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묘산(168.5m)-갈미봉(233m)-천태산(392.1m)

 

산 행 일 : ‘22. 9. 11(일)

소 재 지 : 충남 공주시 의당면 일원

산행코스 : 가산주유소(현대오일)→시묘산→한일시멘트→갈미봉→천태산→동혈사→광덕사→동혈고개(소요시간 : 6.27km/ 2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인터넷에서 ‘천태산(天台山)’을 치면 영동의 ‘천태산(714.3m)’이 가장 먼저 뜬다. 그리고 양산의 천태산(630.9m)과 강진의 천태산(549.4m)이 뒤를 잇는다. 공주(392.1m)와 정읍(197.2m), 화순(482.5m)에서도 동명의 산들이 나름대로의 산세를 자랑한다. 오늘 오른 공주(의당면)의 천태산도 400m에도 못 미치는 높이에도 불구하고 만만찮은 산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온 산의 모든 바위가 ‘구멍이 숭숭 뚫린 구리 색깔(‘銅穴山’으로도 불리는 이유다)’인가 하면,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는 ‘동혈사’라는 천년고찰까지 품고 있었다.

 

▼ 산행들머리는 현대오일 ‘가산주유소’(충남 공주시 의당면 가산리)

천안-논산고속도로 정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43호선(세종 방면)을 타고 내려오다. 덕학교차로(의당면 덕학리)에서 691번 지방도(장군·의당 방면)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가산주유소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시묘산’을 오르지 않을 경우 1km쯤 더 가면 나오는 ‘언고개(송학2리)’에서 시작하면 된다.

▼ 산이 작아선지 단조로운 편이다. 송학리(언고개)나 덕학리(동혈고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들머리로 삼은 다음, 천태산을 찍고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게 일반적이다. 코스가 짧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시묘산을 추가시키는데, 이때는 가산리(가산주유소)를 들머리로 삼는다.

▼ 주유소를 왼편에 끼고 돈 다음,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승용차나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이다.

▼ 들녘이 작아서인지 길은 3분이 채 되지 않아 산자락에 붙는다. 그리고는 왼쪽에 산자락을 끼고 이어진다.

▼ 길을 나선지 5분. 탐방로는 산속으로 파고든다. 이정표야 물론 없다. 거기다 그 흔한 표지기(리본) 하나 매달려있지 않으니 눈대중으로 초입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오른편으로 90도를 트는 지점’이자, ‘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기 직전’이라면 대충 참고가 될지 모르겠다.

▼ 오곡백과가 여무는 데 더없이 좋다는 백로(白露)가 ‘그끄제’였다. 어제는 ‘한가위’, 햅쌀과 햇과일 등으로 차례를 지내는 명절이다. 그런데도 저 들녘의 벼들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춘래불사춘이라더니 올해는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인 모양이다.

▼ 인적이 끊긴 산길은 거칠었다. 잡목과 웃자란 잡초가 갈 길 바쁜 나그네를 자꾸만 붙잡는다. 그렇다고 길의 흔적까지 못 찾을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이 산행 길라잡이의 대세가 된지도 이미 오래다. 그렇다고 앱이 만능이 될 수야 없는 노릇. 산꾼들의 눈은 아직도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를 쫒아간다. 최신 기술에 고전적인 경험을 장착했다고 보면 되겠다.

▼ ‘시묘산’은 200m에도 못 미치는 나지막한 산이다. 그렇다고 마냥 쉬운 산이 어디 있겠는가.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겠는가. 이곳 시묘산도 역시 버겁다 싶을 정도로 가파른 구간을 만나기도 한다.

▼ 숲속으로 들어선지 10분. 자그마한 봉우리를 만난 탐방로가 왼편으로 우회를 한다. 이어서 동쪽으로 난 능선을 타고 ‘시묘산’으로 간다. 특별할 게 없는 상황이지만 길 찾기에 중요한 지점이기에 거론해봤다. 갈모봉으로 가려면 시묘산 정상을 찍은 다음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 5분쯤 더 걸어 시묘산(168.5m)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산’으로까지 분류될 형편은 아닌 듯, 그저 도톰하게 솟아오른 능선상의 한 지점이라고나 할까? 먼저 다녀간 이들이 매달아놓은 표지기가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겠다.

▼ 그러니 정상석이 있을 리가 없다. 그 흔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선두대장을 맡은 ‘그린나래’님이 매달아놓은 따끈따끈한 정상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니 세상의 모든 산을 다 올라보겠다는 ‘만산회’ 멤버들이 묶어놓은 리본들도 보였다. 그들의 놀이터랄 수 있는 강송산악회에서도 이곳을 다녀갔다는 얘기일 것이다.

▼ 꽤 오래 산행을 함께 해온 반가운 이름도 만날 수 있었다. ‘1만 산’ 등정을 위해 쉼 없이 산을 오르던 ‘서래야 박건석’ 선생님이시다. 건강이 안 좋아 요즘은 산행을 못하신다고 하던데, 빨리 쾌차하셔서 산에서 다시 뵈었으면 좋겠다.

▼ 위에서 얘기하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으로 진행한다. 산길의 형편은 아까보다 훨씬 나빠졌다.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코스라는 얘기일 것이다.

▼ 그렇게 7분쯤 내려섰을까 일행들이 갈 생각을 않고 웅성거리는 게 아닌가. 시멘트공장을 만들면서 생긴 절개지가 앞을 가로막아버린 것이다. 이런 때는 선두대장의 모험심과 경험, 그리고 대처능력이 필요하다. 대신 다른 일행들은 그가 내린 결정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 선두대장의 탁월한 능력 덕분에 가장 안전한 루트로 내려설 수 있었다. 먼저 다녀간 이들이 만든 트랙을 무시한 채 새로운 루트를 개척한 덕분이다.

▼ 가파른 경사지를 미끄러지듯 내려서자 ‘한일시멘트 공주공장’이다. 아니 시멘트 제조공정은 ‘단양공장’에서 이루어지니, 이곳은 그 시멘트를 이용해 다른 제품을 만드는 공정일 것이다. 하지만 시설만큼은 단양공장에 못지않게 거대했다.

▼ 길은 한일시멘트 앞에서 둘로 나뉜다. 양쪽 모두 절벽에 가까운 절개지를 끼고 있으나, 먼저 다녀간 이들은 양쪽 모두에서 갈미봉 등산로를 찾을 수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선두대장은 우릴 왼편으로 인도한다. 그쪽이 더 또렷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잠시 후, 첫 번째 모퉁이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정표는 물론 없다. 이곳이 들머리임을 짐작할만한 별도의 시그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튼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또 다른 산행(갈미봉·천태산)을 시작하는 셈이다.

▼ 또렷하진 않지만 길의 흔적은 찾을 수 있었다.

▼ 3분쯤 오르자 무덤이 나오는가 싶더니, 곧 이어 ‘국가지점번호판’까지 세워진 정규 탐방로가 얼굴을 내민다. 참고로 국가지점번호는 산악·강변 등 도로명 주소가 부여되지 않는 비거주지역의 위치정보를 표시하는 번호로, 한글 2자리와 숫자 8자리로 구성된다. 재난·사고 등 응급상황 발생 시 설치된 국가지점번호판의 번호를 119에 알려주면 신속한 현장출동이 가능하다.

▼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가파른 구간마다 침목계단을 놓았는가 하면, 산비탈에는 밧줄난간까지 둘렀다. 지자체에서 꽤 많은 예산을 쏟아 부었나 보다.

▼ 아니나 다를까 ‘세종시계 둘레길’에서 내건 팻말이 눈에 띈다. 세종특별자치시의 시계를 따라 내놓은 길이 151km의 ‘둘레길’로, 모두 12개 구간으로 나뉘는데 이곳은 ‘4구간(개척의 길 : 하봉교차로↔종고개)’일 것이다. 참! 근처에는 송학2리(은곡마을)에서 시작되는 등산로임을 알리는 이정표(송학2리 1㎞/ 동혈사 3.7㎞)도 세워져 있었다.

▼ 오른쪽 산비탈은 철망울타리를 쳐 한일시멘트로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비상용으로 여겨지는 샛문도 보인다. 아까 시멘트공장 앞에서 오른편으로 올라왔을 경우 저곳으로 연결되지 않나 싶다.

▼ 이때 한일시멘트의 야적장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레미탈(remitar)’ 공장이라니 미세 모래를 쌓아두었을 것이다. 레미탈이 미장용 또는 타일부착용 자재(시멘트와 고운 모래의 혼합물)이니 말이다.

▼ 산으로 들어선지 14분, 첫 번째 갈림길을 만났다. ‘세종시계둘레길’의 이정표(종고개← 3.3㎞/ 의랑초등학교↓ 2.7㎞)는 왼편이 4구간의 날머리인 종고개(의당면 유계리)로 연결됨을 알려준다. 둘레길과 헤어지게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세종시계둘레길과 헤어진 산길은 서둘러 고도를 높여간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속도만 조금 떨어뜨린다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한일시멘트에서 산길로 들어서서는 20분)만에 갈미봉 정상에 올라섰다. 밋밋한 육산(肉山)이긴 하지만 약간 뾰쪽하게 솟아오른 게 산봉우리다운 모양새는 갖췄다. 하지만 정상석이나 그 흔한 이정표도 없었다. 그저 삼각점(전의 456)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 갈미봉은 봉우리가 등산로를 약간 벗어나 있어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 수가 있으니 주의한다.

▼ 그게 아쉬웠던지 리딩을 하고 있는 그린나래 대장이 정상표지판(갈미봉, 234m)을 매달아 두었다. 삼각점(233m)과 다른 높이를 적었다는 게 다소 아쉽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덕분에 인증용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

▼ 갈미봉을 지나자 산길이 가팔라진다. 아니 버겁다 싶을 정도로 가팔라졌다. 이럴 때는 속도를 뚝 떨어뜨리는 방법 밖에 없다. 마침 시간까지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았겠는가.

▼ 숨이 턱에 차서 오른다. 이때 코끝을 스쳐가는 한 줄기 향기. 하나 둘 개체수를 늘려가던 소나무가 언제부턴가 솔숲으로 바뀌었다. 그러니 숨을 들이킬 때마다 향긋한 솔내음이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건 당연.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에 확 사라져버린다. 솔향은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품은 향기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 공간이 툭 트이는가 싶더니, 떠나간 무덤 대신 이정표가 터를 잡았다. 송학2리에서 2km쯤 떨어진 지점(동혈사까지는 2.7km)인데, 오른편으로 500m쯤 내려가면 가산사로 연결된단다.

▼ 잠시 후 만난 또 다른 이정표는 거리를 잘못 적었다. ‘동혈사’까지 2.1Km가 남았는데, 그보다 더 먼 곳에 있는 천태산은 0.5km로 적었다. 그게 눈에 거슬린 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매직펜으로 ‘2’를 써넣어 2.5km로 바꿨다.

▼ 계속해서 가파른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기도 한다. 굴곡으로 점철된다는 인생처럼...

▼ 얼마쯤 더 올랐을까 벤치를 놓은 쉼터가 얼굴을 내민다. 이정표는 동혈사가 0.9km쯤 남았음을 알려준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보은사(월곡저수지)로 내려는 길이 나뉜다고도 했다. 그건 그렇고 저 운동기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설마 산에까지 와서 몸을 풀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 천태산은 공주의 4대 혈(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명산이다. 그러니 명당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듯하게 써놓은 저 무덤도 그중 하나일 것이고. 하지만 죽어서 명당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는 동안 복 짓고 업 짓는 게 중요하지.

▼ 무덤은 풍수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배산임수’의 틀을 갖췄다. 그리니 툭 터진 조망은 기본. 세종특별자치시와 시를 둘러싼 산군들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 이후부터는 고만고만한 오르막이 반복된다.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지는 말자, 가팔랐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고 여기면 되겠다.

▼ 그러다가 구호지점표시목(다바 6961-3953)이 있는 봉우리(앱은 355.9m를 찍고 있었다)에 올라섰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40분(갈미봉에서는 40분) 만이다.

▼ 2~3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헬기장이다. 하지만 사용하지 오래인 듯 공터엔 잡초만 무성했다.

▼ 헬기장에서 내려서면 운동기구까지 갖춘 쉼터가 나온다. 왼편으로 내려가면 동혈사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정표(천태산 0.5km/ 등산로 3.7km)에는 ’동혈사‘가 나타나 있지 않으니 참조한다.

▼ 천태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왼편은 비닐망으로 울타리를 쳤다. 동혈사와의 경계를 따라 길이 나있지 않나 싶다.

▼ 잠시 후 올라선 봉우리는 통신시설로 여겨지는 철제구조물이 들어섰다. 이동통신국 아니면 무인산불감시탑이려니 했는데, 의외로 한전의 ’천태산 TRS기지국‘이란다.

▼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왼편에서는 아까 얘기했던 비닐망 울타리가 계속해서 쫒아온다. 그러다가 희미한 갈림길 하나를 만났다. 한전의 기지국에서 5분쯤 되는 지점인데, 이따가 동혈사로 내려갈 때 이 길을 이용하니 잘 기억해 두자.

▼ 갈림길을 지나면서 바위지대가 시작된다. 제대로 된 바위 하나 없던 산에서 나타난 바위들이 신기롭기만 한데, 거기다 생김새까지 범상치가 않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것이다.

▼ 아무리 낮아도 산은 산이다.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거기다 정상부분은 바위지대가 아니겠는가. 저 돌탑이 그 증거라 하겠다.

▼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갈미봉에서 1시간). 바위봉우리인 천태산 정상에 올라선다. 아니 꼭대기만 바위가 오밀조밀하게 몰려 있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그중 가장 크게 보이는 바위에 정상석(392.1m)과 삼각점(전의 23)이 세워져 있었다.

▼ 천태산은 ‘동혈산(東穴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공주의 동쪽 혈(穴, 공주에는 4개의 혈이 있다고 한다)이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일제강점기, 구리가 채굴되고 바위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고 해서 ‘동혈산(銅穴山)’으로 바뀌기도 했으나 광복 후 다시 본래의 이름(東穴山)을 되찾았다고 전해진다.

▼ 이제 하산만이 남았다. 하산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조금 거칠지만 직진(아래 사진)하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서 내려가면, 기암 좌측에 광덕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보인다. 다른 하나는 되돌아 내려가는 방법이다.

▼ 우린 앞에서 얘기했던 삼거리로 되돌아 와 흔적조차 희미한 오솔길로 파고들었다. 다운받은 앱은 양쪽 모두를 가리키지만 선두대장이 조금 더 가까운 코스를 택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하지만 이 루트를 남에게까지 권하고 싶지는 않다. 산짐승, 그중에서도 날씬한 것들이나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팔랐고, 험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 엉덩방아를 두어 번이나 찧고 나서야 ‘동혈사(東穴寺)’로 내려설 수 있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동혈사는, 풍수지리에 따라 공주 지역의 동서남북 네 방위에 지어진 4대 혈사(穴寺)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문헌에는 없지만 절의 역사는 백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웅진 천도 후 천태산의 남동쪽 사면에 조영된 석굴사원에서 비롯됐단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다가 19세기 후반 다시 기록에 나타난다. 현재의 건물들은 1990년대에 옛 절터에서 50m쯤 올라간 곳에 새롭게 지어진 것들이다.

▼ 소문난 수도처의 특징은 시야가 툭 트인다는 점이다. 이곳 동혈사 역시 명품 조망이 펼쳐진다.

▼ 경내는 명심보감용 글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화엄경·금강경·법구경·선어록 등 불가에서 주장하는 금과옥조들을 팻말에 담아 곳곳에 세워놓았다. ‘산길을 거닐며’ 가슴에 새겨두라는 얘기일 것이다.

▼ 대웅전 뒤에는 ‘자연석굴’이 있었다. 어느 불자는 저 굴을 ‘동혈(東穴)’로 적고 있었다. 웅진(熊津, 현재의 공주)을 보호하는 4개의 혈(穴)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굴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웅진이 수도로 존재했던 기간이 고작 63년에 불과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 동혈사는 바위 벼랑에 기대듯 지어졌다. 때문에 대웅전과 나한전은 길고도 가파른 돌계단으로 연결된다. 그마저도 곧장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써가면서 겨우겨우 오른다.

▼ 나한전으로 오르는 도중 뻥 뚫린 구멍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랜 옛날, 동혈사의 스님은 저 구멍에서 나오는 쌀 덕분에 탁발을 하지 않고도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단다. 하지만 이런 소문이 인근에 퍼지면서 상황을 달라졌다. 어느 욕심쟁이 농부가 스님을 살해했고, 더 많은 쌀이 나오도록 구멍을 넓히자, 벼락이 치면서 쌀 대신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벼락을 맞은 농부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고 말이다. 과한 욕심이 화를 불렀다고나 할까?

▼ 계단이 끝나갈 즈음, 돌갓을 쓴 부처님이 절벽에 걸터앉아 있었다. 절벽 가장자리에 앉아 묵언수행이라도 하는 듯. 노송을 일산처럼 쓰고 있는 모양새가 팔공산의 ‘갓바위 부처’를 연상시킨다.

▼ 그 수행에 기라도 보태주려는 듯 ‘3층 석탑(공주시 유형문화제 37호)’이 뒤를 받혀준다. 고려 때 만들어졌다는 탑은 독특한 양식이다. 고려시대에는 자유분방한 사회 분위기가 반영되어 저렇게 층수에 구애받지 않은 이형탑이 만들어지기도 했단다. 하지만 고려시대 양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는 걸 기억해두자.

▼ 계단의 끝은 나한전이다. 바위벼랑을 비집고 들어선 것이 제비집을 연상시킨다.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아난다·가섭을 삼존상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 주위에 십륙나한상을 배치했다.

▼ 나한전에서 내려다본 절간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천년고찰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대웅전 뒤 느티나무가 이를 부정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거대한 몸집을 한껏 부풀린다. 수령이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음직하다.

▼ 시선을 조금 옮기자 조금 전에 살펴보던 돌부처와 삼층석탑이 보인다. 부처님은 (백제 왕도였던) 공주를 바라보고 계신다. 불사를 일으킨 이들은 백제 때, 그것도 웅진의 4대 혈사 중 하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 저건 또 뭘까? 대웅전 근처에서 샛길로 빠져나오는데 거대한 암벽 아래 촛불을 켜두는 유리박스를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눈에 거슬릴 정도로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었다. 바위의 영험하던 기운이 사라져버렸단 의미일까?

▼ 절간을 둘러본 다음 동혈고개로 연결되는 임도를 따라 하산을 이어간다.

▼ 하지만 모험을 좋아하는 선두대장은 그냥 내려가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6분쯤 내려간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더니 능선을 향해 다시 올라간다.

▼ 4분 후 능선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능선 너머에서 ‘광덕사’라는 또 다른 절간을 만났다. 동혈사와 광덕사는 능선을 가운데 두고 남북에 절집이 들어앉은 모양새이다. 동혈사가 따뜻한 양지에 자리 잡은 반면, 광덕사는 음지라서 겨울에는 그야말로 시베리아 벌판으로 변하기 딱 좋겠다. 풍수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절간이 들어설 위치는 아닌 듯. 절간의 살림이 곤궁해 보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 하지만 주변 풍광만을 동혈사에 못지않았다. 거대한 입석이 절간을 보호하고 있는 등 신령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간판도 만만찮다. 위세는 약하지만 ‘광덕종’이라는 종파의 본산이란다. 그래봤자 절간에는 인기척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 아무튼 전각은 여염집에도 못 미칠 정도로 허름했고, 인적 끊긴 절간은 장독마저 뚜껑이 열려있다. 외로운 약사여래상만이 그나마 온전하다고나 할까?

▼ 임도를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절간으로 연결되는 진입로치고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 그렇게 10분쯤 내려오자 동혈사로 올라가는 아스팔트 포장길과 만난다. ‘양극화’. 현대에 들어 대두되는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다. 삼거리에서 그 양극화를 보았다면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 산행날머리는 동혈고개(공주시 의당면 덕학리)

2분쯤 더 진행하자 동혈고개에 내려서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동혈사의 표지석이 절간의 위세를 과시라도 하려는 듯 거대하기 짝이 없다. 그나저나 오늘은 6.27km를 2시간 30분에 걸었다. 산길 대부분이 가파른 오르막이었던 점을 감한하면 꽤 빨리 걸은 셈이다. 산행에 이골이 난 산꾼들의 뒤를 쫒느라 꽤 서둘렀던가 보다.

고용산(高茸山, 295.8m)

 

산행일 : ‘21. 6. 26(토)

소재지 : 충남 아산시 영인면

산행코스 : 용수사 입구→용수사→쇠재 갈림길→암릉→정상→고용사→고용사 입구(소요시간 : 2.87km/ 1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아산시 북부에서 영인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평야 지대에 높이 솟아 있다고 해서 ‘솟을 용(聳)’자를 써 고용산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산은 전체적으로 흙산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위로 오를수록 바위가 많아지다가 정상 어림에서는 완연한 돌산(嶽山)으로 변해버린다. 덕분에 눈요깃거리가 풍부해졌다. 능선에서 만나게 되는 바윗돌들은 물론이고, 정상에서의 조망 또한 큰 자랑거리다. 주변의 아산호는 물론 인근 충청남도 천안, 경기도 평택 시가지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작지만 한번쯤은 꼭 올라봐야 할 산으로 꼽고 싶다.

 

▼ 산행들머리는 ‘용수사’ 앞 버스정류장(아산시 영인면 신화리 산 3-7)

평택·파주고속도로(평택-화성) 오성 IC에서 내려와 국도 43호선을 이용해 아산방면으로 내려오다 신남교차로(아산시 둔포면 신남리)에서 당진방면의 국도(34호선)로 바꿔 탄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철봉교차로(아산시 영인면 신봉리)에서 빠져나온 다음 군도인 ‘토정로’. 이어서 ‘미니스톱 아산영인점(영인면 신화리)’ 앞에서 좌회전하여 ‘고룡산로’를 타고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용수사’ 앞의 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 높은 산이 아니어서 접근로가 다양하고 대부분의 코스가 왕복 2km 남짓하다. 대개는 고용사, 용수사, 용화사, 백련사, 쇠재마을, 작은철봉마을(아산정 활터 앞) 입구를 들머리로 이용한다.

▼ 동쪽, 그러니까 용수사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민가 두어 채가 들어서있을 뿐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평범한 농로이다. 뒤돌아볼 때마다 얼굴을 내미는 ‘성내저수지’가 볼거리라면 볼거리랄까.

▼ 4분쯤 걸었을까 항아리의 주둥이처럼 움푹 파인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용수사’가 얼굴을 내민다. 이 절은 ‘솟을 용(聳)’자에 ‘물 수(水)’자를 써서 ‘聳水寺’다. ‘용’자가 들어가는 대부분의 사찰들이 ‘용 용(龍)’자를 쓰는 것에 비해 특이하다 하겠다. 하지만 인기척을 느낄 수 없어 사연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 흔한 안내판 하나 보이지 않으니 누가 언제 어떤 사연을 갖고 지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 전각이라곤 달랑 대웅전 하나뿐이다. 게다가 기와까지 시멘트 제품을 올린 탓에 공들여 치장한 단청까지 색을 잃어버렸다. 부속건물인 요사채는 그보다 더 현대식 건물이었다.

▼ 사찰 입구에 샘이 예쁘장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자연석을 세우고 누여가며 조형미를 살렸는데, 물은 용(龍)의 입에서 흘러나오도록 했다. 하지만 물이 솟아오른다는 절의 이름이 무색하게 샘은 완전히 말라버렸다.

▼ 용수사의 왼편에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정상까지의 거리는 980m. 산길은 울창한 참나무 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참나무 사이사이에서 물오리나무와 쥐똥나무 개암나무, 생강나무 진달래 등이 들어앉아 빽빽한 숲을 이룬다.

▼ 산길은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이 널찍한데다 경사까지도 거의 느낄 수 없다. 그렇게 5분쯤 걸었을까 길이 양쪽(이정표 : 정상↗ 840m/ 정상↖ 850m/ 용수사↓ 140m)으로 나뉜다. 양 방향 모두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지만 우린 오른쪽으로 향했다. 왼쪽 탐방로는 이따가 고용사로 내려올 때 이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조금씩 가팔라져 간다.

▼ 고용산은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바위산의 참맛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초반에 조그만 바위까지도 만날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래 사진처럼 기묘하게 생긴 바위가 눈에 띄기도 한다.

▼ 오르막길의 경사가 조금씩 가팔라지는가 싶더니 드디어는 허리를 곧추세워버렸다. 짧지만 통나무계단까지 설치했다는 것은 그냥은 길을 내기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다는 증거일 것이다.

▼ 계단은 그 끄트머리에서 능선으로 연결된다. 그리고는 비록 잠시지만 완만하게 이어진다. 울창한 참나무 숲이 그늘까지 만들어주니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 잠시 후 능선이 가팔라지는가 싶더니 이에 발이라도 맞출세라 마주치는 기암괴석의 숫자 또한 점점 불어난다.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한 볼거리들이다.

▼ 요런 바윗길도 가끔 얼굴을 내민다. 오르기가 조금 사나울 뿐 위험하지는 않다.

▼ 반면에 시야가 툭 터지니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을 즐겨볼 일이다. 발아래에서는 성내저수지의 상류가 살짝 얼굴을 내밀고, 그 너머에서는 금산이 고개를 치켜든다. 그런 풍경을 보노라면 마음의 편안함이 덤으로 얻어진다.

▼ 바윗길의 빈도가 점점 높아간다. 하지만 밧줄 같은 안전시설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조금 험할 뿐 안전까지 걱정할 수준은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 바위가 잦다보니 시야 또한 자주 열린다. 이게 바로 고용산 산행의 재미이다. 푸름이 뒤섞인 암릉이 백치미를 자랑하고, 암릉이 이어지는 곳곳은 모두가 전망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하지만 열리는 방향이 비슷하기 때문에 펼쳐지는 풍광 또한 조금 전과 대동소이하다. 그 넓이가 조금 넓어졌을 따름이다. 금산의 왼편으로 국사봉이 하나 더 늘어난 정도랄까?

