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16구간(벌랏한지마을 길)

 

여행일 : ‘23. 4. 1()

소재지 : 충북 보은군 회남면 및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일원

여행코스 : 회남면사무소남대문교소공원남대문리거구리325벌랏한지마을소전교삼거리(거리/시간 : 10km, 실제는 거신교삼거리부터 10.48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열여섯 번째 구간인 벌랏 한지마을 길(10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브랜드가 된 벌랏 한지마을에서 한지 만드는 과정을 직접 체험해볼 수도 있다. 사담길에서는 아름다운 대청호 풍광까지 눈에 담는다. 하지만 가파른 산봉우리를 3개나 넘어야하는 버거운 여정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거신교 삼거리(보은군 회남면 거구리)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상주) 회인 IC에서 내려와 571번 지방도를 타고 문의·대전 방면으로 6km쯤 내려오면 회인천을 건너기 직전 거신교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16구간의 공식 시점은 회남면사무소이나 지난 15구간을 이곳에서 마쳤기 때문에 출발지를 변경했다.

 오늘도 부부의 출발지를 따로 잡았다. 2km쯤 전방에 위치한 남대문 소공원에서 집사람을 출발시키고 내가 쫒아가는 형식이다. 기껏해야 10km 밖에 되지 않는 구간이지만, 300m 내외의 산봉우리를 3개나 넘어야 하는 난이도가 집사람에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정표(회남면사무소 0.4/ 분저리 7.1)가 가리키는 회남면사무소 방향(서쪽)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 행장은 삼거리 근처 주차장에서 꾸리면 되겠다.

 첫 만남은 거신교’. 2차선 도로가 회인천을 가로지르는데, 그 왼편에 보행자만의 길을 따로 내놓았다. 참고로 다리 건너 거교리(巨橋里)에는 것다리(‘거교라는 지명의 원천으로 큰 다리가 마을 앞에 있었다고 한다날방·멱골·본말·사당마루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이중 멱골·본말·사당마루는 대청댐 조성과 함께 수몰됐다.

 다리 아래로는 대청호가 널찍하게 펼쳐진다. 아니 금강의 지류인 회인천(懷仁川)이라고 하는 게 옳겠다. 피반령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다 이곳(거교리)에서 금강 본류(대청호)로 흘러든다.

 다리를 건너면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직진은 거교리를 횡단하는 지방도(회남로)이고, 가운데는 거교리의 마을 안길로 이어준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선답자의 ‘GPX 트랙은 대청호반을 따라 난 데크로드를 따르란다.

 하지만 난 가운데 길을 따라 마을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문득 벽화로 가득한 골목길을 만날 수 있다는 어느 르포기사를 떠올렸었기 때문이다. ‘민화란 이어져 내려오는 생활상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일상생활 양식이나 관습 등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민속적인 내용을 그려왔다. 그러니 부담 없이 감상만 하면 될 일이다.

 이 뭐꼬!’ 옛 풍경 속에 요즘 옷차림의 여인이 등장하다니. 맞다. 민화에는 경계가 없다고 했다. 자연경관·생활풍속·장수·흥복은 물론이고 종교에 대한 믿음까지 모든 것을 아우른단다. 그러니 옷차림보다는 아이를 달래고 있는 어미의 마음이 되어 그림을 감상해 보자.

 끌고나온 소가 꼴을 먹거나 말거나, 꼬맹이들에게는 남의 집 불구경이다. 하루가 멀다않고 만나겠건만 주고받을 말이 무에 그리 많을꼬? ! 충청도 처자들은 소에게 꼴까지 뜯기는가 보다. 소를 몰고 나온 처자가 다른 벽화에 떡하니 등장하는 걸 보면 말이다.

 새참으로는 막걸리만한 것도 없었을 게다. 안주 그릇도 안 보이건만, 불콰하게 달아오른 농부는 왕골을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여기서 팁 하나! 민화는 내용에 따라 화조도(꽃과 새어해도(물고기호작도(호랑이·까치십장생도(장수를 뜻하는 동식물산수도(자연경관풍속도(생활상고사도(옛이야기문자도(글자책가도(·문방사우무속도(종교적 내용) 등으로 나뉜다.

 민화에는 순수하고 소박하며 솔직한 우리 민족의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자연에 대한 사랑, 웃음을 잃지 않는 익살과 멋이 배어 있다. 물고기를 꼬드기고 있는 저 어부들의 몸짓에도 그런 익살이 배어있다.

 자 모양으로 마을을 돈 다음 화장실(옛 차림의 처녀총각이 안을 기웃거리는 그림이 웃음을 자아낸다)에서 호반으로 내려선다. 이어서 대청호반에 내놓은 데크로드를 따른다.

 최근 날씨가 확 풀렸다. 지난 주말, 10여 일의 그리스여행에서 돌아오니 흡사 여름에 가까워져 있었다. 날씨가 풀리면 어부의 손길은 바빠지는 법. 그물을 걷어 올리는 어부의 손길은 바쁘기만 하다.

 호반을 따라 내놓은 이 길은 사담길로 불린다. 옛 사람들은 나지막한 산 고개 끄트머리를 날방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날방 주변은 지금 대청호반을 따라 산책길이 조성됐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거교리로 편입된 고을(사담리)의 옛 지명을 살리기 위해 사담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사담길은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름의 볼 것은 다 갖췄다. 드넓게 펼쳐지는 호반은 기본. 이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는 물론이고, 작은 쉼터도 두어 곳 마련했다.

 요런 작은 나루터도 만날 수 있다. 대청호를 일터로 삼아 살아가는 주민들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나루터로 내려가면 대청호의 작은 흐름까지 눈여겨 볼 수 있다.

 비닐 망()으로 둘러싸인 터널도 사담길의 한 축을 담당한다. 벚꽃 등의 봄꽃이 흐드러진 지금이야 저렇듯 삭막하지만, 넝쿨식물이 물을 만나는 여름철이면 사담길의 제왕은 이곳이 되지 않을까 싶다.

 거교리 선착장은 바닷가가 부럽지 않은 규모다. 꼬맹이 어선 예닐곱 척이 묶여있는 시멘트구조물 말고도, 부교(浮橋) 형의 선착장까지 따로 만들어 놓았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주민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0. 571번 지방도로 올라서니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반긴다. 충청도 사람들이 세계 제일로 치켜세우는 벚꽃길이 아닐까 싶다. 571호선 구간이 포함돼 회인선 벚꽃길로 불리어오다가, 최근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로 이름을 바꾼 길이가 무려 26.6km에 달한다는 그 명품 둘레길 말이다.

 벚꽃 향기에 취해 5분쯤 걷다가 왼편 언덕으로 오른다. 그리고 회남면수몰유래비와 탑을 만났다. 맞다. 이곳 회남면은 대청호 수몰지역으로 유명하다.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많은 마을들이 물속에 잠겼고, 나머지 마을들도 삶의 근거지를 대부분 잃었다. 그 과정에서 면소재지도 신곡리에서 거교리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언덕에서 내려오면 널따란 주차장에 화장실까지 갖춘 남대문 공원이 반긴다. 회남면의 녹색장터가 열리는 곳이다. 도농교류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토·일요일 열린다는데 밴드까지 동원돼 흥을 돋우던 지난번과는 달리 조용히 손님을 맞고 있었다.

 이번에는 스치듯 장터를 지나쳤다. 구입한 물건을 짊어지고 산을 넘을 형편이 못되어서다. 구경을 했다고 해도 구입했을지는 의문이다. 녹색장터는 주민들이 직접 기른 농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판다는 슬로건을 내건다. 하지만 전에 살펴본 바로는 우리 동네 할인마트보다 조금 더 비쌌다.

 남대문 유래비 남대문이란 지명의 내력을 적고 있었다. 둘레가 2.722m쯤 되는 호점산성(虎岾山城)의 남문 밖에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산성의 역사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었다.

 호반에는 수질정화를 위한 인공 수초섬이 떠 있었다. 수초섬 주변에 부교(浮橋)를 띄워 학생들의 자연생태학습장으로 활용한다는데, 그런 시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남대문교는 물이 반 고기가 반이라는 속설이 떠돌 정도로 소문난 낚시터이다. 하지만 오백리길 나그네들에게는 6구간과 연결되는 다리로 더 중요하다.

 16구간은 남대문교를 건너지 않는다. 대신 도로를 횡단한 다음, 회인천의 천변을 따라 남대문마을로 들어간다.

 인적이 뜸한 길은 캠핑족 차지인가 보다. 하지만 텐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근처 어디에서 베스(large mouth bass)라도 낚고 있는 모양이다.

 긴 가뭄에 시달린 대청호는 그 속살을 드러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는 홍수로 인한 피해까지 있었는데도 말이다. 맞다. 지구는 최근 기상 이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큰 가뭄과 폭우를 인접지역인데도 나누어가며 때려버린다. 인간이 저지른 환경파괴에 대한 조물주의 반격이다.

 회인천을 벗어나기도 전에 집사람을 따라 잡았다. 걸어오는 도중 냉이라도 캤던 모양이다. 사랑하는 이의 밥상에 올리고자 하는 예쁜 마음으로...

 남대문마을의 초입에도 서낭당이 있었다. 민속문화제인 청마리의 제신탑(祭神塔)을 본떠 원추형의 돌탑을 반듯하게 쌓아올렸다. 다만 그 규모가 작고, 솟대와 장승이 함께 있던 청마리와는 달리 이곳에는 돌탑 하나만이 외롭다.

 이곳 보은은 대추나무로 대변되는 고장하다. 주변 풍광만 바라봐도 이곳이 보은 땅임을 금방 알아차린다. 터만 있으면 어김없이 대추나무를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떠난 자리는 사람이 채워가는 법. 대청호 주변은 농부들이 떠난 자리를 노후를 즐기려는 도시민들이 대신했다. 잘 다듬어진 소나무하며, 마당을 가득 매운 항아리들이 주인장의 풍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3. ‘남대문(南大門)’ 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남대문리를 형성하는 3개의 자연부락(남대문·거구·만마루) 중 하나로 대추나무가 유독 많은 마을이다. 마을 곳곳 조그만 빈터라도 날라치면 어김없이 대추나무를 심어놓았다. 그래선지 연 소득이 1억을 넘기는 농민도 있단다.

 아름다움에 겨운 듯 담장 아래까지 가지를 내려뜨린 홍매화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동백꽃·매화·산수유·개나리·진달래·벚꽃·유채꽃·철쭉 등 이른 봄부터 차례차례 피어나는 저런 꽃들이 없었다면 봄을 기다리는 일이 지금처럼 설레지 않을 것이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남대문삼거리’.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507번 지방도를 따른다

 이 구간도 활짝 핀 벚꽃 가로수가 줄지어 반긴다. 하긴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은 벚꽃놀이 문화가 발달한 일본인들이 세계 제일이라며 자랑하는 아오모리현 이와키산 벚꽃길(총 길이 20km)’보다도 더 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귀하디귀한 토종 민들레라는 집사람의 호들갑에 카메라부터 들이대 본다. 아니 집사람에게 저 민들레는 훌륭한 식재료다. 어린잎은 생채로 먹거나, 살짝 데쳐 나물로 무쳐 먹는다. 뿌리는 튀겨 먹고, 꽃은 그늘에 말려 차로 마신다.

 8분쯤 더 걸어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면 거구마을’. 남대문리의 3개 자연부락 중 하나로, 옛날 아홉 명의 부자가 살았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정표(남대문리 1/ 남대문교)가 가야할 방향(벌랏마을)을 빼먹고 양쪽 도로만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GPX트랙의 도움을 받지 않을 경우 헷갈리기 딱 좋겠다.

 마을을 통과한 오백리길은 임도를 따라 계곡으로 파고든다. 저 멀리 길은 숲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숲으로 흐르던 길은 결국은 다시 계곡을 따라 흐르고 만다. 물이 그러하듯 길마저도 계곡을 벗어나지 못한다.

 근육질의 저 나무는 정력까지 넘쳐난다. 한 뿌리에서 여섯 개의 줄기를 밀어 올렸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출산률이 0.78%라는 충격적인 발표가 있었다. 취업 이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기사도 있었다. 우리 젊은이들이 저 나무처럼 튼실한 몸과 마음을 지녔으면 좋으련만...

 임도를 따라 30분 조금 못되게 걷자 오솔길이 하나 갈려나간다. 오백리길은 이 오솔길을 따른다.

 초입의 나무줄기에 오백리길 표지판이 매달려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이후부터는 산길을 따른다. 이 구간은 오백리길 나그네들이 애를 많이 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웃자란 잡목이 곳곳에 들어차면서 방향 찾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거기다 수북하게 쌓인 참나무 낙엽은 길의 흔적까지 없애버렸다. 오죽했으면 GPX트랙을 만들어낼 정도의 전문가까지 길을 잃고 헤맸었겠는가.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에 의지해 10분 거리의 능선 안부까지 올랐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두 방향(반대편 산비탈과 왼쪽 능선)에 선답자들의 리본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달려 있는 리본의 수가 많은 방향(능선)을 선택했다. 이어서 진달래와 산벚꽃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길을 오른다. 가파르다는 게 다소 흠이지만 아름다움은 모든 걸 용서한다는 말도 있지 않겠는가.

 5분쯤 후,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이면 ‘325,9m에 올라선다. 오늘 오르게 될 3개의 산봉우리 중 가장 높지만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백리길 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해준다고나 할까?

 올라왔으니 내려갈 차례. 그런데 이게 만만치가 않다. 무지막지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스틱에 의지해 엉거주춤 내려가는 집사람은 그나마 양반, 스틱을 챙겨오지 않은 유사장은 네 발로 기며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내리막길이 끝났다고 길이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작지만 가파른 오르내림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아니 완만한 경사로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325m봉에서 14분쯤 진행했을까 가파른 오르막길이 기다린다. 첨부된 지도에 표기된 어성리 갈림길이 위치한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대기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산비탈을 옆으로 째는 지름길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비탈진 탓에 무섭기까지 했지만, 저렇게 가파른 오르막길을 피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또 다시 나타난 가파른 내리막길과 한바탕 싸움을 치루고 나면, 산길은 능선을 벗어난다.

 이 구간도 역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하지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네 발로 길 정도는 아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30(산길로 들어서고 1시간). 밭두렁에 쳐놓은 울타리 때문에 고생고생 해가며 소금골 임도로 내려설 수 있었다. 이어서 비닐 망()으로 둘러싸인 터널을 지난다.

 터널이 끝나갈 즈음 나그네를 위한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준비해 온 먹거리라도 펼쳐놓으라는 듯 식탁까지 떡하니 배치했다. 덕분에 난 오백리길 도반이자 갑장인 유사장이 준비해온 금준미주(金樽美酒)에 옥반가효(玉盤佳肴)로 한껏 즐길 수 있었다.

 쉼터에서 간식을 먹은 뒤 다시 길을 나선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 않아 만나는 삼거리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이정표가 2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선착장까지의 거리를 0.5km로 적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거리가 부담스러워 다녀오는 것을 포기해버린 일행도 있었다.

 5분쯤 걸으면 나타나는 선착장은 벌랏마을의 옛 나루터이다. 현재는 승객대기소로 쓰던 낡은 건물만 남아있지만 벌랏마을에서 문의로 가는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 나루터가 주민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단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벌랏마을이 육지 속 섬이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벤치에 앉자 빼어난 풍광이 펼쳐진다. 멀리 대청호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휘어진 물길이 무척 인상적인데, 대청호의 수위에 따라 그 모습이 달리 보인다고 한다. 참고로 대청호가 조성되기 전 금강을 낀 마을엔 나루터가 많았다고 한다. 금강을 거슬러 신탄진에 물산이 모이면 뱃길을 따라 내륙지역 곳곳을 파고들었단다. 저 물길도 그중 하나가 분명하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벌랏마을로 향한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서 서낭당을 만났다. 340년이나 묵었다는 느티나무(보호수) 앞에 돌탑을 쌓아올렸는데, 당제까지 지내오는 듯 금줄을 친 흔적까지 엿볼 수 있었다.

 서낭당 옆 돌장승(시멘트일 수도 있겠다)은 명찰을 따로 달지 않았다. 대신 대장군은 수염을 그려 넣었고, 여장군은 수염 대신 비녀를 꽂았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40. 임진왜란 때 사람들이 피난 와 정착하면서 생겨났다는 벌랏마을로 들어선다. ‘벌랏이란 지명은 수몰 전 마을 어귀의 벌랏나루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현재 20여 농가에 30여 명이 거주하는데, 첩첩산중에 물길로 막혀 있던 마을은 6.25 전쟁 당시 전쟁이 난 줄도 모를 정도로 외진 곳이었단다.

 300년 동안 주민들의 생명수였던 우물 위에는 담한정(澹韓亭)’을 세웠다. 담백하고 넉넉하며 평안한 한지(韓紙) 마을이라는 뜻을 담았단다. 그런데 백···(百千萬億)으로 시작되는 저 사언절구(四言絶句)는 대체 누구의 작품일까?

 조금 더 올라가면 벌랏 한지마당이 나온다. 이 마을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봄에 한지를 만들어 대전·옥천·청주 등지로 나가 팔았고 가을 추수 때 쌀로 종이 값을 받았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활력을 잃었다. 마을을 되살린 것은 마을에 널린 닥나무였다. 마을 주민들은 20여 년 전 닥나무를 가공해서 전승이 끊겼던 한지생산을 다시 시작했다. 거기에 재미(다양한 체험)와 예술이 더해지면서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오백리길은 이제 도로(염티·소전로)를 따른다. 1차선으로도 모자라 한없이 구불대기까지 하지만 벌랏마을 주민들에게 이 길은 생명선이다. 이 길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벌랏나루를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밖에 없던 육지 속 섬이었기 때문이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이때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벌랏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을전체가 골짜기에 푹 파묻혀 있는 모양새이다. 아까 눈여겨보았던 주위가 대부분 밭이고 논은 거의 없는 마을이라는 특징이 여실히 들어나는 풍경이다. 하긴 누군가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 빗대 충북의 동막골로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15분쯤 올라섰을까. 또 하나의 서낭당이 만들어져 있었다. 마을 표지석 곁에 정자까지 들어앉혀 오백리길 나그네들의 소중한 쉼터가 되어준다.

 벌랏마을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안내판도 세웠다. 조감도 모양의 지도를 그린 다음 한지체험장, 생태체험장, 물놀이장, 민박촌 등 찾아볼만한 곳들을 표시했다. 일종의 관광지도인 셈이다. 참고로 한지체험은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삶아내고 방망이로 두드려 무르게 한 뒤 채로 걸러 한지를 만드는 과정이다.

 20분쯤 더 걸으면 고갯길의 정점에 이른다. 고도계가 214.7m를 찍고 있으니, 산마루 하나를 오롯이 넘은 셈이다.

 길은 이제 아래로 향한다. 자동차도로 치고는 제법 가파르게 내려간다. 이 구간에서 우린 널따란 포도밭을 만날 수 있었다. 보은에서 청주로 넘어온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대추밭이 포도밭으로 변해있다.

 날머리는 소전보건 진료소(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소전리)

홍매화·벚꽃·진달래 등 흐드러지게 피어난 봄꽃들에 눈 맞추며 걷다보면 어느덧 소전2(所田2 : ‘산서마을이지 싶다)에 이른다. 공식적인 종점은 마을을 지나 소전교삼거리이지만 주차문제로 인해 소전마을 입구에서 트레킹을 마쳤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gpx트랙이 10.48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4km도 못되는 산길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대청호오백리길 15구간(구름고개 길)

 

여행일 : ‘23. 3. 18()

소재지 : 충북 보은군 회남면 일원

여행코스 : 은운리(싸리골)언목마을구름고개(독수리봉 전망대 왕복)분저리용호리선착장판장대교회남면사무소(거리/시간 : 14km, 실제는 15.35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열다섯 번째 구간인 구름고개 길(14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구름이 넘나든다는 고개 하나를 오롯이 넘는다. 하지만 고개를 넘으며 바라보는 감입곡류(嵌入曲流)의 비경이 그 고생을 상쇄시켜 준다. 하나 더, 다리품만 조금 더 팔면 독수리봉 전망대에서 악어 한 마리를 만날 수도 있다. 보은 제일의 비경이라니 그냥 지나치지 말 일이다.


 들머리는 은운리 경로당(보은군 회남면 은운리)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상주) 보은 IC에서 내려와 37번 국도를 타고 옥천방면으로 12km쯤 내려오다 안내교차로(옥천군 안내면 현리)에서 502번 지방도로 옮겨 10km쯤 들어오면 은운리(‘싸리골이지 싶다)’에 이르게 된다. 이 마을 경로당이 15코스의 들머리이다.

