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선비문화길

 

여행일 : ‘23. 2. 1()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서하면 및 안의면 일원

산행코스 : 거연정군자정영귀정동호정람천정경모정황암사농월정월림마을구로정광풍루(소요시간 : 12.21km/ 3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영남 유림은  안동  함양으로 나뉘기도 한다. 이중 안동은 중앙 권력에 진출한 선비들을 많이 배출했고, 함양은 주로 재야에서 활동하는 기개 높은 선비들로 유명했다. 그래선지 함양 땅에는 유독 많은 누각과 정자가 남아 있다. 누정(樓亭)이 자연을 벗 삼아 수양하던 선비들의 휴식처이자 만남의 광장이었기 때문일 게다. ‘비단처럼 아름다운 하천(錦川)’이라는 화림동계곡에도 그런 누정 여덟이 들어서 있는데, 함양군청에서 이 계곡을 선비문화 탐방로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들머리는 거연정휴게소(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대전-통영고속도로 서상 IC에서 내려와 국도 26호선(안의·함양 방면)을 타고 8km쯤 내려오면 봉전마을에 이르게 된다. 버스정류장 부근 거연정휴게소가 트레킹의 들머리가 된다. 초입에 화림동계곡이라는 거대한 빗돌이 세워져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화림동(花林洞) 계곡은 용추계곡이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한 심진동계곡, 거북바위로 유명한 원학동계곡과 더불어 안의삼동(安義三洞)’으로 꼽힌다.

 탐방로는 2개 구간으로 나뉜다. 하지만 1구간(선비문화탐방관농월정, 6km) 2구간(농월정광풍루, 4.1km)을 합쳐도 10.1km에 불과해 노약자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또한 구경거리가 계곡을 따라 일렬로 늘어서있으니 양쪽 끝인 거연정과 광풍루 중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만 선택하면 된다.

 길을 나서기 전 다볕자연학교부터 들러보기로 했다. 1999년 폐교(1944년 개교)된 봉전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숙박·연수시설인데 이 학교의 교정에서 몇 점의 문화재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정으로 들어가기 전 삼강동(三綱洞)’이란 빗돌부터 눈에 담는다. 거연정을 세운 전시서(全時敍)의 증손인 전우석의 충의(忠義), 아들 전택인의 효행(孝行), 손부 분성허씨의 열행(烈行)  3대에 걸친 ··의 삼강행실(三綱行實)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자연석이다. 군자정 근처 노변에 있었으나 훼손이 염려되어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정조 때 선비인 전세량(全世樑)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각(孝子碑閣)’도 눈에 띈다. 효자성균생원전세량지려(孝子成均生員全世樑之閭), 효우문행위세추중(孝友文行爲世推重). 성균관 생원 전세량이 효성과 우애, 문장과 행실로 세상에서 추중을 받았다는 내용의 빗돌이 모셔져 있다. SNS에서 어머니가 병들자 단을 짓고 쾌차를 하늘에 빌었더니, 호랑이가 노루를 물어 던져주었다는 그의 효행도 찾아볼 수 있었다.

 운동장 측면에는 삼강정(三綱亭)이란 정자도 지어져 있었다. 새로 지은 티를 풀풀 풍기는 게 흠이지는 하지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함양의 140여 개 정자들 중 가장 크다고 했다.

 

 화림동계곡으로 되돌아오니 선비길 초입에 화장실이 들어서 있었다. 길을 나서기 전 홀가분하게 비우고 선비걸음으로 느긋하게 걸어보라는 배려겠지만, 손님맞이 첫 풍경치고는 썩 편치 않아 보이는 그림이다.

 들머리의 안내도를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는 말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덕유산 자락의 수려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화림동 계곡 8개의 정자와 8곳의 못이 있다고 해서 八亭八潭이라고도 불리어왔다. 계곡 곳곳에 고풍스런 정자들이 저조차도 풍경인 양 고즈넉이 앉아 있다는 것이다.

