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산(飛鳳山, 372m) - 태봉산(248m)

 

산 행 일 : ‘23. 12. 9()

소 재 지 : 경기도 안성시(죽산면·삼죽면) 용인시(처인구 백암면) 경계

산행코스 : 산행코스 : 하삼마을(빌라)석조삼존불상능선태봉산비봉산죽주산성미륵당봉업사지죽산버스터미널(소요시간 : 8.66km/ 3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안성시(삼죽면·죽산면)과 용인시(처인구 백암면)의 경계에 놓여있는 산이다.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하지만 산이 품고 있는 유적들을 포함하면 상황은 확 달라진다. 죽주산성은 물론이고 수많은 미륵불과 석탑들이 산을 둘러싸고 있다. 하나 더. 사람들은 안성을 일러 안성맞춤이라고들 한다. 광해군 때 대동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안성의 맞춤형 유기가 인기를 끌면서 생겨난 말이다. 하지만 안성을 미륵불(彌勒佛)의 고장이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만큼 석불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번 비봉산 산행은 산행보다, 그 산이 품고 있는 여러 미륵불과 석탑의 답사가 주제가 되어 버렸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나 할까?

 

 산행들머리는 하삼마을 빌라(안성시 죽산면 두현리 : 하금길 42)

중부고속도로 일죽 IC에서 내려와 38번 국도를 타고 안성방면으로 내려오다 두현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잠시 후 하삼마을 버스정류장에 이른다. 정류장 맞은편 골목(하삼길)으로 들어가 첫 번째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5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하얀색 빌라(3)가 보인다. 참고로 우리는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죽산까지 온 다음, 택시를 이용해 이곳으로 왔다.

 지도(청색 선)처럼 진행했다. 관음당에서 출발 태봉산·비봉산·죽산산성을 오른 다음 도로를 따라 (죽산)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다. 도중에 석불과 석탑 등 문화재들을 둘러봤다.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해 죽산향교를 빼먹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 문화재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빌라 오른쪽 공터에 두현리 석조삼존불상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안성시 향토유적(40)에 불과하지만, 불상을 보호각 안에 모셔놓는 등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마을주민 말로는 불상을 자신들이 보살핀다고 했다. 수시로 청소를 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불상 주변은 먼지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갈했다.

 불상은 마애불과 비슷한 형식으로 바위 면을 다듬어 세 분의 부처를 배치하여 좌우의 협시가 본존불을 모시고 있는 형태이다. 바위에 조각되었던 것을 떼어낸 듯이 보이는 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정확한 장소는 불분명하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불상은 세밀한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가 심했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안내문을 참조하시길...

 11 : 28. 빌라 뒤편 산비탈을 치고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정규 탐방로는 아니지만 능선으로 치고 오르는 지름길이라선지 희미하게나마 길이 나있었다.

 길의 형편은 썩 좋지 않았다. 가파른 경사에 낙엽까지 수북이 쌓여 미끄럽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11 : 42. 개척 산행을 하다시피 해가며 능선에 올라섰다. 그러자 정규 탐방로가 또렷이 나타난다. 죽산교회에서 올라오는 길이라고 한다.

 11 : 46. 잠시 후 안부로 내려선다. 3개의 고갯길이 시작된다는 아랫새 고개인 듯. 왼쪽으로 제법 또렷한 길이 나있다. ‘위키백과는 안성으로 가는 녹배고개와 삼죽면을 거쳐 백암으로 이어지는 뒤통말고개, 서낭당고개 등이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적고 있었다.

 경제림 조성을 위한 벌목 덕분에 시야가 툭 터진다. 죽산 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고층건물들이 울쑥불쑥 솟아올랐다. 하나 더. 지도는 요 아래를 관음당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옛날 죽산에 문()이 만()개나 되는 봉업사(奉業寺)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절의 관음당(觀音堂)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지금 오르고 있는 태봉산은 높이라고 해봐야 248m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명색이 산인데 어찌 가파른 곳 하나 없겠는가. 산길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가파름을 더해간다.

 그러다가 정상에 가까워지면서는 버겁다싶을 정도로 가팔라진다. 지자체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길가에 밧줄까지 매달아놓았다.

 12 : 06.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태봉산 정상에 올라섰다. 웃자란 잡목에 둘러싸인 정상은 정상표지석과 돌탑이 지키고 있었다. 육산의 특징대로 특별한 볼거리가 없고,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하나 더. ‘태봉(胎封)’이란 지명은 왕족의 태()를 묻었다()는 데서 유래된 게 보통이다. 태실(胎室)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산은 어디서도 그런 내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표지기가 반갑다. 배창랑과 그 일행, 산여울(김명근), 맑음 등등... 산행보다는 트레킹으로 방향을 바꾼 지 벌써 5~6, 그네들은 여전히 산을 오른다. 그리고 세상의 산들을 다 올랐음일까? 어쩌다 오른, 그것도 동네 뒷산에 불과한데도 어김없이 그네들의 표지기가 휘날린다.

 다음은 비봉산이다. 북쪽 능선을 따라 100m쯤 걸으면 삼거리. ‘하삼 사거리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비봉산 정상 1.0km/ 구교동 0.5km/ 태봉산 0.1km)는 오른쪽이 구교동(죽산리)’에서 올라오는 길임을 알려준다.

 12 : 18. 능선을 따라 잠시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다. 하지만 나뭇가지에 매달린 리본이 이곳에서 영남길이 합쳐짐을 알려준다. ‘영남길 6(삼남·의주·영남·평해·경흥·강화)로 구성된 경기옛길 중 하나로 경기도와 충청도를 잇는 역사문화탐방로이다. 경기도에서는 비봉산 자락에 죽주산성 길이란 산책로를 내면서 화려한 고려문화의 향기라는 미사여구로 첨언을 하고 있었다.

 길은 무척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12 : 22. ‘서낭당고개(이정표에는 뒷통말고개로 적혀있다.)’로 여겨지는 안부사거리로 내려선다. 이정표(비봉산 0.5km/ 죽산면사무소 1.4km/ 삼죽면 내장리 0.5km/ 두현리 하삼 1.2km)는 이 고개가 죽산면과 삼죽면을 이어주고 있음을 알려준다.

 고개를 기점으로 길의 형편이 확 달라진다. 폭이 넓어졌을 뿐만 아니라 가로등을 설치해 야간 등반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국도가 고속도로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쉼터를 겸해 벤치를 놓아두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암자 주변 풍경이 아닌가요?’ 함께 걷던 최군의 넋두리다. 맞다. 마을이나 암자 주변에서나 볼 법한 산죽군락이 비봉산의 정상 어림에 분포되어 있었다. 작고 연한 잎새가 이른 봄 덖어서 차라도 만들어 마시면 딱 좋겠다.

 12 : 40  13 : 30.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5(태봉산에서 35). 비봉산 정상에 올라선다. 분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널찍한 정상은 정상표지석과 돌탑이 지키고 있었다. 왕벚나무와 산벚나무 그늘 아래 벤치와 운동기구까지 배치한 걸 보면 인근 주민들이 자주 올라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식탁용 테이블은 등산객 차지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 온 간식을 먹으며 한 시간 가까이나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정상표지석은 모셔놓았다는 느낌. 도톰하니 대를 쌓고 그 위에 빗돌을 올렸다. 하지만 비봉(飛鳳)’이란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다못해 산이 봉황이 날아오르는 지형이라는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워놓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아니면 봉황이 알을 품은 봉황포란형의 풍수지리설도 좋을 게고...

 정상에서의 조망은 좋은 편이다. ·남쪽으로 시야가 트이면서 죽산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13 : 30. 이제 죽주산성으로 갈 차례이다. 아까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50m쯤 진행하면 삼거리(이정표 : 죽주산성 1.2km/ 약수터 0.7km/ 비봉산 정상 50m), 당연히 죽주산성 방향으로 간다.

 50m쯤 더 가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죽주산성 1.1km/ 일죽면 방초리/ 비봉산 정상 0.1km)가 나온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나무계단에 이어 침목계단을 놓아야했을 만큼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능선은 원시의 숲을 연상시킨다. 그 속에서 나는 억척스런 삶의 현장을 만난다. 이곳 안성은 미륵불의 고장’. 그네들이 주장하는 윤회사상을 전하기라도 하려는 듯 죽어 나자빠진 참나무에서 아카시아나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원시의 숲속에서 원시인이 살아갈 것은 당연. 그러니 저건 네안데르탈인쯤 되겠다. 아무튼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눈이 움푹 들어간 우리네 조상을 닮아도 너무 닮았다.

 14 : 03. 능선 안부로 내려선다. 죽산면 매곡마을과 같은 죽산면의 매산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일 것이다.

 이정표(죽주산성 0.2km/ 매곡마을 0.6km/ 비봉산 정상 1.0km)는 이곳이 장광고개임을 알린다. 하지만 장광저수지(매산리)’ 방향으로는 길도 나있지 않았다. 그러니 kakaomap처럼 매곡 뒷고개로 부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살펴보더니 연리목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집사람도 역시 여자였던 것이다. ‘사랑에 목을 매는 그런 여자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 그녀의 말대로 사랑의 메신저(messenger)라는 연리목(連理木)을 빼다 닮았다. 아니 연리목이란 뿌리가 다른 나무의 줄기가 맞닿아 한 나무줄기로 합쳐져 자라는 현상을 일컫는데, 이건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두 줄기가 다시 합쳐진 경우이니 조금 옹색하긴 해도 연리지(連理枝)’라며 고집해 보자.

 밀도를 더해가는 바위군락도 잠깐의 볼거리로는 충분했다. 독특한 생김새로 나그네의 발길을 자꾸만 붙잡는다.

 그중에서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흔들바위이다. 아랫도리만 살짝 걸려있는 모양이 손만 대도 금방 굴러가버릴 것 같다. 하지만 집사람과 최군이 있는 힘을 다해 밀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14 : 12. 드디어 비봉산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죽주산성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지는 죽주산성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치열했던 격전지였던 과거와는 다르게 이제는 찾는 사람들에게 힐링을 선사하는 산책코스로 변했다.

 죽주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다. 내성·중성·외성 세 겹의 석성으로 물샐 틈 없는 위엄을 자랑한다. 2001년 이후 지표·발굴조사를 통해 죽주산성에서는 백제와 통일신라의 유물이 수습되면서 중성은 삼국시대에, ·외성은 조선시대에 축성됐으며 임진왜란 이후 대대적으로 성벽을 수축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성벽(이정표 : 송문주장군 영각 0.2km/ 비봉산 정상 1.2km)으로 올라선다. 외성(外城)의 서문지 근처 한 지점으로, 이후부터는 성벽의 위를 걷는다.

 잠시 후, 이번에는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성벽으로 올라선다. ‘중성(中城)’에 올라섰다는 얘기일 것이다.

 성벽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른 많은 문화재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과 달리, 죽주산성은 남한산성만큼이나 석축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몽골군의 숱한 침략에도 굴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덕분에 우린 선조의 기개를 그대로 느낄 수 있고.

 북벽(北壁)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때문에 우린 다른 이들이 주 탐방로로 삼았던 북벽으로 가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4 : 24. 성벽이 마치 덧붙여 쌓기라도 한 것처럼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간다. 중성의 서남 치성인 것 같은데, 꼭대기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와 함께 어우러지면서 멋진 풍광을 자아낸다. 참고로 치성(雉城)이란 성벽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시켜 쌓은 부분을 말한다.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관측하고 싸울 때 가까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죽주산성은 요즘 죽산 주민들의 힐링 스폿으로 통한다고 했다. 2010년부터 복원 공사가 이루어져 성벽·성문·포루 등의 복원과 함께, 산성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도록 산책로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가족단위로 산책 나온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곳이 북벽포루인줄 알았다. 그러니 나 홀로 나무와 함께 감성 사진 하나쯤 찍어둘 것은 당연. 감성에 젖었던 때문일까?  포루의 유적이나 드라마촬영지에 대한 안내판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을 의심해보지도 못했다.

 걸어온 길. 외성 쪽으로 뻗어나가는 성벽은 세월의 더께 없이 희고 매끈하다.

 치성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치성의 임무대로 봉업사지를 비롯한 죽산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동남 치성으로 향한다. 중성을 따라 남문동남치성동문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이 15분쯤 이어지는데, 성벽 위를 걸으며 죽산리 전체를 조망하거나 한적한 숲속을 가로지르며 거닐 수도 있다.

 중성의 남문(南門)’이란다. 죽주산성은 1236(고려 고종23) 몽골군을 격퇴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얼마나 많은 군사와 백성이 저 문을 드나들었을까?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킨 그네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몽골군은 청주와 충주로 향하는 두 길이 만나는 요충지였던 죽주산성에 이르러 고려군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고려군은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몽골군은 대규모로 공격을 가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큰 피해를 안은 채 철수했다고 한다. 그때 백성들과 함께 성을 지킨 이가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 장군이다.

 성벽 위로 내놓은 산책로는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잔디로 뒤덮인 것이 숫제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다.

 14 : 34. 중성의 동남쪽 방어시설인 동남 치성에 이른다. 장대석으로 자 모양의 방호벽을 쌓았다.

 14 : 37. 성벽을 따라 가파르게 내려서면 동문, 왼편으로 거짓말처럼 고즈넉한 평지가 분지처럼 펼쳐진다. 연못과 쉼터 등을 가미한 잔디공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옛날에는 군사시설과 창고, 집들이 있었지 않나 싶다. 초지 너머 산자락에 띄엄띄엄 서너 채의 집이 보이는데 한가운데 희미하게 보이는 기와집이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연못’. 배수로가 연결된 계단식 연못은 무적의 산성을 유지할 수 있던 비밀병기였다고 한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성을 포위해 공격할 때도 물이 있었기에 보름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4 : 42. 이왕에 왔으니 어찌 송문주(宋文胄) 장군을 만나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잘 닦인 탐방로를 따라 5분쯤 걸으니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忠義祠)’가 나온다. 매년 음력 99일 송문주 장군을 기리는 제향행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송문주 장군은 1236(고종 23) 몽고군 3차 침입 때 죽주방호별감으로 있으며 죽주산성에서 몽고군의 침략을 물리친 인물로, 안성의 호국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사당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지가 않다. 그저 정조 때 채제공 선생이 쓴 번암집의 송장군묘비명에 사당이 만들어진지 5~6백년이 지나 보수했다고 기록된 것을 내세워 송 장군 사후인 1200년대 후반에 지어졌을 거라고 추정할 따름이다. 또 다른 안내판은 체제공이 쓴 송장군 묘비명을 소개하고 있었다.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둘러싸고 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전술을 쓰자 장군은 멀리서 왔으니 어찌 배고프지 않겠는가! 삼가 이 생선으로 군량을 삼으라 하며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에게 보냈고, 이에 크게 놀란 적이 물러가니 뒤쫓아 무찔렀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죽주산성의 입구로 사용되고 있는 중성의 동문(東門)은 차가 지나다녀도 될 정도로 컸다. 문 앞쪽은 아치형이지만 뒤쪽은 네모난 형태로 옆의 계단을 오르면 중성 동남치성을 만날 수 있다.

 14 : 47. 동문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간다. 그런데 뭔가를 놓쳐버린 듯한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맞다. 죽주산성 제일의 포토죤이라는 북벽 포루를 들러보지 못한 것이다. ‘연모’, ‘옷소매 붉은 끝동 등 사극 촬영지로도 유명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미리 알아오지 못한 내 잘못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14 : 59. 잠시 후 도착한 산성주차장. 죽주산성 조형물이 반긴다. ‘죽주산성(경기도 기념물 제69)’은 삼국시대 신라의 북진 과정에서 축조한 성곽이다. 이곳 죽산은 영남대로가 조령과 추풍령 방면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으로,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도성의 방어와 관련하여 중요시되었다. 산성은 6세기 중반 신라가 북진하는 과정에서 서울 지역과 대중국교역항이 있었던 당항진(남양만 일대)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으로 축조되었다고 전해진다.

 국도(17호선)에 이르니 도로변에 7~8개의 빗돌이 늘어서 있었다. 선정을 베푼 죽산현(竹山縣 : 고려 때는 竹州) 관리들을 칭송하는 송덕비(頌德碑)가 아닐까 싶다.

 15 : 03. 이후부터는 국도를 탄다. 중앙분리대까지 있는 왕복 4차선이 이 도로의 교통량을 짐작케 해준다. 맞다. 예로부터 죽산지역은 교통의 중심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전략적 가치를 이어왔다. 조선시대 각 지역에서 서울(한양)로 가는 주요 도로 중 영남대로(장호원-안성)가 지나고 인근의 삼남대로(진천-용인)와도 교차한다.

 15 : 12. 잠시 후 도착한 미륵당은 법정 동리인 매산리의 4개 자연부락(한평·상구산·하구산·미륵당) 중 하나다. 그런데 문화재 마을로도 불리는 모양이다. 하긴 미륵당(彌勒堂)이란 게 본디 미륵의 거처라는 뜻일지니. 요 아래에 있는 태평미륵이 가져다 준 지명이 분명하다.

 죽주산성 길 안내판은 미륵당 한평마을의 이야기를 전한다. 한평(閑坪)은 토지가 기름져서 농사가 잘 되는 드넓은 들녘을 품었다는 마을, 매산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구산마을(웃지시미 및 아랫지시미)도 기름진 토지에서 질 좋은 쌀이 생산되어 고을 원님께 진상을 바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미륵당에 대한 얘기는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15 : 15. 잠시 후 매산리 석불입상에 이른다. 미륵이 16구나 있다는 석불의 고장 안성을 수식하는 주요 미륵불 중 하나로 태평미륵(太平彌勒)’으로 불리면서 지역 주민들로부터 숭상을 받아왔다. 높이도 5.6m에 이르러 안성지역의 미륵불 중 가장 크다. 그래선지 부처를 모실 누각을 세웠는가 하면 담장까지 빙 둘러 놓았다. 마을 이름도 태평미륵의 거처라고 해서 미륵당이 되었단다.

 안에는 미륵불과 석탑을 함께 모셔놓았다. 높이가 1.9m 미륵당 오층석탑(향토유적 제20)’은 고려 초기인 993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균형미가 떨어진다는 것(탑신이 사라진 2·3·4층은 지붕만 애처롭고, 5층은 아예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말고는 내력이나 생김새 등 특별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매산리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 석가모니 다음으로 부처가 될 것으로 정해져 있는 미륵은 보살과 부처 2가지 성격으로 나뉘는데, 이 입상은 보살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머리 위에 보개(寶蓋)를 쓰고 있는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이는데, 이목구비의 비례가 맞지 않아 괴이한 느낌을 준다. 참고로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7000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다. 그때는 인간의 수명이 84000세나 되며, 지혜와 위덕이 갖추어져 있고 안온한 기쁨으로 가득 찬단다. 그렇다고 아무나 미륵불의 세계인 용화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의 삼장(三藏)을 독송하거나, 옷과 음식을 남에게 보시하거나, 지혜와 계행(戒行)을 닦아 공덕을 쌓거나, 부처님에게 향화(香華)를 공양해야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석불은 고려시대 몽골군을 침입을 물리친 송문주장군과 김윤후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태평미륵(太平彌勒)’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이곳에 있던 중앙관리들의 출장 숙소 태평원(太平院)’에서 따왔다. 하나 더. 석상은 오른손에 두려움을 없애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왼손에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는 모양새라고 했다. 민중의 숭배를 받아온 이유일 것이다.

 미륵당에서 나와 이번에는 봉업사로 간다. 200m쯤 걸으면 사거리. ‘봉업사로 이름을 바꾼 옛 용화사에서 내건 팻말이 길을 인도해준다. 경기도 기념물 제189호인 봉업사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지만, 경내에 죽산리 삼층석탑과 죽산리 석불입상이라는 두 점의 문화재를 품고 있다.

 15 : 25  15 : 45. 귀에 익숙한 이름에 끌려 들어간 봉업사. 시쳇말로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새로운 오층탑이 보일 뿐, 떡하니 버티고 있어야 할 유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앉은 김에 쉬어가라고 했던가. 양지바른 곳이 눈에 띄기에 아까 정상에서 먹다 남겨놓은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15 : 45. 몸이 편하면 마음까지도 여유로워지나 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석불이 절간 왼쪽 산자락에서 빼꼼이 얼굴을 내미는 게 아닌가.

 죽산리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7). 연화대(불상을 안치하기 위한 연꽃모양의 받침대) 위에 놓여있는 높이 3.36m의 석불입상이다. 온화한 표정의 불상은 어깨까지 길게 늘어진 귀가 특징이다. 몸체에 비해 머리와 손이 크게 표현되고, 육계(肉髻)와 타원형의 옷 주름 등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보인다. ! 옆에는 석탑도 하나 있었으나 안내판이 없어 내력은 알 수가 없었다.

 석불은 죽주산성 아래 쓰러져 있던 것을 옮겨다 세운 것이라고 한다.

 15 : 51. 절간을 빠져나오다 죽산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이라는 또 하나의 탑을 만났다. 높이 3.2m의 탑은 두꺼운 지붕돌과 4단의 옥개석받침 등 조형 양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탑을 보수하면서 새로운 양식을 가미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탑은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다시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화차사(華次寺)’이던 신라시대에도 탑이 있었다는 자리다.

 봉업사지로 가는 길 주변은 온통 논밭이다. 근처로 4차선의 국도가 지나가지만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평면적인 풍경에 시야가 편안하다.

 16 : 05. 그렇게 도착한 봉업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435)’은 유역 정비공사가 한창이었다. 국보(國寶)에 어울리는 매무새로 단장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높이가 6m인 탑은 고려 전기에 조성됐다. 여러 장의 크고 넓적한 돌로 지대석을 만들고 위에 단층 기단을 두고 그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고 1층 탑신이 유난히 높은 점이 고려석탑의 특성을 잘 나타낸다고 한다.

 죽산리 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 당간지주는 당간(‘은 부처나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나타내는 깃발, ‘은 당을 거는 장대)을 고정해주는 두 개의 지주대로 절의 입구나 법당 앞에 세워져 있다. 이 당간지주는 높이 4.7m( 0.76m, 두께 0.5m)의 돌기둥 한 쌍이 1m의 간격을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경기도 3대 사찰이었다는 절간의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다고나 할까?

 이곳에 있던 봉업사는 양주 회암사, 여주 고달사와 더불어 고려시대 경기도 3대사찰이었다고 한다. ‘고려사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다 이 절에 들러 태조 왕건의 초상화에 절을 했다고 전한다. 태조 왕건의 어진을 봉안하는 진전사원(眞殿寺院)이었다는 얘기다. 신라시대 화차사(華次寺)’였던 절은 고려시대에 봉업사(‘고려의 업을 일으킨 곳이라는 의미)‘로 되면서 크게 번창했으나 1530년의 문헌에서는 기록조차 사라진다.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제435), 봉업사지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 봉업사지 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에서 당시의 영화를 그려볼 수 있을 따름이다.

