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카이로 외곽, 기자(Giza) 스핑크스(Sphinx)‘

 

특징 : 스핑크스는 이집트에서 기원한 상상의 동물로 사람의 머리(지혜)‘ 사자의 몸()‘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왕의 권력을 상징한다. 동물의 왕 사자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나 성격이 달라진다. 이들 가운데 이집트 기자에 있는 제4왕조(BC 2560~BC 2450) ’카프라 왕 피라미드의 스핑크스가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그리스 신화에서 스핑크스는 여성의 얼굴에 날개 돋친 사자 모습을 한 괴물로 그려진다. '아침에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를 낸 뒤 못 맞추면 잡아먹었으나, 오이디푸스가 나타나 '사람은 어려서 네 발로 기고 커서는 두 발로 걸으나 늙어서는 지팡이를 짚으니 세 발이다'라고 풀자 스핑크스는 부끄러워하며 물속에 몸을 던져 죽어 버렸다고 한다.

 

 피라미드를 모두 구경했으니 이젠 스핑크스로 향할 차례이다. 얼마 되지 않은 거리인데도 우린 버스로 이동했다. 패키지여행자만이 가질 수 있는 편안함이 아닐까 싶다. 입장권을 사서 안으로 들어서니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의자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펼쳐져 있다. 이집트의 다른 유적지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빛과 소리의 쇼(Sound and Light Show)‘가 펼쳐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저 피라미드랑 스핑크스에 빛을 비추며 역사를 설명해주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앞마당을 지나자 피라미드가 신전 너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뒤에 보이는 피라미드는 쿠푸왕의 대피라미드이다. 피라미드가 빌려왔다는 얼굴의 주인인 카프레왕의 피라미드는 각도를 조금 바꾸어야만 나타난다. 스핑크스가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에서 남동쪽으로 300m, 카프레 왕의 것에서는 정동향으로 4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쪽 웰다잉(Well Dying)의 땅 입구에 서서, 정동방을 바라보는 사람 얼굴(지혜)-사자의 몸(용맹) 석상은 동쪽 웰빙의 땅에 사는 백성들에겐 분명 희망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관광객이 많은데 시장이 서지 않았을 리가 없다. 기념품과 의류 등을 진열해놓고 호객행위에 열심이었지만 관심을 끌만한 것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부심벨 신전 필레 신전 앞의 기념품 상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관광지들이 모두 오십보백보라고 보면 되겠다.

 

 

 스핑크스를 만나기 위해서는 신전(Temple)을 지나야 한다. 누군가는 카프레왕의 계곡신전(Valley temple of Khafre)’이라고 적고 있지만 우린 지도에 표기된 대로 스핑크스 신전으로 기억해 두자.

 

 

 스핑크스 주변은 사람들로 넘친다. 조그만 틈새만 보여도 스핑크스가 들어간 인생샷을 건지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런데 그들의 생김새가 각기 다르다. 귓가에 맴돌다 흘러가는 언어들도 제각각이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조금 더 들어가자 알몸을 드러낸 스핑크스가 눈앞에 펼쳐진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저런 형상의 석상을 나라 안 곳곳에 세워왔다고 한다. 그 가운데 이곳 기자에 있는 스핑크스의 규모는 다른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석회암으로 되어 있는 자그마한 돌산 하나를 통째로 깎아서 만들었다는 저 스핑크스는 길이 57m에 높이가 20m. 얼굴 너비만 해도 4m나 되는 거상이다. 석상이라는 표현보다는 건축물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거대하다.

 

 

 스핑크스를 누가 왜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있다.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들을 지키는 일종의 수호신이라는 주장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스핑크스의 얼굴이 카프레 왕의 생전과 같다며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에 딸린 부속 조형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스핑크스의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도 기억해두자. 아무튼 스핑크스와 관련된 다양한 학설들이 전문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확인된 것은 없다.

 

 

 스핑크스는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아니 아직도 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모래 속에서 발굴될 당시부터 사자의 앞발 부분과 뒤꼬리 부분 등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어 있었다니 말이다. 근래에는 스핑크스의 보수공사 도중 어깨 부분에서 300이나 되는 두 덩어리의 큰 돌이 떨어지기도 했단다. 더욱이 원래부터 노출되어 있던 스핑크스의 머리는 현재 없어진 부분이 많다고 한다. 원래의 머리에는 왕관이 쓰여져 있었다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고, 앞이마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코브라가 조각돼 있었는데 그것 역시 겨우 꼬리 부분만 남아 있는 정도이다. 얼굴에는 턱수염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도 지금은 떼어지고 없다.

 

 

 스핑크스는 두 앞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 있다. 가까이 갈 수 없어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저 다리 사이에는 투트모세 4(Thutmose IV, BC 1400~1390 재위)’의 석비(石碑)가 있다고 한다. 비문에 따르면 청년 시절 전차대장으로 복무하던 투트모세 4세가 사냥을 나갔다가 머리까지 모래에 파묻혀 있던 스핑크스 옆에서 설핏 잠이 들고 말았다. 꿈속에서 그는 스핑크스로부터 '이 모래를 제거하면 너를 왕으로 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눈을 뜬 투트모세 4세가 부하들을 불러 모래를 모두 걷어냈고, 그 덕분에 투트모세는 후에 파라오가 되었다고 한다.

 

 

 투트모세 4의 석비(빌려온 사진이다)

 

 

 스핑크스의 얼굴은 수천 년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머리의 코브라 장식과 코, 수염 부분은 아예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점령하였을 당시 프랑스 군인들이 대포 쏘는 훈련을 하면서 그 표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이한 외모에 놀란 아랍인들이 공포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의 얼굴에 대포를 쏘았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두 주장 모두 확실한 근거가 없으니 그냥 흘려듣는 게 좋겠다. 그나저나 이 거대한 스핑크스가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왔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곳 호르 엠 아케르(이집트인들이 불러온 스핑크스의 다른 이름)’ 역시 소문난 놀이터이다. 그러니 마음 놓고 놀아보자. 놀이의 주 종목은 앵글 맞추기이다. 높이 20m에 몸길이가 70m나 되는 저 석상과 뽀뽀도 하고, 안경 씌우기도 하며, 호루스의 분신이자 태양신인 호르 엠 아케르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한다.

 

 

 

 이곳에서 우리 부부는 낯선 풍경과 맞닥뜨렸다. 현지 여성이 사진을 찍고 있는 집사람 옆으로 다가오더니 촬영 각도 등을 코치하는 것이다. 거기서 그쳤더라면 이집트인들의 친절함에 감탄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사람의 핸드폰을 낚아채더니 스핑크스를 배경에 넣어 셔터를 눌러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손을 내민다. 수고한 대가를 달라는 것이다. 1달러짜리 몇 장 쥐어주면 그만이겠지만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게 꼭 기분나빠할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래와 같은 인생샷을 어떻게 건질 수 있었겠는가.

 

 

 

 

 대피라미드 남쪽에는 독특한 모양의 건물이 하나 서 있다. ‘태양의 배 박물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배 모양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급조한 조립식 건물 같다든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더욱이 여러 개의 피라미드가 몰려있는 주변 경관과는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다. 그래선지 조금은 뜬금없다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이 건물이 배 모양으로 지어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애초에 태양의 배라는 중요한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집트 신화에서는 태양의 신 (La)’가 우주를 여행할 때 태양의 배를 이용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쿠푸왕도 죽은 뒤 하늘을 여행할 때 사용하기 위한 배를 만들어 피라미드의 옆에 묻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이르러 이 배가 발견되었고, 발굴·복원 과정을 거친 다음 전시하고 있는 곳이 태양의 배 박물관이다.

 

 

 박물관 앞에는 판석 모양의 바윗돌이 쌓여있었다. ‘태양의 배가 묻혀있던 구덩이를 덮었던 판석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태양의 배는 1954년 대피라미드 남쪽면의 모래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는 도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석회암으로 뚜껑을 덮은 길이 31m, 깊이 3.5m의 구덩이가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 각 부분으로 나뉘어 분해되어 있던 배가 들어 있었단다. 당시에 발견된 1 태양의 배가 현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안으로 입장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추가비용을 내야한다. 그래선지 여행사에서는 이걸 선택 관광으로 돌려놓았다. 많은 여행자들이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리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런 우는 범하기에는 안에서 전시되고 있는 배가 너무 중요한 고고학적 유물이다. ‘태양의 배라고 불리는 이 유물은 무려 4500년 전에 만들어진, 길이가 40미터가 넘는 거대한 목재 선박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아래 사진을 살펴보면 신발에 포대 같은 것을 덧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발에 묻어있는 흙먼지가 건물 안에서 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박물관답게 내부는 태양의 배에 관한 유물과 각종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출토 당시의 사진도 빼놓지 않았다.

 

 

 

 

 

 

 

 태양의 배가 발견된 구덩이도 복원되어 있다.

 

 

 태양의 배를 미니어처로 제작 전시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당시에 타고 다녔을 법한 여러 종류의 배들도 전시되어 있다.

 

 

 

 

 자료 전시실을 지나 태양의 배를 직접 대면하면 먼저 선박의 엄청난 규모에 감탄하게 된다. 그리곤 도저히 4500년 전에 만들어진 배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훌륭한 보존 상태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최고급 레바논 삼나무로 제작된 이 거대한 배는 일종의 상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자들의 주장이다. 수심이 그다지 깊지 않은 나일강에서는 굳이 이렇게 거대한 선박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을 뿐더러, 운용하기도 힘들었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말이다.

 

 

 전시되고 있는 배는 1 태양의 배라고 한다.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죽으면 태양신 라에게 융합이 되고, 파라오의 혼()은 배를 타고 천공을 항행하는 것으로 믿어 졌다. 그런데 신화는 태양의 배에 주간용 배 마아네제트와 야간용 배 메세케테트의 두 종류가 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태양의 배가 존재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한 이 가설은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1987년 일본의 와세다 대학 조사팀에 의해 기존 구덩이 서쪽에서 2의 태양의 배가 묻혀있는 또 다른 구덩이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 태양의 배와 같은 레바논 삼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구덩이 안에 들어간 수분으로 인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았던 이 배는 첨단기술이 발달한 최근(2012)에야 발굴되어 현재 보존처리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단다.

 

 

 일각에서는 이 선박이 원양 항해에 실제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단순히 상징으로 배를 만들었다면 굳이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건조하지 않았을 거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최근에는 실제로 이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로 활용될 수 있는 고왕국 시대의 선착장 유적이 홍해의 해안에서 발견되기도 했단다. 뿐만 아니라 왕의 지시로 탐험대가 머나먼 이국까지 갔다가 귀환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고왕국 시대의 기록들도 있단다. 이런 자료들은 태양의 배가 실제로 원양항해에 사용되었거나, 적어도 실제로 사용되던 선박을 모델로 해서 만든 것일 가능성에 한층 더 무게를 실어준다.

 

 

 

 

 태양의 배 10년 이상의 세월에 걸쳐 재조립·복원되었다. 그런 산고를 거친 뒤에야 세상에 얼굴을 내민 선박에는 쿠푸 왕의 후계자 제데프라(Djedefra)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한다. 제드프라 왕이 선왕 쿠푸를 위해 매장한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이다.

 

 

 

 에필로그(epilogue), 계단식 피라미드가 만들어질 무렵, 다시 말해 대피라미드보다도 100년이나 앞서서 만들어진 스핑크스 지평선에 있는 수호신 호루스라는 의미를 지닌 호르 엠 아케르로 이집트인들 사이에서 수천 년 동안이나 불려왔다. 호루스는 이집트 9신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신들 간의 갈등을 매듭지어 현세를 밝게 해주는 국왕신으로, 이집트 6000년 역사 중 이 나라의 리더들이 늘 표방해왔다. ‘호루스의 이름으로 문명을 만들고 태평성대를 도모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2000년도 더 지난 후의 이방인들 눈에는 그저 괴물(Sphinks)로만 보였던 모양이다. 테베(룩소르)의 돌산에 살면서 아침 네 다리, 낮 두 다리, 밤 세 다리라는 스핑크스 수수께끼를 낸 뒤 틀리면 잡아먹어버렸다는 가장 악질적인 괴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을 보면 말이다. 또 사나운 묘지기로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 비속적 호칭 스핑크스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카이로 외곽, 기자(Giza) 지역의 피라미드들

 

특징 :  카이로(Cairo) : 아랍어로 승리를 뜻하는 카이로는 이집트 수도이자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큰 도시다. 세계에서 밀도가 가장 높은 인구 1700만 명의 카이로는 1000년을 넘게 수도로 이어져오면서도 신도시라 불린다. 5000년이 넘는 장구한 이집트의 역사 속에 멤피스 및 테베, 알렉산드리아 등 옛 이집트의 수도들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현존하는 수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6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수많은 이집트 문명의 수도로서 오랫동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아랍권에서는 카이로를 ’2개의 해협 또는 도시라는 뜻의 아랍어인 미스르(Miṣr)`라 부르는데, 현지에서는 마스르(Maṣr)’라고도 발음한다. ’미스르는 이집트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확대해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 현재의 카이로는 전통과 동서의 영향, 고대와 현대가 잘 조화된 도시다. 그러나 이 도시는 늘어만 가는 이집트의 가난과 급격한 인구팽창으로 인한 문제, 쇠락해가는 사회기반 시설(社會基盤施設)을 보여주기도 한다.

 

 피라미드(pyramid) : 세계 곳곳에는 현대인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대 건축물들이 있다. 바빌론의 궁중 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등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대표적이다. 피라미드도 여기에 속하는데 고도의 건축 기술이나 장비가 없던 고대에 지어진 대형 피라미드의 건축 방식은 현재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으로 쓰인 건축물이다. 신의 화신이었던 파라오가 지상에서의 생명을 끝내고 신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드는 사후세계의 집이었다. 피라미드가 거대하게 축조된 이유는 두 가지로 추정한다. 영생을 얻은 파라오가 거주할 수 있게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주거지를 만들었다는 것과 신의 세계에 닿기 위한 계단의 역할로 거대하게 지어졌다는 것이다. 참고로 피라미드는 이곳 이집트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분포되어 있다. 여러 시대에 걸쳐 이집트·수단·에티오피아·서아시아·그리스·키프로스·이탈리아·인도·타이·멕시코·남아메리카, 그리고 태평양의 몇몇 섬에서 지어졌다. 그중 이집트와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의 피라미드가 가장 유명하다. 참 우리의 선조들이 만든 피라미드도 있다. 지금은 비록 중국(지린성) 땅에 들어있지만 고구려 시대의 무덤인 장군총도 계단식 피라미드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 들렀던 기자 지역에는 기원전 2500년께 이집트 4대 왕조의 쿠푸왕과 그의 아들 카프라왕, 손자인 멘카우라왕의 피라미드가 있었다. 그 중 가장 거대한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그 높이가 137에 이르는데, 무게 2.5가량 돌 250만개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피라미드는 내부 구조 또한 웅장하고 복잡한데 고대 이집트인들이 어떻게, 왜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었을까?’생각하다 보면, 그들의 오묘한 세계관과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그저 불가사의라는 단어로만 남게 된다. 멀리서도 우뚝 솟은 3개의 피라미드의 자태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말에 무게를 더한다.

 

 다른 때보다 일찍 아침식사를 마치고 카이로 시내에서 서쪽으로 약 13Km 떨어진 기자(Giza) 마을로 이동했다. 이집트, 아니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피라미드들을 대표하는 피라미드가 이 지역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단연 기원전 2560년 무렵에 세워진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완공에 약 20년이 걸렸는데 피라미드 중 가장 크다고 해서 대피라미드(The Great Pyramid)’라고도 불린다. 바로 옆에는 아들(카프레-Khafre) 및 손자(멘카우레-Menkaure) 파라오의 피라미드가 있다. 파라오 3대의 피라미드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가이드로부터 건네받은 입장권은 ‘Giza Plateau, EPG 160( 11,200)’, 매표소에 계시된 입장료는 기자 피라미드지역 : 성인 EPG 160/학생 EPG 80, 대 피라미드 : 성인 EPG 360/학생 EPG 180, 카프레 피라미드 : 성인 EPG 100/학생 EPG 50 등이다. 즉 우리가 산표는 세 개의 피라미드가 있는 기자 피라미드지역만 둘러 볼 수 있고, 피라미드내부를 보려면 또 다른 입장권을 사야한다는 얘기이다.

 

 

 

 

 8시가 되자 입장이 시작됐다. 소지품 검사를 거친 후 안으로 들어서자 역사상 세워진 모든 피라미드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쿠푸왕의 대피라미드(The Great Pyramid)’가 눈앞에 나타난다. 이름에 걸맞게 이 피라미드의 높이는 146m(현재는 상당부가 조금 파괴되어서138m)나 된다. 밑변의 길이는 약 230m이다. 원래는 꼭대기에 금으로 만든 피라미드석이 있었는데 도난당해 지금은 윗면이 작은 사다리꼴이 됐다고 한다,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를 짓는 데 들어간 돌의 수는 약 230만개, 전체 무게가 약 700만 톤이나 되는 이 괴물 1311년 영국에서 첨탑의 높이가 160m에 이르는 링컨 대성당(Lincoln Cathedral)’이 완성되기 전까지 인류가 지은 건축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건축물이라는 타이틀을 3800년 넘게 보유해왔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 탓인지 가자지구의 공기는 아침부터 탁했다. 덕분에 원거리 사진은 하나같이 뿌옇게 나와 버렸다. 그래서 이집트 연구가 곽민수 선생의 사진 몇 장을 빌려와 이해를 도와봤다. 그분의 글도 많은 정보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건 그렇고 대피라미드의 네 밑변 합은 1년 일수와 같은 365인치이고, 높이는 지구-태양 간 거리의 10억분의 1이라고 한다. 양력을 사용한 고대 이집트인들이 이것까지 미리 계산했다니 대단한 일이라 하겠다.

 

 

 아래 사진은 대피라미드에서 발견되었다는 쿠푸왕(Khufu)‘의 좌상으로 현재 이집트고고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대피라미드 쿠푸왕의 무덤이다. 1837년 저 피라미드의 안에서 쿠푸왕(Khufu)’이라고 새겨진 상형문자가 발견되면서 무덤의 주인이 알려졌다. ‘쿠푸왕은 이집트 4대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로 기원전 2551년부터 2528년까지 약 20년간 이집트를 통치한 왕이다. 하지만 '쿠푸왕(Khufu)'에 대해 남겨진 기록은 거의 없고 7.5의 작은 좌상 하나만이 발견되었을 정도로 베일에 싸인 왕이다

 

 

 이곳도 역시 관광객들을 위한 상품이 준비되어 있었다. 말과 낙타, 노새에 마차까지 줄줄이 나왔으니 이들 가운데 하나를 이용하면 수월하게 피라미드군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지역이니 흥정을 잘 해야만 한다. 또한 말이나 낙타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대피라미드의 오른편에는 그의 아들이 주인인 카프레의 피라미드(Pyramid of Khafre)’가 있다. 기자지역에 있는 3대 피라미드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인데 높이는 143m라고 한다. ‘대피라미드 보다는 단순하지만 카프레의 피라미드도 역시 꽤 복잡한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카프레의 피라미드도 역시 그 내부에 남아 있는 것은 광택이 나는 화강암 석관뿐이란다. 아니 1818년에 이탈리아의 탐험가 지오반니 벨조니(Giovanni Belzoni, 1778-1823)가 현실(玄室)에 낙서를 남겨놓았다니 다른 점일 수도 있겠다.

 

 

 카프레의 피라미드가 주목을 끄는 이유는 그 거대함 보다 피라미드 상단부에 남아 있는 석회암으로 된 외장석(外裝石, 마감재)’ 때문이다. 모든 피라미드들은 원래 저런 마감재들로 덧씌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카프레 피라미드의 상단부에서만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란다. 기자에서 남쪽으로 10 떨어진 투라(Tura)의 채석장에서 가져온 최고급 석회암으로 매끈하게 마감되어 해가 비치면 빛을 반사하면서 피라미드를 번쩍번쩍 빛나게 했단다. 피라미드를 처음으로 본 고대 그리스인들이 피라미드를 하나의 거대한 돌덩어리로 여겼다는 것을 보면 피라미드가 완성되고 나서 2000여년이 지났을 때까지만 해도 마감재가 온전하게 남아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아래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위 사진에서 보듯 카프레의 피라미드 옆에는 기자지구의 세 피라미드들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은 멘카우레의 피라미드(The Pyramid of Menkaure)’가 있다. 쿠프와 카프레의 피라미드가 워낙 큰 규모를 자랑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지만, 이 세 번째 피라미드도 역시 높이가 62m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두 피라미드에 비해 유난히 작은 것은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카프레)와 할아버지(쿠푸)가 거대한 피라미드를 짓느라 국고를 탕진해버린 탓에 규모를 확 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다.

 

 

 대피라미드로 조금 더 다가가니 피라미드의 외벽에 사람들이 띠를 이루고 있다. 피라미드의 내부로 들어가려는 관광객들이 만들어낸 줄이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출입구는 대피라미드의 진짜 입구가 아니다. 현재의 입구는 832년에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였던 -마문(Al-Mamun)’의 명으로 조직된 탐험대가 대피라미드 내부에 진입하면서 인위적으로 뚫었던 입구이다. 당시까지도 대피라미드는 완전하게 봉인된 상태로 보존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놀랍게도 알-마문의 탐험대는 대피라미드 내부에서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대피라미드가 도굴당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텅빈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피라미드의 가운데에 있는 것인 진짜 입구이다. 우측 하단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부분은 -마문의 명으로 뚫은 입구이다. 피라미드의 진짜 입구는 아직까지도 봉인되어 있단다.

