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49코스(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부안군청)

 

여 행 일 : ‘24. 4. 13()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하서면 및 부안읍 일원

여행코스 :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노계마을등용마을석하마을구암리 지석묘군분장마을장서마을대초마을매창공원서림공원부안군청(거리/시간 : 19.2km, 실제는 13.86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9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아홉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해랑길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새만금을 멀찍이 뒤로 밀어내며 동쪽 내륙으로 들어간다. 바다는커녕 간척지조차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부안의 명기를 기리는 매창공원과 서림공원, 구암리 지석묘군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들머리는 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18km쯤 내려오다 백련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이다. 서해랑길(부안 49코스) 안내도는 단지 맨 안쪽 월포마을 경로당 맞은편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다섯 번째 여정. 서해랑길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바닷가가 아닌 내륙의 평야지대를 걷는다. 평지를 걷지만 19.2km나 되는 길이가 부담스러웠던지 난이도는 별이 3(5개 중)로 분류된다.

 실제 출발은 ‘705번 지방도(변산로)’ 석하마을 버스정류장(부안군 하서면 석상리)’에서 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을 생략하는 대신, 허난설헌, 황진이와 함께 조선 3대 여성 문인으로 꼽히는 매창의 숨결을 조금 더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이정표(종점 13km/ 시점 6.2km)는 우리가 1/3이나 단축해서 걷게 될 것임을 알려준다. 너무 많이 줄어드는 게 아쉽지만, 그 시간에 더 많은 것을 가슴에 담을 수 있으니 억울해 할 일은 아니다.

 11 : 41. 석하마을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법정 동리인 석상리(石上里) 8개 행정부락(청일·반암·구암·용와·석상·석하·마전·운암) 중 하나로, ‘석하란 마을 뒷산에 있는 애기바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바위 인근에 있는 마을(‘돌마리 또는 돌마을’) 아래뜸이라고 해서 석하(石下)로 불린다는 것이다.

 11 : 48. 석하마을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리고는 또 다시 도로로 올라선다. 벚꽃으로 단장한 도로는 변산로에서 고인돌로로 이름표를 바꿔달았다. 부안의 명소 중 하나인 구암리 지석묘군으로 연결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들녘 너머에서 악어산(48.7m)’이 고개를 내민다. 뒤는 석불산(289.7m)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도로변에서 만난 만첩홍매화’. 매화인데 붉은 겹꽃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 후기의 원예가 유박(柳璞 : 1730-1737)은 화암수록(花庵隨錄)에서 매화는 비스듬히 뻗은 여윈 가지에서 성글게 나온 녹악(綠萼) 단엽백매(單葉白梅)를 최고로 치며 천엽(千葉)은 속된 티가 나므로 운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유박처럼 고매한 품격을 지니지 못한 내 눈에는 만첩홍매가 모든 매화 중에서 가장 예쁘게만 느껴진다.

 11 : 50. 잠시 후, 도로를 벗어나 석상(石上) 마을로 들어간다.(초입에 마을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석상리(石上里)의 또 다른 행정부락으로 돌마리 웃뜸 정도로 알아두면 되겠다.

 마을 입구에는 지석묘만큼이나 오래 묵어 보이는 팽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노거수(老巨樹)이니 다 같이 아껴주자는 안내문까지 달았다. 그런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이유가 뭘까?

 석상마을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구암마을로 간다. 석상리의 또 다른 행정부락으로 구암(龜巖)’이란 지명은 이 마을에 있는 고인돌에서 유래했다. 고인돌의 생김새가 거북이 등딱지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12 : 00  12 : 05. ‘구암리 지석묘군(사적 제103)’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고인돌 주변의 민가를 없애고 잔디를 깔아 고인돌 공원으로 조성했다. 너른 주차장은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갖추었다.

 지석묘(支石墓)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탁자처럼 생긴 북방식과 바둑판 모양인 남방식이 있는데, 이곳 구암리 지석묘는 받힘돌이 있는 남방식이라고 한다. 원래 13기가 있었지만 현재는 10기만 남아 옛 얘기를 전해준다.

 고인돌은 10기가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거북이 등딱지처럼 생긴 덮개돌(上石)을 여러 개의 고임돌(支石)이 받혀주는 모양새이다. 바둑판식 지석묘가 시대를 내려오면서 덮개돌 아래에 몇 개의 주상(柱狀) 또는 판상(板狀) 고임돌을 외연을 따라 세운 것으로, 그 자체가 무덤방(石室)의 역할을 한단다.

 요것은 영락없는 탁자다. 그래서일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곳에 고인돌 찻집을 차리고 싶다고 적었다. 하지만 동네 할머니들 눈에는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가을이면 고인돌 위에 고추를 널어놓았었다니 말이다.

 12 : 06. 도로(고인돌로)로 빠져나와 구암교 영은천(靈隱川)’을 건넌다. 내변산 입구 우슬재와 하서면 옥녀봉 분지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청호저수지 남쪽, 하서면 언독리와 행안면 삼간리 경계지점에서 주상천에 합류되는 하천이다. 하나 더. 다리건너 도화사거리에서는 직진이다. 하지만 지방도는 705번에서 736번으로 이름표를 바꿔달았다.

 상서초등학교는 잘 가꾸어진 공원을 연상시킨다. 교정에 힐링 숲길을 조성하고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의 동상과 함께 기린, 얼룩말 등의 조형물을 세워 자연학습 공간으로 꾸몄다.

 구암교에서 상서면으로 들어선 고인돌로는 면소재지를 향해 달려간다.

 왼쪽으로는 하서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구암리 지석묘군이 있게 한 근원일 것이다. 저런 평야지대가 있었기에 지석묘를 축조할 만한 세력이 웅거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오른쪽에는 도화(봉암)마을이 있다. 법정 동리인 통정리(通井里)를 구성하는 7개 행정부락(통정·성암·신성·도화·풍랑·수련) 중 하나로 부안의 너른 들녘이 품은 마을답지 않게 명덕산을 병풍삼아 오롯이 앉아있다.

 12 : 17. 버스정류장 앞 삼거리에서 고인돌로를 벗어난다. 그리고는 봉야로를 따라 분장(分章)’ 마을로 간다.(삼거리의 도로표지판은 장동 방향으로 적고 있었다) 법정 동리인 장동리(長東里)를 구성하는 3개 행정부락(장동·장서·분장) 중 하나이다.

 도로(봉야로)를 가운데 두고 통정리(왼쪽)와 장동리(오른쪽)가 나뉜다. 아래 사진은 통정리의 자연부락인 성암마을이다. 반대편에는 장동리 소속의 분장마을이 있다.

 12 : 26. (분장마을)버스정류장과 양곡보관창고를 차례로 지나면 수로(水路). 서해랑길은 이 물길을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수로의 둑을 따라간다.

 12 : 28. 잠시 후, 평야지대를 만나면서 수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들녘 가장자리를 따라 난 농로를 따라간다. 왼쪽이 구릉지인데 반해 오른편으로는 푸름으로 물든 들녘이 질펀하게 펼쳐진다.

 12 : 32. 그렇게 조금 더 걷자 작은 마을 하나가 반긴다. 하지만 마을은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농사철을 맞아 들일이라도 나간 모양이다. 덕분에 난 마을 이름도 알아보지 못한 채 장서마을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구릉지와 농경지를 양쪽에 낀 들길은 한참이나 더 계속된다.

 생과 사는 백지장 한 장 차이라고 했다. 그런데 저 민들레는 그 차이마저도 없애버렸다. 꽃과 홀씨가 한데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봄바람 불고 들녘에 아지랑이 아롱거리면, 길가에 무심하게 자라는 풀 한 포기도, 야생화 한 송이도 왠지 모르게 가슴을 흔든다. 그래서일까? 문득 박미경이 부른 발라드곡 민들레 홀씨 되어의 가사가 떠오른다. <-전략- 우리는 들길에 홀로 핀 이름 모를 꽃을 보면서 외로운 맘을 나누며 손에 손을 잡고 걸었지 후략->

 12 : 42. 10분 정도 더 걸었을까 이번에는 장서마을이 반긴다. 장동리(長東里)에 속한 자연부락이다.

 장동리의 옛 이름은 장다리(長橋里)’였다. 마을 옆 두포천(斗浦川)을 오가는 다리 이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주민들이 두포천을 건너기 위해 섶다리를 놓았는데, 큰비가 오거나 해일이 닥치면 이 섶다리가 부서져 숙명처럼 다시 만들어야 했고, 지명도 긴 다리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장다리라 불렀단다. 1935년 두포천 하구에 갑문이 설치되고 농경지가 안정되면서 마을이 확장되었고, 이때 서쪽으로 형성된 새로운 마을이 장서(長西)’로 불리게 된다. 장교가 장동(長東)’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12 : 44. 장서마을 앞에서 들녘으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농경지 사이로 난 들길을 따른다.

 좌우로 펼쳐지는 드넓은 들녘은 온통 푸름에 젖어있다. 인근 목장에서 기르는 초지일 것이다.

 들녘 곳곳에는 축사가 들어서 있었다. 최근에 지어진 듯 하나같이 최신식 시설을 갖추었다. 덕분에 곁을 스치듯 지나가는데도 분뇨 냄새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사료용 초지도 많지만 푸름의 대부분은 청보리 몫이다. 시선을 따라 초록빛으로 물든 청보리 물결이 가득 일렁인다. 5월에 수확하는 청보리는 4월에 한창 물이 올라 청록의 봄을 알려준다.(사진은 보리를 다치지 않으려고 고랑에서 찍었다)

 들녘이 넓어서인지 물을 대는 수로도 하천만큼이나 넓다. 물막이도 바닷가 간척지의 배수관문을 연상시킨다.

 12 : 57. ‘주상천(舟上川)’을 건넌다. 두포천(斗浦川) 또는 목포천(木浦川)으로도 불리는데, 상서면과 보안면의 경계를 이루는 호벌치 계곡에서 시작해 주산면·행안면·하서면을 지나 계화면(의복리) 돈지갑문에서 서해안 새만금으로 유입되는 길이 18.4km의 지방하천이다.

 대초양수장. 농경지에 물을 대려면 양수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상서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주상천을 건너면서 행안면에 바톤을 넘긴다. 눈앞에 펼쳐지는 행안면의 들녘은 무척 넓다. 하지만 막힘없이 펼쳐지면서 지평선을 만들어내던 새만금의 모습은 아니다. 좀 넓다 싶으면 옹기종기 마을이 들어앉았고, 그 너머 산자락에서 들녘은 끝나버린다.

 행안면에서의 첫 만남은 야룡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대초리(大草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대초·송호·송서·야룡) 중 하나로, 늦깎이 등단 시인으로 시선을 모은 왕정순(79) 할머니가 사는 고을이기도 하다. 2022 문해, 지금 나는 봄이다라는 시로 전라북도 도지사상을 받았고, 2023년에는 시 부문 전북문단 신인작품상을 받아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다.

 13 : 18. 창고로 여겨지는 건물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13 : 16). 이어서 만나게 되는 도로(순환북로)는 그냥 횡단해버린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농로를 탄다.

 13 : 21.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도로(봉야로)에서는 오른쪽으로 간다. 도로를 따라 부안 방향으로 간다고 보면 되겠다.

 13 : 23. ‘원일볼트라는 제조공장 앞에서 도로(봉야로)를 벗어나 왼쪽으로 들어간다. 대초마을로 들어가는 길인데, 초입의 주영목장 입간판을 참조하면 되겠다.

 13 : 26 - 13 : 41. 대초마을 동구 밖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작은 경기장에 운동기구, 거기다 정자까지 갖추었으니 도시 부럽지 않은 시설이다. 덕분에 우린 느긋하게 간식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13 : 43.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대초리(大草里)의 중심이랄 수 있는 대초마을에 이른다. 예로부터 대추나무가 많았다는 마을이다. 조촌(棗村) 혹은 대추멀이라고 불리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마을 크기와 발음 표기상의 편의를 감안 대추 대초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대초마을 경로당. 마을의 오랜 역사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엄청나게 굵은 팽나무가 건물을 감싸주고 있다. 서해랑길은 이 경로당 앞 골목으로 빠져나간다.

 들녘은 부지런한 농부들로 그득했다. 논에 물을 대고, 밭은 갈아둔다. 돌아오는 농번기를 대비하는 평화로운 농촌 충경이라 하겠다.

 13 : 50. 2차선 도로(행안중앙로)를 횡단하면 신월경로당에 이어 신월마을이 반긴다. 법정 동리인 신기리(新基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신월·청교·안기·계시) 중 하나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새터로 불리다가 신월(또는 신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3 : 56. 또 다른 2차선 도로(신기신월로)를 횡단하면 길은 재내마을로 이어진다. 법정 동리인 진동리(眞洞里) 6개 행정부락(남산·지석·행산·신목·순제·재내) 중 하나다. 이 마을은 시멘트 건물 위에 별도의 지붕을 올린 정자가 눈길을 끌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지붕이 위태위태한데도, 그게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고나 할까?

 서해랑길은 재내마을을 왼쪽으로 에두른 다음 작은 고개를 넘는다.

 14 : 03. 고개를 넘어 월륜길로 내려선다. 그곳에 1941년에 개교했다는 행안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도 부침의 세월을 겪었다고 한다. 학생 수가 줄어 한때 폐교 위기에 까지 몰렸으나 새로운 길을 모색해 이를 타개했다. 부안읍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유치했다나?

 14 : 10  14 : 32. 행안초교사거리(로터리)를 지나면서부터는 매창로를 따른다. 부안이 자랑하는 지명답게 도로도 4차선으로 바뀌어 있다. ! 로터리 부근 진동공원에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점심을 먼저 먹은 다음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라는 모양이다.

 14 : 45. 매창로를 따라 걷길 13. ‘매창공원(이정표 : 종점까지 3.2km)’에 이른다.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여류문장가로 유명한 부안의 명기 이매창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매창의 묘와 시비가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매창(李梅窓 : 1573-1610)은 조선 선조 때의 여류시인으로 이름은 계생 또는 향금이라 했으며, 자는 천향이고 호는 매창이다.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서녀(庶女)로 태어나 아버지한테 글을 배워 한시에 뛰어났으며 가무도 잘했는데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 또한 시조에도 능하여 그의 작품이라 전하는 시가 수십 편에 이르는데 그중 이화우는 이별을 노래한 으뜸 시로 꼽힌다.

 1592, 20살 무렵의 매창은 촌은 유희경(劉希慶 : 1545-1636)과 만나 사랑을 나누고, 평생의 연인이 된다. 이귀와 허균과도 깊은 교류를 했다고 한다. 갓 스무 살이 된 매창은 막 피어오른 꽃봉오리 같은 나이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홀로 남겨져 외로움과 그리움에 시달린다. 봄비처럼 흐느끼는 이화우(梨花雨)’  배나무 꽃비는 그런 매창의 처지를 읊지 않았을까 싶다.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며 잊혀져가는 사랑을 애태우는...<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그밖에도 억고인(憶故人), 증취객(贈醉客), 병중(病中) 등 매창의 여러 시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연인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규원(閨怨)’도 그중 하나다. 사랑하는 그 마음 바다처럼 깊은데 소식은 끊어지고 긴긴 밤에 애간장만 탄다나?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손가락이 마를 정도였을까. <애끓는  말로는 할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남아 세였고나/ 생각나는  그대도 알고프거던/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유희경과 매창은 28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인 사이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의병을 일으킨 유희경과 이별하게 되었고 매창이 37세로 죽을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유희경은 독보적인 예학과 임금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천민의 너울에서 빠져나온 행운아다. 그러나 유희경은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분상승으로 인한 양반들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매창의 간절한 연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마음까지 끊을 수 있겠는가. 매창에 대한 그리움을 오동우(梧桐雨)’란 시로 남긴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라는 허균(許筠 : 1569-1618)의 시도 눈에 띈다. 허균과 매창이 처음 만난 것은 1601 7월이었다. 허균이 조운(漕運)을 감독하기 위해 전라도로 내려가던 중, 비가 많이 내려 부안에 머물게 되었고, 이때 매창을 만나게 된다. 이후 10년간의 교류가 이어진다. 허균의 문집에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후세 문인들도 그녀를 기리고 있었다. ‘매창 뜸이란 시를 지은 가람 이병기(李秉岐 : 1891-1968)도 그중 하나이다. <-전략- 이화우(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 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그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나삼을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겼으리/ 그리던 운우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남았다>

 정비석(鄭飛石 : 1911-1991) 매창묘를 찾아서라는 글을 썼다. <-전략- 그대가 가슴 가득히 설움을 품고 죽어간 지 3 60여 년 후인 이 날에 60노부가 그대의 시를 사랑하고, 그대의 인품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에서 엄동설한에 천리 길을 멀다않고 찾아와 무덤 앞에 경건히 머리 수그리는 이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후략->

 유희경과의 슬픈 사랑을 남긴 채, 매창은 37세를 일기로 동고동락하던 거문고와 함께 잠들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 뜸이라고 부른다. 묘는 소박한 묘비와 상석이 석물의 전부였다. 그러나 알 만한 이들은 오석비신에 팔작지붕을 얹은 근사한 묘비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 그의 인품과 시를 사랑하는 선비와 풍류가에 의해 세워지고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 더. 정비석이 찾아왔을 때만 해도 이곳은 공동묘지였다. 부안군에서 다른 묘들을 이장하고 공원을 조성하면서 주민들의 뜻에 따라 매창의 묘만 남겨두었단다.

 공원은 복합 문화공간으로 꾸몄다. 매창의 묘와 시비 외에도 매창테마관, 습지공원, 어린이놀이터, 농구장, 운동기구 등이 들어서 있었다. 부안의 출향 인사들이 세운 부사(扶士)의 탑도 눈에 띈다.

 15 : 06. ‘매창테마관 2층의 한옥으로 지었다. 1층은 전시관이고 2층은 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기 휴일인 월요일을 빼고 매일 10시에 개관해 5시에 문을 닫는다. 하나 더. 사람들은 매창을 사랑의 화신으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트() 조형물을 배경삼아 사진부터 찍어두고 테마관으로 들어가 보자. 화사하게 핀 튜립이 당신의 사랑을 한껏 축복해줄 것이다.

 매창테마관의 현판, ‘매창화우상억제(梅窓花雨相憶齋)’ 매화꽃 핀 창가에 꽃비가 내릴 때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집이란 뜻으로 전북대학교 김병기 교수가 짓고 썼다고 한다.

 전시관은 4개의 주제로 나누었다. 먼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풍경에 그녀의 대표적 시문을 감상할 수 있게 했고, 이어 매창의 생애, 매창이 남긴 작품 감상과 매창집이 남긴 의미 등을 알아보는 순서로 꾸몄다. 맨 마지막엔 디지털 포토죤이 설치되어 있었다.

 만일 58편의 작품이 담긴 매창집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매창을 알 수도 없었겠지? 매창은 시재(詩才)가 특출하고 가무(歌舞)와 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여류 예술인으로 한시 수백 수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매창의 작품으로는 시조 1수와 58수의 한시가 매창집에 실려 있을 따름이다. 부안현의 아전들이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던 것들을 모아 개암사(開巖寺)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 후세에 전해진다. 3부를 간행했는데, 2부는 서울 간송미술관에 1부는 미국 모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단다.

 내가 좋아하는 매창의 시 춘사(春思, 봄날의 그리움)’가 적혀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유희경에 대한 그리움을 <삼월이라 동녘바람이 불어/ 곳곳마다 꽃이 져 흩날리네/ 상사곡 뜯으며 임 그리워 노래해도/ 강남으로 가신 임은 돌아오시질 않아라>로 읊는다. 나 같으면 단숨에 부안으로 달려왔을 텐데...

 테마관 뜨락에서 만난 글자 조형물. 매창을 낳은 고장답게 바람 부는 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파도치는 소리’, ‘새 우는 소리 등 부안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함께 들어 행복한 소리이자 사랑 그리고 사랑으로 표현했다.

 공원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아직도 새 맛을 퐁퐁 풍기는 각종 시설물들은 물론이고, 산책로에는 나무와 꽃들을 식재하고 곳곳에 조형물과 쉼터를 설치했다. 밤이 되면 조명이 켜져 운치 있는 야간 산책도 가능하단다. 그런 여건을 살려 매년 5월 이곳에서 부안 마실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15 : 18. 매창공원을 빠져나와 도로(오리정로)를 건너면 부안예술회관이다. 문화·예술 공연시설로 1층은 300명 수용의 다목적 강당과 전시실, 2층은 499석의 공연장과 회의실·연습실·분장실 그리고 3층은 조명실과 영사실로 구성되어 있다.

 15 : 23. 조금 더 진행해, ‘번영로를 가로지르면 이번에는 부안중학교가 반긴다. 이정표가 종점까지 1.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15 : 29. 부안중학교 뒤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상소산(上蘇山, 114.9m)’이 고개를 내민다. 조선시대 부안현의 진산으로 한국지명총람에는 삼국통일 당시 당나라 소정방이 진을 쳤었다고 수록되어 있다. 상소산(소정방이 오른 산)이란 지명과 어울리는 얘기이다. 하나 더. 저 산에는 부안현의 사묘 중 고을 수호신을 모시던 성황사가 있었다고 한다. ‘성황산(城隍山)’으로도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공원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초입의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저 가운데에 서면 천사로 변할 테니 최고의 포토죤이라 하겠다.

 15 : 30. 서해랑길은 서림공원(西林公園)으로 들어간다. 1848년 부안 현감으로 부임해 온 조연명에 의해 숲이 조성되었는데, 관아 주변의 성황산이 황폐한 것을 보고 동네 유지 33인으로 삼십삼수계(三十三修稧)’를 조직하여 나무를 심고 서림정이라는 정자도 건립했다. 이후 이필의 현감이 부임해 왔을 때 숲이 다시 황폐해져 있어 앞서의 를 다시 부활시켜 숲을 가꾸면서 오늘의 서림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서림(西林)이란 부안 관아의 서쪽에 있는 숲이라는 뜻이다.

 서림공원은 부안 현감이던 조연명(趙然明)과 이필의(李弼儀)가 나무를 심고 가꾼 데서 시작됐다. 반대편 산자락에 있는 임정유애비(林亭遺愛碑)에는 두 현감의 서림 숲 조성과 서림정을 건립하여 가꾼 것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관의 주도 하에 가꾸어진 서림공원은 2016년 산림청의 국가산림문화자산에 지정된바 있다.

 15 : 34. 조금 더 걷자 gpx트랙이 이제 그만 산책로(임도)를 벗어나란다. 그리고는 편백나무 숲속으로 인도한다. 수십 년은 족히 묵은 듯 어른의 몸통만큼이나 굵은 편백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는 멋진 구간이다. 울창한 숲속에는 누워서 쉴 수 있는 벤치까지 놓아 힐링의 공간으로 조성했다.

 15 : 39. 정상에는 팔각정이 지어져 있었다. 종합안내도에 아래 전망대로 표기된 곳인데, 조금이라도 더 낳은 조망을 보여주려는 듯 이층으로 올렸다.(내 사진이 역광이라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전망대에 오르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부안읍내는 물론이고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산하의 속살까지 샅샅이 보여준다.

 계화면 방향은 아예 막힘이 없다. 지도를 다시 그려야만 했다는 새만금의 드넓은 들녘은 물론이고, 그 너머에 있는 서해바다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15 : 44. 반대방향으로 가파르게 내려서면 다시 산책로를 만난다. 그런데 이게 또 만만찮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우람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길게 뻗어나가는 풍경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다. 포커스만 잘 맞추면 인생샷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도 있겠다.

 오른쪽 산자락에는 부안 향교가 들어앉았다. 1414(태종 14) 창건된 부안향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0(선조 33)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건하는 등 대대적인 확장을 해 오늘에 이른다.

 서림공원에도 매창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백운사에 걸어 올라가니/ 절은 흰구름 사이에 있네/ 스님이여 흰구름을 쓸지 말아요/ 마음 또한 흰구름과 함께 한가로운 것을...> 그런데 저 백운사는 대체 어디에 있는 절일까?

 시비 근처. 매창의 시처럼 예쁜 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동백꽃은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도 곱지만, 바닥에 떨어진 후에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동백꽃이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시인묵객이라면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선홍빛 피의 애처로움이란 이미지도 있다. 옛날 선비들에게는 후자가 주는 이미지가 더 강했던 모양이다. 귀양을 간 곳에 동백나무라도 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니 말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자신의 목이 댕강 떨어지는 것을 연상했기 때문이라나? 그렇다면 지금 난 선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시체처럼 누워있는 낙화(落花)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새색시의 붉은 볼처럼 고운 꽃들만 눈에 차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이 고장 출신인 백양촌 신근의 시비도 보인다. ‘생거부안(生居扶安)’을 예찬하는 시이다. <여기 서면/ 태고의 숨결이 강심에 흐려/ 어머니, 당신의 젖줄인 양 정겹습니다/ 푸른 설화가 물무늬로 천년을 누벼오는데/ 기슭마다 아롱지는 옛님의 가락/ 달빛 안고 하얀 눈물로 가슴 벅차 옵니다 후략->

 15 : 53. 능선 삼거리에서 오른쪽(왼쪽은 성황사와 윗전망대로 연결된다)으로 간다. 이정표는 트레킹이 종료되는 부안군청까지 0.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잠시 후 만난 혜원사(慧圓寺).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1924년 해인사 삼선암 승려 지승이 세웠다. 서외리(부안읍)에 인법당을 세우고 청일암이라 했다. 1970년 현 위치로 옮겨왔고 1999년에는 혜원사로 이름까지 바꿨다. 금당인 극락전을 위시해 인법당·산신각·무구원·마하문화원 등의 전각을 거느리고 있다.

 15 : 58. 서림정(西林亭)은 부안 현감이던 조연명이 33인으로 시계(詩契)를 결성하여 건립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 건물은 없어졌고 그 터에 근래에 새로 지었다. 노휴재(老休齋, 조선 후기의 경로당)에서 소장하고 있는 상소산도(上蘇山圖)’에 조선시대 당시의 서림정과 상소산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주변에는 옛 부안 현감들의 송덕비 등 부안지역과 관련한 각종 비석들이 서있다. 현감 조연명(趙然明)과 이필의(李弼儀) 임정유애(林亭遺愛) ()도 찾아볼 수 있다

 석암(石菴) 정형태(鄭㺾兌) 기적비 춘헌(春軒) 이영일(李永日) 송덕비도 눈에 띈다. 하지만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암각서(巖刻書)는 찾지를 못했다. 19세기 중엽-20세기 중엽 부안 지역의 시인 묵객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어, 지은 시나 글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사랑나무란다. 맞다. 100년 넘은 서어나무 두 그루가 한 몸처럼 붙어 있으니 연리목이 분명하다. 서로 다른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 한 몸이 되었다고 해서 연리지(連理枝)’라고도 부른다. 특히 한 쪽씩 날개를 가진 비익조(比翼鳥)’와 더불어 남녀가 만나 새로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사랑과 결혼, 화합 등의 상징이자 좋은 조짐으로 여긴다.

 16 : 12. 활 쏘는 사람들이 무예수련을 했다는 심고정(審固亭)’ 터를 지나면, 잠시 후 부안군청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이 13.86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매창의 숨결을 느껴보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서해랑길(부안 50코스) 안내도는 군청과 의회 건물을 잇는 공중통로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부안군청에서 만난 평화의 소녀상은 낯선 모습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여느 소녀상들과는 달리 서있는 모습이다. 머리는 단발하기 전의 긴 머리로, 침탈받기 전의 순수하고 맑고 밝은 소녀로 표현했다. 발은 맨발이다. 우리나라가 주권을 잃었다는 것과,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단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성공한 사람의 기준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나였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내 맘에 드는 나로 바뀐다. 나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하며, 지금 하는 일을 무엇보다 좋아하고,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인생이 풍요로워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난 성공한 사람이 분명하다. 나를 믿고 따라주는 집사람이 늘 곁에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서해랑길 48코스(변산해수욕장-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

 

여 행 일 : ‘24. 3. 23()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변산면 및 하서면 일원

여행코스 : 변산해수욕장(사랑의 낙조공원)대항리 패총새만금홍보관소광교차로비득마을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거리/시간 : 10.2km, 실제는 11.30km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8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여덟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변산반도의 북쪽해안과 새만금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들녘(옛날은 해안선이었다)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새만금간척박물관과 새만금홍보관, 신재생에너지테마파크가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하나 더, 초반(새만금홍보관까지)은 변산마실길의 1코스(조개미 패총길)와 겹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들머리는 사랑의 낙조공원(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25km쯤 내려오다 방포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변산해수욕장이다. ‘오토캠핑장 바로 앞에서 오른편으로 올라가면 사랑의 낙조공원 주차장이 나온다. 서해랑길(부안48코스) 안내도는 팔각정 옆에 세워놓았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다섯 번째 여정. 서해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변산반도의 북쪽 해안선을 따라간다. 아니 새만금간척사업으로 인해 절반은 들녘이 되어버렸다. 길이는 10.2km, 짧은 거리인데다 평탄하기까지 해서 난이도는 별이 2(5개 중)로 분류된다. 내가 보기에는 1개만으로도 충분했지만...

 11 : 00. 해안선에 잇대어 내놓은 2차선 도로(변산로)를 따라 동·북진(·北進)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탁 트인 서해바다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지만, 해무가 짙은 탓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1 : 07. 잠시 후, 왼쪽으로 나있는 오솔길로 내려간다. ‘군산대학교 해양연구센터 3층 건물을 바라보며 간다고 보면 된다.

 이정표(종점까지 9.2km) 48코스의 시점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1km로 적고 있다. 하지만 내 앱은 0.4km를 찍는다. 48코스 안내도를 사랑의 낙조공원에 설치해놓은 탓에 0.6km를 줄여서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지난 47코스 때 그만큼 더 걸을 수밖에 없었지만...

 11: 10. ‘군산대학교 해양연구센터 앞에는 대항리 패총(大項里 貝塚)’이 있었다. 패총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조개류를 잡아먹고 버린 껍질이 쌓여 생긴 조개무덤(조개무지)을 말한다. 조개무지 앞에는 안내판을 세워 발굴과정 및 출토된 유물을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한술 더 떠본다. 외국처럼 발굴 당시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 위에 강화유리를 덮어놓았더라면 조금 더 생생하게 패총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항리 패총은 1967년에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된다. 1981년에는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개무지의 크기는 사방이 10m 내외이며, 두께는 60cm라고 한다. 조개무지 속에서 옛사람들의 생활쓰레기인 뗀석기(打製石器) 5점과 빗살무늬토기 조각 2점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선사시대에 이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단다.

 패총 앞은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다. 규모는 조금 작지만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하겠다.

 해양연구센터에서 밭두렁을 타고 온 서해랑길은 야트막한 구릉(丘陵)을 넘는다. 황토 구릉지로 유명산 해제반도를 연상시키는 풍경이 펼쳐진다.

 대량의 양분을 함유한 황토는 농사에 유리하다고 알려진다. 황토로 재배한 작물은 수분이 많고 당도가 높아 맛이 더 좋다는 것이다. 고구마나 양파·마늘·감자 등의 뿌리작물이 특히 잘 자란다고 했다. 양파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저 밭이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11 : 15. 구릉지를 넘어 해무(海霧)가 짙은 바닷가로 내려선다. 해식애의 기암절벽이 눈길을 끈다는 해변이다. 하지만 오늘은 짙은 물안개가 그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 물안개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꿈속을 거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주니까 말이다.

 서해의 맑고 깨끗한 바닷물과 자욱한 물안개가 어우러져 더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해무는 바다에서 끼는 안개다. 따뜻한 해면의 공기가 찬 해면으로 이동할 때 해면 부근의 공기가 냉각되어 생기는 안개다. 하긴 그끄제가 봄을 나눈다는 춘분(春分)’이 아니었겠는가.

 도대체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인지가 구분이 안 된다. 사람들은 대개 망망대해를 보고 그런 표현을 쓴다. 하지만 오늘은 해무에 잠겨있는 저 바다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고운 해변을 안마당처럼 차지하고 있는 저 건물은 모나코 모텔이라고 했다. 코로나-19로 시끄럽던 시절, 홍해(이집트)의 휴양지인 후루가다에서 머물던 나는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갈지로 고민하고 있었다. 각설하고 당시 머물던 ‘Desert rose’라는 리조트의 시설들, 그중에서도 투숙객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용해변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는데, 한국에도 저런 숙박업소가 있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11 : 20. 서해랑길은 백사장 끝에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초입의 이정표가 변산마실길 1코스(조개미 패총길)의 종점인 새만금 간척박물관까지 2.6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탐방로는 병사들이 해안선 감시를 하며 거닐던 교통호를 따라 간다. 바닷가에서는 철조망이 따라온다. 1960-70년대 심심찮게 넘어오던 무장공비의 침투를 막기 위해 쳐놓은 시설물이다.

 덕분에 곳곳에서 옛 경비초소를 만난다. 1970년대 중반, 지역 예비사단에서 만기제대 절차를 밟다가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소식을 접했었다. 그렇듯 당시는 북한 특수공작원들에 대한 방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던 시절이었다. 쓰러져가는 저 시설물에서 흉흉했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본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 다시 바닷가. 하지만 이번에는 바닷가로 내려서지 않고 산책로를 따라간다.

 그렇다고 바닷가 풍경까지 놓치는 것은 아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멋진 풍광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이정목이 변산마실길 1코스인 조개미 패총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새만금간척박물관에서 변산해수욕장을 거쳐 송포항에 이르는 길이 5km의 둘레길이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야산길과 바닷길을 선택하여 걷을 수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11 : 27. ‘대항교차로(30번 국도에서 변산로로 내려오는 지점)’ 앞에서 변산로로 올라온 다음 잠시 도로를 따라간다.

 도로 아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바닷가 벼랑 위로 축대를 쌓고, 바다를 향해 난간을 덧대고 있다. 잔도(棧道)처럼 아슬아슬한 길을 새로 내려는 모양이다.

 변산로는 보도(步道)가 따로 없다. 때문에 여행자들은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도로에서 내려와 공사가 한창인 울퉁불퉁한 탐방로를 따라 걷는다.

 탐방로는 국도 30호선(70호선 병행)’의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이번뿐만이 아니다. 이번 구간(48코스)은 유난히도 자주 국도의 위아래를 횡단하면서 이어진다.