 봉전교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아치형의 교각이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길을 잘못 들었다. 첫 번째 볼거리인 거연정(居然亭)은 하천 중앙의 바위섬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정자로 연결시키는 나무다리가 반대편(탐방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으로 놓여있었던 것이다. 어쩌겠는가. 시작부터 어수선해져버렸지만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거연정은 이름 그대로 자연()과 더불어 살고()’싶은 뭇 사람들의 바람이 담겨 있는 정자이다. 그래선지 풍경 좋은 곳의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자연을 바라보는 형태인 여느 정자들과는 달리 풍경 한가운데에 들어앉아 자신도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정자가 감상의 대상인 물길과 하나가 되어버린 모양새다 . 그것도 아주 깊은 소()에서. 수심이 너무 깊어 한 번 빠지면 항아리처럼 패어있는 소를 헤어나지 못해 익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거연정은 조선중기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가 억새로 정자를 지어 머무르던 곳이라 한다. 울퉁불퉁한 천연 암반 위에 주초석(柱礎石)과 누하주(樓下柱)를 굴곡에 맞춰 깎아 절묘하게 높이를 맞춘 형태를 하고 있다. 마치 정자와 암반이 한 몸처럼 붙어 있는 듯하다. 금천 한가운데에 터를 잡은 이 정자는 연암 박지원 등 조선 선비들의 극찬을 받은 명소이기도 하다. 거연정을 중심으로 바위와 담수, 소나무가 조화를 이룬 광경을 보고 감탄의 글을 남겼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거연정이란 이름은 한가히 내 자연(개천과 돌)을 즐기다라는 뜻을 지닌 주자의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이라는 시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정자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화림재 전공 유적비(花林齋全公遺蹟碑)’가 눈에 띈다.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국치를 당하자 낙향하여 서산서원과 함께 거연정(억새로)을 지었다는 인물이다.

 군자정 봉전교를 건너기 전에 만날 수 있었다. 다리로 가는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거연정의 반대편에 자리한다. 군자정도 울퉁불퉁한 바위에 걸터앉은 탓에 정자를 받치고 있는 지지대가 들쭉날쭉하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본연 모습 그대로 지켜나가려는 선인들의 지혜가 엿보인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쉽게도 정자 주변에 큰 도로가 나고 식당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고즈넉한 정취는 느끼기가 어렵다.

 군자정(君子亭) 해동의 군자로 불리던 조선 성종 때 성리학자 일두 정여창(1450~1504)’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봉전마을에 처가가 있던 그가 이곳을 찾아 시를 읊고 강론을 펼쳤다는 인연에서다. 안음현감 재직 때는 고을 사람들을 괴롭히던 조세정책을 새롭게 하는 선정을 베풀기도 했단다. 정자 하나쯤은 능히 얻을 수 있는 흔적 아니겠는가.

 봉전교 건너에도 탐방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거연정·동호정·군자정·영귀정·경모정·람천정·농월정·구로정... 정자에서 노닐던 풍류를 일러 선비문화라 하는 걸까? 아무튼 탐방로는 계곡의 물길을 따라 내려간다. 산비탈에 나무로 다리모양의 길을 냈다.

 300m쯤 내려오면 영귀정(詠歸亭)을 만난다. 하지만 안내판이 없어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지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이름대로 어느 낙향한 선비가 시나 짓고 살자며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휴촌마을(함양군 병곡면)에 있다는 또 다른 영귀정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단종 때 충신 이지활의 손자 송계 이지번(李之蕃)이 수안군수 시절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었다는 휴촌마을의 그 정자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영귀정 옆 부지에는 정자보다도 더 잘 지어진 한옥이 들어앉았다. 잔디가 깔린 정원도 잘 꾸며졌다. 돈 많은 누군가가 금천의 비경 속에서 호사를 누리며 살아가는가 보다.

 선비길은 화림동계곡의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여정이다. 계곡길이지만 데크로드 등 탐방로가 잘 가꾸어져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그러니 비단처럼 아름답다는 계곡과 그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정자들을 눈에 담기만 하면 된다.