 16 : 08. 봉업사지를 빠져나오자 국도 17호선. 교통섬에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만드는 송문주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맞다. 송문주 장군은 이 지역의 수호신 같은 존재라고 했다. 죽산면 주민들은 매년 송 장군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오는가 하면, 죽주산성과 봉업사지 터 앞을 지나는 도로를 송문주로로 명명하고 저 동상까지 세웠다.

 서동대로를 따라 죽산으로 들어간다. 죽주(竹州)로 불리던 죽산은 지리적으로 기호지방과 삼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 죽산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이었을 건 당연. 신라 때 이미 죽주산성이 축성되었고, 조선말까지 도호부가 자리해 있던 경기·충청의 주요 행정구역이었다.

 16 : 15. 죽산 버스터미널에 이르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8.66km를 찍고 있으니, 코스의 절반 이상이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감악산(紺岳山, 674.9m)

 

산 행 일 : ‘23. 10. 21()

소 재 지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 남면, 연천군 전곡읍의 경계

산행코스 : 출렁다리주차장출렁다리범륜사묵밭쉼터악귀봉장군봉임꺽정봉감악산(비봉)까치봉묵밭쉼터(복귀)출렁다리주차장(소요시간 : 6.78km/ 4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파주와 양주, 연천의 경계에 놓인 산으로 예로부터 화악산(가평송악산(개성관악산(안양운악산(포천)과 더불어 경기 5의 하나로 신령스러운 산으로 일컬어졌다. 이름에 자가 들어간 산은 대개 험한 편이다. 등산이 어렵고, 오른다 해도 꽤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파주의 감악산만은 예외로 봐도 되겠다. 원래는 높고 깊고 가파른 산이지만 탐방로 공사를 잘 해놓아서 비교적 쉽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세 지자체가 서로 경쟁하듯이 시설물들을 설치한 것이 오히려 번잡스러운 흠으로 보였다고나 할까.

 

 산행들머리는 감악산 시설지구(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세종·포천고속도로 안락 IC를 나와 신평화로를 타고 의정부시와 양주시를 통과한 다음, 회암교차로(양주시 회암동)에서 56번 지방도, 상수교차로(양주시 남면)에서 371번 지방도로 옮겨가며 달리다, 설마교차로(파주시 적성면)에서 설마천로로 빠져나오면 잠시 후 감악산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네비게이션에 감악산출렁다리 주차장을 찍고 오면 편하다. 하나 더, 시설지구에는 두부 만드는 집이 즐비했다. 이 고장 특산물인 장단콩으로 만든 손두부·순두부·두부전골·두부부침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황태구이·감자전·능이닭백숙 등 다양한 먹거리를 맛볼 수 있다.

 지도(청색 선)처럼 진행했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범륜사 입구’.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 묵밭쉼터에서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 악귀봉·장군봉·임꺽정봉을 차례로 거쳐 정상에 오른 후 이번에는 왼쪽 능선을 이용해 묵밭쉼터로 내려섰다. 이후는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10 : 05. 출렁다리주차장(출구)에서 데크 계단을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숫자는 헤아려보지 않았지만 버겁다 싶을 정도로 긴 계단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입구의 안내판 정도는 살펴보도록 하자. 감악산을 둘러싼 20km 정도의 순환형 둘레길과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주요 등산로가 그려져 있다. 참고로 둘레길 각 코스의 이름은 지역 학생들이 지었다고 한다. 청산계곡길·손마중길·천둥바윗길·임꺽정길·하늘동네길 등 생경하지만 정겨우면서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민족상잔의 아픈 상처도 한번쯤 보듬어보자. 이곳 설마리 일대는 6.25전쟁 당시 서울 사수를 위한 마지막 요충지였다고 한다. 당시 이곳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 글로스터 부대원들은 중공군의 총공세에 맞서 최후의 한 명까지 싸웠고,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3일간이나 늦출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설마리에 기념공원이 세워졌고, 감악산 출렁다리는 글로스터 영웅의 다리(The Gloucester Heroes Bridge)’라는 닉네임까지 얻었다.

 10 : 12.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이면 정자에 올라선다. 쉼터에 전망대를 더한 다목적 정자이다. 그러니 출렁다리의 전경을 카메라 프레임 안에 넣고 싶다면 잠시 들렀다 갈 일이다.

 정자는 뛰어난 뷰 포인트이다. 난간에 서면 감악산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출렁다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출렁다리 뒤로 펼쳐지는 감악산 전경은 보너스라 하겠다.

 출렁다리 주변(힐링파크에서 운계폭포까지 약 1Km 구간) ‘신비의 숲에서는 야간경관조명이 펼쳐진다고 했다. LED 투광등과 동물조명 등으로 밤하늘의 자연과 동물을 등산로 곳곳에 조형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고보조명·영상·음향 등을 가미해 산 이름인 감악(紺嶽)에 얽힌 스토리를 보다 재미있게 연출한단다.

 요즘은 흔하디흔한 게 출렁다리. 그렇다고 짜릿한 스릴까지 흔해지겠는가. 거기다 산악지형에 설치한 현수교로는 가장 긴 편에 속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다리는 70kg기준 900명이 동시에 올라가도 끄떡없이 지어졌단다. 초속 30m 강풍과 진도7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단다. 하지만 길이가 150m나 되는데 어찌 출렁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움직임에 몸을 내맡기고 맘껏 즐겨보자.

 다리는 36m나 되는 허공에 매달려 있다. 덕분에 출렁거림 속에서도 설마리, 설마천계곡 등 다리 주변의 풍경들을 눈에 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다리 건너. 범륜사로 올라가는 진입로는 상당히 가팔랐다.

 10 : 28. 범륜사(梵輪寺)에 이른다. ! 올라오는 도중 운계폭포로 내려가는 길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냥 지나쳤다. 오래전이긴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폭포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절간 뒤 샛길로 가면 운계전망대가 나온다. 감악산 산행의 필수코스라지만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감악산 중허리에 터를 잡은 범륜사는 한국불교태고종 종단의 사찰이다. 옛날 감악산에는 감악사·운계사·범륜사·운림사 등 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세월의 풍화와 전쟁 등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의 범륜사 1970년 금봉이라는 스님이 옛 운계사(존재했다는 문헌만 있을 뿐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터에 다시 세운 것이란다.

 사찰 앞에 세워놓은 세계평화 빗돌이 눈길을 끈다. 이 사찰의 점심 공양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점심 공양과 저들이 원하는 세계평화가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 더, 절간 뒤 백옥으로 만들었다는 높이 7m 관세음보살상도 볼만하다. 중국 하북성의 아미산 백옥으로 현지에서 만들어 1995년 이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산이 그렇듯, 감악산 역시 방문 목적은 등산이다. 산행은 범륜사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널찍한 데다 바닥까지 야자매트로 깔려있어 산행기분은 나지 않는다.

 작은 돌멩이들이 바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오가는 사람들이 행운을 빌며 붙여놓은 것 같은데, 이게 흡사 자철석이라도 되는 양, 떨어지지 않고 처음 그대로 찰싹 붙어있다.

 10 : 45. 탐방로는 개울을 건너기도 한다. 징검다리가 놓여있지만 여름철 집중 호우 때는 통행이 불가능할 듯. 그렇다고 우회로가 따로 나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개울을 건너자마자 상황이 확 바뀌어버린다. 넓고 반반하던 길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칠기 짝이 없는 너덜길로 바뀐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복원된 숯가마 터(이정표 : 묵은밭 0.2km/ 범륜사 0.6km)에 닿았다. 숯은 참나무로 구워낸 것을 상품(上品)으로 친다. 이는 감악산에 아름드리 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11 : 00-11 : 05. 고역이라 할 수 있는 너덜길의 끝. ‘묵밭 쉼터가 길손을 맞는다. 올라오느라 고생한 이들을 위한 배려로 쉼터용 정자를 배치했다.

 이정표(감악산 정상 1,350m/ 까치봉 1,000m/ 범륜사 800m)는 길이 둘로 나뉨을 알린다. 그렇다고 고민하지는 말자. 어느 코스를 선택하더라도 정상에 이르기는 마찬가지, 그저 한 바퀴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11 : 08. 우리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정상 방향을 선택했다. 물기 없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모양새이다. 이어서 벤치가 놓여있는 곳(‘만남의 숲이 아닐까 싶다)에서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붙는다. ‘악귀봉부터 시작되는 바윗길을 제대로 타보기 위해서이다. 알다시피 바윗길이란 게 올라갈 때가 제멋 아니겠는가.

 지능선이어선지 시작부터 가파르다. 뭔가에 의지하지 않고는 못 올라갈 정도로 깔딱인 곳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런 어려움을 지자체도 알았나보다. 밧줄난간을 세워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다.

 11 : 35.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는 암봉에 올라선다. 수십 길 낭떠러지 위, 풍상에 시달리다 못해 몸을 비비꼬아대는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암봉의 자랑거리는 따로 있었다. 나무 사이로 파주의 산하가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북한산이 그 걸출한 자태를 자랑한다.

 내려오는 길은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가득했다. 그렇다고 소름끼칠 듯이 위험하지는 않으니 약간의 스릴을 즐기면 되겠다.

 감악산의 또 다른 특징은 단풍나무라 할 수도 있겠다. 설악산이나 내장산만큼은 아니지만 굵고 튼실한 단풍나무들이 능선을 뒤덮고 있었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감악산 정상/ 청산계곡 1,420m/ 법륜사 1,570m)에서는 직진한다. 오른편은 보리암 돌탑을 거쳐 출렁다리로 연결되는 감악능선계곡길로 끄트머리에서 청산계곡길(감악산 둘레길)’로 합류된다.

 감악산에 ()’자가 그냥 들어갔겠는가.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곳곳에서 바위지대를 만나게 된다. 그러다보니 곳곳에 저런 나무계단을 놓았다. 오래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밧줄에 의지해서 오르던 구간들이다.

 단풍이 한층 더 무르익었다. ‘가을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올해 들어 처음 만나는 단풍이니 서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핏빛에 풍덩 빠져보면 어떨까?

 11 : 52. 계단을 올라서면 악귀봉(616m)’. 바위봉우리로 돼지바위라고 부른다고도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정상석은 파주시와 양주시가 공동으로 세웠다. 참고로 양주시와 파주시, 연천군 등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감악산은 비봉·임꺽정봉·장군봉·악귀봉이 양주시와 파주시가 어깨를 맞대고 있고, 형소봉은 오롯이 양주시 차지다(대신 까치봉은 파주시 차지다).

 암봉의 특징대로 악귀봉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양주와 파주의 산하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능선은 험상궂기만 하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탐방로는 바위 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가면서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젠 장군봉을 오를 차례이다.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야 할 길이 이어지는데, 초입의 삼거리(이정표 : 장군봉 0.3km/ 감악산약수터 1.6km/ 악귀봉 0.1km)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가을 풍경을 눈요기 삼아 오르면 될 일이다.

 암릉답게 눈만 들면 구경거리가 달려온다. 그 첫 번째 만남은 통천문이다. 하늘로 통하는 문답게 반대편은 천애의 낭떠러지다. 지리산이나 고성의 통천문처럼 통과해볼 생각을 버리라는 얘기다.

 오른편에는 방금 올랐던 악귀봉의 능선이 놓여있다. 악귀봉에서 시작되는 암릉은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다리가 떨릴 정도이다. 그러나 일단 오르면 떠나기를 망설일 정도로, 소나무 등 주변 풍광과 어우러지는 암릉이 한 폭의 그림처럼 수려하기 펼쳐진다. 어쩜 임꺽정은 저런 봉우리들에서 개성과 한양을 호령할 기개를 키웠을지도 모른다.

 앗 곰이다 호들갑을 떠는 집사람의 손가락 끝에 곰 한 마리가 비스듬히 누워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양주 들녘을 지긋이 내려다보면서...

 이즈음 저 멀리 임꺽정봉의 거대한 암벽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아찔한 절벽에는 잔도가 걸렸다. 오래 전, 중국의 산을 오르내리면서 잔도는 험산을 끼고 사는 중국인들의 전유물인줄 알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도 잔도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이젠 웬만한 바위산마다 잔도 하나쯤은 보통이 되어버렸다.

 잠시 흙길로 변했던 능선이 장군봉의 턱밑(이정표 : 장군봉 0.1km/ 형소봉 0.2km/ 감악산주차장 4.7km)에 이르자 다시 한 번 용트림을 한다. 거대한 암벽으로 변해 앞을 막아버린 것이다. 반대 방향으로 우회하여 올라야하겠건만 다행이도 지자체에서 나무계단을 설치했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오른쪽 발아래서 솟아오른 저 암봉은 형소봉일 것이다.

 계단은 바윗길로 바톤을 넘긴다. 오른쪽은 천 길 낭떠러지, 능선이 칼날처럼 생긴 탓에 왼쪽으로 당겨 걸을 수도 없다. 그저 철제난간을 붙잡고 조심조심 오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구간을 감악산 산행의 백미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허공을 걷고 있는 듯한 짜릿한 스릴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 : 10. 암릉의 화룡점정(畵龍點睛) 장군봉(652m)’이 찍고 있었다. ··남으로 시야가 뻥 뚫리면서 양주와 파주의 산하가 거침없이 달려온다. 시선을 조금 올리자 이번에는 도봉산과 북한산의 헌걸찬 바위봉우리가 우뚝 솟아오른다.

 장군봉을 내려서면서 위험구간은 대충 끝난다. 편안해진 길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안부(이정표 : 임꺽정봉 0.1km/ 감악산 정상 0.5km/ 장군봉 0.1km)에서 임꺽정봉을 거치지 않고 곧장 감악산(정상)으로 가는 길이 나뉜다.

 올라야 할 임꺽정봉이다. 양주 쪽 산자락은 천애의 바위벼랑이지만, 파주 쪽은 부드러운 육산의 모양새이다. ‘도적 의적으로 나뉘는 임꺽정에 대한 평가를 닮았다고나 할까?

 배낭걸이 대라고 한다. 산이 좋아 전국의 산을 20년 이상 누비고 다녔지만, 내 기억에 저런 시설을 처음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임꺽정봉의 턱밑(이정표 : 임꺽정봉 0.1km/ 얼굴바위 쉼터 0.3km/ 장군봉 0.1km)에서 신양저수지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12 : 21. 제법 긴 계단을 올라서면 임꺽정봉을 코앞에 둔 삼거리(이정표 : 임꺽정봉 50m/ 감악산 0.4km/ 장군봉 0.2km)’. ‘임꺽정봉의 기상을 흉내라도 내려는 듯 커다란 바위 하나가 위세를 자랑한다.

 양주시에서 세운 안내판이 자기네 땅도 한번 들러보라고 유혹을 보낸다. 천애의 바위절벽에 길은 내놓았으니 스릴을 즐겨보라는 것. 하지만 파주 쪽에 차량을 세워놓은 탓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12 : 23. ‘임꺽정봉에 올라선다.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 중 하나인 임꺽정이 이곳 양주 출신이어선지 그 흔적으로 임꺽정봉과 임꺽정굴을 이곳에 남겨놓았다. 실존 인물인 임꺽정은 명종 14(1559) 임금의 명으로 임꺽정에 대해서 대책을 논의했고 명종 17(1562)에 되어서야 임꺽정의 무리를 소탕할 수 있었다. 그 기간(아니면 그 이전) 중 감악산에 머물렀을 수도 있겠다. 하나 더. 조선시대의 임꺽정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홍명희 작가의 대하소설 임꺽정 덕분이다.

 옛 이야기는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해 감악산의 깊고 험한 산속 동굴에 기거했다고 전한다. 그 동굴이 있는 바위 정상이 지금의 임꺽정봉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임꺽정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무척 호쾌했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장군봉의 암릉과, 남쪽의 절벽단애 아래로 펼쳐지는 신암저수지와 널따란 뜰이 자못 시원시원하다.

 12 : 26. 그리도 뛰어난 조망이건만 막상 오래 즐기지는 못했다. 가뜩이나 좁은 정상이 등산객들로 붐볐기 때문이다. 아무튼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감악산으로 향한다.

 12 : 32-13 : 32.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점심상을 차렸다. 그리고 못다 한 얘기로 회포를 풀다 가기로 했다. 산꾼들이라기 보다는, 만나는 것 자체가 좋고, 그저 산에 드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수다로 한껏 여유를 즐기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주요 포인트 중 하나인 어름골재로 올라선다. 이정표(감악산 120m/ 범륜사 2.290m/ 장군봉 220m/ 임꺽정봉 160m)는 이곳이 사거리임을 알려준다. 곧장 고개를 넘으면 묵밭 근처의 만남의 숲’. 왼편은 장군봉과 임꺽정봉의 중간에서 만났던 삼거리로 연결된다. 감악산의 정상은 물론 오른편으로 가면 된다.

 12 : 33. 몇 걸음 더 걸으면 정자에 닿는다.

 이곳도 조망의 명소 중 하나다. 양주벌판을 가운데 두고 동두천의 칠봉산과 양주의 천보산, 도락산, 불곡산(이 산에도 임꺽정봉이 있다) 등이 불쑥 솟아올랐다. 더 멀리로는 남성미를 물씬 풍기는 도봉산과 북한산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13 : 46- 13 : 54. 출렁다리 주차장에서 길을 나선지 2시간 45분 만에 감악산 정상에 도착했다. 웬만한 운동장이 부럽지 않을 만큼 널따란 정상에는 정상석과 감악산비, 고롱이 미롱이 마스코트, 각종 안내판 등 파주시·양주시·연천군에서 서로 경쟁하듯이 만들어놓은 시설물들로 가득하다. KBS중계소와 강우레이더 같은 공공시설도 들어서 있었다.

 정상의 북쪽 가장자리,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어른 키 정도 되는 빗돌 하나를 앉혔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은 그 유래가 알려지지 않는데, 비석에 새겨진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아 몰자비’(글자가 죽은 비)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아예 글자를 새기지 않은 무자비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설인귀비나 빗돌대왕비(‘비석대왕비라는 뜻으로 비석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된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으로 보인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1982년 학술조사가 이루어지도 했으나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순수비와 비슷하다는 정도만 파악됐을 뿐이다.

 정상석은 양주시와 파주시가 공동으로 만들었다. 연천군이 감악산의 공동 소유권자이긴 하지만 그 영역이 정상까지는 이르지 못했음이리라.

 정상에 어깨를 걸치지 못한 연천군은 군 마스코트인 고롱이 미롱이 감악산 숲길 안내도만 달랑 세워놓았다. 고롱이와 미롱이는 동아시아 최초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된 구석기유적지(전곡리)를 품은 연천군에서 만든 원시인 캐릭터이다.

 조망은 전문가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감악산 등산의 최고 기쁨은 뭐니 뭐니 해도 정상에서 만나는 스카이라인과 납작한 마을들 모습, 그리고 멀리 삐죽삐죽 올라와 있는 한국의 산 풍경이다. 남쪽으로는 동두천시 칠봉산, 양주시 도락산, 서울시 도봉산, 서울시와 고양시를 이어주는 북한산 등이, 북으로는 북한 개성시의 송악산까지 볼 수 있다. 물론 날씨가 도와줘야 가능한 시계이지만, 그야말로 하늘과 공중과 산과 마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광활한 풍경인 것이다.>

 그건 그렇고 북쪽(연천)에서 뜬금없는 풍경이 잡힌다. 산꼭대기에 성모마리아상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요것조것 뒤적여 봐도 누가 왜 만들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저 평화·통일의 마음을 담은 조형물로 유추해 볼 따름. 성모님의 시선이 북녘 땅을 응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임진강, 한탄강 등 접경지역에 내리는 비를 관측할 수 있는 5층 높이의 대형 강우레이더도 들어서 있었다. 태풍·기상변동 등을 목적으로 하는 기상레이더와 달리 반경 125km 이내에서 지표에 근접하게 내리는 비의 양을 면적 단위로 집중 관측해 홍수예보에 활용한단다.

 명자나무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봄에 피어야 할 꽃이 그것도 이 늦가을에 말이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로 시작되는 시조를 읊었다. 뒤이어 나오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똥말똥하여라라던 문구가 떠오르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13 : 54. 하산을 시작한다. ‘까치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인데, 이정표에는 감악산둘레길 중 손마중길로 적혀있었다. 레이더기지의 서쪽 울타리에 기대어 내놓은 데크로드를 따르면 된다.

 13 : 56. 몇 걸음 걷지 않아 멋진 전망대를 만났다. 시야가 툭 트이는 곳에 데크로 대를 만들어놓았다.

 난간에 서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파평산, 천덕산, 덕물산 진봉산 등 수많은 산들이 드넓은 들녘 곳곳에서 솟아올랐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물굽이를 이루며 흘러가는 임진강과 이를 가로지르는 장단교가 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에서 송악산과 극락봉 등,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북녘의 산들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탐방객들을 위해 배려도 잊지 않았다. 조망도를 세워 실물과 대조해보는 재미를 더하게 했다.

 13 : 59. 또 다른 조망처에는 아예 정자까지 들어앉혔다. 하지만 올라가보지는 않았다. 조금 전 들렀던 전망대와 똑 같은 풍경이 펼쳐질 것 같아서이다.

 팔각정(이정표 : 까치봉 600m/ 객현리/ 정상 150m)에서는 까치봉 방향으로 간다. 정자를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길고 긴 나무계단.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지만 곳곳에서 조망이 틔기 때문에 눈이 호사를 누리며 내려갈 수 있다.

 14 : 18. 운계능선을 탄지 19분 만에 토끼봉에 올라섰다. 바위와 소나무가 잘 어우러지는 멋진 산봉우리이다.

 정상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 흔한 이정표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현 위치를 까치봉으로 표시해놓은 감악산 둘레길 안내도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할 따름이다. 그게 서운했던지 누군가가 안내도에 까치봉이라고 큼지막하게 적어놓았다.

 까치봉 역시 멋진 조망처였다. 아까 정상 근처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풍경이 낮아진 고도만큼만 좁아졌다고나 할까?

 이후로도 나무계단은 한참이나 더 계속된다.

 14 : 51. 삼거리 안부(이정표 : 손마중길 740m/ 묵은밭 120m/ 감악산 정상 1,380m)에 내려선다. 직진의 운계능선은 운악산둘레길의 손마중길로 연결된다. 우리는 무릎이 불편한 집사람을 핑계 삼아 묵밭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탈출로도 만만치만은 않았다

 가파른 나무계단을 100m이상이나 내려간 뒤에야 묵밭에 이를 수 있었다이후부턴 아까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된다.

