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봉(三岩峰, 196.2m)-깃대봉(172m)-화봉산(155m)

 

산 행 일 : ‘22. 1. 16(일)

소 재 지 : 전남 신안군 지도읍

산행코스 : 지도읍 재래시장↔지도향교(왕복)→읍사무소→화봉정→화봉산→바람풍재→진재→깃대봉→상암봉→정암선착장(소요시간 : 9.99km/ 3시간 25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지도(智島, 신안군)에 있는 알려지지 않은 산들. 가장 높다는 삼암봉의 해발이 200m에도 못 미치니 산이랄 것도 없다. 그렇다고 조망이 좋은 것도 아니다. 흙산이라서 내세울만한 볼거리도 없다. 그저 산이 거기 있었기에 찾아갔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등산로 하나는 잘 닦여져 있었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계단을 놓았고, 바닥에 야자매트를 깔아 질퍽거릴 염려까지도 없앴다. 그렇다고 해서 찾아가보라는 얘기는 아니다. 오르는 산봉우리의 숫자를 헤아려가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산행들머리는 지도읍 재래시장(신안군 지도읍 읍내리 168-5)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타고 서해바다 쪽으로 들어오면, 서해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 해제반도를 지나 지도로 들어선다. 지도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곧이어 시장(신안군 유일의 재래시장이란다)에 이르게 된다. 차에서 내리니 썰렁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 길손을 맞는다. 11시가 넘었는데도 문을 연 가게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매 3·8일에 오일장이 선다더니 저 가게들도 장날만 문을 연다는 얘기일까? 시장의 역사가 67년. 오랜 세월만큼이나 지도 읍민들의 희로애락이 묻어나는 풍경일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신안군청의 산행안내도는 들머리를 4곳으로 표시한다. 가장 애용되는 기점은 ‘지도읍사무소’와 ‘점암선착장’. 양 기점을 잇는 종주산행을 하다가 체력이 달릴 경우 봉동이나 용산동으로 탈출하면 된단다. 하지만 실제는 향교나 강정리 등 꽤 여러 곳에서도 산행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길이 나있었다.

▼ 산행을 나서기 전에 향교(鄕校)부터 들러봤다. 지도향교(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1호)는 조선 고종 때인 189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섬만으로 구성된 ‘지도군’이 새로 생기면서 ‘1군1향교’ 원칙에 따라 지어졌다.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明倫堂), 양사재(養士齋)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없는 게 특징이라는데, 문이 닫혀 있어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 향교는 개교한지 백년이나 된 지도초등학교와 마주보고 있었다. 향교란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요즘의 초·중·고쯤으로 여기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저 풍경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표상이라 할 수 있겠다.

▼ 15분 만에 시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북쪽방향의 골목으로 들어선다. 읍사무소와 파출소, 우체국 등 공공기관이 몰려있는 행정타운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 골목의 끝. 양지바른 언덕에는 지도읍사무소가 앉아있었다. 현재의 읍사무소는 수군 만호진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왜구를 막기 위해 숙종 8년에 설치했다. 대한제국시기의 지도군청 자리기도 하다. 신안군의 전신 격으로 흑산면에서 고군산면까지 17개 면을 관할했었다.

▼ 읍사무소의 역사는 팽나무(보호수)와 함께 이어왔던 모양이다. 마당 한켠에서 그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고 있는데, 나이가 360살도 더 된단다. 이곳에 수군만호진이 설치된 게 숙종 8년이라니 ‘개소 기념식수(開所 紀念植樹)’쯤 여기면 되지 않을까?

▼ 읍사무소를 왼편 옆구리에 끼고 돌면 일심사가 나온다. 절간 앞에 등산안내도가 설치되어 있으니 한번쯤은 꼭 살펴보고 길을 나서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은선대(隱仙臺)와 관왕묘(關王廟)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은선대는 읍사무소 뒤의 소나무 숲. 임진·정유 왜란 때 파병되었던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세워진 관왕묘는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단다. 그저 일심사 자리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보는 정도라나?

▼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일심사(一心寺)는 자그만 사찰이다. 대웅전과 극락전, 요사가 전부. 하지만 역사는 꽤 오래 된단다. 압해읍 금산사, 비금면 서산사와 함께 전통사찰(제83호)로 지정된 이유이다. 이 절은 300여 년 전부터 관운장의 초상을 모시는 사당으로 존재해왔단다. 1919년 위령사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법당 및 요사채가 중창되었으며, 현재의 일심사는 1953년에 개명된 이름이다(하지만 기록이 전무하여 창건연대나 규모 등을 확인할 길은 없단다). 그건 그렇고 이 절의 특징은 호국 영령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도량이라는데 있다. 극락전에 한국전쟁 중에 전몰한 군인·경찰을 포함한 호국영령들의 540여 위패를 모시고 있다.

▼ 안내판에 적혀있던 은선대는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1896년 지도군수로 부임한 오행록은 이곳을 ‘좋은 나무들이 무성하여 짙은 그늘이 지고, 깊이 우거진 풀에선 향기를 내뿜어 사람으로 하여금 시가를 읊조리게 하는 아담한 정취’가 풍긴다고 적었었다. 그가 말한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산책로를 내고 전망대를 만들어 읍민들의 휴식처를 조성했다.

▼ 전망대에 서면 지도읍(智島邑)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지도읍의 역사는 꽤 복잡하다. 백제시대는 고록지현(古祿只縣), 통일신라시대 염해현(鹽海縣), 고려시대에는 임치현(臨淄縣)으로 바뀌며 영광군(靈光郡)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영광군과 나주목에 속했다가 숙종 8년(1682년)에 지도진이 설치되었으며, 고종 33년(1896년) 지도진이 폐지되면서 ‘지도군’이 되었다. 1914년에는 지도군이 무안군으로 편입되면서 지도면으로 강등되었고, 1969년 신안군과 함께 분리되었으며 1980년 지도읍으로 승격했다.

▼ 산책로 주변의 동백이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동백나무는 12월 초순부터 다음 해 4월 하순까지 꽃을 피운다. 지금이 1월이니 그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는 적기에 찾아온 셈이다.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 저 동백꽃처럼 아름다운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해본다.

▼ 초현대식으로 지어놓은 저 쉼터는 무엇을 형상화했을까? 편의성에 스토리텔링까지 보탰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텐데.

▼ 공원을 빠져나와 산자락으로 붙으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고운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없다. 거기다 조금이라도 무르다 싶으면 야자매트를 깔아 질퍽거림까지 없앴다.

▼ 심지어는 가로등까지 설치했다. 곳곳에 벤치를 놓아두었음은 물론이다. 산책로를 초호화판으로 꾸며놓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노후 된 시설을 내버려두고 있는 것은 작은 흠일 듯. 태양열 전기를 이용하는 전광판이 수명을 다했는데도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었다.

▼ 산길이 곱다고 마냥 평탄한 것만은 아니다. 계단을 놓아야 할 정도로 가파른 구간도 마주친다.

▼ 산행을 시작한지 20분. 산불감시초소가 올라앉은 봉우리(앱에 나타난 높이는 103m이다)에 올라섰다. 선답자들은 이곳을 ‘오봉산’이라 적고 있었다. 하지만 국립지리원 지도와 같은 공인된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무명봉’이다. 그래선지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표지기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 산길은 오봉산을 지나자마자 아래로 뚝 떨어진다.

▼ 안부에 내려서니 삼거리다. 이정표(진재↑ 3.43㎞/ 지도초등학교← 0.28㎞/ 지도읍사무소↓ 0.78㎞)가 가리키는 지도초등학교는 아까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들렀던 지도향교의 옆. 향교를 둘러본 다음 곧장 산자락으로 붙었더라면 금방이었을 거리를 읍사무소까지 되돌아간 덕분에 한참이나 더 걸은 셈이 되었다.

▼ 산길은 다시 오르막으로 변한다. 통나무계단에 밧줄난간까지 설치했을 정도로 상당히 가파르다. 호흡을 조절해가며 오르는데 후미대장 일행이 술상을 차려놓고 손짓을 보내오는 게 아닌가. 마침 배도 출출해진지라 체면불구하고 끼어들었다. 그리고 여성 산우께서 싸주시는 톳 보쌈을 안주삼아 복분자주와 소주 네댓 잔 얻어 마실 수 있었다.

▼ 사진으로도 모자라 산행기록까지 해가는 나에게 과음은 금물. 불콰해진 얼굴로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서는데, 시야가 열리면서 주변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송도와 사옥도, 연도 등 지도의 부속 섬들일 것이다.

▼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벤치도 그 가운데 하나.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곳곳에 놓여 있었다. 하긴 10년도 더 전에 이미 전국단위 ‘섬 등산대회’까지 열었을 정도이니 어련하겠는가.

▼ 산경표를 따르는 산꾼들은 이 능선을 ‘봉대지맥(峰台枝脈)’이라 부른다. 영산기맥(榮山岐脈)의 감방산(258.9m) 남쪽 3.9km 지점(무안읍 매곡리 수반마을의 서쪽 작은 봉우리)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현경면·해제면을 지나면서 봉대산·검무산·이성산·대월산 등을 일군 다음 지도(智島) 앞에서 그 숨을 다하는 36.3km의 산줄기이다. 그런데 지도가 제방으로 연결되면서 지도의 산줄기(제방→정암선착장) 16km를 봉대지맥에 포함시킨 것이다.

▼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도톰하게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에 올라선다. ‘포토존’ 안내판을 세워놓았을 정도로 조망이 빼어난 곳이다. 정상에는 ‘화봉정(花峰亭)’이라는 정자와 함께 서너 개의 벤치를 놓아두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비경을 쉬엄쉬엄 가슴에 담아가라는 모양이다.

▼ 안내판 앞에 서자 시야가 툭 터진다. 그리고 신안의 자랑거리인 수많은 섬들과. 그 섬들을 둘러싼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저걸 배경삼아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면 인생샷 하나쯤은 너끈하련만 아쉽게도 집사람이 없으니 어이할꼬. 한시라도 빨리 집사람의 무릎이 좋아지길 빌어본다.

▼ 시선을 조금 옮기자 신안의 자랑거리인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다. 저 갯벌의 넓이는 378㎢. 우리나라 갯벌의 15%을 차지하며 이 가운데 144㎢는 신안갯벌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나저나 남도의 맛은 곧 바다와 갯벌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신안의 갯벌은 천연 미네랄이 풍부하다. ‘캐나다 동부해안·미국 동부해안·유럽 북해연안·아마존강 유역’과 함께 ‘세계 5대 갯벌’로 꼽히는 이유일 것이다.

▼ 북쪽으로도 시야가 열린다. 그런데 이게 섬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널따란 들녘이 아니겠는가. 맞다. 누군가는 목포시 보다 2배(79.39㎢)나 넓은 면적이 지도의 자랑거리라고 했다. 4,500여명의 주민들은 그 너른 땅에서 논밭을 일구고 김 양식, 천일염을 생산하며 풍요롭게 살아간단다. 특히 드넓은 간척지에서 생산되는 게르마늄 쌀은 최상의 품질을 자랑한단다.

▼ 몇 걸음 더 올라가면 이번에는 무인 산불감시탑이 길손을 맞는다. 이곳은 봉긋하니 솟아오른 게 제법 봉우리다워 보인다. 삼각점((임자 426)도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능선에 걸터앉은 ‘무명봉’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공인 지도에서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화봉산(또는 꽃봉산)’이란 이름은 신안군에서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스토리텔링 차원에서 붙여놓았지 않나 싶다.

▼ ‘화봉산’이란 지명은 ‘등산로 안내도’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조감도(鳥瞰圖)에 주요 지점의 위치를 표시한 다음 지명을 적어놓았다.

▼ 낯익은 표지기들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만산회’. 세상의 산이란 산은 모두 올라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 옆에는 얼마 전 ‘1만 개의 산’을 오른 기념이라며 타월까지 건네주시던 신상호씨의 표지기도 매달려있었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산을 올라보겠다는 허총무님의 표지기도 오늘부로 그 옆에서 펄럭인다.

▼ 이후로는 밋밋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산길이 이어질 뿐 특별한 볼거리는 제공하지 못한다. 가끔가다 나타나는 바위들과 나뭇가지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지도의 산하가 볼거리라면 모를까.

▼ 5일 후면 대한(大寒). 옛날, 꽁꽁 얼어붙은 겨울밤이면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는 소리가 골목골목을 누볐었다. 하지만 산골 출신인 나로서는 망개떡에 대한 추억이 더 간절해지는 계절이다. 그런데 그 망개나무가 열매를 매달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금방 영근 것처럼 싱싱한 채로이다. 팥을 달여 만든 팥소와 멥쌀로 빚은 떡을 살짝 감싸던 싱싱한 잎은 보이지 않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옛 추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 꽃봉산에서 13분. 산길이 왼편으로 급하게 휘더니 능선을 벗어난다. 감정리1구와 장동리를 잇는 임도를 확장하면서 능선을 끊어버린 탓이다. 이로 인해 등산로 일부가 변경되었으나 표지판으로 안내를 하고 있어 길을 염려는 없다. 하지만 이곳에 세워져 있었다는 이정표(삼암봉 3.43㎞/ 감정리 0.7㎞/ 지도읍사무소 3.0㎞)는 눈에 띄지 않았다.

▼ 산길은 왼쪽(감정리1구 방향)으로 30m쯤 떨어진 곳에서 다시 열린다. 이어서 동백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내놓은 새 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본래의 등산로를 만나게 된다.

▼ 이후의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가끔은 가파른 구간이 나오기도 하지만 심하지는 않으니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곳곳에 놓아둔 벤치에서 잠시 쉬어가면 될 일이고 말이다.

▼ 산길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송악(常春藤) 군락을 만나게 된다. 굵직한 나무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바위들까지 송악으로 한껏 치장을 하고 있다. 이곳 지도 아니 신안군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맞다. 송악은 눈보라 치는 매서운 추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늘푸른 덩굴나무다. 그러니 남녘땅 신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암봉을 연상시키는 봉우리도 만날 수 있었다. 바위 사이로 난 길엔 밧줄난간까지 설치해가며 멋을 더했다.

▼ 조금 더 걷자 말라비틀어진 잡초로 뒤덮인 분지가 나타난다. 등산안내도는 이곳을 ‘3개리 분기점’으로 적고 있었다. 감정리와 광정리, 봉리가 이곳에서 어깨를 맞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걸어 내려선 안부에도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은 ‘바람풍재’란다. ‘바람 풍(風)’자로도 모자란 듯 ‘바람’을 하나 더 붙여놓았다. 하지만 바람은 다른 곳보다 오히려 더 잠잠하다. 후박나무와 소사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아늑하기까지 하다. 능선을 횡단하는 길도 나있지 않으니 ‘바람풍재’라는 지명에 걸맞지 않는 상황이랄까?

▼ 능선은 소사나무가 주류이다. 그렇다고 따뜻한 남쪽나라에 어찌 상록수가 없겠는가. 곳곳에서 동백나무나 후박나무로 가득 찬 숲을 만날 수 있다.

▼ 평지나 다름없던 산길이 갑자기 고도를 낮춘다. 그 길을 내려오다 문득 ‘큰산’을 다녀오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깔아놓지 않았단다)를 맹신하다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허총무님의 표지기가 매달려 있던 봉우리가 큰산으로 가는 들머리였다는 걸 산행이 끝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고나 할까?

▼ 감정리 갈림길(임도)에서 30분. 또 다른 임도인 ‘진재’에 내려섰다. 감정리(왼편)과 봉동(오른편)을 잇는 시멘트 임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이다.

▼ 감정리 방향으로는 편백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장성이나 장흥, 남해와 같은 유명한 편백나무 숲에 비유할 바는 아니지만, 코끝을 스쳐가는 향만으로도 이제까지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나가는 듯한 기분이다.

▼ 진재를 지나면서 또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제법 가파르지만 보드라운 흙길이라서 버거울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힘들다면 밧줄난간에 의지해 쉬엄쉬엄 오르면 될 일이다.

▼ 오르막길과의 힘겨룸이 끝나면 산길은 또 다시 고와진다. 이 구간의 특징은 커다란 바위가 제법 많다는 점이다. 덕분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시야가 트이기도 한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봉동의 들녘과 바다가 빼곰이 얼굴을 내민다.

▼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오르내리면 깃대봉이다. 이곳에도 등산안내도가 함께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깃대봉에도 정상석은 없다. 대신 정상표지판(깃대봉, 해발 172m)을 세워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준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형편없다. 빽빽이 들어 찬 잡목들이 시야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 사이로 ‘양달치봉’으로 가는 길이 나있었다. 하지만 다녀오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잡목으로도 모자라 가시넝쿨까지 훼방을 놓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 깃대봉을 지나서도 산길의 형편은 달라지지 않는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계속하고, 소사나무 사이로 감정리(좌)와 봉동(우)의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참! 사진이 어설퍼서 올리지는 않았지만 ‘두류산(169.7m)’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조선유학의 마지막 성지라는 두류단(頭流壇)이 있다는 곳이다. 1914년 호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항로·기정진·김평묵을 모시고 ‘삼현단’이라 부르다가 최익현과 김평묵의 제자이자 지도 출신인 나유영까지 추가해 모시고 있단다.

▼ 송악의 천국답게 조형미까지 갖추었다. 송악은 다른 나무들처럼 하늘로 뻗을 수 있는 조상의 음덕을 입지 못했다. 땅 위를 이리저리 기어 다니거나 다른 나무나 절벽에 빌붙어 살아야 하는 슬픈 운명이다 보니 저런 모양새로 자라고 있는 모양이다.

▼ 깃대봉을 내려선지 20분.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 보면 오늘의 주인공인 ‘삼암봉’을 만나게 된다. 삼암봉의 정상은 그저 평범한 암봉(岩峰)일 따름이다. 기반암 위에 돌출된 바위가 고작인데 그마저도 흙으로 덮여있어 바위봉우리란 느낌이 전해지지 않는다.

▼ 그나마 정상표지판(삼암봉, 해발 196.2m)이 세워져 있어 그 아쉬움을 조금은 메꾸어준다. 참! 삼암봉 정상 어림에서 ‘안산(115.1m)’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뉜다고 했는데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아니 함께 산행을 한 유명 산꾼들(세상의 모든 산을 다 올라보겠다는 의지의 한국인들이다)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희미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 하산을 하려는데 숙주 못지않은 모양새를 갖춘 기생식물이 눈에 띈다. 나뭇가지처럼 옆으로 날개를 펴고 있는 게 이색적이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하다.

▼ 잠시 후 멋진 바위전망대를 만났다.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봉동 일대의 들녘과 바다. 그리고 파도에 밀려다니는 섬들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선답자들은 낙월도와 송이도까지 보인다고 했지만 미세먼지 탓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 봉동 들녘이 드넓게 펼쳐지는가 하면 바다에는 대·소 포작도와 어의도, 신풍도 등 지도의 부속 섬들이 떠있다. 그 사이에는 바둑판처럼 잘 정돈된 염전이 들어섰다. 잘 알다시피 이곳 신안군은 우리나라 최대의 천일염 생산지다. 척박한 땅에 염전이 일구어지고 나서 섬사람들의 생활은 넉넉해졌다고 한다. 하긴 칼슘과 칼륨, 마그네슘 등 미네랄이 풍부한 우리나라 고유의 천일염을 그 어디서 대체할 수 있겠는가.

▼ 조금 더 걷자 규모가 제법 큰 바위지대가 나타났다. 이곳 삼암봉(三岩峰)은 ‘바위가 셋’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했다. 이 일대의 바위가 ‘삼암’이란 지명을 만들어냈지 않았나 싶다.

▼ 길은 집채만 한 바위들 사이로 나있다. 이때 마주치는 바위들 하나하나를 눈에 담아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기괴하게 생긴 조형미에 송악의 푸름이 더해지면서 자못 빼어난 그림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낮추어간다. 아니 가끔은 제법 긴 오름도 있다. 하지만 보드라운 흙길이어선지 지루하거나 힘들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니 소사나무 사이로 살짝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는 바다풍경이 그런 느낌들을 지워버렸을지도 모르겠다.

▼ 삼암봉 정상에서 25분. 쉼 없이 오르내리는 능선이 지겨워질 즈음 임도에 내려섰다. 이정표는 날머리인 점암마을는 아직도 1km나 더 남았음을 알려준다. 참! 그러고 보니 그렇게나 많다던 ‘춘란(春蘭)’을 산행 내내 찾아볼 수 없었다. 유명한 자생지라서 ‘한국 춘란 전시회’까지 열었다고 했는데, 그게 소문이 나서 채취꾼들이 휩쓸어가 버린 것일까?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흙길이 아닌 바닥이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심심찮게 조망되는 임자도 방향의 풍경이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 바다 건너는 튤립축제로 유명한 ‘임자도’이다. 그 사이의 바다는 드넓은 갯벌. 물이 빠져야 제멋을 내는 곳이다. 이곳 지도, 아니 신안군의 갯벌은 지난해 초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홈페이지에까지 소개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갯벌이다. ‘한국 갯벌은 아주 생산적인 에코시스템’이라며 미네랄이 풍부한 갯벌에 생존하는 미생물들이 해양을 정화하여 많은 철새들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가 된다고 설명했다. 하긴 세계 5대 갯벌 가운데 하나이자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람사르습지 등의 명성이 어디로 가겠는가.

▼ 임도를 따라 8분쯤 걸었을까 2차선 도로인 ‘봉리길’이 나온다.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읍사무소처럼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이곳이 공식적인 날머리인모양이다. 하지만 산악회의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점암선착장까지는 아직도 한참을 더 걸어야만 한다.

▼ 선착장으로 가는 길. 임자도(엄밀히는 임자도의 부속섬인 수도이다)와 지도를 잇는 ‘임자2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길이 1,135m의 장대 사장교로 임자1대교(길이 750m)와 함께 저 다리가 놓이면서 30분이나 걸리던 뱃길이 3분(승용차로)으로 단축됐다고 한다. 덕분에 섬 주민들은 물론이고 튤립축제나 대광해수욕장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고 있단다.

▼ 바다 건너에는 임자도가 ‘일(一)’자로 길게 누워있다. 수평선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나직막한 구릉이 길게 펼쳐지는 것이다. 수십, 아니 수백만 년 전 융기 또는 침하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지형이 아닐까 싶다.

▼ 날머리는 점암선착장(신안군 지도읍 감정리)

잠시 후 24번 국도의 교각 아래에 이르자 길이 둘로 나뉜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100m쯤 내려가면 임자도로 들어가는 배들이 드나들던 점암선착장이다. 오늘 산행이 끝난 것이다. 너른 주차장과 버스매표소(대합실), 두엇의 횟집, 민박집, 매점까지 들어선 게 제법 번화한 풍경이다. 하지만 주차장은 텅 비었고 횟집에도 인근 공사장의 인부로 보이는 사람들 두엇이 식사를 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연륙교의 편리함이 만들어낸 서글픈 한 단면이랄까? 아무튼 오늘은 향교를 다녀온 것을 포함하여 3시간 25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이 9.99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만만찮은 오르내림이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맞은편의 농협여객선터미널은 아예 문을 닫아걸었다. 지도(감정리)와 임자도(진리)를 잇는 임자대교가 개통되면서 두 섬을 오가던 뱃길이 끊기면서 나타난 서글픈 현실이다. 뱃길과 관련된 시설들도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중해풍으로 지어놓은 화장실이 더욱 애틋하게 보이는 건.

♧ 에필로그(epilogue). 산행을 마치고 지도의 자랑거리인 젓갈타운에 들러볼까 하다가 하도 추워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니 송도항으로 찾아가 우리나라 최초의 표류여행가이자 표해시말(漂海始末, 정약전 著)의 주인공인 ‘문순득(文順得:1777-1847)’을 만나보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되어버렸다. 세상을 모두 둘러보겠다는 꿈을 갖고 국내·외 여행을 해오고 있는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비록 표류가 가져다 준 여행이었다지만 유구국(流球國 : 現 오끼나와)과 여송(呂宋 : 현 필리핀), 광저우(廣州), 마카오, 그리고 베이징(北京)을 거쳐 3년2개월 만에 고향에 돌아온 그를 나는 늘 부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표해시말은 다산 정약용선생의 제자였던 이강희가 2년(1918~1919)동안 우이도에 머물면서 저술한 유암총서(柳菴叢書)에 실리면서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봉대산(烽臺山, 284m)-금정산(金井山, 263.6m)

 

산 행 일 : ‘21. 11. 13(토)

소 재 지 :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읍

산행코스 : 홍농119센터(한수원사택 버스정류장)→봉대정→봉대산→질마재→전망대→금정산→암릉→칠곡농공단지(소요시간 : 5.29km/ 2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300m에도 못 미치는 산들이니 산이랄 것도 없다. 하지만 막상 산행이 시작되면 그런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제로(0) 레벨에서 산행이 시작되는 탓에 오롯이 280m를 올라야할 뿐만 아니라 경사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골이 깊어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는 수고로움이 더해진다. 하지만 산이 갖고 있는 장점은 그런 고생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심심찮게 시야가 열리면서 서해바다와 맞물린 아름다운 풍광이 눈을 즐겁게 해주는데, 특히 금정산에서 만나게 되는 암릉은 조망 산행의 백미라 하겠다. 계마항과 가마미해변으로도 모자라 위도까지 덧칠되면서 그 아름다움을 한껏 고조시킨다.

 

▼ 산행들머리는 ‘홍농 119안전센터’(영광군 홍농읍 홍농로 543)

서해안고속도로 고창 IC에서 내려와 15번 지방도를 타고 해리방면으로 내려오다 무장교차로(고창군 무장면 월림리)에서 796번 지방도로 옮겨 공음면소재지인 칠암리까지 온다. 이어서 국도 22호선으로 갈아타고 영광방면으로 내려오다 용대삼거리(고창군 상하면 용대리)에서 오른편 77번 국도로 다시 바꿔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영광군 홍농읍에 이르게 된다. 읍내의 홍농사거리(상하리)에서 우회전하면 산행들머리인 ‘119안전센터’가 코앞이다.

▼ 들머리는 홍농읍 상하리와 칠곡리, 성산리, 계마리 등 꽤 여러 곳에서 열린다. 하지만 119안전센터(상하리)에서 시작해 봉대산과 금정산을 거쳐 가마미해수욕장(계마리)으로 내려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칠곡농공단지(칠곡리) 근처 하산지점까지 버스를 대준 산악회의 배려로 1km남짓 되는 거리를 단축할 수 있었다.

▼ 신축공사가 한창인 홍농119안전센터의 뒤. 도로 건너에 위치한 민가의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게 좀 묘하다. 개가 두 마리나 지키고 있는 걸로 보아 남의 집 마당이 분명하니 말이다. 이정표도 물론 없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망설이지 않고 들어선다. 개도 짖는 게 아니라 오히려 꼬리까지 흔들며 길손을 맞는다. 넉넉한 시골 인심이랄까? 덕분에 따라나선 산악회의 이름처럼 ‘기분 좋은 산행’이 될 것 같다고 느꼈다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 길은 넓은데다 정비도 잘 되어 있다. 하지만 초입에서 만나게 되는 갈림길 두어 곳에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헷갈리기 딱 좋다. 우리 부부 역시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를 따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갈 지(之)’를 염두에 두고 길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첫 번째는 오른편, 다음은 왼편 하면서 말이다.

▼ 산길은 무척 가파르다. 아니 ‘코에서 흙냄새가 날’ 정도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 언젠가 제천에 있는 떡갈봉을 함께 오르시던 이석암선생(‘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이 산의 가파름을 빗대어 이르던 말씀이다. 오늘도 함께 산을 오르고 있는데 자신이 한 말을 기억도 못하는 눈치시다. 문장력이 풍부하다보니 그 정도의 표현은 그저 흘러가는 글귀에 불과한 모양이다.

▼ 산행을 시작한지 10분. 무덤이 있는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니 벤치가 놓여있다. 턱에 차올랐을 숨이라도 잠시 골라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 잠시 후 내려선 ‘작은재’에는 운동기구 몇 점이 설치되어 있다. 첫 만남의 이정표(마당바위 헬기장↑ 0.42㎞/ 홍농초교 방면← 0.53㎞/ 한전 정문앞↓ 0.83㎞)는 이곳이 홍농초등학교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임을 알려준다.

▼ 산길은 또 다시 힘겨운 오름짓을 시작한다. 우리 역시 그 가파름과의 버거운 싸움이 시작된다. 통나무 모양의 시멘트 구조물로 계단을 만들어 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아무런 특징이 없는 두 번째 봉우리를 넘은 산길은 다시 한 번 오름길로 바뀐다. 하지만 아까 올랐던 두 번의 오름길에 비하면 거저먹기. 숨을 헐떡일 필요도 없이 세 번째 봉우리에 올라설 수 있다.