 탐방로는 교각 아래를 통과한 다음에도 한참을 더 들어간다.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간 합구마을(대항리)’ 앞바다를 한 바퀴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산촌과 어촌이 절며하게 어우러진 합구마을은 본래 백합 등 조개가 풍성한 마을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합구(蛤九)’라는 지명도 조개가 아홉 개라는 뜻이란다. 하지만 요즘은 어업의 비중이 많이 낮아졌다. 그러니 한적하고 운치 있는 바다를 낀 농촌마을 쯤으로 치부해두자.

 뒤돌아본 국도 30호선. ‘조개미교의 반원형 교각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합구마을의 동구 밖까지 밀려온 바닷물은 썰물 때가 되면 저 다리 아래를 지나 바다로 되돌아간다. 참고로 조개미는 합구마을의 옛 이름이다.

 11 : 37. 탐방로는 잠시 변산로로 올라선다. 그리고 100m쯤 걷다가 변산해수찜()’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정표(종점까지 7.2Km)가 새만금홍보관까지 1.3km가 남았음을 알려주는 지점이다. 참고로 해수찜이란 해수의 염도차를 이용해 몸속 노폐물을 배출하고, 해수에 녹아있는 각종 이로운 미네랄을 흡수하는 원리를 이용해 찜질을 하는 곳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또 다시 바닷가. 저 갯벌은 죽합이 지천이라고 했다. 죽합은 모양이 대나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맛조개라고도 불린다. 호주머니에 소금 한 주먹 갖고 가서 타원형의 구멍에 살짝 뿌리면 백합이 기어 나온단다. 삽이나 호미로 잽싸게 파서도 잡을 수 있단다. 하나 더. ‘개불이 먹고 싶으면 동그란 구멍을 파보라고 했다.

 이후부터는 해안가 벼랑 위로 난 오솔길을 따른다. 서해바다가 심심찮게 내다보이는 기본 좋은 구간이다.

 11 : 42. 전망 좋은 곳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이 근처에서 영화 변산이 촬영되기도 했단다. ‘고향이라고 해준 것도 없으면서 발목은 드럽게 잡네!’ 짝사랑 선미(김고은)의 꾐수에 낚여 고향으로 내려온 학수(박정민). 이준익 감독의 변산은 빡세지만 스웩 넘치고, 부끄럽지만 빛나는 청춘을 그린 영화이다.

 난간에 서면 시야가 뻥 뚫린다. 비안도와 두리도는 물론이고 날씨라도 좋으면 그 너머에 있는 고군산군도까지 조망된다고 했다. 하지만 해무가 짙어 눈에 들어오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계속해서 해안가 오솔길을 탄다. 옛날 병사들이 경계를 하면서 오가던 교통호가 세월의 무게를 못 견디고 걷기 나그네들의 탐방로로 변했다.

 심심찮게 시야가 열리는 이 구간도 코발트빛 서해바다를 마음껏 즐기며 걸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해무가 그런 호사를 앗아가 버렸다. 오솔길 아래의 기암괴석 해안을 눈에 담을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11 : 49. 그러다 올라선 공터는 운동장보다도 더 컸다. 그런데 중장비가 오가는 걸 보면 뭔가 새로운 변신을 위해 공사 중인가 보다. 맞다. kakaomap은 이곳을 새만금챌린지 테마파크로 적고 2026년에 준공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변산마실길 1코스의 명물인 꽃동산을 갈아엎고 있는 거나 아닐까? 봄이면 샤스타데이지의 순백 꽃물결이 일렁인다는 그 꽃동산말이다. 해질 무렵 서해낙조와 함께 즐기면 무릉도원에 온 듯한 황홀경을 느낄 수 있다고 했는데...

 공터의 막바지. 진행방향 저만큼에 새만금간척박물관이 놓여있다.

 옛말처럼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한가 보다. 공터를 빠져나오니 바닷가에 꽃동산 안내판이 나뒹굴고 있다. 주변에는 변산마실길과 변산애향숲 빗돌도 널브러져 있었다.

 11 : 55. ‘간척박물관을 코앞에 둔 지점. 바닷가로 내려가 역방향으로 걸어간다. 변산반도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 병풍바위를 찾아보기 위해서다. 아니 물안개로 뒤덮인 몽환적인 바닷가를 한 번 더 걸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보라, 물안개가 피어오른 저 풍경, 몽유도원도의 실경이 아니겠는가.

 두어 구비 모퉁이를 돌자 신비한 색깔의 바위가 탐방객들을 맞는다. 서로 마주선 두 바위가 찾아온 이들을 호위라도 하려는 듯 좌우로 도열해 있다. 그런데 검은색의 흔한 갯바위인 바다 쪽 바위와는 달리, 육지 쪽에 있는 바위는 색깔도 기이하고 모양도 예사롭지 않다. 높이 9-10여 미터에 길이가 60m쯤 될까? 바다를 향해 쏟아지는 폭포처럼 생겼는데, 그게 병풍으로 보인 사람들도 있었나 보다. 언제부턴가 병풍바위라는 애칭으로 불리어온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물안개는 신비로움을 넘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해준다.

 백사장에는 바람이 만들어놓은 물결무늬가 선명했다. 시간이 난다면 바다로 더 나가보는 것도 괜찮을 듯. 갯골 웅덩이에서 미쳐 빠져 나가지 못한 작은 생명들이 유영하는 광경이라도 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12 : 03. 새만금시설지구 초입에는 작은 포구가 들어서있다. 묵정마을의 어민들이 사용하는 시설인 듯한데, 꼬맹이 어선 몇 척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들은 평화의 사절단처럼 물때를 기다리며 숨을 고른다.

 12 : 05 - 12 : 20. 시설지구에서의 첫 만남은 새만금 간척박물관이다. 새만금과 우리나라의 간척뿐만 아니라 세계의 간척역사, 기술, 미래가치까지 재조명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2023 8, 3층 규모로 문을 열었는데, 3층에 마련된 상설 전시실을 중심으로 교육실, 체험실, 영상관, 수장고, 야외광장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또한 국내외 간척사를 배울 수 있는 전시물과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구비돼 있다.

 박물관 앞마당에는 여러 점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새만금을 바라보다’, ‘새만금 평화의 휴식’, ‘새만금 바람의 소리를 듣다’, ‘새만금 교육의 자리 등으로 주제를 표현하고 있으며 각각의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단다. 하지만 내 눈에는 아래 사진의 조형물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포토 죤으로 삼기 딱 좋은 조형물도 여럿이다.

 상설전시실은 바다·갯벌·사람, 세계 및 한국의 간척, 새만금의 혁신 등을 주제로 다양한 콘텐츠가 구성돼 있으며, 새만금의 발전과정을 담은 고지도와 각종 민속품 등 6000여 점의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관람은 간척의 과거·현재·미래를 차례로 보여주는 동선을 따라가면 된다.

 바닷일은 전통신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개양할미 당집(그림) 옆에는 용왕제 때 쓰는 다양한 깃발과 도구들도 전시하고 있었다. 참고로 바닷가에서는 띠배를 만들어 바닷물이 들어차면 먼 바다로 띄워 보내며 마을주민들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용왕제를 열곤 했다.

 소금도 바다와는 불가분의 관계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재원 중 일부를 염전에서 마련했단다. 그래선지 옆에다 옛날 전통방식으로 천일염을 채취하는 과정과 모습을 그림으로 재현해 놓았다.

 물안개와 조개잡이 삼매경인 아낙내들이 어우러지는 조합이 한 폭의 수묵과로 그려진다.

 12 : 22. 박물관을 빠져나오자 새만금방조제가 시작됨을 알리는 빗돌이 길손을 맞는다. 군산시 비응도동에서, 고군산군도의 신시도를 거쳐, 부안군(변산면) 대항리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이다. 길이는 33.9km, 2위인 네덜란드의 자위더르 방조제보다 1.4km 더 길다고 한다. 1991 11월 착공돼 2010 4 29 19년 만에 준공되었다.

 12 : 25  12 : 37.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새만금홍보관으로 간다. 한국농어촌공사(새만금사업단)에서 운영하는 홍보시설로 새만금 건설과 관련된 역사기록과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새만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다고 보면 되겠다.

 3층에 마련된 전망대에 오르면 새만금의 광활한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군산을 향해 길게 뻗어나가는 저 방조제는 바닥(평균)  290m(최대 535m)에 평균 높이(평균) 36m(최대 54m)라고 한다. 길이는 위에서 얘기한 대로 33.9km이다. 끝이 보일 리가 없다. 그래선지 시야가 닿지 않는 거리까지 관찰할 수 있도록 망원경까지 설치해 놓았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여의도의 140배나 되는 바다를 땅으로 만드는 거대한 사업이다. 우리나라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19년간의 새만금 방조제 축조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자연의 힘을 이기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와 세계적인 간척 기술로 마침내 새만금 간척 사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

 3층의 홍보관은 기획전시실·상설전시실·홍보영상관·전망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람은 전망대가 있는 3층에서 무장애(無障礙)의 동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서 관람하도록 했다.

 사업은 방조제와 간척지 조성이 마무리될 때까지 약 2 9,00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었으며,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환경오염 문제로 간척사업에 대한 찬반 논란이 빚어지면서 물막이 공사를 남겨둔 시점에서 공사가 2차례 중단되기도 했다.

 전시장에는 한국 간척기술의 발전사, 국토이용 상의 문제, 간척사업 추진현황, 수질개선 대책, 주요 철새도래지 등에 관란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새만금은 만경평야의 자와 김제평야의 자에 새롭게 확장한다는 뜻의 자를 덧붙여 만든 신조어다. 만경·김제 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 일구어 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새만금지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미니어처도 전시하고 있었다.

 12 : 37. 관람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정문에서 왼쪽으로 200m쯤 걸으면 홍보관교차로이다.

 새만금 간척지(정확히는 새만금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왼쪽 옆구리에 새만금간척지의 들녘을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왼쪽으로는 새만금 간척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맞다. 새만금간척사업은 측량할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을 새롭게 만들어냈다. 저 멀리 지평선은 그야말로 수평이다. 문득 영화에서 본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들녘이 떠오른다. 저런 광활함이면 말 타고 한없이 달려 말뚝 박고 내 땅이요를 외쳐볼 만하다. 참고로 새만금간척사업으로 군산시·김제시·부안군 공유수면의 401(토지 283, 담수호 118)가 육지로 바뀌었다고 했다. 이는 서울시 면적의 3분의 2(여의도 면적의 140)에 이르는 면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국토 면적도 10 140에서 10 541 0.4% 늘었단다.

 12 : 50 - 13 : 05, ‘묵정교차로에서 30번 국도의 새만금교 아래를 통과하면 직소천(直沼川)’을 만난다. 변산면 중계리에서 발원하여 진서면 석포리, 변산면 중계리를 지나 변산면 대항리에서 새만금 담수호로 흘러드는 20.6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직소천에 있는 아홉 곳의 절경을 봉래구곡(蓬萊九曲)’으로 부를 정도로 상류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 묵정교차로 잔디밭에서 간식을 먹느라 15분 정도 쉬었다.

 변산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변산교로 직소천을 건너면서 하서면(下西面)으로 들어간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변산로를 따른다. 자동차전용도로인 30번 국도의 보조용 도로쯤으로 보면 되겠다.

 도로변 소공원에서 명자나무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봄에 피는 꽃 중 가장 붉은 꽃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화려하지 않고 청순해 보여 아가씨나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꽃샘바람에 붉게 물든 아가씨의 얼굴색을 닮았다나? 꽃말도 수줍음이라고 한다.

 13 : 13. ‘소광교차로에서는 국도(변산바다로)를 횡단한다. 통행량이 많아서인지 횡단보도 표시는 물론이고. 교통섬에 교통신호등까지 설치되어 있다. 이정표(종점까지 4km)가 새만금홍보관에서 1.7km를 걸어왔음을 알려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횡단보도를 건너니 매향비가 반긴다. 매향비(埋香碑)는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해 바닷가에 향을 묻고 세우는 비()를 말한다. 국내 최상급 바지락 생산지였던 부안의 옛 해창(海倉) 갯벌에 그런 향을 묻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갯벌을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빗돌 뒤, 들녘의 초입에는 엄청나게 많은 장승이 늘어서 있었다. ! 이곳에서 해창갯벌 장승제가 열린다고 했다. 해창갯벌 및 새만금 이전의 모든 갯벌은 막혔지만 마지막 남은 수라갯벌. 여전히 40여 종의 멸종위기 생명들이 살아 있는 그곳을 보존하자고 외치는 환경단체들이 여는 행사다. 장승을 통해 자신들의 소망을 듣는다며 작년 여름에도 장승 8개를 추가로 세웠다는데, 그런 행사를 20년이나 해왔다니 저 정도 숫자는 능히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3 : 18. ‘잼버리 1란다. 실패의 대명사로 낙인찍혀버린 ‘2023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대회가 저 안쪽 들녘에서 열렸다는 얘기일 것이다. 2023.8.1-12(12일간) 열린 잼버리대회는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는 대혼돈의 잼버리가 되어버렸었다. 하지만 내 탓이요보다는 여야 정치권과 정부 부처, 전라북도 간의 책임 공방만 치열했었다. 그 현장이 바로 저 다리 건너에 있었던 모양이다.

 다리 건너에는 잼버리기반공사 철거작업 안내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시작 첫날부터 쏟아진 잼버리에 대한 비난은 전북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었다. 그 비난은 대회 장소를 잘못 고른 것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준비 부족에서 원인을 찾고 싶다. 기록적인 폭염이라는 자연재해도 문제였지만, 더러운 화장실과 곰팡이 핀 음식 등 주인의식은 눈꼽만큼도 없는 행사준비가 대혼돈을 만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준비만 철저했더라면 극한 상황을 극복하고 자립심을 높이는 스카우트 운동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장소가 또 이디 있겠는가.

 탐방로는 해창쉼터(13 : 26)’를 만나기도 한다. 옛 해창갯벌을 회상이라도 해라는 듯 공터 가장자리에 벤치 몇 개를 놓아두었다. 하지만 광활한 들녘이 무슨 볼게 있겠는가. 그냥 지나쳐버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30번 국도의 비득치교가 나타난다. 탐방로는 저 다리 아래(이정표 : 종점까지 3km)를 지나간다.

 변산반도에는 계절별로 주꾸미, 전어 등 다양한 해산물이 넘쳐난다. 그 가운데서도 청정갯벌에서 나온 백합과 바지락은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그 백합으로 만들어낸 백합죽은 변산이 자랑하는 최고의 음식으로 꼽힌다. 부안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은 백합죽은 인근 식당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데, 백합 조갯살을 잘게 썰어 넣고 약간의 참기름과 깨소금만으로 간을 해 끓여내기 때문에 백합 고유의 담백한 풍미가 일품이다.

 계속해서 변산로를 따른다. 그저 30번 국도를 오른편에 끼고 가다가, 왼편으로 바꿔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13 : 34. 백련리(白蓮里)의 자연부락인 비득치 마을은 자자손손 바다를 생업으로 살아온 어촌이다. 부안 출신 김민성 시인이 <전략- 확 짠 내가 스며오는 속에/ ‘오오매 으쩐 일이데여!’ 반가워하며/ 내 손을 덥썩 잡는 새포댁의 손/ 소당깨만 한 까칠까칠한 손 -후략>이라며 읊던 새포댁의 손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동향의 김교서 시인은 비득치에 가면이란 시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새만금방조제가 놓이면서 바닷가 마을이 아닌 변산 밑의 산골마을로 변해버렸다.

 잼버리 행사장의 시설물들을 철거하고 있는 듯 들녘에는 중장비가 오가고 있었다. 방조제가 놓이기 전만 해도 저곳은 갯벌이었다. 칠산바다 물고기들이 산란하러 모여들고, 질 좋은 백합과 바지락이 지천이었단다. 멀리 남반구 뉴질랜드에서 북반구 툰드라까지 약 3Km를 오가는 도요물떼새 등 철새의 휴게소이기도 했다. 법정 보호종만 해도 40여 종에 이르렀다나?

 13 : 44. 나지막한 언덕을 넘자 바람 모퉁이가 나오는데, ‘야방 모퉁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야방은 주변 지역을 훤히 잘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이라서, 임진왜란 때 밤에 야방을 섰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런 특징을 살리려는 듯 잼버리 야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잼버리 전망대를 지어놓았다. 다목적 광장, 팔각정, 전망대, 주차장, 안내센터, 화장실, 조형물 등이 설치돼 있다. 하지만 자동차전용도로가 중간에 놓여있어 가볼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대회가 실패로 끝나서인지 펄럭이고 있어야 할 만국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국기를 보며 나라 이름을 알아맞히는 재미가 쏠쏠한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문득 유럽 연수 때 각국을 돌아다니며 삼색으로 된 국기들을 대비해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프랑스·이탈리아·아일랜드·벨기에 등은 세로 삼색기인데 색깔만 다르다. 독일·네덜란드·오스트리아·헝가리 등 가로 삼색기인 나라는 더 많다.

 13 : 48. 잠시 후 백련마을(어촌계 회관)’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백련리(白蓮里) 9개 행정부락(삼산·금광·노계·금산·월포·신촌·문수·백련·대광·비득·소광) 중 하나로, ‘백련이라 지명은 변산의 의상봉과 와우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문수동 계곡 아래에서 못을 이루는데, 그 못에서 하얀 연꽃이 피어났다는 데서 유래했다.

 버스정류장은 광고판을 겸하고 있었다. ‘부안 정명 600주년(2016)’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선정한 9가지 볼거리·살거리·먹거리를 부안 9()·9()·9()’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는다.

 13 : 56. 요것조것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풍력발전기가 고개를 내밀면서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에 이르렀음을 알린다.

 테마파크 입구의 보리밭. 아직은 키가 무릎에도 못 미치고 있다. 하지만 달포만 더 있으면 싱그러운 빛깔로 일렁이는 보리의 군무를 보게 될 것이다. 보릿대가 살랑댈 때마다 풋내음이 퍼지고, 쏟아지는 봄볕 튕겨내며 싱그러운 빛깔로 반짝이는 어느 봄날.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아니한가.

 13 : 59. 테마파크 입구 삼거리. 이정표(종점까지 1km)가 함께 걸어온 변산로와 헤어지라고 한다. 이정표의 지시대로 신재생에너지로로 들어가자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가 반긴다. 테마 체험단지, 실증 연구단지, 산업단지가 함께 입주해 있어 연구개발에서 생산, 교육, 홍보까지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전국 최초의 신재생에너지 복합단지다. 참고로 신재생에너지는 재생에너지와 신에너지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재생에너지는 햇빛··바람·생물유기체 등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이르고, 신에너지는 연료전지·수소에너지 등 기존의 화석연료를 변환시켜 이용하는 에너지를 말한다. 하나 더. 신재생에너지의 특징은 환경 친화성과 비 고갈성이다. 원자력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두다.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 2009년 공사를 시작해 2011년 완공했다. 중심 시설인 테마체험관(위 사진의 오른쪽 건물)’은 즐기면서 학습할 수 있는 에듀테인먼트 시설로 8개 분야(태양열·태양광발전·바이오매스·풍력·소수력·지열·해양에너지·폐기물에너지)의 재생에너지와 3개 분야(연료전지·석탄액화가스화·수소에너지)의 신에너지 및 그린하우스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난해한 에너지의 원리도 놀면서 익히면 더 즐거워진다나? 쓰레기나 돼지똥, 소똥이 전기가 된다면 어린이들이 믿겠는가. 그런 에너지의 변화를 말로 설명해봤자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재생에너지·수력·화력·태양열 등 머리로만 이해하던 에너지의 원리를 만지고, 움직이고, 게임하면서 알아차리게 해 준다고 했다. 알아두면 좋을 지식들을 재미있는 놀이에 담아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단다.

 14 : 15. 테마 체험단지와 실증 연구단지를 지나 산업단지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코너에 월포마을 경로당이 들어서 있는 사거리이다.

 서해랑길(부안 49코스) 안내도는 경로당의 맞은편, 도로 건너에 세워져 있다. 오늘은 3시간을 걸었다. 앱에 11.30km가 찍혀 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새만금 박물관과 홍보관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나 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그것도 시점에서 종점까지 풀코스로 말이다. 코스가 짧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집사람의 건강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네 소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건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다른 소원이 뭐냐고 또 다시 물으신다면 난 건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하시면 난 또다시 건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그 건강의 대상은 내가 아닌 내 집사람이라고 공손히, 그러나 또렷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서해랑길 47코스(격포항  변산해수욕장)

 

여 행 일 : ‘24. 3. 9()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원

여행코스 : 격포항(금정모텔 앞)채석강격포해수욕장수성당적벽강하섬전망대성천항고사포해수욕장송포항변산해수욕장 사랑의 낙조공원’(거리/시간 : 13.9km, 실제는 15.64km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7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일곱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부안이 자랑하는 지질명소인 적벽강과 채석강이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변산마실길(2·3코스)과 겹친다고 해서 마실길 위의 세계지질공원으로도 불린다.

 

 들머리는 격포항(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내려오다 종암교차로(변산면 마포리)에서 빠져나와 오른쪽 격포로로 들어오면 잠시 후 격포항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부안47코스) 안내도는 닭이봉전망대의 입구 근처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네 번째 여정. 서해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간다. 길이는 13.9km, 비교적 짧은 거리지만 산길을 연상시키는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되기 때문에 결코 쉽다고 볼 수는 없다. 난이도가 별이 3(5개 중)로 분류된 이유일 것이다.

 10 : 41. 탐방로는 2차선 도로인 방파제길을 따라 북쪽으로 간다. 전망대가 있는 닭이봉(鷄峰. 85m)’을 오른쪽으로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나는 반대 방향인 격포항 쪽을 선택했다. 물 때(썰물)가 맞은 덕분에 세계적 지질명소인 채석강을 둘러볼 수 있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10 : 44. 채석강으로 가는 길. 왼쪽은 격포항이다. 격포(格浦)는 일찍이 수군(水軍)의 요새지로서 별장이나 첨사가 주둔했다. 조선시대는 전라우수영 관할 격포진이 있었다. 지금은 서해안권의 대표 국가어항으로 개발되어 있어 다양한 수산물을 맛볼 수 있다. 청정해역을 품고 있어 봄 주꾸미, 가을 전어를 비롯해 갑오징어, 꽃게, 백합, 바지락 등 사시사철 다양한 수산물들을 만날 수 있는 풍요로운 항구다.

 채석강(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3)으로 향한다. 다리를 건너면 방파제 위에서 자그마한 공원을 만난다. ‘채석강 갤러리라는데, 부안군에서 석재로 만든 각종 조형물들로 예쁘게 꾸며놓았다. 다양한 대리석 작품들에 채석강과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풍광이 담겨 있다고 보면 되겠다.

 격포항 종합안내 변산팔경 등의 관광홍보판과 함께 어항이용안전수칙 등의 안전에 대한 안내판도 눈에 띈다. 채석강을 구경할 때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의미인 모양이다.

 10 : 47. 방파제 옆으로 난 계단을 내려가면 채석강(彩石江)이 모습을 드러낸다. 20m 높이의 해안절벽은 중생대 백악기( 7천만 년 전)에 형성된 퇴적암이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부서져, 책 수십만 권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 같은 독특한 지형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수북하게 쌓아 놓은 시루떡 같다고도 한다니 보는 이의 생각에 따라서 그 형상도 달리 나타나는가 보다. 참고로 원래의 채석강은 강물에 배를 띄우고 놀던 중국 시인 이태백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의 강이다. 이태백이 놀던 채석강에 견줄 만큼 아름답다고 해서 그 이름을 차용했다고 한다. 아무튼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이태백처럼 술 한 잔 기울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침식에 의해 층을 이룬 절벽 아래로 편마암층이 닳고 닳아 벼루처럼 반들반들하고 닭이봉 아래의 층암절벽은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바위절벽을 움푹 파고 들어간 해식동굴에서 만나는 해넘이도 장관이란다. 하지만 이는 시간을 잘 맞추어야만 볼 수 있으니 참조한다.

 해식동굴은 인생샷을 건져보려는 이들로 항상 붐빈다. 해식동굴 안에 들어가 바다 쪽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명암 대비가 확실한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해식지형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서 눈길을 끈다. 해식절벽이 저런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이곳 채석강은 '연인과 함께 가면 사랑이 깨진다'는 오래된 속설이 있다고 한다. ‘돌 깨는 작업장인 채석장(採石場)’과 소리()가 같아서였을 것이다. ‘채석장 돌이 깨지듯 사랑이 깨진다.’고 여긴 게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70~80년대 만 해도 이곳은 사랑이 무르익는 곳이었다. 이곳에 놀러왔던 연인들이 아름다운 경관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집으로 돌아갈 차편을 놓쳐버리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귀가를 못한 젊은 남녀들이 따로 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상상에 맡기기로 하겠다. 하여간 그로 인해 결혼까지 간 커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11 : 02. 파도가 일렁이는 절벽 앞에 서면 켜켜이 쌓인 세월과 자연의 신비감이 더해진다. 해안가 바닥은 끝없는 바위멍석을 깔아놓은 듯하다. 바위가 거북 등껍질처럼 갈라진 데다 높낮이 차가 있어 발 디딜 곳을 확인하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렇게 1.5km쯤 되는 암반지대를 진행하면 격포해수욕장이다. 하지만 난 오른편 나무계단으로 오른다. ‘서해랑길과 만나기 위해서이다.

 11 : 06. 호텔과 음식점들이 들어서있는 골목을 지나 격포해수욕장으로 내려선다. 해수욕보다는 오히려 채석강과 서해안의 일몰을 보기 위해 찾는 이들이 많은 곳인데, 500m 길이의 백사장이 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고 물이 맑으며, 경사가 완만해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 딱 좋은 여건을 갖고 있다.

 해수욕장 뒤편으로 호텔, 리조트, 펜션, 캠핑장, 음식점, 카페, 수산시장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불편함 없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늘이 편치 않은 빈약한 배후 숲은 단점이라 하겠다.

 11 : 09. 백사장을 지나 반대편 갯바위에 오르면 인어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노을공주로 불리는 인어인데 걸쭉한 얼굴이 공주보다는 왕비에 가깝다. 이 인어상은 31년 전, 격포 앞바다의 대 참사(292명이 사망한 서해페리호 침몰사고)를 겪은 후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나? 하나 더. 이 인어상은 격포 앞바다의 석양이 진홍빛으로 물들면 은빛 비늘을 자랑하며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도 갖고 있단다.

 그 위에는 해넘이 채화대가 있다. 1999 12 31, 새천년을 맞이하는 국가행사를 하면서 마지막 햇빛으로 해넘이 성화에 불을 붙였다는 곳이다. 이 성화는 다음 날 일출 행사에서 얻은 성화와 합쳐진 뒤 새천년 영원의 불 보관함에 간직되어오고 있으며, 각종 대회의 성화에 불씨로 제공되고 있단다. 참고로 영원의 불 보관함은 포항 호미곶의 상생의 손 옆에 있다.

 바다 건너에는 고슴도치를 닮았다는 위도(蝟島)’가 있다. 고운 모래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과 빼어난 해안풍경 등 천혜의 경관을 갖고 있는 섬으로, 허균(許筠) 홍길동전에서 꿈꾼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진다. 그 앞에 떠있는 꼬맹이 섬 임수도는 심청이가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몸을 던진 임당수로 구전되는 곳이다.

 11 : 16. 채화대에서 빠져나와 ‘SONO Belle Hotel & Resort’ 옆으로 난 소로를 따르면 2차선 도로인 변산해변로(이하 변산 해안도로’)’에 이른다. 서해랑길은 이 도로를 따라 한참을 간다. 하지만 보도가 따로 나있어 오가는 차량을 무서워 할 필요는 없다.

 11 : 21. 400m쯤 걸었을까 이정표(종점 12.1km/ 시점 1.8km)가 수성당까지 0.6km가 남았다며 왼쪽으로 난 소로(죽막길)로 들어가란다. ‘변산반도 생태탐방원의 정문 앞 삼거리이다.

 11 : 25. 조금 더 걸으면 서해생명자원센터(한국수산자원공단)에 이어 죽막마을이 나온다. 서해랑길은 마을 앞 개천가를 따라 맞은편 언덕으로 올라간다.

 언덕에서 만난 격포리 후박나무 군락(해안가 200m의 지정구역 안에 132그루가 자란다)’. 안내판은 이 숲이 천연기념물(123)로 지정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이 지역이 후박나무의 북방한계선이라서 식물분포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나? 그나저나 후박(厚朴)하다는 인정이 두텁고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이름대로 후박나무는 후박한 나무이다. 약재, 목재, 염색재로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다 내준다.

 후박나무군락지 옆 너른 공터는 텅 비어 있었다. 아니 뭔가를 심으려는 듯 밭갈이를 해놓았다. 봄에는 유채, 가을에는 코스모스를 식재한다고 했으니 유채 씨라도 뿌리려나 보다.

 11 : 29. 공터를 가로지르면 전북 유형문화재 제58호인 수성당이다. ‘죽막동 유적이라는 이름의 사적(541)으로도 보호받고 있는데, 이 일대에서 선사시대 이래로 바다에 제사를 지낸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란다.

 수성당(水聖堂)은 서해를 다스리는 개양할미와 그의 딸 여덟 자매를 모신 제당으로 조선 순조 1(1801)에 처음 세웠다. 지금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참고로 개양할미는 수성당 옆의 여울굴에서 나와 딸 여덟 명을 낳은 뒤 일곱 딸은 각 도에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깊이를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수성당은 아홉 여신이 좌정해 있다 하여 구낭사라고도 한다. 개양할미는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하여 어부를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한다는 바다의 신이다. 때문에 이 지역 어민들은 개양할미를 정성껏 모셔왔다. 요즘도 정월 열나흘 날에 계양할미에게 치성을 드리는 수성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풍어와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 공동제사이다.

 수성당 앞에서의 조망. 아까 채화대에서 바라보던 풍경과 달라진 게 없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일몰도 변산팔경의 으뜸인 격포낙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육당 최남선이 심춘순례에서 조선의 빼어난 풍광 10경으로 뽑은 그 변산 낙조말이다.

 수성당을 나오면 산책로는 시누대 숲길로 이어진다.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웃자란 시누대가 울창한 숲을 이루는데, 그 숲속으로 터널형의 산책로가 굽이굽이 휘돌아가며 나있다.

 전망 좋은 곳에는 포토죤까지 만들어놓았다. 온 서해가 다 보일 정도로 막힘이 없는데, 이를 배경삼아 사진이라도 찍으라는 듯 액자 조형물을 세워두었다.

 11 : 39. 시누대 숲을 빠져나오면 길은 적벽강(赤壁江)’으로 이어진다. 채석강과 더불어 국가 명승(13)’으로 지정된 곳이다. 용두산(龍頭山)을 에도는 2km의 해안선을 따라 펼치는 붉은 절벽은 채석강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움에 경이로움을 더했다고나 할까? 참고로 적벽강은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소동파가 황주로 유배를 가서 빈한한 삶을 살며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다는 적벽강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검붉은 색을 띤 암반으로 이루어진 적벽강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아니 적벽강의 백미는 석양 무렵이라고 했다. 바위 단애가 진홍색으로 물들며 장관을 이룬단다. 바닷가로 내려서자 파도가 칠 때마다 몽돌 해안의 자갈 구르는 소리가 청아하게 귓가를 때린다. 달빛에 술상을 마주한 소동파가 읊조리는 싯구라도 되는 양...

백악기 후기, 거대한 호수 아래 퇴적된 격포리층이 지질운동으로 솟아올랐다 침식되면서 적벽강이 만들어졌단다. 퇴적암인 셰일과 화산암인 유문암의 경계 부분에 성질이 다른 두 암석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페퍼라이트는 적벽강을 대표하는 지질구조이다.

 글자 조형물은 우리가 변산 마실길 3코스를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적벽강 노을길로 포장된 3코스는 성천항에서 격포항까지의 구간으로 변산마실길의 백미다. 길은 줄곧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가는데 변산반도의 명소인 적벽강과 채석강, 그리고 바닷길이 드러나는 하섬과 격포리 후박나무 군락지를 품고 있다. 특히 이 구간을 걷다가 만나는 노을은 아름다움의 극치로 알려진다.

 11 : 42. 서해랑길은 적벽강의 해식 단애 위를 따라간다.

 덕분에 적벽강의 빼어난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변산의 해안은 모래와 바다만 있는 게 아니다. 멋들어진 기암들이 수문장처럼 바다와 뭍의 경계를 지킨다. 이는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서쪽으로 향하다 순식간에 서해 바다로 몸을 숨긴 덕분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산줄기가 물속으로 잠수하는 중이라고나 할까? 하나 더. 사람들은 내륙의 산줄기를 내변산’, 해안을 외변산이라 부른다는 것도 알아두자.

 11 : 46. 조금 더 걸어 도착한 또 다른 적벽강 생태탐방로 입구. 아름다운 변산 앞바다와 함께 커다란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안내판은 적벽강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특징은 무엇인가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었다.

 안내판은 페퍼라이트, 주상절리, 단층, 돌개구멍 등 다양한 지질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려가 보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4km 전방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으려면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1 : 49. 적벽강을 빠져나오면 또 다시 변산 해안도로를 만난다. 그리고는 꽤 오래 이 도로를 따라간다.

 변산해안로라는 이름대로 도로는 바닷가를 따라간다. 덕분에 곳곳에서 시야가 확 트인다. 이 무렵 나그네들은 하섬을 눈에 담을 수 있다.

 12 : 09. 도로변에 있는 마실길의 반월안내소에 도착하면 회화나무 고목이 나그네를 반긴다. 안내판은 ‘500여 년 전 부안 현청 동헌에 심어졌던 것으로 수령이 다하여 그 몸통을 수거·보관해오다 변산마실길 반월안내소를 개소하면서 수명을 다한 고목이지만 향토의 애환을 지켜온 수혼을 변산 마실길의 수호신으로 삼아 탐방객의 안녕을 빌고자 세워 두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하나 더. 안내소 옆에 변산 아으리랑 노래비와 하섬 부근에서 해양자원을 조사하다 숨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소속 연구원들의 추모비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도록 하자.

