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올드 시티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 이란 및 러시아와 접한 카스피 해 연안의 국가.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데 경제의 상당 부분을 석유와 천연가스가 지탱하고 있어 불의 나라로 불린다. 동유럽권에 속해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까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 달리 아제르바이잔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에 서아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점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동유럽권으로 보는 이유는 19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영향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바쿠(Baku) :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다보다 낮은 카스피 해 연안에 위치,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도라고 한다(가장 높은 수도는 볼리비아의 라파스이다). 캅카스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약 4분의 1 가량이 집중되어 있는 경제의 중심지이다. 2000년대 이후 오일 달러로 아제르바이잔의 경제가 크게 성장하면서 도시 곳곳에 마천루 등 여러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알려진다.

 

 아제르바이잔, 아니 바쿠에서의 첫 만남은 구시가지((Old City))이다. 버스에서 내려 잠시 걸으면 올드 시티 투어의 시작과 끝인 하드록 까페(Hard Rock Cafe)’에 이른다.

 이번 여행은 코카서스 3(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여행사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흑해 연안의 바투미(조지아 제2의 도시)’도 마지막에 들렀다. 그리고 튀르키예의 리제로 넘어가 이스탄불(환승)을 거쳐 귀국했다.

 올드시티의 주요 볼거리는 지도에 표시된 게 다라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이 지도로 찾아다니는 것은 불가능. 앱의 길 찾기 기능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대충 방향을 잡은 다음 무작정 걸으면 된다. 올드 시티의 규모가 작으니 어렵지 않게 찾아 낼 것이다.(지도는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하드록 카페 앞에 아제르바이잔 최고의 서정시인 중 한 명인 나타반(1832-1897, Khurshidbanu Natavan)’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카라바흐 칸국(Karabakh khanate)’의 마지막 통치자인 메흐디굴루 칸(Mahdiqoli Khan)‘의 딸로 인본주의·우정·사랑을 주제로 한 서정적인 가잘을 잘 썼다고 알려진다. 가잘(ghazals)이란 각 줄 끝에 은율이 있는 2행의 후렴구가 특징인 시의 한 형태이다.

 올드 시티의 주 출입구인 동쪽 성문 밖에는 아제르바이잔의 국민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니자미 간자비’(Nizami Ganjavi)의 동상이 세워진 기념 공원이 있다. 참고로 니자미 간자비(Nizami Gencevi, 1141-1209)’는 아제르바이잔 간자시 출신의 시인이다. 본명은 일야스 이븐 유시프(Ilyas Ibn Yusif). 니자미는 아호로 실로 꿰다’,  단어를 조절한다는 뜻을 갖는다. 다섯 편의 서사시 모음집인 함사(Khamsa)’로 이슬람세계에 필명을 떨쳤다고 한다. 1991년 유네스코는 니자미의 850주년을 기념해 세계 기념 인물로 선정했다.

 기념공원 바로 앞에는 니자미 문학 박물관도 있다. 이슬람식 문양과 디자인을 주로 사용한 건물이다. 건물의 전면 2층에는 유명 문인 6명의 동상이 있다. 이들 동상 때문에 박물관은 마치 성전 같은 분위기를 띤다.(화질 때문에 후면 사진 게재)

 동문으로 들어가면서 바쿠의 과거 그 자체인 올드 시티(Old City)’ 투어가 시작된다. 현대적 도시의 심장부에 위치한 올드 시티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채 7~12세기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궁전, 모스크(mosque), 탑 등을 간직하고 있다.

 옛길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이정표를 만난다. 아제르바이잔어와 함께 영어를 병기해놓아 어렵지 않게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다.

 오래된 도시답게 눈에 들어오는 건물마다 하나같이 중세풍이다. 맞다. 이곳 올드 시티는 옛 시내 중심이었고 지금도 시내 중심이라고 한다.

 이곳은 아제르바이잔이 갖고 있는 3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바쿠 성곽도시(Walled City of Baku)’를 품은 문화유적지이다. 그래선지 공사장의 가림막까지도 중세풍의 건축물을 그려 넣었다.

 시르반샤궁(Shirvanshah’s Palace)으로 가는 길, 오른편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성곽이 따라온다. 구시가지의 성곽은 12세기 메투쏘르(Menutsshochr) 왕 시대에 건설되었고, 19세기에 보수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성벽은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하지만 중세에는 카스피 해가 바로 아래까지 찰랑거렸다고 한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포루(砲樓)가 만들어져 있는가 하면, 그 안에는 옛 풍경을 떠올려보라는 듯 당시 사용하던 대포를 전시해 놓았다. 그런데 이게 성 안의 주택가를 향하고 있으니 문제다.

 아름답게 치장된 저 건물은 알리 샴시 스튜디오(Workshop Ali Shamsi)’라고 했다. 대문과 벽이 요란스럽게 치장되어있는데, 특히 사자 그림이 눈길을 끈다. 용기, 고귀함, 지혜를 뜻한다나?

 맞은편 나무는 한술 더 떴다. 가로수에 여자 얼굴을 새겨 포토죤으로 만들었는데, 환경운동가들의 먹잇감으로 이만한 게 없겠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한참을 올라가니 모스크와 궁전의 돔형 지붕이 보이고, 궁전의 정면 출입구가 나타난다. ‘시르반샤 궁은 성곽도시인 바쿠가 품은 가장 중요한 문화재 중 하나다. 시르반샤궁전과 메이든탑이 있는 바쿠 성곽도시(Walled City of Baku with the Shirvanshah’s Palace and Maiden Tower)’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000년 등재)됐다. 하지만 2003년 위기에 처한 유산으로 지적받기도 했다.

 입구의 안내판은 아제르바이잔 건축의 진주로 불리는 시르반샤 궁전(Shirvanshah’s Palace)’ 14-15세기에 지어졌음을 알려준다. 시르반샤 왕조 칼리룰라(Khalilulla) 1세와 1501년 전쟁에서 사망한 그의 아들 파루크(Faruk)의 통치 기간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18세기 러시아 해군의 폭격으로 상층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복구 작업이 진행됐다. 참고로 Shirvan 9세기경부터 1538년 이란 사파비드에 의해 병합될 때까지 이 지역에 있던 왕국이다. 12세기 이후 문화적 전성기를 누리며 도심에 성곽을 축조하는데, 이때의 건물로 메이든 타워로 남아 있다. 13세기에는 바쿠가 일한국(Il-Khante)의 여름궁전이 되어 건축이 이루어졌다. 14세기까지 바쿠 구시가지(Icheri Sheher)를 중심으로 성이 여러 번 새로 지어지고 고쳐지는데, 그 결과가 현재 쉬르반샤 궁전으로 남아 있다.

 왕궁은 부속 건물들과의 균형감 있는 조화가 자랑이라고 했다. 궁전의 단지는 여러 개의 개별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거 지역과 다반하네(Divankhane, 공식적인 회의와 연회 장소), 시르뱐샤의 묘, 첨탑이 있는 회교사원, 목욕탕(hammam), 궁중 점성술사였던 세이드 야야 바쿠비(Seyid Yahya Bakuvi)의 묘, 키구바드(Key-Gubad)의 회교사원 등이다.

 입구의 안내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둘러볼 동선 정도는 파악해두고 안으로 들어가자.

 궁전의 파사드(facade :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 이슬람의 궁전답게 아라베스크(arabesque) 문양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문자·식물·기하학적인 모티프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무늬다.

 1층은 국왕의 거주 공간이었다. 집무는 2층에서 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수습된 유적과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왕의 계보를 보여주는 표, 그밖에도 왕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박물관 형태로 전시되고 있다.

 마치 우물처럼 보이는 저 구멍은 손님이 찾아왔을 때 연회나 만찬을 준비시키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왕이 사용하던 물건들에서 이슬람 통치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주전자가 눈길을 끈다. 동서 문물의 교류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유형의 주전자다.

 황금빛의 저 화려한 장신구는 말안장이 아닐까? 벽에는 사용하기가 아까울 정도로 화려한 칼도 세 개나 걸려 있었다. 하나 더. 전통악기도 눈에 띈다. 초구르(Chogur)로 불리는 현악기, 산투르(Santur)로 불리는 줄을 쳐서 소리 내는 타현악기, 까발(Qaval)로 불리는 북이라고 한다.

 아랍어로 쓰인 책도 있다. 종교적인 서적이 아닐까 싶다.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그림.

 바쿠 구시가지의 모습을 미니어처 형태로 재현해 놓았다. 옛 서울, 그러니까 한성(漢城) 4대문 안에 궁궐과 관아, 그리고 백성의 거주지역이 함께 들어서 있었음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고궁의 전시관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도 눈에 띈다. 전임 대통령인 헤이다르 알리예프라는데, 그의 사진은 이곳 말고도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현 대통령인 일함 알리예프(Ilham Aliyev)의 아버지이기도 한데, 어느 정도 우상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헤이다르는 소련연방 시절 공산당 서기장과 정부 수반을 지냈으며, 1993년부터 2003년까지 아제르바이잔공화국 제3대 대통령을 지냈다.

 정원에는 왕의 스승이자 유명한 점술가, 과학자였던 세이드 야야 바쿠비의 묘당이 있었다. 이밖에도 궁에는 역대왕의 무덤이 있는 디반카나(Divankhana)와 왕가의 영묘도 있다고 했다.

 궁전 벽에는 시바이엘(Sabail) 섬의 요새에서 나온 장식용 패널(명문)과 건축 부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바이엘 요새는 1306년 지진에 의해 파괴되어 바닷물에 잠긴 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18세기 들어 바닷물이 줄어들면서 세상에 드러났다고 한다.

 궁전에서는 빌딩의 숲을 뚫으며 솟아오른 타워전망대와 3개의 빌딩 중 2개만 보이는 플레임 타워(Flame Towers)도 조망된다. 가이드의 말마따나 건물의 모양새가 아제르바이잔의 상징인 불꽃을 쏙 빼다 닮았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 그러니 민초들의 삶도 한번쯤은 엿봐야 하지 않겠는가. 첫 만남은 1078~1079년에 건설되었다는 모하메드 모스크(Muhammad Mosque)’. ‘손상된 탑이란 뜻의 시니갈라 모스크(Siniggala Mosque)’로도 불린다. 1723년 러시아 함대가 바쿠에 접근 항복을 요구하다 거부당하자 포격하기 시작했을 때 포탄 중 하나가 미나렛(첨탑)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강풍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함대가 먼 바다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나? 아무튼 바쿠사람들은 이것을 외국 침략자로 부터의 하나님의 보호로 인식했으며 그후 19C 중반까지 모스크의 미나렛을 저항의 상징으로 복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나갈라(손상된 탑)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궁전 앞의 소공원. 알록달록한 홍차 잔을 포개놓은 것 같은 조형물이 얼핏 탑으로도 보인다. 맞다. 이 탑은 터키, 우즈베키스탄 등 전 세계에 있는 투르크족이 세운 일곱 나라들을 상징한단다. 아제르바이잔도 그중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꿩 대신 닭이라고나 할까? 어느 여행 작가가 애국심까지 들먹거리던 무궁화는 눈에 띄지 않았고, 대신 시계꽃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나이 70을 넘기고서도 세계일주의 꿈을 이루어나가는 우리 부부의 열정(시계꽃의 꽃말)’을 대변해주는 꽃이다.

 잠시 후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이 눈에 띈다. 얼굴만 있는 이 흉상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명한 시인이자 예술가인 알리아가 바이드(1894-1965)’라고 한다. 1990년 제작된 이 조각상에는 우회적으로 표현된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과 나무줄기, 뿌리로 얽힌 모습은 가잘칸 나는 위대한 푸줄리의 후계자다라는 작가의 반문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바쿠의 구시가지 성곽인 이체리 세히르(Icheri Sheher)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얼마 남지 않은 중세 도시 중 하나라고 했다. 그래선지 미로같이 연결되어 있는 좁은 길과 밀집되어 있는 건물, 작은 정원 등과 같은 중세 도시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아시아의 서쪽 끝, 유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하지만 비치파라솔을 씌운 테이블을 야외에 놓고 손님을 받는 식당에서 이곳이 유럽에 더 가까운 문화를 지니고 있음을 실감했다.

 아기자기 예쁘게도 장식된 좁은 길을 따라 18세기 후반에 건설된 집들이 고풍스럽게 늘어서있다. 골목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허튼 데가 하나도 없다. 모두들 사무실이나. 작은 레스토랑, 작은 호텔, 오래된 개인집은 하우스 박물관(House Museum)으로 이용하고, 각종 기념품점, 홈메이드 공예품점들도 있었다.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묵었다는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는 현재 고급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물탄(Multani) 카라반세라이를 비롯해 16세기에 지어진 부카라(Bukhara) 카라반세라이 등 과거 이곳이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말해준다.

 주마 모스크(Juma Mosque)’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원래 이곳에는 배화교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1309년에 아미르 샤라프 알딘 마하무드의 명에 의해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세월이 흘러 이게 황폐해지자 1899년에 그 자리에 주마모스크를 새로 지었다고 한다.

 이 나라도 카펫이 유명한 모양이다. 길가 수많은 상점으로도 모자라다는 듯 길바닥까지 전시장으로 삼았다. 그래선지 카펫 박물관까지 만들어놓았다는데 직접 가보지는 못했다.

 올드 시티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12세기에 지어진 메이든 타워’(Maiden Tower).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요새는 직경 16.5m에 높이가 29.5m인 원통형이며 성벽의 두께는 5m나 된다. ‘메이든이란 이름은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요새에서도 나타나는데, ‘정복되지 않는다'’ 또는 확고부동하다는 뜻을 의미한단다. 이름대로 성채는 지금까지 부서지거나 외부 세력에 정복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으나 시도해보지는 않았다.

 일명 소녀의 탑으로 불리는 이 탑은 12세기 건축된 800년 역사의 방어용 고탑으로 몇 가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설은 바쿠 왕의 딸 메이든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이곳에 감금당하자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다. 또 바쿠 왕이 감금한 여동생이 수치심으로 투신했다는 설과 바쿠성을 쳐들어온 적과 싸운 아름다운 여인의 전설도 있다.(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가이드는 메이든 타워 앞 유적을 바르톨로메오의 무덤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12 제자 중 한 분이었던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등에 포교를 하다가 잡혀 살갗이 벗겨져 죽임을 당했는데 그 장소가 이곳이라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에서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하나 더. 귀국해서 검색해보니 이곳을 하맘 목욕탕으로 소개하는 글이 더 많았다.

 저 석상의 정체는 뭘까? 저 유적지를 지켜주는 신상일지도 모르겠다. 저곳에서 52개나 되는 무덤(석관)이 발견되었다니 말이다.

 어느 레스토랑 앞에서 만난 또 다른 조형물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행운이라는 벼룩시장도 만날 수 있었다. 탐나는 물건도 눈에 띈다. 하지만 눈요기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반입을 금지한다는데 어쩌겠는가.

 자유 시간에 들러본 먹자골목(?).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 문화권이다.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이다. 하지만 거리에는 히잡 쓴 여성이 드물었다. 술집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세속주의 이슬람을 채택하면서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인 덕분일 것이다. 하나 더.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직 낯선 나라인 모양이다. 투어를 하는 동안 우리 일행 외에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2016년 중순부터는 공항에 도착해서 간단한 비자 신청서만 작성 후 20달러만 제출하면 누구나 비자를 받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거기다 물가도 조지아·아르메니아·튀르키예 등 주변 국가들에 비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비하면 월등히 싸다지 않는가.

서해랑길 49코스(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부안군청)

 

여 행 일 : ‘24. 4. 13()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하서면 및 부안읍 일원

여행코스 :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노계마을등용마을석하마을구암리 지석묘군분장마을장서마을대초마을매창공원서림공원부안군청(거리/시간 : 19.2km, 실제는 13.86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9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아홉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해랑길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새만금을 멀찍이 뒤로 밀어내며 동쪽 내륙으로 들어간다. 바다는커녕 간척지조차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부안의 명기를 기리는 매창공원과 서림공원, 구암리 지석묘군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들머리는 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18km쯤 내려오다 백련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이다. 서해랑길(부안 49코스) 안내도는 단지 맨 안쪽 월포마을 경로당 맞은편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다섯 번째 여정. 서해랑길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바닷가가 아닌 내륙의 평야지대를 걷는다. 평지를 걷지만 19.2km나 되는 길이가 부담스러웠던지 난이도는 별이 3(5개 중)로 분류된다.

 실제 출발은 ‘705번 지방도(변산로)’ 석하마을 버스정류장(부안군 하서면 석상리)’에서 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을 생략하는 대신, 허난설헌, 황진이와 함께 조선 3대 여성 문인으로 꼽히는 매창의 숨결을 조금 더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이정표(종점 13km/ 시점 6.2km)는 우리가 1/3이나 단축해서 걷게 될 것임을 알려준다. 너무 많이 줄어드는 게 아쉽지만, 그 시간에 더 많은 것을 가슴에 담을 수 있으니 억울해 할 일은 아니다.

 11 : 41. 석하마을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법정 동리인 석상리(石上里) 8개 행정부락(청일·반암·구암·용와·석상·석하·마전·운암) 중 하나로, ‘석하란 마을 뒷산에 있는 애기바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바위 인근에 있는 마을(‘돌마리 또는 돌마을’) 아래뜸이라고 해서 석하(石下)로 불린다는 것이다.

 11 : 48. 석하마을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리고는 또 다시 도로로 올라선다. 벚꽃으로 단장한 도로는 변산로에서 고인돌로로 이름표를 바꿔달았다. 부안의 명소 중 하나인 구암리 지석묘군으로 연결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들녘 너머에서 악어산(48.7m)’이 고개를 내민다. 뒤는 석불산(289.7m)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도로변에서 만난 만첩홍매화’. 매화인데 붉은 겹꽃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 후기의 원예가 유박(柳璞 : 1730-1737)은 화암수록(花庵隨錄)에서 매화는 비스듬히 뻗은 여윈 가지에서 성글게 나온 녹악(綠萼) 단엽백매(單葉白梅)를 최고로 치며 천엽(千葉)은 속된 티가 나므로 운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유박처럼 고매한 품격을 지니지 못한 내 눈에는 만첩홍매가 모든 매화 중에서 가장 예쁘게만 느껴진다.

 11 : 50. 잠시 후, 도로를 벗어나 석상(石上) 마을로 들어간다.(초입에 마을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석상리(石上里)의 또 다른 행정부락으로 돌마리 웃뜸 정도로 알아두면 되겠다.

 마을 입구에는 지석묘만큼이나 오래 묵어 보이는 팽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노거수(老巨樹)이니 다 같이 아껴주자는 안내문까지 달았다. 그런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이유가 뭘까?

 석상마을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구암마을로 간다. 석상리의 또 다른 행정부락으로 구암(龜巖)’이란 지명은 이 마을에 있는 고인돌에서 유래했다. 고인돌의 생김새가 거북이 등딱지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12 : 00  12 : 05. ‘구암리 지석묘군(사적 제103)’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고인돌 주변의 민가를 없애고 잔디를 깔아 고인돌 공원으로 조성했다. 너른 주차장은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갖추었다.

 지석묘(支石墓)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탁자처럼 생긴 북방식과 바둑판 모양인 남방식이 있는데, 이곳 구암리 지석묘는 받힘돌이 있는 남방식이라고 한다. 원래 13기가 있었지만 현재는 10기만 남아 옛 얘기를 전해준다.

 고인돌은 10기가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거북이 등딱지처럼 생긴 덮개돌(上石)을 여러 개의 고임돌(支石)이 받혀주는 모양새이다. 바둑판식 지석묘가 시대를 내려오면서 덮개돌 아래에 몇 개의 주상(柱狀) 또는 판상(板狀) 고임돌을 외연을 따라 세운 것으로, 그 자체가 무덤방(石室)의 역할을 한단다.

 요것은 영락없는 탁자다. 그래서일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곳에 고인돌 찻집을 차리고 싶다고 적었다. 하지만 동네 할머니들 눈에는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가을이면 고인돌 위에 고추를 널어놓았었다니 말이다.

 12 : 06. 도로(고인돌로)로 빠져나와 구암교 영은천(靈隱川)’을 건넌다. 내변산 입구 우슬재와 하서면 옥녀봉 분지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청호저수지 남쪽, 하서면 언독리와 행안면 삼간리 경계지점에서 주상천에 합류되는 하천이다. 하나 더. 다리건너 도화사거리에서는 직진이다. 하지만 지방도는 705번에서 736번으로 이름표를 바꿔달았다.

 상서초등학교는 잘 가꾸어진 공원을 연상시킨다. 교정에 힐링 숲길을 조성하고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의 동상과 함께 기린, 얼룩말 등의 조형물을 세워 자연학습 공간으로 꾸몄다.

 구암교에서 상서면으로 들어선 고인돌로는 면소재지를 향해 달려간다.

 왼쪽으로는 하서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구암리 지석묘군이 있게 한 근원일 것이다. 저런 평야지대가 있었기에 지석묘를 축조할 만한 세력이 웅거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오른쪽에는 도화(봉암)마을이 있다. 법정 동리인 통정리(通井里)를 구성하는 7개 행정부락(통정·성암·신성·도화·풍랑·수련) 중 하나로 부안의 너른 들녘이 품은 마을답지 않게 명덕산을 병풍삼아 오롯이 앉아있다.

 12 : 17. 버스정류장 앞 삼거리에서 고인돌로를 벗어난다. 그리고는 봉야로를 따라 분장(分章)’ 마을로 간다.(삼거리의 도로표지판은 장동 방향으로 적고 있었다) 법정 동리인 장동리(長東里)를 구성하는 3개 행정부락(장동·장서·분장) 중 하나이다.

 도로(봉야로)를 가운데 두고 통정리(왼쪽)와 장동리(오른쪽)가 나뉜다. 아래 사진은 통정리의 자연부락인 성암마을이다. 반대편에는 장동리 소속의 분장마을이 있다.

 12 : 26. (분장마을)버스정류장과 양곡보관창고를 차례로 지나면 수로(水路). 서해랑길은 이 물길을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수로의 둑을 따라간다.

 12 : 28. 잠시 후, 평야지대를 만나면서 수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들녘 가장자리를 따라 난 농로를 따라간다. 왼쪽이 구릉지인데 반해 오른편으로는 푸름으로 물든 들녘이 질펀하게 펼쳐진다.

 12 : 32. 그렇게 조금 더 걷자 작은 마을 하나가 반긴다. 하지만 마을은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농사철을 맞아 들일이라도 나간 모양이다. 덕분에 난 마을 이름도 알아보지 못한 채 장서마을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구릉지와 농경지를 양쪽에 낀 들길은 한참이나 더 계속된다.

 생과 사는 백지장 한 장 차이라고 했다. 그런데 저 민들레는 그 차이마저도 없애버렸다. 꽃과 홀씨가 한데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봄바람 불고 들녘에 아지랑이 아롱거리면, 길가에 무심하게 자라는 풀 한 포기도, 야생화 한 송이도 왠지 모르게 가슴을 흔든다. 그래서일까? 문득 박미경이 부른 발라드곡 민들레 홀씨 되어의 가사가 떠오른다. <-전략- 우리는 들길에 홀로 핀 이름 모를 꽃을 보면서 외로운 맘을 나누며 손에 손을 잡고 걸었지 후략->

 12 : 42. 10분 정도 더 걸었을까 이번에는 장서마을이 반긴다. 장동리(長東里)에 속한 자연부락이다.

 장동리의 옛 이름은 장다리(長橋里)’였다. 마을 옆 두포천(斗浦川)을 오가는 다리 이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주민들이 두포천을 건너기 위해 섶다리를 놓았는데, 큰비가 오거나 해일이 닥치면 이 섶다리가 부서져 숙명처럼 다시 만들어야 했고, 지명도 긴 다리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장다리라 불렀단다. 1935년 두포천 하구에 갑문이 설치되고 농경지가 안정되면서 마을이 확장되었고, 이때 서쪽으로 형성된 새로운 마을이 장서(長西)’로 불리게 된다. 장교가 장동(長東)’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12 : 44. 장서마을 앞에서 들녘으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농경지 사이로 난 들길을 따른다.

 좌우로 펼쳐지는 드넓은 들녘은 온통 푸름에 젖어있다. 인근 목장에서 기르는 초지일 것이다.

 들녘 곳곳에는 축사가 들어서 있었다. 최근에 지어진 듯 하나같이 최신식 시설을 갖추었다. 덕분에 곁을 스치듯 지나가는데도 분뇨 냄새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사료용 초지도 많지만 푸름의 대부분은 청보리 몫이다. 시선을 따라 초록빛으로 물든 청보리 물결이 가득 일렁인다. 5월에 수확하는 청보리는 4월에 한창 물이 올라 청록의 봄을 알려준다.(사진은 보리를 다치지 않으려고 고랑에서 찍었다)

 들녘이 넓어서인지 물을 대는 수로도 하천만큼이나 넓다. 물막이도 바닷가 간척지의 배수관문을 연상시킨다.

 12 : 57. ‘주상천(舟上川)’을 건넌다. 두포천(斗浦川) 또는 목포천(木浦川)으로도 불리는데, 상서면과 보안면의 경계를 이루는 호벌치 계곡에서 시작해 주산면·행안면·하서면을 지나 계화면(의복리) 돈지갑문에서 서해안 새만금으로 유입되는 길이 18.4km의 지방하천이다.

 대초양수장. 농경지에 물을 대려면 양수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상서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주상천을 건너면서 행안면에 바톤을 넘긴다. 눈앞에 펼쳐지는 행안면의 들녘은 무척 넓다. 하지만 막힘없이 펼쳐지면서 지평선을 만들어내던 새만금의 모습은 아니다. 좀 넓다 싶으면 옹기종기 마을이 들어앉았고, 그 너머 산자락에서 들녘은 끝나버린다.

 행안면에서의 첫 만남은 야룡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대초리(大草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대초·송호·송서·야룡) 중 하나로, 늦깎이 등단 시인으로 시선을 모은 왕정순(79) 할머니가 사는 고을이기도 하다. 2022 문해, 지금 나는 봄이다라는 시로 전라북도 도지사상을 받았고, 2023년에는 시 부문 전북문단 신인작품상을 받아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다.

 13 : 18. 창고로 여겨지는 건물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13 : 16). 이어서 만나게 되는 도로(순환북로)는 그냥 횡단해버린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농로를 탄다.

 13 : 21.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도로(봉야로)에서는 오른쪽으로 간다. 도로를 따라 부안 방향으로 간다고 보면 되겠다.

 13 : 23. ‘원일볼트라는 제조공장 앞에서 도로(봉야로)를 벗어나 왼쪽으로 들어간다. 대초마을로 들어가는 길인데, 초입의 주영목장 입간판을 참조하면 되겠다.

 13 : 26 - 13 : 41. 대초마을 동구 밖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작은 경기장에 운동기구, 거기다 정자까지 갖추었으니 도시 부럽지 않은 시설이다. 덕분에 우린 느긋하게 간식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13 : 43.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대초리(大草里)의 중심이랄 수 있는 대초마을에 이른다. 예로부터 대추나무가 많았다는 마을이다. 조촌(棗村) 혹은 대추멀이라고 불리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마을 크기와 발음 표기상의 편의를 감안 대추 대초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대초마을 경로당. 마을의 오랜 역사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엄청나게 굵은 팽나무가 건물을 감싸주고 있다. 서해랑길은 이 경로당 앞 골목으로 빠져나간다.

 들녘은 부지런한 농부들로 그득했다. 논에 물을 대고, 밭은 갈아둔다. 돌아오는 농번기를 대비하는 평화로운 농촌 충경이라 하겠다.

 13 : 50. 2차선 도로(행안중앙로)를 횡단하면 신월경로당에 이어 신월마을이 반긴다. 법정 동리인 신기리(新基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신월·청교·안기·계시) 중 하나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새터로 불리다가 신월(또는 신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3 : 56. 또 다른 2차선 도로(신기신월로)를 횡단하면 길은 재내마을로 이어진다. 법정 동리인 진동리(眞洞里) 6개 행정부락(남산·지석·행산·신목·순제·재내) 중 하나다. 이 마을은 시멘트 건물 위에 별도의 지붕을 올린 정자가 눈길을 끌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지붕이 위태위태한데도, 그게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고나 할까?

