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수니온 곶(Cape Sounion)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 아티카반도의 남단, 아테네 남동쪽 50km 지점에 있으며 콜로나 곶이라고도 한다. 해면 가까이 높이 60m로 치솟은 절벽 위에는 아티카의 해안을 지켜주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신전(Temple of Poseidon)’이 세워져 있다. 최고의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아이게우스의 아들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붉게 타오르는 바다를 볼 수 있단다.(네이버백과 참조)

 

 차에서 내리면 관리사무소가 길손을 맞는다. 저 건물에는 식음료를 파는 카페가 들어서있다. 석류주스나 레몬주스 같은 음료를 판다니 한번쯤 들러볼 만도 하겠다. 주문한 그리스 커피와 포세이돈 신전을 나란히 놓고 인증사진을 찍어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고.

 아테네에서 가깝다보니 당일치기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여행사도 아테네에 머무르면서 잠시 다녀오는 일정으로 편성하는 게 보통이다.

 관리사무소 앞 안내판, 자국어인 그리스어와 함께 영어로 유적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저기에 한글도 들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정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저 멀리 언덕에 걸터앉은 포세이돈 신전이 눈에 들어온다. 잘라진 절벽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돌단의 대지는 이미 호메로스 시대부터 뱃사람들의 성지로서 숭경되어 왔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에는 그 위에 해신 포세이돈의 신전이 세워졌다.

 신전으로 올라가는 도중 에메랄드빛 작은 라군(lagoon)들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아름답다. 저 바다에 반한 누군가는 바다로 한없이 걸어 나가 그 속에 풍덩 잠겨보고 싶다고 했다. 그만큼 매혹적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에메랄드빛 지중해가 드넓게 펼쳐진다.

 포세이돈 신전의 역사는 기원전 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다로 나간 선원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제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터키 서쪽해안으로 향하는 배들은 모두 여기서 출항을 했단다). 그곳에 제단을 쌓아올렸다가 나중에 신전을 세웠단다. 그러다 기원전 480년에 일어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크게 파괴됐다. 도리아식 기둥만 남아있는 현재의 신전은 기원전 440년경, 그리스의 참주정치로 유명한 페리클레스 시대에 재건되었다. 하나 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인들은 나포하거나 파괴한 페르시아군의 범선들을 이곳으로 끌고 왔었다고 한다. 해전에서 승리한 아테네군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바치는 일종의 트로피였다고나 할까?

 신전은 기둥만이 외롭다. 하지만 옛날에는 사방을 촘촘히 기둥들로 둘러싸고 그 위에 천정을 덮었다. 내부에는 포세이돈의 동상이 봉헌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신전은 원래 총 3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15개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기둥의 높이는 6.1미터, 기단의 직경은 1미터인데, 지붕 쪽으로 가면 직경이 79cm로 좁아진단다.

 신전의 정면 프리즈(frieze)에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와의 싸움 장면과 아테네인들이 살라미스해전에서 페르시아에 승리하는 장면들이 새겨져 있다던 어느 탐방 기사가 문득 떠오른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조각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촘촘하게 서있는 기둥들이 신전의 웅장함을 돋보이게 만든다. 그에 비해 뒤쪽은 앙상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하나 더, 저녁이면 저 신전에 불이 들어온다고 했다. 천하일품의 일몰을 보기 위해 찾아온 여행객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로 제공된다나?

 이곳에도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옛날에는 신전 주위, 아니 수니인 곶 전체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모양이다.

 신전의 기단에는 꽤 많은 글귀가 적혀있었다. 장삼이사의 이름도 적혀있다. 그중에는 1810~1811년에 그리스를 여행했던 영국의 낭만파 계관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의 이름도 있다고 했다. 그리스에 머물면서 포세이돈 신전의 아름다움과 역사성, 신화에 얽힌 이야기에 감동한 나머지 신전기둥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주변은 신전의 잔해들로 어지럽다. 하지만 어느 하나 허투루 대접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금줄을 쳐 여행객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관리사무소 너머에는 길쭉하게 생긴 마크로니소스 섬이 있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메넬라오스가 파리스와 도망갔던 자기 처 Helene를 다시 트로이에서부터 데리고 돌아오다가 잠시 들렀다는 신화의 섬이다. 저 섬은 또 그리스에서 가장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군부독재기간 동안 저곳에 투옥되었고 혹독한 고문을 당했었다.

 반대편으로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오밀조밀한 해안의 앞바다에는 작은 섬 두엇이 떠있다. 누군가는 페트로클로스섬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 일단은 인증사진부터 찍고 본다.

 관리사무소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반대편 언덕으로 올라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포세이돈 신전이 일품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파란 하늘과 청람색 바다를 배경으로 척박한 산 위에 웅장하게 솟은 포세이돈 신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언덕의 맨 꼭대기에는 말뚝 모양의 시멘트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수니온 곶의 표지석쯤으로 여기면 되지 않을까 싶다.

 표지석에 웬 낙서? 2019년에 어떤 머저리가 찾아왔었다는...

 발아래로 펼쳐지는 무심한 바다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파랗다 못해 짙푸르러 검은색으로 변해버린 색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아이게우스(Aegeus)왕은 크레타의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를 죽이러 떠난 아들 테세우스(Theseus)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공하면 흰 돛을, 그렇지 않으면 검은 돛을 달라고 아들에게 말했는데 저 멀리 보이는 배의 돛은 안타깝게도 검은색이었다. 테세우스가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깜빡 잊고서 검은 돛을 단 것이다. 이를 모르는 아이게우스의 가슴은 무너져 내린다. 결국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마는데 그곳이 바로 수니온 곶이다. 그때부터 이곳의 바다를 아이가이 해로 부르다 지금의 에게 해(Aegean)가 되었다.

 아테네로 이어지는 도로도 보인다. 세기의 커플로 알려진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클린 케네디가 사랑을 확인하며 달렸다는 아폴로 코스트이다. 안소니 퍼킨스가 주연했던 비극영화 페드라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저 어디쯤에는 아테나의 유적도 있다고 했다. 기원전 5세기의 신전 흔적이 확인된단다.

 절벽 아래에서는 푸른색이 두드러져 보이는 에게해(Aegean sea) 바닷물이 쉴 새 없이 절벽을 때린다.

 지중해 연안은 겨울철에도 온난·다습하다고 했다. 덕분에 그런 온화한 기후가 만들어 낸 다양한 식생(植生)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앙상한 포세이돈 신전과는 달리 이곳은 꽃밭 수준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갖가지 들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났다.

 이곳은 아열대성 기후인 모양이다. 아열대성 식물인 용설란(龍舌蘭)이 절벽주위에서 자생하고 있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일생에 단 한 번 피운다는 꽃이라도 눈에 띌지 누가 알겠는가. 특히 꽃을 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운이 없었던지 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또 다른 아열대성 식물인 백년초(百年草)도 눈에 띈다. 우리나라에서는 관상용(요즘은 스무디 등의 재료로도 쓰인다), 하지만 수년 전에 들른 타이완에서는 저 열매로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있었다.

서해랑길 43코스(선운산 버스정류장-사포마을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3. 12. 23()

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아산면·부안면·흥덕면 일원

여행코스 : 선운산 버스정류장연기제질마재진마마을(서정주 생가)신기마을반월마을상포마을김소희 생가사포마을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21.1km, 실제는 미당시문학관부터 11.61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3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고창의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부안 땅으로 넘어가는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미당 시문학관, 김소희 생가 등을 꼽을 수 있다.(이 글은 디지털고창문화대전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들머리는 선운산 버스정류장(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IC에서 내려와 22번 국도를 타고 법성포·상하(선운사) 방면으로 달리다가 삼인교차로에서 좌회전하면 잠시 후 선운사 입구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고창43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다.

 3개 코스(4143코스, 49.9km)로 이루어진 고창구간의 마지막 여정이다. 이름처럼 고창 갯벌을 따라 북상하던 서해랑길(41코스)이 느닷없이 방향을 틀어 선운산 자락을 헤집더니(42코스, 선운산을 샅샅이 뒤져본 적이 있기에 생략했다), 43코스에서 다시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부안 땅으로 넘어간다. 길이는 21.1km, 초반에 소요산 임도를 끼고 있어선지 난이도가 별이 3(5개 중)로 분류된다.

 선운산으로 가는 입구. ‘세계유산도시 고창 방문의 해 2023년을 맞아 예쁜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원래 꽃으로 장식된 아치였는데, 이게 영하 10도를 훌쩍 내려가는 동장군에 눈보라까지 몰아치다보니 콘크리트를 쏟아 부은 구조물로 변해버렸다.

 선운산은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암석들이 곳곳에서 수직 암벽을 이룬다. 그중 한 곳에서 송악(천연기념물 제367)’이 자란다. 송악은 나무나 바위를 붙들고 자라는 일종의 덩굴 식물이다. 제주라면 밭담이나 숲 등 흔하게 보이지만 적어도 육지에는 귀하신 몸이다.

 10 : 48. 실제 출발은 선운리(부안면)에 있는 선운리 삼거리에서 했다. 21.1km나 되는 거리는 물론이고, 계속된 폭설주의보로 눈이 수북이 쌓여있을 게 뻔한 산길(임도를 따를 수도 있다) 구간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8km를 단축하는 셈이 됐다.

 이후의 답사도 서해랑길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바닷길보다 김성수 선생의 생가를 둘러보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 같아서다. 삼거리에 세워놓은 해안문화 마실길 안내도를 따르면 되는데, 이 마실길은 이곳에서 출발해 김성수 생가와 김소희 생가를 거쳐 목우마을까지 간다.

 길을 나서기 전 마을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미당시문학관으로 향하는데 전면에 소요산(逍遙山 444.2m)’이 놓여있다. 서해랑길은 저 산의 허리 깨로 난 임도를 따라 이곳으로 온다. 그러다 중간에서 길마재란 고갯마루를 넘는다. ‘길마란 소나 말의 등에 얹는 안장을 가리키는 우리말. 서정주 시인이 1975년 펴낸 대표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는 길마가 구개음화가 안 된 상태로 굳어지면서 질마가 됐다.

 10 : 51-11 : 12. 첫 만남은 미당시문학관’. 삼거리에서 바람개비가 인도하는 대로 80m쯤 들어가면 나온다. 선운분교(봉암초등학교) 폐교 후 건물을 개보수해 2011년 문을 열었다. 미당의 유족들이 기증한 4,000여 점의 유품 전시공간이 있고 미당과 그의 시를 소개하는 영상 자료실이 마련되어 있다.

 미당의 대표 시는 冬天’? ‘국화 옆에서로만 알아오던 내 설익은 앎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문학관 표지석 오른편에 떡하니 앉아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실루엣 처리된 미당이 맞는다. 우리말 시인 가운데 가장 큰 시인이란다. 하지만 시성(詩聖)으로까지 추앙받던 시인은 친일파로 낙인찍혔고, 그런 다음에는 손님으로 들끓던 미당시문학관도 찾는 발길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벽면은 미당과 가족, 친지들의 사진으로 가득하다. 미당을 기리기 위한 문학관이니 그의 약력도 빠질 리가 없다. 벽면에 질마재의 유년시절과 퇴학당한 소년(·소년기), 방황과 열정의 천재적 개성출현(청년기),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한국 시문학의 대표작들(중년기), 만족 없는 탐구, 세계여행과 산 이름 외우기(노년기) 등 유·소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공간 대부분은 미당의 주옥같은 작품들로 채워 넣었다.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시구들을 음미하며 미당을 키웠다는 바람을 만나보면 어떨까? 우리네 빈 가슴이 그 바람으로 채워질지 누가 알겠는가.

 패널이나 액자 등 작품을 전시하는 방법도 다양했다. 심지어는 유리로 터널을 만든 다음 대표작들을 그 벽면에 적고 있었다.

 미당의 남현동(서울) 자택 서재도 재현해 놓았다. 미당 문학 마지막 30(1970-2000)의 산실이란다. 운보가 그린 미당 초상화, 남정 박노수 화백의 시화, 가야금, 친필이 들어있는 도자기, 세계 125개국을 집고 다녔던 지팡이가 생전 그의 일상생활의 취향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준다.

 육필 원고도 눈에 띈다. 이밖에도 그동안 발간됐던 작품집, 서간, 낙관, 늘그막에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을 모자·담배파이프·지팡이 등도 진열되어 있다. 참고로 1915년에 태어난 미당은 2000 10 63년을 함께 산 부인이 세상을 뜨자 곡기를 끊고 그해 12월 하늘로 돌아갔다. 미당은 10대의 습작 시기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생로병사에 따르는 온갖 감정이 실린 1,0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미당의 시와 삶은 후배 문인들의 시선을 통해 전해준다. 고은, 이어령, 김춘수 등 쟁쟁한 이름들이 빈 여백을 가득 메운다.

 옥상 전망대에 가까워질 무렵에는 미당을 오욕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작품들도 만난다. 1943년부터 1944년 미당이 썼던 친일의 글에 관해 감추거나 미화하기보다는 명확하게 드러내어 방문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종천친일파(從天親日派)’라는 자기변명이 눈에 거슬리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옛 학교 건물과 잘 어울리는 새 건물은 5층으로 지어졌다. 미당의 작품과 자료들은 각 층의 전시실로도 부족해 계단의 벽에까지 걸려있었다. 그걸 하나하나 음미해가며 오르다보면 어느덧 옥상 전망대.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미당이 잠들어 있다는 안현마을의 뒷산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대신 창문을 통해 변산반도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본다.

 11 : 12. 문학관 옆 질마재권역 문화센터가 들어섰다. 체험관광과 도농교류, 주민소득 등 다양한 분야의 개발을 추진하는 본부쯤 되는데, 진마마을·서당마을·신흥마을(선운리)과 안현마을(송현리)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단다. 이들의 노력으로 샘과 도깨비집 등 서정주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장소와 소재가 옛날처럼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문학관과 문화센터의 경계에 놓여있는 저 자전거 조형물은 무엇을 전하고 싶을까?

 2차선인 질마재로(소요산 방향)’를 따라 100m쯤 가다 첫 삼거리에서 진마안길로 바꿔 마을로 들어간다. ‘미당 서정주가 태어나 자랐다고 해서 미당길로 불리다가 서정주의 친일행적과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찬양이 알려지면서 이름까지 빼앗긴 서글픈 길이다.

 11 : 18. 잠시 후 진마마을 어귀에서 서해랑길을 만났다. 서해랑길 트랙은 8.8km를 찍는다. 내 앱은 0.8km, 정확히 8km를 단축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이곳 진마마을(선운리) 질마재 시인마을로도 불린다. 시인 서정주가 나고 자란 마을이기 때문이다. 마을도 그가 지은 산문시집 질마재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서 꾸며놓았다.

 당산나무 아래, 바위를 다듬어 만든 조형물이 눈에 띈다. 이후 길 따라 걷다보면 이런 조형물들을 심심찮게 만나는데, 미당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 실린 산문시를 주제로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미당이 환갑에 펴낸 시집 질마재 신화는 마을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미당 특유의 언어로 되살린 것이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실제 마을 주민이었으며, 시집에 나오는 외가 터는 물론이고 서당·빨래터·우물도 아직까지 남아있다.

 웃돔샘도 복원해 놓았다. 삼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샘으로 미당은 이 샘에 얽힌 이야기를 소재로 간통사건과 우물이라는 시를 썼다. ! 근처에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도깨비와 부자 된 설막동이네의 도깨비집도 있다는데 들러보지는 못했다. 때문에 나무로 조각된 여러 형상의 도깨비들을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도깨비집이 복원되어 있다는 걸 미리 알아오지 못한 내 불찰을 탓할 따름이다.

 정떼는 방법을 주제로 한 조형물이란다. <모시밭골 감나무집 과부는 마흔에도 눈썹이 쌍긋한 제물향이 스며날 만큼 이뻤었는데. 여러 해 동안 도깨비 사잇서방을 두고 전답 마지기가 좋아 사들인다는 소문이 그윽하더니. 어느 저녁엔 대사립문에 인줄을 느리고 뜨끈뜨끈 맵고도 비린 검붉은 말피를 쫘악 그 언저리에 두루 뿌려놓았습니다>

 상가수(上歌手)의 소리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조형물은 나무에 살짝 가려있다. <질마재 상가수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 쓴 중을 세우고, 또 상여면 상여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기상청은 연일 한파의 맹공을 외쳤었다.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간 수은주가 되돌아오지를 않는다면서. 그런 추위도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닌가 보다. 고드름이 만들어내는 진풍경. 흡사 주렴을 늘어뜨린 것처럼 매달려 있는 저런 풍경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11 : 24. 잠시 후 만난 미당의 생가. 미당은 어린 시절 이 집에서 서당을 다니다가 아홉 살 무렵 보통학교에 입학하려고 인근의 줄포로 이사했다. 1942년 부친이 죽은 후 친척이 개조해 거주하다 1970년경부터는 사람이 살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왔다. 그러다 2001년에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정면 4, 측면 2칸의 초가지붕 본채, 정면 3, 측면 2칸의 헛간이 있는 초가지붕 아래채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생가 곳곳에는 그의 시와 글을 세긴 빗돌을 세워놓았다. 건물의 벽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동천, 국화 옆에서 등 그의 대표시를 적은 아크릴 판이 곳곳에 붙여져 있다.

 서정주 시인의 생가 바로 옆에는 우하당(又下堂)’이란 현판이 걸린 작고 아담한 기와집 두 채가 서 있다. 이곳에서 미당의 동생이자 시인인 서정태 옹이 살았었다. 그는 우리 나이 여든 일곱부터 질마재가 한눈에 보이는 미당 생가 옆에 조그만 흙집을 짓고 홀로 시를 쓰며 지냈다. 그리고 아흔을 넘겼어도 꼿꼿했던 당신은 2020 3월 돌아가셨다.

 선운리 마을회관  질마재권역 시문학체험관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문이 열렸다고 해도 체험을 해볼 여유는 없었겠지만.

 뒤돌아본 시인의 마을’. 길이 실개천을 따라 마을을 관통하도록 나있다.

 동구 밖 장승이 눈길을 끈다. 마을은 저렇듯 잘 가꾸어져 있다. 축제의 고장 고창을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라고나 할까? 참고로 고창은 1월 세계유산도시 고창 방문의 해 선포식을 시작으로 3월 벚꽃축제, 4월 청보리밭축제, 5월 바지락페스티벌, 6 (복분자·수박·갯벌)축제, 7월 한여름 밤의 페스타 등이 쉼 없이 이어졌다. 마케팅 전략도 뛰어나다. 8 고창으로 여름휴가오세요’, 9~10 단풍이 피어나는 가을, 고창으로 오세요’, 11~12 겨울의 특별한 기억, 설창 고창에서 함께해요처럼 시기와 테마에 맞는 맞춤형으로 전개한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질마재 시인마을 복합문화공간’. 문화 공간 외에도 카페와 책방(북 카페)이 들어서 있다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11 ; 35. ‘선운리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734번 지방도(인촌로)를 따른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서해랑길 대신 해안문화 마실길을 걸어보기 위해서다.

 11 : 39. 잠시 후 안현(鞍峴, 길마재 밑에 있는 마을이란 뜻)’ 마을에 이른다. 동구 밖 표지판은 안현 돋음볕마을로 적고 있었다. ‘처음으로 솟아오르는 햇볕이란 뜻을 담은 애칭이란다. 이 마을은 국화 옆에서로 대변된다. 서정주 시인을 기리기 위해 마을 뒷산에 국화꽃을 심고, ‘100억 송이 국화축제를 여는가 하면, 담벼락을 국화꽃으로 채워 넣었다. 2008년에는 SBS ‘패밀리가 떴다의 촬영지가 되면서 전국적인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안현마을은 국화마을로 통한다. 애칭처럼 모든 집 담과 지붕에 국화가 소담하게 그려져 있다. 송주철 공공디자인연구소가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모티브로 그린 벽화라고 한다.

 마을 앞. 간척으로 인해 생긴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연이어 며칠을 내린 폭설 때문이지 세상은 온통 하얗다. 그 너머에서 변산반도가 성큼 다가온다. 아름답다.

 11 : 58. ‘신기마을을 지난다. 법정 동리인 송현리(松峴里)를 구성하는 3개의 행정마을(고잔·안현·신기) 중 하나다.

 버스정류장 옆 이정표(김성수생가 1.2km/ 김소희생가 11.7km/ 손화중피체지 0.6km/ 미당시문학관 1.7km)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서해랑길(김소희생가)로 되돌아가란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럴 생각이 없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해안길보다는 문화재인 인촌 김성수선생의 생가를 둘러보는 것이 더 바람직했기 때문이다.

 버스정류장 맞은편.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인 손화중 피체지(孫華仲 被逮地)’ 표지판이 세워져있다. 고창지역을 근거로 활동한 손화중은 전봉준·김개남과 함께 대표적인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로 꼽힌다. 나주성 싸움에서 패한 뒤 도망 다니던 손화중이 이 근처 이씨 재실에 숨어 있다가 재실지기의 고발로 체포당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손화중 스스로가 재실지기에게 자신을 고발하여 상금을 받으라고 권유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2 : 03. 잠시 후 이번에는 와우형 지형이라는 고잔마을을 지난다. 소의 머리, 등허리, 꼬리에 해당하는 모양이 남향으로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마을이다. ‘당산굿 줄다리기로도 유명한데, 줄을 잡아당겨야 누워 있는 소가 일어난다고 하여 줄 당기는 것으로 정성을 들인다고 한다.(사진은 마을경로당)

 계속해서 ‘734번 지방도를 따라 북향한다. 길은 인촌로란 이름표를 달았다. 인촌 김성수의 생가로 이어지는 길다운 발상이라 하겠다. 하나 더. 인촌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면서 길의 이름 또한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진마마을의 미당길과는 달리 인촌로는 아직까지 본래의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12 : 10.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인촌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봉암리(鳳岩里)’를 구성하는 4개 자연부락(인촌·봉오·죽도·고당 또는 할미당) 중 하나로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의 생가가 이곳에 있다. 김성수의 인촌(仁村)’이란 호는 그가 태어난 이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

 동구 밖 정자나무는 하나가 아니고 두 그루나 된다. 소나무(수령 224)와 느티나무(수령 231)로 수종이 다르지만 하도 오래 묵다보니 굵기가 장난이 아니다. 둘 모두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늘에 참새방앗간인 정자(仁村亭)까지 지어놓았다.

 12 : 16. 300m쯤 들어갔을까 솟을대문의 거대한 저택이 반긴다.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이자 정치·언론·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 근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955)의 생가이다. 또한 김성수와 동생이자 민족자본 육성의 대표자인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 1896-1979)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1907년 봄, 이 고장을 휩쓴 화적떼의 행패로 부안군 줄포로 이사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위탁하여 보존해 오다 1977년 김연수가 옛 모습 그대로 보수·복원했다.

 안내판은 이곳에서 태어난 김성수·김연수 형제의 화려한 이력을 적고 있었다. 경성방직주식회사와 동아일보, 삼양사, 중앙고등학교,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를 세우고 경영해왔단다. 하지만 전라북도 기념물(39)임을 알리는 공식 안내판에는 그네들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서도 적고 있었다. 맞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던 1937년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김성수는 철저히 일본 제국주의 편에 섰다. 막대한 국방헌금을 냈고 전쟁을 미화하는 시국강연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 일제의 전쟁 동원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조선 청년들의 징병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언론에 여러 차례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해방 이후 승승장구했다. 미군정의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선임되는가 하면,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우익의 거물 정치인으로 우뚝 서게 된다. 그러다 6.25 전쟁의 혼란 속 부통령으로 추대되기까지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작은댁(수당 김연수의 옛집) 사랑채. 1903년 김성수의 친부인 지산(芝山) 김경중(金璟中)이 지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사랑채 앞에 작은 아들인 김연수와 함께 김경중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풍수전문가들의 얘깃거리로 자주 등장하는 이 있다. ‘진응수(進應水)’로 길지의 증거가 되고 그러한 땅은 삼정승을 배출한다는 것이다.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를 그 증거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김연수의 아들인 김상협 국무총리는 다른 하나일 수도 있겠다. 그럼 나머지 한 명은 언제 태어나게 될까?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일 따름인데...

 문간채를 지나면 작은댁 안채. 1881년 김성수의 조부 낙제(樂薺) 김요협(金堯莢)이 건립했다. 인촌 김성수와 수당 김연수 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마루에는 전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이자 20대 및 21대 국회의원인 정운천씨가 이곳에서 태어났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놓여있었다. 김성수와 친척인 그는 김성수가 설립한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뒤 김성수처럼 정치가의 길을 걷고 있다.

 작은댁과 큰댁은 통로문으로 연결된다. 외부로는 솟을대문을 따로 두었다. 인촌 생가는 긴 직사각형의 대지 위에다 낮은 담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는 큰댁, 남쪽에는 작은댁을 배치했다. 한 대지에서 독립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이하다. 생가 규모도 커서 조선 후기 전라도 지방 토호의 부유한 거주 환경 및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단다.

 김성수의 양부인 원파(圓坡) 김기중(金祺中)이 지었다는 문간채를 지나면 큰집 사랑채. 1879년 김성수의 조부 낙제 김요협이 건립했다. 참고로 좁은 의미의 김성수 생가는 이곳 큰댁을 말한다. 김성수의 큰아버지(김기중)과 아버지(김경중)가 한 울타리 안에서 위채와 아래채로 나누어 살았는데, 김성수가 아들이 없는 김기중에게 양자를 갔기 때문이다. 김경중의 집은 작은 아들인 김연수가 물려받았음은 당연하다.

 사랑채 앞의 동상. 왼쪽부터 인촌 김성수, 김상만의 부인 고현남, 김상만, 김성수의 양부인 원파(圓坡) 김기중(金祺中) 순이다. 참고로 김상만(1910~1994)은 인촌의 장남으로 해방 이후 동아일보 사장, 국제신문협회 본부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또 다른 문간채를 지나면 큰댁 안채. 1861년 김성수의 조부 낙제 김요협이 건립했다. 생가는 아름다운 굴뚝과 꽃담도 잠깐의 볼거리로 충분했다. 기와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패턴이 얼마나 많은지를 자랑하려는 듯 보무도 당당히 서있다.

 12 : 37. 도로(734번 지방도)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북쪽 방향이다.