 가끔은 물가로 내려가는 요런 계단을 만나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서슴없이 내려가 볼 일이다. 시간에 여유라도 있다면 탁족을 즐기면 될 것이고.

 들쑥날쑥한 바위를 타고 흐르는 화림동계곡은 금천(錦川)’으로도 불린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물이 비단같이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맞다. 발아래로 흐르는 물빛이 그랬다. 비취색을 띤다. 하지만 밤꽃 향이 풍기는 농사철에는 흙 부유물이 흘러들어 비취빛이 탁해진다고 한다.

 현판조차 없는 정자도 만날 수 있었다. 탐방로를 정비하면서 쉼터용으로 지어놓은 듯한데, 이름 하나 지어주지 않은 무관심이 왠지 아쉽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8. ‘다곡교에 이르니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다산정(茶山亭)’이란 정자까지 배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예로부터 화림동계곡은 팔정팔담(八亭八潭)’으로 불리어왔다. 8개의 정자와 8곳의 소()나 못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저런 새로운 정자들이 들어서면서 팔정팔담은 이제 이름을 바꿔야 할 신세가 되어 버렸다.

 처음 온 사람들이 오해할만한 안내판도 보인다. ‘1구간(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만 소개해놓은 안내도인데, ‘화림계곡 선비문화 탐방안내라는 이름표를 버젓이 달았다.

 이후부터는 도로를 따른다. 200m쯤 걷다가 만나는 대전-통영고속도에서는 대황마을(대봉산·계관봉 등산로가 열리는 곳이다)’로 가는 굴다리 아래를 통과한다. 원래는 개울가를 따르도록 길이 나있었는지, 탐방로가 폐쇄되었으니 우회하라는 안내판이 굴다리 앞에 세워져 있었다.

 150m쯤 들어가면 삼거리. 이정표(동호정 1.1)가 왼쪽으로 가란다. 2차선 도로에서 1차선의 농로로 들어선다고 보면 되겠다.

 200m남짓 더 걸어 길이 홱 돌아가는 지점에서 탐방로는 도로를 벗어난다. 그리고 고속도로 아래로 나있는 데크길을 따라 내려간다. 탐방안내도가 이정표를 대신하고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냇가에 이르니 요런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물론이고, 그에 대한 내력까지 상세하게 적었다. 고객을 위한 기발한 발상이라 하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5. 화림계곡의 얼굴마담이랄 수 있는 동호정(東湖亭)’에 이른다. 엄청난 너럭바위 지대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곳. 너럭바위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정자 사이로는 푸른 바람이 흐른다. 그런 기운을 즐기기 위해 세운 정자가 동호정이라고 한다.

 동호정은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한 면모를 자랑한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의주 피란길에서 왕을 등에 업고 환란을 피한(그렇게까지 해서 목숨을 살릴 가치가 있었을까?) 동호(東湖) 장만리(章萬里)를 기리기 위해 1895년 그의 9대손에 의해 세워졌다. 장만리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자연을 벗 삼아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통나무에 홈을 파서 만든 계단이 이채롭다. 발판을 도끼로 쪼은 듯한 통나무 두 쪽을 정자에 걸쳐 놓았다. 투박하면서도 멋이 있어 보인다.

 정자에는 꽤 많은 편액(扁額)이 걸려 있었다. 자연을 벗 삼아 묵향 흩날리며 일필휘지 시구(詩句)를 적으며 노래하던 선인들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천막처럼 넓고 큰 바위를 뜻하는 차일암(遮日巖)과 수정처럼 맑은 물을 담고 있는 옥녀담(玉女潭) 등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낸다. 그런데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저게 놀이터로 보였던가 보다. 움푹움푹 패인 차일암의 웅덩이에 술을 부어놓고 조롱박으로 떠 마시며 풍류를 즐겼는가 하면, 옥녀담에서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수양한다는 철학적 의미를 핑계 삼아 탁족을 즐겼다고 한다.

