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아산(425.7m)

 

산 행 일 : ‘21. 6. 1(수)

소 재 지 :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및 신동면

산행코스 : 강촌역→강촌하수처리장→방곡전망대→벌목지대→방아산→임도→풀무골→방곡1리(바일마을)→강촌역(소요시간 : 8.17km/ 3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춘천(강촌)에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산. 높지도 않은데다 육산이라서 산세가 보잘 것 없다. 방곡전망대와 벌목지대 말고는 조망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선지 이정표 등의 안전시설은 물론이고 등산로는 아예 손을 댄 흔적조차 없었다. 때문에 산행을 하는 동안 잡목과 가시넝쿨에 할퀴거나 찔리고 하다못해 따귀 서너 대 쯤은 맞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봉 따먹기’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올 필요가 없는 산으로 꼽고 싶다.

 

▼ 산행들머리는 경춘선 전철 ‘강촌역’(춘천시 남산면 방곡리)

최군의 배려로 모처럼의 근교산행을 했다. 지방선거일이지만 사전투표로 대체하고 산행이나 하자는 것이다. 하나 더. 집사람의 불편한 무릎을 감안하여 산행거리가 짧은 자그마한 산을 골랐다. 그것도 미답(未踏)의 산으로. 그렇게 선정된 산이 강촌역 근처의 ‘방아산’이다.

▼ 강촌역을 들·날머리로 삼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정상과 임도 등에서 갈려나가는 길(희미하지만)이 보였지만, 이정표는 물론이고 지도에조차 표기가 되어있지 않아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 1번 출구(하나뿐이다)로 빠져나와 동쪽 방향, 그러니까 강촌유원지 쪽으로 걸으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반대 방향은 구곡폭포관광지와 봉화산으로 연결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첫 번째 사거리에서 만난 이정표는 강촌역 주변의 가볼만한 곳을 잘 알려준다. 우리가 가고자하는 곳은 ‘방곡전망대’, 하지만 안내도는 길로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방향만 알려줄 테니 대충 알아서 가라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저 ‘Propose Stair’는 뭘 의미하는 걸까?

▼ ‘Propose Stair’는 전철역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이르는가 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꽃길’이 ‘Propose Stair’란 부제를 달았다. 하트모양의 문 아래는 계단을 ‘YES’와 ‘NO’로 나누어 놓았다. 세상은 온갖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그렇다고 사랑까지 따라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 사거리에서는 직진이다. 강촌은 ‘MT의 메카’로 꼽힌다. 아니 반강제인 MT가 꼭 아니더라도 젊은이들은 이곳을 스스럼없이 찾아온다. 오죽했으면 강촌역이 ‘사랑과 꿈과 낭만이 있는 경춘선’으로도 모자라 역사 전체를 ‘사랑’으로 도배해 놓았을까. 그래선지 주변은 온통 ‘액티비티’로 먹고사는 회사들 일색이었다. ‘산악오토바이’말고도 버기카, 깡통열차 등 액티비티를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장비들을 진열해놓았는데, 서바이벌 게임도 가능하단다.

▼ 액티비티의 왕은 단연 ‘버기카’가 아닐까 싶다. 사막(페루 여행 때 나스카라인을 보러가던 도중 이카사막에서 타봤는데 스릴이 장난이 아니었다)만은 못해도, 냇가 모래사장과 자갈밭 등을 달리다보면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사륜오토바이인 ‘ATV’이다)

▼ ‘캠핑카’도 꽤 많이 보였다. 색다른 숙박을 원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 탐방로는 ‘바일교’를 건넌다.

▼ ‘강촌천(江村川)’은 남산면 수동리에서 시작해 북서방향으로 흐르다가 북한강으로 유입되는 길이 6.8km의 하천이다. 특별히 내세울만한 볼거리는 없다.

▼ 다리를 건너자 새로 건설된 ‘403번 지방도’가 나온다. 하지만 가드레일을 둘러 진입을 막고 있었다. 등산로로 연결되는 도로(강촌하수처리장 진입로)가 맞은편으로 나있는데도 말이다. 이때는 본능대로 움직이는 게 옳다. 그냥 가드레일을 넘어버리는...

▼ 가드레일을 넘고 나서도 문제였다. 횡단보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뿐만 아니라 이 근처에는 횡단보도 자체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 불법을 저지를 수밖에... 그나마 차량통행이 뜸해서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 ‘강촌하수처리장’의 진입로를 따라 올라간다.

▼ 200m쯤 올라갔을까 등산로가 나타났다. 산자락으로 계단이 놓여있는 데다 이정표(전망대 0.2㎞)까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초입의 저 돌탑은 뭘 의미하는 걸까? 안전 기원용이 아닌 조경용이었으면 좋겠다.

▼ 산길은 가파르다. 아니 무지막지하게 가팔랐다. 시작부터 기를 죽이고 싶었던가 보다. 통나무계단이라도 놓여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그렇다고 너무 기죽지는 말자. 속도만 조금 떨어뜨리면 그만이니 말이다. 그러면 주변 풍광을 살펴보는 여유도 생길 것이다. 이때 붉게 익어가는 산딸기가 넝쿨째 눈에 들어온다.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인...

▼ 저 움막은 대체 누가 살고 있을까? 설마 무속인(巫俗人)? 에이~ 저 가냘픈 몸매의 방아산이 무속인에게까지 나눠줄 기(氣)를 갖고 있기나 할까?

▼ 산길은 고집쟁이였다. 경사가 누그러지지를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가팔라졌다.

▼ 그 가파름은 통나무계단으로도 배겨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겨우 고도를 높여간다.

▼ 산으로 들어선지 15분, 악전고투 끝에 올라선 능선에는 벤치가 놓여 있었다.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잠시 쉬어가라는 모양이다.

▼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자 전망 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아까 역전 사거리에서 눈여겨봤던 ‘방곡전망대’이다.

▼ 전망대에 서면 내로라하는 주변의 산들이 이곳을 주시한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강촌과 강선봉. 오른쪽 아래는 옛 강촌역, 지금은 ‘레일 바이크’ 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아서라! 요즘은 1년마다 바뀐단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여유조차 사라져버렸다던 어느 시인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 시선을 조금 옮기자 ‘봉화산’이 나도 있단다. 곁에 있던 최 君이 그 옆의 봉우리 이름 하나를 들먹이더니, ‘미답’이라며 나중에 별도로 일정을 잡아보겠다고 했는데 무슨 산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칠십 줄에 들어서면서 건망증이 부쩍 심해졌다.

▼ 삼거리로 되돌아오니 아까는 무심코 지나쳤던 이정표(하수처리장 0.2㎞/ 전망대)가 반긴다. 방아산 유일(아니 들머리에도 세워져있었으니 ‘有二’다)의 이정표다. 그런데도 방아산 방향이 텅 비어있는 게 아닌가. 희미하게나마 길이 나있는데도 말이다. 방아산이 가볼만한 산이 아니라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 산길은 이제 능선을 탄다. 인적이 드물어선지 능선이 온통 잡목과 넝쿨식물로 한 가득이다. 때문에 길 찾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길의 흔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 할퀴거나 찔리는 건 기본, 싸대기 서너 대쯤은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럴 때는 그저 능선이 부드럽고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다는데 위안을 삼아가며 걸어볼 일이다. 하지만 그 오르내림이 반복해서 이어지기 때문에 은근한 끈기를 요구한다.

▼ 좌회전, 우회전, 직진 같은 설명은 하지 않겠다. 이정표 등의 시설물은 물론이고, 뚜렷한 지형지물조차 없으니 어디서 방향을 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저 능선의 방향을 확인 한 다음, 길의 흔적을 찾아가며 진행할 따름이다.

▼ 가끔은 요런 코팅지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기도 한다. 바닥에 떨어져서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그건 그렇고 울창한 숲이 따가운 햇살을 막아준다. 하지만 시야까지 막아버린 탓에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때문에 가야할 방향을 찾는 게 만만찮다.

▼ ‘앗! 너희들 거기서 뭐하는 거야?’ 하지만 집사람은 그걸 보고 낯붉히는 내가 더 문제란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나?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 오늘도 난 무학대사에게 한수 배운다.

▼ 60~70년대 산림녹화용으로 각광받던 ‘싸리나무’다. 개구쟁이 시절에는 회초리용으로만 알았고, 더 자라서는 빗자루용으로만 여기던 나무이기도 하다. 그런 싸리나무가 자줏빛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작은 꽃이 올망졸망 달린 모양새에 반해 카메라를 들이밀어 봤다.

▼ 길을 인도하는 최군의 진행 속도가 무척 더디다. 길 찾기가 힘들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집사람의 무릎을 배려해 일부러 천천히 걷고 있을 것이다. 아니 바쁘게 살아온 일상을 산에서까지 적용하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주 5일을 죽어라고 고생했으니 휴일만이라도 자신을 보듬고 다독여야지 않겠는가.

▼ 이마에서 흘린 땀만큼, 아니 헉헉거리며 내뱉은 거친 숨결만큼 새로운 기운이 들어왔나 보다. 산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코가 뻥 뚫리고 목이 편안해진다. 이런 게 바로 ‘피톤치드’의 효능일 것이다. 참! 길이 헷갈릴 때는 주변을 잘 살펴보자. 자주는 아니지만 이런 리본들이 눈에 띄기도 할 것이다.

▼ 가끔은 요런 비탈길을 만나기도 한다. 아픈 무릎 때문에 쩔쩔매는 집사람보다,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최군의 시선이 더 애처롭다. 이런 게 바로 산악인의 우정?

▼ 산은 굴곡진 인생과 같아 오르내림이 반복된다고 했다. 그러니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면 이에 상응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날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그래 쉬운 산이 어디 있으랴.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겠는가.

▼ 산으로 들어선지 1시간 50분. 집사람이 지쳤나보다. 최군은 또 이를 알아차렸고... 앞서가던 두 사람이 배낭을 벗고 앉는다. 삼복더위를 향해 속도를 내고 있는 6월의 열기를 산들바람이 식혀준다. 무더위까지는 아니어선지 금세 시원해진다. 덕분에 우린 이곳(어딘지는 모르겠고, 높이인 ‘352m봉’으로 해두자)에서 30분이나 쉬어갈 수 있었다.

▼ 잠시 후 벌목 지대를 만났다. 방아산에서 가장 멋진 ‘뷰’를 보여주는 곳이다. 벌목(伐木), 산으로서는 아픔이겠지만 이를 찾는 인간들에게는 눈의 호사를 선사한다.

▼ 진행 방향에는 오늘의 주인공인 ‘방아산(맨 왼쪽 봉우리)’이 놓여있다.

▼ 319m까지 떨어졌던 능선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독야청청 소나무’라고 했던가? 민둥산으로 변한 능선에 살아남은 소나무 세 그루가 외롭다. 외로움에 지친 두 그루는 이미 숨이 끊어졌고.

▼ 뒤돌아볼라치면 삼악산의 준봉들이 헌걸차게 솟아오른다. 삼악좌봉, 등선봉, 청운봉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강선봉을 한가운데 놓고 왼편은 검봉산, 오른편은 삼악좌봉이 늘어선다. 창촌농공단지도 눈에 들어옴은 물론이다.

▼ 조금 전 간식 타임을 즐겼던 ‘352m봉’이다. 참! 319m까지 떨어지던 안부에 대한 설명을 깜빡 빼먹을 뻔했다. 오른편 발아래로 나있는 임도를 비탈진 오솔길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 맞은편 능선(해발 389m)에 올라서니 코팅지가 왼쪽으로 갈 것을 지시한다.

▼ 정상으로 가는 길도 여전히 희미했다. 누군가는 ‘적막하지 않으면 산이 아니다’라고 했다. 또 다른 이는 ‘그렇다면 서울 근교의 산들은 이미 산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그만큼 서울 근교의 산들이 사람들로 붐빈다는 얘기다. 강촌역을 아우르는 삼악산, 봉화산, 검봉산 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방아산만은 전자에 속했다. 산행을 마칠 때까지 우리 세 사람 외에는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 5분쯤 더 걸어 오른 방아산(425.7m)은 특별할 게 하나도 없었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능산 상의 한 지점이라고나 할까? 거기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는다. 삼각점(춘천321)만 아니었으면 정상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 정상석이 없는 덕분에 낯익은 리본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세상의 봉우리란 봉우리는 모두 올라보겠다는 그네들도 이곳을 다녀간 모양이다. 문정남·심용보·김신원... ‘만산회(萬山會)’라는 모임의 이름처럼 1만 산은 기본, 2만·3만을 향해 각자의 산행을 이어가는 분들이다. 횟수에 연연하지 않는 나이지만 지난달에는 ‘문정남’선생의 ‘23,456산 등정(4,500일 산행)’ 기념 산행을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내노라는 산객들은 물론이고, 산을 주제로 시를 쓰는 ‘김운남’시인(저서인 ‘三千山 詩塔을 위하여’를 선물 받았다)과 취재차 나온 ‘월간 山’지 ‘신준범’기자도 함께했었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반대편 능선을 탄다.

▼ 이때 시야가 열리면서 봉화산과 검봉산, 강선봉 등 아까 벌목지에서 바라보던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아니 아까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 하산 길, 쏟아지듯 떨어지는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누군가의 배려로 밧줄이 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 그렇게 10분쯤 걸어 임도에 내려설 수 있었다. 어디서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몰라도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하산을 시작한다.

▼ 앞서가던 두 사람이 길가 풀숲을 뒤지는 게 보인다. 뭔가 대단한 것을 만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 집사람의 표현에 의하면 숫제 ‘산딸기 밭’이다. 산딸기는 복분자(覆盆子)라 불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또 이걸 장복하고 소변을 보면 오강이 뒤집힌다고도 했다. 그래서일까? 집사람이 딴 산딸기가 그녀의 입보다는 내 입으로 더 많이 들어온다. 아무렴 어떻겠는가. 새콤달콤한데다 정력까지 증진시켜준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 따고 또 따도 산딸기는 줄어들지를 몰랐다. ‘산딸기 잼을 만들어도 되겠다.’는 집사람의 호들갑이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 임도는 무척 고왔다. 시멘트 포장구간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흙길, 그것도 돌멩이가 없는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된다.

▼ 걷는 게 편하면 눈이 자유로워지는 법이다. 그러자 각양각색의 들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고들빼기도 그중 하나다. 쌉쌀한 맛이 일품인 나물로만 알고 있었는데, 저렇게 예쁜 꽃을 피우다니 이 얼마나 신기한가.

▼ 이왕 올리는 김에 ‘붓꽃’도... 서양 이름인 ‘아이리스’는 무지개란 뜻을 품는다. 그러니 저 꽃에서, 비 내린 뒤에 보는 무지개처럼 ‘기쁜 소식’이 찾아올 것을 기대해도 좋겠다.

▼ 요건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인 ‘마가렛’이다. 데이지라 생각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귀가 후 검색해보니 이름도 생소한 ‘마가렛’이란다. 꽃말은 ‘진실한 사랑’, 집사람을 향한 내 마음이라고나 할까?

▼ 봄꽃이 져간다고는 하지만 무공해 산골에 벌통 하나 없겠는가. 그런데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올 봄이던가? 언론을 떠들썩하게 달구었던 ‘꿀벌 연쇄 실종사건’의 연장선일지도 모르겠다.

▼ 임도로 내려선지 40분. 첫 민가를 만났다. 아니 재래식 참숯공장인데, 숯을 굽고 난 가마를 찜질방으로 활용하는 모양이다.(안내판은 ‘강촌 전통숯가마·찜질’이라 적고 있었다) 원적외선 찜질도 하고 끝난 후에는 삼겹살 파티까지 할 수 있다니 한번쯤 들러볼 만도 하겠다. 우리 일행이야 닭갈비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 ‘드문드문’이지만 민가가 모이기 시작한다. 동구 밖 느티나무의 거대한 몸집은 작지만 마을의 역사까지 작지는 않다는 걸 알려준다. 맞다. ‘풀무골’이란 지명의 유래가 된 ‘대장간’이 오래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까 그 찜질방이 마을의 역사를 물려받은 셈이 된다. 숯가마에 불을 지필 때 지금도 ‘풀무’를 사용할지 누가 알겠는가.

▼ 탐방로는 이제 농로를 따른다. 5일 후면 망종(芒種), 모내기가 시작된다는 계절이다. 하지만 부지런한 농부들은 이미 모내기를 끝마쳤다.

▼ 모내기가 끝난 논은 이제 오리의 놀이터가 됐다. ‘오리 농법’의 한 단면일지도 모르겠다. 논에 오리를 방사하여 잡초를 방제하고 오리 배설물을 비료자원으로 활용하는 농사법 말이다. 친환경 쌀 생산은 물론 오리고기로 부수입까지 올릴 수 있단다.

▼ 15분쯤 더 걸어 도착한 ‘방곡1리(方谷1里, 버스정류장 뒤로 마을회관이 보인다)’, 그런데 마을 표지석은 ‘바일마을’로 적고 있었다. 바일? 이 마을의 옛 이름이라는데, 대체 무슨 내력을 지녔기에 저런 생뚱맞은 이름이 생겼을까?

▼ 이후부터는 301번 지방도를 탄다. 차선이 여섯 개나 되지만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어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음미하며 걸어볼 일이다. 강선봉과 등선봉, 청운봉 등 서슬 시퍼런 암릉들이 그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있으니 말이다.

▼ 출발지에서도 얘기했듯이 강촌은 대학생들의 MT장소로 유명하다.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액티비티 시설이 많이 들어설 건 어쩌면 당연. 42m의 높이라는 저 번지점프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6년 전인가? 안전 불감증으로 인해 14,15층 높이의 저 번지점프대에서 그대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었다. 5m 깊이의 물로 떨어져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 날머리도 강촌역

사랑과 낭만으로 특화된 ‘강촌역’은 강가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하지만 경춘선이 복선화되면서 이제 강촌이 아니라 산촌으로 옮겨졌다. 강촌역에 가까워졌는데도 그 유명한 ‘강촌유원지’가 코빼기도 안 보이는 이유다. 그럼 허기진 우리의 배는 이디서 채워볼 까나? 그건 그렇고 오늘은 8.17km를 3시간 20분에 걸었다. 산행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빨리 걸은 셈이다. 반면에 그만큼 산길이 편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 유원지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었다. ‘강촌 우미닭갈비’, 저렇게 예쁜 포토죤까지 만들어놓았는데 더 찾아봐야 뭐하겠는가. 이집의 메인메뉴인 ‘숯불닭갈비’는 술안주로 제격이었는데, 매콤한 닭갈비를 ‘치즈 퐁듀(cheese fondue)’에 찍어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두타산(頭陀山) ‘베틀바위 산성길

 

산 행 일 : ‘21. 8. 29(일)

소 재 지 :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산행코스 : 두타광장(제2주차장)→매표소→삼화사→옥류동→두타산성→산성12폭포→수도골석간수→박달계곡→용추폭포→제3주차장(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두타산(頭陀山 : 1,353m)이 품고 있는 여러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베틀봉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던 곳이다. ‘베틀 릿지’라고 불리던 험상궂은 바윗길이 암벽산행에 익숙한 전문 산꾼들에게조차 쉽사리 길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폭의 그림, 그것도 잘 그린 수묵화를 보는 듯한 비경을 그대로 내버려둘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동해시의 요구로 산림청에서 바윗길 곳곳에 안전시설을 설치해 명품 탐방로로 만들었다. 덕분에 최근 가장 핫한 산행지로 떠올랐고, 기초체력만 보유했다면 누구나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한국의 산인지 해외 유명한 산인지 구분되지 않는 비경들에 환호하게 된다. 참고로 ‘베틀바위 산성길’은 지난 2019년 9월 착공에 들어가 2020년 8월 1일 베틀바위전망대 1차 개방, 2021년 6월 10일에는 두타산 협곡 마천루까지 4.7km의 잔여구간이 개통됨으로써 전 구간이 완전 개방됐다.

 

▼ 들머리는 두타광장(제2주차장 : 동해시 삼화동 858-10 )

동해고속도로(삼척-속초) 동해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삼척 방면)’와 ‘42번 국도(북평교차로에서 정선 방면)’를 연이어 달리다가 동막교(동해시 이로동 1282)에서 빠져나온다. ‘효자로’를 따라 동해시가지 방향으로 아주 잠깐 달리다가 삼화삼거리(동해시 이로동)에서 우회전하여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릉계곡관광지에 이르게 된다. 무릉계곡 힐링캠프장에 마련된 제2주차장(두타광장)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 총 7.3km의 탐방로는 모두 4개(A·B·C·D) 구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추가된 ‘E’구간은 한꺼번에 걷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 하겠다. 탐방로는 등산로 곳곳에 산재돼 있는 기암과 산림자원을 최대한 활용했다. 숯 가마터, 회양목 군락지, 베틀바위, 미륵바위, 산성폭포, 마천루, 쌍폭포, 용추폭포 등 다양한 스토리를 탐방객에게 선보인다.

▼ 길을 나서기 전 ‘호암소(虎岩沼)’부터 눈에 담는다. 사람을 구한 삼화사 스님이 절로 돌아오던 도중 자신을 해치려는 호랑이를 피해 법력으로 계곡을 건너뛰었는데, 호랑이가 따라 넘으려다 빠져 죽은 전설의 장소다. 하지만 막상 눈에 들어오는 소(沼)는 호랑이 빠져죽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을 것 같이 왜소하기 짝이 없다. 얘기는 얘기일 따름. 그러니 새로 개설되었다는 ‘무릉 달빛 호암소길’이나 걸어보는 것으로 만족해보자.

▼ 무릉계곡 관광지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소형차 전용인 제1주차장을 지나면 먹거리가 풍성한 상가지역. 산행을 마치고 오래된 벗 형우군과 소줏잔을 나누기로 한 곳이다. 3개월 만에 함께하는 산행이니 오고가는 술잔의 속도가 꽤 빨라지지 싶다.

▼ 상가지역을 통과하자 매표소가 나온다.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2천원. 그런데 ‘문화재관람료’를 받는 다른 지역의 산들과는 달리 이곳은 ‘입장료’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징수의 주체가 ‘사찰(삼화사)’이 아닌 ‘지자체(무릉계곡 관리사무소)’일지도 모르겠다. 기분 좋게 돈을 낼 수 있겠다는 얘기이다.

▼ 작년에 다녀온 ‘베틀릿지’(A구간)는 생략할 요량이다. 그렇다고 기념사진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두타산(頭陀山)의 진면목이 바로 저 암봉들이니 말이다. 특히 저 ‘베틀바위 릿지’ 구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사람들 말고는 그림의 떡이던 신비의 장소가 아니겠는가.

▼ 산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발열검사(發熱檢査)를 거쳐야만 했다. ‘마스크 착용’과 ‘안심 콜’ 또한 필수다. ‘손 소독’은 그나마 선택. 코로나의 여파가 이젠 산속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무릉계곡관리사무소를 지나, 다리(무릉교)를 건너면 ‘베틀바위’로 올라가는 길이다. 입구에 큼지막한 ‘베틀바위 산성길’ 표지판이 서 있다. 하지만 이미 답사를 마친 우리 부부는 그냥 통과다. 해가 바뀌었다지만 다녀온 길을 다시 가기보다는, 모처럼 산행을 따라나선 벗 형우군과 소줏잔 나누는 시간을 조금 더 갖는 게 나을 것 같아서이다.

▼ 잠시 후 도착한 무릉반석 근처 천변에는 금란정(金蘭亭)이 들어서 있었다. 이 고장 선비들의 모임인 금란계(金蘭契)의 뜻을 기리고자 세운 정자라고 한다. 광무 7년(1903) 유림제생들이 향교 명륜당에 모여 금란계를 만들어 한일합방 국치에 울분을 달래며 정각을 건립하고자 했으나 일본관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해방 이후 당시 서생계원과 자손들이 선인의 뜻을 이어받아 지었다는 것이다. 정자에는 화가 심지황(沈之潢1888∼1964)이 쓴 현판 외에도 최중희(崔中熙,1895-1990)가 초서로 쓴 '관동기관(關東奇觀)'이란 액자도 걸려있었다. 금란정이 강릉지역의 기이한 볼거리라는 얘기일 것이다.

▼ ‘무릉반석(武陵磐石)’에 내려선다. 그 옛날 누군가가 심었다는 복숭아꽃은 보이질 않고, 대신 1,500여 평의 반석에 자신의 허울 좋은 이름을 드러내려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낙서들만 가득하다. 심지어는 부백(府伯), 찰방(察訪), 토포사(討捕使) 등 자신의 관직까지 적어놓은 조선시대 놈들도 있었다. 아무튼 저 반석에는 줄잡아 850여 명에 이르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무릉의 선계에다 이름이나마 두고 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 조선조 4대 명필인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썼다는 석각(石刻)은 길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관광객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모조품인데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라고 새겨져 있다. ’신선이 놀던 무릉도원, 너른 암반과 샘이 솟는 바위, 번뇌조차 먼지처럼 사라져버린 골짜기‘라니 능히 신선이 놀다 갈만한 장소가 아니겠는가.

▼ 일주문 근처 풍경이 이색적이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절간으로 들어가는 길목인지라 연등(燃燈)을 예상했는데, 느닷없는 리본들이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것도 정체가 아리송한 글자까지 적혀있다. 절에서 내걸었으니 범어(梵語)겠지?

▼ 삼화사로 오르는 길가의 계곡은 ‘용오름 길’이라고도 불린다. 삼화동 초입에서 용추폭포에 이르는 길이 6㎞의 무릉계곡을 이르는 말인데, 전설에 의하면 약사삼불을 실은 용이 저 계곡을 따라서 두타산으로 올랐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품고 있는 용오름 길, 즉 무릉계곡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그 계곡은 두타산에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타(頭陀)’라는 이름보다 산이 품고 있는 ‘무릉’이라는 계곡에 더 익숙하다. 두타산을 ‘금강산에 이은 두 번째’라고 옛 선비들이 평가했던 것도 다 무릉계곡 일대의 경관을 높이 친 결과였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삼화사(三和寺). 지위는 비록 월정사의 말사에 불과하지만 천년고찰답게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문화재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절간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2년, 자장율사가 ‘흑련대’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이후 864년에 범일국사가 '삼공암'이라고 개명,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원찰로 지정되었다. 왕건은 이곳에서 후삼국 통일을 간절히 발원하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자 국민들의 갈등을 풀고 화합시키려는 뜻에서 '삼화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 삼화사의 얼굴마담 격인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은 적광전(寂光殿) 앞에 있다. 이밖에도 보물 제1292호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과, 국가무형문화재 제125호인 ‘삼화사 수륙재’ 등 주요 문화재가 보존 또는 전수되고 있다.

▼ 절간을 지났지만 길은 여전히 널따랗다. 두타산을 찾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여기서 ‘두타(頭陀)’는 고대 인도어(Sanskrit)로 '버리고, 씻고, 닦는다'는 뜻이다. 속세의 번뇌를 떨치고 불도(佛道) 수행을 닦는다는 의미다. 그러니 지금 두타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수행이 될 수도 있겠다. 맞다. 수행은 예로부터 고행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힘든 여정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 중 가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었던가.

▼ 무릉계곡의 또 다른 명소인 ‘학소대(鶴巢臺)’는 탐방로에서 약간 비켜나 있었다. 오랜 옛날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곳. 하지만 <시원한 곳에 배를 띄우니 학(鶴) 떠난 대(臺)는 이미 비었네, 높은데 올라 세상사 바라보니 가버린 자 이와 같아 슬픔을 견디나니>라고 읊었던 무릉거사 최윤상(崔潤祥, 1810-1853)의 ‘무릉구곡가(武陵九曲歌)’처럼 바위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따름이다.

▼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장마 때를 대비해 예비용 다리까지 놓았다. ‘두타산’이라는 이름값에 어울리는 치장이라 하겠다.

▼ 탐방로는 무릉계곡을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커다란 바위들이 널려 있는 암반 위로 두타산과 청옥산에서 발원한 무공해 물이 흐르는 명품 계곡이다. 이 물은 층층이 쌓여진 계단을 만나면 선녀의 모시처럼 투명하게 흐른다. 또 어떤 곳에서는 작은 소(沼)와 담(潭)를 이루기도 한다. 사람들이 이곳을 ‘무릉도원’에 비유해 ‘무릉계곡’이라 부르며 명승지로 분류하는 이유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50분 만에 ‘산성갈림길(용추폭포↑ 1.0㎞/ 두타산성← 0.5㎞/ 무릉계곡관리사무소↓ 1.60㎞)에 도착했다. ‘두타산성’으로 연결되는 길목으로, 우리 부부가 올라가야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작년 이맘 때 탐방로의 미완성으로 인해 중도에서 멈춰야만 했던 ‘베틀바위 산성길’의 잔여 구간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아니 무지막지하게 가파르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베틀바위 산성길’을 새로 내면서 기존 등산로를 깔끔하게 정비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힘들다면 잠깐 쉬어가면 되지 않겠는가.