 12 : 45. 8분쯤 후 도착한 농원마을은 법정 동리인 상암리(象岩里)’를 구성하는 7개 자연부락(석암·원당·쥐섬·농원·신농원·반월·상포) 중 하나로, 1954년 사람들이 정착하여 농원(農園)을 조성하면서 이룬 마을이다. ‘은흥촌(恩興村)’으로도 불리는데 초등학교(봉암)와 보건진료소가 들어서 있었다.

 12 : 48-12 : 58. 마을에 들어서니 봉암삼거리건강원 주인아주머니가 커피를 대접하겠다며 붙잡는다. 여섯이나 되는 인원이 부담스럽지도 않는지.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따끈따끈한 국산차를 대접한다. 객지에서 살다가 귀향했다는 50대 주부인데 자신의 고향을 찾은 외지인들이 고마워서 무언가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다. 따뜻한 인심에 이끌려 한참이나 한담을 즐기다 다시 길을 나섰다.

 12 : 59. 상암 보건진료소를 지난다.

 왼편에는 상암저수지가 있다. 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간척지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소중한 수원이다.

 북진(北進)을 고집하던 도로가 농원마을을 지나면서 동진으로 바뀐다. 바닷가를 떠나 내륙으로 들어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 어디쯤에서 서해랑길로 빠져나가야 한다.

 13 : 15. 내 예상은 옳았다. ‘신촌마을 버스정류장 앞에서 도로가 둘로 나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부안면소재지로 가는 734번 지방도(인촌로)를 버리고 바닷가로 나아가는 수앙·신촌길을 따르기로 했다.

 하룻밤 머물러보고 싶을 정도로 잘 지어진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한때 나는 홍천 농장에 저런 한옥을 짓고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아직까지도 서울 근교의 산속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한옥에 대한 로망까지 포기하지는 못했지만...

 첫 번째 사거리(13:22)에서는 오른쪽이다. 사포리를 향해 바닷가로 가는 길(사포상암로). 진행방향 저 멀리에 거대한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게 방장산이라는 것은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도움을 받고서야 알 수 있었다. 오래전이지만 지금처럼 눈이 수북이 쌓인 겨울철에 저 산을 올랐었다. 하지만 지리에 어두운 난 산만 내려오면 그게 어디에 붙어있는지를 금방 잊어버린다.

 순백의 들녘 너머는 곰소만(고창에서는 줄포만이라고 할 것이다). 그 뒤를 변산반도의 험준한 산봉우리들이 받쳐주는데, 저 봉우리 사이 계곡 어디쯤에 전나무길이 일품인 내소사가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철새 무리가 떼를 지어 하늘을 난다. 맹추위에 쫓겨 더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가는지도 모르겠다.

 14 : 06. 드디어 서해랑길과 마주한다. 줄포만에 이른 것이다. 정확히는 갈곡천의 하구역(또는 汽水域)쯤 되겠다. 갈곡천(葛谷川)은 고창 신림면(가평리)의 방장산에서 발원하여 부안면 중흥리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15.77km 길이의 하천이다. ! 오는 도중 양지바른 곳에 앉아 20분 동안이나 새참을 즐기기도 했다.

 서해랑길 표식은 자전거도로 안내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서해랑길과 저전거길이 겹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방향을 헷갈리게 만드는 못된 이정표(상암리와 김소희생가의 방향을 바꿔놓았다)도 눈길을 끈다.

 이후부터는 갈곡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바다도 아닌 것이 강도 아닌 것이 몸집만 몽땅 부풀려놓았었던 모양이다. 양안에 방조제를 쌓아 들녘을 만들어놓았다. 길은 그 방조제 위로 나있다.

 이즈음 우린 유난히도 많은 저수지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해수인지 아니면 담수인지는 몰라도 크고 작은 저수지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서해랑길을 만나면서 고창 갯벌을 마주한다. 고창 갯벌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자연유산이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자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다. 갯벌 면적은 55.31. 고창갯벌센터가 있는 만돌 해변(41코스)에서 시작해 부안 땅 앞까지다.

 길은 갈곡천을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천은 거슬러 올라갈수록 몸매를 줄여나간다. 그러더니 이내 갯고랑으로 변해버린다.

 14 : 15. 수양배수장. 둑을 쌓아 들녘을 만들어내는 간척사업에서 빠질 수 없는 시설이다.

 오른쪽으로는 그 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들녘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종점에 가까워지면서 갈대꽃의 군무가 길손을 반긴다. 맞다. 43코스의 종반은 아름다운 갈곡천을 따라 걸으며 갯벌과 갈대를 동시에 구경할 수 있는 구간이라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갈대 너머로 내장산이 거대한 몸짓을 드러내면서 춤사위에 흥을 돋운다.

 오늘은 폭설주의보에 잔뜩 쫄아 코스를 1/3이나 줄였다. 그런 결정이 마음까지도 한껏 여유롭게 만들었나보다. 눈에 들어오는 사물마다 아름다움으로 포장되는 걸 보면 말이다.

 갈대로 한가득인 갈곡천 갯고랑 너머로는 후포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우리가 따르고자 했던 해안문화마실길은 저 마을을 지나 목우마을까지 간다.

 14 : 30. 아까 갈곡천의 하구역에서 헤어졌던 사포·상암로와 다시 만났다. 길가 이정표(김소희생가 0.2km/ 부안면방향/ 미당시문학관 13.2km)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갈곡천을 건너란다.

 갈곡천에는 배수관문이 설치되어 다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 바다와 경계를 나누는 셈이다.

 배수갑문은 전망대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줄포만을 향해 나아가는 갯고랑이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낸다.

 조류 관찰대도 만들어 놓았다. 맞다. 이곳 갈곡천에는 멸종위기야생동물 1급인 황새, 매와 2급인 검은목두루미, 말똥가리, 새홀리기 등 7종의 희귀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침수지는 갈대만 무성할 뿐 텅 비어 있었다. 전문가들이 확인했다던 그 철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4 : 35. 서해랑길 표식이 사포마을에 잠시 들렀다가란다. 김소희 명창의 생가가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느냐면서. 맞다. 고창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김소희는 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하늘이 내린 목소리로 유명한 명창이다. MZ세대들에게야 낯설겠지만 우리네 소리를 좋아하는 장년층에게는 요즘의 아이돌만큼이나 인기가 높았었다. 하나 더. 이밖에도 고창은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 신재효 선생과 그가 사랑했던 제자 진채선이 태어나 곳이기도 하다.

 생가는 정면 4, 측면 한 칸의 ''자형 안집과 헛간채로 이루어진 초가집이다. 부자까지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먹고살만한 살림살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진마마을에서 살던 서정주의 집만큼은 아니었던 듯. 같은 초가집이지만 격자무늬 방문을 달았던 서정주의 집과는 달리 김소희의 집은 소박한 띠살문을 달았다. 우리네 기억속의 고향집처럼...

 문루 중앙. 편액 대신 사진을 걸었다. 문득 김소희의 판소리에는 희다가 겨운 백자의 옥빛이 어려 있다던 미당 서정주의 칭찬이 떠오른 것은 그녀의 단아한 얼굴 때문이었을까?

 1917년 이곳에서 태어난 만정(晩汀) 김소희(金素姬, 본명은 김순옥) 13세에 광주로 가서 명창 송만갑의 제자로 국악에 입문했다. 15세에 서울로 올라가 조선성악연구소에서 정정열 등에게 소리··기악을 두루 배우면서 명창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창극좌 입단(1937)여성국악동호회 조직과 한국민속예술학원 창설(1945)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보유자 지정(1964)국악협회 이사장(1993) 등을 거치면서 일생을 국악 발전에 바쳤다. 1995년 향년 79세로 타계했다.

 길은 우리를 사포마을로 인도한다. 법정 동리인 사포리를 구성하는 5개 자연부락(사포·고사리바탕·새터·술항골·회목) 중 하나로 사포(沙浦)’라는 지명은 갯가에 모래가 많다는 데서 유래했다. 어선의 접안이 편리해서 19세기까지 흥덕골에서 거둬들인 세미를 쌓아두던 창고가 들어서 있는 등 호황을 누렸으나 토사의 유입으로 폐항(廢港)되었다고 한다.

 14 : 45. 사포경로당과 반석교회를 차례로 지나면 어느덧 사포마을 버스정류장’. 서해랑길 43코스의 여정은 끝을 맺는다. 서해랑길(부안 44코스) 안내도는 정류장에 기대듯 세워져 있다.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11.61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미당 시문학관과 김성수 생가, 김소월 생가 등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버스정류장 뒤에는 무명의병충의위령탑이 들어서 있었다. 정유재란(1597) 때 왜군의 조총·화총에 맞서 죽창·화살로 싸우다 전멸한 무영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최일수라는 독지가가 세운 탑이란다.

 그 옆에는 해주최씨 가문에서 삼강문을 세워놓았다. 삼강(三綱)이란 한나라의 동중서와 반고가 인간관계의 기본으로 강조한 세 가지 덕목(··)이다. 이 집안은 정유재란 때의 의병장 최서생을 충(), 그의 아들인 기종을 효(), 그리고 열()은 서생의 부인 문화유씨를 내세운다. 화순에 살던 유씨는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인 기종과 종인 순동을 데리고 70여 킬로나 떨어진 이곳까지 와 아들을 순동에게 부탁한 다음 사진포(사포)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유씨의 열행비 옆에 노비 순동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했다. 지독한 감기로 요 며칠 고생하고 있으면서도 내 곁을 지켜주겠다며 부득부득 따라나섰다.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받는 것보다는 더 많이 베푸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는 미국 코넬대학 교수이자, 인간생태학분야의 최고권위자인 칼 필레머(Karl Pillemer)’의 주장을 실천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여행지 :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높은 도시라는 뜻의 아크로폴리스는 고대 그리스 유적의 중심이자 그리스 전체를 상징하는 랜드 마크이다. 아크로폴리스만 봐도 그리스의 절반 이상을 봤다고 할 수 있단다. 아테네 어느 곳에서도 한눈에 쏙 들어오는 높은 언덕위에 고대 그리스의 건축물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해 에레크테이온, 프로필라이아 신전, 헤로데스 음악당, 디오니소스 극장 등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많은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크로(높은)와 폴리스(도시)의 합성어이다. 그러니 등산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르막길을 제법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 참고로 아크로폴리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산물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델로스 동맹을 맺었고, 그 중심 역할이 아테네로 이동하면서 방어와 종교적 중심축인 이 신전을 건축했다.

 매표소 옆 빗돌은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려준다. 그중에서도 첫 번(1)란다. 그래선지 유네스코 도안에 파르테논 신전을 그려 넣었다. 유네스코가 자신의 얼굴마담(심벌마크)으로 내세울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안내도는 아크로폴리스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고대 도시 하나가 성스러운 바위로도 불린다는 바위 절벽위에 오롯이 걸터앉았다.

 날선 바위절벽으로도 모자라 그 위에다 성채를 쌓아올렸다.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 아크로폴리스 투어는 발밑을 조심해야 한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대리석이 반짝반짝 윤이 날 정도로 닳았기 때문이다. 하긴 해마다 1,8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니 어련하겠는가. 아무튼 세계 제일의 문화제에 너무 정신을 빼앗겨 미끄러지는 일이 없도록 하자.

 첫 만남은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Herodes Atticus Odeon)’이다. 아크로폴리스로 오르는 도중 만나게 되는데, 그동안 보아오던 극장(음악당)들에 비해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온전한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기원전 161년 마라톤(Marathon) 출신의 부유한 정치가 아티쿠스가 죽은 아내 레기나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가파른 경사지를 이용해 건축한 공연장은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1951년 지금의 모습으로 고쳐졌는데, 매년 여름철 아테네 페스티벌이 이곳에서 열리는가 하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성악가, 연주자들이 저 무대에 서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성악가 조수미도 저곳에서 공연을 했단다.

 프로필라이아(Propylaia)는 철옹성인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었다. 기원전 437년 파르테논이 완성된 직후에 시작되었으나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주축으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양분)이 일어나면서 중단되었고 이후로도 완성을 시키지 못했단다. 눈에 들어오는 건물은 더 뒤숭숭했다. 앞부분은 미완성 기둥만 남아 있고, 뒷 건물의 지붕은 거의 다 소실되었다.

 회랑의 왼쪽 아래쪽에 큰 사각 구조물이 있었다. 전차를 탄 로마 장군 마르쿠스 비프사니우스 아그리파(BC 62~BC 12)’의 동상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빈 좌대만 남아있다. 아그리파는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를 도와 로마의 제정 시대를 여는 공을 세웠다.

 이러한 사실들은 안내판에서 엿볼 수 있다.

 맞은편에는 아테나 니케(Athena Nike)’신전이 있었다. 이 여신은 아테나와 동행하는 조력자다. 보통 올빼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아테나의 시중을 들며 그녀와 늘 함께 한다(때문에 아테나를 지칭할 때 언제나 같이 언급된다). 니케는 그리스어로 승리를 의미한다. 전쟁에서 늘 승리를 바라던 아테네 시민들이 승리의 여신이 아무데도 못가도록 날개를 잘라내고 이 신전에 모셨다고 전해진다. 영어로는 Nike, 최고의 브랜드로 알려지는 나이키가 여기서 유래되었다나?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이 신전에는 날개 없는 아테나 니케 상이 안치되어 있었단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신전은 큰 기둥과 부서진 유적으로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아크로폴리스 초기 이오니아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신전은 18세기 요새를 지을 석재를 구하려는 터키인들에 의해 허물어졌지만 나중에 파괴된 요새에서 돌을 가져와 저런 상태로 다시 복구시켰다고 한다.

 뒤돌아본 프로필라이아’, 고대 아테네 시대 저 문은 신과 인간의 경계였다고 한다. 아테네인들은 평소 신의 세계를 아무 때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다. 중앙 기둥들 사이로는 신성한 행렬만 지나 다녔고, 일반인들은 양 옆에 있는 좁은 문들로만 다닐 수 있었단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아레오파고스 언덕(‘전쟁의 신 아레스의 언덕)이 내려다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저곳은 신들의 재판이 열렸던 곳이다. 전쟁의 신 아레스가 자기 딸을 겁탈하려 한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를 살해한 죄로 포세이돈에 의해 기소되었지만, 올림포스 12신의 재판 결과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저 언덕은 귀족들의 회의가 열리는 장소이자 재판정으로 기능했다. 후일 민주주의의 확대와 함께 민회의 힘이 커지면서 아레오파고스 회의는 약화됐다. 하지만 지금도 그리스에서는 대법원 아레오파고스라 일컫는다고 한다.

 저 언덕은 사도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설교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이 바울을 비웃었고, 몇 사람만이 바울을 따랐을 따름이다. 그중 아레오파고스 법정 판사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자가 있었다. (사도행전 제17)

 프로필라이아의 마지막 열주를 지나면 널따란 분지가 나온다. 그 오른쪽에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이 있다. 신전은 제법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쉽게 구분이 된다. 기원전 570년 경 건축된 파르테논 신전은 여러 번의 건립과 파괴, 복구를 거쳤다. 현재 모습은 기원전 447~438년의 페리클레스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은 역사와 함께 많은 부침을 겪었다. 아테네 여신을 섬기는 신전으로 지어졌으나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우상의 잔재를 없앤다는 이유로 모든 조각은 파괴되고 성 소피아 교회로 사용되었다. 15세기 터키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는 회교사원으로도 사용됐다. 17세기 베네치아와 전쟁을 할 때는 화약고로 사용되다가 베네치아 군대의 포격으로 크게 파괴되기도 했다.

 파르테논은 전쟁과 지혜의 신이자 아테네의 수호신이기도 한 아테나 여신을 모시던 신전이다. 기둥 받침대 없이 직접 기단위에 세웠으나 세계에서 가장 균형 잡힌 건축물로 분류된다. 유네스코 문화유적 1호이자, 유네스코의 고로로까지 사용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 신전은 직선과 평면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곡선과 곡면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곡선·곡면으로 건축된 탓에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조금씩 좁아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쌓아올릴 경우 지상에서 3.9km 지점에서 서로 만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기둥 46개를 포함한 대리석의 엄청난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인데, 그렇게 해서 중량을 분산시켰단다.

 신전의 안은 텅 비었다. 페이디아스가 봉헌했다는 금과 상아로 만들어진 높이 12미터의 아테나 동상도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옮겨갔다가 화재로 인해 소실됐다고 한다. 피라미드와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한 구조물이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신전은 멀리서 볼 때 기둥의 위에서 아래까지가 일직선으로 보인다. 기둥의 가운데를 볼록하게 만들음으로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 탓이라고 한다. 실제 같은 두께의 기둥을 세울 경우 윗부분은 작게 보일 수밖에 없단다.

 대단한 디테일이다. 도리아식의 간결한 기둥머리 양식과 기둥에 연이어 세로로 파인 타원형의 홈은 대리석 기둥의 웅장함과 힘찬 수직미를 돋보이게 만든다. 크기는 더 놀랍다. 3단의 기단 위에 대리석 기둥이 정면 6, 측면 17개의 직사각형 건물로 총 46개의 기둥이 거대한 신전을 떠받치고 있다. 기단 부분이 동서로 69미터, 남북으로 25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신전이다.

 지붕은 완전히 없어진 상태다. 원래는 천정과 기둥 사이에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장식조각들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유명 조각가들이 만든 아름다운 부조들로 꽉 차여 있었단다. 하지만 상당수가 동로마제국시절 지금의 터키 땅으로 옮겨갔고, 19세기에는 영국으로도 대거 반출되었다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의 예술적 가치를 알려주는 안내판도 여럿 보인다. BC 480년경 이전에 있었던 구 파르테논 신전을 설명해주는가 하면, 페리클레스 시대에 건축된 현재의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했던 조각물들도 소개한다.

 신전의 한쪽 귀퉁이는 홍보용으로 할애했다. 아크로폴리스의 발굴·복원에 대한 일화들을 사진과 함께 게시하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뭔가로 새롭게 변신 중인 모양이다. 아크로폴리스의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문화재를 중심으로 소장·전시하던 고고학 박물관이다. 현재는 새로 지은 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New Acropolis Museum)’으로 그 기능이 옮겨졌다.

 언덕의 동쪽 끝에는 전망대가 있었다. 흰색과 파란색의 그리스 국기가 펄럭이는 전망대에 서면 파르테논·에레크테이온 신전은 물론이고, 아테네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담아왔노라! 이만하면 아크로폴리스를 다녀왔다는 증거로 충분하겠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1호 문화유산이자, 유네스코의 심벌마크로까지 사용하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배경으로 넣었으니까.

 시선을 북동쪽으로 옮기자 리카비토스(Lykavittos)’ 언덕이 다가온다. 신다그마 광장 동쪽에 솟아있는 높이 277m의 바위산으로, 아크로폴리스와 함께 아테네의 핫 플레이스로 꼽힌다. 날씨가 좋으면 아테네 시가지는 물론이고 피레우스 바다까지 조망할 수 있으며, 특히 아크로폴리스의 아름다운 야경을 가장 시원스럽게 볼 수 있는 곳으로 소문났다.

 정상에는 전망대와 19세기에 세워진 흰색의 작은 성당 아기오스 조르지오스(Agios Georgios)’가 있단다. 일몰이 환상적이므로 낮보다는 해질 무렵 들리는 것이 좋은데, 레스토랑과 카페도 있다니 전망 좋은 곳에 앉아 야경을 안주삼아 캔 맥주나 커피를 마셔보는 것도 좋을 듯.

 제우스 신전(Temple of Olympian Zeus)’ 터도 눈에 들어온다. 배경은 근대올림픽 경기장으로 삼았다. 아크로폴리스의 동쪽에 있는 제우스 신전은 올림포스 12신 중 최고신인 제우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기원전 6세기, 참주 정치의 아테네 시대에 건설이 시작됐지만, 성전의 완성은 2세기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1.67m의 코린트양식 기둥 104개가 높이 17m로 세워진 그리스 최대의 신전이었다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보다도 4배나 더 컸단다. 하지만 이방인들의 침략과 다른 건물을 짓는데 신전 석재가 이용되는 등 아픔을 겪었다. 지금은 폐허가 돼 16개의 기둥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넓디넓은 아테네 시가지는 기본이다. 도시는 온통 하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줌을 당겨보면 지중해 연안 주택들이 지닌 일반적인 특징들이 눈에 띈다. 백색 벽면에 붉은 지붕 말이다.

 아크로폴리스 성채의 남쪽 아래, 기슭에는 디오니소스 극장(Theater of Dionysos)’ 유적이 있다.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기원전 4세기 무렵 지어졌단다)으로 알려지는데, 당시엔 17천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술과 연회의 신인 디오니소스에게 바쳐졌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이곳에서 함께 모여 축제를 벌이고 연극도 구경했단다.

 극장은 원형으로, 열려 있는 무대는 점점 높아지는 타원형 구역 안에 위치한다. 매우 탁월한 음향 효과를 제공해 주었던 이러한 설계는 고대 그리스 전역에 생겨난 다른 극장의 원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폐허로 남아있을 따름이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건너편 산꼭대기에 있는 저 건축물은 대체 뭘까?

 파르테논 건너편으로는 돌 유적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그마저도 보존의 대상인지 관광객들의 출입을 못하도록 금줄을 쳐놓았다. 그곳에 이오니아 양식으로 지어진 작은 신전 에레크테이온(Erechtheion)이 있었다. 기원전 421~406년에 건립된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헌정된 신전이다.

 이 건물은 고대 아테네의 신화적 영웅인 에레크테우스(헤파이스토스와 大地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테나 여신이 길렀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색다른 평면과 외관을 갖추게 된 것은 대지가 부정형인데다 신전을 여러 개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전에는 늘 이슈가 되는 카리아 여성의 기둥(女像柱)이 있다. 아름답게 주름 잡힌 천을 걸친 젊은 여성들이 여섯 개의 기둥으로 서있는 이 유명한 포치(porch)는 세계 건축의 최고 보물 중 하나라고 한다. 스파르타 인근의 도시 카리아의 처녀들을 모티브로 삼았는데, 아름답고 훤칠하고 건강해서 튼튼한 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이 바탕이 됐단다.

 다른 주장도 있었다. ‘카리아티드로 불리는 이 돌기둥이 그리스를 배신하고 페르시아 편에 섰던 카리아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동맹군은 카리아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니는 노예로 만들었다 한다. 저 돌기둥이 제2의 카리아가 등장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의미를 담았다는 것이다.

 신전 옆에는 아테나의 올리브 나무가 있다. 아테나 여신이 그리스인에게 선물로 내렸다는 나무로, 에게해·지중해 올리브의 원조이기도 하다. 하지만 1917년에 심었다는 얘기가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불레 문(Boule Gate)을 빠져나오면서 아크로폴리스 투어는 끝난다. 불레 문은 프로필라이아 문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내성이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초문 말고도 외적 침입의 보호 문 역할을 했다.

여행지 :  아테네 시가지 투어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Greece) : 발칸반도의 최남단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로 신화의 나라이자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불린다. 서구 문명과 민주주의가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과학과 철학을 발달시켜 서양 문명의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그리스 문명을 서양 문명의 요람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아테네(Athens) : 그리스의 수도로 서구 문명의 발생지이자 고대 문명의 많은 지적·예술적 사상이 비롯된 곳이다. 기원전 800년경에 나타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 중 하나로, 활발한 해상활동으로 상공업과 무역이 발달했으며, 개방적인 성향의 문화가 성립되면서 민주 정치가 발달했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경 아테네가 이룬 문화적·정치적 업적이 당시 유럽 대륙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끼쳐, 이 도시는 서구 문명의 요람이자 민주주의의 고향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 경기가 열렸으며, 108년 뒤인 2004년 하계올림픽을 다시 개최했다.

 

 아테네 관광의 핵심은 고대 신전과 공공건물, 거기에 도시의 뒷골목을 꼽을 수 있다. 이중 고대신전(아크로폴리스)은 따로 다루기로 하고, 먼저 도심의 풍경을 엿보기로 한다. 그렇게 찾은 곳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국회의사당’. 그리스 왕국의 초대 왕 오토를 위한 궁전으로 1836년 바이에른 건축가 가르트너가 설계했다. 80년 동안 궁전으로 사용되다가, 1924년 그리스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행정부가 사용했고, 1935년 의회가 들어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도에 표기된 일정과는 약간 다르게 진행됐다. 고린도 대신 수니온에 들렀다.

 국회의사당 앞 벽에는 무명용사의 비(Monument of the Unknown Soldier)’가 있다. 그리스-튀르키예(터키) 전쟁(1919~1922, 그리스 왕국의 패전)이 끝난 이듬해에 세웠는데,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앞면에는 병사의 모습, 양쪽에는 고대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명언이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은 영웅들에게는 세상 어디라도 그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 왼쪽은 누워 있는 용사를 위해 빈 침대가 오고 있다.’는 뜻이란다.

 벽면에는 그리스가 참전해왔던 전쟁을 기념하는 동판(銅版)이 붙어 있다. 한국전 참전 기념 동판(KOPEA=KOREA의 그리스어)도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그리스는 1개 대대 849(나중엔 2000명을 넘기기도 했다)의 병력을 파병했다. 이들은 미군에 배속되어 원주전투 등에서 용명을 떨쳤다고 한다.

 묘역은 에브조네스(Evzones)’라는 풍성한 치마 형태의 전통복장을 입은 의장병들이 이 지킨다. 붉은색 모자, 흰색 치마에 방울이 달린 가죽 구두를 신은 이들의 모습은 아테네의 상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의 복장은 오스만튀르크 시절 독립투쟁을 벌인 민병대원들의 복장에서 유래한 것이란다. 치마의 주름은 모두 400개로, 오스만튀르크 치하 400년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라고 한다. 아테네의 명물이라는 근위병 교대식은 시간을 맞추지 못해 구경할 수 없었다.

 국회의사당 옆에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1864~1936)’의 동상이 서 있었다. 정치인이자 혁명가로써 그리스왕국과 그리스 제2공화국의 총리직을 여덟 번이나 역임하며 정치·사회 개혁을 주도하고, 군비를 확장해 영토를 넓혀 국가의 기틀을 다져 놓은 현대 그리스의 국부(國父)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아테네 국제공항의 정식 명칭도 그의 이름을 딴 베니젤로스 국제공항이라니 기억해 두자.(시진이 잘못 나와 남의 것을 빌려왔다)

 구시가지와 국회의사당 사이에 위치한 신타그마 광장(Syntagma square)’은 정치와 교통의 중심지다. 아테네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아테네에서 그리스 각지로 뻗는 거리는 이곳을 기점으로 삼는다. 신타그마는 헌법광장이라는 뜻인데, 1843년 이곳에서 최초의 헌법이 공포되었다고 한다. 광장에서 뻗어나간 에르무(Ermou)거리·미트로폴레오스(Mitropoleos)거리는 대표적인 쇼핑가이며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로 붐빈다.