 서해랑길은 재내마을을 왼쪽으로 에두른 다음 작은 고개를 넘는다.

 14 : 03. 고개를 넘어 월륜길로 내려선다. 그곳에 1941년에 개교했다는 행안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도 부침의 세월을 겪었다고 한다. 학생 수가 줄어 한때 폐교 위기에 까지 몰렸으나 새로운 길을 모색해 이를 타개했다. 부안읍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유치했다나?

 14 : 10  14 : 32. 행안초교사거리(로터리)를 지나면서부터는 매창로를 따른다. 부안이 자랑하는 지명답게 도로도 4차선으로 바뀌어 있다. ! 로터리 부근 진동공원에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점심을 먼저 먹은 다음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라는 모양이다.

 14 : 45. 매창로를 따라 걷길 13. ‘매창공원(이정표 : 종점까지 3.2km)’에 이른다.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여류문장가로 유명한 부안의 명기 이매창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매창의 묘와 시비가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매창(李梅窓 : 1573-1610)은 조선 선조 때의 여류시인으로 이름은 계생 또는 향금이라 했으며, 자는 천향이고 호는 매창이다.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서녀(庶女)로 태어나 아버지한테 글을 배워 한시에 뛰어났으며 가무도 잘했는데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 또한 시조에도 능하여 그의 작품이라 전하는 시가 수십 편에 이르는데 그중 이화우는 이별을 노래한 으뜸 시로 꼽힌다.

 1592, 20살 무렵의 매창은 촌은 유희경(劉希慶 : 1545-1636)과 만나 사랑을 나누고, 평생의 연인이 된다. 이귀와 허균과도 깊은 교류를 했다고 한다. 갓 스무 살이 된 매창은 막 피어오른 꽃봉오리 같은 나이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홀로 남겨져 외로움과 그리움에 시달린다. 봄비처럼 흐느끼는 이화우(梨花雨)’  배나무 꽃비는 그런 매창의 처지를 읊지 않았을까 싶다.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며 잊혀져가는 사랑을 애태우는...<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그밖에도 억고인(憶故人), 증취객(贈醉客), 병중(病中) 등 매창의 여러 시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연인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규원(閨怨)’도 그중 하나다. 사랑하는 그 마음 바다처럼 깊은데 소식은 끊어지고 긴긴 밤에 애간장만 탄다나?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손가락이 마를 정도였을까. <애끓는  말로는 할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남아 세였고나/ 생각나는  그대도 알고프거던/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유희경과 매창은 28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인 사이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의병을 일으킨 유희경과 이별하게 되었고 매창이 37세로 죽을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유희경은 독보적인 예학과 임금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천민의 너울에서 빠져나온 행운아다. 그러나 유희경은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분상승으로 인한 양반들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매창의 간절한 연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마음까지 끊을 수 있겠는가. 매창에 대한 그리움을 오동우(梧桐雨)’란 시로 남긴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라는 허균(許筠 : 1569-1618)의 시도 눈에 띈다. 허균과 매창이 처음 만난 것은 1601 7월이었다. 허균이 조운(漕運)을 감독하기 위해 전라도로 내려가던 중, 비가 많이 내려 부안에 머물게 되었고, 이때 매창을 만나게 된다. 이후 10년간의 교류가 이어진다. 허균의 문집에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후세 문인들도 그녀를 기리고 있었다. ‘매창 뜸이란 시를 지은 가람 이병기(李秉岐 : 1891-1968)도 그중 하나이다. <-전략- 이화우(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 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그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나삼을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겼으리/ 그리던 운우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남았다>

 정비석(鄭飛石 : 1911-1991) 매창묘를 찾아서라는 글을 썼다. <-전략- 그대가 가슴 가득히 설움을 품고 죽어간 지 3 60여 년 후인 이 날에 60노부가 그대의 시를 사랑하고, 그대의 인품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에서 엄동설한에 천리 길을 멀다않고 찾아와 무덤 앞에 경건히 머리 수그리는 이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후략->

 유희경과의 슬픈 사랑을 남긴 채, 매창은 37세를 일기로 동고동락하던 거문고와 함께 잠들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 뜸이라고 부른다. 묘는 소박한 묘비와 상석이 석물의 전부였다. 그러나 알 만한 이들은 오석비신에 팔작지붕을 얹은 근사한 묘비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 그의 인품과 시를 사랑하는 선비와 풍류가에 의해 세워지고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 더. 정비석이 찾아왔을 때만 해도 이곳은 공동묘지였다. 부안군에서 다른 묘들을 이장하고 공원을 조성하면서 주민들의 뜻에 따라 매창의 묘만 남겨두었단다.

 공원은 복합 문화공간으로 꾸몄다. 매창의 묘와 시비 외에도 매창테마관, 습지공원, 어린이놀이터, 농구장, 운동기구 등이 들어서 있었다. 부안의 출향 인사들이 세운 부사(扶士)의 탑도 눈에 띈다.

 15 : 06. ‘매창테마관 2층의 한옥으로 지었다. 1층은 전시관이고 2층은 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기 휴일인 월요일을 빼고 매일 10시에 개관해 5시에 문을 닫는다. 하나 더. 사람들은 매창을 사랑의 화신으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트() 조형물을 배경삼아 사진부터 찍어두고 테마관으로 들어가 보자. 화사하게 핀 튜립이 당신의 사랑을 한껏 축복해줄 것이다.

 매창테마관의 현판, ‘매창화우상억제(梅窓花雨相憶齋)’ 매화꽃 핀 창가에 꽃비가 내릴 때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집이란 뜻으로 전북대학교 김병기 교수가 짓고 썼다고 한다.

 전시관은 4개의 주제로 나누었다. 먼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풍경에 그녀의 대표적 시문을 감상할 수 있게 했고, 이어 매창의 생애, 매창이 남긴 작품 감상과 매창집이 남긴 의미 등을 알아보는 순서로 꾸몄다. 맨 마지막엔 디지털 포토죤이 설치되어 있었다.

 만일 58편의 작품이 담긴 매창집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매창을 알 수도 없었겠지? 매창은 시재(詩才)가 특출하고 가무(歌舞)와 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여류 예술인으로 한시 수백 수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매창의 작품으로는 시조 1수와 58수의 한시가 매창집에 실려 있을 따름이다. 부안현의 아전들이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던 것들을 모아 개암사(開巖寺)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 후세에 전해진다. 3부를 간행했는데, 2부는 서울 간송미술관에 1부는 미국 모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단다.

 내가 좋아하는 매창의 시 춘사(春思, 봄날의 그리움)’가 적혀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유희경에 대한 그리움을 <삼월이라 동녘바람이 불어/ 곳곳마다 꽃이 져 흩날리네/ 상사곡 뜯으며 임 그리워 노래해도/ 강남으로 가신 임은 돌아오시질 않아라>로 읊는다. 나 같으면 단숨에 부안으로 달려왔을 텐데...

 테마관 뜨락에서 만난 글자 조형물. 매창을 낳은 고장답게 바람 부는 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파도치는 소리’, ‘새 우는 소리 등 부안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함께 들어 행복한 소리이자 사랑 그리고 사랑으로 표현했다.

 공원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아직도 새 맛을 퐁퐁 풍기는 각종 시설물들은 물론이고, 산책로에는 나무와 꽃들을 식재하고 곳곳에 조형물과 쉼터를 설치했다. 밤이 되면 조명이 켜져 운치 있는 야간 산책도 가능하단다. 그런 여건을 살려 매년 5월 이곳에서 부안 마실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15 : 18. 매창공원을 빠져나와 도로(오리정로)를 건너면 부안예술회관이다. 문화·예술 공연시설로 1층은 300명 수용의 다목적 강당과 전시실, 2층은 499석의 공연장과 회의실·연습실·분장실 그리고 3층은 조명실과 영사실로 구성되어 있다.

 15 : 23. 조금 더 진행해, ‘번영로를 가로지르면 이번에는 부안중학교가 반긴다. 이정표가 종점까지 1.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15 : 29. 부안중학교 뒤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상소산(上蘇山, 114.9m)’이 고개를 내민다. 조선시대 부안현의 진산으로 한국지명총람에는 삼국통일 당시 당나라 소정방이 진을 쳤었다고 수록되어 있다. 상소산(소정방이 오른 산)이란 지명과 어울리는 얘기이다. 하나 더. 저 산에는 부안현의 사묘 중 고을 수호신을 모시던 성황사가 있었다고 한다. ‘성황산(城隍山)’으로도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공원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초입의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저 가운데에 서면 천사로 변할 테니 최고의 포토죤이라 하겠다.

 15 : 30. 서해랑길은 서림공원(西林公園)으로 들어간다. 1848년 부안 현감으로 부임해 온 조연명에 의해 숲이 조성되었는데, 관아 주변의 성황산이 황폐한 것을 보고 동네 유지 33인으로 삼십삼수계(三十三修稧)’를 조직하여 나무를 심고 서림정이라는 정자도 건립했다. 이후 이필의 현감이 부임해 왔을 때 숲이 다시 황폐해져 있어 앞서의 를 다시 부활시켜 숲을 가꾸면서 오늘의 서림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서림(西林)이란 부안 관아의 서쪽에 있는 숲이라는 뜻이다.

 서림공원은 부안 현감이던 조연명(趙然明)과 이필의(李弼儀)가 나무를 심고 가꾼 데서 시작됐다. 반대편 산자락에 있는 임정유애비(林亭遺愛碑)에는 두 현감의 서림 숲 조성과 서림정을 건립하여 가꾼 것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관의 주도 하에 가꾸어진 서림공원은 2016년 산림청의 국가산림문화자산에 지정된바 있다.

 15 : 34. 조금 더 걷자 gpx트랙이 이제 그만 산책로(임도)를 벗어나란다. 그리고는 편백나무 숲속으로 인도한다. 수십 년은 족히 묵은 듯 어른의 몸통만큼이나 굵은 편백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는 멋진 구간이다. 울창한 숲속에는 누워서 쉴 수 있는 벤치까지 놓아 힐링의 공간으로 조성했다.

 15 : 39. 정상에는 팔각정이 지어져 있었다. 종합안내도에 아래 전망대로 표기된 곳인데, 조금이라도 더 낳은 조망을 보여주려는 듯 이층으로 올렸다.(내 사진이 역광이라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전망대에 오르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부안읍내는 물론이고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산하의 속살까지 샅샅이 보여준다.

 계화면 방향은 아예 막힘이 없다. 지도를 다시 그려야만 했다는 새만금의 드넓은 들녘은 물론이고, 그 너머에 있는 서해바다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15 : 44. 반대방향으로 가파르게 내려서면 다시 산책로를 만난다. 그런데 이게 또 만만찮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우람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길게 뻗어나가는 풍경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다. 포커스만 잘 맞추면 인생샷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도 있겠다.

 오른쪽 산자락에는 부안 향교가 들어앉았다. 1414(태종 14) 창건된 부안향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0(선조 33)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건하는 등 대대적인 확장을 해 오늘에 이른다.

 서림공원에도 매창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백운사에 걸어 올라가니/ 절은 흰구름 사이에 있네/ 스님이여 흰구름을 쓸지 말아요/ 마음 또한 흰구름과 함께 한가로운 것을...> 그런데 저 백운사는 대체 어디에 있는 절일까?

 시비 근처. 매창의 시처럼 예쁜 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동백꽃은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도 곱지만, 바닥에 떨어진 후에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동백꽃이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시인묵객이라면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선홍빛 피의 애처로움이란 이미지도 있다. 옛날 선비들에게는 후자가 주는 이미지가 더 강했던 모양이다. 귀양을 간 곳에 동백나무라도 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니 말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자신의 목이 댕강 떨어지는 것을 연상했기 때문이라나? 그렇다면 지금 난 선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시체처럼 누워있는 낙화(落花)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새색시의 붉은 볼처럼 고운 꽃들만 눈에 차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이 고장 출신인 백양촌 신근의 시비도 보인다. ‘생거부안(生居扶安)’을 예찬하는 시이다. <여기 서면/ 태고의 숨결이 강심에 흐려/ 어머니, 당신의 젖줄인 양 정겹습니다/ 푸른 설화가 물무늬로 천년을 누벼오는데/ 기슭마다 아롱지는 옛님의 가락/ 달빛 안고 하얀 눈물로 가슴 벅차 옵니다 후략->

 15 : 53. 능선 삼거리에서 오른쪽(왼쪽은 성황사와 윗전망대로 연결된다)으로 간다. 이정표는 트레킹이 종료되는 부안군청까지 0.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잠시 후 만난 혜원사(慧圓寺).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1924년 해인사 삼선암 승려 지승이 세웠다. 서외리(부안읍)에 인법당을 세우고 청일암이라 했다. 1970년 현 위치로 옮겨왔고 1999년에는 혜원사로 이름까지 바꿨다. 금당인 극락전을 위시해 인법당·산신각·무구원·마하문화원 등의 전각을 거느리고 있다.

 15 : 58. 서림정(西林亭)은 부안 현감이던 조연명이 33인으로 시계(詩契)를 결성하여 건립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 건물은 없어졌고 그 터에 근래에 새로 지었다. 노휴재(老休齋, 조선 후기의 경로당)에서 소장하고 있는 상소산도(上蘇山圖)’에 조선시대 당시의 서림정과 상소산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주변에는 옛 부안 현감들의 송덕비 등 부안지역과 관련한 각종 비석들이 서있다. 현감 조연명(趙然明)과 이필의(李弼儀) 임정유애(林亭遺愛) ()도 찾아볼 수 있다

 석암(石菴) 정형태(鄭㺾兌) 기적비 춘헌(春軒) 이영일(李永日) 송덕비도 눈에 띈다. 하지만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암각서(巖刻書)는 찾지를 못했다. 19세기 중엽-20세기 중엽 부안 지역의 시인 묵객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어, 지은 시나 글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사랑나무란다. 맞다. 100년 넘은 서어나무 두 그루가 한 몸처럼 붙어 있으니 연리목이 분명하다. 서로 다른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 한 몸이 되었다고 해서 연리지(連理枝)’라고도 부른다. 특히 한 쪽씩 날개를 가진 비익조(比翼鳥)’와 더불어 남녀가 만나 새로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사랑과 결혼, 화합 등의 상징이자 좋은 조짐으로 여긴다.

 16 : 12. 활 쏘는 사람들이 무예수련을 했다는 심고정(審固亭)’ 터를 지나면, 잠시 후 부안군청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이 13.86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매창의 숨결을 느껴보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서해랑길(부안 50코스) 안내도는 군청과 의회 건물을 잇는 공중통로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부안군청에서 만난 평화의 소녀상은 낯선 모습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여느 소녀상들과는 달리 서있는 모습이다. 머리는 단발하기 전의 긴 머리로, 침탈받기 전의 순수하고 맑고 밝은 소녀로 표현했다. 발은 맨발이다. 우리나라가 주권을 잃었다는 것과,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단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성공한 사람의 기준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나였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내 맘에 드는 나로 바뀐다. 나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하며, 지금 하는 일을 무엇보다 좋아하고,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인생이 풍요로워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난 성공한 사람이 분명하다. 나를 믿고 따라주는 집사람이 늘 곁에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여행지 : 메테오라(Meteora)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메테오라(Meteora)’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지방 북서부 트리칼라주 일대에 있는 거대한 사암 바위기둥 위에 세워진 수도원들을 두고 지어진 이름이다. 바위들의 평균 높이는 300m이며, 가장 높은 것은 550m에 이른다.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들이 있어 성지순례 코스에 들기도 하는 이곳은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독특한 풍광을 보여준다. 거대한 바위 위에 만들어진 수도원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과거에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밧줄과 도르래를 이용해야만 올라갈 수 있었다. 1960년대 이후 정부는 관광객들을 위해 험준한 산속까지 도로를 냈고, 수도원이 있는 높은 바위까지 계단을 만들거나 계곡의 바위와 바위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덕분에 우린 개방된 6개의 수도원을 별 어려움 없이 둘러볼 수 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메테오라에 도착했다. 아니 정확히는 메테오라의 배후도시인 칼람바카이다. 도시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기둥 모양으로 우뚝 솟은 거대한 사암(沙岩)으로 이루어진 바위산들과 그 정상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하나 더. ‘칼람바카(Ka1abaka)’ 전망 좋은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단다.

 메테오라는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400Km쯤 떨어진 테살리아 지방에 있는 UNESCO 지정(1988) 세계문화유산이다.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불가사의 건축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메테오라에는 24개의 수도원·수녀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6곳만 복원을 끝내고 손님을 맞는다. 대 메테오른 수도원(1356)을 비롯해 발람 수도원(1530), 로사노 수도원, 세인트 니콜라스 아나퍼프사스 수도원(1458), 트리니티 수도원, 그리고 유일한 수녀원인 성 스테파노 수녀원(1312)이다.

 저녁식사 전에 둘러본 칼람바카는 여느 소도시와 다를 게 없었다. 호텔, 식당, 카페, 편의점 등 웬만한 편의시설은 다 들어서 있다. 관광도시이다 보니 기념품 판매점이 유독 많다는 게 조금 다르다고나 할까?

 하룻밤 묵은 ‘KOSTA FAMISSI 호텔’. ‘칼람바카(Kalambaka)’라는 마을의 입구에 자리하는데, 3성급이지만 깔끔한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호텔은 가족가업으로 운영한다고 했다. 그래선지 벽면을 자랑스러운 마테오라의 역사를 담은 사진들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수도원을 머리에 인 메테오라의 거대한 바위봉우리들이 일렬로 늘어선다. 누군지는 몰라도 전망 좋은 곳이라는 동네 이름 한번 잘 지었다.

 여행사는 메테오라에 있는 여섯 곳 수도원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발람수도원(Holy Monastery of Varlaam)’만 안내해준다. 인상적인 건축물과 탁 트인 전망,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곳이다.

 발람수도원의 평면도, 붉은 선의 왼쪽은 수도사들의 생활공간으로 관광객의 출입이 제한된다. 수도원은 카톨리콘(예배당)과 식당, 도서관, 기숙사, 감방, 종탑,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버스에서 내리면 널따란 광장.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대문 좌우 벽감 속에 성화가 들어있다. ! 메테오라의 여섯 수도원은 일주일에 하루씩 돌아가면서 쉰다고 했다. 우리 같은 패키지여행자야 현지 가이드가 알아서 찾아가겠지만, 자유여행자들은 미리 알아보는 게 바람직하겠다.

 왕관까지 쓰고 있는 저 쌍두 독수리 문장은 뭘 의미하는 걸까? 어쩌면 비잔틴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395년 로마가 동·서로 나뉘고, 10세기 경 동로마에서 쌍두독수리의 나타나기 시작해 12세기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때는 황실의 문장으로 굳어졌다. 당시 비잔틴제국의 황제는 세속적인 권한과 동방정교회의 수장이라는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황실의 문장이 교회의 문장이 되었고, 동방정교회의 전통과 비잔틴제국의 문화를 이어받은 그리스나 동유럽의 나라들에서 교회의 상징 혹은 나라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발람수도원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삼각주였던 테살리아 평원의 칼람바카의 페네야스 계곡은 400m 이상 우뚝 솟은 험준한 바위산이다. 오스만의 종교탄압을 피해 수도사들은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저런 바위 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었다. 초기에는 암벽에 나무사다리를 세우고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러다 지상으로 연결되는 도르래를 설치하고, 밧줄에 두레박이나 그물을 매달아 수도사들이 타고 오르내리거나 생필품을 공급했다.

 수직으로 무려 373m나 끌어올리는 데 사용되던 밧줄이 수도사들의 전통적 생활 방식을 잘 보여준다. 메테오라에 수도원 건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이슬람 투르크족의 침략과 종교 박해를 피해 수도사들은 바위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높이가 수백 미터에 이르는 바위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은 당연히 없었다. 이때 누군가의 지혜로 나온 게 밧줄을 걸어 타고 올라가는 것. 다음에는 도르래를 만들어 벽돌과 흙을 운반해 일일이 손으로 다듬고 빚어 수도원을 세웠다.

 저 다리만 걷어내면 수도원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한다. 다리 건너. 바위를 톱니바퀴처럼 깎아서 만든 계단을 빙빙 돌아서 올라간다. 한쪽은 아찔한 바위절벽. 난간이 둘러져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계단이 길고 가팔라서 올라가는 게 만만치 않다. 오르면 오를수록 하늘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숨은 가빠진다. 그렇다고 안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 이왕이면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라는 느낌으로 올라가보자. ‘하늘의 기둥’, ‘하늘의 정원’, ‘땅과 하늘을 잇는 계단 같은 인간 세상이 아닌듯한 별칭이 실감날 것이다.

 고개라도 들라치면, 더 높은 곳에서 대 메테오론 수도원(The Monastery of Great Meteoron)’이 내려다본다. 메테오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원이다. 1340년에 아토스 산에서 온 아타나시오스라는 학승이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해발고도 613m의 거대한 바위덩어리에 공중에 떠있는 거대한 장소라는 뜻의 대 메테오로(Megalo Meteoro)’란 이름을 붙이고 여기에 수도원을 세웠다. 세월이 흘러 이게(메테오르) 이 지역의 거대한 바위군 및 수도원 전체를 일컫는 단어가 되었다.

 짜릿한 스릴을 즐기며 계단을 올라서면 또 하나의 문이 길손을 맞는다. 수도원 내부로 들어가려면 이곳에서 입장권(3 EUR)를 사야 한다. 하나 더, 이곳도 역시 남성은 반바지와 짧은 티셔츠 차림, 여성은 바지 차림과 소매 없는 셔츠차림은 입장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입구에서 치마 등을 빌려주기(구매한다는 얘기도 있으나 우린 현지 가이드가 다 챙겨줬다) 때문에 크게 불편한 점은 없다.

 발람수도원은 메테오라에서 두 번째로 큰 수도원이다. 1350년 은둔자 발람이 이 암봉에 올라 수행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3개의 교회와 생활공간(cell)을 만들었지만 그가 죽은 후 200년간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518 테오파네스 넥타리우스라는 두 수도사가 재건했다. 수도원이 날로 번창하면서 16세기 말에는 수도사가 35명이나 머물기도 했단다. 하지만 17세기 이후로 수도원이 쇠락하면서 많은 수도사들이 떠났고, 현재는 7명의 수도사(monk)가 머물 뿐이란다.

 수도원 건물은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직사각형 십자가 평면 위에 팔각형 돔을 얹은 건물 두 채를 이어붙인 정교회 건물(아래 사진)도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오스만 스타일의 건물(위 사진)이 들어서 있다. 이층이 앞쪽으로 약간 돌출해 있고 이 돌출부를 살짝 휜 나무지지대가 떠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 꽃이다’. 빗물로 버텨야하는 바위봉우리에서 나무가 자란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2층 높이까지 자랐는가 하면 꽃망울까지 활짝 터뜨렸다. 사람들이 천국이 연상된다며 이곳을 하늘의 정원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리스풍의 정자가 들어선 공중 정원은 발람수도원의 자랑거리다. 최고의 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난간에 서면 메테오라의 기기묘묘한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하지만 감탄해 할 수밖에 없는 저 풍광을 오스만의 종교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든 수도사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온다.

 메테오라의 바위는 6000만 년 전, 지각변동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알프스 조산대의 충돌로 드러낸 거대한 사암 바위는 풍화와 침식 작용을 거치면서 단단한 부분만 남았고, 점차 뾰족하게 솟았다. 검은 바위 위 가로로 된 단층선은 오랜 시간 진행된 침식작용의 흔적이라고 한다. 이런 표현은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도 썼었다.

 정원에서 바라본 루사노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Rousanou /St. Barbara)’. 저 수도원은 이름의 내력부터 알쏭달쏭하단다. 최초로 지어질 당시 이곳에 기거하던 은둔 수도사나 기부자의 이름을 땄을 것으로 추정될 따름이란다. 1745년경, 3세기 레바논지역의 순교자이자 성인인 St. Barbara의 유골 일부를 이곳으로 가져오면서 세인트 바바라 수도원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1930년 다리가 놓이면서 가장 접근이 쉬운 수도원이 되었다.

 이 뭐꼬?’ 정원 한쪽 귀퉁이에 수도꼭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슬람 국가를 여행하면서 흔하게 보던 시설이다. 기도를 드리러 온 신자들이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얼굴을 씻는 시설인데, 그리스 정교회도 그런 규칙이 있었나?

 이젠 건축물들을 둘러볼 차례이다. 건물은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기도 공간인 오른쪽만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왼쪽은 수도사들이 거주하는 곳이라서 출입을 막고 있다. 공개 지역으로 들어가면 전실(narthex), 이곳은 성인들의 순교 장면을 그려놓은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어떠한 고통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공간, 신앙의 자리에 나아가겠느냐고 묻는 의미란다.

 사도, 성인들의 모습이 교회를 장식하고 있는데, 아주 오래된 종교 시설 특유의 엄숙한 공기가 그 화려함을 누르듯이 내려앉아 있다.

 예배당(nave)에 들어가면 바닥과 천장의 성화, 나무로 만든 의자 등 장식 하나하나가 정교하고 조화롭다. 특히 천장의 프레스코화에선 예수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하지만 촬영은 입구의 홀까지만 허용된다.

 발람수도원을 재건했다는 테오파네스 넥타리우스 수도사가 아닐까 싶다.

 성당을 빠져나와 뒤란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옛날 수도사들의 힘겨웠던 삶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예전 수도사들이 사용했다는 우물에는 아직도 두레박이 매달려 있었다.

 그 뒤에는 거대한 오크통이 있었다. 바위봉우리에 걸터앉은 수도원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이었다. 그래서 수도원을 지을 때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물탱크를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12톤짜리 물탱크가 3개나 있는데, 만드는데 무려 18년이나 걸렸다고 전해진다.

 투어는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목조십자가, 성골함, 성화 등 수도사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아이템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다양한 기록물들과 함께 비잔틴 스타일의 성화가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 박물관을 둘러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게 하나있다. 정교회에서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성경말씀에 근거해 예수나 마리아, 성인들의 이콘(Icon)만 허용하고 가톨릭처럼 조각상은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수도나 미사집전 때 사용했을 법한 갖가지 집기들도 진열해 놓았다.

 정교회 성직자들의 의복. 정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수도사들과는 달리 평신도들의 통과의례(通過儀禮) 주관과 함께 성당에서 예배를 집전했다고 한다.

 수도사들의 삶은 어느 작가의 시선으로 살짝 엿본다. <그들의 모습은 깊은 묵상으로 이마가 넓어지고, 세상이 풍기는 냄새를 멀리하고 영성의 향기만을 맡아 코가 좁고 길쭉하며, 삶에 필요한 것만 먹는 것으로 절제의 삶을 살아서 입도 작으며 그나마 수염으로 가리고 있다. 무엇을 보았는지 놀란 눈같이 크고 또 저들의 귀는 왜 그렇게 큰지, 들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겠다고 귀를 크게 열고 있는 것이리라.>

 필경(筆耕)은 수도사들의 주요 일과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필경이 성서에서 그치지 않고 희극 같은 소설도 필사했다고 전해진다. 소설이란 본디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는 장르다. 잡념을 떨치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며 심신을 수양하는 게 수도사들의 삶일지니, 필사하면서 마음이 고생 깨나 했겠다.

 수도원의 역사를 담은 사진들도 게시되어 있다.

 박물관 근처 화장실 때문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메테오라에 대한 자세한 자료들을 게시해 놓았기에 살펴보다가 그만 시간가는 줄 몰랐던 모양이다. 나 혼자 집결장소로 가버린 걸로 오해한 집사람을 이해시키느라 고생깨나 했다.

