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50코스

 

여행일 : ‘22. 2. 27(일)

소재지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일원

여행코스 : 통일전망대(7.0km/차량 이동)→제진검문소(1.0km)→명파해변(4.7km)→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거리/시간 : 12.7km/ 실제는 5.87km를 2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은 ‘동해의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길동무 삼아 함께 걷는다’는 뜻으로 부산광역시 ‘오륙도 해맞이공원’을 시작으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초‘광역 걷기 길’이다. 2010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사)한국의길문화’와 각 지자체 및 지역 민간단체가 뜻을 모아 조성했는데, 770㎞에 이르는 동해안을 총 10개(부산·울산·경주·포항·영덕·울진·삼척동해·강릉·양양속초·고성) 구간 50개 코스로 나누었다. 오늘은 5개 코스(46~50)로 이루어진 고성구간의 마지막이자 해파랑길 대장정이 막을 내리는 50코스를 걷는다.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서 통일전망대까지의 12km 가운데 5.7km를 걷게 되는데 가슴에 담아둘만한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하지만 둘로 나뉘어 있는 조국의 아픈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데 의의가 있는 구간이다. 아니 직접 가볼 수는 없지만,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금강산은 해파랑길 최고의 경관이라 할 수 있겠다.

 

▼ 들머리는 통일안보공원(고성군 현내면 마차진리 188)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속초 IC에서 내려와 56번 지방도를 이용 교동지하차도 사거리(속초시 교동)까지 온다. 이어서 ‘동해대로(국도 7호선)’를 타고 북쪽(간성 방면)으로 올라가다 ‘안보공원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곧이어 통일안보공원이다. 공원에 위치한 통일전망대출입신고소가 오늘 트레킹의 출발점이다.

▼ 구간 조정이 약간 이루어진 코스이다. 원래는 명파초등학교에서 출발했으나, 최근 출발지를 ‘통일안보공원’으로 옮겼다. 민통선을 넘을 때 필요한 요식행위가 공원의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서 이루어지는데, 걷기와 이 행위가 따로따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걷는 거리가 너무 짧았던 점도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명색이 트레킹인데 1km만 걸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아무튼 조정이 이루어진 덕분에 걷는 거리가 5.7km로 늘어났다.

▼ 해파랑길의 종점인 통일전망대에 들어가려면 통일안보공원에 위치한 출입신고소에서 출입명부 작성 등 소정의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는 방역이 더 우선이다. 그 시작은 발열검사. 확진자가 15만 명을 넘어선 지가 벌써 1주일 되었으니 이젠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믿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 영상교육이 생략되었는지 오늘은 출입신고서(관람료로 1인당 3천 원씩을 낸다)를 작성하자 모든 게 끝이다. 하지만 차량의 출발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그때까지는 이곳에서 시간을 때워야 한다. 그렇다고 지루해 할 필요는 없다. 신고소와 함께 들어선 기념품 판매장에 다양한 상품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들쭉술 등 북한산 제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 아이쇼핑을 끝내고 밖으로 빠져나오니 ‘평화의 종’이 매달려 있다. 파주의 것 말고도 또 하나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파주의 것은 ‘세계’라는 접두사를 달고 있으니 차원이 다르다. 재료(분쟁중인 국가 60여 개국의 탄피)나 크기(가로 1.5m, 세로 1.47m)도 물론 다르다. 그렇다고 평화통일을 바라는 속뜻까지 다를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 해파랑길의 구간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평화의 종’ 근처. 그러니까 출입신고소의 앞마당 가장자리에다 만들어놓았다. 장승으로 배경을 삼았는가 하면, 옆에 벤치를 놓아 쉼터의 기능까지 겸하도록 했다.

▼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마라토너라도 되는 양, 수많은 차량이 주차장에 줄지어있다. 국도7호선을 타고 통일전망대까지 갈 수 있지만 출입신고서 작성을 위해 이곳에 들른 차량들이다. 저들은 너나없이 조금 전 받은 출입신고서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전망대로 가다가 중간의 군 검문소에 그 신고서를 제출하면 출입증을 내준다.

▼ 자동차로 10분쯤 달려 도착한 통일전망대(統一展望臺)는 화장실부터가 남다르다. 오벨리스크를 쏙 빼다 닮은 특이한 외형에 ‘평화통일’이란 이름표까지 달아놓았다. 그러나 해파랑길 종주꾼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간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 통일전망대는 전망타워를 중심으로 꾸며졌다. 전망타워를 한가운데에 놓고 그 주위에 리모델링이 예정된 옛 건물과 교회를 배치했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가는 성모상(십자가)과 불상, 망배단, 351고지전투전적비, 충혼탑 등이 터를 잡았다. 6.25전쟁 기념관과 휴게소, 식당은 언덕 아래의 널찍한 주차장에다 지어놓았다.

▼ 휴게소 앞을 지나면 탐방로가 둘로 나뉜다. 오른편은 망배단과 성모상·불상 등을 거쳐 전망타워로 연결되는 무장애 탐방로이고, 충혼탑을 거치는 왼쪽 길은 거리가 짧은 대신 경사지에 놓은 계단을 올라야만 한다.

▼ 고성 출신의 금강산대장군은 청양에 살던 칠갑산여장군을 처로 맞았다. 2019년에 열렸던 청양칠갑산장승축제 때 장승혼례를 치렀단다. 그나저나 장승은 재앙과 악귀를 막고 소망을 하늘에 전하려 했던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이자 마을공동체를 지켜온 수호신이다. 그러니 저 장승에게 통일의 길을 물어보면 어떨까?

▼ 조금 더 걷자 길이 또 다시 나뉜다. ‘DMZ 평화의 길(A코스)’의 집결지가 있는 오른편으로 진행해본다. 망배단과 성모상, 불상이 집단으로 들어서있는 곳이기도 하다.

▼ 해안초소 쪽으로 나있는 ‘DMZ 평화의 길(A코스)’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2018년 남북한 정상은 ‘판문점 선언’에서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자는데 합의했다. 그 일환으로 실질적 평화의 지표를 만들기 위해 조성된 곳이 ‘DMZ 평화의 길’이다. 하지만 아무 때나 찾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관계의 경색,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유행 등으로 폐쇄되기도 한다. 갑자기 열리기도 하고 갑자기 닫히기도 하니 잘 지켜보는 게 우선. 그런 다음 부지런히 신청해보자.

▼ A코스는 이곳을 출발해 금강통문과 금강산전망대를 거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금강통문까지 2.7Km는 걷고, 나머지 5.2Km는 차량으로 이동한다. 이밖에도 통일전망대에서 금강산전망대까지 차량으로 왕복 이동하는 B코스가 있다. A코스는 20명, B코스는 80명씩 하루 두 차례만 운영하며 치열한 경쟁을 피하기 위해 추첨을 할 때도 있다.

▼ 전망대 바로 아래는 ‘망배단(望拜壇)’이 차지했다. 고성지역의 실향민들이 ‘망향제(望鄕祭)’를 드리는 곳이다. <황토마루 고개 넘어 그리운 고향/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의 소원/ 메나리 가락에 목들이 메어/ 어머니 품 안으로 안기어 가는/ 이 길은 고향의 길 불망의 길>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찾아갈 수 없는 실향민의 마음인 듯, 비석에 새긴 글귀가 슬프고 처량하다.

▼ ‘망배단’의 뒤는 명품 조망대이다. 절하는 이들의 마음을 담아 다가가보면 우리네 땅이지만 우리가 갈 수 없는 북녘 땅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금강산이 가깝게는 16km, 멀리는 25km정도, 해금강은 대부분의 지역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 망배단의 앞은 종교시설이 차지했다. 1986년에 천주교에서 세웠다는 높이 10.5m의 십자가가 주인공. 성모 마리아와 김대건 신부가 양 옆을 지키는 모양새이다. 불교라고 해서 빠질 리가 없다. 1988년 신흥사에서 그 옆에다 13.6m 높이의 ‘통일 미륵불’을 세웠다. 그 신상(神像)들 앞에서 양손을 모으고 있는 방문객도 보인다. 통일을 향한 마음은 종교를 가리지 않을 것이다.

▼ 해발 70m의 맨 꼭대기이자 맨 가운데는 2018년에 문을 연 ‘전망타워’가 차지했다. 1984년에 개관한 기존 전망대가 낡아 안전사고가 제기되자 디자인공모를 거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DMZ(Demilitarized Zone)의 ‘D’자를 형상화한 건물은 1층과 2층이 붙어 있고, 3층은 엘리베이터와 계단, 양 축대를 지지대 삼아 공중에 뜬 형태다. 1층에는 안내 데스크와 특산품홍보장 등이 있고, 2층에는 전망교육실과 통일홍보관, 맨 위층은 전망대가 차지했다. 옆에 붙어있다시피 한 기존 전망대는 리모델링을 거쳐 북한음식전문점으로 운영할 계획이란다.

▼ 전망타워 앞마당은 ‘351고지 전투전적비’가 차지했다. 월비산에 있는 이 고지는 ‘앵커(anchor·닻)고지’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남·북한군이 밀고 밀리는 접전을 벌일 때 고성 앞바다에서 미군 함정이 포사격으로 한국군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양측 전사자가 1만 명을 넘긴 이 치열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저 빗돌을 세웠나 보다.

▼ 북한음식전문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옛 ‘통일전망대’ 앞에는 ‘통일우체통’을 세워놓았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통일의 의지를 담은 편지를 저곳에 넣으라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받는 이를 누구로 하면 좋을까?

▼ 지상 34m 높이에 있는 전망대는 승강기를 이용하면 된다. 비상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으나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할 필요는 없을 듯. 다만 승강기가 30인승 1대에 불과하니 줄을 서는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

▼ 전망대에 오르면 금강산의 산봉우리와 바다의 만물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다. 조금 더 땅겨보라는 듯 망원경(유료)까지 배치했다. 하지만 유리창이 시야를 방해하는 게 흠이다. 남쪽(이곳 말고는 조망되지 않는다)의 사진만 게시하는 이유이다. 참고로 보다 더 깔끔한 실물을 보고 싶다면 옥외 전망대가 있는 1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 1층에도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그런데 관람객들의 숫자가 전망타워보다도 오히려 더 많다. 북녘 땅을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보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게 더 간절한 이들은 500원짜리 동전을 전망 망원경 투입구에 넣고 요리조리 돌리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 난간에 서자 북녘의 산하가 고스라니 눈에 들어온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해안가의 작은 섬, 송도이다. 그 왼쪽으로 군사분계선 표시용 말뚝이 있다. 군사분계선은 철책이 아니라 서해부터 동해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말뚝(1,292개)을 박아 표시한다. 말뚝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북한군 초소와 한국군 초소가 육안으로 희미하게 보인다. 해안에서 가까운 곳에 남북을 잇는 도로와 철로가 있다. 잘 뻗은 도로는 금강산 관광객을 실어 나르던 육로다.

▼ 눈에 들어오는 산하는 조물주가 아니고서는 그릴 수조차 없는 수체화이다. 예로부터 절경을 본 사람은 많아도 비경(祕境)을 본 사람은 적다고 했다. 사람들은 또 비경보다 한 단계 위를 선경으로 꼽는다. 그렇다면 저 해금강 일대는 선경(仙境)임이 분명하다.

▼ 바다 쪽으로 눈을 돌리면 해금강이 지척이다. 송도 뒤로 보이는 바위봉우리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끝자락인 구선봉(낙타봉)이란다. 그 오른편으로는 해금강의 말무리반도와 만물상(사자바위), 현종암, 사공바위, 부처바위 등이 도열해 있단다. 하지만 일일이 대조해 볼 수는 없었다. 가보지를 못했으니 어떤 게 어떤 것인지를 어찌 알겠는가.

▼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금강산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날씨와 햇빛의 방향에 따라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때도 많다는데 행운이라 하겠다. 저 봉우리 들은 외금강(外金剛) 2천봉의 하나인 옥녀봉과 채하봉, 육선봉, 집선봉, 관음봉, 일출봉 등이란다. 오늘처럼 날씨 좋은 날에는 내금강의 비로봉도 눈에 들어온단다. 하지만 이 역시 실물과 대조해 볼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없으니 어찌할까나.

▼ 그 오른편에는 ‘금강산 전망대’가 있다. ‘평화의 길’ 탐방을 통해서만 가볼 수 있는 곳. 신청을 해도 운이 좋아야만 선정이 되니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이곳에서 금강산전망대까지는 2km. 그 거리만큼 북녘 땅이 다가오면서, 구선봉(북한에서는 낙타봉)과 해금강, 감호(선녀와 나무꾼의 무대) 등이 그 속살까지 아낌없이 보여준단다. 참고로 그 너머 오른편에는 북한의 ‘덕무현관망대’가 있다. 높이는 351m. 원래는 ‘356고지’였단다. 6·25전쟁 당시 국군의 포격으로 산의 높이가 5m나 깎여 나갈 만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란다.

▼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도중에는 ‘고성지역 전투 충혼탑’을 마주할 수 있었다. 조국 수호를 위해 6.25전쟁에 참전 고성지역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산화한 전몰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탑이다.

▼ 주차장에 되돌아오니 먼저 내려온 박군이 기다리고 있다. 직장에서 만났으나 40년 가까이 어울리다보니 고향의 불알친구처럼 되어버린 인생의 도반(道伴)이다. 나들이 삼아 소주라도 한잔 나누자며 마지막 구간을 함께 했는데,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다’며 휴게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미리 구입해 놓은 옥수수막걸리와 안주를 놓아둔 채로 말이다.

▼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막걸리 두 병을 비우고 ‘6.25전쟁 체험전시관’으로 향했다. 어떻게 찾아온 여정인데 북녘의 산과 바다를 조망하는 데서 멈추겠는가. 왜 남과 북으로 분절됐는지, 어떤 아픔인지,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도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주차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전시관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교훈삼고 민족화합과 조국의 평화통일을 염원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그러니 동선을 따라가며 전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과 영상, 자료, 유물 등을 통해 현실감 있는 체험을 해보자.

▼ 안으로 들어서자 별안간 폭음이 들려온다. 다급함이 느껴지는 외침소리도 들린다. 전쟁터에 들어왔다고 느끼게 하려는 효과음인 모양이다.

▼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요즘은 남북이 평화에 순풍이 부는 상황이지만 아픈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 6.25 참전 용사들이 흘린 피와 땀이 지금껏 우리를 평화롭게 살아올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전시관은 영상체험실과 사진으로 보는 6.25, 전쟁체험실, 전사자 유해발굴실, 6.25전쟁 자료실, 유엔군참전국실, 6.25전쟁 자료실, 6·25 전쟁 중 동해에서의 주요 전투를 다룬 기획 전시실, 병영체험실 등으로 꾸며졌다.

▼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곳은 ‘전사자 유해발굴실’이었다. 전투에서 희생당한 국군 전사자 유해사업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전시해 놓은 실제 발굴품 및 유골 등을 보면서 진한 아픔과 슬픔을 느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전사자의 유해발굴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아직도 진행되고 있으며, 전투기록 분석 및 지역주민, 참전 용사 증언 등으로 발굴 가능 지역을 결정해 발굴 후 신원이 확인되면 화장 후 현충원에 안장되며, 신원이 미확인되면 신원 확인 시까지 중앙감식소에 보관하게 된다.

▼ 앗! 요즘 군인들은 침대생활을 하는가 보다. 그 옆에는 내가 신병훈련소 시절 생활했던 시설(KATUSA로 근무했기 때문에 한국군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통로를 가운데에 두고 양 옆의 맨바닥에서 잠자던 옛 병영도 재현해 놓았다. 이밖에도 국군홍보실과 국군비전실에서는 국군의 발전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트레킹은 제진검문소(군인들이 민통선으로 출입하는 인원과 차량을 확인하는 곳이다)부터 시작한다. 검문소 앞에서 7번 국도를 빠져나와 ‘명파리’ 방향의 도로를 따르면 된다. 이때 무심결에 검문소를 촬영했으나 게재는 않기로 했다. 명색이 국방부에서 과장직까지 수행(비록 파견근무였지만)했던 나인데 어찌 군의 시설을 함부로 노출시킬 수 있겠는가.

▼ 검문소 앞에는 광개토대왕비만큼이나 큰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국도 7호선’의 종점임을 알리는 표식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국도 7호선은 부산광역시 중구에서 함경북도 온성군 유덕면까지를 잇는 도로를 말한다. 그러니 종점으로 가기 위해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따름이다.

▼ 대한민국의 실질적 최북단인 ‘명파리(明波里)’. 마을로 향하는 도로는 넓고도 곧다. 하지만 지나다니는 차량은 눈에 띄지 않는다. 간성에서 대진검문소까지 4차선 국도가 개통되면서부터 지나는 차량이 뜸해졌기 때문이란다.

▼ 그래선지 관광객을 겨냥한 커다란 식당도 간판만이 도로를 지키고 있다. ‘95년 민통선이 북쪽으로 이동되면서 관광객들을 위해 생겨난 시설들이니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다시 문을 열 수 있으려나?

▼ 광산천(鑛山川)으로 여겨지는 하천을 만난 탐방로는 다리(명파2교)를 건너지 않고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강둑을 따라 바닷가로 향한다.

▼ 광산천과 명파천(明波川)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는 출렁다리가 놓였다. 출렁다리의 재미는 누가 뭐래도 흔들림이다. 하지만 이 다리는 아무리 발을 굴러도 끄떡없었다. 튼튼하게 지어놓은 탓에 출렁다리라는 본분을 망각했다고나 할까? 대신 생김새는 카메라에 담아두어도 좋을 만큼 잘 생겼다. 참! 출렁다리 앞의 너른 공터는 쉼터로 꾸며져 있었다. 정자와 벤치, 그리고 운동기구 몇 점을 배치했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명파천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연어의 회귀천으로 입소문이 자자한데, 은어가 서식할 정도로 오염되지 않은 1급수를 자랑한단다.

▼ 출렁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2차선 도로(명파4길)와 마주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 ‘명파해수욕장’에 이른다. 트레킹을 시작하고 17분만인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널따란 주차장. 매년 여름 피서객들을 위한 해변마당축제를 연다고 하더니, 저런 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역특산물을 판매하는 부스 몇 개쯤은 설치해야 하지 않겠는가.

▼ ‘명파해변(明波海邊)’은 접경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 덕분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소박함을 잘 간직하고 있다. 명파리(맑은 물과 깨끗한 백사장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라는 이름대로 길이가 500m(폭 50m)나 되는 은빛 모래사장 너머로 동해의 푸른 파도가 넘실댄다. 민물 하천이 모래사장을 스쳐지나간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해수욕장은 여름철에만 한시적으로 문을 연단다. 그것도 군부대와 협의해가며.

▼ ‘오토캠핑장’도 자랑거리다. 야영 데크 21개소와 돔하우스 5동이 조성돼 있는데, 얼마 전 해변의 철책 제거사업이 완료돼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한다. 하지만 접경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은 약점으로 작용된다. 군에서 개방하는 시간에만 해변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약점이다.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해변을 개방시키니 별다른 불편은 없겠지만.

▼ 명파해변의 또 다른 명물은 ‘아트호텔’이다. 영국 작가 뱅크시(Banksy, 익명으로 활동 중인 미술가 겸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세운 ‘벽에 가로막힌 호텔(Walled Off Hotel, 조망이 최악인 건물을 뱅크시의 작품들로 치장한 게 특징)’에 이은 세계 두 번째 접경지역 아트호텔이자 동해 최북단 호텔이다. 숙소의 기능을 잃고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던 옛 ‘명파DMZ비치하우스’를 예술가·기획자·기관이 참여해 평화·생태·미래를 주제로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했다. 그리고 8개의 객실을 8명(팀)의 예술가가 각자의 색깔을 담아 꾸몄다.

▼ 도로로 되돌아와 ‘마차진’ 방향의 도로를 따른다. 이정표(마차진 3.9㎞)의 하단에 해파랑길 표식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오토캠핑장 뒤로 난 길을 따르고 있었다. 또 다른 볼거리인 ‘승마체험시설’을 눈에 담고 그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본래의 탐방로와 만난다는 것이다. 아무튼 도로를 따라 200m쯤 걸으니 교통표지판(제진 검문소 1km 앞)이 세워져 있는 국도 7호선(동해대로)의 '명파교차로' 램프구간이 나온다. 탐방로는 교차로 조금 못미처에서 산비탈을 치고 오른다. 제진검문소에서 이곳까지는 25분이 걸렸다.

▼ 산비탈에 걸쳐놓은 계단 앞에는 ‘관동팔경 녹색경관길 안내도’를 세워놓았다(이후에 만나게 되는 이정표들도 하나같이 같은 이름의 명찰을 달고 있었다). 관동팔경녹색경관길이란 강원·경북지역의 7개 시·군이 상호 협력해 만든 길이 330km의 보행로로, 관동팔경 가운데 북한에 있는 2곳(삼일포·총석정)을 뺀 나머지 6곳(청간정·의상대·경포대·죽서루·망양정·월송정)을 잇는다. 조선 선조 때 문신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 관동팔경을 유람한 감회를 관동별곡에 담았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감탄했던 아름다운 경관들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보여겠다며 세상에 내놓았다.

▼ 관동팔경의 아름다움은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시작부터 가파른 나무계단이 나타나는 걸 보면 말이다. 거기다 꽤 길기까지 하다.

▼ 고개를 돌리자 ‘명파리’ 들녘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명파리(明波里)란 지명은 동해의 맑은 물과 백사장을 낀 아름다운 경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거기다 광산천과 명파천이 들녘을 적셔주어 전답도 비옥하단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이유일 것이다.

▼ 가파른 오르막길이 끝나자 탐방로는 착하게 변한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완만해졌다. 거기다 산길은 울창한 솔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가 심심을 정화시켜주니 이 보다 더 좋은 산책로가 어디에 있겠는가.

▼ 탐방로는 능선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시야가 트이는 것도 아니다. 걷기 편한 곳으로 자연스럽게 나있다고나 할까? 참! 마차진을 3.4km 남겨놓은 지점에서는 군 작전도로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 마차진을 2.7km 남겨놓은 지점부터는 임도를 탄다. 400m쯤 더 걸으면 임도는 아예 일반도로 수준으로 변한다, 인근에 군부대라도 있는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 산길로 들어선지 40분쯤 되었을까 이동통신 중계탑이 보이는가 싶더니 이정표(마차진 1.8㎞/ 명파해변 2.3㎞)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마차진 푯말이 실제와는 다른 방향에 매달려있기 때문이다. 해파랑길 표식에서 제대로 된 방향(왼편)을 알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아니 눈치 빠른 나그네라면 오솔길 초입에 세워놓은 봉수대(술산봉수) 안내판을 보고도 대충 눈치 챌 수도 있겠다.

▼ 100m쯤 더 걸으면 이번에는 ‘봉수대 갈림길(이정표 : 마차진 1.7㎞/ 명파해변 2.4㎞)’이다. 해파랑길은 봉수대를 거치지 않으니 마음 내키는 나그네들만 들러보면 되겠다. ‘술산봉수’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의 능선을 타면 된다.

▼ 봉수대로 올라가는 오솔길은 무척 곱다. 솔숲 사이로 보드라운 흙길이 나있는데, 경사까지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정비 또한 잘 되어 있었다.

▼ 그렇게 10분 정도 오르자 ‘술산봉수(戌山烽燧)’가 얼굴을 내민다. 석축기단을 쌓고 그 위에 봉화 아궁이를 올린 형태인데, 이는 전형적인 연변봉수대의 구조라고 한다. 

▼ 북쪽의 구장천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남쪽 정양산(거진읍 반암리) 봉수로 전달하던 술산봉수는 조선 후기에 기능을 상실했다고 한다. 국방에 대한 관심이 수도와 남북의 변경 지역에 집중된 데다, 왜구의 출몰까지 적어지자 동해노선의 중요성도 그만큼 줄어들었단다.

▼ 봉수대 곁에는 무인산불감시탑이 들어섰다. 봉​수란 변경 지역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다른 기지에 신속히 알리려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설치했었다. 봉수 부근의 경계도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밤에는 횃불(熢 봉)로, 낮에는 연기(燧 수)로 신호했다. 그 기능을 저 감시탑이 이어받았다고나 할까?

▼ 시야는 동쪽, 그리니까 동해바다 쪽으로만 트인다. 바다 건너에서 출몰하는 왜구를 살피는 데는 이만한 곳도 없었겠다.

▼ 하산은 반대방향이다. 정규 탐방로는 아니지만 길을 찾는 데는 문제가 없다. 초입에서 ‘밀양 박씨’ 무덤을 만났다면 길을 제대로 들어섰다고 보면 되겠다.

▼ 오솔길을 따라 5~6분 정도 내려오자 본래의 탐방로와 다시 만난다.

▼ 봉수대에서 내려선지 25분 만에 도로(금강산로)에 내려섰다. 아까 산을 올랐던 명파리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관동팔경녹색경관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아니 이곳에는 이정표(마차진 0.1㎞/ 명파해변 4.0㎞)까지 세워놓았다.

▼ 해파랑길은 왼편으로 가라고 한다. 하지만 우린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길만 사나울 뿐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0m쯤 걷자 ‘사거리(이정표 :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 0.5㎞/ 명파해변 4.3㎞)’가 나온다. 조금 전 하산지점에서 왼편으로 들어섰었더라면 이곳으로 빠져나왔을 것이다.

▼ 하산 지점의 이정표가 가리키던 ‘마차진(麻次津)’에는 대공사격장이 들어서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사진촬영은 금지다. 박군과 내가 일부러 도로를 따랐던 이유이기도 하다.

▼ 조금 더 걸으니 .KBS 인간극장에서 ‘일심이네 집’으로 소개되었다는 가게가 나온다. 100% 태양건조 오징어만을 고집한다는 소문답게 마당에서 오징어가 말라가고 있다. 하지만 건어물가게는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전화를 하면 달려 나올라나?

▼ 날머리는 통일안보공원(원점회귀)

모퉁이만 돌면 통일안보공원인데도 도로는 적막강산이다. 지나다니는 차량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길가 상점이나 음식점도 하나같이 문을 닫아걸었다. 그러다가 운 좋게도 문을 연 건어물가게 하나를 만났고, 내가 좋아하는 오징어를 몇 마리 살 수 있었다. 아이스팩으로 포장까지 해주는 친절을 뒤로하고 길을 나서니 곧이어 통일안보공원이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2시간을 걸었다. 앱이 5.87km를 찍고 있으니 절반 이상이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해파랑길 48코스

 

여행일 : ‘22. 1. 23(일)

소재지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과 간성읍, 거진읍 일원

여행코스 : 가진항→남천교→동호2리→북천철교→송강·정철정→반암해변→거진해변→거진항(거리/시간 : 16.6km/ 실제는 14.11km를 3시간 15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은 떠오르는 해와 푸른바다를 길동무 삼아 함께 걷는다는 뜻으로 부산의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안을 따라 조성된 초‘광역 걷기길’이다. 770㎞에 이르는 동해안을 총 10개(부산·울산·경주·포항·영덕·울진·삼척동해·강릉·양양속초·고성)구간 50개 코스로 나누었는데, 오늘은 5개 코스 나누어진 고성군 구간(65.3km)의 세 번째 코스를 걷게 된다. 가진항을 출발해 남천과 북천, 반암항과 해변을 거쳐 거진항에 이르는 길이 15km의 트레일이다. 이 구간은 걷는 내내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경관을 눈에 담는다. 또한 백두대간의 헌걸찬 모습도 조망된다. 하지만 대표 볼거리로 제시된 ‘연어맞이 광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카카오나 네이버 등 그 어떤 지도에도 나와 있는 않는데다, 연어맞이광장이라는 지명이 들어간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았다. 뭔가 개선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 들머리는 가진항(고성군 죽왕면 가진리)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속초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간성(고성군청 소재지) 방면으로 올라가다 공현진교차로(고성군 죽왕면 공현진리)에서 바닷가로 빠져나오면 잠시 후 영화 ‘군함도’의 촬영지인 가진항(加津港)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 48코스의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가진항입구 삼거리’의 북동쪽 코너에 세워져 있다.

▼ 48코스는 가진항(고성군 죽왕면)에서 출발해 남천교와 북촌 철교(간성읍)를 지나 거진항(거진읍)에 이른다. 길은 농로와 해변길, 남천과 북천길을 걸으며 다양한 변주를 울린다. 갈 수 있는 남쪽 백두대간의 최북단 우뚝한 향로봉(2003년 나도 저곳에서 백두대간을 완성했었다)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제시된 길이는 16.6km. 하지만 남천교가 바닷가에 새로 놓이면서 2km 정도가 단축됐다.

▼ 해파랑길(고성구간) 안내도는 명태를 품었다. 이곳 고성군이 명태의 집산지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가진항의 안내로 채워져 있던 공간은 텅 비어있었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편의시설을 설치했다면, 사후관리까지 해나가는 게 납세자에 대한 도리가 아닐까?

▼ 차에서 내리면 ‘활어회센터’가 길손을 맞는다. 맞다. 가진항은 ‘물회 1번지’로 유명하다.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자연산 가자미·오징어·해삼 등이 각종 야채와 초고추장을 푼 칼칼한 국물과 어우러지는 고성에서만 맛 볼 수 있는 별미다. 작년 이곳을 찾았던 우리 부부는 기본(일반회+해삼+멍게, 1만5천원)에 소라를 추가하면서 5천원을 더 부담했었다. 참! 물회는 국수를 말아먹어야 제 맛이다. 말만 잘하면 무한 리필이라는 것도 기억해두자.

▼ 회센타 뒤는 신년 일출로 유명한 ‘공현진2리 해변’이다. 아니 스뭇개바위(옵바위)로 더 유명하다. 해변의 남쪽 바다에서 솟구쳐 오른 웅장한 크기의 기암괴석으로, 생긴 그 자체만으로도 황홀한데, 바위 사이로 해라도 떠오를라치면 말로는 표현 못할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 북방파제(빨강등대가 있는 곳)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사직된다. 아니 ‘속초해경 가진출장소’ 방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이해가 빠를 수도 있겠다.

▼ 가는 길목이니 어판장 구경은 필수다. 전체적으로 한갓지지만 경매를 앞둔 탓인지 어수선한 풍경이다. 지난 20일이 대한(大寒)이었으니 아직은 엄동설한. 모닥불에 시린 손을 녹여가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 요놈 때문에 망신당할 뻔 했다. 어설픈 상식으로 ‘복어’라 우겼는데 경매 순서를 기다리던 어부가 ‘도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건드리면 자신의 몸을 활짝 부풀리는 게 영락없는 복어다.