 12 : 15. 도로에서 내려와 오솔길(마실길 이정표 : 성천항까지 3.5km)을 따른다. 이후부터 길은 변산 해안도로와 해안 숲길, 바닷길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하섬 전망대까지 이어진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도 벌써 나흘이나 지났다. TV만 켜면 방송은 온통 남녘의 꽃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꽃봉오리를 활짝 열어젖힌 저 매화꽃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탐방로는 바닷가 비탈진 산자락을 따라 나있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곶부리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

 12 : 20. ‘변산 해안도로와 만나는 지점(마실길 이정표 : 성천항까지 3.2km)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식탁용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까지 겸하도록 했다. 드라이브 스루로 여행을 즐기는 이들을 위한 배려이지 싶다.

 전망대에 서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맞다. 이곳 부안에는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수식어들이 참 많다. ‘변산삼락(邊山三樂)’도 그중 하나인데, ·풍경·이야기 등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저런 풍광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수식어가 아닐까 싶다.

 바닷가 오솔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산책로라기보다 등산로에 가깝다고 보면 되겠다. 47코스의 난이도가 별이 3개로 평가되는 이유일 것이다.

 길은 시누대라고 하는 해장죽(海藏竹) 숲속을 헤집기도 한다. 터널이 만들어내는 빛의 조화로 인생 사진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 있는 구간이다.

 바다로 눈을 돌리자 하섬이 부쩍 가까워졌다. 사당도와 석도, 비안도 등 주변의 섬들도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나 더. 육지에서 1km가량 떨어진 하섬은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무렵 썰물 때가 되면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2~3일간 바다 갈라짐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때 백합·꼬막 등 해산물을 줍는 진풍경이 펼쳐진단다.

 12 : 47. 산길 느낌의 탐방로를 따라 시나브로 걷다보면 어느덧 해안초소에 이른다. 변산반도의 해안을 지키던 옛 군사시설을 전망대 겸 쉼터로 바꾸어 놓았다. 쉼터는 꽃을 들고 프러포즈를 하는 남성의 조형물을 세워 가슴 설레는 분위기까지 연출하고 있었다.

 탐방로는 군인들이 사용하던 교통호를 따른다. 그래선지 해안절벽을 따라 철조망이 쳐져있었다. 이 구간은 철조망에 걸린 팻말을 읽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고이지 않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는 유수불부(流水不腐)’ 같은 사자성어가 있는가 하면, 청춘이 기생을 안으면 천금이 건불이라는 유머 넘치는 글귀도 눈에 띈다.

 12 : 51.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가파른 곳에는 계단을 설치했고, 작은 개울이라도 만날라치면 어김없이 다리를 놓았다. 이뿐 아니다. 작고 예쁜 해변은 나무계단을 이용해 바닷가로 내려갈 수도 있도록 했다.

 바닷가로 내려서자 하섬이 성큼 다가온다. 아름다운 전설이 서려 있는 하섬은 새우가 웅크린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새우 하()를 썼다. 그러다 원불교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바다에 떠 있는 연꽃 같다 하여 연꽃 하()’자로 바꿔 사용한다고 했다. 그나저나 눈에 들어오는 하섬은 여느 섬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썰물 때가 되면 바다가 하섬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고 했다. 전설이 만들어낸 길이다. 옛날 옛적에 육지에서 노부모와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태풍이 불어와 부모님이 탄 고깃배가 하섬까지 떠내려가서 돌아오지 못하자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용왕님께 빌고 빌어 용왕님이 바닷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교통호를 따르다보니 군의 옛 시설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군인들이 떠난 뒤, 초소와 녹슨 철조망만 남아있던 초병의 길 변산 마실길로 다시 태어났다고 보면 되겠다.

 12 : 58. 그렇게 시나브로 걷다보면 어느덧 하섬 전망대. ‘변산 해안도로의 도로변, 하섬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에 데크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 아래로 지나가는 탐방로에는 커다란 대리석 조형물을 세워 이곳이 변산 마실길임을 알린다.

 마실길 나그네들을 위한 전망대도 빼먹지 않았다. 또 하나의 전망대를 탐방로에 걸쳐놓았다. 그나저나 산길을 걷다가 바다에 둘러싸인 하섬을 만나니 눈이 절로 시원해진다. 하지만 하섬은 눈으로 즐기는 선에서 만족해야 한다. 원불교 재단에서 사들여 해상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양을 위한 원불교 신도 외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단다.

 산자락을 헤집으며 뻗어나가는 오솔길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저 능선을 넘으면 성천항으로 연결되는 산비탈이다. 해안을 따라 조성된 오솔길은 한 명씩 차례로 줄을 서서 가야 할 만큼 비좁다.

 13 : 15. 길을 나선지 2시간 35. 변산마실길 2코스(적벽강 노을길)의 시점인 성천항에 도착했다. 포구의 초입, 유유동천(遊儒洞川)의 배수갑문 못미처 갈림길에 변산마실길 안내도와 이정표(송포항 5.0km/ 격포항 9.0km), 그리고 서해랑길 이정표(종점까지 5.6km)가 세워져 있다. 참고로 변산면 운산리에 위치한 성천항(成川港)’은 부안군수가 관리하는 5개 지방어항(곰소항·궁항항·송포항·식도항·성천항) 중 하나다. 연근해 어업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질산어장에서 주로 전어와 갈치를 잡는다.

 성천항은 바다낚시의 명소인 듯. 동호인들이 버스까지 끌고 와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창에 그려놓은 물고기가 나그네의 눈길을 붙들어 맨다. 저 낚시꾼들은 물고기를 낚자마자 뼈만 남기고 회를 떠서 먹어버리는 모양이다.

 13 : 20. 포구의 모퉁이(이정표 : 종점까지 5.2km)를 돌아서면 고사포해수욕장이 길손을 맞는다. 변산반도국립공원에서 모래밭이 가장 길다는 해변으로, 그 길이가 무려 2Km에 이른다고 한다. 잠시지만 모래사장을 걸어본다. 누군가 그랬다. 물 빠진 변산의 해수욕장에 들어서면 신발은 벗어두자고. 촉촉하게 젖은 모래 위를 걷는 감촉이 생각보다 부드럽고 따뜻하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갈 길이 바쁜 나그네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저 종착지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을 뿐...

 고사포해수욕장의 백사장은 모래가 부드럽고 물이 깨끗하고 수온이 적당해서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이다. 근거리에 있는 하섬은 물론이고, 비안도와 두리도, 거기에 고군산군도의 여러 섬들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고사포해수욕장의 자랑거리는 방풍림 역할을 하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파도소리에 더해진 솔바람소리가 인상적인데, 그 숲속에 야영장이 조성되어 있다. 솔숲 앞으로는 드넓은 서해바다가 부드럽게 펼쳐진다. ‘! 좋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멋진 해변이라 하겠다. 그래서일까? 아직은 쌀쌀한 날씨인데도 소나무 숲에는 꽤 많은 텐트가 쳐져 있었다.

 13 : 39. 서해랑길은 해수욕장을 지나 맞은편 산자락(이정표 : 종점까지 3.7km)으로 파고든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병사들이 사용하던 교통호를 따른다.

 하섬이 바라보이는 갯바위에는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내려가 볼 수도 있겠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시야가 넓어지는 법이니 탐방로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더 뛰어나지 않겠는가.

 13 : 44. 모퉁이를 돌아서자 수많은 펜션들이 잠시 쉬었다가란다. 운산교차로를 스치듯 지나면 서해랑길은 마리나, 헤이데이, 그랑메종, 보보스, 바라한 등 서구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펜션들로 가득한 저 마을을 관통한다.

 13 : 55. 펜션지구의 뒤 작은 고개를 넘자 양어장으로 여겨지는 시설이 나타났다. 하지만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경관 좋은 곳으로 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선지 정자까지 지어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주변은 기암괴석으로 가득했다. 바닷물에 깎이고 깎여 아무렇게나 다듬어진, 태고의 신비스러운 흔적을 여기서도 본다. 역광으로 인해 어둑해진 풍광이 신비스러움을 더해준다.

 함께 걷던 80대 도반의 손가락 끝에는 거북바위가 걸려있었다. 거북이 한 마리가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모양새라는 것이다.

 정자에 올라본다. 시선이 가는 곳마다 빼어난 풍광이 펼쳐진다. 맞다. 한반도가 품은 작은 반도 변산은 서해 제일의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힐 만큼 빼어난 미모를 갖췄다. ‘서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이유다.

 인간은 경제적인 동물이라고 했다. 그러니 서해바다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저런 명소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

 모실길 노선안내판이 우리가 지금 변산 마실길 2코스(노루목 상사화길)’를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구간은 철책 초소길을 따라가며 자연적으로 조성된 상사화 군락지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송포항에서 출발해 솔향기 가득한 숲길과 붉노랑상사화 군락지, 금빛모래의 고사포해수욕장을 거쳐 옥녀가 머리를 감았다는 성천포구에 이르는 길이 4.8km의 코스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교통호를 따라간다. 바닷가 산비탈에 쳐놓은 녹슨 철조망도 함께 따라간다.

 그렇게 걷다보면 벌거벗은 구릉지도 만난다. 그곳에는 유채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마실길은 이렇듯 봄의 유채꽃에서 겨울의 눈꽃에 이르기까지 사계절 내내 꽃들이 활발하게 피어난다.

 14 : 14. 나무로 만든 출렁다리를 건넌다. 작지만 탄력이 있어 출렁거림이 남다른 곳이다.

 14 : 20. 시야가 툭 트이는 널따란 구릉지는 상사화 군락지로 조성해 놓았다. 매년 늦여름(8월말부터 9월초) 샛노란 붉노랑상사화와 함께 순백의 위도상사화가 곱게 피어난단다. 때를 잘 맞추면 푸른 파도와 함께 펼쳐지는 환상적인 풍경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나?

 어떤 이는 이곳을 샤스타데이지 꽃밭으로 적고 있었다. 맞다. 봄에 이곳을 찾으면 상사화 대신 샤스타데이지가 꽃망울을 활짝 열고 길손을 맞이한단다.

 붉노랑상사화는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있을 땐 잎이 없어 잎은 꽃을, 꽃은 잎을 그리워한다는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는 꽃이다. 평소에는 연한 노란색이지만 직사광선이 강한 곳에서는 붉은빛을 띤다고 해서 붉노랑상사화란 이름이 붙여졌다. 만개 때는 껑충한 연초롱 꽃대 끝에 왕관처럼 얹혀진 노랑 꽃술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조망도 좋다. 비안도와 두리도, 거기에 고군산군도의 수많은 섬들까지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다.

 해안은 더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아름답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선지 부안의 바닷가는 각박한 세상살이에 할퀴어지고 뜯기고 긁힌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있었다.

 탐방로는 바다를 향해 돌출된 곶부리를 돌아가는 모양새이다. 한적한 오솔길은 사색하기 딱 좋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을 내딛는 순간 머리는 맑아지고 맘속의 모난 돌도 둥글둥글 다듬어진다.

 14 : 25. 모퉁이를 돌아서자 반원형의 전망대가 잠시 들렀다가란다. 다리 모양의 대를 세우고 그 위에다 전망대를 만들었다.

 전망대에 서자 변산해수욕장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나로서는 옛 추억을 소환시켜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35년쯤 전, 그러니까 내 나이 서른의 중반 무렵, 가족들과 함께 저곳에서 하계휴가를 보냈었다. 당시 아버지가 잡아온 바지락과 백합으로 술국을 끓였고, 그걸 반주삼아 마신 술로 나는 얼큰하게 취했었다. 그날 밤. 판소리랍시고 흥얼대는 내 술주정을 늦게까지 들어주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바다 건너 저 멀리서는 새만금 방조제와 고군산군도가 자신도 한번 보아달란다.

 1960년대 전후 북한의 간첩 침투를 막기 위해 설치했다는 녹슨 철조망은 이제 소망의 벽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조개껍데기나 판자에 나름대로의 소원을 적었는데, 남녀의 이름과 함께 하트() 표식을 넣은 게 가장 많이 눈에 띈다.

▼ 안내판은 이 부근을 붉노랑상사화의 자생지라고 했다(9월 무렵)를 잘 맞추면 샛노랗게 핀 상사화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단다하지만 3월 초인 지금으로서는 언감생심이다대신 복수초가 꽃봉오리를 활짝 열고 있었다이른 봄소식은 복수초의 노란 꽃잎에서 온다고 했다아직은 바람이 차지만 활짝 핀 복수초에서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낀다.

 14 : 31. 변산해수욕장의 남단과 맞닿아있는 송포항(松浦港), 부안군수가 관리하는 또 다른 지방어항이다. 이곳도 성천항처럼 칠산어장을 주요 어장으로 삼아 전어와 갈치 등을 잡는다. 참고로 송포(松浦)는 지지포라는 곳에서 살던 어느 선비가 이곳 소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14 : 36. 변산해수욕장은 송포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시작된다. 변산면 대항리에 있는 변산해수욕장은 서해안 3대 해수욕장(대천·변산·만리포)’ 중 하나로, 희고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2km 길이의 사빈과 배후의 소나무 숲이 한데 어우러지며 천혜의 절경을 이룬다. ‘백사청송(白沙靑松)의 해변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백사장도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에게 안성맞춤이란다.

 탐방로는 해수욕장의 배후 솔숲으로 나있다. 변산해수욕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해수욕장 중 하나로 1933년에 개장했다. 배후 솔숲에 굵직한 소나무들이 가득한 이유일 것이다.

 탐방로에는 수많은 시판(詩板)이 늘어서 있었다. 이 지역 출신의 작가들인지 하나같이 부안의 산하를 노래하고 있다. 맞다. 이곳 부안은 시문학의 보고이기도 하다.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났던 명기 매창(梅窓)이 있었는가 하면, 현대에 와서는 서정시인 신석정(辛夕汀)을 배출하기도 했다. 이들은 변산반도와 채석강 등 부안의 주옥같은 산하를 빼어난 문장으로 풀어냈었다.

 글자조형물은 파도를 담았다.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 지역 예술가가 만든 조형물이란다. 제목은 꿈꾸는 물고기’. 변산과 관련된 주제인 물고기를 모티브로 삼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다채로운 포토존과 조형물들이 해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해파랑길 안내책자나 kakaomap 47코스의 종점을 변산해수욕장의 버스정류장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47코스와 48코스의 시·종점임을 알리는 그 어떤 시설물도 눈에 띄지 않는다. 헷갈려하는데 두루누비에서 다운받은 앱이 사랑의 낙조공원까지 조금 더 가라고 알려준다.

 14 : 52. 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의 초입. 이정표가 당신은 이미 48코스를 400m나 걸어왔다고 알려준다.

 변산해수욕장의 랜드마크로 자리를 굳힌 사랑의 낙조공원은 꽤나 긴 계단을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 첫 만남인 전망대를 겸한 작은 광장에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을 표현하며, 한 쌍의 하트가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하트는 반쪽만 만들어 놓았고, 비워진 반쪽은 탐방객들의 사랑 표현을 채워 넣을 수 있도록 했다. 석양 무렵 이 조형물에 대칭으로 신체를 맞출 경우 인생사진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 있단다. 아래(다섯 번째)에 게재되어 있는 해넘이 안내판을 보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로마의 명물인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 Mouth of Truth)’을 닮은 조형물도 눈에 띈다. 얼굴 앞면을 둥글게 새긴 대리석 가면(플루비우스의 얼굴)이다. ‘진실의 입이란 이름은 입에다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강의 신() ‘플루비우스(Pluvius)’가 손을 잘라버린다는 전설에서 왔다. 중세시대에는 일부 영주들이 사람들에게 손을 넣게 하고 몰래 잘라버리기도 했다는데,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면서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난간에 서면 변산해수욕장이 속살을 드러낸다. 그런데 생경스럽다는 이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맞다. ‘변산해수욕장이 서해라고 해서 갯벌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시커먼 갯벌 대신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물이 들락거릴 때도 흙탕물 대신 쪽빛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공원에서 바라본 해수욕장의 배후 풍경. 변산해수욕장은 노을이 머무는 사계절 관광지로 새롭게 변신하고 있었다. 오토캠핑장을 시작으로 전기시설이 가능한 야영장(80), 스토리센터, 노을바라기(전망대), 비치가든(물놀이장), 노을쉼터 등 다양한 시설을 만들어놓았다.

 하트 손이란다. 사람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신체의 일부가 손인데 사랑의 첫 단계가 손잡기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까지 손을 잡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남자와 여자의 손으로 하트를 조각했단다. 사랑의 약속이 깨지지 않고 영원히 남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니,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조형물을 배경으로 인증사진 하나쯤 남겨보면 어떨까?

 사랑의 낙조공원 해넘이 안내판. 월별 해넘이 위치와 일자별 해넘이 시각을 담았다. 노을에 대해서는 최적의 뷰를 보여주는 곳이니 부안의 멋진 노을을 듬뿍 담아가라고 한다.

 15 : 02. 서해랑길 안내도(부안 48코스) 사랑의 낙조공원의 진입광장 남쪽 가장자리에 세워놓았다.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5.64km를 찍고 있으니 상당히 더디게 걸은 셈이다.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오솔길이 만만치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여행과 레포츠에 푹 빠져있는 나. 집사람은 그런 내가 좋다며 항상 함께 해준다. 이런 생활 패턴이 우리 부부의 건강 비결이 아닐까 싶다. 미국 대중문화계의 스타이자 코미디의 전설로 불리는 조지 번스 100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인 앨런과 함께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남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천직으로 삼았고,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다>

서해랑길 45코스(곰소항 회타운  모항 해수욕장)

 

여 행 일 : ‘24. 1. 27()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진서면 및 변산면 일원

여행코스 : 곰소항 회타운작도마을관선마을왕포마을작당마을변산자연휴양림모항해수욕장(거리/시간 : 14.7km, 실제는 15.81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5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다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생태계의 보고인 곰소만의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서해바다로 나가는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곰소 나룻산공원 및 모항 광맥계를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곰소항 회타운(고창군 진서면 곰소리)

서해안고속도로 줄포 IC에서 내려와 710번 지방도를 타고 줄포로 온다. 줄포사거리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부안방면으로 2km, 영전사거리(부안군 보안면)에서 30번 국도로 옮겨 격포방면으로 7km쯤 달리면 격포항에 이르게 된다. 곰소복지회관 앞에서 왼쪽으로 들어오면 수산물판매센터가 나온다. 서해랑길(부안45코스) 안내도는 센터의 뒤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두 번째 여정.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온 곰소만의 해안선을 따라 서해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길이는 14.7km, 작은 오르내림이 있는 산자락을 헤집기도 하지만 거리가 짧은 탓에 난이도는 별이 2(5개 중)로 분류된다.

 10 : 35. ‘곰소항길을 따라 서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 양옆으로 젓갈상점과 건어물상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곰소항으로 들어오는 수산물이 그만큼 풍부하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맞다. 곰소항은 하루 130여척의 어선들이 드나들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다고 했다. 그로 인해 국내 최대의 젓갈시장을 비롯해 수산시장과 건어물시장 등이 조성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고 한다.

 갈치의 새끼인 풀치라고 했다. ‘갈치의 원말은 칼치. 칼 모양을 닮은 고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갈치의 새끼는 풀치가 되었단다. 작고 기다란 게 풀잎을 닮아서라나? 그러니 이 자라 이 되는 셈이다.

 10 : 41. ‘곰소항은 전북특별자치도에서 군산항 다음으로 큰 어항이다. 바다를 지키는 가장 오래된 수군의 중심 진영(검모포)이기도 했다. 일제 때는 인근에서 수탈한 각종 농산물과 군수물자가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해방 후에는 칠산어장의 조기잡이 배를 비롯한 주변의 고기잡이배들이 몰리던 수산물 집산지였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포구는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싯구를 떠올리게 만든다. 꼬맹이 어선 20여 척이 물이 차오르기만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10 : 44  10. 49. 잠시 후 나룻산 공원에 이른다. 서해랑길은 공원을 우회해 간다. 하지만 일단은 나룻산으로 올라가 보자. 서해바다에 덧댄 곰소만에 대한 조망이 일품이라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공원 앞 조형물은 을 형상화했다. ‘곰소라는 지명을 모티브로 삼았을 것이다. 포구(옛날엔 섬이었다) 앞에 있었다는 깊은 소()에서 곰소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니 말이다. 이 소를 여울개라고도 하는데 칠산바다의 수호신인 개양할머니가 이곳을 건너 다 무릎까지 빠졌다는 전설도 있다.

 정상에는 워털루 평원 사자의 언덕( Butte du Lion)’을 연상시키는 원뿔형의 봉우리를 쌓아놓았다. 규모야 엄청나게 차이가 있었지만... 아니 사자 대신 조명등을 꼭대기에 앉힌 것과 오름길을 계단 대신 무장애 길로 만든 것도 다른 점이었다.

 바위절벽에는 범선을 걸쳐놓았다. 바다를 향하고 있는 게 저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려는 부안 군민들의 진취적인 기상을 담았을지도 모르겠다.

 뱃머리에 서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곰소항의 전체적인 풍경은 물론이고, 저 멀리 곰소만의 터줏대감 죽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거기다 작은 고깃배들이 하얀 물살을 가르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완성시킨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10 : 53. 입구까지 되돌아 올 필요는 없다. 중간쯤에서 오른쪽으로 나있는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오면 곰소항 젓갈단지로 연결된다. 이쯤에서 팁 하나. 젓갈단지에 들르면 천일염으로 곰삭힌 맛깔스런 곰소젓갈을 맛볼 수 있다. 맛이 있으면 두어 통 사와도 될 일이고 말이다. 나야 지난번 44코스 때 한보따리 사갔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지만... 참고로 곰소는 강경, 광천, 소래포구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젓갈 생산지다.

 젓갈단지를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바닷가. 이번에는 벚꽃나무 가로수 길을 따른다. 나른한 봄날 마파람에 꽃비라도 날릴라치면 장관을 이루겠다.

 10 : 58. 30번 국도(청자로)로 올라서 격포항 방면으로 간다. (진서리·유천리·용계리·반암리) 도요지 등 이곳 부안지역이 우리나라 청자(초기) 생산의 메카였던 사실이 도로 이름에까지 나타난다.

 잠시 후 청자로는 길이가 300m쯤 되는 방조제를 건넌다. 이 방조제 덕분에 오른편에 커다란 인공호수가 만들어졌다. 주변에 대하양식장이 들어서있는 걸로 보아 바닷물을 가두어두고 있는 모양이다.

 왼쪽으로는 곰소만이 드넓게 펼쳐진다. 영광굴비로 잘 알려진 칠산바다의 한 자락이 내륙 깊숙이 들어온 천혜의 입지조건으로 한때는 최대의 조기잡이 어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곰소나 줄포 외에도 사포, 후포 등 여러 포구가 발달했었다.

 11 : 04. 방조제를 건너면 작도마을’. 법정 동리인 진서리(鎭西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구진·연동·진동·진서·백포·작도) 중 하나로 진서리의 서쪽 끝에 위치한다. ‘작도(作陶)’,  그릇을 만드는 마을이라는 이름대로 고려시대 때 이 마을에서 고려청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40개소의 가마가 있었다는 진서리 요지(鎭西里窯址)’는 현재 사적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11: 08. 곰소초등학교에 이어 나타나는 작도마을 경로당’. 서해랑길은 경로당 건물을 왼쪽에 끼고 90도로 방향을 튼다. 초입에 이정표(종점 12.7km/ 시점 2km) 말고도 부안마실길의 이정표(모항 갯벌체험장 10.4km/ 곰소염전 2.3km)를 따로 세웠다. 두 길이 함께 쓰는 구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우리는 지금 부안마실길의 7코스인 곰소 소금밭길(왕포곰소염전, 12)’을 걷는 중이기도 하다.

 이후부터는 곰소만과 어깨를 맞대고 걷는다. 진행방향에 놓인 죽도를 바라보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 내가 잘못 보았나? 인삼을 산삼의 사촌쯤으로 여겨왔기에 산자락이나 구릉지에서 기르겠거니 했었다. 실제 인삼의 주산지도 진안이나 금산, 풍기 등 내륙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바다에서 10m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인삼을 기르고 있으니 어찌 생소하지 않겠는가.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다른 방조제들과는 달리 이곳(‘석포방조제라고 했다)은 한없이 구불대는 감입곡류의 하천을 닮았다. 대자본에 의한 계획적인 간척사업이 아니라 주민들이 손수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 똥섬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들을 제쳐두고 하필이면 똥섬이 되었을까? 저렇게 예쁜 섬을 두고 말이다.

 이번에는 바다를 향해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파고 들어갔다. 한 평이라도 더 넓히고 싶은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낸 풍경이지 싶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곰소만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서해바다를 향해 뻗어나가는 바다에는 죽도가 두둥실 떠오른다. 곰소만 안쪽에 들어있다고 해서 내죽도(고창 앞바다의 외죽도와 대비된다)’라고도 불리는데, 사리 때는 갯벌을 걸어서 들어갈 수도 있단다.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어 지금은 곰소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트레킹을 시작했던 곰소항이 실루엣 처리되어 고개를 내민다.

 물 빠진 바다에는 고깃배가 낮잠을 잔다. 물이 들면 부지런을 떨어야겠지만, 썰물 때면 하릴없어진 고깃배에 휴식의 여유가 주어진다. 그 한가로운 풍경에 반한 우리 같은 나그네들은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기 바쁘고.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드넓은 들녘 너머에서는 내변산의 험상궂은 능선이 일렁인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관음봉(424m). 그 아래에 천년고찰 래소사가 고즈넉이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11 : 35. 방조제를 잘 따르던 탐방로가 느닷없이 내륙으로 방향을 튼다. ‘마실길 이정표(왕표/ 곰소)도 오른편을 가리킨다. 방조제 끝에서 길이 끊긴 탓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썰물일 때는 바닷가를 따라 관선마을로 갈 수도 있다. 관선마을 위 국도에서 서해랑길과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실제, 모험심이 강한 일행 몇 명은 길이 아닌 그 길로 가로질러 오기도 했다.

 이즈음에서 코스를 단축한 집사람을 만났다. 석포마을에 있는 무하리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했더니 가까운 서해랑길 접점까지 나와 있었다.

 11 : 38. 석포마을 방향으로 300m쯤 걸었을까, 길가에 둘레길 나그네들을 위한 쉼터용 정자를 지어놓았다.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30번 국도로 올라간다.

 오르막길.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간척사업이 만들어 낸 석포리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인간이 지닌 무궁무진한 능력에 감탄하며 조금 전 걸어온 궤적을 눈으로 그려본다. 그러자 부지런히 걸어오고 있는 후미그룹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11 : 42. 서해랑길은 도로로 올라서마자 다시 헤어지란다. 이정표(종점까지 9.7km)도 왼쪽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를 무시한 채로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정표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관선헌(觀仙軒)’이란 저 빗돌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초입에는 관선마을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런 안내판은 둘레길이 지나는 마을마다 설치되어 있었는데, 45코스의 특징 중 하나로 꼽을 수도 있겠다.

 11 : 44.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시 국도. 곧은길을 놓아두고 굳이 에둘러 돌아오도록 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다고 관선헌(觀仙軒)’의 정체를 알려준 것도 아니고.

 왼쪽 발아래에는 관선마을이 있다. 법정 동리인 운호리(雲湖里)를 구성하는 7개 행정부락(마동·중마동·작당·왕포·소운호·운호·관선) 중 하나로 안내판은 풍수지리에서 지명의 유래를 찾고 있었다. 마을 뒷산에 장삼바위와 시루봉이 있는가 하면, 목탁바위·바리바위·북바위·목탁채바위 등 지형이 스님이 불공드리는 형상이라서 관선이라 불리었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가는 설명이겠지만, 옛 지명인 관선불(觀仙佛)’로 대비해보면 고개가 끄덕거려 질 것이다.

 이 뭣꼬? 산비탈에 대를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그런데 이게 전철 역사를 연상시키는 기괴한 모양새이다. 이름은 아예 읽을 수도 없게 만들어버렸다. 공사가 한창이어서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곰소만에 대한 뷰가 뛰어난 곳이니 카페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도로변의 명품 소나무에다 곰소만의 뷰까지 더해진다면 부안의 핫 플레이스로 등장할 게 틀림없다.

 11 : 50. 탐방로는 또 다시 국도와의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운호방조제로 내려간다. 그 초입, ‘마실버스 운행시간표까지 매단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관선마을과 왕포마을을 이어주는 운호방조제’. 길이가 600m나 되는 이 방조제가 운호마을의 드넓은 앞들을 만들어냈다.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검은 갯벌을 드넓게 펼쳐낸다. 석포에서 관선을 거쳐 왕포에 이르는 저 갯벌은 관선불갯벌로도 불리는데, 예로부터 갯살림이 풍성하기로 유명했단다. 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관선불의 어전(漁箭,어살) 어업이 등장한다나? 지금 저 갯벌에는 굴이 잔뜩 널려있단다. 그런데 이게 바위에 붙지 않고 펄 속에 박혀 자라는 탓에, 바위에 붙어 자라는 굴보다 대여섯 배나 크고, 맛과 영양 면에서 월등하단다. 썰물 때 햇볕을 많이 쬐는 데다 주변 갯벌이 기름지기 때문이란다.

 오른편은 운호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드넓은 들녘이다. 그 뒤로는 내변산의 아름다운 능선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그 중심에 놓인 건 아마 신선봉(488m)일 것이다.

 만조 때의 곰소만은 하얀 안개 가득하다고 했다. 이게 어선들을 안아주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낸단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온통 시커먼 배를 드러내놓고 있다. 그런데도 바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12 : 00. 운호방조제의 끝. 이정표(종점까지 8.4km)가 언덕으로 올라가란다.

 언덕으로 오르면 바다전망대 펜션’. 탐방로는 펜션의 뒷마당을 지난다. 이어서 감나무 과수원의 사잇길을 지나 왕포마을로 간다.

 12 : 08. 탐방로는 왕포마을을 횡단한다. 예쁜 벽화로 치장된 고샅을 빠져나오면 마을 어귀에 널따란 광장(이정표 : 7.8km)이 조성되어 있다. 깔끔한 화장실에다 정자가 두 개나 들어서있는 게 둘레길 나그네들의 쉼터로 안성맞춤이겠다.

 마을 앞은 포구가 들어섰다. 접안되어 있는 배들의 숫자나 크기도 시골마을 치고는 제법 크다. 맞다. 1970년대만 해도 이곳 왕포항은 가장 잘나가는 어촌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는 수백 척의 어선들이 모여서 풍어성시를 이루었다. 그래서 포구 이름도 인근 바다에서 고기잡이로는 으뜸이라는 뜻에서 왕포(王浦)’가 되었다고 했다. 용왕님도 (그 풍요로움에) 쉬어가는 마을이라나?

 채널A’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 시즌 5’가 왕포항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값비싼 감성돔과 국민횟감인 대광어(넙치)가 깜짝 잡히기도 했지만 낚시의 대상 어종은 칠산바다의 특산물인 조기였다. 그런 조기 조형물이 포구로 나가는 초입에 설치되어 있었다.

 작은 부두를 오른편에 끼고 트레킹을 이어나간다. 선착장 왼쪽의 조그마한 다리 아래를 통과해 들어온 배들이 정박해있다. 그러니 그 하나하나가 손바닥만 할 수밖에...

 12 : 18. 다시 국도(청자로)로 올라왔다. 다음에 닿게 될 작당마을이 코앞이지만 바닷가에 길을 낼 수 없었음이리라.

 12 : 22. 작당마을로 내려가는 길 초입에는 마을표지석과 함께 부안마실길 입간판을 세워놓았다. 마을까지는 400m쯤 더 걸어야 한단다. 하나 더. 조금 전 지나온 왕포마을에서 시작된 마실길 6코스 이정표(왕포마을에서 0.75km)는 종점인 갯벌체험장까지 5.4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12 : 27. 작당마을에 이른다. 운호리에 속한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작당(鵲堂)‘이란 지명은 마을 지형이 까치집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곳은 한때 조기잡이 활황으로 북적거리는 선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약 스무 가구 정도만 살아가고 있는 조촐한 마을이 되었다.

 작당마을 포구는 수로와 연결된 갯길을 활용하고 있었다.

 마을 앞 갯벌은 2018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극중 학수와 용대가 갯벌에서 싸우는 장면이 저곳에서 촬영됐다. 하지만 안내판 하나 없으니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을 극히 드물 것이다. 옛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갯벌에는 김 양식시설로 여겨지는 지주만 늘어서 있을 따름이었다.

 12 : 32. 작당마을 고샅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또 다시 국도로 올라선다. 이때 ‘600’이란 숫자로 디자인 된 (작당)버스정류장이 눈길을 끈다. 1416년 둘(부령현과 보안현)로 나뉘어있던 지역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부안현으로 탄생되었음을 자축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다. 주민들은 또 부안에 오시면 오복이 가득하다는 슬로건 부래만복(扶來滿福)’을 외치고 있었다.

 추억을 나누며라는 카페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차도 마시Go, 그릇도 사GO, 추억도 나누GO’라는 홍보문구로 유혹하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카페이니 커피는 기본. 거기에 더해 정성들여 다린 28년 전통의 대추차를 팔고 있단다.

 12 : 36. 잠시 후 도로에서 내려서서 짧은 방조제를 걷는다. 칠산바다 말고는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는 없다.

 방조제 끝에서 산으로 올라간다. 이어서 무장공비가 출현하던 시절 해안초소에서 사용하던 참호를 따라 진행한다.

 당시 사용하던 벙커도 눈에 띈다. 사용을 안 한지 오래됐지만 개·보수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요즘처럼 남북이 으르렁대는 하 수상한 시기에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누가 알겠는가.

 전북 천리길 스탬프함이 자신도 좀 봐달란다. 옆의 이정표는 부안마실길에서 세웠다. 서해랑길의 변산반도 구간은 이렇듯 여러 종류의 둘레길과 사이좋게 나눠쓴다.

 12 : 43. 이번에는 마동방조제를 걷는다. 이처럼 곳곳에서 방조제를 걷는다는 것 또한 45코스의 특징 중 하나이다. 하나 더. 마실길 안내판은 마동(馬洞)’ 마을의 유래를 옛날 선비가 이곳을 유람하던 중 유유동의 말재(말등모양)를 넘어 마동을 지나다 말이 쉬기에 알맞다고 했다는 데서 찾고 있었다.

 이즈음 최근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노을경관쉼터가 눈에 들어온다. 국도 30호선 쌍계재에 지어놓은 쉼터용의 3층짜리 전망대이다. 발아래에 있는 변산자연휴양림과 곰소만에 더해 서해바다까지 조망된다는 곳인데, 특히 해질 무렵이면 환상의 서해바다 일몰이 펼쳐진단다.