 금적암(琴笛岩)’은 악기를 연주했다는 바위다. 그래선지 요즘도 이곳에서 국악이 연주되기도 한단다. 한국국악협회 함양지부에서 가야금을 반주 삼아 민요를 불러준단다. ‘금적암 영가대라는 이름에 걸맞는 퍼포먼스라 하겠다.

 영가대(詠歌臺)’는 노래를 불렀다는 곳. 선비들은 차일암에 둘러앉아 술을 마셨을 터, 그렇다면 인근에서 호출해 온 기생들이 가무(歌舞)’로 그들의 흥을 돋우었을 게 분명하다.

 탐방로와 동호정은 징검다리로 연결된다. 큰 바위 여러 개를 놓았는데, 장마철에는 이게 물에 잠기기도 한단다. 신발을 벗고 건널 수도 있으나 물이 불어나면 길이 막히는 수도 있으니 길을 나서기 전에 미리 알아볼 일이다.

 의외의 풍경(하천의 한가운데에 소나무로 가득한 섬이 있다)을 제쳐두고 징검다리를 다시 건넌다. 벼랑에 가까운 산비탈에 제비집처럼 매달린 데크로드가 멋져보였기 때문이다.

 데크길을 지나면 계단식 논이 펼쳐진다. 논 옆으로 너른 박석이 깔려 있다. 박석을 따라 동쪽으로 향한다. 이 구간에서 우린 함양의 산골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함양의 특산물인 사과밭이 좌우로 도열하고, ‘다랭이 논에서는 양파 파종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이밖에도 함양은 산양산삼과 여주, 곶감 등이 많이 나는 고장이다.

 과수원을 지나 호성(虎城)’ 마을에 다다른다. 마을 앞의 산 모양이 호랑이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호성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 마을과 초현동(招賢洞)이 합쳐져 법정동리인 황산리가 되었는데, ‘황산(黃山)’이란 황석산의 관문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 앞, 화림동 계곡을 가로지르는 호성교 아래를 지난다. 이때 썩 좋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강변의 큼지막한 바위에다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자신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과시욕의 결정판이라고나 할까?

 조금 더 걸으니 경모정(景慕亭)’이 나타난다. 경모정은 고려 개국공신인 배현경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지은 정자로, 화림동 계곡의 정자들이 대부분 19세기 말에 지어진데 비해 비교적 근래(1978)에 지어졌다고 한다. 아니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최근에 다시 지은 모양이다. 단청도 하지 않은 채 손님을 맞고 있었다.

 길은 다시 나무데크로 변했다. 이 구간은 계곡 쪽으로 숲이 울창하지 않아 계곡을 보면서 걸을 수 있다. 가끔은 나무의자에 앉아 쉬어갈 수도 있다.

 잠시 후 이번에는 람천정을 만난다. 하천 가장자리에 초석(礎石)을 세우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렸다. 어느 작가는 화림동 8() 중에서 가장 소박하다고 적고 있었다. 한글로 된 현판을 람천정(藍川亭)’으로 해석한 그는 작은 규모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드러나는, 그래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겸손하면서도 늠름했기 때문이란다.

 탐방안내도는 람천정 앞에서 다리(이정표 : 황암사 1.4/ 경모정 0.4)를 건너라고 했다. 장마 때는 물에 잠기는 잠수교다. 하지만 우린 경관이 나아보이는 우회로를 선택했다. 덕분에 우린 요런 소나무 숲속을 거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에 취하다보면 여정은 어느새 행복감으로 충만해진다.

 또 다른 볼거리도 있었다. ‘회룡포(回龍浦)’를 일러 육지 안에 있는 아름다운 섬마을이라고 했던가? 비록 회룡포만큼은 아니어도 그에 못지않은 풍광을 만나기도 한다. 유유히 흐르던 하천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둥글게 원을 그리는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0. 눈의 호사를 누리며 걷다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놓인 황암사가 얼굴을 내민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3,500여 호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사당의 뒤에서 머리를 삐쭉 내밀고 있는 산은 당해 전투가 벌어졌던 황석산(1,192m)’이다. 저 산에 바위봉우리와 계곡의 지형을 이용해서 만든 황석산성이 있다.