▼ 산행을 시작한지 27분 만에 해맞이공원에 올라섰다. 이정표는 이곳을 ‘마당바위’라 적고 있는데, ‘헬기장’보다도 더 너른 공터에는 봉대정(烽臺亭)이라는 팔각정외에도 해맞이축제를 위한 제단과 희망과 상생의 우체통, 체육시설 등 잡다한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읍민들이 스스럼없이 찾아오는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아치형 대문은 ‘봉대산 해맞이공원’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맞다. 매년 정월 초하루면 이곳은 ‘해맞이 축제장’으로 변한다고 한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리는 행사의 하나일 따름이지만, 읍민들에게는 한 해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중요한 행사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명까지도 ‘해맞이 공원’이 되었다.

▼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비도 세워놓았다. <昨夜一宿靑天 足豆時生白髮’(어제 밤 푸른 하늘에서 지내고 한발 한발 내려오니 흰 머리카락이 돋는 것 같구나)>. 이따가 오르게 될 금정산 자락에 있는 금정암(金井庵, 1627년 보명선사가 창건한 사찰)에서 하룻밤을 머문 김삿갓이 그 경관에 감탄하며 읊었다는 싯귀(詩句)를 새겼다. 한때 고시생들의 요람이었다는 금정사는 현재 원자력발전소로 인해 통행이 제한되면서 폐찰상태에 놓여있다고 한다.

▼ 해맞이공원이라는 이름답게 동쪽으로의 조망이 시원스럽다. 청보리로 유명한 공음면의 너른 들녘을 배경삼아 홍농읍 시가지가 나지막이 웅크리고 있다. 그런데 자그만 읍치고 꽤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홍농읍에 터를 잡은 원자력발전소 덕분이 아닐까 싶다.

▼ 공원 아래 안부는 홍농읍사무소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봉대산 정상↑ 0.4㎞/ 읍사무소방면← 0.63㎞/ 작은재 ↓0.42㎞)이다.

▼ 또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길. 이번에도 역시 가파르기 짝이 없다. 아니 나무계단까지 놓은 것이 아까보다 훨씬 더 심해졌다.

▼ 해맞이공원에서 8분. 산행을 시작한지는 35분 만에 ‘봉대산’ 정상에 올라섰다. 높이 284m(핸드폰의 앱은 278m)의 산봉우리는 반반하게 터가 닦여있다. 숫제 판석으로 좌대까지 만들었다.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몸짓이 아닐까 싶다. 맞다. 이곳에는 백수 구수산의 ‘고도도 봉수대(古道島 烽燧臺)’에서 신호를 받아 상하면(고창군)의 고리포봉수대로 전하던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 성종(981년) 때 시작되어, 조선 중종 때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법성포의 조창을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다.

▼ 정상석은 이곳에 있었다는 봉수대(烽燧臺)를 상징이라도 하려는 듯 불꽃을 형상화 했다. 봉수라는 게 본디 불꽃으로 신호를 보내는 시설이니 당연하다 하겠다. 참고로 봉수대는 높은 산정에 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횟불, 낮에는 연기로 군사적 상황을 중앙으로 급히 전하던 일종의 원시 통신수단이다. 고려 의종(1149년) 때부터 제도화되었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그야말로 일망무제다. 시야가 툭 트이면서 주변 풍광이 거칠 것 없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남쪽 방향은 조금 전에 올랐던 해맞이공원과 별반 달르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방향까지 시야가 열린다. 발아래에 신촌저수지가 놓여있는가 하면, 그 너머로는 계양산, 그리고 더 멀리로는 위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 정상 건너편에서 암봉이 하나 솟아올랐다. 길은 이 봉우리를 비켜가지만 공음면과 법성포 방면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조망의 명소이니 놓치지 말고 올라볼 일이다.

▼ 코앞에 있는 봉대산의 정상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주위 풍경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 이 암봉을 지나면 이정표(가마미방면↑ 4.51㎞/ 칠곡삼거리← 1.27㎞/ 한전정문 0.8㎞↓)가 세워진 또 다른 바위봉우리가 나온다. 대구의 산꾼 김문암씨가 만든 정상표지판은 이정표에 매달려 있었다. 진짜 정상에는 매달아놓을 만한 마땅한 지지대가 없었던 모양이다.

▼ ‘가마미 해수욕장’ 방면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내려가는 길도 역시 무척 가파르다. 오르내림이 모두 가파르니 가히 봉수대가 들어설만한 지형이라 하겠다. 참고로 이 능선은 경수지맥(鏡水枝脈, 영산기맥의 구황산(서봉)에서 서북쪽으로 분기한 길이 35km의 산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라고 한다. 경수지맥이 장사산(고창군 상하면)에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이중 남서쪽으로 가지를 쳐 빚어 올린 봉우리가 봉대산과 금정산이란다. 이 산줄기는 홍농읍 칠곡리에서 그 맥을 서해에 넘겨준다.

▼ 산은 굴곡진 인생과 같아 오르내림이 반복된다고 했다. 그러니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면 이에 상응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날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그래 쉬운 산이 어디 있으랴.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겠는가.

▼ 그래선지 요런 애교도 부려놓았다. 편한 길이니 돌아가란다. 그래봤자 ‘도나캐나’였지만 말이다.

▼ 바위지역에는 밧줄도 매어놓았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의 경사가 아닌데다, 바닥의 접촉면도 거칠어서 밧줄의 도움 없이도 내려서는데 지장이 없다.

▼ 이 구간에서는 법성포 방향의 풍경이 시야에 잡힌다. 서해바다를 가로지르는 영광대교는 물론이고, 고창군에서 흘러내려온 구암천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영광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백제불교최초도래지는 저 하천 너머에 있을 것이다.

▼ 가파른 오르내림만 계속되는 건 아니다. 아래처럼 순한 산길도 걷게 된다. 참!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산은 텅 비어있었다. 산행을 끝마칠 때까지 우리 일행 말고는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도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지역협력을 중요시하는 한수원에서 관리하고 있지 않나 싶다.

▼ 그렇게 얼마를 진행했을까 이번에는 비탈이 아예 곧추서버렸다. 그것도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이다. 하지만 나무계단을 놓았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다만 그 계단이 길다는 게 조금 부담스러울 뿐...

▼ 길고 긴 계단을 오르는 일은 고달프다. 대신 눈은 즐거워진다. 조금 전에 넘어온 봉대산 줄기에 더해, 이번에는 고창 지역의 너른 들녘과 그 뒤를 받치고 있는 수많은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 계단이 놓인 봉우리를 넘자 ‘질마재’에 내려선다. 칠곡리와 계마리를 잇는 고갯마루인데, 이정표(가마미↑ 3.4㎞/ 한빛원전→ 2.0㎞/ 칠암폭포← 0,7㎞/ 봉대산정상↓ 1.1㎞)와 등산로안내도 말고도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이정표는 왼쪽에 금정산이 자랑하는 명소 가운데 하나인 ‘칠암폭포’가 있음을 알려준다. 홍문동천(虹門洞天 : 무지개 문이 하늘에 닿는다)과 옥쇄주분쇄락상신(玉砕珠噴灑落爽神 : 물줄기가 옥구슬 가루를 흩뿌리듯 떨어지니 마음마저 시원하다)으로 대변되는 아름다운 폭포지만 다녀오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요즘 같은 갈수기에는 폭포의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질마재를 기점으로 또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아까의 그 가파름은 많이 누그러졌다. 대신 바윗길에 가까울 정도로 바위의 숫자가 부쩍 늘어났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봉대산에서 금정산까지 산봉우리가 몇 개나 있는지 모르겠다. 산등성이를 넘으면 또 새로운 등성이가 나타나니 말이다.

▼ 봉우리 위로 올라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금정산이 살짝 얼굴을 내민다. 그 오른편에는 한빛원전이 들어앉았다. 그렇다면 저 바위절벽 어디쯤에 산의 이름을 낳게 한 ‘금샘’이 있을 것이다.

▼ 지난 일요일(7일)은 입동(立冬).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길가의 단풍나무가 먼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난 흉측하게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에서 김응룡 감독이 내뱉었던 탄식을 회상해 낸다.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인생무상 아니 목생무상(木生無常)이다.

▼ 잠시 후 또 다른 칠암폭포 갈림길(이정표 : 가마미↑ 3.0㎞/ 칠암폭포 및 저수지← 1.4㎞/ 질마재↓ 0.5㎞)를 만났으나 망설이지 않고 지나쳐버린다.

▼ 가파르게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는 길. 길가 바위마다 송악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다른 나무들처럼 하늘로 뻗을 수 있는 조상의 음덕을 입지 못하고, 땅 위를 이리저리 기어 다니거나 다른 나무나 절벽에 빌붙어 살아야 하는 슬픈 운명이다 보니 저런 모양새로 자라고 있는 모양이다.

▼ 또 다시 나타난 가파른 내리막길. 이번에는 길기까지 하다. 그만큼의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날 것을 걱정하며 툴툴거리는데, 함께 걷던 일행이 그 이유를 알려준다. ‘봉대산’과 ‘금정산’이 하나의 능선으로 연결되지만 별개의 산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길은 내려가도 너무 내려간다.

▼ 가파른 내리막길의 끝에는 ‘엑기재(어느 분의 후기에서 따왔는데 옳은지는 모르겠다)’가 있었다. 한빛원전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금정산↑ 0.5㎞/ 한빛원전→ 0.65㎞/ 봉대산↓ 3.9㎞)이다. 질마재에서 이곳까지는 23분이 걸렸다.

▼ 또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길, ‘비탈이 허리를 곧추세웠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 꽤 오래 계속된다. 그 가파름과 버거운 싸움을 치러야만 하는 우리로선 죽을 맛인 구간이다. 의지할 수 있는 밧줄난간을 매어놓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가파른 경사는 ‘갈 지(之)’자 걸음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끝내는 나무계단을 이용해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했다. 맞다. 산은 산이다. 작거나 낮다고 깔보면 고생한다. 더구나 바닷가의 산들은 더 그러하다.

▼ 고진감래(苦盡甘來)랄까?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시야가 툭 터지는 바위지대가 나오면서 환상적인 조망이 펼쳐진다. 법성포 방향의 풍경이 성큼 다가오는데, 서해바다에 둘러싸인 ‘숲쟁이 꽃동산’이 또렷하다. 백제불교 최초도래지를 품고 있는 산이다. 이곳에는 벤치를 놓아두었다. 눈의 호사를 실컷 즐기다 가라는 모양이다.

▼ 조망을 즐기다가. 아니 점심 대용으로 준비해간 막걸리로 목을 축이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완만해진 능선을 따라 9분쯤 더 걷자 널찍한 헬기장이 나온다.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이곳이 금정산 정상이다. 하지만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이정표도 세워놓지 않았다. 그저 김문암씨가 매달아놓은 정상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금정산(金井山)이란 지명은 요 아래 천연동굴에 있다는 ‘옹달샘’에서 따온 이름이지 싶다.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에 태양이 비치면 금빛이 된다고 해서 금정(金井)이라 했는데, 아무리 퍼내도 금빛을 띠고 있어 부금(浮金)이라 부르기도 했단다. 옛 이야기도 전해진다. 가마미 근처에 살던 노인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동굴 속에서 옹달샘을 발견하고 물을 마셨는데, 다음 날 잠에서 깬 노인이 배를 만지자 금이 나오더란다. 그런데 욕심 많은 아들 내외가 더 많은 금을 얻고자 할아버지의 배를 무리하게 누르자 금은 나오지 않고 할아버지는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노인이 시주한 돈으로 동굴 앞에 세운 절이 ‘금정암(지금은 폐찰 상태다)’. 얘기는 얘기일 따름이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지근거리에 있는 ‘선창금 갈림길’(이정표 : 가마미 1.4㎞/ 선창금 1.67㎞)을 지나 가마미해변으로 내려가는 이 길은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이다. 길지는 않지만 바윗길을 타는 덕분에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과 함께 스릴까지 한꺼번에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 약간의 모험심만 투자하면 스릴은 최고조에 이른다. 위도에 더해 해상풍력발전기까지 덤으로 담아보는 눈의 호사는 넉넉한 보너스다.

▼ 이제 주변경관도 살펴보자. 왼편에는 ‘108번뇌’를 상징하는 영광대교의 108m짜리 주탑(主塔)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그 오른편으로 뻗어나간 길은 그 유명한 ‘백수해안도로’다. 교통의 기능보다는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해안절벽, 광활한 갯벌, 해질녘 낙조 등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입소문을 탔다.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이어 2011년엔 ‘대한민국 자연경관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해 명실상부 영광을 대표하는 드라이브 명소가 됐다.

▼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보자. 발아래로는 ‘계마항’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서해바다를 평풍처럼 두른 풍경이 마치 원색의 물감으로 완성한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 그 오른편에는 모래미해변이 서해바다와 맞물려 있다. ‘가마미(駕馬尾)’는 1627년 보명선사(조선 인조 때 금정암을 창건했다는 중)가 말이 해변을 향해 오는 형국이라 하여 마래(馬來)라 부른데서 시작된다. 그러다가 말의 꼬리가 피어나는 모양, 또는 금정산의 지형이 마치 멍에를 쓴 말의 꼬리처럼 생겼다는 설이 떠돌면서 가마미(멍에 駕, 말 馬, 꼬리 尾)가 되었다.

▼ 이후부터는 전형적인 육산을 걷게 된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는 순한 길이다.

▼ 그렇다고 조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조금 전 암릉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좌우로 펼쳐지는데, 하산지점에 가까워지면서는 ㈜TKS의 영광조선소까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도크와 마당이 텅 비어있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문을 닫은 지 꽤 오래된 모양이다. 경영난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지방기업의 아픈 현실이랄까?

▼ 금정산 정상에서 내려선지 28분. 칠곡농공단지 근처 도로(842번 지방도, 가마미로)에 내려서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다른 이들이 날머리로 삼는 가마미해수욕장은 오른편 도로를 따라 한참을 더 가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대덕산이라는 또 하나의 산을 올라야하는 빠듯한 일정을 맞추기 위한 산악회의 배려 덕분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2시간 20분을 걸었다. 핸드폰 앱이 찍은 거리는 5.29km. 산행 내내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렸음을 감안하면 나름대로 빨리 걸은 셈이다.

▼ 산악회의 일정은 산을 하나 더 오르란다. 법성포의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대덕산(大德山, 240.7m)’이다. 와탄천의 물돌이 길에 물이 차오르면 ‘구수마을’ 앞 들녘이 완전한 섬처럼 보이는데, 추수라도 앞둘라치면 이 들녘이 황금색으로 빛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집사람은 단호했다. 더 이상의 산행을 거부한다며 대신 영광의 별미나 맛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완주를 하신 ‘참매’님의 사진을 빌려다 써본다.

▼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 여유시간을 사용해야만 하니 어쩌겠는가. 일단은 ‘백제불교 도래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맥주로 목도 축일 겸해서 들어간 편의점에서 도래지까지 가는 택시를 불러 달랬는데, 등산복 차림의 우리 부부를 본 주인장께서 지역에서는 산책코스라며 가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신다. 그녀가 일러준 대로 따라가는데,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길은 굴비의 고장답게 이름까지도 ‘굴비로’이다. 도로변에는 건어물시장도 들어서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한보따리 챙겨도 좋을 듯.

▼ 이곳 법성포는 예로부터 호남지방을 드나드는 배들의 관문이었다. 고려시대에 이미 조창(漕倉)이 개설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호남지방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을 서울의 마포나루까지 실어 나르던 배와 중국대륙까지 가는 배들이 이곳 법성포나루를 거쳐 갔다고 한다. 조창과 조운(漕運)의 기능은 이 마을을 수군이 주둔할 정도로까지 번성시켰다. 하지만 근대식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가 늘어나면서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저런 작은 어선들만이 정박해있을 따름이다.

▼ 영광은 ‘굴비’의 고장이다. 그래선지 도로변의 조형물도 굴비 일색이다. 그러니 어찌 굴비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굴하지 않는다’는 뜻의 ‘굴비(屈非)’는 고려시대 이자겸(李資謙, 미상~1126)이 만들었다. 딸 셋을 하나는 16대 예종(睿宗), 나머지 둘은 예종의 아들(자신에게는 외손자)인 인종(仁宗)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묘한 족보를 만들어버린 인물이다. 그가 영광으로 유배를 오게 됐는데, 이곳에서 만난 말린 조기를 ‘굴비’라는 이름으로 진상하며 ‘선물은 주되, 결코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았단다.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아부가 아니며, 또한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 ‘에이 조기가 아니라 갈치네’ 집사람의 말마따나 다리의 모양새가 갈치처럼 길쭉하게 생겼다. 각설하고 간이 잘 된 영광굴비는 살이 눅눅하지 않아 담백한 맛이 난다. 질이 좋은 소금으로 염장하기 때문이란다. 재료가 되는 조기도 중요하다. 신안에서 영광을 거쳐 부안에 이르는 길은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파시(波市)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곳이었다. 해마다 알을 밴 조기들이 칠산 앞바다를 지나 북쪽으로 향했고, 이게 최고의 굴비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을 배기도 전에 남중국해에서 대부분이 잡혀버린다. 요즘은 수산시장을 돌며 사들인 조기가 굴비의 원료가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영광굴비가 제 맛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염산면의 소금과 법성포 해풍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충족시켰으니 가히 영광굴비라 불릴 수 있지 않겠는가.

▼ 영광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사면 백만 원짜리라도 백화점 굴비지만, 영광서 사게 되면 오만 원짜리도 영광굴비가 된다’고 주장한단다. 그런 굴비를 마다할 집사람이 아니다. 쪼르르 달려가더니 포즈부터 잡고 보는데, 조형물에 담긴 ‘자린고비’라는 뜻을 그녀는 알고 있기나 한 걸까? 반찬이 아까워 천장에 생선을 매달아 놓고 쳐다보기만 했다는 할아버지와는 달리 그녀의 씀씀이는 요즘 내 연금의 한도를 넘어서고 있으니 말이다.

▼ 30분 가까이 걸었을까 산꼭대기에 걸터앉은 석불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에는 중국에서나 볼 법한 탑(사실은 도래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이 세워져 있다.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에 도착한 것이다. 저곳은 법성포라는 고을 이름의 근원이기도 하다. 법성포의 법(法)은 불교를, 성(聖)은 마라난타 스님을 의미한다. 성인으로 평가받는 마라난타 스님이 불교를 들여온 곳이라는 뜻이다.

▼ 2006년에 문을 연 백제불교 최초도래지에는 높이 23.7m의 사면불상과 부용루, 탑원, 만다라광장, 상징문, 유물전시관 등이 들어서 있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도래지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간다라 양식의 건축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것이다. 맞다. 이곳 ‘법성포(法聖浦)’는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포구’라는 뜻이다. 그 옛날 파키스탄의 간다라에서 출발한 ‘마라난타’라는 승려가 신장 위구르의 쿠처·돈황과 장안·남경을 거쳐 당시 백제 땅인 지금의 법성포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했다 한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지자체에서 놓칠 리가 있겠는가. 간다라 양식의 건축물을 짓고 불교 유물들을 전시해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 ‘탑원(塔園)’은 간다라 지역에 남아있는 ‘탁트히바히 사원’의 주탑원을 본떴다고 한다. 마라난타 존자의 고향인 간다라의 대표적인 사원 양식이라는데, 중앙의 스투파(stupa·불사리 탑)를 바라보며 승려가 수행하던 작은 굴(감실형의 불당)이 빙 둘러 있는 형식이다. 그래선지 감실 내부에는 불상과 작은 탑들이 들어있었다.

▼ ‘간다라유물관’은 황토색 벽돌로 지어졌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지붕 위에 원형 기둥을 얹었다. 드럼 모양의 찰주(불탑 꼭대기에 세운 장식의 중심을 뚫고 세운 기둥)가 튀어나온 형상이다. 현지조사 등을 거쳐 재현한 간다라 지역(현 파키스탄 페샤와르 일대)의 전통 건축양식이란다. 간다라 지역은 기원 전후 헬레니즘과 융합해 불교 미술을 꽃 피운 고장이다.

▼ 안으로 들어가면 백제불교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영상과 자료들을 통해 마라난타(摩羅難陀) 존자가 언제 어떻게 법성포에 오게 되었는지, 그 역사와 간다라 양식에 대해 상세히 알려준다.

▼ 파키스탄 현지에서 들여왔다는 2~5세기 부조와 불상 등 진품 147점도 전시하고 있었다. 파키스탄 대사관의 협력을 얻어 건너온 진귀한 것들이라는데, 이를 통해 스와트, 페샤와르, 탁실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간다라 불교문화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특히 깊은 눈과 날카롭고 긴 코, 얇은 입술과 갸름한 얼굴 등 서구적인 용모로 조각된 불상들은 1~3세기경 인도 불교문화와 그리스 헬레니즘이 합쳐진 간다라 미술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 가장 높은 곳은 ‘사면대불(四面大佛)’이 차지했다. 암석에 동굴을 파서 만든 석굴사원 형식이다. 그 아래 전각은 ‘부용루’. 벽면에 석가모니의 출생에서 고행까지의 전 과정을 23개의 원석에 간다라 조각기법으로 음각해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사면대불상까지는 108번뇌를 하나하나 녹이며 올라가라고 백팔계단으로 놓았다는데 직접 올라가보지는 못했다. 대신 10m 높이의 돌기둥(石柱)과 설법도(設法圖) 부조 등을 꼼꼼히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다.

▼ 바닷가에는 널따란 데크 광장을 조성했다. 배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것으로 보아 마라난타가 배에서 내렸다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간다라 지역의 스와트(Swat)를 출발한 스님은 길기트와 훈자를 거쳐 중국 신장지역인 쿠차, 장안, 항저우(杭州)에 다다른다. 그리고 배를 타고서 법성포(法聖浦)에 도착하니, 그때가 백제 침류왕 원년인 서기 384년이다.

▼ 모처럼 찾은 영광이니 상상만 해도 침이 고이는 굴비를 어찌 맛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가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현지사정을 가장 잘 아는 택시기사 분의 추천을 받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법성토우’라는 식당을 찾았고 그 선택은 탁월했다. 돌솥굴비(1만원)와 녹차보리굴비(1만5천원)를 주문했는데, 다른 곳에 비해 가격이 저렴했을 뿐만 아니라 담백하게 간이 된 맛 또한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밑반찬으로 나온 젓갈에 반한 집사람은 아래층의 특산품 매장에 들러 곱창김(2만8천원/속)과 젓갈(병당 만원)까지 푸짐하게 챙겨들고 나왔다. 덕분에 내 지갑은 홀쭉해졌지만 말이다.

고산봉(高山峰. 359.1m)-석산봉(石山峰, 242m)

 

산 행 일 : ‘21. 10. 23(토)

소 재 지 : 전남 함평군 대동면

산행코스 : 향교저수지 입구→정자쉼터→고산사지 삼거리→고산사지(왕복)→강운촌닭 삼거리→고산봉 정상→정창마을(황금박쥐) 갈림길→석산봉 삼거리→석산봉 정상(왕복)→정자쉼터→향교 뒤 삼거리→대동면사무소(소요시간 : 8.8km/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높이가 300m를 겨우 넘겼으니 산이랄 것도 없다. 거기다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기암괴석 같은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뭘까? 이유는 간단하다. 크기에 비해 가슴이나 눈에 담아갈만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조망은 가장 큰 자랑거리다. 바닷가 평야지대에서 솟아오른 덕분에 함평 들녘은 물론이고 서해바다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석산봉의 암릉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진안의 마이산을 닮은 바위봉우리가 뜬금없이 솟아올라 눈에 호사를 누리게 만든다. 8.8㎞가 짧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도보로 연결되는 함평천 건너 기산봉까지 둘러보면 되니 산행거리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 산행들머리는 ‘천지단향양봉’ 옆 삼거리(함평군 대동면 향교리 718-1)

서해안고속도로 함평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함평·나주 방면으로 달리다가 기각사거리(평읍 기각리)에서 왼편 ‘영수길(함평실고삼거리↔향교사거리)’로 옮기면, 잠시 후 대동면사무소와 함평향교를 지나 천지단향양봉(영농조합법인)에 이른다. 조합건물 옆 삼거리가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카카오맵(kakaomap)은 ‘천지단향양봉 영농조합법인’을 치면 된다.

▼ 고산봉의 들머리는 꽤 여러 곳에서 열린다. 지도에 표시된 4곳 외에도 상강마을과 고산마을 등 두어 곳에서 더 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동면사무소(4코스)를 들·날머리로 삼는 게 보통이라서, 다른 들머리는 길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니 참조해 둘 일이다.

▼ 향교저수지 둑(隄防)을 향해 걸으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둑 아래에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 걸로 보아, 대동면사무소를 들머리로 삼았을 경우 저 길로 걸어오게 되지 않나 싶다.

▼ 제방 위로 올라서자 만수위까지 차오른 ‘향교저수지’가 그 푸름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1968년에 축조된 저수량 41천㎥의 저수지로, 농업용수의 생명이 수질인 점을 감안하면 최고 품질의 물을 담고 있다 하겠다.

▼ 산행을 시작한지 5분. 저수지를 왼편 옆구리에 끼고 잠시 걷자 임도 하나가 오른편으로 나뉜다. 산자락으로 파고드는 이 길이 고산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이다. 들머리에 이정표(고산봉 정상 2,530m/ 고산골)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이정표는 고산골 방향에다 ‘정유재란 대승지’라 적고 있었다. 이 지역(향교리) 출신의 의병장 칠실(漆室) 이덕일(李德一, 1561-1622) 장군이 정유재란(1597년) 때 왜군에게 대승을 거둔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이곳(고산골)과 동막골(금성산성 5㎞ 지점)에서 왜군 7,000명을 격파(다소 과장된 듯하다)한 그는 이후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복무하였고, 종3품인 병마우후(兵馬虞候)를 지낸 다음 증직으로 병조판서를 제수 받았다.

▼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길이 넓은데다 정비까지 잘 되어 있지만 경사가 가팔라서 오르는 게 쉽지는 않다.

▼ 산길로 들어선지 5분 만에 능선으로 여겨지는 곳에 올라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Daum지도에 표기되어 있는 ‘팽나무·느티나무·개서어나무·의줄나무’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천연기념물(제108호)로까지 지정되어있기에 꼭 찾아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지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함평(대동면) 향교리의 ‘느티나무·팽나무·개서어나무 숲’은 아까 차로 지나왔던 대동면소재지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팽나무 10그루, 개서어나무 52그루, 느티나무 15그루와 푸조나무·곰솔·회화나무 각 1그루가 향교초등학교 옆에 있는 옛 도로변에 아래 사진(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처럼 줄줄이 심어져 있단다. 나이는 대략 350살.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으로부터 벌판과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의 기능을 하는데, 풍수지리상 수산봉(함평읍 소재)이 불의 기운을 품고 있어 그 재앙을 막기 위해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능선에 올라섰는데도 가파른 오르막길은 그 기세를 누그러뜨릴 줄 모른다. 아니 오히려 더 가팔라졌다. 지자체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바닥에 침목계단을 깔아 오르내리는데 부담을 덜도록 했다.

▼ 그렇게 10분쯤 올라섰을까 뜬금없이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생김새도 아닌데다 규모까지 작으나 전형적인 육산에서 만나는 생소한 풍경인지라 카메라에 담아봤다.

▼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만큼은 어느 암릉에 뒤지지 않았다. 대동면 들녘과 동함평산업단지가 널따랗게 펼쳐지는가 하면, 백룡산과 금성산 등 나주의 산들이 그 뒤를 받쳐주고 있다.

▼ 또 한 번의 가파른 몸짓을 하고나서 올라서게 된 무명봉.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만든 의자가 놓여있다.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잠시 쉬어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이런 쉼터는 몇 걸음 걷지 않아 다시 만난다.

▼ 무명봉에서 산길은 아래로 향한다. 그것도 침목계단을 깔았을 정도로 가파르다. 문득 오르던 산을 인생에 비유하던 지기가 떠오른다. 그는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산을 굴곡진 인생에 비유하면서,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고 주장했었다. 그렇다면 이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으로 변할 것이다.

▼ 바위 위에다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이 주인노릇을 하는 두 번째 봉우리를 넘자 울창한 소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커다랗고 붉은 소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모진 세파에 시달린 탓인지 잘 생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서 있는 그 자태만으로도 너무나 싱싱하고 곱게 내게 다가온다. 거기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상강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이 합류되는 안부(이정표 : 고산봉 정상↑ 1,327m/ 상강마을→ 776m/ 대동면사무소↓ 2,400m)에 내려선다. 펑퍼짐한 것이 옛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마루처럼 보이지만 길은 오른편 상강마을로만 열린다.

