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올드 시티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 이란 및 러시아와 접한 카스피 해 연안의 국가.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데 경제의 상당 부분을 석유와 천연가스가 지탱하고 있어 불의 나라로 불린다. 동유럽권에 속해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까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 달리 아제르바이잔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에 서아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점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동유럽권으로 보는 이유는 19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영향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바쿠(Baku) :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다보다 낮은 카스피 해 연안에 위치,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도라고 한다(가장 높은 수도는 볼리비아의 라파스이다). 캅카스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약 4분의 1 가량이 집중되어 있는 경제의 중심지이다. 2000년대 이후 오일 달러로 아제르바이잔의 경제가 크게 성장하면서 도시 곳곳에 마천루 등 여러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알려진다.

 

 아제르바이잔, 아니 바쿠에서의 첫 만남은 구시가지((Old City))이다. 버스에서 내려 잠시 걸으면 올드 시티 투어의 시작과 끝인 하드록 까페(Hard Rock Cafe)’에 이른다.

 이번 여행은 코카서스 3(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여행사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흑해 연안의 바투미(조지아 제2의 도시)’도 마지막에 들렀다. 그리고 튀르키예의 리제로 넘어가 이스탄불(환승)을 거쳐 귀국했다.

 올드시티의 주요 볼거리는 지도에 표시된 게 다라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이 지도로 찾아다니는 것은 불가능. 앱의 길 찾기 기능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대충 방향을 잡은 다음 무작정 걸으면 된다. 올드 시티의 규모가 작으니 어렵지 않게 찾아 낼 것이다.(지도는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하드록 카페 앞에 아제르바이잔 최고의 서정시인 중 한 명인 나타반(1832-1897, Khurshidbanu Natavan)’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카라바흐 칸국(Karabakh khanate)’의 마지막 통치자인 메흐디굴루 칸(Mahdiqoli Khan)‘의 딸로 인본주의·우정·사랑을 주제로 한 서정적인 가잘을 잘 썼다고 알려진다. 가잘(ghazals)이란 각 줄 끝에 은율이 있는 2행의 후렴구가 특징인 시의 한 형태이다.

 올드 시티의 주 출입구인 동쪽 성문 밖에는 아제르바이잔의 국민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니자미 간자비’(Nizami Ganjavi)의 동상이 세워진 기념 공원이 있다. 참고로 니자미 간자비(Nizami Gencevi, 1141-1209)’는 아제르바이잔 간자시 출신의 시인이다. 본명은 일야스 이븐 유시프(Ilyas Ibn Yusif). 니자미는 아호로 실로 꿰다’,  단어를 조절한다는 뜻을 갖는다. 다섯 편의 서사시 모음집인 함사(Khamsa)’로 이슬람세계에 필명을 떨쳤다고 한다. 1991년 유네스코는 니자미의 850주년을 기념해 세계 기념 인물로 선정했다.

 기념공원 바로 앞에는 니자미 문학 박물관도 있다. 이슬람식 문양과 디자인을 주로 사용한 건물이다. 건물의 전면 2층에는 유명 문인 6명의 동상이 있다. 이들 동상 때문에 박물관은 마치 성전 같은 분위기를 띤다.(화질 때문에 후면 사진 게재)

 동문으로 들어가면서 바쿠의 과거 그 자체인 올드 시티(Old City)’ 투어가 시작된다. 현대적 도시의 심장부에 위치한 올드 시티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채 7~12세기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궁전, 모스크(mosque), 탑 등을 간직하고 있다.

 옛길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이정표를 만난다. 아제르바이잔어와 함께 영어를 병기해놓아 어렵지 않게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다.

 오래된 도시답게 눈에 들어오는 건물마다 하나같이 중세풍이다. 맞다. 이곳 올드 시티는 옛 시내 중심이었고 지금도 시내 중심이라고 한다.

 이곳은 아제르바이잔이 갖고 있는 3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바쿠 성곽도시(Walled City of Baku)’를 품은 문화유적지이다. 그래선지 공사장의 가림막까지도 중세풍의 건축물을 그려 넣었다.

 시르반샤궁(Shirvanshah’s Palace)으로 가는 길, 오른편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성곽이 따라온다. 구시가지의 성곽은 12세기 메투쏘르(Menutsshochr) 왕 시대에 건설되었고, 19세기에 보수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성벽은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하지만 중세에는 카스피 해가 바로 아래까지 찰랑거렸다고 한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포루(砲樓)가 만들어져 있는가 하면, 그 안에는 옛 풍경을 떠올려보라는 듯 당시 사용하던 대포를 전시해 놓았다. 그런데 이게 성 안의 주택가를 향하고 있으니 문제다.

 아름답게 치장된 저 건물은 알리 샴시 스튜디오(Workshop Ali Shamsi)’라고 했다. 대문과 벽이 요란스럽게 치장되어있는데, 특히 사자 그림이 눈길을 끈다. 용기, 고귀함, 지혜를 뜻한다나?

 맞은편 나무는 한술 더 떴다. 가로수에 여자 얼굴을 새겨 포토죤으로 만들었는데, 환경운동가들의 먹잇감으로 이만한 게 없겠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한참을 올라가니 모스크와 궁전의 돔형 지붕이 보이고, 궁전의 정면 출입구가 나타난다. ‘시르반샤 궁은 성곽도시인 바쿠가 품은 가장 중요한 문화재 중 하나다. 시르반샤궁전과 메이든탑이 있는 바쿠 성곽도시(Walled City of Baku with the Shirvanshah’s Palace and Maiden Tower)’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000년 등재)됐다. 하지만 2003년 위기에 처한 유산으로 지적받기도 했다.

 입구의 안내판은 아제르바이잔 건축의 진주로 불리는 시르반샤 궁전(Shirvanshah’s Palace)’ 14-15세기에 지어졌음을 알려준다. 시르반샤 왕조 칼리룰라(Khalilulla) 1세와 1501년 전쟁에서 사망한 그의 아들 파루크(Faruk)의 통치 기간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18세기 러시아 해군의 폭격으로 상층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복구 작업이 진행됐다. 참고로 Shirvan 9세기경부터 1538년 이란 사파비드에 의해 병합될 때까지 이 지역에 있던 왕국이다. 12세기 이후 문화적 전성기를 누리며 도심에 성곽을 축조하는데, 이때의 건물로 메이든 타워로 남아 있다. 13세기에는 바쿠가 일한국(Il-Khante)의 여름궁전이 되어 건축이 이루어졌다. 14세기까지 바쿠 구시가지(Icheri Sheher)를 중심으로 성이 여러 번 새로 지어지고 고쳐지는데, 그 결과가 현재 쉬르반샤 궁전으로 남아 있다.

 왕궁은 부속 건물들과의 균형감 있는 조화가 자랑이라고 했다. 궁전의 단지는 여러 개의 개별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거 지역과 다반하네(Divankhane, 공식적인 회의와 연회 장소), 시르뱐샤의 묘, 첨탑이 있는 회교사원, 목욕탕(hammam), 궁중 점성술사였던 세이드 야야 바쿠비(Seyid Yahya Bakuvi)의 묘, 키구바드(Key-Gubad)의 회교사원 등이다.

 입구의 안내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둘러볼 동선 정도는 파악해두고 안으로 들어가자.

 궁전의 파사드(facade :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 이슬람의 궁전답게 아라베스크(arabesque) 문양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문자·식물·기하학적인 모티프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무늬다.

 1층은 국왕의 거주 공간이었다. 집무는 2층에서 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수습된 유적과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왕의 계보를 보여주는 표, 그밖에도 왕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박물관 형태로 전시되고 있다.

 마치 우물처럼 보이는 저 구멍은 손님이 찾아왔을 때 연회나 만찬을 준비시키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왕이 사용하던 물건들에서 이슬람 통치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주전자가 눈길을 끈다. 동서 문물의 교류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유형의 주전자다.

 황금빛의 저 화려한 장신구는 말안장이 아닐까? 벽에는 사용하기가 아까울 정도로 화려한 칼도 세 개나 걸려 있었다. 하나 더. 전통악기도 눈에 띈다. 초구르(Chogur)로 불리는 현악기, 산투르(Santur)로 불리는 줄을 쳐서 소리 내는 타현악기, 까발(Qaval)로 불리는 북이라고 한다.

 아랍어로 쓰인 책도 있다. 종교적인 서적이 아닐까 싶다.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그림.

 바쿠 구시가지의 모습을 미니어처 형태로 재현해 놓았다. 옛 서울, 그러니까 한성(漢城) 4대문 안에 궁궐과 관아, 그리고 백성의 거주지역이 함께 들어서 있었음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고궁의 전시관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도 눈에 띈다. 전임 대통령인 헤이다르 알리예프라는데, 그의 사진은 이곳 말고도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현 대통령인 일함 알리예프(Ilham Aliyev)의 아버지이기도 한데, 어느 정도 우상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헤이다르는 소련연방 시절 공산당 서기장과 정부 수반을 지냈으며, 1993년부터 2003년까지 아제르바이잔공화국 제3대 대통령을 지냈다.

 정원에는 왕의 스승이자 유명한 점술가, 과학자였던 세이드 야야 바쿠비의 묘당이 있었다. 이밖에도 궁에는 역대왕의 무덤이 있는 디반카나(Divankhana)와 왕가의 영묘도 있다고 했다.

 궁전 벽에는 시바이엘(Sabail) 섬의 요새에서 나온 장식용 패널(명문)과 건축 부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바이엘 요새는 1306년 지진에 의해 파괴되어 바닷물에 잠긴 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18세기 들어 바닷물이 줄어들면서 세상에 드러났다고 한다.

 궁전에서는 빌딩의 숲을 뚫으며 솟아오른 타워전망대와 3개의 빌딩 중 2개만 보이는 플레임 타워(Flame Towers)도 조망된다. 가이드의 말마따나 건물의 모양새가 아제르바이잔의 상징인 불꽃을 쏙 빼다 닮았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 그러니 민초들의 삶도 한번쯤은 엿봐야 하지 않겠는가. 첫 만남은 1078~1079년에 건설되었다는 모하메드 모스크(Muhammad Mosque)’. ‘손상된 탑이란 뜻의 시니갈라 모스크(Siniggala Mosque)’로도 불린다. 1723년 러시아 함대가 바쿠에 접근 항복을 요구하다 거부당하자 포격하기 시작했을 때 포탄 중 하나가 미나렛(첨탑)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강풍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함대가 먼 바다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나? 아무튼 바쿠사람들은 이것을 외국 침략자로 부터의 하나님의 보호로 인식했으며 그후 19C 중반까지 모스크의 미나렛을 저항의 상징으로 복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나갈라(손상된 탑)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궁전 앞의 소공원. 알록달록한 홍차 잔을 포개놓은 것 같은 조형물이 얼핏 탑으로도 보인다. 맞다. 이 탑은 터키, 우즈베키스탄 등 전 세계에 있는 투르크족이 세운 일곱 나라들을 상징한단다. 아제르바이잔도 그중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꿩 대신 닭이라고나 할까? 어느 여행 작가가 애국심까지 들먹거리던 무궁화는 눈에 띄지 않았고, 대신 시계꽃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나이 70을 넘기고서도 세계일주의 꿈을 이루어나가는 우리 부부의 열정(시계꽃의 꽃말)’을 대변해주는 꽃이다.

 잠시 후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이 눈에 띈다. 얼굴만 있는 이 흉상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명한 시인이자 예술가인 알리아가 바이드(1894-1965)’라고 한다. 1990년 제작된 이 조각상에는 우회적으로 표현된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과 나무줄기, 뿌리로 얽힌 모습은 가잘칸 나는 위대한 푸줄리의 후계자다라는 작가의 반문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바쿠의 구시가지 성곽인 이체리 세히르(Icheri Sheher)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얼마 남지 않은 중세 도시 중 하나라고 했다. 그래선지 미로같이 연결되어 있는 좁은 길과 밀집되어 있는 건물, 작은 정원 등과 같은 중세 도시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아시아의 서쪽 끝, 유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하지만 비치파라솔을 씌운 테이블을 야외에 놓고 손님을 받는 식당에서 이곳이 유럽에 더 가까운 문화를 지니고 있음을 실감했다.

 아기자기 예쁘게도 장식된 좁은 길을 따라 18세기 후반에 건설된 집들이 고풍스럽게 늘어서있다. 골목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허튼 데가 하나도 없다. 모두들 사무실이나. 작은 레스토랑, 작은 호텔, 오래된 개인집은 하우스 박물관(House Museum)으로 이용하고, 각종 기념품점, 홈메이드 공예품점들도 있었다.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묵었다는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는 현재 고급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물탄(Multani) 카라반세라이를 비롯해 16세기에 지어진 부카라(Bukhara) 카라반세라이 등 과거 이곳이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말해준다.

 주마 모스크(Juma Mosque)’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원래 이곳에는 배화교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1309년에 아미르 샤라프 알딘 마하무드의 명에 의해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세월이 흘러 이게 황폐해지자 1899년에 그 자리에 주마모스크를 새로 지었다고 한다.

 이 나라도 카펫이 유명한 모양이다. 길가 수많은 상점으로도 모자라다는 듯 길바닥까지 전시장으로 삼았다. 그래선지 카펫 박물관까지 만들어놓았다는데 직접 가보지는 못했다.

 올드 시티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12세기에 지어진 메이든 타워’(Maiden Tower).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요새는 직경 16.5m에 높이가 29.5m인 원통형이며 성벽의 두께는 5m나 된다. ‘메이든이란 이름은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요새에서도 나타나는데, ‘정복되지 않는다'’ 또는 확고부동하다는 뜻을 의미한단다. 이름대로 성채는 지금까지 부서지거나 외부 세력에 정복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으나 시도해보지는 않았다.

 일명 소녀의 탑으로 불리는 이 탑은 12세기 건축된 800년 역사의 방어용 고탑으로 몇 가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설은 바쿠 왕의 딸 메이든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이곳에 감금당하자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다. 또 바쿠 왕이 감금한 여동생이 수치심으로 투신했다는 설과 바쿠성을 쳐들어온 적과 싸운 아름다운 여인의 전설도 있다.(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가이드는 메이든 타워 앞 유적을 바르톨로메오의 무덤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12 제자 중 한 분이었던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등에 포교를 하다가 잡혀 살갗이 벗겨져 죽임을 당했는데 그 장소가 이곳이라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에서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하나 더. 귀국해서 검색해보니 이곳을 하맘 목욕탕으로 소개하는 글이 더 많았다.

 저 석상의 정체는 뭘까? 저 유적지를 지켜주는 신상일지도 모르겠다. 저곳에서 52개나 되는 무덤(석관)이 발견되었다니 말이다.

 어느 레스토랑 앞에서 만난 또 다른 조형물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행운이라는 벼룩시장도 만날 수 있었다. 탐나는 물건도 눈에 띈다. 하지만 눈요기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반입을 금지한다는데 어쩌겠는가.

 자유 시간에 들러본 먹자골목(?).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 문화권이다.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이다. 하지만 거리에는 히잡 쓴 여성이 드물었다. 술집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세속주의 이슬람을 채택하면서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인 덕분일 것이다. 하나 더.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직 낯선 나라인 모양이다. 투어를 하는 동안 우리 일행 외에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2016년 중순부터는 공항에 도착해서 간단한 비자 신청서만 작성 후 20달러만 제출하면 누구나 비자를 받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거기다 물가도 조지아·아르메니아·튀르키예 등 주변 국가들에 비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비하면 월등히 싸다지 않는가.

여행지 : 메테오라(Meteora)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메테오라(Meteora)’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지방 북서부 트리칼라주 일대에 있는 거대한 사암 바위기둥 위에 세워진 수도원들을 두고 지어진 이름이다. 바위들의 평균 높이는 300m이며, 가장 높은 것은 550m에 이른다.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들이 있어 성지순례 코스에 들기도 하는 이곳은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독특한 풍광을 보여준다. 거대한 바위 위에 만들어진 수도원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과거에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밧줄과 도르래를 이용해야만 올라갈 수 있었다. 1960년대 이후 정부는 관광객들을 위해 험준한 산속까지 도로를 냈고, 수도원이 있는 높은 바위까지 계단을 만들거나 계곡의 바위와 바위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덕분에 우린 개방된 6개의 수도원을 별 어려움 없이 둘러볼 수 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메테오라에 도착했다. 아니 정확히는 메테오라의 배후도시인 칼람바카이다. 도시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기둥 모양으로 우뚝 솟은 거대한 사암(沙岩)으로 이루어진 바위산들과 그 정상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하나 더. ‘칼람바카(Ka1abaka)’ 전망 좋은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단다.

 메테오라는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400Km쯤 떨어진 테살리아 지방에 있는 UNESCO 지정(1988) 세계문화유산이다.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불가사의 건축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메테오라에는 24개의 수도원·수녀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6곳만 복원을 끝내고 손님을 맞는다. 대 메테오른 수도원(1356)을 비롯해 발람 수도원(1530), 로사노 수도원, 세인트 니콜라스 아나퍼프사스 수도원(1458), 트리니티 수도원, 그리고 유일한 수녀원인 성 스테파노 수녀원(1312)이다.

 저녁식사 전에 둘러본 칼람바카는 여느 소도시와 다를 게 없었다. 호텔, 식당, 카페, 편의점 등 웬만한 편의시설은 다 들어서 있다. 관광도시이다 보니 기념품 판매점이 유독 많다는 게 조금 다르다고나 할까?