 투어를 마친 후 야외전망대로 이동했다. 메테오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전망바위에 서자 바위 숲이 펼쳐진다. 마치 돌로 된 숲처럼 울퉁불퉁한 회색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그 뒤로 그리스를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핀두스 산맥과 메테오라 유적지의 거점도시인 칼람바카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최고의 뷰 포인트답게 메테오라의 여섯 개 수도원 가운데 네 개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밖에도 메테오라에는 두 개의 수도원이 더 있다고 한다. 가보지도, 그렇다고 눈에 담지도 못했지만 007시리즈 포 유어 아이즈 온리(For Your Eyes Only, 1981)’의 로케이션 장소로 더 유명한 성 트리니티(성삼위) 수도원(Holy Trinity Monastery, Agia Triada)’과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고 사마리아 여자, 물고기 잡이의 기적 등의 벽화가 볼거리라는 성 스테파노 수녀원(St. Stephen Nunnery)’이다.

 루사노 수도원이 발아래로 펼쳐지는데 붉은 지붕의 수도원 건물과 웅장한 바위덩어리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그 뒤에는 성 니콜라스 아나파프사스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St. Nicholas Anapausas)’이 있다. 16세기에 지어진 수도원으로 크레타 출신의 화가 ‘Theophanis Strelitzas’가 그렸다는 벽화로 유명하다.

 시선을 들자 이번에는 대 메테오론 수도원과 함께 조금 전에 다녀온 발람수도원이 얼굴을 내민다. 참고로 수도사들이 자연동굴에 처음 온 것은 9세기였다고 한다. 수도원 건물이 건축된 것은 14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이게 공동체로 발전했고, 15세기 말 스물네 채의 수도원을 포함하는 규모로 성장하기도 했다. 덕분에 오스만제국 치하에서 소멸되어 버릴 그리스의 전통과 헬레니즘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래선지 촬영용 의상까지 챙겨온 여성분들이 꽤 있었다. 하긴 장쾌하면서도 아름다운 마테오라의 풍경을 배경 삼는 일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공자는 나이 칠십을 종심(從心)’이라고 했다. 깨우칠 만큼 깨우친 이들이니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해도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그러니 인생샷 하나 건져보려는 집사람의 저 몸짓은 또 하나의 도가 분명하다.

 20대 초·중반을 외국인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난, 그네들의 습성이 몸에 배어 사진 찍는 건 좋아하지만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별로로 여긴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일 수밖에 없었다. 인생샷도 일심동체라야 제멋이라는데 어쩌겠는가.

 에필로그(epilogue), 어느 전문가는 메테오라에 수도원이 들어선 이유를 셋으로 나누고 있었다. 첫째는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다는 것. 하나님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했으니 높은 곳이라면 하나님의 소리를 조금이라도 잘들을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다음은 속세에서 은둔하기 위해서다. 세속의 번잡함을 피해 오롯이 홀로 신과 마주할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접근이 어려운 곳에 은둔처를 만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도자들이 종교 탄압으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위해 어떤 세력도 닿기 힘든 곳으로 도망간데 연유한다.

서해랑길 48코스(변산해수욕장-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

 

여 행 일 : ‘24. 3. 23()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변산면 및 하서면 일원

여행코스 : 변산해수욕장(사랑의 낙조공원)대항리 패총새만금홍보관소광교차로비득마을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거리/시간 : 10.2km, 실제는 11.30km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8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여덟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변산반도의 북쪽해안과 새만금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들녘(옛날은 해안선이었다)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새만금간척박물관과 새만금홍보관, 신재생에너지테마파크가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하나 더, 초반(새만금홍보관까지)은 변산마실길의 1코스(조개미 패총길)와 겹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들머리는 사랑의 낙조공원(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25km쯤 내려오다 방포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변산해수욕장이다. ‘오토캠핑장 바로 앞에서 오른편으로 올라가면 사랑의 낙조공원 주차장이 나온다. 서해랑길(부안48코스) 안내도는 팔각정 옆에 세워놓았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다섯 번째 여정. 서해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변산반도의 북쪽 해안선을 따라간다. 아니 새만금간척사업으로 인해 절반은 들녘이 되어버렸다. 길이는 10.2km, 짧은 거리인데다 평탄하기까지 해서 난이도는 별이 2(5개 중)로 분류된다. 내가 보기에는 1개만으로도 충분했지만...

 11 : 00. 해안선에 잇대어 내놓은 2차선 도로(변산로)를 따라 동·북진(·北進)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탁 트인 서해바다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지만, 해무가 짙은 탓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1 : 07. 잠시 후, 왼쪽으로 나있는 오솔길로 내려간다. ‘군산대학교 해양연구센터 3층 건물을 바라보며 간다고 보면 된다.

 이정표(종점까지 9.2km) 48코스의 시점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1km로 적고 있다. 하지만 내 앱은 0.4km를 찍는다. 48코스 안내도를 사랑의 낙조공원에 설치해놓은 탓에 0.6km를 줄여서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지난 47코스 때 그만큼 더 걸을 수밖에 없었지만...

 11: 10. ‘군산대학교 해양연구센터 앞에는 대항리 패총(大項里 貝塚)’이 있었다. 패총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조개류를 잡아먹고 버린 껍질이 쌓여 생긴 조개무덤(조개무지)을 말한다. 조개무지 앞에는 안내판을 세워 발굴과정 및 출토된 유물을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한술 더 떠본다. 외국처럼 발굴 당시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 위에 강화유리를 덮어놓았더라면 조금 더 생생하게 패총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항리 패총은 1967년에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된다. 1981년에는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개무지의 크기는 사방이 10m 내외이며, 두께는 60cm라고 한다. 조개무지 속에서 옛사람들의 생활쓰레기인 뗀석기(打製石器) 5점과 빗살무늬토기 조각 2점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선사시대에 이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단다.

 패총 앞은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다. 규모는 조금 작지만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하겠다.

 해양연구센터에서 밭두렁을 타고 온 서해랑길은 야트막한 구릉(丘陵)을 넘는다. 황토 구릉지로 유명산 해제반도를 연상시키는 풍경이 펼쳐진다.

 대량의 양분을 함유한 황토는 농사에 유리하다고 알려진다. 황토로 재배한 작물은 수분이 많고 당도가 높아 맛이 더 좋다는 것이다. 고구마나 양파·마늘·감자 등의 뿌리작물이 특히 잘 자란다고 했다. 양파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저 밭이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11 : 15. 구릉지를 넘어 해무(海霧)가 짙은 바닷가로 내려선다. 해식애의 기암절벽이 눈길을 끈다는 해변이다. 하지만 오늘은 짙은 물안개가 그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 물안개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꿈속을 거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주니까 말이다.

 서해의 맑고 깨끗한 바닷물과 자욱한 물안개가 어우러져 더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해무는 바다에서 끼는 안개다. 따뜻한 해면의 공기가 찬 해면으로 이동할 때 해면 부근의 공기가 냉각되어 생기는 안개다. 하긴 그끄제가 봄을 나눈다는 춘분(春分)’이 아니었겠는가.

 도대체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인지가 구분이 안 된다. 사람들은 대개 망망대해를 보고 그런 표현을 쓴다. 하지만 오늘은 해무에 잠겨있는 저 바다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고운 해변을 안마당처럼 차지하고 있는 저 건물은 모나코 모텔이라고 했다. 코로나-19로 시끄럽던 시절, 홍해(이집트)의 휴양지인 후루가다에서 머물던 나는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갈지로 고민하고 있었다. 각설하고 당시 머물던 ‘Desert rose’라는 리조트의 시설들, 그중에서도 투숙객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용해변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는데, 한국에도 저런 숙박업소가 있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11 : 20. 서해랑길은 백사장 끝에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초입의 이정표가 변산마실길 1코스(조개미 패총길)의 종점인 새만금 간척박물관까지 2.6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탐방로는 병사들이 해안선 감시를 하며 거닐던 교통호를 따라 간다. 바닷가에서는 철조망이 따라온다. 1960-70년대 심심찮게 넘어오던 무장공비의 침투를 막기 위해 쳐놓은 시설물이다.

 덕분에 곳곳에서 옛 경비초소를 만난다. 1970년대 중반, 지역 예비사단에서 만기제대 절차를 밟다가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소식을 접했었다. 그렇듯 당시는 북한 특수공작원들에 대한 방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던 시절이었다. 쓰러져가는 저 시설물에서 흉흉했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본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 다시 바닷가. 하지만 이번에는 바닷가로 내려서지 않고 산책로를 따라간다.

 그렇다고 바닷가 풍경까지 놓치는 것은 아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멋진 풍광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이정목이 변산마실길 1코스인 조개미 패총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새만금간척박물관에서 변산해수욕장을 거쳐 송포항에 이르는 길이 5km의 둘레길이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야산길과 바닷길을 선택하여 걷을 수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11 : 27. ‘대항교차로(30번 국도에서 변산로로 내려오는 지점)’ 앞에서 변산로로 올라온 다음 잠시 도로를 따라간다.

 도로 아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바닷가 벼랑 위로 축대를 쌓고, 바다를 향해 난간을 덧대고 있다. 잔도(棧道)처럼 아슬아슬한 길을 새로 내려는 모양이다.

 변산로는 보도(步道)가 따로 없다. 때문에 여행자들은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도로에서 내려와 공사가 한창인 울퉁불퉁한 탐방로를 따라 걷는다.

 탐방로는 국도 30호선(70호선 병행)’의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이번뿐만이 아니다. 이번 구간(48코스)은 유난히도 자주 국도의 위아래를 횡단하면서 이어진다.

 탐방로는 교각 아래를 통과한 다음에도 한참을 더 들어간다.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간 합구마을(대항리)’ 앞바다를 한 바퀴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산촌과 어촌이 절며하게 어우러진 합구마을은 본래 백합 등 조개가 풍성한 마을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합구(蛤九)’라는 지명도 조개가 아홉 개라는 뜻이란다. 하지만 요즘은 어업의 비중이 많이 낮아졌다. 그러니 한적하고 운치 있는 바다를 낀 농촌마을 쯤으로 치부해두자.

 뒤돌아본 국도 30호선. ‘조개미교의 반원형 교각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합구마을의 동구 밖까지 밀려온 바닷물은 썰물 때가 되면 저 다리 아래를 지나 바다로 되돌아간다. 참고로 조개미는 합구마을의 옛 이름이다.

 11 : 37. 탐방로는 잠시 변산로로 올라선다. 그리고 100m쯤 걷다가 변산해수찜()’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정표(종점까지 7.2Km)가 새만금홍보관까지 1.3km가 남았음을 알려주는 지점이다. 참고로 해수찜이란 해수의 염도차를 이용해 몸속 노폐물을 배출하고, 해수에 녹아있는 각종 이로운 미네랄을 흡수하는 원리를 이용해 찜질을 하는 곳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또 다시 바닷가. 저 갯벌은 죽합이 지천이라고 했다. 죽합은 모양이 대나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맛조개라고도 불린다. 호주머니에 소금 한 주먹 갖고 가서 타원형의 구멍에 살짝 뿌리면 백합이 기어 나온단다. 삽이나 호미로 잽싸게 파서도 잡을 수 있단다. 하나 더. ‘개불이 먹고 싶으면 동그란 구멍을 파보라고 했다.

 이후부터는 해안가 벼랑 위로 난 오솔길을 따른다. 서해바다가 심심찮게 내다보이는 기본 좋은 구간이다.

 11 : 42. 전망 좋은 곳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이 근처에서 영화 변산이 촬영되기도 했단다. ‘고향이라고 해준 것도 없으면서 발목은 드럽게 잡네!’ 짝사랑 선미(김고은)의 꾐수에 낚여 고향으로 내려온 학수(박정민). 이준익 감독의 변산은 빡세지만 스웩 넘치고, 부끄럽지만 빛나는 청춘을 그린 영화이다.

 난간에 서면 시야가 뻥 뚫린다. 비안도와 두리도는 물론이고 날씨라도 좋으면 그 너머에 있는 고군산군도까지 조망된다고 했다. 하지만 해무가 짙어 눈에 들어오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계속해서 해안가 오솔길을 탄다. 옛날 병사들이 경계를 하면서 오가던 교통호가 세월의 무게를 못 견디고 걷기 나그네들의 탐방로로 변했다.

 심심찮게 시야가 열리는 이 구간도 코발트빛 서해바다를 마음껏 즐기며 걸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해무가 그런 호사를 앗아가 버렸다. 오솔길 아래의 기암괴석 해안을 눈에 담을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11 : 49. 그러다 올라선 공터는 운동장보다도 더 컸다. 그런데 중장비가 오가는 걸 보면 뭔가 새로운 변신을 위해 공사 중인가 보다. 맞다. kakaomap은 이곳을 새만금챌린지 테마파크로 적고 2026년에 준공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변산마실길 1코스의 명물인 꽃동산을 갈아엎고 있는 거나 아닐까? 봄이면 샤스타데이지의 순백 꽃물결이 일렁인다는 그 꽃동산말이다. 해질 무렵 서해낙조와 함께 즐기면 무릉도원에 온 듯한 황홀경을 느낄 수 있다고 했는데...

 공터의 막바지. 진행방향 저만큼에 새만금간척박물관이 놓여있다.

 옛말처럼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한가 보다. 공터를 빠져나오니 바닷가에 꽃동산 안내판이 나뒹굴고 있다. 주변에는 변산마실길과 변산애향숲 빗돌도 널브러져 있었다.

 11 : 55. ‘간척박물관을 코앞에 둔 지점. 바닷가로 내려가 역방향으로 걸어간다. 변산반도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 병풍바위를 찾아보기 위해서다. 아니 물안개로 뒤덮인 몽환적인 바닷가를 한 번 더 걸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보라, 물안개가 피어오른 저 풍경, 몽유도원도의 실경이 아니겠는가.

 두어 구비 모퉁이를 돌자 신비한 색깔의 바위가 탐방객들을 맞는다. 서로 마주선 두 바위가 찾아온 이들을 호위라도 하려는 듯 좌우로 도열해 있다. 그런데 검은색의 흔한 갯바위인 바다 쪽 바위와는 달리, 육지 쪽에 있는 바위는 색깔도 기이하고 모양도 예사롭지 않다. 높이 9-10여 미터에 길이가 60m쯤 될까? 바다를 향해 쏟아지는 폭포처럼 생겼는데, 그게 병풍으로 보인 사람들도 있었나 보다. 언제부턴가 병풍바위라는 애칭으로 불리어온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물안개는 신비로움을 넘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해준다.

 백사장에는 바람이 만들어놓은 물결무늬가 선명했다. 시간이 난다면 바다로 더 나가보는 것도 괜찮을 듯. 갯골 웅덩이에서 미쳐 빠져 나가지 못한 작은 생명들이 유영하는 광경이라도 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12 : 03. 새만금시설지구 초입에는 작은 포구가 들어서있다. 묵정마을의 어민들이 사용하는 시설인 듯한데, 꼬맹이 어선 몇 척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들은 평화의 사절단처럼 물때를 기다리며 숨을 고른다.

 12 : 05 - 12 : 20. 시설지구에서의 첫 만남은 새만금 간척박물관이다. 새만금과 우리나라의 간척뿐만 아니라 세계의 간척역사, 기술, 미래가치까지 재조명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2023 8, 3층 규모로 문을 열었는데, 3층에 마련된 상설 전시실을 중심으로 교육실, 체험실, 영상관, 수장고, 야외광장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또한 국내외 간척사를 배울 수 있는 전시물과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구비돼 있다.

 박물관 앞마당에는 여러 점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새만금을 바라보다’, ‘새만금 평화의 휴식’, ‘새만금 바람의 소리를 듣다’, ‘새만금 교육의 자리 등으로 주제를 표현하고 있으며 각각의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단다. 하지만 내 눈에는 아래 사진의 조형물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포토 죤으로 삼기 딱 좋은 조형물도 여럿이다.

 상설전시실은 바다·갯벌·사람, 세계 및 한국의 간척, 새만금의 혁신 등을 주제로 다양한 콘텐츠가 구성돼 있으며, 새만금의 발전과정을 담은 고지도와 각종 민속품 등 6000여 점의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관람은 간척의 과거·현재·미래를 차례로 보여주는 동선을 따라가면 된다.

 바닷일은 전통신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개양할미 당집(그림) 옆에는 용왕제 때 쓰는 다양한 깃발과 도구들도 전시하고 있었다. 참고로 바닷가에서는 띠배를 만들어 바닷물이 들어차면 먼 바다로 띄워 보내며 마을주민들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용왕제를 열곤 했다.

 소금도 바다와는 불가분의 관계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재원 중 일부를 염전에서 마련했단다. 그래선지 옆에다 옛날 전통방식으로 천일염을 채취하는 과정과 모습을 그림으로 재현해 놓았다.

 물안개와 조개잡이 삼매경인 아낙내들이 어우러지는 조합이 한 폭의 수묵과로 그려진다.

 12 : 22. 박물관을 빠져나오자 새만금방조제가 시작됨을 알리는 빗돌이 길손을 맞는다. 군산시 비응도동에서, 고군산군도의 신시도를 거쳐, 부안군(변산면) 대항리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이다. 길이는 33.9km, 2위인 네덜란드의 자위더르 방조제보다 1.4km 더 길다고 한다. 1991 11월 착공돼 2010 4 29 19년 만에 준공되었다.

 12 : 25  12 : 37.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새만금홍보관으로 간다. 한국농어촌공사(새만금사업단)에서 운영하는 홍보시설로 새만금 건설과 관련된 역사기록과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새만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다고 보면 되겠다.

 3층에 마련된 전망대에 오르면 새만금의 광활한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군산을 향해 길게 뻗어나가는 저 방조제는 바닥(평균)  290m(최대 535m)에 평균 높이(평균) 36m(최대 54m)라고 한다. 길이는 위에서 얘기한 대로 33.9km이다. 끝이 보일 리가 없다. 그래선지 시야가 닿지 않는 거리까지 관찰할 수 있도록 망원경까지 설치해 놓았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여의도의 140배나 되는 바다를 땅으로 만드는 거대한 사업이다. 우리나라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19년간의 새만금 방조제 축조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자연의 힘을 이기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와 세계적인 간척 기술로 마침내 새만금 간척 사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

 3층의 홍보관은 기획전시실·상설전시실·홍보영상관·전망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람은 전망대가 있는 3층에서 무장애(無障礙)의 동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서 관람하도록 했다.

 사업은 방조제와 간척지 조성이 마무리될 때까지 약 2 9,00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었으며,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환경오염 문제로 간척사업에 대한 찬반 논란이 빚어지면서 물막이 공사를 남겨둔 시점에서 공사가 2차례 중단되기도 했다.

 전시장에는 한국 간척기술의 발전사, 국토이용 상의 문제, 간척사업 추진현황, 수질개선 대책, 주요 철새도래지 등에 관란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새만금은 만경평야의 자와 김제평야의 자에 새롭게 확장한다는 뜻의 자를 덧붙여 만든 신조어다. 만경·김제 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 일구어 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새만금지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미니어처도 전시하고 있었다.

 12 : 37. 관람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정문에서 왼쪽으로 200m쯤 걸으면 홍보관교차로이다.

 새만금 간척지(정확히는 새만금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왼쪽 옆구리에 새만금간척지의 들녘을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왼쪽으로는 새만금 간척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맞다. 새만금간척사업은 측량할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을 새롭게 만들어냈다. 저 멀리 지평선은 그야말로 수평이다. 문득 영화에서 본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들녘이 떠오른다. 저런 광활함이면 말 타고 한없이 달려 말뚝 박고 내 땅이요를 외쳐볼 만하다. 참고로 새만금간척사업으로 군산시·김제시·부안군 공유수면의 401(토지 283, 담수호 118)가 육지로 바뀌었다고 했다. 이는 서울시 면적의 3분의 2(여의도 면적의 140)에 이르는 면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국토 면적도 10 140에서 10 541 0.4% 늘었단다.

 12 : 50 - 13 : 05, ‘묵정교차로에서 30번 국도의 새만금교 아래를 통과하면 직소천(直沼川)’을 만난다. 변산면 중계리에서 발원하여 진서면 석포리, 변산면 중계리를 지나 변산면 대항리에서 새만금 담수호로 흘러드는 20.6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직소천에 있는 아홉 곳의 절경을 봉래구곡(蓬萊九曲)’으로 부를 정도로 상류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 묵정교차로 잔디밭에서 간식을 먹느라 15분 정도 쉬었다.

 변산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변산교로 직소천을 건너면서 하서면(下西面)으로 들어간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변산로를 따른다. 자동차전용도로인 30번 국도의 보조용 도로쯤으로 보면 되겠다.

 도로변 소공원에서 명자나무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봄에 피는 꽃 중 가장 붉은 꽃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화려하지 않고 청순해 보여 아가씨나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꽃샘바람에 붉게 물든 아가씨의 얼굴색을 닮았다나? 꽃말도 수줍음이라고 한다.

 13 : 13. ‘소광교차로에서는 국도(변산바다로)를 횡단한다. 통행량이 많아서인지 횡단보도 표시는 물론이고. 교통섬에 교통신호등까지 설치되어 있다. 이정표(종점까지 4km)가 새만금홍보관에서 1.7km를 걸어왔음을 알려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횡단보도를 건너니 매향비가 반긴다. 매향비(埋香碑)는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해 바닷가에 향을 묻고 세우는 비()를 말한다. 국내 최상급 바지락 생산지였던 부안의 옛 해창(海倉) 갯벌에 그런 향을 묻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갯벌을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빗돌 뒤, 들녘의 초입에는 엄청나게 많은 장승이 늘어서 있었다. ! 이곳에서 해창갯벌 장승제가 열린다고 했다. 해창갯벌 및 새만금 이전의 모든 갯벌은 막혔지만 마지막 남은 수라갯벌. 여전히 40여 종의 멸종위기 생명들이 살아 있는 그곳을 보존하자고 외치는 환경단체들이 여는 행사다. 장승을 통해 자신들의 소망을 듣는다며 작년 여름에도 장승 8개를 추가로 세웠다는데, 그런 행사를 20년이나 해왔다니 저 정도 숫자는 능히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3 : 18. ‘잼버리 1란다. 실패의 대명사로 낙인찍혀버린 ‘2023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대회가 저 안쪽 들녘에서 열렸다는 얘기일 것이다. 2023.8.1-12(12일간) 열린 잼버리대회는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는 대혼돈의 잼버리가 되어버렸었다. 하지만 내 탓이요보다는 여야 정치권과 정부 부처, 전라북도 간의 책임 공방만 치열했었다. 그 현장이 바로 저 다리 건너에 있었던 모양이다.

 다리 건너에는 잼버리기반공사 철거작업 안내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시작 첫날부터 쏟아진 잼버리에 대한 비난은 전북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었다. 그 비난은 대회 장소를 잘못 고른 것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준비 부족에서 원인을 찾고 싶다. 기록적인 폭염이라는 자연재해도 문제였지만, 더러운 화장실과 곰팡이 핀 음식 등 주인의식은 눈꼽만큼도 없는 행사준비가 대혼돈을 만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준비만 철저했더라면 극한 상황을 극복하고 자립심을 높이는 스카우트 운동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장소가 또 이디 있겠는가.

 탐방로는 해창쉼터(13 : 26)’를 만나기도 한다. 옛 해창갯벌을 회상이라도 해라는 듯 공터 가장자리에 벤치 몇 개를 놓아두었다. 하지만 광활한 들녘이 무슨 볼게 있겠는가. 그냥 지나쳐버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30번 국도의 비득치교가 나타난다. 탐방로는 저 다리 아래(이정표 : 종점까지 3km)를 지나간다.

 변산반도에는 계절별로 주꾸미, 전어 등 다양한 해산물이 넘쳐난다. 그 가운데서도 청정갯벌에서 나온 백합과 바지락은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그 백합으로 만들어낸 백합죽은 변산이 자랑하는 최고의 음식으로 꼽힌다. 부안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은 백합죽은 인근 식당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데, 백합 조갯살을 잘게 썰어 넣고 약간의 참기름과 깨소금만으로 간을 해 끓여내기 때문에 백합 고유의 담백한 풍미가 일품이다.

 계속해서 변산로를 따른다. 그저 30번 국도를 오른편에 끼고 가다가, 왼편으로 바꿔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13 : 34. 백련리(白蓮里)의 자연부락인 비득치 마을은 자자손손 바다를 생업으로 살아온 어촌이다. 부안 출신 김민성 시인이 <전략- 확 짠 내가 스며오는 속에/ ‘오오매 으쩐 일이데여!’ 반가워하며/ 내 손을 덥썩 잡는 새포댁의 손/ 소당깨만 한 까칠까칠한 손 -후략>이라며 읊던 새포댁의 손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동향의 김교서 시인은 비득치에 가면이란 시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새만금방조제가 놓이면서 바닷가 마을이 아닌 변산 밑의 산골마을로 변해버렸다.

 잼버리 행사장의 시설물들을 철거하고 있는 듯 들녘에는 중장비가 오가고 있었다. 방조제가 놓이기 전만 해도 저곳은 갯벌이었다. 칠산바다 물고기들이 산란하러 모여들고, 질 좋은 백합과 바지락이 지천이었단다. 멀리 남반구 뉴질랜드에서 북반구 툰드라까지 약 3Km를 오가는 도요물떼새 등 철새의 휴게소이기도 했다. 법정 보호종만 해도 40여 종에 이르렀다나?

 13 : 44. 나지막한 언덕을 넘자 바람 모퉁이가 나오는데, ‘야방 모퉁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야방은 주변 지역을 훤히 잘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이라서, 임진왜란 때 밤에 야방을 섰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런 특징을 살리려는 듯 잼버리 야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잼버리 전망대를 지어놓았다. 다목적 광장, 팔각정, 전망대, 주차장, 안내센터, 화장실, 조형물 등이 설치돼 있다. 하지만 자동차전용도로가 중간에 놓여있어 가볼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대회가 실패로 끝나서인지 펄럭이고 있어야 할 만국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국기를 보며 나라 이름을 알아맞히는 재미가 쏠쏠한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문득 유럽 연수 때 각국을 돌아다니며 삼색으로 된 국기들을 대비해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프랑스·이탈리아·아일랜드·벨기에 등은 세로 삼색기인데 색깔만 다르다. 독일·네덜란드·오스트리아·헝가리 등 가로 삼색기인 나라는 더 많다.

 13 : 48. 잠시 후 백련마을(어촌계 회관)’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백련리(白蓮里) 9개 행정부락(삼산·금광·노계·금산·월포·신촌·문수·백련·대광·비득·소광) 중 하나로, ‘백련이라 지명은 변산의 의상봉과 와우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문수동 계곡 아래에서 못을 이루는데, 그 못에서 하얀 연꽃이 피어났다는 데서 유래했다.

 버스정류장은 광고판을 겸하고 있었다. ‘부안 정명 600주년(2016)’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선정한 9가지 볼거리·살거리·먹거리를 부안 9()·9()·9()’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는다.

 13 : 56. 요것조것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풍력발전기가 고개를 내밀면서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에 이르렀음을 알린다.

 테마파크 입구의 보리밭. 아직은 키가 무릎에도 못 미치고 있다. 하지만 달포만 더 있으면 싱그러운 빛깔로 일렁이는 보리의 군무를 보게 될 것이다. 보릿대가 살랑댈 때마다 풋내음이 퍼지고, 쏟아지는 봄볕 튕겨내며 싱그러운 빛깔로 반짝이는 어느 봄날.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아니한가.

