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고원길 6구간(전주가는 길)

 

여행일 : ‘24. 3. 16()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부귀면 일원

여행코스 : 장승삼거리장승마을메타세쿼이아길(실제 출발지, 인증)모래재휴게소모래재주화산(조약봉, 인증)임도사거리부천마을원봉암마을부귀면사무소(거리/시간 : 15.8km, 실제는 메타세쿼이아길부터 12.22km 3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완주) 소양 IC에서 내려와 26번 국도를 타고 진안·장수 방면으로 19km쯤 내려온다. ‘서판사거리(진안군 부귀면 신정리)’에서 우회전 모래재로로 옮겨 3km쯤 들어오면 원세동 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500m쯤 더 올라가면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장승삼거리에서 출발해 메타세쿼이아길 따라 전주를 넘나들던 모래재로 오른다. 이어서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인 주화산(조약봉)을 넘은 다음, 금남정맥 아래 임도를 따라 부귀면사무소로 오는 전형적인 고원길이다. 해발 500m도 넘는 산줄기를 탄다고 해서 난이도는 ’. 구간 거리도 15.4km나 되지만, 지난 5구간 때 추가로 걸었건 거리를 빼고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부터 걷기 시작했다.

 10 : 40. ‘메타세쿼이아길을 따라가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가 양옆으로 늘어서있는 이 길은 모래재휴게소까지 이어진다. 1986년부터 2004년까지 잠동-큰터골의 1km 구간에 메타세쿼이아가 집중적으로 식재됐고, 2008년에는 모래재휴게소까지 구간이 확장되었다. 초기에 조성된 가로수는 수령 40년이 되어가면서 어른의 몸통보다도 더 굵어졌다. 줄기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덕분에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우뚝우뚝 솟아 삼각형을 이루는 메타세쿼이아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드라마 보고 싶다에서 주인공 박유천과 윤은혜가 아픈 상처를 잊고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던(네티즌들이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기도 했단다), ‘내 딸 서영이에서 서영이 엄마 아빠가 젊은 시절 걸었던 추억의 길이다. 영화 국가 대표에서도 이 길이 등장했었다. 주인공 하정우 등 스키선수들이 성동일 코치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렸었다.

 10 : 42. 몇 걸음 더 걸어 이른 테크길 입구. 이정표가 이름표(메타세쿼이아)를 달았다. 6구간의 2개 인증지점 중 하나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 모자까지 썼다. 그러니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바깥에 데크 탐방로를 새로 내놓았다. 이정표의 방향표시도 저 길을 따르라고 한다. 그러니 탐방로를 따라가다 오가는 차량이 없을 때 잠깐 도로로 나가 사진을 찍으면 된다. 참고로 메타세쿼이아길은 사진작가들이 가장 즐겨 찾는 장소 중 하나이다.

 들녘 너머에는 신덕마을(웅치골)이 그림처럼 앉아있다. 야생화를 키우고 유기농산물을 재배한다는 산골마을이다. 마을 뒤 편백나무 숲에는 산책로가 만들어져있고, 숙박시설과 마을사람들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도 있단다. 그래선지 고원길 트랙은 저 마을을 들렀다가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새로 만든 데크길을 따르다가 그만 진입로를 놓쳐버렸다.

 10 : 50. 잠시 후 도착한 웅치골 사거리’. ‘모래재로(옛 국도 26호선)’에서 옛 웅치길이 갈려나가는 지점이다. 호랑이와 도둑떼가 출몰하던 시절, 이 길은 전주를 연결되던 유일한 길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전주로 향하던 왜군이 이 재(熊峙 또는 곰티재)를 넘었다. 관군과 의병이 왜군에 맞서 대격전을 벌였고, 고갯마루에는 현재 이를 알리는 웅치전적비가 서있다. 한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았던 산길은 1910년 신작로가 되었다. 하지만 99굽이의 비포장 길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모래재가 뚫리면서 기억너머로 사라졌지만, 아직도 비포장 산길로서의 기능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 길은 이제 트레킹족의 차지가 되었다.

 웅치골 입구. 코너에 백곰 한 마리가 서 있다. 곰은 제 몸만 한 마을 표지석을 껴안고 웃는다. 충렬의 혼이 깃들어있는 곳이니 잠시 들렀다가라는 듯. 아무튼 옛 웅치(熊峙, 곰티재) 길은 신덕마을의 한가운데를 관통해 산골짜기로 숨어든다. 모래재길이 생기기 전 진안과 전주를 연결하던 아주 오래되고 유일한 고갯길이었다.

 안내도는 임진왜란 웅치전적에 대해 간락하게나마 알려준다. 1592 7 8, 왜군은 웅치방면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전장에는 의병장 황박이 최전방을, 나주판관 이복남이 제2선을, 김제군수 정담이 정상에서 최후 방어를 담당했다.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 무렵 화살이 떨어진 조선군이 안덕원으로 후퇴하면서 일단락된다. 하지만 김제군수 정담과 휘하의 병력은 웅치에 남아 끝까지 항전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정담을 비롯해 종사관 이봉·강운 등 대부분의 병력이 전사하고 웅치는 왜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들의 용맹에 감동한 왜군은 전사한 아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국의 충성스런 넋을 위로한다(弔朝鮮國忠肝義膽)’라고 적은 푯말을 세우고 지나갔다고 한다. 아무튼 웅치를 넘은 왜군은 7 9일 전주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웅치전투에서 입은 피해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고, 남원에서 돌아온 동복현감 황진이 그런 왜군을 안덕원 인근에서 격파했다. 하나 더. 이 전투의 승리와 한산대첩이 있었기에 호남지방이 보전될 수 있었고, 이는 임진·정묘 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고원길은 사거리에서 큰터골 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세동리(細洞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신덕·적천·큰터골·원세동·우정·부암) 중 하나로 메타세쿼이아길 1차 조림지의 끝이라는 것 외에는 귀가 솔깃할 얘깃거리는 전해주지 않는다.

 이정표는 6구간의 시점(始點) 장승삼거리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4.4km로 적고 있었다. 핸드폰의 트랙은 현재 0.85km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6구간의 시점이 아닌 메타세콰이어길에서 출발(생략구간은 지난 5구간 답사 때 이미 걸었다)한 덕분에 3.9km를 단축한 셈이 됐다.

 큰터골 마을회관. 고원길은 회관 앞 고샅길을 따라간다.

 당산나무 아래 철망울타리는 걷기 여행자들이 매달아놓은 리본들로 빈틈이 없을 정도다. 울긋불긋한 게 흡사 무당집 처마를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10 : 54. 마을을 빠져나오면 다시 모래재로이다. 그런데 가로수가 은행나무로 바뀌어있는 게 아닌가. 느닷없이 수종이 바뀐 게 조금 어색했지만. 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철이면 메타세쿼이아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도 있겠다.

 10 : 57. ‘큰터골 버스정류장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마을주민들보다는 송어요리 전문점인 진미가든의 단골손님들에게 더 유용할 듯. 예약이 필수일 정도로 인기가 높은 로컬 맛집이라니 말이다.

 11 : 02. 노거수 두 그루가 수문장을 자처하는 수목원 가든 찻집을 지나자 이번에는 적천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세동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이다.

 버스정류장(적천마을) 맞은편에는 시조시인 구름재 박병순의 생가가 있었다. 박병순(朴炳淳, 1917-2008)은 스승인 가람 이병기에 이어 한국현대문학사에 시조의 가치와 의미를 대중적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정열을 쏟은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 시절 시조집을 몰래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최초의 시조 전문지 신조를 발간하고, ‘가람동인회로 활동하면서 시조시인으로서 한국시조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박병순의 생가. 1917년에 태어나 1939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나라사랑도 남달랐는데, 집 둘레에 무궁화를 심고 한글보급운동에도 힘을 쏟았다고 한다.

 마당에는 박병순의 흉상과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봄눈. 앵도, 속금산, 무궁화 등 그의 대표작들을 새겼는데, 이중 속금산과 무궁화는 이 집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생가를 빠져나와 도로를 건넌다. 그리고는 농로를 따라 북진한다. 특별한 의미는 없으나 억새가 무성한 것이 가을철에는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겠다.

 길가 부지런한 산골 농부는 일 년 농사 준비로 분주하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저 농부의 올 농사는 틀림없이 풍년일 것이다.

 11 : 09. 도로(모래재로)로 올라서자 또 다시 메타세쿼이아가 반긴다. 아까보다는 굵기나 크기가 작아졌지만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들이 명품 파크 웨이(Park-Way)’로 꼽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파크 웨이란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드라이브하는 길로서 주변자연과 문화자원을 활용한 휴양활동의 전초기지를 말한다.

 11 : 13. 길은 좀 더 가팔라지고 좀 더 급하게 굽이진다. 그리고 적천저수지라는 자그마한 저수지를 호젓이 지난다.

 11 : 17. 그러자 고갯길이 갑자기 활짝 열리면서 모래재 휴게소가 길손을 맞는다. 26번 국도가 새롭게 놓이면서 모래재길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멀어져 간다. 그러다 느리게 달리기 위해, 천천히 걷기 위해, 그리고 잠시 멈추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길로 변했고, 모래재 휴게소도 그들이 찾는 쉼터로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

 모래재 휴게소. 아침마다 토종 계란과 향 짙은 원두커피를 준비한다는 곳이다. 휴게소에서 아침을 시작하고 재를 넘는 직장인들도 있단다. 하나 더. 어떤 이는 휴게소의 약수를 첫 손가락에 꼽기도 했다. 해발 480m의 지하 73m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찾아 뽑아 올린 건강한 물인데, 진안군에서 1년에 한 번씩 수질검사까지 해준단다.

 맞은 편, 도로 건너에는 전주공원(공원묘지)이 위치하고 있다.

 11 : 19. ‘모래재 휴게소 광장의 끄트머리쯤에서 왼쪽으로 난 임도로 올라간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를 경우는 모래재 터널로 연결된다. 참고로 모래재는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진안과 장수, 무주 등 이른바 전북의 지붕으로 불리는 무진장 주민들이 전주를 오가려면 꼭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도로는 1972 11월 개통됐다. 1997 4차로의 도로가 보룡고개에 나기 전까지 차량통행이 가장 많았으나, 한편으론 심한 굴곡으로 인해 대형 사고가 많이 일어났기도 했다.

 임도는 제법 가파르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기다 거리까지 짧다.

 11 : 25. 잠시 후 이번에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트레킹이 끝나고 산행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이정표는 산행구간의 핵심인 주화산(조약봉)까지의 거리를 0.81km로 적고 있다.

 고원길은 이제 산길을 탄다. 느리게 오르는 반듯한 산길은 고운 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진안고원의 경계에 놓인 산들이 갖는 특징이지 싶다. 진안과 다른 지역의 고도 차이가 300m나 되다보니 능선까지 오르는데 드는 힘도 그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다. 진안지역에서는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11 : 29. 덕분에 4분 만에 모래재에 올라설 수 있었다.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인 주화산에서 시작해 내려온 호남정맥의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고개이다. 높이는465m, 진안에서 보면 그다지 높지 않으나 전주시 방향으로는 매우 높은 고도를 갖고 있다.

 모래재라는 지명은 고갯마루 왼편에 위치한 신촌리(완주군 소양면)의 골짜기 모사골에서 유래했다. 모사가 모새(모래)로 발음됐고, 이게 또 표준어가 되면서 지명으로 굳어졌다. 아무튼 탐방로는 이정표(주화산 0.6km/ 곰티재 4.7km/ 모래재휴게소 0.31km)가 가리키는 주화산 방향의 능선을 따라간다.

 이후부터는 호남정맥(湖南正脈)의 마루금을 따라간다. 호남지방을 동서로 크게 갈라놓은 이 산줄기는 서쪽은 해안의 평야지대이고, 동쪽은 남원을 중심으로 한 산간지대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이 산줄기를 경계로 농경과 산업은 물론이고 현격히 다른 생활문화권을 형성하게 된다.

 능선의 나무 가지마다 노란색과 붉은색의 리본이 매달려 고원길을 안내한다. 이 리본은 진안의 특산물인 홍삼과 인삼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 산길을 올라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 잠시 쉬어가라며, 천천히 돌아가라며 여행길을 함께하는 동반자 같다.

 나뭇가지 사이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멋지게 꼬부라진 도로가 내다보인다. 한때 위험하기로 전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던 모래재이다. 진안은 산이 8할이다. 때문에 마을과 마을이 고개로 연결되고 다른 고장을 가려면 고개를 넘어야만 한다. 가늠도 어렵게 많은 고개들. 그 중 모래재는 노령산맥의 호남정맥에서 제일 먼저 산을 넘어 진안과 전주를 연결시킨 중요한 고개였다.

 ! 아까 모래재로 올라올 때와는 달리 산길이 많이 가팔라졌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하긴 명색이 백두대간 다음으로 큰 산줄기인 정맥(正脈)이니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1 : 39. 도중에 편백나무 숲이 적힌 이정표(주화산/ 편백나무 숲/ 곰티재)를 만났다. 요 아래 소양면의 어디쯤에 편백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후부터 능선은 사납던 기세를 확 누그러뜨린다. 덕분에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편안한 산행이 이어진다.

 11 : 45.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헬기장이다. 아니 실질적인 주화산일수도 있겠다. 고도계가 3정맥분기점인 주화산(조약봉)보다 3m나 더 높은 570m를 찍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출발지인 메타세쿼이아길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5분이 걸렸다.

 널찍한 공터의 서쪽 가장자리에는 전망대가 들어섰다. 산비탈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대를 만들었다.

 난간에 서자 시원스런 조망이 펼쳐진다. 묵방산과 응봉산 등 완주의 산들은 물론이고 저 멀리 전주시가지의 고층빌딩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11 : 48. 공터를 지나자 곧이어 주화산(조약봉, 563.5m)이 길손을 맞는다. 진안군(부귀면 세동리)과 완주군(소양면 신원리)의 경계에 있는 높이 563.5m의 산으로 산악인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은 주화산(珠華山)을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시작한 금남·호남정맥의 마지막 지점으로 상정하고, 이를 기점으로 북쪽으로 금남정맥, 남쪽으로 호남정맥이 갈려나간다고 본다. ‘주화산이란 이름도 2000년대 이후 산악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정상석은 없다. 육산의 특징대로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그저 건건산악회에서 세운 ‘3정맥 분기점 표시봉이 이들을 대신한다고나 할까? 아니 주화산을 기점으로 강 3개의 수계가 나뉘는 점은 특별한 의미일 수도 있겠다. 동남쪽에 섬진강(부귀천), 동북쪽으로 금강(정자천), 서쪽으로 만경강(소양천)의 분수령이 된다. 하나 더, 진안고원길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6구간의 두 번째 인증지점으로서의 의미도 갖는다.

 이정표가 정맥 3개가 나뉘고 있음을 알려준다. 참고로 진안고원은 정맥 종주산악인들이 많이 찾는 곳 중 하나이다. 장수군 영취산에서 시작되는 금남·호남정맥이 팔공산부터 주화산(조약봉)까지 41.5km, 이곳 주화산에서 갈라진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 각각 26.3km, 10.5km 진안고원을 지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부귀산 방향, 즉 금남·호남정맥의 능선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서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지자체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침목계단을 놓아 내려서는 부담을 덜도록 했다.

 11 : 53. 그렇게 내려서다보면 어느덧 조약치이다. 이정표(모래재휴게소 1.15km/ 주화산(조약봉) 0.22km)는 이곳이 금남호남정맥에 있는 고갯마루 중 하나라고 알려준다. 하지만 막상 금남호남정맥의 부귀산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은 없었다.

 이후부터는 세봉임도(細鳳林道)를 따른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모래재휴게소의 반대방향인데, 입봉(638.7m)을 거쳐 연석산(928.2m)로 넘어가는 금남정맥의 8부쯤 되는 산허리를 따라 임도가 나있다고 보면 되겠다. 편백나무로 옷을 갈아입은 산자락이 눈길을 끄는 구간이기도 하다.

 임도는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봉암리 산골짜기(kakaomap 봉호재골 연애골로 적고 있었다) 써미트 골프장이 들어서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퍼팅그린이나 페어웨이, 인공호수 등 골프장에서 만들어놓은 시설들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작용해주기 때문이다.

 임도는 골프장의 바로 위를 지나기도 한다. ‘굿 샷’, ‘나이스 버디 등 서로를 응원해주는 목소리는 물론이고, 골퍼들이 내쉬는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 했다.

 도중에 거리표시가 있는 이정표(#1 : 부귀면사무소 7.6km, #2 : 부귀면사무소 6.3km)를 두 번이나 만날 정도로 임도는 길게 이어진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한참이나 오르기도 한다. 탐방로가 주화산보다도 높은 입봉(立峰, 638.7m) 9부 능선을 넘도록 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12 : 23 - 12 : 32. 진안군도 그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길가에 벤치를 놓아 지친 발걸음을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우리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떨어진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12 : 39. 임도가 끝나면서 산길로 들어선다. 저 벤치는 미리 체력을 보충해놓은 다음 산길을 타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는 오르막길이 나오지도 않았지만...

 12 : 41. 잠시지만 입봉에서 봉암리로 뻗어나가는 능선(이정표 : 부귀면사무소 5.1km/ 장승삼거리 10.7km)을 타기도 한다. 아니 능선(해발 583m)을 넘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산비탈을 옆으로 째며 길이 나있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계단을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 집사람처럼 무릎이 시원찮은 이들에게는 마의 구간이다.

 12 : 58. 두충나무재배지와 산죽군락을 연이어 지나 농로로 내려선다.

 임도를 따라 부천마을(봉암리)’로 향한다. 이렇듯 고원길은 굽이굽이 들어앉은 마을들을 지난다. 덕분에 잃어가는 우리 농촌의 삶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추억에 남을 길이 되어준다. 그렇다고 길 따라 걷기만 하면 진안고원 마실길의 제맛을 놓쳐버린다. 뜨문뜨문 마을이 나타나면 둘러보고, 말 한마디 건네고 또 한마디 답해야 마실길의 맛이다.

 13 : 02. 마을 안길을 지나는데 정자(富泉亭)가 이 마을의 유래를 궁금하게 만든다. ‘부천(富泉)’. 물이 넉넉하니 농사가 잘 되었을 게고, 주민들의 삶도 풍요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마실 나온 동네 주민은 내()가 없어 샘()을 썼다는 뜬구름 잡는 얘기로 갈음해버린다. 마을의 유래라도 건져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소규모 주택단지도 눈길을 끈다. 하나의 대지에 세 가구가 들어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양새이다.

 고원길은 이제 들길을 탄다. 굽이마다 마을과 자연이 반겨주는 길이다.

 이때 보령고개로 올라가는 골짜기가 눈에 들어온다. 모래재를 넘어 전주로 가던 26번 국도가 지금은 4차선으로 변해 저 고개를 넘는다. 1997 1월 전주와 무주에서 열린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앞두고 개통됐다.

 13 : 20. 부천마을에서 출발한 들길은 10분쯤 지나 2차선의 부귀로를 만난 다음 원봉암(元鳳岩)’ 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봉암리(鳳岩里) 4개 행정부락(원봉암·소태정·부천·미곡) 중 하나로 천주교 교우촌(‘공소도 있다)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정표(부귀면사무소 2.7km/ 장승삼거리 13.1km) 신촌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원봉암이 두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13 : 27. 도로(부귀로)를 따라가다 만난 봉암교’. 이정표(부귀면사무소 2.2km/ 장승삼거리 13.6km)가 다리를 건너지 말란다. 보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피해 정자천의 둑길을 따르란다. 진안고원길은 이렇듯 자연과 함께 하는 길로 인도하는 게 특징이다.

 이후부터는 정자천(程子川)을 따라 내려간다. 운장산 골짜기(부귀면 궁항리)에서 발원하여 거석리와 정천면 월평리를 거쳐 용담호로 흘러드는 길이 20km의 하천으로, ‘정자란 지명은 하천 주변에 정자가 많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하지만 이웃한 주천면과 용담면 지역에 주자천(朱子川)’이 흐르므로 이에 견주어 중국의 현인인 정자(程子)에 맞추어 이름을 고친 듯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정자천은 예로부터 풍광이 아름답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이는 용담댐에 수몰되어버린 하류의 얘기고, 상류는 충적지를 만들면서 생긴 곡선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그 충적지를 지나다 만난 요런 길이라도 볼거리로 꼽으면 몰라도...

 13 : 40. 26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굴에서 바깥쪽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으면 명암 대비가 확실한 작품이 나오기도 하는 곳이다.

 굴다리 근처 부귀교차로에서 잠시 49번 지방도(귀상로)로 올라선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부귀로로 다시 내려선다.

 13 : 44. ‘오산교로 정자천을 건너면 이번에는 사인암 마을이 맞는다. 법정 동리인 거석리(巨石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상거석·신거석·사인암·하거석·금평·금계곡) 중 하나로 사인암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사자 형국이고 큰 바위가 있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그러다 고려 때 사인 벼슬을 하던 사람이 살았었다며 요즘은 사인암(舍人岩)’으로 고쳐 부른단다. 하지만 마을 정자는 아직도 사인암(獅仁岩)이란 지명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새롭게 단장된 신작로를 따라간다. 보도가 따로 나있어 오가는 차량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13 : 50. 배구·족구·풋살 경기가 가능한 다목적구장이란다. 우천 시에도 경기를 치를 수 있는 경기장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 육상 트랙까지 만들어 놓았다.

 다목적구장 옆에는 충혼탑이 있었다. 안내판은 한국전쟁 때 이 지역을 지키다가 숨진 주민자치대 및 의용경찰대원들의 거룩한 혼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전한다. 9.28 수복으로 퇴로가 막힌 공산당이 운장산 일대로 몰려 무고한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만행을 일삼자, 이들이 목숨 받쳐 이 지역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6구간이 끝나는 신거석 마을로 간다. 거석리의 중심 마을이자, 부귀면 소재지로 면사무소·파출소·우체국·보건지소·농협 등 부귀면의 행정기관이 모두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 이 무슨 생소한 풍경이란 말인가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공중전화가 버젓이, 그것도 대로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썩 편치 않은 풍경도 눈에 띈다. 친일잔재라 할 수 있는 윤치호 시혜 불망비 윤치호 흥학 불망비 시혜불망비는 부귀면에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소작료를 경감해 준 사실을 기리기 위해 1929년 소작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흥학불망비는 부귀초등학교 부지를 희사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부귀면 초대 면장이 건립했다. 윤치호는 한때 독립협회를 비롯해 만인공동회 등 애국 계몽활동을 지도하고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나 1915년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특사로 석방돼 변절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안내판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不忘) 할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니 이 빗돌들은 잘못된 역사적 사실의 행적을 밝히고 현재를 살아가는 후대에게 교훈과 경계를 삼기 위한 역사 교육의 생생한 증거로 제공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14 : 03. 부귀면사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은 12.22km를 찍는다. 코스의 절반 정도가 500m 안팎의 능선과 임도를 오르내렸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눈에 익은 진안고원길 특유의 조형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7구간(황금폭포 하늘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을 면사무소 앞마당에 세워놓았다.

진안고원길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

 

여행일 : ‘24. 3. 2()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성수면·마령면·부귀면 일원

여행코스 : 오암마을황소마재(인증)장재동추동가래울재신동내동재내동판치재서촌전옥례 묘(인증)외판치서판교장승삼거리(5구간 종점)장승마을메타세쿼이아길(거리/시간 : 12.3km+3km, 실제는 장재동 마을부터 12.47km 3시간 1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오암마을(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순천·완주고속도로 상관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임실 방면으로 11km쯤 내려온다. ‘병암교차로(임실군 관촌면 관촌리)’에서 745번 지방도로 옮겨 10km쯤 달리다가 양화3(성수면 좌포리)’에서 좌회전, 중길로를 따라 2km쯤 들어오면 오암마을에 이르게 된다. 5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마을 앞 정자에 문패처럼 세워놓았다.

 고만고만한 높이의 고갯마루 넷을 오르내린다. 골짜기마다 자리한 마을과 저수지를 만나고, 멀리 마이산을 시야에 두다 보면 어느새 종점(부귀면 장승삼거리)에 닿는다. 난이도는 보통’. 코스 길이(12.3km)는 짧지만 고개를 네 개나 넘는다는 게 반영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중 하나(황소마재)를 생략하고 장재동마을에서 출발했다. ‘메타세쿼이아 길까지 연장해 걷겠다는 산악회의 결정 때문이다. 집사람의 체력으로는 15km를 걷는다는 게 무리이니 어쩌겠는가.

 10 : 29. 실제 출발지인 장재동마을 어귀. 차도는 장재동마을을 지나 추동마을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넓이가 들쭉날쭉한 도로사정을 감안해 이쯤해서 차를 돌리기로 했다. 자칫 길이 좁아지기라도 하면 장축의 산악회버스를 돌릴 수조차 없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재동마을로 이어지는 추장길을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만덕산 줄기의 골짜기, 남동쪽으로 트인 곳에 장재동과 추동 마을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추장(추동+장재동)’이란 도로명이 이를 증명해준다.

 10 : 32. 잠시 후 도착한 장재동 마을은 천주교 신자촌으로 보면 되겠다. 구한말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로 어은동(魚隱洞, 1888년에 공소가 설립된 진안의 유서 깊은 천주교 신자촌)과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하천(추동천)의 최상류, 오지에 위치하고 있어 관군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고, 남쪽으로는 성수면 중길리와 접하고 있어 유사시 피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초기 이주자들은 생업으로 옹기를 굽고 살았다 한다.

 삼노운동을 하자는 팻말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부연설명을 보며 실없는 미소로 마무리 짓는다. 버리지도 태우지도 묻지도 말자는 운동의 자 대신 (NO)’자를 넣은 것이다. 하긴 요즘은 글로벌이 대세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을회관 앞에서 고원길(고개너머 마령길)을 만났다. ‘황소마재를 넘어온 고원길이 마을회관 앞(덕천2)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다리(덕천2) 옆 이정표가 반갑다 눈인사를 보내온다. 방향표지판의 노란색과 붉은색은 진안의 특산물인 인삼과 홍삼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노란색은 순방향, 붉은 색은 역방향이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진안고원길을 한 바퀴 돌게 되어 있다.

 10 : 36. 몇 걸음 더 걸으면 천주교 장재동공소. 진안지역의 공소(公所, 본당보다 작아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공동체)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설립됐다. 1883년에 인근의 가래올(추동)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고, 1890년도에는 장재동에도 신자들이 이주해 와 공소가 설립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4년 본래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추동마을로 간다. 마을로 들어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따로 나있지만, 고원길은 추동천의 둑길을 따라 간다. 참고로 만덕산(765.5m)’의 북서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은 덕천저수지에 모였다가 추동마을 앞으로 흘러간다. 추동천 또는 덕천천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추동마을 어귀(동남향)에는 엄청나게 굵은 노거수 네 그루가 흡사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방수나 방풍보다는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조성한 비보(裨補林) 숲이 아닐까 싶다. 마을의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10 : 45. 마을 숲을 지났다싶으면 이내 추동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덕천리(德川里)를 구성하는 10개 자연부락(신덕·대동·신동·대동·신동·장재동·추동·안방리·판치·안골) 중 하나로, 마을 형성시기에 주위에 가래나무()가 많다고 해서 가래울 또는 가래골로 불리다가 한자화 되는 과정에서 추동으로 변했단다. 하나 더. 추동마을도 역시 천주교 신자촌이라고 한다. 진안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유박해(1801) 무렵이란다. 고산(완주군) 지방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데, 추동마을은 1883년경 형성됐다고 한다.

 이정표는 5구간 시점인 오암마을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3.7km로 적고 있다. 반면에 내 앱은 1.15km를 찍는다. 그러니 집사람과 함께 걷는다는 핑계로 2.5km쯤 단축해서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안내판은 이곳이 십승지지(十勝之地)에 버금가는 피난처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진안 사람들 사이에 동비서추(東飛西楸)’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큰 난리가 나면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동쪽의 비사랑마을(백운면)과 함께 이곳 추동마을이 꼽힌다는 것이다.

 마을을 지나 두 번째 고개(첫 번째 고개인 황소마재는 생략했다) 가래울재로 간다. 고개가 높지 않은데다 큰 커브를 그려가며 올라가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올라설 수 있다.

 10 : 59. 컨테이너가 반기는 가래울재(해발 370m)’에 올라선다. 고원길은 움푹 파인 능선의 안부를 꿰뚫듯 지난다. ! 왼쪽 개활지를 향해서도 길이 나있었다. 하지만 벌목과 경제림 조성을 위해 내놓은 임도이니 헷갈리지 말 일이다.

 이정표(장승삼거리 7.7km/ 오암 4.6km)가 이곳이 가래울재임을 알려준다. 진안고원길은 이렇듯 주요 지점마다 이름표가 달린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산길은 인생과 같다고 했다. 그러니 오르막길 다음에는 내리막길이 나타날 수밖에... 하지만 실제의 상황은 인생과는 딴판이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하는 내리막길 삶과는 달리 산길에서의 내리막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진행 방향 저 아래에 신동저수지와 신동마을이 놓여있다. 그 뒤로 보이는 고개가 잠시 후 넘어야 할 내동재이다.

 저수지 위 골짜기에는 엄청나게 넓은 묘목원이 들어서 있었다. 육묘의 수종도 국·공립 수목원에 못지않게 다양했다.

 길가 두어 곳에 쉼터용 정자를 지어놓았다. 묘목원에서 세운 모양인데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도 아낌없이 자리를 내어준다.

 신동저수지. 구글지도는 소류지로 적고 있었다. 경작지에 공급할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둑을 쌓았지만 그 규모가 작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 15. 신동마을에 내려선다. 덕천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옛 이름은 놋점이었다고 한다. 예전 이 마을에서 놋그릇을 만들어 전주 등지로 반출했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놋점터 또는 유기점리로 불리다가 놋점이 없어진 후 1800년경부터 나뭇골이라는 뜻의 신동으로 불린다고 한다.

 신동은 산골마을 치고는 규모가 꽤 컸다. 그래선지 들어선 교회도 선교 수양관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고 신자가 늘어나면서 사라졌단다.

 신동마을의 벽화는 풍물놀이를 담았다. 하지만 깃발은 농자천하지대본 대신 마을의 특산품을 적었다. ‘명품 고사리가 생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마을을 지나 비스듬히 내동재를 넘는다. 작은 고개라서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다. 거기다 숲까지 깊으니 뒷짐이라도 지고 사색하며 걸어보면 어떨까?