 오른쪽. 방조제가 만들어 낸 간척지는 대하양식장으로 가득했다. 수량이 제법 풍부한 마동천이 흐르니 농경지로 손색이 없겠건만. 자본주의의 생리는 돈이 더 되는 대하양식장을 만들어냈나 보다.

 ! 게 닷!’ 집사람이 호들갑을 떤다. 그녀의 가리키는 손가락의 끝. 검은 점으로 나타나던 것들이 뭔가에 놀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맞다. 바닷물이 먼 바다로 빠져나간 곰소 갯벌은 지금 치열한 삶의 현장이 됐다. 진흙에서 고개를 내민 갯것과 그 갯것들을 잡으려는 또 다른 것들의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살아보려는 희발농게의 종종걸음과 먹잇감을 노리는 바닷새의 저공비행이 교차하는 삶의 현장.

▼ 방조제 끝에는 쌍계재 아홉구비 길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45코스의 또 다른 이름이고여기서 말하는 쌍계재는 전망대가 지어져 있는 저 위의 고갯마루를 이른다.

 12 : 53. 방조제 끝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다. 마실길은 왼쪽 해안(시멘트포장까지 되어 있다)을 따르라는데 서해랑길 표식(리본)은 산비탈에 매달려있는 것이다. 일단은 이정표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고나서야 두 길이 다시 만난다는 걸 알았다. 하나 더. 만조(滿潮) 때 바닷물에 길이 잠기기 때문에 길을 에둘러 내놓았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또 다른 방조제(무척 짧다)를 지나자 안내판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부안 마실길 6코스(쌍계재아홉구비길)의 쌍계재 아래에 2.2km의 새로운 코스를 조성해놓았다는 것이다. 기존노선에 추가하면 순환코스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순환이 필요가 없는 나는 기존 코스를 따르기로 했다. 그러자 신우대 숲이 길손을 맞는다. 눈에 들어오는 신우대는 우람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크고 굵었다. 그게 하도 울창하다보니 길은 터널처럼 나있다. 이런 길을 걷는다는 것은 행복 그 자체이다. 그러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신우대 숲길은 굽이굽이 휘돌아가며 앞으로 나아간다. 때문에 조금만 떨어져도 앞사람을 놓치기 십상이다. 이쯤해서 팁 하나. 사람 키를 넘는 대나무는 신우대이고 키가 무릎 근처에 오는 대나무는 조릿대다. 신우대는 옛날에 화살을 만드는 데 썼다. 산죽(山竹)이라 부르는 조릿대로는 소쿠리를 만들었다. 지방에 따라서는 조릿대와 신우대를 병용하여 쓰기도 한단다.

 이즈음에서 만난 마동 해안경비초소는 아예 눈요깃거리로 만들어놓았다. 6.25전쟁 이후 1970년대 해안선을 통해 무장공비가 침투함에 따라 이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마동초소는 변산 내륙지역으로의 침투를 방호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내무반을 중심으로 상황실 등이 설치된 장병들의 휴식공간이기도 했다.

 이후부터는 전형적인 산길이 이어진다. 바닥 곳곳에 바위가 돌출되어있어 걷는 게 썩 편하지 않은 구간이다. 하나 더. 진서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이 이즈음에서 변산면에 바톤을 넘겨준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변산 자연휴양림이 고개를 내민다. 지난 2016년 이틀 밤을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숲과 바다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는 입소문을 믿고 찾아왔었고, ‘부안 마실길’ 4~6구간을 걸어보기도 했었다.

 숙소인 산림문화휴양관과 수영장, 생태습지관찰원 등의 시설을 갖춘 변산 자연휴양림은 바다와 가장 가까운 휴양림이다. 덕분에 모든 객실에서 아름다운 서해를 바라볼 수 있다. 날이 어둑해지면 맞은편 고창 심원면의 불빛이 오징어 어선의 집어등처럼 황홀경을 연출해주기도 한다. 가벼운 산책도 가능하다. 휴양림 뒤편으로 솔향기와 피톤치드가 가득한 솔바람 숲길 3km가 조성돼 있다.

 휴양림 앞을 지나서 또 다시 숲속으로 든다. 아까와는 달리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된다. 하나 더. 휴양림에 세워놓은 모실길 이정표는 시점인 갯벌체험장까지 1.8km가 남았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서해랑길 종점은 갯벌체험장에서도 2km가까이 더 가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곰소만은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이다. 굽이가 큰 만()은 방조제를 쌓아 농경지를 조성했고, 경제적 가치가 적은 저런 꼬맹이 만들은 자연 그대로 놓아두었다. 덕분에 우린 경관 좋은 해변을 걸어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방호용 철조망은 그대로 놓아두었다. 때문에 탐방로는 저런 개구멍을 통과할 수도 있다. 철조망 너머 군 초소가 눈에 띄기도 한다. 단장이 되어있지 않아 흉물스러운 몰골이다. 철조망에는 군 작전지역이므로 승인되지 않은 접근을 금지한다.’는 경고푯말까지 붙어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겁준다.

 해안초소의 안내판은 초소 주변을 정비한 후 보존해오고 있다 했다. 그렇다면 가리비 껍데기로 치장된 저 철도망도 그 일환일지 모르겠다. 아니면 마실길을 아끼는 어느 독자지가가 만들어놓은 예술성 깊은 작품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13 : 38. 규모가 제법 큰 해변도 만나게 된다. 양 옆이 해식애로 이루어져 경관까지 빼어나다. 탐방로가 아닌데도 해변으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가장자리는 모래가 아닌 각양각색의 조개껍질 부스러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걸 본 집사람의 방심이 동했나보다. 영화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 제니라도 되는 양 하얀 조개껍질을 공중에 흩뿌린다. 맞다. 나에게 그녀는 영원한 제니. ‘알리 맥그로우보다도 더 예쁜...

 13 : 48. 저 멀리 내변산의 울퉁불퉁한 암릉들이 눈에 들어오는가 싶으면 마실길은 금강가족타운이란 펜션에 이른다. 탐방로는 펜션의 앞마당을 가로지르며 이어진다.

 객실이 많음은 물론이고, 널따란 야외수영장과 족구장, 씨름장까지 갖추고 있는 펜션이다.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으니 갯벌체험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일 것이다. 하지만 인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 그러고 보니 그 넓던 야외수영장도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산길을 탄다. 하지만 큰 오르내림이 없어 힘들지는 않다. 길이 또렷한데다 곳곳에 마실길 표식이 설치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었다면 잃은 사람이 더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장락무극(長樂無極, 즐거움이 오래 계속해서 끝이 없다)’ 같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명심보감용 판자들을 읽어가며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만 2016년도 때보다 그 숫자가 확 줄어든 게 아쉽기는 했지만. 그게 아쉬워 당시 끄적거렸던 글을 소환해본다. ‘당신을 기다릴 것 같아요’, ‘결코 안 갈 것 같던 시간도 가고, 절대 안 올 것 같던 시간도 온다. 시간은 글쎄도 설마도 없다.’는 등 판자의 뒷면에 적혀있는 글들이 눈길을 끈다. 특히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먹지라는 술타령은 실소까지 짓게 만들고 있다.

 13 : 58. 산자락 오솔길을 지나면 작은 방조제가 나온다. 둑을 따라 걷다보면 왼편에는 모항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고 오른편에서는 갑남산의 산줄기가 나타난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능선이 나름대로 빼어난 산세를 자랑하고 있다. ! 둑에는 데커레이션(decoration)용인지 폐 선박이 놓여있었다. 덕분에 난 철판이 아닌 플라스틱으로도 배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14 : 02. 또 다시 국도(30호선)로 올라선다. 언제부턴가 도로 이름이 청자로에서 변산로로 바뀌어 있다. 변산반도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길가 2개나 되는 변산마실길 안내판은 하나같이 마실길이 부안의 지질명소들을 지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세계지질공원이라는 부연설명까지 한다. 여기에 모항 광맥계가 포함되어 있음도 알려준다. 하지만 모항의 최고 볼거리인 해골바위에 대한 안내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갑남산 아래는 김해 김씨 문중의 제각이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지난 44코스 때 고창 땅에서 만났던 빗돌처럼 세장산(世葬山)’ 대신 세천(世阡)’을 새겨 넣었다. ‘뫼 산()’ 대신 두렁 천()’자를 썼으니 선산을 산이 아닌 밭의 가장자리에 썼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우리네 선조들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땅에 터를 잡고 세거(世居)하면서 앞들에서 농사짓고 뒷산에 장사(葬事)하며 살아왔다.

 14 : 06. 잠시 후 국도와 헤어져 왼편 바닷가로 향한다. 서해랑길 이정표는 종점까지 1.4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같은 장소인데도 모항해수욕장까지는 1km가 남았단다. 서해랑길이 해안을 따라 에둘러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닷가를 따라 몇 걸음 더 걸으면 3층으로 지어진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일정한 돈을 내고 갯벌을 체험할 수 있는 모항갯벌체험장이란다. 펜션과 식당에다 체력단련장과 야외공연장, 인공폭포 등의 부대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갯벌체험을 하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텅 비어있기는 매한가지이다. 겨울철이라서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음이리라.

 갯벌체험장 앞 갯벌. 영역을 표시라도 하는 것처럼 빙 둘러 돌담을 쌓아놓았다. 아니 독살 체험을 위한 시설일지도 모르겠다. 밀물 때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어망이다. 사람들은 퍼덕이는 물고기를 그저 주워들기만 하면 되고...

 진행방향 저만큼에 모항이 보인다. 이름(실제는  자를 쓴다)처럼 어머니의 품같이 아늑한 어촌마을이다. 1999 12 31 새천년을 잇는 영원의 불씨를 채화했던 곳이라고 한다. 자 그럼 모항으로 들어가 보자. 시인 안도현은 말대로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체험장에서 조금 더 걸으면 바다의 위에다 만들어 놓은 전망데크가 나온다. 모항 앞바다의 갯벌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하지만 시설노후로 안전사고 위험이 있다며 입구를 막아버렸다. 예산 낭비의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이왕에 혈세를 들여 지어놓았으면 제대로 관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탐방로는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을 제켜두고 해안을 따라간다. 이때 만나게 되는 모항경로당에는 엄마품 건강센터라는 부속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엄마 품처럼 따스하고 정겨운 마음으로 누군가를 돌본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14 : 21. 모항(茅項) 포구는 그냥 지나친다. 크지도 그렇다고 빼어난 볼거리도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하나 더.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게 노을밖에 없네’. 한 무명 래퍼가 고향인 변산으로 내려가 겪는 우여곡절을 그린 영화 변산에 등장하는 대화다. 영화 속에서 모항은 두 주인공이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 한잔을 기울이던 공간으로 나온다. 그게 저 어디쯤일지도 모르겠다.

 포구를 스치듯 지나온 탐방로는 이제 모항 해나루 가족호텔의 뒤 해안선을 따라간다. 바닷가를 장식하고 있는 거대한 해식애를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바닷가는 거대한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안이 자랑하는 지질명소로 모항 광맥계로 불리는 곳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생선뼈 화석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진짜 생선뼈 화석은 아니다. 후기 백악기, 부안에서는 굉장히 큰 화산 폭발이 있었는데 당시 마그마와 함께 분출된 화산재들이 사면을 따라 흐르면서 빠르게 퇴적되고 굳었다. 화산재들이 다져지는 과정에서 심부에서는 균열을 따라 열수가 흐르고 광물을 성장시켜 지금과 같은 석영맥이 형성되었다.(전북서해안 국가지질공원 지질명소 홈피에서 발췌·정리)

 누군가는 채석강에서 이어진 해안절벽을 모항 주변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생각하는 바위(또는 해골바위)’로 가족호텔 근처 바닷가로 내려가면 만난다. 하지만 난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해버렸다. 그런 바위가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사전 준비 없이 방문한 내 잘못이니 어쩌겠는가.(사진은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렸다)

 전망 좋은 곳에는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서해에 대한 조망을 즐기라며 망원경까지 배치했다.

 정자에 오르자 칠산바다가 성큼 다가온다. 저 바다는 한때 황금어장이었다. 황금갑옷 입은 장수처럼 산란기를 앞둔 노란 조기들이 모여들었다. 지금은 조기잡이 안강망 배들은 더 이상 칠산바다를 찾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 칠산바다가 텅 빈 것은 아니다. 많은 뱃사람들은 여전히 칠산바다에 의지해 살아간다.

 14 : 31. ‘모항해수욕장에 이른다. 방풍림으로 조성된 듯한 오래 묵은 해송들이 지금은 피서객들의 편안한 쉼터로 변해있는 해수욕장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안도현 시인의 모항 가는 길이 유명세를 타면서 변산반도의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안 시인은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반도를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라고 표현했다. 아무튼 보드랍기 짝이 없는 모래사장과 멋진 노송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경관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임에 틀림없다. 참고로 이 해수욕장은 국토해양부에서 최우수 청정 해수욕장으로 선정(2010)한바 있다.

 이 해송 숲은 모항해수욕장의 랜드마크(landmark)이기도 하지만 전국 사진작가들의 일몰 포인트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14 : 37. 해수욕장 입구의 모항 갯벌체험장 조형물에 이별을 고하고 주차장으로 간다. 이어서 모항갯벌해수욕장 관리사무소 앞에 세워놓은 서해랑길(부안 46코스) 안내판을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이 15.81km를 찍고 있으니 조금 더디게 걸은 셈이다. 산길 구간이 썩 편치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오늘도 사랑하는 집사람과 함께 걸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 걷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은 믿지 말라고 단언했고,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또한 약보보다 식보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가 낫다고 주장했다. 이로보아 걷는 게 좋다는 것은 동서양을 불문한가 보다. 그러니 어찌 걷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거기다 사랑하는 사람까지 곁에 있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서해랑길 44코스(사포마을 버스정류장-곰소항 회타운)

 

여 행 일 : ‘24. 1. 13()

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흥덕면 및 부안군 줄포면·보안면·진서면 일원

여행코스 : 사포버스정류장후포마을시아농장줄포만 갯벌생태공원구진마을곰소항 회센터(거리/시간 : 14km, 실제는 15.76km 3시간 35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4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줄포만의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해제반도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줄포만 갯벌생태공원, 곰소염전 등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사포마을 버스정류장(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TG를 빠져나와 23번 국도를 타고 줄포·부안 방면으로 5km쯤 달리다가 신기삼거리(흥덕면 사포리)에서 좌회전, ‘후포로 2km 남짓 들어오면 사포마을 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부안44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첫 번째 여정. 드넓은 줄포만의 남·동쪽 해안선을 따라 고창에서 부안 땅으로 넘어간다. 길이는 14km, 거리가 짧은데다 평지로 이루어져 난이도는 별이 2(5개 중)로 분류된다.

 10 : 22. 2차선의 찻길인 후포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 길은 동학농민혁명군의 진격로이기도 하다. 1894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을 축출하고 백산 등지에서 머물렀으나 후임 군수의 설득으로 3월 초에 해산했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3 20일경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재봉기를 선언한다. 이게 동학혁명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니 당시 목숨을 걸고 내달렸을 선현들의 뜻을 떠올리며 걸어보면 어떨까?

 10 : 26. 잠시 후 후포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후포리(後浦里) 4개 자연부락(대촌·용머리·후서·후포) 중 하나로 마을 앞에 개가 있다고 해서 뒷개 또는 후포(後浦)라 하였다. 그래선지 북쪽 갯가에는 예전 소금을 굽던 염판도 있다고 했다. 아무튼 이정표(종점 13.7km/ 시점 0.3km)는 버스정류장(후포) 조금 못미처에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란다.

 마을 앞. 파도가 넘실거렸을 바다는 이제 들녘으로 변했다. 만선의 기쁨을 안고 드나들었을 돛단배도 지금은 없다. 대신 맹추위에 할 일을 잃어버린 트랙터가 낮잠을 잔다. 기지개를 펼 봄날을 기다리며.

 그 갯벌이 그리운 이도 있었나 보다. 마을 앞에 대하양식장을 지어 옛 향수를 소환시켰다. 이왕이면 당 할머니에게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며 지냈다는 해신제까지 복원시켰더라면 하는 바람은 나 혼자만의 푸념일까?

 10 : 28. 옛날, 돛단배가 드나들었을 갯고랑은 배수갑문이 떡하니 가로막았다. 참고로 줄포만 깊숙이 들어앉은 후포마을은 예로부터 조운활동이 활발한 포구였다. 내륙에서 산출되는 물산을 집결시킨 후, 선박을 이용해 개성이나 한양으로 운송하던 물류의 전진기지(海倉)였다. 운송되어 온 물자도 후포를 통해 내륙으로 옮겨질 정도로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수로를 건너 후포리에서 신덕리(新德里)’로 들어간다. 이어서 방조제를 쌓아 만든 자그만 들녘을 가로지른다.

 10 : 40. 대단위 목장지대를 지난다. 수북이 쌓여있는 곤포 사일리지로 보아 소를 기르는 게 분명하다. kakaomap 시아농장이라고 적고 있으나 이에 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소떼가 머물렀을 축사는 텅 비어있었다. 소가 없으니 이를 관리할 사람들도 필요 없었나보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적이 가져갈 물건 하나 없겠는가. 사람이 오갈 때마나 사납게 짖어대는 저 개가 증거다.

 길은 이제 나지막한 산릉으로 올라간다. 산이라 해봐야 해발이 50m도 못되고, 대개는 밭으로 개간한 낮은 구릉지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린다. 구름처럼 뭉실뭉실한 지형이다.

 이후부터는 구릉지 위를 걷는다. 그리고는 한동안 낮고 완만한 언덕을 쉼 없이 타고 넘는다.

 눈을 들면 사방이 온통 황토색이다. 대량의 양분을 함유한 황토는 농사에 유리하다고 알려진다. 황토로 재배한 작물은 수분이 많고 당도가 높아 맛이 더 좋다는 것이다. 고구마나 양파·감자 등의 뿌리작물이 특히 잘 자란다는데, 그래선지 양파 밭이 꽤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땅 반에 하늘이 반인 구릉지는 지금 보리가 주인이다. 소한·대한의 맹추위가 아직 물러가지도 않았는데 무럭무럭 잘도 자란다. 그리고 4-월에는 푸릇한 청보리가 6월이면 황금빛으로 익어갈 것이다.

 부지런한 농부는 일 년 농사 준비로 분주하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저 농부의 올 농사는 틀림없이 풍년일 것이다.

 흔히 보아오던 세장산(世葬山)’이 아니라 세천(世阡)’이란다. ‘뫼 산()’ 대신 두렁 천()’자를 썼으니 선산을 산이 아닌 밭의 가장자리에 썼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우리네 선조들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땅에 터를 잡고 세거(世居)하면서 앞들에서 농사짓고 뒷산에 장사(葬事)하며 살아왔다.

 길은 경사가 20도를 넘는 구릉지를 넘기도 한다. 붉은 빛으로 뒤덮인 저 황토지대는 고창 사람들의 농가 소득을 증대시키는 원천이다. 지금은 양파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이제 구릉지를 내려서서 목우(牧牛)’마을로 간다. 법정동리인 신덕리(新德里)를 구성하는 7개 자연부락(목우·상연·하연·언안·연장·용소·원덕) 중 하나인데, 탐방로는 마을을 먼발치에 두고 들녘으로 방향을 튼다.

 이때 줄포만과 바다 건너 변산반도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우뚝 선 산릉이 길게 바다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이렇듯 고창의 북쪽해안은 갯벌과 더불어 변산반도의 웅장한 산세를 볼 수 있어 좋다. 첩첩이 쌓인 산들이 거리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 거리가 멀수록 더 옅은 빛깔을 띠고 있어 입체감이 살아난다.

 목우마을 앞 들녘. 탐방로는 농경지 사이로 난 농로를 따른다. 그리고 농로의 끝자락에서 고창을 벗어나 부안 땅으로 들어간다.

 11 : 00. 작은 개울을 건너면 부안(줄포면 우포리) 땅이다. 탐방로는 둑길을 따라 바닷가로 간다. 울창한 갈대숲을 옆구리에 낀 멋진 구간이다.

 갈대가 키 높이로 자라 은근한 낭만 풍경이 연출된다. 하지만 갈대숲의 백미는 낮이 긴 여름철이다. 서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는 노을과 실바람에 흔들리는 잎새가 매혹하기 때문이다.

 그 안쪽 들녘에서는 철새가 난다.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습지와 갈대숲, 농경지가 더해지면서 철새들의 쉼터가 되었나보다.

 농경지를 지나 구릉지로 올라간다. 붉은 색에 가깝던 고창과는 달리 누런 황갈색으로 변했다.

 11 : 09. 구릉지에는 선양저수지가 있었다. 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간척지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소중한 수원이다.

 11 : 15. 농로를 겸한 임도를 벗어나 2차선 도로인 생태공원로(이정표 : 종점까지 9.3km)’로 올라선다.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쯤으로 보면 되겠다.

 이때 줄포지역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발아래에는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이 들어앉았다.

 11 : 21. 잠시 후 만난 삼거리.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직진, 하지만 부안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인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을 둘러보려면 오른편으로 가야한다. 하나 더. 서해랑길을 따르더라도 생태공원에 이르기는 매한가지다. 정문 대신 후문으로 들어간다는 게 다를 뿐이다.

 이정표(종점 8.8km/ 줄포만 생태공원 0.4km/ 시점 5.2km)는 줄포만 생태공원에 잠시 들렀다가란다.

 11 : 25. 하지만 난 서해랑길을 따르기로 했다. 이어서 조금 더 걸어 바닷가에 이른다. 곧게 뻗은 방조제를 중심으로 왼편에는 줄포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지고, 오른쪽의 습지에는 갯벌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줄포만 위에 다리 형태로 놓인 생태관찰로는 갯벌 생물을 관찰하기 딱 좋은 곳이다. 계단이 놓여있어 갯벌로 내려가 직접 관찰해 볼 수도 있다.

 부안도 역시 갯벌의 고장이다.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휘어진 활처럼 거대한 해안선(대략 178)을 그리는데, 그 대부분에 넓고 진득한 갯벌이 발달했다. 특히 변산반도 남단의 줄포만은 해양수산부로부터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받았다. 2010년에는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기도 했다. 칠면초와 나문재·갈대 같은 염생식물을 비롯해 100종이 넘는 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다.

 물 빠진 바다에는 갯고랑이 나타난다. 바다와 마을을 이어주는 실핏줄로 바닷물이 밀려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썰물 때 끊어질 듯 가느다란 생명줄로 다시 태어나는 길이다. 한때 저 길은 돛단배의 나들이 길이도 했다. 토사가 쌓이면서 이제는 뱃길이 끊겨버렸지만...

 11 : 30. 이제 갯벌생태공원을 둘러볼 차례이다. 한동안 쓸모없는 땅처럼 여겨졌던 갯벌 저류지를 친환경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공원이다. 갯벌의 퇴적작용으로 줄포는 상습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제방을 쌓은 것이 시민의 쉼터로 자리 잡았다. 제방을 쌓은 이후 안쪽의 20만평 저류지는 갈대와 염생식물이 군락을 이루면서 자연스레 생태늪지로 발전했다. 이걸 친자연환경적인 생태공원으로 가꿔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다양한 체험거리와 체육시설, 캠핑장, 산책로는 물론이고, 숙박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가족, 연인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 준다.

 안으로 들어가면 10만평에 달하는 갈대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지그재그 나무데크, ‘S’자 나무데크 등 다양한 길을 따라 갈대 사이를 거닐 수 있다. 하지만 이 부근에 있었다는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촬영 세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국적인 풍치를 물씬 풍긴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줄포에 왔으니 사진 한 장쯤은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내 마을을 알아차렸는지 갈대밭에 글자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공원 안 수로에서는 물놀이 체험도 가능하다. 바닷물과 민물이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물길인데, 이 수로를 보트를 타고 돌아볼 수 있다.

 바둑 테마공원이란다. 부안이 고향인 한국 현대바둑의 아버지 조남철 국수를 기리기 위해 조성했다. 문득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바닷가, ‘불바르 공원(Bulvar Park)’에서 만났던 체스 판이 생각난다. 저와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사람들이 직접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입체화시킨 게 눈길을 끌었었다. 우리도 한번쯤은 시도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공원은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했다. 의자 하나까지도 돌을 쪼아가며 예술성을 가미했다. 하지만 뜬금없이 나타난 코끼리 조형물이 혼란을 주기도 한다. 공원의 2개 연못과 3개의 동산에는 20여종의 자생화초류 염생식물과 6종의 민물고기, 야생화 등이 터를 잡고 산다고 했다. 운이 좋으면 오소리나 재두루미, 백로, 바다오리 등의 야생동물도 볼 수 있단다. 그렇다면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다는 그 야생동물을 조형물로 만들어놓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11 : 50. 다시 바닷가로 돌아와 이번에는 둑길을 따른다. 줄포의 침수를 대비하기 위해 1996년에서 1999년까지 연장 975m의 방조제를 쌓았다.

 왼쪽은 줄포만. 추위 탓인지 갯벌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니 시심(詩心) 하나 불러올만한 풍경도 잡히지 않는다. 밀물에 쫒긴 아낙들이 바지락이 가득 든 플라스틱 통을 들거나 머리에 이고 갯고랑을 따라 한 줄로 걷는 모습이 한 편의 서사시이자 한 폭의 풍경화라는데도 말이다.

 11 : 52. 방조제는 전망대 기능까지 수행하도록 했다. 도로변에 흙을 도톰하니 쌓아올려 대를 만들었다. 갯벌생태공원의 전모를 한꺼번에 살펴보라는 모양이다.

 관광객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부안이라는 문자 조형물을 세워 사진 찍기 딱 좋도록 했다.

 언덕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발아래 놓인 습지는 물론이고 저 멀리 줄포시가지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곰소만 깊숙한 곳에 들어앉은 줄포는 한때 서해안 어업의 중심지였다. 조기의 3대 어장 중 하나인 위도가 가까이 있어 만선이라도 되면 줄포 또한 성황을 이루었단다. 그러나 갯벌의 퇴적으로 수심이 얕아지는 바람에 1938년 항구의 기능을 가까운 곰소항에 넘겨줬고, 90년대의 폐항을 거쳐 지금은 완전히 내륙의 땅이 되어버렸다.

 이즈음 마실길 팻말이 눈에 띈다. 명품 산책로로 꼽히는 부안 마실길은 새만금전시관에서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에 이르는 부안 땅을 둘로 가른다. 8개 코스(66km) 변산 마실길 6개 코스(97km) 내륙 마실길로 나뉘는데, 코스마다 붙여진 이름만으로도 탐방을 대신한다. 이중 8코스인 청자골 자연생태길은 이곳 갯벌생태공원에서 곰소염전에 이르는 11km 구간이다. 참고로 마실은 마을을 뜻하는 방언이지만 마실간다는 말로도 자주 쓰인다. 이때 마실은 이웃집으로 놀러가거나 가까운 곳으로 바람 쐬러 간다는 뜻으로 쓴다. 그러니 가벼운 마음으로 마실 다니듯이 걸어보자.

 11 : 58. 방조제 끝, 공터는 작은 공원으로 꾸몄다. 쉼터용 정자를 지어놓았는가 하면, 눈요깃거리 삼아 등대도 세워두었다.

 이후부터는 최근(2023 10) 개설된 신작로가 길을 안내한다. ‘분탕골로라는데 부안군환경센터의 오른쪽으로 지나간다.

 12 : 09. 잠시 후 방조제로 올라선다. 이어서 둑길을 따라 보안면(유천리)으로 들어간다. 둑 아래로는 2차선 도로인 분탕골로가 함께 간다.

 드넓은 신창들녘을 적시며 흘러온 신창천(버드내·줄내·남포천)은 하천이라기보다는 저수지에 가깝다. 방조제에 가로막힌 물을 두 개의 배수갑문을 통해 줄포만으로 흘려보내는데, 일정량을 항시 가두어두고 있는 모양이다.

 바닷가 간척지나 담수호는 빼놓을 수 없는 겨울철새 도래지다. 신창천 저류지에서도 철새가 떼를 지어 노닐고 있었다. 참고로 국립생물자원관의 2021~22년 겨울철 조류 센서스 결과에 의하면 부안군은 계화조류지, 동진강, 고부천 일원을 중심으로 황새, 흰꼬리수리 등 53 155,264여 마리의 철새가 겨울을 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매년 시행해오고 있다는 겨울철새 먹이주기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철새 무리는 하늘에서도 관찰할 수 있었다. 철새 도래지의 장관은 해가 뜨고 질 무렵 노을진 오렌지빛 하늘을 무대 삼아 펼치는 철새 떼의 현란한 군무라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직접 눈에 담을 수는 없었다.

 옛 사람들은 저 바다를 웅연조대(雄淵釣臺)’라며 변산팔경(邊山八景)’의 첫 번째로 꼽았다. 줄포만에 떠있는 어선에서 밝히는 불빛이 물에 어리는 풍경과 어부들이 낚싯대를 둘러메고 뱃노래를 부르는 광경이 장관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알려주는 안내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부안의 바닷가를 걸으며 느낀 첫인상은 돈을 쏟아 붓듯이 치장했다는 점이다. 그런 예산을 조금 할애해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안내판 두어 개쯤 만들어두었으면 어땠을까? 보는 재미에 읽는 재미까지 더해진다면 찾는 이들도 그만큼 더 늘어날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갯벌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둑을 쌓아 양식장을 만들었다. 대하양식장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바닷물고기를 기르는 듯한 양식장도 눈에 띈다.

 신창들녘 너머는 유천마을일 것이다. 마을 뒤 구릉지에 세계적인 고려 상감청자를 구워 낸 사적 제69 유천리 도요지(扶安柳川里陶窯址)’가 있다.

 12 : 21  12 : 40. ‘분탕골로는 방조제 끝에서 유천·호암로로 바뀐다. 이어서 호암마을(유천리)을 스치듯 지나간다. 도로 전체를 공원으로 꾸며놓은 멋진 구간이다. 덕분에 준비해간 간식을 나눠먹으며 푹 쉬어갈 수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도 많은 배수갑문을 만난다. 부안의 들녘 대부분이 간척사업에 의해 생겨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간척(干拓)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이루어지던 당시는 작은 갯고랑이나 해변을 막는 정도였다. 대단위의 역사는 민간자본이 형성된 일제강점기부터라고 보면 되겠다.

 13 : 02. 배수갑문이 가둬놓은 물길(다리가 놓였다)을 건너면 신복리(新福里) 땅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사장교 형식의 신활교로 만화천(萬花川)을 건넌다. 무언가를 감싸고 있는 듯한 버팀기둥의 생김새가 눈길을 끄는데, 그게 한쪽뿐이라서 공사를 하다 만 느낌을 준다. ‘미완성 아닌 미완성이 주는 헷갈림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탐방로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갯고랑을 따라 바다로 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방조제로 둘러싸인 들녘을 가로지른다. kakaomap은 이 구간을 구진길로 적고 있었다.

 이 구간에서도 갈대밭을 만날 수 있었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줄포만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나부끼는 갈대꽃은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이 뭣꼬!’ 스님들의 화두만큼이나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보리밭으로 보이는 들녘에서 수백 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철새들로부터 보리밭을 지키기 위한 농민들의 몸부림이라고 했다. 철새들이 보리의 잎은 물론이고 뿌리까지 다 먹어치우고 있지만, 철새보호구역에다 멸종위기의 철새들이라 포획할 수도 없어 깃발로 쫓아볼 따름이란다. 효과는 없었지만...

 13 : 20. 시쳇말로 호적초본에 잉크도 안 마른 신작로를 건너 구진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진서리(鎭西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구진·연동·진동·진서·백포·작도) 중 하나로, 천마산을 머리로 하고 남향으로 자리한 바닷가 마을이다. 구진(舊鎭)이란 이름 그대로 옛날 이곳에는 수군(水軍) 진이 있었다고 한다. 거무진이나 검모포(黔毛浦), 또는 검모포진(黔毛浦鎭)으로도 불리는 이유다.

 마을의 오랜 역사는 마을 뒷산의 느티나무가 전해준다. 수령이 800년에 가깝다니 그동안 민초들의 겪었던 고난을 지켜봤을 터다. 거기다 나무는 영험하기까지 하단다. 나뭇가지라도 함부로 꺾으면 마을에 동토가 났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마을 당산제의 대상이 될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안내판은 마을의 역사를 전하고 있었다. 고려 말 여원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역할을 했던 곳이 구진 마을이란다. 원나라는 일본 원정을 결정하고 고려로 하여금 전함과 수송선, 식량 등 모든 군사물자를 준비케 했다. 그 결과 이곳 검모포와 천관산(전남 장흥)에서 전국의 3 5백여 명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크고 작은 전함 900척을 불과 넉 달 만에 건조했단다. 하나 더. 옆의 빗돌이 전하는 줄포만 탐방로는 대체 뭘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 비슷한 시설도 보지 못했는데...

 13 : 32. 탐방로는 30번 국도인 청자로로 올라선다. ‘청자라는 도로명은 진서리에 있는 도요지(陶窯址, 사적 제70)로부터 얻어온 지명일 것이다. 11세기 후반에서 13세기까지 고려청자를 구워내던 다수의 가마가 이 부근 구릉지에 있었다니 말이다. 변산 재목창의 땔감과 질 좋은 자토(瓷土), 거기에 줄포항이란 조운로까지 갖췄으니 도자기 생산지로 이만한 곳도 없었겠다.

 도로 건너 곰소염전 7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부안의 유일한 염전이다. 곰소만의 주력 항구이던 줄포항이 토사로 메워져 입출항이 어려워지자, 1936-1938년 진서리(연동마을) 앞에 있던 범섬과 웅연도을 구진마을과 작도리로 연결하여 곰소항을 조성하면서, 그 내부 연동리 쪽으로 곰소염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946년의 일인데 당시만 해도 소금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전매품이었다.

 겨울철 염전은 길고 깊은 잠을 잔다. 때문에 염전 본연의 풍경, 즉 뜨거운 태양 아래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소금가루가 입가에 하얗게 말라붙은 염부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지는 해의 노을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그네들의 구릿빛 피부는 언감생심이라 하겠다.

