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도(文甲島)

 

여행일 : ‘23. 10. 6()

소재지 :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문갑도리

트레킹 코스 : 문갑도선착장당너머갈림길처녀바위깃대봉중이절골 갈림길농막문갑마을문갑도선착장(소요시간 : 4.89km/1시간 55)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덕적군도(德積群島)의 중심 섬인 덕적도에서 남서쪽으로 8km 지점에 있는 면적 3.49에 해안선 길이가 11km쯤 되는 작은 섬이다.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섬의 생김새가 선비의 문갑과 같다 하여 문갑도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평평한 문갑(文匣)과는 달리 섬 전체가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구릉의 기복이 심하고 경지 면적이 귀하다. 이로보아 투구를 쓴 장수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독갑도(禿甲島)’가 오히려 설득을 얻을 듯. 때문에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한다. 연근해에서 꽃게를 비롯한 조기·새우·민어·갈치 등이 많이 잡히며, ··조개류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찾아오는 방법

덕적도를 가는 뱃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고속훼리(코리아나호 또는 스마트호)를 타거나 대부도(화성시)에 있는 방아머리선착장에서 차도선(車渡船)을 이용하면 된다. 산악회에서는 운임이 싼 방아머리선착장을 출발지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개별 도착일 경우에는 바람직하지 않을 듯. 주차시설이 협소해서 차량 댈 곳을 찾다가 타고가야 할 배편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싣고 갈 대부 고속페리 3’. 400명의 승객(구명복 숫자. 차량은 별도)을 태울 수 있는 차도선으로 덕적도까지 하루 2(8:00, 12:30) 운항하며 요금은 성인 기준 11,700원이다. 하나 더, 선내에 매점이 있어 라면이나 간식, 주류, 음료 등을 구매할 수 있다. 참고로 문갑도는 덕적도(진리항)에서 다른 배로 갈아타고 들어가야 한다.

 덕적도(진리항)까지는 꼬박 2시간이 걸렸다. 예정보다 20분이나 늦은 셈이다. 먼 바다로 나오면서 배의 피칭(pitching)이 심해지더니 파도가 높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데려다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다. 풍랑이나 해무(海霧) 등 수시로 변하는 바닷길 사정은 종잡을 수 없는 게 보통인데도 무사히 도착했기 때문이다. 사실 작년에는 안개가 짙다는 이유로 배가 뜨지 않아 덕적도에서 빈둥대다가 돌아간 일도 있었다.

 오늘은 문갑도를 찾아볼 계획이다. 8개의 유인도와 33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덕적군도(德積群島)’에 속한 자그만 섬이기 때문에 본섬인 덕적도(진리항)에서 출발하는 다른 배로 갈아타고 들어가게 된다.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도착이 늦어진 대신, 타고 온 배와 타고 갈 배가 바톤 터치를 하는 이점도 있었다. 덕분에 우린 부두를 방황해야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덕적도 선착장에서 다시 한 번 승선권을 사야만 했다. 우리가 타고 갈 배는 나래호(대부고속훼리와 같은 차도선이다). 이곳 진리항을 출발, 홀수일 기준 문갑도·굴업도·백야도·율도·지도·문갑도 순으로 덕적군도를 한 바퀴 돌아온다. 짝수일은 반대방향으로 도니 참조한다. 하나 더, 문갑도는 갈 때는 물론이고 돌아올 때도 들른다. 둘의 간격은 2시간 30. 하루 일정으로 왔다면 이 시간 안에 문갑도 트레킹을 끝마쳐야 한다.

 나래호는 여러 명품 섬을 들른다. 특히 용아장성이 부럽지 않다는 바위섬 백아도(白牙島)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연상시키는 개머리언덕으로 유명한 굴업도(掘業島)’는 덕적도 여행의 백미로 꼽힌다. 그러니 트레커나 백패커들로 붐빌 것은 당연. 연휴인 7~9일은 표가 이미 매진되었다는 저 안내판이 증거이다.

 11 : 40. 문갑도에 도착했다. 문갑도(文甲島)는 선비의 책상인 문갑(文匣)을 닮았다는 섬이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문갑(文甲)으로 변했다나? 섬은 물갑도란 별명도 갖고 있단다. 비탈진 산이 대부분이나 계곡에 물이 많기 때문이란다. 예전에는 논농사까지 지었다고 하나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하긴 인력이 부족해 계절노동자까지 들여오는 요즘 누가 논농사를 짓겠는가.

 문갑도를 둘러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등산이고, 다른 하나는 산자락을 헤집으며 내놓은 둘레길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면서 해안의 명소들을 눈에 담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다 보기 위해서는 2일 정도의 시간이 요구된다.

 배에서 내리자 화유산 능선이 실루엣처럼 펼쳐진다. 300m에도 못 미치는 섬 산인데도 우람하면서도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다. 처녀바위(231m)를 왼쪽에 두고 가운데가 깃대봉(277.6m), 그 오른쪽에 왕재봉(248m)인데, 오늘은 처녀바위를 거쳐 깃대봉 정상에 오른 다음 마을로 내려올 것이다. 시간이 충분할 경우 왕재봉까지 다녀올 것이고.

 마을표지석이 반기는 선착장. 그 옆에는 어루정이라는 정자도 있었다. 덕분에 우린 스틱을 펴는 등 편하게 산행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정자 뒤, 사람 얼굴을 쏙 빼닮은 갯바위가 눈길을 끈다.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 큰 바위 얼굴(Great Stone Face)’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헐크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11 : 45. 문갑마을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선착장 초입에는 나그네 쉼터인 여행자센터가 들어섰다. 문갑도의 특산물인 무화과쥬스와 한월리 모래로 끓인 샌드커피 등을 판매한다고 했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이왕에 국민의 혈세를 들여 지어놓았으면, 취지에 맞게 잘 운영해 주었으면 좋겠다.

 선착장에서 100m쯤 떨어진 데크 계단을 오르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문갑도에서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두 시간. 섬 전체를 둘러보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니 둘레길을 따라 해안 경관을 보던가. 아니면 화유산 등산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내 결정은 화유산 깃대봉(277.6m)이었고, 이곳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참고로 화유산은 문갑도 유일의 산이고, 깃대봉은 화유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했다. 감기가 아직 낫지 않았는데도, 내 곁을 지켜주겠다며 부득부득 따라나섰다. 하지만 집사람의 체력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고, 겨우겨우 깃대봉 정상에 올라설 수는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초죽음 상태가 되어있었다.

 데크계단이 끝나자 이번에는 침목계단이 상당히 가파르게 이어진다. 3분이면 능선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길은 곱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갈림길이 나와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12 :00, 좌우로 길이 나뉘는 첫 번째 포인트를 지난다. ‘어루재라는 고갯마루로 오른쪽은 문갑마을, 왼쪽은 어루너머해수욕장으로 연결된다. 참고로 어루너머(넘어)해수욕장은 아주 작은 모래해변이라고 한다. 나만을 위한 비밀의 해변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은밀하고 예쁘단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이정표를 만났다. 방향표시는 기본, 하단에 문갑도 해안누리길 지도를 그려 넣은 다음 현재 위치를 표시했다.

 잠시 후 만난 또 다른 이정표는 아예 소화기함까지 매달았다. ‘라이터 등 화기휴대·취사·흡연 금지라는 경고판도 눈에 띈다. 주요 기점의 이정표마다 소화기함을 매달아놓았는데, 산불예방 차원이겠지만 다른 섬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라 하겠다.

 모노레일도 설치되어 있었다. 마을과 화유산의 산자락에 들어앉은 엄나무 농장(마을기업에서 공동으로 운영한단다)을 잇는데, 인력이 귀한 섬의 애로를 해소하기 위한 시설이란다. 아무튼 500Kg의 적재량은 물론이고 사람도 3명이나 탈 수 있다니 섬 주민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겠다.

 능선이 상당히 가팔라졌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거운 짐을 이고 진 농부들이 이 능선을 오르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저 모노레일이 그들을 대신한다.

 능선 곳곳에는 모노레일의 수혜 대상인 엄나무 농장이 들어서 있었다. 매년 봄 우리네 식탁에서 마주하는 벙구나물(또는 개두릅)’은 저 엄나무에서 채취된다.

 염소 서너 마리가 초지에서 노닌다. 그런데 하나같이 목줄을 하고 있다. 얼마 전 불법 방목된 염소들이 식생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농작물까지 해친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이곳 문갑도는 그런 걱정이 필요 없겠다.

 농장 덕분에 시야가 뻥 뚫렸다. 바다에는 마치 조물주가 공기놀이하다 던져 놓은 것처럼 올망졸망한 섬들이 사방으로 분산하고 있다. 그 빼어난 풍경에 나도 몰래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농장지대를 지난 탐방로는 또 다시 짙은 숲속으로 들어선다. 농장을 지났는데도 길은 말끔히 단장되어 있었다. 지난주가 추석, 조상님 묘역 벌초하듯이 정성들여 탐방로를 정비했던 모양이다. 주민들에게 글로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우리가 오르고 있는 깃대봉 300m에도 못 미치는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해수면에서 산행이 시작되므로 그 높이만큼 오롯이 올라야 한다. 가파른 오르막 구간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12 : 10. 두 번째 포인트인 당너머해변 갈림길에 이른다. 오른쪽은 마을, 그리고 왼쪽은 당너머 해변으로 연결된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갈림길. 이정표는 문덕뿌리 낚시터로 연결됨을 알려준다. 하나 더, 이곳이 해누리길 1코스와 2코스, 5코스가 나뉘는 당너머 분기점이 아닐까 싶다. 첨부된 지도는 이 부근에 당너머분기점을 표시하고 있지만, 조금 전의 당너머해변 갈림길과 이곳을 빼고는 다른 갈림길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문갑도 해누리길 1코스 및 5코스를 걷게 된다. 문갑도의 둘레길이라 할 수 있는 해누리길은 총 15.14km로 조성됐다. 여객선을 타고 온 탐방객들을 위한 당일치기 코스(4.25km, 선착장을 기점으로 깃대봉과 마을을 거치는 1시간 30분짜리 노선으로 첨부된 지도의 자색과 진녹색 선으로 칠해진 부분)과 문갑도를 크게 한 바퀴 돌 수 있는 5시간짜리 노선(12.55km)으로 구분해 조성했다. ! 사자바위 같은 명품 경관들을 잇는 4개의 연계코스가 나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갈림길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서서히 가겠다며 자신을 떨쳐놓고 가라 했을 정도로 버거워했던 구간이다. 오르는 도중 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이정표 ; 깃대봉 0.9km/ 마을/ 선착장 1.6km)을 만나기도 한다.

 12 : 18. 멋진 바위전망대를 만났다. 전망 좋기로 유명한 처녀바위로 오인 했을 정도로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바위에 오르면 굴업도, 가도, 각흘도, 선갑도, 백아도, 부도, 지도 등 덕적군도의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박씩을 투자해가며 굴업도와 백아도는 다녀왔다. 다음 차례로 꼽는 건 선갑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배경이 되었다는 무인도이다.

 길은 가파름의 연속이다. 감기로 인한 체력저하로 힘들어하는 집사람으로서는 죽을 맛이고...

 12 : 25. 이정표(깃대봉 0.5km/ 마을/ 등산로) 문갑풍월이란 팻말을 달았다. 섬의 외형이 글을 읽는 선비의 책상을 닮았다는 문갑도(文匣島). 당연히 글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을 게고, 이는 문갑풍월(文匣風月)’이란 사자성어를 만들었다.

 방향표시야 없지만 왼쪽으로 샛길이 하나 나있다. 초입에는 처녀바위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나들이 갈만한 곳이 없던 섬 처녀들이 이곳으로 소풍을 와서 색동치마를 입고 춤추며 놀았다나? 다른 얘기도 전해진다. 처녀들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 총각들이 거센 풍랑을 이겨내며 잘 돌아오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저 바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깃대봉 제일의 핫 플레이스인 처녀바위 20m쯤 위에 있었다. 바위는 소문난 조망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아름다운 덕적군도의 바다를 배경삼아 인생샷이라도 한 장 건지고 싶은 모양이다.

 집사람이라고 해서 그 대열에서 빠지겠는가. 모두 빠져나간 뒤에 한 컷...

 총각을 기다리는 처녀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 북쪽 깃대봉 방향을 제외한 동서남쪽 바다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올라오는 도중 만났던 두 곳의 조망처에서 바라보던 풍경을 합쳐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아래 사진은 올망졸망한 섬들이 몰려있는 덕적군도의 풍경이다.

 반대편은 덕적도와 소야도로는 모자란다는 듯. 자월면의 수많은 섬들이 빈 여백을 가득 메운다. ·소이작도, ·하승경도, 승봉도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 탐방을 마친 섬들이다. 특히 대이작도는 처가댁 형제들의 가족모임을 겸해서 다녀온 곳이기도 하다. 

 북쪽은 바다 대신 깃대봉이 조망된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나 혼자서 오르기로 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집사람이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며 혼자서 정상을 다녀오라 했기 때문이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따라 하산하겠다는 것이다.

 12 : 32. 문갑마을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사거리 안부에 이른다. 이정표(깃대봉/ 중이절골/ 마을/ 처녀바위)는 왼쪽으로 내려가면 중이절골에 닿음을 알려준다. ! 홀기재로 내려가는 하산 길이 막히다시피 한 탓에 이곳으로 되돌아와 문갑마을로 내려갔다는 점도 기억해두자.

 중이절골이 어디를 이르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해누리길 순환코스와 연결된다는 것쯤을 알겠다. 그렇다고 내려가 볼 생각은 없다. 시간도 없지만 월간 산의 기사를 이미 섭렵했으니 말이다. 대신 해당 글을 옮겨본다. <이중삼중으로 덤불이 앞을 막다가도 다시 걸을 만한 길이 되길 반복했다. 엄나무가 특산인 섬답게 도깨비 방망이의 무자비한 가시가 난무했다. 땅바닥엔 간간이 뱀이 있어 긴장감은 갈수록 절정으로 치달았다. ‘100m 걷기가 이토록 힘들 줄이야 싶었으나, 되돌아가기엔 늦었다. 둘레길치곤 오르내림이 커서 최대 100m 이상 고도를 올렸다 내리기도 했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정상에서의 환희를 맛보려면 턱 밑의 오르막길에서 땀 좀 흘려야 한다. 하나 더, 이 구간의 또 다른 특징은 나무가 하나같이 검게 그을린 채 가지만 앙상하다는 점이다. 2021 8월 일어난 산불 탓이란다. 산행대장 말로는 어느 등산객이 버린 담뱃불 탓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12 : 38-43. 드디어 깃대봉 정상에 올라섰다. 깃대봉은 문갑에서 가장 높다. 때문에 섬을 세부측량하면서 이곳에 깃발을 꽂았고, 사람들은 자연스레 깃대봉이란 이름을 붙였다.

 정상은 현재 전망대로 꾸며졌다. 시야를 넓히려는 듯 일단은 대를 올렸다. 그런 다음 바위에 걸터앉은 정상석을 가운데 두고 데크로 빙 둘러 난간을 만들었다. 그나저나 난 블랙야크 섬& 100 인증 챌린지가 싫다.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이들로 인해 부지하세월로 순서를 기다려야만 하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들 덕분에 집사람이 정상까지 올라올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문갑 제일봉답게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다. ‘황해 제일경으로 꼽힌다는 소문처럼 덕적군도의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0년여 전에 들른 조도(鳥島). 하도 섬이 많아 새 때가 몰려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었다. 이곳 깃대봉도 그에 못지않은 풍경을 보여준다. 선갑도, 울도, 지도, 백야도, 각흘도, 굴업도 등등...

 반대편 바다도 온통 섬. 섬의 천국인 덕적군도로도 모자라다는 듯, 이번에는 자월면의 크고 작은 섬들이 바다를 수놓는다. 덕적도, 소야도, 흑도, 자월도, ·소이작도 등등...

 지자체의 배려도 돋보인다. 양 방향에 조망도를 세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그림과 대비해가며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하산을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정표(누적바위/ 홀기재)가 가리키는 홀기재 방향에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웃자란 잡초가 길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냥 진행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자칫 길이라도 잘못 들 경우 돌아가는 배를 타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12 : 47. ‘중이절골 갈림길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문갑마을 쪽으로 내려간다. 산길은 가파르게 떨어진다. 하지만 흙길에다 폭까지 넓어 부담 없이 내려설 수 있다.

 12 : 50. 잠시 후 삼거리를 만났다. 이정표는 세워놓지 않았지만 홀기재에서 내려오는 길이지 싶다. 그런데 길이 의외로 또렷한 게 아닌가. 아까 깃대봉 정상에서 약간의 모험을 감행했더라면 별 어려움 없이 내려왔겠기에 하는 말이다.

 12 : 55. 가파른 내리막길은 농막을 만나면서 끝난다. 이후부터는 산자락을 옆으로 째며 서서히 고도를 낮춘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가세요’. 초청이 내심 반가웠지만 배를 타야 한다는 핑계로 그냥 지나친다. 충분히 배를 탈 수 있다며 다시 권했지만 소심한 우리 부부는 고맙다는 인사만 드리고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산행대장의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배가 10~20분 정도 빨리 들어올 수도 있고, 그렇다고 고지된 출항시간까지 기다리는 것도 아니라니 어쩌겠는가.

 이후부터는 경사가 거의 없이 평탄하게 이어진다. 중간에 갈림길(이정표 : 문갑마을/ 처녀바위/ 홀기재)을 만나기도 한다.

 이 구간의 볼거리는 돌탑이다. 누군가가 작은 돌탑 수십 기를 길가 곳곳에 쌓아 놓았다.

 13 : 05. 그렇게 10분쯤 걸어 임도로 내려선다. 이후부터는 포장길을 따라 마을로 간다. 이 구간에서도 갈림길(이정표 : 선착장/ 2코스 분기점/ 깃대봉)을 만난다.

 13 : 10. 5분쯤 더 걸으면 문갑마을에 이른다.

 마을 뒤 삼거리에서는 오른쪽으로 갔다. ‘윗말이 아닐까 싶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뜬금없는 풍경을 만났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린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던 나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디다 버려야 할지로 고민해도 모자랄 소라껍질이 멋진 조형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누가 저런 기발한 발상을 했을까?

 궁금증에 이끌려 소라껍질을 따라가 봤다. 그리고 갯일을 하는 아낙네들로 벽면을 가득 채운 민가를 만났다.

 문간에 서니 문갑도 아! 옛날이여라는 현판이 반긴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들어갈 수야 없는 노릇. 마실 나온 이웃 주민에게 내부 구경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봤더니(동네 박물관쯤으로 생각했기 때문). 친절하게도 주인장을 불러 내 의중을 전해주신다. 주인장도 맘껏 둘러보라고 했음은 물론이다.

 집안은 옛 물건들로 가득했다. 농기구나 가구는 물론이고 학용품까지 우리네가 써오던 추억의 물건들이다. 옛 추억을 소환하는 사진도 몇 점 걸었다. ‘문갑도 역사박물관이라고나 할까?

 문갑도 아 옛날이여’, ‘문갑도의 추억’, ‘가난한 어부의 아들 등 주인장의 솜씨로 여겨지는 작품도 몇 점 걸려있다. 귀경해 검색해보니 옹진군 갈매기소식지 옹진 그리고 사람 코너에 실렸던 글이다. 아무래도 집주인이 김용준씨가 아니었을 까 싶다. 아무튼 멋진 주인장 덕분에 소중한 옛 추억을 불러올 수 있었다.

 13 :15. 미몽에서 깨어나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양짓말에 이른다. 아래 사진은 문갑마을 전경이다.

 주민이라고 해봐야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자그만 섬이지만 있을 것은 다 있었다. 행정지원센터, 경찰파출소, 물류보관소(우체국 대신) 등등...

 마을 앞 방파제는 문갑도의 역사를 담았단다. 하지만 그림이 적어 그 내용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민박 및 식당(운영은 않는 듯)을 겸한 매점은 전화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모양이다. 캔 맥주로 목이라도 축일까 해서 들어갔으나 인기척이 없었다. 내 낌새를 보고 뒤쫓아 온 산행대장이 주인장은 조개 잡으러 갯벌에 나갔단다. 산행대장에게 돈을 치루고 맥주를 건네받았지만, 자칫 전화로 주인장을 부를 뻔했다.

 마을 앞 문갑해수욕장은 길이 700m에 너비가 50m나 되는 고운 모래사장을 갖고 있었다. 끝자락의 언덕을 넘으면 한층 더 뛰어난 한월리해수욕장이 나온단다. 단단한 모래질 해변으로 유명한 곳인데, 이 해수욕장들의 인기가 높아 덕적군도의 5개 나래호 항로 중에서 굴업도 다음으로 많은 여행객이 문갑도를 방문한단다.

 인천시 토탈디자인 빌리지 조성사업(마을 단위의 종합적인 경관 조성)’의 지원을 받아 동네를 단장하는 과정에서 태어났다는 예쁘장한 연못(유수지공원이라나?)’도 눈에 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천주교 문덕공소이다. ! 섬에는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감리교회도 있다고 했다.

 13 : 20. 주변 풍광에 빠져 있다가 선착장으로 간다. 마을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눈앞에 펼쳐지는 다도해 풍광을 눈에 담으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저 수조의 물은 해수욕장을 찾은 피서객들을 위한 담수일까, 아니면 갯벌에 일 나갔다가 돌아오는 주민들을 위한 바닷물일까?

 바닷가를 따라 난 길은 곡선미가 무척 고왔다.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있는 바다는 물론이고, 담쟁이넝쿨로 뒤덮인 바위벽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도로 개설 때 생긴 생채기 곳곳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화분이 만들어졌다.

 조잡하지만 의젓한 삭도(索道). 절벽을 처마삼아 제비집처럼 둥지를 튼 절간이나, 강원도의 석탄광(지금은 사라졌지만)에서나 볼법한 풍경이, 초라한 모습으로 변신해 여행객들의 눈요깃거리가 되어준다.

 제법 큰 해식동굴도 눈에 띈다. 저 안에 호랑이라도 한 마리 앉히고, 스토리텔링으로 포장하면 멋진 관광 상품이 될 텐데...

 13 : 35. 선착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1시간 55분을 걸었다. 앱은 4.89km를 찍고 있다. 산행인데다 집사람의 컨디션이 엉망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문갑도의 볼거리는 문갑8으로 집약된다. 한얼리해변·처녀바위전망대·문턱뿌리사자바위·병풍바위자연조각공원·진모래·할미염전망대·당공바위·벼락바위 등 수억 년의 세월이 빚고 파도와 바람이 만든 자연의 걸작들이다. 그런데 내가 본 것은 고작 처녀바위전망대가 전부다. 다시 한 번 문갑도를 찾아와야 할 이유가 아닐까 싶다.

 에필로그(epilogue) : 주민들은 문갑도의 옛날을 풍요와 인심으로 꼽았다. 어족자원이 풍족하고 마을에 장사꾼이 찾아오면 먹던 밥그릇을 내줄 정도로 인심 넘쳤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풍부하던 어족자원은 사라졌고, 대신 펜션에 민박, 행정기관까지 들어섰다. 하지만 넘치는 인심은 조금도 변치 않았나 보다.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커피 한잔 권하는 게 스스럼없었고, 뜨내기 불청객인데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집안을 둘러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시 한 번 찾아와야 할 또 다른 이유다. 하룻밤 머물며 문갑팔경을 꼼꼼히 둘러보고, 주민들이 개발했다는 열흘밥상까지 받아본다면 이 아니 좋을손가. 섬의 특산물인 벙구나물, 빨간감자, 고사리, (고동) 등으로 만들었다니 얼마나 맛있겠는가.

고대도(古代島)

 

여행일 : ‘23. 5. 13()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

산행코스 : 선착장또랑산당너머해수욕장당산뱅부여귀츨라프공원선바위전망대해안컨테이너선착장(소요시간 : 7.64m/ 3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대천항에서 북서쪽으로 14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그만(0.87) 섬으로 해안선 길이도 6km에 불과하다. 하지만 풍부한 수산자원으로 인해 마한 때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마을을 형성했단다. 옛 집터가 많다고 해서 고대로(古代島)’로 불리는 이유이다. 어장의 발달은 자가발전소·자체전화·상수도시설 등의 편의시설을 일찍부터 들여왔고, 주민들은 현대식주택을 짓는 등 문화생활을 누리며 부유하게 살아왔다. 물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깨끗한 청정해역은 인근 장고도와 함께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근원이 되기도 했다. 참고로 고대도는 우리나라 최초 기독교 선교가 이뤄진 섬이기도 하다. 1832 7 25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 1803-1851)’선교사가 고대도에 도착, 8 12일까지 머물렀다.

 

 찾아오는 방법

일단은 대천 연안여객선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고대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서해안고속도로 대천 IC에서 내려와 국도 36호선(원산도 방면)를 타고 신흑동로터리까지 온 다음 대천항로로 들어서면 잠시 후 대천항에 이르게 된다. 타고 온 차랑은 공영주차장(무료)에 세워두면 된다.

 고대도의 탐방로는 3개 코스로 나눌 수 있다. 선착장을 시작으로 동일교회선교센터·고대도교회·해안길·귀츨라프기념공원·선바위로 이어지는 1코스(1.4km)와 선착장에서 등대·고대도교회·당너머해변까지의 2코스(1.4km), 이 둘을 합해 운용하면 3.3km짜리 3코스가 된다. 여기에 봉화제를 보태는 탐방객도 있으나 봉 따먹기를 하지 않은 이들이라면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를 태우고 갈 가자 섬으로 호는 사람과 차를 함께 싣는 카페리(Car ferry)’ 선박이다. 매일 3(07:20, 13:00, 16:00) 대천항을 출발해서 삽시도(술똥선착장 및 밤섬선착장)와 장고도, 고대도 등을 들른 다음 다시 대천항으로 되돌아온다. 운임은 고대도 기준 12,300원.

 40분쯤 후, 첫 번째로 들른 삽시도의 술똥선착장’. 대부분의 차와 사람들이 이곳에서 내렸다. 배가 들르는 3개의 섬 가운데 가장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삽시도는 8년 전에 다녀갔기에 이번엔 들르지 않았다. 

 두 번째로 들르는 곳은 장고도, 장고처럼 생겼다는 섬의 모양새 보다는 앞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들이 눈길을 끈다. 장고도도 6년 전에 방문했었다. 

 대천항을 출발한지 1시간20분만에 고대도선착장에 도착했다. 100여 가구, 250여명이 살아가는 고대도는 섬으로 들어오는 선착장과 연결된 마을인 가운데말과 섬 아래쪽에 있는 아랫말로 나뉜다고 했다. 주민 대부분은 이곳 가운데말에 거주한단다.

 배에서 내리자 고대도의 입간판이 반긴다. ‘청정해역 어촌마을에 오신 걸 환영한단다. 맞다. 고대도는 물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깨끗한 바다가 자랑거리다. 그로인해 인근 장고도와 함께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최근에는 행정안전부와 한국섬진흥원에서 이달의 섬으로 뽑기도 했다. ! 고대도둘레길을 소개하는 안내판도 눈에 띈다. 그러니 고대도에서 얼마동안 머무를지를 궁리해 보자. 다음 배가 14:30에 있고, 마지막 배는 16:50에 들어오니 타고나갈 배를 염두에 두고 트레킹 코스를 설계해 볼 일이다.

 고대도 표지석은 ‘GOD 愛島라는 브랜드를 달았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섬이라면서... 하긴 이곳 고대도가 우리나라 기독교의 최초 선교지라니 그럴 만도 하겠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런 꼬맹이 섬에까지 선교사를 보내주었겠는가. 그것도 다른 어느 곳보다 먼저.

 몇 걸음 더 걸어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동일교회 고대도 선교센터가 반긴다. 센터는 칼 귀츨라프 선교기념이라는 수식어로 안내를 시작한다. 우리나라에 개신교의 첫 씨앗을 뿌렸다는 선교사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를 말하는가 보다. 참고로 1832 7월 고대도의 안항이라는 곳에 범선 한 척이 정박했다. 길이 46.5m, 깃대 높이 34.1m 507t급 이양선 로드 에머스트(Lord Amherst)였다.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온 영국 국적의 이 배는 폭 9m 세곡선이 고작이었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 섬 주민에겐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내부에는 귀츨라프가 타고 왔었다는 무역선 로드 앰허스트(Lord Amherst)’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휴 린제이(H. Lindsay)’가 선장인 저 배는 1832 2월 중국 마카오를 떠나 7월에 서해안의 백령도를 거쳐 충청도 홍주목만(洪州牧彎) 불모도(不毛島)에 도착한 후 고대도의 안항(安港)에 예인되었다.

 좌우 벽면은 귀츨라프에 대한 얘기로 채워 넣었다. 우리나라에 주재하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한국을 다녀간 선교사들이 더러 있었다. 선교사로 파송된 게 아니었기에 한국에 거주하면서 선교 사역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온 이들로 교회 역사에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중 한국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선교사가 프러시아계 독일인으로 의사이자 목사였던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이다. 그게 1832년이었다며 개신교의 선교 원년으로 삼아 기념하겠다는 것이다.

 귀츨라프는 1803 7월 독일 포메라니아(Pomerania) 지방의 피리쯔(Pyritz)에서 유태계 독일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 경건주의운동의 발상지였던 할레(Hall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26년 네덜란드 선교회 파송을 받고 동남아 자바 지방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이후 영국 동인도회사의 1천 톤급 무역선 로드 앰허스트(Lord Amherst)’에 통역·선의(船醫선목(船牧)으로 참여함으로써, 한국에 오는 첫 선교사로서의 기록을 남겼다.