▼ 15 : 50. 똑 같은 길을 걸어야 하는 무료함을 견뎌가며 걷길 25분 드디어 출렁다리 주차장에 이르면서 산행이 종료된다오늘은 4시간 30분을 걸었다핸드폰의 앱이 6.78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하긴 집에 돌아온 집사람이 앞으로 산행은 사양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에필로그(epilogue), 주차장에서 짐을 챙기다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악사(紺嶽祠)라는 사당이 없어졌다니 말이다. 내 나라 강산을 짓밟은 당나라, 그 군대를 이끈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모신다니 이를 말인가. 하긴 세상이 하 수상한데 무슨 꼴인들 못 보겠는가. 올 여름인가? 언론은 어느 얼간이가 광복절날 일장기를 문간에 내걸었다고 전했었다. 그러니 설인귀를 모시는 게 문제가 아니라,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토착 왜구가 스스럼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주금산(鑄錦山, 813.6m)

 

산 행 일 : ‘23. 8. 19()

소 재 지 : 경기도 남양주시(수동면)과 포천시(내촌면) 가평군(상면) 일원

산행코스 : 불기고개(수동고개)시루봉몽골문화원(독바위) 갈림길선바위전망대주금산 정상불기고개(소요시간 : 5.15km/ 3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한북정맥의 수원산(水源山) 서파고개에서 남쪽으로 가지 쳐놓은 산줄기(사람들은 이를 천마지맥이라 부른다)에서 첫 번째로 솟구친 산이다. 옛 이름은 비단산’. 비단을 펼쳐놓은 듯 아름답다 칭송받는 산이다. 최근에는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고 입소문을 탔다. 주금산(鑄錦山)이란 이름처럼 비단을 녹여 풀어놓은 듯 아름답다나? 주금산은 수도권의 알려지지 않은 명산으로 분류된다. 잘난 산세에다 서울에서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은 있지만, 대중교통의 이용이 썩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춘선이 전철화 되고, 마석역에서 몽골문화원까지 시내버스가 40~50분 간격으로 다니면서 접근성까지 좋아졌다. 최근 찾은 이들이 부쩍 늘어난 이유일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불기고개(가평군 상면 상동리)

서울-양양고속도로 화도 IC에서 내려와 387번 지방도를 타고 현리(가평) 방면으로 들어가면 몽골문화촌(남양주시 수동면)을 지나 불기고개(또는 수동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남양주와 가평의 시·군 경계인 고갯마루에 간이식당과 작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주금산 산행은 원점회기가 가능한 몽골문화촌(남양주시 수동면)이나 내리(포천시 내촌면)에서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 상동리(가평군 상면)와 베어스타운(포천시)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 우리처럼 정상만 찍고 되돌아오려면 불기고개에서 시작하는 게 최선이다.

 09 : 00. 건너편 산자락으로 들어붙으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이때 도로를 횡단하게 되므로 오가는 차량을 조심해야 한다. 첩첩산중이던 옛날 늑대나 여우를 살펴가며 고개를 넘었듯이 말이다. 오죽했으면 산 아래 마을의 이름이 돌아우마을이었겠는가. 혼자 고개를 넘는 선비를 돌아오우, 돌아오우하고 애타게 불렀으나 그냥 넘다가 짐승 밥이 되었다나?

 정상까지 거리는 2.5km. 주금산의 등산코스 중 가장 짧은 코스이다. 높여야 할 고도(高度)도 가장 적다. 핸드폰의 고도계가 389m를 찍고 있으니 앞으로 400m 남짓만 더 높이면 된다.

 산길은 시작부터 무척 가파르다. 거짓말 좀 보태 코에서 흙냄새가 느껴질 정도라고나 할까?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통나무계단을 놓았는가 하면, 그래도 버거운 사람들을 위해 밧줄 난간까지 매어놓았다.

 09 : 05. 숨이 턱에 차오른다. 5분 만에 지능선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거기다 잣나무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가 심신까지 맑게 해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광활하지는 않지만 잣나무 숲이 펼쳐진다. 하지만 국내 잣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가평의 본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저 나무에서 채취되는 잣 또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가평군이 타 지역보다 일교차가 큰 탓에 이곳에서 생산되는 잣 또한 타 지역의 것보다 더 고소하면서도 영양이 높기 때문이란다.

 능선에 올라섰는데도 산은 사나운 기세를 누그러뜨릴 줄 모른다. 그 기세에 눌린 산길은 왔다갔다 갈 지()’자를 써가며 겨우겨우 고도를 높여간다.

 09 : 20, 15분쯤 더 걸어 폐 헬기장에 올라선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산길은 사나웠던 기세를 많이 누그러뜨린다.

 10 : 35 : 불기고개 코스는 서너 곳에서 갈림길을 만난다. 첫 만남은 몽골문화원이 있는 비금계곡(남양주시 수동면)’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몽골문화원에서 원점산행을 할 경우, ‘독바위쪽으로 올라 정상을 찍은 다음 하산하면서 저 길로 내려간다. 참고로 비금계곡은 옛날 선비들이 이 산에 놀러왔다가 거문고를 숨겨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인데, 갈수기에도 물소리가 화려한 암반계곡이다.

 이정표(정상 1.53km/ 몽골문화촌 3.14km/ 불기고개1.1km)는 친절하게도 위도와 경도까지 적고 있었다.

 삼거리 조금 못미처에는 행선지를 알 수 없는 갈림길이 나있었다. 행여 길이라도 잘못 들어설세라 누군가가 나뭇가지로 막아두는 친절을 베풀었다.

 지자체의 배려도 엿볼 수 있었다. 곳곳에 쉼터를 만들어 지친 다리를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아직도 길은 평탄하다. 하지만 걷는 게 만만치만은 않다. 삼복더위가 물러갈 줄 모르고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엊그제 내린 비가 습도까지 잔뜩 높여놓았다.

 편안하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황이 변해버린다. 통나무 계단을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길이 가팔라져버린 것이다.

 두 번째 이정표(정상 1.3km/ 수동고개 1.2km) 근처에서는 커다란 바위도 만날 수 있었다. 전형적인 육산에서 보는 바위라선지 더 반갑다. 아니 주금산은 육산답지 않게 바위가 많았다. 특히 독바위는 주금산의 백미로 알려지지 않았겠는가.

 길을 갈수록 더 사나워진다.

 그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겨우 고도를 높여간다. 그렇다고 멈출 수야 없는 노릇. 밧줄 난간에 의지해 쉬엄쉬엄 올랐다.

 구름이 낮게 갈아 앉은 게 비가 오려나 보다. 맞다. 기상청은 오후 2시 무렵 소나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9 : 55.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두 번째 삼거리에 이른다. 이정표(정상 1.1km/ 상동리 1.0km/ 수동고개 1.4km)는 오른쪽이 수동리(가평군)의 주말농장에서 올라오는 길임을 알려준다.

 이정표 뒤, 언덕처럼 생긴 봉우리가 시루봉(585m)’이다. 하지만 쉼터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하나 더, 언제부터 시루봉이란 이름이 붙여졌을까? 10년여 전, 주금산을 답사하기 위해 사전조사를 하던 때만 해도 시루봉이란 이름은 없었다.

 아무튼 정상은 텅 비어 있었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표지기(정상석이 없을 경우 산꾼들이 인증용으로 매달아 놓은)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게 서운했던지 누군가가 밧줄 난간 기둥에다 시루봉이라고 적어놓았다.

 아무리 밋밋해도 시루봉은 산봉우리였다. 내려가는 길이 저렇게 가파른 걸 보면 말이다.

 오가는 이들이 안전 산행을 기원하며 하나 둘 쌓아올린 돌탑이 눈에 띈다. 소박한 바람만큼이나 엉성한 돌탑이다.

 또 다시 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고온다습한 날씨 탓에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다. 그러니 저런 오르막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이즈음 바윗길도 만나게 된다. 힘은 들지만 요리조리 피하다가 넘는 맛이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10 : 20. 또 다른 쉼터, 이번에는 통나무를 세워 의자를 만들었다.

 이정표를 겸한 안내판도 눈에 띈다. 자연생태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산림을 보호하잔다.

 이때 울창한 숲 너머에서 거대한 암벽이 살짝 얼굴을 내민다. 산꾼들 사이에서 선바위로 불리는 명물이다.

 또 다시 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이번도 역시 밧줄 난간을 매어놓아야 했을 만큼 가파르다.

 요런 폐 벙커도 눈에 띈다. 얼마나 많은 우리네 아들들이 저 속에서 힘든 인고의 시간을 보냈을꼬?

 10 : 35. 세 번째 갈림길은 몽골문화원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이곳에서 왼쪽(비금리)으로 가면 주금산 산행의 하이라이트라는 독바위가 나온다. 하지만 우린 정상으로 간다. 되돌아오다가 들러도 되니까. 그게 삼복더위에 지쳐 깜빡 해버렸지만...

 이정표(정상까지 0.48km)는 왼쪽과 우리가 올라온 길의 최종 목적지를 몽골문화원으로 적고 있었다. 내리(포천시)에서 올라오는 길을 빠뜨린 것이다. 남양주시에서 만들었다고 자기 지역의 등산로만 표시하다니 해도 해도 너무했다.

 주금산 숲길 안내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진입로 표시라도 해두었으면 좋았으련만, 자기 관내만 쏙 뽑아 그려 넣었다. 때문에 불기고개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주금산의 명물인 독바위를 놓쳐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정표나 안내도만 살펴볼 게 아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야가 열리기 때문이다. 아까 쉼터에서 살짝 얼굴을 내밀던 선바위가 거칠게 없다는 듯이 성큼 다가온다. 그 오른편으로는 가평의 산하가 펼쳐진다.

 몇 걸음 더 걷자,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샛길이 어렴풋이 나타난다. 물론 주 등산로는 아니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는 일은 없도록 하자. 멋진 전망대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올라선 선바위(혹은 조망돌뼈)’ 상부는 폐자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전망이 좋은 곳이니, 군부대의 망루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조망도도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2%가 아니라 20%쯤 부족한 듯. 마을 이름은 몰라도 눈앞에 펼쳐지는 산 이름이라도 적어놓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아쉽게도 조망은 허락되지 않는다. 구름을 잔뜩 머금은 날씨가 시야를 가로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주금산 정상은 물론이고, 수원산에 개주산, 철마산, 그리고 천마산으로 흐르는 천마지맥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데 말이다.

 이후부터는 천마지맥(天摩枝脈)’을 탄다. 한북정맥이 운악산을 지나 수원산에 오르기 전 명덕삼거리에서 남쪽으로 가지를 친 천마지맥(도상거리 49.4km)은 이곳 주금산을 지나 철마산·천마산·백봉·예봉산을 일군 다음 팔당호에서 숨을 거둔다.

 정상으로 가는 도중 바윗길을 타기도 한다. 모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곳도 있다. 거대한 바위가 날카롭게 서있기 때문에, 크랙을 붙잡고 통과해야만 한다.

 잠시 후 만난 또 다른 갈림길, 암봉으로 연결되는 샛길은 아까처럼 희미하다. 하지만 걸러서는 결코 안 된다. 조금 전 올랐던 선바위보다 훨씬 더 나은 조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주금산 정상. 그 오른편에 지난 해 답사했던 개주산이 있고, 당시 눈여겨 본 바 있는 가평 베네스트 골프장도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올라온 불기고개(수동고개)의 뒤로는 화채봉과 서리산, 축령산이 줄을 잇는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주금산의 두 명물이 성큼 다가온다. 왼쪽의 수직절벽은 선바위, 그 오른편에서 독바위가 솟아올랐다. 항아리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지 않나 싶다. 하나 더, 예전에는 덕암(德岩)’으로 불렸다는 얘기도 있다. ‘어진 덕()’자가 왜 붙었는지는 몰라도, 그게 덕바위를 거쳐 독바위가 되었다나?

 선바위에서 정상까지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짧고 완만한 내리막에 길고 가파른 오르막으로 보면 되겠다.

 명색이 정상인데 그리 쉽게 정복을 허락하겠는가. 막바지에 만나는 오르막은 상당히 가팔랐다.

 10 : 55.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55. 헬기장에 올라선다. 웃자란 잡초가 무성하지만 ‘H’자 보도블럭은 최근에 칠한 듯 하얀색으로 빛난다. 산악 안전사고를 대비해 관리해오고 있는 것 같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주금산 정상이다. 정상은 주금(鑄錦)’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도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없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탓에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육산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그저 두 개나 되는 정상석이 눈길을 끈다고나 할까?

 주금산은 포천시와 가평군의 경계(남양주시에서는 약간 빗겨나 있다)에 놓여있다. 정상석이 두 개인 이유일 것이다. 인증 사진은 잘 생긴 포천시의 것을 제켜두고 말뚝 모양의 가평군 것을 배경으로 삼았다. 삼각점(일동 20)까지 포함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아서이다.

 포천시라고 해서 남양주시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이정표의 방향표시에 남양주시나 가평군의 지명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등산안내도도 마찬가지. 포천시에서 만든 듯 자기 관내만 그려 넣었다. 망국의 지름길일 수도 있는 지역 이기주의가 언제쯤 사라질까?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차량을 이용해서 왔으니 불기고개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 때문에 하산 기록은 생략. 대신 걷다가 만난 버섯 몇 컷을 올려본다. 첫 만남은 느타리버섯 식용에다 채취한 양도 꽤 되어 우리 집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흰둘레줄버섯’. 항암효과(특히 자궁암)가 있다지만 사진만 찰칵.

 식용인 뽕나무버섯으로 여겨지지만 확실하지 않아 그냥 패스.

 꽃으로 오인하기 딱 좋을 정도로 잘생긴 버섯도 한 컷.

 마지막으로 먹음직스런 산머루 열매도 한 컷. 그나저나 오늘은 왕복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5.15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삼복더위로도 모자라 습기까지 잔뜩 머금은 날씨가 발길을 붙잡았던 모양이다.

쌍령산(雙嶺山, 502m)

 

산 행 일 : ‘23. 7. 1()

소 재 지 : 경기도 용인시(처인구) 원삼면 및 안성시 양성면 일원

산행코스 : 중촌마을빌리지주능선430.6쌍령산407.9임도문수봉분기점애덕고개미리내성지중촌마을(소요시간 : 9.85km/ 4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용인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으로 용인 남부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산이 품고 있는 기세만큼은 어디에 내놔다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자 순교자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쌍령산 자락인 미리내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유적지를 낀데다 교통편까지 좋아(서울에서 60 정도) 부담 없는 당일 산행지로 추천할 만하다

 

 산행들머리는 중촌마을(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평택·제천고속도로 서안성 IC를 나와 45번 국도를 타고 용인방면으로 가다 난실교차로(안성시 양성면 난실리)에서 안성맞춤대로로 바꿔 탄다. 이어서 노곡리 회전교차로에서 미리내성지로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중촌마을에 이르게 된다. 버스정류장(미산2)에서 골목으로 들어오면 마을회관이 나온다. 참고로 우리는 잠실역에서 5600번 광역버스를 타고 용인버스터미널까지 온 다음, 일행의 차량을 이용해 중촌마을로 왔다.

 지도(붉은 선)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했다. 임도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붉은 선이 아닌 오른쪽 점선을 따라 주능선(쌍령산과 쌍영산의 중간지점)으로 올라섰다. 하산도 애덕고개에서 미리내 성지로 내려온 다음 도로를 따라 중촌마을로 돌아왔다.

 쌍령산 방향으로 나있는 골목(중촌안길)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참고로 중촌마을은 미산리(美山里)’ 3개 자연부락(상촌·중촌·약산) 중 하나로, 중촌(中村)이란 지명은 마을의 위치에서 유래했다. 윗말과 아랫말로 불리다가 1914(행정구역 개편) 마을이 셋으로 나뉘면서 아랫말에서 중촌(또는 중말)으로 바뀐 것이다.

 골목길을 걷다보면 오세영(1955~2016) 작가의 생전 작업실도 만날 수 있다. 만화가의 사회적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작가로 1993년 한겨레신문이 선정한 우리 시대의 만화가 10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1999년 대한민국출판 만화대상, 2009년 고바우 만화상 등을 통해 작가로서의 면모를 인정받았다. 이밖에도 김수현 작가, 변승훈 화가, 배우 노주현 등 여러 예술인들이 이 마을에 산다는데, 시간에 쫓겨 일일이 들러볼 수는 없었다.

 문이 닫힌 탓에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안내판으로 대신해본다. 만화가 오세영은 낮은 시선에서 바라본 민초들의 삶을 만화 컷 속으로 옮겨 온 작가다. 우리네 얼굴과 표정, 말본새, 체취, 삶의 풍경 등을 생생하고 구수하게 담아내며 일가를 이뤘다. 대표작으로 땅꾼 형제의 꿈’, ‘만화 세계역사’. ‘월북작가 순례기’, ‘만화 토지 등이 있다.

 10분쯤 걷자 왼쪽 산자락에 안성 휴()빌리지라는 아파트처럼 생긴 건물이 얼굴을 내민다. 노인들을 위한 프리미엄 실버타운이 아닐까 싶다.(진입로는 다른 방향으로 나있다)

 중촌안길의 끝, 요런 주택이 들어서있어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마침맞게 집 앞에서 산자락을 향해 임도가 나있다.

 하지만 그 길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100m쯤 올라간 지점에 금줄을 쳐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야 없는 노릇. 오른쪽으로 내려가 작은 개울을 건너니 임도가 나온다. 방향만 보고 진행했는데 운이 좋았다고 보겠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후부턴 웃자란 잡초와 잡목들을 헤치며 길을 만들어가는 수준의 산행이 이루어진다. 방향만 보고 찾아가는 개척 산행이라고나 할까?

 우리 말고도 이 코스를 이용한 사람이 있었다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되어준다.

 선두를 맡은 최군이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다. 코를 땅에 대고 올라야할 만큼 가파른 산비탈은 그냥 오르기만도 벅찬데, 잡목들까지 가득 찼으니 길을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산행을 시작한지 30. 무덤 몇 기가 있는 지능선(支稜線)에 올라섰다.

 그렇다고 길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거친데다 가파르기까지 한 산길은 변할 줄 모른다. 뿐만 아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까지 발목을 잡는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땀으로 인해 온몸은 이미 흠뻑 젖어버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쉬엄쉬엄 오르다가, 그마저도 힘들면 잠깐씩 쉬어가며 오른다.

 그렇게 30(지능에 올라선 뒤) 정도의 악전고투를 치르고 나서야 주능선에 올라설 수 있었다.(정규 탐방로로 올라오지 않은 탓인지 이정표는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튼 오른편은 쌍영산(이곳에서 150m쯤 떨어진 지점), 우리가 오르려는 쌍령산은 왼쪽으로 가면 된다.

 쌍영산(정상석은 없지만 삼각점이 있다) 사진은 최군이 촬영해 온 것(뒤로 쳐진 나를 기다리다가 다녀왔단다)을 올려본다. 쌍령산에서 1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봉우리인데 누가 이름(‘ 으로 살짝 바꿨다)을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지도(일부이지만)에까지 등재되어 있다.

 조금은 편안해진 산길을 따라 13분쯤 오르면 430.6m, ‘맨발이라는 아호를 쓰는 분이 팻말을 매달아 놓았다.

 쌍령지맥(雙嶺枝脈)’이란 한남정맥의 문수봉 서쪽 1.6m 지점의 봉우리(380m)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쌍령산(502m)·천덕산(322.3m)·백련봉(235.2m)·덕암산(164m) 등을 일구고 동고리(평택시 고덕면) 진위천과 안성천의 합수점에서 그 숨을 다하는 도상거리 43.6km의 산줄기이다(신산경표 참조).

 고사목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땅에서 태어난 나무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원시의 숲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라 하겠다. 지맥 종주를 하는 이들을 빼고는 찾는 이가 거의 없다는 얘기도 될 것이고...

 정상에 가까워지자 바위 무리가 자신들도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그래 500m를 겨우 넘기는 수준이지만 산은 산이다. 그것도 정상석까지 갖춘 의젓한 산이다.

 저건 송악이겠지? 하늘로 쑥쑥 뻗어나가는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땅 위를 이리저리 기어 다니거나 다른 나무나 절벽에 빌붙어 살아야 하는 슬픈 운명을 타고난 넝쿨 식물 말이다.

 주능선이라고 해서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다. 이렇게 가파른 구간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 숨이 턱에 걸릴 즈음에야 헬기장으로 이루어진 쌍령산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2.37km이니 무척 더디게 올라온 셈이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얘기도 된다.

 헬기장의 남단에서 조망이 열린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천천히 담아가라는 듯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정상석은 헬기장의 한쪽 귀퉁이에 세워져 있었다. 벤치 등의 편의시설도 그쪽에 몰려있다. 이왕에 올라왔으니 산의 내력이나 알아보자. 쌍령산(雙嶺山)이란 이름은 산자락에 있던 동명의 절(쌍령사)에서 따왔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쌍령사(雙嶺寺)는 성륜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절은 현재 찾아볼 수 없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지리서나 고지도에도 나오지 않는단다. 다만 쌍령산 남쪽, 고려 때 백운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쌍운암(雙雲庵) 터가 쌍령사가 있던 자리로 추측될 뿐이란다.(네이버백과 발췌·정리)

 하나 더, 쌍령산의 옛 이름은 성륜산(聖輪山)’이라고 한다. ‘성륜이란 성스러운 바퀴 , 불교에서의 법륜(法輪)을 뜻한다. 법륜은 부처의 교법을 이르는 말로 전륜왕의 금륜(金輪)이 산과 바위를 부수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에 비유된다. 따라서 성륜산은 마야산(摩耶山)이나 반야산(般若山), 문수산(文殊山)처럼 불교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정상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평상 용도의 보도블럭도 깔아 놓았다. 금계국을 심은 꽃밭도 눈에 띈다. 덕분에 우린 점심상을 펴고 느긋하게 쉬다 갈 수 있었다.

 이정표는 3개 주능선 중 2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미리내 성지 방향의 북서쪽 능선(420고지와 바사리고개를 거쳐 문수봉·어은산으로 이어진다)과 고삼농협 방향의 남쪽능선(우리가 올라온 능선으로 쌍영산을 거쳐 봉황산으로 이어진다)인데,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쌍령산은 동남쪽 능선(경수산으로 이어진다)도 거느린다.