 호국 영령들에 묵념이라도 드리고 싶다면 서하교를 건너야 한다. 그런 다음 길고 긴 계단을 올라가는 고생을 추가로 감수해야만 한다.

 홍살문과 출입문인 충의문(忠義門)을 연이어 지나면 사당인 황암사(黃巖祠)가 나온다. 자료에 따르면 1597년 왜군 27천명이 황석산성을 3일 동안 공격했다. 안의현감 곽준, 함양군수 조종도, 그리고 거창·초계·합천·삼가·함양·산청·안의에 사는 사람들이 관군과 함께 왜적에 맞서 싸웠으나 음력 818일에 황석산성은 함락됐다. 숙종 임금 때 이곳에 사당을 짓고 황암사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사당을 헐고 추모제도 금지했다. 1987년에 황석산성이 사적(322)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지역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2001년 호국의총(護國義塚)을 정화하고 사당을 복원했다.

 순국영령의 혼이 모셔져 있는 의총은 사당의 뒤편에 있었다. 하나 더, 사당 좌우에는 황석산성순국선열충혼비·황암사중건기념비·황석산성순국사적비를 세워놓았다.

 묘역은 오죽(烏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가슴 깊이 묻은 아픈 일들, 밖으로 배어나와 까맣게 탄다던 박영옥 시인의 싯귀처럼 조국을 지키다가 스러져간 영혼들의 애달픈 마음을 담아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황암사를 둘러본 다음 다시 서하교를 건넌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왼쪽으로 굽어지며 이어져 있는 구()도로로 들어선다.

 옛길의 모퉁이에 들어앉은 농월정 쉼터는 문이 닫혀 있었다. 새로운 신작로가 뚫리면서 오가는 차량이 함께 끊겼을 게고, 손님이 찾지 않는 휴게소는 하릴 없이 낮잠만 잔다.

 조금 더 걸으면 신작로 만나지만, 그에 조금 못미처에 냇가로 내려가는 데크계단이 놓여있다. 초입에 이정표(농월정 0.6/ 황암사 0.4)를 세워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데크길은 천변을 따라 이어진다. 하지만 우린 물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이렇게 경관이 좋은데, 거기다 긴 겨울 가뭄에 목마른 내()가 길까지 내어주고 있는데 일부러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내려선 계곡은 풍경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계곡 전체가 하나의 바위고 그곳에서 바위절벽이 솟아난 형국이다. 너럭바위나 안반바위라는 낱말로는 그 풍경을 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환호성을 쏟아낼 수밖에 없다. 수백 명이 올라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옥빛 물살은 요리조리 굽이치며 장쾌하게 바위 사이를 흐른다.

 계곡을 뒤덮은 너럭바위, 그 위로 쉴 새 없이 맑은 물이 흐른다. 그리고 고풍스러운 정자와 그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선 울창한 나무들까지. 옛 선비들도 이런 풍경에 홀딱 마음을 빼앗겼나 보다. 하긴 TV 드라마 환혼에까지 등장했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여자 주인공 무덕이의 몸으로 환혼한 살수 낙수가 어릴 때 기문이 막혀 술법을 배우지 못한 남자 주인공 장욱에게 최고의 술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집수·유수·치수 단계를 설명하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단다.