▼ 정상 방향의 능선을 당겨봤다. 푸름으로 도배된 숲 곳곳에 바위가 돌출되어 있는 모양새인데 그 바위구간에는 어김없이 밧줄이 매어져 있다. 밧줄에 의지해서 올라야하는 구간이 꽤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 잠시 후 얼굴을 내미는 삼거리(이정표 : 정상↑ 0.34㎞/ 성내1리(쇠재)→ 0.59㎞/ 용수사↓ 0.64㎞). 오른편은 성내1리(쇠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 삼거리를 지난 산길은 점차 급경사로 변해간다. 거기다 온전한 바윗길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바위 구간마다 밧줄을 매어놓았으니 이에 의지해 오르면 된다. 다만 평소에 운동을 별로 하지 않는 여성들이라면 며칠 동안 팔이 아플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 처마처럼 생긴 바위가 이채로워 카메라에 담아봤다. 둥글납작한 바위들을 포개놓은 모양새인데 구들장으로 사용해도 괜찮겠다. 그렇다고 이 바위를 무턱대고 오르는 것은 금물. 비가 온 뒤끝이어선지 엄청나게 미끄러웠기 때문이다.

▼ 이후부터는 비탈진 바윗길의 연속이다. 물론 밧줄이 설치되어 있어 큰 위험은 없다. 그저 짜릿한 손맛이나 즐기고 볼 일이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어김없이 성내저수지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왼쪽은 성내리 ‘쇠재마을’이다. 이렇듯 고용산은 조망이 뛰어난 산이다. 해발이라고 해봐야 고작 256m에 불과하지만 평야지대에서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덕분에 육산과 암릉 산행을 겸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코스가 짧아 남녀노소가 산책삼아 오를 수도 있다. 이런 장점들을 지자체가 놓칠 리가 없다. 최근 아산시에서 치유의 숲과 야영장 등을 갖춘 산림관광지로 개발을 발표한바 있다.

▼ 밧줄 난간도 맬 수 없는 곳에서는 우회하며 오르기도 한다. 바위들을 요리조리 돌아서거나 빠져나가고 혹은 올라설 때마다 변화하는 풍광에 또다시 눈이 휘둥그레진다. 군데군데 널린 널따란 바위도 장점이다. 전망도 좋고 쉬어가기도 좋다.

▼ 정상에 가까워질 무렵 기막힌 풍경을 만났다.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바위틈 사이에서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영락없는 반송(盤松)이다. 줄기 밑동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와 우산과 같은 모양으로 자란다는 소나무 말이다. 수형(樹形)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게 반송인데, 이게 기이하게 생긴 바위와 함께 어우러지면서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키고 있다.

▼ 정상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바윗길을 다시 한 번 치고 올라야 한다. 첨부된 지도는 이 부근을 진달래군락이라고 적고 있었다. 혹자는 또 고용산의 가장 뛰어난 자랑거리로 진달래로 뒤덮인 바윗길을 들었다. 그런데도 진달래가 눈에 띄지 않으니 문제다. 어린 참나무와 간간히 서있는 소나무가 전부인 것이다. 아무래도 진달래 군락은 이곳을 말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 산행을 시작한지 45분 만에 정상에 올라섰다. 헬기장이 들어선 정상은 온통 돌멩이투성이다. 문득 어느 지인이 전해주던 이곳 고름산쇠성(고용산의 다른 이름)에 얽힌 옛 얘기 하나가 떠오른다. 아산 현감을 지낸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 1517-1578)’이 꾀를 부려 통인(각 관아의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으로 하여금 자진해서 돌을 깨게 했다는 전설 말이다. 금을 찾지 못한 통인이야 헛고생만 잔뜩 했겠지만, 그가 깨놓은 돌멩이는 50여년 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주민들이 적을 물리치는데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건 그렇고 널따란 정상에는 먼저 온 이들이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오가는 언어가 하나같이 영어이다. 인근 지역(평택)에 미군기지가 들어선 다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풍경이란다. 주말이면 산책삼아 고용산을 오른다는 것이다.

▼ 헬기장을 겸할 정도로 널따란 정상에는 말뚝 모양의 정상표시석이 세워져 있었다. 표기된 높이는 고작 ‘295.8m’. 하지만 너른 들녘 가운데서 우뚝 솟아오른 탓에 눈대중으로는 엄청나게 높아 보인단다. 오죽했으면 지명에 ‘솟을 聳(용)’자를 넣었을까.

▼ 반대편에는 남한에 189개 밖에 없다는 ‘1등 삼각점(아산11)’이 설치되어 있었다. 헬기의 이착륙을 돕는 풍향계와 국기봉도 보인다. 하지만 풍향계는 바람자루가 없고, 국기봉 또한 태극기가 사라진지 오래다.

▼ 또 다른 정상표시석도 보인다. 이번엔 원형의 석판에 고용산(高聳山)이란 지명을 새겼다. 하지만 옛 이름은 ‘고룡산’, ‘고름산’, ‘고령산’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고용산’으로 바뀌었단다. 각종 고지도(古地圖)들도 하나같이 고용산으로 표기하는데, 다만 ‘용’자를 조선지형도(朝鮮地形圖)‘에서는 ‘솟을 聳(용)’자를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날쌜 용(勇)’자를 쓰고 있다. 이밖에도 ‘샘솟을 湧(용)’자나 ‘용 용(龍)’자를 쓰기도 한다.

▼ 이정표가 참 특이하게도 생겼다. 동판에 선(線)만으로 지도를 그린 다음, 그 끄트머리에다 지명을 적어 넣었다. 허나 거리 표시가 빠져있는 것은 천려일실이랄까?

▼ 낯선 풍경도 보인다. 정상에 무덤을 써놓은 것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산정에 무덤을 쓰면 가뭄이 든다고 믿어왔다. 대신 묘를 쓴 사람은 운수 대통해 큰 부자가 된다고 했다. 그러니 어찌 낯선 풍경이 아니겠는가. 가뭄이 극에 달할 경우 정상의 묘를 파헤치고 기우제를 지낸다고 했으니, 이 묘지는 행사용으로 만들어놓은 것일 수도 있겠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화려하다. 일일이 나열하는 게 번거로워 다른 이의 글로 대신해본다. <북쪽으로는 가까이 아산만과 아산호, 평택시 안중 땅이 인접해있고 멀리는 평택시가지도 보인다. 북동쪽으로는 안성시가 보이고, 천안의 성거산, 태조산이 보인다. 남쪽으로는 광덕산·봉수산·설화산·배방산·태학산 등 아산의 온 산이 거의 다 보인다. 서쪽으로는 도고산과 예산·당진까지 보이는 듯하다.>

▼ 산 아래 성내저수지의 푸른 물이 시원하고, 서남쪽 넓은 들 저편에선 영인산이 마주보고 있다. 고개를 오른편으로 조금 돌리자 이번에는 인주면 너머의 아산호가 아래 사진처럼 널따랗게 펼쳐진다.

▼ 자 이젠 하산이다. 동판 이정표가 가리키는 ‘고용사’ 방향이다. 이 구간 역시 시작부터 가파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부분이 흙길이라는 점이다. 거기다 경사진 곳에는 어김없이 통나무계단을 놓았다.

▼ 하지만 곳곳에서 바윗길을 만나기도 한다. 밧줄에 의지해서 내려설 수밖에 없는 구간도 있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나같이 짧고 경사 또한 버거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 하산을 시작한지 6분. 삼거리(이정표 : 고용사 820m↑/ 신봉1리(철봉)→ 1,140m/ 정상↓ 180m)를 만났다. 신봉1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인데 벤치와 평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길은 계속해서 가파르다. 밧줄난간을 설치했을 정도라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술 더 떴다. 능선의 오른편에다 목책을 둘러쳐놓은 것이다. ‘접근 금지. 추락위험’이라는 경고판까지 매달아놓았다.

▼ 목책을 넘어갈 수야 없는 노릇. 고개를 디밀어보니 거대한 바위절벽이 서슬이 시퍼렇게 서있다. 옛날 채석장이 있던 곳이란다. 과거 이곳에서 캐낸 돌들은 전국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만큼 질이 좋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6분쯤 더 내려가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고용사↑ 540m/ 용수사← 510m/ 정상↓ 480m). 왼편은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용수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 하산 길에는 꽤 많은 무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만큼 이곳 고용산이 풍수에 좋다는 얘기일 것이다.

▼ 이곳 고용산은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등산객뿐만 아니라 산책삼아 오르는 사람들까지 모여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돌탑하나 없겠는가. 그 하나하나의 소망들이 돌멩이가 되어 저리도 곱게 쌓였나보다.

▼ 조금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버스승강장 550m/ 정상 950m)가 나온다. 그런데 이정표는 왼편 고용사 방향을 텅 비워놓았다. 스님들의 정진수행을 해치지 말라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우리 부부는 왼편으로 향했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이 그쪽으로 인도하고 있는데다 대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난 길이 무척 또렷했기 때문이다.

▼ 대숲을 빠져나오자 앞이 툭 트이는 대신 길이 희미해져 버린다. 하지만 걱정할 게 뭐겠는가. 오른편에서 ‘고용사’의 전각들이 얼굴을 내미니 말이다. 고용사(절에서 세운 팻말에는 ‘고룡사’로 적고 있었다)도 아까 들머리에서 만났던 ‘용수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 누가 언제 무슨 연유로 지었는지는 파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저 산신각과 범종각 등 서너 채의 전각과 지장보살상, 석탑이 더 들어서 있다는 게 다르다고나 할까?

▼ 대웅전의 규모는 용수사보다도 훨씬 작았다. 그마저도 명부전과 함께 쓴다. 하지만 사세는 제법 넉넉한 듯 싶다. 독경 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지고 있는가 하면, 불공을 드리고 있는 신도들도 꽤 여럿 보이니 말이다.

▼ 절이라는 게 본디 풍수가 좋은 곳에 들어선다고 했다. 이곳 고용사 역시 툭 터진 조망을 자랑하는 게 영락없는 명당이다. 발아래로 연인면의 너른 들녘이 드넓게 펼쳐지는 것이다.

▼ 산행날머리는 ㈜성민산업(아산시 영인면 신화리 6) 앞 도로변

절을 빠져나와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큼지막한 공장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까 고용산으로 들어올 때 이용했던 ‘고룡산로’의 도로변에 위치한 ㈜성민산업의 자동차부품 공장이자 오늘 산행의 날머리이다. 산행이 끝났다는 얘기이다. 고용산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는 1시간 20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신길샘)은 2.87km를 찍도 있다. 산행의 대부분이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은 바윗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봐야겠다.

 

태조산(太祖山, 421.5m)-흑성산(黑城山, 504m)

 

산행일 : ‘18. 3. 1()

소재지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안서동·유량동 일원

산행코스 : 각원사능선삼거리태조산아홉사리고개흑성산흑성산성독립기념관(산행시간 : 3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온라인 산악회



특징 : 흑성산이나 태조산 모두 제대로 된 바위 하나 만날 수 없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고 보면 되겠다. 때문에 가슴에 담아둘만한 산세는 갖고 있지 못하다. 일부러 시야를 터놓은 몇 곳을 제외하고는 조망 또한 보잘 것이 없다. 흙산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는 산으로 보인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산은 잘 가꾸어져 있다. 천안시가 만든 홍보책자에는 태조산을 '수려한 산세에 감탄이 절로 나는 산'이라 했고 '둥그스름하게 연꽃이 핀 듯한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는 천안의 명산'이라고도 표현했다. 천안의 진산(鎭山)으로 천안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흑성산도 마찬가지다. 흑성산성을 복원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만들었다. 특히 흑성산 아래에는 독립기념관이라는 우리 민족의 새로운 성지(聖地)가 조성되어 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 하는 명소이다. 이 독립기념관을 찾아올 때 흑성산이나 태조산까지 함께 끼워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마침 등산로 정비가 잘 되어있어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도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산행들머리는 각원사 주차장(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경부고속도로 천안 IC에서 내려와 23번 지방도(망향로)를 타고 입장면 방향으로 아주 잠깐 달리다가 안서동삼거리(천안시 동남구 신부동)에서 우회전하여 각원사길을 따라 들어가면 잠시 후 산행들머리인 각원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각원사(覺願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재일교포인 각연거사(覺然居士) 김영조(金永祚)의 시주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성금을 더해 1977년에 세워졌다.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사찰을 세우려 한 것이 발원의 본뜻이라고 한다. 1978년에 설법전(設法殿)을 건립하였고, 1979년에 칠성전(七星殿)과 산신전(山神殿), 1984년 관음전, 1996년 대웅보전(大雄寶殿) 등을 차례로 완공했다. 현재는 앞에서 열거한 건물들 외에도 영산전과 성종각, 청동대불 등이 조성되어 있다.




주차장에 내리니 이층으로 지어진 성종각(聖鐘閣)이 중생을 맞는다. 그런데 태조산루(太祖山樓), 태조산에 있는 누각이란다. 절간에 있는 건물치고는 이름이 묘하다. 누각의 형태를 띠고 있으니 ()’자를 쓴 것까지는 뭐랄 수 없겠으나, 낯선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까지는 지워낼 수가 없다. 사찰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이 건물의 아래층에는 특이한 조형물 하나가 놓여있다. 고대의 목조건축에서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기와인 치미(鴟尾)’이다. 각원사 대웅전의 용마루 양 끝에 세웠다는데 그 생김새가 경주 황룡사의 치미를 그대로 베꼈다. 다만 그 재질이 청동에서 기와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경내로 들어서면 국내의 대웅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 나타난다. 정면 7, 측면 4칸의 목조 건물로 34개의 주춧돌이 놓여 있으며 100여만 재의 목재(木材)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외관(外觀)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사분합(四分閤, 문짝이 넷으로 이루어진 문)의 쌍여닫이문이 달려있다. 법당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에 두고 좌우로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대성 자모 관세음보살을 협시보살로 봉안하고 있으며, 불상 뒤에 모시는 후불탱화의 주불은 석가모니불이고, 좌우로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그 회상(會上)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높이 15m에 둘레가 30m나 되는 청동대불이 아닐까 싶다. 칠성전(七星殿, 아래에 첨부된 사진) 옆에다 놓은 제법 긴 계단을 오르면 만날 수 있는데, 무게가 60ton이나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귀와 손톱의 길이만도 각각 175cm30cm나 된단다. 이 불상은 태조산 주봉을 뒤로하여 서향을 바라보며 자비의 미소로 많은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이 대불을 세 바퀴 돌고나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으니 한번쯤 시도해 볼 일이다. 그렇다면 난 어땠을까? 지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속설을 믿겠는가.




칠성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으나 길이 넓은데다 판석(板石)으로 바닥을 깔아놓기까지 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7분쯤 지나자 공들여 쌓아올린 케언(cairn)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로수 역할이라도 하려는 듯이 길의 양편에 줄줄이 늘어서 있다.




케언(cairn)만 있는 게 아니다. 절간의 경내에서나 볼 법한 반듯한 규모의 석탑(石塔)도 세워져 있다. 동자승의 조형물도 보인다. 경배(敬拜)를 드릴만한 것들을 참 많이도 만들어 놓았다.




돌탑지역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곧장 위로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위로 오를 수 있을 정도이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길가에 밧줄까지 매어놓아 힘이 보대끼는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게끔 했다.



오르는 길에는 동굴도 만날 수 있다. 그다지 깊어보이지는 않지만 비박(野營, Bivouac)도 가능하겠다. 그나저나 동굴 안에다 호랑이 조형물이라도 하나 만들어 두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해서라도 옛날 얘기 한 토막을 곁들이면서 말이다. 문득 괴산의 산막이 옛길에서 보았던 호랑이굴이 생각나서 그런 넋두리까지 해봤다.



잠시 후 성거산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뉘는 능선삼거리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35분만이다. 태조산으로 가려면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을 따라야 한다. ‘각원사에 대해 설명해 놓은 안내판과 함께 세워놓은 이정표(태조산2040m/ 성거산 정상3750m/ 좌불상610m)가 진행방향을 알려주고 있으니 길 찾기에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능선을 탄지 7분쯤 지나면 안서동의 ‘e-편한세상 아파트로 연결되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태조산 정상1680m/ 안서 e-편한세상1350m/ 유왕골(약수터)840m)를 지나고, 이어서 4분쯤 더 걸으면 쉼터를 만난다. 정자와 벤치는 물론이고 운동기구까지 갖춘 것이 흡사 도심(都心)의 공원을 보는 것 같다. 이곳 태조산이 천안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더니 그에 걸맞는 대접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산길은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은 함께 온 일행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눠도 될 정도로 널찍하다. 거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가끔 나타나는 급상사 지역엔 나무계단이나 돌계단을 놓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싶으면 밧줄난간까지 설치했다.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갈림길마다 이정표를 세워두었음은 물론이다. 재작년(再昨年)엔가 관할 지자체인 천안시에서 독립종주로를 정비한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는데 그게 마무리되었나보다. 당시 기사에서는 취암산·흑성산에서 시작해서 태조산·성거산·위례산을 지나 부소산·개죽산·작성산·은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애국선열들의 민족혼을 느낄 수 있는 독립종주로라 부르면서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에 걸쳐 사업이 추진된다고 했었다.



그렇게 5분쯤 더 진행하면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7357-7007)’이 세워진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이어서 4분 후에는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7317-6990)’이 세워진 또 다른 봉우리에 올라선다. 둘 중의 하나가 대머리봉(359.6m)일 텐데 어느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잠시 후 천안시 청소년수련원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태조산 정상843m/ 청소년수련원1250m/ 성거산 정상4861m)를 지났다싶으면 산길은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 가파름이 버거울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길어서 수월하지만은 않는 구간이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 의외의 풍경을 만났다. 산꼭대기이다 싶을 정도로 높직한 능선에다 울타리를 쳐놓은 것이다. 능선의 정중앙을 따라 끝없이 쳐진 것이 사유지(私有地)를 구분하려는 목적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교보생명의 사유지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이제는 능선을 따른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태조산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 만이다. 정상은 이층의 팔각정이 지어져 있다. 정상표지석은 정자의 앞에다 배치했다. 태조산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과 함께 건강안내판도 두엇 세워놓았다. 공원처럼 잘 가꾸어 놓았다는 얘기이다. 이곳 태조산이 천안의 진산이라더니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산이 낮은데다 산세까지 완만해서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태조산(太祖山)이란 지명은 고려 태조가 이곳에서 군사를 양병했다는 설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또한 왕건을 도운 도선국사(道先國師)는 이곳에 와서 지형을 정찰한 후 이곳은 하늘 아래 가장 평안한 동네로다.’라고 말했단다. 천안(天安)이란 지명이 생긴 이유이다.




정자의 아래에는 조망판까지 세워놓았다. 널따랗게 펼쳐지는 천안시가지와 함께 천안아산신도시까지 그려 넣었다. 일봉산과 남산, 봉서산, 노태산 등 시가지가 품고 있는 산들을 표기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런 경관을 보려면 정자의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 주변의 잡목들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위에 내몰려 갈 길을 서두른다. 겨울잠을 자던 개구기라 나온다는 경칩(驚蟄)이 코앞인데도 맹추위는 물러갈 줄 모르는 모양이다. 바닥은 아직도 살얼음이 꽁꽁 얼어있고, 볼을 스쳐가는 바람은 모든 사물을 금방이라도 꽁꽁 얼려버릴 것 같다. 아무튼 울타리를 따라 400m쯤 내려서니 오른편 철조망 너머로 난 길이 하나 보인다. 하지만 들어오지는 말라는 안내판이 매달려 있다. ‘교보생명 계성원(연수원)’ 시설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나타나는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면 삼각점이 설치된 봉우리에 닿는다. 이정표(3포스트1230m/ 교육원삼거리1670m/ 태조산600m)는 이곳의 위치를 ‘2Post’로 적고 있다. 그리고 진행방향을 3포스트라고 표기해 놓았다. 보는 이를 헷갈리게 만드는 지명이 아닐까 싶다. 기존의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지명을 사용하려면 이정표에다 간략하게나마 지도를 함께 그려 넣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진행방향의 울타리를 열어놓은 걸로 보아 사유지는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잠시 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주능선을 따라 난 산길과는 별도로 임도(林道) 하나가 왼편으로 나있는 것이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은데다가 임도가 워낙 널따랗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산악회의 방향표시지도 왼편을 향하고 있다. 선두대장도 길이 헷갈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다른 의도가 있겠거니 하고 방향표시지를 따르고 본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결정이었다. 선두대장도 이를 알고 어디쯤에선가 방향을 틀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곳에다 표식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이를 놓치고 끝까지 내려가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바닥에 쌓인 낙엽이 깊어진다. 그만큼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고 임도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게 10분 남짓 내려서니 도선사라는 사찰이 나온다.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사찰이라는데 건물부터가 여느 여염집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평범하면서도 작은 절간이다. 그저 약수(藥水)를 품어내고 있는 입구의 두꺼비상이 눈길을 끄는 것이 모두라고 보면 되겠다.



이후부터는 도선사의 진입로를 겸하고 있는 임도를 따른다. 잠시 후 전원주택들이 간간히 보이는 마을길을 지났다싶으면 8분 후에는 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목천읍 유왕골과 지산리를 잇는 시도(市道, 덕천1)이다.



도로를 따라 6분쯤 걷자 태조산과 흑성산의 경계인 아홉싸리고개에 이른다. 산길은 왼편 축대의 위로 열린다.



들머리 부근에서 잠시 가파르던 산길은 이후부터는 느긋하게, 그러나 지속적인 오르막길을 만들면서 꾸준히 고도(高度)를 높여 간다. 하지만 길의 상태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한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데다가 계단 등의 안전시설도 일절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에 올랐던 태조산과는 달리 버려져 있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그러다보니 정상 가까이에서는 고초를 겪기도 한다. 가파른 오르막길에 살얼음까지 깔려있어 미끄럽기 짝이 없는 데도 몸을 의지할만한 것들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고갯마루에서 40분 만에 대전MBC 흑성산 TV중계소앞에 올라선다. 유난히도 많아 보이는 흑성산의 통신시설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어서 나타나는 임도를 따라 조금만 더 오르면 널따란 헬리포트에 이른다. 천안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전망대이다.




헬기장 뒤에 보이는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공군 항로보안단의 지대와 미극동공군의 통신대란다. 때문에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흑성산성 쪽으로 가려면 군부대의 철조망을 따라 난 비탈길을 걷는 모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살얼음이 얼어있는 오늘 같은 날에는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길이다. 그런 모험이 싫은 사람들에게도 방법은 있다. 대전MBC 흑성산 TV중계소 앞으로 내려가서 왼쪽의 임도로 나아가면 흑성산성에 이를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행글라이더 활공장에서 바라보는 일망무제의 조망은 포기해야만 한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대전방송(TJB)의 중계시설이 있는 정상부분의 아래에 고려 말 북쪽의 홍건적과 남서쪽의 왜적의 침입을 격퇴했다는 김사혁 장군의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전적비의 옆에다 세워놓은 정상표지석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다. 아니 정상석에 비해 전적비가 너무 크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참고로 흑성산의 본래이름은 검은산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검다'는 뜻을 그대로 옮겨 '흑성산'으로 바꾼 것이란다. 태조산에서 흑성산까지는 1시간 20분이 걸렸다.




정상석의 맞은편에는 흑성산성이 복원되어 있다. 성문(城門) 앞 광장 양쪽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만큼 조망이 좋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2012년엔가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로 선정되기도 했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전망대에 서면 천안 일대가 빠짐없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이곳을 명당이라고 하나 보다. 맞다. 흑성산은 풍수지리상 서울의 외청룡에 해당되고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즉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의 명당 길지로 예로부터 '좌우동천승적지(左右洞天勝敵地)'라 불리었다고 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김시민, 이동령, 이범석, 유관순, 조병옥 등 많은 구국열사가 배출된 원인이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말하는 좌우동천승적지는 석천리와 지산리의 승적골(勝敵谷)을 말하는데 석천리의 승적골은 5(덜목, 제목, 칙목, 사리목, 돌목)의 사이에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 있기 때문이며, 지산리 승적골은 매우 아늑하여 예부터 피난처로 알려져 있단다.



성안(城內)으로 들어서자 경주의 첨성대(瞻星臺)를 닮은 건축물 하나가 눈에 띈다. 성 밖의 사정을 성안의 군사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던 노대(弩臺)‘라고 한다. 수원 서장대(西將臺)의 서북측에 동향으로 자리 잡은 서노대(西弩臺)를 본 따 축조한 것으로 누각이 없이 쇠뇌(弩砲=노포)를 쏠 수 있게 만들었으며 전돌을 쌓아 방형의 대를 만들었고 모서리를 깎아 모를 없앤 게 특징이란다. 참고로 흑성산성(黑城山城, 충남 문화재자료 제364)은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쌓는 방식)으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천안의 옛 산성 중 기록이 남아 있는 유일한 산성이다.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성의 둘레가 약 2,290(), 높이가 6자이며, 그 안에 샘이 두 곳 있는데 날이 가물 때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은 둘레 약 570m이나 산성 대부분이 훼손되어 원형을 찾기 어렵다. 그 중심부에는 미군(美軍) 시설과 KBS 등의 송신소가 있다.



▼ 끄트머리로 나아가면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다. 문득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자란 휴식이나 여가를 즐기는 공간이다. 그런 시설이 산성 안에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산성이란 게 본디 적을 막기 위한 시설 중에서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안내판에도 이에 대한 고증은 적혀있지 않다. 아무래도 천안시가지나 독립기념관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展望臺)용으로 만들어놓지 않았나 싶다. 난간에 설치해 놓은 조망도가 그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참 반대편에도 공심돈(空心墩)이란 건축물을 지어놓았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망루(望樓)와 포루(砲樓)의 역할을 겸하던 돈대(墩臺)인데 이 역시 수원성의 것을 벤치마킹(benchmarking)했다고 한다. 그만큼 흑성산성에 대한 고증(考證) 자료가 빈약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석 옆에 있는 철계단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 산길은 성벽의 아래로 옹색하게 나있다. 아니 ‘KBS 대전총국흑성산중계소의 축대라 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성벽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그런데 이정표(전망대0.2Km, 단풍나무 숲길 1.4Km/ 흑성산성0.7Km)에는 두 방향만 표시해 놓았다. 흑성산성을 왼편으로 돌아가도록 하면서 우리가 내려왔던 길을 아예 빼버린 것이다. 내려오던 길이 좁으면서도 옹색하다는 느낌이 강했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4분 후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 만들어진 전망대에 이른다. 전망대에 오르면 독립기념관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저곳에 들어서게 된 이유는 동쪽의 병천면에 3·1운동의 한 본거지였던 유관순기념사당이 있어 독립운동과 관계된 곳이라는 점과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지형이 평탄한 넓은 땅이 있다는 입지조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저곳에 독립기념관이 들어서게 된 것과 관련하여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 1691-1756)에 얽힌 일화 하나가 전해진다. 영조 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죽자 그의 묘소를 지금의 독립기념관 자리에 정하였는데 이때 어느 유명한 지관이 이곳은 2~3백년 후에는 나라에서 요긴하게 쓸 땅이므로 그때가면 이장을 해야 되니 이곳에서 십여 리 동쪽에 묘를 쓰라고 권하여 지금의 북면에 위치한 은석산에 묘소를 정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예언대로 독립기념관이 들어섰으니 풍수지리상 명당 길지인 이곳이 제구실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전망대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자, 산길은 갑자기 가파르게 변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가파르다. 길가에 밧줄난간을 만들어 몸을 의지할 수 있도록 해놓았을 정도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계속해서 능선을 탈 경우에는 흑성산기도원으로 연결된다. 독립기념관으로 내려가고 싶을 경우에는 이정표(단풍나무 숲길0.9Km/ 교친21.0Km/ 흑성산성1.2Km)가 가리키고 있는 왼편 단풍나무 숲길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 구간도 역시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밧줄난간이 매어져 있다는 점도 조금 전의 능선길과 같다.