 근처에 있는 방문객 센터는 텅 비어 있었다. ‘퓌리츠라는 카페와 여객선 매표소가 들어설 예정이라는데, 칼 귀츨라프의 고향마을 ‘Pyritz(현재는 폴란드 땅이란다)’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카페는 언제 들어설지 요원해 보였고, 매표소도 이곳이 아닌 원래의 장소에서 승선권을 팔고 있었다.

 섬마을에는 식당이 없다. 하지만 상점은 두 곳이나 들어서 있었다. 덕분에 트레킹을 마치고 타고 나갈 배를 기다리는 동안 시원한 캔맥주로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오른쪽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방파제와 그 끄트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등대를 전방에 놓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 근처에 단면이 날카로운 간단여가 있다고 한다. 그 너머 북서쪽 끝에는 옛날 오천수영의 수군들이 가끔 드나들며 목을 지키던 조구여도 있단다. 해산물이 많이 나는 곳이라나? 여기서 란 물속에 잠겨있는 바위를 말한다. ‘암초의 하나로 보면 되겠다.

 내연발전소가 눈에 띄는 걸로 보아, 필요로 하는 전기는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는 모양이다.

 발전소 앞 해변은 질 좋은 모래사장이다.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하겠건만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위험시설을 곁에 두었다는 게 흠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망 손질을 하는 어부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외국인이다. 맞다. 언론은 초 고령사회라며 최근의 어촌 현실을 심심찮게 전한다. 바닷가 어촌마을이지만 배를 탈만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 공백을 이제 외국인들이 메꾸어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해안도로가 끝나는 지점의 대나무 숲에서 나무계단을 오른다. ‘또랑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또랑산과 당너머해수욕장, 당산을 거쳐 마을로 되돌아오는 코스이다.

 초입에 세워놓은 탐방로 안내도를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길은 시작부터 탐방객들의 기를 확 죽여 버린다. 또랑산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게 버거울 정도로 길지 않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지만 나무계단이 끝나면서 산길은 한없이 고와진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거기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양쪽 옆에 밧줄 난간을 설치해 길과 숲을 확실히 구분했다.

 산으로 들어선지 10(트레킹을 시작한지는 35). ‘또랑산으로 가는 갈림길(이정표 : 당너머해수욕장 330m/ 또랑산 180m)을 만났다. 또랑산은 오른쪽 방향이다.

 탐방로 주변을 우산나물의 군락지였다. 채취 시기는 지났지만 참취도 심심찮게 보였다.

 이정표는 또랑산 180m 전방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산길은 계속해서 고도를 낮춘다. ‘또랑산이 산을 이르는 지명이 맞는 걸까? 결론은 아니올시다였다. 이정표가 말한 180m 전방에서 우린 바닷가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려선 바닷가는 멋진 전망대였다. 장고를 닮았다는 섬, 장고도가 길게 누워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고, 그 오른편으로는 육지나 마찬가지인 안면도가 드넓게 펼쳐진다.

 왼편, 그러니까 당너머해수욕장 쪽으로 해식애가 펼쳐진다. 길이 있을까 해서 나아가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영광의 송이도에서 저런 바위절벽에 매달려 낑낑대다가 카메라까지 사망시켜버린 아픈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당너머해수욕장쪽으로 간다. 이어서 3분 후에는 포장길을 만나고, 길은 이곳에서 양쪽으로 나뉜다. 당산은 왼편이다. 하지만 그 당산 너머에 있다는 당 너머 해수욕장은 오른쪽이다. 그러니 해변까지 내려갔다가 되돌아 나와야 한다.

 조금 더 걷자 침목계단이 해변으로 내려서란다. 주변은 솔밭, 수령이 백년을 훌쩍 넘겼을 것 같은 적송(赤松) 수십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내려선 해수욕장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었다. 고운 모래가 한가득인 작은 해변을 노송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게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고대도는 풍요의 상징이라고 한다. ·여름·가을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갯벌에서 손쉽게 조개나 고동을 잡을 수 있고, 섬 주변의 암초에서 해삼이나 전복, 홍합도 손쉽게 채취할 수 있단다. 하지만 섬 주변이 온통 주민들의 양식장이라니 그냥 구경만 해둘 일이다.

 삼거리로 돌아와 이번에는 반대편, ‘당산 쪽으로 간다. 이어서 몇 걸음 더 걸으면 민가(옛 도리사)가 반긴다. ‘당산은 민가 앞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파고들어야 만날 수 있다.

 당산 아래 있었다는 실상묘법연화종의 사찰 도리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개에게 먹이를 주러 나오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주지스님이 돌아가신 후 폐사가 되었고, 현재는 절과는 무관한 사람이 살고 있단다.

 적당히 가파른 산길을 잠시 오르자 섬&산의 인증 장소인 당산(44m)’이 반긴다. 고대도에는 이곳 당산 말고도 뒷산·산끝재·봉화재 등 여러 개의 산이 있다. 이중 봉화재(길이 어설퍼서 가보지는 못했다)가 가장 높다지만 높이는 겨우 89.5m에 불과하다. 하지만 예부터 조난이 발생하거나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땐 봉화를 올렸을 만큼 중요한 장소였다고 한다.

 정상석 뒤는 각시당이다. 황토와 돌로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사각의 제단(祭壇)을 쌓았는데,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당제를 지내는 공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농토가 부족했던 고대도의 주민 대부분은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에 종사했는데, 워낙 사고가 잦다보니 이곳 당산에 당집(1999년 화재로 소실됐다)을 짓고 매년 정월 초에 소를 잡아 제를 올렸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하나둘 섬을 떠나면서 한동안 중단됐다가, 1992년부터 다시 지내온다고 한다.

 당산에서 내려오면 마을. 고대도의 취락은 낮은 구릉지 사이에 형성되어있다. 그 주위를 밭들이 제법 넓게 둘러싼다. 이렇듯 고대도의 마을은 원산도와 안면도를 마주하며 선착장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

 해산물이 널리다시피 한 고대도는 그 덕분에 모든 게 풍요롭다고 했다. 그래선지 눈에 들어오는 집들 대부분이 서울 근교의 단독주택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지어졌다. 치장 또한 여느 전원주택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담수화시설이 들어서 있는 걸 보면, 물은 그다지 풍족하지 않는 모양이다.

 바닷가까지 나와 해안도로(고대도둘레길 1코스)를 따라 귀츨라프공원이 있는 고대도 남쪽 끝으로 간다. 지금까지는 고대도둘레길 2코스(선착장, 등대, 당너머해수욕장, 고대도교회) 50분 동안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선교센터가 낀 선착장 주변을 돌아보는 데는 25분이 걸렸었다.

 탐방로는 작은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청결했다. 곳곳에 놓인 저 빗자루가 원인이지 싶다. 주민들 스스로가 청결을 유지해나간다는 의미일 게고 말이다.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길가에는 대형 고무 통이 늘어서 있었다. 고대도의 특산품인 까나리액젓 열치(큰 멸치)이 안에서 숙성되는 중이라고 한다. 숙성된 젓갈은 대천항으로 내다 파는데, 주민 소득의 한 축을 당당히 꿰차고 있다나?

 머리를 제거한 채 말리는 생선도 눈에 띈다. 복어 새끼인데, 6개월 이상 바싹 말렸다가 복어의 독소가 제거되는 가을에 찜이나 지져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란다.

 새로 짓고 있는 저 건물은 어촌계공동작업장이 아닐까 싶다. 예전 고대도는 고기잡이로 먹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3가구 정도만 고기를 잡고, 나머지는 바지락·낚지·소라 등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바지락 양식 농장이 있어 4월부터 12월까지는 바지락 채취에 눈코 뜰 새가 없다나?

 공동작업장 앞 해변은 몽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고 귀여운 몽돌들이 조개껍질 부스러기와 함께 모래사장을 대신한다. 파도가 몰려오자 그 몽돌들이 울어댄다. 파도와 몽돌이 빚어내는 이중주다. 한 마디로 기가 막히다.

 눈과 귀만 즐거운 게 아니다. 갈매기를 희롱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다. 동쪽 장벌에 바지락 양식장이 들어서 있고, 조개나 고동이 많이 잡힌다고 했는데 이를 찾아 모여든 모양이다.

 바다로 시선을 옮기자, 사진 전시회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풍광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푸른 바다 위에 태안반도의 영목항과 원산도를 잇는 원산·안면대교가 두둥실 떠올랐는데, 여기에 억새섬·시루섬 등 꼬맹이 섬 두어 개가 화룡점정을 찍는다.

 맞은편의 원산도는 앞에서 말한 원산·안면대교가 놓이면서 육지가 되었다. 여기에 국내최장 해저터널인 보령해저터널까지 뚫리면서 이젠 접근성까지 좋아졌다.

 다리로 변신한 해안도로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바닷가를 따라 조금 더 가면 바다 위로 길이 나있다. 긴 다리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해안의 가장자리를 따라 경운기가 다닐 정도의 넓이로 길을 냈다. 갯벌에서 먹고사는 주민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바다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곳곳에 만들어 두었다.

 다리 위를 걸으며 바라보는 해식해안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해안의 굴곡을 따라 길도 곡선을 이루면서 앞으로 나간다. 그렇게 걷다보면 해안절벽이 끝나는 곳에서 다리는 다시 땅에다 낸 길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폭은 다리와 마찬가지로 좁다.

 모퉁이를 돌기 바로 직전 전망대로 가는 길이 나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바닷가를 계속 따르기로 했다. 저 끄트머리 어디쯤에 전망대로 오르는 길이 나있을 것 같아서이다.

 몇 걸음 더 걷자 뱅부여가 얼굴을 내민다. 돌출된 갯바위가 바다를 향해 길을 만들고 있다.

 바위 속에 갇힌 물 위에는 하늘이 담겼다. 미세먼지 탓일까? 바다 건너 희뿌연 원산도가 아름다워야 할 풍경화를 망쳐버린다.

 해안도로로 내려선지 20분(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40분). ‘뱅부여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를 기념하는 자그만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가 타고 온 배가 정박했다는 고대도의 안항(安港)이 이곳인 모양이다. 1832 7 25일 도착한 귀츨라프는 8 12일까지 머물렀다.

 칼 귀츨라프 선교비는 그가 타고 온 로드 애머스트호를 형상화했다. 그의 업적은 다른 빗돌을 세워 전한다. 귀츨라프의 앞은 최초라는 단어로 압축된다. 한국 개신교 선교사, 한글 주기도문 번역, 한문성경과 한문 전도서적 전달, 세계에 한글의 우수성 소개, 서양 감자 파종, 서양의 근대 의술 베풂 등이다. 첫 번째 업적으로 꼽는 선교는 1866년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 34, 1884년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 1885년 입국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53년 앞서 이루어졌다.

 기념비의 받침돌에는 한글의 자음 ···...’을 새겨놓았다. 왼쪽에는 영어로 Lord’s Prayer를 음각했다. 귀츨라프가 한자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려고 시도했음을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검문을 위해 앰허스트호에 올랐던 마량진 관리들이 일기불순으로 하룻밤을 배에서 머물렀고, 귀츨라프는 이들(홍주목사 이민회의 서생 )에게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준 다음 한글로 토를 달아줄 것을 부탁했다. 이것이 부분적으로나마 한글로 성경을 번역한 첫 번째 사건이다.

 스페인 설치미술가 후안 가라이사발(Juan Garaizabal)’이 직접 설치했다는 도시의 기억 베를린(Memoria Urbana Berlin)’도 눈에 띈다. ‘보헤미아 베들레헴교회(귀츨라프를 배출한 베를린선교학교를 설립했다)’ 예배당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베들레헴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훼손됐고, 1962년 베를린 도시계획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었다. 그 후 2012년 갈라이사발에 의해 원래 교회의 위치에 31m의 철근 조형물로 재탄생했는데, 고대도의 작품은 베를린의 것을 5m로 축소시켰다고 한다.

 기념공원 앞은 자갈밭 해변이다. 큰 자갈, 작은 자갈, 둥글둥글한 자갈, 납작한 자갈에 양념으로 모래와 조개가루가 섞였다. 이역만리에서 온 코쟁이들을 떠올리며, 귓가로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즐기기 딱 좋은 곳이다.

 고대도의 남쪽 바닷가는 작은 바위들 천국이다. 물이 빠져나가면 사자·코뿔소·독수리 등 다양한 모양의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중에서도 높이가 15m나 된다는 선바위(돛단여)’는 백미다. 고대도의 랜드 마크로 고기잡이 나가는 어부들이 하루의 무사함을 빌며 머리를 숙이고 지나간다고 해서 기원바위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공원 부근에서 오솔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 50m쯤 올라간 지점에서 전망대로 연결되는 탐방로를 만났다.

 통나무 난간을 두른 탐방로를 100m쯤 올라가자 전망대가 나타난다. 철제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데크 전망대를 올렸다.

 전망대에 오르면 고대도의 랜드 마크라는 선바위가 성큼 다가온다. 아까 공원에서는 카메라의 줌을 당겨야만 했는데,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들이 선바위 주변의 풍광을 삼켜버리는 건 아쉽다 하겠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이번에는 장고도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어촌계공동작업장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쪽, 그러니까 서쪽 해안으로 간다. 움푹 들어간 이 일대는 농경지가 꽤 넓게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논은 없고 밭에 고추·양파·배추 등을 경작하는 정도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35분.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멋진 해변이 나온다. 넓지는 않지만 뛰어난 풍광과 전망을 보유하고 있어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할 것 같다. 굵직한 노송이 모래사장을 둘러싸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변에 서면 장고도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해안절벽을 따라 다리도 놓여있다. 하지만 만든 지 오래인 듯 바닥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그렇다고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떤 멋진 볼기리가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다리의 끝은 썩어 문드러진 컨테이너박스가 지키고 있었다. 안에는 부서진 책상도 놓여있다. 길에서 만난 주민은 양식장 감시초소로 사용하던 시설이라고 했다. 이 부근에 전복과 해삼 양식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0분. 마을로 되돌아와 골목을 누벼봤다. 첫 만남은 마을 복지회관’. 자그마한 섬에 비해 호화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지어졌다. 지상 2층 건물에 문화복지시설과 주민휴게시설이 들어서있단다.(부근에 있는 보건소는 생략)

 귀츨라프 선교사의 역사적인 첫 걸음을 기념한다는 고대도교회는 꽤 세련됐다.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루는 세련된 외모가 돋보이는데, 십자가만 아니라면 여느 집단의 사옥으로 오해하기 딱 좋을 듯. 귀츨라프가 고대도에 복음의 씨앗을 내린지 딱 150년이 지난 198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벽에는 한글을 영어로 번역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귀츨라프가 한자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을 형상화 한 것이란다. 당시의 번역은 일부이긴 하지만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최초의 시도로 알려진다.

 고대분교(청룡초등학교) 터에는 칼 귀츨라프 해양역사전시관이 들어섰다. 고대도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거기다 멋지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완공되면 선교센터가 이곳으로 옮겨올 것이라고 한다.

 날머리는 고대도선착장(원점회귀)

마을을 둘러본 다음 선착장으로 빠져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대천항으로 되돌아가는 승선권은 고대도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우린 대천항에서 이미 샀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핸드폰 앱에 찍힌 거리가 7.64km이니 무척 느리게 걸은 셈이다. 선교센터 등 볼거리가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고하도(高下島) ‘용오름 길

 

여행일 : ‘21. 5. 2()

소재지 : 전남 목포시 달동

산행코스 : 고하도복지회관둘레숲길입구말바위전망대(판옥선)용오름길용머리해안데크전망대(판옥선)등산로입구이충무공유적지고하도복지회관(소요시간 : 7.04km/ 2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목포에서 2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고하란 지명은 높은 산(유달산) 밑에 있는 섬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삼국시대 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장군에 의해 전략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충무공유적지(지방기념물 제10)가 조성되어 있다. 고하도 트레킹의 자랑거리는 용머리길에서 바라보는 유달산과 목포시가지, 그리고 다도해에 대한 조망이다. 특히 밤바다와 어우러지는 오색등의 향연은 목포관광의 백미로 꼽힌다. 참고로 이순신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이 섬을 보화도(寶花島)’로 적는다. 그밖에 고화도(高和島고하도(高霞島칼섬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목포사람들은 친근하게 용섬이라 부른단다.

 

 산행들머리는 고하도복지회관 주차장(목포시 달동 782-16)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IC에서 빠져나와 국도 1호선(2012년 목포대교가 개통되면서 고하도가 기점이 됐다)을 타고 고하도(목포신항)’로 들어온다. 신항교차로에서 좌회전 고하도길을 따라 1.5km쯤 들어오면 고하도 복지회관에 이른다. 복지회관 앞에 화장실은 물론 쉼터용 정자까지 갖춘 널찍한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고하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둘레길로, 크게 둘레숲길 용오름길로 나뉜다. 거기에 해안테크까지 끼워 넣어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여정이라 여기면 되겠다. ·종점은 둘레숲길의 들머리에서 가까운 고하도 복지회관이 보통, 하지만 최근 해상케이블이 생기면서 케이블카스테이션을 기점으로 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고하도안길을 따라 복지회관 쪽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반대방향으로 가면 조선육지면 발상지비를 구경할 수도 있다. 참고로 이곳 고하도는 육지면(陸地棉)이 처음 재배된 곳이기도 하다. 1904년 목포 주재 일본영사에 의해서였다. 육지면은 고려 말 문익점이 가져온 재래면과 달리 남미가 원산지다. ‘미국면이라고도 불리는데, 면사의 품질이 재래면보다 훨씬 좋았다.

 150m쯤 걸으면 윗마을로 넘어가는 고하도길’. 탐방로는 도로(어느 기자는 이 부근을 뒷도랑 잔등이라 부르고 있었다)를 가로질러 맞은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초입에 등산로안내판과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정표(용머리 2.8/ 이충무공유적지 0.3)는 터닝 포인트까지의 거리가 2.8km임을 알려준다. ! 첨부된 지도의 둘레숲길 입구에서 산자락으로 들어선다는 것도 알아두자.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은 고하도등산로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인 둘레숲길이다. 그래선지 이름에 딱 어울리는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걷게 된다.

 등산로는 정비가 잘되어 있었다. 길이라도 나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고, 가파른 구간이나 전망 좋은 지점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로 활용했다.

 마냥 흙길만 걷는 건 아니다. ‘큰덕골저수지(왼쪽 0.7km 지점)’ 갈림길을 지나면 아래 사진처럼 위태로운 바위구간을 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내 시선이 바삐 움직이는 이유는 뭘까? 멸종위기 난초인 석곡이라도 눈에 띌까 해서다. 바위나 나무줄기에 붙어사는 이 식물이 고하도 인근에서 드물게 발견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석곡 꽃은 흰색 또는 연한 홍색인데 향이 좋아 관상용으로 부문별하게 채취되면서 멸종위기에 처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야가 트인다. 바다 건너편은 영암. 영암과 목포 사이 바다에 작은 섬, 등대도가 떠 있다. 발아래에 고하도선착장이 놓여있음은 물론이다.

 무명봉(아까 그 기자는 옛날 불당골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올라와 불을 지폈다는 큰산으로 적고 있었다)으로 올라섰던 탐방로가 급전직하로 떨어진다. 그것도 바윗길. 하지만 계단과 난간은 물론이고 밧줄까지 매어 위험요인을 모조리 없애버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8. 안부로 내려서자 길 하나가 오른편으로 나뉜다. 초입의 등산로안내판에 고하도등산로로 표기된 지점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이따가 산행을 마치고 되돌아나갈 때 이용할 계획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고하도진성 수군통제영터를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이제 능선을 따른다. 능선을 따라 평지와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된다. 가장 낮은 곳은 해발고도가 3m,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해봐야 79m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길을 3.2km쯤 갔다고 되돌아오는 왕복 코스다.

 그렇게 잠시 걸어 삼각점이 설치된 봉우리(이정표 : 용머리 1.8/ 등산로입구 1.0)로 올라섰다. 안내판은 전망 좋은 곳이라며 잠시 쉬어갈 곳을 권한다. 벤치까지 준비되어 있다면서.

 안내판은 또 유달산 일대와 목포항이 바라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본 풍경은 그보다도 훨씬 넓었다. 입암산과 삼학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오고 있었다.

 탐방로는 이제 경사까지 사라져 버렸다. 평탄한 것이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다. 그러다보니 숲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까지도 정겹다. 바닷바람도 살랑살랑 마음속까지 청량하게 해준다.

 잠시 후 또 다른 전망대에 이른다. 능선을 걷다보면 이렇듯 시야가 트이는 곳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데, 유달산과 목포항·삼학도에 앞으로 걸어야할 용처럼 길게 뻗은 고하도의 모습까지. 이곳 용오름길에서는 항구도시 목포를 마음껏 느낄 수 있다.

 이곳의 안내판도 지명(현재 위치의)을 알려주지 않은 채 그냥 쉬어갈 것만 권하고 있었다.

 바위지대라서인지 조금 전의 전망대보다 시야가 훨씬 넓어졌다. 유달산 일대와 목포항은 기본. 거기다 목표대교를 더했는가 하면, 고하도의 용머리까지 고개를 살짝 내밀고 있었다.

 내려가는 길은 나무계단을 놓았다. 바위지대라서 길 내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등산로가 정비되기 전에는 밧줄에 매달려 씨름깨나 할 수밖에 없었겠다.

 계단은 전망대 역할까지 해준다. 길게 뻗은 고하도와 그 끝에 있는 용머리, 목포대교까지 시원하게 보인다. 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 저 풍경은 옛날 유생들 사이에서 용두귀범(龍頭歸帆)으로 불리기도 했다. 돛단배가 만선의 기쁨을 안고 고하도 용머리 앞을 돌아오는 모습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켰다나?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계속된다. ‘둘레숲길이라는 브랜드가 저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풍경이라 하겠다. 하나 더, 옛 선비들은 이곳 고하도를 고도설송(高島雪松)’이라 읊으며 목포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소나무가 저렇게 많았기에 가능했지 싶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5, ‘말바위에 이른다. 거대한 바위 하나가 그보다 조금 작은 바위에 걸쳐져 있는 형상인데, 올라타고 있는 바위의 모양이 말의 발굽을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말바위에서 해안가로 내려가면 일제강점기에 만든 동굴진지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길을 안내하는 그 어떤 표식도 찾아볼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길을 나서니 8분쯤 되는 지점에서 또 하나의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정표는 왼편이 해상케이블카 고하도 스테이션으로 연결됨을 알려준다.

 잠시 후, 목포해상케이블카의 철탑이 그 육중한 몸매를 드러낸다. 목포 앞바다를 가르며 아래로 쳐졌던 케이블이 저 철탑에서 다시 고도를 높였다가 고하도 스테이션으로 내려간다. 고하도와 북항스테이션을 잇는 3.23km 길이의 저 케이블카를 타면 목포9(木浦九景) 중 유달산(1)과 목포대교(2), 삼학도(7), 다도해(8)를 구경할 수 있다고 했다.

 지자체는 황량할 수밖에 없는 철탑(이정표 : 고하도전망대 370m/ 용오름숲길) 주변을 포토죤으로 바꿔놓았다. ‘하트박스 조형물을 배치해, 찾아온 연인들이 이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도록 했다. 하나 더, 사랑은 영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걸 바라는 연인들이 남긴 열쇄도 꽤 많이 매달려 있었다.

 이후 전망대까지 370m 구간은 전형적인 산책로이다. 아니 숫제 차량이 다녀도 될 성 싶은 널찍한 임도로 변해있다.

 이 구간에서 우린 하트의자 전망대도 만났다. 안내판은 의자의 중간이 ‘V’자 모양으로 꺾인 탓에 서로가 가깝게 앉을 수밖에 없다며, 앉기만 해도 사랑에 빠진다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곳은 조망의 명소이기도 하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유달산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이를 하트의자와 함께 넣는다면 인생샷을 건질 수도 있겠다. 나처럼 혼자서 찾아온 이들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이겠지만.

 시선을 조금 옮기자, ‘목포대교가 나도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대교의 하얀 선이 하늘철도처럼 보인다. 그 왼편에서는 아름다운 해안선이 용의 옆구리를 호위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50. 고하도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고하도 전망대에 이른다. 이충무공이 명량대첩 승리 후 107일 동안 전열을 가다듬었던 고하도. 충무공의 얼을 기리고자 13척의 판옥선 모형을 격자형으로 쌓아올린 24m 높이의 독특한 건물이다. 전망대 말고도 충무공의 얼을 담은 교육 및 관람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내부는 휴게공간과 전시공간, 그리고 전망공간으로 꾸며졌다. 1층은 휴식공간인 카페, 2~5층은 목포관광을 소개하는 전시공간이다. 옥상은 전망공간으로 꾸몄다.

 2~5층은 전시공간으로 활용된다. 가장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충무공의 활약상과 판옥선 제작 과정. 임진왜란의 시대적 상황과 함께 판옥선과 거북선의 제조과정을 그림과 글로 벽에 새겨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목포의 역사·관광·문화예술 등 다양한 정보도 접수된다. 유달산의 사계절을 담은 풍경, ‘목포의 눈물을 노래한 이난영을 비롯 목포를 빛낸 예술인들, 목포 도심권 볼거리와 먹거리 등 목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국제 슬로시티임을 알리는 로고도 눈에 띈다. 맞다. 이곳 목포는 슬로시티이기도 하다. 역사적 가치가 높고(원도심 일대의 근대역사문화유산), 자연경관(유달산·외달도·달리도 등)이 훌륭하며, 슬로푸드와 주민공동체 문화가 잘 보존되는 등 색다른 매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activity를 경험해볼 수 있는 공간도 만들었다.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강화유리 위에 서면 패러글라이딩을 타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이때 아찔한 고도감까지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맨 위층으로 올라가면 전망공간이 나오는데, 입구에서 전망대의 건축물을 보고 감탄했다면 이번에는 황홀한 풍경에 감탄하게 된다. 탐방객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실물과 비교해가며 감상할 수 있도록 사방에 조망도를 세워두었다.

 목포시가지를 바라보며 목포의 역사를 떠올려본다. 100년 전 들어선 구도심과 아파트·고층건물이 들어선 신도시, 여기에 다도해로 나서는 여객선과 크고 작은 고깃배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삼학도와 삼호반도(영암)가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에 영산강이 놓여있음은 물론이다.

 반대 방향으로는 달리도와 외달도, 율도, 장좌도, 안좌도 등 옹기종기 앉은 섬들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수평선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파란 물결, 그 위를 돛단배라도 되는 양 떠다니는 섬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싸기라도 하려는 듯 햇살이 쏟아진다. 천국이 있다면 저렇게 아름다울지도 모르겠다.

 ! 세월호다.’ 누군가 신항 쪽을 바라보며 외친다. 바다 밑에서 3, 또 뭍에서 4년을 보낸 세월호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붉게 녹슬고 찢긴 채로 말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으니 문제다. 미뤄왔던 백내장 수술을 하시라도 빨리 받아야겠다.

 터닝 포인트인 용머리를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 가는 방법은 둘. 등산로(용머리길)나 해안 데크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아니 한 바퀴 돌아오는 코스이니 어느 길을 선택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라 하겠다. 나는 용머리길을 먼저 타보기로 했다.

 눈요깃거리 풍년이다. 심심찮게 고개를 내미는 유달산만으로도 벅찬데, 거기다 목포 시() 문학회에서 게시해놓은 시를 읽으며 걷는 재미까지 더했다. 하긴 한국관광공사에서 ‘2020 가을 비대면관광지 100으로까지 선정했었다니 오죽할까.

 이 구간도 역시 곳곳에서 시야가 트인다. 내다보이는 풍광이 특히 빼어난 곳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로 조성했다.

 숲 밖으로 눈을 돌리자 목포항과 유달산이 펼쳐진다. 이를 배경으로 크고 작은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오간다. 점점이 떠있는 장자도·달리도 등 다도해 풍광도 매력적이다. 그 바다로 나가는 길목에서 목포대교가 위용을 뽐내고 있음은 물론이다.

 오르내림을 두어 차례 반복하다 12(전망대에서)만에 고하도의 끝인 용머리에 선다. 이곳이 터닝 포인트임을 알려주려는 듯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용머리의 전설(용이 날개를 펴고 승천했다는)이 아니라 숲길을 걸으면 용의 기운을 듬뿍 받을 수 있다는 자랑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탐방로는 이제 바닷가로 내려간다. 까마득한 바위벼랑이지만 나무계단이 놓여있어 내려가는데 어려움은 없다. 그저 아름답기로 소문난 주변 풍광을 눈에 담기만 하면 될 일이다.

 탐방로가 바닥까지 떨어진 건 아니었다. 하긴 바닷물이 찰랑거리는데 길이라니 어불성설이 아니겠는가. 대신 해상 보행로를 따로 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두어 곳에는 널따란 광장까지 만들어두었다.

 광장은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사진의 배경으로 넣으라는 듯 조형물도 배치했다. 그중 하나가 용의 비상이란 작품이다. 고하도의 또 다른 이름은 용섬’, 목포의 희망을 담아 하늘에 오른다는 뜻을 담았단다.

 바다에는 목포대교가 놓였다. 2012년에 완공된 목포대교는 총 연장 4.129로 목포 북항과 고하도를 잇는 연륙교이다. () 두 마리가 날아오르는 형상이라는데, 하늘과 바다가 붉게 물들 때 황홀한 낙조 위에서 두 마리 학이 펼치는 춤사위의 화려함은 목포 관광의 백미로 꼽힌다.