 차창 밖으로 바라본 아테나 학당(Akademeia)’.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세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육기관이다. 건물 앞 기둥 위에는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아테나 여신과 악기를 들고 있는 아폴론 신이 올라가 있다. 아테나는 지혜의 여신이고 아폴론은 학문과 예술의 신이다. 둘이 합쳐지면 아카데미를 상징하게 된다나?

 요새 이름은 아테네대학교’. 정식 이름은 아테네 국립 카포디스트리아스 대학교인데, 그리스 독립 전쟁의 지도자였던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졌다고 한다. 1837 5 3일 그리스의 오톤 국왕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서부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간 하드리아누스의 문은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렸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AD76~138)’ 131년에 만든 문으로 기존의 아테네를 확장하는 하드리아누폴리스를 건설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다음은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Panathenaic Stadium)’이다. ‘1회 올림픽(근대 올림픽의 시초)이 열린 곳으로 고대 아테네 시대에는 판 아테네 대축제가 이곳에서 열렸다. 저 경기장은 1895년 제1회 올림픽 개최 당시 그리스 부호인 아베로프가 낸 기부금으로 복원됐다고 한다.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대리석 좌석과 말굽 모양의 트랙은 고대 경기장을 그대로 복원시킨 것인데, 고대에는 관람석이 없었으나 로마시대 대부호인 헤르데스 아티쿠스가 대리석으로 만들어 기증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후 소실되었고 근대에 와서 아베로프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경기장은 45000명의 관중을 수용 할 수 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밖에서도 경기장 내부를 샅샅이 살펴볼 수 있는데, 굳이 5유로의 입장료를 내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이다. ! 이곳은 BC 490년 고대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던 때 한 아테네 병사(Fidipitz)가 달려와 아테네 시민들에게 마라톤 평야에서의 승전소식을 알리고 쓰러져 숨을 거둔 장소이기도 하다.

 안내판은 경기장의 길이가 268.31미터이고, 너비가 141미터임을 알려준다. 트랙의 길이는 191미터라고 한다. 그밖에도 여러 제원이 상세하게 적혀있으나 설명은 생략.

 출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시간이 없음을 핑계 삼아 발길을 돌린다. 주어진 10분 안에 경기장을 모두 둘러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기장 입구에는 그리스의 사업가이자 박애주의자인 게오르기오스 아베로프(Georgios Averoff)’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1896년 하계올림픽 준비를 위한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의 후원금을 제공하고 올림픽 접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란다.

 경기장 조감도인 모양인데, 영어는 한 단어도 보이지 않는다.

 안내판은 2500년 마라톤의 역사를 전한다. BC 330 고대올림픽(BC 776년 최초로 개최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이 열렸고, 로마의 지배를 받던 140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경기장을 개축하면서 좌석을 5만 석으로 늘렸다. 현재의 경기장은 1896년 첫 근대올림픽을 위해 건축되었다. AD 393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폐지되었던 올림픽이 1,500년이 지나 같은 장소에서 근대올림픽 대회로 재탄생 한 것이다. 108년이 지난 2004년에는 또 한 번의 올림픽(우리나라는 금메달 9, 은메달 12, 동메달 9개로 종합 9위를 기록했다)이 이곳 아테네에서 열렸다.

 다음 방문지는 모노스트라키 광장이다. 아니 광장 근처에 서는 벼룩시장이다. 차에서 내리니 그래피티(graffiti)로 도배된 건물이 눈에 띈다. 1970년대 브롱스(뉴욕) 빈민가의 거리 낙서로 시작했던 것이 언제부턴가 예술의 한 장르로 어엿이 자리 잡았다. 내 눈에는 타인의 재산권을 무단으로 훼손하는 범죄행위로 여겨질 따름이지만.

 잠시 후 벼룩시장이 나온다. 매주 일요일 모나스트라키 광장 인근 골목에서 벼룩시장이 열린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목요일, 그런데도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어찌된 일일까? 까짓 그게 무슨 대수인가. 해외여행에서 벼룩시장을 찾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니, 우린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다.

 앙증맞은 도기 인형, 출처를 알 수 없는 조잡한 조각상들. 거리의 좌판에는 없는 것 없이 그득했다. ! 이곳은 고대 아고라의 근처라고 했다. 아테네의 아고라는 고대 아테네의 메인 스트리트로, 시장·신전·정부청사·감옥 등이 밀집해 있던 곳이다. 그렇다면 저 벼룩시장은 고대 아고라의 기능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조금 더 걸으니 유적지 발굴현장이 나온다.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라고 하는데, 널브러져 있는 건물의 잔해 너머로 아크로폴리스가, 다른 한편에는 아레오파고스 언덕이 보인다.

 아고라(agora) 시장에 나오다’, ‘사다 등의 의미를 지니는 아고라조(Agorazo)’에서 비롯된 것으로 원래는 시장이란 의미로 쓰였다. 그러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일상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나 사람들의 모임 자체를 뜻하게 된다. 민회(民會)나 재판·상업·사교 등의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시민생활의 중심지라고 보면 되겠다. 오늘날에는 공적인 의사소통이나 직접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말로 널리 사용된다.

 근처에는 로만 아고라도 있다고 했다. 로마인들이 고대 아고라를 대체할 목적으로 조성했다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아니 방문 당시만 해도 아고라 유적이 고대아테네와 로마 지역으로 나누어진다는 것도 몰랐다. 참고로 로마 시대에는 아고라를 포룸(forum)’이라고 불렀다.

 안내판은 번역이 귀찮아 naver 지식백과에서 빌려왔다. <기원전 6세기 참주 정치 시대에 만들어진 아테네의 아고라는 대략 550×700m 크기의 직사각형 광장의 3면을 주랑으로 에워싸고 있으며, 주변에 커다란 공공건물들이 들어서 균형 있는 배치를 이루고 있다. 1931 ASCSA(American School of Classical Studies at Athens)에 의해 발굴되었다. 1950년대에는 아고라 동쪽의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이 재건되어 오늘날 아고라 박물관 등으로 쓰이고 있다.>

 마침 지하철이 발굴현장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런데 바깥 면이 온통 그래피티로 도배되어 있는 게 아닌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낯선 풍경이었다.

 아고라 주변답게 노점상들이 늘어섰고, 야외에 테이블을 내놓은 카페와 식당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이곳은 오가는 시민과 관광객들로 늘 북적인다고 했다.

 이후부터는 꽤 번화한 골목을 걸었다. 노천카페들이 줄지어 있고 옷이나 신발, 가방 등을 파는 상점도 많았다.

 식당이나 카페는 예외 없이 야외에 의자를 놓아두었다. 커피 한 잔 놓고 몇 시간이고 대화한다는 그리스인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한마디로 이 골목은 현대의 아고라라고 할 수 있겠다.

 이곳 그리스도 군복이 대세인 모양이다. 군복과 군장을 파는 상점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드디어 모나스트라키 광장(Monastiraki square)’이다. 모나스티라키는 작은 수도원(monastery)’이라는 뜻으로, 광장의 한쪽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갈색 수도원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아테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자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광장 주위에는 유명한 타베르나와 노천카페들이 줄지어 있고, 상품을 진열해놓은 상점들도 꽤 많다. 과일 노점상도 그 가운데 한 자리를 당당히 꿰차고 있었다

 지하철역처럼 생겨 살짝 들여다보았다. ‘모노스트라키역이 아닐까 싶다. 지하철 1호선과 3호선이 만난다는...

 누군가 성 아포스톨루(Apostolou)성당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또 아포스톨루 성당이 고대 그리스 유적이 아니라 비잔틴 시대의 유적이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일부만 복원된 벽화와 천정화를 볼 수도 있다고 했다.

 아크로폴리스 쪽으로 올라가다보니 요런 유적지가 얼굴을 내민다. ‘치스타라키스 사원(Tzistarakis Mosque)’이라는데, 오스만 제국이 아테네를 정복했을 때 치스타라키스라는 파샤가 세운 사원이라고 한다. 현재는 전통 도자기·민속예술·민속악기 등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단다.

 혹자는 아담은 이브에게 갈비뼈를 주었고 제우스 신전은 치스타라키스 사원에게 기둥을 주었다고 했다. ‘치스타라키스가 저 사원을 짓기 위해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의 17번째 기둥을 뽑아 사용했다는 것이다.

 아테네 투어의 마지막은 아크로폴리스의 조망으로 꾸몄다. 언덕 위의 고성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카페(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낮과는 또 다른 아크로폴리스를 올려다봤다.

 아크로폴리스에 조명용 불이 켜졌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아크로폴리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밤하늘에서 초승달과 별이 손을 흔들어준다. 일정에 쫓겨 마지못해 일어나는 아쉬움을 달래주기라도 하려는 듯.

 아테네에 머무는 동안 사용했던 ‘Xenophone Hotel’. 이 호텔은 개인 짐을 직원이 수동식 기계를 이용해 계단위로 올려주는 게 특징이다. 엘리베이터의 문도 수동으로 밀어야만 열린다. 하나 더, 여행사에서는 욕실 일회용품과 드라이기, 커피포트를 알아서 챙겨오라고 했었다. 하지만 칫솔·치약과 면도기 말고는 모두 제공되고 있었다.

비봉산(飛鳳山, 372m) - 태봉산(248m)

 

산 행 일 : ‘23. 12. 9()

소 재 지 : 경기도 안성시(죽산면·삼죽면) 용인시(처인구 백암면) 경계

산행코스 : 산행코스 : 하삼마을(빌라)석조삼존불상능선태봉산비봉산죽주산성미륵당봉업사지죽산버스터미널(소요시간 : 8.66km/ 3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안성시(삼죽면·죽산면)과 용인시(처인구 백암면)의 경계에 놓여있는 산이다.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하지만 산이 품고 있는 유적들을 포함하면 상황은 확 달라진다. 죽주산성은 물론이고 수많은 미륵불과 석탑들이 산을 둘러싸고 있다. 하나 더. 사람들은 안성을 일러 안성맞춤이라고들 한다. 광해군 때 대동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안성의 맞춤형 유기가 인기를 끌면서 생겨난 말이다. 하지만 안성을 미륵불(彌勒佛)의 고장이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만큼 석불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번 비봉산 산행은 산행보다, 그 산이 품고 있는 여러 미륵불과 석탑의 답사가 주제가 되어 버렸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나 할까?

 

 산행들머리는 하삼마을 빌라(안성시 죽산면 두현리 : 하금길 42)

중부고속도로 일죽 IC에서 내려와 38번 국도를 타고 안성방면으로 내려오다 두현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잠시 후 하삼마을 버스정류장에 이른다. 정류장 맞은편 골목(하삼길)으로 들어가 첫 번째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5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하얀색 빌라(3)가 보인다. 참고로 우리는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죽산까지 온 다음, 택시를 이용해 이곳으로 왔다.

 지도(청색 선)처럼 진행했다. 관음당에서 출발 태봉산·비봉산·죽산산성을 오른 다음 도로를 따라 (죽산)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다. 도중에 석불과 석탑 등 문화재들을 둘러봤다.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해 죽산향교를 빼먹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 문화재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빌라 오른쪽 공터에 두현리 석조삼존불상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안성시 향토유적(40)에 불과하지만, 불상을 보호각 안에 모셔놓는 등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마을주민 말로는 불상을 자신들이 보살핀다고 했다. 수시로 청소를 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불상 주변은 먼지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갈했다.

 불상은 마애불과 비슷한 형식으로 바위 면을 다듬어 세 분의 부처를 배치하여 좌우의 협시가 본존불을 모시고 있는 형태이다. 바위에 조각되었던 것을 떼어낸 듯이 보이는 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정확한 장소는 불분명하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불상은 세밀한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가 심했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안내문을 참조하시길...

 11 : 28. 빌라 뒤편 산비탈을 치고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정규 탐방로는 아니지만 능선으로 치고 오르는 지름길이라선지 희미하게나마 길이 나있었다.

 길의 형편은 썩 좋지 않았다. 가파른 경사에 낙엽까지 수북이 쌓여 미끄럽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11 : 42. 개척 산행을 하다시피 해가며 능선에 올라섰다. 그러자 정규 탐방로가 또렷이 나타난다. 죽산교회에서 올라오는 길이라고 한다.

 11 : 46. 잠시 후 안부로 내려선다. 3개의 고갯길이 시작된다는 아랫새 고개인 듯. 왼쪽으로 제법 또렷한 길이 나있다. ‘위키백과는 안성으로 가는 녹배고개와 삼죽면을 거쳐 백암으로 이어지는 뒤통말고개, 서낭당고개 등이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적고 있었다.

 경제림 조성을 위한 벌목 덕분에 시야가 툭 터진다. 죽산 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고층건물들이 울쑥불쑥 솟아올랐다. 하나 더. 지도는 요 아래를 관음당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옛날 죽산에 문()이 만()개나 되는 봉업사(奉業寺)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절의 관음당(觀音堂)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지금 오르고 있는 태봉산은 높이라고 해봐야 248m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명색이 산인데 어찌 가파른 곳 하나 없겠는가. 산길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가파름을 더해간다.

 그러다가 정상에 가까워지면서는 버겁다싶을 정도로 가팔라진다. 지자체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길가에 밧줄까지 매달아놓았다.

 12 : 06.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태봉산 정상에 올라섰다. 웃자란 잡목에 둘러싸인 정상은 정상표지석과 돌탑이 지키고 있었다. 육산의 특징대로 특별한 볼거리가 없고,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하나 더. ‘태봉(胎封)’이란 지명은 왕족의 태()를 묻었다()는 데서 유래된 게 보통이다. 태실(胎室)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산은 어디서도 그런 내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표지기가 반갑다. 배창랑과 그 일행, 산여울(김명근), 맑음 등등... 산행보다는 트레킹으로 방향을 바꾼 지 벌써 5~6, 그네들은 여전히 산을 오른다. 그리고 세상의 산들을 다 올랐음일까? 어쩌다 오른, 그것도 동네 뒷산에 불과한데도 어김없이 그네들의 표지기가 휘날린다.

 다음은 비봉산이다. 북쪽 능선을 따라 100m쯤 걸으면 삼거리. ‘하삼 사거리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비봉산 정상 1.0km/ 구교동 0.5km/ 태봉산 0.1km)는 오른쪽이 구교동(죽산리)’에서 올라오는 길임을 알려준다.

 12 : 18. 능선을 따라 잠시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다. 하지만 나뭇가지에 매달린 리본이 이곳에서 영남길이 합쳐짐을 알려준다. ‘영남길 6(삼남·의주·영남·평해·경흥·강화)로 구성된 경기옛길 중 하나로 경기도와 충청도를 잇는 역사문화탐방로이다. 경기도에서는 비봉산 자락에 죽주산성 길이란 산책로를 내면서 화려한 고려문화의 향기라는 미사여구로 첨언을 하고 있었다.

 길은 무척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12 : 22. ‘서낭당고개(이정표에는 뒷통말고개로 적혀있다.)’로 여겨지는 안부사거리로 내려선다. 이정표(비봉산 0.5km/ 죽산면사무소 1.4km/ 삼죽면 내장리 0.5km/ 두현리 하삼 1.2km)는 이 고개가 죽산면과 삼죽면을 이어주고 있음을 알려준다.

 고개를 기점으로 길의 형편이 확 달라진다. 폭이 넓어졌을 뿐만 아니라 가로등을 설치해 야간 등반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국도가 고속도로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쉼터를 겸해 벤치를 놓아두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암자 주변 풍경이 아닌가요?’ 함께 걷던 최군의 넋두리다. 맞다. 마을이나 암자 주변에서나 볼 법한 산죽군락이 비봉산의 정상 어림에 분포되어 있었다. 작고 연한 잎새가 이른 봄 덖어서 차라도 만들어 마시면 딱 좋겠다.

 12 : 40  13 : 30.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5(태봉산에서 35). 비봉산 정상에 올라선다. 분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널찍한 정상은 정상표지석과 돌탑이 지키고 있었다. 왕벚나무와 산벚나무 그늘 아래 벤치와 운동기구까지 배치한 걸 보면 인근 주민들이 자주 올라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식탁용 테이블은 등산객 차지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 온 간식을 먹으며 한 시간 가까이나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정상표지석은 모셔놓았다는 느낌. 도톰하니 대를 쌓고 그 위에 빗돌을 올렸다. 하지만 비봉(飛鳳)’이란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다못해 산이 봉황이 날아오르는 지형이라는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워놓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아니면 봉황이 알을 품은 봉황포란형의 풍수지리설도 좋을 게고...

 정상에서의 조망은 좋은 편이다. ·남쪽으로 시야가 트이면서 죽산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13 : 30. 이제 죽주산성으로 갈 차례이다. 아까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50m쯤 진행하면 삼거리(이정표 : 죽주산성 1.2km/ 약수터 0.7km/ 비봉산 정상 50m), 당연히 죽주산성 방향으로 간다.

 50m쯤 더 가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죽주산성 1.1km/ 일죽면 방초리/ 비봉산 정상 0.1km)가 나온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나무계단에 이어 침목계단을 놓아야했을 만큼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능선은 원시의 숲을 연상시킨다. 그 속에서 나는 억척스런 삶의 현장을 만난다. 이곳 안성은 미륵불의 고장’. 그네들이 주장하는 윤회사상을 전하기라도 하려는 듯 죽어 나자빠진 참나무에서 아카시아나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원시의 숲속에서 원시인이 살아갈 것은 당연. 그러니 저건 네안데르탈인쯤 되겠다. 아무튼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눈이 움푹 들어간 우리네 조상을 닮아도 너무 닮았다.

 14 : 03. 능선 안부로 내려선다. 죽산면 매곡마을과 같은 죽산면의 매산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일 것이다.

 이정표(죽주산성 0.2km/ 매곡마을 0.6km/ 비봉산 정상 1.0km)는 이곳이 장광고개임을 알린다. 하지만 장광저수지(매산리)’ 방향으로는 길도 나있지 않았다. 그러니 kakaomap처럼 매곡 뒷고개로 부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살펴보더니 연리목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집사람도 역시 여자였던 것이다. ‘사랑에 목을 매는 그런 여자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 그녀의 말대로 사랑의 메신저(messenger)라는 연리목(連理木)을 빼다 닮았다. 아니 연리목이란 뿌리가 다른 나무의 줄기가 맞닿아 한 나무줄기로 합쳐져 자라는 현상을 일컫는데, 이건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두 줄기가 다시 합쳐진 경우이니 조금 옹색하긴 해도 연리지(連理枝)’라며 고집해 보자.

 밀도를 더해가는 바위군락도 잠깐의 볼거리로는 충분했다. 독특한 생김새로 나그네의 발길을 자꾸만 붙잡는다.

 그중에서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흔들바위이다. 아랫도리만 살짝 걸려있는 모양이 손만 대도 금방 굴러가버릴 것 같다. 하지만 집사람과 최군이 있는 힘을 다해 밀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14 : 12. 드디어 비봉산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죽주산성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지는 죽주산성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치열했던 격전지였던 과거와는 다르게 이제는 찾는 사람들에게 힐링을 선사하는 산책코스로 변했다.

 죽주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다. 내성·중성·외성 세 겹의 석성으로 물샐 틈 없는 위엄을 자랑한다. 2001년 이후 지표·발굴조사를 통해 죽주산성에서는 백제와 통일신라의 유물이 수습되면서 중성은 삼국시대에, ·외성은 조선시대에 축성됐으며 임진왜란 이후 대대적으로 성벽을 수축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성벽(이정표 : 송문주장군 영각 0.2km/ 비봉산 정상 1.2km)으로 올라선다. 외성(外城)의 서문지 근처 한 지점으로, 이후부터는 성벽의 위를 걷는다.

 잠시 후, 이번에는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성벽으로 올라선다. ‘중성(中城)’에 올라섰다는 얘기일 것이다.

 성벽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른 많은 문화재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과 달리, 죽주산성은 남한산성만큼이나 석축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몽골군의 숱한 침략에도 굴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덕분에 우린 선조의 기개를 그대로 느낄 수 있고.

 북벽(北壁)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때문에 우린 다른 이들이 주 탐방로로 삼았던 북벽으로 가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4 : 24. 성벽이 마치 덧붙여 쌓기라도 한 것처럼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간다. 중성의 서남 치성인 것 같은데, 꼭대기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와 함께 어우러지면서 멋진 풍광을 자아낸다. 참고로 치성(雉城)이란 성벽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시켜 쌓은 부분을 말한다.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관측하고 싸울 때 가까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죽주산성은 요즘 죽산 주민들의 힐링 스폿으로 통한다고 했다. 2010년부터 복원 공사가 이루어져 성벽·성문·포루 등의 복원과 함께, 산성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도록 산책로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가족단위로 산책 나온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곳이 북벽포루인줄 알았다. 그러니 나 홀로 나무와 함께 감성 사진 하나쯤 찍어둘 것은 당연. 감성에 젖었던 때문일까?  포루의 유적이나 드라마촬영지에 대한 안내판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을 의심해보지도 못했다.

 걸어온 길. 외성 쪽으로 뻗어나가는 성벽은 세월의 더께 없이 희고 매끈하다.

 치성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치성의 임무대로 봉업사지를 비롯한 죽산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동남 치성으로 향한다. 중성을 따라 남문동남치성동문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이 15분쯤 이어지는데, 성벽 위를 걸으며 죽산리 전체를 조망하거나 한적한 숲속을 가로지르며 거닐 수도 있다.

 중성의 남문(南門)’이란다. 죽주산성은 1236(고려 고종23) 몽골군을 격퇴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얼마나 많은 군사와 백성이 저 문을 드나들었을까?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킨 그네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몽골군은 청주와 충주로 향하는 두 길이 만나는 요충지였던 죽주산성에 이르러 고려군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고려군은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몽골군은 대규모로 공격을 가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큰 피해를 안은 채 철수했다고 한다. 그때 백성들과 함께 성을 지킨 이가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 장군이다.

 성벽 위로 내놓은 산책로는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잔디로 뒤덮인 것이 숫제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다.

 14 : 34. 중성의 동남쪽 방어시설인 동남 치성에 이른다. 장대석으로 자 모양의 방호벽을 쌓았다.

 14 : 37. 성벽을 따라 가파르게 내려서면 동문, 왼편으로 거짓말처럼 고즈넉한 평지가 분지처럼 펼쳐진다. 연못과 쉼터 등을 가미한 잔디공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옛날에는 군사시설과 창고, 집들이 있었지 않나 싶다. 초지 너머 산자락에 띄엄띄엄 서너 채의 집이 보이는데 한가운데 희미하게 보이는 기와집이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연못’. 배수로가 연결된 계단식 연못은 무적의 산성을 유지할 수 있던 비밀병기였다고 한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성을 포위해 공격할 때도 물이 있었기에 보름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4 : 42. 이왕에 왔으니 어찌 송문주(宋文胄) 장군을 만나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잘 닦인 탐방로를 따라 5분쯤 걸으니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忠義祠)’가 나온다. 매년 음력 99일 송문주 장군을 기리는 제향행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송문주 장군은 1236(고종 23) 몽고군 3차 침입 때 죽주방호별감으로 있으며 죽주산성에서 몽고군의 침략을 물리친 인물로, 안성의 호국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사당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지가 않다. 그저 정조 때 채제공 선생이 쓴 번암집의 송장군묘비명에 사당이 만들어진지 5~6백년이 지나 보수했다고 기록된 것을 내세워 송 장군 사후인 1200년대 후반에 지어졌을 거라고 추정할 따름이다. 또 다른 안내판은 체제공이 쓴 송장군 묘비명을 소개하고 있었다.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둘러싸고 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전술을 쓰자 장군은 멀리서 왔으니 어찌 배고프지 않겠는가! 삼가 이 생선으로 군량을 삼으라 하며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에게 보냈고, 이에 크게 놀란 적이 물러가니 뒤쫓아 무찔렀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죽주산성의 입구로 사용되고 있는 중성의 동문(東門)은 차가 지나다녀도 될 정도로 컸다. 문 앞쪽은 아치형이지만 뒤쪽은 네모난 형태로 옆의 계단을 오르면 중성 동남치성을 만날 수 있다.

 14 : 47. 동문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간다. 그런데 뭔가를 놓쳐버린 듯한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맞다. 죽주산성 제일의 포토죤이라는 북벽 포루를 들러보지 못한 것이다. ‘연모’, ‘옷소매 붉은 끝동 등 사극 촬영지로도 유명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미리 알아오지 못한 내 잘못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14 : 59. 잠시 후 도착한 산성주차장. 죽주산성 조형물이 반긴다. ‘죽주산성(경기도 기념물 제69)’은 삼국시대 신라의 북진 과정에서 축조한 성곽이다. 이곳 죽산은 영남대로가 조령과 추풍령 방면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으로,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도성의 방어와 관련하여 중요시되었다. 산성은 6세기 중반 신라가 북진하는 과정에서 서울 지역과 대중국교역항이 있었던 당항진(남양만 일대)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으로 축조되었다고 전해진다.

 국도(17호선)에 이르니 도로변에 7~8개의 빗돌이 늘어서 있었다. 선정을 베푼 죽산현(竹山縣 : 고려 때는 竹州) 관리들을 칭송하는 송덕비(頌德碑)가 아닐까 싶다.

 15 : 03. 이후부터는 국도를 탄다. 중앙분리대까지 있는 왕복 4차선이 이 도로의 교통량을 짐작케 해준다. 맞다. 예로부터 죽산지역은 교통의 중심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전략적 가치를 이어왔다. 조선시대 각 지역에서 서울(한양)로 가는 주요 도로 중 영남대로(장호원-안성)가 지나고 인근의 삼남대로(진천-용인)와도 교차한다.

 15 : 12. 잠시 후 도착한 미륵당은 법정 동리인 매산리의 4개 자연부락(한평·상구산·하구산·미륵당) 중 하나다. 그런데 문화재 마을로도 불리는 모양이다. 하긴 미륵당(彌勒堂)이란 게 본디 미륵의 거처라는 뜻일지니. 요 아래에 있는 태평미륵이 가져다 준 지명이 분명하다.

