이라는 안내판이 보이기는 했지만 산남방조제로 가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돌꼬리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도로가 온통 헤집어져 있다. 하지만 바닷가를 따라 난 옛길이 선명해 진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눈을 들자 석창리 앞바다의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저 갯벌은 석화가 지천이라고 한다. 석화는 해풍에 맛을 키우고 갯벌의 영양분을 빨아 제 살을 불린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석화는 바다의 인삼로 불릴 만큼 영양이 높다. 동장군이 맹위를 떨칠 때면 맛과 영양이 최고에 달해 이를 맛보려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나?

 11 : 54. 정자가 길손을 맞는 산남방조제(석창리-산남리-월천리를 잇는다)’에 이른다. 초입의 이정표는 종점(칠산타워)까지 10.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함평만해안도로는 서해랑길 5코스처럼 돌머리해안과 영광군 칠산대교를 잇는다. 함평만의 수려한 경관과 명품 해상교량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명품 드라이브 코스로 명성을 얻었다.

 이제 산남리 앞 방조제를 걷는다. 제법 빠른 걸음으로 걸었는데도 45분이나 걸린 엄청나게 긴 방조제이다. 이 방조제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동생 김연수가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삼양사라는 회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월천리 백옥과 석창리 농암 간 3.8km의 둑을 쌓았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시작해 1933년에 완공된 이 간척사업으로 인해 400정보(町步)나 되는 손불간척지가 생겨났으니, 그게 바로 산남리의 저 너른 들녘이다. 이후 갯땅은 농토가 되었고, 지금은 고소하고 쫀득한 맛좋은 함평 간척지 쌀이 생산된다. 하나 더, 산남리 마을에는 1970년대 초 꽃반지 끼고의 가수 은희가 만든 문화공간 민예학당이 있다. 자연재료를 활용한 디자인 제품, 천연염색의 현장을 보고 싶다면 잠시 들려도 좋을 것이다.

 반대편은 함평만의 드넓은 갯벌,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경사가 완만해 석화()와 바지락, 낙지 등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석화(石花)’는 바위에 붙어 있는 모습이 '꽃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코끝이 알싸할 정도로 찬바람이 불 때부터 맛이 들기 시작해 12월이면 절정에 이른다. 농한기의 귀한 소득원이기도 하다.

 갯벌에 쳐놓은 저 그물망의 정체는 대체 뭘까? ‘개막이일지도 모르겠다. 조석간만의 차가 클 때 갯벌에 그물을 쳐 놓고 밀물 조류를 따라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갇히도록 하는 전통 고기잡이다.

 12 : 18 - 12 : 48. 방조제의 중간쯤에서 만난 정자, 끝이 보이지 않는 둑길이 지루하게 느껴질 즈음이라서 더욱 반갑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 간 간식을 서로 나누며 30분 정도의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갯벌이 하도 넓다보니 그 사이로 강처럼 물길이 나있다. 평평하게만 보이는 갯벌에도 높낮이는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 갯고랑(전남 지역에서는 개웅이라 한다)이다. 어부들은 그 고랑을 용케도 찾아내고, 이제는 길이 된 고랑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

 생김새로 봐서는 낙지 산란장 같은데... 이곳 함평만이 세발낙지의 본고장이라니 말이다. 세발낙지는 발이 세 개여서가 아니라 가늘어서 붙은 이름이다. 갯벌에서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한 낙지는 일하다가 쓰러진 소를 일으킨다고 할 만큼 원기를 북돋아 주는 해산물로 알려져 있다. ‘바다의 산삼 혹은 노다지라고도 불린다.

 13 : 07. 길고 긴 방조제의 끝은 일공구(이정표 : 종점까지 7.1km)’이다. 맨 처음 공사를 시작한 곳이어서 일공구라 한다는데, 위에서 얘기하던 삼양사의 간척공사 산물이다. 하나 더, 향토사 공부를 한다는 김경수씨는 간척공사 이전에는 이곳이 백옥동(白玉洞) 마을이었다고 적고 있었다.

 일공구에도 선착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갯벌에 기우뚱 몸을 기대고 있는 고깃배도 여럿 보인다. 포구에는 잡아온 물고기를 파는 횟집도 들어서있었다. 하지만 손님은 보이지 않는다. 간척공사 때 이곳은 각처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이 뿌리는 돈으로 늘 흥청거렸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우리 같은 둘레길 나그네들이나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니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 되어버린 셈이다.

 신옥교라는 무지개다리를 이용해 월천저수지(손불간척지의 수원)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을 건넌다. 한가하게 날개짓을 해대는 서너 마리 갈매기의 환송을 받으며...