 이후부터는 길이 1,080m 해안 데크(deck)’를 따른다. 바닷가 바위벼랑에 기대 듯 길을 내놓았다. 덕분에 쪽빛 바다와 절벽을 때리는 파도 소리를 즐기며 걸을 수 있다. 하나 더, 왼쪽 멀리에서 유달산이 따라오는가 하면, 다가온 해풍이 살짝 볼을 때리고 지나가는 등 조금 전 걷던 숲길과는 느낌이 완연히 다르다.

 해식애(海蝕崖)를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파도의 침식과 풍화 작용이 스쳐간 흔적들이다. 다만 먼 바다에서 몰아쳐 온 파도가 비켜 지나간 지점이라서 다른 섬들처럼 우람스럽지는 않다.

 또 다른 광장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만났다. 제목은 개선장군 이순신’. 명량해협에서 대첩을 거둔 장군의 기상을 담았단다. 고하도가 그를 만난 것은 정유재란 때다. 명량대첩 후 고하도에서 함대 정비를 하면서다. 장군은 107일간을 머물며 전선 40여 척을 건조했고 8000여 명의 군사를 훈련시켰다. 군자금을 확보했는가 하면, 총통·화약 등을 만들어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이게 수군재건의 토대가 되어 왜란을 끝내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데크 로드를 12분쯤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오른편은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 직진 (아래 사진)은 공사 중이라서 탐방객은 딱 여기까지만 걸을 수 있단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일제강점기 벙커용으로 뚫었다는 해안 동굴을 곁눈질도 못했으니 말이다. 연합군의 공격을 대비한 시설로 고하도에는 그런 동굴이 14개나 있단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만만찮다. 가파른 벼랑 위로 오르려다보니 계단의 경사도 급할 수밖에 없었나보다. 그마저도 힘든 곳에서는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기도 한다. 노약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구간이라 하겠다. 그래선지 목포시에서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0(전망대부터는 20). 트레킹 초반에 거론했던 삼거리, 즉 이충무공 유적지(고하도진성)로 내려가는 길이 갈려나가는 삼거리에 이른다. 그리고 이번에는 왼쪽, 그러니까 등산로 입구쪽으로 진행했다.

 그러자 고하도진성 안내판이 길손을 맞는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장군이 쌓았다는 성이다. 섬의 중앙 큰덕골을 둘러싸고 있는 능선에 1.125m 길이로 축조했다. 장군은 이곳에서 병력보충·병선건조·군량미조달 등을 통해 수군을 재건, 전쟁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쯤에서 의문점 하나. 300m나 떨어져 있는 유적지의 안내판을 왜 이곳에 세워놓았을까?

 100m만 더 걸으면(삼거리에서) ‘등산로안내판에서 말하는 등산로 입구. 이곳에는 등산로안내판과 이정표(말바우 0.2) 말고도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들어서 있었다.

 탐방로는 이제 도로(고하도길)을 따라 이충무공유적지로 간다. 이순신장군의 흔적을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구간이다. 그러니 쉬엄쉬엄 걸으며 이순신장군과 얽힌 역사 등 유서 깊은 고하도의 뒤안길을 되새김질해보자. 거기다 푸른 바다, 다도해를 감상하는 힐링까지 만끽한다면 더 좋고.

 걷는 도중 수군통제영 터()’를 만날 수 있었다. 이순신장군이 명량대첩 후 전열을 가다듬었던 전진기지로, 이순신은 이곳에서 전투력을 강화시켜 7년 전란을 종식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요 어디쯤에 선소(船所)가 있지 않았을까? 고하도는 압해도와 율도·달리도·화원반도 등에 가려 숨어있는 모양새다. 거기다 영산강 하구라 배를 정박하기에도 용이하다니 이만하면 전열정비의 필요성을 느낀 이순신장군이 최적지로 꼽을만하지 않았겠는가. 장군은 이곳 고하도에서 40여 척의 배를 건조했다고 전해진다.

 바닷가에는 고하도 선착장이 있다. 나이든 세대들은 응박개선창이라 부른다는데, 그 아래에는 1980년대 건설된 또 하나의 선착장이 있다. 아무튼 2012년 목포대교가 완공되기 전까지 섬의 관문이었던 저곳은 사람을 실고 드나들던 선박이 하루 종일 분주했다고 한다.

 잠시 후 고하마을로 넘어가는 작은 고갯마루에 선다. 이충무공유적지(전남도 지방기념물 제10)는 이 고갯마루에서 왼쪽 능선을 타면 된다. 참고로 고갯마루로 올라서기 전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가면 고하도선착장에 이어 조선육지면발상지비(朝鮮陸地綿發祥之碑)’를 만나볼 수 있다.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거론했던 기념물이다.

 500년 이상 된 곰솔이 군락을 이루는 숲속으로 들어선다. 껍질이 검은빛을 띠는 늙수그레한 곰솔 무리가 바다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낸다. 그런 좋은 조건을 지자체에서 그냥 놓아두었을 리가 없다. 숲속 곳곳에 벤치와 평상을 놓아 시민들이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를 맡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홍살문을 지나자 모충문(慕忠門)이 어서 오란다. 충무공을 숭모(崇慕)하는 마음으로 들어서라는 얘기일 게다. 아니 장군의 애국충정을 본받음으로써 자신처럼 외세(일제강점기)에 의해 야산에 버려지는 전철을 밟지 말라는 뜻을 담았을지도 모르겠다. 광복 후 수습하여 현재의 위치에 세웠지만 아픈 상처임은 분명하다.

 안으로 들면 모충각(慕忠閣)이 반긴다. 이충무공기념비(전남도 유형문화재 제39)를 모시는 비각으로 내부에는 42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기념비는 이순신이 고하도에 진성을 축성하고 군사를 주둔했던 터에 세운 것으로, 훗날 삼도 수군통제사 오중주가 공사를 시작했고, 1722년 충무공의 5대손인 삼도 수군통제사 이봉상(李鳳祥)이 완성했다. 남구만(南九萬)이 비문을 지었고, 조태구(趙泰耉)가 글씨를 썼다.

 비문은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군사 주둔지로 고하도를 선정하게 된 과정, 수군 진영이 1647년에 당곶진으로 옮겨가게 되어 이곳 고하도진영을 폐하게 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오중주가 유허비 건립을 주도한 내용, 전쟁 발발 시 군량미 비축 및 공급의 중요성, 후임 수군통제사들에게 이곳이 고하도 진영 터임을 알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게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날머리도 고하도복지회관 앞 주차장(원점회귀)

이충무공유적지를 마지막으로 고하도 용오름길 트레킹은 막을 내린다. 아니 산악회버스가 기다리는 고하도복지회관 앞 주차장으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마감했다. 고하도 트레킹은 7.04km를 걸었다. 걷는데 2시간이 걸렸지만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겠다. 눈요기를 얼마큼 하느냐에 따라 소요시간이 달라질 테니까 말이다.

가파도(加波島)

 

여행일 : ‘22. 3. 28(월)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도리

산행코스 : 상동선착장→상동마을→소망전망대→일주도로(고냉이돌)→가파포구(하동마을)→소망전망대→상동포구(거리 및 시간 : 자그만 섬이라서 의미 없음)

 

함께한 사람들 : 가족나들이

 

특징 : 모슬포항에서 5.5km쯤 떨어진 작은 섬(30만 평으로 제주도의 부속섬 중에서는 네 번째로 크다)으로 우리나라 최남단 섬 마라도와 제주도 본섬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섬 속의 섬’이라는 얘기이다. 가파도의 가장 특징은 해발 20.5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작은 섬이라는 점이다. 덕분에 평상 같이 평평한 섬 안으로 조금만 들어서면 어디에서든 탁 트인 조망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바다 건너에는 가장 키가 큰 한라산(1,950m)이 우뚝 솟았고, 반대편에서는 최남단의 섬 마라도가 한걸음 달려오라며 손짓한다. 트레킹도 쉽다. 해안 일주도로를 위시해 길이 사통팔달로 나있지만 해안선 길이가 4.2㎞에 불과해 여유롭게 걸어도 2시간이면 족하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돌아보면 된다.

 

▼ 여행의 시작은 운진항(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가파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운진항(모슬포 남항)으로 와야만 한다. 이곳에서 가파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운항한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마지막 2항차(15:20, 16:00)를 이용했을 경우 섬을 둘러볼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가파도에서 나오는 배편이 16시 20분에 끊기기 때문이다. 참! ‘청보리축제(4월-5월)’ 기간에는 매 30분 간격으로 배편을 늘린다는 것도 참조한다.

▼ 우리를 태워다 준 ‘블루레이 3호’. 199톤 크기의 자그마한 배지만, 294명이나 태운다니 여객선용으로 특화되었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저 ‘Blue Ray’라는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설마 14.5knots의 속도를 빛살처럼 빠르다고 우기지는 않았을 테고, 또 다른 번역어인 ‘가오리’를 나타내는지도 모르겠다.

▼ 운진항에서 출발한 배는 넉넉잡아 10분이면 ‘가파도(상동 포구)’에 도착한다. 제주도 본섬의 서남쪽에 위치한 가파도는 섬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지명이다. 가오리를 닮은 섬의 생김새에다 먼 바다의 특징인 ‘파도’를 더했다. 참! 덮개 모양을 닮아 ‘개도(蓋島)’라 부르던 것이 가파도로 굳어졌다는 설도 있으니 기억해 두자.

▼ 배에서 내리니 물질 삼매경인 해녀가 눈에 들어온다. 얕은 곳에서 작업을 하는 걸로 보아 ‘하군’쯤 되지 않을까 싶다. 아니 가파도를 오가며 사진작가로 활동하다, 이주에 이어 어촌계장까지 겸하고 있다던 기사 속의 초보 해녀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해녀는 기량의 숙달 정도에 따라 상군(上軍)·중군(中軍)·하군(下軍)으로 나뉜다.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제주 해녀문화’로 등재되었다.

▼ 포구의 방파제는 광고판을 겸한다. 카페와 민박집도 있지만 대부분은 식당. 한정식에 중식, 심지어는 아이스크림 가게까지도 눈에 띈다.

▼ 배에서 내리면 상동마을이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선지 마을은 이미 관광지로 변했다. 식당과 카페에 마트, 민박 등 육지의 여느 관광지에 못지않은 풍경을 보여준다.

▼ 길을 나서기 전에 기념촬영부터. 이번 여행은 칠순을 맞은 집사람에게 바치는 내 선물이다. 부부만의 한갓진 여행을 계획했다가, 집사람이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 같아 부랴부랴 계획을 바꿨다. 하지만 막내 처제는 코로나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 이번 여행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다.

▼ 아래 사진처럼 가파도에는 제주올레길(10-1코스, 4.2km)이 나있다. 하지만 올레길 순례자가 아니라면 일부러 이를 따를 필요는 없겠다. 정중앙에 위치한 소망전망대에서 해안 일주도로를 향해 사통팔달로 길이 뚫려 있으니 섬에 머무는 시간을 감안해 둘러볼 코스를 정하면 된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2시간이면 족하다.

▼ 해안선을 버려두고 마을 안 고샅길로 들어섰다. 가파도의 삶을 먼저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아이들이 학교가고 주민들이 매일같이 마실 다니는 길이니 가파도의 모든 것이 담겨있지 않겠는가.

▼ 그런 내 선택을 옳았다. 그 길에서 나는 가파도의 풍광을 눈과 가슴에 오롯이 담을 수 있었다. 특히 벽화 거리는 가파도 관광의 ‘화룡점정’이다. 벽마다 가파도의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이야기해주는 벽화가 그려져 있으니 별도의 해설자도 필요 없다. 그러고 보니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도 섬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 그냥 벽화가 아니라 가파도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여기서 우스갯소리 하나. ‘가파도(갚아도) 좋고 마라도(말아도) 좋고’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는 두 섬이 빚을 돌려받기가 어려울 정도로 외진 곳에 있다는 데서 유래한 제주도 속담이란다. 하지만 두 섬은 요즘 전국에서 가장 핫한 관광지 중 하나로 변했다.

▼ 가오리에 파도를 더한 게 ‘가파도’인줄 알았는데, 주민들은 ‘가고픈 섬’이라서 가파도라며 우겨댄다.

▼ ‘가장 제주다운 섬’이란다. 맞다. 봄이면 섬이 온통 초록빛으로 물드는데다, 돌담이나 밭담도 잘 보존되고 있어 토속적인 제주의 멋을 가장 잘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행정안전부에서 선정한 ‘10대 명품섬’에 포함된 이유란다.

▼ 요건 아예 집을 통째로 화폭으로 삼아버렸다. 관광객의 눈높이에 맞췄다고나 할까? 예전의 가파도는 이웃 섬인 마라도를 가면서 그냥 지나가거나 잠깐 들르는 섬이었다. 별 볼일 없던 섬이었단 얘기다. 하지만 올레길이 생기고 청보리가 알려지면서 마라도와 우도처럼 사시사철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단다. 이젠 별 볼일 많은 섬으로 변했다고나 할까?

▼ 가장 ‘가파도’다운 풍경이라 하겠다. 주변 바닷가에서 주워 온 듯한 조약돌과 특산물인 뿔소라와 전복, 고동으로 집과 담을 치장했다. 가파도의 예술가로 소문난 이춘자 할머니의 작품이라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당시 기사는 그녀가 10년 넘게 정성으로 꾸몄다고 했다. 그게 이제 가파도 명소가 되었다.

▼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카페도 눈에 띈다. 개구리 모양의 화분을 벽에 매달은 건물의 외형이 지극히 이국적이고, 뜻은 모르겠지만 ‘꼬막꼬막 걸으멍’이란 이름까지도 예쁘다.

▼ 가파도의 돌담은 본섬(제주도)의 것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제주의 담이 검은 현무암인 것과 달리 가파도 돌담은 색이 제각각이다. 바닷물에 깎이고 닳은 마석(磨石)을 써서 그렇단다. 하지만 기능은 똑 같다. 크기가 다른 돌을 성기게 쌓아 틈으로 바람이 잘 빠진다. 오랜 세월 섬에 적응하며 얻은 생활의 지혜라서 허술해 보이지만 강한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단다.

▼ 미술관에서나 볼 법한 설치미술도 엿볼 수 있었다. 그물과 소라 등 섬마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소재를 이용해선지 지극히 향토적 감성을 자극시켜준다.

▼ ‘발상의 전환’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밋밋할 수밖에 없는 돌담에 소품 두어 개를 더하자 이렇게 변했으니 말이다.

▼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던가. 가파도를 두 번째 고향으로 삼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도회지로 떠나는가 보다. 무너져가는 집 마당에는 사람 대신 선인장만 가득했다.

▼ 뒤돌아본 상동마을. 십년이면 강산도 변하다고 했던가? 마파도의 집들도 변화의 물결을 탔나보다. 거센 바람을 피해 담장 아래 웅크리고 있던 집들이 언제부턴가 고개를 내밀었다. 몸 하나 가릴 것 없음은 예나 다름없지만, 태풍도 무서워하지 않는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해 집을 지었음이리라.

▼ 마을을 지나 ‘소망전망대’로 향했다. 가파도의 길은 해안가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돌 것이냐, 아니면 나처럼 섬 한가운데를 가로지를 것이냐에 따라 두 갈래로 나뉜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가도 섬 경치를 즐기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볼 일이다.

▼ ‘가파도’하면 사람들은 먼저 ‘청보리’를 떠올린다. 요즘은 ‘유채꽃’을 더했다. 하지만 ‘갯무꽃’도 이에 못지않았다. 지중해가 원산지라는데 일부러 파종해놓은 듯 작지 않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참고로 갯무는 ‘바닷가에서 자라는 무(갯+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처럼 무우꽃과 비슷하게 생긴데다 뿌리와 잎 모두 식용이 가능하단다. 하지만 밭에서 재배하는 무우와는 달리 뿌리가 작고 잎이 질기다고 한다.

▼ 마을을 빠져나오자 드넓은 보리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일손이 부족해 심기 시작했다는 가파도의 보리는, 이제 가파도를 넘어 제주도의 명물이 되었다. 섬 면적의 3분의 1에 이르는 땅이 보리밭이라니 보리밭을 빼놓고 어찌 가파도를 묘사할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사방이 청보리의 푸른 물결로 장관을 이루는데, 여기에 돌담과 바다가 덧붙여지면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다. 매년 봄 ‘청보리 축제’가 열리는 이유일 것이다.

▼ 드넓은 보리밭 사이를 걷다보면 둥그렇게 쌓아올린 돌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 안에 무덤이 들어있으니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경계인 셈이다.

▼ 가파도의 보리는 ‘향맥’이라는 제주도의 재래종이란다. 바닷일로 바쁜 주민들이 생각해 낸 대체작물이다. 키가 1m를 훌쩍 넘기지만 씨만 뿌려 놓으면 잘 자라기 때문이다.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그게 지금은 관광 상품이 되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보리물결이 넘실대는 게 장관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푸른 바다에 돌담까지 더해지니 이런 풍경을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 마을 근처에는 ‘상동우물’이라는 샘도 있었다. 150년 전에 판 우물이라는데 식수 및 빨래터로 사용할 수 있어서 당시는 주민 대부분이 상동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하동에 공동우물과 빨래터가 신설되자 대다수 상동주민들이 하동으로 옮겨가 지금은 하동이 섬의 중심이 되었다. 아무튼 가파도는 제주도 유인도 중 유일하게 물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 청보리밭을 지나자 이번에는 유채꽃이 길손을 맞는다. 청보리밭의 초록 파도를 기대한 상춘객에게는 뜻밖의 광경이겠지만 유채꽃 풍경은 이미 마파도의 또 다른 자랑거리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우리처럼 4월에 찾아올 경우 청보리의 초록 물결과 유채꽃의 노란 물결을 동시에 담아갈 수 있다.

▼ 제주도의 봄은 노란색이다. 가파도도 같은가 보다. 유채꽃이 가파도의 들녘을 온통 샛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가파도의 유채꽃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게 올해는 더 늘어났단다. 그에 반해 청보리 재배면적이 부쩍 줄어들었음은 물론이다.

▼ 유채꽃은 제주도의 봄을 알리는 얼굴마담이다. 2월 무렵 꽃망울을 열기 시작해 4월이면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노란빛꽃 구름에 안긴 인생 사진을 찍기에 딱 좋은 시기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어찌 카메라 앞에 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청보리와 유채꽃, 그리고 멀리 보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걷다 보면, 가파도 최고 높이(해발 20.5m)의 ‘소망 전망대’가 나온다. 소망 전망대는 가파도서 제주 본섬은 물론 마라도, 푸른 바다와 청보리밭을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는 최적의 명소다.

▼ 전망대에 오르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바다 건너의 제주 본섬. 샛노란 유채꽃밭 너머로 투구를 쏙 빼다 닮은 산방산이 그림처럼 솟아오른다. 참! 전망대 아래에는 ‘게르’를 닮은 초가움막도 지어져 있었다. 제주도가 몽고마의 방목지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전망대 부근에도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상동과 하동의 중간지점이니 ‘중동(농담이다)이라고나 할까? 정체불명의 조그만 동네지만 초등학교와 전화국, 발전소 같은 중요 시설들이 들어서 있으니 가파도의 중심지인 셈이다.

▼ 유채꽃 일색인 서쪽 방향도 막힘이 전혀 없다. 가파도는 이렇듯 시야를 가로막는 게 없다. 심지어는 그 흔한 전봇대조차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푸른 바다건너 산방산과 한라산이 손에 잡힐 듯 한눈에 들어오는가 하면, 먼 바다 쪽에서는 마라도가 한 발짝 더 다가오라며 유혹한다.

▼ 남쪽 바닷가로 향한다. 겨울에 저장해놓았던 얼음을 꺼내 쓰기 시작한다는 춘분(春分)도 이미 지났다.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뺨을 스쳐가는 바람결은 포근하기만 하다. 그게 좋아 사람들을 피해 코로나19의 주홍글씨처럼 따라 붙는 마스크를 내리자 막힌 가슴이 뻥 뚫린다. 이런 게 가파도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싶다.

▼ 커다란 풍력발전기가 2대나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면 가파도에서도 ‘청정에너지 자립’을 꿈꾸고 있나보다. 아까 배에서 내리는 우리를 맞아주던 빗돌의 ‘친환경 명품 섬’은 그 홍보문구이고 말이다. 바람을 브랜드 상품으로 전환한 대표적 사례라고나 할까?

▼ 마라도 방향의 바닷가로 내려서니 일주도로가 나있다. 시멘트로 포장된 무장애 길이다. 그러니 나처럼 쉬엄쉬엄 걸을 수도 있고, 포구 앞에서 빌려주는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밟아도 좋다. 어느 방법을 선택하더라도 풍경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간다.

▼ 먼 바다 이어선지 파도가 제법 높다. 이처럼 바람이 잔잔한데도 저렇다면 바람이라도 거셀라치면 어떨까 싶다. 하긴 오죽했으면 ‘헨드릭 하멜’이 타고 온 네덜란드 선박 스펠웰호가 이곳에서 난파당했겠는가. 그 덕분에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서양에 소개되었지만 말이다.

▼ 바다 건너에는 대한민국 최남단의 섬 ‘마라도’가 있다. 먼 바다에서 몰아쳐온 거친 파도와 강한 해풍이 깎아 만든 기암절벽이 절경을 자랑하는데, 여기에 난대성 해양 동식물까지 더해지면서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42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 잠시 후 ‘고냉이돌’이란 커다란 바위를 만났다. ‘고냉이’는 고양이의 제주도 방언. 폭풍에 생선이 떠밀려오기를 기다리던 고양이가 굶주림에 지쳐 바위가 되었다는 설화를 지녔다. 하지만 요리조리 살펴봐도 고양이가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무학대사는 부처와 돼지의 눈을 빌어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했다. 지천명(知天命)을 넘긴지 스무 해나 지났건만 아직도 내 수양은 멀었나보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하동마을이 나온다. 가파도에 들어선 두 개의 마을 가운데 하나로 아래쪽에 위치한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참고로 원래 무인도였던 가파도는 1842년 이후부터 사람들이 들어가 살게 되었다. 200명 남짓의 섬 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하며 연안에서 해녀들이 김, 굴, 해삼, 전복, 소라 등을 채취한다.

▼ 입구의 안내판은 주민들이 신성시 여기는 두 곳을 소개하고 있다. ‘상동 할망당’에서 갈라져나온 ‘하동 할망당’은 하동 주민(특히 해녀)들을 보호해주는 신당이고, 까마귀를 쏙 빼다 닮았다는 ‘까마귀돌(동산)’도 주민들이 신성시 여기는 바위라고 한다. 이밖에도 가파도에는 제단(짓단), 어멍아방돌, 보름바위(큰왕돌), 고인돌 등의 바위들이 볼거리로 제공된다.

▼ 하동포구의 방파제는 튼튼하게도 만들어놓았다. 먼 바다에서 몰아쳐오는 높은 파도를 막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참고로 가파도 근해는 ‘벵에돔 자판기’라고 불릴 정도로 입질이 좋은 핫플레이스로 알려져 있다. 그래선지 ‘물반, 고기반’의 어장을 찾아온 낚시꾼들을 기다리는 낚싯배 십여 척이 포구 안에서 한낮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 물양장에 앉아있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손길은 바쁘기만 하다. 물질해서 따온 해산물을 손질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파도 해역은 물살 흐름이 빨라 물질하기에 썩 편치는 않다. 하지만 전복, 소라 등 패류는 물론이고 고등어, 방어, 자리돔 등이 씨알이 굵어서 제주에서도 고품질 상품으로 각광받는다.

▼ 가파도의 중심은 하동마을인가 보다. 마을회관은 물론이고 치안센터와 보건진료소도 이곳에 들어서 있다.

▼ 포구에는 ‘가파도 개경(開耕) 12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 빗돌을 세운 시기가 올해(壬寅年)란다. 아니 아직 돌아오지도 않은 12월(음력)에 세웠다고 적고 있으니, 한 갑자(甲子) 전 그러니까 180년 전에 마을이 세웠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무인도였던 이 섬은 소와 말을 방목하는 국유 목장지가 되면서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40년(헌종 6년) 영국 선박이 침입해 소를 잡아가는 사건이 발생(이로 인해 목장이 폐쇄됐다)했고, 1842년 폐목장지에 개경 허가를 해주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게 벌써 180년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 하동마을에도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서 있었다. 하긴 먹을거리(제주도 최고의 낚시터에 농사지을 땅까지 더했다)로 넘친다는 가파도, 그중에서도 가장 큰 마을에 어찌 음식점 한둘 없겠는가. 마라도가 해물자장면 하나로 맛 지도를 완성하고, 비양도는 보말죽이 대세를 이루지만, 물산이 풍부한 이곳 가파도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맛난 음식이 많다고 한다.

▼ 짬뽕과 짜장이 전문인 저 식당은 원조라 우기는 걸로 보아 이곳 가파도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모양이다. 맛은 SBS의 ‘불타는 청춘’과 KBS의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증명해 준단다. 그밖에도 뿔소라구이와 문어숙회, 소라·홍해삼회들 서브메뉴로 내걸고 있으니 뱃시간에 쫓기지 않는다면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 하동마을의 담장도 역시 아름답게 치장됐다. 느림의 미학을 한껏 즐기며 읽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하멜’에 대한 이야기도 보인다. 가파도를 ‘게파도’라는 이름으로 서양에 소개한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 하멜이 암초에 걸려 배가 파선되자 이곳 가파도에 상륙했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등대를 세웠다는데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일부 담벼락은 ‘가파도 새싹보리’의 광고판으로 변했다. ‘새싹보리’란 보리의 새순을 말한다. 씨앗이 2일의 발아과정과 10일의 성장과정을 거치면 잎이 10cm쯤 자라는데, 이때 잎을 수확하여 먹는다.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변비에 효과적이며 고혈압이나 빈혈, 당뇨 등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 바닷가에서 오르다 보면 ‘불턱’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일종의 탈의실인데 해녀들이 물질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거나 불을 쬐며 쉬는 공간이다. ‘불’은 글자 그대로 불씨를 뜻하며 ‘덕’은 ‘불자리’를 뜻한다니 ‘화톳불’ 정도로 여기면 되겠다.

▼ 근처에는 ‘돈물깍’도 있었다. 바닷가의 샘 끄트머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돈물’은 담수를 일컫는 제주지역의 사투리. 바닷물 즉 짠물과 대비되는 말인데, 바닷가 마을에는 소금기 없는 담수가 드물지만 바닷가에 용출하는 샘이 몇 개는 있게 마련이어서 제주지역 바닷가 어디서나 사용하는 명칭이기도 하다.

▼ 마을을 빠져나와 ‘소망전망대’로 향했다. 마을 주민이 상동포구로 나가는 지름길이라고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뱃시간에 맞추느라 미리 포구로 나간 집사람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찌 서두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튼 이 구간은 느린 걸음이 가장 잘 어울리는 길이었다. 아름다운 풍광이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자꾸만 붙잡았기 때문이다.

▼ 상동포구로 되돌아 나오는 길. 본섬인 제주도가 환상적인 풍광으로 다가온다. 제주에서 보는 가파도가 아닌 가파도에서 바라보는 제주의 모습은 낯설다. 거기다 가장 낮은 곳에서 바라보는 가장 높은 한라산은 차라리 경이롭다. 그 앞의 산방산과 송악산도 덩달아 높은 풍경으로 다가온다.

▼ ‘당신이 필요해요. 눈으로만 봐주는 당신’이라는 팻말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제발 밭으로 들어가지 말아달라는 애절한 부탁인데, 아까 사진을 찍으면서 유채꽃밭 속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이다. 길이 나있기에 무심코 들어갔었는데, 이제 보니 외지인들의 무단침입으로 인해 생긴 상처였던 모양이다.

▼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은 덕분에 청보리밭과 유채꽃밭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행운도 누렸다. 그나저나 마파도의 자랑거리는 이제 유채꽃이라 할 수 있겠다. 청보리밭보다도 유채꽃밭의 면적이 압도적으로 넓어 보이니 말이다.

▼ ‘제주 올레길’의 길라잡이도 눈에 띈다. 파란색은 정방향 표시로 제주의 쪽빛 바다를 상징하며, 주황색은 역방향(거꾸로 걸을 때) 표시로 제주의 특산물인 밀감을 나타낸다. 그러니 나는 지금 올레길을 거꾸로 걷고 있는 셈이다.

▼ 앗! ‘친환경 명품 섬’이라던 빗돌에 어울리지 않게 내연발전소라니... 이유는 간단했다. 가파도의 이국적 풍경이 입소문을 타면서 관광객의 숫자가 몇 배로 늘어났고, 이로 인해 음식점이나 민박집 같은 편의시설들이 더불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전력수요의 폭증을 불러왔고, 그 부족분을 디젤발전기를 돌려 메꾸고 있다는 것이다.

▼ 아까 상동우물을 거론하면서 가파도는 물 걱정이 없는 섬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 또한 불가능해졌던 모양이다. 아래 사진처럼 바닷물을 민물(淡水)로 바꾸는 ‘해수담수화 시설’이 들어서있는 걸 보면 말이다.

▼ 소망전망대 앞에서 상동마을로 내려간다. 아까 지나왔던 길이기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니 배의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주변 풍광에 신경쓸 겨를도 없다. 제주 본섬이나 유채꽃밭을 배경으로 삼을 경우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져 올릴 수 있을 텐데도 말이다. 참고로 가파도에서는 눈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포토존이다. 벽화마을 벽에 기대어 한 컷, 제주본섬을 뒤로 하고 한 컷, 소망전망대에 올라 한 컷. 스마트폰과 여행객만 있으면 그 어디나 인생샷 스팟이 된다.