 오늘은 풀코스를 완주했다. 2km쯤 전방에 위치한 언목마을에서 집사람을 출발시키고 내가 쫒아가는 형식이다. ‘구름고개 길란 브랜드까지 만들어낸 고갯길(은운리-분저리)이 부담스러웠지만, 집사람의 체력에 맞춰 걷다가 마땅한 곳에서 회남면 택시를 부를 요량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쯤이야 하는 집사람 덕분에 택시를 부르지 않고도 마칠 수 있었다.

 15구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이정표(분저리 6.5/ 장고개 2.1) 답양1에 세워져 있었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분저리 방향(북쪽)의 협곡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 행장은 주차장 한켠에 세워놓은 쉼터용 정자에서 꾸리면 되겠다.

 그런데 100m쯤 떨어진 곳에서 도로가 1차선으로 바뀌어버리는 게 아닌가. 입구에는 협소한데다 급커브가 많아 대형차량의 통행을 제한한다는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하지만 마음 좋은 황사장님은 체력이 부담스러운 회원(우리 집사람처럼)들을 조금이라도 더 태워다 주겠다며 차를 몰고 들어간다. 그러다가 언목마을에서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고생고생하고 있었지만...

 오백리길은 가산천(佳山川)’을 옆구리에 끼고 좁디좁은 협곡 속으로 들어간다. 은운교를 건너고 이름조차 없는 또 다른 다리를 건넌다. 조잘대는 시냇물 소리에 발맞추니 발걸음도 경쾌해진다. 참고로 가산천 노성산(보은군 수한면)에서 발원하여 용촌리·답양리·은운리를 거쳐 대청호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하천이다.

 이 길은 공인된 지방도(502호선)’이다. 보은군(회남면) 거신교 동단에서 시작 옥천군을 거친 다음 보은군(탄부면) 탄부교차로까지 간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구간(분저리와 은운리 사이 5.8 km)은 명목만 지방도일 뿐이지 등치 큰 자동차는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데다 구불구불하기까지 하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8. 첨부된 지도에 보호수(이를 알리는 표지판은 보이지 않았다)’로 명기된 삼거리에 이른다. 왼쪽은 계곡을 돌아나가 대청호로 들고, 오백리길인 오른쪽은 언목마을을 지나 구름고개로 오른다. 아무튼 이곳에서 우린 몸집 큰 느티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근처에 돌탑까지 쌓아놓은 것으로 보아 언목마을의 당산나무가 아닐까 싶다.

 이정표(분저리 4.5/지경리 2)는 이곳을 언목으로 적고 있었다. 지명에서  노루목처럼 쓰이는 게 보통이다. 사람의 목덜미처럼 잘록하게 돌아가거나 어느 한 지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그러니 노루목처럼 생긴 저 골짜기 안에 작은 마을이 숨어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인적이 뜸한 산골마을에서는 외지인이 반가움의 대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젠 옛말이 되었나보다. 흐르는 시절이 얼마나 하 수상했으면 저리도 섬뜩한 현수막까지 내걸었을까.

 몇 걸음 더 걸어 모퉁이를 돌아서자 언목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아까 들머리에서 만났던 싸리골(은운리)’도 오지였는데, 은운리와 분저리를 잇는 고갯길에 위치한 이곳은 가히 오지의 끝판왕이라 하겠다. ‘구름도 울고 넘는 저 산 아래로 시작되는 유행가가 생각나는 동네라고나 할까? 그런데도 4층짜리 주택이 들어섰다. 세상이 변해도 참 많이 변했다.

 마을을 빠져나와 비탈진 언덕으로 오르면 카페 은운리가 반긴다. 은운리 출신의 젊은 주인장이 운영(2021년에 문을 열었단다)하는 저 카페는, view가 좋은데다 브라질산 최고급 원두를 쓰는 커피 맛이 일품으로 알려지면서 호사가들의 입소문을 타는 중이라고 했다. 직접 구운 빵과 컵라면도 제공되며, 날이 추워지면 대추차와 생강차 등 수제차도 판단다.

 카페를 지나면서 산길 구간이 시작된다. 오르막의 가파름도 만만찮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산허리에 올라서게 되고, 이후부터는 경사가 거의 없는 밋밋한 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온통 산에 둘러싸여 보이는 건 하늘에 그려진 능선뿐이다. 15구간의 브랜드가 구름고개 길로 굳어진 이유가 아닐까 싶다.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 지나온 언목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에는 호도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때그때 제철 농산물을 파는 카페 은운리에서 내놓는 지역 특산품 중 하나이다. ! 카페에서는 직접 생산하는 가구 소품도 살 수 있다고 했다.

 오백리길을 벗어나지 말라는 경고용 현수막도 내걸려 있다. 가드레일을 넘지 말 것. 그러니 산나물 채취는 언감생심이다.

 오늘도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 26코스에 들어선 서해랑길을 함께 걷고 있는 여성 도반인데, 이곳 대청호오백리길은 무서움도 없이 혼자서 걷는 중이라고 했다.

 3일 후면 춘분(春分). ‘2월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는 속담이 있듯이 2월 바람은 동짓달 바람처럼 매섭고 차갑다. 풍신(風神)이 샘이 나서 꽃을 피우지 못하게 바람을 불기 때문이다. ‘꽃샘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지구 온난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요즘은 옛말이 됐다. 그 덕에 진달래도 저렇게 소담스러운 꽃망울을 활짝 피워냈다.

 평생을 꽃다운 소녀로 살고 싶다는 집사람이다. 그러니 활짝 핀 진달래를 보고 어찌 방심이 동하지 않겠는가. 냉큼 달려가 포즈부터 취하고 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카페에서는 32). 구름고개의 정점(고도계는 273m를 찍는다)으로 여겨지는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이곳에 왼편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제법 또렷하게 나있었다. 행여 대청호라도 눈에 담을 수 있을까 일단을 올라봤다.

 하지만 대청호는 빽빽하게 들어찬 소나무들 뒤로 숨어버렸다. 소나무 사이사이를 돌아가며 2~3분을 더 내려가고 나서야 요 정도의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금강일보의 김현호 기자는 언목마을로 가는 길을 한국 10대 오지마을 길(나머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로 적고 있었다. 맞다. 얼마나 오지였으면 명색이 지방도(5로 시작되는 세 자리 수의 도로는 충청북도 소관이고, 6으로 시작되는 세 자리 수는 충청남도 소관이다)인데도 1차선으로 그냥 놓아두고 있겠는가. 하긴 심심찮게 나타나는 저런 암벽들 때문에 이 정도의 길조차 내는 게 쉽지는 않았겠다.

 10분쯤 더 걸어 또 다른 모퉁이에 다다랐다. 이곳에도 왼쪽 능선을 향해 길이 나있었고, 대청호가 그리운 나는 그 길로 들어섬을 망설이지 않는다.

 하지만 또 속았다. 잘 써진 묘역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청호 너머로 서탄봉(7구간 꽃봉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져 나온 봉우리이다)과 환산이 눈에 들어오지만 주변 잡목이 아랫도리를 몽땅 잘라먹어 버렸다.

 자칫 심심해지기 쉬운 산길이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구불구불로도 모자라 삐뚤빼뚤대기까지 하는 길을 바라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이즈음부터 대청호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일부러 찾아갔던 아까보다도 훨씬 더 완벽해졌는데, 굽이굽이 돌고 도는 오백리길처럼 대청호 역시 곡선으로 요동치고 있다. 옥천 방아실에서 길게 뻗어 나온 산줄기를 굽이굽이 휘감으며 흐르는 금강 물길이다.

 저녁 잠자리 때 부인이 두려운 이들이여 오백리길로 오라. 복분자(覆盆子) 나무가 저렇게 군락을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복분자를 먹으면 정력이 강화되어 소변 줄기에 요강이 엎어진다는 속설도 있지 아니한가.

 나그네들을 위한 쉼터도 빼먹지 않았다. 준비해온 소찬에 박주로 목을 축이고 가기에 딱 좋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0. 쉬엄쉬엄 내려오다 보면 왼쪽으로 무덤들이 보인다. 그 무덤 위로 독수리봉 전망대로 가는 오솔길이 나있다. 오백리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지만 보은 제일의 비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니 꼭 들어가 보자.

 오솔길은 오백리길 7구간이 지나가는 서탄리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인도한다. 그 초입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전망대까지의 거리(0.5km)와 함께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풍경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 속 지형은 악어의 머리를 쏙 빼다 닮았다.

 전망대로 가는 길은 15구간에서 유일하게 맛볼 수 있는 오솔길이다. 500m의 산길이니 짧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폭신폭신한 흙길에 경사까지 무디다보니 걷는데 부담이 없다. 거기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피톤치드까지 흠뻑 보내주니 내딛는 발걸음이 오히려 힘차진다.

 8분쯤 들어가면 독수리봉 전망대(독수리봉에 걸터앉았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가 나온다. 은운리 고갯길에서 잠시 쉬다 온 구름이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에 반해 다시 쉬어갈 수밖에 없다는 곳. 그곳에 전망대를 짓고 절경을 감상하도록 했다. 절경을 바라보며 멍이라도 때리다 가라는 모양이다.

 전망대에 서면 입이 떡 벌어지는 절경과 마주한다. 건너편 서탄봉이 큰 악어 한 마리가 호수 위에 떠있는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치 곧바로 달려들 기세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거울처럼 잔잔한 물 위로 파란하늘이 비치는 호수, 그리고 그 주면을 둘러싼 절경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호수여행의 즐거움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대청호의 또 다른 비경인 부소담악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서탄리를 크게 휘감아 굽이쳐온 물길이 또 하나의 절경을 만들어냈다. 자연이 빚어낸 조각품으로 대청호의 위엄과 신비로움이 함께 어우러지며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오백리길로 되돌아와 답사를 이어간다. 이제는 완연한 내리막길이다. 하지만 볼거리는 전무한 편이다.

 그렇게 15분쯤 내려오자 예상 외로 너른 들녘이 나타난다. 회남면에서 가장 너른 빈정들이라는데, 대청호에 물이 채워진 다음에도 2만 평이나 되는 농경지를 유지하고 있단다.

 분저실 초입에는 폐교(회남초교 분저분교)를 활용해 만든 드림스쿨 예지원이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만두었는지 텅 빈 마당에는 경작을 금한다는 경고판만이 외롭게 서있었다.

 폐교 부근에서 도로가 2차선으로 바뀌었다. 꽃망울을 활짝 연 매화나무 가로수가 길손을 반기는 멋진 구간이다.

 대한민국 스타팜(Star-Farm)’이란 팻말이 눈길을 끈다. ‘스타팜이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선정한 대한민국 대표농장이다. 국가인증제를 선도하는 농장을 지정해 소비자에게 국가인증 농·식품의 올바른 이해와 신뢰를 제고시키고, 체험을 통한 소비촉진을 위해 2010년 도입했다.

 한때 침대는 과학입니다라는 광고가 세상을 들썩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모든 게 과학으로 귀결되는 추세다. 저 과일나무도 그중 하나일 것이고. 나무의 높이를 최대한으로 낮춤으로써 일손을 확 줄여버렸다.

 그 과학은 작물의 재배 범위까지 확 넓혀놓았다. 드넓은 들녘을 꽉 채워버린 인삼밭이 그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잠시 후 들른 분저리(粉諸里, 또는 분저실)’는 여말 명장인 최영 장군이 군량을 모아 가루로 만들어 군사들에게 나눠주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여말은 북쪽에는 홍건적, 남쪽에는 왜구가 날뛰던 시절이다. 특히 왜구와는 끝없는 전쟁을 치렀다. 이에 공민왕은 최영에게 양광도(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와 전라도의 체복사를 맡겼고, 왜구들에게 최영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역사는 적는다. 그러니 최영장군이 왜구를 토벌하러 가는 도중 이곳에 들렀을 수도 있겠다.

 분저리(이정표 : 회남면사무소 7.5/ 은운리 6.5)는 녹색체험마을로 운영되고 있었다. 수영장 등 다양한 체육시설이 갖춰져 있는 체험마을로, 여름이면 복숭아따기체험과 농촌생활체험, 전통문화체험, 레저스포츠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단다. 가족단위 나들이지로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마을 앞 가로수에는 새집이 매달려 있었다. 녹색체험마을다운 발상이라 하겠다. ‘나누는 삶이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과 동·식물간의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게 요즘 추세이니 말이다.

 오백리길은 분저리를 지나 대청호와 마주한다. 이즈음 만난 버스정류장(하루에 3번 멈춘다나?) 용호리란 옛 지명을 적고 있었다. 현재의 지명인 분저리도 병기했다. 용호리(龍湖里)가 대청호에 수몰되면서 남은 부분을 분저리에 포함시켰다는 얘기일 것이다.

 대청호(금강의 지류인 회인천이기도 하다) 너머는 신곡리’. 오백리길 6구간 때 신곡리 앞의 호반도로(회남로)를 걷기도 했었다.

 용호리선착장(이젠 분저나루라고 해야겠지?)은 개점휴업 상태인가 보다. 선착장 옆 전원주택의 소유로 여겨지는 보트 한척이 외로울 뿐이다. 그것도 뭍에서...

 이제 오백리길은 회인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걷는 내내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언제부턴가 가로수가 벚나무로 바뀌었다. 대전(동구)의 자랑거리인 오백미(五白眉), 그중에서도 첫째로 꼽히는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굵은 벚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 교회에 십자가가 없다니. 건물의 생김새도 예배당이라기보다는 여염집에 더 가깝다. 요즘은 이해 불가능한 교회도 많던데...

 교회 근처에서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 도로가 능선으로 올라선다. 뒤돌아보면 방금 지나온 황개골(kakaomap에 그렇게 적고 있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회남면은 대청호에 물이 채워지면서 큰 수난을 겪었다. 대부분의 농경지가 수몰되었고, 경사도가 심한 박토만 남았다. 그러다보니 한 평의 땅도 소중했을 테고, 농부는 저런 산비탈까지 개간을 위한 삽질을 멈추지 않는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40. 판장소교를 지났다싶으면 판장대교가 기다린다. ‘대교라는 이름이 부끄럽게 길이가 100m에도 못 미치는 자그만 다리다. 하긴 이런 산골에서는 저만한 다리를 놓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리 건너 판장교삼거리’. 이정표(회남면사무소 4.3/ 분저리 3.2)가 트레킹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저 낚시꾼은 강태공은 못되는가 보다. 부지하세월이 일상화되어야 하겠건만, 움직임을 멈춘 찌에 노한 어부는 아예 물속으로 들어서 버렸다.

 대청호의 담수는 지형까지도 변화를 주었다. 산줄기가 물에 잠기면서 호수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을 곳곳에 만들었다. 덕분에 오백리길은 심심찮게 능선의 허리를 가로지르며 넘는다.

 15분쯤 더 걸어 늘개미 마을(광포1)’ 앞을 지난다. 법정 동리인 광포리(廣浦里)’를 구성하는 4개 자연부락(늘개미·늘티·도목·큰골) 중 하나다. ‘늘개미는 지형이 널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판장이라고도 하는데 이게 옛 이름인 판장리(板藏里)가 되었다.

 긴 겨울가뭄은 대청호의 아름다움을 많이 훼손시켰다. 저 버드나무 숲이 물에 잠기면, 거기다 대청호의 안개라도 더해진다면 주산지(注山池)에 못지않는 장관을 연출할 텐데 아쉽다.

 올해는 꽃이 꽤 일찍 피었다고 했다. 꿀벌의 날갯짓도 바빠졌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심심찮게 영하로 내려가는 수은주까지 무시할 수야 있겠는가. 겹겹이 둘러놓은 저 포대기는 농부가 전하는 애틋한 벌 사랑이다.

 잠시 후 조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는다. 고갯마루에는 오백리길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이 늘개미 마을임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표석과 마을유래비를 세웠다. 1914년부터 불려오던 판장리(板藏里)라는 지명에 부정적 이미지가 담겨있다고 해서 2019년 구전으로 전해오던 광포리(廣浦里)로 고쳤다는 것이다. 양한석 시인의 수몰지구 내 고향이라는 시비도 보였으나 옮기는 것까지는 사양한다.

 광포리 고개를 넘으면서 주변 풍광이 확 바뀌어버린다. 대청호 너머로 산만 첩첩이 쌓였던 풍경 대신 규모가 제법 큰 마을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15구간의 종점인 거교리이다. 하지만 길은 곧장 마을로 들어가지 않는다. 호안을 따라 한없이 구불대면서 목적지를 외면하고 만다.

 산비탈에 터를 잡은 거교마을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회남면의 새로운 소재지다. 대청댐의 완공되면서 신곡리·조곡리·산수리·거교리·사탄리·매산리·어성리·분제리 등 대부분의 마을이 수몰되었고, 그 과정에서 면사무소도 신곡리에서 거교리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고운 풍광을 놓칠 집사람이 아니다. 그 풍광을 배경삼아 포즈부터 취하고 본다. 그리고 뒤센 미소를 보내온다. 예의를 차리는 웃음이 아니라 얼굴 전체를 밝히며 진정한 기쁨을 드러내는 그런 웃음 말이다.

 또 다시 나타나는 거교리’, 그게 아까보다 한참 더 고와졌다. 나무데크길(‘사담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탁 트인 대청호수를 바라보며 조용히 산책하듯 걸을 수 있게 만들었다)이 성곽처럼 마을을 감싸고 이어지며 한 폭의 그림으로 승화된다.

 한없이 구불대는 길이 지겨워질 즈음 새실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조곡리(鳥谷里)를 구성하는 2개 자연부락(새실·마전사) 중 하나다. ‘새실은 노성산과 호점산성 사이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마을을 전면에서 바라보면 새 조()’자 모양으로 나타난다며 조곡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게 현재의 지명이 됐다.

 마을 앞, 옛날 사진들이 담긴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섶다리가 장마로 끊겨 다리 걷고 영당으로 장보러 갔었지. 가재또랑에서 가재·중태기 잡아 끓여 먹었지. 주막거리에서 막걸리 내기 윷놀이 하면서 놀았지. 각시둠벙에서 멱감고 오다가 복숭아 서리해 먹다가 들켰지. 군량뜰에 모심을 때 물이 모자라 도링(?)이 입고 물댔지. 방앗간 옆 공터에서 추석맞이 콩쿨대회도 하고 공회당 앞마당에선 낮엔 자치기하고 밤엔 도둑놈 잡기도 했었지.’

 조금 더 걸으면 거교삼거리’. 이정표(면사무소 0.4/ 분저리 7.1) 400m쯤 더 가야 날머리가 나온다고 알려준다.

 조곡리도 마을 표석과 함께 마을 자랑비를 세워놓았다. 홍희표 시인의 , 조곡리란 시비도 보인다.

 반대편은 돌탑과 장승 차지다. 내력이야 청마리의 랜드마크인 제신탑(祭神塔, 충북 민속문화재 제1)’에 못 미치지만 외형은 훨씬 더 잘생겼다. 청마리의 것은 주민들이 손수 쌓거나 깎았으나 이곳은 돈을 들여 전문가의 손을 빌렸음이리라.

 날머리는 거교삼거리 주차장(보은군 회남면 조곡리)

이정표 앞에 깔아놓은 방향표시지가 오른편으로 가란다. 이쯤에서 15구간을 마치고 다음 16구간을 이곳에서 출발하겠다는 산악회의 결정이다. 취사가 가능한 장소를 찾다가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을 만났다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5.35km, 앞세운 집사람을 뒤쫓느라 걸음이 빨라졌던 모양이다.

 부지런한 집사람은 한시도 손을 놀리지 않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냉이를 캐더니만 식사를 마친 후에는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호강에 넘치는 난 내일 아침 밥상에서 저 냉이로 끓인 국을 마주할 것이고.

대청호오백리길 13구간(한반도 길)

 

여행일 : ‘23. 2. 18()

소재지 : 충북 옥천군 안남면과 안내면 일원

여행코스 : 안남면사무소독락정금정골둔주봉한반도전망대점촌고개화인마을염수재(걸포마을)신촌교(거리/시간 : 13km, 실제는 13.89km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열세 번째 구간인 한반도길(13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둔주봉이라는 산봉우리 하나를 오롯이 넘는다. 대신 금강의 물줄기가 만들어낸 절경, 즉 한반도 모양의 지형을 눈에 담게 된다. 구간 브랜드로까지 굳어진 이유이다.