▼ 탐방로는 해양출장소 앞을 지나자마자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이차선도로인 ‘가진해변길’로 올라선다.

▼ 오른편은 ‘가진리(加津里)’. 조금 전 트레킹을 시작했던 ‘포구(浦口)’의 배후마을이다. ‘가진’이란 지명은 넉넉하게 잡히던 수산물에서 유래됐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덕포’. 규모는 작아도 예부터 다른 어항보다 수산물이 많이 나 주민들이 덕을 많이 봤다는 것이다. 후에 작은 나루가 하나 더 생기면서 ‘가포진(加浦津)’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진리(加津里)로 고쳐졌다.

▼ 바닷가에 들어선 갤러리(Square Root Gallery)가 눈길을 끌기에 다가가 봤다. 미술시장이 열린다니 소품이라도 하나 구입할 수 있을까 해서이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바닷가로 나가니 ‘가진해변’이 드넓게 펼쳐진다.

▼ 탐방로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서는데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새로 내놓은 도로답게 거칠 것 없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 겨울 풍경은 역시 황량하다. 바다나 들녘 할 것 없이. 대한(大寒) 추위가 여전하지만 햇살은 더없이 강렬했다. 그 빛살아래 펼쳐지는 세상은 이제 막 펼쳐놓은 순백의 도화지다. 저 공간엔 사라진 지난 흔적들 대신 새로운 희망이 하나둘 수 놓여 갈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5분. 최근 개통했다는 ‘남천교’를 건넌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기존의 남천교까지 ‘ㄷ’자 모양으로 빙 돌아오느라 3.5km를 걸어야만 했는데, 이 다리가 놓임으로써 0.7km로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해파랑길 순례자들에게는 희소식 중에서도 희소식이라 하겠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백두대간을 배경삼아 들어선 간성읍(杆城邑)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고성군 중앙부의 읍으로 8·15광복 후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4년 수복되었다. 진부령(陳富嶺)에서 발원하는 북천(北川)과 마산(馬山)에서 발원하는 남천(南川)이 각각 읍의 북부와 남부를 지나면서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를 형성한다.

▼ 반대편은 남천(南川)의 하수역이다. 남천은 마산(고성군 간성면 탑동리)에서 발원하여 향목리(죽왕면)에서 동해로 유입되는 길이 8.3km의 지방하천으로, 북천·자산천과 더불어 고성에서 소문난 은어 낚시터다. 그래선지 겨울철이면 고니를 비롯한 철새들이 무리지어 찾는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 눈에 띄지 않았다.

▼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오른편 둑길로 내려선다. 그리고 배수펌프장을 지나자 ‘동호리 해변(東湖里 海邊)’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해변의 초입에는 정자와 벤치. 운동기구 등을 갖춘 작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동쪽에 호수가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동호리’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도 세워두었음은 물론이다. 갈벌(갈대가 많다는), 선유리(仙遊里, 경치가 아름답다는) 등으로도 불려왔다나?

▼ 사람을 끌어드리려는데 포토죤 하나 만들어두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마스코트 삼아 세워놓은 듯한 저 손가락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참! 파도와 사랑 마크를 버무린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 반대편에는 가진해변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텅 빈 겨울 바닷가. 특히 일망무제의 동해 바다를 굽어보노라면 가슴에 쌓여 있던 시름과 스트레스가 단번에 사라지는 듯한 통쾌함을 맛볼 수 있다.

▼ 탐방로는 해변을 가로지르지 않는다. 대신 방풍림용으로 조성된 듯한 울창한 해송 숲을 오른편에 끼고 이어진다. 아니 숲속을 들락거리기도 한다.

▼ 숲은 꽤 굵고 오래 묵은 소나무들로 가득하다. 더위를 피해 떠나온 여행자들에게는 최적의 피서지가 될 듯. 하긴 저런 여건을 갖추었기에 고성군의 관광종합계획에 ‘동호리 해양스포츠체험센터 조성사업’이 포함되지 않았겠는가.

▼ 길을 걷다보면 ‘관동별곡 800리길’ 이정표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송강 정철은 강원도관찰사로 재직하던 1580년 고성과 경북 울진 사이에 있는 관동팔경인 총석정·삼일포·청간정·낙산사·경포대·죽서루·망양정·월송정 등을 다니며 가사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관동별곡을 지었다. 그가 유람한 역사적 사실을 모티브로 삼아 만든 트레일이 ‘관동별곡 800리길’인데 기존의 해파랑길과 겹쳐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 탐방로가 곧게 뻗어나간 신설도로로 올라서는가 싶더니 또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곧장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트레킹이 끝나고 갖게 될 술자리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가져보기 위해서이다. 코로나라는 놈이 ‘형우’군과 나 사이를 그만큼 오랫동안 갈라놓았다는 얘기도 된다.

▼ 신설도로의 끝에는 ‘북천 배수펌프장’이 있었다. 하지만 도로를 따른 탓에 바닷가에 있다는 습지와 갈대밭은 구경할 수 없었다.

▼ 펌프장의 뒤는 북천(北川)이 동해바다와 만나는 하수역이다. 물가에는 모래언덕이 여럿 형성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사이의 물길은 바다에서 고향을 찾아 북천으로 돌아오는 연어의 회귀 경로이다. 참고로 북천은 칠절봉(고성군 간성읍 진부리)에서 발원하여 봉호리를 지나 거진읍 송죽리에서 동해로 유입되는 길이 20.17km의 지방하천이다.

▼ 펌프장에서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강둑을 따른다. 강변에는 요런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었다. 뭔가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맞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강 건너에 지어놓은 정자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자작나무와 소나무로 치장된 자그마한 산을 배경으로 삼은 게 여간 멋스럽지가 않다. 참! 오리 떼도 볼 수 있었다. 아까 남천에서 놓쳤던 ‘철새 떼’를 엉뚱한 북천에서 보았다고나 할까?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25분. ‘북천 철교(北川 鐵橋)’에 도착했다. 1930년경 일제가 자원수탈을 목적으로 건설한 동해북부선(원산-양양)의 철교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철교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자 아군이 폭파하게 된다. 그 후 60여 년간 교각만 황량하게 남아있던 것을 행정안전부가 평화통일을 염원하고 저탄소 녹색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이곳을 ‘평화누리길’로 지정하면서 새롭게 태어났다.

▼ 초입에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마차진터널, 공현진터널, 간성역, 문암역의 철도관사 등 새롭게 태어나야 할 문화재급 시설들의 사진도 함께 게재했다.

▼ 한국철도시설공단으로부터 폐철각(廢鐵脚)을 기증받은 고성군은 이를 리모델링하고 길이 191m의 덱 상판을 설치함으로써 2011년 걷기와 자전거마니아들을 위한 전용교량으로 재탄생시켰다.

▼ 교각의 잔여 공간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작은 전망대를 만들어 주변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도록 했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7번 국도의 ‘북천1교’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 뒤로 펼쳐지고 있을 백두대간은 실루엣으로 처리되어 버렸다. 저곳에 있을 향로봉은 백두대간의 남쪽 마룻금이 끝나는 지점이다. 하지만 자연이 아닌 인간이 끊어놓아 못내 아쉬움이 남는 곳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던 나 역시 저곳에 올랐었다. 그리곤 북녘으로 뻗어나가는 산줄기에서 감히 눈길을 떼지 못했었다. 내 나이 벌써 칠십. 나에게 백두대간의 북녘구간 종주는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후배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그 시기가 앞당겨져 그 대열에 나도 끼었으면 더 좋겠고 말이다.

▼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강둑을 따라 바닷가로 향한다. 이때 ‘리컴벤트 자전거’를 타고 가는 라이더를 만났다. 등을 대고 누워 타는 형태의 자전거로 편안한 자세로 페달을 밟을 수 있어 장거리 주행에 알맞다고 알려져 있다. 공기 저항도 작아 더 빠른 주행이 가능한데 디자인이 독특해 이미 선진국에서는 꽤 많이 보급돼 있단다.

▼ 잠시 후 ‘국토종주 동해안 자전거길’의 북천철교인증센터(공중전화 부스처럼 생긴 시설)가 있는 쉼터에 이른다. 주인장격인 정자는 ‘松江鄭澈亭’. 조선 명종·선조 때의 정치인이자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인’으로 꼽히는 정철(鄭澈, 1536-1593)의 이름으로도 모자라 그의 호(松江)까지 더해 정자의 이름으로 삼았다.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은 그와의 인연을 내세우려는 모양이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그러지 않음만 못했다.

▼ 쉼터의 한켠. 강변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아까 건너편 강둑을 걸으면서 철새 떼를 보았었는데, 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 해안 쪽 강변에는 데크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저 ‘생태습지’를 둘러볼 수도 있겠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시간을 절약하는 만큼 형우군과 갖게 될 즐거운 술자리가 더 길어질 테니까. 하지만 습지를 그냥 지나친 건 두고두고 아쉬워 할 수밖에 없었다. 북천 하구의 전형적인 특징. 즉 침식과 퇴적이 병행하면서 만들어진 초지형태의 습지지역을 구경하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 ‘마산해안교(초계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다)’를 건넌 탐방로는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사유지(철망으로 울타리를 쳐놨다)로 여겨지는 야트막한 산(아래 사진 : ‘마산’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이 바닷가를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반암리 솔밭길 1㎞/ 마산해안교 0.6㎞)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송죽 배수펌프장’이 손짓을 보내온다.

▼ 전혀 강원도답지 않게 드넓은 반암 들녘. 바닷가에는 방풍용으로 심어놓은 듯한 송림이 일자로 길게 늘어서 있다. 그게 하도 곧아서인지 잠깐의 볼거리로 충분했다.

▼ 배수펌프장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오른편에 해송 숲을 끼고 이어진다. 사유지인지는 몰라도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 출입을 막고 있었다.

▼ 언덕 아래로 난 작은 굴다리도 지난다. 군부대(왼쪽)와 오른쪽 해안가 초소를 연결하는 언덕에 뚫려있으니 대전차용의 시설일 수도 있겠다.

▼ 마산해안교에서 35분. 동해대로(국도 7호선)를 만나지만 탐방로는 국도를 따르지 않고 반암교차로(이정표 : 반암리 0.2㎞/ 마산해안교 2.9㎞)에서 일반도로를 따라 반암리로 향한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반암항 0.7㎞/ 반암리솔밭길 1.5㎞)에서는 오른편 반암마을로 들어선다.

▼ 마을은 민박집 일색이다. 규모가 조금 크다싶으면 어김없이 ‘펜션’ 간판을 달았다. 바닷가 마을이지만 주업은 서비스업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2016년엔가 숙박·음식점 등의 서비스업이 접경지역 산업구조의 주축을 이룬다는 기사가 떴었는데 사실이었던가 보다.

▼ 민박집 중 일부는 바닷가 담장을 터 해수욕장과 연결시켰다. 눈을 뜨자마자 바닷물로 뛰어들 수 있으니 피서객들로서는 이보다 더 나은 숙소가 어디 있겠는가.

▼ 마을을 벗어나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반암항 0.1㎞/ 반암리솔밭길 2.1㎞). 탐방로는 오른편 ‘반암항’으로 향한다.

▼ 뒤돌아볼라치면 반암해변(盤巖海邊)이 드넓게 펼쳐진다. 반암은 넓고 평평한 바위를 일컫는다. 하지만 바위는 보이지 않고 온통 모래사장뿐이다. 그 길이가 무려 12㎞나 된다는데, 군사지역 내에 있어 현재는 200m만 개방하고 있단다.

▼ 작은 어선 두어 척이 정박되어 있을 뿐인 반암항은 그냥 통과다. 생선회 값이라도 비교해보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시설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 반암항을 약간 지난 지점. 바닷가 경사지에 커다란 시멘트 구조물이 2열로 설치되어 있었다. 대전차 방어용 구축물일 것이다.

▼ 바닷가에 쌓여있는 테트라포드(Tetrapod)가 눈길을 끌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유선형의 아름다운 모양새가 지금껏 보아오던 것들과는 확연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 접경지역임을 실감나게 하는 군 초소도 눈에 담아본다. 멸공통일을 외치며 군 생활을 하던 우리만큼은 아니어도, 아직까지도 북한은 우리의 주적(主敵)이다. 어찌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 오른쪽 발아래로 곧장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거품을 내며 부서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몰려드는 파도는 펑퍼짐한 바위 위에다 물결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물이 맑을수록 그림자의 무늬도 맑아진다. 바다는 언제나 그렇듯 일렁이며 생동하고 있다.

▼ 초소를 지나면 ‘송포2리 해변’이다. 모래사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데크 탐방로가 길게 놓여있다.

▼ 갈매기를 품은 바다는 낭만적이다. 쉬지 않고 들락거리며 모래밭을 애무하는 파도의 숨결, 모래사장에 촘촘히 찍힌 갈매기의 발자국은 우리를 낭만으로 이끄는 손짓이다. 특히 갈매기의 날갯짓은 한여름의 따뜻한 원초적 기억까지 자극시킨다. 사람들이 겨울바다를 운운하며 달려오는 이유일 것이다.

▼ 하지만 해변을 오래 걸을 수는 없었다. 해안침식이 심해 곳곳에서 길이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 별 수 없이 도로(해오름해변길)로 올라섰다. 아니 탐방로도 도로로 인도하고 있었다. 해안침식이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45분. ‘거진1교(이정표 : 거진항 1.9㎞)’를 건너면 거진리(巨津里)다. 이 마을은 오징어가 호황을 이루던 1970년대만 해도 인구가 25,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증명했다고나 할까? 500년 전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가다 ‘클 거(巨)'자 모양으로 생긴 지형을 보고 장차 거부장자(巨富長者)가 많이 늘어날 것이라 했다니 말이다. ‘거진(巨津)’이라는 지명의 유래이기도 하다. 거진리는 두어 개의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거탄진리(巨呑津里)라는 옛 기록이 있는가 하면, 자산천이 둘로 나뉘면서 1km 정도를 길게 돌아 우회한다고 해서 수회리(水廻里)로 불리기도 했다. 두 갈래였던 물줄기를 곧장 바다로 흐르게 고친 후, 넓은 하천부지와 해안 매립부지를 택지로 조성해 현재 모습으로 만들었단다.

▼ 잠시 후 ‘거진11리 해변’에 이른다. 거진읍내 초입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1983년 문을 연 이래 매년 여름철에만 한시적으로 개장한단다. 백사장의 길이가 500m나 된다니 제법 큰 규모의 해수욕장이라 하겠다. 거기다 읍내라서 숙식의 편의성까지 갖춰 가족단위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는다고 한다.

▼ 관광입국(觀光立國)이 세계적인 추세가 된 요즘. 우리나라 지자체들이라고 관광객 유치를 뒤로 제켜둘 리가 없다. 해변에 예쁘장한 조형물들을 세워 인생샷 하나쯤 건져보려는 관광객들의 입맛을 자극한다. 그중 하나가 ‘명태의 꿈(아래 사진)’이다.

▼ 방파제는 낚시 삼매경인 강태공 차지다. 바람에 내맡긴 귀가 시릴 만도 하건만 귀를 감싸는 것까지 잊고 있다. 그래 낚시꾼에게 겨울바다는 그리움일 것이다. 입질을 기다리는 사무치는 그리움. 세상의 시름까지 잊게 만드는 그런 그리움이다.

▼ 동방파제와 서방파제로 둘러싸인 거진항(巨津港)은 고성군에서 가장 큰 포구이다. 하긴 1995년에 이미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을 정도이니 어련하겠는가. 거진항이 이렇게 커진 것은 모두 명태 덕분이라고 한다. 거진항은 오랫동안 명태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래서 시내에는 다방도 많았고, 식당은 술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 명태로 바꾼 경기였다. 하지만 명태가 잡히지 않는 요즘은 추억속의 옛 얘기가 되어버렸단다.

▼ 어촌계 사무실로 여겨지는 건물은 벽화로 도배되어 있었다. 조합원들의 배들과 함께 바닷속 풍경을 그려 넣었는데, 대표 어종으로 돌문어를 꼽았다. 축제까지 열고 있는 ‘명태’도. 그렇다고 물회로 유명한 ‘가자미’도 아닌 것이다. 세월의 부침이 대표 어종까지도 바꾸어놓은 모양이다.

▼ 길가 건조대에는 말린 물가자미가 오밀조밀하다. 그 옆에는 자신이 터줏대감임을 내세우기라도 하려는 듯 명태 몇 마리도 걸려있다. 바닷가. 그것도 겨울철이면 저런 풍경은 일상화가 된다.

▼ 날머리는 고성수협 바다마트(고성군 거진읍 거진리)

몇 걸음 더 걸으면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이 세워져 있는 ‘고성수협 바다마트’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수산물판매장’. 그리움을 핑계 삼아 나를 따라나선 형우군의 숨은 노림은 바로 ‘회’이다. 그러니 그냥 지나칠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안으로 들어가 숭어와 물가자미를 넉넉하게 샀다. 서울의 생선은 대부분이 양식인데다, 스트레스를 받아 진이 다 빠진 것이다. 금방 잡아왔다는 자연산, 그것도 옆에서 군침을 흘리는 친구까지 있는데 부족해서야 되겠는가.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15분을 걸었다. 핸드폰에 찍힌 거리가 14.11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생선가게 아줌마가 가르쳐준 ‘횟집’으로 들어가 8천원(2인)으로 상을 차린 다음 회를 먹었다. 회가 고소하고 너무 맛있었다. 아니 그 느낌은 순전히 형우군만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초밥. 10년 전쯤 제주도로 골프투어를 갔다가 터득하게 된 비법이다. 같이 간 어느 CEO께서 알려주셨는데, 맛김을 깔고 그 위에 밥과 회, 그리고 겨자를 차례로 쌓은 다음 또르르 말아먹으면 기막힌 초밥이 되는 것이다. 그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소주 2병과 맥주 1병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비워버리고 말았다.

▼ 수산물공판장를 빠져나오면 어촌계가 운영하는 ‘활어회센터’. 그 사이의 광장(주차장 겸용)에는 거진항의 마스코트인 명태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맞다. 요즘은 그 빛이 바랬다지만, 옛날 이곳은 명태 잡이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었다. ‘고성 명태축제’를 아직까지 계속해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파랑길 34코스

 

여행일 : ‘21. 5. 23(일)

소재지 : 강원도 동해시 발한동·묵호진동·어달동·대진동·망상동과 강릉시 옥계면 일원

여행코스 : 묵호역입구(1.6km)→묵호등대공원(5.8km)→망상해변(6.4km)→한국여성수련원입구(소요시간 : 13.8km/ 실제는 14.03km를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은 떠오르는 해와 푸른바다를 길동무 삼아 함께 걷는다는 뜻으로 부산의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안을 따라 조성된 초‘광역 걷기길’이다. 770㎞에 이르는 동해안을 총 10개(부산·울산·경주·포항·영덕·울진·삼척동해·강릉·양양속초·고성)구간 50개 코스로 나누었는데, 오늘은 2개 코스 나누어진 동해시 구간(27.1km)의 두 번째 코스를 걷게 된다. 옥계역을 출발해 대진항과 망상해변을 거쳐 옥계해변에 이르는데 길이는 대략 14km쯤 된다. 이 구간은 걷는 내내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경관을 바라보게 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초반에 들르게 되는 ‘논골담길’은 국내 최고의 여행지로 꼽힌다. 동해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들어선 등대마을에서 우리는 고단하면서도 정감 넘치던 옛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 34코스의 시작점은 묵호 수변공원(동해시 묵호진동 13-64 )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망상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동해·삼척 방면으로 내려오다 사문재삼거리(동해시 발한동)에서 왼편 ‘발한로’로 갈아탄다. 이어서 사문삼거리와 발한삼거리에서 연이어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잠시 후 널찍한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 바로 옆에 ‘묵호수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참고로 해파랑길 34코스의 원래 시점은 묵호역의 앞이다. 지난 번 33코스를 마무리했던 곳에서 출발하기 위해 이곳을 임시 들머리로 삼았을 따름이다.

▼ 2020년 노선의 일부가 변경되었다. 원래는 묵호역에서 출발해 망상해변과 웇재를 거쳐 옥계시장에 이르도록 되어있었으나 일부(‘망상-웇재-옥계시장’을 ‘망상-옥계해변’으로) 구간을 변경한 것이다. 2019년 고성에서 발생 속초까지 번진 산불로 인해 황폐화된 일부 지역을 걷는 대신,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경관을 감상하며 지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덕분에 거리도 22.5km(묵호역에서 옥계시장까지 19.2km+옥계시장에서 옥계해변까지 3.3km)에서 13.8km로 많이 단축됐다.

▼ 수변공원 앞 도로를 건넌 다음, ‘등대길 슈퍼&펜션’ 오른편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논골담길’의 4개 탐방로 가운데 하나인 ‘등대오름길’이다. ‘등대오름길’이 시작됨을 알려주는 두어 개의 안내판들이 초입에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논골담길은 4개의 골목으로 이루어졌다. 서쪽(그림에서는 아래쪽)의 논골 1길과 논골 2길, 논골 3길 그리고 동쪽(그림에서는 오른쪽)의 '등대오름길'이다. 우리 부부처럼 해파랑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아닌 경우, 대부분은 논골 1길로 올라 바람의 언덕과 등대 주변을 관광한 후 논골 2길로 내려오는 코스가 선호된다고 한다. 참! ‘논골’이란 지명은 질퍽거리는 골목길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묵호항이 무연탄과 시멘트 운송으로 호황이었던 시절, 항구 뒤편 안묵호의 비탈진 언덕에 지어진 판잣집 사이의 골목길이 질퍽한 흙길이었다는 것이다. 언덕 꼭대기의 덕장으로 져 나르던 오징어와 명태지게에서 떨어지는 바닷물로 늘 질었던 골목은 ‘남편과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이 못 산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단다. 하지만 땀과 바닷물에 젖었던 장화도 이젠 벽화에만 더러 등장하는 아련한 추억의 풍경이 되었다.

▼ 안으로 들어서자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묵호동의 이야기’와 함께 ‘논골담길의 담화’의 유래가 적혀있으니 한번쯤 읽어보고 길을 나서는 게 좋겠다. 이곳 묵호는 조선 후기 구제를 위해 이곳에 온 강릉부사 이유응(李儒膺)이 물도 검고 바다도 검고 물새도 검다고 해서 ‘먹 묵(墨)’자를 써 ‘묵호’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게 다수설이다. 하지만 안내판은 그가 검은 새와 바위가 많은 오이진(烏耳津)에서 멋진 경관을 바라보며 글을 쓰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한데서 유래됐다고 적고 있었다.

▼ 언덕 위 등대까지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있는 등대마을은 하늘이 가까운 전형적인 달동네. 마을의 담벼락은 벽화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연탄집, 이발관, 논골주막 등 전성기의 달동네 모습이다. 하지만 풍요와는 거리가 먼, 주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마을의 옛 풍경들이다. 맞다. 2010년부터 그려지기 시작한 이 그림에는 하나같이 묵호의 역사와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래서 묵호 어민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이 길은 그 자체가 역사의 한 자락이자 과거와 현재가 시간을 공유하는 공간이 된다.

▼ 아름다운 시(詩)는 아름다운 경관에 아름다운 마음이 더해져서 태어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곳 논골마을도 시가 빠져서는 안 된다. 그래선지 곳곳에 시판을 걸어두었는데, 주문진 출신 김영현 시인의 ‘아버지 혼불의 바다’도 그중 하나이다.

▼ 투박한 계단까지도 볼거리로 변신했다. 웃기, 앉아있기, 수다떨기, 쇼핑하기, 노래하기, 잠자기 등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시간당 칼로리를 적었다. 그렇다면 맨 아래 적혀있는 ‘hurry up!!’은 이래저래 칼로리는 소모되는 법이니 닥치고 빨리 올라가라는 의미일까? 아무튼 이런 재치가 있어 한번 골목에 들어서면 십중팔구 모든 길을 다 걷게 된다는 얘기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처마와 처마 사이로 이어지는 굽은 골목이 보여주는 매력과 굽은 골목을 돌 때마다 나타나는 따뜻한 벽화가 저절로 발길을 이끌기 때문이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널디 너른 동해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 바다의 초입에는 해상 인도교인 ‘오션프론트’가 들어섰다. 묵호바다는 해안선을 향해 하루 종일 강한 파도가 철썩이는 곳이다. 이 같은 특성을 살리기 위해 만든 길이 85m(높이 7m·폭 3m)의 다리인데, 눈으로는 넓은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만들어진 수평선을 바라보고 몸으로는 동해 바람을 느끼며 거닐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걸어보지는 못했다. 공사가 덜 끝났는지 문이 굳게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 옛날 저 산비탈에는 어부와 그의 가족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때문에 산비탈 전체가 블록으로 벽을 올려 만든 판잣집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1980년대 어획량까지 급감하면서 마을 역시 급격히 쇠퇴해졌다. 그러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논골담길’ 벽화마을이 조성됐다. 오래된 마을에 다양한 테마와 묵호만의 이야기를 담은 벽화마을길을 만든 것이다. 사진의 오렌지색 지붕은 2013년 방영된 SBS 수목 드라마 ‘상속자들’의 여주인공 ‘차은상'이 어머니와 함께 도망쳐 나와 살던 집이다.

▼ 골목을 장식하는 건 벽화만이 아니다. 묵호의 역사와 이야기가 담겨있는 조형물들을 곳곳에 설치했다. 이렇듯 논골담길은 다양한 그림과 소품들로 채워져 있다. 그 하나하나는 논골 주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어, 걷다보면 과거의 영광과 삶의 애환이 어떠했는지를 공감하게 만든다.

▼ 오만가지 잡동사니로 치장된 ‘등대 그집’이라는 기념품 가게도 만날 수 있었다. 시간에 쫓겨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커피를 파는 카페도 겸하는 모양이다.

▼ ‘논골1길’을 살짝 맛보며 ‘바람의 언덕’으로 간다. 조망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벽화로 채워진 마을길을 잠시 걷자 ‘나폴리 찻집’. 이어서 묵호항의 옛날 사진들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일주문 형식의 전시지역을 지나자 ‘바람의 언덕’이다.  묵호등대나 논골담길에서도 바다가 보이긴 한다. 하지만 이곳 ‘바람의 언덕’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선지 언덕의 맨 꼭대기에다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데크를 여러 개의 단으로 나누어 깔아둠으로써 마음 내키는 곳에 주저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 전망대에 서면 묵호항(墨湖港) 일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과거 묵호는 동해안 제일의 무역항이었다고 한다. 석탄과 시멘트를 실어 나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화주와 선원들로 성황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거기다 명태와 오징어의 어획량까지 풍부해 주민들이 생활도 넉넉했다. 외지인들과 내지인들이 한데 엉켜 요정과 백화점이 문전성시를 이루며 ‘유행의 첨단도시’. ‘술과 바람의 도시’로 표현되던 때이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 어획량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이웃 동해항에 주도권을 넘겨주고 지금은 동해항의 보조항만 기능을 수행하는 정도라고 한다.

▼ 이곳에서 천방뒤축 뛰어놀던 아이들을 형상화한 작품도 보인다. 그 옆에는 마을주민들이 출자해 만든 ‘논골담길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커피 한잔 앞에 놓고 내려다보는 묵호항의 풍경이 일품이라니 한번쯤 이용해 볼 일이다. 거기다 수익금의 절반을 마을의 보수 등에 사용한다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 전망대 한쪽에는 고기잡이 나간 가장을 기다리는 ‘만복이네 식구들’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고깃배가 들어올 시간이면 아기 업은 마을 아낙들이 배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기 위해 이곳에 몰려들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 바람의 언덕을 둘러본 다음 묵호등대로 왔다. 등대는 항만의 시작점이자 종착지라 할 수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등대는 묵호동의 맨 꼭대기(해발고도 67m)에 걸터앉아 있다. 그리고는 끝도 없이 펼쳐지는 동해바다를 매의 눈으로 살펴본다. 하지만 등대의 내부는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등탑에서의 조망이 일품일 뿐만 아니라, 등대 홍보관에도 볼거리가 널려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찮은 코로나-19가 고귀한 인간의 행복을 망쳐버린 셈이다.

▼ 등대 주변은 소공원으로 꾸며놓았다. 횃불을 형상화 한 조형물을 가운데에 두고 정자와 파고라, 벤치 등의 시설들을 꼼꼼히 배치했다. 우체통을 전화박스 안에 숨기고는 ‘행복한 우체통’이라 너스레를 떠는가 하면 ‘착시 거울’이나 ‘health gate’ 같은 놀이기구들을 설치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했다.

▼ 해마다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는데 어찌 포토죤 하나 없겠는가. 인생샷 건져보려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조형물들을 여럿 만들어 놓았다. 참! 이곳은 야경을 배경으로 삼으면 더 멋진 사진이 나온다고 했다. 특히 한여름 밤에는 묵호항 일대를 오가는 오징어잡이 어선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환하게 켜진 선박 불빛들이 흔들리면서 어촌마을 모습 그대로를 연출해준단다.

▼ 건너편 허공에는 높이가 59m나 된다는 다리 하나가 놓였다.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란다. 동해안을 바라보며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 ‘스카이워크’를 중심으로 양쪽 구조물을 잇는 케이블 와이어를 따라 하늘 위를 달리는 자전거인 스카이사이클과 원통 슬라이드를 미끄러져 약 30m 아래로 내려가는 자이언트 슬라이드로 구성됐다. 하지만 ‘오션프론트’와 마찬가지로 문이 굳게 닫혀있어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 40분 정도 논골담길을 둘러본 뒤 수변공원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해안선을 따라 걷는다. ‘바다문화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파고라와 벤치 등 각종 편의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아니 그보다는 거친 파도가 해안선 옆으로 솟은 바위를, 새하얀 방파제를 때리는 소리가 더 인상적인 길이다.