▼ 안내판은 이곳을 ‘한국전쟁이 부른 아픔의 길’로 적고 있었다. 불갑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빨치산이 학교면·함평읍의 주요 시설과 인근마을을 습격하고 방화·약탈·납치 등의 만행을 저지르다 군경에 쫓겨 본부인 불갑산으로 달아날 때 이 고개를 넘었다는 것이다. 이때 양민들은 빨치산이 약탈한 식량과 생필품을 운반하는 부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단다. 전쟁이 낳은 아픔이라 하겠다.

▼ 이정표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지명만 적는 여느 이정표들과는 달리 이곳은 지명 외에도 식당과 펜션 등의 상호를 적어 넣었기 때문이다. 지역 상권을 살려보려는 고심의 흔적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등산로 정비에 협찬을 받았을 것이고 말이다.

▼ 안부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역시 힘겨룸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 그 힘겨룸이 금방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5분이면 정자가 있는 쉼터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게 아닌가. 등산객을 위한 시설은 아닐 테니, 주민들이 산책 삼아 이곳까지 올라온다는 얘기일까?

▼ 길가 바위들은 두터운 이끼로 옷을 해 입었다. 서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못내 버거웠던 모양이다.

▼ 작은 내림에 이어 나타나는 길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10분쯤 치고 오르자 이번엔 ‘고산사지 삼거리(이정표 : 고산봉 정상↑ 427m/ 고산사지← 166m/ 대동면사무소↓ 3,300m)’이다. 고산사지까지는 고작 166m. 터무니없이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면 한번쯤 다녀오기를 권한다. 심심산골에서 천년의 미소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 절터로 가는 길은 신우대가 잠시 훼방을 놓는 것 말고는 길이 또렷하다.

▼ 2~3분쯤 후 도착한 곳에는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외롭다. 비탈진 산자락 바위에다 부처를 새겨놓았는데, 매우 우람하다는 안내판의 설명과는 달리 규모나 조형미 모두 보잘 것이 없었다. 그저 미소 띤 얼굴에서 온화함을 느낀 게 전부랄까? 오래전(고려 초기)에 조성된 데다 석질까지 나빠 마모가 심한 탓일 게다.

▼ 마애불 아래에 있다는 절터까지는 둘러보지 않고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그리고 가파른 오르막 구간을 5분쯤 치고 오르자 ‘강운촌닭 삼거리(이정표 : 고산봉 정상↑ 390m/ 강운촌닭→ 1,441m/ 대동면사무소↓ 3,418m)’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강운촌닭 방향의 능선에 있다는 ‘공구바위’를 보고 싶은데, 그러다간 주어진 시간까지 산행을 마무리 짓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것 같아서이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힘센 장사가 공기놀이를 하던 바위라는데,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 또 다시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길. 산행 준비를 하면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낮다고 만만하게 봤다가 큰 코를 다쳤다’는 어느 분의 후기를 봤었는데 이제 실감이 난다. 정상에 도착할 때까지 어느 곳 하나 버겁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말이다.

▼ 그 오르막은 다행히도 금방 끝났다. 그리고 돌탑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멋진 바위전망대에 올라선다. 강운리(대동면)는 물론이고 나주(나산면) 지역까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이다.

▼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가파른 오르막을 다시 한 번 치고 오르자 고산봉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5분만이다. 두루뭉술하게 생긴 정상은 잡다한 시설물들로 가득하다. 필수 시설이랄 수 있는 정상석과 이정표(대동면사무소↑ 4,100m/ 대동면사무소↓ 3,727m), 삼각점 말고도 정자에 평상까지 설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나 역시 평상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선두대장 덕분에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낭만까지 곁들이면서 말이다.

▼ 고산봉은 400m에도 못 미치는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서해바다를 낀 함평의 평야지대에서 솟아오른지라 오히려 우람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고산(高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일 것이다. 거기다 봉우리가 붓끝처럼 솟아올랐으니 주위의 시선을 끄는 군계일학이 되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필봉(筆峰)이라 불리기도 했단다.

▼ 성능 좋은 망원경도 2대나 설치해 놓았다. 그만큼 조망이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망원경에 의지할 것까지도 없다. ‘위험’ 표지판이 세워진 바위지대로 나아가면 함평과 나주의 산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단 위험천만한 천애절벽의 위이니 안전에 주의가 요구된다.

▼ 발아래에는 강운저수지가 놓여있다. 논농사가 많은 함평에는 저수지가 유독 많은데, 풍경만으로도 눈길을 붙잡는 곳이 적지 않다. 그 너머로는 산들이 첩첩이다.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은 물론이고 더 멀리로는 태청산과 불갑산, 무등산, 월출산까지 자세하게 보인다.

▼ 석산봉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너무 가파르다 싶은 곳에는 철제계단을 놓았다.

▼ 계단에 올라서자 시야가 툭 트인다. 그리고 덕산리 방향의 들녘과 서해바다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 계단의 바로 아래에서 삼거리(이정표 : 대동면사무소← 3,943m/ 정창마을↑ 2,669m/ 고산봉 정상↓ 169m)’를 만났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능선을 버리고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꺾는다.

▼ 삼거리에는 ‘붉은박쥐 서식지 생태·경관보전지역’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붉은박쥐(천연기념물 제452호)는 황금박쥐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외모가 매우 화려하다. 하지만 암컷과 수컷의 비율이 1:40으로 극히 불균형적인데다 환경오염 등으로 개체수가 줄어 멸종위기에 처한 세계적인 희귀종이다. 중국 남부와 일본 대마도 등지에서 10마리 미만의 채집기록이 남아있을 뿐이었는데, 지난 99년 함평군 고산봉 일대의 동굴에서 집단으로 동면하던 황금박쥐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 길은 계속해서 가파르다. 지자체에서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침목계단을 놓았는가 하면, 밧줄 난간을 설치해 이에 의지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 그렇게 10분 정도를 내려서자 펑퍼짐한 안부가 나온다. 삼거리(이정표 : 면사무소↑/ 고산마을→/ 등산로 없음←/ 정상↓)인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붉은박쥐로 유명한 고산마을(덕산2리)로 연결된다. 마을 뒤 고산봉의 산자락에 일제 때 금을 캐기 위해 파놓은 30여 개의 동굴이 있는데, 그중 10여 곳에서 100여 마리의 붉은박쥐가 서식하고 있단다.

▼ 기이한 샘 ‘구수천(廐首泉)’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고산동 마을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조그만 웅덩이가 나오는데, 이게 8km나 떨어져 있는 서해바다와 연결이라도 되어있는 듯 밀물이 들면 샘물이 차서 넘치고, 썰물일 때는 물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구간 구(廐)’에 ‘머리 수(首)’자를 쓰는 이유는 뭘까?

▼ 안부를 지난 산길은 또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고산마을 삼거리(이정표 : 대동면사무소↑ 3,127m/ 고산마을 800m→/ 고산봉 정상↓ 973m)’를 만난다. 하지만 잡목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것이 일 년에 한두 명이나 이용하는 듯 싶다.

▼ 산길은 또 다시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다시 올라가야할 일이 걱정될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 우려와는 달리 뒤이어 나타나는 길은 작은 오르내림만 반복한다. 다음에 오르게 될 석산봉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 정상에서 내려선지 30분. ‘석산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이 분기하는 봉우리(이정표 : 석산봉← 658m/ 대동면사무소↑ 2,507m/ 고산봉↓ 1,593m)에 올라섰다. 그런데 함께 걷던 일행들이 곧장 직진해버리는 게 아닌가. 석산봉까지의 거리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인데, 덕분에 우리 부부의 발걸음만 바빠지게 생겼다.

▼ 이정표는 석산봉까지의 거리를 658m로 적고 있었다. 산길인 점을 감안하면 다녀오는데 30분 정도 걸릴 것이다.

▼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하지만 바닥에 돌이 많아 걷는 게 편하지만은 않다. 이 구간의 또 다른 특징은 막바지에 이르면서 심심찮게 시야가 열린다는 것이다. 아차마을이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그 뒤로는 서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 15분을 걸어 올라선 ‘석산봉’을 누군가는 맘모스의 등처럼 생긴 거대한 암반이라고 했다. 사방이 깎아지른 낭떠러지라고도 했다. 하지만 막상 올라본 정상은 여느 흙산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그건 그렇고 두세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벤치가 전부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게 안타까웠는지 누군가가 자연석을 세우고 그 표면에다 석산봉이라 적었다. 높이(268m)도 덧붙였음은 물론이다.

▼ 하지만 고개를 돌리면 상황은 급변한다. 그가 말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진안의 마이산처럼 생긴 거대한 암봉이 함평읍 방향으로 길게 뻗어나가는데 양 옆이 천애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석산봉의 암릉은 물론이고, 함평의 너른 들녘과 나지막한 산들, 그리고 드넓은 서해바다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대동면사무소 방향으로 진행한다. 경사를 거의 느낄 수 없는 유연한 산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5분쯤 걸었을까 벤치를 놓아둔 쉼터에 올라선다.

▼ 이곳에서의 조망 또한 일품이다. 아까 석산봉에서 보았던 풍경이 그대로 펼쳐지는데, 이번에는 그 석산봉까지 한눈에 담아볼 수 있다.

▼ 산길은 이후로도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그래선지 산길을 벗어나 숲속을 기웃거리는 여유까지 부려봤다. 6~7년 전쯤 등산로 주변에 여러 종류의 버섯종균을 접종했다는 기사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당시 기사는 그 이유를 등산객들에게 색다른 체험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외부 산행객들이 자주 찾는 명소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니 몇 송이 채취한다고 해도 문제될 게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버섯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 ‘석산봉 삼거리’를 출발한지 15분 만에 헬기장보다도 더 넓어 보이는 봉우리에 올라섰다. 정자까지 지어 쉼터를 겸하도록 했지만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참! 오는 도중 ‘빨치산 활동 이동경로’라는 안내판이 눈에 띄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과 불순분자들이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이 능선을 따라 이동했다는 것이다.

▼ 앞서 내려가고 있는 집사람의 몸짓이 무척 부자연스럽다. 전문가들은 산을 내려갈 때 자기 체중의 3배가 되는 하중이 무릎에 걸린다고 말한다. 그러니 몸무게가 제법 나가는 집사람의 무릎은 지금쯤 과부하가 걸려있을 것이다. 스틱이 그걸 조금은 감소시켜주겠지만 말이다.

▼ 하산길이라고 해서 계속해서 내리막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래 사진처럼 계단을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 구간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 송악처럼 생겨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송악은 눈보라 치는 매서운 추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늘푸른 덩굴나무다. 그러니 남녘땅 함평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정자봉을 출발한지 20분. 삼각점과 돌탑이 있는 봉우리를 넘어 안부에 내려섰다. 산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꺾는다. 능선을 벗어나는 걸로 보아 날머리가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 조금 더 내려서자 ‘향교(鄕校) 뒤 삼거리(이정표 : 대동면사무소↑ 297m/ 향교저수지← 629m/ 고산봉 정상↓ 3,803m)’에 이른다. 대동면사무소를 들·날머리로 삼을 경우 어느 쪽 능선을 타고 고산봉으로 오를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순환코스이니 어디로 가더라도 한번 씩은 지나가야만 한다. 너무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이다. 참! 이곳에는 향교 뒷산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황새골과 처녀바위에 얽힌 이야기인데 내용을 생략하겠다.

▼ 조금 더 걸어 산자락을 빠져나오자 정자쉼터가 나온다. 고산봉을 찾는 이들 대부분이 들·날머리로 삼는 곳인데, 이들을 위해 등산안내도는 물론이고 먼지떨이기까지 설치해 놓았다. 몇 점의 운동기구도 보인다. 정자가 주민들의 쉼터로도 이용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면사무소 뒤뜰로 나오자 이번에는 황금박쥐 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함평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부상한 황금빛 박쥐를 탑 모양의 기둥 꼭대기에 앉히고, 그 아래에는 나비 조형물을 배치했다. 뒷산인 고산봉이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야생동물인 붉은박쥐의 주요 서식지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명품 축제로 이미 자리매김 된 함평의 ‘나비축제’의 홍보도 곁들이면서 말이다.

▼ 산행날머리는 대동면사무소

황금박쥐 조형물을 지나자 대동면사무소가 나오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3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이 8.8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참!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엑스포공원에 들러볼 것을 권한다. 금빛 찬란한 황금박쥐가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24k 순금으로 제작된 황금박쥐의 무게는 무려 126kg. 1999년 고산봉에서 처음 발견된 황금박쥐 126마리를 상징한 무게라고 한다.

♧ 에필로그(epilogue), 이곳 함평은 비빔밥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함평 5일장에 있는 식당가. 독특한 조리법과 맛으로 전주비빔밥에 비견된다는 함평비빔밥을 맛보기 위해서다. 그중에서도 ‘육회비빔밥’이 가장 인기가 좋다지만 날것을 먹지 못하는 우리 부부는 돌솥비빔밥과 낙지비빔밥은 주문했다. 각각 1만5천원과 2만원이니 가격은 만만찮다. 하지만 그 맛과 서비스는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 곁들여 나온 선지국은 일미였다. 그것도 내 술병이 비워져가는 속도에 맞춰 덥혀다 주는 게 아닌가. 처음 찾아간 ‘함평천지한우프라자 명품관’이 브레이크타임에 걸려 육질 좋다는 한우를 맛볼 기회는 놓쳤지만 이를 대신하기에 충분한 메뉴였다.

옹성산(甕城山, 572m)

 

산 행 일 : ‘21. 5. 18(화)

소 재 지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산행코스 : 주차장→동복유격대→안성저수지→옹암바위→옹암삼거리→쌍문바위→백련암터→옹성산→옹성산성→쌍두봉→독재삼거리→상부주차장→주차장으로 원점회귀(소요시간 : 7.44km/ 2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높이가 600m에도 못 미치니 분명 야산에 속한다. 하지만 옹성산은 기암괴석만으로도 명산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설 수 있다. 옹성산의 정상은 마치 항아리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항아리 옹(甕)’자에 ‘성 성(城)’자를 쓰는 이유이다. 옹성은 또 ‘철옹성(鐵甕城)’의 준말도 된다. 그래선지 이 산의 9부 능선에는 ‘전남 3대 산성’ 가운에 하나라는 철옹산성(鐵甕山城)이 축조되어 있었다. 덕분에 스릴 넘치는 암릉 산행과 함께 선인들이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운 호국정신까지 되새겨 볼 수 있다. 화순 적벽으로 유명한 동복호의 조망은 덤. 그러니 한번쯤은 꼭 들러보아야 할 산으로 꼽고 싶다.

 

▼ 산행들머리는 ‘옹성산 주차장’(화순군 동복면 안성리 428-2)

호남고속도로 옥과 IC에서 내려와 국도 15호선 동복방면으로 내려오다 신선마을(동복면 안성리) 입구 조금 못 미쳐서 오른편으로 들어오면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승용차는 이보다 한참이나 더 들어간 곳에 위치한 상부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다.

▼ 옹성산의 들머리는 이곳 신성마을 외에도 독재(화순군 백아면 다곡리)에서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열 중 아홉은 이곳 신성마을을 들·날머리로 삼는다.

▼ 군부대가 있는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불멸의 유격혼’이라는 동복유격대의 표지석을 참조하면 되겠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이 부대는 곁눈질로 만족하고 그냥 지나치자. 사진촬영은 엄격히 금지된다.

▼ 5분쯤 들어가면 안성저수지. 관개용 저수지로 보이는데 눈길을 끌만한 경관은 갖고 있지 못하다. 가슴에 담아둘만한 얘깃거리도 없었다.

▼ 오늘의 꽃은 ‘엉겅퀴’로 꼽아봤다. 거친 가시와 당찬 꽃송이가 옹성산에서 훈련을 받고 있을 유격대원들의 강인한 정신력을 닮았기 때문이다. 꽃말인 ‘경계’나 ‘위급’도 군인들을 연상시킨다. 거기다 가시가 달린 억센 이미지에다 짓밟히면서도 잘 자란다는 특성은 ‘민중의 삶’까지 떠올리게 만들지 않겠는가.

▼ 저수지 근처에서 만나게 되는 첫 번째 갈림길(오솔길)은 그냥 지나친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두 번째 갈림길에서는 왼쪽으로 난 임도로 들어선다. 주차장에서 10분쯤 되는 지점인데 초입에 이정표(옹성산←)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 노약자나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곳도 그냥 지나치는 게 좋겠다.

▼ 널찍한 임도를 따라 5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능선사거리’이다. 왼편은 아까 그냥 지나쳤던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올라오는 길.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편 능선을 따른다. 고갯마루를 넘는 직진 길은 유격훈련장으로 연결될 것이다.

▼ 길은 또렷하다. 하지만 ‘군사시설 보호지역’이니 출입하고자 할 때에는 관할 부대장의 허가를 받으라는 경고판이 진입을 망설이게 만든다. 그렇다고 뻔히 아는 등산로를 포기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경고판 뒤로 보이는 ‘등산로’라고 적힌 팻말이 그 증거물이다.

▼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10분. 거대한 암벽이 떡하니 앞을 막아선다. 옹성산을 에워싼 세 바위봉우리 중 하나인 '옹암(독아지 바위)'이다.

▼ 수직에 가까운 바위절벽에는 굵은 밧줄이 매어져 있다. 붙잡고 오르라는 듯 쇠파이프로 난간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무섭기는 매한가지다. 아까 노약자나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정규탐방로로 돌아가라고 권했던 이유이다.

▼ 설치된 밧줄에 의지해 바위 위에 올라서면 길은 더 고약해진다. 이젠 밧줄까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위태롭기는 하지만 왔다갔다 해가며 위로 오르는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다만 안전장치가 없기 때문에 둘이 아닌 네 개의 발을 사용해야만 한다.

▼ 위로 올라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풍경이 변해버린다. 서슬 시퍼런 암벽이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가 지나왔던 ‘안성저수지’가 살짝 얼굴은 내민다.

▼ 어렵게 올라선 바위의 위, 흙길로 변하는가 싶던 산길에 더 큰 바위가 불쑥 솟아올랐다. 하긴 옹성산이라는 이름까지 낳게 만든 장본인이 어디 그리 쉽게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겠는가.

▼ 이번에도 역시 밧줄에 의지해서 오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서너 번이나 연거푸 밧줄에 매달려 용틀임을 해야만 한다. 개개의 바윗길들이 짧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30분 만에 ‘옹암바위’의 정상에 올라섰다. ‘독아지 옹(甕)’자를 써서 ‘독아지봉(408m)’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둥그스레하게 생긴 이 둥근 봉우리로 인해 산 전체가 ‘옹성산’으로 불리는 것이다.

▼ 시야가 툭 트이는 절벽의 끄트머리로 다가가려는데 경고판 하나가 겁을 준다. 추락 위험이 있으니 등산객의 접근을 금한다나? 그렇다고 조망을 포기할 등산객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 이곳에서는 화순의 또 다른 명산이 모후산은 물론이고, 백아산까지 조망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 조금 전에 올라온 저점에는 또 다른 경고판이 세워져 있었다. 추락의 위험이 있으니 통행을 금한다는 것이다. 맞다. 모르고 올라왔으니 망정이지 이곳에서 내려가라고 하면 나 역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겠다. 그만큼 위태위태한 구간이었다는 얘기이다.

▼ 옹암을 지나면서 산길은 고도를 낮춘다. 그리고 300m가량 내려가다 옹암삼거리(이정표 : 옹성산성← 0.8㎞/ 주차장→ 0.7㎞/ 옹암바위↓ 0.3㎞)에서 왼쪽 임도를 따른다. 오른편은 상부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정상 0.9㎞/ 주차장 0.9㎞/ 임도는 표식이 없음)에서는 왼편 자드락길을 탄다.

▼ 옹성바위를 출발한지 15분. 잘 지어진 방갈로형의 산장을 만났다. 옛날 이곳에는 월봉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10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는데, 지금은 모두 떠나고 별장형의 주택 두 채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니 그마저도 빈집인 모양이다.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얼마나 오랫동안 비워두었는지 마당도 웃자란 잡초로 가득하다.

▼ 잡초와 칡넝쿨이 무성한 분지를 스치듯 지나치자 길이 두 갈래(이정표 : 백련암터↖ 0.1㎞/ 옹성산성↗ 0.5㎞, 주차장 1.6㎞)로 나뉜다. 일단은 옹성산성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그쪽에 옹성산의 또 다른 명물인 ‘쌍문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쌍문바위만 보고 가도 옹성산에 오른 품삯을 건진다는 말도 있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50m쯤 더 올라갔을까 어른이 넉넉히 들락거릴 수 있는 크기의 구멍 두 개가 뚫린 ‘쌍문바위’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거대한 바위에 쌍으로 뚫린 모양새가 영락없는 문(門)이다. 맞다. 인위로 만든 건 아니지만, 옛날 이곳은 외성 노릇을 하는 세 암봉에서 옹성산 중심부의 내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겸했다고 한다.

▼ 뻥 뚫린 구멍의 생김새가 자못 빼어나다. 그래선지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낸 이도 있었다. 아득한 옛날 솜씨 좋은 석공이 ‘독아지 바위’를 빚은 뒤, 그 여새를 몰아 이곳에다 두 개의 바위 문을 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 뒤쪽에서 바라본 ‘쌍문바위’. 고성 상족암과 남해 금산의 쌍홍문을 연상시키는 바위는 얼핏 누렇게 보이기도 한다. 오래된 이끼가 암벽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란다. 자연과 바람, 세월이 선물한 훈장인 셈이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백련암터로 향한다. ‘암자터’로 가려면 울창한 대나무 숲을 지나야만 한다. 햇빛이 스며들지 못하는 어두컴컴한 터널이다. 문득 ‘당장의 어려움에 좌절하지 말고 나아가라’는 어느 현자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저런 어둠의 터널을 두고 빛으로 향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할 과정이라고 했었다. 인생의 과정을 빌어 한 얘기겠지만 산길 또한 이와 같지 않겠는가.

▼ 대나무 숲을 통과하면 물결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둘러싸고 있는 널찍한 공터가 나온다. 백련암이 있던 자리인데, 세상의 좋은 곳은 모두 절간이 들어앉았다는 우스갯소리가 떠오를 정도로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지금은 작은 샘만이 이곳이 암자 터였음을 알려줄 따름이다. 암자라도 있었더라면 저 샘물을 관리했었을 것이고, 덕분에 우리도 목이라도 축이고 갔을 텐데 아쉽다.

▼ 우물 옆에는 향을 피운 향로와 촛대 등 기도한 흔적이 남아 있다. 기도터를 관리했던지 삽이며 청소 도구도 보였다. 그만큼 이곳의 풍수가 좋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하긴 동복팔경(同福八景) 가운데 하나가 옹성효종(甕城曉鍾). 즉 옹성산에 울려 퍼지는 새벽 종소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 암자터를 지나자마자 삼거리가 나왔다. 그런데 이정표(옹성산 정상↖ 1.0㎞/ 정상↗ 0.4㎞/ 쌍문바위↓ 0.1㎞)가 어디로 갈지를 놓고 고민하게 만든다. 둘 모두 정상으로 가는데 길이만 서로 따를 뿐인 것이다. 집사람의 눈초리가 오른쪽으로 향하는데도 난 왼편을 고집했다. 산행 거리가 짧은데다 마치 주어진 시간까지도 넉넉했기 때문이다. 이왕에 왔으니 하나라도 더 봐야 하지 않겠는가.

▼ 8분쯤 더 걸어 능선에 올라서자 이정표(옹성산 정상→ 0.5㎞/ 창랑길↑/창랑길←. 전망좋은 곳/ 쌍문바위↓ 0.6㎞)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뜬금없이 ‘창랑길’이란 지명이 툭 튀어나와 보는 이를 헷갈리게 만드는 이정표이다. 이곳 옹성산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설치한 시기가 서로 다른 이정표들이 혼재되어 있어, 지명이나 거리 등의 표기가 제멋대로인 것이다. 새로운 시설물을 설치하려면 옛 시설물들을 제거하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 아무튼 창랑길로 들어섰다. 하단에 ‘전망 좋은 곳’이라는 부제까지 달아놓았는데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정표는 우릴 속이지 않았다. 50m쯤 들어가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광주시민의 식수원인 ‘동복호’가 널따랗게 펼쳐졌기 때문이다. 산허리까지 올라온 동복호의 호안선이 빚어내는 유연한 굴곡이 그윽하다. 조망처에는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풍광이니 쉬엄쉬엄 즐기다 가라는 모양이다.

▼ 사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정상으로 향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전망대를 만났다. 길가에 써놓은 무덤 끝으로 다가가자 동복호가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줌을 당겨보자 정자 하나가 클로즈업 된다. 동복호가 만들어지면서 고향을 잃고, 선산에 가지 못하는 수몰민들이 매년 모여서 시제를 모신다는 ‘망향정’이다. 저곳은 또 적벽을 대표하는 ‘노루목적벽’을 가장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요 아래 바위절벽이 ‘노루목적벽’이기 때문이다.

▼ 잠시 후, 그러니까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만에 정상에 올라섰다.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널따란 정상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옹성산’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이곳이 산에서 가장 높은 지점일 따름이지 옹성(甕城)이란 지명을 낳게 한 명소, 즉 옹기바위(甕岩)와 철옹성(鐵甕山城)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정상에는 ‘2등 삼각점’과 함께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해발고도가 572m로 적혀있다. 국제신문에서는 573.5m, 네이버지도는 574m, 거기다 앱이 깔린 내 핸드폰은 600m를 찍고 있다. 그러니 높이가 조금 틀린다고 해서 무슨 문제이겠는가.

▼ 정상에서의 조망은 보잘 것이 없다.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숲이 시야를 가로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무등산이 있는 북쪽 방향이 살짝 열릴 따름인데 짙은 안개가 그마저도 가려버렸다.

▼ 하산을 시작한다. 옹성산성, 그러니까 조금 전 올라왔던 반대방향의 능선을 탄다.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 간다. 중간에 시야가 잠깐 열리기도 하나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지극히 평범한 구간이다. 참! 정상 바로 아래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이정표 : 옹성산성↑ 0.8㎞/ 주차장→ 1.6㎞/ 백련암터↓)이 나뉘기도 했다.

▼ 정상에서 내려선지 15분.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났다. 그런데 이정표(옹암바위↑ 1.1㎞, 주차장 1.7㎞/ 주차장→ 1.5㎞/ 옹성산 정상↓ 0.8㎞)가 보는 이를 헷갈리게 만드는 게 아닌가. 옹암바위는 분명 오른편으로 가야 하는데도 곧장 직진하라는 것이다. 직진하면 철옹산성과 쌍두봉이 나오는데도 말이다.

▼ 탐방로는 거대한 바위절벽 아래를 지난다. 자연이 빚어놓은 성벽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바위절벽을 에둘러 올라서면 사람이 작은 돌을 꼼꼼하게 쌓아올린 철옹산성(전남기념물 제195호)을 만난다. 이렇듯 자연과 인간이 힘을 합쳐 쌓아올린 성이 바로 철옹산성(鐵甕山城)이다.

▼ 옹성산은 깎아지른 듯한 옹암과 쌍두봉이 버티고 있는 산이다. 그 뒤쪽으로 철벽같은 자연암벽을 이용한 산성을 쌓았으니 그야말로 ‘철옹성(鐵甕城)’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쌓았다는 이 성의 이름 역시 ‘철옹산성’. 길이 5,400m(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의 둘레가 3,874척이라 했는데 이를 미터로 환산하면 1,223m이다)로 담양의 금성산성, 장성의 입암산성과 함께 전남 3대 산성의 하나로 꼽힌다. 참고로 철옹산성은 옹성산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포곡식 산성이다. 성벽은 해발 275~550m 일대에 분포하고, 축조방식은 부분적으로 약간씩 다르다.

▼ 원형이 남아있는 성벽을 지나면 널찍한 암반지대다. 길고 크다고 해서 ‘장대(長臺)바위’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병사들이 보초를 서는 ‘파수대(초소)’를 두기에 이만한 곳이 없겠다. 그만큼 시야가 툭 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벤치 몇 개를 놓아둔 쉼터로 변해있다. 그리고 파수를 보던 병사들 대신에 등산객 몇이 느긋하게 조망을 즐긴다.