 13 : 59. 테마파크 입구 삼거리. 이정표(종점까지 1km)가 함께 걸어온 변산로와 헤어지라고 한다. 이정표의 지시대로 신재생에너지로로 들어가자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가 반긴다. 테마 체험단지, 실증 연구단지, 산업단지가 함께 입주해 있어 연구개발에서 생산, 교육, 홍보까지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전국 최초의 신재생에너지 복합단지다. 참고로 신재생에너지는 재생에너지와 신에너지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재생에너지는 햇빛··바람·생물유기체 등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이르고, 신에너지는 연료전지·수소에너지 등 기존의 화석연료를 변환시켜 이용하는 에너지를 말한다. 하나 더. 신재생에너지의 특징은 환경 친화성과 비 고갈성이다. 원자력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두다.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 2009년 공사를 시작해 2011년 완공했다. 중심 시설인 테마체험관(위 사진의 오른쪽 건물)’은 즐기면서 학습할 수 있는 에듀테인먼트 시설로 8개 분야(태양열·태양광발전·바이오매스·풍력·소수력·지열·해양에너지·폐기물에너지)의 재생에너지와 3개 분야(연료전지·석탄액화가스화·수소에너지)의 신에너지 및 그린하우스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난해한 에너지의 원리도 놀면서 익히면 더 즐거워진다나? 쓰레기나 돼지똥, 소똥이 전기가 된다면 어린이들이 믿겠는가. 그런 에너지의 변화를 말로 설명해봤자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재생에너지·수력·화력·태양열 등 머리로만 이해하던 에너지의 원리를 만지고, 움직이고, 게임하면서 알아차리게 해 준다고 했다. 알아두면 좋을 지식들을 재미있는 놀이에 담아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단다.

 14 : 15. 테마 체험단지와 실증 연구단지를 지나 산업단지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코너에 월포마을 경로당이 들어서 있는 사거리이다.

 서해랑길(부안 49코스) 안내도는 경로당의 맞은편, 도로 건너에 세워져 있다. 오늘은 3시간을 걸었다. 앱에 11.30km가 찍혀 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새만금 박물관과 홍보관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나 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그것도 시점에서 종점까지 풀코스로 말이다. 코스가 짧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집사람의 건강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네 소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건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다른 소원이 뭐냐고 또 다시 물으신다면 난 건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하시면 난 또다시 건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그 건강의 대상은 내가 아닌 내 집사람이라고 공손히, 그러나 또렷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안고원길 6구간(전주가는 길)

 

여행일 : ‘24. 3. 16()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부귀면 일원

여행코스 : 장승삼거리장승마을메타세쿼이아길(실제 출발지, 인증)모래재휴게소모래재주화산(조약봉, 인증)임도사거리부천마을원봉암마을부귀면사무소(거리/시간 : 15.8km, 실제는 메타세쿼이아길부터 12.22km 3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완주) 소양 IC에서 내려와 26번 국도를 타고 진안·장수 방면으로 19km쯤 내려온다. ‘서판사거리(진안군 부귀면 신정리)’에서 우회전 모래재로로 옮겨 3km쯤 들어오면 원세동 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500m쯤 더 올라가면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장승삼거리에서 출발해 메타세쿼이아길 따라 전주를 넘나들던 모래재로 오른다. 이어서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인 주화산(조약봉)을 넘은 다음, 금남정맥 아래 임도를 따라 부귀면사무소로 오는 전형적인 고원길이다. 해발 500m도 넘는 산줄기를 탄다고 해서 난이도는 ’. 구간 거리도 15.4km나 되지만, 지난 5구간 때 추가로 걸었건 거리를 빼고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부터 걷기 시작했다.

 10 : 40. ‘메타세쿼이아길을 따라가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가 양옆으로 늘어서있는 이 길은 모래재휴게소까지 이어진다. 1986년부터 2004년까지 잠동-큰터골의 1km 구간에 메타세쿼이아가 집중적으로 식재됐고, 2008년에는 모래재휴게소까지 구간이 확장되었다. 초기에 조성된 가로수는 수령 40년이 되어가면서 어른의 몸통보다도 더 굵어졌다. 줄기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덕분에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우뚝우뚝 솟아 삼각형을 이루는 메타세쿼이아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드라마 보고 싶다에서 주인공 박유천과 윤은혜가 아픈 상처를 잊고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던(네티즌들이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기도 했단다), ‘내 딸 서영이에서 서영이 엄마 아빠가 젊은 시절 걸었던 추억의 길이다. 영화 국가 대표에서도 이 길이 등장했었다. 주인공 하정우 등 스키선수들이 성동일 코치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렸었다.

 10 : 42. 몇 걸음 더 걸어 이른 테크길 입구. 이정표가 이름표(메타세쿼이아)를 달았다. 6구간의 2개 인증지점 중 하나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 모자까지 썼다. 그러니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바깥에 데크 탐방로를 새로 내놓았다. 이정표의 방향표시도 저 길을 따르라고 한다. 그러니 탐방로를 따라가다 오가는 차량이 없을 때 잠깐 도로로 나가 사진을 찍으면 된다. 참고로 메타세쿼이아길은 사진작가들이 가장 즐겨 찾는 장소 중 하나이다.

 들녘 너머에는 신덕마을(웅치골)이 그림처럼 앉아있다. 야생화를 키우고 유기농산물을 재배한다는 산골마을이다. 마을 뒤 편백나무 숲에는 산책로가 만들어져있고, 숙박시설과 마을사람들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도 있단다. 그래선지 고원길 트랙은 저 마을을 들렀다가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새로 만든 데크길을 따르다가 그만 진입로를 놓쳐버렸다.

 10 : 50. 잠시 후 도착한 웅치골 사거리’. ‘모래재로(옛 국도 26호선)’에서 옛 웅치길이 갈려나가는 지점이다. 호랑이와 도둑떼가 출몰하던 시절, 이 길은 전주를 연결되던 유일한 길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전주로 향하던 왜군이 이 재(熊峙 또는 곰티재)를 넘었다. 관군과 의병이 왜군에 맞서 대격전을 벌였고, 고갯마루에는 현재 이를 알리는 웅치전적비가 서있다. 한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았던 산길은 1910년 신작로가 되었다. 하지만 99굽이의 비포장 길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모래재가 뚫리면서 기억너머로 사라졌지만, 아직도 비포장 산길로서의 기능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 길은 이제 트레킹족의 차지가 되었다.

 웅치골 입구. 코너에 백곰 한 마리가 서 있다. 곰은 제 몸만 한 마을 표지석을 껴안고 웃는다. 충렬의 혼이 깃들어있는 곳이니 잠시 들렀다가라는 듯. 아무튼 옛 웅치(熊峙, 곰티재) 길은 신덕마을의 한가운데를 관통해 산골짜기로 숨어든다. 모래재길이 생기기 전 진안과 전주를 연결하던 아주 오래되고 유일한 고갯길이었다.

 안내도는 임진왜란 웅치전적에 대해 간락하게나마 알려준다. 1592 7 8, 왜군은 웅치방면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전장에는 의병장 황박이 최전방을, 나주판관 이복남이 제2선을, 김제군수 정담이 정상에서 최후 방어를 담당했다.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 무렵 화살이 떨어진 조선군이 안덕원으로 후퇴하면서 일단락된다. 하지만 김제군수 정담과 휘하의 병력은 웅치에 남아 끝까지 항전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정담을 비롯해 종사관 이봉·강운 등 대부분의 병력이 전사하고 웅치는 왜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들의 용맹에 감동한 왜군은 전사한 아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국의 충성스런 넋을 위로한다(弔朝鮮國忠肝義膽)’라고 적은 푯말을 세우고 지나갔다고 한다. 아무튼 웅치를 넘은 왜군은 7 9일 전주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웅치전투에서 입은 피해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고, 남원에서 돌아온 동복현감 황진이 그런 왜군을 안덕원 인근에서 격파했다. 하나 더. 이 전투의 승리와 한산대첩이 있었기에 호남지방이 보전될 수 있었고, 이는 임진·정묘 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고원길은 사거리에서 큰터골 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세동리(細洞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신덕·적천·큰터골·원세동·우정·부암) 중 하나로 메타세쿼이아길 1차 조림지의 끝이라는 것 외에는 귀가 솔깃할 얘깃거리는 전해주지 않는다.

 이정표는 6구간의 시점(始點) 장승삼거리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4.4km로 적고 있었다. 핸드폰의 트랙은 현재 0.85km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6구간의 시점이 아닌 메타세콰이어길에서 출발(생략구간은 지난 5구간 답사 때 이미 걸었다)한 덕분에 3.9km를 단축한 셈이 됐다.

 큰터골 마을회관. 고원길은 회관 앞 고샅길을 따라간다.

 당산나무 아래 철망울타리는 걷기 여행자들이 매달아놓은 리본들로 빈틈이 없을 정도다. 울긋불긋한 게 흡사 무당집 처마를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10 : 54. 마을을 빠져나오면 다시 모래재로이다. 그런데 가로수가 은행나무로 바뀌어있는 게 아닌가. 느닷없이 수종이 바뀐 게 조금 어색했지만. 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철이면 메타세쿼이아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도 있겠다.

 10 : 57. ‘큰터골 버스정류장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마을주민들보다는 송어요리 전문점인 진미가든의 단골손님들에게 더 유용할 듯. 예약이 필수일 정도로 인기가 높은 로컬 맛집이라니 말이다.

 11 : 02. 노거수 두 그루가 수문장을 자처하는 수목원 가든 찻집을 지나자 이번에는 적천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세동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이다.

 버스정류장(적천마을) 맞은편에는 시조시인 구름재 박병순의 생가가 있었다. 박병순(朴炳淳, 1917-2008)은 스승인 가람 이병기에 이어 한국현대문학사에 시조의 가치와 의미를 대중적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정열을 쏟은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 시절 시조집을 몰래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최초의 시조 전문지 신조를 발간하고, ‘가람동인회로 활동하면서 시조시인으로서 한국시조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박병순의 생가. 1917년에 태어나 1939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나라사랑도 남달랐는데, 집 둘레에 무궁화를 심고 한글보급운동에도 힘을 쏟았다고 한다.

 마당에는 박병순의 흉상과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봄눈. 앵도, 속금산, 무궁화 등 그의 대표작들을 새겼는데, 이중 속금산과 무궁화는 이 집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생가를 빠져나와 도로를 건넌다. 그리고는 농로를 따라 북진한다. 특별한 의미는 없으나 억새가 무성한 것이 가을철에는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겠다.

 길가 부지런한 산골 농부는 일 년 농사 준비로 분주하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저 농부의 올 농사는 틀림없이 풍년일 것이다.

 11 : 09. 도로(모래재로)로 올라서자 또 다시 메타세쿼이아가 반긴다. 아까보다는 굵기나 크기가 작아졌지만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들이 명품 파크 웨이(Park-Way)’로 꼽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파크 웨이란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드라이브하는 길로서 주변자연과 문화자원을 활용한 휴양활동의 전초기지를 말한다.

 11 : 13. 길은 좀 더 가팔라지고 좀 더 급하게 굽이진다. 그리고 적천저수지라는 자그마한 저수지를 호젓이 지난다.

 11 : 17. 그러자 고갯길이 갑자기 활짝 열리면서 모래재 휴게소가 길손을 맞는다. 26번 국도가 새롭게 놓이면서 모래재길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멀어져 간다. 그러다 느리게 달리기 위해, 천천히 걷기 위해, 그리고 잠시 멈추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길로 변했고, 모래재 휴게소도 그들이 찾는 쉼터로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

 모래재 휴게소. 아침마다 토종 계란과 향 짙은 원두커피를 준비한다는 곳이다. 휴게소에서 아침을 시작하고 재를 넘는 직장인들도 있단다. 하나 더. 어떤 이는 휴게소의 약수를 첫 손가락에 꼽기도 했다. 해발 480m의 지하 73m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찾아 뽑아 올린 건강한 물인데, 진안군에서 1년에 한 번씩 수질검사까지 해준단다.

 맞은 편, 도로 건너에는 전주공원(공원묘지)이 위치하고 있다.

 11 : 19. ‘모래재 휴게소 광장의 끄트머리쯤에서 왼쪽으로 난 임도로 올라간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를 경우는 모래재 터널로 연결된다. 참고로 모래재는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진안과 장수, 무주 등 이른바 전북의 지붕으로 불리는 무진장 주민들이 전주를 오가려면 꼭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도로는 1972 11월 개통됐다. 1997 4차로의 도로가 보룡고개에 나기 전까지 차량통행이 가장 많았으나, 한편으론 심한 굴곡으로 인해 대형 사고가 많이 일어났기도 했다.

 임도는 제법 가파르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기다 거리까지 짧다.

 11 : 25. 잠시 후 이번에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트레킹이 끝나고 산행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이정표는 산행구간의 핵심인 주화산(조약봉)까지의 거리를 0.81km로 적고 있다.

 고원길은 이제 산길을 탄다. 느리게 오르는 반듯한 산길은 고운 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진안고원의 경계에 놓인 산들이 갖는 특징이지 싶다. 진안과 다른 지역의 고도 차이가 300m나 되다보니 능선까지 오르는데 드는 힘도 그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다. 진안지역에서는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11 : 29. 덕분에 4분 만에 모래재에 올라설 수 있었다.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인 주화산에서 시작해 내려온 호남정맥의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고개이다. 높이는465m, 진안에서 보면 그다지 높지 않으나 전주시 방향으로는 매우 높은 고도를 갖고 있다.

 모래재라는 지명은 고갯마루 왼편에 위치한 신촌리(완주군 소양면)의 골짜기 모사골에서 유래했다. 모사가 모새(모래)로 발음됐고, 이게 또 표준어가 되면서 지명으로 굳어졌다. 아무튼 탐방로는 이정표(주화산 0.6km/ 곰티재 4.7km/ 모래재휴게소 0.31km)가 가리키는 주화산 방향의 능선을 따라간다.

 이후부터는 호남정맥(湖南正脈)의 마루금을 따라간다. 호남지방을 동서로 크게 갈라놓은 이 산줄기는 서쪽은 해안의 평야지대이고, 동쪽은 남원을 중심으로 한 산간지대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이 산줄기를 경계로 농경과 산업은 물론이고 현격히 다른 생활문화권을 형성하게 된다.

 능선의 나무 가지마다 노란색과 붉은색의 리본이 매달려 고원길을 안내한다. 이 리본은 진안의 특산물인 홍삼과 인삼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 산길을 올라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 잠시 쉬어가라며, 천천히 돌아가라며 여행길을 함께하는 동반자 같다.

 나뭇가지 사이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멋지게 꼬부라진 도로가 내다보인다. 한때 위험하기로 전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던 모래재이다. 진안은 산이 8할이다. 때문에 마을과 마을이 고개로 연결되고 다른 고장을 가려면 고개를 넘어야만 한다. 가늠도 어렵게 많은 고개들. 그 중 모래재는 노령산맥의 호남정맥에서 제일 먼저 산을 넘어 진안과 전주를 연결시킨 중요한 고개였다.

 ! 아까 모래재로 올라올 때와는 달리 산길이 많이 가팔라졌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하긴 명색이 백두대간 다음으로 큰 산줄기인 정맥(正脈)이니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1 : 39. 도중에 편백나무 숲이 적힌 이정표(주화산/ 편백나무 숲/ 곰티재)를 만났다. 요 아래 소양면의 어디쯤에 편백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후부터 능선은 사납던 기세를 확 누그러뜨린다. 덕분에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편안한 산행이 이어진다.

 11 : 45.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헬기장이다. 아니 실질적인 주화산일수도 있겠다. 고도계가 3정맥분기점인 주화산(조약봉)보다 3m나 더 높은 570m를 찍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출발지인 메타세쿼이아길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5분이 걸렸다.

 널찍한 공터의 서쪽 가장자리에는 전망대가 들어섰다. 산비탈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대를 만들었다.

 난간에 서자 시원스런 조망이 펼쳐진다. 묵방산과 응봉산 등 완주의 산들은 물론이고 저 멀리 전주시가지의 고층빌딩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11 : 48. 공터를 지나자 곧이어 주화산(조약봉, 563.5m)이 길손을 맞는다. 진안군(부귀면 세동리)과 완주군(소양면 신원리)의 경계에 있는 높이 563.5m의 산으로 산악인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은 주화산(珠華山)을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시작한 금남·호남정맥의 마지막 지점으로 상정하고, 이를 기점으로 북쪽으로 금남정맥, 남쪽으로 호남정맥이 갈려나간다고 본다. ‘주화산이란 이름도 2000년대 이후 산악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정상석은 없다. 육산의 특징대로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그저 건건산악회에서 세운 ‘3정맥 분기점 표시봉이 이들을 대신한다고나 할까? 아니 주화산을 기점으로 강 3개의 수계가 나뉘는 점은 특별한 의미일 수도 있겠다. 동남쪽에 섬진강(부귀천), 동북쪽으로 금강(정자천), 서쪽으로 만경강(소양천)의 분수령이 된다. 하나 더, 진안고원길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6구간의 두 번째 인증지점으로서의 의미도 갖는다.

 이정표가 정맥 3개가 나뉘고 있음을 알려준다. 참고로 진안고원은 정맥 종주산악인들이 많이 찾는 곳 중 하나이다. 장수군 영취산에서 시작되는 금남·호남정맥이 팔공산부터 주화산(조약봉)까지 41.5km, 이곳 주화산에서 갈라진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 각각 26.3km, 10.5km 진안고원을 지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부귀산 방향, 즉 금남·호남정맥의 능선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서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지자체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침목계단을 놓아 내려서는 부담을 덜도록 했다.

 11 : 53. 그렇게 내려서다보면 어느덧 조약치이다. 이정표(모래재휴게소 1.15km/ 주화산(조약봉) 0.22km)는 이곳이 금남호남정맥에 있는 고갯마루 중 하나라고 알려준다. 하지만 막상 금남호남정맥의 부귀산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은 없었다.

 이후부터는 세봉임도(細鳳林道)를 따른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모래재휴게소의 반대방향인데, 입봉(638.7m)을 거쳐 연석산(928.2m)로 넘어가는 금남정맥의 8부쯤 되는 산허리를 따라 임도가 나있다고 보면 되겠다. 편백나무로 옷을 갈아입은 산자락이 눈길을 끄는 구간이기도 하다.

 임도는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봉암리 산골짜기(kakaomap 봉호재골 연애골로 적고 있었다) 써미트 골프장이 들어서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퍼팅그린이나 페어웨이, 인공호수 등 골프장에서 만들어놓은 시설들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작용해주기 때문이다.

 임도는 골프장의 바로 위를 지나기도 한다. ‘굿 샷’, ‘나이스 버디 등 서로를 응원해주는 목소리는 물론이고, 골퍼들이 내쉬는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 했다.

 도중에 거리표시가 있는 이정표(#1 : 부귀면사무소 7.6km, #2 : 부귀면사무소 6.3km)를 두 번이나 만날 정도로 임도는 길게 이어진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한참이나 오르기도 한다. 탐방로가 주화산보다도 높은 입봉(立峰, 638.7m) 9부 능선을 넘도록 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12 : 23 - 12 : 32. 진안군도 그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길가에 벤치를 놓아 지친 발걸음을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우리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떨어진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12 : 39. 임도가 끝나면서 산길로 들어선다. 저 벤치는 미리 체력을 보충해놓은 다음 산길을 타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는 오르막길이 나오지도 않았지만...

 12 : 41. 잠시지만 입봉에서 봉암리로 뻗어나가는 능선(이정표 : 부귀면사무소 5.1km/ 장승삼거리 10.7km)을 타기도 한다. 아니 능선(해발 583m)을 넘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산비탈을 옆으로 째며 길이 나있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계단을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 집사람처럼 무릎이 시원찮은 이들에게는 마의 구간이다.

 12 : 58. 두충나무재배지와 산죽군락을 연이어 지나 농로로 내려선다.

 임도를 따라 부천마을(봉암리)’로 향한다. 이렇듯 고원길은 굽이굽이 들어앉은 마을들을 지난다. 덕분에 잃어가는 우리 농촌의 삶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추억에 남을 길이 되어준다. 그렇다고 길 따라 걷기만 하면 진안고원 마실길의 제맛을 놓쳐버린다. 뜨문뜨문 마을이 나타나면 둘러보고, 말 한마디 건네고 또 한마디 답해야 마실길의 맛이다.

 13 : 02. 마을 안길을 지나는데 정자(富泉亭)가 이 마을의 유래를 궁금하게 만든다. ‘부천(富泉)’. 물이 넉넉하니 농사가 잘 되었을 게고, 주민들의 삶도 풍요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마실 나온 동네 주민은 내()가 없어 샘()을 썼다는 뜬구름 잡는 얘기로 갈음해버린다. 마을의 유래라도 건져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소규모 주택단지도 눈길을 끈다. 하나의 대지에 세 가구가 들어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양새이다.

 고원길은 이제 들길을 탄다. 굽이마다 마을과 자연이 반겨주는 길이다.

 이때 보령고개로 올라가는 골짜기가 눈에 들어온다. 모래재를 넘어 전주로 가던 26번 국도가 지금은 4차선으로 변해 저 고개를 넘는다. 1997 1월 전주와 무주에서 열린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앞두고 개통됐다.

 13 : 20. 부천마을에서 출발한 들길은 10분쯤 지나 2차선의 부귀로를 만난 다음 원봉암(元鳳岩)’ 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봉암리(鳳岩里) 4개 행정부락(원봉암·소태정·부천·미곡) 중 하나로 천주교 교우촌(‘공소도 있다)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정표(부귀면사무소 2.7km/ 장승삼거리 13.1km) 신촌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원봉암이 두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13 : 27. 도로(부귀로)를 따라가다 만난 봉암교’. 이정표(부귀면사무소 2.2km/ 장승삼거리 13.6km)가 다리를 건너지 말란다. 보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피해 정자천의 둑길을 따르란다. 진안고원길은 이렇듯 자연과 함께 하는 길로 인도하는 게 특징이다.

 이후부터는 정자천(程子川)을 따라 내려간다. 운장산 골짜기(부귀면 궁항리)에서 발원하여 거석리와 정천면 월평리를 거쳐 용담호로 흘러드는 길이 20km의 하천으로, ‘정자란 지명은 하천 주변에 정자가 많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하지만 이웃한 주천면과 용담면 지역에 주자천(朱子川)’이 흐르므로 이에 견주어 중국의 현인인 정자(程子)에 맞추어 이름을 고친 듯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정자천은 예로부터 풍광이 아름답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이는 용담댐에 수몰되어버린 하류의 얘기고, 상류는 충적지를 만들면서 생긴 곡선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그 충적지를 지나다 만난 요런 길이라도 볼거리로 꼽으면 몰라도...

 13 : 40. 26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굴에서 바깥쪽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으면 명암 대비가 확실한 작품이 나오기도 하는 곳이다.

 굴다리 근처 부귀교차로에서 잠시 49번 지방도(귀상로)로 올라선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부귀로로 다시 내려선다.

 13 : 44. ‘오산교로 정자천을 건너면 이번에는 사인암 마을이 맞는다. 법정 동리인 거석리(巨石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상거석·신거석·사인암·하거석·금평·금계곡) 중 하나로 사인암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사자 형국이고 큰 바위가 있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그러다 고려 때 사인 벼슬을 하던 사람이 살았었다며 요즘은 사인암(舍人岩)’으로 고쳐 부른단다. 하지만 마을 정자는 아직도 사인암(獅仁岩)이란 지명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새롭게 단장된 신작로를 따라간다. 보도가 따로 나있어 오가는 차량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13 : 50. 배구·족구·풋살 경기가 가능한 다목적구장이란다. 우천 시에도 경기를 치를 수 있는 경기장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 육상 트랙까지 만들어 놓았다.

 다목적구장 옆에는 충혼탑이 있었다. 안내판은 한국전쟁 때 이 지역을 지키다가 숨진 주민자치대 및 의용경찰대원들의 거룩한 혼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전한다. 9.28 수복으로 퇴로가 막힌 공산당이 운장산 일대로 몰려 무고한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만행을 일삼자, 이들이 목숨 받쳐 이 지역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6구간이 끝나는 신거석 마을로 간다. 거석리의 중심 마을이자, 부귀면 소재지로 면사무소·파출소·우체국·보건지소·농협 등 부귀면의 행정기관이 모두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 이 무슨 생소한 풍경이란 말인가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공중전화가 버젓이, 그것도 대로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썩 편치 않은 풍경도 눈에 띈다. 친일잔재라 할 수 있는 윤치호 시혜 불망비 윤치호 흥학 불망비 시혜불망비는 부귀면에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소작료를 경감해 준 사실을 기리기 위해 1929년 소작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흥학불망비는 부귀초등학교 부지를 희사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부귀면 초대 면장이 건립했다. 윤치호는 한때 독립협회를 비롯해 만인공동회 등 애국 계몽활동을 지도하고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나 1915년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특사로 석방돼 변절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안내판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不忘) 할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니 이 빗돌들은 잘못된 역사적 사실의 행적을 밝히고 현재를 살아가는 후대에게 교훈과 경계를 삼기 위한 역사 교육의 생생한 증거로 제공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14 : 03. 부귀면사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은 12.22km를 찍는다. 코스의 절반 정도가 500m 안팎의 능선과 임도를 오르내렸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눈에 익은 진안고원길 특유의 조형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7구간(황금폭포 하늘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을 면사무소 앞마당에 세워놓았다.

서해랑길 47코스(격포항  변산해수욕장)

 

여 행 일 : ‘24. 3. 9()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원

여행코스 : 격포항(금정모텔 앞)채석강격포해수욕장수성당적벽강하섬전망대성천항고사포해수욕장송포항변산해수욕장 사랑의 낙조공원’(거리/시간 : 13.9km, 실제는 15.64km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7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일곱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부안이 자랑하는 지질명소인 적벽강과 채석강이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변산마실길(2·3코스)과 겹친다고 해서 마실길 위의 세계지질공원으로도 불린다.

 

 들머리는 격포항(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내려오다 종암교차로(변산면 마포리)에서 빠져나와 오른쪽 격포로로 들어오면 잠시 후 격포항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부안47코스) 안내도는 닭이봉전망대의 입구 근처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네 번째 여정. 서해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간다. 길이는 13.9km, 비교적 짧은 거리지만 산길을 연상시키는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되기 때문에 결코 쉽다고 볼 수는 없다. 난이도가 별이 3(5개 중)로 분류된 이유일 것이다.

 10 : 41. 탐방로는 2차선 도로인 방파제길을 따라 북쪽으로 간다. 전망대가 있는 닭이봉(鷄峰. 85m)’을 오른쪽으로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나는 반대 방향인 격포항 쪽을 선택했다. 물 때(썰물)가 맞은 덕분에 세계적 지질명소인 채석강을 둘러볼 수 있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10 : 44. 채석강으로 가는 길. 왼쪽은 격포항이다. 격포(格浦)는 일찍이 수군(水軍)의 요새지로서 별장이나 첨사가 주둔했다. 조선시대는 전라우수영 관할 격포진이 있었다. 지금은 서해안권의 대표 국가어항으로 개발되어 있어 다양한 수산물을 맛볼 수 있다. 청정해역을 품고 있어 봄 주꾸미, 가을 전어를 비롯해 갑오징어, 꽃게, 백합, 바지락 등 사시사철 다양한 수산물들을 만날 수 있는 풍요로운 항구다.

 채석강(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3)으로 향한다. 다리를 건너면 방파제 위에서 자그마한 공원을 만난다. ‘채석강 갤러리라는데, 부안군에서 석재로 만든 각종 조형물들로 예쁘게 꾸며놓았다. 다양한 대리석 작품들에 채석강과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풍광이 담겨 있다고 보면 되겠다.

 격포항 종합안내 변산팔경 등의 관광홍보판과 함께 어항이용안전수칙 등의 안전에 대한 안내판도 눈에 띈다. 채석강을 구경할 때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의미인 모양이다.

 10 : 47. 방파제 옆으로 난 계단을 내려가면 채석강(彩石江)이 모습을 드러낸다. 20m 높이의 해안절벽은 중생대 백악기( 7천만 년 전)에 형성된 퇴적암이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부서져, 책 수십만 권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 같은 독특한 지형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수북하게 쌓아 놓은 시루떡 같다고도 한다니 보는 이의 생각에 따라서 그 형상도 달리 나타나는가 보다. 참고로 원래의 채석강은 강물에 배를 띄우고 놀던 중국 시인 이태백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의 강이다. 이태백이 놀던 채석강에 견줄 만큼 아름답다고 해서 그 이름을 차용했다고 한다. 아무튼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이태백처럼 술 한 잔 기울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침식에 의해 층을 이룬 절벽 아래로 편마암층이 닳고 닳아 벼루처럼 반들반들하고 닭이봉 아래의 층암절벽은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바위절벽을 움푹 파고 들어간 해식동굴에서 만나는 해넘이도 장관이란다. 하지만 이는 시간을 잘 맞추어야만 볼 수 있으니 참조한다.