▼ 산길로 들어선지 30분.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두타산성(일명 문지방산성)에 올라섰다. 빤질빤질 무던히도 밟았을 문지방. 난(亂)을 피해 올라온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싸우다 산화한 의병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이 산성을 처음 쌓은 것은 파사왕 23년(102)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목조대왕(이성계의 4대 조부)이 몽고군의 침입 때 삼척읍민을 데리고 ‘두타산성’으로 피난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414년(태종 14년) 삼척부사 김맹손(金孟孫)이 높이 1.5m에 둘레 2.5km로 다시 쌓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 최원흘(崔元屹)을 중심으로 한 젊은 의병들이 이곳에서 왜병을 전멸시키기도 했단다. 하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희미하다. 바위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부분적으로 석축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마저도 산돌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약간 다듬어 사용했을 테니 온전히 남아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 두타산성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등산객들에게는 경관 좋은 곳이 최고다. 그런 장소가 바로 이곳 문지방산성이다. 깎아지른 암벽과 노송이 연출하는 비경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나홀로 소나무’가 아닐까 싶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바위틈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거기다 세월이 선물한 훈장이라도 되는 듯 생김새까지 자못 빼어나다.

▼ 또 다른 볼거리는 ‘백곰바위’. 백곰의 뒷모습을 쏙 빼다 닮았는데, 각도라도 틀라치면 정말 백곰이 뒤돌아 금세라도 움직일 듯하다. 누군가는 저 바위를 코카콜라에서 나오는 북극곰을 닮았다고 했다. 맞다. 어쩌면 저리도 비슷할까? 자연이 만들어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 소나무 뒷면으로 보이는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깎아지른 암벽과 신령한 기운이 깃든 홍송(紅松)이 연출하는 비경은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 눈요기를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성벽 옆을 지나자 산길은 다시 가팔라진다.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좌우로 펼쳐지는 비경에 이미 취해버렸는데 그깟 잡념이 찾아들 틈이 어찌 있겠는가.

▼ 잠시 후 올라선 바위지대에는 끄트머리에 밧줄난간이 쳐져 있었다. 바위절벽이니 더 이상 가지 말라는 금줄이다. 하지만 산성터가 내려다보이는 멋진 조망대이니 잠시 머물다가도 좋을 일이다.

▼ 산길로 들어선지 45분. 이정표(베틀바위전망대↑ 1.2㎞/ 산성12폭포→) 하나가 자신를 따라오라며 손짓을 보내온다. 두타산이 품은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인 ‘산성12폭포’가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10m쯤 들어가자 자연 전망대가 나오면서 두타산성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에서의 첫 만남은 ‘거북바위’다. 거대한 바위벼랑 위를 거북이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는 것이다. 둥그런 것은 거북이 등딱지, 길게 튀어나온 것은 거북이 목, 반대편에 붙은 작은 바위는 거북이의 꼬리를 연상시킨다. 그게 다가 아니다. 절벽에 들어앉은 다른 바위들도 하나같이 기괴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야외 갤러리인 듯 이곳에서는 고사목 하나조차도 작품이 된다.

▼ 거북바위 아래로 다가가자 ‘산성12폭포’가 성큼 다가온다. 이름 그대로 12개의 폭포가 연이어 쏟아져 내리는 엄청난 폭포지대다. 폭포의 맨 위는 하늘금. 얼마나 길던지 맨 아래에 있을 소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폭포 하나의 길이를 10m로만 잡는다고 해도 120m는 족히 넘을 것 같다. 다만 수량이 적다는 것이 조그만 흠이지만, 장마철에 찾아온다면 숨 막히는 장관을 볼 수 있을 테니 이 또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 건너편 바위벼랑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어찌 보면 큰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것 같기도 한데, 작년에 찾아왔을 때 저 절벽의 허리쯤으로 길을 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전하기도 했었다. 장가계나 태항산 등 중국의 유명산들을 돌아다니면서 늘 부러워했던 잔도(棧道). 그게 지금은 저곳에 놓였단다. 이 아니 좋을 손가.

▼ 삼거리로 되돌아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는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수도골→ 0.5㎞, 마천루 1.2㎞/ 베틀바위전망대↖/ 두타산성↓ 0.4㎞). 드디어 ‘베틀바위 산성길’과 접속한 것이다. 작년 1차 답사 때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지점이다. 미지의 세계로 남겨 둘 수밖에 없던 C코스가 얼마 전 공사를 마치고 등산객들을 향해 얼굴을 내민 것이다.

▼ 잠시 후 산성12폭포의 상부로 내려선다. ‘12폭포’라는 게 본디 기다란 폭포를 의미한다고 했다. 얼마나 길던지 열두 번을 꺾으며 내리친다는 것이다. 까마득히 미끄러지듯 쏟아지듯 내려온 물줄기가 요런 구비들을 워터 슬라이드를 타듯 구르며 떨어져 내린다.

▼ 오른쪽은 수백 길 낭떠러지, 아까 반대편 전망대에서 바라볼 때 12구비의 폭포 가운데 가장 길었던 구간일 것이다. 그나저나 벼랑이 높으니 조망 또한 좋을 것은 당연. 옛 그림에서나 볼 법한 빼어난 경관이 그려진다.

▼ 왼편에는 두어 개의 폭포가 겹치고 있었다. 수억 년의 세월 동안 두타산을 구르고 떨어져 내려온 물길은 화강암의 암벽에다 골을 내면서 저런 와폭(臥瀑)과 직폭(直瀑)들을 수없이 만들어냈다. 눈요기만이 아니다. 산을 가로질러 내려온 물줄기가 산산이 비산하면서 더위에 지친 산꾼들을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 맨 위의 폭포는 꽤 깊은 담(潭)까지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선지 못 주변은 더위를 식히려는 산꾼들의 물놀이 터로 변해버렸다. 물 떨어지는 소리를 안주삼아 박주라도 한 잔 걸친다면 이 아니 신선경일 손가.

▼ 산성12폭포를 지나면 길은 ‘금강바위길’로 이어진다. 마천루 근처에 있다는 ‘금강산바위(어느 바위를 이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에서 따온 이름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길은 새로 다듬어놓아서 걷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이정표가 잘 마련돼 있어 길을 찾기도 쉽다.

▼ ‘마천루’로 연결되는 이 길은 올 6월에 개장했다. 길이 열리기 전 이곳은 인간의 접근이 어려운 전인미답의 장소였다고 한다. 거친 암벽으로 이루어진 탓에 전문 산꾼들조차 고개를 내두를 정도였단다. 하지만 지금은 장삼이사가 찾는 관광명소로 변했다. 산림청 및 동해시의 노고 덕분이다.

▼ 첩첩이 쌓인 바위가 하도 신기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위로 올라갈수록 몸집을 부풀리는 바위덩어리들이 흡사 명장의 작품이라도 되는 듯 기이한 형태로 서있는 것이다.

▼ 길은 바위절벽과 바위절벽 사이의 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그러다보니 새로 난 길은 푸르렀고 또 그만큼 깊었다. 시야가 툭 터지는 바위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놀이삼아 나온 장삼이사들이 점심상을 차려놓은 채로 뭉그적거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 바위절벽으로 나가자 달력에서나 볼법한 풍경이 펼쳐진다. 웅장한 자연에 눈을 떼지 못하면서 탄성이 저절로 터진다. 맨몸으로 융기한 거대한 암봉이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데, 폭포와 적송까지 품고 있는 것이다.

▼ 새로운 세상에 들어온 이방인에게는 눈에 들어오는 게 모두 신기한가 보다. 바위 틈새에 밀어 넣은 작은 돌멩이들에까지 포커스를 맞추면서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 작은데다 볼품까지 없는 동굴이지만 경계(警戒)삼아 게시해 본다. 석간수라도 있을까 기웃거리다 입구에 비해 안이 넓은 걸 발견할 수 있었고,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천정에 머리를 서너 번이나 호되게 부딪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패커(backpacker)들에게는 최상의 비박(biwak) 장소인 듯 비닐장판까지 깔려 있었다.

▼ 잠시 후 또 다른 동굴을 만났다. 아니 아까와는 격이 다른 동굴이다. 하늘을 닿을 듯 높이 솟은 바위 밑에서 규모가 제법 큰 암굴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이다. 어두컴컴한 암굴로 10여 미터쯤 들어가자 물이 고여 찰랑거린다. 바위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석간수(石間水)’이다. 하지만 마시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넘치지 않고 고여 있는 샘물의 위생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아까도 얘기했듯이 길은 숲속으로 나있다. 하지만 한걸음만 빗겨나면 수백 길 낭떠러지이다. 그런데도 두렵지 않은 이들이 있나보다. 아찔하기 짝이 없을 텐데도 스릴을 즐기는 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 금강바위길로 들어선지 50분. 탐방로는 ‘마천루 전망대’에 이른다. 수직의 바위벼랑에다 매달듯 지은 전망대가 아찔하다. 전망대가 있는 자리는 그동안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접근 불가의 공간이었다. 탐방로를 내면서 두타산협곡이 가장 잘 조망되는 이곳을 놓치지 않고 전망대를 들어앉혔다. 전망대의 주위로 치솟은 거대한 바위들이 마치 빌딩 숲처럼 보인다 하여 ‘마천루(摩天樓)’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 전망대에 서면 두타산의 협곡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작명가의 시선에 마천루처럼 보였다는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들이다. 두타산과 청옥산의 정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신선봉과 폭 100m에 높이가 70m의 거대한 자연암벽 병풍바위, 용맹스러운 장군의 얼굴을 닮은 장군바위 등등 그 하나하나가 별유천지(別有天地)요, 선경(仙境)이다.

▼ 시선을 조금 옮기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박달계곡 건너편으로 번쩍 솟은 바위들이 보이는가 하면, 용추폭포와 쌍폭포의 시원한 물줄기가 새의 시선으로 내려다보인다. 천하절경이 눈앞에서 그리고 발아래에서 수려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 이후는 잔도(棧道)를 따른다. 잔도란 험한 바위벼랑에 선반처럼 달아 낸 길을 말한다. 장가계나 태행산 등 중국에서나 볼 수 있던 풍경인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하나 둘 선을 보이는 추세다. 두타산도 그 가운데 하나. 시선(詩仙)이자 주선(酒仙)으로 불리는 이백(李白)이 ‘하늘 오르기보다 힘들다’고 노래한 잔도가 이곳 두타산에도 놓인 것이다.

▼ 바윗길 그 패이듯 끊어진 자리에 잔도가 놓였다. 촉(蜀)의 제갈량은 위(魏)를 치기 위해 사천성 험준한 산악지형에 길을 냈고, 항우에게 쫓겨 파촉(巴蜀)으로 들어간 유방은 지나온 잔도를 불태우라 명령했었다. 이렇듯 중국에 기원을 둔 잔도는 전쟁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목숨을 건 병사가 아닌 산천경개를 구경나온 장삼이사가 희희낙락 걷는다.

▼ 협곡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아찔한 두려움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암벽의 허리를 딛고 걷는다는 설렘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설렘에 겨워 고개를 돌려보니 고릴라 한 마리가 천애절벽에 올라앉아 있는 게 아닌가. 오직 조물주만이 빚을 수 있는 최고의 걸작이라 하겠다.

▼ 잔도가 끝나자 탐방로는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그 가파름이 버거워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써가며 길을 냈다.

▼ 금강바위길로 들어선지 65분. 삼거리를 만났다. 하지만 이정표(용추폭포→ 0.4㎞, 두타계곡관리사무소 2.5㎞/ 수도골↓ 0.8㎞, 베틀바위 2.9㎞)는 두 방향만 표시하고 있다. 철제계단이 왼쪽 방향의 산자락으로 파고드는데도 말이다. 두타산 정상으로 오르는 옛길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이후부터 길은 철제계단을 따른다.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박달계곡의 진면목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이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느림의 미학’을 추구해보자. 그리고 신선이 노닐었다는 무릉계곡의 풍광들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차곡차곡 담아보자.

▼ 고개라도 들라치면 ‘마천루 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만물상의 기암괴석들이 전망대의 배경이 되어주는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발가락바위’. 발가락을 쏙 빼다 닮은 것으로도 모자라 숫자까지도 맞췄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 바위를 마천루라는 그림을 완성시키는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꼽는다.

▼ 그렇게 잠시 걷자 박달계곡의 세찬 물소리가 울려 퍼진다. 폭포들의 아우성이다. 이곳에서 탐방로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 그 소리의 주인들을 만나러 간다.

▼ 맨 윗자리는 용추폭포(龍湫瀑布)가 차지했다. 청옥산에서 시작된 물은 계곡을 내려오면서 절벽에 부딪혀 가며 굽이치다 이곳에 이르러 3단의 절벽에 폭포를 이루며 수직 낙하한다. 그 모양새가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 하다해서 ‘용 용(龍)’자에 ‘못 추(湫)’자를 얻었는데, 상단과 중단은 옹기항아리 모양으로 되어있고, 하단은 용소(龍沼)라는 둘레가 30m에 이르는 깊고 검은 웅덩이다.

▼ 폭포 주변은 온통 암각 된 글씨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신선이 노닐었다는 무릉계곡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별유천지(別有天地)에 다녀갔다는 티를 내고 싶은 인간들이 남긴 찌꺼기다. 순사(巡使, 조선시대 지방의 군무를 살피던 임시직)나 부백(府伯, 府使의 또 다른 표현) 등 자신의 벼슬을 자랑하고픈 놈들도 여럿 보였다.

▼ 용추폭포의 조망대는 다리 형식을 취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철제다리를 놓고 전망대로 삼았다.

▼ 용추폭포를 떠난 물줄기는 멀리 가지 못하고 이내 다시 긴 낙하의 꿈을 꾼다. 그게 ‘쌍폭포’라는 또 하나의 절경을 만들어내는데,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나 된다.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도 빼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리가 아니라 암반 위에다 별도의 공간을 만들었다.

▼ 쌍폭포는 양쪽에서 쏟아지는 폭포를 말한다. 두타산 쪽에서 내려온 폭포가 왼쪽 박달폭포이고, 청옥산에서 내려온 폭포가 오른쪽 옥류폭포(玉流瀑布)다. 양쪽에서 쏟아지기에 소리도 웅장하고 모양도 장관이다.

▼ 박달폭포는 우리네 한복의 치마를 닮았다. 물이 층층이 쌓여진 계단을 타고 선녀의 모시처럼 투명하게 흐른다. 그래서일까? 여인의 속살을 엿보기라도 한 듯 두근거리는 이유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의 대표적인 케이스라 하겠다.

▼ 쌍폭포를 끝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무릉계곡을 따라 내려가는데, 17분 후면 얼레지쉼터를 지나 아까 두타산성으로 올라가면서 기점으로 삼았던 삼거리에 이른다. 격랑의 물길도 언제부턴가 얌전해졌다. 그리고 바위를 둘러가며 멋진 계곡의 모습을 연출한다.

▼ 널따란 암반에 기암괴석, 그 사이로 옥수가 흐른다. 무릉계곡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중국 송나라 때 시인 도연명의 소설 ‘도화원기(桃花源記)’에는 나오는 지명이다. 강에서 고기를 잡던 한 어부가 복숭아꽃을 따라가다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됐고 그곳에서 만났다는 지상낙원의 땅이다. 동굴 밖으로 나온 뒤에는 다시 찾을 수 없었다는, 천국과도 같은 이상향의 땅. 전국의 명승 곳곳에 보이는 ‘무릉(武陵)’의 지명은 모두 여기서 따왔다.

▼ 층층나무 고목이 눈에 띄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얼마나 오래 묵었는지 어른의 허리통 두엇을 합친 것보다도 더 굵다. 그게 범상치 않았던지 산림청에서도 안내판까지 매달아놓았다.

▼ 산행 날머리는 제3주차장

폭포에서 출발한지 45분. 학소대와 삼화사, 무릉반석을 차레로 지나면 매표소가 나오고, 이어서 1·2주차장을 거치면 산행이 종료되는 제3주차장에 이른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산행거리가 8.62㎞인 점을 감안하면 속도가 더디었던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니 천년만년 함께 지내고 싶은 집사람에 더해 오래 묵은 친구까지 함께 하다 보니 그리됐을 수도 있겠다. 이 행복한 순간순간들을 서둘러 보낼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비봉산(飛鳳山, 458m)

 

산 행 일 : ‘21. 11. 27(토)

소 재 지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산행코스 : 비봉초등학교→(박정희)사단장공관→전망대→비봉공원 갈림길↔비봉산(일출봉) 왕복→비봉산전망대→비봉전망타워→송청 회전교차로(소요시간 : 마을투어 포함 7.23km/ 2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양구의 진산(鎭山)으로 산경표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소양양구지맥에 놓여있는 산이라 주장한다. 백두대간의 매자봉(1,450m)에서 분기한 소양기맥(뒤에 가지를 치면서 양구지맥으로 변한다)이 양구읍 서천변 하리교에서 그 숨을 다하기 직전에 빚어놓은 산봉우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양구 주민들에게는 와 닿지 않는 얘기일 따름이다. 그네들에게 비봉산은 그저 도심공원처럼 친근한 산이기 때문이다. 새해 일출도 이곳에서 맞이하고, 산책삼은 휴식도 역시 이곳에서 갖는다고 한다. 그래선지 등산로를 잘 정비해 놓았음은 물론이고, 운동기구를 갖춘 쉼터도 곳곳에 배치했다.

 

▼ 산행들머리는 비봉초등학교(양구군 양구읍 하리 43)

서울-양양고속도로 춘천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를 타고 양양·속초 방면으로 달리가가 신남교차로(인제군 남면 신남리)에서 46번 국도로 옮기면 양구대교(소양호를 가로지른다)와 양구터널(봉화산 자락을 꿰뚫는다)을 지나 양구읍에 들어서게 된다. 송청교차로(양구군 국토정중앙면 죽리)에서 양구읍내로 들어온 다음 하리교차로에서 우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비봉초등학교에 이르게 된다.(사진은 비봉초등학교와 붙어있다시피 한 양구보건소이다)

▼ 양구군에서 내건 산행안내도는 들머리를 4곳(냉천골도 어엿한 들머리이다)으로 표시한다. 하지만 송청리의 ‘회전교차로’에서도 오를 수 있다. 탐방로 정비가 잘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송청리를 하산지점으로 삼을 경우 ‘웰빙먹거리타운’에서 뒷풀이까지 가능해지는 장점도 있다.

▼ 시작부터 뜬금없는 풍경이다. 이곳 양구는 열차가 다니지 않는 고장이다. 그런데 군청(보건소는 군청 소속) 앞에다 떡하니 열차(조형물)를 놓아둔 것이다. 오죽했으면 집사람이 사진부터 찍고 보라 했겠는가. 아니 ‘양구 시티투어버스’가 포함된 ‘경춘선 호수문화열차’가 용산역에서 출발한다 했으니 이를 형상화했을지도 모르겠다.

▼ 양구보건소와 비봉초등학교 사이의 샛길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단장 공관’이라고 적힌 팻말을 이정표 삼아 들어가면 된다.

▼ 본격적인 산행은 ‘사단장 공관’ 앞에서 시작된다. 들머리에 ‘비봉산 등산로’를 그려 넣은 종합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무언가 볼만한 것이 있다면 내다보는 게 인지상정. ‘사단장 공관’으로 방향을 트니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라는 노거수 두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공관 아래서 살던 할아버지의 꿈에 머리가 새하얀 산신령이 나타나 ‘이놈아! 뜨거워죽겠다’라고 호통을 치더란다. 깜짝 놀라 밖에 나가보니 진짜로 나무가 불에 타고 있지 않겠는가. 일단은 불부터 끄고 봤음은 물론이다. 훗날 이런 얘기를 전해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불타고 있던 신갈나무를 ‘할아버지나무’, 맞은편 갈참나무를 ‘할머니나무’라고 부른데서 그런 이름이 시작되었단다.

▼ 여염집이나 진배없는 저 소박한 건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군 5사단장으로 재임할 당시 머물던 공관이라고 한다. 개·보수과정을 거쳐 지난 2009년에 문을 열었는데 안에는 박 전 대통령과 관련된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단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울타리 밖에서 기웃거리다 외관만 카메라에 담고 돌아섰다.

▼ 들머리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세를 뚝 떨어뜨려 버린다. 그리고는 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 잠시 후 올라선 능선에는 야외학습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동·식물, 새 등 숲과 관련된 자료를 담은 ‘학습안내판’을 세우고 의자를 놓아 참가자들이 편히 앉아 설명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이런 학습장은 두어 곳에서 더 만나게 된다. 비봉산이 갖고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을만하다.

▼ 의자에 앉으니 숲 사이로 천태종 소속의 동강사가 살포시 내려다보인다.

▼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청춘 양구’라 적힌 조형물이 내다보인다. 하산 후 시내구간을 걸을 때도 ‘청춘’이란 글귀는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이곳 양구군이 내걸고 있는 슬로건이 아닐까 싶다. 하긴 군부대가 많으니 젊은 군인들도 많겠다.

▼ 산행을 시작한지 15분. 이정표(일출봉↑ 0.2㎞/ 전망대← 50m/ 비봉초교↓ 0.4㎞) 하나가 잠시 들렀다가라며 꼬드긴다. 시야가 툭 트이는 곳이 있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일단은 전망대로 향하고 본다.

▼ 50m쯤 들어갔을까 비탈진 언덕에 사각의 정자가 지어져 있다. 참! 가는 도중 강아지를 닮은 귀여운 바위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정자에 오르니 ‘전망대’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조망이 펼쳐진다. 먼저 들어오는 풍경은 파로호(破虜湖). 1944년 화천댐이 생기면서 형성된 인공호수로, 1951년 5월 한국군과 미국군이 중국군을 격파한 곳이라고 하여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이 그런 이름을 붙이고 친필 휘호를 내리면서 지명으로 굳어졌다. 호반에 떠있는 자그만 섬은 ‘꽃섬’일 것이다. 따듯한 봄에는 유채꽃과 철쭉류를, 해가 내리쬐는 여름에는 양귀비와 장미를, 하늘이 푸르러지는 가을에는 하늘색과 대비되는 백일홍과 코스모스, 메밀꽃 그리고 해바라기를 볼 수 있다는 곳이다.

▼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양구읍(楊口邑) 시가지가 눈앞으로 불쑥 다가온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저곳은 북한 땅이었다.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저렇게 넓은 들녘을 잃은 김일성이 얼마나 가슴 아파 했을까?

▼ 다시 길을 나선다. 비봉산은 아까 인제군에서 올랐던 ‘기룡산’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시종일관 오름짓만 해대던 기룡산과는 달리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해가며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기 때문이다. 덕분에 산책하듯이 산을 오를 수 있었다.

▼ 말안장을 연상시키는 능선을 따라 걷다가, 계단이 놓인 가파른 구간을 잠시 치고 오르자 KBS중계시설이 얼굴을 내민다. 아까 나뭇가지 사이로 엿보이던 ‘청춘양구’라는 간판형의 조형물이 내걸려 있는 곳이다.

▼ 능선은 온통 소나무 세상이다. 이삼십 년쯤 묵은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난 산길은 걷는 자체만으로 행복해진다. 코끝을 스쳐가는 짙은 솔향기가 심신을 맑게 해주니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저 솔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도 듬뿍 들어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길은 웰빙, 아니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행복한 길이다.

▼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냉천골 갈림길’(이정표 : 일출봉↑ 0.6㎞/ 냉천골→ 0.7㎞/ 비봉초교↓ 1.8㎞) 근처에서 정자에 벤치와 운동기구까지 갖춘 첫 번째 쉼터를 만났다. 서두에서도 얘기했듯이 양구 주민들에게 이곳 비봉산은 도심공원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선지 ‘명심보감’에나 나올 법한 유익한 글귀들을 여럿 매달아놓았다.

▼ 조금 더 오르면 이번에는 ‘비봉공원 갈림길’(이정표 : 일출봉← 0.5㎞/ 비봉공원→ 1.4㎞/ 냉천골↓ 0.8㎞)이 나온다. 비봉산전망대라는 또 다른 조망 명소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코스로, 우리 부부 역시 하산코스로 이용할 계획이다. 그러니 정상을 둘러본 다음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갈 지(之)’자를 써가면서 올라야만 할 정도로 가파르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잠깐이면 그 가파름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중간쉼터’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런데 쉴 수 있는 벤치보다 운동기구가 더 많다. 명색이 쉼터인데도 말이다. 고생고생 해가며 이 높은 곳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부족한 사람들이 있을까?

▼ 소나무 숲이 하도 울창하다보니 아예 산림욕장으로 꾸며버렸나 보다. 길가에 누워서 쉴 수 있는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하지만 이용하는 이는 별로 많지 않은 듯. 벤치 위에 솔가리가 수북이 내려앉았다.

▼ 얼마쯤 더 걸었을까 또 다시 급경사 구간이 나타난다. 허리를 곧추세운 듯 날카롭게 서버린 경사 때문일까 탐방로는 나무계단까지 놓아가며 찾아온 이들을 정상으로 인도한다. 계단이 싫은 사람들은 오른편 우회로를 이용하면 된다. 송천리로 연결되는 등산로인데 곧이어 나타나는 삼거리(이정표 : 일출봉← 0.2㎞/ 송청리↑ 4.5㎞/ 냉천골↓ 1.1㎞)에서 왼편으로 오르면 정상이다. 다만 이럴 경우 거리가 꽤 늘어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산행 시작 1시간 만에 정상에 올랐다. 동네 운동장보다도 더 넓은 정상은 다양한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정상석과 삼각점(인제 24), 이정표(죽곡리 농공단지 2.16㎞/ 냉천골 1.30㎞)는 기본. 벤치에 팔각정까지 지어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정상석은 ‘비봉산’이라는 본명보다도 별명인 ‘일출봉’을 더 크게 적었다. 하긴 예로부터 양남팔경의 하나인 ‘비봉조양(飛鳳朝陽, 비봉산의 해돋이)’으로 꼽혀왔다니 어련하겠는가. 맞다. 이곳은 양구 제일의 ‘해맞이’ 장소로 꼽힌다. 매년 정월 초하루면 군청에서 주관하는 ‘신년 해맞이’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 정상은 조망의 명소이기도 하다. 발아래로 파로호가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봉화산과 백석산, 도솔산, 사명산, 백암산, 가칠봉 등 1천 미터를 넘나드는 고산준령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정자 내부의 조망안내도와 비교해가며 살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 조망의 백미는 ‘한반도 섬’이다. 쓰레기 불법투기 등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파로호의 나대지를 관광명소로 탈바꿈시킨 인간승리의 현장이다.

▼ 이제 하산할 차례다. 아까 지나왔던 ‘비봉공원 갈림길’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비봉공원 방향의 능선을 탄다. 하지만 하산코스라고 해서 내리막길만 기대하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아래 사진처럼 만만찮은 오르막길과 두세 번이나 힘을 겨루어야하기 때문이다. 계단으로도 부족해 밧줄난간까지 매어놓았을 정도로 가파르다.

▼ 비봉공원으로 내려가는 능선은 오른편에 냉천골, 왼편은 곧은골을 끼고 이어진다. 때문에 두 골짜기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삼한시대에 쌓았다는 산성은 끝내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 영조 35년에 쓰인 ‘기묘장적(己卯帳籍)’에 기록된 산성으로 둘레 892척에 높이가 8척이나 된다기에 잔뜩 기대했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아니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유적을 찾아보겠다고 벼른 게 차라리 어불성설이 아니었을까?

▼ 하산을 시작한지 25분, 비봉공원갈림길을 지나친지 15분 만에 비봉산전망대에 올랐다. 4층으로 지어진 전망대는 높이가 15m나 된다. 그런데 골조가 나무가 아니겠는가. 안내판도 약간의 흔들림이 있을 거라며 겁을 준다. 두렵다. 하지만 구조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내진 및 내풍 설계를 적용했다니 안심하고 오를 일이다.