▼ 이곳은 확 트인 전망이 일품이다. 독아지 바위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는가 하면, 그 너머 멀리에서는 모후산이 우뚝 솟았다. 참! ‘국제신문’은 이 바위 뒤쪽에 있는 암벽을 타고 돌아가면 옹달샘이 나온다고 했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들머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용이 살다 하늘로 올라갔다는 용소(龍沼). 깊이가 2m에 이르며 사계절 내내 항상 맑은 물이 가득 차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성의 중심부쯤 되는 곳에서 만난 정체모를 바윗돌. ‘이 뭐꼬’라는 스님들이 즐겨 사용하는 화두가 떠오를 정도로 그 용도가 궁금하다. 이곳이 산성이었으니 군사들의 훈련 용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임진왜란 때 이 고을 현감을 지낸 뒤 진주성 전투에서 싸우다 순국한 황진장군이 이곳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기도 했다니 말이다.

▼ 조금 더 걸어 내려오니 대나무가 울창한 널따란 분지가 나타난다. 세월이 많이 흘렀겠지만 사람이 살았던 듯 돌배나무와 은행나무, 뽕나무 등 민가의 주위에서나 볼 법한 풍경들이 연이어 펼쳐진다. 산성의 역할이 마감되면서 사람들이 들어와 살지 않았나 싶다. 청옹산성의 내부가 계곡을 포함해 수량이 풍부한데다 활동공간도 넓다는 기록으로 보아 사람이 살기에 이만한 곳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 길은 야트막한 산허리를 돌고 돌아 쌍두봉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10분 남짓 걸었을까 능선안부에서 삼거리(이정표 : 주차장→ 1.1㎞/ 옹성산성↓ 0.6㎞, 옹성산 정상 1.4㎞)를 만났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향한다. 하지만 능선 위로도 길이 나있다.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쌍두봉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 옹성산의 중심축이랄 수 있는 ‘쌍두봉’을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정표에서 빼버린 길인데도 능선 위로 난 길은 의외로 또렷했다. 철옹산성의 외성노릇을 했을 정도로 서슬 시퍼런 바위봉우리이지만 길이 위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눈에 담아둘만한 풍경은 없었다. 그저 뒤돌아볼라치면 쌍두봉의 또 다른 바위봉우리가 큼지막하게 다가온다는 것 뿐.

▼ 4분쯤 지나 도착한 쌍두봉(507m)의 정상은 텅 비어있었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국제신문의 근교산 취재팀이 매달아놓은 표지기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주차장 방향으로 하산을 계속한다. 거대한 바위사이 굴곡진 틈. 즉 협곡을 연상시키는 산골짜기를 따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긴 계단이 놓여있다. 중간에 쉼터까지 만들어놓았을 정도라면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구간은 무지막지한 경사에다 심심찮게 나타나는 암벽 때문에 계단을 설치하지 않았다면 오르내리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 같다. 그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거대한 암벽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 계단은 내려서는데 만 10분이나 걸렸다. 이어서 3분쯤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주차장↗ 0.8㎞/ 북면 다곡리↖ 1.0㎞/ 옹성산성↓ 0.9㎞)가 나타난다. 왼편은 옹성산의 유이(唯二)한 등산로인 ‘독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 삼거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임도처럼 넓어진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내놓은 탐방로를 따라 10분쯤 더 내려서자 민가(느낌으로 봐서는 절간으로 보였다)가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상부 주차장에 이른다. 승용차를 이용했을 경우 들·날머리가 되는 곳이다. 그래선지 등산안내도와 이정표(동복유격대↑ 1.2㎞/ 옹성산 정상→ 2.3㎞/ 옹성산 정상↓ 2.5㎞)는 물론이고, 철옹산성의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유격대 앞 주차장까지는 이제 1.2km를 남겨 놓았다. 15분 정도만 더 걸으면 된다는 얘기이다.

▼ 출발지로 내려가는 길. 군계일학처럼 우뚝 솟은 옹성암봉이 다시 등장한다. 암벽에 타포니 현상이라고 하는 포탄 맞은 듯한 모습을 뒤로하고 안성저수지를 거쳐 동복유격대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1시 40분. 산행을 시작한지 2시 40분 만이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7.44km를 찍고 있었다.

▼ 귀경길에 두어 곳의 적벽을 둘러봤다. 천리 길 머나먼 옹성산까지 찾아왔으니 이왕이면 이 산이 만들어내고 있는 비경까지 함께 둘러보라는 산악회의 배려일 것이다. 먼저 찾은 곳은 ‘창랑적벽(滄浪赤壁)’. 길이 날듯이 상승하는 천변에 제법 으리으리한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 전망대에 오르면 푸르름이 가득한 천변 너머로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창랑적벽(滄浪赤壁)이다. 큼지막한 움직임이 한꺼번에 정지되어버린 듯 요지부동의 단애가 아랫도리를 물에 담그고 있다. 냇물은 창랑천, 마을 앞으로 흐르는 물이 맑다는 뜻이다. 이 창랑천의 물길이 오랜 세월 깎아 만든 태고의 절벽이 바로 창랑적벽이다. 창랑 말고도 물염(勿染), 장항(獐項, 노루목), 보산(寶山)이라는 또 다른 적벽을 만들었으니 이들을 ‘화순적벽(和順赤壁)’이라 통칭한다. 1519년 기묘사화 때 화순 동복에 유배되었던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1483~1537)가 ‘적벽’이라 부르면서 시작된 이름인데, 소동파가 선유하며 노래했던 중국의 적벽에서 빌려왔단다.

▼ 창랑적벽에서 크게 한 굽이를 더 돌면 ‘물염적벽(勿染赤壁)’이다. 길 따라 올라서면 널따란 광장과 함께 수많은 빗돌들이 길손을 반긴다. 물염정전승기, 물염정삼현선생사적비 등 물염정과 관련된 빗돌들은 물론이고, ‘금성 나씨’의 홍보용 빗돌들도 여럿이다. 아니 나씨들 것이 더 우람하다. 물염정(勿染亭)을 세운 송정순이 외손인 나주나씨(羅州 羅氏) 무송(茂松)과 무춘(茂春) 형제에게 정자를 물려주었다고 하더니 그들이 주인노릇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요즘의 건물주들은 조물주의 위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 가장 높은 곳은 물염정(勿染亭,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2호)이 차지했다. 호남 8대 정자 중 으뜸으로 꼽는 정자이다. ‘물염’은 조선 중종과 명종조에 성균관전적 및 구례·풍기군수를 지낸 송정순(宋庭筍, 1521~1619)의 호로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마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몇 번의 관직생활 뒤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은거했다. 정자 내부에는 수십 개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창주(滄洲) 나무송(羅茂松)이 지은 원운(原韻)을 비롯해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매천(梅泉) 황현(黃玹) 등 수많은 객들이 정자와 적벽을 찬하여 남긴 시문들이다.

▼ 정자 아래쪽에는 김삿갓이라 불린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의 시비와 동상이 있다. 삿갓을 눌러쓰고 세상의 ‘염(染)’을 경계한 난고 김병연이 생을 마친 곳이 동복 땅이다. 이곳을 자주 찾아왔던 그는 ‘장유적벽(將遊赤壁) 탄유객무주(歎有客無酒)’라 하여 적벽에서 노닐다 술이 없음을 한탄하기도 했다.

▼ 물염정에서 내다보는 물염적벽은 우거진 식물들에 뒤덮여 청벽(靑壁)이다. 하지만 이젠 다가갈 수 없는 금역(禁域)이 되었다. 1985년 동복댐이 건설되면서 접근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30년만인 지난 2014년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왔고, 그 덕분에 우린 이렇게 멀리서나마 적벽을 구경할 수 있게 됐다. 그건 그렇고 20대 중반 무렵 유람삼아 이곳 적벽(‘노루목’이었을 게다)을 찾았었다. 당시는 나룻배를 타고 적벽 가까이로 다가가 까마득한 벼랑을 올려다 볼 수도 있었다. 그게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은 물결에 배 맡기고 탁주에 취하여 노래하던 시절이었다. 또한 너른 백사장에서는 모래찜질이나 천렵도 가능했었다.

 

봉래산(蓬萊山, 410m)

 

산행일 : ‘21. 4. 19(월)

소재지 : 전남 고흥군 봉래면

산행코스 : 편백숲 주차장→체육공원→봉래2봉→봉래1봉→봉래산 정상→용송 빗돌→시름재→편백나무 숲→편백숲 주차장(소요시간 : 약 6km/ 2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고흥반도 최남단 외나로도(外羅老島)에 있는 높이 410m의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그러나 섬 산답게 곳곳에서 거대한 바위를 품었고, 그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고흥반도의 산들과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다운 풍광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그런데도 봉래산을 찾는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다른 곳으로 쏠린다. 등산보다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9천 그루에 이르는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을 찾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편백나무 숲길을 걸으면서 피톤치드가 보태주는 힐링을 얻어가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 산행들머리는 ‘외나로도 편백숲 주차장’(고흥군 봉래면 예내리 산 212-14)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고흥 IC에서 내려와 국도 15호선을 타고 내려오면 내나로도를 거쳐 이곳 외나로도에 이르게 된다. 이어서 ‘나로도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앞 오거리에서 4시 방향의 ‘하반로’를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봉래산의 7부 능선쯤에 조성되어 있는 외나로도 편백숲 주차장에 닿는다. 널찍한 주차장에는 화장실은 기본. 테이블과 벤치를 세트로 배치해 쉼터도 만들었다. 심지어는 흙먼지 털이기까지 설치해 놓았다.

▼ 봉래산을 오르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다. 가장 많이 이용되는 방법은 편백나무숲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정상을 오른 후 편백나무 숲을 거쳐 원점회귀 하는 것. 그밖에도 동쪽 해안의 우주과학관(예내해변) 또는 하반해수욕장에서 출발하여 시름재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방법과 서쪽 해안의 염포해수욕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방법 등이 있다.

▼ 탐방로 입구에 만들어놓은 게이트를 통과하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아니 시국이 시국인지라 ‘관광지 방역관리본부’에서 설치한 몽골텐트라 하는 게 옳겠다. 참! 다도해국립공원사무소에서는 하절기(3월-10월) 입산시간을 04시-16시로 제한하고 있었다. 동절기에는 앞뒤로 1시간씩 단축됨은 물론이다.

▼ 평지나 다름없는 길을 따라 100m쯤 들어갔을까 체육공원이 나온다. 아고라를 세우고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나로도)의 안내도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본 다음에 산행을 나설 것을 권해본다. 그러면 이곳이 봉래산 원점회귀 산행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안내판들 가운데 하나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오늘 걷게 될 탐방로가 고흥군에서 조성한 세 번째 ‘마중길’. 즉 ‘고흥 싸목싸목길(사계절 향내길)’이라는 것이다. 안내판은 또 삼나무·편백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 아래를 걸으면서 세상사 어디선가 받았을 상처를 흔적 없이 치유해보길 기대한다고 적고 있다. 걷다가 만나게 되는 이정표는 ‘지붕 없는 왁자지껄 쉼터’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각자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하면 된단다.

▼ 이정표(봉래산 탐방로↑ 2.2㎞/ 편백숲← 1.4㎞/ 주차장↓ 0.1㎞)는 이곳에서 길이 둘로 나뉨을 알려준다. 직진해서 능선을 타면 봉래산 정상에 이르게 되고, 왼편은 피톤치드 공장인 편백나무 숲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 부부는 봉래산을 먼저 오른 다음 내려오는 길에 편백나무 숲을 들르기로 했다. 두 지점을 연결하는 탐방로가 잘 닦여있기 때문이다.

▼ 오른쪽 길. 즉 봉래산 정상으로 향하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탐방로는 초입부터 만만찮은 경사를 내보인다. 지자체로서는 그게 못내 부담스러웠던지 모양이다.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써가며 경사를 많이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집사람처럼 ‘이까짓 오르막쯤이야’를 외쳐대는 사람들도 꽤 많았던 모양이다. 곧장 치고 오르는 지름길도 제법 뚜렷했다.

▼ 탐방로를 닦을 때 나왔음직한 큼지막한 돌들이 모였고, 누군가는 저렇게 돌탑을 쌓아올렸다. 오르는 게 힘들다고 바라는 소망 하나 없을까. 하다못해 무사히 산행을 마치게 해달라는 기도라도 드려보자.

▼ 취사가 금지된다고 해서 준비해 온 음식까지 못 먹겠는가. 저 원형 식탁은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물이다.

▼ 가파른 오르막길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다. 10분 남짓이면 작은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고,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고도를 높여가기 때문이다.

▼ 이때 왼편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예내저수지 아래에 위치한 나로도우주센터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우리나라 우주 발사체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야외엔 실물 크기의 나로호 모형과 나로호 개발 전 우주발사체 개발의 모체가 됐던 KSR 과학 관측 로켓 등이 전시돼 있다. 다양한 체험을 통해 우주를 경험해 볼 수도 있다니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길이 널찍하게 닦인 것은 기본, 경사가 심한 곳에는 나무계단을 놓아 안전을 도모했다. 갈림길은 물론이고 일정한 간격으로 이정표를 세워놓아서 길을 잃고 헤맬 일도 없다. 이곳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국립공원에 걸맞는 꾸밈새라 할 수 있겠다.

▼ 잠시 후 국가지점표시판(라라 0031-0558)이 세워진 바위지대가 나오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 조금 전과는 달리 외나로도의 서쪽 해안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 중심에는 ‘조구나루(동광)’가 놓여있다. 시선을 조금 더 옮기면 나로도항과 함께 애도(쑥섬)도 눈에 들어온다.

▼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바위지대다. 탐방로는 이 거대한 바위를 피해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이번에는 아예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봉래산을 세상에 알리는데 일조한 ‘삼나무·편백나무 숲’을 오롯이 바라볼 수 있는 전용 전망대이다. 편백나무 숲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도 세워두었음은 물론이다.

▼ 전망대에 서면 봉래산의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진다. 그 왼편에는 예내저수지와 우주센터가 있다. 그림의 중앙은 물론 봉래산의 하이라이트인 삼나무·편백나무 숲이 장식한다. 거침없이 동공을 파고드는 진녹색의 물결이다.

▼ 조망을 즐기다가 돌계단을 오르니 ‘봉래 1봉’이다. 하지만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봉래1봉임을 알리는 별다른 표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정표(봉래2봉 0.5㎞/ 주차장 1.1㎞)에 나타난 지명을 보고 이곳이 그곳이려니 유추해볼 따름이다. 그렇다고 시설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전망도’ 아니 ‘조망도’를 세워놓았다. 원탁의자도 배치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쉬엄쉬엄 즐기다 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 바위지대로 나가자 외나로도의 서해안이 눈앞에 펼쳐진다. 먼저 상초마을과 외초마을부터 눈에 담는다. 고개를 조금 더 돌리자 이번에는 염포해안. 갯바위 낚시터로 유명한 곳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아름답기 짝이 없다. 이곳을 왕래하던 중국 사신들도 저런 풍광에 취해 ‘봉래산’이란 이름을 갖다 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봉래산’이라는 게 본디 영주산(瀛州山), 방장산(方丈山)과 함께 전설상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 그 오른편으로는 조구나루(동광)와 교동마을이 있다. ‘외나로도항’은 그 너머. 그런데 포구의 앞에 있는 애도가 본섬인 외나로도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들고 남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리아스식 해안으로 이루어진 고흥에는 23개 유인도와 200여개 무인도가 딸려 있다.

▼ 이후로는 소사나무 숲속을 누비게 된다. 봉래산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이다. 이밖에도 봉래산에는 고로쇠나무와 소나무가 많다고 한다. 희귀 야생화로 보호 중인 복수초(福壽草)의 대규모 자생 군락지도 있단다.

▼ 이제 탐방로는 봉래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을 걷게 된다. 크고 작은 바위들을 넘으며 봉래산을 물론이고 고흥반도 주변의 풍광을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다. 왼편은 항상 삼나무·편백나무 숲과 우주센터가 자리하고 있고, 오른편에서는 나로도와 고흥반도의 아름다운 풍광이 제 모습을 뽐낸다.

▼ 작은 바위를 돌아가기도 하고, 두부처럼 모난 바위를 정면으로 보며 가기도 한다. 거대한 바위가 길을 막는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무계단을 놓아 노약자들도 별 어려움 없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 오랜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 어느 거인이 공깃돌 놀이하기에 딱 좋은 바위가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능선을 오르내리다보면 저렇게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될 만한 바위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 요놈들은 영락없는 개다. 그것도 우리네 옆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실이가 분명하다.

▼ 눈의 호사를 계속해서 이어진다. 봉래산의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그 중심에는 항상 편백나무 숲이 들어있다. 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저 편백나무 숲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편백나무 숲이라고 한다. 올 2월에는 전남도에서 발표하는 ‘올해 방문해야 할 명품 숲’에 선정되기도 했다.

▼ 거대한 바위를 우회하는 나무계단도 우리 부부에게는 또 다른 호사이다.

▼ 바위지대가 끝나면 탐방로는 또 다시 울창한 소사나무 숲속을 따라 이어진다.

▼ 고즈넉한 능선을 따르던 탐방로가 오르막길로 변하는가 싶더니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봉래 2봉’에 올라선다. 집채만 한 바위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듯한 주변 풍경이 눈길을 끄는 곳이다.

▼ 이곳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그저 이정표(봉래산 정상 0.6㎞/ 봉래1봉 0.5㎞)에서 이곳이 ‘봉래 2봉’임을 유추해 볼 따름이다. 봉우리가 3개인 봉래산에서 정상과 1봉을 제외하면 남는 것은 2봉뿐이니 말이다.

▼ 2봉에서의 전망도 빼어난 편이다. 아니 누군가는 이곳이 봉래산 제일의 전망대라고까지 했다. 먼저 진행방향을 살펴보자. 잠시 후에 오르게 될 봉래산 정상이 우뚝하고, 그 왼편 산자락은 편백나무 숲이 장식하고 있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조금 전에 올랐던 ‘봉래1봉’이 그 빼어난 미모를 자랑한다. 넓게 펼치면 봉우리 주변을 바다가 감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비록 버스를 타고 들어왔지만 이곳 나로도는 역시 섬이었다.

▼ 오른편으로 펼쳐지는 그림에는 염포항이 놓여있다. 해수욕장도 살짝 얼굴을 내민다. 바다를 향해 튀어나간 곶의 뒤에서는 아름다운 섬 하나가 손짓을 보내온다. 바다 위에 솟은 바위와 드러누운 바위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맷돌 형상을 하고 있는 ‘곡두여’이다. 저 돌섬은 바닷사람들이 겁내는 암초다. 하지만 낚시꾼들에게는 프리미엄 낚시터로 널리 알려져 있다.

▼ 탐방로는 울창한 숲을 헤집으며 나있는 터널과 바위가 만들어놓은 천연의 전망대를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이 구간도 역시 눈이 호사를 누리는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 완만하던 탐방로가 갑자기 가팔라진다. 그것도 바윗길이다. 해발이 410m에 불과한 산이지만 명색이 봉래산의 정상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힘들게 해서라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 가파른 오르막길을 잠시 치고 오르자 드디어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 만이다. 봉수대가 있었다는 정상은 수북하게 쌓인 잡석더미를 연상시킨다. 그래선지 막 쌓아올린 돌탑을 오르는 느낌이다. 그건 그렇고 섬에 있는 봉수대이니 연변봉수(沿邊烽燧)가 분명할 테지만 자세한 내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편백나무 숲과 나로도우주센터는 물론이고 조망에다 식생까지 적어 넣은 안내판도 막상 봉수대에 대해서는 뒤끝을 흐려버렸다.

▼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봉래산 정상’이란 이름표를 단 기둥을 세웠다.

▼ 우주센터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자세한 상황은 전문가의 시선을 빌려보자. <팔영산·마복산·천등산 등 고흥반도의 산들과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데 고흥의 시산도·지죽도·거금도·소록도는 물론 멀리 여수의 돌산도와 금오도·안도 등도 한눈에 들어온다.>

▼ 봉래산과 맞대고 있는 능선에서는 장포산과 마치산이 솟아올랐다. 그 오른편에는 ‘곡두여’가 있다. 해식애로 이루어진 저 부근은 유람선을 타고 돌아봐야 제 맛이라고 한다. 곡두여 외에도 나로(羅老)라는 지명을 낳게 한 ‘서답바위’, 부채바위, 사자바위, 부처바위 등 수많은 해안 절경들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정상의 이정표(시름재→ 1.2㎞/ 주차장← 2.2㎞/ 봉화산 정상↓)는 우리에게 어디로 갈 것인지를 놓고 선택을 강요한다. 하지만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선택이다. 오지에 묻혀있던 봉래산을 세상에 알린 일등공신인 ‘편백나무 숲’을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름재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유이다.

▼ 시름재로 내려가는 능선은 소사나무 일색이다. 어찌나 울창한지 아예 터널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국과 일본 등에 서식하는 낙엽활엽수인 소사나무는 이곳처럼 주로 해안에 분포한다. 몸채의 뒤틀림이 심하고, 그 생김새가 아름답기 때문에 분재용으로 선호되는 나무이다.

▼ 숲길이라고 해서 볼거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아래 사진과 같은 기암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길가 바위에라도 올라설라치면 시야가 열리면서 다도해의 고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 양탄자처럼 보드라운 풀밭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쉬어가기 딱 좋겠다. 아니 잠시나마 눈을 붙이기에도 그만이겠다. 비록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겠지만 말이다.

▼ 정상에서 내려선지 20분. 길가에 죽은 나무줄기 몇 개가 쌓여있다. 그 뒤에는 ‘용송(龍松)’에 대한 얘기를 적은 비석까지 세워놓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봉래산의 청석골에서 쉬던 용이 이곳의 비경에 도취되어 승천하지 못하고 소나무로 변해 살아가다가 봉래산 자락에 우주센터가 들어서자 소명을 다했다며 승천했단다. 인근 주민들이 태풍 매미 때 죽은 이 소나무에 ‘용송’이란 스토리텔링을 한 다음 그 잔해를 모아놓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로도에서 발사되는 우주선은 성공여부를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하늘에 올라가 있는 용이 자신이 수호해주던 지역에서 올라온 우주선을 돌보지 않고 어찌 배겨낼 수 있겠는가.

▼ 용송을 지난 탐방로는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침목 계단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이사이에 야자매트까지 깔았기 때문이다. 무릎이 성치 않은 사람들도 힘들이지 않고 내려설 수 있다는 얘기이다.

▼ 이 구간은 꽤 많은 돌탑들이 눈에 띄었다. 탐방로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돌멩이들을 쌓아올린 모양인데, 개중에는 정성들여 쌓은 흔적이 역력할 정도로 잘 생긴 것도 있었다.

▼ 그렇게 5분쯤 내려가자 ‘시름재(이정표 : 편백숲 입구 0.5㎞/ 봉래산 정상 1.1㎞)’에 이른다. 하도 숲이 우거져 사람들이 넘기 싫어했다는 고갯마루지만 지금은 어엿한 쉼터로 변해있다. 산행안내도는 물론이고 정자에 화장실까지 갖췄다.

▼ 편백숲 방향의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50m쯤 떨어진 지점에서 탐방로는 오솔길(이정표 : 편백숲← 0.5㎞/ 예내제↑/ 시름재↓ 0.1㎞)로 들어선다. 임도와 헤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임도와 다시 만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주차장← 1.9㎞/ 우주센터↑ 2.2㎞/ 봉래산 정상↓ 1.7㎞). 이번에는 편백나무 숲으로 연결되는 오솔길이다. 이곳은 아까 들머리에서 보았던 ‘고흥 싸목싸목길(사계절 향내길)’의 주요 포인트이기도 하다. 3개의 코스가 모두 이곳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참고로 1~3 코스로 이루어진 편백나무 숲길은 총 11.8km다. 1코스는 4.2km로 우주과학관에서 예내저수지, 삼나무 편백숲을 거쳐 무선국으로 통하는 치유의 길이다. 2코스는 편백숲과 봉래산 정상을 거쳐 내려오는 5.8km 구간이다. 3코스는 편백숲에서 무선국에 이르는 길로 봉래산의 7부 능선을 가로지른다. 3코스는 사실상 1코스 안에 포함돼 있다. 그러니까 길을 우주과학관에서 시작한다면 1~3코스를 모두 아우르는 셈이 된다.

▼ 도로를 버리고 편백나무 숲길로 들어선다.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된 '나로도 편백숲'은 1920년대 일제 강점기 지역 주민들이 정성을 들여 심고 가꿨다고 한다. 현재 22㏊ 면적에 높이가 20m도 넘은 아름드리 편백나무와 삼나무 9천여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 편백나무 숲에 들어서면 길이 둘로 나뉜다. 그렇다고 고민할 필요까지는 없다. 두 길이 모두 쉼터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편백나무가 보내주는 솔향기를 조금이나마 더 맡고 싶을 경우 50m를 더 돌아가는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참고로 편백나무 숲의 탐방로는 경사가 거의 없어 남녀노소 누구나 방문하기 좋다. 힐링을 위해 찾아온 탐방객들에게는 평상과 벤치를 놓아두는 배려도 했다.

▼ 오솔길을 따라 편백나무 숲속으로 들어선다. 가는 낙엽들이 쌓인 푹신한 흙길. 아늑하고 거칠 것 없이 하늘로 쭉쭉 뻗은 둥치들 사이로 걷는 걸음이 마냥 흥겹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에 취해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그 향기 속에는 피톤치드까지 가득할 것이다. 피톤치드는 나무가 해충, 병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뿜는 자연 항균 물질로 스트레스 해소와 심폐 기능 강화, 살균 효과가 있다.

▼ 숲의 나이가 100년에 이르다보니 눈에 들어오는 나무 하나하나가 모두 어른 두 명이 함께 끌어안아야 할 정도로 굵직하다. 높이도 30m에 이르는 거목들이니 바로 아래서 나무를 위로 올려다보기 힘들 정도다. 나무숲 사이로 빛도 쉽게 통과 못하는 듯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하다. 그 속으로 난 숲길을 걸으며 아름드리 편백나무 아래에서 산림욕을 즐길 수 있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편백나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활력에 넘쳐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울창한 편백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도심에서 찌들은 안 좋은 기운들이 쏙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피톤치드를 통해 스트레스가 말끔히 해소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힐링’하면 ‘편백나무 숲’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산림욕을 하러 편백나무 숲을 찾는다. 심폐기능 강화는 물론이고 스트레스 완화와 유해물질 프롬알데히드 제거, 항균 탈취, 알레르기·피부질환 면역기능 증대 등 수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미세먼지 자욱한 때 편백나무 숲을 거닐면 상쾌 통쾌 그 자체다.

▼ 30m도 넘는 거목들이 즐비한 숲은 겨우 통과한 빛살도 주눅 들어 숨죽인다. 100년이나 묵었다는 이 오래된 숲속에서 치유의 길을 걸어본다. 그것도 가장 편하게.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 숲에서 아예 머무르고 싶어지니 말이다. 그런 내 마음이 안쓰러웠는지 숲속에 평상과 벤치가 놓아 쉼터를 조성했다. 길가 곳곳에는 벤치도 놓아두었다. 바삐 가지 말고 오래 숨을 들이쉬고 뱉으며 숲을 즐기라는 배려일 것이다.

▼ 6만평이 넘을 정도로 광대한 넓이지만 울창한 숲속 산책로를 다 걸어 나오는 데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탐방로가 종이 아니라 횡으로 나있었던 모양이다. 뒤돌아본 숲은 싱그러움을 상징하듯 초록색군락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저 숲은 1981년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숲이 훼손되지 않은 채로 보존되어 온 이유이다. 그 덕분에 현재 국가 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전국 18곳에 산림문화자산이 지정되어 있지만 편백나무 숲이 지정된 것은 봉래산이 유일하단다.

▼ 아쉬움을 뒤로하고 숲 밖으로 나서니 시야가 뻥 뚫리면서 시퍼런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바다와 하늘이 경계가 없다. 옅게 낀 해무 탓이 아닐까 싶다.