 하룻밤 묵은 ‘KOSTA FAMISSI 호텔’. ‘칼람바카(Kalambaka)’라는 마을의 입구에 자리하는데, 3성급이지만 깔끔한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호텔은 가족가업으로 운영한다고 했다. 그래선지 벽면을 자랑스러운 마테오라의 역사를 담은 사진들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수도원을 머리에 인 메테오라의 거대한 바위봉우리들이 일렬로 늘어선다. 누군지는 몰라도 전망 좋은 곳이라는 동네 이름 한번 잘 지었다.

 여행사는 메테오라에 있는 여섯 곳 수도원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발람수도원(Holy Monastery of Varlaam)’만 안내해준다. 인상적인 건축물과 탁 트인 전망,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곳이다.

 발람수도원의 평면도, 붉은 선의 왼쪽은 수도사들의 생활공간으로 관광객의 출입이 제한된다. 수도원은 카톨리콘(예배당)과 식당, 도서관, 기숙사, 감방, 종탑,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버스에서 내리면 널따란 광장.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대문 좌우 벽감 속에 성화가 들어있다. ! 메테오라의 여섯 수도원은 일주일에 하루씩 돌아가면서 쉰다고 했다. 우리 같은 패키지여행자야 현지 가이드가 알아서 찾아가겠지만, 자유여행자들은 미리 알아보는 게 바람직하겠다.

 왕관까지 쓰고 있는 저 쌍두 독수리 문장은 뭘 의미하는 걸까? 어쩌면 비잔틴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395년 로마가 동·서로 나뉘고, 10세기 경 동로마에서 쌍두독수리의 나타나기 시작해 12세기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때는 황실의 문장으로 굳어졌다. 당시 비잔틴제국의 황제는 세속적인 권한과 동방정교회의 수장이라는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황실의 문장이 교회의 문장이 되었고, 동방정교회의 전통과 비잔틴제국의 문화를 이어받은 그리스나 동유럽의 나라들에서 교회의 상징 혹은 나라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발람수도원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삼각주였던 테살리아 평원의 칼람바카의 페네야스 계곡은 400m 이상 우뚝 솟은 험준한 바위산이다. 오스만의 종교탄압을 피해 수도사들은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저런 바위 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었다. 초기에는 암벽에 나무사다리를 세우고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러다 지상으로 연결되는 도르래를 설치하고, 밧줄에 두레박이나 그물을 매달아 수도사들이 타고 오르내리거나 생필품을 공급했다.

 수직으로 무려 373m나 끌어올리는 데 사용되던 밧줄이 수도사들의 전통적 생활 방식을 잘 보여준다. 메테오라에 수도원 건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이슬람 투르크족의 침략과 종교 박해를 피해 수도사들은 바위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높이가 수백 미터에 이르는 바위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은 당연히 없었다. 이때 누군가의 지혜로 나온 게 밧줄을 걸어 타고 올라가는 것. 다음에는 도르래를 만들어 벽돌과 흙을 운반해 일일이 손으로 다듬고 빚어 수도원을 세웠다.

 저 다리만 걷어내면 수도원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한다. 다리 건너. 바위를 톱니바퀴처럼 깎아서 만든 계단을 빙빙 돌아서 올라간다. 한쪽은 아찔한 바위절벽. 난간이 둘러져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계단이 길고 가팔라서 올라가는 게 만만치 않다. 오르면 오를수록 하늘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숨은 가빠진다. 그렇다고 안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 이왕이면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라는 느낌으로 올라가보자. ‘하늘의 기둥’, ‘하늘의 정원’, ‘땅과 하늘을 잇는 계단 같은 인간 세상이 아닌듯한 별칭이 실감날 것이다.

 고개라도 들라치면, 더 높은 곳에서 대 메테오론 수도원(The Monastery of Great Meteoron)’이 내려다본다. 메테오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원이다. 1340년에 아토스 산에서 온 아타나시오스라는 학승이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해발고도 613m의 거대한 바위덩어리에 공중에 떠있는 거대한 장소라는 뜻의 대 메테오로(Megalo Meteoro)’란 이름을 붙이고 여기에 수도원을 세웠다. 세월이 흘러 이게(메테오르) 이 지역의 거대한 바위군 및 수도원 전체를 일컫는 단어가 되었다.

 짜릿한 스릴을 즐기며 계단을 올라서면 또 하나의 문이 길손을 맞는다. 수도원 내부로 들어가려면 이곳에서 입장권(3 EUR)를 사야 한다. 하나 더, 이곳도 역시 남성은 반바지와 짧은 티셔츠 차림, 여성은 바지 차림과 소매 없는 셔츠차림은 입장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입구에서 치마 등을 빌려주기(구매한다는 얘기도 있으나 우린 현지 가이드가 다 챙겨줬다) 때문에 크게 불편한 점은 없다.

 발람수도원은 메테오라에서 두 번째로 큰 수도원이다. 1350년 은둔자 발람이 이 암봉에 올라 수행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3개의 교회와 생활공간(cell)을 만들었지만 그가 죽은 후 200년간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518 테오파네스 넥타리우스라는 두 수도사가 재건했다. 수도원이 날로 번창하면서 16세기 말에는 수도사가 35명이나 머물기도 했단다. 하지만 17세기 이후로 수도원이 쇠락하면서 많은 수도사들이 떠났고, 현재는 7명의 수도사(monk)가 머물 뿐이란다.

 수도원 건물은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직사각형 십자가 평면 위에 팔각형 돔을 얹은 건물 두 채를 이어붙인 정교회 건물(아래 사진)도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오스만 스타일의 건물(위 사진)이 들어서 있다. 이층이 앞쪽으로 약간 돌출해 있고 이 돌출부를 살짝 휜 나무지지대가 떠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 꽃이다’. 빗물로 버텨야하는 바위봉우리에서 나무가 자란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2층 높이까지 자랐는가 하면 꽃망울까지 활짝 터뜨렸다. 사람들이 천국이 연상된다며 이곳을 하늘의 정원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리스풍의 정자가 들어선 공중 정원은 발람수도원의 자랑거리다. 최고의 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난간에 서면 메테오라의 기기묘묘한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하지만 감탄해 할 수밖에 없는 저 풍광을 오스만의 종교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든 수도사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온다.

 메테오라의 바위는 6000만 년 전, 지각변동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알프스 조산대의 충돌로 드러낸 거대한 사암 바위는 풍화와 침식 작용을 거치면서 단단한 부분만 남았고, 점차 뾰족하게 솟았다. 검은 바위 위 가로로 된 단층선은 오랜 시간 진행된 침식작용의 흔적이라고 한다. 이런 표현은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도 썼었다.

 정원에서 바라본 루사노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Rousanou /St. Barbara)’. 저 수도원은 이름의 내력부터 알쏭달쏭하단다. 최초로 지어질 당시 이곳에 기거하던 은둔 수도사나 기부자의 이름을 땄을 것으로 추정될 따름이란다. 1745년경, 3세기 레바논지역의 순교자이자 성인인 St. Barbara의 유골 일부를 이곳으로 가져오면서 세인트 바바라 수도원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1930년 다리가 놓이면서 가장 접근이 쉬운 수도원이 되었다.

 이 뭐꼬?’ 정원 한쪽 귀퉁이에 수도꼭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슬람 국가를 여행하면서 흔하게 보던 시설이다. 기도를 드리러 온 신자들이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얼굴을 씻는 시설인데, 그리스 정교회도 그런 규칙이 있었나?

 이젠 건축물들을 둘러볼 차례이다. 건물은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기도 공간인 오른쪽만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왼쪽은 수도사들이 거주하는 곳이라서 출입을 막고 있다. 공개 지역으로 들어가면 전실(narthex), 이곳은 성인들의 순교 장면을 그려놓은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어떠한 고통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공간, 신앙의 자리에 나아가겠느냐고 묻는 의미란다.

 사도, 성인들의 모습이 교회를 장식하고 있는데, 아주 오래된 종교 시설 특유의 엄숙한 공기가 그 화려함을 누르듯이 내려앉아 있다.

 예배당(nave)에 들어가면 바닥과 천장의 성화, 나무로 만든 의자 등 장식 하나하나가 정교하고 조화롭다. 특히 천장의 프레스코화에선 예수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하지만 촬영은 입구의 홀까지만 허용된다.

 발람수도원을 재건했다는 테오파네스 넥타리우스 수도사가 아닐까 싶다.

 성당을 빠져나와 뒤란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옛날 수도사들의 힘겨웠던 삶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예전 수도사들이 사용했다는 우물에는 아직도 두레박이 매달려 있었다.

 그 뒤에는 거대한 오크통이 있었다. 바위봉우리에 걸터앉은 수도원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이었다. 그래서 수도원을 지을 때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물탱크를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12톤짜리 물탱크가 3개나 있는데, 만드는데 무려 18년이나 걸렸다고 전해진다.

 투어는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목조십자가, 성골함, 성화 등 수도사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아이템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다양한 기록물들과 함께 비잔틴 스타일의 성화가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 박물관을 둘러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게 하나있다. 정교회에서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성경말씀에 근거해 예수나 마리아, 성인들의 이콘(Icon)만 허용하고 가톨릭처럼 조각상은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수도나 미사집전 때 사용했을 법한 갖가지 집기들도 진열해 놓았다.

 정교회 성직자들의 의복. 정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수도사들과는 달리 평신도들의 통과의례(通過儀禮) 주관과 함께 성당에서 예배를 집전했다고 한다.

 수도사들의 삶은 어느 작가의 시선으로 살짝 엿본다. <그들의 모습은 깊은 묵상으로 이마가 넓어지고, 세상이 풍기는 냄새를 멀리하고 영성의 향기만을 맡아 코가 좁고 길쭉하며, 삶에 필요한 것만 먹는 것으로 절제의 삶을 살아서 입도 작으며 그나마 수염으로 가리고 있다. 무엇을 보았는지 놀란 눈같이 크고 또 저들의 귀는 왜 그렇게 큰지, 들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겠다고 귀를 크게 열고 있는 것이리라.>

 필경(筆耕)은 수도사들의 주요 일과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필경이 성서에서 그치지 않고 희극 같은 소설도 필사했다고 전해진다. 소설이란 본디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는 장르다. 잡념을 떨치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며 심신을 수양하는 게 수도사들의 삶일지니, 필사하면서 마음이 고생 깨나 했겠다.

 수도원의 역사를 담은 사진들도 게시되어 있다.

 박물관 근처 화장실 때문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메테오라에 대한 자세한 자료들을 게시해 놓았기에 살펴보다가 그만 시간가는 줄 몰랐던 모양이다. 나 혼자 집결장소로 가버린 걸로 오해한 집사람을 이해시키느라 고생깨나 했다.

 투어를 마친 후 야외전망대로 이동했다. 메테오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전망바위에 서자 바위 숲이 펼쳐진다. 마치 돌로 된 숲처럼 울퉁불퉁한 회색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그 뒤로 그리스를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핀두스 산맥과 메테오라 유적지의 거점도시인 칼람바카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최고의 뷰 포인트답게 메테오라의 여섯 개 수도원 가운데 네 개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밖에도 메테오라에는 두 개의 수도원이 더 있다고 한다. 가보지도, 그렇다고 눈에 담지도 못했지만 007시리즈 포 유어 아이즈 온리(For Your Eyes Only, 1981)’의 로케이션 장소로 더 유명한 성 트리니티(성삼위) 수도원(Holy Trinity Monastery, Agia Triada)’과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고 사마리아 여자, 물고기 잡이의 기적 등의 벽화가 볼거리라는 성 스테파노 수녀원(St. Stephen Nunnery)’이다.

 루사노 수도원이 발아래로 펼쳐지는데 붉은 지붕의 수도원 건물과 웅장한 바위덩어리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그 뒤에는 성 니콜라스 아나파프사스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St. Nicholas Anapausas)’이 있다. 16세기에 지어진 수도원으로 크레타 출신의 화가 ‘Theophanis Strelitzas’가 그렸다는 벽화로 유명하다.

 시선을 들자 이번에는 대 메테오론 수도원과 함께 조금 전에 다녀온 발람수도원이 얼굴을 내민다. 참고로 수도사들이 자연동굴에 처음 온 것은 9세기였다고 한다. 수도원 건물이 건축된 것은 14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이게 공동체로 발전했고, 15세기 말 스물네 채의 수도원을 포함하는 규모로 성장하기도 했다. 덕분에 오스만제국 치하에서 소멸되어 버릴 그리스의 전통과 헬레니즘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래선지 촬영용 의상까지 챙겨온 여성분들이 꽤 있었다. 하긴 장쾌하면서도 아름다운 마테오라의 풍경을 배경 삼는 일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공자는 나이 칠십을 종심(從心)’이라고 했다. 깨우칠 만큼 깨우친 이들이니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해도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그러니 인생샷 하나 건져보려는 집사람의 저 몸짓은 또 하나의 도가 분명하다.

 20대 초·중반을 외국인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난, 그네들의 습성이 몸에 배어 사진 찍는 건 좋아하지만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별로로 여긴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일 수밖에 없었다. 인생샷도 일심동체라야 제멋이라는데 어쩌겠는가.

 에필로그(epilogue), 어느 전문가는 메테오라에 수도원이 들어선 이유를 셋으로 나누고 있었다. 첫째는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다는 것. 하나님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했으니 높은 곳이라면 하나님의 소리를 조금이라도 잘들을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다음은 속세에서 은둔하기 위해서다. 세속의 번잡함을 피해 오롯이 홀로 신과 마주할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접근이 어려운 곳에 은둔처를 만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도자들이 종교 탄압으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위해 어떤 세력도 닿기 힘든 곳으로 도망간데 연유한다.

여행지 : 델피(Delphi) 유적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파르나소스 산(2,457m)의 남서쪽 산자락에 위치한 도시 유적. 고대 그리스의 최고 신탁이던 델포이의 신탁이 이루어진 곳이자, 땅의 배꼽 옴파로스(Omphals)’가 놓여있던 장소이다. 신화에 따르면 아폴론이 이를 지키던 괴물 여신 피톤을 죽였고 이후 델포이는 아폴론을 숭배하는 주요 성소가 되었다. 도시국가의 왕들은 신탁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사자를 보냈고, 델피는 상업·무역이 매우 활발한 곳이 되었다. 하나 더, 이 성역은 기원전 586년부터 4 ()그리스 경기 중 하나인 피티아 경기가 4년마다 열리기도 했다. 경기의 승자는, 템피 계곡의 월계수로 만든 월계관을 쓰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고 한다.

 

 아테네를 출발한 버스는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델피에 도착했다. 유적지 앞에 들어선 마을부터 들른 이유이다. ! 델피로 오는 도중 태양의 후예 촬영지 아라호바를 스치듯 지나오기도 했다. 덕분에 우린 송중기와 송혜교가 키스를 하던 종탑을 곁눈질로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델피는 메테오라로 가는 도중에 들른다. 델피와 테르모필레를 둘러본 다음 메테오라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델피마을에서 바라본 풍경. 거대한 협곡을 낀 드넓은 저 평원은 옛날 아폴론의 신성한 땅으로 불렸다고 한다. 사진에서 길처럼 나타나는 부분은 프레이스토스 강이란다. 우기인 겨울철에만 물이 흐르기 때문에 평소에는 저렇게 하얗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단다.

 투어는 입장권을 사면서 시작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던 도시 델피’, 그런 믿음은 현대까지 이어졌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보호받고 있다.(개방시간 : 08:30-15:30)

 델피성역의 추정 조감도. 입구라 할 수 있는 로만 아고라를 시작으로 리산데르의 기념물, 트로이 목마, 아테네 마라톤 기념물, 코르키라(코르푸 섬)의 청동 황소, 아르카디아 기념물, 헬레니스틱 스토아, 아르고스 왕의 엑시드라, 시프노스 보물창고, 테베 보물창고, 보이오티아 보물창고, 아테네 보물창고, 메가라 보물창고, 코린토스 보물창고, 낙소스 스핑크스, 다각형 옹벽, 아테네 스토아, 플라타이아이 삼발이 의자, 로도스의 전차, 아폴론 신전제단, 아폴론 시탈카스(Sitalcas·곡식의 수호자) 청동상, 아폴론 신전, 극장, 서쪽 스토아가 줄줄이 이어진다. 사진에는 없지만 맨 위에 경기장인 스타디온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델파이의 무덤(the cemeteries of Delphi)’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관람객을 맞는다. 대 위에 놓인 석관(石棺)을 이르는 모양이다.

 델피 유적은 땅속에 묻혀있던 옛 도시를 발굴해 놓은 현장이다. 그러니 유물의 파편들이 사방에 널려있을 건 당연. 참고로 델피는 신탁의 유명세에 힘입어 주변 도시국가들이 신전관리와 제례유지를 위해 결성한 인보동맹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390년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이교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델피의 역사도 막을 내린다. 이후 폐허 위에 카스트리 마을이 세워져 아폴론의 성역마저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발굴에 착수하면서 델피라 명명했다.

 첫 만남은 로만 아고라(Roman agora)’. 전형적인 스토아 형식으로, 성역으로 들어가는 동쪽 출입문의 담벼락에 바싹 붙어있다. 로마시대 상업과 만남의 장소였고 신전에 바칠 제물 등을 팔던 시장터이다.

 아고라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토의와 그에 대한 투표가 이루어지던 곳이기도 하다.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도시의 일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늘 아고라에 모여 정치나 철학, 과학,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아고라가 민주주의를 열어 가는 중요한 장소였다는 얘기다. 여자와 노예들에게는 그런 권리를 주지 않았다는 게 아쉽지만...