 이곳도 역시 라이더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진입 방지 볼라드(bollard)’는 보이지 않지만 출입을 금지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하지만 우리가 쉬고 있는 중에 라이더들이 여럿 지나가고 있었다. 저런 현수막 정도로는 그들의 출입을 막지 못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거북이 닷! 거북이를 쏙 빼다 닮은 바위를 본 최군이 거북이를 생포하겠다며 냉큼 올라타고 본다.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知天命)에 들어섰는데도, 산에만 들어서면 아직도 소년이다. 그런 최군의 모습을 바라보는 난 마냥 즐겁고...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미리내(성지) 방향이다. 용인시(오른쪽)와 안성시(왼쪽)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인데, 능선을 따라 난 길은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초반에 딱 한번 요런 바위구간을 지나기도 한다.

 20분쯤 걸어 첫 번째 갈림길(이정표 : 석포숲기념공원 3.61km/ 미리내성지 1.44km/ 쌍령산 0.80km)을 만났다. 왼쪽은 미리내성지로 내려가는 단축 코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능선을 타기로 했다. ‘애덕고개를 거쳐 미리내 성지로 내려가기 위해서다.

 5분쯤 더 걸어 만난 이정표(미리내고개 3.1km/ 쌍령산 0.9km) 용인시경계둘레길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민간 주도로 조성된 길이 240km의 둘레길로 시 경계를 따라 용인시를 한 바퀴 돌게 된다.

 의시시한 송전탑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위험시설로 분류되지만(특히 비오는 날에는), 오늘처럼 맑은 날에는 시야를 열어주는 고마운 시설이 된다.

 길은 여전히 곱다. 조금이라고 가파르다 싶으면 침목계단을 깔고, 그것도 모자라 밧줄난간까지 매어놓았다. 행여 들어올세라 쳐놓은 금줄이야 보기 좋은 풍경이 아니었지만.

 임산물의 종류를 적어놓지 않은 걸 보면, 산나물 채취 자체를 금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길이 고와선지 내딛는 발걸음들이 하나같이 경쾌하다.

 하산을 시작한지 50. 이정표(미리내 성지 2.3km/ 고초골 공소 2.3km/ 쌍령산 1.6km)가 이름표를 성지순례길로 바꿔달았다. 김대건 신부님을 따라 걷는 순례길 중 골초골로 가는 코스가 이곳에서 갈린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산길이라고 해서 마냥 내려가는 것만은 아니다. 아래 사진처럼 제법 가파른 구간을 올라가기도 한다. 하지만 침목계단에 밧줄난간까지 갖춰 오르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하면 ‘407.7m에 올라선다. 능선 상에 두루뭉술하게 솟아오른 그저 그렇고 그런 봉우리이다. 하지만 쌍령산 정상에도 없던 삼각점(안성 446)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자체에서도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벤치와 식탁까지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국제신문 근교산행 팀의 산행대장을 역임한 최남준씨도 그런 점을 의식했던 모양이다. 해발고도를 적은 표지판을 나무에 매달아 자신이 지나갔음을 알린다.

 또 다른 이는 상원봉(408m)’이라고 적힌 코팅지를 매달아놓았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도 검색되지 않는 지명이니 문제다. 요 아래 어디쯤에 상원마을이라도 있을지 모르겠다.

 17분쯤 더 걸어 임도(이정표 : 애덕고개 1.1km/ 쌍령산 2.3km)에 내려선다. 탐방로는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오른다. 왼쪽으로 가도 미리내성지에 이르지만(이정표가 애덕고개로 갈 수 있다고 하니까) 우리는 그냥 능선을 타기로 했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능선은 계속해서 곱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코스다.

 300m쯤 진행했을까 또 하나의 갈림길(이정표 : 애덕고개 0.8km/ 문수봉 3.1km/쌍령산 2.6km)이 나타난다. 오른편은 문수봉길(김대건 신부님을 따라 걷는 도보순례길 중)’로 문수봉을 거쳐 은이성지에 이르게 된다. ! 이곳에서 문수봉으로 가는 쌍령지맥과 헤어진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아까의 임도에서 20. 탐방로는 또 다른 임도로 내려선다. 이정표(애덕고개 0.3km)는 임도(왼쪽)에도 애덕고개를 적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길은 삼봉산-시궁산-바래기산을 잇는 20km 길이의 임도일 것이다. 석포숲공원으로 연결되는 임도를 타더라도 애덕고개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고.

 이번에도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선다. 애덕고개로 연결되는 이 구간은 대부분 내리막이다. 두어 곳에서는 침목계단을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르기까지 하다.

 8분쯤 지나면(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15) ‘애덕고개(이정표 : 미리내성지 0.5km/ 은이성지 9.8km/ 시궁산 2.34km/ 는 쌍령산 대신 고초골공소가 적혀있다)’. 용인시(처인구 이동읍)의 묵리와 안성시(양성면)의 미산리를 잇는 고갯마루이다. 하나 더, 얼마 전에 올랐던 시궁산의 주요 들머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애덕고개는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 순례길인 청년 김대건 길(은이성지미리내성지)’에 있는 3개의 고개 중 마지막 고개이다. 박해를 피하던 천주교 신자들이 삼덕(신덕·망덕·애덕)을 기리며 넘나들던 고갯마루로 알려진다. 그래선지 천주교 관련 기념물들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그중 김대건 신부님에 관련된 안내판이 가장 눈에 띈다. 1846 9 16, 그의 나이 26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를 믿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한강의 새남터에서 8번째 칼에 김대건 신부의 머리는 땅으로 떨어졌다. 순교 후 미리내 교우촌에서 살던 17세 이민식(빈첸시오)이 신부님의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미리내 성지에 안장했다고 한다.

 반대편의 안내판 중 하나도 소개해 본다. 이민식(빈첸시오, 1828~1921)이 새남터에서 순교한 신부님의 시신을 이곳까지 모셔왔는데 날이 밝더란다. 하는 수 없이 산비탈 콩밭 이랑에 시신을 숨기고 솔가지로 덮어놓았는데, 콩밭 임자가 인부들을 데리고 와 가을걷이를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이때 나온 게 묵주신공’, ‘제 목숨을 대신 드려도 좋으니 우리 착한 목자 김신부님 장례나 잘 치르게 해 주십시오였다. 그러자 천둥번개가 치면서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는 게 아닌가. 콩밭 임자가 인부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이 개면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더란다. 이런 게 바로 기적이 아니겠는가.

 청년 김대건 길은 지난 2020년 용인시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둘레길이다. 김대건 신부가 생전 사목활동을 하던 길이자, 순교 후 유체가 이동한 경로이기도 하다. 처인구 양지면 은이성지에서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에 이르는 10.3km의 숲길이다.

 미리내 성지는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의 묘역, 어찌 그를 기리는 시비 하나쯤 없겠는가.

 미리내 성지로 내려가는 길, 잠시지만 청년 김대건 길을 걸었다. 이 구간은 17세의 청년 이민식이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옮긴 길이기도 하다. 신부님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10 26일 그는 새남터 백사장에서 포졸들의 눈을 피해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시신을 안고 산길로 150여 리 길을 밤에만 걸어서 닷새째 되는 날인 10 30일 미리내에 도착했다. 그가 걸은 길 중 일부가 바로 이 길인 것이다.

 17분쯤 내려오면 미리내 성지’. 첫 만남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 성당 및 묘역이다. 이 성당의 주보성인은 순교자들의 모후라고 한다. 그래선지 입구에 피에타(Pieta) 상이 세워져 있었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안고 비탄해 하는 형상인데, 두 분 모두에 한복을 입혀드린 게 눈길을 끈다.

 1921년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 첫 사제이자 순교자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 건립을 결정한다. 당시 미리내 본당의 초대 주임신부이던 강도영(마르코) 신부는 불과 몇 시간 동안 계시다가 치명하신 새남터보다는 긴 세월 묻히고 살이 썩은 미리내에 세워져야 한다. 특히 김신부님의 유해를 모셔온 미리내 교우들의 열성을 생각해서라도...’라고 주장했다. 결국 1927년 미리내에 기념관 건립이 결정됐고, 1928년 봄 공사를 시작 그해 7월에 완공되었다. 기념성당의 제대 아래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아래턱뼈와 척추뼈가 모셔져 있고, 시신이 담겨져 있던 목관 조각 일부도 전시되어 있단다.

 1925 7 5,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비오 11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김신부님의 묘는 시복에 맞춰 지어진 고딕 양식의 저 성당 앞에 모셔져 있다. 그 옆에는 김대건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미리내본당 초대 주임이자 한국 교회의 세 번째 사제 강도영 신부, 그리고 미리내본당 3대 주임 최문식 신부의 묘소도 함께 있다. 묘역 위쪽에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의 묘소와 이민식(빈첸시오)의 묘소도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후부터는 미리내 성지의 경내를 걷는다. 성지 입구 쪽으로 가다보면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이 조성돼 있어 순례의 마음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 참고로 미리내성지의 미리내는 은하수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이게 신유박해(1801)와 기해박해(1839) 때 신자들이 숨어들어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궈 살던 마을의 이름이 됐다. 밤이면 그네들의 집에서 새어나온 호롱불빛이 깊은 밤중에 은하수처럼 보인다고 해서다.

 나 같은 천주교 신자들이라면 십자가의 길 14(본시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무덤에 묻히기까지 그리스도 수난의 마지막 사건들을 묘사한 14장면의 연속 그림 또는 조각)를 지나며 해당 기도를 드려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그렇게 잠시 내려가면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김대건 신부님의 유해 중 종아리뼈가 제대 아래에 모셔져 있단다)’이 얼굴을 내민다. 1991년에 세웠다고 하는데 외관이 참 특이하다. 성당은 피라미드를 닮았고, 종탑으로 여겨지는 옆 건물도 영락없는 오벨리스크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홍해를 건넜는데. 이와 관련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무튼 개방시간을 못 맞춘 탓에 고딕양식의 천정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치장되어 있다는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다.

 성지를 빠져나가는 도중에는 묵주기도의 길을 만났다. 환희와 빛, 고통, 영광의 신비가 나타나는데, 기도를 드릴만한 시간이 없어 성호만 그은 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구원의 기도 등등 만만찮은 시간이 소요되니 어쩌겠는가.

 묵주기도의 길  환희의 신비 3.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하는 곳이다.

 미리내 성지의 입구에도 조형물들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그중 한국 최초의 사제이자 유네스코 세계인물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이 묻혀 계신, 박해시대의 교우촌이라는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하단에는 신부님이 순교하면서 남기신 유언을 적어 넣었다.

 아래 사진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성 요샙 미리내성당은 들러보지 못했다. 1906년에 건립된 유서 깊은 성당이라는데도 말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저 성당이 있는 줄도 모르고 찾아왔었으니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그건 그렇고 오늘은 4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9.85km(성지 정문에서 산행출발지인 중촌마을회관까지의 도로 1.5km 포함),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무덥고 습기 찬 날씨 탓이 아닐까 싶다

시궁산(時宮山, 514.9m)

 

산 행 일 : ‘23. 4. 15()

소 재 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일원

산행코스 : 묵리마트임도(쉼터)시궁산383.2수녀원 갈림길임도묵리마트(소요시간 : 4.88km/ 2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용인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으로 용인 남부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산행은 옆에 있는 삼봉산(414m)과 연계하여 종주하는 코스가 많은데, 거문정을 기점으로 하여 애덕고개를 거쳐 시궁산과 삼봉산 순으로 등반하고 굴암마을로 내려오거나, 반대로 굴암마을에서 시작하여 거문정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주로 이용된다. 교통편이 좋고 서울에서 불과 60 떨어진 곳이라 부담 없는 당일 산행지로 추천할 만하다

 

 산행들머리는 묵리마트(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

수도권 제2순환고속도로(화성-광주) 서용인 IC에서 내려와 국도 42호선을 타고 이천방면으로 달리다 대촌교차로(처인구 남동)에서 45번 국도로 옮겨 안성·평택 방면으로 간다. 원천교차로(이동읍 천리)에서 빠져나와 318번 지방도(백암방면)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묵리마트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우리는 잠실역에서 5600번 광역버스를 타고 용인버스터미널까지 온 다음, 택시를 이용해 묵리마트까지 왔다.

 시궁산의 들머리는 보통 애덕고개(또는 거문정)나 굴암교가 이용된다. 어느 한곳에서 시작해 시궁산과 삼봉산을 연계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우리처럼 코스를 줄이고 싶은 경우에는 묵리마트에서 시작해 곧장 시궁산으로 오르면 된다.

 도로 건너 산자락으로 파고들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초입에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만일 승용차를 몰고 왔다면 안내도 앞의 공터에 주차시키면 된다.

 현재 위치를 출발점으로 삼는 안내도는 등산코스를 5개로 나눈다. 시궁산 정상까지 일단 오른 다음, 어디로 갈지를 놓고 코스를 구분했다. 등산 마니아들은 삼봉산이나 갈미봉을 연계시키면 되겠고, 우리처럼 나들이 삼아 오른다면 임도를 낀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산길은 고운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이 경사까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숲이 온통 연록색이다. ’연록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얘기도 있지 않는가.

 명색이 산인데 마냥 편히 오를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맞다. 산길은 오래지 않아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해버린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경사진 곳에는 침목계단을 놓고, 그래도 힘들다 싶으면 밧줄난간을 매어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다.

 산행을 시작한지 20. 임도에 올라서니 쉼터가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산행 시작부터 쉬어갈 이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오른다. 임도를 내면서 생긴 절개지에 침목계단이 놓여있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계단을 오르다) ‘묵리(墨里)’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자연 마을로 굴암(窟岩묵방(墨防장촌(長村한덕(閑德) 등을 두었는데, 먹을 만들던 곳이라 하여 먹 묵()’자를 지명으로 쓴다고 한다. 옛날에는 묵방이 또는 묵뱅이로 불리기도 했다.

 계단 위 능선에는 석포 숲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2대에 걸쳐 수집한 고서화를 국가에 기증해 화제가 된 손창근 선생이 200만 평이나 되는 사유지를 국가에 기부했다는 것이다. ‘석포(石圃)’ 1974년 서강대에 양사언필 초서’(보물 제1624) 등 고서화 200점을 기증했던 손세기 선생의 아호이다. 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아들인 손창근이 50여 년간 사유림 662( 200만평)에 잣나무·낙엽송 200만 그루를 심어 가꿔오다 2012년 식목일에 산림청에 기부했다.

 안내판이 전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니 장촌(長村)’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장씨 성을 가진 이들이 터를 잡았다는 마을인데, 잘 지어진 집들로 꽉 들어차있다. 하긴 석포숲이라는 명품 공원을 끼고 있으니 저만한 전원주택 단지도 없겠다. 참고로 석포 숲 공원 2018 북부지방산림청 Vista Point 10 중 하나로 선정된 바 있다. 또한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1호 탄소 중립의 숲으로 선정돼 시민 참여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임도를 지나면서 산길은 많이 가팔라진다.

 그렇다고 버겁다는 얘기는 아니다. 능선이 온통 진달래 꽃밭으로 이루어진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화사하게 피어난 진달래꽃이 눈웃음을 지어오는데 버겁다는 느낌쯤이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길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꽃으로도 막지 못할 정도로 가파른 구간이 나타났다. 산길은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고도를 높여간다.

 두어 곳에서 만난 돌탑이 그 증거라 하겠다. 볼품없는 생김새지만 저건 간절한 소망의 발현이다. 얼마나 버거웠으면 신의 힘까지 빌어보려 했겠는가.

 그게 안타까운 지자체도 한 수 거들었다. 밧줄 난간을 설치해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다.

 그래도 버겁다면 잠시 쉬었다 가란다.

 심기일전 해 다시 길을 나선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나는 급경사 오르막이 기를 확 죽여 버린다.

 오르막길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길고 가파른 오르막에 짧고 완만한 내리막이 반복된다.

 시궁산은 전형적인 육산이다. 그렇다고 바위지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 위로 길이 나있기도 했다.

 뒤돌아본 바위지대.

 고사목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아 원시의 숲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벤치라고 다 같은 벤치가 아니다.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자연스런 멋을 더했다.

 산길이 마냥 가파른 것만은 아니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잠시지만 완만한 구간이 나타기도 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20. 드디어 정상에 올라섰다. 2020년의 등산로 정비사업 덕분에 요즘은 전망데크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시궁산은 용인 남부지역의 최고봉이다. 그래선지 정상에 광장 수준의 전망데크를 만들어놓았다. 35(112)이나 되는 넓이에 데크를 깔고 한가운데 정상석을 모셨다. 여러 개의 벤치를 놓아 쉼터의 기능까지 더하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옛날, 그러니까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이곳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보통 연못이 아니라 하늘나라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했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연못이었단다. ! 누군가는 하늘나라에 있는 여러 궁() 중 선녀들이 목욕하는 곳을 시궁(時宮)이라 부른다고 했다. 이 산의 이름이 시궁이 된 이유라면서...

 시궁산과 영욕을 함께 해오던 옛 정상석은 전망데크 아래로 옮겨놓았다. 그런데 높이가 513m로 적혀있는 게 아닌가. 조금 전의 것은 분명 514.9m이었는데도 말이다. 전망데크를 만들면서 1.9m 높이의 지지대를 세웠는지도 모르겠다.

 정상의 삼각점(용인 507)은 놓치기 딱 좋겠다. 데크 바닥에 4각의 작은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모셔두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봉우리 세 개가 뚜렷한 삼봉산(414.7m)은 물론이고, 저 멀리 어비리의 이동저수지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시 중심부에 있는 석성산과 수지구의 광교산, 모현읍의 정광산 등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정표(애덕고개 2.3/ 삼봉산 1.7/ 묵리 1.4)는 정상으로 올라오는 길이 세 곳임을 알려준다.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삼봉산 방향인데 몇 걸음 걷지 않아 헬기장을 만날 수 있었다. !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전망데크 아래서 30분을 머물기도 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잦아들었다. 이슬비보다도 더 가는 는개로 변해 우산이 필요 없게 됐다. ! ‘종주산행의 왕(‘월간 산에서)’이라는 신경수씨는 이 산줄기를 한남쌍령시궁단맥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한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쌍령지맥의 문수봉(용인시 이동면·원삼면·양성면의 경계에 있는 390m)에서 서쪽으로 분기해 갈미봉(338m)·묘봉(228.6m)·시궁산·삼봉산(413m)·능골산(190m) 등을 일구고 신창마을(용인시 이동면)의 진위천변에서 숨을 다하는 약 10km의 산줄기란다.

 하산 길도 가파르기는 매한가지였다. 침목계단을 놓았으나 두텁게 쌓인 낙엽으로 인해 무척 미끄러웠다. 올라올 때보다도 더 스틱에 힘을 주었다고나 할까?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 펴라는 속담이 있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산길은 저런 허접한 돌탑까지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등장시킨다.

 하산 길이라고 해서 마냥 내려가는 것만은 아니다. 작은 봉우리 두엇을 올라야하기 때문에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만나기도 한다.

▼ 하산을 시작한지 25. ‘383.2m에 올라서니 식탁을 겸한 벤치가 놓여있다그러니 어찌 지나칠 수 있겠는가준비해 온 음식들을 펼쳐놓고 만찬을 즐겼다지난 달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챙겨온 전통주 우조를 꺼내놓았음은 물론이다(치약 냄새가 난다며 모두들 고개를 내둘렀지만).

▼ ‘383.2m의 이정표는 삼봉산이 0.9km 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려준다그게 마음이 놓였던 모양이다간식 삼아 둘러앉은 자리가 1시간으로 늘어나버렸다하긴 지난 가을 만난 게 마지막이었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 다시 길을 나선다길은 아까보다도 더 가팔라졌다그런데도 계단이 놓여있지 않으니 문제다그렇다고 겁낼 필요까지는 없다밧줄 난간을 만들어놓았으니 이를 붙잡고 내려오면 된다.

▼ 행여나 미끄러질세라 조심조심 내려서다보면 어느덧 능선안부에 이른다안부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는데썩 편치 않은 구조물도 눈에 띈다오토바이 진입 방지 볼라드(bollard)’를 설치해놓은 것이다이곳 역시 오토바이의 산길 훼손이 심했던 모양이다.

 이정표(삼봉산 0.5/ 시궁산 1.0)는 양쪽 능선만 가리킨다.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을 찾아낼 수 있다.

 삼봉산 쪽으로도 볼라드(bollard)’가 설치되어 있었다. 밧줄 난간도 보인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 일행은 이쯤에서 삼봉산과의 종주산행을 그만두기로 했다. 는개로 변했던 비가 언제부턴가 이슬비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산이 어디로 가겠는가. 다음에 오르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영보수녀원을 거쳐 용인레저스포츠로 내려가는 길인데 가파르기 짝이 없는 내리막이 한참동안 이어진다.

 이런 길은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빗줄기 속에서 물기를 흠뻑 머금고 있는 산비탈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저런 가느다란 밧줄이 고마운 이유일 것이다.

 고행에 가까운 내리막길이 오래지 않아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후부터 산길은 물기 한 점 없는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하면 임도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오른쪽으로 방향으로 틀어 임도를 따른다. 참고로 반대편(왼쪽) 임도를 따르면 굴암고개로 연결된다. ‘굴암교를 들머리로 삼아 삼봉산을 오를 경우 들르게 되는 고갯마루이다. 영보수녀원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 자세히 찾아보지 않았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S’자를 그려가며 이어지는 임도는 휘도는 자체만 갖고도 아름다웠다. 거기다 하늘을 찌를 듯이 뻗어 오른 잣나무와 낙엽송이 운치를 더해준다. 시궁산의 산허리를 휘돌아가는 명품 트레킹코스 석포 숲 테마임도가 새로 개설되었다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었는가 보다.

 가끔은 조망이 트이기도 한다. 산자락에는 작은 마을이 들어앉았다. 산이 산에 기대고, 사람들은 그 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모양새이다.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들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누군가의 작은 정성이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25분쯤 걸었을까 길이 차단봉으로 막혀있다. 일반 차량의 진입을 막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곳에서 임도가 둘로 나뉘고 있었다. 오른편은 아까 산을 오르면서 만났던 데크쉼터로 이어진다. 걸었던 길을 다시 걷지 않으려는 우리는 물론 왼쪽 방향, 즉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테마임도 종점(0.76km)으로 간다.

 이정표는 임도가 석포 숲 공원까지 연결됨을 알려준다. 6.14km를 더 걸어야 하니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 하겠다.

 낙엽송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길을 10분 남짓 더 걷자 또 다른 차단봉이 가로막는다. 이번에는 오른쪽에 샛문을 내놓는 친절함을 베풀었다.

 차단봉을 지나자 펜션처럼 생긴 주택단지가 나온다. kakaomap 펜션여행으로 적고 있으나, 입간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아 자세한 정보는 알아낼 수 없었다.