▼ 망설임 끝에 올라선 전망대는 그동안의 고민을 실없게 만들어버린다. 양구시가지가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오는데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 이후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지자체에서도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계단을 설치했다. 나선형으로 만들면서 한껏 멋까지 부렸다. 하지만 집사람처럼 무릎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최악의 구간이라 하겠다. 계단의 턱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높았기 때문이다.

▼ 가파른 내리막길이 지겨워질 즈음에야 나타나는 ‘비봉공원’은 ‘충혼탑’이 먼저 반긴다. 양구는 같은 민족끼리 피를 흘려야만 했던 아픈 현대사를 지닌 고장이다.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유엔 고지, 크리스마스 고지 등은 6.25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지명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 어찌 충혼탑 하나 없겠는가. 6.25 전쟁 당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이곳 비봉공원에 충혼탑을 세웠다.

▼ 산행코스까지 바꿔가며 보고자 했던 박수근 화백의 동상은 찾을 수 없었다. 하도 아쉬워서 다른 분의 사진을 올려본다. 이곳 양구는 향토성 짙은 작품으로 가장 한국적인 현대 회화를 그린 작가로 평가받는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이 태어난 곳이다. 이중섭과 쌍벽을 이룬 작가로 평가받았으며, 이중섭의 자유분방함에 반해 최대한 절제된 화면효과를 추구했다고 한다. 대표작으로는 ‘봄이 오다’, ‘일하는 여인’, ‘할아버지와 손자’, ‘노상의 소녀들’, ‘농악’. ‘나무와 여인’ 등이 있다.

▼ 비봉공원을 빠져나오면 이번에는 ‘군민공원’이다. 하산을 시작하고 50분이 지난 지점인데, 자잘한 벤치 몇 개와 물기 하나 없는 인공폭포가 전부인 작은 공원이다. 하지만 폭포의 위에다 ‘전망타워’를 얹을 경우 분위기는 확 달라진다.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로 둔갑해버리는 것이다. 참! 3층에 들어선 ‘카페’가 양구의 유명 맛집이라던데 한번쯤 짬을 내보는 것도 괜찮겠다.

▼ 이젠 산악회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송청회전교차로’로 가야할 차례다. ‘중심로’를 따라 1.7km쯤 걸으면 된다. 이때 양구 제일의 번화가라는 경찰서 앞 로터리에서 ‘백자조형물’을 만났다. 뭔가 양구를 대표할만한 사연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맞다. 이곳 양구는 고려시대 이래로 주목받는 도자기 생산지였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분원에 백자 원료인 백토를 공급했으며 광주분원에 기술과 조형미를 이식한 사람들도 양구의 도자기 장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분원에서 본격적으로 왕실을 위한 백자를 빚기 시작하면서 양구에서 직접 생산하는 백자는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거기다 현대에 들어서 보다 가볍고 편리한 식기구를 추구하게 됐고 사실상 양구백자는 명맥이 끊기게 된다.

▼ 박수근 화백은 그림 하나로 먹고 산 전업 화가였다. 하지만 반듯한 화실 하나 없이 어렵게 지냈다고 한다. 그런 서글픔을 양구군에서 풀어주었나 보다. 시내를 아예 그의 미술관으로 꾸며버렸다. 정림리(화가의 생가 터일 것이다)에 ‘박수근미술관’을 따로 지어놓았음은 물론이다.

▼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했던가? 요즘에는 학교의 변신도 무죄인 모양이다. 양구고등학교의 담벼락을 박수근 화백의 ‘길거리미술관’으로 둔갑시켜 놓은 걸 보면 말이다.

▼ 빠른 걸음으로 20분쯤 걸으니 ‘팔효자각(八孝子閣)’이 나온다. 조선 헌종 때 양구군내 효자 8위를 모시기 위해 지은 전각으로, 그들의 효행을 목판에 상세히 기록하여 저 건물 안에 보관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저 안에는 비석만이 외롭다. 6.25 전쟁 때 전각과 함께 목판이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기록도 후손들의 족보와 양구현지, 양구군읍지에 그 일부만이 전해질 따름이란다. 참! 효자각의 옆에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인 고인돌도 전시되고 있었다.

▼ 산행날머리는 ‘송청리 회전교차로’

효자각을 살펴본 다음 몇 걸음 더 걸으니 ‘송청리 회전교차로’가 나온다. 산악회에서 지정한 날머리로 이곳에는 ‘웰빙 먹거리타운’이 조성되어 있어 어느 때나 식사가 가능하다. 또한 비봉산의 등산코스 중 가장 긴 코스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산악회버스를 이곳에 주차해 둔 이유일 것이다. 그나저나 오늘 산행은 2시간 30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이 7.23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첨부된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비봉산의 등산로 가운데 가장 긴 코스가 이곳 송청리 회전교차로에서 시작된다.

▼ 산을 두 개나 올랐는데도 시간이 남았나 보다. 산악회는 양구의 또 다른 명소인 ‘한반도섬’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한반도섬’은 양구가 우리 국토의 정중앙임을 알리기 위해 파로호(破虜湖) 상류에 조성한 섬이다. 이곳은 무단 경작으로 인한 부영양화와 쓰레기 불법 투기로 몸살을 앓던 곳이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바로 아래에 소형 보를 설치하고 습지를 조성한 후 생태계가 되살아났으니 환경보호와 휴식 공간 확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그 덕분인지 최근에는 포털사이트에서 검색순위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유명세를 보이고 있다.

▼ ‘한반도섬’은 세 곳에서 연결된다. 강원도와 제주도로 연결된 나무다리를 건너거나, 북쪽에서 함경도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 중 강원도로 통하는 길이 주차장이 넓을 뿐만 아니라 나무다리도 길고 운치가 있는 공식적인 입구다. 참! 반대편에서 짚라인을 타고 경기도로 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 한반도섬은 ‘양구 10년 장생길’의 일부이기도 하다. 양구의 브랜드는 ‘청춘 양구’다. 국내 어느 지역보다 공기가 맑아서 양구에 오면 10년은 젊어진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양구는 공기 중 산소 농도가 23%가량으로 전국에서 최상위 수준이다. 공해를 유발하는 공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 우리 부부는 동해바다를 건너 한반도섬으로 들어갔다. 양 옆으로 펼쳐지는 호수를 바라보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걷는다. 걷는 자체만으로도 즐거운데, 거기다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가득 담겨오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동쪽 호숫가에는 분수(噴水)가 들어섰다. 야간이면 음악이 가미된 분수 쇼가 펼쳐지는 곳으로 5월에서 10월까지 매주 금·토·일요일 오후 8시에 쇼가 시작된다니 시간에 맞춰 찾아볼 일이다. 조금 일찍 도착해 파로호의 잔잔함을 느끼며 걷다가 해가 지면 음악 분수 쇼를 보는 일정으로 꾸며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호수를 바라보다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름은 왜일까? 눈에 들어오는 수면이 그만큼 잔잔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티 하나 없는 그 화폭 위에는 또 다른 산하가 그려지고 있었다. 수평선을 중심에 두고 대칭을 이루 듯...

▼ 한반도섬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갈대숲. 눈앞으로 다가오는 풍경은 가히 몽환적이다. 어는 글쟁이는 파로호반을 걷고 있노라면 세상의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고 했다. 내가 파로호인지 파로호가 나인지 모르는 그런 무아지경에 빠지는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한다더니, 그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 동해바다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형상화 한 섬들이 들어앉았다. 한반도섬과 동해에 떠있는 독도의 디테일이라니 오랜만에 만나보는 통쾌함이랄까? 저걸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 인간들을 골려주기라도 한 듯 기분이 썩 좋아진다.

▼ 한반도에 상륙하자 널따란 광장이 손님을 맞는다. 광장 곳곳에 사진 찍기 딱 좋은 갖가지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음은 물론이다.

▼ 한반도의 주인인 배달민족의 조상은 ‘웅녀(熊女)’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桓雄)으로부터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받아먹으면서 삼칠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자 문득 여자의 몸으로 변했고, 환웅과 혼인해 우리네 조상인 단군왕검을 낳았다. 그렇다면 저 곰이 웅녀?

▼ 한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는 서울. 그래선지 서울시의 대표적 상징물인 해치상(해태)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서울시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란다. 이밖에도 전국 8도의 상징물들을 시·도와 협의해 기증형식으로 제공 받을 계획이란다.

▼ 관광지이니 포토죤은 필수. 그 중에서도 그네는 특히 인기다. ‘I♡YG’라는 조형물이 좋은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 글자가 거꾸로 나타난다는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 그런데 ‘국토의 정중앙, 자연의 중심 양구’라고 적힌 저 조형물의 정체는 뭘까? 문구의 내용이야 익히 들어왔으니 진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꼭대기에 올라앉은 저 전투기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르겠다.

▼ 관광객이 몰려오니 어찌 즐길 거리 하나 없겠는가. 수동형의 오리보트는 물론이고, 투명카약, 동력이 가미된 꼬맹이 요트까지 다양한 놀이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단 한 대밖에 없는 태양열 보트도 길 떠날 준비를 마쳤단다.

▼ 파로호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cafe 바라보다’는 상부를 잔디밭으로 꾸몄다. 여름철 무더위를 대비한 지혜가 아닐까 싶다.

▼ 자 이젠 섬을 한 바퀴 둘러볼 차례이다. 배나 비행기는 없지만 튼튼한 두 다리로 다리를 건너면 금세 제주도에 도착한다. 호수의 서쪽 동수리 방향에서 인도교(人道橋)를 이용해 곧장 제주도로 들어올 수도 있다.

▼ 섬으로 들어서자 한라산 백록담 모형이 반긴다. 주변은 제주도를 상징하는 돌하르방(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인 장공익 옹이 제작했단다)과 유채꽃밭 그림으로 장식했다. 가장자리에 벤치를 놓아두는 센스도 엿볼 수 있다. 벤치에 않자 티 하나 없는 수면위에서 실바람이 흐느적거린다.

▼ 육지로 되돌아오니 지리산이 반긴다. 백두대간의 남쪽 끄트머리를 장식하는 어머니 같은 산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돌무더기 위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작은 3개의 통로가 보였다.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를 연결하는 지리산의 특성을 나타낸 것이란다. 산 구조물 하나로 지형 특색까지 살리는 세심함이 감탄할만하다.

▼ 지리산에서 섬의 북쪽 끄트머리까지는 두툼하게 쌓아올린 둑으로 연결시켰다. 생김새로 보아 백두대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국토종주를 나서볼 일이다. 고요한 파로호를 바다라고 생각하고 길을 따라 심어져 있는 나무를 숲이라고 생각하며 걸어보자. 골짜기처럼 푹 파여진 틈은 강이다. 백두대간을 걷는 우리는 곳곳에서 산을 상징하는 큼지막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덕유산, 설악산, 금강산, 두류산 등 그 산에 대한 설명을 담은 안내판을 세워두었음은 물론이다.

▼ 지리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 걷기 여행은 백두산에서 대미를 장식한다. 최단시간 국토종주를 마친 셈이다. 그렇게 만난 백두산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산이자.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답게 덩치도 큼지막했다. 그 기세를 살리려는 듯 커다란 소나무도 한 그루 심어놓았다.

▼ 한반도는 곧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나라꽃은 ‘무궁화’이다. 그래선지 백두산 근처에다 무궁화 숲을 배치했다. 조형물이라는 걸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산림청이 공모한 ‘2022년 무궁화동산 조성사업’에 대상 지자체로 선정되었다니 내년쯤에는 꽃이 활짝 핀 무궁화동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양구로 오는 도중 인제에 있는 ‘기룡산(起龍山, 1015m)’을 먼저 올랐다. 아니 정상은 구경도 못했으니 등산이랄 게 없는 일정이다. 오늘 따라나선 팀이 강원의 20대 명산을 모두 올라보는 ‘에코 하이킹 챌린지(Eco Hiking Challenge)’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인증장소인 활공장까지만 다녀오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기룡산 산행의 출발은 인제고등학교 앞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 기룡산의 들머리는 꽤 여러 곳에서 열린다. 하지만 우리처럼 활공장까지만 다녀올 요량인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주어진 시간 내에 다녀오려면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거리가 짧은 코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M(어린이공원)’에서 출발해 ‘H(전망대)’를 거쳐 ‘G(패러글라이딩장)’까지 왕복했다.

▼ 기숙을 기본으로 깐 인제고등학교는 외형부터가 조금 특이하다. 학교 앞에 도로를 두고 그 아래에 운동장이 들어앉았다. 그 운동장에는 유소년 축구경기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관중들은 거의 없다. 언텍트가 기본이 된 코로나의 여파가 아닐까 싶다. 맞다. 우리도 역시 워킹스루(Walking-through) 방식으로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켜가며 산행하고 있는 중이다.

▼ 학교 담벼락이 끝나는 곳에 들어선 어린이공원에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아니 무지막지하게 가파르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수도 있겠다. 울창한 잣나무 숲길을 오른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잣나무 숲이 끝나자 이번에는 토종 소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이 구간도 가파르기는 매한가지다.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고도를 높일 수 있다면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삼거리가 있는 능선에 올라선다. 쉼터를 겸한 전망대로 조성되어 있는데, 널찍한 전망대에는 이정표(활공장↑ 350m/ 하늘지붕 소나무박물관←/ 인제고등학교·어린이공원↓ 620m) 외에도 기룡산의 설명판과 소양강 하안단구 안내판 등이 설치되어 있다.

▼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조망안내도이다. 전경사진을 게시해 실물과 사진을 비교해가며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은 별로이다. 조망도는 인제 시가지는 물론이고 소양강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비봉산에 더해 한석산과 방태산까지 그렸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지는 건 비봉산이 전부이다. 미세먼지 탓일 게다. 거기다 인제 시가지는 웃자란 나무들이 그림의 대부분을 잘라먹어 버렸다.

▼ 활공장으로 가는 길은 일단 곱다. 경사가 완만할 뿐만 아니라 바닥에 야자매트를 깔아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느낌이다.

▼ 산행을 시작한지 35분 만에 활공장에 올라섰다. 초등학교의 운동장만큼이나 큰 활공장은 정자와 벤치, 그리고 운동기구까지 두루 갖췄다. 인제 읍민들에게는 산책삼아 오를 정도로 친숙한 뒷동산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인증을 위한 표지판은 행글라이더가 이륙을 시작하는 지점에 세워져 있었다. 해발고도는 480m. 하단에 적힌 ‘강원 20대 명산 인증 챌린지’가 인증에 필요한 증표가 아닐까 싶다.

▼ 인제읍의 진산인 기룡산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운동기구 뒤로 열린다. 그렇다고 다녀올 수는 없는 노릇. 주어진 시간인 1시간 30분에 맞추려면 곧바로 내려가야만 한다.

두백산(頭伯山, 225m)

 

산 행 일 : ‘21. 9. 18(토)

소 재 지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산행코스 : 왕곡마을입구(장승)→두백산 등산안내판→전망대→두백산 정상(중계탑)→안부 삼거리→임도→왕곡마을(소요시간 : 마을투어 포함 3.15km/ 1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높이가 300m에도 못 미치니 산이랄 것도 없다. 거기다 바위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정상에서의 조망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등산로는 전국의 어느 유명산 못지않게 잘 정비되어 있다.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산이 품고 있는 ’왕곡마을‘을 찾는 이들이 하도 많기 때문이다. 마을을 찾아온 여행객들이 산책삼아 오르는 산이 바로 ’두백산‘이다.

 

▼ 산행들머리는 왕곡마을 주차장(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322)

동해고속도로(삼척-속초) 속초 IC에서 내려와 56번 지방도를 이용해 교동지하차도사거리(속초시 교동)까지 이동한 다음, 동해대로(국도 7호선)를 타고 고성 방면으로 올라간다. 그러다가 오봉리·왕곡마을 입구(고성군 죽왕면 오봉리)에서 빠져나와 ‘송지호’ 방면으로 들어가면 잠시 후 저잣거리를 지나 왕곡마을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 실질적인 들머리는 주차장에서 저잣거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이다. 왕곡마을 투어를 포함시키는 산악회 대부분이 타고 온 버스를 고갯마루에 멈추고 회원들을 내려주기 때문이다.

▼ 두백산의 산행 들머리는 딱 두 곳이다. 둘 모두 왕곡마을에서 출발하는데, 하나는 마을에서 저잣거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 뒤 마지막 민가에서 시작된다. 구태여 하나를 덧붙인다면 오음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꼽을 수 있지만, 길이 거친데다 또렷하지도 않아 이용하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다.

▼ 널찍한 임도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초입에 이정표(두백산 정상까지 840m) 및 두백산 숲길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산속으로 들어가자 울창한 대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대나무 터널을 지나는데 ‘사각사각’거리는 소리가 청각을 자극한다. 댓잎이 바람에 흔들려 서로 비벼대는 소리로, 들으면 들을수록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소리이기도 하다. 당송8대가인 소동파(蘇東坡)도 이런 맛에 대나무 숲길을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 대나무 숲을 벗어나자 이번에는 소나무 숲. 이제 겨우 180m를 걸었을 뿐인데, 길가의 이정표는 벌써 두 번째이다. 이렇듯 두백산의 이정표는 촘촘히도 세워져 있다.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 길은 정비가 잘되어 있다. 널찍한 데다 바닥에는 야자매트까지 깔아 미끄러지지 않게 했다. 가파르다는 게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이 정도의 경사도 없는 산이 어디 있겠는가.

▼ 산길은 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고도를 높여간다. 가파른 경사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려보려는 눈물겨운 투쟁이다.

▼ 몸을 비트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경사가 더 심해지자 침목계단을 놓았다. 그것도 제법 길다.

▼ 탐방로 곳곳에는 벤치를 놓아두었다. 힘들게 올라왔으니 잠시 쉬었다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 가파른 오르막길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하지만 전체적인 거리가 짧기 때문에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거기다 야자매트와 나무계단을 놓았으니 조금만 속도를 떨어뜨린다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 그 가파름의 대미는 침목계단이 장식한다. 그런데 이게 길고 가파르다보니 계단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밧줄난간을 설치해 이에 의지해 오를 수 있도록 했다.

▼ 산행을 시작한지 28분, 정상에 오르기 바로 직전 철조망이 쳐진 시설물이 나타난다. 이 시설물의 왼쪽 공터가 두백산 제일의 조망처이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벤치까지 놓아둔 걸 보면 쉬엄쉬엄 조망을 즐기다 가라는 모양이다.

▼ 정상을 통신시설에 빼앗긴 사람들은 이곳을 정상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고성 늘뫼산악회에서 설치한 정상판이 이 시설물의 철망에 묶여있는 걸 보면 말이다. 뿐만 아니라 두백산의 안내판도 이곳에 세워놓았다.

▼ 두백산은 왕곡마을을 포근히 둘러싸고 있는 다섯 개의 봉우리 가운데 하나이다. 오지중의 오지인 왕곡마을은 예로부터 오목한 분지형의 십승지지 요건에 해당된다고 알려져 왔다. 오음산(五音山)을 주산으로 오른쪽의 진방산(唇防山)과 제공산(濟孔山), 왼쪽의 두백산(頭伯山)과 공모산(拱帽山), 전면의 호근산(湖近山)이 마을을 빙 둘러싸며 길지중의 길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두백산도 길지라는 얘기가 된다. 그런 길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 정상판을 배경삼아 기념사진 하나 남겨둔다.

▼ 분명 두백산의 안내판이건만 산은 맛보기. 대신 왕곡마을에 대해 적고 있다. 품고 있는 사연이 그만큼 넉넉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맞다. 왕곡마을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북방식 전통 한옥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수백 년간의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마을의 역사는 14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두문동 72인 중의 한명인 함부열(咸傅說)이 간성(고성의 옛 지명)으로 낙향했고 그의 손자 함영근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의 후손들이 사는 북방식 전통 한옥과 초가집 50여 채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2001년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35호로 지정됐다.

▼ 벤치 쪽으로 나가자 둘레가 6㎞나 된다는 송지호(松池湖)가, 그리고 그 뒤로는 에메랄드빛 동해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송지호는 같은 자연 석호(潟湖)인 근처의 ‘화진포호’와는 달리 옛 시인묵객들로부터 주목받지 못한 은둔의 호수이다. 1748년 간성군수를 지냈던 김광우는 그 이유를 너무 많은 소나무에서 찾았다고 한다. 직접 쓴 ‘간성군읍지’에 호수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소나무가 많아서 옛 시인묵객들이 지나치기 일쑤였다고 적었다.

▼ 시선을 오른편으로 옮기자 이번에는 설악산의 준봉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 이정표는 하산 지점을 숲길입구(840m)와 왕곡마을(1,400m)로 표기하고 있었다. 이렇듯 두백산의 모든 이정표는 양 방향만 지시한다. 산길이 외길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양쪽 길의 끝은 모두 왕곡마을이라고 보면 된다. 숲길입구에서 마을 주차장까지의 거리가 겨우 100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실제 정상은 강릉문화방송의 중계탑이 점령했다. 그래선지 정상은 보잘 것이 없다. 조망도 터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쉴만한 공간도 없다. 산길은 이 시설물의 출망 울타리를 따라 오른쪽으로 우회한다.

▼ 항일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며 노래했건만 이곳 두백산 정상의 봄은 아직 멀었나보다. 이곳이 정상이라는 알리는 그 어떤 표식도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그저 선답자들이 매달아놓고 간 표지기들만이 외로울 뿐...

▼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올라왔던 반대 방향인 서쪽, 그러니까 이정표가 지시하던 ‘왕곡마을’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 하산 길에는 건너편에 위치한 오음산(五音山)을 실컷 눈에 담으며 내려올 수 있다. 왕곡마을을 둘러싼 다섯 봉우리(호근산·제공산·배제산·두백산·골무산)의 주산인데, 옛날 신선들이 이 산과 산 아래에 위치한 선유담에서 오음육률(五音六律)을 즐겼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 내려가는 길도 역시 가파르다. 하지만 계단에 밧줄난간까지 설치해 어렵지 않게 내려설 수 있도록 했다.

▼ 그렇게 15분쯤 내려왔을까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오른편은 오음산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정상을 다녀오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길이 무척 거칠다는 산행대장의 안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리 얻어온 정보에 의하면 기우제를 지내는 등 인근 주민들이 자주 오르내린다고 했는데, 이는 헛소문이었던 모양이다.

▼ 탐방로는 산뜻하게 정비되어 있다. 길가의 잔가지 제거는 물론이고 바닥의 잡초까지 깔끔하게 깎아놓았다. 추석을 맞아 조상 묘역의 벌초를 하는 김에 등산로까지 정비를 했던 모양이다. 맞다. 이곳 두백산은 왕곡마을의 ‘전통 민속체험 축제’ 기간에는 ‘두백산 트레킹’이라는 별도의 체험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 정도의 정비는 항상 유지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내려오는 도중 울창한 숲 사이로 시야가 트이기도 한다. 그리고 송지호와 동해바다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 하산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이정표(두백산 정상 1,400m)와 두백산 숲길안내도가 세워진 날머리에 도착했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을 민가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집 마당을 통과하기가 난감해 망설이는데 개까지 짖어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럴 때 구세주는 언제나 집사람이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의 배짱에 놀랐는지 짖어대던 개까지도 금방 꼬리를 내려버린다.

▼ 자 이젠 배우 김영철처럼 ‘동네 한 바퀴’ 둘러볼 차례이다. 마을은 50여 가구가 산자락에 기대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기와집(31채)과 초가집(20채)이 적절히 섞여 있는데다 전선을 지중화한 덕분에 전봇대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근대 이전의 조선시대로 돌아간 느낌이 드는 이유이다. 그건 그렇고 동네는 모두 4개의 권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저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니 너무 시끄럽지 않게 돌아보는 게 우선이다.

▼ 가장 먼저 들른 ‘함정균 가옥(咸丁均家屋,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8호)’은 부인의 택호가 아닌 주인장의 이름을 따랐다.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본채는 박인로의 ‘조홍시가(早紅柿歌)’를 떠올리게 만드는 '반시재(盤枾齋)'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정면 2칸에는 마루가 있고 그 뒤에 안방, 측면에 사랑방과 고방이 있는 영동 북부지방 주거의 전형적인 평면배치라고 한다. 본채의 좌측 부엌 앞에 외양간 지붕을 달아내었고, 본채 뒤쪽에는 툇마루가 달려 있으며, 마루 양측 끝에는 하부는 뒤주, 상부는 두 짝 여닫이문이 달린 벽장이 있다. 본채 우측에는 행랑채가 있다. 현재 ‘강릉 함씨’ 21대 후손이 살고 있는 이 주택은 19세기 중엽에 건축되었단다.

▼ 다음으로 찾아가는 곳은 ‘큰상나말집’으로 2016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동주’가 촬영되었던 곳이다. 내 공직기간 내내 좌우명으로 삼았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되는 ‘서시’를 노래한 윤동주의 성장 배경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집의 구조를 조금 더 살펴보자. ‘ㄱ’ 자형으로 지어진 본채는 부엌에 외양간을 덧댔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것에 대비하여 기와지붕은 경사지게 하였고 집의 기단도 돌을 쌓아 높였다. 차가운 북서풍을 막으려고 집 뒤는 담으로 막았으나 햇볕 드는 앞쪽은 틔웠다. 이러한 형태를 조선 시대 함경도 지방(관북지방) 겹집 구조라고 한단다.

▼ 이를 자랑하듯 영화의 한 컷이 처마 밑에 걸렸다. 영화를 감독한 이준익 감독은 이 마을의 집성촌과 주거 형태가 북간도와 비슷하여 이곳을 골랐다고 한다.

▼ ‘큰 백촌집’이다. 200년 전 백촌에 살던 ‘경주 김씨’ 집안의 며느리(능선 구씨)가 자녀들과 함께 북방식 가옥인 이 초가에서 살았다고 한다.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오다 70년대 중반 도시로 이주해 지금은 비어있다. 그건 그렇고 기와가 볏짚으로 바뀌었을 뿐 이 집도 앞에서 본 가옥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ㄱ’ 자형으로 부엌에 외양간을 붙었다. 이렇듯 한 지붕 아래 방·고방·마루·부엌·외양간이 통으로 들어간 형태를 사람들은 ‘양통집’이라 부른다.

▼ 다음은 ‘작은 백촌집’이다. 백촌에 설던 김태선 씨가 이사하여 살던 집으로 1945년 공현진의 폐가(기와집)에서 가져온 목재를 재활용하여 지은 집이다. 큰백촌집의 김태곤과는 형제간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마을의 집 이름은 함정균가옥을 빼고는 ○○가옥이나 ○○고택이라 하지 않고 안주인의 고향이나 이사 온 마을을 따서 지었다. 성천집, 큰상나말집, 큰백촌집, 작은백촌집, 석문집, 한고개집, 이런 식이다.

▼ ‘성천집’은 집의 구조가 약간 달랐다. 북방식 가옥의 특징이랄 수 있는 ‘ㄱ’자가 아니라 ‘ㅡ’자형인 것이다. 집집마다 갖고 있는 외양간이 이 집만 없었기 때문이다. 가옥의 이름은 집 주인인 함일홍의 부인 택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의 부인이 ‘성천’에서 시집왔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작은 상나말집’과 ‘석문집’, ‘한고개집’ 등이 더 있었지만 지면이 부족하여 생략하겠다. 참! 마을에는 민박집도 여럿 들어서 있었다. 주말마다 열린다는 뻥튀기, 떡메치기, 그네타기, 널뛰기 등의 체험도 해볼 겸해서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겠다.

▼ 진흙과 기와를 켜켜이 쌓아 지붕만큼 올린 굴뚝도 왕곡마을의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가운데 하나다. 아래 사진처럼 굴뚝이 담의 한 부분을 이뤄 담인지 굴뚝인지 분간하기 어려운가 하면, 따로 떨어져 있는 원통형의 굴뚝도 있다. 또 어떤 집은 꽃담 쌓듯 몸에 화려한 장식을 두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굴뚝들은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낯선 풍경이지만 열악한 기후가 만들어낸 지혜라고 한다. 열을 잘 전달시키기 위해 굴뚝을 높이 쌓는 대신, 굴뚝 위에 항아리를 올림으로써 열을 오래 머물게 하는 동시에 불티까지 가두어둔다는 것이다.