 

 

 

 자 이젠 피라미드의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대피라미드는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 있는 건축물이지만, 내부에 들어가 보는 건 더더욱 특별한 경험이다. 하지만 관계당국에 의해서 입장객 숫자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고, 결코 싸지 않은 입장료도 추가로 내야 한다. 그렇다고 이곳까지 와서 입장료를 아끼겠다고 피라미드 내부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지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 카메라는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으니 입구에 맡겨놓아야 한다.

 

 

 

 대피라미드의 내부에서는 특별한 보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피라미드의 구조는 다른 피라미드들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복잡하게 되어 있다. ‘왕의 방과 여왕의 방, 지하의 방이라고 불리는 3곳의 현실 같은 공간이 있지만 현재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왕의 방이라고 불리는 공간만 공개되고 있다. !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왕의 방이나 여왕의 방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 그 방이 왕이나 여왕을 위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단다.

 

 

 안으로 들어서자 좁고 긴 회랑이 나타난다. 경사까지도 여간 가파른 게 아니다. 가만히 서있기도 힘든데 가파른 오르막, 그것도 어떤 곳에서는 고개까지 숙여가며 오르다보니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 이건 눈요기용 관광이 아니라 숫제 고행이다. 앎을 찾아 떠나는 고행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안에서는 발밑을 조심해야 한다. 내부에 조명시설이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두침침하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핸드폰의 손전등 기능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꽤 보였다.

 

 

 대피라미드의 복잡한 여러 공간들 가운데에 가장 인상적인 곳은 대회랑이다. 영어로는 ‘The Grand Gallery’라고 불리는 이곳은 왕의 방으로 가는 통로로, 실제로 그곳을 통해서만 왕의 방으로 갈 수 있다. 대회랑의 천장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좁아지는 형태를 하고 있는데, 높이가 8-9m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가 웅장하다.

 

 

 회랑을 오르는데 작은 터널이 보인다. 철망으로 입구를 막아놓았는데 환기구가 아닐까 싶다.

 

 

 땀으로 흠뻑 젖은 뒤에야 왕의 방에 이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피라미드 내부 탐험은 분명 신나는 여정이었다. 피라미드라는 위대한 업적의 속살을 본다니 어찌 흥분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설렘을 안고 찾아든 왕의 방은 실망 그 자체였다. 고대 이집트의 무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그 흔한 벽화라던가 문자기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玄室)에는 한쪽 귀퉁이가 깨진 듯이 보이는 화강암 석관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을 따름이다. 저 관에는 미이라(mirra)’가 들어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때나마 미이라가 있었다는 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대피라미드에 왕의 미라나 유물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첫 번째 가능성은 '도굴'이다. 하지만, 내부와 외부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굴을 당한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 두 번째 가능성은 이 대피라미드 쿠푸왕의 진짜 무덤이 아닐 가능성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의 기록에 나일강 가운데 있는 섬 지하 어딘가에 쿠푸왕의 무덤이 있다.’는 점을 들어 쿠푸왕의 진짜 무덤이 나일강 유역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피라미드는 도굴을 막기 위해 만든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가능성은 대피라미드 내부에 '비밀의 방'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이집트에서 왕은 신이자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에 피라미드의 정중앙에 왕의 방이 건설되는데, 이에 반해 쿠푸왕의 방은 정중앙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부의 어떤 곳에 진짜 왕의 무덤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피라미드 내부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기자(Giza)’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카이로 도심에서 남쪽으로 2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기자는 카이로 광역권에 속하는 위성도시이다. 동시에 기자는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이집트에서 인구가 세 번째로 많은( 300) 독립된 거대한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대중교통도 좋은 편이다. 카이로 도심에서 지하철을 타고 기자역에 내려 택시를 타면 어렵지 않게 유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참고로 카이로의 지하철은 현재 3개의 노선이 운영 중인데, 이중 기자역은 2호선으로 주황색 라인이다.

 

 

 이들 피라미드 말고도 작은 피라미드들이 여럿 보였다. 그 가운데 하나인 헤테프헤레스(Hetepheres)’ 여왕의 묘는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다. 입장료를 따로 받지는 않으나 아무런 장식(玄室)도 없는 작고 소박한 현실이니 일부러 들어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참고로 헤테프헤레스는 다슈르(Dahshur, 사카라 바로 남쪽 나일 강 서쪽 강둑에 있는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유적지)의 주인공 스네페루(Sneferu, 고왕국 제4왕조의 창시자로 BC 2575~2551 재위)’의 왕비이다.

 

 

 

 피라미드 앞에 철책으로 둘러쳐진 배 구덩 (Boat Pits)이 보인다. 이따가 보게 될 태양의 배가 이곳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한 바퀴 돌아봤다면 이제 피라미드를 한눈에 담아볼 차례이다. 피라미드에 다가가보면 커다란 돌덩이들을 계단처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짐은 물론이다. 그렇게 230만개의 돌을 쌓아올렸다고 한다. 돌 하나의 무게는 평균 2~3, 가장 큰 것은 무려 15톤이나 나간단다. 이렇게 건설하는 데는 수만 명의 건설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는데 다들 일반 자유민이었다고 한다. 노예에 의한 강제노역은 영화가 만들어낸 허구란다. 당시 이집트는 나일 강이 범람하는 3개월 동안 농사를 지을 수 없었는데 그 농부들이 피라미드 건설의 주역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곳 기자에서는 피라미드 건설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살았던 마을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그들의 삶의 질은 그리 나쁘지 않았단다. 그들은 농한기에만 나와서 일을 했으며 국가로부터 식량도 지원 받았다고 하니 피라미드의 건설은 종교적 의미와 함께 사회보장적인 통치시스템의 일환이었다 하겠다. 며칠 전 정부에서 발표하던 뉴딜정책(New Deal)이라고나 할까?

 

 

 피라미드에 다가갈수록 위엄 보다는 잘 정비된 우리 고향집 뒤 돌산 같은 친근함이 느껴진다. 잘 쌓아놓은 큰 돌 계단 위에 걸터앉아 재잘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커다란 정방형의 바위 위에 앉아 셀카를 찍는 사람들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화면에는 경외스럽던 피라미드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핸드폰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건축물인 것이다.

 

 

 

 대피라미드에서 남서쪽으로 1가량 가면, 6개 피라미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파노라마 전망대를 만난다. 잔망한 즐거움은 여기서도 계속된다. 쿠푸 할아버지-카프레 아버지능 그룹과 멘카우라 손자능-대비-왕비능 그룹 간 간격이 벌어지자 그 사이에서 여행자들은 온갖 몸 개인기를 펼친다.

 

 

 카프레의 피라미드를 가운데 놓고 왼편이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오른편은 카프레의 아들의 묘인 엔카우레의 피라미드이다. 그런데 육안으로는 카프레의 피라미드가 대피라미드보다 더 높아 보인다. 대피라미드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건설한 탓이겠지만 카프레 피라미드의 높이는 사실 136m로 훼손되기 이전의 대피라미드보다는 10m 가량, 훼손된 상태의 대피라미드보다도 1m 정도가 더 낮다고 한다.

 

 

 

 이젠 피라미드와 함께 놀아볼 차례이다. 먼저 피라미드를 배경 삼아 인생샷부터 건진다. 그게 끝나면 피라미드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다음엔 손가락으로 집어도 본다. 무게가 나가지 않으니 카메라의 각도만 잘 맞추면 되겠다.

 

 

 

 

 

 기자지구에 있는 모든 피라미드들을 한 폭의 화면에 담을 수 있는 방법은 헤테프헤레스(Hetepheres)’ 여왕의 묘 뒤편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지를 못했기에 자료 사진을 첨부해 본다.

 

 

 에필로그(epilogue), 피라미드는 이집트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석조 건축물이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이를 피라미드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무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승천하는 곳이라는 뜻의 무르는 하늘로 올라가는 신성한 장소를 가리킨다. 현세의 고단한 삶보다 죽은 뒤의 사후세계를 더 동경했던 사람들이 이집트인들이다. 그들은 죽은 뒤에 이승의 고통스런 삶에서 해방되어 오시리스의 세계에서 영원한 삶을 누린다고 믿었다. 모든 죽은 자들은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죽은 자의 신 오시리스와 하나가 된다. 이집트인들이 죽은 사람을 `오시리스라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이집트를 여행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눈에는 이 위대한 건축물이 별 것 아니게 보였던 모양이다. 광대한 사막에 우뚝 솟은 웅장한 건축물의 위용에 기가 눌렸을 법도 하건만, 자기들이 즐겨먹는 세모꼴의 빵쪼가리인 피라미스(Pyramis)’를 연상했다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아니 깎아내리기 위해 일부러 그런 이름을 붙였을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 피라미드라고 다 전통적인 삼각 탑 형태인 것은 아니다. 각 시대에 따라 다른 개성을 보여주는데 기자 인근 사카라의 조세르왕 피라미드는 계단식이며, 다슈르는 한쪽 변이 굴절되거나 벽돌 색이 붉은 피라미드로 유명하다. 이런 형식들을 종합해볼 때 계단식(죠세르)으로 시작해 굴절식(스네푸르)을 거쳐 벽돌식(붉은 피라미드, 기자 피라미드)으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홍해의 휴양지, 후르가다(Hurghada)

 

특징 : 이집트의 홍해 연안에 위치한 이 마을은 멋진 산호초와 터키석처럼 아름다운 빛깔의 푸른 바다가 펼쳐지는 곳이다. 때문에 윈드서핑(Windsurfing)’이나 스쿠버다이빙(scuba diving)’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Extreme Sports)를 즐기는 젊은이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고 한다. 거기다 최근 10년 동안 관광지 개발이 진척되어 대형 리조트와 호텔들이 들어서면서 유럽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여행객들이 찾아온단다. 특히 나 같은 애주가들에게는 가히 파라다이스라고 보면 되겠다. 숙소인 리조트에 10불이 채 되지 않는 돈을 추가로 내면, 온갖 종류의 술을 그것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안주까지 무료로 제공되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룩소르를 출발한 버스는 5시간이 지나서야 홍해연안에 도착했다. 이집트 동부의 모래사막을 넘자마자 짙푸른 해변과 조우하는 것 자체가 느닷없다. 우윳빛 지루한 사막 끝에 펼쳐지는 후루가다의 바다는 색의 대비가 더욱 강렬했다. 이어서 해안을 오른편에 끼고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자 이집트 최고의 휴양지로 꼽히는 후루가다가 나온다. 후루가다 해안은 다합, 샤름, 엘 세이크와 더불어 전 세계 다이버들의 성지로 꼽히기도 한다. 다이버가 아닌 일반 여행객들은 글라스보트(배 밑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는 배)’를 타게 되는데, 이때 아름다운 열대어와 산호초, 돌고래를 만나는 환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그건 그렇고 후루가다는 그동안 보아오던 이집트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다른 도시들이 사막과 유적들로 대변된다면 이곳은 잘 정돈 된 거리와 푸른색으로 넘치는 바다가 대표적인 풍경이라 하겠다. 현대적인 느낌이 강한 휴양도시라고나 할까. 그래선지 해변에는 특급 리조트와 호텔들이 줄지어 있었다.

 

 

 

 후루가다로 오는 내내 창밖으로 펼쳐지던 풍경이다. 이집트는 풍성한 나일강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황량하고 건조한 서부 사막, 오른쪽으로는 산과 같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동부 사막이 분포되어 있다. 두 사막의 가장 큰 차이는 서부사막이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으로 이루어진데 비해 동부사막은 암석으로 된 산(미처 침식되지 못한 구릉지)’이라는 점이다. 이 사막들이 이집트 국토의 94% 정도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집트를 여행하는 내내 삭막하고 황량한 풍경만 눈에 들어온다고 보면 되겠다. ! 동부사막에는 군데군데 푸른 식물도 자라고 있었다. 그래선지 그 풀을 먹이로 삼아 양()을 기른다는 농가들도 가끔 눈에 띄었다. 양을 키우는 일은 보통 여자들이 맡는다고 한다.

 

 

 룩소르를 빠져나오는 길. 나일강을 따라 이동하다보면 나일강 옆에 별도로 만들어진 수로(水路)가 눈에 띈다. 나일강물은 저렇게 식수나 관개용수 등으로 사용되었고 강줄기는 상업 활동과 교통의 주요 통로 역할을 했다. 땅도 사람도 나일 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더 나아가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을 신성시까지 했고 말이다. 참고로 나일강은 탄자니아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해 지중해까지 그 길이가 6650나 된다.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발원한 백나일과 에티오피아 타나 호수에서 시작하는 청나일이 수단의 하루툼에서 합류한 다음 이집트의 아부심벨로 흘러 들어온다. 아부심벨을 지난 나일강은 아스완 하이댐에 의해 만들어진 낫세르호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는 아스완을 지나 룩소르, 아슈트를 지나 카이로에 이르게 된다. 카이로는 나일삼각주의 꼭지점에 해당하는 도시로, 여기서 나일강은 다시 동서로 갈라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강은 지중해의 로제타(Rosetta)로 빠져 나가고, 동쪽으로 흐르는 강은 지중해의 다미에타(Damietta)로 빠져 나간다.

 

 

 후루가다로 오는 도중 들렀던 휴게소에서 만난 원주민 여성이다. 당나귀를 몰고나와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그리곤 당나귀와 함께 사진이라도 찍을 경우 1불씩을 받는 것이다. 지난 해 페루를 여행하다가 쿠스코에서 만났던 인디오 여성을 떠올리게 만드는 상황. 그저 전통의상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던 페루 원주민과는 달리 이곳 여성분은 약간 깨제제한 것이 달랐을 따름이다.

 

 

 해안을 따라 달리던 버스는 잠시 후 우리가 머물게 될 ‘Desert rose’에 도착한다. 우리말로 하면 사막에 피어난 장미. 이름 그대로 규모가 크고 화려한 5성급 리조트다. 이곳 후루가다에는 이런 고급 리조트들이 많다고 한다. 정부에서 헐값으로 불하 받은 넓은 땅에 디럭스하게 지은 것들로, 투숙객들은 대부분 휴식을 위해 후루가다를 찾는 유럽인들이다. 하지만 이런 리조트의 주인인 이집트 사람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살지 않고, 외국으로 나가 거주한다니 이 또한 아이러니라 하겠다. 참고로 이곳 후루가다는 1980년대 이후 이집트 정부에 의해 계획된 관광지답게 치안이 잘 되어 있다. 리조트의 두꺼운 철문을 여러 명의 보안요원이 지키는가 하면, 철저한 보안검색을 거쳐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일반인들은 들어오기 힘든,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은밀한 공간은 그야말로 여행객들 위한 별천지였다.

 

 

 리조트 중앙 홀의 럭셔리한 '샹들리에(chandelier)‘. 무슬림의 나라답게 기하학적인 문양을 보여준다. 움직이는 동물이나 신상들은 모두 우상으로 취급하여 그리거나 새기는 것을 금기시 하고 있는 이슬람교의 특성으로 인해 생긴 문양들이다.

 

 

 투숙객에게는 빨강 또는 파랑색의 밴드가 주어진다. 아니 서로 바꾸어 이용할 수 없도록 아예 손목에다 고정시켜 버린다. 이 밴드를 보여주면 리조트 내의 모든 편의시설(뷔페식당, 칵테일바, 야외식당 등)에서 식음료를 먹고 마실 수 있는데 밴드의 색깔에 따라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와 형우군의 손목에는 술이 제공되는 파랑색 밴드가 채워졌다. 물론 10불 조금 못되는 돈을 추가로 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이 밴드는 1 2일 동안 무제한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일종의 티켓이다. 리조트 내에 설치된 수많은 바에서 이 밴드만 보여주면 맥주나 양주, 심지어는 칵테일까지 원하는 종류의 술이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피자나 햄버거 등 간단한 안주도 물론 공짜다. 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라고나 할까.

 

 

 배정된 객실에 짐을 풀자마자 리조트 구경에 나선다. 한마디로 잘 가꾸어져 있다. 구획을 나누어가며 시설물들을 중심으로 꽃과 나무를 조화롭게 배치해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켰다. 그러다보니 어디에 앉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더라도 인생샷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 있다.

 

 

 

 건물의 벽면이나 담벼락, 터널, 화분 등 곳곳에게 심어진 부겐빌레아는 아름다움을 뛰어넘어 화려함으로 승화됐다. 여행을 밥 먹듯이 해온 내가 접해보기 힘든 화려함이었다.

 

 

 조금 더 걸으니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된 정원의 한가운데에 수영장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것도 너른데다 부대시설까지 잘 갖춘 풀이 세 개나 된다. 이런 걸 보고 파라다이스라고 하나 보다. 맞다. 물놀이를 하는 사람이나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나저나 풀장 주변은 객실동이 배치됐다. 방마다 의자와 테이블이 놓인 테라스를 갖추고 있어 쉬면서 리조트를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테라스로 나가면 여태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보아오던 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아직은 2, 사막의 나라 이집트이지만 한낮의 기온이 20 내외에 그치고 있다. 풀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철이 이르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물놀이에 한창인 사람들도 제법 된다. 비치타월을 두르고 썬탠(suntan)을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대부분이 백인인데 그들에겐 그까짓 기온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햇빛에 목말라하는 유럽인들이니 이렇게 화창한 날씨를 그냥 흘려버리기 아까웠을 수도 있겠다.

 

 

 풀장 건너편에는 ‘The Palm’이라는 대형 식당이 있었다. 복도 같은 중앙통로에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뷔페식으로 차려놓고, 좌우에 룸이 배치된 구조이다. 음식을 골라 담은 후 아무 곳에나 앉으면 된다. 룸마다 바가 마련되어 있어 반주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그뿐 아니다. 이집트식 얇은 밀떡과 터키 케밥, 다양한 즉석요리도 제공되고 있었다. 그런데 맛도 맛이지만 요리사들의 친절함이 돋보였다. 주문하는 대로 만들어 줄뿐만 아니라 요리에 대해 물어보면 싫은 기색 없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조금 더 나가니 리조트의 전용해변이 나온다. 항아리처럼 내륙으로 움푹 파고들었는데 모래사장으로 둘러싸인 풍경이 흡사 사막의 오아시스를 보고 있는 듯하다.

 

 

 

 비치에는 밀짚모자처럼 생긴 파라솔이 설치되어 있다. 소문난 바닷가들을 여행하다보면 흔하게 만날 수 있는 풍경 가운데 하나이다. 다만 그 숫자가 많다는 것만 다를 뿐...

 

 

 

 비치파라솔 아래서 쉬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양인들이다. 후루가다를 이집트가 아니라고 하던 누군가의 말이 실감난다. 그는 이집트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집트인들보다 유럽 및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더 많은 휴양지라고 했다. 관광업에 종사하는 이집트인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는 또 여행 내내 접했던 이집트인의 고달픔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고 멋들어진 호텔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곳이 바로 후루가다라고 했다.

 

 

 

 

 내해(內海)를 벗어나자 홍해(紅海, Red Sea)의 푸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눈앞의 홍해는 눈부시게 파랬다. 어딜 봐도 빨간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왜 홍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 빨갛다는 것과 바다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고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단어인데도 말이다. 혹시 매력적으로 포장하기 위한 위장술은 아닐까? 상상이 가지 않는 색을 가지고 있는 바다를 떠올리게 되니 말이다. 이유는 너무 간단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산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는데 바다 속 해조들 때문에 빨갛게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홍해가 되었다는 것이다. 싱겁다.

 

 

 바닷가에는 ‘diving center’가 들어서 있다. 간판 상단에 ‘undersea adventure’라는 홍보문구를 적어 넣었는가 하면, 옆에는 ‘wind surfing school’을 운영하고 있다는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익스트림 스포츠(Extreme Sports)’의 천국이라는 이곳 후루가다의 명성에 걸맞게 이 리조트에서도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람들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나보다. 바다를 향해 길게 다리를 놓은 걸 보면 말이다. 그 위에는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푸르른 세상을 마음껏 구경하라는 배려일 것이다.

 

 

 사방이 온통 푸른색이다. 하늘과 바다의 색 경계가 없는 듯한 풍경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홍해의 무릉도원이라 일컫는단다.

 

 

 데크 아래에서 스노클링(snorkeling)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오리발과 스노클, 물안경, 마스크 등의 장비를 이용하여 잠수를 즐기는 레저 스포츠의 하나인데, 별도의 잠수 기술이나 수영 실력이 없이도 가능하고 연령이나 체력에 구애 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스포츠다. 스노클링을 하는 사람들 곁에 안전요원이 붙어있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스포츠는 리조트의 전용해변에서 가능하다. 바닷물이 싫거나 익스트림 스포츠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은 리조트 내부에 마련된 스파나 웰니스 센터(Wellness center)’를 이용할 수 있다. 그것마저 싫은 사람들에게는 ‘The Dance Club’이라는 나이트클럽이 준비되어 있다.

 

 

 하늘을 날고 있는 낙하산(parachute)도 여럿 보였다. 이곳 후루가다의 인기 레포츠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한 패러세일링(parasailing)이란다. 특별히 만들어진 낙하산(parasail)을 이용한 익스트림 스포츠(extreme sports)’인데, 낙하산에 사람을 묶어서 긴 밧줄로 연결한 뒤 모터보트에 매달아 빠르게 달려 나가는 힘으로 낙하산을 하늘 높이 띄게 하는 원리다. 원래는 프랑스 공수부대의 훈련용 프로그램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1950년의 일이다. 이게 영국으로 전해지면서 레포츠로 발전되었단다. 이후 세계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는 레포츠로 성장했으며, 우리나라에는 1985년 몽산포 해수욕장에서 처음 선을 보인바 있다.