 죽주산성 길 안내판은 미륵당 한평마을의 이야기를 전한다. 한평(閑坪)은 토지가 기름져서 농사가 잘 되는 드넓은 들녘을 품었다는 마을, 매산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구산마을(웃지시미 및 아랫지시미)도 기름진 토지에서 질 좋은 쌀이 생산되어 고을 원님께 진상을 바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미륵당에 대한 얘기는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15 : 15. 잠시 후 매산리 석불입상에 이른다. 미륵이 16구나 있다는 석불의 고장 안성을 수식하는 주요 미륵불 중 하나로 태평미륵(太平彌勒)’으로 불리면서 지역 주민들로부터 숭상을 받아왔다. 높이도 5.6m에 이르러 안성지역의 미륵불 중 가장 크다. 그래선지 부처를 모실 누각을 세웠는가 하면 담장까지 빙 둘러 놓았다. 마을 이름도 태평미륵의 거처라고 해서 미륵당이 되었단다.

 안에는 미륵불과 석탑을 함께 모셔놓았다. 높이가 1.9m 미륵당 오층석탑(향토유적 제20)’은 고려 초기인 993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균형미가 떨어진다는 것(탑신이 사라진 2·3·4층은 지붕만 애처롭고, 5층은 아예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말고는 내력이나 생김새 등 특별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매산리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 석가모니 다음으로 부처가 될 것으로 정해져 있는 미륵은 보살과 부처 2가지 성격으로 나뉘는데, 이 입상은 보살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머리 위에 보개(寶蓋)를 쓰고 있는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이는데, 이목구비의 비례가 맞지 않아 괴이한 느낌을 준다. 참고로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7000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다. 그때는 인간의 수명이 84000세나 되며, 지혜와 위덕이 갖추어져 있고 안온한 기쁨으로 가득 찬단다. 그렇다고 아무나 미륵불의 세계인 용화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의 삼장(三藏)을 독송하거나, 옷과 음식을 남에게 보시하거나, 지혜와 계행(戒行)을 닦아 공덕을 쌓거나, 부처님에게 향화(香華)를 공양해야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석불은 고려시대 몽골군을 침입을 물리친 송문주장군과 김윤후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태평미륵(太平彌勒)’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이곳에 있던 중앙관리들의 출장 숙소 태평원(太平院)’에서 따왔다. 하나 더. 석상은 오른손에 두려움을 없애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왼손에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는 모양새라고 했다. 민중의 숭배를 받아온 이유일 것이다.

 미륵당에서 나와 이번에는 봉업사로 간다. 200m쯤 걸으면 사거리. ‘봉업사로 이름을 바꾼 옛 용화사에서 내건 팻말이 길을 인도해준다. 경기도 기념물 제189호인 봉업사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지만, 경내에 죽산리 삼층석탑과 죽산리 석불입상이라는 두 점의 문화재를 품고 있다.

 15 : 25  15 : 45. 귀에 익숙한 이름에 끌려 들어간 봉업사. 시쳇말로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새로운 오층탑이 보일 뿐, 떡하니 버티고 있어야 할 유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앉은 김에 쉬어가라고 했던가. 양지바른 곳이 눈에 띄기에 아까 정상에서 먹다 남겨놓은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15 : 45. 몸이 편하면 마음까지도 여유로워지나 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석불이 절간 왼쪽 산자락에서 빼꼼이 얼굴을 내미는 게 아닌가.

 죽산리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7). 연화대(불상을 안치하기 위한 연꽃모양의 받침대) 위에 놓여있는 높이 3.36m의 석불입상이다. 온화한 표정의 불상은 어깨까지 길게 늘어진 귀가 특징이다. 몸체에 비해 머리와 손이 크게 표현되고, 육계(肉髻)와 타원형의 옷 주름 등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보인다. ! 옆에는 석탑도 하나 있었으나 안내판이 없어 내력은 알 수가 없었다.

 석불은 죽주산성 아래 쓰러져 있던 것을 옮겨다 세운 것이라고 한다.

 15 : 51. 절간을 빠져나오다 죽산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이라는 또 하나의 탑을 만났다. 높이 3.2m의 탑은 두꺼운 지붕돌과 4단의 옥개석받침 등 조형 양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탑을 보수하면서 새로운 양식을 가미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탑은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다시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화차사(華次寺)’이던 신라시대에도 탑이 있었다는 자리다.

 봉업사지로 가는 길 주변은 온통 논밭이다. 근처로 4차선의 국도가 지나가지만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평면적인 풍경에 시야가 편안하다.

 16 : 05. 그렇게 도착한 봉업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435)’은 유역 정비공사가 한창이었다. 국보(國寶)에 어울리는 매무새로 단장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높이가 6m인 탑은 고려 전기에 조성됐다. 여러 장의 크고 넓적한 돌로 지대석을 만들고 위에 단층 기단을 두고 그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고 1층 탑신이 유난히 높은 점이 고려석탑의 특성을 잘 나타낸다고 한다.

 죽산리 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 당간지주는 당간(‘은 부처나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나타내는 깃발, ‘은 당을 거는 장대)을 고정해주는 두 개의 지주대로 절의 입구나 법당 앞에 세워져 있다. 이 당간지주는 높이 4.7m( 0.76m, 두께 0.5m)의 돌기둥 한 쌍이 1m의 간격을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경기도 3대 사찰이었다는 절간의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다고나 할까?

 이곳에 있던 봉업사는 양주 회암사, 여주 고달사와 더불어 고려시대 경기도 3대사찰이었다고 한다. ‘고려사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다 이 절에 들러 태조 왕건의 초상화에 절을 했다고 전한다. 태조 왕건의 어진을 봉안하는 진전사원(眞殿寺院)이었다는 얘기다. 신라시대 화차사(華次寺)’였던 절은 고려시대에 봉업사(‘고려의 업을 일으킨 곳이라는 의미)‘로 되면서 크게 번창했으나 1530년의 문헌에서는 기록조차 사라진다.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제435), 봉업사지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 봉업사지 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에서 당시의 영화를 그려볼 수 있을 따름이다.

 16 : 08. 봉업사지를 빠져나오자 국도 17호선. 교통섬에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만드는 송문주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맞다. 송문주 장군은 이 지역의 수호신 같은 존재라고 했다. 죽산면 주민들은 매년 송 장군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오는가 하면, 죽주산성과 봉업사지 터 앞을 지나는 도로를 송문주로로 명명하고 저 동상까지 세웠다.

 서동대로를 따라 죽산으로 들어간다. 죽주(竹州)로 불리던 죽산은 지리적으로 기호지방과 삼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 죽산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이었을 건 당연. 신라 때 이미 죽주산성이 축성되었고, 조선말까지 도호부가 자리해 있던 경기·충청의 주요 행정구역이었다.

 16 : 15. 죽산 버스터미널에 이르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8.66km를 찍고 있으니, 코스의 절반 이상이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강원도 평화누리길 15코스-2(인제 북면길)

 

여행일 : ‘23. 12. 3()

소재지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일원

여행코스 : 원통교어두원교한계삼거리정자문교차로12선녀탕 주차장만해마을용대교차로도적소교차로미시령 옛길미시령(거리/시간 : 28.1km, 실제는 도적소교차로에서 12선녀탕 주차장까지 역방향 13.07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들머리는 설악산 미시령탐방지원센터(인제군 북면 용대리)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를 타고 속초방면으로 올라오다 한계교차로에서 46번 국도(고성방면)로 옮긴다. 이어서 용대삼거리에서 56번 지방도로 옮겨 속초방면으로 조금 가다 도적소교차로에서 미시령 옛길로 빠져나오면 구절양장의 가파른 오르막길을 기어올라 미시령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고갯마루에 들어선 설악산국립공원 미시령탐방지원센터 15코스의 종점이자 16코스의 시작점이다.

 북면 소재지(원통리) ‘원통교에서 시작 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도적소교차로에서 옛길을 따라 미시령 고갯마루까지 올라가는 코스다. 구간거리는 자전거길 답게 28.1km. 라이더들이야 우습겠지만 걷기 여행자들이 하루에 걷기에는 벅찬 거리다. 때문에 우린 절반으로 나눠 오늘은 십이선녀탕 주차장에서 미시령까지 걷기로 했다. 하나 더. 출발지와 도착지의 고도차로 인한 난이도를 줄이기 위해 미시령부터 역방향으로 걸었다.

 미시령 정상에 있던 옛 휴게소는 지금 설악산국립공원 미시령탐방센터(백두대간과 미시령의 역사와 문화를 과거와 현재의 사진 자료로 전시하고 있다)’로 옷을 바꿔 입었다. 널디너른 주차장은 전망대로 변했다. 훼손돼있던 주변 산자락도 자연 상태로 되돌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난간에 서면 성인대(신선대)’ 능선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지금이야 이 일대가 모두 설악산으로 분류되지만, 오래전에는 미시령을 기준으로 북측은 금강산 권역으로 분류했다. 그러니 고성군(토성면)에 위치한 신선봉(1,212m)은 금강산의 남쪽 끝자락에 해당한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짙은 연무에 갇혀버린 속초 시가지와 동해가 어렴풋이 나타난다. 반면에 속초로 내려가는 미시령 옛길은 또렷한 편이다. 미시령(826m)은 예부터 진부령·대간령·대관령 등과 함께 관동지역에서 백두대간을 넘는 주요 교통로였다. 그럼에도 길고 험준해서 열고 닫기를 거듭했다. 고려 때 폐했다가 조선 성종 24(1493) 다시 개척해 미시파령(彌時坡嶺)으로 불렸고, 조선 말에 다시 폐쇄됐다가 1960년경 재개통됐다. 이후 1971년 인제와 양양을 잇는 한계령 도로, 2007년 미시령터널, 최근에는 서울-양양고속도로까지 뚫리면서 이제는 호젓한 도로로 남았다.

 미시령(彌矢嶺) 표석은 건너편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미시령은 고성군 토성면과 인제군 북면 사이에 위치한 고갯마루이다. 인근의 다른 고개에 비해 높고 경사가 가파른 편이므로, 고개를 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뜻의 미시령(彌時嶺)’에서 유래된 지명이지 않나 싶다. 기록에 따라 미시령은 미시파령(彌時坡嶺연수령(延壽嶺연수파령(連壽坡嶺) 등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황철봉을 거쳐 마등령, 공룡능선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막혀있었다. 국립공원 특별보호지역으로 지정해 2026년까지 출입을 금한단다. 그런데 그 시작년도가 2007년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백두대간을 이어오던 내 발목을 붙잡던 2003년의 출입금지는 대체 무슨 근거였을까? 아무튼 황철봉 구간 말고도 신선봉, 대간령을 거쳐 진부령으로 가는 구간까지 막아놓았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평화누리길은 인제 방면 미시령 옛길을 따라 내려간다. 폭설이라도 내릴라치면 제설보다는 차량통행을 막아버릴 정도로 가파른 경사를 자랑하는 구간이다. 아무튼 난 옛길의 내리막 구간을 생략하기로 했다. ‘도적소교차로까지 3km를 생략한 대신 그 시간에 이 지방 대표 먹거리인 황태구이를 먹어보기 위해서이다. 반주로 소주 한 병쯤 겻들일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 9 : 58. 실제 출발지는 미시령터널’ 입구 도적소교차로’. 3.69km 길이의 터널로 들어가는 56번 지방도와 미시령 옛길이 헤어지는 지점이다참고로 도적소(盜賊沼)’는 미시령의 큰 고개 아래서 둥지를 틀고 있던 도적들이 미시령을 넘어 다니는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은 뒤 빠뜨려 죽였다는 물웅덩이().

 9 : 58. 굴다리를 빠져나와 용대삼거리 방향(왼편에 봉평막국수라는 음식점이 있으니 참조한다)으로 나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자동차 전용도로인 56번 지방도(미시령로)와는 별개로 자전거 길을 따로 내놓았다.

 왼쪽으로는 미시령계곡이 흐른다. 미시령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도적폭포에서 요 아래 용대삼거리까지 4.8km에 걸쳐 흐르는데,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의 맑고 깨끗한 계곡물과 물놀이하고 쉴 수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는 개울이다.

 10 : 04. 화장실을 개방형으로 내놓은 선바위 카페는 겨울방학 중이란다. `23.11.10부터 `24.1.30까지라니 곰처럼 긴 겨울잠이라도 자나보다.

 하지만 그 곰은 동굴로 들어가지 않은 채 카페를 지키고 있었다. 그나저나 자연석이 분명하겠건만 곰을 닮아도 너무 빼다 닮았다.

 몇 걸음 더 걸으면 계곡 위로 삐죽하게 솟아 홀로 서 있는 듯한 바위가 보인다. 용대마을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인 선바위(立石, 지역민들은 촛대바위라 부르기도 했다)’이다.

 줌으로 바라본 선바위

 이후부터는 미시령계곡을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적폭포와 선바위를 끼고 있으며, 울창한 원시림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무더운 여름철에도 전혀 더위를 느낄 수 없다는 곳이다.

 난간에 매달린 리본은 지금 우리가 인제천리길의 일부 구간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인제 천리길이란 인제 젊은이들이 옛사람의 자취·역사·문화가 서린 길들을 걷기 좋게 연결해놓은 길이다. 잊혀진 마을들을 잇는 옛길과 숨겨진 자연 비경을 간직한 산길은 그 길이가 400km 남짓 된다니 말 그대로 천릿길이다.

 탐방로는 굴다리를 두어 번 통과한다. 56번 지방도가 자동차 전용도로라서 횡단보도를 낼 수 없었음이리라.

 10 : 22. ‘미시령 설악집은 황태와 오징어 직판장이다. 아니 산나물과 목청꿀 같은 지역특산품은 물론이고, 미역·다시마에 명란·창란·오징어로 만든 젓갈까지 판단다. 하지만 나그네의 눈에는 주위를 포위하다시피하고 있는 황태덕장이 더 눈길을 끈다. 그리고 저런 풍경은 용대리 구간을 걷는 동안 끊임없이 얼굴을 내민다.

 이곳 용대리는 한국 최대의 황태덕장이라고 했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황태의 70%를 차지한단다. 용대리에서 황태덕장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라고 한다. 그 당시 함경도 청진 등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고향의 맛을 잊지 못해 하나둘 덕장을 세웠는데 지금은 강원도의 명물이 된 것이다.

 10 : 24. 자동차 전용도로로 올라설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창암계곡을 가로지르는 중수교 옆에는 군부대진입교라는 자전거용 다리를 새로 놓았다.

 10 : 31. ‘백골병단 전적비가 오른쪽 350m 지점에 있음을 알린다. 한국 최초의 유격대로 창설된 817명의 백골병단 대원들은 설악산에서 적을 교란함으로써 아군 작전에 기여하는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들을 기리고 순국 산화한 장병의 명복을 빌고자 비를 건립했단다.

 10 : 42. ‘용대교차로에 이른다. 진부령을 넘어 고성으로 가는 46번 국도와 미시령을 넘어 속초로 가는 56번 지방도가 나뉘는 지점이다.

 교차로 아래에 이정표 몇 개를 세워놓았다. 그런데 ‘DMZ 평화의길 강원도 평화누리길의 방향표시가 서로 다른 게 아닌가. 맞다. 그동안 함께 해오던 두 길이 이곳을 기점으로 평화의길은 진부령으로, 그리고 평화누리길은 미시령으로 간다.

 미시령 옛길 이정표는 장승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보다. 하나 더. 용대관광지에서 미시령 정상까지 15.4km 구간을 미시령 옛길이라 부르는 모양이고.

 일단은 진부령 방향,  용대3로 들어간다.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인제지역의 끝자락인 용대3리는 황태마을이라고도 불린다. 그래선지 이곳에서 황태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금년 5월에도 황태와 자연의 조화로운 향연 용대리라는 주제로 방문객들의 오감을 즐겁게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졌었다. 특히 축제기간 내내(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가마솥 황태국도 시식할 수 있다니 한번쯤 찾아볼만 하겠다. 거기다 상설 장터에서 시중가보다 할인된 특별한 가격으로 황태를 구입할 수 있다지 않는가.

 마을 뒤편에는 90m 높이의 매바위가 있다. 매바위는 현재 인공폭포를 만들어놓았다. ·여름·가을 내내 시원한 물줄기를 뽐내고, 겨울철에는 빙벽타기대회가 개최되는 등 관광명소로 손꼽힌다. 건너편 바위봉(위 사진) 용바위일 것이다. 용대리의 옛 이름인 용의터’, ‘용대동(龍垈洞)’은 용()이 머리를 들고 있는 듯한 저 바위의 아랫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10 : 47.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인제읍 방향으로 난 황태길를 따른다. 왕복 2차선의 차도이지만 오가는 차량이 드물어 위험하지는 않다.

 옥수골(옥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는 마을) 앞 북천(北川)에는 꼬맹이 섬이 있었다. 물굽이가 요리조리 용트림을 하다가 작은 땅덩어리 하나를 하천 가운데 남겨놓았다. 그 섬에 굵직한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면서 일류의 쉼터가 되었나보다. 육지와 섬을 잇는 출렁다리까지 놓은 걸 보면...

 10 : 50. 황태구이 전문점인 소풍이란다. ‘북설악 황토마을(전통 한옥 여섯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의 향토음식점이라는데 강원도의 전통 양식인 너와를 얹은 건물이 이국적인 냄새를 물씬 풍긴다.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한옥체험마을 한식당으로 된장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단다.

 이 음식점은 화학조미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 착한 식당이라고 했다. 30년이 넘는 종자된장과 종자간장, 그리고 밭에서 직접 기르는 채소를 식재료로 사용한단다. 부속건물 앞에 줄지어 놓인 저 항아리들이 그 증거일 것이다.

 백담마을로 가는 길. 좌우로 펼쳐지는 풍경이 만만찮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북천 물줄기 따라 바위절벽이 늘어서는가 하면, 길가 곳곳에 들어서 있는 황태덕장은 차라리 덤이다.

 덕장은 텅 비어있었다. 할복을 마친 명태는 지금 12월 말쯤 찾아오는 추위를 기다리며 냉동실에서 낮잠을 잔다. 하지만 때가 되면 명태는 코를 꿰고, 덕걸이 작업을 거쳐 한파 속에서 누렇게 익어갈 것이다. 참고로 용대리 일대는 겨울 내내 맹추위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서민들이 살아가기에는 썩 좋지 않은 환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그런 기후가 국내 최대의 황태덕장을 만들어냈다. 명태는 거는 즉시 얼어야만 물과 함께 육질의 양분과 맛이 빠져나가지 않는데, 이곳은 밤 평균기온이 두 달 이상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며 계곡에서 늘 바람이 불어오는 등 천혜의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기구까지 갖춘 길가 쉼터는 ‘DM Z평화의길 표지판을 내걸었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최근의 화두처럼 너무 서두르지 말고 느긋이 걸어보라는 모양이다.

 11 : 04. ‘백공미술관(佰貢美術館)’이 잠시 들렀다가란다. 서울대 출신이자 검사출신의 법조인이었던 백공 정상림씨가 세운 미술관이다. 이름이야 조금 낯설지만 우리나라 근대(19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다수 소장·전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획전시를 통해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심심찮게 선보인다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먼저 뜨락에 만들어놓은 조각 공원부터 살펴본다. 널찍한 잔디밭에는 꽤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리아 조각상 등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이라는데 문외한이라서 그 가치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안에는 속초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박동국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발길 따라 잉태한 풍경 이라는 주제 아래 백두산이나 북미, 동유럽 등 여행지에서 남긴 스케치 소품까지 꽤 많은 작품을 전시해 놓았다.

 그중에서도 인제의 명물 자작나무를 비롯해 강원지역의 자연과 사계를 담은 작품들이 가장 눈길을 끈다. 이쯤에서 전문가의 평을 들어보자 <특히 자작을 그린 시리즈 자작, 하얀 영혼의 실루엣에 계절감과 다양한 구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푸른 하늘과 흰 자작의 대비, 강렬한 자줏빛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자작, 노랑과 초록으로 싱그러운 자작 등이 다양한 색채로 관객을 맞는다.>

 200호 이상 되는 대작도 전시해 놓았다는데, 아무래도 동양화처럼 그려놓은 저걸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또 다른 평도 빌어보자. <소나무를 사실적으로 그린 고수(固守)’ 시리즈도 눈에 띈다. 또 둥근 달이 뜬 밤하늘 아래 웅장한 울산바위, 흰 눈 쌓인 내린천, 속초 장사항, 고성 아야진, 정박한 배와 우두커니 서 있는 등대 등 그가 몸담아 온 강원의 자연이 캔버스로 들어왔다.>

 11 : 10.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불쑥 솟아오른다.

 보건복지장관이 딱 좋아할만 한 풍경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해도 아이는 하나만 갖는다는데, 저 숲속의 소나무들은 절반 정도가 한 뿌리에서 줄기가 둘이나 자라고 있으니 말이다.

 11 : 21. ‘화운당이란다. 조금 전 들렀던 백공미술관 관장인 박종용 화백의 호가 화운당이었으니 그의 아틀리에일지도 모르겠다.

 11 : 24. 텅 비어있는 저 하늘황태덕장도 조금 더 추워지면 명태가 주렁주렁 매달릴 것이다. 참고로 옛말에 맛 좋기는 청어, 많이 먹기는 명태라고 했다. 서민들이 즐겨 먹는 생선으로 명태만 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다양한 요리로 서민들의 밥상을 책임지는 명태지만, 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고종 8(1871) 이유원이 지은 임하필기에 명태라는 이름의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명천에 태씨 성을 가진 어부가 있었는데 어떤 물고기를 낚아 주방 일을 맡아 보는 관리로 하여금 도백에게 바치게 했다. 도백이 이를 아주 맛있게 먹고 이름을 물으니 모두 알지 못하였다. 도백은 태씨 성의 어부가 잡은 물고기이니 이를 명태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하늘이란 덕장 이름은 뒷동산에 있는 풍력발전기에서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드니 풍력발전기 몇 기가 거대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11 : 32. 아치형 조형물이 황태마을을 지나고 있음을 알린다(제대로 걸었더라면 저건 황태마을의 입구가 된다). 황태마을이 백담사 오르는 길 즈음부터 진부령과 미시령이 갈라지는 삼거리 바로 뒤쪽까지를 통칭하는 지명이라니 말이다. ! 이왕에 시작했으니 조금 더 살펴보자. 명태의 생물은 생태라고 한다. 곧바로 얼리면 동태가 되고, 바짝 말리면 북어가 된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 황태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검게 변하면 먹태라 불린다. 명태를 반쯤 말린 것은 코다리, 명태 새끼를 말린 것은 노가리가 된다. 이밖에도 말리는 정도와 잡히는 계절, 또는 잡는 도구에 따라 백태, 흑태, 깡태, 꺽태, 강태, 망태, 조태, 왜태, 막물태, 사태, 오태, 피태라는 이름으로 달라진다. 명태가 이리도 이름이 많은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물고기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탐방로는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른 내설악의 수많은 산봉들을 바라보며 간다. 이곳은 황태길’. 못다 한 황태 얘기나 해보자. 황태는 잘 말려지면서 황금빛을 띈다. 황태를 만들다 조직 질감에 실패한 건 파태’, 색이 어두운 검정이 된 걸 흑태라고 한다. 또 날씨가 짓궂어 얼지 않고 말라 버리면 깡태’, 너무 추워서 녹지 않은 채 허옇게 말라 버리니 백태이다. 그러니 황태는 사람이 덕장에 걸고, 바람이 구름을 타며 요리하는 하늘이 정하는 자연의 산물이다.

 고개를 돌리자 풍력발전단지가 성큼 다가온다. 하지만 바람이 제법 부는데도 대부분이 날갯짓을 멈춘 채 태업중이다. ‘용대풍력단지 북부보전센터라는 표지판이 단지로 들어가는 진입로 입구에 세워져있었는데,  보전센터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11 : 42. ‘백담사입구 사거리에 이른다. 소문난 황태 맛집이 꽤 여럿 있다는 곳이다. 황태는 깊은 맛은 물론 타우린과 베타인 성분이 풍부해 간 해독과 피로회복에 좋으며 지방·콜레스테롤 함량이 낮아 혈액순환을 원활히 돕고 심혈관 질환개선에 좋다. 거기다 이곳은 전국 황태의 70%를 생산한다는 용대리. 그러니 어찌 황태 맛집이 흔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질 좋은 명태를 손끝이 아플 정도로 춥고 바람 많은 겨울철에 덕장에 걸어 말리면 햇볕에 녹고 다시 얼기를 약 3개월. 노랗게 속을 채운 황태는 시원한 속풀이 국으로도 좋고 고소한 구이로도 그만이다.

 백담마을 조형물은 여의주를 문 쌍룡(雙龍)을 담았다. 용대리(龍垈里) 북쪽, 길 양쪽의 쌍룡이 머리를 들고 있는 듯한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용대리의 지명을 나타냈지 않나 싶다.

 마을을 홍보하는 안내판도 빼놓지 않았다. 설악산 자락의 마을로, 백담사를 타고 내려오는 영실천(백담계곡)을 끼고 있단다. 꽃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야생화마을은 다양한 체험과 축제를 통해 힐링촌으로 진화하는 중이란다.

 그런데 마을회관 앞 뜨락에 난데없는 기린 한 마리가 서성이는 게 아닌가. 아니 이곳 인제(麟蹄)의 지명을 뜻풀이 해놓은 조형물일지도 모르겠다. 인제가 말발굽처럼 생겼다고 해서 기린 자에 발굽 자를 쓰고 있다니 말이다.

 11 : 50. ‘내가평교를 건넌다. 내설악에서 흘러온 영실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다.

 다리 밑 영실천은 꽁꽁 얼어붙었다. 내설악의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영시암(永矢庵)에서 모인다고 해서 영시천(永矢川)’이라고도 불린다는 저 하천은 요 아래서 북천으로 합류된다.