▼ 산행날머리는 ‘외나로도 편백숲 주차장’(원점회귀)

편백나무 숲을 벗어나고 20분쯤 더 걸으면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주차장에 이르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6㎞를 2시간 20분에 걸었다. 절반 이상이 능선이었음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참! 주차장으로 나오는 길에 옛 사람들이 살았음직한 터도 만날 수 있었다. 나지막한 돌담도 보인다. 아까 안내판에서 보았던 ‘화전민의 돌담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난 집사람의 이름을 크게 불러봐야겠다. 이 길에서 미워하고 사랑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거나 지우다보면 어느새 그 이름이 맑아진다고 안내판은 적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지워야할 이름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미워했던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까치봉(572m), 말봉산(589m), 천봉산(天鳳山m, 612m)

 

여행일 : ‘21. 4. 1(목)

소재지 : 전남 보성군 문덕면·복내면과 화순군 사평면의 경계

산행코스 : 대원사→삼거리→까치봉→마당재→말봉산→삼거리→천봉산(왕복)→대원사(소요시간 : 약 9.5km/ 3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산두레

 

특징 : 딱 4년 6개월 만에 ‘산두레’를 찾았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심심찮게 따라다니던 산악회인데 자작의 산행기가 있는 산은 또 다시 오르지 않는다는 내 고집으로 인해 함께 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미답의 산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다른 일정과 겹쳐대니 어쩌겠는가. 오죽했으면 산두레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구나 하는 푸념까지 늘어놓았었겠는가. 그러다가 산행대장이 윤홍주대장으로 바뀌면서 미답의 산이 공지되었고, 그렇게 해서 따라나선 산이 보성 땅에 있는 ‘천봉산’이다. 전형적인 육산인 천봉산은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편이다. 볼거리가 드물다는 육산의 특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산이 품고 있는 대원사는 결코 낯설지 않은 천년고찰이다. 십리 벚꽃길과 티벳박물관 등의 볼거리까지 갖추고 있어 사시사철 사람들로 붐빈다고 한다.

 

▼ 산행들머리는 ‘대원사 주차장’(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831)

호남고속도로 문흥 JC에서 ‘광주 제2순환로’로 옮겨 화순·나주 방면으로 달리다가 소태 IC에서 내려와 화순방면 국도(29호선)로 갈아탄다. 이어서 금능교차로(화순군 이양면 금능리)에서 58번 지방도, 복내사거리(보성군 복내면 복내리)에서는 다시 국도(이번에는 18호선 주암방면)로 바꿔 들어가다 대원사삼거리(문덕면 죽산리)에서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원사에 이르게 된다. ‘초르텐(chorten)’이라는 티베트 불탑이 찾아오는 길손을 맞아주는 절의 주차장이 산행의 들머리가 된다.

▼ 천봉산은 꽤 여러 곳에서 오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들머리는 대원사와 백민미술관. 모두 보성(문덕면) 땅이다. 이밖에 문덕면의 봉갑사와 복내면(보성군)의 일봉리, 화순(사평면)의 운산마을에서도 오를 수 있다.

▼ 절간에 왔으니 일단 경내부터 들러보는 게 순서. 주차장의 오른편에 보이는 일주문으로 들어서면 된다. 대원사(大原寺)는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통일신라 때는 5교9산 중 열반종(涅槃宗)의 8대 가람 중 하나로 꼽혔던 참선도량이었다. 고려 땐 송광사의 16국사 중 제5대 자진원오(慈眞圓悟) 국사가 절 이름을 죽원사(竹原寺)에서 대원사로 바꿔가며 크게 중창, 정토신앙과 참선수행의 도량으로 발전했으나 여순사태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극락전만 남기고 모두 불타 버리는 비운을 맞게 된다. 그러다가 현 주지인 현장스님이 주지로 오면서 중창불사를 일으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 일주문 앞에는 이곳이 국가농업유산인 ‘고차수(古茶樹)’의 군락지임을 알리는 팻말을 세워놓았다. 극락전 뒷편 언덕에서 자라는 야생녹차로 350년쯤 묵었는데, 현재 보성녹차의 시배지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단다. 맞다. 천년고찰인 대원사는 대규모 사찰이었다. 그러니 사찰의 융성과 함께 차 문화 또한 꽃피웠을 것이다.

▼ 일주문의 오른편에 붙어있는 작은 문은 꼭 기억해두자. 일화문이라는데 ‘우리는 한 꽃’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이세상은 너와 내가 따로 없으니 모든 생명이 한 가족으로 살아가자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문으로 나가 왼편으로 진행하면 천봉산 등산로의 들머리가 나온다. 절간을 둘러본 다음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 경내에는 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나 볼 법한 금언과 명구들이 많이 보인다. <욕심보다 더 질긴 결박은 없다. 분노보다 더 뜨거운 불꽃은 없다. 어리석음보다 더 엉성한 그물은 없다.> 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 말인가. 이밖에도 ‘사랑으로 은혜를 많이 베풀어라. 세상이 좁아서 언제든 만나지 않으랴. 미움으로 원한을 절대 만들지 말라. 세상이 좁아서 어디서 피할 수 있으랴’ 등의 팻말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

▼ 일주문을 지나자 5칸으로 지어진 이층짜리 전각이 얼굴을 내민다. 아래층에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셨으니 천왕문(天王門)이나 천왕각(天王閣)으로 불리는 게 마땅하겠건만 ‘김지장 성보박물관’이라는 낯선 편액을 달고 있었다. 김지장(金地藏)은 신라 성덕대왕의 태자였다고 전해지는 스님이다. 하지만 24세에 출가하여 75년 동안 금욕 수행한 다음 99세에 열반에 들어 육신보살이 되었단다. 이에 중국 불교에서는 그를 지장왕보살로 떠받들고 있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아 이곳에다 그의 기념관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과연 김지장스님과 어떤 인연 있을까? 아니 과거가 아닌 앞으로 맺어나갈 억겁의 인연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 구품교(九品橋)로 건너는 연못은 대원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여름이면 활짝 핀 연꽃과 각종 수생식물로 생태 공원을 방불케 한단다. 대원사 경내에는 이런 연못이 7개가 있는데, 이는 인간의 몸에 있는 일곱 개의 챠크라(Chakra, 인간의 감각·감정·신체 기능을 지배하고 있는 에너지 센터)를 상징한단다.

▼ 주불전인 극락전의 대문 격인 ‘연지문(蓮池門)’은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낮다. 아니 무엇보다도 머리로 치는 커다란 목탁이 걸려있어 흥미를 돋운다. 일명 '용서하는 왕목탁'이다. 여기에 머리를 부딪치면 나쁜 기억이 사라지고 정신을 맑게 해준다니 한번쯤 시도해 볼 일이다. 두 손으로 목탁을 잡고 이마로 세 번 부딪치며 ‘나쁜 기억 사라져라, 나의 지혜 밝아져라, 나의 원수 잘되거라’를 되뇌며 들어가면 된단다.

▼ 주불전은 극락전(전라남도유형문화재 87호)이다. 불교의 이상향. 즉 극락정토를 상징하는데 일주문과 사천왕루를 지나고 구품교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연지문 너머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시간이 없어 생략했지만 극락전의 안에는 보물 제1861호인 ‘대원사 극락전 관음보살 달마대사 벽화’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영조 때인 1766~1767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쪽 벽에 흰옷 입은 관음보살과 선재동자가 함께 있는 관음보살 벽화를, 그리고 동쪽 벽에는 달마대사와 혜가단비의 고사를 표현한 달마대사 벽화를 그렸단다.

▼ 대원사는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어린 영령(태아령)을 위로하는 지장 기도도량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극락전 옆에다 어린 영혼들을 천도하기 위해 태안지장보살상을 세우고 빨간 모자를 쓴 수많은 동자상들을 모셨다. 천도를 위한 백일기도도 열린단다.

▼ 부모공덕불(父母功德佛)이란다. 아버지지장과 어머니지장을 앞뒤 감실에 모시고 있다. 이밖에도 전남도 유형문화재(35호)로 지정되어 있는 자진국사부도(大原寺慈眞國師浮屠)와 김지장전(金地藏殿), 아도영각(阿道影閣), 천불전(千佛殿), 산신각(山神閣), 황희정승영각(黃喜政丞影閣), 금종루(金鐘樓), 선원(禪院), 요사(寮舍) 등의 전각이 있다.

▼ 일주문으로 되돌아와 산행을 시작한다. 일주문과 '우리는 한 꽃'이란 현판이 걸린 일화문을 잇따라 통과한 다음,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곧이어 산행들머리가 나타난다. 초입에 이정표(천봉산 7.0㎞, 까치봉 1.7㎞)'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산죽밭 사이로 난 침목계단을 오르자 산길은 경사가 거의 없는 능선을 탄다. 육산의 특징인 보드라운 흙길에다 코끝에서는 솔향기가 솔솔. 그야말로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기에 딱 좋은 코스라 하겠다.

▼ 그렇다고 오름길 한번 없으랴. 명색이 600m급의 산인데 말이다. 비록 잠시지만 이런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 산행을 시작한지 25분이면 주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길이 세 갈래로 나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산봉우리인데, 누군가 이정표(까치봉← 0.78㎞, 말봉산 3.8㎞/ 백민미술관→ 3.7㎞/ 대원사↓ 1㎞)에다 ‘문수봉삼거리’라고 적어놓았다. 친절하게도 450m라며 높이까지 표시했다.

▼ 오른편은 또 다른 들머리인 ‘백민미술관(百民美術館)’으로 연결된다. 보성 출신의 향토작가인 조규일(曺圭逸)의 작품과 소장품을 기증받아 1993년에 문을 연 국내 최초의 군립미술관으로 그의 호인 백민(百民)이 미술관의 이름이 되었다. 조규일의 대표작을 중심으로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을 상설전시하고 있다.

▼ 천봉산으로 연결되는 주능선은 왼편으로 흐른다. 맞다. 오늘 산행은 대원사를 중심에 두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돈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까치봉까지 0.78㎞의 구간은 작은 오르내림을 계속한다. 경사도 거의 없다. 두 봉우리의 고도차가 122m밖에 되지 않아 서둘러 고도를 높일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 전형적인 육산(肉山)이지만 바윗길 느낌이 나는 구간도 있었다. 비록 딱 한번, 그것도 50m도 채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하도 신기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 오늘 산행은 수많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게 된다. 하지만 독자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딱 3개뿐이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게 ‘까치봉’이다. 그런 자부심 때문인지 까치봉으로 오르는 마지막 구간은 상당히 가팔랐다.

▼ 삼거리봉에서 넉넉잡아 20분이면 ‘까치봉’에 올라선다.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정표(말봉산 3.0㎞, 천봉산 5.2㎞/ 대원사 1.7㎞, 백민미술관 4.5㎞)에다 현재의 위치(까치봉, 해발 570m)를 표시해 놓았을 따름이다. 대구의 산악인 김문암씨가 걸어놓은 정상표지판이라도 보이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없으니 걷기에 딱 좋은 코스라 하겠다.

▼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완연한 봄기운을 느끼게 된다. 따뜻해진 날씨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산벚나무와 생강나무, 진달래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북이 쌓인 낙엽더미 속에서는 새 생명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수줍은 듯 꽃망울을 열었다. 봄소식을 알리는 전령 가운데 하나인 ‘얼레지 꽃’이다.

▼ 이름 없는 봉우리를 두 개쯤 넘었을까 갑자기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것도 곧장 내려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고 나서야 고도를 낮출 정도로 많이 가파르다.

▼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런 내리막길은 오래지 않아 끝나고 또 다시 완만한 경사의 보드라운 흙길로 변하기 때문이다.

▼ 까치봉에서 내려선지 30분. 느닷없이 산죽밭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산길은 ‘마당재’에 내려선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보성 문덕면과 화순 사평면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마루이다.

▼ 사거리가 분명하지만 이정표(말봉산↑ 2.2㎞, 천봉산 4.4㎞/ 대원사 입구← 0.8㎞/ 까치봉↓ 0.8㎞)는 보성지역의 세 방향만 나타내고 있다. 화순 방면은 쏙 빼버린 것이다. 어깨를 맞대고 있는 두 지자체간에 서로 배려하는 게 요즘의 트랜드인 윈윈(win-win)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 마당재를 지난 능선은 점점 왼쪽으로 휜다. 푸릇푸릇한 풀이 돋아난 것이 이제는 바닥까지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아니 짧은 내림과 길고 완만한 오름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높여간다. 그렇다고 서두르지는 않는다. 마당재에서 말봉산까지는 2.2㎞. 거리가 길다보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 그렇게 15분쯤 더 걸어서 오른 삼거리봉(이정표 : 천봉산 3.5㎞/ 까치봉 1.7㎞)에서 선두대장인 윤홍주씨가 술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산행 때마다 간식을 막걸리로 때우는 내 습관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 이곳에는 이정표 하나가 더 세워져 있었다. 말봉산(0.4㎞)과 화순의 운산마을(3.2㎞) 방향만 표기한 것으로 보아 화순군에서 세웠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보성 땅에 있다는 죄만으로 대원사를 누락시킬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긴 보성군에서 세운 이정표도 화순 땅의 지명은 쏙 빼먹어 버렸지만 말이다.

▼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작은 산치고는 오르내리는 봉우리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힘들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까 운산마을 갈림길이 있는 삼거리봉까지 오면서 고도를 다 높여놓은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 나뭇가지에 매달린 ‘국제신문’의 리본이 반갑다. 부산시의 유력 일간지 가운데 하나로 ‘근교 산’이란 취재팀을 운영하는데, 조금 덜 알려진 산들을 찾을 때 그들이 남긴 기록을 많이 참조하는 편이다.

▼ 이번에는 양지꽃이 눈에 띈다. 치자연(雉子筵)·위릉채(萎陵菜)·소시랑개비라고도 불리는 관화식물(觀花植物)로 어린순과 연한 잎을 삶아 나물로 먹거나 된장국을 끓여 먹으며, 혈증을 다스리는 탕약의 약재로도 쓰인다.

▼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기를 13분. 산길은 우릴 ‘말봉산’에다 올려놓는다. 물론 ‘삼거리봉’에서 막걸리를 마시고나서 부터이다. 말봉산은 독자적인 이름을 가질만한 외형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두루뭉술한 능선인데, 그 능선 상에서 살짝 솟아오른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나무들에 포위당해 조망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육산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 정상표지석도 눈에 띄지 않는다. 보성군에서 세워놓은 이정표(천봉산 2.2㎞/ 까치봉 3.0㎞)가 다인데, 이번에는 현위치 표시도 없다. 김문암씨의 ‘정상표지판’마저 없었더라면 십중팔구 정체불명의 산봉우리로 추락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508m로 잘못 표기해놓은 산의 높이는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그래선지 매달려있어야 할 표지판이 땅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 천봉산으로 향한다. 산악마라톤을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완만한 산길이 계속된다. 걷는 내내 산죽과 함께한다는 또 다른 특징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어떤 곳에서는 웃자란 산죽들에 둘러싸인 터널을 통과하기도 한다.

▼ 이번에는 또 다른 봄의 전령사인 ‘제비꽃’이 반긴다. 강남에 갔던 제비가 돌아올 때쯤 꽃이 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방에 따라서는 오랑캐꽃이나 반지꽃, 앉은뱅이꽃, 외나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랑캐꽃이란 이름은, 꽃을 뒤에서 보면 그 모양이 오랑캐의 투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 산자락은 온통 산죽으로 덮여있다. 그러고 보니 대원사가 위치한 마을의 이름이 ‘죽산리(竹山里)’였다. 오죽 산죽이 많았으면 그런 지명이 붙여졌을까. 그렇게 20분 남짓 걸었을까 대원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가 나온다.

▼ 이곳은 윤대장이 대원사로의 탈출이 가능하다던 지점이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이정표도 대원사의 글씨를 커다랗게 적어놓았다. 하지만 1㎞ 남짓만 더 걸으면 천봉산 정상인데 어느 누가 이곳에서 탈출할까 싶다.

▼ 천봉산에 가까워진 탓인지 산길이 조금 가팔라졌다. 그러나 산악마라톤을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경사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 그렇게 10분 정도를 걷자 윤대장이 진행방향표시지를 깔고 있는 게 보인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분명히 삼거리인데도 두 개나 되는 이정표는 각각 까치봉과 대원사만 가리키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천봉산 방향이 쏙 빠져버린 것이다.

▼ 윤대장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10m쯤 더 걸으니 제대로 된 이정표(천봉산 정상 0.3㎞, 봉갑사 4.3㎞/ 대원사 1.5㎞/ 말봉산 1.7㎞, 까치봉 4.9㎞)가 세워져 있다. 삼거리에 있어야 할 이정표를 엉뚱한 곳에다 세워놓은 것이다.

▼ 이정표는 천봉산의 정상 말고도 ‘봉갑사(鳳甲寺,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鳳岬寺)’라는 지명을 적고 있다.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창건했다는 이 절을 영광 불갑사, 영암 도갑사와 더불어 ‘호남삼갑(湖南三甲)’으로 꼽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어불성설. 무릇 '갑'이란 '으뜸'과 '최초'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 백제 최초의 사찰인 불갑사나 풍수리지리의 대가인 도선이 자신의 고향에다 지었다는 도갑사와 어찌 어깨를 견줄 수 있겠는가.

▼ 삼거리를 지나면 천봉산은 바로 코앞이다. 짧고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섰다가 약간 가팔라진 건너편 산비탈을 잠깐 치고 오르면 드디어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20분 만이다.

▼ 두세 평이나 됨직한 정상은 비좁은데도 텅 비어있다는 느낌이다. 가장 중요한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삼각점(복내 23)이나 이정표 갖고는 이곳이 정상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현지 주민들도 그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문덕초교 동문들이 이정표에다 정상표지판을 붙여놓았다. 참! 정상에서는 길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여러 갈래로 나뉘는 길을 찾아내기에는 이정표가 너무 부실했기 때문이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우선 동쪽부터 살펴보자. 전남지역 주민들의 젖줄인 주암호가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그 뒤는 조계산 도립공원의 아름다운 산세가 받쳐준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이번에는 존재산, 방장산, 계당산, 천운산 등을 품은 호남정맥이 구불구불 달려가는데, 그 너머로 첩첩이 쌓인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자세한 상황은 국제신문의 기사를 인용해본다. <정상에 서면 일망무제란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사방팔방 산의 물결이 펼쳐진다. 북으로 까치봉 말봉산 너머로 무등산과 그 우측으로 화순 모후산이, 동쪽 주암호 뒤로 조계산과 그 우측 뒤로 호남정맥의 종착지인 광양 백운산과 암봉인 금전산 그리고 소설 '태백산맥'의 중심무대인, 군부대철탑이 보이는 존제산이 확인된다.>

▼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아까 지나왔던 삼거리로 되돌아가 이번에는 대원사 방향으로 내려선다. 산죽군락지를 따라 나있는 이 코스는 가파르기 짝이 없다. 그 가파름이 얼마나 심했으면 밧줄까지 매어놓았을까 싶다.

▼ 그렇다고 가파른 내리막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잠깐이지만 완만한 구간이 나타나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오르막길을 만나기도 한다. 참! 내려오는 길에는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바위를 만나기도 했다.

▼ 하산을 시작한지 35분 만에 ‘천봉산 임도’에 내려섰다. 차량이라도 다니는지 반질반질하게 길이 나있는데, 이 길을 따라 대원사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더 걸린다니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겠다.

▼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50m쯤 더 걷자 산길은 또다시 능선으로 올라선다. ‘임도삼거리’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는 500m만 더 걸으면 대원사에 이르게 된다고 알려준다. 산행이 다 끝나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 솔향기 가득한 숲길을 잠시 걸으면 침목을 덧댄 급경사 내리막길이 나타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진행방향의 나뭇가지 사이로 대원사가 얼굴을 내민다.

▼ 산행 날머리는 대원사주차장(원점회귀)

그렇게 10분쯤 내려서면 작은 개울(이정표 : 천봉산 2.2㎞)이 나오고, 이어서 총총거리며 징검다리를 건너면 산행을 출발했던 대원사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은 3시간 10분이 걸렸다. 이는 순수하게 걸은 시간이며, 대원사와 티벳박물관을 둘러보는데 걸린 시간은 포함되지 않았다.

▼ 주차장 근처. 오색의 타르초(風幡)가 펄럭이는 하얀 건축물은 ‘수미광명탑(약사여래 삼존불을 모셨는지 약사여래법당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이다. 티벳박물관 개관을 축하하는 달라이 라마의 메시지와 티베트·네팔에서 보내온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탑 외부에는 네팔에서 제작한 마니보륜 108개를 매달았다. 불교 경전이 들어 있는 마니보륜을 돌리면서 탑을 한 바퀴 돌면 소망이 이뤄진다니 한번쯤 시도해 볼 일이다. 티베트 불교의 육자진언 '옴마니밧메훔'을 암송하면서 말이다. 부처의 자비가 온 세상에 퍼지기를 바라는 의미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참고로 ‘타초르’는 ‘룽다(風馬, 룽다란 긴 장대에 매단 한 폭의 기다란 깃발을 의미하니 긴 줄에 정사각형의 깃 폭을 줄줄이 이어달은 만국기 모양의 ’타초르‘와는 약간 다르다)’라고도 불리는 오색 깃발이다. 우주의 5원소(하늘, 땅, 불, 구름, 바다)를 상징하는 파랑·노랑·빨강·하양·초록 깃발에 불경 구절을 깨알같이 적어 끈으로 이었다. 부처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퍼지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아래 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다 썼다.

▼ 대원사의 명물로 자리 잡은 ‘티벳박물관’은 수미광명탑의 뒤에 있다. 현장스님(대원사 주지)이 인도 여행 중 티베트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만난 인연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티베트 불교문화는 인류가 이룩한 영적인 문명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런 티베트의 정신문화와 예술 세계를 소개하고 한국 불교와 교류를 촉진하고자 2001년 박물관을 열었다. 1천여 점의 전시물은 현장스님이 티베트와 몽골 등지를 순례하며 모았다고 한다.

▼ 소정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서자 ‘달라이라마’가 가장 먼저 반긴다. ‘티벳박물관’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풍경이라 하겠다. 티베트의 살아있는 성자이자 관세음보살의 현신이 곧 달라이라마이니 말이다.

▼ 이밖에도 티베트 불교회화인 탕카, 티베트 사람들의 생필품인 티포트, 석가모니 직계 후손인 석가족 장인이 만든 불상, 티베트 불교의 정수로 꼽히는 만다라 등 다양한 티베트의 문화들을 만나볼 수 있다.

▼ 박물관의 대미는 ‘저승체험장’의 몫이다.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또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망자의 시신을 독수리 먹이로 내주는 티베트 장례 문화를 담은 사진은 오싹하면서도 성찰할 기회를 준다.

▼ 대원사로 들어가는 입구. 구불구불 돌아가는 5.5km의 도로는 벚꽃이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꼽힌다는 그 길에 지금은 꽃비가 내린다. 서럽도록 하얀 꽃잎이 봄치고는 제법 센 바람결을 따라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장축의 버스를 운전하는 김부장님에게는 이 또한 달갑잖은 상황일 뿐이다. 2차선이라지만 가뜩이나 차선이 비좁은데다, 그마저도 시도 때도 없이 휘기 때문이다. 거기다 반대방향에서는 벚꽃놀이 나온 차량들이 끊이지 않으니 이 얼마나 조심스럽겠는가.

♧ 에필로그(epilogue), 지리·계룡·한라·모악산과 더불어 국내의 대표적 여산인 천봉산은 아도화상(阿度和尙)과 인연이 있는 산이라고 전해진다. 신라 미추왕 시절,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지금의 선산(경북)으로 들어와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면서 불법을 전파하는데, 어느 날 꿈에 봉황이 나타나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니 빨리 도망가라고 하더란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창밖에서 봉황이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봉황은 광주 무등산의 봉황대까지만 데려다주고 사라져버렸던 모양이다. 3개월 동안이나 봉황이 머문 곳을 찾아 호남의 산들을 누빈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다가 하늘의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인 봉소형국(鳳巢形局)을 찾아낸 다음 붙여놓은 이름이 천봉산(千鳳山)이라는 것이다. 그 산자락에다 대원사를 창건했음은 물론이다.

금당산(金堂山, 303.5m)

 

산행일 : ‘18. 2. 10()

소재지 : 광주시 서구 풍암동과 남구 송하동·주월동·진월동의 경계

산행코스 : 풍암저수지황새봉(186.4m)황새정삼흥정금당산옥녀봉(233m)원광대 한방병원(산행시간 : 1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온라인 산악회


특징 : 광주광역시 서구의 풍암지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금당산(金堂山)은 북쪽에 옥녀봉과 서쪽으로는 황새봉을 거느리고 있다. 무등산에서 분적산을 거쳐 북서쪽으로 내려선 분적지맥이 진월동을 지나면서 솟아오른 산으로 남구(진월동)와 서구(풍암동)의 경계를 이룬다. 도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래선지 산 전체를 아예 산상공원(山上公園)으로 가꾸어 놓았다. 산길은 넓고 또렷하며 길이 나뉘기라도 할라치면 빼놓지 않고 이정표를 세웠다. 거기다 조그만 공터라도 생길라치면 어김없이 운동기구나 벤치 등 시민들의 편의를 위한 시설들을 배치했다. 전망 좋은 곳에는 정자(亭子)까지 지어놓았음은 물론이다. 또한 주변의 아파트 단지를 따라 많은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어 작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코스를 즐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가족끼리 산책삼아 오르기에 딱 좋지 않나 싶다.

 

산행들머리는 풍암저수지(광주시 서구 풍암동)

호남고속도로 문흥 JC에서 2순환도로로 갈아타고 달라다가 풍암교(서구 풍암동)에서 빠져나와 우회전하여 회재로로 옮겨 타면 잠시 후 풍암저수지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관개용 저수지로 축조된 풍암저수지는 제방 길이 190m에 높이는 6.1m이다. 만수면적이 133,000m²에 이를 정도로 넓은데, 풍암택지개발 이후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예쁘장한 담장으로 단장된 산책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는 이곳이 빛고을 산들길임을 알리는 팻말 외에도 빛고을 산들길 안내도와 풍암동을 소개해놓은 안내판, 그리고 금당산 산책로 안내도등이 세워져 있다. 시간에 쫒기지만 않는다면 한번쯤 살펴보고 산행을 나설 일이다. 그중 금당산 산책로를 그려놓은 안내판은 꼭 살펴봐야 한다. 옥녀봉에서 하산지점인 원광대한방병원으로 내려가는 코스가 막혀있다는 것을 표기해놓았기 때문이다. 무작정 진행하다가 자칫 되돌아 나와야만 하는 불상사를 겪을 수도 있으니 유념하는 게 좋겠다.




빛고을 산들길 안내도도 한번쯤은 살펴보자. 광주광역시에서 심혈을 기울여 조성해놓은 둘레길이니 말이다. ‘빛고을 산들길은 광주시 북구 용산교에서 삼각산, 군왕봉, 동구 잣고개, 남구 분적산, 서구 금당산, 광산구 어등산, 백우산, 진곡, 비아를 거쳐 다시 용산교로 이어지는 81.5km에 이르는 둘레길이다. 참고로 '빛고을 산들길'이라는 이름에는 광주를 뜻하는 빛고을을 중심으로 산과 들이 연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는다는 의미의 산들, 산들바람을 가볍게 느끼면서 산들산들걷는다는 의미를 함께 포함하고 있단다.



몇 걸음 더 들어가니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산자락에다 만든 인공폭포를 기본으로 깔고, 그 옆에 놓인 데크계단 아래에는 먼지 털이용 에어 컴프레서(air compressor)’를 설치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앞에는 물웅덩이를 만들고 플라스틱 솔도 비치해 놓았다. 산행 중에 들러붙은 흙먼지는 물론이고, 신발까지 깨끗이 닦고 돌아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그동안 다녀본 수많은 산 중에서 가장 고객 위주로 시설을 꾸몄지 않나 싶다. 관할 행정관청이 서구청 관계자분들에게 글로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반대방향, 그러니까 풍암저수지 쪽에는 4각의 정자를 배치하고, 그 뒤에다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풍암저수지를 조망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올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웃자란 잡목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화의 아랫도리를 절반이나 잘라먹어버리기 때문이다.



인공폭포의 오른편, 데크로 만든 계단을 오르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깔끔하게 잘 만들어진 것이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하긴 주민들의 의견까지 수렴해가며 만든 시설이니 오죽하겠는가. 며칠 전, 산행준비를 하다가 이곳 금당산을 소개 해놓은 글을 발견했었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 발견한 글이었는데, 금당산 입구의 급경사 지역에 놓인 계단이 철과 플라스틱 소재로 되어있어 볼썽사납다고 했었다. 그런 계단이 이렇게 말끔하게 뒤바뀌어 있는 것이다.




제법 긴 데크계단을 오르자 풍암정(楓巖亭)이 나온다. 발아래에 펼쳐지는 풍암저수지에서 따온 이름이 아닐까 싶다. 하긴 풍암(楓巖)’이라는 지명이 본디 금당산의 가을단풍이 아름답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니 본래의 자기 이름을 되찾았다고 봐도 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특별히 염두에 두어야 할 정자는 아니다. ! 낯선 풍경이 있기는 하다. 건물의 외부에 걸려있는 게 보통인 현판(懸板)이 정자의 내부에 걸려있었다.