 돌기둥을 받히던 기단. 그런데 중앙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곳 그리스는 지진이 빈번한 나라, 그러니 기둥을 고정시키기 위해 그 무엇인가를 저 구멍에 꽂았을지도 모르겠다.

 이후부터는 신성한 길(sacred way)’을 따른다. 델피 성역의 입구에서 아폴론 신전에 이르는 길로, 이 길의 좌우에는 각양각색의 보물창고와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보물창고는 도시국가들이 자신들의 보물을 저장해두던 금고다. 각지에서 모인 도시국가들은 신탁을 먼저 받기 위해, 신탁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보물 창고(Treasury)를 지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델포이 박물관에 있다.

 시키니온과 시프니안의 보물창고(the treasury of the sikyonians and siphnians)’라고 한다. 자유여행으로 다녀온 산토리니가 속한 키클라데스 제도의 작은 섬나라 시프노스(Siphnos)에서도 자신들의 번영을 유지할 방도를 구하며 봉헌했던 모양이다. 역사는 그 신탁을 잘못 해석해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전하지만... 하나 더, 시키온은 코린토스 서쪽에 위치한 고대 도시다.

 아르고스왕의 엑세드라(Exedra of the Kings of Argos). 아르고스(Argos)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미케네와 인접한 작은 도시국가였다. 왕이나 고위직 관료가 델피를 방문했을 때 머물 수 있는 엑세드라(Exedra, 반원형의 휴식 공간)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보이오티아인의 보물창고(The treasury of the Boeotians). 보이오티아(Boeotia)는 코린토스 만에 접한 도시국가들의 연합체라고 했다. 그런데 보이오티아 동맹의 맹주였던 테베의 보물창고를 따로 지어놓은 이유는 뭘까?

 메가라 코린토스 등 다른 도시국가의 보물창고도 여럿 눈에 띈다. 하긴 그리스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심지어 이집트까지 신탁을 받고자 하는 도시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신에게 봉헌했다니 어련하겠는가. 심지어는 신탁을 받으려고 델피에서 1년 넘게 머물기도 했단다.

 문자로 가득한 축대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우리가 배우고 익히는 역사는 저런 기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금줄 안에 모셔진 저 돌은 옴팔로스(Omphalos)’라고 한다. 옴팔로스는 배꼽을 뜻하는 라틴어다. 그리스인들은 신체의 중앙을 배꼽으로 보듯 이곳을 땅의 중심으로 보고,  배꼽 돌을 놓아두었다고 한다(저건 모조품이고 진품은 고고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가 세계의 중심을 향해서 동쪽과 서쪽으로 두 마리의 독수리를 날려 보냈더니, 두 독수리가 델포이에서 서로 만나더란다. 그 장소가 바로 세계의 배꼽이라고 하는 옴파로스.

 아테네의 보고는 델피 유적지에서 온전한 형태로 서있는 유일한 건물이라고 한다. 마라톤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인들이 아폴론에게 바친 봉헌물을 보관하던 보물창고(寶庫), 2개의 도리아 양식 기둥이 받드는 매우 단출한 건물 형태를 보인다. 건물의 메토프에는 신화 속 영웅들의 무용담도 부조되어 있다. 1904-1906년 아테네 시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는데,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완벽하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단다.

 아테네 보고의 맞은 편 언덕에 자리한 가이아 여신의 성소는 아폴론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에 왕뱀 피톤이 신탁을 내리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근처에 놓인 회색 바위는 당시 델피의 여사제 시빌레가 그 위에서 신탁을 내렸다고 해서 시빌레 바위라고 불린다.(사진은 내가 찍은 게 흐려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아테네인의 열주랑(Stoa of Athenians :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승리를 축하하고 아폴론신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헌정) 뒤에 있는 아폴론신전의 다각형 돌 축대(Polygonal wall)’. 쌓아올린 다각형 바위들이 서로 견고하게 맞물려 있다. 접촉면이 많은데다 틈새까지 보이지 않아 페루 여행 때 쿠스코에서 신기해했던 ‘12각의 돌(La Piedra de Los Doce Anguios)’을 떠올렸을 정도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진의 피해를 막기 위한 지혜가 아니었을까 싶다.

 저 건물의 용도는 대체 뭘까? 궁금증을 못 참고 다가가보니 ‘Do not touch please’란다.

 아폴론 신전으로 오르는 길, 길가에 늘어서 있던 화려한 건축물들은 이제 이야기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기단부만 남아 표지석이나 안내판이 없을 경우 정체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라고나 할까?’

 신성한 길(sacred way)’은 델피 유적의 구심점인 아폴론 신전(Temple of Apollo)’으로 인도한다. 아폴론을 모시는 신전으로 이곳에서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델포이의 신탁이 이루어졌다. 아폴론은 신이었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여 사제 피티아(Pythia)를 통해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델포이 신탁소에는 왕은 물론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철학자들도 찾아와 무녀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숭배 금지령을 내리면서 델포이는 역사의 페이지를 마감했다.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원래의 신전은 길이 60m에 폭이 23m이었다. 38개의 도리스식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는데, 현재는 암갈색 돌기둥 6개와 여기저기 깨진 제단만 어지럽게 남아있어 얼핏 폐허처럼 보인다.

 현재의 아폴론 신전은 기원전 4세기 이곳을 강타한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알크메오니드 신전을 대신하여 새로 지은 것이다. 신전의 네 면을 한 줄의 원기둥으로 빙 둘러친 건축구조였다고 한다.

 신화에 의하면, 아버지인 제우스는 쌍둥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탄생을 기뻐하며 아폴론에게 예언을 관장하는 능력을 주었다고 한다. 아폴론이 태어난 지 나흘이 지나자, 제우스는 그에게 황금 왕관과 현악기 리라, 백조가 끄는 마차를 주며, 피톤(델포이)으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곳에서 헤라의 명령으로 어머니 레토가 임신한 동안, 이들을 줄곧 괴롭혔던 큰 뱀 피톤을 아폴론은 화살로 쏘아 퇴치했다. 이후 아폴론은 피톤이 지키던 가이아의 신전을 차지하고, 지명도 피톤에서 델포이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렇게 델포이의 신전은 아폴론의 신전으로 바뀌고, 신전의 피티아를 통해 사람들에게 신탁을 내리게 하였다. 그 후로 인간은 가이아의 뜻이 아닌, 제우스의 뜻을 알리는 아폴론의 신탁에 의하여 미래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위키백과 참조)

 아폴론 신전의 맞은편, 안내판은 ‘The altar of Chiots area’로 적고 있었다. ‘치오츠 제단 지역이라는데, ‘Chiots’는 대체 뭘 말하는 걸까? 아무튼 이 지역에는 치오츠 제단(The altar of Chiots)’ 플라타이아인의 삼각대(The tripod of the Plataeans)’,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동상의 받침대(he pedestal of the statue of Aemilius Paulus)’. 그리고 아탈로스 1세의 스토아(The stoa of King Attalus)’를 포함한다고 했다.

 플라타이아인의 삼각대는 저 청동 기둥을 말하는가 보다.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 전쟁 중 그리스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시아군으로부터 노획한 청동무기를 녹여 만들었다는 승리의 기념비이다. 원래 빙빙 꼬여 올라가는 3마리 뱀의 머리위에 피티아의 상징인 삼발이 솥을 올려놓은 형태였는데, 지금은 청동 기둥만 남았다(머리 부분은 1204년 이스탄불에 입성한 십자군에 의해 절단되어 무기로 만들어지거나 현금으로 바뀌었단다). 아무튼 저 기둥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약탈당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히포드럼 광장)에 세워졌다. 따라서 진품은 현재 이스탄불에 있고 이곳 델포이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동상(The statue of Aemilius Paulus)’은 받침대(pedestal)만 남아있었다. 아밀리우스 파울루스 (로마)장군이 피드나 전투(로마가 그리스 본토를 지배하고 지중해의 패자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힌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군대를 격파한 승전기념비로, 전투장면을 부조(상단에) 4각의 빗돌 위에 동상을 올려놓은 형태였으나. 이 또한 동상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폴론 신전에서 조금 더 위로 오르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극장(Tea Theatre)을 만난다. BC 4세기에 건설된 델포이 극장은 2, 35단의 관람석이 있어 5000명이 동시에 음악이나 연극 등을 관람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원형극장으로 현재의 모습은 로마시대에 개축된 것이다. 비교적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어 지금도 여름이면 연극이나 콘서트가 공연되기도 한단다. 하나 더, 관람석 위로 오르면 델피 유적지뿐 아니라 광활한 올리브 숲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원형극장의 뒤로도 길이 널찍하니 나있었다. 방향표시석은 이 길을 따르면 ‘Stadium’에 이르게 됨을 알려준다. 그러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어진 시간에 쫓겨 달리듯이 다녀올 수밖에 없었지만...

 원형극장의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델피는 산 사면을 깎아 도시를 건설했다. 제일 위에 원형경기장, 그 밑에 원형극장, 그 밑에 신전, 그리고 가장 아래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들어앉혔다. 그리스의 도시들에서 신전과 극장, 원형경기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고 한다. 신전은 신과 통하는 장소였고, 극장은 연극이나 노래 등 예술을 통해 정신을 정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했다. 또한 원형경기장에서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건강하게 단련시켰을 것이다.

 숨이 턱에 찰 즈음 도착한 꼭대기에는 고대 그리스의 경기장인 스타디온(Stadion)’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에 건축된 경기장은 길이 178m에 폭이 26m, 수용 인원이 6,000명인데, 아폴론이 피톤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피티아 제전(Pythia games)’이 이곳에서 열렸다. 계단과 운동장 모두 매몰되었던 것을 2세기경 그리스의 대부호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가 자비를 들여 발굴·재건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8세기부터 시와 음악에 관한 행사를 중심으로 8년마다 개최되던 제전은 육상과 말타기 기술, 마차경주 등이 더해지면서 4년마다 열렸고, 그리스 4대 제전(올림피아 제전, 네메아 제전, 이스트미아 제전, 피티아 제전)의 하나가 되었다. 피티아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월계관이 씌어졌다. 하나 더, 이 제전의 특징은 다른 제전과는 달리 음악 경연이 함께 벌어졌다는 점이다. 음악의 신인 아폴론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나?

 마지막으로 들른 건 고고학박물관(규모는 작지만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중 하나로 아폴론의 성역과 마르마리아에서 발굴된 조각품, 봉납물, 비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신탁을 행할 때 무녀가 앉는 자리로 썼다는 삼발 솥단지가 방문객들을 맞는다. ‘피티아라 불리던 무녀는 신경이 약간 마비된 상태에서 유황 성분의 연기(환각을 일으키는 성분이 함유된 가스)까지 맡아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신탁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하나 더, 아폴론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가 적혀있다고 한다. 절차를 거쳐 받아간 신탁을 해석하는 것은 신탁을 받아간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문구라나?

 낙소스의 스핑크스’. 기원전 6세기에 만든 12m 높이의 원주(圓柱) 위에 얹혀 있던 조각상으로, 에게 해의 섬 낙소스 인들이 봉헌한 보물창고 앞을 지키고 있었단다. 이밖에도 아폴론 성역의 보물창고들 외부에는 많은 조각상들이 건조되어 있었다고 한다.

 도시국가 아르고스에서 봉헌했다는 쌍둥이 형제상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니가 효자 아들들에게 가장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신에게 빌었더니 둘이 함께 죽어 신의 곁으로 가더란다. 당시는 신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자신 곁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나? 그러니 아르카익 시대(BC8~5C)에 만들었다는 조각상이 웃을 수밖에...

 벽에는 황금머리 황소(The Silver Statue of a Bull)’가 걸려있었다. 기원전 6세기(아르카이크 시대) 이오니아에서 만든 작품으로 은박을 입힌 구리판 세 조각을 연결해 제작했다. 참고로 황소는 현신한 제우스를 상징한단다.

 아폴론과 그의 자매 아르테미스, 그리고 이들의 어머니인 레토의 신상이라고 한다. 금과 상아로 아름답게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왕으로 이름났던 크로이소스 왕이 봉헌했을 것으로 추정한단다. 그들이 치장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관과 귀거리, 팔찌 등 황금으로 만든 치장물들을 함께 전시해 화려함을 잔뜩 자랑하고 있었다.

 대접처럼 생긴 저 도자기에는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추구하던 비례·대칭의 조화가 집약되어 있다고 했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 헌주를 쏟고 있는 아폴론을 묘사한 단순한 그림에 아폴론을 상징하는 까마귀와의 이야기, 적색기법의 도자기가 발달하면서 추가된 흰색과 1.618의 황금 비율이 가미되어 있단다.

 소크라테스로 여겨지는 조각상도 있었다.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게 기른 석상은 진지한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댄서의 원주(The Column of the Dancers)’라는 작품이다. 아칸서스(Acanthus) 잎 조각 위로 아름다운 세 여인이 머리에 옴파로스(Omphalos, 대지의 배꼽)를 이고 있는 모양새라고 한다. 그 앞에 따로 놓아둔 돌(옴파로스)을 얘기하는지도 모르겠다.

 안내판은 안티노우스(Antinoos)’로 적고 있었다. 로마의 다섯 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 황제의 총애를 받던 미소년이다. 황제를 수행하여 이집트를 순행하던 중 나일 강에 빠져 익사했는데, 그가 로마에 공헌한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의 조각상을 델포이 성역에 봉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델피 박물관의 유물 중 최고로 꼽히는 이니오호스(전차를 모는 전사) 청동상이라고 한다. BC373년 지진 때 땅에 묻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청동상으로는 드물게 오닉스(줄무늬가 있는 대리석)로 된 눈까지 남아있다. BC478 혹은 474년에 있었던 피티안 경기의 전차 경주에서 승리한 시실리의 군주 폴리잘로스에 의해 델피에 헌납된 것으로, 옷이 날리지 않게 잡아매어 놓는다거나 굳게 다문 입술, 고삐를 잡은 팔에 보이는 힘줄 등 전차경기에서 승리하고 싶다는 마음가짐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밖에도 기원전으로 시대를 돌리는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1896년에 발굴된 청동상과 작은 도상들, ‘아르카이크 시대에서 로마 시대까지 시대별로 그리스의 발전사를 살펴볼 수 있다.

 메테오라로 가는 도중 테르모필레(Thermophylae)’에 들렀다. ‘테르모 뜨거운’, 그리고 필레 입구라는 뜻으로 이 지역의 유황온천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그래선지 여행사는 이곳 노천온천에서의 족욕(足浴)을 그리스 여행 최고의 보너스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면 헛웃음부터 나온다. 우리네 동네 뒷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작은 개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화장실 등 탐방객들을 위한 편의시설 역시 눈에 띄지 않는다.

 물은 따뜻한데다 유황냄새까지 나는 걸로 보아 온천임은 분명하다. 물을 맞을 수 있도록 인공폭포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런 명당자리가 비어있을 리는 만무, 먼저 온 유럽의 젊은이들이 삼각팬티 하나만 걸친 채로 선점하고 있었다. 그리스인들 보다는 오가는 외국 나그네들이 더 많이 이용하는 편이란다.

 그런 외설스러움이 익숙하지 않는 우리네 아낙네들은 하류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좋다면서 희희낙락 했지만... 하나 더, 아낙네들은 족탕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온천을 하며 이끼를 떼서 몸에 바르는 그리스의 민간요법을 귀띔조차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인 노천 온천탕에서 자유롭게 온천욕을 한다. 온도가 40도쯤 되는 해수 온천이라는데, 기록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이 저 온천수로 상처를 치료했다고 전한다. 그래서일까? 여행에 지쳐가던 집사람이 손까지 흔들어가며 활기찬 반응을 보인다.

 온천 지역에는 스파 리조트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걸 좋아하지 않는 탓인지 운영을 중단했다. 그리고 지금은 난민 캠프로 이용되고 있었다.

 테르모필레는 그리스 북부에서 남부 지역으로 이동할 때 반드시 거쳐야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3차 페르시아전쟁 때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간 벌어진 전투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 전적지에 레오니다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창을 겨눈 레오니다스 왕이 적군을 향해 포효하는가 하면, 그 아래 기단에서는 300명의 스파르타 특공대가 용전분투하고 있다. 좌우로 보이는 조형물은 스파르타의 전사 상이지 싶다.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특공대는 이곳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에서 수십만 명의 페르시아 군에 맞서 마지막 한 명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싸우다 전멸했다. 적군을 막는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스파르타군의 임전무퇴 정신은 페르시아군에 공포를 심어주었고, 그리스 군에게는 자유를 향한 투혼을 일깨워 페르시아 군을 몰아내는 동력으로 작용하게 했다. 이 전투가 그리스 역사에서 영원한 전설이 되고, 스파르타 군에게는 불멸의 영예를 안겨준 이유일 것이다.

 또 다른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승리를 의미하는 날개가 한쪽만 달려있다. <스파르타 전사들이 전멸하는 패배를 당했지만 이들의 용맹스런 정신은 승리를 거둔 것 이상>임을 상징한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실감이 난다.