 11 : 54. 잠시 후 나타나는 구만2를 지나자 도로변이 온통 오토캠핑장 천지다. 이 부근이 구만동 계곡이라는 아름다운 경관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구만동이란 지명은 구만이라는 사람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구만동계곡은 미시령계곡과 백담계곡이 합쳐져 흘러 내려오는 큰 계곡으로, 백담사와 12선녀탕 사이 약 3km 구간을 이르는 지명이다. 맑고 깨끗한 계곡물과 울창한 솔밭, 멋진 암반이 조화를 이루어 여름철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라때로 불리는 나 같은 꼰대에게는 한겨울 캠핑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요즘 텐트는 웬만한 방갈로 저리 가라는 크기라고 한다. 그 안에는 테이블과 의자는 물론, 그릴, 휴대용 냉장고, 조명까지 없는 게 없다고 했다.

 건물의 예뻐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음식점(설산하우스)이라는데 간판을 걸려있지 않았다. 이쯤에서 넋두리 하나. 사실 난 황태구이 안주삼아 소주 한잔 걸치려고 남들보다 3km를 줄여서 걷는 중이다. 하지만 느림보 나그네에겐 그마저도 호사였던가 보다. 한참이나 뒤에서 출발한 둘레길 도반들이 스치듯이 추월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주변 풍광을 살펴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담느라고 시간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 백담사입구 사거리를 지나면서 도로는 이름을 바꿨다. 황태마을과 함께 황태길이 끝났고, 이제 만해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12 : 10. ‘구만교 앞에서 왼쪽(만해마을)으로 방향을 튼다. 자전거길 이정표가 용대삼거리에서 5.4km쯤 떨어진 지점임을 알려준다.

 ‘DMZ 평화의길 팻말이 아직까지는 평화누리길과 함께 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두 길은 용대삼거리에서 헤어진다.

 카페 아니오니라고 한다. 직접 로스팅 해준다는 커피도 커피지만 갓 구워낸 빵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난 몇 걸음 들어가다가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아까운 시간을 소모시킬 정도의 뷰가 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대리의 또 다른 특징은 마가목이 아닐까 싶다. 마가목 나무를 아예 가로수로 심어놓았다. 약효가 좋은 마가목 나무의 효능과 효과를 알리는 마가목축제도 열고 있다고 했다.

 12 : 21.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도로변에 마련된 널찍한 주차장에 이른다. 인제군에서 야심차게 조성해놓은 문화·예술 컴플렉스에 도착했다고 보면 되겠다. 여초서예관, 한국시집박물관, 만해문학박물관 등이 도로변에 줄지어 있다.

 첫 만남은 여초서예관(如初書藝館)’이다. 한국 근현대 서예사의 4대가로 꼽히는 여초(如初) 김응현(金應顯. 1927-2007)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으로 단일 서예관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라고 한다. 800평쯤 되는 2층 건물에 상설·기획전시실, 체험실, 세미나실 등의 각종 편의시설과 함께 관련 도서 및 소장품 6,386점과 서예작품 1,133점을 전시하고 있다.

 여초(如初)’ 처음과 같다는 뜻을 지닌다. 김응현의 증조부는 경술국치와 일제의 회유에 항거해 목숨을 끊은 우국지사 오천(梧泉) 김석진(金奭鎭)이다. 조부인 동강(東江) 김영한(金寗漢)도 일제의 작위를 거부하고 은거했다. 그런 가문에서 자라며 보고 배운 우국충정을 끝가지 지켜간다는 마음가짐일지도 모르겠다.

 선생의 약력부터 살펴본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답게 화려한 경력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하나 더. 선생의 형제들도 명성이 자자한 서예가들이다. 세 형인 경인(褧人) 김문현, 일중(一中) 김충현, 백아(白牙) 김창현도 서예가로 활동했으며, 특히 김충현은 김응현과 더불어 한국 현대 서예계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먼저 생애관(生涯館)’부터 둘러본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교도 서울에서 다녔고, 활동도 서울에서 했다. 그러다 말년인 1999년 구룡동천(북면 한계2리 구룡계곡 일원)으로 내려와 8년 동안 생활하다 2007년 작고했다. 선생의 기념관을 인제군에다 지어놓은 이유이다.

 안에는 글을 쓰던 공간을 재현해 놓았다. 손으로 직접 쓸 수밖에 없는 장르답게 책상에는 컴퓨터가 보이지 않는다.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다는 선생의 생애와 작품세계는 패널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선생의 작품은 2층에서 만난다. 조부(김영한)에게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예를 배운 그는 10대 후반에는 조부가 구해 온 한·위 시대의 법첩을 중심으로 서법을 연마했다. 이를 바탕으로 15세 때부터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1950년대에는 숙명여자대학교·홍익대학교·성균관대학교 등에 출강하며 한문학과 서예를 가르쳤다. 1956년 김충현·노수현·김서봉·민태식과 함께 서예 연구단체인 동방연서회를 창립했다.

 그는 한자의 5(五體 : 篆書·隸書·草書·行書·楷書)에 모두 정통했다고 평가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북위체에 기반 힘 있고 호방한 예서와 해서에 특출한 것으로 평가되며, 역시 자유롭고 막힘없는 필치의 행서와 초서 작품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2003년에 완성한 광개토대왕비문은 필생의 역작으로 손꼽힌다.

 12 : 38. 다음은 한국시집박물관이다. 한국 근현대기의 시집(詩集)을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2014년 개관했다. 1층에는 시집을 대여해 읽을 수 있는 작은 도서관과 다양한 체험학습 공간이 있으며, 2층에는 1900~1970년대까지의 근현대기에 출판된 시집을 연대기로 전시한 상설 전시실과 시를 짓고 낭송하는 체험실,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먼저 숲속부터 거닐어보면 어떨까? 혼자 걸어도 좋고, 함께 걸으면 더 좋은 소나무 숲을 소나무 숲을 거닐며 시인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꾸며놓았다. 윤동주, 박목월, 김소월 등등 당신이 평소에 동경해오던 시인과 대표시를 읽으며 메마른 가슴을 따뜻하게 힐링할 수 있을 것이다.

 1층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어, 로비 서가에서 선택한 시집을 읽으면서 시의 정서에 흠뻑 빠져볼 수 있다. 벽면에 적힌 시들을 읽어보는 것도 잠깐의 재미로는 충분했다. 우리가 자라오면서 심심찮게 흥얼거렸을 법한 국민 시들이 벽면에 빼곡히 적혀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인제문인시서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무릉도원, 참선의 공간 등으로 인제의 아름다운 경관을 읊은 시인묵객들의 운문 20편을 인제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예가들이 써서 전시하고 있었다.

 상설전시실은 시문학사의 흐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시집과 문학자료를 1900년부터 1970년까지 10년 단위로 나누어 실물과 영상으로 전한다. 근대시 성립(1900-1910 : 이광수, 최남선), 독자적 자유시(1920 : 한용운, 김소월), 모더니즘 시의 성립(1930 : 김영랑, 정지용), 해방공간의 민족시( 1940 : 조지훈, 박두진), 전후시의 정신적 분화(1950 : 박인환, 구상), 순수시와 참여시(1960 : 신경림, 고은), 삶의 현실과 시적 변용(1970 : 오세영, 황동규)

 박물관은 국내외 시인 및 소장가들이 기증한 10,000여권의 시집을 소장하고 있단다. 그중에는 1921년 펴낸 조선 최초의 현대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 1921년 펴낸 조선 최초의 현대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 정지용 시집(1935, 1946), 김립 시집(1939), 이육사 시집(1946) 등 희귀 시집 100여권이 포함되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들에 대한 일화도 살짝 엿볼 수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시설은 시 낭송 비디오를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부스라고 했다. 소파 벽면에 비디오를 만드는 방법이 잘 안내되어 있으니 한번쯤 시도해보면 어떨까? 주어진 시간이 빠듯한 나그네야 그냥 떠나올 수밖에 없었었지만...

 12 : 52. ‘만해마을에 이른다. 만해마을은 한국문학사의 대표적 시인이자 불교의 대선사, 민족운동가로 일제강점기 겨레의 가슴에 민족혼을 불어넣어 준 만해 한용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만해는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이후 백담사에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이곳에 만해마을이 세워진 이유이다. 현재 동국대학교에서 운영하고 있어 동국대학교 만해마을로 불린다.

 숙박시설인 설악관을 지나면 만해문학박물관이 얼굴을 내민다. 만해마을을 상징하는 박물관은 넓고 깨끗한 벽면을 따라 한용운의 삶과 님의 침묵을 비롯한 만해의 작품세계, 당시의 시대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입구. 만해의 좌상이 반긴다. 만해 한용운은 독립운동가 겸 시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며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의 바탕은 승려에서 출발한다.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는 한편,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주요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 등이 있다.

 박물관으로 들어서면 품은 뜻을 깊고 길게 울리라는 듯 시를 적은 징을 가지런히 걸어놓았다. 이어서 風霜歲月 流水人生이라는 만해의 친필이 반긴다. 그 아래는 두 줄의 짧은 글로 만해의 일대기를 적었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류의 행복이다라는 만해의 법문도 눈에 띈다. 소소한 자유와 평화로운 일상이 만해선사가 추구하던 삶의 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싶다.

 1층의 상설전시실에는 만해의 친필 서예와 작품집, 그리고 연보로 본 만해선사의 생애 주제로 본 만해선사의 삶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만해의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학잡지들의 창간호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하나 더. 유리창 너머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만해선사(동상)도 만날 수 있었다.

 전시관은 만해의 친필 원고, ‘님의 침묵이 실렸던 시집 등 눈여겨보아야 할 자료들이 차고 넘친다. 이왕에 왔으니 어릴 적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외울 수밖에 없었던 님의 침묵이나 어느 해 정월 초하루에 적었다는 조선 청년에게라는 글 등도 한번쯤 읊조려 보자. 그러다보면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를 읊은 듯한 모기라는 시도 눈에 띌 것이다.

 만해와 조선일보의 관계도 전한다. 그는 만년에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머물렀다. 일본에 대한 만해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선총독부 쪽으로는 창문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또 동료이자 친구였던 최린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곧바로 인연을 끊었을 정도로 매국에 대한 태도가 단호했다. 그런 그가 친일파로 지목받는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는 교분이 두터웠다고 전해진다. 심우장을 지을 때는 방응모로부터 도움도 받았단다. 그게 아쉬움으로 남는 건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박물관을 빠져나오자 커다란 종과 북이 매달려 있다. ‘범종루(梵鐘樓)’로 법당의 네 가지 주요 물품인 범종·운판·목어·홍고 등을 비치하는 사찰당우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누각을 기본으로 전통양식의 지붕에다 단청을 입히는 여느 사찰들과는 달리 콘크리트골조 기둥에 최소한의 비가림 지붕만 얹었다.

 보현보전(普賢寶殿)은 한술 더 떴다. 뼈대만 앙상한 전각에는 부처님조차도 모셔놓지 않았다.

 청소년들이 지은 시에 빠져보는 즐거움도 있다. 청소년평화생명백일장에서 입상한 작품들을 현수막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만해마을의 정문은 경절문(涇截門)’이란다. 온갖 잡다한 생각을 단호히 물리치고 지름길로 곧바로 들어가는 문이란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터득하여 곧바로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법문이라나? 하지만 중생에게는 벽면에 걸린 동판이 더 눈길을 끈다. 29개국 55명의 외국 시인과 255명의 한국 시인 작품 등 310편의 시를 동판에 새겨, 세계평화를 희구하는 모든 시인들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13 : 14. ‘만해교를 건너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드넓게 펼쳐진다. ‘용대숲으로라는 청소년 수련시설에서 운영하는 숲 놀이터로 그네나 트리클라이밍, 숲 밧줄놀이 등을 체험해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탐방로는 아름드리 소나무로 가득한 숲을 오른편에 끼고 에돌아간다.

 아쉽게도 숲은 문을 닫아걸었다. ‘송홧가루 날려 길손 붙잡는다며 소나무 숲을 찬미한 이가 있었다. 소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는 사람들을 순화시킨다. 때문에 숲에 들면 일행이 있는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혼자 앉은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 무엇을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소나무 숲이 쉼표가 되는 이유다. 그러기에 문 닫힌 소나무 숲이 더욱 아쉬워졌다.

 위에서 얘기한 ‘()용대숲으로에서는 프로그램 참여자들의 신청을 받고 있었다. 밧줄을 타고 나무 위로 오르는 트리클라이밍(물론 안전장비를 착용한다), 그네다리나 바이킹해먹 같은 숲 밧줄놀이’,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하여 지정된 지점을 통과하고 목적지까지 완주하는 오리엔티어링(orienteering), 자전거 가이드투어 등이 진행된단다.

 북천의 물줄기는 나름대로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한여름 장마철이 3개월이나 지났으니 이제 갈수라 할 수 있다. 계곡을 품고 있는 설악산의 산줄기가 그만큼 크고 깊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웃 숲속 야영장에서는 아예 장박을 모집하고 있었다. 관광지마다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알박기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13 : 26. 12선녀탕 입구의 윗남교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3.07km,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도중에 만난 미술관과 박물관 등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서해랑길 41코스(구시포해변-심원면사무소)

 

여 행 일 : ‘23. 11. 11()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법성면·홍농읍 및 전북 고창군 상하면 일원

여행코스 : 구시포해변명사십리해변동호해변서해안바람공원람사르고창갯벌센터심원면사무소(거리/시간 : 19.7km, 실제는 명사십리해변에서 갯벌센터까지 14.77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1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고창의 서쪽 해안을 따라 걷는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명사십리해변과 장호해변, 바람공원, 갯벌식물원 등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구시포해수욕장(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서해안고속도로 고창 IC에서 내려와 15번 지방도(아산방면), 대동교차로에서 733번 지방도(해리방면), 지로삼거리에서 22번 국도(법성포방면), 상하교차로에서 다시 733번 지방도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구시포해수욕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고창41코스) 안내도는 군청 이동봉사실 앞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고창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걷는다. 구간 거리가 19.7km로 다소 긴 편이나, 전체가 평지길이라서 걷는데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난 5km쯤 단축해 법장천 배수갑문(지도에서 두 번째 파인 지점)부터 걸었다. 12km를 한도로 걷고 있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다. 이런 엄동설한에 혼자 걷는 시간이라도 줄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구시포 해변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해넘이라고 했다. 저물어가는 해가 가막섬에 걸치면서 만들어내는 노을은 우리나라 최고의 일몰 명소로 손색이 없단다. 그런데 그 가막섬이 방파제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산악회 버스를 타고 들어온 가막섬에는 항구가 들어서 있었다. 조수간만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바다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고나 할까? 하지만 난 와인 잔을 형상화 한 등대가 더 흥미롭다. 이곳 고창은 복분자의 고장. 등대는 복분자로 만든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으로 가득 채워놓은 모양새이다.

 그런데 저 호랑나비 조형물은 무엇을 의미는 걸까? 어쩌면 이곳 고창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임을 알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올해 봄 호랑나비가 보여주는 자연의 신비, 호랑나비야 돌아와라는 주제로 호랑나비에 관한 전시회까지 열리지 않았던가.

 해상펜션이란다. 다른 지역은 낚시꾼들이 이용하는 게 보통인데, 이곳은 주로 갯벌체험을 온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머문다고 한다. 아늑하게 생긴 돔 안에 취침·취사 시설은 물론이고 샤워가 가능한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갑판에서 바비큐 파티까지 가능하다나?

 또 하나의 포인트인 장호 갯벌체험장은 출발지로 가는 도중 차를 잠시 멈추고 둘러봤다. 위도를 마주보고 있는 장호마을 앞바다 갯벌은 마을 어촌계 소유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활동은 많은 부분에서 제약을 받는다. 소정의 금액을 낸 이들만 너른 갯벌에서 큼지막한 동죽조개를 캐고, 단단한 모래사장에서 승마체험을 할 수 있다.

 해변으로 내려서자 명사십리로 불리는 하얀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진다. 자를 대고 그린 듯한 직선의 길이가 무려 8.5km에 달한다니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이 특징인 서·남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라 하겠다. 덕분에 해변승마를 즐기려는 승마동호인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바닥이 단단한데다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해변이 길기까지 해 말을 타고 달리기에 딱 좋다는 것이다. 장호마을에는 외승 체험이 가능한 해변승마클럽도 있다.

 해변은 각종 체험을 하려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고 했다. 하지만 제철이 아니어선지 모래사장은 텅 비어있었다. 하나 더, 백제시대 상로현이었던 이 지역은 신라시대인 757(경덕왕 16) ‘장사현으로 이름을 바꾼다. 연안에 길고 넓은 모래사장이 있어 길 장()’ 모래 사()’를 썼다. 그게 인근 무송현과 합쳐지면서 무장현이 됐고, 지금은 그마저도 없어지고 상하면 해리면이 됐지만...

 장호어촌 체험마을은 이곳(주민들은 해변쉼터라 부른다) 말고도 갯벌체험장(마을에 있다)과 명사십리 해양파크를 포함한다. 체험활동도 조개채취나 승마체험 말고도 어망체험이나 후릿그물체험, 고개껍질꾸미기, 새우잡이 등이 진행된다.

 12 : 18-20. 실제 출발지는 법장천 배수갑문’. 41코스 시작점(구시포)에서 5.5km쯤 떨어진 지점으로, 12km를 한도로 트레킹을 이어가고 있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참고로 집사람은 시작점에서 9.3km쯤 떨어진 전북수산기술연구소에서 출발했다.

 길가 이정표는 서해랑길이 국가생태문화탐방로와 함께 쓰고 있음을 알려준다. 행정구역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고창군을 구석구석 돌아 볼 수 있는 탐방로로 내륙습지인 운곡습지와 연안습지인 고창 갯벌습지, 고창읍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창 고인돌유적지 등을 걸으며, 고창의 역사와 문화, 생태계가 공존하고 있는 자연환경을 직접 느껴볼 수 있다.

 오른편은 법장천(고창군 해리면 사반리 기슭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하천)의 유수지. 방조제에 갇힌 물길은 꽤 넓은 호수를 만들었다. 그 뒤로는 방조제를 쌓아 만든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12 : 20. 북쪽으로 난 명사십리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참고로 법장천 배수갑문은 상하면과 해리면의 경계이다. 상하면의 장호리에서 해리면의 사반리로 넘어간다. 그러니 41코스의 상하면 구간은 버스로 이동했다고 보면 되겠다.

 이 구간은 걷는 내내 소나무 숲과 함께한다. 명사십리 해변은 개방형 조간대(朝間帶)라고 한다. 계절풍의 영향으로 모래 공급이 쉬워 바닷가에 풍성사구가 형성됐다. 이 해안사구에 방풍림 역할을 하는 해송 숲이 들어섰는데, 도로가 이 숲을 헤집으며 나있는 것이다.

 12 : 31. 명사십리를 포함하는 이 구간은 조망 좋기로 입소문을 탔다. 저녁이면 바다는 노을로 덧씌워지기까지 한단다. 그런 명소를 지자체가 그냥 놓아두었을 리가 없다. 곳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여행객들을 끌어 모은다.

 난간에 서면 확 트인 바다와 어우러지는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때만 잘 맞추면 저 멀리 위도 너머로 떨어져가는 해를 볼 수도 있단다. 온 세상을 물들여버리는 저녁노을은 덤이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저 멀리 변산반도가 놓여있다. 하나 더. 이곳도 역시 해변이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일직선으로 뻗어나간다. 모래의 질도 특이하다고 했다. 다른 곳처럼 발이 푹푹 빠지는 게 아니라, 판판하게 다져진 게 걷기에 딱 좋단다.

 도로 주변 곳곳에 들어선 아기자기한 펜션들도 명사십리 해안도로를 꾸며주는 멋진 풍경이 된다.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을 베개 삼아 하룻밤 동화속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것도 유쾌한 일이겠다.

 12 : 41. 서해랑길을 걷다보면 각 지역에서 대표 음식을 만난다. 그동안 목포의 홍어를 비롯 증도 짱뚱어, 무안 낙지, 영광 굴비 등을 만났었다. 일부는 어떤 형태로든 조금씩 맛까지 보면서 지나왔음은 물론이다. 이곳 고창은 장어라고 했다. 그래선지 길가 곳곳에 장어집이 들어서 있었다.

 저건 상부마을(광승리) 포구쯤 되겠다. 물양장은 물론이고 선착장까지도 갖지 못했지만, 꼬맹이 어선 몇 척이 출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다. 이 일대는 칠산어장의 배후지역으로 예로부터 조기, 꽃게 등 어족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12 : 46. ‘명사십리 해양파크라고 한다. 인근 동호·구시포해수욕장 등 관광지와 연계한 어민 소득 창출을 위해 세운 시설로, 갯벌체험 후 씻는 샤워장이나 공연장 말고도 냉동창고 등 수산물 처리가공시설과 수산물 판매장, 횟집, 토산품 판매점 등을 갖추었다. 일종의 어촌 종합유통센터라고나 할까?

 2009년 문을 열었다는 해양파크는 수산물처리가공시설과 수산물판매장, 횟집 등을 포함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근처에 포구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늦어도 많이 늦었지만, 공사가 한창인 저 방파제가 그 대안이 아닐까 싶다. 어선의 접안이 가능해질 테니 말이다.

 12 : 50. 조금 더 걷자 길이 바닷가를 떠난다. 그리고는 내륙의 작은 고갯마루를 넘는다. 좋은 바닷가를 놓아두고 에둘러 돌아가는 이유가 뭘까?

 12 : 54. 이유는 간단했다. 바닷가에 들어앉은 저 전북 수산기술연구소’. 저렇게 큰 시설이 바닷가를 독차지하고 있으니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13 : 05. ‘동호해변에 이른다. 줄포만(곰소만)과 맞닿아 있는 해안으로 백사장을 따라 늘어선 수백 년 된 해송 숲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탐방로는 명사십리로를 따른다. 하지만 난 조망도 즐길 겸해서 해변을 걸어볼 것을 권해본다. 백사장과 해송 숲 사이에 야자매트를 깔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는 계속해서 위도가 따라온다. 거기에 쌍여도(미여도)’가 빈 여백을 채운다. 명사십리에서 첫 선을 보일 때만 해도 점으로 나타나더니 어느새 몸집을 부풀렸다.

 해수욕장에 가까워지자 조금은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바다와 백사장, 관광객 시설, 상가 등의 순서로 돼 있는 여느 해수욕장들과는 달리, 이곳은 상가는 저 안쪽에 있고 상가와 백사장 사이를 소나무 숲이 메우고 있었다. ‘숨겨진 해수욕장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 입구의 안내판을 한번쯤 살펴보고 해수욕장으로 들어가자는 것을 깜빡 빼먹을 뻔 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당신은 이 지역 유일의 해신당인 영신당을 살펴볼 수 있다.

 국민여가캠핑장이란다. 해변 레저는 자동차 캠핑이 대세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체감온도가 영하 20도까지 내려갈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에도 숲속 곳곳에 캠핑족들이 들어가 있었다. 텐트는 웬만한 방갈로 저리 가라는 크기. 저 안에는 테이블과 의자는 물론, 그릴, 휴대용 냉장고, 조명까지 없는 게 없다고 했다.

 동호해수욕장은 드넓은 백사장을 자랑한다. 백사장 남쪽 끝에 있는 수산기술연구소까지의 거리는 약 1.5km. 결코 짧지 않은 거리다. 백사장 뒤쪽으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가지런히 서 있는데다 수심이 0.5~1.5m로 어린이들도 안심하고 물놀이를 즐길 수 있어 가족 피서지로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세면대와 화장실, 민박, 식당 등의 편의시설도 여느 유명 해수욕장에 못지않게 잘 갖추어져 있다.

 동호해변의 갯벌은 동죽과 바지락이 지천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해수욕장의 조형물도 동죽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바닷가로 나가본다. 맞은편에는 위도와 쌍여도(미여도), 북쪽으로 뻗어나간 해수욕장의 끝에는 외죽도가 놓여있다. 부안면 앞바다에 떠있는 내죽도에 대비되는 이름으로 대죽도 소죽도로 구성된다. 간조 때 갯벌이 드러나면 걸어서도 섬에 들어갈 수 있단다.

 동호해변은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모래찜질하기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바닷물의 염도가 높아 피부병과 신경통 환자들이 많이 찾아온단다. 그래서일까? 해수욕장 주변의 시설지구는 성업 중이었다. 민박과 펜션 등 숙박업소는 물론이고, 음식점에 카페까지 웬만한 편의시설은 다 들어섰다. 모두 다 문을 열고 손님을 맞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체험센터를 지나자 굴을 뚫고 있었다. 탐방로는 터널 앞에서 오른편으로 간다. 하지만 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영신당이 있을 밥한 산등성이로 올라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다. 그리고 길을 찾기도 했다. 그런데 이 길이 웃자란 잡초와 잡목으로 뒤덮여 통행이 불가능하니 문제다.

 그나마 친절한 주민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랄까? 지자체의 게으른 행정에 툴툴거리는데 마실 나온 주민이 동호마을 쪽으로 100m쯤 더 가면 길이 잘 나있다고 알려준다.

 13 : 27.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100m쯤 더 가니 구동호마을’. 초입에서 산등성이로 올라가는 길이 왼쪽으로 갈려나가고 있었다. 이어서 200m쯤 올라가니 조성공사가 한창인 전망공원이 나온다.

 13 : 30. 전망공원의 중심은 원형전망대이다. 돌출된 암벽지대에 2층의 메인 건물을 짓고, 바다를 향해 길게 대를 쌓았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동호해안의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탐방로 조성공사가 한창인 현장을 100m쯤 더 걷자 숲속에 숨어있던 영신당이 얼굴을 내민다. 이 고장 유일의 해신당으로, 해마다 풍어와 어민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단다.

 사랑꾼인 집사람은 오늘도 바쁘다. 4km쯤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은 양지바른 곳에서 냉이를 캐고 있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나와 잠깐 캤다는데 벌써 한 움큼이다. 서방님 밥상에 올릴 생각에 추위까지도 잊었나보다.

 13 : 42. 10분 남짓의 시간을 투자해 전망공원과 해신당을 둘러본 다음 구동호마을로 내려선다. 법정 동리인 동호리(冬湖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지만, ‘옛 구()’자가 좁은 의미의 동호리였음을 알려준다. 참고로 동호리는 가재지(歌子洞구동호(舊冬湖남부(南部삼양동(三養洞신동호(新冬湖)  5개의 행정리와 가재지·신흥·구동호·남부·삼양동·신동호·소리개 등 7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에는 동백정(冬柏亭)’이란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동호마을의 옛 이름인데 마을에 동백나무가 무성한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이후 변산반도 방향의 바다가 호수처럼 보인다하여 호수 호(‘)’자를 덧대 동호(冬湖)’가 되었단다. 이곳 동호가 우리가 흔히 만나게 되는 동서남북의 동호(東湖)가 아닌 동백 꽃 바다가 된 이유이다.