산행날머리는 독립기념관

17분쯤 후 널따란 아스팔트포장 도로에 내려선다. 길가에 ‘B코스, 흑성산 정상가는 길, 1500m’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진 걸로 보아 우리가 제대로 내려온 모양이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길가엔 단풍나무들이 줄을 지어 심어져 있다. 이정표에 적혀있던 단풍나무 숲길이 바로 이곳인가 보다. 이는 곧 산행이 마무리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30분쯤 쉬었으니 실제로 걸은 시간은 3시간 30분인 셈이다.



잠시 후, 진행방향 저만큼에 독립기념관이 나타난다. 외침(外侵)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 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國難克服史)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전시·연구함으로써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민족정신을 북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건립된 겨레의 전당이다. 해방 이후 독립기념관 건립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정부에서 부지(400)를 매입하였고 국민의 성금(49024325009, 198648일 기준)으로 건립 자금을 충당했다. 원래는 1986815일에 개관할 예정이었으나, 그 해 84일 뜻하지 않은 화재가 일어나 1년을 늦추어 개관하였다. 현재 75개동의 건물에 총 9만여 점의 유물이 전시·보존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문화유산과 역사적인 자료들을 전시해놓은 제1전시관부터 항일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제7전시관까지 총 7개 전시관이 있다.



겨레의 큰 마당’, 즉 길이 258m에 폭이 222m나 되는 겨레의 집앞마당에는 사람들로 넘치고 있다. ‘삼일절행사가 열리고 있는 모양이다. 기념행사나 음악회 등과 같이 수만 명이 모이는 큰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설계된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셈이다.



줄타기공연이 한창인 마당 뒤편의 겨레의 집은 독립기념관의 상징적 건축물로, 기념 홀의 역할을 한다. 길이 126m, 68m, 높이 45m 에 이르는 규모로, '동양최대의 기와집'으로 설명된다. 전통 건축물의 맞배지붕양식을 본떠 설계되었으며, 기와는 구리로 제작되었다. 현판은 서예가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이다. 겨레의 집 내부에는 불굴의 한국인상이라는 한민족의 기상을 담은 거대한 조각상이 유명하다. 태극기를 들고 앞을 가리키는 인물을 필두로 여러 인물들이 그와 함께하는 형태의 군상(群像)인데, 온 몸을 바쳐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신 순국선열들의 얼을 형상화한 작품이란다.



오늘은 31, 아흔여덟 번째로 맞는 삼일절이다. 이렇게 뜻깊은 날을 독립기념관에서 가만 놔둘 리가 없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1,919명의 명예독립운동가의 대한독립만세행진등 다양한 시민 참여형 문화행사가 열린다고 했다. 국가상징물인 태극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자 하는 행사도 그중 하나이다. ‘겨레의 큰 마당에 약 900여 기의 태극기를 설치한 길이 110m‘31 태극기 터널을 조성해놓았다.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함께 적어놓은 어록(語錄)을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한 공간이다. 그런데 옛날과 같은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상징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부 사람들의 행태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신념을 위해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 것까지야 뭐라고 하겠는가마는 함께 들고 나온 성조기가 태극기의 본 뜻을 오염시키는 것 같아서이다. 거기다 이스라엘 국기까지 보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난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는 않는 편이다. 현 정부에 표를 던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난 요즘 태극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차장으로 나가는 길에 마치 두 손을 모아 뭔가를 빌고 있는 듯한 대형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아니 막 대지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 같기도 하다. 민족의 비상을 상징하는 겨레의 탑인데 그 높이가 무려 51.3m나 된다고 한다. 과거·현재·미래에 걸친 영원불멸의 민족기상을 표상하고 민족의 자주·자립을 향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단다. ·후면에 무궁화와 태극(太極)이 약동하는 부조(浮彫)가 있고, 탑 내부에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 사신도(四神圖)를 상징화한 모자이크 조각이 4면을 장식되어 있다. 또한 바닥에는 화강석으로 국토가 그려져 있고, 구리 주물관 24()로 방향을 표시하고 있단다.


운주산(雲住山, 459m)

 

산행일 : ‘18. 2. 6()

소재지 : 세종시 전동면과 전의면의 경계

산행코스 : 고소재삼각점봉임도삼거리운주산 정상운주산성 순환로서문지고산사운주산성 주차장(산행시간: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산악회


특징 : 세종특별자치시의 진산(鎭山)인 운주산은 관내에서 가장 높은 산(459m)일 뿐만 아니라 아픈 역사의 유적지(遺蹟地)를 품고 있는 산이다. 정상을 기점으로 3개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包谷式)으로 쌓아올린 운주산성(충남도지정기념물)’을 말하는데, 백제 멸망 후 풍왕과 복신, 도침장군을 선두로 일어났던 백제부흥 운동군의 최후의 구국항쟁지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선지 산은 전체적으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널따란 등산로에 조금이라도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그리고 길이 나뉘는 곳마다 이정표를 설치했으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한마디로 산림공원(山林公園)을 만들어 놓은 셈이다. 산세 또한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서 오르내리는데 어려움도 없다. 경사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거기다 2~3시간이면 넉넉히 산행을 마칠 수 있으니 가족단위의 산행에 적합한 산이라 할 수 있겠다.


 

산행들머리는 세종시 국가유공자묘역(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봉대리 산 30-10)

논산-천안고속도로 남풍세 IC에서 내려와 조치원·공주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1번 국도를 탄다. 전동교차로(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석곡리)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나와 굴다리 아래를 통과하면 전동삼거리(전동면 노장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전동로를 따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전동면과 전의면의 경계에 놓인 고갯마루인 고소재에 올라서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고갯마루의 왼편에는 널따란 묘역(墓域)이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에서 조성한 국가유공자묘역이란다. ‘국가유공자묘역이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護國英靈)들을 모시는 묘역을 말한다. 다시 말해 국민의 애국정신 함양을 위한 호국의 성지(聖地)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한 묘역이라는 얘기이다. 이런 사업은 국가에서 하는 게 보통이지만 요즘에는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자기 지역 출신을 기리는 사업이니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이곳이 국가유공자 묘역임을 알리는 표지석의 왼편으로 들어가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등산로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100m쯤 들어가자 맞은편 산자락으로 올라갈 수 있게끔 계단이 놓여있다. 망설일 필요 없이 올라서면 된다. 참고로 망경산으로 가려면 들머리가 있는 도로 건너편에서 이정표(망경산 정상0.6Km/ 전동면/ 천안시/ 운주산 정상4.2Km)를 찾아야 한다. 0.6Km쯤 올라야 만나게 되는 망경산은 천안에 소재하고 있는 망경산(600.1m)과 구분하기 위해 작은 망경산이라고도 불린다.



언덕 위로 오른 산길은 묘역(墓域)을 조성하면서 깎아내린 절사면(切捨面)의 왼편 가장자리를 따른다. 덕분에 발아래에 있는 국가유공자 묘역과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망경산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지자체(地方自治團體) 단위의 묘역이어선지 들어선 묘의 숫자는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5분쯤 걸려 묘역을 통과하면. 모퉁이에 세워진 이정표(운주산 정상4.1Km/ 망경산 정상0.7Km)가 능선에 올라섰음을 알려준다. 희미하나마 오른편 능선으로도 길의 흔적이 보이는 걸 보면 고갯마루에서도 이곳으로 올라오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은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은 두엇이 나란히 서서 걸어도 될 만큼 널찍한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높이가 459m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이니 일부러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길이 나뉘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을 뿐만 아니라, 길이 나있으나 등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방향에는 친절하게도 등산로 아님이라는 표시까지 해두었다.





그렇게 봉우리 몇 개를 넘자 벌목(伐木)으로 인해 생긴 개활지(開豁地)가 나타난다. 천안시 방향으로 시야가 뻥 뚫린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의 없다. 짙게 낀 연무(煙霧)가 시계(視界)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길이 순하다고 해서 맨날 완만한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골이 깊을 뿐만 아니라 경사까지도 급한 곳이 나온다. 하긴 높이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오르내림의 폭()이 큰 충청도 지역 산들의 특징이 어디 가겠는가. 다만 이곳 운주산은 그런 특징이 약할 따름인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4분 만에 삼각점봉에 올라선다. 해발이 240m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봉우리이다. 그래선지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등산로에서 약간 비켜난 지점에 설치해놓은 삼각점(청주 402)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긴 이름도 없는 봉우리에서 정상석을 찾는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걷자 산길은 임도로 내려선다. 그리고 50m쯤 떨어진 곳에서 산길은 또 다시 임도와 헤어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임도와 만났다가 헤어지는 지점마다 이정표(운주산 정상 1.5Km/ 망경산 정상 3.3Km)가 세워져 있고, 특히 다시 만나는 산자락에는 침목(枕木) 계단이 곱게 놓여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누군가는 이곳을 밤실고개라고 적고 있던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10분 후, 또 다시 임도(이정표 : 운주산 정상 1.1Km/ 망경산 정상 3.7Km)를 만난다. 이어서 밀양 박씨묘역을 만났다 싶으면 임도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6분 정도 임도를 따르다보면 삼거리가 나온다. 아니 능선을 따라 오솔길이 나있으니 사거리(이정표 : 운주산 정상0.6Km/ 봉대리/ 미곡리/ 망경산 정상4.2Km, 노곡리)라 부르는 게 옳겠다.



길가에 세워진 국가지점번호 표시판이 눈길을 끈다. 상단에다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해 놓은 것이다. 생산되는 전기를 어디에 사용하는지는 몰라도 처음 보는 외형이다.



운주산으로 향한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자 경고판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경사가 심한 곳이니 미끄럼에 주의하란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침목(枕木)으로 계단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였던지 계단의 가장자리를 따라 밧줄난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거기다 이 구간은 거리까지도 짧다.



하지만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첫 번째 계단이 끝났다 싶으면, 진행방향의 산자락에 놓인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이번 것은 아예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문득 백팔계단을 만났던 기억이 난다. 어디에선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108개나 되는 그 계단을 오르면서 백팔번뇌(百八煩惱)를 떨쳐버리라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108개의 계단을 오르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나타나는 계단에 비하면 백팔계단은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 할 수 있겠다. 계단의 숫자가 108개가 아니라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을 것 같기 때문이다.




15분 조금 못되게 죽을 고생을 하면 계단은 끝난다. 하지만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또 다른 긴 계단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계단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이번 것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이다. 오르는데 걸리는 시간이 10분을 넘기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45분 만에 둥그런 대() 모양으로 생긴 정상(이정표 : 고산사1.7Km/ 성곽순환로/ 망경산 정상4.8Km)에 올라선다. 운주산(雲注山)항상 구름이 머무는 산이라는 뜻으로 구름 운()’살 주()’ 자를 쓴다. 하지만 옛 이름은 고산(高山)이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그 증거를 금성산 아래에 있는 비암사(碑岩寺)에서 소장하고 있는 4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여러 형태의 스님들을 형상화한 괘불의 아랫부분에 쓰여 있는 글씨에서 찾는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운주산(雲住山)전의현(全義縣)‘의 남쪽 7리에 있는데 증산(甑山), 고산(高山)과 더불어 솥발 모양으로 솟아있다.’는 기록과 대비시키며 문헌(文獻)에서 나오는 운주산이 현재의 금성산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결부시킬 경우 현재의 운주산은 자동적으로 문헌상의 고산이 된다. 또한 그들은 조선 초기까지 해도 '고산'이라 불려왔으나 조선 후기에 '운주산(雲住山)'으로 잘못 기록되면서 이런 결과가 빚어졌다고 주장한다.



정상은 둥그런 모양의 대지(臺地)로 이루어져 있다.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제단(祭壇)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위에 고유문이라고 적힌 빗돌이 세워져 정상표지석을 대신하고 있다. '고유문(告由文)이란 국가나 일반 개인의 집에서 큰일을 치르고자 할 때나 또는 치른 뒤에, 그 이유를 신명(神明)이나 사당(祠堂)에 모신 조상에게 알리는 글을 말한다. 이로 보아 이곳 운주산 정상에서 해마다 지내오고 있다는 고산제(高山祭)’ 행사를 위해 만든 시설물이 아닐까 싶다. ! 깜빡 잊을 뻔했다. 이곳이 정상임을 알리는 또 다른 표식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고유문 빗돌을 올려놓은 대 옆에 삼각점(전의 024)을 설치하고 이곳의 해발고도를 459m로 적어 놓았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괜찮은 편이다. 동쪽 방향으로 시야가 열리는데, 같은 산줄기에 있는 망경산과 동림산을 중심으로 그 오른편으로는 청주시가지가 그리고 왼편에는 천안 제5 일반산업산지가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천안시에 소재하는 독립 기념관과 청주시 및 아산만까지 보인다는데, 오늘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도 걷히지 않고 있는 연무(煙霧) 때문이다. 아니 동림산 우측에 있어야할 청주시가지까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그나마 그쪽 방향에 세워놓은 조망도 덕분에 눈에 들어와야 풍경화의 포인트들을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다.



()의 아래에는 백제의 얼 상징탑이 우뚝 솟아있다. 백제 부흥 운동을 하다 죽은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탑()라고 한다. 이곳에서 그들의 명복을 비는 천도재(薦度齋)를 매년 올리고 있는데, 백제가 멸망한 음력 98일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그 즈음의 토요일에 고산제(高山祭)’라는 이름으로 열리고 있단다. 참고로 고산제는 여지도서(與地圖書)’충청읍지(忠淸邑誌)’ 등에 나오는 운주산의 옛 이름 고산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에서 몇 걸음 내려서자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뉜다. 뜬금없는 운주산성 안내판말고도 이정표(성곽순환로 청송약수터0.8Km/ 고산사1.6Km/ 뒤웅박고을2.2Km, 전동면사무소 5.4Km/ 운주산 정상)가 세워져 있으니 잘 살펴보고 길을 나설 일이다. 하산지점인 고산사로 내려가는 길이 두 개로 나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민할 필요까지는 없다. 어디로 가더라도 고산사에 이르기는 매한가지니까 말이다.



이정표가 등산로로 표기하고 있는 고산사 방향의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널따란 데다 판석(板石)까지 곱게 깔아 놓았다. 성곽까지의 거리 또한 짧다. 하지만 인위적인 냄새가 강해 산행하는 재미는 뚝 떨어진다.



좋은 길을 놓아두고 성곽순환로를 따른다. 운주산성을 조금이라도 더 음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산허리를 따라 난 오솔길은 자연 그대로이다. 세월 따라 자연스레 만들어진 오솔길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성곽(이정표 : 성곽순환로/ 청송약수터0.5Km/ 운주산 정상0.4Km)이 나타난다. 최근에 복원을 해놓은 듯 쌓아올린 돌들의 색깔이 하얗다. 아마 동문지(東門址)일 것이다. 성문의 안쪽에 있는 사각의 터에는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다. 무슨 건물이 있던 자리인 것 같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울타리 앞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나, ()에 대한 안내가 아니라 운주산성 전반에 대한 설명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안내판을 세운 공무원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겠지만, 뭔가를 하나라도 더 알아보고 싶어 하는 탐방객들에게는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영락없이 닮았다며 바위 하나를 가리킨다. 맞다. 그녀 말마따나 맹꽁이를 쏙 빼다 닮았다. 바위다운 바위 하나 보이지 않던 산길에서 처음으로 만난 바위가 눈요깃감이라니 행운이라 할 수도 있겠다.



잠시 후 정자(亭子) 하나가 나타난다. 조망이 좋은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곳에다 정자를 지어놨는지 모르겠다.



정자를 지났다싶으면 또 다시 성곽(城郭)을 만난다. 운주산성(雲住山城)의 서문지(西門址)일 것이다. 성곽은 오래된 고성(古城) 답지 않게 깔끔하고 정돈이 잘 된 느낌이다. 이곳 역시 최근에 복원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상에서 이곳 서문지까지는 대략 40분 정도가 걸렸다. 참고로 운주산성(雲住山城 :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1)은 운주산 정상을 기점으로 서·남단 3개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包谷式 山城 :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 일대를 돌아가며 벽을 쌓는 방식)’이다. 성의 둘레는 3,098m, 이것이 외성(外城) 구실을 하고 있고 성안에 543m 규모의 내성(內城)이 있다. 그러니까 이중성(二重城)인 셈인데 하나는 석성(石城)이고 하나는 토성(土城)으로 같은 시기에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세종시에서 세운 안내판에는 내·외성이 모두 석성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백제시대에 축성된 이후 고려와 조선을 지나면서 큰 전쟁을 치루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붕괴된 것을 최근에 이르러 복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참고로 유적지 발굴과정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와 토기의 조각들이 다수 수습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 어골문(魚骨文)과 격자문(格子文)이 장식된 기와조각을 비롯하여 토기조각이 발견되고 조선시대 백자조각도 수습되었단다. 이로보아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초까지 사용되어 온 산성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운주산성은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풍왕과 복신, 도침장군을 선두로 일어났던 백제부흥 운동군의 최후의 구국항쟁지(救國抗爭地)로 알려져 있다.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한 후 백제 유민들은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임존성에서 흑치상지와 복신이 이끌던 부흥군은 도침대사가 이끄는 주류성으로 모여 나당연합군을 크게 물리쳐서 빼앗겼던 수많은 성을 회복한바 있다. 당시 복신과 도침대사가 근거지로 삼아 승리했던 주류성의 위치가 바로 이곳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주장의 근거를 백강에서 가깝고 농사짓는 땅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돌 많고 척박해 농사지을 수 없는 곳이다라고 적은 일본 최고(最古)의 정사(正史)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찾는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도 주류성은 연기군에 있다고 주장했다. 위 묘사와 가장 근접하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주류성의 위치를 두고 홍성의 학성산성서천의 건지산성’, ‘부안의 위금암산성등으로 견해가 갈린다.



그나저나 백제 부흥군은 그들이 바라던 바를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야 어떠했던 간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음으로 최후를 맞은 3년여의 삶을 그려보자. 그들의 영혼이 1300여년 세월을 넘어 운주산 골짜기마다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리고 이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보자. 우리 모두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함으로써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자는 얘기이다.



산성의 안은 공원으로 가꾸어 놓았다.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팔각정자와 연못, 평상 쉼터와 산책길 등 가족과 여행객들이 잠시 머물며 숨을 고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산성에서의 스산한 마음을 뒤로 하고 무거운 발길을 고산사로 돌린다. 내려오는 길가에는 유난히도 돌이 많다. 운주산이 전형적인 흙산임을 감안할 때 의외라 할 수도 있겠다. 혹시라도 백제 유민들이 흘린 눈물방울이 돌로 변한 것이나 아닐까? 그렇다면 난 지금 백제유민들의 한 맺힌 눈물을 발길로 차며 내려가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서문(西門)에서 고산사로 내려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그중 하나는 임도를 따라 편안하게 내려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덜길을 이용해 곧장 고산사로 내려가는 방법이다. 성문 앞에 세워진 이정표(고산사 0.7Km/ 임도/ 운주산 정상 1.0Km)에는 고산사로 곧장 내려가는 길에다 등산로라고 표기를 해놓았다. 오솔길이 더 바람직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물기 없는 계곡을 따라 난 길을 20분 남짓 내려서자 계곡 옆 산자락에 들어앉은 사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운주산의 옛 이름인 고산(高山)’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고산사(高山寺)‘이다. 고산사(高山寺)라는 절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고색창연한 옛 절도 아니고, 명성을 크게 떨칠 만큼 위세 당당한 가람(伽藍)은 더욱 아니다. 1966년에 지었으니까 역사 또한 일천할 뿐이다. 하지만 창건 사연만은 남다른 데가 있다.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과 비명에 숨진 백제 부흥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원찰(願刹)이란다. 참고로 이 절은 운주문화연구원의 최병식 원장이 지었다고 한다. 백제 역사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전공인 전자공학까지 버린 늦깎이 고고학자(考古學者)’란다. 주지스님은 법광이다. 백양사와 선운사에서 승가대학장을 역임했다는 이력이 돋보이는 스님이다.



절의 대문을 겸하고 있는 2층짜리 종각(鐘閣)‘은 이름부터가 백제루’(百濟樓)‘이다. 절집 누각으로는 매우 독특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백제를 향한 창건주의 열망이 묻어나는 수식어라 할 수 있겠다. ()에는 백제삼천범종이 걸려 있다.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 나당연합군과 마지막까지 싸우다 비명에 숨진 백제 부흥군의 원혼을 위로하고자 조성한 범종이라고 한다.



마당으로 올라서면 백제국 의자대왕 위혼비(百濟國 義慈大王 慰魂碑)’가 눈에 들어온다. 위혼비 너머로 보이는 전각(고산사를 설명하면서 첨부한 사진과 같은 전각이다)백제극락보전(百濟極寶殿)’이다. 당나라에 끌려가 세상을 떠난 의자왕과 백제를 재건하려다 산화한 부흥군의 극락왕생을 빈다는 의미일 것이다. 보다 더 상세히 알고 싶다면 백제루 앞에 세워놓은 공덕비(功德碑)’를 찾아볼 일이다. 운주산성의 유래, 백제 부흥운동의 개요, 1997년 고산사 창건의 동기와 백제극락보전 중창의 의미를 간략하게 적었다.



사찰이 내려다보이는 산 절벽의 턱밑에 걸터앉은 전각 하나가 절간의 전체적인 풍모를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세존각(世尊閣)이라는데 그 안에 모셔진 부처여래상이 절간을 오가는 중생을 굽어 살피는 형상이다.



세존각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발아래에 있는 고산사의 전경이 한눈에 쏙 들어옴은 물론이고, 작성산과 금성산, 오봉산 등 주변의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산행날머리는 고산사 앞 주차장

위혼비 앞에 있는 약수터에서 목을 축인 후 절간을 빠져나온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나타나는 일주문을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관리사무소가 있는 주차장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이 걸렸다. 강추위 때문에 중간에 쉬지를 않았으니 오롯이 걷는 데만 소요된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다만 요것조것 설펴보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음은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주차장 주변은 공원으로 잘 가꾸어 놓았다. 계곡물을 끌어올려 물레방아를 만들었는가 하면, 작은 연못 위로는 데크로 길을 내어 산책을 할 수 있게끔 했다.


천마산(栢紫山, 287m)-천호산(天護山, 366m)

 

산행일 : ‘17. 3. 7()

소재지 : 충남 계룡시 금암동·엄사면·두마면과 논산시 연산면의 경계

산행코스 : 계룡지구대(양정)금바위천마산두리봉천호산353m대목재전투경찰대 사격장송정21번 국도송정1(산행시간 : 3시간 40)

 

함께한 산악회 : 갤러리산악회

 

특징 : 한마디로 산이라기보다는 공원(公園)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드는 산이다. 그만큼 잘 가꾸어 놓았다는 얘기이다. 그래선지 눈이 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산을 오르내리는 시민들을 꽤 많이 만날 수가 있었다. 평상복 차림이 대부분이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두 산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천마정에서 만나게 되는 금바위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망(眺望)만은 괜찮은 편이다. 명품 전망대로 알려진 금바위 말고도 여러 곳에서 계룡산과 계룡시가지, 그리고 대둔산 등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길도 고운 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한 것이 여느 흙산들이 보이는 특징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소나무보다는 참나무들이 많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을 감안해 볼 때 가족나들이 겸해서 한번쯤은 찾아볼 만한 산으로 꼽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양정지구대(계룡시 엄사면 엄사리 211-8)

호남고속도로 계룡 I.C에서 내려와 계룡대로를 타고 계룡시가지를 통과하면 연화교차로(계룡시 엄사면 엄사리)가 나온다. 교차로에서 1번 국도로 올라가 1Km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양정삼거리가 나오는데, 삼거리 근처에 있는 계룡지구대가 산행들머리이다. 당진-영덕고속도로 공주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와 96번 국도, 그리고 1번 국도를 번갈아 타고 계룡시까지 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실제로 우리를 싣고 온 산악회 버스도 이 후자(後者)의 방법을 택했다.




계룡지구대(논산경찰서) 앞마당의 왼편 산자락으로 놓인 통나무계단을 밟고 올라서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눈에 확 띄는 곳에 계단이 놓여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들머리에는 에어브러시(airbrush)‘가 매달린 천마·천호산 등산로 안내도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산행을 시작해 볼 일이다. 산행 스케줄을 짜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산길은 한없이 순하다. 널따라면서도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완만하기 때문이다. 혼자보다는 둘이서 도란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거기다 어젯밤 내린 눈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낭만을 더한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들려오는 뽀드득 거리는 소리가 여간 듣기 좋은 게 아니다. 올해의 마지막 눈 산행이 될 것 같아 느릿느릿 걸으면서 한껏 여유를 누려본다.



여린 소나무 숲길을 지나자 산길이 가팔라진다. 길가에 밧줄 난간까지 만들어 놓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르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적당히 가파르다고 보면 된다.