▼ 다시 돌아온 상동마을의 포구. 아까는 못 보았던 ‘상동 할망당(제주도에서는 여신을 ‘할망’이라 부른다)’이 눈에 띈다. 가파리 주민들을 수호해 주는 해신당(海神堂)으로, 1년에 한 번씩 집안과 객지로 나간 가족들의 무사안녕과 풍어를 기원해오고 있단다. 참고로 가파도에는 동쪽 해안에 마을 제단이 있고, 북쪽과 남쪽 해안에 상동할망당인 ‘대부리당’과 하동할망당인 ‘뒷서낭당’이 있다. 마을 제단은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남자 주민대표들이 천제를 지내는 곳이다. 반면 ‘당’은 여자들이 주도하여 어부와 해녀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곳이다.

강화나들길 13코스(볼음도 길)

 

여행일 : ‘22. 9. 25(일)

소재지 : 인천시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리

여행코스 : 선착장→조개골해변→영뜰해변→볼음도은행나무→봉화산→당아래마을→선착장(거리/시간 : 12.8km/ 실제는 12.31km를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 불리는 강화도에는 우리 민족의 수많은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강화 나들길’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와 산과 벌판, 산골마을과 갯마을, 그리고 갯벌과 철새 서식지를 잇는 310.5Km(20개 코스) 길이의 역사·문화·자연 트레일이다. 그러니 ‘나들(이)’란 이름처럼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들’듯이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을 담아가면 되겠다. 오늘은 열세 번째 코스인 ‘볼음도 길’을 걷는다. 이름처럼 해안선을 따라 볼음도를 한 바퀴 둘러보는 코스로 짜였는데, 여기에 천연기념물(제304호)인 ‘은행나무’를 구경하고 볼음도 제3봉인 ‘봉화산(82.8m)’을 넘는다고 보면 되겠다.

 

▼ 찾아가는 길 : 일단은 선수선착장(강화군 화도면 내리)까지 와야만 한다. 볼음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88올림픽도로·국도(48호선)·지방도(356번·84번) 등을 타고 강화도로 들어온 다음, 온수교차로(길상면 온수리)에서 ‘마니산로’로 옮기면 상방리(화도면소재지)와 후포항을 거쳐 ‘선수선착장’에 이르게 된다.

▼ 강화도 서북단 청정해역에 위치한 천혜의 섬 볼음도는 서도면(주문도·볼음도·아차도·말도)에서 가장 큰 섬이다. 13코스(볼음도길)는 이 섬의 해안선을 시계방향으로 돌다가 막바지에 봉화산을 넘는다. 그래선지 금빛 모래사장과 황금빛 들녘, 울창한 송림 등 다양한 풍경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천연기념물인 ‘볼음도 은행나무’는 그중에서도 백미. 저어새의 집단서식지라는 갯벌(천연기념물 제409호)도 눈여겨 볼만한 풍경이다.

▼ 우리를 태워다 줄 ‘삼보12호’이다. 승객 385명과 십여 대의 차량을 동시에 운송할 수 있는 카페리여객선으로 선수선착장에서 하루 3차례(8시50분, 12시50분, 16시20분) 출발하는데, 볼음도와 아차도를 거쳐 주문도까지 간다. 돌아올 때(주문도의 느리항에서 7시10분, 11시00분, 14시30분 출발)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니 출발시간에 20분쯤(느리항에서 볼음도까지 25분쯤 소요) 더해서 기다리면 될 것이다.

▼ 볼음도에 가까워지자 주변 섬들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마을까지 들어선 아차도(阿此島)와 주문도(注文島)에 무인도인 수리봉이 더해지는데, 사진은 수리봉에 붙어있는 여(썰물 때면 수리봉과 이어진단다)를 게시했다. 저어새와 왜가리, 노랑발도요 등의 놀이터로 알려지는 작은 바위섬이다. 참! 그 오른쪽 저 멀리에 있는 섬은 분지도(分芝島)일 것이다.

▼ 7,800원(기본요금에 유류할증료 1천원을 보탰다)짜리 승선권을 내고 배에 오르니, 정확히 55분 만에 볼음도에 데려다준다. 선실에 누워 쪽잠 자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볼음도 유일의 선착장은 대합실(편의점을 겸한다)은 물론이고 널찍한 물양장에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 우리 같은 둘레길 나그네들의 관심사는 ‘인증’이 먼저다. 그리고 대합실 옆에서 스탬프보관함을 찾아내고 그 앞에 일 열로 줄을 만든다.

▼ 길을 나서기 전. 지켜야 할 일부터 알아보자. 먼저 세계적으로 희귀종인 저어새(천연기념물 제205호)가 집단으로 서식하는 곳이니 자연생태계를 훼손하는 행위를 말아야 한다. 저어새를 포획하는 일은 더더욱 안 된다. 또한 해안을 걷다가 만날지 모르는 대인지뢰를 만져서도 안 된다. 남·북 양측에서 매설해놓은 대인지뢰가 장마철 호우로 유실되어 해안가로 떠내려 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볼음도의 이야기’는 저어새가 알려주고 있었다. 볼음도의 역사는 물론이고 자연생태계에 체험학습까지 꼼꼼하게도 알려준다. 참고로 볼음도는 본래 ‘만월도(滿月島)’였다고 한다. 인조 때 명나라로 가던 임경업(林慶業)이 풍랑을 만나 이 섬에 체류하다 둥근달을 보았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그러다가 둥근 달인 보름달의 발음대로 볼음도로 고쳐졌고, 또 한자화 되면서 볼음도(乶音島)가 됐다.

▼ 시계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맞은편에 보이는 곶은 볼음도 남동단의 ‘물엄곶’이다. 직접 시도해보지는 않았지만, 첨부된 지도는 곶의 끄트머리까지 다녀올 수 있다고 했다.

▼ 갈 길 바쁜 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차도’로 향한다. 그 분위기에 취해버린 나그네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난 사진발 잘 받는 여성 모델을 앞에 세우고 스냅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거기다 인생사 얘기까지 주고받으며 걸었으니 이보다 더한 호사여행이 어디 있을까.

▼ 잠시 후, 바닷가(이정표 : 시점 0.4㎞)로 내려선다. 황금빛 모래사장에 해송 숲까지 더했지만 주어진 이름은 없었다. 편의시설도 눈에 띄지 않음은 물론이다. 볼음도에는 이보다 더 나은 해변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 모처럼의 섬 여행이니 어찌 모래사장 걷기를 마다하겠는가. 아니 해송 숲길이 끝나서 바닷가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 바다로 눈을 돌리자 아차도가 눈에 들어온다. 오른편은 주문도이고, 왼편의 작은 섬은 수리봉이다. 그 사이에는 널디너른 갯벌이 들어앉았다. 볼음도는 드넓은 갯벌이 자랑거리다. 저 거대한 갯벌은 법으로 보호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419호로 규모가 가장 큰 천연기념물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희귀종 저어새의 최대 서식지가 강화갯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볼음도 갯벌에선 전 세계에 2400여 마리밖에 없다는 저어새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단다.

▼ 해안으로 내려선지 10분. 모래사장이 끝나갈 즈음, 탐방로는 산속(이정표 : 종점 11.8㎞)으로 파고든다. 아니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물엄곶’의 허리를 횡단한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참고로 물엄곶은 바위절벽으로 된 모퉁이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몰려있고, 암벽에는 얼굴바위 모양의 기암도 걸려 있단다.

▼ 웃자란 잡초와 잡목으로 인해 길 찾기가 썩 편치는 않았다. 그렇다고 걱정할 일도 아니다. 길이 헷갈릴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이정목을 세웠고, 나들길 특유의 리본도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촘촘히 매달아놓았다.

▼ 나들길 곳곳에는 작은 쉼터도 만들어두었다. 식탁용 벤치까지 놓아두는 멋을 부렸지만 사용하는 사람은 드문 듯, 탁자 위에는 솔가리만 수북하게 쌓였다.

▼ 5분쯤 걸어 반대편 해안으로 내려섰다. 해변이 작아선지 이곳도 별도의 이름은 붙어있지 않았다.

▼ 이곳에도 대인지뢰 주의 경고판이 세워져 있었다(이후로도 심심찮게 만난다). 수난사고 및 갯바위 추락 사고를 조심하라는 경고판도 보인다.

▼ 아쉽게도 바닷가는 파도에 실려 온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여기저기 그물, 스티로폼 등의 폐어구와 생활쓰레기들이 널브러져 있다. 주민들의 잘못은 아니란다.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일부러 쓰레기를 해안에 갖다 버릴 일도 없고 어구를 사용할 일도 없단다. 어느 전문가는 그 범인을 중국으로 적고 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모래사장으로 내려서서 ‘조개골해변’으로 향한다. 모래가 고와선지 발바닥에 전해오는 느낌이 여간 좋은 게 아니다. 발이 빠지지 않아 걷기에도 편했다. 조개골해변의 초입은 커다란 바위 무더기가 지키고 있었다. 물놀이 나온 피서객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의젓하기 짝이 없다.

▼ 바다 쪽에는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신장(神將)처럼 서있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은 눈요깃감이다. 흔치 않은 생김새에 줄무늬 옷까지 입은 것이다. 그게 감흥을 불러일으켰던지 ‘형제바위’라는 멋진 이름으로 부르는 이도 있었다.

▼ 오른쪽 문설주는 인간의 손길을 덧댔다. 이정표를 걸터앉도록 해 신선함에 더해 시각적 아름다움까지 선사해준다.

▼ 돌문 너머로 나타나는 ‘조개골해변’은 의외였다. 조그만 섬이라서 해변도 자그마하려니 생각했는데, 갯벌은 드넓었고 모래밭도 놀라울 정도로 끝없이 뻗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래밭을 느긋하게 걸어본다. 그리고 가을바다의 낭만과 즐거움을 한껏 만끽해본다. 집사람과 함께라면 더 좋겠지만, 세상이 두 쪽 나도 일요일에는 교회를 찾는 집사람이니 어쩌겠는가.

▼ 시선을 옮기자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그 중앙에는 분지도(分芝島)가 놓여있다. 주문도에서 분리되어 나갔다는 섬으로, 떼를 나누었다는 의미를 품었단다. 그게 조금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하루에 두 번 물이 빠지면 주문도와 뭍으로 연결된단다.

▼ 이곳은 체험학습장이라도 되는 듯, 조개를 캐고 있는 가족들이 두엇 보였다. 맞다. ‘조개골’이란 지명이 어디 그냥 생겨났겠는가. 껍질마다 백가지 무늬가 들어있다는 백합이 지천으로 널려있다는 것이다. 볼음도에선 백합을 ‘조개의 왕’이란 뜻의 ‘상합(上蛤)’이라 부른다. 여느 갯벌에선 바지락·꼬막 따위를 캐는데, 볼음도에선 어른 손바닥만 한 백합을 캔다.

▼ 해수욕장으로 개발된 조개골해변은 길이가 1.5km 정도로 수심이 깊지 않아 해수욕하기에 좋다고 한다. 길고긴 모래사장을 따라 둑이 쌓여있고 그 위에 텐트를 칠 수 있는 소나무 숲이 까마득히 펼쳐져있다. 모래도 매우 부드럽고 곱다.

▼ 만개한 수크렁 너머로 갯벌이 펼쳐진다. 저 갯벌은 상합 조개가 지천이라고 한다. 상합 조개가 갯벌 속 깊이 몸을 숨기는 추운 계절이 아니면 주민들은 어김없이 그레를 메고 갯벌로 나간단다. 그리고 갯벌을 뒤져 상합조개를 잡는단다. 돈이 귀한 섬 주민들의 화수분 창고 노릇을 톡톡히 한다는 것이다.

▼ ‘조개골해변’과 ‘영뜰해변’의 사이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반도, 즉 ‘소곶’도 중간 지점에서 횡단해버리기로 했다. 이어서 4분쯤 지나 반대편 해안(이정표 : 종점 10.5㎞)으로 내려선다.

▼ 눈앞에 나타난 ‘영뜰해변’은 무척 광활했다. 방금 지나온 ‘조개골해변’보다도 훨씬 더 넓은 해변은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어 있었다. 하지만 간조 때는 물이 빠져 앞바다가 대부분 갯벌로 변하기 때문에 해수욕은 할 수 없다고 한다. 아니 요즘은 해안까지 거칠어진 탓에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단다. 대신 갯벌체험 출발지로 정착되어가는 중이라나?

▼ 영뜰해수욕장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다. 조금 전 지나온 ‘조개골해변’은 조개를 캐는 체험가족들이라도 있었는데 말이다.

▼ 영뜰해수욕장에서 바라본 갯벌. 물이 빠지면 최대 6㎞까지 갯벌이 펼쳐진단다. 이런 볼음도 갯벌이 그 유명한 강화갯벌이다. 강화도 서남부 해안과 볼음도를 포함한 강화도 서남쪽 일부 섬의 갯벌을 강화갯벌이라 하는데, 면적이 서울 여의도의 53배(약 435㎢)나 된단다.

▼ 전망대부터는 소나무 숲속을 걸어보기로 했다. 산림청에서 조성한 ‘해안방재림’으로 10ha의 면적에 해송 1,600주와 해당화, 맥문동 등을 식재했다. 로프 휀스로 구분해놓은 탐방로를 별도로 만들어놓았음은 물론이다. 갖가지 편의시설도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캠핑사이트에는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잠시 피곤한 다리를 쉬어가라고 만들어 놓은 벤치에는 물기 젖은 나뭇잎만 어지럽게 쌓여있다.

▼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숲속을 걷는다. 주어진 시간까지 넉넉하니 서두를 이유도 없다. 걷는 속도를 최대한으로 떨어뜨리는 이유다. 그리곤 ‘느림의 미학’에 곁들여 살아온 생을 반추해본다. 나는 자신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을까?

▼ 바다 쪽에는 벤치를 놓아두었다. 너른 바다를 바라보며 한껏 휴식을 취해보라는 모양이다. 벤치에 앉아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을 망연히 바라본다. 멍 때린다는 것이 실감난다. 좋다. 이런 게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 바닷가에는 ‘파도막이’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풍랑, 해일 및 쓰나미 등에 의해 침식되는 해안가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란다. 퇴사울타리(모래포집기)에 대한 안내판도 보인다. 영뜰해변 보호를 위해 두 시설을 설치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영뜰해변의 끄트머리에서 산속으로 파고든다. 길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웃자란 잡목과 잡초가 무성하고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있어 진행이 쉽지 않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속도로처럼 길이 훤해지니 말이다.

▼ 산속으로 들어선지 10분쯤. 이름표(광산전망대)까지 단 이정표(은행나무전망대 0.9㎞/ 영뜰전망대 1.2㎞)가 얼굴을 내미나, 전망대를 연상시킬만한 시설물이나 조망처는 눈에 띄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금 더 오르니 2층짜리 팔각정이 불쑥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곳도 조망이 트이지 않기는 매일반이다.

▼ 나들길은 이제 산허리를 헤집으며 나간다.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원시의 숲속으로 오솔길이 나있다.

▼ 그렇게 20분 정도를 진행하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바다가 나타난다. 볼음도의 서쪽 모퉁이로 저 어디쯤에 말도(唜島)가 있을 것이다.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왼편 바다에는 지도상으론 NLL 남쪽에 있는데도 북한이 실효지배하고 있다는 ‘함박도(咸朴島)’도 있을 것이다. 1965년, 말도 주민 120여 명이 조개를 캐러갔다가 납북되었던 섬 말이다.

▼ 이후부터는 임도를 탄다. 그리고 ‘요옥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의 고갯마루를 넘어 북쪽 해안으로 나아간다. 참! 고갯마루를 넘다보면 요옥산 방향으로 나있는 희미한 오솔길이 눈에 띄기도 한다. 하지만 군부대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요옥산의 정상을 찾아갈 필요는 없겠다. 어차피 들어가지 못할 테니까.

▼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널따란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섬이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너른 들녘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볼음도는 북쪽에 봉화산(83m), 서쪽에 요옥산(103m)이 있으며, 그 사이의 지역이 낮고 평평하여 취락이 형성되었다. 접경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어업은 백합 양식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볼음도 제일봉인 ‘요옥산(103m)’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산꼭대기에 들어선 군부대 때문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산이 됐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눈요기로 만족할 수밖에.

▼ 모퉁이를 돌아서자 ‘볼음2리’의 비옥한 들녘이 끝없이 펼쳐진다. 황금빛으로 물든 저 너른 들녘을 보고, 섬이라고 우길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섬에서 만난 어촌은 농촌다웠고, 거기다 풍요롭기까지 했다.

▼ 나들길은 ‘볼음2리’를 마주보는 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 삼거리가 13코스(볼음도길)의 딱 중간이다. 기념 삼아 이정표(시·종점까지 모두 6.4㎞)를 게시해보는 이유다.

▼ 들길은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바닷가까지 나간 나들길은 이제 방조제를 따라 은행나무로 간다. 왼편은 북녘 땅으로 연결되는 너른 바다. 오른편에는 볼음2리의 황금빛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 갯벌로 내려가는 일가족을 시선으로 쫒아간다. 그러자 뒤쪽 저 멀리로 방파제 하나가 드러난다. ‘말도(唜島)’로 가는 선착장일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십여 년 전 까지만 해도 저 선착장과 말도 사이를 운항하는 배(평화호)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군청에서 운영하는 행정선이 주 2~3회 오가는데, 사전 심사를 받아야만 말도의 출입이 허락된단다. 하나 더, 말도에는 비무장지대 푯말 제1호가 있다. 휴전선 155마일이 말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볼음도의 얼굴마담이랄 수 있는 ‘볼음도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4호)’가 얼굴을 내민다. 높이가 24.5m나 된다는 이 나무에는 기구한 사연이 전해온다. 800여 년 전 황해도에 물난리가 나 부부 은행나무 중 수나무가 바다로 떠내려 왔다는 것이다. 볼음도 주민이 그 나무를 주워 심은 게 지금의 은행나무라고 한다. 흥미로운 건, 북한에 아내 은행나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황해도 연안군 호남중학교 뒷마당에 있다는 아내 은행나무는 북한 천연기념물 제165호라고 한다.

▼ 밑동 둘레가 9.4m나 되는 저 은행나무는 볼음도를 지키는 나무라고 한다. 은행나무 가지를 다치게 하거나 부러진 가지를 태우면 목신(木神)의 진노를 사서 재앙을 받게 되고 끝내는 죽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매년 1월 30일 주민들이 모여 안녕과 풍어를 비는 풍어제를 지내왔으나, 6.25 이후 출어가 금지되자 풍어제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 은행나무 뒤편의 작은 팽나무(옛날 풍어제를 올릴 때 은행나무와 함께 신목으로 모시던 나무)를 살펴보는데 계단이 눈에 띈다. 길이 보이는데 어찌 올라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언덕 위는 쉼터용 정자가 주인이었다. 망원경까지 갖췄으니 전망대를 겸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언덕에 오르자 북녘으로 뻗어나간 바다와 함께 ‘볼음저수지’가 발아래로 펼쳐진다.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들었다는 저수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데, 그 위로 흘러가는 뭉게구름이 화룡점정을 찍는다. 누군가는 ‘볼음도’의 특징을 아름다운 경관으로 꼽고 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특히 볼음도에서 바라본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 이제 봉화산으로 갈 차례이다. 동쪽으로 뻗어나간 긴 제방을 따르면 된다. 제방의 오른편은 ‘볼음저수지’다. 6·25 전까지 볼음도 사람들은 앞바다에 나가 새우를 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 이후 접경지역으로 변하면서 어업이 어려워졌고, 대안으로 넓이가 10만평이나 되는 저 저수지를 쌓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단다.

▼ 저수지에는 탐조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맞다. 저곳은 노랑부리백로와 저어새의 번식지이자, 20여 종의 새들이 먹이를 찾아 모여드는 새들의 낙원이라고 한다. 해질 무렵 물위를 적시는 붉은 노을과 새들의 고요한 움직임을 보는 게 볼음도 여행의 묘미 중 하나로 알려진다.

▼ 왼편으로는 널디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 건너는 북녘 땅, 볼음도에서 직선거리로 5.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한다. 날이 좋아 시야가 확보되면 연백군(황해도)의 마을까지도 내다볼 수 있다는데, 오늘은 그런 행운이 주어지지 않았다.

▼ 저수지의 끄트머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농로를 따라가다 만나는 삼거리에서는 왼쪽 방향이다. ‘T’자 코너의 이정표가 거리(종점까지 4.6km)와 방향을 알려주고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누구의 손길인지는 몰라도 길가가 코스모스 꽃밭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그게 가을의 전령이라는 자신의 임무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맞다 가을걷이가 시작된다는‘추분(秋分)’이 그제가 아니었던가.

▼ 길은 ‘평양금이산(74m)’과 ‘봉화산’을 잇는 능선을 향해 올라간다. 이 구간도 역시 꽃길로 꾸며졌다. 이어서 잘 지어진 주택(주인장이 꽃길을 만든 듯)을 지나 고갯마루로 올라선다.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오른쪽 능선의 초입에 이정표(종점까지 4.1km)가 세워져있다.

▼ 산길은 오르기 딱 좋을 만큼 완만했다. 하지만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 흔적이 희미했다. 그렇다고 길을 못 찾을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거기다 리본까지 촘촘히 매달려있는 데야...

▼ 산으로 들어선지 10분(트레킹을 시작한지는 2시간40분)만에 봉화산(82.8m, ‘봉이산’으로 불린다) 정상에 올라섰다. 요옥산과 앞남산(86m)에 이은 ‘볼음도 제3봉’으로 옛날 이곳에 봉화대가 있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하지만 삼각점(볼음 402) 하나만이 외로울 뿐 정상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 대신 ‘문정남’선생님의 띠지(리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숫자가 ‘15,000’인걸 보면 일만 봉을 넘어 이만 봉으로 가는 길목에 이 봉우리를 올랐다는 얘기일 것이다. 지난 5월(12일) ‘23,456산 등정 기념’ 산행(달성 용문산)을 함께 다녀왔으니, 오래 전 이곳을 다녀가신 모양이다.

▼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가는 길은 울창한 솔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에 취해볼 수 있는 멋진 구간이다.

▼ 내려오는 도중 ‘천궁(川芎)’을 만났다. 수많은 가을꽃들 중 저게 유독 눈에 띄는 건 집사람에 대한 내 일편단심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여성에 좋은 약재라니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부인병(생리장애)은 물론이고 순환계와 치과 질환에도 뛰어난 효능이 있다고 한다.

▼ 산을 내려오면 널찍한 들녘이 또 다시 나타난다. 이어서 농로를 따라 볼음리로 간다. 참고로 볼음도는 물이 많은 섬이다. 곳곳에 논이 펼쳐져 있고 수로도 제대로 갖춰져 있다. 덕분에 마을을 둘러싼 벼들을 보며 걷다보면 마음도 몸도 풍요로워진다.

▼ 이때 바다 건너 ‘석모도’를 눈에 담을 수 있다. ‘서검도’와 ‘미법도’도 함께. 그 뒤는 교동도가 분명하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20분. 농로의 끝에서 ‘볼음도리(당아래마을)’로 들어선다. 볼음도의 중심 마을로 면사무소(출장소)는 물론이고 치안센터에 농협(분점)까지 들어선 행정타운이다. 민박도 대부분 이곳에 몰려 있으며, 마켓에서는 잠깐의 여유까지 부려볼 수도 있다. 참! 볼음교회도 잠깐의 볼거리로는 충분했다. 1903년에 세워졌으니 볼음도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하겠다.

▼ 눈길을 끈 시설은 ‘보건지소’다. 섬 주민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병원이기 때문이다. 2018년에 보건지소가 세워지고 공중보건의가 배치되었다지만,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난감하긴 매일반이란다. 민통선 지역이라서 헬기를 띄우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행정선 등을 이용 주문도로 이동해서 헬기에 태워 병원으로 이송시킨단다.

▼ 이젠 선착장으로 나갈 일만 남았다. 고개 하나를 넘지만 나지막한데다 보도까지 따로 내놓아 부담 없이 넘을 수 있다.

▼ 고개 너머에서 다시 만난 바닷가. 물 빠져나간 갯벌은 아까보다 훨씬 더 넓게 잿빛 속살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 않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볼 법한 기괴한 풍경만으로도 족한데 구멍까지 송송 뚫려있는 것이다. 선착장의 저어새는 ‘칠게’나 ‘흰발농게’, ‘세스랑게’ 등이 저 안에서 산다고 했다. 영화에 나오던 괴생명체가 ‘게’로 변신했다고나 할까?

▼ 선착장으로 되돌아오니 무심코 지나쳤던 ‘횟집’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문을 닫은 지 오래인 듯 먼지만 수북하다. 그렇다고 술꾼이 술을 포기할 수야 없는 노릇. 대합실 매점에서 산 캔맥주를 마시며 배를 기다리는 데는 이만한 곳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12.31km를 3시간30분에 걸었다. 대부분이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조금 더디게 걸은 셈이다. 눈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가란도(佳蘭島) 모실길

 

여행일 : ‘21. 5. 2(일)

소재지 : 전남 신안군 압해읍 가란리

산행코스 : 숭의선착장→가란선착장→짝짓기나무→주상절리→용굴→용머리→돌캐노두길→한삼길→시몬→솔등해수욕장→숭의선착장(소요시간 : 약 9.5km/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신안군청에서 북동쪽으로 4㎞, 목포시청에서 북서쪽으로 7km쯤 떨어진 가란도는 압해도의 부속 섬이다. 그러니 ‘섬 속의 섬’인 셈이다. 때문에 압해도로 건너왔다고 해도 숭의선착장까지 이동해서 배를 한 번 더 타야 하는 불편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배를 타지 않고도 출입이 가능해졌다. 2008년 압해대교가 놓인데 이어 2012년에는 가란대교가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압해도는 40년간 목포시에서 더부살이를 해오던 ‘신안군청’을 새로 들여왔고, 이곳 가란도 역시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할 수 있었다. 다리가 몰고 온 풍요라 하겠다. 주요 볼거리로는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갯벌과 그 위에 놓여있는 까치섬과 솔섬, 그리고 금굴, 짝찟기나무, 돌캐노두길, 주상절리, 솔등해수욕장 등이 있다.

 

▼ 산행들머리는 숭의선착장(신안군 압해읍 분매리 678-11)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TG를 빠져나와 죽림 JC에서 내려와 국도 2호선을 타고 천사대교(신안군 압해읍) 방면으로 가다가 신기사거리(압해읍 분매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오면 잠시 후 숭의선착장에 이르게 된다. ‘가란대교’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 숭의선착장은 가란도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건너편 가란선착장으로 도선이 왕래하면서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 지도에는 모실길(둘레길)과 등산로, 그리고 마을길로 나누어 표시하고 있지만, 이를 무시하고 해안선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아봤다. 썰물 때여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덕분에 볼거리는 곱절로 늘어났다고 보면 되겠다. 반면에 용머리산(74.9m)은 들머리를 찾지 못해 올라보지 못했다.

▼ 도선이 대기하던 선착장은 이제 어선들 차지가 되었다. 그것도 꼬맹이 배들 일색이다. 하긴 근해 어업에서는 커다란 배가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겠다.

▼ ‘가란대교’라는 나무다리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다리의 수문장은 ‘준공 표지석’과 ‘가란대교 안내판’이 대신하고 있었다. 2012년에 개통된 이 다리는 섬과 섬을 잇는 보행자 전용의 다리다. 거기다 주민들에게 양질의 물을 공급하기 위한 상수관까지 얹었다니 그야말로 다목적 다리인 셈이다. 안내판은 또 다리에서 하지 말아야 할 행위들도 적고 있었다.

▼ 다리는 바다에 높다란 철제 교각을 심고 그 위에 나무로 상판을 깔았다. 길이 275m에 너비가 2.5m나 되니 편도 1차선의 도로 수준이다. 그런데도 사람만 건널 수 있단다. 그래서 어떤 이는 ‘가란도 모실길’로 통하는 이 목교를 사람 이전에 자연을 생각하는 에코로드(EcoLoad)라고도 했다. 아무튼 보행자 전용이라니 주인답게 느긋이 걸어보자. 그리고 아스라이 펼쳐지는 주변 풍광을 가슴에 넉넉히 담아보자.

▼ 파고라를 가운데에 둔 광장이 네 개나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이곳은 낚시를 금지한단다. 오로지 주변 경관을 살펴보는 전망대로만 이용하라는 것이다. 추락이 이유라는데 과잉방어가 아닐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이를 무시하고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 두엇이 눈에 띄기도 했다. 조수간만 차가 커서 이곳을 지나가는 물고기들이 많다는데 이를 놓칠 강태공들이 어디 있겠는가.

▼ 다리는 보행자 전용이다. 그러니 차량이나 경운기 등은 다닐 수가 없다. 하지만 농어촌 고령자들이 이용하는 4륜 오토바이는 통행이 가능하단다. 전동차도 허용이 되는지 다리 위를 오가며 작은 짐 보따리들을 옮기고 있었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가란선착장’이 내려다보인다. 건너편 숭의선착장과의 거리는 겨우 180m. 때문에 숭의선착장을 바라보면 바다라기보다 강 건너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런데도 두 선착장은 배로만 왕래가 가능했고, 가란대교가 놓인 후로는 두 선착장 모두 뒷방늙은이 신세로 전락했다. 부교(浮橋) 형태의 선착장에 매어진 꼬맹이 어선 몇 척만이 외로운 이유이다.