 산행날머리는 묵리마트(원점회귀)

펜션을 빠져나오면 318번 지방도(이원로)가 나오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50m쯤 더 걸으면 묵리마트가 나오면서 시궁산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은 2시간 4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이 4.88km을 찍고 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무릎이 시원찮은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개주산(介胄山, 675m)

 

산 행 일 : ‘22. 11. 12()

소 재 지 : 경기도 가평군 상면

산행코스 : ‘원흥리마을회관원흥교회제각포도밭467.7m원흥리 갈림길율길리 갈림길개주산헬기장베네스트골프장 입구원흥마을회관(소요시간 : 6.99Km/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가평군 상면에 나지막이 엎드린 675의 소담한 산. 산이 그다지 높지 않은 탓도 있지만, 인근에 있는 주금산(813)이나 운악산(936)에 가려 입소문을 타지 못한 감이 있다. 차도를 바짝 끼고 있는데도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그냥 지나버리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교통편이 좋고 서울에서 불과 50 떨어진 곳이라 부담없는 당일 산행지로 추천할 만하다

 

 산행들머리는 원흥리 마을회관(가평군 상면 원흥리)

국도 46호선(경춘로)을 타고 춘천방면으로 올라오다 하천IC(가평군 청평면 하천리)에서 내려와 37번 국도(포천방면)를 따라 15km쯤 들어오면 원흥교차로(상면 원흥리)가 나온다. 교차로에서 빠져나와 원흥길로 들어서면 곧이어 원흥리(元興里)에 이른다. 타고 온 차량은 회관 옆 주차장에 세워두면 되겠다. ! 2년쯤 전인가 저 회관에 행복마을관리소가 들어선다는 기사가 떴었다. 초고령화·과소화·저소득 등 3중고를 겪으며 소멸 위기를 겪는 농어촌의 위기를 주민 스스로 타개해나가기 위한 생활공동체라나? 이제라도 삶의 질 향상과 지역 활력을 불러일으키겠다니 다행이라 하겠다.

 원흥리(마을회관)나 율길리(자작교), 베네스트골프장 입구 등에서 오르는 게 보편적이다. 하지만 주금산과 연계산행을 하는 이들도 의외로 많다. 우리처럼 승용차를 타고 온 사람들은 주차가 용이한데다 원점회귀가 가능한 원흥리를 기점으로 삼는 게 보통이다.

 정자(元興亭) 앞 표석은 마을의 유래를 적고 있었다. 먼 옛날 마을에 있던 원흥사(元興寺)라는 절에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이다. 이 절의 불법 높은 스님이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었는데, 그 이후로 이곳이 민간불심(民間佛心)의 터전이 되었다 하여 원흥부락(元興部落)’이라 부르기 시작했단다. 아쉬운 점은 태봉2라는 지명을 아직도 쓰고 있는 것이다. 2016년 법정 동리로 독립해 나왔으면서도 말이다.

 마을회관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잠시 후 원흥교회를 만났다면 제대로 들어선 셈이다.

 길이 둘로 나뉘는 원흥교회 앞에서는 약간은 낯선 선택이 필요하다. 오른쪽으로 난 포장길을 버리고 포장도 되지 않은 왼쪽(실제는 직진이다)으로 들어서야 한다.

 그나저나 마을은 인적이 끊겼다싶을 정도로 텅텅 비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마을도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30.6%나 된다는 기사를 본 것 같다. 초고령화 마을에 해당된다는 얘기다. 그러니 초겨울 농한기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어디 흔하겠는가.

 마을을 벗어나 임도로 들어선다. 그런데 저 철문의 용도는 대체 뭘까? 여느 임도라면 차단봉 하나면 족할 텐데도 말이다.

 국가지점번호판(다사 8413-7969)까지 세워져 있는 걸 보면 길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나보다.(가평군에서는 원흥리에서 시작되는 등산로의 들머리를 다른 곳에 내놓았기에 하는 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5. 원주최씨(原州崔氏) 제각을 만났다. ‘경주 최씨에서 분관된 성씨라는데, 누구의 위패를 모시는 제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입동(立冬)이 지난지도 벌써 5. 그래선지 산자락은 초겨울 느낌이 완연하다. 활엽수들은 빈가지만 허공에 걸려있고, 낙엽 침엽수들도 하나 둘 가늘디가는 잎이 져간다.

 산행을 시작한지 25. 작은 능선을 앞에 둔 지점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GPX트랙이 지시하는 대로 왼편으로 간다.

 이즈음 널따란 포도밭이 얼굴을 내민다. 해발 300 이상의 준고랭지에서 생산되는 운악산 포도(이 부근의 포도는 운악산포도로 통칭된다)’는 당도가 높고 향이 뛰어나 가평 특산물의 중심에 우뚝 선 바 있다. 비가림농법으로 생산되는 포도인지라 단 맛이 더욱 풍부해 선물용으로 선호된단다.

 달고 맛있는 포도는 사람만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야생동물도 군침을 흘리는 듯, 접근 방지용 고전압(高電壓) 전선을 꼼꼼히도 둘러놓았다.

 조금 더 가니 비닐 망()으로 길을 막아놓았다. 산짐승으로부터 뭔가를 보호하려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는 잘 가꾸어진 가족묘역이 들어서 있었다. 그 묘역 덕분에 시야까지 툭 트인다. 하지만 연무가 짙어 그 너머에 들어앉아 있을 축령산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묘역 뒤쪽의 비닐망을 넘어 산행을 이어간다. 이어서 능선을 따라 오르는데, 길은 희미하지만 잡목이 거슬리지는 않아 걷기에 불편하지 않다.

 뒤이어 나타나는 잣나무 숲. 문득 가평의 산속을 헤집고 있다는 걸을 느끼게 된다. 산자락에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아름드리 잣나무가 가득한 것이다.

 맞다. 이곳 가평은 국내 잣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전국 최대의 잣 생산지가 아니겠는가. 저 나무에서 채취되는 잣 또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단다. 가평군이 타 지역보다 일교차가 높은 탓에 이곳에서 생산되는 잣 또한 타 지역의 것보다 더 고소하기 때문이란다.

 산행을 시작한지 50. 능선(앱은 고도를 443m로 찍는다)에 올라서니 폐 군사시설이 널려있다. 군사적 요충지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 개주산 일대는 중공군과의 주요 격전지 중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2014년에는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산길은 이곳에서 오른쪽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쳐져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길이 조금 더 또렷해졌음은 물론이다. 이후부터는 동릉(東稜)으로 여겨지는 능선을 계속해서 탄다.

 길이 편해진 덕분에 주위를 돌아보는 시선까지 여유로워졌다. 그뿐 아니다. 육산에서 만난 바위가 반가워 올라가보는 호사까지 더했다.

 인터넷 게임에 나오는 팩맨(Pac-Man)을 닮았네요.’ 맞다. 집사람의 말마따나 못난이 팩맨이 고스트를 피해 쿠키를 잡아먹는 모양새이다.

 경주에 있는 단석산의 명물인 단석(斷石)‘을 떠올리게 만드는 바위도 만났다. 김유신이 난승(難勝)이라는 신인으로부터 얻은 신검(神劍)으로 내리쳤다는 그 바위 말이다. 아니 마치 칼로 자른 듯이 반듯하게 둘로 쪼개진 것이 단석산의 바위보다 훨씬 더 잘 생겼다.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나 붙여놓는다면 또 하나의 명품 바위로 탄생될 게 틀림없다.

 육산의 특징대로 산길은 순하다. 하지만 가파름까지 없앨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거기다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능선에 올라서고는 10). ‘삼각점이 설치된 봉우리에 올라섰다. 핸드폰의 앱이 467m를 찍는 걸 보면, 선답자가 얘기하던 467.7m인 모양이다. 아무튼 이곳에는 지하 벙커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고도를 높여간다. 아니, 짧고 완만한 내림에 길고 가파른 오름의 연속이다.

 ! 사격훈련 중이니 출입을 하지 말란다. 철조망으로 능선을 가로막기도 했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야 없지 않겠는가. 설마 공휴일(카투사에서 근무했던 난 70년대에도 토요일이 휴무였다)까지 훈련을 하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그냥 통과해버렸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삼거리.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정표(개주산 정상 1.7/ 원흥리 1.8)를 만났다. 하지만 우리가 걸어온 능선으로는 방향표시를 해놓지 않았다. 선답자의 GPX트랙과 kakaomap이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아니면 가평군에서 별도의 등산로를 만들어놓았을 것이고...

 또 다시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산행을 이어간다.

 초겨울에 꽃구경은 어불성설. 그 아쉬움을 꽃을 쏙 빼다 닮은 버섯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잘 생긴 버섯은 꽃보다도 더 예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뿐 아니다. 심심풀이 삼아 채취한 표고버섯과 노루궁뎅이버섯은 현장에서 막걸리 안주가 되어주었고, 양이 조금 많은 느타리버섯은 다음날 아침 된장찌개 재료로 변신까지 했다

 꽃만 닮은 게 아니다. 어떤 것은 영락없는 해산물이다. 보라. 저 버섯은 군침이 확 돌 정도로 가리비조개를 닮지 않았는가.

 요건 구름? 아무려면 어떤가. 내 눈에는 꽃보다 아름답기만 한데...

 보건복지부에서 가장 좋아할만한 나무도 보인다. 한 뿌리에서 여덟 줄기가 나왔으니 저만하면 다산의 로고로 삼아도 되겠다.

 산길은 거의 평탄하게 이어진다. 완만하지는 않지만 버거울 정도도 아니다.

 고갯마루로 오인하기 딱 좋은 작은 고개에 내려서기도 한다.

 앙증맞은 쉼터도 만날 수 있었다. 통나무 의자가 발길을 붙드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막걸리로 목도 축일 겸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개주산의 또 다른 특징은 단풍나무라 하겠다. 내장산이나 강천산만큼은 아니지만 굵고 튼실한 단풍나무들이 능선을 뒤덮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걷자 길고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이번에는 버거울 정도로 가파른 산길이 20분 가까이나 계속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원흥리갈림길에선 58). 이번에는 율길리 갈림길(이정표 : 개주산 정상 0.2/ 율길리 3.2/ 원흥리 3.3)이 나타난다.

 이정표는 오른편이 율길리(栗吉里)’로 연결됨을 알려준다. 십이탄천(十二灘川)을 따라 길이 뱀처럼 구불하게 나있다는 마을인데 운악산 포도의 주산지로 유명하다. 포도밭 면적이 전체 농경지의 90% 이상을 차지한단다. 8~9월 포도가 한창일 때는 마을 전체가 포도향으로 가득하다나?

 개주산은 이제 200m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가파른 오르막길과 싸워야만 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10. 두루뭉술하게 솟아오른 정상에 올라섰다. 십여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판과 이정표(주금산 정상 4.6/ 율길리 3.4·원흥리 3.5)이 설치되어 있었다.

 개주산의 개주(介胄)는 갑주(甲胄)와 같은 말로 갑옷과 투구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산이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장수를 닮았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정상에도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초겨울 찬바람에 쫒긴 우리는 부랴부랴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온 반대 방향이다. 이어서 100m 조금 못되는 지점에서 헬기장을 만난다. 요즘도 사용을 하고 있는지 풍향기까지 매달려 있는 등 반듯하게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 내려가야 할 방향(상동리)은 헬기장의 우측 숲속에 숨어있는 이정표(상동리 2.1/ 주금산 4.5/ 개주산 0.1)가 알려주고 있었다.

 이정표는 오른편으로 가면 왕숙지맥을 거쳐 주금산으로 연결됨을 알려준다. 왕숙지맥(王宿枝脈)이란 한북정맥의 수원산(697m) 부근( 1.6km) 야산에서 남동쪽으로 분기하여 주금산·철마산·천마산·백봉·수리봉·문령산(문재산) 등을 일군 뒤, 수석동(남양주) 미음나루(왕숙천과 한강의 합류지점)에서 숨을 다하는 약 47.9km의 산줄기다. 천마지맥으로 불리기도 하나, ‘백봉(587m)’에서 헤어져 왕숙천과 한강의 합수지점으로 스며든다. 수계를 구분하는 산줄기를 주된 산줄기로 보는 대한산경표에서만 부르는 지명이다.

 간식타임은 헬기장에서 가졌다. 넉넉히 준비해간 막걸리 덕분에 30분이나 노닥거릴 수 있었다. 그러나 스산한 찬바람에 쫓겨 하산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왼편 나뭇가지 사이로 운악산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것이 전형적인 바위산의 외형을 보여준다.

 산길은 의외로 곱다. 서둘러 고도를 낮출 필요가 없다는 듯 완만한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하산길의 장점은 눈요깃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바위 구간이 많은 덕분에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기괴한 바위를 여럿 만났다.

 승천을 못한 용을 닮은 바위도 그중 하나다. 집사람은 천년쯤 묵은 거북이로 보인다고 했지만...

 누군가는 세월이 하 수상하다고 했다. 취임한지 6개월도 안된 대통령의 지지율이 30%에도 이르지 못한다면서. 그래서일까? 진달래가 제 철도 모르고 꽃망울을 활짝 열어 제켰다. 자신도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하산을 시작한지 35분쯤 되었을까,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고도를 낮추어가던 산길이 갑자기 가파르게 변한다. 그것도 서서는 제대로 내려갈 수도 없을 정도로 가팔라졌다. 거기다 참나무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버거운 곳에서는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바위 구간에서는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그런 곳마다 밧줄난간을 설치해 놓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무릎이 시원치 않은 집사람은 밧줄난간의 도움으로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가다 쉬기를 반복하면서 내려간다. 덕분에 앞서가는 최군의 기다림은 부지하세월...

 얼마쯤 내려왔을까 시야가 툭 터진다.

 조금 더 내려오니 이번에는 나뭇가지 사이로 운악산이 고개를 내민다. 그 뒤는 연인산일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저 홈통의 정체는 대체 뭘까? 오른편 산자락에 위치한 골프장으로 빗물이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려는 시설이지 싶다.

 가파른 내리막길의 끝, 이제 다 내려왔으니 했지만 산길은 다시 올라가란다. 그것도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 구간을...

 이때 낯익은 표지기를 만났다. ‘배창랑과 그 일행 = 산군들’, 심심찮게 산행을 같이 해오는 산악인으로, 수천 개의 산을 올랐다고 자부하는 나마저도 애 취급할 수 있는 배태랑 산꾼이다.

 410m 남짓의 산봉우리까지 치고 오른 산길은 다시 아래로 향한다. 가파름을 이기지 못한 산길은 이곳에도 밧줄난간을 매어놓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베네스트골프장이 내다보인다. ‘나이스 샷!’이라는 골퍼의 외침이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참고로 저 골프장은 전설로 불리는 잭 니클라우스가 직접 디자인한 코스로 유명세를 탔다. 모든 홀에서 조형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며, 특히 메이플·버치·파인 등 3개의 코스는 매 홀마다 코스 공략을 위한 철학이 담겨 있단다.

 베네스트골프장 쪽으로는 아직도 단풍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라운딩을 하면서 자연의 다채로운 변화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을 골프장의 장점으로 꼽고 있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단풍만 보아서는 아직도 여기는 가을이다. 맞다. 지형 때문인지는 몰라도 필드를 누비고 있는 골퍼들의 차림새는 아직도 가을 옷차림이었다.

 산길이 끝날 즈음 울창한 잣나무 숲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참나무 일색에 양념삼아 들어앉은 소나무가 전부이던 산에 난데없는 잣나무라니 생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이런 풍경이 싫다는 얘기는 아니다. 잣나무 특유의 상쾌한 내음이 코를 찔러대는데 싫어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특히 그 내음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가 듬뿍 들어있지 않겠는가. 산행 내내 쌓여온 피로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치유되어버리는 이유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30(개주산 정상에서 1시간 20). 베네스트골프장 입구의 도로로 내려섰다.

 탐방로는 이제 골프장의 진입도로를 따라 동북방향으로 간다. 하지만 확·포장공사가 한창이어서 먼지가 풀풀 날린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며 모처럼 폐를 깨끗이 비워냈기에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50(골프장입구에서는 15). 원흥마을로 들어가기 직전 느닷없는 이정표(개주산 정상 3.5)를 만났다. 아까 정상으로 가는 도중 원흥리에서 올라오는 갈림길을 만났었는데, 이곳에서 시작된 등산로였던 모양이다.

 원흥마을 뒤 언덕에는 한옥 풀빌라 가평재가 들어앉았다. 한옥 한 채를 통째로 빌려 쓰는 곳인데, 겉은 한옥이지만 내부는 양옥으로 꾸며졌다니 퓨전 한옥이라 할 수 있겠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 웬만한 호텔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꾸며져 있다니 한번쯤 머물러 볼 일이다.

 산행날머리는 원흥마을회관(원점회귀)

산행을 시작한지 4시간. ‘샘말교를 건너 출발지인 마을회관으로 돌아오면서 산행은 종료된다. 그건 그렇고 핸드폰의 앱이 6.99km를 찍고 있으니 엄청나게 천천히 걸은 셈이다. 집사람의 불편한 무릎 때문일 것이다.

관음봉(觀音峯, 556.9m)-된봉(430.3m)

 

여행일 : ‘21. 9. 11(토)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과 오남읍, 호평동 일원

산행코스 : 사릉역→어남이고개→오남저수지갈림길→견성암약수터갈림길→관음봉→된봉→송능리 방향 능선→호평자동차검사소→호평·평내역(소요시간 : 8,14km/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남양주시는 총면적의 70%가 산림이다. 그러나 산만 높은 게 아니다. 물길도 있다. 북한강이 남양주를 따라 흘러와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만나 마침내 한강이 된다. 이처럼 남양주는 서울 도심에서 지척이지만 산과 강이 어울려 특별한 걷기를 즐길 수 있다. 그런 특징들을 연결시켜 놓은 트레일(trail)이 바로 ‘다산길’이다. 오늘은 이 가운데 13코스를 걸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13코스, 아니 다산길 전체가 폐쇄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코스를 조금 변경해봤다. 경로를 알려주던 안내판까지 모두 철거되어버린 마당에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없어서이다. 그래서 도심 구간 전체를 빼는 대신 숲길을 늘려보기로 했다. 그럼에도 13코스의 핵심 봉우리인 관음봉과 된봉을 모두 올랐으니 다산길을 걷는 기분만은 오롯이 즐겼다고 보면 되겠다.

 

▼ 트레킹 들머리는 사능역(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최군으로부터 근교산행 제안을 받고 부랴부랴 ‘치악산둘레길’ 답사를 취소했다. 제부도에 사는 지인을 위해 정한 산행지는 용인의 ‘시궁산’. 하지만 다른 중요한 일정이 생겼다는 연락으로 받고 부랴부랴 ‘다산길 13코스’로 산행지를 바꿨다. 집 근처에도 올라보지 못한 산이 있는데 구태여 용인까지 찾아갈 필요가 없어서이다. 둘레길이 시작되는 곳은 경춘선 전철 ‘사릉역(思陵驛)’. 비운의 왕 단종(端宗)의 정비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의 능(陵)이 역의 이름이 됐다. 그러나 역의 이름과는 달리 사릉은 오히려 금곡역과 더 가깝다는 것도 알아두자.

▼ 이 지도를 제작한 분은 어남이고개에서 출발해 ‘관음봉’까지 간 다음 이후부터는 ‘다산길 13코스’를 따라 사릉역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우리는 ‘된봉’에서 다산길과 헤어져 송능리 방향의 능선(진건읍과 호평·평내동의 경계)을 따르다가 ‘352m봉(지도에는 360.7m봉으로 표기되어 있다)’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호평동으로 하산했다. 참고로 ‘다산길’은 모두 13개 코스(169.3㎞)로 이루어져 있다. ‘다산’이란 이름은 조선말의 위대한 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호에서 따왔다. 정약용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곳이 바로 두물머리(남양주시 조안면)이기 때문이다. 그의 실학정신이 깃든 길을 걸으며 역사의 향기를 음미해보자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남양주시의 초심은 사라져버린 지 이미 오래. 다산길 자체를 아예 없애버렸다. 이정표 등의 편의시설도 모조리 제거시켜버렸음은 물론이다.

▼ 변경된 코스의 들머리인 ‘어남이고개’까지 4km는 택시를 이용했다. 오남읍(북쪽)과 진건읍(남쪽)의 경계인 이곳은 천마산으로 올라가는 들머리이기도 하다. 고개의 이름인 ‘어남이’는 세조가 묘지터를 찾으러 광릉방면으로 가는 길에 건너다본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어람리(御覽里)'라 하던 것이 와전되어 ‘의냄리’, ‘어냄이’ ‘어남이’로 불리게 되었단다.

▼ 사람이 끊어버렸던 능선은 사람의 손에 의해 다시 되살아났다. ‘어남이’ 고갯마루에 육교를 걸쳐놓은 것이다. 버스정류장(금호어울림아파트)에서 내려 이 다리로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 다리 위는 서너 개의 통나무의자를 놓아 쉼터의 역할을 겸하도록 했다. 등산로 초입답게 흙먼지털이기까지 갖추었다. 그런데 막상 쉬고 있는 이들은 라이더들이 아니겠는가. 맞다. 산악자전거를 즐기는 라이더들에게 이 능선은 꽤 유명한 라이딩 코스로 알려져 있다. 필수 라이딩 코스로 여겨질 만큼 유명하단다. 업힐과 다운힐 코스가 아기자기하게 펼쳐져 있어 MTB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란다.

▼ 이왕에 올랐으니 조망부터 즐겨보자. 북쪽 방향의 오남읍은 시작부터가 시가지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금호어울림아파트가 시야를 반쯤 가려버렸다. 반대로 남쪽의 진건읍 방향은 공장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 이정표(관음봉 3.3㎞, 천마산 7.2㎞/ 오남체육공원 2.2㎞)는 이곳이 천마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의 초입임을 알려준다. 반대 방향. 즉 육교를 건너면 ‘오남체육공원’으로 연결되는 모양이다.

▼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그 기세가 못내 버거웠던 모양이다. 침목계단으로도 모자라 밧줄난간까지 설치했다. 붙잡고 오르라는 배려일 것이다.

▼ 하지만 5분이 채 되지 않아 그 가파름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경사가 거의 없는 능선길이 계속된다. 거기다 바닥까지도 보드라운 흙길. 마침맞게 울창한 숲이 햇볕 한 점 스며들지 못하게 해주니 여름 산행지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호들갑을 떨기에 다가가보니 이름 모를 버섯이 돋아나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터를 잡은 떡갈나무 낙엽에 어울리지 않게 예쁘게 생겼다. 가을 산에서 만나는 버섯은 꽃에 버금간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 탐방로는 능선을 따른다. 하지만 능선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의미 없는 봉우리는 사면을 따라 심심찮게 우회한다.