 들머리는 안남면사무소(옥천군 안남면 연주리)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상주) 보은 IC에서 내려와 37번 국도를 타고 옥천방면으로 12km쯤 내려오다 인포교차로(옥천군 안내면 인포리)에서 575번 지방도(안남로)로 옮겨 5km쯤 들어오면 안남면소재지인 연주리에 이르게 된다.

 한반도길이란 이름처럼 대청호의 상류, 즉 금강 물줄기가 꿈틀대면서 빚어놓은 한반도 모양의 지형을 눈에 담는 구간이다. 대신 전망대가 있는 둔주봉(384m)’을 오롯이 넘게 된다. 이밖에도 200m 내외의 능선을 두 곳이나 더 넘어야만 한다. 구간 거리가 13km에 불과한데도 쉽지 않은 코스로 분류되는 이유이다.

 오백리길 13구간의 얼굴마담은 한반도 지형이다. 하지만 그 만남을 위해서는 둔주봉(또는 등주봉)이라는 산봉우리부터 올라야만 한다. 면사무소 앞에 산행안내도를 세워놓은 이유일 것이다. 오백리길은 독락정에서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다 금정골에서 정상을 향해 치고 오른다.

 안남초등학교 앞(남쪽)으로 걸어가며 트레킹이 시작된다. 참고로 오늘 걷게 될 안남면과 안내면은 신라의 아동혜현(阿冬兮縣)’에서 시작된다. () ()’의 뜻이고 동() (), 또는 고을의 뜻을 지녔으니 고대부족국가의 통치자가 있었던 고을,  왕읍(王邑)’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그러다 고려 초(940) 안읍현(安邑縣)으로 이름을 바뀌어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옥천군 안내면과 안남면이 되었다.

 학교 앞 이정표는 직진 방향의 독락정으로 가란다. 하지만 반대편에 위치한 인포리도 함께 제시한다. 막 되먹은 탐방로(그만큼 거칠었다)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 즉 둔주봉에서 한반도지형을 살펴본 다음 이곳으로 되돌아와 도로를 따라 인포리로 가라는 안내일지도 모르겠다.

 도로변의 옛 우물은 지붕까지 올려 보존하고 있었다.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까지 겸한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으로 살짝 덧씌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 ‘독락정(연주2)’에 이르니 거대한 당산나무가 길손을 맞는다. 초계주씨 집성촌으로 마을 옆 정자에서 이름을 따왔다. 아니 정자를 세운 독락옹(獨樂翁)의 정신을 계승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주몽득은 임진왜란 때 추령에서 왜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고, 1607(선조40) 사답사(四答使)로 일본에 건너가 포로 1000명을 소환해오기도 했다. 1624(인조2)에는 이괄(李适)의 반란을 진압하는 공도 세웠단다.

 내일은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雨水), 하지만 농사일을 시작한다는 춘분(春分)은 한 달이나 남았다. 그런데도 부지런한 농부는 이미 논을 갈고 있었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저 농부의 올 농사는 틀림없이 풍년일 것이다.

 잠시 후 금강의 물줄기가 보이는가 싶더니 비탈진 언덕에 걸터앉은 독락정(獨樂亭, 충북 문화재자료 제23)’이 얼굴을 내민다. ‘영묘사  3개의 건물이 나란히 늘어섰는데, 인근 유생들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등 서원 구실을 했다는 독락정은 맨 끝에 있다.

 정자 주변은 초계주씨세거지비와 시조인 한림학사 주황의 위령비, 독락옹 주몽득의 송덕비 등을 위시해 초계 주씨(草溪 周氏)’ 가문의 여러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시조인 주황(周璜)은 주나라 왕손의 후예로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를 지냈다고 한다. 오계지란(五季之亂) 때인 907(효공왕 11) 신라로 건너와 초계에 정착했단다.

 독락정은 1607(선조 40) 절충장군·중추부사 벼슬을 지낸 주몽득(周夢得)이 세운 정면 2(1965년 개축하면서 양쪽에 툇마루를 설치 3칸이 되었다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다. 정면에 당시 군수였던 심후(沈候) 독락정이란 현판이, 마루에는 송근수(宋近洙)의 율시기문(律詩記文)을 비롯한 10여 점의 기문액자가 걸려 있다.

 독락정을 살펴본 다음 다시 길을 나선다. 도로변에 위치한 양수장의 축대에는 민화가 그려져 있었다. 강변에 둘러앉아 물고기를 관찰하는가 하면 남자아이들은 물고기를 잡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

 이제 오백리길은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강물을 왼편 옆구리에 차고 걸으니 강변산책로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강 건너는 한반도길(13구간)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낸 지형(한반도 모양의 )이다. 그 끄트머리 백사장을 바라보며 옛 선비들이 느꼈을 풍취를 이입해 본다. ‘맑게 흐르는 강물은 십리 길의 깨끗한 모래 위에 거울처럼 열려있네라는 독락정의 상량문에 적혀 있던 글귀를 떠올리면서...

 강변에 기대어 쉬고 있는 나룻배 한 척이 한가롭기 짝이 없다. 겨울철 긴 가뭄은 대청호 수위를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덕분에 대청호의 얼굴마담인 호숫가 모래사장이 속살까지 보여주건만, 저 배는 무심한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 하릴없이 낮잠만 잔다.

 굽이굽이 흘러온 금강은 도중에 지류를 품으면서 몸집을 한껏 부풀렸고, 그 큰 덩치 덕분에 낚시꾼까지 품었다. 저 낚시꾼은 세월을 낚았다는 강태공이 부럽지 않을 것 같다. 옥천 제일의 경관을 찌 너머에 두었으니 입질이 조금 없다고 무슨 대수겠는가.

 길은 차도에 가까울 정도로 넓다. 아니 지나다니는 차량이 제법 되는지 바퀴자국까지 나있다. 하지만 이 구간은 비가 많이 올 때는 진입이 통제된다. 대청호의 수위가 높아지면 물에 잠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른편 산비탈은 온통 칡넝쿨로 덮여있다. 공생(共生)이라는 산림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주범이다. 하지만 역사의 바늘을 조금만 거꾸로 돌려보면 칡은 정말 고마운 식물이었다. 뿌리·줄기··꽃 모두 요긴하게 쓰였다. 뿌리는 흉년에 부족한 식량을 대신했으며, 질긴 껍질은 삼태기를 비롯한 생활용구로 널리 이용됐다. ‘동의보감은 칡꽃에 대한 효능도 적고 있다. 칡꽃과 소두화(팥꽃)를 같은 양으로 가루를 내어 먹으면 술을 마셔도 취할 줄 모른단다. 술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효능이 아닐까 싶다.

 강변의 산자락은 전형적인 육산, 하지만 물줄기가 휘돌아가는 곳에서는 암벽이 돌출되기도 한다. 그게 조화로웠던지 금강을 둘러싸고 있는 풍광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렇게 25분쯤 걸었을까 양봉 농가가 나온다. 벌통 수십 통을 뒤꼍에 두고, 앞마당에는 큰 평상과 경운기까지 놓여있다. 농가의 틀을 갖춘 모양새인데, 부업으로 고기까지 낚는지 강가에 고무보트도 한 척 묶여있었다.

 주인장은 자연인처럼 살아가는 모양이다. 양봉의 규모가 제법 큰데도 천막집에서 살고 있었다. 굴뚝의 온기에 몸을 의탁하던 새 한 마리가 사람 소리에 놀라 후다닥 날아올랐다. 하지만 하릴없을 게 뻔한 주인장은 인기척도 내지 않는다.

 몇 걸음 더 걸으면 고성삼거리’. 오른편은 금정골까지 에돌아가는 게 귀찮은 이들이 곧장 등주봉으로 치고 오르는 지름길이다. 아니 아까 마을(독락정)에서 만난 주민은 마을에서도 등주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있다고 했었다.

 이정표(금정골 1.0/ 등주봉 1.9/ 독락정 2.2)가 지시하는 금정골 방향으로 직진한다.

 누군가의 불행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될 수도 있는 모양이다. 기생식물로 몸살을 앓는 나무들이지만, 우리 같은 나그네들에게는 강물과 어우러지는 멋진 풍광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17분쯤 더 걸어서 닿은 금여울 농원에서는 주인장의 풍류를 엿볼 수 있었다. 금강을 마주하는 아름다운 풍광을 농원의 이름에 담았다. ‘錦江 금여울’. 누가 봐도 우리말의 한판승이다.

 주인장의 멋은 솟대에서도 느껴졌다.

 조금 더 걸으면 마지막 농가. 일구어놓은 텃밭이 제법 너른데도 움막에서는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풍광이 좋아 나 역시 홍천에다 농장을 마련했었다. 그게 벌써 20년이 되었고 틈틈이 일군 과수원도 틀을 갖췄다. 하지만 놀러 다니기 바쁜 난 고작해야 일 년에 열흘 정도 쉬다 올 따름이다. 내 나이 아직은 젊었음이리라.

 이곳에서 길은 혼란스러워진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농가의 맞은편 텃밭을 지나기만 하면 탐방로가 선연하게 나타난다.

 길은 나있지만 편치는 않다. 무정한 잡목은 길까지 잠식해버렸고, 그것으로도 부족했던지 넝쿨식물이 발목을 휘감기도 한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강변 풍경이 고와선지 고달프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렇게 5분 남짓 진행하자 또 다른 갈림길,  금정골삼거리가 나온다. 곧장 직진하면 피실로 연결된단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동이면 석탄리의 피실’, 즉 대청호로 인해 지금은 물에 잠겨버렸다는, 수몰을 피한 곳에 오토캠장(옥천 팜랜드)을 조성해놓았다는 그 마을과는 어떻게 다를까?

 이정표(등주봉 정상 1.3/ 피실 1.4/ 독락정 3.2)는 등주봉 정상을 향해 오른편 능선을 치고 오르란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직선으로 치고 오르는 산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1.3km를 오르는 동안 고도를 300m 이상이나 끌어올리려면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가끔은 금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산길로 들어선지 18. 땀을 한바가지가 흘렸는데도 이정표(등주봉 정상 0.7/ 금정골 0.6)는 아직 절반도 못 올라왔단다.

 이후에도 숨이 턱에 걸리도록 치고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오르막길은 속도를 조금 떨어뜨리는 게 상책이다. 수행자가 참선하듯이 마음을 비우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더디게 옮겨본다.

 구호지점표지판의 변신? 탐방로의 주요 지점에는 안심위치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구조재난이 주목적인 여느 산들과는 달리 등산로 범죄예방의 기능을 더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코스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경사가 더 가팔라졌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을 일러 코에서 땅 냄새가 난다고 했었다. 경사가 오죽 가팔랐으면 땅에다가 코를 박다시피 하며 오르겠는가.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둔주봉(屯駐峰, 또는 등주봉)에 올라설 수 있었다. 하지만 정상(384m)에서는 고진감래라는 고사성어도 남의 집 얘기일 따름이었다. 그 고생을 하며 올라왔건만 서너 평 남짓한 공터에 정상표지석(재경안내산악회에서 세웠는데 登舟峯으로 적고 있었다. 요 아래서 모여 사는 초계주씨들 족보에 그렇게 쓰여 있단다) 하나만 외로웠기 때문이다. 한 곳으로만 트이는 조망도 잡목이 아랫도리를 잘라먹어 버렸다.

 정상에서 한 단을 내려와 이정표(전망대 0.8/ 금정골 1.3)가 가리키는 전망대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 또 다른 이정표는 이곳에서 피실로도 내려갈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금정골 방향 10m 지점에서 둔주봉 산성이라는 또 다른 표석을 만날 수 있었다. 정상 주위에 150m 길이로 쌓았다는 삼국시대 토성이다. 산봉우리에는 봉수대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토성은 물론이고 봉수대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산 길은 안전용 밧줄을 매어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밧줄구간이 끝나는 안부에서 삼거리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정표(등산로입구 1.6/ 고성 1.9/ 둔주봉정상, 피실 0.9)는 오른편이 고성에서 올라오는 길임을 알려준다. 비가 많이 올 때는 이 구간의 진입을 금한다는 안내판도 보인다.

 삼거리를 지나서도 위험성은 가시지 않았다. 벼랑에 가까운 산비탈을 횡으로 째며 난 오솔길이 벼룻길처럼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한눈을 팔다간 자칫 큰 사고를 부를 수도 있겠다.

 하산을 시작한지 18. ‘한반도전망대로 올라선다.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고 둔주봉정(屯駐峰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운치를 더했다. 벤치를 놓아 쉼터까지 겸하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우린 잠깐이지만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독락정에서 금강의 풍광을 바라보면서 시를 짓고 술잔을 나누었을 옛 선비들의 여유를 소환시켰음은 물론이다. 마침맞게, 둘레길 도반이자 갑장인 유사장이 육회까지 준비해 왔다. 옛 선비들이 바라봤을 풍경에 그들이 나누었을 술과 안주까지 갖췄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난간에 서자 금강의 물길이 U자를 그리며 휘돌아나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런데 강 건너 물길 안에 갇힌 땅이 영락없는 한반도가 아닌가. 하지만 그동안 보아오던 한반도 지형들과는 많이 다르다. 동과 서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는데, 이런 지형은 전국의 한반도지형 중 이곳이 유일하단다.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떠나 다른 곳과 다르다는 특이성이 사람을 불러 모은다고나 할까?

 상황을 설명해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지형의 길이는 1.45km, 실제 한반도를 ‘980분의 1’로 축소시킨 크기라고 한다. 다만 동·서가 바뀌었을 따름이다. 아무튼 저런 상황에 아름다운 경관이 더해지면서 옥천 제1이 되었다.

 정자 앞에는 마법의 볼록거울이 세워져 있었다. 거울을 통해서 보면 동서가 제대로 된 한반도가 눈에 들어온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산맥에 해안선까지 한반도를 쏙 빼다 닮았다.

 비경에 쏙 빠져 있다가 아쉬운 듯 발걸음 옮긴다. 점촌고개로 내려가는 길은 그야말로 비단길이다. 울창한 침엽수림이 떨구어놓은 솔가리가 수북이 쌓여,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느낌으로 걷게 된다.

 솔향기가 물씬 풍기는 숲길 곳곳에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운치 있는 소나무 숲속에서 노닐며 힐링까지 얻어가라는 모양이다.

 점촌고개에 내려서기 직전 길은 침목계단으로 변한다. 요리조리 방향을 틀면서 만들어내는 곡선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전망대를 출발한지 17, ‘점촌고개로 내려섰다. 제 구실을 못하는 이정표(안남면사무소 1/ 피실나루터/ 한반도전망대 0.8)가 오히려 길 찾기를 더 헷갈리게 만드는 지점이다. 양 방향 어디에서도 13구간의 표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대체 어디로 가란 것일까?

 핸드폰에 깔아놓은 gpx트랙을 따르기로 했다. ‘피실 나루터 방향으로 3분쯤 내려가자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가란다. 수몰되기 전 읍내 장과 연결시켜주던 피실 나루터는 직진이다. kakaomap은 요 아래 점말골(‘안피실로도 불릴 게다)’과 동이면(석탄리) 피실이 금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두어 채의 농가가 전부인 꼬맹이 마을(‘점촌마을이 아닐까 싶다)을 지난다. 개가 세 마리나 지키고 있지만 오랜만에 만난 길손이 반가운지 짖지도 않는다. 아니 오히려 꼬리까지 흔들어준다.

 애국심은 저런 마음에서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면서도 빈 집에 태극기를 게양해놓았다. 어디에 살던지 애국심까지 변할 게 있느냐는 듯이...

 조금 더 올라 만나게 되는 대나무 숲은 많은 이들이 헷갈려하는 지점이다. 오백리길은 이곳에서 왼쪽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비슷한 풍경이어선지 오른편으로 들어섰다는 후기가 의외로 많았다.

 대나무 숲을 지나자 잡목만이 가득한 야산이 나타난다. 길의 흔적을 찾기가 힘든 구간이다. 그런 흔적조차도 고도를 높여갈수록 더욱 약해져갔다. 그저 나뭇가지에 매달린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를 등대삼아 오를 따름이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gpx트랙과 일치하는 걸 보니. 그도 같은 앱을 다운받아 왔나보다.

 갈 길을 방해하는 잡목은 그나마 양반이라 하겠다. 복분자(覆盆子)같은 가시넝쿨들이 들어찬 곳은 진입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을에 소주 몇 병만 챙겨오면 한겨울 넘기기는 일도 없겠다는 일행의 농담까지 썰렁하게 만들어버리는 고약한 풍경이라 하겠다.

 깊은 산골 옹달샘. 멧돼지가 파놓은 작은 물웅덩이도 만난다. 산속에서 멧돼지와 만나면 어떻게 대응하라고 했더라?

 대충 방향을 잡아가며 길 없는 길을 찾아나간다. 그렇게 올라선 능선(앱은 높이를 243m로 찍는다).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오백리길 표지판이 얼굴을 내미는 게 아닌가. 반갑다. 오백리길 정비에 소홀하기 짝이 없는 옥천군청도 그냥 손 놓고 놀고 있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20(농가주택에서) 조금 못되어 오른 능선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5분쯤 능선을 타다 이번에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산을 내려간다.

 하산 길도 역시 희미하다. 길안내를 해주는 낡은 산악회 표지기가 드문드문 보인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그중에는 대전발전연구원에서 매달아놓은 오백리길 표지기도 들어있었다. 옥천구간을 걸어오면서 처음으로 만났으니 이 아니 반가울 손가.

 그렇게 6분쯤 내려오니 잘 가꾸어진 김녕김씨 묘역이 나타난다. 그런데 묘비만 가득할 뿐 봉분이 없다. 요즘 권장되고 있는 평장(平葬)인가 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5. 묘역을 빠져나오면 임도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잘 닦인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이때 이따가 통과하게 될 인포리가 시야에 잡힌다. 장령지맥의 끝자락 장계교와 멀리 금적지맥길이 아스라하다. 이 부분은 다른 이의 표현을 살짝 빌려왔다. 

 12분쯤 내려오자 갈림길 모서리에 오대임도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가 오대임도를 걸어왔던 모양이다. 아니면 앞으로 걷게 될 임도(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간다)가 오대임도라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이후부터는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온다. 구불구불 틀어대는 곡선미에 더해 단풍나무로 여겨지는 가로수까지 심어 운치를 더했다.

 그 길에는 오지빌리지라는 캠핑장이 있었다. 이름처럼 오지마을에 꼭꼭 숨어있는 모양새이다. 하지만 간이 수영장까지 갖춘 품격 있는 캠핑장이었다.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논두렁밭두렁 따라 꼬불꼬불 휘어지는 곡선미로 한껏 멋을 부린 전형적인 시골길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35. 화인마을(안내면 인포리)에 도착하니 3층으로 지어진 안내중학교가 우뚝하다. 그나저나 안내중학교의 학부모들은 마음이 놓이겠다. 외딴 곳에 지어진 탓에 땡땡이를 칠 수가 없어 보이니 말이다.

 화인마을 앞 도로(575번 지방도)와 만나는 화인삼거리로 내려선다. 법정 동리인 인포리를 구성하는 3개의 자연부락(화인·걸포·관골) 중 하나인 화인(化仁)’에서 이름을 따왔다. 참고로 화인마을에는 고려 때부터 역()이 있었다고 한다. 출장 중인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던 화인원(化仁院)도 있었단다. 화인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연유이다.

 삼거리에는 마을유래비와 함께 관골 표지석도 세워놓았다. 조금 전 스치듯 지나온 작은 마을이 관골(官谷)’이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옛날 찰방(察訪)이 살았었다는 마을이다.

 이정표(걸포리 1.2/ 인포리 대청호반 0.7)가 가리키는 걸포리 방향(동쪽)으로 향한다. 300m쯤 걷다가 만나는 다른 삼거리에서는 왼쪽 임도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정표(걸포리 0.8/ 한반도전망대/ 장계대교)는 한반도전망대 방향에도 13구간의 표시를 해놓고 있었다. 한반도를 둘러본 다음 안남면사무소로 되돌아갔다가 도로를 따라 이곳으로 와도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경관 좋은 화인마을도 이농의 추세를 벗어날 순 없었던 모양이다. 도로변 농가가 줄줄이 비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임도로 들어선 오백리길은 고개 하나를 오롯이 넘는다. 그러다보니 꽤나 가파르게 올라설 수밖에 없었다.

 해발 168m까지 치고 올랐던 오백리길이 능선을 넘더니 아래로 향한다. 길 좌우로 빼곡하게 들어찬 옻나무단지가 두려울 수밖에 없는 오싹한 구간이다. 염색약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연약한 피부를 가졌으니 어쩌겠는가.