 해식동굴은 인생샷을 건져보려는 이들로 항상 붐빈다. 해식동굴 안에 들어가 바다 쪽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명암 대비가 확실한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해식지형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서 눈길을 끈다. 해식절벽이 저런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이곳 채석강은 '연인과 함께 가면 사랑이 깨진다'는 오래된 속설이 있다고 한다. ‘돌 깨는 작업장인 채석장(採石場)’과 소리()가 같아서였을 것이다. ‘채석장 돌이 깨지듯 사랑이 깨진다.’고 여긴 게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70~80년대 만 해도 이곳은 사랑이 무르익는 곳이었다. 이곳에 놀러왔던 연인들이 아름다운 경관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집으로 돌아갈 차편을 놓쳐버리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귀가를 못한 젊은 남녀들이 따로 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상상에 맡기기로 하겠다. 하여간 그로 인해 결혼까지 간 커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11 : 02. 파도가 일렁이는 절벽 앞에 서면 켜켜이 쌓인 세월과 자연의 신비감이 더해진다. 해안가 바닥은 끝없는 바위멍석을 깔아놓은 듯하다. 바위가 거북 등껍질처럼 갈라진 데다 높낮이 차가 있어 발 디딜 곳을 확인하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렇게 1.5km쯤 되는 암반지대를 진행하면 격포해수욕장이다. 하지만 난 오른편 나무계단으로 오른다. ‘서해랑길과 만나기 위해서이다.

 11 : 06. 호텔과 음식점들이 들어서있는 골목을 지나 격포해수욕장으로 내려선다. 해수욕보다는 오히려 채석강과 서해안의 일몰을 보기 위해 찾는 이들이 많은 곳인데, 500m 길이의 백사장이 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고 물이 맑으며, 경사가 완만해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 딱 좋은 여건을 갖고 있다.

 해수욕장 뒤편으로 호텔, 리조트, 펜션, 캠핑장, 음식점, 카페, 수산시장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불편함 없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늘이 편치 않은 빈약한 배후 숲은 단점이라 하겠다.

 11 : 09. 백사장을 지나 반대편 갯바위에 오르면 인어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노을공주로 불리는 인어인데 걸쭉한 얼굴이 공주보다는 왕비에 가깝다. 이 인어상은 31년 전, 격포 앞바다의 대 참사(292명이 사망한 서해페리호 침몰사고)를 겪은 후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나? 하나 더. 이 인어상은 격포 앞바다의 석양이 진홍빛으로 물들면 은빛 비늘을 자랑하며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도 갖고 있단다.

 그 위에는 해넘이 채화대가 있다. 1999 12 31, 새천년을 맞이하는 국가행사를 하면서 마지막 햇빛으로 해넘이 성화에 불을 붙였다는 곳이다. 이 성화는 다음 날 일출 행사에서 얻은 성화와 합쳐진 뒤 새천년 영원의 불 보관함에 간직되어오고 있으며, 각종 대회의 성화에 불씨로 제공되고 있단다. 참고로 영원의 불 보관함은 포항 호미곶의 상생의 손 옆에 있다.

 바다 건너에는 고슴도치를 닮았다는 위도(蝟島)’가 있다. 고운 모래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과 빼어난 해안풍경 등 천혜의 경관을 갖고 있는 섬으로, 허균(許筠) 홍길동전에서 꿈꾼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진다. 그 앞에 떠있는 꼬맹이 섬 임수도는 심청이가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몸을 던진 임당수로 구전되는 곳이다.

 11 : 16. 채화대에서 빠져나와 ‘SONO Belle Hotel & Resort’ 옆으로 난 소로를 따르면 2차선 도로인 변산해변로(이하 변산 해안도로’)’에 이른다. 서해랑길은 이 도로를 따라 한참을 간다. 하지만 보도가 따로 나있어 오가는 차량을 무서워 할 필요는 없다.

 11 : 21. 400m쯤 걸었을까 이정표(종점 12.1km/ 시점 1.8km)가 수성당까지 0.6km가 남았다며 왼쪽으로 난 소로(죽막길)로 들어가란다. ‘변산반도 생태탐방원의 정문 앞 삼거리이다.

 11 : 25. 조금 더 걸으면 서해생명자원센터(한국수산자원공단)에 이어 죽막마을이 나온다. 서해랑길은 마을 앞 개천가를 따라 맞은편 언덕으로 올라간다.

 언덕에서 만난 격포리 후박나무 군락(해안가 200m의 지정구역 안에 132그루가 자란다)’. 안내판은 이 숲이 천연기념물(123)로 지정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이 지역이 후박나무의 북방한계선이라서 식물분포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나? 그나저나 후박(厚朴)하다는 인정이 두텁고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이름대로 후박나무는 후박한 나무이다. 약재, 목재, 염색재로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다 내준다.

 후박나무군락지 옆 너른 공터는 텅 비어 있었다. 아니 뭔가를 심으려는 듯 밭갈이를 해놓았다. 봄에는 유채, 가을에는 코스모스를 식재한다고 했으니 유채 씨라도 뿌리려나 보다.

 11 : 29. 공터를 가로지르면 전북 유형문화재 제58호인 수성당이다. ‘죽막동 유적이라는 이름의 사적(541)으로도 보호받고 있는데, 이 일대에서 선사시대 이래로 바다에 제사를 지낸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란다.

 수성당(水聖堂)은 서해를 다스리는 개양할미와 그의 딸 여덟 자매를 모신 제당으로 조선 순조 1(1801)에 처음 세웠다. 지금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참고로 개양할미는 수성당 옆의 여울굴에서 나와 딸 여덟 명을 낳은 뒤 일곱 딸은 각 도에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깊이를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수성당은 아홉 여신이 좌정해 있다 하여 구낭사라고도 한다. 개양할미는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하여 어부를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한다는 바다의 신이다. 때문에 이 지역 어민들은 개양할미를 정성껏 모셔왔다. 요즘도 정월 열나흘 날에 계양할미에게 치성을 드리는 수성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풍어와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 공동제사이다.

 수성당 앞에서의 조망. 아까 채화대에서 바라보던 풍경과 달라진 게 없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일몰도 변산팔경의 으뜸인 격포낙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육당 최남선이 심춘순례에서 조선의 빼어난 풍광 10경으로 뽑은 그 변산 낙조말이다.

 수성당을 나오면 산책로는 시누대 숲길로 이어진다.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웃자란 시누대가 울창한 숲을 이루는데, 그 숲속으로 터널형의 산책로가 굽이굽이 휘돌아가며 나있다.

 전망 좋은 곳에는 포토죤까지 만들어놓았다. 온 서해가 다 보일 정도로 막힘이 없는데, 이를 배경삼아 사진이라도 찍으라는 듯 액자 조형물을 세워두었다.

 11 : 39. 시누대 숲을 빠져나오면 길은 적벽강(赤壁江)’으로 이어진다. 채석강과 더불어 국가 명승(13)’으로 지정된 곳이다. 용두산(龍頭山)을 에도는 2km의 해안선을 따라 펼치는 붉은 절벽은 채석강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움에 경이로움을 더했다고나 할까? 참고로 적벽강은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소동파가 황주로 유배를 가서 빈한한 삶을 살며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다는 적벽강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검붉은 색을 띤 암반으로 이루어진 적벽강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아니 적벽강의 백미는 석양 무렵이라고 했다. 바위 단애가 진홍색으로 물들며 장관을 이룬단다. 바닷가로 내려서자 파도가 칠 때마다 몽돌 해안의 자갈 구르는 소리가 청아하게 귓가를 때린다. 달빛에 술상을 마주한 소동파가 읊조리는 싯구라도 되는 양...

백악기 후기, 거대한 호수 아래 퇴적된 격포리층이 지질운동으로 솟아올랐다 침식되면서 적벽강이 만들어졌단다. 퇴적암인 셰일과 화산암인 유문암의 경계 부분에 성질이 다른 두 암석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페퍼라이트는 적벽강을 대표하는 지질구조이다.

 글자 조형물은 우리가 변산 마실길 3코스를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적벽강 노을길로 포장된 3코스는 성천항에서 격포항까지의 구간으로 변산마실길의 백미다. 길은 줄곧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가는데 변산반도의 명소인 적벽강과 채석강, 그리고 바닷길이 드러나는 하섬과 격포리 후박나무 군락지를 품고 있다. 특히 이 구간을 걷다가 만나는 노을은 아름다움의 극치로 알려진다.

 11 : 42. 서해랑길은 적벽강의 해식 단애 위를 따라간다.

 덕분에 적벽강의 빼어난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변산의 해안은 모래와 바다만 있는 게 아니다. 멋들어진 기암들이 수문장처럼 바다와 뭍의 경계를 지킨다. 이는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서쪽으로 향하다 순식간에 서해 바다로 몸을 숨긴 덕분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산줄기가 물속으로 잠수하는 중이라고나 할까? 하나 더. 사람들은 내륙의 산줄기를 내변산’, 해안을 외변산이라 부른다는 것도 알아두자.

 11 : 46. 조금 더 걸어 도착한 또 다른 적벽강 생태탐방로 입구. 아름다운 변산 앞바다와 함께 커다란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안내판은 적벽강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특징은 무엇인가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었다.

 안내판은 페퍼라이트, 주상절리, 단층, 돌개구멍 등 다양한 지질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려가 보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4km 전방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으려면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1 : 49. 적벽강을 빠져나오면 또 다시 변산 해안도로를 만난다. 그리고는 꽤 오래 이 도로를 따라간다.

 변산해안로라는 이름대로 도로는 바닷가를 따라간다. 덕분에 곳곳에서 시야가 확 트인다. 이 무렵 나그네들은 하섬을 눈에 담을 수 있다.

 12 : 09. 도로변에 있는 마실길의 반월안내소에 도착하면 회화나무 고목이 나그네를 반긴다. 안내판은 ‘500여 년 전 부안 현청 동헌에 심어졌던 것으로 수령이 다하여 그 몸통을 수거·보관해오다 변산마실길 반월안내소를 개소하면서 수명을 다한 고목이지만 향토의 애환을 지켜온 수혼을 변산 마실길의 수호신으로 삼아 탐방객의 안녕을 빌고자 세워 두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하나 더. 안내소 옆에 변산 아으리랑 노래비와 하섬 부근에서 해양자원을 조사하다 숨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소속 연구원들의 추모비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도록 하자.

 12 : 15. 도로에서 내려와 오솔길(마실길 이정표 : 성천항까지 3.5km)을 따른다. 이후부터 길은 변산 해안도로와 해안 숲길, 바닷길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하섬 전망대까지 이어진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도 벌써 나흘이나 지났다. TV만 켜면 방송은 온통 남녘의 꽃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꽃봉오리를 활짝 열어젖힌 저 매화꽃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탐방로는 바닷가 비탈진 산자락을 따라 나있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곶부리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

 12 : 20. ‘변산 해안도로와 만나는 지점(마실길 이정표 : 성천항까지 3.2km)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식탁용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까지 겸하도록 했다. 드라이브 스루로 여행을 즐기는 이들을 위한 배려이지 싶다.

 전망대에 서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맞다. 이곳 부안에는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수식어들이 참 많다. ‘변산삼락(邊山三樂)’도 그중 하나인데, ·풍경·이야기 등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저런 풍광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수식어가 아닐까 싶다.

 바닷가 오솔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산책로라기보다 등산로에 가깝다고 보면 되겠다. 47코스의 난이도가 별이 3개로 평가되는 이유일 것이다.

 길은 시누대라고 하는 해장죽(海藏竹) 숲속을 헤집기도 한다. 터널이 만들어내는 빛의 조화로 인생 사진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 있는 구간이다.

 바다로 눈을 돌리자 하섬이 부쩍 가까워졌다. 사당도와 석도, 비안도 등 주변의 섬들도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나 더. 육지에서 1km가량 떨어진 하섬은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무렵 썰물 때가 되면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2~3일간 바다 갈라짐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때 백합·꼬막 등 해산물을 줍는 진풍경이 펼쳐진단다.

 12 : 47. 산길 느낌의 탐방로를 따라 시나브로 걷다보면 어느덧 해안초소에 이른다. 변산반도의 해안을 지키던 옛 군사시설을 전망대 겸 쉼터로 바꾸어 놓았다. 쉼터는 꽃을 들고 프러포즈를 하는 남성의 조형물을 세워 가슴 설레는 분위기까지 연출하고 있었다.

 탐방로는 군인들이 사용하던 교통호를 따른다. 그래선지 해안절벽을 따라 철조망이 쳐져있었다. 이 구간은 철조망에 걸린 팻말을 읽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고이지 않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는 유수불부(流水不腐)’ 같은 사자성어가 있는가 하면, 청춘이 기생을 안으면 천금이 건불이라는 유머 넘치는 글귀도 눈에 띈다.

 12 : 51.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가파른 곳에는 계단을 설치했고, 작은 개울이라도 만날라치면 어김없이 다리를 놓았다. 이뿐 아니다. 작고 예쁜 해변은 나무계단을 이용해 바닷가로 내려갈 수도 있도록 했다.

 바닷가로 내려서자 하섬이 성큼 다가온다. 아름다운 전설이 서려 있는 하섬은 새우가 웅크린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새우 하()를 썼다. 그러다 원불교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바다에 떠 있는 연꽃 같다 하여 연꽃 하()’자로 바꿔 사용한다고 했다. 그나저나 눈에 들어오는 하섬은 여느 섬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썰물 때가 되면 바다가 하섬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고 했다. 전설이 만들어낸 길이다. 옛날 옛적에 육지에서 노부모와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태풍이 불어와 부모님이 탄 고깃배가 하섬까지 떠내려가서 돌아오지 못하자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용왕님께 빌고 빌어 용왕님이 바닷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교통호를 따르다보니 군의 옛 시설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군인들이 떠난 뒤, 초소와 녹슨 철조망만 남아있던 초병의 길 변산 마실길로 다시 태어났다고 보면 되겠다.

 12 : 58. 그렇게 시나브로 걷다보면 어느덧 하섬 전망대. ‘변산 해안도로의 도로변, 하섬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에 데크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 아래로 지나가는 탐방로에는 커다란 대리석 조형물을 세워 이곳이 변산 마실길임을 알린다.

 마실길 나그네들을 위한 전망대도 빼먹지 않았다. 또 하나의 전망대를 탐방로에 걸쳐놓았다. 그나저나 산길을 걷다가 바다에 둘러싸인 하섬을 만나니 눈이 절로 시원해진다. 하지만 하섬은 눈으로 즐기는 선에서 만족해야 한다. 원불교 재단에서 사들여 해상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양을 위한 원불교 신도 외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단다.

 산자락을 헤집으며 뻗어나가는 오솔길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저 능선을 넘으면 성천항으로 연결되는 산비탈이다. 해안을 따라 조성된 오솔길은 한 명씩 차례로 줄을 서서 가야 할 만큼 비좁다.

 13 : 15. 길을 나선지 2시간 35. 변산마실길 2코스(적벽강 노을길)의 시점인 성천항에 도착했다. 포구의 초입, 유유동천(遊儒洞川)의 배수갑문 못미처 갈림길에 변산마실길 안내도와 이정표(송포항 5.0km/ 격포항 9.0km), 그리고 서해랑길 이정표(종점까지 5.6km)가 세워져 있다. 참고로 변산면 운산리에 위치한 성천항(成川港)’은 부안군수가 관리하는 5개 지방어항(곰소항·궁항항·송포항·식도항·성천항) 중 하나다. 연근해 어업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질산어장에서 주로 전어와 갈치를 잡는다.

 성천항은 바다낚시의 명소인 듯. 동호인들이 버스까지 끌고 와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창에 그려놓은 물고기가 나그네의 눈길을 붙들어 맨다. 저 낚시꾼들은 물고기를 낚자마자 뼈만 남기고 회를 떠서 먹어버리는 모양이다.

 13 : 20. 포구의 모퉁이(이정표 : 종점까지 5.2km)를 돌아서면 고사포해수욕장이 길손을 맞는다. 변산반도국립공원에서 모래밭이 가장 길다는 해변으로, 그 길이가 무려 2Km에 이른다고 한다. 잠시지만 모래사장을 걸어본다. 누군가 그랬다. 물 빠진 변산의 해수욕장에 들어서면 신발은 벗어두자고. 촉촉하게 젖은 모래 위를 걷는 감촉이 생각보다 부드럽고 따뜻하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갈 길이 바쁜 나그네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저 종착지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을 뿐...

 고사포해수욕장의 백사장은 모래가 부드럽고 물이 깨끗하고 수온이 적당해서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이다. 근거리에 있는 하섬은 물론이고, 비안도와 두리도, 거기에 고군산군도의 여러 섬들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고사포해수욕장의 자랑거리는 방풍림 역할을 하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파도소리에 더해진 솔바람소리가 인상적인데, 그 숲속에 야영장이 조성되어 있다. 솔숲 앞으로는 드넓은 서해바다가 부드럽게 펼쳐진다. ‘! 좋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멋진 해변이라 하겠다. 그래서일까? 아직은 쌀쌀한 날씨인데도 소나무 숲에는 꽤 많은 텐트가 쳐져 있었다.

 13 : 39. 서해랑길은 해수욕장을 지나 맞은편 산자락(이정표 : 종점까지 3.7km)으로 파고든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병사들이 사용하던 교통호를 따른다.

 하섬이 바라보이는 갯바위에는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내려가 볼 수도 있겠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시야가 넓어지는 법이니 탐방로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더 뛰어나지 않겠는가.

 13 : 44. 모퉁이를 돌아서자 수많은 펜션들이 잠시 쉬었다가란다. 운산교차로를 스치듯 지나면 서해랑길은 마리나, 헤이데이, 그랑메종, 보보스, 바라한 등 서구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펜션들로 가득한 저 마을을 관통한다.

 13 : 55. 펜션지구의 뒤 작은 고개를 넘자 양어장으로 여겨지는 시설이 나타났다. 하지만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경관 좋은 곳으로 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선지 정자까지 지어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주변은 기암괴석으로 가득했다. 바닷물에 깎이고 깎여 아무렇게나 다듬어진, 태고의 신비스러운 흔적을 여기서도 본다. 역광으로 인해 어둑해진 풍광이 신비스러움을 더해준다.

 함께 걷던 80대 도반의 손가락 끝에는 거북바위가 걸려있었다. 거북이 한 마리가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모양새라는 것이다.

 정자에 올라본다. 시선이 가는 곳마다 빼어난 풍광이 펼쳐진다. 맞다. 한반도가 품은 작은 반도 변산은 서해 제일의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힐 만큼 빼어난 미모를 갖췄다. ‘서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이유다.

 인간은 경제적인 동물이라고 했다. 그러니 서해바다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저런 명소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

 모실길 노선안내판이 우리가 지금 변산 마실길 2코스(노루목 상사화길)’를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구간은 철책 초소길을 따라가며 자연적으로 조성된 상사화 군락지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송포항에서 출발해 솔향기 가득한 숲길과 붉노랑상사화 군락지, 금빛모래의 고사포해수욕장을 거쳐 옥녀가 머리를 감았다는 성천포구에 이르는 길이 4.8km의 코스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교통호를 따라간다. 바닷가 산비탈에 쳐놓은 녹슨 철조망도 함께 따라간다.

 그렇게 걷다보면 벌거벗은 구릉지도 만난다. 그곳에는 유채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마실길은 이렇듯 봄의 유채꽃에서 겨울의 눈꽃에 이르기까지 사계절 내내 꽃들이 활발하게 피어난다.

 14 : 14. 나무로 만든 출렁다리를 건넌다. 작지만 탄력이 있어 출렁거림이 남다른 곳이다.

 14 : 20. 시야가 툭 트이는 널따란 구릉지는 상사화 군락지로 조성해 놓았다. 매년 늦여름(8월말부터 9월초) 샛노란 붉노랑상사화와 함께 순백의 위도상사화가 곱게 피어난단다. 때를 잘 맞추면 푸른 파도와 함께 펼쳐지는 환상적인 풍경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나?

 어떤 이는 이곳을 샤스타데이지 꽃밭으로 적고 있었다. 맞다. 봄에 이곳을 찾으면 상사화 대신 샤스타데이지가 꽃망울을 활짝 열고 길손을 맞이한단다.

 붉노랑상사화는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있을 땐 잎이 없어 잎은 꽃을, 꽃은 잎을 그리워한다는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는 꽃이다. 평소에는 연한 노란색이지만 직사광선이 강한 곳에서는 붉은빛을 띤다고 해서 붉노랑상사화란 이름이 붙여졌다. 만개 때는 껑충한 연초롱 꽃대 끝에 왕관처럼 얹혀진 노랑 꽃술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조망도 좋다. 비안도와 두리도, 거기에 고군산군도의 수많은 섬들까지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다.

 해안은 더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아름답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선지 부안의 바닷가는 각박한 세상살이에 할퀴어지고 뜯기고 긁힌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있었다.

 탐방로는 바다를 향해 돌출된 곶부리를 돌아가는 모양새이다. 한적한 오솔길은 사색하기 딱 좋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을 내딛는 순간 머리는 맑아지고 맘속의 모난 돌도 둥글둥글 다듬어진다.

 14 : 25. 모퉁이를 돌아서자 반원형의 전망대가 잠시 들렀다가란다. 다리 모양의 대를 세우고 그 위에다 전망대를 만들었다.

 전망대에 서자 변산해수욕장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나로서는 옛 추억을 소환시켜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35년쯤 전, 그러니까 내 나이 서른의 중반 무렵, 가족들과 함께 저곳에서 하계휴가를 보냈었다. 당시 아버지가 잡아온 바지락과 백합으로 술국을 끓였고, 그걸 반주삼아 마신 술로 나는 얼큰하게 취했었다. 그날 밤. 판소리랍시고 흥얼대는 내 술주정을 늦게까지 들어주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바다 건너 저 멀리서는 새만금 방조제와 고군산군도가 자신도 한번 보아달란다.

 1960년대 전후 북한의 간첩 침투를 막기 위해 설치했다는 녹슨 철조망은 이제 소망의 벽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조개껍데기나 판자에 나름대로의 소원을 적었는데, 남녀의 이름과 함께 하트() 표식을 넣은 게 가장 많이 눈에 띈다.

▼ 안내판은 이 부근을 붉노랑상사화의 자생지라고 했다(9월 무렵)를 잘 맞추면 샛노랗게 핀 상사화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단다하지만 3월 초인 지금으로서는 언감생심이다대신 복수초가 꽃봉오리를 활짝 열고 있었다이른 봄소식은 복수초의 노란 꽃잎에서 온다고 했다아직은 바람이 차지만 활짝 핀 복수초에서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낀다.

 14 : 31. 변산해수욕장의 남단과 맞닿아있는 송포항(松浦港), 부안군수가 관리하는 또 다른 지방어항이다. 이곳도 성천항처럼 칠산어장을 주요 어장으로 삼아 전어와 갈치 등을 잡는다. 참고로 송포(松浦)는 지지포라는 곳에서 살던 어느 선비가 이곳 소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14 : 36. 변산해수욕장은 송포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시작된다. 변산면 대항리에 있는 변산해수욕장은 서해안 3대 해수욕장(대천·변산·만리포)’ 중 하나로, 희고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2km 길이의 사빈과 배후의 소나무 숲이 한데 어우러지며 천혜의 절경을 이룬다. ‘백사청송(白沙靑松)의 해변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백사장도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에게 안성맞춤이란다.

 탐방로는 해수욕장의 배후 솔숲으로 나있다. 변산해수욕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해수욕장 중 하나로 1933년에 개장했다. 배후 솔숲에 굵직한 소나무들이 가득한 이유일 것이다.

 탐방로에는 수많은 시판(詩板)이 늘어서 있었다. 이 지역 출신의 작가들인지 하나같이 부안의 산하를 노래하고 있다. 맞다. 이곳 부안은 시문학의 보고이기도 하다.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났던 명기 매창(梅窓)이 있었는가 하면, 현대에 와서는 서정시인 신석정(辛夕汀)을 배출하기도 했다. 이들은 변산반도와 채석강 등 부안의 주옥같은 산하를 빼어난 문장으로 풀어냈었다.

 글자조형물은 파도를 담았다.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 지역 예술가가 만든 조형물이란다. 제목은 꿈꾸는 물고기’. 변산과 관련된 주제인 물고기를 모티브로 삼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다채로운 포토존과 조형물들이 해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해파랑길 안내책자나 kakaomap 47코스의 종점을 변산해수욕장의 버스정류장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47코스와 48코스의 시·종점임을 알리는 그 어떤 시설물도 눈에 띄지 않는다. 헷갈려하는데 두루누비에서 다운받은 앱이 사랑의 낙조공원까지 조금 더 가라고 알려준다.

 14 : 52. 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의 초입. 이정표가 당신은 이미 48코스를 400m나 걸어왔다고 알려준다.

 변산해수욕장의 랜드마크로 자리를 굳힌 사랑의 낙조공원은 꽤나 긴 계단을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 첫 만남인 전망대를 겸한 작은 광장에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을 표현하며, 한 쌍의 하트가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하트는 반쪽만 만들어 놓았고, 비워진 반쪽은 탐방객들의 사랑 표현을 채워 넣을 수 있도록 했다. 석양 무렵 이 조형물에 대칭으로 신체를 맞출 경우 인생사진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 있단다. 아래(다섯 번째)에 게재되어 있는 해넘이 안내판을 보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로마의 명물인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 Mouth of Truth)’을 닮은 조형물도 눈에 띈다. 얼굴 앞면을 둥글게 새긴 대리석 가면(플루비우스의 얼굴)이다. ‘진실의 입이란 이름은 입에다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강의 신() ‘플루비우스(Pluvius)’가 손을 잘라버린다는 전설에서 왔다. 중세시대에는 일부 영주들이 사람들에게 손을 넣게 하고 몰래 잘라버리기도 했다는데,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면서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난간에 서면 변산해수욕장이 속살을 드러낸다. 그런데 생경스럽다는 이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맞다. ‘변산해수욕장이 서해라고 해서 갯벌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시커먼 갯벌 대신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물이 들락거릴 때도 흙탕물 대신 쪽빛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공원에서 바라본 해수욕장의 배후 풍경. 변산해수욕장은 노을이 머무는 사계절 관광지로 새롭게 변신하고 있었다. 오토캠핑장을 시작으로 전기시설이 가능한 야영장(80), 스토리센터, 노을바라기(전망대), 비치가든(물놀이장), 노을쉼터 등 다양한 시설을 만들어놓았다.

 하트 손이란다. 사람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신체의 일부가 손인데 사랑의 첫 단계가 손잡기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까지 손을 잡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남자와 여자의 손으로 하트를 조각했단다. 사랑의 약속이 깨지지 않고 영원히 남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니,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조형물을 배경으로 인증사진 하나쯤 남겨보면 어떨까?

 사랑의 낙조공원 해넘이 안내판. 월별 해넘이 위치와 일자별 해넘이 시각을 담았다. 노을에 대해서는 최적의 뷰를 보여주는 곳이니 부안의 멋진 노을을 듬뿍 담아가라고 한다.