▼ 우리네 주변에서 사라진지 이미 오래인 ‘작두 샘’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전기가 없던 시절 많은 집에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는 방식이었다. 그게 한걸음 더 발전한 것이 ‘작두 샘’이다. 물이 있는 곳까지 내려가 있는 파이프의 상부에 저 펌프를 설치하고, 펌프 안에 물 한바가지를 부은 다음 작두질하듯 움직여 물을 끌어 올리는 방식이다. 지금은 박물관이나 체험학습장에서 볼 수 있을 뿐인데, 이곳 왕곡마을에서 그 귀한 풍경을 만난 것이다.

▼ 옛 마을이라고 해서 옛 이야기로만 끝내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고 싶었던지 마을 앞 텃밭에 ‘녹차’를 기르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다보면 저게 또 하나의 얘깃거리로 풍성해지지 않겠는가.

▼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작은 상자 하나를 든 여행객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전국적으로도 명성을 얻고 있는 ‘왕곡마을 한과’인데, 집사람도 사이드 메뉴로 내놓는 수정과를 마시러 들어갔다가 하나를 샀다. 전통한과기능보유자가 만들었으니 어찌 맛이 없겠느냐며 말이다. 맞다. 홍보용 사진 속에서 ‘동네 한 바퀴(KBS-1TV)’의 김영철이 이집 주인장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게 그 증거라 하겠다. 이밖에도 KBS-2TV의 생생정보통과 JTBC의 ‘바라던 바다’ 등 다수의 방송에서 이 집만의 맛이 소개되었다고 한다.

▼ 마을 중앙에는 마을회관(경로당)이 들어앉았다. 이 회관을 중심으로 식당과 카페, 마을장터 등의 편의시설과 놀이시설(그네)이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작년에 들렀을 때 눈여겨보았던 포토죤은 사라지고 없었다. 실사(實寫) 출력한 전통가옥에다 ‘옛 것 그대로 시간이 멈춘 곳’이라는 부언(附言)까지 달아 인생샷 하나쯤 건져볼 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카페 ‘화인당’이다. 카페이니 본업인 Coffee와 Tea는 기본, 그 가운데 추억의 다방 커피가 눈길을 끈다. 손님이 설탕과 크림을 배합해가며 직접 타먹는 것을 얘기하는 걸까? 그밖에도 물과 청량음료에 맥주까지, 심지어는 컵라면과 과자까지 판단다. 이건 숫제 마트. 그것도 국민지원금의 사용도 불가능한 대형마트 수준이라 하겠다.

▼ 회관 앞에 마련된 ‘마을장터’에 이르자 구수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시킨다. 농산물 판매점인줄 알았는데 요깃거리까지 팔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메뉴판은 아예 주막집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조금 전 발걸음을 이끌었던 냄새는 막걸리와 궁합을 맞추기 위해 지져대는 메밀전에서 흘러나왔던 모양이고 말이다.

▼ 그네나 널뛰기 같은 놀이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는 ‘전통체험장’도 핫 플레이스 가운데 하나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단위 여행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 마을 입구로 나가면 ‘정미소’가 나온다. 이곳도 역시 ‘동주’의 촬영지이다. 이 영화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던 어둠의 시대에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시인 윤동주(강하늘)와 독립운동가 송몽규(박정민)의 빛나던 청춘을 담았다. 두 주인공의 아지트였던 정미소는 동주가 홀로 앉아 시집을 읽기도 하고 그들의 잡지를 만들기도 했던 곳이다.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 거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니?’라는 몽규의 말이 동주의 가슴에 비수같이 꽂혔던 곳이기도 하다.

▼ 안에는 지금도 사용하는 듯한 도정기(搗精機)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도 여럿 게시해 놓았다. 참고로 이준익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동주’는 5억 원이라는 순수 제작비가 말해주듯 저예산 독립영화이다. 중급영화의 제작비가 40억~50억 정도라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1,176,468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1천만 관객이 수두룩한 요즘이니 뭐가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손익분기점이 27만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공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대형 상업영화들과의 무한경쟁 속에서 말이다.

▼ 마을에는 효자각(孝子閣)이 둘이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조정에서 정문까지 내려진 ‘함희석(咸熙錫)’의 효자비를 모신다. 효자 함희석은 부모가 병환으로 눕게 되자 바다에 헤엄쳐 나가 귀한 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했다고 전해진다. 집안에 큰불이 나 부모가 큰 화상을 입었을 때도 지성으로 부모를 보살피는 등 효성을 다했단다.

▼ 다른 하나는 ‘양근함씨 4세효자각(揚根咸氏 四世孝子閣)’이다. 동몽교관(童蒙敎官, 어린이를 가르치기 위해 각 군현에 둔 벼슬)을 지낸 함성욱은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7일을 더 살게 하였다. 이어서 그의 아들 ‘인흥’과 ‘인홍’, 손자 ‘덕우’, 증손 ‘희용’까지 줄줄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피를 부친에게 먹여 생명을 연장시켰다고 한다. 이를 안 조정에서 이들에게 조봉대부와 통정대부, 가선대부 등의 칭호를 내려주고, 비를 건립하여 이를 기리도록 했다.

▼ 마을을 빠져나오데 빨갛게 익은 감이 갈 길 바쁜 나그네를 배웅해준다. 감나무는 새가 둥지를 틀지 않고, 벌레가 생기지 않고, 그늘을 주고, 오래 살고, 단풍이 아름답고, 낙엽은 거름에 좋고, 열매는 맛이 좋아 ‘칠덕수(七德樹)’다. 효자각을 두 개나 갖고 있는 마을에 어울리는 나무요 열매라 하겠다.

▼ 산행을 마친 뒤에는 ‘가진항’으로 이동했다. 포항과 함께 ‘물회’의 양대 산맥이라는 산행대장의 멘트가 꼭 아니어도 뱃가죽이 등에 들어붙을 정도로 배가 출출해져 있으니 최상의 일정이라 하겠다. 기본(일반회+해삼+멍게)에 소라를 추가시키니 1인당 2만원, 밥 대신 나온 국수사리를 말아가며 먹다보니 소주를 2병이나 마셔버렸다. 소주 안주가 될 정도로 양이 충분했던 모양이다. 바다향이 물씬 묻어나는 맛 또한 기대에 부응했다.

▼ 주어진 시간은 1시간 30분,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며 느긋하게 먹고 마셨지만 시간은 30분 가까이나 남았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방파제로 나가보니 예상했던 대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식애가 눈앞에 펼쳐진다. 영화 ‘군함도’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하더니 그게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운봉산(雲峰山, 285m)

 

산 행 일 : ‘21. 9. 18(토)

소 재 지 :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산행코스 : ’운봉교‘ 삼거리→용천사 입구→말안장바위→’미륵암‘ 갈림길→’22사단 정문‘ 갈림길→정상→’미륵암 갈림길‘ 복귀→주상절리→습지→머리바위→숲길입구→운봉리 숭모공원(소요시간 : 4.43km/ 2시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높이가 300m에도 못 미치니 산이랄 것도 없다. 그렇다고 백두대간이나 정맥, 하다못해 지맥에 걸쳐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가 뭘까? 이유는 간단하다. 크기에 비해 가슴이나 눈에 담아갈만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운봉산은 제주도의 한라산처럼 화산활동의 결과로 생겨난 산이다. 그래서 주상절리 등 용암의 흔적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덕분에 산행 중 얼굴바위나 주먹바위, 거북바위, 안장바위 등 기암괴석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거기다 어디다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빼어난 조망까지 지녔다. 그러니 산행시간이 조금 짧다는 흠은 있지만 이런 좋은 볼거리들을 두고 어찌 사람이 찾지 않겠는가.

 

▼ 산행들머리는 ‘운봉교’(고성군 토성면 운봉리 314-19)

동해고속도로(삼척-속초) 속초 IC에서 내려와 56번 지방도를 이용해 교동지하차도사거리(속초시 교동)까지 이동한 다음, 동해대로(국도 7호선)를 타고 고성 방면으로 올라간다. 그러다가 문암삼거리(고성군 토성면 백촌리)에서 빠져나와 무릉도원로로 옮겨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운봉교’에 이르게 된다. 문암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 운봉산의 들머리는 이곳 ‘운봉교’ 말고도 ‘운봉산 숲길입구’와 미륵암, 그리고 22사단 정문 등이 있다. 하지만 열 중 아홉은 이곳 운봉교와 운봉산 숲길입구를 들·날머리로 삼는다.

▼ 문암천의 둑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됐다. 하지만 운봉리 방향으로 30m쯤 더 들어간 지점에 있는 삼거리가 옳은 들머리이다. 이정표는 물론이고 ‘운봉산 숲길 안내도’까지 그곳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하나라도 더 보려면 안내도를 한번쯤은 살펴보고 길을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 50m쯤 문암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임도를 만나게 된다. 위에서 거론했던 탐방로인데, 두 길은 이곳에서 합쳐져 용천사로 이어진다. 합류지점에 세워놓은 ‘용천사’ 팻말의 방향표시를 참조하면 되겠다.

▼ 그렇게 15분쯤 들어가자 삼거리가 나타난다. 직진은 용천사, 오른편은 토종벌을 사육한다는 ‘청명농원’이다. 등산로는 두 길의 사이에서 열린다. 이정표(운봉산 정상↗/ 용천사↑/ 운봉리↓)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임도와 헤어지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초입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침목계단이 놓여있어 그다지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계단이 끝나자마자 길은 다시 완만해진다.

▼ 흙길로 시작된 탐방로가 느닷없이 바윗길로 변해버린다. 맞다. 이곳 운봉산은 화산폭발로 인해 생긴 산이라고 했다. 그 특징인 주상절리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바위들은 맛보기인 셈이다.

▼ 운봉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기묘묘한 바위들을 자주 만난다는 점이다. 그들과의 만남은 ‘말안장바위’로부터 시작된다. 생김새가 말의 등에 올려놓는 안장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말안장이 있으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동심으로 돌아간 집사람이 냉큼 올라앉고 본다. 그걸 본 나는 카메라부터 들이대고.

▼ 잠시 후, 이번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모여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지점에 이른다. 안장바위처럼 팻말을 세워놓지 않았어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전망바위’라 부른다. 거침없이 내다보이는 기능으로 인해 저절로 붙여진 이름이다.

▼ 그중에서도 나 홀로 솟아오른 바위 하나가 유난히 돋보인다. 그러니 어찌 사람들이 버려둘 수 있겠는가. 인생사진이라도 하나 건질까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 바위로 올라가자 비취빛 동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토성면 앞바다일 것이다. 그리고 저 풍경화 속에는 며늘아기가 머물고 있는 청간정 해안도 들어있을 것이다. 요양 차 내려온 지 4년이나 되었으니 이제 그만 회복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이번에는 운봉산이 고개를 내민다. 그런데 아담한 것이 제주의 오름을 많이 닮았다. 다만 꼭대기가 펑퍼짐한 오름과는 달리 정상부가 뾰족하게 솟아올랐다는 게 다르다고나 할까? 아니 이곳 운봉산이 제주의 오름처럼 화산활동의 결과물이란 게 선입감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 조망을 실컷 즐겼으니 또 다시 길을 나설 차례이다. 이어지는 산길은 돌멩이 하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순수한 흙길이다. 덕분에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적당히 섞인 숲길이 이어지면서 눈이 호사를 누린다.

▼ 울창한 숲속에서 안내판 하나를 만났다. ‘튤립나무(Tulip Tree)’라는데 노란색이 감도는 녹색의 꽃이 튤립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제철이 아니어선지 꽃은 찾아볼 수 없고, 플라타너스처럼 생긴 잎을 매단 자잘한 나무들이 몇 그루 보일 따름이다. 하긴 저 나무는 200년을 자라야만 성목이 된다는데 이를 말이겠는가.

▼ 잠시 후 길이 가팔라지는가 싶더니 아예 허리를 곧추세워 버렸다. 그러니 길이라고 제대로 낼 수 있겠는가. 통나무계단을 일직선으로 놓았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다.

▼ 산행을 시작한지 35분. 길고 긴 계단을 올라서자 길이 둘로 나뉜다. 아니 미륵암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쳐진다고 하는 게 옳겠다. 숲길 이정표(운봉산 정상↖ 0.3㎞/ 미륵암↘ 1.0㎞, 샘터·습지 0.3㎞, 머리바위 1.0㎞/ 용천사↓ 0.9㎞)는 오른편에 운봉산 제일의 명소인 ‘머리바위’가 있음을 알려준다. 정상은 물론 왼편. 정상을 둘러본 뒤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또 다시 가팔라진다. 아니 버거울 정도로 가파르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산허리를 휘감으면서 오르도록 길을 내놓았으면 좋았으련만, 이를 무시한 채 거의 수직으로 나 있기 때문이다. 통나무 계단에다 밧줄난간까지 매어놓았지만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 ‘세상 참 좋아졌다’. ‘22사단’이라는 지명이 표기된 이정표(운봉산 정상↑/ 22사단 정문→/ 용천사·미륵암↓)를 보고 어느 노익장이 내뱉는 넋두리다. 맞다. 그네들이 살아온 세상에서 22사단이란 지명은 입 밖에 내놓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꼭꼭 숨겨져 있어야만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공공기관에서조차 스스럼없이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22사단 정문으로 내려가는 저 코스는 주상절리 답사의 명소로 알려진다. 중턱부터 정상부까지 온통 잿빛 바윗덩어리들로 덮여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든다고 한다.

▼ 산행을 시작한지 43분 만에 올라선 정상은 너른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원래는 이곳에 3m 깊이의 분화구가 있었다고 한다. 운봉산이 화산폭발로 생겨난 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을 군부대가 평평하게 만들어 헬기장으로 사용하고 있단다. 참고로 운봉산의 옛 이름은 ‘정산(鼎山)’이었다고 한다. 밀물과 썰물이 있던 먼 옛날 바닷물이 들어와 찼을 때 그 생김새가 솥을 엎어놓는 것 같은 정산 위에 사람들이 올라가 살았단다. ‘은봉산(銀峰山)’이라 칭한 기록도 있다니 기억해 두자.

▼ 어른 키 높이만한 정상석은 북쪽 귀퉁이에서 자리를 틀었다. 그런데 그 커다란 크기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게 있다. 4m의 높이의 깃대에 매달린 태극기가 천이 아니라 강철인 것이다. 왕대나무에 매달려 사시사철 펄럭이던 천 태극기가 자꾸 헤어지는 바람에 아예 펄럭이는 모양의 강철 태극기로 교체해 버렸단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일망무제(一望無際)이다. 시야를 가로막는 게 없기 때문에 탁 트인 세상을 한눈에 안아볼 수 있다. 지자체에서는 이를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조망도를 따로 세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과 대조해가며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 조망도를 살펴봤다면 이젠 눈이 호사를 누릴 차례이다. 먼저 토성면 지역부터 살펴보자. 발아래로 펼쳐지는 드넓은 들판은 기본. 설악산을 오른편에 낀 쪽빛 해안선을 따라 아름다운 수평선이 길게 늘어선다. 내륙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능파대·교암항·아야진항·청간리·봉포항을 지나 속초시까지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 왼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이번에는 죽왕면 지역의 해안선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도 역시 널따란 들녘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 에메랄드빛 동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지는가 하면, 끝 간 데 없는 바다에는 죽도와 백도 등 하얀 바위섬들이 아랫도리에 물에 담그고 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아름다운 풍광들이다. 하긴 이런 보상이 있기에 수고로움을 마다하고 산에 오를 것이다.

▼ 반대방향의 산악지역도 빼놓을 수 없다. 북녘하늘 아스라이 금강산이 있고, 그 앞으로 향로봉과 죽변산, 그리고 더 가까이로는 이따가 오르게 될 오음산이 눈에 들어온다. 남으로는 설악산과 마등령, 황철봉, 울산바위, 속초의 해안선이 눈 끝에 닿아 있다.

▼ 첫 번째 삼거리(마당바위 갈림길)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미륵암’쪽으로 진행한다. 정상에서 바라보던 북쪽, 그러니까 금강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내려선다고 보면 되겠다.

▼ 눈을 들면 아까 정상에서 만났던 풍경들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불쑥 바다로 내달려 나간 수많은 곶과 길게 줄지어 있는 은빛 백사장, 점점이 이어지는 작은 섬들, 그 주변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등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 오늘의 꽃은 구절초(九節草)를 꼽아봤다. 꽃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으니, 가을을 알리는 전령사로 이만한 게 없을 것 같아서이다. 거기다 간장을 보호하고 혈액순환을 돕는 등 약효까지 뛰어나지 않겠는가. 구절초라는 이름은 중양절(음력 9월9일)에 채취한 것이 가장 약효가 좋다는데서 유래했다. 줄기의 마디가 단오에는 다섯 중양절에는 아홉 마디가 된다는 뜻의 ‘구’와 중양절의 ‘절’, 혹은 꺽는다는 뜻의 ‘절’자를 쓴다.

▼ 이밖에도 쑥부쟁이와 벌개미취, 잔대, 무릇, 마타리 등 꽤 많은 야생화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솔체꽃’도 그 가운데 하나다. 꽃봉오리의 모양이 구멍 뚫린 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학명의 스카비오사(Scabiosa)는 라틴어로 옴이란 뜻으로, 이 꽃이 피부병에 약효가 있다는 뜻에서 부르게 된 이름이라 한다. 역병으로 고생하는 마을사람들 위해 약초를 구하러 다니던 요정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얘기를 품은 꽃이기도 하다. 꽃말도 전설에 따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되었다.

▼ 10분쯤 내려왔을까 또 다른 삼거리가 나타난다. 운봉리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둘로 나뉘는 지점(이정표 : 미륵암↑ 0.6㎞/ 머리바위→ 0.6㎞/ 주상절리← 0.1㎞)이다. 같은 운봉리이지만 오른편은 ‘운봉산 숲길’ 입구, 왼편은 미륵암이란 사찰로 연결된다. 참! 왼편은 운봉산에서 꼭 들러봐야만 하는 ‘주상절리’로도 연결된다.

▼ 이곳에서 이정표를 보고 길을 찾았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겠다. 주상절리의 방향 및 거리가 얼토당토않게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주상절리가 지시하는 방향에는 길이 나있지 않다. 미륵암과 같은 방향인데도 왼편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100m라는 거리도 맞지 않다. 이를 믿고 갔다간 도착하기도 전에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이정표 보다 세 배쯤 더 멀어요’라던 일행의 말마따나 200m쯤 걷고 나서야 ‘주상절리’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삼거리(주상절리←/ 미륵암↗)에 닿을 수 있었다. 우리가 가고자하는 ‘주상절리’는 왼쪽. 오른편은 미륵암이라는 암자로 내려가는 길이다.

▼ 50m쯤 더 올라가자 ‘돌이 흐르는 강’이라 적힌 팻말이 길손을 맞는다. 주상절리를 저렇게도 부르는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 운봉산은 ‘강원평화지역 국가지질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비무장지대(DMZ)와 인접한 5개 군(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의 21개 지질명소 가운데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고성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생대 제3기 알칼리 현무암의 분포지역이기도 하다. 제4기에 형성된 철원과 제주도 등의 현무암에 비해 침식 정도가 심해 주상절리의 원형 뿐 아니라 주상절리가 무너져 형성된 암괴류를 함께 관찰할 수 있다.

▼ 팻말 너머로는 별천지가 펼쳐진다. 운봉산의 북쪽 사면을 장식하고 있는 현무암 너덜지대인데, 이게 마치 물이 흐르는 것 같다고 해서 ‘현무암의 강’이나 ‘돌이 흐르는 강’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게 주민들에게는 경이롭게 보였던 모양이다. ‘서둑돌’이라 부르며 신성시 여겨 집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 작으면 농구공, 크면 건물 기둥만 한 돌들이 마치 강이 흐르다 멈춘 듯한 모습으로 쌓여있다. 지질학자들이 ‘암괴류’라 부르는 저 돌들은 주상절리가 부서지면서 만들어졌다. 주상절리는 마그마가 급격히 식으면서 부피가 줄어들어 만들어지는 수직 기둥 모양의 구조이다. 암괴류 곳곳에서 기둥처럼 생긴 돌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로 운봉산은 약 700만 년 전, 화강암을 뚫고 올라온 마그마가 만든 화산이다. 이 돌들은 당시 용암이 빠르게 식으며 만들어진 현무암이다. 하지만 제주도처럼 용암이 흐른 것은 아니고 얕은 땅속에서 그대로 식은 것이란다. 이렇게 굳은 마그마가 ‘주상절리’가 되었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머리바위’ 방향으로 내려선다. 이어서 몇 걸음 더 걷자 발을 딛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닥이 질퍽거리는 곳과 마주친다. 안내판은 이곳을 ‘습지’라 적고 있었다. 방금 전 들렀던 주상절리의 돌밭 밑에서 졸졸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더니 그 물줄기가 이곳을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 참! 아들 없는 집에서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정성을 드렸다던 ‘샘터’는 눈에 띄지 않았다. 선답자들의 후기에서 보았던 ‘팻말’도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 습지를 벗어나자 또 다시 동해바다가 펼쳐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에메랄드빛 바다를 배경삼아 바위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올랐다. 이정표에 적혀있던 ‘머리바위’일 것이다.

▼ 조금 더 걷다가 바위봉우리를 줌으로 당겨봤다. 아찔한 바위봉우리건만 스릴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는 한낱 놀이터에 불과한 모양이다.

▼ 잠시 후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즐비한 바위지대로 올라섰다. 그리고 운봉산을 만든 장사기 남긴 흔적들과의 만남이 시작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남근석’. 남성의 성기를 쏙 빼다 닮은 바위 하나가 비스듬히 누워있다. 그냥 닮기만 한 게 아니다. 그 생김새까지도 시샘이 날 정도로 아주 잘 생겼다.

▼ 다음은 ‘머리바위’다. 펑퍼짐한 이마에 눈·코·입, 그리고 툭 튀어나온 턱이 영락없는 사람의 얼굴이다. 혹자는 저 바위를 운봉산을 만든 장사의 머리라고 주장하나, 전설이란 옛 사람들이 남긴 얘기일 따름이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 머리바위 옆에는 크기는 작지만 사람의 얼굴을 한 바위 하나가 더 있다. 그런데 이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바위가 아니겠는가. 맞다. 폴리네시아의 이스타섬에 있는 ‘모아이 석상’이 딱 저랬었다. 길쭉한 코에 툭 튀어나온 턱은 물론이고 둥그런 눈까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모아이석상을 쏙 빼다 닮았다. 그런데 천만리 바다건너에서 언제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까?

▼ 머리바위를 왼편으로 우회하면 주먹바위가 얼굴을 내민다. 거대한 바위의 가운데 툭 튀어나온 부분이 주먹을 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마지막 만남은 ‘거북바위’다. 꽤 유명세를 타는 바위인데, 내 눈에는 거북의 형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다른 사람들이 지닌 심미안이 나에게는 왜 없을까? 무학대사는 부처와 돼지의 눈을 들어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했다. 맞다. 칠십년 가까이 쌓아온 내 수양은 아직도 멀었다.

▼ 바위지대를 내려오다가 뒤돌아보니 조금 전에 만났던 바위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기괴하게 생긴 저 바위들은 전설에 의해 태어났다. 아까 얘기했듯이 금강산 장사가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에 들어가려고 힘깨나 쓰는 짐승들을 불러 모아 구름보다 더 높이 산봉우리를 쌓아올렸는데, 이때 작업을 하다가 다치고 죽은 동물들의 형체가 굳어져 저렇게 변했다는 것이다.

▼ 바위지대의 특징은 역시 뛰어난 조망.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 에메랄드빛 동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그 앞의 너른 들판은 바다를 만날 때까지 거침없이 쭉 뻗어나간 모습이다.

▼ 이젠 하산만이 남았다. 바위지대를 조심스럽게 내려서자 이번에는 가파른 통나무계단이 나타난다.

▼ 하산을 시작한지 1시간 만에 ‘운봉산 숲길 입구’에 내려섰다. 미륵암 근처의 두 들머리 가운데 하나로, 이곳에 주차가 가능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 숲길 입구에는 이정표(머리바위 0.3㎞, 운봉산 정상 1.2㎞)와 함께 ‘운봉산 숲길안내도’도 세워놓았다. 금강산이 되려고 돌을 알뜰살뜰 모으다가, 고성에서 이미 금강산이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너무 억울해 으르렁거리며 울었다고 해서 ‘운봉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을 적었다. 안내판에는 없지만 또 다른 전설도 기억해두자. 옛날 부지런한 장사가 금강산의 장사와 집짓기 시합을 하던 중 금강산 장사가 집을 완성했다는 거짓 소문에 3일(석 달 열흘이란 설도 있다) 동안 울면서 통곡하며 그 동안 지은 돌성을 무너뜨렸는데, 이때 지었던 돌성의 높이가 구름 위까지 올라갔다고 하여 ‘운봉산’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 산행은 끝났지만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운봉리의 ‘숭모공원’까지는 1km쯤 더 걸어가야 한다. 농로가 좁은 탓에 승용차 외에는 이곳으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 운봉마을로 이동하는 도중 담양의 관방제림(防堤林, 천연기념물 제366호)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나무 숲이 눈에 들어왔다. 제방(堤防)으로 여겨지는 둑 위에 백여 년은 족히 묵었을 것 같은 굵은 소나무들이 풍치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 날머리는 ‘숭모공원’(고성군 토성면 운봉리)

숲길 입구로 내려선지 10분 만에 도착한 ‘숭모공원’은 온통 태극기 세상이다. 공원을 빙 둘러싼 50여 개의 태극기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숭모공원은 3·1운동 직후 조직된 대한독립애국단 강원도단(철원애국단)에 가입해 활동한 이근옥·김연수·문명섭(이상 운봉리), 김형석(아야진리), 이석규(백촌리) 등 독립운동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그러니 저 태극기의 물결은 숭모공원이란 이름에 걸맞는 풍경이라 하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운봉리의 모든 세대(70여 가구)는 매일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단다. 이곳 운봉리가 ‘태극기 마을’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이유이다.

 

베틀봉(786m)

 

산 행 일 : ‘20. 10. 9(금)

소 재 지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 및 동해시 삼화동의 경계

산행코스 : 두타광장(제2주차장)→매표소→베틀 릿지→미륵바위→베틀봉→산성터→무릉계곡→학소대→삼화사→제3주차장(소요시간 : 4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두타산(頭陀山 : 1,353m)이 품고 있는 여러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베틀봉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던 곳이다. ‘베틀 릿지’라고 불리던 험상궂은 바윗길이 암벽산행에 익숙한 전문 산꾼들에게조차 쉽사리 길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폭의 그림, 그것도 잘 그린 수묵화를 보는 듯한 비경을 그대로 내버려둘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동해시의 요구로 산림청에서 바윗길 곳곳에 안전시설을 설치해 명품 탐방로로 만들었다. 덕분에 최근 가장 핫한 산행지로 떠올랐고, 기초체력만 보유했다면 누구나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한국의 산인지 해외 유명한 산인지 구분되지 않는 비경들에 환호하게 된다.