 3차 페르시아전쟁 당시 이곳은 서쪽에 경사가 70도에 달하는 험준한 산들이 벽처럼 서있었고 동쪽은 바다였다. 산과 바다 사이 평지는 100m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스파르타군 300명을 필두로 한 그리스 연합군 약 5000명은 이곳에서 페르시아군(역사가 헤로도토스는 100만 명이 쳐들어왔다고 적는다)을 막았다. 그런 불리함속에서도 첫날과 둘째 날의 전투는 페르시아군의 참패로 끝났다. 하지만 그리스인 중 배신자가 나타나면서 페르시아의 정예부대 1만이 샛길(산을 넘는)로 쳐들어왔고, 레오니다스는 자신과 스파르타 특공대 300명은 남아서 협로를 지키고 나머지 그리스군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후퇴시킨다. 그렇게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고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특공대는 모두 죽는다. 그 영웅적인 이야기는 영화 ‘300’으로 만들어졌고, 그들의 무용담은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다.

 에필로그(epilogue), 델피에는 아폴론 성역만 있는 게 아니다. 피티아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훈련장소로 사용되었던 김나시온(Gymnasion)’과 아테나 여신을 모시던 아테나 프로나이아(Athena Pronaia, 델피의 주신 아폴론 신전 앞에 있는 신전이라는 의미)’인데, 아폴론 성역에서 걸어서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하지만 난 탐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1시간으로는 아폴론성역(꼭대기에 있는 스타디온은 달리듯이 다녀왔는데도)과 고고학박물관을 둘러보기에도 빠듯했으니 어쩌겠는가. 평생 한번 다녀오기도 힘든 그리스인데, 보고 싶은 것을 못 보고 돌아서며 아쉬움 넘치는 원망을 여행사로 돌리며 델피를 떠난다.

여행지 : 산토리니(Santorini), 피라(Fira) 마을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 여행의 단골 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고 너무도 많이 소개가 된 곳이라 다시 거론하기 새삼스러울 정도지만 그래도 그리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바다, 그리고 하늘의 색깔을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어느 곳, 어떤 시간에서도 경험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풍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산토리니는 대략 울릉도 크기만 한 본섬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그 섬 안에 피라와 이아, 카마리 등 여러 마을들이 산재해 있다.

 

 산토리니 여행 셋째 날은 피라(Fira) 마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하늘길로 오든, 바닷길로 오든 모든 산토리니 여행은 섬의 수도 피라(Fira) 마을에서 시작된다. 본섬의 서쪽, 화산섬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경치 좋은 이 마을에 산토리니 인구의 대다수가 살고 있다. 피라는 행정적으로 산토리니의 수도 역할을 한다. 하지만 크기는 별로, 해안선을 따라 절벽 위에 길게 형성된 마을은 걷는 길이가 1.3km밖에 되지 않는다.

 피라마을 투어도 단순한 편이다. 칼데라의 바위절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마을의 메인 골목을 따라 걸어보면 된다. 선사·고고학 박물관 등 이곳저곳 빠짐없이 둘러보다가, 시간이 남을 경우 절벽 아래에 있는 올드 포트까지 내려갔다 오면 된다.

 투어는 테토코풀루 광장(Theotokopoulos Main Square)’에서 시작된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상점 및 음식점들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네댓 시간 동안 마을 곳곳을 둘러본 다음 이곳으로 되돌아와 주차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광장에는 산토리니를 상징하는 당나귀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저 당나귀들은 아직도 산토리니의 중요한 일꾼 역할을 수행한단다. 믿기지 않겠지만, 가파른 절벽에 지그재그로 만들어진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는 저만한 교통수단이 없단다.

 옛 항구(Old Port)부터 가보기로 했다. 절벽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조금 힘들지만 어쩌겠는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니 한번쯤 둘러봐야 하지 않겠는가. 가는 길은 간단했다. 메인골목의 담벼락에 붙어있는 ’Old Port‘ 방향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시야가 툭 트이면서 비취빛 지중해가 펼쳐진다. 칼데라의 바위절벽 가장자리(경사진 부분)에 마을이 들어선 산토리니의 전형적인 풍경이라 하겠다.

 피라마을도 산토리니의 전형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절벽의 경사면에 기대어 계단식으로 지어진 집들은 하나같이 하얀색으로 빛나고, 그 맞은편에는 에게 해의 드넓은 바다가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색깔로 펼쳐진다. 단순한 색체들이 어울려서 만들어내는 경치는 담백하지만 그 앙상블은 여느 조합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다.

 발아래는 에게 해가 펼쳐진다. 화산폭발로 이곳 산토리니에서 갈려나갔다는 섬들과 함께. 오른쪽이 티라시아(Thirasia)’이고, 왼쪽은 분화구가 있는 니아 카르메니(Nea Kameni)’이다.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맨 왼쪽에 팔리아 카르메니(Palia Kameni)’가 있다. 꼼꼼히 살펴보면 꼬맹이 섬인 아스프로니시(Aspronisi)’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계단이 놓인 경사로를 따라 몇 걸음 더 걸으면 길고 긴 계단(Karavolades Stairs)이 시작된다. 계단의 연속이라서 무릎이 시원찮은 노약자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구간이다. 그래선지 입구에 당나귀를 타고 내려갈 수 있다는 안내판을 붙여놓았다. 편도에 ‘10유로란다.

 당나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당나귀는 항구와 절벽 위의 마을을 잇는 주요 이동수단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케이블카가 들어서면서 이젠 관광용으로 쓰임새가 바뀌었고, ‘동키 택시(donkey taxi)’로 불리는 산토리니의 명물이 됐다. 그렇다면 저곳은 ‘donkey station’쯤으로 부르면 되겠다. 상부의 택시 승강장?

 (Donkey Way To Fira)은 아찔한 바위절벽을 헤집으며 나있다. 가장자리로 다가가보면 발아래로 비취빛 지중해가 아스라이 펼쳐진다. 무섭다는 얘기다. 절벽 쪽으로 난간을 둘렀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계단을 놓았으나 가파르기는 매한가지. 벼랑은 이마저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일정한 간격으로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면서 겨우겨우 아래로 내려간다. ! 항구를 살펴본 다음 마을로 되돌아올 때 절대 걷지 말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당나귀들이 싸 놓은 똥들이 풍기는 지독한 냄새를 감수할 요량이 아니라면. 아무튼 지금까지 맡아 본 동물의 배설물 냄새 중 가장 심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숨결 속에 그 냄새가 들어있다고 생각해보라.

 오르내리는 여행객들의 버거움을 산토리니 당국도 알았나보다. 중간에 저런 쉼터를 만들어 두었다. 나무도 심어놓아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까지 만들어 주겠다.

 물품보관 창고로 여겨지는 건물도 눈에 띈다. 턱이 진 계단 길, 바닥은 돌과 회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 파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 누군가는 보수를 해야 할 것이고, 그 때마다 자재를 운반해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길의 보수는 동키 택시의 기사들이 하고 있는 모양이다. 택시를 옆에 세워둔 채 모르타르(mortar)를 만드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길을 걷는 내내 올드 포트(old port)’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였다. 아티니오스에 신항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중요한 상업 항구였지만 현재는 관광용 항구 역할만 수행한다.

 내려가는데도 땀이 줄줄 흐른다. 3월 하순이니 이른 봄이라 할 수 있겠건만 지중해의 날씨는 벌써 여름을 재촉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얼마를 내려갔을까 또 다른 동키 스테이션이 보인다. 600여 개나 된다는 계단길이 끝나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땀을 한바가지나 쏟고 나서야 도착한 항구, 이왕에 내려왔으니 가슴 가슴마다 산토리니의 추억을 담뿍 담아가란다. 저렴한 가격에 모시겠다나?

 낚시 투어도 진행되는 모양이다. 수년 전, 다른 여행지에 갔다가 참치 낚싯배를 탄 일이 있었다. 초장에 양주까지 넉넉히 준비해 갔지만 결과는 전무, 만일을 대비해 가져갔던 햄버거로 허기를 채우며 툴툴댔던 추억이 솔솔...

 작은 고깃배 대여섯 척이 전부인 포구는 한가롭기 그지없다. 수심이 얕아 큼지막한 배는 접근조차 할 수 없겠다. 관광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새로운 항구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wine shop은 문이 닫혀있다. 열렸다고 해도 살 생각은 없었지만...

 항구 주변은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항구를 감싸는 바위벼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데, 그 난간에 걸터앉은 건물 몇 채가 빈틈까지 메워준다. 하지만 기능을 잃어버린 항구처럼 자신의 몫을 다 했다는 듯 빈 건물로 남아있다. 하나 더, 저런 경관도 찬찬히 살펴볼 수가 없었다. 그늘진 곳은 모두 레스토랑이 차지했고, 거기다 호객을 하는 종업원들 때문에 오가는 것조차도 자유롭지 못했다.

 바다에는 크루즈 선박들이 정박해 있었다. 맞다. 산토리니는 최근 전 세계인들이 떠나고 싶은 유럽 여름휴양지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바 있다. 스페인의 이비사섬과 스페인 카나리아 섬 테네리페가 그 뒤를 잇는다. 조사기관인 CV빌라는 황금 일몰, 따뜻한 기온, 놀라운 풍경으로 유명한 산토리니가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명소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평까지 덧붙였었다.

 크루즈에서 내린 여행객들로 늘 붐비는 만큼, 항구 주변에 카페, 레스토랑, 상점 등이 늘어서 있다. 에게 해 푸른 바다나 칼데라 절벽을 눈에 담으며 맥주 한잔 하거나, 지중해식 음식 한 상을 즐겨보는 것도 좋을 듯.

 요트를 타고 화산 섬인 네아 카메니(Nea Kameni)와 팔레아 카메니(Palea Kameni) 등 인근 화산섬들을 돌아볼 수도 있다.

 절벽 위(마을)로 올라갈 때는 케이블카를 이용했다. 과거에는 카라볼라데스 계단(Karavolades Stairs)이 절벽 위로 올라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2년 케이블카가 놓이면서 선택에 자유가 주어졌다. 다만 6유로의 탑승료(편도)는 내야한다.

 대합실(Lower Station). 관광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분들의 정체는 대체 뭘까?

 케이블카는 단체로 움직이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캐빈에 타고 있는데도 우리가 마지막 캐빈에 오를 때까지 멈춘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다본 세상. 네아 카메니, 팔레아 카메니 섬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인다. 그게 또 크루즈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참고로 저 섬들은 산토리니의 화산지형을 고스란히 담아낸 곳으로 알려진다. 네아 카메니는 분화구까지 트레킹이 가능하고, 팔레아 카메니는 유황온천에서 헤엄을 칠 수도 있단다.

 눈앞에 펼쳐지는 피라마을은 이아(Oia) 마을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사실 여행자들에게 피라(Fira)는 낯선 편이다. 머릿속에 산토리니가 곧 이아(Oia)’라고 기억시켜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벼랑에 걸터앉은 하얀 마을, 좁은 골목 등 이아마을과 별간 다르지가 않다.

 티리시아(Nisos Thirasia)’ 섬도 눈에 들어온다. 본래는 산토리니 본 섬과 한몸이었는데, 수천 년 전 화산폭발로 갈라졌다고 전해진다. 그 오른쪽, 절벽에 매달려 있는 듯한 마을은 피로스테파니(Firostefani)’가 아닐까 싶다. 뷰포인트로 소문난 세 개의 종 교회(Three Bells of Fira iconic viewpoint)’를 옆에 끼고 있다는...

 상부 승강장(Upper Station)에서 내려 마을 투어에 들어간다. 메인 골목을 따라 끄트머리까지 간다. 클럽으로 흥청거리는 에리트루 스타부르 거리, 보석가게들이 즐비한 골드 스트리트, 고대 그리스의 공예품들을 판매하는 이파판티스 거리 등이 이방인의 발길을 유혹한다.(지명은 여행칼럼니스트인 서진님의 글에서 빌려왔다)

 피라마을도 교회가 참 많았다. 1990년대 말. 보고 일정에 쫓길 때마다 새벽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스름을 헤치며 차를 몰다가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십자가 불빛을 보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 교회를 믿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이곳 산토리니는 거짓말 좀 보태 열 집 건너 한 집이 교회라고 할 정도다. 그리스 국민의 95% 이상이 기독교인이라는 통계가 실감이 난다.

 산토리니의 골목길을 비좁다. 도로도 비슷한 형편이다. 아니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 대부분이 마찬가지라고 보면 되겠다. 애초에 자동차가 아닌 마차나 사람의 통행을 고려해 설계됐기 때문이다. 아무튼 굳이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그 골목들을 헤매는 게 피라마을 여행의 묘미다. 절벽에 빼곡히 늘어선 집과 그 골목사이를 걷다가, 흰 담벼락의 계단에 서서 아름다운 블루와 화이트의 조화를 감상한다.

 얼마쯤 걸었을까 길이 많이 넓어졌다. 오른쪽으로는 시야까지 열린다. 사진 찍기 딱 좋은 장소다. 끊임없이 눌러대는 카메라 셔터를 타고 산토리니의 다양한 풍경들이 프레임 속에 담긴다.

 산토리니의 일상. 엄마야 조급하건 말건 아이는 마냥 즐겁다. 저런 소소한 일상들이 모여 산토리니와 사랑에 빠지게 하지 않나 싶다. 거기에 신이 빚어낸 환상의 풍경이 더해지면서...

 아틀란티스 호텔. 아틀란티스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는 대륙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산토리니가 바로 그 사라진 대륙이라고 믿는다. 호텔의 이름을 아틀란티스로 삼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피라 마을은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는 새하얀 집이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에게 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바(Bar)나 카페, 레스토랑, 호텔이 들어섰다.

 그런데 테라스를 라운지 삼은 게 특이하다. 맞다. 어느 여행 작가는 그리스식 레스토랑인 타베르나도 절벽 사이에 테이블을 갖춰야 명당으로 꼽힌다고 했었다.

 피라의 가장 큰 특징은 집들이 하나같이 벼랑에 기대여 지어졌다는 점이다. 흰 테라스를 품은 집들이 벼랑 아래 계단을 따라 자리를 채운다. 어렵사리 담과 담을 비집고 골목도 생겨났다. 벽을 흰색으로 칠하고 창틀은 바다를 닮은 코발트색으로 칠했다. 그게 입소문을 타면서 이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 되었다.

 푸른 대문의 집들 사이로 미로처럼 나 있는 좁은 골목 길. ‘피라에서는 아랫집 지붕은 윗집 테라스가 된다. 사람들은 그 테라스에 누워 에게 해의 바람을 맞으며 일광욕을 즐긴다.

 마을을 벗어난 북쪽 끝, 집들은 없고 봉우리에 원통형 바위만 뽈록하니 솟아올랐다. 산토리니 최고의 전망대로 알려지는 스카로스 바위(Skaros Rock)’ 18세기까지 베네치안 귀족들이 거주하는 산토리니의 수도였다고 한다.

 큰길가에 박물관이 있다기에 찾아보기로 했다. 절벽의 가장자리를 벗어나자 길을 따라 전통식당인 타베르나(taverna)와 가게들이 몰려 있었다.

 박물관 앞의 큰길, 산토리니의 여유로움은 읽혀지지 않았다. 대형 슈퍼마켓과 버스·택시 터미널, 행정관서와 박물관 등 핵심시설들이 들어서 있는 길가 풍경은 산토리니라기 보다는 아테네의 변두리 어디쯤에 더 가까워 보였다. 덕분에 슬로시티를 연상해온 내 상념은 확 날아가 버렸다.

 큰길가에 선사 박물관(The Museum of Prehistoric)과 고고학 박물관(Archeological Museum)이 있었다. 선사 시대와 고대를 일부러 나누어서 박물관을 운영할 만큼 관련 유물과 자료가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대 화산폭발로 파괴된 청동기 시대의 도시인 아크로티리(Akrotiri)’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단다. 박물관 1층에는 주로 기원전 17세기의 도자기, 오브제 등이, 지하에는 아크로티리의 건물을 장식했던 벽화(프레스코화)를 전시하고 있다.

 초기 키클라데스 시대(BC 2700-2400)의 대리석 조각상들

 기원전 17세기 탁자

 초기 키클라데스 시대(BC 2700-2400) 청동 단검

 후기 키클라데스 시대(BC 17세기 초) 도자기 물병, 주전자 등

 황금으로 만든 염소. 아크로티리에서 발견된 유일한 황금 조각상이란다. 이로보아 화산 폭발 때 주민들이 고가품들을 들고 대피했을 것이라나?

 아크로티리 벽화.

 아크로티리 유적지 조감도. ‘아크로티리 유적 BC1650~1500년 사이에 일어난 화산 폭발로 인해 화산재와 진흙에 묻혔던 청동기시대 미노아문명의 유적이다. 1967년부터 발굴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유적을 통해 당시 산토리니 섬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크레타와 교류했고 2~3층의 건물에서 생활했다. 놀랍게도 상하수도 시설을 갖춘 도시였으며 수세식 변기가 있는 집도 발견됐다.

 점심은 큰길가에서 했다. 벼랑 위에 지어진 테라스 형 카페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경관이야 실컷 봤으니 오롯이 식사나 즐기자는 집사람의 주장을 따랐다. 대신 집사람의 입맛에 딱 맞는 연어스테이크에 해산물스파게티를 먹었다. 빈산토(Vinsanto)와 동키 맥주를 반주로 곁들였음은 물론이다.

여행지 : 산토리니(Santorini), 이아(Oia) 마을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 여행의 단골 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고 너무도 많이 소개가 된 곳이라 다시 거론하기 새삼스러울 정도지만 그래도 그리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바다, 그리고 하늘의 색깔을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어느 곳, 어떤 시간에서도 경험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풍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산토리니는 대략 울릉도 크기만 한 본섬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그 섬 안에 피라와 이아, 카마리 등 여러 마을들이 산재해 있다.