▼ 소관 지자체인 남양주시는 부자 고을이다. 신도시가 자꾸 들어서고 있으니 지방세가 눈 쌓이듯이 불어났을 것이다. 그러니 시민들의 휴식처인 산길 가꾸기에 쏟아 부은 돈도 만만찮았을 게 뻔하다. 허름한 벤치가 아니라 커다란 통나무를 반으로 툭 잘라 만든 저 의자가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 요즘은 언택트(un-contact)가 최고의 미덕으로 꼽힌다. 우리 일행이 3명으로 축소된 이유이다. 한술 더 떠 우리는 가능한 마스크를 착용한 채로 걸어보기로 했다. 아니 우리뿐만 아니라 산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맞다. 코로나-19 팬데믹(COVID-19 pandemic)이 만들어낸 신풍속도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게다.

▼ 잣나무 하면 사람들은 대개 ‘가평’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곳 남양주 역시 곳곳에서 잣나무 숲을 만날 수 있다. 이런 숲에 몸을 맡기면 머리로 알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맑은 공기 덕분에 깨어난 온몸의 감각들이 이제 숲을 자세히 더듬어 느끼기 시작한다.

▼ 하늘을 가릴 듯 쭉쭉 뻗어난 숲길을 따라가다 바위 하나를 만났다. 전형적인 육산에서 만난 첫 번째 바위다. 그런데 생김새까지도 만만찮다. 보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를 쏙 빼다 닮지 않았는가. 수직의 이마와 작고 둥근 후두부, 작은 크기의 턱과 이빨을 갖고 있으며, 턱이 앞으로 튀어나온...

▼ 종주산행의 대가 신경수씨는 이 능선을 ‘한북천마관음단맥’으로 부르고 있었다. 한북천마지맥(한북정맥의 수원산에서 분기한 지맥)의 천마산(天摩山, 812.4m) 정상(정확히는 서남쪽 100m지점으로 화도읍·오남읍·호평동의 경계)에서 서북서 방향으로 분기하여 관음봉까지는 오남읍과 호평동의 경계, 그 이후부터는 오남읍과 진건읍의 경계를 따라 뻗어나가는 세맥(細脈)이다. 길이 13.3km의 이 산줄기는 어남이고개와 삭다니고개를 지나 진건천이 왕숙천을 만나는 곳에서 숨을 다한다.

▼ 관음산 줄기는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바위 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그보다 더 귀한 풍경을 만났다. 얼굴을 내밀어야 할 야생화는 정작 보이지 않고, 들녘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코스모스가 대신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그것도 척박한 바위틈에 어렵사리 터를 잡았다.

▼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다리처럼 난간까지 걸쳐놓은 나무계단을 만났다. 버거울 정도의 경사도 아닌데 계단이라니 이건 낭비다. 아니 산을 보호하기 위한 최상의 처방으로 보는 게 옳겠다. 인간이 지나다니며 헤집어 놓은 흙을 빗물이 휩쓸어 가버리기를 반복하다보면 산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 통나무의자로도 모자라 평상까지 놓았다. 준비해온 점심상 차리기에 딱 좋겠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잊지 말자. ‘추억은 가슴 속에, 쓰레기는 배낭 속에’

▼ 관음봉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산은 산이다. 아니 556.9m이면 근교산 치고는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 어찌 가파른 구간 하나쯤 나타나지 않겠는가. 거기다 바윗길. 어설프기는 하지만 바윗길은 바윗길이다.

▼ 덕분에 밧줄에 의지해야만 하는 곳도 두어 번 나타난다. 잠깐이면 끝나버리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짜릿한 손맛까지 즐길 수 있었으니 오늘 산행은 횡재를 한 셈이다.

▼ 바윗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시야가 열린다는 점이다. 진접 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고층아파트의 숲 뒤로 보이는 산들은 퇴뫼산과 천겸산, 수리봉, 용암산 등일 것이다.

▼ 능선은 온통 참나무들 세상이다. 숲은 인간이 간섭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저희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치른 후 음수(陰樹)의 특성을 가진 한 무리들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참나무가 최후의 승리자인 셈이다. 맞다. 남해안과 높은 산꼭대기를 제외한 남한의 대부분은 온대림인데, 이게 생존경쟁에서 참나무에게 유리한 점으로 작용한단다. 남한의 산들 대부분이 참나무들로 꽉 들어 차 있는 이유이다.

▼ 앞서가던 최군이 숲속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뭔가를 들고 나온다. 그리고는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불러댄다. 하긴 그 귀하디귀한 ‘노루궁뎅이 버섯’을 채취했으니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후로도 그런 풍경은 대여섯 번이나 볼 수 있었다. 그만큼 많이 채취했다는 얘기다. 그 포획물은 모두 내 차지가 되었지만 말이다. 탁월한 항암효과는 물론이고 치매예방에다 당뇨병 개선효과까지 있다며 나에게 넘겨준 결과이다.

▼ 식빵을 쌓아놓은 것처럼 생긴 이 버섯의 이름은 대체 뭘까? 생김새처럼 우리가 먹을 수 있을까?

▼ 요놈은 또 영락없는 삿갓이다. 얼마 전 김삿갓문학길(외씨버선길의 12번째 길이다)을 걸으면서 만난 김삿갓이 쓰고 있던 삿갓이 꼭 저랬었다.

▼ 걷는 도중 꽤 많은 서어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하나같이 훤칠한 키에 미끈한 몸매를 과시하는 근육질이다. 그래서 서어나무를 ‘근육질나무’로 부르기도 한단다. 하긴 수천수만 년을 이어온 우리 숲의 가장 흔한 나무 중 하나가 서어나무가 아니겠는가.

▼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5분. 두루뭉술하게 생긴 ‘436m봉(첨부된 지도에서 약수터로 표기된 곳 근처 오른편으로 휘는 지점. 봉우리 이름은 핸드폰에 찍힌 해발고도를 썼다)에 올라섰다. 이곳은 한때 헬기장으로 사용되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통나무의자 두어 개가 놓여있을 따름이다. 용도가 나그네들의 쉼터로 바뀌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이정표(관음봉→ 0.8㎞/ 오남저수지← 2.0㎞/ 어남이고개↓ 2.5㎞)는 이곳이 삼거리임을 알려준다. 진행해야 할 관음봉은 이곳에서 오른편.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면 철마산 등산로의 초입이기도 한 오남저수지로 연결된다.

▼ 관음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완만한 능선길로 되돌아간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 이정표(관음봉 0.9㎞/ 견성암약수터 0.2㎞)는 오른편에 견성암(見聖庵)이란 사찰이 있음을 알려준다. ‘독정(獨井)’이라 불리는 우물로 유명한 절이다. ‘바우(바위)’라는 현자가 독정의 물을 마시며 수도하다가 약사여래불을 친견했다는 것이다. 산령각에서의 조망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유순하게 이어지는 산등성이 사이로 멀찍이 남양주 시내와 우뚝 솟은 롯데타워가 보인단다.

▼ 탐방로는 자작나무 숲속을 지나기도 한다. 윤택이 나는 흰색 옷을 두른 나무가 한 치의 휘어짐 없이 쭉쭉 하늘을 향해 뻗어 올랐다. 그게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며 숲속 어디선가 동화 속 요정들이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건 그렇고 저 흰색 표피는 종이처럼 얇게 벗겨진다. 전기가 없던 시절 그 껍질에 불을 붙여 촛불처럼 사용했는데, 이게 불에 타면서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고 해서 자작나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 순간 이동이라도 했을까? 문득 세미나 참석차 들렀던 톰스크(러시아)의 자작나무 숲이 생각난다. 톰스크공대 교수의 초대로 하룻밤을 머물렀던 움막을 둘러싼 자작나무 숲은 그야말로 광활함 그 자체였다. 그보다는 못하지만 의외의 곳에서 이런 자작나무 숲을 만났으니 행운이라 하겠다.

▼ 썩 좋지 않은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했다. 그럼 나무는 죽어서 무엇을 남길까? 나무 나름이겠지만 이 나무는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결과로 남았다. 나무치료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는 최군의 말로는 알에서 깨어난 해충의 애벌레가 성장하면서 표피를 갉아먹은 때문에 저렇게 흉물스럽게 죽어갔단다.

▼ 안부로 내려섰던 산길은 또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것도 많이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길가에 밧줄난간이 설치되어 있으니 힘이 들 경우 이를 붙잡고 오르면 되기 때문이다.

▼ 삼거리봉(436m봉)을 내려선지 20분 만에 관음봉에 올라섰다. 잡석더미로 이루어진 정상은 예쁘장한 정상석이 지키고 있다. 삼각점(성동 426)도 보인다. 삼각점은 삼각 측량의 기초가 되는 위치와 높이의 기준점을 뜻한다. 국가지리정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다는 얘기일 것이다.

▼ 관음봉(觀音峰)은 세상의 소리를 듣는 관음보살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중생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그 소리를 보고(눈·귀·코·혀·몸 등 여래의 다섯 감각기관은 서로 그 대상을 바꾸어 작용할 수 있다) 그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는 보살 말이다.

▼ 어떤 이들은 관음의 뜻을 가장 멀리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다고 풀이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정상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만큼 조망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예상대로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발아래로는 호평 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시가지를 병풍처럼 둘러싼 백봉산 너머에서는 갑산과 예봉산이 나도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왼편으로 시선을 옮기자 이번에는 마석시가지와 천마산이 문안산·청계산과 함께 얼굴을 내민다. 반대방향에서는 북한산도 눈에 담을 수 있다.

▼ 관음봉에도 이정표(천마산 3.9㎞/ 어남이고개 3.3㎞)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된봉’ 방향은 텅 비어있다. 한때는 ‘다산길’ 종주자들이 뻔질나게 다니던 길(13코스)인데도 말이다. 다산길의 운영을 중단했다지만 등산로까지 폐쇄된 것은 아닌데, 해도 너무했다.

▼ 이후부터는 옛 ‘다산길 13코스’를 따른다. 된봉과 영락교회묘원을 거쳐 사릉역으로 이어지는 이 능선은 작은 봉우리들을 여럿 오르내린다. 또한 원시의 숲을 연상시킬 정도로 울울창창한 숲속으로 길이 나있다.

▼ 밤 기온이 내려가고 대기 중의 수증기가 엉켜서 풀잎에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가 엊그제였으니 누가 뭐래도 이젠 가을이다. 그래선지 어설프기는 하지만 단풍 구경도 할 수 있었다. 병이 들어 남들보다 조금 일찍 옷을 갈아입었지만, 여름철에는 저런 잎까지도 눈에 띌 일이 없으니 말이다.

▼ 이 구간은 중간에 바위봉우리를 넘기도 한다. 전형적인 육산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 덕분에 시야가 열리면서 아까 관음봉에서 보았던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아니 호평 시가지는 아까보다 오히려 더 넓어졌다.

▼ 된봉으로 오르는 도중 오토바이 라이더들을 만났다. 아까 서두에서 얘기했듯이 이곳 관음봉 능선은 산악자전거 라이더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코스로 유명하다. 업힐과 다운힐 코스가 아기자기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토바이 라이더들이라고 해서 어찌 좋아하지 않겠는가.

▼ 거대한 바위무더기가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오늘 산행에서 바위다운 바위로는 이게 유일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생김새까지도 나무랄 데가 없지 않는가. 스토리텔링이라도 하나 만들어놓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 관음봉을 출발한지 50분 만에 ‘된봉’ 정상에 올라섰다. 열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알루미늄 기둥으로 만든 정상판과 삼각점(성동 307)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상판(475m)과 삼각점(430.3m)에 적혀있는 해발고도가 각기 다르니 문제다. 아무래도 정부에서 설치한 삼각점이 더 신빙성이 높지 않을까 싶다. 그건 그렇고 ‘관음봉’에서 이곳 ‘된봉’까지는 1.6km(핸드폰의 앱)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50분이나 걸렸으니 꽤나 더디게 걸은 셈이다. 고되게 올라야만 이를 수 있다는 지명답게 꽤나 오르내림이 심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사방 어느 곳에서 시작하든지 힘들게 고개를 넘어야만 오를 수 있다는 ‘된봉’의 유래가 적힌 ‘산행안내도’도 보인다. 그런데 누군가가 낙서를 잔뜩 해놓았다. 지명이 잘못 적혀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내가 보기에도 헷갈리기 딱 좋게 되어 있다.

▼ 하산을 시작하려는데 기능을 상실한 이정표 하나가 눈에 띈다. 대신 등산로(다산길 13코스 방향)에 깔아놓은 나무를 치우지 말라는 부탁을 적어놓았다. 오토바이나 자전거의 통행을 막으려는 장애물이란다.

▼ 송능리로 내려가는 하산길(된봉에서 다산길과 헤어진다)은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그런데 이게 난장판이 아니겠는가. 길바닥이 엉망진창으로 헤집어져 있는 것이다. 아까 된봉을 오르면서 만났던 오토바이 라이더들이 남긴 흔적이 아닐까 싶다. 이래서 누군가는 조금 전과 같은 장애물을 만들었을 게고 말이다.

▼ 깡통로봇을 닮은 바위가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그건 그렇고 이 능선은 ‘바로건너산(누가 지었는지 이름 한번 묘하다)’을 넘어 적성교를 거친 다음 송능리(松陵里)로 연결된다. 송능리는 인조반정으로 쫒겨난 비운의 조선 15대 왕 ‘광해군’과 부인 유씨의 묘가 있다. 광해군의 생모(공빈 김씨)의 묘(成陵)와,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의 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자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이 이어진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진행하자 좌측으로 호평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뉜다. 우리가 선택한 하산코스로 중간에 호평터널 상부의 275m봉을 넘기도 한다.

▼ 이후로도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낮추어간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없는 곱디고운 산길이다.

▼ 산행날머리는 호평 자동차검사소(남양주시 호평동 479-13)

송능리로 연결되는 능선에서 내려선지 30분 남짓. 산길은 또 다시 몸을 나눈다. 이곳에서도 우린 왼편을 선택했다. 이어서 50분 정도를 더 내려서자 주택가에 내려서고 골목길을 따라 조금 더 걷자 ‘호평자동차검사소’가 나오면서 산행이 종료된다(평내호평역까지 0.7km는 뺐다). 오늘 산행은 4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은 8,14km를 걸었단다. 아무리 산길이라고 해도 너무 더디게 걸었다. 특히 하산길이 더 더뎠다. 며칠 전 연골주사를 맞은 집사람의 무릎이 아직까지 불편했던 게 원인이다.

 

사태봉산(310.6m)-불당골산(404.9m)-국수봉(423.8m)

 

산 행 일 : ‘21. 6. 12(토)

소 재 지 :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과 도척면의 경계

산행코스 : 곤지암도서관→감투봉 갈림길→사태봉산→불당골산→국수봉→인배산→안부사거리→신촌리 버스정류장(산행거리 : 9.10 km, 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오랜만에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한 수도권(경기도 광주시) 산을 찾았다. 곤지암읍과 도척면의 경계를 따라 이어지는 능선인데, 고만고만한 산 그것도 당당하게 이름까지 갖고 있는 산봉우리들이 꽤 많다는 특징이 있다. 잘 꾸며보려는 지자체의 노력도 엿보인다. 나지막한 산들이지만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계단을 놓았고, 심심찮게 나타나는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다. 쉼터도 곳곳에 만들어놓았음은 물론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산책코스로 그만이라 하겠다. 하지만 난 이런 산들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날머리로 삼으려는 넉고개에서 시작해 정개산과 천덕봉과 원덕봉을 잇는 능선은 이미 다녀왔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다가 ‘산두레 산악회’ 윤대장의 산행기록을 곁눈질할 기회가 있었고, 최군의 동의를 얻어 이번에 찾아보게 됐다. 대부도에서 사는 다른 일행의 접근거리도 감안했음은 물론이다.

 

▼ 산행들머리는 경강선 전철 ‘곤지암역’(광주시 곤지암읍 곤지암리)

서울에서 출발하는 광역버스와 지하철이 수시로 다니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된다. 참고로 우리 부부는 승용차를 몰고 와서 곤지암역의 환승주차장(유료이니 참조할 것)에 주차시켰다. ‘곤지암도서관’에도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만 주말이라서 자리가 없을 게 거의 확실했기 때문이다.

▼ 산행은 꽤 여러 곳에서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곤지암도서관이나 넉고개에서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다. 참고로 우리 일행은 곤지암역에서 시작해서 신촌리로 하산했다. 마지막 봉우리인 ‘적산’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 실제 들머리는 곤지암도서관이다. 곤지암역을 빠져나와 인도교를 이용해 곤지암천을 건너면 무단횡단이 불가능한 경충대로(4차선)다. 우회전하여 50m쯤 걷다가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오른편에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서면 ‘곤지암터미널’을 오른편에 낀 사거리를 만난다. 개의치 않고 도로를 건너 직진하면 잠시 후 곤지암도서관이 보일 것이다.

▼ 탐방로는 곤지암도서관의 오른편에서 열린다. 도서관의 축대를 끼고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놓여있다.

▼ 들머리에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사태봉산과 불당골산까지의 거리는 각각 2.35㎞와 3.81㎞. 천덕봉까지는 18.47㎞라지만 이미 다녀온 봉우리이니 오늘은 염두에 두지 말자. 참! 이정표는 위도와 경도를 적어 현재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었다. 여기에 지명과 함께 고도까지 넣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 계단을 오르자 이번에는 ‘등산안내도’가 자신도 좀 보아달란다. 지도는 단순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곳 곤지암도서관에서 동원대학교까지의 능선을 하나의 선으로 이은 다음 곳곳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연결시켰다. 다른 생각을 할 필요 없이 끄트머리까지 곧장 걸으라는 모양이다.

▼ 가야할 길을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면 이제 길을 나설 차례이다. 탐방로는 일단 곱다. 널찍한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 약수터도 눈에 띈다. 하지만 물이 마른지는 꽤 오래된 듯.

▼ 산행을 시작한지 10분 만에 능선(이정표 : 사태봉산→ 2.04㎞/ 곤지암지구대← 0.45㎞/ 곤지암도서관↓ 0.31㎞)에 올라섰다. 왼편은 곤지암지구대에서 올라오는 오솔길이다.

▼ 탐방로는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있다. 경사가 심하다싶으면 어김없이 침목계단을 놓았다. 습기가 많은 곳에는 야자매트를 깔아 질퍽거릴 염려도 없다.

▼ 능선에 올라선지 10분. 벤치 서너 개를 놓아둔 쉼터를 만났다. 이정표(사태봉산 ↑1.7㎞/ 감투봉← 0.56㎞/ 곤지암도서관↓ 0.65㎞)는 오른편에 ‘감투봉’이 있다고 알려준다. 그렇다고 일부러 다녀올 것까지는 없다. 봉우리 따먹기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봉우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이곳은 소문난 포토죤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낙엽을 하트 모양으로 쌓아놓았기 때문이다. 사랑꾼인 집사람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하트 안으로 냉큼 들어가더니 또 하나의 하트를 만들어낸다.

▼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중간에 두어 번의 갈림길(이정표 #1 : 사태봉산↑ 1.37㎞/ 쌍용아파트→ 0.35㎞/ 곤지암도서관↓ 0.98㎞, 이정표 #2 : 사태봉산← 1.35㎞/ 샘솟는교회→ 0.23㎞/ 곤지암도서관↓ 1㎞)을 지나기도 한다.

▼ 오늘 걷게 되는 능선은 조망이 열리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래선지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이 지나고서야 처음으로 시야가 열렸다. 그러자 멋지게 지어진 주택들이 눈에 들어온다. 외모가 비슷비슷한 것이 건축업자가 한꺼번에 지어 분양한 모양이다.

▼ 능선은 참나무가 대부분, 간이라도 맞추려는 듯 소나무가 간간히 섞여있다.

▼ 그렇게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작은 체육공원이 얼굴을 내민다. 갖가지 운동기구는 물론이고 식탁형의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널찍하면서도 깔끔하게 정비된 탐방로에 쉼터, 거기다 체육공원까지. 숫제 도심의 공원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 산행을 시작한지 50분. 가파른 오르막길을 앞두고 삼거리를 만났다. 그런데 이정표(사태봉산↗ 0.2㎞, 불당골산 1.66㎞/ 불당골산↖ 1.69㎞/ 곤지암도서관↓ 2.15㎞)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선택하란다. 불당골산으로 가는 도중에 사태봉산의 정상을 거쳐서 갈 것인가를 결정하라는 것이다. 거리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왼쪽은 사태봉산을 우회해서 가는 코스라는 얘기일 것이다.

▼ 망설임 없이 오른편으로 향한다. 불당골산으로 가는 길목에 놓여있는 산봉우리를 빼놓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이후로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심지어는 통나무계단을 놓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파른 구간도 있다. 이름표가 붙어있는 첫 번째 봉우리다보니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드디어 사태봉산 정상(310.6m)에 올라섰다. 산행을 시작한지는 65분 만이다.

▼ 정자가 들어서 있을 정도로 널찍한 정상이지만 필수품이랄 수 있는 정상석은 막상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사태봉산’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불당골산 1.46㎞/ 곤지암도서관 2.35㎞)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정상은 여러 기능을 겸하도록 했다. 정자와 벤치를 놓음으로써 쉼터기능을 기본으로 깔고. 운동기구인 철봉을 배치해 체육공원을 겸하도록 했다. 거기다 심심하면 보라는 듯이 사태봉산 산행안내도와 곤지암의 지명유래를 함께 세워두었다.

▼ 사람이 많이 오르내리는 곳이니 어찌 돌탑 하나 없겠는가. 그것도 신기에 가깝게 쌓아올렸다.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기에 저런 신묘한 모양새가 나올 수 있었을까?

▼ 불당골산으로 향한다. 가파르게 아래로 내려선 탐방로는 아까 사태봉산 아래서 헤어졌던 길과 다시 합쳐진다.