 고개너머 마령길은 고개를 하나 넘고, 휘어지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뒤돌아보면 또 다른 풍경이 오롯이 떠오른다. 내가 걸어온 길이다.

 11 : 25. 내동재에 올라섰다. 신동마을과 (내동·판치)마을 주민들이 왕래하던 고개로 마을 간의 왕래와 논밭에 가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하나 더. 내동재에서 북서쪽 능선을 따라가면 부귀면 방각마을로 이어지는 방각이재·깃대봉·장구목재 등을 거쳐 만덕산에 이른다. 남쪽은 덕천리 중심 산지를 이루다가 안방마을 앞 갈모봉(354m)에서 정리된다.

 고갯마루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내동재 이정표(장승삼거리 5.7km/ 오암 6.6km). 앱은 해발 362m를 찍는다. 내동마을의 해발이 310m이었으니 고도를 50m 밖에 올리지 않은 셈이다. 그만큼 수월하게 올라왔다는 얘기다.

 이제 내동마을로 내려갈 차례다. 익산·포항고속도로를 정면에 놓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저 멀리 마이산이 조망된다. 크게 보이는 암마이산 뒤에서 숫마이산이 삐쭉이 고개를 내민다.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의 모양새라고나 할까?

 11 : 35. 그렇게 걷다보면 어느새 내동마을이다. 큰 마을인 판치마을의 안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안골이라 부르다가 한자화 되면서 내동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은 집이 5채가 채 되지 않았다.

 내동마을 이정표(장승삼거리 5.0km/ 오암 7.3km)도 이름표를 달았다.

 고원길은 이제 판치마을로 간다. 아니 판치마을까지는 가지 않고 판치저수지 아래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판치재로 올라간다.

 부지런한 집사람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던 모양이다. 잠시만 시간을 달라더니 손놀림이 바빠진다. 그렇게 채취한 봄나물은 다음 날 아침상에 냉이된장국이 되어 올라왔고, 나머지는 친지들에까지 나누어줄 수 있었다.

 11 : 53. 내동과 판치 마을 사이에는 판치저수지가 있다. 덕천리 일대의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제법 큰 저수지(담수량이 24만 톤이나 된다고 했다)이다.

 고원지대에서 저수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러니 강우량의 변화가 농업용수의 확보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할 수밖에 없다.  간이 기상대가 그 증거라 하겠다.

 11 : 58. 저수지 아래서 만난 삼거리. 직진하면 판치마을이 나온다. 하지만 고원길은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참고로 널티로도 불리는 판치마을은 마을 입구에 동서로 길게 조성된 숲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때 베었다가 생사람이 죽는 등 변고가 많이 생기자 다시 조성했다고 한다.

 12 : 02. 잠시 후 고원길은 익산·포항고속도로 아래(이정표 : 장승삼거리 3.4km/ 오암 8.9km)를 지난다. 높고 긴 교량이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구간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판치재의 높이는 357m. 조금 전 지나왔던 판치마을 갈림길의 표고가 288m이었으니 1.2km를 걸어가면서 70m의 고도를 높이는 셈이다.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평탄한 길이 계속되는 이유일 것이다. 하나 더. 임도는 차량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찍했다. 바닥에 바퀴자국이 또렷한 것이 차량통행이 제법 많은 모양이다.

 12 : 14.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는 판치재(또는 널재)에 올라선다. 과거 백운이나 마령 사람들이 전주로 나갈 때 넘던 고개이다. ‘널재라는 지명은 널재마을의 뒷산이 널빤지처럼 판판하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널재  으로도 해석되는데, 이는 넓은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단다.

 느티나무 그늘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이정표(장승삼거리 2.5km/ 오암 9.8km) 아름다운 순례길의 팻말도 눈에 띈다. 그런데 저 달팽이는 뭘 의미하는 걸까? 어쩌면 느림의 미학을 음미하며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걸어보라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 태양광발전소의 썩 편치 않은 풍경을 눈에 담으며 트레킹을 이어간다판치재는 마령면과 부귀면의 경계에 해당한다북쪽 신정리(부귀면방향으로 들어선 고원길은 서촌마을·외판치마을·장승마을을 연이어 들른다.

▼ 12 : 20.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작은 분지에 들어앉은 서촌’ 마을이다소박한 규모만큼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마을로 서학(천주교신자들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마을 어귀에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숲이 조성되어 있으며정월 열나흘 날 저녁에는 거리제도 지낸단다.

 마을 뒤로 올라가면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노거수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서촌마을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게 마을 당산목으로 삼아도 충분하겠다. 맞다. 그늘에 놓여있는 저 의자가 그 증거일 수도 있겠다.

 서촌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살짝 거칠어진다. 왕래하는 사람들이 적은 탓인지 잡초로 무성한데다 질척거리기까지 한다.

 11 : 29. 그렇게 잠시 걸어 전옥례 묘역에 닿았다. 아니 묘역에 들어가기 전, 이정표(장승삼거리 1.6km/ 오암 10.7km)가 먼저 길손을 맞는다.

 전옥례 묘소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 2개 인증지점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우리 부부가 생략한 구간에 있는 황소마재에 세워져 있다). 자신의 얼굴과 이정표가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두어야 하는 이유이다.

 전옥례 묘역은 사유지이다. 그래선지 울타리를 둘러놓았다. 하지만 고맙게도 둘레길 나그네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작은 문을 내놓았다. 글을 빌어서나마 묘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후손들에게 감사를 드려본다.

 전옥례(全玉禮)’ 할머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장녀라고 한다. 갑오동학농민혁명으로 부모를 잃은 그녀는 천애고아로 유랑하다 마이산 금당사에 들어가 김옥련으로 이름을 바꾸고 공양주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23세에 이찬영씨와 결혼해 52녀를 두었다. 우여곡절 끝에 진안군 부귀면 희망목장으로 왔을 때 전봉준장군의 딸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숨어살던 때라 숨기고 지냈지만, 어느 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야기가 실린 것을 보고 이제는 자신이 전봉준의 딸인 것을 알려도 되겠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출생내력을 밝혔단다.

 묘역에는 묘비 말고도 전옥례 할머니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1970년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란다. 이후 정읍동학농민혁명사 등 각종 서적과 논문에 이런 사실이 실리면서 세상에 전해졌다.

 묘역에서 내려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거기에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자칫 엉덩방아라도 찧을 수 있으니 조심해서 내려갈 일이다.

 12 : 34. ‘서촌재길로 내려선다. 서촌마을로 이어지는 진입로 겸 농로로, 고원길은 이 길을 따라 서판마을로 간다.

 12 : 38. 서판마을(이정표 : 장승삼거리 1.1km/ 오암 11.2km). 법정 동리인 신정리(新亭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가정·신리·서판·승각) 중 하나이다. 신정천변 들판의 자연부락 판치이기도 하다.

 12 : 49. ‘서판교로 세동천(신정리 앞을 흐를 때는 신정천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을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2차선 도로인 모래재로’. 고원길은 200m쯤 이 도로를 따른다.

 12 : 52. 세동천의 둑길로 내려서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세동천이 휘돌아가면서 만들어놓은 자그만 들녘을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렇듯 진안고원길은 기계음으로 찌든 속세의 길보다는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아 연결시킨다.

 4분쯤 걸어 만난 작은 개울. 앞이 막힌 고원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장승삼거리가 얼굴을 내민다.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이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다.

 12 : 58. 장승삼거리에 이른다. ‘진안고원길 5구간의 종점이자 한국고갯길 TOUR in 진안’ 23일 코스(78일 종주팀, 34일 하프팀도 있다)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한국고갯길(KHT : Korea Hills Trail)은 한국형 하이킹·백패킹 문화를 통해 지역을 살리는 공정여행 시스템으로 국내의 다양한 트레일(trail)을 걷는 투어(TOUR)를 이어오고 있다. 먹고 싶은 곳에서 먹고, 구경하고 싶은 곳을 구경하면서 나만의 걷기 여행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나?

 장승삼거리는 버스정류장을 겸한다. 작은 슈퍼마켓도 하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한적한 풍경을 보여준다. 6구간(전주가는 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은 버스정류장 앞에 세워져 있다.

 2차선 도로인 모래재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6구간(전주가는 길)을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산악회의 결정이지만). 거리가 먼데다 높은 산까지 올라야하는 다음 구간의 힘든 여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한 결단이다.

 13 : 04. ‘장승2를 건너자 세동천의 둑길로 내려선다. 최근에 정비를 끝냈는지 둑 위로 난 시멘트포장길 양 가장자리에 야자매트까지 깔아놓았다.

 오른편에 세동천을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부귀면 세동리에서 발원한 세동천은 신정리를 거쳐 연장리(하평마을)에서 정곡천과 합친 다음 강정리(월운마을)에서 제룡강(섬진강 상류)에 합류되는 섬진강의 지류이다. 상류인 세동천에 이어 신정천, 연장천 등 지나는 지역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기도 한다.

 둑길을 걷다보면 물길이 깎아 만든 바위절벽도 만난다.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기묘하지도 않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13 : 11. ‘장승마을 앞에서 또 다시 모래재로를 만났다.

 모래재로를 따라가면 코스를 꽤 단축할 수 있다. 메타세쿼이아길 입구에서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실제 그렇게 걷는 이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고원길은 신정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장승마을로 들어선다. 해발 300m를 훌쩍 넘기는 산간지방을 고원길은 혼자 즐기며 걷기에는 산이 깊거나 한적하다. 그래도 잃어가는 우리 농촌의 삶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추억에 남을 길이다. 하지만 길 따라 걷기만 한다면 진안고원 마실길의 제맛을 모른다. 뜨문뜨문 마을이 나타나면 둘러보고, 말 한마디 건네고 또 한마디 답해야 마실길의 맛이다.

 마을 담벼락은 예쁜 벽화 대신 속 깊은 글귀를 담았다. ‘나눌 수 있는 봄 향기. 당신이 있어 나는 늘봄이다’. 문득 영춘(永春)’이란 예쁜 이름을 지어주신 할아버지의 당부가 떠오른다. 네 이름이 늘봄이니. 봄 향기 사위에 퍼져나가 듯. 아름다운 마음을 세상과 공유하라는...

 13 : 14. ‘곰티로를 따라 방각마을(같은 신정리)쪽으로 가다보면 장승초등학교가 나온다. 1946년에 문을 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초등학교이다. 1954년 장승국민학교로 승격했고, 1982년에는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다. 2010년 학생 수가 13명으로 줄어들면서 폐교위기에 몰렸으나, 인근 지역(전주)에서 학생을 유치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으로 2021년 학생이 57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학교를 중심으로 지역사회가 살아난 대표 사례로 꼽힌다나?

 교정에는 장승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이 아니 장승초등학교와 병설유치원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하나 더. 고원길은 초등학교 교정을 통과한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으로 지나가도록 하자. 특히 평일에는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정숙보행이 요구된다.

 고사리손으로 가꾸어가는 텃밭. 학교는 전주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했다. 인구 65만의 대도시에서 살아온 어린이들로서는 새로운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맞다.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에서 자연과 벗하며 자라는 아이들에게서 길러지는 감성,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서로를 살리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 필요한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초등학교를 지난 고원길은 개울로 몸을 움츠린 세동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13 : 21. 그러다 우정천과의 합수지점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우정천을 거슬러 오른다. 개울을 건널 수 있는 다리를 찾아서이다. 덕분에 나그네들은 250m쯤 에돌아갈 수밖에 없다.

 12 : 26. ‘U’자 형으로 커브를 돌아온 길은 세동천과 다시 만난다. 하지만 다리(우정교)를 건너지 않고 세동천의 왼쪽 둑길을 따라 간다.

 우정교에는 우정마을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법정 동리인 세동리(細洞里) 6개 행정마을(신덕·적천·큰터골·원세동·우정·부암) 중 하나로 풍수상 소가 물을 마시는 지형이라고 해서 우정(牛井)’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피난처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던 오지마을이다.

 세동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 오른쪽 산자락에 원세동마을이 들어앉았다. 보건진료소까지 들어서있는 규모가 제법 큰 마을이다.

 13 : 35.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부귀면의 자랑이자 진안군 명물 중 하나인 메타세쿼이아길을 만나게 된다. 우람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길게 뻗어나가는 풍경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참고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세동리(부귀면) 원세동마을에서 큰터골마을까지 1.5km구간에 곧게 뻗은 긴 다리를 외투 자락으로 살짝 가린 팔등신 미인들처럼 나란히 도열해 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유명하기로는 담양이 으뜸이다. 모래재 가로수 길은 나무의 굵기나 가로수 구간의 길이가 짧아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쭉 뻗은 길이 살짝 여유 있게 돌아가는 등 비교를 거부할 만큼 묘한 매력을 자랑한다.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13 : 42. 트레킹은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에서 끝난다(사진은 5구간 출발지점의 조형물을 담았다). 이랑마을 입구에서 100m 남짓 더 나아간 지점이다. 오늘은 3시간 15분을 걸었다. 앱은 12.47km를 찍는다. 고만고만한 고개를 3개나 넘은데다, 걷는 도중 냉이까지 채취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진안고원길 4구간(섬진강 물길)

 

여행일 : ‘24. 2. 17()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성수면 일원

여행코스 : 성수면사무소반용재반용마을포동마을성수체련공원양화마을오암마을(거리/시간 : 12.8km, 실제는 12.98km 3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성수면사무소(진안군 성수면 외궁리)

순천·완주고속도로 상관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임실 방면으로 11km쯤 내려오다 병암삼거리(관촌면 덕천리)’에서 49번 지방도로 옮겨 8km쯤 들어오면 성수면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4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뜨락에 세워져 있다.

 이름(섬진강 물길)처럼 섬진강의 물길을 눈요깃거리 삼아 걷는 12.4km짜리 구간. 초반의 반용재와 중반의 가장골을 빼면 섬진강 본류와 지류(달길천)를 따라 걷게 된다. 난이도는 보통’. 코스의 길이가 짧지만 반용재의 가파른 오르막 구간을 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0 : 23. 남서쪽 방향의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관촌으로 이어지는 49번 지방도(관진로)이다.

 10 : 24. 80m쯤 걷다 성수파출소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농로를 겸한 임도를 따라 반용재골로 들어간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 섬진강변의 용포리 주민들이 성수면소재지인 외궁리로 갈 때 넘나들던 고갯마루이다. 그렇다고 왕래가 잦던 길은 아니었다고 한다. 용포리가 성수면보다 강 건너 임실군 관촌면에 속한 생활권이었기 때문이다.

 반용재로 올라가는 길. 용포리(반용·포동·산막) 주민들이 이용하던 숲길은 신작로가 뚫리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다 고원길을 내면서 골짜기를 에돌아 올라가는 숲길을 조성했다. 가파른 구간에는 통나무계단도 깔았다. 그런데 이게 길고 가팔라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덕분에 나그네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올라간다.

 그런 오르막이 10분이면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다음부터는 평탄한 숲길이 이어진다.

 10 : 36. 트레킹을 시작한지 14. 군도 1호선(가외반로)으로 올라선다. 핸드폰의 앱이 해발 335m를 찍고 있으니 10분여 동안 고도(高度) 75m나 높인 셈이다. 참고로 이 도로(郡道)는 반용마을과 포동마을을 거쳐 745번 지방도(관마로)로 연결된다.

 이정표(오암 12.0km/ 성수면사무소 0.8km)는 이곳이 인증 지점임을 알려준다. 그러니 자신의 얼굴과 이정표가 겹치게 사진을 찍어두도록 하자.

 이후 고원길은 도로를 따라 반용재(해발 348m)’를 넘는다. 성수면 외궁리(안평마을)와 용포리(반용마을)를 잇는 거리 1.2km, 높이 348m의 고개이다. 남북으로 흐르는 능선을 동서로 가르는데, 북쪽에는 성수면의 이름 유래가 된 성수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병풍바위를 지나 방미산에 이른다.

 반용재의 왼편(서쪽) 바로 아래로는 섬진강이 흐른다.

 세월은 결혼 상대마저도 변화시키는가 보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라때 시절. 배우자감은 이웃마을 처자 말고는 없었다. 그게 글로벌 시대를 맞아 동남아 여성으로 폭을 넓혔는가 싶었는데, 언제부턴가 북한여성으로 바뀌어 있다.

 이 구간도 역시 산자락이 온통 복분자 넝쿨로 가득 차 있었다. 오뉴월에 찾아와야 제격이겠다는 얘기다.

 10 : 43. 요것조것 기웃거리며 600m쯤 걷다보면 이정표가 이제 그만 오솔길로 들어가란다. ‘진안고원 길의 참맛을 다시 느껴보라는 모양이다.

 고원길 이정표는 다양한 정보를 전해준다. 구간 정보(오압 11.4km/ 성수면사무소 1.4km)를 기본에 깔고, 근처 주요 포인트에 대한 정보(포동마을 2.5km/ 원외궁마을 2.3km)를 보탰다. ‘야생동물 주의 안내는 팁이다.

▼ 탐방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가장자리 잡목을 깔끔이 제거해 임도처럼 널찍하게 만들어 놓았다거기다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내리막길이다.

 산자락을 빠져나오니 잘 지어진 고택 한 채가 얼굴을 내민다. 뜨락도 정성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했다. 이곳 반용마을은 성수산을 병풍삼은 것으로도 모자라 섬진강까지 앞마당에 두었다. 그러니 돈 많은 이들이 찾아들 만도 하겠다.

 10 : 51. 몇 걸음 더 걸어 도로(가외반로)로 올라선다. 고원길의 뭉툭한 방향표지판은 오른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십중팔구(十中八九)는 왼쪽으로 가고 있었다. 30m만 가면 반용교(고원길이 지난다)’가 나오는데 굳이 600m나 에돌아갈 필요가 없다면서.

 10 : 53. 도로를 따라 150m쯤 올라가다 마을표지석 앞에서 반용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용포리(龍浦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반용·포동·송촌) 중 하나로 진안군과 임실군 사이의 협곡에 기다란 형태로 놓여있다. 성수산을 베개 삼고, 섬돌 아래 섬진강을 둔 지형이다.

 탐방로는 마을을 관통한다. 예쁜 돌담길을 낀 고샅길이 가슴까지 설레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너무 호들갑떨지는 말자. ‘둘레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지역 주민이 낯선 나그네에게 그런 길을 열어주었고, 우린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생활리듬을 깨뜨리는 소음까지 발생시켜서야 되겠는가.

 소박한 골목길은 강변으로 이어진다. 강변으로 나오니 구중심처(九重深處)에서나 볼 법한 예쁜 고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아까 봤던 한옥이 양반집이었다면 소슬지붕까지 얹은 이건 사대부 가문에서나 지을 법한 형식이다.

 강변의 정자(盤龍亭)’. 주위를 야외박물관으로 꾸몄다고 한다. 빗돌까지 세워가며 자랑하지만 막상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설마 요 장승이 전부는 아니겠지? 아무튼 반용마을은 귀농귀촌 우수마을이라고 했다. 배산임수의 수려한 경관에다 마을을 가꾸려는 노력들이 더해져 그런 결과가 만들어졌지 않나 싶다. 원주민과 이주민의 화합이 높아 정월 대보름날에는 달집태우기 행사까지 성대하게 열린다고 했다.

 강변의 느티나무 거목 두 그루가 옛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옛날 저곳에는 사람만 건너다니던 낮은 다리(잠수교)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저 느티나무는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을 게고. 하지만 2000년 새 다리가 놓이면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작은 쉼터를 조성했다. 한때 나룻배(1970년대 잠수교가 놓이기 전까지는 나룻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까지 놓아두었으나 그것마저도 지금은 옛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11 : 00. 마을을 빠져나와 반용교로 섬진강을 건넌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를 마을을 에둘러오느라 10분이나 걸렸다.

 다리를 건너다 바라본 상류 쪽 풍경. 섬진강을 품은 반용마을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임을 알려준다. 아름다운 풍광만큼이나 주민들 간의 정 또한 돈독한 살기 좋은 마을이란다.

 반용교 아래에는 보()가 설치되어 있었다. 덕분에 반용마을 앞 강물은 일정한 수량을 유지한다. 하나 더. 저 보를 지난 섬진강 물길은 90도로 방향을 튼다. 앙칼진 산릉이 섬진강을 남쪽에서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다리 건너. 안내판은 반용(盤龍)’이란 지명의 유래를 적고 있었다. 풍수상 마을이 초중반사(草中盤蛇)의 낙원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초중반사란 야초·인삼·약초가 우거진 속에 뱀이 소반처럼 사리고 있는 형국을 이른다나? 초중반사의 명당에 뱀이 사리고 있으면 반룡(蟠龍)’이 된다. 이게 언제부턴가 반룡(盤龍)으로 변했나보다. ! 그 옆에는 섬진강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 두었다.

 11 : 05. ‘명산휴게실을 지나자마자 지방도를 벗어나 강변 둑길로 내려선다.

 고원길은 이제 섬진강 둑길을 따라간다. 강 건너에서는 감입곡류의 물줄기가 만들어놓은 깎아지른 기암절벽이 나그네와 함께 간다. ‘섬진강 물길이라는 이름값을 한다고나 할까? 아무튼 데미샘을 출발한 물줄기는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과 만나 수량을 늘린다. 백운면을 적시며 흐르던 강물은 마령면과 성수면을 지날 때까지 섬진강 최상류를 이룬다. 그러다 진안군 남부지역 산골오지를 지나 임실 땅으로 흘러가면서 어느 정도 강의 면모를 갖춘다.

 ! 봄이닷! 봄이 유독 늦게 찾아온다는 진안 땅이다. 그런데도 다른 곳에서는 구경조차 못해본 푸른 초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하긴 요 며칠, 언론은 남녘의 꽃소식을 연일 전해주고 있었다.

 포동마을로 가는 강변길 안쪽에는 경작을 기다리는 논이 자리한다. 그 속에 임마누엘 냉천수양관이 있다. 노인복지센터와 요양원까지 갖춘 큼지막한 시설이지만, 수양관 근처로 도로가 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부지를 사는가 하면, 선교비 마련을 위해 하느님이 장사를 시켰다는 등 받아들이기가 썩 편지 않는 종교시설이다.

 강 건너 비탈진 산자락에도 민가가 들어섰다. 맞다. 사람들은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아왔다. 그게 한집 또 한집 늘어나면서 마을을 이루었고, 그렇게 조상대대로 살아왔다. 그러니 강가 사람들에게 섬진강은 어머니 같은 존재다. 강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고,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거나 물놀이를 즐겼다.

 11 : 24. 그렇게 걷다보면 포동2에 이른다. 메인 도로나 마을을 잇는 우리가 익히 아는 교량이라기보다는, 강 건너 산자락에 만들어놓은 다랑이 논·밭에 일하러 다닐 때나 이용하는 것 같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가파른 절벽과 평평한 농경지가 대조를 이룬다. 강변 둑길은 계속해서 그 사이를 가른다. 그리고는 큰 원을 그리면서 포동교로 간다. 참고로 포동교는 성수면 용포리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흘러내려온 회초천이 섬진강에 합류되는 두물머리에 있다. 회초천을 보탠 섬진강은 포동교 아래서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임실군 관촌면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고원길 이정표(오암 8.3km/ 성수면사무소 4.5km)은 이제 그만 섬진강과 헤어지란다. 그러면서 포동마을로 인도한다. 동북쪽 좌포리에서 흘러온 섬진강은 반룡마을 앞에서 동쪽으로 휘감아 돌면서 꽤 넓은 충적지 들판을 만들어냈다. 포동마을은 그 들판의 안쪽 가장자리에 있다.

 11 : 27. 250m쯤 더 걸어 군도(1호선, 용포로)로 올라선다. 이어서 포동마을을 향해 왼쪽으로 간다. 참고로 이 길은 745번 지방도를 만난 다음 관촌면(임실군)으로 간다. 관촌(館村)’은 삼례·전주를 지나온 통영대로 옛길이 통과하는 길목으로 출장관원 등이 묵을 수 있는 관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1 : 29. 잠시 후 도착한 포동마을(이정표 : 오암 7.7km/ 성수면사무소 5.1km)’. 용포리(龍浦里)에 속한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큰 물가에 위치한 탓에 예전에는 나룻배로 건너다녀야만 했던 오지이다. 그래서 나루터라는 뜻을 가진 포동(浦洞)’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안내판은 그런 사연을 적었다. 면소재지와 멀리 떨어진데다 강과 산으로 가로막혀 교통이 매우 불편했단다. 반면에 강변으로 이어진 임실군 관촌면은 다니기가 수월했다나? 그래서 주민들은 학교도 관촌으로 갔고, 시장을 보기위해서도 관촌으로 갔다.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관촌이 생활권인 셈이다.

 마을회관 앞 광장. 포동마을은 그 역사만큼이나 큼지막했다. 맞다. 포동마을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 근처 유물산포지에서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발굴된바 있다.

 정자는 풍류정(風遊亭)’이란 현판을 달았다. 바람 솔솔 불어오는 섬진강변에서 풍치 있고 멋스럽게 놀아보라는 모양이다. 아무튼 난 이곳에서 15분을 머물다 갔다. 산악회 회장님의 실수로 버스에서 잘못 내려, 아직까지도 길을 헤매고 있는 집사람을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마을에는 카페와 식당까지 들어서 있었다. 샤워장까지 갖춘 물놀이장도 보인다. 맞다. 이 마을은 녹색농촌체험마을이라고 했다. ‘바람도 쉬어간다는 수식어까지 달았다. 그러니 저 정도의 부대시설쯤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을 주민의 시가 적힌 카페 외벽이 눈길을 끈다. <바람 따라 돌고 돌아 한참을 돌다가/ 바람도 쉬어가는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봄이면 강에는 물안개 피고... -이하 생략-> 읽는 것만으로도 마을 풍경이 그려지는 멋진 표현력이다.

 고원길은 고샅길을 누비다가 마을 뒤편으로 빠져나간다. 아까 반용마을에서도 얘기했듯이 주민들의 생활리듬을 깨뜨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이 뭣꼬? ‘기러기 조형물을 문설주에 매달아놓았다. 기러기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한 새다. 짝짓기를 한 암수는 한쪽이 죽어도 다른 기러기와 짝짓기를 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고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전통혼례 때 신랑이 기러기 인형을 주는 풍습이 있다. 이로보아 기러기가 쌍으로 걸린 저 집은 부부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외기러기가 걸린 옆집에서는 홀아비나 홀어미가 살고 있을 것이고...

 11 : 51. 마을 뒤. 포장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임도로 올라가려는데,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던 주민이 오른쪽으로 나있는 샛길(비닐하우스를 오른편에 끼고 도는 모양새이다)로 가라고 알려주신다. 길이 나뉘는 지점이지만 방향표지판이 없기에 응당 직진이겠거니 했다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11 : 52. 몇 걸음 더 걸어 농로(용포로)로 내려선다. 이어서 나지막한 고개 하나를 넘는다.

 길가 사과나무는 가지치기를 이미 끝냈다. 맞다. 이틀 후면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雨水).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나무는 꽃망울을 활짝 터뜨릴 것이다.

 11 : 59. 잠시 후 만난 삼거리(이정표 : 오암 7.1km/ 성수면사무소 5.7km). 성벽이라도 되는 양 곤포사일리지가 앞을 턱 가로막는다. 그리고는 방향을 틀어 왼쪽으로 가란다.

 12 : 03. 이후부터는 임도를 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기장골에 있는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난다. 이때 진안고원 길의 참모습이 느껴지는 풍경이 펼쳐진다. 둥글고 한가로운 길, 그래서 고원길에서는 경쟁이나 도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길을 걸으며 만나는 풍경을 오롯이 즐기기만 하면 된다.

 기장골 이정표(오암 6.6km/ 성수면사무소 6.2km)는 이곳이 두 번째 인증지점임을 알려준다.

 임도는 기장골 고갯마루를 향해 오름짓을 한다. 이때 잘 생긴 노송 한 그루가 힘내라며 격려의 손짓을 보내온다.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를 외치며...

 고개 너머. 고원길 이정표가 왼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집사람은 지름길이라며 오른쪽으로 간다. 다른 둘레길 도반들도 오른쪽으로 갔다면서 말이다. 고랭지채소밭의 밭두렁 끝에서 두 길이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밭두렁 끝에서 길이 사라지면서 숲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가시나무 넝쿨이 우거진 원시림을 헤쳐 나가며 찔리고 할퀴는 것으로도 모자라 따귀까지 맞아가며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규 탐방로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고원길은 이제 침목계단이 깔린 숲길을 따라 또 다른 임도로 간다.

 12 : 13. 임도를 따라 이번에는 이차선 도로인 용포로를 만나러 간다.

 12 : 20. ‘용포로(이정표 : 오암 5.6km/ 성수면사무소 7.2km)’로 내려선 다음 도로를 따라 북진한다. 이 길은 양산교차로에서 745번 지방도(관마로)와 만난다. 참고로 용포로 745번 지방도 포동교차로(성수면 용포리)에서 시작해 포동마을과 반용마을(강 건너)을 거친 다음 양산교차로(성수면 좌포리)에서 745번 지방도와 다시 만나는 2차선 도로이다.

 건너편에는 성수산(492.5m)이 있다. 그리고 성수산과 용포로 사이로 섬진강이 흐른다. 다시 만난 섬진강은 아까 지나온 반용마을과 포동마을 방향으로 흘러간다. 섬진강이 포동마을 뒷산을 가운데 두고 180도 휘돌아가는 모양새이다. 고원길로 풀어보면,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포동마을에서 고개를 넘어 (반용교에서 800m쯤 떨어진) 섬진강의 상류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섬진강변 아랫삼막들에서는 물놀이가 가능하다고 했다. 깊지 않은 곳에서는 물고기와 다슬기도 잡을 수 있단다. 매운탕에 소주를 곁들인 다음 날. 다슬기 해장국으로 속을 풀 수 있다니 이 아니 좋을 손가.

 왼쪽 산자락에는 마이산 풍혈냉천 캠핑장이 들어서 있었다. 데크 사이트로 조성된 오토캠핑장 36면과 글램핑 시설 5동이 들어서있는데, 공간이 넓은데다 소나무 사이마다 사이트가 배치되어 있어 그늘에서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단다.