 

 섬 최북단에 있는 이아(Oia) 마을은 산토리니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로 피라(산토리니의 수도)와 더불어 산토리니를 대표하는 마을이다. 하얀 집과 파란 지붕,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산토리니의 풍경을 간직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둘째 날 오후는 이아마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세계 3대 일몰이라는 굴라스 성채에서의 해넘이까지 지켜본 다음, 셔틀버스를 이용해 숙소로 돌아오면 된다.

 마을을 둘러보는 방법은 단순하다. 칼데라의 비탈에 기댄 마을을 종단하는 메인 골목(차량이 다닐 수 있는 구간도 있다)을 따라 걷다가 심심찮게 나뉘는 골목들을 기웃거리면 된다. 마을이 크지 않기 때문에 한나절이면 속속들이 둘러볼 수 있다.

 이아마을도 역시 셔틀버스로 이동했다. 차에서 내리니 당나귀가 반긴다. 산토리니의 교통수단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귀하신 몸이다. 마을 골목들이 하나같이 좁은데다 계단으로 이루어진 탓에, 자동차의 통행이 불가능해서 불편하지만 당나귀로 짐을 운반할 수밖에 없단다.

 마을 중심광장은 산토리니에서는 보기 드물게 넓었다. 그래선지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을 만남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었다. 하나 더, 광장의 랜드 마크는 파나기아 플라차니 교회(Church of Panagia Akathistos Hymn)’라고 했다. 파란색 돔과 아치형 창문이 특징이며,  6개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모양의 종탑이 이 교회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교회 전면의 저 이콘(icon)은 뭘 의미하는 걸까. 요한계시록의 주 하나님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가 떠오르는데...

 일단은 인증사진부터. 비취빛으로 물든 지중해는 하늘을 쏙 빼다 닮았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바다인지 도무지 구분되지 않는다.

 이아마을은 산토리니 여행의 진수를 보여준다. 에게해의 멋진 조망과 산토리니를 상징하는 흰색 건물들, 누군가는 저런 풍경을 일러 로맨스의 대명사라고 했다. 신혼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나 프러포즈나 서약을 원하는 커플들이 가장 원하는 풍경이라면서 말이다.

 저 멀리, 칼데라에 걸터앉은 또 다른 마을은 피라마을일 것이다.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다는 느낌이다.

 계단식의 하얀 집과 풍차가 있는 절벽마을 이아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산토리니와 동의어가 되었다. 흰색 건물, 조약돌 거리, 마을 곳곳에 있는 파란색 돔, 건축은 종종 아치형의 곡선미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키클라데스와 베네치아의 영향이 혼합된 산토리니의 독특한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먼저 메인 골목을 따라 왼쪽으로 간다. 칼데라가 만들어놓은 절벽의 난간을 따라 길이 나있는 모양새인데, 에게해 쪽 비탈진 벼랑에는 흡사 제비집이라도 되는 양 집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그리스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경치가 오른쪽으로 펼쳐진다. 푸른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그리스 국기처럼 푸른 바다와 흰색 건물이 상징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잠시 후 작은 공원을 만났다. 아니 교회의 종탑이 세워져있는 거나 둥그런 돔에 ‘holy place’이니 ‘climb on the church’라는 경고문이 적혀있는 걸 보면 교회의 옥상일지도 모르겠다.

 화환이 받쳐져 있는가 하면, 그리스 젊은이들이 기도를 드리고 가는 저 빗돌은 대체 뭘 기념하고 있을까? 그나저나 이아마을에서도 국기가 자주 눈에 띄었다. 펄럭이는 그리스 국기마저도 하얀색 파란색으로 매우 산토리니스럽다.

 아랫도리를 하얀색 옷으로 갈아입은 저 소나무도 극히 산토리니스러운 풍경이라 하겠다.

 이아마을은 볼거리로 넘친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작품을 판매하는 갤러리가 많고 아기자기한 기념품과 산토리니의 특산품, 옷가지, 액세서리 등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골목의 좁은 길을 따라 자리 잡았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어느 하나 환상적이지 않는 게 없다. 하얀 집들이 예쁘고 곳곳에 피어있는 꽃들도 아름답고 파아란 하늘도 멋지다.

 저 집은 이제 막 페인트칠을 끝냈나 보다. 이곳 산토리니는 벽을 더럽혀진 채로 방치해 두면 꽤 비싼 벌금을 부과하고 있단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감에도 불구하고 일 년 내내 새하얀 벽을 유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아마을에서는 앉으면 앉은 대로, 그곳이 바로 포토죤으로 변하고 또 핫 플레이스가 된다.

 빼어난 주변 풍광에 푹 빠져 얼마를 걸었을까 그리스정교회가 쌍으로 들어선 광장에 이른다. 하얀색 벽과 파란색 돔은 산토리니의 상징이라서 사진이나 그림엽서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거기에 에게해의 조망까지 더한 탓인지 카메라를 든 젊은이들이 꽤 여럿 눈에 띈다.

 그중 하나가 19세기 초에 지어진 성 지오르지오교회(Saint Georgios Ola Holy Orthodox Church)’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산토리니의 교회는 보통 작고 단순하며 하나의 네이브와 종탑이 있다. 내부는 성경과 성도들의 삶을 묘사한 프레스코화와 아이콘으로 장식되어 있다.

 교회 앞, 저 동상은 대체 누구일까? 그리스를 여행하다보면 심심찮게 동상을 만난다. 하지만 하나같이 영어 병기를 해놓지 않아 주인공의 정체는 알아낼 수 없었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문득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는 참아왔던 감탄사를 터뜨린다. 나 역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것도 잊은 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빠져들었다. 세상 모든 사랑이 모여 섬이 된다면 이런 모습일까?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다.

 눈에 띄는 저 수영장은 어느 호텔의 소유일 것이다. 이아마을에 있는 대부분의 호텔은 길고 긴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벼랑에 기대어 지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수영장도 따로 만들지 않고 건물에 포함되어 있는 게 보편적이다.

 산토리니답지 않은 풍경도 만났다. 캠핑카는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고, 모터보트와 자동차는 주인이 돌아올 날만 하염없이 기다린다.

 중심광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간다. 길은 아까보다 많이 좁아졌다. 거기다 산토리니의 마을답게 계단도 나온다.

 길은 숫제 미로(迷路). 난해하기 짝이 없는 골목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바닥에 돌들을 깔아놓고 틈새를 석회로 칠해 걷기에도 딱 좋다. 담은 희고 노랗고 때로는 푸르다. '그림 같다'는 말은 최소한 이아에서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산토리니에서는 녹슨 화포까지도 멋진 조형물이 된다.

 이아마을은 하얀색 벽과 평평한 지붕, 파란색 돔형 지붕으로 대변된다. 집들은 무리를 지어 구불구불한 거리와 골목으로 연결된다.

 깎아내린 절벽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골목을 누빈다.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 하나라도 더 보겠다는 일념인데 어딘들 못 기웃거리겠는가. 그렇게 다리품을 판 덕분에 이아마을 최고의 핫 플레이스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산토리니의 상징인 블루 돔 교회(Blue domed church Santorini)’이다.

 쨍한 푸른빛의 돔이 인상적인 블루 돔 교회 성 아나스타시교회 성 스피리돈교회를 아우른다. 산토리니를 방문한 여행객이라면 칼데라 경사면에 나란히 서있는 이 교회들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남기는 것은 필수다.

 하얀 집과 파란 돔, 에게 해의 푸른 물빛이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르게 만든다. 지붕이 파란 곳은 그리스 정교회의 돔 지붕뿐이다. 그런 교회 수십 개가 푸른빛으로 포인트를 만든다.

 이아마을의 핫 플레이스 중 하나인 아틀란티스 서점은 텅 비어 있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단다. 영국인 부부에 의해 설립된 저 서점은 동화 같은 내부 인테리어가 볼거리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서점을 찾은 여행객들이 기증하고 갔다는 각국 언어로 된 책들이 빼곡한 것도 저곳만의 매력이라고 했다. 운이라도 좋으면 쉽게 구할 수 없는 서적을 득템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선명한 흰색과 블루로 치장한 건물들이 하늘과 바다의 색감과 어우러져 아름답다.

 일몰을 대비에 굴라스(Gulas) 성채의 위치를 미리 알아두기로 했다. 집사람을 카페에 남겨두고 나 홀로 길을 나선다. 하지만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벽에 그려진 방향표시를 믿고 찾아갔으나 허사. 지역 주민에게 물어봤으나 굴라스 성채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는 눈치다.

 이때 구원의 천사가 나타났다. 싱가포르에서 왔다는 젊은 여성이 주민과 나누는 얘기를 들었다며 자신을 따라오라는 것이다. 자기는 앱으로 찾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아래 사진에서 바위 벼랑 위에 있는 거무튀튀한 건축물들이 굴라스 성채이다.

 줌으로 당겨본 성채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옛날에는 귀족들의 거주지와 여러 교회, 창고 등이 모여 있었으나, 1956년의 지진으로 인해 저런 모습으로 변했단다.

 돌을 쌓아올린 게 엉성하지만 성곽의 형태는 갖췄다. ‘성 니콜라스의 성으로도 불리는 이 요새는 15세기 베네치아가 점령했을 당시 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어졌다. 1956년 지진 때 대부분의 건축물이 무너졌고, 성의 망루만이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랑의 열쇠’. 연인들은 자물쇠를 난간에 걸고 두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 기도하듯 주문을 외운다. 우리 사랑 영원하게 해주소서. 열쇠는 힘차게 던져 바닷물 깊이 빠뜨린다. 열쇠가 없으니 자물쇠는 영원히 봉인될 것이고 우리 둘의 사랑도 끝이 없겠지. 파리의 센강에 놓인 퐁네프(Pont Neuf) 다리는 자물쇠로 유명해진 세계적 명소, 우리나라도 서울 남산 타워에 가면 퐁네프 못지않은 자물쇠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성채는 이아마을 최고의 전망대이기도 하다. 시야를 막는 게 없어 일망무제의 조망을 허락한다. 참고로 저 하얀색 건물들은 외세에 대한 저항을 담았다고 했다. 그리스가 외세에 점령당했을 때 국기 좌상단의 십자가 색을 따 외벽을 하얗게 칠했고 파랑 바탕색으로 창틀을 장식했다는 것이다.

 풍차가 멋진 오른쪽 풍경도 눈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선명한 쪽빛 바다와 햇볕 쨍하게 내려쬐는 하늘 그리고 이와 대비를 이루는 하얀색 건물과 파란 지붕들. 저런 풍경이 있었기에 포카리스웨트 CF가 성공을 거두었지 않나 싶다. 저런 청량한 풍경에다 청량감을 퐁퐁 풍기던 손예진, 사람들은 당연히 해당 음료에서 청량함을 느꼈을 것이다.

 저 아래, 그러니까 260여 개나 된다는 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옛 항구인 아무디 베이(Ammoudi Bay)’가 나온다. 생선·바다가재·새우·홍합 등 신선한 해산물로 맛있는 요리를 해준다는 선셋이란 유명 맛집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려가는 게 쉽지도 않고 눈요깃거리도 없다는 가이드의 귀띔에 넘어가주기로 했다. 어제 저녁에 먹은 해산물 믹스그릴의 비싼 가격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옛 방앗간인 풍차 역시 이아마을을 대표하는 사진 명소이다. 풍차를 배경으로 삼으면 인생샷 하나쯤은 거뜬하게 건질 수 있단다.

 그림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 같은 저 풍차는 현재 숙박시설로 제공되고 있단다. 내부에 침실과 욕실은 물론이고 작은 부엌까지 구비하고 있다나? 하지만 하도 인기가 많아 8개월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하룻밤 묵어갈 수 있다니 참조한다.

 이아마을은 현재 진행형이다.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고공 크레인이 분주히 움직인다.

 다시 돌아온 굴라스 성채’. 일몰이 가까워지자 여행객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희고 푸른 이아마을과 이와 대비되는 붉은 노을을 360도로 돌려가며 감상한다. 그게 산토리니 여행의 백미로 꼽힌다나?

 해질 무렵이 되자 성채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도 없어진다.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피부의 사람들, 인종 전시장이라고나 할까? 동일한 특징도 보인다. 나라에 관계없이 커플이 주류를 이룬다.

 마을 너머 작은 섬 위로 해가 지고 붉은빛은 바다를 검게 물들인 뒤 하얀 마을 위에 내린다.

 이아마을의 자랑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석양이다. 바다가 보이는 절벽이라면 어디서든 일몰을 감상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곳 굴라스 성채가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절벽 위의 집들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마을 전체는 고요에 휩싸인다.

 메인광장으로 되돌아오는 길, 골목은 황홀하게 반짝이는 보석 진열대로 변해있었다. 지중해의 보석이라는 산토리니가 진짜 보석으로 환생이라도 한 듯이...

여행지 : 산토리니(Santorini), 피르고스(Pirgos) 마을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 여행의 단골 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고 너무도 많이 소개가 된 곳이라 다시 거론하기 새삼스러울 정도지만 그래도 그리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바다, 그리고 하늘의 색깔을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어느 곳, 어떤 시간에서도 경험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풍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산토리니는 대략 울릉도 크기만 한 본섬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그 섬 안에 피라와 이아, 카마리 등 여러 마을들이 산재해 있다.

 

 두 번째 방문지는 피르고스 칼리스티스 (Pirgos Kallistis)’. 줄여서 피르고스라 부르는데, 이아나 파라 마을은 항상 붐비는데 비해 피르고스는 덜 알려져 여유로운 관광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인기가 높다. 19세기 초까지 산토리니의 수도였던 곳이라서 고전 건축물과 웅장한 교회 건물들을 둘러보는 재미도 있다. 산토리니 제일의 조망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초승달처럼 생긴 산토리니는 푸른 바다, 하얀 벽, 파란 지붕, 그리고 절벽 가옥과 아찔한 골목으로 여행자의 심장을 쿵쿵 두드려주는 세기의 여행지다. 서쪽은 깎아지른 바위절벽, 반면에 오른쪽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해안선을 끼고 있다.

 주차장에 내려 본격적인 투어에 들어간다. 피르고스는 산토리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그러니 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야함은 물론이다. 나중에는 숨이 찰 정도로 가팔라지기도 하지만.

 골목길 바닥은 돌을 깔았다. 아니 바닥에 돌을 깔아놓고 그 틈새를 석회로 채웠다. 콘크리트를 타설하면서 자갈 대신 돌멩이를 넣었다고 여기면 될 듯. 그런 골목길을 잠시 오르자 커다란 교회가 고개를 내민다. ‘크리스토스 교회(Church Christos)’로 팔각 종탑이 눈길을 끈다. 이게 또 5층 높이라서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저런 팔각 큐폴라(cupola)는 산토리니(유일하다)뿐만 아니라 그리스에서도 드물기 때문에 건축학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단다.

 관광객들이 모여드니 기념품 가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리스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컵과 미니어처, 색체가 강렬한 그릇까지 어느 하나 욕심나지 않는 게 없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의 초반, 끓어오르는 구매욕을 꾸역꾸역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짐의 무게가 늘어날수록 여행이 힘들어지니까.

 산토리니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마저도 신비롭다. 옛 유적을 본뜬 외관으로 관광객들의 시선을 이끈다. 아니 잔존 유적을 활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카페나 레스토랑이라고 빠지겠는가. ‘Cava alta’, 지중해 요리로 유명한 곳인데, 예약이 필수란다. 입구에 붙어있는 ‘Crazy donkey’ 팻말은 산토리니에 생산되는 맥주를 곁들이면 분위기 된다는 얘기일까? 하나 더, 카페 입구에는 들어올 때는 낯선 사람이지만 나갈 때는 친구이다라는 글귀가 낯선 사람에 대한 친절을 의미하는 ‘philoxenia’라는 단어와 함께 적혀 있었다.

 산토리니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다는 마을은 우리네의 옛 달동네처럼 집들이 산비탈에 기대어 지어졌다. 그래선지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하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것 같다. 오르막길을 고집하면 옛 성터이자 정상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 부부는 길을 잃고 말았다. 성채로 오르는 문을 놓쳐버린 탓에 성곽(비잔틴양식이라고 했다) 아래를 한참이나 헤매고 다녔다. 참고로 그리스어로 피르고스(Pirgos) ‘Tower’를 의미한다. 중세 때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비탈에 지어졌는데, 처음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기지였던 셈이다. 그러다 해적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성벽 바깥에도 마을이 형성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단다.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성곽을 반 바퀴나 돌았다. 인적이 뚝 끊긴 길은 오랫동안 방치된 성채의 아래로 위태롭게 나있다. 하지만 그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나 할까? 정규 탐방로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특이한 풍경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리조리 헤매다보면 암굴처럼 생긴 공간을 지나기도 한다. 주택의 아래로 난 통로가 영락없는 굴다리.

 벼랑에 기대듯, 아니 계단을 쌓아올리듯 지어놓은 주택은 하나같이 텅 비어있다. 기웃거려보니 텅 빈 공간에 틀만 남은 창문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오래 전에 폐허가 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탁 트인 전망도 이 구간의 볼거리다. 산토리니의 북서쪽 끝자락에 들어앉은 이아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왼편에 있는 섬은 티라시아일 것이다.

 들녘으로 이루어진 동쪽 해안도 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의 섬은 ‘Anafi’일 것이다.