▼ 걷는 도중 만난 바위가 하도 반가워 카메라에 담아봤다. 생김새나 크기 모두 보잘 것이 없지만 1시간 이상을 걸어오면서 처음으로 만난 바위이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 자신의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소나무도 만났다. 휘휘 늘어진 가지를 지팡이에 의지하고서야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 산길은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아니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 사태봉산을 내려선지 20분 만에 커다란 돌탑이 자리를 지키는 봉우리에 올라섰다. 탑 앞의 자연석에는 누군가가 매직펜으로 ‘탑봉’이라 적어 넣었다. 절대 손대지 말라는 경고문도 보인다. 그만큼 정성들여 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이제 불당골산으로 가야할 차례이다. 완만한 경사의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서자 삼거리(이정표 : 불당골산↑ 0.56㎞/ 진우2리(신우냉장) 버스정류장→ 1.44㎞/ 사태봉산↓ 0.9㎞). 오른편은 진우2리의 버스정류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 이후부터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러다가 자칫 바위산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 바윗길을 만나기도 한다. 전형적인 육산에서 만난 희귀한 풍경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 돌탑봉을 내려선지 30분 만에 ‘불당골산(404.9m)’의 정상에 올라섰다. 불당골산은 오늘 오른 산들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하지만 특별한 점은 하나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봉우리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사태봉산처럼 이곳도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름표를 단 이정표(깊은목산↑ 0.32㎞/ 곤지암리(이화전기)버스정류장← 2.1㎞/ 사태봉산↓ 1.46㎞)가 이를 대신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 8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깊은목산(392m)’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이정표마저도 없었다. ‘깊은목산’이라 적힌 판자가 참나무 아래에 놓여 있어 이곳이 깊은목산의 정상임을 눈치 챘을 따름이다. 참! 이곳에는 가끔 산행을 함께 해오고 있는 ‘배창랑’ 선배님의 띠지도 매달려 있었다. 그도 이미 지나갔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나 더. 한뫼산악회에서 매달아놓은 정상표시 코팅지도 발견할 수 있었다.

▼ 깊은목산에서 내려서는 산길은 가파르다. 아니 많이 가파르다고 하는 게 옳겠다. 곧장 내려서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면서 겨우 고도를 낮추고 있으니 말이다.

▼ 그렇게 7분쯤 내려서면 ‘수양1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국수봉↑ 1.02㎞/ 수양1리 버스정류장← 2.3㎞/ 깊은목산↓ 0.24㎞). 이어서 완만해진 산길을 따라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길이 나뉘는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국수봉↑ 0.88㎞/ 진우3리(소티) 버스정류장→ 1.5㎞/ 깊은목산↓ 0.38㎞)가 나온다.

▼ 명감나무(청미래) 열매가 하도 탐스러워 카메라에 담아봤다. 문득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저 열매가 시고 떫은 초록일 때부터 눈독을 들이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퍼석퍼석하게 말라버린 약간 달콤한 육질을 입속에 넣으며 씹히는 부분이 조금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으로 유년을 보낸 기억이 새롭다. 소년의 티를 벗고 난 다음에는 빨갛게 익은 저 열매의 안에다 독약을 넣고 밀봉한 후 꿩이나 토끼를 꼬드기기도 했었다.

▼ 오름짓을 시작하던 산길이 언제부턴가 많이 가팔라졌다.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좌우로 몸을 비틀며 고도를 높여갈 정도이다. 하긴 오늘 걷고 있는 능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이번에 오를 국수봉이 아니던가.

▼ 그렇게 20분쯤 오르자 드디어 국수봉(423.8m). 오늘 답사하고 있는 능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하지만 가슴에 담아둘만한 특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울창한 숲속에 들어앉은 정상은 조망도 트이지 않았다.

▼ 이곳도 역시 ‘정상석’은 세워져 있지 않다. 흔하디흔한 선답자들의 띠지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국수봉’이라는 현위치가 표시된 이정표(인배산↑ 1.95㎞/ 진우리저수지→ 1.5㎞/ 깊은목산↓ 1.26㎞)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인배산을 향해 내려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붙잡고 내려가라며 밧줄까지 매어놓았다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 국수봉에서 내려선지 10분. 도톰하게 솟아오른 지점에서 삼거리를 만났다. 그런데 이정표(인배산↑ 1.7㎞/ 진우저수지→ 2㎞/ 국수봉↓ 0.25㎞)에 적힌 지명 하나가 눈길을 끈다. 진우저수지 방향으로 5.1㎞를 가면 ‘해룡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이 ‘앵자지맥(鶯子枝脈)’과 만나는 지점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한남정맥의 문수봉(文殊峰 403.2m)에서 북쪽으로 분기한 앵자지맥이 칠봉산과 해룡산을 거쳐 이곳 국수봉으로 온다고 했으니 말이다. 이 산줄기는 잠시 후 우리가 오르게 될 인배산과 넉고개, 그리고 천덕산과 앵자봉을 지나 남종면 검천리의 남한강에서 그 숨을 다한다.

▼ 얼마쯤 더 걸었을까 앞서가던 일행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는 다들 환호성을 터뜨린다. 이제껏 시야가 열리지 않는 답답한 산행을 해왔는데, 처음으로 만난 조망이 기대 이상으로 멋졌으니 어찌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조망대 앞에 서자 멋진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름 모를 산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올랐는데 저 멀리 보이는 높은 봉우리는 ‘원적산’이 아닐까 싶다. 그 왼편은 앵자봉일 게고 말이다.

▼ 적송(赤松) 군락지를 지나기도 한다. 같은 ‘붉은 소나무’. 즉 태백산맥에서 만날 수 있는 금강송(金剛松)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하다 하겠다. 하긴 하도 잘 생겨서 미인송(美人松)이라는 별칭까지 붙은 금강송에야 어찌 비할 수 있겠는가.

▼ 송전탑 근처에서 다시 한 번 시야가 열린다. 원적산 일대가 시원스레 조망되는데, 날씨까지 청명하게 받쳐주니 그야말로 일품이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이유이다.

▼ 수양1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인배산↑ 0.2㎞/ 수양1리 버스정류장→ 2.3㎞/ 국수봉↓ 1.75㎞)를 지나자 곧이어 인배산(310m) 정상이다. 국수봉에서 40분쯤 떨어진 봉우리인데, 이곳은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안내판에다 ‘인배산’이라 적어놓았다. 덕분에 이곳이 인배산이란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공공시설물에 낙서를 하는 행위는 마땅히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이제 산길은 작고 완만한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낮추어간다. 그러다가 삼거리(이정표 : 적산↑ 2.07㎞/ 인후리→ 1㎞/ 인배산↓ 0.24㎞)를 만나기도 한다.

▼ 오늘의 주인공은 단연 ‘오디’다. 뽕나무에서 열리는 이 열매 역시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어린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간식거리였다. 달콤한 맛이 어린이들의 입맛에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단맛에 하나를 더했다. ‘산뽕나무’여선지는 몰라도 새콤한 맛이 더해진 것이다. 덕분에 열매를 입에 넣기도 전부터 입안에서 군침이 잔뜩 돈다. 행복하다. 이런 맛으로 사람들이 산을 찾는 모양이다.

▼ 오디에 입맛 다시며 걷다보면 어느덧 적산과 인배산 사이에 위치한 안부다. 인배산에서 25분쯤 떨어진 지점인데, 하산지점을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완주와 탈출 가운데 승자는 탈출. 완주가 습관인 최군이 고집을 부려보지만 다를 이쯤에서 산을 내려가자는데 어쩌겠는가.

▼ 이정표(적산↑ 1.27㎞/ 신촌리 버스정류장← 1.19㎞/ 인후리 실천신학대학원→ 0.69㎞/ 인배산↓ 1.04㎞)는 탈출로가 양쪽으로 나뉨을 알려준다. 타고 온 차량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얘기다. 결론은 신촌리 방향이다. 곤지암으로 나가는 대중교통의 이용이 월등히 수월했기 때문이다.

▼ 신촌리는 상당히 큰 공장지대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길은 아직도 시골티를 벗어나지 못했다. 걷다 쉬기를 반복하면서 오디를 따먹었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 산행날머리는 신촌리(곤지암읍) 버스정류장

그렇게 20분쯤 걷자 4차선의 널찍한 ‘경충대로’가 나오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곤지암까지 타고나갈 버스는 도로 아래로 난 굴다리를 지나 반대편에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산행은 정확히 6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준비해간 중식과 간식을 먹느라 각각 1시간씩을 쉬었으니 실제로는 4시간을 걸은 셈이다. 핸드폰의 앱에 9.10㎞가 찍혀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고동산(古同山, 591m)

 

산행일 : ‘21. 5. 22(토)

소재지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과 양평군 서종면의 경계

산행코스 : 삼회2리 마을회관→라르고료칸→전망대→고동산 정상→안부 삼거리→고동산 계곡→라르고료칸→삼회2리 마을회관(소요시간 : 8.25km/ 4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서울 근교인데다 북한강까지 조망되는 꽤 좋은 산인데도 불구하고 ‘고동산’이란 이름을 아는 사람을 별로 많지 않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화야산(해발 755m)이 거느리고 있는 봉우리 가운데 하나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은 대부분 뾰루봉(해발 709m)과 화야산, 고동산을 잇는 종주산행을 한다. 2007년에 이곳을 찾았던 우리 부부도 역시 그렇게 진행한바 있다. 하지만 ‘경로 우대’라는 달갑지 않은 예우까지 받게 된 요즘은 장거리일 수밖에 없는 ‘종주 산행’은 아예 불가능해져 버렸다. 일단 고동산부터 오른 다음 어디까지 갈지는 체력을 보아가며 결정하자는 심산으로 출발했던 이유이다. 그게 비록 고동산 하나로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 산행들머리는 ‘삼회2리 마을회관’(가평군 청평면 삼회리 475-6)

서울·양양고속도로 서종 IC에서 내려와 391번 지방도(북한강로)를 타고 북한강(오른편 강변도로)을 거슬러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삼회2리’에 이르게 된다. 마을회관 앞에 화장실이 딸린 널따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으니 타고 온 차는 이곳에 주차하면 된다. ‘화야정(禾也亭)’이란 정자도 지어놓아 산행 채비를 하는데도 어려움이 없다.

▼ 산행지도는 팜스테이(글램핑장) 근처에 세워놓은 ‘화야산 종합안내도’를 첨부했다. 오늘 산행은 지도에 그려놓은 3코스를 따라 진행했다.

▼ 들머리는 마을회관의 앞. 그러니까 391번 지방도를 건너야만 한다. 이정표(고동산 3.2㎞)와 화야산등산안내도는 물론이고 이곳 ‘사기막’의 마을 표지석까지 세워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 즉 삼회리(三會里)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사기막(沙器幕)’ 마을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사기막이란 그릇을 굽는 움막이 있었던 마을을 이르는 일종의 대명사이다. 때문에 사기막이란 지명을 쓰는 곳은 전국 방방곡곡에 널려있다. 그렇다면 이곳에도 사기그릇이나 항아리를 굽던 마을이 들어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 고동산을 바라보며 얼마간 걷자 산뜻하게 지어진 건물들이 얼굴을 내민다. ‘Moire 478’라고 하는 별장형 리조트의 ‘인포메이션 센터’라고 한다. 이곳은 프라이빗 리조트인 ‘F1’이기도 하다. 하나 더. 이곳 ‘Moire 478’은 tvN의 ‘두 번째 스무 살’과 JTBC의 ‘사랑하는 은동아’, SBS의 ‘상류사회’ 및 ‘가면’. MBC의 ‘전설의 마녀’ 등이 촬영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 이왕에 만났으니 MOIRE 478의 안내도도 한번 살펴보자. 각각 다른 분위기와 특색을 지닌 별장과 함께 다채로운 휴미락(休味樂) 시설들을 그려넣었다. 대표적인 부대시설로는 야외 인피니티풀과 이탈리아 레스토랑 <맘마 Mamma>, 중국 레스토랑 <정원 情園>, 전문 로스터가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사용하는 카페 <꼬무네 Comune> 등이 꼽힌다.

▼ 무아레에서 세운 이정표는 독채 팬션인 F3과 F2를 거쳐 라르고 료칸에 이르도록 표시되어 있었다. 참고로 무아레(Moire)는 프랑스어로 물결을 의미한단다. 물결은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앞으로’를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각각의 물결은 각자의 모습들을 갖고 있는데, 그 물결의 무늬가 지문처럼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과거와 앞으로 생길 미래’라는 의미를 담아 생각하는 사람과 합쳐 심볼로 삼았단다.

▼ 신개념의 동네에서는 경고판마저도 새로운가 보다. 임팩트를 주려는 듯 중심 단어의 크기와 색상을 다르게 표시해놓은 것이다. 그게 오래된 탓에 색상이 비록 하얗게 바래있었지만 말이다.

▼ 산행을 시작한지 20분. ‘T’자형의 첫 삼거리를 만났다. 이곳 ‘삼회2리’를 산행 기점으로 삼는 사람들은 화야산과 고동산을 함께 둘러보는 게 보편적이다. 그러니 화야산을 먼저 오르려면 왼쪽으로, 고동산을 먼저 오르겠다면 오른쪽으로 진행하면 된다.

▼ 이정표(화야산← 3.8㎞/ 고동산→ 2.1㎞, 화야산 5.4㎞/ 삼회2리 마을회관↓ 1.1㎞)는 화야산을 양쪽 방향 모두에다 표기해 놓았다. 오늘 오르게 될 능선의 중심이 되는 산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자 MOIRE 478의 ‘라르고 료칸’이 얼굴을 내민다. 일본식으로 지어진 펜션으로 18명까지 머물 수 있단다. ‘라르고(Largo)’란 ‘느릿하게’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거기다 료칸(りょかん)이 정원 딸린 ‘여관’을 지칭하는 일본어이니 여유롭게 쉬다 갈 수 있는 숙박시설이란 얘기일까?

▼ ‘앗! 우산소나무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눈여겨보았던 피네아소나무를 닮았기에 비명까지 질렀는데도 집사람은 시큰둥한 표정이다. 근처에도 안 갔다는 것이다. 내 눈에는 우산을 펼쳐놓은 것처럼 보이는데도 말이다. 그녀의 감성이 그만큼 무디어졌다는 얘기가 아닐까? 나이를 먹으면 남녀의 성별이 바뀌다시피 한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 잠시 후 탐방로는 포장길을 벗어나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정표(고동산 ?㎞, 화야산 5.0㎞/ 삼회2리 마을회관 1.45㎞)의 숫자를 지워버렸다. 고동산까지의 거리가 잘못 표기되었다는 불만인 모양인데, 그렇다고 시설물을 훼손할 것까지야 없지 않겠는가.

▼ 산길은 겁이라도 주려는 듯 시작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길은 또렷하게 잘 나있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15분쯤 지났을까 가파름이 극해 달해버린다. 허리를 곧추세운 능선을 곧장 치고 오르지 못한 산길은 왔다갔다 ‘갈 지(之)’를 써가면서 겨우겨우 고도를 높여간다. 산행속도가 뚝 떨어져버리는 이유이다.

▼ 15분쯤 더 걸어 이정표(고동산 1.1㎞/ 삼회2리 마을회관 2.05㎞)를 만났지만 썩 반갑지만은 않다. 가파른 것만으로도 가뜩이나 버거운데, 거기에 바위라는 장애물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 바윗길이 마냥 고달픈 것만은 아니다. 매달린 밧줄에서 전해오는 손맛이 여간 상큼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실로 얼마 만에 느껴보는 스릴인가.

▼ 한날한시에 한 몸으로 태어나도 죽음까지 함께 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한 뿌리에서 자라난 쌍둥이 가운데 하나는 이미 죽어있다. ‘목생무상(木生無常)’이라고나 할까?

▼ 바위지대의 나무들은 생김새까지도 바위를 닮았다. 산자락의 모진 비바람에 척박한 토양까지 더해진 환경 속에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리도 몸을 비비 꼬고 있을까.

▼ 바윗길은 힘들다. 그리고 위험하다. 그렇다고 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개개의 바위들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형상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다. 거기에 소나무들의 향연까지 더해진다. 얽히고설킨 가지가 그네들의 힘들게 살아온 세월을 말해준다.

▼ 크랙(Crack)’을 붙잡고 통과해야만 하는 구간도 있었다. ‘추락’을 조심하라는 경고판은 물론이고, 동절기 때 이용할 수 있도록 우회로까지 따로 내놓았지만 생각만큼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다. 한 점 망설임도 없이 통과해버리는 집사람이 그 증거이다.

▼ 산길은 능선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길을 내기 힘들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봉우리를 우회시키기도 한다.

▼ 바위길이지만 워낙 숲이 깊다보니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북한강이라도 내다보고 싶다면 가끔가다 만나는 바위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 그래봤자 나뭇가지 사이에서 겨우 삐져나온 강줄기를 살짝 엿볼 수 있을 따름이지만 말이다.

▼ 오늘의 화두는 ‘중2’. 최군의 첫째 아들이 이에 해당되는데, 어디로 튈지를 몰라서 북한의 김정은까지도 두려워한다는 나이다. 아니 초등학생인 둘째 아들 말로는 그런 ‘중2’를 때려잡는 게 ‘50대’. 즉 자기 아버지란다. 그러고 보니 최군의 나이도 벌써 50줄에 들어섰나 보다.

▼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1시간 30분 만에 ‘제2전망대’에 올랐다. 그러나 조망보다 이정표(고동산 정상 100m)가 더 반가운 지점이다.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던 정상이 이제 100m 앞으로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 바위 끝에 서면 굽이굽이 흘러가는 북한강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 근처에는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이 있었다. 누군가 망중한을 즐기다가 심심풀이로 쌓아놓은 모양이다.

▼ 정상에 가까워질 무렵 사랑놀이하기에 딱 좋은 암벽구간을 만날 수 있었다. 낯이 설은 연인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 제2전망대를 출발한지 15분 만에 정상에 올라섰다. 산행을 시작한지는 2시간 20분 만이다. 바위봉우리인 정상은 비좁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정상석은 두 개나 세워져 있었다. 정상이 가평군과 양평군의 경계에 놓여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발고도까지 다르게 표기할 필요야 없지 않았을까 싶다.

▼ 인증 사진은 가평군에서 세운 정상석이 제격이다. 북한강을 배경으로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발아래로 흘러가는 북한강은 물론이고 주변의 산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기 때문이다. 강변에 위치한 예봉산과 운길산은 물론이고 천마산과 북한산, 축령산, 운악산 등 수많은 산들이 흡사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 이정표도 두 개나 세워놓았다. 그런데 이마저도 지역 이기주의가 아니겠는가. 가평군(화야산 정상 3.3㎞/ 삼회2리 마을회관 3.25㎞)과 양평군(화야산 정상 3.1㎞/ 수입1리 2.5㎞) 모두 자기네 지역의 등산로만 표기해 놓은 것이다. 요즘의 화두인 상생(相生)을 조금만 실천했더라면 이보다 더 알찬 이정표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거기다 국민이 낸 세금까지 줄일 수 있지 않았겠는가.

▼ 정상 근처에서 만난 고사목(枯死木)이 하도 기기묘묘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이야 아니겠지만 생김새만 놓고 볼 때는 고산지대에서 만났던 주목보다 한층 더 기괴했다.

▼ 이젠 화야산(禾也山)으로 향할 차례이다. 화야산을 거쳐 뾰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타면 된다. 대부분 보드라운 흙길을 걷게 되지만 고동산 근처에서는 아래 사진처럼 바위구간도 지난다.

▼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하지만 고도가 낮아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음에 오르게 될 화야산(755m)이 지나온 고동산(591m)보다 훨씬 더 높기 때문일 것이다.

▼ 정상을 출발한지 25분 만에 이정표(화야산 2.5㎞/ 고동산 0.8㎞)가 세워진 헬기장을 지난다.

▼ 조금 더 걸으니 이번엔 삼회2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화야산↑ 2.3㎞/ 삼회2리 마을회관← 4.0㎞/ 고동산↓ 1.0㎞)이다. 고민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시계는 이미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는데, 가야할 길이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그래 산이 어디로 도망가기야 하겠는가. 화야산은 다음을 기약하고 이곳에서 그만 내려가기로 하는 이유이다.

▼ 이정표는 화야산까지 2.3㎞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화야산 정상에서 삼회2리까지 거리는 4.9㎞. 두 구간을 합치면 7.2㎞나 된다. 해지기 전에 산을 내려오기에는 무리인 거리라 하겠다.

▼ 하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하지만 길이 좌우로 몸을 틀면서 나있는데다 바닥까지 보드라운 흙길이라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내려설 수 있다.

▼ 주변은 온통 다래넝쿨 천지다. 가을철에 오면 제법 알뜰한 간식거리를 챙길 수도 있겠다.

▼ 숙주식물과 기생식물의 시체가 함께 누워있다. 누가 이긴 것일까?

▼ 푸른 이끼로 뒤덮인 나뭇등걸은 태고의 모습을 상상시킨다. 울창한 숲에 양치식물까지 사방에 널린 그야말로 원시의 숲이다.

▼ 그렇게 얼마를 내려섰을까 작은 개울을 만났다. ‘고동산계곡’으로 불리는 골짜기이다. 하지만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합수지점부터는 ‘화야산 큰골’로 이름이 바뀐다. 이 골짜기의 자랑은 독특한 모양의 바위들로 널려있다는 것이다. 둥글둥글하고 까뭇까뭇한 바위, 집체만한 바위가 무더기로 쌓여 있으며 거북이 등처럼 생긴 돌들이 무리지어 있는 등 계곡 곳곳이 절경을 이룬다.

▼ 규모는 작지만 수많은 폭포와 담(潭)을 눈에 담으며 걷을 수 있는 구간이다.

▼ 내려오는 도중 꽤 너른 잣나무 숲도 만날 수 있었다. 숲에는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아름드리 잣나무가 가득하다. 맞다. 이곳 가평은 국내 잣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전국 최대의 잣 생산지가 아니겠는가. 저 나무에서 채취되는 잣 또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단다. 가평군이 타 지역보다 일교차가 높은 탓에 이곳에서 생산되는 잣 또한 타 지역의 것보다 더 고소하기 때문이란다.

▼ 삼거리에서 내려선지 50분. 두 골짜기가 합쳐지는가 싶더니 개울의 물도 많이 늘어났다. 골짜기와 함께 산길(이정표 : 삼회2리 마을회관↑ 2.7㎞/ 화야산 정상→ 1.7㎞/ 고동산↓ 2.3㎞)도 합쳐진다. 화야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이다.

▼ 이정표는 오른편 고동산 방향에다 화야산(3.6㎞)까지 적어 넣었다. 아까 우리가 하산을 놓고 고민하던 삼거리를 거쳐서도 화야산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때문에 화야산만 오르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원점회귀 지점으로 이곳을 삼는다.

▼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산이니 어찌 돌탑 하나쯤 없겠는가. 누가 쌓았는지는 몰라도 정성들여 쌓아올린 흔적이 역력하다.

▼ 산길은 계속해서 개울을 따른다. 그러다보니 여러 번에 걸쳐 개울을 건너기도 한다. 징검다리를 총총거리며 건너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지만 여름철 장마라도 오면 통행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 징검다리로는 안 되겠는지 어떤 곳에는 나무다리를 놓았다. 하지만 이 근처. 아니 계곡을 따라 난 탐방로 전체는 너덜지대다. 길은 넓고 분명하지만 크고 작은 돌들이 바닥에 깔려있어 걷는 게 여간 사납지가 않다. 특히 습도가 높은 날에는 발목부상까지도 조심해야겠다.