 12 : 29. 벚나무 가로수의 호위를 받으며 걷다보면 어느덧 널따란 둔치에 이른다. 섬진강 물줄기가 휘돌면서 만들어놓은 충적지인데, 연습구장 2면과 덕 아웃, 백넷, 내외야 그물망과 펜스 등을 갖춘 전용야구장을 조성해놓았다. 지금 그곳에서는 젊은 동호인들이 훈련에 한창이다. 덕분에 우린 산골의 적막을 깨뜨리는 그들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12 : 32. ‘산막교로 섬진강을 건넌다. 초입의 이정표(오암 4.8km/ 성수면사무소 8.0km)가 양화마을까지 2.2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다리 아래로는 섬진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강의 최상류라 수량이 많지 않고 강폭도 넓지 않다. 이곳을 지난 섬진강은 수많은 산과 들, 그리고 마을을 돌고 돌면서 남해로 흘러간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이곳 진안을 시작으로 임실과 순창을 지나 전라남도 곡성과 구례 땅을 거친 다음, 경상남도 하동과 전라남도 광양을 가르면서 흐르다가 광양만에 닿는다.

 상류 쪽 풍경. 강 오른쪽 둔치로 탐방로가 나있다. 길가에는 둔치 특유의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었다. 지대가 낮으니 태풍이나 집중호우 때는 차량을 옮기라고 적었다. 물이 깊은데다 유속의 변동까지 심하니 물놀이도 삼가주란다.

 강 건너 산비탈은 기암절벽을 이뤘다. 산태극수태극을 이루며 흐르던 물줄기가 산줄기를 휘돌아나가면서 깎아 만든 절경이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감입곡류의 섬진강은 곳곳에 크고 작은 충적지 들판을 만들어놓았다. 그중 하나에 성수체련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1만평쯤 되는 부지에 잔디운동장과 족구·배구·농구·인라인스케이트장 등 야외시설과 샤워실·취수대·스트레칭 장소 등 부대시설을 갖추었다. 매년 개최되는 면민의 날을 비롯한 각종 대회가 이곳에서 열리는데, 작년에는 진안홍삼배 유소년축구대회로 열기가 달아오르기도 했단다.

 12 : 43. 체련공원의 끝(이정표 : 오암마을 4.1km/ 성수면사무소 8.7km). 고원길은 야외화장실 뒤로 간다. 그리고는 745번 지방도(관마로) ‘양산교의 교각 아래를 지난다. 참고로 관마로는 양산교 건너에서 관촌면을 향해 터널로 들어간다. 터널이 뚫리기 전 양화마을 사람들이 관촌에 가기위해서는 말궁구리재라는 고개를 넘어야만 했단다. 말이 고개를 넘다가 구르는 일이 하도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나? 이 지역이 그만큼 오지였다는 얘기가 되겠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둔치를 따른다. 745번 지방도의 왼쪽 아래로 길이 나있다. 그런 인연으로 집중호우 때는 지방도가 고원길이 되어준다.

 12 : 52. 지방도의 교각 아래를 다시 한 번 지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잠수교(이정표 : 오암 3.2km/ 성수면사무소 9.6km)가 놓여있다.

 잠수교는 장마철마다 물속에 잠겨버리는 반쪽짜리 다리다. 하지만 이게 풍경화로 변하면 온전한 다리보다도 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거기에 철 지난 갈대라도 강물과 어울릴라치면 그 경관을 훨씬 더 고와진다.

 사람들은 이 일대의 물줄기를 오원천(五院川)’이라 부른다. 섬진강 상류인 제룡강이 서천·신정천과 합류하여 성수면 좌포리와 용포리를 지나는 구간을 일컫는다. 섬진강은 이렇게 구간에 따라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오원이란 지명은 관촌면 철도역 근처에 있던 조선시대의 교통로를 관할하던 오원역(五院驛)에서 비롯됐다. 삼례도찰방(三禮道察訪)이 관할하던 호남평야의 12개 역들 가운데 하나이다.

 다리 건너에서 만난 또 다른 이정표(양화마을 350m/ 풍혈냉천 600m/ 포동마을 4.8km)가 짬을 좀 내면 진안의 또 다른 볼거리인 풍혈냉천을 볼 수 있다며 유혹한다. 하지만 다녀오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앞서 걷던 도반이 풍혈의 문이 닫혀있더라는 상황을 전화로 알려왔기 때문이다.

 들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그분이 보내준 사진으로 달래본다. 양화마을의 풍천도 밀양 얼음골처럼 냉장고 같은 찬바람이 솔솔 나온다고 했다. 풍혈(風穴)은 바깥 공기가 틈새 많은 돌 틈 사이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순간 단열 팽창하면서 급격히 열기를 빼앗겨 찬바람이 나오는 현상이다. 도반은 찬바람이 나오는 동굴이 사유지라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문을 닫아버린 것은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닐까 싶다.

 섭씨 3의 석간수가 솟아나는 냉천(冷泉)은 구경할 수 있었다나?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피서를 겸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12 : 56. 고원길은 745번 지방도를 횡단해 양화마을로 들어간다. 법정동리인 좌포리(佐浦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원좌·봉좌·내좌·산수동·양화·증자) 중 하나로, 섬진강을 뜨락에 두고 달길천을 늘상 옆구리에 끼고 살아가는 강촌마을이다. 강변 사람들은 섬진강과 함께 살아간다.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섬진강을 바라보며 기쁨을 나누고 슬픔을 달랜다. 강변 느티나무 아래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삶의 여유를 누리기도 한다.

 달길천의 둑길에는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보림(裨補林)이 분명해 보인다. 풍수지리상 길지 또는 명당의 조건에 부족할 경우 숲과 나무를 심어 좋은 마을을 만들고자 했던 조상들의 유산이다.

 수령이 210년이나 된다는 느티나무 보호수’. 매년 정월 초사흘에 당산제까지 지내주는 고목이다. 그래선지 나이만큼이나 품도 넓어 보인다. 그늘에 정자는 물론이고 마을회관까지 품었다.

 안내판은 예로부터 볕이 잘 들어 눈이 잘 녹는다고 해서 양화(陽化)’라는 지명을 얻었다는 마을의 유래를 적고 있었다. 마을의 자랑거리인 풍혈냉천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준다.

 양화마을(이정표 : 오암 2.7km/ 성수면사무소 10.1km)부터는 둑길을 따라 달길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섬진강 본류를 벗어나 지류로 들어선 셈이다. 참고로 달길천은 성수면 중길리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흐르다가 양화마을 앞에서 섬진강에 합류되는 7km 길이의 하천이다.

 아름다운 순례길 이정표는 이 근처에 대산종사의 탄생지가 있음을 알려준다. ‘대산은 원불교 세 번째 종법사(宗法師, 원불교 교단의 최고 지도자)인 김대거(金大擧, 1914-1998)의 법호이다. 2대인 정산종사에게서 바톤을 받아 교조인 소태산대종사의 법통을 이은 인물인데, 이곳 좌포리에서 태어나 11살 때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출가했다. 하나 더. 대산종사는 내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니 그가 남긴 게송에 반해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

 지류이어선지 강폭이 많이 좁아졌다. 수량도 뚝 줄어들었다. 하지만 강변이 보여주는 풍광은 여전히 고왔다.

 달길천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넓지 않은 농경지가 길게 펼쳐진다. 하천가에 자리한 농경지는 낮은 산들로 감싸여있다. 가는 길에 그런 풍경 속에 들어앉은 중길교(오암 1.5km/ 성수면사무소 11.3km)를 지나기도 한다.

 13 : 36. 4구간의 종점인 오암마을에 도착했다. 두 개의 하천(만덕산 오두재에서 흘러내린 중길천과 이 마재골에서 발원한 물줄기)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자리한 작고 소박한 자연부락이다. 고원길(5구간) 조형물은 마을 앞, 두물머리에 놓인 다리에 세워져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이 12.98km를 찍고 있으니 시간당 4km를 걸은 셈이다. 반용재라는 결코 쉽지 않은 고개를 넘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진안고원길 3구간(내동산 도는 길)

 

여행일 : ‘24. 2. 3()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백운면 및 성수면 일원

여행코스 : 백운면사무소산림환경연구소구신치원구신마을염북마을염북재쉼터점촌마을원외궁마을성수면사무소(거리/시간 : 18.5km, 실제는 산림환경연구소부터 16.18km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백운면사무소(진안군 백운면 동창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장수) 진안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를 타고 임실·남원 방면으로 10km쯤 내려오다 백운3교차로에서 1시 방향의 임진로로 들어오면 곧이어 백운면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이름(내동산 도는 길)처럼 내동산을 가운데 놓고 반 바퀴쯤 돌아가는 18.5km짜리 구간이다. 덕분에 내동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여러 마을을 지나고, 주민들이 소통했던 고개도 여럿 넘는다. 난이도는 중간’. 하지만 난 12km를 목표로 걷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산림환경연구소부터 걸었다.

 3구간의 출발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앞 화단에 세워져 있다.

 10 : 25. 실제 출발지인 전북산림환경연구소. 임업에 관한 연구와 기술보급, 우량종묘 생산, (산림박물관·수목원·휴양림)운영관리 등을 위해 설치된 전북특별자치도청 소속기관이다. 특히 지역 적응력이 뛰어난 신품종을 개발하는데, 이곳에서 육종 개발한 왕방울은행나무는 상표등록까지 되어있으며, 무궁화 신품종도 국립종자원에 품종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연구소는 내동산(887.9m)의 허리쯤에 들어앉았다. 덕분에 지대가 높아 시야가 툭 트이는데, 이를 놓치지 않고 청사 앞 잔디밭을 전망대 삼아 조망도까지 설치해 놓았다. 백운면의 들녘너머로 지나가는 금남호남정맥을 사진과 대조해가며 감상해보라는 모양이다.

 1천 미터를 훌쩍 넘기는 고봉들이 파노라마를 이루며 좌우로 펼쳐진다. 가운데서 우뚝 솟아오른 게 선인무수(仙人舞袖)와 장군대좌의 천하명당을 숨기고 있다는 선각산(仙角山·1,142m)이다. 왼쪽은 덕태산(1,113m), 그리고 오른쪽 저 멀리로 보이는 게 팔공산(1,151m)이다.

 이곳은 고원화목원’. 그럴듯한 이름에 이끌려 단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청사 근처에서 한국 전통정원을 만났다. 하지만 손바닥만 한 연못과 정자가 전부인 풍경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겨울철이니 야외 식물원은 더 초라할 게 분명하다. 나머지 구역의 구경을 포기해버린 이유다.

 정원의 뒤. 산림욕장으로 오르는 나무계단 앞에서 진안고원길 이정표(성수면사무소 16km/ 백운면사무소 2.5km)를 만났다.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다보니 2.5km를 단축한 셈이 됐다.

 2017년 문을 연 고원화목원은 식물연구소로 우리나라 식물 종 다양성 확보와 보전을 위한 곳이다. 전문 원() 23개와 아열대식물원, 자연학습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1,150종류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고원지역에서 볼 수 있는 구름국화·한라구절초·구상나무 등 우리나라 특산종도 보호되고 있단다.

 반달곰 가족이 손님을 맞는 아열대식물원은 피라미드형으로 지어졌다. 오전 9 30분부터 오후 5 30분까지 문을 여는데, 동절기(10-2)에는 이보다 30분 늦게 문을 열고, 30분 먼저 문을 닫는다.

 온실 내부엔 260여 종 7,000여 본의 열대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1 365일 언제든 활짝 피운 다채로운 꽃을 만나볼 수 있다.

 겨울에 보는 꽃은 호사(豪奢). 웰빙을 넘어선 힐링이다.

 고원화목원은 내동산(萊東山)의 품에 안겨있는 모양새다. 참고로 내동산은 백마산으로도 불린다. ‘원구신(성수면 구신리)’ 마을의 노적바위가 갈라지면서 백마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 백마가 거닐어 백마산이 됐다고 한다. 내동산의 명칭은 선인이 노닐었다고 해서 중국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蓬萊)에서 ()’자를 따왔다고 한다. 고지도인 해동지도 광여도에는 내동산(內東山)으로, ‘여지도서에는 내동산(萊東山)으로 표기 돼 있다고 했다.

 10 : 44. 단지를 빠져나와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선다. 이정표(성수면사무소 15.1km/ 백운면사무소 3.1km) 고원화목원을 통과하는 구간이 900m임을 알려준다. 내 앱은 1km를 찍고 있다. 볼거리가 없다며 투어를 생략했지만 탐방로를 벗어나 두어 곳을 기웃거렸더니 어느새 그만큼의 거리를 걸었던 모양이다.

 10 : 46. ‘상서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덕현리(德峴里)’ 5개 행정부락(원덕·상서·윤기·동산·내봉) 중 하나이다. 그런데 마을 앞 이정표는 상덕현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행정 단위인 상서마을도 2개의 자연부락(상덕현·서촌)으로 나뉘는데, 그중 상덕현 마을이란 얘기일 것이다.

 탐방로는 이제 원덕(또는 원덕현)’ 마을로 간다. 예전 마을 어귀에 장승이 세워져 있었다고 해서 장승백이로도 불리는 덕현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이다.

 이때 백운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흘러가는 반송리·동창리·운교리 일대는 300-500m의 넓은 충적지가 발달되어, 다른 곳에 비해 평야지대가 넓은 편이다.

 10 : 49. 원덕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마을 뒤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구신치로 간다. 초입의 이정표가 다음 들르게 될 원구신 마을까지 1.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구신치로 올라가는 길. 버거울 정도는 아니지만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논두렁에는 세 떼를 쫓던 허수아비가 올 가을 찾아올 새로운 풍요를 기다리며 다랑논을 지키고 있었다.

 가슴 아픈 현장도 눈에 띈다. 규모가 제법 큰 축사지만 안은 텅 비어있었다. 가축을 기를 수 없는 뭔가의 이유가 생겼을 것이고, 이를 헤쳐 나가지 못한 농부는 눈물을 머금고 축사의 문을 닫아야만 했을 것이다.

 고원지대의 가장 큰 특징은 겨울 한파가 매섭다는 점이다. 바람도 거셀 게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주택의 외벽을 두껍게 돌로 쌓았다. 저 정도면 그 어떤 추위도 무서울 게 없겠다.

 11 : 02. 낙엽송 숲속에 들어앉은 구신치를 넘는다. 백운면의 덕현리와 성수면의 구신리를 잇는 고개로 덕고개라고도 불린다. 예전 백운면 사람들이 임실장이나 관촌장을 오갈 때 넘나들던 고개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오랜 세월 발길에 닳고 닳은 고갯마루는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움푹 파여 있었다.

 고갯마루의 이정표(성수면사무소 13.8km/ 백운면사무소 4.7km)는 이곳이 3구간의 인증 장소임을 알려준다. 참고로 진안고원길은 각 구간마다 두 곳의 인증지점이 있다.

 고개 너머에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침목으로 바닥을 깔고 그 위에 통나무 의자를 배치했다. 구신리 쪽의 시야까지 툭 트이지만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원구신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한시라도 빨리 따라잡아야하기 때문이다.

 원구신마을로 내려가는 길. 잠시지만 전형적인 산길을 걷는다. 맞다. 진안고원길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을 되살려냈다고 했다.

 길을 걷는 여행자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둘레길은 지역 주민의 생활 터전을 지나기 때문에 농작물을 따거나 논밭에 함부로 들어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 주인 있는 임산물 채취도 마찬가지다. 지역 주민에게 농작물이나 임산물은 소중한 재산이자 자식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11 : 07. ‘742번 지방도로 내려선다. 임실군에서 들어와 진안군 성수면과 백운면을 거친 다음 장수군으로 넘어가는 지방도이다.

 도로를 80m쯤 걷다가 마을표지석 앞에서 농로로 접어들어 원구신 마을로 간다. 법정 동리인 구신리(求臣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원구신·염북·장성·시동) 중 하나로 원구신(元求臣)’이란 지명은 구신리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다.

 11 : 11. 잠시 후 도착한 원구신 마을. ‘구신리라는 지명은 고려 말 이성계가 운봉에서 왜구를 격퇴한 후 개성으로 돌아가다 이곳의 지형을 보고 신하를 구하는 형국이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사진은 마을회관 앞 정자이다. 공동 우물 위에 정자를 올린 게 특이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마을 어귀. 길을 가운데 두고 왼쪽은 동뫼라는 나지막한 동산(저 위까지 올라가본 둘레길 도반은 꼭대기에 묘가 있더라고 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모정(茅亭)이 들어앉았다.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지점이다. 이 일대의 지명을 낳게 한 기념물이 바로 저곳에 있기 때문이다.

 마을 안내판은 모정 옆에 노적바위가 있다고 적었다. 모정보다도 더 커다란 저 바위를 이르지 않나 싶다.

 저 바위가 벼락을 맞아 갈라지면서 백마가 나왔다고 한다. 그 백마가 거닐어 백마산(지금의 내동산)이 됐으며, 백마가 산에서 내려와 마령면의 마령이 됐단다.

 동뫼 아래에는 열부 경주김씨의 기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전태익의 처라는 것 말고는 다른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에서 흘러내려온 물길은 제법 너른 들녘을 만들어냈다. 탐방로는 그 물길을 따라 간다. 하나 더. 안내판은 또 원구신 사람은 송장도 무겁다는 말도 있다고 했다. 그만큼 물이 풍부한 마을이란다. 덕분에 농작물의 수확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품질도 뛰어나다나?

 이즈음 집사람을 만났다. 출발지인 원구신마을에서 5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나는 3km쯤 걸어왔다). ‘혼자가 아닌 함께를 추구하는 그녀답게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11 : 23. 탐방로는 구신천(求臣川)’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간다. 그렇게 10분쯤 걷다가 다리(이정표 : 하염북마을 1.6km/ 원구신마을 550m)를 건넌다. 이후부터는 구신천을 왼쪽으로 바꿔 차고 간다. 참고로 구신천은 구신리의 내동산 남쪽에서 시작되어 관촌면 방현리 부근에서 섬진강으로 합류되는 길이 11km의 하천이다. 이게 운수·신기리를 지나면서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지류들을 보태 몸집을 부풀린 다음 좌산리에 이르면 좌산천(佐山川)’으로 이름을 바꾼다.

 11 : 27. ‘구신천(求臣川)’을 경계로 진안군과 임실군이 나뉜다. 때문에 임실군(관촌면)의 산골마을로 들어가는 구암교(이정표 : 하염북마을 950m/ 원구신마을 1.1km)’를 만나기도 한다. 그 너머 산골짜기에는 거북이를 닮은 바위가 있다는 구암마을(운수리)’이 들어앉았다.

 구신천은 공존의 현장이라고 하겠다. ()에 물길(魚道)을 따로 만들어 물고기의 이동을 자유롭게 했다. 덕분에 하천에서 서식하는 회유성(回遊性) 어류가 인공구조물로 막힌 공간을 쉽게 오르내린다.

 11 : 35. 또 다시 742번 지방도(성백로)로 올라선다. 이어서 도로를 따라 100m쯤 걷는다. 짧은 거리지만 보행로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니 오가는 차량을 조심해가며 걸어야 한다. 도로를 횡단할 때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하염북마을 앞을 지나는 이 도로는 옛날 고창에서 장수까지 등짐으로 소금을 나르던 행상 길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이곳 하염북에 주막이 3개나 있었단다.

 11 : 37. ‘하염북마을 앞 삼거리에서 관촌으로 향하는 742번 지방도(성백로)를 버리고, 성수 방면으로 가는 오른쪽 염상로로 옮긴다. 단풍나무와 철쭉을 가로수 삼은 멋진 구간이다. 하지만 이 구간도 역시 보행로가 따로 나있지 않으니 오가는 차량을 피해가며 걸어야 한다.

 인삼 재배단지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진안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인삼이 재배됐다. 기록상으로도 370년쯤 전, 지금의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하나 더. 진안은 인삼과 사과가 주요 소득원이다.

 11 : 46. 이정표(‘하염북마을에서 650m)가 이제 그만 상염북마을로 들어가란다. ‘구신리(求臣里)’를 구성하는 또 다른 자연부락(행정단위)으로 아까 지나온 하염북과 이곳 상염북을 합쳐 염북(念北)’이라 하는데, 마을 앞에서 수문장을 자처하고 있는 충성스런 느티나무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자나 깨나 임금이 계시는 북쪽만을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마을 앞은 10여 그루의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370년이나 묵었다는 느티나무(진안군 보호수)가 눈길을 끈다. 국난을 맞아 군왕을 생각하여 쓰러졌다가 소생했다는 나무다. 임진왜란이 나고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자 나무가 스스로 북쪽으로 엎드려 꽃을 피우지 않다가 선조가 환궁하자 스스로 일어나 꽃을 피웠는가 하면, 1910년 경술국치 때도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쓰러졌다가 3년 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후 주민들은 이 나무를 충목(忠木)’이라 불렀고, 그늘에 충목정(忠木亭)’이란 정자를 지어 그 충정을 기려오고 있다고 했다.

 마을 담벼락은 벽화로 채워 넣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을 암시하는 풍물놀이와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몸짓에서 산골마을의 이상향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농로가 나그네의 발길을 인도한다. ‘염북터널로 이어지는 좁은 골짜기에 손바닥만 한 다랑논들이 오밀조밀 들어앉았다.

 이런 골짜기에서의 둠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조상들은 논·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를 파고 물을 저장했다. 이 웅덩이가 바로 둠벙이다.

 11 : 57. 농로는 2차선 도로인 염상로와 연결되고 있었다. 하지만 탐방로는 100m쯤 전방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임도를 따른다. 초입의 이정표(성수면사무소 9.6km/ 백운면사무소 8.9km) 3구간의 절반 조금 넘게 걸었음을 알려준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구신리(백운면) 염북마을과 도통리(성수면) 중평마을을 잇는 6.42km 길이의 임도로 중간에 해발이 543m나 되는 염북재를 넘어야 한다.

 안내판은 차량통행 때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나열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폭이 넓은데다 정비까지 잘 되어있어 안심하고 다녀도 되겠다. 차량통행이 빈번한 탓인지 길도 반질반질하게 나 있었다.

 진안고원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이정표나 리본, 화살표(페인트) 등이 촘촘히 설치되어 있어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저런 안내판은 옥의 티라 하겠다. 진안고원길의 산악구간을 재구성한 풍경이라는데 얼룩이 져서 애초에 그림이 있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임도는 완만한 편이다. 가끔 가파른 구간도 나오지만 대부분은 이처럼 평탄하게 이어진다. 임도 초입에서 염북재까지의 거리는 3km. 반면에 높여야 할 고도는 200m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서둘러 고도를 높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산이 깊으니 야생동물이 많을 것은 당연. 멧돼지를 주의하라는 안내판까지 세워둔 이유일 것이다. 멧돼지를 만났을 때의 대처요령을 적어두는 배려가 돋보인다.

 야생동물 포획 틀도 눈에 띈다. 하나 더. 누군가는 인적이 드문 진안고원길은 사람보다 동물을 더 많이 만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갑자기 풀숲에서 날아오르는 꿩을 보고 놀란 게 전부였다.

 잠시 쉬었다가라는 듯 벤치도 놓아두었다.

 외길이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런데도 시·종점까지의 거리가 적힌 이정표를 곳곳에 세워놓았다. 덕분에 얼마를 왔고, 또 얼마가 남았는지를 감안해가며 걷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 좋았다.

 가끔은 요런 경사로가 나오기도 한다. 아무튼 길은 굽이굽이 잘도 휘돌아간다. 이래서 내동산 도는 길이라는 3구간의 브랜드가 생겨났지 않나 싶다.

 겨울철 트레킹의 가장 큰 단점은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빈 가지만 남은 길가 나무들이 심심찮게 시야를 열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 45.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염북재 쉼터에 이른다. 조망이 툭 터지는 곳에 데크로 대를 쌓고 그 위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조성했다. 참고로 이곳은 임도구간에서 해발이 가장 높은 지점이다. 핸드폰의 앱은 548m를 찍고 있었다.

 이정표(성수면사무소 6.4km/ 백운면사무소 12.1km)가 이곳이 인증 지점임을 알려준다. 3구간의 두 번째 인증지점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니 완주를 인증받기 위해서는 이정표와 본인의 얼굴이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두어야 한다.

 쉼터에서의 조망은 화려했다.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손바닥만 한 농경지. 그에 기대어 살아가는 마을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 뒤로는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저래서 이곳 (··)지역을 첩첩산중이라고들 하는 모양이다.

 잠시 후 능선의 한 지점을 넘는다. 생김새로 봐서는 염북재이지 싶다. 하지만 해발은 쉼터보다 약간 낮은 536m를 찍는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벌목이 끝난 개활지를 눈에 담아가며 걷는 구간이기도 하다.

 12 : 58. 두 번째로 만난 임도 안내판. 이정표(성수면사무소 5.5km/ 백운면사무소 13.0,km)가 종점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준다.

 산이 이렇게 깊은데 심마니가 없겠는가. 산자락을 누비고 있는 심마니들을 만났고, 또 그들이 캤다는 더덕과 도라지도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약초에 문외한 나에게는 더덕이나 도라지 보다 길가에 널리다시피 한 복분자가 더 관심을 끈다. 이곳뿐만 아니라 임도를 걷다보면 곳곳에서 복분자 숲을 만난다. 그러니 진안고원길 3구간은 오뉴월에 찾아야 제격이겠다.

 13 : 27. 첫 삼거리를 만나 오른편으로 간다. 같은 임도(중평-염북)이지만 중평안길이란 고유의 이름까지 갖고 있는 구간이다. 이정표는 이제 3.4km만 더 걸으면 종점인 성수면사무소에 이른다고 알려준다.

 13 : 28. 100m쯤 더 걷다가 왼쪽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든다. 초입에 방향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도보 여행자의 약속을 되뇌어본다. 먼저 길을 허락해주신 마을과 숲속 생명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 이렇듯 사유지까지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신 주민들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는가.

 오솔길은 꽤 가파르게 이어진다. 하지만 폭신폭신한 흙길이라서 내려서는데 부담은 없다.

 13 : 34. 잠시 후 도착한 점촌마을(이정표 : 백운면사무소 3.0km). 법정 동리인 외궁리(外弓里)’를 구성하는 3개 행정부락(원외궁·안평·신고) 중 하나인 신고마을. 이게 또 신리와 고미동, 점촌으로 나뉜다. ‘점촌(店村)’이란 지명은 이 마을에 있었다는 도요지(陶窯址)로부터 유래되었지 않나 싶다. 고려 때 청자를 생산했었고, 120년쯤 전에는 옹기(甕器) 가마가 들어섰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마을을 스치듯 지나 건너편 산자락으로 향한다. 이때 귀여운 소품들로 치장된 민가를 지나기도 한다.

 이후부터는 전형적인 산길을 걷는다.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을 되살려냈다는 진안고원길이다. 하지만 이 구간을 걸으며 묵은 길이란 표현이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게 나만의 오해일까? ‘진안고원길이란 브랜드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억지로 땔감이나 약초를 구하러 다니던 산길로 코스를 돌려놓은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높이 326m의 능선을 가로지른 다음에는 가파르게 내려선다. 통나무계단이 끝 간 데 없이 놓여있는 구간이다.

 13 : 53. 신리저수지 제방으로 내려선다.

 13 : 54. 건너편 관진로(이정표 : 성수면사무소 2.1km)로 올라서서, 종계장(種鷄場)으로 여겨지는 시설물을 전면에 두고 걷는다.

 14 : 04. 그렇게 10분쯤 걷다가 만난 삼거리(이정표 : 성수면사무소 1.6km)에서는 오른편으로 간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원외궁마을이 놓여있다. 고개를 넘어가면 한 마을이 나오고, 또 산자락 모퉁이를 돌아서면 다른 한 마을이 나오는 게 진안고원길의 특징이다. 추억 속의 내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14 : 12. ‘원외궁(元外弓) 마을에 이른다. 외궁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외궁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활등성이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렇게 생긴 이름이 활목’, 마을의 위치가 그 활목의 바깥쪽이라고 해서 외궁(外弓)’이 되었다. 여기에 으뜸 원()’자를 보탰으니 외궁리에서 가장 먼저 형성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동구 밖에는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원외궁 마을이 풍수적으로 배의 형국이라서 배가 떠나가지 않도록 마을에 샘을 파지 못하게 했고, 재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수구막이 역할을 해줄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2차선 도로인 가외반로를 따라 안평마을(성수면소재지)’로 간다.

 14 : 21. 외궁초등학교를 오른편에 끼고 직각으로 방향을 튼다. 1934년에 문을 열었다는 학교는 현재 20명의 학생이 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건물은 도회지 학교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날이 갈수록 주민이 줄어들고 있는 농촌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 하겠다.

 종점인 성수면사무소로 가는 길. 중간에 서바이벌 훈련장을 연상시키는 놀이터가 들어서있었고, 화장실도 눈에 띈다. 하지만 문이 잠겨있어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쯤에서 팁 하나. 화장실을 찾아 면사무소 문을 두드렸는데, 당직자로 보이는 여직원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맞다. 현대는 공공 업무도 서비스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14 : 26. 조금 더 걸어 성수면사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이 16.18Km을 찍고 있다. 절반 이상이 임도나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마주보지 말고 같은 방향을 보자는 집사람. 그런 그녀가 함께 해주었기에 오늘도 행복한 여정이 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집사람을 만나 결혼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진안고원길 2구간(들녘길)

 

여행일 : ‘24. 1. 20()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마령면 및 백운면 일원

여행코스 : 마령면사무소원평지마을계남마을방화마을백마교평장마을영모정신전마을상백마을중백마을백운면사무소(거리/시간 : 14.7km, 실제는 원평지마을부터 12.21km 3시간 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마령면사무소(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장수) 진안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를 타고 임실·남원 방면으로 9km쯤 내려오면 마령사거리에 이른다. 좌회전해 200m쯤 들어오면 마령면사무소이다. 2구간(들녘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앞에 세워져 있다.

 진안에서 가장 넓다는 마령 들녘과 그 들녘에 기대어 살아가는 마을들을 지나고, 주민들이 소통했던 고개를 넘는 14.7km짜리 구간이다. 운치 있는 계곡에 자리한 옛 정자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톡톡하다. 난이도는 보통’. 하지만 난 12km를 목표로 걷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원평지 마을에서 걷기 시작했다.

 10 : 28. 실제 출발지인 원평지마을’. 마령면 청사 소재지인 평지리(平地里)를 구성하는 5개 행정 부락(사곡·석교·송내·원평지·평산) 중 하나로 면사무소(평산마을 소재)에서 동남쪽으로 1.6km쯤 떨어진 들녘에 위치한다.