 

 

 외해(外海)의 해변이라고 해서 그냥 놓아둘 리기 없다. 꽤 많은 비치파라솔을 설치해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직접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바닷물에서 수영을 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옹기처럼 둥그렇게 내륙으로 파고 든 비치와 홍해의 푸른 바다 사이에는 두 개의 다리가 놓여있다. 둘 사이 섬에는 쉼터가 만들어져 있다. 나처럼 파란 밴드를 차고 있는 투숙객들에게 술과 안주가 무료로 제공됨은 물론이다.

 

 

 

 자 이젠 본격적으로 마셔볼 차례이다. 일단 맥주부터 한잔 주문했다. 바텐더는 가져다줄테니 테이블에 앉아 있으란다. 하지만 나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한잔을 직접 챙기면서 스카치나 한잔 더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몰드위스키(Malt whisky)를 좋아하는 평소의 습관대로 글렌피딕(Glenfiddich), 그것도 ’On The Rocks‘... 바텐더는 아무런 불평 없이 주문하는 대로 가져다준다. 아니 몇 번을 더 부탁해도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가져다주었다.

 

 

 

 이번 여행은 대체로 술이 귀한 일정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물론이고 시내의 마켓에서도 술을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지 식당에서도 술은 팔고 있지 않았다. 그저 외국인을 상대하는 식당에나 가야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선택했던 게 사카라 맥주였는데 피라미드의 원조인 조세르 피라미드가 있던 사카라의 지명을 브랜드로 가져다 쓰고 있었다. 어느 책에서인가 맥주의 원조도 이집트라고 한 것을 보았다.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즐겨 마셨던 것이 맥주라고 하였으니 맥주 이름에 사카라는 붙인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저녁이 되자 리조트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한다.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포위된 야외 카페는 쌍쌍 또는 무리지어 앉은 여행객들로 북적였다. 다들 너나 할 것 없이 술잔을 앞에 놓았다. 우리 일행도 그 가운데 하나였음은 물론이다. 사막 사파리까지 거르면서 술을 마셨던 형우군과 나는 이미 얼큰하게 취해버렸지만 말이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홍해 바닷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반잠수정(바닥이 유리로 된 글라스 보트)‘ 투어를 신청했다.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를 달리니 제법 규모가 큰 부두가 나온다. 선착장에는 하얗고 멋진 배들이 가득 정박해 있었다. 바다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탈 배는 투박하게 생긴 반잠수정이다.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다고 해서 글라스 보트(glass boat)‘라고도 불린다. 홍해의 아름다운 바닷속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특화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임무에 충실하다보니 외모보다는 기능에 초점을 맞췄겠지만 내 시선은 자꾸 주변의 하얀 요트들에 꽂힌다. 하긴 잘 생긴 것들에 집착하는 게 본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아니겠는가. ! 이 배는 원할 경우 스노쿨링이나 스쿠버다이빙도 체험이 가능하단다. 하지만 형우군과 내 관심은 오로지 리조트에 쏠려있다. 술이 귀한 나라에서 공짜로, 그것도 무제한으로 제공되고 있으니 어찌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생긴 대로 논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우리가 타고 나가는 배가 딱 그랬다. 이게 과연 앞으로 나가고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뭉툭하게 생긴 외모대로 배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루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주변 경관을 바라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인상 좋은 선장아저씨가 조종간인 까지 맡겨주는데 지루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 고래 닷!’ 배가 막 출발하려는데 집사람이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난 들은 채도 않았다. 매 분기마다 출발해온 해외여행에서 이런 장난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6년 동안이나 그래왔다면 반응하는 사람이 더 이상할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다. 연안에서는 고래가 발견되지 않는다며 선원들의 반응도 시큰둥했다. 그런데 빨리 오지 못해!’라며 호통을 치는 집사람의 성화에 못 이겨 다가가보니 진짜로 돌고래가 뛰어놀고 있지 않겠는가. 그제야 카메라를 꺼내들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진 한 장 찍지도 못했는데 돌고래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난 마누라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는 집사람의 놀림에 시달리고 있다.

 

 

 홍해 바다는 푸르렀다. 거기다 청량하고 아름답기까지 해 바라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바다를 향해 가슴을 편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한다. 그러자 너른 바다가 나를 빨아드린다. 마치 블랙홀처럼. 온통 푸른색의 블랙홀, 그 중심에 지나치게 아름다운 홍해가 있었다.

 

 

 배가 출발하자. 모두들 갑판에 모여 홍해바다를 구경한다. 물빛이 유독 푸르다는 것만 다를 뿐 동해바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끝 간 데 없이 바다가 펼쳐지는 동해와는 달리 이곳 홍해의 건너편에는 황량한 모래언덕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다. 홍해 바다에 떠있는 모래섬인 모양이다. 섬은 오직 한 가지 색만 가지고 있었다. 바로 사막의 색, 누런색이다. 온통 사막인 것이다. 하지만 바다는 누런 육지의 색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너무나 아름다웠다. 문득 저 모래언덕이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시나이 반도일지도 모른겠다는 생각이 든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렇다면 모세가 이곳을 지나갔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는가. 나일강과 시나이 반도를 건너는 모세의 출애굽기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바다를 건너 이집트 군대를 따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시나이산에서 10계명을 받는 일이다. 이 두 사건은 정말 극적이어서 영화와 연극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그러면 물이 갈라지게 해서 이집트군을 따돌린 그 바다는 과연 어디일까? 국내에 번역된 성서에는 분명 홍해(Red Sea)라고 적혀 있다. 히브리어 ‘Yam Suph’ ‘Sea of Reeds(갈대바다)’로 번역하면서 이 갈대 바다가 나일 델타의 동쪽 지류 이스마일리아를 따라 형성된 거대한 비터호 (Bitter Lake)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겠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곳은 홍해이고, 모세가 건넜다는 시나이반도가 코앞에 있을 정도로 가까우니 그가 이곳으로 건넜다고 상상한다 해서 그게 뭐 나무랄 일이겠는가.

 

 

 배가 움직이는 동안 댄스파티도 열렸다. 선원들과 여행객들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데 춤판에 끼어든 고객은 주로 여성이다. 그중에서도 가족여행을 왔다는 터키 여성분이 가장 돋보였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배가 조금 더 깊은 바다에 이를 즈음 계단을 통해 배의 바닥으로 내려간다. 바닥은 둥그렇게 생긴 회전의자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고, 그 앞은 바닷속을 내다볼 수 있도록 유리로 되어 있다.

 

 

 

 유리 너머로 별천지 같은 바닷속 세상이 펼쳐진다. 홍해가 자신의 알몸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세상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도시를 설명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렵다.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속이 울렁거리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난생 처음 접하는 세상의 신비로움에서 시작된다.

 

 

 후루가다의 바닷속은 거대한 정원 하나가 통째로 가라앉은 것 같다. 수초, 산호, 그리고 형형색색의 온갖 물고기들. 그 가운데서도 사방에 널린 산호초가 가장 눈길을 끈다. 맞다. 저렇게 많은 산호들이 자라는 바다이기에 사람들 눈에 붉은 색으로 보였을 것이고 홍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바닷속 물고기 떼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고기 떼들이 점점 많아진다. 산호초도 더 굵어졌다. 아름답다. 아니 신비롭다. 그런 설렘 때문이었을까? 닿을 듯 말 듯 산호초를 스쳐 지나가는 고기 때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얼마쯤 더 갔을까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 떼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물고기들 사이에는 사람이 있었다. 먹이를 주고 있는 스쿠버다이버들에게 수많은 물고기들이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팬서비스라고나 할까. 아니 팬서비스치고는 너무 장관이다.

 

 

 

 에필로그(epilogue), 이집트를 여행하는 내내 꿈꾸어 온 것이 있었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친절한 바텐더가 건네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음미하는 것. 이왕에 떠나온 여행이니 조그만 낭만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이곳 이집트는 사막에 이슬람 문화가 더해져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눈을 들면 삭막하기 짝이 없는 사막뿐이었고 마트에서는 술을 팔지도 않았다. 운이 좋아 술을 파는 곳을 만났더라도 파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가 하면, 술을 샀다고 해서 대놓고 마실 수도 없었다. 그런데 후루가다는 마치 해방의 도시 같았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맥주잔을 부딪치는가 하면 사람들은 눈치도 보지 않고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이곳이 이슬람국가인 것을 깜빡 잊어버릴 정도였다. 이집트 근처의 나라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옛 동료가 그랬다. 이왕에 갔으면 양탄자가 깔려있는 노천바에서 이집트 맥주 '스텔라'를 곁들이며 물담배 '시샤'를 피워보라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이집트 음식 빼고 전 세계 음식이 다 있다는 후루가다의 밤거리로 나가보라고 했다. 그게 바로 이집트 속의 유럽인 후루가다의 매력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밤거리로 나가보지도 못했고 물담배는 구경도 못했으니 이번 이집트 여행은 실패한 셈이다. 그런데 내 얘기를 듣고 있던 형우군의 대답은 의외로 심플했다. ‘다시 한 번 더 오면 되지 뭐~’. 맞다.

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룩소르(Luxor,  Thebes), 룩소르 신전(Luxor Temple)

 

특징 : ’카르나크 신전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주신(主神)인 아몬(Amon)을 위해 지어졌다. 아멘호테프 3세의 작품으로 카르나크 신전의 부속신전이다. 유일신 아텐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한 아멘호테프 4(아케나텐) 때 잠시 중단되었다가 아케나텐의 뒤를 이어 즉위한 투탕카멘이 공사를 재개했고, 훗날 람세스 2세가 제1탑문과 첫 번째 안마당을 세워 지금과 같은 신전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한참 뒤의 지배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은 성스러운 배가 놓이는 제실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로마의 황제들까지도 신전의 부분 부분을 끊임없이 증축했기 때문에 딱 한 마디로 신전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완공되었다라고 말하기는 힘들단다. 룩소르 신전은 이처럼 여러 파라오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서 완성되었지만 신전이 지어진 목적만큼은 분명하다. ‘카르나크 신전처럼 룩소르의 3신인 주신 아몬과 그의 아내 무트, 그리고 아들 콘수를 위해서 지어졌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카르나크 신전에 비하면 조금 떨어진다. 그 규모도 적을 뿐만 아니라 일 년 내내 아멘의 신상이 모셔졌던 카르나크 신전에 비해 이곳 룩소르 신전은 일 년에 딱 한 차례, 오페트 축제(Opet Festival)라고 불리는 특별한 기간 동안만 아멘의 신상을 모셨기 때문이다.

 

 어둠이 깔릴 무렵 룩소르 시내를 마차로 누볐다. 다음 행선지인 룩소르 신전이 야간 투어로 일정이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신전의 야경(夜景) 가운데 룩소르 신전이 가장 뛰어나다는 가이드의 추천인데 어찌 대낮을 고집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이 일정은 정규 일정에는 포함되지 않은 선택 관광이다. 그러나 그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한껏 치장된 마차를 타고 나름대로 전통 의상을 갖춘 마부의 옆자리에 앉아 그의 설명을 들으며 시내 곳곳을 둘러보는 게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 마부는 유창하진 않지만 영어 대화가 가능했다. 여행객들로부터 배운 탓에 글을 읽거나 쓰진 못한다지만 주변 풍광을 설명해주는 데는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마차는 나일강을 따라 룩소르 신전 옆 도로와 시장을 누빈다. 넓은 도로를 달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마차 두 대가 겨우 비켜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차는 물 흐르듯 잘도 달린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거기다 사람까지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도대체 막힘이 없는 것이다. 부대끼며 살아온 오랜 세월이 만들어 낸 문화가 아닐까 싶다.

 

 

 

 가끔 영어로 된 삼성 휴대폰 대리점이 보여 반갑다. LG 가전제품을 팔고 있는 상점도 눈에 띄었다. 외국에만 나오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내 가슴 또한 뿌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

 

 

 

 룩소르 기차역이다. 중세 유럽풍의 외관으로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집트의 신전 탑문과 신전의 기둥을 조합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집트는 10% 정도 되는 기독교를 제외하면 모두가 이슬람이다. 그래선지 시내에서 만난 기독교의 예배당까지도 외관은 모스크를 영락없이 빼다 닮았다.

 

 

 시장 골목은 우리네 전통시장과 비슷한 풍경을 보여준다. 야채나 과일가게는 물론이고 의류, 잡화 등 다양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풍경보다는 마차가 복잡한 시장바닥을 비집고 돌아다니는 것이 더 신기하기만 했다.

 

 

 이슬람 세상이니 여성들의 히잡과 차도르가 시장 곳곳에 내걸려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투어를 마친 마차는 우릴 룩소르 시내의 한복판에 있는 룩소르 신전의 앞에다 내려놓는다. 룩소르 신전은 도시 한복판에, 그것도 나일강 동편 중심지에 있어 더욱 유명한지도 모른다. 카르나크가 신과 선대왕에 대한 경외심의 상징이라면, 제전을 치르는 가장 중요한 사원 룩소르 사원은 신과 왕의 대화가 이뤄지는 장소로 민중들에게 각인돼 있다. 나일강 범람 등의 현안을 해결하는 마지막 장소이기 때문이다.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서자 숫양(아몬을 뜻한다)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들이 널따란 길의 양 옆으로 늘어서 있다. 30왕조의 초대 왕인 넥타네보 1가 만든 스핑크스의 길(Avenue of Sphinxes)‘이란다. 저 길은 해마다 열리던 오페트 축제(Opet Festival, 아몬신과 무트신의 결혼을 기념하고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축제)‘  카르나크 신전에서 모셔오던 신(아몬, 무트, 콘수)들을 거룩한 나룻배에 태워 3쯤 떨어진 이곳 룩소르 신전으로 모셔오던 성스러운 길이다. 신들은 이곳 룩소르 신전에서 3주간을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신전 앞의 널따란 광장 한켠에는 룩소르 신전과는 별개로 작은 신전이 하나 있었다. 안내판이 세워져 있지 않아 궁금해 하는데 일행 중 한명이 사라피스(Sarapis)‘ 신을 모시는 예배소라고 귀띔해준다. 사라피스는 제우스(Zeus)의 용모를 띤 신()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Ptolemaeos I Soter, BC 323~285)‘가 여러 그리스적 요소와 함께 도입했다. 그는 죽은 자의 신 오시리스(Osiris)‘와 멤피스에서 숭배한 평생 한번밖에 출산하지 못하는 암소가 천상에서 비추는 빛으로 임신하여 태어난 성스러운 수소 아피스(Apis)‘를 하나로 합쳐 그리스 출신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국가 신으로 만들었다. 헬레니즘 세계의 종교습합(syncretism)이 잘 나타난 형태라고 보면 되겠다.

 

 

 널따란 마당(’넥타네보 1세의 뜰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에는 너비 65m에 높이가 25m 1 탑문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여섯 개의 거대한 석상과 하나의 오벨리스크(obelisk)도 보인다. 18왕조의 아멘호테프 3가 세운 기존의 아몬신전에다 19왕조의 람세스 2세가 덧대어 지은 것들이다. 그나저나 카르나크 신전의 부속 신전이라는 세평에도 불구하고 그 위용은 대단했다. 하긴 람세스라는 당대 신 같은 통치자가 축조했다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람세스 2가 세웠다는 24m 높이의 오벨리스크는 현재 하나만 남아있다. 다른 하나는 프랑스의 콩코드 광장에 있다고 한다. 1829 무하마드 알리 왕이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에게 선물로 보냈기 때문이다. 한편 루이 필립은 오벨리스크 선물에 대한 답례로 시계를 보내왔는데 이 시계는 지금 카이로의 알리 모스크에 설치되어 있단다. 이집트의 신전들 대부분이 비슷한 상태라고 보면 되겠다. 그 많던 오벨리스크들 대부분이 유럽 각지로 약탈되어 나갔고 막상 이집트에는 몇 개 남아있지 않다.

 

 

 맨 왼쪽에 있는 석상은 나머지 셋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새이다. 양 팔을 ’X‘자 모양으로 가슴위로 모은 석상의 인상착의가 특이할 뿐만 아니라 얼굴의 생김새도 매끈하게 생긴 게 영락없는 여성이다. 그저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것과 턱에 달고 있는 파라오 수염 정도가 다른 상들과 같은 정도이다. 어쩌면 다른 곳에서 옮겨왔을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맨 오른쪽 석상은 많이 훼손되어 있다. 양쪽 팔은 떨어져 나가버렸고 얼굴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그래선지 머리에 쓰고 있는 왕관까지도 달라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문을 지키고 있는 두 좌상(坐像)은 원형에 가깝다. 오른쪽 석상의 얼굴이 훼손된 것을 뺀다면 거의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오른쪽 좌상의 앞에 보이는 좌대는 위에서 얘기한바 있는 오벨리스크, 즉 프랑스의 콩코드광장으로 옮겨간 오벨리스크가 서있던 자리이다.

 

 

 1탑문에는 그 유명한 카데시 전투(Battle of Kadesh)’ 장면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카데시 전투란 람세스 2가 다스리던 이집트 신왕국과 팔레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세력을 다투던 라이벌 히타이트(Hittite)가 기원전 1274년에 오늘날의 시리아 카데시 지역에서 벌였던 전투를 말한다. 결과부터 말하면 카데시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이 전투로 인해 인류 최초로 평화조약이 체결된다. 그리고 이 조약은 람세스 2가 내치에 힘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무승부를 승리로 포장하면서까지 람세스 2세의 치적으로 삼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1탑문 뒤로는 1 마당(람세스 2세의 마당)‘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1탑문과 함께 람세스 2에 의해 만들어진 57mx51m 규모의 이 널찍한 공간은 아멘호테프 3세가 세운 2 탑문까지 이어지는데 74개나 되는 원기둥으로 조성된 아주 인상적인 공간이다. 참고로 1탑문 뒤쪽에 있는 3개의 제실은 테베의 3신인 아몬과 무트, 콘수가 타던 성스러운 배를 모시는 곳이라고 한다.

 

 

 

 파피루스 머리로 장식된 기둥들 사이에는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붉은 왕관(파피루스)을 쓴 람세스 2와 상이집트를 상징하는 흰 왕관(연꽃)을 쓴 람세스 2‘, 그리고 통일 이집트를 상징하는 이중 왕관을 쓴 람세스 2세의 석상으로 도배가 되어있다.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함께 다스렸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파라오 두 땅의 주인(nb-tAwy)’이라는 호칭도 갖고 있었단다. 참고로 람세스 2는 고대 이집트의 가장 유명한 파라오들 가운데 하나이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의 주인공 모세와 어린 시절 다정한 친구였으나 나중에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탄압하는 폭군으로, 이집트 전역에 흩어져있는 엄청난 유적들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1995년 세계적으로 인기몰이를 했던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로 인해 더욱 잘 알려졌다. ‘이집트 태양왕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이집트 신왕조 시절인 기원전 1303년부터 기원전 1213년까지 90세의 수명을 누렸고 60년 동안 통치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으로는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며 대규모 건설사업을 계속하면서도 내분을 잠재우는 리더십을 발휘했고, 밖으로는 이집트 영토를 넓히고 많은 포로를 확보했던 정복의 영웅으로서 맹위를 떨쳤다.

 

 

 

 첫 번째 마당의 남서쪽에는 신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슬람풍의 건축물 하나가 들어서 있다. ‘아부 엘-학가그(Abu el-Haggag)’란 이름의 모스크(mosque)이다. ‘순례자들의 아버지란 뜻을 가진 아부 엘 학가그는 이곳 룩소르에 이슬람을 전파한 인물로 훗날 이집트인들로부터 성자로 추앙받는다. 1174년 이라크의 모술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 시절 고아가 되었지만 장사를 해서 엄청난 부자가 된다. 하지만 40세가 되던 해에 이슬람에 대해 더 알고자 가족들과 함께 이집트로 넘어와 이집트 중부 만수라에 정착했는데 꿈에 남부의 테베로 가라는 계시를 받고 룩소르로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하가그는 룩소르에서 해박한 지식으로 명성을 날렸는데 카이로의 칼리프가 그에게 이집트의 대법관 자리를 맡으라고 했을 정도였단다. 그의 시신은 현재 모스크의 중앙 돔 지하에 있는 검은 색 관에 모셔져 있단다.

 

 

 아래는 다른 분에게서 빌려온 사진으로 낮에 바라본 모스크의 풍경이다. 남의 신전에 기대어 지어진 이슬람 시대의 모스크는 룩소르 신전이 갖고 있는 다층적인 역사를 여실히 보여준다. ! 지금도 저 신전에서는 이슬람의 예배가 드려지고 있단다.

 

 

 투탕카멘(Tutankhamen)과 아낙수나문(Ankhesenamun) 부부로 여겨지는 석상도 만날 수 있었다.

 

 

 다른 석상도 눈에 띄었으나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해득이 불가능한 부조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회랑의 가장자리에도 눈길을 끄는 것들이 있었다. 투탕카멘과 호렘헵 시대에 지어졌다는 외벽에 새겨진 부조들이다. 벽에는 오페트 축제(Opet Festival)’ 때 룩소르의 3신이 배를 타고 카르나크에서 룩소르 신전으로 향하는 모습과 다시 카르나크로 돌아가는 여정이 꽤나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지금은 거의 무너져버린 2 탑문은 아멘호테프 3세에 의해서 지어졌다. 하지만 탑문 앞에 세워진 한 쌍의 좌상(坐像) 1탑문과 마찬가지로 람세스 2의 것이다. 아무래도 람세스 2세가 신전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갈아치우지 않았나 싶다. 하긴 이집트의 온 국토가 전부 람세스 2세의 놀이터라는 얘기가 어디 그냥 만들어졌겠는가.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두 번째 탑문을 지나게 되면 하나의 회랑(回廊)을 만나게 된다. 높이가 19m에 이르는 원기둥 14개가 두 줄로 늘어서 있는데 원래는 천장으로 덮여 있었다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그나저나 이 회랑은 신전의 핵심부로서 입구보다 조금 더 높게 지어졌다고 해서 대회랑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집트의 신전들은 신전의 핵심부를 입구보다 조금 더 높게 짓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대회랑을 통해 연결되는 곳은 아멘호테프 3세의 마당(’태양의 마당이라는 이도 있다)’이라는 2 마당이다. 이곳은 수많은 기둥들이 이중으로 둘러싼 다주식 광장(Hypostyle hall)이다. 45×50m 규모의 광장을 파피루스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64개의 아름다운 원기둥들이 삼면에 두 줄로 늘어서 있는 형태이다. 하지만 큰주랑 쪽에 있는 기둥들은 윗부분이 거의 부서졌고, 주랑에서 마당으로 들어가면 양 옆으로만 기둥들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정면에 보이는 기둥들은 안마당의 것이 아니고 다음 방의 열주실 기둥들이다.

