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도(古代島)

 

여행일 : ‘23. 5. 13()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

산행코스 : 선착장또랑산당너머해수욕장당산뱅부여귀츨라프공원선바위전망대해안컨테이너선착장(소요시간 : 7.64m/ 3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대천항에서 북서쪽으로 14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그만(0.87) 섬으로 해안선 길이도 6km에 불과하다. 하지만 풍부한 수산자원으로 인해 마한 때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마을을 형성했단다. 옛 집터가 많다고 해서 고대로(古代島)’로 불리는 이유이다. 어장의 발달은 자가발전소·자체전화·상수도시설 등의 편의시설을 일찍부터 들여왔고, 주민들은 현대식주택을 짓는 등 문화생활을 누리며 부유하게 살아왔다. 물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깨끗한 청정해역은 인근 장고도와 함께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근원이 되기도 했다. 참고로 고대도는 우리나라 최초 기독교 선교가 이뤄진 섬이기도 하다. 1832 7 25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 1803-1851)’선교사가 고대도에 도착, 8 12일까지 머물렀다.

 

 찾아오는 방법

일단은 대천 연안여객선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고대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서해안고속도로 대천 IC에서 내려와 국도 36호선(원산도 방면)를 타고 신흑동로터리까지 온 다음 대천항로로 들어서면 잠시 후 대천항에 이르게 된다. 타고 온 차랑은 공영주차장(무료)에 세워두면 된다.

 고대도의 탐방로는 3개 코스로 나눌 수 있다. 선착장을 시작으로 동일교회선교센터·고대도교회·해안길·귀츨라프기념공원·선바위로 이어지는 1코스(1.4km)와 선착장에서 등대·고대도교회·당너머해변까지의 2코스(1.4km), 이 둘을 합해 운용하면 3.3km짜리 3코스가 된다. 여기에 봉화제를 보태는 탐방객도 있으나 봉 따먹기를 하지 않은 이들이라면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를 태우고 갈 가자 섬으로 호는 사람과 차를 함께 싣는 카페리(Car ferry)’ 선박이다. 매일 3(07:20, 13:00, 16:00) 대천항을 출발해서 삽시도(술똥선착장 및 밤섬선착장)와 장고도, 고대도 등을 들른 다음 다시 대천항으로 되돌아온다. 운임은 고대도 기준 12,300원.

 40분쯤 후, 첫 번째로 들른 삽시도의 술똥선착장’. 대부분의 차와 사람들이 이곳에서 내렸다. 배가 들르는 3개의 섬 가운데 가장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삽시도는 8년 전에 다녀갔기에 이번엔 들르지 않았다. 

 두 번째로 들르는 곳은 장고도, 장고처럼 생겼다는 섬의 모양새 보다는 앞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들이 눈길을 끈다. 장고도도 6년 전에 방문했었다. 

 대천항을 출발한지 1시간20분만에 고대도선착장에 도착했다. 100여 가구, 250여명이 살아가는 고대도는 섬으로 들어오는 선착장과 연결된 마을인 가운데말과 섬 아래쪽에 있는 아랫말로 나뉜다고 했다. 주민 대부분은 이곳 가운데말에 거주한단다.

 배에서 내리자 고대도의 입간판이 반긴다. ‘청정해역 어촌마을에 오신 걸 환영한단다. 맞다. 고대도는 물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깨끗한 바다가 자랑거리다. 그로인해 인근 장고도와 함께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최근에는 행정안전부와 한국섬진흥원에서 이달의 섬으로 뽑기도 했다. ! 고대도둘레길을 소개하는 안내판도 눈에 띈다. 그러니 고대도에서 얼마동안 머무를지를 궁리해 보자. 다음 배가 14:30에 있고, 마지막 배는 16:50에 들어오니 타고나갈 배를 염두에 두고 트레킹 코스를 설계해 볼 일이다.

 고대도 표지석은 ‘GOD 愛島라는 브랜드를 달았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섬이라면서... 하긴 이곳 고대도가 우리나라 기독교의 최초 선교지라니 그럴 만도 하겠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런 꼬맹이 섬에까지 선교사를 보내주었겠는가. 그것도 다른 어느 곳보다 먼저.