▼ 이 구간은 해안선을 따라 솟아오른 기암괴석들과 파도, 짙푸른 바다가 한데 어우러지며 장관을 연출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까막바위’가 있다. 서울 남대문의 ‘정동방(正東方)’에 있다는 바위로, 전망대의 입구에 커다란 빗돌을 세워 이를 알리고 있다. 참고로 까막바위라는 이름은 까마귀가 바위에 새끼를 쳤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 바다를 향해 나아간 전망대에는 청동 ‘문어상’을 모셨다. 이곳 주민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어느 호장(戶長:향리직의 우두머리)의 전설에 나오는 그 문어이다. 조선시대 이곳 망상현에 인품이 온후하고 덕망 있는 호장(戶長:향리직의 우두머리)이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왜구가 침입하자 호장은 왜적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맨손으로 당해 내기는 속수무책, 결국에는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약탈을 끝낸 왜적이 호장과 빼앗은 재물을 싣고 돌아가려하자 주민들이 막아섰으나 도리어 목숨만 잃을 뿐이었다. 이를 본 호장이 크게 분노했고 ‘비록 내가 너희들에게 육신은 죽어도 너희들을 다시는 이곳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리라’라고 꾸짖자, 맑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천둥번개가 치고 파도가 몰아치면서 호장이 탄 배가 뒤집혀 모두 죽고 말았다. 남은 한 척의 배도 달아나지 못하고 느닷없이 나타난 거대한 문어가 내리치는 발길질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주민들은 당시 나타난 문어가 호장이 죽어 변신한 혼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한다.

▼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곰치국’의 간판을 단 상호가 유난히도 자주 눈에 띈다. 맞다. 이곳 동해는 곰치국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물곰탕’으로도 불리는 이 음식은 하도 못 생겨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꼼치’라는 어종으로 끓여낸다. 묵은 김치와 무를 썰어넣고 끓여내는데, 순두부처럼 흐물흐물하게 입에서 녹는 반전 식감은 잊을 수 없는 매력이다. 조선시대부터 해장으로 명함을 내밀었을 정도로 쓰린 속을 편안히 잠재우는 마력을 지녔다. ‘자산어보’의 정약전은 ‘해점어’라 부르며 살이 아주 연하고 뼈도 연한데 맛은 싱겁지만 술병을 잘 고친다고 기록했다.

▼ 하양과 빨강 등대가 손짓하는 어달항으로 향하는 길. 발아래로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거품을 내며 부서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몰려드는 파도는 펑퍼짐한 바위 위에다 물결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물이 맑을수록 그림자의 무늬도 맑아진다. 바다는 언제나 그렇듯 일렁이며 생동하고 있다.

▼ 도로로 다시 내려선지 12분. ‘낚시의 명소’라는 입간판까지 내건 ‘어달항(於達港)’을 지난다. 50척 남짓 되는 어선들이 입출항하는 작은 항구지만, 인근 연안어장과 정치망 어업 등을 통해 싱싱한 수산물이 매일 들어온다는 항구이다. 덕분에 주변 횟집에서 여러 가지 해산물을 쉽게 맛볼 수 있으며, 조용하고 아늑한 항구 분위기를 맛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 도로변을 따라 내놓은 해파랑길은 도로 만큼이나 폭이 넓다. 하지만 그게 더 거추장스러워졌다. 주차되어 있는 차량들을 피하다보면 차도로 내려서서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바다에는 부표처럼 생긴 등대가 떠 있었다. 저 등대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돌아올 누군가는 알까? 동구 밖 당산나무처럼 긴 세월을 뿌리박고 오매불망 기다리는 그 마음을... 등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푸른 바다에서는 만선의 꿈을 키우는 어선들만 오락가락 분주하다.

▼ 잠시 후 새하얀 모래밭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백사장 길이가 300m(폭 20~30m)라는 ‘어달 해수욕장’이다. 이곳은 2~4도의 경사에 평균 물 깊이도 1m 밖에 되지 않아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주로 찾는다고 한다. 하긴 여름철 성수기에도 크게 붐비지 않는데다, 싱싱한 먹을거리로 넘치는 횟집타운까지 끼고 있으니 가족단위 피서지로 이만한 곳도 없겠다.

▼ 백사장에는 아이들이 물놀이에 한창이다. 그 뒤로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 그들을 덮칠 기세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 어달해변에서는 감성적인 카페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어떤 곳은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아니 바다를 배경삼은 인생샷 하나 건져보라는 포토죤일지도 모르겠다.

▼ 대진항을 향해 내닫는 길. 중세 성곽의 망루를 쏙 빼다 닮은 군의 해안초소가 인상적인 구간이다. 아니 항구가 아닌, 그렇다고 언덕도 아닌 곳에 세워진 등대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건 그렇고 바닷가에 널린 크고 작은 갯바위가 매력이기도 한 이곳에서 절대 놓쳐서 안 될 게 있다면 그건 파도와 몽돌이 빚어내는 이중주다. 한 마디로 기가 막히다.

▼ 어달항을 지난 지 30분 만에 ‘대진항(大津港)’에 도착했다. 작은 어선 몇 척이 한가한 포구보다는 선박 모양으로 꾸며놓은 ‘LALA 카페&서프’ 건물이 오히려 더 눈길을 끄는 항구이다. 하지만 한적한 외형과는 다르게 문어와 방어, 청어, 곰치, 개복치, 학꽁치 명주조개 등 다양한 어종의 활어항으로 유명하단다.

▼ 해파랑길 이정표(망상해변 2.4㎞/ 묵호역 5.6㎞)가 매달려있는 널따란 광장에는 ‘서울 경복궁의 정동방은 이곳 대진마을입니다’라고 쓰인 커다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럼 ‘경복궁의 정 동쪽에 위치한 바닷가’라는 지명 유래까지 보유한 정동진(正東津)은 어쩌란 말인가. 아무튼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라도 이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남대문의 정동방을 표방한 까막바위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경복궁이라니.

▼ 대진항을 지나면 탁 트인 ‘대진해수욕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안 와본 가족은 있어도, 한 번 와본 가족은 없다’. 이런 수식어로 대진해수욕장을 표현하는 이가 있었다. 수심이 얕고 물이 맑은데다 사람까지 적어 가족단위 피서지로 최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젊은 연인들이 더 많이 찾는 곳으로 보였다. 서핑보드로 뒤덮이다시피 한 모래사장이 그 증거라 하겠다. 참! ‘대진(大津)’이라는 지명과는 달리 이곳의 행정계는 망상동(望祥洞)이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 ‘대진 해수욕장’에서 좌측으로 빠져나와 ‘일출로’를 탄다. 붉은 색으로 칠해진 군부대의 담장 옆을 지나자 서울대 동해해양연구센터. 이 구간에서 우린 바다와 헤어진다. 시야가 막히기 때문에 조금은 답답한 구간이라 하겠다. 하지만 꽃망울을 활짝 연 넝쿨장미 울타리가 이 모든 것을 상쇄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 잠시 후 마상천 위를 가로지르는 ‘해물금교’가 길손을 맞는다. 이때 바닷가에 놓인 또 다른 다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민간인에게는 금단(禁斷)의 영역이니 바다를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경관이나 가슴에 담아두자.

▼ 다리를 건너면 ‘노봉해수욕장(魯峰海水浴場)’이 시작된다. 350m(폭 50m) 길이의 작은 백사장을 품은 아담한 해변으로 모래가 곱고 수온이 적당하며 수심이 얕아 가족단위 휴양지로 명성이 높다. 하지만 해파랑길은 노봉해변 대신에 해안도로를 따라 이어진다.

▼ 영동선의 망상역 근처에서 길은 아까보다 더 고와졌다. 넝쿨장미 울타리가 도로의 양옆으로 길게 쳐져 있기 때문이다.

▼ 노봉해변을 스치듯 지나친지 12분 만에 망상해수욕장에 들어섰다. 왼편으로는 망상해수욕장의 얼굴마담이랄 수 있는 ‘카라반’. 그리고 오른편으로는 해수욕장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바닷가 리조트나 펜션이 인기 있는 이유는 한여름 밤의 낭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비싼 게 흠이다. 텐트 치고 숙박하는 것까지도 싫은 사람들이 찾는 게 카라반이다. 그저 싸들고 가서 맛있는 식사를 해 먹은 후 바로 들어가 잠을 청하면 되니 이 얼마나 편한 시설인가. 거기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파도소리를 느끼며 티타임을 즐기거나 고소한 바비큐파티와 맥주파티를 즐기는 이국적 분위기라니.

▼ 망상해수욕장(望祥海水浴場, 강원도 국민관광지 제2호)은 백사장의 길이가 무려 2㎞에 이른다. 수심도 0.5∼1m에 불과해 가족단위 피서지로 정평이 나있다. 해안선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백사장과 푸른 물, 은빛 파도, 울창한 삼림과 맑은 공기는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거봉인 정철(鄭澈)이 이곳에서 강도(講道)를 열었을 만큼 경승을 자랑한다. ‘바랄 망(望)’에 ‘상서로워질 상(祥)’을 쓰는 이름에 걸맞다고나 할까?

▼ 길고 긴 모래사장이 끝나갈 즈음이면 ‘사구(砂丘)’가 나온다. 사구는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모래들이 쌓인 곳이다. 때문에 일반적인 식물이 살기에는 적합지가 않다. 그런데도 이곳에는 바닷바람과 너울성 파도, 강한 햇빛 등 극한 환경에서도 자라는 갯방풍, 갯완두, 갯메꽃 등 약 30여종의 해안식물이 자생하고 있단다. 동해시에서 이런 자생식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 및 관찰데크를 설치하는 한편, 외래식물 제거나 종자파동 등을 통해 해안식물을 보호·증식하고 있었다.

▼ 해파랑길은 ‘망상컨벤션센터’ 직전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바닷가를 걸었다. 컨벤션센터와 사구식물보호지역 사이로 탐방로가 잘 나있었기 때문이다. 이 구간에서는 ‘파크골프장’으로 여겨지는 시설도 눈에 띄었다. 파크골프(park golf)란 나무로 된 채를 이용해 역시 나무로 만든 공을 쳐 잔디 위 홀에 넣는, 말 그대로 공원에서 치는 골프놀이이다. 장비나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며, 세게 휘둘러도 멀리 안 나가는 까닭에 최근에 부쩍 인기가 높아진 레포츠이다.

▼ 시설공사가 한창인 ‘망상오토캠핑리조트’ 앞에서 모래사장을 빠져나오니 영동선 아래로 난 굴다리. 다리 아래를 지나자 탐방로는 국도(7호선)로 올라선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원래의 34코스는 국도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하도록 나있었기 때문이다. 굴다리 입구의 벽면에 이정표(여성수련원 5.41㎞/ 묵호역 7.14㎞)가 붙여져 있으니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이후부터는 국도를 따른다. 차도와 인도를 난간으로 구분한 다음 푸른색 선으로 해파랑길임을 표시했다. 그나저나 이 구간은 여름철이면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겠다. 오뉴월 뙤약볕을 막아줄만한 시설이나 나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계속해서 바닷가를 따를 걸 그랬나보다. 그랬다면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도 실컷 맞아보지 않았겠는가.

▼ 오른편으로는 ‘망상오토캠핑리조트’의 여러 시설(아래 사진은 한옥타운이다)들이 따라온다. 2002년 제64회 세계캠핑캐라바닝 동해대회를 계기로 조성된 가족단위의 사계절 캠핑관광 휴양시설로 훼밀리롯지, 캐빈하우스, 아메리칸 코테지 등의 이국적인 숙박시설과 캐라반, 오토캠핑사이트 및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고품격 휴양 관광지다. 하지만 지난 2019년 발생한 산불로 큰 피해를 입었고, 그 복구공사가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 왼쪽에서 따라오는 산봉우리는 온통 민둥산이다. 2019년 강릉시 옥계면에서 발생했던 산불의 영향일 것이다. 당시 산불이 강풍을 타고 망상해변까지 번졌고, 그로 인해 저 산은 물론이고 아름답던 망상오토캠핑리조트까지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 바다가 내다보이는 언덕에는 ‘옥계휴게소’가 걸터앉았다. 동해고속도로(삼척-속초)의 속초방향 휴게소로 동해의 뷰(view)가 하도 고와 ‘고속도로 휴게소 10대 사진명소’로 까지 선정된 곳이다. 저곳에서는 SBS-TV의 예능 ‘만남의 광장’이 맨 처음 열리기도 했다. 산불피해로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던 당시 백종원과 멤버들은 로컬 푸드로 ‘홍게라면’을 개발했고, 이게 전파를 타면서 휴게소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 북쪽으로 향하는 해파랑길은 여전히 바다를 벗 삼는다. 기찻길 역시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그 길을 건너는 고가도로는 나름대로 전망대의 역할까지 해준다. 한마디로 뷰가 끝내주는 곳이다. 지대가 놓은 곳에 길을 내놓은 덕분에 시야를 툭 트이면서 동해바다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 고가도로를 내려서면 ‘한라시멘트’이다. 환경문제로 지역주민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지역경제에는 큰 몫을 담당한단다. 갈등도 상생협력을 통해 해결해나가고 있다니 다행이라 하겠다.

▼ 오른편으로 도직항(道直港)이 내려다보인다. 꼬맹이 포구에는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낚시꾼들이 타고 온 자동차들만 가득했다.

▼ 시멘트공장 옆에는 ‘샛터 성황당대명비’가 세워져 있었다. 길 건너 ‘주수2리(珠樹2里)’ 마을에는 ‘새터’라는 표지석도 보인다. 이 부근이 ‘새터 마을’이고, 시멘트공장이 들어서면서 성황당(城隍堂)이 사라지자 이곳에 대명비(大命碑)를 세웠다는 얘기일 것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옥계역교차로’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옥천대교’를 건넌다. 망상해수욕장을 벗어난 지 50분 만인데, 직진해 나가면 원래의 해파랑길이 끝나는 ‘현내교’ 방향이다. 참고로 다리 아래로 흐르는 주수천(珠樹川)은 옥계면에서 가장 큰 하천이다. 낙풍천과 만나는 하류에서 넓은 평지가 만들어져 산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넓은 농경지가 펼쳐진다.

▼ 탐방로는 잠시 후 또 다른 다리를 건넌다. 이번에는 낙풍천(樂豐川)을 가로지르는 ‘광포교’이다. 이어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조금만 더 걸으면 이내 옥계해수욕장(玉溪海水浴場)에 이른다.

▼ 옥계해수욕장은 강릉시 옥계면 금진리에서 주수리까지 약 2.5㎞에 이르는 비교적 넓은 사빈(沙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철 이른 백사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하긴 성수기에도 이곳은 비교적 조용하단다. 그래서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이 이용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 트레킹 날머리는 한국여성수련원 앞(강릉시 옥계면 금진리)

해파랑길은 해수욕장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옥계해변 안내도’에서 울창한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내놓은 탐방로를 따르기 때문이다. 수령 40~50년은 너끈히 넘어 보이는 울창한 송림(松林)이 탐방객들과 함께하는 길이다. 이어서 솔향기 킁킁거리며 걷다보면 여성수련원이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해파랑길 34-35코스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수련원 앞에 만들어져 있다. 아무튼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4.03km. 논골담길을 둘러보는데 걸린 시간을 감안하면 빠른 속도로 걸음 셈이다.

 

해파랑길 30코스

 

여행일 : ‘21. 3. 28(일)

소재지 : 강원 삼척시 근덕면 일원

여행코스 : 용화 레일바이크역→용화해변→황영조 기념공원→촛대바윗길→문암해변→초곡해변→원평해변→궁촌 레일바이크역(소요시간 : 7㎞/ 실제로는 10.25㎞를 2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50개 구간으로 나누어진 해파랑길 가운데 가장 짧은(7km) 코스이다. 해파랑길의 특징은 누가 뭐래도 바닷가를 따라 걷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구간은 레일바이크를 통한 종주도 가능하다. 그런 이색적인 테마를 살리려다보니 코스의 길이가 짧아졌다는 주장이 설득을 얻는 이유이다. 두 방법을 모두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코스를 설계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도 있다. ‘해금강’이라는 애칭까지 얻었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용굴·촛대바위길’을 들러보라는 배려를 담았다는 것이다. 모두가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나는 후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럴 경우 30코스의 길이가 10㎞ 가까이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 들머리는 용화 레일바이크 역(근덕면 용화리 166)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근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영덕 방면으로 내려오면 용화교차로가 나온다. 국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용화초등학교가 ‘해파랑길 30코스’의 출발지이다. 초등학교 정문 근처에 구간안내도와 함께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 해파랑길 30코스는 삼척해양레일바이크의 두 정거장(용화↔궁촌)을 잇는 코스라고도 할 수 있다. 30코스가 걸어갔다가 레일바이크를 타고 돌아오도록 설계되었다는 주장의 근원이다. 반면 이 일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용굴·촛대바위길’이 코스에서 빠져있다는 큰 흠이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다녀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러려면 7㎞의 구간 거리가 9㎞로 늘어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초등학교 정문에서 마을 쪽으로 나오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50m쯤 걸으면 용화교(龍化橋)가 나오는데 탐방로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왼편 골목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우린 삼척해양레일바이크 용화정거장을 들러보기로 했다. 용화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된다.

▼ 잠시 후 ‘삼척해양레일바이크’의 용화정거장에 이른다. 일제 강점기에 놓은 폐철로를 활용해 궁촌에서 용화까지 5.4㎞를 편도로 운행하는 복선형 철길 바이크로 지난 2010년 7월 20일 개장했다. 역사 2동과 휴게소, 건널목, 조명이 연출되는 3개의 터널 그리고 부대시설로 주차장 및 화장실 등을 갖췄는데, 바이크를 타면 1시간여 동안 터널과 해송 숲 등을 거치며 해안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오르막길에선 페달을 밟지 않아도 전동으로 움직일 수 있게 돼 있어 장년층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 레일바이크 정거장을 감싸 안듯이 반 바퀴를 돌자 요런 다리가 놓여있다. 용화천(龍化川)을 가로지르는 철교(鐵橋)에 기대어 내놓은 보행자 전용의 길이다.

▼ 탐방로의 아래로는 ‘용화해변(龍化海邊)’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길이가 1㎞쯤 되는 반달형 모양의 백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해안에서 가장 사랑받는 피서지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수심이 얕은데다 파도도 높지 않아 한적한 분위기를 즐기려는 가족 단위 휴양객들이 많이 찾기 때문이다. 하나 더. 해변 가운데로 용화천이 흐르는 덕분에 해수욕 후 담수로 몸을 씻을 수도 있단다.

▼ 해변은 반달 모양으로 생긴 해안선이 육지 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모양새이다. 그 양쪽 끝 부분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이 바다로 돌출되어 있다.

▼ 남쪽 방향의 암석해안을 줌으로 당겨봤다. 바닷가 큼직한 갯바위를 연결시켜 놓은 구름다리가 멋지다.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로 다리주변의 기암괴석은 물론이고 용화해변의 은빛 모래사장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최고의 조망대라고 한다.

▼ 해안을 빠져나와 레일바이크의 철로를 건넌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0분 만인데, 선로 출입금지 및 건널목 주의라는 경고판이 눈길을 끈다. 사람의 힘으로 가는 레일바이크일지라도 갑작스런 제동은 불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초소까지 지어놓은 걸로 보아 레일바이크가 운행될 때에는 안전요원이 상주하는 모양이다.

▼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용화정거장에는 빈 레일바이크만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거장 앞에 노후시설물 정비를 위해 운영을 중단(3.26-4.20)한다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던가 보다. 덕분에 필요 없는 고민이 시작됐다. 비어있는 선로를 따라 초곡리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가뜩이나 짧은 30코스(7㎞)를 더 줄인다면 뭐가 남겠는가.

▼ 철로를 건너면 용화리의 마을안길이다. 길가는 온통 펜션 천지이다. 이곳 용화해변을 찾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 마을을 벗어나 뒤편 언덕으로 오르면 탐방로는 이제 옛 국도(7호선)를 따른다. 아니 정확히는 ‘동해안일주 자전거길’이다. 도로의 양쪽 가장자리에다 파랑색 선을 그어 차도와 구분해놓았다. 그렇게 14분쯤 걷자 시야가 툭 터지는 언덕에 정자가 지어져 있다.

▼ 정자에 오르면 용화해변과 장호해변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 길 건너 산자락에는 ‘말굽재’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옛날 이곳은 말을 타고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한다. 그런데 주민들이 신성시하던 성황당이 있어 지체 높은 양반도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만 했단다. 행여 말에서 내리지 않고 고개를 넘을 경우 말의 발톱이 굽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말굽재’라는 지명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유이다.

▼ 옛 국도변을 걷는 이 구간의 특징은 조망만이 아니다. 길가에서 피어난 꽃들로 인해 심심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매화꽃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함께 걷던 이는 벚꽃이란다. 꽃잎의 중간이 갈라진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매화꽃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꽃자루가 긴 것하며 한군데서 여러 송이의 꽃이 피어나는 것은 벚꽃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에라 모르겠다. 모름지기 꽃이란 아름다우면 그만 아니겠는가.

▼ 홍매화라 여겨 찍은 요것도 아니란다. 마을에서 쫓겨난 ‘복숭아’. 그중에서도 ‘개복숭아’라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로부터 버림받은 나무가 산자락에서 터를 잡았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맞다. 우리네 조상들은 복숭아가 벽사(僻邪)의 기능이 있어 '귀신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그래서 복숭아나무가 집안에 있으면 조상신(祖上神)이 집으로 올 수 없다하여 울타리 안에 심지 않았다고 한다.

▼ 개나리는 아예 사방에 널렸다. 도로를 내면서 조경용으로 심어놓은 탓일 게다. 그렇다고 해서 지겹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리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로 시작되는 윤석중의 ‘봄나들이’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데 어찌 지겨울 수가 있겠는가. 이왕에 시작했으니 하나 더 알고가자. 우리네 조상들은 개나리의 열매를 연교(連翹)라 하여 한약재로 써왔다고 한다. 종기의 고름을 빼고 통증을 멎게 하거나 살충 및 이뇨작용을 하는 내복약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임금님께 올리는 탕제로 처방했을 정도라니 이보다 더 귀한 약재가 또 어디 있겠는가.

▼ 그렇게 15분쯤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해파랑길 30코스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초곡항’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마을의 두 자랑거리인 ‘용굴·촛대바위길’과 ‘황영조기념공원’이 있음을 알리는 입간판을 초입에 세워놓았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참! 갯바위 사진도 눈에 띄었는데, 그게 ‘삼존미륵불’이라는 것은 마을을 벗어나면서 알 수 있었다.

▼ 옛 국도와 포구 진입로 사이에는 널찍하니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각의 정자 외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다. 그저 새참으로 준비한 막걸리나 마시기에 딱 좋은 장소라 하겠다. 모처럼 선두대장을 탈피한 윤대장처럼 말이다.

▼ 초곡항으로 내려가는 길은 벚꽃이 장식했다. 꽃망울을 활짝 열어젖힌 자태가 자못 빼어났지만 카메라에 담지는 않았다. 일본의 나라꽃으로 도배된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벚꽃이 비록 일본의 국화(國花)이긴 하지만 그 원산지는 한국이라면서 말이다. 과거 일본인이 제주도에 있는 왕벚나무를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일본 벚나무’의 시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왕벚나무를 가져가서 개량해서 그네들의 국화를 만들었고, 실제 우리가 아름답다며 사방에 심고 있는 벚나무들이 왕벚나무가 아닌 그네들이 개량해 놓은 종자라는 게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왕에 그런 항변을 하고 싶다면 우리네 손으로 개량한 품종을 더 널리 심고 난 뒤에 했으면 좋겠다.

▼ 조금 더 내려가니 진행방향의 언덕에 ‘오륜기’가 또렷하다. 1992년에 열렸던 바르셀로나 하계올림픽에서 마라톤 경기를 재패한 황영조 선수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고향 마을에 조성한 ‘황영조 올림픽기념공원’이다. 선수 개인의 인간승리 과정과 우승의 감격을 기리는 한편,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용기와 꿈을 심어주자는데 착안했단다.

▼ 공원으로 올라가기 전에 185.2m 길이의 ‘황영조 터널’부터 먼저 둘러봤다. 해양레일바이크 구간에 설치된 3개의 터널 가운데 하나로 마라토너인 황영조의 특징을 살렸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마라토너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바이크의 스피드도 덩달아 빨리해보는 콘셉트로 꾸며놓았다는 것이다.

▼ 안으로 들어서자 ‘Wonderful 삼척’이라고 적힌 전광판이 눈길을 끈다. 그 뒤로는 여러 색깔의 조명으로 터널을 꾸몄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 선수가 달리는 모습을 이미지화했다는데 예술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저 휘황찬란하다는 느낌뿐이었다. 참고로 3개의 터널 가운데 나머지 두 곳은 터널 내부를 색색갈의 조명으로 꾸며 놓아 환상적인 느낌을 더한다는 ‘축제의 터널(309.8m)’과 각종 레이저 쇼와 함께 바다의 생태를 경험할 수 있도록 꾸민 ‘신비의 해저터널(1014m)’이다.

▼ 언덕에 오르자 3층으로 지어진 ‘황영조 기념관’이 먼저 반긴다.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22세의 나이로 우승한 황영조 선수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로 1층과 2층은 전시실, 그리고 3층은 휴게실로 꾸며졌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결승선을 통과하는 영광의 장면은 물론이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에게 수여된 고대 그리스의 청동 투구도 만날 수 있으니 꼭 들어가 볼 일이다.

▼ 안으로 들어서자 연락처부터 적으란다. 체온 측정이라는 코로나가 낳은 관문도 거쳤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1층은 두 개의 전시실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중 제1전시실은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을 제패하기까지의 성장과정과 훈련과정 등을 소개하는 각종 사진 자료, 그리고 제2전시실은 올림픽 우승 당시의 기념사진과 각종 마라톤 대회 참가 사진·물품·영상물을 전시했다. 2층으로 오르면 ‘세계 마라톤 역사관’과 ‘마라톤 체험관’을 만날 수 있다.

▼ 이젠 공원을 둘러볼 차례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황영조 올림픽마라톤 세계제패 기념상’. 그 앞에는 시상대가 놓여있다. 세계를 재패한 황영조가 저 시상대의 가장 윗자리에 올라섰다는 표현일 것이다. 맞다. 당시 우리는 너나없이 지구의 반대편에서 들려온 낭보에 가슴벅차했었다.

▼ 그 뒤편에는 작은 집을 지어놓았다. 그리고는 동그랗게 뚫린 구멍을 통해 황영조의 집을 찾아보란다.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의 영웅 황영조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 저 마을의 어디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숨은 그림 찾기’인 셈이다.

▼ 힌트가 없어 그냥 지나쳐버렸다는 어느 탐방기가 생각나 카메라의 줌부터 당겨봤다. 그러자 오륜기가 선명한 황영조의 집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미리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오륜기’라는 힌트는 이미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 잔디밭의 끄트머리. 조망이 툭 터진 곳에는 황영조가 달리고 있는 형상을 새긴 조형물을 배치했다. 새처럼 빨리 달려 세계를 재패했다는 것을 암시나 하려는지 황영조의 뒤를 새가 따르고 있는 그림이다. 조형물 옆에는 도종환 시인이 황영조를 위해 쓴 ‘그는 파도처럼 달렸다’라는 시비(詩碑)가 있었다. 죽음과도 같은 몬주익 언덕을 넘어올 때 초곡리 파도가 그의 등을 떠밀었단다.

▼ 6년쯤 전인가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 둘러보았던 ‘몬주익 언덕(Montjuïc Hill)’이 생각나 사진을 올려본다. 올림픽 주경기장 앞. 황영조선수가 일본선수를 제치고 선두로 나섰음직한 언덕길에 조성되어 있는데, 한국 교민들은 ‘황영조 공원’이라 부른다고 했다.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의 상(像)과 풋프린팅(foot printing)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1년 경기도와 바르셀로나가 상호 협의하여 조성했는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황영조의 마라톤 금메달을 함께 기념하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경기도에서 세웠을까? 황영조는 강원도 출신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이곳 교민들이 강원도에다 건의를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그 대안으로 경기도에 부탁하여 만들게 되었다고 가이드가 알려줬다. 강원도로서는 좋은 홍보 기회를 놓친 셈이다.

▼ 초곡항으로 내려서자 ‘풀 반환점(21.0975㎞)’이라고 적힌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황영조 선수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제패를 기념하기 위해 열리는 ‘삼척 황영조 국제마라톤 대회’의 반환점이 이곳이라는 것이다. 삼척 시내의 ‘엑스포광장’을 출발해 한치터널과 맹방·궁촌을 차례로 거친 다음 반환점인 이곳 황영조 마을을 찍고,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국제 공인코스(42.195㎞)이다. 25회 대회까지 매년 개최되어왔으나 작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대회가 취소되었다.

▼ 반환점 조형물 뒤는 초곡항(草谷港)이다. 레일바이크의 출발점인 궁촌해변과 어촌체험마을로 유명한 장호항 사이에 다소곳하게 자리한 작은 항구이지만, 예로부터 양양 남애항·강릉 심곡항과 함께 강원도의 미항으로 손꼽혀왔다. 독특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인근 해안이 절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사지역이라는 이유로 한동안 육로로는 다가설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규제가 풀리면서 해안절벽을 잇는 탐방로가 개설됐고, 이게 입소문을 타면서 요즘은 명품 관광지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참고로 ‘초곡(草谷)이란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자연마을인 사일과 문암을 합쳐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사일(沙日) 또는 사곡(沙谷), 문암(門岩), 원평(院坪), 매리방(梅里芳), 희동(希洞), 개삼평(開三坪) 등의 단위부락으로 나누어져 있단다.

▼ 방파제 끄트머리로 나가자 초곡항 유일의 등대가 반긴다. 대부분의 항구는 2개의 등대를 갖고 있는 게 보통이다. 빨강등대는 배가 항구로 들어올 때 항로의 오른쪽에 설치돼 항구가 왼쪽에 있음을 알린다. 하얀색 등대는 그 반대다. 그런데도 초곡항에는 하얀색 등대 하나뿐인 것이다. 그만큼 작은 항구라는 증거일 것이다.

▼ 탐방로는 초곡항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하지만 우린 직진했다. 초곡항을 최고의 관광지로 만들어준 ‘용굴·촛대바위길’을 어찌 둘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직진하면 어판장을 지나자마자 탐방로의 입구가 나오는데, 일요일이어서인지 가족단위 탐방객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예년 같으면 탐방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빌 터인데,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해 비교적 한산한 편이란다.