 

 

 

 이 마당은 카르낙신전의 7탑문 전의 안마당과 마찬가지로 은신처를 의미하는 ‘cachette’라고도 불린단다. 이유도 같다. 미국 탐사대가 1987년 이곳에서 20개가 넘는 18왕조 시대의 석상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유물들은 현재 룩소르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단다.

 

 

 

 

 태양의 마당은 32개의 원기둥이 8개씩 네 줄로 늘어서 있는 열주실로 이어진다. 이제 완벽하게 지붕으로 덮여있는 신전의 지성소가 곧 나타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천장으로 덮여진 신전은 원기둥이 있는 열주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이집트 신전의 구조에 관한 일종의 규칙이라니 말이다. 23개의 방과 27개의 지성소로 구성되어 있는 이곳은 원래 천장으로 다 덮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록 남아있지 않지만 말이다.

 

 

 

 신전은 세월의 흐름에 맞춰 변해온 신들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이곳은 원래 파라오들이 자기 자신의 지성소를 지었던 장소였다. 하지만 세월은 온전히 그들 것만으로 놓아두지를 않았다. 신왕조의 파라오들뿐만 아니라 이후 이집트를 통치하며 파라오 대우를 받았던 황제들까지도 이곳에 예배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신전은 위에서 얘기했던 대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예배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런 다양한 행태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알렉산더 대왕이라 하겠다. 그는 이곳 신전 내부에 자신만의 예배소(아래 사진)를 지었는가 하면, 아멘호테프 3세를 모방하여 자신이 직접 이집트의 신들을 경배하는 부조(아래 두 번째 사진)를 남겨 놓았다.

 

 

 

 열주실 다음의 4개의 기둥이 있는 방은 봉헌실로 아몬신에게 봉헌을 올리던 곳이고, 바로 뒤는 알렉산더 대왕이 복원한 아몬의 성스러운 배를 모시던 공간이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아멘호테프 3의 즉위를 표현한 대관식의 방이 있고, 여기서 다시 왼쪽으로 가면 탄생의 방이라 불리는 곳이 나온다. 아멘호테프 3세의 어머니가 신의 손길로 아들을 임신하고 파라오 아멘호테프가 신의 아들로 신성하게 태어나 축복을 받으며 성장하는 장면의 부조가 있다. 크눔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장면도 볼 수 있단다.

 

 

 신전의 마지막 방은 아멘호테프 3세의 지성소라고 불리는 곳으로 룩스르 신전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아멘호테프 3세가 태어난 분만실이자 아몬신의 거룩한 배를 보관하던 지극히 성스러운 장소이다. 신전이 실제로 사용되던 당시에는 오로지 고위 신관들과 파라오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성소 내부는 이집트의 조각과 로마의 스투코(치장 벽토)로 장식한 전실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로마인들 역시 이곳을 제의를 올리는 데 사용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벽면에는 장례문서의 내용인 밤과 낮의 태양선이 새겨져 있다는데 확인까지는 불가능했다. 나란히 남아있다는 알렉산더대왕과 아멘호테프 3세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하긴 이 모든 것이 낯선 신성문자로 표현되어 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벽에 새겨진 조각상과 그림들에서 그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흔적들은 읽지는 못하지만 파라오들의 역사는 짐작할 수 있게 해줬다.

 

 

 

 룩소르신전은 한때(로마시대 이후) 교회로도 사용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곳곳에 예수와 열두 제자의 그림, 그리고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분명 고대 이집트의 주신(主神)인 아멘과 그의 부인 무트, 아들 콘수를 위해 지어진 신전이지만 후세의 사람들은 기독교나 이슬람을 모시는 예배당으로도 사용한 것이다.

 

 

 왕가의 계곡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멤논의 거상(Colossi of Memnon)’을 찾아봤다. 그러니까 파라오들이 부활을 꿈꾸며 잠들어 있는 나일강의 서안(西岸)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유적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곳은 원래 아멘호테프 3(Amenhotep III, BC 1390~1353 재위)’의 장제전(葬祭殿, mortuary temple)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신상의 주인은 아멘호테프 3일 텐데 왜 멤논이라 불리는 것일까? 전하는 바에 따르면 기원전 27년 룩소르 지역에 지진이 일어나면서 아멘호테프 3 석상에 균열이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이 지역을 여행하던 그리스의 역사학자 스트라보(Strabo, BC 63-23)가 석상 아래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었는데, 여명이 밝아올 무렵 석상의 균열 사이에서 바람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되었단다. 그런데 스트라보에게는 이 소리가 아들 멤논을 잃은 어머니 에오스의 울음소리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석상에 멤논의 거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참고로 멤논(Memnon)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이자 에티오피아의 왕으로 군대를 이끌고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으나 아킬레스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 이 석상은 199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보수된 후 더 이상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거상은 두 팔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린 채 옥좌 위에 앉아 있다. 무릎 오른쪽에는 아멘호테프 3의 부인 테예(Teje)’, 왼쪽에는 어머니인 무템비아(Mutemwia)’가 서 있다. 하지만 맴논은 얼굴과 가슴 부분이 크게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남쪽 석상의 오른쪽에 있는 테예의 조각이 그나마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참고로 거상은 그 높이가 기단을 포함해서 18m나 된단다. 남쪽의 석상은 기단이 3.3m 좌상이 13.97m, 전체 높이가 17.27m. 북쪽의 석상은 이보다 조금 더 커 기단이 3.6m 좌상이 14.76m, 전체 높이가 18.36m.

 

 

 거상의 측면에는 신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조와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나일강의 범람을 주관하는 신 하피(Hapi)’가 상 이집트를 상징하는 연꽃과 하 이집트를 상징하는 파피루스를 하나로 묶고 있는 모습이다. 상형문자는 석상에 사용된 돌의 원산지까지 밝히고 있단다. 나일강 하류 헬리오폴리스 동쪽 아흐마르산의 채석장에서 나왔다고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돌을 분석해본 일부 학자가 아스완 서쪽 굴랍산이나 팅가르산의 규암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단다.

 

 에필로그(epilogue), ‘이집트에는 왕궁이 없다?’ 여행이 끝나갈 즈음 우연히 던져진 누군가의 화두(話頭)가 끝내는 화재로 변해버렸다. 7일 동안 이집트를 일주하다시피 했는데 왕궁은커녕 왕궁의 주춧돌도 구경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가이드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30~40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현세보다는 부활을 위주로 한 내세(來世)에 관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 유적들은 피라미드와 왕가의 계곡 등으로 대변되는 무덤과 신전, 부활을 위한 미이라로 집약할 수 있다고 한다. ! 가이드는 왕궁은 세월을 견디지 못하는 흙벽돌로 짓고, 신전은 화강암으로 올렸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룩소르(Luxor,  Thebes), 카르나크 신전(Temple of Karnak)

 

특징 : 대기와 풍요를 관장하다 나중엔 전지전능한 신으로 해석된 아몬(Amon)은 이집트의 () 중의 신이다. 고대이집트의 수도인 테베(룩소르)가 이 아몬을 주신으로 모시면서 카르나크 신전은 이집트 최대·최고 권력의 신전으로 꼽혀왔다. ‘T’자 형으로 생긴 이 거대한 성전은 기원전 2000년경 중왕국 시대부터 짓기 시작해 신왕국 제18 왕조 때 틀을 갖추었고, 앗시리아 등 외세의 침공이 있을 무렵인 20왕조까지 크고 작은 공사를 계속했다. 틀을 갖추는 데에만 400년 넘게 걸린 것이다. 현재의 신전은 10개의 탑문과 람세스 1세로부터 3대에 걸쳐 건설된 대열주실, 투트모세 1세와 그의 딸로 여왕이 된 하트셉수트가 세운 오벨리스크, 투트모세 3세의 신전과 람세스 3세의 신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높이 약 23m의 석주 134개가 늘어선 대열주실은 너비 약 100m, 안쪽 깊이 53m로 안쪽의 하트셉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와 함께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참고로 카르낙은 이집트어로 이페트 수트(Ipet sout)’. 가장 신성한 장소를 나타낸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예배소였던 것이다. 주신인 아몬을 위해 지어진 이 신전에서 왕들이 즉위했고, 아문 신과 하나가 되어야만 진정한 파라오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카르나크 신전은 룩소르 중심에서 북쪽으로 3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나일강의 동쪽이다. 이집트인들은 예로부터 나일강 동쪽은 살아 있는 사람과 신전을 위한 공간이고, 해가 저무는 강의 서쪽은 죽은 자들을 위한 영혼의 안식처로 여겼다. 그러니 아몬신이 머무를 카르나크를 강의 동쪽에 지었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관광안내소(매표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신전의 사진과 모형도가 만들어져 있다. 특히 모형도는 현재의 모습을 미니어처로 만들어놓아 이해를 쉽게 했다. 그래선지 가이드도 이곳에서 역사공부를 시켜준다. 카르나크 신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중심이 되는 가장 큰 신전이 아문(Amun) 신전이다. 그리고 아문의 아내 무트(Mut)를 위한 신전이 있고, 아문과 무트의 아들인 몬투(Montu)를 위한 신전이 있다.

 

 

 신전은 매표소를 지나서도 한참이나 더 걸어야 나왔다. 신전 앞 운동장이 그만큼 넓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집트 최고의 신전이라는 걸 은근히 자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운동장 너머로는 성벽 형태의 제1탑문이 나타난다. 여러 개의 탑문들 중 가장 늦은 30왕조의 넥타네보 1(Nectanebo I, BC 380-362 재위)’가 세운 것으로 길이가 113m, 두께가 15m, 높이가 45m에 이른다. 그동안 들렀던 다른 신전들과는 달리 부조가 새겨져 있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색적이다.

 

 

 신전의 오른편에 이슬람의 모스크처럼 생긴 건물이 있었는데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파라오 아케나텐(Akhnaton, BC 1350-1334 재위)이 아마르나(Amarna)로 천도하기 전에 세운 아텐신전(Temple of Aten)‘ 1탑문의 동쪽 어디쯤에 있었다고 했다. 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호렘헤브(Horemheb, BC 1319-1292 재위)‘에 의해 파괴되어 아몬신전의 탑문을 짓는데 사용되었다고 하더니 그 터에 후세 사람들이 뭔가를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좀 더 다가가자 작은 오벨리스크가 하나 서 있다. 이곳부터 카르나크 신전이 시작된다는 표시 같기도 하다. 이 신전은 신들의 제왕인 아몬을 숭배하기 위해 건축됐다. 가로 1.5에 세로가 0.8에 이르는 엄청나게 너른 부지에는 10개의 탑문과 2개의 안마당, 대 열주실을 포함한 여러 개의 열주실, 2개의 오벨리스크, 커다란 성스러운 연못, 그리고 여러 개의 작은 부속신전과 제실들이 있다. 또한 콘수신전, 오페트신전, 프타신전과 람세스 3세 신전, 투트모시스 3세 신전 등 여러 개의 신전을 포함한다.

 

 

 오벨리스크 뒤로 탑문까지 숫양 머리를 한 스핑크스 40마리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이들은 신전을 지키는 위병으로 파라오와 신들을 지키고 보호해준다. 신전이 만들어진 신왕국 시대 이 길은 나일강 부두까지 이어졌다. 당시는 100개가 넘는 스핑크스가 있었다고 한다.

 

 

 스핑크스는 턱 아래 두 발 사이로 파라오를 상징하는 오시리스 상을 품고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양을 아몬신의 상징으로 여기니 저 형상은 아몬신이 파라오를 보호하고 있다는 의미이지 싶다.

 

 

 1탑문의 뒤편에서 이 탑문이 지닌 비밀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겉면이 떨어져 나가면서 속에 있던 벽돌이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걸 보고 우리는 벽돌을 쌓아 탑문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탑문을 지나면 신왕국 22왕조 때 증축된 널따란 안마당이 나타난다. 이곳에도 가장자리에 스핑크스가 도열해 있고, 좌우로 두 개의 소신전이 자리하고 있다. 마당 왼쪽으로 나가면 야외박물관이라 불리는 지역이라는데 가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른 이의 글로 그 풍경을 설명해 본다. <‘하얀 제실(White chapel)’과 같은 몇 개의 유적이 있는데, ‘세소스트리스 1(Sesostris I)’의 하얀 제실에서는 걸작으로 꼽히는 아름다운 상형문자를 볼 수 있다. 하트셉수트여왕의 붉은 제실은 석영암으로 지어진 외관에서 따온 이름이다.>

 

 

 

 마당 중앙에는 잘 생긴 기둥 하나가 서있다. 25왕조의 4번째 파라오 타하르카(Taharqa, BC 690-664 재위)’가 세운 키오스크(kiosk)’를 지탱하던 기둥이란다. 원래는 10개의 기둥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원형정자였다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기둥 하나만 외롭게 남아있다.

 

 

 

 안마당의 왼쪽(북쪽)에는 세티 2(Seti II, BC 1204-1198 재위)’의 신전이 있다. 카르나크신전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부속 건물로 졸속복원의 상징인 시멘트 땜질이 많이 되어있으나 정교한 부조들이 아직까지 훼손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안에는 테베의 세 신()인 아몬(Amon)과 무트(Mut, 아몬의 아내로 하늘의 여신), 콘수(Khonsu, 아몬의 아들로 달의 신)를 위한 예배당(chaple)이 있는데, 오페트축제(Opet festival, 카르낙 신전의 세 신을 룩소르 신전으로 옮기는 의식) 때 이들 신이 사용할 배를 보관하던 중요한 장소였다고 한다.

 

 

 오른편에는 람세스 3(Ramses III, BC 1190-1187 재위)‘ 아몬(Amon)‘에게 바친 신전이 있다. 그래선지 신전 입구의 현관 앞에는 람세스 3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오른쪽의 것은 얼굴이 많이 훼손되었다. ! 누군가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 세워진 오벨리스크가 이곳 람세스 신전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19세기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이룬 마하마드 알리가 프랑스왕 루이 필립에게 건넨 선물이었단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개념을 상실한 통치자였던 게 분명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훼손된 부분이 많은 오시리스 석상(石柱를 겸한다)이 안마당 좌우로 나란히 서 있다. 석주를 지나면 신전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일부러 들어가 볼 필요는 없겠다. 신전 내부에 특별한 것이 없고 지성소도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 ’람세스 3세 신전의 뒤편에 역시 람세스3세가 세운 콘수신전(Temple of Khonsu)‘이 있다는데 찾아보지는 않았다. 스핑크스가 있는 참배로와 탑문, 기둥이 있는 안마당, 열주실, 지성소 등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신전 내부로 들어가려는데 입구에 검은 화강석으로 된 발 부분이 보인다. ‘람세스 3라는데 윗부분은 파괴되고 발목만 남았나 보다. 발목만 보고 그 주인을 알아보는 게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기단부 측면에 새겨진 카르투시(cartouche) 상형문자를 통해 알 수 있단다. 이 문자는 람세스 3세의 즉위명(Thronname)으로 우세르-마트--메리-아문(User-maat-Ra-meri-Amun)이라 읽는다.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아문의 사랑을 받는 라의 진실은 강하다'가 된다. 카르나크신전을 아문-라 신전이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젠 제2탑문 앞으로 간다. 신왕국 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호렘헤브(Horemheb, BC 1319-1292 재위)’ 때 착공하여 19왕조의 람세스 2 때 완공되었단다. 탑문 입구에 거대한 석상 둘이 마주보고 서있는데, 탑문을 완성시킨 람세스 2(Ramses II)’. 왼쪽의 것은 제21 왕조 때 아몬신의 신관이었던 피네젬(Pinedjem)’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기 때문에 피네젬의 거상이라고도 한다.

 

 

 한쪽 석상의 발쪽에는 람세스 2세의 왕비 네페르타리(Nefertari)’가 부조(浮彫)되어 있다. 네페르타리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왕비로 알려져 있다.

 

 

 탑문의 벽에는 람세스 2세가 카데시 전투(Battle of Kadesh)’에서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탑문 안으로 들어가면 가운데 길 양쪽으로 굵은 기둥이 이어지고 그 뒤로 기둥이 질서정연하게 열을 서 있다. 이곳이 그 유명한 대열주실(大列柱室)이다. 대열주실은 가로 102m에 세로 53m, 전체 면적이 5,500쯤 된다. 이곳에는 16줄에 모두 134개의 파피루스 모양 기둥들이 마치 숲처럼 늘어서 있다. 기둥의 높이는 23m이고 기둥의 둘레는 10m나 된다. 이들 기둥에는 신과 파라오와 관련된 수많은 부조들이 새겨져 있다. 특히 중앙부의 거대한 원형 열주에는 정교한 파피루스 꽃 모양과 아문을 숭배하는 왕의 치적이 새겨져 있다.

 

 

 기둥 반 공간 반으로 빼곡히 줄지어 선 대열주실의 위용은 대단하다. 그러다보니 누구든 열주 사이에 서면 인생샷이다. 인생샷을 건지느라 시간을 잊고 있는 커플들도 보인다. 열주들이 주는 위압감은 동반자와 함께 열주 사이를 숨바꼭질 하면서 푼다. 이때 열주는 만지는 피라미드처럼 숨겨주는 친근한 존재가 된다.

 

 

 중앙기둥 12개는 아멘호테프 3(Amenhotep , BC 1390-1353 재위)’가 그리고 나머지 기둥들은 세티 1(Seti I, BC 1290-79 재위)’ 람세스 2에 의해 만들어졌다. 가운데 2열로 6개씩 서있는 아멘호테프 3세의 기둥이 다른 것들에 비해 큰데 높이는 20m가 넘고, 활짝 핀 파리루스 꽃 모양의 기둥머리는 둘레가 15m나 된다고 한다. 기둥에는 투트모세 3(Thutmose III, BC 1479-1426 재위)’의 연대기나 왕명표 등 중요한 역사적 자료와 파라오가 신에게 예물을 봉헌하는 모습, 성스러운 배, 신전에서의 생활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

 

 

 

 기둥 위에는 창문도 만들어져 있었다.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만든 창문일 것이다. 지금은 비록 파괴되고 없지만 원래 대신전은 지붕이 덮여 있었다니 말이다. 아무튼 돌을 깎아 창살을 만들었다니 대단히 정교한 솜씨였던 건 분명하다.

 

 

 이들 기둥의 위에 있던 지붕은 대부분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천정 일부에 채색한 그림과 카르투시(cartouche)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림에 표현된 동식물 그리고 자연이 어찌나 사실적이고 선명한지 살아서 튀어나올 것 같다.

 

 

 옛날에 파피루스에 기록했듯이 각각의 파피루스 모양의 기둥에는 여러 가지 부조들로 가득하다. 기둥을 세운 파라오의 업적을 새겨둔 것으로 대부분은 적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두 개로 갈라진 긴 모자를 쓰고 있는 아문 신에게 포도주를 바치는 왕들의 모습부터, 여러 신들의 손에 이끌려가고 있는 왕들의 모습도 눈여겨 볼만하다.

 

 

 

 열주들 사이에 숨어있는 석상이 눈에 띈다. 뭔가 내력이 있을 것 같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는데 알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아멘호테프 3세가 지은 세 번째 탑문을 지나면 두 개의 오벨리스크가 보인다. ‘투트모세 1(Thutmose I)’ 하트셉수트(Hatshepsut)‘가 세운 오벨리스크인데, 하트셉수트의 것은 사실 4탑문 너머에 있다.

 

 

 3탑문과 4탑문 사이 마당에는 투트모세 1(Thutmose I, BC 1493-1482 재위)’ 투트모세 3가 세운 오벨리스크 4개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투트모세 1가 세운 22m 높이 오벨리스크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흔적만 남아있다. 투트모스 1세는 하트셉수트의 아버지로 기원전 1500년경 13년 정도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는 카르나크 신전의 대열주실 일부와 제4, 5 탑문 그리고 두 개의 오벨리스크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3탑문과 4탑문 사이에서 무트신전 방향인 오른쪽으로 꺾으면 7~10탑문으로 가게 된다.

 

 

 4 탑문은 신왕국 18왕조의 투트모세 1가 세운 문으로 하트셉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가 서있는 투트모세 3세의 열주실로 연결된다.

 

 

 4탑문과 5탑문 사이에는 14개의 기둥이 있는 투트모세 3의 열주실이 있다. 가운데에는 하트셉수트 여왕이 세웠다는 오벨리스크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높이 30m에 무게가 430톤으로 현존하는 오벨리스크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한다. 그녀도 한 쌍의 오벨리스크를 세웠는데 하나는 부서져 인근 성스러운 호수 옆에 전시돼 있다. 그러니까 카르나크 신전에 세워진 6개의 오벨리스크 중 2개만 온전히 남아있는 셈이다. 그나저나 표면에는 여왕이 자신의 아버지인 투트모세 1를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과 자신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단다. 또한 오벨리스크의 제작과정과 관련해 채석에서 완성까지 약 7개월이 걸렸으며 나일강물이 불었을 때 배로 실어오기로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과 함께 훗날 사람들이 이곳을 보고 어떻게 세웠을까 불가사의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내용까지 적어놓았단다.