▼ 나무다리를 지나 섬에 이르면 좌우로 길이 나뉜다. 오른편은 가란마을로 연결되는 마을길. 반대편인 왼쪽은 너른 갯벌과 자갈밭을 지나 ‘솔등해수욕장’으로 연결된다. 어디로 가더라도 해안길만 잘 따르면 결국 섬을 한 바퀴 도는 셈이라서 차이는 없다. 다만 왼쪽은 썰물 때만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마을길로 들어서자마자 만난 선착장에는 ‘어업인 안전쉼터’가 들어서 있었다. 섬 주민들을 위한 복지시설로 험한 날씨에는 대피소가 되고, 평상시에는 작업을 위한 탈의·세면 및 어업기자재 보관 등의 기능을 수행한다. 가란도는 한술 더 떴다고 한다. 가란도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위생적인 화장실을 보탰다. 그 옆에는 지역 특산물을 파는 판매점도 보인다.

▼ 선착장에서도 길이 나뉜다. 어업인 쉼터와 특산품판매점 사이에 놓인 데크계단은 솔등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이고, 해안선을 따라 난 길은 가란마을로 연결된다. 참! 길이 나뉘는 지점에 ‘가란도 종합안내도’와 함께 ‘가란도 모실길’의 지도를 그려 넣은 화강암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는 게 어떨까?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한다. 마침맞게 물까지 빠져있으니 바닷가부터 한 바퀴 둘러보는 게 우선 아니겠는가. 길은 의외로 넓다. 차량통행이 가능할 정도다. 맞다. 2018년엔가 이곳 가란도에 ‘공영버스(말만 버스지 실제는 12인승 승용차다)’가 운행된다는 기사를 본 것도 같다. 당시 기사는 마을이 섬의 한 가운데 자리한 탓에 압해도로 나가는 가란대교까지의 거리가 1.6㎞나 된다고 했다.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60~90대 어르신들이 보따리를 이고지고 걸어다는 게 무리라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군에서 전기차를 제공해줬다는 것이다. 운전자격증이 있는 주민이 숭의선착장에 군내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가란선착장까지 차를 몰고 나간단다.

▼ 길가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한가득 피어났다. 그 가운데 오늘의 꽃으로 자란(紫蘭)을 꼽아봤다. 꽃이 아름다워 채취가 심한 탓에 최근 자생지 및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는데 길가에서 마주쳤으니 행운이라 하겠다. 거기다 이곳 가란도가 난(蘭)이 많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니 이보다 더 적당한 꽃이 어디 있겠는가.

▼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민가는 ‘펜션’이다. 다리가 놓였으니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났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이들을 맞아들일 시설 또한 필요하지 않겠는가. 섬사람들의 생업도 저렇게 세월에 발맞춰 하나둘 관광업으로 바뀌어 간다.

▼ 부속섬인 ‘까치섬’과 ‘솔섬’은 갯벌로 연결되고 있었다. 하지만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바닷길은 아니다. 물 빠진 갯벌에 섬이 놓였으니 사방이 온통 길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편에는 200m쯤 되는 수로를 사이에 두고 ‘압해도’가 있다. 마치 어미 닭이라도 되는 양 새끼섬인 가란도를 지긋이 지켜본다.

▼ 해안은 북동쪽이 길게 돌출되어 있을 뿐 드나듦이 거의 없이 매우 단조롭다. 굴곡진 간석지(干潟地)라도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방조제를 쌓아 농경지로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쌓아올린 방조제와의 첫 만남은 가란마을 앞(이정목 : 짝짓기나무 410m/ 가란마을 740m/ 가란선착장 840m)이다. 200~300m쯤 되는 둑을 쌓아 그 안에 널디너른 농경지를 조성했다.

▼ 하지만 방조제를 쌓은 게 오래지 않은 듯 농작물은 심어져 있지 않았다. 간척지가 농경지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10년 정도의 염분 제거기간이 필요하다니 말이다. 간척지 너머에는 ‘가란마을’이 들어앉았다. 가란도의 유일한 마을로 주민(65가구 72명) 대부분이 저곳에 모여 산다. 어르신들의 사랑방인 경로당과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보건지소 등 복지시설도 저곳에 모여 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 길을 재촉해 가란도의 명물 ‘짝짓기나무’에 섰다. 애달픈 사랑얘기를 품은 전설 속의 나무로 한 뿌리에서 자란 줄기들이 서로 엉기고 엮여 기묘한 모양새를 만들어냈다.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 가란도 남자와 까치섬(짝짓기나무와 마주하는 섬)의 여자가 서로 사랑을 했더란다. 그런데 양가의 반대로 결혼에 이르지 못하고 남몰래 이곳에서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는데,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자 이들은 영원한 사랑을 위해 서로 나무가 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 특별한 얘기만큼 생김새도 독특하다. 꼭 껴안은 모습. 아니 이건 숫제 합궁의 모양새이다. 이야기 속 남녀의 애틋한 정을 그대로 내보여주고 있으나 얘기는 얘기일 따름. 아이들과 함께라면 눈을 살짝 가려주는 센스를 발휘해보는 게 어떨까?

▼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른다. 섬을 시계의 반대방향으로 돌다보니 오른쪽 옆구리에 바다를 끼고 걷는 형국이 됐다. 때문에 눈만 들면 드넓은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이곳 가란도는 갯벌이 섬의 땅보다 5배나 더 된다고 한다. 덕분에 주민들은 낙지잡이와 갯지렁이 잡이 등으로 소득을 올리기도 한단다. 요즘은 노령화로 인해 손으로 낙지를 잡는 이를 보기가 힘들어졌다지만 말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5분. 길이 둘로 나뉜다. 산자락으로 파고드는 길이 도로에 가까울 정도로 널찍하다. 바닥까지 반질반질한 것이 가란마을로 연결되지 않나 싶다. 갯일을 다니는 주민들의 통행로 말이다. 아무튼 도로는 또 이곳에서 끊겨 버린다. 이후는 썰물 때에 한해 길이 열리는 바닷가이다.

▼ 때를 잘 맞춰 찾은 덕분에 우린 바닷가를 따라 탐방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차오른 바닷물을 피해 먼발치에서나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주상절리를 우리는 코앞에다 놓고 감상할 수 있었다. 가란도 해안선에서 만나게 되는 독특한 지질로 오랫동안 침식과 퇴적이 반복되면서 생성된 독특한 암석 형태가 신비롭다.

▼ ‘주상절리’란 긴 세월 바다와 바람이 만들어 낸 자연의 신비다. 단면의 형태가 육각형 내지 다각형인 기둥 모양의 절리로, 사람들은 보통 제주도의 해안가를 떠올린다. 하지만 가란도의 주상절리는 외모부터가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주상절리와는 확연히 다른 모양새다. 각이 져 있지 않고 마치 퇴적암의 단면처럼 생긴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전문가들이 주상절리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

▼ 이후부터는 물 빠진 바닷가를 따라 걷는다.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하루 두 번씩 물이 들고 나는 서해안의 특성이 만들어내는 길이다. 이 길은 볼거리가 많은 길이기도 하다. 민물이 바다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곡선을 그리며 물길을 만드는 풍경, 갯가에서 굴이나 바지락을 채취하며 생업을 일구는 섬사람의 모습, 먹이를 찾아 갯벌을 기어가는 게 무리들은 섬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 바닷가 너른 밭은 대부분 내버려져 있었다. 텃밭으로 일구어도 되련만 마을이 멀어선지 갈대만이 가득하다.

▼ 경작을 시작한 간척지도 눈에 띈다. 유채가 노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어린잎과 줄기를 먹기 위해 명나라에서 들여왔지만 먹을 게 넉넉해진 요즘은 관광자원으로 더 각광 받고 있다. 마늘밭도 보인다. 하지만 이곳 가란도에서 생산되는 주요 농산물은 쌀이라고 한다. 밭작물은 보리와 고구마, 마늘 등이 약간 생산될 뿐이란다.

▼ 바닷가로 내려선지 5분. 또 다른 볼거리인 ‘용굴’은 풀숲에 가려있어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거기다 입구까지 작아서 선두대장의 표식이 없었더라면 나 역시 놓칠 뻔했다. 그나저나 용굴의 또 다른 이름은 ‘금굴(金窟)’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금을 채취하기 위해 뚫은 데서 기인한 이름이다. 해방 후 폐광되면서 바닷물이 밀려들어 굴 내부 깊숙한 곳에는 물이 차 있단다.

▼ 자그마한 입구와는 달리 안은 꽤나 크고 넓다. 어두컴컴한 것이 길이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긴 일본인들이 채굴할 당시 많은 양의 금이 생산되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물이 차있다는 곳까지는 들어가 보지 않았다. 관리되지도 않는 동굴에서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야 없지 않겠는가.

▼ 드넓은 갯벌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대가 꽂혀있다. 김 양식을 위한 ‘지주’이다. 해안가에 나무를 박아놓고 김발을 매다는데, 밀물 때는 김발이 바닷물에 잠기고 썰물 때는 수면 밖으로 드러나 햇볕을 쬐면서 병충해에 강하고 영양소도 풍부한 건강한 김으로 자란다고 한다. 서남해안의 청정해역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풍경이라 하겠다. 하긴 이곳 신안의 갯벌은 보성·순천·서천(충남)·고창(전북)과 함께 ‘한국의 갯벌’이라는 이름으로 지정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 아니겠는가.

▼ 다음은 고구마의 꼭지. 그러니까 고구마처럼 생긴 섬의 동북부 끄트머리에 위치한 ‘용머리 해안’이다. 섬 여행을 하다보면 ‘용머리 해안’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제주도와 연화도가 대표적인데, 얼마 전에 다녀온 두미도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곶(串)이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곳 가란도도 같은 모양새라고 보면 되겠다.

▼ 그렇다면 이 바위는 용(龍)의 머리쯤으로 보면 되겠다. 참고로 압해도 인근에는 유난히도 용과 관련된 지명이나 설화가 많다고 한다. 혹자는 그 이유를 압해도가 배출한 강한 인물에서 찾고, 그 대표로 ‘수달장군’이란 별칭으로 불리던 ‘능창(能昌)’을 꼽는다. 능창은 나주 호족인 다련군(多憐君) 오희(吳禧, 왕건의 둘째 부인인 장화왕후의 아버지) 등 서남해 해상세력 대부분이 왕건에게 투항할 때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인물이다. ‘고려사’에도 왕건이 능창과의 정면 대결을 두려워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다. 그런 능창이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 이곳 압해도 일대라는 것이다. 참! 능창은 정면 승부 대신 간계를 쓴 왕건에게 잡혔고, 궁예에게 보내져 죽임을 당했다는 것도 알아두자.

▼ 바닷가 갯바위에는 자연산 굴이 지천이다. 오돌토돌한 표면에 꼬맹이 굴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이곳 사람들은 굴을 ‘꿀’이라 부른다고 한다. 달콤한 꿀처럼 맛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하긴 하루에 두 번씩 바닷물에 잠기고 햇볕에 노출되면서 치밀해진 육질이니 맛 또한 깊어졌을 것이다.

▼ 용머리에 이어 ‘돌캐 노두길’이 얼굴을 내민다. 돌캐노두길은 가란도 주민의 땀과 눈물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노두길’이란 사람들이 섬과 섬 사이 갯벌에 돌을 던져 만든 길이다. 이곳 가란도 주민들도 ‘버섬’이라는 작은 무인도까지 크고 작은 돌을 날라 생업의 연장선을 늘렸다. 하지만 버섬까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주어진 시간도 빠듯했지만 그보다는 엉망으로 변해버릴 신발이 더 걱정되어서이다.

▼ 노두길의 특징은 하루에 두 번씩 사라졌다 생겼다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 노둣길이 전통 어법인 ‘독살’의 기능을 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독살은 간조와 만조의 물때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전통 어법이다. 갯가에 안팎을 경계 짓는 담장 형태로 길게 돌을 쌓는데 어부는 밀물에 멋모르고 독살 안으로 들어왔다가 썰물에 빠져나가지 못한 생선을 잡는다. '돌살'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남도 사투리로 독은 돌과 혼용되곤 한다.

▼ 선답자의 글에서는 이 부근에서 함초(鹹草) 군락지를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복이 없었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 행여 앞사람을 놓치기라도 할세라 부지런지 쫓다보니 무심코 지나쳤을 수도 있겠다. 마디가 튀어 나왔다고 해서 ‘퉁퉁마디’라고도 불리는데, 최근 미네랄아 풍부한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기에 집사람에게 칭찬도 받을 겸해서 조금 뜯어갈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다.

▼ ‘주산지’를 닮은 풍경도 만났다. 지금은 비록 맨몸을 드러내고 있지만 물이라도 차면 저 나무들은 아랫도리를 물에 적시게 될 것이다. 물안개가 떠오르는 새벽도 떠올려보자. 자못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겠는가.

▼ 바닷가로 내려선지 25분 만에 두 번째 방조제에 올라섰다. 가란도에는 이런 방조제가 여럿이다. 들고남이 빈번한 해안선에 둑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었다. 그만큼 먹고삶이 절실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배 수리에 삼매경인 어부들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하루에 두 번 물이 쓰고 드는 조수간만의 차는 어민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준다. 밀물엔 저 어부들처럼 어구를 챙기거나 어장을 살피고, 썰물엔 훤히 드러난 갯벌을 걸으며 고둥이나 굴, 감태 등 다양한 갯것을 얻는다.

▼ 돌캐노두길이나 방조제 등 한 뼘의 땅이라도 더 만들어보려는 주민들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하지만 어렵게 장만한 땅의 대부분은 내버린 듯 방치되고 있었다. 지금은 농사보다 바다에서 얻는 수익이 더 크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알몸을 드러낸 갯벌은 푸른 초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해조류인 감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런 개펄 위에는 짱뚱어가 뛰어다니고, 수많은 농게와 칠게가 먹이를 찾아 움직인다. 이런 움직임을 살펴보는 것이 ‘갯벌체험’. 일행들과 함께 갯벌이 선사하는 특별한 재미에 빠져보는 게 어떨까?

▼ 뭍에 자동차가 있다면 물 빠진 바다는 경운기가 주인인 모양이다. 하긴 바닥이 거친 갯벌에서 저만한 기동력도 없겠다. 가란도는 갯벌의 섬이다. 하루 두 번, 모세의 기적보다 더한 기적이 일어나는 곳, 갯벌. 썰물의 시간이면 드넓은 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광활한 갯벌이 나타난다. 가란도 갯벌에서는 잠깐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 따위는 기적 축에도 끼지 못한다.

▼ 또 다른 방조제다. 섬에서는 반듯반듯하게 잘라 켜켜이 쌓아놓은 방조제도 잠깐의 눈요깃거리가 된다. 그리고 그 여운은 바람에 밀려오는 바닷물을 수줍게 밀어내는 풍경까지 그려내게 만든다.

▼ 드넓은 갯밭 위로 펼쳐진다는 굴 양식장은 눈에 담을 수가 없었다. 썰물이 극에 이를 때, 그것도 잠시만 얼굴을 내민다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밀물의 속도감으로 인해 조금만 늦어도 굴밭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줄을 맞춘 말뚝 위로 동아줄이 씨줄날줄 엮여 있고, 거기에 굴이 주렁주렁 매달린 게 가란도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가란도의 굴 양식법은 ‘수평끈식’이라고 한다. 수하식(줄에 굴 포자가 붙은 껍데기를 매달아 바다 속에 늘어뜨려 키우는 방식)인 통영이나 여수와는 달리 갯벌에 말뚝을 박아놓고 줄을 연결해 키우는 방식이다.

▼ 이후부터는 해안도로를 따른다. 잠시 후 마주친 삼거리에서 이정표(한산길↑ 165m/ 가란마을← 400m/ 돌캐노두길↓ 330m)를 만났고, 우린 이곳에서 가란도의 제일봉인 ‘용두산’을 지나쳐버렸다는 걸 알아챘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야 없는 노릇. 길이 하도 험해 고생만 죽도록 했다는 일행의 넋두리에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정상석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눈에 담을만한 풍경도 일절 없었다는 것이다.

▼ 조금 더 걷자 모실길의 지도가 그려진 빗돌이 길손을 맞는다. 그런데 현위치가 ‘한산길’을 지난 지점에 표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이름만 매겨져있을 뿐 내세울만한 특징이 없다보니 그냥 지나쳐버렸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우리가 걸어왔던 해안도로를 ‘한산길’이라 부르는지 않나 싶다.

▼ 아름다운 곳에서는 자그만 소품까지도 정겹다. 잠시 쉬어가라며 놓아둔 의자도 그 하나이다. 섬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풍경이라 하겠다.

▼ ‘시몬’은 어디를 이르는 지명일까? 조금 전의 한산길과 마찬가지로 그 어떤 설명도 없으니 어찌 알겠는가. 그저 해안에 곡선을 그리는 독특한 형태의 ‘모랫등’을 이른다는 선답자의 글을 떠올려볼 따름이다. 참고로 ‘모랫등’은 조류가 약한 구간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래가 자연스럽게 퇴적되면서 만들어진 지형이다.

▼ 드넓은 갯벌을 바라보며 애틋한 섬의 유래를 되짚어본다. 가란도(佳蘭島)는 자연산 난이 많이 자생한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하지만 원래의 이름은 ‘가난도’였다고 전해진다. 곤궁했기 짝이 없던 주민들의 살림살이에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그러다가 가난이 한스러웠던 주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길 소망하며 가란도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말이 씨 된다고, 스토리텔링은 가난했던 가란도를 한때 부자섬으로 바꿔주기도 했단다. 1971년부터 시작된 지주식 김양식 덕분인데, 김양식이 사양화로 접어든 요즘은 낙지잡이와 감태, 굴 등이 주 수입원이 됐단다.

▼ 공사가 한창인 구간도 있었다. 섬 가꾸기 사업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가란도는 지난 2019년부터 국토교통부가 지원하는 ‘새뜰마을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다. 취약지역 주민의 생활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생활 인프라를 구축하는 사업이니 저 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 맨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볼거리는 ‘솔등해수욕장’이다. 규모가 작은데다 편의시설도 갖추지 못했지만, 고운 모래가 나지 않는 압해도 권역에서는 보기 드문 해수욕장이라고 한다. 200m 조금 못되어 보이는 해안선에 희고 고운 모래가 상당히 넓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 해수욕장은 텅 비어있다. 탈의실이나 샤워장은 물론이고 화장실도 없다. 그 빈자리를 낚싯배가 노렸을까? 물 빠져나간 모래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 썰물 때를 잘 맞춘 덕분에 모래사장 끄트머리에서 자갈밭 모퉁이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 바다 건너에 위치한 ‘압해도’가 눈에 들어온다. 목포 북항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으로 지세가 삼면으로 퍼져 바다를 누르고 있는 형태여서 압해도(押海島)라 불렀다고 한다. 섬 모양이 낙지가 발을 펴고 바다를 누르고 있는 형상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털 미용을 한 귀여운 ‘푸들’이나 예로부터 전해오는 상상속의 ‘기린’을 닮았다는 얘기들이 떠도는 걸 보면 말이다. 압해도는 신안군청이 들어선 곳이기 하다. 꽤나 큰 섬(48.95㎢)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가란대교가 나타나면서 가란도의 트레킹은 마무리된다. 가란도를 둘러보는 데는 1시간 40분이 걸렸다. 해안선의 길이가 6.5km라고 하니 꽤 빨리 걸은 셈이다. 탐방로 대부분이 도로인데다. 썰물 덕분에 열린 바닷길도 걷기가 무척 편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화태도(禾太島) 갯가길

 

여행일 : ‘21. 11. 21(일)

소재지 : 전남 여수시 남면 화태리

산행코스 : 뻘금 버스정류장→치끝→마족항→월전항→독정항→묘두→묘두항→꽃머리산→뻘금 버스정류장→화태교차로(소요시간 : 약 12.17km/ 3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여수 돌산도에서 남서쪽으로 2㎞ 지점.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된 작은 섬으로 월호도·두리도·송도·자봉도 등이 섬을 둘러싸고 있다. 옛 이름은 ‘휫대(나팔)섬’.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돌산도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섬이 저절로 울어 왜적의 침공을 알려주었다는데서 유래됐다. 또 마을 뒷산이 군량미를 쌓아 놓은 노적가리를 닮아 ‘벼이삭 수(穗)’자를 써서 수태도(穗太島)라 부르기도 했다. 현재는 벼이삭과 같은 의미의 ‘벼 화(禾)’자를 써서 화태도가 되었다. 화태도는 2015년 연도교가 놓이면서 섬 아닌 섬이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해안선을 따라 ‘화태갯가길’이란 둘레길을 조성하고, 이를 ‘여수갯가길’의 다섯 번째 코스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가슴에 담아둘만한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해식애나 바위봉우리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은 실컷 눈에 담아갈 수 있다.

 

▼ 산행들머리는 ‘뻘금 버스정류장’(여수시 남면 화태리 371-1)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도롱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면 여수시 외곽과 돌산도를 거쳐 화태대교에 이른다. 다리를 건너 만나게 되는 첫 번째 버스정류장에서 ‘화태도갯가길’이 시작된다. 참고로 ‘갯가’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의 물가라는 뜻이다. 일부 구간이 바닷물이 물러날 때만 건널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 ‘화태도 갯가길’은 13.7km 길이의 둘레길을 1구간(치끝-월전, 3.2km)과 2구간(월전-독정항 1.7km), 3구간(독정항-묘두, 3.8km), 4구간(묘두-뻘금, 2.8km), 5구간(뻘금-화태대교, 2.2km) 등 다섯 개 구간으로 나누어 놓았다. 하지만 트레커들은 화태대교를 건너는 5구간을 생략하는 게 보통이다. 섬과 섬을 잇는 연도교가 하도 많다보니 이젠 식상해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 이곳 버스정류장은 분명 갯가길이 지나간다. 하지만 1구간의 출발점은 이곳이 아니다. 그래선지 출발점인 ‘치끝’으로 내려가는 들머리에 안내판을 세워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곁에는 4구간과 5구간이 나뉘는 지점임을 알리는 이정표(화태대교 2.2㎞/ 묘두 2.8㎞)도 보인다.

▼ ‘치끝’으로 내려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화태도는 현재 진행형인 모양이다. 새로 생긴 간척지에 뭔가를 새로 조성하고 있는 듯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현장 뒤쪽 언덕에 화려한 자태로 올라앉은 건물은 ‘화태초등학교’이다.

▼ ‘치끝항’에는 나룻배 수준의 어선 몇 척이 전부다. 하지만 바깥에 구축된 개머리방파제에는 나름대로 격식을 갖춘 배들이 주인노릇을 한다. 아무리 작아도 명색이 항구이다 보니 내·외항을 따로 두었다고나 할까? 참고로 방파제 뒤로 보이는 다리는 ‘화태대교’이다.

▼ 포구를 감싸고 있는 방파제의 초입(간이화장실 옆)에서 마족항으로 연결되는 탐방로가 열린다. 바닷가를 따라 곧장 마족항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단 바닷물이 빠져나갔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 들머리의 안내판은 ‘화태갯가길’을 소개하고 있었다. 비렁길과 소나무 숲길을 걷는가 하면, 호젓한 어촌 마을을 통과하는 걷기 길이란다. 특히 꽃머리산에 오르면 다도해의 수많은 섬들을 조망할 수 있단다. 참고로 화태갯가길은 화태대교 개통(2015년)을 계기로 ‘여수 갯가길’의 다섯 번째 코스에 포함시켜 개장(2017년)한 도보여행 길이다. 사단법인 ‘여수갯가’가 주도해 여수반도와 주변 섬의 해안선을 둘레길로 연결시켰는데, 2013년 1코스(우두리항-무술목)가 개통된 이래 4코스(임포~신기)까지 돌산도를 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다. 5코스는 처음으로 돌산도 외의 섬에 만들어진 길이다.

▼ 탐방로는 비탈진 산자락을 따라 나있다. 하지만 정비가 잘 되어 있으니 그저 울울창창한 상록수림이나 감상하며 걸으면 되겠다. 이곳 화태도는 따뜻한 남쪽나라. 남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등 상록수가 탐방로 주변에 가득하니 말이다.

▼ 산길로 들어선지 15분. 모퉁이를 돌아 ’마족항‘으로 내려선다. 꼬맹이 어선 몇 척이 전부인 자그만 포구다. 몇 되지 않은 주택들도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 한적하기 짝이 없다. 참고로 마족(馬足)이란 지명은 말을 운반하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조선 중기 이곳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기마목장으로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 대신 방파제는 외지에서 온 낚시꾼들로 붐비고 있었다. 맞다. 여수바다는 생활낚시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이곳 화태도가 첫손에 꼽힌단다. 2015년 화태대교가 놓이면서 접근성이 좋아진데다 겨울 시즌에도 입질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낚시꾼이 몰리다보니 쓰레기가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CCTV까지 설치해 놓았으니 양심을 버리지 말라며 엄포를 놓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본 갯가길 주변은 온통 쓰레기 천지였다. 가장 큰 문제는 인분. 공중화장실이 부족한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잘 먹었다는 표시를 꼭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가에다 퍼질러 놓아야 되겠는가. 구덩이를 파서 일을 보고, 흙으로 덮어두는 에티켓(etiquette)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 포구의 끄트머리쯤에서 다시 산자락으로 올라선다. 그런데 아까에 비해 길이 많이 넓어졌다. 거기다 왼편으로는 시야까지 열린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모섬이랄 수 있는 돌산도가 코앞이다. 금호도로 들어가는 배가 출발하는 ‘신기항’도 큼지막하게 다가온다. 그 왼편에서는 ‘화태대교’가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다.

▼ 탐방로는 심심찮게 길이 나뉜다. 하지만 이정표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라서 GPX 파일을 받아놓지 않았을 경우 헷갈리기 딱 좋다. 그렇다고 무작정 헤맬 수는 없는 노릇. 이럴 때는 일단 바닷가 방향으로 진행하는 지혜를 발휘해 보자.

▼ 대한민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그 아픔의 현장을 화태도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군인들이 바다를 향해 눈을 부릅떴을 초소는 현재 텅 비어있다. 아니 빈 시멘트구조물로 남아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다. 문화공간으로 바뀌어가는 요즘 추세에 발맞추어 이곳도 탈바꿈해보면 어떨까?

▼ 군인들이 쓰던 화장실만은 재활용에 성공했다. 갯가길 나그네들을 위한 간이화장실로 탈바꿈한 것이다. 커튼으로 문짝을 대신하고 있지만 이 얼마나 훌륭한 변신인가.

▼ 안내판은 ‘비렁길’을 갯가길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었다. 그래선지 탐방로는 산비탈을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이때 나뭇가지 사이로 제법 큰 섬인 대횡간도(우리말로 ’빗깐이‘인데, 벌거벗은 모습의 경사진 섬이라는 뜻이란다)’가 살짝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 입질이 좋다는데 갯바위라고 해서 비워둘 리가 있겠는가. 비집고 들어설 자리라도 날라치면 어김없이 강태공들 차지다. 특히 주말에는 날이 새기도 전에 저런 자리는 동이 나버린단다. 양식장에서 탈출한 우럭과 참돔이 자연산 감성돔과 함께 심심찮게 입질을 해오기 때문이란다.

▼ 낚시하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장고처럼 생긴 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소횡간도’가 아닐까 싶다.

▼ 잠시 후 희미하게나마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기에 따라봤다. 아니 파도에 휩쓸리며 재잘거리는 몽돌해안이 그리워 내려섰다고 하는 게 옳겠다.

▼ 그리고 그곳에서 화태도 제일의 비경을 만났다. 이곳 화태도 해역은 바다 속의 호수로 대변된다. 화태도를 둘러싼 수많은 섬들이 먼 바다로부터 들이치는 파도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해식애(海蝕崖)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그런데 그 귀한 해안절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우연히 만난 행운이라 하겠다.

▼ 오른편. 그러니까 월전마을 방향도 역시 서슬 시퍼런 해안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 탐방로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송악으로 한껏 치장을 한 소나무 몇 그루가 길손을 반긴다. 송악은 눈보라 치는 매서운 추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늘푸른 덩굴나무다. 그러니 남녘땅 여수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마족항을 출발한지 35분, 산자락을 빠져나오니 ‘월전항’이다. 월전(月田)은 달밭이란 뜻이다. 그래서 월전의 옛 이름은 ‘달밭기미’다. 기미는 작은 만을 뜻한다. 참고로 화태도에는 이곳 월전 말고도 묘두와 대동, 독정이, 마족, 건너몰, 치끝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 ‘나발도(섬의 생김새가 나팔을 닮았단다)’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는 월전항의 ‘문여 방파제’도 역시 낚시꾼들로 가득하다. 하긴 화태도에서 가장 조건이 좋고 조황까지 안정적인 곳이라는데 이를 말이겠는가. 하지만 그들이 몰고 온 차량이 많아도 너무 많다. 숫제 주차장으로 변해버렸다. 연도교가 몰고 온 변화겠지만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호젓하고 여유로운 풍경이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 동영상까지 촬영해가며 낚시를 하는 강태공도 보였다. 큼지막한 참돔이라도 한 마리 잡아 올리는 장면을 포착하려는 유튜버(youtuber)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화태도 인근이 감성돔은 물론 참돔, 볼락, 쥐노래미, 우럭, 학공치, 망상어, 도다리, 주꾸미, 문어, 갑오징어 등 다양한 어종이 회유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 포구에는 주막도 들어서 있었다. 식사(해물탕) 말고도 안주인 회무침과 해물전을 메뉴로 내걸었는데, 가격도 꽤 저렴한 편이었다.