 ‘1공구라는 이름값이라도 하려는 양, 포구는 아직도 새로운 방파제를 쌓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일공구부터는 월천방조제를 걷는다. 일공구에서 안악에 이르는 이 방조제는 2000 8월 태풍 프라피룬으로 유실되었다. 무너진 제방을 다시 쌓을 때 거친 환경에서도 꽃을 피우는 해당화 6만여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이라고나 할까?

 13 : 22. ‘안악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월천리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안악(雁岳)이란 지명은 雁來基(안래기 안애기)’ 또는 雁落(안락 안악)’이 변형된 것이란다.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기러기와 인연이 많은 모양이다.

 월천방조제가 끝나는 곳에는 작은 공원(이정표 : 종점까지 5.7km)이 조성되어 있었다. 큼지막한 빗돌이 방금 전 월천방조제를 걸었고,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안악마을임을 알려준다.

 안악마을의 포구는 작다. 시쳇말로 주먹만 하다고나 할까? 정박하고 있는 어선도 주먹만 한 보트 두어 척이 전부다. 하지만 횟집에 펜션까지 들어서있으니 먹거리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함평만 갯벌에서 나오는 싱싱한 숭어·세발낙지·보리새우 등은 여름철 미각을 돋운다고 하지 않던가.

 포구에는 소녀상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함평만의 부드러운 곡선이 주는 안정감과 미래를 지향하는 함평의 기상을 형상화 했단다. 거기에 국민가수 이미자가 노래한 섬마을 선생님에 나오는 총각선생님에 대한 섬 처녀의 간절한 기다림을 담았단다. 그럼 이곳 안악마을이 원래는 섬이었다는 얘기일까?

 섬마을 선생님 노래비도 눈에 띈다. 10년쯤 전 대이작도를 답사하다 섬마을 선생님과 관련된 관광지를 만났었다. 1967년 김기덕 감독이 만든 영화 섬마을 선생님의 촬영지라면서 이미 폐교된 초등학교를 보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노래와의 인연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쉬운 점이라고나 할까?

 몇 걸음 더 걸어 이른 안악해수욕장. 200m 길이의 결 고운 백사장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감싼다. 그 숲에는 썬 베드를 놓아 피서객들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했다. 백사장에는 규모는 작지만 전천후 인공해수풀장도 만들었다. 명품 피서지로 만들려는 지자체의 노력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화이트 정원(‘해름애 언덕’, ‘바람의 언덕으로도 불린다)’은 안악해변의 또 다른 볼거리이다. ‘농산어촌 활력화 경관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수국·팜파스그라스·코스모스 등 여름부터 가을까지 형형색색의 꽃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싱그러운 여름 수국은 시들어가는 중, 대신 팜파스그라스가 나그네의 동심을 소환시킨다. 깃털모양의 풍성한 이삭이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데, 거기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기까지 해 여간 신비로운 게 아니다.

 그밖에도 보라색 버들마편초가 정원을 장식하고 있었다. 버들잎처럼 좁은 잎 모양 형태와 긴 꽃대 끝에 꽃이 달려서 마편 즉 말채찍처럼 생겼다고 해서 버들마편초란 이름을 얻었다.

 해당화는 일종의 보너스다. 해안가 도로변에서 만나게 되는데, 넓디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소금물투성이의 모래땅에 뿌리를 묻고 살아간다.

 꽃밭에서의 힐링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진행방향에 칠산대교를 놓고 걷게 된다.

 함평만 해안도로는 황혼 무렵의 해넘이가 자랑거리다.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해제반도 너머로 떨어지는 석양이 짙은 감흥을 선사한단다. 하지만 지금은 벌건 한낮, 일몰이 만들어내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상상으로만 그려볼 수 있을 따름이다.

 13 : 46. 이번에는 학산리(鶴山里) 앞 방조제를 걷는다. 1930년경 목포사람 정태성이 막았다고 한다.

 방조제가 만들어낸 들녘(둑을 쌓은 이의 이름을 따 정태성농장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300m 남짓의 둑이 만들어낸 들녘치고는 꽤나 넓다. 그 너머 산자락에는 학산리의 자연부락인 지호(芝湖) 마을과 평산(平山) 마을이 있다.

 서해랑길은 한없이 구불대는 함평만의 해안선을 따라 종점인 향화도항으로 간다. 문득 이은상 시인의 고지가 바로 저긴데가 떠오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칠산대교가 코앞인데도 걷고 또 걸어도 이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함평만은 육지에서 흘러 내려온 흙이 퇴적돼 만들어져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 숨 쉬는 생태계의 보고다. 수심이 깊지 않고 조차가 크고 조류 소통이 좋아 갯벌이 발달했다. 덕분에 주민들은 갯벌에 기대어 바지락을 캐고, 낙지를 잡고, 김 양식을 하며 생활해왔다. 갯벌을 막아 농지를 조성하고 염전을 만들기도 했다.