 

 

 4탑문 안으로 들어서면 투탕카멘(Tutankhamen, BC 1333-1323 재위)의 모습을 한 아몬 신과 그의 아내 아모네트(Amonet)의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탐방을 하다보면 꽤 많은 석상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안내판이 세워진 곳은 없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왕명표라는 누군가의 말에 홀려 카메라에 담아봤다. 글자들 밖에 동그라미를 그려 놓은 것은 왕의 이름이라는 것. 그 위에 벌이 있으면 왕의 직위명이라는 등 그의 설명을 들었지만 내 눈에는 그게 그거로 보일 따름이다. 그저 옛날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를 알고 있는 일행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훼손이 심해 사진 촬영을 하진 않았지만 5탑문과 곧이어 나오는 6탑문은 투트모세 1 투트모세 3가 세웠다. 6탑문을 지나면 지성소로 이어진다. 지성소 주변의 유적들도 훼손이 심해 사방으로 흩어진 상태다. 양 옆으로 두 개의 홀을 가진 지성소는 성스러운 배를 위한 장소인 아몬신의 지성소이다. 이곳에 모시던 신상은 새해 첫날 오페트 축제가 열릴 때면 남쪽으로 3 떨어진 람세스 신전으로 3주간 옮겨져 있다 돌아왔다고 한다.

 

 

 지성소에는 가운데 제단 같은 것만 있고 휑한 편이다. 하지만 벽면에는 수많은 신들의 부조가 있고, 천장에는 천신 누트(Nut)를 상징하는 별들이 그려져 있다. 이집트 사람들은 천신 누트와 지신 겝(Geb)이 결혼해 네 자식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다. 그리고 오시리스의 아들이 호루스고, 호루스의 부인이 하토르다. 하늘에는 누트 외에 태양신 아몬과 라가 있다. 아몬은 무트와 결혼해 아들 콘수(Khonsu)와 몬투를 낳았다. 그러므로 무트는 천국의 왕비이자 모든 신들의 어머니로 추앙받기도 한다. 그리고 아문과 라는 기원전 21세기 무렵부터 몬투를 대신해서 테베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신왕국 시대 아문과 라는 오시리스와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신이 되었다. 그래서 카르나크 신전도 아문과 라에게 바쳐진 것이다.

 

 

 더 안으로 들어가면 세소스트리스 1(Sesostris I, BC 1918-1875 재위)’의 신전 터, 혹은 중왕국 시대의 마당이라고 불리는 장소가 나온다.

 

 

 중왕국의 안뜰을 사이에 두고 지성소와 마주보고 있는 건물이 아크메누(Akh-Menou)’라는 곳이다. ‘기념물들의 빛이라는 의미라는데 용도는 역대 파라오들이 종교의식을 행하던 곳이란다. ‘투트모세 3세의 축제전이라고도 부르는데, 홀 가운데쯤에는 식물원이라 불리는 곳도 있다. 벽에는 투트모세 3세가 군사 원정길에 보았을법한 이국적인 동식물을 표현한 섬세한 부조가 새겨져 있단다. 축제전 벽 너머에는 투트모세 3세의 신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다. 그나저나 이곳은 관람이 가능한 마지막 장소다. 이젠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야 한다는 얘기이다.

 

 

 

 아크메누를 끝으로 되돌아 나오다가 성스러운 호수로 향했다. 아래 사진은 호수에 이르러 뒤돌아본 풍경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하트셉수트 오벨리스크에서 빠져나왔는데 왼편에 투트모세 1가 세웠다는 7탑문이 보인다. 7탑문 전의 안마당은 은신처, 또는 은닉처를 뜻하는 ‘cachette’로 불린다. 1902-1904년 프랑스 고고학자 ‘Feorge Legrain이 이끄는 발굴팀이 이곳에서 숨겨진 신왕조의 석상들을 많이 발견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 유물들은 현재 룩소르박물관에 보관중이란다. 안마당의 벽에는 히타이트를 물리치고 평화조약을 체결한 람세스 2세와 해양족과 리비아를 물리친 메렌프타의 부조가 있다.  7탑문에 이어 8탑문과 9탑문을 지나면 10탑문으로 연결된다.

 

 

 카르나크 신전의 동서축과 남북측이 만나는 지점의 동남쪽 방향에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연못이 신성호수(Sacred Lake)‘이다. 현재의 연못은 후세에 복원해 놓은 것으로 길이 200m에 너비 117m의 규모이다. 이집트 왕국 시절 사제들은 직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이 호수에서 심신을 정화시켰는데 호수의 물은 태초의 물을 상징하는 신인 (Nun)', 즉 바다로부터 가져왔단다. 참고로 호수 동쪽에 만들어진 관람석에서는 빛과 소리의 쇼를 볼 수 있다.

 

 

 아까 얘기하던 하트셉수트 여왕이 세운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 그러니까 쓰러졌다는 오벨리스크는 아직도 넘어진 채 성스러운 호수로 가는 길에 전시되어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투트모세 3세가 부셔버렸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오벨리스크의 상단 삼각뿔 부분에 보면, 하쳅수트가 아문 신으로부터 파라오의 자격을 인정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위 카르투시에는 그녀의 즉위명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마트--(Maat-ka-Ra)라고 읽으며, '라의 정의와 생명력'이라는 뜻을 지닌다. 여성으로 남성이 하는 파라오를 했던 여걸 하트셉수트, 그녀는 정치와 건축에서 남성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통치이념에서도 정의와 생명력을 강조했고, 아문-라신의 사랑을 받았던 최초의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성스러운 호수 부근에는 쓰러진 오벨리스크 말고도 스카라브(scarab, 쇠똥구리)’ 석상이 있다. 이집트에서는 태양과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 장식으로 많이 쓰이는데 이 주위를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이 조각상을 시계가 도는 반대방향으로 1번 돌면 행운을, 3번 돌면 결혼을, 5번 돌면 아들을 얻는다는 것이다.

 

 

 근처의 벽에서는 상형문자로 표시한 숫자도 찾아볼 볼 수 있다. |, , ϱ의 세 가지 숫자가 보인다. 이게 우리의 1, 10, 100이란다. 이집트인들은 이와 같은 정수뿐 아니라 분수와 제곱근() 개념까지 사용했다고 하니, 그들의 사고력이 현대인에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에필로그(epilogue), 카르나크 신전의 주신전인 아몬신전을 관람하는 것이 메인 루트라면 그 왼쪽(북쪽)으로는 몬투(Montu)신전, 그리고 오른편(남쪽)에는 무트(Mut)신전이 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부족해 둘러보는 것은 생략하기로 했다. 아니 볼 것이 없다는 귀띔 때문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대신 그의 귀띔을 글로 옮겨본다. 무트신전(Temple of Mut)은 아몬신의 아내인 무트를 위해 아멘호테프 3세가 세운 신전으로 아몬신전의 10탑문과 연결된다. 신전에는 탑문, 안마당, 열주실 등이 있고 700개의 석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흔적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몬투신전(Temple of Montu)’은 테베의 토착신이자 아몬과 무트여신의 아들인 무트를 위한 신전이다. 매의 형상을 한 전쟁의 신 멘투를 위해 역시 아멘호테프 3세가 세웠는데 현재는 문 정도만 남아있다. 가는 길에는 프타신전이 있다.

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룩소르(Luxor,  Thebes), 왕가의 계곡(vally of the king)

 

특징 : ()이집트에서 고왕국의 거점을 마련했던 왕들이 자신들의 안식처로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거대 피라미드를 지었다면, 중왕국 말기와 신왕국 시대의 왕들은 새로운 도읍지 테베(룩소르) 서쪽 왕가의 계곡에 지하 동굴 무덤을 만들었다. 태양 가까이 닿으려 지상에 지었더니 사후 부활해 쓸 부장품들을 도굴당하기 일쑤이기에 무덤 같지 않은 야산의 지하를 묘지로 선택한 것이다. 그 야산이 바로 다이르 알바흐리(Deir el-Bahri)’ 계곡인데, 조금 전에 들렀던 하트셉수트 장제전 말고도 이곳에는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는 투트모세 3, 투탕카멘, 람세스 왕가 등의 능() 64기나 들어서 있다. 이곳이 낙점된 이유는 산꼭대기가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고,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비밀스런 장소였기 때문이란다.

 

 하트셉수트 장제전을 출발한지 10분 만에 왕가의 계곡에 도착했다. 이곳도 역시 보안검색을 거쳐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초리는 카메라에 집중하는 눈치다. 오직 핸드폰 촬영만 가능하단다. 그래선지 덩치 큰 카메라는 보안검색 과정에서 걸러져 보관소에 맡겨지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입장권(EGP 200/  14,000)을 구입하면 현재 관람을 허락하고 있는 여러 무덤 가운데 세 개를 골라서 들어가 볼 수 있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검표원이 입장권에 구멍을 뚫어주므로 얼렁뚱땅 하나 더 보려는 생각은 애초부터 버려야 한다.

 

 

 

 

 매표소에서 계곡 입구까지는 제법 멀다. 아까 들렀던 하트셉수트 장제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니 걸어가겠다는 섣부른 생각은 일찌감치 떨쳐버리자. 마침 두 지점을 오가는 교통편이 셔틀 트레인(Shuttle train)’이라서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다.

 

 

 셔틀에서 내린 후에도 한참을 더 걸어야만 무덤에 이를 수 있다. 계곡으로 들어가다 보면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메마른 바위 골짜기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런데 그 끄트머리에 들어앉은 바위산의 생김새가 조금 묘하다. 피라미드를 쏙 빼다 닮은 것이다. ! 그러고 보니 왕실의 묘역이 이곳에 들어선 이유를 저 모양새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잦은 도굴로 인해 피라미드를 버리고 지하로 숨어들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조금 더 올라가니 쉼터가 나온다. 차와 탄산음료를 팔고 있어 휴게소의 기능을 겸한다. 또한 이곳에는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 안내도가 세워져 있어 가이드들의 해설지역이기도 하다. 현재 개방 중인 무덤들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은 다음 자유 시간을 주는 것이다. 가이드가 나눠준 입장으로는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아홉 기()의 무덤들 가운데 세 곳을 둘러볼 수 있는데, 누구의 무덤을 찾아볼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은 람세스 3(Ramses III, BC 1186-1155 재위)’의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인 람세스 3는 제20왕조를 세운 세트나크트(Sethnakth, BC 1190-1187 재위)’ 왕의 아들로 이집트에서 큰 권력을 휘둘렀던 마지막 왕으로 여겨진다. 람세스 3세가 등극할 당시 이집트는 해상민족과 리비아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잘 막아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이집트 사회를 직업에 따라 계급화 했으며 테베 서쪽 마디나트 하부에 자신의 거대한 장제전, 궁전, 복합도시 등을 세웠다. 무역과 산업을 권장하여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해안지방 푼트에 해양 무역선을 보냈고 시나이의 구리 광산과 이집트 남쪽 지방에 있는 누비아의 금광을 개발했다. 람세스는 재위 32년 테베에서 죽었고 왕자 람세스 4세가 왕위를 이었다. 그렇게나 큰 권력을 가진 그였지만 궁중의 음모로 인해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르니 무덤에 대한 개략적인 구조와 설명을 적어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무덤의 주인인 ‘Ramses III’ 앞에 적힌 ‘KV 11’이라는 숫자가 눈길을 끈다. 왕들의 계곡에서 열한 번째로 발굴된 무덤이라는 것을 나타낸단다.

 

 

 탐방은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진 계단으로부터 시작된다. 무덤으로 연결되는 이 연도(羨道)는 길다. 미라와 관이 있는 현실(玄室)은 계단-복도--복도-전실로 이어지는 연도를 지나야만 다다를 수 있다. 그가 가졌던 큰 권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길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람세스 3세가 가진 다섯 가지 이름을 보면, 강하고 위대하고 부유하다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그가 통치기간 동안 많은 일들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지중해 동부 지역 민족과의 갈등을 해결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신전을 짓고 산업을 일으키는 등 부국강병을 위해 애썼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여러 신의 형상을 볼 수 있다. 하토르(Hathor), (Ra), 케프리(Khepri, 태양신), 이시스(Isis), 네프티스(Nephthys), 마트(Maat, 법과 정의의 여신)와 같은 여신들이 주를 이룬다. 첫 번째 복도에서는 매의 형상을 한 -하라크티(Ra-Harakhty)’가 길손을 맞고, 두 번째 복도에서는 제물을 바치고 음악을 연주하는 인간과 신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세 번째 복도는 배를 타고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신과 파라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매의 형상을 한 호루스, 악어 형상을 한 소베크(Sobek)가 배를 이끌고 위에서는 뱀이 이들을 지켜준다.

 

 

 

 

 

 

 이들을 지나 네 개의 석주가 있는 방에 이르면, 람세스 3세가 오시리스에게 제물을 바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곳은 태양신 케프리, , 아툼(Atum)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다음에 나오는 복도와 전실에도 농경과 천체의 운행 등을 담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인간이 하는 일들을 신들도 똑 같이 하는 모양이다. 이들을 지나면 드디어 현실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는 원래 람세스 3세의 미라를 담았던 석관이 있었다지만 현재는 텅 비어 있다. 미라는 이집트 박물관에 석관은 루브르 박물관에 가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둘러본 곳은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네 번째 파라오인 메렌프타(Merenptah)’의 무덤이다. 메렌프타는 역대 최고의 파라오로 꼽히는 람세스 2(Ramses II)’의 열세 번째 아들로 BC 1213~1203년 이집트를 통치했다.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도 역시 위대한 군주였다고 한다. 팔레스티나의 이스라엘인을 정복했는가 하면 리비아인의 반군(叛軍)을 격파하여 왕의 일족을 포로로 잡았으며, 지중해 연안 여러 민족이 나일강 하구 부근에 침입해온 것을 격퇴시켰단다. ‘이스라엘은 황량하여지고 그 종자는 없어졌다라고 쓰인 그의 전승비(戰勝碑)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지명이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났다니 이 또한 기억해 두자.

 

 

 메렌프타의 무덤 앞에도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에는 여덟 번째로 발굴되었다는 표시인 ‘KV 8’이 선명하다. 무덤의 주인인 메렌프티는 환갑에 즉위하여 10년간 나라를 통치했다. 아부심벨신전, 카르낙신전, 룩소르신전 등 가장 많은 유적을 남긴 람세르 2가 무려 67년간이나 재위하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하도 오래 살다보니 그보다 서열이 빨랐던 열두 명의 형들이 모두 죽고 없어 열세 번째 아들인 메렌프타가 왕이 되었단다.

 

 

 무덤으로 가기 위해서는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데 무덤 입구에서 뒤를 돌아보면 왕가의 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계곡을 감싸고 있는 산은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 자리지 않는 민둥산이다. 동양의 왕릉은 대개 자연친화적으로 나무가 있고 봉분(封墳)이 있는데 반해 이집트의 왕릉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이곳도 역시 아래로 길게 내려서야 무덤의 내부에 이를 수 있다. 그 길이가 160m에 이르는데 통로에는 전체적으로 태양신 라의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다. 무덤 속은 화려했다. 비스듬한 경사를 따라 길게 뻗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면 벽과 천장이 온통 파라오와 왕비, 전쟁, 승리, 동물 부조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돼 있다.

 

 

 

 

 

 

 신전의 종점이 지성소라면, 지하왕릉의 종점은 현실(玄室)이다. 메렌프타 묘의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석관 두 개가 모두이다. 일찌감치 도굴 당한 탓에 발굴 당시에도 이런 상태였다고 한다. 하긴 부장품들이 남았다고 해봤자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몇몇 무덤은 도굴 방지를 위해 현실에서 무덤이 끝나는 양 처리하고는 지하 깊은 곳에 암굴을 두기도 했단다. 하지만 도굴을 피하지는 못했다. 19세기 영국인 탐험가 조반니 베르지오니가 람세스1, 세티1세의 무덤을 발견한 이후 숱한 발굴이 이어졌지만, 투탕카멘의 묘를 제외하고는 모두 보물찾기에 실패했다.

 

 

 저 관의 주인인 메렌프타는 제19왕조의 네 번째 파라오이다. 이곳 왕가의 계곡은 메렌프타가 속한 ‘19왕조뿐만 아니라 신왕국시대(BC 1550~1073)의 다른 왕조들도 묘를 썼다. 외세 힉소스를 몰아내고 이집트 영토를 최대로 넓힌 18왕조(투트모세 왕가, 투탕카멘 등), 람세스·세티·아멘모세·타우세레트 등 왕가가 경쟁하던 19왕조, 람세스 왕가의 독점시대였던 20왕조의 임금과 왕실 가족의 묘 64기가 이곳에서 발견됐다. 이 가운데 아홉 기()만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단다.

 

 

 

 

 

 마지막 하나는 람세스 4(Ramses IV, BC 1156-1150 재위)’의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인 람세스 4는 국내외 상황이 어렵던 시기 거대한 건축 공사를 벌이는 등 이집트의 영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파라오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그의 아버지가 신에게 바친 선물, 아들에 대한 축복, 아버지의 통치에 대한 연구 등을 적은 긴 기록인 해리스 파피루스(Harris Papyrus)’를 펴냈다. 또한 테베 서부의 다이르알바리에 2개의 커다란 신전을 짓기 시작했으며 아몬 신의 신전 단지인 카르나크에 자신의 아버지가 지어놓은 작은 신전들을 장식하는 일도 계속했다. 또한 아버지가 테베 서부에 지어놓은 커다란 건축물 근처에 자신의 조그마한 장제전을 지었고 이집트 곳곳에 명문을 남겼다. 하지만 즉위할 무렵 이미 중년의 나이였던 탓에 벌여놓은 사업들을 대부분 끝내지 못한 채 즉위 6년 만에 죽었고 그의 아들로 생각되는 람세스 5세가 왕위를 이었다.

 

 

 이곳의 안내판은 ‘KV 2’라고 적고 있다. 왕가의 계곡은 현재까지 모두 64()의 파라오 무덤이 발굴되었다. 이들 무덤을 찾아내 체계적인 이름을 붙인 사람은 존 가드너 윌킨슨(John Gardner Wilkinson)’이라고 한다. 그는 총 21개의 무덤을 발견했고, 왕가의 계곡(Kings' Valley)을 뜻하는 ‘KV’ 다음에 발견 순서대로 번호를 붙였다. 이때 처음 발견된 것이 람세스 7세의 무덤으로 ‘KV 1’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맨 마지막 번호는 ‘KV 64’, 현재도 레이더 탐사를 통해 65번째 무덤 발굴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단다.

 

 

 이곳도 역시 아래로 내려가면서 탐방이 시작된다. 하긴 왕가의 계곡 무덤들이 대부분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계단과 경사로, 부속실(사적인 생활용품들을 넣어둔 방), 전실(종교 의식 등에 사용되는 도구를 넣어둔 방), 현실(관을 넣어둔 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제18~19왕조 때는 도굴방지를 위해 '샤프트'라 불리는 깊은 수직갱(수직으로 떨어지는 깊은 갱)까지 만들었다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통로는 흰색 회반죽위에 부조와 채색이 되어 있는데, 석고처럼 부드러운 것이 아니고 표면이 사포처럼 오톨도톨하다. 또한 배경자체가 흰색인데다 조명까지 비추다보니 무덤 특유의 칙칙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람세스 4의 무덤 현실에도 석관 이외의 부장품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발굴 당시에 이미 도굴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파라오의 무덤은 매장 후부터 도굴되는 수난을 당했다. 무덤 작업에 참여한 장인들에 의해 처음 도굴이 이루어졌고, 그 후에도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도굴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집트의 역사는 도굴의 역사기도 하다. 고왕조에 지어진 피라미드가 도굴꾼의 표적으로 전락한데다 파라오조차 선조 무덤을 털었다니 남아도는 것이 없었다. 이에 따라 12왕조부터는 피라미드를 거의 짓지 않게 됐다. 그래도 파라오에게는 사후세계의 보금자리가 필요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결국 피라미드를 대체할 왕가의 계곡이 룩소르에 조성된다. 18왕조 아멘호테프 1(Amenhotep I, BC 1514-1493 재위)가 아이디어를 내고, 그 뒤를 이은 투트모세 1(Thutmose I, BC 1493-1483 재위)가 실행에 옮겼다.

 

 

 

 

 

 이 무덤 역시 일찍이 훼손되어 부장품이나 유물은 없다. 그렇다고 문화재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도굴당한 것보다도 더 가치 있는 보물들이 오히려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벽화와 부조이다. 특히 벽화는 채색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고대 테베와 네크로폴리스(Ancient Thebes with its Necropolis)’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유일 것이다.

 

 

 

 다섯 번째로 발굴되었다는 ‘KV5’, ‘람세스 2세의 가족(Sons of Rameses )’ 묘역은 문이 닫혀있었다. 무덤의 개략도를 보면 48개의 방이 만들어져 있다. 그만큼 직계가족이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람세스 2 52명의 아들을 포함해 100여명의 직계비속을 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에필로그(epilogue), ‘파라오의 저주라는 오싹한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도굴당하지 않고 완벽한 상태로 발견된 투탕카멘 무덤의 발굴에 참여했던 카나번 경이 모기에 물려 죽으면서 시작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가 죽은 뒤 2~3년 내에 투탕카멘의 발굴에 참여했거나 그 무덤을 구경한 사람들 20여 명이 사고나 병으로 줄줄이 죽어나간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파라오가 자신의 무덤을 파헤친 자들에게 저주를 내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때마침 무덤 입구의 관 위에 왕을 방해하는 자에게 죽음의 날개가 펼쳐지리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고 전해지면서 이 이야기는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나중에 근거 없는 얘기라는 게 밝혀지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도 파라오의 저주는 사라지지 않은 채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린다. 그건 그렇고 다이르 알바흐리 계곡을 방문했으면서도 투탕카멘의 묘 왕비의 계곡은 둘러보지 못했다.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박물관으로 유물들은 모두 옮겨버린 투탕카멘의 묘는 몰라도 왕비의 계곡을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왕비의 계곡에는 제19·20대 왕조(BC 1292~1075)에 속하는 여왕들과 몇 명의 왕자·공주들이 묻혀 있다. 그중에서도 람세스 2의 왕비인 네페르타리(Nefertari, BC 1301-1255)’의 무덤은 특히 유명하다. 벽화의 원래 색상이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남아있단다. 하지만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다는 가이드의 말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예술에 문외한인 나에게 눈요기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입장료인 180유로(EUR)가 어디 작은 돈인가.