▼ 탐방로의 끄트머리인 ‘용굴’까지는 660m의 데크길이 짙푸른 해변을 따라 이어진다. 그 길에 올라서자마자 바위 위에 우뚝 솟은 제1전망대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깎아지른 갯바위. 아니 날카롭게 솟아오른 작은 바위섬의 맨 꼭대기에다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었다.

▼ 전망대에 오르자 주변 풍광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용굴·촛대바윗길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고 싶으면 제1전망대에 올라보라던 어느 기사가 이제 이해가 간다. 참고로 해안절벽을 잇는 저 탐방로는 지난 2019년 개장했다. 끝자락인 용굴까지 데크로드가 짙푸른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데, 촛대바위와 거북바위, 피라미드바위, 사자바위, 용굴 등 독특한 지형이 늘어선 해안 절경이 주요 볼거리이다.

▼ 망망대해의 동해와 함께 문암해수욕장도 한눈에 담긴다. 이곳 초곡항 앞바다는 자연산 문어와 전복 등의 주요 서식처라고 한다. 그런 해산물들을 채취하기 위해 제주의 해녀들이 건너왔는데,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의 어머니 역시 제주 출신의 해녀였단다.

▼ 제1전망대에서 내려오면 드넓은 동해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 딱 좋은 지점(‘광장 1’이라는 사람도 있었다)을 만나게 된다. 푸른 바다를 유영하는 고기를 형상화했다는 원형 테두리 안에다 포인트를 맞추면 동해의 푸른 바다가 가득 담겨온다.

▼ ‘광장 1’에 이어 나타나는 ‘광장 2’를 지나자 이번에는 출렁다리가 나온다. 움푹 들어간 절벽 사이로 연결된 56m 길이의 현수교로 용굴·촛대바위길의 명소로 이미 자리 잡았다.

▼ 다리를 건넌다. 기대와는 달리 흔들림이 심하지 않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들의 걸음걸이가 보무당당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중간의 바닥에는 강화유리를 깔아 11m 아래의 일렁이는 파도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했다. 그 덕분에 약간의 스릴을 맛볼 수는 있었다.

▼ 탐방로는 다리이다. 철제 교각(橋脚)에다 상판은 나무를 얹었다. 교각을 세우지 못하는 곳에는 잔도(棧道)를 만들었다. 수직의 험한 벼랑에다 선반을 매달 듯이 아슬아슬하게 길을 내놓은 것이다. 다만 절벽에 구멍을 낸 후, 그 구멍에 받침대를 넣고 받침대 위에 나무판을 깐 중국의 잔도와는 달리, 곳곳에 철제 기둥을 세워 안전도를 많이 높였다.

▼ 탐방로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촛대바위’이다. 하지만 촛대바위가 선을 보이기도 전부터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사방에 즐비하다. 하긴 이 일대의 애칭인 ‘해금강’이 어디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이름이겠는가.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바위들이 그만큼 많이 널려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 잠시 후 촛대바위와 거북바위를 살펴볼 수 있는 ‘제2전망대’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개개의 바위를 설명해놓았는데 그저 읽어보는 것만으로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니다. 안내판에 그려진 그림에다 실물을 맞춰보라는 얘기이다. 촛대나 사자, 피라미드 등 기암괴석들이 또 다른 의미 다가올 것이다.

▼ 전망대 맞은편 파도가 넘나드는 곳에는 바람이 세게 불면 곧 부러질 듯 곧추선 ‘촛대바위’가 있다. 용굴·촛대바위길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상징물로 이 바위의 이름이 곧 탐방로의 이름이 되었다. 참! 옆에 있는 세모꼴의 바위를 보고 ‘피라미드바위’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피라미드바위는 거북이바위의 또 다른 이름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요리조리 뜯어봐도 도대체 촛대의 형상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끝이 뾰족한 것도 아니고 뭉툭한데 어딜 봐서 촛대를 닮았다는 말인가. 무학대사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육십 평생을 살아왔건만 아직도 내 수양은 미천하기만 한 모양이다.

▼ 촛대바위의 오른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는 ‘거북이바위’라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거북이를 닮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일행 한 분이 바위의 맨 꼭대기를 살펴보란다. 맞다. 그의 말대로 거북이 한 마리가 기어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안내판은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는 예로부터 잡귀를 쫓거나 간절한 소망을 빌 때 자주 등장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라면서 두 손을 모아 거북이에게 소원을 빌어 보라고 권한다.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이라는 덕담도 빼놓지 않았다.

▼ 탐방로 주변은 눈길이 가는 곳마다 기암괴석들이 즐비하다. 이 일대의 바위들은 ‘추암 촛대바위’ 군(群)과 함께 조선 누층군의 석회암이 노출된 것이라고 한다. 석회암은 화학적 풍화작용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데, 이 일대는 토양 밑에 있을 때 지하수의 작용으로 용해되어 독특한 모양을 이루었고, 이것이 바닷물에 의해 노출되어 지금과 같은 절경을 이루게 되었단다.(두산백과에서 발췌 정리했다)

▼ 탐방로의 맨 끄트머리에도 전망대를 배치했다. ‘용굴 촛대바위길’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용굴’은 물론이고 이사부의 전설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자바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일류의 조망대이다.

▼ ‘용​굴’은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을 가진 굴이다. 안내판은 작은 고깃배가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라고 적고 있었으나 배를 타지 않았으니 들어가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대신 용굴에 대한 전설을 옮겨본다. <먼 옛날. 바닷가에 살던 어느 가난한 어부가 죽은 구렁이가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꿈을 꾸었다. 이때 백발노인이 나타나 어부에게 말하기를 ‘죽어있는 구렁이를 가져가 초곡리에서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경사가 있을 것이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 배를 타고 나가 보니 정말 죽은 구렁이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게 아닌가? 어부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을 되새기며 지금의 용굴로 끌고 와 정성껏 제사를 지내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죽었던 구렁이가 살아나 굴속으로 들어가더니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이다. 이런 괴이한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 어부에게는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바다에 나가기만 하면 고기를 많이 잡게 되어 얼마 후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단다.>

▼ 해안 절벽 중간에서 불쑥 튀어나온 바위가 ‘사자바위’라고 한다. 수사자가 절벽에서 머리를 내밀고 동해를 바라보는 형상이란다. 안내판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신라 실직주의 군주였던 이사부가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정복할 때 나무로 만든 사자를 이용해서 항복을 받아낸 역사의 한 토막을 적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 이사부가 만들었다는 사자가 저 바위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반문을 덧붙인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이번에는 촛대바위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가장 앞에 있는 바위는 아까 거론했던 ‘거북이바위’이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아까와는 많이 달라졌다. 작년 봄 이집트의 기자지역에서 만나보았던 피라미드를 쏙 빼다 닮은 것이다. 안내판도 ‘피라미드바위’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집트에서 옮겨다 놓은 것 같다는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 포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해안도로를 따른다. 지도를 보면 이 길은 문암해변과 초곡해변, 원평해변을 거쳐 궁촌항으로 간다. 하지만 이름만 놓고 보면 헷갈리기 딱 좋다. 초곡항을 금방 빠져나왔으니 초곡해변이 제격이련만 난데없이 문암해변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이 해변을 거쳐야만 초곡해안에 이른다. 참고로 해파랑길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용굴·촛대바윗길’을 돌아보는 데는 35분이 소요됐다. 거리는 2.1㎞. 물론 등대까지 다녀온 거리가 포함되어 있다.

▼ 초곡항의 북쪽 방파제 초입. 석문(石門)처럼 생긴 바위가 특이해 카메라에 담아봤다. 항구를 지키는 수문장이라도 되는 듯이 들머리의 양옆을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늠름하게 버티고 있다.

▼ 모퉁이를 돌아 ‘문암해변’으로 들어서자 세은정사에서 세워놓은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삼존미륵불’이라는 이름과 함께 갯바위 사진을 게시했다. 까마득한 옛날 지질활동으로 생성된 바위에다 세은정사라는 절간에서 미륵불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다.

▼ 바닷가로 눈을 돌리자 조금 전에 들렀던 용굴·촛대바위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한 기암괴석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삼존미륵불’로 조금 전에 거론했던 바위이다. 하지만 내 상상력이 부족한 탓인지 미륵불의 형상이 선뜻 그려지지 않는다. 맞다. 온갖 이름을 끌어대고 의미를 더해도 군더더기일 뿐, 이 길의 주인공은 역시 바다다.

▼ 문암해변에 이어 나타나는 초곡해변. 두 해변은 육안으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두 해변은 거의 3km에 육박하는 기다란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래사장 바로 옆길로는 가지 못한다.

▼ 조금 전에 만났던 ‘미륵삼존불’ 안내판을 세운 ‘세은정사를 지나 굴다리를 통과하자 탐방로는 다시 옛 국도로 올라선다. 초행객들을 위해선지 촛대바위길과 문암해변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커다란 입간판을 들머리에 세워놓았다.

▼ 초곡항을 출발한지 13분. 국도에 올라서자마자 ‘초곡휴게소’에 이른다. 양쪽 역(궁촌과 용화)에서 동시 출발한 레일바이크가 중간에서 만나는 곳으로 간단한 식음료를 판매한다. 휴게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주변풍경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다양한 조각품을 세워 쪽빛 바다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

▼ 이후부터는 옛 국도를 따른다. 오른편은 해송이 울창한 숲을 이루는데 반해 왼편은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한국은 세계 최강을 향한 현재 진행형‘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실감나는 풍경이라 하겠다. 제조업이 없는 세계 최강은 사상누각이고, 그 제조 산업은 원활한 물류가 받쳐주어야만 가능하지 않겠는가. 물류의 기본인 도로건설이 이곳에서도 한창이라는 얘기이다.

▼ 15분 조금 못되게 도로변을 따르던 탐방로가 갑자기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오른편에 보이는 울창한 해송 숲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비록 잠시이지만 레일바이크의 선로를 따라서 걷는다. 운행이 중단된 레일바이크 선로는 텅 비어있다. 덕분에 우린 선로 위를 걸어볼 수 있었지만, 반면에 환호성과 함께 즐거워하며 열심히 페달을 밟는 레일바이크 행렬을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 바닷가로 내려서거나 또는 솔숲을 걸을 수도 있다. 이때 만나는 솔숲은 운치가 있어 참 좋다. 수령이 수십 년은 족히 넘겼을 법한 곰솔(해송)들이 바닷가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비보 숲이라도 되는 양 바닷가를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다.

▼ 강태공인 듯 세월을 낚고 있는 낚시꾼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그 뒤로는 전형적인 삼척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맞다. 삼척은 산다운 산, 바다다운 바다를 품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삼척에서 만나는 창망한 동해바다는 어딜 가나 쪽빛으로 일렁이고, 백두대간과 맞닿은 산줄기는 기운차고 늠름하다. 그 산과 바다는 서로 맞닿아 있다.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온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바다가 출렁이고,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곧바로 기세등등한 산줄기가 시작된다. 고개를 들 때마다 눈이 상큼해지고 가슴이 후련해지는 이유일 것이다.

▼ 군함 조형물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재활용품으로 만들었다는데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는 레일바이크의 선로가 지난다. 참고로 레일바이크는 복선으로 꾸며져 있었다. 덕분에 궁촌정거장과 용화 정거장에서 동시에 출발하게 되는데, 이때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들과 반가운 손짓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나 더. 반대편 정거장에서 내려 돌아올 때에는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된단다.

▼ 탐방로는 ‘그라시아 리조트’ 앞에서 원평해변으로 내려선다. 이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궁촌마을(宮村里)’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마을 이름인 ‘궁촌’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가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와 간성을 거쳐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해서 '궁촌'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국가어항을 갖춘 이 마을은 관광 및 해양스포츠 장소로 복합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 원평해변과 궁촌마을의 사이를 흐르는 ‘추천(楸川)’의 냇물은 철다리를 이용해 건넌다. 궁방산과 한우봉 아래서 발원하여 궁촌리와 매원리 사이를 지나 동해바다로 흘러드는 지방하천이다.

▼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자못 빼어나다. 궁촌항의 방파제 뒤편으로 보이는 바위섬은 이곳 궁촌마을을 어촌체험마을로 만든 일등 공신이다. 바다낚시는 물론이고 스노클링 또는 투명카누를 체험하며 여가를 즐길 수 있단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동통신사의 안테나가 세워진 산줄기의 왼편에는 공양왕 삼부자의 묘가 있다. 참! 공양왕의 왕릉이 하나 더 있다는 것쯤은 알아두자. 전문가들조차도 어느 쪽이 진짜라고 확단하지 못한다지만 고양의 묘역은 사적(제191호)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날머리는 삼척해양레일바이크 궁촌 정거장(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146-10)

해안가 도로를 아주 짧게 걷다가 마을 안길을 통과하면 옛 국도(7호선)의 도로변에 자리 잡은 궁촌 레일바이크 역에 도착한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역사 입구의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다. 트레킹을 마치면서 확인해보니 오늘은 총 2시간 30분을 걸었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10.25㎞를 찍고 있다. 용굴·촛대바위길 등 눈요깃거리들을 기웃거리느라 정규코스보다 3㎞나 더 걸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볼거리들이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 관광지의 가장 큰 매력은 그곳의 풍광을 담은 기념사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곳은 ‘삼척 해양레일바이크’의 역사(驛舍), 그러니 상징 조형물 하나쯤 어찌 만들어놓지 않았겠는가.

 

해파랑길 47코스

 

여행일 : ‘20. 8. 15()

소재지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일원

여행코스 : 삼포해변(3.2km)봉수대해변송지호 철새 관망타워(2.4km)왕곡 한옥마을(4.1km)공현진1·2리 해변가진항(거리/시간 : 9.7km/ 실제는 11.513시간 1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삼포해변을 출발해서 봉수대 해변과 송지호해변, 공현진 1·2리 해변을 거쳐 가진항에 이르는 해파랑길 47코스는 길이가 10km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구간이다. 하지만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는 차고도 넘친다. 중간에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송지호와 영동지방의 전통가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왕곡마을을 지나기 때문이다. 거기다 크고 작은 바위섬과 갯바위들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해변들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그 가운데서도 하이라이트는 서낭바위 산책로라 하겠다. 외국에서나 볼 법한 기암괴석들이 바닷가에 널려있어 잠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정규코스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꼭 들러볼 것을 권한다.

 

들머리는 삼포해변(고성군 죽왕면 삼포리 243-13)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속초 IC에서 내려와 56번 지방도를 이용 교동지하차도사거리(속초시 교동)까지 온다. 이어서 동해대로(7번 국도)’를 타고 고성방면으로 올라가다 삼포민박촌(죽왕면 삼포리) 앞에서 오른편으로 빠져나오면 삼포해변이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오션투유리조트건너편 도로가에 세워져 있다.

 

 

 

해안도로(삼포해변길)을 따라 북쪽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삼포해변(三浦海邊)을 오른편 옆구리에 꿰차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해안도로를 사이에 둔 왼편 공터에는 카라반이 가득하다. 작년 여름, TV JTBC에서 방영한바 있는 캠핑클럽이 꽤나 인기를 끌었다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저렇게도 많은 카라반 가운데 비어있는 게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하긴 평생 캠핑 한번 떠나보지 않았던 나까지도 따라하고 싶었을 정도로 1세대 아이돌 핑클의 멤버들이 보여주던 캠핑에서의 소소한 일상은 재미있었다.

 

 

동해에서도 가장 물이 맑고 깨끗한 해수욕장으로 손꼽히는 삼포해변은 아는 사람들만 아는 숨은 명소이다. 저 지난달에는 tvN ‘바퀴 달린 집이 이곳을 찾기도 했다. 성동일, 김희원, 여진구 등이 라미란, 혜리와 함께 왔는데 그들의 인기만큼이나 해수욕장의 관심 또한 부쩍 높아졌다고 한다. 삼포해변은 서핑축제 미드나잇 서핑 뮤직 페스티벌이 매년 열릴 정도로 서핑의 메카로도 유명하다. 덕분에 파티의 섬스페인 이비자와 비유되는 삼비자라는 별칭까지 갖고 있단다. 지난달에는 ‘DMZ 평화이음 드라이브인 콘서트 with 자우림·국카스텐공연이 성황리에 열리기도 했다. 생활 속 거리 두기와 관람객 간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동차 극장처럼 관객이 차량 안에서 관람하는 드라이브인방식으로 진행되었지만 말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0, 삼포해변과 맞닿아 있는 봉수대 해변(烽燧臺海邊)’ 앞을 지난다. 길이가 800m나 되는 백사장이지만 1996년까지만 해도 이곳은 민간인이 들어갈 수 없는 통제구역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고성산불로 피해를 본 지역주민들을 위해 1997년 해수욕장으로 개장했단다. 그건 그렇고 봉수대해변의 자랑거리는 오토캠핑장으로 알려져 있다. 캠핑 데크 84면과 카라반 10, 공동취사장, 화장실, 샤워장 등의 시설에다 저녁에는 밤바다의 운치를 느낄 수 있도록 조명까지 켜준단다. 레저 체험시설도 들어서 있었다. 스카이버마와 스카이버켓, 로그터널, 엑스크로스 등의 체험시설들이 미들코스와 하이코스로 나뉘어 설치되어 있다. 볼더링 월과 인공암벽도 눈에 띄었다.

 

 

'오호항 어촌체험마을''송지호 해변' 입간판이 세워진 '동해대로' 진출입로에서 우측으로 휘어져 죽왕 보건지소 앞을 지난다. 이어서 '송지호 해수욕장' 환영 아치를 통과하면 '오호교' 다리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만이다.

 

 

다리를 건넌 해파랑길은 해변펜션 앞에서 왼쪽, 그러니까 송지호 해변을 향해 방향을 튼다. 커브지점에는 동해안종주 자전거길이정표까지 세워놓았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를 따랐다가는 두고두고 후회할 수도 있다. 오른쪽 바닷가에 기암괴석의 전시장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들머리에 '강원 평화지역 국가지질공원 안내도'서낭바위의 운명’, ‘서낭바위 산책로 조형물등이 세워져 있으니 주의만 조금 기울인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통나무계단을 올라서자 하얀색 등대가 길손을 맞는다. 등대 부근에 산재해 있는 암초들로부터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등대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크기나 생김새,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등대이다. 탐방로는 등대의 옆을 스치듯 지나간다.

 

 

등대를 지나자마자 길은 둘로 나뉜다. 왼편은 서낭바위 해변, 먼저 능선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전망대부터 올라본다. ()의 해안초소를 개조해 이층짜리 전망대를 만들었는데, 아래층을 그대로 놓아둔 걸 보면 아직도 야간에는 초소로 사용하고 있나 보다.

 

 

명색이 전망대인데 시야가 막혔을 리가 없다. 에메랄드빛 망망대해가 끝 간 데 없이 눈에 차오르고, 그 오른편에는 봉수대해변에서 삼포해변을 거쳐 자작도해변에 이르는 해안선이 길게 펼쳐진다. 왼편 발아래는 잠시 후 내려설 서낭바위 해변이다.

 

 

전망대 아래의 바위지대인 서낭바위는 오호리 마을의 서낭당(성황당, 아래 사진에서 하얀색 건물)이 위치하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서낭당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신(성황신)을 모셔놓은 우리나라 전통신앙의 영역으로, 서낭당 일대는 물건을 함부로 파거나 헐지 않는 금기가 지켜져 온 장소이다. 마을주민들은 이 일대의 바위들을 서낭바위라 부르며 서낭당에서 하듯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드려오고 있단다. ! 해변에 내려서면 조약돌 여남은 개를 이고 선 바위가 먼저 보인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비스듬히 선 화강암 바위 표면에 자갈을 올려 떨어지지 않고 딱 붙으면 운수대통이라 여긴다고 해서 운수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린단다.

 

 

서낭당의 오른편에 보이는 부채바위는 버섯이나 오리, 문어 등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차별침식으로 머리 부분이 넓적하고 허리 부분이 잘록하게 깎인 바위인데, 쓰러질 듯 아슬아슬한 것이 여간 위태롭지가 않다. 그래선지 목 부위에 시멘트로 보강한 흔적도 보였다. ! 그러고 보니 대만에서도 저렇게 생긴 바위를 본적이 있다. 세계자연유산인 야류지질공원의 명물 여왕머리 바위(女王頭)’로 당시 가이드는 고대 이집트의 여왕 네페르티티(Nefertiti, BC1370-1330)’를 닮았다고 했다. 당시 우리 부부는 그녀와 함께 사진 한번 찍어보려고 언제 줄어들지도 모르는 줄을 하염없이 서있어야만 했는데 부채바위앞은 썰렁하기만 하다. 머리 위에 소나무까지 이고 있는 게 대만보다 오히려 한 수 위인데도 말이다. 아직까지 입소문을 타지 않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스토리텔링이라도 가미될 경우 관람료까지 너끈히 받을 수 있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해변에는 부채바위만 있는 게 아니다. 생김새가 제각각인 기암괴석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는 풍화와 침식작용이 만들어낸 자연 조각품들이다. 참고로 서낭바위 주변은 그동안 군사시설에 포함돼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저 영험하다는 소문에 무속인들이 몰래 들어가 치성을 올리고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게 전부였단다. 그러다가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면서 2017년 깔끔하게 산책로를 조성했다.

 

 

 

동화의 캐릭터처럼 귀여운 아래 바위는 복어(붕어)바위라고 했다. 눈 달린 복어(붕어)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도대체 내 눈에는 그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무학대사가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육십 평생 수양을 쌓아왔건만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순간이었다.

 

 

국가지질공원인 이곳은 화강암의 풍화미지형(風化微地形)과 파도의 침식작용이 어우러져 매우 독특한 지형경관을 이루고 있다.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 속으로 마그마가 뚫고 들어와 형성된 암맥(岩脈, dike rock)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독특한 형태로, 회백색의 화강암 사이로 관입해 식어버린 돌은 옅은 갈색의 규장암이다. 8300만 년 전에 생성되었다는 규장암층은 뱀 꼬리처럼 바닷가 백사장까지 길게 이어져 있는데 멀리서 보면 커다란 햄버거나 샌드위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15분 정도 눈요기를 즐기다가 '서낭바위 산책로' 입구(이정표 : 송지호해변 0.4/ 오호항 0.1)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송지호 해변으로 향한다. 아니 송지호 해변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해안도로(심층수길)의 오른편 백사장에 피서객들로 가득하니 말이다.

 

 

송지호 해변(松池湖海邊)은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 4에 달하는데다, 우거진 송림이 훌륭하게 그늘막 노릇을 해주는 멋진 해수욕장이다. 또한 저 해변은 수심이 낮아 아이들이 안전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으며, 백사장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아름다워 가족단위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해변을 따라 거닐다 보면 일렁이는 파도 너머로 손에 잡힐 듯한 바위섬 하나가 보인다. 일출 풍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죽도(竹島)’로 지난해 해중경관지구로 지정되면서 해양레저가 활발히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는 곳이다.

 

 

송지호 모래사장이 끝나는 곳에는 최근에 오픈한 '르네블루by워커힐(하얀색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87개의 럭셔리 객실을 비롯해 루프톱(Rooftop), 비즈니스센터, 스몰 웨딩이 가능한 연회장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었단다. 이어서 주차장이 나오는데 이게 거짓말 좀 보태서 북경의 천안문광장 만큼이나 넓다. 하지만 텅텅 비어있다. 수요 예측을 잘못 했는지 아니면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피서객들의 숫자가 현격히 줄었는지는 모르겠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7번 국도(동해대로)’'송지호 교차로' 직전(이정표 : 강원심층수 0.2/ 송지호해변 0.5)에서 우측 '강원심층수' 방향으로 진행해 나간다. 그리고 대교의 강원심층수 철망울타리를 따라 송지호로 향한다. 해양심층수는 수심 200m 아래의 깊은 '안정된 바다'에 있는 물이다. 이 물은 영양 염류가 풍부하고 식물성 플랑크톤 및 용존 산소량이 적어 지구상에서 가장 깨끗한 식수원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성을 사업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대교와 강원도, 고성군, 일본KIBI 시스템 등이 강원심층수라는 회사를 만들었고, 현재 심층수와 관련된 음료, 김치 등이 출시되어 일본 등에 수출되고 있다.

 

 

강원심층수의 울타리가 끝나면 송지호에서 흘러나오는 물길과 동해바다가 만나는 기수역(汽水域)이 나온다. 탐방로는 이곳(이정표 : 송지호/ 오토캠핑장)에서 둘로 나뉜다. 해파랑길은 송지호가 있는 왼쪽, 송지호 해변의 또 다른 명물인 오토캠핑장으로 가고 싶다면 물길 위에 놓은 목교(木橋)를 건너면 된다. 90개소의 야영장(데크)10동의 통나무집으로 구성된 오토캠핑장은 지난 2007년 개장 이래 매년 많은 캠핑족이 찾는다고 한다. 탁 트인 동해바다와 널찍한 모래사장, 그리고 울창한 송림이 우거진 송지호(호수)가 자랑거리인데, 최근 밀리터리체험장까지 들어서면서 가족단위 캠핑족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단다.

 

 

동해대로(47번 국도)의 아래, 아니 정확히는 송지호교라는 다리의 아래를 통과하면 또 다른 목교(木橋)가 송지호의 물길을 가르고 있다. 탐방로는 이 다리를 건너 철새 관망타워로 향하는데, 고성군에서는 이 구간을 송지호 둘레길이라 부른다. 고성판 올래길인 갈래구경길7경길이기도 한데 송지호와 왕곡마을이라는 고성의 자랑거리를 품고 있는 걷기 코스이다. 또한 철새관망타워에라도 오를라치면 송지호의 철새 관찰은 물론이고 에메랄드빛으로 물들어 있는 동해바다까지 조망된다. ! ‘둘레길이지만 그렇다고 꼭 걸어야할 필요는 없다. 고성군에서 걷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자전거를 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용·청소년용·어린이용·2인용·4인용 자전거를 신분증만 제시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단다. 헬멧과 무릎보호대 등 자전거 라이딩 보호 장비도 비치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철새관망타워 근처에 위치한 자전거 대여소는 월요일에 쉰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다리 위에서의 조망이 일품이다.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송지호가 발아래 놓여있고, 그 너머로는 설악의 준봉들이 병풍처럼 길게 펼쳐진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향로봉(香爐峰)이 성큼 다가온다. 금강산 12천 봉우리 가운데 하나이자 남한에서 오를 수 있는 백두대간의 최북단에 위치한 봉우리이다. 고도가 높아 구름이 덮이는 날이면 향로에 불을 피워놓은 모습처럼 보인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백두대간 종주를 마친 나 역시 향로봉을 다녀왔다. 진부령에서 향로봉까지는 왕복 33킬로, 힘은 들었지만 백두대간을 완성시킨다는 희열에 들떠 달리다시피 다녀올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자투리시간을 이용해 그 귀한 천궁(川芎)을 여러 뿌리 캘 수 있었지만 말이다.

 

 

탐방로는 이제 송지호의 호반을 따라 나있다. 사색하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그 길은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다. 그동안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눌 만큼 시간은 넉넉했다. 덕분에 시간이 흐를수록 오가는 얘기는 친밀해졌고 사랑은 한층 더 충만하고 견고해졌다. 이런 게 바로 해파랑길을 걷는 참맛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7~8분 정도를 걷자 `철새관망타워`가 나온다.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고니와 괭이갈매기, 민물가마우지 등 송지호를 도래지로 삼고 있는 철새를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지상 4층짜리 자연생태학습관이다. 호수의 고즈넉한 전경과 바다의 시원함을 동시에 내려다보는 즐거움은 또 다른 즐거움이라 하겠다. 면적 278.47규모의 타워에는 총 89240여 점의 박제를 전시한 조류박제전시관과 송지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옥외전망대, 망원경이 설치된 전망타워 등을 갖추고 있다.

 

 

관망타워에 올라가기 전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는 송지호 쉼터를 둘러보았다. DMZ의 고장 고성답게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조각과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통일을 향하여라는 조형물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남고성과 북고성으로 나뉜 고성군은 늘 가슴 아픈 분단의 역사와 그리움으로 표현되는 상처를 간직한 곳이다. 이 작품은 그런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것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통일의 문을 형상화한 높이 2.7m, 가로 2.2m의 사각 프레임 안에는 우리민족의 평화통일 염원을 상징하는 손을 마주잡은 인물을 음각으로 극대화시켰고, 앞뒤에는 소망과 화합을 상징하는 소년 소녀상을 양각으로 조형했다. 청색과 적색은 남북을 의미한단다. ! 근처에 있다는 철새관망대는 찾아보지 못했다. 조형물 옆의 쉼터에서 일행들과 함께 술을 마시느라 들러본다는 걸 깜빡 잊었기 때문이다. 호수 위로 난 데크로드를 걸으며 이곳에 둥지를 튼 습지 생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2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동갑내기들이 권하는 술자리인데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쉽게 올 수 없는 곳이니 내친김에 철새관망타워에 올라보기로 한다. 경로대상자는 1천원의 입장료가 면제되지만 마스크 착용은 필수다. 거기다 자신의 신상 정보도 적어야 한다. 엘리베이터로 오른 4층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시원스러웠다. 송지호의 전경은 물론이고 탁 트인 동해바다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철새 도래시기에는 망원경으로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고니도 관찰할 수 있다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벽면에 다양한 철새의 박제와 사진 등을 걸어 탐방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었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가에는 테이블을 놓았다. 한쪽 귀퉁이에 들어선 카페테리아의 배려인데, 해양심층수로 만든 호박 식혜가 인기가 좋다니 한번쯤 마셔볼 일이다. 아름다운 주변 풍광에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차까지 곁들인다면 이 어찌 신선놀음이 아니겠는가.