 

▼ 들머리는 두타광장(제2주차장 : 동해시 삼화동 858-10 )

동해고속도로(삼척-속초) 동해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삼척 방면)’와 ‘42번 국도(북평교차로에서 정선 방면)’를 연이어 달리다가 동막교(동해시 이로동 1282)에서 빠져나온다. ‘효자로’를 따라 동해시가지 방향으로 아주 잠깐 달리다가 삼화삼거리(동해시 이로동)에서 우회전하여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릉계곡관광지에 이르게 된다. 무릉계곡 힐링캠프장에 마련된 제2주차장(두타광장)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 버스에서 내려 무릉계곡 관광지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소형차 전용인 제1주차장과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는 상가지역을 통과하자 매표소가 나온다.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2천원. 그런데 ‘문화재관람료’를 받는 다른 지역의 산들과는 달리 이곳은 ‘입장료’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징수의 주체가 ‘사찰(삼화사)’이 아닌 ‘지자체(무릉계곡 관리사무소)’일지도 모르겠다. 기분 좋게 돈을 낼 수 있겠다는 얘기이다. 참! 산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발열검사(發熱檢査)를 거쳐야만 했다. 코로나의 여파가 이젠 산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매표소 앞의 다리(무릉교)를 건너자마자 베틀릿지로 오르는 탐방로(이정표 : 배틀바위 1,5㎞/ 용추폭포 3.1㎞/ 매표소 0,1㎞)가 열린다. 새로 놓인 이 길의 이름은 ‘베틀바위 산성길’. 베틀바위와 두타산성을 잇는 코스라는 의미를 담았다. 금년 8월1일 개장한 이 길은 베틀바위 전망대와 12산성폭포를 지나 박달계곡을 거쳐 무릉계곡 깊은 쪽으로 내려선 다음, 용추폭포와 쌍폭포, 선녀탕의 순서로 내려오는 코스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두타산성을 거쳐 무릉계곡의 ‘옥류동’으로 내려왔다. 박달계곡을 거쳐 용추폭포로 이어지는 구간(들머리에 세워놓은 노선도의 C구간과 D구간의 일부)이 오는 가을 개장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길은 거친 바위를 타는 리지등반이나 암벽등반을 즐기는 이들만 다니던 길이었다. 접근 불가의 험준한 지형 너머에 있는 두타산 베틀바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녀온 이들의 무용담으로 베틀바위 일대의 기막힌 경관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등산로가 없는 코스였으니 일반 등산객은 언감생심, 다녀올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금년 8월1일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탐방로가 새로 열렸다. 가파른 경사를 부드럽게 누이고 수직의 벼랑에다 계단을 놓아가며 이어놓은 길이다. 동해시에서 ‘잦은 등반사고’를 이유로 탐방로 개설을 요구했고, 동부지방산림청에서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 탐방로는 곳곳에 산재돼 있는 기암과 산림자원을 관광용으로 활용했다. 들머리 부근의 금강송 군락지에 만들어놓은 ‘휴휴 명상 쉼터’와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엿 볼 수 있는 ‘숯 가마터(아래 사진)’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 숯 가마터를 지나자 산길이 가팔라진다. 아니 많이 가파르다. 내품는 거친 숨이, 하늘에 닿는 코스가, 오르는 내내 인내를 요구한다. 아름다운 절경을 쉽게 내주지 않는 자연의 이치가 아닐까 싶다.

▼ 하지만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곳곳에서 시야가 열리면서 기막히게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놓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너나없이 희열에 가득 찬 탄성을 내지른다. 자신도 모른 채 말이다.

▼ ‘그림폭포(중대폭포)’를 배경으로 선 집사람은 아예 ‘대한민국 만세’다. 세계 일주를 목표로 부부여행을 나선지 7년. 돌아다닌 나라만도 벌써 40개가 넘었다. 해외에만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더니 이젠 그녀도 애국자가 다 되어가나 보다.

▼ 발아래로는 무릉계곡 입구의 상가지역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그 뒤는 쌍용시멘트의 채광장(採鑛場)이다. 나에게는 폐광 이후에 발생될 제반 사회문제에 대처할 입법 문제로 찾아봤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 비탈에 길은 내다보니 비좁을 것은 당연하다. 그래선지 편도(片道)로 길을 내기도 했다. 오가는 사람이 서로 비켜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길이 좁으니, 들머리에 세워놓은 이정표(베틀바위 0.5㎞/ 내려가는 길(옛길)/ 올라오는 길)를 잘 살펴보고 들어서야 한다.

▼ 바위 벼랑의 틈을 비집고 길을 내다보니 편도로 길을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오랜 기간 세찬 풍파를 맞으며 인고의 100여년 세월을 겪어온 ‘회양목 군락지’도 관광자원으로 부활시켰다. 그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놓았음은 물론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 고사성어에 딱 어울리는 풍경으로 변한다. 더 높이,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갈수록 경관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 회양목 군락지를 지나면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 위에 걸터앉은 ‘베틀바위 전망대’가 나타난다. 탐방로의 주인공은 물론 ‘베틀바위’다. 하지만 탐방로를 딛고 오르는 주변으로 펼쳐지는 풍경도 이에 못지않다. 집채만 한 바위와 수직의 멋진 암벽이 수시로 나타나는가 하면, 바위 사이사이에서는 금강송이 붉은 둥치를 올리고 활개 치듯 자라고 있었다. 원시림의 초록 그늘과 수직의 바위가 교대로 나타난다는 얘기이다. 거대한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지는 저런 멋진 풍경을 조물주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 천혜의 비경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암벽산행에 익숙한 소수의 사람들만 찾을 수 있었다. 험한 산행코스 탓에 일반인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던 셈이다. 그러던 곳이 이젠 명품 탐방로로 바뀌었다. 돌을 쪼아 길을 내었는가 하면, 밧줄에 의지해 올라야만 했던 바위벼랑에는 길고 가파르게 나무계단을 놓았다. 그마저도 힘들었던지 몸을 틀어가면서 위로 향하고 있다.

▼ 길고 긴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베틀바위 전망대(이정표 : 베틀바위↑ 0.2㎞/ 베틀바위 전망대→/ 매표소↓ 1.4㎞)’이다. 100미터도 넘어 보이는 바위절벽 위에 걸터앉은 전망대로, 탐방객들은 이곳에서 기암괴석들이 만들어내는 절경을 마주하며 다시 한 번 탄복하게 된다. 산행을 시작했던 제2주차장에서 이곳까지는 정확히 1시간이 걸렸다.

▼ 데크로 만든 전망대에는 안내판을 세워 베틀바위의 내력을 알려주고 있었다. 암릉의 전체적인 생김새가 베틀을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산악인들 사이에는 ‘베틀 릿지’, 천하비경 장가계(張家界). 동해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린다는 얘기와 함께 ‘옛날 하늘나라의 질서를 어겨 벌을 받던 선녀가 승천을 위해 삼베 세 필을 짜던 곳’이라는 전설도 적어 넣었다.

▼ 전망대에 서면 베틀바위의 전모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경관의 규모가 워낙 큰 데다 입체적이기까지 해서 장엄하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100m도 넘어 보이는 까마득한 높이의 석벽에는 닭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의 바위에서부터 사람의 형상을 닮은 바위에 이르기까지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수없이 늘어섰다. 그 바위들 사이사이에는 붉은 둥치의 당당한 금강송이 들어앉았다. 그리고는 묽은 먹색이 번지는 그림을 그려낸다. 굵은 붓으로 찍어 그린 수묵화처럼 말이다.

▼ ‘베틀바위’는 창검처럼 솟은 바위에다 수직의 벼랑이 어우러져 두타산에서 가장 압도적이면서 기이한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다. 두타산의 계곡이 ‘무릉도원’이라면, 안내판의 문구처럼 두타산의 베틀바위는 ‘장가계’나 황산(黄山)에 비유할 만하다. 과연 내가 우리나라에 있는지가 실감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옛 선비들의 탐방기에는 베틀바위에 대한 얘기는 단 한 줄도 없다고 한다.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거칠고 험한 길 너머의 풍경이어서 그랬으리라.

▼ 전망대 가운데로 비집고 들어선 바위의 기이한 생김새에 끌려 카메라에 담아봤다. 두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게 영락없는 당간지주(幢竿支柱)이다. 요 아래에 있는 삼화사에서 설법이나 법회를 하면서 저 바위에 깃대(幢竿)를 꽂았다는 스토리텔링을 해놓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얘기이다.

▼ 그림 속에 빠져 있다가 빠져나오니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기다린다. 그 길을 오르다가 문득 뒤돌아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무릉도원처럼 혹여 이곳도 나가면 다시 찾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나 감히 발을 들일 수 없던 곳이 바로 ‘베틀바위’였으니 말이다. 입구를 찾지 못한다는 진짜 무릉도원처럼.

▼ 가파른 오르막길의 끄트머리,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미륵바위를 만날 수 있었다. 전망대에서 15분 남짓 되는 지점이다. 산 아래 풍경을 굽어보는 자리에 누가 일부러 세운 듯이 서있는 미륵바위는 등을 돌린 미륵의 형상을 쏙 빼다 닮았다. 안내판에는 미륵봉 능선에 위치한 이 바위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미륵불과 선비, 부엉이 등으로 나타난다고 적혀 있었다.

▼ 미륵바위에서 20m쯤 더 나아가자 두타산 최고의 자연 전망대가 나타난다. 천애의 절벽 위로 올라서면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무릉도원이 발아래에 깔려있고, 그 너머로는 동해의 만경창파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정표(미륵바위/ 두타산성 0.7㎞/ 매표소 1.7㎞)가 가리키는 두타산성 방향임은 물론이다. 이어서 상당히 완만해진 능선을 따라 5분 정도 걷자 삼거리가 나온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능선을 벗어나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정표(두타산성→ 0.5㎞/ 등산로 아님↑/ 베틀바위전망대↓ 0.3㎞)도 직진방향으로 난 능선길이 등산로가 아니라고 적었다. 하지만 두타산 정상으로 올라가려면 저 능선을 타야만 한다. 또한 우리가 가려고 하는 ‘베틀봉’도 저 능선에 놓여있다.

▼ 베틀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었다. 구들장처럼 넓적하다지만 너덜길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도 계단이나 밧줄난간 등의 인위적인 시설은 전혀 없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구간이 ‘베틀바위 산성길’을 벗어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 이 구간은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아니 길가에 늘어선 금강송(金剛松)은 볼거리로 꼽을 수도 있겠다. 목질이 금강석처럼 단단한 금강송의 본래 이름은 황장목(黃腸木). 속이 노란 황장목은 표피가 붉어서 적송(赤松), 줄기가 매끈하게 뻗었다고 해서 미인송으로도 불린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에겐 유난히 친근한 나무다. 금줄에 솔가지를 매달고 태어나 송기를 벗겨 먹으며 허기를 때웠고, 송홧가루로는 술이나 떡을 빚는 등 낭만을 부리기도 했다. 솔가리와 장작으로는 밥을 지었고, 늙어 죽으면 소나무 관에 드러누워 다시 소나무가 지켜주는 산에 묻히는 게 우리네 삶이었다.

▼ ‘베틀바위 산성길’을 벗어나고 40분이 지나서야 ‘베틀봉’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가파르고 힘든 구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고생 끝에 올라선 베틀봉 정상은 텅 비어있다는 느낌이었다. 정상석이 보이지 않아서일 것이다. 삼각점(삼척 402)과 이정표(무릉계 3.2㎞)가 세워져 있지만 이게 어디 정상석만이야 하겠는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느 산꾼이 정상판을 매달아 놓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사방이 숲으로 가려있어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누군가 쌓아올린 자그만 돌탑마저 없었더라면 사진 한 장 제대로 건지지도 못할 뻔했다.

▼ 이젠 하산할 차례이다. 이정표가 유일하게 가리키고 있는 ‘무릉계(3.2㎞)’ 방향인데 올라왔던 만큼 내려와야 하니 가파를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는 ‘두타산성(頭陀山城)’의 성터로 보이는 돌무더기 위를 걷기도 했다. 동·서·남·북에 장대(將臺)가 있었다는 외성(外城)의 일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밖에도 내성(內城)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대궐터(大闕址)’도 있다고 한다. 아니 몽골의 침입 때 이곳으로 피난했다는 이성계의 고조부를 ‘목조(穆祖)’로 추존했으니 그가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 그렇게 15분 정도를 내려서자 아까 베틀봉으로 올라가면서 헤어졌던 ‘베틀바위 산성길(이정표 : 수도골← 1.3㎞/ 베틀바위→ 0.7㎞/ 등산로 아님↓)과 다시 만난다. 이어서 14분 후에는 두타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갈림길(이정표 : 두타산← 3.6㎞/ 두타산성↑ 0.5㎞/ 베틀바위↓)을 스치듯 지나간다.

▼ 가을이 무르익었는지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풍경이 자주 눈에 띈다. 하긴 찬이슬이 내리기 시작한다는 한로(寒露)가 어제였으니 이를 말이겠는가.

▼ 5분쯤 더 내려왔을까 ‘산성12폭포’를 가리키는 이정표(산성12폭포←, 거북바위/ 베틀바위전망대↓ 1.2㎞)가 나온다. 이어서 지시하는 방향으로 10m쯤 더 들어가자 자연 전망대가 나오면서 베틀바위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거북바위’이다. 거대한 바위벼랑 위를 거북이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는 것이다.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 영락없이 살아있는 거북이다.

▼ 가까이 다가가자 거북이가 자신의 몸집을 성큼 부풀린다. 마치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처럼 말이다. 대신 넘치던 생동감은 사라지고 화석처럼 굳어져버렸다. 세상에는 완벽함이란 없는 모양이다.

▼ 근처에는 거북바위 말고도 볼거리들이 참 많았다. 절벽에 들어앉은 바위들이 하나같이 기괴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외 갤러리인 듯 이곳에서는 고사목 하나조차도 작품이 된다.

▼ 거북바위 아래로 다가가자 ‘산성12폭포’가 성큼 다가온다. 이름 그대로 12개의 폭포가 연이어 쏟아져 내리는 엄청난 폭포지대다. 폭포의 맨 위는 하늘금. 얼마나 길던지 맨 아래에 있을 소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폭포 하나의 길이를 10m로만 잡는다고 해도 120m는 족히 넘을 것 같다. 다만 수량이 적다는 것이 조그만 흠이지만, 장마철에 찾아온다면 숨 막히는 장관을 볼 수 있을 테니 이 또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 건너편 바위벼랑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어찌 보면 큰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것 같기도 하다. 문득 미공개 구간인 C구간(12산성폭포↔박달계곡)의 탐방로를 저 절벽의 허리쯤으로 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태항산 등 중국의 유명산들을 돌아다니면서 느껴왔던 바램이다. 제비집처럼 절벽에 매달아 놓은 잔도(棧道), 생각만 해도 스릴 넘치지 않는가.

▼ 탐방로로 되돌아와 몇 걸음 더 걸으니 바위 끄트머리에 밧줄난간이 쳐져 있다. 바위절벽이니 더 이상 가지 말라는 금줄이다. 하지만 산성터가 내려다보이는 멋진 조망대이니 잠시 머물다가도 좋을 일이다.

▼ 이어서 잠시 후에는 두타산성(일명 문지방산성)에 내려선다. 빤질빤질 무던히도 밟았을 문지방. 난(亂)을 피해 올라온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싸우다 산화한 의병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이 산성을 처음 쌓은 것은 파사왕 23년(102)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목조대왕(이성계의 4대 조부)이 몽고군의 침입 때 삼척읍민을 데리고 ‘두타산성’으로 피난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414년(태종 14년) 삼척부사 김맹손(金孟孫)이 높이 1.5m에 둘레 2.5km로 다시 쌓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 최원흘(崔元屹)을 중심으로 한 젊은 의병들이 이곳에서 왜병을 전멸시키기도 했단다. 하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희미하다. 바위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부분적으로 석축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마저도 산돌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약간 다듬어 사용했을 테니 온전히 남아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 두타산성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등산객들에게는 경관 좋은 곳이 최고다. 그런 장소가 바로 이곳 문지방산성이다. 깎아지른 암벽과 노송이 연출하는 비경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나홀로 소나무’가 아닐까 싶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바위틈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거기다 세월이 선물한 훈장이라도 되는 듯 생김새까지 자못 빼어나다.

▼ 소나무 뒷면으로 보이는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깎아지른 암벽과 신령한 기운이 깃든 홍송(紅松)이 연출하는 비경은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참! 요것조것 살펴보기는 했는데 ‘백곰바위’는 눈에 담지 못했다. 백곰의 돌아선 뒷모습을 쏙 빼다 닮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행을 나서기 전에 미리 알아봐두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할 일이다.

▼ 산성터에서 내려오는 길도 여간 가파른 게 아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베틀바위 산성길’을 새로 내면서 기존 등산로를 깔끔하게 정비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내려오니 ‘무릉계곡’이다. 이정표(용추폭포↑ 1㎞/ 무릉계곡 관리사무소→ 1.6㎞/ 두타산성↓ 0.5㎞)는 무릉계곡을 대표하는 볼거리인 쌍폭포와 용추폭포가 왼편에 있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우린 주차장으로 향했다. 예전에 둘러본 곳이기도 하지만, 함께 산행을 한 친구 형우군이 그럴 시간에 소주나 한잔 더 하자고 권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를 피해 횡성 별장에서 숨어살다 보니 속세의 이야기가 많이 그리웠나 보다.

▼ 탐방로는 이제 무릉계곡을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커다란 바위들이 널려 있는 암반(巖盤)위로 두타산과 청옥산에서 발원한 무공해 물이 흐르는 명품 계곡이다. 이 물은 층층이 쌓여진 계단을 만나면 선녀의 모시처럼 투명하게 흐른다. 또 어떤 곳에서는 작은 소(沼)와 담(潭)를 이루기도 한다. 사람들이 이곳을 ‘무릉도원’에 비유해 ‘무릉계곡’이라 부르며 명승지로 분류하는 이유이다. 참고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중국 송나라 때 시인 도연명의 소설 ‘도화원기(桃花源記)’에는 나오는 지명이다. 강에서 고기를 잡던 한 어부가 복숭아꽃을 따라가다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됐고 그곳에서 만났다는 지상낙원의 땅이다. 동굴 밖으로 나온 뒤에는 다시 찾을 수 없었다는, 천국과도 같은 이상향의 땅. 전국의 명승 곳곳에 보이는 ‘무릉(武陵)’의 지명은 모두 여기서 따왔다.

▼ 내려오는 길, 웅성거리는 소리를 따라 왼편 산자락으로 오르니 ‘학소대(鶴巢臺)’가 있다. 오랜 옛날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곳이다. 하지만 <시원한 곳에 배를 띄우니 학(鶴) 떠난 대(臺)는 이미 비었네, 높은데 올라 세상사 바라보니 가버린 자 이와 같아 슬픔을 견디나니>라고 읊었던 무릉거사 최윤상(崔潤祥, 1810-1853)의 ‘무릉구곡가(武陵九曲歌)’처럼 바위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따름이다. 아니 그가 보았을 물줄기까지 이젠 메말랐으니 오히려 삭막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 계곡을 따라 25분쯤 내려오자 삼화사(三和寺)에 이른다. 지위는 비록 월정사의 말사에 불과하지만 천년고찰답게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문화재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절간이다. 주법당인 적광전을 비롯하여 극락전, 약사전, 비로전 등 18개 전각이 서 있으며, 보물 제1277호인 삼화사 삼층석탑, 보물 제1292호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등과, 국가무형문화재 제125호인 ‘삼화사 수륙재’ 등 주요 문화재가 보존 또는 전수되고 있다. 하지만 무슨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듯 경내가 하도 어수선해 사진을 찍기도 힘들었다. 참고로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2년, 자장율사가 ‘흑련대’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이후 864년에 범일국사가 '삼공암'이라고 개명했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원찰로 지정되었다. 왕건은 이곳에서 후삼국 통일을 간절히 발원했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자 국민들의 갈등을 풀고 화합시키려는 뜻에서 '삼화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 삼화사에서 내려오는 길가의 계곡은 ‘용오름 길’이라고도 불린다. 삼화동 초입에서 용추폭포에 이르는 길이 6㎞의 무릉계곡을 이르는 말인데, 전설에 의하면 약사삼불을 실은 용이 저 계곡을 따라서 두타산으로 올랐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품고 있는 용오름 길, 즉 무릉계곡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그 계곡은 두타산에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타(頭陀)’라는 이름보다 산이 품고 있는 ‘무릉’이라는 계곡에 더 익숙하다. 두타산을 ‘금강산에 이은 두 번째’라고 옛 선비들이 평가했던 것도 다 무릉계곡 일대의 경관을 높이 친 결과였다.

▼ 용오름 길에 있는 ‘무릉반석(武陵磐石)’으로 내려가 봤다. 양사언이 새겼다는 각자를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5천㎡나 된다는 넓은 바위에는 자신의 허울 좋은 이름을 드러내려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낙서들뿐이었다. 심지어는 부백(府伯), 찰방(察訪), 토포사(討捕使) 등 자신의 관직까지 적어놓은 조선시대 놈들도 있었다. 아무튼 저 반석에는 줄잡아 850여 명에 이르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무릉의 선계에다 이름이나마 두고 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 무릉반석 근처 천변에는 금란정(金蘭亭)이 들어서 있었다. 이 고장 선비들의 모임인 금란계(金蘭契)의 뜻을 기리고자 세운 정자라고 한다. 광무 7년(1903) 유림제생들이 향교 명륜당에 모여 금란계를 만들어 한일합방 국치에 울분을 달래며 정각을 건립하고자 했으나 일본관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해방 이후 당시 서생계원과 자손들이 선인의 뜻을 이어받아 지었다는 것이다. 정자에는 화가 심지황(沈之潢1888∼1964)이 쓴 현판 외에도 최중희(崔中熙,1895-1990)가 초서로 쓴 '관동기관(關東奇觀)'이란 액자도 걸려있었다. 금란정이 강릉지역의 기이한 볼거리라는 얘기일 것이다.

▼ 조선조 4대 명필인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썼다는 석각(石刻)은 길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관광객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모조품인데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라고 새겨져 있다. ’신선이 놀던 무릉도원, 너른 암반과 샘이 솟는 바위, 번뇌조차 먼지처럼 사라져버린 골짜기‘라니 능히 신선이 놀다 갈만한 장소가 아니겠는가. 석각의 하단에는 ‘옥호거사서신미(玉壺居士書辛未)’라는 문구도 보였다. 신미년에 옥호거사가 썼다는 뜻이다. 이는 1750년에 삼척부사로 와서 2년 동안 있었던 옥호자 정하언(玉壺子 鄭夏彦)이 쓴 글씨라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정하언은 ‘어제 편제(御製 扁額)’와 창경궁 편액(扁額)을 썼을 정도로 글씨가 뛰어났다. 또한 '옥호거사서신미'라는 7자에서 신미년은 정하언 부사의 재임기간인 1751년과 일치하고 있다. 참고로 양사언이 강릉부사로 왔던 때도 신미년(1571년)이며, 전임 부사인 정두형의 상(喪)을 조문하기 위해 무릉계에 인접한 비천동을 다녀갔다는 기록도 있다.

▼ 산행 날머리는 제3주차장

무릉반석을 빠져나오면 잠시 후 매표소가 나오고, 이어서 1·2주차장을 거치면 산행이 종료되는 제3주차장에 이른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20분이 걸렸다. 산행거리가 7㎞ 남짓인 점을 감안하면 속도가 더디었던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래 사진은 금란정 근처에 있는 ‘최인희(崔寅熙, 1926~1958)’의 시비(詩碑)이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 고장 출신 시인인데 그의 대표 시(詩) 낙조(落照)가 새겨져 있었다. ‘골 따라 산길 더듬어 오르면 더불어 벗할 친구도 없고’로 시작되는 그의 시와는 달리, 오늘 난 천년만년 함께 지내고 싶은 집사람에 더해 오래 묵은 친구까지 함께 산길을 걷고 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 에필로그(epilogue), 우리나라에는 ‘무릉(武陵)’이란 이름의 명소가 꽤 많다. 하지만 도연명의 무릉도원 같은 지상낙원까지는 못 된다 해도 그에 견줄만한 경치는 단연 동해시의 명승인 ‘무릉계(武陵溪)’가 아닐까 싶다. 두타산과 청옥산 사이에 V자로 깊이 파낸 칼자국 같은 4㎞ 남짓의 긴 계곡. 그곳이 ‘무릉계’다. 무릉계곡은 계곡 전체가 굵은 붓으로 먹을 듬뿍 찍어서 그려낸 듯 신비롭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두타산 무릉계곡을 ‘선계(仙界)’, 그러니까 ‘신선의 세상’에다 비유했다.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감히 뛰어넘었다는 얘기이다. 1977년 무릉계곡이 ‘국민관광지 1호’로 지정된 이유다.

금병산(金屛山, 652m)

 

산 행 일 : ‘20. 8. 29()

소 재 지 :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과 동내면, 동산면의 경계

산행코스 : 김유정역전원주택단지금병산 입구산신각약수터주능선정상김유정문학촌김유정역(소요시간 : 3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대룡산(899m)에서 이어져온 능선이 원창고개에서 잠시 가라앉았다가 다시 일어난 봉우리로 높이가 700m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지막한 산이다. 거기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보니 가슴에 담아둘만한 풍경은 전혀 없다. 정상에서의 조망이 그나마 위안이랄까? 그런데도 금병산을 찾는 사람들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단다. 이는 김유정이 태어나고 자랐던,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고향 실레마을이 이곳 금병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유정은 1930년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는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토속어와 직설적으로 토해내는 비속어, 갖가지 비유와 풍부한 어휘 등으로 이어지는 정교한 조사법 등 김유정 특유의 문체로 대변된다. 이런 점을 지자체에서 놓쳤을 리가 없다. 김유정의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과 이야기집, 체험방 등을 한데 묶어 김유정 문학촌을 조성했는가 하면 금병산 자락과 실레마을에는 열여섯 마당으로 나누어진 작가와 함께하는 실레마을 이야기길을 개설했다. 그 덕분에 실레마을은 이야기가 복작대는 마을이 됐고 그 이야기들을 찾아 한 해에 수십만 명이 찾아온단다.

 

산행들머리는 김유정역’(춘천시 신동면 김유정로 1435)

기나긴 장마로 인해 실로 오랜만에 산을 찾았다. 거리는 조금 멀지만 이번에도 역시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한 춘천시 소재의 산이다. 산행이 시작되는 김유정역(金裕貞驛)‘까지는 경춘선 전철을 타고 오면 된다. ‘김유정역1939년 경춘선 개통과 함께 신남역(新南驛)’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지역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다. 그러다가 인근 마을에 김유정문학촌이 조성(2002)되면서 역의 이름도 김유정역으로 변경(2004)했다. 한국에서 역 이름이 인물 이름으로 지정된 첫 번째 사례로 꼽힌다. 한옥으로 지어진 현재의 역사(驛舍)2010년 경춘선이 복선화되면서 새로 지어졌다. 대신 옛 역사는 현재 준철도기념물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옛 역사(아래 사진)는 삼각형의 박공(朴工, 팔작지붕이나 맞배지붕에서 양 옆면의 마구리 부분)을 지붕에 돌출시켜 정면 입구를 강조한, 일제 말의 전형적인 역사(驛舍)이다. 신남역(현 김유정역)은 아는 사람들이나 아는 간이역에 불과했다. 작고 한산하던 이 시골역은 1997년에 방영된 MBC 홈드라마 간이역이 인기를 끌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아내를 사별한 아버지와 13녀의 자녀들이 함께 살아가며 겪는 갈등과 사랑, 세대 간 가치관의 충돌과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 등을 담은 이 드라마가 이곳 신남역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빠져나오자 금병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런데 산봉우리가 통째로 구름 속에 잠겨있는 게 아닌가. 높이라고 해봐야 고작 652m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산이 워낙 깊은데다 물기가 많은 지역적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역 앞에서 레일바이크 주차장이 있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강촌역부터 옛 김유정역까지의 경춘선이 지금은 레일바이크 코스로 바뀌었는데, 탐방로는 ‘Rail Park’ 주차장 정문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춘천은 역시 막국수와 닭갈비의 고장, 길가에는 꽤 많은 닭갈비집들이 들어서있다. 그중에는 소설 속 이름들을 인용한 식당들도 여럿 보인다. 우리가 눈여겨보는 메뉴는 숯불’, 닭갈비는 역시 일산화탄소에 쏘여야 제 맛이기 때문이다. 산행이 끝나고 나서 일이지만 나와 최군은 술안주로 삼은 숯불 닭갈비에 푹 빠졌었고, 추가로 시킨 막국수도 집사람의 입맛에 딱 맞았던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비워버렸다.

 

 

산행을 시작한지 7~8분쯤 되었을까 1리 마을회관이 나온다. 23세의 김유정이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와 세운 야학당(夜學堂)이 있던 자리이다. 설립 이듬해에는 금병의숙(錦屛義塾)으로 개칭해 간이학교로 인가받은 다음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주인이 바뀐 터는 지금 김유정 기적비가 남아 옛날 얘기를 전해주고 있다. 1978329일 기일을 맞아 건립됐는데 휘호는 소설가 김동리가 썼다고 한다. 작품 속 인물들이 살던 가옥들은 찾아보지 못했다. 이왕에 왔으니 소설 속 흔적들을 조금이라도 더 훑어봤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준비된 여행자가 되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몇 걸음만 더 걸으니 김유정 실레이야길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현재 위치는 증리(甑里)’, 금병산에 둘러싸인 마을의 모양새가 마치 시루와 같다는데서 유래한 지명이란다. ‘시루 증()’자를 쓰는 이유이다. 그런데 김유정 유적지를 조성하면서 마을 이름을 실레로 돌려놓았다. ‘시루()’의 강원도 사투리가 실레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안내도 앞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오른편으로 향했다. 이정표가 세워지지 않은 걸로 보아 잠시 후에 다시 합쳐질 것 같아서이다.