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에드푸 신전(Temple of Edfu)

 

특징 : 나일강 서안에 자리한 에드푸는 룩소르와 아스완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이곳에 이집트 최고의 신 가운데 하나인 호루스에게 봉헌된 신전이 지어져 있다. ‘호루스 신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신전은 기원전 237프톨레마이오스 3(Ptolemy )’가 착공한 후 역대의 여러 왕을 거쳐 프톨레마이오스 12(Ptolemy ⅩⅡ)’ 때인 기원전 57년에 현재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하지만 로마의 지배시설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신전은 버려지게 된다. 그 이후 오랫동안 모래 속에 묻혀 있다가 20세기 초 프랑스 고고학회가 발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전은 탑문과 주벽 등의 구조는 물론, 부조 등의 장식이 온전한 형태로 발굴됨으로써 주신(主神)인 호루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지를 창조한 태양신 라(Ra)는 공기의 신 슈(Shu)와 그의 아내 이슬의 신인 테프누트(Tefnut)를 만들었고, 2대인 게브(Geb, 대지의 남신)와 누트(Nut, 하늘의 여신) 부부를 거쳐 호루스의 아버지인 오시리스(Osiris)가 나온다. 오시리시는 아우인 세트(Seth)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데, 호루스가 장성한 뒤에 자기 아버지를 죽인 세트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에드푸 신전은 크루즈 선착장에서 5쯤 떨어져 있다. 그래서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보통이다. 그렇다고 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집트 여행의 또 다른 매력이라는 마차 투어를 즐겨보기 위해서라고 보면 되겠다. 우리 일행은 마차 하나에 두 명씩 탔다. 하지만 그게 정원은 아니었는지 네 명이서 하나를 타고 가는 외국인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여명(黎明) 속의 에드푸. 하루의 일상이 시작되고 있는 시가지를 통과하자 에드푸 신전의 앞에 만들어놓은 주차장에 이른다. 선착장을 출발한지 15분 만이다. 그렇다고 곧바로 신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에드푸신전이 보이지만 기념품 상가를 지나야 하는 등 500m쯤 더 걸어야만 신전에 이를 수 있다.

 

 

조금 더 들어가니 그레코로만 양식으로 지어진 신전이 나타난다. 하토르(Hathor)에게 헌정되었다는 마미시(Mammisi) 신전이다. 마미시는 콥트어로 탄생지 또는 생가라는 뜻이다. 신전이 그와 같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곳에서 하토르와 호루스 사이의 아들 하르솜투스(Harsomtus)’가 태어났기 때문이란다. 이 신전은 프톨레마이오스 9(Ptolemy ) 때 세워졌다. 당시만 해도 하토르를 위한 독자적인 신전이었다지만 지금은 호루스 신전의 부속 신전 같은 느낌이 강하다.

 

 

 

마미시 신전을 지나 동북쪽으로 60m쯤 가면 에드푸 신전의 입구에 이르게 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폭이 79m라는 커다란 마당이다. 마당 건너에는 보존상태가 썩 좋아 보이는 신전이 있다. 규모도 엊그제 들렀던 콤옴보 신전이나 필레 신전보다 훨씬 더 크다. 참고로 저 신전은 호루스(Horus)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이 지역이 호루스가 삼촌 세트와 전쟁을 벌였던 곳이라고 해서 이곳에 터를 잡았단다. 호루스는 이곳에서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삼촌을 제압한 뒤 명실상부한 인간계 통치구조의 직접적 관장신이 된다.

 

 

신전은 동서 길이 79m에 남북 길이가 137m인 남북방향의 신전이다. 신왕국의 람세스 시대에 세운 동서방향의 작은 신전이 있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ios, BC 305-BC 30)’가 이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현재의 신전을 새롭게 지었단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Theodosius I)’ 때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이 신전은 버려지게 된다. 또 기독교도에 의해 조각과 그림의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다. 더욱이 나일강이 범람하면서 모래가 12m 높이까지 뒤덮게 되었는가 하면 에드푸 지역 주민들이 신전 가까이 집을 짓고 살면서 신전으로서의 의미가 완전히 퇴색해버렸다. 이런 호루스 신전이 다시 세상이 알려진 건 1798년 프랑스 탐험대에 의해서였다. 1860년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인 오귀스트 마리에트(Auguste Mariette)’에 의해 신전 복원작업이 시작되었고, 2005~2006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탑문의 부조를 살펴보자. 36m 높이의 탑문 입구 좌우에는 모두 6개의 큰 부조가 새겨져 있다. 적을 무찌르는 파라오와 호루스(Horus), 그리고 호루스의 어머니 이시스(Isis)이다. 호루스 신화의 주요 장면을 재현해 놓았지 않나 싶다. 탑문 상부에도 양쪽으로 각각 21개의 부조가 두 줄로 새겨져 있다. 모두 이집트의 신과 파라오라고 한다. 또 하나, 탑문의 바로 위쪽에는 태양신 라(Ra)를 상징하는 원반을 성스러운 뱀 우라에우스(Uraeus, 고개를 쳐든 뱀의 머리로 왕권을 상징)가 보호하고 있는 장식이 붙어있다.

 

 

탑문 입구로 가면 좌우에 두 개의 매 형상 조각상을 볼 수 있다. 호루스는 종종 매의 머리를 한 인간, 매의 머리를 한 동물, 혹은 매 그 자체로 묘사된다. 이 조각상에서도 호루스는 이곳이 자신의 신전임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위풍당당한 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참고로 석상의 다리 사이에 부조된 인물은 파라오(pharaoh)’라고 한다. 자신을 호루스가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지 않나 싶다.

 

 

오른편의 석상은 파라오를 상징하는 이중관까지 쓰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주둥이가 떨어져 나갔다.

 

 

탑문 앞에서 돌아본 풍경이다. 널찍한 마당에는 꽤 많은 의자들이 고정 시설처럼 놓여있다. 이곳에서도 빛의 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탑문 안으로 들어가면 안마당(中庭)이 나온다. 동서 길이 42.6m에 남북 길이가 49m에 이른다니 안마당치고는 상당히 넓다 하겠다. 맞다. 고대 이집트 신전 가운데 카르나크(Karnak)’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고 한다. 보존상태 또한 뛰어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열주실을 전면에 둔 안마당은 삼면(··)에 모두 32개의 대열주 회랑(回廊)이 있다.

 

 

회랑의 열주는 코린트 양식(Corinth style)’을 띄고 있다. 주두(柱頭)에 아칸서스 잎을 이 단으로 두르는 게 코린트양식의 특징이니 말이다. 맞다. ‘에드푸 신전은 그리스 출신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집트의 신들과 신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지은 건축물이다. 특히 이 열주들은 BC 116-BC 71년에 세워졌다지 않는가. 그러니 코린트 양식이 접목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회랑을 걷다보면 생명의 열쇠라는 앙크(ankh)’ 문양이 자주 눈에 띈다. ‘영원한 생명으로 번역되는 상형문자인데, 이집트 신화의 신들은 앙크의 고리를 잡고 있다든가, 양팔을 가로지른 채로 양손에 쥐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이 앙크는 콥트교도들에도 신성시되었단다. 십자가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교회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해왔다는 것이다.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열주실로 들어가기 전 다양한 부조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호루스에게 봉헌물이 든 단지를, 하토르 여신에게는 자신을 상징하는 스핑크스를 바치는 장면의 부조가 보이는가 하면, 반대편에는 다른 여신에게 엘렉트럼(electrum, 금과 은의 합금)을 받치는 부조가 새겨져 있다. 탑문의 뒤쪽에서는 일 년에 한번 덴데라(Dendera)의 하토르가 배를 타고 이곳으로 찾아와 남편인 호루스를 만난다는 내용의 부조도 찾아볼 수 있다. 매 장식의 호루스 배와 여신 머리 장식의 하토르 배가 로프로 묶여있는 형상이다. 이집트의 신들은 결혼을 한 뒤에도 같이 살지는 않았었나 보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문 좌우에서 우린 또 다른 검은색 화강석으로 된 호루스 조각상을 만나게 된다. 신전에 있는 다른 호루스들보다 보존이 잘 되어서인지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로 인해 항상 붐비는 에드푸 신전의 마스코트이다.

 

 

 

열주실로 들어가지 전에 뒤돌아본 탑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외 열주실과 내 열주실이 다시 나타난다. 외 열주실에는 기둥이 6개씩 세 줄, 내 열주실에는 4개씩 세 줄의 기둥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열주실로 들어서면 양쪽으로 방이 하나씩 있는데 오른쪽 방은 종교의식과 관련된 상형문자 텍스트들이 있다고 해서 도서관이라 불린다. 왼쪽은 정화 혹은 봉헌의 방이란다. 또한 12개의 기둥이 있는 두 번째 열주실에도 보물의 방나일강의 방’, 그리고 향수나 방향제를 만드는 방법이 적혀있는 방들이 있다.

 

 

내부의 천장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콥트교도가 오래도록 이곳에 거주하면서 연기를 피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천정에 그려져 있다는 별자리 등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열주실의 기둥과 벽은 온갖 부조 벽화들로 가득했다. 그중에는 파라오가 호루스와 하토르의 축복을 받는 내용이 많다. 그리고 파라오가 이들 신에게 꽃과 같은 봉헌물을 바치기도 한다.

 

 

 

 

이들 열주실을 지나면 안으로 또 다시 두 개의 전실이 있고, 그 안쪽에 지성소가 있다. 지성소는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조명을 해 놓았으며, 가운데 가마 모양의 범선이 놓여 있다. ‘하늘을 나는 배(나일강의 혜택을 입고 살아가는 나라답게 나일강을 오가는 배들을 가장 성스럽게 여겼지 않나 싶다)’라는데 그 뒤에는 30왕조의 넥타네보 2(Nectanebo II)’가 만든 신상을 안치했다는 봉안소인 나오스(Naos)가 있다. 원래는 나무에 황금을 입힌 호루스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비어있었다. 축제나 행사가 있을 때 파라오는 이곳 지성소를 찾아 향을 피우고 호루스와 하토르를 기리는 의식을 거행했단다.

 

 

지성소의 내부 벽면도 호루스와 세트가 대결하는 장면 등 부조 벽화들로 가득했다. 아니 조명으로 인해 더욱 화려해졌다. 이를 두고 수렴형 신전의 화룡점정이라는 표현을 쓴 이도 있었다. 그는 또 에드푸 신전이 르네상스식 좌우대칭 양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상하대칭 구조까지 중첩시켰다고 했다. 즉 입구에서 지성소 까지 발 디딘 쪽은 점점 높아지고, 기둥 위쪽과 천장 부분은 점점 낮아져, 마치 원근법의 소실법처럼 지성소로 모든 에너지가 수렴된다는 것이다.

 

 

이젠 신전의 외벽을 따라 돌아본다. 서쪽 벽으로 가면 이 신전에서 가장 극적인 부조를 만날 수 있다. 파라오의 수호신 호루스가 악의 상징인 세트(Seth)를 물리치는 이야기가 10여 개의 장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오시리스의 아들인 호루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삼촌 세트에게 복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세트는 엄청 작은 하마로 표현되어 나약한 존재임을 부각시킨다.

 

 

 

 

 

 

세트가 악의 화신(동물 형상)으로 나타나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하지만, 결국에는 호루스가 하토르와 파라오의 도움을 받아 나일강에서 하마(Nilpferd)로 변한 세트를 찾아내서 죽인다는 내용이다. 처음엔 세 명, 다음엔 네 명, 그 다음엔 다섯 명이 힘을 합쳐 하마를 잡아 올리려고 애를 쓰는 모습도 자세히 그려져 있다. 마지막에는 그물을 이용하여 하마를 육지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하게 되고, 이어서 하마는 칼을 든 호루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들 벽화는 고대 이집트 신화 중 오시리스 신화를 부조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콥트교도의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부조의 얼굴이 크게 훼손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종교란 게 본디 사랑과 포용인 것을 그들은 왜 몰랐을까?

 

 

북쪽 벽면에서는 수많은 카르투쉬(Cartouche)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절반 정도가 빈칸으로 남아 있다. 앞으로 새겨 넣을 왕의 이름을 고려해서 미리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란다. 다른 한편으론 그곳에 들어갈 임금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영원하기를 바란 왕국이었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웠겠는가. 아무튼 카르투쉬란 고대 이집트 왕의 이름을 새겨 넣는 타원형의 상형문자판을 말한다. 혹자는 우리의 군대 인식표(군번줄)를 닮았다고 해서 왕명표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인식표에 군번과 이름이 들어간다면, 카르투쉬에는 파라오가 태어날 때의 이름과 즉위할 때의 이름이 들어간다.

 

 

이곳 에드푸 신전에도 나일로미터가 있었다. 하지만 나일강으로부터 5나 떨어져 있는 탓에 현재는 수위 측정이라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사라진지 이미 오래란다. 참고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로미터의 눈금을 보고 물이 빠진 뒤의 상황을 예측했다. 길이에 대한 고대의 측정 단위는 큐빗(cubit)이었다. 팔꿈치에서 가운데손가락 끝까지의 길이(46정도)‘1큐빗인데 수위가 12~13 큐빗 정도로 낮으면 가물어 기근이 들고, 16큐빗이면 먹고 남을 만큼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다고 믿었단다.

 

 

 

크루즈가 밤에 운행했던 탓에 나일강의 또 다른 명물이라는 에스나 락(Lock)’은 눈에 담지 못했다. 낮은 수위의 물길로 갈아타기 위한 갑문(閘門)으로 에스나의 랜드 마크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온 이유이다. 거대한 나일강은 아스완 하이댐과 로우댐으로 강물을 두 번이나 막았어도 상류의 수위는 하류의 수위보다 높고, 이를 방치할 경우 물살이 세질 수밖에 없다. 이의 해결을 위해 설치한 시설이 마스르아스완 대교 서단에 있는 에스나 락(Lock)’으로 배가 어디서든 완만하고 안정감 있게 운항할 수 있도록 물 높이를 조절해 준다.

 

 

에스나 락(Lock)’은 급경사가 있는 곳에 갑문식 도크를 만들어 배가 상하로 오르내리도록 하는 시설이다. 내려가는 배가 갑문으로 들어갈 때는 아래쪽 문을 닫고 진입한 다음, 뒤쪽 물문을 닫는다. 그런 다음 도크 안에 있는 물을 서서히 빼면서 하류의 수위에 맞춘 다음 아래 도크를 열고 다시 항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에드푸신전을 조금 더 깊이 알고 싶으면 먼저 고대 이집트 신화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태양신 레를 숭배한 가장 오래된 고대 이집트의 도시)의 신학에 따르면 태양신 아툼(Atum혹은 Ra)이 슈(Shu, 공기의 남신)와 테프누트(Tefnut, 이슬의 여신)를 창조했고, 이 둘이 결합하여 게브(Geb, 대지의 남신)와 누트(Nut, 하늘의 여신)를 낳는다. 그 후 게브와 누트 사이에서 남신 오시리스(Osiris)와 세트(Seth), 여신 이시스(Isis)와 네프티스(Nephthys)가 나오는데 이들 남매가 각각 짝을 지어 오시리스와 이시스, 세트와 네프티스가 부부가 된다. 이들 아홉이 이집트의 구주신(九主神)’으로 사람들에게 숭배되었다. 이 가운데 오시리스신은 이집트를 통치하며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존경을 받았지만, 이를 시기한 동생 세트의 모함에 빠져 죽게 된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관을 찾아내어 남편을 살려냈지만, 이를 안 세트가 오시리스를 열네 토막으로 잘라 이집트 방방곡곡에 버렸다. 이시스는 다시 조각들을 찾아서 결합시켰지만, 물고기에 먹혀 버린 남근만은 찾지 못했다. 이시스는 나일강의 진흙으로 그 부분을 보충한 후 생명을 불어넣어 오시리스를 살려내었고, 그와 결합해 아들 호루스(Horus)‘를 낳게 된다. 이 호루스가 성장하여 작은아버지이자 아버지의 원수인 세트를 물리치고 왕위에 복귀한다. 그렇게 해서 호루스는 현세의 왕으로, 오시리스는 내세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호루스신을 믿는 나일강 상류 사람들과 세트신을 믿는 나일강 하류 사람들의 권력투쟁이 반영된 전설이 아닐까 싶다.

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콤옴보 신전(Temple of Kom Ombo)

 

특징 : 에스나에서 남쪽으로 120, 아스완에서 북쪽으로 50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콤옴보는 사탕수수와 옥수수가 많이 생산되는 전형적인 농업지역이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시대(BC 305-BC 30)’만해도 누비아나 에티오피아 방면을 상대로 하는 대상무역의 거점으로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이곳에 악어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 소베크(Sobek) 과 매의 형상을 한 호루스(Horus) 을 모시는 신전이 지어져 있다. 두 개의 신전을 결합해 하나의 신전으로 만들었는데 보통 이집트 신전이 동서축으로 건설된 것과 달리 콤옴보 신전은 남북을 축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콤옴보에는 악어로 가득한 섬이 있었는데 과거 이집트 사람들은 두려운 악어의 존재를 신으로 숭배함으로써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소베크 신을 모시는 신전을 이곳에 세운 이유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신전 곳곳에는 파라오가 소베크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부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전 근처에는 악어를 미라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는 악어 박물관도 위치해 있다.

 

 

크루즈의 정박지에서 콤 옴보(Kom Ombo)‘ 신전까지는 금방이다. 느긋하게 5분쯤 걷자 코린트 양식(Corinth style)‘으로 지어진 신전이 나타난다. 화려하고 섬세하며, 아칸서스(acanthus) 잎으로 장식된 기둥머리가 특징인 양식이다. 콤옴보 신전은 기원전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 6(기원전 180-145)‘ 때 짓기 시작해 프톨레마이오스 13(기원전 51-47)‘ 때 완공되었다. 하지만 어제 들렀던 필레 신전처럼 로마인들이 이용하면서 건물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신전에 이르자 코린트 풍의 문()이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문이 두 개다. ’소베크호루스라는 두 명의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라서 본전(本殿) 또한 둘이기 때문이란다. 다른 신전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다. 남쪽(왼편) 신전에서는 악어신 소베크(Sobek)를 섬기고 북쪽(오른편) 신전에서는 초기 형상의 호루스(Horus the Elder)’로 알려진 매의 신 하로에리스(Haroeris)’와 그의 아내인 타세네트노프레트(Tasenetnofret)’ 및 그의 아들이자 2개국의 통치자였던 판넵타이(Panebtawy)’를 모신다고 한다.

 

 

나일강의 뱃길을 지켜 준다는 신전의 문()은 거대했고 히에로클리프(Hieroglyph, 이집트 상형문자)‘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1 열주실이라는데 저녁이라서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이의 글로 대신해본다. <콤 옴보 신전은 가로 51m, 세로 90m의 벽과 석주(石柱)로 이루어져 있다. 나일강 쪽 입구로부터 현관, 내외 열주실, 세 개의 전실, 두 개의 지성소로 이어진다. 외 열주실에는 12m 높이의 기둥 5개가 세 줄로 서 있다. 그리고 내 열주실에는 파피루스 다발 형태의 기둥 5개가 두 줄로 서 있다. 내 열주실부터 지성소까지는 벽이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이들 벽에는 소벡과 하로에리스 관련 부조가 새겨져 있다.>

 

 

 

 

벽면에는 소베크와 하토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왕이 하이집트와 상이집트의 왕관을 쓰고 있는 신들의 어머니 무트(Mut)’로부터 통일 이집트의 왕관을 받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참고로 소베크(Sobek)는 악어의 신이자 나일강을 관장하는 물의 신이다. 이 지방에서는 우주창조 당시 혼돈(混沌: chaos)의 물에서 나타난 조화의 신으로 여겼기에 악어에게 음식물을 바치기도 하고, 악어의 행동에서 길조를 읽는 등 악어 숭배가 성행했단다. 소베크를 모시는 신전이 지어진 이유일 것이다.

 

 

부조(浮彫)들은 하로에리스와 소베크가 파라오에게 축복을 내리거나, 파라오가 이들 신에게 봉헌하는 장면이 특히 많다. 그리고 파라오를 상징하는 카르투시(Cartouche)를 새기고 그 주변을 동식물 문양으로 치장한 부조도 있다. 이집트 신전 중 부조가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채색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단다.

 

 

 

 

또 하나 두드러진 부조는 고대 이집트의 달력이다. 세계 최초의 태양력이라는데 달을 표시하고 그 달에 해야 할 일들을 상형문자로 적어놓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1년을 나일강의 범람기(아크헷 akhet-'빛나는 것', '유익한것'을 뜻함), 파종의 시기(페레트 peret- 출현을 뜻함), 수확기(셰무 shemou-'불타는 것'을 뜻함)로 나누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은 나일강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혜의 결과였을 것이다. 나일강 유역은 원래 비가 내리지 않는 사막이다. 그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나일강이 범람했기 때문이다. 범람이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었던 것이다. 6월에서 9월까지 에티오피아 고원에 호우가 내리면 6월 말부터 아스완에 홍수가 나기 시작해서 8월이면 범람하고, 10월 중순에 수위가 절정에 달했단다.