 첫 만남은 의사둔암오기열기적비(義士遯菴吳基烈紀蹟碑)’. 소중한 현충(顯忠) 시설이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자신을 희생해가며 나라를 지킨 저런 이들이 아니었다면, 웰빙·힐링을 외쳐가며 전국의 산하를 누비고 있는 우리 또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둔암(遯菴) 오기열(吳基烈) 선생은 진안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한 달 후인 4 6일 전영상·김구영·황해수 등과 함께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독려하는 격문을 작성·게시하였으며, 장날에 다시 시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8·15 해방 후 제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때 북한군에 체포되어 전주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커다란 은행나무 그늘에는 영풍정(迎豊亭)’이란 정자가 들어앉았다. ‘풍년을 맞이한다는 이름대로 발아래로 펼쳐지는 너른 들녘에서 해마다 풍년이 이루어지길 기원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10 : 32. 마을 앞 도로변(국도 30호선)에는 효자 오성복(吳成福, 1795~?)의 정려(旌閭)가 있었다. 오성복은 1871(고종 8) 정려를 받았다. 정려는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오성복 지려(孝子 贈 童蒙敎官朝奉大夫吳成福之閭)’라 새겨져 있다. 그의 조상인 오빈(吳玭)의 정려도 눈에 띈다.

 진안군사(鎭安郡史)’ 친상(親喪)에 여묘(廬墓)했기에 마령면 평지리에 7세조 오빈과 함께 정려했다고 적었다. 참고로 오빈(吳玭, 1547~1593)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1590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일하다 고경명(高敬命)의 휘하로 들어가 싸웠고, 1593년 고종후(高從厚)와 함께 의병을 모아 진주성으로 들어가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절간의 일주문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대문도 눈길을 끈다. 어느 대갓집(마을 앞 너른 들녘에 걸맞는)에서 위세삼아 짓지 않았을까 싶다.

 10 : 35. 마을 앞 원평지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운계로를 따라간다. ‘진안고원길은 영풍정에서 농로를 이용해 섬진강변으로 가지만, 정자까지 다시 돌아가는 게 싫어 곧장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이때 마령면의 너른 들녘이 좌우로 펼쳐진다. 이곳 평지리는 평지를 이루는 넓은 분지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름대로 평지리는 농경지가 산지보다 많은 군내 유일한 지역이다. 섬진강 상류 지역으로 강 주변에 높이 300m의 충적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10 : 42. ‘계남교를 건너기 직전. 둑길을 타고 온 진안고원 길을 다시 만났다.

 진안고원 길의 뭉툭한 화살표가 다리를 건너란다. 노란색은 순방향, 분홍색은 역방향을 가리킨다. 하나 더. 이정표는 마령면사무소(2구간 시점)에서 이곳까지를 3km로 적고 있다. 내 핸드폰의 앱은 1km를 찍는다. 그러니 14.7km에서 2km를 단축해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다리 아래로는 섬진강의 본류가 흘러간다. 백운면 신암리 대미셈에서 발원해 백암리에서 백운동천’, 운교리에서 상표천 마치천을 합쳐 몸집을 불린 다음 이곳으로 왔다. 그래선지 상류인데도 강폭이 넓고 수량도 풍부했다.

 천변에는 길이가 140m쯤 되는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마을에서 보이는 마이산의 광대봉이 화산 형국이라 이를 가리기 위해 조성했다는데, 강줄기를 따라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도 톡톡히 수행한단다.

 불교는 민간신앙과 불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부분에서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태고종은 특히 더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사천왕상 대신 장승이 대문을 지키고 있는 광명사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었다.

 마을 앞에는 전행권(全幸權)의 처 동래 정씨의 효열비와 김상섭의 처 열녀 김해 김씨의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네들의 행적도 적혀있었지만 읽어보지는 않고 그냥 지나친다.

 10 : 49. 탐방로를 겸한 도로(운계로)는 강변과 헤어져 내동산쪽으로 방향을 튼다. 잠수 후 만나는 정자(‘望雲亭이란 편액을 달고 있었다) 앞에서는 계남마을로 들어간다. 하지만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볼 것을 권한다. 진안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로 알려진 계남정미소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로변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계남정미소는 녹슨 함석지붕에 허름한 벽체가 예전 정미소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쌀 대신 추억을 찧는다며 공동체 박물관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옛날 정미소가 마을의 사랑방 구실을 했듯 이곳이 마을의 기억을 보존하고 나누는 공간이 되기를 원해서라나? 이름 그대로 농촌마을에서 대부분 사라져가는 오래된 정미소를 새롭게 복원해 문화체험과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마을 주민들의 묵은 앨범에서 꺼낸 빛바랜 사진과 집안 깊숙이 처박혀 있던 오래된 물건들을 모아 전시해놓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계남정미소는 전주에 사는 사진작가 김지연씨의 개인 소유라고 한다. 2005년 다 쓰러져가는 작은 정미소를 사들여 수리한 다음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김씨는 구식 이발관, 정미소, 새마을운동의 유산인 근대화상회(구멍가게) 등 사라져 가는 것들을 카메라로 기록해 온 사람이란다.

 10 : 52. 정자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마을로 들어간다. 첫 만남은 농업인건강관리실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계남마을 경로당. 법정 동리인 계서리(溪西里) 4개 행정 부락(방화·계남·오동·서비산) 중 하나인 계남마을의 원래 이름은 스님이 암자를 짓고 불도를 닦았다고 해서 신앙골이었다. 그러다 큰 시냇물이 남쪽으로 흐른다는 이유로 계남(溪南)’으로 바꿨다고 전해진다.

 마을 고샅을 횡단한 탐방로는 내동산 방향으로 오름짓을 한다.

 10 : 55- 10 : 59. 잠시 후 도착한 또 다른 자연부락(계남마을의 윗뜸 정도로 치부해두자). 작은 저수지를 발아래 두고 예닐곱 채의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탐방로는 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간다. 하지만 몇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어떨까? ‘래산사라는 또 하나의 현충시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래산사(萊山祠)’는 수당(修堂) 정종엽(鄭鐘燁.1885-1940) 선생을 모시는 사당이다. 항일의병결사인 임자밀맹단에서 활동한 일제강점기 유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유림회가 지난 1957년에 세웠다. 시설로 사위동, 서원동, 수당선생 유적비, 관리사, 도장각(강당), 외삼문 등을 두고 있다.

 앙지문(仰止門, 시경에 나오는 문구로 큰 산을 우러르며 큰 뜻을 따르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다)을 들어서면 사당(萊山祠)이 나온다. 참고로 수당 정종엽은 이석용 의병장과 항일의병 활동에 동참했다. ‘임자동밀맹단(임자년인 1912년 겨울에 만들어진 비밀단체)’에 가담,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할 것을 결의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경에 체포됐다. 그 후 창씨개명 반대 및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 1940년 사망하였다. 2003년 건국포장에 추서됐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도장각(道長閣)’이 있다. 선생이 근방의 학동들을 모아 가르치던 강당으로 1932년에 건립했다.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유형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당 앞에는 애국지사수당정선생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10 : 59. 사당을 빠져나와 다시 길을 나선다. ‘방화마을까지는 농로를 따른다.

 11 : 01. 잠시 후 울창한 소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최근에 지은 듯 시쳇말로 잉크도 안 마른 정자도 잠시 쉬었다가라며 손짓한다. 방화마을에서 내동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들머리이다.

 이곳은 마이산으로 대변되는 진안 땅. 그래선지 마이산의 핫 플레이스인 탑사에서나 볼 법한 돌탑을 쌓아놓았다.

 이왕에 왔으니 내동산 등산로 안내판도 한번쯤 살펴보자. 내동산은 백마산으로도 불린다. 성수면 구신리 원구신마을의 노적바위가 갈라지면서 백마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 백마가 거닐어 백마산이 됐으며, 백마가 산에서 내려와 마령면의 마령(馬靈)’이 됐다고 전해진다.

 13 : 03. ‘방화마을에 이른다. 계서리를 구성하는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옛 이름은 방아다리였다. ‘교리(橋里)’라고도 불리었는데 침교(砧橋)’라는 택지가 있다고 해서다. 그러다 한자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방아다리 방아가 방화(訪花)가 되었단다.

 이 마을에도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첨부된 지도에 표기된 수많은 정자 중 하나다. 이렇듯 2구간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정자를 만나게 된다. ‘쌍계정·만취정·영모정·미룡정처럼 강가 풍치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들어섰고, 마을에도 주민들의 쉼터를 겸한 정자를 어김없이 지어놓았다.

 마을 담벼락은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쯤에서 아쉬운 점 하나. 이곳 방화마을은 1구간에서 만났던 마이산 부부공원의 주인공, 즉 부부의 생년월일이 같은 시인인 담락당 하립 삼의당 김씨 부부가 살던 곳이다. 그러니 저 담벼락은 부부의 시와 관련된 벽화로 채워 넣었어야 하지 않을까?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진안고원 길이란 이름에 걸맞게 내동산의 산자락을 헤집으며 길이 나있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걸어온 길과 마령의 풍성한 벌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11 : 17. 호젓한 산길을 걷다보면 삼거리(이정표 : 백운면사무소 9.9km/ 마령면사무소 4.8km). 탐방로는 임도를 버려두고 들녘을 향해 방향을 튼다. 이어서 2차선 도로(운계로)를 건넌 다음(11 : 23) 널찍한 들녘을 가로지른다.

 11 : 27. 들녘의 끝에서 섬진강(데미샘에서 흘러내려오는 본류다)을 만났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멋진 바위벼랑을 가슴에 담는다. ‘진안·무주 국가지질공원의 지질 명소인 운교리 삼각주퇴적층이다. 1억 년쯤 전, 자갈·모래·진흙 등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암이라는데, 절벽의 줄무늬(층리)가 한쪽 방향으로 경사진 것이 눈에 띈다. 진안 분지에 퇴적물을 공급한 환경과 역사를 알려주는 소중한 지질자원이다.

 그 절벽에 처마의 제비집처럼 쌍계정(雙溪亭)’이 매달려 있었다. 1886년 오도한(吳道漢), 이우우(李友禹) 등이 발의해 세운 누정으로 쌍계동 천현계(雙磎洞天賢稧)의 계원들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naver 지식백과는 쌍계정이란 이름의 유래를 백운천과 남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는 데서 찾고 있었다. 하지만 합수지점은 이곳에서 800m쯤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 이해를 돕기 위해 인터넷에서 얻어 온 '쌍계정' 사진.

 탐방로는 이제 삼계석문천변길을 따라 백마교로 간다. 강변 너른 모래톱에서는 무성한 갈대의 누렇게 바랜 잎새와 갈꽃이 비바람에 출렁인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삼각주 퇴적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망대를 만난다.

 지질공원의 안내도와 함께 운교리 삼각주 퇴적층에 대한 설명판도 세워놓았다. 덕분에 강 너머의 거대한 바위절벽을 이룬 삼각주 퇴적층을 설명판과 비교해가며 관찰할 수 있다. 참고로 진안무주 국가지질공원에는 진안의 마이산·운일암반일암·구봉산·천반산·운교리삼각주퇴적층 등 5, 무주의 외구천동·적상산천일폭포·오산리구상화강편마암·용추폭포·금강벼룻길 등 5곳이 포함되어 있다.

 절벽에 걸터앉은 정자 한 채가 보인다. ‘만취정(晩翠亭)’이다. ‘송객정(送客亭)’으로도 불리는데, ‘진양 하씨의 오형제인 하호(河灝하선(河璿하욱(河昱하식(河湜하봉(河鳳)이 순조 연간에 방화 마을로 이사 온 뒤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1970년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나그네를 환송한다는 의미의 송객정은 다섯 형제의 선조인 하연(河演, 1376~1453)이 놓아주었다는 다섯 마리 잉어에서 유래했단다. 조선 초기 영의정을 지낸 문신인데, 전라도관찰사 때 지방순시를 하다가 황룡 꿈을 꾸었고, 다음 날 하인이 잡아 온 다섯 마리의 잉어를 놓아주었다는 설화이다. 하연은 이 다섯 마리 잉어가 용으로 변신해 승천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황룡오리출상원도(黃龍五鯉出象源圖)’라는 그림으로 남겼다.

▼ 이해를 돕기 위해 인터넷에서 얻어 온 '만취정' 사진.

 11 : 36. 백마교(白馬橋)로 섬진강(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8.6km)을 건넌다. 다리 이름은 내동산의 별칭인 백마산에서 따왔지 않나 싶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내동산의 산줄기가 요 어디쯤에서 섬진강 물속으로 잠긴다니 말이다. 하나 더. 백마교를 경계로 마령면에서 백운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섬진강 너른 모래톱에는 비바람에 출렁이는 갈대만 무성했다. 하지만 가을철 갈꽃이 만발할 무렵이면 또 하나의 눈요깃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탐방로는 잠시 2차선 도로(운계로)로 올라선다. 아니 가장자리를 따라 따로 길이 나있다. 하나 더. 그 사이 공간에는 전영태라는 옛 면장을 기리는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전영태씨는 백운면장 말고도 매사냥으로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 20호로 지정된 분이다. 백운에서 시작된 물줄기와 노촌에서 영모정을 거쳐 오는 물이 합수되는 곳에 모운정(慕雲亭)’이라는 정자를 짓기도 했다.

 11 : 40. 2차선 도로인 운계로 원운1를 건넌다. 하지만 탐방로는 다리를 건너기 직전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즈음 정면(동쪽)으로 우뚝우뚝 서있는 1m가 넘는 산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하지만 때 아닌 비바람이 눈에 들어올 만한 것을 모두 삼켜버린다.

 이후부터는 마치천(馬峙川)’의 둑길을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백운면의 북쪽에 있는 성수산에서 발원한 마치천(상류의 천변에 있던 마치라는 마을의 이름을 빌렸다나?)은 노촌리·평장리 들녘을 적신 뒤, 운교리 부근에서 섬진강으로 합류된다.

 11 : 43. 3분쯤 더 걸어서 만난 다리(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8.1km).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진안고원 길의 정체성에 부합시킨다며 최근 코스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옛 코스는 이곳에서 다리를 건너 원운마을로 간다. 하지만 새로운 코스는 계속해서 마치천의 강둑을 따른다. 덕분에 코스는 12.9km에서 14.7km로 늘어났다.

 11 : 54. 마치천을 건너(11 : 46), 이번에는 널디너른 평장리 들녘을 가로지른다. 이어서 30번 국도를 건너면 잠시 후 하평장(또는 평가)’ 마을(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7.1 km)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평장리(平章里)를 구성하는 3개 행정부락(상동·정동·평가) 중 하나로, ‘평장이란 지명은 고려 시대 평장사를 지낸 이거(李据)와 그의 증손인 이행전(李行典) 두 사람이 태어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마치천과 세동천이 만들어놓은 충적평야가 저리도 넓으니 그만한 인물이 능히 태어날 만도 하겠다.

 탐방로는 마을을 횡단한다. 요즘에야 누리기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우리네 선조들은 자연 속에 집을 지었다. 정자나무가 길손을 맞고, 실개천을 따라 올라가 집으로 들어가는 고샅에는 작은 꽃들이 대문 앞까지 안내해주었다. 실개천이나 꽃들은 없지만 구불구불 휘어지며 이어지는 고샅길을 걸으며 옛 풍치를 소환해 본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2차선 도로인 평노길이 길손을 맞는다. 탐방로는 이 길을 따라 동진한다.

 지난 1992년 문을 닫은 옛 평장초등학교 건물은 2018 진안고원학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새로운 시도를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소규모학교 시설을 지어 드론체험관(드론교육, 드론체험, 드론스포츠)을 만든단다. 잘 보존되어 있는 소나무 숲을 활용해 자연 숲 놀이공간도 조성한다나?

 12 : 04. ‘상평장(또는 상동)’ 마을에는 보건진료소가 들어서 있었다. 그만큼 큰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12 : 05. 보건진료소 바로 위에서 도로를 벗어나 오른편 소로(상평장길)으로 들어간다. 노촌리의 하미마을로 들어가는 샛길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그 중간어림에서 영모정이라는 고풍스런 정자를 만날 수 있고...

 영모정으로 가는 길. 낙락장송 몇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이어서 울창한 숲길이 우리를 영모정으로 안내한다. 이 숲은 2008 9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누리상(네티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길 아래로는 섬진강의 제1지류인 상표천(또는 미재천)’이 흐른다. 백운면 노촌리 덕태산 줄기에서 발원한 상표천 물줄기는 노촌호에서 머물렀다가 평장리와 운교리를 거쳐 당산마을 앞에서 섬진강에 합류된다.

 12 : 12. 숲길은 신의련(愼義連, 1546-1606)’의 유적지로 길손을 인도한다. 신의련은 임진왜란 때 병든 아버지를 왜적의 손에서 지켜낸 효자로 유명하다. ‘거창 신씨를 중심으로 원노촌(元蘆村) 마을 사람들이 홍수를 방지할 목적으로 조성한 숲속에 정려를 모시는 효자각(孝子閣), 추모비를 비롯한 비석군(碑石群). 영모정(永慕亭) 등이 들어서 있다.

 1801(순조 1)에 세운 효자각(孝子閣)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주위에 담장을 둘렀다. 안에는 비석은 보이지 않고 대신 현판이 걸려 있었다. 효자각 내 현판은 증수의부위 효자 신의련지려(贈修義副尉 孝子愼義連之閭)’라고 쓴 다음 신의련의 사적을 자세히 서술했다. 당시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글을 지었으며, 전 사헌부 지평 황기천(黃基天)이 글을 썼다.

 신의련은 임진왜란 때 자신의 집에까지 쳐들어 온 왜적들의 손에서 병든 아버지를 지켜냈다고 한다. 아버지 대신 자기를 죽여 달라는 신의련의 효성에 감동한 왜장이 이곳은 효자가 사는 곳이다(孝子所居之地)’라는 방을 동구 밖에 써 붙이고 부하들에게 절대 침범하지 말라고 명하고는 물러갔단다. 덕분에 1만여 명이 무사히 난을 피할 수 있었고, 정유재란 때는 그 수가 5만에 이르렀다나? 이로 인해 난을 피한 사람들의 수를 따 동네 이름이 만인동(萬人洞)’을 거쳐 오만동(五萬洞)이 됐고, 들녘은 면화평(免禍坪), 앞산은 덕태산(德泰山)으로 불리었다고 전해진다.

 효자각에서 내다보는 계곡은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그런 미재천의 천변, 계류를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영모정(永慕亭)이 들어섰다. 미계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69(고종 6)에 세운 정자로 1984년 전북 문화재자료(15)로 지정됐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아담한 누정은 지붕이 특징이다. 일반기와를 쓰지 않고 이 지역에서 나는 너새(돌기와)를 얹었다.

 영모정 근처에서 길이 갈라진다. 들판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길은 원노·신기·마치, 천 따라 물길 거슬러 나아가는 길은 하미·비사 등의 부락으로 연결되다.

 12 : 17. 하미마을 쪽 숲길을 따라 200m 남짓 더 올라가면 미재천의 천변에 자리한 미룡정(美龍亭)’을 만난다. 미계 신의련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또 다른 정자이다. 정자에 오르면 미재천이 내려다보이고, 느티나무 숲의 운치도 즐길 수 있다.

 정자 주변에는 미계덕산고(美溪德山高)와 미계장구지소(美溪杖屨之所) 등 신의련을 칭송하는 선돌 서너 개가 세워져 있었다. 신의련의 영모비(永慕碑)와 마을의 화재막이 역할을 하는 돌탑도 눈에 띈다.

 미룡정 앞 미재천은 개울 수준의 작은 계곡이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바위들과 울창한 숲이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진안고원 길(2구간)’의 완주를 인증해 줄 이정표는 미룡정으로 내려가기 직전에 만날 수 있다. 매 구간마다 이런 이정표를 2개씩 설치했는데, 2구간의 첫 번째 인증용 이정표는 남악제의 둑에 세워져 있다.

 탐방로는 미룡정 뒤로 난 농로를 따른다. ‘간짓대 걸쳐놓고 턱걸이하기 딱 좋다는 농담을 떠올리게 만드는 좁은 산골짜기. 손바닥만 한 논밭도 버려두기 아깝다는 듯, 길을 그것도 시멘트포장까지 해놓았다.

 12 : 24. 농로를 버리고 숲길(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5.2km)로 들어선다. 산길은 통나무계단을 놓아야 했을 정도로 가파르게 시작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평평하게 변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두 번의 계단 구간을 올라 임도로 들어선다. 이후는 휘파람이 저절로 나오는 걷기 딱 좋은 길이 계속된다. 오르내림이 없는데다 보드라운 흙길에는 낙엽까지 수북해 폭신폭신하기까지 하다.

 산길의 동반자는 리본이 되어준다. 목의 나무 가지마다 노란 색과 붉은 색의 리본이 매달려 고원길을 안내한다.

 나그네들을 위한 배려도 돋보인다.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12 : 40. 덕태산의 동북쪽 능선 끄트머리 안부인 닥실고개에 올라선다. 2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앱은 444m를 찍는다)으로 백운면의 운교리와 노촌리를 연결하는 고갯마루다. 북쪽 노촌리에 하마치마을과 원노촌마을이 있고, 남쪽은 운교리 신전마을이 있다. 하나 더. 이곳은 그간 묵어 있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신작로가 뚫리면서 인적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진안고원길이 조성되면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 온전한 고개의 기능을 되찾고 있다.

 이정표(백운면사무소 4.3km/ 마령면사무소 10.4km)가 이곳이 닥실고개임을 알려준다. ‘닥실이란 지명은 고개 서쪽에 있는 양계봉(493.7m)’에서 얻어왔다고 한다. 고개 양쪽 골짜기의 이름도 닥실골이란다.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신전 방향은 정상까지 고랭지채소밭으로 활용하고 있어 농로가 개설되어 있다. 산중이라서 경작지에 멧돼지 등의 접근을 막기 위해 쳐놓은 전기선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하지만 길은 엉망이었다. 이틀을 연이어 내린 겨울 장마로 인해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우스갯소리가 떠오를 정도로...

 12 : 50. 고랭지채소밭 사이로 난 길을 10분쯤 걸으면 신전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운교리(雲橋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원운·원산·주천·신전) 중 하나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마을이다. 조금 전 넘어온 닥실고개와 잠시 후 넘게 되는 배고개를 통해서만 다른 세상과 마날 수 있는 벽지이기도 하다.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진 별천지라고나 할까?

 안내판은 신진마을의 옛 이름이 가루손이였음을 알려준다. 마을 지형이 소가 가로로 누운 와우혈이기 때문이란다. 볼거리로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비보풍수림 송림원을 내세운다. 하지만 어떤 걸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주민이 눈에 띄지 않아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정자가 있는 동구 밖, 당산나무는 수령이 30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당산제를 지내기도 한단다. 진안군에서 보호수로 지정해 놓았다.

 다음 행선지인 상백운 마을로 나가는 길은 구불구불 곡선으로 이어진다. 거기다 오르막이다. 하긴 알을 깨고 나가는 일이 어디 그리 수월하겠는가. 아니 바깥세상과 연결해주는 또 다른 통로인 닥실고개에 비하면 숫제 고속도로나 마찬가지다. 자동차까지 다닐 수 있으니 말이다.

 13 : 09. 별천지를 떠나는 아쉬움을 보듬고 배고개(383m)’를 넘는다. 신전마을과 상백암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이다. 명찰(배고개)까지 단 이정표가 2.9km만 더 걸으면 종점인 백운면사무소에 닿는다며 힘을 내란다.

 상백암마을로 가는 길가도 역시 농경지가 펼쳐진다. 그 사이에 비닐망이 튼튼하게 쳐져있다.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아보려는 힘겨운 투쟁의 한 산물이다.

 수문장처럼 길목을 지키고 있는 저 조형물은 대체 뭘까? 이 근처에 사슴목장이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길가의 모정(茅亭)은 농부들의 쉼터이다. 하지만 진안고원길이 지나가면서부터는 걷기 여행자들이 더 많이 찾는다. 준비해간 간식을 나누는 참새방앗간으로 사용하기 딱 좋은 곳이다.

 13 : 12. ‘상백암 마을은 스치듯 지나간다. 법정 동리인 백암리(白岩里)’를 구성하는 5개 행정부락(원촌·번암·중백·상백·백운동) 중 하나로 백암이란 지명은 마을 주변에 차돌바위(흰 바위)가 많은데서 유래했다. 그 백암마을의 맨 위에 위치한 부락쯤으로 보면 되겠다.

 13 : 19. ‘백운동로로 내려선다. 상백암마을 주민들은 변화가 필요했던가 보다. 논이었음직한 들녘이 온통 사과나무로 가득하다. 최근에 심은 듯한 어린 사과나무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 사이로 난 길(상백암길)을 따라 잠시 내려오면 2차선 도로인 백운동로를 만난다.

 도로 아래로는 백운계곡이 흐른다. 백암리를 감싸고 있는 선각산(1,105m)과 덕태산(1,113m)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인데, 이게 제법 빼어난 풍경을 만들어낸다. 여름철이면 피서객들로 붐빌 수도 있겠다.

 13 : 26. 이후부터는 내동산을 전면에 놓고 걷는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백암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중백암마을에 이른다.

 13 : 32. 중백암마을 정자에서 트레킹을 끝내기로 했다. 백운면사무소까지는 아직 400m쯤 더 가야하지만 산악회버스가 점심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데 어쩌겠는가. 특히 겨울비까지 주룩주룩 오는 데야 고민해 볼 필요조차도 없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5분을 걸었다. 앱은 12.21km를 찍는다. 비바람이 몰아치는가 하면, 일부 구간에서 푹푹 빠지는 진흙탕과의 싸움까지 치렀던 점을 감안하면 나름 빨리 걸은 셈이다.

진안고원길 1구간(마이산길)

 

여행일 : ‘24. 1. 6()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진안읍 및 마령면 일원

여행코스 : 진안 만남쉼터마이돈 테마파크연인의길통천문은수사탑사화전삼거리원동촌마을마령면사무소(거리/시간 : 12.9km, 실제는 14.51km 4시간 2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진안 만남쉼터’(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장수) 진안 TG를 빠져나와 30번 국도(진무로)를 타고 진안으로 온다. 진안로터리에서 오른쪽으로 100m쯤 들어가면 월랑체육공원’, 그 입구에 진안 만남쉼터가 있다. 참고로 월랑체육공원은 성묘산 일대에 조성해놓은 근린공원이었으나 공설운동장·문예체육회관·테니스장·게이트볼장 등 각종 체육시설을 갖추면서 2010년 체육공원이 되었다. 하나 더. 월랑(月浪)은 백제 때 이곳에 있었다는 난진아현(難珍阿縣)’이란 고을의 별칭이다(三國史記  高麗史). 마이산 자락을 비추는 달빛이 물결을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카메라 조작 실수로 사진이 잘못 나와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려왔다)

 고샅길·논둑길·밭둑길·숲길·물길·고갯길 등으로 이루어진 진안고원 길은 길목마다 자연의 속살이 숨어 있다. 14개 구간(총 길이 209km) 모두를 이으면 둥근 원 모양이 되는데, 길은 평균 고도 300m 100개 마을 그리고 40개의 고개를 지난다.

 1구간인 마이산 길은 읍내에 위치한 진안만남쉼터에서 출발, 암마이산과 수마이산의 한가운데를 넘고, 은수사와 탑사를 지나며 마이산을 둘러보는 길이다. 산을 직접적으로 오르지 않아 부담은 적으면서도 마이산의 핵심 지역을 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하지만 최근 진안고원 길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며 코스를 변경했다. 마이산 초입에서 능선으로 올라 금남·호남정맥을 따르다가 탑재를 거쳐 마령면사무소까지 간다.

 길을 나서기 전 ‘6.25참전호국영웅기념탑에 묵념부터 드려본다. 우리가 웰빙·힐링을 외치며 전국의 산하를 누빌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저 분들이 목숨을 바쳐 이 땅을 지켜주신 덕분이 아니겠는가. 하나 더. 이곳 진안과 인연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 옆의 진안사랑가도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10 : 19. ‘진안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도로(진무로)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자용 길을 내놓았다.

 10 : 22. 잠시 후 내려선 사양천의 둑길. 이곳에서 만나는 성산수풀은 수백 년 전부터 숲이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하도 숲이 짙다보니 마을 이름까지도 수풀이 되었다나? 이곳은 진안시가지가 진안천의 물길을 마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홍수 때 물길이 진안 읍내로 직류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제림(防災林)’으로 보면 되겠다.

 10. 26. 진안 읍내를 스쳐가는 초반. ‘근하교차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길이 자로 휘기도 한다. 자칫 길이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붙들어 매도 되겠다. 주요 포인트마다 진안고원 길의 뭉툭한 화살표가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노란색은 순방향, 분홍색은 역방향을 가리킨다.

 10 : 30. 또 다시 만난 하천. 아까보다 많이 가늘어졌다. 이름도 진안천에서 사양천으로 바뀌었다. 보여주는 풍광도 180도로 바뀐다. 밋밋한 시가지 대신 진안의 얼굴마담인 마이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걷는다. 진안에서는 월랑팔경(月浪八景)’ 가운데 으뜸으로 마이귀운(馬耳歸雲)’을 꼽는다. 구름이 감도는 마이산의 자태가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마이산이 오늘은 구름 대신 안개에 갇혀버렸다. 그렇다고 마이귀운까지 내팽개칠 필요야 있겠는가. ‘꿩 대신 닭이라고, 구름을 허리에 두른 마이산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산속으로 파고든다. 참고로 월랑팔경(또는 진안팔경)’의 나머지 일곱은 羌嶺牧笛(강령목적, 강령 목동들의 피리소리), 富貴落照(부귀낙조, 부귀산 저녁노을), 古林暮鐘(고림모종, 고림사 저녁종소리), 鶴川魚艇(학천어정, 학천 고기잡이 배), 牛蹄細雨(우제세우, 가랑비 내리는 우제들 풍경), 南樓曉角(남루효각, 남루의 새벽 고동소리), 羽化齊月(우화제월, 우화산에 둥실 솟은 밝은 달)’로 하나같이 진안읍의 아름다운 풍경을 강조한다.