 안내판은 단짠단짠 곰소염전 방문기라며 곰소염전의 단맛이 나는 소금을 소개하고 있었다. 허영만의 만화를 영화화한 식객의 무대가 되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안내판도 보인다. 한편 tvN 예능프로그램 일로 만난 사이에서도 소개됐다. 2019년 유재석과 임원희, 지창욱이 함께 곰소염전에서 일을 했다. 소금 모으기·나르기·포장하기 등 힘든 노동을 치르면서 단짠 케미를 보여주는데, 유재석은 당시 단짠단짠의 조화로 식혜와 낙지젓갈을 함께 먹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해안생태·문화탐방로는 귀여운 장승을 마스코트로 삼았다. 변산반도는 산세가 빼어나고 해안 경치도 아름다운 곳. 반도 전체가 국립공원이다. 그래선지 서해랑길 등 다양한 걷기 코스가 마련돼 도보여행에 맛들인 이들이 몰려든다. 해안생태·문화탐방로도 그중 하나이다.

 맞은편에 있는 슬지제빵소는 이색 찐빵을 판매하는 핫플레이스다. 지역에서 나는 팥으로 만든 찐빵과 소금커피가 입소문을 탔다. 이쯤해서 의문점 하나. ‘찐빵과 커피의 조화가 상상되시나요?’ 우선 찐빵은 팥을 직접 만들기 때문에 많이 달지 않고 건강한 맛이란다. 또한 시그니처 커피인 곰소 소금커피는 아이스라테 커피에 흑당과 발효소금 시럽을 섞어 단짠단짠한 맛이 일품이란다. 그게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나?

 곰소로 가는 해안도로 주변은 양식장이 수도 없이 많다. 그 대부분은 대하 양식장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근에는 왕새우 직판장도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부안에서 가장 친근한 해산물은 바지락이다. 새만금방조제 사업 이후 종적을 감춘 백합과 달리, 바지락은 지금도 부안 갯벌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다. 인삼을 곁들인 바지락죽, 갖은 야채와 고춧가루 양념으로 버무린 회무침 등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13 : 45. ‘곰소에 이른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진서리 앞바다의 곰섬을 중심으로 동쪽의 범섬과 연동, 서쪽의 까치섬과 작도리를 잇는 제방을 쌓아 육지로 만들면서 곰소항 일대가 축조되었다. ‘곰소(熊淵)’란 지명은 곰처럼 생긴 두 개의 섬 앞에 깊은 소()가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과거 소금을 곰소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웅연(熊淵), 웅소(熊沼), 웅연도(熊淵嶋) 등으로도 불렸다. 2009 1 1일 진서면 진서리에서 면소재지가 있는 곰소리가 독립된 법정리로 분리·설치되었다.

 이정표(종점까지 1.4km)는 번거로운 시가지를 피해 바닷가로 우회시킨다. ‘서해랑길다운 발상이라 하겠다.

 거대한 팽나무 고목이 바닷가 공터에서 자라고 있었다. 44코스를 걸어오는 동안 꽤 많은 당산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저 나무도 어딘가에서 자라던 당산나무를 범섬공원 근처로 옮겨왔을지도 모르겠다.

 곰소만(곰소에 왔으니 이제 줄포만에서 벗어나야겠지?)에 어깨를 맞댄 부지는 널따란 광장을 중심으로 공연장과 회센터, 젓갈센터 등 여러 시설들을 들어앉혔다. 전라북도에서 군산항 다음으로 큰 어항의 위세를 이어가기 위한 야심찬 시도라 할 수 있겠다. ‘젓갈 발효축제 알주꾸미 축제 등의 축제도 이곳에서 열린다.

 바닷가로 나가면 곰소만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다. 한국의 갯벌은 모두 일곱 군데가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어 있다. 서해 북쪽부터 송도, 대부도, 서천, 고창·부안, 무안, 증도, 순천만·보성 갯벌 등이다. 이중 고창·부안 갯벌의 면적이 45.5로 가장 넓다.

 축제가 잦으니 찾는 이들이 많을 것은 당연. 이들을 위한 포토죤을 만들어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중 하나가 곰소역이다. 열차가 다닌 일도 없었거니와 앞으로도 다닐 일이 없는 곳에 철로를 깔고 역사를 지었다. 뜬금없는 발상이지만 사진 찍기에는 딱 좋았다.

 철로의 매력 포인트는 선로 위로 올라가 중심을 잡아보는 맛이 아니겠는가.

 탐방로는 바닷가를 따라 곰소항으로 간다. 이때 다양한 조형물들을 만난다. 바닷가답게 돌고래나 소라 같은 바다 생물들을 조형물로 제작해 전시했다.

 잘못된 표기라고 지적했던 글자 조형물이다. ‘C’가 아니라 ‘G’가 되어야 한다며 혀를 차는데, ‘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 이석암 선생이 낚시꾼을 포함시키면 ‘G’자가 된다고 알려주신다. 작가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왕새우는 곰소항의 또 다른 특산물이다. 오늘도 수많은 대하양식장을 만났었다.

 곰소항은 하루 130여척의 어선이 드나들 정도로 활기를 띤단다. 최근에는 젓갈로도 유명해졌다. 곰소항의 풍부한 수산물에 미네랄 풍부한 곰소염전의 소금이 더해져 맛좋은 젓갈이 생산된단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오징어젓갈에 가리비젓갈까지 각단지게 챙겨본다.

 곰소항에 가까워지자 죽도(竹島)’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곰소는 예전에 섬이었다고 한다. 1938년 작도와 웅도를 잇는 제방을 쌓으면서 육지가 됐다. 덕분에 과거 선인들이 묘사하던 웅연도(態淵島 : 곰섬) 앞바다 풍경은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곰소항은 빼어난 일출과 일몰의 풍경을 자랑하며 장관을 이룬다.

 14 : 10. 곰소항 조금 못미처에 있는 회센터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서해랑길(부안 45코스) 안내도는 회센터 뒤 바닷가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35분을 걸었다. 앱이 15.76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 43코스(선운산 버스정류장-사포마을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3. 12. 23()

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아산면·부안면·흥덕면 일원

여행코스 : 선운산 버스정류장연기제질마재진마마을(서정주 생가)신기마을반월마을상포마을김소희 생가사포마을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21.1km, 실제는 미당시문학관부터 11.61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3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고창의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부안 땅으로 넘어가는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미당 시문학관, 김소희 생가 등을 꼽을 수 있다.(이 글은 디지털고창문화대전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들머리는 선운산 버스정류장(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IC에서 내려와 22번 국도를 타고 법성포·상하(선운사) 방면으로 달리다가 삼인교차로에서 좌회전하면 잠시 후 선운사 입구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고창43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다.

 3개 코스(4143코스, 49.9km)로 이루어진 고창구간의 마지막 여정이다. 이름처럼 고창 갯벌을 따라 북상하던 서해랑길(41코스)이 느닷없이 방향을 틀어 선운산 자락을 헤집더니(42코스, 선운산을 샅샅이 뒤져본 적이 있기에 생략했다), 43코스에서 다시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부안 땅으로 넘어간다. 길이는 21.1km, 초반에 소요산 임도를 끼고 있어선지 난이도가 별이 3(5개 중)로 분류된다.

 선운산으로 가는 입구. ‘세계유산도시 고창 방문의 해 2023년을 맞아 예쁜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원래 꽃으로 장식된 아치였는데, 이게 영하 10도를 훌쩍 내려가는 동장군에 눈보라까지 몰아치다보니 콘크리트를 쏟아 부은 구조물로 변해버렸다.

 선운산은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암석들이 곳곳에서 수직 암벽을 이룬다. 그중 한 곳에서 송악(천연기념물 제367)’이 자란다. 송악은 나무나 바위를 붙들고 자라는 일종의 덩굴 식물이다. 제주라면 밭담이나 숲 등 흔하게 보이지만 적어도 육지에는 귀하신 몸이다.

 10 : 48. 실제 출발은 선운리(부안면)에 있는 선운리 삼거리에서 했다. 21.1km나 되는 거리는 물론이고, 계속된 폭설주의보로 눈이 수북이 쌓여있을 게 뻔한 산길(임도를 따를 수도 있다) 구간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8km를 단축하는 셈이 됐다.

 이후의 답사도 서해랑길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바닷길보다 김성수 선생의 생가를 둘러보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 같아서다. 삼거리에 세워놓은 해안문화 마실길 안내도를 따르면 되는데, 이 마실길은 이곳에서 출발해 김성수 생가와 김소희 생가를 거쳐 목우마을까지 간다.

 길을 나서기 전 마을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미당시문학관으로 향하는데 전면에 소요산(逍遙山 444.2m)’이 놓여있다. 서해랑길은 저 산의 허리 깨로 난 임도를 따라 이곳으로 온다. 그러다 중간에서 길마재란 고갯마루를 넘는다. ‘길마란 소나 말의 등에 얹는 안장을 가리키는 우리말. 서정주 시인이 1975년 펴낸 대표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는 길마가 구개음화가 안 된 상태로 굳어지면서 질마가 됐다.

 10 : 51-11 : 12. 첫 만남은 미당시문학관’. 삼거리에서 바람개비가 인도하는 대로 80m쯤 들어가면 나온다. 선운분교(봉암초등학교) 폐교 후 건물을 개보수해 2011년 문을 열었다. 미당의 유족들이 기증한 4,000여 점의 유품 전시공간이 있고 미당과 그의 시를 소개하는 영상 자료실이 마련되어 있다.

 미당의 대표 시는 冬天’? ‘국화 옆에서로만 알아오던 내 설익은 앎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문학관 표지석 오른편에 떡하니 앉아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실루엣 처리된 미당이 맞는다. 우리말 시인 가운데 가장 큰 시인이란다. 하지만 시성(詩聖)으로까지 추앙받던 시인은 친일파로 낙인찍혔고, 그런 다음에는 손님으로 들끓던 미당시문학관도 찾는 발길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벽면은 미당과 가족, 친지들의 사진으로 가득하다. 미당을 기리기 위한 문학관이니 그의 약력도 빠질 리가 없다. 벽면에 질마재의 유년시절과 퇴학당한 소년(·소년기), 방황과 열정의 천재적 개성출현(청년기),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한국 시문학의 대표작들(중년기), 만족 없는 탐구, 세계여행과 산 이름 외우기(노년기) 등 유·소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공간 대부분은 미당의 주옥같은 작품들로 채워 넣었다.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시구들을 음미하며 미당을 키웠다는 바람을 만나보면 어떨까? 우리네 빈 가슴이 그 바람으로 채워질지 누가 알겠는가.

 패널이나 액자 등 작품을 전시하는 방법도 다양했다. 심지어는 유리로 터널을 만든 다음 대표작들을 그 벽면에 적고 있었다.

 미당의 남현동(서울) 자택 서재도 재현해 놓았다. 미당 문학 마지막 30(1970-2000)의 산실이란다. 운보가 그린 미당 초상화, 남정 박노수 화백의 시화, 가야금, 친필이 들어있는 도자기, 세계 125개국을 집고 다녔던 지팡이가 생전 그의 일상생활의 취향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준다.

 육필 원고도 눈에 띈다. 이밖에도 그동안 발간됐던 작품집, 서간, 낙관, 늘그막에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을 모자·담배파이프·지팡이 등도 진열되어 있다. 참고로 1915년에 태어난 미당은 2000 10 63년을 함께 산 부인이 세상을 뜨자 곡기를 끊고 그해 12월 하늘로 돌아갔다. 미당은 10대의 습작 시기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생로병사에 따르는 온갖 감정이 실린 1,0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미당의 시와 삶은 후배 문인들의 시선을 통해 전해준다. 고은, 이어령, 김춘수 등 쟁쟁한 이름들이 빈 여백을 가득 메운다.

 옥상 전망대에 가까워질 무렵에는 미당을 오욕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작품들도 만난다. 1943년부터 1944년 미당이 썼던 친일의 글에 관해 감추거나 미화하기보다는 명확하게 드러내어 방문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종천친일파(從天親日派)’라는 자기변명이 눈에 거슬리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옛 학교 건물과 잘 어울리는 새 건물은 5층으로 지어졌다. 미당의 작품과 자료들은 각 층의 전시실로도 부족해 계단의 벽에까지 걸려있었다. 그걸 하나하나 음미해가며 오르다보면 어느덧 옥상 전망대.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미당이 잠들어 있다는 안현마을의 뒷산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대신 창문을 통해 변산반도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본다.

 11 : 12. 문학관 옆 질마재권역 문화센터가 들어섰다. 체험관광과 도농교류, 주민소득 등 다양한 분야의 개발을 추진하는 본부쯤 되는데, 진마마을·서당마을·신흥마을(선운리)과 안현마을(송현리)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단다. 이들의 노력으로 샘과 도깨비집 등 서정주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장소와 소재가 옛날처럼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문학관과 문화센터의 경계에 놓여있는 저 자전거 조형물은 무엇을 전하고 싶을까?

 2차선인 질마재로(소요산 방향)’를 따라 100m쯤 가다 첫 삼거리에서 진마안길로 바꿔 마을로 들어간다. ‘미당 서정주가 태어나 자랐다고 해서 미당길로 불리다가 서정주의 친일행적과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찬양이 알려지면서 이름까지 빼앗긴 서글픈 길이다.

 11 : 18. 잠시 후 진마마을 어귀에서 서해랑길을 만났다. 서해랑길 트랙은 8.8km를 찍는다. 내 앱은 0.8km, 정확히 8km를 단축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이곳 진마마을(선운리) 질마재 시인마을로도 불린다. 시인 서정주가 나고 자란 마을이기 때문이다. 마을도 그가 지은 산문시집 질마재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서 꾸며놓았다.

 당산나무 아래, 바위를 다듬어 만든 조형물이 눈에 띈다. 이후 길 따라 걷다보면 이런 조형물들을 심심찮게 만나는데, 미당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 실린 산문시를 주제로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미당이 환갑에 펴낸 시집 질마재 신화는 마을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미당 특유의 언어로 되살린 것이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실제 마을 주민이었으며, 시집에 나오는 외가 터는 물론이고 서당·빨래터·우물도 아직까지 남아있다.

 웃돔샘도 복원해 놓았다. 삼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샘으로 미당은 이 샘에 얽힌 이야기를 소재로 간통사건과 우물이라는 시를 썼다. ! 근처에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도깨비와 부자 된 설막동이네의 도깨비집도 있다는데 들러보지는 못했다. 때문에 나무로 조각된 여러 형상의 도깨비들을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도깨비집이 복원되어 있다는 걸 미리 알아오지 못한 내 불찰을 탓할 따름이다.

 정떼는 방법을 주제로 한 조형물이란다. <모시밭골 감나무집 과부는 마흔에도 눈썹이 쌍긋한 제물향이 스며날 만큼 이뻤었는데. 여러 해 동안 도깨비 사잇서방을 두고 전답 마지기가 좋아 사들인다는 소문이 그윽하더니. 어느 저녁엔 대사립문에 인줄을 느리고 뜨끈뜨끈 맵고도 비린 검붉은 말피를 쫘악 그 언저리에 두루 뿌려놓았습니다>

 상가수(上歌手)의 소리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조형물은 나무에 살짝 가려있다. <질마재 상가수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 쓴 중을 세우고, 또 상여면 상여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기상청은 연일 한파의 맹공을 외쳤었다.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간 수은주가 되돌아오지를 않는다면서. 그런 추위도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닌가 보다. 고드름이 만들어내는 진풍경. 흡사 주렴을 늘어뜨린 것처럼 매달려 있는 저런 풍경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11 : 24. 잠시 후 만난 미당의 생가. 미당은 어린 시절 이 집에서 서당을 다니다가 아홉 살 무렵 보통학교에 입학하려고 인근의 줄포로 이사했다. 1942년 부친이 죽은 후 친척이 개조해 거주하다 1970년경부터는 사람이 살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왔다. 그러다 2001년에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정면 4, 측면 2칸의 초가지붕 본채, 정면 3, 측면 2칸의 헛간이 있는 초가지붕 아래채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생가 곳곳에는 그의 시와 글을 세긴 빗돌을 세워놓았다. 건물의 벽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동천, 국화 옆에서 등 그의 대표시를 적은 아크릴 판이 곳곳에 붙여져 있다.

 서정주 시인의 생가 바로 옆에는 우하당(又下堂)’이란 현판이 걸린 작고 아담한 기와집 두 채가 서 있다. 이곳에서 미당의 동생이자 시인인 서정태 옹이 살았었다. 그는 우리 나이 여든 일곱부터 질마재가 한눈에 보이는 미당 생가 옆에 조그만 흙집을 짓고 홀로 시를 쓰며 지냈다. 그리고 아흔을 넘겼어도 꼿꼿했던 당신은 2020 3월 돌아가셨다.

 선운리 마을회관  질마재권역 시문학체험관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문이 열렸다고 해도 체험을 해볼 여유는 없었겠지만.

 뒤돌아본 시인의 마을’. 길이 실개천을 따라 마을을 관통하도록 나있다.

 동구 밖 장승이 눈길을 끈다. 마을은 저렇듯 잘 가꾸어져 있다. 축제의 고장 고창을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라고나 할까? 참고로 고창은 1월 세계유산도시 고창 방문의 해 선포식을 시작으로 3월 벚꽃축제, 4월 청보리밭축제, 5월 바지락페스티벌, 6 (복분자·수박·갯벌)축제, 7월 한여름 밤의 페스타 등이 쉼 없이 이어졌다. 마케팅 전략도 뛰어나다. 8 고창으로 여름휴가오세요’, 9~10 단풍이 피어나는 가을, 고창으로 오세요’, 11~12 겨울의 특별한 기억, 설창 고창에서 함께해요처럼 시기와 테마에 맞는 맞춤형으로 전개한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질마재 시인마을 복합문화공간’. 문화 공간 외에도 카페와 책방(북 카페)이 들어서 있다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11 ; 35. ‘선운리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734번 지방도(인촌로)를 따른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서해랑길 대신 해안문화 마실길을 걸어보기 위해서다.

 11 : 39. 잠시 후 안현(鞍峴, 길마재 밑에 있는 마을이란 뜻)’ 마을에 이른다. 동구 밖 표지판은 안현 돋음볕마을로 적고 있었다. ‘처음으로 솟아오르는 햇볕이란 뜻을 담은 애칭이란다. 이 마을은 국화 옆에서로 대변된다. 서정주 시인을 기리기 위해 마을 뒷산에 국화꽃을 심고, ‘100억 송이 국화축제를 여는가 하면, 담벼락을 국화꽃으로 채워 넣었다. 2008년에는 SBS ‘패밀리가 떴다의 촬영지가 되면서 전국적인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안현마을은 국화마을로 통한다. 애칭처럼 모든 집 담과 지붕에 국화가 소담하게 그려져 있다. 송주철 공공디자인연구소가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모티브로 그린 벽화라고 한다.

 마을 앞. 간척으로 인해 생긴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연이어 며칠을 내린 폭설 때문이지 세상은 온통 하얗다. 그 너머에서 변산반도가 성큼 다가온다. 아름답다.

 11 : 58. ‘신기마을을 지난다. 법정 동리인 송현리(松峴里)를 구성하는 3개의 행정마을(고잔·안현·신기) 중 하나다.

 버스정류장 옆 이정표(김성수생가 1.2km/ 김소희생가 11.7km/ 손화중피체지 0.6km/ 미당시문학관 1.7km)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서해랑길(김소희생가)로 되돌아가란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럴 생각이 없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해안길보다는 문화재인 인촌 김성수선생의 생가를 둘러보는 것이 더 바람직했기 때문이다.

 버스정류장 맞은편.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인 손화중 피체지(孫華仲 被逮地)’ 표지판이 세워져있다. 고창지역을 근거로 활동한 손화중은 전봉준·김개남과 함께 대표적인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로 꼽힌다. 나주성 싸움에서 패한 뒤 도망 다니던 손화중이 이 근처 이씨 재실에 숨어 있다가 재실지기의 고발로 체포당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손화중 스스로가 재실지기에게 자신을 고발하여 상금을 받으라고 권유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2 : 03. 잠시 후 이번에는 와우형 지형이라는 고잔마을을 지난다. 소의 머리, 등허리, 꼬리에 해당하는 모양이 남향으로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마을이다. ‘당산굿 줄다리기로도 유명한데, 줄을 잡아당겨야 누워 있는 소가 일어난다고 하여 줄 당기는 것으로 정성을 들인다고 한다.(사진은 마을경로당)

 계속해서 ‘734번 지방도를 따라 북향한다. 길은 인촌로란 이름표를 달았다. 인촌 김성수의 생가로 이어지는 길다운 발상이라 하겠다. 하나 더. 인촌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면서 길의 이름 또한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진마마을의 미당길과는 달리 인촌로는 아직까지 본래의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12 : 10.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인촌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봉암리(鳳岩里)’를 구성하는 4개 자연부락(인촌·봉오·죽도·고당 또는 할미당) 중 하나로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의 생가가 이곳에 있다. 김성수의 인촌(仁村)’이란 호는 그가 태어난 이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

 동구 밖 정자나무는 하나가 아니고 두 그루나 된다. 소나무(수령 224)와 느티나무(수령 231)로 수종이 다르지만 하도 오래 묵다보니 굵기가 장난이 아니다. 둘 모두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늘에 참새방앗간인 정자(仁村亭)까지 지어놓았다.

 12 : 16. 300m쯤 들어갔을까 솟을대문의 거대한 저택이 반긴다.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이자 정치·언론·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 근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955)의 생가이다. 또한 김성수와 동생이자 민족자본 육성의 대표자인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 1896-1979)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1907년 봄, 이 고장을 휩쓴 화적떼의 행패로 부안군 줄포로 이사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위탁하여 보존해 오다 1977년 김연수가 옛 모습 그대로 보수·복원했다.

 안내판은 이곳에서 태어난 김성수·김연수 형제의 화려한 이력을 적고 있었다. 경성방직주식회사와 동아일보, 삼양사, 중앙고등학교,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를 세우고 경영해왔단다. 하지만 전라북도 기념물(39)임을 알리는 공식 안내판에는 그네들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서도 적고 있었다. 맞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던 1937년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김성수는 철저히 일본 제국주의 편에 섰다. 막대한 국방헌금을 냈고 전쟁을 미화하는 시국강연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 일제의 전쟁 동원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조선 청년들의 징병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언론에 여러 차례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해방 이후 승승장구했다. 미군정의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선임되는가 하면,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우익의 거물 정치인으로 우뚝 서게 된다. 그러다 6.25 전쟁의 혼란 속 부통령으로 추대되기까지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작은댁(수당 김연수의 옛집) 사랑채. 1903년 김성수의 친부인 지산(芝山) 김경중(金璟中)이 지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사랑채 앞에 작은 아들인 김연수와 함께 김경중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풍수전문가들의 얘깃거리로 자주 등장하는 이 있다. ‘진응수(進應水)’로 길지의 증거가 되고 그러한 땅은 삼정승을 배출한다는 것이다.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를 그 증거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김연수의 아들인 김상협 국무총리는 다른 하나일 수도 있겠다. 그럼 나머지 한 명은 언제 태어나게 될까?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일 따름인데...

 문간채를 지나면 작은댁 안채. 1881년 김성수의 조부 낙제(樂薺) 김요협(金堯莢)이 건립했다. 인촌 김성수와 수당 김연수 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마루에는 전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이자 20대 및 21대 국회의원인 정운천씨가 이곳에서 태어났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놓여있었다. 김성수와 친척인 그는 김성수가 설립한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뒤 김성수처럼 정치가의 길을 걷고 있다.

 작은댁과 큰댁은 통로문으로 연결된다. 외부로는 솟을대문을 따로 두었다. 인촌 생가는 긴 직사각형의 대지 위에다 낮은 담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는 큰댁, 남쪽에는 작은댁을 배치했다. 한 대지에서 독립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이하다. 생가 규모도 커서 조선 후기 전라도 지방 토호의 부유한 거주 환경 및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단다.

 김성수의 양부인 원파(圓坡) 김기중(金祺中)이 지었다는 문간채를 지나면 큰집 사랑채. 1879년 김성수의 조부 낙제 김요협이 건립했다. 참고로 좁은 의미의 김성수 생가는 이곳 큰댁을 말한다. 김성수의 큰아버지(김기중)과 아버지(김경중)가 한 울타리 안에서 위채와 아래채로 나누어 살았는데, 김성수가 아들이 없는 김기중에게 양자를 갔기 때문이다. 김경중의 집은 작은 아들인 김연수가 물려받았음은 당연하다.

 사랑채 앞의 동상. 왼쪽부터 인촌 김성수, 김상만의 부인 고현남, 김상만, 김성수의 양부인 원파(圓坡) 김기중(金祺中) 순이다. 참고로 김상만(1910~1994)은 인촌의 장남으로 해방 이후 동아일보 사장, 국제신문협회 본부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또 다른 문간채를 지나면 큰댁 안채. 1861년 김성수의 조부 낙제 김요협이 건립했다. 생가는 아름다운 굴뚝과 꽃담도 잠깐의 볼거리로 충분했다. 기와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패턴이 얼마나 많은지를 자랑하려는 듯 보무도 당당히 서있다.

 12 : 37. 도로(734번 지방도)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북쪽 방향이다.

 12 : 45. 8분쯤 후 도착한 농원마을은 법정 동리인 상암리(象岩里)’를 구성하는 7개 자연부락(석암·원당·쥐섬·농원·신농원·반월·상포) 중 하나로, 1954년 사람들이 정착하여 농원(農園)을 조성하면서 이룬 마을이다. ‘은흥촌(恩興村)’으로도 불리는데 초등학교(봉암)와 보건진료소가 들어서 있었다.

 12 : 48-12 : 58. 마을에 들어서니 봉암삼거리건강원 주인아주머니가 커피를 대접하겠다며 붙잡는다. 여섯이나 되는 인원이 부담스럽지도 않는지.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따끈따끈한 국산차를 대접한다. 객지에서 살다가 귀향했다는 50대 주부인데 자신의 고향을 찾은 외지인들이 고마워서 무언가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다. 따뜻한 인심에 이끌려 한참이나 한담을 즐기다 다시 길을 나섰다.

 12 : 59. 상암 보건진료소를 지난다.

 왼편에는 상암저수지가 있다. 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간척지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소중한 수원이다.

 북진(北進)을 고집하던 도로가 농원마을을 지나면서 동진으로 바뀐다. 바닷가를 떠나 내륙으로 들어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 어디쯤에서 서해랑길로 빠져나가야 한다.

 13 : 15. 내 예상은 옳았다. ‘신촌마을 버스정류장 앞에서 도로가 둘로 나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부안면소재지로 가는 734번 지방도(인촌로)를 버리고 바닷가로 나아가는 수앙·신촌길을 따르기로 했다.

 하룻밤 머물러보고 싶을 정도로 잘 지어진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한때 나는 홍천 농장에 저런 한옥을 짓고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아직까지도 서울 근교의 산속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한옥에 대한 로망까지 포기하지는 못했지만...

 첫 번째 사거리(13:22)에서는 오른쪽이다. 사포리를 향해 바닷가로 가는 길(사포상암로). 진행방향 저 멀리에 거대한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게 방장산이라는 것은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도움을 받고서야 알 수 있었다. 오래전이지만 지금처럼 눈이 수북이 쌓인 겨울철에 저 산을 올랐었다. 하지만 지리에 어두운 난 산만 내려오면 그게 어디에 붙어있는지를 금방 잊어버린다.

 순백의 들녘 너머는 곰소만(고창에서는 줄포만이라고 할 것이다). 그 뒤를 변산반도의 험준한 산봉우리들이 받쳐주는데, 저 봉우리 사이 계곡 어디쯤에 전나무길이 일품인 내소사가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철새 무리가 떼를 지어 하늘을 난다. 맹추위에 쫓겨 더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가는지도 모르겠다.

 14 : 06. 드디어 서해랑길과 마주한다. 줄포만에 이른 것이다. 정확히는 갈곡천의 하구역(또는 汽水域)쯤 되겠다. 갈곡천(葛谷川)은 고창 신림면(가평리)의 방장산에서 발원하여 부안면 중흥리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15.77km 길이의 하천이다. ! 오는 도중 양지바른 곳에 앉아 20분 동안이나 새참을 즐기기도 했다.

 서해랑길 표식은 자전거도로 안내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서해랑길과 저전거길이 겹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방향을 헷갈리게 만드는 못된 이정표(상암리와 김소희생가의 방향을 바꿔놓았다)도 눈길을 끈다.

 이후부터는 갈곡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바다도 아닌 것이 강도 아닌 것이 몸집만 몽땅 부풀려놓았었던 모양이다. 양안에 방조제를 쌓아 들녘을 만들어놓았다. 길은 그 방조제 위로 나있다.

 이즈음 우린 유난히도 많은 저수지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해수인지 아니면 담수인지는 몰라도 크고 작은 저수지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서해랑길을 만나면서 고창 갯벌을 마주한다. 고창 갯벌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자연유산이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자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다. 갯벌 면적은 55.31. 고창갯벌센터가 있는 만돌 해변(41코스)에서 시작해 부안 땅 앞까지다.

 길은 갈곡천을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천은 거슬러 올라갈수록 몸매를 줄여나간다. 그러더니 이내 갯고랑으로 변해버린다.

 14 : 15. 수양배수장. 둑을 쌓아 들녘을 만들어내는 간척사업에서 빠질 수 없는 시설이다.

 오른쪽으로는 그 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들녘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종점에 가까워지면서 갈대꽃의 군무가 길손을 반긴다. 맞다. 43코스의 종반은 아름다운 갈곡천을 따라 걸으며 갯벌과 갈대를 동시에 구경할 수 있는 구간이라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갈대 너머로 내장산이 거대한 몸짓을 드러내면서 춤사위에 흥을 돋운다.

 오늘은 폭설주의보에 잔뜩 쫄아 코스를 1/3이나 줄였다. 그런 결정이 마음까지도 한껏 여유롭게 만들었나보다. 눈에 들어오는 사물마다 아름다움으로 포장되는 걸 보면 말이다.

 갈대로 한가득인 갈곡천 갯고랑 너머로는 후포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우리가 따르고자 했던 해안문화마실길은 저 마을을 지나 목우마을까지 간다.

 14 : 30. 아까 갈곡천의 하구역에서 헤어졌던 사포·상암로와 다시 만났다. 길가 이정표(김소희생가 0.2km/ 부안면방향/ 미당시문학관 13.2km)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갈곡천을 건너란다.

 갈곡천에는 배수관문이 설치되어 다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 바다와 경계를 나누는 셈이다.

 배수갑문은 전망대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줄포만을 향해 나아가는 갯고랑이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낸다.

 조류 관찰대도 만들어 놓았다. 맞다. 이곳 갈곡천에는 멸종위기야생동물 1급인 황새, 매와 2급인 검은목두루미, 말똥가리, 새홀리기 등 7종의 희귀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침수지는 갈대만 무성할 뿐 텅 비어 있었다. 전문가들이 확인했다던 그 철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4 : 35. 서해랑길 표식이 사포마을에 잠시 들렀다가란다. 김소희 명창의 생가가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느냐면서. 맞다. 고창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김소희는 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하늘이 내린 목소리로 유명한 명창이다. MZ세대들에게야 낯설겠지만 우리네 소리를 좋아하는 장년층에게는 요즘의 아이돌만큼이나 인기가 높았었다. 하나 더. 이밖에도 고창은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 신재효 선생과 그가 사랑했던 제자 진채선이 태어나 곳이기도 하다.

 생가는 정면 4, 측면 한 칸의 ''자형 안집과 헛간채로 이루어진 초가집이다. 부자까지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먹고살만한 살림살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진마마을에서 살던 서정주의 집만큼은 아니었던 듯. 같은 초가집이지만 격자무늬 방문을 달았던 서정주의 집과는 달리 김소희의 집은 소박한 띠살문을 달았다. 우리네 기억속의 고향집처럼...

 문루 중앙. 편액 대신 사진을 걸었다. 문득 김소희의 판소리에는 희다가 겨운 백자의 옥빛이 어려 있다던 미당 서정주의 칭찬이 떠오른 것은 그녀의 단아한 얼굴 때문이었을까?

 1917년 이곳에서 태어난 만정(晩汀) 김소희(金素姬, 본명은 김순옥) 13세에 광주로 가서 명창 송만갑의 제자로 국악에 입문했다. 15세에 서울로 올라가 조선성악연구소에서 정정열 등에게 소리··기악을 두루 배우면서 명창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창극좌 입단(1937)여성국악동호회 조직과 한국민속예술학원 창설(1945)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보유자 지정(1964)국악협회 이사장(1993) 등을 거치면서 일생을 국악 발전에 바쳤다. 1995년 향년 79세로 타계했다.

 길은 우리를 사포마을로 인도한다. 법정 동리인 사포리를 구성하는 5개 자연부락(사포·고사리바탕·새터·술항골·회목) 중 하나로 사포(沙浦)’라는 지명은 갯가에 모래가 많다는 데서 유래했다. 어선의 접안이 편리해서 19세기까지 흥덕골에서 거둬들인 세미를 쌓아두던 창고가 들어서 있는 등 호황을 누렸으나 토사의 유입으로 폐항(廢港)되었다고 한다.

 14 : 45. 사포경로당과 반석교회를 차례로 지나면 어느덧 사포마을 버스정류장’. 서해랑길 43코스의 여정은 끝을 맺는다. 서해랑길(부안 44코스) 안내도는 정류장에 기대듯 세워져 있다.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11.61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미당 시문학관과 김성수 생가, 김소월 생가 등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버스정류장 뒤에는 무명의병충의위령탑이 들어서 있었다. 정유재란(1597) 때 왜군의 조총·화총에 맞서 죽창·화살로 싸우다 전멸한 무영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최일수라는 독지가가 세운 탑이란다.