 

 

실레마을은 김유정의 고향으로 마을 전체가 작품의 무대가 된다. 내용도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기반으로 했다고 알려진다. 이를 바탕으로 금병산 자락과 실레마을에 내놓은 자락길김유정 실레이야길인데, 멀리서 문학기행을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단다. 참고로 실레이야기길은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과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길, 점순이가 를 꼬시던 동백숲길, 덕돌이가 장가가던 신바람길, 산국농장 금병도원길, 춘호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길, 응칠이가 송이 따먹던 송림길, 응오가 자기 논의 벼 훔치던 수아리길, 산신각 가는 산신령길, 도련님이 이쁜이와 만나던 수작골길,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 맹꽁이 우는 덕만이길, 근식이가 자기집 솥 훔치던 한숨길, 금병의숙 느티나무길,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 나오던 데릴사위길, 김유정이 코다리찌개 먹던 주막길 등 재미난 이야기 열여섯 마당과 만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잠시 후 길이 또 다시 나뉜다. 이곳도 역시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았다. 무턱대고 오른편 금병 전원마을로 들어섰다가 마을안길에서 잠시 헷갈리기도 했지만 두 길이 합쳐진다는 주민분의 조언을 받아 계속해서 진행할 수 있었다.

 

 

산행을 시작한지 20, 드디어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금병산 등산로안내도와 국가지점표지판(라사 1929-7903)이 세워져 있었다. 금병산은 수종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흙이 많은 육산이라서 걷기가 편해 사계절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특히 산골나그네길’, ‘만무방길’, ‘금따는 콩밭길’, ‘동백꽃길’, ‘봄봄길 등 김유정의 소설 제목에서 따온 산길을 따라 걷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산자락에 걸쳐놓은 통나무다리를 건너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이 길은 금병산의 등산로이지만 실레이야기길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실레이야기길의 일부 구간이 폐쇄되었음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는가 하면, 이정표(산신각 1.0, 살레이야기길 전망대 1.7/ 김유정역 1.0)도 이름표를 실레이야길로 달고 있었다. 그렇다고 금병산 정상까지의 거리가 3.6라는 것까지 빼먹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들머리에서 저수지로 가는 길이 왼편으로 나뉜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금병산 등산로 가운데 하나인 만무방길로 보이는데, 두 길은 나중에 교차지점에서 다시 만나고 있었다.

 

 

탐방로는 울창한 잣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다. 분위기로 보아 응칠이가 송이 따먹던 송림길로 여겨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응칠이는 1935년에 발표된 만무방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여기서 만무방은 염치가 없이 막돼먹은 사람을 일컫는다. 주인공인 응칠은 부채 때문에 파산을 선언하고 도박과 절도로 전전하며 아우인 응오의 동네로 와서 무위도식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가 닭을 잡아 생으로 뜯어먹으며 송이를 따던 곳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만무방은 김유정 문학 특유의 해학성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농촌의 착취 체제에 내재하는 모순을 겨냥한 작품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 짙은 솔향이 스며있다. 상큼한 내음에 기분까지 한껏 좋아진다. 거기다 길바닥에는 잣송이까지 심심찮게 눈에 띈다. ‘꿩 먹고 알 먹는다는 속담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탐방로는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없다. 거기다 임도처럼 널찍하니 가족끼리 손을 잡고 한가롭게 걷기에 딱 좋겠다. ! 오는 도중에 오솔길 하나가 주능선으로 향해 갈려나가고 있었다. 이 길은 '첫고개''두고개' '새고개'로 넘어가는 길목이며 '·''만무방'의 작품 무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임도처럼 널찍한 실레이야기길을 따랐다. 이왕에 금병산까지 왔는데 어찌 금병산 산신령님을 뵙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산길로 들어선지 15분 만에 금병산의 산신령을 모신다는 산신각(山神閣)’에 도착했다. 이곳 실레마을에서는 수백 년 전부터 산신각을 짓고 진병산(금병산의 옛 이름)의 영험한 산신령을 모셔왔다고 한다. 매년 오월 길일을 잡아 제사도 지내는데, 이때는 술 대신 감주를 젯술로 사용한단다. 산신령이 여신이기 때문이라는데, 우리나라의 산신각 대부분이 남신을 모시는 것을 감안하면 특이하다 하겠다. 그건 그렇고 산신각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1996년 산신각의 코앞에 고압송전탑이 생기면서 마을의 젊은이들이 갑자기 죽어나가는 등 변고가 잇따르자 한전과 협의하여 이곳에 새롭게 산신각을 지었단다.

 

 

아까 지나쳤던 삼거리로 되돌아갈까 하다가 계속해서 실레이야기길(열 번째 마당인 산신각 가는 산신령길이다)’을 타기로 했다. 잠시 후 주능선으로 오르는 또 다른 오솔길을 만나게 되는데 구태여 되돌아갈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들머리에 산악회의 시그널이 매달려 있긴 했지만 웃자란 잡초와 잡목이 등산로를 차지해버려 진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만무방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탐방로에는 체육시설까지 만들어 놓았다. 스트레칭용 외에도 철봉까지, 설치된 운동기구도 다양했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시설인지는 모르겠다. 동네 주민들이 이용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외지에서 온 탐방객들에게는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이미 몸이 풀려있을 텐데 또 다시 운동기구에 매달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상의 높이가 652m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인데도 주변 풍경은 깊은 산중을 연상시킨다. 원시의 숲을 떠올릴 정도로 숲이 울창한 것이 원인일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집사람과 논쟁이 시작됐다. 주제는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버섯의 식용 여부. 그리고 이 논쟁은 산행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종류도 다양한 버섯들이 길가에서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숲이 깊은데다 장마철 습기가 생육에 도움을 주었지 싶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탐방로는 계곡으로 들어선다. 개울 수준이지만 수량(水量)은 제법 많은 편이다. 거기다 맑고 차갑기까지 하다. 계곡이 긴데다 숲까지 울창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 계곡의 이름은 '물골'. 김유정의 작품 '산골'''의 무대라고 한다. 골짜기 위쪽에 주인공 근식이의 집이 있었단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계곡을 따른다. 계곡의 가장자리를 따르다가 또 어떤 곳에서는 개울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덕분에 물길이 만들어놓은 작은 폭포와 소()를 여럿 만나게 된다. 눈요깃거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금병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간이라 하겠다.

 

 

 

산신각을 출발한지 35분 만에 쉼터에 도착했다. 탐방로는 요 아래에서 개울과 헤어졌다. 이제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는 예고가 아닐까 싶다.

 

 

장의자 앞의 돌무더기에는 플라스틱 호스가 꽂혀있었다. 제법 많은 양의 물도 흘러나온다. 두 손으로 받아 마셔보니 청량한 게 물맛까지 좋았다. 그냥 쉬어만 갈게 아니라 목까지 축이라는 배려용 약수터인 모양이다. 하지만 바가지 하나쯤 놓아두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불행이도 내 예감은 적중했다. 산길이 가팔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만무방길을 통틀어 가장 힘든 구간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른 산에 비하면 이 정도는 가파른 축에 끼지도 못할 테니까 말이다.

 

 

가팔라진 오르막길은 10분이 채 안되어 끝났다. 그리곤 어디로 갈지를 놓고 고민하게 만드는 삼거리에 데려다 놓는다. 이정표(금병산 정상1.32/ 금병산 정상1.0/ 저수지)가 세워져 있는데 양쪽 길이 모두 금병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들머리에서 본 지도에는 이 길이 동백꽃길로 연결되는 금따는 콩밭길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왼편에 표기된 거리표시는 얼토당토않게 된다. 고민 끝에 오른편으로 진행했던 이유이다.

 

 

이제 탐방로는 산비탈을 옆으로 째며 이어진다. 덕분에 경사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지능선을 만나면서는 약간 가팔라지기도 했다.

 

 

금따는 콩밭길을 따라 22분쯤 걸었을까 삼거리가 나온다. 아니 지도에는 이곳을 사거리로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정표(금병산 정상/ 저수지/ 김유정역)는 세 방향뿐이다. 방향표시도 약간 헷갈린다. 저수지는 지나가지도 않는 방향(‘산골나그네길일 것이다)에다 저수지라고 적어놓은 것이다. 우리가 올라왔던 방향은 김유정역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계속해서 오르막길이다. 하지만 버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대부분이 완만한데다 가파른 곳에는 통나무계단을 놓는 등 오르내리는 이들을 배려한 덕분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살펴보더니 연리목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집사람도 역시 여자였던 것이다. ‘사랑에 목을 매는 그런 여자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 그녀의 말대로 사랑의 메신저(messenger)라는 연리목(連理木)을 빼다 닮았다. 원래 연리목이란 뿌리가 다른 나무의 줄기가 맞닿아 한 나무줄기로 합쳐져 자라는 현상을 일컫는데, 이 정도의 생김새라면 연리목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 싶다. 참고로 연리지(또는 )의 고사(故事)는 후한 말(後漢 末)의 대학자 채옹(蔡邕)에서 유래됐다. 효성이 지긋하기로 소문난 채옹은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3년 동안을 옷도 벗지 않은 채로 간병을 했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에는 100일 동안이나 잠자리에 들지도 않고 보살폈으나 끝내 돌아가셨다. 그 후 옹의 집 앞에 나무 두 그루가 싹이 나더니 점점 자라면서 가지가 서로 붙더니 마침내는 한 그루처럼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리지라는 단어는 원래 효심(孝心)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다정한 연인(戀人)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당()나라 시인(詩人) 백락천(白樂天)에 의해서다. 백락천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한가(長恨歌)라는 장대한 서사시로 읊었다. 그는 당현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장한가의 끝 구절이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맹세,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선 연리지가 되자고 간곡히 하신 말씀,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은 차라리 끝간 데가 있을지라도,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님을 사모하는 이 마음의 한은 끝이 없으리다.>

 

 

연리목에 대한 애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덧 헬기장이다. 시야가 열리는 곳에 평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으나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먼저 온 사람들이 이미 네 명이나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한답시고 단체 트레킹까지 포기하고 개인 산행을 왔는데 일부러 이를 어길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참고로 이곳은 조망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구름이 짙게 낀 오늘은 예외이지만, 날씨가 좋으면 북동쪽으로 대룡산이 보이고, 동으로는 응봉, 응봉에서 시계바늘 방향인 남동쪽 홍천 방면으로는 연엽산, 구절산, 성치산이 연이어 시야에 들어온다. 응봉과 구절산을 잇는 능선 너머로는 홍천 공작산도 시야에 와 닿는다.

 

 

두루뭉술한 모양새의 정상(이정표 : 김유정문학촌 3.81/ 원창고개 2,57/ 김유정역 4.35)은 전망대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낭만의 도시 춘천의 전망대라던 어느 기자의 말처럼 이곳 금병산의 가장 큰 장점인 빼어난 조망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시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을 부각이라도 시키려는지 데크에는 조망도까지 세워놓았다. 사진으로 보는 춘천시가지는 펀치볼(인제군 해안분지)을 닮았을 정도로 둥그렇게 산이 에워싸고 있다. 그 분지의 북쪽을 소양강이 뚫고 지나간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사방이 어둑해질 정도로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다른 이의 글을 빌어 올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북쪽으로 춘천시내 잼버리도로가, 봉의산, 의암호반, 용화산, 오봉산, 부용산 그리고 종류산이 또렷하다. 북동쪽 저 멀리 중앙고속도로 위로 금병산의 모산 대룡산이 자리하였다. 남동쪽에 연엽산, 구설산이 남쪽으로는 금확산, 쇠뿔봉산릉이 아련하고, 남서쪽에 좌방산, 종자산, 널미재, 장락산 그리고 저 멀리 용문산도 보인다. 서쪽엔 소주봉, 봉화산, 검봉이 머리를 내밀고 북서쪽에 삼악산이 보이는가 했더니 그 오른쪽에는 계관산, 북배산, 가덕산이 존재를 내밀고 화악산이 기운차게 일어섰다.>

 

 

정상석은 데크 전망대의 아래 한쪽 귀퉁이에 세워져 있다. 금병산의 원래 이름은 진병산(陳兵山)’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강원도 조방장 원호가 이곳에 진을 쳤는가 하면, 일제 침략기 때는 의병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진을 쳤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그러다가 김유정이 소설에서 금병산(金屛山)’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지명이 바뀌었단다. 가을이면 그 산기슭이 황금빛 병풍을 둘러친 듯 아름답다면서 말이다

 

 

 

이제 산을 내려갈 차례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김유정 문학촌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능선을 따라 나있는 이 길은 동백꽃길이다. 여기서 말하는 동백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동백(冬柏)이 아니고, 봄이면 잎이 나오기 전 노란 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를 이른다. 김유정이 그의 작품에서 생강나무 꽃을 강원도 사투리인 동백꽃으로 풀어놓으면서 등산로의 이름으로까지 굳어졌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길가에는 생강나무가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동백나무는 씨알조차 찾아볼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 정상에서 동쪽 능선을 타는 길은 원창고개로 내려서는 봄봄길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동백꽃길구간은 그나마 볼거리가 있었다. 노송이 군락을 이루는 구간이 있는가 하면, 거대하진 않지만 북사면이 절벽을 이룬 바위지대도 나온다. 최군의 말로는 나뭇가지 사이로 서쪽 삼악산이 보인다고 했다. 북으로는 실낱처럼 이어지는 46번 국도와 춘천 시내 일부도 보인단다. 하지만 구름에 쌓여있어 눈짐작으로만 헤아려볼 수 있었다. 아무튼 잠시 쉬어가기 딱 좋을 장소였다. 또한 금병산 제일의 포토죤으로 손색이 없었다.

 

 

 

하산길은 경사가 꽤 가팔랐다. 아니 내려서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이 가팔랐다. 하지만 걱정은 금물이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통나무계단을 놓거나 밧줄난간을 매어놓았으니 이를 의지하면 된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서자 쉼터를 겸하고 있는 삼거리(이정표 : 김유정 문학촌2.21/ 1리 저수지/ 금병산 정상1.6)가 나온다. 곧장 직진하면 산행을 시작하면서 거론했던 저수지를 거쳐 김유정역으로 가게 되고, 김유정문학촌으로 연결되는 동백꽃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살짝 방향을 틀면서 이어진다. 이정표의 지도에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갈려나가는 금따는 콩밭길도 그려 넣었다. 하지만 점선이다. 핵심 등산로는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부쩍 완만해진 잣나무 숲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오자 운동기구 몇 점과 함께 쉼터용 정자가 지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김유정 문학의 현장이라고 적힌 빗돌이 유독 눈길을 끈다. 지금 걷고 있는 구간이 김유정 작가가 산책하며 작품을 구상하던 실레마을 이야기길이라는 것이다. 농민들의 곤궁한 삶을 향토적 해학으로 소설화했던 김유정이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금 따는 콩밭, 만무방, 봄봄, 동백꽃 등 주옥같은 소설 30여 점을 남겼다는 내용도 함께 적고 있었다.

 

 

책처럼 생긴 안내판도 보인다. 작가와 함께하는 실레이야기길의 첫 번째 마당,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이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들병장수라고도 불리는 들병이는 병에 술을 담아가지고 다니면서 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들병이들이 인제, 홍천으로 넘나드는 이 산길을 통해서 마을로 들어와 잠시 머물다가 떠났다는 것이다. 그들이 머물다 떠난 자리에는 이야기가 쌓였고, 김유정은 그 이야기들을 해학적인 표현을 곁들여가며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안해, 소낙비, 솟 등의 작품에다 풀어놓았다.

 

 

쉼터를 지났다싶으면 시야가 열리면서 실레마을(증리)’이 눈에 들어온다. 산행이 대충 끝났다는 얘기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책과 인쇄 박물관이 길손을 맞는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총 3층 규모의 전시실을 둘러보며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배우고, 고서부터 근현대 문학, 신문, 잡지, 교과서를 아우르는 폭넓은 장르의 책들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각종 기계의 시연과 함께 체험도 해볼 수 있단다. 누군가는 이 세상 모든 책들이 각각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만든 인쇄공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꿈꿔왔던 사람들의 영혼이 깃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박물관은 그런 영혼이 깃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박물관을 지나 마을안길로 들어선다. 실레마을은 김유정이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가 생을 마감했던 고향이다. 그리니 금병산은 고향 뒷산이 된다. 이 둘은 모두 1930년대 주옥같은 소설을 남긴 김유정의 작품 소재가 된다. 잣나무 숲 뒤쪽은 동백꽃의 실존 배경이고, 마을 한가운데 잣나무 숲 속에는 봄봄의 실존인물인 봉필이 영감집이 있다. 김유정의 간이학교 금병의숙과 김유정이 꼬다리찌개로 술을 마시던 주막터도 있다. 이렇듯 점순이와 덕돌이, 덕만이, 뭉태, 춘호, 근식이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실레마을이다. 춘천시에서는 이런 사연들을 주워 모아 열여섯 마당의 실레마을 이야기길을 만들었고, 금병산 산길은 김유정의 소설 제목으로 이름을 삼아 한발 한발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데크로드 등 잘 닦인 탐방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오면 김유정 문학촌이 나온다.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30분 만이다. 이곳은 2002년에 문을 연 김유정 유적지문학진흥법에 따라 등록된 강원도 최초의 문학관이기도 하다. 4,528의 부지 위에 김유정 생가와 기념전시관, 디딜방아간, 외양간, 휴게정 등이 들어서 있다. 문학촌의 입장료는 성인 기준 2천원, 김유정의 생가와 기념관, 그리고 길 건너에 따로 지어놓은 김유정 이야기집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는데 문학관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쉽지만 코로나19 때문이라니 어쩌겠는가.

 

 

담장 너머에는 생가가 복원되어 있었다. ‘자 모양의 초가집이지만 산골마을 치고는 그 규모가 제법 크다. 거기다 디딜방아와 외양간까지 별채로 두었을 정도라면 인근에서 부잣집이란 소릴 충분히 들었을 것 같다. 생가 옆에는 기와집 한 채가 커다랗게 지어져 있었다. 김유정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김유정기념관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무척 눈에 거슬린다. 생가보다도 훨씬 크게 지은 것도 문제인데, 거기다 생가에 바싹 붙여놓아 주인공을 더욱 왜소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아무튼 저 안에는 족보, 호적등초본, 학적부를 비롯하여 31편의 소설과 수필 서간문 등이 발표된 각종 문학지와 잡지의 영인본, 김유정이 참여해 활동했던 '구인회' 동인 및 그가 사랑했던 여인 판소리 명창 박록주에 관한 자료, 김유정을 테마로 한 작품, 김유정 연구 책 논문 등이 전시돼 있다고 한다.

 

 

생가 건너편은 민속마을처럼 꾸며 놓았다. 사무실과 세미나실이 들어있는 관리동을 중심으로 김유정 이야기집과 네 동의 민속공예체험방, 야외공연장, 이야기 쉼터, 매점&식당 등이 들어서 있다. 생가와 기념관에 이 건물들을 더해 김유정 문학촌이라 하는가 보다. 마을 앞에 심어놓은 수크렁(Pennisetum alopecuroides)도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영국의 소설가 에밀리 브란테가 지은 폭풍의 언덕을 떠올릴 정도는 아니지만 허리춤에 닿을 정도로 웃자란 수크렁이 바람 따라 춤을 추며 물결무늬를 만들어내는 게 흔한 풍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학촌에는 김유정의 연보와 함께 1936년에 발표된 동백꽃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농촌을 배경으로 마름의 딸과 소작인 아들의 풋풋한 애정을 해학적으로 그려 낸 작품으로, 토속어와 향토적인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서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고 평가 받는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동백꽃'은 동백나무의 붉은 꽃이 아니라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라고 한다. 소설에서는 세상에는 없는 노란 동백꽃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김유정의 고향인 춘천에서는 생강나무를 두고 동백나무라 부른다. 당시 생강나무는 지금과 달리 영양이 좋지 않은 탓에 가지가 축 처져서 그늘을 만들기에 좋았다고 한다. 소설 속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라는 표현은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밖에도 봄봄에 대한 내용도 곁눈질로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봄봄, 동백꽃 등 김유정의 작품에 나오는 줄거리를 형상화한 조형물들도 여럿 보인다. 아래 사진은 ()’의 마지막 장면을 재현한 조형물이다. 들병이와 바람이 나서 집안 재산목록 1호인 솥단지를 훔쳐온 근식이와 솥을 찾으러 달려온 아내, 그리고 아기를 업은 들병이와 근식이가 가져온 솥과 맷돌, 함지박, 보따리를 지게에 진 들병이의 남편을 실감나게 형상화했다. 참고로 1935년 매일신보에 발표된 단편소설 깨숙이라는 들병이가 등장한다. 일제 식민지 후기의 들병이들은 시골 주막을 돌아다니며 술과 함께 몸까지 팔아 가족(남편, 아기)들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에필로그(epilogue) : 춘천시 실레마을에서 태어난 김유정(金裕貞, 1908-1937)의 어릴 적 아명은 멱설이었다고 한다. 멱서리란 짚으로 날을 촘촘하게 걸어서 볏섬 크기로 엮어 만든 그릇을 말하는데, 그 멱서리 속에 곡식을 그득 담듯 재산을 많이 모으라는 뜻이었다. 어린 멱설은 일곱 살과 아홉 살에 연이어 부모를 여의었지만 열두 살 되던 해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추측컨대, 이때가 그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건 그렇고 1930년대 문학의 축복이라 불리는 김유정은 30년도 채 못 채운 29의 나이에 30여 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3명의 여인을 사랑했지만 하나도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먼저 사랑했던 여인은 어머니, 하지만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그 슬픔을 자전적 소설 '생의 반려' 속에다 잘 그려 넣었다. 그리고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 첫사랑 박녹주(당대의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를 만났다. 하지만 그의 애절한 마음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박녹주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김유정은 실의에 빠지게 되고,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돌아와 나이 많은 들병이들과 같이 어울리며, 마을 사람들과 정을 나눈다. 그런 고향을 배경으로 '봄봄', '',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12편의 작품이 탄생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사랑한 박봉주(시인 박용철의 동생으로 평론가였던 김환태와 결혼했다)도 끝내 짝사랑으로 끝나고 만다. 극한 가난과 질병,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특유의 웃음과 해학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 속에서 웃음뿐만 아니라 애잔한 그의 삶 또한 느껴지는 이유이다.

백적산(白積山, 1141.2m)

 

산행일 : ‘18. 6. 12()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과 용평면, 진부면의 경계

산행코스 : 모리재 터널모릿재8909781040백적산서북능선 삼거리묘련원주·강릉철도 평창터널 진입로 앞(산행시간 : 3시간40)

 

함께한 산악회 : 갤러리 산악회

 

특징 : 평창군의 용평·대화·진부 등 3개 면의 경계에 정수리를 둔 듬직한 산으로 백두대간이 오대산에서 서쪽으로 곁가지를 내려 남한에서 다섯 번째 높은 계방산(1577m)을 밀어 올리고 이 계방산의 1462봉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정남 방향으로 약 50리를 달려 오랜 산고 끝에 백적산을 낳았다. 이 산줄기는 계속해서 잠두산과 백석산, 중왕산, 가리왕산, 청옥산 등 기라성 같은 명산들을 탄생시킨다. 이렇듯 소중한 백적산이건만 강원도 오지(奧地)의 땅에 위치한 탓에 아직까지도 입소문을 타지 못했다. 찾는 이가 무척 드문 이유이다. 산세는 후덕한 몸매를 지닌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그러나 정상 어림에는 바위지대도 섞여있다. 그 바위들이 석영과 석회석이 혼합된 흰색이라고 해서 백적산또는 흰적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 할 산으로 꼽고 싶다. 다만 이때 산행코스는 이목정리를 기점으로 삼을 것을 권한다. 이목정 마을회관에서 시작해서 정상을 찍고 난 다음, 내려올 때는 괴롭재에서 굴암사로 하산하거나, 체력이 남았을 경우에는 괴발산까지 들른 후 무당봉을 거쳐 마을회관으로 돌아오면 되겠다. 그쪽 방면에 흰 횟돌의 너덜지대인 왕성단과 상여바위, 삼형제바위, 얼굴바위 등 기이하게 생긴 볼거리들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반대편 방향의 능선을 탔을 경우에는 원시림 속을 헤집고 다녀야 하는 개척 산행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산행들머리는 모릿재(평창군 대화면 신리)

영동고속도로 평창 IC에서 내려와 31번 국도를 이용 평창방면으로 가다가 신리삼거리(평창군 대화면 신리)에서 좌회전하여 모릿재로로 옮겨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면과 진부면의 경계인 모릿재에 올라서게 된다. 정확히 말해서 새로 뚫린 모릿재 터널의 대화방면 입구로 보면 되겠다.




모릿재 터널앞에서 오른편으로 난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차량이 지나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너른 것으로 보아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는 임도 이상의 임무를 수행했을 것 같다.



길가에는 잘 지어진 전원주택도 보인다. 주택의 주위는 온통 들꽃들 세상이다. 망초와 찔레나무, 애기똥풀 등 꽤 많은 야생화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꽃을 만개(滿開)하고 있다. 자연스레 생겨난 꽃밭 속에 들어앉았으니 공짜로 호사를 누리는 셈이다.




완만한 경사의 시멘트포장임도를 걷다보면 차단기(遮斷機)가 길을 막고 있다. 차량통행을 막기 위해 산림청에서 설치한 시설물인데 봉에 매달아놓은 안내문에는 통행할 때 주의해야할 내용을 적었다. 이를 어기다가 사고를 당해도 산림청에서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건부 통행이 가능하다면 구태여 이런 차단기가 필요했을까 싶다.



차단기를 넘자 이번에는 길이 둘로 나뉜다. 21일에서 515일까지, 그리고 111일부터 1215일까지는 입산을 통제한다는 안내판 아래에 임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정표 기능까지 수행토록 했으니 다목적인 셈이다. 왼편은 막동과 장전으로 넘어가는 길이고 오른편은 대화4리로 연결된단다. 모릿재는 왼편 즉 막동방향이니 참조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14분 만에 모릿재의 능선마루에 올라선다. 대화면과 진부면이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이곳에서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임도가 둘,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산자락으로 파고드는 오솔길이다. 백적산은 이 오솔길로 들어서야 한다. 들머리에 평창의 명산, 백적산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도도 둘이다. 이 가운데 오른편은 잠두산을 거쳐 백석산으로 연결되니 참조한다. 그쪽 방향으로 몇 걸음 나아가니 ‘6·25 전사자 유해발굴기념지역이라는 내용의 철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6·25 당시 이곳은 국군 7사단과 북한군 2사단 사이에 7일간이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단다. 전투의 결과는 승리였지만 이에 따른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130명의 국군이 전사했음은 물론이고, 180명이나 실종되었다니 말이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무한책임론에 의거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2008년부터 이곳에서도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현재까지 12구가 발굴되었단다.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산길은 처음부터 기()를 팍 죽이고 본다. 시작부터 엄청나게 가파른 것이다. 그나마 주변의 숲이 잣나무이라는 것이 다행이지 싶다. 거칠게 들이키는 숨결을 따라 짙은 솔향이 덤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저 솔향에 듬뿍 들어있는 피톤치드(phytoncide)의 효능 중에는 몸으로 스며드는 각종 병균에 대한 살균기능 외에도 피로회복 기능까지 함유하고 있다, 그런데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잣나무가 아니겠는가. 가파른 산길임에도 불구하고 버겁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탐방로 주변은 울창한 숲의 연속이다. 원시림에 가깝다고 보면 되겠다. 천 미터가 훌쩍 넘는 높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산들이 워낙 유명해서 아직까지 입소문을 덜 탔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산나물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참취와 곰취는 물론이고 칼나물과 찔뚝바리, 외나물, 깨나물, 병풍나물, 참나물 등도 흔하디흔하단다. 그렇지 않아도 부지런한 집사람의 손길이 더욱 빨라지는 이유일 것이다.




숨이 턱에 차오르게 만들던 산길이 잠시 기세를 죽이더니 첫 번째 봉우리에 이른다.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12분 만이다. 그런데 정상까지 오르지를 않고 직전에서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킨다. 주능선에 자리 잡은 ‘890m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제야 겨우 주능선에 올라선 셈이 되겠다.