▼ 화태도의 편의시설은 대개 월전마을에 들어서 있다. 파출소와 우체국도 이 마을에 있다. 정자 앞에 터를 잡은 남면사무소의 중계민원처리소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 마당에다 차사장 일행이 술상을 차린다. 갑장을 핑계 삼은 나 역시 그들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동향인 또 다른 갑장이 챙겨온 전라도 김치와 수육을 안주삼아 오랜만에 얼큰하게 취해 볼 수 있었다.

▼ 월전선착장은 화태도에 있는 네 개의 선착장 가운데 가장 크다. 그래선지 이곳에는 대합실까지 들어서 있었다. 그것도 문이 열린 채로 말이다. 맞다. 독정이와 함께 돌산을 오가는 여객선이 아직도 기항한단다. 다리가 놓인 후로는 여객선이 다니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다.

▼ 포구를 빙 돌아 선착장을 지나면 도로 끝에서 다시 산길로 오른다. 그리고 화태도의 남쪽 끄트머리를 에도는 비렁길을 걷는다. 이때 바다에 떠있는 가두리양식장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온다. 여수 전체 양식 어류의 40% 가량이 화태도에서 생산된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 ‘기둥도 아닌 것이. 뿌리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시기며’ 도무지 구분이 안 되는 소나무의 밑동이 신기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 잠시 후, 철제계단이 놓여있기에 바닷가로 내려서고 본다. 아까처럼 별천지가 나타날지 또 누가 알겠는가.

▼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의 경관은 아니었다. 그저 비스듬히 누운 바위벼랑이 양 옆으로 길게 펼쳐질 따름이다.

▼ 그 부족함은 ‘대두라도(콩을 닮았단다)’가 메꿔주고 있었다. 선창마을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 탐방로는 바닷가로 내려서기도 한다. ‘갯가길’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이후부터는 왼쪽 옆구리에 ‘월호도’를 끼고 걷게 된다. ‘달빛 호수의 섬’이라니 어쩌면 저리도 고운 이름이 생겨났을까?

▼ 독정마을에 가까워질 무렵 지극히 시골스런 풍광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네만 둥그러니 매달려 있으니 스냅사진으로서는 가치가 없었다. 그러다 인물이 들어간 총무님의 사진을 발견하고 얻어다 올려본다.

▼ 월전항에서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25분. 부드러운 해안길을 지나 ‘독정항’에 닿는다. 화태도에서 가장 큰 마을로 저 마을의 방파제 역시 낚시의 명소로 꼽힌다. 참돔과 감성돔이 잘 잡히며 우럭이나 볼락도 보너스로 낚인단다.

▼ 월호도를 마주보고 있는 ‘독정항’은 미로처럼 얽힌 특이한 방파제를 갖고 있었다. 맨 안쪽에는 나룻배 수준의 작은 배, 밖으로 나갈수록 배는 덩치를 부풀려간다. 파도로부터 배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이는데, 꼭 저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월호도와 개도, 아도, 자봉도 등에 둘러싸인 독정마을의 앞바다는 그렇지 않아도 호수처럼 잔잔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 가장 큰 마을답게 꽃밭이 잘 관리되고 있었다.

▼ 포구를 지나 도로 끝에서 다시 산길로 오른다. 이어서 새하얀 억새꽃이 가을의 풍치를 물신 풍기는 산길을 걷는다.

▼ 바다는 한없이 고요하다. 크고 작은 섬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선지 바다에는 꽤 많은 가두리양식장이 들어서 있었다. 화태도에서는 감성돔과 참돔, 농어, 우럭 등 여러 종류의 수산물을 양식한단다. 아니 곁에 다시마양식장으로 여겨지는 부표가 떠있는 걸로 보아 전복을 기르는지도 모르겠다.

▼ 35분 남짓 진행했을까 안내판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물이 빠졌을 때는 왼쪽, 물이 들었을 때는 오른편으로 가란다. 바다가 왼쪽에 놓여있음은 물론이다.

▼ 마침 물이 빠져나갔기에 서슴없이 내려서고 본다. 파도소리를 친구삼아 걸을 수 있는데 망설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이어서 그다지 길지는 않지만 자갈밭 해안을 따라 묘두(섬의 서쪽 끄트머리)로 향한다.

▼ 부지런한 아낙네는 쉴 틈도 없나보다. 12km가 넘는 갯가길을 걷는 것만도 부담스러우련만 갯바위를 오가는 발길이 바쁘다. 하긴 물 빠진 갯바위마다 바다고동이 한 가득인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 부서진 무동력선도 보인다. 한때 양식업자들이 머물던 공간이었으련만 지금은 망가진 채로 바닷가에 버려져 있다. 태풍 ‘타파’가 이 해역을 강타했던 게 2년 전이었던가?

▼ 물이 빠지면서 드러난 암초에는 등대가 올라앉았다. 저 등대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돌아올 누군가는 알까? 동구 밖 당산나무처럼 긴 세월을 뿌리박고 오매불망 기다리는 그 마음을...

▼ 바닷가에서 올라서면 ‘묘두(猫頭)’. 서쪽 끄트머리인데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섬의 지형이 고양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게 개의 머리로 보인 사람들도 있었나 보다. 옛날에는 ‘개머리’라고도 했다는데, 언제부터인가 고양이를 닮았다는 쪽에 의견이 기울어지면서 묘두로 굳어졌다고 한다.

▼ 산길은 포구의 방파제 뒤에서 열린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까치밥처럼 남겨진 저 열매는 엄연한 ‘유자’란다. 하지만 작아도 너무 작다. 대신 상큼한 맛과 향은 과수원에서 자라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나단다. 내일이 소설(小雪)이니 겨울의 문턱을 넘어선 셈이다. 갑자기 유자차가 마시고 싶어지는 이유다.

▼ 표지를 따라 산으로 접어들면 별안간 대숲이 나타난다. 서걱서걱 댓잎을 밟고 가는 길이 운치가 있다. 대숲을 벗어나면 바닷바람을 맞고 자라난 해송의 푸른빛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 잠시 후 올라선 유체꽃밭은 유채꽃 대신 말라비틀어진 잡초로 덮여있었다. 이곳은 화태도 주민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공간이다. 주민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칡넝쿨 투성이던 땅에 제주도에서 공수해 온 유채씨앗을 심었고, 고라니가 뜯어먹지 못하도록 그 위에다 모기장까지 덮어가며 가꾸었다고 한다. 이게 입소문을 타면서 지금은 여수갯가길의 명소가 되었다.

▼ 화태도의 갯가길은 예전에 군인들이 경계 근무하느라 다니던 길을 되살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네 자식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놓은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내딛는 걸음마다 그네들의 고생을 떠올리며 걸어보자.

▼ ‘이 뭐꼬?’ 선방 수좌들에게 가장 근원이 되는 화두(話頭)다. 하지만 참선과 먼 나에게는 저 정도의 돌담도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무릎 높이도 안 되던 돌담이 어느새 어른의 키를 훌쩍 넘겼기 때문이다. 다른 섬에서는 염소의 방목용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곳은 높아도 너무 높다. 그래선지 경작용이란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20년 전만해도 저 안에서 고구마, 보리, 콩 등의 농작물을 길렀단다.

▼ 화태도의 서쪽 끝 모퉁이를 돌아서자 화태대교가 얼굴을 내민다. 총길이 1,345m에 주탑의 사이가 500m인 다리로, 사장교(斜張橋)로는 인천대교(800m)와 부산항대교(540m)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길단다.

▼ 버려진지 오래인 듯한 선착장은 배 대신 낚시꾼이 차지하고 있었다. 심심찮게 입질이 온다는 문어라도 잡고 있을지 모르겠다. 화태도의 문어 잡이는 조금 특이하단다. 다른 지역에서는 통발이나 문어 단지를 이용해 잡는 게 보통인데, 이곳에서는 ‘문어 건지’라는 외줄낚시로 잡는다는 것이다. 갈코리 모양의 낚시인데 이 갈코리에 고등어 토막 등을 끼워 문어를 낚는단다.

▼ 묘두항에 가까워질 무렵 안내판 하나를 만났다. 이 부근이 상괭이 출몰지역이란다. 친절하게도 ‘웃는 미소천사, 토종고래’라는 해설까지 덧붙였다. 맞다. 토종 돌고래인 상괭이는 둥글둥글한 머리에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 ‘미소 천사’란 별명으로 불린다. 무차별적인 혼획과 플라스틱 쓰레기로 인한 해양오염 등으로 해마다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 지난 2012년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됐다. 그런 귀하신 몸이 이 근처에서 서식한다는 것이다.

▼ ‘묘두’에서 25분 거리에 있는 ‘묘두항’은 좀 어수선한 풍경이다. 항구 안이 배 대신 양식시설로 가득한 것이다. 2년 전, 태풍 ‘타파’는 이곳 화태도의 어장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었다. 이에 놀란 가두리 양식업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해역을 찾아 저렇게 몰려들었나 보다.

▼ 포구 위 양지바른 언덕에 들어앉은 묘두마을은 부티가 쭉쭉 흐르고 있었다. 수년 전, 남해안의 섬에 들렀다가 현지인들과 술자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양식업이 발달하면서 도회지 월급쟁이들이 부럽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맞다. 앞바다에 저리도 많은 양식장이 들어서있으니 어찌 풍요롭지 않겠는가.

▼ 묘두마을부터는 이차선의 포장도로를 따른다. 그 길을 따라 10분 남짓 걸었을까 고갯마루에서 꽃머리산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이정표(능선삼거리 0.6㎞, 꽃머리산 0.9㎞)를 만났다.

▼ ‘뻘금능선‘을 따르는 등산로는 고운 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이라서 폭신폭신한데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조금이라도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 그렇게 10분쯤 진행하자 ‘뻘금능선 삼거리(이정표 : 꽃머리산↑ 0.3㎞/ 뻘금→ 0.4㎞/ 묘두입구↓ 0.6㎞)’이다. 날머리인 화태대교는 이곳에서 오른편이다. 하지만 꽃머리산은 능선을 따라 직진해야 한다.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 이번에는 나무계단이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길다. 중간에 쉼터까지 만들어두었을 정도. ‘꽃머리산’의 높이가 133m라는 게 맞긴 맞는 겨?

▼ 명색이 화태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데 어찌 돌탑 하나 없겠는가. 그것도 화태도갯가길이 들러 가는 산일지니 오죽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겠는가. 한 사람이 하나씩만 소원을 빌었었어도 돌멩이는 산더미처럼 쌓였을 것이다.

▼ 산길로 들어선지 20분. 서너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꽃머리산 정상에 올라선다. 정상은 절반을 밧줄난간으로 경계를 삼고 있다. 바위절벽이니 더 이상 나아가지 말라는 경계용일 것이다. 벤치를 놓아두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정상에 있다던 정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쩌면 태풍 ‘타파’가 무너뜨려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 정상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이정표(능선삼거리 0.3㎞, 묘두입구 0.9㎞)에 문패용 문구(꽃머리산 정상)를 적어 넣어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준다. 참고로 이곳 화태도에는 이곳 꽃머리산 외에도 운마산과 요악산, 삼각산 등 자잘한 산 3개가 더 있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동·남쪽으로만 열린다. 발아래는 ‘찌끝’. 포구 뒤로 두 번째 산이 ‘운마산’이다. 가장 뒤에서 흡사 평풍이라도 되는 양 화태도를 감싸고 있는 산은 금오도의 ‘대부산’일 것이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뻘금 방향으로 내려선다. 이때 화태도의 전경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을 수 있다.

▼ 트레킹 날머리는 ‘뻘금 버스정류장’

경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길을 7분쯤 내려섰을까 아까 트레킹을 시작했던 ‘뻘금 버스정류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핸드폰 앱이 12.17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대부분이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그만큼 적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화태교차로’에는 꽃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코끼리 형태의 섬 화태도’를 표현하고 있다는데, 아쉽게 철이 지난 지금은 말라비틀어진 줄기만 가득했다. 아니다. 오색의 바람개비가 꽃들을 대신하고 있었다.

두미도(頭尾島)

 

여행일 : ‘21. 8. 16(월)

소재지 :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면 두미리

트레킹 코스 : 북구선착장→남구선착장→전망대→대판마을(왕복)→천황산(468m)→투구봉(333m)→임도→북구선착장(소요시간 : 11.6km/4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통영시청에서 남서쪽으로 약 26km 해상에 위치한 총면적 5.03㎢에 해안선 길이가 11㎞인 자그만 섬이다. 섬의 모양이 꼬리가 달린 물고기의 머리와 비슷하다 하여 두미도라고도 부른다. 최고봉인 천황산(467m)으로부터 투구봉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해안선은 비교적 단조로운 암석해안으로 남쪽과 서쪽 해안이 해식애를 이룬다. 그 덕분에 섬은 규모에 비해 볼거리가 많은 편이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동뫼섬이다. 가오리처럼 생긴 섬의 꼬리에 해당되는 위치인데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암릉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천황산 등산도 빼놓을 수 없다. 정상부위의 암릉은 암벽산행의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고, 특히 정상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조망은 가히 일품이다.

 

▼ 찾아가는 길 : 일단은 통영항 여객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두미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두미도 말고도 사량도(상도)나 욕지도, 한산도, 매물도, 연화도, 비진도, 우도, 추도 등도 이곳에서 출발한다. 그건 그렇고 첫 배의 출항시간인 6시50분에 맞춰 아침식사를 하려면 조금은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하지만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터미널 주변에 새벽부터 문을 여는 식당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통영의 별미라는 ‘충무김밥’은 물론이고 해물뚝배기나 백반 등 제공되는 메뉴도 다양하다.

▼ 우리를 태워다 줄 ‘바다누리호’이다. 승객 124명과 승용차 6대를 동시에 운송할 수 있는 194톤급 카페리여객선으로 통영항에서 아침 6시50분과 오후 2시30분 등 하루 2차례 출발하는데, 낙도 보조항로 운항선박이라 두미도·상노대도·하노대도·욕지도 등 통영의 여러 섬들을 두루두루 거친다. 하나 더. 배편이 요일별로 차이가 날뿐만 아니라 삼천포 장날 역시 다르게 운행하는 등 조금 복잡하게 되어 있으니 운항사(한림해운, 055-644-8092)로 문의하여 배 시간을 확인하는 게 최상이다.

▼ 1시간 20분쯤 되었을까 안내방송과 함께 배는 두미도에 이른다. 아니 정확히는 두미도의 첫 번째 기항지인 ‘북구선착장’이다. 이 배는 반대편에 위치한 ‘남구선착장’에서 두 번째로 기항하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그 기항 순서가 바뀐다고 한다. 두미도 북구→남구→상노대도→하노대도→욕지도의 순서를 오후에는 반대 방향으로 배를 띄운다는 것이다.

▼ 섬은 꼬리가 달린 바닷고기인 가오리나 홍어처럼 생겼다. 두미도(頭尾島)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이다. 탐방코스는 배가 닿는 남구선착장에서 출발해서 천황산과 투구봉을 오른 다음, 북구선착장을 거쳐 남구선착장으로 되돌아와 배를 타고 통영으로 나오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배의 출항시간까지 기다리는 게 너무 지루하다는 약점이 있다. 이럴 경우 섬의 일주도로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다.

▼ 남구선착장에 기항이 어렵다는 전갈을 받고 부랴부랴 ‘북구선착장’에서 내리기로 했다. 덕분에 7시간(1항차와 2항차의 간격이 긴 탓이다)이나 되는 섬 채류시간에 맞춰 느긋하게 섬을 한 바퀴 둘러보려던 계획은 바꿀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두미도는 하선과 승선을 달리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남구선착장에서 배를 내려 천황산을 먼저 오르고, 이어서 순환도로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돈 다음 북구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나오면 같은 코스를 중복해서 걷지 않고도 섬 전체를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배에서 내리자 마을 표지석이 반긴다. 두미도를 대표하는 두 개의 마을 가운데 하나인 ‘북구마을’이다. 아니 설풍, 고운, 학리, 사동이 북구마을을 이룬다고 했으니 정확히는 ‘학리’라고 하는 게 옳겠다. 학리란 바다에서 보면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는 형상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때 천황산은 학의 머리가 된다는 것도 알아두자. 참고로 두미도의 주민은 현재 61가구 91명에 불과하다. 대부분 북구마을과 남구마을에 모여 사는데, 30%가량이 70살 이상인 초고령사회라고 한다. 농업과 어업이던 주업도 바뀌었다. 최근에는 낚시꾼이나 등산객들을 상대로 하는 관광업이 늘어나는 추세란다.

▼ ‘두미개척 100주년’ 기념비가 보초를 서고 있는 마을회관에는 ‘두미도 섬택근무 업무협약 체결식’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섬택근무’란 재택근무와 유사한 형태지만 집에서 근무하는 것이 아닌, 섬에서 근무 하는 것이다. 올 봄에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는데, 공단 직원들이 일주일에 3~4명씩 근무하면서, 일상 업무뿐만 아니라 섬마을 공동체 활동을 주민들과 함께 해오고 있단다. 두미도는 8년 전에 이미 광케이블이 깔렸기 때문에 뭍에서와 다름없이 인터넷·스마트폰 등을 이용해 정상 근무를 할 수 있다고 한다.

▼ 북구마을의 오래된 집들 대부분은 높다란 돌담에 둘러싸여 있었다. 지붕의 끝과 맞닿게 지붕을 쌓은 것이다. 두미도 사람들은 여름 태풍도 두려워하지만 봄에 부는 동풍을 가장 무서워한다고 한다. 그 바람은 회오리처럼 몰아쳐 집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기도 한단다. 그래서 두미도 사람들은 높디높은 돌담을 쌓기 시작했는데, 가옥을 가운데에 두고 둥글게 쌓은 게 보통. 하지만 달팽이 모양으로 구불구불하게 쌓기도 했다. 담장 전시장이라고나 할까? ‘돌담섬’이란 별칭을 얻게 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 바닷가는 타포니(tafoni) 현상으로 여겨지는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수없이 널려있었다. 타포니란 염풍화작용으로 암석에 동굴처럼 구멍이 뻥뻥 뚫린 지형을 말한다. 멀리서 보면 벌집이나 해골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혹자는 골다공증 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 두미도는 등산객들이 주로 찾는 섬이다. 스쿠버다이빙이나 낚시를 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 그들을 환영이라도 하는 양 저런 멋진 조형물까지 세워놓았다. 맞다. 찾아오는 이를 반기고 배려하는 것이 불심의 근본이 아니겠는가. 두미도는 본디 미륵이 머물다간 섬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둔미도(芚彌島)’란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연화세계를 알려거든 세존께 물어보라(欲知蓮華藏頭尾問世尊)는 불경의 말씀을 근거로 삼는다. 이를 입증하듯 1937년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산속에는 암자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잔해만 남아있고, 불상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 일단은 남구마을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천황산 등산을 남쪽전망대에서 시작하기 위해서다. 물론 부근의 작은 마을 두엇도 둘러볼 예정이다. 남구마을은 섬의 중턱을 따라 내놓은 순환임도를 따르면 된다. 두미도를 한 바퀴 도는 이 임도는 지난 2013년에 완공됐다. 길이는 9.29km. 2007년에 착공했다니 6년이나 걸린 셈이다. 그만큼 공사가 쉽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이 뚫림으로써 주민들은 등짐을 지고 산길을 넘거나, 배를 타지 않고도 생필품을 보급 받을 수 있게 됐단다.

▼ 길가 취수탑의 철망을 감싸고 있는 담쟁이넝쿨이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그동안 꽃을 안 피우는 식물인줄로만 알았는데 꽃을 피우고 있었고, 그것도 이렇게나 아름답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우정'이라는 꽃말도 만만찮다.

▼ 순환임도(일주도로)를 따라 10분 남짓 걸었을까 승용차가 멈춰서더니 타라고 한다. ‘두미연수원’의 책임자라는 분이 전망대까지 태워다준다는 것이다. 이동하는 도중 그로부터 섬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이분은 천황산의 새로운 등산로를 개척하는 일등공신이란다. 정상으로 오르는 바윗길도 이분이 개척했단다. 산행을 끝마치고 식사를 할 때도 만났는데, 마치 자기 일처럼 식당 일을 거들어주고 있었다. 남에게 도움을 주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고나 할까?

▼ 전망대까지 데려다준다는 것을 굳이 ‘남구선착장’에서 내렸다. 명색이 선착장까지 들어선 마을이니 특별하진 않더라도 유의미한 이야깃거리 하나쯤 있을 줄 누가 알겠는가. 작은 어선 세 척만이 외로운 포구로 내려서니 선착장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잡석더미만 눈에 들어온다. 저 공사로 인해 배가 기항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 남구마을의 옛 이름은 ‘굴밭기미’라고 한다. 어른 머리만한 벚굴이 지천으로 나고, 그 껍질이 산더미처럼 쌓인 마을이라는데, 요즘은 ‘구전’으로 표기되고 있다.

▼ 펜션과 민박에 식당까지, 편의시설들이 즐비하던 북구마을과는 달리 이곳 남구마을은 썰렁하기만 했다. 그저 공공기관의 하나인 보건진료소와 반듯하게 지어진 이층짜리 ‘마린리조트센터’가 전부라고나 할까? 두미도는 제철 생선이 풍부하게 잡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다 산호를 비롯한 해저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바닷속 비경을 구경하려는 스쿠버다이버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저 리조트에 ‘다이브샵’이 들어서있는 이유일 것이다.

▼ 세찬 바람에 쫓긴 민가는 높은 돌담 속으로 숨어버렸다. 지붕의 처마 높이에 맞춰 쌓은 돌담이 둥그렇게 집을 감싸고 있어 아래서 바라보면 지붕은 보이지 않고 담만 보일 정도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계절풍의 심술을 잘 아는 이곳 사람들은 높은 것으로도 모자라 겹담까지 쌓았다고 한다. 강하게 부는 바람에 싸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저 돌담의 한가운데에 바람이 통하도록 ‘바람길’까지 내 놓았다니 이 얼마나 지혜로운가. 참! 바닷가에 터를 잡은 동백나무 숲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수십 년은 족히 넘겼음직한 동백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나무그늘 아래에는 데크 쉼터까지 만들어놓았다. 그만큼 경관이 뛰어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비록 꽃을 피울 때에 한해서이겠지만 말이다.

▼ 두미도 여행에 큰 의미를 부여해준 가장 반가운 친구를 만났다. 웬만한 후기에는 빠짐없이 얼굴을 내미는 ‘누렁이’가 내게로 찾아와준 것이다. 환영한다고 꼬리까지 치면서...

▼ 임도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순환 임도를 따른다. 청석마을로 연결되는 이 길은 낭떠러지를 꿰뚫으며 나있다. 바다로 뚝 떨어지는 산비탈. 도저히 길을 낼 수 없는 상황인데도 사면을 깎아 외길을 만든 것이다. 토목 공법의 발전이 만들어낸 역사라 하겠다. 이 임도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청석마을은 섬 속의 섬이었다고 한다. 생필품이라도 받으려면 배를 이용하거나 지게를 지고 산길을 넘어 다녀야만 했단다. 그게 지금은 걸어서도 15분이면 충분하다니 이게 바로 상전벽해가 아니겠는가. 거기다 심심찮게 시야까지 트이니 이 얼마나 좋은가. ‘상노대도’를 중심으로 비상도와 하서도, 납도 등 자그만 섬들이 마치 돛단배라도 되는 양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닌다.

▼ 누렁이가 인도하는 대로 고갯마루를 넘자 ‘남쪽전망대(혹자는 청석전망대라 부르기도 했다)’가 나온다. 바다를 향해 툭 트인 지점에다 나무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안내판도 보인다. 하지만 글자가 지워진 탓에 판독할 수는 없었다.

▼ 전망대에 서면 ‘상노대도’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그 앞에 일렬로 서있는 밖·안· 돌 등의 ‘거칠리도’는 흡사 멀리뛰기라도 할라치면 단번에 이를 것같이 가깝다. 그 뒤의 큼지막한 섬들은 하노대도와 욕지도일 것이다.

▼ 이곳 남쪽전망대는 천황산 등산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보기로 했다. 남쪽 해안가에 터를 잡은 마을들도 하나쯤 둘러봐야 하지 않겠는가. 누렁이도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앞장을 서주고 있다.

▼ 잠시 후 두세 명은 너끈히 걸터앉을 수 있는 반석이 나타났다. 그 옆에는 의자까지 놓여있다. 뭔가 바라볼만한 게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두미섬이란 지명을 낳게 한 동뫼섬(혹자는 ‘독뫼섬’이라고도 한다)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이다. 덕분에 난 의자에 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을 감상하며 숨을 고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 반대편에서는 두미도의 또 다른 명물인 ‘새끼섬’이 확 달려든다. 그 뒤에 보이는 섬은 남해도의 부속섬인 ‘호도’일 것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된 청석마을에서 경작지다운 경작지를 만날 수 있었다. 예전 남구의 중심은 지금처럼 구전마을이 아니라 청석마을이었다고 한다. 일 년 먹을 양식만 있어도 부자소리를 듣던 시절이니 넓은 밭과 논까지 있던 청석이 당연 큰 마을일 수밖에. 당시는 두남분교 역시 청석에 있었단다. 하지만 농업이 쇠하고 수산업이 번창하면서 중심이 구전마을로 옮겨갔고 청석마을은 이제 한 집만이 외롭게 남았다.

▼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청석마을의 민가가 내려다보인다. 그 너머로는 두미도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동뫼섬’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바다로 향해 길게 뻗어나간 능선은 푸른 모자를 썼다. 그 아래는 서슬 시퍼런 해안절벽. 누군가는 저런 풍경을 보고 용머리가 다도해 파도와 만나면서 살아난다고 했다. 그 용이 상·하노대도와 욕지도 방향으로 누워있다면서 말이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 줌을 당겨보면 바위능선의 중간이 끊겨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잘려나간 부분이 섬(島)이 되었고, 동쪽에 있는 뫼(산이라는 뜻의 옛말이 아닐까 싶다)라 해서 ‘동뫼섬’이란 이름이 붙여졌지 않나 싶다. ‘독뫼섬’이란 또 다른 지명은 그 섬이 돌로 이루어졌다는데서 따왔을 것이고 말이다.

▼ 도로에 ‘꼬맹이 의자’가 놓여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지금은 폐교되었다는 초등학교에서 흘러나온 모양인데, 두미도 종주도로에서는 바다 쪽을 향해 놓인 의자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여행객들을 위한 섬 주민의 따스한 배려일 것이다.

▼ 임도 따라 걷기를 20분. 대판마을에 닿았다. 옛집 두 채에 관광객이 늘어나는 추세에 발이라도 맞추려는 듯 펜션형의 주택이 새롭게 들어섰다. 두미도에는 저런 마을이 여럿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퇴락하여 마을마다 한두 채가 겨우 남아있을 뿐이고, 북구의 학리마을과 남구의 구전마을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 돌담과 노거수가 조화를 이루는 옛집 마당에는 수십 년, 아니 수백 년도 더 되었을 것 같은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걸 가지치기까지 해놓은 덕분에 마치 분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 전망대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등산을 시작한다. 등산로는 전망대 맞은편에서 열리는데, 이때 계단 왼편으로 천황산 정상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두미도는 전체적으로 엎어 놓은 바가지 형태이다. 때문에 평지가 거의 없는데, 그 한가운데에서 우뚝 솟아오른 게 천황산이다. 높이는 467m. 그다지 높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해발 제로(0)에서 시작하는 산행이다 보니 그리 만만하게 볼 수도 없다.

▼ 들머리에 단순하게 방향표시만 해놓은 이정표와 함께 ‘천황산 등산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천황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의 시점이 이곳 남쪽전망대(1코스)와 동쪽전망대(2코스) 뿐이다. 천황산 정상에서 투구봉을 거쳐 고운마을로 내려가는 등산로는 아예 표시조차 하지 않았다. 섬을 일주하는 순환임도도 고운마을에서 설풍마을까지는 끊겨있다. 현실에 맞게 고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철거해버리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 울창한 동백나무 숲을 헤집으며 난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돌이 많은 길바닥이 조금은 거칠지만 길은 널찍했고, 길 주변의 잡목이나 잡초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또한 경사가 조금이라도 가팔라졌다 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 산을 오르다보면 작은 암봉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두미도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는 7시간(선택이 아니라 필수 시간이다)도 알차게 사용할 겸해서 빼놓지 말고 올라가보자. 섬 산행의 특징대로 주변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올 것이다.

▼ 암봉에 오르자 오른편에는 남구선착장을 포함한 다도해 풍경. 왼편도 새끼섬이 낀 바닷가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그 한가운데는 두미도의 최고봉인 천황산이 놓여있다. 멀리서 봐도 거대한 암봉임을 알 수 있다.

▼ 얼마쯤 걸었을까 천황산이 1.5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산길이 가팔라진다. 흩어진 바위더미 사이로 난 탐방로도 많이 거칠어졌다.

▼ 이곳 두미도는 관광객보다 등산객이 더 많은 섬이다. 그러니 돌탑 하나쯤 없겠는가. 그런데 쌓아올린 솜씨가 신기에 가깝다. 갈망하는 바람이 얼마나 절실했으면 저런 솜씨를 발휘했을까 싶다.