 솜씨 좋은 조각가가 한껏 실력을 발휘한 듯, 물살은 암반 곳곳을 깎고 부드럽게 다듬어 기묘한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농월정(弄月亭)은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 1571-1639)가 머물며 세월을 낚던 곳. 그는 병자호란 때 굴욕적인 강화가 맺어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은거하며 정자를 지었다. 지금의 정자는 새로 지은 것이다. 원래 정자는 2003년 방화로 인해 소실됐고, 10년 동안 방치되다가 2015년 기록사진과 도면을 토대로 복원했다. 참고로 정자 이름 농월(弄月) 달을 희롱한다는 뜻. 정자 앞 너럭바위는 달이 연못에 비치는 바위 월연암(月淵岩)’으로 이름에도 옛 선비들의 풍류가 잘 담겼다.

 농월정 앞 넓게 펼쳐진 반석 지대는 월연암 혹은 달바위로 불린다. 그 바위에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之所)’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농월정을 지은 지족당 선생이 지팡이 짚고 놀던 곳이란다. 달을 희롱하면서 말이다.

 시간에 쫓겨(판독할 능력도 부족했다) 이해도 못한 채 그냥 지나쳤지만, 누군가의 한시도 적혀 있었다. 참고로 농월을 즐겼다는 박명부는 옳고 그름, 나아감과 물러감을 분명히 하는 선비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곽재우·김성일 휘하에서 군무를 도왔고,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 유폐에 대한 부당함을 직간하다 파면되었으며, 병자호란 때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자 이곳으로 낙향해 은둔 생활을 했다.

 썩 좋지 않은 풍경도 눈에 띈다. 그 너른 반석 곳곳에 자신의 허울 좋은 이름을 드러내려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낙서들이 가득했다. 심지어는 참봉(參奉) 등 자신의 관직까지 적어놓은 조선시대 놈들도 있었다. 무릉의 선계에다 이름이나마 두고 오고 싶었던 모양이다.

 선계에서 노닐다가 왼편 냇가를 따라 농월정을 빠져나간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터널처럼 오솔길이 나있다.

 농월정 앞은 유원지가 들어서 있었다. 작심하고 조성해놓은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식당이 밀집해 있다는 정도랄까?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5. 유원지가 들어선 방정마을(안의면 월림리)에서는 종담서당(鍾潭書堂)’을 만날 수 있다. 지족당 박명부가 농월정과 함께 세운 서당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아니 박명부가 낙향하여 지었다니 조선 중기쯤 되겠다.

 문이 잠긴 탓에 담 너머에서 기웃거리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정문과 자 형태로 배치된 정당은 정면 3, 측면 1.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서당치고는 화려해서일까 함께 걷던 구우(舊友)는 사당 느낌이 난다고 했다.

 다시 길을 나선다. 농월정은 1구간과 2구간의 경계. 그러니 방정마을에서 2구간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2구간 초입에는 농월정오토캠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길을 걷다보면 길게 늘어선 한옥펜션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밖에도 25개의 사이트와 카라반이 있단다. 뛰어난 경관에 각종 편의시설까지 갖춰 캠핑마니아들에게는 또 하나의 성지로 알려진다.

 탐방로는 이제 금천(남강)의 둑길을 따른다. 굴곡이 없는 평평한 길이다. 선비문화탐방로의 대부분은 이렇듯 평평한 길의 연속이다. 덕분에 무릎에 무리가 적다. 그래서 다리가 조금 불편한 노약자도 걸을 수 있다. 대신 등산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이 길이 지루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15분쯤 걸었을까 탐방로가 도로(육십령로)로 올라선다. 하지만 금방 도로를 벗어나 월림(月林)’ 마을로 들어간다. 물레방아에서 물이 내려온다는 함양의 5 물내리마을(율림·안심·두항·월림·봉산)’ 중 하나로 30여 가구가 오순도순 모여 사는 정겨운 마을이다. ! 물이 맑고 깨끗하다고 해서 다수(多水)’마을로 불린다는 것도 알아두자.

 이곳에서 우린 월소정(月沼亭)’이란 정자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화림동계곡의 팔담팔정(八潭八亭)’에는 끼지 못하고, 그저 동네 쉼터로 이용되고 있었다. 월소정이란 이름은 옛 지명에서 따왔지 않나 싶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월소동과 황대동·후암동의 일부를 합쳐 월림리가 되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이번에는 금천을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하류로 내려간다.