잠시 후, 그러니까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20분쯤 되었을까 이정표(정상 1.6/ 모릿재터널 0.5) 하나가 나타난다. ‘해피700평창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게 보인다.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쾌적한 해발고도는 700m라고 한다. 그런데 평창의 평균해발고도가 700m란다. 평창에서 브랜드(brand)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란다.



산길은 주능선을 따른다. 이 능선은 대화면()과 진부면()의 경계선을 따라 백적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잠깐 아래로 내려서는데 진행방향에 978m봉이 우뚝 솟아있다. 고생께나 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겠다.



안부에 이르니 능선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나무기둥에 ‘6·25 전사자 유해발굴 완료지역이라는 표지판이 매달려 있는 걸로 보아 아까 들머리에서 보았던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의 현장인 모양이다.



또다시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길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밋밋하고 평탄한 봉우리에 올라선다. ‘978m인 모양인데 ‘890m을 내려선지 20분 만이다.



잠시 후 산길은 송전탑(送電塔)의 아래를 지난다. 공사를 위해 주변을 정리한 탓인지 조망이 시원스럽다. 백적산에서 능선으로 연결되는 잠두산과 백석산은 물론이고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중왕산과 가리왕산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수많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는 것이 강원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후부터 산길은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가끔은 바위를 오르기도 해야 하지만 꼭지점에 일단 오르고 난 뒤부터는 산길이 편해진다. 경사가 약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는 얘기이다.



백적산은 전형적 육선(肉山)이다. 그러니 볼거리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조망 또한 기대할 수 없다. 이 또한 육산이 갖는 특징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은 볼거리마저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런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앞서가던 집사람이 손짓을 보내온다. 오른편에 볼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다가가 보니 비스듬히 드러누운 바위 하나가 고목(古木)에 기대어 있다. 둘 모두 오래 묵은 탓에 색깔까지 닮았다. 그게 신기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웃자란 잡초들이 가득해 속도를 내기가 불편할 정도이다. 그렇게 36분쯤 진행하자 ‘1040m’봉으로 여겨지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물론 978m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다시 내려가는 길, 진행방향에 백적산 정상으로 여겨지는 봉우리가 살짝 고개를 내민다. 날카롭게 생긴 것이 올라가려면 땀 깨나 흘려야 할 것 같다.



웃자란 잡초를 헤치며 8분쯤 더 내려가자 초원에 가까운 공터가 나타난다. 누군가 이쯤에서 헬기장을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갖가지 잡초들로 뒤덮여 있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또 이곳에서 묘련사로 내려가는 길이 갈린다고도 했다. 하지만 잡초들 때문에 확인해볼 수는 없었다.



안부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아니 엄청나게 가파르다고 하는 게 옳겠다. 가파르다는 것을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는 문장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 얼마나 코를 땅에다 가까이 대었으면 흙냄새까지 맡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오르고 있는 산길의 형편이 딱 그렇다. 그만큼 가파르다는 얘기이다.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길가에다 밧줄을 매어놓았다. 밧줄에 의지해서 오르라는 배려일 것이다.



밧줄로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곧장 오르지를 못하고 오른편으로 사선을 그으면서 비스듬하게 길을 낸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사선을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길은 또 다시 위로 향하면서 길가에다 밧줄을 매어놓았다. 하긴 계속해서 옆으로 나가다간 다른 방향으로 가버릴 수도 있을 테니 어쩌겠는가.



밧줄구간이 끝나는가 싶더니 바위들이 선을 뵈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빈도(頻度)를 높여간다. 하지만 산길은 바위들을 잘도 피해서 간다. 경사가 가팔라서 힘들기는 하지만 위험하지는 않다는 얘기이다.



그래도 명색이 바윗길인데 밧줄 한 번 잡지 않고 오를 수 있겠는가. 정상 가까이에 이를 즈음에는 2m 정도의 수직에 가까운 벼랑을 만나기도 한다. 밧줄에 의지하지 않고는 오를 수 없으니 오늘 산행은 손맛까지 즐기게 해주는 셈이다.



밧줄에 의지해서 위로 오르면 전망바위가 나온다.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멋진 바위이다. 오늘은 황사나 미세먼지가 일절 없는 날이다. 덕분에 눈은 최고로 호사(豪奢)를 누린다. 이곳 백적산에서 능선으로 연결되는 잠두산과 백적산은 물론이고, 중왕산과 가리왕산, 청옥산, 남병산 등이 같은 산줄기를 따라 줄을 잇고 있다. 그 뒤로도 1m를 훌쩍 넘기는 강원도의 고산준령(高山峻嶺)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두타산과 상원산, 발왕산 등일 것이다.




전망바위를 지나자마자 ‘Y’형으로 길이 나뉜다. 이정표(골안이(굴암사)/ 골안이( 마을회관))는 두 방향 모두 동일한 지명(골안이)을 표기하고 괄호 안에다 각각 굴암사마을회관이라고 적어 넣었다. 우리가 올라왔고 또 내려가려고 하는 지점은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산행 준비를 하면서 검색해본 ‘Daum 지도에도 해피700길 백적산이라는 이름의 5.3km짜리 등산로를 소개하면서 이목정리에서 정상을 거쳐 굴암사로 연결되는 코스만 소개하고 있었다. 이로보아 제대로 된 등산로는 이 하나뿐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내려가려고 하는 묘련사방향의 탐방로를 찾아나가는 게 만만찮아 보이기 때문이다.



삼거리를 지나자마자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50분만이다. 두세 평쯤 되는 정상에는 새로 세운 것 같은 정상표지석과 판독이 어려운 삼각점(봉평 23) 하나가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백적산이란 이름은 산자락에 석영과 석회석이 혼합된 흰색의 바위가 많이 쌓여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인근 주민들은 흰적산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보통 때는 바위들이 희게 보이나 날씨가 궂으면 검게도 보인다니 참조한다. 또한 정상어림에는 왕성단이라는 이름의 너덜지대가 있으며, 마시면 힘이 솟아나는 샘도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지나왔던 갈림길 근처에서 찾아봐야 하지 않았나 싶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보잘 것이 없다. 빙 둘러서 잡목들이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안타까웠던지 정상표지석 뒤편을 조금 열어 놓았다. 그렇다고 억울해 할 필요는 없다. 방금 올라왔던 길로 서나 걸음만 되돌아나가면 쉬어가기 딱 좋은 너럭바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15명 정도는 너끈히 앉을 수 있을 듯하다. 마침 조망까지 시원스러우니 준비해간 간식이라도 먹으면서 느긋하게 조망을 즐기면 된 일이다. 그래봤자 아까 전망바위에서 보았던 것과 똑 같은 풍경이 펼쳐지겠지만 말이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몇 걸음 더 옮기면 무인산불감시탑이 세워져 있다. 감시탑의 철망에 정상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대구에 거주하는 산악인 김문암씨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정상석이 새로 세워지지 전까지만 해도 이게 정상석의 역할을 대신했을 것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골안이(굴암사) 2.4/ 골안이(마을회관) 3.4)가 가리키고 있는 굴암사 방향이다. 길은 무인산불감시탑을 오른편에 끼고 뒤로 나있다.



괴발산(1097.2m)으로 연결되는 능선은 시작부분에서 상당히 가파르게 내려서나 잠시 후에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경사 또한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밋밋한 능선이 계속된다. 드문드문 바위도 보이나 이 구간의 특징은 철쭉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봄이면 아름다운 꽃 잔치가 열리면서 능선은 또 다른 볼거리로 화려해질 것 같다.



그렇게 10분쯤 내려오면 길이 둘로 나뉜다. 그런데 이정표(골안이(굴암사)2.0/ 정상0.4)에는 괴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권할만한 코스가 아니니 이쯤에서 굴암사로 내려가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정표를 따를 수도 없다. 우리의 하산지점은 굴암사가 아니고 묘련사이기 때문이다. 능선을 따라 직진하는 이유이다.



능선에는 바위들이 널려있다. 능선을 따라 듬성듬성 박혀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제법 규모가 있는 암릉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제법 쏠쏠한 눈요깃거리로 변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바위들이 하나같이 흰색을 띠고 있다. 누군가 서북쪽 능선이 흰바위로 덮여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았나 보다. 그는 또 흰적산이란 지명(地名)의 유래를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서북능선의 이런 특성에서 찾고 있었다.




하산을 시작한지 27분쯤 되었을까 두세 평 남짓한 공터 근처에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깔려 있는 게 보인다. 왼편으로 진행하라는 표시이나 길의 흔적은 나타나있지 않다. 그 흔한 산악회의 리본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어쩌면 그도 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선답자들의 후기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아무튼 능선을 계속해서 탈 경우에는 괴롭재를 거쳐서 괴발산’(1097.2m)으로 연결된다. 탐방로는 괴롭재에서 굴암사로 내려가거나, 아니면 괴발산 정상을 찍고 무당봉(856.3m)을 거쳐 이목정마을로 내려갈 수도 있다.



잡목을 헤치고 나오자 희미하게나마 산길이 나타난다. 지능선을 따르는 길인데 전문가가 아니면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다. 심마니나 찾아다니는 길로 보면 되겠다. 초심자들은 절대로 삼가야할 코스라는 얘기이다. 그럼 우리 부부처럼 어중간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 정도는 찾아낼 수 있기에 일단 들어서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엄청난 고생을 겪어야만 했다. 지능선으로 내려선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자가 뚝 끊겨버린 것이다. 준비해간 표시지를 모두 사용해버렸단다. 거기다 여분의 종이들까지 다 떨어져버렸다니 어쩌겠는가. 이젠 우리끼리 길을 찾아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려가다 길이 끊기면 좌우(左右)로 오가며 길을 흔적을 찾아나간다. 산비탈의 경사가 워낙 가파르다보니 좌우를 오가는데도 엄청나게 힘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진행속도가 더디어질 건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그렇게 한참을 진행하니 제법 큰 계곡이 떡하니 나타난다. 회장님과 선두대장이었던 정사장에게 전화를 해봐도 도움은 되지 않는다. 이곳이 어디쯤인지를 알 수가 없으니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계곡으로 내려설 수는 없다. 만일 그랬다가는 조난을 당하기 십상이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 절벽이라도 만나면 대책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옆으로 째는 길이를 늘려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잡목들에 의지해가며 200m정도를 어렵게 옮긴 후에야 희미한 산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악전고투를 치루고 난 후에야 진행방향 저만큼에 첫 민가가 나타난다. 지옥 같던 산비탈을 드디어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좋은 점도 있기는 했다. 곰취와 참취 등 각종 산나물들이 아예 밭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을 잃기 전에 10분 정도를 뜯었는데, 우리 부부가 일 년 내내 먹어도 될 정도의 양을 뜯을 수 있었다.



이후부터는 아스팔트도로를 따른다. 그렇게 얼마를 내려오자 묘련사가 나타난다. 전통 지붕을 얹은 절집 한 동과 그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있는 단출한 사찰이다. 역사가 오래되지 않아 보이기에 들어가 보는 것은 사양키로 한다. 아니 절에 대한 경외심이 점점 약해져가는 요즘의 내 심경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0년 가까이를 매주 산에 올라 다니면서 문화재관람료를 내온 것만 해도 불만인데, 일부 승려들이 그런 돈을 제 맘대로 쓰고 다닌다는 내용의 보도까지 접했으니 어찌 분하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길가에 늘어선 고랭지 채소밭에는 감자꽃이 만개해 있다. 꽃을 따주어야 감자알이 크고 튼실해진다는데도 저렇게 그냥 놔두는 걸 보면 그에 따른 인건비가 만만찮게 드는가 보다. ! 내려오는 길에 멋지게 지어진 전원주택을 만났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보련사 입구에 세워놓은 입간판의 하단에 ‘LT명지벨리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있는 걸로 보아 펜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계속되는 아스팔트길이 지루해질 즈음 산딸기가 선을 뵌다. 그리고 그 빈도를 점차 늘려간다. 아무리 따먹어도 그 숫자가 줄어드는 것 같지 않으니 이건 숫제 화수분이라 표현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계속해서 재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그 보물단지 말이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부질없는 생각 하나. 아무리 따라도 술이 넘치지 않는다는 계영배(戒盈杯)라도 들고 나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맛있는 산딸기를 안주 삼아 감로주를 마실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신선놀음이 아니겠는가.



산행날머리는 원주-강릉철도 평창터널 진입로 앞(평창군 대화면 신리 87-2)

상큼하기 짝이 없는 찔레꽃 향에 취하고, 산딸기의 달콤함에 입맛 다시며 걷다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아까 들머리로 향하는 길에 버스가 지나갔던 지방도(모릿재)가 나오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산자락을 벗어나고 20분 정도 지난 지점이다. 이곳에서 왼쪽은 모릿재터널, 산악회 버스는 반대방향인 대화 방향으로 2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원주-강릉철도 평창터널 진입로의 앞에 주차되어 있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5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3시간 40분이 걸린 셈이다. 하지만 나물을 뜯느라 속도가 떨어진데다 또한 길을 잃고 헤맨 시간이 제법 되므로 의미 있는 시간은 되지 못하겠다.


구탄봉(九嘆峯, 87m)

 

산행일 : ‘18. 5. 21()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산행코스 : 푸르미아파트휴양림 갈림길구탄봉 정상짚라인 탑승장송이벨리자연휴양림(산행시간 : 2시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양양읍 월리에 위치한 구탄봉은 통일신라시대의 지술가였던 도선국사가 산세를 보고 명당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아홉 번이나 올라갔지만 결국 찾지 못해 가슴을 치며 탄식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세가 험하지 않은데다 왕복 2시간 전후의 가벼운 산행을 즐길 수 있어 마을 사람들에게 '뒷 산'이라고 불릴 정도로 친숙하고 익숙한 산이기도 하다. 거기다 최근에는 송이벨리자연휴양림이라는 종합 웰빙 휴양타운이 생겨 양양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아무튼 이곳은 가볍게 운동한다는 마음으로 소나무 향기와 숲 속 자연을 즐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산을 내려와 양양 5일장에 들러 양양의 명물이라는 송이는 물론 은어나 연어까지 먹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산행들머리는 명지 푸르미아파트 앞(양양군 양양읍 월리 449-1)

동해고속도로 양양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를 타고 양양읍 방향으로 오다가 임천교차로(양양읍 임천리)에서 빠져나와 양양로를 이용해 시내로 들어온다. 이어서 군청사거리(양양읍 남문리)에서 또 다시 우회전하여 남대천을 건너면 59번 국도와 만나는 남단교차로(양양읍 월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또 다시 우회전하면 잠시 후 명지 푸르미아파트입구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닿는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버스에서 내리면 널따란 들녘 너머로 설악산이 조망된다.



버스정류장에서 50m 정도를 더 나아가다 왼편 남대천로로 빠져나온다. 이 역시 시멘트 포장도로인데, 진행방향에 동해고속도로(삼척-속초)의 높다란 교각(橋脚)이 보이면 제대로 들어온 셈이 되겠다. 아니 왼편 산자락에 자리 잡은 명지 푸르미아파트를 참조할 수도 있겠다.



100m쯤 더 들어갔을까 고속도로 교각 조금 못미처에서 길이 또 다시 나뉜다. 이번에도 역시 왼편으로 들어선다. 들머리에 이정표(구탄봉 1.7㎞←)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개인주택의 대문 앞에서 산길은 왼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번에도 역시 어렵지 않게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들머리에 등산로 안내판까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길은 위로 오르지를 않은 채 산자락의 아랫도리를 헤집으며 이어진다. 경사가 제법 가파른 산비탈이지만 한 사람이 지나다니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는 된다. 거기다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밧줄을 매어놓았다. 안심하고 걸어도 된다는 얘기이다.



오른편 나뭇가지 사이가 열리면서 남대천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는 저 냇물을 연어의 길이라고도 부른다. 맞는 말이다. 저 먼 곳 알래스카의 짙푸른 바다를 떠난 연어들이 한반도의 작은 강들 가운데 하나인 이곳 남대천으로 찾아드니 말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바다에 나갔던 연어가 떼를 이뤄 이곳 남대천으로 되돌아온다. 파도를 헤치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알을 낳은 뒤 생을 마감한단다. 이곳 남대천은 우리나라 연어의 70% 이상이 회귀하는 곳이란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연어는 모천회귀(母川回歸)의 성질을 지닌 물고기이다. 남대천에서 태어난 연어들은 오호츠크해와 베링해, 알래스카를 거쳐 3~5년 만에 다시 되돌아오는데 이곳에서 산란하고 생을 마친다. 1·2급수 맑은 물이 흐르는 남대천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경계선(境界線)이자 생()과 사()의 교차점(交叉點)인 셈이다.



길가에 세워진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소망 기원 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이 계곡은 예로부터 길지로 알려져 왔는데, 이곳에서 기도하면 소망하는 바가 모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낙엽송길소나무길등 이런 안내판들은 이후로도 여럿 보인다. 하지만 어느 기사(記事)에선가 보았던 졸졸졸 계곡길이나 송이길같은 이름은 눈에 띄지 않았다.




산으로 들어선지 10분쯤 되었을까 길이 둘(이정표 : 구탄봉 전망대1050m/ 팔각정 전망대680m, 남대천460m)로 나뉜다. 왼편은 팔각정 전망대로 가는 길이니 구탄봉에 올랐다 하산하는 길에 들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구탄봉 정상에 올랐다가 짚-라인방향으로 해서 송이밸리로 내려와, 송이관과 백두대간생태교육장, 목재문화체험장을 구경하고 하산하는 길에 팔각정 전망대에 오르면 되겠다는 얘기이다. 이어서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구탄봉 전망대1000m/ 팔각정 전망대690m/ 남대천540m)가 나온다. 이번에도 역시 팔각정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이지만 무시하기로 한다.




탐방로는 계곡을 따라 나있다. 그러다보니 계곡을 건너야 할 때도 있다. 장마 때가 걱정될 수도 있겠으나 염려는 내려놓아도 되겠다. 비록 작은 개울이지만 나무다리까지 놓아두었으니 말이다. 어느 기자가 거론했던 졸졸졸 계곡길은 이곳을 두고 한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산책로이지만 조그만 공터라도 나면 어김없이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구태여 서두를 것 없이 쉬엄쉬엄 걸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힐링(healing)이 되지 않겠는가.



진행방향에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치솟아 오른 낙엽송들이 보인다. 그 범위가 넓은 편은 않지만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하다 하겠다. ’낙엽송길이라는 이름표까지 달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15분쯤 진행하자 쉼터가 나온다. 이번에는 벤치는 물론이고 평상과 누워서 쉴 수 있는 장의자까지 갖춘 제대로 된 쉼터이다. 누군가 이곳 송이벨리휴양림을 소개하면서 시설이 뛰어난 탐방로를 갖추었다고 자랑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당시 기사에서는 휴양림 주변에 조성된 백두대간 탐방로를 산책하다보면 전망대와 어린이 숲놀이터, 데크로드, 덩굴쉼터 등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산책로 중간 중간마다 비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음악이 운치를 더한다고도 했다.



쉼터를 지나자마자 길이 둘(이정표 : 구탄봉 정상 470m/ 목제문화 체험장 250m/ 남대천 1200m)로 나뉜다. 왼편으로 들어서니 분수(噴水) 연못이 만들어져 있고 여러 동의 텐트(tent)들이 이 연못을 둘러싸고 있다. 벨리자연휴양림의 시설 중 하나인 하늘캠핑장인가 보다. 산림 속에서 야영을 하며 쾌적한 휴양을 즐길 수 있다는 그 시설 말이다. ! 아까 들머리에서 보았던 지도에는 이곳을 숲속 야영장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오른편으로 향한다. 이제부터는 가파른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하긴 그래봤자 구탄봉의 해발고도(海拔高度)가 백 미터에도 못 미치지만 말이다. 아무튼 길가는 온통 소나무들의 천국이다. 그래선지 이곳에 세워진 안내판도 소나무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소나무들이 하나 같이 자그마하다. 척박한 환경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의 미덕이지 싶다. 기둥도 역시 올곧지를 못해 목재로 쓰기에는 부적할 것 같다. 누군가는 이곳의 소나무들을 금강송(金剛松)으로 분류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그렇지 않다는 얘기이다.




이 구간에는 다른 특징도 있다. ’MTB경기장의 방향표지판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곳 휴양림의 또 다른 자랑거리라는 양양 MTB경기장을 지칭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한국산악자전거연맹으로부터 공인을 받은 이 경기장은 동호인코스(6.3)와 엘리크코스(5.3)로 나뉘는데, 두 코스 모두 송이벨리주차장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렇게 15분쯤 오르자 드디어 구탄봉 정상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만이다. 정상에는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탁 트인 조망을 실컷 즐겨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국가지점번호 표지목(라아 9796-0650)‘을 겸하고 있는 이정표(송이벨리480m/ 송이벨리470m, 남대천 1670m)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데크의 앞에는 구탄봉(九嘆峯)‘의 지명(地名)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통일신라 때의 명승이었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오대장맥을 타고 오다가 산세를 바라보며 이곳에 반드시 명당(明堂)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그 명당을 찾고자 아홉 번 올라 아홉 번을 탄식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명당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가 찾지 못했다는 그 자리에는 지금 송이벨리자연휴양림이라는 명소가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현대의 풍수사(風水師)들이 도선보다 한 수 위일지도 모르겠다.



산불감시탑까지 끼워 넣은 전망대에는 벤치는 물론이고 식탁까지 놓아두었다. 발걸음을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줄기다가 가라는 모양이다. 난간에는 조망도도 세워두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과 대비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구룡령에서 설악산 대청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룻금이 늠름한데, 그 아래로 남대천 지류가 모여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하조대, 낙산사, 속초까지 훤히 보이는 동해바다의 해안선도 또렷하다. 양양읍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옴은 물론이다.




전망대 뒤편의 가장 높은 곳에는 커다란 바위가 자리 잡았다. 바위의 위가 구탄봉의 정상이라 여겨져 가까이 다가가 설펴본다. 혹시라도 정상표시가 되어있을까 해서이다. 하지만 바위의 위는 텅 비어있다. 조그만 정상표지석이라도 세워놓으면 또 하나의 멋진 포토죤(photo zone)’이 되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송이벨리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은 무척 너른 편이다. 서너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충분할 정도이다. 거기다 보드라운 흙길은 경사 또한 거의 없다.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이 산행이라고 하지를 않고 산책이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삼거리(이정표 : 짚라인 승차장440m/ 목재문화 체험장200m)가 나온다. 하산지점인 자연휴양림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오늘 산행이 짧다고 생각한다면 능선을 조금 더 타다가 짚라인 탑승장에서 임도를 따르면 된다. 그건 그렇고 이곳 삼거리에는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정체가 의심스러운 시설물이라고 해야겠다.




계속해서 능선을 따른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잘 닦여있다는 얘기이다. 관할 관청인 양양군청에서 그만큼 정성을 들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푸르미아파트임도구탄봉정상안막치기에 이르는 1.5구간의 이 탐방로는 2009년에 개설되었다. 희망근로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는데 기존의 좁은 길을 보수하면서 목계단 50개와 목다리 7개소, 이정표 등을 새로 설치했다고 한다.



능선이 끝나갈 즈음, 그러니까 하산을 시작한지 18분쯤 지나자 건너편 산자락에 놓인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나르기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짚라인이륙장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기왕 온 김에 레저스포츠를 잠시 즐기고 싶다면 짚라인을 이용해 하늘을 잠시 날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활강거리가 580m로 여러 가지 형태로 탑승이 가능하고 국내 최초로 엎드려 타는 익스트림(extreme)형 탑승형태도 가능하다니 말이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잠시 후 아까 능선삼거리에서 갈려나갔던 길과 다시 만나게 되고, 이어서 조금 더 걸으면 송이벨리자연휴양림에 이르게 된다.




임도 아래에 설치해 놓은 모노레일(monorail) 위로 차량이 지나가는 게 보인다. ’짚라인의 승강장과 하강장을 오가는 숲속기차라고 한다. 1.5쯤 되는 거리인데 걸어서 올라가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설치했단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나무에 꽃이 피어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그 밖의 꽃들도 여럿 보인다. 하지만 하나같이 조경용으로 심어놓은 것들 일색이다. 자생(自生) 야생화는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얼마쯤 내려왔을까 오른편 산자락에 송이버섯 모양으로 생긴 건축물 몇 동이 지어져있다. 2014년에 문을 열었다는 송이밸리자연휴양림에 이른 모양이다. 양양군의 특산품인 송이와 산림휴양시설이 접목된 자연휴양림이다. 구탄봉 인근 13만평의 부지에 조성된 이 휴양림은 대자연의 쾌적한 산림 속에서 숙박과 레포츠, 산책, 놀이 등을 복합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종합 웰빙 휴양타운이다. 산림문화휴양관 등 숙박동과 함께 목재문화체험관, 백두대간생태교육장, 야외공원 등이 있어 각종 워크숍과 세미나, 수련회는 물론, 가족단위 방문객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단다. 참고로 송이관은 4개 존으로 구분돼 양양송이의 조리법, 가공저장법, 송이축제 등 송이와 관련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신비한 양양 황금송이의 세계를 특별한 연출로 보여준다. 산속에 송이가 자라고 있는 곳이 재현됐고, 독버섯과 구분할 수 있는 방법도 소개된다.



송이관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이 나온다. 어린 자녀들과 함께 즐길만한 꺼리가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는 공간이다. 입구부터 백두대간과 양양군 명소가 담긴 사진 전시들이 나열돼 있고, 입구 한 켠에는 스마트기기의 방명록이 있는데 손으로 눌러 입력할 수 있어 눈길을 끈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면 백두산부터 출발해 묘향산과 구월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 내장산을 거쳐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산줄기들에 대한 소개가 되어 있다. 각각의 산이 적혀있는 미디어의 버튼을 누르면 해당 산에 대해 영상으로 소개가 나온다. 이어 백두대간을 따라 존재하는 민간신앙의 흔적, 구룡령 옛길 이야기 등 각각의 유물 등이 함께 전시돼 있다. 바로 옆 생태체험관으로 들어가면 백두대간의 사계 영상이 등장하면서 눈요기를 한 후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이 등장한다.




밖으로 빠져나오니 목재문화체험장이 보인다. 이곳은 다양한 목공예품, 생활가구 만들기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2층에는 목공예 전시물과 목재종합전시물이 있다. 양양군의 목재문화가 소개돼 있고, 다양한 목재가 실로폰처럼 나열돼 있는데 각각의 나무재질을 때려 보면 다른 소리들이 나와 청감을 자극한다. 100개가 넘는 다양한 목재 표본들이 나열돼 있는 전시물은 각각의 나무 이름이 적혀 있어 여러 가지 목재들을 비교 관람해 볼 수도 있다.