 트레킹을 시작한지 4시간 5, 고개 너머 걸포(傑浦)’ 마을에는 염수재(念修齋)’라는 옥천육씨(沃川陸氏)’ 시조를 모시는 재실이 들어서 있었다. 참고로 걸포라는 지명은 갈대가 우거진 포구를 끼고 있었다는데서 유래됐다. ‘갈포라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걸포가 되었단다.

 걸포마을을 빠져나오면 37번 국도를 만난다. 이어서 도로를 따라 안내교차로로 간다. 4차선 도로인데다 보행로가 따로 없으니 가드레일에 바짝 붙어서 걸을 일이다.

 도로 아래로는 대청호가 드넓게 펼쳐진다. 하지만 긴 가뭄 탓인지 허옇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안내교차로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신촌교로 가는 575번 지방도의 오른편에는 안내습지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안내천의 하류 3의 부지에 습지를 만들고 갈대·애기부들·고마리·창포 등의 수생식물을 심었다. 인근 유역에서 배출되는 오염물질을 이곳에서 정화해 대청호로 방류하는 시스템이다.

 날머리는 신천교(옥천군 안내면 현리)

안내천을 가로지르는 신천교를 건너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13구간이 끝나고 14구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3.89km, 가파른 산길과 임도가 대부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은 셈이다.

 오백리길 14코스 장고개구불길은 이곳에서 강변으로 내려간다.

대청호오백리길 12구간(푸른들 비단길)

 

여행일 : ‘23. 2. 4()

소재지 : 충북 옥천군 안남면과 동이면 일원

여행코스 : 말티마을말티고개위청동아래청동가덕교(실제는 청마대교를 건넜다)평촌삼거리미산마을종미마을안남면사무소(거리/시간 : 13km, 실제는 11.27km 3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열두 번째 구간인 푸른들 비단길(13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대청호의 본류인 금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 대신 햇볕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강변길의 특성 상 여름철에는 지옥의 행군이 될 수도 있겠다.


 들머리는 말티마을 대청호오백리길 쉼터’(옥천군 동이면 청마리)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TG를 빠져나와 금강로(영동방면)’를 따라 1km남짓 내려오다 우산로2(‘보청천을 건넌 다음부터는 575번 지방도)’로 옮긴 다음 강변도로를 따라 6km쯤 하류로 내려오면 청마농장(민박)에 이른다. 농장 앞에서 청마교를 건너 500m쯤 들어가면 정자(‘대청호오백리길 쉼터라는 간판을 달았다)가 들어앉은 널따란 광장이 나온다.

 푸른들 비단길이란 이름처럼 대청호 상류 금강(비단 ’)과 그 물줄기가 꿈틀대면서 빚어놓은 푸른 들녘을 끼고 걷는 구간이다. 덕분에 호젓한 강촌마을의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거기다 상고시대 때부터 이어져오는 문화유적(청마리 제신탑)’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트레킹을 나서기 전 청마리의 랜드마크인 제신탑(祭神塔, 충북 민속문화재 제1)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가로등에 매달려 있는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올라가니 옻배움터 표지판. 제신탑은 저 옻배움터로 들어가는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조금 더 들어가자 벽화를 그려놓은 창고가 나온다. 농촌이니 풍년을 기원하는 농악쯤으로 여기겠지만 사실은 매년 정월 대보름에 열리는 탑신제의 행사장면을 그렸다. ‘탑신제란 민초들에 의해 전해져 내려오는 민속신앙으로 질병과 악귀를 쫓아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 제사(洞祭). -솟대-장승의 순으로 제사를 올리며, 제사가 끝나면 농악대가 찾아다니며 굿을 하여 마을의 풍년과 편안함을 빈다고 한다.

 제신탑은 그 맞은편에 있다. 제신탑이란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기원하던 곳으로 탑신제당(塔身祭堂)’이라고도 불리며, 그 기원이 마한(BC2-AD4)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 청마리의 신앙 유적은 원탑과 솟대, 장승, 산신당 등 복합적인 문화형태를 띤다. 탑은 절에서 흔히 보는 것들과는 달리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돌을 원추형(圓錐形)으로 쌓아올리고 그 꼭대기에 기다란 돌 하나를 세웠다. 곁의 작은 돌무더기에는 솟대(하늘과 땅을 연결하는)를 꽂아놓았다.

 장승은 길가에 세웠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나란히 서있는 게 보통인데, 이곳은 길의 양옆에 서서 수문장 역할을 자처한다. 또 다른 유적인 산신당(山神堂)은 뒷산에 있다고 한다. 소나무를 신목으로 모시는 자연신 형태를 띤단다. 하나 더, 저 장승은 4년마다 돌아오는 윤년의 정월 대보름에 새로 세운다고 한다. 새로운 민속 문화재를 만들어나간다고나 할까? 민속 문화재라는 게 본디 우리 민족이 아주 오래전부터 행해온 신앙·세시풍속·생업·의식주 등 전통 사회의 생활문화가 담긴 물건을 모두 포함하니 말이다.

 마침 동네 주민들이 윤년인 올 정월 대보름(내일)에 새로 세울 장승을 제작하고 있었다. 인터넷과 통신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는 현대, 그 이면에는 우리네 고유문화가 사라져간다는 그림자가 스며있다. 그것도 통신의 발달만큼이나 빠르게 소멸해 간다는... 그런 세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기네 전통 민속을 지켜나가는 저들이 존경스러운 건 나뿐일까?

 청마초등학교 옛터는 옻배움터로 다시 태어났다. 강의실과 전시·판매장 등을 갖췄다는데, 전국 유일의 옻산업특구(옻 재배에 최적의 자연환경을 갖췄단다)’인 옥천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긴 예로부터 옥천은 옻으로 유명했다. 옥천 공납품으로 건칠(옻나무 진을 말려 만든 약재)을 진상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에 전한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옻샘이 남아 있는가 하면, 수령이 300년 가까운 옻나무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 옻과 관련된 지명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단다.

 12구간의 출발지임을 알리는 이정표(가덕 2/ 안터마을 5.7)는 창고 옆 삼거리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진행방향(가덕)의 표시가 조금 묘하다. 오백리길 홈페이지에서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라 했는데, 이정표는 금강 쪽(청마대교 방향)으로 안내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내려 받은 선답자의 ‘gpx트랙도 이정표처럼 강변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백리길 쉼터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나간다. ‘gpx트랙이 지시하는 대로 금강을 오른편에 끼고 하류로 내려간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8. ‘마티마을 공동생활관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탐방로는 이제 후묵골로 들어간다. 완만한 경사의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진다.

 좁디좁은 입구와는 달리 골짜기 안은 꽤 널찍했다. 두세 채의 민가까지 들어섰으니 의젓한 마을이라 하겠다. 하지만 오르막길의 경사는 시간이 갈수록 가팔라진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3. 마지막 민가 앞에서 길이 뚝 끊겨버렸다. 선답자의 gpx트랙보다는 오백리길 홈페이지의 안내를 받는 게 옳다는 방증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되돌아 갈수야 없는 노릇. 주인장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앞마당을 가로지르고 본다. 그리고 주택 진출입로의 끝에서 포장 임도를 만났다. 오백리길 홈페이지의 지시대로 말티마을을 횡단했더라면 이 임도로 왔을 것이다.

 임도로 올라서니 금강이 얼굴을 내민다. 장수군의 신무산(뜬샘봉)에서 발원한 금강은 이 지역을 지나며 곳곳에서 산태극수태극을 만든다. 그리고 금강유원지를 거쳐 온 저 물줄기는 또 다시 굽이쳐 옥천1경인 둔주봉(屯駐峰)’으로 향한다.

 로버트 바크(Richard Bach)는 그의 저서 갈매기의 꿈에서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고 했다. 맞다. 지금 걷고 있는 이 임도가 그 증거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앞에 펼쳐지는 금강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니 말이다. 그러자 휘돌아가는 물굽이가 만들어놓은 모래사장과 고요하게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가 한 폭의 풍경화로 그려진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5. 임도로 올라선지 13분 만에 말티고개에 올라선다. 12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해발 267m)이다. 그러니 벤치 하나쯤 놓아두었을 법도 하련만 막상 고갯마루에는 엉덩이를 댈만한 돌멩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나 더, 이곳에서 왼쪽 능선(사진에서는 오른쪽)을 탈 경우 탑봉으로 연결된다.

 고갯마루를 넘은 오백리길은 이제 위청동에서 올라오는 임도로 옮겨간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 느긋하게 걷는데 눈에 익은 표지기(‘허총무는 오백리길을 리딩하는 청마산악회 요원이다)가 눈에 띈다. 서해랑길의 도반인 사슴과 구름님은 우리와는 다른 일정에 이곳을 다녀간 모양이다.

 완만한 경사의 내리막길을 15분쯤 걷자 위청동마을이 나온다. 옛날엔 여섯 채 정도의 집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딱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러나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는 남아있는 한 채가 더 소중하다. 농부소설가 김봉난할머니의 집이라니 말이다.

 할머니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현관문이 휑하니 열려있는가 하면, 마당은 잡동사니로 어지럽다. 어쩌면 작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포항 출신(동지여중·동지여상 졸업)인 할머니의 최종학력은 수도사범대학교(현 세종대) 국문과 중퇴다. 산골마을로 시집와 억척스런 삶을 살아오신 할머니의 바램은 소설 한 편을 제대로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위청동을 지나면서 길은 거칠어진다. 말라비틀어진 잡초는 허리춤까지 차오르고, 대나무 숲이 기존의 길을 잠식해버렸다. 마을이 사라지면서 인적이 끊겼으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던가? 앞서가는 집사람에게서 난 저수하심 (低首下心)’이란 사자성어를 배운다. 교양이 있고 수양을 쌓은 사람일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남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저 움막의 용도는 대체 뭘까? 난로까지 설치되어있으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움막 아래에 농경지가 있는 걸로 보아 농번기 때 사용하는 농막일지도 모르겠다.

 길은 물기 하나 없는 개울을 두어 번 가로지른다. 장마철에는 길이 폐쇄될 수도 있을 듯. 그나저나 김봉난 할머니는 25세 때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이 길을 올라왔다고 했다. 울면서 올라오지나 않았을까?

 그러다보니 요런 앙증맞은 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계곡은 넓지 않은 편이다. 그렇다고 일구어 먹을 땅뙈기 하나 없겠는가.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묵밭 일색이었다.

 비록 잠시지만 가파른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한다. 무릎이 시원찮은 집사람에게는 지옥의 행군이 될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 오백리길 표지기다. 트레킹을 시작하고 1시간 만에 처음으로 만났다. 오백리길 옥천구간은 앱(gpx트랙)의 도움 없이는 걸을 수 없다는 평이 난 이유일 것이다. 둘레길의 장점 중 하나는 지역경제에 대한 도움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백리길의 한 축을 맡은 대전시처럼 명품 둘레길로 가꾸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겠는가.

 말티고개에서 하산을 시작한지 32분 만에 또 다시 시멘트포장 임도로 내려설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오른편 방향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5. 잘 지어진 전원주택이 보이는가 싶더니 장승이 반긴다. 뭔가가 적혀있으나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장승에도 같은 글귀가 적혀있으니 그냥 지나치도록 하자.

 초입에는 수문장 노릇이라도 하라는 듯 아예 쌍으로 세워두었다. 글자가 좀 틀리기는 했어도 방생정계(放生淨界)’ 호법선신(護法善神)’이라는 휘호까지 품었다. 매인 것(모든 생명체)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자비를 베푸는가 하면, 불법을 수호하고 성불을 돕는 착한 신이라니 이 집이 불국정토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음지에 들어선 집에서의 삶은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을 듯...

 잠시 후 대여섯 가구가 모여 사는 아래청동의 본 마을에 이른다. ‘청마리는 예전의 갈마동리와 마티리, 청동리를 합쳐 만들어졌다. 그러니 옛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금강이 반긴다. 강 건너는 지수리(안남면), 12구간의 후반부는 반대편인 저 강변을 따라 걷는다.

 이후부터는 금강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왼쪽 옆구리에 끼고서...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5(아래청동에서 10). ‘청마2교차로에 이르면 길이 둘로 나뉜다. 오백리길은 계속해서 금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서 청마대교를 건너도 된다. ‘가덕교까지 올라간 오백리길이 다리 건너로 돌아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청마대교를 건너기로 했다. 가덕교까지 올라갔다가 반대편으로 되돌아오면서 만나게 되는 풍경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사람의 체력안배까지 감안했음은 물론이다.

 상류 쪽 풍경이다. 오른쪽 강변을 따라 가덕교까지 올라갔다가 반대편(왼쪽) 강변을 따라 다리 건너로 되돌아온다.

 하류 쪽 풍경. 다리를 건넌 오백리길은 이제 금강의 물 흐름에 발맞추며 내려간다.

 잠시지만 575번 지방도(안남·보은 방향의 안남로’)를 따른다. 이때 혜연스님의 화실이 있는 연관사를 스치듯 지나친다. 특별한 볼거리는 없으나 그림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한번쯤 들러볼 만도 하겠다.

 연관사를 줌으로 당겨봤다. 저곳은 그림을 도반 삼아 불법을 전해준다는 혜연스님이 주지로 있다. 스님은 1998년 한국화대전 초대전과 2005년 대한민국여성미술대전 특선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단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35. ‘평촌삼거리에 이르니 이정표(안남면사무소 4.8/ 가덕 2.3)가 반긴다. 오백리길은 이곳 평촌마을 앞 삼거리에서 도로(안남로)와 헤어져 강변으로 간다. 참고로 이곳은 안남면의 행정 동리인 수동리(水洞里, 지수2)’, 물가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 평촌은 물가 들녘에 위치한 마을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조금 더 걸어 강변에 이르니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오백리길 나그네들에게는 이만한 쉼터도 없겠다.

 안내판은 이곳이 KBS의 예능 프로그램인 ‘12의 촬영지였음을 알려준다. 강변에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출연자들의 사진도 함께 게재했다. ‘향수100리길을 소개하면서 이 부근 모래사장을 이용했던 모양이다.

 물가로 내려가는 길도 나있다. 지형으로 볼 때 여울(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이라도 있었을 듯. 맞다. 누군가는 이 부근에 은응댕이 여울이 있었다고 했다. 여울 근처의 은행나무를 잘랐는데 그 그루터기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음식을 먹을 정도로 굵었다나?

 이후부터는 강변길을 따른다. 왼편은 금강, 오른편은 구릉지에 가까운 나지막한 산자락을 끼고 길이 나있다. 그 사이에는 뜨락에 가까운 작은 들녘이 들어앉았다.

 맞은편에서 달려온 라이더들이 반갑게 인사를 보낸다. 맞다. 이 구간은 향수100리 자전거길이기도 하다. 옥천 출신 정지용 시인의 대표 시 향수(鄕愁)’에서 이름을 따온 이 길은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해서 자전거 동호인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자전거여행 길 30선()’에 뽑히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안남면사무소에서 금강휴게소에 이르는 18.6를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꼽았다나?

 이곳 지수리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설화가 하나 있다. 진벌 앞산에 묘를 쓰면 왕비가 난다는 것이다. 그게 또 육영수여사의 외할머니가 이곳에 묻힘으로써 왕비가 난다는 명당자리임을 증명해 주는 계기가 되었단다. 그래선지 양지바른 산자락마다 반듯하게 써놓은 묘들로 한가득이었다.

 오늘은 입춘(立春). 맹추위가 떠날 줄을 모르고 기승을 부리지만 계절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길가 농경지에 심어놓은 가축용 사료가 저리도 파릇파릇해진 걸 보면 말이다.

 반면에 강물은 아직도 한겨울이다. 꽁꽁 얼어붙은 게 잘하면 도강도 가능하겠다.

 이렇듯 경관이 빼어난 곳을 가만 둘 인간이겠는가. 간판은 달지 않았지만 민박집으로 여겨지는 건물들도 눈에 띈다.

 저 헬기의 정체는 과연 뭘까? 누군가에게는 음풍농월을 즐기는 장소가 될 수도 있겠다. 박주에 소찬 놓고 시 한수 지어 곡을 부치니 이만한 풍류가 또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간이 되는 경제활동. 누군가의 이익은 누군가에겐 해가 될 수도 있다. 산림의 경제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벌목작업이 터줏대감이었던 저 나무들에게는 목숨까지 빼앗기는 아픔이 되었다.

 그렇게 25분쯤 걷자 민가 한 채가 나타난다. 100m쯤 전방에는 너덧 채의 민가가 더 있다. 첨부된 지도에 나와 있는 음지말이지 싶다.

 이곳에도 강가로 내려가는 길이 나있었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도태골 여울이 아닐까 싶다. ‘도태골이란 지명은 미산 마을 쪽 골짜기의 이름인 도태골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여울을 이용해 마을 사람들이 옥천 장에 나가기도 했고, 옥천에 볼 일을 보러 가기도 했단다.

 음지말 앞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안남면사무소 2.3/ 가덕교 4) 를 만났다. 이정표는 이곳 삼거리에서 왼쪽 들녘을 가로지르란다.

 미산(薇山)’ 마을은 그 들녘의 끄트머리에 들어앉았다. 원래 이름은 궐산’, 마을위의 산이 낮고 고사리같이 퍼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고사리 미()’자를 써서 미산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마을 앞에서 만난 이정표(안남면사무소 2.1/ 가덕교 5)가 이번에도 왼쪽으로 가란다.

 마을을 지켜준다는 선돌도 만났다. ‘수살맥이라고 부르는데 마을을 수호하는 기능을 갖고 있으며 사람의 얼굴 모습과 흡사하도록 가장자리를 손질하였다고 한다.

 몇 걸음 더 걸자 이번에는 경율당(景栗堂, 충북유형문화재 제192)이 반긴다. 영조 때인 1735, 학자인 경율(景栗) 전후증(全后曾)이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율곡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던 그는 자신의 호를 경율이라 하고, 서당 이름도 경율당이라 했단다.

 문이 잠겨있어 카메라에 건물의 외관만 담았다. 안내판은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4면에 마루를 품어 전형적인 서당 형식을 보여준다고 적고 있다.

 경율당에서 오백리길은 금강을 완전히 벗어나 버린다. ‘종배마을로 이어지는 이 구간은 인삼밭 천지였다. 인삼의 주산지인 금산군과 어깨를 맞대고 살다보니 그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30. ‘종배(從培)’ 마을로 들어선다. 그리고 마을을 관통한다. 대부분의 둘레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그러니 지역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지나가도록 하자. 낯선 나그네에게 길을 열어준 그들에게 도움은 못 줄지언정 피해까지 끼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을안길을 걷다 또 하나의 귀하신 몸을 만났다. 정비가 잘 되어있는 대전구간과는 달리 이곳 옥천에서는 가뭄에 콩 나듯이 눈에 띄니 반갑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을 뒤 작은 봉우리에는 정자가 올라앉았다. 덩치 큰 나무 아래라선지 빼어난 풍취까지 더해준다. 아니 이 마을에서 신목으로 모시는 느티나무일지도 모르겠다. ‘호무시(’호미를 놓는다는 뜻이란다)나무라 하여 보호되고 있으며 요즈음도 노인들을 중심으로 제사까지 올린다는 나무 말이다.

 저건 웬 시츄에이션? 밭에 잘 생긴 호박을 열을 맞춰 진열해놓았다. 그것도 바닥에 마분지까지 깔고서... 정부의 무한책임이 요구되는 요즘이니, 막혀버린 호박의 판로에 대한 시위일지도 모르겠다.

 동구 밖에는 마을자랑비와 함께 강릉 유씨의 효심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시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면서 서모까지 얻어주었는가 하면, 서모가 죽은 후 시아버지가 눈까지 멀자, 틈틈이 모은 돈으로 개안 수술을 시켜 주었고, 35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모셨다고 한다.

 오백리길은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린다. 안남면 소재지인 연주리를 진행방향에 놓고 드넓은 들녘을 걷게 된다. 날이 풀리면 저 들녘은 푸름으로 넘칠 것이다. 그러니 12구간의 브랜드인 푸른 비단길은 저 들녘에서 탄생했지 않나 싶다.

 12분쯤 농로를 따르던 오백리길이 575번 지방도(안남로)로 올라선다. 하지만 도로를 따르지는 않고 농로로 다시 내려서고 만다. 시쳇말로 간만 보았다고나 할까?

 농로에 이어 안남천의 제방을 걷는다.