 

 

 

지성소(Holy of Holies)로 여겨지는 곳에는 까맣고 커다란 바위가 놓여있다. 대리석의 표면 위에 태양원반과 코브라가 새겨진 걸로 보아 이 위에 호루스의 석상이 놓여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또 다른 검정 대리석 위에는 소베크의 석상이 놓여있었을 것이다.

 

 

 

2열주실근처의 풍경도 다른 이의 글로 대신해본다. <벽면에는 호루스 신과 토트 신에게서 물려 받는 프톨레마이오스 7세가 그려져 있으며, 전실에 3개의 방이 있는데 보존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 지성소를 둘러싼 회랑도 이중구조로 되어 있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데, 그 중 남쪽의 것이 소베크 신에게, 북쪽의 것이 하로에리스 신에게 바쳐진 것이다.>

 

 

 

수술도구들이 그려진 벽화도 있다. 옆에 보이는 여자들은 임산부란다. 그렇다면 고대 이집트에서도 제왕절개 수술이 시술되고 있었다는 얘기일까? 의학의 아버지라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377)’보다 늦게 이 신전이 지어졌으니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그려진 도구들을 두개골을 여는데 사용하던 수술도구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 집게, 갈고리 등 다양한 도구들이 새겨진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수술도구로 보는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학자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두자.

 

 

2 열주실에 있다는 호루스와 토트(소베크 임무를 덧붙여 계승)의 뜻을 새 지배자(이방인)인 프톨레마이오스 7세가 이어받았음을 나타낸다는 그림은 구경하지 못했다. 남의 나라를 차지하고도 주인노릇을 한 그들의 표정이 궁금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정권을 잡은 군사참모 출신 임금이다. 주지하다시피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를 침략한 뒤 북서쪽 아몬신전에 달려가 신전의 사제를 위협해 자신이 이집트와 중동지역을 다스릴 후예임을 신탁 받은 바 있다. 이방인들의 찬란한 이집트 문명 입기의 시초였다.

 

 

 

콤 옴보 신전은 다른 신전에 비해 파손이 심한 편이었다. 가까이 있는 나일강의 범람과 지진 등의 피해로 훼손이 심했기 때문이란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폭풍에 의한 피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건축재로 쓰겠다며 가져갔는가 하면 콥트교도들은 부조까지 훼손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어 가지 색상의 조명으로 덧입혀 놓은 갈색의 사암 건물은 한마디로 신비로웠다.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룬다는 석양 무렵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저녁에 찾아온 탓인지 천정에 남아있다는 화려한 색상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떤 색상인지 짐작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곁눈질로나마 기억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문득 화려한 색상들로 채색된 신전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나뒹구는 돌덩어리에도 지혜가 숨어있었다. 두 개의 돌을 하나로 묶기 위해 나비 모양의 결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음각(陰刻)을 해놓은 것이다. 파여진 곳에는 나무를 넣었는데, 큰 바위를 이런 방식으로 이어주면 오랜 세월 동안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방법은 고대 로마 유적에서 보았던 투박한 디귿자 모양의 결구와 크게 다르지 않는 건축법일 것이다.

 

 

사자가 사람의 팔을 물고 있는 그림도 보인다. 전쟁에서 적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단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극한의 공포감을 갖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친 사람을 보살필 인력까지 투입해야 하니 이보다 더 좋은 전술이 어디 있겠는가. 요즘으로 치면 발목지뢰라고나 할까?

 

 

하단에는 목에 줄을 매고 줄줄이 끌려가는 사람들을 새겨 놓았다. 그런데 하나같이 왼쪽 팔이 없다. 위 사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사자에게 팔이 잘린 포로들이 아닐까 싶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얼굴이 훼손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전력에서 이탈된 인원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신전을 돌아다니다 보면 앙크(ankh, 영생의 열쇠)를 든 신들이 자주 눈에 띈다. 동물의 얼굴에 인간의 몸을 가진 신들이다.

 

 

하로에리스와 소벡이 천국의 열쇠를 들고 무언가 상의하고 있는 듯한 부조도 보인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있는 상형문자들은 그들이 내린 결정이라고 보면 되겠다.

 

 

 

신전의 북쪽 지역이라면서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는데 찍어온 사진이 흐려 내용은 확인해보지 못했다.

 

 

좀 외떨어진 곳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다. 나일강의 높이를 측정하던 나일로미터(Nilometer)라고 한다. 이 우물은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맨 아래까지 걸어 내려갈 수 있는 구조인데 그 끝은 나일강과 연결되어 있단다. 나일강이 범람할 경우 자연스럽게 이 나일로미터에도 물이 차오를 터이니 나일강의 수위를 측정할 수 있는 장치인 셈이다. 지금은 아스완 하이댐으로 인해 나일강이 범람하지 않지만 1970년 이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나일강이 범람을 했고, 나일로미터의 수위가 이집트인들의 농사와 삶의 지표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얻은 수치로 농사가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는 한편 세금을 걷는 자료로 썼다는 것이다. 문득 우리나라의 자랑거리인 세종대왕의 측우기와 수포교가 생각난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측우기를 만든 건 1441, 나일로미터는 그보다 2천년 가까이나 먼저 만들어졌다. 설치 목적이 비슷했을지 몰라도 비교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얘기이다.

 

 

아래 사진은 나일로미터의 전체적인 윤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 이 우물은 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직접 받을 수 있는 임금이라는 것을 과시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단다. 실은 제사장이 저 문을 통해 아래로 내려간 다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쇼를 펼쳤다지만 말이다.

 

 

열주에 그려진 그림들은 대부분 소베크와 호루스에 공양을 하는 모습들이다. 신에게 바치는 공물의 종류도 다양하고 띠 장식도 각기 다르다. 매의 형상을 하고 통일 이집트를 나타내는 이중관을 쓴 호루스도 눈길을 끌었다. 반면에 그 앞의 다른 새들은 상이집트의 왕관과 하이집트의 왕관을 따로 쓰고 있었다. ‘네크베트(Nekhbet)’라고 하는 초기 이집트의 신으로 각각 상·하 이집트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신전은 원래 중앙부에서 외벽까지 세 겹으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다 부서지고 일부만 남아 어림짐작으로만 구분할 수 있다.

 

 

 

신전에서 내려다보면 강변에 정박해있는 크루즈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많은 크루즈 선들이 나란히 정박해 있고 거기서 내린 여행객들은 시간 간격을 두고 콤옴보 신전을 방문한다.

 

 

때는 바야흐로 2월 하순, 대동강 물이 녹는다는 우수(雨水)가 지난지도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지만 날씨는 여전히 쌀쌀하다. 추위에 약한 집사람은 구스다운 자켓에 조끼까지 껴입었는데도 크루즈로 돌아가자며 자꾸만 재촉한다. 이집트가 사막이라서 더운 나라인줄 알았는데 이곳의 겨울도 만만치 않나보다.

 

 

신전 근처에는 악어박물관(Crocodile Museum)’이 있다. 인근에서 발견된 악어 미라(mirra) 300구를 보전 전시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악어 미라박물관이다. 악어의 미라뿐만 아니라 악어 미라를 담았던 석관도 여럿 전시되고 있었다. 문득 이 고장 사람들이 겪었을 악어들과의 끊임없는 사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들이 찾아낸 최선의 결론은 악어와의 공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들을 내가 보고 있다.

 

 

 

세계 유일의 악어박물관이라는 타이틀(title)에 걸맞게 전시물의 대부분은 악어 미라들이 차지하고 있다. 악어 미라는 검은 색을 띠고 있으며, 일부는 천과 끈으로 묶어놓기도 했다. 마치 염한 악어처럼 보인다. 그리고 악어알과 새끼도 있고, 악어 부조와 입체 조소(彫塑)도 있다.

 

 

 

 

전시물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유물이다. 정교하게 조각된 4면 석비 위에서 악어 한 쌍이 한가로이 쉬고 있는 모습인데, 이 석비에서 파라오는 악어신 소베크(Sobek)와 파라들의 어머니인 하토르(Hathor) 여신으로 표현된단다.

 

 

 

 

박물관 안에는 악어의 생활상은 물론이고 미라의 제작과정과 장례 의식에 관한 부조(浮彫)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이들 부조에 새겨진 신은 모두 여성으로 보면 된단다. 이집트에서 악어는 생긴 것과는 달리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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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누비아(Nubia) 아부심벨 신전(Abu Simbel temples)‘

 

특징 : 60년 이상 이집트를 다스린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 2(Ramses II)’는 자신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국내외에 펼쳐 보이고자 이집트 곳곳에 크고 작은 기념물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이집트 남부 아스완주에 세운 거대한 신전(神殿) ‘아부심벨이다. 기원전 13세기, 히타이트와 결전을 벌인 카데시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집트 남쪽 사암층을 뚫어 왕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이 만들어졌다. 신전은 정면 높이 32m, 너비 38m이며 안쪽으로 63m나 파 들어갔으며 입구에는 높이 22m에 달하는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좌상 4개를 세웠다. 신전의 규모도 경이롭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신전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성소에 까지 햇빛이 들어온다는 점이다. 3000년 전에 만들어낸 경이로움 못지않게 현대 인류도 아부심벨 신전을 위한 기적을 만들어냈다. 1960년대 아스완 댐의 건설로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위기에 몰리자 유네스코와 국제사회가 이 경이로운 신전을 살려내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4년 반 동안에 50개국의 지원과 수많은 고고학자의 노력으로 신전은 원래 위치에서 65m 위로 옮겨졌다.

 

아스완에 정박해 있는 배(크루즈)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날 아침 일찍 아부심벨로 향했다. 이곳 아스완에서 280나 떨어진 국경 근처(수단 국경에서는 4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에 있다 보니 새벽 5시에 숙소를 나설 수밖에 없었고, 아침식사도 역시 버스 안에서 도시락으로 때워야만 했다. ! 이곳으로 오는 도중 아스완댐을 지나왔는데 그곳에서의 보안검색이 눈길을 끌었다. 거의 30분을 기다려야만 했을 정도로 꼼꼼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테러가 많은 지역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어둠을 뚫고 2시간 정도를 달리던 버스가 휴게소에 들른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의 한가운데에 작은 휴게소 하나만 달랑 지어져 있다. 휴게소는 간편식사와 음료도 팔고 있었으나 주 수입원은 유료화장실로 보였다. 1인당 5 EGP(이집트 파운드)를 받고 있었는데 휴게소에 들르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화장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 가는 도중에 몇 번이나 정신없이 졸다가 깼는데도 창밖은 계속 비슷한 풍경이었다. 어스름이 걷혔는데도 역시 똑 같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온통 사막뿐이었다.

 

 

마침 해가 떠오르고 있어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풀 한포기 없는 평탄한 사막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곳은 이집트의 서부사막이란다. 구릉지도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평평한 대지에는 송전탑들만 우뚝하다. 이련 풍경이 서부사막의 특징인데 그 덕분에 가끔은 신기루를 볼 수도 있단다. 또한 후루가다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동부사막의 풍경과는 확연히 구분 된단다.

 

 

거칠 것 없는 평평한 대지이다 보니 거기에 건설한 고속도로도 거칠 게 없다. 조그만 구부러짐도 없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도로가 집사람에겐 색달라 보였던 모양이다. 냉큼 포즈부터 잡고 본다.

 

 

크루즈를 출발한지 4시간 가까이 되어 아부 심벨(Abu Simbel)’에 도착했다. 하지만 매표소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만 했다. 둘 사이에 기념품 상가를 들어앉혔는데 그 규모가 제법 컸기 때문이다. 도로변에도 인도가 따로 나있었으나 관광객들은 다들 상가 안으로 나있는 코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곤 너나없이 진열되어 있는 각종 기념품들을 기웃거린다. 그동안 들러왔던 다른 관광지들보다 상가의 크기나 서비스, 특히 상품의 퀄리티(quality)가 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싶다. 기념품 상가는 매표소 앞까지 이어진다.

 

 

 

매표소에 이르니 입장료가 200 EGP(이집트 파운드)란다. 한화로 14,000원쯤 되니 꽤 비싼 편이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단다. 아부심벨 신전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강의 피해를 막기 위해 아스완 인근에 댐을 만들었는데 댐에 물이차면서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될 위기에 처한 것. 다행히도 유네스코가 직접 개입해 신전 전체를 강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상류로 통째로 옮겼다. 이전 비용이 많이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입장료가 비싸진 이유를 유네스코에서 찾는 이유이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아부심벨을 보고 감탄할 수 있지 않은가.

 

 

매표소 건물에는 아부심벨 신전이 옮겨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전시관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부심벨 신전은 과거 아스완 댐 공사 때 수몰될 뻔했던 것을 유네스코에서 조각조각 내서 옮긴 것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옮기는 작업에는 1,700여명의 인력과 전문가들이 동원됐다. 이들은 신전 전체의 모형을 복원하기 위해 폭발물을 사용하지 않고 주변까지 포함한 125000의 암석을 조각조각 분리해 옮긴 후 그대로 조립해 냈다. 공사 중 댐 수위가 점차 올라오자 신전 둘레에 보조댐까지 쌓으면서 진행된 공사는 결국 3000년 전에 만들어 계산해 낸 태양의 움직임까지 훼손하지 않으면서 완벽한 이전을 마무리해 냈다.

 

 

옮기기 전의 풍경을 담은 사진도 게시되어 있었다. 이집트 최남단에 위치한 아부 심벨(Abu Simbel)’은 지금으로부터 약 3200년 전에 지어졌다. 이집트 신왕국 19왕조의 파라오이던 람세스 2의 작품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단군조선 시대쯤 되겠다. 그렇게나 대단한 유적이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오랫동안 사라져 있었다. 오랜 세월 모래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17년 스위스의 고대 이집트 학자 조반니 바티스타 벨초니(Giovanni Battista Belzoni, 1778~1823)’에 의해 발굴되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부심벨은 발굴 당시 안내를 맡았던 이집트 소년의 이름이라고 한다. 1979년 어제 들렀던 필레 신전과 함께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었다.

 

 

입장권을 끊고 유적지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우뚝 솟아있는 정체불명의 사암 언덕이 보인다. 저 언덕의 아래에 아부심벨(Abu Simbel)’ 신전이 들어있다. 본래의 아부심벨은 나일강변의 절벽을 뚫어서 만든 것이었는데, 이것을 원래의 위치보다 65m 정도 높은 언덕으로 이전하기 위해, 우선 언덕과 언덕 내부 사이에 대형 돔을 설치하여 신전의 붕괴를 예방한 다음, 1 6천여 개의 조각으로 분할한 신전을 원래대로 쌓아올렸다고 한다. 1972년에 시작한 대역사는 4년 후에야 조립을 마칠 수 있었단다.

 

 

아래 사진은 투어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바라본 사암 언덕이다.

 

 

나일강을 따라 난 길을 돌아서면 나세르 호반(湖畔)에 위치한 아부심벨 신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아부심벨 대 신전(大神殿)’과 그 옆의 소 신전(小神殿)’으로 이루어졌는데 대신전은 람세스 2 자신을 위한 것이고 소신전은 그의 왕비인 네페르타리(Nefertari)’를 위해 지었다. 둘 모두 내부에서의 카메라 촬영은 불가다. 핸드폰 촬영은 가능하다니 구태여 추가로 돈을 내고 카메라를 이용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집트 19왕조의 파라오이자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였던 람세스 2가 자신을 위해 세운 대신전은 정면의 높이가 32m이며 너비는 38m이다. 안쪽 깊이는 63m라고 한다. ‘람세스 2는 이집트의 영토를 엄청나게 확장한 왕이다. 그는 정복지 중에서도 아프리카 내륙의 누비아 지역에 특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누비아 지역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민에 대한 해답은 아부심벨이었다. 누비아에 이집트의 위풍당당함을 광고하는 한편, 누비아인과 싸워야 하는 이집트 병사들에게는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누비아와 가장 가까운 아스완에 신전을 건설했다. 그리고 신전 앞에 앉아 수단 쪽을 향해 아직까지도 그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대신전 앞에 서자 높이가 22m나 된다는 거대한 좌상(坐像)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모두가 람세스 2의 좌상이라는데 태양의 신 (Ra)’를 숭상하는 람세스 2세가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또한 상, 하 이집트를 의미하는 왕관을 씌워 자신이 초대 왕 메네스(Menes, BC 3150)’ 이후 이집트를 재통일한 주역임을 알리고 있단다. 좁은 의미의 이집트는 나일강 하류의 하이집트이고, 상이집트는 남쪽 누비아문화권이다.

 

 

좌상의 다리 사이에 보이는 작은 입상들은 람세스 2세의 어머니와 부인, 아들, 딸 등 왕족의 형상이라고 한다. ! 왼쪽에서 2번 째 좌상은 허리 윗부분이 부서져 땅에 떨어져 있었다. 지진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라는데 복원을 하지 않은 채로 보존되고 있다.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월의 흐름까지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아부심벨만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입구의 위, 매의 머리를 하고 있는 신상(神像)은 호루스와 태양신 라(Ra)가 결합된 지평선의 호루스, ‘-호르-아크티(Ra-Hor-Akhty)’라고 한다. 문의 양쪽에는 여성의 상()이 세워져 있는데 오른쪽이 네페르타리(Nefertari) 왕비라고 한다.

 

 

람세스 2세의 발밑 받침대에 보이는 상형문자는 태양의 신 라(Ra)와 지혜의 여신 토트(Thoth)에게 바치는 헌시(獻詩)라고 한다. 또한 매 형상의 호루스와 수호천사의 조소상은 신전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단다. 이러한 내용들은 1822년 상형문자의 해독이 가능해지면서 알게 되었단다.

 

 

 

신전의 안으로 들어서면 네 개씩 두 줄로 늘어선 석상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두 팔을 가슴 앞에 십자로 모으고 있는 10m 크기의 여덟 석상들은 모두 오시리스(Osiris)’의 모습으로 표현한 람세스 2라고 한다. 오시리스는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신으로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그는 쌍둥이 동생 세트의 음모에 빠져, 몸이 14조각으로 잘려, 이집트 전국에 뿌려졌으나, 그의 아내 이시스가 물고기가 삼킨 생식기만을 제외한 사체 14조각을 모두 찾아내서 부활시킨다, 람세스 2세는 오시리스의 이런 부활 능력을 빌어 사후에 신으로 부활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한다.

 

 

 

맨 안쪽에는 지성소(至聖所)가 있다. 네 개의 신상이 모셔진 신성한 곳으로 가장 왼쪽이 창조의 신이자 암흑의 신인 프타(Ptah), 그 옆이 파라오의 수호신 아몬(Amen), 그리고 그 옆이 바로 람세스 2세이고, 가장 오른쪽은 태양의 신 라(Ra)와 호로스가 결합한 라-호르-아크티(Ra-Hor-Akhty)’라고 한다. 위대한 신들과 자신을 동격화 시킨 람세스 2세의 배짱과 의도가 잘 드러난 작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지성소의 뛰어난 점은 다른 데에 있다. 지성소는 대신전 입구에서 61m쯤 떨어져 있는 암굴이다. 그런데도 1년에 두 번, 그러니까 춘분(2 22, 람세스 2세의 생일)과 추분(10 22, 람세스 2세가 왕위에 오른 날)이면 해가 떠오르면서 햇빛이 이 깊은 암굴 속까지 파고든다는 것이다. 그리곤 신상을 환하게 비추는데 가장 먼저 람세스 2세를 비추고, 그 다음에 곁에 앉은 태양신 라를 비춘 후, 라몬으로 이동하지만 어둠의 신 프타는 비추지 않고 약 20분 후에 사라진단다. 3000년 전 태양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계산할 수 있었던 이집트의 천문학적 지식과 건축기술 덕분에 가능했다고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시각에서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가 아부심벨에 도착했을 때는 태양이 이미 중천에 떠있었던 관계로 햇빛이 비치는 장관은 구경하지 못했다. 오늘은 10 22일과 2 22일이 아니니 햇빛이 성소까지 들어오지는 않겠지만 언저리까지는 오지 않았겠는가. 그런 상황을 읊은 어느 여행가의 글로 아쉬움을 달래본다. <아침 해가 뜰 때면 밤새도록 어둠 속에서 기다린 람세스 2세의 좌상이 창백한 모습에서 차츰 홍조를 띤다. 햇살이 강렬해짐에 따라 그 모습이 마치 조금씩 차오르는 생명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듯하다.> 아무튼 이집트는 대단한 나라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거대한 건물을 조각하면서도 태양의 방향과 각도, 시간 등까지 계산해가면서 치밀하게 작업을 했다니 말이다. 하긴 이렇게 뛰어난 선조들을 두었으니 '죽은 자가 산자를 먹여 살리는 나라'라는 말을 듣지 않겠는가.

 

 

석상 뒤의 벽에는 부조가 새겨져 있고,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전쟁을 묘사한 카데시(Kadesh) 전투 장면이란다. 오늘날의 시리아와 터키 국경 인근인 카데시를 두고 벌인 이 전투는 기원전 1274년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변, 카데시에서 람세스 2세의 이집트 마차부대와 무와탈리(Muwatalli) 2세의 히타이트 마차부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승부를 가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카데시 전투는 상호인정·상호불가침·호혜평등 등이 담긴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을 낳기도 했다. <히타이트의 위대한 지배자는 결코 이집트 땅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람세스는 결코 히타이트의 땅을 침범해 약탈하지 않는다.>라는 평화조약문을 상형문자(象形文字)와 설형문자(楔形文字)로 적어 각각 나눠 가진 것이다. BC 1258년의 일인데 양국은 조약에 명시된 대로 BC 1180년 히타이트가 멸망할 때까지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람세스 2는 평화 속에서 신전과 석상 등 수많은 건축물을 이집트 전역에 세워 그의 업적을 과시할 수 있었다. 참고로 히타이트와의 평화조약에 대한 기록은 아부심벨 신전을 비롯해 라메세움 신전, 카르낙 신전과 옛 히타이트의 수도인 하투샤 유적지에서 발굴된 점토판에도 남아 있단다.