 동호항은 먼발치서 바라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응룡(상하면 계산서원 배향)의 발자취가 서린 포구다. 고창지역에서 모은 군량미를 이곳 동호항을 통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행주산성으로 보냈다고 전해진다.

 13 : 46. 동호마을 앞에서 방조제 둑길을 탄다. 흐드러지게 핀 갈대꽃이 길손을 반기는 아름다운 구간이다.

 오른편은 온통 대하양식장이다. 반면에 왼쪽은 줄포만을 사이에 두고 변산반도가 기다랗게 펼쳐진다.

 13 : 55. 77번 국도(동호로)로 올라선다. 한반도의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L"자형으로 이어지다보니 이곳까지 연결되어 있었나 보다. 하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국도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줄포만에 떠있는 저 섬의 정체는 뭘까? 파도에 깎여나간 듯 손바닥만 한 땅덩어리가 만조의 바다를 뚫고 솟아올랐다.

 14: 00. 삼양동(三養洞) 마을에 이르자 동호 배수갑문이 얼굴을 내민다. 선착장은 없지만 이 부근은 삼양동 어민들의 포구로 이용된다.

 14 : 03. 몇 걸음 더 걸어 도착한 동호교차로에는 유리창까지 두른 정자 외에도 간척지준공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해리천 하구에 방조제를 쌓아 간척지를 만든 걸 기념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참고로 해리천(海里川)은 무장면 월림리 산기슭에서 발원해 해리면을 관류, 심원면 궁산리까지 14.1km를 흘러 서해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서해랑길 이정표가 변신을 했다. 시점과 종점을 먼저 적고, 그 하단에 다음 행선지를 적던 기존과는 달리, 이번 코스의 것들은 다음에 만나게 될 주요 포인트만 적고 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시도가 개선이 아니라 개악으로 보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오해일까?

 동호교차로에서 국도를 벗어난 탐방로는 이제 애향갯벌로를 탄다. 초입의 700m구간은 방조제. 배수갑문이 두 개나 만들어져 있었다. 하나 더. 해리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 방조제를 건너 심원면(고전리)으로 간다.

 아니나 다를까 간척사업은 엄청나게 너른 들녘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게 유수지와 습지로 방치되고 있었다. 고창군 전체가 생물권보전지역이란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습지는 새들의 낙원이 되었다. 텃새와 철새가 함께 관찰되는데, 우리가 간 날에는 왜가리와 오리가 떼를 지어 먹이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얼굴을 내민다는 황새는 눈에 띄지 않았다.

 왼쪽으로는 줄포만이 펼쳐진다. 아니 줄포만의 입구쯤으로 보는 게 옳겠다.

 14 : 12. 방조제 끝에는 고창컨트리클럽이 있다. ‘+3을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골프장으로, 정규 18홀 외에 12’ 3홀을 더 두어 성수기 등 경기 지연 시 고객 불만을 해소시켜준다고 했다. 18홀 플레이만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골퍼에게는 멋진 보너스가 될 것이고.

 국가생태문화탐방로 이정표는 오른쪽에 삼양염전이 있음을 알려준다. 삼양사의 창업주인  김연수(金秊洙)씨가 창업한 천일염전인데, 이 일대의 염전이 하도 넓다보니 마을의 이름까지도 염전마을(심원면 고전리)’이 되었단다. 주민들은 빛나는 순백의 소금밭 풍경을 일러 고창 속 은자(隱者)의 나라라고 부르고 있었다.

 14 : 15. 몇 걸음 더 걷다가 소나무 숲(이정표 : 바람공원 2km/ 동호해수욕장 2.5km)으로 들어간다. 방풍림으로 조성해놓은 것 같은데, 어른의 허리통보다도 더 굵은 소나무들이 해안을 따라 숲을 이루고 있다. 길은 숲속을 요리조리 다니다가 바다 쪽으로 시야가 열리기도 한다.

 검은머리 물떼새 형상을 한 방향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이밖에도 참조롱이·큰고니·노랑부리저어새 등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답게 고창 갯벌을 찾아오는 철새들을 모티브로 삼아 이정표를 만들고 있었다.

 탐방로는 한마디로 멋졌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테크 로드를 내놓았는가 하면 곳곳에 벤치를 놓아 쉬엄쉬엄 돌아볼 수 있도록 했다. 거기다 숲속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에 대한 안내판까지 세워놓아 읽을거리까지 제공한다.

 이 멋고?’ 낯선 풍경 하나가 길 걷던 중생에게 화두로 다가온다. 바닷가에 길게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중간의 한 지점을 터 바닷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어 봐도 그 용도가 감도 잡히지 않는다.

 14 : 25. ‘서해안 바람공원에 닿았다. 이름대로 시원한 바닷바람과 서해안의 일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공원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으로, (바람 및 해넘이)광장, 산책로, 전망대,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전망대에 오르자 외죽도(外竹島)의 두 섬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줄포만의 안쪽, 깊숙이 들어앉은 내죽도(內竹島)’에 대비되는 지명으로 대()죽도와 소()죽도를 포함한다. 또 하나. 소죽도는 무인도인 반면 대죽도는 1가구 1명이 거주하고 있단다.

 바람을 상징하는 풍차도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거센 바람에도 날개가 미동조차 않는 돌지 않는 풍차. 그래서일까? 문득 사랑도 했다. 미워도 했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로 시작되는 문주란의 노래가 떠오른다.

 바람개비도 여러 개 장착했다. 그러나 이 역시도 돌아가지 않는다. 이 지역은 바람 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니 소형 풍력발전기를 배치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친환경 분산형 전원 확대와 지자체 에너지전환 주도에 발맞추는 한편, 주변 공공시설에도 전력을 공급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난간에 매달린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이 부근 해안에 길이 1.3km( 40~70m) 쉐니어(chenier)’ 지형이 발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쉐니어란 태풍이나 조류에 의해 갯벌위에 모래와 자갈이 육지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만들어지는 독특한 퇴적지형을 말한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움직이는 섬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볼 수는 없었다. 바다는 만조에 가깝게 물이 차있다. 그러니 바다와 바다 사이에 모래톱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런데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만 펼쳐질 따름이다. 더 놓은 곳에 올라야만 쉐니어를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탐방로는 또 다시 숲속을 걷는다. 제방의 둑처럼 도톰하니 솟아오른 부분을 따라 1.4km 정도의 산책로가 나있다. 둑의 양옆에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가히 최고의 산책로라 하겠다.

 하지만 그런 호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야간 산책을 위한 조명공사를 하느라 길을 온통 헤집어놓았다.

 덕분에 도로(애향갯벌로)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부담스러워할 필요는 없다. 2차선이지만 가장자리를 따라 보도를 따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새옹지마라고 딱딱한 아스팔트 도로를 걷는 대신 눈은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오른쪽에 갈대로 가득한 습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4 : 45. 이번에는 세계자연유산인 고창갯벌을 홍보하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2층의 대를 세우고 그 위해 하얀 그늘막이 있는 전망대를 얹었다.

 전망대에 오르면 건장한 수탉과 암탉 그 뒤를 졸졸 따르고 있는 병아리 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근처에 계명산(雞鳴山)’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계명산에서 닭이 울면 중국 땅에서도 들린다고 했으니 말이다.

 만돌마을과 그 주변에 있는 명소들은 만화로 전하고 있었다. 그 구심점인 고창갯벌을 빼먹었을 리가 있겠는가. ‘람사르 습지이면서 유네스코 생물권보전 핵심지역이고, ‘세계자연유산 등재예정구역이기도 하단다.

 난간에 서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소 죽도는 물론이고, 그 뒤에 있는 위도와 쌍여도 등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만조 때라서 전망대의 주제인 고창 갯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망대가 전하고자 했던 계명산 7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앞에 대를 쌓고 또 하나의 전망대를 얹었다. 이곳과는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14 : 51. 잠시 후 도착한 계명산 전망대. 관찰데크 아래 공간은 솟대와 농게 등의 조형물 차지다. 계단 등의 이동 공간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망둥어, , 저어새 등 고창 갯벌에서 서식하는 생물들을 이야기판으로 만들어 붙여놓았다.

 이곳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을 담은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외죽도, 염전과 김양식장, 계명산, 만돌마을, 고창갯벌에 관한 얘기들을 가슴속에 담아갈 수 있다.

 앙증맞은 벤치가 눈길을 끈다. 어미고래와 아기고래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양새인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듯이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 어미고래의 얼굴표정이 자상하기 그지없다.

 난간에 서자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만조인데도 이작도의 풀등처럼 모래톱이 물에 잠기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아까 확인해보지 못했던 움직이는 섬 쉐니어(chenier)’가 아닐까 싶다. 1800년 전부터 형성된 모래 퇴적층이라는데, 양쪽 끝부분이 해안선 방향으로 활처럼 휘어져 있고 1967년 처음 관측한 이래 육지 방향으로 조금씩 모래층이 이동하고 있으며 그 모습도 수시로 변한단다.

 이곳도 풍차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지는 않기는 마찬가지다.

 14 : 56. ‘계명산 28.9m에 불과하다. 하지만 제로 레벨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10층짜리 건물의 옥상에 올라간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그렇게 올라선 정상에는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벤치는 물론이고 운동기구까지 배치한 걸 보면 주민들의 쉼터를 겸하고 있는 모양이다.

 계명산(雞鳴山)’ 닭이 우는 산이란 뜻을 지녔다. 옛날에는 달구지로 불리기도 했단다. 아무튼 이곳에서 닭이 울면 그 소리가 중국에 까지 갔다고 한다. 만돌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 산동성 옌타이(煙臺)까지는 대략 390km. 닭 울음소리가 그 멀리까지 갔다는 것은 만돌마을 사람들의 기개와 마을 번영의 염원이 담겨있다고 봐야 한단다.

 반대편으로 난 침목계단 길을 따라 내려가면 만돌마을이다. 만돌(萬突)은 풍수지리설에 따른 지명이다. 장차 굴뚝이 만 개가 솟을 것이라는 예언에서 유래했단다. 마을은 앞으로 드넓은 줄포만(곰소만)이 펼쳐져 있고 대죽도와 함께 멀리 부안군까지 바라볼 수 있어 섬과 갯벌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보지는 못했지만 해질 무렵 펼쳐지는 낙조가 일품으로 알려진다. 천일염 체험, 조개잡이 체험, 고기잡이 체험, 갯벌 버스타기 같은 체험 프로그램도 참여할 수 있단다.

 15 : 00. 마을 앞, 탐방로는 동화속의 네덜란드를 연상시키는 둑길을 따른다. 줄포만과 마을 사이에 둑을 쌓고 그 위에 길을 냈다. 그런데 마을과 갯벌의 높이가 비슷한 것이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바다건너 저 멀리 변산반도의 높은 산들이 반긴다. 변산반도는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곳이다. 지금은 까마득히 보이지만 걷다 보면 어느새 도달해 있을 것이다.

 15 : 12. 마을을 벗어나 드넓은 들녘으로 간다. 아니 방조제 안쪽이긴 하지만 크고 작은 저수지가 길 양옆으로 줄을 잇는 구간이다.

 왼쪽, 호수를 연상시킬 정도로 큰 저 저수지의 용도는 대체 뭘까?

 바람 많은 들녘. 그 한가운데를 지나다 만난 염전은 우릴 색다른 풍경 속으로 인도한다. 소금은 햇볕과 바람을 먹고 자란다. 좋은 햇빛과 좋은 바람이 보석처럼 빛나는 하얀 소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소금밭은 지금 긴 낮잠을 잔다. 뜨겁게 내리 쬘 내년의 뙤약볕을 기다리며...

 15 : 26. 전망타워 비슷한 시설이 보이는가 싶더니 고창 갯벌식물원의 입구에 이른다. 청정지역 고창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갯벌의 고장이다. 2007년 해양수산부로부터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받은 이래, 2011년 람사르 갯벌습지, 2013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2021년에는 유네스코 자연유산에까지 등록됐다. 그러니 어찌 습지식물원 하나쯤 만들어두지 않았겠는가.

 갯벌 습지에는 아까 보았던 전망타워 외에도 생태탐방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함초와 칠면초, 나문재 등 70여 종의 염생식물이 군락을 이룬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과거 고창의 해안은 천연의 해안선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갯벌이었다고 한다. 그게 갯벌에 대한 이용이 많아지면서 축제식 양식장으로 변했다. 간척사업으로 인해 갯벌이 훼손되면서 갯벌 환경 또한 변해갔다. 이곳 갯벌식물원도 축제식 양식장으로 이용되다가 버려진 것을 지자체에서 둑을 터주면서 생태계를 되살렸다고 한다. 바닷물이 다시 흐르면서 칠면초, 해홍나물, 퉁퉁마디 같은 염생식물들이 다시 자리를 잡더란다.

 옛 방파제의 벽화는 어촌의 풍경을 담았다. 동네 아낙네들이 조개를 캐느라 여념이 없다.

 간척지에 들어선 태양광발전소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태양광 모듈의 생김새로 보아 태양의 이동에 맞추어 회전할 수 있지 않나 싶다.

 15 : 40. ‘람사르 고창 갯벌센터에 이른다. 고창 갯벌은 주민들에게는 매번 밟는 땅이자 매일 아침 보는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고창을 방문한 이방인들에게는 밟아보고 싶은 땅이자 경험해보고 싶은 곳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갯벌에 들어가는 우는 범하지 말자. 갯벌을 훼손시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이방인들을 위해 저런 센터를 세웠지 않나 싶다. 갯벌의 생태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갯벌식물원을 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갯벌생태 해설 프로그램도 신청할 수 있다니 말이다.

 15 : 42. 갯벌센터의 뒤쪽. 너른 주차장 한켠에 서해랑길 쉼터가 들어서 있었다. 문제는 서해랑길 안내도가 그 옆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원래의 안내도(고창 42코스) 1km쯤 더 걸어야 하는 심원면사무소 앞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데도 말이다.

 면사무소 앞에 있던 것을 뽑아왔다는 산악회장의 너스레가 아니더라도 이쯤에서 트레킹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구간을 이곳에서 시작하겠다는데 일부러 면사무소까지 찾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에 14.77km를 걸었다고 찍혀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강원도 평화누리길 15코스-1(인제 북면길)

 

여행일 : ‘23. 11. 19()

소재지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일원

여행코스 : 원통교어두원교한계삼거리정자문교차로12선녀탕 주차장만해마을용대삼거리미시령 옛길미시령(거리/시간 : 28.1km, 실제는 12선녀탕 주차장까지 13.37km 2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들머리는 원통교(인제군 북면 원통리)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를 타고 속초방면으로 50km쯤 올라오면 원통리에 이른다. 평화누리길 15코스의 출발점은 마을 앞 북천을 동서로 횡단하는 원통교이다. 참고로 원통(元通)’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원통역이라는 역참(驛站)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북면 소재지(원통리) 원통교에서 시작해 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용대삼거리에서 옛길을 따라 미시령 고갯마루까지 올라가는 코스다. 구간거리는 자전거길 답게 28.1km. 라이더들이야 우습겠지만 걷기 여행자들이 하루에 걷기에는 벅찬 거리다. 때문에 우린 절반으로 나눠 오늘은 십이선녀탕 주차장까지만 걷기로 했다.

 09 : 08. 15코스의 시점은 원통교의 동단(東端)이다. 이곳에서 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천의 오른편 둑 위로 널찍하니 길이 나있다.

 강 건너 원통 시가지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맞다. 군대라도 갈라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동구 밖까지 따라 나와 부디 살아서 돌아오라며 눈시울을 적시던 라때 시절, 이곳 원통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로 회자되던 고을이었다. 주민들보다 외출 나온 군인들이 더 많던 그런 첩첩산중 오지마을이 저런 고층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니 어찌 낯설지 않겠는가.

 세월과 함께 쇠락해가던 군사도시는 이제 군인과 상생하는 병영문화도시로 거듭났다고 한다. 4층 규모의 웰컴센터가 들어섰는가 하면 병영역사와 문화가 담긴 테마존, 특화된 먹자골목 등 볼거리·즐길거리·먹을거리가 즐비하단다. 그렇다면 길가의 저 참호는 옛 추억 소환용일지도 모르겠다. 온고지신(溫故知新). 그래, 언젠가 공연장에서 만난 고() 박동진(朴東鎭) 명창께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를 외치지 않던가.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는 저 바람개비는 조경용? 아서라 저래 뵈도 의젓한 풍력발전기라고 한다. 친환경 분산형 전원 확대와 지자체 에너지전환 주도에 발맞추기 위해 개발된 소형발전기로, 주변 공공시설에 전력을 공급해주는 주민 편익시설이다. 하나 더. 하천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를 막아 소수력발전을 하고 있었다.

 코리아 둘레길의 한 축을 담당하는 ‘DMZ 평화의 길 팻말이 눈에 띈다.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과 겹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DMZ 평화의 길은 비무장지대(DMZ)를 걸으며 분단의 현실을 체험하고 접경지역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만든 트레일(trail)이다. 강원 고성에서 인제·양구·화천·철원·연천·파주·김포를 경유해 인천 강화까지 접경지역의 9개 시·군을 횡단하는 길이 524km의 도보길이다.

 09 : 19. ‘라때의 추억을 소환해가며 걷기를 10분 남짓. 둑길이 끝나면서 2차선 도로(갈골로)로 올라선다.

 나만큼이나 많은 풍파를 겪었나보다 함께 걷던 산수(傘壽)의 도반 손가락 끝에는 힘이 겨운 듯 지지대에 의지하고 있는 노송 한 그루가 있었다.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 곡강시(曲江詩)’에서 사람이 70까지 사는 것은 예부터 드물었다(人生七十古來稀)’고 했다. 70세의 별칭이 고희(古稀)가 된 근원이다. 그런데 이분은 이미 80을 넘기셨다. 그의 손가락 끝에 놓인 소나무에게 경의를 보내며 트레킹을 이어간다.

 왜가리는 철새? 결론은 ‘NO’이다. 원래는 철새였으나 기후변화와 강한 적응력 덕분에 현재는 완전히 텃새가 되었다. 하나 더. 옛 사람들은 왜가리를 으악새라 부르면서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을 왜가리처럼 소리를 지른다며 나무랐다고 한다. ‘으악-으악하는 왜가리의 울음소리가 영 곱지 못했기 때문이다.

 09 : 23. ‘갈골교를 건너자 길이 둘로 나뉜다. 아까 도로(갈골로)로 올라섰던 탐방로가 다시 둑길로 내려서는 것이다.

 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둑길은 왼편에 북천, 그리고 오른편에 둑을 쌓아 조성한 뜨락만큼이나 작은 들녘을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명색이 평화누리길’. 거기다 ‘DMZ 평화의 길까지 더했는데 어찌 쉼터 하나 없겠는가. 정자는 물론이고 몸이라도 풀고 가라는 듯 운동기구 몇 점을 배치했다. 커다란 견공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어 쉬기는커녕 다가가보지도 못했지만.

 9 : 40. ‘어두원교로 북천을 건넌다. ‘어두라는 지명은 다리 건너에 있는 어두원 마을(원통8)’에서 빌려왔다. 높은 산이 솟아 있고 골짜기가 깊어서 항상 어둡다는 오지마을이다. 그러니 한자로 변한하면 음지(陰地)’쯤 되겠다. 그런데도 굳이 어두리(魚頭里)’를 공식 지명으로 내걸고 있는 이유는 뭘까?

 평화누리길은 자전거길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이정표(용대삼거리 19.1km)도 자전거를 매달았다.

 다리에서 바라본 상류 쪽 풍경. 안개가 걷히지 않아 파노라마로 펼쳐져야 할 설악산은 그 형상조차 가늠해 볼 수 없었다.

 다리 건너는 어두원마을’. 탐방로는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북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물줄기를 왼편에 끼고 달려온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오른편에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09 : 45. 100m쯤 더 걸으면 또 하나의 쉼터. 이번에는 반듯한 팔각정까지 지어놓았다. 그것도 북천의 벼랑에 걸터앉은 모양새로...

 접경권 평화누리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용늪마을 자연생태학교, 냇강마을, 만해마을, 백담사, 인제산촌민속박물관 등 인제권역에서 만날 수 있는 주요 관광지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평화누리길은 자전거길. 그러니 자전거 거치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하나 더, 왼쪽에 보이는 도로는 44번 국도(설악로)이다.

 쉼터는 조망의 명소이기도 하다. 난간에 서면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북천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발원해 남서방향으로 흘러 인북천으로 유입되는 지방하천이다.

 탐방로는 44번 국도와 나란히 간다. 북천이 오른편에서 따라옴은 물론이다.

 09 : 48. 설하관광농원 캠핑장에 이른다. 하지만 걷기 여행자들에겐 함께 걷는 도반과 커피라도 한잔 나눌 수 있는 ‘cafe kanune’가 더 친근하다.

 요즘은 한 달 살기가 유행이라고 했다. 그 정도는 머물러야 그 지역의 속살을 속속들이 느껴볼 수 있다나? 문득 올해 봄 다녀온 코카서스 3국이 생각난다. 조지아의 현지인으로부터 한 해 살이를 권유 받았고,  15일 정도의 여행기간 내내 고민에 빠지기도 했었다. 내 연금에 조금만 더 보태면 귀족처럼 살 수가 있다니 어찌 귀가 솔깃해지지 않았겠는가.

 09: 54. ‘관벌교차로라고 한다. 고원통(古元通)의 남쪽 들녘 옆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이곳에 관청이 있었다고 한다.

 교차로를 빠져나오면 설악휴게소가 잠시 쉬었다가란다. 하지만 이른 시간이어선지 인적은 뜸한 편이었다.

 탐방로는 이제 한계리(寒溪里)’로 들어간다. 망국의 한을 짊어진 신라 마의태자(麻衣太子)와의 인연을 들먹이는 마을이다. 10월 하순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이 한겨울에 이곳에 도착했고, 살을 에이는 추위와 몰아치는 눈보라를 겪으며 한계(寒溪)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란다.

 이때 안개가 걷히면서 산줄기 하나가 살짝 얼굴을 내민다. ‘한석산(寒石山 : 1,117m)’이 아닐까 싶다.

 10 : 02. ‘한계2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 44번 국도의 한계교 아래를 지난다. 직진하면 한계삼거리 휴게소’. 하지만 오가는 차량들은 휴게소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새로 뚫린 국도를 따라 휭하니 사라질 뿐이다.

 탐방로는 46번 국도를 향해 간다. 길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자전거길임을 알리는 하늘색 선이 그어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공명(共鳴)의 집이란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남의 사상이나 행동에 공감하며 그에 따르는 이가 산다는 얘기일 것이다. 두 물체가 마주쳐야 울림이 난다. 산 위에서 야호하고 소리치면 반대쪽 산에 부딪혀 소리가 되돌아온다. 이처럼 자기가 내뱉은 말이나 행동은 결국은 시나브로 자기에게 돌아온다. 남을 욕하거나 저주하면 상대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남을 칭찬하고 장점을 말하는 습성을 길러야 한다.

 오지 특유의 특산물들이 옛 추억을 다시 한 번 소환시킨다. ‘라때 시절 이곳 인제는 군인들이 가장 회피하던 지역 중 하나였다. 102(지금은 해체됐다)에 걸린 것만으로도 서럽던 당시, 이곳까지 들어온 군인들은 빽 없는 부모들을 원망하며 거꾸로 매달아도 세월은 간다며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빠삐용의 한국판이었다고나 할까.

 10 : 11. ‘고원통교 다리를 건넌다. 다리건너는 고원통(古元通)’ 마을. 조선시대 역()이 있었다는 곳이다(마을 중심을 원통으로 빼앗기고 이름표에  를 덧댔다나?). 인제읍지(1843)는 역마 1, 복마 2,  4,  1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탐방로는 다리 건너에서 오른편으로 간다. ! 왼편으로 가면 내설악 예술인촌이 나온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마을에 거주하는 유명 작가 및 관내 문화예술단체의 작품을 전시하는 내설악 공공미술관도 들어서있다니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고원통 마을은 얼핏 유원지를 연상시킨다. 도로를 따라 꽤 많은 음식점과 숙박업소, 심지어는 호텔까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연 집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여름 한철 장사라도 하는 것일까?

 황태가공공장도 눈에 띈다. 인제의 겨울 풍경 중 단연 으뜸이라는 황태덕장이 인근에 있는 모양이다. 겨울의 추위와 볕에 의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쫀득하게 마르는 황태의 맛과 그것들이 가득한 덕장의 눈 덮인 풍경은 그야말로 겨울이 주는 선물과도 같다.

 탐방로는 이제 국도 46호선을 따른다. 아니 4차선으로 확장한 46호선을 새로 냈으니 이젠 ‘46호선 옛길이라고 하는 게 옳겠다. 참고로 그동안 함께 달려오던 국도 44호선과 46호선은 이곳 한계삼거리에서 이별을 고한다. 44호선은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가고, 46호선은 진부령을 넘어 고성으로 간다.

 10 : 16. ‘고원통교차로 부근에서는 신·구 두 도로가 함께 가기도 한다.

 10 : 26. 하지만 산을 꿰뚫어버리는 새 도로(미시령로)와는 달리 옛길(고원통로)은 북천 물줄기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다. 때문에 한계터널 입구의 교각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길은 양옆에 철제울타리를 둘렀다. 11코스 때 돌산령을 넘으면서 만난 울타리는 군 시설의 보호와 함께 북한에서 넘어오는 ASF(아프리카 돼지열병) 감염 멧돼지의 차단막을 겸한다고 했었다. 이곳도 비슷한 용도겠지?

 아까도 얘기했듯이 이 구간은 평화누리길 ‘DMZ 평화의 길이 사이좋게 함께 쓴다. 힘차게 달려가는 라이더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이유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주변 풍경이 확 바뀐다. 기암괴석의 바위봉우리. 그리고 바위틈에서 자라는 소나무들. 설악산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아니 아직은 맛보기일지도 모르겠다.