▼ ‘이게 투구바위이나요?’ 웬 투구가 이리도 많으냐는 내 넋두리를 어느 가족이 단체로 물어온다. 그네들은 내가 ‘투구봉’의 투구바위를 일컫는 것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바위의 생김새를 내 생각대로 표현했을 따름이라고 서둘러 마무리했지만, 아무리 봐도 투구를 쏙 빼다 닮았다.

▼ 계단으로도 모자라 바윗길에는 밧줄난간까지 설치했다. 경사가 약한 탓에 썩 위험해 보이지도 않는데 ‘위험구간’이라는 팻말까지 매달아놓았다.

▼ 산행을 시작한지 55분, 첫 번째 삼거리(이정표 : 천황산 정상↑ 640m/ 동쪽전망대→ 1㎞/ 남쪽전망대↓ 1.5㎞)를 만났다. 동쪽전망대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쳐지는 지점으로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이곳에서도 기암 하나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영락없는 사람의 얼굴. 그것도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표정이다.

▼ 천황산 등산로의 특징 중 하나는 이정표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등산로 전체가 외길 수준이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겠지만 그래도 2개(들머리 제외)라니 드물어도 너무 드물다. 그게 미안했던지 길바닥 곳곳에 화살표를 그려 방향을 표시하고 있었다. 지인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눈 여겨 보았다던 화살표도 저렇게 그려졌을까?

▼ 전위봉에 올라선다. 이곳은 조망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두미도의 최고 비경으로 꼽히는 ‘동뫼섬’은 물론이고, 다도해라는 남해바다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나는 곳이니 그냥 지나쳐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

▼ 바위에서 바라보는 ‘동뫼섬’은 두미도 여행의 백미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 꼬리가 흡사 연화도의 용머리를 보는 듯하다. 주민들은 저 바위섬을 ‘개바위’라고도 부른단다. 그 생김새가 마치 개가 쭈그리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무튼 코발트빛 바다를 배경으로 멀리 노대도, 욕지도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 전위봉에서 살짝 내려선다. 이때 반반한 바위지대가 나타나면서 동뫼섬이 다시 한 번 얼굴을 내민다.

▼ 전위봉에서 내려서니 완만한 능선을 따라 길게 돌담이 쳐져있다. 이곳 두미도에서도 염소를 방목한다고 했으니 경계용으로 쌓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염소란 놈이 이까짓 높이를 넘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은 계속 남는다. 참! 이런 돌담은 아까 지나왔던 돌탑 부근에서도 눈에 띄었었다.

▼ 잠시 후 마주친 삼거리(이정표는 없다)에서는 오른쪽 길을 따르기로 했다. 아까 우리를 태워다 준 연수원 책임자께서 개척했다는 새로운 루트이다. 하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다며 되돌아오는 등산객을 본 집사람이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발길을 돌려버리는 게 아닌가. 그럼 하네스(harness)를 차고 암벽을 오르내리던 그녀는 어디 갔단 말인가. 흐르는 세월 앞에 장사는 없었던 모양이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 우회로를 타기로 했다. 아니 안전이 확보된 정규탐방로이다. 이어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잠시 치고 오르니 급경사 바위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굵직한 밧줄이 매어져 있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 1시간 20분 만에 올라선 정상에는 표지석이 2개나 있었다. 말뚝 모양의 정상석 말고도 세 동강난 또 다른 정상석이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쓰러져 있는 정상석에 ‘天黃峯’으로 적혀있는 게 아닌가. 이제껏 ‘天皇峯’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일제의 잔재라 할 수 있는 지명을 아직까지도 고수한다며 꾸짖으려했던 내 무지가 들통 나는 순간이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이다. ‘상·하 노대도’와 욕지도 등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섬들이 은빛 바다 위를 점점이 수놓는다. 한려수도의 전형적인 풍경이라 하겠다. 망원렌즈라도 챙겨왔더라면 그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연화도와 연대도, 비진도 등도 함께 담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 잠시 후 오르게 될 ‘투구봉’ 너머로는 남해도 인근의 풍광이 펼쳐진다. 이곳도 역시 올망졸망한 섬들이 동네잔치라도 벌이는 양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호도. 조도, 모도 등 일일이 나열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 숫자가 많다.

▼ 북쪽 방향도 만만찮다. 추도 뒤로 통영의 미륵산이 보이고, 그 왼쪽에는 사량도가 있다. 한마디로 이곳 두미도는 수많은 섬들에 둘러싸인 모양새라 하겠다. 눈을 들면 들어오는 게 오로지 섬뿐이니 말이다.

▼ 하산을 시작한다. 천황산으로 오르는 능선이 순하지도 그렇다고 거칠지도 않은 길이었다면, 투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시작부터 바윗길로 시작된다. 때문에 갖가지 등산 기법을 활용해야만 무사히 산을 내려갈 수 있다. 먼저 선보여야 할 기법은 밧줄에 매달려 20m쯤 내려가는 것이다. 수직에 가까운 바위절벽이지만 암벽산행의 이력이 있는 집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두 번째는 직접 바위를 잡고 내려가는 기법이다. 바위절벽에 이어 나타난 칼바위능선에서 써먹게 되는데, 뾰쪽한 바위들이 공룡의 등허리처럼 날을 세웠는가 하면, 그 양짝이 수직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하지만 암릉의 특징인 조망은 이를 보상하기에 충분하다. 좌우로 펼쳐지는 다도해의 풍광을 발아래에 두다보면,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붙잡아야 할 바위의 크랙(crack)을 살피는 일까지 소홀하지는 말자.

▼ 세 번째는 스틱에 의지하거나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방법이다.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대신 스릴을 느낄 수 없어 산행의 재미까지 한꺼번에 뚝 떨어져버린다.

▼ 하산을 시작한지 30분. 안부까지 고도를 낮춘 산길은 또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거대한 바위절벽을 만나자 오른편으로 우회를 한다.

▼ 바위 위로 오르자 천황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천황산은 자그마한 섬에 위치하지만 통영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통영이 자랑하는 미륵산(461m)이나 동명인 욕지도의 천황산(392m)보다도 더 높은 것이다. 두미도를 찾는 외지인 대부분이 등산객들인 이유이다.

▼ 이후부터 길은 썩 편치가 않다. 능선이 크고 작은 바위들을 잔뜩 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산길은 바위능선을 버리고 9부 능선쯤 되는 산자락의 사면을 헤집으며 나있다. 오른편에 바위능선 그리고 왼편에는 염소 방목장의 철망펜스를 끼고 이어지는 모양새인데 길이 정비가 안 되어 있는 탓에 걷기가 영 사납다.

▼ 안부를 지난 지 20분. 동백나무와 소사나무가 적당히 섞인 숲을 빠져나오자 ‘투구’를 쏙 빼다 닮은 거대한 바위봉우리 하나가 툭 튀어나온다. ‘투구봉(333m)’이지 싶다. 투구처럼 생긴 봉우리이니 응당 투구봉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핸드폰의 앱은 자꾸만 더 가라고 한다. 그래야만 진짜 투구봉을 만날 수 있다면서 말이다.

▼ 바위에서 내려와 울창한 소사나무 숲을 조금 더 걷자 앱이 ‘투구봉’이란다. 하지만 커다란 바위덩어리 몇 개가 무리지어 있을 뿐이다. 정상석이나 이정표는 물론이고 선답자들이 남겨놓았어야 할 그 어떤 흔적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앱의 지도가 ‘투구봉’의 위치를 잘못 표시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이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북서쪽으로 이어지던 능선은 이후부터는 온전히 북쪽으로 향한다. 길도 순해졌다. 바위가 듬성듬성 박히기는 했지만 전형적인 흙길로 변하기 때문이다. 경사까지도 완만해진 덕분에 무릎이 약한 등산객들도 내려서는데 조금도 무리가 없다.

▼ 하산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만에 일주도로(임도)에 내려섰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가면 아까 산행을 시작하면서 둘러봤던 대판마을과 청석마을을 만나게 된다. 그밖에도 고운·설풍·덕리·순천 등의 작은 마을들도 기웃거려 볼 수 있다. 하지만 둘러보는 것까지는 그만두기로 했다. 척박한 섬 마을, 특히 한두 집이 전부인 외진 동네에 등산복을 입고 어슬렁거린다는 게 옳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요즘은 언택트(un-contact)가 최고의 미덕으로 자리 잡은 코로나-19 팬데믹(COVID-19 pandemic)이 아니겠는가.

▼ ‘고운마을’로 내려가는 입구에는 마을 표지석 대신에 ‘그 겨울 꽃 동백’이라는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송호룡이란 사람이 1890년대 중반 두미도에 정착하여 험난한 개척의 삶을 사셨던 조부모님과 부모님에게 바치는 글이라는데, 글 솜씨가 여간 뛰어난 게 아니다.

▼ 날머리에도 이정표(투구봉 정상 1.0㎞)와 함께 안내판 하나를 세워두었다. 이번에는 ‘숲길 안내판’이란 제목으로 순환임도와 등산로를 같이 그려 넣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지도 위에다 낙서를 해놓았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에 ‘위험’, 그리고 천왕봉에서 투구봉 사이에는 ‘정비하삼’이라 적었다. 단지 두 마디일 뿐인데도 오늘 걸었던 등산로의 형편이 속속들이 표현되어 있다.

▼ 가슴이 툭 트이는 바다를 내다보며 북구마을로 향한다. 이어서 25분쯤 후에는 북구마을에 이르게 되면서 두미도 트레킹은 막을 내린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시간 30분(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은 뺐다) 만이다. 그런데 나가는 배를 타려면 아직도 3시간을 더 버텨야만 한다.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동네나 한 바퀴 더 돌아봐야겠다.

▼ 점심식사는 ‘두미 양지휴게소(010-6557-4485)’에서 할 수 있었다. 선마리나(주)에서 운영하는 두미연수원의 펜션 상가1층에 식당을 열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섬에 왔으니 회는 필수. 소·맥을 반주삼아 회정식(15,000/1인)을 주문해봤다. 하지만 막상 밥상머리에 나온 회는 맛보다가 끝나버렸을 정도로 양이 작다. 그게 미안했던지 주인장은 요즘은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며 가격을 3,000원이나 깎아주었다.

▼ 식당 근처에는 ‘샘’도 하나 있었다.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니 석간수인 셈. 바가지까지 놓아둔 걸 보면 마실 수도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 두미도의 명물은 ‘장군샘’이다. 위치를 몰라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통영 섬 지역의 전설에 자주 등장하는 아기장군 ‘설영’이 마신 물이라고 했다. 고려 충신 최영 장군을 떠올리게 만드는 설영은 비늘 갑옷을 입고 섬과 섬 사이를 날아다녔다는 설화 속 인물이다.

 

말도(末島)

 

여행일 : ‘21. 6. 6(일)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말도리

트레킹 코스 : 말도항선착장→단도섬→말도등대→정자→83.8m봉→해변→112.9m봉→해안절벽→마을→여객선선착장→말도항선착장(소요시간 : 6.6㎞/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군산시 서남쪽 약 50㎞ 해상에 위치한 총면적 0.36㎢에 해안선 길이가 3㎞인 자그만 섬이다. 63개의 섬으로 구성된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말도(末島)라는 지명을 얻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끝섬’이 더 익숙하단다. 섬은 규모에 비해 볼거리가 많은 편이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불을 밝힌 ‘말도등대’와 천연기념물 제501호로 지정된 ‘말도 습곡구조’가 대표적이다. 그밖에도 파란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 민둥섬 ‘단도’와 신비의 천년송을 머리에 이고 있는 ‘토끼섬’, 바닷가를 따라 형성된 해안절벽도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특히 이런 관람 포인트들을 연결하는 탐방로를 잘 닦아놓아 둘러보는데도 어려움이 없다.

 

▼ 찾아오는 방법

말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장자도(군산시 옥도면 장자도리)’까지 와야만 한다. 말도를 왕복하는 여객선이 이곳 ‘장자도 선착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 IC에서 내려와 21번 국도를 타고 부안방면으로 내려오다 ‘신시1사거리(군산시 옥도면 신시도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오면 신시도와 무녀도를 거쳐 ‘장자도’에 이르게 된다. 그건 그렇고 새만금방파제와 고군산군도의 6개 섬이 다리로 연결되면서 이곳 장자도도 새로운 변화를 맞았다. 고군산군도의 외곽 섬들을 한 바퀴 돌아오는 여객선의 기항지가 되었음은 물론, 상가와 펜션 등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자본의 논리로 돌아가는 관광지가 됐다. 시쳇말로 천지개벽했다고 보면 되겠다.

▼ 지도는 산악회에서 게재한 걸 사용했다. 중요 지점의 표시가 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트랙까지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이를 따르면 섬의 곳곳을 빠짐없이 둘러볼 수 있다.

▼ 배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나가다보면 바다건너 저 멀리로 자그마한 섬들 몇 개가 눈에 들어온다. 가장 오른쪽은 횡경도이다. 이어서 소횡경도와 방축도, 광대섬, 명도, 보농도, 말도가 일렬로 늘어선 모양새이다. 이 가운데 방축도와 명도, 말도가 유인도이고 나머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 우리를 태워다 줄 배는 ‘고군산 카페리호’이다. 사람과 차량을 함께 싣는 이 배(총톤수 206톤, 승객 178명, 승용차 11대)는 하루에 두 번(11:00, 14:00) 이곳 장자도를 출발하는데, 관리도를 거쳐 방축도, 명도를 거친 다음 최종 목적지인 말도에 이른다. 참! 말도에서 돌아올 때는 방축도와 명도는 거치지 않고 관리도만 들른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 첫 기항지인 관리도를 거쳐 방축도에 이르니 명품바위로 입소문을 탄 ‘독립문바위’가 얼굴을 내민다. 바위는 아랫도리를 물속에 담그고 있다. 밀물 때라서 일 것이다. 그래선지 구멍을 둘러싼 바위 모양이 마치 아치처럼 보인다. 저런 모양새가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과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뒤에 보이는 다리는 방축도와 광대섬을 잇는 83m길이의 인도교이다. 2019년에 들렀을 때는 통행을 막고 있었는데 지금쯤을 풀렸을지도 모르겠다.

▼ 세 번째 기항지인 명도를 지나자 명도와 보농도를 잇는 공사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군산시에서는 말도와 명도, 방축도 등 3개의 유인도서와 무인도서인 보농도와 광대섬을 인도교(人道橋)로 이어 명품 트레킹코스로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지났던 구간(광대섬-명도)은 공사를 시작도 안하고 있었다. 2022년 완공을 목표로 한다면서도 말이다. 작년엔가 인도교 설치공사가 지지부진하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기사는 2019년 겨울부터 공사가 중단되고 있다했는데 한시라도 빨리 재개되어 이 섬들을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장자도를 출발하고 50분을 훌쩍 넘기고서야 말도에 도착했다. 파도가 높다보니 더디게 달려왔던 모양이다. 거친 파도는 속도만 떨어뜨린 게 아니었다. 마을 앞에 마련된 기존 선착장에는 배를 댈 수가 없단다.

▼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곳 말도에는 파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튼실한 항구가 만들어져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마을 앞의 선착장에서 100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아 오늘처럼 선착지를 옮긴다고 해도 하등 문제될 게 없다. ‘배를 다른 곳에 대겠다.’는 선장님의 안내 방송 한 번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 방파제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면 길(말도길)이 양쪽으로 나뉜다. 오른쪽은 마을로 이어지는데 이따가 트레킹을 마치고 나올 때 이용하게 된다. 우리가 걷게 될 왼편은 등대로 가는 길이다. ‘말도길’로 명명된 이 해안도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물양장을 지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가정집은 눈에 띄지 않는다. 포구인데도 말이다. 마을은 아까 배를 대려고 했던 선착장 근처에 들어서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린 이 항구는 어선들의 정박항이자 어부들의 작업장, 인근 어장에서 작업하는 어선이 피난하는 포구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 조금 더 걸으니 항구를 감싸고 있는 ‘민둥섬’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오른편으로 작은 바위섬이 하나 더 있다. 이 섬들은 방파제 공사로 말도와 이어지면서 본래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말도항’이라는 대피항이 생겨났음은 물론이다.

▼ 등대가 걸터앉은 본섬의 끄트머리를 지나자 방파제로 연결된 작은 바위섬이 얼굴을 내민다. ‘토끼섬’이라는데 바위 꼭대기에 나무 한 그루가 톡 튀어나온 게 무척 인상적이다. 대머리에 머리카락 한 올이 솟아나온 것 같다면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이 나무가 바로 바위 속에 뿌리를 내린 신비의 ‘말도 천년송’이다. 선착장에 세워놓은 안내도는 이 지역이 바다갈매기의 서식처로 5월 말경이 되면 수만 마리의 갈매기가 모여들어 장관을 이룬다고 적고 있었다.

▼ 소나무의 생김새가 궁금해 올라가보기로 했다. 바윗길이 제법 험했지만 까짓 대수겠는가. 그렇게 만난 소나무는 과연 ‘천년송’으로 대접받을 만했다. 우선 굵기부터가 범상치가 않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바위틈에서 태어나. 모진 풍파에 시달려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천년’을 묵었다고 우긴다고 해서 누가 나무라겠는가.

▼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천년송’뿐만이 아니었다. 이름 모를 꽃이 피어났는가 하면, 방풍나물도 사방에 널려있다시피 했다.

▼ 다음은 민둥섬인 ‘단도’이다. 이 섬은 사방이 아찔한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있어 위로 오를 수는 없다. 단도의 또 다른 특징은 상부 전체가 푸른 초지로 덮여있다는 점이다. 오랜 풍화작용이 윗부분을 흙으로 바꿔놓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멀리서 볼 때 민둥섬으로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 단도에서 방파제로 연결된 하양등대까지 가보기로 했다. 특별할 게 없는 외모였지만 멋진 조망이 펼쳐질 것 같아서이다. 등대로 연결되는 방파제는 한마디로 튼실했다. 널찍한 방파제로도 부족했던지 테트라포드(일명 삼발이)로 양옆을 감쌌다.

▼ 그런 내 짐작은 적중했다. 등대의 난간으로 오르자 ‘말도항’이 그 전모를 드러낸다. 빨강등대가 자리한 맞은편 방파제 안쪽으로 널따란 포구가 들어앉았는데 호수처럼 아늑하고 아름다웠다.

▼ 시선을 왼쪽으로 옮기자 이번에는 등에 지고 걸어왔던 풍경들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단도와 토끼섬. 그 오른편 본섬의 언덕에는 말도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등대가 걸터앉아 있다.

▼ 아까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나가는데 무심코 지나쳤던 건물들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 그 가운데서도 ‘말도항 외곽공사 보강공사’ 현장사무실이 눈길을 끈다. 동·서방파제와 파제제(波除堤) 등의 보강공사를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맞다. 4년쯤 전인가 들렀던 가거도에서도 이런 종류의 공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서해 먼 바다에서 들이닥치는 파도를 가장 먼저 맞다보니 시설물이 자주 부서진다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 말도 역시 군산 앞바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이로구나.

▼ 이 현장사무실을 왼편에 끼고 올라가면 ‘말도등대’를 만날 수 있다. 길은 널찍하다. 거기다 시멘트로 포장까지 해놓아 소형 차량쯤은 너끈히 지나다닐 수 있겠다.

▼ 언덕으로 올라서니 팔각 등탑의 하얀 등대 하나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올랐다. 외모는 특이할 게 없다. 하지만 호미곶등대와 함께 102년이나 된 역사가 깊은 등대다. 말도등대(1909년)보다 먼저 불을 밝힌 등대는 국내 1호인 팔미도등대(1903)와 부도(1904), 거문도(1905), 우도(1906)가 전부라고 한다. 뒤를 이어 어청도(1912)와 마라도(1915)에 차례로 불을 밝혔단다. 말도를 관광할 때 꼭 찾아봐야 하는 명물로 자리매김 된 이유이다.

▼ 등대의 앞에는 ‘스탬프 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등대 스탬프투어’를 위한 시설로 등대여권을 소지한 일반인이 저곳에 비치된 스탬프를 여권에 찍으면 된다. 일정 수 이상의 등대방문을 인증한 여행자들에게는 국립등대박물관에서 등대별 건축미를 반영한 특색 있는 메달을 수여한단다. 참! 그 옆에는 1909년 당시의 것으로 여겨지는 등대가 미니어처로 만들어져 있었다. 20세기 초반에 선보인 콘크리트 건축물, 게다가 높다랗게 지은 건축물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건축양식이었다고 한다.

▼ 등대 위로 올라가본다. 문이 닫혀있는 등탑부분은 들어갈 수 없기에 기단 위로 올라가서 주변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서해 먼 바다. 등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서해의 쪽빛바다는 바람이 할퀴어 하얀 백파가 일고 있었다. 하지만 어부들에게는 그런 바다까지도 삶의 현장이 되는가 보다. 뒤집힌 바다의 수평선 위에 여러 척의 어선이 떠있는 걸 보면 말이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이번에는 ‘말도항’이 눈에 들어온다. 고군산군도의 서측 끝에 위치하고 있는 저 항구는 주변 어장에서 조업하는 어선들의 대피항 기능은 물론, 중간 보급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먼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거친 파도를 막아줄 서방파제와 동방파제가 1998년에 완공되면서부터이다.

▼ 고개를 더 돌리자 잠시 후에 걷게 될 능선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통신시설이 올라앉은 봉우리가 섬에서 가장 높은 ‘112.9m봉’이다. 능선으로 연결되는 초입에는 관사로 여겨지는 부속건물이 지어져있었다. 소형선박까지도 위성항법장치(GPS) 등 첨단장비를 갖춘 요즘은 등대의 무인화 추세가 대세인데도 이곳은 아직까지 유인등대로 남아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한때 이 등대도 역시 무인화로 결정이 났었지만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아직도 유인등대로 남아있단다.

▼ 정문을 빠져나오자마자 왼편 능선으로 올라선다. 해안을 둘러봤으니 이젠 산도 올라봐야 하지 않겠는가.

▼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널찍한 것은 기본. 조금이라도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나무계단을 놓았다. 참! 부지런한 아줌마들에게는 횡재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바닷바람을 머금은 약쑥이 지천으로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 능선을 따르다보면 바닷가가 내려다보이기도 한다. 탐방로 아래에서 얼굴을 내미는 절벽은 아찔할 정도로 높고 험했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는 망설임 없이 오른편으로 향한다. ‘83.8m봉’을 다녀오기 위해서이다. 이어서 울창한 산죽 숲길을 잠시 걷자 정자가 나타난다. 몇 가지 운동기구까지 갖춘 걸로 보아 섬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분명하다.

▼ 몇 걸음 더 걸으니 ‘83.8m봉’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놓여있다. 이제 눈이 바빠져야 할 때이다. 말도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중엽 한양에서 심판서라는 사람이 유배를 오면서부터였다고 전해진다. 그를 모시는 제당(영신당)이 마을 근처의 숲에 있다했으니 이 언저리쯤 되지 않겠는가.

▼ 하지만 제당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저 숲을 헤치며 기다란 계단이 놓여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올라선 ‘83.8m봉’의 꼭대기에는 벤치를 갖춘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대를 둘러싼 나무들 때문에 제 기능을 못하고 있었다.

▼ 하산은 반대 방향의 데크 계단을 이용하면 된다. 산허리를 반 바퀴 돌아 아까 산으로 올랐던 지점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 구간은 숲이 잠시 열리면서 고군산의 풍경을 살짝 엿볼 수도 있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이동통신사의 중계탑을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우린 또 하나의 삼거리와 맞닥뜨린다. 말도의 유일한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이 이곳에서 나뉜다.

▼ 마을 쪽의 구릉에는 작은 텃밭들이 줄지어 있었다. 식탁에 자주 올라야만 하는 야채류는 직접 재배해서 먹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왼편으로 내려가고 본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곳이니 일부러 찾아볼 필요가 없다는 산행대장의 조언이 있었지만 말도에서 하나밖에 없는 해변을 어찌 둘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가팔랐다. 되돌아 올라올 때를 걱정했었다면 어느 정도일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 그렇게 한참을 내려서자 산봉우리 하나가 앞을 막는다. 그런데 그 풍경이 자못 괴이하다. 능선으로 이어진 부분이 잘록한 탓에 본섬에 딸린 부속섬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이다.

▼ 잘록한 곳에서 데크 계단을 내려서자 제법 너른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반달형으로 움푹 파인 해안에 모래가 축적되면서 그럴듯한 해변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물만 갖추어진다면 해수욕장으로 이용해도 부족함이 없겠다. 그건 그렇고 모래사장의 왼편에는 무인도인 ‘보농도’가 있다. 우리 같은 여행자들에게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는 섬이다. 하지만 찾아볼 날도 멀지 않았다. 말도와 보농도를 잇는 제1교(308m)와 보농도와 명도를 잇는 제2교(410m)가 2022년도에 완공된다고 했으니 말이다. 명도와 광대섬을 잇는 477m짜리 구간의 공사는 아직까지 시작도 안했다지만 까짓 조금만 더 속도를 내면 되지 않겠는가.

▼ 능선의 반대편은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서해 먼 바다에서 들이닥친 파도가 저런 모양새의 해안절벽을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저 바다는 황금어장으로 알려져 있다. 대륙붕인데다 연안수와 황해난류의 영향으로 조기·고등어·새우·갈치 등 어족의 회유가 많아 4∼5월 성어기에는 각지에서 어선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룬다고 한다.

▼ 이동통신중계탑으로 되돌아와 또 다시 능선을 따른다. 이어서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갈림길. 이번에는 오르막길이다. 말도에서 가장 높은 ‘112.9m봉’으로 올라가는 길이니 당연하다 하겠다.

▼ ‘112.9m봉’은 불가침 구역이었다. 안테나로 여겨지는 군의 시설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입은커녕 사진도 찍지 말라는 경고판까지 걸어놓았다. 이를 어길시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에 의거 처벌을 받는단다.

▼ 그 옆에는 은강교회의 기도원이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오래 전에 운영을 중단했는지 잡초더미 속에 묻혀있었다.

▼ 삼거리로 되돌아가 조금 더 내려가자 왼편 산비탈을 따라 기다란 나무계단 놓여있다. 이곳 말도를 세상에 알리는데 일조한 ‘말도 습곡구조(褶曲構造)’로 내려가는 길이다.

▼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 중간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모처럼 시야가 열리는 곳이니 잠시 쉬어가라는 모양이다.

▼ 전망대에 서자 고군산(古群山)의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바다는 물론이고, 그 너머에 있는 선유도와 장자도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여기서 고군산은 ‘옛날 군산’을 의미한다. 현재의 군산은 하나의 도시이지만 원래는 지금의 군산 앞바다에 떠있는 섬들을 아우르는 지명이었다고 한다. 바다 위에 점점이 솟아있는 섬들이 마치 산봉우리의 무리처럼 보여 ‘군산(群山)’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 길고 긴 나무계단을 다시 한 번 내려서자 드디어 바닷가이다. 이 일대의 해안절벽은 약 5억9000만 년 전인 시·원생대 선캄브리아기(Precambrian time)에 만들어진 지질구조라고 한다. 최소 3회에 걸친 대규모 습곡작용의 흔적이 또렷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게 국내의 다른 장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단다. 그래서 정부는 이 일대를 ‘말도 습곡구조’라는 이름을 붙여 천연기념물 501호로 지정해 놓았다. 그만큼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습곡이란 횡압력에 의해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암층 또는 지층의 상부에 잡힌 주름을 말한다.

▼ 바닷가로 내려서자 기암절벽이 펼쳐진다. 바위는 흥에 겨운 누군가가 웨이브를 준 듯 휘어져 있다. 그래서일까? 얼핏 눈썹으로 보이기도 한다. 평소에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지형이라는 얘기이다. 맞다. 선캄브리아기는 고생대 이전의 매우 오래된 지질시대라서 이 시대의 암석은 대부분 심한 변성작용을 받아 원래의 암석 구조가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곳은 연흔(漣痕: 바람이나 물의 움직임에 의해 퇴적물의 표면에 형성되는 파상의 흔적 화석)과 경사진 층리 등의 퇴적구조를 아직까지도 잘 간직하고 있단다.

▼ 반대편도 역시 해안절벽이다. 생김새는 조금 달라도 저곳 역시 ‘말도 습곡구조’의 일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지질에 대해 문외한이 나로서는 저게 어떤 구조인지를 헤아릴 수는 없다. 그저 국내에서 보기 힘든 희귀한 구조들(충상의 듀플렉스 구조, 여러 단계에 걸쳐 만들어진 중첩된 습곡 등)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는 수준에서 마무리해볼 따름이다.

▼ 이젠 마을로 내려갈 차례이다. 조금 전 내려왔던 길을 되돌아 올라가다 중간쯤에서 이번에는 왼편으로 향한다. 이어서 길게 놓인 나무계단을 얼마큼 내려섰을까 숲이 열리면서 말도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컬러풀한 지붕의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아니 바다만 없다면 영락없는 산촌이다.

▼ 자그만 마을이지만 그럴듯한 교회도 들어서있었다. 하지만 마을을 둘러보는 것까지는 삼가기로 했다. 요즘은 관광까지도 언택트가 대세라 하지 않던가. 설상 들어간다고 해도 마을회관을 빼면 좁은 골목에 낡은 집들이 전부 아니겠는가.

▼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왼편에 제법 너른 공터가 보인다. 옛날에 초등학교(분교)가 있던 자리라기에 들어가 보니 공덕비가 몇 개 세워져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얼룩무늬 건물은 예전에 군인들이 근무하던 시설이란다.