 

 

2실과 3실 사이의 벽에는 이시리스 신에게 영혼을 바치고, 의식을 행하는 모습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다음은 소신전 차례이다. 정면의 높이 12m에 폭이 26m, 안쪽 길이가 20m인 소신전은 대신전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람세스 2가 자신의 아내 네페르타리(Nefertari, BC 1301-BC 1255)’를 위하여 지은 신전이란다. 그는 이 신전의 건축을 짓는 이들에게 역사상 그 어떤 신전보다도 아름다운 신전을 세우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여러 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첫 번째 왕비였던 네페리타리(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의미)’ 왕비를 제일 총애하여 그녀를 위해 신전을 짓고 사랑의 여신, 하토르(Hathor)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래서 신전의 네파르타리 왕비는 태양을 상징하는 원반, 긴 깃털과 뿔이 달린 관을 쓴 사랑의 여신 하토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입구에는 10m 높이의 입상(立像) 여섯 개가 세워져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와 다섯 번째 상()은 네페르타리(Nefertari) 왕비이고, 수염 난 네 사람은 모두 람세스 2. 이왕에 만났으니 네페르타리(Nefertari)의 미모에 집중해보자. 우리나라에선 클레오파트라(Cleopatra, 정확히는 클레오파트라 7’)가 최고 미녀로 알려져 있지만 이집트에선 네페르티티(Nefertiti, BC 14세기에 활동한 이집트 왕 아크나톤의 왕비), 네페르타리 그 뒤에 클레오파트라 순으로 미녀 서열이 매겨진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네페르타리는 역대 왕비 중 유일하게 자신의 신전을 가진 왕비, 왕 무릎을 넘는 조각이 금지됐던 시대에 왕과 동등한 높이의 석상이 건축된 왕비다. 그만큼 람세스 2세로부터 인정을 받은 왕비였던 것이다.

 

 

람세르 2세와 네페르타리의 발치에 만들어놓은 입상들은 둘 사이에 낳은 왕자와 공주라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람세스 2세와 네페르타리 왕비의 다리 모양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람세르는 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고 있는 반면 네페르타리 왕비는 두 발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전을 만들 당시 람세르 2세는 살아 있었지만 네페르타리는 죽은 뒤였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자세히 살펴보면 벽돌을 쌓아놓은 것과 같은 무늬가 나타난다. 나일강변의 절벽을 뚫어서 만든 본래의 신전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흔적들이란다.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산고의 아픔이자 영광의 상처들인 셈이다.

 

 

신전 내부에는 하토르여신의 입상이 새겨진 여섯 개의 기둥의 있고, 벽면은 왕비의 모습을 그린 벽화로 가득하다. 소신전의 구조는 대신전과 비슷하지만 내부의 기둥이나 벽화 등은 대신전에 비해 섬세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벽면에는 왕과 왕비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그토록 오래전 세상을 다 가졌던 위대한 왕이 부부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중국에도 진시황이라는 같은 의미의 영웅이 있다. 그도 역시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 또한 만리장성 같은 역사적 유적도 남겼다. 하지만 둘은 확연히 구분된다. 수많은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즐기기 위해 아방궁을 지은 진시황과는 달리 람세스 2세는 왕과 왕비의 이야기를 조각하고 이를 신전으로 남겨 백성들에게 본보기로 삼게 했다. 폭군으로 남은 진시황과는 달리 이집트인들로부터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는 위대한 왕이 된 이유일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아부심벨 신전(Abu Simbel temples)’은 문화유적을 아끼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불굴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집트가 낳은 영웅 람세스 2가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이 신전은 모래 속에 파묻힌 채로 오랫동안 역사에서 잊히어왔다. 그러다가 1813년 페트라(Petra, 고대 나바테아 왕국의 도시 유적)를 발견한 스위스 학자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르트(Johann Ludwig Burckhardt)’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수작업으로 모래를 제거하는 기술이 없어 발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817년에야 이탈리아의 모험가 조반니 벨초니(Giovanni Battista Belzoni)’에 의해 신전 내부로 들어가는데 성공했고, 발굴을 도와준 현지인의 이름이라는 아부심벨이란 지명도 이때 생겼다. 1831년 영국의 로버트 헤이가 람세스 동상의 발밑까지 모래를 제거했지만 또 다시 모래에 묻혀버렸고, 1909년에야 프랑스의 가스통 마스페로(Gaston Camille Charles Maspero)’의 지휘 아래 신전을 덮고 있던 모래가 완전히 제거됐다. 하지만 1960년대 이집트 정부가 아스완댐을 건설하면서 또 다시 물에 잠기는 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발 벗고 나선 게 유네스코였다. 1968년 신전은 만여 개의 조각으로 분리돼 원래 자리에서 65m 위로 옮겨졌다. 그리고 퍼즐을 맞추듯 재조립되었다.

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아스완(Aswan), ’필레 신전(Philae Temple)‘

 

특징 : 나일 강의 진주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신전으로 예전에 필레섬에 있었다고 해서 '필레 신전'이라고도 부른다. 이후 아스완댐이 건설되면서 아랫도리가 물에 잠겨 있다가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1972) 때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아길리카 섬(Agilika island)‘으로 이전했다. 신전을 이전할 때 전체를 분해해서 돌 하나하나에 번호를 붙여가며 마치 퍼즐을 맞추듯 복원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왕조시대에 지어졌다는 이곳에서는 고대 이집트 최고의 신인 오시리스(Osiris)의 아내 이시스(Isis)를 모셨다. 건물은 이집트 시대의 형태를 답습하면서도 그리스의 요소를 받아들여 건설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세웠다는 1탑문과 신전으로 향하는 참배의 길 양쪽으로 늘어선 100m 가까운 열주들, 그리고 신전의 벽면을 꽉 메우고 있는 상형문자들이 가장 눈길을 끈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키오스크(kiosk)도 인증사진의 배경으로 넣기에 부족함이 없다.

 

크루즈 선착장을 출발한 버스가 20분쯤 달리자 필레신전의 매표소에 닿는다. 그렇다고 이곳에 신전(神殿)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아스완 로우댐으로 인해 생겨난 인공호수의 안에 있는 아길리카 섬(Agilika island)‘에다 신전을 지어놓았기 때문에 매표를 한 후에 다시 배를 타야만 한다.

 

 

 

 

이집트 고대 유적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이곳에도 기념품 판매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진열된 기념품들은 조잡한 것도 있는 반면 제법 퀄리티(quality)가 있어 보이는 것들도 눈에 띈다. 특히 일부 조각품들은 공을 많이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구입하는 우()는 범하지 말자. 흥정만 잘하면 그들이 부르는 가격의 절반까지도 깎아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조심해야 할 일은 또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파피루스(papyrus)‘는 사지 말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파는 파피루스는 대부분이 가짜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파피루스는 전문 상점에서나 살 수 있으며 가격대도 비싼 편이다. 참고로 파피루스란 식물 줄기의 껍질을 벗겨 내고 찢은 뒤, 다시 매끄럽게 해서 만든 일종의 종이. 이집트 문명의 제지기술은 종이보다 훨씬 빨랐다.

 

 

아길리카 섬(Agilika island)‘까지는 보트가 실어다 준다. 조금 전 100 EGP(이집트 파운드)을 주고 구입한 입장권에 뱃삯이 포함되어 있으니 추가로 돈을 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뱃삯을 별도로 내야 한다고 우기는 보트 기사들도 있다니 주의할 일이다.

 

 

강안(江岸)의 바위 언덕 위에 멋진 건물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아니 이 근처에 있다는 올드 캐터랙트 호텔(Old Cataract Hotel)‘로 오해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얼핏 ’old‘라는 상호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로 꼽히던 추리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가 머물면서 나일강의 죽음(1937)‘을 집필했다는 곳이니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귀국해서 사진을 확대해보니 ’old nubian‘이라는 ’guesthouse‘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강기슭(江岸)은 온통 거대한 바위투성이다. 작은 바위섬들도 여럿 눈에 들어온다. 그러다보니 눈앞에 나타나는 풍경들은 하나같이 아름답다. 그런데 그게 함께 어우러지더니 아예 한 폭의 풍경화로 변해버린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이런 풍경만 가지고도 유명 관광지가 되기에 충분하겠다 싶다.

 

 

10분 조금 못되게 달렸을까 좌측으로 필레 신전(Philae temple)‘이 모습을 드러낸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 때 지어진 신전(神殿)으로 이시스(Isis) 여신을 모시는데 이시스이세트(Iset)‘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란다. 대지의 신 게브(Geb)와 천공(天空)의 여신 누트(Nut)의 딸로, 오빠 오시리스(Osiris)의 아내가 되어 호루스(Horus)를 낳았다. 그녀는 동생 세트(Seth)의 손에 죽은 남편의 갈가리 찢긴 유해를 고생 끝에 찾아내어 비탄 속에 매장한 일, 또한 자식 호루스를 온갖 위난으로부터 보호하며 양육한 일들로 아내와 어머니의 본보기가 되는 여신으로 알려진다. 참고로 애초 저 신전은 필레 섬에 있었다. ’이시스여신을 모시고 있는데도 필레신전으로 더 익숙한 이유이다. 1960년대에 아스완댐의 건설로 인해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 위기에 처하자 유네스코는 아부심벨 신전과 함께 평소에도 아랫도리가 물에 잠겨있던 필레 신전을 이전할 것을 결정했다. 이후 세계 50여 개국의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4년에 걸쳐 이곳 아길리카 섬(Agilika island)‘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잠시 후 아길리카 섬(Agilika island)‘에 도착했다.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작은 배 10여 척이 정박되어 있는 목제 선착장은 그동안 보아왔던 그 어떤 곳보다 잘 만들어져 있다. 유네스코 자금으로 복원하다보니 선착장까지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았던 모양이다.

 

 

배에서 내렸다고 해서 곧바로 투어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이집트 경찰에게 표를 보여주고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 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검색대를 지나면 신전으로 향하는 넓은 뜰과 연결된다. 그 뒤쪽으로 이시스의 친구이자 축복의 여신아렌스누피스 신전(Temple of Arensnuphis)’이 있다. 아리헤스네페르, 아르스누피스, 하렌스누피스 등으로도 불리는데 안내판에는 ’Arsenophis’로 표기하고 있다. 이정표는 이밖에도 누비아지역의 토착신으로 여겨지는 만둘리스 신전(Temple of Mandoulis)’‘Temple of Imhotep’, ‘Temple of Isis’도 표기해 놓았다.

 

 

잠시 후 기다란 열주(列柱)를 양쪽에 품은 거대한 건축물이 나타난다. ‘프톨레마이오스 2가 세웠다는 1탑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305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리던 그리스 출신의 왕가(王家).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 장군이자 계승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으면서 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기원전 305년에 이르러 스스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Ptolemaeos I Soter)’로 칭하고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집트인들도 그를 독립 이집트왕국의 파라오로 인정했고 기원전 30년 로마 공화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300년 가까이 이집트의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 당시 남자 통치자들은 모두 프톨레마이오스로 칭했고 여자 통치자들은 클레오파트라’, ‘아르시노에’, ‘베레니체등으로 불렸다. 세기의 미녀로 꼽히는 클레오파트라(정확히는 클레오파트라 7이다)’프톨레마이오스가문의 여왕이라고 보면 된다. ! 파라오의 뒤에 붙이는 숫자는 현대 역사연구가들이 편의상 붙였다는 것도 알아두자. 당대의 그리스계열 왕가는 이름 뒤에 붙이는 별칭으로 구분했기 때문이다. 가령 프톨레아미오스 1의 경우 가문 뒤에다 ‘1‘2대신 구원자라는 뜻의 소테르Soter)’를 붙였다는 것이다.

 

 

1탑문을 중앙에 두고 양쪽으로 수많은 열주(列柱/ colonnade)들이 기다랗게 늘어선 모양새이다. 위로 좁아지는 형태의 기둥들은 아주 크거나 웅장하지는 않지만 화려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기둥의 아래 부분은 상형문자를 음각(陰刻)했고, 머리 부분에도 여러 가지 문양들을 조각해 넣었다.

 

 

 

 

좌우로 늘어선 열주들 사이를 지나면 높이 18m에 폭이 45m1탑문이 나온다.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탑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2가 세웠다고 하는데, 그래선지 벽면의 부조도 이시스 여신(Isis)’호루스 신(Horus)’, ‘하토르 여신(Hathor)’ 등의 신들 말고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벽면에 새겨진 조각은 너무나 선명해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림은 이시스와 호르스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인데, 호리호리한 몸매의 이시스는 둥근 원형판이 올라앉은 쇠뿔 모양의 관을 머리에 썼고, 호루스는 머리에 관을 쓰고 새의 형상을 하고 있다. ! 탑문의 앞에는 원래 두 개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탑문의 안쪽도 부조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특히 이시스가 갓난아기 호루스에게 젖을 먹이는 그림이 부조되어 있는 방이 눈길을 끈다. 혹자는 마미시라 적고 있었고, 또 다른 어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6(Ptolemaeos )’가 태어난 탄생소라고 주장했는데, 어떤 게 맞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저 그림이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님께 젖을 먹이는 성화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이겠지만 말이다.

 

 

 

그밖에도 이시스가 호루스를 낳는 장면과 습지에서 호루스를 돌보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이시스는 남편을 죽인 세트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호루스를 파피루스로 대변되는 습지에서 키워야만 했다. 앙크(ankh, 생명의 열쇠)를 들고 있는 크놈신(Khnum, 인간을 창조했다는 신이다)의 형상도 찾아볼 수 있다.

 

 

 

1탑문 너머의 안뜰(中庭) 모습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면 한가운데에 2탑문을 놓고 양쪽에 열주들이 늘어서 있는 모양새이다. 아니 다른 점도 있다. 오른편의 열주들은 회랑을 만들고 있는데 반해 왼편 열주들은 기둥의 아래에다 벽을 만들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중간에는 창문과 같은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열주들이 늘어서있는 오른편 회랑에는 여섯 개의 방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토트(Thoth, 학문의 신)’세샤트(Seshat, 도서관과 글쓰기의 여신)’가 보호하는 신성한 도서관이었다고 한다.

 

 

왼편의 기둥들은 특별한 사연까지 갖고 있단다. 10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오른편과는 달리 왼편은 7개의 기둥만 서있는데 이는 호루스가 칠삭둥이라는 것을 나타낸단다.

 

 

열주 회랑(列柱 回廊)을 지나면 2탑문이다. 신전의 본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보면 되겠다. 2탑문은 높이가 12m로 앞의 것보다 규모만 조금 작아졌을 뿐 생김새나 부조된 벽화는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했다.

 

 

 

신전 안에는 십자가가 그려진 제단(祭壇)도 있었다. 뒤 벽면에도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이집트의 모든 신전을 폐쇄시켰다고 한다. 이곳 이시스 신전도 540년에 폐쇄되었는데, 이후 기독교 분파인 콥트교의 교회로 사용되었단다. 저 제단도 당시에 만들어졌지 않나 싶다. 참고로 꼽트교란 이집트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기독교 분파로 451칼케돈공의회에서 총대주교 디오스코로스가 이단으로 단죄된 데 반발해 로마교구에서 독립했으며, 현재 이집트 인구의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시스 신전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지성소(至聖所, Holy of Holies)‘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신전의 가장 은밀한 곳에 만들어졌다. 그곳에는 이시스가 오시리스에게 앙크 십자가를 넣어 부활시키는 장면과 어린 호루스에게 젖먹이는 모습이 생생하게 양각되어 있어 신비감을 더해 준다.

 

 

호루스가 이시스에게 감사의 예물을 바치는 그림이 눈길을 끈다. ‘이시스(Isis)’ 여신이 남편인 오시리스(Osiris)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호루스(Horus)‘를 돌보는 그림에 대한 연장선상이라고 보면 되겠다.

 

 

오시리스의 부활을 도왔다는 네프티스의 모습도 보인다. 오시리스를 나타내는 사자(死者)의 관 양쪽 끝에는 흔히 이 두 여신의 모습을 그린다고 한다.

 

 

특히 이시스(Isis)‘ 여신의 부조가 가장 많이 눈에 띈다. ’이시스라는 이름의 표의문자인 옥좌(玉座)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소의 뿔 사이에 원판(圓板)을 놓은 관()을 쓰고 있다. 참고로 이시스 여신에 대한 신앙은 이집트 지역 밖으로까지 퍼져나갔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시스교()로서 소 교단을 형성하고 독특한 비의(秘儀)를 갖기에 이르기도 했단다. 또한 그리스 사람들은 그녀를 데메테르, 헤라, 셀레네, 그 밖에 아프로디테와도 동일시했다.

 

 

 

신전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젠 부속건물들을 둘러볼 차례이다.

 

 

이시스 신전의 뒤, 나일강 앞으로 아우구스투스 신전(Temple of Augustus, 사진의 앞쪽 건물)’디오클레티아누스 문(Gate of Diocletianus)’이 자리하고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문(Gate of Diocletianus)

 

 

이시스신전의 동쪽에는 오시리스 신화와 관련이 있는 하토르 신전(Temple of Hathor)’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앞에는 트라이아누스의 정자(Kiosk of Trajanus)’가 있었다.

 

 

하토르 신전(Temple of Hathor)

 

 

트라이아누스의 정자(Kiosk of Trajanus)이다, 필레 유적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 건물로 종려나무와 파피루스 문양이 아름답게 장식된 14개 기둥이 시선을 붙든다.

 

 

부조의 생김새로 보아 이곳이 ‘Graeco-Roman blocks by the temple of Hathor’가 아닐까 싶다. 멤피스의 야외박물관에서 보았던 하토르 여신의 두상과 비슷하게 생겼기에 하는 말이다.

 

 

20세기 초반 영국에 의해 아스완댐(low‘dam)이 건설되면서 우기 때만 되면 필레신전의 기둥 아래까지 물이 차올랐다고 한다. 건물 아랫부분의 색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곳 아킬리카 섬으로 옮긴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원형을 유지하며 신전을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질키아 섬의 화강암을 폭파하고 제거하여 필레 섬과 동일한 지형을 조성한 후 유적 전체를 분해해 옮긴 후 재조립했단다.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섬 전체를 옮겨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주어진 자유 시간을 이용해 신전의 곳곳을 둘러봤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느라 무심코 지나쳤던 곳들을 다시 한 번 살펴봤고, 그런 다음에는 사진 찍을 곳을 찾아 두서없이 돌아다녔다. 결과는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하나같이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하긴 나일 강의 진주라는 칭송을 아무런 이유 없이 받았겠는가. 하물며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어떻게 호수 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겠는가. 건물 전체를 분해해서 돌 하나하나에 번호를 붙여가며 퍼즐을 맞추듯 복원하는 수고를 마다않았던 이유일 것이다.

 

 

 

 

 

 

▼ 필레 신전은 누비아 유적(Nubian Monuments)‘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1979)되어 있다. 포함된 범위는 아부심벨에서 필레까지(from Abu Simbel to Philae)‘이다. 이집트의 남쪽 끝, 수단과의 경계 지역인 누비아 지역에 있는 고대 유적으로 람세스 2세가 세운 아부심벨 대신전과 소신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세운 필레 신전이 대표적이다. 두 유적 모두 1960년대 아스완 하이댐(Aswan High Dam)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했으나,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안전한 장소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야외에는 관람석도 만들어져 있었다. ’필레 신전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 빛과 소리의 축제(Light & Sound Presentation)‘의 부대시설이 아닐까 싶다.

 

 

사원을 돌아다니다보니 아까는 보지 못했던 필레의 첫 번째 사원과 전시된 다른 블록의 잔해(Remains of the first temples of Philae and other blocks on display)’라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기존의 사원을 조각조각 내어 이곳으로 옮긴 다음 원래대로 다시 조립해놓았다니 이 안내도는 현재의 모습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살펴본다면 큰 도움이 되겠기에 하는 말이다.

 

 

 

 

에필로그(epilogue), 이집트 여행을 하려면 먼저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의 이시스신화부터 알아보는 게 좋다. 그래야만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남긴 유적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초에 땅의 신 게브(Geb)‘와 하늘의 여신 네트(Net)‘ 사이에는 4명의 자녀가 있었다. 첫째가 오시리스(Osiris), 둘째가 이시스(Isis), 셋째는 세트(Seth) 그리고 막내가 네프티스(Nephthys)로 오빠인 오시리스와 이시스가 결혼하자 세트는 신들의 왕좌를 형에게서 빼앗고자 오시리스를 죽이고 그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서 나일 강 전역에 버린다. 남편의 시신을 찾아 이집트 전역을 다니며 모아 온 이시스는 남편의 시신 12조각을 동생 네프티스와 함께 부활시키고 그와의 사이에서 이집트의 신이자 인간의 왕인 호루스를 낳게 된다. 폭풍과 전쟁의 신 세트는 호루스의 탄생을 알고 어린 호루스를 죽이고자 뱀이 되어 그를 물었으나 지혜의 신 토트(Thoth)‘의 도움으로 이시스는 아들을 지켜낸다. 그리고 결국에는 호루스에 의해 세트는 죽임을 당한다. 이후 이집트 통일 왕국의 모든 파라오들은 자신들을 살아 있는 호루스로 칭하였고 이시스 여신을 자신들의 왕권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추앙했다. 참고로 이시스 여신은 오랫동안 하토르(Hathor, 호루스의 아내)‘ 여신과 혼용되어 오다가 AD 4세기 이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