 

 

내려올 때는 계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한 층 아래에 있는 야외 전망대(높이가 낮은 탓에 조망은 별로다)에 들렀다가 그 아래층에 있는 조류박제전시관을 들어가 봤다. 89240여 점의 새들이 박제되어 있단다. 그 가운데서도 철새를 소재로 한 우표들이 눈길을 끌었다. ! 이왕에 시작했으니 송지호에 날아드는 철새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자. 송지호를 찾아오는 철새들 중 대표적인 것은 괭이갈매기와 고니, 흰뺨검둥오리, 민물가마우지 등이다. 그 외에도 여름 철새와 겨울 철새, 나그네 새, 텃새 등으로 다양한데, 제철을 맞추어 송지호를 찾으면 철새들의 장관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호숫가에는 몸을 숨기고 새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조류 관찰대도 만들어 놓았다. 또한 탐방로 주변에는 안내판들도 여럿 설치했다. 송지호 서식하는 물고기와 텃새, 그리고 계절별 철새들에 대한 자료를 사진과 함께 적어 넣었다. 덕분에 고니와 민물가마우지·청둥오리·가창오리·쇠오리·비오리·흰꼬리수리 등 어떠한 철새들이 이곳에 들르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탐방로는 호숫가를 따라 북쪽으로 간다. 송지호와 7번국도 사이에 난 호젓한 솔숲 길로 고성군에서 '송지호 산소(O2)'이라 부를 정도로 자연을 벗 삼는 멋진 길이다. 이런 구간은 꼭 둘이 아니어도 좋은 것 같다. 길은 걷는다는 것은 행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나를 위로하는 일이며 나와 화해하는 행위라는 얘기이다. 속도전에 등 떠밀려 방향도 없이 살아가는 일상,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아채기는커녕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삶이 조금은 버겁다면 길 위에 서보자. 그 길에서 우리는 느리게 걷고 조용히 숨 쉬며 다른 누구도 아닌 를 알아갈 수 있다.

 

 

탐방로 왼편으로는 송지호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둘레가 6.5쯤 되는 송지호(松池湖)는 아득한 옛날 바다였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모래가 쌓이면서 자루 모양이 되었고, 어느 날 바닷물보다도 민물이 더 많아지자 사람들은 석호(潟湖, 사주 등에 의해 바다와 분리되면서 생긴 호수)라 불렀다. 지금도 송지호 물길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으며, 수시로 도미와 숭어 같은 바닷물고기가 호수를 넘나든단다. 이처럼 풍부한 어족은 이곳을 유명한 철새 도래지로 만들었다. 어족이 풍부하다보니 매년 고니(천연기념물 제201)와 멸종 위기종인 흰꼬리수리·말똥가리, 큰고니 독수리 등 철새들이 많이 찾아온다. 그런 철새들의 군무를 관찰할 수 있도록 지어놓은 게 조금 전에 들렀던 철새관망타워이다. 참고로 전설에 의하면 1,500년 전의 송지호는 정거재(鄭巨載)라는 구두쇠 영감의 문전옥답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노승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자 똥을 퍼주면서 내쫓았는데, 스님이 문간 옆에 놓여 있던 쇠절구를 논 한가운데에 던지고 사라졌다. 그 뒤로 쇠절구에서 물이 솟아나 송지호가 되었다는 것이다.

 

 

철새관망타워를 나선지 14분쯤에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함께 해온 자전거 길과 헤어져 왼편으로 향한다. 10분 남짓 더 걸어서 만나는 갈림길(이정표 : 왕곡마을 0.7/ 송지호 관망타워 1.8)에서는 오른편이다. 이어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T`자형 삼거리이다. 오른편으로 가면 저잣거리. 왼쪽으로 방향을 꺾은 탐방로는 연꽃방죽을 지나자 왕곡(旺谷) 마을로 들어선다. 철새관망타워를 출발한지 37분만이다. 왕곡마을은 바다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는 데도 파도소리는 물론이고, 갯가의 비릿한 내음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곳, 마을 앞에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는데도 깊고 깊은 산중인 듯 고고한 마을이다. 마을의 역사는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집안도 평온하지 못하다고, 고려 말 유신이었던 강릉 함씨 집안의 형은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되었고, 동생인 함부열(咸傅說)은 간성에 은거하여 양근 함씨가 된다. 이후 그의 손자 함영근이 왕곡마을에 뿌리내렸다. 지금은 강릉 최씨와 다른 성씨도 함께 살고 있다. 마을은 19세기를 전후해 지어진 전통가옥들이 잘 보존되어 온 점을 인정받아 중요민속자료 제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꽃 방죽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자 2016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동주'의 촬영지라는 팻말이 붙은 '정미소'가 나온다.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던 어둠의 시대에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시인 윤동주(강하늘)와 독립운동가 송몽규(박정민)의 빛나던 청춘을 담은 영화다. 두 주인공의 아지트였던 정미소는 동주가 홀로 앉아 시집을 읽기도 하고 그들의 잡지를 만들기도 했던 곳이다.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 거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니?’라는 몽규의 말이 동주의 가슴에 비수같이 꽂혔던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준익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동주5억 원이라는 순수 제작비가 말해주듯 저예산 독립영화이다. 중급영화의 제작비가 40~50억 정도라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1,176,468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1천만 관객이 수두룩한 요즘이니 뭐가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손익분기점이 27만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공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대형 상업영화들과의 무한경쟁 속에서 말이다.

 

 

조금 더 들어가자 왕곡마을(오봉 1)의 마을회관(경로당)이 나온다. 특이 사항이 없기에 그냥 지나치려는데 마을장터에서 흘러나오는 구수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시키는 게 아닌가. 농산물 판매점인줄 알았는데 요깃거리까지 팔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메뉴판은 아예 주막집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조금 전 발걸음을 이끌었던 냄새는 막걸리와 궁합을 맞추기 위해 지져대는 메밀전에서 흘러나왔던 모양이고 말이다.

 

 

관광객들을 위한 포토죤도 보인다. 실사(實寫) 출력된 전통가옥을 배경삼아 인생샷이라도 건져보라는 모양이다. ‘옛 것 그대로 시간이 멈춘 곳이라는 부언(附言)이 눈길을 끈다. 맞다. 초가와 기와집이 골고루 섞여 있는 마을은 마치 조선시대로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런 풍경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지 마을에는 민박집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주말마다 열린다는 뻥튀기, 떡메치기, 그네타기, 널뛰기 등의 체험도 해볼 겸해서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겠다.

 

 

마을회관 바로 위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흐른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직진방향의 마을안길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이왕에 왔는데 영동지방의 전통가옥들을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함희석 효자 비각(咸熙錫孝子碑閣)’이다. 조선(고종) 때 사람인 함희석은 지극한 효행을 인정받아 조정으로부터 정려까지 하사받은 인물이다.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다가 병환으로 누운 부친을 봉양했고, 경신년(1860) 화난 때는 큰 화상을 입은 부친을 정성으로 간호했단다. 비각 안에는 효자전통정대부 돈영부도정 강릉 함희석 지려라고 적힌 비석이 들어있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조선시대 문신 정3품 상계(上階), 즉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명이다. 유교를 통치의 이념으로 삼은 나라답게 효자에게 내리는 품계 또한 엄청나게 높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젠 전통가옥들을 둘러볼 차례이다. 마을은 50여 가구가 산자락에 기대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기와집(31)과 초가집(20)이 적절히 섞여 있는데다 전선을 지중화한 덕분에 전봇대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근대 이전의 조선시대로 돌아간 느낌이 드는 이유이다. 첫 번째로 안내판이 없는 기와집을 둘러봤다. '' 자형으로 부엌에 외양간을 붙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것에 대비하여 기와지붕은 경사지게 하였고 집의 기단도 돌을 쌓아 높였다. 차가운 북서풍을 막으려고 집 뒤는 담으로 막았으나 햇볕 드는 앞쪽은 틔웠다. 이러한 형태를 조선 시대 함경도 지방(관북지방) 겹집 구조라고 한단다. 굴뚝도 눈길을 끈다. 진흙과 기와를 켜켜이 쌓아 지붕만큼 올리고 위에 항아리를 거꾸로 놓았다. 열기를 구들로 다시 들여보내기 위한 지혜란다.

 

 

두 번째는 성천집이다. 19세기 말 함일홍이 성천사는 부인을 맞아 함께 살던 초가이다. 마을의 집들은 이처럼 안주인의 고향이나 이사 온 마을의 택호를 따서 성천집, 큰상나말집, 큰백촌집, 작은백촌집, 석문집, 한고개집 등으로 부르고 있었다.

 

 

다음으로 찾아가는 곳은 큰상나말집으로 앞서 거론했던 영화 동주가 촬영되었던 곳이다. 내 공직기간 내내 좌우명으로 삼았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되는 서시를 노래한 윤동주의 성장 배경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이를 자랑하듯 영화의 한 컷이 벽에 걸렸다. 영화를 감독한 이준익 감독은 이 마을의 집성촌과 주거 형태가 북간도와 비슷하여 이곳을 골랐다고 한다.

 

 

함정균 가옥(咸丁均家屋,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8)’은 부인의 택호가 아닌 주인장의 이름을 따랐다.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본채는 박인로의 조홍시가(早紅柿歌)’를 떠올리게 만드는 '반시재(盤枾齋)'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정면 2칸에는 마루가 있고 그 뒤에 안방, 측면에 사랑방과 고방이 있는 영동 북부지방 주거의 전형적인 평면배치라고 한다. 본채의 좌측 부엌 앞에 외양간 지붕을 달아내었고, 본채 뒤쪽에는 툇마루가 달려 있으며, 마루 양측 끝에는 하부는 뒤주, 상부는 두 짝 여닫이문이 달린 벽장이 있다. 본채 우측에는 행랑채가 있다. 현재 강릉 함씨’ 21대 후손이 살고 있는 이 주택은 19세기 중엽에 건축되었단다.

 

 

'한과 만드는 집'도 찾아봤다. 예쁘장한 처자가 조청에 쌀 강냉이를 묻혀 커다란 누에고치처럼 생긴 것을 몇 개씩 집어 준다. 맛을 보고 그냥 갈 수는 없는 노릇, 주전부리를 좋아하는 집사람을 위해 작은 곽에 든 만 원짜리를 들고 일어섰다.

 

 

20분 남짓 마을을 둘러보다 마을회관 근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해파랑길을 따른다. 이어서 작은 상나말집과 양근 함씨 4대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각을 기웃거리다보면 길은 어느덧 마을 입구에 이르게 된다. 마을을 지키는 장승과 마을의 역사를 적은 안내판을 세워 옛 것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왕곡마을에 들어왔음을 알린다. 이곳에서 두백산 숲길의 들머리를 겸하는 고갯마루를 넘으면 왕곡마을회관에서 8분 거리에 있는 저잣거리이다. 가게가 죽 늘어서 있는 길거리라는 뜻에 맞게 향토식당과 왕곡한과, 전통체험장 등이 들어서 있다는데 문이 굳게 닫혀있어서 이용할 수는 없었다.

 

 

저잣거리를 나서서 7~8분쯤 지나면 왕곡한과 판매점’, 계속해서 5분쯤 더 걸으면 왕곡마을입구 삼거리(이정표 : 공현진1리 해변 0.6/ 왕곡마을 저잣거리 0.7)’가 나온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7번 국도를 따라 3분쯤 더 걸으라고 한다.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국도의 위를 말이다. 그러다가 공현진해변 입구 버스정류장 앞(이정표 : 공현진해변 0,3)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라는 것이다. 아직도 이 구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명색이 해파랑길인데 탐방객들을 이처럼 위험한 곳으로 인도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왕곡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공현진교' 아래로 인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에는 공현진해변길을 따른다. 이어서 5분쯤 더 걸으니 공현진 해변(公峴津海邊)이 드넓게 펼쳐지면서 공현진항 등대가 멀리 보인다. 아니 정확히는 공현진1리 해변이다. 공현진항을 가운데에 놓고 남쪽의 공현진1리와 북쪽의 공현진 2리 해수욕장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널따란 모래사장은 텅 비어있다시피 하다. 수심이 얕은 공현진2리 해수욕장이 더 인기가 있다던 얘기가 사실이었나 보다. 아니면 이곳 역시 코로나19의 여파일 것이고 말이다. ! 이곳 공현진1리 해변은 개그 테마해변이라 불리기도 한다. SBS 공채개그맨들이 한때 이곳에서 라디오 생방송과 공연 등을 진행하면서 얻어낸 별칭이라고 한다.

 

 

해변의 가장자리를 따라 난 길가에는 인어상이 세워져 있었다. 설악해맞이공원과 속초해변에서 본 인어상보다는 좀 투박하지만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이 여간 매력적이지 않다. 인어 하나로는 부족했던지 그 옆에 문어 조형물도 세워놓았다.

 

 

잠시 후 탐방로는 공현진항(公峴津港)에 이른다. 국가어항답게 방파제와 물량장 등의 기본시설뿐만 아니라 널따란 주차장과 야간조명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하지만 항구에 정박되어 있는 배들은 1~5톤의 소형급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가까운 바다에서 가자미나 우럭, 광어, 놀래미 등의 횟감 어종을 주로 잡는다고 한다. 그렇게 잡아온 물고기들은 주차장 맞은편의 활어회센터에서 팔고 있었다. ! 운이라도 좋으면 주변의 얕은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성게나 해삼, 전복 등을 채취한다니 싱싱한 횟감을 즉석에서 맛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공현진 포구를 벗어나자 곧이어 공현진2리 해변이 그 뒤를 잇는다. 이곳의 너른 백사장은 모래가 고울 뿐만 아니라 수심까지 얕아서 해수욕장으로서의 입지조건이 뛰어나가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항상 문이 열려있는 것은 아니란다. 마을운영위원회에서 관리를 맡고 있지만 관할군부대의 협조 아래 한시적으로 운영될 따름이라고 한다.

 

 

공현진2리 해변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수뭇개 바위이다. 해수욕장의 남쪽 바다에서 솟구쳐 오른 웅장한 크기의 기암괴석으로, 생긴 그 자체만으로도 황홀한데 바위 사이로 해라도 떠오를라치면 말로는 표현 못할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참고로 '조선지지자료(1910년에 발간)'에는 이 바위를 3개의 바위가 묶여있다는 뜻에서 삼속도(三束島)’로 기록하고 있다. 안내판에는 '삼속도'가 세월이 흐르면서 '셔뭇뒤''스뭇대'를 거쳐 '수뭇개'로 구전되었을 것이라 적고 있었다. 한편 이 바위는 옵바위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옛날 물개가 많아서 바위에 옷을 덮듯이 올라가 쉬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하지만 이 옵바위는 수뭇개바위보다 한참이나 작은 다른 바위라는 게 알려지면서 군지명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2017수뭇개바위로 이름을 통일시켰다.

 

 

해변이 끝나갈 즈음 만나게 되는 정자 앞에서 탐방로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곧이어 '공현진 경로당' (이정표 : 가진항 1.4/ 공현진항 0.5)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후로는 가진해변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탐방로를 따로 내놓지 않았으므로 지나다니는 차량에 주의를 기울여가며 걸어야 하는 구간이다.

 

 

 

날머리는 가진항(고성군 죽왕면 가진리 46-7)

공현진해변을 나선지 10, 도로변 공터에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다. 주차할만한 공간을 찾다보니 그랬겠지만 47코스의 종점인 가진항(加津港)은 조금 더 걸어야만 이를 수 있다. 오늘 트레킹은 3시간 15분이 걸렸다. 핸드폰 앱에 찍힌 거리는 11.51, 47코스의 공식 거리인 9.7km보다 2가까이를 더 걸은 셈이다. 서낭바위와 왕곡마을 등의 명소를 자세히 살펴보느라 정규 코스를 많이 벗어났던 모양이다. 참고로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가진항 입구삼거리에 설치되어 있다.

해파랑길 46코스

 

여행일 : ‘20. 8. 1()

소재지 :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과 고성군 토성면·죽왕면 일원

여행코스 : 장사항(6.6)봉포항청간정(3.5)아야진항천학정(1.1)능파대(4.4)백도해변삼포해변(소요시간 : 15.6/ 4시간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모두 5개 코스(46~50)로 이루어진 해파랑길 고성구간은 절경과 명승지가 의외로 많은 곳이다. 이 가운데 토성면(용촌리)에서 시작되는 46코스는 봉포해변과 백도해변, 자작진해변 등 크고 작은 해변을 9개나 품고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것도 그냥 해변이 아니다. 죽도와 가도, 앞섬 등 이름만큼이나 예쁜 바위섬들을 푸른 바다 위에 띄워 너나없이 빼어난 경관을 만들어낸다. 그런 아름다움은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에서 절정을 이룬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들어앉은 고색창연한 정자에서 바라보는 망망대해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거친 해안 풍광이 일품인 청학정과 기암괴석의 전시장인 능파대도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라 하겠다.

 

들머리는 장사항(속초시 장사동 548-5)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속초 IC에서 내려와 56번 지방도를 이용 수복탑사거리(속초시 동명동)까지 온다. 이어서 중앙로를 타고 고성방면으로 올라가다 우림연립(속초시 장사동 518-7) 앞에서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해파랑길 46코스의 들머리인 장사항이 나온다. 장사항은 소박한 어촌 그대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다른 항구에 비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에서는 바나나보트, 요트 등을 덤으로 즐길 수 있다.

 

 

 

해파랑길 안내도 맞은편의 'another blue' 카페 사잇길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어서 '장사동 활어센터' 표지석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중앙로'를 따라 북진한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하자 속초시의 캐릭터인 '해오미' 조형물과 함께 여기서부터 금강산입니다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속초시와 고성군의 경계인데, 하단에 금강산 고성군이라고 적어 넣은 걸 보면 고성군에서 금강산을 브랜드로 삼고 있는 모양이다. ! 이곳으로 오는 도중 '해양경찰 충혼탑'도 만났으나 사진 게재는 생략했다. 전사·순직한 해양경찰관 174명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해양경찰대에서 세운 충혼탑이다.

 

 

·군 경계에서 몇 걸음 더 걸으면 'ㅏ자' 갈림길이 나온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까리따스 마테오 요양원'으로 간다. 이어서 고성 카페거리를 통과한 다음 중앙로로 되돌아 나온다. 하지만 카페거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눈에 들어오는 카페는 몇 되지 않는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바다정원'이라는 카페가 모든 것을 대신한다고 보면 되겠다. 몇 년 전만 해도 바닷가에 초록 카펫을 깔고, 하얀 의자와 빨간 파라솔 등을 놓은 강렬한 색감의 베이커리 카페로 화제를 모았던 곳이다. 손님들이 줄을 잇자 작년에 5층짜리 큼직한 신관을 오픈했단다. 이 집의 시그니처 빵인 모찌크림치즈빵과 치아바타 등을 주문할 수 있는 빵카페와 수제맥주를 파는 펍이 1층에 있고, 2층에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다시 돌아온 중앙로. 보고 또 봐도 마음에 쏙 드는 풍경이다. 소나무와 무궁화가 산책로의 양옆으로 도열해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국화인 벚나무로 도배된 다른 지역의 도로들에 식상해왔는데, 이곳은 나라나무(國木)라 할 수 있는 소나무와 나라꽃(國花)무궁화를 가로수로 심어 놓았으니 어찌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면을 통해서나마 고성군청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를 드려본다.

 

 

도로 건너 용촌리(토성면)’는 작년에 발생했던 산불의 흔적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불에 탄 주택은 흉물스럽게 버려졌고, 고사목으로 변한 소나무는 뼈대만 앙상하다. 하지만 새로 지은 듯한 주택도 여럿 보였다. 문득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란 시가 생각난다. 화마가 할퀴고 간 깊은 상처가 서서히 치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용촌천위에 놓인 용촌교를 건넌다. 다리에서 바라보는 용촌천의 기수역(汽水域) 풍경이 가히 일품이다. 푸른 습지 너머, 바다 한가운데 죽도가 떠있는데 그게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설악산. 비선대, 울산바위, 미시령 고개가 바로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 숨 멎을 듯 고요한 화폭에 설악은 구름과 바람과 산 공기를 불러 모아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냈다. 정말 장관이다.

 

 

용촌교를 건넌 해파랑길은 이제 도로와 이별을 고하고 둑방길을 따라 해안으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켄싱턴 해변에 이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만이다. 이후부터는 모래사장과의 경계선에 놓은 데크 탐방로를 따른다. 안내판은 이 길을 평화누리길이라고 적고 있다. 세계 유일 분단지역의 상징성을 가진 평화 누리길접경지역 발전종합계획(2011.7.27.)’에 따라 2021년까지 총 551km로 조성될 계획이라고 한다. 강화에서 고성까지 총 10개 시·군에 조성되어 있으며, 자연·생태·역사·문화·안보 등 시군별 차별화된 테마로 조성된다. 또한 비포장도로와 기존 사용하고 있는 도로 및 폐 도로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동시에 군 작전로를 활용하는 친환경적인 길()이라고 한다.

 

 

잠시 후 '켄싱턴 리조트 설악비치' 앞을 지난다. 그런데 난데없는 버스 한 대가 리조트 앞에 주차되어 있는 게 아닌가. 런던의 명물인 '더블 데커(double decker)', 2층 버스인 '루트마스터(Routemaster)'라고 한다. 이 버스는 한때 2,700여 대나 운행되기도 했단다. 런던 전역을 누비며 시민들의 발이 되어 주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2005년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현재는 런던 중심가의 관광용 노선 2개만이 운행되고 있을 따름이다. 켄싱턴(Kensington)은 런던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상류층 주거 지역이다. 어쩌면 이 리조트가 켄싱턴 주민들에 버금가는 고객들이 쉬었다가기에 충분한 시설을 갖추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홍보용이 아닐까 싶다.

 

 

고운 모래가 자랑인 켄싱턴 해변은 동명(同名)의 리조트에서 운영하는 프라이비트(private) 해수욕장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모래사장에 'KENSINGTON BEACH'란 글자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하트와 액자 속으로 들어간 테이블 등 조형물들도 여럿 보인다. 바닷물에 발을 담글 듯이 늘어선 식탁들도 비치파라솔을 씌워 멋을 더했다.

 

 

켄싱턴 해변을 한층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단연 죽도(竹島)이다. 봉포항에서 1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저 섬은 올해 안에 해양관광지로 다시 태어날 계획이라고 한다. 섬에 접근할 수 있는 접안시설과 해상 산책로를 설치하고, 얼굴바위와 큰발바위, 심장바위 등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상경관을 스토리텔링 할 계획이란다.

 

 

유럽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인공폭포도 아름다운 색상으로 덧칠까지 해놓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자 봉포항이 길손을 맞는다. 외항과 내항으로 나누어져 있는 봉포항은 50여 척의 배가 드나드는 작은 포구이다. 하지만 활어센터가 있어 싱싱한 활어회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먹을 수 있단다. ! 봉포항의 볼거리가 방파제와 테트라포드에 그려진 모자이크 타일 벽화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한 잔 먹세그려 / 또 한 잔 먹세그려 / 꽃 꺾어 세어가며 무진무진 먹세그려로 시작되는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함께 적어 활어센터에 꼭 들렀다 갈 것을 권하고 있었다.

 

 

봉포해변은 봉포항의 방파제(이정표 : 청간정 2.1/ 고성군계 4.2) 뒤에서 시작된다. 마치 해외 휴양지의 물빛을 연상시키는 산호색 바다와 깨끗한 모래, 그리고 점점이 떠있는 갯바위가 금방이라도 바다에 뛰어들고 싶게 만드는 해수욕장이다. 또한 앞바다에는 죽도가 있어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없어 자칫 밋밋할 수도 있는 바다를 외롭지 않게 해준다. 죽도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은 아름답기로 이미 정평이 나있다. 한편 이곳은 스노쿨링과 다이빙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해변에 널린 바위들이 바다 생물들의 생존 여건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란다.

 

 

봉포항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바닷가를 벗어나 도로를 따른다. 3~4분쯤 걸었을까 해변 주차장에 푸드 트럭들이 즐비하다. 청년포차 공간인 청년 상상마당이라는데 청년들에게 안정적인 창업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고성군에서 조성했단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다 '천진해수욕장입구 정류장(이정표 : 청간정 1.3/ 봉포항 0.9)'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천진해변이 나온다. 천진항과 연결된 초승달 모양의 이 해변은 해안선을 따라 하얀 백사장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 배후 마을은 민박 예고제를 운영하여 피서객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고 있단다.

 

 

천진해변과 연결된 천진항의 볼거리는 방파제의 뒤편에 있다. 테트라포드 너머 바닷가에 갯바위가 즐비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거북이를 닮은 바위 하나가 유난히도 시선을 끈다. 하지만 이곳의 명물은 맷돌바위이다. 파도가 치면 감싸고 있는 주변 바위와 마찰을 일으키면서 마치 맷돌을 가는 듯한 소리가 난다는데 다가가 보지는 않았다. 카메라에 담을 만한 외형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다. 봉포항에서 천진항까지는 15분이 걸렸다.

 

 

천진항을 빠져나오면 탐방로는 잠시 바닷가와 이별을 고한다. 이어서 애견 동반 펜션인 '멍 스테이''크리스마스 펜션'을 차례로 지나더니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또 다시 바닷가로 향한다. 이후부터는 데크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된다. ! 이때 천진항과 그 너머 죽도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오니 놓치지 말고 감상해보자.

 

 

데크 탐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청간정(淸澗亭)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남한에 있는 관동팔경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하는데, ‘정자가 바위사이에 흐르는 물과 임해 있다는 뜻의 청간(淸澗)’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닷가 숲속에 들어앉은 풍경이 사뭇 아름답다. 이를 놓칠 시인 묵객들이 아니다.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청간정을 언급했고, 조선후기의 아웃사이더이자 문체반정의 최대 피해자였던 이옥도 청간정을 노래했다. 그런가하면 정선(청간정도)과 김홍도(금강사군첩) 강세황(청간정도)도 저곳에 들러 그림을 남겼다.

 

 

탐방로는 군 초소가 있는 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다음 행선지인 청간정이 코앞에 있는데도 천진천(天津川)이 길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물길을 가로지르는 목교(木橋)가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군의 순찰로로 여겨져 이용하는 것 자체를 포기했을 따름이다. 그렇게 만난 강줄기를 따라 잠시 거슬러 올라가자 청간교가 나온다. 천진항을 나선지 15분만이다. 청간교 건너에는 청간정' 입간판이 기와지붕을 머리에 이고 서 있었다. '관동팔경 수일경이란 거창한 수식어까지 달고서 말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청간정 자료전시관에 들러 청간정을 노래한 시문과 회화 자료 등을 곁눈질 한 뒤, 작은 구릉 위로 오르면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인 청간정(淸澗亭)이 나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지어진 정자의 외부 현판은 독립운동가인 청파 김형윤이 1928년에 쓴 글씨다. 원래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문헌상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고종 21년에 소실됐다. 정자 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청간정친필 현판과 최규하 전 대통령의 친필 시판이다. 이 전 대통령은 1955년 중수 당시 이곳에 들러 현판을 하사했고 최 전 대통령은 1980년 여름에 이곳에 들러 한시를 남겼다. 참고로 청간정은 원래 청간역(淸澗驛)의 정자였다고 전해진다.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종 15(1520)에 간성군수로 있던 최정(崔情)이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전에 이미 청간정이 있었다고 본다. 그 후 현종 3(1662)에 정양(鄭瀁)이 다시 중수하였다고 전해진다. 1844년 갑신정변 당시 불에 타 방치돼 오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1955년 이승만 전 대통령 명으로 보수했고 1981년 최규하 전 대통령의 지시로 해체 복원됐다.

 

 

정자에 올라 바라보는 동해바다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곱디고운 모래로 뒤덮인 해안들이 좌우로 펼쳐지는가 하면, 정면으로는 망망대해가 끝 간 데 없다. 조선 인조 때 간성군수를 지냈던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노래한 수성지의 표현을 빌어보자. <정자위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면 물과 바위가 서로 부딪쳐 산이 무너지고 눈을 뿜어내는 듯한 형상을 짓기도 하고 갈매기 수 백 마리가 아래위로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일출과 월출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좋은데, 밤에 현청에 드러누워 있으면 바람 소리 파도 소리가 창문을 뒤흔들어 마치 배에서 잠을 자는 듯하다.>

 

 

청간정에서 내려서면 청간해변’. ‘명사(鳴沙)’로 불리는 특이한 모래사장을 보유한 곳이다. 여기서 명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명사십리(明沙十里)’가 아니다. ‘곱고 흰 모래가 아니라 울 명()’자를 써서 우는 모래로 읽힌다. ‘신증동국여지승람모래색이 눈같이 하얗고 사람과 말이 지날 때면 부딪쳐 나는 소리가 쟁쟁하여 마치 쇳소리 같다.’고 표현했고, 김정호도 대동지지에서 청간정은 해안가에 기암괴석이 어지럽게 서 있으며 해변 위 모래는 빛나니 흰 눈이 뒤덮인 것 같고, 밟으면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니 주옥을 밟는 것 같다고 썼다. 그러나 내 귀에는 그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하긴 피서객들로 들끓는 곳에서 그런 소리를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이지 않겠는가.

 

 

백사장으로 내려서니 큰애 부부가 술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며느리의 건강 때문에 주말부부로 살아가는 와중에도 내가 이곳을 지나간다는 얘기를 듣고 생선회를 준비한 모양이다. 홀로 서울 생활을 해야만 하는 아들은 안쓰럽지만, 함께 나온 며늘아기의 건강도 한결 좋아 보이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곳에 아파트를 마련해 요양을 시작한 뒤로는 한 번도 입원을 하지 않았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무튼 하룻밤을 이곳에서 머물다 다음날 자신의 차로 귀경하자는 아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해파랑길 종주를 마무리 짓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청간해변이 끝나갈 즈음 바닷가 풍경이 사뭇 달라진다. 모래사장이 바위지대로 변한 것이다. 그것도 운동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너른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잠시 후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아야진포구에 이른다. 청간정에서 20분 조금 못되는 지점이다. '동해의 새벽 바닷길을 여는 아야진항' 벽화를 지나 아야진항으로 들어서면 고깃배들이 빼곡히 정박되어 있다. 포구에는 '아야진 연승협회'라는 특이한 간판을 내걸고 있는 건물도 들어서 있었다. 스포츠에 저런 종목도 있었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지나가던 주민이 주낙이라고 알려준다. 비교적 굵은 한 가닥의 기다란 줄에 여러 가닥의 가는 줄을 달고, 그 끝에 낚시를 연결하여 고기를 낚는 어로 기법이라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오징어 모양의 등대가 특징인 이 항구의 원래 이름은 대야진(大也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큰 대()' 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아야진(我也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곳 아야진에서 옆 동네인 반암리로 넘어가는 산()의 생긴 모양이 한자어인 잇기'()'자처럼 생겼다는 데서 이름의 유래를 찾는 사람들도 있다. '야진(也津)’이라는 이름을 얻은 후 마을의 단합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라는 뜻을 넣어 아야진(我也津)’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야진항의 북방파제는 바닥에 트릭아트를 그려 넣어 포토죤으로 조성했다. 착시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사진 찍기에 그만인데 색이 바래서 현실감은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집사람에게는 반갑기만 한 모양이다. 하긴 25코스 동정마을 앞의 트릭아트를 마지막으로 1년 이상을 못 보았으니 얼마나 반갑겠는가.