 그 옆에는 해주최씨 가문에서 삼강문을 세워놓았다. 삼강(三綱)이란 한나라의 동중서와 반고가 인간관계의 기본으로 강조한 세 가지 덕목(··)이다. 이 집안은 정유재란 때의 의병장 최서생을 충(), 그의 아들인 기종을 효(), 그리고 열()은 서생의 부인 문화유씨를 내세운다. 화순에 살던 유씨는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인 기종과 종인 순동을 데리고 70여 킬로나 떨어진 이곳까지 와 아들을 순동에게 부탁한 다음 사진포(사포)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유씨의 열행비 옆에 노비 순동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했다. 지독한 감기로 요 며칠 고생하고 있으면서도 내 곁을 지켜주겠다며 부득부득 따라나섰다.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받는 것보다는 더 많이 베푸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는 미국 코넬대학 교수이자, 인간생태학분야의 최고권위자인 칼 필레머(Karl Pillemer)’의 주장을 실천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서해랑길 41코스(구시포해변-심원면사무소)

 

여 행 일 : ‘23. 11. 11()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법성면·홍농읍 및 전북 고창군 상하면 일원

여행코스 : 구시포해변명사십리해변동호해변서해안바람공원람사르고창갯벌센터심원면사무소(거리/시간 : 19.7km, 실제는 명사십리해변에서 갯벌센터까지 14.77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1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고창의 서쪽 해안을 따라 걷는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명사십리해변과 장호해변, 바람공원, 갯벌식물원 등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구시포해수욕장(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서해안고속도로 고창 IC에서 내려와 15번 지방도(아산방면), 대동교차로에서 733번 지방도(해리방면), 지로삼거리에서 22번 국도(법성포방면), 상하교차로에서 다시 733번 지방도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구시포해수욕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고창41코스) 안내도는 군청 이동봉사실 앞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고창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걷는다. 구간 거리가 19.7km로 다소 긴 편이나, 전체가 평지길이라서 걷는데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난 5km쯤 단축해 법장천 배수갑문(지도에서 두 번째 파인 지점)부터 걸었다. 12km를 한도로 걷고 있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다. 이런 엄동설한에 혼자 걷는 시간이라도 줄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구시포 해변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해넘이라고 했다. 저물어가는 해가 가막섬에 걸치면서 만들어내는 노을은 우리나라 최고의 일몰 명소로 손색이 없단다. 그런데 그 가막섬이 방파제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산악회 버스를 타고 들어온 가막섬에는 항구가 들어서 있었다. 조수간만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바다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고나 할까? 하지만 난 와인 잔을 형상화 한 등대가 더 흥미롭다. 이곳 고창은 복분자의 고장. 등대는 복분자로 만든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으로 가득 채워놓은 모양새이다.

 그런데 저 호랑나비 조형물은 무엇을 의미는 걸까? 어쩌면 이곳 고창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임을 알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올해 봄 호랑나비가 보여주는 자연의 신비, 호랑나비야 돌아와라는 주제로 호랑나비에 관한 전시회까지 열리지 않았던가.

 해상펜션이란다. 다른 지역은 낚시꾼들이 이용하는 게 보통인데, 이곳은 주로 갯벌체험을 온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머문다고 한다. 아늑하게 생긴 돔 안에 취침·취사 시설은 물론이고 샤워가 가능한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갑판에서 바비큐 파티까지 가능하다나?

 또 하나의 포인트인 장호 갯벌체험장은 출발지로 가는 도중 차를 잠시 멈추고 둘러봤다. 위도를 마주보고 있는 장호마을 앞바다 갯벌은 마을 어촌계 소유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활동은 많은 부분에서 제약을 받는다. 소정의 금액을 낸 이들만 너른 갯벌에서 큼지막한 동죽조개를 캐고, 단단한 모래사장에서 승마체험을 할 수 있다.

 해변으로 내려서자 명사십리로 불리는 하얀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진다. 자를 대고 그린 듯한 직선의 길이가 무려 8.5km에 달한다니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이 특징인 서·남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라 하겠다. 덕분에 해변승마를 즐기려는 승마동호인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바닥이 단단한데다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해변이 길기까지 해 말을 타고 달리기에 딱 좋다는 것이다. 장호마을에는 외승 체험이 가능한 해변승마클럽도 있다.

 해변은 각종 체험을 하려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고 했다. 하지만 제철이 아니어선지 모래사장은 텅 비어있었다. 하나 더, 백제시대 상로현이었던 이 지역은 신라시대인 757(경덕왕 16) ‘장사현으로 이름을 바꾼다. 연안에 길고 넓은 모래사장이 있어 길 장()’ 모래 사()’를 썼다. 그게 인근 무송현과 합쳐지면서 무장현이 됐고, 지금은 그마저도 없어지고 상하면 해리면이 됐지만...

 장호어촌 체험마을은 이곳(주민들은 해변쉼터라 부른다) 말고도 갯벌체험장(마을에 있다)과 명사십리 해양파크를 포함한다. 체험활동도 조개채취나 승마체험 말고도 어망체험이나 후릿그물체험, 고개껍질꾸미기, 새우잡이 등이 진행된다.

 12 : 18-20. 실제 출발지는 법장천 배수갑문’. 41코스 시작점(구시포)에서 5.5km쯤 떨어진 지점으로, 12km를 한도로 트레킹을 이어가고 있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참고로 집사람은 시작점에서 9.3km쯤 떨어진 전북수산기술연구소에서 출발했다.

 길가 이정표는 서해랑길이 국가생태문화탐방로와 함께 쓰고 있음을 알려준다. 행정구역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고창군을 구석구석 돌아 볼 수 있는 탐방로로 내륙습지인 운곡습지와 연안습지인 고창 갯벌습지, 고창읍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창 고인돌유적지 등을 걸으며, 고창의 역사와 문화, 생태계가 공존하고 있는 자연환경을 직접 느껴볼 수 있다.

 오른편은 법장천(고창군 해리면 사반리 기슭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하천)의 유수지. 방조제에 갇힌 물길은 꽤 넓은 호수를 만들었다. 그 뒤로는 방조제를 쌓아 만든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12 : 20. 북쪽으로 난 명사십리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참고로 법장천 배수갑문은 상하면과 해리면의 경계이다. 상하면의 장호리에서 해리면의 사반리로 넘어간다. 그러니 41코스의 상하면 구간은 버스로 이동했다고 보면 되겠다.

 이 구간은 걷는 내내 소나무 숲과 함께한다. 명사십리 해변은 개방형 조간대(朝間帶)라고 한다. 계절풍의 영향으로 모래 공급이 쉬워 바닷가에 풍성사구가 형성됐다. 이 해안사구에 방풍림 역할을 하는 해송 숲이 들어섰는데, 도로가 이 숲을 헤집으며 나있는 것이다.

 12 : 31. 명사십리를 포함하는 이 구간은 조망 좋기로 입소문을 탔다. 저녁이면 바다는 노을로 덧씌워지기까지 한단다. 그런 명소를 지자체가 그냥 놓아두었을 리가 없다. 곳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여행객들을 끌어 모은다.

 난간에 서면 확 트인 바다와 어우러지는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때만 잘 맞추면 저 멀리 위도 너머로 떨어져가는 해를 볼 수도 있단다. 온 세상을 물들여버리는 저녁노을은 덤이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저 멀리 변산반도가 놓여있다. 하나 더. 이곳도 역시 해변이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일직선으로 뻗어나간다. 모래의 질도 특이하다고 했다. 다른 곳처럼 발이 푹푹 빠지는 게 아니라, 판판하게 다져진 게 걷기에 딱 좋단다.

 도로 주변 곳곳에 들어선 아기자기한 펜션들도 명사십리 해안도로를 꾸며주는 멋진 풍경이 된다.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을 베개 삼아 하룻밤 동화속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것도 유쾌한 일이겠다.

 12 : 41. 서해랑길을 걷다보면 각 지역에서 대표 음식을 만난다. 그동안 목포의 홍어를 비롯 증도 짱뚱어, 무안 낙지, 영광 굴비 등을 만났었다. 일부는 어떤 형태로든 조금씩 맛까지 보면서 지나왔음은 물론이다. 이곳 고창은 장어라고 했다. 그래선지 길가 곳곳에 장어집이 들어서 있었다.

 저건 상부마을(광승리) 포구쯤 되겠다. 물양장은 물론이고 선착장까지도 갖지 못했지만, 꼬맹이 어선 몇 척이 출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다. 이 일대는 칠산어장의 배후지역으로 예로부터 조기, 꽃게 등 어족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12 : 46. ‘명사십리 해양파크라고 한다. 인근 동호·구시포해수욕장 등 관광지와 연계한 어민 소득 창출을 위해 세운 시설로, 갯벌체험 후 씻는 샤워장이나 공연장 말고도 냉동창고 등 수산물 처리가공시설과 수산물 판매장, 횟집, 토산품 판매점 등을 갖추었다. 일종의 어촌 종합유통센터라고나 할까?

 2009년 문을 열었다는 해양파크는 수산물처리가공시설과 수산물판매장, 횟집 등을 포함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근처에 포구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늦어도 많이 늦었지만, 공사가 한창인 저 방파제가 그 대안이 아닐까 싶다. 어선의 접안이 가능해질 테니 말이다.

 12 : 50. 조금 더 걷자 길이 바닷가를 떠난다. 그리고는 내륙의 작은 고갯마루를 넘는다. 좋은 바닷가를 놓아두고 에둘러 돌아가는 이유가 뭘까?

 12 : 54. 이유는 간단했다. 바닷가에 들어앉은 저 전북 수산기술연구소’. 저렇게 큰 시설이 바닷가를 독차지하고 있으니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13 : 05. ‘동호해변에 이른다. 줄포만(곰소만)과 맞닿아 있는 해안으로 백사장을 따라 늘어선 수백 년 된 해송 숲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탐방로는 명사십리로를 따른다. 하지만 난 조망도 즐길 겸해서 해변을 걸어볼 것을 권해본다. 백사장과 해송 숲 사이에 야자매트를 깔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는 계속해서 위도가 따라온다. 거기에 쌍여도(미여도)’가 빈 여백을 채운다. 명사십리에서 첫 선을 보일 때만 해도 점으로 나타나더니 어느새 몸집을 부풀렸다.

 해수욕장에 가까워지자 조금은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바다와 백사장, 관광객 시설, 상가 등의 순서로 돼 있는 여느 해수욕장들과는 달리, 이곳은 상가는 저 안쪽에 있고 상가와 백사장 사이를 소나무 숲이 메우고 있었다. ‘숨겨진 해수욕장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 입구의 안내판을 한번쯤 살펴보고 해수욕장으로 들어가자는 것을 깜빡 빼먹을 뻔 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당신은 이 지역 유일의 해신당인 영신당을 살펴볼 수 있다.

 국민여가캠핑장이란다. 해변 레저는 자동차 캠핑이 대세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체감온도가 영하 20도까지 내려갈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에도 숲속 곳곳에 캠핑족들이 들어가 있었다. 텐트는 웬만한 방갈로 저리 가라는 크기. 저 안에는 테이블과 의자는 물론, 그릴, 휴대용 냉장고, 조명까지 없는 게 없다고 했다.

 동호해수욕장은 드넓은 백사장을 자랑한다. 백사장 남쪽 끝에 있는 수산기술연구소까지의 거리는 약 1.5km. 결코 짧지 않은 거리다. 백사장 뒤쪽으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가지런히 서 있는데다 수심이 0.5~1.5m로 어린이들도 안심하고 물놀이를 즐길 수 있어 가족 피서지로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세면대와 화장실, 민박, 식당 등의 편의시설도 여느 유명 해수욕장에 못지않게 잘 갖추어져 있다.

 동호해변의 갯벌은 동죽과 바지락이 지천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해수욕장의 조형물도 동죽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바닷가로 나가본다. 맞은편에는 위도와 쌍여도(미여도), 북쪽으로 뻗어나간 해수욕장의 끝에는 외죽도가 놓여있다. 부안면 앞바다에 떠있는 내죽도에 대비되는 이름으로 대죽도 소죽도로 구성된다. 간조 때 갯벌이 드러나면 걸어서도 섬에 들어갈 수 있단다.

 동호해변은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모래찜질하기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바닷물의 염도가 높아 피부병과 신경통 환자들이 많이 찾아온단다. 그래서일까? 해수욕장 주변의 시설지구는 성업 중이었다. 민박과 펜션 등 숙박업소는 물론이고, 음식점에 카페까지 웬만한 편의시설은 다 들어섰다. 모두 다 문을 열고 손님을 맞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체험센터를 지나자 굴을 뚫고 있었다. 탐방로는 터널 앞에서 오른편으로 간다. 하지만 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영신당이 있을 밥한 산등성이로 올라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다. 그리고 길을 찾기도 했다. 그런데 이 길이 웃자란 잡초와 잡목으로 뒤덮여 통행이 불가능하니 문제다.

 그나마 친절한 주민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랄까? 지자체의 게으른 행정에 툴툴거리는데 마실 나온 주민이 동호마을 쪽으로 100m쯤 더 가면 길이 잘 나있다고 알려준다.

 13 : 27.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100m쯤 더 가니 구동호마을’. 초입에서 산등성이로 올라가는 길이 왼쪽으로 갈려나가고 있었다. 이어서 200m쯤 올라가니 조성공사가 한창인 전망공원이 나온다.

 13 : 30. 전망공원의 중심은 원형전망대이다. 돌출된 암벽지대에 2층의 메인 건물을 짓고, 바다를 향해 길게 대를 쌓았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동호해안의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탐방로 조성공사가 한창인 현장을 100m쯤 더 걷자 숲속에 숨어있던 영신당이 얼굴을 내민다. 이 고장 유일의 해신당으로, 해마다 풍어와 어민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단다.

 사랑꾼인 집사람은 오늘도 바쁘다. 4km쯤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은 양지바른 곳에서 냉이를 캐고 있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나와 잠깐 캤다는데 벌써 한 움큼이다. 서방님 밥상에 올릴 생각에 추위까지도 잊었나보다.

 13 : 42. 10분 남짓의 시간을 투자해 전망공원과 해신당을 둘러본 다음 구동호마을로 내려선다. 법정 동리인 동호리(冬湖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지만, ‘옛 구()’자가 좁은 의미의 동호리였음을 알려준다. 참고로 동호리는 가재지(歌子洞구동호(舊冬湖남부(南部삼양동(三養洞신동호(新冬湖)  5개의 행정리와 가재지·신흥·구동호·남부·삼양동·신동호·소리개 등 7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에는 동백정(冬柏亭)’이란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동호마을의 옛 이름인데 마을에 동백나무가 무성한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이후 변산반도 방향의 바다가 호수처럼 보인다하여 호수 호(‘)’자를 덧대 동호(冬湖)’가 되었단다. 이곳 동호가 우리가 흔히 만나게 되는 동서남북의 동호(東湖)가 아닌 동백 꽃 바다가 된 이유이다.

 동호항은 먼발치서 바라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응룡(상하면 계산서원 배향)의 발자취가 서린 포구다. 고창지역에서 모은 군량미를 이곳 동호항을 통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행주산성으로 보냈다고 전해진다.

 13 : 46. 동호마을 앞에서 방조제 둑길을 탄다. 흐드러지게 핀 갈대꽃이 길손을 반기는 아름다운 구간이다.

 오른편은 온통 대하양식장이다. 반면에 왼쪽은 줄포만을 사이에 두고 변산반도가 기다랗게 펼쳐진다.

 13 : 55. 77번 국도(동호로)로 올라선다. 한반도의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L"자형으로 이어지다보니 이곳까지 연결되어 있었나 보다. 하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국도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줄포만에 떠있는 저 섬의 정체는 뭘까? 파도에 깎여나간 듯 손바닥만 한 땅덩어리가 만조의 바다를 뚫고 솟아올랐다.

 14: 00. 삼양동(三養洞) 마을에 이르자 동호 배수갑문이 얼굴을 내민다. 선착장은 없지만 이 부근은 삼양동 어민들의 포구로 이용된다.

 14 : 03. 몇 걸음 더 걸어 도착한 동호교차로에는 유리창까지 두른 정자 외에도 간척지준공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해리천 하구에 방조제를 쌓아 간척지를 만든 걸 기념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참고로 해리천(海里川)은 무장면 월림리 산기슭에서 발원해 해리면을 관류, 심원면 궁산리까지 14.1km를 흘러 서해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서해랑길 이정표가 변신을 했다. 시점과 종점을 먼저 적고, 그 하단에 다음 행선지를 적던 기존과는 달리, 이번 코스의 것들은 다음에 만나게 될 주요 포인트만 적고 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시도가 개선이 아니라 개악으로 보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오해일까?

 동호교차로에서 국도를 벗어난 탐방로는 이제 애향갯벌로를 탄다. 초입의 700m구간은 방조제. 배수갑문이 두 개나 만들어져 있었다. 하나 더. 해리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 방조제를 건너 심원면(고전리)으로 간다.

 아니나 다를까 간척사업은 엄청나게 너른 들녘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게 유수지와 습지로 방치되고 있었다. 고창군 전체가 생물권보전지역이란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습지는 새들의 낙원이 되었다. 텃새와 철새가 함께 관찰되는데, 우리가 간 날에는 왜가리와 오리가 떼를 지어 먹이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얼굴을 내민다는 황새는 눈에 띄지 않았다.

 왼쪽으로는 줄포만이 펼쳐진다. 아니 줄포만의 입구쯤으로 보는 게 옳겠다.

 14 : 12. 방조제 끝에는 고창컨트리클럽이 있다. ‘+3을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골프장으로, 정규 18홀 외에 12’ 3홀을 더 두어 성수기 등 경기 지연 시 고객 불만을 해소시켜준다고 했다. 18홀 플레이만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골퍼에게는 멋진 보너스가 될 것이고.

 국가생태문화탐방로 이정표는 오른쪽에 삼양염전이 있음을 알려준다. 삼양사의 창업주인  김연수(金秊洙)씨가 창업한 천일염전인데, 이 일대의 염전이 하도 넓다보니 마을의 이름까지도 염전마을(심원면 고전리)’이 되었단다. 주민들은 빛나는 순백의 소금밭 풍경을 일러 고창 속 은자(隱者)의 나라라고 부르고 있었다.

 14 : 15. 몇 걸음 더 걷다가 소나무 숲(이정표 : 바람공원 2km/ 동호해수욕장 2.5km)으로 들어간다. 방풍림으로 조성해놓은 것 같은데, 어른의 허리통보다도 더 굵은 소나무들이 해안을 따라 숲을 이루고 있다. 길은 숲속을 요리조리 다니다가 바다 쪽으로 시야가 열리기도 한다.

 검은머리 물떼새 형상을 한 방향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이밖에도 참조롱이·큰고니·노랑부리저어새 등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답게 고창 갯벌을 찾아오는 철새들을 모티브로 삼아 이정표를 만들고 있었다.

 탐방로는 한마디로 멋졌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테크 로드를 내놓았는가 하면 곳곳에 벤치를 놓아 쉬엄쉬엄 돌아볼 수 있도록 했다. 거기다 숲속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에 대한 안내판까지 세워놓아 읽을거리까지 제공한다.

 이 멋고?’ 낯선 풍경 하나가 길 걷던 중생에게 화두로 다가온다. 바닷가에 길게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중간의 한 지점을 터 바닷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어 봐도 그 용도가 감도 잡히지 않는다.

 14 : 25. ‘서해안 바람공원에 닿았다. 이름대로 시원한 바닷바람과 서해안의 일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공원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으로, (바람 및 해넘이)광장, 산책로, 전망대,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전망대에 오르자 외죽도(外竹島)의 두 섬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줄포만의 안쪽, 깊숙이 들어앉은 내죽도(內竹島)’에 대비되는 지명으로 대()죽도와 소()죽도를 포함한다. 또 하나. 소죽도는 무인도인 반면 대죽도는 1가구 1명이 거주하고 있단다.

 바람을 상징하는 풍차도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거센 바람에도 날개가 미동조차 않는 돌지 않는 풍차. 그래서일까? 문득 사랑도 했다. 미워도 했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로 시작되는 문주란의 노래가 떠오른다.

 바람개비도 여러 개 장착했다. 그러나 이 역시도 돌아가지 않는다. 이 지역은 바람 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니 소형 풍력발전기를 배치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친환경 분산형 전원 확대와 지자체 에너지전환 주도에 발맞추는 한편, 주변 공공시설에도 전력을 공급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난간에 매달린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이 부근 해안에 길이 1.3km( 40~70m) 쉐니어(chenier)’ 지형이 발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쉐니어란 태풍이나 조류에 의해 갯벌위에 모래와 자갈이 육지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만들어지는 독특한 퇴적지형을 말한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움직이는 섬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볼 수는 없었다. 바다는 만조에 가깝게 물이 차있다. 그러니 바다와 바다 사이에 모래톱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런데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만 펼쳐질 따름이다. 더 놓은 곳에 올라야만 쉐니어를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탐방로는 또 다시 숲속을 걷는다. 제방의 둑처럼 도톰하니 솟아오른 부분을 따라 1.4km 정도의 산책로가 나있다. 둑의 양옆에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가히 최고의 산책로라 하겠다.

 하지만 그런 호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야간 산책을 위한 조명공사를 하느라 길을 온통 헤집어놓았다.

 덕분에 도로(애향갯벌로)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부담스러워할 필요는 없다. 2차선이지만 가장자리를 따라 보도를 따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새옹지마라고 딱딱한 아스팔트 도로를 걷는 대신 눈은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오른쪽에 갈대로 가득한 습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4 : 45. 이번에는 세계자연유산인 고창갯벌을 홍보하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2층의 대를 세우고 그 위해 하얀 그늘막이 있는 전망대를 얹었다.

 전망대에 오르면 건장한 수탉과 암탉 그 뒤를 졸졸 따르고 있는 병아리 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근처에 계명산(雞鳴山)’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계명산에서 닭이 울면 중국 땅에서도 들린다고 했으니 말이다.

 만돌마을과 그 주변에 있는 명소들은 만화로 전하고 있었다. 그 구심점인 고창갯벌을 빼먹었을 리가 있겠는가. ‘람사르 습지이면서 유네스코 생물권보전 핵심지역이고, ‘세계자연유산 등재예정구역이기도 하단다.

 난간에 서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소 죽도는 물론이고, 그 뒤에 있는 위도와 쌍여도 등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만조 때라서 전망대의 주제인 고창 갯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망대가 전하고자 했던 계명산 7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앞에 대를 쌓고 또 하나의 전망대를 얹었다. 이곳과는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14 : 51. 잠시 후 도착한 계명산 전망대. 관찰데크 아래 공간은 솟대와 농게 등의 조형물 차지다. 계단 등의 이동 공간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망둥어, , 저어새 등 고창 갯벌에서 서식하는 생물들을 이야기판으로 만들어 붙여놓았다.

 이곳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을 담은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외죽도, 염전과 김양식장, 계명산, 만돌마을, 고창갯벌에 관한 얘기들을 가슴속에 담아갈 수 있다.

 앙증맞은 벤치가 눈길을 끈다. 어미고래와 아기고래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양새인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듯이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 어미고래의 얼굴표정이 자상하기 그지없다.

 난간에 서자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만조인데도 이작도의 풀등처럼 모래톱이 물에 잠기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아까 확인해보지 못했던 움직이는 섬 쉐니어(chenier)’가 아닐까 싶다. 1800년 전부터 형성된 모래 퇴적층이라는데, 양쪽 끝부분이 해안선 방향으로 활처럼 휘어져 있고 1967년 처음 관측한 이래 육지 방향으로 조금씩 모래층이 이동하고 있으며 그 모습도 수시로 변한단다.

 이곳도 풍차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지는 않기는 마찬가지다.

 14 : 56. ‘계명산 28.9m에 불과하다. 하지만 제로 레벨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10층짜리 건물의 옥상에 올라간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그렇게 올라선 정상에는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벤치는 물론이고 운동기구까지 배치한 걸 보면 주민들의 쉼터를 겸하고 있는 모양이다.

 계명산(雞鳴山)’ 닭이 우는 산이란 뜻을 지녔다. 옛날에는 달구지로 불리기도 했단다. 아무튼 이곳에서 닭이 울면 그 소리가 중국에 까지 갔다고 한다. 만돌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 산동성 옌타이(煙臺)까지는 대략 390km. 닭 울음소리가 그 멀리까지 갔다는 것은 만돌마을 사람들의 기개와 마을 번영의 염원이 담겨있다고 봐야 한단다.

 반대편으로 난 침목계단 길을 따라 내려가면 만돌마을이다. 만돌(萬突)은 풍수지리설에 따른 지명이다. 장차 굴뚝이 만 개가 솟을 것이라는 예언에서 유래했단다. 마을은 앞으로 드넓은 줄포만(곰소만)이 펼쳐져 있고 대죽도와 함께 멀리 부안군까지 바라볼 수 있어 섬과 갯벌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보지는 못했지만 해질 무렵 펼쳐지는 낙조가 일품으로 알려진다. 천일염 체험, 조개잡이 체험, 고기잡이 체험, 갯벌 버스타기 같은 체험 프로그램도 참여할 수 있단다.

 15 : 00. 마을 앞, 탐방로는 동화속의 네덜란드를 연상시키는 둑길을 따른다. 줄포만과 마을 사이에 둑을 쌓고 그 위에 길을 냈다. 그런데 마을과 갯벌의 높이가 비슷한 것이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바다건너 저 멀리 변산반도의 높은 산들이 반긴다. 변산반도는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곳이다. 지금은 까마득히 보이지만 걷다 보면 어느새 도달해 있을 것이다.

 15 : 12. 마을을 벗어나 드넓은 들녘으로 간다. 아니 방조제 안쪽이긴 하지만 크고 작은 저수지가 길 양옆으로 줄을 잇는 구간이다.

 왼쪽, 호수를 연상시킬 정도로 큰 저 저수지의 용도는 대체 뭘까?

 바람 많은 들녘. 그 한가운데를 지나다 만난 염전은 우릴 색다른 풍경 속으로 인도한다. 소금은 햇볕과 바람을 먹고 자란다. 좋은 햇빛과 좋은 바람이 보석처럼 빛나는 하얀 소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소금밭은 지금 긴 낮잠을 잔다. 뜨겁게 내리 쬘 내년의 뙤약볕을 기다리며...

 15 : 26. 전망타워 비슷한 시설이 보이는가 싶더니 고창 갯벌식물원의 입구에 이른다. 청정지역 고창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갯벌의 고장이다. 2007년 해양수산부로부터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받은 이래, 2011년 람사르 갯벌습지, 2013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2021년에는 유네스코 자연유산에까지 등록됐다. 그러니 어찌 습지식물원 하나쯤 만들어두지 않았겠는가.

 갯벌 습지에는 아까 보았던 전망타워 외에도 생태탐방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함초와 칠면초, 나문재 등 70여 종의 염생식물이 군락을 이룬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과거 고창의 해안은 천연의 해안선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갯벌이었다고 한다. 그게 갯벌에 대한 이용이 많아지면서 축제식 양식장으로 변했다. 간척사업으로 인해 갯벌이 훼손되면서 갯벌 환경 또한 변해갔다. 이곳 갯벌식물원도 축제식 양식장으로 이용되다가 버려진 것을 지자체에서 둑을 터주면서 생태계를 되살렸다고 한다. 바닷물이 다시 흐르면서 칠면초, 해홍나물, 퉁퉁마디 같은 염생식물들이 다시 자리를 잡더란다.

 옛 방파제의 벽화는 어촌의 풍경을 담았다. 동네 아낙네들이 조개를 캐느라 여념이 없다.

 간척지에 들어선 태양광발전소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태양광 모듈의 생김새로 보아 태양의 이동에 맞추어 회전할 수 있지 않나 싶다.

 15 : 40. ‘람사르 고창 갯벌센터에 이른다. 고창 갯벌은 주민들에게는 매번 밟는 땅이자 매일 아침 보는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고창을 방문한 이방인들에게는 밟아보고 싶은 땅이자 경험해보고 싶은 곳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갯벌에 들어가는 우는 범하지 말자. 갯벌을 훼손시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이방인들을 위해 저런 센터를 세웠지 않나 싶다. 갯벌의 생태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갯벌식물원을 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갯벌생태 해설 프로그램도 신청할 수 있다니 말이다.

 15 : 42. 갯벌센터의 뒤쪽. 너른 주차장 한켠에 서해랑길 쉼터가 들어서 있었다. 문제는 서해랑길 안내도가 그 옆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원래의 안내도(고창 42코스) 1km쯤 더 걸어야 하는 심원면사무소 앞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데도 말이다.

 면사무소 앞에 있던 것을 뽑아왔다는 산악회장의 너스레가 아니더라도 이쯤에서 트레킹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구간을 이곳에서 시작하겠다는데 일부러 면사무소까지 찾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에 14.77km를 걸었다고 찍혀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 40코스(법성포-구시포)

 

여 행 일 : ‘23. 11. 11()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법성면·홍농읍 및 전북 고창군 상하면 일원

여행코스 : 법성 버스정류장검산마을홍농읍사무소상삼마을하삼마을고리포구시포해변(거리/시간 : 13.9km, 실제는 14.23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0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고창지역(4km)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보안지역인 원자력발전소를 피해 내륙을 횡단한다. 고창 땅에 있는 고리포와 구시포를 빼면 내놓을만한 볼거리가 없다는 얘기이다.

 

 들머리는 법성 버스정류장(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 신평교차로(영광읍)에서 22번 국고로 바꿔 법성포까지 온다. 복용삼거리에서 좌회전 842번 지방도(영광로)로 옮기면 잠시 후 법성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영광40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근처에 세워놓았다.

 이번 구간은 전라 남·북도의 경계를 넘는 구간이다. 전라남도의 해안(40개 코스, 652.2km)을 숨 가쁘게 달려온 서해랑길이 이 구간에서 전라북도에 바톤을 넘겨준다. 하지만 의미에 비해 볼거리는 빈약하다. 보안구역인 원자력발전소를 피해 내륙을 횡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닷가를 다시 만난 고창에서 아름다운 풍광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길이는 13.7km, 구간 전체가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무척 짧은 거리다. 난이도가 별이 2(5개 가운데)인 이유일 것이다.

 11 : 15. ‘법성3 다리를 건너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갯벌을 돋우어 조성한 뉴타운(2009년 포구 앞, 속칭 걸레바탕을 매립한 뒤 공모로 뽑은 지명이다)과 구도심을 연결한 몇 개의 다리 중 하나이다.

 물 빠진 법성포 앞바다는 갯벌만이 시커멓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물이 차면 저곳은 호수처럼 변한다고 했다.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온 탓에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호남지방을 드나드는 배들의 관문이 되어왔던 이유이다. 하지만 수심이 낮아진데다, 다른 곳에 근대식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들이 들어서면서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한적한 어촌마을로 변해버렸다.

 11 : 18. 다리 건너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길은 굴비의 고장답게 이름까지도 굴비로이다. 무늬만 굴비인 게 아니다. ‘굴비를 브랜드로 내건 도로답게 들어선 음식점이나 건어물가게의 이름도 하나같이 굴비를 내걸었다.

 영광군은 신재생에너지 산업클러스터를 꿈꾸는 고장이다. 우리나라의 4개 원자력발전단지 중 하나가 이곳 영광에 있는가 하면, 드넓은 바닷가를 따라 태양광발전단지와 풍력발전단지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하지만 영광의 주민 모두가 찬성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정부 정책에 반대해 세종시 정부청사 앞으로 달려가자는 걸 보면...

 에이~ 조기가 아니라 갈치네’. 누군가의 말마따나 다리(보행교인 한두름교’)를 덧씌운 조형물이 갈치처럼 길쭉하게 생겼다. 각설하고 간이 잘 된 영광굴비는 살이 눅눅하지 않아 담백한 맛이 난다. 질이 좋은 소금으로 염장하기 때문이란다. 재료가 되는 조기도 중요하다. 신안에서 영광을 거쳐 부안에 이르는 길은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파시(波市)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곳이었다. 해마다 알을 밴 조기들이 칠산 앞바다를 지나 북쪽으로 향했고, 이게 최고의 굴비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을 배기도 전에 남중국해에서 대부분이 잡혀버린다. 요즘은 수산시장을 돌며 사들인 조기가 굴비의 원료가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영광굴비가 제 맛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염산면의 소금과 법성포 해풍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충족시켰으니 가히 영광굴비라 불릴 수 있지 않겠는가.

 영광은 굴비의 고장이다. 그래선지 조형물도 굴비 일색이다. 그러니 어찌 굴비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굴하지 않는다는 뜻의 굴비(屈非)’는 고려시대 이자겸(李資謙, 미상~1126)이 만들었다. 딸 셋을 하나는 16대 예종(睿宗), 나머지 둘은 예종의 아들(자신에게는 외손자)인 인종(仁宗)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묘한 족보를 만들어버린 인물이다. 그가 영광으로 유배를 오게 됐는데, 이곳에서 만난 말린 조기를 굴비라는 이름으로 진상하며 선물은 주되, 결코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았단다.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아부가 아니며, 또한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11 : 25. 두 번째 다리(법성2) 앞에서 굴비로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난 연우로로 들어간다. 도심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 조형물로 치장된 첫 번째 다리(한두름교)는 보행자 전용이라는 것도 기억해두자.

 법성포역사문화탐방길은 법성포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탐방로이다. 보은의 두꺼비 전설이 있는 철비’, 조선시대 동헌 등 주요 관아와 객사, 수령들의 선정비, 전라지역 12고을의 조창 터,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56일 동안 머물렀던 하촌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며 낙향한 훈련도정 이척이 지은 제월정(영호정)’ 등을 만나볼 수 있다.

 11 : 26. 행운당(도장집) . 일행 중 하나가 걸음을 멈춘 채 핸드폰의 앱을 확인하느라 분주하다. 좋은 길을 놓아두고 골목(행운당과 수산물가공업체인 해미락굴비수산의 사이)으로 들어서라는 서해랑길의 방향표시가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골목은 갈수록 좁아진다. 이에 비례하듯 경사도 가팔라져 간다.

 11 : 30. 오름길의 막바지에서 엄청나게 굵은 느티나무(이정표 : 종점 12.9km/ 시점 1.0km)를 만났다. 나이도 법성포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오래 묵은 듯. 이런 볼거리를 그냥 놓아 둘 지자체가 아니다. 쉼터용 정자를 지어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이곳은 법성포 시가지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조망의 명소이기도 하다. 저녁에는 저 느티나무에 달이 걸리는 진풍경도 넘볼 수 있단다

 11 : 32. 842번 지방도(연우로)가 지나가는 동짓재(‘동깃재로 부르는 지역민들도 있었다)’에 올라선다. ‘법성포 12 중 일곱 번째인 동령추월(東嶺秋月)’, 즉 가을철에 뜨는 둥근 달이 빼어나다는 고갯마루이다.

 11 : 33. 도로로 내려서지는 않는다. 인의산(165.3m) 방향(오른쪽)의 언덕길로 잠시 진행하자 이 고장 출신 애국지사의 충용비(忠勇碑)가 얼굴을 내민다. 한국전쟁 때 법성면 일대의 수복을 위한 병력지원을 요청하려 광주로 가는 도중 공비의 습격을 받아 전사한 백인기 방위군 소위의 충용을 기리는 빗돌이다.