 한참을 헤매다가 반대편으로 내려오니 관광객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쫓아 성채로 올라갔다.

 옛 냄새를 폴폴 풍기는 건물이 눈에 띈다. 맞다. 안내책자는 피르고스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마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묵은 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저 건물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성 니콜라오스 성당(Agios Nikolaos)’이라고 한다. 1660년에 지어진 지붕이 돔형인 바실리카이며, 성당 입구의 빗돌은 산토리니 섬의 전쟁 기념비라고 했다. 그건 그렇고 이 성당은 길 찾기에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성당 부근에 성채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기 때문이다.

 피르고스의 성채는 15세기에 세워진 산토리니의 다섯 성채 중 하나이다. 이 문은 성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데, 외부의 침입이 있을 경우 문을 닫아 주민들을 보호했다.

 피르고스는 산토리니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였고, 1980년까지는 산토리니의 행정 수도였다. 그래선지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은 하나같이 낡았다. 아니 정상 어림은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 듯 텅텅 비어있었다. 덕분에 골목을 걷다보면 중세시대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을 꼭대기에는 카스텔리 성(Kasteli castle)’이 있다. 아니 그 터만 덩그러니 남았다. 성은 15세기 후반 베네치아인들이 당시 지중해에 만연했던 해적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그 필요성이 소멸됐고, 이제는 폐허로 남아 관광객들의 눈요깃감이 되어준다.

 정상의 높이는 기껏해야 350m쯤 된다고 했다. 하지만 산토리니에서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란다. 덕분에 산토리니의 모든 방향을 파노라마처럼 둘러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사진부터 찍고 보자. 여행이란 게 본디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가 아니겠는가.

 툭 트인 조망은 산토리니의 칼데라(caldera)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 난간에 피라마을이 걸터앉았다. 남쪽 맨 끄트머리에는 아크로티리마을이 있다. 땅 속에 파묻혀있던 유적지가 인근에서 발견됐고, 이를 유료 박물관으로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시선을 오른쪽, 즉 산토리니의 서북단 끄트머리로 옮기면. 선셋으로 유명한 이아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반대편, 동쪽해안은 광활하지는 않지만 평야지대다. 그래선지 공항이 들어서있고, 꽈리 튼 포도나무를 심어놓은 들녘도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세인트 조지 성당(Saint George Church)’이 있었다. 1680년에 지어진 아치형 바실리카로 예언자 엘리아스(Elias)의 수도원에 소속된 성당이라고 한다. 하나 더, 교회 입구에는 ‘Collection of icons and ecclesiastical objects of Pyrgos’라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성당 내부에 이콘 및 성물 컬렉션이 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기척이 없어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 아쉬움은 입구의 예수님을 안은 성모상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정상의 광장은 카페 보르타고(Botargo)’가 야외 홀로 이용하고 있었다.

 피르고스도 눈만 들면 교회다. 이 마을에는 48개의 교회가 있다고 했다. 그것도 모두가 정교회란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내부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족교회이기 때문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니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피르고스를 중심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하이킹코스가 개설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리스 와인은 신화에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깊다. 특히 이곳 산토리니의 와인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그러니 어찌 와이너리 하나쯤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산토리니의 포도재배 역사는 기원전 약 12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착 품종인 아시리티코(Assyritiko) 백포도가 재배되는데, 이로부터 얻어지는 와인은 강한 시트러스 향을 특징으로 한다.

 산토리니의 와이너리들은 대부분 시음을 포함한 투어를 진행하므로, 제조 과정과 함께 신선한 와인을 맛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찾은 곳이 쿠초얀노풀로스 와이너리’. 4대에 걸쳐 와인을 제조하고 있는 쿠초얀노풀로스 가문의 와이너리로, 산토리니의 유명 와이너리답게 이곳도 역시 부설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와인생산에 사용되는 각종 기자재들을 전시해 놓았다. 덩치가 크다보니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모양이다.

 박물관으로 안내해주는 저 조형물은 대체 누구를 형상화한 것일까?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여야 맞을 것 같은데, 하반신은 말이고 상반신만 인간인 켄타우로스를 닮았다. 신화 속 켄타우로스는 포도주를 마셨을 경우 엄청나게 취하는 것으로 나오던데...

 박물관은 와인을 저장하던 지하 8m 아래 동굴에 만들어 놓았다. 1660년부터 1970년까지 300년간 와인 저장고로 사용하던 동굴에 포도주 제조과정의 단계와 기계류들을 연대순으로 전시했다.

 미로처럼 얽힌 동굴을 걸으며 산토리니 와인에 대해 알아간다. 산토리니 와인의 역사와 재배업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도록 각종 전시물을 배치했다.

 산토리니 와인을 대표하는 빈산토(Vinsanto)’를 담았던 통인가 보다. 산토리니 주민들은 수천 년 전부터 만들어왔던 전통방식을 재현해냈다. 화이트와인을 만드는 아씨리티코(Assyrtiko)’ 품종의 포도를 바로 수확하지 않고 2주 정도 햇볕에 더 노출시켰다가 당도가 훨씬 높아졌을 때 수확한단다. 참고로 빈산토는 섬의 이름인 산토(Santo)와 와인이란 뜻의 이탈리아어 (Vin)’이 합성됐다. 산토리니에서 생산된 와인이 세계적 명성을 떨칠 때 원산지를 표시하기 위해 포장지에 적었는데, 이게 와인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농원의 쟁기질, 포도나무 가지치기, 과실 수확, 포도 밟기 등 제조과정을 24개의 과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한국어를 포함한 14개의 언어로 자동음성 안내를 해주는 번역기도 제공된다.

 와이너리는 포도를 재배하고, 그 수확물로 와인을 만드는 곳이다. 그 와인은 마트나 카페로 판매된다. 하나의 기업인 셈이다. 그러니 이에 대한 기록은 필수, 박물관은 이때 생긴 기록물들까지 전시하고 있었다.

 이곳은 정교회의 나라. 와이너리를 이끌어온 조상들의 사진과 함께 성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

 박물관 투어가 끝나면 20여 종류의 와인이 진열된 시음장으로 안내된다. 하지만 시음은 4가지 종류만 제공된다.

 매장에서의 와인 구매로 투어의 마지막을 장식함은 물론이다. 참고로 산토리니 와인은 한때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도 했었다. 지금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밀려 지역 특산품쯤으로 취급되지만, 수천 년 전부터 빚어왔다는 전통 와인에 대한 산토리니 주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고 했다.

 밖으로 나오면 포도밭, 이곳에서 우린 산토리니 특유의 포도나무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제껏 보아온 선입견은 떨쳐버려야 한다. 포도나무의 높이가 무릎에도 차지 않을 정도인데, 그게 또 위나 옆으로 자라는 게 아니라 큰 새의 둥지처럼 원형으로 말아놓았기 때문이다. 이는 거친 바람과 강한 햇빛으로부터의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만들어낸 독특한 가지치기 방식(‘Koulara’ 재배법)으로 인해 생긴 형상이라고 한다.

 와이너리를 빠져나오다 만난 꽃이 하도 예뻐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 여행의 단골 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고 너무도 많이 소개가 된 곳이라 다시 거론하기 새삼스러울 정도지만 그래도 그리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바다, 그리고 하늘의 색깔을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어느 곳, 어떤 시간에서도 경험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풍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산토리니는 대략 울릉도 크기만 한 본섬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그 섬 안에 피라와 이아, 카마리 등 여러 마을들이 산재해 있다.

 

 첫 방문지는 메사리아마을이다. 3일 동안 머무를 호텔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섬의 동쪽 해변과 인접한 평지에 마을이 들어서있는데, 인근에 산토리니 공항이 위치하고 있다.

 산토리니는 에게 해에 있는 작은 섬이다. 때문에 피레우스 항(아테네의 외항으로 최고의 산업항구다)에서 배를 타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아니 돈을 조금 더 쓰고 비행기(45)로 들어갈 수도 있다. 배도 급행 쾌속선(4시간)과 완행 페리( 8시간)로 나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초승달처럼 생긴 산토리니는 푸른 바다, 하얀 벽, 파란 지붕, 그리고 절벽 가옥과 아찔한 골목으로 여행자의 심장을 쿵쿵 두드려주는 세기의 여행지다. 서쪽은 깎아지른 바위절벽, 반면에 오른쪽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해안선을 끼고 있다.

 여행사는 이동수단 중 가장 싼 완행 페리를 이용하고 있었다. 호텔에서 나눠주는 아침식사 대용 도시락(·쥬스·사과·생수)를 하나씩 챙겨들고 승선인원이 2,500명이나 된다는 초대형 선박 블루 스타에 오른다. 좌석은 이코노미. VIP나 침대석 등 선택의 폭이 넓으나 여행사는 이 역시도 가장 싼 좌석을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 안에 식당·카페·미니마켓 등 편의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어 이용에 어려움은 없다.

 완행 페리이어선지 산토리니로 가는 도중 두 곳을 경유하고 있었다. 첫 번째로 들른 섬은 파로스(Paros)’. 에게 해에 있는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낙소스 다음으로 큰 섬이며, 반투명한 백색의 파리아 대리석이 생산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섬은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한다. 신화 속 파로스는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귀향하던 메넬라오스가 탄 귀향선의 선장 이름이다. 그는 메넬라오스 일행이 풍랑에 밀려 이집트 연안의 섬에 표착했을 때 뱀에 물려 사망한다. 그리고 그 섬의 이름이 됐다.

 선창은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사진에는 안 나오지만 배를 빠져나가는 차량들도 꽤 여럿이다. 참고로 블루스타 호는 사람 말고도 꽤 많은 숫자의 차량을 함께 태운다. 내부에는 간단한 음료를 즐길 수 있는 바와 레스토랑, 선물 용품점이 있으며 좌석은 흡연석과 금연석으로 구분된다.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도 구비돼 있어 배에서도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들른 섬은 낙소스(Naxos). 그리스 신화에서 크레타의 미궁에서 빠져나온 테세우스가 잠든 아리아드네를 버려두고 간 섬으로 유명하다. 아리아드네는 축제와 술의 신이자 낙소스의 수호신인 디오니소스에게 발견되어 그의 아내가 된다. 죽은 뒤에는 제우스신의 배려로 북쪽왕관자리라는 별자리가 되어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섬의 끄트머리에 떡하니 걸터앉은 저 유적은 아폴론 신전의 하나만 남은 문이라고 한다. 초기 키클라데스 시대의 유적인데, 다른 부분은 다 무너져 돌무더기로만 남아있고 저 문만 온전하게 남아있다나? 아무튼 낙소스의 상징처럼 항구와 함께 그림 같은 구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패스트푸드로 때운 점심이 부실해 컵라면까지 소환할 수밖에 없었던 긴 여정, 잠을 청하려고 산 맥주는 소주까지 섞어가며 마셨다. 그렇게 8시간을 보낸 후에야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산토리니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뱃전에서 만난 첫 도시는 이아마을이다. 산토리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산토리니 여행의 중심이 된다. 특히 저 마을에서 바라보는 황금빛 노을은 세계 3대 일몰로 꼽힌다.

 두 번째로 얼굴을 내미는 건 산토리니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피라마을’. 에게 해와 화산절벽이 만나는 칼데라 지형에 매달려 있다.

 갈 지()’자를 써가며 항구(old port)로 내려가는 길이 선명하다. 피라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코스로, 대부분은 당나귀를 타고 저 길을 따라 바닷가까지 내려온다.

 섬은 온통 바위, 그것도 서슬 시퍼런 절벽으로 이루어졌다. 화산 폭발로 인해 섬이 쪼개지면서 생긴 단애라고 한다.

 수직의 바위절벽 위에 하얀 마을이 걸터앉았다. 잡티가 하나도 없는 순백의 마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산토리니의 전형적인 풍경이라 하겠다.

 잠시 후 도착한 아티니오스(Athinios)’항은 천 길 낭떠러지 아래 있었다. 절벽을 깎아 땅을 만들고 배가 정박할 수 있도록 항구를 조성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뒤로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가 보인다. 절벽을 깎아 길을 냈는데, 한 번에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겨우 올라간다.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그 배를 타려는 또 다른 사람들로 선착장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민박집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우르르 몰려들기도 한다. 본격적인 성수기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이 정도라면 산토리니는 역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섬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맞다. 성수기인 7~8월에는 저렇게 큰 페리인데도 좌석 구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 항구에는 카페, 레스토랑,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호텔을 연결해주는 안내소도 눈에 띈다. 하지만 간판의 대부분은 렌터카가 차지하고 있었다. 산토리니에서는 대중교통 이용이 불편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깎아지른 바위절벽을 기다시피 오르고 있는 차량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같이 굼벵이 걸음으로 기다시피 오르고 있다. 바위절벽을 깎아 길을 내가보니 폭에 한계가 있었나 보다. 거기에 조금 전 크루즈에서 내린 차량들이 한꺼번에 올라가면서 체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말이다.

 숙소는 메사리아 마을에 있는 칼마 호텔이다. 3성급의 자그만 호텔이지만 화이트와 블루가 예술에 가깝게 어우러지는 조화, 산토리니가 자랑하는 시그니처 컬러이다. 거기에 지중해의 푸른 바다가 내다보이는 뛰어난 를 더했다.

▼ 제법 큰 수영장도 있었다. 하지만 성수기가 아니어선지 물은 채워놓지 않았다.

 독립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놓은 발코니도 자랑거리다. 덕분에 우린 몽키 맥주(옐로우·레드·크레이지가 출시되고 있었다)와 우조(Ouzo)로 피로연 분위기를 낼 수 있었다. 우조의 야릇한 향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우조는 포도를 증류시킨 40도가 넘는 독주다. 거기에 아니스 향을 가미했다. 때문에 치약냄새가 나서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다.

 발코니에서는 산토리니의 다양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구릉지는 기본, 황폐하지만 산도 있었고, 바다 방향으로는 작지만 들녘도 분포되어 있었다.

 이제 메사리아 마을을 둘러볼 차례다. 메사리아는 시골 냄새가 풀풀 풍기는 작은 마을이다. 베이커리나 카페, 슈퍼마켓, 렌터카서비스, 주유소, 문구점 같은 상점들도 사이좋게 하나씩 있을 정도, 하지만 있을 것은 다 있었다. 특히 레스토랑은 세 개나 눈에 띈다. 그게 메뉴 선택의 폭을 넓일 수 있었고, 홀 매니저가 추천해 준 메뉴(해산물과 육류를 각각 믹스 그릴)로 품격 있는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맥주와 우조(그리스 전통주)로 반주를 곁들였음은 물론이다.

 메사리아 마을은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이아나 피라 마을처럼 입소문을 탄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항이 가까운 지리적 여건으로 일부 관광객들이 숙소로 이용하는 정도. 때문에 길거리도 텅 비었다. 자유 일정으로 편성된 우리 일행(30명이나 되었지만)이 전부였을 정도...

 찾는 이들이 드물지만 이곳 역시 산토리니임은 분명하다. 하얀 마을로 대변되는 산토리니’. 그래선지 공원의 나무들까지도 아랫도리를 하얗게 칠해놓았다.

 가로수는 유칼립투스 나무(올리브인줄 알았는데 일행이 고쳐준다)’라고 했다. 그나저나 수령이 얼마나 오래되었기에 저렇게 굵을까?

 도로변 소공원을 지키는 저 동상은 대체 누구일까? 영문 표기가 없는데다 물어볼만한 주민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튼 그리스를 여행하다보면 저런 동상들을 시도 때도 없이 만나게 된다.

 안으로 들어가자 돌로 지은 화려한 주택이 여럿 눈에 띈다. 하지만 하나같이 텅 비어있었다. 창문도 떨어져나간 지 이미 오래다. 현지 가이드는 이곳에 고급 주택단지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폐허가 되었는지는 그녀도 모른다고 했다.

 조금 더 들어가니 Feggaropetra라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하단에는 traditional cave house라고 적어놓았다. Feggaropetra라는 이름의 전통 동굴 집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동굴 집은 산토리니의 전통 가옥 중 하나다. 화산활동으로 인해 생긴 연질의 암벽을 파서 집을 지었다.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얼마나 아름다운 장소였으면 6월의 탄생석인 월장석(moonstone)으로 이름을 삼았겠는가.

 상상속의 집을 그려가며 잠시 오르자 연질의 바위절벽이 나타난다. 바위벽에는 문도 여럿 달려있다. 동굴 가옥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산토리니는 화산활동으로 인해 생긴 섬이다. 섬 주민들은 나무가 자라기 힘든 건조하고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나무로 지은 집 대신 화산재가 쌓여 형성된 지층을 파서 만든 동굴형 주택을 통해 그들만의 특별한 주거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절벽 앞 공터는 웃자란 잡초로 무성했고, 눈에 들어오는 문들도 하나같이 유리가 없었다. 주민들이 떠난 지 이미 오래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저런 곳에서 살까 싶다. 그나저나 폐허로 변한 동굴가옥과 그 위에 지어진 현대식 주택들이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마을에는 작은 공원이 여럿 조성되어 있었다. 덕분에 올리브나무 그늘에서 모처럼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쌍쌍으로 그네까지 타가면서...

 담장 너머에서는 레몬이 무럭무럭 익어간다. 저 철망은 오가는 사람들의 손길을 거부한다는 메시지일 수도 있겠다.