 

 

탐방로는 이제 아야진 해변을 지난다. 물놀이보다는 낚시터로 더 어울리는 갯바위지대로 시작한 해변은 잠시 후 상당히 긴 모래사장으로 변한다. 크고 작은 갯바위와 질 좋은 백사장, 거기다 맑은 바다까지 함께 해주니 가족단위 피서지로 딱 좋다 하겠다. 백사장이 온통 피서객들로 넘쳐나는 이유일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모래사장만 벗어나면 암반 형태의 갯바위 지대로 바뀐다. 그것도 제법 넓고 길게 펼쳐져 있어 먼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물길을 막아준다. 그래선지 해변 끝까지 나간 아이들도 꽤 많이 보인다.

 

 

아야진 해변을 벗어난 탐방로는 이제 고개 하나를 넘는다. 고개를 넘어서 만나는 삼거리에서는 간성방향, 이후로도 탐방로는 물길을 건너는가하면 여러 곳에서 방향을 틀기도 한다. 하지만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국토종주 동해안자전거길만 따라 걸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 구간은 평화누리길의 고성구간이기도 하다. 거기다 군의 순찰로까지 겸하고 있으니 길 세계의 팔방미인인 셈이다.

 

 

개발되지 않은 바닷가를 따라 난 탐방로를 따라가다 해변이 끝날 즈음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 2차선 도로인 교암길이 나온다. 아야진 해수욕장에서 25분쯤 걸리는 지점이다. 이 도로의 바로 앞에서 오른편 숲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오래 묵은 소나무들이 꽉 들어찬 숲속을 잠시 걷자 천학정(天鶴亭)‘이 얼굴을 내민다. 1931년 지방 유지인 한치응과 최순문, 김성운 등이 뜻을 모아 지은 정자로 정면 좌측에 모암산인(茅菴山人)이 전서체로 쓴 천학정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천학정기천학정 시판이 걸려 있다. 정자는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에 걸터앉은 수려한 자태에 더해 수령이 백년도 더 넘은 소나무 숲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었다. '고성8(高城八景 : 건봉사, 천학정, 화진포, 청간정, 울산바위, 통일전망대, 송지호, 마산봉 설경)' 중에서도 두 번째 자리를 꿰차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청학정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남쪽으로 가도와 백도에 이어 청간정까지 바라다보이고 북으로는 교암항이 코앞이다. 하긴 청학정이라는 이름 자체가 상하천광(上下天光)’ 즉 동해의 푸른 바닷물을 거울삼아 그 모습을 비춘다는 뜻이라니 이를 말이겠는가. ! 이곳은 일출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니 기억해 두자.

 

 

청학정에서 내려서면 베짱이 다이브리조트라는 빨강색 건물이 눈길을 끄는 교암항(橋巖港)’이다. 교암항은 조용한 어촌마을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작고 한적한 어항으로 항구 자체보다는 천학정과 능파대, 그리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교암해변 등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려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교암항에서 문암항까지는 해안도로(청학정길)를 따른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교암 해수욕장을 오른편에 끼고 이어지는 멋진 구간이다. 이 해수욕장은 길이가 1km나 되는 백사장이 자랑거리다. 시위를 한껏 당긴 활처럼 잔뜩 휘어있는 모양새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경사가 완만하고 모래의 질까지 좋단다. 거기다 천학정과 능파대라는 명승까지 끼고 있으니 가족단위 피서지로 최상이라 하겠다.

 

 

교암해변의 모래사장이 끝나는 곳, 그러니까 교암항에서 10분 남짓 되는 지점에는 문암항(文巖港 : ’문암2리항이라고도 한다)’이 자리하고 있다. 한적한 어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작은 포구이지만, 뒤에 기암괴석 군락이 바다로 뻗어 나와 있어 이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항상 넘치는 곳이다. 참고로 이곳 문암마을의 옛 이름은 괘진(掛津)’이었다고 한다. 서쪽으로 큰 하천이 흐르나 이 하천이 범람해도 피해가 전혀 미치지 않는 마을로, 항상 걸려 있다는 뜻에서 걸릴 괘()’자와 바다를 끼고 있다하여 나루 진()’ 자를 붙였는데 지금도 주민들에게는 옛 이름이 더 익숙하게 들린단다. 하나 더, 마을이 하천과 바다로 둘러싸여 섬과 다름없다고 해서 연꽃마을로 불려왔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문암항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능파대(凌波臺)’이다. 목제 데크를 올라가면 능파대가 동남방향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타포니(tafoni) 현상이라는데, 타포니란 염풍화작용으로 암석에 동굴처럼 구멍이 뻥뻥 뚫린 지형을 말한다. 멀리서 보면 벌집이나 해골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혹자는 골다공증 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선 타포니(오랜 세월 동안 바닷물의 염분이 화강암의 틈에 스며들어가 바윗덩어리를 부스러뜨려 만든 풍화혈) 외에도 그루브(groove : 암석 측면에 긴 고랑처럼 발달한 지형)가 발견된다고 한다.

 

 

능파대는 원래 섬이었다가 문암천에서 흘러내린 모래가 쌓이면서 육지와 이어진 육계도(陸繫島)라고 한다. 이곳의 바위들은 1억만 년 전 중생대 쥐라기 때 형성된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지하에서 형성된 암석이 압력이 낮은 지표로 올라오면 돌이 물러져 풍화되기 쉽다. 그렇게 지상으로 돌출된 바위들이 1억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바닷물에 의해 풍화가 진행돼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단다. 참고로 능파(凌波)‘라는 지명은 '급류의 물결' 또는 '파도 위를 걷는다'라는 뜻으로 미인의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뜻하기도 하는데, 이모 강원 감사가 관내 순시 중 파도가 해안가의 기암괴석에 부딪히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파도를 능가하는 돌섬이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문암항에는 스킨 스쿠버 다이빙(skin scuba diving)‘ 간판이 여럿 보였다. 형형색색의 산호초가 빚어내는 절경을 찾아 모여든 다이버들을 위한 전용 카페인 모양인데 이곳으로 오는 도중 들렀던 항구들에서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었다. 서핑이 주를 이루던 양양이나 강릉, 삼척 등의 해안과는 다른 풍경이라 하겠다. 그만큼 서핑이나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는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그나저나 늦은 감은 조금 있지만 한번쯤은 나도 도전해보고 싶다. 스쿠버다이빙(skuba diving)은 어쩔지 몰라도 스킨다이빙(skin diving)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능파대 뒤편으로는 문암해변이 펼쳐진다. 탐방로는 특별히 눈에 담을 것은 없지만 분위기 좋은 카페들도 제법 많이 들어서 있었다. 탐방로는 이 해변을 지나 문암대교으로 향한다. 토성면(도원리) 마산(1,052m)에서 발원한 문암천(文岩川)’을 가로지르기 위해서이다.

 

 

 

문암대교를 건너자마자 백도 해변(白島海邊)’이 시작된다. 백사장의 길이가 200m인 해수욕장인데 '백도'란 이름은 바다 남동쪽에 위치한 백도에서 유래했단다. 이곳은 오토 캠핑장이 눈길을 끌었다. 비교적 시설(데크, 전기 등)이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해변에는 조형물들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Endless LOVE’란 조형물은 담긴 뜻까지도 고왔다. 두 연인의 정열적인 포옹을 통해 사랑이 시작되고 그 사랑이 영원함을 상징한단다. 이밖에 대형 문어와 가리비, 고동 등의 조형물도 눈에 담을 만했다.

 

 

데크 탐방로를 따라 잠시 걷자 두 기의 미륵불이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77년 바닷가 모래밭에서 하나를 발견한 뒤 90년대에 또 하나의 석불을 발견하여 나란히 세우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았단다. 이 석불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척부사를 지낸 이의 부친이 사망하여 무덤 앞에 문석을 세우기 위해 당시 문상을 왔던 고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고승이 알려준 마을에서 문석을 만들어 가져다 세우면 가문이 번성한다 해서 지금 문석이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제작하여 삼척으로 옮겨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문석을 싣고 떠나려 하면 거센 풍랑이 일어 배를 띄울 수가 없었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삼척부사는 이 문석이 이 마을을 떠나려 하지 않으니 그냥 남겨두고 떠났다고 한다. 그 뒤 이 마을에서는 청어 등이 많이 잡혀 풍어를 이루었고, 아이가 없는 집안에서 이곳에서 불공을 드리면 아이를 얻는 등 문석이 마을에 복을 준다고 하여 미륵불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일제 때 땅속에 묻혔는데, 6.25 사변 뒤 마을에서 무술인 등을 동원하여 찾기를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하나 밖에 찾지 못하였고 이후 큰 태풍이 지난 뒤 모습을 드러낸 나머지 하나를 찾아 지금의 이 자리에 나란히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수욕장을 빠져나오면 곧이어 문암1리항이 나온다. ‘문암2리항을 출발한지 20분만이다. ‘문암1리항은 포구 앞바다에 떠있는 백도의 유명세로 인해 백도항이라고도 불리는데, 인근 해역은 참가자미 낚시터로 꽤 유명하단다. 그래선지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항구 구경을 시켜준 탐방로는 이제 문암1고을을 꿰뚫고 지나가는 도로(문암항길)을 따른다. 잠시 후 '고성방가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곧이어 문암리 선사유적(文巖里先史遺蹟, 사적 제426)’이 나온다.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구릉지의 남쪽 경사면 모래언덕에 형성된 이 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유적지는 현재 텅 비어있는 상태다. 하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동북아시아의 신석기문화, 한반도 선사인의 원류 및 이동경로, 당시의 문화계통과 전파과정 등을 밝히는데 있어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 받는단다.

 

 

선사유적을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자작도 해변이 뒤를 잇는다. 300m가 조금 못되는 모래사장이 활처럼 안쪽으로 움푹 휜 해수욕장이다. 넓은 곳은 폭이 121m나 된다니 나름대로 규모를 갖춘 해수욕장으로 보면 되겠다. 그런데도 백사장은 텅 비어있다시피 하다. 하긴 편안하게 쉬면서 물놀이를 즐기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고 알려주던 지인까지 있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는 또 엿장수들이 피서철에 영업하러 왔다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주민들에게 쫓겨난 일화까지 들먹였었다. 아무튼 이곳은 수심이 무척 얕다고 한다. 해안선에서 20~30m를 나가도 성인의 허리와 가슴 사이 정도 밖에 물이 차오르지 않는 다는 것이다.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는 딱 좋은 해수욕장이라 하겠다. 문암1리항에서 이곳까지는 15분이 걸렸다.

 

 

자작도는 하나의 섬을 일컫지 않는다고 한다. 풀이 듬성듬성 자란 모래사장 앞 바다에 펼쳐진 바위들, 즉 갈매기 배설물로 하얘진 백도와 소백도 안쪽으로 자작자작내려 않은 바위섬 군락을 통칭해서 자작도라 부른다는 것이다. 참고로 자작도의 옛 이름이 무선대(舞仙臺)’라는 주장도 있다. 신라시대 화랑들이 금강산을 오가던 길에 고성의 무선대바위섬 위에서 춤을 추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 무선대 바위섬들에 자작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자작도 해변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동광그룹 고성연수원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연수원 오른편의 해안선을 따라 진행해봤다. 명성이 자자한 자작도를 조금 더 가까이서 바라보기 위해서이다. 그런 결정은 우리에게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능파대와 똑 같은 풍광, 즉 기암괴석의 전시장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외의 경관에 시선을 빼앗기다가 연수원 앞으로 되돌아와 길을 다시 잇는다. 그리곤 마을안길(자작도선사길)을 통과한 다음 또 다른 자작해안에 이른다. 이어서 해안도로(삼포해변길)을 따라 자작교다리를 건너면 삼포해변이 시작된다. 800m나 되는 긴 모래사장과 울창한 소나무 숲, 그리고 깨끗한 바닷물이 특징인 해수욕장이다. 경사도 거의 없는데다 물도 깊지 않아 해수욕의 즐거움을 한껏 누릴 수 있단다. 한편 이 해수욕장은 해변을 붉게 물들이는 해당화와 울창한 소나무 숲이 빚어놓은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다. 거기다 흑도와 백도, 호미섬 같은 작은 바위섬들이 바다를 떠다니며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 배가시킨다. 그런 풍광에 초점을 맞춘 숙박 앱 고코투어는 이곳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여행지'로 소개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 유명 휴양지에 버금가는 코발트블루 색상의 이국적 바다색깔과 바다와 하늘의 경계선에 펼쳐지는 짙푸른 바다색의 변화가 매력적이라면서 말이다. '안 가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라는 표현에 딱 어울리는 곳이란다.

 

 

왼편 길가에는 삼포광장이 널따랗게 조성되어 있었다. 야생화 꽃밭과 벤치를 갖춘 해수욕장의 휴식공간이라는데 삼포해변에서 매년 열린다는 삼포해변 서핑축제(미드나잇 피크닉페스티벌)’ 때는 크게 한 몫을 하겠다. 아무튼 광장에는 원형 데크뫼 산()’자 조형물, 그리고 해수욕장 풍경을 액자에 담을 수 있도록 포토존도 두 곳이나 만들어 놓았다.

 

 

 

날머리는 오션투유 리조트옆 주차장(고성군 죽왕면 삼포리 243-11)

바닷가 풍광을 눈에 담아가며 잠시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오션투유 리조트가 어서 오라며 손짓을 보내온다. 삼포해변에 기대어 지어진 리조트로 46코스는 저곳에서 종료된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이 저 리조트의 입구 맞은편 도로변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총 4시간 10분을 걸었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17.53를 찍고 있다. ‘()한국의길과문화에서 공지한 15.6보다 2나 더 걸었다는 것은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9월에 걷기 좋은 여행길46코스를 꼽았을 정도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해파랑길 45코스

 

여행일 : ‘20. 7. 18()

소재지 : 강원도 속초시 대포동·조양동·청호동·중앙동·영랑동·장사동 일원

여행코스 : 설악 해맞이공원(1.6)대포항(2.1)속초항(1.3)속초 등대전망대(9.1)영랑호 둘레길장사항(소요시간 : 16.9가운데 속초해변에서 시작, 14.6/ 3시간 5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설악 해맞이공원에서 시작해 외옹치와 설악해변, 청초호, 영금정, 청초호, 영랑호를 거쳐 장사항에 이르는 코스로 속초 시내를 한꺼번에 아우른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거리는 다소 길지만(16.9) 코스의 난이도가 낮아 부담이 없는데다 영랑호 구간(7.5)에서는 호반을 따라 내놓은 호젓한 숲길을 걷기도 한다. 또한 영금정과 범바위처럼 경관이 빼어난 곳에서는 잠깐의 여유를 즐길 수도 있고, 청초호에서는 갯배라는 색다른 체험도 해볼 수 있다. 거기다 싸고 싱싱한 활어회가 덤으로 따라 붙으니 해파랑길을 처음 입문하시는 분들에게 감히 추천드릴 수 있는 구간이라 하겠다.

 

 

들머리는 속초해수욕장(속초시 조양동 1450-104)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양양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를 타고 청곡교차로(양양군 양양읍 청곡리)‘로 온다. 이어서 7번 국도를 타고 속초 방향으로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해파랑길 45코스가 시작되는 설악해맞이공원(속초시 대포동 178-9)‘에 이르게 된다. 설악산의 입구이기도 한 이곳은 본래 내물치라는 해돋이 관광명소였는데, 19999월 개최된 국제 관광엑스포에 맞춰 가족공원으로 새롭게 개원됐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속초 해수욕장에서부터 트레킹을 시작했다. 45코스의 초입인 바다향기로외옹치해변2018년 민간에 개방되자마자 다녀왔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코로나19 팬데믹(COVID-19 pandemic)‘의 영향은 해수욕장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해수욕장 전체에 금() 줄을 치고 입구와 출구를 따로 만든 것은 기본. 발열 검사와 함께 분사식(噴射式) 소독까지 시키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의 출입을 아예 막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해수욕장에 들어와서도 마스크를 벗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집사람처럼 사진 찍을 때야 잠깐 벗을 수밖에 없겠지만. 이런 상황에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백사장에는 '속초여행'이라고 쓰인 조형물과 함께 '조도(鳥島)'의 경관을 자랑하는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이곳 속초해변에서 바라보는 조도가 속초팔경의 제5경이라는 것이다. 안내판은 또 소야팔경(所野八景)’논산조양(論山朝陽)을 들먹이고 있다. 이 일대의 일출이 일품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는 논산이라는 약간 높은 구릉지에서 바라보는 아침 해를 이른 것이니, 설악해변에서 사용할 비유는 아니겠다. 참고로 속초팔경은 영금정과 영랑호 범바위, 청대산, 청초호, 속초해수욕장 및 조도, 외옹치, 설악해맞이공원, 학무정 등이 포함되어 있다.

 

 

돌고래가 수면을 박차고 오르는 형상의 조형물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아니 그 옆에 세워놓은 해변의 여인상에 더 호감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모래사장에 엎드린 자세인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으니 눈길을 끄는 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SOKCHO' 조형물 뒤에는 전 세계 중요지점의 방향과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뉴욕, 파리, 베를린, 블라디보스톡, 북경 등 꽤 많은 도시들이 눈에 익다. 세계 일주를 목표로 여행을 시작한지가 벌써 6년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시도조차 못해본 곳들이 세계 방방곡곡에 널려있다. 그런데도 코로나로 인해 발이 묶여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해수욕장에서 빠져나오니 '1군단 전적비'가 우뚝하다. 19506월 평택에서 창설된 이 부대는 6.25 전쟁 중 한·만 국경선까지 진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전쟁 중(1951.6.6~1952.12.22) 이곳 속초에 주둔하면서 설악산과 향로봉, 884고지 월비산 등의 전투에 투입돼 양양·속초·간성을 적들로부터 지켜냈다고 한다.

 

 

전적비까지 다 둘러봤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트레킹을 나설 차례이다.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도로(청호해안길)을 따르면 된다. 이 길을 걷다보면 군의 경계초소를 만나기도 한다. 아직까지도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이리라. 반면에 경관 좋은 바닷가에는 전망대를 만들어두기도 했다.

 

 

전망대에 오르자 동해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조도(鳥島)가 놓여있다. 사람 대신 새들이 찾는다는 섬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서 이름도 조도란다. 그러니 섬에 걸터앉은 등대도 무인(無人)이다. 아무튼 저 섬은 해맞이로 유명한 섬이다. 새로운 하루가 열림을 알려주는 분홍빛 태양을 등에 짊어지기라도 할라치면 저 섬은 그림에서나 볼 법한 풍경을 만들어낸단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소야팔경(所野八景)의 다섯 번째에 논산조양(論山朝陽)을 올려놓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소야팔경(所野八景)에는 청초마경(靑草磨鏡)과 노도귀범(鷺島歸帆), 주교야화(舟橋夜火), 온정조하(溫井朝霞), 논산조양(論山朝陽), 청대화병(靑垈畵屛), 노동명월(蘆洞明月), 이동백설(梨洞白雪)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10분 남짓 걸었을까 청호초등학교직전에 이정표(속초항1.8, 아바이마을 갯배 0.8/ 속초해수욕장0.7)가 세워져 있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랐다. 또 다른 해파랑길 표식이 그래도 된다고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실향의 아픔을 담은 벽화로 가득한 벽화마을을 빗겨나 버리는 우를 범해버렸다. 그런 것도 모른 채 10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청초호 물이 동해로 빠져나가는 기수역(汽水域)이 갈 길을 막는다. 이곳에는 '하나호 선장 유정충 상'이 세워져 있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인 유정충은 한국 전쟁 중 부모를 따라 월남했다. 성장하여 하나호 선장이 된 그는 제주 서남쪽 해상에서 조업 중 풍랑으로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모든 선원들을 퇴선 시킨 뒤 혼자 조타실에 남아 구조신호를 보내다 배와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사고 후 대한민국 최초의 전국 어민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국민훈장 목련장이 추서되었고, 보건사회부는 그를 의사자로 지정했다.

 

 

청초호 기수역에서 길이 막힌 탐방로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설악대교방향인데 이 구간은 속초사잇길의 네 번째 길인 아바이 마을길이기도 하다. 속초의 핫플레이스인 속초관광수산시장에서 눈요기를 하고 갯배로 청초호를 건넌 뒤, 신포마을해변에서 동해바다를 만끽하고, ‘아트플랫폼 갯배벽화마을에서는 피난민의 애환을 가슴에 담는 등 아바이 마을골목골목을 탐방하도록 짜여진 둘레길이다. 참고로 아바이할아버지를 뜻하는 함경도 사투리이다. 그러니 함경도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마을이 곧 아바이 마을이다. 피난민들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된 아바이마을은 속초의 역사와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다. 한국전쟁과 1.4 후퇴 때 남하한 국군을 따라 내려왔다가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피난민들이 청초호 해변에 움막집을 집고 아등바등 살며 상권을 만들어 오늘의 속초를 일구었기 때문이다. 속초시 인구 중 강원도 출신을 제외하면 70% 이상이 이북 5도민 사람들이라는 사실에서 아바이마을 사람들의 역할을 헤아릴 수 있다.

 

 

'설악대교' 교각 아래에는 컨테이너 박스를 이중으로 겹쳐 만든 '아트플랫폼 갯배'가 들어서 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실향민의 정착촌 '아바이 마을'에 조성한 문화공간으로 오대양 육대주를 부유하던 해양 컨테이너를 활용해 2016년 오픈했다. ‘아바이 마을주민들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데 매일 11시에서 18시까지 문을 연단다.

 

 

2층 전시실에는 장롱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지난 2010년 처음 시작한 장롱사진공모전은 당신의 추억이 속초의 역사입니다라는 주제로 2013년까지 진행한 사업이다. 장롱 속에서 잠자던 옛 사진들이 매년 100장 이상씩 출품됐고 뜻밖의 소중한 발견도 많았다고 한다. 전투식량 상자를 이어붙인 집 앞에서 책보를 들고 있는 학생들,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청호동 방파제에서 놀고 있는 아이, 설악산 관광호텔 앞에서 찍은 설악국민학교 동창회 사진까지, 장롱 속에 잠들어 있던 빛바랜 흑백사진들이 너나없이 50~60년 전 속초를 증언한다. 누군가의 앨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 흑백사진들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대의 추억이 묻어있다. 그것들에서 난 속초만의 풍속과 생활상, 거리의 변천을 찾아내 본다.

 

 

전망 좋은 창가에는 테이블도 놓아두었다. 창문 너머로 펼쳐지는 청초호(靑草湖) 기수역의 아름다운 풍경까지 함께 즐겨보라는 모양이다. 참고로 청초호는 사주(砂洲)로 둘러싸인 둘레 5의 석호이다. 하지만 어선이 드나들 수 있게 인위적으로 수로를 넓고 깊게 파놓아 담수호는 아니다. 지금은 속초항의 내항으로 쓰이는데, 500t급의 선박이 오갈 수 있단다.

 

 

탐방로는 이제 설악대교를 건넌다. 청초호의 새로운 물길(水路) 개설로 두 동강 난 아바이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이 다리는 아트플랫폼 갯배' 부근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다리품을 팔지 않고도 다리 위로 오를 수 있다.

 

 

설악대교의 아래에서 석호(潟湖)인 청초호와 동해바다가 서로 만난다. 그 왼편은 등대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바닷가. 즉 청호해변이다. 이 해변은 청호동 아바이마을 실향민들의 주요 생활터전이기도 하다. 가을동화 촬영지로 유명한 아바이 마을은 갯배를 타는 곳과도 연결되어 있어 내국인은 물론 많은 외국인이 방문하는 명소이다. 여름에는 주민이 운영하는 민간해수욕장으로도 활용되며, ’아바이 순대촌이 따로 형성돼 있어 맛 기행도 함께 즐길 수도 있다.

 

 

설악대교를 건너면 신포마을이 반긴다. ‘신포는 함경남도 동해안 중부에 있는 도시 이름이다. 신포 사람들이 피난을 와서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고 해서 마을 이름도 신포가 되었다. 그래선지 설악대교의 교각 아래에는 옛 속초항의 흑백사진과 함께 속초 사자놀이의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었다. 속초 사자놀이는 1950년대까지 북한에서 연희(演戲)되던 사자놀이가 넘어온 이주민속(移住民俗)의 하나로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연은 정월대보름 전날부터 다음날까지 마을공동체와 함께 했던 마당놀이와 동네돌기(길놀이)를 재현하는데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의미와 가가호호를 순회하며 놀이를 펼치는 연희적 요소가 잘 조화되어 있다.

 

 

선착장으로 들어서는데 가을동화의 촬영지임을 알리는 조형물이 눈에 띈다. 맞다. 신포마을은 TV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지로 여자 주인공 은서가 살았던 마을이다. 은서를 찾기 위해 갯배를 타고 들어가는 준서와 무심한 표정으로 갯배를 타고 나가는 은서가 스쳐지나가면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래선지 길가에는 가을동화와 관련된 상호들이 많이 보였다. 하나같이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를 파는 식당이나 카페들이다.

 

 

청초호는 갯배로 건넌다. 속초 핫플레이스인 중앙동과 청호동 아바이마을을 연결하는 줄배6.25전쟁 후 속초가 수복되면서 북한 땅 고성에서 남하한 조막손이라는 김씨 노인이 20명쯤 탈 수 있는 배를 만들어 배 삯을 받아 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주민들 또한 청초호를 빙 돌아 시내로 나가는 수고를 덜게 되었으니 감지덕지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 갯배는 마을 위로 설악대교가 놓인 지금까지도 운행되어 낭만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정취를 여행자에게 선사한다. 뱃삯으로 단돈 500원만 내면 뱃사공 노릇도 해볼 수 있다. 줄에 매달린 갈고리로 실제 뱃사공과 함께 배를 끌면서 건너가면 된다. 나름대로 추억과 운치가 동반된 여정을 만들 수 있으니 한번쯤 도전해 볼 일이다.

 

 

오늘도 구우(舊友)인 형우군이 함께 했다. ‘회 없는 바닷가 여행은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지론을 달고 사는 친구다. 거기다 이번에는 자기가 회를 살 차례라는 용띠 갑장(甲長)도 추가됐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속초관광수산시장이다. 중앙동 갯배선착장 근처에 위치하는데, 자연산을 고집하는 동명항보다는 가격이 저렴할 것 같아서이다. 그런 우리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수산시장의 지하에 들어서 있는 회센타는 규모도 컸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어종을 싼 값에 판매하고 있었다. 단 회를 떠 주는 것으로 끝. 야채나 초장 등의 사이드 메뉴는 추가로 돈을 내야만 한다. 아무튼 그렇게 준비된 회는 영금정 근처의 갯바위에서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즐겨가며 먹었다. 자연 풍광과 함께 맑은 공기를 음미하는 그 맛에 맛들여보지 못한 사람은 여행을 왜 한가함의 철학이라고 부른지를 깨닫지 못한다. 스스로 방랑자가 되어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활어회를 챙겨들고 해파랑길로 되돌아오니 금강대교가 손짓한다. 청초호와 동해바다가 만나는 또 다른 기수역에 놓은 다리이다. 해파랑길은 다리 건너에서 동해안 자전거길과 다시 만나 속초항으로 향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만에 속초항에 도착했다. 핸드폰에 찍힌 거리는 3.2. 생선회를 뜨는데 걸렸던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이것저것 둘러보느라 꽤 많은 시간을 허비했나 보다. 그만큼 구경거리가 많았다는 얘기도 될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속초항은 엄청나게 넓었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여객선은 물론이고 거대한 몸채를 자랑하는 크루즈 선박과 군함까지 정박되어 있다. 하긴 여객터미널과 국제여객터미널로도 모자라 국제크루즈터미널까지 들어서 있으니 이를 말이겠는가.

 

 

부두에는 몽골텐트가 길게 쳐져 있다. 각 텐트는 복성호, 아바이호, 대경호 등의 어선 이름을 상호로 내걸었다. 속초의 또 다른 명물이라는 오징어 난전이 아닐까 싶다. 난전(亂廛)이란 무등록 점포를 뜻하는데 이곳 속초항에 수협 허락을 받은 포장마차들이 영업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선주들이 직접 운영하는 이곳은 그날 잡아온 것들만 판다고 한다. 5월에 산 오징어 맏물이 들어오면 천막을 치고, 추석 지나 오징어가 끊기면 12월 말일까지 도루묵과 양미리를 구워 팔다가 천막을 걷는단다.

 

 

코로나19’ 때문에 할 일이 없어진 속초항 국제여객터미널을 지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영금정(靈琴亭)’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본디 저 자리에는 지금보다 높은 바위산이 있었다고 한다. 바위산의 모양이 정자처럼 보였고 또 파도가 이 바위산에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신령한 거문고소리 같다고 해서 신령할 영(’)거문고 금()’ 자를 넣어 영금정이라 불렀다. 그러나 일제 때 속초항을 개발하면서 이 바위산을 부시고 영금정 옆에 방파제를 만들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현재의 영금정은 정자(亭子)로 바뀌어 있다. 바위산의 꼭대기에 팔각정을 짓고 영금정(靈琴亭)’이란 현판을 달아놓았다. 2008년 동명항 경관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전망대 겸용의 정자란다.

 

 

영금정이라 부르게 된 또 다른 연유도 있다. 옛날 이곳에 사방이 절벽을 이룬 석산이 있었다. 위에는 각양각색의 괴석들이 정자 모양으로 둘러섰는데 암반이 평평해서 몇 사람이 앉아서 놀 수 있었다. 그 바위바닥에는 장사가 천마를 타고 달린 발자국이 있었고 말죽통 같은 괴석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징바위가 있었는데 이 괴상한 돌을 발길로 툭 차면 소리처럼 괴상한 소리가 나서 징바위라 불렀단다. 괴이한 것은 파도가 석산 벽에 부딪치면 신묘한 음곡이 들려 왔음으로 이 또한 신령한 거문고 소리와 같다 해서 영금정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한편 밤이면 선녀들이 남몰래 내려와 목욕을 하고 신묘한 음색의 곡조를 즐기면서 놀던 곳이라 하여 비선대(秘仙臺)’라고도 불렀단다.