 탐방로는 사양천을 끼고 올라간다. 탐방로 곳곳에는 파고라나 벤치를 설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읍민들을 위한 체육공원도 눈에 띈다. 참고로 마이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은 사양저수지에 모인 다음, 사양천이 되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진안천에 합류된다.

 탐방로 바닥은 홍보의 장으로 활용했다. 홍삼과 고추 등 진안의 특산물들을 그 효능과 함께 소개한다. 구입할 수 있는 시기까지 덧붙였음은 물론이다.

 10 : 40. 새만금·포항고속도로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이때 길가 마이산 태극길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트레킹을 마칠 때까지 같은 이름의 이정표를 심심찮게 만났지만 그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태극무늬를 그리며 마이산을 넘도록 길을 내놓지 않았나 하고 추측해볼 따름이다.

 10 : 45. 잠시 후 내사양마을에 이른다. 원래 이름은 사양골’. 골짜기가 많은 곳, 즉 심심산골의 오지마을이라는 뜻일 게다. 그러다 해도 명산인 마이산을 비켜간다고 해서 비킬 사()’ 볕 양()’자를 써 사양동이 되었다고 한다. 해질 무렵 서산에 걸친 해가 이 마을을 비추는 사양낙조(斜陽落照)의 아름다움에서 유래를 찾는 이들도 있다.

 마을로 들어가기 전, 왼쪽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힐링하기 딱 좋은 공원이 걸터앉았다. 마이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니 한번쯤 꼭 올라가보자.(산악회의 배려로 귀경길에 들렀기에 일정이나 소요시간에서 제외시켰다)

 미로공원 돌담공원으로 나누었는가 하면, 곳곳에 억새와 핑크뮬리 등을 심어 한껏 멋을 부렸다. 하지만 그보다는 마이산에 대한 조망으로 더 유명하다. ‘·수 마이루 정자에 오르면 마이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이산(馬耳山)은 조선 태종이 이 지역을 지나다가 산의 모양새가 말의 귀와 같다고 한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신라시대에는 서대산, 고려 때는 용출산,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속금산으로 불렸다. 계절마다 이름도 달라진다. 봄에는 안개를 뚫고 나온 두 봉우리가 쌍돛대를 닮아 돛대봉’, 여름에 수목이 울창해지면 용의 뿔 같다 해서 용각봉(龍角峰)’, 가을은 단풍 든 모습이 말의 귀 같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 해서 문필봉(文筆峰)’이 된다.

 마이산이 멀게 보인다는 것은 흠. 하지만 흐드러지게 핀 억새꽃을 가슴에 담다보면 그 아쉬움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하나 더. ‘단단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차분하게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등 위로를 주는 표지판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이산 북부에 위치한 내사양 마을은 관광예술단지로 조성되어 있었다. 상가를 포함해 식당(대부분 진안의 명물 흑돼지를 판다)과 숙박업소가 주를 이룬다.

 집사람은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집단시설지구는 우리 부부처럼 다른 장소에서 각각 출발한 일행들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기 딱 좋은 곳이다.

 10 : 54. 집단 시설지구를 빠져나오면 마이돈 테마파크’. 이름대로 돼지를 주제로 한 공원으로 곳곳에 개성 있는 돼지 조형물들이 있어 사진 찍기 딱 좋다. 돼지체험관에라도 들르면 소시지 만들기, 불고기피자 만들기, 홍삼 아이스크림 만들기 등의 체험도 해볼 수 있단다. 탐방로는 이 공원을 횡단한다.

 공원 입구. 흑돼지 가족이 길손은 맞는다. 진안군은 깜도야라는 브랜드까지 만들었을 정도로 자신들이 기르는 흑돼지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고원지대의 맑은 물과 낮과 밤의 일교차로 사육되기 때문에 육질의 맛과 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20년쯤 전인가? 진안 흑돼지를 자랑하겠다는 이 고장 인사의 초대를 받았었고, 운장산 산행을 마친 후 회사 직원들과 함께 가마솥에서 통째로 끓인 흑돼지를 맛볼 수 있었다. 아무튼 그때의 기억만 떠올려도 침이 자르르 흐른다면 짐작이 갈지도 모르겠다.

 활짝 웃는 황금 돼지도 눈에 띈다. ‘웃으면 복 돼지라나? 그래 오늘 저녁에는 저 돼지를 꼭 끌어안고 잠들어보자. 돼지 자체만으로도 복덩어린데, 황금까지 뒤집어썼으니 로또’ 1등의 번호라도 알려줄지 누가 알겠는가.

 천사금척지향(天賜金尺之鄕)이라는 빗돌이 눈길을 끈다. ‘하늘이 금으로 된 자를 내려주신 고장 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꿈속에서 선인(仙人)으로부터 받았다는 금척(金尺)이 마이산을 뜻한다는 말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내용은 조선 개국 후 궁중무용 1호인 금척무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11 : 03. 공원 상부는 사양저수지‘. 1957년에 착공해 1962년에 준공한 시쳇말로 손바닥만 한 저수지이다. ‘사양(斜陽)’ '햇빛이 비켜간다'는 뜻. 북쪽으로 트인 골짜기라서 빛 드는 시간이 짧았나 보다. 그 방죽은 지금 데크 산책로가 수면을 수놓고 있다. 하지만 난 바람개비가 팽팽 도는 둑길을 걷는다.

 저수지는 생각보다 작았고, 수면은 명경처럼 잔잔했다. 이런 특징 덕분에 사양저수지는 마이산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그나저나 두 귀를 쫑긋 세운 마이산이 물속에 잠기면서 커다란 꽃으로 변했다. 그것도 꽃봉오리를 활짝 열면서... ! 누군가는 저 모양을 보고 수풀 속에 몸을 반쯤 감추고 날개를 펼친 한 마리의 나비와도 같다고 했다.

 제방의 끝. ‘포룡대(鉋龍臺)’라는 빗돌이 눈길을 끈다. 이 저수지에서 지낸다는 용왕제(龍王祭)’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일 년에 두 번 음력 정월과 7월 백중날에, 제방에 오방기를 세우고 4개의 호롱불을 켜고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정오에 제를 올렸다니 말이다.

 11 : 08. 저수지에서 100m쯤 내려오면(마이산의 반대 방향) ‘연인의 길이 시작되는 만남의 광장을 만난다. 과거 마이산 구 도로로 불리던 길이 1.5km의 이 길은 2002년 경 연인의 길로 리모델링되었고, 마이산의 북부 진입로로 변했다. 또한 차를 타고 마이산 중턱까지 올라 다니던 길은 지금 오롯이 산책용으로만 이용되고 있다.

 길 아래는 진안역사박물관이 들어섰다. 구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진안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용담댐 건설로 사라진 마을들과 이주민, 실향민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이밖에도 관광예술단지에는 진안홍삼스파, 산약초타운, 가위박물관 등 진안의 대표 관광시설이 밀집해 있다.

 150m쯤 더 걸으면 연인이라는 간판을 내건 잘 지어진 이층집이 얼굴을 내민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진안고원길(1구간)’ 코스가 최근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코스는 이곳에서 연인의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간다. 100만 관광지이자 입장료가 있는 탑사를 경유하는 것보다, 숲길이 좋은 마이산옛길로 변경하는 게 진안고원길의 정체성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하나 더. 거리도 12.9km에서 13.2km로 늘어났다.

 연인의 길은 마이산을 모티브로 삼았다. 수마이봉과 암마이봉이 동·서로 솟아오른 마이산은 마치 부부가 나란히 서있는 모양새라고 한다. 세계 유일의 부부 봉이라는 애칭을 얻게 된 연유이다. 그런 부부 봉의 모습을 착안해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리모델링했다.

 탐방로 곳곳에 만들어놓은 연인을 테마로 한 다양한 조형물이 설렘과 재미를 선사한다. ‘만남의 광장에는 연인의 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조형물(하트트리, 핑거하트)이 세워졌고, 잠시 후 만나는 스마일 Zone’에서는 처음 만났을 때의 환한 미소가 펼쳐진다. 이후로도 연인의 발전단계를 형상화한 조형물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다음은 포옹 Zone’이다. 연인으로 만난 두 남녀, 서로 사귀기로 했으니 포옹쯤이야 허용되지 않겠는가.

 뽀뽀 Zone’을 지나면 키스 Zone’이 기다린다. 남녀 간의 사랑도 애교 수준의 뽀뽀를 넘어 이제 진한 애정 표현으로 변한다.

 도중에 마이산 북부전망대로 오르는 길이 나뉘기도 했다. 하지만 왕복 460m라는 거리, 특히 눈앞에 나타난 가파른 나무계단이 부담스러워 다녀오지는 않았다. 게시된 사진은 마이귀운(馬耳歸雲)’의 풍경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지만...

 11 : 35. ‘하트 Zone(하나 된 마음으로 사랑을 약속하는 형상)’을 지나자 마이 열차(만남의 광장에서 이곳까지 왕복하는 전기차로 편도 3천원, 왕복 5천원의 탑승료를 받는다)’의 종점(상부 승강장)이다. 탑승시설 말고도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사랑이 결실을 맺는 사랑마당 프로포즈 Zone’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꽃다발을 주며 미래를 약속하는 프로포즈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이성계와의 인연은 조형물로 전한다. 마이산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신선이 나타나 금척을 주며 삼한의 영토를 잘 다스려보라고 했다는 전설이 깃든 산이다. 조선시대 왕의 의자 뒤에 있던 일월오봉도도 마이산을 남쪽에서 보고 그렸다고 전해진다.

 마이산 story’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조선 태조 이성계와의 인연, ‘연인의 길 안내, 등 다양한 정보를 담았는데, 그중에서도 돼지를 닮은 마이산 등산로가 눈길을 끈다.

 이후부터는 비포장 산책로를 따른다. 이어서 100m 남짓 더 걸으면 사양저수지에서 계단을 따라 곧장 올라오는 사람들을 만난다.

 탐방로는 이제 210개쯤 되는 나무계단을 오른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사이 협곡을 향해 길고 긴 오름길이 펼쳐진다.

 11 : 42.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천왕문이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을 가로지르는 이곳은 은수사와 탑사로 통하는 관문이라 건물이 없어도 천왕문이라 불린다. ‘산태극수태극의 명당으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금남·호남정맥의 주능선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섬진강 두 물줄기가 마이산을 중심으로 태극을 이루기 때문이다.

 숫마이봉과는 달리 암마이봉은 정상까지 다녀올 수 있다. 하지만 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안전사고를 예방한다며 입구를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매년 11월 초부터 다음 해 3월 초까지 출입을 금지한단다.

 반대편에 있는 화엄굴 역시 문이 닫혀있었다. 숫마이봉의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석간수라도 한 모금 마셔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반대방향(남쪽)으로 내려간다. 이 구간 역시 길고 긴 나무계단이 펼쳐진다. 누군가는 계단의 수가 508개나 된다고 했다.

 11 : 53 - 12 : 02. 계단을 내려서면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은수사(銀水寺)’가 반긴다. 조선 초기 상원사라 했는데 숙종 무렵 터만 남아 있다가 누군가에 의해 정명암(正明庵)’이 지어졌다. 하지만 이마저도 없어졌다가 1920년 사양동(진안읍 단양리)에 살던 이규헌(李圭憲)이 다시 지었는데, 이때 은수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은수사란 이름은 이성계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물이 은같이 맑다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

 천연기념물 제386호인 청배실나무는 은수사의 자랑거리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데, 지형의 특성상 산 밑에서 위로 바람이 불면 청실배나무의 잎이 흔들리며 서로 마찰하여 형용하기 어려운 소리가 난다고 한다. 또한 겨울철 청실배나무 밑동 옆에 물을 담아두면 가지 끝을 향해 역() 고드름이 생기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단다. 하나 더. 은수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제380호인 줄사철나무 군락도 있다.

 마이산(암마이봉) 절벽을 보면 곳곳에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타포니(taffoni : 풍화혈)라고 불리는 이 구멍들은 역암에서 자갈 사이를 메우고 있는 물질인 매트릭스가 자갈보다 빨리 풍화되는 차별침식으로 자갈이 빠져나가면서 생겼다. 타포니는 벌집 모양의 자연동굴을 지칭하는 프랑스 코르시카 섬의 방언으로 세계적으로 진귀한 지질 현상이다.

 이제 돌탑으로 유명한 탑사로 갈 차례이다. 은수사가 탑사 보다 가파른 위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아래로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12 : 09  12 : 28. 잠시 후 이갑용(李甲用, 1860~1957)이 세웠다는 탑사(塔寺)’에 이른다. 1885년 마이산에 들어온 그는 솔잎을 생식하면서 탑을 쌓았다고 한다. 1920년대 초반 초가에 돌미륵불을 안치하고 불공을 드리다가, 1935년 목조함석지붕의 인법당과 산신각을 지으면서 정식으로 부처님을 모셨다. 이갑용이 98세의 나이로 죽은 뒤, 손자 이왕선이 한국불교태고종에 사찰등록을 하면서 정식으로 탑사라는 이름을 쓰게 됐단다. 1986년 인법당을 대웅전으로 고쳐 짓고, 1996년 나한전(현재의 영신각)을 지었으며, 1997년 종각과 요사채를 지어 오늘에 이른다.

 탑사는 이갑용 처사가 쌓은 돌탑으로 유명하다. 돌탑들의 형태는 일자형과 원뿔형이 대부분이고 크기는 다양하다. 이 돌탑들은 1800년대 후반 이갑용 처사가 혼자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 모두 108기의 탑을 만들었다는데, 100여 년이 지난 현재도 80여 기에 달하는 탑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나 더. 탑사의 석탑은 섬세하게 가공된 돌들로 쌓은 여느 탑들과는 달리 가공되지 않은 천연석을 그대로 이용했다. '막돌허튼식'이라는 조형 양식으로 음양의 이치와 팔진도법이 적용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거센 강풍이 불어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그래선지 미국 CNN에서는 마이산 탑사를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사찰 33에 포함시켰다.

 암굴에 모셔놓은 이갑용 처사 상(). 복전(福田)과 촛불 공양을 드릴 수 있도록 해놓았다. ‘내 마음이 미혹하면 중생이고, 깨우치면 부처라고 했다. 그러니 이갑용 처사를 공양을 받을 만한 법력이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참고로 이갑룡은 25세 되던 해에 유··선 삼교에 바탕을 둔 용화세계 실현을 꿈꾸며 이곳에 들어왔다. 이어 사람들의 죄를 빌고 창생(蒼生)을 구할 목적으로 30년을 한결같이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탑을 쌓았다고 한다.

 섬진강의 발원지는 진안군(백운면 신암리) 원신암마을 상추막이골에 위치한 데미샘이다. 이 데미샘이 있는 봉우리를 천상데미라 부르는데, ‘섬진강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봉우리란 뜻이다. 그런데 마이산의 탑사에 있는 용궁도 섬진강의 발원지 중 하나로 꼽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이 물은 탑영제에서 잠시 머물다가 은천을 이루며, 데미샘에서 흘러 온 물과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에서 만나 옥정호로 흘러간단다.

 108개 탑은 하나같이 백팔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한다. 대웅전 뒤, 가장 높은 곳에는 천지탑(天地塔, 전라북도 문화재 제35)’이 있었다. 이갑룡처사가 만 3년의 고행 끝에 완성(1917)시켰는데, 기공법과 축지법에 가장 많은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부부탑(왼쪽이 음이고 오른쪽이 양)으로, 타원형으로 돌아 올라가면서 축조했다. 천지탑 주변 일자형의 33개 탑은 신장탑으로 천지를 감싸고 우주의 33천 세계를 의미한다나?

 탑의 보존에 대한 무한의 의지를 담았다. 탑을 만지지도 말 것이며, 탑신에 돌을 올리지도 말라며 읍소를 한다. 소원을 올리려다가 자칫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 앞에는 오방탑(五方塔)’이 있다. 사각모성에 서있는 5기의 일자형 신장탑으로 오행과 오방을 상징한단다. 이밖에도 약사탑, 월광탑, 일광탑, 중앙탑(흔들탑)과 이 탑들을 보호하는 주변의 신장탑들이 제각기 이름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절간을 빠져나오는데 허호석의 마이산이란 시비가 눈에 띈다. 참고로 1억 년 전, 진안고원은 호수였다. 호수로 쓸려온 모래와 자갈 따위가 물속에서 쌓여 2m 두께의 역암층이 됐고 7천만 년 전쯤이 됐을 때 땅이 크게 흔들려 역암층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것이 마이산이다. 두 봉우리 중 풍만한 쪽이 암마이봉(해발 686m), 뾰족한 쪽이 수마이봉(680m)이다.

 마이산은 역암층이다. () 자갈 역자다. 지각변동으로 자갈, 모래, 퇴적층이 뒤섞여 바위로 굳어지고 풍화로 자갈이 빠져나가면서 큰 구멍이 생겼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석탑을 쌓아올렸다. 저리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을까?

 마이산과의 첫 만남인 집사람. 덕분에 마이산을 3번이나 답사한바 있는 나까지 진안고원 길을 내팽개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겠다며 세계 일주까지 이어오고 있는 마당에 그녀를 위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탑사 아래는 작은 사하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불교용품 판매점은 물론이고 식당까지 들어섰다.

 12 : 28. 탑사는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지나야 한다는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가람 수호를 하는 천왕문(天王門)이나 불국토로 들어간다는 불이문(不二門)도 눈에 띄지 않는다. 사찰 3문이 통째로 없는 것이다. 환영의 문구를 담고 있는 저 입석 두 개가 그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탑사를 빠져나오면 길이 둘로 나뉜다. 아스팔트 포장도로 말고도 데크길이 숲속을 헤집는데 이용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튼 탐방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곳곳에 쉼터용 벤치가 놓여있는가 하면, 마이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안내판도 세웠다.

 12 : 38.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마이산 부부공원에 이른다. 조선 중기 한마을에서 한날한시에 태어나 부부가 되었다는 조선시대 유일의 부부 시인 담락당(湛樂堂) 하립(1769~1830) 260여 편의 시를 남겨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꼽히는 삼의당(三宜堂) 김씨(1769~1823)를 기리는 공원이다. 남원 서봉방(捿鳳坊)에서 태어나고 생활하던 부부가 이곳 진안(마령)에서도 오래 살았다고 한다.

 공원에는 부부의 시비가 여럿 세워져 있었다. 몰락한 양반가 집안의 부부가 과거를 포기하고 진안 산골에서 자영농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집에 돌아가면 청계천 헌책방이라도 한번 들러봐야겠다. 그들의 시집이라도 찾아낼지 누가 알겠는가.

 초입에는 부부의 영정을 모신 명려각(明麗閣)이 들어섰다. ()은 낮과 밤의 음양. 즉 부부를 의미하고 려()는 삼의당 시인의 시문이 너무나 미려(美麗)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옆에는 부부의 시비(詩碑)도 세워놓았다. 참고로 김삼의당과 하립은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둘은 18세 되던 해 백년가약을 맺었다. 하립은 과거를 위해 한양으로 떠나 오랜 시간 공부에만 매진했고(급제는 못했지만), 김삼의당은 그런 남편을 위해 남원에 머물며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를 조선의 전형적인 여성상으로 추켜세우는 이들도 있다.

 돌탑을 쌓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덕분에 동심으로 돌아가 돌멩이 하나 살짝 올려볼 수 있었다.

 12 : 49. 공원을 벗어나면 탑영제(塔影堤)가 길손을 맞는다. 암마이산과 수마이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서천으로 유입되기 전 잠시 머물다 가는 인공호수로 오리배를 탈 수 있는 유원지로 개발되어 있다. 수채화 같은 아름다움이 몽환적이기까지 한 호수에는 가장자리의 물 위로 떠 있는 데크길도 내놓았다.

 이후부터는 벚꽃 길을 따른다. 전국에서 가장 늦게 피는 벚꽃으로도 유명한 마이산 벚꽃은 이산묘와 탑사를 잇는 2.5km 구간에 식재되어 있다. 진안고원의 독특한 기후로 인해 수천 그루의 벚꽃이 일시에 개화하여 그 화려함은 전국 최고의 명성을 자랑한다. 수령 20~30년의 마이산 벚꽃은 재래종 산벚꽃으로 깨끗하면서 환상적인 꽃 색깔로 유명하다.

 탑영제 둑에서 바라본 풍광. 앞산이 암마이봉이고 뒤쪽에 상부만 보이는 봉우리가 수마이봉이다. 암수 한 쌍의 봉우리가 솟아있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탑영지는 탑 그림자가 드리우는 곳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대로 마이산 봉우리가 호수에 거울처럼 비추는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곳은 2012 KBS-2TV에서 방영된 내 딸 서영이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주인공 서영이의 부모 고향이 진안군으로 설정되어, 진안의 다양한 명소가 촬영 장소로 활용되었다. 안내판은 MBC-TV의 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적고 있었다.

 날씨가 포근한 탓에 역 고드름 현상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참고로 마이산은 신비스러운 곳으로 알려진다. 그 신비 중 하나가 역 고드름 현상이다. 겨울철 탑사와 은수사 주변에 물을 그릇에 담아 놓아두면 물이 하늘을 향해 자라면서 기둥이 되어 언다는 것이다.

 그 아쉬움을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으로 달래본다. 보라! 신기하지 않는가.

 13 : 05. ‘금당사(金塘寺)’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금당사(金堂寺)라고도 하는데, 650년 고구려에서 건너온 승려 보덕(普德)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무상(無上)이 자신의 제자 금취(金趣)와 함께 세운 것으로 알려진다. ‘고금당(古金塘)’이라는 원래의 터는 이곳에서 1.5km쯤 떨어져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를 겪은 후 16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했다. 하나 더. 814년 중국에서 온 혜감(慧鑑)이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문화재로 금당사 괘불탱(보물 제1266)와 목불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을 갖고 있다.

 13 : 10 - 13 : 45. 탐방로는 주차장에 닿기 전 집단시설지구부터 들른다. 등갈비를 숯불로 직접 굽는 모습으로도 부족해 코로는 그 냄새까지 솔솔 들어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반주삼아 소주 한 병을 냉큼 비우고 일어서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마이산의 또 다른 명물인 대왕꽈배기. 페이스트리로 되어 있어서 고소한 맛이 일품이라는데 이 또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꽈배기에 도너츠, 거기다 인삼튀김까지 두둑하게 챙기니 보는 즐거움에 먹는 즐거움까지 더해진다. 이런 맛에 트래킹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집단시설지구를 벗어나자 탐방로는 도로를 따라간다. 왕복 2차선의 도로는 통행량이 많은 편.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자 전용의 탐방로를 따로 내놓았다. 쉼터를 겸한 소공원을 여럿 만들었는가 하면, 마이산의 볼거리를 자랑하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했다.

 14 : 00  14 : 10. 남부주차장에서 조금 더 걸으면 이산묘(駬山廟, 전라북도 기념물 제120)’가 나온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제자들이 친친계(親親契, 송병선 제자)와 현현계(賢賢契, 최익현 제자)를 구성하여 스승의 뜻을 기리고자 1925 이산정사(駬山精舍)’를 건립했다. 1900년대 의병활동 근거지였던 곳이다. 후에 단군과 조선의 태조·세종·고종을 비롯해 을사년 이후 순국한 애국선열, 조선의 명현들을 포함한 79위를 배향하면서 이산묘가 됐다.

 이산묘에는 단군과 조선의 태조·세종·고종을 모시는 회덕전(懷德殿), 을사늑약 이후의 순국선열 34위를 모신 영광사(永光祠), 조선시대 명현 40위를 모신 영모사(永慕祠)가 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김구, 신익희 등의 친필 휘호를 새긴 비석과 편액, 암각서 등이 있다.

 이산묘 입구, 거대한 바위절벽(용바위)은 암각서군(巖刻書群,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6)으로 불린다. 용암(龍岩), 주필대(駐蹕臺), 마이동천(馬耳洞天), 비례물동(非禮勿動), 청구일월 대한건곤(靑丘日月 大韓乾坤)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들로 평가받는다.

 마이동천(馬耳洞天)과 주필대(駐蹕臺). 주필(駐蹕)은 임금이 거둥할 때 잠시 머물거나 묵고 간다는 뜻으로 이성계가 왔다 간 것을 기념해 새긴 것이다.

 구한말 항일지사인 송병선과 그 문인들의 이름도 찾아볼 수 있다. 연재 송병선의 제자가 이산정사 설립을 발의한 후에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 더. 이곳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새겨진 청구일월 대한건곤(靑丘日月 大韓乾坤)은 해방 후 백범 김구선생이 쓴 글로 대한민국이 해와 달처럼 오래오래 밝게 빛나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절벽 앞에는 호남의병창의동맹단결성지(湖南義兵倡義同盟團結成址)’란 빗돌도 세워져 있었다. 1907년 이석용 의병장이 이곳에서 항일 의병을 결성하면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란 단을 쌓고 고천제(告天祭)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정재 이석용을 중심으로 진안·임실·순창·장수·남원 등에서 일어난 1000명 호남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기 위한 빗돌로 보면 되겠다. 참고로 이석용은 동지들과 진안, 영광, 고창 등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지만 일경에 체포돼 1914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4 : 10  14 : 14, 이산묘 맞은편 충혼의 다리 너머에는 독립유공자추모탑이 세워져 있었다.

 독립유공자추모탑 뒤편에서도 암각된 글자를 찾아볼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비례물동(非禮勿動)’, 고종이 호남 유림에 내린 글씨로,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뜻이란다.

 하지만 고종이 의병 창의를 독려한 의미로도 해석된다.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자본을 되찾는 일이 곧 예의이니, 이천만 동포는 분연히 일어나 빼앗긴 조국을 되찾자는 뜻이란다.

 탐방로는 마이산남로를 따라간다. 아니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자 전용의 길을 따로 내놓았다.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배려도 돋보인다. 곳곳에 쉼터와 소공원을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마이산 타포니’, ‘마이산 백악기 역암’, 호남의병창의동맹단 터인 용암 등 마이산과 관련된 풍물들을 소개하는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14 : 24. 엄청나게 넓은 주차장도 만난다. 남부주차장에서 이곳까지는 1km. 마이산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거리다. 어쩌면 벚꽃 구경을 온 상춘객들을 위한 시설일지도 모르겠다.

 14 : 34. ‘화전교를 건너면 화전삼거리이다. ‘마이산도립공원의 입구이기도 한데, 아까 연인의 길 초입에서 헤어졌던 진안고원 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새로이 개설한 코스가 한남·금남정맥과 탑재를 넘고, 은천마을을 거친 다음 은천을 따라 이곳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후부터는 은천천을 따라 조성된 자전거도로를 따른다. 강둑 위로 시멘트포장길이 나있다.

 오른쪽으로는 맑은 은천(隱川)’이 흐른다. 진안읍 가림리에서 발원하여 마령면 강정리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10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원래 이름은 음천(陰川)’, 냇물이 그늘진 곳으로 흐른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조선 말엽에 은천으로 바뀌었다. 아무튼 수량이 풍부한데다 타포니 현상의 벼랑까지 자주 만나 아름다운 풍광을 곳곳에서 연출해준다.

 마이산의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에 발달한 역암이다. 내부 팽창에 의한 차별침식으로 바위 표면에 움푹 파인 부분이 많다. ‘타포니 현상이다. 그런데 저 바위는 움푹움푹 파인 것으로도 모자라 칼로 내리치기라도 한 듯이 반듯하게 잘려나갔다.

 14 : 42. ‘중동촌교 다리를 건너면 길은 잠시 은천의 천변을 떠난다. 그리고는 사행천이 만들어놓은 자그마한 들녘의 가장자리를 따라 원동촌마을로 간다.

 14 : 49. ‘원동촌마을’. 법정 동리인 동촌리(東村里)’를 구성하는 3개의 행정마을(원동촌·서촌·화금) 중 하나로 마을의 역사는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경덕왕 때 화전동(花田東)’으로 불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1413년 진안감무(鎭安監務)가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촌으로 바꿨다고 한다. 하나 더. 마을 앞에는 마을의 오랜 역사를 자랑이라도 하듯 굵직한 나무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마을 숲으로 불리는 방풍림이 아닐까 싶다. 아니 마을의 약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한 비보림(裨補林)일지도 모르겠다.

 마을은 어딘가 먼 곳에서 꿈꿔오던 풍경을 보여준다. 담벼락은 마을 이야기와 문화를 담은 민화로 가득했고, 이끼가 가득 올라온 노거수들은 신령스러움까지 전해준다. 정월 초사흘에 찾아오면 당산제도 구경할 수 있단다.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숨은 명소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동촌 양곡정미소이다. 마을 단위치고는 제법 큰 규모이지만 현재 가동을 멈춘 상태다. 그런데 그게 더 이색적으로 다가온다. 소음 하나 없는 교요함이 시간이 멈춘 듯한 평화로움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르겠다.

 14 : 54. 마을 앞 동촌교 다리를 건너 30번 국도(진무로)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진안고원 길이 국도를 따르지는 않는다. 또 다시 은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국도를 따라가기로 했다. 주어진 시간보다 10분이라도 먼저 도착하려면 은천의 둑길로 에돌아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산악회 운영진으로부터 어디쯤 오고 있느냐는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았지만...주어진 시간보다 15분 정도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12 : 14. 날머리인 마령면사무소는 들러볼 수 없었다. 산악회버스가 면소재지 입구인 마령사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도착했다지만 식사까지 마친 회원들이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한가하게 면사무소까지 다녀올 수 있겠는가. 하는 수 없이 사진은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려왔다. 아무튼 오늘은 4시간 25분을 걸었다. 앱이 14.51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강원도 평화누리길 15코스-2(인제 북면길)

 

여행일 : ‘23. 12. 3()

소재지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일원

여행코스 : 원통교어두원교한계삼거리정자문교차로12선녀탕 주차장만해마을용대교차로도적소교차로미시령 옛길미시령(거리/시간 : 28.1km, 실제는 도적소교차로에서 12선녀탕 주차장까지 역방향 13.07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들머리는 설악산 미시령탐방지원센터(인제군 북면 용대리)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를 타고 속초방면으로 올라오다 한계교차로에서 46번 국도(고성방면)로 옮긴다. 이어서 용대삼거리에서 56번 지방도로 옮겨 속초방면으로 조금 가다 도적소교차로에서 미시령 옛길로 빠져나오면 구절양장의 가파른 오르막길을 기어올라 미시령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고갯마루에 들어선 설악산국립공원 미시령탐방지원센터 15코스의 종점이자 16코스의 시작점이다.