 농기계의 재활용? 움직임이 멈춰버린 경운기가 펌프로 다시 태어났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연주교를 건너자 널따란 잔디광장이 나타난다. 안남면을 대표하는 공원으로 연주공원 또는 배바우공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배바우는 이곳 연주리(蓮舟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는 도덕리(덕실부락)에서 흐르는 냇가에 배()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서 연유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배바우는 물속에 잠기게 될 것이며, 그 앞의 넓은 들은 호수가 되어 배를 띄우게 되고, 인포리에는 포구가 생긴다고 했다. 주민들까지도 믿지 않는 전설이었지만, 대청댐에 물이 차면서 수몰선(水沒線)이 이 배바위에 이르게 되었단다. 결국 배바위가 물속에 잠기는 것이 아니고 물 위에 뜨는 형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옛말 그른 게 하나도 없다고나 할까?

 지역공동체인 안남은 상상의 배인 배바우를 형상화했다. 안남의 역사와 함께 흘러온 금강에 두둥실 떠 있는 배이다. 배 위의 소녀상은 자치와 협동의 지역공동체를 의미한단다. 하나 되어 나아가는 안남이라는 꿈을 향해 스스로 노를 저어가는 안남 주민들의 힘과 의지를 표현했다나?

 안남면을 상징하는 조형물은 무지개로 표현했다. 일곱 개 색깔의 무지개처럼 7개 마을(연주리·종미리·지수리·도덕리·청정리·화학리·도농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공원에는 제신탑(원탑)도 있었다. 청마리의 것은 본떠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데, 청출어람이랄까 본물(本物)보다도 더 잘생겼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배바우장터가 열린다고 했다. 지역에서 발행하는 배바우 화폐를 이용할 시 20% 할인된 저렴한 가격으로 안남면 지역에서 생산된 싱싱한 농산물(·호두·마늘·호박·고추 등)을 구입할 수 있다니 한번쯤 시도해 볼 일이다.

 날머리는 안남면사무소(옥천군 안남면 연주리)

장터 옆 안남면사무소에서 12구간의 트레킹을 마쳤다. 오늘은 11.27km을 걸었다. 가덕교까지 가지 않고 청마대교에서 금강을 건넌 덕분에 2km쯤 단축할 수 있었다. 소요시간은 3시간 10, 말티고개를 제외한 나머지 구간이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대청호오백리길 9구간(지용향수 길)

 

여행일 : ‘22. 12. 3()

소재지 : 충북 옥천군 군북면·옥천읍 일원

여행코스 : 진걸선착장청풍정국원리마성산(실제는 성왕로 우회)교동저수지죽향초교정지용생가육영수생가향교(거리/시간 : 15km, 실제는 12.09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아홉 번째 구간인 지용향수길(15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대청호의 본류인 금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는 것이 장점이. 마성산 정상에서의 조망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하나 더, 옥천읍내에서 만나는 육영수와 정지용의 생가는 마성산을 넘어온 이들에 대한 보상이라 하겠다.

 

 들머리는 진걸선착장’(옥천군 군북면 석호리)

경부고속도로 옥천 TG를 빠져나와 지용로 매동로’, ‘성왕로를 연이어 타고 대청호 방면으로 6km쯤 올라오다, 국원리삼거리에서 석호길로 옮겨 2.5km쯤 더 들어오면 진걸 선착장에 이르게 된다.

 대청호의 상류인 금강의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이다. ‘마성산에서의 조망도 볼거리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정규 탐방로인 마성산 구간을 생략한 채, ‘국원마을에서부터는 옛 국도를 따라 옥천읍내로 들어갔다. 이미 올라본 마성산을 다시 오르기보다는 볼거리가 많은 옥천읍내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석호리에는 현재 진걸, 그리고 8구간 때 만난 석결 마을만이 수몰을 면한 채 남아 있다. 길 위에서 바라본 진걸마을은 빨강과 파랑의 원색 지붕을 얹은 고만고만한 가옥이 10여 채 늘어서 있다. 마을 앞 호숫가에 어선이 정박해 있다는 건 대청호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가는 어촌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건너편은 막지리(이곳과 같은 군북면이다)’일 것이다. 바깥나들이를 하려면 산길을 차로 1시간 넘게 돌아 나가야 한다는 곳. 옥천 5일장이라도 서는 날이면 동네사람들 전원이 배를 타고 나오는 호수 속 오지마을이다.

 버스를 타고 들어왔던 임도를 되돌아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어느 여행자는 이 마을에 머물며 아침 산책길에 밤과 호두를 한 주머니씩이나 주웠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풍경은 확연히 다르다. 그렇게나 많다던 밤나무와 호두나무는 다 어디가고 대나무만 한가득이란 말인가.

 진걸마을은 산에 막히고 물에 갇힌 마을이다. 때문에 마을로 들어가는 게 만만치가 않다. 구절양장의 임도를 굽이굽이 돌아야만 들고 날 수 있다. 더 큰 악재는 경사까지도 가파르다는 점이다. 군내버스까지도 손을 놓아버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도 대청호의 수질을 살리려는 부단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호숫가로 내려가는 길마다 차단봉을 설치해 차량의 무단진입을 막고 있었다.

 임도의 자랑거리는 ‘S-Line’이 만들어내는 곡선미이다. 하지만 은행나무 가로수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가지치기 된 지금이야 정제된 멋으로 끝나지만, 가을철 잎이 노랗게 물들라치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지 않을까 싶다.

 ! 산악회버스가 옴짝달싹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를 내려주고 되돌아가다 턱진 곳에 걸쳐버린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하긴 오죽했으면 옥천군에서 다람쥐택시라는 기발한 운송방법까지 생각해냈겠는가. 다람쥐택시란 버스노선이 닿지 않는 오지마을 주민들이 버스와 비슷한 요금을 내고 택시를 이용할 수 있는 행정서비스라고 한다.

 고개를 넘자 발아래 저만큼에 청풍정이 놓여있다.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지름길도 나있다. 하지만 사유지이니 들어오지 말란다. 지름길을 이용하지 못할 경우 한참이 돌아가야 하는데도 말이다. 이때 김삿갓의 네절인심 고약타를 떠올렸다면 나 혼자만의 오해였을까? 후렴으로 지옥가기 딱조타까지 생각해 냈는데...

 사유지라는 텃세 덕분에 300m 가량이나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7. 모퉁이를 돌아서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나지막한 언덕에 걸터앉은 청풍정(淸風亭)이 드넓은 호수와 어우러지며 진경산수화 하나를 그려놓는 것이다. 옛날 음풍명월로 유유자적하던 선비들이 딱 좋아했을 법한 풍경이겠다. 하지만 저 정자는 새로 지은 것이다. 대청댐이 준공되면서 1996년 이곳으로 이전했다. 참고로 수몰 이전의 청풍정은 금강이 굽이쳐 흐르다 절벽에 부딪쳐 소를 이루고, 휘늘어진 버드나무가 10여리를 곧게 뻗어 가슴과 마음을 훤하게 뚫어주는 천하절경이었다고 한다.

 홑처마 팔작지붕인 정자는 정면 3칸에 측면이 1칸이다. 평면은 한 칸의 온돌방과 두 칸의 우물마루로 구성됐다. 하지만 언제쯤 지어졌는지는 모른단다. 조선 후기 참봉을 지낸 김종경이라는 사람이 지었다고만 알려진다. 참봉(參奉)이라면 종9품의 최 말단직. 벼슬에 환멸을 느낀 그가 후학 양성을 위해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온돌방을 끼고 있다는 게 그 증거이고...

 청풍(淸風)이면 응당 명월(明月)이 뒤따라야지 않겠는가. 그 명월은 조선 말 개화 사상가였던 김옥균(金玉鈞, 1851-1894)이 장식한다. 정자를 왼편에 끼고 돌면 월명암이라고 적힌 깎아지른 바위절벽이 나타나는데, 이 바위의 주인공이 김옥균과 애틋한 사랑을 나누다 죽음으로 진심을 전한 명월이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자신이 주도했던 갑신정변(1884) 3일천하로 막을 내리자 옥천으로 내려와 이곳 청풍정에서 명월이란 기생과 함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명월의 마음은 편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라의 큰일을 할 장부가 자신 때문에 외진 곳에서 허송세월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강물에 몸을 던졌다니 말이다. 저 바위에 새겨진 명월암(明月岩)’이란 글자는 김옥균이 명월의 그런 애정을 잊지 못해 적어놓은 것이란다.

 대청호는 수위에 따라 잠겼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한다. 때문에 검은 색 암벽에 선명하게 물무늬 자국이 남아 있다.

 정자 앞에 서면 대청호가 한가득 차오른다. 대청호에 물을 담으면서 금강 강줄기는 더욱 선명해졌다. 대신 물줄기가 등치를 부풀린 만큼 산줄기는 가늘어졌다. 그리고 음각과 양각처럼 한 몸이 된 새로운 지형을 수면 위에 펼쳐놓는다.

 청풍정을 빠져나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길은 산길과 호숫가를 굽이굽이 돌고 돌아 외길을 따라간다. 군내버스도 포기해버린 좁디좁은 임도다. 그걸 무시한 채 운전솜씨를 자랑하던 청마산악회 황사장님은 조금 전과 같은 봉변을 당했고...

 청풍정에서 8분 거리. 이번에는 석호정이란 정자가 길손을 맞는다. 대청호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정자지만, 둘레길 나그네인 나로서는 타고 온 대형버스가 회차(回車) 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임도는 아직도 1차선이다. 하지만 굽이가 많이 누그러졌을 뿐만 아니라 폭도 아까보다는 꽤 넓어졌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석결마을에서 넘어온 길(석호1)과 진결마을에서 시작된 석호길이 하나로 합쳐지는 삼거리에 이른다. 지난 8구간 때 날머리로 삼았던 돌거리고개이다.

 마을을 소개하는 안내판에는 사진 한 장이 삽입돼 있었다. 굽이도는 강줄기 안쪽으로 은빛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그 가장자리에는 미루나무도 두어 그루 보인다. 마을 앞을 흐르던 금강(錦江)의 본래 모습이지 싶다. 물비늘 반짝이는 맑은 강물, 눈부시게 고운 모래가 어우러진 저런 풍경이 바로 비단강이 아니겠는가.

 돌거리고개 못미처에서 다시 한 번 대청호를 만났다. 하지만 아까 사진에서 보던 모래사장은 없었다. 맞다. 대청댐이 완공된 뒤 옥천 땅의 금강에서 모래사장을 찾는 건 언감생심이 되어버렸다. 재잘거리던 강물은 호수로 변했고, 은빛 금빛 모래사장은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SEOKHORI 178’, 호기심을 자극하는 조형물이 눈에 띄기에 카메라에 잡아봤다. 대청호 뷰가 좋다고 입소문을 탄 감성펜션이라고 한다. 겸하고 있는 카페는 인근 대전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번쯤 꼭 들러봐야 할 핫플레이스로 꼽힌다나?

 잠시 후 도착한 석호리(石湖里)와 국원리(菊園里)의 경계. 마을 표지석이 나그네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한다. 마을 유래비와 함께...

 석호리 경계를 벗어나다 만나는 대청호에게 마지막 이별을 고한다. 9구간에서의 대청호 조망은 이곳을 끝으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 국원리에 이르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반긴다. 국원리는 3개의 자연마을(안말·주막말·늘티)을 두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본동이자 가장 큰 부락이라는 안말이지 싶다. 이 마을에는 눈앞의 부귀영화에 눈이 먼 농부의 얘기가 전해진다. 점심 공양을 받은 스님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명당 두 곳을 추천하더란다. ‘만대영화자리와 당대발복자리인데, 당장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농부는 당대발복을 원했다나? 이는 부를 누리는 대신 문중의 손이 끊겨버리는 결과를 초래했고.

 큰 마을답게 보건진료소까지 들어서 있었다. 얘기를 조금 더 해보자. 같은 마을에 살던 경주이씨가 귀띔으로 얘기를 전해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만대영화자리라고 알려준 곳(늘티마을 근처 야산인데 이따가 지나게 된다)에다 묘를 썼고,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자손을 두고 잘 살고 있다나?

 보건소를 스치듯 지난 석호길 성왕로(옛 국도)’를 만난다. 오백리길 이정표(마성산 3.8/ 청풍정 2.9)는 삼거리인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란다. 도로표지판이 가리키는 옥천 방향이다.

 주인장의 신심이 얼마나 깊었으면 뜨락에 성모상까지 모셨을까? 남이 볼 때는 성호 긋는 것조차 망설이는 나로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200m쯤 더 걸으면 새말(주막말)’로 여겨지는 또 다른 동네. 과거 주막거리라 불리던 곳이다. 옥천장을 다녀오는 소정리·석호리·막지리·용호리 주민들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하던 곳이란다. 하지만 대청호에 물이 차면서 발길이 끊겼고, 주막거리라는 애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새말 근처의 국원교차로는 성왕로(옛 국도)를 새로운 국도(37호선)로 연결시키는 지점이다. 그러니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길쯤은 무시하고 곧장 직진하면 된다.

 곧이어 37번 국도의 아래를 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교각을 지나자마자 오백리길이 도로로부터 갈려나가기 때문이다.

 갈림길 초입에 이름표(‘신촌이라는데 새말의 한자어이지 싶다)까지 단 이정표(마성산 3.1/ 청풍정 3.3)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생략을 한 마성산의 사진(해설 포함) 2014년 답사 때의 것을 올려본다. 정상은 두 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랫단은 헬기장, ‘장룡산악회에서 세운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윗단에 설치되어 있다.

 정상은 사방이 확 트이기 때문에 조망(眺望)이 일품이다. 팔음지맥(八音枝脈)의 산줄기와 도덕봉과 장령산, 서대산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조망은 근거리에 있는 환산과 구()옥천 시가지라 할 수 있다. 물론 동쪽에는 조금 전에 지나온 이슬봉이 바라다 보인다.

 ! 우회했던 이 구간은 자건거길을 따른다는 걸 깜빡 잊을 뻔 했다. 도로 가장자리에 하늘색 선을 그어 차도와 구분했다. ‘대청호 도선코스(길이 44.4km)’라는 명품 자전거길인데, 아까 트레킹을 시작했던 진걸선착장에서 건너편 막지리까지는 배를 타야만 한다며 이름에 도선이란 특징을 덧댔다.

 잠시 후 도착한 늘티마을(국원리). ‘향수을 전통주교육원(원장 김기엽)’이 갈길 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붙든다. 전통누룩과 찹쌀만으로 빚었다는 막걸리가 술꾼인 내 침샘을 자극시킨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 궁중술빚기 대회에서 3년 연속 수상한 이가 술을 빚는다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안으로 들어가 시음부터 하고 본다. 막걸리는 물론이고 과하주·세빚주·송손주·당귀주·석탄주(삼키기조차 아깝다는 뜻) 등 종류도 참 다양하다. 다음은 김양희 실장(안주인이지 싶다)으로부터 막걸리의 종류와 빚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덕분에 막걸리와 청주·탁주를 구분할 수 있게 됐다). 불콰해진 얼굴로 교육원을 나설 때, 내 손에는 세 종류의 막걸리가 들려있었음은 물론이다.

 몇 걸음 더 걷자 석장승 한 쌍이 늘티소류지를 배경삼아 서있다. 최근 세웠다는데 장승의 앞에 제단까지 만들어두었다. ! 마을을 떠나기 전 유래나 살펴보자. 그동안 써오던 이름은 구건리(九巾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불리어왔다. 그러다가 1995년 안말의 서당 벽면에서 국원추전(菊園秋典)’이라는 본래 지명을 발견했고, 주민투표와 군의회 의결을 거쳐 아름다운 국화동산이라는 옛 이름(국원리)을 되찾았다.

 옥천읍 관내로 들어서자 관성도예전시장이 눈에 띈다. 눈요기라도 해보려고 다가가 봤지만 문이 닫혀있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마음에 드는 소품이라도 눈에 띄면 하나 사올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는 나는 마음에 드는 소품이 눈에 띄면 망설이지 않고 사는 편이다.

 옥천 사람들은 집 놓아두고 외박만 하나?’ 줄을 잇는 무인 텔에 집사람이 놀란 눈초리다. 대전 사람들을 노린 시설일 거라며 둘러댔지만 내가 보기에도 많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궁금증 하나. 국원리는 관광도로변의 관광영농에 눈뜬 곳이라고 했다. 마을에서 제배한 참외와 메론 등을 옥천-보은간 국도에서 판매해 수익을 올린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곳까지 오는 동안 특산물판매장이 한 곳도 눈에 띄지 않는 건 왜일까?

 옛 국도의 특징은 벚나무 가로수라 하겠다. 수령이 30년은 족히 넘는 듯 굵직한 몸통을 자랑한다. 길은 우아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는 가지 아래로 나있다. 사람들은 이 구간을 금강 향수 100리길이라 부른다고 했다. 교동저수지에서 소정리까지 옛 37번 국도를 따라 이어지는 8km가량의 코스인데, 봄이 무르익을 때면 흩날리는 벚꽃 비를 맞아가며 걷는 재미가 톡톡하다나?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길은 교동저수지를 가운데 두고 둘로 나뉜다. 그렇다고 고민할 필요까지는 없다. 둘 모두 구읍으로 이어지니 마음에 드는 쪽으로 진행하면 된다. 나는 저수지 오른편으로 난 나무데크길(‘구읍 벚꽃길이라고 했다)을 따랐지만...

 교동저수지는 1960년대 초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한다. 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왔다고나 할까? 그게 최근 아름다운 변신을 했다. 다른 저수지와 다르게 옥천이 낳은 정지용 시인의 시와 그에 걸맞은 조형물들을 수면 위에 펼쳐놓았다.

 교동저수지 둑을 타자 그 끄트머리에서 지용문학공원과 이어졌다. 저수지 가장자리에는 정지용 시에 나오는 얼룩소, 얼굴, 홍시와 같은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참고로 정지용은 1902년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1918년 휘문고보에 입학했고, 1926년부터 문단 활동을 시작한 이래 120여 편의 시를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여파는 시인을 월북 작가로 묶었고 그의 시들은 공개적 언급이 금지됐다. 그러다 1988년 해금과 함께 그의 시는 우리에게 돌아왔고, 그를 기리는 이런 공간은 물론이고 문학축제까지 생겼다.

 정지용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게 향수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저 얼룩소나 빨래하는 아낙들은 고향의 옛 풍경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저건 호수 1’을 형상화 한 작품일 것이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그 오른편은 오빠 오실 때 맛보이려고 남겨뒀다는 홍시일 것이고...

 지용문학공원의 중심은 구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다. ‘시비문학공원이었던 것을 2020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단다. 정지용의 시비가 주축을 이룬다는 게 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동갑내기인 김소월이나 윤동주·박용철·도종환·박목월 같은 시인들의 시비도 다수 있었다.

 시비는 단순히 시만 적혀있는 게 아니다. 종합예술을 지향하려는 듯 조각품(적힌 시에 어울리는지는 몰라도)에 새겨 넣었다. 시너지효과를 노렸다고나 할까?

 시비광장 위쪽에 있는 시인의 가벽에는 그의 일대기가 10편으로 나뉘어 새겨져 있다. 1902년 옥천면 하계리 탄생, 1918년 휘문고보 입학, 1926년 문단 활동 시작, 1950년 북한에 의해 서대문형무소 구금, 이후 월북 작가로 묶였다가, 1988년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시인의 문학도 해금됐다.

 정지용의 약력이 적힌 빗돌(도종화 시인이 썼단다)을 마지막으로 공원을 벗어난다. 그리고는 구읍 시가지를 횡단해 지용유적 제2 죽향초등학교로 간다. 도중에 향수를 닮은 집처럼 오래된 한옥들을 여럿 만나기도 한다. 하긴 고려 충선왕 때부터 20세기 초까지 옥천의 중심지였다니 어련하겠는가.

 오래된 마을에서는 찻집까지도 한옥인가 보다. 아니 내력이 있는 건물이니 그 흔한 찻집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저 집은 1910년 조선 10대 갑부로 불리던 김기태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옥천여중 교사(1944-1965)로 사용되었고, 2001년 김선기 서예가가 매입 식사대접 장소로 활용하다 지금은 그냥이란 찻집으로 전환했단다.

 정지용의 모교인 죽향초등학교 1909년 사립 창명학교(彰明學校)’로 설립됐다. 이듬해 옥천공립보통학교, 1938년 옥천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옥천죽향공립국민학교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100년 하고도 23년이나 더 되는 역사만큼이나 이름도 바뀌어 온 셈이다. 안내판은 시인이 1910년 입학, 1914년 졸업한 사실을 적고 있었다.