 반대편 골목도 걸어보기로 했다. 메사리아 마을은 작다. 하지만 아담한 것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골목을 돌아다니다보면 때맞춰 울리는 종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리스정교회의 예배당 역시 하얀 벽에 파란 지붕, 산토리니의 시그니처를 고집한다. 그런데 교회가 많아도 너무 많다. 동네 골목까지 비집고 들어온 우리나라의 카페만큼이나...

 또 다른 정교회. 그런데 하나같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때문에 안은 들어가 볼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교회는 크건 작건 간에 대부분이 하얀색 벽에 파란색 지붕 그리고 종 3개 또는 5개가 구멍마다 달린 종탑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저렇게 예쁜 디자인으로 교회의 모습을 통일적으로 짓게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이곳은 민주주의의 요람이라는 그리스, 민주주의는 획일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찌 산토리니의 시그니처를 벗어난 순백의 교회 하나쯤 없겠는가.

 하도 많다보니 교회끼리 겹치기도 한다. 맞다. 그리스는 국민의 98% 그리스정교를 믿는다고 했다.

 특이하게 생긴 교회가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가톨릭 국가에서야 흔하겠지만 그리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외형을 지녔다.

 무턱대고 들어선 어느 예배당, 마당의 저 독수리 조형물은 무엇을 의미할까?

 산토리니에서의 자유일정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오는 도중 또 한 번의 행운이 주어졌다. ‘블루 스타호의 갑판에서 에게 해를 붉게 물들이며 사그라지는 해를 눈에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가 서서히 지면서 노을빛이 수평선을 따라 그려지는 아름다운 풍광이 연출된다.

여행지 : 수니온 곶(Cape Sounion)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 아티카반도의 남단, 아테네 남동쪽 50km 지점에 있으며 콜로나 곶이라고도 한다. 해면 가까이 높이 60m로 치솟은 절벽 위에는 아티카의 해안을 지켜주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신전(Temple of Poseidon)’이 세워져 있다. 최고의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아이게우스의 아들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붉게 타오르는 바다를 볼 수 있단다.(네이버백과 참조)

 

 차에서 내리면 관리사무소가 길손을 맞는다. 저 건물에는 식음료를 파는 카페가 들어서있다. 석류주스나 레몬주스 같은 음료를 판다니 한번쯤 들러볼 만도 하겠다. 주문한 그리스 커피와 포세이돈 신전을 나란히 놓고 인증사진을 찍어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고.

 아테네에서 가깝다보니 당일치기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여행사도 아테네에 머무르면서 잠시 다녀오는 일정으로 편성하는 게 보통이다.

 관리사무소 앞 안내판, 자국어인 그리스어와 함께 영어로 유적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저기에 한글도 들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정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저 멀리 언덕에 걸터앉은 포세이돈 신전이 눈에 들어온다. 잘라진 절벽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돌단의 대지는 이미 호메로스 시대부터 뱃사람들의 성지로서 숭경되어 왔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에는 그 위에 해신 포세이돈의 신전이 세워졌다.

 신전으로 올라가는 도중 에메랄드빛 작은 라군(lagoon)들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아름답다. 저 바다에 반한 누군가는 바다로 한없이 걸어 나가 그 속에 풍덩 잠겨보고 싶다고 했다. 그만큼 매혹적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에메랄드빛 지중해가 드넓게 펼쳐진다.

 포세이돈 신전의 역사는 기원전 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다로 나간 선원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제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터키 서쪽해안으로 향하는 배들은 모두 여기서 출항을 했단다). 그곳에 제단을 쌓아올렸다가 나중에 신전을 세웠단다. 그러다 기원전 480년에 일어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크게 파괴됐다. 도리아식 기둥만 남아있는 현재의 신전은 기원전 440년경, 그리스의 참주정치로 유명한 페리클레스 시대에 재건되었다. 하나 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인들은 나포하거나 파괴한 페르시아군의 범선들을 이곳으로 끌고 왔었다고 한다. 해전에서 승리한 아테네군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바치는 일종의 트로피였다고나 할까?

 신전은 기둥만이 외롭다. 하지만 옛날에는 사방을 촘촘히 기둥들로 둘러싸고 그 위에 천정을 덮었다. 내부에는 포세이돈의 동상이 봉헌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신전은 원래 총 3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15개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기둥의 높이는 6.1미터, 기단의 직경은 1미터인데, 지붕 쪽으로 가면 직경이 79cm로 좁아진단다.

 신전의 정면 프리즈(frieze)에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와의 싸움 장면과 아테네인들이 살라미스해전에서 페르시아에 승리하는 장면들이 새겨져 있다던 어느 탐방 기사가 문득 떠오른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조각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촘촘하게 서있는 기둥들이 신전의 웅장함을 돋보이게 만든다. 그에 비해 뒤쪽은 앙상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하나 더, 저녁이면 저 신전에 불이 들어온다고 했다. 천하일품의 일몰을 보기 위해 찾아온 여행객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로 제공된다나?

 이곳에도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옛날에는 신전 주위, 아니 수니인 곶 전체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모양이다.

 신전의 기단에는 꽤 많은 글귀가 적혀있었다. 장삼이사의 이름도 적혀있다. 그중에는 1810~1811년에 그리스를 여행했던 영국의 낭만파 계관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의 이름도 있다고 했다. 그리스에 머물면서 포세이돈 신전의 아름다움과 역사성, 신화에 얽힌 이야기에 감동한 나머지 신전기둥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주변은 신전의 잔해들로 어지럽다. 하지만 어느 하나 허투루 대접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금줄을 쳐 여행객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관리사무소 너머에는 길쭉하게 생긴 마크로니소스 섬이 있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메넬라오스가 파리스와 도망갔던 자기 처 Helene를 다시 트로이에서부터 데리고 돌아오다가 잠시 들렀다는 신화의 섬이다. 저 섬은 또 그리스에서 가장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군부독재기간 동안 저곳에 투옥되었고 혹독한 고문을 당했었다.

 반대편으로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오밀조밀한 해안의 앞바다에는 작은 섬 두엇이 떠있다. 누군가는 페트로클로스섬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 일단은 인증사진부터 찍고 본다.

 관리사무소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반대편 언덕으로 올라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포세이돈 신전이 일품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파란 하늘과 청람색 바다를 배경으로 척박한 산 위에 웅장하게 솟은 포세이돈 신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언덕의 맨 꼭대기에는 말뚝 모양의 시멘트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수니온 곶의 표지석쯤으로 여기면 되지 않을까 싶다.

 표지석에 웬 낙서? 2019년에 어떤 머저리가 찾아왔었다는...

 발아래로 펼쳐지는 무심한 바다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파랗다 못해 짙푸르러 검은색으로 변해버린 색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아이게우스(Aegeus)왕은 크레타의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를 죽이러 떠난 아들 테세우스(Theseus)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공하면 흰 돛을, 그렇지 않으면 검은 돛을 달라고 아들에게 말했는데 저 멀리 보이는 배의 돛은 안타깝게도 검은색이었다. 테세우스가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깜빡 잊고서 검은 돛을 단 것이다. 이를 모르는 아이게우스의 가슴은 무너져 내린다. 결국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마는데 그곳이 바로 수니온 곶이다. 그때부터 이곳의 바다를 아이가이 해로 부르다 지금의 에게 해(Aegean)가 되었다.

 아테네로 이어지는 도로도 보인다. 세기의 커플로 알려진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클린 케네디가 사랑을 확인하며 달렸다는 아폴로 코스트이다. 안소니 퍼킨스가 주연했던 비극영화 페드라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저 어디쯤에는 아테나의 유적도 있다고 했다. 기원전 5세기의 신전 흔적이 확인된단다.

 절벽 아래에서는 푸른색이 두드러져 보이는 에게해(Aegean sea) 바닷물이 쉴 새 없이 절벽을 때린다.

 지중해 연안은 겨울철에도 온난·다습하다고 했다. 덕분에 그런 온화한 기후가 만들어 낸 다양한 식생(植生)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앙상한 포세이돈 신전과는 달리 이곳은 꽃밭 수준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갖가지 들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났다.

 이곳은 아열대성 기후인 모양이다. 아열대성 식물인 용설란(龍舌蘭)이 절벽주위에서 자생하고 있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일생에 단 한 번 피운다는 꽃이라도 눈에 띌지 누가 알겠는가. 특히 꽃을 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운이 없었던지 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또 다른 아열대성 식물인 백년초(百年草)도 눈에 띈다. 우리나라에서는 관상용(요즘은 스무디 등의 재료로도 쓰인다), 하지만 수년 전에 들른 타이완에서는 저 열매로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있었다.

여행지 :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높은 도시라는 뜻의 아크로폴리스는 고대 그리스 유적의 중심이자 그리스 전체를 상징하는 랜드 마크이다. 아크로폴리스만 봐도 그리스의 절반 이상을 봤다고 할 수 있단다. 아테네 어느 곳에서도 한눈에 쏙 들어오는 높은 언덕위에 고대 그리스의 건축물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해 에레크테이온, 프로필라이아 신전, 헤로데스 음악당, 디오니소스 극장 등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많은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크로(높은)와 폴리스(도시)의 합성어이다. 그러니 등산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르막길을 제법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 참고로 아크로폴리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산물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델로스 동맹을 맺었고, 그 중심 역할이 아테네로 이동하면서 방어와 종교적 중심축인 이 신전을 건축했다.

 매표소 옆 빗돌은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려준다. 그중에서도 첫 번(1)란다. 그래선지 유네스코 도안에 파르테논 신전을 그려 넣었다. 유네스코가 자신의 얼굴마담(심벌마크)으로 내세울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안내도는 아크로폴리스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고대 도시 하나가 성스러운 바위로도 불린다는 바위 절벽위에 오롯이 걸터앉았다.

 날선 바위절벽으로도 모자라 그 위에다 성채를 쌓아올렸다.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 아크로폴리스 투어는 발밑을 조심해야 한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대리석이 반짝반짝 윤이 날 정도로 닳았기 때문이다. 하긴 해마다 1,8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니 어련하겠는가. 아무튼 세계 제일의 문화제에 너무 정신을 빼앗겨 미끄러지는 일이 없도록 하자.

 첫 만남은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Herodes Atticus Odeon)’이다. 아크로폴리스로 오르는 도중 만나게 되는데, 그동안 보아오던 극장(음악당)들에 비해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온전한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기원전 161년 마라톤(Marathon) 출신의 부유한 정치가 아티쿠스가 죽은 아내 레기나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가파른 경사지를 이용해 건축한 공연장은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1951년 지금의 모습으로 고쳐졌는데, 매년 여름철 아테네 페스티벌이 이곳에서 열리는가 하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성악가, 연주자들이 저 무대에 서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성악가 조수미도 저곳에서 공연을 했단다.

 프로필라이아(Propylaia)는 철옹성인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었다. 기원전 437년 파르테논이 완성된 직후에 시작되었으나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주축으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양분)이 일어나면서 중단되었고 이후로도 완성을 시키지 못했단다. 눈에 들어오는 건물은 더 뒤숭숭했다. 앞부분은 미완성 기둥만 남아 있고, 뒷 건물의 지붕은 거의 다 소실되었다.

 회랑의 왼쪽 아래쪽에 큰 사각 구조물이 있었다. 전차를 탄 로마 장군 마르쿠스 비프사니우스 아그리파(BC 62~BC 12)’의 동상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빈 좌대만 남아있다. 아그리파는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를 도와 로마의 제정 시대를 여는 공을 세웠다.

 이러한 사실들은 안내판에서 엿볼 수 있다.

 맞은편에는 아테나 니케(Athena Nike)’신전이 있었다. 이 여신은 아테나와 동행하는 조력자다. 보통 올빼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아테나의 시중을 들며 그녀와 늘 함께 한다(때문에 아테나를 지칭할 때 언제나 같이 언급된다). 니케는 그리스어로 승리를 의미한다. 전쟁에서 늘 승리를 바라던 아테네 시민들이 승리의 여신이 아무데도 못가도록 날개를 잘라내고 이 신전에 모셨다고 전해진다. 영어로는 Nike, 최고의 브랜드로 알려지는 나이키가 여기서 유래되었다나?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이 신전에는 날개 없는 아테나 니케 상이 안치되어 있었단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신전은 큰 기둥과 부서진 유적으로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아크로폴리스 초기 이오니아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신전은 18세기 요새를 지을 석재를 구하려는 터키인들에 의해 허물어졌지만 나중에 파괴된 요새에서 돌을 가져와 저런 상태로 다시 복구시켰다고 한다.

 뒤돌아본 프로필라이아’, 고대 아테네 시대 저 문은 신과 인간의 경계였다고 한다. 아테네인들은 평소 신의 세계를 아무 때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다. 중앙 기둥들 사이로는 신성한 행렬만 지나 다녔고, 일반인들은 양 옆에 있는 좁은 문들로만 다닐 수 있었단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아레오파고스 언덕(‘전쟁의 신 아레스의 언덕)이 내려다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저곳은 신들의 재판이 열렸던 곳이다. 전쟁의 신 아레스가 자기 딸을 겁탈하려 한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를 살해한 죄로 포세이돈에 의해 기소되었지만, 올림포스 12신의 재판 결과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저 언덕은 귀족들의 회의가 열리는 장소이자 재판정으로 기능했다. 후일 민주주의의 확대와 함께 민회의 힘이 커지면서 아레오파고스 회의는 약화됐다. 하지만 지금도 그리스에서는 대법원 아레오파고스라 일컫는다고 한다.

 저 언덕은 사도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설교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이 바울을 비웃었고, 몇 사람만이 바울을 따랐을 따름이다. 그중 아레오파고스 법정 판사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자가 있었다. (사도행전 제17)

 프로필라이아의 마지막 열주를 지나면 널따란 분지가 나온다. 그 오른쪽에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이 있다. 신전은 제법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쉽게 구분이 된다. 기원전 570년 경 건축된 파르테논 신전은 여러 번의 건립과 파괴, 복구를 거쳤다. 현재 모습은 기원전 447~438년의 페리클레스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은 역사와 함께 많은 부침을 겪었다. 아테네 여신을 섬기는 신전으로 지어졌으나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우상의 잔재를 없앤다는 이유로 모든 조각은 파괴되고 성 소피아 교회로 사용되었다. 15세기 터키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는 회교사원으로도 사용됐다. 17세기 베네치아와 전쟁을 할 때는 화약고로 사용되다가 베네치아 군대의 포격으로 크게 파괴되기도 했다.

 파르테논은 전쟁과 지혜의 신이자 아테네의 수호신이기도 한 아테나 여신을 모시던 신전이다. 기둥 받침대 없이 직접 기단위에 세웠으나 세계에서 가장 균형 잡힌 건축물로 분류된다. 유네스코 문화유적 1호이자, 유네스코의 고로로까지 사용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 신전은 직선과 평면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곡선과 곡면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곡선·곡면으로 건축된 탓에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조금씩 좁아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쌓아올릴 경우 지상에서 3.9km 지점에서 서로 만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기둥 46개를 포함한 대리석의 엄청난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인데, 그렇게 해서 중량을 분산시켰단다.

 신전의 안은 텅 비었다. 페이디아스가 봉헌했다는 금과 상아로 만들어진 높이 12미터의 아테나 동상도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옮겨갔다가 화재로 인해 소실됐다고 한다. 피라미드와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한 구조물이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신전은 멀리서 볼 때 기둥의 위에서 아래까지가 일직선으로 보인다. 기둥의 가운데를 볼록하게 만들음으로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 탓이라고 한다. 실제 같은 두께의 기둥을 세울 경우 윗부분은 작게 보일 수밖에 없단다.

 대단한 디테일이다. 도리아식의 간결한 기둥머리 양식과 기둥에 연이어 세로로 파인 타원형의 홈은 대리석 기둥의 웅장함과 힘찬 수직미를 돋보이게 만든다. 크기는 더 놀랍다. 3단의 기단 위에 대리석 기둥이 정면 6, 측면 17개의 직사각형 건물로 총 46개의 기둥이 거대한 신전을 떠받치고 있다. 기단 부분이 동서로 69미터, 남북으로 25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신전이다.

 지붕은 완전히 없어진 상태다. 원래는 천정과 기둥 사이에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장식조각들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유명 조각가들이 만든 아름다운 부조들로 꽉 차여 있었단다. 하지만 상당수가 동로마제국시절 지금의 터키 땅으로 옮겨갔고, 19세기에는 영국으로도 대거 반출되었다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의 예술적 가치를 알려주는 안내판도 여럿 보인다. BC 480년경 이전에 있었던 구 파르테논 신전을 설명해주는가 하면, 페리클레스 시대에 건축된 현재의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했던 조각물들도 소개한다.

 신전의 한쪽 귀퉁이는 홍보용으로 할애했다. 아크로폴리스의 발굴·복원에 대한 일화들을 사진과 함께 게시하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뭔가로 새롭게 변신 중인 모양이다. 아크로폴리스의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문화재를 중심으로 소장·전시하던 고고학 박물관이다. 현재는 새로 지은 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New Acropolis Museum)’으로 그 기능이 옮겨졌다.

 언덕의 동쪽 끝에는 전망대가 있었다. 흰색과 파란색의 그리스 국기가 펄럭이는 전망대에 서면 파르테논·에레크테이온 신전은 물론이고, 아테네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담아왔노라! 이만하면 아크로폴리스를 다녀왔다는 증거로 충분하겠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1호 문화유산이자, 유네스코의 심벌마크로까지 사용하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배경으로 넣었으니까.