10분쯤 지나 천마사 갈림길‘(이정표 : 팔각정 0.97Km/ 천마사 0.22Km/ 양정 0.39Km)을 만났다 싶으면 곧이어 삼각점(공주 457)이 설치되어 있는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삼각점봉에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잡목들 때문에 아랫도리가 잘려나가긴 했지만 계룡시가지를 조망하는 데는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시가지의 뒤편은 계룡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어젯밤에 눈이 내린 탓인지 산릉이 온통 하얀 색깔을 띠고 있다. 오늘 산행의 특징은 조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계룡시(鷄龍市)1개 동(금암동)3개 면(도안면, 엄사면, 두마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60.68면적에 인구가 4957(2013 추계)인 자그마한 도시이다. 우리나라 유일의 국방도시로 시민의 대부분이 군인(軍人) 등 유동인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존 주민들은 10% 남짓 밖에 되지 않는 게 특징이다. 계룡시는 황등야산군과 황등야군, 황산군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때 연산현에 속했다가 1895년 공주부 연산군, 그리고 1896년에는 충청남도 연산군이 되었다. 1914년에는 두마면으로 개칭되어 논산군에 편입되었다. 1989년 계룡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증하자 1990년 계룡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2003년에는 계룡시로 승격했다.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산행이 이어진다. 그리고 4분쯤 지나면 시청갈림길‘(이정표 : 팔각정0.88Km/ 시청0.82Km/ 양정0.42Km)을 만난다. 왼쪽 방향의 눈길에 사람들의 발자국이 여럿 찍혀있다. 양정에서 올라오면서 보지 못했던 흔적들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코스라는 얘기일 것이다.



잠시 후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는 공터가 나온다. 간단하게 몸을 풀 수 있는 기구들 외에도 평행봉 등의 체력단련용 기구들도 보인다. 숫제 종합 체육센터를 만들어 놓은 셈이다. 거기다 꽤나 많은 벤치들까지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벤치는 이곳 말고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이는 천마산이 그냥 산에 그치는 게 아니라 계룡시민들의 안마당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천마정으로 향한다. 여전히 길은 넓다. 아니 오히려 더 넓어졌다고 봐야겠다. 경사가 없는 것 또한 변함이 없다.



그렇게 7분 남짓 진행하면 날등에 올라앉은 팔각의 멋진 정자(亭子)를 만난다. 천혜의 전망대로 알려진 천마정(天馬亭)이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이는 거대한 바위의 반대편 끝자락에 걸터앉은 것이 누가 보아도 천혜의 조망처이다. 잠시 쉬어가며 조망을 즐겨보라는 배려로 지어놓은 모양이다.




천마정의 앞은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의 한가운데가 마치 칼로 잘라 놓은 것처럼 나뉘어져 있다는데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이 바위는 금바위(또는 金岩)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밖에도 암소바위(바위의 모양새가 소의 머리와 몸통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송장바위 등 바위에 얽힌 다양한 이름들을 갖고 있다. 그 중에서 고려 중엽에 못된 무뢰배로 변한 개태사의 승려들을 토벌한 최일장군에 얽힌 전설 하나를 전해볼까 한다. 국가의 혼란을 틈타 민간(民間)에 큰 폐해(弊害)를 끼치고 있던 개태사의 승려들을 토벌하려고 내려온 최일장군이 어느 날 말을 타고 개태사를 향하여 가던 중이었다. 금암리 앞을 지나려는데 한 농부가 검은 암소로 논을 갈면서 이놈의 미련한 소야! 최일 만큼이나 미련하고 어두운 소이구나라고 외치더란다. 이 소리를 들은 최일 장군이 말에서 내려 농부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니 천마산 중턱에 있는 암소바위가 개태사를 보호하고 있어 이 절을 치려고만 하면 안개로 절을 보호하니 암소바위를 칼로 내려 친 다음 개태사를 치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단다. ()의 계시(啓示)임을 알아차린 최일장군이 천마산에 올라 장검으로 암소바위의 한복판을 내려치니 바위가 갈라지면서 피가 주르르 흐르더란다. 그런 연후에 안개가 걷힌 개태사에 숨어있던 승려들을 토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송장바위라는 이름은 바위가 사람의 시신(屍身)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금바위라는 이름이 생겨난 연유는 또렷하지가 않다. 위의 전설에서 바위가 둘로 갈라졌다고 했는데 여기서 생겨난 이름이 아닐까 싶다. ‘금이 간 바위라는 뜻으로 말이다. ‘이란 낱말의 어원(語源)에는 둘로 나누어진 사이에 생겨난 선()을 이르는 뜻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금암(金岩)은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역(誤譯)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추론은 모두가 내 개인적인 의견일 따름이니 그냥 흘려들으면 될 일이다.



천마정에서의 조망(眺望)은 한마디로 빼어나다. 정자에라도 오를라치면 계룡시 문화체육공원이 자리 잡은 엄사면 일대와 금암동 아파트촌을 비롯한 계룡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시가지 뒤편에는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계룡산(鷄龍山)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이곳 계룡시만이 아니라 대전과 공주, 논산 등 주변에 자리 잡은 수많은 도시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는 산이다. 아무튼 저 산은 풍수지리에서도 우리나라 4대 명산으로 꼽힌다. 뿐만 아니라 관광지로도 제5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유일 것이다.



데크길을 지나 천마산으로 향한다. 거의 경사가 없는 반반한 산길이 이어진다. 잠시 후 보덕사 갈림길’(이정표 : 천마산 0.42Km/ 보덕산 / 시청 1.98Km, 양정 1.64Km, 팔각정 0.28Km)을 지났다 싶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길게 놓인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면 송전탑(送電塔)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정표 : 천마산0.16km/ 농소리입구0.38km/ 시청2.24km, 양정 1.9km, 팔각정 0.52km)에서 농소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데, 계룡시가지와 계룡산 등 주변 풍경이 한눈에 잘 들어오므로 잠깐 쉬어가며 조망을 즐겨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천마산으로 향한다. 거의 경사가 없는 반반한 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거기다 가끔은 계룡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한마디로 멋진 길이라 할 수 없다. 서슬 시퍼런 계룡산의 산줄기는 가파르기 짝이 없다. 그래서 저 산줄기, 즉 계룡산에서 대둔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그 옛날 동쪽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신라군을 막는 저지선(沮止線)이 되었다. 신라군에 맞서 싸워야 할 백제군의 마지막 저지선 말이다. 이후부터는 이렇다 할 언덕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들판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 산줄기에 나있는 고갯마루들 중 어느 하나라도 넘으면 금강을 지나 서해 바다까지 한달음에 나아갈 수 있는 지세(地勢)인 것이다.




잠시 후, 그러니까 천마정을 출발한지 15분이 조금 못되어 천마산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45분만이다. 열 평이 훨씬 넘는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의외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꼭 있어야할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등산로의 상태나 이정표 등 시설물들이 잘 정비되어 있었기에 정상석 하나쯤은 당연히 세워져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허전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정상은 이정표(천호봉 4.0km, 농소리 1.1km/ 양정 2.06km, 금안동 0.7km, 팔각정 0.67km )와 벤치, 그리고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정상은 조망까지도 보잘 것이 없다. 나뭇잎이 다 져버린 빈 나뭇가지 사이로 계룡시가지가 고개를 내밀지만 잎이라도 무성해질라치면 이는 곧 사라져버릴 테니까 말이다.



천호산으로 향한다. 내려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산길은 여전히 완만하게 이어진다. 원래부터 낮은 산이라서 고도를 낮추는데 급할 게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7분 후에는 농소리로 연결되는 삼거리에 내려선다. 이정표(황룡재7.23Km/ 농소리입구0.26km, 유림회관 1.79km/ 천마산0.27km, 팔각정 0.94km, 양정 2.33km, 시청 2.67km)의 위에는 능선종점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아마 산책삼아 천마산을 오른 시민들에게 이쯤에서 내려가라고 지시하고 있는 모양이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들이 하나 같이 농소리로 향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위로 향한다. 그리고 밋밋한 오름길을 따라 3~4분쯤 올라가면 벤치 두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하고 있는 두리봉 정상이다. 천마산과 마찬가지로 정상석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 흔하던 이정표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국가지점표시목(다바 7697-0725)이 이들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두리봉을 지난 산길은 상당히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산길은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길가에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미끄러지는 것이 두려울 경우 밧줄에 의지해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내리막길 오른편은 비닐 망()으로 막혀있다. 누군가 약초라도 재배하고 있나 보다. 그렇게 9분 정도를 내려서면 첨부된 지도에 나와 있는 농소리고개(이정표 : 천호봉3.15km/ 농소리0.25km/ 천마산0.85km) 이다.



농소리고개에서는 컨테이너 박스로 지어진 농막(農幕)을 오른편에 두고 왼편 산자락으로 올라선다. 잠시 후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조림한 것으로 보이는 소나무들이 가득 차 있는 기분 좋은 산길이 잠시 이어진다. 왼편으로 잘 써놓은 묘역(墓域)도 내려다보인다. 숫자로 보아 문중 묘로 보이는데 후손들이 조상의 음덕(蔭德)을 많이 입었나보다.



그렇게 5~6분쯤 진행하면 또 다른 농막(農幕)을 만난다. 이번의 것도 역시 컨테이너를 이용했다. 맞은편 산자락에 묘목을 심는 등 주변을 농장으로 일구었는데, 농장을 관리하는데 쓰이는 농막인 모양이다.



농막에서는 비록 잠시지만 임도(林道)를 따른다. 오른편 방향으로 50m쯤 진행하다가 임도가 둘로 나뉘는 지점에서는 왼편의 오르막 임도를 따른다. 누군가가 매달아 놓은 코팅지가 천호산의 방향을 알려주고 있으니 들머리를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100m쯤 임도를 따르다가 왼편 산자락으로 치고 오르면 또 다시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농막에서 6분이 걸렸는데, 능선을 농장으로 일구어버린 탓에 산자락을 한 바퀴 에둘러서 올라온 셈이다. 다시 올라선 능선은 여전히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주변의 풍경 또한 아까와 별반 다름이 없다. 거의 모든 나무들이 참나무들뿐이란 얘기이다. 조망이 트이지 않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런 작은 오르내림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그리고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아니 가끔은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곳에서는 밧줄을 매달아 놓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 거리가 짧아서 큰 어려움 없이도 올라설 수 있기에 특별히 거론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렇게 3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안부사거리(이정표 : 천호봉1.06km/ 농소리0.66km/ 개태사 방향/ 천마산3.26km)를 지나고, 이어서 4분 후에는 수복동 삼거리’(이정표 : 천호봉 0.9km/ 회음동 0.8km, 수복동 0.75km/ 천마산 3.1km)를 만난다.



또 다시 반복되는 작은 오르내림을 이어가다 보면 또 다른 수복동 갈림길’(이정표 : 천호봉0.32km/ 수복동0.8km/ 천마산3.68km)을 만난다. 능선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아무튼 오늘 걷고 있는 산길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곱다고 할 수 있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곳곳에 이정표까지 잘 세워져 있다. 길 잃을 걱정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굳이 필요가 없어 보이는 곳에까지 이정표들을 세워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만큼 많은 이정표들이 세워져 있다는 얘기이다. 논어(論語)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온다. 자공(子貢)의 물음에 공자(孔子)가 답하는 형식을 빌었는데,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다. 중용(中庸)의 중요함을 나타내는 말인데, 내가 더 중용에서 벗어났을지도 모르겠다. 이정표를 세운 사람들로 봐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다 설치했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오늘 걷고 있는 이 능선은 금남정맥(錦南正脈)의 일부구간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려나온 금남호남정맥은 전북 진안군 부귀면에 위치한 주화산(珠華山, 600m)에서 금남과 호남이라는 두 개의 산줄기로 나뉜다. 이중 북쪽으로 갈려나오는 산줄기가 금남정맥인데, 주화산에서 시작하여 왕사봉과 대둔산을 지나 계룡산으로 이어지다가 부여의 부소산에서 끝을 맺는다. 총 길이가 118쯤 되는데 금강의 남쪽에 있는 산줄기라는 데서 금남(錦南)‘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후부터는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오늘 걷고 있는 산릉에서 가장 주가 되는 산이다 보니 뭔가 생색이라도 내려나 보다. 그렇게 4분쯤 올라서면 개태사 갈림길‘(이정표 : 천호산 0.3km/ 개태사1.1km/ 천마산 방향)이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개태사(開泰寺)로 연결된다. 고려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하늘의 가피(加被)를 받아 천년만대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의지로 창건했다는 그 개태사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당시 이곳 황산벌에서는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신검이 두 나라의 사활을 걸고 치열한 전투를 치렀었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승리한 왕건은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大業)을 이룰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 황산벌이 강력한 고려제국 건설의 첫 무대였던 셈이다. 그런 인연으로 만들어진 기념물이 거대한 제국()을 연() 곳이라는 뜻의 개태사(開泰寺)였다는 것이다. 하긴 내가 왕건이었다고 해도 오래오래 기억해 둘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참고로 원래의 개태사는 폐허로 변해 터만 남아 있었으나, 1930년 김광영이란 사람이 중건하여 도광사라 부르다가 그 뒤 개태사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잠시 후 또 하나의 수복동 삼거리’(이정표 : 천호봉 0.12km/ 수복동 0.94km/ 천마산 3.88km, 개태사 방향)를 만났다 싶으면 곧이어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고 있는 천호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천마산을 출발한지 1시간 25분 만이다. 서너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있다. 이곳도 역시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은 이정표(벌곡방향/ 신계룡변전소4.30km, 수복동 0.89km/ 천마산4.0km, 개태사 방향) 하나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이정표에다 이곳의 지명을 적어 놓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산행 초반에 만나는 이정표들은 맨 꼭대기에다 현재 위치의 지명을 적어놓았더니만 이곳의 이정표에는 그것마저도 생략해 버렸다. 그저 선답자들이 매달아 놓고 간 리본들을 참조해 이곳이 천호산의 정상이려니 해볼 따름이다.



천호산(天護山)의 원래 이름은 황산(黃山)이었다고 한다. 산 아래 들녘의 지명인 황산벌에서 따왔지 않나 싶다. 백제의 계백장군이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그 들판 말이다. 또 다른 설()은 천호산이라는 이름의 근원을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신검 사이에 있었던 치열한 전투에서 찾는다. 이곳 황산벌에서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큰 싸움을 치렀는데, 그 전투에서 왕건이 승리함으로써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大業)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전투를 계기로 대업을 이룬 왕건은 이 땅을 하늘이 도운 곳이라 여겼고, 황산의 이름 또한 천호산(天護山)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해진다.



천호산을 지나면서 주변의 풍경이 확 바뀐다. 참나무 일색이던 능선이 소나무 일색을 변한 것이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짙은 솔향이 코끝을 자극해 준다. 지쳐가던 육신(肉身)이 다시 깨어나는 것 같다. 솔향 속에 배어있을 피톤치드(phytoncide)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중의 하나가 소나무라니까 말이다. 이 피톤치드의 효능 중에는 몸으로 스며드는 각종 병균의 살균기능 외에도 심폐기능을 강화시키는 효능도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호사(豪奢)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한다. 능선이 또 다시 참나무들로 옷을 갈아입어버리는 탓이다. 본디 지니고 있던 특징을 벗어난다는 게 그만큼 어려운 모양이다. 이곳 천마산과 천호산에는 산의 특징으로 삼아도 될 만큼 참나무 숲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7분쯤 걸으면 화악리로 연결되는 삼거리(이정표 : 황룡재3.0Km/ 화악리입구1.0Km/ 천호산0.5Km)를 만난다.



이후로도 산길은 크게 변화를 주지 않는다. 능선은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있고, 그 능선은 온통 참나무 일색인 것이다. 그렇다고 소나무가 일절 없다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소나무 무리들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저 양념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얼마쯤 걸었을까 오랜만에 시야(視野)가 열린다. 송전탑(送電塔)을 세우면서 주변의 나무들을 제거해 놓은 덕분이다. 이름 모를 주변의 산들이 수없이 널려있는데, 눈대중으로 헤아려 볼 때 그중 가장 높은 산은 대둔산이 아닐까 싶다.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된다. 고맙게도 능선만을 고집하지 않는 구간도 만난다. 조금은 덜 힘든 것 같아 사면(斜面)으로 난 길이 여간 고맙다. 거기다 주변의 소나무들까지 그 개체수를 늘려가고 있다.



사면을 돌아 오르면 양지서당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이정표(황룡재2.3Km/ 양지서당 입구1.0Km/ 천호산1.2Km)를 만난다. 혹시 대전시 유성구(도룡동)에 있던 그 양지서당(養志書堂)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 인성예절(人性禮節) 등을 기본 바탕으로 하는 한문과 서예, 검도 등을 가르치던 양지서당이 2000년대 초쯤에 논산시 쪽으로 이전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아서이다. 천호산에서 이곳까지는 17분이 걸렸다.



사면으로 난 길에서 다시 한 번 조망이 트인다. 아까 송전탑에서 보았던 풍경이 또 다시 펼쳐지는데, 잡목이 훼방을 놓던 아까보다는 훨씬 더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삼거리에서 산길은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그리고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능선이 또 다시 이어진다. 소나무가 울창한 숲길은 수북하게 쌓인 솔가리로 인해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이건 숫제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거기다 경사까지 거의 느낄 수가 없으니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 아닐까 싶다.



얼마쯤 걸었을까 산길이 위로 향하고 있다. 까짓 오름길이 여기만 있는 게 아니니 특별히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오름길은 밋밋한 경사로(傾斜路)로만 이어지던 오늘 산행에서는 보기 드물게 가파르기에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밧줄에 의지해서 오를 수 있도록 길가에 난간을 만들어 놓았을 정도라고 하면 쉽게 이해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거기다 오르막길의 거리 또한 제법 긴 편이다. 꽤나 힘을 쏟아야만 첨부된 지도에 353m봉으로 나와 있는 봉우리 위에 올라설 수 있다는 얘기이다. 소나무 몇 그루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353m봉 정상은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해놓았다. 조망이 좋으니 느긋하게 쉬면서 즐기다 가라는 의미인 모양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있다.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의미인데, 지금의 상황과 딱 맞지 않나 싶다. 봉우리 위에서의 조망이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이다. 천마산에서 가장 뛰어난 전망대로 알려진 천마정보다 오히려 한 수 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오늘의 산행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조망, 즉 계룡산과 대둔산에 대한 조망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멋진 풍광에 푹 빠져 있다가 하산을 서두른다. 하산 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내려설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길가에 밧줄난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밧줄에 의지해서 서서히 내려가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면 대목재(이정표 : 황룡재1.4Km/ 사격장0.6Km/ 대목리0.5Km/ 천호산2.1Km)에 내려선다. 연산면의 한림정마을(송정리)과 벌곡면의 대목골마을(한삼천리)을 잇는 고갯마루이다. 사거리인 이곳에선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선두대장의 진행방향표시지가 오른편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능선을 타다가 팔각정을 거쳐 연산농공단지로 내려갈 계획이었는데, 뭔가 피치 못할 변수(變數)라도 생겼던 모양이다.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하지만 길을 구부러뜨림으로써 그 경사를 확 떨어뜨렸다. 부담 없이 내려설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저 길이 굽이돌면서 만들어 놓은 예쁜 곡선(曲線)을 눈에 담으며 서서히 내려서고 볼 일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패자(敗者)의 한을 품은 퇴락한 흔적이라도 찾아볼 것이고 말이다. 고대사회를 피로 물들였던 살벌한 격전지였으니 아직까지 숨어있는 그 어느 흔적 하나 찾아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13분쯤 내려가니 전투경찰대의 사격장이 나타난다. 이곳 연산은 고대 사회를 피로 물들인 격전지(激戰地) 중 한 곳이다. 계백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대군과 맞선 황산벌도 이곳이고, 고려에 투항한 견훤이 자신이 세운 후백제의 군대와 맞서 싸워 왕권을 찬탈한 큰아들 신검을 무릎 꿇게 한 곳도 다름 아닌 이곳이다. 누군가는 그런 치열함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육군 제2훈련소(연무대)’에서 찾고 있었다. 천 년도 훨씬 더 지난 그 옛날, 피로 물들었던 이 땅에서 지금은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군생활의 기초를 닦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라면 이곳 전투경찰대의 사격장 또한 그 치열함에 넣어도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싶다.



산행날머리는 송정1(논산군 연산면 송정리 423-4)

사격장에서부터는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른다. 잠시 후 전투경찰대 정문을 통과하고 나면 곧이어 송정2리 한림정마을에 이르게 된다.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선비가 정자(亭子)를 짓고 살았다는 데서 유래된 마을이다. 산행은 이곳에서 대충 끝났다고 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10분이 걸렸다. 수북하게 쌓인 눈 때문에 쉬지를 못하고 걸었으니 오롯이 걷는 데만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하지만 산악회의 버스는 송정1리 마을에 주차되어 있다고 한다. 주차를 시킬만한 곳을 찾다보니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2Km 넘게, 그러니까 30분 정도를 더 걸어야만 한다는 얘기이다. 덕분에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길을 걷게 되었다. 그까짓 거리쯤이야 문제될 게 없지만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을 스쳐가며 걸어야만 하는 ‘1번 국도4차선 도로변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정자(亭子)가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는 마을 앞 사거리에는 한림정마을의 지도와 함께 마을의 유래를 적어 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계백과 5000결사대의 기상이 서린 마을이라는 부제(副題)를 달았다.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1번 국도에도 계백로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계백장군과 그 장졸들이 품었을 우국충정(憂國衷情)을 기리 보전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게 있다. 길가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壁畫)이다. 고전 산수화를 그려놓았는데, 봉우리 위에는 정자가 지어져 있다. 한림정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글귀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 오늘 하루만이라도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해 보자.


향적산(香積山, 574)-함지봉(咸芝峰, 386.5m)-깃대봉(310.2m)

 

산행일 : ‘17. 1. 30()

소재지 : 충남 계룡시 엄사면·신도안면과 논산시 상원면·연산면의 경계

산행코스 : 무상사향적산방헬기장향적산상여바위국사봉(백련봉)윗산명재아랫산명재함지봉깃대봉황산성관동리(산행시간 : 4시간 3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금남정맥(錦南正脈)의 싸리재 근처 465m봉에서 남쪽으로 가지를 치는 능선이 있다. 이 능선을 따라 대략 1Km쯤 떨어진 곳에 빚어진 산이 향적산(香積山)이다. 향적산에서 계속 남진하는 능선은 약 7km 거리에서 함지봉(咸芝峰)을 들어 올린 후, 2km를 더 가는 곳에서 황산성 터를 지난다. 이어서 남은 여맥(餘脈)들을 모두 연산천에다 가라앉힌다. 오늘은 위에서 말한 맥()의 대부분을 걸어 보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드는 코스를 만날 수 있었다. 빼어난 산세(山勢)를 자랑하는 암릉구간이 있는가 하면, 향적산의 정상과 상여바위 등에서는 일망무제의 조망(眺望)도 즐길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나머지 구간은 편안하기 이를 데 없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없는 것이 뛰어다녀도 될 것 같다는 얘기이다. 15Km 가까운 거리를 4시간 30분에 걸었다면 길이 얼마나 편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이렇게 좋은 산이 아직까지도 입소문을 타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아무튼 한번쯤은 꼭 올라봐야 할 산이지 않나 싶다.

 

산행들머리는 무상사(계룡시 엄사면 향한리 452-13)

호남고속도로 계룡 I.C에서 내려와 1번 국도를 타고 엄사면소재지인 엄사리까지 일단 온다. 논산시 방향이다. 엄사리의 관문인 연화교차로(엄사리)에서 국도를 빠져나온 후, 조금 들어오다 평리사거리에서 좌회전한다. 잠시 후 엄사중학교를 지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향한리 사거리(엄사면 향한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무상사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오늘 산행은 지도에 표시된 코스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들머리를 향한리에 있는 무상사(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로 삼아 주능선에 있는 헬기장으로 올랐고, 하산도 황산성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임도로 떨어진 다음 길을 개척해가며 관동리를 거쳐 연산면소재지까지 진행했다



산행에 들어가기 전에 무상사(無上寺)에 들러보기로 한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절이었기 때문이다. 국제적 선수행(禪修行) 그룹인 관음선종의 창설자인 숭산행원(崇山行願, 1927-2004)에 의해 2000년에 건립된 무상사는 불교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는 사찰이다. 특히 세계 각국에서 동양불교의 진수를 찾아 모인 외국 스님들이 수양하는 국제선원으로 유명하다. 숭산스님은 당대 최고의 선사였던 고봉선사에게서 전법계(傳法偈)를 받았고, 197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해외 선교를 시작하였다. 200411월 서울의 화계사에서 열반에 들었지만 그가 남긴 가르침은 전 세계 (30여 국가에 100여개 선원)에 널리 펴져 있다. 참고로 무학대사는 이곳 향적산에서 800명의 위대한 법사가 나와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풍수지리의 대가(大家)답게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관음선종의 아시아 지역 본원인 무상사가 이곳에 터를 잡았으니까 말이다.



무상사의 오른편으로 난 임도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는 무조건 왼편을 따른다. 오른편은 만운사(이정표 : 만운사 1.5Km)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50m쯤 더 걸으면 만나는 갈림길(이정표 : 향적산 정상 1.6Km/ 싸리재 1.13Km)에서도 역시 왼편이다. 둘 모두 정상으로 연결되기는 마찬가지지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오르기 위해서이다.



무상사를 왼편에 끼고 난 길은 제법 넓다. 하지만 거칠기 짝이 없다. 간벌(間伐)한 나무들을 길에 깔아놓았기 때문이다. 지나다니지 말라는 무언의 시위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조금만 참으면 널따란 임도를 다시 만나게 되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아까 오른편으로 나뉘었던 임도와 다시 만나는 게 아닐까 싶다.



산행을 시작하고 10분쯤 지났을까 또 다시 길이 나뉜다. 신경 쓰지 말고 향적산방에서 세워놓은 안내판의 국사봉의 방향표시를 따른다. 잠시 후 연화사로 들어가는 길이 또 다시 나뉘나 개의치 않고 그냥 통과한다. 들어가 볼 필요도 없다는 얘기이다. 무속신앙(巫俗信仰)의 기도터가 분명할 테니까 말이다.