 

 

건너편에는 속초 여행의 시작이자 전망 포인트라는 속초등대가 있다. ‘영금정 속초등대전망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동틀 무렵 저곳에서 바라보는 망망대해의 일출은 가히 환상적이라고 한다. 일출이 꼭 아니어도 좋다. 한편의 영화처럼 그려지는 아침바다의 어선들. 그리고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설악산이 바로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니 이 얼마나 감동적이겠는가. 하지만 아쉽게도 전망대로 올라갈 수는 없단다. 이 또한 코로나19’ 탓이다. 참고로 속초등대는 6.25 후 휴전선을 바로 앞에 둔 속초의 지정학적, 군사적, 경제적 이유로 항구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5768일 첫 불을 밝혔다. 이후 2006년에 등대해양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는데 옥외전시실과 홍보관, 옥외전망대 등을 설치했다. 목재사다리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등대 입구 마당에 우리나라 최동단 독도등대와 최서단에 있는 소청도등대, 최남단에 있는 마라도등대, 최북단에 있는 대진등대 등 4곳의 유인등대 소개와 함께 등대 전경이 담긴 대형 유리판과 조형물을 설치했다.

 

 

눈길을 돌리면 영금정과 방파제로 연결된 동명항이 있다. 동명항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어민들이 갓 잡아 온 싱싱한 자연산 활어를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활어시장 입구에는 상인들이 당당하게 자연산만 판다고 선언한 문구가 보인다. 자연산이 아닐 경우 10만원을 보상해준다는 현수막이 가게마다 나붙었다. 활어시장은 방파제와 이어져 있어 시원한 바다를 거닐며 모처럼의 여유를 맛 볼 수도 있다.

 

 

영금정(靈琴亭)’은 하나만이 아니다. 동해의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곳에 또 하나의 정자를 짓고 같은 이름의 이름표를 달았다. 정자까지는 돌다리를 놓아 거친 파도에도 끄떡없도록 했다. 동해바다의 숨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들어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해돋이정자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걸 보면 일출용으로 지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 조명시설까지 갖추었다니 저녁이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

 

 

영금정의 역사 안내판과 정자 안내판까지 꼼꼼히 살펴보고 난 뒤에야 길을 나섰다. 영금정의 풍경이 그만큼 아름다웠다는 증거일 것이다. 코로나로 진입이 막힌 등대전망대를 그냥 지나치자 이번에는 거문고 쉼터가 길손을 맞는다. 신비한 거문고 소리를 간직한 영금정(靈琴亭)을 표현하기 위한 조형물로 보이는데, 쉼터의 이름도 이 조형물의 생김새에서 따왔나 보다.

 

 

쉼터는 전망대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동해바다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을 만큼 예쁜 색으로 펼쳐진다. 다만 영랑동 해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백사장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를 막기 위해 삼발이로 쌓은 제방도 아름다운 풍경을 갉아먹는 방해물이 되어 버렸다.

 

 

탐방로는 이제 영랑해안길을 따른다.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길을 따라 상가가 형성되어 있는데, 하나 같이 실내포차란 간판을 달았다. 맞다. 속초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는 영랑해안길의 포장마차 거리가 바로 이곳이다. 늦은 밤에도 부담 없이 찾아갈 만한 동네라서 여행자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단다. 하지만 아바이 순대라는 간판이 눈에 띄지 않은 점은 아쉬웠다. 월남한 속초 분들에게 아바이 순대는 고향일 텐데도 말이다. 그들에게 돼지의 창자에 담긴 것은 양념만이 아니라 기억하고 싶은 이름들이다. 순대를 채우던 아바이와 순대를 써시던 오마니, 맴소(염소)와 새지(송아지)가 울던 초저녁 그늘. 백두산에는 호개(호랑이)가 뛰댕기고 메구락지(개구리)는 논에서 뛰댕기는 늦봄 어느 날들이 아른거리리라.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등대해변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아까 지나왔던 속초해변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이곳 또한 속초가 자랑하는 피서지라고 한다. 그래선지 물놀이 나온 피서객들로 상당히 붐비고 있었다.

 

 

바다를 끼고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면 빛바랜 정지 표지판이 보인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큰 도로를 건너면 영랑 호수공원이 나온다. 영금정을 출발한지 30분 만이다. 이제 해파랑길은 영랑호의 호반을 따라 한 바퀴 돌게 된다. 이 구간은 총 10개 코스로 구성된 속초 사잇길의 첫 번째 길인 영랑호길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중간 중간에 쉼터와 화장실도 잘 정비되어 있다. 운동시설도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천천히 즐기면서 걷기에 딱 좋은 코스라 하겠다. 그러려면 시간을 조절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말이다.

 

 

영랑호에 도착하니 그림 같은 호수가 하늘 반영과 함께 펼쳐진다. 거기다 배경으로 설악산까지 품었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하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아니다.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암릉들이 하나같이 구름 속에 갇혀버렸다.

 

 

영랑호는 한마디로 아름다운 호수이다. 영랑호라는 이름도 영랑이라는 화랑이 호수에 매료되어 오래 머무르며 풍류를 즐긴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호수에 매료되어 머물렀단 말인가! 그 길을 내가 걷게 된다 생각하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참고로 영랑호는 8둘레에 넓이가 36만평이나 되는 자연호수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주위가 30여 리인데 물가가 굽이쳐 돌아오고 암석이 기괴하다. 호수 동쪽 작은 봉우리가 절반쯤 호수 가운데로 들어갔는데 옛 정자터가 있으니 이것이 영랑 신선 무리가 놀며 구경하던 곳이다고 적고 있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뜻일 것이다.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영랑호에 대해 구슬을 감추어둔 듯 신비롭다고 표현한 바 있다.

 

 

탐방로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가정집 정원 느낌의 숲길이 나오는가 하면 아름드리 거목들이 도열한 곳도 지난다. 또 어떤 곳에서는 황토색 테이프로 밑동을 동여맨 가로수들이 늘어서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속초의료원이 나오고, 이어서 호반에 세워진 통천군 순국동지 충혼비(通川郡殉國同志忠魂碑)’가 눈에 들어온다. 공산 치하에서 생명을 걸고 싸우다 피 흘린 반공 전사자와 한국전쟁 당시 전몰용사 140여 명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1969년 박용학, 정주영 등 전국 통천 군민 150여 명의 의연금(義捐金)으로 세웠다는 이 탑에서 나는 남의 땅에다 터를 잡을 수밖에 없었던 실향의 아픔이 느껴졌다.

 

 

해병대 전우회관을 지나 소공원으로 들어서자 신라 화랑 영랑(永郎)과 용을 테마로 한 화강암 조각 작품이 세워져 있다. 영랑호라는 지명은 신라 사선가운데 하나라는 저 화랑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때 영랑과 술랑(述郎), 남랑(南郎), 안상(安詳) 등의 화랑이 금강산에서 수련한 뒤 무술대회에 나가기 위하여 고성군 삼일포에서 3일 동안 쉬다가 금성으로 가는 길에 영랑호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영랑은 호반의 풍치에 도취되어 무술대회에 나가는 것조차 잊고 계속해서 머물렀단다. 이때부터 호수의 이름도 영랑호라 부르게 되었다.

 

 

영랑호반에 들어선지 40분쯤 되었을까 영랑호의 명물인 범바위가 나타난다. 동국여지승람에서 표현했던 대로 큰 바위가 영랑호에 잠겨있는 모양새이다. 그 위엄이 당당하고 마치 범 형상으로 생겼다고 해서 범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졌단다.

 

 

이젠 직접 범바위에 올라가 볼 차례이다. 범을 닮은 바위일 따름인데 구태여 위까지 올라가볼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명색이 속초팔경의 하나인데 그만한 볼거리가 없겠는가. 그렇게 시작한 오름길은 모퉁이를 돌고 나서 시작된다. 그리고 긴 나무계단을 오르자 영랑정이라는 빨간색 예쁜 정자가 나타난다. 드넓은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원래 저곳은 한국전쟁 당시 속초지역 수복에 공이 많았던 제11사단장 김병휘(金炳徽)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금장대(金將臺)’가 있던 자리다. 세월이 흘러 6각으로 된 기단부만 남아 있던 것을 2005년에 복원해 놓은 것이 현재의 정자이다.

 

 

범바위의 표면은 동네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은 채 가운데에서 씨름 한판을 벌여도 될 만큼 드넓다. 밑은 낭떠러지이다 보니 바위에 엉거주춤 앉는 순간, 묘한 울렁거림까지 느껴진다. 울렁거림도 잠시 영랑호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자 이내 감탄이 터진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이번엔 설악산이 길게 펼쳐진다. 예로부터 영랑호를 찾는 시인묵객들이 거르지 않고 꼭 올랐다는 얘기가 허언이 아니라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라 하겠다.

 

 

범바위에서 내려와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돌아 호안으로 나간다. 이때 범바위의 웅장한 전모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범바위는 하나의 바위가 아니라 여러 개가 모인 바위군(岩群)이다. 이 거대한 몸뚱이를 일컫기에 바위라는 단어는 너무나 작다. 바위 꼭대기를 보려면 몇 걸음 뒤로 물러서 고개를 들어야 가능하다.

 

 

조금 더 걸으니 향토 시인 최명길(1940~2014)'화접사(꽃과 나비의 노래)'라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나는 나비가 되오리. 그대는 꽃이 되오시라. 내가 벼랑을 날아 그대에게 다가가오리...중략... 한 즈믄 해 지난 다음쯤에야 그대가 나비 되오시라. 나는 꽃이 되오리. 집사람을 향한 내 마음을 어찌도 이리 잘 표현했는지 모르겠다.

 

 

 

장전마을입구에도 영랑호의 유래와 관련된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아까 보았던 영랑이라는 화랑(花郞)과 용 외에도 신라 사선의 나머지 화랑인 술랑과 남랑, 안상을 포함시켜 조각했다. 계속해서 몇 걸음 더 걸으니 '화랑도 체험 관광지 및 실내 승마장' 입간판이 길가에 세워져 있다. 화랑도(花郞道)의 가치를 현대에 맞게 개발하여 보급하는 곳으로, 옛 화랑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마상무예와 말위에서 부리는 각종 곡예인 마상재’, 말을 타고 격구채로 공을 쳐서 상대방 문에 넣는 격구등의 공연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승마와 활쏘기, 봉술 대련, 말먹이 주기, 표창 던지기, 도인 체조 등 다양한 체험 활동이 가능하단다.

 

 

탐방로는 대부분 호숫가로 내놓은 도로를 따른다. 자전거길과 함께 도로의 가장자리에 따로 내놓았다. 이 가운데 초록색은 보행자 전용이다. 차량과 자전거보다 우선을 두었다는 느낌이다.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호수가 주는 잔잔함과 푸르른 자연환경이 시원하게 몰아치던 동해바다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시끄러운 것보단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여행객들에게 딱 좋은 코스라 하겠다.

 

 

도로변 숲속에는 버려진 주택들이 많이 보였다. 외국에서나 볼 법한 예쁜 집들인데 하나 같이 폐허로 변해있다. 20194월에 발생했던 산불 때 피해를 입었던 주택들이 아닐까 싶다.

 

 

조금 더 가자 호숫가에 보행자 데크를 놓아 여행자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서 영랑호를 느껴볼 수 있도록 했다.

 

 

데크로드의 끄트머리에 이르자 숲속에 숨어있던 공룡 한 마리가 고개를 내민다. 안내판은 영랑 호반에 산재해 있는 여러 형상의 바위들 가운데 하나라 적고. 보는 이에 따라서 공룡 또는 하마의 머리 형상으로 다가온다고 했다. 심지어는 고래의 머리로 보는 사람들도 있단다.

 

 

영랑호를 한 바퀴 돌아 나오자 기수역에 놓인 영랑교가 고생했다며 반긴다. 아까 영랑 호수공원으로 들어서면서 보았던 다리이다. 저 다리, 아니 저 다리보다 조금 더 아래에 있는 사진교를 건넜더라면 트레킹이 종료되는 장사항에 곧바로 도착했을 텐데도 해파랑길은 영랑호반을 따라 7.5나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1시간 50분이나 투자하면서 말이다.

 

 

영랑교와 연결된 4차선 도로(중앙로)를 건너면 장사 체험마을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대형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45코스의 날머리인 장사항에 이르렀다는 얘기일 것이다. ‘장사(사진)’ 마을은 본래 육지가 아닌 바다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모래가 쌓여서 영랑호는 호수로 변했고, 사진리에는 마을이 형성되었다. 모래톱에 형성된 마을이라 '모래기'라고 불렸고, 이것을 한자로 '사야지(沙也只)'라고 표기하면서 사진리(沙津里)가 되었다.

 

 

그래선지 바닷가는 결이 고운 모래가 두텁게 쌓여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곳은 장사항으로 90m에 이르는 방파제가 볼거리로 꼽히는 어항이다. 대형 어선보다는 30여척의 고깃배가 들고 나며 전형적인 어촌의 풍경을 연출하는 게 꽤 볼 만하다. 이곳에서는 매년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에 오징어 맨손잡기 축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여행자들은 이때 오징어 맨손잡기 및 먹물 글씨 쓰기와 같은 오징어를 테마로 한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해조류 표본 만들기, 소형 통발을 이용한 해양생물 채집 등도 가능하다니 가족나들이 삼아 한번쯤 도전해 볼 일이다.

 

 

 

트레킹 날머리는 장사항(속초시 장사동 548-5)

해수욕장과 마을 사이에는 바다숲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배 모양 쉼터와 파고라, 벤치 등으로 잘 꾸며져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오징어 조형물이 가장 눈길을 끈다. 매년 여름 열리는 오징어 맨손잡기 행사를 형상화한 것이란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총 14.6를 걸었다. 속초해변에서부터 시작했는데도 원래 길이인 16.9에 거의 육박하는 거리를 3시간 55분에 걸쳐 걸었다. 들락거리게 만드는 볼거리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해파랑길 45코스의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장사항 입구에 위치한 장사동 어업인회관을 지나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해파랑길 44코스

 

여행일 : ‘20. 7. 4()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과 손양면, 강현면 일원

여행코스 : 수산항 입구(5.7km)오산리 선사유적지낙산 해변(0.5km)낙산사 입구(1.9km)낙산사설악해변(4.2km)물치항속초 해맞이공원(소요시간 : 12.3, 실제로는 16.44/ 4시간 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원래의 거리는 12.3이나 낙산사 경내를 둘러보는 거리가 빠져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고 국가가 지정한 명승(名勝)이자 천년고찰인 낙산사를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이럴 경우 2정도의 거리가 더 늘어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아무튼 이 구간은 아름다운 경관은 물론이고 선현의 숨결까지 함께 느껴볼 수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낙산해변물치항같은 작은 포구들, 거기다 오산리 선사유적과 낙산사 등의 역사유적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코스를 약간 변경해 걸어보았다. 43코스를 답사하면서 연장했던 구간(1)을 뺀 대신에 대포항까지 1조금 못되는 거리를 추가로 더 걸었다. 중간에 낙산사 경내를 둘러봤음은 물론이다.

 

트레킹의 들머리는 손양 문화마을 정류장(양양군 손양면 도화리 257)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하조대 IC에서 내려와 해안도로를 타고 양양방면으로 올라가면 달리다보면 수산항입구에 이어 손양 문화마을입구가 나온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버스정류장 곁에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1쯤 더 올라간 지점에 위치한 오산리 선사유적지앞에서 시작했다. 지난 43코스 답사 때 이곳까지 걸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도로 건너, 그러니까 유적지의 반대편에는 쏠비치리조트가 위치하고 있다.

 

 

 

트레킹을 나서기 전에 먼저 오산리 선사유적(鰲山里先史遺蹟, 사적 제394)‘을 둘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박물관 문이 닫혀있기에 외부에 복원해 놓은 신석기인의 움집(竪穴住居)‘만 살펴봤다. 둥글게 생긴 움집의 내부 바닥은 진흙을 깔아 다지고 그 한가운데에 화덕()을 배치한 모양새이다. 오산리 유적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이런 집자리들이 14기나 별견되었다고 한다.

 

 

4차선 도로(선사유적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내놓은 국토종주 동해안자전거길을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번 44코스도 역시 자전거길의 표식인 파란색 선을 따른다고 보면 되겠다.

 

 

해돋는 마을이란 부제가 달린 오산리마을표지석 곁에 세워진 버스정류장이 눈길을 끈다. 양양을 대표하는 연어와 송이버섯 조형물을 덧댄 디자인에서 설계한 이의 진한 지역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동명천을 가로지르는 오산교를 건너자 송전해변으로 들어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나뉜다. 오산해변인데 우리 부부는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지난번 43코스 답사 때 곁눈질로나마 이미 구경을 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이른 강원대 동해수련원‘. 도로 맞은편에는 바다캠핑장이 널따랗게 자리하고 있다. 도로(선사유적로) 양옆으로 넓게 들어선 푸르른 솔숲을 활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송전리 해변솔밭이라 불리는 이 숲속에는 별도의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오뉴월 땡볕이 부담스러울 경우 이 산책로를 따라 걸어도 된다.

 

 

오산교를 지나자 도로가애 해당화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개화시기가 조금 지났지만 게으른 놈들은 이제야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다.

 

 

마을 주변에 갈풀이 많이 자생한다고 해서 갈벌이라 불린다는 가평리(柯坪里)‘ 마을표지석을 지나자 연어와 송이버섯이 보초를 서고 있는 낙산대교가 길손을 맞는다. 양양의 풍경을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으로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만이다. ! 남대천에 가까워지면서 백두대간이 조망되기 시작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진행방향 저 멀리서 백두대간의 준봉들이 나 여기 있다며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설악산 대청봉이 불쑥 치솟았는가 하면. 대청봉 우측 푹 꺼진 지점에서는 울산바위와 달마봉이 자신의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자랑하고 있다.

 

 

낙산대교는 그 길이가 470m나 된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남대천(南大川)‘의 수량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양양의 대표 하천인 남대천은 갈대가 무성하고 백로가 이따금씩 쉬어 가는 여유로움이 찾는 이의 발목을 잡는 곳이다. 봄에는 황어, 7~8월엔 은어, 10~11월엔 연어 떼가 돌아오는 어머니의 강이기도 하다. 참고로 남대천은 양양군의 팥밭무기(현북면) 인근 오대산(부연동 계곡)과 두로봉 등지에서 발원하여 삼산리, 법수치리, 어성전리에서 큰 물줄기를 이룬 후 양양읍 남쪽을 지나 동해안으로 흘러드는 강원도 최대의 강이다. 지류로는 점봉산에서 발원한 오색천과 구룡령에서 발원한 서림천(西林川, 일명 갈천)이 있다.

 

 

낙산대교를 건넌 탐방로는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낙산해변으로 향한다. 왼편은 읍내로 들어가는 길이니 참조한다. 이어서 남대천을 오른편에 끼고 10분 조금 못되게 걷자 낙산해수욕장이 드넓게 펼쳐진다. 모래가 깨끗하고 수질이 맑은데다 접근성까지 뛰어나 여름철이며 피서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부산 해운대해수욕장과 강릉 경포대해수욕장과 함께 동해안의 3대 해수욕장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낙산해변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1를 훌쩍 넘기는 백사장이 기다랗게 펼쳐져 있다. 해변의 끄트머리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리는데 모래사장과 송림 사이에 데크로드가 놓여있으니 이를 따르면 된다.

 

 

드넓은 모래사장이 텅 비어있기에 의아했는데 바다로 조금 더 나가자 물놀이를 하고 있는 피서객들이 눈에 들어온다. 솔숲에 가까운 곳과 바다 근처의 모래사장 경사도(傾斜度)가 서로 다르다는 증거일 것이다. 바다 쪽의 경사가 훨씬 더 가팔랐음은 물론이고 말이다. 참고로 낙산해수욕장은 여름에는 여름대로 활기참이 가득하고 가을이나 겨울에는 아늑함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깨끗한 모래와 수질 덕분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데, 수상레저를 즐기려는 젊은 층이 특히 많다고 한다. 덕분에 바나나보트나 수상오토바이 등을 즐기는 젊은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 부부는 해안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내놓은 탐방로를 따르기로 했다. 모래사장으로 연결되는 진입로 입구에 조류인플루엔자(AI) 전파가능성이 높은 철새도래지라서 출입을 통제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현수막이 꼭 아니더라도 도로가 더 나을 것 같다. ’러브 의자의자 그네같은 사진 찍기 딱 좋은 조형물들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중간쯤에서 해변으로 나가 이번에는 데크로드를 따른다. 이때 만나게 되는 게 해변캠핑장인데, 근처 소공원에는 강아지와 함께 독서하는 인물상이 만들어져 있었다. 사진첩에 담아둘만한 멋진 기념사진 하나쯤 건지기에 충분한 포토존이다. 이밖에도 해변에는 부부가 서로의 등을 밀어주고 있는 형상의 친한 사이와 공연장면을 나타낸 '환영(幻影)-Concert', 빗자루를 타고 행복의 여행을 떠나는 '달 따러 갑니다', ’나의 오벨리스크등 수많은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배후단지와 모래사장 사이에는 이곳 낙산해수욕장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날개를 활짝 편 갈매기를 형상화했다는데 낙산해변과의 연관성에 대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었다.

 

 

1998년에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강원도의 힘'이 촬영되었던 장소임을 알리는 표지석도 세워져 있었다. 옛 연인이었던 주인공들이 각각 강원도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낯설은' 작품이라는 평을 들었다. 51회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정식으로 초청되었는가 하면, 19회 청룡영화상에서는 감독상과 각본상까지 수상했다. 하지만 예술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그저 일탈의 영화로만 보였을 따름. 영화를 보는 내내 불륜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감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추측은 사실로 드러나 버렸다. 그 이후 나는 그가 제작한 영화는 일절 외면해오고 있다.

 

 

해변에 설치된 수많은 조형물 가운데 오줌싸개 소년동상이 가장 눈길을 끌지 않았나 싶다. 간밤에 이부자리에 오줌을 싼 아이가 부모에게 혼이 난 뒤 키를 뒤집어쓰고 울면서 이웃집에 소금을 얻으러 가는 장면과, 그 뒤에서 어린 동생을 업고 이를 웃으며 쳐다보는 누이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그 해학적인 표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데,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얼굴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 게 아닌가. 누군가의 장난이겠지만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으로 인한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해수욕장 주변을 달리는 꽃마차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동물보호단체에서야 동물학대에 노동력 착취까지 덧붙이지만 저만한 관광 상품이 또 어디 있겠는가. 또한 말을 반려동물처럼 모셔놓고 기를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낙산해수욕장이 끝나는 곳에서 해파랑길은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오른편에 보이는 언덕으로 오른다. 낙산사를 둘러보기 위해서인데, 후문으로 들어갔다 정문으로 빠져나오는 코스가 낙산사 투어의 가장 짧은 동선(動線)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설악의 끝자락이 동해와 만나는 지점으로 놓인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천년고찰 낙산사(洛山寺)’가 나온다. 신라 문무왕 11(671)에 의상(義湘)이 창건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의상은 파랑새로 변장한 관음보살의 인도에 따라 바닷가 굴에 들어가 정진한 결과 바다의 용왕으로부터 수정염주와 불상 및 붉은 연꽃을 얻어 대나무가 자라는 곳에 절간을 세웠다. 그래서 낙산사는 관음도량이고, 그것도 해수관음도량이다. ‘낙산(洛山)’이라는 이름도 관음보살이 거주하고 있는 인도의 보타낙가(補陀落伽, Potalaka) 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 낙산사도 화마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통일신라를 비롯해 여러 번 불에 탔다. 2005년에는 강풍을 타고 번진 산불로 인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후 문화재청의 도움으로 사찰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주변 숲은 아직도 회복 중에 있다.

 

 

낙산사로 올라가다 뒤돌아본 낙산해수욕장 풍경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모래사장 오른편에는 같은 길이의 고층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그만큼 찾는 이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매표소를 거쳐 경내로 들어서자 낙산사 길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한낱 낙산사에 놓인 갈래 길들을 소개하는 지도에 불과한데도 선()을 추구하는 절간답게 길에서 길을 묻다라는 부제를 달았다. 인간은 살아 있는 날까지 알 수 없는 길을 따라 길 위를 걷는다. 이런 이치를 깨달은 옛 선인들은 우리에게 삼간(三間), 즉 공간(空間)과 시간(時間), 인간(人間)과 친하라고 권했다. 또한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고도 했다. 끊임없이 사색하고 명상하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 오늘만은 나도 구도자(求道者)의 자세로 경내를 돌아보자. ‘해를 맞이하는 길소원이 이루어지는 길을 이용해 의상대홍련암을 먼저 둘러본다. 이어서 근심이 풀리는 길의 끄트머리에서 해우소를 들른 다음, 이번에는 설레임이 있는 길을 따라 해수관음상으로 간다. 그리곤 꿈이 이루어지는 길을 통해 원통보전으로 가면 낙산사 방문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아니 정문이랄 수 있는 홍예문도 만나봐야겠다.

 

 

절의 창건자인 의상스님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의상기념관과 다래헌(차와 기념품 판매)을 지나자 일출의 명소라는 의상대(義湘臺)‘가 나온다. 의상이 수도하던 절벽 위에 지은 정자로 관동팔경의 하나이며 동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을 연출하는 비경이기도 하다. 의상대를 호위하듯 절벽 끝에 아찔하게 서 있는 소나무. 관음송(觀音松)그림이고, 의상이 좌선했을 대에서 의상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바닷가 해안절벽도 한 컷의 사진으로 충분하다. 특히 파도소리 청량한 절벽을 끼고 홍련암까지 이어지는 벼랑길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의상대의 맞은편 바위절벽에는 홍련암(紅蓮庵, 강원도 문화재자료 36)‘이 둥지를 틀었다. 200545, 하필이면 식목일에 일어난 엄청난 화마까지도 범접을 못했던 신비의 암자이다. 그게 이유는 아니겠지만 홍련암은 우리 국민이 가장 많이 찾는 비원과 염원의 장소 중 하나다. 불교 신도들은 '기도성지' '관음성지'라고 부르는데 불교도가 꼭 아니더라도 많은 관광객이 방문한다. '기도발이 센 곳이라는 소문을 듣고 소원을 빌러 오는 사람들이다. 홍련암의 또 다른 특징은 절경이라는 것이다. 동해 바닷가 석굴 위, 독특하고 아름다운 해안 경관 속에 자리 잡았다. 이 암자의 법당 밑에서는 바닷물이 출렁이며 쉴 새 없이 석굴(觀音窟) 안을 드나든다. 참고로 의상대와 홍련암 일대는 따로 명승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변 해안이 독특하고 경관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의상대사의 전설이 깃든 곳이라서가 아닐까 싶다.

 

 

해수관음상을 만나러 가는 길, 연꽃 가득한 연못(관음지)을 지나자 보타전(普陀殿)이 중생을 맞는다. 원통보전·해수관음상과 더불어 낙산사가 우리나라의 대표적 관음성지임을 상징하는 불전이다. 안에는 천수(千手(십일면(十一面여의륜(如意輪마두(馬頭준제(準提불공견색(不空羂索)7관음과 32응신(應身), 그리고 1500관음상을 봉안했다. 1993년에 지은 이 전각은 2005년의 산불 때도 무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산자락을 돌아 위로 오르자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이 손짓한다. 높이 16미터 둘레 3미터의 거대 불상으로 불상조각가 권정학씨가 1971년 시작해 66개월이 걸려 완성했다고 한다. 동양 최대의 크기라는 해수관음상은 어느 불상보다도 예쁘고 인자하기까지 하다. 왼손에 감로수병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천의(天衣) 자락을 살짝 잡고 있으며, 미간에는 백호(白毫)를 박아 온누리에 퍼지는 자비의 광명을 상징하고 있다. ! 사진은 생략했지만 해수관음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해수관음 공중사리탑(海水觀音空中舍利塔, 보물 제1723)‘이라는 사리탑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비문에 따르면 1683년 숙종 9년에 홍련암 불상에 금칠(개금)을 다시 할 때 주변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하더니 공중에서 오색찬란한 사리들이 쏟아져 1692년 석겸스님 등이 큰 뜻을 세우고자 조성했단다.

 

 

맨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낙산사의 금당(金堂)원통보전(圓通寶殿)‘이다. 서기 671년 의상이 홍련암 관음굴에서 21일 기도 끝에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여의주, 수정염주와 함께 사찰의 건립위치를 전해 받은 곳에 원통보전을 세웠다. 법당의 안에는 보물 제1362호인 건칠관음보살좌상을 모셨다. 고려 후반 전통 양식을 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지금까지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원통보전 앞에는 칠층석탑(보물 제499)이 있다. 이 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1467)에 이르러 7층으로 높였다. 부분적으로 손상됐으나 탑 꼭대기에 있는 쇠붙이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으며, 기단부에서 투박한 겹연꽃 무늬를 볼 수 있다. !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도 낙산사의 또 다른 명물이다. 기와를 쌓고 다진 흙 사이사이에 동그랗게 다듬은 화강석을 별모양으로 끼워 넣어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정감이 느껴진다. 담이라는 본래의 실용적 기능에 이처럼 정감을 덧붙여놓은 안목과 소박한 정서로부터 받는 감동은 낙산사의 어떤 문화재가 주는 감동보다도 깊다.

 

 

홍예문을 나서기 바로 직전에 만나게 되는 낙산(洛山) 배 시조목(始祖木)’도 눈여겨볼 만하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재래종 황실배가 낙산사 주변에서 재배됐다고 한다. 이에 배 품종의 하나인 장십랑을 1915년 주지스님이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낙산배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단다. ! 원통보전을 빠져나오는 길에 동종도 볼 수 있었다. 2005년 산불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 복원한 것이란다. 낙산사 안 의상기념관에는 당시 화재에 녹아내리다 남은 동종의 일부가 전시돼 있단다.