 시선을 북동쪽으로 옮기자 리카비토스(Lykavittos)’ 언덕이 다가온다. 신다그마 광장 동쪽에 솟아있는 높이 277m의 바위산으로, 아크로폴리스와 함께 아테네의 핫 플레이스로 꼽힌다. 날씨가 좋으면 아테네 시가지는 물론이고 피레우스 바다까지 조망할 수 있으며, 특히 아크로폴리스의 아름다운 야경을 가장 시원스럽게 볼 수 있는 곳으로 소문났다.

 정상에는 전망대와 19세기에 세워진 흰색의 작은 성당 아기오스 조르지오스(Agios Georgios)’가 있단다. 일몰이 환상적이므로 낮보다는 해질 무렵 들리는 것이 좋은데, 레스토랑과 카페도 있다니 전망 좋은 곳에 앉아 야경을 안주삼아 캔 맥주나 커피를 마셔보는 것도 좋을 듯.

 제우스 신전(Temple of Olympian Zeus)’ 터도 눈에 들어온다. 배경은 근대올림픽 경기장으로 삼았다. 아크로폴리스의 동쪽에 있는 제우스 신전은 올림포스 12신 중 최고신인 제우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기원전 6세기, 참주 정치의 아테네 시대에 건설이 시작됐지만, 성전의 완성은 2세기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1.67m의 코린트양식 기둥 104개가 높이 17m로 세워진 그리스 최대의 신전이었다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보다도 4배나 더 컸단다. 하지만 이방인들의 침략과 다른 건물을 짓는데 신전 석재가 이용되는 등 아픔을 겪었다. 지금은 폐허가 돼 16개의 기둥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넓디넓은 아테네 시가지는 기본이다. 도시는 온통 하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줌을 당겨보면 지중해 연안 주택들이 지닌 일반적인 특징들이 눈에 띈다. 백색 벽면에 붉은 지붕 말이다.

 아크로폴리스 성채의 남쪽 아래, 기슭에는 디오니소스 극장(Theater of Dionysos)’ 유적이 있다.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기원전 4세기 무렵 지어졌단다)으로 알려지는데, 당시엔 17천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술과 연회의 신인 디오니소스에게 바쳐졌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이곳에서 함께 모여 축제를 벌이고 연극도 구경했단다.

 극장은 원형으로, 열려 있는 무대는 점점 높아지는 타원형 구역 안에 위치한다. 매우 탁월한 음향 효과를 제공해 주었던 이러한 설계는 고대 그리스 전역에 생겨난 다른 극장의 원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폐허로 남아있을 따름이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건너편 산꼭대기에 있는 저 건축물은 대체 뭘까?

 파르테논 건너편으로는 돌 유적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그마저도 보존의 대상인지 관광객들의 출입을 못하도록 금줄을 쳐놓았다. 그곳에 이오니아 양식으로 지어진 작은 신전 에레크테이온(Erechtheion)이 있었다. 기원전 421~406년에 건립된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헌정된 신전이다.

 이 건물은 고대 아테네의 신화적 영웅인 에레크테우스(헤파이스토스와 大地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테나 여신이 길렀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색다른 평면과 외관을 갖추게 된 것은 대지가 부정형인데다 신전을 여러 개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전에는 늘 이슈가 되는 카리아 여성의 기둥(女像柱)이 있다. 아름답게 주름 잡힌 천을 걸친 젊은 여성들이 여섯 개의 기둥으로 서있는 이 유명한 포치(porch)는 세계 건축의 최고 보물 중 하나라고 한다. 스파르타 인근의 도시 카리아의 처녀들을 모티브로 삼았는데, 아름답고 훤칠하고 건강해서 튼튼한 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이 바탕이 됐단다.

 다른 주장도 있었다. ‘카리아티드로 불리는 이 돌기둥이 그리스를 배신하고 페르시아 편에 섰던 카리아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동맹군은 카리아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니는 노예로 만들었다 한다. 저 돌기둥이 제2의 카리아가 등장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의미를 담았다는 것이다.

 신전 옆에는 아테나의 올리브 나무가 있다. 아테나 여신이 그리스인에게 선물로 내렸다는 나무로, 에게해·지중해 올리브의 원조이기도 하다. 하지만 1917년에 심었다는 얘기가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불레 문(Boule Gate)을 빠져나오면서 아크로폴리스 투어는 끝난다. 불레 문은 프로필라이아 문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내성이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초문 말고도 외적 침입의 보호 문 역할을 했다.

여행지 :  아테네 시가지 투어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Greece) : 발칸반도의 최남단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로 신화의 나라이자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불린다. 서구 문명과 민주주의가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과학과 철학을 발달시켜 서양 문명의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그리스 문명을 서양 문명의 요람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아테네(Athens) : 그리스의 수도로 서구 문명의 발생지이자 고대 문명의 많은 지적·예술적 사상이 비롯된 곳이다. 기원전 800년경에 나타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 중 하나로, 활발한 해상활동으로 상공업과 무역이 발달했으며, 개방적인 성향의 문화가 성립되면서 민주 정치가 발달했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경 아테네가 이룬 문화적·정치적 업적이 당시 유럽 대륙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끼쳐, 이 도시는 서구 문명의 요람이자 민주주의의 고향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 경기가 열렸으며, 108년 뒤인 2004년 하계올림픽을 다시 개최했다.

 

 아테네 관광의 핵심은 고대 신전과 공공건물, 거기에 도시의 뒷골목을 꼽을 수 있다. 이중 고대신전(아크로폴리스)은 따로 다루기로 하고, 먼저 도심의 풍경을 엿보기로 한다. 그렇게 찾은 곳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국회의사당’. 그리스 왕국의 초대 왕 오토를 위한 궁전으로 1836년 바이에른 건축가 가르트너가 설계했다. 80년 동안 궁전으로 사용되다가, 1924년 그리스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행정부가 사용했고, 1935년 의회가 들어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도에 표기된 일정과는 약간 다르게 진행됐다. 고린도 대신 수니온에 들렀다.

 국회의사당 앞 벽에는 무명용사의 비(Monument of the Unknown Soldier)’가 있다. 그리스-튀르키예(터키) 전쟁(1919~1922, 그리스 왕국의 패전)이 끝난 이듬해에 세웠는데,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앞면에는 병사의 모습, 양쪽에는 고대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명언이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은 영웅들에게는 세상 어디라도 그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 왼쪽은 누워 있는 용사를 위해 빈 침대가 오고 있다.’는 뜻이란다.

 벽면에는 그리스가 참전해왔던 전쟁을 기념하는 동판(銅版)이 붙어 있다. 한국전 참전 기념 동판(KOPEA=KOREA의 그리스어)도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그리스는 1개 대대 849(나중엔 2000명을 넘기기도 했다)의 병력을 파병했다. 이들은 미군에 배속되어 원주전투 등에서 용명을 떨쳤다고 한다.

 묘역은 에브조네스(Evzones)’라는 풍성한 치마 형태의 전통복장을 입은 의장병들이 이 지킨다. 붉은색 모자, 흰색 치마에 방울이 달린 가죽 구두를 신은 이들의 모습은 아테네의 상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의 복장은 오스만튀르크 시절 독립투쟁을 벌인 민병대원들의 복장에서 유래한 것이란다. 치마의 주름은 모두 400개로, 오스만튀르크 치하 400년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라고 한다. 아테네의 명물이라는 근위병 교대식은 시간을 맞추지 못해 구경할 수 없었다.

 국회의사당 옆에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1864~1936)’의 동상이 서 있었다. 정치인이자 혁명가로써 그리스왕국과 그리스 제2공화국의 총리직을 여덟 번이나 역임하며 정치·사회 개혁을 주도하고, 군비를 확장해 영토를 넓혀 국가의 기틀을 다져 놓은 현대 그리스의 국부(國父)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아테네 국제공항의 정식 명칭도 그의 이름을 딴 베니젤로스 국제공항이라니 기억해 두자.(시진이 잘못 나와 남의 것을 빌려왔다)

 구시가지와 국회의사당 사이에 위치한 신타그마 광장(Syntagma square)’은 정치와 교통의 중심지다. 아테네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아테네에서 그리스 각지로 뻗는 거리는 이곳을 기점으로 삼는다. 신타그마는 헌법광장이라는 뜻인데, 1843년 이곳에서 최초의 헌법이 공포되었다고 한다. 광장에서 뻗어나간 에르무(Ermou)거리·미트로폴레오스(Mitropoleos)거리는 대표적인 쇼핑가이며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로 붐빈다.

 차창 밖으로 바라본 아테나 학당(Akademeia)’.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세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육기관이다. 건물 앞 기둥 위에는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아테나 여신과 악기를 들고 있는 아폴론 신이 올라가 있다. 아테나는 지혜의 여신이고 아폴론은 학문과 예술의 신이다. 둘이 합쳐지면 아카데미를 상징하게 된다나?

 요새 이름은 아테네대학교’. 정식 이름은 아테네 국립 카포디스트리아스 대학교인데, 그리스 독립 전쟁의 지도자였던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졌다고 한다. 1837 5 3일 그리스의 오톤 국왕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서부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간 하드리아누스의 문은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렸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AD76~138)’ 131년에 만든 문으로 기존의 아테네를 확장하는 하드리아누폴리스를 건설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다음은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Panathenaic Stadium)’이다. ‘1회 올림픽(근대 올림픽의 시초)이 열린 곳으로 고대 아테네 시대에는 판 아테네 대축제가 이곳에서 열렸다. 저 경기장은 1895년 제1회 올림픽 개최 당시 그리스 부호인 아베로프가 낸 기부금으로 복원됐다고 한다.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대리석 좌석과 말굽 모양의 트랙은 고대 경기장을 그대로 복원시킨 것인데, 고대에는 관람석이 없었으나 로마시대 대부호인 헤르데스 아티쿠스가 대리석으로 만들어 기증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후 소실되었고 근대에 와서 아베로프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경기장은 45000명의 관중을 수용 할 수 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밖에서도 경기장 내부를 샅샅이 살펴볼 수 있는데, 굳이 5유로의 입장료를 내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이다. ! 이곳은 BC 490년 고대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던 때 한 아테네 병사(Fidipitz)가 달려와 아테네 시민들에게 마라톤 평야에서의 승전소식을 알리고 쓰러져 숨을 거둔 장소이기도 하다.

 안내판은 경기장의 길이가 268.31미터이고, 너비가 141미터임을 알려준다. 트랙의 길이는 191미터라고 한다. 그밖에도 여러 제원이 상세하게 적혀있으나 설명은 생략.

 출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시간이 없음을 핑계 삼아 발길을 돌린다. 주어진 10분 안에 경기장을 모두 둘러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기장 입구에는 그리스의 사업가이자 박애주의자인 게오르기오스 아베로프(Georgios Averoff)’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1896년 하계올림픽 준비를 위한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의 후원금을 제공하고 올림픽 접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란다.

 경기장 조감도인 모양인데, 영어는 한 단어도 보이지 않는다.

 안내판은 2500년 마라톤의 역사를 전한다. BC 330 고대올림픽(BC 776년 최초로 개최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이 열렸고, 로마의 지배를 받던 140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경기장을 개축하면서 좌석을 5만 석으로 늘렸다. 현재의 경기장은 1896년 첫 근대올림픽을 위해 건축되었다. AD 393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폐지되었던 올림픽이 1,500년이 지나 같은 장소에서 근대올림픽 대회로 재탄생 한 것이다. 108년이 지난 2004년에는 또 한 번의 올림픽(우리나라는 금메달 9, 은메달 12, 동메달 9개로 종합 9위를 기록했다)이 이곳 아테네에서 열렸다.

 다음 방문지는 모노스트라키 광장이다. 아니 광장 근처에 서는 벼룩시장이다. 차에서 내리니 그래피티(graffiti)로 도배된 건물이 눈에 띈다. 1970년대 브롱스(뉴욕) 빈민가의 거리 낙서로 시작했던 것이 언제부턴가 예술의 한 장르로 어엿이 자리 잡았다. 내 눈에는 타인의 재산권을 무단으로 훼손하는 범죄행위로 여겨질 따름이지만.

 잠시 후 벼룩시장이 나온다. 매주 일요일 모나스트라키 광장 인근 골목에서 벼룩시장이 열린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목요일, 그런데도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어찌된 일일까? 까짓 그게 무슨 대수인가. 해외여행에서 벼룩시장을 찾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니, 우린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다.

 앙증맞은 도기 인형, 출처를 알 수 없는 조잡한 조각상들. 거리의 좌판에는 없는 것 없이 그득했다. ! 이곳은 고대 아고라의 근처라고 했다. 아테네의 아고라는 고대 아테네의 메인 스트리트로, 시장·신전·정부청사·감옥 등이 밀집해 있던 곳이다. 그렇다면 저 벼룩시장은 고대 아고라의 기능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조금 더 걸으니 유적지 발굴현장이 나온다.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라고 하는데, 널브러져 있는 건물의 잔해 너머로 아크로폴리스가, 다른 한편에는 아레오파고스 언덕이 보인다.

 아고라(agora) 시장에 나오다’, ‘사다 등의 의미를 지니는 아고라조(Agorazo)’에서 비롯된 것으로 원래는 시장이란 의미로 쓰였다. 그러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일상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나 사람들의 모임 자체를 뜻하게 된다. 민회(民會)나 재판·상업·사교 등의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시민생활의 중심지라고 보면 되겠다. 오늘날에는 공적인 의사소통이나 직접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말로 널리 사용된다.

 근처에는 로만 아고라도 있다고 했다. 로마인들이 고대 아고라를 대체할 목적으로 조성했다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아니 방문 당시만 해도 아고라 유적이 고대아테네와 로마 지역으로 나누어진다는 것도 몰랐다. 참고로 로마 시대에는 아고라를 포룸(forum)’이라고 불렀다.

 안내판은 번역이 귀찮아 naver 지식백과에서 빌려왔다. <기원전 6세기 참주 정치 시대에 만들어진 아테네의 아고라는 대략 550×700m 크기의 직사각형 광장의 3면을 주랑으로 에워싸고 있으며, 주변에 커다란 공공건물들이 들어서 균형 있는 배치를 이루고 있다. 1931 ASCSA(American School of Classical Studies at Athens)에 의해 발굴되었다. 1950년대에는 아고라 동쪽의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이 재건되어 오늘날 아고라 박물관 등으로 쓰이고 있다.>

 마침 지하철이 발굴현장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런데 바깥 면이 온통 그래피티로 도배되어 있는 게 아닌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낯선 풍경이었다.

 아고라 주변답게 노점상들이 늘어섰고, 야외에 테이블을 내놓은 카페와 식당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이곳은 오가는 시민과 관광객들로 늘 북적인다고 했다.

 이후부터는 꽤 번화한 골목을 걸었다. 노천카페들이 줄지어 있고 옷이나 신발, 가방 등을 파는 상점도 많았다.

 식당이나 카페는 예외 없이 야외에 의자를 놓아두었다. 커피 한 잔 놓고 몇 시간이고 대화한다는 그리스인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한마디로 이 골목은 현대의 아고라라고 할 수 있겠다.

 이곳 그리스도 군복이 대세인 모양이다. 군복과 군장을 파는 상점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드디어 모나스트라키 광장(Monastiraki square)’이다. 모나스티라키는 작은 수도원(monastery)’이라는 뜻으로, 광장의 한쪽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갈색 수도원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아테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자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광장 주위에는 유명한 타베르나와 노천카페들이 줄지어 있고, 상품을 진열해놓은 상점들도 꽤 많다. 과일 노점상도 그 가운데 한 자리를 당당히 꿰차고 있었다

 지하철역처럼 생겨 살짝 들여다보았다. ‘모노스트라키역이 아닐까 싶다. 지하철 1호선과 3호선이 만난다는...

 누군가 성 아포스톨루(Apostolou)성당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또 아포스톨루 성당이 고대 그리스 유적이 아니라 비잔틴 시대의 유적이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일부만 복원된 벽화와 천정화를 볼 수도 있다고 했다.

 아크로폴리스 쪽으로 올라가다보니 요런 유적지가 얼굴을 내민다. ‘치스타라키스 사원(Tzistarakis Mosque)’이라는데, 오스만 제국이 아테네를 정복했을 때 치스타라키스라는 파샤가 세운 사원이라고 한다. 현재는 전통 도자기·민속예술·민속악기 등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단다.

 혹자는 아담은 이브에게 갈비뼈를 주었고 제우스 신전은 치스타라키스 사원에게 기둥을 주었다고 했다. ‘치스타라키스가 저 사원을 짓기 위해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의 17번째 기둥을 뽑아 사용했다는 것이다.

 아테네 투어의 마지막은 아크로폴리스의 조망으로 꾸몄다. 언덕 위의 고성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카페(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낮과는 또 다른 아크로폴리스를 올려다봤다.

 아크로폴리스에 조명용 불이 켜졌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아크로폴리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밤하늘에서 초승달과 별이 손을 흔들어준다. 일정에 쫓겨 마지못해 일어나는 아쉬움을 달래주기라도 하려는 듯.

 아테네에 머무는 동안 사용했던 ‘Xenophone Hotel’. 이 호텔은 개인 짐을 직원이 수동식 기계를 이용해 계단위로 올려주는 게 특징이다. 엘리베이터의 문도 수동으로 밀어야만 열린다. 하나 더, 여행사에서는 욕실 일회용품과 드라이기, 커피포트를 알아서 챙겨오라고 했었다. 하지만 칫솔·치약과 면도기 말고는 모두 제공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