15분쯤 걸었을까 몇 채의 가옥들이 나타난다. ‘향적산방이라는데 일명 산제당이라 불리는 거북바위와 용바위가 볼거리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거북바위 하단부에는 기도를 드리는 동굴이 있고, 용바위는 거북바위 남동쪽 아래에 있는데 나무숲에 가려져 있다고 한다. 아무튼 산제당은 조선 후기 역학(易學)의 대가이자 남학계의 신종교인 영가무도교(詠歌舞蹈敎)의 창시자인 일부(一夫) 김항(金恒) 선생이 정역(正易)을 공부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는 세계의 중심지는 한국이며 한국의 중심지는 계룡산이라 주장했다고 한다. 김항 선생은 산제당에 있는 거북바위가 하도(河圖)이며, 용바위는 낙서(洛書)로 이곳이 계룡산의 중심이 된다고 주장했다. 역술인들은 하도와 낙서를 주역(周易)의 기본원리로 보고 있다.



산길은 향적산방의 경내를 가로지르며 나있다. 그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어른들 두세 사람이 서로 손을 맞잡아야만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로 허리통이 굵은 것이 몇 백 년은 족히 되었겠다. 그만큼 이곳 산제당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참을 뭉그적거린 후에야 산행을 이어간다. 김항선생의 기도터를 기웃거려보고 싶었으나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했다. 최소한 그가 수련을 했다는 곳을 보고난 후에야, 그가 왜 세상의 중심을 한국이라고 했는지를 눈치라도 챌 수 있지 않겠는가. 아쉬운 일이다. 아무튼 10분 후 장군암(將軍庵)을 만난다. 여염집을 닮은 건물들이 몇 채 들어서 있는 것이 이곳 역시 무속신앙(巫俗信仰)의 기도터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건물 뒤에 보이는 커다란 바위 아래에는 신당(神堂)이 지어져있을 것이다. 만일 그곳에서 물이라도 난다면 용궁(龍宮)’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말이다.



장군암을 지나서도 산길은 또렷하다. 둘이 나란히 서서 걸어도 될 정도로 넓다. 거기다 길가에 밧줄난간까지 만들어 놓아 폭설 때도 길 찾는데 별 어려움이 없겠다. 그렇게 잠시 걸었을까 진행방향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이 계단은 능선 위에 있는 헬기장으로 연결된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진행하면 능선(이정표 : 국사봉0.32Km/ 엄사리(청송약수터)4.68Km)에 올라선다. 첨부된 지도에 헬기장으로 표기된 지점이다. 이곳은 오른쪽 만운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다. 확인은 안 해봤지만 이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갈래라고 한다. 가파른 등성이를 고집하는 길과 왼편 비탈을 돌아 작은 산등으로 오른 다음 고스락으로 오르는 길이다. 어느 길로 가든 10분이면 고스락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왼편 비탈을 돌아서 오르기로 한다. 이정표에 국사봉으로 표기된 방향이다. 여기서 국사봉은 향적산의 정상을 이르는 말이니 참조한다. 그런데 왜 국사봉이라 하는지는 모르겠다. 이따가 황산성 방향으로 능선을 타다보면 국사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또 다른 봉우리를 만나게 되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3분쯤 지나자 대피소에 이른다. 왼편 계룡시를 바라보는 조망이 일품인 곳인데 널찍한 것이 비박을 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겠다.



대피소에서부터는 다시 능선을 탄다.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처음에는 밧줄난간을, 그리고 다음에는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계단을 오르는 길 오른편에 거대한 송신탑이 나타난다. 대전방송(TJB)의 향적산중계소란다. 대부분의 송신탑들은 산의 꼭대기에다 모셔놓는데, 이곳은 산의 허리에다 들어앉혔다. 다른 지자체에서도 본받을만한 발상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7분쯤 오르니 향적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만이다.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정상표지석 외에도 향적산의 명물로 불리는 천지창운비(天地創運碑)와 오행비(五行碑), 그리고 삼각점안내판(공주 314, 실제 삼각점은 눈에 띄지 않는다)이 세워져 있다. 참고로 향적산(香積山)향이 쌓인 산이라는 뜻이다. 계룡산과 맥락을 같이하는 이 산은 옛날부터 영산(靈山)으로 알려져 많은 종교인과 기복을 빌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수도를 위해 이 산으로 입산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들이 피운 향의 향기가 쌓여 있다는 뜻에서 산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전해진다. 한편 이곳 향적산은 계룡산을 향해 엎드려 절을 올리고 있는 산세로 보기도 한다. 또한 향적산에서 보이는 계룡산은 정상인 천황봉을 큰 닭의 머리라고 볼 때 서편의 연천봉과 동편의 황적봉이 힘차게 펼친 닭의 날개로 보기도 한다.



정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천지창운비(天地創運碑)와 오행비(五行碑)가 아닐까 싶다. 특이하게 생긴 외형(外形)은 일단 제켜놓고 보자. 그리고 왜정(倭政) 때 평양에 살던 조미양 할머니가 묘향산과 구월산에 있던 단군성조의 얼을 이곳으로 옮겨와 신봉하는 활동을 하다가 1948년 작고한 이후 그의 며느리인 손씨 부인이 시어머니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 비석들을 세웠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일단 믿어보자. 그렇다면 그 비석에 적힌 문구라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문구들을 해석하는 사람이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천지창운비는 사각형 돌로 된 받침대 위에 세운 약 2m 높이의 콘크리트 사각형 기둥이다. 기둥 꼭대기에는 지붕격인 옥개석이 얹혀 있다. 각 면은 북, , , 서쪽 방향으로 흰색 대리석 판이 박혀 있다. 석판마다에 한문으로 북면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 동면에는 천계황지(天鷄黃地), 남면에는 남두육성(南斗六星), 서면에는 불() 자가 음각되어 있다. 그리고 천지창운비 서쪽 약 1.5m 거리에 있는 오행비는 흰색 대리석 받침돌 위에 세운 높이 약 1.6m에 폭이 각각 30cm가량 되는 짙은 회색 화강암 사각기둥이다. 이 오행비 북면에는 한문으로 한 일(), 동쪽에 다섯 오(), 남쪽엔 모일 취(), 서쪽에는 불 화() 자가 음각(陰刻)되어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일품이다. 사방으로 막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선 계룡산이 있는 북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연천봉에서 시계방향으로 문필봉과 쌀개봉, 천황봉이 날아갈 듯이 자태를 뽐낸다. 천황봉 오른쪽으로는 황적봉, 치개봉, 우산봉, 갑하산 등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동쪽에는 서대산과 천만산이 보이고 그 뒤로는 대둔산이 하늘금을 이룬다. 남쪽에서도 수많은 산들이 고개를 내민다. 상여바위 뒤로 함지봉으로 이어지는 남릉이 꿈틀거리고 있고, 남서(南西)로는 논산의 황산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서쪽으로는 상월면 들판과 구릉지대 뒤로 금북정맥 백월산과 오서산, 성태산 등이 아른거린다. 북서쪽 멀리로는 청양의 칠갑산과 금북정맥의 높고 낮은 산들이 눈에 와 닿는다.



남쪽 방향에는 전망데크까지 만들어 놓았다. 실경(實景)과 비교해가면서 즐기라고 계룡시를 주로 한 조망안내도까지 세워두었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싱여바위(첨부된 지도에는 농바위로 표기되어 있다)를 거쳐 함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남릉)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하얀 눈을 뒤집어 쓴 능선이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성큼 다가온다.




하산은 남릉을 탄다.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는 방향인데, 길이 또렷하기 때문에 이정표가 없다고 해서 들머리를 못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하산을 시작하자마자 눈이 호사(豪奢)를 누린다. 화려한 눈꽃 잔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상으로 오를 때 눈길을 걷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뭔가 10% 정도 부족하다고 느꼈었는데 그 부족분을 이곳 남릉에서 채워주고 있다고 보면 된다.



10분쯤 걸었을까 거대한 암릉이 앞을 가로막는다. 향적산의 백미(白眉)로 알려진 상여바위(농바위)이다. 상여바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위에다 눈으로 덧칠까지 했다. 한마디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얘기이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 똑 떨구던 옛 동심(童心)이 살아났나 보다. 그러니 오늘 산행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여바위를 피해갈 수 있는 길은 없다. 무조건 오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다. 아래에서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위험스러워 보이지만 막상 오르고 나면 바윗길이 제법 널찍하기 때문이다. 낭떠러지 위로 난 비탈길을 잠깐 걷기도 하지만 조금만 조심한다면 별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역시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바위벼랑 위로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왼편으로 계룡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오른편 앞에는 어은리 들판 넘어 탑산여맥 산줄기가 늘어서있다. 그 오른편 산줄기는 아마 노성지맥일 것이다. 그리고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방금 전에 올랐던 향적산이 살펴 가시라고 손짓을 한다. 송신탑이라는 뾰쪽한 고깔모자를 쓰고서 말이다.



조망을 즐기며 10분쯤 걷다보면 자 안부를 만난다. 이정표(황산성6.9Km/ 향국사3.0Km, 무상사 1.4Km/ 국사봉?)가 파수를 서고 있는 이곳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무상사가 나온다. 그렇다면 이 지점을 경유하는 산행코스가 멋지게 그려질 수도 있겠다. 요 아래 무상사에다 승용차를 주차시키고, 오늘 우리가 선택했던 향적산방(또는 싸리재 경유)-헬기장-향적산-상여바위봉-이곳 안부를 거쳐 무상사로 되돌아가는 원점회귀 코스 말이다.



이제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거기다 능선만 따르면 되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그저 환상적인 눈꽃잔치에 푹 빠지고 볼 일이다. 그렇게 8분쯤 걸었을까 또 다른 안부(이정표 : 황산성5.6Km/ 대명리(극락사)0.4Km/ 향적산(국사봉)3.0Km)를 만난다. 이번에는 자 안부이니 논산시 상월면 방향으로 연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12분 후에는 국사봉(442.3m) 위에 올라선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두어 번의 오르내림이 반복되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이곳 국사봉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 안 보인다는 얘기이다. 그 흔한 이정표마저도 없다. 조금 앞서 지나간 일행이 매달아 놓은 종이까지 없었더라면 이곳이 국사봉인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게 뻔하다. 그나저나 국사봉이라는 지명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하나의 산에 같은 이름의 봉우리가 둘이어서는 안 되는데도, 향적산의 정상과 이곳의 지명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럼 국사봉(國事峰)이라는 지명의 유래부터 살펴보자. <조선조 태조가 신도안을 도읍지로 정하려 할 즈음 이 봉우리에 올라 계룡산 주변의 지세를 살펴보고 나라를 위한 큰 인물이 나올 곳이라 하여 한자로 國事峰’, 또는 國師峰이라 지었다>는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향적산의 정상을 국사봉으로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그 산세(山勢)가 이곳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침 이곳을 백련봉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꽤 많다니, 향적산의 정상을 국사봉’, 그리고 이곳을 백련봉으로 부르는 게 옳을 것 같다.



눈꽃잔치를 즐기는 산행이 계속된다. 아니 아까보다 훨씬 더 짙어졌다. 걷는 속도가 더뎌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무튼 국사봉에서 잠시 내려갔다 싶은데 산길이 갑자기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헷갈리기 딱 좋은 지점이 아닐까 싶다.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능선을 벗어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방향을 튼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또 다시 능선의 모양새로 되돌아온다. 이제야 제대로 진행하고 있다는 믿음이 간다. 그렇게 10분쯤 걸으면 안부사거리에 내려서는데 윗산명재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곳에서 반가운 지명 하나를 발견한다. 이정표(황산성4.9Km/ 도곡리방향/ 대우리(백련사)0.4Km/ 향적산(국사봉)3.3Km)백련사라는 지명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올랐었던 국사봉을 백련봉으로 불러야할 이유가 훨씬 더 또렷해졌다.



산길은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하지만 눈꽃잔치는 아까보다는 조금 약해졌다. 그만큼 고도(高度)를 낮추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눈요깃거리까지 안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름다움에 심취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주변의 경관을 기웃거리며 25분 정도를 더 진행하면 작은산명재’(이정표 : 황산성3.4Km/ 도곡리방향/ 어은리1.1Km/ 향적산(국사봉)4.8Km)에 내려선다.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약간은 경사가 가팔라지는 모양새이다. 통나무계단을 설치한 곳이 나타나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는 밧줄난간까지 만들어 두었다. 거기다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괜찮게 생긴 바위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15분 후에는 수척골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물론 아랫산명재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이곳 수척골산도 정상표지석이 없기는 백련봉(국사봉)과 매한가지이다. 이정표도 물론 없다. 누군가가 삼각점안내판(공주 454)의 기둥에다 매달아 놓은 표지판(수척골산 366.2m)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후로도 산길은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는다. 그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커다란 바위들이 듬성듬성 늘어서 있는 능선을 치고 오르니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산봉우리의 위이다. 누군가는 이곳을 370m봉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정상에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그 어떤 표시도 없다. 그저 마창 산죽산악회의 노란색 시그널이 매달려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영진지도를 보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주산이 있다고 표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각점도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이곳 370m봉이 주산(황산)이라는 것이다. 영진지도에 주산이라 표기된 지점의 높이가 고작 308m에 불과하다면서 말이다. 62m나 낮은 봉우리에다 이름까지 갖다 붙일 이유가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곳 370m봉의 소나무 숲속에서 판독이 불가능한 삼각점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수북하게 쌓인 눈 때문에 삼각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나저나 영진지도에 표기된 지점을 다녀온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곳에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370m봉에서 15분쯤 더 진행하면 공터로 이루어진 함지봉 정상에 올라선다. 이곳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한쪽 귀퉁이를 지키고 있는 이정표(표정리1.4Km/ 향적산6.5Km)가 이를 대신하고 있지만 그 또한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그저 삼각점(논산 022)에 적힌 높이(386m)를 보고 이곳이 함지봉인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 표시가 있기는 하다. 어느 산꾼이 자신의 시그널에다 함지봉 386.5m’라고 써놓았다.



잠시 후 시야가 툭 터지는 전망바위를 만난다. 오른편으로 드넓은 논산 들녘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조망을 즐기다가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밧줄 난간까지 만들어 놓은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황산성1.7Km/ 표정리0.6Km/ 향적산(국사봉)6.8Km)가 나온다. 이번에도 역시 표정리로 내려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나뉜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능선의 풍경이 확 바뀐다. 바위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난 것이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숫제 암릉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산길은 바윗길과는 거리가 멀다. 바위를 피해가며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바위 위를 오를 때도 있으나 평평한 것이 일반 산길과 다름이 없다. 그저 특이하게 생긴 바위들에 눈을 맞추며 걷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14분쯤 걸으면 평범하기 짝이 없게 생긴 깃대봉에 올라선다. 그러니 이곳이 어디라고 여길만한 표시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 흔한 이정표 하나도 없다. 그저 앞서간 일행이 붙여놓고 간 간이표시(깃대봉 304.9m)를 보고 이곳이 깃대봉인가 할 따름이다.



깃대봉을 지나서도 능선의 풍경은 바뀌지 않는다. 비록 잠시이지만 큰 바위들이 늘어선 멋진 산길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보드라운 흙길이 나타났다 싶으면 저만큼에 뾰쪽하게 솟아오른 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264m봉이다.



웃자란 잡초들로 가득 차 있는 264m봉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황산성0.43Km/ 향적산(국사봉)8.2Km)로 나뉜다. 황산성으로 가려면 직진, 그러니까 오른편 길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왼편 길이 더 또렷하니 문제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정표를 따르기로 한다. 이정표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는가.



하산 길을 재촉한다. 이 구간은 가파를 뿐만 아니라 질퍽거려 미끄럽기까지 하다. 길가에 밧줄난간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이다. 밧줄에 의지해서 조심조심 내려가면 되니까 말이다. 가파른 구간이 끝났다싶으면 산길은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이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널찍한 분지(盆地)가 나타난다. 생김새로 보아 영락없는 성터이다.



분지에 이르니 황산성이라고 적힌 표석(標石)이 눈에 띈다. 그래 이곳이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된 황산성(黃山城)이었던 것이다. 황성(黃城) 또는 북산성(北山城), 성황산석성(城隍山石城) 등의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황산성(黃山城)은 연산 지역과 논산 방면 황산벌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깃대봉 남릉 일원에 축조된 산성(山城)이다. 백제의 웅진시대부터 사비시대에 걸쳐 축조된 성으로 추측되며, 북쪽은 험난한 산세로 되어 있어 적의 침입이 어려운 지세를 이용하여 자연석을 축성하였고 나머지는 활석을 사용 축성하였는데 성 높이는 서부가 2m, 동부가 1.8m이고 성의 폭은 1m내외이며 성 둘레는 870m이다. 대부분 도괴된 상태로 성의 동서남북에 문의 흔적이 있고, 성의 북쪽 봉우리 부분에 30정도의 넓은 면적이 있어서 군을 사령하던 장대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산현 성곽조는 주위가 1,740척이고, 높이가 12척인데, 안에 우물 1개소와 군창지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성내 곳곳에서 백제 토기와 고려와 조선시대 유물들이 발견되는데, 이중 기와조각에 찍힌 대안원년(大安元年)’1209(고려 희종 5)에 해당된다. 특히 황산인방(黃山寅方)’으로 판독되는 기와는 이곳이 백제 5방의 하나인 동방 득안성(得安城)에 관계된 곳이었음을 추정케 해준다. 이로 미루어보아 백제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정표(황산성/ 향적산(국사봉))가 가리키는 대로 하산을 시작한다. 그리고 2~3분 후에는 주차장에 내려선다. 이정표(관동리방향/ 표정리 2.0Km, 덕암리 4.5Km)향적산등산로 안내도’. 그리고 황산성에 대한 안내판까지 세워진 주차장은 일단 넓다. 그리고 포장임도로 우리가 하산지점으로 계획하고 있는 관동리까지 연결된다. 승용차의 통행이 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대형버스의 진입은 불가능하단다. 계속해서 걸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또 다른 이정표(관동리3.5Km/ 표정리방향/ 향적산(국사봉)8.85Km, 황산성 0.15Km)에는 관동리까지의 거리표시가 되어 있다. 임도를 따를 경우에는 앞으로도 3.5Km를 더 걸어야한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중간에서 지름길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다.



임도를 따라 3분쯤 걷다가 첫 번째 묘역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조금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두 번째 묘역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야만 제대로 된 길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길은 연산향교로 이어진다고 하니 참조한다. 아무튼 우린 길을 개척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커녕 짐승들조차 다닌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찔리거나 할퀴는 것은 물론이고 가끔가다 싸대기까지 얻어맞아가며 10분 남짓 내려서니 임도가 나온다.



오른편에 채색(彩色)이 된 전각이 보인다. 하지만 사찰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곳 향적산 인근은 기도터가 많은 곳으로 소문나 있다. 저 건물도 기도터로 보인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향적산(香積山)'향이 쌓인 산'이라는 뜻이다. 저런 기도터가 하도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기도터를 대표하는 게 바로 향()일 테니까 말이다.



산행날머리는 연산 재래시장 주차장

임도를 따라 10분쯤 걸어 나가면 하산지점으로 예정된 관동리가 나온다. 하지만 산악회의 버스는 보이지 않는다.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우린 연산면소재지까지 걸어 나갈 수밖에 없다. 10분 이상을 더 걸어서 말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30분이 걸렸다. 중간에 멈춘 일이 없으니 오롯이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주미산(舟尾山, 382m)-능암산(陵岩山, 294m)-월성산(月城山, 313m)

 

여행일 : ‘17. 1. 26()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금학동과 옥룡동, 오곡동, 신기동, 소학동 일원

산행코스 : 경찰서두리봉(272m)우금치지막곡산(紙幕谷山, 298m)주미산철마산(鐵馬山, 345.1m)능암산웅치월성산옥룡동주민센터(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강송산악회


특징 : 오늘 산행은 공주대간(公州大幹)‘의 일부를 걷게 된다. 공주시의 남쪽을 ’U‘자 형태로 둘러싸고 있는 길이 13.7km(현지 안내판의 수치)의 능선이 공주대간인데, 월성산과 능암산, 철마산, 주미산, 두리봉 등의 주요 산봉우리들을 품고 있다. ’공주대간이란 뚜렷한 이름 없이 그저 삶의 터전을 가꿔오던 산골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생업의 길이었던 것을 여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길을 다듬은 뒤에 백두대간을 모티브로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외지 사람들에게는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의 주요 격전지로 더 알려져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물론 우금치(牛禁峙)’이다. 하지만 나머지 구간도 어느 곳 하나 동학농민운동과 관련을 맺지 않은 곳은 없다.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사이에 벌어졌던 ‘1차 전투(10.23~25)’‘2차 전투(11.08~11.11)’가 모두 이곳 공주대간 상의 웅치(熊峙)와 우금치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관군(관군+일본군)은 대간 줄기를 따라 금학동과 봉수대, 웅치, 효포, 우금치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에 농민군은 동쪽부터 서쪽 봉황산까지 30~40여리(13~16km)에 걸쳐 깃발을 꽂아 군세를 과시했다고 한다. 공주대간이 13km 정도니까 공주시내 전체를 둘러쌓았다고 보면 되겠다. 우금치 진격을 위해 우금치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방어선을 교란시키려고 효포 지역의 두 봉우리에서 공격할 듯 기세를 취하기까지 했단다. 아무튼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대패했다. 그리고 이 전투를 계기로 농민혁명도 끝났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역사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금치는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동학농민군이 반봉건·반외세 기치를 걸고 마지막 항전을 이루어냈던 장소로, 한국 근대사의 한고비를 이루는 무대가 된 뜻깊은 장소이며 우리 민족의 기개 넘치는 격전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우금치전적지(공주시 금학동 327-2)

논산-천안고속도로 남공주 I.C에서 내려와 40번 국도로 올라오자마자 다시 빠져나와야 한다. T.G 바로 근처에 봉정교차로(공주시 태봉동)가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우금치로를 타고 공주시내로 들어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금치전적지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우금치는 현재 터널이 뚫려있다. 아니 덮개를 씌웠다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도로를 내느라 능선을 깊숙이 팠었던 것을 다시 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흙을 덮기 전에 미리 터널을 만들어 두었음은 물론이다. 동물의 이동 통로를 만드느라 그랬지 않았나 싶다. 만일 그랬다면 동물들 덕분에 공주대간이 다시 살아난 셈이 됐다. ‘인간과 동물의 공존(共存)’,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참고로 우금치라는 이름의 유래는 우금(牛禁)과 우금(牛金)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이곳에 도둑의 출몰이 잦았다고 한다. 이에 관()에서는 해가 지고 난 뒤에는 소를 몰고 고개를 못 넘게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고개 이름을 우금(牛禁)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개에서 금송아지가 나왔다고 해서 우금(牛金)이라 불렀단다.



차에서 내려 터널을 향해 조금만 더 걸으면 우금치 전적지가 나온다. 사적 제387호로 지정되어있는 우금치전적지에는 동학혁명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동학농민혁명 때 이 고개를 넘기 위해 노력했던 동학군의 안타까운 넋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또한 동학 농민 운동은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정치의 개혁을 위해 농민들이 봉기했다는 역사적 의의를 기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잘 관리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곳의 일을 들춰내기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패배의 역사도 역사일진데 말이다.



우금치(牛禁峙)는 동학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2차 전투(11.08~11.11)’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1025일까지의 전투에서 연패(連敗)한 동학농민군은 논산에서 약 1주 동안 전열을 재정비한 뒤 118일 공주를 향해 최후 결전을 감행한다. 관군은 동학농민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이인과 판치에서 퇴각한다. 농민군의 공격에 놀란 관군과 일본군은 대간 줄기를 따라 금학동, 봉수대, 웅치, 효포, 우금치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한다. 9일 오전 10시 마침내 동학농민군은 우금치를 향해 진격을 한다. 그리고 우금치 진지에 불과 몇 미터까지 돌진하였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월등한 화력에 막혀 오르다 밀리기를 40~50회를 거듭하다가 8시경 철수를 시작함에 따라 공주전투의 막이 내리기 시작했다. 두 차례에 걸친 공주 전투는 4만 명이 넘는 최대 규모였으나 화력(火力=총포 등의 위력)의 현격한 열세전술(戰術)의 부재로 인해 농민군이 대패(大敗)하고 말았다.



누군가 위령탑의 비문(碑文)을 훼손시켜 놓았다. 적힌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이건 도리가 아닌 것 같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저렇게 훼손을 한다면 세상에 남아 날 시설물이 어디 있겠는가. 공주가 도리를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고을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터널의 위로 올라서자 오른편 산자락에 장승들이 늘어서 있다. 두리봉의 들머리(이정표 : 봉화대7.8Km/ 두리봉2.2Km/ 우금치전적지0.1Km)이다. 오늘 오르게 될 주미산이나 월성산 등은 왼편, 그러니까 두리봉의 반대방향이다. 하지만 이정표의 어디에도 그런 지명은 나타나지 않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산행을 하는 중에 만나게 되는 모든 이정표들은 하나같이 두리봉과 봉화대를 신주(神主)처럼 모시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봉화대란 월성산의 정상에 복원된 시설물을 말한다. 다시 말해 오늘 산행은 봉화대를 향해 진군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봉화대 방향은 절개지이다. 요 아래로 난 도로를 내는 과정에서 잘려나간 흉터일 것이다. 때문에 산길은 절개지의 오른편으로 열린다. 그리고 잠시 후 능선에 오르면 갈림길(이정표 : 봉화대7.6Km/ 뱁새울0.6Km/ 두리봉2.4Km)을 만난다. 반대방향, 그러니까 공주시가지 방향으로도 길이 나있는 걸로 보아 우금치 터널을 거치지 않고도 이곳으로 곧장 올라오는 길이 있었던 모양이다.



길은 잘 나있다. 출발하기 전부터 예상하기는 했다. 명색이 공주대간이니 얼마나 공을 들였겠는가. 그런 내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잘 가꾸어져 있다고 봐야겠다. 몇 년 전 지자체(地方自治團體) 차원에서 정비 사업을 펼쳤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기사에서는 나무계단과 밧줄 난간을 새로 설치하는 한편, 주요 지점에는 안내도와 이정표를 그리고 쉬어갈만한 곳에는 나무의자들을 각각 설치했다고 전했었다. 그 뒤로도 주기적으로 등산로 주변의 풀과 나무들을 제거하는 등 노면(路面) 정비를 해왔을 게 분명하다.