 빗돌을 살펴본 다음 탐방로에서 잠시 벗어나본다. 굵직굵직한 느티나무와 팽나무 수십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수백 년은 족이 묵었음직한 것이 도로 건너에 있는 법성진 숲쟁이의 연장이 아닐까 싶다. 숲의 내력은 지난 39코스 때 설명했었다.

 혜원 신윤복 선생이 그렸답니다’.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이 일러주신다. 담벼락에 그려진 민속화가 김홍도의 작품인줄로만 알았다. 민속화는 무조건 김홍도라는 내 선입견 탓이었고, 그런 무지를 그가 정정해 준 것이다. 덕분에 난 오늘도 새로운 앎을 얻어간다. 공자님의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가 실감나는 하루라 하겠다.

 11 : 36. 서해랑길은 842번 지방도(연우로)를 가로지른다. 이정표(종점까지 12.6km) 말고도 영광굴비특품사업단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영광굴비홍보전시관(문이 닫힌 듯해 들어가지는 않았다) 오른편에는 서호농악회관이 들어서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인 영광법성포단오제의 난장트기 행사 때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단체일 것이다. ‘서호란 이름은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법성포 앞바다의 별칭에서 따왔을 것이고...

 두 건물의 사잇길로 들어서자 폐허로 변한 마을이 나타났다. 하필이면 이런 황량한 풍경 속으로 길을 냈을까?

 폐촌을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밭두렁을 따라 이어진다. 밭에서는 알알이 여문 콩깍지가 타작을 기다린다.

 왼쪽에는 검산제가 있다. 갈대밭과 수림을 배경삼은 풍경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한 저수지이다. 둑 너머에서는 영광대교가 자신도 있다며 좀 보아달란다.

 11 : 42. ‘검산(撿山)’ 마을에 이른다. 도로(연우로)변에 버스정류장과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벽화가 그려진 골목을 빠져나오자 검산마을 경로당’. 쉼터용 정자가 잠시 쉬었다 가란다. 하지만 2.5km쯤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으려면 그럴 여유는 없다.

 널디 너른 들녘이 마을 앞으로 펼쳐진다. 전남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만들어진 풍요의 상징이다. 그 너머 바다, 홍농읍과 백수읍 사이 해협을 영광대교가 가로지른다.

 11 : 47. 정자를 지나 200m쯤 더 걸었을까 홍농읍과 법성면의 경계를 가르는 구암천이 얼굴을 내민다. 이정표(종점까지 11.7km)는 둑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란다.

 전남방조제로 물길이 막힌 구암천(龜岩川)’은 너른 유수지로 변해있다.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습지도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참고로 구암천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신촌리 과치제에서 발원하여 두암저수지를 지나 전라남도 영광근 홍농읍 칠곡리에서 서해로 합류하는 총연장 15.29km의 지방하천이다.

 구암천에는 홍농교가 놓여있다. 법성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다리를 건너 홍농읍으로 들어간다.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초입에 입간판까지 세워놓았다.

 그렇다고 홍농교를 건너는 것은 아니다. 서해랑길은 옛 다리인 연우교를 이용한다. 1981년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홍농교가 놓이면서 효용가치를 잃은 연우교는 상판에 흙을 쌓은 도로공원으로 바뀌었다. 참고로 연우(蓮牛)’라는 이름은 이 고장 출신으로 박정희정권 때 내무부장관을 지낸 박경원(朴璟遠)’의 호에서 따왔다. 고향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앞장섰던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지역민들 사이에 회자된다고 했다.

 안내판은 이곳이 줄 나룻터였음을 알려준다. 연우교가 놓이기 전, 1910년대부터 1971년까지 주민들은 나룻배를 이용해 강을 건넜다고 한다. 강 양편을 잇는 밧줄을 뱃사공이 끌어당기면서 나아가는 나룻배이다. 그 나룻배를 복원했다며 하단에 이용수칙까지 적어놓았다. 하지만 나룻배가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뭘까? 무심한 지자체가 게으르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나룻배를 없애려면 안내판까지 함께 치웠어야 하지 않겠는가.

 11 : 52. 다리 건너(이정표 : 종점까지 11.1km)에서 왼쪽 강둑을 탄다. 잠시 후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농로를 따른다.

 12 : 01. ‘자 모양으로 난 길을 8쯤 걸으면 ‘842번 지방도’. 도로 양옆에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우리가 걸어왔던 곳에 신흥(新興) 마을’, 그리고 진행방향에는 같은 상하리(4) 월봉(月峰) 마을이 있단다.

 잠시 후 이른 월봉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10.5km)에도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참고로 영광군청은 월봉이란 지명의 유래를 마을 지형이 반달처럼 생긴데서 찾고 있었다. ‘미역섬이라 불러오다 박도섬 등으로 바뀌었다고도 했다. ‘전남방조제가 축조되기 전에는 이곳이 섬이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월봉마을을 감싸듯이 돌아 나오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홍농읍이 놓여있다. 그런데 고층아파트들이 울쑥불쑥 솟아오른 게 시골 소읍치고는 낯선 풍경을 보여준다. 원자력발전소가 만들어 낸 변화가 아닐까 싶다.

 12 : 07. 저 거대한 시설은 농협의 벼 건조·저장센터라고 했다.

 저장센터 앞 버란계(버스정류장), 어느 선답자는 군청에까지 연락해 이곳의 정확한 지명이 벌안개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벌의 안쪽에 잇는 갯가라는 뜻일 게다. 옛날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고, 바닷일을 업으로 살던 어부들의 안식처였던 포구도 있었다나?

 우람하게 치솟은 해주아파트를 오른편에 두고 하봉마을(상하2)’로 간다. 봉대산(峯大山) 아래에 위치하면서 망덕산(望德山) 줄기를 따라 위에 위치한 마을을 상봉(上峯), 아래에 위치한 마을을 하봉(下峯)이라 부른단다.

 마을길은 꽃밭으로 꾸며졌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마을인가 보다.

 12 : 25. 홍농로(이정표 : 종점까지 8.7km)로 올라서 홍농읍 저잣거리를 걷는다.

 12 : 27. 잠시 후 다온누리아파트 앞에서 도로를 건너 하봉마을로 간다. 다음 블록에서는 오른쪽으로 난 상하길을 따른다. ! 아까 도로로 올라오기 전에 만난 농기계 보관창고에도 하봉이란 이름이 붙어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하봉마을의 중심가쯤 되겠다.

 이 길(상하길)은 행정타운인가 보다. 파출소와 읍사무소는 물론이고 초·중학교가 모두 이 거리에 들어서있었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농협의 간판이 조금 이상하단다. ‘지명을 브랜드로 내거는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굴비를 얼굴마담 삼았다는 것이다. 맞다. 영광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사면 백만 원짜리라도 백화점 굴비지만, 영광서 사게 되면 오만 원짜리도 영광굴비가 된다고 주장한다고 했다. ‘자린고비도 영광에서는 남의 집 얘기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나저나 자린고비라는 뜻을 집사람은 알기나 할까? 반찬이 아까워 천장에 생선을 매달아 놓고 쳐다보기만 했다는 할아버지와는 달리 그녀의 씀씀이는 요즘 내 연금의 한도를 넘어서고 있으니 말이다.

 번화가를 벗어나자 상점 대부분이 문이 닫혀있다. 요즘 TV만 켜면 불경기라는 뉴스가 뜨는데, 그 현장이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 매서운 한파에 경기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12 : 35. 홍농초등학교의 담벼락. ‘인성이 실력이다라는 휘호가 눈길을 끈다. 맞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고루한 사고발상은 이제 그만 사라졌으면 좋겠다.

 잠시 후 만난 홍농중학교의 담벼락에선 장미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세월이 하 수상하다보니 장미까지도 철이 바뀐 줄을 모르나 보다.

 12 : 41. 도심을 빠져나오면 확·포장공사가 한창인 홍농로와 마주한다.

 한수원사택 입구이기도 한 이곳에는 ‘119 안전센터가 들어서 있다. 2년 전, 봉대산과 금정산을 답사하러 왔을 때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어느새 현대적인 외양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참고로 봉대산에는 백수 구수산의 고도도 봉수대(古道島 烽燧臺)’에서 신호를 받아 상하면(고창군)의 고리포봉수대로 전하던 봉수대가 있었다. 고려 성종(981) 때 시작되어, 조선 중종 때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법성포의 조창을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란다.

 이후부터는 영광(한빛)원자력발전소로 가는 홍농로를 따른다. 도중에 영광승마원과 영광테마식물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기도 한다.

 12 : 51. 서당마을 앞 진덕삼거리에서는 한빛원자력본부 방향 직진이다. 오른쪽(구시포 방향의 진덕로’)으로 가면 더 가까운데 도로를 피해 우회시킨다. 참고로 서당(書堂)이란 지명은 1870년경 밀양박씨의 입향조가 문맹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옛 서당은 현재 문중 재실로 변했단다.

 100m쯤 걷다가 오른쪽으로 난 농로로 들어간다. 초입에 이정표(종점까지 7.4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그런데 어느 축산농가 앞에서 길이 곤포 사일리지로 막혀있는 게 아닌가. ‘럼피스킨이라는 소 피부병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12 : 55. 조금 전 헤어졌던 진덕로(이정표 : 종점까지 6.2km)’를 다시 만났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른다는 얘기는 아니다. 도로를 만나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상삼마을로 간다.

 잠시 후 진덕리(眞德里)에 속한 자연부락 상삼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5.9km)에 이른다. 영광군청은 상삼(上三)’이란 지명의 유래를 삼밭(蔘田)에서 찾고 있었다. 남원 땅에서 들어온 남양방씨가 삼밭을 경작했는데, 이 삼밭의 위에 마을이 위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을 이름인 자가 인삼 삼()’이 아니고 석 삼()’인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13 : 10. 상삼마을부터는 밭과 논 사이로 난 농로를 따른다. 그렇게 12분쯤 더 걸으면 하삼마을이다. 영광군청은 이 마을도 역시 삼밭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옥녀가 머리를 산발한 지형의 옥녀산발 마을이 삼() 재배면적이 늘어나면서 삼밭 또는 갯삼밭으로 고쳐졌다는 것이다. 이게 또 마을의 위치로 인해 삼밭 아래란 의미의 하삼(下三)’이 되었고.

 하삼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5.1km)은 개짓는 소리로 요란했다. 크고 험상궂게 생긴 개들이 이집 저집에서 윽박지르듯 짖어댄다. 개집이 천정까지 철망으로 막혀있다는 게 그나마 안심이 된다.

 13 : 15. 마을을 벗어나 2차선 도로인 진덕로2(이정표 : 종점까지 4.6km)’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르지는 않는다. 도로를 횡단한 다음 농로를 이용해 건너편 들녘으로 간다.

 동아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수확을 끝낸 들녘은 텅 비었다. 부지런한 농부는 곤포 사일리지조차도 논두렁에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13 : 21. 전라 남·북도의 경계에 놓인 자룡천의 강둑(이정표 : 종점까지 4.2km)에 올라선다. 그리고는 둑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참고로 자룡천(紫龍川)은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검산리에서 발원해 남서쪽으로 흐르다 용대저수지를 지나 자룡리에서 서해로 스며드는 길이 6.13km의 지방하천이다.

 방조제에 막힌 자룡천은 유수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 자못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13 : 26. 진덕리(영광군 홍농읍)과 자룡리(고창군 상하면)의 앞바다를 막은 동아방조제(이정표 : 종점까지 3.7km)’에 올라섰다. 둑 위로 2차선의 해안도로가 지나간다. 하나 더, 전라남도의 해안(40개 코스, 652.2km)을 숨 가쁘게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 둑길에서 전라북도에 바톤을 넘겨준다.

 동아배수장 앞에서 바라본 바다.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와 안쪽에다 펑퍼짐한 바다를 만들어놓은 것이 영락없는 호로병인데, 바닷물이 들어오는 저 주둥이 부분도 남북으로 나뉜단다. 왼쪽은 전라남도(영광군 홍농읍 성산리), 반면에 오른쪽은 전라북도(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땅이다. 하나 더, 갈대밭이 들어선 바닷가는 철새도래지인 듯. 꽤 많은 왜가리들이 먹이활동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13 : 33. 500m쯤 되는 방조제가 끝나면 길은 둘로 나뉜다. 서해랑길은 왼쪽 구시포 쪽으로 간다.

 가시연꽃길 이정표가 오른쪽으로 가면 용대 가시연꽃군락지가 나온다고 알려준다. 고창군에서 자연환경과 문화역사 자원을 담아 만든 예향천리마실길  10코스인 가시연꽃길(13km)이 이곳으로 지나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13 : 36. 300m쯤 더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 이번에도 왼쪽(구시포 방향)으로 간다. 다만 길이 2차선에서 1차선으로 바뀔 따름이다.

 이곳에서는 ‘12일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자기네 식당에서 촬영했다는 듯 거북선 숯불풍천장어라는 상호를 두드러지게 적어놓았다.

 이후부터는 바닷가를 따른다. 철제 난간까지 두른 멋진 산책로가 고리포까지 나있다. 하지만 길이 널찍한 것은 흠이 될 수도 있겠다. 승용차는 물론이고 트럭까지 스스럼없이 지나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륙 방향, 1km도 더 되는 구간은 대하양식장 천지다. 소금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저곳에 염전이 들어서있었지 않나 싶다.

 습지를 가득 메운 갈대밭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아니 근처에서 노닐고 있는 왜가리까지 더해줄 경우 흔치 않는 풍경으로 업그레이드된다.

 바닷가 안내판은 고리포마을 해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바닷가에 쳐놓은 저 그물의 정체는 대체 뭘까? 호리병처럼 생긴 내만을 한 바퀴 둘러놓은 것 같은데...

 13 : 56. 바닷가로 내려선지 21. ‘고리포(古里浦)’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고리포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던 포구로 유명하다. 마을은 봉군들이 머무르면서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참고로 고리포봉수대는 포구 북동쪽 600m 지점의 안산(120m) 정상에 있었다고 한다. 문헌은 영광군 홍농산(弘農山, 지금의 봉대산일 것이다)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소응포 봉수로 전달해 주었다고 적고 있다.

 포구 앞, 작은 모래섬이 천혜의 항구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맞다. 고리포는 현 고창 지역의 포구 중 유일하게 그 위치가 이동되지 않고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포구라고 했다. 입지여건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10척도 못되는 소형 선박들이 이용하고 있을 따름이란다.

 고리포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숯불풍천장어는 거북선을 독채로 전세 냈다. 민박이 가능한 맛집으로 잔잔한 바다냄새와 함께 커다란 지붕이 열리며 파란 하늘을 덤으로 볼 수 있는 고창의 핫 플레이스라고 한다. 하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는 카메라 셔터 한번 누르고 그냥 지나칠 따름이다.

 고리포를 지난 서해랑길은 주씨고개를 향해 가파르게 치고 오른다. 주씨고개는 40코스에서 가장 높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14 : 06. 고갯마루를 넘자 발아래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1800년 무렵부터 소금을 생산하던 구시포(仇時浦)’는 염전을 일구기 위해 설치한 수문의 모양새가 소의 구시통(구유의 방언)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 100에 뽑히기도 했다.

 14 : 16. ‘구시포 해변(仇時浦 海邊)’은 고창 제일의 핫 플레이스로 꼽힌다. 명사가 십리에 펼쳐지는데다 송림까지 우거져 오토캠핑과 가족단위 캠핑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해수욕장은 길이 1.7km에 폭이 2m인 백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울창한 송림이 뒤를 받치는가 하면, 나지막한 야산이 아늑하게 모래사장을 감싼다. 갯벌 한 점 없이 고운 백사장이 특히 돋보이는데, 바닷물이 빠지면 모래가 단단해져 축구를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한마디로 가족단위 피서지로는 이만한 곳이 없다 하겠다.

 이곳은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해변 바로 앞에 바다낚시터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가막섬이 떠 있는데, 그 뒤로 펼쳐지는 저녁노을이 가히 일품이라고 한다.

 저 갈매기들은 인간과의 공생을 추구하고 싶은 모양이다. 관광객들이 다가가도 도망가지를 않고 자리만 잠깐 내주고 있었다.

 관광객들에 더해 캠핑족까지 몰려드는 곳에 어찌 조형물이 없겠는가. 움직임을 멈춘 그네는 생물권보전지역,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람세스 습지 같은 고창의 명소들을 가리키는 방향표지판까지 매달고 인생샷 하나 건져보려는 이들을 기다린다.

 ‘I  구시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포토 죤이다. 이곳 구시포는 tvN의 인기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 어촌편 시즌3의 첫 촬영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그만큼 화면발이 받쳐준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시포항은 여느 항구와 달리 육지에서 떨어져 있는 가막도(可莫島)’라는 섬에 자리하고 있다. 덕분에 다른 항구에 비해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어선이 입·출항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또한 항구를 와인 잔 모양으로 넓게 정비하면서 바다로 뻗은 800m의 긴 제방과 등대, 전망데크, 트릭아트, 공원 등을 조성해 관광객들이 쾌적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14 : 30. 서해랑길(40코스)은 고창군청의 이동봉사실 앞에 이르면서 끝을 맺는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4.23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상담가인 클라이드 M 네레모어는 그의 저서 행복에로의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을 찾기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행복한 삶의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럴 필요조차 없다. 사랑하는 집사람이 하루 24시간으로도 부족하다며 내 곁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서해랑길 39코스(답동마을-법성포)

 

여 행 일 : ‘23. 10. 28()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백수읍 및 법성면 일원

여행코스 : 답동 버스정류장가자봉노을전시관영광대교백제불교 최초도래지법성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6.3km, 실제는 노을카페부터 16.28km 4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9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여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코스 대부분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백수해안도로를 따른다. 덕분에 동해를 닮았다는 서해바다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다. 하지만 해거름이 아니어서 백수해안도로의 하이라이트인 노을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들머리는 답동마을 버스정류장(영광군 백수읍 홍곡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 신평교차로(영광읍)에서 805번 지방도로 옮겨 백수읍까지 온다. 대전리교차로에서 우회전 77번 국도를 따라 올라오면 잠시 후 답동마을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영광38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근처에 세워져 있다.

 이번 구간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 중 아홉 번째라는 백수해안도로를 주축으로 한다. 그저 초반 4.5km를 해안도로 대신 구수산의 능선으로 바꾸고, 후반부에 백제불교최초도래지를 구경시키는 정도라고나 할까? 길이는 16.3km, 4.5km가 산길인 점을 감안하면 다소 부담스러운 거리다. 난이도가 별이 4(5개 가운데)나 되는 이유일 것이다.

 오늘 걷게 될 백수해안도로 1회 대한민국 경관대상에서 자연경관 최우수상을 받았단다. 이름조차 낯선 상인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4개 유형(시가지역사문화농산어촌·자연)의 뛰어난(건축물·공공공간·주변환경 등이 종합적으로 잘 어우러진) 경관을 발굴·홍보하기 위해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에서 기획한 행사라고 했다.

 동해 같은 서해의 최고 해안길이란다. 동해의 파도, 청청한 남해, 서해의 끝없는 갯벌로 대변되는 우리네 바다는 어디가 더 좋다고 평할 수 없을 만큼 각자의 매력을 갖고 있다. 그러니 서해바다는 쓸쓸한 갯벌이 질펀하고, 사연을 간직한 섬들이 곳곳에 널려있어야 하며, 안내판에서 저런 표현은 사라져야만 한다.

 11 : 50. 트레킹은 백암 해안전망대에서 시작했다. 영광에서 노을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 중 하나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39코스 시점에서 77번 국도(홍농 방향)를 따라 2km쯤 가다 ‘Cafe 노을로 내려가면 된다. 참고로 이곳 백수(白岫)’는 아흔아홉 개의 산봉우리를 이르는 지명이다. 그런 특징을 직접 느껴보라는 듯 39코스의 초반은 구수산 줄기인 가자봉과 뱀골봉을 오르내린다. 하지만 난 산길 대신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이미 답사를 마친 길을 또 다시 걷기보다는 백수해안도로의 명소들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포장 공사가 한창인 도로를 건너자 ‘Cafe 노을이 나온다. 테라스에 앉아 마시는 커피가 일품으로 알려진 곳이다. 서해바다를 마당삼은 덕분에 최고의 오션 뷰를 보여준단다.

 맞다. 카페에서의 조망은 일품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영화 마파도의 촬영지인 동백마을’. 바다를 내려다보며 밭일을 하던 장면 등이 저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절벽 같은 길을 내려가면 만나는 마을은, 어느 집에서나 문을 열면 비경의 바다와 바로 마주할 수 있단다. 영화촬영지가 된 이유일 것이다.

 반대편에는 가자골이 있다. ‘백수해안공원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해안전망대라는 이름을 낳게 한 정자는 바다와 맞닿은 벼랑 가장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다가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자를 에워싼 잡목들이 서해바다에 대한 조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망은 카페 주변에서 실컷 즐기도록 하자.

 12 :00. 전망대를 빠져나온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가재골(백암리1)’에 이른다. 영화 황해에서 하정우가 살인청부 받은 인물의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만을 들고 버스를 기다리던 시골 버스승강장이 이곳일 것이다.

 12 : 00-12 : 10. 가재골(입구에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던 부부의 슬픈 이야기를 담은 백수해안공원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기잡이 나갔다가 왜구에게 붙잡힌 어부를 기다리다 죽어 바위로 변했다는 모자바위도 있다.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을 지나자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난간에 서면 칠산도와 안마도, 송이도 등 칠산 앞바다의 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이곳은 전설이 빚어놓은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어부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자 그의 부인이 아이를 등에 업고 촛대를 들고 나가 바닷가에서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돌이 됐다. 바다에서 익사한 남편은 거북이가 됐고, 촛불을 보고 바닷가로 돌아와 돌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보라! 거북이 한 마리가 촛대처럼 생긴 바위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지 않는가.

 벼랑에 걸치듯 내놓은 계단도 놓치지 말자. 조금 힘들기야 하겠지만 고두섬 같은 또 다른 볼거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안공원의 얼굴마담격인 모자바위(母子岩)’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를 업은 엄마의 형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무학대사는 부처와 돼지의 눈을 빌어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했다. 공자는 나이 70이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종심(從心)이라 했다. 하지만 칠십에 이른 나에게 도란 아직도 남의 얘기일 따름인가 보다.

 12 : 18.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걸어 대리골(백암리1)’에 이른다.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인데, 대나무를 다리로 착각해서 교동(橋洞)’으로 불리기도 한다나?

 이곳은 영화 황해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하정우가 하룻밤을 묵어갔던 민박집인데 지금은 동명(황해)의 펜션으로 변해있다. 그저 영화 초반 스치듯 지나가던 고두섬만이 옛 모습 그대로라고나 할까? 퀭한 얼굴로 아침밥을 먹던 하정우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사진은 사라져버린 울주횟집(현 황해펜션) 대신 고두섬을 배경삼은 프로방스 펜션&글램핑을 게재했다.

 바다 건너 송이도에 고두섬 끝이라는 지명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송이도에 삼천갑자 동방삭을 능가하는 고두섬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이곳 백수해안에서 뜀박질 한 번으로 송이도에 이를 정도로 도력이 엄청났다나?  고두섬을 당시 그가 발판으로 삼았었을 지도 모르겠다.

​▼ 명품 드라이브코스로 입소문을 탄 백수해안도로는 연간 방문객이 76만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그러니 주차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일 것이다.

 안내판은 칠산갯길 300  2코스인 노을길이 이곳으로 지나감을 알려준다. 법성포터미널에서 출발 영산성지·모래미해수욕장·열부순절지 등을 거쳐 동백마을에 이르는 23.39km의 둘레길이다.

 12 : 24. 이번에는 순아골이란다. 백암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다.

 12 : 32. ‘Farm Voree(‘rural convergence industry’로 포장했지만 카페가 옳다)’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백수해안도로는 정말 아름다웠다. 바다를 끼고 언덕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도 그렇거니와 앞바다도 거칠 것 하나 없이 탁 트여 파란 수평선만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게 약간은 흠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커피 향 가득한 작은 도서관 뭉클이란다. 1층은 카페와 도서관, 2층은 테라스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커피 향을 즐기며 독서를 즐겨보라는 듯. 하지만 난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2.5km쯤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이 이제나저제나 내가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쩌겠는가.

 12 : 40. 덕산마을 앞 삼거리에 이른다. ‘홍농읍으로 연결되는 77번 국도는 직진, 백수해안도로는 이곳에서 왼쪽으로 간다.

 이곳은 구수산의 산줄기를 넘어온 서해랑길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도로로 내려서는 지점에 구수산등산로 안내판과 함께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11.8km/ 시점 4.5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하나 더, 산길 대신 해안도로를 따라 걸은 내 트랙에는 3.68km가 찍혀 있었다.

 서해랑길은 덕산마을(대신리)을 거쳐 정유재란열부순절지(旌酉再亂烈婦殉節地)’로 간다. 그렇다고 트랙을 꼭 따를 필요는 없겠다. 곧장 순절지로 내려가는 데크계단이 놓여있는데 구태여 돌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건 그렇고 붉은 양귀비가 매혹적이라던 주변이 온통 황량한 풍경으로 변해있는 게 아닌가. 꽃이 시들자 내년을 기약하며 밭을 갈아엎었나 보다.

 사적비를 기웃거리다 도해문(蹈海門)’으로 들어가니 모열사(慕烈祠)가 반긴다. 칠산바다에 투신한 아홉 열녀를 기리는 사당이다. 정유재란 때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등에 살던 동래정씨(東萊鄭氏진주정씨(晋州鄭氏) 문중의 부인들이 전쟁을 피해 지금의 묵방포(墨防浦)까지 왔으나 결국 왜적들에게 잡히자 대마도로 끌려가 치욕을 당하느니 의롭게 죽을 것을 결심하고 모두 칠산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고 전해진다.

 1681(숙종 7) 나라에서는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상을 주고 정려(旌閭)를 내려 이들의 정절을 기렸다. 비각(碑閣)은 팔각의 돌기둥 4개를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형 옥개석을 올렸다. 바다를 배경으로 오른쪽에 8열부의 비각, 왼쪽에 정등(鄭燈)의 처 밀양박씨의 비각이 같은 규모로 배치되어 있다.

 열부순절지(이정표 : 종점까지 11.5km)에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런 다음 데크 로드를 따라 스카워크로 간다. 줄을 지어 늘어서있는 검붉은 갯바위에 걸치듯 길을 내놓았다.

 험상궂지 않다고 해식애가 아니겠는가. 천년 세월 모진 풍파를 견디다보니 영험함까지 띠게 되었나 보다. ()라도 받으려는 듯 푸짐하게 상까지 차려놓은 무당이 뭔가를 열심히 빌고 있었다.

 12 : 48. 다시 올라선 도로(해안로). 도로변 공터에서 주말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지역 특산물로 여겨지는 농산물을 팔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힘이라도 실어주려는 듯 천빛예술봉사단이 공연으로 흥을 돋운다.

 12 : 50. 스카이워크 형식으로 지어진 노을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스카이워크의 끝은 끝없는 사랑(Endless Love)’이라는 멋진 조형물이 장식하고 있었다. ‘칠산바다의 상징인 괭이갈매기(천연기념물 제389)의 날개를 형상화한 최고의 포토 스팟이다.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아름다운 사랑과 백년해로의 기원을 담았다니 조형물을 배경으로 인생샷 하나 건져보면 어떨까.

 난간에 서자 일망무제의 풍경이 펼쳐진다.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어선지 시선이 수평선과 일직선이다. 문득 아까 혀를 차게 만들던 동해바다답다는 표현이 떠오른다. 하지만 내 주장도 틀리지는 않았다. 안마군도의 섬들이 아스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시야를 가리는 섬 또한 서해바다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가야할 방향의 언덕은 카페와 펜션으로 한 가득이다. 이곳 백수해안도로가 그만큼 유명세를 탔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언덕을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영광의 아름다운 노을 풍경을 전시하고 있는 노을전시관이 놓여있다.

 노을전시관 부근 바닷가, 갯바위에 걸터앉은 대신등대는 빼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낭만적인 노을을 볼 수 있는 해넘이 명소다. 곁에 노을전시관을 두었을 만큼 낙조가 아름다워 관광객뿐만 아니라, 등대를 배경으로 노을 사진을 찍으려는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13 : 05-13 : 10. 노을전시관은 저녁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전시관이다. 노을의 원리부터, 노을 사진, 노을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 등을 모두 보여주는 오로지 노을을 위한, 노을에 의한 공간이다.

 노을이 생기는 원리는 물론이고, 노을을 테마(사진·음악·문학)별로 나누어 전시했는가 하면, 빛의 색·성질·산란 등에 관한 내용도 전한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영광 노을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빛의 과학적 이해를 도와주는 학습장이라고나 할까?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2)도 만들어놓았다. 탁 트인 칠산바다에 가라앉는 붉은 해를 비롯해 주변 경관을 구경하기 딱 좋겠다.

 전시관 앞.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로 널리 알려진 가수 조미미의 노래비가 있었다. 뒷면은 대표 앨범 3장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았다. 조미미는 1947년 영광에서 태어났고, 1965년에 가수로 데뷔했다. 남진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가수였으며, 후덕한 외모와 맑은 목소리로 '바다가 육지라면' '단골손님' '서산 갯마을' '해지는 섬포구' 등 섬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근처 광장에서 후배 가수들이 버스킹을 열고 있었다. 저 젊은이들은 조미미에 대해 얼마쯤 알고 있을까?

 13 : 15. 노을전시관부터는 데크로드를 걷는다. 그리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노을 종을 만났다. 노을이 되어 어머니 곁을 지키는 효심을 담은 종이다. 구전에 따르면 먼 옛날 도음소도에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 날, 비바람이 심한데도 아들은 소금가마를 지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굵은 빗줄기에 소금이 녹아버렸고, 아들은 다른 방법으로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하느라 며칠을 더 바깥에서 머물게 된다. 이를 알지 못하는 어머니는 급기야 아들을 찾아 나섰고, 바위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대로 돌이 되고 말았다. 며칠 후 약을 지어 돌아오던 이들이 돌이 돼버린 어머니를 발견하고 구슬프게 울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후 사람들은 해질녘이면 아들이 붉은 노을을 등에 지고 어머니 곁으로 온다고 믿는단다.

 한 번 치면 웃을 일이 생기고, 두 번 치면 사랑의 감정이 찾아들고, 세 번 치면 행복할 일이 생긴다는 스토리를 입혔다. 다만 칠 때마다 맥놀이를 들어야 한단다. 여기서 맥놀이는 몸으로 종의 진동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사랑의 자물쇠도 눈에 띈다. 노을종을 친 다음 소원을 담아 사랑의 자물쇠를 걸어놓으면, 웃음·사랑·행복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나?

 오랜만에 보는 멋진 안내도이다. ‘백수해안 노을 길 지도를 바탕삼아, 꼭 찾아봐야 할 주요 포인트는 사진까지 게시했다. 다음 행선지의 거리를 하단에 적음으로써 이정표의 기능까지 더했다.

 ! 벌통이다 이를 본 동갑네기 도반은 벌통을 따겠다며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아서라. 오래전 일이지만 산청의 석대산에서 말벌에 쏘였었고, 고통과 염증에 시달리던 난 식사까지 거른 채 산청의료원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탐방로는 너무 높지 않은 해안절벽을 따라 만들어졌다. 그 길을 걸으며 바라보는 서해바다는 차라리 생경스럽다. 저 멀리 서너 개의 작은 섬이 수평선을 갉아먹고 있을 뿐 갯벌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동해바다와 서해바다의 중간쯤이라고나 할까?

 13 : 28- 13 : 46. 모처럼 만난 전망대. 하지만 누군가의 돗자리가 다가가는 걸 부담스럽게 했다. 하긴 우리 역시 간식을 먹느라 벤치 하나를 독차지해버렸지만...

 칠산정(백수해안도로 최고의 전망대라는데 가보지는 않았다) 아래 설치된 목책산책로인 건강365계단 1 365일 건강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오르는 계단의 숫자가 많을수록 건강해진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바닷가 벼랑을 따라 잔도처럼 길을 냈다. 바위절벽은 아니어도 내려다보는 풍경이 아찔하다. 이 구간의 자랑거리는 길에서 바라보는 황금빛 노을이다. 하지만 바닷가에 널린 기암괴석들도 그에 못지않은 매력을 준다. 일상에 지친 가슴을 뻥 뚫어지게 만든다고나 할까?

 산책로는 생태탐방로를 겸한다. 길이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기 때문에 숲속에서 자라는 여러 식물을 눈에 담을 수 있다.  털머위 꽃도 그중 하나이다.

 이 길은 백수해안 노을길로 불린다. 곳곳에서 석양이 만들어내는 진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두어 곳에 바다로 내려가는 길과 함께 해안 절벽 끝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14 : 03. ‘도음소도(주민들은 돔배섬이라고 한다)‘를 마주보는 모퉁이를 돈다. 이어서 법성포로 연결되는 내만(內灣)으로 들어서자 바다 건너 금정산 자락이 해안풍경과 함께 조망된다. 참고로 도음소도는 도 닦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란 뜻을 지녔다고 한다. 마라난타가 백제로 들어올 때 불상을 처음 내려놓았던 곳으로 알려진다.

 내만이어선지 파도가 일렁이지 않는 바다는 마치 호수 같다. ‘서해답지 않게 놀라울 만큼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그 위에 떠 있는 돔배섬(왼쪽에서 살짝 머리만 내미는 곳)과 괭이섬(가운데), 쥐섬(작은 바위섬)까지, 곱디고운 풍광에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다.

 14 : 09. 천천히 바다 풍광을 즐기며 걷다보면 어느덧 삼미랑 어촌체험관에 닿는다. 카페와 펜션을 함께 운영하는 휴식 공간이다. 하나 더. 길에서 만난 둘레길 나그네의 말에 의하면 서해랑 카페를 겸하기 때문에 두루누비 회원이 들르면 5천원 상당의 커피를 제공한다고 했다.

 14 : 10-14 : 15. 70m쯤 더 걸어 도착한 8주차장’. 바다를 향해 전망데크를 만들어놓았다. ‘포토 죤도 세 개나 배치했다. 눈앞에 펼쳐질 풍경을 믿고, 바라보고, 사진 찍어가라는 얘기일 것이다.