▼ 교사(校舍)는 이미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폐자재만 가득했다. 웃자란 잡초에 반쯤 가려있는 ‘책 읽는 소녀상’과 반공소년상‘이 옛날 이곳에 초등학교가 있었음을 짐작케 해줄 따름이다.

▼ 마을을 빠져나오면 조그마한 포구가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 여객선용 부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고 왔던 배도 원래는 이곳에 대려고 했었다.

▼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여행자를 위한 편의시설도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붉은 지붕을 한 ‘여객선대기소’는 물론이고 여행 포인트를 그려 넣은 ‘말도 안내도’와 천연기념물 제51호인 ‘말도 습곡구조’에 대한 설명판도 이곳에 세웠다.

▼ 선착장으로 나가니 건너편 해안절벽이 성큼 다가온다. 그러면서 조금 전 능선의 너머에서 보았던 바닷가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아니 아까보다 훨씬 더 또렷해졌다. 이번에는 영락없는 눈썹의 모양을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인상을 잔뜩 쓰고 있다. 선착장에 세워놓은 안내판은 저 모양새를 ‘물결 모양의 무늬’인 연흔(連痕)으로 적고 있었다. 이곳 말도는 저런 지층 말고도 사층리(경사진 층리) 등의 퇴적구조를 지금까지 잘 간직하고 있단다.

▼ 이젠 우리를 태우고나갈 여객선만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배를 ‘말도항’에 대겠단다. 아직도 파도가 높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항구로 나갈 걱정은 필요 없다. 옛날에야 고개를 넘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해안도로를 잘 닦아놓았기 때문이다. 물결무늬 기암절벽을 끼고 난 길을 따라 걷다보면 오히려 눈이 즐거워진다.

▼ 항구로 되돌아오니 섬으로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상점이 눈에 띈다. 카페와 민박을 겸한다는데 1.6리터들이 맥주 페트병 하나에 새우깡 하나를 집어 드니 1만원을 달랜다. 이곳까지 오는데 들어간 물류비가 포함되었나보다. 참! 부근에는 또 다른 편의시설인 펜션과 식당도 들어서 있었다.

퍼플섬(Purple Island), 반월도(半月島)-박지도(朴只島)

 

여행일 : ‘21. 4. 24(토)

소재지 :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반월리와 박지리

트레킹 코스 : 소곡리주차장→문 브릿지→반월선착장→마을카페→어깨산→반월도 당숲→마을카페→퍼플교→박지선착장→박지당산→라벤더정원→박지선착장→퍼플교→두리매표소(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산수산악회

 

특징 : 섬 1004개를 보유해 ‘천사섬’이라는 세계적 닉네임까지 얻은 신안군. 그중에서도 보랏빛으로 소문난 두 섬이 있다. 박지도와 반월도가 바로 그곳인데 어촌 지붕과 다리 등을 모두 보랏빛으로 칠한 가운데, 이른 봄에는 보라색 유채가, 5~6월엔 라벤더, 9~10월엔 아스타국화가 퍼플색감을 이어간다. 최근에는 외국 언론들에까지 보도되면서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얻어가고 있다. 지난해 독일 최대의 위성TV방송인 ‘프로지벤(Prosieben)’과 홍콩의 유명 여행 잡지 ‘유 매거진(U magazine)’에 소개됐는가 하면, 올해는 미국 CNN에서 ‘사진작가들의 꿈의 섬’이라 소개했고, 폭스 뉴스(FOX NEWS)도 ‘퍼플섬의 독창성’을 조명했다. 로이터통신도 ‘퍼플에 흠뻑 젖은 한국 섬이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타전한바 있다.

 

▼ 트레킹 들머리는 소곡리주차장(신안군 안좌면 소곡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77호선을 타고 압해도까지 일단 들어온다. 압해읍사무소 앞에서 우회전하여 국도 2호선으로 갈아타고 길고 긴 천사대교를 건너면 암태도. 기동삼거리(암태면 기동리)에서 좌회전하여 805번 지방도를 타면 팔금도, 팔금도 끄트머리에서 ‘신안1교’를 건너면 안좌도에 이른다. 안좌중학교를 지나자마자 만나는 삼거리에서 우회전, 첫 번째 만나는 삼거리에서는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두리선착장 근처에 조성된 널따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퍼플섬 트레킹의 들·날머리인데 차에서 내리자 퍼플나라에 들어온 착각에 빠진다. 퍼플교 입구까지 이어지는 보행도로도 마을을 소개하는 안내판도 모두 보라색이기 때문이다.

▼ 우리 부부처럼 산까지 올라보려는 사람들을 위해 등산로가 잘 나타나 있는 지도를 첨부해봤다. 새로 놓인 다리. 즉 단도(매표소)와 반월선착장을 잇는 ‘문브릿지’가 빠져있지만 등산로를 찾기에는 이만한 게 없어보여서이다.

▼ 관광안내소 부근의 조형물에서 ‘보랏빛(purple) 다리’와 ‘퍼플섬’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박지도와 반월도를 한꺼번에 나타내려는 듯, 반으로 자른 박의 위에 반달을 얹고 그간의 추진과정을 적었다. 얘기는 평생을 박지도에서 살아온 김애금 할머니의 ‘두 발로 걸어서 육지로 나가고 싶다’는 소망에서 시작된다. 사연을 접한 신안군에서 안좌도의 두리선착장과 박지도, 박지도와 반월도를 잇는 총 연장 1.46㎞의 나무다리를 놓았다는 것이다. 지자체와 주민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특색 있는 섬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댔고, 당시 섬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왕도라지꽃과 꿀풀꽃 등의 자연환경을 살려 섬 전체를 보라색으로 가꾸기 시작했단다.

▼ 바닥에 그려놓은 보라색 선을 따라 바닷가에 이르자 ‘신안갯벌 도립공원’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맞다. 이곳 안좌면. 아니 신안군의 갯벌은 지난 달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홈페이지에까지 소개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갯벌이다. ‘한국 갯벌은 아주 생산적인 에코시스템’이라며 미네랄이 풍부한 갯벌에 생존하는 미생물들이 해양을 정화하여 많은 철새들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가 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신안 천일염이 강한 바람과 태양으로 만들어진다’며 천일염에 많은 양의 수분, 칼슘, 칼륨, 마그네슘 등 미네랄이 풍부하다는 호평도 덧붙였다.

▼ 보라색 선은 두리마을 앞 바다에 있는 꼬맹이 섬 ‘단도’까지 이어진다. 2020년 이곳 단도와 반월도를 잇는 ‘문 브릿지((Moon Bridge)’를 놓으면서 이곳에다 매표소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단도와 본섬을 방파제로 연결시켰음은 물론이다. 참! 퍼플섬을 탐방할 때 모자와 선글라스는 필수다. 퍼플교와 해안산책로 등 탐방로에 햇빛을 피할만한 그늘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친절하게도 매표소에서 햇볕을 가릴 수 있는 보랏빛 우산을 빌려 주니 말이다. 팁 하나 더. 보라색 옷이나 모자, 가방, 스카프 또는 머그컵을 소지한 사람은 입장료(3천원)를 면제 받는다. 무료입장 여부를 정하는 보랏빛 물건에 대한 판단은 표를 파는 이의 재량이란다.

▼ 자 이젠 퍼플섬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들러볼 섬은 반월도. 안좌면의 단도와 반월도를 잇는 ‘문 브릿지’를 건너면 된다. 이 다리는 ‘퍼플교’로 통하는 세 개의 보랏빛 다리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놓였다. 총연장은 416m. PE부잔교(313m)에다 콘크리트 부잔교(2기, 20m)와 소형어선 통행을 위한 해상교량(63m)이 복합된 국내 유일한 ‘해상 보행교’이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부잔교(浮棧橋)란 수위에 따라 위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다리를 말한다.

▼ 다리 중간에는 쉼터도 만들어 놓았다. ‘느림보의 미학’이랄까? 쉬엄쉬엄 걸으며 주변 경관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가슴에 담아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그런데 앉아보면 미세한 출렁거림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안전이 보장되는 시설이니 그저 짜릿한 쾌감이나 즐기면 될 일이다.

▼ 테이블에 앉으면 또 다른 퍼플교인 ‘소망의 다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반월도와 박지도를 잇는 다리인데, 저 다리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을 경우 인생샷을 건지는 행운이 주어지기도 한다. 아니 퍼플교는 어딜 가더라도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푸른 바다 위에 놓인 보라색 다리와 그 위의 파란 하늘이 동화 속 세상처럼 신비롭기 때문이다.

▼ 소형어선의 통행을 위해 만들어놓은 ‘해상교량’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보랏빛에 더해 입체감까지 주어지니 단체사진 찍기에 저만한 곳도 없겠다. 참! ‘문 브릿지’는 평상시에는 해상보행교이다. 하지만 큼지막한 선박이라도 지나갈라치면 다리가 열리는 장관을 연출한단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열리지는 않으니 때를 잘 만나야만 그런 이색적인 장면을 눈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 출렁다리를 건너면 ‘반월도 선착장’. 이정표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커다란 표지석이 길손을 반긴다. 반월도(半月島)는 섬의 형태가 사방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반달 모양으로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 반월도에는 두 개의 마을이 있다. 선착장이 있는 이곳이 ‘토촌마을’. 또 다른 마을인 ‘반월마을(안마을)’은 해안도로를 따라 2㎞쯤 걸으면 만날 수 있다.

▼ 신안군의 브랜드인 ‘천사 섬(1004)’ 조형물도 보인다. 맞다. 이곳 신안군은 섬을 무려 1,004개나 보유하고 있단다. ’섬 마케팅‘으로 관광자원화 할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참고로 해양수산부는 2015년 기준 우리나라 섬의 숫자를 3,358개(유인도 482개, 무인도 2,876개)라고 발표한바 있다. 그중 전라남도는 무려 65%인 2,165개의 섬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라남도 섬의 절반가량이 신안군 소속인 셈이다.

▼ 섬에 들어서자 보랏빛 세상이 펼쳐진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강렬한 보랏빛인 것이다. ‘토촌마을’의 지붕은 물론이고 도로와 자동차, 화장실, 안내표지, 심지어 쓰레기수거함까지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온통 보랏빛 물결’이더라는 기사를 올릴 수 있지 않겠는가.

▼ 보랏빛의 정점은 ‘재활용품 수거함’이 찍고 있었다. 리사이클(recycle)의 터닝 포인트까지 보랏빛으로 물들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해안산책로를 따라 어깨산의 들머리가 있는 ‘마을카페’로 향한다. 산책로의 주변은 꽃밭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라벤더와 루드비키아, 접시꽃, 아스타국화, 자엽안개나무, 팥꽃나무 등 보랏빛의 꽃을 피우는 꽃나무들을 심었다.

▼ 화사하지는 않지만 보랏빛 꽃망울을 열고 있는 나무가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우애’라는 꽃말을 갖고 있는 라일락인 것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보랏빛 꽃밭을 기웃거리며 잠시 걷자 Purple Island ‘반월도 카페’가 잠시 쉬어가라며 손짓한다. 맛있는 커피와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카페(현재는 양심 무인카페 운영 중)로 마을 주민이 운영하고 있다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아무튼 그 옆에는 보라색 공중전화 부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네모난 공중전화 대신 자그마한 벽걸이 다이얼 전화가 걸려 있어 이국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 ‘반월도 카페’로 다가가자 거대한 보라색 반달이 반긴다. 어린 왕자와 사막여우가 보라색 반달 위에 앉아 건너편 박지도를 바라보고 있는 조형물이다. 이곳은 소문난 포토죤이기도 하다.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제법 기니 눈치껏 찍고 빨리 자리를 비워주는 게 좋다.

▼ 반월도와 박지도는 자전거를 타고 섬을 돌아 볼 수도 있다. 아니 자전거 이용을 적극 권해본다. 박지도와 반월도의 둘레길이 각각 4.2km, 5.7km나 되므로 하루 만에 두 섬을 걸어서 구경하는 게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금은 1시간 당 5천원(청소년 3천원). 자전거 대여소에서 빌리면 된다.

▼ 어깨산 등산로는 ‘마을카페’와 ‘자전거대여소’ 사이에 있다. 들머리에 이정표(딸당 0.5㎞, 어깨산 정상 0.9㎞/ 박지도 1.5㎞)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정표에는 ‘대덕산(큰재)’란 지명까지 적혀있었다. 봉우리 따먹기나 하는 사람들이 찾는 봉우리인데 1.3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단다.

▼ 들머리에는 어깨산등산로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이곳을 출발해 정상과 절골재를 거친 다음 안마을로 내려오는 1.8㎞ 길이의 코스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반월도의 또 다른 산봉우리인 ‘대덕산’은 누락되어 있다. 일부러 찾아볼 필요까지는 없다는 신호가 아닐까 싶다.

▼ 50m쯤 들어가 산자락에 부딪힌 등산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꺾이는 지점에 세워진 이정표를 참조하면 된다. 이어서 50m 남짓 더 가자 이번에는 길이 둘로 나뉜다. 그런데 왼편(첨부된 사진의 무덤 방향). 그러니까 산자락으로 파고드는 길이 더 또렷하니 문제다. 옳다구나 하고 산자락으로 들어선 우리 부부는 죽도록 고생만 하고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희미해지더니 나중에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 삼거리로 되돌아 나오니 샛별산악회(광주광역시 소재)에서 매달아놓은 리본에 ‘등산로 없음’이란 글씨가 보인다. 아까는 왜 눈에 띄지 않았는지 모른다. 이후부터는 한눈팔지 않고 널찍한 임도를 따르기로 했다.

▼ 산을 오르는데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이색적인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보라색으로 물든 아름다운 다리가 바다 위에 놓여있는가 하면, 주민들이 사는 동네 지붕도 하나같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 등산로는 한마디로 잘 다듬어져 있다. 널찍한데다 조금이라도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자연석으로 계단을 쌓았다. 그렇게 0.5㎞쯤 오르자 ‘딸당’이다. 반월도 할아버지당의 딸을 모신 제당이라는데 기품 있는 동백나무 두 그루 앞에 제단이 있다.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돌탑공원’이 나온다. 이 돌탑들은 반월도 출신 장상순(69세) 님께서 2016년 봄부터 건강을 기원하며 틈틈이 시간을 내어 정성스레 쌓아 올린 것들이라고 한다.

▼ 정상에 가까워졌는데도 길은 여전히 널따랗다. 아니 오히려 더 넓어진 듯하다. 그만큼 정성들여 가꾼 결과가 아닐까 싶다.

▼ 돌탑공원에서 10분 남짓 더 오르면 반월도 최고봉인 ‘어깨산(210m)’의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10분 만이다. 정상은 헬기장처럼 넓다. 쉬어가라는 듯 벤치도 놓여있다. 하지만 정상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 흔한 선답자의 ‘표지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깨산 정상’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할 뿐이다. 참고로 어깨산이란 지명은 산의 지형이 사람의 어깨와 같이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자어로는 견산(肩山)이 된다.

▼ 반대편 급경사지대를 잠시 내려가자 만호정(萬戶亭)에 닿는다. 봉수대가 들어앉기 딱 좋은 곳에 우뚝 솟은 팔각정이다.

▼ 정자의 옆에는 수직의 바위절벽인 ‘만호바위(萬戶岩)’가 있다. 바위에서 바라보면 일만 가구가 보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그만큼 시야가 넓게 터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난간으로 나가자 다도해의 풍광이 널찍하게 펼쳐진다. 이제는 본섬(안좌도)이 되어버린 ‘우목도’는 물론이고. 도초도와 비금도, 사치도 수치도 등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렇다면 저 섬들에 일만 호가 살고 있다는 얘기일까?

▼ 이후의 산길은 고운 편이다. 널찍한 것은 기본. 거기다 경사까지 없으니 콧노래라도 부르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걷자 울창한 대나무 숲속에 감추어진 ‘절골재(이정표 #1 : 안마을← 0.5㎞/ 달바위→/ 만호바위↓ 0.4㎞ 이정표 #2 : 대덕산→)’가 나온다. 삼거리인 이곳에서 안마을은 왼편이다. 오른편은 물론 대덕산. 30분 정도 크게 한 바퀴 도는 원점회귀 코스다.

▼ 봉 따먹기에 관심이 없는 우리 부부의 발걸음은 안마을로 향했다. 이어서 원시림을 연상시키는 울창한 숲길을 통과하자 널찍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정상에서 내려선지 35분 만에 안마을에 이른 것이다. 마을 앞바다에 떠 있는 작고 귀여운 섬은 ‘노루섬’이라고 한다. 한자로 장도(獐島)로 표기되기도 한다.

▼ ‘반월 새벽교회’ 앞에서 길은 둘로 나뉜다. 양쪽 모두 섬 일주도로지만 우리는 조금이라도 덜 걸어도 되는 왼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당숲’에 이르렀다. 주민들이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던 숲이다. 참! 반대편으로 가면 ‘반월마을’이 나오는데, 섬 주민들이 ‘마을 식당’을 운영한다니 시간이 나면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마을에서 나는 재료로 밥상을 차리는데 제철 재료로 만들기 때문에 건강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단다.

▼ 도로변에 있는 이 ‘당숲’은 제14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받기도 했다. 300년 된 팽나무와 동백, 후박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며 제를 지낸다 한다.

▼ 반월마을은 ‘인동 장씨(仁同 張氏)’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라고 한다. 시조 금용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인동 장씨의 반월도 정착은 400여 년 전 경북 인동에서 금용(金用) 시조의 23대손으로 태어난 할아버지의 입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그래선지 당숲 근처에 그네들의 제각(祭閣)이 떡하니 들어서 있었다. 마을 뒷산이 그네들의 세장산(世葬山)임을 알리는 커다란 빗돌도 세 개나 세워놓았다.

▼ 이제 탐방로는 해안산책로를 따른다. 이곳 반월도나 박지도는 섬 둘레에 아름다운 바다를 낀 해안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걷거나 또는 자전거를 빌려서 돌아볼 수 있다. 또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산책로를 따라 산행을 즐길 수도 있다.

▼ 다음은 ‘소망의 다리’를 건너볼 차례이다. 아까 어깨산을 오를 때 들머리로 삼았던 ‘마을카페’ 앞에서 시작되는데, 평생을 박지마을에서 살아온 김매금 할머니의 ‘걸어서 섬을 건너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만든 다리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반월도와 박지도를 잇는 이 나무다리의 길이는 915m. 물론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보행자 전용의 다리이다.

▼ 다리가 길어서인지 중간 두어 곳에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아니 ‘슬로시티’는 아니지만 너무 서둘지 말고 쉬엄쉬엄 걸으면서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가슴에 담아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참! 다리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만해도 이 다리는 디자인이 다소 밋밋했다고 한다. 하지만 컬러 마케팅을 거쳐 보라색 옷으로 갈아입은 후로는 반월도·박지도의 랜드 마크가 됐다.

▼ 다리를 건너는데 물 빠진 갯벌에 ‘노두길’ 하나가 살포기 그 자태를 드러낸다. 애틋한 사랑 얘기가 스며있는 ‘중(스님) 노두길’이다. 옛날 박지도 산속에 조그마한 암자가 있었고 반월도 뒷산에도 아담한 암자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박지도 암자에는 젊은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반월도 암자에는 비구 스님 한 분이 살았다. 얼굴을 본적은 없지만 서로를 그리워하던 스님과 비구니는 썰물 때면 돌무더기를 바다에 쌓아 징검다리를 만들면서 두 섬을 이으려 했다. 수년이 지난 후 마침내 두 사람은 바다 한 가운데 돌무더기에서 서로 만나 얼싸 안았지만 그만 밀물이 들어와 두 사람을 삼켜버리고 말았단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이 쌓아올린 노둣길은 아직까지 남아 슬픈 사랑의 얘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이번에는 아까 반월도로 건너올 때 이용했던 ‘문 브릿지’가 성큼 다가온다. 수위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이는 PE부잔교이나 해상교량을 만들어 놓아 소형 어선이 지나다닐 수도 있도록 했다.

▼ 박지도에 가까워지자 선착장 근처의 편의시설들이 눈에 들어온다. 화장실 말고도 술까지 파는 휴게실이 들어서 있어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쉬어가기에 딱 좋은 곳이다.

▼ 생각보다 긴 다리를 건너 두 번째 섬인 ‘박지도(朴只島)’에 다다랐다. 박지도는 박 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1700년께 ‘김해 김씨’가 이주 정착해 마을이 형성됐다는 구전도 전해진다. 섬의 지형이 박 모양이라 하여 ‘바기섬’ 또는 ‘배기섬’이 되었다는 설에 믿음이 가는 이유이다. ‘범죄 없는 마을’임을 자랑하는 빗돌도 보인다. 하긴 도망갈 수도 없는 곳에서 죄를 지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선착장에 세워놓은 커다란 조형물이 시선을 끈다. 박지도를 상징하는 조형물인데, 반으로 갈라놓은 조롱박에서 샘물이 흘러나오는 모양새다. 이 조형물 앞은 관광객들로 항상 붐빈다. 퍼플섬을 찾은 탐방객들이 인증샷을 찍는 필수 코스로 통하기 때문이다.

▼ 섬은 걷지 않고도 둘러볼 수 있다. 3천원만 지불하면 전동 셔틀이 섬을 한 바퀴 돌아준다. 친환경 전기차를 타고서 섬 이곳저곳의 풍경과 섬사람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섬 여행의 또 다른 재미가 분명하다.

▼ 박지도에서의 첫 일정은 당산(堂山)을 오르는 것이다. 등산로는 마을표지석 뒤쪽에서 열린다.

▼ 들머리에 섬길(둘레길) 및 산책로를 그려 넣은 ‘안내판’이 세워져있으니 산을 오르기 전에 한번쯤 꼭 살펴볼 일이다. 당산 등산로(산이 낮아서인지 산책로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에다 둘레길의 절반씩을 끼워 넣은 2개의 코스에다 섬을 일주하는 코스 등 3개의 코스로 나누었다.

▼ 왼편은 2.1㎞ 길이의 ‘박지도 둘레길이다. 이따가 산행을 마치고 나서 저 길을 따라 이곳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 산으로 오르다가 뒤돌아본 풍경은 가히 일품이다. 박지도에서 안좌도의 두리매표소를 잇는 퍼플교와 바다의 풍경이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 왼편으로는 또 다른 퍼플교인 박지도와 반월도를 잇는 다리가 길게 놓여있다. 조형미를 가미한 오른편 다리와는 달리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탓에 더 길게 느껴진다.

▼ 잠시 후 산책로는 울창한 숲속으로 파고든다. 원시의 숲을 걷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다. 안내판은 이 나무들을 ‘사스피레(구정풀)’로 적고 있었다. 보통 꽃다발의 바닥나무로 이용되는데 마을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단다.

▼ 산행을 시작한지 15분 만에 박지당산(130m)의 정상에 올라섰다. 산꼭대기에 당(堂)이 있었다고 해서 ‘당산’이란 이름의 붙여졌는데, 주민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질병퇴치를 위해 흠 없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당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외지의 등산객들이 다른 곳의 당산과 구분하기 위해 섬의 이름을 앞에 붙여 ‘박지당산’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이젠 본명으로 굳어져버렸다.

▼ 정상은 자그마한 언덕 같은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반월도의 어깨산을 바라보고 앉아 기(氣)를 받으면 만사형통 한다는 ‘기바위’이다. 그렇다면 사실 여부는 제켜놓고라도 일단은 앉고 볼 일이다. 설사 기를 못 받는다고 뭐가 문제겠는가. 잠시나마 쉬었으니 하산길이 편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올라온 반대편. 그러니까 ‘900년의 우물(우실샘)’ 이정표를 따라 5분 정도 내려가면 울창한 상록수 숲속에 들어앉은 우물을 만날 수 있다. 900년이나 묵었다는 ‘우실샘’인데, 세월의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고 그저 크기가 약수터 수준이라는 정도. 바가지까지 놓여있지만 고인 물이라서 썩 내키지는 않는다. 참! 이정표는 아직도 ‘우실샘’이라 적고 있었다. 위에 있는 암자터와 연계해 ‘사랑샘’으로 이름을 바꾼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아직도 계획단계에 머물고 있는 모양이다. 젊은 연인들이 선한 천사의 마음으로 다리를 건너와 중노두를 함께 걸으면서 사랑을 확인해보는 일정.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콘셉트인가. 하루빨리 계획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 정상으로 되돌아가 ‘박지당’으로 향한다. 갈림길(이정표 : 정상← 70m/ 박지당↑ 180m/ 우실샘↓ 150m)에 ‘당산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지도를 보면 ‘암자 터’란 지명이 눈에 띈다. 옛날 박지도와 반월도의 사이에 노두길을 놓았다는 스님. 즉 애틋한 사람의 전설을 만들었던 비구니 스님이 머물던 암자의 터일지도 모르겠다.

▼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해안산책로↑ 0.9㎞/ 박지당← 50m/ 우실샘↓ 350m). 고민할 필요도 없이 왼편으로 들어서자 빙 둘러서 돌담을 쌓아놓은 널따란 공터가 나온다. 안내판은 이곳을 ‘박지제당(朴只祭堂)’으로 적고 있었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을 위해 당제를 지내오던 곳이란다. 하지만 지금은 중단되었다는 사실도 적었다.

▼ 박지마을로 내려가는 길 또한 울창한 상록수림 지대다.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심은 듯한 굵지 않은 측백나무 숲길도 지난다. 그렇게 10분쯤 내려서자 ‘바람의 언덕’이 반긴다. 바다 쪽으로 시야가 툭 터지는 언덕인지라 바람이 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지명의 유래가 아닐까 싶다.

▼ 언덕의 꼭대기에는 ‘바람의 언덕’이란 조형물과 함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쁜 보랏빛의 공중전화 박스도 세워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이다.

▼ 언덕 너머에는 박지마을이 들어앉았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반월도와 박지도의 주민들은 각기 ‘마을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박지마을은 ‘마을호텔(성수기 4인실 6만원, 8인실 12만원)’까지 준비되어 있다니 참조하면 되겠다.

▼ 바람의 언덕에는 ‘라벤더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상당히 큰 규모의 라벤더 꽃밭이다.

▼ 그러나 퍼플섬에 어울리는 보랏빛 꽃 라벤더는 구경할 수 없었다. 6~7월이나 되어야 꽃을 피우기 때문에 철모르고 피어난 꽃들이 듬성듬성 보일 따름이다. ‘풍부한 향기’라는 꽃말처럼 향수나 화장품의 재료로 사용될 정도로 향기가 좋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 라벤더(lavender)에는 ‘정절, 기대, 대답해주세요’와 같은 또 다른 꽃말도 있다는 걸 기억해 두자.

▼ 자그만 웅덩이까지도 관광 자원화 했다. 이름 하여 ‘생태 둠벙’. 농사를 짓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웅덩이란 얘기일 것이다. 이게 또 다양한 생물의 터전이 된다는 의미에서 ‘생태’라는 단어를 덧붙였을 게고 말이다.

▼ 박지마을에서 퍼플교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해안산책로와 숲 산책로 어느 곳을 택하든 1.4㎞ 거리다. 일단 해안산책로를 따라 걷고 본다. 이때 길 오른편으로 광활한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런데 아까 반월도에 들어올 때 보다 바닷물이 훨씬 더 빠져나갔다. 밀물 때 가득 차있던 바다가 썰물 때가 되자 통째로 사라지면서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게 꼭 인생을 보는 것 같다. 우리네 삶도 저렇게 비움과 채움이 반복되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 잠시 후 ‘숲 산책로’로 옮겨 걸었다. 정성들여 닦아놓은 길이 고운데다가 햇빛까지 가려주는 숲길을 놓아두고 일부러 해안산책로를 걸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 숲 산책로 중간에서 ‘혹이 붙은 이당나무(예덕나무)’를 만났다. 좀 색다른 모습의 꽃을 피우는 낙엽소교목인데, 나무줄기가 온통 혹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 박지도까지 모두 둘러봤다면 이젠 출발지인 안좌도(두리선착장)로 되돌아갈 차례이다. 이때도 역시 퍼플교를 이용하면 된다. 두리마을과 박지도를 잇는 이 다리의 길이는 547m. 아까 건너왔던 다리. 즉 반월도를 잇는 또 다른 퍼플교와 함께 2008년에 완공됐다.

▼ 이 다리는 아까 박지도로 들어올 때 건너왔던 다리와는 또 다른 외모를 지냈다. 다리 중간에 너른 공간을 만들어 쉼터를 배치했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양 옆으로 길게 다리를 놓은 다음 그 끄트머리에다 쉼터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그냥 앞만 보고 내달릴 일은 아니다. 쉬엄쉬엄 걷다가 목교 아래도 한번쯤 내려다보라는 얘기이다. 다리 아래로 펼쳐진 비옥한 갯벌에서 맘 놓고 뛰어다니는 짱뚱어와 안좌도의 특산물이라는 감태를 눈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 어떤 이들은 퍼플교를 ‘천사의 다리’라 부르기도 한다. 천사의 마음으로 이 다리를 건너란 뜻도 되고 이 다리를 건너면 천사가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면서 말이다.

▼ 다리 건너 ‘두리매표소’에는 퍼플교의 역사를 알려주는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안좌·반월·박지도의 역사와 함께 퍼플교의 설치 배경을 적었다. 또한 과거와 현재의 사진을 나란히 게시함으로써 눈으로 직접 대비해 볼 수 있도록 했다. 참! 관광객들 사이에는 보라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기념품 가게를 겸한 매표소에서 파는 상품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은 상품이 자수를 넣은 보라색 티셔츠(2만원)라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