 북면 소재지(원통리) ‘원통교에서 시작 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도적소교차로에서 옛길을 따라 미시령 고갯마루까지 올라가는 코스다. 구간거리는 자전거길 답게 28.1km. 라이더들이야 우습겠지만 걷기 여행자들이 하루에 걷기에는 벅찬 거리다. 때문에 우린 절반으로 나눠 오늘은 십이선녀탕 주차장에서 미시령까지 걷기로 했다. 하나 더. 출발지와 도착지의 고도차로 인한 난이도를 줄이기 위해 미시령부터 역방향으로 걸었다.

 미시령 정상에 있던 옛 휴게소는 지금 설악산국립공원 미시령탐방센터(백두대간과 미시령의 역사와 문화를 과거와 현재의 사진 자료로 전시하고 있다)’로 옷을 바꿔 입었다. 널디너른 주차장은 전망대로 변했다. 훼손돼있던 주변 산자락도 자연 상태로 되돌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난간에 서면 성인대(신선대)’ 능선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지금이야 이 일대가 모두 설악산으로 분류되지만, 오래전에는 미시령을 기준으로 북측은 금강산 권역으로 분류했다. 그러니 고성군(토성면)에 위치한 신선봉(1,212m)은 금강산의 남쪽 끝자락에 해당한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짙은 연무에 갇혀버린 속초 시가지와 동해가 어렴풋이 나타난다. 반면에 속초로 내려가는 미시령 옛길은 또렷한 편이다. 미시령(826m)은 예부터 진부령·대간령·대관령 등과 함께 관동지역에서 백두대간을 넘는 주요 교통로였다. 그럼에도 길고 험준해서 열고 닫기를 거듭했다. 고려 때 폐했다가 조선 성종 24(1493) 다시 개척해 미시파령(彌時坡嶺)으로 불렸고, 조선 말에 다시 폐쇄됐다가 1960년경 재개통됐다. 이후 1971년 인제와 양양을 잇는 한계령 도로, 2007년 미시령터널, 최근에는 서울-양양고속도로까지 뚫리면서 이제는 호젓한 도로로 남았다.

 미시령(彌矢嶺) 표석은 건너편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미시령은 고성군 토성면과 인제군 북면 사이에 위치한 고갯마루이다. 인근의 다른 고개에 비해 높고 경사가 가파른 편이므로, 고개를 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뜻의 미시령(彌時嶺)’에서 유래된 지명이지 않나 싶다. 기록에 따라 미시령은 미시파령(彌時坡嶺연수령(延壽嶺연수파령(連壽坡嶺) 등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황철봉을 거쳐 마등령, 공룡능선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막혀있었다. 국립공원 특별보호지역으로 지정해 2026년까지 출입을 금한단다. 그런데 그 시작년도가 2007년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백두대간을 이어오던 내 발목을 붙잡던 2003년의 출입금지는 대체 무슨 근거였을까? 아무튼 황철봉 구간 말고도 신선봉, 대간령을 거쳐 진부령으로 가는 구간까지 막아놓았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평화누리길은 인제 방면 미시령 옛길을 따라 내려간다. 폭설이라도 내릴라치면 제설보다는 차량통행을 막아버릴 정도로 가파른 경사를 자랑하는 구간이다. 아무튼 난 옛길의 내리막 구간을 생략하기로 했다. ‘도적소교차로까지 3km를 생략한 대신 그 시간에 이 지방 대표 먹거리인 황태구이를 먹어보기 위해서이다. 반주로 소주 한 병쯤 겻들일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 9 : 58. 실제 출발지는 미시령터널’ 입구 도적소교차로’. 3.69km 길이의 터널로 들어가는 56번 지방도와 미시령 옛길이 헤어지는 지점이다참고로 도적소(盜賊沼)’는 미시령의 큰 고개 아래서 둥지를 틀고 있던 도적들이 미시령을 넘어 다니는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은 뒤 빠뜨려 죽였다는 물웅덩이().

 9 : 58. 굴다리를 빠져나와 용대삼거리 방향(왼편에 봉평막국수라는 음식점이 있으니 참조한다)으로 나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자동차 전용도로인 56번 지방도(미시령로)와는 별개로 자전거 길을 따로 내놓았다.

 왼쪽으로는 미시령계곡이 흐른다. 미시령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도적폭포에서 요 아래 용대삼거리까지 4.8km에 걸쳐 흐르는데,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의 맑고 깨끗한 계곡물과 물놀이하고 쉴 수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는 개울이다.

 10 : 04. 화장실을 개방형으로 내놓은 선바위 카페는 겨울방학 중이란다. `23.11.10부터 `24.1.30까지라니 곰처럼 긴 겨울잠이라도 자나보다.

 하지만 그 곰은 동굴로 들어가지 않은 채 카페를 지키고 있었다. 그나저나 자연석이 분명하겠건만 곰을 닮아도 너무 빼다 닮았다.

 몇 걸음 더 걸으면 계곡 위로 삐죽하게 솟아 홀로 서 있는 듯한 바위가 보인다. 용대마을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인 선바위(立石, 지역민들은 촛대바위라 부르기도 했다)’이다.

 줌으로 바라본 선바위

 이후부터는 미시령계곡을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적폭포와 선바위를 끼고 있으며, 울창한 원시림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무더운 여름철에도 전혀 더위를 느낄 수 없다는 곳이다.

 난간에 매달린 리본은 지금 우리가 인제천리길의 일부 구간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인제 천리길이란 인제 젊은이들이 옛사람의 자취·역사·문화가 서린 길들을 걷기 좋게 연결해놓은 길이다. 잊혀진 마을들을 잇는 옛길과 숨겨진 자연 비경을 간직한 산길은 그 길이가 400km 남짓 된다니 말 그대로 천릿길이다.

 탐방로는 굴다리를 두어 번 통과한다. 56번 지방도가 자동차 전용도로라서 횡단보도를 낼 수 없었음이리라.

 10 : 22. ‘미시령 설악집은 황태와 오징어 직판장이다. 아니 산나물과 목청꿀 같은 지역특산품은 물론이고, 미역·다시마에 명란·창란·오징어로 만든 젓갈까지 판단다. 하지만 나그네의 눈에는 주위를 포위하다시피하고 있는 황태덕장이 더 눈길을 끈다. 그리고 저런 풍경은 용대리 구간을 걷는 동안 끊임없이 얼굴을 내민다.

 이곳 용대리는 한국 최대의 황태덕장이라고 했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황태의 70%를 차지한단다. 용대리에서 황태덕장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라고 한다. 그 당시 함경도 청진 등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고향의 맛을 잊지 못해 하나둘 덕장을 세웠는데 지금은 강원도의 명물이 된 것이다.

 10 : 24. 자동차 전용도로로 올라설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창암계곡을 가로지르는 중수교 옆에는 군부대진입교라는 자전거용 다리를 새로 놓았다.

 10 : 31. ‘백골병단 전적비가 오른쪽 350m 지점에 있음을 알린다. 한국 최초의 유격대로 창설된 817명의 백골병단 대원들은 설악산에서 적을 교란함으로써 아군 작전에 기여하는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들을 기리고 순국 산화한 장병의 명복을 빌고자 비를 건립했단다.

 10 : 42. ‘용대교차로에 이른다. 진부령을 넘어 고성으로 가는 46번 국도와 미시령을 넘어 속초로 가는 56번 지방도가 나뉘는 지점이다.

 교차로 아래에 이정표 몇 개를 세워놓았다. 그런데 ‘DMZ 평화의길 강원도 평화누리길의 방향표시가 서로 다른 게 아닌가. 맞다. 그동안 함께 해오던 두 길이 이곳을 기점으로 평화의길은 진부령으로, 그리고 평화누리길은 미시령으로 간다.

 미시령 옛길 이정표는 장승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보다. 하나 더. 용대관광지에서 미시령 정상까지 15.4km 구간을 미시령 옛길이라 부르는 모양이고.

 일단은 진부령 방향,  용대3로 들어간다.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인제지역의 끝자락인 용대3리는 황태마을이라고도 불린다. 그래선지 이곳에서 황태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금년 5월에도 황태와 자연의 조화로운 향연 용대리라는 주제로 방문객들의 오감을 즐겁게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졌었다. 특히 축제기간 내내(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가마솥 황태국도 시식할 수 있다니 한번쯤 찾아볼만 하겠다. 거기다 상설 장터에서 시중가보다 할인된 특별한 가격으로 황태를 구입할 수 있다지 않는가.

 마을 뒤편에는 90m 높이의 매바위가 있다. 매바위는 현재 인공폭포를 만들어놓았다. ·여름·가을 내내 시원한 물줄기를 뽐내고, 겨울철에는 빙벽타기대회가 개최되는 등 관광명소로 손꼽힌다. 건너편 바위봉(위 사진) 용바위일 것이다. 용대리의 옛 이름인 용의터’, ‘용대동(龍垈洞)’은 용()이 머리를 들고 있는 듯한 저 바위의 아랫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10 : 47.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인제읍 방향으로 난 황태길를 따른다. 왕복 2차선의 차도이지만 오가는 차량이 드물어 위험하지는 않다.

 옥수골(옥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는 마을) 앞 북천(北川)에는 꼬맹이 섬이 있었다. 물굽이가 요리조리 용트림을 하다가 작은 땅덩어리 하나를 하천 가운데 남겨놓았다. 그 섬에 굵직한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면서 일류의 쉼터가 되었나보다. 육지와 섬을 잇는 출렁다리까지 놓은 걸 보면...

 10 : 50. 황태구이 전문점인 소풍이란다. ‘북설악 황토마을(전통 한옥 여섯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의 향토음식점이라는데 강원도의 전통 양식인 너와를 얹은 건물이 이국적인 냄새를 물씬 풍긴다.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한옥체험마을 한식당으로 된장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단다.

 이 음식점은 화학조미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 착한 식당이라고 했다. 30년이 넘는 종자된장과 종자간장, 그리고 밭에서 직접 기르는 채소를 식재료로 사용한단다. 부속건물 앞에 줄지어 놓인 저 항아리들이 그 증거일 것이다.

 백담마을로 가는 길. 좌우로 펼쳐지는 풍경이 만만찮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북천 물줄기 따라 바위절벽이 늘어서는가 하면, 길가 곳곳에 들어서 있는 황태덕장은 차라리 덤이다.

 덕장은 텅 비어있었다. 할복을 마친 명태는 지금 12월 말쯤 찾아오는 추위를 기다리며 냉동실에서 낮잠을 잔다. 하지만 때가 되면 명태는 코를 꿰고, 덕걸이 작업을 거쳐 한파 속에서 누렇게 익어갈 것이다. 참고로 용대리 일대는 겨울 내내 맹추위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서민들이 살아가기에는 썩 좋지 않은 환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그런 기후가 국내 최대의 황태덕장을 만들어냈다. 명태는 거는 즉시 얼어야만 물과 함께 육질의 양분과 맛이 빠져나가지 않는데, 이곳은 밤 평균기온이 두 달 이상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며 계곡에서 늘 바람이 불어오는 등 천혜의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기구까지 갖춘 길가 쉼터는 ‘DM Z평화의길 표지판을 내걸었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최근의 화두처럼 너무 서두르지 말고 느긋이 걸어보라는 모양이다.

 11 : 04. ‘백공미술관(佰貢美術館)’이 잠시 들렀다가란다. 서울대 출신이자 검사출신의 법조인이었던 백공 정상림씨가 세운 미술관이다. 이름이야 조금 낯설지만 우리나라 근대(19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다수 소장·전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획전시를 통해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심심찮게 선보인다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먼저 뜨락에 만들어놓은 조각 공원부터 살펴본다. 널찍한 잔디밭에는 꽤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리아 조각상 등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이라는데 문외한이라서 그 가치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안에는 속초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박동국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발길 따라 잉태한 풍경 이라는 주제 아래 백두산이나 북미, 동유럽 등 여행지에서 남긴 스케치 소품까지 꽤 많은 작품을 전시해 놓았다.

 그중에서도 인제의 명물 자작나무를 비롯해 강원지역의 자연과 사계를 담은 작품들이 가장 눈길을 끈다. 이쯤에서 전문가의 평을 들어보자 <특히 자작을 그린 시리즈 자작, 하얀 영혼의 실루엣에 계절감과 다양한 구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푸른 하늘과 흰 자작의 대비, 강렬한 자줏빛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자작, 노랑과 초록으로 싱그러운 자작 등이 다양한 색채로 관객을 맞는다.>

 200호 이상 되는 대작도 전시해 놓았다는데, 아무래도 동양화처럼 그려놓은 저걸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또 다른 평도 빌어보자. <소나무를 사실적으로 그린 고수(固守)’ 시리즈도 눈에 띈다. 또 둥근 달이 뜬 밤하늘 아래 웅장한 울산바위, 흰 눈 쌓인 내린천, 속초 장사항, 고성 아야진, 정박한 배와 우두커니 서 있는 등대 등 그가 몸담아 온 강원의 자연이 캔버스로 들어왔다.>

 11 : 10.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불쑥 솟아오른다.

 보건복지장관이 딱 좋아할만 한 풍경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해도 아이는 하나만 갖는다는데, 저 숲속의 소나무들은 절반 정도가 한 뿌리에서 줄기가 둘이나 자라고 있으니 말이다.

 11 : 21. ‘화운당이란다. 조금 전 들렀던 백공미술관 관장인 박종용 화백의 호가 화운당이었으니 그의 아틀리에일지도 모르겠다.

 11 : 24. 텅 비어있는 저 하늘황태덕장도 조금 더 추워지면 명태가 주렁주렁 매달릴 것이다. 참고로 옛말에 맛 좋기는 청어, 많이 먹기는 명태라고 했다. 서민들이 즐겨 먹는 생선으로 명태만 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다양한 요리로 서민들의 밥상을 책임지는 명태지만, 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고종 8(1871) 이유원이 지은 임하필기에 명태라는 이름의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명천에 태씨 성을 가진 어부가 있었는데 어떤 물고기를 낚아 주방 일을 맡아 보는 관리로 하여금 도백에게 바치게 했다. 도백이 이를 아주 맛있게 먹고 이름을 물으니 모두 알지 못하였다. 도백은 태씨 성의 어부가 잡은 물고기이니 이를 명태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하늘이란 덕장 이름은 뒷동산에 있는 풍력발전기에서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드니 풍력발전기 몇 기가 거대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11 : 32. 아치형 조형물이 황태마을을 지나고 있음을 알린다(제대로 걸었더라면 저건 황태마을의 입구가 된다). 황태마을이 백담사 오르는 길 즈음부터 진부령과 미시령이 갈라지는 삼거리 바로 뒤쪽까지를 통칭하는 지명이라니 말이다. ! 이왕에 시작했으니 조금 더 살펴보자. 명태의 생물은 생태라고 한다. 곧바로 얼리면 동태가 되고, 바짝 말리면 북어가 된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 황태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검게 변하면 먹태라 불린다. 명태를 반쯤 말린 것은 코다리, 명태 새끼를 말린 것은 노가리가 된다. 이밖에도 말리는 정도와 잡히는 계절, 또는 잡는 도구에 따라 백태, 흑태, 깡태, 꺽태, 강태, 망태, 조태, 왜태, 막물태, 사태, 오태, 피태라는 이름으로 달라진다. 명태가 이리도 이름이 많은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물고기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탐방로는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른 내설악의 수많은 산봉들을 바라보며 간다. 이곳은 황태길’. 못다 한 황태 얘기나 해보자. 황태는 잘 말려지면서 황금빛을 띈다. 황태를 만들다 조직 질감에 실패한 건 파태’, 색이 어두운 검정이 된 걸 흑태라고 한다. 또 날씨가 짓궂어 얼지 않고 말라 버리면 깡태’, 너무 추워서 녹지 않은 채 허옇게 말라 버리니 백태이다. 그러니 황태는 사람이 덕장에 걸고, 바람이 구름을 타며 요리하는 하늘이 정하는 자연의 산물이다.

 고개를 돌리자 풍력발전단지가 성큼 다가온다. 하지만 바람이 제법 부는데도 대부분이 날갯짓을 멈춘 채 태업중이다. ‘용대풍력단지 북부보전센터라는 표지판이 단지로 들어가는 진입로 입구에 세워져있었는데,  보전센터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11 : 42. ‘백담사입구 사거리에 이른다. 소문난 황태 맛집이 꽤 여럿 있다는 곳이다. 황태는 깊은 맛은 물론 타우린과 베타인 성분이 풍부해 간 해독과 피로회복에 좋으며 지방·콜레스테롤 함량이 낮아 혈액순환을 원활히 돕고 심혈관 질환개선에 좋다. 거기다 이곳은 전국 황태의 70%를 생산한다는 용대리. 그러니 어찌 황태 맛집이 흔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질 좋은 명태를 손끝이 아플 정도로 춥고 바람 많은 겨울철에 덕장에 걸어 말리면 햇볕에 녹고 다시 얼기를 약 3개월. 노랗게 속을 채운 황태는 시원한 속풀이 국으로도 좋고 고소한 구이로도 그만이다.

 백담마을 조형물은 여의주를 문 쌍룡(雙龍)을 담았다. 용대리(龍垈里) 북쪽, 길 양쪽의 쌍룡이 머리를 들고 있는 듯한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용대리의 지명을 나타냈지 않나 싶다.

 마을을 홍보하는 안내판도 빼놓지 않았다. 설악산 자락의 마을로, 백담사를 타고 내려오는 영실천(백담계곡)을 끼고 있단다. 꽃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야생화마을은 다양한 체험과 축제를 통해 힐링촌으로 진화하는 중이란다.

 그런데 마을회관 앞 뜨락에 난데없는 기린 한 마리가 서성이는 게 아닌가. 아니 이곳 인제(麟蹄)의 지명을 뜻풀이 해놓은 조형물일지도 모르겠다. 인제가 말발굽처럼 생겼다고 해서 기린 자에 발굽 자를 쓰고 있다니 말이다.

 11 : 50. ‘내가평교를 건넌다. 내설악에서 흘러온 영실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다.

 다리 밑 영실천은 꽁꽁 얼어붙었다. 내설악의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영시암(永矢庵)에서 모인다고 해서 영시천(永矢川)’이라고도 불린다는 저 하천은 요 아래서 북천으로 합류된다.

 11 : 54. 잠시 후 나타나는 구만2를 지나자 도로변이 온통 오토캠핑장 천지다. 이 부근이 구만동 계곡이라는 아름다운 경관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구만동이란 지명은 구만이라는 사람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구만동계곡은 미시령계곡과 백담계곡이 합쳐져 흘러 내려오는 큰 계곡으로, 백담사와 12선녀탕 사이 약 3km 구간을 이르는 지명이다. 맑고 깨끗한 계곡물과 울창한 솔밭, 멋진 암반이 조화를 이루어 여름철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라때로 불리는 나 같은 꼰대에게는 한겨울 캠핑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요즘 텐트는 웬만한 방갈로 저리 가라는 크기라고 한다. 그 안에는 테이블과 의자는 물론, 그릴, 휴대용 냉장고, 조명까지 없는 게 없다고 했다.

 건물의 예뻐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음식점(설산하우스)이라는데 간판을 걸려있지 않았다. 이쯤에서 넋두리 하나. 사실 난 황태구이 안주삼아 소주 한잔 걸치려고 남들보다 3km를 줄여서 걷는 중이다. 하지만 느림보 나그네에겐 그마저도 호사였던가 보다. 한참이나 뒤에서 출발한 둘레길 도반들이 스치듯이 추월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주변 풍광을 살펴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담느라고 시간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 백담사입구 사거리를 지나면서 도로는 이름을 바꿨다. 황태마을과 함께 황태길이 끝났고, 이제 만해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12 : 10. ‘구만교 앞에서 왼쪽(만해마을)으로 방향을 튼다. 자전거길 이정표가 용대삼거리에서 5.4km쯤 떨어진 지점임을 알려준다.

 ‘DMZ 평화의길 팻말이 아직까지는 평화누리길과 함께 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두 길은 용대삼거리에서 헤어진다.

 카페 아니오니라고 한다. 직접 로스팅 해준다는 커피도 커피지만 갓 구워낸 빵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난 몇 걸음 들어가다가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아까운 시간을 소모시킬 정도의 뷰가 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대리의 또 다른 특징은 마가목이 아닐까 싶다. 마가목 나무를 아예 가로수로 심어놓았다. 약효가 좋은 마가목 나무의 효능과 효과를 알리는 마가목축제도 열고 있다고 했다.

 12 : 21.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도로변에 마련된 널찍한 주차장에 이른다. 인제군에서 야심차게 조성해놓은 문화·예술 컴플렉스에 도착했다고 보면 되겠다. 여초서예관, 한국시집박물관, 만해문학박물관 등이 도로변에 줄지어 있다.

 첫 만남은 여초서예관(如初書藝館)’이다. 한국 근현대 서예사의 4대가로 꼽히는 여초(如初) 김응현(金應顯. 1927-2007)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으로 단일 서예관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라고 한다. 800평쯤 되는 2층 건물에 상설·기획전시실, 체험실, 세미나실 등의 각종 편의시설과 함께 관련 도서 및 소장품 6,386점과 서예작품 1,133점을 전시하고 있다.

 여초(如初)’ 처음과 같다는 뜻을 지닌다. 김응현의 증조부는 경술국치와 일제의 회유에 항거해 목숨을 끊은 우국지사 오천(梧泉) 김석진(金奭鎭)이다. 조부인 동강(東江) 김영한(金寗漢)도 일제의 작위를 거부하고 은거했다. 그런 가문에서 자라며 보고 배운 우국충정을 끝가지 지켜간다는 마음가짐일지도 모르겠다.

 선생의 약력부터 살펴본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답게 화려한 경력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하나 더. 선생의 형제들도 명성이 자자한 서예가들이다. 세 형인 경인(褧人) 김문현, 일중(一中) 김충현, 백아(白牙) 김창현도 서예가로 활동했으며, 특히 김충현은 김응현과 더불어 한국 현대 서예계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먼저 생애관(生涯館)’부터 둘러본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교도 서울에서 다녔고, 활동도 서울에서 했다. 그러다 말년인 1999년 구룡동천(북면 한계2리 구룡계곡 일원)으로 내려와 8년 동안 생활하다 2007년 작고했다. 선생의 기념관을 인제군에다 지어놓은 이유이다.

 안에는 글을 쓰던 공간을 재현해 놓았다. 손으로 직접 쓸 수밖에 없는 장르답게 책상에는 컴퓨터가 보이지 않는다.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다는 선생의 생애와 작품세계는 패널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선생의 작품은 2층에서 만난다. 조부(김영한)에게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예를 배운 그는 10대 후반에는 조부가 구해 온 한·위 시대의 법첩을 중심으로 서법을 연마했다. 이를 바탕으로 15세 때부터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1950년대에는 숙명여자대학교·홍익대학교·성균관대학교 등에 출강하며 한문학과 서예를 가르쳤다. 1956년 김충현·노수현·김서봉·민태식과 함께 서예 연구단체인 동방연서회를 창립했다.

 그는 한자의 5(五體 : 篆書·隸書·草書·行書·楷書)에 모두 정통했다고 평가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북위체에 기반 힘 있고 호방한 예서와 해서에 특출한 것으로 평가되며, 역시 자유롭고 막힘없는 필치의 행서와 초서 작품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2003년에 완성한 광개토대왕비문은 필생의 역작으로 손꼽힌다.

 12 : 38. 다음은 한국시집박물관이다. 한국 근현대기의 시집(詩集)을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2014년 개관했다. 1층에는 시집을 대여해 읽을 수 있는 작은 도서관과 다양한 체험학습 공간이 있으며, 2층에는 1900~1970년대까지의 근현대기에 출판된 시집을 연대기로 전시한 상설 전시실과 시를 짓고 낭송하는 체험실,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먼저 숲속부터 거닐어보면 어떨까? 혼자 걸어도 좋고, 함께 걸으면 더 좋은 소나무 숲을 소나무 숲을 거닐며 시인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꾸며놓았다. 윤동주, 박목월, 김소월 등등 당신이 평소에 동경해오던 시인과 대표시를 읽으며 메마른 가슴을 따뜻하게 힐링할 수 있을 것이다.

 1층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어, 로비 서가에서 선택한 시집을 읽으면서 시의 정서에 흠뻑 빠져볼 수 있다. 벽면에 적힌 시들을 읽어보는 것도 잠깐의 재미로는 충분했다. 우리가 자라오면서 심심찮게 흥얼거렸을 법한 국민 시들이 벽면에 빼곡히 적혀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인제문인시서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무릉도원, 참선의 공간 등으로 인제의 아름다운 경관을 읊은 시인묵객들의 운문 20편을 인제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예가들이 써서 전시하고 있었다.

 상설전시실은 시문학사의 흐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시집과 문학자료를 1900년부터 1970년까지 10년 단위로 나누어 실물과 영상으로 전한다. 근대시 성립(1900-1910 : 이광수, 최남선), 독자적 자유시(1920 : 한용운, 김소월), 모더니즘 시의 성립(1930 : 김영랑, 정지용), 해방공간의 민족시( 1940 : 조지훈, 박두진), 전후시의 정신적 분화(1950 : 박인환, 구상), 순수시와 참여시(1960 : 신경림, 고은), 삶의 현실과 시적 변용(1970 : 오세영, 황동규)

 박물관은 국내외 시인 및 소장가들이 기증한 10,000여권의 시집을 소장하고 있단다. 그중에는 1921년 펴낸 조선 최초의 현대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 1921년 펴낸 조선 최초의 현대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 정지용 시집(1935, 1946), 김립 시집(1939), 이육사 시집(1946) 등 희귀 시집 100여권이 포함되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들에 대한 일화도 살짝 엿볼 수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시설은 시 낭송 비디오를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부스라고 했다. 소파 벽면에 비디오를 만드는 방법이 잘 안내되어 있으니 한번쯤 시도해보면 어떨까? 주어진 시간이 빠듯한 나그네야 그냥 떠나올 수밖에 없었었지만...

 12 : 52. ‘만해마을에 이른다. 만해마을은 한국문학사의 대표적 시인이자 불교의 대선사, 민족운동가로 일제강점기 겨레의 가슴에 민족혼을 불어넣어 준 만해 한용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만해는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이후 백담사에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이곳에 만해마을이 세워진 이유이다. 현재 동국대학교에서 운영하고 있어 동국대학교 만해마을로 불린다.

 숙박시설인 설악관을 지나면 만해문학박물관이 얼굴을 내민다. 만해마을을 상징하는 박물관은 넓고 깨끗한 벽면을 따라 한용운의 삶과 님의 침묵을 비롯한 만해의 작품세계, 당시의 시대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입구. 만해의 좌상이 반긴다. 만해 한용운은 독립운동가 겸 시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며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의 바탕은 승려에서 출발한다.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는 한편,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주요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 등이 있다.

 박물관으로 들어서면 품은 뜻을 깊고 길게 울리라는 듯 시를 적은 징을 가지런히 걸어놓았다. 이어서 風霜歲月 流水人生이라는 만해의 친필이 반긴다. 그 아래는 두 줄의 짧은 글로 만해의 일대기를 적었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류의 행복이다라는 만해의 법문도 눈에 띈다. 소소한 자유와 평화로운 일상이 만해선사가 추구하던 삶의 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싶다.

 1층의 상설전시실에는 만해의 친필 서예와 작품집, 그리고 연보로 본 만해선사의 생애 주제로 본 만해선사의 삶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만해의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학잡지들의 창간호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하나 더. 유리창 너머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만해선사(동상)도 만날 수 있었다.

 전시관은 만해의 친필 원고, ‘님의 침묵이 실렸던 시집 등 눈여겨보아야 할 자료들이 차고 넘친다. 이왕에 왔으니 어릴 적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외울 수밖에 없었던 님의 침묵이나 어느 해 정월 초하루에 적었다는 조선 청년에게라는 글 등도 한번쯤 읊조려 보자. 그러다보면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를 읊은 듯한 모기라는 시도 눈에 띌 것이다.

 만해와 조선일보의 관계도 전한다. 그는 만년에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머물렀다. 일본에 대한 만해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선총독부 쪽으로는 창문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또 동료이자 친구였던 최린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곧바로 인연을 끊었을 정도로 매국에 대한 태도가 단호했다. 그런 그가 친일파로 지목받는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는 교분이 두터웠다고 전해진다. 심우장을 지을 때는 방응모로부터 도움도 받았단다. 그게 아쉬움으로 남는 건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박물관을 빠져나오자 커다란 종과 북이 매달려 있다. ‘범종루(梵鐘樓)’로 법당의 네 가지 주요 물품인 범종·운판·목어·홍고 등을 비치하는 사찰당우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누각을 기본으로 전통양식의 지붕에다 단청을 입히는 여느 사찰들과는 달리 콘크리트골조 기둥에 최소한의 비가림 지붕만 얹었다.

 보현보전(普賢寶殿)은 한술 더 떴다. 뼈대만 앙상한 전각에는 부처님조차도 모셔놓지 않았다.

 청소년들이 지은 시에 빠져보는 즐거움도 있다. 청소년평화생명백일장에서 입상한 작품들을 현수막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만해마을의 정문은 경절문(涇截門)’이란다. 온갖 잡다한 생각을 단호히 물리치고 지름길로 곧바로 들어가는 문이란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터득하여 곧바로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법문이라나? 하지만 중생에게는 벽면에 걸린 동판이 더 눈길을 끈다. 29개국 55명의 외국 시인과 255명의 한국 시인 작품 등 310편의 시를 동판에 새겨, 세계평화를 희구하는 모든 시인들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13 : 14. ‘만해교를 건너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드넓게 펼쳐진다. ‘용대숲으로라는 청소년 수련시설에서 운영하는 숲 놀이터로 그네나 트리클라이밍, 숲 밧줄놀이 등을 체험해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탐방로는 아름드리 소나무로 가득한 숲을 오른편에 끼고 에돌아간다.

 아쉽게도 숲은 문을 닫아걸었다. ‘송홧가루 날려 길손 붙잡는다며 소나무 숲을 찬미한 이가 있었다. 소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는 사람들을 순화시킨다. 때문에 숲에 들면 일행이 있는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혼자 앉은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 무엇을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소나무 숲이 쉼표가 되는 이유다. 그러기에 문 닫힌 소나무 숲이 더욱 아쉬워졌다.