하지만 조망만은 빼어나다. 발아래에는 서구(광주광역시)에서 뽑은 팔경(八景)’ 삼경(三景)’이라는 풍암저수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수지 뒤에서는 월드컵 경기장이 나도 여기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예술작품이라고 해도 나무랄 이가 없을 정도로 예쁘게 지어진 건축물이다. 참고로 풍암저수지는 1956년 농업용으로 축조되었으나 풍암택지 개발로 내방객이 증가하자 1999년 국토공원화 시범 사업으로 전통 정자와 목교(木橋), 인공폭포, 음수대(飮水臺) 등을 설치하여 물과 전통이 어우러지는 광주의 상징적 쉼터로 개발된바 있다. 수생식물과 어류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주변 대부분이 오래된 송림(松林)이라서 물이 맑고 수심이 깊어 투영되는 둘레의 산들이 매우 선명하고 아름답다고 소문나있다.



다시 산행에 나선다.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는데 조그만 공터라도 생겼다 싶으면 어김없이 벤치 등의 편의시설 들을 들어앉혔다. 체육시설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산이 도심(都心)에 있다 보니 아예 공원으로 가꾸어 놓았나 보다.




조그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특이한 건 계단의 중간쯤에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두었다는 점이다. 의자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오르는 도중에 쉬어야 할 정도로 길지도 않는데 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8분쯤 되었을까 길가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코팅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종종 산행을 함께 하고 있는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걸어놓은 것으로 황새봉 186.4m)’이라고 적혀있다. 원래부터 이런 이름의 봉우리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가 새로 작명(作名)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저 전국의 산을 다 올라보겠다는 그의 집념이 놀라울 뿐이다. 아니 새로운 봉우리를 오를 때마다 이런 정상표시 코팅지를 매달아 놓는 그의 열정이 부럽다.



산길은 한없이 곱다. 보드라운 흙길은 폭신폭신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고, 경사도 완만해서 평지나 다름없다. 그보다 더 좋은 건 길의 폭이 넓다는 점이다. 집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기에 더없이 좋다.



한껏 여유를 부리면서 걷다보면 삼거리(이정표 : 황새정0.7Km/ 운리마을0.6Km/ 풍암호수0.7Km)’가 나온다. 오른편은 운리(雲裡)’ 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구름 속에 있는 것 같다는 마을이다. 이곳에도 역시 벤치 몇 개를 놓아두었다.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잠시 쉬어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8분쯤 지나자 오른편으로 조망이 트이는 암릉이 나타난다. 남서쪽 제2순환도로 송암 TG’ 너머로 화방산이 솟아있고, 그 아래에는 송원중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동남쪽 방향의 노대동 아파트 너머로 보이는 산들은 아마 분적산에서 송광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일 것이다.




어설프긴 하지만 이곳에서 처음으로 바윗길을 걷게 된다. 능선의 한 중앙을 따라 암릉이 깔려있지만 워낙 반반한데다 경사까지 완만하다보니 바윗길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무튼 얼마 전 대도심 내의 야산을 지질학습장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이란 연구논문이 발표된 적이 있었다. 금당산에 대한 지질조사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조선대(지구과학교육과) 안건상 교수의 논문이었는데, 그는 이곳 금당산을 학생들을 위한 지질학습장으로 개발할 것을 주장했었다. 논문에는 지형 요소로 빙하기에 형성된 U자형의 형태, 다양한 크기와 방향의 절리, 화산암 지대에서 단애와 너덜지대(애추) 등이 관찰되고, 여러 지역에서 토양이 형성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 걷고 있는 이런 암반(巖盤), 여느 다른 암반들과 하등에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데도 그런 특징들이 숨어 있었나 보다.



그렇게 3분쯤 오르자 반듯하게 잘 지어진 팔각정(八角亭)이 나타난다. ‘황새정이란다. 5년쯤 전인가 황새봉의 정자를 새로 지었다는 언론보도를 본 것 같은데, 이 정자를 두고 한 말이었던가 보다. 당시 기사에서는 2012년의 태풍 볼라벤때 정자가 쓰려졌다고 했다. 1년이 채 안되어 복구가 완료되었다기에 과연 광역자치단체답다고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그나저나 119산악구급함까지 갖춘 이곳에서 산길은 두 갈래(이정표 : 삼흥정0.6Km/ 신암정0.3Km/ 풍암호수1.4Km)로 나뉜다. 그런데 이정표에 표기되어 있는 두 행선지가 모두 정자이다. 삼거리인 이곳도 역시 황새정’, 오늘 길에는 풍암정도 만났었다. 아무래도 금당산에는 꽤나 많은 정자들을 지어놓았나 보다.



황새정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화방산을 중심에 둔 남서쪽 방향의 조망(眺望)이 터지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화방산과 송암톨게이트가 보이는가 하면 가야할 능선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곳이다. 이어서 가파르게 아래로 떨어졌다 싶으면 산길을 다시 오르막으로 변한다. 아까와는 다르게 제법 가파른 오르내림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까 말이다.



조금이라도 가파른 곳에는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계산의 생김새도 각양각색이다. 데크계단이 보인가 싶더니, 이번에는 침목계단이 나타난다. 통나무로 만든 계단 두 가지로 나뉜다. 옆으로 뉘였는가 하면 어떤 곳에는 짧게 잘라 세워놓았다. 또 다른 곳, 특히 바윗길에는 발 디딤판 모양의 계단을 철제로 만들었다.




황새정에서 10분쯤 더 걸으면 바윗길이 나타난다. 비록 바닥에 깔려있긴 하지만 온전한 바윗길로 분류할 수도 있겠다. 그래선지 길가 양 옆에다 밧줄난간까지 둘러놓았다. 이 부근은 조망(眺望)이 좋은 편이다. 바윗길인데다 길가에 늘어선 소나무들도 심심찮게 시야를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송암공업단지와 화방산 등 아까 보았던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다만 아까보다 그 넓이가 늘어나있다. 그만큼 고도(高度)를 높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게 5분쯤 더 걷자 송하동 갈림길이 나온다. 이정표(정상0.4Km/ 송하동0.7Km/ 풍암호수1.8Km)와 국가지점표지판 외에도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이어서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타난다. 멋들어진 소나무들이 빼곡한 예쁜 길이다. 그리고 푹 꺼진 안부에서 삼흥정이란 정자를 낀 널찍한 쉼터를 만난다. 여러 종류의 체육시설까지 갖추었으니 다목적 쉼터라고 하는 게 옳겠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중흥동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뉜다. 왼쪽방향이다.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것도 꽤나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거기다 제법 길기까지 하다. 하지만 계단을 잘 만들어놓았으니 속도만 조금 떨어뜨린다면 별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13분쯤 진행하면 일부러 쌓아올린 것 같이 생긴 헬기장에 올라선다. 10평 남짓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졌는데 이정표(옥녀봉1.2Km, 태현사 0.7Km/ 옥천사0.7Km, 분적산 정상 5.2Km/ 풍암호수2.2Km)빛고을 산들길 안내도외에도 우리나라가 월드컵 4의 기적을 이룩한 게 금당산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적은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남자들이 실력을 겨루는 양기(陽氣)가 강한 월드컵 경기장을 음기(陰氣)의 기운이 강한 금당산의 옥녀봉 근처에다 지음으로써 음양의 조화로 4강 진출이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헬기장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오른편으로는 진월지구의 아파트들이 숲을 이룬다. 그 뒤에 보이는 산은 아마 제석산일 것이다.



왼편의 조망도 괜찮다. 풍암지구 아파트 숲의 오른편으로 보이는 예쁘장한 건물은 월드컵 축구경기장이다. 2002년에 열렸던 ·일 월드컵축구대회때 건설했는데, 연면적 71630에 지상 5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용인원은 4245명이며, 2137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시설을 갖추고 있다. 월드컵대회 이후 다목적 종합경기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를 변경하여 2004400m 8레인의 육상트랙이 완공되었다. 미디어센터, 선수대기실, 통신 및 의료시설과 탁구장·태권도장·유도장·볼링장·배드민턴장·헬스클럽·공연장·유스호스텔 등 각종 부대시설도 갖추고 있단다. 저 경기장에서는 스페인-슬로베니아(62), 중국-코스타리카(64)의 조별 리그전이 열렸고, 한국-스페인(622)8강전이 열렸었다. 당시 거스 히딩크감독이 이끄는 한국팀은 세계적인 강호 스페인을 누르고 월드컵 4강에 올랐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거스 히딩크 스타디움(Guus Hiddink Stadium)'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현재는 광주FC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상표지석이 있는 암봉으로 향한다. 짧게 아래로 내려서니 체육시설이 있는 곳에서 막걸리와 음료수를 팔고 있다. 하지만 이용하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긴 영하의 추위 속에서 시원한 것을 찾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잠시 후 정상의 바로 아래에서 삼거리를 만났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왼편은 옥녀봉으로 가는 길이다. 금당산 정상을 둘러보고 난 뒤에는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금당산 정상에 올라선다. 정상은 두 개의 단()으로 나누어진 암봉(岩峰)이다. 그래선지 정상표지석도 두 개나 된다. 가장 높은 곳에 세워놓은 오래 묵어 보이는 것 말고도, 아랫단에다 커다란 정상석 하나를 더 세운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1시간이 걸렸다. 참고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금당산신사(金堂山神祠)가 현 남쪽 10리에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금당산쇠 금()’집 당()’ 자를 쓰는데 이는 본래 불교에서 나온 말로 부처님을 모시는 건물인 사찰의 전각을 말한다. 금색 옷을 입고계신 분이 주석하고 있는 건물을 금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로보아 빛고을 광주가 아미타부처님이 상주하고 계시는 극락정토이고, 서구의 진산인 금당산이 부처님 집, 즉 금당(金堂)이 된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정상에서의 조망도 빼어난 편이다. 오른쪽으로는 진월지구과 노대지구의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 뒤에는 제석산은 물론이고, 분적산에서 송광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나타난다. 그러나 짙게 낀 연무(煙霧)로 인해 거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져 있다.



국기게양대 뒤쪽에 정자가 보이기에 따라가 보니 무인산불감시탑으로 보이는 철제 구조물 옆에 금당정(金塘亭)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정자의 이름 중 자가 집 당()’이 아니라 둑 당()’ 자로 되어있는 게 아닌가. 그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아무튼 이 정자는 광주시가지 너머로 무등산이 조망된다는 곳이다. 하지만 연무로 인해 호남의 명산이라는 무등산은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아까 얘기했던 삼거리로 되돌아가 이번에는 왼편 길로 향한다. 물론 옥녀봉 방향이다. 하산을 시작하자마자 만나는 가파르면서도 긴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태현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다. 거리표시가 되어있지 않은 이정표(옥녀봉/ 태현사/ 헬기장) 외에도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참고로 금당산은 옥녀봉과 함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서 여성을 지칭하며, 음기(陰氣)가 드세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음기를 누르기 위해 지은 절이 옥천사(玉泉寺)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잠시 반반해지는가 싶던 산길이 다시 오르막으로 변한다. 그리고 방금 올랐었던 금당산이 어렴풋이 조망되는 무명봉에 올라선다. 이어서 소나무가 울창한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서면 이번에는 좌우로 길이 나뉘는 십자안부에 이른다. 이곳도 역시 이정표(옥녀봉/ 풍암지구/ 광주선명학교/ 헬기장)외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안부를 지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것도 긴 오르막길이다. 이어서 팔각의 정자가 지어져 있는 열 평쯤 됨직한 공터에 올라선다. 누군가 일부러 쌓아올린 것 같이 봉긋하게 솟아오른 형상이다. 그래선지 옥녀봉대(玉女峰臺)‘라는 이름표까지 붙여 놓았다. 금당산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15분이 걸렸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체육시설이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주월동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다. 그런데 이정표(헬기장/ 주월동 현대APT, 원광대학 한방병원)에 옥녀봉 방향이 텅 비어있다. 가지 말라는 모양이다. 아무튼 옥녀봉을 둘러본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직진해서 원광대 한방병원으로 내려가는 ‘500m’짜리 코스가 있긴 하지만 현재는 폐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 멋진 전망대(展望臺)까지 만날 수 있는 코스이지만 사유지(私有地)라는 이름으로 지난 20169월부터 폐쇄되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길을 막아버린 주인만 탓할 일은 아닐 것 같다. 지주(地主)의 허락도 없이 쉼터와 계단, 전망대 등을 무단으로 설치해놓은 지방자치단체의 잘못이 더욱 커 보이기 때문이다. 공익(公益)을 위한답시고 사익(私益)을 해치는 행위는 개발독제시대(開發獨裁時代)에나 가능했던 일이 아니겠는가.



삼거리를 지났다 싶으면 저만큼에 밋밋한 모양의 옥녀봉(玉女峰 233m) 정상이 나타난다. 이처럼 여성의 둔부같이 완만한 모양의 산이라고 해서 옥녀봉이란 이름이 붙었단다. 그나저나 대여섯 평쯤 되어 보이는 공터는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나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 다는 얘기이다. 가끔 보이는 산꾼들의 정상표지판도 보이지 않는다. 주변의 나무들 때문에 조망 또한 시원치가 않다.



조금 전에 거론했던 삼거리로 되돌아와 하산을 시작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기다 그 가파름이 심하다 싶은 곳에는 어김없이 밧줄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그저 쉬엄쉬엄 내려오기만 하면 된다.



산행날머리는 원광대 한방병원 앞(남구 주월동 543-8)

그렇게 10분 조금 넘게 내려서면 금당중학교 갈림길‘(원광대 한방병원/ 금당중학교/ 옥녀봉0.5Km)이 나오고, 이어서 갑자기 반반해진 오솔길을 따라 조금 더 진행하면 원광대 한방병원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1시간40분이 걸렸다. 주어진 시간 안에 식당까지 들르려고 서두르다보니 오늘 산행은 중간에 쉬지를 않았다. 오롯이 걷는 데만 소요된 시간인 것이다.


어등산(魚登山, 293m)

 

산행일 : ‘18. 2. 10()

소재지 : 광주시 광산구 박호동과 등임동, 장수동, 산정동, 운수동, 서봉동 일원

산행코스 : 승산저수지활공장황새봉등용정석봉(338m)어등산장수제장수교차로(산행시간 : 2시간)

 

함께한 사람들 : 온라인 산악회


특징 : 높이가 338m에 불과한 나지막한 육산(肉山)이지만 광산구(광주광역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송정(松汀)’의 진산(鎭山)이다. 하지만 주봉인 석봉 인근에서는 왜소하나마 암릉도 만날 수 있다. 흙산임에도 불구하고 조망까지 좋은 이유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산은 한말(韓末) 때 의병(義兵)과 왜병(倭兵)이 자주 싸웠던 전쟁터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래선지 산은 잘 가꾸어져 있다. 숫제 산상공원(山上公園)으로 꾸며 놓았다. 널찍하게 길을 내놓은 것은 물론이고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갈림길마다 이정표를 세워놓았음은 물론이다. 거기다 주요 포인트마다 안내판을 세워 처음 찾는 이들에게 어등산이 품은 사연들을 전해주고 있다. 편안한 산행에다 역사적 사실까지 배울 수 있으니 가족동반 산행지로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겠다.

 

산행들머리는 송산공원 주차장(광주시 광산구 송산동)

무안-광주고속도로 운수 IC에서 내려와 오른편 동곡로를 잠깐 따르다가 선운지하차도에서 지하도로 들어가지 말고 우회전하여 어등대로를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송산공원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에는 '황룡강누리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송산유원지에서 출발해 용진교와 임곡마을을 거쳐 다시 송산유원지로 되돌아오는 코스인데, 30Km의 거리를 바람길선비 마실길그리고 마을안길3개 코스로 나누어놓았다. 이 길을 걷다보면 입석마을의 입석과 용진 마애여래좌상, 월봉서원, 윤상원 생가, 양씨 삼강문, 황룡강 산막습지 등의 명소를 만날 수 있단다.



오늘 산행은 아래의 지도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광주여대로 내려가려 했던 원래의 하산코스가 볼 것도 별로 없으면서 지루하기만 하다는 평이 있어, 장수제로 변경을 했기 때문이다. 이 코스도 역시 볼거리는 일절 없다. 대신 거리가 짧다는 장점이 있으니, 우리 같이 산을 하나 더 타려는 사람들에게는 유익하게 활용될 수도 있겠다.



주차장 뒤편에 송산공원이라고 적힌 커다란 조형물이 보인다. 지도에는 송산유원지라고 나와 있는데 이곳에서는 공원으로 부르는 모양이다. 강둑으로 올라가 보니 강 건너편에 작은 놀잇배들이 매어져 있는 게 전형적인 유원지(遊園地)의 풍경이다. 그래 송산공원은 황룡강(黃龍江) 한가운데에 떠있는 섬에 조성되어 있다고 했다. 면적이 39,277인 섬 전체가 공원이라는 것이다. 12천여 평에 이르는 잔디광장과 그 광장을 둘러싼 산책로, 그리고 우거진 나무숲 아래에는 캠프장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특히 청등보 바로 아래의 강 한가운데에 만들어진 2개의 물놀이장은 수십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수영을 해도 넉넉할 정도란다.




주차장에서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면 어등산의 들머리가 나온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길이 워낙 또렷해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자마자 안내판 하나가 나타난다. ’어등산광산팔경의 하나임을 들면서 그 아래에다 어등산에 대한 설명을 적어 놓았다. 호남 의병활동의 본거지였으며, 어등산 주변 마을과 사찰들 또한 의병들의 주요 활동무대였으며 은신처였다고 한다. 때로는 부식을 조달받는 공급처이기도 했고, 아군들끼리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였다. 일제가 호남 의병을 말살하기 위해 폭도라는 누명을 씌우며 토벌할 때 이 지역에 감옥소를 지어 의병들을 가두고 고통을 주기도 했단다.



몇 걸음 더 들어가면 대여섯 평쯤 되는 공터에 여러 개의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다. 그중 하나는 어등산과 황룡강에 얽힌 전설이다. 황룡강은 옛날부터 용()이 많이 살던 강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박산마을의 박판관이 황룡강가 연못에서 기르던 잉어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어등산의 유래 전설이나 박산마을 앞 황룡강 깊은 소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용기재(龍起峙) 전설 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송산유원지의 청등보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과 황룡면 황룡리의 용소에서 큰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단다.



다른 하나는 어등산 종합 안내도이다. 어등산의 서남쪽 부분의 지도를 그린 다음, 송산유원지에서 석봉에 이르는 주능선과 운수동 소재 보문고에서 주능선으로 연결되는 코스를 구름길용오름길‘, ’의병길‘, ’노을길4개 구간으로 나누어놓았다. 지도의 왼편에는 어등산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을 너절하게 적어 넣었다. 그나저나 성의가 부족한 안내판이 아닐까 싶다. ’종합안내도란 타이틀을 걸어놓고도 등산로는 기껏 절반도 못 미치게 안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내판의 상단에 누리길이라는 로고(logo)가 붙어있는 걸로 보아 광산구청에서 세운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등산 전체가 오롯이 자기 관내일 텐데도 일부분만 안내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나머지 하나는 빛고을 산들길을 안내하고 있다. 광주광역시의 외곽을 한 바퀴 도는 총 연장 81.5Km의 거리를 6개 구간으로 나누고, 산들길이 지나가지는 않지만, 이곳 어등산처럼 둘러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은 부노선(20.2Km)’이라는 이름으로 산들길에 포함시켰다.



공터를 지나자마자 산길은 가팔라진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통나무계단이나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경우에는 밧줄까지 매어놓았다.




산행을 시작하고 10분 남짓이 지나면 능선에 올라선다.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산길이 이어진다. 경사 또한 완만하기 짝이 없다. 산이 나지막하다보니 서둘러 고도(高度)를 높여야 할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5분쯤 걷자 활공장이 나타난다. 이륙장의 규모가 협소할 뿐만 아니라 바람의 방향이나 속도를 체크할 수 있는 풍향시설도 보이지 않는다. 활공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조망만은 끝내준다. 발아래에 있는 송산유원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수억 년의 세월과 함께 흘러온 황룡강(黃龍江)은 상류의 모래와 흙을 한줌씩 날라다 쌓고 또 쌓아 제법 너른 섬을 만들어 놓았다. 그동안 원시적으로 남아있던 이 섬은 주변에 마을이 들어서고, 이 마을이 도시로 성장하면서 이젠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수려하면서도 아름다운 휴식처로 변해 시민들의 품에 안긴 것이다. 유원지 주변은 황룡강이 만들어 놓은 너른 평야지대이다. 그 뒤로는 광산구는 물론이고 장성과 함평 땅에 위치한 수많은 산들이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다.




활공장 옆에 이정표(석봉 2.0Km/ 송산유원지 0.9Km)와 함께 황새봉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아무래도 이곳 활공장이 황새봉(151m) 정상이었나 보다. 아무튼 황새봉은 '한새봉' 또는 '병정봉'이라고도 부른다. '한새'는 큰 새라는 뜻으로 황새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란히 있는 두 개의 봉우리 모습이 마치 황새의 날개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참고로 황새봉은 어등산에서 석양의 붉은 노을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장소라고 한다. ‘광산팔경의 하나인 어등낙조(魚登落照)’가 바로 이곳을 지칭하는 것이란다.



산행을 이어간다. 데크계단을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는 길에 만나게 되는 봉우리는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킨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걸으라는 배려까지 해주는 착한 산길이라 하겠다.




잠시 후 산길은 조릿대 숲으로 파고든다. 키가 작다는 조릿대의 특징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이 어른의 키를 훌쩍 넘겨버릴 정도로 웃자란 조릿대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이런 조릿대 숲은 산행을 하는 동안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어등산의 특징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조릿대는 산죽, 갓대, 산대, 신우대 등으로도 불리는 작은 대나무로 죽세공, 관상, 식용, 약용 등 다양하게 이용된다.



조릿대 숲이 끝나는 지점에는 이정표(석봉 2.2Km/ 송산유원지 1.0Km)와 함께 시판(詩板)’을 세워놓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던 송천 양응정(15191581)이 지었다는 화전놀이(煮花)’라는 시()이다. 어등산 아래 박산마을에서 살았던 그는 어등산을 비롯해 자연을 노래한 시를 많이 남겼다고 한다.



잠시 후 가파른 계단길이 나타난다. 침목으로 만들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그 위에는 또 다른 나무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이 또한 짧은 길이는 아니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계단 위에도 이정표(석봉 1.9Km/ 송산유원지 1.7Km)를 세워 놓았다. 아까 산행을 시작하면서 얘기했던 어등산 등산로4구간인 노을길에 대한 안내판도 보인다. 황새봉에서 송산유원지까지의 1Km구간을 지도에 표시한 다음, 그 왼편에는 광산팔경의 하나라는 황새봉의 어등낙조(魚登落照)’를 나타내는 듯한 글귀를 적어 두었다. ‘날개를 접고 쉬는 황새처럼 저물녘 황새봉에 앉아 황룡강의 노을을 보면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네. 땀 흘려 오르내린 어등산 산책길이 우리네 인생길과 어찌 다르리오. 고요히 나를 돌아보며 명상에 잠기네.’



계단을 올라서고 난 뒤에는 길은 또 다시 순해진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지만 평지나 거의 다름없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길이 널따란데다 갈림길이라도 나올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두었다. 거기다 등산로가 아닌 곳에는 등산로 아님표시를 하면서 아예 길을 막아버렸다.



석봉을 1.2Km쯤 남겨놓은 지점에 이르니 국가지점번호판과 함께 오토바이의 통행을 금한다는 경고판을 세워놓았다. 하도 길이 곱다보니 간혹 오토바이를 몰고 오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럴 경우 등산객의 신체에 위해를 가할 수도 있으니 통행을 막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아까부터 개체수를 늘려가던 소나무가 언제부턴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이 곱다. 갑자기 심신(心身)이 맑아져온다. 솔향과 함께 스며드는 피톤치드(phytoncide)의 효능 덕분일 것이다. 피톤치드의 효능 중에는 몸으로 스며드는 각종 병균에 대한 살균기능 외에도 피로회복 기능까지 함유하고 있다니 말이다. 그런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바로 소나무가 아니겠는가.



작은 오르내림을 몇 번 더하면 마당바위 갈림길이 나온다. 이정표(석봉0.8Km/ 마당바위0.8Km/ 송산유원지2.1Km)와 국가지점표시판 외에도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잠시 후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난다. 이번에는 의병전적지 갈림길‘(이정표 : 석봉0.6Km/ 의병전적지0.2Km/ 송산유원지2.3Km)이다.



또 다시 이어지는 작은 오르내림, 약간 가파른 곳에서는 통나무계단이 놓여있다. 그 옆에는 보통의 경사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반반이다. 고지식하게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계단보다 편한 옆길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얘기이다. 아니 계단의 옆으로 난 길에 발자국이 더 많다.




계단을 오르면 팔각의 정자가 길손을 맞는다. '등룡정(登龍亭)'이란다. 이곳에도 역시 이정표(석봉0.3Km/ 보문고2.6Km/ 송산유원지2.6Km)와 함께 등용정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등용정(登龍亭)은 용이 되어 올라간다는 뜻으로 용에 대한 전설이 많은 어등산을 상징하는 정자이다. 잉어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박산마을의 전설 외에도 지금은 골프장으로 변해 버린 용담골에도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용담(龍潭)의 전설이 있단다. ! 정자 앞에 우체통 두어 개가 설치되어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느림보의 미학을 거론할 때 등장하는 우체통일지도 모르겠다. 황새봉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45분이 걸렸다.




석봉으로 향한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면 헬기장이 나타난다. 산불이나 환자가 발생했을 때 이용하는 비상착륙장인 모양이다.



헬기장을 내려섰다싶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석봉이 나타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이 조금 더 지난 시점이다. 그런데 정상의 바로 아래에서 광주여대로 가는 길(이정표 : 광주여대 4.7Km/ 등용정 0.3Km)이 나뉜다. 석봉 정상을 둘러본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이곳 석봉에서 등용정을 거쳐 황새봉에 이르는 1.9Km의 구간은 의병의 길이다. 한말(韓末) 김태원 의병장이 이 능선에서 쌍안경으로 일본군경의 동태를 살피며 작전을 지휘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한두 평도 채 되지 않는 비좁은 정상은 커다란 바위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은 그 바위의 위에 걸터앉아 있다. ! 정상에 대한 특징을 놓칠 뻔 했다. 어등산이 전형적인 육산(肉山)임에도 불구하고 이곳 석봉만은 골산(骨山)의 느낌을 강하게 준다는 점이다. 능선을 따라 바위지대가 길게 펼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바위가 험상궂지도 않고 바닥에 낮게 깔려있어서 위험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 암릉이다. 아무튼 이런 특징 때문에 석봉(石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 않나 싶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난 편이다. 안내판의 멘트(announcement)처럼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황룡강과 광활하게 펼쳐진 광산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오른편 산자락에 들어앉은 '어등산 C.C'는 필드 위를 오가는 골퍼(golfer)들의 움직임이 보일 정도로 가깝게 다가온다. 골프장의 뒤 연무(煙霧)로 인해 희미하게 나타나고 있는 곳은 광산구의 시가지일 것이다.



석봉(石峰, 338m)에 대한 안내판은 정상으로 오르기 전에 만나게 되는 이정표의 옆에다 세워 놓았다. 산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주위에 큰 산이 없기 때문에 장성과 나주, 함평, 광주를 조망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라는 안내와 함께, ()의 물줄기를 연상시키는 석봉은 옛날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빼어난 봉우리였다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또한 한말에는 김태원 의병장이 쌍안경으로 일본군경의 동태를 살피며 작전을 지휘했던 곳이기도 하단다.



하산을 시작한다. 아까 올라왔던 방향으로 10m쯤 되돌아나간 후, 삼거리에서 이정표(광주여대 4.7Km/ 등용정 0.3Km)가 가리키고 있는 광주여대 방향으로 진행해도 되고, 정상에서 바윗길을 타고 왼편으로 내려가도 된다. 다만 2~3분쯤 걷다가 능선을 벗어나 오른편 바위지대로 내려서야한다는 점만 주의하면 된다. 실수로 능선을 탄 사람이라면 잠시 후 무덤이 나타날 테니 이때라도 발길을 돌리면 된다.