 해안선은 곳곳에서 구불댄다. 해변에 바짝 붙어 구불구불 이어진 이 길은 한결 운치 있다. 옛 사람들은 그런 지리적 여건도 그냥 버려두지 않았다. 방조제를 쌓았고, 주민들은 그 들녘에 기대어 살아간다.

 바다는 김 양식장의 지주로 한 가득이다. 갯벌에 저런 기둥들을 세우고 김을 매달아 양식한다. 바다 건너 도리포 곱창김의 주산지로 알려진다. 그만큼 청정해역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같은 해역을 끼고 있는 함평에서도 곱창김을 양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양식은 바다에서만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해수를 저장해두는 저 저수지는 동성수산과 손불수산에서 양식업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잠시 후 포장도로로 올라선다. 808번 지방도에서 갈라져 나온 함평항길이 해안도로와 만난 것이다.

 함평항으로 가는 길, 물 빠진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는 고깃배들이 의외로 많다. 근처에 함평항이라는 틀이 잡힌 포구가 있는데도 말이다. 함평항이 항구의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는 얘기가 아닐까?

 14 : 26. 함평항에 도착했다. 원래 이름은 해은항’, 해은마을(함평군 손불면 학산리)에 있는 포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까지 어업은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고, 2006년에 어촌정주어항(어촌의 생활 근거지가 되는 소규모 어항)이 되었다. 하지만 여객선은 들르지 않는다. 아니 들러본 적도 없고, 그저 인근 어민들의 선착장으로만 활용되어 왔었다. 그게 해안도로가 건설되고, 국가어항으로의 승격을 목표로 시설을 확충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됐다.

 부두는 웬만한 축구경기장보다도 더 넓었다. 하긴 국가관리 연안어항으로의 승격을 위해 명칭까지 바꿨다니 어련하겠는가. 해양 마리나 시설, 항로준설, 연안정비 등 개발 사업도 현재 진행 중이라고 했다. 하나 더, 이곳에는 편의점이 들어서 있었다.

 널찍한 잔디공원에서 ‘HAM PYEONG’이라고 적힌 커다란 전시물이 반긴다. 이곳 함평항은 해넘이의 명소 중 하나다. 조형물 곁에 노을이 내려앉은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유리 전망대를 지어놓은 이유일 것이다. 전망대에 서면 저 멀리 육지와 섬의 실루엣, 이 둘을 이어주는 칠산대교를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거기다 일몰까지 더해지면 조물주만이 그려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단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옥실 방조제를 지나 영광 땅(염산면 옥실리)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이 방조제가 함평과 영광의 군 경계인 셈이다.

 푸름으로 뒤덮인 옥실리 들녘과 새하얀 철새가 만들어내는 조화가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칠산대교가 바다를 가른다. 호리병처럼 생긴 함해만의 주둥이이자, 해제반도가 끝나는 북쪽의 도리포와 영광군 염산면의 향화도 사이에 놓은 다리다. 왕복 2차선, 길이 1800m로 지난 2019 12월에 개통됐으며, 그 덕분에 양 지역은 차량 이동 시간이 70분에서 5분으로 단축돼 생활편의가 크게 향상됐다.

 옥실방조제의 끄트머리에도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고깃배보다는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무동력선들이 더 눈길을 끄는 포구이다.

 선착장을 지나자 칠산대교가 머리맡으로 다가온다. 35코스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얘기일 것이다.

 함평만의 입구, 바다가 깊어졌나보다. 고기잡이에 한창인 어선들이 꽤 많다.

 14 : 56. 날머리인 향화도항에 도착했다. 항구에 들어서자 111m의 높이를 자랑하는 칠산타워가 시야를 꽉 메워버린다. 전남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로, 영광군의 11개 읍면이 하나로 화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단다. 전망대에 오르면 칠산대교와 인근의 섬과 바다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서해랑길 안내도(영광 36코스)는 향화도항의 입구, 버스승강장 옆에 세워져 있었다. 참고로 함평만이 함평군과 무안군을 아우르는 큰 항아리라면 이곳 향화도항과 도리포 유원지는 그 항아리의 주둥이다. 지명에서 드러나듯 섬이었단 향화도(向化島)는 간척사업에 의해 육지가 됐고, 항구가 들어서면서 송이도와 낙월도를 잇는 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13.47km가 찍혀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던 점을 감안하면 무리한 속도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