 위에서 얘기한 ‘()용대숲으로에서는 프로그램 참여자들의 신청을 받고 있었다. 밧줄을 타고 나무 위로 오르는 트리클라이밍(물론 안전장비를 착용한다), 그네다리나 바이킹해먹 같은 숲 밧줄놀이’,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하여 지정된 지점을 통과하고 목적지까지 완주하는 오리엔티어링(orienteering), 자전거 가이드투어 등이 진행된단다.

 북천의 물줄기는 나름대로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한여름 장마철이 3개월이나 지났으니 이제 갈수라 할 수 있다. 계곡을 품고 있는 설악산의 산줄기가 그만큼 크고 깊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웃 숲속 야영장에서는 아예 장박을 모집하고 있었다. 관광지마다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알박기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13 : 26. 12선녀탕 입구의 윗남교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3.07km,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도중에 만난 미술관과 박물관 등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강원도 평화누리길 15코스-1(인제 북면길)

 

여행일 : ‘23. 11. 19()

소재지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일원

여행코스 : 원통교어두원교한계삼거리정자문교차로12선녀탕 주차장만해마을용대삼거리미시령 옛길미시령(거리/시간 : 28.1km, 실제는 12선녀탕 주차장까지 13.37km 2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들머리는 원통교(인제군 북면 원통리)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를 타고 속초방면으로 50km쯤 올라오면 원통리에 이른다. 평화누리길 15코스의 출발점은 마을 앞 북천을 동서로 횡단하는 원통교이다. 참고로 원통(元通)’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원통역이라는 역참(驛站)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북면 소재지(원통리) 원통교에서 시작해 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용대삼거리에서 옛길을 따라 미시령 고갯마루까지 올라가는 코스다. 구간거리는 자전거길 답게 28.1km. 라이더들이야 우습겠지만 걷기 여행자들이 하루에 걷기에는 벅찬 거리다. 때문에 우린 절반으로 나눠 오늘은 십이선녀탕 주차장까지만 걷기로 했다.

 09 : 08. 15코스의 시점은 원통교의 동단(東端)이다. 이곳에서 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천의 오른편 둑 위로 널찍하니 길이 나있다.

 강 건너 원통 시가지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맞다. 군대라도 갈라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동구 밖까지 따라 나와 부디 살아서 돌아오라며 눈시울을 적시던 라때 시절, 이곳 원통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로 회자되던 고을이었다. 주민들보다 외출 나온 군인들이 더 많던 그런 첩첩산중 오지마을이 저런 고층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니 어찌 낯설지 않겠는가.

 세월과 함께 쇠락해가던 군사도시는 이제 군인과 상생하는 병영문화도시로 거듭났다고 한다. 4층 규모의 웰컴센터가 들어섰는가 하면 병영역사와 문화가 담긴 테마존, 특화된 먹자골목 등 볼거리·즐길거리·먹을거리가 즐비하단다. 그렇다면 길가의 저 참호는 옛 추억 소환용일지도 모르겠다. 온고지신(溫故知新). 그래, 언젠가 공연장에서 만난 고() 박동진(朴東鎭) 명창께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를 외치지 않던가.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는 저 바람개비는 조경용? 아서라 저래 뵈도 의젓한 풍력발전기라고 한다. 친환경 분산형 전원 확대와 지자체 에너지전환 주도에 발맞추기 위해 개발된 소형발전기로, 주변 공공시설에 전력을 공급해주는 주민 편익시설이다. 하나 더. 하천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를 막아 소수력발전을 하고 있었다.

 코리아 둘레길의 한 축을 담당하는 ‘DMZ 평화의 길 팻말이 눈에 띈다.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과 겹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DMZ 평화의 길은 비무장지대(DMZ)를 걸으며 분단의 현실을 체험하고 접경지역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만든 트레일(trail)이다. 강원 고성에서 인제·양구·화천·철원·연천·파주·김포를 경유해 인천 강화까지 접경지역의 9개 시·군을 횡단하는 길이 524km의 도보길이다.

 09 : 19. ‘라때의 추억을 소환해가며 걷기를 10분 남짓. 둑길이 끝나면서 2차선 도로(갈골로)로 올라선다.

 나만큼이나 많은 풍파를 겪었나보다 함께 걷던 산수(傘壽)의 도반 손가락 끝에는 힘이 겨운 듯 지지대에 의지하고 있는 노송 한 그루가 있었다.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 곡강시(曲江詩)’에서 사람이 70까지 사는 것은 예부터 드물었다(人生七十古來稀)’고 했다. 70세의 별칭이 고희(古稀)가 된 근원이다. 그런데 이분은 이미 80을 넘기셨다. 그의 손가락 끝에 놓인 소나무에게 경의를 보내며 트레킹을 이어간다.

 왜가리는 철새? 결론은 ‘NO’이다. 원래는 철새였으나 기후변화와 강한 적응력 덕분에 현재는 완전히 텃새가 되었다. 하나 더. 옛 사람들은 왜가리를 으악새라 부르면서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을 왜가리처럼 소리를 지른다며 나무랐다고 한다. ‘으악-으악하는 왜가리의 울음소리가 영 곱지 못했기 때문이다.

 09 : 23. ‘갈골교를 건너자 길이 둘로 나뉜다. 아까 도로(갈골로)로 올라섰던 탐방로가 다시 둑길로 내려서는 것이다.

 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둑길은 왼편에 북천, 그리고 오른편에 둑을 쌓아 조성한 뜨락만큼이나 작은 들녘을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명색이 평화누리길’. 거기다 ‘DMZ 평화의 길까지 더했는데 어찌 쉼터 하나 없겠는가. 정자는 물론이고 몸이라도 풀고 가라는 듯 운동기구 몇 점을 배치했다. 커다란 견공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어 쉬기는커녕 다가가보지도 못했지만.

 9 : 40. ‘어두원교로 북천을 건넌다. ‘어두라는 지명은 다리 건너에 있는 어두원 마을(원통8)’에서 빌려왔다. 높은 산이 솟아 있고 골짜기가 깊어서 항상 어둡다는 오지마을이다. 그러니 한자로 변한하면 음지(陰地)’쯤 되겠다. 그런데도 굳이 어두리(魚頭里)’를 공식 지명으로 내걸고 있는 이유는 뭘까?

 평화누리길은 자전거길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이정표(용대삼거리 19.1km)도 자전거를 매달았다.

 다리에서 바라본 상류 쪽 풍경. 안개가 걷히지 않아 파노라마로 펼쳐져야 할 설악산은 그 형상조차 가늠해 볼 수 없었다.

 다리 건너는 어두원마을’. 탐방로는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북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물줄기를 왼편에 끼고 달려온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오른편에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09 : 45. 100m쯤 더 걸으면 또 하나의 쉼터. 이번에는 반듯한 팔각정까지 지어놓았다. 그것도 북천의 벼랑에 걸터앉은 모양새로...

 접경권 평화누리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용늪마을 자연생태학교, 냇강마을, 만해마을, 백담사, 인제산촌민속박물관 등 인제권역에서 만날 수 있는 주요 관광지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평화누리길은 자전거길. 그러니 자전거 거치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하나 더, 왼쪽에 보이는 도로는 44번 국도(설악로)이다.

 쉼터는 조망의 명소이기도 하다. 난간에 서면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북천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발원해 남서방향으로 흘러 인북천으로 유입되는 지방하천이다.

 탐방로는 44번 국도와 나란히 간다. 북천이 오른편에서 따라옴은 물론이다.

 09 : 48. 설하관광농원 캠핑장에 이른다. 하지만 걷기 여행자들에겐 함께 걷는 도반과 커피라도 한잔 나눌 수 있는 ‘cafe kanune’가 더 친근하다.

 요즘은 한 달 살기가 유행이라고 했다. 그 정도는 머물러야 그 지역의 속살을 속속들이 느껴볼 수 있다나? 문득 올해 봄 다녀온 코카서스 3국이 생각난다. 조지아의 현지인으로부터 한 해 살이를 권유 받았고,  15일 정도의 여행기간 내내 고민에 빠지기도 했었다. 내 연금에 조금만 더 보태면 귀족처럼 살 수가 있다니 어찌 귀가 솔깃해지지 않았겠는가.

 09: 54. ‘관벌교차로라고 한다. 고원통(古元通)의 남쪽 들녘 옆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이곳에 관청이 있었다고 한다.

 교차로를 빠져나오면 설악휴게소가 잠시 쉬었다가란다. 하지만 이른 시간이어선지 인적은 뜸한 편이었다.

 탐방로는 이제 한계리(寒溪里)’로 들어간다. 망국의 한을 짊어진 신라 마의태자(麻衣太子)와의 인연을 들먹이는 마을이다. 10월 하순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이 한겨울에 이곳에 도착했고, 살을 에이는 추위와 몰아치는 눈보라를 겪으며 한계(寒溪)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란다.

 이때 안개가 걷히면서 산줄기 하나가 살짝 얼굴을 내민다. ‘한석산(寒石山 : 1,117m)’이 아닐까 싶다.

 10 : 02. ‘한계2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 44번 국도의 한계교 아래를 지난다. 직진하면 한계삼거리 휴게소’. 하지만 오가는 차량들은 휴게소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새로 뚫린 국도를 따라 휭하니 사라질 뿐이다.

 탐방로는 46번 국도를 향해 간다. 길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자전거길임을 알리는 하늘색 선이 그어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공명(共鳴)의 집이란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남의 사상이나 행동에 공감하며 그에 따르는 이가 산다는 얘기일 것이다. 두 물체가 마주쳐야 울림이 난다. 산 위에서 야호하고 소리치면 반대쪽 산에 부딪혀 소리가 되돌아온다. 이처럼 자기가 내뱉은 말이나 행동은 결국은 시나브로 자기에게 돌아온다. 남을 욕하거나 저주하면 상대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남을 칭찬하고 장점을 말하는 습성을 길러야 한다.

 오지 특유의 특산물들이 옛 추억을 다시 한 번 소환시킨다. ‘라때 시절 이곳 인제는 군인들이 가장 회피하던 지역 중 하나였다. 102(지금은 해체됐다)에 걸린 것만으로도 서럽던 당시, 이곳까지 들어온 군인들은 빽 없는 부모들을 원망하며 거꾸로 매달아도 세월은 간다며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빠삐용의 한국판이었다고나 할까.

 10 : 11. ‘고원통교 다리를 건넌다. 다리건너는 고원통(古元通)’ 마을. 조선시대 역()이 있었다는 곳이다(마을 중심을 원통으로 빼앗기고 이름표에  를 덧댔다나?). 인제읍지(1843)는 역마 1, 복마 2,  4,  1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탐방로는 다리 건너에서 오른편으로 간다. ! 왼편으로 가면 내설악 예술인촌이 나온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마을에 거주하는 유명 작가 및 관내 문화예술단체의 작품을 전시하는 내설악 공공미술관도 들어서있다니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고원통 마을은 얼핏 유원지를 연상시킨다. 도로를 따라 꽤 많은 음식점과 숙박업소, 심지어는 호텔까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연 집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여름 한철 장사라도 하는 것일까?

 황태가공공장도 눈에 띈다. 인제의 겨울 풍경 중 단연 으뜸이라는 황태덕장이 인근에 있는 모양이다. 겨울의 추위와 볕에 의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쫀득하게 마르는 황태의 맛과 그것들이 가득한 덕장의 눈 덮인 풍경은 그야말로 겨울이 주는 선물과도 같다.

 탐방로는 이제 국도 46호선을 따른다. 아니 4차선으로 확장한 46호선을 새로 냈으니 이젠 ‘46호선 옛길이라고 하는 게 옳겠다. 참고로 그동안 함께 달려오던 국도 44호선과 46호선은 이곳 한계삼거리에서 이별을 고한다. 44호선은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가고, 46호선은 진부령을 넘어 고성으로 간다.

 10 : 16. ‘고원통교차로 부근에서는 신·구 두 도로가 함께 가기도 한다.

 10 : 26. 하지만 산을 꿰뚫어버리는 새 도로(미시령로)와는 달리 옛길(고원통로)은 북천 물줄기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다. 때문에 한계터널 입구의 교각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길은 양옆에 철제울타리를 둘렀다. 11코스 때 돌산령을 넘으면서 만난 울타리는 군 시설의 보호와 함께 북한에서 넘어오는 ASF(아프리카 돼지열병) 감염 멧돼지의 차단막을 겸한다고 했었다. 이곳도 비슷한 용도겠지?

 아까도 얘기했듯이 이 구간은 평화누리길 ‘DMZ 평화의 길이 사이좋게 함께 쓴다. 힘차게 달려가는 라이더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이유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주변 풍경이 확 바뀐다. 기암괴석의 바위봉우리. 그리고 바위틈에서 자라는 소나무들. 설악산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아니 아직은 맛보기일지도 모르겠다.

 오른편에서 따라오는 북천도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크고 작은 못은 물론이고, 집채 만한 바위부터 작은 돌멩이까지 조화롭게 깔린 내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

 저건 숫제 ()’이다. 용이 물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멋진 스토리텔링으로 덧씌운다면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변할 수도 있겠다.

 길은 수없이 많은 ‘S’자형 곡선을 그리면서 이어나간다. 따라가고 있는 북천(北川) 감입곡류(嵌入曲流)’의 하천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물굽이가 심한 곳에는 모래톱도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게 자못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퇴적층이라선지 소나무가 숲을 이루면서 주변 산하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10 : 46. 산이 깊은 곳이니 물이 맑을 것은 당연. 이해득실을 따지는 인간들이 이를 내버려둘 리가 없다.  설악산수 공장이 그 증거이다.

 쌍다리 쉼터는 캠핑촌인 듯. 널따란 공터에 텐트들이 빼곡히 들어 차 있었다.

 국도 46호선 옛길은 가고 또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심심산골을 향해 한없이 파고드는 모양새이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데, 아름답기로 소문난 북천이 함께 간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북천은 에메랄드빛 소()와 담()을 수없이 품었다. 한여름 최적의 가족 피서지로 꼽힐 만하다.

 인제의 가장 큰 특징은 북한과 접경을 이룬다는 점이다. 그래선지 결혼도 북한 출신 여성의 정보가 제공되고 있었다

 11 : 07. ‘정자문교차로에 이른다. 용대리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는데, 이곳에도 화장실까지 갖춘 쉼터가 만들어져있었다. 참고로 정자문은 마을 앞 강가에 정자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길가에는 열녀정문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정자나 정려문 모두 사라지고 없단다.

 이곳도 조망의 명소이다. 용대리(남교마을) 앞들을 적셔주는 북천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용대리에서 시작된 북천(北川)은 내설악 깊은 곳에서 흘러온 백담천까지 품고 웅장한 물길을 이어 간다.

 설악 하이 트레킹웨이 종합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 일부 구간을 저렇게 부르는 모양인데. 인제휴게소(인제군 남면)에서 용대삼거리까지 44번과 46번 국도에 붉은 선을 그어놓았다. 주요 포인트들을 함께 표시해놓았음은 물론이다.

 이곳 용대리가 전국 제1의 청정지역임을 자랑하는 조형물도 눈에 띈다.

 이후부터는 북천의 강둑을 따른다. 북천과 북천의 물줄기가 빚어낸 작은 들녘을 양옆에 두고 둑길이 나있다.

 도중에 만난 어느 민박집 원두막. 초겨울 찬바람에 시래기가 말라간다.

 11 : 17. ‘한 숨 자고가면 백수(白壽)는 넉넉히 넘기실 것입니다’. ‘장수정(長壽亭)’을 만난 일행이 넉살을 떤다. 둘러메고 온 배낭을 퇴침삼아 홍루몽(紅樓夢)이라도 꿔보라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서라. 초등학교 입학 전에 이미 할아버지의 통역을 거친 귀동냥을 했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도서관까지 찾아가 완독해봤지만, 결과는 항상 일장춘몽을 되뇌며 아쉬운 입맛만 다셔야했으니 말이다.

 침대는 과학입니다’. 과학계를 난감하게 만들었던 광고도 이제 어색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비닐망으로 과수원을 통째로 둘러쳐야만 할 날이 오게 될 줄을 당시 사람들은 짐작이나 했을까 싶다.

 북천의 물굽이가 빚어놓은 개울 속 섬에는 캠프촌이 들어섰다. 600명이 동시에 이용 가능한 숙박시설과 교육시설, 부대시설을 갖춘 사설 청소년수련원이다. 트래킹, 카약, 래프팅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도 함께 즐길 수 있다고 한다.

 11 : 29. ‘용대교를 건너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십이선녀교가 어서 오란다. 15코스를 절반으로 단축했으니 이제 그만 마칠 때가 되었다면서 말이다.

 넝쿨식물 터널이란다. 용대권역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했는데, 조롱박·색동호박·수세미·여주·환타지믹스 등 넝쿨식물들을 심어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가을철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가 멋진 풍경을 연출해준다고 한다.

 용대권역 농촌종합개발사업의 내력은 그림으로 전해준다. 문화·복지시설과 소득기반시설을 갖추었으며, 황태홍보전시관·습지생태자연학습장·약초재배체험장·장류체험장 등의 다양한 시설을 조성해 권역별 특성에 맞는 마을로 탈바꿈시키겠다나?

 11 : 35. ‘남교마을로 들어서면 십이선녀교(十二仙女橋)’가 반긴다. 20년쯤 전, 저 건너에 있는 십이선녀탕 계곡을 지나 대승령으로 올랐고, 귀때기청봉과 대청봉을 거쳐 오색약수로 하산했었다. 기억조차 희미해졌지만 연이어 나타나는 현세 속의 선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답사를 이어가던 기억이 새롭다.

 십이선녀교를 건너지는 않는다. 탐방로는 다리를 지나쳐 남교마을로 들어간다. 아니 집단시설지구로 변한 윗남교라고 하는 게 옳겠다. 참고로 남교(嵐校)’는 조선시대 이곳에 있던 보안도(保安道)에 딸린 역참(驛站)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당시 남교역에는 복마가 3, 노가 5, 비가 3명 있었다고 한다.

 시설지구답게 꽤 많은 펜션들이 들어서 있었다. 중세풍에 현대미를 더하는 등 개개의 외관도 하나같이 예쁘다. 그러니 멋진 정자 하나쯤 없겠는가. 하지만 개인소유였던 모양이다. 철망울타리를 둘러 출입을 막아놓았다. 세월이 하 수상하다보니 아름다음을 아는 사람들은 마음씨도 아름답다는 옛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나보다.

 숙박업소에 이어 나타나는 주차장은 엄청나게 넓었다. 윗남교와 당정골 사이에 있다는 이레가리일지도 모르겠다. 7,000여 평에 달할 정도로 넓어, 소 한 마리로 갈 경우 7일이나 걸린다는 그 들녘 말이다.

 주차장 초입, 전망 데크가 눈에 띈다. 스치듯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십이선녀탕을 곁눈질이라도 해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어찌 난간에 서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쉽게도 십이선녀탕계곡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북천의 물줄기가 발아래로 흘러갈 따름이다.

 11 : 46. 집단시설지구의 널디너른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2시간 4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이 13.37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빨리 건넌 셈이다. 하지만 먼저 도착한 이들은 벌써 식사가 한창이었다. 아무래도 저들은 달려오다시피 했나보다.

강원도 평화누리길 12코스(양구 펀치볼길)

 

여행일 : ‘23. 10. 8()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일원

여행코스 : 돌산령터널(해안입구)DMZ자생식물원만대리오유리해안면사무소양구통일관후리(백두대간트레일 시점)양구·인제경계453번 지방도 다릿골시험장입구(거리/시간 : 14km, 실제는 만대리부터 다릿골시험장 입구까지 13.31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들머리는 해안입구(양구군 해안면 만대리)

중앙고속도로 춘천 IC에서 내려와 46번 국도를 타고 양구읍까지 온다. 송청교차로(국토중앙면 죽리)에서 31번 국도(양구·해안방면), 임당삼거리(동면 임당리)에서 453번 지방도(해안방면)로 옮기면 돌산령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12코스 시점인 해안입구에 이르게 된다.

 해안면의 입구(돌산령 터널)에서 시작해 양구(해안면)와 인제(서화면)의 경계에 이르는 길이 14km의 구간. 해안면의 산하를 오롯이 횡단한다고 보면 되겠다. 문제는 종점인 양구·인제 경계에 버스가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최소 453번 지방도의 다릿골시험장 입구까지 3.6km를 더 걸을 수밖에 없다.

 실제는 시점(돌산령 터널)에서 3km쯤 떨어진 만대리(萬垈里)’ 마을회관 앞에서 출발했다. 인근 북녘 땅에 들어선 선전마을에 대응하기 위해 주택 20여 채를 지으면서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1972년의 일인데, 전선 방어에 기여하기 위한 재건촌이라고나 할까? 때문에 모두가 북향이었고, 마을 한가운데에는 북쪽에서 항상 볼 수 있도록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기도 했단다.

 만대리는 들녘이 넓어 만호(萬戶)가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동네다. 이는 옛사람들의 이상향이 만들어낸 지명이 아닐까 싶다. 50년대 라때만 해도 한 집에 대여섯의 자녀는 기본. 부모까지 합치면 호()마다 최소 일곱 명(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빼고도)이 된다. 마을 하나에 7()이라니 그게 꿈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10 : 20. 2차선 도로인 만대로를 따라 현리(해안면소재지) 방향으로 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산행대장은 마을회관 앞 샛길로 들어가 평화누리길과 만나라고 했다. 하지만 우린 만대로와 겹치는 ‘DMZ평화의길을 따르기로 했다. 볼거리가 더 많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오늘은 찬이슬이 내린다는 한로(寒露). 아침 공기가 많이 차가워졌고, 더 추워지기 전에 추수를 마쳐야 하는 부지런한 농부는 눈코 뜰 새가 없다. 벼 베기가 끝난 저 들녘이 그 증거라 하겠다.

 불그스레 익어가는 사과도 가을을 재촉한다. 그런데 작고 귀여운 게 우리가 익히 아는 사과와는 많이 다르다. 나도 모르게 능금이란 단어가 툭 튀어나온 이유일 것이다. 어린 시절 달지만 너무 강한 신맛에 얼굴을 잔뜩 찡그려가며 먹던 추억 속의 과일이다.

 가을의 전령이라는 구절초(낙동구절초)도 한 몫을 거든다.

 들녘은 온통 인삼밭에서 세운 차양막을 뒤덮였다(농경지의 60%를 차지한단다). 예로부터 인삼 하면 개성이었다. 한국전쟁 후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가 금산에 자리를 잡더니, 세월이 흘러 다시 북상, 이곳 펀치볼에 새 둥지를 틀었나 보다.

 10 : 28. 가을 풍경에 도취되어 걷다보면 어느덧 만대리 3’. 법정 동리인 만대리의 자연부락(산촌·평촌·내동·운전) 중 하나인데 어느 부락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새마을이라는 마트의 상호가 옛 추억을 소환해 줄 따름...

 버스정류장에는 양구군 관광안내도가 붙어있었다. 그런데 관할 읍·면이 5개뿐이다. 접경지역 지자체들의 일반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10 : 33. 453번 지방도(펀치볼로)로 올라섰다.

 코너에 농산물가공지원센터가 들어서 있었다. 전처리실과 증숙실, 세척실, 포장기 등 시래기 레토르트(retort) 작업을 위한 장비를 갖췄다고 한다. 저 시설을 거처 펀치볼 시래기가 브랜드화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양구군은 시래기 수요 확대를 위해 시래기 순대, 시래기 불고기, 시래기 만두, 시래기 막걸리 등의 개발도 병행한단다.

 ‘DMZ평화의길 이정표는 우리가 ‘28코스를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평화누리길(12코스)에서는 벗어나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해안면소재지에 있는 여러 명소(통일관, 전쟁기념관 등)를 둘러보려고 일부러 ‘DMZ평화의길을 따랐다. 펀치볼 분지의 들녘을 가로지르는 평화누리길은 면소재지를 에두르며 나있기 때문이다.

 10 : 36. 몇 걸음 더 걸으면 오유리(五柳里)’에 이른다. 오리나무가 많다고 해서 오류동 또는 오릿골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운천리(雲川里)를 병합하여 오유리가 되었다.

 펀치볼 하우스라는 브랜드를 쓰는 농가는 펀치볼 시래기의 장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었다. 천혜의 자연조건(깨끗한 땅과 가을철 높은 일교차)에서 길러 높은 하늘 바람에 말려냈다는 것이다. 참고로 식감이 부드러운 시래기는 비타민 B·C와 미네랄, 철분, 칼슘, 식이섬유 등이 풍부해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겨울철 웰빙 식재료다. 그런 시래기를 말리는데 이곳 펀치볼 만한 곳이 없다고 한다. 고산분지 지형으로, 일교차가 크고 바람이 분지 안에서 맴돌기 때문이란다.

 ‘DMZ펀치볼 둘레길’ 4개 노선 중 하나인 평화의 숲길도 이곳을 지나는 모양이다. ‘평화누리길 ‘DMZ평화의길’, ‘DMZ펀치볼 둘레길까지, 펀치볼은 가히 둘레길 세상이라 하겠다.

 10 : 45. 오유 1·2리를 지났다싶으면 해안면 소재지인 현리(縣里)가 마중 나온다. 원래 해안소(亥安所)가 있었던 곳(지명에 자가 들어간 이유가 아닐까 싶다)으로 춘주(춘천)부에 딸려 있다가 조선 세종 6(1424) 양구군으로 이속되었다. 191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자월·상평 등을 병합해 해안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초입에서 만난 해안중학교 앞에는 외솔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옛날 이곳에는 수령이 1,000쯤 되는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 또한 외솔백이였다나? 2005년 새농촌운동을 추진하면서 나무가 있던 자리에 저 쉼터를 조성하고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해안면사무소. 이곳 해안면은 엄격한 통제를 받던 지역이었다. 까다로운 입주심사를 거친 후에도 기본적인 자유가 제한되었다. 1996년 해안면의 출입제한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는 출입증 없이는 오갈 수도 없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시골 면소재지 치고는 꽤 번화한 모습이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숙박업소, 식당, 마트, 상점 등 웬만한 편의시설을 다 들어서 있었다. 참고로 여의도 면적의 여섯 배쯤 되는 해안면은 펀치볼(Punch Bowl)’과 궤를 같이 한다. 미군 종군기자의 눈에 화채를 닮는 그릇으로 보였다는 분지(盆地)가 통째로 해안면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까지 해안(海安)으로 불리던 마을은 뱀이 들끓어 바다 '()'를 돼지 '()'로 바꾸고, 집집마다 뱀과 상극인 돼지를 기르면서 뱀이 사라졌다고 한다.

 시래기·사과 축제의 입점 부스를 모집하는 현수막이 눈길을 끈다. 해안면은 고지대(해발 400-500m)의 분지다. 그러니 고랭지채소가 잘 자랄 것은 당연, 주민들은 실한 가을무에서 수확한 무청으로 시래기를 만든다고 했다. 그게 펀치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우리네 식탁에 올라올 것이고...

 해안면의 인구는 1,200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천주교는 공소가 아닌 본당이 들어서 있었다. 규모도 제법 크다. 가톨릭의 교세가 그만큼 실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메인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중학교를 시작으로 면사무소, 우체국, 119지역대, 파출소, 농협 등을 차례로 지나게 된다. 하나 더, 이곳 해안면은 무주지(無主地)로 골머리를 앓던 곳이다. 전후 입주한 주민들이 고생해서 땅을 일궈도 주인이 나타나면 빼앗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이번에 해결되었다고 한다. 정부에서 감정평가를 실시한 뒤 평가금액에서 개간비를 뺀 나머지 금액으로 토지를 주민들에게 매각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해안재건비(亥安再建碑)’란다. 해안면은 ‘6.25 전쟁 최대의 격전지이다. 70여 년 전, 참혹한 고지전(高地戰)을 치르면서 폐허가 됐던 곳이 새롭게 태어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마을 앞 텃밭은 무가 주인이다. 맞다. 전쟁이 끝난 뒤, 펀치볼 마을로 이주한 사람들은 남겨진 지뢰를 피해가며 척박한 땅을 옥토로 만들었다. 그 밭에서 지금 무와 배추 등이 자란다.

 11 : 01. ‘현리교 앞 이정표. 엉터리니 그냥 지나치기로 하자. 지시대로 가면 엄청나게 돌게 되니 말이다. 우리 일행은 이정표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80m쯤 가다 되돌아왔다.

 다리 건너에는 성황지(城隍池)’가 조성되어 있었다. 인공호수를 파고 호반을 따라 산책코스를 만들었다.

 성황지는 흙탕물 저감을 위한 침사지. 그간 이곳 펀치볼 지역은 한강수계 수질오염의 범인 중 하나로 꼽혀왔다. 강우 때마다 많은 양의 흙탕물이 하천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성황천에 가동보(성황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11 : 08. 몇 걸음 더 걸으면 회전교차로’. ‘DMZ평화의길 2시 방향의 453번 지방도(해안서화로)를 따른다.

 초입에 펀치볼 시래기광장으로 들어가는 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안에는 시래기 오픈갤러리도 조성되어 있단다.

 하지만 보건지소와 복지회관을 양옆에 낀 힐링하우스만 보일 뿐, 특별히 눈에 담을 볼거리는 없었다. 하나 더, 힐링하우스는 외국인 계절노동자를 위한 숙소이다. 타국에 와 열심히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해결하기 위해 건립했단다.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농촌이 유지될 수 없다는 요즘 현실이 반영된 시설이라 하겠다.

 다음은 ‘DMZ펀치볼 둘레길의 안내센터. 국토정중앙 최북단이라는 상징성과 전쟁과 평화에 관련된 주제로 조성한 73.2km의 숲길이다. 4개 코스(평화의숲길·오유밭길·만대벌판길·먼멧재길)로 이루어져 있고, 2021년 지리산둘레길·백두대간트레일·대관령숲길과 함께 국가숲길로 지정됐다.

 하나 더, 이 길은 민간인 출입통제지역 안에 조성된 숲길로, 미확인 지뢰지역과 인접하기 때문에 반드시 안전문제 동의서 작성 및 숲길등산지도사의 동반과 안내에 따라야 한다. 또한 1 2, 하루 200(선착순, 2인 이상)만 탐방 허용하고, 단체 예약은 전화 상담 우선, 숲밥 신청은 일주일 전 전화 예약이 필수이다.