울퉁불퉁한 암반지대를 얼마간 지나자 울창한 조릿대 숲이 나타난다. 숲을 통과하자마자 조그만 공터에 세워진 이정표(산정약수터 삼거리 2.5Km/ 석봉 0.4Km, 송산유원지 3.6Km)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이정표 외에도 어등산 안내판과 벤치를 만들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잉어가 하늘로 올라간 산이라는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적어 놓았다. 옛날 어등산 서쪽 박산마을에 박중윤이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는 황룡강변에 양공정이란 정자를 짓고 큰 잉어 한 마리를 길렀단다. 어느 날 박중윤이 정자에서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자신이 기르는 잉어가 나타나 자기가 용이 되어 승천할 때가 되었는데도 연못이 좁아 승천하기 어려우니 양공정을 헐어 연못을 넓혀 달라는 부탁을 하더란다. 이에 박중윤이 양공정을 헐고 연못을 넓혔음은 물론이다. 며칠 후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면서 잉어가 자취를 감추었기에, 후세 사람들이 박산마을 뒷산을 잉어가 하늘로 올라간 산이라 하여 '어등산(魚登山)'이라 했다는 것이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완만한 오르막 계단길이 나타나는가 하면, 길가에 만들어 놓은 벤치 쉼터는 느림보의 미학도 괜찮을 거라며 갈 길 바쁜 나그네들의 발길을 자꾸만 붙잡는다.



그렇게 15분쯤 걸었을까 벤치 두 개가 놓여있는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벤치 뒤에 있는 나무에 마호봉(311.7m)’이라고 적힌 코팅지가 매달려 있다. 종종 산행을 같이 해오고 있는 서래야 박건석선생의 작품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산들을 모두 올라보고 싶다는 그가 새로운 산 하나를 또 만들어냈나 보다.



산길은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거의 경사가 없는 반반한 길이 계속된다.



하산을 시작한지 24분 만에 어등산 정상에 올라선다. 하지만 이곳이 정상이라는 표식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서너 평쯤 되는 공터에 놓아둔 벤치 두 개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는 석봉을 어등산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옳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하긴 산의 주봉(主峰)을 어엿이 놓아두고 다른 봉우리, 그것도 높이가 한참이나 더 낮은 봉우리를 정상이라고 우기는 일을 그다지 흔하다고는 볼 수 없다. 참고로 어등산이란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이름의 생성(生成)을 조선조 초기로 보는 이유이다. 하지만 건너편 복룡산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어등산의 명칭도 백제시대까지 소급하여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산길은 어등산에서 왼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거의 직각에 가깝기 때문에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외길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풍락정(風樂亭)이라는 사각의 정자(亭子)를 만난다. 장수제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절골삼거리’(이정표 : 산정약수터삼거리1.4Km/ 장수제1.3Km/ 석봉1.5Km)이다.



절골삼거리에서 장수제 방향으로 직진한다. 하지만 주 등산로는 오른편 산정약수터 방향임을 참조한다. 아무튼 우린 광주광역시(서구)에 소재하고 있는 금당산이라는 산을 하나 더 타야했기에 조금 더 짧은 하산코스를 이용했다. 원래의 하산지점인 광주여대까지의 코스가 지루하기만 할뿐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장수제 코스도 역시 볼거리는 일절 없다. 하지만 길은 고운편이다. 계단을 새로 놓는 등 정비도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다만 최근에 정비를 한 듯, 여간 질퍽거리는 게 아니다. 그렇게 산길은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 간다.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삼거리(이정표 : 등산로 없음/ 어등산 1.0Km)가 나온다. 방향표시가 없는 오른편으로 내려서면 또 다른 삼거리, 이정표는 보이지 않지만 이곳 역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눈앞에 하산지점으로 삼았던 장수제가 나타난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자그마한 저수지에 불과하다.




날머리는 하남진곡산단로의 장수교차로(광산구 장수동 664-4)

장수제에 이르렀다고 해서 산행이 끝난 것은 아니다. 길은 비록 널따랗지만 그저 ‘SUV’ 차량이나 다닐 정도지 대형버스의 진입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느긋이 10분 정도를 더 걸었을까 하남진곡산단로 상에 있는 장수교차로가 나오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2시간이 걸렸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으니 오롯이 걷은 데만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장수교차로는 하남진곡산단로(광주광역시 광산구 동곡로 875 광주광역시 북구 삼소로 1)’고봉로(흑석동 118-11, 흑석사거리 광산동 175-16, 오룡교 인근)’가 만나는 교차점(交叉點)이다. 그런데 이 고봉로가 보여주는 풍모(風貌)가 장난이 아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꼿꼿이 솟아오른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를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것이다. 인근에 있는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숲길만큼은 아니어도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멋진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가야산(伽倻山, 497.3m) 시루봉(400m)

 

산행일 : ‘17. 7. 30()

소재지 : 전남 광양시 옥곡면과 중군동성황동마동광영동 일원

산행코스 : 장동2구 회관불광사군장이재시루봉가야산입마춤 바위적벽중마동 중복도로 육교주차장(산행시간 : 2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온라인산악회


특징 : 광양시청 뒤에 위치한 높이 497m의 나지막한 산으로 시내 어디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광양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이유이다. 조망 또한 뛰어난 편이다. 전체적으로 불 때에는 육산(肉山)이 분명한데도 꽤 여러 곳에 커다란 암릉들이 자리하고 있는 덕분이다. 북쪽의 백운산(白雲山)과 그 위 지리산(地異山)이 보이는가 하면 올망졸망한 섬들을 새끼처럼 품고 있는 남해바다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러나 그 정도를 갖고 천리 길을 멀다않고 찾아오는 이유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전국의 수많은 등산마니아들이 끊임없이 찾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 산이 ’200대 명산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명산의 반열에 오른 산을 빼먹고 지나갈 수야 없지 않겠는가.


 

산행들머리는 장동2구 마을회관(광양시 옥곡면 장동리)

남해고속도로(순천-부산) 옥곡 IC에서 내려와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우회전하여 861번 지방도를 타면 눈 깜박할 사이에 옥곡천이 나온다. 이 옥곡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장동교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 좌회전하면 만나게 되는 마을이 바로 장동2이다. 이 마을의 회관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가 된다. 불광사까지 도로가 나있긴 하지만 길이 좁아서 대형차량은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산행을 나서기 전에 이 마을이 자랑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먼저 둘러보기로 한다. 광양시에 소재하고 있는 9개의 정려(旌閭) 중 하나인 쌍효려비(雙孝閭碑)‘가 마을회관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려란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을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세운 정문(旌門)을 이르던 말이니 참조한다. 대여섯 걸음쯤 옮겼을까 쌍효문(雙孝門)‘이란 대문이 나타난다. 효자가 두 명이나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게 옳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서너 걸음만 더 옆으로 옮기면 그런 궁금증을 해소시켜줄 정려(旌閭)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려의 뒤에는 빗돌(碑石)이 세워져 있다. 효자(孝子)효부(孝婦)의 효행을 함께 기리는 쌍효려비(雙孝閭碑)‘이다. 즉 고종 29(1892) 조정에서 정려를 내릴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의 증직을 함께 받은 전주 유씨유계양(柳季養)과 숙부인(淑夫人)의 증직을 받은 해주 오씨(海州 吳氏)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이다. 1929년 손자 오위장(五衛將) 유채규(柳采圭)가 정려를 건립하였으며 그 이후 정각 및 주변을 보수정비하였다.



아쉽게도 비문(碑文)을 직접 읽어볼 기회는 없었다. 문이 굳게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정려의 뒤편에 지어진 정자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려의 전경(全景)이 환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첫 번째 갈림길을 만나면 불광사에서 내건 표지판을 따른다. 잠시 후 진행방향 저만큼에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싶으면 길을 제대로 들어선 셈이 된다. 400년도 더 묵었다고 해서 보호수로까지 지정(15-5-4-8)되어 있는 나무인데 느티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은 푸조나무(Mukutree)라고 한다. 푸조나무는 느릅나무과의 나무로 남해안 어디에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는데 그 모양새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참고로 전남 강진(35)과 장흥(268), 부산 수영공원(311) 등 세 곳에서 있는 나무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광양시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마을은 시골냄새를 물씬 풍긴다. 집집마다 너른 텃밭을 갖고 있는가 하면 뜨락마다 감나무와 배, 사과나무 등의 과일나무들을 정원수(庭園樹) 삼아 빼곡히 심어놓았다. 담벼락을 넘어온 꽃사과와 석류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는 게 보인다.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무더운 삼복(三伏) 더위인데도 계절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있나보다. 하긴 가을의 들머리인 입추(立秋)10일도 채 남지 않았다.




마을 안길을 빠져나가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오늘 걷게 될 능선이 나타난다. 야트막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를 가운데에 두고 움푹하게 파여진 오른편 안부가 군장이재(군장치)‘이다. 왼편의 높게 보이는 봉우리가 시루봉임은 물론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8분쯤 지나면 백련사라는 절이 나타난다. ’한국불교 미타종이라는 종파 소속의 자그만 사찰인데, 누가 언제 어떤 사연을 갖고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건물 또한 우리가 늘 보아오던 그런 절집이 아니라 일반의 여염집에 더 가깝다. 특별히 눈에 담을 만한 것이 없으니 일부러 들어가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미타종(彌陀宗)은 대한불교종단총연합회에 소속된 종단 중의 하나로 관무량수경무량수경‘ ’아미타경‘ ’열반경‘ ’화엄경등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다. 함허 득통(涵虛得通)을 종조로 삼으며 총본산은 충북 단양의 봉암사에 두고 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사찰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난다. 절간이 참 많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다 문득 가야산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만다. 가야(伽倻)라는 지명의 근원은 인도의 부다가야(Buddha Gaya)‘에서 찾는 게 옳을 것이다. '부처의 화원(花園)'이라는 의미인데, 부처님의 4대 성지탄생지인 룸비니(Lumbini)‘와 최초의 설법지인 녹야원(사라나트, Sarnath)‘, 열반지인 구시나가라(Kuśinagara)‘중 하나로 기원전 5세기에 석가모니가 이곳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부처는 열반하기 전 제자 아난다에게 사람들이 참배할 곳으로 위의 네 곳을 일러준다. 그렇게 귀한 이름을 갖고 있는 산이니 어찌 많은 절간을 품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잠시 후 오른편에 가야산 불광사(伽耶山 佛光寺)‘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전각(殿閣)이 나타난다. 양 옆에 금강역사의 그림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금강문(金剛門)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금강문은 보통 앞면 3, 옆면 1칸의 직4각형 평면을 이룬 단층집으로 건축된다. 중앙문은 앞뒤 모두 아무런 창호를 달지 않고 개방하며, 양 옆칸은 모두 벽체를 친다. 안에는 중앙문만 사람이 통행할 수 있게 하고, 양 옆칸에는 중앙 쪽으로 홍살을 세워 격리시키고, 그 안에 금강역사상을 세웠다. 이 문을 통과함으로써 사찰 안에 들어오는 모든 악귀가 제거되어 가람의 내부는 청정도량이 된다는 것이다.



경내로 들어서면 삼칸 겹집으로 지어진 대웅전이 나타난다. 그 뒤편으로는 '삼성각(三聖閣)'이 보인다. 불광사(佛光寺)대승불교 조계종(大乘佛敎 曹溪宗)’ 소속의 사찰이란다. 이 종단은 신라시대의 원효대사를 종조(宗祖)로 모신다며 2006년에 새로 발족했다는데, 종파에서 근본경전으로 의지하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무엇인지, 또는 어떤 사찰들이 이 종단에 속해있는지 등 자세한 사항은 종단의 홈페이지에서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아직 자리를 덜 잡은 탓일 것이다. 물론 국내 불교의 연합체라 할 수 있는 한국불교종단총연합회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다.



불광사를 빠져나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열 걸음쯤 걸었을까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왼편 산자락으로 들어설 것을 명령하고 있다. 길이 나있지 않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또다시 열 걸음쯤 더 걸으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또렷하게 난 오솔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산길을 따라 10분쯤 걸었을까 약수터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우물은 앙증맞게 생긴 지붕까지 얹어놓았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다. 거기다 운동기구 몇 점과 벤치까지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샘물은 말라버렸다. 요즘 같은 장마철에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우물의 기능은 이미 끝났다고 봐야하겠다.




아까보다는 훨씬 더 가팔라진 산길을 따라 5분 남짓 더 오르면 능선 안부에 올라선다. 삼거리인 군장이재(군장치)’이다. 정상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오른편으로 제법 또렷한 길이 나있다. 첨부된 지도에 나와 있는 증산으로 연결되는 길인데 이 코스 역시 등산객들의 이용이 잦은 모양이다.



능선에 올라섰다 싶으면 산길은 순해진다. 임도에 가깝게 산길의 폭이 넓어졌는가 하면 경사 또한 거의 없다. 거기다 울울창창(鬱鬱蒼蒼)한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난 산길은 오뉴월 염천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시원하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산책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정도로 멋진 산길이라는 얘기이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송전탑(送電塔)이 나타난다. 이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시루봉이 살짝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송전탑을 지나 얼마간 더 걸으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지만 시루봉으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한다. 하지만 시루봉에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구태여 힘든 오르막길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오른편으로 난 우회로(迂廻路)를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두 길은 시루봉 너머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을 잠시 치고 오르면 드디어 시루봉 정상이다. 능선에 올라선지 20,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이 지났다.



넓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송전탑(送電塔)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등 이곳이 시루봉의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식물이 일절 없다는 얘기이다. 그저 송전탑에 매달아놓은 국가지점번호표지판(라라 1838-6380)‘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니 그런 표식물이 있기는 하다.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 한 기가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시루봉에서의 조망(眺望)은 괜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산행들머리로 삼았던 장동마을과 그 근처에 있는 신금저수지가 희미하게 보일 따름이다. 연무(煙霧)가 짙게 끼어있기 때문이다.



가야산으로 향한다. 아까 올라왔던 방향으로 몇 걸음 되돌아가 이번에는 왼편으로 접어들면 된다. 쉬울 것 같지만 길 찾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생각 없이 돌탑이 있는 능선을 계속해서 따랐다가는 광양시 광영동으로 곧장 하산을 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내려서서 침목(枕木)계단과 데크계단을 연이어 지나면 가야산 둘레길가야산 임도등 여러 개의 길이 만나는 중요한 분기점(分岐點)큰골재에 이르게 된다. 울창한 숲 속에는 여러 개의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그만큼 이곳을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가야산의 6부 등선을 연결하는 가야산 임도는 광양시 광영동 큰골약수터에서 불광사를 거쳐 골약동 군재마을로 연결되는 총 길이 7.69의 임도를 말한다. 매년 4월 이곳에서 열리는 산악마라톤대회 때에는 중심코스가 되기도 한단다.



이곳이 산행의 분기점(分岐點)임을 알려주는 안내도도 내걸었다. 현재 위치의 해발이 363m임을 알려주면서 가야산 정상까지는 758m를 더 가야한다고 적고 있다. 광명동약수터는 509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단다. 산행에 도움이 되는 시설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지도를 반쪽만 그려 놓았고, 거리까지 표기해놓은 광명동약수터는 어디에 있는지 표기조차 하지 않았다.



가야산 정상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길게 놓인 통나무계단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 시작 지점(이정표 : 장수쉼터1.22Km/ 가람쉼터0.63Km)에서 가야산 둘레길이 양쪽으로 나뉜다. 직진하면 기야산 정상이고 왼쪽으로 내려가면 궁도장과 쉼터를 거쳐 주차장으로 내려가게 된다. 오른편은 물론 가람쉼터로 연결된다. 참고로 가야산 둘레길이란 가야산 정상을 중심으로 3~5부 능선 곳곳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생태, 역사, 문화자원을 연결해 놓은 광양판 올레길이라고 보면 된다.



완만하게 곡선을 이루는 플라스틱 재질의 통나무계단을 오르면 산길을 울퉁불퉁한 너덜길로 변한다. 가파르기까지 해서 오르는 게 수월해보이지는 않지만 양쪽 가에 설치해놓은 목제난간의 힘을 조금 빈다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고생해가며 능선에 오르면 평탄부에서 삼거리를 만난다. 이정표(가야산 정상 120m/ 큰골샘터 860m)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른편은 한석농원으로 연결된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안테나 시설이 눈에 띈다. 방송사의 중계탑은 정상에 있는 걸로 알고 있기에 의아해서 다가가보니 경찰서에서 통제구역임을 알리는 경고판을 걸어놓았다. 보안시설인 모양이다.



조금 더 걷자 가야산 정상이다. 정상에는 방송사(MBC)의 송신탑이 들어서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철탑들이 흉물스럽지만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가야산(伽倻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경남 합천(1,430m)과 충남 예산(678m), 그리고 전남의 광양(497m)나주(191m) 등 네 개나 된다. 이중 나주의 가야산을 제외하고는 100대 명산(가야)200대 명산(예산과 광양)에 포함되어 있으니 가야(伽倻)‘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가야산(伽倻山)'이 본디 인도의 불교성지인 부다가야(Buddhagaya) 부근에 위치한 부처의 주요 설법처로 신성시되는 산이기 때문이다.



제법 너른 정상에는 두 개의 정상표지석 외에도 삼각점(광양 305, 1996재설)과 돌탑들이 세워져 있다. 특히 정상석의 뒤편 아름드리 소나무에 걸려있는 자그만 벽시계가 눈길을 끈다. 벤치에 앉아 느긋이 쉬다가 시간에 맞춰 내려가라는 배려용인 모양이다. 참고로 가야산은 가요산(歌謠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광양)가요산(歌謠山)은 증산(甑山) 남쪽 5리에 있다.’고 하여 처음 등장한다. ‘대동지지(大東地志동여비고(東輿備考)’, ‘호남지도(湖南地圖)’, ‘청구도(靑邱圖)’ 또한 같은 이름이다. 현재의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건 조선 영조 때 편찬한 읍지(邑誌)여지도서(輿地圖書)’이다. ‘가야산(伽倻山)은 증산에서 뻗어 나온다. 관아 동쪽 3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海東地圖)’지승(地乘)’, ‘광여도(廣輿圖)’ 등도 이를 따른다. 이로보아 가요산이라 불리던 것이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혼용되다가 근래에 가야산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연무(煙霧)가 짙어 사물을 분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을 다른 사람의 글로서나마 대신해본다. <정상에 서면 북쪽 백운산(白雲山:1,217m)과 그 위 지리산(地異山:1,915m)이 보이고, 올망졸망한 섬들을 새끼 품은 봉황처럼 동서로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남해의 청정해역으로 날아드는 장엄함까지 함께 즐길 수 있다.> 또 다른 글도 있다.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 백운산에서 치달려 내려오는 호남정맥의 마지막 줄기와, 그 오른쪽으로 지리산 능선과, 광양제철소 너머로 남해도가, 남쪽으로 여수의 영취산과, 서쪽으로는 길게 늘어져 있는 여수반도가 조망된다.>



적벽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왔던 길의 바로 오른편 방향이다. 직진을 할 경우에는 작은가야산으로 가게 되니 주의하자. 100m 남짓 내려가면 삼거리(이정표 : 적벽530m/ 동백쉼터720m, 1주차장 1,320m/ 가야산 정상130m)를 만나게 되고, 적벽방향으로 직진해서 몇 걸음 더 걸으면 두 번째 갈림길(이정표 : 적벽/ 금광블루빌1,720m, 한석농원 1,410m/ 가야산 정상160m)이 나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가야할 방향은 왼편인데 곧장 진행해버리면 가야산의 명물인 입마춤바위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바위를 보기 위해서는 금광블루빌 방향으로 200m쯤 더 내려가야만 한다.



잠시 후 멋진 암릉지대가 나타난다. 크기도 거대할 뿐만 아니라 생김새 또한 기기묘묘(奇奇妙妙)하다. 거기다 광양시가지와 남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등 조망까지도 빼어나다. 한마디로 빼어난 자태를 자랑한다는 얘기이다. 암릉은 철제계단을 만들어 아래로 내려가도록 했다.





입마춤바위는 계단의 아래에 있다. 하지만 그 생김새는 실망에 가깝다. 각도를 바꾸어가며 살펴봐도 입마춤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문득 작년엔가 베트남의 하롱베이에 갔을 때 만났던 키스바위가 생각난다. 그땐 살포시 입을 맞추고 있는 형상이 확실하게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입마춤바위부근에는 정자(亭子)를 지어놓았다. 모처럼 만나는 절경이니 쉬었다 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발아래에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면서 말이다. 광양시가지는 물론이고 작은 섬들이 흡사 돛단배마냥 바다 위를 떠다니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건너편 산자락도 눈에 들어온다. 바위지대로 보이는 곳에는 꽤 많은 케언(cairn)을 쌓아 놓았다. 어쩌면 아까 큰골재의 이정표에서 보았던 가람쉼터가 아닐까 싶다. 조망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가야산의 또 다른 명소 말이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적벽 이정표를 따른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길이다. 숲길 사이로 넓은 반석길이 나타난다. 반석길 오른쪽 터진목으로 광양시의 서쪽 아파트촌 너머로 봉화산, 구봉산 자락이 조망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거대한 암릉을 만난다. 호남의 전문 클라이머(climber)들이 암벽 훈련장으로 사용하는 적벽이란다. 적벽(赤壁)은 본래 중국 고대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인해 알려진 지명이다. 후베이성(湖北省) 푸치현(蒲圻縣) 서북부 양쯔강(揚子江) 남안에 위치하는데 208년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 5만 명이 조조에 대항하여, 수륙 양쪽에서 조조의 20만 명 대군과 싸워 화공으로 대승을 거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어떤 사연을 갖고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 모르겠다. 중국의 적벽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강변에 웅장하게 솟아 있어 지세가 험준하다고 하는데 이곳의 지형도 그렇게 험준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도 모르겠다.



벼랑의 상단에는 케른(cairn)이 세워져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1999년 캉첸중가(8586m) 등반 중 사망한 고() 한도규 대원(한울산악회)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란다.



누군가는 적벽에서의 조망을 가야산 제일경이라 추켜세웠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시원스러운 조망이 펼쳐진다. 연무(煙霧)로 인해 희미하긴 하지만 광양시가지는 물론이고 그 너머에 있는 광양만까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연무 때문에 광양만의 명물이라는 이순신대교는 어디쯤에 있는지 분간이 안 된다. 아쉬운 일이다. 참고로 광양만은 예로부터 영·호남간 교통의 요지로 발달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충무공이 이끄는 조선과 명나라 수군의 연합함대가 왜적을 무찌르던 전승지역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의 조망도 다른 이의 글을 빌려본다.<왼편으로는 광양제철소와 남해도가, 정면 아래쪽으로 광양시가, 묘도 너머로, 여수반도의 영취산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암릉에는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좌우로 방향을 트는 중간쯤에 이르자 서벽과 동벽이 위치한 방향을 알려주는 자그만 이정표가 바위에 붙어있어 이곳이 유명한 자연 암장(巖場·巖壁場)임을 실감케 한다. 적벽은 호남지역 전문 클라이머들의 암벽 훈련장으로 알려진다. 가야암장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동벽과 중앙벽, 적벽, 서벽 등 여러 암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루트도 여러 개가 개척되어 있다고 한다.




암릉을 벗어나자 곧이어 가야산 둘레길(이정표 : 시민쉼터0.45Km/ 입마춤바위0.63Km)‘을 또 다시 만난다. 그러고 보면 아까 들렀던 입마춤바위에서 이곳으로 곧장 오는 방법도 있었던 모양이다.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길이 가팔라진다. 아니 엄청나게 가팔라졌다고 하는 게 옳겠다. 곧장 아래로 내려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를 쓰고 나서야 고도(高度)를 낮출 수 있다면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다. 산길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길 양쪽에다 밧줄난간을 만들어 오르내리는데 부담을 줄이도록 배려를 했다. 그렇게 7~8분 정도를 고생하면 길은 잠시 완만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탑골과 굴개재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사거리(이정표 : 1주차장0.77Km/ 굴개재0.11Km/ 탑골0.32Km/ 둘레길(적벽))를 만난다.



산길은 사거리를 지나서도 여전히 가파르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많이 약해졌다. 내려서는데 별 부담이 없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내려가면 육교(陸橋)가 나온다. 가야산과 도심(都心)을 잇는 가교(架橋)이다.



육교에 내려서기 직전, 좌우로 길이 나뉘는 곳에 가야산 둘레길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가야산 둘레길은 가야산의 정상을 가운데다 놓고 3~5부 능선 곳곳의 명소들을 연결한다. 4.8Km의 구간에 흩어져 있는 적벽과 입마춤바위, 가람쉼터, 큰골재, 장수쉼터, 어깨골, 시민쉼터 등 7개 포인트를 모두 돌려면 대략 한 시간 반쯤 걸린단다. 대나무와 송림 숲길 등을 따라 걷게 되는데 곳곳에서 기암괴석과 돌탑 등 눈요기를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양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중마동 중복도로 육교주차장(광양시 마동 1063)

육교를 건너선 후에는 오른편으로 내려서서 중복도로를 따른다. 걷는 내내 광양시가지의 고층건물들이 조망되는 멋진 길이다. 길 아래에 있는 중마고등학교는 조용하기 짝이 없다. 요즘은 방학 동안에는 자율학습이 없나보다. 그렇게 5분 조금 못되게 걷다보면 반듯하게 지어진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나오면서 오늘 산행이 끝난다. 오늘 산행은 총 2시간 4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에필로그(epilogue), ‘광양 오미(五味)’라는 말이 있다. 광양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할 다섯 가지의 음식을 말한다. 쇠고기를 구리 석쇠에 놓아 참숯불에 구워먹는 재래식 고기구이인 광양숯불구이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붕장어구이와 망덕포구의 전어구이’, ‘섬진강 재첩국’, ‘토종닭숯불구이등이 있다. 이 다섯 가지를 모두 먹어보면 좋겠지만 오늘은 그중 하나만 맛을 보기로 한다. 우선 주차장 근처의 식당가로 향한다. 주어진 시간이 짧은 탓에 근처에서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숯불구이음식점만이 눈에 띈다. 그런데 그마저도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게 아닌가. 별수 없이 섬진강 다슬기 식당(061-791-6500, 010-2645-9100)’의 문을 두드린다. 다슬기나 재첩이나 그게 그것일 것 같아서이다. ‘꿩 대신 닭의 심정으로 들어선 식당에서 난 훈훈한 남도의 인심을 만날 수 있었다. 다슬기국을 주문한 일행과는 달리 준비해 간 도시락을 반찬 삼아 마시겠다며 술만 주문했는데도 따뜻한 국물이 필요할 것이라며 다슬기 국물을 한 그릇 가득히 내놓는 것이 아닌가. ‘다슬기의 은은한 향이 배인 구수한 국물에 곁들였던 소주 탓이 아니라 그네들이 보여준 훈훈한 인심에 취해버린 여행이었다.


첨찰산(尖察山, 485m)

 

여행일 : ‘17. 4. 29()

소재지 : 전남 진도군 고군면과 의신면의 경계

산행코스 : 쌍계사삼선암약수첨찰산헬기장진도아리랑비운림산방(산행시간 :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진도의 진산(鎭山)이자 가장 높은 산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서 정상에서의 조망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산세 또한 뛰어나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개의 명품 볼거리를 품에 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하나는 천연기념물(107)로 지정되어 있는 쌍계사 상록수림(雙溪寺 常綠樹林)‘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남종화(南宗畵)의 대가 소치(小癡) 허유(許鍊)운림산방(雲林山房)‘이다. 그 외에도 등산을 하는 길에 진도 아리랑비를 만나볼 수 있으며, 산의 서쪽 아래에는 진도지방에 전승되는 민속놀이인 다시래기(중요무형문화재 제81)‘로 유명한 민속마을인 사천리가 있다. 또한 진도에서 가장 큰 수원지인 사천저수지도 첨찰산의 산자락에 위치한다. 다만 산행시간이 짧다는 게 흠일 수도 있으나, 이럴 경우에는 덕신산에서 학정봉으로 이어지는 맞은편 능선을 연계하면 되니 문제될 것도 없다. 아무튼 한번쯤은 꼭 찾아볼만한 산이다. 특히 가족들과 함께라면 더 좋을 것 같다. 가볍게 산행을 끝낸 후 주변 관광지들을 둘러본다면 멋진 가족여행 코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산행들머리는 쌍계사 주차장(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84)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I.C에서 내려와 1번 국도를 타고 목포대교를 건넌 후, 영암방조제와 금호방조제를 차례로 지난 뒤 구지교차로(해남군 화원면 영호리)에서 77번 지방도로 옮긴다. 이어서 우수영교차로(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서 18번 국도로 갈아타고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읍까지 들어온다. 남동교차로(진도군 진도읍 남동리)에서 빠져나와 왕온로와 운림산방로를 차례로 타고 들어오면 잠시 후 쌍계사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일주문을 지나 쌍계사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길가에는 오색의 연등(燃燈)이 줄을 지어 매달려 있다. 다음 주에 있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기 위해 설치한 모양이다. 잠시 후 쌍계사 앞에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첨찰산 정상3Km, 넓적바위 1.8Km/ 쌍계사)로 나뉜다.