 몇 걸음 더 걸어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동일교회 고대도 선교센터가 반긴다. 센터는 칼 귀츨라프 선교기념이라는 수식어로 안내를 시작한다. 우리나라에 개신교의 첫 씨앗을 뿌렸다는 선교사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를 말하는가 보다. 참고로 1832 7월 고대도의 안항이라는 곳에 범선 한 척이 정박했다. 길이 46.5m, 깃대 높이 34.1m 507t급 이양선 로드 에머스트(Lord Amherst)였다.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온 영국 국적의 이 배는 폭 9m 세곡선이 고작이었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 섬 주민에겐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내부에는 귀츨라프가 타고 왔었다는 무역선 로드 앰허스트(Lord Amherst)’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휴 린제이(H. Lindsay)’가 선장인 저 배는 1832 2월 중국 마카오를 떠나 7월에 서해안의 백령도를 거쳐 충청도 홍주목만(洪州牧彎) 불모도(不毛島)에 도착한 후 고대도의 안항(安港)에 예인되었다.

 좌우 벽면은 귀츨라프에 대한 얘기로 채워 넣었다. 우리나라에 주재하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한국을 다녀간 선교사들이 더러 있었다. 선교사로 파송된 게 아니었기에 한국에 거주하면서 선교 사역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온 이들로 교회 역사에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중 한국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선교사가 프러시아계 독일인으로 의사이자 목사였던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이다. 그게 1832년이었다며 개신교의 선교 원년으로 삼아 기념하겠다는 것이다.

 귀츨라프는 1803 7월 독일 포메라니아(Pomerania) 지방의 피리쯔(Pyritz)에서 유태계 독일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 경건주의운동의 발상지였던 할레(Hall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26년 네덜란드 선교회 파송을 받고 동남아 자바 지방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이후 영국 동인도회사의 1천 톤급 무역선 로드 앰허스트(Lord Amherst)’에 통역·선의(船醫선목(船牧)으로 참여함으로써, 한국에 오는 첫 선교사로서의 기록을 남겼다.

 근처에 있는 방문객 센터는 텅 비어 있었다. ‘퓌리츠라는 카페와 여객선 매표소가 들어설 예정이라는데, 칼 귀츨라프의 고향마을 ‘Pyritz(현재는 폴란드 땅이란다)’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카페는 언제 들어설지 요원해 보였고, 매표소도 이곳이 아닌 원래의 장소에서 승선권을 팔고 있었다.

 섬마을에는 식당이 없다. 하지만 상점은 두 곳이나 들어서 있었다. 덕분에 트레킹을 마치고 타고 나갈 배를 기다리는 동안 시원한 캔맥주로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오른쪽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방파제와 그 끄트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등대를 전방에 놓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 근처에 단면이 날카로운 간단여가 있다고 한다. 그 너머 북서쪽 끝에는 옛날 오천수영의 수군들이 가끔 드나들며 목을 지키던 조구여도 있단다. 해산물이 많이 나는 곳이라나? 여기서 란 물속에 잠겨있는 바위를 말한다. ‘암초의 하나로 보면 되겠다.

 내연발전소가 눈에 띄는 걸로 보아, 필요로 하는 전기는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는 모양이다.

 발전소 앞 해변은 질 좋은 모래사장이다.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하겠건만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위험시설을 곁에 두었다는 게 흠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망 손질을 하는 어부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외국인이다. 맞다. 언론은 초 고령사회라며 최근의 어촌 현실을 심심찮게 전한다. 바닷가 어촌마을이지만 배를 탈만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 공백을 이제 외국인들이 메꾸어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해안도로가 끝나는 지점의 대나무 숲에서 나무계단을 오른다. ‘또랑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또랑산과 당너머해수욕장, 당산을 거쳐 마을로 되돌아오는 코스이다.

 초입에 세워놓은 탐방로 안내도를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길은 시작부터 탐방객들의 기를 확 죽여 버린다. 또랑산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게 버거울 정도로 길지 않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지만 나무계단이 끝나면서 산길은 한없이 고와진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거기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양쪽 옆에 밧줄 난간을 설치해 길과 숲을 확실히 구분했다.

 산으로 들어선지 10(트레킹을 시작한지는 35). ‘또랑산으로 가는 갈림길(이정표 : 당너머해수욕장 330m/ 또랑산 180m)을 만났다. 또랑산은 오른쪽 방향이다.

 탐방로 주변을 우산나물의 군락지였다. 채취 시기는 지났지만 참취도 심심찮게 보였다.