 시인이 공부하던 학교 건물은 1926년에 지은 근대 건축물(국가등록문화재 제57)이다. 외벽은 긴 목재를 비늘처럼 수평으로 포개 올려 비가 스며들지 않도록 했고, 지붕은 함석을 삼각형으로 단순하게 올렸다. 이는 목조교사의 일반적 형태였으나 1980년대 들어 대부분 사라졌다. 다행이 이곳은 2003년까지 교실로 사용되면서 헐리지 않고 남아 시인의 어린 시절을 전해준다.

 교육을 통해 민족을 일깨우려한 선각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범재 김규흥(凡齊 金奎興, 1872-1936)’의 기념물도 눈에 띈다. 선생이 이 학교의 전신인 사립 창명학교를 설립하고 목화밭을 기증해 학교 터로 사용하게 해 해방 후 학교에서 은수저 선물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교정에는 고려 후기 문화재(충북 문화재자료 제51) 죽향리사지 삼층석탑도 보존되고 있었다. 탑선골 절터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 육영수여사의 휘호탑도 세워져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그녀도 이 학교를 졸업(27)했단다.

 다음은 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나지막한 흙담 안에 아담한 초가(본채와 사랑채)가 들어서 있다. 하지만 지붕 이엉 교체공사로 인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상황은 다른 이의 글로 대신한다. <본채 안방에는 둥근 테 안경을 쓴 정지용의 초상화와 그의 시 할아버지가 걸려 있고, 부엌 옆에는 지용유적 제1’. 명시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1902 515(음력) 실개천가의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새집이 들어섰다는 동판이 붙어 있다.>

 생가 바로 옆에는 정지용문학관이 들어섰다. 그가 지은 시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정지용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일본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나온 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된 뒤로는 흔적이 끊겨버린다. 전쟁 후 정지용은 월북 작가로 묶였고 그의 시들은 공개적 언급이 금지돼 있었다. 그러다 김동리·박두진 등 48명의 문인과 각계인사들이 회복운동을 시작했고, 1988년 해금과 함께 그의 시는 우리에게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서면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검은 구두를 신고, 둥근 안경을 낀 시인이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 밀랍으로 제작된 인형인데 긴가민가할 정도로 생생한 모습이 방문객들을 흠칫 놀라게 만든다. 그렇다고 최고의 포토죤인 시인의 옆자리를 포기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전시실에는 시인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지용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그의 문학을 시대별, 연도별로 정리해 놓아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의미와 비중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게 했다.

 부속시설인 문학교실에서는 정지용 시어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시인의 시를 캘리그라피(Calligraphy) 기법으로 직접 써보는 자리인데, 행사에 참여한 둘레길 도반은 자신의 작품을 치켜들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만큼 유익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문학관 앞 골목길도 시인의 흔적들로 채워졌다. 옥천 여행자들에게 가장 핫한 포토죤이기도 하다. 많은 집 담벼락이 향수의 내용이 담긴 아기자기하고 예쁜 그림과 글로 완성되어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그뿐 아니다. 종달새, 호수, 홍시 등 정지용의 다른 시들도 그림으로 만날 수 있었다.

 실개천 난간에는 그의 시들이 걸렸다. 정지용시집(1948)과 백록담(1950)에 실린 시들이라고 한다. 이렇듯 향수를 비롯한 정지용의 작품들을 옥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생가의 사립문 앞에, 골목길 담벼락에, 실개천이 휘어 나가는 곳에

 방송사의 이슈 픽을 연상시키는 조형물도 눈에 띈다. 호수, 고향, 유리창, 향수 등 여러 문구가 적혀있는데, 그중에서도 첫 번째 픽은 단연 향수가 아닐까 싶다. 한가로운 고향의 따뜻하고 소박한 모습을 한 폭의 풍경화처럼 생생하게 그려낸 걸작으로, 일본 유학시절(1927) ‘조선지광에 발표됐다.

 옥천은 온통 향수로 도배됐다. 향수100리길·향수마을아파트·향수주유소·향수요양원·향수식당·향수식품 등등. 심지어는 포장마차까지도 향수를 내걸었다. 점심 때 안주 삼을 어묵을 샀던 곳이다.

 걷는 도중 옥천전통문화체험관도 만날 수 있었다. 한옥 숙박은 물론이고 다양한 체험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옥천을 전통문화와 놀이가 공존하는 체류형 관광단지로 육성하기 위해 조성했단다.

 모처럼 찾아온 옥천인데 어찌 육영수여사의 생가를 거를 수 있겠는가. 1925년 이 집에서 태어난 육영수 여사는 어린 시절을 쭉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1974년 이후 방치되어오다가 철거되어 터만 남았던 것을 2002년 생가지(生家址)가 충청북도 기념물 123호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1894년경에 지어진 집은 교동집(校洞宅)’이라 불리던 옥천지역의 명가로 1600년대부터 김··민 삼정승이 살던 곳이라고 했다. 1918년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가 매입하고 기단을 높여 개축했다고 전해진다. 99칸 집이었다는 이야기처럼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건너채·안채·뒤채·행랑·별당·후원·정자·연못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채에는 육영수여사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그녀는 우리 역사상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최고의 영부인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단다.

 생가 앞 광장에서는 청춘마이크란 야외공연을 하고 있었다. ‘청춘, 빛나는 무대로 나오다라는 주제로 각종 연주와 마술 퍼포먼스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펼쳐지고 있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옥천향교(충북 유형문화제 제97)’. 대성전과 명륜당, ·서재, 내삼문(명륜당이 외삼문을 겸한다), 홍도당(용도는 모르겠다)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성전에는 5(五聖)·10(十哲송조6(宋朝六賢)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우리나라 18(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단다.

 향교 입구에는 16기의 비석이 모여 있었다. 조선시대 옥천군을 다스리던 군수나 관찰사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인데, 그중 1958년에 세운 공적비(주인공인 한치봉은 옥천여중의 초기 교사(한옥)를 사서 기증한 분이다)가 눈길을 끌었다.

 날머리는 향교 앞 느티나무(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비석군 맞은편,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람한 등치를 자랑한다. 수령이 410년이나 된다니 1398(태조 7)에 지어진 향교와 함께 옥천을 지켜온 셈이다. 이 느티나무 아래서 오백리길 9구간 걷기를 마감했다. 오늘은 12.09km 3시간 30분에 걸었다. 코스 전체가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더디게 걸은 셈이다. 옥천의 명소들을 구경하느라 발걸음이 더뎌졌던 모양이다.

 김규흥 선생의 생가를 찾다가 놓쳐버린 사마소의 사진은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것을 빌렸다. 사마소란 조선시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지방 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이다. 효종 5(1654)에 세워진 옥주 사마소(충북 유형문화재 제157)’는 전국의 3곳 남은 사마소 중 유일하게 본래 자리에 남아 있다고 한다.

대청호오백리길 8구간(선비 길)

 

여행일 : ‘22. 11. 19()

소재지 : 충북 옥천군 군북면·옥천읍 일원

여행코스 : 추소리 느티나무(절골)환평재생약자원관리센터환평리 갈림길이지당서화천 생태습지보오마을옥천폐기물처리장이평마을석결마을돌거리고개(거리/시간 : 13/ 실제는 14.42km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여덟 번째 구간인 선비길(13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대청호의 상류인 서화천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는 것이 장점이. 하지만 많은 곳에서 인도가 따로 없는 포장도로를 걸어야한다는 단점도 있다.

 

 들머리는 추소리 느티나무’(옥천군 군북면 추소리)

경부고속도로 대전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좌회전, 비래서로와 신상로를 잇따라 타고 군북면소재지(옥천군)까지 온다. 초입의 삼거리에서 소재지인 이백리로 들어오지 말고 환산로로 갈아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추소리(절골)에 이르게 된다. 고갯마루에 걸터앉은 둥그나무 8구간의 들머리이다. 나무 아래엔 여지없이 돌탑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이 한가득 담긴 서낭당이다.

 대청호, 아니 상류인 서화천의 아름다운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이다. 특히 초반부인 추소리 부소담악과 중반부 지오리에서 만나는 호안절벽은 대청호 제일의 절경으로 꼽는데 모자람이 없다. 거기다 이지당이라는 보물까지 가슴에 담았으니 이 아니 멋진가. 하지만 이 구간도 도로(인도가 따로 없다)를 걸어야하는 단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백리길 표식(이정표·팻말·리본 등)이 거의 없다는 점도 6·7구간과 같았다. 걷는 내내 지자체의 무관심에 대해 불평했던 이유이다.

 둥그나무 아래서 길을 나선다. 초입의 동학정(동학혁명과 관련된 지명으로 추정되는데 어디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빗돌을 지나자, 돌장승이 마을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떡하니 버티고 있다. 하지만 환영한다는 듯 선한 표정으로 길손을 맞는다.

 잠시 후 부소담악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뉜다. 400m 거리의 추소정까지 데크 탐방로가 놓여있다.

 추소리 쪽 황톳길로 들어서자 대청호가 그 속살을 드러낸다. 그리고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부소담악(芙沼潭岳)’의 빼어난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예로부터 숨은 병풍이라 불리었고, 이름 그대로 금강변을 따라 기암이 병풍처럼 펼쳐진 부소무니의 선경이다.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대청호는 진짜배기 명경이다. 물빛은 거울처럼 맑아 데칼코마니처럼 숲과 산을 비추고, 말갈기를 쏙 빼다 닮은 모래언덕은 하얀 억새꽃으로 한껏 멋을 부린 채 호수를 향해 내닫는다.

 탐방로는 추소리 마을광장(실은 주차장이다)’에서 대청호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추소리(楸沼)’로 들어간다. 추소리는 자연마을 몇 개를 합쳐 새로운 마을을 만들면서 추동(楸洞)과 부소(扶沼)에서 한자씩 취한 지명이라고 한다. 부소는 부수머리(또는 부소머리)’의 옛말을 한자화 한 것인데, 마을 앞 바위지대로 서화천이 뱀같이 굽이치면서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고, 물이 고여 못()을 이룬다는 뜻을 지녔단다.

 겨울 호반은 한산했다. 대청호 물살을 힘차게 가르던 보트들은 배를 허옇게 드러낸 채 따뜻한 봄날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고 상상의 나래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작은 배 하나 띄워놓고 우암 송시열이 느꼈을 풍류를 맛본다.

 주차장을 지나면서 길은 살짝 오르막으로 변한다. 그리고는 추소리 고샅길을 지나 환산의 산허리를 에돌아가는 환산로(2차선 도로)’로 연결된다.

 추소경로당 맞은편에는 이 마을 출신 소설가 유승규(1921-1993)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고향에서 직접 농사지으며 채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농촌 사회의 질곡을 글로 풀어냈다면서, 이무영과 함께 농민문학의 꽃을 피운 소설가로 소개하고 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 오르막길이 끝나면서 환평로로 올라섰다. 군내버스가 다니는 2차선 도로다. 탐방로는 왼편(옥천방면)으로 방향을 트는데,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는 변함없이 벚나무다. 대전에서 시작된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버스정류장(추소리) 옆에는 추소마을이 문화유씨 세거지(世居地)임을 알리는 빗돌과 함께 향혼비를 세워놓았다. 추소팔경으로까지 꼽혔던 빼어난 경관들이 대청호 속으로 잠긴데 대한 아쉬움을 담았으리라. 그런데 소소소금강(笑沼小金剛)’이란 저 시비의 정체는 대체 뭘까? ‘布德 150년 입추라는 글귀로 보아 어느 천도교도가 지은 모양인데...

 환산 등산로의 들머리(담장을 따라 오솔길이 나있다)가 되어주는 좋은 기도동산 ‘Paul&Daniel Christian School’을 겸하는 모양이다. 기독교 교육중심의 대안학교라고 한다.

 5분 남짓 걸어 환평재에 닿았다. 오백리길은 계속해서 도로(환산길)를 따른다. 하지만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는 왼편으로 난 임도를 가리킨다. 핸드폰에 다운받아 놓은 트랙도 같은 방향을 지시한다. 선두대장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이정표는 이 길을 달빛산책로로 표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올라선 능선에선 환산을 조망할 수 있었다. 예로부터 환산(옛 이름은 고리산)은 군사요충지였다. 백제의 왕자 여장이 쌓았다는 고리산성의 성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달빛산책로로의 진입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낭만적인 이름(달빛산책로)과는 달리 길이 무척 험했기 때문이다. 웃자란 잡초와 잡목이 길을 가로막는 데다, 가파른 내리막 구간에는 참나무 낙엽까지 수북이 쌓였다. 덕분에 난 엉덩방아를 두 번이나 찧고 말았다.

 악전고투를 치루고 난 뒤에야 환평리 들녘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 이후부터는 논두렁밭두렁을 뒤뚱뒤뚱 걷는다. 양팔을 춤추듯이 휘저으며 가는 앞사람을 바라보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평균대만큼이나 비좁으니 중심 잡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서화천으로 이어지는 강변산책로를 만나기도 했다. 소슬바람에 춤추고 있는 억새가 예뻤지만 다녀오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이지당을 지나면서부터는 내내 서화천과 함께 하게 됨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화천을 벗어난 오백리길은 이제 환평마을로 향한다. 뒷산인 고리산의 전설이 전해지는 마을이다. 고리산엔 배를 매는 큰 고리가 있는데 과거 큰 비가 내려 여기에 배를 자주 묶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가 올 때마다 고리에 가장 가까운 고무실(나중에 고리실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환평마을이 되었다)’을 찾았단다.

 환평리 들녘을 걷다가 언덕으로 올라서자 신식 건물이 하나 나온다(오는 도중 환평리로 올라가는 길과 헤어졌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운영하는 국가생약자원관리센터. 황기며 울금이며 맥문동이며 다양한 약초들이 재배되고 있단다.

 오백리길 옥천구간은 길 찾기가 힘들다는 게 특징이다. 마을길·들길·산길을 걸으며 수많은 갈림길을 만나지만, 그중 이정표가 세워진 곳은 5%도 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흔한 리본까지도 매달려 있지 않으니 어찌 길을 찾을 수 있겠는가. 둘로도 모자라 세 갈래(직진이 올바른 방향)로 나뉘는 생약자원관리센터도 오백리길 표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GPX 트랙을 미리 받아놓지 않았더라면 낭패를 볼 뻔했다.

 옥천만 해도 따뜻한 남쪽 나라인가 보다. 들녘의 김장용 무·배추가 아직도 푸른 걸 보면 말이다. 무서리에 시들기라도 할까봐 김장을 마쳐버린 홍천의 내 농장과는 딴 세상이다.

 생약자원관리센터에서 12(트레킹을 시작한지 55). 오백리길은 다시 환산로로 올라선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실감한 지점이기도 하다. 다운 받아놓은 GPX 트랙이 벼랑에 가까운 반대편 산비탈로 내려가라 했기 때문이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 큰 부상을 입을 텐데도 말이다. 파일을 만든 이는 초능력자였을지도 모르겠다.

 트랙을 무시한 채 환산로를 따라 걸었다. ‘안전’, 둘레길 여행자들이 지켜야 할 가장 큰 덕목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5분쯤 더 걸어 만난 환평리 갈림길’, 모처럼 나타난 이정표(이지당 1/ 부소담악 4)가 반갑기 이를 데 없다. 이곳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오백리길이 360도에 가깝게 방향을 틀면서 도로와 헤어지기 때문이다.

 잠시 후 아까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맸던 지점의 아래를 지나간다. 위험을 무릅쓰고 내려왔더라면 1분이면 닿을 거리다.

 못 간다고 전해라로 대변되는 이애란의 백세인생을 떠올리게 만드는 저 문구는 대체 뭐란 말인가. 쓰레기에 얼마나 몸살을 앓았으면 저런 현수막까지 내걸었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어땠을까? 한번쯤 뒤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드넓은 인삼포(人蔘圃)가 눈길을 끄는 이 구간도 갈림길을 여럿 만난다. 그러니 좌회전·우회전 등의 진행 방향을 거론하는 건 무의미하다. 나처럼 GPX 트랙을 미리 다운받아 놓지 않은 사람들은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환평리 갈림길에서 15(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5), 서화천(옥천에서는 소옥천이라 부르기도 한단다)에 내려서니 이지당(二止堂, 보물 제2107)’이 얼굴을 내민다. 조선시대 중엽 인근 옥각리에 살던 김(((() 4문중이 합작해서 세운 서당이다. 이후 퇴락된 것을 1901년 이 서당을 세웠던 4문중에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서화천을 바라보며 석축기단 위에 지어진 건물은 정면 6, 측면 1칸이다. 일렬로 서있어서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보이지만, 본채 1, 누각건물 1동으로 돼있다. 위로 오르는 사다리도 놓여있는데, 중층의 누를 덧붙여 지은 이런 형태는 찾아보기 힘든 경우라 그 가치가 더 높다고 한다.

 마루에는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각신동이라는 마을 앞의 서당이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조헌(趙憲, 1544-1592)이 직접 썼다고 한다. 호인 중봉(重峯)으로 더 알려진 그는 임진왜란 때 1,7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해 영규대사의 승병과 함께 청주를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금산싸움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순국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집사람이 반가워 카메라부터 들이댔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지당(二止堂)’의 현판을 배경 삼았다. 이지당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시전(詩傳)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에서 따왔다고 한다.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라는 뜻의 문구에서 끝의 두 ()’자를 따 새로운 이름으로 삼았다.

 이지당으로 들어가는 초입은 멋진 바위가 줄을 잇는다. 그 바위에 이지당 중봉선생유상지소(二止堂 重峯先生遊賞之所)’라 새겨져 있었다. ‘우재선생서(尤齊先生書)’라는 글씨도 보이는데, 우재는 송시열의 또 다른 호라고 한다. 우암이 이지당(二止堂)’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남긴 글씨란다.

 서화천 위로 놓인 다리(이지당교)를 건너 트레킹을 이어간다. 다리 건너에서 만난 옥천자전거길 안내판은 이후부터 자전거와 공존해야 함을 알려준다.

 다리를 건너 도로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천변도로를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반대편은 4번 국도로 연결된다). 언제부턴가 도로명이 옥각로로 바뀌어 있다.

 맞은편 도로에서 바라본 이지당’. 바위 반 흙 반의 벼랑을 여덟 폭 병풍삼은 이지당은 서화천을 앞마당 삼았다. 개울에서 흐르는 물소리, 잎사귀를 때리는 빗소리로 심신을 안정시키며 공부하기에 딱 좋은 장소라 하겠다. 공부에 몰두하다가 머리라도 지끈해지면 마루로 나와 그 소리들을 벗 삼아 휴식을 취하지 않았을까?

 반대편에는 서화천의 생태하천 복원공사(각신지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2만평쯤 되는 하천부지에 인공습지를 조성하는 중이란다. 여행객들을 끌어들이려는지 탐방로와 정자, 벤치 등도 함께 만들고 있었다.

 이지당에서 10. 오백리길은 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는다. 하지만 나는 GPX 트랙이 지시하는 대로 둑길로 내려섰다. 그리고 꼭꼭 숨어있던 비경을 만났다. 산태극수태극이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펼쳐지는데,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바위절벽을 끼고 도는 감입곡류(嵌入曲流)는 언제 봐도 신비롭다.

 눈의 호사를 누리며 10분쯤 걷자 서화천 생태습지에 닿는다. 47천 평(습지만도 1만 평이 넘는단다)이나 되는 지오리 일대 하천부지에 수질정화를 위한 습지를 조성해놓았다.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처리된 처리수를 다시 정화하고, 빗물과 함께 유입되는 비점 오염물질을 정화해 소옥천(서하천의 하류)’으로 방류하는 시스템이란다. 소옥천의 물은 침강지와 깊은 습지, 얕은 습지, 생태침강지 등을 거치면서 식재된 식물의 수질정화를 통해 깨끗한 물로 다시 태어나 하천으로 되돌아간다.

 생태습지는 관광지 냄새를 물씬 풍긴다. 호수를 연상시키는 연못들 사이사이를 누비는 탐방로는 물론이고, 조망 데크에 분수까지 갖췄다. 휴게시설과 체험장도 있단다. 거기다 노랑꽃창포와 부들·노랑어리연꽃·갈대·수련 등 수질정화 기능이 뛰어난 수변 및 수생식물까지 심었다니 어련하겠는가.