 전망대 아래는 방파제 등대(칠산타워를 형상화했단다)가 있는 대신항이다. 대신마을 어민들은 저 포구에서 배를 타고 칠산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는다. 늦봄부터 여름까지는 민어와 백합, 가을에는 꽃게와 새우가 잡힌다고 했다. 일부 어민들은 낚싯배를 운영해 짭짤한 소득을 올리기도 한단다.

 난간에서면 두고두고 꺼내볼만한 빼어난 풍경이 펼쳐진다.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온 작은 물굽이()가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내보여준다. 대신항 너머로 나타나는 영광대교는 차라리 덤이다.

 대신항으로 내려서면, 탐방로는 또 다시 데크 로드로 연결된다. 호리병처럼 내륙으로 파고든 칠산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14 : 26. 데크로드와 이별을 고한다. 이후부터는 도로(해안로)를 따른다.

 14 : 30. 잠시 후 도착한 대초마을 앞 삼거리. ‘옥당박물관이 잠깐 들렀다가란다. 아주 오래된 토기와 석기가 전시돼 있으며, (동국·해동)통보에서부터 1·5원짜리 지폐까지 화폐의 역사도 함께 엿볼 수 있단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 영광의 얼굴을 빛낸 사람(수은 강항, 소태산 박중비, 공옥진)에 대한 기록도 만날 수 있다나?

 편액 없는 제각을 지나 고갯마루를 넘으면. 이후부터는 영광대교를 마주보며 걷게 된다.

 영광대교는 영광군 백수읍과 홍농읍을 잇는다. 저 다리가 놓임으로써 두 읍간의 이동시간이 20분 이상이나 단축되었다고 한다.

 영광대교 부근은 도로 확·포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 다리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모래미해수욕장이 있었다. 해안선이 짧은데다 폭까지 좁지만, 백사장의 모래가 곱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철이 아니기에 들러보지는 않았다.

 다리 남단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영광대교 표지돌과 기념조형물(영광의 속뜻인 신령스러운 빛을 형상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박경숙 시인의 영광대교를 적은 시비를 세워놓았다.

 14 : 51. 2016년에 준공했다는 영광대교를 건넌다. 주탑과 주탑 간 거리인 주경간격이 320m에 달하는 현수교이다.

 15 : 00. 북단(이정표 : 종점까지 4.5km)에서 빠져나와 국도 아래 굴다리를 통과한다. 이어서 숲속을 헤집는 데크 로드를 따른다.

 15 : 08. 목맥마을(木麥, 홍농읍 칠곡리)  목넹기 방조제로 내려선다. 1925년 전남농장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해서 전남방조제로도 불리는데 둑 위로 도로(칠곡로)가 나있다. 탐방로는 버스정류장(이정표 : 종점까지 4.1km) 앞에서 도로를 횡단해 습지로 내려선다.

 탐방로는 목맥마을과 자갈금마을(법성면 진내리)을 잇는 목넹기 방조제를 따른다. 아니 둑 아래, 그러니까 제방과 유수지 사이에 보행로를 따로 내놓았다.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만들어진 모래등 들에는 갈대가 한가득인 유수지가 들어섰다. 고창 땅에서 흘러온 구암천이 방조제에 막히면서 만들어진 인공호수이다. 범위도 무척 넓었다. 그런 장점을 지자체가 놓칠 리가 없다. 데크 탐방로가 갈대밭 사이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유수지에는 꽤 많은 철새들이 노닐고 있었다. 담수호와 넓은 농경지가 풍부한 먹이를 제공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15 : 17. 제방 끝(이정표 : 종점까지 3.5km)에는 선착장이 있었다. 자갈금 어민들이 사용하는 선착장일 것이다. 참고로 오래 전, 고깃배 선단이 들어오면 법성포 물길의 입구이던 목넹기에 파시가 선다고 했다. 그 목넹기가 이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탐방로는 이제 데크 로드를 따라 백제불교 최초도래지로 간다.

 15 : 27. 잠시 후 백제불교 최초도래지에 이른다. 법성포(法聖浦) 불법(佛法)을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의미다. 백제 침류왕 원년(서기 384)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중국)에서 해로를 통해 이곳 법성포에 발을 디디며 불교를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테마파크를 조성해놓았다.

 도래지에는 고대 인도의 탁트히바히 사원 주탑원을 본떴다는 탑원((塔園)을 비롯해 간다라유물관(2~5세기 불상·불전도·부조 등을 전시), 간다라 양식의 사면대불상, 부용루(참배 및 조망용 누각) 등이 들어서 있다. 찬란한 간다라 불교 예술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탐방로는 탑원의 뒤 언덕(이정표 : 종점까지 2.6km)을 넘는다. 그리고는 숲쟁이 꽃동산을 헤집으며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꽃과 나무 사이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걸으면서 법성포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감상 할 수 있는 구간이다.

 15 : 43. 울창한 숲과 꽃, 거기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포구를 눈에 담다보면 어느덧 주차장(이정표 : 종점까지 2.2km)이다. 아니 온갖 이름 모를 꽃들로 단장된 것이 꽃동산의 연장이라 함이 더 옳겠다.

 15 : 47. 주차장을 지나 잠깐이지만 숲속으로 난 데크로드를 따른다. 이어서 법성진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정표 : 종점까지 2.1km)으로 들어선다. 물론 주차장 사잇길이나 메인도로(백제문화로)를 따라도 된다.

 몇 걸음 더 걸어서 만난 법성사의 담벼락은 다양한 바닷속 풍경을 담았다. 절간답게 부처님도 빼놓지 않았다. 하나 더, 이곳(법성진성 조형물이 세워진 지점)에서 법성진성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뉜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들머리에 법성진성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함께 세워놓은 조형물이 조금 이상하다. ()이 아니라 포구를 드나들었음직한 돛단배를 형상화했다.

 길이 왜 이따위야?’ 오솔길의 형편은 고창에서 왔다는 둘레길 나그네의 한마디로 대변된다. 이정표 등의 특별한 표식이 없는 들머리는 찾기조차 힘들었고(‘두루누비의 트랙을 따라가는 사람이야 문제없겠지만), 정비되지 않은 산길은 웃자란 잡초 때문에 걷는 게 영 사나웠다.

 15 : 53. 오솔길을 빠져나오니 전망대를 겸한 이층의 누각이 반긴다. 그 앞에 이정표(종점까지 1.9km) 법성진성 안내판을 세웠다. 진성(鎭城)은 지방의 각 진영을 성벽으로 둘러싼 방어용 시설이다. 법성진성은 전라도 일대의 세곡을 모으던 법성창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 중종 9년인 1514년에 축조했다. 내부에는 동헌, 객사 등 관아시설뿐만 아니라 세곡 수납과 관련된 창고시설도 있었다고 한다.

 법성진성(전라남도 기념물)의 성곽을 따라간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이 성벽에는 축성에 동원된 전라도 관내 군·현의 이름과 쌓은 길이, 그리고 축성책임자·재정담당자 등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했다. 하나 더, 300m도 채 되지 않는 성벽을 걷는데 12분이나 걸렸다. 주위가 온통 달래 밭이었기 때문이다. 서방님께 달래장을 만들어 올리겠다는데 어쩌겠는가.

 16 : 08. 수백 년은 족이 묵었음직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자라고 있는 숲쟁이(이정표 : 종점까지 1.5km)’로 내려선다. ‘숲쟁이란 숲정이의 사투리이다. 남도에서 쟁이 ’, 다시 말해 성()을 뜻하는 어휘로도 쓰였다. 그러니 숲으로 된 성으로 보면 되겠다. 맞다. 숲쟁이는 1514년 법성진성을 축조할 때 법성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인공 숲으로, 법성진성의 북벽과 연결되어 동쪽으로 이어진다. 남도의 대표 숲으로 인정받아 1988년 전라남도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명승 제22로 승격되었다.

 숲쟁이는 방풍림의 역할을 수행한다. 포구와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관은 덤이다. 2006년에는 한국의 10대 아름다운 숲에 지정되기도 했다. 그래선지 단오제(국가중요무형문화재 123, 2009년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등 각종 민속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진내리의 고샅길을 걷는다. ‘서해랑길의 특징은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스마트폰 조작 실수로 두루누비(코리아둘레길) 앱을 활용할 수 없었던 나는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었다. ‘서해랑길 리본을 확인하며 걷다가 삼거리와 마주쳤는데, 갈려나가는 골목의 초입에 있어야 할 리본이 직진방향에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100m남짓 걷다가 되돌아오기는 했지만(리본이 보이지 않아서) 소중한 경험이었다.

 더덩실 더덩실, 벽화 속 주민들은 풍물놀이 삼매경이다. 조선 중기에 시작되었다는 법성포 단오제, 그 행사의 한 장면을 그려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16 : 18. 골목을 누비다가 비석군(碑石群)’을 만났다. 이곳 법성진성을 다스리던 관리(수군절제사나 첨사였을 것이다)들을 칭송하는 빗돌인데, 앞에 주인공의 약력과 공적을 적어놓은 게 특이했다. 부근에는 독립운동가인 고경진선생의 생가 터도 있었고, 법성진성이 축성된 지 500년이나 되었음을 알리는 빗돌도 눈에 띄었다.

 굴비의 본고장답게 셀 수 없이 많은 굴비판매장과 굴비식당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법성1를 건넌다. 갯고랑 건너는 갯벌을 메워 만든 인공 섬이다. 현재 뉴타운이 들어서 있다.

 이곳 법성포는 예로부터 호남지방을 드나드는 배들의 관문이었다. 고려시대에 이미 조창(漕倉)이 개설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호남지방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을 서울의 마포나루까지 실어 나르던 배와 중국대륙까지 가는 배들이 이곳 법성포나루를 거쳐 갔다고 한다. 조창과 조운(漕運)의 기능은 이 마을을 수군이 주둔할 정도로까지 번성시켰다. 하지만 근대식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가 늘어나면서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저런 작은 어선들만이 정박해있을 따름이다.

 반대편으로 빠져나와 이번에는 바다와 맞닿은 도로를 따른다. 뉴타운답게 굵직굵직한 건물들이 도로변에 들어서 있다.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온 법성포 앞바다는 호수를 연상케 한다고 해서 대서호(大西湖)’로 불린다고 했다. 또한 중국의 동정호에 버금가는 풍광을 보여준다고 해서 소동정(小洞庭)’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하지만 수심이 낮아진 지금은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없게 되었다. 매어있는 배들이 하나같이 작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억새꽃이 가을이 무르익었음을 알린다. 맞다.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이 10일 밖에 남지 않았다.

 법성포 조형물은 굴비 두름을 담았다. 황금빛 조기들이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굴비로 새롭게 변신하는 고장. 문헌에 나오는 법성포의 내력들도 함께 적어 넣었다. 하나 더. 굴비라는 이름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 인종 때 법성포로 귀양 온 이자겸이 그 맛에 반해 임금에게 바쳤다고 한다. 하지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된 도리로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비겁하게 굴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녀 굴비(屈非)’라고 불렀다고 한다.

 16 : 35. 법성 버스정류장에 이르면서 39코스 걷기가 종료된다. 서해랑길(영광 40코스) 안내판은 터미널 왼쪽 벽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오늘은 4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16.28km를 찍고 있으니 조금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도 되겠다.

 누군가 그랬다. 영광 법성포에서 거시기 해지면 굴비에 잎새주 한 잔을 하라고. 술을 마시지 않는 여자들도 멜랑꼴리해진 마음이 중화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난 그러지를 못했다. 볼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주어진 시간이 다 되어서야 종점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미안함을 글로서나마 집사람에게 전해본다.

서해랑길 37코스(합산마을 버스정류장-하사6구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3. 9. 23()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염산면 및 백수읍 일원

여행코스 : 합산마을 버스정류장월평항두우리 염전당두마을상정마을창우항하사6구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9.7km, 실제는 15.35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7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대부분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방조제를 걷는다. 장점은 볼거리로 넘친다는 것. 칠산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작은 섬들은 기본,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염전과 드넓은 갯벌을 가득 채운 풍력발전기는 양념이다. 거기에 백바위해변의 빼어난 경관이 방점을 찍는다.

 

 들머리는 합산마을 버스정류장(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22번 국도와 808번 지방도, 77번 국도를 갈아타고 들어오다 양일마을 경로당(염산면 봉남리)’ 앞에서 칠산로5로 옮기면 잠시 후 합산마을에 이른다. 서해랑길(영광37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염산방조제와 칠산로5길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이번 구간도 간척사업과 인연이 깊다. 방조제의 둑길이 아니면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염전이나 들녘을 횡단한다. 거리는 다소 긴 19.7km, 그게 부담스러운 나는 택시를 불러 5km(집사람은 7.5km)를 이동(같은 코스로)했다. 하지만 5만원이란 거금을 지불했으니 권장할만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실제 출발지는 운곡마을(雲谷, 염산면 야월리) 앞 방조제(첨부된 지도에서 야월리 서쪽 해안의 툭 튀어나온 지점). 37코스의 시점에서 4.87km쯤 떨어진 지점이다. ‘월평항에서 2.5km쯤 더 나간 지점이기도 한데, 칠산갯길 300(천일염길)의 탐방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나 현 위치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안내판 너머로 검붉은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사리 때는 10km나 떨어진 각씨도까지 경운기를 타고 가는 재미를 즐길 수 있단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간척사업이 빚어놓은 전형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물 빠진 갯벌에 바둑돌처럼 놓인 비작도를 위시한 작은 섬들, 그 섬들을 잇는 방조제가 바둑판의 선이라도 그리는 양 여백을 가득 채운다.

 칠산바다 갯벌은 지금 가을빛으로 물든 칠면초로 한가득이다. 그 뒤로는 작은 섬들이 둥둥. 이게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는다. 저 그림을 보기 위해 접근성이 떨어지는 이곳까지 왔다. 집사람을 핑계 삼아 생략해도 될 것을 5만원의 거금까지 들여가면서 말이다.

 11 ; 47. 방조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가음산(206.2m)을 정면에 두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염산면의 해안은 간척사업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앞바다의 작은 섬들을 줄줄이 방조제로 이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때 생긴 들녘은 대부분 염전. 이게 또 경제성을 잃으면서 대하양식장으로 업종을 바꿨다.

 왼편은 칠산바다의 갯벌, 그런데 바다의 폭이 100m도 채 되지 않는다. 항아리처럼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염전에서 사용할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한다.

 가음산 자락의 농경지. 누렇게 익은 벼가 게으른 농부를 애타게 부른다.

 바둑판처럼 반듯반듯 한 염전이 뒤를 잇는다. 가을볕 아래 소금 알갱이가 알알이 영글어간다. 영광의 대표적 풍경의 하나라 하겠다. 참고로 영광 앞바다에 펼쳐진 갯벌은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라고 했다. 생산되는 소금도 미네랄이 풍부해 질 좋은 소금으로 정평이 나 있단다.

 12 : 09. 내만처럼 파고들던 바다가 방조제(이정표 : 종점 12.9km/ 시점 6.8km)를 만나면서 끝난다. 저 둑을 경계로 야월리에서 두우리로 넘어간다.

 방조제 안쪽은 바닷물을 가두어두는 저수지다. 저 물은 염전에 생명수로 공급된다.

 저수지에서 턴을 한 탐방로는 다시 방조제를 따른다. 바다를 향해 되돌아오는 모양새라고 하겠다.

 둑길을 200m쯤 걸었을까, 오른편으로 방향을 트니 두우리의 염전 단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지명(地名) 자체가 이미 소금 산(鹽山)’인 곳, 얼마나 소금밭이 컸으면 칠산 바닷물이 70리길을 들고 난다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첫 만남은 영백염전이다. ‘1회 전국 염전콘테스트에서 영예의 대상까지 수상한바 있는 50년 전통의 전통갯벌염전으로 소금 모으기, 운반하기, 수차 돌리기 등 염전 체험도 가능하단다.

 소금은 4월부터 10월까지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매일 생산되는 건 아니고, 소금 알갱이가 영글어야 거두어들일 수 있다. 소금밭 두렁을 서성이는 저 염부는 그 때를 헤아리고 있을 게고...

 염전이 단지를 이루다보니 군내버스도 정기적으로 다닌다. 하지만 이용하는 사람이 드문 듯 버스정류장은 오토바이 차지가 되어버렸다.

 길 양옆으로 소금밭이 도열해 있다. 염전이 단지를 이루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화학물질 오염원인 농지와 거리를 둘 수 있어 친환경 소금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야 칼슘·칼륨·마그네슘 등 필수 미네랄 함량이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다는 한국산 천일염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튼 음식의 깊은 맛을 위해서는 국산 천일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그게 저 소금밭에서 염부들의 노력을 보태가며 얻어지는 것이다.

 이 지역의 염전은 바닥을 타일이나 옹기로 깐 장판염이라고 한다. 햇빛과 바람으로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생산하는 천일염 염전은 크게 저수지와 증발지, 결정지로 구분된다. 염도 35(퍼밀·1000분의 1)의 바닷물이 각 구획을 거치면서 물이 증발되고 염도는 높아진다, 결정지에 이르면 200 이상의 염도를 지닌 바닷물에서 소금 결정이 생성된다. ‘꽃이 핀다고 표현되는 이 단계까지 오는 데 약 1개월이 걸린단다.

 비작도 쪽으로도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저런 풍경은 사진작가들에게 훌륭한 낚시감이 된다. 해가 뜨고 질 무렵 염전 풍경을 렌즈에 담고 있는 사진작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이유이다.

 양 옆구리에 염전을 낀 길은 1.4km나 이어진다. 하도 길다보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맞다.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영광은 신안에 이어 지역 대표 천일염 생산지 중 하나다. 천일염 전국 소비량 기준 약 17~18%가 생산된다. 오죽했으면 면의 이름까지 소금 산(鹽山)이 되었겠는가.

 12 : 32. 정자 둘이 나란히 서있는 둑에 올라섰다. 정자 뒤, 길게 뻗어나가는 방조제 끄트머리에는 비작도가 놓였다.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로 변한 꼬맹이 섬이다. 그 오른편으로는 칠산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함평만을 벗어난 바다는 썰물이 한창인지 갯벌이 하늘 끝에 닿았다. 간척지도 망망한 염전. 저절로 가슴이 시원해진다.

 저 갯벌은 국내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고 했다. 해양수산부 등이 매기는 갯벌 평가에서 매년 1위를 차지한단다. 겨울 북풍이 불 때 격한 파도가 치면서 바다 밑 뻘을 모두 쓸어가고, 다시 봄부터 새로운 뻘이 내려앉는 지형적 특징 덕분이라나?

 방조제를 따라 당두마을로 간다. 소금밭과 갯벌을 양옆에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두우리의 저 싱싱한 갯벌은 영양가 높은 플랑크톤이 풍성해서 고기 떼가 몰려오고, 어패류도 쑥쑥 자란다. 봄에는 실뱀장어, 여름~가을엔 숭어와 새우 꽃게, 가을부터 늦겨울까진 김장용 새우가 잡힌다.

 생태계 복원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도 보인다. 모래 날림으로 인한 염전 피해와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해 퇴사울타리와 대나무 방풍책을 설치했다. 자생 수목인 해송으로 방풍림도 조성했다. 그런 노력이 인정받아 산림청 주최 전국 우수 산림생태복원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간척지 방향은 옷을 바꿔 입었다. 소금밭을 지나자 진초록 대파 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생명력 넘치는 푸른빛이다.

 당두마을로 가는 방조제는 꽤 길었다. 덕분에 우린 서해바다를 실컷 보게 된다.

 서해바다는 다도해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을 보여준다. 섬 십여 개가 군데군데 보일 뿐 나머지는 일직선의 수평선이다. 그 많던 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은 풍요로움을 위해 섬과 섬을 연결했고, 그 결과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잃었다.

 12 : 53. 배수갑문을 지나 두우리 어촌마을체험관에 이른다. ‘두우리 8km나 되는 해안선을 자랑한다. 바닷물이 많이 빠지면 7~12km나 걸어 나갈 수 있는 갯벌도 자랑거리다. 그러니 많은 주민들이 어촌계를 중심으로 갯벌을 부치며 살아갈 것은 당연. 그런 삶은 1973 KBS TV 연속극 두우리 녀석들로 소개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체험관은 문이 닫혔다. 그 이유는 안내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마을 앞 갯벌에서 갯벌양식장 환경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합의 지속적인 자원관리를 위해 무단출입을 금한다니, 어찌 체험객들을 받을 수 있겠는가.

 체험관 앞,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9.9km/ 시점 9.8km) 37코스의 반을 걸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난 5km를 택시로 이동했다. 그러니 이제 시작인 셈이다.

 12 : 56. 200m 남짓 더 걸었을까 삼거리가 나온다. ‘칠산갯길 300 이정표는 두우리해수욕장까지 1.07km 밖에 남지 않았다며 곧장 가란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당두마을’. 천일염으로 유명한 두우리(斗牛里) 3개 자연부락(당두·상정·창우) 중 하나로, 마을 뒷산이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닭머리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당두(堂斗)’로 변했다. 그 왼쪽은 상정마을이다. 마을이 높은 곳에 위치하며 정자와 같다고 해서 상정(上亭)’이란 지명을 얻었다.

 13 : 00. 77번 국도로 올라서 상정마을을 관통하는데 이때 원불교 마크가 눈에 띈다. 맞다. 영광은 원불교의 발상지다. 박중빈 대종사의 생가인 구호동 집터를 비롯해 기도터였던 마당바위, 그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노루목대각지까지 모두 영광에 있다.

 시골 마을치고는 제법 번화한 모양새이다. 펜션과 민박에 식당, 마트까지 갖출 것은 다 갖췄다. 백바위해수욕장과 인접해있다는 지리적 요건이 작용했을 것이다.

 상정마을 버스정류장. ‘실뱀장어 채포 허가권에 대한 해양수산부 답변이 붙어있었다. 민물에서 사는 뱀장어는 연어와 달리 바다에서 산란한다. 때문에 장어 양식장에 공급할 치어(실장어)를 바다에서 잡아야 하는데, 이때 사용하는 그물(낭장망 어구)의 합법성 여부에 대한 답변이다. 아무튼 실장어잡이는 불법이 성행한다고 했다. 실장어 가격이 장난이 아니라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이 모기장 같은 극도로 촘촘한 그물을 사용해 실장어뿐 아니라 모든 치어를 깡그리 잡아버린다는 것이다.

 상정마을 정자는 칠산바다에 대한 조망이 뛰어나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칠산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그렇다면 자리를 잘못 잡았다. 도로 건너의 바닷가 언덕에 얹어놓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상정마을을 지나 백바위 해변까지는 기분 좋은 산책로였다. 77번 국도(칠산로)의 갓길에 나무데크를 깔았다.

 중간에 전망대까지 만들어두는 세심함도 엿보인다. 칠산바다를 눈에 담아보라는 배려인 듯, 하지만 웃자란 잡목이 풍경화의 아랫도리를 잘라먹어버렸다.

 13 : 14. 빼어난 경관으로 입소문을 탄 백바위해수욕장에 이른다. 입구의 울창한 노송 숲은 자랑거리, 백사장도 제법 넓은데다 모래 입자가 무척 곱다. 덕분에 모래사장이나 갯벌에서 씨름·닭싸움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갯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 아이들도 좋아한단다. 영광군에서 천일염·갯벌축제를 연다니 일부러라도 한번쯤 들러볼만 하겠다.

 해수욕장의 자랑거리는 아름다운 경관만이 아니다. 모래사장 너머의 갯벌은 호미로 헤집는 자리 어디서든 백합과 고둥이 나올 만큼 생태가 건강하다고 했다.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저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그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해변은 자동차 캠핑족들로 붐볐다. 그동안 서해랑길을 걸으며 이렇게 많은 인파는 처음 보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칠산바다가 그만큼 곱다는 얘기가 아닐까?

 백사장 너머,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바위가 눈길을 끈다. ‘백바위(白巖)’라는 지명을 낳게 한 풍경이다. 해안가에 거대한 흰 바위 무리가 갯벌 쪽으로 길게 뻗어 나가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백바위 끝에 올라앉은 정자가 풍치를 더해준다. 이곳 백바위해안은 낙조의 명소라고 했다. 정자와 한데 어우러지는 낙조의 색감도 훌륭하지만, 인적을 드물어서 감동적인 낙조풍경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란다.

 백바위는 예쁘장한 나무다리로 연결되고 있었다. 조형미 넘치는 아치를 배경삼은 사진을 남겨보는 것도 괜찮을 듯. 참고로 백바위는 무슨 특별한 전설이 있는 게 아니다. 바닷가에 둘러싸여 있는 바위가 하얀색을 띠고 있어 그런 이름을 얻었다.

 13 : 24. 또 하나의 다리(조금 전보다 한참이나 작다)를 건너자 백암정(白巖亭)’이란 정자가 반긴다. 쉼터는 기본, 낙조를 바라보는 전망대를 겸했다. 거기에 뒤로 물러설 경우 낙조 풍경의 중심이 된다니 이만하면 다목적 정자라 하겠다.

 정자에 오르면 저 멀리 크고 작은 섬들이 아스라하다. 맞다. 두우리 앞바다는 크고 작은 섬들이 볼거리다. 마을 앞 10~20km 안에 영광굴비가 잡히는 칠산도, 한국관광공사가 아름다운 섬으로 꼽은 송이도, 영화 마파도 촬영장소인 각이도 등 20여개의 유·무인도가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일곱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나타난다. 영광 앞바다는 산처럼 보이는 일곱 개의 저 섬들이 있다하여 칠산바다가 되었다. 그 바다는 조기들의 고향이었다. 3월에서 4월 무렵, 산란을 위해 회유하는 조기 떼들로 바다는 넘실거렸고, 전국의 어선들이 몰려들어 성시를 이루었다. 그야말로 물 반에 고기 반, 사흘 동안 조기를 잡아 평생을 먹고 산다는 '사흘칠산'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정자를 빠져나온다. 하지만 다리 건너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커다란 백바위를 우회해 숲속으로 들어선다.

 13 : 30. 잠시 후 임도(이정표 : 종점까지 8.3km)로 올라 뒷산(81.6m)을 에도는 해안도로를 탄다. 이때 칠산바다의 고운 풍광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마침 오가는 차량도 없으니 실컷 눈에 담으면 될 일이다. 오죽 안 다녔으면 칡넝쿨이 도로 가운데까지 퍼졌을까.

 호젓하고 편안한 길은 주변까지 꽃밭으로 만들었다. 노란 금계국과 하얀 들국화가 더미를 이룬다. 그게 아스라이 펼쳐지는 바다와 함께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는다.

 저게 바로 칠산이란 지명을 낳게 한 섬들이다. 그런데 섬이 여섯 개 뿐이다. ‘마음씨가 고운 사람에게만 일곱 개로 나타난답니다.’ 젊은 도반이 너스레를 떤다. 그럼 난 마음씨가 썩 좋은 편은 아닌가 보다.

 고개를 돌리자 백암정이 눈에 들어온다. 백바위 해변은 노을이 없는데도 충분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 무리의 하얀 바위가 넓은 모래사장과 어우러져 흡사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뒷산 자락의 바닷가, 나 홀로 외로운 등대도 잠깐으로 볼거리로는 충분하다. 높이 11.5m(직경 1.8m)의 흰색 원형강관조로 인근을 항해하는 어선의 주·야간 항행지표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13 : 45-59. 뒷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 끝자락에 정자가 걸터앉았다. 칠산바다와 백수읍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쉼터 겸 전망대이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가져온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망중한을 즐길 수 있었다.

 칠산바다 조망, 하늘과 바다를 반반으로 나누는 선, 그 위에 고만고만한 섬 여섯 개(정확히는 일곱 개)가 놓여있다. ‘! 피라미드처럼 생겼네?’ 코로나의 만연으로 입국 여부가 불투명하던 시절, 우리부부는 이집트를 여행 중이었다. 당시 기자지역의 사막에서 바라보던 피라미드가 문득 떠올랐나 보다.

 백수읍 갯벌에 늘어선 풍력발전기 무리도 눈에 들어온다. 광활한 들녘을 가득 메우며 단지를 이룬 규모는 어마어마하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14 : 02. 임도를 벗어나 창우마을로 들어선다. 마을이 푸른 바다(칠산바다)에 둘러싸여있다 하여 푸를 창()’자를, 소를 닮았다는 마을 뒤 한우산에서 소 우()’자를 따와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

 잠시 후 이른 창우항(이정표 : 종점까지 6.5km)’은 바다를 삶의 현장 삼아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선착장이다. 하지만 널찍한 물양장에다 크레인을 두 대나 갖춰 웬만큼 크다는 항구가 부럽지 않다. 커다란 창고와 어민회관도 눈에 띈다. 지역맞춤형 소득증대사업인 어촌뉴딜 사업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선착장에는 꽤 많은 고깃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인근 해역에 조기·꽃게·가오리·서대·새우 등 바다자원이 풍부하다는 소문이 맞나보다.

 창우항을 지나면 불갑천의 둑길을 탄다. 널따란 갯벌 위로 둑길이 뱀처럼 휘어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진다. 갯벌 사이 고인 물에 햇살이 비치자 물고기 비늘처럼 번쩍인다.

 창우항을 돌아온 갯골은 깊고 긴 물 빠진 갯고랑을 불갑산 자락까지 끌어간다. 그래서 하천의 이름까지 불갑천이 되었다. 이즈음 갯벌에서 쉬고 있는 한 무리의 흰 갈매기 때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갈대가 아니라 억새랍니다 둑길의 자취까지 지울 듯 잠식해오는 웃자란 억새를 갈대라고 했다가 집사람에게 초본(草本) 교육을 톡톡히 받았다.

 드넓은 갯벌은 온통 풍력발전기 차지다. 백수읍 하사리와 염산면 두우리의 국공유지 20여만 평에 해상풍력발전을 중심으로 에너지 융복합 산업플랫폼을 구축한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해상풍력발전이란 풍력 터빈을 호수나 피오르 지형, 연안 같은 수역에 설치해 그 곳에서 부는 바람의 운동에너지를 회전날개에 의한 기계에너지로 변환해 전기를 얻는 발전방식을 일컫는다.

 저 강태공은 시간이 아니라 운저리(‘망둥어 꼬시래기로도 불린다)’를 낚는 중이라고 했다. 36구간의 무미건조했던 대화가 떠올랐지만 호기심에 이끌려 한마디 더 건네 본다. ‘그럼요. 얼마나 맛있고 식감이 좋은데요’. 회로도 먹느냐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불갑천이 좁아지더니 소하천으로 변했다. 아니 저건 염전에서 사용할 바닷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일종의 수로이다. 아무튼 건너편에서 둘레길 도반들이 손을 흔들어준다. 출발지 부근처럼 이곳도 자 모양으로 길이 굽어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니 염전이 들어서 있는 게 당연. 소금 만들기가 끝물이어서 일까? 염전은 텅 비어있다는 느낌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저 소금밭에는 흰 소금 대신 붉은 칠면초가 자라고 있을 게다. 쓸쓸한 분위기로 대변되는 염전의 겨울 풍경...

 14 :37. ‘자형 수로의 끝(이정표 : 종점까지 4.3km)에 이른다. 저 둑을 경계로 서해랑길은 송암리(같은 염산면)’로 넘어간다.

 방조제 안쪽은 커다란 저수지가 들어서 있었다. 이곳 역시 염전에 공급할 바닷물을 가두어두는 곳. 거기에 대하양식까지 겸하고 있는 듯 통발모양의 어망이 쳐져 있었다.

 저수지를 지난 서해랑길은 이제 반대편 둑길(이정표 : 종점까지 4.1km)을 탄다.

 영광은 ‘Green Energy’의 메카다. 원자력에 풍력, 태양광까지 탈 탄소를 위한 발전시설을 모두 갖췄다. 나머지 2%는 조력(潮力)으로 채워 넣으면 완벽해지지 않을까?

 태양광발전소와 농경지 사이를 걷던 서해랑길이 다시 둑길로 올라선다. 탐방로는 풍력발전기 사이사이를 걷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다가가 본 발전기는 멀리서 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하나하나가 거대한 구조물이다. 누군가는 저 안에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불갑천 주변은 저수지나 염전, 양어장, 수로가 많다. 그래서 사방 천지가 물이다. 물에 비치는 풍력발전기의 그림자가 아름답다.

 15 :02. 탐방로가 함께 걸어온 불갑천과 헤어지잔다. 그리고 이정표(종점까지 2.5km)가 가리키는 들녘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또 다른 들녘을 횡단한다.

 15 : 14. 77번 국도(이정표 : 종점까지 1.6km)에 닿았다. 영광풍력발전() 사옥이 있는 지점이다. 영광풍력은 국내 최대 규모인 140MW(메가와트)급의 서해안 윈드팜(Wind Farm)’이다. 72천 가구가 사용 가능한 26MWh(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함으로써, 111t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단다.

 탐방로는 국도로 올라서지 않은 채 왼쪽 아래로 난 소로를 따른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었다. 그 끝에서 불갑천을 만났기 때문이다. 불갑천의 물길은 분명 좁았다. 그렇다고 건너 뛸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러니 애초부터 다리를 건너는 게 옳은 선택일 것이다.

 불갑천과 맞닥뜨린 우린 다리(불갑천교)로 올라갈만한 곳을 찾아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길을 만들었고, 가드레일을 넘어 다리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염산면과 백수읍의 경계를 이루는 다리 아래로는 불갑천(佛甲川)’이 흐른다. 불갑면 자비리의 노은재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유입되는 길이 32.5km의 물줄기이다.

 15 : 28.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난 농로로 빠져나간다. 가드레일을 잘라 통로를 만들었는가 하면, 초입에 이정표(종점까지 0.9km)까지 세워놓았다. 이럴 거라면 애초부터 다리 위로 인도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싶다.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누렇게 익은 벼들로 한껏 풍성해진 들녘을 양옆에 끼고 가는 멋진 구간이다.

 15 : 40. 하사리(下沙里)의 자연부락인 염전마을(하사6)’에 이르면서 37코스는 끝을 맺는다. 1952년 염전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하나 더, 종점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마을 노인정이 위치하고 있어 트레킹 날머리로는 이만 곳이 없었다.

 서해랑길(영광 38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농로가 백수로와 맞닿는 지점에 세워져 있었다. ‘칠산갯길 300의 안내판도 눈에 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염전길에서 백합길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에 15.35km가 찍혀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