 이정표는 또랑산 180m 전방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산길은 계속해서 고도를 낮춘다. ‘또랑산이 산을 이르는 지명이 맞는 걸까? 결론은 아니올시다였다. 이정표가 말한 180m 전방에서 우린 바닷가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려선 바닷가는 멋진 전망대였다. 장고를 닮았다는 섬, 장고도가 길게 누워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고, 그 오른편으로는 육지나 마찬가지인 안면도가 드넓게 펼쳐진다.

 왼편, 그러니까 당너머해수욕장 쪽으로 해식애가 펼쳐진다. 길이 있을까 해서 나아가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영광의 송이도에서 저런 바위절벽에 매달려 낑낑대다가 카메라까지 사망시켜버린 아픈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당너머해수욕장쪽으로 간다. 이어서 3분 후에는 포장길을 만나고, 길은 이곳에서 양쪽으로 나뉜다. 당산은 왼편이다. 하지만 그 당산 너머에 있다는 당 너머 해수욕장은 오른쪽이다. 그러니 해변까지 내려갔다가 되돌아 나와야 한다.

 조금 더 걷자 침목계단이 해변으로 내려서란다. 주변은 솔밭, 수령이 백년을 훌쩍 넘겼을 것 같은 적송(赤松) 수십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내려선 해수욕장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었다. 고운 모래가 한가득인 작은 해변을 노송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게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고대도는 풍요의 상징이라고 한다. ·여름·가을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갯벌에서 손쉽게 조개나 고동을 잡을 수 있고, 섬 주변의 암초에서 해삼이나 전복, 홍합도 손쉽게 채취할 수 있단다. 하지만 섬 주변이 온통 주민들의 양식장이라니 그냥 구경만 해둘 일이다.

 삼거리로 돌아와 이번에는 반대편, ‘당산 쪽으로 간다. 이어서 몇 걸음 더 걸으면 민가(옛 도리사)가 반긴다. ‘당산은 민가 앞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파고들어야 만날 수 있다.

 당산 아래 있었다는 실상묘법연화종의 사찰 도리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개에게 먹이를 주러 나오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주지스님이 돌아가신 후 폐사가 되었고, 현재는 절과는 무관한 사람이 살고 있단다.

 적당히 가파른 산길을 잠시 오르자 섬&산의 인증 장소인 당산(44m)’이 반긴다. 고대도에는 이곳 당산 말고도 뒷산·산끝재·봉화재 등 여러 개의 산이 있다. 이중 봉화재(길이 어설퍼서 가보지는 못했다)가 가장 높다지만 높이는 겨우 89.5m에 불과하다. 하지만 예부터 조난이 발생하거나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땐 봉화를 올렸을 만큼 중요한 장소였다고 한다.

 정상석 뒤는 각시당이다. 황토와 돌로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사각의 제단(祭壇)을 쌓았는데,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당제를 지내는 공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농토가 부족했던 고대도의 주민 대부분은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에 종사했는데, 워낙 사고가 잦다보니 이곳 당산에 당집(1999년 화재로 소실됐다)을 짓고 매년 정월 초에 소를 잡아 제를 올렸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하나둘 섬을 떠나면서 한동안 중단됐다가, 1992년부터 다시 지내온다고 한다.

 당산에서 내려오면 마을. 고대도의 취락은 낮은 구릉지 사이에 형성되어있다. 그 주위를 밭들이 제법 넓게 둘러싼다. 이렇듯 고대도의 마을은 원산도와 안면도를 마주하며 선착장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

 해산물이 널리다시피 한 고대도는 그 덕분에 모든 게 풍요롭다고 했다. 그래선지 눈에 들어오는 집들 대부분이 서울 근교의 단독주택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지어졌다. 치장 또한 여느 전원주택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담수화시설이 들어서 있는 걸 보면, 물은 그다지 풍족하지 않는 모양이다.

 바닷가까지 나와 해안도로(고대도둘레길 1코스)를 따라 귀츨라프공원이 있는 고대도 남쪽 끝으로 간다. 지금까지는 고대도둘레길 2코스(선착장, 등대, 당너머해수욕장, 고대도교회) 50분 동안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선교센터가 낀 선착장 주변을 돌아보는 데는 25분이 걸렸었다.