 범위가 하도 넓은 탓에 생태습지를 한눈에 담을 수는 없다. 그래도 꼭 담고 싶다면 남쪽 끄트머리(용목마을 앞)에 있는 조류 관찰대를 추천한다. 길게 놓인 계단이 다소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보상은 의외로 크기 때문이다.

 데크 계단을 오르면 팔각정을 만난다. 정자 앞 난간에는 조류 관찰용 망원경이 마련되어 있다. 습지를 찾아오는 철새들이 놀래지 않게 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관광지에 가까운 습지에서 노니는 철새들이라면, 사람 몇 지나간다고 해서 놀랄 일도 없을 것이다.

 때를 잘못 맞춘 탓인지 철새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드넓은 생태습지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저 습지는 수질개선이라는 본연의 임무 외에도 인근 주민들에게 소득까지 늘려준단다. 임금을 주고 제초작업 등을 부탁한다니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셈이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지오2을 따라 보오마을로 간다. 왼쪽 옆구리에 서화천을 매달고 가는 모양새라고 보면 되겠다. ! 이 구간은 상습 침수지역이기도 하다. 대청호의 수위가 올라가면 자동으로 물에 잠기게 된단다. 그래선지 초입에 차단기를 설치하고, 침수가 될 경우 도로를 막겠다는 통행금지 팻말을 붙여놓았다.

 습지에서 정화된 물이 내려가는 길목은 강태공의 차지였다. 아니 이 부근의 서화천변은 온통 강태공들이 타고 온 차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대청호의 수위가 오르면 몰려드는 물고기 떼를 따라 낚시꾼들이 떼를 지어 모여든다나? 그러다보니 쓰레기 관련 민원도 함께 늘어났고, 2021년부터는 낚시를 금지하고 있다던데...

 냇물을 걸상 삼은 저 옥천천 수질측정소는 대청호의 수질오염 방지를 위한 시설이란다. 서화천의 수질을 상시적으로 측정·감시해오고 있다나? 아무튼 오백리길은 저 측정소를 마지막으로 대청호(서화천)와 헤어져 내륙으로 파고든다.

 조류관찰대에서 15, ‘보오마을(’보골 또는 복골로도 불린다)’에 이른다. 조그마한 산촌이지만 첫인상이 무척 좋아 보이는 마을이다. 마을이 온통 꽃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그만 터라도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꽃밭을 만들어놓은 덕분이다. 경로당 앞에 정자를 지어 나그네들에게 쉼터까지 제공하고 있었다.

 골목길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었는가 하면. 돌 축대사이사이도 꽃을 심어 풍치를 더했다. 하지만 이 마을은 장마가 길어지기라도 하면 육지 속의 섬이 되어버리는 오지마을이기도 하다. 대청호가 만수위가 되면 마을 진입로가 물에 잠겨버리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시내버스도 함께 끊겨 버림은 물론이다.

 고샅길을 올라가니 비석에 시 한 편을 새겨놓았다. 류재길 씨의 대청호야 돌려다오라는 시로 대청호가 삼켜버린 풍경에 대한 그리움과 마을의 정취를 노래하고 있다. <봄이 오면 냇물 따라 천렵하는 노래소리, 어두우면 아낙네들 땀 내리는 첨벙소리>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설레지 않는가.

 고샅길을 지나 마을 뒤로 나간다. 오백리길은 이제 이평1(2차선 도로)’이 지나가는 산등성이(아래 사진의 둑처럼 보이는 부분)를 향해 나아간다.

 잠시 후 만나는 소류지(沼溜地)’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길이 둘로 나뉘는데도 오백리길의 표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소류지를 오른편에 끼고 직진하면 된다. 길이 훤하게 뚫려있는 왼쪽(아스팔트로 포장까지 되어 있다)에 홀리지 말 일이다.

 조금 전 거론했던 산자락에 이르자 길을 갈 지()’자를 쓰면서 위로 올라간다. 하지만 금방이면 끝나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아니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다보면 오르막길이라는 것까지 깜빡 잊어버릴 것이다.

 집사람의 부지런한 손길은 오늘도 멈출 줄 모른다. 서방님께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 하는 그녀의 눈에 나물이 들어왔으니 어찌 그냥 지나치겠는가. ‘달래장으로 변한 저 달래는 내일 아침 곱창김과 함께 밥상으로 올라올 것이다. 아까 이지당에서 나를 기다리며 캤다는 냉이는 국으로 끓여져 있을 것이고.

 이평리로 연결되는 차도(이평1)로 올라섰다. 보오마을에서 이곳까지는 0.75km, 하지만 나물을 캐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느라 20분이나 걸렸다. ! 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이정표(이평리 2.5/ 이지당 4)가 세워져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그러나 이름표(보골 갈림길)가 무색하게도 보골로 내려가는 방향표시는 매달려있지 않았다. 이후부터 오백리길은 차도를 따른다. 2차선 도로이지만 차량통행이 거의 없어 오가는 차량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길이 편하면 눈이 바빠지는 법이다. 그러다가 꽃보다도 아름답다는 만추의 풍경을 만났다. 골짜기에 숨은 듯 들어앉은 보오마을이 붉은 옷으로 단장한 낙엽송 산자락과 함께 어우러지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이 일대는 토종식물이자 멸종위기식물인 병아리풀의 자생지란다. 한해살이인데다 8-9월에 꽃을 피운다니 꽃구경은커녕 풀 구경도 이미 물 건너간 셈. 관상용으로도 재배한다니 누구네 화단에서나 만날 볼 기회가 주어질라나?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힘겹게 고갯마루로 올라선 길은 다시 아래로 향한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은 눈요깃거리가 된다. 지형지물을 살려가며 길은 냈는지 도로가 만들어내는 곡선미가 제법 아름답다.

 깊은 계곡에는 대규모 폐기물종합처리장이 들어섰다. 쓰레기 매립지와 소각시설로 이루어졌다는데,  소각시설이 낭비로 여겨지는 이유는 대체 뭘까? 쓰레기 소각으로 열을 얻어내는 시설을 오랫동안 봐왔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근처에 산다는 이유로 열 공급을 무료로 받았음은 물론이고, 아파트관리비도 소각장에서 내주었었는데...

 한가로운 도로를 여유롭게 걷기를 30. 7구간 때 만났던 이평리(梨坪里)’와 같은 이름의 동네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아니 같은 듯 같지 않은 마을이다. 대청호에 물이 차면서 마을이 졸지에 둘로 나뉘어버렸고, 이젠 대청호를 사이에 두고 목메어 바라보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평리 앞에서 다시 서화천을 만났다. 그런데 이게 몸집을 확 불린 것이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서화천이 금강에 합류되는 지점에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금강이 흘러가는 길목에 댐을 만들면서 대청호가 생긴 것이고...

 또 다른 호숫가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도로변에 걸린 현수막은 반딧불이 서식처 복원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맞다. 올 봄엔가 홍수터라는 대청호반에 생물서식처인 둠벙과 생태습지 등을 조성 수변식생을 복원하겠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었다. 이평리 일대는 반딧불이 3종을 비롯한 멸종위기 야생생물과 청정지표종·희귀종이 서식하고 있단다. 하지만 생태계 교란종이 확산되면서 개체수가 확 줄어들었단다.

 공사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개체수를 늘려가고 있는 생태계 교란종을 제거하고, 생태복원 깃대종(늦반딧불이, 꼬리명주나비 등)의 서식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공사이다. 반딧불이를 테마로 한 생태관광지로 개발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오백리길은 막바지를 향해 내닫는다. 하지만 그 끝을 쉽게 내주고 싶지 않은 듯, 높이가 130m쯤 되는 고갯마루를 넘어가란다. 체력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이평마을에서 15, 고개를 넘자 이번에는 석결(石結)’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뭐 볼게 있어 그 먼 길을 왔냐는 할머니들의 자가용은 신식이었다. 유모차를 밀고 다니던 분들이 언제부턴가 자신만을 위해 제작된 자가용을 몰고 다닌다. 편의성과 안전성을 모두 갖췄으니 모터가 없는 수동이라고 해서 뭐가 문제겠는가. 내리막길에서는 브레이크를 잡고, 걷다가 지치면 안락한 의자에 앉아 잠시 쉬면 그만이다. 마실 것? 의자 아래에 짐칸을 배치했으니 걱정아 물러가라이다.

 석결마을에서 더 넓어진 대청호를 만났다. 서화천을 따라오던 오백길이 어느덧 금강 본류에 이르렀다는 증거일 것이다.

 몇 걸음 더 걸어 만난 모퉁이에는 작은 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정자에는 오백리길 표지판을 붙여놓았다. 이곳까지 걸어오느라 지쳤을 나그네들에게 다리품이라도 풀고 가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게으른 지자체는 만들지만 알았지 정비하는 건 잊었나보다. 선비길(8구간)의 명물로 꼽히는 장승이 온전치를 못한 걸 보면 말이다. ‘대청호 보전하세를 여읜 금강인 어절씨구만이 외롭게 서있다.

 날머리인 돌거리고개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고갯마루로 올라가지는 못했다. 날머리를 200m쯤 앞둔 지점에서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대청댐광장(실은 부유쓰레기 적치장이다)’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거리고개에는 주차할만한 장소가 없다나?

 날머리는 돌거리고개’(옥천군 군북면 석호리)

때문에 돌거리고개까지는 산악회 버스로 이동했다. 석호길(진걸마을에서 옥천으로 나가는 도로)과 우리가 걸어온 석호1이 만나는 삼거리가 8구간의 종점이다. 아무튼 오늘은 14.42km 3시간 50분에 걸었다. 나물을 뜯는 집사람에게 보조를 맞추느라 조금 더디게 걸었던 모양이다.

 

대청호오백리길 7구간(부소담악 길)

 

여행일 : ‘22. 10. 15(토)

소재지 : 충북 옥천군 군북면 일원

여행코스 : 와정삼거리→꽃봉→방아실→대정삼거리→거먹골→항골삼거리→공곡재→이평리→갈벌(보현사)→황룡사→부소담악(거리/시간 : 14㎞/ 실제는 13.32km를 4시간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는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과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리’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을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일곱 번째 구간인 ‘부소담악 길(14km)’을 걷는다. 이 구간도 호숫가를 걸으며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초반 3.5km(꽃봉 구간)을 뺀 나머지는 오롯이 포장도로를 걸어야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 구간의 도로도 역시 인도가 따로 없었다.

 

▼ 들머리는 ‘와정삼거리(방아실 입구)’(옥천군 군북면 대정리)

경부고속도로 대전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좌회전, 비래서로와 신상로를 잇따라 타고 대청호까지 온다. 신상교차로(대전시 동구 신상동)에서 571번 지방도를 타고 대청호반을 따라 북진하면 오래지 않아 ‘와정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지난 6구간(대추나무길)에 이어 이번 7구간(부소담악길)도 이곳에서 출발하게 된다.

▼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이다. 특히 후반부의 추소리에서 만나는 ‘부소담악’은 대청호 제일의 절경으로 꼽힌다. 거기다 번외지만 ‘돌팡깨’라는 신비스런 풍광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구간도 산길과 도로(인도가 따로 없다)를 걸어야만 하는 단점이 더 크다. 오백리길 표식(이정표·팻말·리본 등)이 거의 없다는 점도 6구간과 같았다. 걷는 내내 지자체의 무관심에 대해 불평할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 오른쪽(동쪽), 그러니까 방아실(군북면 대정리)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 길은 군북면소재지를 거쳐 옥천읍으로 연결된다. 곧장 직진하면 6구간(대추나무 길)의 종점인 보은군 회남면이 나온다.

▼ 100m 조금 못되게 걷자, ‘Hill Hotel’ 앞에서 왼편 산자락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뉜다. ‘꽃봉’으로 올라가는 길임을 알리는 이정표(꽃봉까지 1.7㎞)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우리 부부는 반대편에 세워놓은 또 다른 이정표(대정삼거리 0.7㎞/ 청주절골 4.2㎞)를 따르기로 했다. 산길인 ‘꽃봉 구간’을 생략하고, 도로(비야대정로)를 따라 대정삼거리로 곧장 간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는데다 4.8km 가량의 거리까지 단축할 수 있으니 무릎이 불편한 집사람에게는 최상의 선택이 아니겠는가.

▼ 낚시터 팻말이 낯설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상수원인 대청호는 ‘수질보전 특별대책 지역’으로 지정하는 등 수질보호를 위해 심혈을 쏟고 있다. 반면에 낚시는 수질오염의 주범으로 찍혀 규제를 받는다. 그런데도 지자체는 어떻게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었을까?

▼ 10분쯤 걸었을까 ‘대정삼거리’에서 아까 헤어졌던 7구간과 다시 만났다. 들머리에서 0.7km를 걸어왔지만, 탐방로를 제대로 걸었을 경우에는 5.5km를 걸어야만 이곳에 이를 수 있으니 4.8km를 거저먹은 셈이다. 참고로 방아실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대정리(大亭里)는 대전 쪽에서는 횟집·낚시터 등으로 유명하지만 옥천에서는 섬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증약리에서 항곡리로 넘는 고갯길이 포장되기 전에는 마달령을 넘어 세천으로 돌아오는 불편을 겪어야만 했단다.

▼ 길 건너 ‘방아실’은 대청호반에 위치한 청정마을이다. 꽃처럼 예쁜 언덕 위의 마을이란 뜻으로 ‘꽃다울 방(芳)’에 ‘언덕 아(阿)’를 쓴다. 수채화 한 폭을 보는 듯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마을이라고나 할까? 주변에 수상스키를 즐길 수 있는 수상레저시설과 낚시터 그와 더불어 다양한 먹거리촌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 방아실 앞에서 대청호와 첫 대면이 이루어진다. 내륙을 향해 대청호가 쑥 들어왔다. 산을 넘지 못하는 물길이 산이 끝나는 모서리를 돌아 제 발길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찾아든 것이다.

▼ 대정교회를 지나자 ‘금오골(마을 안내판은 금옥골로 적고 있었다)’이 얼굴을 내민다. 동구 밖 거대한 느티나무가 마을의 오래된 역사를 알려주는데, 마을을 지켜주었을 신목은 이제 그 임무를 바꿨나보다. 나무 그늘에 정자까지 품고 주민들에게 쉼터가 되어준다.

▼ 대청호를 마주보는 언덕에는 ‘향수뜰마을 복지회관’이 들어섰다. 안내판은 이곳 와정리와 방아실·항곡리·이평리·추소리·환평리 일원을 ‘향수뜰 권역’으로 묶고 있었다. 어쩌면 옛 추억을 물씬 풍기게 만들자는 의미의 ‘권역 브랜드’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권역에서 나온 안전한 농산물로 제빵 체험, 찐빵 만들기, 수제맥주 만들기, 두부 만들기, 묘목접목, 나무열쇠고리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활동을 할 수 있다니 한번쯤 도전해 볼 일이다.

▼ 향수뜰마을 복지회관(권역 센터)을 지나다 또 다른 모습의 대청호를 만났다. 명경처럼 잔잔하다는 대청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호로병의 좁은 주둥이 안에 들어선 호수는 물결 하나 일지 않는다.

▼ 지난번 6구간 때 얘기했듯이, 오백리길은 대전 권역을 지나자마자 엉망으로 변해버린다. 지자체의 무관심으로 인해 오백리길 표식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앱(선답자의 트랙)의 도움 없이는 길 찾기가 불가능한 이유다. 하지만 그 앱이 악몽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우리 부부처럼 선답자의 개척 구간에서 헤맬 수도 있으니 말이다. 트랙의 지시대로 보건진료소(향수뜰마을 복지회관과 나란히 붙어있다) 앞에서 갈림길로 들어섰다가, 20분이나 헤매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 대청호가 만들어놓은 자투리 같은 들녘, 부지런한 농부는 수확이 한창이다.

▼ 다운받은 트랙은 ‘생태복원지’로 탈바꿈된 옛 낚시터 뒤 산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산으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임자가 있는 산이라며 고함을 질러내는 데야 어쩌겠는가. 밤 주우러 온 게 아니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내려가라는 것이다. 능선까지 거의 올라갔다가 되돌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 보건진료소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도로(비아대정로)를 따른다. 도중에 ‘향수뜰 권역’의 공동생활관도 기웃거려 볼 수도 있다.

▼ 잠시 후, 오백리길은 ‘새거리’를 스치듯 지나간다. 와정리에 속한 자연부락 가운데 하나다.

▼ 오백리길은 새거리를 지나면서 오르막으로 변한다. 그리고 고개(아래 사진에서 능선 안부) 하나를 넘어 향곡리로 간다.

▼ 가을의 전령이라는 새하얀 구절초 꽃들이 바람의 흐름에 따라 하늘하늘 몸을 흔들고 있었다. 멋들어진 춤사위에 반해 갈 길도 잊고 한참을 서서 꽃들의 군무를 바라보았다. 어느 맑은 가을날, 찬란한 햇살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구절초 무리를...

▼ 감나무를 눈에 담는 재미도 있었다. 붉디붉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니 가을 사진 하나쯤으로 아주 괜찮은 그림이 된다.

▼ 고갯마루로 올라서자 임도가 하나가 왼편으로 갈려나간다. 아까 보건진료소 앞산에서 쫓겨나오지만 않았더라면, 길 아닌 길에서 길을 찾다가 저 임도를 따라 이곳으로 빠져나왔을 것이다. 현수막은 그 길을 ‘이시울골’로 들어가는 농로라고 적었다. 대청댐 수몰과 함께 사라졌다가 최근 재건을 시작했다는 오지의 숨겨진 마을이다.

▼ 새거리에서 20분. 고개를 넘자 ‘황골삼거리’다. 옛 이름이 한자로 고쳐지면서 ‘황골’은 현재 ‘항곡리(恒谷里, 발음대로 썼단다)’로 불린다. ‘골이 크다’는 뜻까지 품은 그럴듯한 마을이지만, 증약리에서 넘어오는 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오지마을이었다. 때문에 대정리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대전 생활권을 영위한다. 중학교의 학구도 대전 동신중학교라고 한다.

▼ 이정표(부소담악 6.5㎞/ 수생식물학습원 4.5㎞)는 왼쪽(환산로·이평2길)으로 가란다. 하지만 난 항곡마을을 먼저 둘러본 다음 트레킹을 이어갈 것을 권한다. 흔하지 않은 이색적인 풍광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 50m쯤 들어가면 또 다른 삼거리. 오른쪽에 있는 마을을 무시하고 곧장 직진한다. 참! 이왕에 왔으니 ‘마을자랑 빗돌’에 적힌 내용도 한번쯤 읽어보면 어떨까? 항곡리를 ‘황골’로도 부르는데, 이는 금을 채굴하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나?

▼ 몇 걸음 더 걷자 거대한 바위지대가 눈앞에 펼쳐진다. 제주도의 화산암을 연상시키는 검은색 바위(흑색 금강석회암)가 산을 이루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돌무더기가 있는 언저리라는 뜻으로 ‘돌팡깨’라고 부른다고 한다.

▼ 데크계단을 오르면 바위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난다. 바위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것이다. 바위의 생김새도 볼거리다. 선돌처럼 뽈록하니 솟아나온 게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바위는 나무 그루터기를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 돌팡깨도 입소문을 좀 탔던 모양이다. 특산물판매장에 식당(문이 닫혀있었다)까지 들어섰다는 건 그만큼 찾는 이들이 많다는 증거일 테니 말이다.

▼ ‘황골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부소담악 방향이다. 대청호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 이 구간은 전형적인 두메산골의 풍경이 이어진다. 다소 지루할 수 있는 길이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길이 정겹다.

▼ 잠시 후 길은 임도로 바뀐다. 오르막으로 변하는데다 좌우 휘어진 각도도 만만찮다. 눈비라도 내릴라치면 초보운전자는 살 떨리는 운전을 해야 할 듯. 맞다. 겨울철에는 차량통행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임도의 초입에 세워져 있었다.

▼ 대신 좋은 점도 있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심심찮게 시야가 열리기 때문이다. 대청호반이 훤히 내다보이며, 탁 트인 풍경이 꽉 막힌 가슴을 뻥 뚫어준다. 그런 호반에는 전원주택이 들어앉으며 그림처럼 예쁜 풍경화가 완성된다.

▼ 공곡재에 가까워지자 길은 허리를 곧추세운다. 이 구간의 특징은 뱀이 많다는 점이다. 공곡재로 오르는 도중 뱀을 세 마리나 봤다. 또 하나. 주차된 차량도 꽤 많이 만났다. 밤을 주우러 온 모양인데 그들이 버린 쓰레기들로 인해 간식을 먹을 만한 자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 이때 다시 한 번 시야가 열리며 리아스식 호안이 펼쳐진다. 반도처럼 툭 튀어나온 저 곳은 7구간의 번외 명소로 꼽히는 ‘수생식물학습원’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모든 수생식물과 열대지방의 수생식물들을 재배·번식·보급시킴으로써 자연 생태보전의 파수꾼 노릇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단다.