 15 : 02. 서해랑길 안내도(부안 48코스) 사랑의 낙조공원의 진입광장 남쪽 가장자리에 세워놓았다.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5.64km를 찍고 있으니 상당히 더디게 걸은 셈이다.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오솔길이 만만치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여행과 레포츠에 푹 빠져있는 나. 집사람은 그런 내가 좋다며 항상 함께 해준다. 이런 생활 패턴이 우리 부부의 건강 비결이 아닐까 싶다. 미국 대중문화계의 스타이자 코미디의 전설로 불리는 조지 번스 100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인 앨런과 함께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남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천직으로 삼았고,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다>

진안고원길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

 

여행일 : ‘24. 3. 2()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성수면·마령면·부귀면 일원

여행코스 : 오암마을황소마재(인증)장재동추동가래울재신동내동재내동판치재서촌전옥례 묘(인증)외판치서판교장승삼거리(5구간 종점)장승마을메타세쿼이아길(거리/시간 : 12.3km+3km, 실제는 장재동 마을부터 12.47km 3시간 1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오암마을(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순천·완주고속도로 상관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임실 방면으로 11km쯤 내려온다. ‘병암교차로(임실군 관촌면 관촌리)’에서 745번 지방도로 옮겨 10km쯤 달리다가 양화3(성수면 좌포리)’에서 좌회전, 중길로를 따라 2km쯤 들어오면 오암마을에 이르게 된다. 5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마을 앞 정자에 문패처럼 세워놓았다.

 고만고만한 높이의 고갯마루 넷을 오르내린다. 골짜기마다 자리한 마을과 저수지를 만나고, 멀리 마이산을 시야에 두다 보면 어느새 종점(부귀면 장승삼거리)에 닿는다. 난이도는 보통’. 코스 길이(12.3km)는 짧지만 고개를 네 개나 넘는다는 게 반영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중 하나(황소마재)를 생략하고 장재동마을에서 출발했다. ‘메타세쿼이아 길까지 연장해 걷겠다는 산악회의 결정 때문이다. 집사람의 체력으로는 15km를 걷는다는 게 무리이니 어쩌겠는가.

 10 : 29. 실제 출발지인 장재동마을 어귀. 차도는 장재동마을을 지나 추동마을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넓이가 들쭉날쭉한 도로사정을 감안해 이쯤해서 차를 돌리기로 했다. 자칫 길이 좁아지기라도 하면 장축의 산악회버스를 돌릴 수조차 없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재동마을로 이어지는 추장길을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만덕산 줄기의 골짜기, 남동쪽으로 트인 곳에 장재동과 추동 마을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추장(추동+장재동)’이란 도로명이 이를 증명해준다.

 10 : 32. 잠시 후 도착한 장재동 마을은 천주교 신자촌으로 보면 되겠다. 구한말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로 어은동(魚隱洞, 1888년에 공소가 설립된 진안의 유서 깊은 천주교 신자촌)과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하천(추동천)의 최상류, 오지에 위치하고 있어 관군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고, 남쪽으로는 성수면 중길리와 접하고 있어 유사시 피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초기 이주자들은 생업으로 옹기를 굽고 살았다 한다.

 삼노운동을 하자는 팻말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부연설명을 보며 실없는 미소로 마무리 짓는다. 버리지도 태우지도 묻지도 말자는 운동의 자 대신 (NO)’자를 넣은 것이다. 하긴 요즘은 글로벌이 대세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을회관 앞에서 고원길(고개너머 마령길)을 만났다. ‘황소마재를 넘어온 고원길이 마을회관 앞(덕천2)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다리(덕천2) 옆 이정표가 반갑다 눈인사를 보내온다. 방향표지판의 노란색과 붉은색은 진안의 특산물인 인삼과 홍삼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노란색은 순방향, 붉은 색은 역방향이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진안고원길을 한 바퀴 돌게 되어 있다.

 10 : 36. 몇 걸음 더 걸으면 천주교 장재동공소. 진안지역의 공소(公所, 본당보다 작아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공동체)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설립됐다. 1883년에 인근의 가래올(추동)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고, 1890년도에는 장재동에도 신자들이 이주해 와 공소가 설립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4년 본래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추동마을로 간다. 마을로 들어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따로 나있지만, 고원길은 추동천의 둑길을 따라 간다. 참고로 만덕산(765.5m)’의 북서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은 덕천저수지에 모였다가 추동마을 앞으로 흘러간다. 추동천 또는 덕천천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추동마을 어귀(동남향)에는 엄청나게 굵은 노거수 네 그루가 흡사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방수나 방풍보다는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조성한 비보(裨補林) 숲이 아닐까 싶다. 마을의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10 : 45. 마을 숲을 지났다싶으면 이내 추동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덕천리(德川里)를 구성하는 10개 자연부락(신덕·대동·신동·대동·신동·장재동·추동·안방리·판치·안골) 중 하나로, 마을 형성시기에 주위에 가래나무()가 많다고 해서 가래울 또는 가래골로 불리다가 한자화 되는 과정에서 추동으로 변했단다. 하나 더. 추동마을도 역시 천주교 신자촌이라고 한다. 진안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유박해(1801) 무렵이란다. 고산(완주군) 지방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데, 추동마을은 1883년경 형성됐다고 한다.

 이정표는 5구간 시점인 오암마을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3.7km로 적고 있다. 반면에 내 앱은 1.15km를 찍는다. 그러니 집사람과 함께 걷는다는 핑계로 2.5km쯤 단축해서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안내판은 이곳이 십승지지(十勝之地)에 버금가는 피난처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진안 사람들 사이에 동비서추(東飛西楸)’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큰 난리가 나면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동쪽의 비사랑마을(백운면)과 함께 이곳 추동마을이 꼽힌다는 것이다.

 마을을 지나 두 번째 고개(첫 번째 고개인 황소마재는 생략했다) 가래울재로 간다. 고개가 높지 않은데다 큰 커브를 그려가며 올라가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올라설 수 있다.

 10 : 59. 컨테이너가 반기는 가래울재(해발 370m)’에 올라선다. 고원길은 움푹 파인 능선의 안부를 꿰뚫듯 지난다. ! 왼쪽 개활지를 향해서도 길이 나있었다. 하지만 벌목과 경제림 조성을 위해 내놓은 임도이니 헷갈리지 말 일이다.

 이정표(장승삼거리 7.7km/ 오암 4.6km)가 이곳이 가래울재임을 알려준다. 진안고원길은 이렇듯 주요 지점마다 이름표가 달린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산길은 인생과 같다고 했다. 그러니 오르막길 다음에는 내리막길이 나타날 수밖에... 하지만 실제의 상황은 인생과는 딴판이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하는 내리막길 삶과는 달리 산길에서의 내리막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진행 방향 저 아래에 신동저수지와 신동마을이 놓여있다. 그 뒤로 보이는 고개가 잠시 후 넘어야 할 내동재이다.

 저수지 위 골짜기에는 엄청나게 넓은 묘목원이 들어서 있었다. 육묘의 수종도 국·공립 수목원에 못지않게 다양했다.

 길가 두어 곳에 쉼터용 정자를 지어놓았다. 묘목원에서 세운 모양인데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도 아낌없이 자리를 내어준다.

 신동저수지. 구글지도는 소류지로 적고 있었다. 경작지에 공급할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둑을 쌓았지만 그 규모가 작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 15. 신동마을에 내려선다. 덕천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옛 이름은 놋점이었다고 한다. 예전 이 마을에서 놋그릇을 만들어 전주 등지로 반출했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놋점터 또는 유기점리로 불리다가 놋점이 없어진 후 1800년경부터 나뭇골이라는 뜻의 신동으로 불린다고 한다.

 신동은 산골마을 치고는 규모가 꽤 컸다. 그래선지 들어선 교회도 선교 수양관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고 신자가 늘어나면서 사라졌단다.

 신동마을의 벽화는 풍물놀이를 담았다. 하지만 깃발은 농자천하지대본 대신 마을의 특산품을 적었다. ‘명품 고사리가 생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마을을 지나 비스듬히 내동재를 넘는다. 작은 고개라서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다. 거기다 숲까지 깊으니 뒷짐이라도 지고 사색하며 걸어보면 어떨까?

 고개너머 마령길은 고개를 하나 넘고, 휘어지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뒤돌아보면 또 다른 풍경이 오롯이 떠오른다. 내가 걸어온 길이다.

 11 : 25. 내동재에 올라섰다. 신동마을과 (내동·판치)마을 주민들이 왕래하던 고개로 마을 간의 왕래와 논밭에 가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하나 더. 내동재에서 북서쪽 능선을 따라가면 부귀면 방각마을로 이어지는 방각이재·깃대봉·장구목재 등을 거쳐 만덕산에 이른다. 남쪽은 덕천리 중심 산지를 이루다가 안방마을 앞 갈모봉(354m)에서 정리된다.

 고갯마루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내동재 이정표(장승삼거리 5.7km/ 오암 6.6km). 앱은 해발 362m를 찍는다. 내동마을의 해발이 310m이었으니 고도를 50m 밖에 올리지 않은 셈이다. 그만큼 수월하게 올라왔다는 얘기다.

 이제 내동마을로 내려갈 차례다. 익산·포항고속도로를 정면에 놓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저 멀리 마이산이 조망된다. 크게 보이는 암마이산 뒤에서 숫마이산이 삐쭉이 고개를 내민다.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의 모양새라고나 할까?

 11 : 35. 그렇게 걷다보면 어느새 내동마을이다. 큰 마을인 판치마을의 안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안골이라 부르다가 한자화 되면서 내동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은 집이 5채가 채 되지 않았다.

 내동마을 이정표(장승삼거리 5.0km/ 오암 7.3km)도 이름표를 달았다.

 고원길은 이제 판치마을로 간다. 아니 판치마을까지는 가지 않고 판치저수지 아래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판치재로 올라간다.

 부지런한 집사람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던 모양이다. 잠시만 시간을 달라더니 손놀림이 바빠진다. 그렇게 채취한 봄나물은 다음 날 아침상에 냉이된장국이 되어 올라왔고, 나머지는 친지들에까지 나누어줄 수 있었다.

 11 : 53. 내동과 판치 마을 사이에는 판치저수지가 있다. 덕천리 일대의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제법 큰 저수지(담수량이 24만 톤이나 된다고 했다)이다.

 고원지대에서 저수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러니 강우량의 변화가 농업용수의 확보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할 수밖에 없다.  간이 기상대가 그 증거라 하겠다.

 11 : 58. 저수지 아래서 만난 삼거리. 직진하면 판치마을이 나온다. 하지만 고원길은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참고로 널티로도 불리는 판치마을은 마을 입구에 동서로 길게 조성된 숲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때 베었다가 생사람이 죽는 등 변고가 많이 생기자 다시 조성했다고 한다.

 12 : 02. 잠시 후 고원길은 익산·포항고속도로 아래(이정표 : 장승삼거리 3.4km/ 오암 8.9km)를 지난다. 높고 긴 교량이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구간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판치재의 높이는 357m. 조금 전 지나왔던 판치마을 갈림길의 표고가 288m이었으니 1.2km를 걸어가면서 70m의 고도를 높이는 셈이다.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평탄한 길이 계속되는 이유일 것이다. 하나 더. 임도는 차량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찍했다. 바닥에 바퀴자국이 또렷한 것이 차량통행이 제법 많은 모양이다.

 12 : 14.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는 판치재(또는 널재)에 올라선다. 과거 백운이나 마령 사람들이 전주로 나갈 때 넘던 고개이다. ‘널재라는 지명은 널재마을의 뒷산이 널빤지처럼 판판하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널재  으로도 해석되는데, 이는 넓은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단다.

 느티나무 그늘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이정표(장승삼거리 2.5km/ 오암 9.8km) 아름다운 순례길의 팻말도 눈에 띈다. 그런데 저 달팽이는 뭘 의미하는 걸까? 어쩌면 느림의 미학을 음미하며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걸어보라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 태양광발전소의 썩 편치 않은 풍경을 눈에 담으며 트레킹을 이어간다판치재는 마령면과 부귀면의 경계에 해당한다북쪽 신정리(부귀면방향으로 들어선 고원길은 서촌마을·외판치마을·장승마을을 연이어 들른다.

▼ 12 : 20.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작은 분지에 들어앉은 서촌’ 마을이다소박한 규모만큼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마을로 서학(천주교신자들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마을 어귀에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숲이 조성되어 있으며정월 열나흘 날 저녁에는 거리제도 지낸단다.

 마을 뒤로 올라가면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노거수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서촌마을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게 마을 당산목으로 삼아도 충분하겠다. 맞다. 그늘에 놓여있는 저 의자가 그 증거일 수도 있겠다.

 서촌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살짝 거칠어진다. 왕래하는 사람들이 적은 탓인지 잡초로 무성한데다 질척거리기까지 한다.

 11 : 29. 그렇게 잠시 걸어 전옥례 묘역에 닿았다. 아니 묘역에 들어가기 전, 이정표(장승삼거리 1.6km/ 오암 10.7km)가 먼저 길손을 맞는다.

 전옥례 묘소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 2개 인증지점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우리 부부가 생략한 구간에 있는 황소마재에 세워져 있다). 자신의 얼굴과 이정표가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두어야 하는 이유이다.

 전옥례 묘역은 사유지이다. 그래선지 울타리를 둘러놓았다. 하지만 고맙게도 둘레길 나그네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작은 문을 내놓았다. 글을 빌어서나마 묘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후손들에게 감사를 드려본다.

 전옥례(全玉禮)’ 할머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장녀라고 한다. 갑오동학농민혁명으로 부모를 잃은 그녀는 천애고아로 유랑하다 마이산 금당사에 들어가 김옥련으로 이름을 바꾸고 공양주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23세에 이찬영씨와 결혼해 52녀를 두었다. 우여곡절 끝에 진안군 부귀면 희망목장으로 왔을 때 전봉준장군의 딸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숨어살던 때라 숨기고 지냈지만, 어느 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야기가 실린 것을 보고 이제는 자신이 전봉준의 딸인 것을 알려도 되겠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출생내력을 밝혔단다.

 묘역에는 묘비 말고도 전옥례 할머니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1970년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란다. 이후 정읍동학농민혁명사 등 각종 서적과 논문에 이런 사실이 실리면서 세상에 전해졌다.

 묘역에서 내려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거기에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자칫 엉덩방아라도 찧을 수 있으니 조심해서 내려갈 일이다.

 12 : 34. ‘서촌재길로 내려선다. 서촌마을로 이어지는 진입로 겸 농로로, 고원길은 이 길을 따라 서판마을로 간다.

 12 : 38. 서판마을(이정표 : 장승삼거리 1.1km/ 오암 11.2km). 법정 동리인 신정리(新亭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가정·신리·서판·승각) 중 하나이다. 신정천변 들판의 자연부락 판치이기도 하다.

 12 : 49. ‘서판교로 세동천(신정리 앞을 흐를 때는 신정천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을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2차선 도로인 모래재로’. 고원길은 200m쯤 이 도로를 따른다.

 12 : 52. 세동천의 둑길로 내려서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세동천이 휘돌아가면서 만들어놓은 자그만 들녘을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렇듯 진안고원길은 기계음으로 찌든 속세의 길보다는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아 연결시킨다.

 4분쯤 걸어 만난 작은 개울. 앞이 막힌 고원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장승삼거리가 얼굴을 내민다.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이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다.

 12 : 58. 장승삼거리에 이른다. ‘진안고원길 5구간의 종점이자 한국고갯길 TOUR in 진안’ 23일 코스(78일 종주팀, 34일 하프팀도 있다)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한국고갯길(KHT : Korea Hills Trail)은 한국형 하이킹·백패킹 문화를 통해 지역을 살리는 공정여행 시스템으로 국내의 다양한 트레일(trail)을 걷는 투어(TOUR)를 이어오고 있다. 먹고 싶은 곳에서 먹고, 구경하고 싶은 곳을 구경하면서 나만의 걷기 여행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나?

 장승삼거리는 버스정류장을 겸한다. 작은 슈퍼마켓도 하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한적한 풍경을 보여준다. 6구간(전주가는 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은 버스정류장 앞에 세워져 있다.

 2차선 도로인 모래재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6구간(전주가는 길)을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산악회의 결정이지만). 거리가 먼데다 높은 산까지 올라야하는 다음 구간의 힘든 여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한 결단이다.

 13 : 04. ‘장승2를 건너자 세동천의 둑길로 내려선다. 최근에 정비를 끝냈는지 둑 위로 난 시멘트포장길 양 가장자리에 야자매트까지 깔아놓았다.

 오른편에 세동천을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부귀면 세동리에서 발원한 세동천은 신정리를 거쳐 연장리(하평마을)에서 정곡천과 합친 다음 강정리(월운마을)에서 제룡강(섬진강 상류)에 합류되는 섬진강의 지류이다. 상류인 세동천에 이어 신정천, 연장천 등 지나는 지역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기도 한다.

 둑길을 걷다보면 물길이 깎아 만든 바위절벽도 만난다.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기묘하지도 않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13 : 11. ‘장승마을 앞에서 또 다시 모래재로를 만났다.

 모래재로를 따라가면 코스를 꽤 단축할 수 있다. 메타세쿼이아길 입구에서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실제 그렇게 걷는 이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고원길은 신정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장승마을로 들어선다. 해발 300m를 훌쩍 넘기는 산간지방을 고원길은 혼자 즐기며 걷기에는 산이 깊거나 한적하다. 그래도 잃어가는 우리 농촌의 삶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추억에 남을 길이다. 하지만 길 따라 걷기만 한다면 진안고원 마실길의 제맛을 모른다. 뜨문뜨문 마을이 나타나면 둘러보고, 말 한마디 건네고 또 한마디 답해야 마실길의 맛이다.

 마을 담벼락은 예쁜 벽화 대신 속 깊은 글귀를 담았다. ‘나눌 수 있는 봄 향기. 당신이 있어 나는 늘봄이다’. 문득 영춘(永春)’이란 예쁜 이름을 지어주신 할아버지의 당부가 떠오른다. 네 이름이 늘봄이니. 봄 향기 사위에 퍼져나가 듯. 아름다운 마음을 세상과 공유하라는...

 13 : 14. ‘곰티로를 따라 방각마을(같은 신정리)쪽으로 가다보면 장승초등학교가 나온다. 1946년에 문을 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초등학교이다. 1954년 장승국민학교로 승격했고, 1982년에는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다. 2010년 학생 수가 13명으로 줄어들면서 폐교위기에 몰렸으나, 인근 지역(전주)에서 학생을 유치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으로 2021년 학생이 57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학교를 중심으로 지역사회가 살아난 대표 사례로 꼽힌다나?

 교정에는 장승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이 아니 장승초등학교와 병설유치원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하나 더. 고원길은 초등학교 교정을 통과한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으로 지나가도록 하자. 특히 평일에는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정숙보행이 요구된다.

 고사리손으로 가꾸어가는 텃밭. 학교는 전주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했다. 인구 65만의 대도시에서 살아온 어린이들로서는 새로운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맞다.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에서 자연과 벗하며 자라는 아이들에게서 길러지는 감성,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서로를 살리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 필요한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초등학교를 지난 고원길은 개울로 몸을 움츠린 세동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13 : 21. 그러다 우정천과의 합수지점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우정천을 거슬러 오른다. 개울을 건널 수 있는 다리를 찾아서이다. 덕분에 나그네들은 250m쯤 에돌아갈 수밖에 없다.

 12 : 26. ‘U’자 형으로 커브를 돌아온 길은 세동천과 다시 만난다. 하지만 다리(우정교)를 건너지 않고 세동천의 왼쪽 둑길을 따라 간다.

 우정교에는 우정마을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법정 동리인 세동리(細洞里) 6개 행정마을(신덕·적천·큰터골·원세동·우정·부암) 중 하나로 풍수상 소가 물을 마시는 지형이라고 해서 우정(牛井)’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피난처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던 오지마을이다.

 세동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 오른쪽 산자락에 원세동마을이 들어앉았다. 보건진료소까지 들어서있는 규모가 제법 큰 마을이다.

 13 : 35.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부귀면의 자랑이자 진안군 명물 중 하나인 메타세쿼이아길을 만나게 된다. 우람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길게 뻗어나가는 풍경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참고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세동리(부귀면) 원세동마을에서 큰터골마을까지 1.5km구간에 곧게 뻗은 긴 다리를 외투 자락으로 살짝 가린 팔등신 미인들처럼 나란히 도열해 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유명하기로는 담양이 으뜸이다. 모래재 가로수 길은 나무의 굵기나 가로수 구간의 길이가 짧아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쭉 뻗은 길이 살짝 여유 있게 돌아가는 등 비교를 거부할 만큼 묘한 매력을 자랑한다.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13 : 42. 트레킹은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에서 끝난다(사진은 5구간 출발지점의 조형물을 담았다). 이랑마을 입구에서 100m 남짓 더 나아간 지점이다. 오늘은 3시간 15분을 걸었다. 앱은 12.47km를 찍는다. 고만고만한 고개를 3개나 넘은데다, 걷는 도중 냉이까지 채취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여행지 : 델피(Delphi) 유적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파르나소스 산(2,457m)의 남서쪽 산자락에 위치한 도시 유적. 고대 그리스의 최고 신탁이던 델포이의 신탁이 이루어진 곳이자, 땅의 배꼽 옴파로스(Omphals)’가 놓여있던 장소이다. 신화에 따르면 아폴론이 이를 지키던 괴물 여신 피톤을 죽였고 이후 델포이는 아폴론을 숭배하는 주요 성소가 되었다. 도시국가의 왕들은 신탁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사자를 보냈고, 델피는 상업·무역이 매우 활발한 곳이 되었다. 하나 더, 이 성역은 기원전 586년부터 4 ()그리스 경기 중 하나인 피티아 경기가 4년마다 열리기도 했다. 경기의 승자는, 템피 계곡의 월계수로 만든 월계관을 쓰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고 한다.

 

 아테네를 출발한 버스는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델피에 도착했다. 유적지 앞에 들어선 마을부터 들른 이유이다. ! 델피로 오는 도중 태양의 후예 촬영지 아라호바를 스치듯 지나오기도 했다. 덕분에 우린 송중기와 송혜교가 키스를 하던 종탑을 곁눈질로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델피는 메테오라로 가는 도중에 들른다. 델피와 테르모필레를 둘러본 다음 메테오라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델피마을에서 바라본 풍경. 거대한 협곡을 낀 드넓은 저 평원은 옛날 아폴론의 신성한 땅으로 불렸다고 한다. 사진에서 길처럼 나타나는 부분은 프레이스토스 강이란다. 우기인 겨울철에만 물이 흐르기 때문에 평소에는 저렇게 하얗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단다.

 투어는 입장권을 사면서 시작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던 도시 델피’, 그런 믿음은 현대까지 이어졌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보호받고 있다.(개방시간 : 08:30-15:30)

 델피성역의 추정 조감도. 입구라 할 수 있는 로만 아고라를 시작으로 리산데르의 기념물, 트로이 목마, 아테네 마라톤 기념물, 코르키라(코르푸 섬)의 청동 황소, 아르카디아 기념물, 헬레니스틱 스토아, 아르고스 왕의 엑시드라, 시프노스 보물창고, 테베 보물창고, 보이오티아 보물창고, 아테네 보물창고, 메가라 보물창고, 코린토스 보물창고, 낙소스 스핑크스, 다각형 옹벽, 아테네 스토아, 플라타이아이 삼발이 의자, 로도스의 전차, 아폴론 신전제단, 아폴론 시탈카스(Sitalcas·곡식의 수호자) 청동상, 아폴론 신전, 극장, 서쪽 스토아가 줄줄이 이어진다. 사진에는 없지만 맨 위에 경기장인 스타디온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델파이의 무덤(the cemeteries of Delphi)’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관람객을 맞는다. 대 위에 놓인 석관(石棺)을 이르는 모양이다.

 델피 유적은 땅속에 묻혀있던 옛 도시를 발굴해 놓은 현장이다. 그러니 유물의 파편들이 사방에 널려있을 건 당연. 참고로 델피는 신탁의 유명세에 힘입어 주변 도시국가들이 신전관리와 제례유지를 위해 결성한 인보동맹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390년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이교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델피의 역사도 막을 내린다. 이후 폐허 위에 카스트리 마을이 세워져 아폴론의 성역마저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발굴에 착수하면서 델피라 명명했다.

 첫 만남은 로만 아고라(Roman agora)’. 전형적인 스토아 형식으로, 성역으로 들어가는 동쪽 출입문의 담벼락에 바싹 붙어있다. 로마시대 상업과 만남의 장소였고 신전에 바칠 제물 등을 팔던 시장터이다.

 아고라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토의와 그에 대한 투표가 이루어지던 곳이기도 하다.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도시의 일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늘 아고라에 모여 정치나 철학, 과학,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아고라가 민주주의를 열어 가는 중요한 장소였다는 얘기다. 여자와 노예들에게는 그런 권리를 주지 않았다는 게 아쉽지만...

 돌기둥을 받히던 기단. 그런데 중앙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곳 그리스는 지진이 빈번한 나라, 그러니 기둥을 고정시키기 위해 그 무엇인가를 저 구멍에 꽂았을지도 모르겠다.

 이후부터는 신성한 길(sacred way)’을 따른다. 델피 성역의 입구에서 아폴론 신전에 이르는 길로, 이 길의 좌우에는 각양각색의 보물창고와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보물창고는 도시국가들이 자신들의 보물을 저장해두던 금고다. 각지에서 모인 도시국가들은 신탁을 먼저 받기 위해, 신탁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보물 창고(Treasury)를 지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델포이 박물관에 있다.

 시키니온과 시프니안의 보물창고(the treasury of the sikyonians and siphnians)’라고 한다. 자유여행으로 다녀온 산토리니가 속한 키클라데스 제도의 작은 섬나라 시프노스(Siphnos)에서도 자신들의 번영을 유지할 방도를 구하며 봉헌했던 모양이다. 역사는 그 신탁을 잘못 해석해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전하지만... 하나 더, 시키온은 코린토스 서쪽에 위치한 고대 도시다.

 아르고스왕의 엑세드라(Exedra of the Kings of Argos). 아르고스(Argos)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미케네와 인접한 작은 도시국가였다. 왕이나 고위직 관료가 델피를 방문했을 때 머물 수 있는 엑세드라(Exedra, 반원형의 휴식 공간)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보이오티아인의 보물창고(The treasury of the Boeotians). 보이오티아(Boeotia)는 코린토스 만에 접한 도시국가들의 연합체라고 했다. 그런데 보이오티아 동맹의 맹주였던 테베의 보물창고를 따로 지어놓은 이유는 뭘까?

 메가라 코린토스 등 다른 도시국가의 보물창고도 여럿 눈에 띈다. 하긴 그리스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심지어 이집트까지 신탁을 받고자 하는 도시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신에게 봉헌했다니 어련하겠는가. 심지어는 신탁을 받으려고 델피에서 1년 넘게 머물기도 했단다.

 문자로 가득한 축대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우리가 배우고 익히는 역사는 저런 기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금줄 안에 모셔진 저 돌은 옴팔로스(Omphalos)’라고 한다. 옴팔로스는 배꼽을 뜻하는 라틴어다. 그리스인들은 신체의 중앙을 배꼽으로 보듯 이곳을 땅의 중심으로 보고,  배꼽 돌을 놓아두었다고 한다(저건 모조품이고 진품은 고고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가 세계의 중심을 향해서 동쪽과 서쪽으로 두 마리의 독수리를 날려 보냈더니, 두 독수리가 델포이에서 서로 만나더란다. 그 장소가 바로 세계의 배꼽이라고 하는 옴파로스.

 아테네의 보고는 델피 유적지에서 온전한 형태로 서있는 유일한 건물이라고 한다. 마라톤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인들이 아폴론에게 바친 봉헌물을 보관하던 보물창고(寶庫), 2개의 도리아 양식 기둥이 받드는 매우 단출한 건물 형태를 보인다. 건물의 메토프에는 신화 속 영웅들의 무용담도 부조되어 있다. 1904-1906년 아테네 시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는데,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완벽하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단다.