▼ 물이 불어난 덕분에 주변 풍광이 한층 풍요로워졌다. 폭포의 물줄기가 굵어졌는가 하면, 소의 깊이도 한결 깊어졌다.

▼ 목교를 지나면서부터는 철망 울타리로 개울을 막아놓았다. 상수원 보호지역. 즉 화야산 계곡의 맑고도 풍부한 물을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 혹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나무뿌리가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문득 얼마 전에 들렀던 ‘퍼플섬’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이렇게 생긴 나무에 안내판까지 세워가며 관광 상품화 했었다.

▼ 그렇게 얼마간 더 걸으면 화야산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는 널찍한 공터에 내려선다. 고동산을 출발한지 2시간 10분 만에 산자락을 벗어난 것이다. 이제 차가 주차되어 있는 ‘삼회2리 마을회관’까지 20분 정도만 더 걸으면 산행이 끝난다. 오늘 산행은 총 6시간 20분이 걸렸다. 준비해간 점심을 먹느라 느긋하게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4시간 40분을 걸은 셈이다. 이정표에 적힌 거리를 합하면 8.25km. 꽤나 더디게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종현산(鍾懸山, 588.5m)

 

산행일 : ‘21. 2. 27(토)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과 연천군 청산면의 경계

산행코스 : 종현교→460봉→종현산→덕둔리방향 능선→잣나무 숲→아장교(소요시간 : 약 7km/ 4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코로나-19’ 와중에도 2월부터는 격주 단위로 ‘외씨버선길’이라는 트레일을 걷기 시작했다. 버스를 이용하여 해당지역까지 간 다음 집사람과 함께 걷는 일정이다. 나머지 주말에는 서울 근교의 산들을 찾아다녔음은 물론이다. 그러던 차에 최군의 전화를 또 받았고, 이번에는 포천에 있는 ‘종현산’을 찾았다. 600m에도 못 미치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오지에 위치한데다 이정표 등의 편의시설까지 일절 없어서 일반인들에게는 접근이 어려운 산이기 때문이다. 갑갑하기 짝이 없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산행을 할 수 있으니 요즘 시국에 이보다 더 나은 산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아장교로 내려오는 하산길이 바위로 되어 있어 다소 위험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 산행들머리는 ‘종현교’(포천시 신북면 덕둔리 산 252-1)

구리-포천고속도로 ‘신북 IC’에서 내려와 국도 43호선을 타고 철원방면으로 달리다가 ‘신북면사무소 앞 교차로’에서 좌회전 368번 지방도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종현교에 이르게 된다. 차량은 들머리에 있는 공터에 세우면 된다. 승용차 5~6대 정도는 주차가 가능하다. 참고로 이곳 덕둔리(德屯里)는 둔덕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만큼 산골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종현산을 오르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를 꼽는다. 제일휴게소에서 오르는 방법과 종현교에서 오르는 방법, 그리고 종현교 바로 옆에 있는 불무리교육대에서 오르는 방법이다. 일부 지도는 원둔덕 또는 상정초등학교에서 오르는 방법과. 법수동에서 오르는 방법도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제일휴게소를 들머리로 삼아서 정상에 오른 다음 종현교로 내려오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경사가 완만하고 바위가 적은 길로 하산하는 게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지 않겠는가.

▼ 종현교의 바로 옆에 ‘포천염광수련원’이 자리하고 있으니 들머리를 찾는데 참조하면 되겠다. 미션스쿨인 염광학원(鹽光學園)의 대단위 수련시설이니 찾아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 부부는 내비게이션에 ‘종현교’를 찍고 왔다. 중간에 포천이 아닌 동두천을 경유해 와서 약간 헷갈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돌아갈 때는 우리 예상대로 포천을 경유해 귀가했다.

▼ 공터의 바로 뒤에서 산자락으로 들어서야 하는데도 현실은 그럴 수가 없었다. 돼지열병의 방역을 위해서라며 산자락을 통째로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감염원인 멧돼지와 사람 사는 세상을 원천적으로 갈라놓기 위해서일 것이다.

▼ 능선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찾다가 다리로 나오니 제법 규모가 큰 하천이 나온다. 기암절벽과 맑은 계곡이 손잡고 선경을 빚어낸다는 ‘열두개울’이다. 선녀바위와 만장바위, 무장소, 도라소, 쌍무소 등의 명소가 10리에 걸쳐 펼쳐지는데, 오래 전 다리가 없던 시절에 법수동에서 덕둔리로 가려면 열두 번이나 개울을 건너야 한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참고로 종현산의 남서쪽으로 흐르는 저 하천의 원래 이름은 ‘산내천(山內川. 또는 靑山川)’이다. 소요산과 왕방산, 국사봉, 계류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산골 중의 산골’, 즉 산안(山內)이라는 뜻에서 온 지명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열두개울’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 해결책은 다리 끝부분에 있었다. 다리의 끝과 연결시킨 철망을 붙잡고 산자락으로 이동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바닥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까짓 철망을 붙잡은 손아귀에 힘만 조금 더 더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들어붙은 산자락에는 제법 또렷한 길이 나있었다.

▼ 완만한 능선을 따라 잠시 걷자 잘 써진 무덤 하나가 나온다. 봉분은 각종 문양을 넣은 석재로 테를 둘렀고 그 앞에는 비석은 물론이고 상석에 망주석까지 갖췄다. 무덤만 보면 정경대부는 못되어도 벼슬깨나 한 것으로 보이는데, 비문은 그냥 학생(學生)으로 적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명당일지도 모르겠다. 무덤의 발복(發福)으로 후손이 잘 되어 저렇듯 돈을 들였을지 누가 알겠는가.

▼ 묘역의 오른편 나뭇가지 사이로는 ‘열두개울’이 내려다보인다. 경기도의 계곡은 요즘 많이 달라졌다. 불무리교육대(부대 앞 버스정류장은 ‘휴양소’로 되어있다)라는 군사시설 외에는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 눈에는 아직도 불법으로 영업하는 식당의 평상들이 냇가 널려있는 풍경이 더 익숙한데도 말이다. 누구나 편안하게 자연 그대로를 즐길 수 있도록 해준 행정기관에 찬사를 드려본다.

▼ 산으로 들어선지 10분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커다란 바위벼랑이 갈 길을 막는다. 종현산의 등산로가 많이 험하다더니 이런 바윗길이 많아서 그런 표현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최군의 아이들도 함께하고 있는데 걱정이다.

▼ 바위를 피해 왼쪽으로 돌아 오르니 ‘국가지점번호(다사 6486-9825)’ 푯말이 길손을 맞는다. 정상까지 3.4㎞가 남았단다. 들머리에서 여기까지가 0.45㎞이니 정상까지의 총 거리가 4㎞ 가까이나 되는 셈이다. 종현산의 높이가 588.5m인 것을 감안하면 등산로의 경사가 완만하다는 얘기도 된다.

▼ 길은 또렷한데 반해 상황은 썩 좋지 않다. 바닥이 거의 너덜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보통의 흙길로 돌아오니 너무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 그렇게 10분 정도를 걷자 또 다른 푯말이 세워져 있다. 이번에는 119의 ‘구조지점표시목(위험지역 1)’이다. 현 위치를 ‘초성리휴게소와 정상사이’로 적고 있는 푯말은 정상까지의 남은 거리를 1.9㎞로 표기했다. 들머리인 마을입구에서는 0.5㎞를 걸어왔다는 것이다. 첫 번째 푯말에서 10분쯤 걸었을 따름인데 1.5㎞나 걸었다는 것이다. 시설물을 세운 경기도와 포천시의 관계자들은 이 구간에서 축지법을 사용했던 모양이다.

▼ 두 번째 푯말을 지나면서 산길은 상당히 가팔라진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닌데다 흙길이라서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 발길이 편하면 사념 또한 많아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2주일 만에 만났으니 주고받을 얘기가 많아지는 것 또한 당연하다. 오순도순 밀린 얘기를 나누며 8분 정도를 오르자 송전탑이 나온다.

▼ 송전탑을 아래서 올려다보며 셔터를 눌러봤다. 대칭을 이루는 모양새가 그럴 듯하지만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맞다. 꼭대기 위로 지나가고 있어야할 뭉게구름이 빠졌다.

▼ 송전탑을 지나서도 걷기 딱 좋은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깔린 낙엽이 소리를 질러댄다. 낙엽이야 비명일지 몰라도 내 가슴에 전해오는 바스락거림은 반가움의 표시다. 최군의 두 아이도 나와 같았던지 쫑알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기 짝이 없었다.

▼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만에 주능선에 올라섰다. 조그만 봉우리인 이곳은 주능선을 따라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이다. ‘법수교(法水橋)’나 ‘강서교’로 연결되는 등산로인데 길의 흔적이 또렷한 걸로 보아 이용하는 사람들이 제법 되는 모양이다. 참고로 ‘법수(法水)’라는 지명은 마을 앞을 흐르는 ‘열두개울’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불법이 중생의 마음 속 때를 깨끗이 씻어내는 물’에 비견될 정도로 물이 맑다는 것이다.

▼ 주능선을 만나면서 오른편으로 크게 휜 탐방로는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기 딱 좋은 기분 좋은 산길이다.

▼ 그렇다고 모든 구간이 다 완만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래 사진처럼 가파른 내리막길도 나타나니 주의할 일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까짓 미끄러져봐야 엉덩이 한번 털어버리면 그만 아니겠는가.

▼ 이 구간은 걷는 내내 왼편 나뭇가지 사이로 채석장이 내다보인다. 산의 한쪽 면을 통째로 잘라내고 있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라 하겠다. 하지만 눈에 거슬리지는 않는다. 두부 자르듯이 반듯반듯하게 잘라놓은 공법. 즉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벤치 커트’라는 채석방법을 쓰고 있다는 선입견이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길 20분. 산길이 느닷없이 아래로 뚝 떨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안부를 만났다. 첨부된 지도의 2번 등산로와 만나는 지점이다. ‘열두개울’의 지류인 ‘절골’을 거슬러 올라오는 길로, 우리가 올라왔던 3번 등산로보다 0.5㎞쯤 단축되는 코스이다.

▼ 안부의 오른편에는 ‘열두개울’에서 올라오는 길이 또렷하게 나있다. 반면에 왼편에서는 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 안부를 지난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파름이라서 그런지 꽤나 힘들게 올라설 수밖에 없었다.

▼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올라선 봉우리는 교통호 일색이다. 최근 격주 간격으로 찾고 있는 포천지역 산들의 일반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대부분의 봉우리들은 군의 벙커가 차지하고,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를 교통호로 잇는 풍경 말이다. 그나마 이곳 종현산은 벙커가 없는 봉우리들이 대부분이라는 게 조금 다를 뿐이다.

▼ 작은 오르내림 두어 번을 하던 산길이 또 다시 아래로 향한다. 그리고 15분 조금 못되는 지점에서 또 다른 안부를 만났다.

▼ 이번의 안부는 아예 좌우로 임도가 뚫려있다. 오른쪽에서 올라오는 길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절골’을 거슬러 올라오는 ‘2번 등산로’이다. 이 코스를 이용할 경우 우리가 걷고 있는 ‘3번 등산로’보다 0.3㎞ 정도 단축된다고 한다.

▼ 또 다시 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것도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좌우로 ‘갈 지(之)’자를 쓰고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르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라 하겠다.

▼ 그렇다고 이 구간이 마냥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래 사진의 나무처럼 기괴한 모양의 볼거리들이 심심찮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 기괴하게 생긴 바위들 또한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임도사거리를 지나면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던 자잘한 바위들이 언제부턴가 몸체를 크게 부풀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아예 바윗길 수준이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만만찮다. 아래 사진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호랑이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포효하는 모습을 쏙 빼다 닮았다.

▼ 터키의 ‘카파도키아(Cappadocia)’를 연상시키는 바위도 눈에 띄었다. 고깔모자나 레고 장난감처럼 생긴 바위들이 잔뜩 모여 있던 ‘파샤바 계곡(Pasabag)’. 그곳에서 나를 놀래게 했던 송이버섯처럼 생긴 바위를 이곳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다만 ‘카파도키아’의 것은 몸통은 하얗고 갓은 거무튀튀한데 반해, 이곳은 몸통과 갓이 모두 하얗다는 게 다를 뿐이다.

▼ 바위절벽 위에 걸터앉은 노송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나무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바위에 기대어 살아온 삶은 몸체를 부풀릴 여력도 없었을 게고. 또 요리조리 몸을 비틀고 있는 저 몸통은 오랜 풍상을 겪으면서 만들어진 습관이 분명하다.

▼ 과연 저런 곳에 길이 나있을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바위지대도 나온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끊어진 듯 보이는 등산로는 이런 바위들 틈새로 미끄러지듯 길을 이어간다.

▼ 460m봉으로 여겨지는 바위봉우리에서는 매의 머리를 닮은 바위를 만났다. 거대한 매가 하늘을 향해 비상하려는 듯한 모양새이다. 이밖에도 쉬어가기 딱 좋은 마당바위, 종현산의 정상의 군부대가 올려다 보이는 걸상바위, 중국의 고성을 연상시키는 성벽바위 등 눈에 담아둘만한 바위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 눈요깃거리가 끝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울창한 잣나무 숲이 펼쳐진다. 참나무 일색에 양념삼아 들어앉은 소나무가 전부이던 산에 난데없는 잣나무라니 생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이런 풍경이 싫다는 얘기는 아니다. 잣나무 특유의 상쾌한 내음이 코를 찔러대는데 싫어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특히 그 내음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가 듬뿍 들어있을 것이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오느라 지쳐있던 심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치유되어버리는 이유이다.

▼ 잣나무 숲이 끝나자 안부가 나온다. 제일휴게소로 내려가는 등산로에 놓여있는 560m봉과 현재의 종현산 정상이랄 수 있는 570m봉 사이의 안부라고 보면 되겠다. 이곳에는 ‘덕둔리 入口(우리가 올라온 방향은 군휴양소 入口)’라고 적힌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리저리 살펴보던 최군은 길이 보이지 않는단다. 그럼 우리가 날머리로 삼은 ‘제일휴게소’는 어디로 내려가야 한단 말인가.

▼ 일단은 정상부터 오르기로 한다. 길이야 그 뒤에 찾으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정상은 왼편에 보이는 봉우리이다.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나 거리가 짧아서 부담스러울 정도까지는 아니다.

▼ 정상으로 오르는 도중 ‘국가지점번호(다사 6672-9777)’ 푯말을 다시 만났다. 이곳도 역시 이정표(종현산 정상 0.1㎞/ 종현교 2.5㎞) 기능까지 겸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두 구간의 거리를 2.6㎞로 적고 있다. 오늘 산행에서 만난 119의 푯말들마다 각기 다른 거리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3.85㎞와 2.4㎞에다 이번에는 2.6㎞라니 정확한 거리는 대체 얼마란 말인가.

▼ 잠시 후, 그러니까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만에 마루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이곳은 정상이 아니다. 실제 정상인 588.5m봉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꿩 대신 닭’ 격으로 이곳 570m봉을 정상으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아재개그 하나. ‘종현산이란 지명의 유래는?’ 정답은 옛날 산 정상에 큰 종을 매달아 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내 대답은 확고했다. ‘종현’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정상석을 기증한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것. 다들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반문했지만 왕수산악회에서 세운 정상석의 뒤를 보여주었더니 다들 고개를 끄떡거린다. ‘증. 이종현’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 정상에 서면 빈 나뭇가지 사이로 건너편에 있는 진짜 정상이 내다보인다. 그 꼭대기에는 군의 벙커가 올라앉아 있다.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이유인데 사진촬영도 불가능하단다. 덕분에 풍경화 대신 서슬 시퍼런 경고판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이다. 전곡지역의 널따란 들녘과 근처에 있는 국사봉, 왕방산, 그리고 그 우측으로 소요산 정도가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잡목의 나뭇가지 사이로 얼핏 내다보이는 정도다. 참! 어떤 이는 불암산과 수락산, 도봉산은 물론이고 관악산까지도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한북정맥으로 여겨지는 마룻금만 희미하게 나타날 뿐이었다.

▼ 자! 이제 하산이다. 정상적으로는 ‘덕둔리 입구’ 푯말이 세워진 안부까지 되돌아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리더 최군은 정상에서 곧바로 치고 내려가잔다. 길이 또렷하게 나있는 것이 분명 제일휴게소로 내려가는 정규 등산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오늘도 최군의 오판은 계속되고 있나 보다.

▼ 하산 길은 처음부터 죽을 맛이다. 절벽에 가까운 바윗길인 것이다. 바위 사이사이로 길이 나있긴 하지만 위험하기는 매일반이다. 자칫 발이라도 헛디디면 최소한 중상인 것이다. 사실 돌부리에 발이 걸린 집사람이 중심을 잃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다행이 바위에 무릎을 찍히는 것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가슴 철렁한 순간이었다.

▼ 바윗길이 끝나갈 즈음 돌탑 하나를 만났다. 위험한 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램. 즉 안전에 대한 열망의 표현일 것이다. 최군의 큰 아들 민상이가 돌멩이 하나를 올려놓는 게 보인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기도까지 드린다. 그만큼 위태로운 구간이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 오래지 않아 바윗길은 끝난다. 하지만 이후에 나타나는 흙길 또한 만만치가 않다. 바위가 아니라 흙이라는 게 다를 뿐 가파르기 짝이 없는 내리막길이기 때문이다. 붙잡을 나무라도 많으면 좋으련만 그마저 허락되지 않는 난감한 구간이다.

▼ 죽을상인 민상이와는 달리 둘째 아들인 동규는 그저 희희낙락이다. 조그만 여유라도 생길라치면 갖가지 포즈를 취하며 귀여움을 떤다. 그게 다 아빠가 챙겨주는 덕분일 것이다.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 그렇게 내려오길 1시간 40분(길이 험한 탓에 더디게 걸은 시간이다). 거대한 바위봉우리가 그렇지 않아도 더딘 발걸음 가로막는다. 길은 이곳에서 바위를 피해 왼편으로 우회시킨다.

▼ 이때. 최군의 오판이 또 다시 불거졌다. 왼편에 보이는 잣나무 숲으로 내려가자는 것이다. 길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데 막무가내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 일행 가운데 최고의 산꾼은 최군이 아니겠는가.

▼ 그렇게 내려선 길은 ‘차마 말로 할 수 없다’던 어느 보양강장제 광고에 딱 어울리는 상황으로 우릴 맞는다. 허리를 바짝 곧추세운 산비탈은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기만 한데 의지할만한 나무들조차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버티다 못해 끝내는 엉덩이를 땅에 대고 미끄러져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그것도 너무 빨리 내려가지 않도록 발로 브레이크까지 잡아가며 말이다.

▼ 미끄러지듯이 숲에 들어서자 곧게 자란 아름드리 잣나무가 신비스러운 기운을 내뿜는다. 짙은 녹색을 띠는 잎사귀와 회백색의 나무껍질이 어우러져 솔숲과는 또 다른 매력을 풍긴다. 냄새 또한 소나무와 같으면서도 또 다르다. 그런 내음이 코끝을 스쳐가면서 머릿속까지 개운해진다. 조금. 아니 버거울 정도로 가파른 숲이지만 조심조심 발을 떼면 걷는 것만으로도 그 자체가 건강샤워가 된다.

▼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가 보다. 덕분에 이렇게 예쁘게 생긴 운지버섯도 만날 수 있었다.

▼ 산자락은 온통 잣나무 숲이다. 저 정도면 명성이 자자한 가평의 ‘축령백림’에 못지않는 잣나무 숲이라 하겠다. 맞다. 이곳 포천은 우리나라 잣의 3대 생산지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포천에서 생산되는 잣은 맛과 품질을 인정받아 조선시대에는 임금님께 진상까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산자락 전체가 잣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그 굵기도 만만찮다. 참고로 잣은 심은 지 7년이 되면 열매가 열리지만, 양질의 잣은 대략 20년은 되어야만 수확할 수 있단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은 이런 나무들을 키우기 위해 얼마만큼 많은 땀을 저기에 쏟아 부었을까?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 잣나무 숲을 벗어나자 남의 집 마당이다. 길 없는 길을 헤매다보니 엉뚱한 곳으로 내려선 것이다. 미안해 할 주인장이 없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겠다. 그건 그렇고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무려 2시간 10분이나 걸렸다. 내려오는 길이 그만큼 험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 이후부터는 잘 닦인 임도를 따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열두개울’에 다다른다. 소요산 자락의 금동리(포천시 신북면)에서 발원해 연천군 청산면을 지나 양주시 신천으로 합류하는 총 길이 15㎞의 하천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다리가 없던 시절, 하류인 연천의 법수동에서 저 안쪽에 있는 포천의 덕둔리까지 가려면 개울을 열두 번이나 건너야 한다며 붙여놓은 이름이다. 물론 지금은 2차선의 신작로가 뚫렸는가 하면 다리도 여섯 개나 놓였다.

▼ 산행 날머리는 아장교(포천시 신북면 덕둔리 598-1)

임도는 ‘세인트펜션’ 앞에서 ‘아장교’를 통해 개울을 건넌다. 그리고 368번 지방도와 만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는 종현교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까짓 2㎞쯤이야 느긋이 걸어도 30분이면 되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오늘 산행은 총 5시간 1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50분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나게 오래 걸은 셈이다. 참고로 우리가 걷고 있는 반대편, 그러니까 왼편으로 가면 ‘허브아일랜드’로 유명한 ‘삼정리’가 나온다. 조선 초기 세 정승이 난을 피해 외부와 접촉을 끊고 산수를 벗 삼아 여생을 보냈다는 마을이다.

▼ 이때 ‘열두개울’ 뒤편으로 거대한 바위절벽이 펼쳐진다. 맞다. 저렇듯 솜씨 좋은 석공이 한껏 솜씨를 부려놓은 듯한 기암절벽과 계곡물이 거세게 휘돌아 흐르다가 쉬어가는 작은 연못들이 바로 ‘열두개울’의 본래 모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리산이나 설악산의 깊은 계곡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우기기도 한단다.

▼ 5분쯤 걸었을까 ‘다래골 염소탕’이란 간판이 보였다. 많은 블로거들로부터 포천의 ‘맛집’으로 소개된 명소이다. 마침 주인장께서 승용차를 픽업해올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준단다. 덕분에 우린 종현교까지 걸을 필요도 없이 수육과 전골을 안주삼아 폭음을 즐길 수 있었다. 전날 잡은 염소고기만을 사용한다는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육질이 매우 부드러운데다 맛도 여느 유명 음식점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다만 닭백숙 등의 서브메뉴가 성수기 외에는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은 흠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