 탐방로는 작은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청결했다. 곳곳에 놓인 저 빗자루가 원인이지 싶다. 주민들 스스로가 청결을 유지해나간다는 의미일 게고 말이다.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길가에는 대형 고무 통이 늘어서 있었다. 고대도의 특산품인 까나리액젓 열치(큰 멸치)이 안에서 숙성되는 중이라고 한다. 숙성된 젓갈은 대천항으로 내다 파는데, 주민 소득의 한 축을 당당히 꿰차고 있다나?

 머리를 제거한 채 말리는 생선도 눈에 띈다. 복어 새끼인데, 6개월 이상 바싹 말렸다가 복어의 독소가 제거되는 가을에 찜이나 지져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란다.

 새로 짓고 있는 저 건물은 어촌계공동작업장이 아닐까 싶다. 예전 고대도는 고기잡이로 먹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3가구 정도만 고기를 잡고, 나머지는 바지락·낚지·소라 등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바지락 양식 농장이 있어 4월부터 12월까지는 바지락 채취에 눈코 뜰 새가 없다나?

 공동작업장 앞 해변은 몽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고 귀여운 몽돌들이 조개껍질 부스러기와 함께 모래사장을 대신한다. 파도가 몰려오자 그 몽돌들이 울어댄다. 파도와 몽돌이 빚어내는 이중주다. 한 마디로 기가 막히다.

 눈과 귀만 즐거운 게 아니다. 갈매기를 희롱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다. 동쪽 장벌에 바지락 양식장이 들어서 있고, 조개나 고동이 많이 잡힌다고 했는데 이를 찾아 모여든 모양이다.

 바다로 시선을 옮기자, 사진 전시회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풍광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푸른 바다 위에 태안반도의 영목항과 원산도를 잇는 원산·안면대교가 두둥실 떠올랐는데, 여기에 억새섬·시루섬 등 꼬맹이 섬 두어 개가 화룡점정을 찍는다.

 맞은편의 원산도는 앞에서 말한 원산·안면대교가 놓이면서 육지가 되었다. 여기에 국내최장 해저터널인 보령해저터널까지 뚫리면서 이젠 접근성까지 좋아졌다.

 다리로 변신한 해안도로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바닷가를 따라 조금 더 가면 바다 위로 길이 나있다. 긴 다리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해안의 가장자리를 따라 경운기가 다닐 정도의 넓이로 길을 냈다. 갯벌에서 먹고사는 주민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바다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곳곳에 만들어 두었다.

 다리 위를 걸으며 바라보는 해식해안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해안의 굴곡을 따라 길도 곡선을 이루면서 앞으로 나간다. 그렇게 걷다보면 해안절벽이 끝나는 곳에서 다리는 다시 땅에다 낸 길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폭은 다리와 마찬가지로 좁다.

 모퉁이를 돌기 바로 직전 전망대로 가는 길이 나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바닷가를 계속 따르기로 했다. 저 끄트머리 어디쯤에 전망대로 오르는 길이 나있을 것 같아서이다.

 몇 걸음 더 걷자 뱅부여가 얼굴을 내민다. 돌출된 갯바위가 바다를 향해 길을 만들고 있다.

 바위 속에 갇힌 물 위에는 하늘이 담겼다. 미세먼지 탓일까? 바다 건너 희뿌연 원산도가 아름다워야 할 풍경화를 망쳐버린다.

 해안도로로 내려선지 20분(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40분). ‘뱅부여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를 기념하는 자그만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가 타고 온 배가 정박했다는 고대도의 안항(安港)이 이곳인 모양이다. 1832 7 25일 도착한 귀츨라프는 8 12일까지 머물렀다.

 칼 귀츨라프 선교비는 그가 타고 온 로드 애머스트호를 형상화했다. 그의 업적은 다른 빗돌을 세워 전한다. 귀츨라프의 앞은 최초라는 단어로 압축된다. 한국 개신교 선교사, 한글 주기도문 번역, 한문성경과 한문 전도서적 전달, 세계에 한글의 우수성 소개, 서양 감자 파종, 서양의 근대 의술 베풂 등이다. 첫 번째 업적으로 꼽는 선교는 1866년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 34, 1884년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 1885년 입국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53년 앞서 이루어졌다.

 기념비의 받침돌에는 한글의 자음 ···...’을 새겨놓았다. 왼쪽에는 영어로 Lord’s Prayer를 음각했다. 귀츨라프가 한자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려고 시도했음을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검문을 위해 앰허스트호에 올랐던 마량진 관리들이 일기불순으로 하룻밤을 배에서 머물렀고, 귀츨라프는 이들(홍주목사 이민회의 서생 )에게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준 다음 한글로 토를 달아줄 것을 부탁했다. 이것이 부분적으로나마 한글로 성경을 번역한 첫 번째 사건이다.