 아테네 보고의 맞은 편 언덕에 자리한 가이아 여신의 성소는 아폴론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에 왕뱀 피톤이 신탁을 내리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근처에 놓인 회색 바위는 당시 델피의 여사제 시빌레가 그 위에서 신탁을 내렸다고 해서 시빌레 바위라고 불린다.(사진은 내가 찍은 게 흐려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아테네인의 열주랑(Stoa of Athenians :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승리를 축하하고 아폴론신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헌정) 뒤에 있는 아폴론신전의 다각형 돌 축대(Polygonal wall)’. 쌓아올린 다각형 바위들이 서로 견고하게 맞물려 있다. 접촉면이 많은데다 틈새까지 보이지 않아 페루 여행 때 쿠스코에서 신기해했던 ‘12각의 돌(La Piedra de Los Doce Anguios)’을 떠올렸을 정도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진의 피해를 막기 위한 지혜가 아니었을까 싶다.

 저 건물의 용도는 대체 뭘까? 궁금증을 못 참고 다가가보니 ‘Do not touch please’란다.

 아폴론 신전으로 오르는 길, 길가에 늘어서 있던 화려한 건축물들은 이제 이야기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기단부만 남아 표지석이나 안내판이 없을 경우 정체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라고나 할까?’

 신성한 길(sacred way)’은 델피 유적의 구심점인 아폴론 신전(Temple of Apollo)’으로 인도한다. 아폴론을 모시는 신전으로 이곳에서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델포이의 신탁이 이루어졌다. 아폴론은 신이었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여 사제 피티아(Pythia)를 통해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델포이 신탁소에는 왕은 물론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철학자들도 찾아와 무녀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숭배 금지령을 내리면서 델포이는 역사의 페이지를 마감했다.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원래의 신전은 길이 60m에 폭이 23m이었다. 38개의 도리스식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는데, 현재는 암갈색 돌기둥 6개와 여기저기 깨진 제단만 어지럽게 남아있어 얼핏 폐허처럼 보인다.

 현재의 아폴론 신전은 기원전 4세기 이곳을 강타한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알크메오니드 신전을 대신하여 새로 지은 것이다. 신전의 네 면을 한 줄의 원기둥으로 빙 둘러친 건축구조였다고 한다.

 신화에 의하면, 아버지인 제우스는 쌍둥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탄생을 기뻐하며 아폴론에게 예언을 관장하는 능력을 주었다고 한다. 아폴론이 태어난 지 나흘이 지나자, 제우스는 그에게 황금 왕관과 현악기 리라, 백조가 끄는 마차를 주며, 피톤(델포이)으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곳에서 헤라의 명령으로 어머니 레토가 임신한 동안, 이들을 줄곧 괴롭혔던 큰 뱀 피톤을 아폴론은 화살로 쏘아 퇴치했다. 이후 아폴론은 피톤이 지키던 가이아의 신전을 차지하고, 지명도 피톤에서 델포이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렇게 델포이의 신전은 아폴론의 신전으로 바뀌고, 신전의 피티아를 통해 사람들에게 신탁을 내리게 하였다. 그 후로 인간은 가이아의 뜻이 아닌, 제우스의 뜻을 알리는 아폴론의 신탁에 의하여 미래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위키백과 참조)

 아폴론 신전의 맞은편, 안내판은 ‘The altar of Chiots area’로 적고 있었다. ‘치오츠 제단 지역이라는데, ‘Chiots’는 대체 뭘 말하는 걸까? 아무튼 이 지역에는 치오츠 제단(The altar of Chiots)’ 플라타이아인의 삼각대(The tripod of the Plataeans)’,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동상의 받침대(he pedestal of the statue of Aemilius Paulus)’. 그리고 아탈로스 1세의 스토아(The stoa of King Attalus)’를 포함한다고 했다.

 플라타이아인의 삼각대는 저 청동 기둥을 말하는가 보다.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 전쟁 중 그리스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시아군으로부터 노획한 청동무기를 녹여 만들었다는 승리의 기념비이다. 원래 빙빙 꼬여 올라가는 3마리 뱀의 머리위에 피티아의 상징인 삼발이 솥을 올려놓은 형태였는데, 지금은 청동 기둥만 남았다(머리 부분은 1204년 이스탄불에 입성한 십자군에 의해 절단되어 무기로 만들어지거나 현금으로 바뀌었단다). 아무튼 저 기둥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약탈당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히포드럼 광장)에 세워졌다. 따라서 진품은 현재 이스탄불에 있고 이곳 델포이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동상(The statue of Aemilius Paulus)’은 받침대(pedestal)만 남아있었다. 아밀리우스 파울루스 (로마)장군이 피드나 전투(로마가 그리스 본토를 지배하고 지중해의 패자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힌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군대를 격파한 승전기념비로, 전투장면을 부조(상단에) 4각의 빗돌 위에 동상을 올려놓은 형태였으나. 이 또한 동상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폴론 신전에서 조금 더 위로 오르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극장(Tea Theatre)을 만난다. BC 4세기에 건설된 델포이 극장은 2, 35단의 관람석이 있어 5000명이 동시에 음악이나 연극 등을 관람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원형극장으로 현재의 모습은 로마시대에 개축된 것이다. 비교적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어 지금도 여름이면 연극이나 콘서트가 공연되기도 한단다. 하나 더, 관람석 위로 오르면 델피 유적지뿐 아니라 광활한 올리브 숲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원형극장의 뒤로도 길이 널찍하니 나있었다. 방향표시석은 이 길을 따르면 ‘Stadium’에 이르게 됨을 알려준다. 그러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어진 시간에 쫓겨 달리듯이 다녀올 수밖에 없었지만...

 원형극장의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델피는 산 사면을 깎아 도시를 건설했다. 제일 위에 원형경기장, 그 밑에 원형극장, 그 밑에 신전, 그리고 가장 아래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들어앉혔다. 그리스의 도시들에서 신전과 극장, 원형경기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고 한다. 신전은 신과 통하는 장소였고, 극장은 연극이나 노래 등 예술을 통해 정신을 정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했다. 또한 원형경기장에서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건강하게 단련시켰을 것이다.

 숨이 턱에 찰 즈음 도착한 꼭대기에는 고대 그리스의 경기장인 스타디온(Stadion)’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에 건축된 경기장은 길이 178m에 폭이 26m, 수용 인원이 6,000명인데, 아폴론이 피톤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피티아 제전(Pythia games)’이 이곳에서 열렸다. 계단과 운동장 모두 매몰되었던 것을 2세기경 그리스의 대부호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가 자비를 들여 발굴·재건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8세기부터 시와 음악에 관한 행사를 중심으로 8년마다 개최되던 제전은 육상과 말타기 기술, 마차경주 등이 더해지면서 4년마다 열렸고, 그리스 4대 제전(올림피아 제전, 네메아 제전, 이스트미아 제전, 피티아 제전)의 하나가 되었다. 피티아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월계관이 씌어졌다. 하나 더, 이 제전의 특징은 다른 제전과는 달리 음악 경연이 함께 벌어졌다는 점이다. 음악의 신인 아폴론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나?

 마지막으로 들른 건 고고학박물관(규모는 작지만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중 하나로 아폴론의 성역과 마르마리아에서 발굴된 조각품, 봉납물, 비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신탁을 행할 때 무녀가 앉는 자리로 썼다는 삼발 솥단지가 방문객들을 맞는다. ‘피티아라 불리던 무녀는 신경이 약간 마비된 상태에서 유황 성분의 연기(환각을 일으키는 성분이 함유된 가스)까지 맡아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신탁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하나 더, 아폴론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가 적혀있다고 한다. 절차를 거쳐 받아간 신탁을 해석하는 것은 신탁을 받아간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문구라나?

 낙소스의 스핑크스’. 기원전 6세기에 만든 12m 높이의 원주(圓柱) 위에 얹혀 있던 조각상으로, 에게 해의 섬 낙소스 인들이 봉헌한 보물창고 앞을 지키고 있었단다. 이밖에도 아폴론 성역의 보물창고들 외부에는 많은 조각상들이 건조되어 있었다고 한다.

 도시국가 아르고스에서 봉헌했다는 쌍둥이 형제상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니가 효자 아들들에게 가장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신에게 빌었더니 둘이 함께 죽어 신의 곁으로 가더란다. 당시는 신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자신 곁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나? 그러니 아르카익 시대(BC8~5C)에 만들었다는 조각상이 웃을 수밖에...

 벽에는 황금머리 황소(The Silver Statue of a Bull)’가 걸려있었다. 기원전 6세기(아르카이크 시대) 이오니아에서 만든 작품으로 은박을 입힌 구리판 세 조각을 연결해 제작했다. 참고로 황소는 현신한 제우스를 상징한단다.

 아폴론과 그의 자매 아르테미스, 그리고 이들의 어머니인 레토의 신상이라고 한다. 금과 상아로 아름답게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왕으로 이름났던 크로이소스 왕이 봉헌했을 것으로 추정한단다. 그들이 치장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관과 귀거리, 팔찌 등 황금으로 만든 치장물들을 함께 전시해 화려함을 잔뜩 자랑하고 있었다.

 대접처럼 생긴 저 도자기에는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추구하던 비례·대칭의 조화가 집약되어 있다고 했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 헌주를 쏟고 있는 아폴론을 묘사한 단순한 그림에 아폴론을 상징하는 까마귀와의 이야기, 적색기법의 도자기가 발달하면서 추가된 흰색과 1.618의 황금 비율이 가미되어 있단다.

 소크라테스로 여겨지는 조각상도 있었다.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게 기른 석상은 진지한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댄서의 원주(The Column of the Dancers)’라는 작품이다. 아칸서스(Acanthus) 잎 조각 위로 아름다운 세 여인이 머리에 옴파로스(Omphalos, 대지의 배꼽)를 이고 있는 모양새라고 한다. 그 앞에 따로 놓아둔 돌(옴파로스)을 얘기하는지도 모르겠다.

 안내판은 안티노우스(Antinoos)’로 적고 있었다. 로마의 다섯 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 황제의 총애를 받던 미소년이다. 황제를 수행하여 이집트를 순행하던 중 나일 강에 빠져 익사했는데, 그가 로마에 공헌한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의 조각상을 델포이 성역에 봉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델피 박물관의 유물 중 최고로 꼽히는 이니오호스(전차를 모는 전사) 청동상이라고 한다. BC373년 지진 때 땅에 묻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청동상으로는 드물게 오닉스(줄무늬가 있는 대리석)로 된 눈까지 남아있다. BC478 혹은 474년에 있었던 피티안 경기의 전차 경주에서 승리한 시실리의 군주 폴리잘로스에 의해 델피에 헌납된 것으로, 옷이 날리지 않게 잡아매어 놓는다거나 굳게 다문 입술, 고삐를 잡은 팔에 보이는 힘줄 등 전차경기에서 승리하고 싶다는 마음가짐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밖에도 기원전으로 시대를 돌리는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1896년에 발굴된 청동상과 작은 도상들, ‘아르카이크 시대에서 로마 시대까지 시대별로 그리스의 발전사를 살펴볼 수 있다.

 메테오라로 가는 도중 테르모필레(Thermophylae)’에 들렀다. ‘테르모 뜨거운’, 그리고 필레 입구라는 뜻으로 이 지역의 유황온천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그래선지 여행사는 이곳 노천온천에서의 족욕(足浴)을 그리스 여행 최고의 보너스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면 헛웃음부터 나온다. 우리네 동네 뒷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작은 개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화장실 등 탐방객들을 위한 편의시설 역시 눈에 띄지 않는다.

 물은 따뜻한데다 유황냄새까지 나는 걸로 보아 온천임은 분명하다. 물을 맞을 수 있도록 인공폭포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런 명당자리가 비어있을 리는 만무, 먼저 온 유럽의 젊은이들이 삼각팬티 하나만 걸친 채로 선점하고 있었다. 그리스인들 보다는 오가는 외국 나그네들이 더 많이 이용하는 편이란다.

 그런 외설스러움이 익숙하지 않는 우리네 아낙네들은 하류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좋다면서 희희낙락 했지만... 하나 더, 아낙네들은 족탕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온천을 하며 이끼를 떼서 몸에 바르는 그리스의 민간요법을 귀띔조차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인 노천 온천탕에서 자유롭게 온천욕을 한다. 온도가 40도쯤 되는 해수 온천이라는데, 기록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이 저 온천수로 상처를 치료했다고 전한다. 그래서일까? 여행에 지쳐가던 집사람이 손까지 흔들어가며 활기찬 반응을 보인다.

 온천 지역에는 스파 리조트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걸 좋아하지 않는 탓인지 운영을 중단했다. 그리고 지금은 난민 캠프로 이용되고 있었다.

 테르모필레는 그리스 북부에서 남부 지역으로 이동할 때 반드시 거쳐야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3차 페르시아전쟁 때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간 벌어진 전투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 전적지에 레오니다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창을 겨눈 레오니다스 왕이 적군을 향해 포효하는가 하면, 그 아래 기단에서는 300명의 스파르타 특공대가 용전분투하고 있다. 좌우로 보이는 조형물은 스파르타의 전사 상이지 싶다.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특공대는 이곳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에서 수십만 명의 페르시아 군에 맞서 마지막 한 명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싸우다 전멸했다. 적군을 막는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스파르타군의 임전무퇴 정신은 페르시아군에 공포를 심어주었고, 그리스 군에게는 자유를 향한 투혼을 일깨워 페르시아 군을 몰아내는 동력으로 작용하게 했다. 이 전투가 그리스 역사에서 영원한 전설이 되고, 스파르타 군에게는 불멸의 영예를 안겨준 이유일 것이다.

 또 다른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승리를 의미하는 날개가 한쪽만 달려있다. <스파르타 전사들이 전멸하는 패배를 당했지만 이들의 용맹스런 정신은 승리를 거둔 것 이상>임을 상징한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실감이 난다.

 3차 페르시아전쟁 당시 이곳은 서쪽에 경사가 70도에 달하는 험준한 산들이 벽처럼 서있었고 동쪽은 바다였다. 산과 바다 사이 평지는 100m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스파르타군 300명을 필두로 한 그리스 연합군 약 5000명은 이곳에서 페르시아군(역사가 헤로도토스는 100만 명이 쳐들어왔다고 적는다)을 막았다. 그런 불리함속에서도 첫날과 둘째 날의 전투는 페르시아군의 참패로 끝났다. 하지만 그리스인 중 배신자가 나타나면서 페르시아의 정예부대 1만이 샛길(산을 넘는)로 쳐들어왔고, 레오니다스는 자신과 스파르타 특공대 300명은 남아서 협로를 지키고 나머지 그리스군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후퇴시킨다. 그렇게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고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특공대는 모두 죽는다. 그 영웅적인 이야기는 영화 ‘300’으로 만들어졌고, 그들의 무용담은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다.

 에필로그(epilogue), 델피에는 아폴론 성역만 있는 게 아니다. 피티아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훈련장소로 사용되었던 김나시온(Gymnasion)’과 아테나 여신을 모시던 아테나 프로나이아(Athena Pronaia, 델피의 주신 아폴론 신전 앞에 있는 신전이라는 의미)’인데, 아폴론 성역에서 걸어서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하지만 난 탐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1시간으로는 아폴론성역(꼭대기에 있는 스타디온은 달리듯이 다녀왔는데도)과 고고학박물관을 둘러보기에도 빠듯했으니 어쩌겠는가. 평생 한번 다녀오기도 힘든 그리스인데, 보고 싶은 것을 못 보고 돌아서며 아쉬움 넘치는 원망을 여행사로 돌리며 델피를 떠난다.

진안고원길 4구간(섬진강 물길)

 

여행일 : ‘24. 2. 17()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성수면 일원

여행코스 : 성수면사무소반용재반용마을포동마을성수체련공원양화마을오암마을(거리/시간 : 12.8km, 실제는 12.98km 3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성수면사무소(진안군 성수면 외궁리)

순천·완주고속도로 상관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임실 방면으로 11km쯤 내려오다 병암삼거리(관촌면 덕천리)’에서 49번 지방도로 옮겨 8km쯤 들어오면 성수면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4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뜨락에 세워져 있다.

 이름(섬진강 물길)처럼 섬진강의 물길을 눈요깃거리 삼아 걷는 12.4km짜리 구간. 초반의 반용재와 중반의 가장골을 빼면 섬진강 본류와 지류(달길천)를 따라 걷게 된다. 난이도는 보통’. 코스의 길이가 짧지만 반용재의 가파른 오르막 구간을 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0 : 23. 남서쪽 방향의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관촌으로 이어지는 49번 지방도(관진로)이다.

 10 : 24. 80m쯤 걷다 성수파출소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농로를 겸한 임도를 따라 반용재골로 들어간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 섬진강변의 용포리 주민들이 성수면소재지인 외궁리로 갈 때 넘나들던 고갯마루이다. 그렇다고 왕래가 잦던 길은 아니었다고 한다. 용포리가 성수면보다 강 건너 임실군 관촌면에 속한 생활권이었기 때문이다.

 반용재로 올라가는 길. 용포리(반용·포동·산막) 주민들이 이용하던 숲길은 신작로가 뚫리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다 고원길을 내면서 골짜기를 에돌아 올라가는 숲길을 조성했다. 가파른 구간에는 통나무계단도 깔았다. 그런데 이게 길고 가팔라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덕분에 나그네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올라간다.

 그런 오르막이 10분이면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다음부터는 평탄한 숲길이 이어진다.

 10 : 36. 트레킹을 시작한지 14. 군도 1호선(가외반로)으로 올라선다. 핸드폰의 앱이 해발 335m를 찍고 있으니 10분여 동안 고도(高度) 75m나 높인 셈이다. 참고로 이 도로(郡道)는 반용마을과 포동마을을 거쳐 745번 지방도(관마로)로 연결된다.

 이정표(오암 12.0km/ 성수면사무소 0.8km)는 이곳이 인증 지점임을 알려준다. 그러니 자신의 얼굴과 이정표가 겹치게 사진을 찍어두도록 하자.

 이후 고원길은 도로를 따라 반용재(해발 348m)’를 넘는다. 성수면 외궁리(안평마을)와 용포리(반용마을)를 잇는 거리 1.2km, 높이 348m의 고개이다. 남북으로 흐르는 능선을 동서로 가르는데, 북쪽에는 성수면의 이름 유래가 된 성수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병풍바위를 지나 방미산에 이른다.

 반용재의 왼편(서쪽) 바로 아래로는 섬진강이 흐른다.

 세월은 결혼 상대마저도 변화시키는가 보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라때 시절. 배우자감은 이웃마을 처자 말고는 없었다. 그게 글로벌 시대를 맞아 동남아 여성으로 폭을 넓혔는가 싶었는데, 언제부턴가 북한여성으로 바뀌어 있다.

 이 구간도 역시 산자락이 온통 복분자 넝쿨로 가득 차 있었다. 오뉴월에 찾아와야 제격이겠다는 얘기다.

 10 : 43. 요것조것 기웃거리며 600m쯤 걷다보면 이정표가 이제 그만 오솔길로 들어가란다. ‘진안고원 길의 참맛을 다시 느껴보라는 모양이다.

 고원길 이정표는 다양한 정보를 전해준다. 구간 정보(오압 11.4km/ 성수면사무소 1.4km)를 기본에 깔고, 근처 주요 포인트에 대한 정보(포동마을 2.5km/ 원외궁마을 2.3km)를 보탰다. ‘야생동물 주의 안내는 팁이다.

▼ 탐방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가장자리 잡목을 깔끔이 제거해 임도처럼 널찍하게 만들어 놓았다거기다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내리막길이다.

 산자락을 빠져나오니 잘 지어진 고택 한 채가 얼굴을 내민다. 뜨락도 정성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했다. 이곳 반용마을은 성수산을 병풍삼은 것으로도 모자라 섬진강까지 앞마당에 두었다. 그러니 돈 많은 이들이 찾아들 만도 하겠다.

 10 : 51. 몇 걸음 더 걸어 도로(가외반로)로 올라선다. 고원길의 뭉툭한 방향표지판은 오른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십중팔구(十中八九)는 왼쪽으로 가고 있었다. 30m만 가면 반용교(고원길이 지난다)’가 나오는데 굳이 600m나 에돌아갈 필요가 없다면서.

 10 : 53. 도로를 따라 150m쯤 올라가다 마을표지석 앞에서 반용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용포리(龍浦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반용·포동·송촌) 중 하나로 진안군과 임실군 사이의 협곡에 기다란 형태로 놓여있다. 성수산을 베개 삼고, 섬돌 아래 섬진강을 둔 지형이다.

 탐방로는 마을을 관통한다. 예쁜 돌담길을 낀 고샅길이 가슴까지 설레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너무 호들갑떨지는 말자. ‘둘레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지역 주민이 낯선 나그네에게 그런 길을 열어주었고, 우린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생활리듬을 깨뜨리는 소음까지 발생시켜서야 되겠는가.

 소박한 골목길은 강변으로 이어진다. 강변으로 나오니 구중심처(九重深處)에서나 볼 법한 예쁜 고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아까 봤던 한옥이 양반집이었다면 소슬지붕까지 얹은 이건 사대부 가문에서나 지을 법한 형식이다.

 강변의 정자(盤龍亭)’. 주위를 야외박물관으로 꾸몄다고 한다. 빗돌까지 세워가며 자랑하지만 막상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설마 요 장승이 전부는 아니겠지? 아무튼 반용마을은 귀농귀촌 우수마을이라고 했다. 배산임수의 수려한 경관에다 마을을 가꾸려는 노력들이 더해져 그런 결과가 만들어졌지 않나 싶다. 원주민과 이주민의 화합이 높아 정월 대보름날에는 달집태우기 행사까지 성대하게 열린다고 했다.

 강변의 느티나무 거목 두 그루가 옛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옛날 저곳에는 사람만 건너다니던 낮은 다리(잠수교)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저 느티나무는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을 게고. 하지만 2000년 새 다리가 놓이면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작은 쉼터를 조성했다. 한때 나룻배(1970년대 잠수교가 놓이기 전까지는 나룻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까지 놓아두었으나 그것마저도 지금은 옛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11 : 00. 마을을 빠져나와 반용교로 섬진강을 건넌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를 마을을 에둘러오느라 10분이나 걸렸다.

 다리를 건너다 바라본 상류 쪽 풍경. 섬진강을 품은 반용마을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임을 알려준다. 아름다운 풍광만큼이나 주민들 간의 정 또한 돈독한 살기 좋은 마을이란다.

 반용교 아래에는 보()가 설치되어 있었다. 덕분에 반용마을 앞 강물은 일정한 수량을 유지한다. 하나 더. 저 보를 지난 섬진강 물길은 90도로 방향을 튼다. 앙칼진 산릉이 섬진강을 남쪽에서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다리 건너. 안내판은 반용(盤龍)’이란 지명의 유래를 적고 있었다. 풍수상 마을이 초중반사(草中盤蛇)의 낙원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초중반사란 야초·인삼·약초가 우거진 속에 뱀이 소반처럼 사리고 있는 형국을 이른다나? 초중반사의 명당에 뱀이 사리고 있으면 반룡(蟠龍)’이 된다. 이게 언제부턴가 반룡(盤龍)으로 변했나보다. ! 그 옆에는 섬진강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 두었다.

 11 : 05. ‘명산휴게실을 지나자마자 지방도를 벗어나 강변 둑길로 내려선다.

 고원길은 이제 섬진강 둑길을 따라간다. 강 건너에서는 감입곡류의 물줄기가 만들어놓은 깎아지른 기암절벽이 나그네와 함께 간다. ‘섬진강 물길이라는 이름값을 한다고나 할까? 아무튼 데미샘을 출발한 물줄기는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과 만나 수량을 늘린다. 백운면을 적시며 흐르던 강물은 마령면과 성수면을 지날 때까지 섬진강 최상류를 이룬다. 그러다 진안군 남부지역 산골오지를 지나 임실 땅으로 흘러가면서 어느 정도 강의 면모를 갖춘다.

 ! 봄이닷! 봄이 유독 늦게 찾아온다는 진안 땅이다. 그런데도 다른 곳에서는 구경조차 못해본 푸른 초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하긴 요 며칠, 언론은 남녘의 꽃소식을 연일 전해주고 있었다.

 포동마을로 가는 강변길 안쪽에는 경작을 기다리는 논이 자리한다. 그 속에 임마누엘 냉천수양관이 있다. 노인복지센터와 요양원까지 갖춘 큼지막한 시설이지만, 수양관 근처로 도로가 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부지를 사는가 하면, 선교비 마련을 위해 하느님이 장사를 시켰다는 등 받아들이기가 썩 편지 않는 종교시설이다.

 강 건너 비탈진 산자락에도 민가가 들어섰다. 맞다. 사람들은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아왔다. 그게 한집 또 한집 늘어나면서 마을을 이루었고, 그렇게 조상대대로 살아왔다. 그러니 강가 사람들에게 섬진강은 어머니 같은 존재다. 강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고,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거나 물놀이를 즐겼다.

 11 : 24. 그렇게 걷다보면 포동2에 이른다. 메인 도로나 마을을 잇는 우리가 익히 아는 교량이라기보다는, 강 건너 산자락에 만들어놓은 다랑이 논·밭에 일하러 다닐 때나 이용하는 것 같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가파른 절벽과 평평한 농경지가 대조를 이룬다. 강변 둑길은 계속해서 그 사이를 가른다. 그리고는 큰 원을 그리면서 포동교로 간다. 참고로 포동교는 성수면 용포리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흘러내려온 회초천이 섬진강에 합류되는 두물머리에 있다. 회초천을 보탠 섬진강은 포동교 아래서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임실군 관촌면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고원길 이정표(오암 8.3km/ 성수면사무소 4.5km)은 이제 그만 섬진강과 헤어지란다. 그러면서 포동마을로 인도한다. 동북쪽 좌포리에서 흘러온 섬진강은 반룡마을 앞에서 동쪽으로 휘감아 돌면서 꽤 넓은 충적지 들판을 만들어냈다. 포동마을은 그 들판의 안쪽 가장자리에 있다.

 11 : 27. 250m쯤 더 걸어 군도(1호선, 용포로)로 올라선다. 이어서 포동마을을 향해 왼쪽으로 간다. 참고로 이 길은 745번 지방도를 만난 다음 관촌면(임실군)으로 간다. 관촌(館村)’은 삼례·전주를 지나온 통영대로 옛길이 통과하는 길목으로 출장관원 등이 묵을 수 있는 관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1 : 29. 잠시 후 도착한 포동마을(이정표 : 오암 7.7km/ 성수면사무소 5.1km)’. 용포리(龍浦里)에 속한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큰 물가에 위치한 탓에 예전에는 나룻배로 건너다녀야만 했던 오지이다. 그래서 나루터라는 뜻을 가진 포동(浦洞)’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안내판은 그런 사연을 적었다. 면소재지와 멀리 떨어진데다 강과 산으로 가로막혀 교통이 매우 불편했단다. 반면에 강변으로 이어진 임실군 관촌면은 다니기가 수월했다나? 그래서 주민들은 학교도 관촌으로 갔고, 시장을 보기위해서도 관촌으로 갔다.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관촌이 생활권인 셈이다.

 마을회관 앞 광장. 포동마을은 그 역사만큼이나 큼지막했다. 맞다. 포동마을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 근처 유물산포지에서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발굴된바 있다.

 정자는 풍류정(風遊亭)’이란 현판을 달았다. 바람 솔솔 불어오는 섬진강변에서 풍치 있고 멋스럽게 놀아보라는 모양이다. 아무튼 난 이곳에서 15분을 머물다 갔다. 산악회 회장님의 실수로 버스에서 잘못 내려, 아직까지도 길을 헤매고 있는 집사람을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마을에는 카페와 식당까지 들어서 있었다. 샤워장까지 갖춘 물놀이장도 보인다. 맞다. 이 마을은 녹색농촌체험마을이라고 했다. ‘바람도 쉬어간다는 수식어까지 달았다. 그러니 저 정도의 부대시설쯤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을 주민의 시가 적힌 카페 외벽이 눈길을 끈다. <바람 따라 돌고 돌아 한참을 돌다가/ 바람도 쉬어가는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봄이면 강에는 물안개 피고... -이하 생략-> 읽는 것만으로도 마을 풍경이 그려지는 멋진 표현력이다.