 목교 너머는 솔숲 쉼터라고 한다. 금천의 물굽이가 만들어낸 섬 아닌 섬이다. 소나무들은 어쩌다가 저런 곳에 무리를 지어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하천의 한가운데서 숲을 이루고 있는 솔숲이 경이로우면서도 반갑다.

 금천의 물줄기를 끼고 가는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가로수 삼아 벚나무를 심었는가 하면, 예쁘게 단장된 쉼터도 심심찮게 보인다. 길가에는 작은 꽃밭도 만들었다. 월림마을의 또 다른 특징이 특용작물 재배라고 했으니 제철이라도 만나면 약초나 감국의 꽃을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0. 8번째 정자인 구로정(九老亭)’에 이른다. 1854년에 태어난 선비 9명이 수계를 하여 풍류를 즐겼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 후손들이 1955년에 건립한 팔작지붕 정자다. ! 이들에 내한 내력이 궁금하다면 정자로 올라 구로정기(九老亭記)라도 읽어볼 일이다.

 정자에 오르면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금천이 발아래로 깔린다. 밤이 맑은 날, 이곳에 모인 선비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하늘에 뜬 달을 희롱하기에 딱 좋은 풍경이라 하겠다. 그 너머 강둑에는 성북마을이 들어앉았다. 안음현 관아 뒤 대밭산 너머 북쪽에 있었다는 오래 묵은 마을이다.

 이후부터는 시멘트 포장길(후암길)을 따른다.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구간이다. 금천을 끼고 간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점풍교를 건너면 관북마을’. 용추계곡에서 흘러온 지우천(금천의 지류)의 천변에 들어앉은 마을로 관북(官北)’이란 지명은 옛 안음현 청사가 있는 곳의 북쪽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임수역(臨水驛)’이 있었다고 해서 역말로도 불린다. 그만큼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얘기일 것이다.

 안의대교의 교각 아래를 지나자 엄청나게 굵은 버드나무가 줄을 지어 얼굴을 내민다. 얼핏 보아도 수백 년은 묵은 것 같은데, 이게 입소문을 타다보니 오리숲이란 이름까지 얻었다. 버드나무가 오리(2km)에 걸쳐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는 300m에도 못미처 보였지만...

 잠시 후 고수부지로 내려서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무리지어 늘어서있다. 금천(이 즈음에서는 남강이라 부르기도 한다)은 보를 막아 물이 넘실거리도록 했다. 지금은 얼어붙어있지만 여름철이면 풍성한 나뭇가지가 잔잔하고 푸른 수면에 비친다고 한다. ‘연암문화제가 이곳에서 열리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한 조류인 북학사상을 선도한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봉직(1791-1795)하면서 백성을 구휼하고자 했던 이용후생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개최하는 행사이다.

 날머리는 광풍루(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안의교로 금천을 건너면 제법 규모가 큰 2층 누각이 금천을 바라보고 있다. 한때 함양과는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다는 자부심의 상징물이다. 조선 태종 12(1412) 당시 이안현감인 전우(全遇)가 선화루(宣化樓)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웠고, 세종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성종 25(1494)에는 안의현감 정여창(鄭汝昌)이 중건하고 지금의 명칭인 광풍루(光風樓)로 이름을 바꿨다. 정유재란 때에 불타버린 것을 1602(선조 35) 현감 심종진(沈宗)이 복원하고, 3년 뒤인 1605년에 현감 장세남(張世男)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각의 뒤에는 역대 현감들의 선정비(善政碑)가 늘어서 있었다. 불망비라고도 하는데, 선정을 베푼 관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그 덕을 기리기 위해 고을사람들이 세워주는 비석이다. 상인들이 세웠다는 상무사 불망비와 의병대장 문태서의 기공비(紀功碑)는 일종의 보너스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2.21km, 유서 깊은 정자들을 둘러보느라 꽤나 지체했던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