 스페인 설치미술가 후안 가라이사발(Juan Garaizabal)’이 직접 설치했다는 도시의 기억 베를린(Memoria Urbana Berlin)’도 눈에 띈다. ‘보헤미아 베들레헴교회(귀츨라프를 배출한 베를린선교학교를 설립했다)’ 예배당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베들레헴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훼손됐고, 1962년 베를린 도시계획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었다. 그 후 2012년 갈라이사발에 의해 원래 교회의 위치에 31m의 철근 조형물로 재탄생했는데, 고대도의 작품은 베를린의 것을 5m로 축소시켰다고 한다.

 기념공원 앞은 자갈밭 해변이다. 큰 자갈, 작은 자갈, 둥글둥글한 자갈, 납작한 자갈에 양념으로 모래와 조개가루가 섞였다. 이역만리에서 온 코쟁이들을 떠올리며, 귓가로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즐기기 딱 좋은 곳이다.

 고대도의 남쪽 바닷가는 작은 바위들 천국이다. 물이 빠져나가면 사자·코뿔소·독수리 등 다양한 모양의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중에서도 높이가 15m나 된다는 선바위(돛단여)’는 백미다. 고대도의 랜드 마크로 고기잡이 나가는 어부들이 하루의 무사함을 빌며 머리를 숙이고 지나간다고 해서 기원바위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공원 부근에서 오솔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 50m쯤 올라간 지점에서 전망대로 연결되는 탐방로를 만났다.

 통나무 난간을 두른 탐방로를 100m쯤 올라가자 전망대가 나타난다. 철제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데크 전망대를 올렸다.

 전망대에 오르면 고대도의 랜드 마크라는 선바위가 성큼 다가온다. 아까 공원에서는 카메라의 줌을 당겨야만 했는데,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들이 선바위 주변의 풍광을 삼켜버리는 건 아쉽다 하겠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이번에는 장고도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어촌계공동작업장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쪽, 그러니까 서쪽 해안으로 간다. 움푹 들어간 이 일대는 농경지가 꽤 넓게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논은 없고 밭에 고추·양파·배추 등을 경작하는 정도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35분.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멋진 해변이 나온다. 넓지는 않지만 뛰어난 풍광과 전망을 보유하고 있어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할 것 같다. 굵직한 노송이 모래사장을 둘러싸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변에 서면 장고도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해안절벽을 따라 다리도 놓여있다. 하지만 만든 지 오래인 듯 바닥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그렇다고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떤 멋진 볼기리가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다리의 끝은 썩어 문드러진 컨테이너박스가 지키고 있었다. 안에는 부서진 책상도 놓여있다. 길에서 만난 주민은 양식장 감시초소로 사용하던 시설이라고 했다. 이 부근에 전복과 해삼 양식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0분. 마을로 되돌아와 골목을 누벼봤다. 첫 만남은 마을 복지회관’. 자그마한 섬에 비해 호화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지어졌다. 지상 2층 건물에 문화복지시설과 주민휴게시설이 들어서있단다.(부근에 있는 보건소는 생략)

 귀츨라프 선교사의 역사적인 첫 걸음을 기념한다는 고대도교회는 꽤 세련됐다.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루는 세련된 외모가 돋보이는데, 십자가만 아니라면 여느 집단의 사옥으로 오해하기 딱 좋을 듯. 귀츨라프가 고대도에 복음의 씨앗을 내린지 딱 150년이 지난 198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벽에는 한글을 영어로 번역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귀츨라프가 한자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을 형상화 한 것이란다. 당시의 번역은 일부이긴 하지만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최초의 시도로 알려진다.

 고대분교(청룡초등학교) 터에는 칼 귀츨라프 해양역사전시관이 들어섰다. 고대도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거기다 멋지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완공되면 선교센터가 이곳으로 옮겨올 것이라고 한다.

 날머리는 고대도선착장(원점회귀)

마을을 둘러본 다음 선착장으로 빠져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대천항으로 되돌아가는 승선권은 고대도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우린 대천항에서 이미 샀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핸드폰 앱에 찍힌 거리가 7.64km이니 무척 느리게 걸은 셈이다. 선교센터 등 볼거리가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