쌍계사(雙溪寺)에 들러보기로 한다. 주어진 시간이 넉넉한데 구태여 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어서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진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다는 천년고찰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게 더 큰 이유이다.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지나 쌍계사의 경내로 들어선다.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는 규모의 사찰이다. 아니 남녘의 끝자락에 위치한 섬에 있는 사찰치고는 크다고 할 수도 있겠다. 참고로 쌍계사란 절의 양편으로 두 개의 하천()이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진도의 쌍계사와 함께 우리나라 4대 쌍계사로 분류되는 하동의 쌍계사와 논산의 쌍계사, 북한(함경북도 명간군)의 쌍계사 등도 같은 연유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쌍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857(신라 문성왕 19) 도선(道詵)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절 양옆으로 시냇물이 흘러서 쌍계사라 불렀다고 하며, 1648(조선 인조 26) 의웅(義雄)이 중건하였다. 1677(숙종 23) 대웅전을 세웠으며, 1695년에는 시왕전을 중건했다. 1880동사열전의 저자인 각안(覺岸:18201896)이 머물며 동산(東山지순(知淳)과 함께 대법당과 시왕전·첨성각을 중수했고, 이후 1980년에는 도훈(道薰)이 해탈문을 세우고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 해탈문, 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국보급 문화재는 보유하고 있지 않으나 전라남도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로 대웅전(121)과 목조삼존불좌상(221), 왕전목조지장보살상(222)이 있다.



쌍계사를 둘러봤으면 이젠 산행을 나설 차례이다. 산행은 절간의 왼편 숲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숲으로 들어서면 과연 이곳이 천연기념물로 대접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바닥을 넓적한 자연석으로 깔아 자연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해외여행을 하면서 돌이 깔려 있는 옛 도시의 도로들을 보며 그들의 보존의식에 부러움을 느끼곤 했었는데 여기서 그런 풍경을 보다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삼선암골을 끼고 나있다. 이 골짜기와 이따가 하산하게 될 봉화골사이에 천연기념물 제107호인 쌍계사 상록수림이 넓게 펼쳐져 있다. 진도군의 군목(郡木)인 후박나무와 도토리처럼 생겼는데 잣 맛이 나는 열매가 달리는 구실잣밤나무, 한약재로 쓰이는 종가시나무, 동백나무, 생달나무, 붉가시나무 등 잎이 넓은 상록수가 다양하다. 나무를 칭칭 감고 올라가는 마삭줄, 송악 같은 덩굴이 흔하고, 졸참나무와 자귀나무, 느릅나무, 소사나무 같은 활엽수까지 더해 푸름을 뽐낸다. 등산로 도입부는 상록수와 활엽수가 뒤섞였고, 올라갈수록 상록수가 많아져 그늘이 짙다.



이곳 쌍계사의 상록수림은 무려 188천 평에 달한다. 상록수림의 50-70%를 차지하고 있는 구실잣밤나무를 비롯하여 동백나무와 참가시나무, 참식나무 등 상록활엽수림이 온 산에 가득해 있다. 정상으로 연결되는 등산로는 햇빛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숲의 터널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5월부터 6월초까지는 쌍계사 계곡을 중심으로 구실잣밤나무 꽃이 만발해 온 산이 금색물결을 이룬다. 또한 이 숲은 희귀조인 팔색조가 서식하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산길은 삼선암골을 옆구리에 끼고 나있다. 그러다보니 산길은 자연스레 가파른 사면(斜面)을 헤집으며 나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계곡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비탈 쪽에다 밧줄난간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산으로 들어선지 25분쯤 되면 삼선암 약수터’(이정표 : 정상 1.3Km)가 나온다. 특별한 맛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여행자의 목마름을 단번에 해갈해 주는 석간수(石間水)가 바로 그것이다. 이물질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돌을 둥그렇게 쌓아놓은 샘은 수량이 풍부한 듯 물이 넘쳐흐르고 있다. 봄 가뭄으로 인해 주변 계곡이 말라있는 것을 감안할 때 지하수(地下水)인 모양이다. 먼저 물맛을 보고난 집사람이 바가지를 내민다. 의외로 물맛이 좋단다. 그녀의 말마따나 물은 시원하면서도 달콤했다. 이런 게 바로 감로수(甘露水)가 아닐까 싶다. 불교에서 말하는 육욕천(六慾天)의 둘째 하늘인 도리천에 있다는 달콤하고 신령스런 액체인 감로말이다. 이 액체는 한 방울만 마셔도 온갖 괴로움이 사라지고, 살아 있는 사람은 오래 살 수 있고 죽은 이는 부활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불사주(不死酒)로도 일컬어진다. 때로는 부처의 교법(敎法)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인다.




약수터 바로 위에서 산죽(山竹) 숲을 만난다. 이곳이 혹시 삼선암의 터인지도 모르겠다. 약수터의 이름이 삼선암인데도 불구하도 주변에서 절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굵은 산죽들은 대개 절간 주위에서 무리지어 자라기에 그런 추정을 해보았다.



숲의 곳곳에는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나무 그늘에 앉아 쉬노라면 어느덧 땀이 식고, 새소리와 바람 소리에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물소리까지 들린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겠지만 봄 가뭄이 한창이라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더위를 잊고 세상 근심도 잊을 수 있는 힐링(healing) 숲이 따로 없다.



계곡은 너른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 물이라도 흐른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없겠다. 푸름으로 물든 숲과 너른 암반, 그리고 그 위를 흐르는 옥수(玉水)가 있다면 그게 바로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향(理想鄕)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아까 쌍계사 앞의 이정표에서 보았던 넓적바위가 이곳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외에는 그런 지명을 붙일만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수터에서 10분쯤 더 오르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정표(이정표 : 점찰산 정상0.8Km/ 쌍계사2.0Km)는 정상을 왼편 방향으로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직진(直進) 방향의 길도 또렷하다. 산악회에서 나눠준 지도에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이쯤에서 둘로 나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직진으로 난 길은 정상으로 곧바로 치고 오르는 길일 것이다. 이정표는 조금 더 쉽게 오를 수 있는 우회(迂迴)의 길로 진행하도록 지시하고 있을 것이고 말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숲은 여전히 짙다. 10m가 훌쩍 넘는 상록수가 하늘을 덮고 그 아래 작은 나무들까지 잎사귀를 보태니, 그늘이 깊고 짙고 두텁다. 누군가 첨찰산의 상록수림이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하더니, 그 말이 실감이 난다.



아름다운 녹색 숲길에서 마음껏 심호흡하며 산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산 중턱에 닿는다. 언제부턴가 산길은 계곡을 벗어나 있다. 그리고 경사도 함께 가팔라졌다. 뿐만 아니다. 숲의 나무들도 상록수림에서 낙엽수림으로 바뀌어있다. 그중에는 남쪽의 해안(海岸)에서 흔하게 만나는 소사나무가 많다.



약수터에서 출발한지 25분쯤 되었을까 쉼터가 나타난다. 등산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벤치를 놓았는데 등산안내도외에도 이정표(첨찰산 정상0.7Km/ 수리봉2Km, 공설운동장 5.8Km/ 넓적바위0.5Km, 쌍계사 2.3Km)가 세워져 있다. 쉼터의 왼편으로 시멘트포장 임도가 나았다. 기상대로 올라가는 도로이다. 저 도로를 따를 경우 수월하게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하지만 0.5Km 정도를 더 걸어야 하는 지체(遲滯)는 감수해야만 한다.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밧줄난간을 만들어두었고, 그보다 더 가파른 곳에는 나무계단을 설치했다. 또한 곳곳에 간이 쉼터도 조성해 놓았다. 의자 등 쉼터의 시설물들은 태풍 피해를 본 편백나무를 재활용한 것이란다.



두 번째 계단을 오르면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시야가 열린다. 발아래에 깔려있는 진도읍의 시가지는 물론이고 저 멀리 남쪽 바다의 다도해(多島海)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지금은 비록 미세먼지로 인해 흐릿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저 바다에는 주지도와 양덕도, 혈도, 송도, 광대도, 저도, 작도도 등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싣고 둥둥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 사천저수지와 삼막봉도 눈에 들어온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조금 더 진행하면 이번에는 전망바위가 나온다. 그리고 반대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조금 희미하긴 하지만 상마도와 중마도, 하마도, 안도, 죽도 등이 시야에 잡힌다. 첨찰산 정상과 반대편 봉우리에 있는 기상대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깐 아래로 내려섰다가 맞은편 능선으로 치고 오르면 정상 바로 직전에서 산허리를 둘러싸고 있는 듯한 돌무더기가 눈에 띈다. 혹시 첨찰산성(尖察山城)‘일지도 모르겠다. 봉수대가 있는 산정을 중심으로 동남쪽의 해발 460m 고지와 남쪽 420m 고지를 연결했다는 포곡식(包谷式) 산성(山城) 말이다. 이 성은 1500년도 더 된 백제 때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때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왜인들이 수시로 침범해서 남해안 일대를 괴롭히는 일이 잦았다. 따라서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에다 관방처(關防處)로서 산성을 축성했다는 것이다. 길이가 1.5쯤 되는 성벽은 현재 완전히 도괴된 상태이다. 다만 유구(遺構)의 성격으로 보아 협축법에 의해 쌓은 석축성으로 판단된다. 석재는 30×50의 판석형 막돌을 사용하였고 갈대숲을 이룬 성내에는 여러 개의 절터와 와편 등이 산재해 있다.



성터를 지났다싶으면 정상이다. 정상의 한가운데는 원뿔형으로 생긴 봉수대가 차지하고 있다. ‘무인산불감시탑과 이정표(기상대 0.3Km, 등산로종점(두목재) 1.7Km/ 넓적바위 1.2Km, 등산로입구(쌍계사) 3Km)도 보인다. 정상의 봉수대(烽燧臺)는 어설프기 짝이 없다. 옛날에는 봉수대였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돌무더기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더 옳을 수도 있겠다. 돌로 연대(烟臺)를 쌓고 그 위에다 수북하게 돌을 쌓아올렸는데, 봉수라기보다는 차라리 케언(cairn)에 더 가깝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이곳에도 의젓한 봉수가 있었다. 자연적인 바위산 위에 남북 길이 9m, 동서 길이 8.5m, 둘레 30.3m의 원형으로 쌓아올렸는데, 30×20크기의 자연석으로 난층쌓기를 하였단다. 이 봉수는 해남 관두산 봉수(현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성좌동 관두산)로부터 여귀산 봉수(현 임회면 죽림리 여귀산)로 전달된 봉홧불을 해남 황원 봉수(현 해남군 화원면 장춘리·문내면 고당리의 접경 日星山)에 중계하는 연변봉수(沿邊烽燧)의 하나로 건립되었다. 대략 조선 초기 진도군의 행정체계가 재정비되는 시기, 즉 세종대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1894년에 폐지되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섬에서 가장 높은 덕분에 시야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정상에서 바라보는 다도해 풍광은 장관이다. 바다건너 해남 땅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두륜산은 물론이고 공룡능선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땅끝기맥의 꿈틀거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또 다른 방향에는 높고 낮은 진도의 산들이 첩첩이 쌓여 있다. 아까 올라오는 길에 보았던 사천저수지와 삼막봉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더 멀리에 있을 수많은 섬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미세먼지라는 게 우리 맘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긴 꼭 미세먼지 아니더라도 해무(海霧) 때문에 섬이 선명하게 보이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오석(烏石)으로 만든 정상표지석은 봉수대의 바로 아래에다 세워 놓았다. 첨찰산은 뾰죽할 첨()‘살필 찰()‘자를 쓴다. 뾰쪽하게 생긴 산 정상부가 적의 동태나 지세를 살피기에 딱 좋겠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이 산의 정상에다 봉수대를 설치했었고, 산의 이름 또한 봉화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만일 쉴만한 장소를 원한다면 정상석의 2시 방향에서 길을 찾아야한다.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30m 정도 들어가면 널따란 바위가 나오기 때문이다. 거기다 전망까지 탁 트이니 이만한 쉼터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글에서 보니 왼쪽이 삼막봉,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건 수리봉, 철마산 등이라고 했다. 그리고 물이 가두어진 곳은 사천저수지라고 했다.



기상대가 있는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경사가 심하지만 데크로 계단을 만들어 놓아 어렵지 않게 내려설 수 있다. 그것도 반반한 곳에 이를 때까지 길게 놓였다. 내려가다 보면 축구공처럼 둥그렇게 생긴 진도기상대(珍島地域氣象)‘의 건물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진도·해남 등 전남 남부해안의 기상을 관측하기 위해 설치한 광주지방기상청 산하의 기상관측 기관인데, 지난 20018월에 문을 열었다. 저 기상대는 해돋이와 해넘이를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해질녘 농도(濃度)를 달리하는 산릉들이 중중첩첩 겹치고 포개지는가 하면, 희미한 능선이 끝나는 곳에 붉게 물든 바다를 배경으로 크고 작은 섬들이 솟아오르는데 그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라는 것이다.



계단을 내려서면 헬기장이 나온다. 첨찰산 정상과 기상대가 자리한 동남봉(東南峰)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요즘도 활용을 하고 있는 지 잔디밭이 잘 손질되어 있다. 아무튼 주변 지세(地勢)가 반반한 것이 옛날 이곳에 있었다는 첨찰산성의 중심지가 이쯤이었을 듯도 싶다. 또한 이곳 첨찰산에 진도 말목장(馬牧場)의 속장(屬場)이 있었다고 하더니 구릉의 생김새로 보아 그랬을 만도 하겠다. 참고로 조선시대에 이곳 진도는 전국 최대 규모의 말목장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의하면 1414년 제주에서 말 1800마리를 옮겨와 감목관을 설치하고 추자도 주민을 이주시켜 말을 관리했다고 한다.



헬기장 근처에서 길은 둘(이정표 : 아리랑비1.7Km/ 첨찰산 정상0.1Km)로 나뉜다. 우리가 하산 코스로 이용하려고 하는 봉화골은 오른편 방향이다. 하지만 덕신산 등 맞은편의 능선에 있는 산들과 연계산행을 원한다면 이곳에서 직진을 해야 한다.



하산 길도 역시 골짜기를 끼고 나있다. 이번에는 봉화골이다. 대나무 숲을 지나고 나면 곧이어 첨찰산 특유의 상록수림이 또 다시 시작된다. 숲은 어두컴컴할 정도로 짙다. 이렇게 상쾌한 느낌을 주는 숲은 흔치 않다. 그러니 구태여 발걸음 재촉할 필요는 없다. 온몸으로 숲의 기운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걸어볼 일이다. 아주 천천히 즐기듯이 말이다.



코끝에 걸치는 공기는 신선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질 정도이다. 산소음이온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전라남도 보건환경연구원에서 최근(2013) 이곳 첨찰산의 공기질(空氣質)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일이 있었다. 당시 공기의 비타민으로 불리는 산소음이온은 cc(최대값) 1753개가 나타났다. 차량통행이 많은 도시지역이 0200개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산림치유물질로 널리 알려진 피톤치드 최대농도는 130pptv로 소나무가 우거진 산들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상록활엽수 우점(優占)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오존의 농도는 28.5ppb/시간으로 대기환경기준 100 ppb/시간과 비교해 1/3 수준이었다. 그리고 미세먼지농도는 0.046/로 대기환경기준인 0.1 /3040%에 불과했다.



내려오는 내내 상록수림이 펼쳐진다. 이마를 스쳐가는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눈도 호사를 누린다. 기름을 바른 듯한 녹색의 동백잎이 빛을 발하며 길손을 유혹한다. 계곡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돌들 사이로 낙숫물도 떨어지는 곳이 있는가 하면, 바위를 에돌아 흐르는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렇게 20여분을 내려오면 급경사 등산로가 끝이 나면서 평지길이 나오고 그 길 끝자락에 개울을 가로지르는 데크다리가 나오는데 이 다리를 건너면 산행의 종점지인 진도아리랑비공원이다.




하산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임도(이정표 : 사천광장 0.7Km/ 첨찰산 2.2Km)에 내려선다. 삼거리인 이곳에는 진도아리랑비()‘가 세워져 있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로 이어지는 진도아리랑을 기념하는 비이다. 진도에 가면 세 가지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글씨와 그림,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이중 글씨와 그림은 잠시 후에 들르게 될 운림산방(雲林山房)에서 비롯된다. 남종화(南宗畵)의 산실로 일컬어지는 운림산방이 진도에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하나인 노래가 바로 진도아리랑이다. 진도아리랑은 정선, 밀양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의 하나로 꼽힌다. 그 아리랑이 이곳 진도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일상이란다. 밭일 하던 할머니도 장터에서 마주치는 아주머니도 흥만 나면 어김없이 아리랑을 불러 젖힌다는 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구성진 아리랑의 노랫가락에 녹이며 살아온 섬사람들의 삶이 바로 노래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진도아리랑은 부요적(婦謠的) 성격이 강한 서정민요이다. 현지에서는 아리랑타령이라고 부른다. 사설은 기본적으로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하고 있다. 사설 내용에 욕·상소리·한탄·익살 등이 응집되어 부인네들의 야성을 거침없이 노출시키고 있으며, 또한 도서 지방의 지역성을 표출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사설의 형식은 21연의 짧은 장절형식(章節形式)으로 이루어지는 분장체(分章體) 장가(長歌)이다. 가창 방식은 기존 사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형태의 사설이 창작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덧붙여질 수 있는 선후창 형식의 돌림노래[輪唱]이다. 돌림노래란 여럿이 부를 때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메김소리를 하고 나머지는 맞는소리(맞음소리)를 하는 것으로, 이러한 가창 방식은 집단 노동요의 전형적인 가창 방식과 일치한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까지 등재된 진도아리랑은 비탄조의 정선아리랑과는 달리 육자배기가락에 판소리의 구성진 목청이 어우러진 진도 지방 특유의 정조(情調)를 지니고 있다. 혼자 부를 때에는 유장하고 슬픈 노래가 되어 신세타령과 같은 표출 기능이 두드러지지만, 노래판에서 여럿이 부를 때에는 빠르고 흥겨운 노래로 신명을 고양시키고 일체감을 조성·강화시킨다. 갑자기 집사람의 발뒤꿈치가 가벼워진다. 덩실거리는 어깨춤에는 흥까지 넘쳐난다. 진도아리랑이 지닌 특유의 분위기에 고양(高揚)이라도 되었나보다. 누가 저런 여자를 보고 60대라고 하겠는가.



진도아리랑비근처에 아리랑 진돗개 시범 사육장이라고 적힌 입간판이 보인다. 진도하면 진도라는 섬의 이름보다도 섬에서 기르는 토종개인 진돗개로 유명세를 탔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만큼 진돗개가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귀소본능(歸巢本能), 용맹성, 대담성, 결벽성, 수렵본능, 경계성, 비유혹성(非誘惑性) 등의 우수한 품성을 지니고 있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견이자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명견으로 인정받았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인류가 야생동물을 가축화한 최초의 동물이 개라는 것은 구석기시대 화석에서 개의 유골이 발견되는 데서 능히 입증된다. 진도의 자랑인 진도개는 가축으로서 사육하게 된 뚜렷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구전(口傳)에 의하면 다음의 4가지 유래설이 있다. 첫째, 남송시대 무역선이 진도 근해에서 조난당하였을 때 남긴 남송국 개가 진도개의 시조를 이루었다는 설. 둘째는 고려 원종 때 삼별초군이 강화도에서 관군과 몽골군에게 항거하려고 진도로 근거지를 옮긴 일이 있었다. 그때 몽골군이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관군과 함께 진도에 원정하면서 남기고 간 개의 후손이라는 설. 그리고 셋째는 조선 초기에 진도군 지산면에 설치하였던 국영(관마) 목장의 병견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당시 몽골에서 수입했다는 설이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우리나라 고유견이 있어 번식 유지해 왔는데 진도에 분포했던 개만이 육지와 격리되어 타견과 혼혈됨 없이 순수 번식으로 고유의 혈통을 보존하여 오늘의 진도개가 되었다는 설이다.



아리랑비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사천일제라는 저수지를 왼편에 끼고 걷다보면 저만큼에 사천리가 눈에 들어온다. 운림산방(雲林山房), 첨찰산(尖察山), 쌍계사(雙溪寺), 상록수림(常綠樹林) 등이 있는 사천리 일대는 사천관광지(斜川觀光地)’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렇다고 관광진흥법에 근거하여 지정된 관광지는 아니다. 그저 진도군이 관내 관광지를 소개할 때 사용하는 지리적 권역의 하나라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면 남종화의 산실이라는 운림산방(雲林山房, 명승 제80)에 이르게 된다. 작년엔가 둘러본 본 일이 있었지만 다시 한 번 들어가 보기로 한다. 그럴만한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운림산방은 조선말 남종화의 대가였던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8~1893)가 만년을 보낸 곳으로, 경사지를 다듬어 세웠는데 맨 위쪽에는 허련의 화상을 모신 운림사(雲林祠)가 있고 오른쪽 후면에는 사천사(斜川祠)가 자리하고 있다. 사천사는 소치의 문중 제각으로 매년 한식날 소치 선생의 6대조 가문이 춘향대제를 봉행하는 건물이다. 그 아래에는 돌담으로 둘러진 터에 살림집인 안채가 지어져 있으며, 안채의 앞으로는 소치가 머물던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그밖에도 화실과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기념관 등이 있다. 소치는 1856(철종 7) 스승 추사 김정희가 죽은 다음 해에 고향인 진도로 내려와 초가를 짓고 거처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의 이름을 처음에는 운림각(雲林閣)이라 하고 마당에 연못을 파서 주변에 여러 가지 꽃과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 소치는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렸다. 남종화의 터전으로서 운림각이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1893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불후의 명작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소치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허형이 진도를 떠나면서 운림산방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예전의 모습을 거의 잃게 된다. 그 후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피폐된 이곳을 허형의 아들 허윤대가 다시 사들였고 또 다른 아들 허건이 1992년부터 2년에 걸쳐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생가 등을 다 둘러본 뒤 소치기념관(小癡記念館)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진도 출신의 남종문인화가 소치(小癡) 허련(許鍊=허유, 1808~1892)의 작품과 관련 자료를 전시함으로써 소치가 한국 회화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1980년에 운림산방 내에 건립하였다. 허련(허유)은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임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많았던 그는 20대 후반에 해남의 두륜산방에서 초의선사의 지도 아래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고 그림을 공부했다. 184033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평생 가장 소중히 모신 스승 추사 김정희를 만나게 되어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았다. 비록 남도의 섬에서 출생하기는 했지만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질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시(), (), ()에 모두 능한 삼절을 이루게 되었다. ()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 남종화의 효시로 알려진 왕유(王維)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당대의 명사였던 석파 이하응(흥선대원군), 민영익, 신관호, 권돈인, 정학연 등 권문세가의 고위 관리들과 교유한 그는 장안에 명성이 높았다. 소치를 일컬어 민영익은 묵신(墨神)이라 하고, 정문조는 여기에 더해 삼절이라고 평했다.



기념관은 영상실과 전시실로 구분되는데 영상실에서는 운림산방의 역사와 전경, 그리고 소치 허련의 작품과 화맥(畵脈)을 한눈에 보여준다. 그리고 서화 전시실에서는 소치 가문(家門)이 이어온 남종화의 계보와 그들의 활동사항 등을 소개한다. 소치 허련의 송죽매국, 양선죽창, 미산(米山) 허형(許瑩)고사선유, 팔곡백납병, 그리고 남농(南農) 허건(許健)양유춘색, 계산유곡등 소치의 작품들과 5대에 걸쳐 화가로 활동했던 후손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참고로 소치는 작가의 내적 심경, 즉 사의표출(寫意表出)에 중점을 두는 남종화에 심취했다. ‘소치라는 아호는 스승인 김정희가 내려주었는데 원나라 때 사대가의 한 사람이었던 대치 황공망을 본떠 지은 것이다. 추사는 소치의 화재를 두고 압록강 동쪽에서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소치에 의해 풍미되기 시작한 남종화는 그의 가계에 의해 이어진다. 미산(米山) 허형(許瀅, 1862~1938)은 소치가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로 그의 화풍을 이어받아 산수, 노송, 모란, 사군자 등을 잘 그렸는데 아버지의 화격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받는다. 미산은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7~1987)을 낳았다. 남농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한 후 20세기 근대 화단에 한국화의 중심에 자리한 화가가 되었으며, 운림산방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남종화는 소치, 미산, 남농 3대에 걸쳐 이어져 왔고 이러한 가풍에 영향을 받아 지금도 화가로 활동하는 후손들이 많다.



이번에는 같은 부지 내에 지어진 진도역사관에 들러보기로 한다. 진도 지역의 역사유물을 보존·전시하고, 진도의 민속과 자연환경 등을 소개하기 위하여 설립한 전시관으로 20031031일 개관하였는데 건축총면적은 1,710.87이다. 진도지역 고유의 역사유물을 영구히 보존함으로써 후세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된 진도역사관은 삼별초실, 유배문화실,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도서문화와 유배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민속유산을 보존하고 후배들에게 계승ㆍ발전시키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228점의 전시품이 갖추어져 있는 상설전시실은 선사/고대실(돌보습·돌낫·돌칼·고인돌 모형 등 전시)과 삼별초항쟁 코너(대동사강 영인본·삼별초 무기·용장산성 및 용장산 전투 관련 전시물·남도석성 모형 등 전시), 명량대첩 코너(조선시대 무기 모형과 명량대첩 해전 모형 등 전시), 유배문화실(문곡연보 영인본·목칼과 형틀 등 조선시대 형구 모형 등 전시), 역사의 발자취 코너(망헌선생 유집 영인본·근현대의 진도 지도와 사진 등 전시), 향토문화실(진도군읍지 영인본·화로와 베틀 등 생활도구·쟁기와 홀테 등 농기구 전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밖에도 향토작가전시실(기획전시실)에는 허백련·하철경·박행보 등 진도 출신 작가들의 서화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영상실에서는 진도의 역사와 현황, 민속과 자연환경 등에 대한 영상물을 상영한다. 휴관일은 월요일이다.



진도역사관의 건물 안에는 금봉전시관도 들어 있다. 이곳 진도가 배출한 걸출한 화가 중 한사람인 금봉 박행보(金峯 朴幸輔)‘ 선생이 기증한 산수화, 문인화 등 작품 109점을 전시해놓았다. 의재 허백련선생과 소전 손재형선생의 사사(師事)를 받은 금봉은 남도문인화의 맥을 이어온 한국 화단의 거목이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입선과 특선을 수차례 했으며, 그 기량을 인정받아 문화공보부장관상과 국무총리상을 수상해 남도화맥을 잇는 큰 산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각종 미술대전에서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그 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2003년에는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귀경길에 고군면(古郡面) 바닷가에 위치한 회동리(回洞里)에 들러보기로 한다. 전국 10대 축제 중 하나라는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珍島 神秘의 바닷길 祝祭)‘가 열기고 있기 때문이다. 옛 이름이 영등축제(靈登祝祭)‘인 이 행사는 음력 2월에 행해지는데 바람을 일으키는 신()영등할머니(뽕할머니라고도 부름)‘를 부르는 영등제(靈登祭)‘에서 비롯되었다. 영등할머니는 농작(農作)의 풍흉과 관계되는 농신(農神)의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일기가 불순하면 농작물이 피해를 입고 일기가 순조로우면 풍작을 바랄 수 있으니 말이다. 진도군에서는 축제기간 동안 진도 고유의 민속예술인 강강술래와 씻김굿, 들노래, 다시래기 등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와 만가, 북놀이 등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를 선보이고 다양한 이벤트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축제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시기에 맞춰 열린다. 하지만 난 바닷길이 열리는 것을 구경하지 못했다. 하루에 두 번 열린다는 시간까지는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바닷길은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義新面 茅島里) 사이 약 2.8km 바다가 조수간만(潮水干滿, low tide and high tide)의 차()로 인해 바다 밑이 40m의 폭()으로 물위로 드러나 바닷길이 열린다는데 신비로움이 있다. 바닷물은 하루 두 차례씩 들고 나는데 이 현상을 보기 위해 매년 국내외 관광객 수십만 명이 찾아와 바닷길이 완전히 드러나 있는 약 1시간의 기적을 구경한다. 참고로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곳 신비의 바닷길은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 피에르 랑디씨가 진도에 놀러왔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귀국 후 프랑스 신문에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96년에는 일본의 인기가수 덴도요시미씨가 신비의 바닷길을 주제로 한 진도이야기(珍島物語)‘노래를 불러 크게 히트하면서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