휴양림 시설들을 둘러본 후 송이관 앞으로 되돌아오니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이어서 차단봉이 설치되어 있는 정문을 통과하면 널따란 주차장이 나오면서 구탄봉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 트레킹은 총 2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는 큰 의미가 없다. 휴양림의 시설들을 어떻게 둘러보았느냐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각기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송이벨리자연휴양림 안내도양양군 관광안내도‘, ’MTB 경기장 코스 안내도등 정문 앞에 세워놓은 안내도들을 살펴보다 발길을 돌리니 특이한 시설물 하나가 눈길을 끈다. 가건물로 보이는 시설의 외관(外觀)을 온통 태양열 집열판으로 씌워놓은 것이다. 요즘(昨今)의 추세가 에코에너지(ecoenergy)임을 감안할 때 바람직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곤신봉(坤申峰, 1,131m)

 

산행일 : ‘17. 8. 8()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사천면과 평창군 대관령면의 경계

산행코스 : 보현성지1쉼터거북등어명정 왕복임도 2지점산성마루전망대대공산성보현사갈림길곤신봉 왕복보현사보현성지(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산악회


특징 : 선자령에서 불과 2.5km 거리에 있는 곤신봉(1131m)은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지나치는 봉우리 중 하나로만 알려져 있을 따름이고, 오롯이 곤신봉만을 찾기 위해 1m가 넘는 고산지대까지 오르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덕분에 곤신봉이 품고 있는 숲과 계곡은 아직까지도 세상의 때가 덜 탄 깨끗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느낄 수 있다. 거기다 맑고 시원한 물은 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넓은 초원으로 이루어진 정상부에는 거대한 선풍기 같은 풍력발전기가 설치되어 있어 마치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발을 멈추고 바람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이다 보면 누구라도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다. 다만 강릉 쪽에서 오를 경우 거의 바닥부터 시작해야하기 때문에 1m 이상의 고도(高度)를 올려야하는 고생쯤은 각오해야 한다. 아무튼 한번쯤을 올라보는 게 좋겠지만 곤신봉만을 위해 찾기보다는 강릉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대공산성이나 명주군왕릉 등을 포함하는 코스로 만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보현성지 주차장(광양시 옥곡면 장동리)

동해고속도로(삼척-속초) 강릉 IC에서 내려와 35번 국도를 타고 삼척방면으로 달리다가 성산면 소재지인 구산리로 들어가기 직전의 삼거리에서 오른편 456번 지방도로 옮긴다. 이어서 보광천을 건너기 바로 직전에 만나는 삼거리에서 오른편의 415번 지방도로 바꿔 들어가다 보광리사거리에서 왼편(이정표의 보현사 방향)으로 방향을 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보현성지(寶賢聖地)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오늘 산행은 첨부된 아래의 지도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곤신봉에서 선자령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낮은목이에서 보현사로 하산하려던 원래의 계획을 대공산성의 서문에서 곤신봉 방향으로 8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삼거리에서 보현사로 내려오는 것으로 변경했다. 계획했던 원래의 하산길이 너무 험하다는 지인(知人)의 귀띔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현성지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기 바로 전에 오른편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경위도(經緯度) 좌표(座標)까지 표기해 놓은 이곳 특유의 이정표(어명정 2.71Km/ 보현사 1.07Km)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이 바우길 3구간임을 알려주는 이정표(명주군왕릉 10Km/ 보광유스호스텔 1.6Km)가 눈길을 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산행은 바우길 3구간의 일부를 걷게 되는 모양이다. 여기서 바우바위를 지칭하는 강원도 말이다. 강원도와 강원도 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 '감자바우'라고 부르듯, 바우길은 강원도 사람들이 예부터 걸어 다니던 길을 연결한 강원도 사람들의 길이다. 이를 '사단법인 강릉 바우길'에서 걷기를 즐기는 대중들에게 알리며 강원도 천연의 자연과 역사ㆍ문화 유적들을 느낄 수 있는 걷기 코스로 열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산행은 대공산성 순환등산로외에도 바우길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을 모두 걸어보는 셈이다.



산에 들어서자마자 소나무들이 줄을 잇는다. 하나같이 황갈색을 띠고 있는 나무들이다. 사람들은 저런 소나무들을 금강소나무(金剛松)라 일컫는다. 나무의 몸 색깔이 붉다고 적송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일본 사람들이 일반 소나무와 구분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지어 붙인 이름이라니 참조한다.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역 일원에서 잘 자라는 이 소나무는 나무 재질이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껍질은 얇고 붉을 색을 띠며, 심재부(深材部)는 붉은색 혹은 적황색을 낸다. 나이테가 조밀하고 잘 썩지 않아 예로부터 궁궐을 짓거나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사용됐으며 현존 국내 최고(最古) 목조건축물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에도 이 소나무가 쓰였다고 한다. 다른 나무는 그만한 무게를 버텨내지도 못하고 오래가지도 못했기 때문이란다.



길가 소나무에 '올림픽 아리바우길'이라고 적힌 팻말이 매달려 있는 게 보인다. 작년(2016) 말쯤엔가 같은 이름의 트레킹코스를 조성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조성사업이 이미 마무리되었나 보다.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올림픽(평창)+아리랑(정선)+바우(강릉바우길)라는 의미가 합쳐져 평창의 역사적인 올림픽 개최와 강원도를 대표하는 지역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으로 온ㆍ오프라인을 통한 선호도 조사를 실시해 선정됐다고 한다. 트레킹 구간은 총 연장 131.7km9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선5일장과 나전역, 아우라지역, 구절리역, 노추산, 모정탑길, 안반덕, 대관령 선자령ㆍ옛길, 오죽헌, 경포대 등 평창과 강릉, 그리고 정선의 주요 관광지들을 모두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지그재그로 갈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고도(高度)를 높이고 있다면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그나마 그런 오르막이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도 있겠다. 10분도 못되어 걷기 딱 좋을 만큼의 경사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그렇게 13분쯤 오르면 임도(이정표 : 임도 1지점2.60Km/ 등산로 종점0.41Km)를 만난다. 이정표가 지시하고 있는 왼쪽 방향의 임도 1지점으로 향한다. 곧장 능선으로 치고 오르는 오솔길도 보이나 개의치 않기로 한다.



임도를 따라 3분쯤 걸었을까 오른편으로 오솔길이 하나 나있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지만 선두대장의 진행방향 표시지는 오솔길로 들어서란다. 뜨거운 햇빛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임도보다는 숲속을 걷는 게 좋다고 생각 되었던 모양이다.



황토색깔이 완연한 산길은 일단 곱다. 임도에 부럽지 않을 정도로 널따란데다가 경사까지도 거의 느낄 수가 없다. 그렇게 10분쯤 걸으면 능선 위에서 삼거리(이정표 : 어명정1.70Km/ 등산로 종점1.01Km)를 만난다. 능선을 따라 오른편으로 난 길은 아까 임도를 만났던 지점에서 헤어졌던 길과 연결되지 않을까 싶다. 능선으로 올라선 산길은 아까보다는 많이 좁아졌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둘이 어께를 맞대고 걸어도 충분할 정도로 넓다. 이 구간의 특징은 길의 양쪽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왼편이 키를 한껏 높인 소나무들이 기세를 자랑하고 있는 반면, 오른편으로는 소나무에 비하면 작은 몸체를 지닌 굴참나무 군락이 펼쳐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의 구역을 침범한 무법자들이 없을 리가 없다. 어디서나 청개구리파들은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조금은 어색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거부감은 들지 않는다. 산이 주는 너그러움이 아닐까 싶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지 않았던가. 그래 이왕에 산에 들었으니 뭔가를 얻어 가보자.



청량감에 젖어 걷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여유롭게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기 짝이 없다. 그 흥이 발에까지 스며들었나 보다. 그렇게 10분 조금 넘게 걸으면 3 쉼터를 만난다. 커다란 바위무더기 앞에다 앉은키에 맞춰 절단한 통나무 몇 개를 세워 놓았다.



산길은 여전히 곱다. ‘3쉼터의 바로 위에서 약간 가파른 곳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금방 끝나버리고, 잠시 후에는 원래대로 돌아가 버린다.



그렇게 8분쯤 더 걷자 임도가 나온다. ‘거북등이라는 지명을 갖고 있는 곳이다. 들머리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두 개의 이정표를 세워 놓았다. 하나는 대공산성 순환등산로를 만들면서 세운 이정표(어명정0.60Km/ 임도 2지점0,70Km/ 등산로 종점2.10Km)이고 다른 하나는 바우길 3구간의 거리표시를 나타내는 이정표(명주군왕릉7.8Km/ 보광유스호스텔3.9Km)이다. 맞은편 길가에 세워놓은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안내판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일대에서 보호하려는 유전자가 소나무가 아니라 병꽃나무와 옷나무, 미역줄기나무 등이기 때문이다. 이 일대의 소나무(金剛松)는 궁궐을 짓거나 임금의 관을 만들 때 사용했을 정도로 그 재질(材質)을 인정받았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오른편 임도를 따라 어명정으로 향한다. 이때 사소한 부주의 하나가 큰 사고를 불러오고 말았다. 어명정까지의 거리인 ‘0.60Km’60m로 잘못 읽어버린 것이다. 잠깐이면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 2~3분 안에 돌아온다며 집사람을 거북등에 남겨놓고 나 혼자 길을 나선 게 불찰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도 어명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중간에 만난 현지 등산객에게 물으니 조금 더 가보란다. 그렇게 어명정까지 다녀오느라 20분이 걸려버렸다. 2~3분이면 되돌아오겠다던 남편이니 집사람으로서는 안절부절 못했을 게 당연하다. 거기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없으니 무섭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난 스틱까지 내던지며 노발대발하는 집사람의 행동을 생전처음 접할 수 있었다. 다행이 얼마안가 풀리기는 했지만 두 번 다시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실수였다.



가는 길에는 오른쪽, 그러니까 동해바다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강릉시가지와 동해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지겠지만 오늘만은 예외다. 짙게 낀 연무(煙霧)가 대부분의 산하(山河)를 옴짝달싹 못하게 가두어버린 것이다.



10분쯤 내려가자 바우길 3코스의 이름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어명정(御命亭)’이 나타난다. 2007년에 광화문 복원을 위해 베어낸 소나무의 그루터기 위에다 세운 정자(亭子)라고 한다. 정자의 앞에는 그런 사실을 적은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산림청장(서승진)과 문화재청장(유홍준)이 옛날 방식대로 교지(敎旨)를 받은 후, 소나무의 벌채에 앞서 산신과 소나무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위령제(慰靈祭)를 지낸 곳이라는 것이다. 당시 행사에서는 (), 본 금강송을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광화문 복원 역사에 쓰임을 명함이라는 명령서가 낭독되기도 했다. 벌채 대상 소나무 중 직경이 가장 큰 소나무 한 그루를 선정해 위령제를 지내고 주변 나무에 북어와 창호지를 묶는 소지 매기, 나무의 영혼을 달래는 헌시낭독, 산신과 나무의 영혼을 달래는 산신굿에 이어 벌목을 거행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이 목재를 포함해 광화문 복원을 위해 벌채한 금강소나무는 직경 50-90에 이르는 특대재(特大材) 26()으로 건조 처리 과정 등을 거쳐 광화문의 기둥과 보 등에 사용된바 있다. 참고로 궁궐을 짓는 데 쓰였던 소나무는 황장목이라고 하여 일반인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황장목으로 지정된 곳엔 황장금표(黃腸禁標)’라고 하여 이를 알리는 표지석을 세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정자의 바닥 한가운데를 둥그렇게 유리를 끼워 넣고, 그 아래에 직경 1m 가까이 되는 어명을 받은 소나무의 그루터기를 전시하고 있다. 덕분에 잘려나간 나무의 나이테가 확인된다. 사람의 나이는 호적으로 알고, 나무의 나이는 나이테로 안다. 나이테를 보면 어느 해에 가뭄이 들고, 어느 해에 산불이 났는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해 모든 자연재해를 온몸으로 다 받아들인 흔적들이다. 사람에게 사람의 역사가 있듯 나무 한 그루에도 역사가 있고, 자연의 기록이 있다.



정자 옆에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이라는 조금 긴 이름의 둘레길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강릉 바우길가운데 일부 구간의 이름이란다. 대관령은 전체가 금강소나무와 참나무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굵직굵직한 소나무들이 가장 많이 있는 곳에다 이 길을 내었다.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이라는 이름은 10년 전 경복궁을 복원할 때 이곳의 소나무들을 베어 기둥으로 쓴 인연을 살리기 위해 붙여졌다고 한다. 기둥들은 제 몸 위에 얹어지는 무거운 하중을 견뎌낼 수 있어야만 한다. 때문에 대궐의 기둥으로 쓸 수 있는 소나무는 지름이 최소한 90정도는 되어야 한다니 이곳의 소나무들이 얼마나 굵을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거북등으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임도 2지점방향이다. 임도를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걷자 오른편으로 산길이 열린다. 이곳이 임도 2지점이다. 들머리에 임도 2지점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대공산성1.28Km/ 임도 1지점0.40Km/ 어명정1.30Km)와 국가지점번호표지목(마사1245-7288)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아까 어명정에서도 대공산성으로 오를 수는 있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 중간에 위치한 산성마루에서 두 길이 합쳐지기 때문이다. 그 길이 더 짧고 수월하지만 난 거북등에서 기다리고 있는 집사람 때문에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대공산성(大公山城 : 강원도기념물 제28)’의 안내문을 살펴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보현산성이나 대궁산성으로도 불린다는데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대궁산성을 만났을 때 다시 거론해 보기로 하겠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물이 흐리지 않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온다. ‘대공산성교라는데 폭우(暴雨) 때를 대비한 안전시설인 모양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침목(枕木) 계단이 나타난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잠시 후면 그 끄트머리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오르막길은 계속된다. 하지만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될 만큼 적당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조금 더 걷자 삼거리가 나온다. 임도에서 15분쯤 떨어진 지점이다. 이정표(대공산성0.52Km/ 어명정1.60Km/ 임도 2지점0.76Km)산성마루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는 것을 보니 대공산성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쯤 되는 모양이다. 아까 거론했던 대로 어명정에서 곧장 산길로 들어섰을 경우 이곳으로 연결되니 참조한다.



편안하다 싶던 산길이 점차 가팔라지기 시작하더니 드디어는 ‘108계단이라고 적힌 팻말까지 나타나게 만들어버린다. 그 뒤편에 긴 돌계단이 놓여 있는 걸로 보아, 저 계단을 오르면서 가진바 모든 번뇌(煩惱)를 다 떨쳐버리라는 모양이다. 불교에서는 중생의 모든 번뇌를 108가지, 즉 백팔번뇌(百八煩惱)라고 했다. 그러니 계단 하나를 오르면서 번뇌 하나씩을 비워버린다면 계단을 모두 오르고 난 뒤에는 부처님처럼 해탈(解脫)을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나에게도 기회가 온 셈이다.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는 집사람의 화도 함께 떨쳐버리게 될 테니까 말이다.



백팔번뇌를 떨쳐보라는 ‘108 계단이 과연 효험이 있었나보다. 마음이 여간 허허롭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그 끄트머리에다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비어있는 가슴에 더 넓은 세상을 채워가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겠는가. ‘임도 2지점에서 이곳까지는 25분이 걸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연무(煙霧)가 걷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망데크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길가에는 밧줄까지 매어 놓았다. 오르내리는 게 힘들 경우 의지해보라는 배려인 모양이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다. 그럴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대공산성 순환등산로안내도를 보면 이쯤에서 대공산성의 동문(東門)을 만나게 된다고 했다. 또 다른 기록을 보면 95×104크기의 장방형 주초석(柱礎石)이 동문 입구에 2m 간격으로 놓여있다고 했다. 석재는 성문 안쪽에서 22정도에 2개의 둥근 문추공(門樞孔)이 있는데 지름 25, 깊이 3~5이며, 바깥쪽으로 가로 17, 세로 9, 깊이 3의 네모진 구멍이 2개씩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 성문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정표(대공산성 서문 0.50Km/ 전망데크 0.16Km, 어명정 2.14Km) 외에는 이곳에 성문이 있었다는 그 어떤 흔적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5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우물이 나온다. 성의 중심에서 북쪽지역 저지로 내려간 곳에 우물 2곳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샘물이 넘쳐흐르는 데다 표주박까지 놓여있기에 한 모금 마시고 본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것이 감로수(甘露水)가 따로 없다.




약수터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산악회의 진행방향표시지가 지시하는 대로오른편으로 향한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니 능선의 위이다. 잠시 후 왼편으로 난 길이 하나 보이는데, 약수터에서 헤어졌던 길이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6분 후 어느 이름 없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물론 약수터부터 계산한 시간이다. 서너 평이나 됨직한 공터에는 대공산성에서 매봉으로 연결되는 등산로의 폐쇄기간을 적어놓은 안내판과 구급함이 설치되어 있다.



그 옆에 세워놓은 대공산성 순환등산로를 그린 안내도에는 현재의 위치를 서문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린 이미 성내에 들어와 있었고, 이제 곧 성을 벗어나게 된다는 얘기가 된다. 대공산성(大公山城 : 강원도기념물 제28)944m 높이의 보현산에 타원형으로 축조된 높이 2m에 둘레가 4Km에 달하는 산성이다. 이 성은 남쪽의 제왕산성과 동남 방향의 칠봉산성, 명주성 등에 둘러싸인 고대산성의 거점 성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으로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길쭉한 타원형의 평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성벽은 두께 40×50×20정도의 돌로 쌓았다. 높이 1.5~2.5m, 상부 폭 1.5m, 하부 폭 7m 정도로 축조하였다. 산성은 신라와 고구려와의 무력 충돌이 빈번했던 5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을미의병(乙未義兵) 때에는 민용호(閔龍鎬)의 부대가 이곳에서 약 10개월간 대일항전을 치렀다고 전해진다. 1896113일 원주에서 일어난 민용호 부대는 원주에서 강릉으로 동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보현산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민용호는 정부군이나 일본군과 평지에서 맞서기보다는 산악 지대인 관동 지방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을 것이다.



곤신봉으로 향한다. 몇 걸음 떼지 않아 대공산성지(大公山城址)’라고 쓰인 빗돌이 나타난다. 옆에는 제법 각이진 바위들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서문(西門) 터인 모양이다. 대공산성(大公山城)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도읍지로 정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축조하였다는 전설과 발해의 대씨(大氏)가 쌓았다 하여 대공산성(大公山城)이라 불린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가까운 곳에 보현사가 있어 보현산성(普賢山城)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평은 조금 다르다. 5세기 이전에 이 지역은 고구려 영역이었고 백제는 이곳까지 힘이 미칠 수 없었으며, 5세기부터 시작된 신라와 말갈의 접경 지역은 니하성(泥河城)으로 판단하는 견해도 있으나 발해의 대씨가 축조한 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전설로 전해 오는 백제의 온조왕이나 발해의 대씨가 쌓았다는 설은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거나 오류(誤謬)로 여긴다는 얘기이다. 대신 그들은 조선시대 지리지들이 보여 주는 보현사의 존재와 관련한 명칭인 보현산성에 더 무게를 싣는다. 참고로 산성에 대한 옛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처음 보이며 파암산석성(把巖山石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의 지리지 기록에서는 모두 보현산성(普賢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공산성(大公山城)’이란 기록은 197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간한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로보아 신라 말 보현사(普賢寺)가 문을 연 인연으로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 또한 보현산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각종 지리지들이 산성의 이름을 보현산성으로 기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과적으로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이 오류를 범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는 얘기이다.



안내도로만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서문(西門)으로 대공산성을 빠져나와 곤신봉 방면으로 향한다. 진행방향의 능선 위에 풍력발전기가 보이면 옳게 방향을 잡았다고 보면 되겠다. 그곳이 바로 곤신봉 정상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바위를 만난다. 그런데 그 바위가 심상치가 않다. 크기가 거대할 뿐만 아니라 생김새 또한 괴이하게 생긴 것이다. ()을 쏙 빼다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고려시대 이후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머리에 쓰던 사모(紗帽)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8분쯤 진행하자 왼편으로 오솔길 하나가 나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보현사로 연결되는 길이니 염두(念頭)에 새겨두자. ‘낮은목이에서 보현사로 내려가는 코스가 너무 험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이 코스를 이용해서 하산하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갤러리산악회도 그게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선두대장의 진행방향 표시지가 왼편으로 향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다면 곤신봉 정상을 둘러본 후에는 이곳으로 다시 되돌아 올 수밖에 없겠다.



곤신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상당히 가파르다. 산길은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곧바로 치고 오르지를 않고 왼편으로 우회(迂迴)를 시키면서 경사를 누그러뜨리고 있다. 덕분에 오르는 게 버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위로 곧장 치고 오르는 길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용이 적은 탓에 길이 희미하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조금 돌아서 올라가는 방법을 택했다고 보면 되겠다. 아쉽게도 다른 이들의 글에서 보았던 곤신봉 봉우리 아래에 있다는 샘터인 용천수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삼거리에서 2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시야가 확 트이는 장소에 서게 된다. 백두대간(白頭大幹)과 만나는 선자령 능선이다. 능선에 올라서자마자 눈앞이 훤해진다. 푸른 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과연 누가 이곳을 1m가 넘는 고산(高山)이라 할 수 있을까. 숫제 평원(平原)인 것이다. 그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풍력발전기들이 하얀색 날개를 힘차게 돌리고 있다. 한마디로 이국적인 풍광이 펼쳐진다. 능선에 올라선 후에는 오른편 능선을 탄다. 목초지(牧草地)와 숲의 경계선을 따라 길이 나있다. 백두대간, 즉 한반도의 등줄기이다.



이젠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걷는다. 백두대간이란 걸 자랑이라도 하려는 양 바람이 거세다. 아니 이건 숫제 바람의 언덕이다. 초원이 펼쳐진 능선을 따라 늘어선 거대한 풍차들이 윙윙 바람소리를 내면서 돌아간다. 낯설면서도 어느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풍경이 펼쳐진다. 푸른 초원과 파란 하늘 사이에서 희고 거대한 모습을 하고 돌아가는 풍차 아래를 걷는다. 문득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의 장편소설인 돈키호테(Don Quixote)’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비루먹은 말 로시난테를 타고 기세 좋게 풍차를 향해 돌진하던 그 장면 말이다.



남쪽을 바라보면 드넓은 목초지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목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부드러운 초록색 구릉(丘陵)과 바람개비처럼 보이는 흰색의 커다란 풍력발전기, 그리고 푸른 하늘이 함께 어우러지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아니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동화의 삽화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무척 잘 그린 그림인 것만은 분명하다.



길가에는 너무도 앙증맞고 예쁜 들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났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이유이다. 걷기에 편한 구릉지대라서 숨도 차지 않는다. 한껏 여유를 부려가며 들꽃들과 눈 맞추다 보면 10분 조금 못되어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곤신봉 정상에 올라선다.



목초지와 숲의 가운데로 난 길가에 자리한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정상표지석과 곤신봉의 위치와 내력을 적어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곤신봉의 곤()과 신()은 주역에서 남서방향을 이르는 말로, 우리나라 산 이름 가운데 방위와 관련한 용어를 사용한 예는 극히 드물다. 그래선지 곤신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를 적어 놓았다. 강릉부사가 집무하는 동헌(칠사당)에서 바라볼 때 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 방위 용어로 곤신(坤申)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근에는 명당(明堂)이 많아 묏자리로 많이 쓰이지만, 곤신방(坤申方)에서 부는 바람은 떼(잔디)가 잘 자라지 않는 바람이라서 뫼를 쓸 때에는 곤신봉이 바라보이는 곳에는 쓰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단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하산을 이어간다. 사람의 발길을 많이 타지 않은 듯, 길은 나 있지만 좁은 외길이다. 나무의 잔가지와 뿌리가 자연스럽게 길과 계단을 만들어 놓은 덕분에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고도 내려설 수 있다. 아니 능선의 경사가 생각보다는 완만한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낮은목이에서의 하산 코스보다 이 코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산길을 걷다보면 엄청나게 오래 묵은 소나무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저 나무들은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완성할 때쯤 들깨 씨 반쪽만한 솔씨에서 처음 싹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일합방을 겪고, 숱한 가뭄과 홍수를 겪고, 해방과 6·25전쟁을 겪고,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렀을 게 분명하다. 사람에게 사람의 역사가 있듯 나무 한 그루에도 역사가 있고, 자연의 기록이 있다. 산길을 걸으며 이런 자연의 기록들을 살펴보고 또 자연 앞에 우리의 몸을 낮추며 나무처럼 우리 스스로 겸허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갈림길에서 내려선지 40분쯤 지나면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은 부도(浮圖)’ 한 기가 나타난다. 잔재주는 덜 하지만 앙련(仰蓮)의 큰 연꽃무늬가 시원하게 둘러있는 낭원대사오진탑(朗圓大師 悟眞塔 : 보물 제191)’이다. 모든 부분을 평면 8각으로 만든 8각원당형(八角圓堂型) 부도로 한때 무너져 있던 것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탑몸체부(塔身部)를 받치는 기단부의 가운데 기둥과 상륜부(相輪部)의 일부 부재는 없어졌다. 참고로 보현사를 창건한 낭원대사(朗圓大師)834(흥덕왕10)에 출생하여 930(고려태조 13)97세로 입적한 나말여초(羅末麗初)를 빛낸 고승이다. 사굴산파의 창시자이자 강릉단오제의 주신이기도 한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직제자로서, 여기 보현사에 40여 년간 주석하면서 스승의 뒤를 이어 본디 예나라 땅이었던 이 고장의 황량한 풍토에 불광(佛光)을 한껏 펼쳐놓았다고 한다.



다시 7~8분 정도를 가파르게 내려서면 보현사에 이른다. 보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신라시대에 낭원(朗圓)국사 보현이 직접 창건하여 지장선원(地藏禪院)으로 불리다가 후에 보현사로 개칭하였다. 다른 내용의 전설도 전해진다. 신라 때 천축국(天竺國)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이 강릉의 동남쪽 남항진(南項津) 해변에 당도하여 문수사(文殊寺지금의 寒松寺)를 세웠다고 한다. 이 때 보현보살이 한 절에 두 보살이 함께 있을 필요가 없으니, 내가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진 곳을 절터로 삼아 떠나겠다.’하고 시위를 당기니 보현사 터에 화살이 떨어졌으므로 이 절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경내에는 조선 후기 순조 때 중건한 대웅전과 요사채·주지실·종각 등과 1982년에 중건한 나한전(羅漢殿) 등의 당우들이 있으며, 절 앞에는 보물 제192호인 낭원대사 오진탑비(朗圓大師悟眞塔碑)와 사자모양을 취한 석물(石物), 절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보물 제191호인 낭원대사 오진탑, 그리고 속세로 나가는 길목에 20여 기의 부도(浮屠)가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복층으로 지어진 금강루(金剛樓)의 아래는 사찰의 대문격인 금강문(金剛門)이다. 금강문에는 편지공양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을 임시로 만들어 놓았다.



뭔가를 적느라 온 정신을 쏟고 있는 불자들을 피해 경내로 들어서니 법당(法堂) 영역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영산전삼성각, 그리고 우측에는범종각이 서있는가 하면, 스님들의 처소인 수선당등이 오밀조밀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중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3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법당 안에는 흙으로 만든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도광 2’(1822)의 기록이 있는 후불탱화(後佛幀畵)가경4년기미(嘉慶四年己未, 1799)’라는 기록이 있는 탱화 1점이 있다.



절을 빠져나오면 금강루 옆에 보물 제192호인 낭원대사오진탑비(郎圓大師悟眞塔碑)’가 서있다. 신라 성덕왕때인 914년 보현사를 중창한 낭원대사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높이가 188에 폭이 98, 두께가 20나 되는 이 빗돌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 용머리모양의 귀두(龜頭)를 갖추고 등에도 6각의 구갑(龜甲)무늬가 덮여있다. 그 이름에 `고려국명주보현산지장선원(高麗國溟州普賢山地藏禪院)'이라 나와 있으니, ‘범우고(梵宇攷)’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보현사'라고 기록하기 이전의 이 절 이름은 분명히 지장사 또는 지장암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빗돌은 고려 태조23(940)에 세워졌으며, 신라말 고려초에 걸쳐 문필을 휘날렸던 최언위가 지은 비명에 의하면 낭원대사는 신라 문성왕16(854)에 경주에서 태어나 고려 태조13(930)에 이 절에서 입적한 것으로 드러난다.



절을 빠져나온 길손들을 약수터가 맞는다. 다시 속세(俗世)로 돌아가는 중생(衆生)들에게 한 잔의 물로서 배웅이라고 하려는 모양이다. 아무튼 물은 차가우면서도 달콤하다. 아까 대공산성에서 마셨던 물맛보다는 못하지만 감로수(甘露水)로 분류하는 데는 이견을 달지 않아도 되겠다. ! 경내에도 약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보다 물맛이 떨어지는 편이니 갈증을 못 참을 정도가 아니라면 잠시 참아두었다가 이곳에서 물을 마셔보기를 권한다.



보현사 앞으로는 개울이 흐른다. 수량(水量)은 비록 많지 않으나 계곡의 너럭바위 위로 보현산에서 흘러온 투명한 물이 흐른다. 또한 주변의 울창한 숲이 그늘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여름철 피서지로 제격이겠다. 하지만 제방(堤防)이 높아 개울로 내려가는 게 만만치는 않겠다. 스님들의 청정수행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높게 쌓았는지도 모르겠다.



산행날머리는 보현성지 주차장(원점회귀)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길 오른편 아래로는 계곡이 계속 이어진다. 큰 바위와 작은 바위가 조화를 이루고, 바위 위로 흐르는 물들은 작은 폭포를 이루며 떨어진다. 내려가는 길에는 일군의 부도탑(浮屠塔)들도 만난다. 평범한 범인(凡人)의 눈에도 제법 오랜 세월이 베인 곳이라고 느껴져 마음을 여미게 된다. 아무튼 숲 그늘의 시원한 촉감과 청량한 물소리는 지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주변 풍광에 푹 빠져 걷다보면 저만큼에 보현성지 표지석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정확히 4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이 채 10분을 넘기지 않았으니 오롯이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