 고원길은 고샅길을 누비다가 마을 뒤편으로 빠져나간다. 아까 반용마을에서도 얘기했듯이 주민들의 생활리듬을 깨뜨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이 뭣꼬? ‘기러기 조형물을 문설주에 매달아놓았다. 기러기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한 새다. 짝짓기를 한 암수는 한쪽이 죽어도 다른 기러기와 짝짓기를 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고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전통혼례 때 신랑이 기러기 인형을 주는 풍습이 있다. 이로보아 기러기가 쌍으로 걸린 저 집은 부부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외기러기가 걸린 옆집에서는 홀아비나 홀어미가 살고 있을 것이고...

 11 : 51. 마을 뒤. 포장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임도로 올라가려는데,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던 주민이 오른쪽으로 나있는 샛길(비닐하우스를 오른편에 끼고 도는 모양새이다)로 가라고 알려주신다. 길이 나뉘는 지점이지만 방향표지판이 없기에 응당 직진이겠거니 했다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11 : 52. 몇 걸음 더 걸어 농로(용포로)로 내려선다. 이어서 나지막한 고개 하나를 넘는다.

 길가 사과나무는 가지치기를 이미 끝냈다. 맞다. 이틀 후면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雨水).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나무는 꽃망울을 활짝 터뜨릴 것이다.

 11 : 59. 잠시 후 만난 삼거리(이정표 : 오암 7.1km/ 성수면사무소 5.7km). 성벽이라도 되는 양 곤포사일리지가 앞을 턱 가로막는다. 그리고는 방향을 틀어 왼쪽으로 가란다.

 12 : 03. 이후부터는 임도를 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기장골에 있는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난다. 이때 진안고원 길의 참모습이 느껴지는 풍경이 펼쳐진다. 둥글고 한가로운 길, 그래서 고원길에서는 경쟁이나 도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길을 걸으며 만나는 풍경을 오롯이 즐기기만 하면 된다.

 기장골 이정표(오암 6.6km/ 성수면사무소 6.2km)는 이곳이 두 번째 인증지점임을 알려준다.

 임도는 기장골 고갯마루를 향해 오름짓을 한다. 이때 잘 생긴 노송 한 그루가 힘내라며 격려의 손짓을 보내온다.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를 외치며...

 고개 너머. 고원길 이정표가 왼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집사람은 지름길이라며 오른쪽으로 간다. 다른 둘레길 도반들도 오른쪽으로 갔다면서 말이다. 고랭지채소밭의 밭두렁 끝에서 두 길이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밭두렁 끝에서 길이 사라지면서 숲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가시나무 넝쿨이 우거진 원시림을 헤쳐 나가며 찔리고 할퀴는 것으로도 모자라 따귀까지 맞아가며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규 탐방로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고원길은 이제 침목계단이 깔린 숲길을 따라 또 다른 임도로 간다.

 12 : 13. 임도를 따라 이번에는 이차선 도로인 용포로를 만나러 간다.

 12 : 20. ‘용포로(이정표 : 오암 5.6km/ 성수면사무소 7.2km)’로 내려선 다음 도로를 따라 북진한다. 이 길은 양산교차로에서 745번 지방도(관마로)와 만난다. 참고로 용포로 745번 지방도 포동교차로(성수면 용포리)에서 시작해 포동마을과 반용마을(강 건너)을 거친 다음 양산교차로(성수면 좌포리)에서 745번 지방도와 다시 만나는 2차선 도로이다.

 건너편에는 성수산(492.5m)이 있다. 그리고 성수산과 용포로 사이로 섬진강이 흐른다. 다시 만난 섬진강은 아까 지나온 반용마을과 포동마을 방향으로 흘러간다. 섬진강이 포동마을 뒷산을 가운데 두고 180도 휘돌아가는 모양새이다. 고원길로 풀어보면,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포동마을에서 고개를 넘어 (반용교에서 800m쯤 떨어진) 섬진강의 상류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섬진강변 아랫삼막들에서는 물놀이가 가능하다고 했다. 깊지 않은 곳에서는 물고기와 다슬기도 잡을 수 있단다. 매운탕에 소주를 곁들인 다음 날. 다슬기 해장국으로 속을 풀 수 있다니 이 아니 좋을 손가.

 왼쪽 산자락에는 마이산 풍혈냉천 캠핑장이 들어서 있었다. 데크 사이트로 조성된 오토캠핑장 36면과 글램핑 시설 5동이 들어서있는데, 공간이 넓은데다 소나무 사이마다 사이트가 배치되어 있어 그늘에서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단다.

 12 : 29. 벚나무 가로수의 호위를 받으며 걷다보면 어느덧 널따란 둔치에 이른다. 섬진강 물줄기가 휘돌면서 만들어놓은 충적지인데, 연습구장 2면과 덕 아웃, 백넷, 내외야 그물망과 펜스 등을 갖춘 전용야구장을 조성해놓았다. 지금 그곳에서는 젊은 동호인들이 훈련에 한창이다. 덕분에 우린 산골의 적막을 깨뜨리는 그들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12 : 32. ‘산막교로 섬진강을 건넌다. 초입의 이정표(오암 4.8km/ 성수면사무소 8.0km)가 양화마을까지 2.2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다리 아래로는 섬진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강의 최상류라 수량이 많지 않고 강폭도 넓지 않다. 이곳을 지난 섬진강은 수많은 산과 들, 그리고 마을을 돌고 돌면서 남해로 흘러간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이곳 진안을 시작으로 임실과 순창을 지나 전라남도 곡성과 구례 땅을 거친 다음, 경상남도 하동과 전라남도 광양을 가르면서 흐르다가 광양만에 닿는다.

 상류 쪽 풍경. 강 오른쪽 둔치로 탐방로가 나있다. 길가에는 둔치 특유의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었다. 지대가 낮으니 태풍이나 집중호우 때는 차량을 옮기라고 적었다. 물이 깊은데다 유속의 변동까지 심하니 물놀이도 삼가주란다.

 강 건너 산비탈은 기암절벽을 이뤘다. 산태극수태극을 이루며 흐르던 물줄기가 산줄기를 휘돌아나가면서 깎아 만든 절경이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감입곡류의 섬진강은 곳곳에 크고 작은 충적지 들판을 만들어놓았다. 그중 하나에 성수체련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1만평쯤 되는 부지에 잔디운동장과 족구·배구·농구·인라인스케이트장 등 야외시설과 샤워실·취수대·스트레칭 장소 등 부대시설을 갖추었다. 매년 개최되는 면민의 날을 비롯한 각종 대회가 이곳에서 열리는데, 작년에는 진안홍삼배 유소년축구대회로 열기가 달아오르기도 했단다.

 12 : 43. 체련공원의 끝(이정표 : 오암마을 4.1km/ 성수면사무소 8.7km). 고원길은 야외화장실 뒤로 간다. 그리고는 745번 지방도(관마로) ‘양산교의 교각 아래를 지난다. 참고로 관마로는 양산교 건너에서 관촌면을 향해 터널로 들어간다. 터널이 뚫리기 전 양화마을 사람들이 관촌에 가기위해서는 말궁구리재라는 고개를 넘어야만 했단다. 말이 고개를 넘다가 구르는 일이 하도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나? 이 지역이 그만큼 오지였다는 얘기가 되겠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둔치를 따른다. 745번 지방도의 왼쪽 아래로 길이 나있다. 그런 인연으로 집중호우 때는 지방도가 고원길이 되어준다.

 12 : 52. 지방도의 교각 아래를 다시 한 번 지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잠수교(이정표 : 오암 3.2km/ 성수면사무소 9.6km)가 놓여있다.

 잠수교는 장마철마다 물속에 잠겨버리는 반쪽짜리 다리다. 하지만 이게 풍경화로 변하면 온전한 다리보다도 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거기에 철 지난 갈대라도 강물과 어울릴라치면 그 경관을 훨씬 더 고와진다.

 사람들은 이 일대의 물줄기를 오원천(五院川)’이라 부른다. 섬진강 상류인 제룡강이 서천·신정천과 합류하여 성수면 좌포리와 용포리를 지나는 구간을 일컫는다. 섬진강은 이렇게 구간에 따라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오원이란 지명은 관촌면 철도역 근처에 있던 조선시대의 교통로를 관할하던 오원역(五院驛)에서 비롯됐다. 삼례도찰방(三禮道察訪)이 관할하던 호남평야의 12개 역들 가운데 하나이다.

 다리 건너에서 만난 또 다른 이정표(양화마을 350m/ 풍혈냉천 600m/ 포동마을 4.8km)가 짬을 좀 내면 진안의 또 다른 볼거리인 풍혈냉천을 볼 수 있다며 유혹한다. 하지만 다녀오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앞서 걷던 도반이 풍혈의 문이 닫혀있더라는 상황을 전화로 알려왔기 때문이다.

 들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그분이 보내준 사진으로 달래본다. 양화마을의 풍천도 밀양 얼음골처럼 냉장고 같은 찬바람이 솔솔 나온다고 했다. 풍혈(風穴)은 바깥 공기가 틈새 많은 돌 틈 사이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순간 단열 팽창하면서 급격히 열기를 빼앗겨 찬바람이 나오는 현상이다. 도반은 찬바람이 나오는 동굴이 사유지라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문을 닫아버린 것은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닐까 싶다.

 섭씨 3의 석간수가 솟아나는 냉천(冷泉)은 구경할 수 있었다나?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피서를 겸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12 : 56. 고원길은 745번 지방도를 횡단해 양화마을로 들어간다. 법정동리인 좌포리(佐浦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원좌·봉좌·내좌·산수동·양화·증자) 중 하나로, 섬진강을 뜨락에 두고 달길천을 늘상 옆구리에 끼고 살아가는 강촌마을이다. 강변 사람들은 섬진강과 함께 살아간다.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섬진강을 바라보며 기쁨을 나누고 슬픔을 달랜다. 강변 느티나무 아래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삶의 여유를 누리기도 한다.

 달길천의 둑길에는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보림(裨補林)이 분명해 보인다. 풍수지리상 길지 또는 명당의 조건에 부족할 경우 숲과 나무를 심어 좋은 마을을 만들고자 했던 조상들의 유산이다.

 수령이 210년이나 된다는 느티나무 보호수’. 매년 정월 초사흘에 당산제까지 지내주는 고목이다. 그래선지 나이만큼이나 품도 넓어 보인다. 그늘에 정자는 물론이고 마을회관까지 품었다.

 안내판은 예로부터 볕이 잘 들어 눈이 잘 녹는다고 해서 양화(陽化)’라는 지명을 얻었다는 마을의 유래를 적고 있었다. 마을의 자랑거리인 풍혈냉천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준다.

 양화마을(이정표 : 오암 2.7km/ 성수면사무소 10.1km)부터는 둑길을 따라 달길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섬진강 본류를 벗어나 지류로 들어선 셈이다. 참고로 달길천은 성수면 중길리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흐르다가 양화마을 앞에서 섬진강에 합류되는 7km 길이의 하천이다.

 아름다운 순례길 이정표는 이 근처에 대산종사의 탄생지가 있음을 알려준다. ‘대산은 원불교 세 번째 종법사(宗法師, 원불교 교단의 최고 지도자)인 김대거(金大擧, 1914-1998)의 법호이다. 2대인 정산종사에게서 바톤을 받아 교조인 소태산대종사의 법통을 이은 인물인데, 이곳 좌포리에서 태어나 11살 때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출가했다. 하나 더. 대산종사는 내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니 그가 남긴 게송에 반해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

 지류이어선지 강폭이 많이 좁아졌다. 수량도 뚝 줄어들었다. 하지만 강변이 보여주는 풍광은 여전히 고왔다.

 달길천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넓지 않은 농경지가 길게 펼쳐진다. 하천가에 자리한 농경지는 낮은 산들로 감싸여있다. 가는 길에 그런 풍경 속에 들어앉은 중길교(오암 1.5km/ 성수면사무소 11.3km)를 지나기도 한다.

 13 : 36. 4구간의 종점인 오암마을에 도착했다. 두 개의 하천(만덕산 오두재에서 흘러내린 중길천과 이 마재골에서 발원한 물줄기)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자리한 작고 소박한 자연부락이다. 고원길(5구간) 조형물은 마을 앞, 두물머리에 놓인 다리에 세워져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이 12.98km를 찍고 있으니 시간당 4km를 걸은 셈이다. 반용재라는 결코 쉽지 않은 고개를 넘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여행지 : 산토리니(Santorini), 피라(Fira) 마을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 여행의 단골 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고 너무도 많이 소개가 된 곳이라 다시 거론하기 새삼스러울 정도지만 그래도 그리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바다, 그리고 하늘의 색깔을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어느 곳, 어떤 시간에서도 경험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풍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산토리니는 대략 울릉도 크기만 한 본섬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그 섬 안에 피라와 이아, 카마리 등 여러 마을들이 산재해 있다.

 

 산토리니 여행 셋째 날은 피라(Fira) 마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하늘길로 오든, 바닷길로 오든 모든 산토리니 여행은 섬의 수도 피라(Fira) 마을에서 시작된다. 본섬의 서쪽, 화산섬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경치 좋은 이 마을에 산토리니 인구의 대다수가 살고 있다. 피라는 행정적으로 산토리니의 수도 역할을 한다. 하지만 크기는 별로, 해안선을 따라 절벽 위에 길게 형성된 마을은 걷는 길이가 1.3km밖에 되지 않는다.

 피라마을 투어도 단순한 편이다. 칼데라의 바위절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마을의 메인 골목을 따라 걸어보면 된다. 선사·고고학 박물관 등 이곳저곳 빠짐없이 둘러보다가, 시간이 남을 경우 절벽 아래에 있는 올드 포트까지 내려갔다 오면 된다.

 투어는 테토코풀루 광장(Theotokopoulos Main Square)’에서 시작된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상점 및 음식점들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네댓 시간 동안 마을 곳곳을 둘러본 다음 이곳으로 되돌아와 주차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광장에는 산토리니를 상징하는 당나귀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저 당나귀들은 아직도 산토리니의 중요한 일꾼 역할을 수행한단다. 믿기지 않겠지만, 가파른 절벽에 지그재그로 만들어진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는 저만한 교통수단이 없단다.

 옛 항구(Old Port)부터 가보기로 했다. 절벽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조금 힘들지만 어쩌겠는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니 한번쯤 둘러봐야 하지 않겠는가. 가는 길은 간단했다. 메인골목의 담벼락에 붙어있는 ’Old Port‘ 방향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시야가 툭 트이면서 비취빛 지중해가 펼쳐진다. 칼데라의 바위절벽 가장자리(경사진 부분)에 마을이 들어선 산토리니의 전형적인 풍경이라 하겠다.

 피라마을도 산토리니의 전형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절벽의 경사면에 기대어 계단식으로 지어진 집들은 하나같이 하얀색으로 빛나고, 그 맞은편에는 에게 해의 드넓은 바다가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색깔로 펼쳐진다. 단순한 색체들이 어울려서 만들어내는 경치는 담백하지만 그 앙상블은 여느 조합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다.

 발아래는 에게 해가 펼쳐진다. 화산폭발로 이곳 산토리니에서 갈려나갔다는 섬들과 함께. 오른쪽이 티라시아(Thirasia)’이고, 왼쪽은 분화구가 있는 니아 카르메니(Nea Kameni)’이다.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맨 왼쪽에 팔리아 카르메니(Palia Kameni)’가 있다. 꼼꼼히 살펴보면 꼬맹이 섬인 아스프로니시(Aspronisi)’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계단이 놓인 경사로를 따라 몇 걸음 더 걸으면 길고 긴 계단(Karavolades Stairs)이 시작된다. 계단의 연속이라서 무릎이 시원찮은 노약자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구간이다. 그래선지 입구에 당나귀를 타고 내려갈 수 있다는 안내판을 붙여놓았다. 편도에 ‘10유로란다.

 당나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당나귀는 항구와 절벽 위의 마을을 잇는 주요 이동수단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케이블카가 들어서면서 이젠 관광용으로 쓰임새가 바뀌었고, ‘동키 택시(donkey taxi)’로 불리는 산토리니의 명물이 됐다. 그렇다면 저곳은 ‘donkey station’쯤으로 부르면 되겠다. 상부의 택시 승강장?

 (Donkey Way To Fira)은 아찔한 바위절벽을 헤집으며 나있다. 가장자리로 다가가보면 발아래로 비취빛 지중해가 아스라이 펼쳐진다. 무섭다는 얘기다. 절벽 쪽으로 난간을 둘렀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계단을 놓았으나 가파르기는 매한가지. 벼랑은 이마저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일정한 간격으로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면서 겨우겨우 아래로 내려간다. ! 항구를 살펴본 다음 마을로 되돌아올 때 절대 걷지 말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당나귀들이 싸 놓은 똥들이 풍기는 지독한 냄새를 감수할 요량이 아니라면. 아무튼 지금까지 맡아 본 동물의 배설물 냄새 중 가장 심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숨결 속에 그 냄새가 들어있다고 생각해보라.

 오르내리는 여행객들의 버거움을 산토리니 당국도 알았나보다. 중간에 저런 쉼터를 만들어 두었다. 나무도 심어놓아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까지 만들어 주겠다.

 물품보관 창고로 여겨지는 건물도 눈에 띈다. 턱이 진 계단 길, 바닥은 돌과 회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 파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 누군가는 보수를 해야 할 것이고, 그 때마다 자재를 운반해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길의 보수는 동키 택시의 기사들이 하고 있는 모양이다. 택시를 옆에 세워둔 채 모르타르(mortar)를 만드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길을 걷는 내내 올드 포트(old port)’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였다. 아티니오스에 신항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중요한 상업 항구였지만 현재는 관광용 항구 역할만 수행한다.

 내려가는데도 땀이 줄줄 흐른다. 3월 하순이니 이른 봄이라 할 수 있겠건만 지중해의 날씨는 벌써 여름을 재촉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얼마를 내려갔을까 또 다른 동키 스테이션이 보인다. 600여 개나 된다는 계단길이 끝나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땀을 한바가지나 쏟고 나서야 도착한 항구, 이왕에 내려왔으니 가슴 가슴마다 산토리니의 추억을 담뿍 담아가란다. 저렴한 가격에 모시겠다나?

 낚시 투어도 진행되는 모양이다. 수년 전, 다른 여행지에 갔다가 참치 낚싯배를 탄 일이 있었다. 초장에 양주까지 넉넉히 준비해 갔지만 결과는 전무, 만일을 대비해 가져갔던 햄버거로 허기를 채우며 툴툴댔던 추억이 솔솔...

 작은 고깃배 대여섯 척이 전부인 포구는 한가롭기 그지없다. 수심이 얕아 큼지막한 배는 접근조차 할 수 없겠다. 관광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새로운 항구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wine shop은 문이 닫혀있다. 열렸다고 해도 살 생각은 없었지만...

 항구 주변은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항구를 감싸는 바위벼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데, 그 난간에 걸터앉은 건물 몇 채가 빈틈까지 메워준다. 하지만 기능을 잃어버린 항구처럼 자신의 몫을 다 했다는 듯 빈 건물로 남아있다. 하나 더, 저런 경관도 찬찬히 살펴볼 수가 없었다. 그늘진 곳은 모두 레스토랑이 차지했고, 거기다 호객을 하는 종업원들 때문에 오가는 것조차도 자유롭지 못했다.

 바다에는 크루즈 선박들이 정박해 있었다. 맞다. 산토리니는 최근 전 세계인들이 떠나고 싶은 유럽 여름휴양지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바 있다. 스페인의 이비사섬과 스페인 카나리아 섬 테네리페가 그 뒤를 잇는다. 조사기관인 CV빌라는 황금 일몰, 따뜻한 기온, 놀라운 풍경으로 유명한 산토리니가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명소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평까지 덧붙였었다.

 크루즈에서 내린 여행객들로 늘 붐비는 만큼, 항구 주변에 카페, 레스토랑, 상점 등이 늘어서 있다. 에게 해 푸른 바다나 칼데라 절벽을 눈에 담으며 맥주 한잔 하거나, 지중해식 음식 한 상을 즐겨보는 것도 좋을 듯.

 요트를 타고 화산 섬인 네아 카메니(Nea Kameni)와 팔레아 카메니(Palea Kameni) 등 인근 화산섬들을 돌아볼 수도 있다.

 절벽 위(마을)로 올라갈 때는 케이블카를 이용했다. 과거에는 카라볼라데스 계단(Karavolades Stairs)이 절벽 위로 올라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2년 케이블카가 놓이면서 선택에 자유가 주어졌다. 다만 6유로의 탑승료(편도)는 내야한다.

 대합실(Lower Station). 관광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분들의 정체는 대체 뭘까?

 케이블카는 단체로 움직이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캐빈에 타고 있는데도 우리가 마지막 캐빈에 오를 때까지 멈춘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다본 세상. 네아 카메니, 팔레아 카메니 섬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인다. 그게 또 크루즈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참고로 저 섬들은 산토리니의 화산지형을 고스란히 담아낸 곳으로 알려진다. 네아 카메니는 분화구까지 트레킹이 가능하고, 팔레아 카메니는 유황온천에서 헤엄을 칠 수도 있단다.

 눈앞에 펼쳐지는 피라마을은 이아(Oia) 마을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사실 여행자들에게 피라(Fira)는 낯선 편이다. 머릿속에 산토리니가 곧 이아(Oia)’라고 기억시켜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벼랑에 걸터앉은 하얀 마을, 좁은 골목 등 이아마을과 별간 다르지가 않다.

 티리시아(Nisos Thirasia)’ 섬도 눈에 들어온다. 본래는 산토리니 본 섬과 한몸이었는데, 수천 년 전 화산폭발로 갈라졌다고 전해진다. 그 오른쪽, 절벽에 매달려 있는 듯한 마을은 피로스테파니(Firostefani)’가 아닐까 싶다. 뷰포인트로 소문난 세 개의 종 교회(Three Bells of Fira iconic viewpoint)’를 옆에 끼고 있다는...

 상부 승강장(Upper Station)에서 내려 마을 투어에 들어간다. 메인 골목을 따라 끄트머리까지 간다. 클럽으로 흥청거리는 에리트루 스타부르 거리, 보석가게들이 즐비한 골드 스트리트, 고대 그리스의 공예품들을 판매하는 이파판티스 거리 등이 이방인의 발길을 유혹한다.(지명은 여행칼럼니스트인 서진님의 글에서 빌려왔다)

 피라마을도 교회가 참 많았다. 1990년대 말. 보고 일정에 쫓길 때마다 새벽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스름을 헤치며 차를 몰다가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십자가 불빛을 보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 교회를 믿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이곳 산토리니는 거짓말 좀 보태 열 집 건너 한 집이 교회라고 할 정도다. 그리스 국민의 95% 이상이 기독교인이라는 통계가 실감이 난다.

 산토리니의 골목길을 비좁다. 도로도 비슷한 형편이다. 아니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 대부분이 마찬가지라고 보면 되겠다. 애초에 자동차가 아닌 마차나 사람의 통행을 고려해 설계됐기 때문이다. 아무튼 굳이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그 골목들을 헤매는 게 피라마을 여행의 묘미다. 절벽에 빼곡히 늘어선 집과 그 골목사이를 걷다가, 흰 담벼락의 계단에 서서 아름다운 블루와 화이트의 조화를 감상한다.

 얼마쯤 걸었을까 길이 많이 넓어졌다. 오른쪽으로는 시야까지 열린다. 사진 찍기 딱 좋은 장소다. 끊임없이 눌러대는 카메라 셔터를 타고 산토리니의 다양한 풍경들이 프레임 속에 담긴다.

 산토리니의 일상. 엄마야 조급하건 말건 아이는 마냥 즐겁다. 저런 소소한 일상들이 모여 산토리니와 사랑에 빠지게 하지 않나 싶다. 거기에 신이 빚어낸 환상의 풍경이 더해지면서...

 아틀란티스 호텔. 아틀란티스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는 대륙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산토리니가 바로 그 사라진 대륙이라고 믿는다. 호텔의 이름을 아틀란티스로 삼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피라 마을은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는 새하얀 집이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에게 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바(Bar)나 카페, 레스토랑, 호텔이 들어섰다.

 그런데 테라스를 라운지 삼은 게 특이하다. 맞다. 어느 여행 작가는 그리스식 레스토랑인 타베르나도 절벽 사이에 테이블을 갖춰야 명당으로 꼽힌다고 했었다.

 피라의 가장 큰 특징은 집들이 하나같이 벼랑에 기대여 지어졌다는 점이다. 흰 테라스를 품은 집들이 벼랑 아래 계단을 따라 자리를 채운다. 어렵사리 담과 담을 비집고 골목도 생겨났다. 벽을 흰색으로 칠하고 창틀은 바다를 닮은 코발트색으로 칠했다. 그게 입소문을 타면서 이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 되었다.

 푸른 대문의 집들 사이로 미로처럼 나 있는 좁은 골목 길. ‘피라에서는 아랫집 지붕은 윗집 테라스가 된다. 사람들은 그 테라스에 누워 에게 해의 바람을 맞으며 일광욕을 즐긴다.

 마을을 벗어난 북쪽 끝, 집들은 없고 봉우리에 원통형 바위만 뽈록하니 솟아올랐다. 산토리니 최고의 전망대로 알려지는 스카로스 바위(Skaros Rock)’ 18세기까지 베네치안 귀족들이 거주하는 산토리니의 수도였다고 한다.

 큰길가에 박물관이 있다기에 찾아보기로 했다. 절벽의 가장자리를 벗어나자 길을 따라 전통식당인 타베르나(taverna)와 가게들이 몰려 있었다.

 박물관 앞의 큰길, 산토리니의 여유로움은 읽혀지지 않았다. 대형 슈퍼마켓과 버스·택시 터미널, 행정관서와 박물관 등 핵심시설들이 들어서 있는 길가 풍경은 산토리니라기 보다는 아테네의 변두리 어디쯤에 더 가까워 보였다. 덕분에 슬로시티를 연상해온 내 상념은 확 날아가 버렸다.

 큰길가에 선사 박물관(The Museum of Prehistoric)과 고고학 박물관(Archeological Museum)이 있었다. 선사 시대와 고대를 일부러 나누어서 박물관을 운영할 만큼 관련 유물과 자료가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대 화산폭발로 파괴된 청동기 시대의 도시인 아크로티리(Akrotiri)’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단다. 박물관 1층에는 주로 기원전 17세기의 도자기, 오브제 등이, 지하에는 아크로티리의 건물을 장식했던 벽화(프레스코화)를 전시하고 있다.

 초기 키클라데스 시대(BC 2700-2400)의 대리석 조각상들

 기원전 17세기 탁자

 초기 키클라데스 시대(BC 2700-2400) 청동 단검

 후기 키클라데스 시대(BC 17세기 초) 도자기 물병, 주전자 등

 황금으로 만든 염소. 아크로티리에서 발견된 유일한 황금 조각상이란다. 이로보아 화산 폭발 때 주민들이 고가품들을 들고 대피했을 것이라나?

 아크로티리 벽화.

 아크로티리 유적지 조감도. ‘아크로티리 유적 BC1650~1500년 사이에 일어난 화산 폭발로 인해 화산재와 진흙에 묻혔던 청동기시대 미노아문명의 유적이다. 1967년부터 발굴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유적을 통해 당시 산토리니 섬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크레타와 교류했고 2~3층의 건물에서 생활했다. 놀랍게도 상하수도 시설을 갖춘 도시였으며 수세식 변기가 있는 집도 발견됐다.

 점심은 큰길가에서 했다. 벼랑 위에 지어진 테라스 형 카페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경관이야 실컷 봤으니 오롯이 식사나 즐기자는 집사람의 주장을 따랐다. 대신 집사람의 입맛에 딱 맞는 연어스테이크에 해산물스파게티를 먹었다. 빈산토(Vinsanto)와 동키 맥주를 반주로 곁들였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