앞서가던 심용보(沈爖輔)선생님이 표지기(ribbon)를 매달고 계신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삼각점(공주 408, 1979. 8 복구)이 설치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해발이 겨우 194.6m에 불과한데 왜 이런 곳에다 삼각점을 설치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산행을 마칠 때쯤에는 이보다 더 의외인 삼각점도 보게 되지만 말이다. 참 오늘 심선생님으로부터 너무 귀한 선물을 받았다. 전국의 13,000개 산(봉우리)을 오른 기념으로 발간하신 우리나라 산, 봉우리 편람이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았으니 나도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중의 하나가 되는 셈이다. 기분 좋은 승격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대단하신 분이다. 우리 나이로 80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도 1주일에 다섯 번 정도를 산을 오르신다니 말이다. 산봉우리에 연연하지 않는, 아니 연연할 수조차 없는 초보 산꾼에 불과하지만 그의 열정과 체력만은 꼭 닮고 싶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든 산들을 글로 표현해 보고 싶다.



산길은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해가며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아니 길고 가파른 오르막길에 짧고 완만한 내리막길이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우금치와 지막곡산의 표고 차가 200m가까이 되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했을까 수원지 갈림길‘(이정표 : 봉화대7.1Km/ 수원지1.2Km/ 두리봉2.9Km)을 만나고, 이어서 10분 정도를 더 오르면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559-2514)과 벤치 2개가 놓여있는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나뭇가지에 광주지역의 산악인 백계남씨의 표지기가 매달려 있는 게 보인다. ’지막곡산 297.6m‘이란다. 하지만 조금 전에 이곳을 지나간 문정남선생님의 표지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분의 판단으로는 지막곡산이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내 생각도 역시 그렇다. 진행방향 저만큼이 이보다 조금 더 놓은 산봉우리 하나가 솟아있는 게 그 증거이다. 이곳은 274.7m봉이 아닐까 싶다.



산길은 274.7m봉을 지나면서 급하게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미끄러지는 게 부담스러울 경우 밧줄 난간에 의지해서 내려가면 된다.



안부까지 떨어졌던 산길은 다시 위로 향한다. 그리고 13분 후에는 지막곡산에 올라선다.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570-1477)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등 이곳이 지막곡산이라는 그 어떤 표시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누군가 표시목에다 지막곡산이라고 적어 놓았을 뿐이다. 공공기물에 낙서를 한 행위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이곳이 정상인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지막곡산을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아까 274.7m봉을 내려서면서 가파르다 여겼는데 이곳에는 비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긴 아까는 25m만 고도를 낮추면 되었는데, 이번에는 50m를 낮추어야만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게다. 하지만 이번에도 밧줄에 의지해서 내려선다면 큰 어려움은 없다.



그렇게 9분쯤 내려서면 안부삼거리(이정표 : 주미산0.3Km/ 산림휴양관0.5Km/ 우금티터널2.2Km)가 나온다. 왼편은 올 7월에 문을 연 주미산자연휴양림으로 연결된다. ’숲속의 집산림문화휴양관‘, 야영장 등의 숙박시설은 물론이고 목제문화체험관과 야외 물놀이 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니 유네스코세계유산인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등 공주지역의 문화유적을 구경하러 오는 길에 한번쯤 들러 봐도 좋을 듯싶다.



안부를 지나면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 가파름이 부담스러웠던지 이번에는 나무계단까지 만들어 두었다. 밧줄난간도 설치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10분쯤 올랐을까 데크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공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광을 즐길 수 있다.




5~6분쯤 더 걸었을까 공주대간 종합안내도와 이정표(봉화대 5.7Km/ 4.3Km), 그리고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622-2447)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삼거리를 만난다. 주미산의 정상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능선에서 약간 비켜나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정상을 둘러보고 나면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정상에는 작고 귀여운 정상표지석을 세워놓았다. 공주시에서 산행로를 정비하는 길에 정상석까지 챙긴 모양이다. 여러 봉우리 중 하나인 이곳 주미산을 최고봉으로 인정하면서 말이다. 주미산(舟尾山)이라는 이름은 공주지역의 풍수지리(風水地理)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공주는 북쪽 일부만 트여 있은 분지(盆地)로 사람을 가득 실은 배가 출발하기 전 모습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행주형(行舟形)의 지형인데, 이곳 주미산 인근이 배의 끝부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한편, 뱃머리 방향의 배를 매어두어야 할 지점에는 정지산(艇止山. 금성동 소재)이 있고, 정지산 아래엔 뱃사공에 해당하는 사공바위와 선박들이 정박했던 곳에 해당하는 정자방(正子方, 일명 정지방, 증지방)이 있다고 한다.



정상석 뒤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앞으로 걷게 될 공주대간의 나머지 구간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철마산에서 능암산을 거쳐 월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산은 계룡산 줄기가 아닐까 싶다. 왼쪽 멀리 보이는 건 갑하산과 우산봉일 것이고 말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이후부터 당분간은 일정한 고도(高度)를 유지하면서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반복해서 오르내리는 산행이 계속된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진행하면 철마산에 올라선다. 그렇다고 이곳이 철마산이라는 증거는 없다. 정상표지석이 안 보인다는 얘기이다. 이정표(봉화대 3.4Km/ 주미산 0.5Km)에도 현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저 삼각점(공주 315)에 적힌 해발고도(315m)를 보고 이곳이 정상이려니 할 따름이다. 아니 이곳이 정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표시가 또 하나 있기는 하다. 누군가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642-2419)에다 철마산이라고 적어 놓았다.




철마산에서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한 번 치고 오르면 10분 후에는 이정표(봉화대 2.8Km/ 주미산 1.1Km)와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688-2428)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이번에는 통나무로 의자까지 만들어 놓았다. 339m봉이 아닐까 싶다. 3~4분 남짓 앞에서 걷고 있는 문정남선생님이 매달아놓은 표지기가 눈에 띈다. 하단에 ’14,692이라고 적어 놓았다. 적힌 숫자만큼의 산봉우리들을 올랐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제부터는 고도(高度)를 까먹는 산행이 시작된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해가면서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간다는 얘기이다. 18분 후, 이정표 대신에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698-2495)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에서 왼편으로 길이 하나 나뉘고, 이어서 3분 후에는 또 다시 왼편으로 길이 나뉜다. 이번에는 이정표(봉화대 3.5Km/ 두리봉 6.5Km)까지 세워 놓았다. 이어서 중간에 2개의 이정표(#1 : 봉화산 3.3Km/ 두리봉 6.7Km, #2 : 봉화대 3.1Km/ 두리봉 6.9Km)를 더 만나고 나면 능암산 정상이다 철마산에서 내려선지 48분만이다.



능암산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712-2573)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니 능암산을 대표하는 것은 명품소나무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잘 다듬은 정원수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멋진 것이 명품소나무반열에 넣어도 되겠다



조망 또한 일품이다. 남동 방향이 암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계룡산 방향의 산줄기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왼쪽 끄트머리에 희미하게 나타나는 것은 금강이 아닐까 싶다.



산행을 하다보면 심심찮게 시판(詩板)들을 만나게 된다. 김소월, 서정주, 신경림 등 꽤 많은 시인(詩人)들의 대표작을 적어 놓아 음미하면서 걷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그 중에 한용운선생님의 복종이란 시가 가장 가슴에 다가와 사진을 올려본다.



능선의 양쪽은 거의 비탈에 가깝다. 흡사 토성(土城)의 성곽(城郭)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사람의 힘으로 이렇게 흙을 빚어 올리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 자연 성곽으로 보면 되겠다. 120년 전 이 길은 농민군들이 뛰어 다녔을 것이다. 꼭 통과해야만 하는 우금치나 웅치를 향해 말이다.



이후로도 산길은 계속해서 아래로 향한다. 그렇다고 오르막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이 더 길면서도 가파르다는 얘기이다. 가는 길에는 왼편으로 생태공원으로 연결되는 갈림길(이정표 : 봉화대1.4Km/ 생태공원0.8Km/ 두리봉)을 만나기도 한다. 이 구간에서는 주의해야 할 게 하나 있다.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이정표(봉화대 1.3Km/ 생태공원 1.3Km)이다. 방금 걸어온 방향을 생태공원으로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방향에서 산행을 해오는 사람들은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 그나마 누군가 이정표의 그쪽 방향에다 아님, 주미산방향으로라고 적어 놓아 다행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십자안부까지 떨어졌던 산길이 다시 위로 향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첨부된 지도에 표기된 229m봉이 아닐까 싶다. 이곳도 역시 정상석은 없다. 그저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6744-2671)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하긴 이름도 없는 봉우리에 무슨 정상석이 필요하겠는가. 아무튼 정상에 서면 잠시 후에 오르게 될 월성산이 진행방향의 나뭇가지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229m봉을 지나면서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산길은 그 가파름이 부담스러웠나보다. 통나무로 계단까지 만들어 놓았다. 길고 긴 계단이 만들어내는 곡선이 생각보다는 아름다운 길이다.



그리고 7분 후에는 안부사거리(이정표 : 봉화대 0.6Km/ 주미산 4.3Km)에 내려선다. 능치(陵峙), 능치고개일 것이다. 혹자는 이곳 능치(陵峙)의 어원(語源)능치고분군에서 찾기도 한다. 공주터널이 지나고 있는 바로 위 금학동 쪽의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그 백제시대의 고분군(古墳群) 말이다. 참고로 이 고개는 능치(陵峙)와 능현(陵峴, 신증동국여지승람) 외에도 웅치(熊峙) 또는 곰티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논산 방면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웅진성(공주)으로 들어가기 위해 넘던 고갯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 웅치는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때 농민군(農民軍)의 주요 격전지(激戰地)였다. 18942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광범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여 발생한 민란은 동학교도와 결합되고 반침략과 반봉건을 지향하는 개혁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차 봉기(蜂起)’이다. 한때 전주성을 함락시키기도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전주화약을 체결함으로써 봉기는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신정권을 세웠다는 소식에 척왜(斥倭)를 외치며 18949월에 다시 봉기한다. 그리고 남접과 북접이 항일구국투쟁이라는 명분으로 공동 전선을 펴게 된다. 2차 봉기의 마지막 격전지가 공주 우금치 지역이다. 공주를 사이에 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우금치전투가 있기 전에 벌어졌던 ‘1차 전투(10.23~25)’의 격전지가 바로 이곳 웅치였다는 것이다. 전투에서는 비록 패하였지만 말이다.



반대편 능선으로 올라서자마자 삼거리(이정표 : 봉화대/ 수원골/ 공주여고)을 만난다. 왼편은 수원골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던 산길은 효포초등학교 삼거리’(이정표 : 봉화대 0.3Km/ 주미산 4.6Km)를 만나면서 가팔라진다. 길가에 밧줄난간을 만들어 놓았다면 대충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나 고갈되어가는 체력 때문에 애를 먹게 되는 구간이다.



숨이 턱에 차서 오르길 20분이면 드디어 월성산 정상이다. 이는 웅치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니 참조한다. 정상은 체육시설을 갖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왼편 e-편한세상아파트로 연결되는 삼거리(이정표 : 대웅아파트1.8Km/ e-편한세상아파트2.2Km/ 주미산4.0Km)인데 체육시설과 평상은 물론 공주대간 코스안내도건강운동정보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정상표지석은 그보다 조금 위에다 세웠다. 그런데 봉화대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이곳의 지명은 분명 월성산이다. 그리고 봉화대는 그곳에 세워진 하나의 시설물일 따름이다. 정상석이 잘 못 되었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정상석의 뒤에는 산뜻한 외모의 봉수대(烽燧臺)가 세워져 있다. 논산의 노성산성에 있던 봉수대로부터 신호를 받아 정안의 고등산봉수대로 연락을 해주던 봉수대가 있었던 터인데 2007년에 새로 복원했단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남쪽의 계룡산 줄기가 한눈에 잘 들어오는가 하면, 북쪽으로는 공주시가지가 널찍하게 펼쳐진다.



하산을 시작한다. 철사다리를 빙글 돌아 내려가면 잠시 후 정상 정도 높이의 또 다른 봉우리가 나타난다. 정상과 쌍둥이 형제라고 보아도 되겠다. 이곳에는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조망을 실컷 즐겨보라는 모양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남쪽방향으로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열린다. 오늘 올랐던 전망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지 않을까 싶다. 금강과 세종시 지역은 물론이고, 멀리 우산봉과 계룡산의 굵은 힘줄까지도 또렷하게 나타난다.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육각으로 지어진 정자(亭子)를 만난다. 하지만 그냥 지나쳐도 되겠다. 정자에 올라봐야 볼만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잠시 쉬어가는 용도로 지어놓았나 보다. 반대방향에서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거칠어진 숨결을 풀어볼 겸해서 말이다.



정자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길이 널따랗기 때문에 내려서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언제부턴가 길가는 소나무들 천지로 변해있다. 숲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걷는 산행이 시작된다는 얘기이다.



이제부터는 심심찮게 갈림길이 열린다. 그만큼 도심(都心)에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첫 번째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수원골갈림길’(이정표 : 옥룡정수장2.2Km/ 수원골0.4Km/ 봉화대0.7Km)이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는 게 지겹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라면 이쯤해서 수원골로 내려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정자에서 내려선지 13분 만이면 또 다른 정자를 만난다. 이번에는 간단한 운동기구 두 세트 정도와 벤치도 함께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조망이 트이지 않기는 매한가지이다. 반대방향에서 힘들게 올라온 사람들에게 잠깐 쉬어가라는 배려가 아닐까 싶다. 나무그늘 덕에 무더운 여름에는 땀 식히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이제부터는 선택이 필요하다. 아직까지도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있는 능선을 계속해서 타느냐 아니면 이쯤에서 산을 내려갈 것인지를 놓고 말이다. 이를 눈치라도 챘는지 곳곳에다 갈림길을 만들어 두었다. 그 첫 번째는 8분 후에 만나게 되는 주공아파트 갈림길‘(이정표 : 옥룡정수장1.2Km/ 주공아파트0.4Km/ 봉화대1.7Km)이다. 이어서 공주대 옥룡캠퍼스 갈림길‘(이정표 : 옥룡정수장0.9Km/ 공주대옥룡캠퍼스0.4Km/ 봉화대2.0Km)대웅아파트 갈림길‘(이정표 : 옥룡정수장0.7Km/ 대웅아파트0.3Km/ 봉화대2.2Km), ’옥룡사거리 갈림길‘(이정표 : 옥룡정수장0.6Km/ 옥룡사거리/ 봉화대2.3Km)이 대략 2~4분 간격으로 줄지어 나타난다.



잠시 후 괴이하게 생긴 삼각점(충남 36)을 만난다. 삼각점을 가운데에다 신주(神主)처럼 모셔놓고 네모진 오석(烏石)으로 테를 둘렀다. 그 아래에는 국가의 중요시설물이니 훼손돼지 않도록 협조해달라는 당부의 말까지 적어 놓았다.



산행이 마감되는 옥룡정수장은 삼각점의 바로 아래에 있다. 능선의 한가운데에다 조성한 탓인지 산길은 이 시설물을 왼편으로 우회(迂迴)하도록 해놓았다. 내려오는 길에 시야가 잠깐 열리면서 옥룡동 일원과 공주시가지를 관통하는 금강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산행날머리는 옥룡정수장

정수장을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반 바퀴를 돌면 체육시설지구가 나온다. 이곳에 큼지막한 공주대간 탐방로 안내판을 세워놓았으니 자기가 걸어온 길을 정리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체육시설을 지나면 정수장의 정문이다. 문의 옆에는 등산로의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길을 못 찾고 정수장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골머리를 자주 앓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산행은 이곳에서 끝났다고 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쉬지 않았으니 오롯이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에필로그(epilogue), 오늘 산행은 동학농민운동을 되새기며 걷는 셈이 되었다. 산행을 시작했던 우금치에서부터 산행이 마무리되는 봉화대에 이를 때까지 120년 전의 동학농민군의 넋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부민란(古阜民亂)을 시작으로 1년여에 걸친 농학농민운동은 결국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참가했던 농민군들이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3·1독립운동으로 그 정신이 계승되었다고 한다. 오래오래 기억하고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할 아픔의 역사라는 얘기일 것이다. 민란으로까지 번질 정도로 궁핍한 백성들을 제대로 보듬지 못한 위정자(爲政者)들 때문에 엉뚱하게 외세 침략의 발판이 되고만 뼈아픈 우리의 역사이자 씁쓸한 패배의 기록이지만 올바르게 인식하고 다시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특히, 시끄럽기 짝이 없는 요즘의 현실이라면 이는 더욱 절실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적산(梨摘山, 181m)-이화산(梨花山, 171.7m)-구정봉(九政峰, 110.4m)

 

여행일 : ‘16. 11. 10()

소재지 : 충남 태안군 이원면과 원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청산리나루터가마봉(55.1m)이적산이교산(梨郊山, 150m)시우치봉(148.2m)이화산뾰루봉(127m)구정봉청산2리회관(산행시간 : 4시간30)

 

함께한 사람들 : 강송산악회


특징 : 금북정맥(錦北正脈) 줄기의 구정봉(104m, 태안군 소원면)에서 북쪽으로 가지를 친 산줄기가 후망지맥(候望支脈)’이다. 주요 봉우리들로는 철마산(208m)과 승주산(160m), 망월산(148.6m), 가제산(173m), 국사봉(205.8m), 노인봉(165m), 후방산(144.2m) 등이 있는데, 태안의 명품 바다인 가로림만(加露林灣)을 싸안고 있는 봉우리들로 보면 된다. 그 후망지맥의 안쪽에 100m 내외의 고만고만한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산줄기가 있다. 이적산과 이화산, 구정봉 등 오늘 오른 산들인데, 어느 것 하나 200m를 넘기지 못하는 자그마한 산봉우리들에 불과하지만 가끔은 조망까지 트이는 등. 산의 구색은 두루 갖추고 있다. 특히 여섯 개의 봉우리 모두 이름이 붙어 있는 이화산은 일품이다. ‘태안의 정원이라 불린다는 소문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금방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선지 이화산을 제외한 나머지 봉우리들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아니 일 년에 한두 명이나 찾는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속칭 봉우리 따먹기를 하는 사람들이나 찾는다는 얘기이다. 나 역시 이화산을 제외한 나머지 봉우리들은 권하고 싶지 않다. 고생만 죽어라고 하게 될 뿐, 가슴 속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전무(全無)하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청산리나루터(태안군 원북면 청산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에서 내려와 32번 국도를 타고 태안읍까지 온다. 이어서 만리포 방면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두야교차로(태안읍 장산리)에서 우회전하여 603번 지방도를 탄다. 잠시 후 무내교차로(태안읍 삭선리)에서는 좌회전하여 계속해서 603번 지방도를 탄다. 직진하면 634번 지방도이니 참조한다. 아무튼 이 길을 타고 한참을 달리다가 마산 버스정류장(원북면 마산리)’에서 우회전한 후 군도(郡道 : 나루터길)을 따라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청산리나루터에 이르게 된다. 군내버스의 종점이자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버스에서 내리면 청산리나루터이다. 인천행 정기여객선(定期旅客船)이 기항(寄港)하던 나루터로 1930년 대 까지만 해도 손님을 태운 배가 매일 한 번씩 드나들었을 정도로 번창했던 나루터이다. 도로사정이 원활하지 못했던 당시만 해도 128Km에 불과한 뱃길이 이 지방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그만 어선들 몇 척이 매어져 있을 뿐 한적하기 짝이 없다. 도로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여객과 화물의 물동량이 급격히 떨어지자 1978년에 여객선의 운항이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농어촌 정주어항(漁村停住漁港,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도서나 벽지에 있는 어업 근거지)’으로 운영되고 있단다.



버스가 들어왔던 반대방향의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길가 전신주에 매달려 있는 꽃향기길 이정표(새섬리조트 3.5Km/ 시우치저수지 3.4Km)'가리키고 있는 새섬리조트 방향이다. 잠시 후 오른편에 풍경이라는 잘 지어진 펜션이 보인다면 제대로 들머리를 잡았다고 보면 된다.



펜션 앞을 지나면서 길은 임도로 변한다. 그리고 10분쯤 지나면 올라서게 되는 고갯마루에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새섬리조트 2.8Km/ 청산리나루터 1.1Km)로 나뉜다. 가마봉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 임도를 따라야 한다. 기존의 임도보다 약간 좁아진데다 이정표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참 이곳에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새섬리조트 방향으로 진행할 경우, 능선을 타지 않고도 다음에 오르게 될 이적산의 들머리에 이를 수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마봉에서 이적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탄다. 우리도 그 능선을 탔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론하는 이유는 능선을 탈 경우 엄청난 고생을 치러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나중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만이라도 임도를 이용해서 편하게 산행을 해보라는 의미에서다.



아래로 뚝 떨어졌던 임도가 다시 위로 향한다. 그리고 잠시 후 능선에 올라서면 송전탑(送電塔) 하나가 보인다. 이어서 능선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또 다른 송전탑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가마봉 정상이다. 정상은 송전탑 말고는 텅 비어 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이정표나 삼각점 등 이곳이 가마봉의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 어떤 표시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만산 회원(萬山 會員)’이라는 조삼국(趙三國)선생님의 반쯤 잘려나간 리본(ribbon) 하나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을 따름이다. 들머리에서 이곳 가마봉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렸다.



조금 전에 이곳으로 오면서 만났던 송전탑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른편의 능선을 따른다. 이적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이지만 권하고 싶지는 않은 코스이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임도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이다. 이런 정보를 몰랐던 우린 무지막지한 고생을 해야만 했다. 길이 잘 보이지 않는 것쯤은 차라리 애교(愛嬌)로 쳐도 좋다. 쓰러진 나무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어 유격훈련을 해야 만이 진행이 가능할 정도이다.



거기다 능선은 길기까지 하다. 저만큼 앞에 보이는 것이 이적산이겠거니 하고 기대해보지만 봉우리에 오르면 또 다른 봉우리가 저만큼에서 나타난다. 기대와 실망을 번갈아 하는 산행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아무튼 이 구간에서 에이 十八이라는 육두문자(肉頭文字) 한번 내뱉지 않고 산행을 했다면 성인군자(聖人君子)’라는 것을 내가 보증해 주겠다. 그만큼 길이 험하다는 얘기이다. 가시넝쿨인 명감나무가 유난히 많은데다 산초나무와 엄나무 등 가시나무들 천지다. 찔리거나 할퀴는 건 보통이고, 아랫도리에 신경 쓰느라 자칫 위라도 방심할라치면 싸대기를 얻어맞기 일쑤이다. 그러니 어찌 육두문자가 튀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30분 정도 고생을 치르고 나면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된다. 아까 풍경펜션 뒤의 고갯마루에서 헤어졌던 임도일 것이다. 임도를 따랐더라면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절약되었을 것을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한 꼴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2분 후에는 삼거리(이정표 : 새섬리조트2.1Km/ 마을0.7Km)을 만난다. 이곳에서는 왼편의 마을방향으로 진행한다.



삼거리에서 20m쯤 내려가다 오른편에 보이는 비포장 임도로 들어선다. 잠시 후 진행방향 저만큼에 묘역(墓域)이 보인다면 제대로 들어섰다고 보면 된다.



묘역을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거칠어진다. 그러고 보면 조금 전의 임도는 묘역을 관리하려고 낸 사도(私道)였던 모양이다. 산길이 거칠지만 버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까 고생했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고생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산길이 조금 나아졌다싶으니 마음까지도 여유로워 지는 모양이다.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까지 생긴 것을 보면 말이다.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서해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입구가 좁고 만의 내부가 넓은 호리병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가로림만(加露林灣)이다.



그렇게 30분 남짓 진행하면 드디어 이적산 정상이다. 이곳도 역시 텅 비어있기는 가마봉과 매한가지이다. 그저 아까보다는 훨씬 많은 리본들이 매달려 있다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만산 회원(萬山 會員)’이신 심용보(沈爖輔)선생님과 문정남(文政男)선생님 외에 오늘은 5.000산을 올랐다는 신상호선생님 것도 보인다. 잠시 후 서래야 박건석선생께서 올라오시더니 정상표시코팅(coating)를 매달으신다. 오늘부로 이적산은 이름표를 하나 새로 달게 되는 셈이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후로 이적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정상에 올랐다는 확실한 인증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교산으로 향한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 않아 삼각점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그렇다면 이적산의 정상은 이곳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관리번호(서산 310) 아래에 적혀있는 높이(海拔高度)178m이다. 지도(地圖)에 나와 있는 이적산의 높이보다 3m가 낮은 것이다. 문정남(文政男)선생님과 신상호선생님의 리본이 매달려 있지만 난 개의치 않기로 한다. 조금 전에 박건석선생님이 코팅지를 매달아 놓은 곳을 정상으로 여기기로 한다. 그래도 이름표가 매달려 있는 곳이 조금이라도 더 의젓하지 않겠는가.



삼각점 앞에는 송전탑이 세워져 있다. 철탑 사이로 시야가 열리면서 이교산과 이화산 등 잠시 후에 오르게 될 봉우리들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잠시 후 산길은 오른편에 보이는 송전탑으로 향한다. 능선을 벗어난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오회장님의 방향표시지는 능선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길이 좀 묘하다. 능선이 온통 산초나무 밭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교산으로 가려면 별 수 없다. 무조건 들어서고 본다. ‘! 따가워그 대가는 혹독했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등의 여러 곳에다 생채기를 내고 난 뒤에야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시 오르면 이교산의 정상이다. 이적산에서 11분이 걸렸다. 아무튼 이곳 이적산도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등 그 어느 것 하나 이곳이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시설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저 심용보선생님 등이 매달아 놓은 리본들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까 오는 길에 문정남선생님과 함께 중간에서 내리시더니 우리보다 조금 먼저 이곳을 통과하신 모양이다.




이교산을 지나면서 산길은 더욱 희미해진다. 길을 찾아가며 진행하기 보다는 그저 능선을 따른다는 편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 14분 후에는 시우치봉(時雨峙峰)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도 역시 아무런 특징이 없는 밋밋한 봉우리에 불과하다. 물론 정상임을 알려주는 그 어떤 시설물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먼저 지나가신 만산회원님들의 리본을 보고 이곳이 시우치봉의 정상임을 알게 될 뿐이다.



이교산을 지나면서 개척 산행이 시작된다. 없는 길을 만들어 가면서 진행한다는 얘기이다. 너덜지대가 나오는가 하면, 명감나무의 가시넝쿨들이 발길을 휘감는 지역도 심심찮게 만난다. 한마디로 고생이 막심한 구간이다.