 오른편에서 따라오는 북천도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크고 작은 못은 물론이고, 집채 만한 바위부터 작은 돌멩이까지 조화롭게 깔린 내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

 저건 숫제 ()’이다. 용이 물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멋진 스토리텔링으로 덧씌운다면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변할 수도 있겠다.

 길은 수없이 많은 ‘S’자형 곡선을 그리면서 이어나간다. 따라가고 있는 북천(北川) 감입곡류(嵌入曲流)’의 하천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물굽이가 심한 곳에는 모래톱도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게 자못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퇴적층이라선지 소나무가 숲을 이루면서 주변 산하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10 : 46. 산이 깊은 곳이니 물이 맑을 것은 당연. 이해득실을 따지는 인간들이 이를 내버려둘 리가 없다.  설악산수 공장이 그 증거이다.

 쌍다리 쉼터는 캠핑촌인 듯. 널따란 공터에 텐트들이 빼곡히 들어 차 있었다.

 국도 46호선 옛길은 가고 또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심심산골을 향해 한없이 파고드는 모양새이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데, 아름답기로 소문난 북천이 함께 간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북천은 에메랄드빛 소()와 담()을 수없이 품었다. 한여름 최적의 가족 피서지로 꼽힐 만하다.

 인제의 가장 큰 특징은 북한과 접경을 이룬다는 점이다. 그래선지 결혼도 북한 출신 여성의 정보가 제공되고 있었다

 11 : 07. ‘정자문교차로에 이른다. 용대리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는데, 이곳에도 화장실까지 갖춘 쉼터가 만들어져있었다. 참고로 정자문은 마을 앞 강가에 정자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길가에는 열녀정문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정자나 정려문 모두 사라지고 없단다.

 이곳도 조망의 명소이다. 용대리(남교마을) 앞들을 적셔주는 북천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용대리에서 시작된 북천(北川)은 내설악 깊은 곳에서 흘러온 백담천까지 품고 웅장한 물길을 이어 간다.

 설악 하이 트레킹웨이 종합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 일부 구간을 저렇게 부르는 모양인데. 인제휴게소(인제군 남면)에서 용대삼거리까지 44번과 46번 국도에 붉은 선을 그어놓았다. 주요 포인트들을 함께 표시해놓았음은 물론이다.

 이곳 용대리가 전국 제1의 청정지역임을 자랑하는 조형물도 눈에 띈다.

 이후부터는 북천의 강둑을 따른다. 북천과 북천의 물줄기가 빚어낸 작은 들녘을 양옆에 두고 둑길이 나있다.

 도중에 만난 어느 민박집 원두막. 초겨울 찬바람에 시래기가 말라간다.

 11 : 17. ‘한 숨 자고가면 백수(白壽)는 넉넉히 넘기실 것입니다’. ‘장수정(長壽亭)’을 만난 일행이 넉살을 떤다. 둘러메고 온 배낭을 퇴침삼아 홍루몽(紅樓夢)이라도 꿔보라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서라. 초등학교 입학 전에 이미 할아버지의 통역을 거친 귀동냥을 했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도서관까지 찾아가 완독해봤지만, 결과는 항상 일장춘몽을 되뇌며 아쉬운 입맛만 다셔야했으니 말이다.

 침대는 과학입니다’. 과학계를 난감하게 만들었던 광고도 이제 어색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비닐망으로 과수원을 통째로 둘러쳐야만 할 날이 오게 될 줄을 당시 사람들은 짐작이나 했을까 싶다.

 북천의 물굽이가 빚어놓은 개울 속 섬에는 캠프촌이 들어섰다. 600명이 동시에 이용 가능한 숙박시설과 교육시설, 부대시설을 갖춘 사설 청소년수련원이다. 트래킹, 카약, 래프팅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도 함께 즐길 수 있다고 한다.

 11 : 29. ‘용대교를 건너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십이선녀교가 어서 오란다. 15코스를 절반으로 단축했으니 이제 그만 마칠 때가 되었다면서 말이다.

 넝쿨식물 터널이란다. 용대권역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했는데, 조롱박·색동호박·수세미·여주·환타지믹스 등 넝쿨식물들을 심어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가을철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가 멋진 풍경을 연출해준다고 한다.

 용대권역 농촌종합개발사업의 내력은 그림으로 전해준다. 문화·복지시설과 소득기반시설을 갖추었으며, 황태홍보전시관·습지생태자연학습장·약초재배체험장·장류체험장 등의 다양한 시설을 조성해 권역별 특성에 맞는 마을로 탈바꿈시키겠다나?

 11 : 35. ‘남교마을로 들어서면 십이선녀교(十二仙女橋)’가 반긴다. 20년쯤 전, 저 건너에 있는 십이선녀탕 계곡을 지나 대승령으로 올랐고, 귀때기청봉과 대청봉을 거쳐 오색약수로 하산했었다. 기억조차 희미해졌지만 연이어 나타나는 현세 속의 선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답사를 이어가던 기억이 새롭다.

 십이선녀교를 건너지는 않는다. 탐방로는 다리를 지나쳐 남교마을로 들어간다. 아니 집단시설지구로 변한 윗남교라고 하는 게 옳겠다. 참고로 남교(嵐校)’는 조선시대 이곳에 있던 보안도(保安道)에 딸린 역참(驛站)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당시 남교역에는 복마가 3, 노가 5, 비가 3명 있었다고 한다.

 시설지구답게 꽤 많은 펜션들이 들어서 있었다. 중세풍에 현대미를 더하는 등 개개의 외관도 하나같이 예쁘다. 그러니 멋진 정자 하나쯤 없겠는가. 하지만 개인소유였던 모양이다. 철망울타리를 둘러 출입을 막아놓았다. 세월이 하 수상하다보니 아름다음을 아는 사람들은 마음씨도 아름답다는 옛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나보다.

 숙박업소에 이어 나타나는 주차장은 엄청나게 넓었다. 윗남교와 당정골 사이에 있다는 이레가리일지도 모르겠다. 7,000여 평에 달할 정도로 넓어, 소 한 마리로 갈 경우 7일이나 걸린다는 그 들녘 말이다.

 주차장 초입, 전망 데크가 눈에 띈다. 스치듯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십이선녀탕을 곁눈질이라도 해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어찌 난간에 서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쉽게도 십이선녀탕계곡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북천의 물줄기가 발아래로 흘러갈 따름이다.

 11 : 46. 집단시설지구의 널디너른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2시간 4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이 13.37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빨리 건넌 셈이다. 하지만 먼저 도착한 이들은 벌써 식사가 한창이었다. 아무래도 저들은 달려오다시피 했나보다.

서해랑길 40코스(법성포-구시포)

 

여 행 일 : ‘23. 11. 11()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법성면·홍농읍 및 전북 고창군 상하면 일원

여행코스 : 법성 버스정류장검산마을홍농읍사무소상삼마을하삼마을고리포구시포해변(거리/시간 : 13.9km, 실제는 14.23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0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고창지역(4km)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보안지역인 원자력발전소를 피해 내륙을 횡단한다. 고창 땅에 있는 고리포와 구시포를 빼면 내놓을만한 볼거리가 없다는 얘기이다.

 

 들머리는 법성 버스정류장(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 신평교차로(영광읍)에서 22번 국고로 바꿔 법성포까지 온다. 복용삼거리에서 좌회전 842번 지방도(영광로)로 옮기면 잠시 후 법성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영광40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근처에 세워놓았다.

 이번 구간은 전라 남·북도의 경계를 넘는 구간이다. 전라남도의 해안(40개 코스, 652.2km)을 숨 가쁘게 달려온 서해랑길이 이 구간에서 전라북도에 바톤을 넘겨준다. 하지만 의미에 비해 볼거리는 빈약하다. 보안구역인 원자력발전소를 피해 내륙을 횡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닷가를 다시 만난 고창에서 아름다운 풍광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길이는 13.7km, 구간 전체가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무척 짧은 거리다. 난이도가 별이 2(5개 가운데)인 이유일 것이다.

 11 : 15. ‘법성3 다리를 건너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갯벌을 돋우어 조성한 뉴타운(2009년 포구 앞, 속칭 걸레바탕을 매립한 뒤 공모로 뽑은 지명이다)과 구도심을 연결한 몇 개의 다리 중 하나이다.

 물 빠진 법성포 앞바다는 갯벌만이 시커멓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물이 차면 저곳은 호수처럼 변한다고 했다.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온 탓에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호남지방을 드나드는 배들의 관문이 되어왔던 이유이다. 하지만 수심이 낮아진데다, 다른 곳에 근대식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들이 들어서면서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한적한 어촌마을로 변해버렸다.

 11 : 18. 다리 건너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길은 굴비의 고장답게 이름까지도 굴비로이다. 무늬만 굴비인 게 아니다. ‘굴비를 브랜드로 내건 도로답게 들어선 음식점이나 건어물가게의 이름도 하나같이 굴비를 내걸었다.

 영광군은 신재생에너지 산업클러스터를 꿈꾸는 고장이다. 우리나라의 4개 원자력발전단지 중 하나가 이곳 영광에 있는가 하면, 드넓은 바닷가를 따라 태양광발전단지와 풍력발전단지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하지만 영광의 주민 모두가 찬성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정부 정책에 반대해 세종시 정부청사 앞으로 달려가자는 걸 보면...

 에이~ 조기가 아니라 갈치네’. 누군가의 말마따나 다리(보행교인 한두름교’)를 덧씌운 조형물이 갈치처럼 길쭉하게 생겼다. 각설하고 간이 잘 된 영광굴비는 살이 눅눅하지 않아 담백한 맛이 난다. 질이 좋은 소금으로 염장하기 때문이란다. 재료가 되는 조기도 중요하다. 신안에서 영광을 거쳐 부안에 이르는 길은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파시(波市)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곳이었다. 해마다 알을 밴 조기들이 칠산 앞바다를 지나 북쪽으로 향했고, 이게 최고의 굴비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을 배기도 전에 남중국해에서 대부분이 잡혀버린다. 요즘은 수산시장을 돌며 사들인 조기가 굴비의 원료가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영광굴비가 제 맛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염산면의 소금과 법성포 해풍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충족시켰으니 가히 영광굴비라 불릴 수 있지 않겠는가.

 영광은 굴비의 고장이다. 그래선지 조형물도 굴비 일색이다. 그러니 어찌 굴비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굴하지 않는다는 뜻의 굴비(屈非)’는 고려시대 이자겸(李資謙, 미상~1126)이 만들었다. 딸 셋을 하나는 16대 예종(睿宗), 나머지 둘은 예종의 아들(자신에게는 외손자)인 인종(仁宗)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묘한 족보를 만들어버린 인물이다. 그가 영광으로 유배를 오게 됐는데, 이곳에서 만난 말린 조기를 굴비라는 이름으로 진상하며 선물은 주되, 결코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았단다.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아부가 아니며, 또한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11 : 25. 두 번째 다리(법성2) 앞에서 굴비로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난 연우로로 들어간다. 도심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 조형물로 치장된 첫 번째 다리(한두름교)는 보행자 전용이라는 것도 기억해두자.

 법성포역사문화탐방길은 법성포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탐방로이다. 보은의 두꺼비 전설이 있는 철비’, 조선시대 동헌 등 주요 관아와 객사, 수령들의 선정비, 전라지역 12고을의 조창 터,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56일 동안 머물렀던 하촌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며 낙향한 훈련도정 이척이 지은 제월정(영호정)’ 등을 만나볼 수 있다.

 11 : 26. 행운당(도장집) . 일행 중 하나가 걸음을 멈춘 채 핸드폰의 앱을 확인하느라 분주하다. 좋은 길을 놓아두고 골목(행운당과 수산물가공업체인 해미락굴비수산의 사이)으로 들어서라는 서해랑길의 방향표시가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골목은 갈수록 좁아진다. 이에 비례하듯 경사도 가팔라져 간다.

 11 : 30. 오름길의 막바지에서 엄청나게 굵은 느티나무(이정표 : 종점 12.9km/ 시점 1.0km)를 만났다. 나이도 법성포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오래 묵은 듯. 이런 볼거리를 그냥 놓아 둘 지자체가 아니다. 쉼터용 정자를 지어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이곳은 법성포 시가지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조망의 명소이기도 하다. 저녁에는 저 느티나무에 달이 걸리는 진풍경도 넘볼 수 있단다

 11 : 32. 842번 지방도(연우로)가 지나가는 동짓재(‘동깃재로 부르는 지역민들도 있었다)’에 올라선다. ‘법성포 12 중 일곱 번째인 동령추월(東嶺秋月)’, 즉 가을철에 뜨는 둥근 달이 빼어나다는 고갯마루이다.

 11 : 33. 도로로 내려서지는 않는다. 인의산(165.3m) 방향(오른쪽)의 언덕길로 잠시 진행하자 이 고장 출신 애국지사의 충용비(忠勇碑)가 얼굴을 내민다. 한국전쟁 때 법성면 일대의 수복을 위한 병력지원을 요청하려 광주로 가는 도중 공비의 습격을 받아 전사한 백인기 방위군 소위의 충용을 기리는 빗돌이다.

 빗돌을 살펴본 다음 탐방로에서 잠시 벗어나본다. 굵직굵직한 느티나무와 팽나무 수십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수백 년은 족이 묵었음직한 것이 도로 건너에 있는 법성진 숲쟁이의 연장이 아닐까 싶다. 숲의 내력은 지난 39코스 때 설명했었다.

 혜원 신윤복 선생이 그렸답니다’.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이 일러주신다. 담벼락에 그려진 민속화가 김홍도의 작품인줄로만 알았다. 민속화는 무조건 김홍도라는 내 선입견 탓이었고, 그런 무지를 그가 정정해 준 것이다. 덕분에 난 오늘도 새로운 앎을 얻어간다. 공자님의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가 실감나는 하루라 하겠다.

 11 : 36. 서해랑길은 842번 지방도(연우로)를 가로지른다. 이정표(종점까지 12.6km) 말고도 영광굴비특품사업단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영광굴비홍보전시관(문이 닫힌 듯해 들어가지는 않았다) 오른편에는 서호농악회관이 들어서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인 영광법성포단오제의 난장트기 행사 때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단체일 것이다. ‘서호란 이름은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법성포 앞바다의 별칭에서 따왔을 것이고...

 두 건물의 사잇길로 들어서자 폐허로 변한 마을이 나타났다. 하필이면 이런 황량한 풍경 속으로 길을 냈을까?

 폐촌을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밭두렁을 따라 이어진다. 밭에서는 알알이 여문 콩깍지가 타작을 기다린다.

 왼쪽에는 검산제가 있다. 갈대밭과 수림을 배경삼은 풍경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한 저수지이다. 둑 너머에서는 영광대교가 자신도 있다며 좀 보아달란다.

 11 : 42. ‘검산(撿山)’ 마을에 이른다. 도로(연우로)변에 버스정류장과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벽화가 그려진 골목을 빠져나오자 검산마을 경로당’. 쉼터용 정자가 잠시 쉬었다 가란다. 하지만 2.5km쯤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으려면 그럴 여유는 없다.

 널디 너른 들녘이 마을 앞으로 펼쳐진다. 전남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만들어진 풍요의 상징이다. 그 너머 바다, 홍농읍과 백수읍 사이 해협을 영광대교가 가로지른다.

 11 : 47. 정자를 지나 200m쯤 더 걸었을까 홍농읍과 법성면의 경계를 가르는 구암천이 얼굴을 내민다. 이정표(종점까지 11.7km)는 둑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란다.

 전남방조제로 물길이 막힌 구암천(龜岩川)’은 너른 유수지로 변해있다.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습지도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참고로 구암천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신촌리 과치제에서 발원하여 두암저수지를 지나 전라남도 영광근 홍농읍 칠곡리에서 서해로 합류하는 총연장 15.29km의 지방하천이다.

 구암천에는 홍농교가 놓여있다. 법성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다리를 건너 홍농읍으로 들어간다.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초입에 입간판까지 세워놓았다.

 그렇다고 홍농교를 건너는 것은 아니다. 서해랑길은 옛 다리인 연우교를 이용한다. 1981년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홍농교가 놓이면서 효용가치를 잃은 연우교는 상판에 흙을 쌓은 도로공원으로 바뀌었다. 참고로 연우(蓮牛)’라는 이름은 이 고장 출신으로 박정희정권 때 내무부장관을 지낸 박경원(朴璟遠)’의 호에서 따왔다. 고향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앞장섰던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지역민들 사이에 회자된다고 했다.

 안내판은 이곳이 줄 나룻터였음을 알려준다. 연우교가 놓이기 전, 1910년대부터 1971년까지 주민들은 나룻배를 이용해 강을 건넜다고 한다. 강 양편을 잇는 밧줄을 뱃사공이 끌어당기면서 나아가는 나룻배이다. 그 나룻배를 복원했다며 하단에 이용수칙까지 적어놓았다. 하지만 나룻배가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뭘까? 무심한 지자체가 게으르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나룻배를 없애려면 안내판까지 함께 치웠어야 하지 않겠는가.

 11 : 52. 다리 건너(이정표 : 종점까지 11.1km)에서 왼쪽 강둑을 탄다. 잠시 후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농로를 따른다.

 12 : 01. ‘자 모양으로 난 길을 8쯤 걸으면 ‘842번 지방도’. 도로 양옆에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우리가 걸어왔던 곳에 신흥(新興) 마을’, 그리고 진행방향에는 같은 상하리(4) 월봉(月峰) 마을이 있단다.

 잠시 후 이른 월봉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10.5km)에도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참고로 영광군청은 월봉이란 지명의 유래를 마을 지형이 반달처럼 생긴데서 찾고 있었다. ‘미역섬이라 불러오다 박도섬 등으로 바뀌었다고도 했다. ‘전남방조제가 축조되기 전에는 이곳이 섬이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월봉마을을 감싸듯이 돌아 나오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홍농읍이 놓여있다. 그런데 고층아파트들이 울쑥불쑥 솟아오른 게 시골 소읍치고는 낯선 풍경을 보여준다. 원자력발전소가 만들어 낸 변화가 아닐까 싶다.

 12 : 07. 저 거대한 시설은 농협의 벼 건조·저장센터라고 했다.

 저장센터 앞 버란계(버스정류장), 어느 선답자는 군청에까지 연락해 이곳의 정확한 지명이 벌안개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벌의 안쪽에 잇는 갯가라는 뜻일 게다. 옛날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고, 바닷일을 업으로 살던 어부들의 안식처였던 포구도 있었다나?

 우람하게 치솟은 해주아파트를 오른편에 두고 하봉마을(상하2)’로 간다. 봉대산(峯大山) 아래에 위치하면서 망덕산(望德山) 줄기를 따라 위에 위치한 마을을 상봉(上峯), 아래에 위치한 마을을 하봉(下峯)이라 부른단다.

 마을길은 꽃밭으로 꾸며졌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마을인가 보다.

 12 : 25. 홍농로(이정표 : 종점까지 8.7km)로 올라서 홍농읍 저잣거리를 걷는다.

 12 : 27. 잠시 후 다온누리아파트 앞에서 도로를 건너 하봉마을로 간다. 다음 블록에서는 오른쪽으로 난 상하길을 따른다. ! 아까 도로로 올라오기 전에 만난 농기계 보관창고에도 하봉이란 이름이 붙어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하봉마을의 중심가쯤 되겠다.

 이 길(상하길)은 행정타운인가 보다. 파출소와 읍사무소는 물론이고 초·중학교가 모두 이 거리에 들어서있었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농협의 간판이 조금 이상하단다. ‘지명을 브랜드로 내거는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굴비를 얼굴마담 삼았다는 것이다. 맞다. 영광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사면 백만 원짜리라도 백화점 굴비지만, 영광서 사게 되면 오만 원짜리도 영광굴비가 된다고 주장한다고 했다. ‘자린고비도 영광에서는 남의 집 얘기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나저나 자린고비라는 뜻을 집사람은 알기나 할까? 반찬이 아까워 천장에 생선을 매달아 놓고 쳐다보기만 했다는 할아버지와는 달리 그녀의 씀씀이는 요즘 내 연금의 한도를 넘어서고 있으니 말이다.

 번화가를 벗어나자 상점 대부분이 문이 닫혀있다. 요즘 TV만 켜면 불경기라는 뉴스가 뜨는데, 그 현장이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 매서운 한파에 경기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12 : 35. 홍농초등학교의 담벼락. ‘인성이 실력이다라는 휘호가 눈길을 끈다. 맞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고루한 사고발상은 이제 그만 사라졌으면 좋겠다.

 잠시 후 만난 홍농중학교의 담벼락에선 장미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세월이 하 수상하다보니 장미까지도 철이 바뀐 줄을 모르나 보다.

 12 : 41. 도심을 빠져나오면 확·포장공사가 한창인 홍농로와 마주한다.

 한수원사택 입구이기도 한 이곳에는 ‘119 안전센터가 들어서 있다. 2년 전, 봉대산과 금정산을 답사하러 왔을 때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어느새 현대적인 외양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참고로 봉대산에는 백수 구수산의 고도도 봉수대(古道島 烽燧臺)’에서 신호를 받아 상하면(고창군)의 고리포봉수대로 전하던 봉수대가 있었다. 고려 성종(981) 때 시작되어, 조선 중종 때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법성포의 조창을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란다.

 이후부터는 영광(한빛)원자력발전소로 가는 홍농로를 따른다. 도중에 영광승마원과 영광테마식물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기도 한다.

 12 : 51. 서당마을 앞 진덕삼거리에서는 한빛원자력본부 방향 직진이다. 오른쪽(구시포 방향의 진덕로’)으로 가면 더 가까운데 도로를 피해 우회시킨다. 참고로 서당(書堂)이란 지명은 1870년경 밀양박씨의 입향조가 문맹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옛 서당은 현재 문중 재실로 변했단다.

 100m쯤 걷다가 오른쪽으로 난 농로로 들어간다. 초입에 이정표(종점까지 7.4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그런데 어느 축산농가 앞에서 길이 곤포 사일리지로 막혀있는 게 아닌가. ‘럼피스킨이라는 소 피부병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12 : 55. 조금 전 헤어졌던 진덕로(이정표 : 종점까지 6.2km)’를 다시 만났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른다는 얘기는 아니다. 도로를 만나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상삼마을로 간다.

 잠시 후 진덕리(眞德里)에 속한 자연부락 상삼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5.9km)에 이른다. 영광군청은 상삼(上三)’이란 지명의 유래를 삼밭(蔘田)에서 찾고 있었다. 남원 땅에서 들어온 남양방씨가 삼밭을 경작했는데, 이 삼밭의 위에 마을이 위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을 이름인 자가 인삼 삼()’이 아니고 석 삼()’인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13 : 10. 상삼마을부터는 밭과 논 사이로 난 농로를 따른다. 그렇게 12분쯤 더 걸으면 하삼마을이다. 영광군청은 이 마을도 역시 삼밭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옥녀가 머리를 산발한 지형의 옥녀산발 마을이 삼() 재배면적이 늘어나면서 삼밭 또는 갯삼밭으로 고쳐졌다는 것이다. 이게 또 마을의 위치로 인해 삼밭 아래란 의미의 하삼(下三)’이 되었고.

 하삼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5.1km)은 개짓는 소리로 요란했다. 크고 험상궂게 생긴 개들이 이집 저집에서 윽박지르듯 짖어댄다. 개집이 천정까지 철망으로 막혀있다는 게 그나마 안심이 된다.

 13 : 15. 마을을 벗어나 2차선 도로인 진덕로2(이정표 : 종점까지 4.6km)’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르지는 않는다. 도로를 횡단한 다음 농로를 이용해 건너편 들녘으로 간다.

 동아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수확을 끝낸 들녘은 텅 비었다. 부지런한 농부는 곤포 사일리지조차도 논두렁에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13 : 21. 전라 남·북도의 경계에 놓인 자룡천의 강둑(이정표 : 종점까지 4.2km)에 올라선다. 그리고는 둑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참고로 자룡천(紫龍川)은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검산리에서 발원해 남서쪽으로 흐르다 용대저수지를 지나 자룡리에서 서해로 스며드는 길이 6.13km의 지방하천이다.

 방조제에 막힌 자룡천은 유수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 자못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13 : 26. 진덕리(영광군 홍농읍)과 자룡리(고창군 상하면)의 앞바다를 막은 동아방조제(이정표 : 종점까지 3.7km)’에 올라섰다. 둑 위로 2차선의 해안도로가 지나간다. 하나 더, 전라남도의 해안(40개 코스, 652.2km)을 숨 가쁘게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 둑길에서 전라북도에 바톤을 넘겨준다.

 동아배수장 앞에서 바라본 바다.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와 안쪽에다 펑퍼짐한 바다를 만들어놓은 것이 영락없는 호로병인데, 바닷물이 들어오는 저 주둥이 부분도 남북으로 나뉜단다. 왼쪽은 전라남도(영광군 홍농읍 성산리), 반면에 오른쪽은 전라북도(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땅이다. 하나 더, 갈대밭이 들어선 바닷가는 철새도래지인 듯. 꽤 많은 왜가리들이 먹이활동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13 : 33. 500m쯤 되는 방조제가 끝나면 길은 둘로 나뉜다. 서해랑길은 왼쪽 구시포 쪽으로 간다.

 가시연꽃길 이정표가 오른쪽으로 가면 용대 가시연꽃군락지가 나온다고 알려준다. 고창군에서 자연환경과 문화역사 자원을 담아 만든 예향천리마실길  10코스인 가시연꽃길(13km)이 이곳으로 지나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13 : 36. 300m쯤 더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 이번에도 왼쪽(구시포 방향)으로 간다. 다만 길이 2차선에서 1차선으로 바뀔 따름이다.

 이곳에서는 ‘12일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자기네 식당에서 촬영했다는 듯 거북선 숯불풍천장어라는 상호를 두드러지게 적어놓았다.

 이후부터는 바닷가를 따른다. 철제 난간까지 두른 멋진 산책로가 고리포까지 나있다. 하지만 길이 널찍한 것은 흠이 될 수도 있겠다. 승용차는 물론이고 트럭까지 스스럼없이 지나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륙 방향, 1km도 더 되는 구간은 대하양식장 천지다. 소금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저곳에 염전이 들어서있었지 않나 싶다.

 습지를 가득 메운 갈대밭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아니 근처에서 노닐고 있는 왜가리까지 더해줄 경우 흔치 않는 풍경으로 업그레이드된다.