 평화의 길 표지석. 이곳 펀치볼 분지가 천지(天地 : 하늘과 땅)를 품었고, 천지(天池 : 백두산 산정에 있는 자연 호수)를 닮았단다.

 11 : 15. 진열된 무기를 기웃거리다 전투전적비를 만났다. 도솔산지구와 펀치볼지구 전투를 함께 기념한단다. 맞다. 이곳 양구는 6·25전쟁 당시 동북방 최대 격전지였다. 전쟁 전에는 북한 지역이었으나 국군과 연합군이 38선을 돌파하면서 비로소 자유 대한민국 품으로 편입됐다. 국군은 양구지구 9개 전투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여 연전연승을 거뒀는데, 특히 해안은 도솔산·대우산·가칠봉·펀치볼 등 4개 전투가 벌어졌을 정도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도솔산지구전투(6.4-6.20)는 귀신 잡는 무적해병 신화를 창조했다. 미 해병대가 성공하지 못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를 우리 해병대가 교체 투입돼 탈환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도솔산을 방문해 목숨을 걸고 고지를 탈환한 해병대에 무적해병이라고 쓴 친필 휘호를 하사했다. 펀치볼지구전투(8.31-9.20)는 한미 해병대가 휴전회담이 제기된 이후 전투력을 재정비한 북한군2군단을 격퇴하면서 펀치볼과 주변 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전투다.

 11 : 19. 이어서 양구통일관이 길손을 맞는다. 통일에 대비하여 국민에게 북한 실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통일의지를 고취시키는 등 통일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한 시설이다. 평화지역 국가지질공원 사무실과 을지전망대·4땅굴의 매표소도 같은 건물에 들어서 있었다.

 을지전망대·4땅굴의 매표소는 휴관이란다. 관련 자료라도 얻을까 해서 들어가니 뜬금없다(휴관 중인데 왜 들어왔냐는 듯)는 얼굴로 직원이 맞는다. 자료도 청춘양구라는 양구군의 관광용 팸플릿이 전부였다.

 통일전시관은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통일교육을 강화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건전한 안보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내가 본 전시관은 20%쯤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북한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생활용품과 수출품, 사진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네 60-70년대 것들이라고나 할까? 실제로 그런지가 궁금해 전시관에 대한 팸플릿이 있는가 물어봤지만 없다는 대답이다. 그럼 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남북관계의 현실은 물론이고, 그동안의 정책 변화 등도 알리고 있었다.

 윤석열 정부의 통일·대북 정책도 소개하고 있었다. 이를 강조하고 싶었음인지 사진까지 첨부했다. 통일정책은 그동안 몇 차례 큰 변화를 거쳤다. 당시 변화의 중심에 있던 대통령들의 사진도 함께 게시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북한말 따라잡기, 북한 그림 짝 맞추기 등의 체험공간도 만들어져 있었다.

 통일관 앞의 그리팅맨(greeting man)은 오늘도 고개 숙여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사한다. 유영호 작가의 작품이라는데, 그는 2011년 지구 반대편인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를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15도로 고개 숙인 초대형 알루미늄 조각상 그리팅맨을 설치해 왔다. 그리팅맨은 문화와 인종, 시간을 초월해 인사를 건네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단다.

 11 : 25. 양구전쟁기념관은 9개 전투를 상징하는 기둥(상징탑)을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공사가 한창이라며 금줄을 쳐놓았기 때문이다. 2000년 개관한 양구전쟁기념관은 한국전쟁 때 치열한 격전을 벌인 양구지역의 9개 전투(도솔산·피의능선·펀치볼·백석산·가칠봉·대우산·크리스마스고지·949고지·단장의능선)의 전쟁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건립했다.

 기념관은 9개의 전시 공간으로 나누어졌다고 한다. 전쟁 발발부터 휴전협정까지의 과정 설명·전사자 명단과 함께 참전 군인들의 개인 유품·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고, 도솔산전투 디오라마·영상실·생존자 증언코너 등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통일관 광장에는 ‘DMZ평화의길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28코스의 종점이자 29코스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11 : 28-44 : 전쟁기념관 우측에 있는 ‘DMZ조이나믹 체험관은 놀이형 체험시설이라고 한다. 트렘펄린, 모험놀이, 터널놀이, 네트 놀이대, 조합 놀이대, 곡선형 짚와이어 등의 체험시설을 갖췄단다.

 준비해 온 간식으로 요기를 때운 뒤, 다시 길을 떠난다. ‘평화의길은 체험관 앞 광장을 가로지른다. 이어서 산비탈에 기대놓은 데크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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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44. 하지만 하시라도 빨리 평화누리길과 만나고 싶었던 우린 계속해서 453번 지방도를 따르기로 했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도열해 있는 길은 한마디로 예뻤다. 샛노란 옷으로 갈아입는 가을이면 또 하나의 눈요깃거리가 되겠다.

 길가 벌통은 지극히 한산하다. 벌들도 가을준비를 마치고 휴식기에 들어 갔나보다.

 해안면의 쥬키니 호박은 철이 가는지도 모르나보다. 한로가 지났는데도 튼실한 열매를 키워내고 있었다. 최근 양구상회의 호박찐빵이 입소문을 타고 있던데...

 12 : 01. 그렇게 16분쯤 걸으면 작은 공원이 있는 삼거리’. 평화누리길은 이곳에서 지방도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임도를 따라 산자락으로 들어간다. ! 오는 도중 우측에서 오는 만대벌판길과 평화누리길을 만나기도 했다. ! 산행대장 말로는 지방도를 따라가도 된다고 했다. 조금 멀기는 하지만...

 이곳에도 토사유출을 저감시키기 위한 인공호수가 만들어져 있었다. 만대천을 막아 침사지를 만들고, 그 주위에 산책로를 조성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아까 조이나믹체험장에서 헤어졌던 ‘DMZ평화의길이 다시 합쳐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나 더, 체력을 감안해야 한다며 간식도 거른 채 조이나믹체험장을 지나쳤던 80대 노익장 도반을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15분이나 쉬다가 온 우리보다도 더 늦게 도착했다함은 그만큼 에둘러 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12 : 09-18. 침사지 호반을 따라 내놓은 산책로. 신경 써서 조성한 것 같으나. 내가 보기엔 10%쯤 부족한 듯. 쉬어갈 수 있는 벤치가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이곳에서 평화의길로 진행하신 도반도 기다릴 겸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그것! 당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입니까?’ 경고판의 문구가 심상치가 않다. 미확인 지뢰와 불발탄이 산재한 곳이니 산나물 채취나 동식물 포획, 불법 개간 등을 한답시고 철조망을 넘지 말라는 것이다.

 백두대간트레일 안내판도 눈에 띈다. 후리(後里) 시점에서 논장교까지의 1구간(평화염원길, 21km)이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참고로 백두대간트레일은 양구 후리에서 홍천 불발령까지 총 10개 코스 159.5km로 조성돼 있다. 2021년 산림생태적·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숲길로 지정됐다.

 물골교로 만대천을 건넌다. 펀치볼(해안면 분지)에 떨어지는 빗물은 모두 저 물길을 따라 인북천으로 빠져나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물골이라 부른다.

 12 : 25. 150m쯤 더 걸었을까(물골교에서) 또 하나의 삼거리가 나온다. 평화누리길 종합안내판과 위험지구임을 알리는 경고판 등 번거로울 정도로 많은 안내판들이 이곳이 중요 기점임을 알려준다. 이정표도 평화누리길(인제 경계 2.5km/ 돌산령 8.5km) DMZ평화의길, 백두대간트레일 등 3개나 세워놓았다. 하나 더, 이 구간은 ‘DMZ펀치볼둘레길  먼멧재길과도 겹친다고 했다.

 왼쪽으로 올라서서 숲길을 탄다. 울창한 숲속을 구불구불한 임도가 헤집으며 지나간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길 양옆으로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그 철조망에 걸린 지뢰 표지판은 이곳 해안면에 미확인 지뢰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음을 나타낸다.

 12 : 30. 차단기(이정표 : 인제군경계 2.0km/ 돌산령 9.0km)가 차량은 출입 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엄중함을 알리려는 듯 초소도 세워놓았다. 군사시설보호지역, 지뢰 매설지역 등을 알리는 경고판도 서너 개나 된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산림유전자원보호지역’. 신갈·찰피·들메나무 등 희귀식물 자생지이자 유용식물 원생지라고 한다.

 길은 미확인 지뢰로 뒤덮인 지역을 헤집으며 나있는 모양새다. 덕분에 길 주변은 희귀 동식물의 낙원이 되었단다. 천연기념물 금강초롱을 비롯한 희귀식물과 산양·독수리·하늘다람쥐 등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12 : 40. 걷기 여행자들에 대한 지자체의 배려도 돋보인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오르막길임은 분명하니 쉬엄쉬엄 가라는 듯 정자를 지어놓았다.

 차량 한 대가 겨우 갈 수 있는 비포장 길은 구불구불 나있다. 구절양장 같은 이 길은 쉽게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길을 일러 인제로 넘나들던 해안 주민들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했다.

 자연석으로 만든 도로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상황이 바뀔 때 천천히라는 글씨나 화살표로 나타난다. 시쳇말로 라때는 표지판이 다 저랬는데...

 13 : 00. 두 번째 정자. 준비해 온 간식이라도 먹으라는 듯 식탁까지 놓아두었다.

 이 뭣꼬?’ 드럼통을 방호벽처럼 쌓아올렸다. 그것도 겹으로. 아무러면 어떤가. 삭막한 드럼통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예쁜 들국화를 피워 올렸다.

 13 : 02. 잠시 후 만난 사거리. 인제군과 양구군의 군계(郡界)란다. 좌우로 나뉘는 임도(평화누리길은 왼쪽 임도를 따른다) 외에도 맞은편 산자락을 치고 오르는 산길이 하나 더 나있다. 펀치볼둘레길의 먼멧재길이다.

 이정표(양구·인제 경계/ 돌산령 11.0km)의 방향표시가 없는 지명이 이곳이 두 지자체의 경계임을 알려준다.

 먼멧재길 이정표는 이곳을 숲밥 쉼터로 적고 있었다. 펀치볼의 자랑거리로 입소문을 탄 숲밥은 지역민이 재배하고, 정성껏 준비한 다양한 산채 음식 등을 탐방객이 있는 숲길까지 찾아가서 뷔페식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로, KBS ‘한국인의 밥상에서 강원도의 맛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지역특산물인 시레기·인삼·머위·우산나물·두릅 등 10여 가지의 찬이 제공되는데, 탐방 일주일 전 신청하면 주민들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시간에 맞춰 갖다 준다고 했다. 하나 더, 20인분 이상만 가능하기 때문에 개인 여행에서는 맛볼 수 없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평화누리길 12코스인 펀치볼길은 이곳 양구·인제 경계에서 끝을 맺는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13코스인 서화길을 따른다.

 13 : 20. 먼멧재(멧돼지가 많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 삼거리에 이른다. ‘DMZ평화의길 접경권 평화누리길의 안내판들이 이곳이 중요 기점임을 짐작케 해준다, 이정표도 평화누리길(원통 36km/ 군시설/ 양구 1km)과 백두대간트레일(양구 후리 3.5km/ 홍천 광원리 109.5km)에서 따로 세웠다.

 대암산으로 가는 임도는 자바라 문을 쳐놓았다. 이정표는 그 쪽에 군사시설이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출입을 통제하던 초소는 군인들이 떠난 지 이미 오래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요즘은 핵심 시설만 출입을 통제하고 있나보다.

 평화누리길 12·13코스의 경계는 인제·양구 경계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안내판(13코스인 서화길) 1km쯤 더 걸어야 하는 이곳 먼멧재 삼거리에 세워져 있었다. 이유가 뭘까?

 이후부터는 숲길이 아닌 시멘트포장 임도가 이어진다. 길 중간 중간에 평화누리길 안내판 서있고 자전거도로 표시와 시그널도 보인다.

 지자체도 그늘 하나 없는 딱딱한 시멘트길이 미안했던 모양이다. 중간에 파고라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하지만 내리막이라서 조금도 부담이 없다. 그저 진행방향에 펼쳐지는 백두대간(설악산 구간) 능선을 볼거리삼아 걸으면 된다.

 13 : 53. 다릿골시험장(국방기술품질원) 진입로가 갈려나가는 지점에도 자바라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8분 전쯤 사격장 입구에서도 자바라 문을 만났었다). 문 앞에는 라이더들을 위한 쉼터도 마련했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자전거를 둘러메고 옆으로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겠다.

 길가 빗돌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새겼다. 박정희 대통령이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던 사자성어다. 뒷면은 초전필승(初戰必勝, ‘라때는 초전박살이라 했던 것 같은데)을 넣어 군에서 만든 것이란 걸 입증시킨다.

 도로를 폐쇄하겠다는 공고문. 도로를 내면서 사유지가 들어간 모양인데 보상이 안 됐나 보다. 라이더들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14 : 15. 인북천에 놓인 다리(후평교)를 건넌다.

 인북천(麟北川, 인제의 북쪽에 있다는 뜻)은 가까이는 해안면(펀치볼), 멀리는 백두대간의 향로봉, 무산봉을 지난 도솔지맥 분기봉인 북한의 매자봉 1174m에서 내려온 물길이다. 이 물은 소양강과 한강을 거쳐 서해로 흘러든다.

 14 : 17. 잠시 후 453번 지방도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초입에 다릿골시험장의 입구임을 알리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3.31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해안면소재지의 통일관련 시설물 등 볼거리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도로변의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쉬운 길(지방도 이용)과 어려운 길(우리가 걸어온 길)로 나누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을 경우 3.78km쯤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는 점을 적었다.

강원도 평화누리길 11코스(양구 돌산령길)

 

여행일 : ‘23. 9. 17()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동면 및 해안면 일원

여행코스 : 팔랑리대암산용늪 탐방안내소도솔산 전적지돌산령 정상해안입구(거리/시간 : 16km, 실제는 대암산 용늪 탐방안내소부터 10.7km를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들머리는 월운저수지 상부(양구군 동면 월운리)

중앙고속도로 춘천 IC에서 내려와 46번 국도를 타고 양구읍까지 온다. 송청교차로(국토중앙면 죽리)에서 31번 국도(양구·해안방면)로 옮겨 금강산 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월운저수지에 이른다. 댐의 상부에 평화누리길  ‘DMZ평화의 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팔랑리(양구군 동면)에서 시작해 해안입구(양구군 해안면)에 이르는 16km짜리 구간. 하지만 팔랑리의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서해랑길 같은 공식적인 트랙이 없음은 물론이고 선답자들의 기록도 중구난방. ‘가톨릭 팔랑리공소를 기점으로 삼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곳 월운저수지(같은 동면이지만 월운리)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아무튼 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대암산 용늪 탐방안내소 앞에서 출발하는 꼼수를 사용했다.

 평화누리길은 자전거 길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우리 같은 걷기 여행자들은 들러리인 셈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평화누리길보다 새로 개통되는 ‘DMZ평화의 길을 걸어보면 어떨까? 미 개통구간은 조금 더 기다렸다가 걸으면 될 것이고 말이다.

 이 구간은 ‘DMZ평화의 길(27코스)’도 함께 간다. 평화누리길(강원도 11코스)과 종점만 다를 뿐 시점은 같기 때문이다. 아니 월운저수지 구간은 두 탐방로가 약간 다르게 나있다고 했다.

 일단은 도로 건너에 있는 피의 능선 전투전적비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의 무한책임임과 동시에 우리네 후손들이 짊어져야 할 의무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피의능선 전투(Battle of Bloody Ridge)’ 1951 8 16일부터 9 5일까지(20일간) 벌어진 전투다.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 중 하나였던 이 전투를 기억하고, 희생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전적비를 세웠다.

 피의능선 전투는 국군이 휴전회담을 진척시키는 동시에 휴전에 대비하여 중요한 요충지(캔사스선 북방 10~20km 지역에 위치한 수리봉 일대)들을 확보하기 위해 실시한 공격작전이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의 1개 연대 규모, 그리고 북한군 1개 사단 규모의 사상자(1,480여 명이 사살되고 70여 명이 생포)가 발생하자 미군 신문(Stars and Stripes) 피의능선 전투라 이름 지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북한군은 펀치볼 북쪽 능선으로 물러난다.

 실제는 대암산 용늪 탐방안내소 앞에서 출발했다. ‘돌산령 옛 고갯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출발할까도 했지만, 경사만 가파를 뿐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생략했다. 특히 쉼터용 정자에 화장실까지 갖추었으니 출발지점으로 이만한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참고로 대암산의 1,280m 구릉지대에 형성된 용늪은 북방계와 남방계 식물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남한에서 처음 발견된 고층습원(高層濕原)으로 다양한 지연환경과 동·식물을 갖고 있어 1989년 자연생태계 보전지역, 1997년에는 국내 최초로 람사르 조약의 습지로 등록되었다.

 용늪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탓에 일정 기간에 제한된 인원에게만 탐방을 허용한다. 탐방안내소는 이곳 말고도 인제군의 서흥리(10년 전 내가 이용했던 곳이다)와 가아리가 있다. 아무튼 민간통제선 안에 자리 잡고 있어 군의 통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 저처럼 문이 굳게 닫혀있는 이유일 것이다.

 10 : 14. 돌산령 옛 고갯길(돌산령 터널이 생기기 전 양구에서 해안으로 갈 때 이용하던 지방도)을 올라가며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 구간(12.34km)은 갓길이 따로 없는 왕복 2차선 도로다. 산자락 쪽으로 파란 선을 그어 자전거 길을 구분하고 있으나 안전 확보는 라이더(보행자 포함)의 몫이다.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정표는 돌산령 정상까지 4.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11코스가 시작되는 팔랑리까지는 5km. 딱 그만큼 단축했다고 보면 되겠다.

 돌산령 정상까지는 400m 이상 고도를 높여야 한다. 하지만 길은 경사를 거의 못 느낄 정도로 평탄하다. 하긴 5km를 걸으며 400m만 높이면 되니 서두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몸이 편하면 마음까지도 여유로워지나 보다. 심심찮게 변하는 주변풍광에 눈 맞추며 걸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 절개지의 비탈진 사면에 박아놓은 락볼트(soil nailing공법). 도로개설 당시의 어려움을 대변해준다.

 길가 산비탈은 산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초여름에는 흰색의 화려한 꽃으로, 가을에는 붉게 익은 열매로 우리를 사로잡는 나무다. 그 열매가 딸기와 비슷하게 생겨서 산딸나무라 부른다. 그나저나 붉고 고운 열매가 군침을 돌게 해 따먹어 봤다. 하지만 약간 달달할 뿐 즐겨 찾을만한 과일은 아닌 것 같다.

 10 : 31. 첫 번째 쉼터(이정표 : 정상까지 3.9km)에 닿았다. 오르막길을 힘들게 올라온 이들에 대한 배려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자전거 거치대는 기본. 파고라 모양으로 만든 쉼터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지붕까지 씌웠다. 전천후인 셈이다. 그나저나 쉼터라고 해서 꼭 쉬었다 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쉼터는 있는 자체로만으로도 나그네에게 기쁨을 준다.

 옛 고갯길은 군인 통제 하에 있다고 봐야겠다. 길 양쪽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는 것은 기본. 도로도 순찰차량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다. 길섶에 핀 야생화를 촬영하는 중인데, 순식간에 차량이 나타나더니 도로를 벗어나지 말라는 경고를 내릴 정도였다.

 갖가지 경고용 현수막도 이 구간의 특징 중 하나다. 민통선 이북의 군사시설보호지역이라서 무단출입 및 채집·영농활동을 금지한단다.

 순찰차의 말마따나 철조망을 넘어서는 안 된다. 이 울타리는 또 북한에서 넘어오는 ASF(아프리카 돼지열병) 감염 멧돼지의 차단막까지 겸하고 있나보다.

 무단출입은 물론이고 사진촬영까지 금지한단다. 전적지를 안내해주던 병사는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으니 카메라나 핸드폰은 꺼내지도 말라며 겁을 주고 있었다.

 그나마 이건 부탁에 가깝다. 천연기념물 217호인 산양의 주요서식지이니 아끼고 보호해주잔다.

 가끔가다 허락되지만 조망 또한 주요 볼거리다. DMZ 방향의 산하가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지대가 높아서인지 운해로 뒤덮여 있었다.

 올 여름, 무섭게 쏟아지던 빗줄기는 이곳에도 많은 상처를 남겼다. 산사태가 도로를 덮친 곳에서는 위험을 무릅쓴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도로가 유실되다시피 한 곳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가끔은 저런 급경사 구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1,050m(돌산령 정상)까지 고도를 높여야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맞다. ‘DMZ평화의 길(27코스)’ 안내판은 이 구간을 물리적 난이도가 높다고 적고 있었다.

 10 : 55. 24분쯤 더 걸어 두 번째 쉼터를 만났다. 이정표는 정상까지 2.2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돌산령 고갯길 ·구도로가 나뉘는 삼거리에서 정상까지의 거리가 6km라고 했으니 대략 2km마다 쉼터를 만들어놓은 셈이다.

 돌산령 인근은 ‘DMZ 야생화벨트 사업이 시행된 모양이다. 청사초·김의털·비비추·꿀풀·기린초 등을 심고, 흰민들레·질경이·구절초·벌개미취 등은 씨앗을 뿌렸단다. 시간이 흐르면 동아시아 그린브릿지 연결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은 몰라도 야생화를 구경하려는 관광객들은 많이 찾아오겠다.

 이 지역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주목·분비·거제수 등을 보호하고 있단다.

 안내판에 이끌려 카메라의 초점을 야생화에 맞춰본다. 가장 먼저 잡힌 것은 개미취’. ‘들국화라 부르는 국화과 꽃의 얼굴마담이다. 참고로 들국화란 산국·감국·쑥부쟁이·개미취·구절초 등등 산과 들에 피는 국화과의 꽃들을 싸잡아 부르는 이름이다.

 생김새가 조금 다르나 이것 역시 개미취.

 요건 구절초’, 세분류하면 낙동구철초란다. 모 대학 도예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여사친 산우가 심심찮게 보내주는 차의 원료이기도 하다. 가끔 이 차를 마시는데 은은한 노란빛이 우려난 차색도 곱지만 향도 정말 일품이다. 향긋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다 되지 않을 정도로...

 블루 마거리트(Blue Marguerite)로도 불리는 블루데이지(Blue Daisy)’이다. 한국 이름은 청화국이라나?

 백공작이라고도 불리는 미국쑥부쟁이. 싸잡아서 들국화로 부르는 국화과의 꽃들은 종류도 많다. 꽃의 생김새도 구분이 불가능 할 정도로 비슷비슷하다. 작은 꽃들이 총총하게 피는 미국쑥부쟁이가 유일하게 뚜렷한 차이점을 본인다고나 할까?

 작약, 당귀, 황기, 지황과 더불어 5대 기본 한방 약재 중 하나로 꼽히는 천궁도 꽃을 활짝 피웠다.

 야산에서 피는 구절초나 개미취와는 달리 심산이나 고원에서나 만날 수 있는 체꽃(스카비오사)’도 눈에 띈다. 꽃봉오리의 모양이 구멍 뚫린 체를 닮았다고 해서 체꽃이란 이름을 얻었다. 스카비오사(Scabiosa) 이란 뜻의 라틴어, 이 꽃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11 : 29: 굽이굽이 돌산령길을 돌아올라 도솔산전적지 입구에 이른다. 하지만 군인들이 딱 막고 섰다. 그들의 안내를 받아야만 탐방이 가능하단다. 말이 안내지 전적지를 둘러싼 울타리를 넘을 것을 대비한 경계가 아닐까 싶다.

 도솔산 전적지의 입구임을 알리는 빗돌. 붉은 글씨로 적힌 무적 해병이 눈길을 끈다. 도솔산 전투의 승리를 치하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내려준 휘호라고 한다. 한편 도솔산 전투를 기리는 도솔산가라는 군가가 제정되기도 했단다.

 도솔산(兜率山, 1,148m)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도 도솔산 전적지를 가리킨다. 전적지 뒤로 길이 나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완주하면 담낭이 튼튼해진다는 양구 십년장생 길(4년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도솔산과 대암산 정상을 거쳐 양구생태식물원으로 떨어지는 4코스란다. 하지만 민통선 안이라서 통행은 불가. 길은 길이나 걷지 못하는 길인 셈이다.

 11 : 34. 전적지는 꽤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위령비를 중심으로 한때 해병대의 주력 상륙장비로 사용되던 수륙양용장갑차. 그리고 비목을 연상시키는 나무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다.

 도솔산지구전투 6·25전쟁 당시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북한 공산군 제5군단 예하의 제12사단 및 제32사단이 점령 중이었던 도솔산(1,148m)을 혈전 끝에 탈환한 전투를 말한다. 첫 공격은 1951 6 4일 시작됐다. 그리고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면 적의 공격을 받아 다시 빼앗기고, 또 빼앗는 가운데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던 24개 목표 고지를 6 19일 완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2,263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으며, 아군 또한 7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산악전 사상 유례 없는 대공방전으로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평화나무·생명나무가 눈길을 끈다. DMZ을 횡단하는 평화·생명지내 체험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는데, ‘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열고, 평화의 들판에 통일의 집을 짓는다.’는 어느 단체의 홍보문구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위령비는 나무 장승들이 지키고 있었다.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그날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양구군 각 면에서 만든 것들이란다. 하지만 난 6.25 전쟁 당시 스러져간 무명용사들의 돌무덤과 철모가 올려진 비목(碑木)을 연상한다. 저 위령비가 그리 만들었을 것이다.

 전적지에서의 조망도 뛰어난 편이다. 아까 고갯길을 올라오면서 바라보던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아니 높아진 고도만큼이나 시야도 넓어졌다.

 되돌아 나오는 길.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돌산령 정상이 고개를 내민다. 돌산령 정상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사진촬영이 금지된다.

 11 : 50. 돌산령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정상을 묘사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군부대가 나오지 않도록 도로만 카메라에 담는다.

 이곳이 돌산령의 정상이라는 표식은 일절 눈에 띄지 않았다. 그 흔한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이곳의 해발(1,050m, 내 앱은 980m를 찍고 있었다)을 적은 표지판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헬기장 너머로 보이는 저 봉우리가 도솔산(兜率山, 1,148m)’이 아닐까 싶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산, 때문에 웬만한 국내의 산을 다 올라봤지만 도솔산은 아직도 미답의 산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그 왼쪽에 있는 산의 정체는 뭘까. 도솔산보다 한참이나 더 높고, 망루까지 설치되어 있는데...

 몇 걸음 더 걷자 길이 나뉜다. 평화누리길은 계속해서 도로(돌산령 옛 고갯길)을 따른다. 왼쪽은 군의 관측기지인  ‘OP(observation post)'로 연결되니 진입하면 안된다.

▼ 왼쪽으로 가면 호국 도솔암이 나온단다. 한국전쟁 당시 여섯 번이나 주인이 바뀐 격전지 가칠봉이 인접한 최전방 군법당이다. 해발 1,070미터에 위치해 설악산 봉정암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절이란다.

 11 : 56  12 : 21. 세 번째 쉼터에 이른다. 널찍한 공간에 전망까지 좋아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우리도 준비해간 간식을 서로 나누며 여유롭게 머물다 갔음은 물론이다.

 판박이로 만들어놓았던 아까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많은 이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공간도 넓히고 벤치도 여럿 배치했다. 그래선지 많은 이들이 이곳을 전망대로 분류하고 있었다.

 발아래로 펀치볼(Punch Bowl)’이 펼쳐진다. 아니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고산준령이 기다랗게 펼쳐지는가 하면 그 봉우리들을 운해가 감싸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양구 제일의 전망대 중 하나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참고로 펀치볼은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분지를 둘러싼 모습이 화채 그릇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펀치볼 평화누리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2주 후에 걷게 될 12코스(양구 펀치볼길)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평화누리길은 공식적인 지도가 없어 답사를 위한 준비나, 답사 후 기록을 남길 때 애로가 많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전형적인 가을 풍경을 연출한다.

 12 : 33. 네 번째 쉼터에 다다른다.

 건너편에는 대암샘터라는 약수터가 있었다. 사시사철 가뭄을 타지 않는 샘이라니 돌산령 고갯마루를 넘어온 라이더나 트레커들에게 감로수가 되어주기 충분하겠다.

 그렇다고 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꺼비 조형물의 입에 파이프를 박아 물이 흘러나오게 하고 있었다.

 길은 굽이굽이 내리막의 연속이다. 그런 길을 걷다보면 요런 대전차 방어시설도 만나게 된다. 돌산령 옛길이 군사요충지라는 얘기일 것이다.

 13 : 10. 다섯 번째 쉼터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계곡 쉼터를 만난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는 게 아닌가. 산림청의 입산금지 팻말과 지정된 장소 외의 출입을 금한다는 군부대장의 서슬 퍼런 경고판도 세워져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 자물쇠를 채워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안에는 ‘DMZ펀치볼 둘레길 탐방객들이 자연을 벗 삼아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출입이 허용된 공간이라는 얘기다.

 작은 폭포가 겹겹이 쌓여있는 계곡은 머물다가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아니 족탕이나 알탕을 즐기기에도 이만한 곳이 없겠다.

 맞은편, 길 건너에 있는 야생화공원은 완벽하게 막혀있었다.

 오유밭길은 해안면의 ‘DMZ펀치볼 둘레길 4개의 노선(평화의길·오유밭길·만대벌판길·먼멧재길) 중 하나다. 바람꽃·노루귀·얼레지·제비꽃 등 북방계 야생화를 관찰할 수 있고, 전쟁의 흔적을 통해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진입로는 열쇠를 채워 출입을 막고 있었다. 안내판은 그 이유를 적었다. 곳곳에 미확인 지뢰가 있으므로 숲길 등산지도사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등산지도사를 대동할 때만 문이 개방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13 : 30. 20분쯤 더 걸으면 453번 지방도에 내려서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첨부된 지도에 해안입구로 표시된 지점이다. 오늘은 3시간을 걸었다. 앱에 10.70km가 찍혀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해발 1,050m의 돌산령 고갯마루를 넘는 게 만만찮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정표(해안면 4.9km/ 돌산령 정상 5.1km)는 지나왔거나 가야할 곳의 지명과 거리만 표시하고 있을 뿐,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11코스(양구 돌산령길)의 종점으로 알고 있는 내 앎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종점 오른편은 돌산령터널이다. 저 직선코스를 놓아두고 만산령 옛 고갯길을 에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