그렇게 20분 정도 고생을 치르고 나면 드디어 민가(民家)가 나온다. 그런데 민가의 앞에서 난감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문 앞에서 커다란 개가 사납게 짖어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니고 둘이나 된다.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니 다행이도 줄에 묶여있다. 줄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쌓여 조심조심 지나가는데, 개새끼 눈에도 여리게 보였던지 짖어대는 소리가 더욱 거세진다.



동네를 지나면 건너편에 이화산이 나타난다. 200m에도 못 미치는 높이인데도 제법 높다랗게 보인다. 바닷가에 위치한 탓인가 보다. 아무튼 400m급의 높이는 된다 치고 산을 올라야겠다. 이곳의 해발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것을 감안해야 하니까 말이다.



마을에서 시우치저수지까지는 도로를 따른다. 아까 청산리나루터로 들어올 때 지나왔단 군도(郡道)인 나루터길이다. 시우치저수지는 원래 바다에 방조제(防潮堤)를 쌓아 만든 인공 저수지이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벼농사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강태공들에게는 낚시터로 더 유명하단다. 저수지가 만들어내는 경치 또한 빼어나다. 건너편에 고즈넉하게 앉아있는 네잎 클로버 수양관(펜션)’이 저수지와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것도 잘 그린 산수화이다. 아무튼 저수지를 만났다싶으면 도로를 벗어나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정표(갈두천·풍천5.1Km/ 청산리나루터3.2Km)가 가리키는 갈두천(풍천) 방향이다.



이어지는 길은 저수지를 왼편에 끼고 반 바퀴를 돈다고 생각하면 된다. 저수지의 끄트머리에 있는 전신주에 갈두천이 5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매달려있다. 이곳에서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물론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갈두천 방향이다. 그렇게 10분 남짓 걸으면 등산로라고 적힌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이화산의 들머리가 나온다. 도로에 내려선지 18분 만이다. 중간에 잘 지어진 네잎 클로버 수양관을 지났음은 물론이다.



이화산에서 처음으로 등산로다운 등산로를 만난다. 통나무로 만든 나선형(螺旋形)의 계단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막무가내로 오르기가 아까울 정도로 멋진 길이다.



그렇게 13분 정도를 오르면 6봉인 갓봉(171m)이다. 특이할 게 없는 정상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그 옆에 운동기구까지 설치해 놓았다. 오르는 구간이 짧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운동량을 채워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아니 그저 스트레칭(stretching) 정도라고 보는 게 더 옳겠다.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산행이 이어진다. 150m 내외의 고만고만한 산봉우리들이 계속되니 힘이 들 리가 없다. 등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산책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콧노래라도 불러가며 걸어도 무방할 것이다.



잠시 아래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면 5봉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이화산(171,7m)의 정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통나무로 만든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이곳이 정상이라는 표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참고로 옛날 이곳 이화산에는 돌배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그 배나무들이 봄철이면 하얀 꽃들을 피워내었던 모양이다. 그런 풍경이 하도 아름다워 배꽃뫼라 했는데, 한자 표기에 의해 이화산(梨花山)’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조선조 초기인 1416년 태종(이방원)이 후일 세종대왕이 되는 충령대군과 함께 태안의 이화산에서 수렵을 했다는 기록이 신동국여지승람조선왕조실록에 올랐을 정도이니, 이화산은 옛날부터 특별한 산이었던 셈이다.



다음 봉우리는 4봉인 탑봉(塔峰, 162m)이다. 이곳도 역시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서 만든 의자만 놓여 있을 뿐, 별다른 특징은 보여주지 못한다.



아니 다른 점이 있기는 하다. 정상 어림에서 비록 좁지만 시야(視野)가 열린다. 그리고 가로림만(加露林灣)이 눈앞에 펼쳐진다. 발아래에 있는 태안군은 물론이려니와 건너편 서산시의 해안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자못 빼어난 풍광이다.



탑봉에서 내려서는데 수많은 돌탑(石塔)들이 나타난다. 아까 첫 번째 봉우리인 갓봉에 오를 때도 돌탑들을 만나기는 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쌓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의 돌탑들은 누군가가 정성들여 쌓아올린 흔적이 역력하다. 거의 전문가 수준인 것이다. 그래서 이곳 4봉을 탑봉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5분 후에는 3봉인 바지그루산(145m)에 올라선다. 봉우리의 한가운데에 어른의 허리쯤에 이를 높이의 바위가 자리 잡고 있을 뿐 별다른 특징이 없는 것은 다른 봉우리들과 마찬가지이다.



3봉에서는 제법 깊게 떨어진다. 경사 또한 제법 가파른 편이다. 안부를 지나 오르막길에는 크지는 않지만 바위지대까지 나타난다.



12분 후 2봉인 중미산(中美山, 166m)에 올라선다. 반반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두 개의 벤치를 놓아두었다.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도 보인다.



그리고 6분 후에는 이화산의 마지막 봉우리인 상산(上山, 156m)에 올라선다. 정상에는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한가운데에는 정상석도 보인다. ‘원북면체육회에서 세운 것인데 왜 이곳에다 세웠는지 모르겠다. 오회장님의 지적하던 대로 높이까지도 182m라고 틀리게 적어 놓았다.



전망대에 서면 가로림만(加露林灣)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호리병 모양으로 생겼다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다. 호수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무튼 가로림만은 호리병같이 생긴 모양새 때문에 민()-() 간의 갈등이 많은 곳이다. 가로림만의 초입인 태안군 이원면 내리와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 사이의 바다를 막아 조력발전소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추진 중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갈등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긴 생태계의 파괴를 우려하는 주민들과 지역발전을 기대하는 주민들 간의 다툼이 어디 이곳뿐이겠는가. 그저 서로 -(win-win)’이 될 수 있는 원만한 타협이 이루어지길 빌어볼 따름이다.



데크에는 양쪽으로 계단이 나있다. 내려가는 길이 두 개로 나뉜다는 얘기이다. 우린 올라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 하산을 시작한다. 통나무계단을 밟고 잠시 내려가면 빽빽하게 들어찬 소나무 숲 사이를 걷게 된다. 폭신폭신한 흙길에 솔가리들까지 수북하게 쌓여있다. 이런 길을 걷다보면 몸도 마음도 편안해 진다. 특히 이렇게 경사가 완만한 솔숲 길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코끝을 스치는 소나무향 속에는 피톤치드까지 넘치도록 가득 차 있다. 도심(都心)의 오염에 찌들었던 이내 가슴은 어느새 밑바닥까지 깔끔하게 정화되어 있다.



폭신폭신하기 짝이 없는 오솔길을 쉬엄쉬엄 걷다보면 어느새 임도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6봉에서 5분 정도의 거리이다. 이곳에서는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비포장임도를 따른다.



2분 정도 걸었을까 왼편 산자락으로 난 길이 하나 보인다. 임도로 여겨질 정도로 넓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산길은 오솔길로 변한다. 그리고 제법 가팔라진다.



6분 후 뾰루봉 정상에 올라선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것은 아까 이화산에서 만난 산봉리들과 마찬가지이지만 이곳에는 삼각점(서산 434)이 설치되어 있다. 아까 이화산에서 만난 봉우리들보다는 의미가 있는 봉우리라는 얘기일 것이다.



임도로 되돌아 내려온다. 그리고 계속해서 임도를 따른다. 7분 후 도로에 내려서면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오른편은 원북면소재지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도로를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걷다가 새마을운통탑()’을 만났다 싶으면 오른편 임도로 들어서야 한다. 쇠줄로 막아놓았지만 개의치 않아도 좋다.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면 환상적인 가을 단풍을 만나게 된다. 조림(造林)된 단풍나무들이 산자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산악회에서 나누어준 지도에 신일조경이라는 지명이 나오더니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임도가 끝나는 지점은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에 보이는 절개지(切開地)를 치고 올라야만 한다.



절개지를 올라섰다하면 몇 걸음 걷지 않아 구정봉 정상이다. 이곳도 역시 특징이 없기는 다른 봉우리들과 매한가지이다. 누군가의 안내가 없다면 어느 누구도 이곳이 구정봉의 정상이란 걸 눈치 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외로움은 오늘로서 마지막이다. 함께 오른 박건석선생이 정상표시코팅지를 매달아 놓았기 때문이다.



이젠 하산만 남았다. 올라왔던 임도를 따라 도로까지 되돌아간 다음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하지만 우린 단축코스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그게 불행의 서막이 될 줄은 까마득히 모른 채로 말이다. 길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애초부터 길이란 게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저 방향만 보고 길을 만들어가며 내려갈 따름이다. 군대 생활을 할 때에도 받지 않았던 유격훈련을 늘그막에 제대로 체험해볼 수밖에 없었다.



20분 후 저수지가 나타난다. 드디어 인간이 만들어놓은 흔적을 만난 것이다. 이어서 산죽(山竹) 숲을 헤치고 나가면 포도과수원이다.


산행날머리는 청산2리 마을회관

포도밭을 빠져나오면 도로에 내려서게 되고, 이어서 저만큼에 마을회관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4시간 30분이 걸렸다. 중간에 멈춰보지 않았으니 온전히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영인산(靈仁山, 363.6m)-상투봉(299m)-닷자봉(275m)

 

산행일 : ‘16. 6. 19()

소재지 : 충남 아산시 염치읍과 영인면, 인주면의 경계

산행코스 : 주차장2매표소수목원상투봉닫자봉영인산깃대봉연화봉산림박물관자연휴양림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 3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누군가 그랬다. ‘충청도 산들을 우습게보지 말라고오늘 오른 산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높이가 고작 400m에도 못 미치는 나지막한 산인데도 불구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봉우리 사이의 골이 너무 깊었던 것이 그 이유이다. 오늘 산행은 영인산 자연휴양림을 빙 둘러싸고 있는 5개의 봉우리들을 종주하는 코스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독립적인 산이라기보다는 영인산에 포함된 다섯 개의 봉우리로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세 개의 독립적인 산으로 봐야할 것 같다. 신선봉과 깃대봉, 연화봉으로 이루어진 영인산을 하나로 보고, 상투봉과 닫자봉은 별개의 산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이다. 같은 산으로 보기에는 골이 너무 깊기 때문이다. 봉우리들 사이로 물길이 지나가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산은 곱다. 바위산으로 볼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곳곳에 암릉이 발달되어 있고, 그 덕분에 조망까지 툭 트인다. 거기다 자연휴양림을 끼고 있어 볼거리도 많다. 가족들끼리 즐길 수 있는 편의시설도 충분하다. 산행이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할 산이 아닐까 싶다. 가족과 함께라면 더욱 좋을 거고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영인산자연휴양림 주차장(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산 56-1)

서해안고속도로 서평택 I.C에서 내려와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서평택 IC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77번 국도를 탄다. 잠시 후 내기삼거리(평택시 포승읍 방림리)에서는 우회전하여 38(얼마 후 39번과 합쳐진다) 국도를 탄다. 아산만방조제를 지나 영인면소재지인 아산리에서 국도를 빠져나오면 아산온천교차로가 나온다. 좌회전하여 아산온천로를 따르다가 잠시 후 돌이가든(영인면 아산리 129) 앞에서 오른편으로 길을 바꾸면 곧이어 영인산자연휴양림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도로(휴양림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건너 맞은편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휴양림에서 내건 2매표소를 설치운영 하겠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으니 참조한다.



잠시(5) 후 임도를 만난다. 개의치 말고 가로지른다. 그리고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9분 후 오른편으로 길(이정표 : 정상4.9Km/ 주차장0.7Km)이 하나 나뉜다.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산의 높이가 낮다보니 서둘러서 고도(高度)를 높일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4분쯤 더 걸으면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상투봉1.9Km, 정상 4.6Km/ 어금니바위0.7Km)을 만난다. 원골로 연결되는 왼편 방향에 어금니바위라는 지명(地名)이 보인다. ‘아산(牙山)’이라는 이 지방의 이름이 어금니바위(부처바위)’라는 바위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 바위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아산(牙山)’이라는 이름을 얻게 만든 어금니()’를 닮은 바위가 영인산의 기슭에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바위가 소개되었을 정도이니 어금니바위는 아산의 자존심 같은 존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책에는 괴석이 신기한 부처를 이루어 3년 동안 다섯 명의 원(사또)을 갈려 보냈다라고 적혀있다.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산길은 여전히 완만하게 이어진다. 다만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던 소나무들이 그 개체수를 점점 늘려간다는 것이 달라졌을 따름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낯익은 팻말도 보인다. 국제신문의 산행대장을 지냈던 최남준씨가 .라는 아명(雅名)으로 매달아 놓은 팻말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걷고 있는 이 능선이 영인지맥(靈仁支脈)’이었던가 보다. 금북정맥 상에 있는 성거산(579m)과 걸마고개 사이의 무명봉에서 서북쪽으로 분기하여 용와산(238m)과 연암산(293m), 금산(286m), 영인산, 입암산207m) 등을 일구고 아산만에서 그 맥을 다한다는 약 45km의 산줄기 말이다. 아래 사진은 여영이라는 또 다른 산악인이 매달아 놓은 팻말을 찍은 것이다.



작은 봉우리 몇 개를 오르내리며 고도(高度)를 높여가던 능선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291.3m봉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 상투봉이 조망되는 곳이다. 이후 산길은 완만한 경사의 내리막길로 바뀐다.



산행을 시작하고 40분쯤 지났을까 난데없이 매표소(이정표 : 상투봉0.7Km, 정상 3.4Km/ 휴양림9.6Km/ 주차장2.2Km)가 나타난다. 능선에 매표소라니 흔하지 않은 발상이다. 하지만 잠시 후 무릎을 탁 치고 만다. 아까 산행들머리에서 보았던 현수막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2매표소를 설치 운영하겠다는 그 현수막말이다. 당시만 해도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쳐버렸는데 이곳을 의미했던가 보다. 그리고 그만큼 이 코스(신설주차장에서 수목원)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매표소를 지나면 푸른 초원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영인산 휴양림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수목원(樹木園)이다. 2000년 대형 산불로 황폐화된 삼림을 복구하고 시민의 자연학습장을 마련하기 위해 2011년 개장했다고 한다. 이 수목원은 중심지구·계곡학습지구·습지학습지구·산림복원지구 등으로 나눠지는데 교목(喬木) 3507천 그루와 관목(灌木) 26514만 그루, 초화류(草花類) 54448만 그루. 그리고 기타 팥배나무 등 1158627천 그루가 식재(植栽)되어 있다고 한다.





망초도 무리를 지어 피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나보다. 망초를 천덕꾸러기 풀로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언젠가 지인으로부터 망초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망할 놈의 풀이라고 풀이를 해 주었었다. 아무리 뽑아내도 계속해서 자라나는 잡초에 질려버린 농부가 내뱉은 말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는 또 다른 설()도 덧붙였었다. 이 식물이 나타나면서 나라가 망()했다는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망초가 귀화해 온 시기가 조선이란 국가가 망해가는 구한말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거질 ()’를 써서 망초(莽草)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래 사진과 같은 상황, 즉 묵정밭에 우거진 잡풀로 봤던 모양이다. 그래서 난 맨 마지막의 의견에 동조하고 싶다. 그래야만 저렇게 아름다운 꽃밭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상투봉은 전체가 암봉(巖峰)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호흡을 하며 긴 계단을 오르자 어느새 상투봉 정상이다. 매표소를 지난 지 15분 만이다. 상투봉이라는 이름은 봉우리의 생김새로부터 왔다고 한다. 멀리서 볼 때 산봉우리의 생김새가 상투를 틀어 올린 것 같이 뽈록하게 솟아있다는 것이다. 동림산(桐林山)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니 참조한다.



정상은 나무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예쁘장하게 생긴 정상표지석은 데크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물론 이정표(닫자봉 1.1Km, 정상 2.7Km/ 흔들바위 0.1Km/ 주차장 1.2Km, 휴양림 1.4Km)도 보인다. 특이한 점은 조망도(眺望圖)를 양쪽 방향에다 세워놓았다는 것이다. 등산객들의 조망을 돕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난간에 선다. 그리고 조망도와 비교해가며 아산만 일대를 조망해본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서해바다 근처의 들녘에 솟아있어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뻥 뚫리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이곳 영인산 일원을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던 이유일 것이다. 덕분에 우리 역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부근은 아픈 우리 역사의 현장이었다. 청일전쟁 때는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청나라 군사들이 아산만 갯벌로 상륙하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으며, 6·25 전쟁 때에는 남북 간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미군이 37년 동안 주둔하면서 민간인의 출입을 금지했었다.



흔들바위로 향한다. 강청리 방향이다. 중간에 자그만 암봉을 지난다. 범상치 않은 생김새의 기암(奇巖)이 주변 들녘과 잘 어우러지며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낸다.




잠시 후 흔들바위에 이른다. 이름표까지 달고 있는 것에 비해 생김새는 보잘 것 없는 바위이다. 한 사람이 밀거나 또는 열 사람이 밀어도 흔들리는 정도가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 따름이란다. 안내 동판(銅版)에는 정호재(鄭好宰)라는 사람이 썼다는 문장도 적혀 있다. 바위 위에 적혀 있는 판독이 불가능한 글씨의 내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장이란다.



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상투봉, 바위로 이루어진 생김새가 얼핏 상투를 틀어 올린 것 같기도 하다.



정상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닫자봉으로 향한다. 하산은 가파른 경사의 나무계단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다음은 침목(枕木)계단이다. 이는 내리막길의 경사가 만만찮게 가파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18분 정도를 내려서면 계곡을 가로막아 만든 사방용 저수지가 나온다. 하지만 저수지는 맨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 지역 역시 가뭄이 극심했던 모양이다.



저수지의 둑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넌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갈림길(이정표 : 닫자봉0.4Km, 정상 2.0Km/ 관리사무소0.7Km/ 상투봉0.7Km)을 만난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닫자봉으로 향한다.



계곡을 지나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바위들까지 제법 많아 얼핏 보면 암릉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르는 것까지 도와주지 못한다. 날씨까지 덥다보니 많이 힘들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18분 정도를 오르면 닷자봉 정상이다. 솔숲으로 뒤덮인 정상은 보잘 것이 없다. 직육면체(直六面體)의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영인산성 1.2Km, 정상 1.6Km/ 수목원지구/ 상투봉 1.1Km)가 세워져 있을 뿐 다른 볼거리는 일절 없다고 보면 된다. 물론 조망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평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마저도 먼저 온 사람들이 이미 차지해버렸지만 말이다.



더 머무를 이유가 없어 곧바로 길을 나선다. 영인산 방향이다. 이 구간도 역시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아니 상투봉 때보다 훨씬 더 가팔라졌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곳 또한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주의를 기울이면서 내려오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영인산이나 눈에 담으면 될 일이다.




그렇게 16분쯤 내려오면 물기 한 점 없는 계곡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얼마 후에는 갈림길(이정표 : 정상0.9Km/ 영인산성0.6Km, 산림박물관 1.1Km/ 닫자봉0.7Km, 상투봉 1.8Km)을 만난다. 이곳에서는 어느 방향을 선택하더라도 영인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다. 취향에 맞춰 방향을 결정하면 될 일이다. 다만 계단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면 왼편을 권하고 싶다. 오른편, 그러니까 영인산성을 경유할 경우에는 1천개 이상이나 되는 계단을 올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여름 뙤약볕에 계단은 죽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사방용 저수지를 만난다. 이번에는 찰랑거릴 정도로 물이 가득 차있다. 산길은 이곳(이정표 : 정상9.8Km/ 영인산성0.7Km, 상투봉 1.9Km)에서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그리고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산길은 서두르지 않는다.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이고 있다. 그러다가 정상을 500m 남겨둔 지점에 이르자 변화가 온다. 가팔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가 심해지더니 끝내는 코가 땅에 닿을 듯한 급경사로 변해버린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길가에 로프가 늘어져 있다는 것이다. 힘든 사람들은 붙잡고 오르라는 모양이다.



얼마쯤 올랐을까 멋진 바위전망대를 만난다. 늙을 대로 늙은 소나무가 곁가지를 휘휘 늘어뜨리고 있어 풍치까지 더하는 아름다운 전망대이다. 이곳 영인산은 정상과 시루봉, 그리고 연화봉 등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럴 때에는 정상을 신선봉(神仙峰)’이라 부르며 다른 봉우리들과 구분한다. 그 신선봉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근원지가 바로 이곳이 아닐까 싶다. 만일 신선들이 놀았다면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 같아서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이가 또 있었나보다. ‘오션블루라는 단체에서 표지석을 만들면서 신선봉 소나무라고 표기해 신선봉이라는 지명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전망대를 지나서도 바윗길은 계속된다. 하지만 그다지 오래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정상에 올라선다. ‘영인산성 갈림길에서 30분 남짓, 닷자봉에서는 1시간이 걸렸다.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영인산 정상은 좀 어수선하다는 느낌이다.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아산 22), 이정표(시련과 영광의 탑0.6Km, 산림박물관 1.1Km, 휴양림지구 2.6Km/ 영인산성0.4Km/ 닫자봉1.6Km, 상투봉 2.7Km) 말고도, 무인산불감시탑에다 돌탑 등 꽤나 많은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어서 일 것이다. 정상의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산꼭대기에 우물이 있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서이다. 글은 가뭄이 들 때마다 우물 앞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고 했다. 그때마다 큰 영험이 있었기 때문에 산의 이름까지도 영인(靈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물은 끝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괴이하게 생긴 전망대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목제데크로 만들었는데 배(船舶)를 닮았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노아의 방주라고도 했다. 성경에 푹 빠진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배는 삼층으로 만들어져 있다. 물론 전망대는 맨 위층이다. 그렇다면 2층은 선실(船室)이 되는 셈이다.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보이는 걸로 보아 내 예측이 맞았나 보다.



전망대로 오른다. 빙 둘러가며 시야(視野)가 뻥 뚫린다. 서해 바다와 삽교천은 물론이고 아산만 방조제와 아산 시가지까지 한눈에 잘 조망된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다. 짙게 낀 연무(煙霧)로 인해 온 천지가 흐릿할 뿐이다. 아무튼 아산시에서는 전망대로도 부족하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양쪽에 조망도(眺望圖)까지 설치해 놓은 걸 보면 말이다. 각 지점에 대한 해설까지도 꼼꼼하게 적어놓는 친절까지 베풀고 있다.



깃대봉으로 향한다. 옛날 이곳에 주둔하던 군부대가 깔아 놓은 콘크리트 계단을 따라 잠시 내려선다. 길가에 군부대 막사로 보이는 건물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미군들의 차지였다. 당시만 해도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었었는데 군부대가 이전한 후 자연휴양림으로 개발된 것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닐 수 없다. 잠시 후 반대편 능선으로 오르면 잘 다듬어 놓은 철쭉 군락지가 나타난다. 철쭉군락지의 위가 깃대봉이다. 영인산 정상에서 8분 정도 되는 거리이다.



깃대봉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외에도 군시설(軍施設)이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대공포를 보관했던 건물의 잔해란다. 정상 직전에 보았던 철조망이 둘러쳐진 작은 건물은 옛 탄약고였고 말이다. 깃대봉은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이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군은 이 봉우리에다 일장기를 꽂았다. 그래서 이름 또한 깃대봉이 되었단다. 주면에 나뒹구는 시멘트 덩어리 중에는 일장기를 받치던 기둥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기억하기 싫은 아픔의 현장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영인산보다도 한 수 위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시야가 흐린 탓에 구분이 잘 안되지만, 북쪽 아산호 건너로 평택시가 조망되고, 북서쪽으로는 삽교방조제가 서해대교와 함께 보인다고 했다.



연화봉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오면서 정상의 시련과 영광의 탑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연화봉으로 향하는 길, 역시 자연휴양림답다. 자투리땅이라도 보이면 어김없이 편의시설들을 들어 앉혔다. 벤치는 기본, 중간에 탁자까지도 배치했다. 거기다 가끔은 시비(詩碑)까지도 세워 두었다. 이건 숫제 공원이다. 통째로 산을 공원으로 탈바꿈시켜 버렸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깃대봉을 지나면서 산은 다시 육산(陸産)으로 변한다. 그리고 보드랍기 짝이 없는 흙길이 이어진다. 뺨을 간질이는 바람결에 짙은 솔향이 묻어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나무들이 언제부턴가 소나무들로 바뀌어 있다.



7분쯤 걸었을까 느닷없이 거대한 쌍둥이 탑이 나타난다. 1998년에 세웠다는 24m 높이의 민족의 시련과 영광의 탑이다. 위의 사진들을 설명하면서 이곳 영인산의 아픈 역사에 대해서 적었었다. 그 아팠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영광의 길로 나가자는 상징적인 조형물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규모가 너무 크다. 산세를 해칠 정도 저렇게 큰 조형물이 꼭 필요했을까 싶다.



연화봉에서부터는 임도(이정표 : 휴양림지구 1.8Km/ 용샘 62m/ 깃대봉 0.22Km, 정상 0.47Km)를 따른다. 하지만 난 쌍둥이 탑을 가로지른다. 그 뒤편에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정상은 보잘 것이 없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을뿐더러 조망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그저 쌍둥이 탑을 뒤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한다.



영인산을 내려올 때와 마찬가지로 시멘트 계단을 따라 내려선다. 이 또한 군부대가 남기고간 흔적일 것이다. 계단은 아까 연화봉에서 헤어졌던 임도와 다시 합쳐지면서 끝난다. 그리고 잠시 후 영인산성 갈림길’(이정표 : 산림박물관/ 영인산성/ 시련과 영광의 탑)을 만난다. 산성까지 다녀올까 고민하다가 그냥 발길을 돌리고 만다. 또 다른 이정표(수목원 지구0.9Km, 휴양림지구 1.9Km/ 산성입구0.4Km/ 정상0.9Km)에 표기된 거리가 만만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산림박물관이 나온다. 연화봉에서 내려선지 13분 만이다. 산림박물관은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신개념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고 한다. 전시관은 5가지 주제로 나뉘어져 있는데, 영인산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영인산의 역사를 시작으로 나무와 관련된 고전동화, 역사 속의 아산나무, 나무 및 식물 화석, 한대림에서 난대림까지 서식하는 나무들을 알기 쉽게 전시해 놓았단다.