 

 

몇 걸음 더 걷자 홍예문((虹霓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이 세속으로 돌아가는 중생에게 이별을 고한다. 무지개문인 홍예문은 세조 때 인근의 26개 고을로부터 장대석(긴네모꼴 돌) 하나씩을 기증받아 지었다고 한다. 장대석이 2중으로 문의 아치를 만들고 담과 그 사이를 막돌로 채워 넣었다. 위의 누각(樓閣)1963년에 세운 것으로 2005년 산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2007년 복원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 홍예문은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주차장에서 올라온 해파랑길이 홍예문 앞을 지나 후진항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몰랐던 우리 부부는 역방향인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주차장을 향해 잠시 걷자 탐방로가 도로를 벗어나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곳에서라도 계속해서 도로를 따랐으면 좋았을 것을 우리 부부는 그러지를 못했다. 만일 그랬더라면 인월요(印月堯, 옛 낙산유스호텔)과 일주문을 거쳐 7번 국도로 내려섰을 텐데도 말이다. 아무튼 우린 관음성지 낙산사라는 명찰을 단 일주문을 거쳐 대형주차장으로 내려섰고, ‘전진1마을 표지석 앞에서 ‘7번 국도(동해대로)를 만난 다음 북진했다. 그러다가 만난 게 낙산사의 일주문(一柱門, 五峰山 洛山寺), 가까운 코스를 놓아두고 빙 에둘러서 돌아온 셈이 되어버렸다. 낙산해수욕장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10분이 걸렸다.

 

 

해파랑길을 놓친 우리 부부는 7번 국도의 가장자리를 따라 난 동해안종주 자전거길을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민박요금 예고 시범마을이라는 전진 2로 들어선다. 참고로 전진리(前津里)는 오봉산 낙산사를 중심으로 하여 남쪽 마을을 앞나루, 북쪽 마을을 뒷나루로 불러오다가 두 마을이 통합되면서 전진리가 되었다.

 

 

뒷나루마을 앞은 설악해변이다. 길이 600m에 폭이 80m인 백사장을 품고 있는데, 수심이 얕은데다 낙산사라는 명승을 가까이 두고 있어 가족동반 피서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해수욕장 뒤편에 늘어선 민박집들은 침실에서도 일출을 볼 수 있단다.

 

 

설악해변이 다 끝나간다 싶으면 곧이어 '후진항이 나온다. 입구에 세워진 '비치 마켓 후진항'이라고 적힌 조형물이 눈길을 끌지만 항구로 들어가 보는 것까지는 생략하기로 한다. 후진항의 볼거리인 비치 마켓이 열리는 날(매월 둘째 주말)에 맞추지 못했으니 일부러 들어가 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후진항의 모퉁이를 돌아서면 정암해변이다. 물놀이가 금지된 정암해변에는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만이 해변을 지키고 있다. 이 구간은 도로의 가장자리가 아닌 바닷가를 따라 별도의 탐방로(자전거길)가 조성되어 있다. 덕분에 가없이 뻗어나간 망망대해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다. 커다란 바다는 그의 모든 파도를 가지고 바닷가로 몰려온다. 커다란 분노를 일으키듯 몸집을 키워가며 모래밭을 향해 몰려온다. 하지만 모래밭에서 하얀 거품으로 사라질 때는 허무하기까지 하다.

 

 

군 초소 위에 새롭게 들어선 전망대에라도 오를라치면 동해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수평선이 좌우로 길게 완만한 곡선 모양으로 뻗어있다. 또한 산책로 주변에 만들어놓은 쉼터용 조형물들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 가운데서도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누워서 휴식할 수 있는 의자가 유독 시선을 끌었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지는 바닷가가 왠지 낯설다. 강원도 땅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눈에 들어오는 바닷가마다 해안절벽이 아니면 모래사장 일색이었는데, 이곳은 유독 자갈과 돌로 이뤄진 것이다. 쌍천과 물치천 등 동해바다로 유입되는 하천의 돌들이 바다로 흘러갔다 다시 조류를 타고 해변에 쌓이면서 동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지자체인 양양군에서 이를 놓쳤을 리가 없다. 몽돌 및 몽돌에 부딪치는 독특한 파도소리에다 예술적 감성을 더해 몽돌 소리길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정암해변의 끝은 물치천(沕淄川)’이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둔전리에 이르러 향산폭포(香山瀑布)를 이루고 다시 석교리를 지나서 물치 남쪽에서 동해로 흘러드는 길이 14.74의 하천이다. 참고로 지명인 물치()’'물에 잠긴다', ‘()’'마을'이라는 뜻으로, 송시열(宋時烈)이 이곳을 지나다 물에 잠긴 이 마을에서 길이 막혔다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세월을 낚는 것은 강태공만이 아닌가 보다. 소꿉장난에 정신이 없는 저 모녀를 보면 말이다. 그 정겨운 풍경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도보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로움이 아닐까 싶다. 도보여행의 장점은 언제든 원할 때 출발했다가 원하는 곳에서 멈출 수 있고, 눈길을 유혹하는 모든 것을 바라보거나 구경할 수 있으며, 원할 땐 언제든 멈춰 서 관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치항 입구에도 특이한 외형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바다·축제·자연·일출의 하모니를 콘셉트로 삼아 동해안 일출의 감동을 극대화하는 시각적 메타포(metaphor)로 디자인했다는데 내 눈에는 그저 난해한 조형물로만 보일 따름이다. 설악해변에서 이곳까지는 45분이 조금 더 걸렸다. ! 물치교(沕淄橋)를 건너는 도중 설악산의 웅장한 자태를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높이 1,708m로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높은 산이다. 음력 8월 한가위에 덮이기 시작하는 눈이 하지에 이르러야 녹는다 하여 설악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작은 어선 몇 척이 정박되어 있을 뿐인 물치항은 양양을 상징하는 송이버섯 모양의 빨갛고 하얀 등대가 특징이다. 더욱이 이게 수평선과 하나를 이루면 아무렇게나 카메라 셔터를 눌러도 예쁜 그림이 나온다.

 

 

한적하기 짝이 없는 포구에 비해 횟집상가는 큼지막했다. 아니 웬만한 항구들보다도 훨씬 더 컸다. 하긴 해마다 초겨울이 되면 도루묵축제까지 열린다는데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호기심에 끌려 들어가 본 상가는 요즘 잘 잡힌다는 오징어 한 마리를 놓고 만원을 부르고 있었다. 해삼도 마리 당 만원이란다. 요즘 관광지에서의 바가지 물가가 뉴스에 자주 오르던데 이곳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물치항을 벗어난 탐방로는 해안공원인 황금 연어공원으로 들어선다. 길이 6.4m의 노란색 연어가 주인인 황금연어공원은 양양을 대표하는 어종인 연어를 테마로 하고 있는 공원이다. 여느 공원처럼 그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연어를 상징으로 만들어져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이곳만의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정자와 벤치도 만들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멋들어진 정자에 앉아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즐기노라면 세월 가는 줄도 까맣게 잊을 것 같다. 참고로 양양 남대천에서 태어난 연어는 넓디넓은 망망대해로 나가 성장한 다음 산란철이 되면 자신의 고향인 남대천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후대를 위해 산란한 뒤 장엄한 죽음을 맞는 회귀성 어류이다.

 

 

공원에는 연어 조형물 외에도 멋진 조망과 짜릿한 스릴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스카이워크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바다를 향해 길게 고개를 내민 데크의 끝부분에는 강화유리를 깔아 스릴을 만끽할 수 있도록 했다. 다른 스카이워크처럼 규모는 크지 않지만 스릴을 느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이때 좌우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화는 덤이라 하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 또한 일품이라고 한다.

 

 

황금연어공원과 맞닿은 쌍천(雙川)’은 양양군과 속초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쌍천은 길이 12.6의 지방하천이다. 설악동 대청봉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다 동으로 우회한 후 대포동에서 동해로 유입된다. 상류에서 흘러가던 물줄기가 하류인 물치 부근에서 두 가닥으로 나누어져 흐르기 때문에 두 가닥의 하천이라는 의미로 쌍천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쌍천교다리를 건너자 국제 관광엑스포기간에 맞추어 개방했다는 해맞이 공원이 길손을 반긴다. 설악산과 동해바다에 대한 조망 외에도 해돋이까지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라서 해맞이공원이란 이름이 붙었단다. 공원은 처음 보는 순간 깔끔하게 조성된 공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바다 바로 앞에 자리한 것, 그리고 초록과 돌들이 이어진 구성 등은 누구라도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공원은 해맞이광장과 연인의 길, 행복의 길, 사랑의 길 등 다양한 테마로 꾸며져 있으며, 바다를 주제로 한 여러 조각 작품들과 함께 설악산 관문 상징조형물, 조명분수대 등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갖가지 시설이 들어서 있다. 또한 해변 쪽에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도록 여러 개의 벤치를 놓아두었다. 벤치에 앉은 연인들아 서로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얼마나 멋진 풍경이겠는가. 거기다 떠오르는 해라도 함께 해준다면 이보다 더 즐거운 추억이 어디 있겠는가.

 

 

 

! 이곳 해맞이공원이 해파랑길 44코스의 종점이라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공영주차장의 한켠에 설치되어 있다. 한편 옛 이름이 내물치(內勿淄)’이었다는 이곳에서는 잠수함관광도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날머리를 대포항로 변경한 탓에 탑승해보지는 못했다. 동해바다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였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잠수함 이름은 포세이돈의 자식 이름을 딴 트리토네 마린(Tritone marine)’. 트리토네는 반인반어의 모습으로 바다가 잔잔할 때 물위로 나와 인어의 모습으로 소라 고동을 분다고 한다.

 

 

 

트레킹 날머리는 대포항 주차장

해파랑길 44코스의 날머리는 본래 해맞이공원이지만 우리 부부는 대포항 주차장까지 연장해서 걸었다. ‘7번 국도의 해안 쪽 가장자리에 내놓은 자전거길을 따라 1조금 못되게 걸으면 된다. 오늘은 총 16.44를 걸었다. 44코스의 원래 길이는 12.3이지만 낙산사와 오산리 선사유적지를 둘러보느라 4정도를 더 걸었던 모양이다. 소요시간은 4시간 5,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겠다며 꼼꼼히 살폈던 점을 감안하면 나름대로 빨리 걸었던 셈이다.

해파랑길 36코스

 

여행일 : ‘20. 6. 13()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일원

여행코스 : 정동진역(1.5)183고지(2.8)당집(4.6)페러글라이딩 활공장(0.5)안인해변(소요시간 : 9.4/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해파랑길 36코스는 강릉바우길 8구간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안보체험 등산로를 겸한다. 먼저 만든 강릉 바우길에 숟가락 하나 더 얹듯이 해파랑길과 안보체험 등산로를 포함시켰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만큼 의미 있는 구간이라는 얘기도 될 것이다. 아무튼 이 구간은 바닷길을 걷는다는 해파랑길의 취지와는 상반된다. 해발이 400m에도 못 미친다고는 하지만 구간 전체가 산길을 걷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길은 해파랑길 50개 코스 중 바다를 가장 시원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길로 알려져 있다. 바다 바로 옆에 서있을 때보다 산 위의 산책로를 걸을 때 파도 소리가 더 가깝고 크게 들린다는 것이다. 그저 느낌일 따름이지만 나 또한 그런 분위기에 빠져볼 수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신발이 바다에 빠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정동진역 앞 괘방산 입구‘(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296-1)

동해고속도로(삼척-속초) 강릉 IC에서 내려와 ’35번 국도’7번 국도를 번갈아 타며 삼척방면으로 내려오다. 모전삼거리(강릉시 강동면 모전리)에서 율곡로로 갈아타고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해돋이의 명소로 소문난 정동진이 나온다. 정동진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괘방산 등산로 입구가 해파랑길 36코스의 들머리이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도 등산로 입구에 만들어져 있다.

 

 

 

트레킹을 나서기 전에 정동진역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지난번 35구간 탐방 때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들러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1962년에 간이역으로 세워진 정동진역은 전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기차역으로 기네스북에까지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곳을 세상에 알린 것은 한편의 TV드라마였다. 1995SBS-TV에서 광복 50주년 특별기획으로 방영했던 모래시계의 주 촬영지가 바로 이곳 정동진이었기 때문이다. 이곳 정동진역의 소나무는 혜린이 형사에게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드라마를 보려는 직장인들이 퇴근하자마자 귀가한다고 해서 귀가시계라는 별칭까지 붙여졌던 이 드라마는 시청률이 무려 64.5%를 기록했었다. 이는 1996년 방영된 KBS2'첫사랑(65.8%)1991MBC'사랑이 뭐길래(64.9%)에 이어 역대 시청률 3위에 아직까지 랭크되어 있다. 4위는 1999MBC '허준(63.7%)이다. 참고로 정동진은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동서남북 방위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동진은 위도 37°41'29"로 광화문의 37°34'08"보다 약간 위쪽에 위치한다. 실제 광화문 정동 쪽은 동해시 어달동 대진 마을 부근이 된단다.

 

 

별도의 입장권을 구입하지 않고도 역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오래 간직할만한 추억거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정동진 시비'와 몇 점의 조각 작품들이 눈에 띌 따름이다. ‘고현정 소나무'에 집중하는 이유이다. 선로 쪽으로 휘어져 있는 저 소나무에서 고현정이 간이역에서 체포되는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한다. 당시 폐역이 검토되던 역이 모래시계에 한 번 나온 뒤로 전국적인 관광 명소로 탈바꿈했단다.

 

 

괘방산 입구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시작한다. 아니 입구에 세워놓은 3개의 안내판들부터 살펴보고 길을 나서기로 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해파랑길 안내판‘. 35코스(옥계시장정동진역)의 종점이자 36코스(정동진역안인항)의 시점임을 알려주고 있다. 가운데는 강릉 바우길안내판이다. 8구간(안인항정동진역)의 종점이자 9구간(정동진역옥계시장)의 시점이란다. 해파랑길 36코스가 바우길 8구간과 일치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저 진행방향만 다르다고나 할까? 맨 왼쪽은 안보체험 등산로안내판이 주인이다. 요것도 중간(당집)에 세 갈래로 나뉘기는 하지만 안인항으로 연결되기는 매한가지이다. 설명이 조금 너절해졌지만 해파랑길 36코스는 한마디로 한 지붕 세 가족인 셈이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그렇다고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다. 10분이 채 되지 않아 능선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왔다갔다 갈 지()‘자로 길을 냄으로써 경사까지 많이 죽여 놓았다.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능선을 탄다. 소나무들로 가득한 능선이다. 하지만 이곳의 소나무들은 그리 큰 편이 아니다. 모진 해풍에 시달린 탓인지 키가 작고 몸통은 말랐다. 아니 자갈밭을 연상시키는 거친 토양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이곳은 햇볕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조망을 허용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날에는 결코 반갑지 않은 구간이라 하겠다.

 

 

’183고지에 다와 갈 무렵 걷기에 딱 좋던 산길이 갑자기 가파르게 변한다. 그것도 밧줄 난간을 매어놓아야 했을 정도로 많이 가파르다. 아직도 해발이 200m를 넘기지 못했건만 명색이 산이다 보니 산다운 모양새라도 갖추고 싶었던 모양이다.

 

 

트레킹을 시작하지 28, ’183고지에 올라선다. 통나무 의자 두어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고 있는 이곳에는 이정표가 두 개나 세워져 있다. 하나는 바우길 이정표(안인항7.9/ 정동진1.5), 다른 하나는 ’183고지안보 7지점이라는 이름표를 동시에 달고 있는 안보체험 등산로용 이정표(삼우봉 5.0/ 정동진 1.3)이다. 해파랑길은 두 이정표에 표식만 덧붙이며 숟가락 하나를 더 얹었다. 참고로 해파랑길 36코스는 안보체험 등산로이기도 하다. 1996918일 밤, 북한 무장공비 26명이 안인진 포구 남쪽 1.5km 지점으로 침투했다. 불행 중 다행이도 공비들이 타고 온 잠수정의 스크루가 고깃배의 그물에 걸림으로써 도망가지 못하게 됐고, 이에 공비들은 이곳 괘방산을 거쳐 칠성산(七星山953m)으로 도주했다. 공비들이 소탕된 후 강릉시와 강릉시 산악회원들이 길을 정비한 후 안보체험 등산로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83고지에서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길이 곧게 뚫린 이 구간은 조망까지 열린다. 칠봉산과 칠성산, 매봉산은 물론이고 그 뒤에 있는 백두대간의 헌걸찬 준봉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후에도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그러다가 아래 사진과 같은 돌탑을 만났다. 아니 이곳뿐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이런 돌탑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자그마한 돌맹이들이 유난히 많은 괘방산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명색이 세 개의 탐방로를 겸하고 있으니 그에 맞는 편의 시설을 갖추지 않았을 리가 없다. 길이 나뉘는 곳마다 이정표를 세워두었음은 물론이고, 여러 종류의 벤치와 평상 등을 갖춘 쉼터도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길도 매우 잘 정비되어 있어 초등학생도 무난하게 완주할 수 있을 정도다.

 

 

168고지를 출발하지 28분쯤 되었을까 바닥의 흙이 이전과는 달리 온통 까매졌다. 옛날 이곳에 탄광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내가 중앙정부에서 에너지정책 업무를 담당하던 1980년대 중반만 해도 이곳에는 꽤나 많은 탄광들이 문을 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9년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인해 경제성이 없던 이 일대의 탄광들도 모두 문을 닫은바 있다. 그러니 주변에 널린 저 검은색 흙들은 무연탄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폐석더미가 분명하다.

 

 

이 부근에서 괘방산의 정상이 조망된다. 방송사와 이동통신사에서 세워놓은 송신탑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 이 근처에서 흙이 묽게 탄 것 같다는 화비령(火飛嶺)’을 거쳐 청학산(靑鶴山)으로 연결되는 갈림길을 만난다고 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라선지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참고로 청학산은 1996년 북한의 잠수함침투 때 무장공비들이 집단으로 자살한 장소이다. 잠시나마 긴박했던 옛 이야기를 떠올려보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이후부터 길은 임도로 변한다.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괘방산 지역에는 강릉광업소등 여러 개의 탄광이 문을 열고 있었다. 이 임도는 당시 광산에서 캐낸 석탄(무연탄)을 운반하던 운탄길이다. 탄광들이 모두 문을 닫은 후 사람과 차량이 오가던 길은 조용한 산 속의 임도로 남았다. 그런 옛길을 내가 옛 추억을 떠올리며 걷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걷자 사거리(이정표 : 당집 0.6/ 정동진 3.3)가 나온다. 해파랑길은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알 수 없는 임도와는 이곳에서 헤어진다.

 

 

오솔길로 변한 탐방로는 사거리를 지나면서 가파르게 변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허리를 옆으로 꿰뚫으며 나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주변의 숲이 오리나무로 변하면서 햇볕까지 완벽하게 차단해준다. 오히려 걷기 좋은 구간으로 변했단 얘기이다.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울창한 숲속에 들어앉은 널따란 공터(이정표 : 안인5.1/ 동명2.0/ 밤나무정4.2/ 정동진3.9)가 나온다. 근처에 서낭나무가 보이는가 하면 널따란 반석도 보인다. 벤치 몇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마당 한가운데는 돌담을 둘러치고 소담한 집 한 채를 들어앉혔다. 산신제를 지내는 당집이란다. 문을 열어보니 부처님과 산신이 그려진 걸개그림 앞에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다는 것은 평소에도 관리를 해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후부터는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15분쯤 걸었을까 안부(이정표 : 안인 4.0/ 정동진 5.0)가 나온다. 일부 지도에는 이 부근에다 괘일고개를 그려 넣고 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안부에 내려서니 길가 철조망에 덕지덕지 매달린 산악회 리본들이 눈에 들어온다. 무당집 처마를 연상시키는 풍경이랄까? 그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세 종류의 탐방로가 함께 쓰고 있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안부를 지나자 산길은 다시 가팔라진다. 오늘 트레킹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다. 12분이면 정상에 올라설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힘들다면 쉬엄쉬엄 오르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안부와 정상 사이에는 임도가 나있다. 이정표(삼우봉1.1/ 등명락가사1.7/ 당집1.3, 정동진 5.35)는 오른편에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인 등명락가사(燈明洛伽寺)’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 절에서 공부하던 서생들이 새벽이면 괘방산에 올라 불을 밝히고 기도를 해서 과거급제자가 많이 나왔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절이다.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북쪽의 고구려와 동쪽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란다. 창건 당시는 수다사(水多寺)였으나 신라 말기 병화(兵火)로 소실되었고 고려 초기에 중창하면서 이름도 등명사(燈明寺)로 바뀌었다.

 

 

임도를 지나서도 가파른 오르막길은 계속된다. 이번에는 바위구간이다.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지자체에서 밧줄난간을 쳐놓았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0분 만에 괘방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아니 정확히는 정상의 바로 밑이다. 정상을 방송사와 이동통신사의 송전시설들이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냥 차지만하고 있는 게 아니라 철조망까지 둘러놓아 아예 진입을 막아버렸다. 전주의 모악산처럼 요즘은 개방을 해주고 있는 추세인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정상을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정상 부근에서 오른편으로 바다 조망이 확 트인다. 엊그제 내린 비 탓인지 마침맞게 하늘까지 쾌청하게 열렸다. 미세먼지와 황사로 맑은 날을 보기 드문 요즘으로서는 엄청난 행운이라 하겠다. 덕분에 발아래로 파란 바다가 넘실대니 그야말로 심쿵모드다. ‘심쿵은 우리 맏손주의 태명이기도 하다. 그런 심쿵을 갖다 붙였다면 내 눈에 들어온 풍광이 과연 어땠을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탐방로는 철조망을 둘러쳐놓은 정상을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를 한다. 하지만 비탈진 곳에 길을 내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데크로 계단까지 놓아가며 산허리를 뚫었다. 그렇게 4~5분쯤 걸었을까 이정표(삼우봉 0.9/ 괘방산 정상 40m/ 당집 1.5) 하나가 세워져 있다. 왼쪽에 보이는 오솔길로 들어서면 괘방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면서 말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들어서니 괘방산(掛膀山)의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해발이 원래의 높이인 ’339m‘보다 6m가 더 높은 ’345m‘이다. 방송사의 송신시설에 자리를 빼앗긴 분풀이를 높이로 보상받으려 한 것일까? 그건 그렇고 괘방산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명단을 쓴 방()을 이 산에 걸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 산줄기 덕분에 예부터 강릉에서 과거 급제자가 많이 나왔다는 설도 있다. ‘택리지강원도 편에는 지방민들은 놀러 다니기를 좋아해서 노인들은 기악과 술과 고기를 가지고 산이나 물가에 가서 마음껏 논다. 때문에 그 자제들 또한 학문에 몰두하는 사람이 적은데 오직 강릉에만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많이 나왔다고 적었다.

 

 

정상석만 세워놓았을 뿐 마땅히 쉴 곳이 없고, 또한 조망도 터지지 않으니 오래 머무를 필요도 없다. 인증 사진을 찍자마자 곧장 길을 나선다.

 

 

2분쯤 더 걸었을까 정상에 대한 아쉬움을 보상해주고도 남을 만한 조망의 명소를 만났다. 왼쪽으로 시야가 트이면서 강릉항과 강릉시청 등 강릉시가지와 강동면 일대, 그리고 경포항까지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다. 그 뒤를 헌걸찬 백두대간의 준봉들이 받쳐주고 있음은 물론이다. 고맙게도 조망도까지 만들어놓아 어디가 어딘지 모를 이유도 없다.

 

 

조금 더 걷자 삼우봉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안인2.9/ 통일공원1.5/ 정동진6.1)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이곳은 삼우봉의 정상은 아니다. 그저 통일공원에서 올라오는 길이 합류되는 지점쯤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참고로 안인진리는 북한 잠수정이 침투하기 훨씬 이전, 19456·25전쟁이 발발하던 날 북한군이 최초로 발을 디뎠던 곳이기도 하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곳이 바로 통일공원이다. 공원 오른쪽 바닷가의 함정전시관에 있는 배는 퇴역함정인 3,471t급 전북함이다. 관람객들은 함정 내를 둘러볼 수 있다고 한다. 또 한 척의 배는 1996년 북한 무장공비들이 타고 왔던 잠수정이다. 이 잠수정 역시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정상석이 있을 리가 없다. 그저 벤치 두어 개가 놓인 쉼터일 따름이다.

 

 

삼우봉의 정상은 이정표의 바로 위에 있었다.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조망을 허락하고 있어 조금 전에 들렀던 괘방산보다는 훨씬 품격이 높다. 그래선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 삼우봉을 괘방산을 대신하는 봉우리로 쳐준다.

 

 

천 미터를 훌쩍 넘기는 고봉들이 숲을 이루는 백두대간 마룻금이 광활하게 펼쳐지는가 하면, 그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모여든 임곡천이 구불구불 똬리를 틀듯이 발아래로 흘러간다.

 

 

삼우봉에는 앉아서 기념사진 찍기 딱 좋은 삼각형 바위가 있다. 주변에는 정원에서나 볼법한 멋진 소나무들도 여럿 보인다. 눈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지는가 하면, 시원한 바닷바람은 뺨을 스쳐간다. ‘바위 위에 앉아 있어도 왕의 호사가 부럽지 않다는 누군가의 표현이 실감나는 풍경이다.

 

 

누군가는 이곳 강릉을 3(三靑)이라고 했다. ‘물이 푸르니 수청(水靑)이요, 소나무가 푸르니 송청(松靑)이며, 마음이 푸르니 심청(心靑)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삼우봉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푸르기 짝이 없는 동해바다에 산길을 꽉 매운 소나무들, 거기다 이런 풍광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찌 푸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우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거기다 바윗길까지 겹쳐 내려서는 게 조금은 부담스럽다. 하지만 길가에 밧줄 난간이 매어져 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바닥에 떨어진 산길은 이후부터 평탄하게 이어진다. 오리나무로 바뀐 주변의 숲도 햇볕을 완벽하게 차단해준다. 다시 말해 걷기 딱 좋은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삼우봉을 내려선지 10분 남짓, 활공장으로 가는 도중에 거대한 돌무더기를 만났다. 짧지만 성벽의 위를 걷기도 한다. 고려 초기에 쌓은 고려산성터라는데, 여진족과 왜구를 막기 위해 강릉 주민들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이 성터는 1969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인에 영동화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주민들이 공사현장에 석재를 판매하기 위해 성벽을 헐어내면서 대부분 훼손되었단다. 때문에 451m였던 성은 현재 서벽 25m와 남벽 55m 정도만 남아 있을 따름이란다.

 

 

 

잠시 후 안부삼거리(이정표 : 안인2.0/ 강릉임해자연휴양림0,8, 통일공원 1.3/ 삼우봉0,7)를 만난다.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푸른 바다와 산의 정취를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강릉임해자연휴양림으로 연결된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다시 오르막으로 변한다. 그것도 상당히 가파르지만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오르는데 부담은 없다. 거기다 거리까지 짧아 산성터를 출발하고 나서 8분이면 활공장에 올라설 수 있다.

 

 

많이 가팔라진 산길을 잠시 치고 오르자 널따란 나무데크가 나온다. 왼편은 패러글라이딩을 위한 활공장, 오른편은 평상까지 놓아둔 것이 쉼터로 안성맞춤이다. 아니 최고의 전망까지 갖추었으니 비박 마니아들이 침 깨나 흘릴만한 요지이겠다. 텐트를 벗어나지 않고도 최고로 멋진 동해의 일출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하지만 강릉시로서는 그게 영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오염이나 산불의 발생을 들먹이며 야영금지라는 경고판을 곳곳에 설치해 놓은 걸 보면 말이다. ! 이곳에서는 강릉시의 시산제나 풍년기원제 등이 열리기도 한단다.

 

 

활공장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맞게 날씨까지 청명해서 시야가 막힘이 없다. 먼저 하늘과의 경계가 불분명한 망망대해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반대편에는 오대산과 방태산, 설악산 등을 품은 헌걸찬 산릉이 늠름하게 버티고 있다. 고개 한번 돌렸을 따름인데 한쪽은 망망대해가, 다른 한쪽은 첩첩산중이 펼쳐져는 것이다.

 

 

이젠 내려갈 일만 남았다. 작은 오르내림이 두어 번 반복되지만 진폭이 크지 않으니 그저 솔향기에 취해보거나 가끔가다 터지는 조망을 즐기면서 걸으면 될 일이다. 그래야 산 우에 바닷길이라고도 불리는 바우길 8구간을 걷는 진짜 맛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의 강원도 사투리이다. 그러니 표준말로 풀어쓰면 산 위에 바닷길이 된다. 산길을 걷지만 마치 바다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강릉 사람들은 발밑에 바다가 펼쳐지면서 파도소리까지 그대로 들을 수 있다는 허풍을 떠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만큼 자랑스러운 둘레길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이 구간도 역시 잘 꾸며 놓았다. 통나무 의자에 분홍색의 벤치까지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한쪽 귀퉁이에는 돌탑도 보인다. 쉬어간 사람들의 염원이 알알이 쌓여있을 것이다.

 

 

능선은 대부분 소나무가 울창한 숲길로 이루어져 있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데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늘도 그늘이려니와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가 더위에 지친 심신을 상큼하게 바꿔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진행하자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안인0.6/ 쉼터0.3/ 정동진8.4)가 다소 헷갈리지만 이곳에서는 오른편 방향의 쉼터로 향한다.

 

 

키 큰 소나무는 바닷바람을 막아 주고, 길옆에 가지런하게 자라는 키 작은 소나무들은 걷는 이들이 혹시라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근심거리를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낸다. 솔향기를 가득 머금은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쳐가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향기에 취해 걷다보면 잠시 후 잘 가꾸어진 쉼터에 이른다. 원목의자에 식탁은 물론이고, 정자까지 지어 품격을 높인 쉼터이다.

 

 

 

트레킹 날머리는 안인삼거리’, 괘방산 입구 주차장(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13-34)

삼거리에서 방향을 틀어 10, 길게 놓인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널따란 주차장이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이곳에도 해파랑길 안내도와 강릉바우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정동진처럼 안보체험등산로란 이름도 슬쩍 끼워 넣었다. 하지만 스탬프보관함은 안인항까지 가야만 만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종료하기로 했다. 37코스 답사 때 버스가 주차되어 있던 이곳까지 이미 걸어왔었기 때문이다. 스탬프를 찍지 않는 우리 부부이니 구태여 똑 같은 길을 다시 걸을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오늘은 총 3시간 15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9.24, 전 구간이 산길이었음을 감안할 때 상당히 빨리 걸은 셈이다. 아니 능선의 오르내림이 그만큼 심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