 바닷가 안내판은 고리포마을 해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바닷가에 쳐놓은 저 그물의 정체는 대체 뭘까? 호리병처럼 생긴 내만을 한 바퀴 둘러놓은 것 같은데...

 13 : 56. 바닷가로 내려선지 21. ‘고리포(古里浦)’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고리포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던 포구로 유명하다. 마을은 봉군들이 머무르면서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참고로 고리포봉수대는 포구 북동쪽 600m 지점의 안산(120m) 정상에 있었다고 한다. 문헌은 영광군 홍농산(弘農山, 지금의 봉대산일 것이다)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소응포 봉수로 전달해 주었다고 적고 있다.

 포구 앞, 작은 모래섬이 천혜의 항구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맞다. 고리포는 현 고창 지역의 포구 중 유일하게 그 위치가 이동되지 않고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포구라고 했다. 입지여건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10척도 못되는 소형 선박들이 이용하고 있을 따름이란다.

 고리포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숯불풍천장어는 거북선을 독채로 전세 냈다. 민박이 가능한 맛집으로 잔잔한 바다냄새와 함께 커다란 지붕이 열리며 파란 하늘을 덤으로 볼 수 있는 고창의 핫 플레이스라고 한다. 하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는 카메라 셔터 한번 누르고 그냥 지나칠 따름이다.

 고리포를 지난 서해랑길은 주씨고개를 향해 가파르게 치고 오른다. 주씨고개는 40코스에서 가장 높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14 : 06. 고갯마루를 넘자 발아래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1800년 무렵부터 소금을 생산하던 구시포(仇時浦)’는 염전을 일구기 위해 설치한 수문의 모양새가 소의 구시통(구유의 방언)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 100에 뽑히기도 했다.

 14 : 16. ‘구시포 해변(仇時浦 海邊)’은 고창 제일의 핫 플레이스로 꼽힌다. 명사가 십리에 펼쳐지는데다 송림까지 우거져 오토캠핑과 가족단위 캠핑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해수욕장은 길이 1.7km에 폭이 2m인 백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울창한 송림이 뒤를 받치는가 하면, 나지막한 야산이 아늑하게 모래사장을 감싼다. 갯벌 한 점 없이 고운 백사장이 특히 돋보이는데, 바닷물이 빠지면 모래가 단단해져 축구를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한마디로 가족단위 피서지로는 이만한 곳이 없다 하겠다.

 이곳은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해변 바로 앞에 바다낚시터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가막섬이 떠 있는데, 그 뒤로 펼쳐지는 저녁노을이 가히 일품이라고 한다.

 저 갈매기들은 인간과의 공생을 추구하고 싶은 모양이다. 관광객들이 다가가도 도망가지를 않고 자리만 잠깐 내주고 있었다.

 관광객들에 더해 캠핑족까지 몰려드는 곳에 어찌 조형물이 없겠는가. 움직임을 멈춘 그네는 생물권보전지역,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람세스 습지 같은 고창의 명소들을 가리키는 방향표지판까지 매달고 인생샷 하나 건져보려는 이들을 기다린다.

 ‘I  구시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포토 죤이다. 이곳 구시포는 tvN의 인기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 어촌편 시즌3의 첫 촬영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그만큼 화면발이 받쳐준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시포항은 여느 항구와 달리 육지에서 떨어져 있는 가막도(可莫島)’라는 섬에 자리하고 있다. 덕분에 다른 항구에 비해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어선이 입·출항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또한 항구를 와인 잔 모양으로 넓게 정비하면서 바다로 뻗은 800m의 긴 제방과 등대, 전망데크, 트릭아트, 공원 등을 조성해 관광객들이 쾌적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14 : 30. 서해랑길(40코스)은 고창군청의 이동봉사실 앞에 이르면서 끝을 맺는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4.23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상담가인 클라이드 M 네레모어는 그의 저서 행복에로의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을 찾기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행복한 삶의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럴 필요조차 없다. 사랑하는 집사람이 하루 24시간으로도 부족하다며 내 곁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감악산(紺岳山, 674.9m)

 

산 행 일 : ‘23. 10. 21()

소 재 지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 남면, 연천군 전곡읍의 경계

산행코스 : 출렁다리주차장출렁다리범륜사묵밭쉼터악귀봉장군봉임꺽정봉감악산(비봉)까치봉묵밭쉼터(복귀)출렁다리주차장(소요시간 : 6.78km/ 4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파주와 양주, 연천의 경계에 놓인 산으로 예로부터 화악산(가평송악산(개성관악산(안양운악산(포천)과 더불어 경기 5의 하나로 신령스러운 산으로 일컬어졌다. 이름에 자가 들어간 산은 대개 험한 편이다. 등산이 어렵고, 오른다 해도 꽤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파주의 감악산만은 예외로 봐도 되겠다. 원래는 높고 깊고 가파른 산이지만 탐방로 공사를 잘 해놓아서 비교적 쉽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세 지자체가 서로 경쟁하듯이 시설물들을 설치한 것이 오히려 번잡스러운 흠으로 보였다고나 할까.

 

 산행들머리는 감악산 시설지구(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세종·포천고속도로 안락 IC를 나와 신평화로를 타고 의정부시와 양주시를 통과한 다음, 회암교차로(양주시 회암동)에서 56번 지방도, 상수교차로(양주시 남면)에서 371번 지방도로 옮겨가며 달리다, 설마교차로(파주시 적성면)에서 설마천로로 빠져나오면 잠시 후 감악산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네비게이션에 감악산출렁다리 주차장을 찍고 오면 편하다. 하나 더, 시설지구에는 두부 만드는 집이 즐비했다. 이 고장 특산물인 장단콩으로 만든 손두부·순두부·두부전골·두부부침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황태구이·감자전·능이닭백숙 등 다양한 먹거리를 맛볼 수 있다.

 지도(청색 선)처럼 진행했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범륜사 입구’.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 묵밭쉼터에서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 악귀봉·장군봉·임꺽정봉을 차례로 거쳐 정상에 오른 후 이번에는 왼쪽 능선을 이용해 묵밭쉼터로 내려섰다. 이후는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10 : 05. 출렁다리주차장(출구)에서 데크 계단을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숫자는 헤아려보지 않았지만 버겁다 싶을 정도로 긴 계단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입구의 안내판 정도는 살펴보도록 하자. 감악산을 둘러싼 20km 정도의 순환형 둘레길과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주요 등산로가 그려져 있다. 참고로 둘레길 각 코스의 이름은 지역 학생들이 지었다고 한다. 청산계곡길·손마중길·천둥바윗길·임꺽정길·하늘동네길 등 생경하지만 정겨우면서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민족상잔의 아픈 상처도 한번쯤 보듬어보자. 이곳 설마리 일대는 6.25전쟁 당시 서울 사수를 위한 마지막 요충지였다고 한다. 당시 이곳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 글로스터 부대원들은 중공군의 총공세에 맞서 최후의 한 명까지 싸웠고,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3일간이나 늦출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설마리에 기념공원이 세워졌고, 감악산 출렁다리는 글로스터 영웅의 다리(The Gloucester Heroes Bridge)’라는 닉네임까지 얻었다.

 10 : 12.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이면 정자에 올라선다. 쉼터에 전망대를 더한 다목적 정자이다. 그러니 출렁다리의 전경을 카메라 프레임 안에 넣고 싶다면 잠시 들렀다 갈 일이다.

 정자는 뛰어난 뷰 포인트이다. 난간에 서면 감악산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출렁다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출렁다리 뒤로 펼쳐지는 감악산 전경은 보너스라 하겠다.

 출렁다리 주변(힐링파크에서 운계폭포까지 약 1Km 구간) ‘신비의 숲에서는 야간경관조명이 펼쳐진다고 했다. LED 투광등과 동물조명 등으로 밤하늘의 자연과 동물을 등산로 곳곳에 조형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고보조명·영상·음향 등을 가미해 산 이름인 감악(紺嶽)에 얽힌 스토리를 보다 재미있게 연출한단다.

 요즘은 흔하디흔한 게 출렁다리. 그렇다고 짜릿한 스릴까지 흔해지겠는가. 거기다 산악지형에 설치한 현수교로는 가장 긴 편에 속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다리는 70kg기준 900명이 동시에 올라가도 끄떡없이 지어졌단다. 초속 30m 강풍과 진도7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단다. 하지만 길이가 150m나 되는데 어찌 출렁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움직임에 몸을 내맡기고 맘껏 즐겨보자.

 다리는 36m나 되는 허공에 매달려 있다. 덕분에 출렁거림 속에서도 설마리, 설마천계곡 등 다리 주변의 풍경들을 눈에 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다리 건너. 범륜사로 올라가는 진입로는 상당히 가팔랐다.

 10 : 28. 범륜사(梵輪寺)에 이른다. ! 올라오는 도중 운계폭포로 내려가는 길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냥 지나쳤다. 오래전이긴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폭포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절간 뒤 샛길로 가면 운계전망대가 나온다. 감악산 산행의 필수코스라지만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감악산 중허리에 터를 잡은 범륜사는 한국불교태고종 종단의 사찰이다. 옛날 감악산에는 감악사·운계사·범륜사·운림사 등 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세월의 풍화와 전쟁 등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의 범륜사 1970년 금봉이라는 스님이 옛 운계사(존재했다는 문헌만 있을 뿐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터에 다시 세운 것이란다.

 사찰 앞에 세워놓은 세계평화 빗돌이 눈길을 끈다. 이 사찰의 점심 공양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점심 공양과 저들이 원하는 세계평화가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 더, 절간 뒤 백옥으로 만들었다는 높이 7m 관세음보살상도 볼만하다. 중국 하북성의 아미산 백옥으로 현지에서 만들어 1995년 이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산이 그렇듯, 감악산 역시 방문 목적은 등산이다. 산행은 범륜사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널찍한 데다 바닥까지 야자매트로 깔려있어 산행기분은 나지 않는다.

 작은 돌멩이들이 바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오가는 사람들이 행운을 빌며 붙여놓은 것 같은데, 이게 흡사 자철석이라도 되는 양, 떨어지지 않고 처음 그대로 찰싹 붙어있다.

 10 : 45. 탐방로는 개울을 건너기도 한다. 징검다리가 놓여있지만 여름철 집중 호우 때는 통행이 불가능할 듯. 그렇다고 우회로가 따로 나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개울을 건너자마자 상황이 확 바뀌어버린다. 넓고 반반하던 길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칠기 짝이 없는 너덜길로 바뀐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복원된 숯가마 터(이정표 : 묵은밭 0.2km/ 범륜사 0.6km)에 닿았다. 숯은 참나무로 구워낸 것을 상품(上品)으로 친다. 이는 감악산에 아름드리 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11 : 00-11 : 05. 고역이라 할 수 있는 너덜길의 끝. ‘묵밭 쉼터가 길손을 맞는다. 올라오느라 고생한 이들을 위한 배려로 쉼터용 정자를 배치했다.

 이정표(감악산 정상 1,350m/ 까치봉 1,000m/ 범륜사 800m)는 길이 둘로 나뉨을 알린다. 그렇다고 고민하지는 말자. 어느 코스를 선택하더라도 정상에 이르기는 마찬가지, 그저 한 바퀴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11 : 08. 우리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정상 방향을 선택했다. 물기 없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모양새이다. 이어서 벤치가 놓여있는 곳(‘만남의 숲이 아닐까 싶다)에서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붙는다. ‘악귀봉부터 시작되는 바윗길을 제대로 타보기 위해서이다. 알다시피 바윗길이란 게 올라갈 때가 제멋 아니겠는가.

 지능선이어선지 시작부터 가파르다. 뭔가에 의지하지 않고는 못 올라갈 정도로 깔딱인 곳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런 어려움을 지자체도 알았나보다. 밧줄난간을 세워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다.

 11 : 35.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는 암봉에 올라선다. 수십 길 낭떠러지 위, 풍상에 시달리다 못해 몸을 비비꼬아대는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암봉의 자랑거리는 따로 있었다. 나무 사이로 파주의 산하가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북한산이 그 걸출한 자태를 자랑한다.

 내려오는 길은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가득했다. 그렇다고 소름끼칠 듯이 위험하지는 않으니 약간의 스릴을 즐기면 되겠다.

 감악산의 또 다른 특징은 단풍나무라 할 수도 있겠다. 설악산이나 내장산만큼은 아니지만 굵고 튼실한 단풍나무들이 능선을 뒤덮고 있었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감악산 정상/ 청산계곡 1,420m/ 법륜사 1,570m)에서는 직진한다. 오른편은 보리암 돌탑을 거쳐 출렁다리로 연결되는 감악능선계곡길로 끄트머리에서 청산계곡길(감악산 둘레길)’로 합류된다.

 감악산에 ()’자가 그냥 들어갔겠는가.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곳곳에서 바위지대를 만나게 된다. 그러다보니 곳곳에 저런 나무계단을 놓았다. 오래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밧줄에 의지해서 오르던 구간들이다.

 단풍이 한층 더 무르익었다. ‘가을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올해 들어 처음 만나는 단풍이니 서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핏빛에 풍덩 빠져보면 어떨까?

 11 : 52. 계단을 올라서면 악귀봉(616m)’. 바위봉우리로 돼지바위라고 부른다고도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정상석은 파주시와 양주시가 공동으로 세웠다. 참고로 양주시와 파주시, 연천군 등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감악산은 비봉·임꺽정봉·장군봉·악귀봉이 양주시와 파주시가 어깨를 맞대고 있고, 형소봉은 오롯이 양주시 차지다(대신 까치봉은 파주시 차지다).

 암봉의 특징대로 악귀봉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양주와 파주의 산하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능선은 험상궂기만 하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탐방로는 바위 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가면서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젠 장군봉을 오를 차례이다.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야 할 길이 이어지는데, 초입의 삼거리(이정표 : 장군봉 0.3km/ 감악산약수터 1.6km/ 악귀봉 0.1km)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가을 풍경을 눈요기 삼아 오르면 될 일이다.

 암릉답게 눈만 들면 구경거리가 달려온다. 그 첫 번째 만남은 통천문이다. 하늘로 통하는 문답게 반대편은 천애의 낭떠러지다. 지리산이나 고성의 통천문처럼 통과해볼 생각을 버리라는 얘기다.

 오른편에는 방금 올랐던 악귀봉의 능선이 놓여있다. 악귀봉에서 시작되는 암릉은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다리가 떨릴 정도이다. 그러나 일단 오르면 떠나기를 망설일 정도로, 소나무 등 주변 풍광과 어우러지는 암릉이 한 폭의 그림처럼 수려하기 펼쳐진다. 어쩜 임꺽정은 저런 봉우리들에서 개성과 한양을 호령할 기개를 키웠을지도 모른다.

 앗 곰이다 호들갑을 떠는 집사람의 손가락 끝에 곰 한 마리가 비스듬히 누워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양주 들녘을 지긋이 내려다보면서...

 이즈음 저 멀리 임꺽정봉의 거대한 암벽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아찔한 절벽에는 잔도가 걸렸다. 오래 전, 중국의 산을 오르내리면서 잔도는 험산을 끼고 사는 중국인들의 전유물인줄 알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도 잔도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이젠 웬만한 바위산마다 잔도 하나쯤은 보통이 되어버렸다.

 잠시 흙길로 변했던 능선이 장군봉의 턱밑(이정표 : 장군봉 0.1km/ 형소봉 0.2km/ 감악산주차장 4.7km)에 이르자 다시 한 번 용트림을 한다. 거대한 암벽으로 변해 앞을 막아버린 것이다. 반대 방향으로 우회하여 올라야하겠건만 다행이도 지자체에서 나무계단을 설치했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오른쪽 발아래서 솟아오른 저 암봉은 형소봉일 것이다.

 계단은 바윗길로 바톤을 넘긴다. 오른쪽은 천 길 낭떠러지, 능선이 칼날처럼 생긴 탓에 왼쪽으로 당겨 걸을 수도 없다. 그저 철제난간을 붙잡고 조심조심 오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구간을 감악산 산행의 백미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허공을 걷고 있는 듯한 짜릿한 스릴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 : 10. 암릉의 화룡점정(畵龍點睛) 장군봉(652m)’이 찍고 있었다. ··남으로 시야가 뻥 뚫리면서 양주와 파주의 산하가 거침없이 달려온다. 시선을 조금 올리자 이번에는 도봉산과 북한산의 헌걸찬 바위봉우리가 우뚝 솟아오른다.

 장군봉을 내려서면서 위험구간은 대충 끝난다. 편안해진 길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안부(이정표 : 임꺽정봉 0.1km/ 감악산 정상 0.5km/ 장군봉 0.1km)에서 임꺽정봉을 거치지 않고 곧장 감악산(정상)으로 가는 길이 나뉜다.

 올라야 할 임꺽정봉이다. 양주 쪽 산자락은 천애의 바위벼랑이지만, 파주 쪽은 부드러운 육산의 모양새이다. ‘도적 의적으로 나뉘는 임꺽정에 대한 평가를 닮았다고나 할까?

 배낭걸이 대라고 한다. 산이 좋아 전국의 산을 20년 이상 누비고 다녔지만, 내 기억에 저런 시설을 처음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임꺽정봉의 턱밑(이정표 : 임꺽정봉 0.1km/ 얼굴바위 쉼터 0.3km/ 장군봉 0.1km)에서 신양저수지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12 : 21. 제법 긴 계단을 올라서면 임꺽정봉을 코앞에 둔 삼거리(이정표 : 임꺽정봉 50m/ 감악산 0.4km/ 장군봉 0.2km)’. ‘임꺽정봉의 기상을 흉내라도 내려는 듯 커다란 바위 하나가 위세를 자랑한다.

 양주시에서 세운 안내판이 자기네 땅도 한번 들러보라고 유혹을 보낸다. 천애의 바위절벽에 길은 내놓았으니 스릴을 즐겨보라는 것. 하지만 파주 쪽에 차량을 세워놓은 탓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12 : 23. ‘임꺽정봉에 올라선다.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 중 하나인 임꺽정이 이곳 양주 출신이어선지 그 흔적으로 임꺽정봉과 임꺽정굴을 이곳에 남겨놓았다. 실존 인물인 임꺽정은 명종 14(1559) 임금의 명으로 임꺽정에 대해서 대책을 논의했고 명종 17(1562)에 되어서야 임꺽정의 무리를 소탕할 수 있었다. 그 기간(아니면 그 이전) 중 감악산에 머물렀을 수도 있겠다. 하나 더. 조선시대의 임꺽정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홍명희 작가의 대하소설 임꺽정 덕분이다.

 옛 이야기는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해 감악산의 깊고 험한 산속 동굴에 기거했다고 전한다. 그 동굴이 있는 바위 정상이 지금의 임꺽정봉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임꺽정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무척 호쾌했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장군봉의 암릉과, 남쪽의 절벽단애 아래로 펼쳐지는 신암저수지와 널따란 뜰이 자못 시원시원하다.

 12 : 26. 그리도 뛰어난 조망이건만 막상 오래 즐기지는 못했다. 가뜩이나 좁은 정상이 등산객들로 붐볐기 때문이다. 아무튼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감악산으로 향한다.

 12 : 32-13 : 32.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점심상을 차렸다. 그리고 못다 한 얘기로 회포를 풀다 가기로 했다. 산꾼들이라기 보다는, 만나는 것 자체가 좋고, 그저 산에 드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수다로 한껏 여유를 즐기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주요 포인트 중 하나인 어름골재로 올라선다. 이정표(감악산 120m/ 범륜사 2.290m/ 장군봉 220m/ 임꺽정봉 160m)는 이곳이 사거리임을 알려준다. 곧장 고개를 넘으면 묵밭 근처의 만남의 숲’. 왼편은 장군봉과 임꺽정봉의 중간에서 만났던 삼거리로 연결된다. 감악산의 정상은 물론 오른편으로 가면 된다.

 12 : 33. 몇 걸음 더 걸으면 정자에 닿는다.

 이곳도 조망의 명소 중 하나다. 양주벌판을 가운데 두고 동두천의 칠봉산과 양주의 천보산, 도락산, 불곡산(이 산에도 임꺽정봉이 있다) 등이 불쑥 솟아올랐다. 더 멀리로는 남성미를 물씬 풍기는 도봉산과 북한산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13 : 46- 13 : 54. 출렁다리 주차장에서 길을 나선지 2시간 45분 만에 감악산 정상에 도착했다. 웬만한 운동장이 부럽지 않을 만큼 널따란 정상에는 정상석과 감악산비, 고롱이 미롱이 마스코트, 각종 안내판 등 파주시·양주시·연천군에서 서로 경쟁하듯이 만들어놓은 시설물들로 가득하다. KBS중계소와 강우레이더 같은 공공시설도 들어서 있었다.

 정상의 북쪽 가장자리,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어른 키 정도 되는 빗돌 하나를 앉혔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은 그 유래가 알려지지 않는데, 비석에 새겨진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아 몰자비’(글자가 죽은 비)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아예 글자를 새기지 않은 무자비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설인귀비나 빗돌대왕비(‘비석대왕비라는 뜻으로 비석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된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으로 보인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1982년 학술조사가 이루어지도 했으나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순수비와 비슷하다는 정도만 파악됐을 뿐이다.

 정상석은 양주시와 파주시가 공동으로 만들었다. 연천군이 감악산의 공동 소유권자이긴 하지만 그 영역이 정상까지는 이르지 못했음이리라.

 정상에 어깨를 걸치지 못한 연천군은 군 마스코트인 고롱이 미롱이 감악산 숲길 안내도만 달랑 세워놓았다. 고롱이와 미롱이는 동아시아 최초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된 구석기유적지(전곡리)를 품은 연천군에서 만든 원시인 캐릭터이다.

 조망은 전문가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감악산 등산의 최고 기쁨은 뭐니 뭐니 해도 정상에서 만나는 스카이라인과 납작한 마을들 모습, 그리고 멀리 삐죽삐죽 올라와 있는 한국의 산 풍경이다. 남쪽으로는 동두천시 칠봉산, 양주시 도락산, 서울시 도봉산, 서울시와 고양시를 이어주는 북한산 등이, 북으로는 북한 개성시의 송악산까지 볼 수 있다. 물론 날씨가 도와줘야 가능한 시계이지만, 그야말로 하늘과 공중과 산과 마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광활한 풍경인 것이다.>

 그건 그렇고 북쪽(연천)에서 뜬금없는 풍경이 잡힌다. 산꼭대기에 성모마리아상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요것조것 뒤적여 봐도 누가 왜 만들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저 평화·통일의 마음을 담은 조형물로 유추해 볼 따름. 성모님의 시선이 북녘 땅을 응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임진강, 한탄강 등 접경지역에 내리는 비를 관측할 수 있는 5층 높이의 대형 강우레이더도 들어서 있었다. 태풍·기상변동 등을 목적으로 하는 기상레이더와 달리 반경 125km 이내에서 지표에 근접하게 내리는 비의 양을 면적 단위로 집중 관측해 홍수예보에 활용한단다.

 명자나무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봄에 피어야 할 꽃이 그것도 이 늦가을에 말이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로 시작되는 시조를 읊었다. 뒤이어 나오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똥말똥하여라라던 문구가 떠오르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13 : 54. 하산을 시작한다. ‘까치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인데, 이정표에는 감악산둘레길 중 손마중길로 적혀있었다. 레이더기지의 서쪽 울타리에 기대어 내놓은 데크로드를 따르면 된다.

 13 : 56. 몇 걸음 걷지 않아 멋진 전망대를 만났다. 시야가 툭 트이는 곳에 데크로 대를 만들어놓았다.

 난간에 서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파평산, 천덕산, 덕물산 진봉산 등 수많은 산들이 드넓은 들녘 곳곳에서 솟아올랐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물굽이를 이루며 흘러가는 임진강과 이를 가로지르는 장단교가 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에서 송악산과 극락봉 등,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북녘의 산들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탐방객들을 위해 배려도 잊지 않았다. 조망도를 세워 실물과 대조해보는 재미를 더하게 했다.

 13 : 59. 또 다른 조망처에는 아예 정자까지 들어앉혔다. 하지만 올라가보지는 않았다. 조금 전 들렀던 전망대와 똑 같은 풍경이 펼쳐질 것 같아서이다.

 팔각정(이정표 : 까치봉 600m/ 객현리/ 정상 150m)에서는 까치봉 방향으로 간다. 정자를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길고 긴 나무계단.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지만 곳곳에서 조망이 틔기 때문에 눈이 호사를 누리며 내려갈 수 있다.

 14 : 18. 운계능선을 탄지 19분 만에 토끼봉에 올라섰다. 바위와 소나무가 잘 어우러지는 멋진 산봉우리이다.

 정상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 흔한 이정표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현 위치를 까치봉으로 표시해놓은 감악산 둘레길 안내도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할 따름이다. 그게 서운했던지 누군가가 안내도에 까치봉이라고 큼지막하게 적어놓았다.

 까치봉 역시 멋진 조망처였다. 아까 정상 근처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풍경이 낮아진 고도만큼만 좁아졌다고나 할까?

 이후로도 나무계단은 한참이나 더 계속된다.

 14 : 51. 삼거리 안부(이정표 : 손마중길 740m/ 묵은밭 120m/ 감악산 정상 1,380m)에 내려선다. 직진의 운계능선은 운악산둘레길의 손마중길로 연결된다. 우리는 무릎이 불편한 집사람을 핑계 삼아 묵밭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탈출로도 만만치만은 않았다

 가파른 나무계단을 100m이상이나 내려간 뒤에야 묵밭에 이를 수 있었다이후부턴 아까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된다.

▼ 15 : 50. 똑 같은 길을 걸어야 하는 무료함을 견뎌가며 걷길 25분 드디어 출렁다리 주차장에 이르면서 산행이 종료된다오늘은 4시간 30분을 걸었다핸드폰의 앱이 6.78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하긴 집에 돌아온 집사람이 앞으로 산행은 사양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에필로그(epilogue), 주차장에서 짐을 챙기다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악사(紺嶽祠)라는 사당이 없어졌다니 말이다. 내 나라 강산을 짓밟은 당나라, 그 군대를 이끈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모신다니 이를 말인가. 하긴 세상이 하 수상한데 무슨 꼴인들 못 보겠는가. 올 여름인가? 언론은 어느 얼간이가 광복절날 일장기를 문간에 내걸었다고 전했었다. 그러니 설인귀를 모시는 게 문제가 아니라,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토착 왜구가 스스럼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