박물관 못미처에서 왼편에 보이는 오솔길로 내려선다. 이후부터는 영인산 자연휴양림의 시설지구를 걷는다. 중심활동지구와 자연휴양림지구를 통과하면 25분 후에는 자연휴양림림의 입구, 즉 매표소에 이른다. 참고로 영인산자연휴양림은 39만평이나 되는 넓고 푸른 산림에 통나무로 만든 가족단위 숲속의 집과 썰매장, 물놀이터, 어린이 놀이터, 등 놀이 시설과 수목원, 등산로, 평상 등 편의시설들을 고루 갖추어 놓아 가족단위 휴양지로 안성맞춤이라고 알려져 있다.



산행은 매표소를 벗어나서도 한참을 더 계속된다. 자연휴양림에서 대형버스의 진입을 금지시키면서 주차장을 산자락 아래에다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제법 먼데다 도로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구간이다. 아니 실제로도 지루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데크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가로수로 심어 놓은 벚꽃나무들도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 준다. 무성하게 자라 짙은 나무그늘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루하지만 참을 만한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산행날머리는 휴양림주차장(원점회귀)

도로를 따라 내려서길 18, 길이 왼편으로 꺾이면서 도로(이정표 : 주차장0.5Km/ 상투봉2.5Km, 정상 5.1Km)와 헤어진다. 이어서 8분 후에는 저만큼에 널따란 주차장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4시간 4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배방산(排芳山, 301m)-태학산(泰鶴山, 455.3m)

 

여행일 : ‘15. 12. 29()

소재지 : 충남 아산시 배방읍과 천안시 풍세면·광덕면의 경계

산행코스 : 동천교회배방산성배방산솔치(지미카터로)태화산태학산삼태마애불태학사법왕사태산휴양림주차장(산행시간 : 450)

 

함께한 사람들 : 가보기산악회

 

 

특징 : 배방산과 태학산은 작은 산들이다. 그리고 육산(肉山)으로 분류해야 할 정도로 대부분이 흙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특출한 산세(山勢)는 보여주지는 못한다. 당연히 암릉이 발달되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암릉까지는 아니어도 가끔은 바위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도 제법 큰 바위들이다. 그래서 마애불이라는 국보급 문화재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산이 갖고 있는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조망(眺望)이 아닐까 싶다. 육산임을 감안한다면 의외라고 할 수 있다. 하여간 배방산 정상과 태학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일품이다. 거기다 내려가는 길에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이라는 국보급 문화재까지 구경할 수 있으니 이만한 산행지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마침 잘 정비된 등산로까지 걷기에 좋을 만큼 순하니 가족산행지로 적극 추천할 만 하다.

 

산행들머리는 동천교회(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당진-영덕고속도로 예산·수덕사 I.C에서 내려와 21번 국도를 타고 아산 방면으로 달리면 읍내교차로(아산시 신창면 읍내리)가 나온다. 21번 국도는 이곳에서 45번 국도와 헤어진 후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계속해서 21번 국도를 탄다. 얼마 후 배방읍(아산시)에 이르면 국도를 내려와 오른쪽 도로(왼편은 45번 국도로 연결된다)를 따른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온천대로를 따른다. 곧이어 나타나는 남동교차로(삼거리:배방읍 구령리)에서 또 다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동천교회가 보인다. 동천교회로 가는 길에 신도라면 아산공장이 보이니 방향을 잡는데 참조한다. 경부고속도로에서 들어오는 방법도 있다. 천안 I.C에서 내려와 1번 국도를 타고 대전방면으로 달리다가 청삼교차로(천안시 동남구 삼룡동)에서 21번 국도로 옮겨 아산방면으로 들어오면 된다. 그리고 아산시가지에 이르기 전 남동교차로(아산시 배방읍 구령리)에서 내려와 위의 순서를 따르면 된다. 오늘 따라나선 가보기산악회에서는 후자의 코스를 따랐다.

 

 

 

동천교회의 왼편에 보이는 통나무계단을 오르며 산행을 시작한다. 아산시에서 세운 이정표(배방산성 0.8km, 배방산정상 2.5km, 설화산정상 18.1km, 배태망설 19.9km) 외에도 배방산 정상까지의 거리 및 방향을 표기한 입간판 등 여러 가지 시설물들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정표에 적혀있는 배태망설이라는 낯선 지명(地名)을 보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배방산과 태학산, 망경산, 설화산을 줄인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역 산꾼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으로 자리 잡힌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한다. 이 산들을 묶어 아산지맥이라 명명하고 종주코스로 즐겨 찾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정표에 까지 표기를 해 놓았나 보다.

 

 

산길은 초반부터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가파르게 시작된다. 하지만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오르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산을 찾는 등산객들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거기다 깔끔하게 손질된 등산로는 이곳 지자체에서 얼마나 공들여 가꾸었는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다보니 지난번에 연이어 다녀왔던 통내산(청도군) 및 구현산(창녕군)과 자연스레 대비가 된다. 산세(山勢)가 괜찮은 산들인데도 불구하고 버려지다시피 방치되고 있는 것을 보고 많이 안타까워했었기 때문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면 10분 후 쉼터갈림길(이정표 : 배방산정상2.2km/ 크라운제과0.3km/ 동천교회주차장0.2km)을 만나게 된다. 크라운제과 아산공장에서도 올라오는 길도 있는 모양이다.

 

 

쉼터갈림길 근처에서 잠시 완만해졌던 산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가팔라져버린다. 이 오름길도 역시 통나무계단을 놓아 오르는 사람들을 돕고 있다. 심지어는 로프로 난간까지 만들었을 정도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오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세워진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정표(산성둘레길 1.2Km, 배방산정상 1.7Km/ 크라운제과 0.9Km)를 보니 이곳이 배방산성(排芳山城)의 입구인 모양이다. 안내판에는 산성의 내력을 한글과 영어로 각각 적어 놓았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67호인 배방산성은 250m 높이의 성재산 정상어림에 쌓아올린 옛 산성이다. 성의 길이는 약 1500m이며,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 돌무지로 보이나 성의 남쪽에는 15m 정도의 성벽이 다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성벽은 두께 10~20, 길이 40~50정도의 납작한 돌로 쌓았고, 안쪽에 석재·잡석을 이용하여 너비 34m를 길이모쌓기(돌의 길이가 표면에 나타나게 가로 쌓는 일)로 하였다. 하단에서 상단으로 갈수록 약간 안쪽으로 경사지게 쌓았는데, 복원한다면 높이는 56m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의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 등에서 백제의 토기조각들이 발견되고 있어 백제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개로왕 원년(445)에 공수라는 칠순노인이 성배(成排)와 성방(成芳)이라는 쌍둥이 남매를 데리고 있었는데, 성배가 성방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해서 두 남매의 이름을 따서 배방산 복부성(伏俯城)이라 했다고 한다. 또 형태가 솥을 엎어놓은 모양이어서 복부성(伏釜城)이라고도 한다. 한편으론 고려 초에 태조왕건이 후백제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참고로 ‘1872년 지방지도’(온양)조선지형도의 배방면에 산성(山城)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남동쪽에는 배방산이 나타난다. ‘배방산 서쪽에 흙으로 쌓은 성 모양이 마치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 같다 하여 복부성이라 하며, 배방산성(排芳山城) 또는 산이 매처럼 생겼다 하여 응양산성(鷹陽山城)이라고도 한다.’

 

 

안내판을 지나자마자 저만큼에 또 다른 안내판이 하나 보인다. 이것 역시 배방산성의 현황의 유래를 적고 있는데, 그 오른편에는 온양 방씨(方氏)와 배방산성의 유래를 따로 적어 놓았다. 뜬금없는 성씨(姓氏)가 나오기에 궁금했는데 그 내용을 읽어보니 금방 이해가 간다. 이 일대가 그들의 사유지(私有地)였던 것이다. 안내판은 물론 그들 문중(門中)에서 세운 것이고 말이다.

 

 

산성입구를 지난 산길은 성재산(Daum지도에는 성터산으로 나와 있다)의 정상으로 향하지 않고 산허리를 빙 둘러 나있다. 아까 만났던 이정표에 산성둘레길이란 지명이 나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성벽을 따라 산길을 만든 모양이다.

 

 

산허리를 따라 반 바퀴를 돌면 송전탑(이정표 : 배방산정상 1.2Km/ 동천교회주차장 1.2Km)이 나온다. 산성입구에서 10분 만이다. 산길은 이곳에서 배방산성과 이별을 고한다.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른편에 보이는 길은 산성을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만든 둘레길이 아닐까 싶다.

 

 

산성을 빠져 나오면 산길은 운치 있게 변한다. 잡목(雜木)이 대세를 이루던 산길이 갑자기 소나무들의 세상으로 변한 때문이다. 그것도 나이 지긋한 노송(老松)들이다. 잠시 후 이해를 할 수 없는 이정표(공술 0.8km/ 623도로 1.3km/ 정상1.2km)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이어지는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심하지 않아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그런데다 곳곳에는 벤치와 평상을 놓아두어 쉬어갈 수 있도록 배려까지 했다. 산성을 벗어난 지 20분 가까이 되면 산길은 꽤나 가팔라진다. 그리고 잠시 후 윤정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정상0.1Km/ 윤정사1.42Km/ 배방산성1.4Km)을 지나면 곧이어 배방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1시간 만이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태화산 정상5.0Km, 카터로 1.0Km/ 윤정사1.43Km, 정자 0.17Km/ 크라운제과2.5Km, 배방산성 1.5Km). 삼각점(전의21) 등 여느 정상에서나 만날 수 있는 시설물들 외에도 돌탑과 무인산불감시탑, 그리고 신협에서 쳐 놓은 그늘막까지 들어서 있다. 심지어는 운동기구까지 만들어 놓아 차라리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배려도 지나치면 오히려 흠이 될 수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배방산이란 이름은 백제 개로왕 때 지략을 겸비한 성배(成排)와 성방(成芳) 남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조선조 창업 당시 고려조에 충성을 다하던 온양 방씨들을 이곳에서 내쫓았다 하여 배방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과안산' 또는 '길재'라는 다른 이름도 전해진다. 산 모양이 기러기가 지나가는 형국이므로 '과안산'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며, 길재는 기러기재의 축약인 것으로 보인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올라왔던 방향을 제외한 나머지 방향의 시야(視野)가 뻥 뚫린다. 태학산 방향이 낭떠러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진행방향으로는 조금 후에 오르게 될 태화산이 또렷하고, 그 왼편에는 천안의 들녘이 펼쳐진다. 고개를 오른편으로 돌리면 신흥리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산은 설화산과 망경산일 것이다.

 

 

 

고개를 왼편으로 크게 돌리면 능선에 앉아있는 정자(亭子) 하나가 보인다. 그 뒤에 천안시가지가 펼쳐짐은 물론이다. 만일 조금 더 또렷하게 천안시가지를 보고 싶다면 저곳까지 다녀오면 된다. 기껏해야 10분 정도만 투자하면 되니 거리까지 가까운 편이다.

 

 

정자에서의 조망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정자까지 꼭 다녀와야 하는 이유이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천안시가지의 풍경은 물론이고, 건너편에 있는 태학산도 조금 전에 배방산 정상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또렷하게 나타난다. 거기다 배방산의 바위벼랑까지 눈에 쏙 들어오니 어찌 뛰어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배방산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태학산으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10분쯤 후 바위벼랑 위에 걸터앉아 있는 바위 하나를 만난다. 누군가의 글에서 내려가는 길에 흔들바위를 만나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모르겠다. 확인을 위해 집사람에게 밀어보라고 하지만 꿈쩍도 않는다. 아무래도 생김새만 흔들바위를 닮았나 보다. 그건 그렇고 이곳에서 또 다시 태학산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바위를 지나면서 산길의 가파름은 대부분 해소된다. 이어서 호젓하면서도 운치 있는 소나무 숲길을 따라 10분 남짓 더 내려가면 솔치고개(이정표 : 설화산정상 14.7km, 태화산 4.0km, 망경산정상 7.8km, 광덕산정상 12km/ 크라운제과 3.5km, 배방산정상 1.0km)이다. 배방산이나 태학산에 설치된 이정표에는 카터로로 표기되어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이 길이 지미 카터로(jimmy carter road)'가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카터대통령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사랑의집건축을 위해 아산시를 방문했을 때 이 도로를 이용했었단다. 그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도로의 이름을 지미카터로로 명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건너편 능선으로 오르면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나무계단을 오르고 나면 산길은 한없이 고와진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傾斜)까지도 거의 없다보니 걷는 게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다. 한껏 여유를 부리며 걸어도 좋을 듯 싶은 구간이다.

 

 

 

가는 길에 기괴한 삶 하나을 만난다. 영양가 많은 땅속을 마다하고 척박하기 짝이 없는 바위틈으로 찾아든 삶이다. 사람들이라고 해서 어찌 저런 삶이 없다고 하겠는가. 그게 어리석은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갈고 닦는 방법의 하나로 일부러 선택한 이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내가 저런 상태에 놓여 있었다면 과연 난 어떤 결과의 산물이었을까? 후자이었기를 바라보지만 글쎄다.

 

 

솔치고개에서 15분쯤 걸으면 235m(이정표 : 태화산정상 3.1Km/ 카터로 0.9Km)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비슷한 느낌, 아니 아까보다는 조금 더 경사가 가팔라진 오름길을 15분쯤 더 오르면 벤치가 놓여있는 봉우리이다. 이정표(태화산정상 2.3km, 광덕산정상 10.3km, 설화산정상 12.9km/ 카터로1.7km)에 현위치로 적혀 있는 삼각봉은 이곳에 설치되어 있는 삼각점(전의 406)을 줄여서 쓴 표현일 것이다.

 

 

 

삼각봉을 지나면서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기 시작한다.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곳이 심심찮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설화산에서 망경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또렷하고 그 아래에는 수철리 마을의 올망졸망한 가옥(家屋)들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마을 앞의 빈 들녘에 점점이 보이는 하얀 물체들은 사료용 볏짚들일 것이다.

 

 

 

삼각점봉을 지나면서 커다란 바위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난다. 어떤 곳에서는 제법 암릉에 가까워지기도 하면서 말이다. 하긴 저 정도의 바위들이 있었기에 마애불(磨崖佛)과 같은 국보급 문화재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전망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벤치를 놓아두었다. 천천히 쉬면서 조망을 즐겨보라는 것일 게다. 꼭 조망 좋은 곳에만 벤치를 놓은 것은 아니었다. 쉬어가기 좋은 곳에도 어김없이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도심(都心)에서 가까운 공원(公園)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이유이다.

 

 

곳곳에서 터지는 조망을 즐기면서 10분쯤 걸으면 쌍용정사 갈림길‘(이정표 : 태화산정상1.9km/ 쌍용정사0.8km/ 카터로2.1km, 배방산 3.1km)이 나오고, 계속해서 10분쯤 더 걸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세워진 깃대가 나타난다. 그 끝에는 뭔가가 매달려있다. 패러글라이딩(para gliding) 활공장에서 접하게 되는 풍향기(風向旗)로 알고 다가가보니 의외로 헬기장이다. 헬기장에서도 풍향기가 필요한가 보다.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쉼터가 있는 376m(이정표 : 설화산정상 1.9Km/ 카터로 2.8Km)을 지나면 10분 후에는 또 다른 헬기장이 나온다. 이번에도 역시 풍향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두 번째 헬기장에서 길이 하나 나뉜다(이정표 : 태화산정상 0.5Km/ 호서대 1.5Km/ 카터로 3.5Km). 호서대로 내려가는 길이다.

 

 

10분쯤 더 걸으면 세 번째 헬기장을 만난다. ‘웬 헬기장이 이렇게 많아요?’ 앞서가건 집사람의 눈에도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하긴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서 세 개나 되는 이정표를 만났으니 이상할 만도 하겠다. 그것도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있는 헬기장들을 말이다. 세 번째 헬기장을 지났다싶으면 잠시 후 태화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배방산을 내려선지 1시간 30분 만이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커다란 정상표지석과 이정표(호서대1.9km/ 넋티고개2.3km, 망경산정상 3.8km, 광덕산정상 8.0km, 설화산정상 10.6km/ 동천교회7.5km, 카터로 4.0km)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2010년 무렵까지만 하다라도 이곳은 망경산과 태학산의 갈림길 정도로만 알려졌던 곳이다. 그런데 아산시에서 이곳에다 태화산정상표지석을 세웠다. 덕분에 하나의 산이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되는 불상사가 생겨버렸다. 천안시와 아산시의 관할권 다툼이 만들어낸 서글픈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전형적인 집단 이기주의의 산물일 것이고 말이다. 하여간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한 1/25,000지형도(2008년 인쇄)에 태학산 정상은 461m봉이라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곳이 원래의 태학산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이왕에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번 짚고 넘어가면 어떨까 싶다. 아산시가 부르는 태화산이라는 명칭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명칭이다. , 태화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천안 고을 남쪽 18리에 위치한다.’라고 기록돼 있다. 특히 ‘1872년 지방지도(1872年地方地圖)’에 분명하게 태화산(泰華山)’으로 표기돼 있고, ‘조선지형도(朝鮮地形圖)’한국 지명 총람에는 현재와 같은 한자표기로 태화산(太華山)’이라고 분명하게 표기하고 있다. 그런 태화산이 태학산이 된 것은 이 산 아래에 위치한 사찰 태학사(泰鶴寺)’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찰들이 산 이름을 딴 것과 달리 이곳에서만은 역전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태화산에서 잠시 아래로 내려섰다가 맞은편 능선으로 오르면 태학산 정상이다. 태화산 정상에서 10분 정도의 거리다.

 

 

대여섯 평이나 됨직한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휴양림관리사무소1.63Km/ 주차장(광풍중학교)2.45Km/ 태화산0.35Km) 그리고 삼각점(전의 304) 외에도 팔각정이 세워져 있다. 마음 놓고 쉬면서 조망을 즐겨보라는 모양이다. 태학산의 정상표지석을 보면 그 높이를 455m로 적고 있다. 아까 태화산의 정상석이 461m로 적고 있었으니 태화산보다 6m가 낮은 셈이다. 이는 태학산 정상의 옳은 위치가 이곳이 아니라 아산시에서 정상석을 세워둔 곳이 옳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여간 태학산 정상이 자기의 관할구역임을 내세우려는 천안시와 아산시의 지역 간 소소한 알력다툼이겠지만 하루빨리 정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산의 이름을 같이 사용하면서 두 봉우리에 ‘00이라는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거기다 덧붙여 이 산의 옛 이름인 태화산을 되찾는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고 말이다.

 

 

정자에 오르면 오른편으로는 천안시 풍세면이, 왼편은 천안과 아산 신도시가 내려다보인다. 시원스럽기 그지없는 풍광이 사뭇 잘 그린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으로 다가온다.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휴양림관리사무소 방향이다. 하산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하지만 침목(枕木)으로 계단을 만들어 편안하게 내려설 수 있도록 해놓았다. 나선형(螺旋形)의 곡선을 만들어내고 있는 계단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느긋하게 즐기면서 내려서볼 일이다.

 

 

20~30년쯤 나이가 먹었음직한 소나무 숲을 15분 정도 내려오면 시판(詩板)까지 갖춘 안부사거리를 만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무심코 이정표(호서대0.97Km/ 체육시설물0.24Km, 휴양림 1.13Km/ 태학산 정상0.5Km)를 따르다가는 휴양림이 있는 오른편으로 내려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태학사의 뒤편에서 다시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마애불을 만나볼 수 있다. 따라서 이곳 안부에서는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호서대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 옳다. 비록 마애불이 보고 싶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호서대 쪽으로 방향을 잡고 능선을 오른다. 잠시 후 작달막한 소나무가 귀여운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의자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이어서 능선을 따라 잠시 내려서면 산길은 오른편(이정표 : 주차장(마애불)1.17Km/ 정상(팔각정)0.80Km)으로 방향을 튼다. 안부에서 5분 거리이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곧장 능선을 따르는 길도 또렷하게 보이니 주의할 일이다. 아마 호서대로 가는 길인 모양이다.

 

 

잘 다듬어진 침목계단을 내려서면 또 다시 삼거리(이정표 : 휴양림관리사무소0.55Km/ 주차장0.81Km/ 정상1.06Km)를 만난다. 마애불로 가려면 휴양림관리사무소가 있는 오른편 방향으로 내려서야 한다. 곧바로 직진할 경우 주차장으로 내려서게 되니 주의할 일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진행방향 저만큼에 상하좌우(上下左右)가 모두 10m가까이나 되는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나타난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쳐놓은 난간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면 양각(陽刻) 기법으로 새겨진 거대한 불상(佛像)이 나타난다. 보물 제407호인 삼태리 마애여래입상(三台里 磨崖如來立像)’이다. 요 아래에 있었다는 산중 암자 해선암(海仙庵)을 창건한 진산조사(珍祖師山)가 절 뒤편의 바위에다 돋을 기법으로 새긴 것이란다. 하지만 불상의 형식은 고려시대의 것이라니 참조할 일이다. 불상은 천연바위의 면을 그대로 살려 7.1m에 이르는 입상(立像)으로 조각하였는데 얼굴 쪽은 조각이 두드러지는 반면에 아래쪽은 부조가 얕은 편이다. 눈 코 입이 뚜렷하고 뺨도 도톰해 보인다. 목에는 삼도(三途)가 뚜렷이 새겨졌으며 옷은 양쪽 어깨가 다 가려진 통견(通肩:通兩肩法의 약칭)이다. 두 손은 가슴께에 올려 서로 감싸 쥐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아래쪽으로 늘어진 옷자락은 층층이 U자 모양을 이루고 있어 도식적이나, 단순하고 분명한 선 처리가 오히려 시원한 느낌을 준다. 참고로 우리나라 마애불의 대부분이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반면 삼태리마애불은 서해가 아닌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이는 인근 광덕산을 중심으로 주변 산들이 빚어내는 운해(雲海)가 태학산 아래에서 시작되는데, 이를 향해 세우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긴 바다나 구름바다나 바다이기는 매한가지이니 바다를 향하기는 향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애불들이 담고 있다는 바다 건너 외침을 막아달라는 간절한 기원은 어떻게 풀어야할지 모르겠다.

 

 

마애불에서 200m쯤 내려가면 태학사와 법왕사라는 두 절이 마중 나온다. 하지만 무턱대고 절로 들어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잘 가꾸어진 잔디밭이 보였기 때문이다. 수목원야생화단지가 이 근처에 있다고 들었지만 확실하지는 않고, 아무튼 휴양림에서 신경을 써가며 관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거기다 약수터로 보이는 건물까지 보이니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약수터는 물기 한 점 없이 메말라 있었다. 서해안 지역에 가뭄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내려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약수터가 하나 같이 메말라 있던 것을 보면 말이다.

 

 

잔디밭 바로 아래에는 태학사(泰鶴寺)가 자리 잡고 있다. 태학사는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에 소속된 사찰로 그 근원을 태학산에서 가장 먼저 지어졌다는 해선암(海仙庵)에서 찾고 있다. 해선암은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 때 진산조사(珍祖師山)가 창건했다는 산중 암자(庵子)이다. 창건 이후 연혁이 전해지지 않다가 언제부턴가(연도미상) 폐사(弊社)되어 그 흔적만 남아있었는데, 1930년대에 이병희(李炳熙, 1903~1994)가 중건(重建)하였다는 것이다. 기도를 위해 이곳에 들렀던 그가 마애불을 친견하고 불심(弗心)이 발하여 출가를 하게 됐고, 공주 마곡사에서 득도하여 수계한 후 광덕사(廣德寺)에서 토불(土佛)을 옮겨와 옛 해선암(海仙庵) 터 아래에 절을 세워 해선암이라 칭하였으며, 이후 재건축하고 1959년 개명하여 현재의 사찰인 태학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건물로는 대웅전, 미륵전, 산신각과 요사체가 있으며, 유물로는 해선암터에서 발견된 석탑과 보물 407호인 마애불이 있다.

 

 

태학사의 옆에는 법왕사(法王寺)가 있다. 언뜻 보면 하나의 사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이좋게 옆구리를 맞대고 있다. 비좁은 협곡에 두 개의 사찰이 들어서다보니 법왕사 역시 갑갑해 보인다. 대웅전과 미륵전, 산신각, 요사채 등 꽤나 많은 전각(殿閣)들이 비좁은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법왕사는 옆에 있는 태학사와는 달리 대한불교조계종소속의 사찰이다. 위에서 태학사를 설명할 때 해선암을 잇는다는 표현을 썼었다. 이곳 법왕사도 역시 그 법통(法統)을 해선암에서 찾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 부근에서 찾을 수 있는 옛 사찰이라곤 해선암 뿐인데다, 폐사(弊社)된 해선암의 법통을 이었다고 공증 받은 사찰 또한 없는 것으로 아니까 말이다.

 

 

암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나한전에 올라가봐야만 법왕사의 전모(全貌)가 제대로 드러난다.

 

 

법왕사에 들른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다. 천연동굴을 이용해서 만든 굴법당이다. 이를 놓칠 수 없어 대웅전 아래에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본다. 누구의 염원을 담고 있는지는 몰라도 수많을 촛불들이 그 간절함이라도 나타내려는 양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계단을 오르자 암반을 양각(陽刻)하여 새겨놓은 약사여래 마애석불이 나온다. 굴의 벽면을 자세히 살피면 이 뭣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나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의제를 곰곰이 생각해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이 뭣고?’를 넣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본래의 면목, 즉 참 나를 깨달아 생사를 해탈(解脫)해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중생(衆生)인 내가 어찌 그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난 또 하나의 교훈(敎訓)을 마음에 세기며 발길을 돌린다.

 

 

산행날머리는 태학산자연휴양림(泰鶴山自然休養林) 주차장

절을 빠져나오면 도로로 연결된다. 잠시 후 휴양림관리사무소 앞을 지난다. 관리사무소를 지나면 길 양쪽 소나무숲 속에 들어선 잔디구장과 놀이동산, 데크와 들마루 등 휴식공간들이 보인다. 겨울철임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는 게 여간 보기가 좋다. 2001년에 개장한 자연휴양림은 102ha의 면적에 하루 수용 가능인원은 1,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휴양림에는 각종 편의시설 외에도 많은 종류의 자생화와 수목(樹木)이 분포되어 있고, 특히 소나무가 집단생육하고 있어 가족단위 휴양에 적당하다고 한다. 절을 빠져나온 지 10분 조금 못되면 휴양림을 벗어난다. 하지만 버스가 기다리는 주차장까지는 이곳에서도 10분 정도를 더 걸어야만 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간식도 먹지 않고 걸었으니 순수하게 걸은 시간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사찰이나 전망대를 둘러보는데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음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