▼ 황골삼거리에서 55분. ‘공곡재’에 올라섰다. 고갯마루는 어디가 됐든 사람들이 쉬어가는 장소다. 지자체도 이를 알았던 모양이다. ‘공곡정’이란 정자를 지어 오백리길 나그네들에게 쉼터로 제공했다.

▼ 고갯마루는 장승이 지키고 있었다. 그 뒤에는 서낭당으로 여겨지는 돌탑도 보인다. 아니 막걸리가 뿌려져 있는 걸로 보아 서낭당이 분명하다. 높이가 216m나 되는 고갯마루를 넘는 이들의 안전을 비는 서낭당 말이다.

▼ 오백리길은 이제 길고 긴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이 길은 공존의 길이기도 했다. 임도를 따르고 있느니 자동차는 기본, 지자체는 여기에 도보길(오백리길의 부소담악길)과 자전거길(부소담악 자전거길)을 보탰다.

▼ 귀하디귀한 그 ‘오백리길 리본’을 엉뚱한 곳에서 만났다. 그렇게나 보기 힘들었던 리본을 공곡재 근처, 환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의 초입에다 매달아 놓은 것이다. 내 노년의 롤 모델이신 뚜벅이님의 말씀대로 ‘7-1구간’을 이곳에서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산악회는 군북면소재지에서 7-1구간을 시작하겠다고 적고 있었지만...

▼ 조금 더 내려가자(공곡재에서 7분) ‘이평리’로 들어가는 길이 나뉜다. 첩첩 산중의 오지지만 이평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가운데 농토가 가장 넓단다. 수몰민 중 일부가 이곳에 들어와 완만하면서도 너른 산의 경사면을 경작지로 일구었다고 한다. 참! 이평리는 물 건너 용호리로 건너는 ‘물아래여울’이 있던 곳으로, 옛날 동학군 지도부가 건넜던 여울이기도 하다. 동학군들이 이 여울을 건너 고리산을 올랐고, 증약리로 갔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 버스정류장에는 옥천 출신인 정지용 시인의 ‘향수’가 적혀 있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이하 생략>. 싯구를 읊조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고향마을을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즘을 대표하는 시이다. 한때는 노래방에서 손꼽히던 애창곡(김희갑 작곡/ 박인수·이동원 노래)이기도 했다.

▼ 길은 꼬불꼬불, 고리산의 산허리를 헤집으며 이어진다. 새로 낸 듯 경사지에는 넝쿨식물은커녕 잡초조차 자라지 않았다. 차선도 난데없이 2차선으로 변했다.

▼ 도로확장 때 함께 조성해 놓은 듯 길가에는 작은 꽃밭도 들어서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가을꽃이 지친 나그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 길은 한없이 ‘꼬부랑’거린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에 따라 길을 내다보니 별 수 없었을 게다. 민가도 잊을만하면 하나씩 나타난다. 험준한 지형에서 각자의 형편대로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흔적이다.

▼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대청호가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푸른빛 절경을 펼쳐 보이면서 말이다. 그러자 9km를 걸어온 여정의 피로가 한 방에 녹아내린다. 머릿속 온갖 잡생각 또한 한눈에 가득 차는 풍경에 씻겨 내린다.

▼ 바위봉우리의 생김새가 심상찮아 카메라에 잡아봤다. ‘마당바우’라는 이름표를 단 것이, 철제난간을 두른 꼭대기 대(臺)가 마당만큼이나 넓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사유지 안에 들어있어 올라가보지는 못했다.

▼ 이 일대의 길가는 온통 ‘복분자’ 넝쿨로 가득했다. 검붉은 열매를 먹으면 정력이 강화되어 소변 줄기에 요강이 뒤집어진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과실이다. 그러니 정력보강이 필요한 남자들이여 어느 봄날 7구간을 꼭 걸어볼 일이다.

▼ 이 지역의 ‘반남 박씨’들은 형편이 넉넉한가 보다. 폐 선박으로 공동 숙소를 만들었는가 하면, 액티비티 스포츠용으로 모터보트까지 비치해두었다.

▼ 트래킹을 시작한지 3시간. 난감한 일이 발생했다. 날머리는 아직도 먼데 산악회버스가 세워져 있는 게 아닌가. 더 큰 고민은 밥상까지 차려놓았다는 점이다. 결론은 날머리까지 다녀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주어진 시간까지 1시간30분이나 남아,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이 결정은 나를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 버스를 이용 날머리로 이동한다는 산악회의 결정이 내가 출발하고 난 뒤에 내려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난 부소담악 주차장에서 독상을 차려 식사를 하는 귀하신 몸이 되어버렸다.

▼ 호수를 향해 툭 튀어나간 반도(지도에서는 부소담악과 별반 다르지 않게 나타난다)를 횡단하자 또 다른 대청호,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대청호는 진짜배기 명경이다. 수면에 하늘과 물이 맞물리며 데칼코마니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 수정가든(닭백숙 전문식당)에 이어 ‘갈벌 버스정류장’이 길손을 맞는다. 이평리(梨坪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였지만 대청댐에 물을 가두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이름(주민들은 현재 건너편 구건리골에 이주하여 살고 있단다)이다. 그래선지 ‘kakaomap’은 이곳을 ‘추실’로 적고 있었다.

▼ 버스정류장에는 한 폭의 걸개그림이 매달려 있었다. 대청호로 수몰되기 전 ‘갈벌’ 마을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냈는데, 금강으로 여겨지는 큰 냇가를 중심으로 물레방아·다리·마을길, 그리고 많은 집들이 들어섰다. 또한 집집마다 이름을 써놨는데 성이 모두 ‘박’씨라는 게 독특하다. 박씨들 집성촌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그림에서는 고향 마을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이 잔뜩 배어있었다.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풍경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 오백리길은 이제 대청호에 바짝 기대며 간다. 바다처럼 드넓은 호수와 우람한 산줄기, 그 경계에 자리 잡은 마을까지 한데 어우러져 멋지다는 표현으로 부족할 정도다. 일상에 지친 마음에 호수만큼 넓은 여유를 품는다.

▼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또 다른 모습의 대청호가 나그네를 유혹한다. 호숫가 나룻배는 한껏 여유를 부리고, 데칼코마니를 연출하는 호수는 흰 구름까지 담았다. 어느 유명 화가가 저런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 진행방향 저 멀리에서는 ‘부소담악’이 살짝 드러난다. 사람들은 이 부근의 대청호를 일러 ‘꽃 넝쿨을 호수 위에 드리워 놓은 모양(浮沼:부소)’이라고 한다. 첩첩산중에 대청댐 건설로 물이 차오르면서 낮은 봉우리는 섬이 되고 긴 능선은 호수 위 띠가 되었단다. 덕분에 저 띠를 걷는 탐방객들은 청정옥수의 호위를 좌우로 받게 된다.

▼ 갈벌에서 10분, 모퉁이를 돌아서자 ‘고리산 황룡사(古利山 黃龍寺)’라고 적힌 거대한 빗돌이 길손을 맞는다. 경주의 황룡사가 이사라도 왔나? 아니 경주의 절간은 ‘임금 황(皇)’자를 쓴다. 대신 이곳은 ‘누를 황(黃)’자를 쓰면서 ‘세계불교 세심종’의 총본산을 자처한다. 인류의 모든 종교를 포용하여 인류 구제와 세계평화를 서원으로 한다는 한국불교의 한 종파이다. 그래선지 ‘세계인류세심운동본부’라는 큰 글자 아래에 ‘남북통일’과 ‘인류평화’를 써 놓았다.

▼ 이색적인 일주문과 개생문(開生門)을 연이어 지나면 대웅보전이 얼굴을 내민다. 미륵불을 위시한 불상들과 수많은 윤회탑(정체는 모르겠다)도 눈에 들어왔지만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기록으로 남길만한 역사나 외형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전쟁이나 재해 등으로 숨진 국내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절간쯤으로 기억했다고나 할까?

▼ 황룡사 앞은 유원지가 들어섰다. 우거진 갈대밭과 칡덩쿨이 헝클어진 호숫가에 수상레저를 중심으로 카페와 음식점들이 모여들면서, 웬만한 유원지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로 붐빈다. 어쩌면 이 부근에 있던 마을들은 호수에 잠겼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물에 잠기지 않은 변두리가 저런 유원지로 변했을 것이다.

▼ 부소담악은 유원지를 통과하도록 길이 나있다. 입구를 지키는 장승 옆에는 이를 알리는 종합안내도까지 세워놓았다. 하지만 이를 보지 못한 난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무질서하게 뒤엉킨 자동차들에 시선을 피하다가 그만 안내판까지 놓쳐버렸다.

▼ 2분쯤 더 걸어 나지막한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7구간이 종료되는 ‘추소리 둥그나무’다. 추소리의 신목인 둥그나무는 어른 서넛은 모여야 빙 둘러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로 우람하다. 그런 몸채로부터 뻗어나간 가지 또한 풍성하기 그지없는데, 그 아래에 서낭당(돌탑)을 모셨다. 참고로 추소리는 이 둥그나무를 중심으로 위·아래 마을로 나뉜다. 둥그나무 부근의 길가 언덕위에 자리한 마을이 ‘윗마을’이고 둥그나무에서 동남쪽 300m 아래 대청호변에 위치한 마을이 ‘아랫마을’이다.

▼ ‘부소담악 둘레길안내도’가 지시하는 대로 산길(부소담악으로 들어가는 3개의 탐방로 중 하나)로 들어섰다. 덕분에 산봉우리 하나를 오롯이 넘어야만 했다.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높이지만, 이미 지쳐버린 발걸음은 한없이 더뎌진다. 특별한 눈요깃거리도 없다. 그저 중간에 만나게 되는 문화류씨 묘역이 전부라고나 할까? 참! 이곳 추소리는 문화류씨의 집성촌이라고 했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가족과 다름없단다.

▼ 전망대에 오르기 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장승공원은 ‘소원 바리기(‘음식을 담는 그릇’이라는 순우리말)’ 장소로 알려진다. 나무를 깎아 만든 다양하고 익살스러운 장승들을 바라보며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 장승공원 뒤 산봉우리는 ‘추소정(湫沼亭)’이 걸터앉았다. 부소담악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아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 추소정에서 바라본 풍경은 빼어나다. 하긴 ‘대청호 최고의 절경’이라는 수식어가 어디 그냥 생겨났겠는가. 추소정에서 바라볼 때 물 건너 추소리(아랫마을)가 있고, 그 뒷산이 환산이다.

▼ 잠시 후 또 다른 정자를 만났다. 옛(舊) 정자인 ‘부소정’이란다. 특이하게도 정자의 기둥 사이를 창호로 막아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을까? 누군가 부소담악 자랑으로 가득 찬 전단까지 붙여놓았다.

▼ 탐방로는 이제 호로병처럼 생긴 지형의 목 부분을 지난다. 부소담악은 생긴 모양새로 보면 산이라기보다 산맥에 가깝다. 40~90m 높이(폭은 가장 넓은 곳이 20m 정도란다)의 절벽이 강줄기를 따라 병풍처럼 이어지기 때문이다.

▼ 아쉽게도 부소담악의 하이라이트인 병풍바위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안전사고를 이유로 밧줄로 난간을 두른 뒤, 출입금지 팻말로 아예 도배를 했다. 덕분에 난 부소담악을 감싸며 돌아드는 물길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산자락을 적시는 풍경이 고와 ‘추소 8경’의 하나로까지 꼽혀왔다는데 말이다. 유구한 세월 속에 추소팔경은 빛바랜 지 오래지만, 부소담악은 대청호가 들어서면서 오히려 더 도드라졌다는데...

▼ 밧줄 난간에는 사진 제보를 부탁하는 전단이 매달려 있었다. 올 2월13일에 발생한 실족사건의 수사를 위해, 시간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당일 찍은 사진이 있을 경우 제보해 달라고 한다.

▼ 통행금지 라인을 차마 넘을 수가 없었기에, 맨 끄트머리의 풍경은 옛날 것(환산 등산 때 날머리를 이곳으로 삼았었다)과 총무님의 것으로 대신한다. 부소담악은 부소무니 앞 물위에 떠 있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갈수기와 만수위 때 높이가 달라지는 700여m의 절벽이 물줄기를 따라 병풍처럼 길게 이어지는데, 생김새가 산맥에 가까워서, 갈수기 때는 높은 산을 산행하듯 암벽을 오르내리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 부소담악은 물에 잠기기 전부터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일찍이 우암 송시열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보고 ‘소금강(小金剛)’이라고 이름 지어 노래했을 정도이니 그 빼어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 중 ‘가장 아름다운 6대 하천’에 꼽히기도 했으며, KBS-2TV에서 방영된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시즌 3에서 사선녀가 탄성을 지르던 곳이기도 하다.

▼ 되돌아올 때는 호숫가 경사면을 따라 난 비탈길을 타봤다. 사람 하나가 겨우 다니는 오솔길 아래로 시퍼런 물이 넘실거린다.

▼ 부소담악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는 방법을 알리는 ‘현수막’이 눈에 띈다. 부소담악 자체에서는 절경을 볼 수 없으니 배를 타고 병풍바위 맞은편에 위치한 미르정원으로 오라는 것이다. 맞다. 부소담악의 ‘담악(潭岳)’이란 말 그대로 물 위로 드러난 산이다. 원래부터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오늘 날의 비경은 대청호에 물을 가두면서 자연스레 생겨났다고 한다. 산줄기가 물에 잠기면서 칼날 같은 능선만 수면 위로 길게 드러났고, 물에 잠긴 부분의 흙이 씻겨나가면서 바위가 드러나 열두 폭 병풍을 펼쳐놓은 듯한 형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반대편에서 바라봐야만 그 전모를 알 수 있다나?

▼ 날머리는 갈벌마을 호숫가(옥천군 군북면 이평리)

장승공원에서도 아까 들어왔던 길이 아닌 오른편 호숫가를 따랐다. 그리고 데크와 보드라운 흙길을 거쳐 황룡사 앞 유원지까지 되돌아오면 여정은 끝난다. 하지만 산악회버스가 ‘갈벌마을’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1km를 더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14.99km를 4시간 10분에 걸었다. 초반의 산길 구간을 생략했던 점을 감안하면 조금 더디게 걸은 셈이다. 와정리에서 길을 찾느라 헤맨 탓일 것이다.

대청호오백리길 6구간(대추나무 길)

 

여행일 : ‘22. 10. 1(토)

소재지 : 충북 옥천군(군북면)·대전광역시 동구(오동·주촌동)·보은군(회남면) 일원

여행코스 : 와정삼거리→꽃봉갈림길→오동(주촌마을)→산적소굴→대추나무단지→우무동→법수리선착장→연꽃단지→어부동→회남대교→남대문교 소공원(거리/시간 : 16㎞/ 실제는 오동마을부터 13.32km를 4시간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는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과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리’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을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여섯 번째 구간인 ‘대추나무 길(16km)’을 걷는다. 이 구간도 호숫가를 걸으며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4km나 되는 산길로도 모자라 차도(이 구간의 도로는 인도가 따로 없다)를 걸어야만 하는 단점도 있다.

 

▼ 들머리는 ‘와정삼거리(방아실 입구)’(옥천군 군북면 대정리)

경부고속도로 대전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좌회전, 비래서로와 신상로를 잇따라 타고 대청호까지 온다. 신상교차로(대전시 동구 신상동)에서 571번 지방도를 타고 대청호반을 따라 북진하면 오래지 않아 ‘와정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6구간(대추나무길) 말고도 7구간(부소담악길)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경과 보은의 특산물인 대추나무를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 하지만 산길과 도로(차량통행이 빈번하지만 인도가 따로 없다)를 걸어야만 하는 단점이 더 크다. 특히 구간 대부분에 오백리길 표식(이정표·팻말·리본 등)이 되어있지 않다는 점은 변명할 여지도 없다. 앱의 도움 없이는 길 찾기가 불가능했으니 둘레길로서는 빵점짜리 구간이라 하겠다.

▼ 와정리(‘힐호텔’ 쪽)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100m쯤 떨어진 힐호텔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능선을 타고 4km쯤 진행하다 ‘주촌2구(토방터)’ 근처 회남로(571번 지방도)로 내려선다.

▼ 하지만 우리 부부는 ‘오동 버스정류장’(대전시 중구 오동)에서 출발했다. 무릎이 불편한 집사람을 위한 내 작은 배려인데, ‘와정 삼거리(방아실 입구)’에서 4km쯤 떨어진 곳이니 딱 그만큼 코스를 단축했다고 보면 되겠다. 참! 정류장 옆에 ‘광산김씨 공안공파’의 유허지 비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오백리길은 도로를 따라 ‘토망대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하지만 일단 ‘주촌동’까지 내려가 보기로 했다. 오백리길을 역(逆)으로 가는 셈이지만,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그곳에 예상치 못한 풍광이 숨어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5분쯤 내려갔을까(주촌마을회관 앞을 지난다), 호수를 만난 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 ‘차단봉’으로 막아놓았지만 호숫가로도 길이 나 있었다. 하지만 한걸음 내디디면 깊은 물길로 이어지는 가지 못할 길이다. 만수위에 이른 대청호가 삼켜버린 ‘안골 선착장’이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차단봉을 넘자 대청호가 그 속살을 드러낸다. 건너편 야트막한 산들이 물위로 비쳐 자연의 데칼코마니가 성큼 다가와 있다. 첫 만남이 이리도 아름다운 걸 보면 오늘 트레킹은 아마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다.

▼ 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회남로’를 따라 걷는다. 길가 가로수는 아직도 벚꽃나무다. 맞다. 지난 5구간 때도 얘기했듯이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은 바깥아감에서 회남면(충북 보은군)까지라고 했다.

▼ 5분쯤 걸어 ‘토망대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대전 땅에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버스정류장이다. 회남로는 이제 보은 땅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정류장 옆에는 문중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알리는 빗돌들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 오백리길은 버스정류장을 기점으로 도로를 벗어나 왼쪽 임도로 내려선다. 하지만 난 곧바로 출발할 수가 없었다. 정류장에 적힌 최원규 시인의 시 ‘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나 그대의 미소가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진 게 아니라 수미산이나 잎새에 가려있기 때문이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음도 바람 속에 묻혀있기 때문이라는 싯구가 어찌 그리 가슴에 와 닿는지...

▼ 5분쯤 내려갔을까 ‘태산북두(泰山北斗)’라고 적힌 빗돌이 발길을 붙잡는다. 태산북두란 태산과 북두칠성을 우러러 보는 것처럼, 남에게 존경받는 뛰어난 존재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아래 적힌 ‘산적소굴’을 뭘 의미하는 걸까? 한유에 비견될 만큼 뛰어난 인재인 주인장이 산적처럼 웅크리고 있다는 자랑일지도 모르겠다.

▼ 임도를 걷다보면 심심찮게 대청호를 푸른 물빛을 만난다. 그리고 하나같이 아름다운 풍광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 임도는 사진처럼 제법 높은 고갯마루를 향해 오름짓도 한다.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이어도 조금 힘들어지려 하면 금세 내리막이 나타나 지루함이 없다. 오백리길의 특징 중 하나라 하겠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어촌마을의 한가로운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다. 금빛 윤슬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며 걷다보면 고향 풍경과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른거린다.

▼ 문중 묘역도 여럿 만났다. 대청호로 인해 이장이 불가피해진 조상의 무덤들을 한꺼번에 모은 것들인데, 회덕황씨 묘역(아래 사진)도 그중 하나다.

▼ 포장길이던 임도가 언제부턴가 흙길로 변했다. 하지만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지는 건 변함이 없다.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고나 할까?

▼ 산적소굴에서 25분. 작은 고갯마루를 넘는가 싶던 임도가 느닷없이 오솔길로 변해버린다. 이어서 몇 걸음 더 걸으면 벌초를 마친 가족 묘역이 얼굴을 내미는데, 헷갈리기 딱 좋은 지점이다. 묘역의 끝에서 그 오솔길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그널이 매달려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잘 살펴보고 진행하는 수밖에 없겠다.

▼ 묘역에서 길을 못 찾고 헤매다가 호숫가로 내려서게 됐다.  의도치 않은 고생을 했지만 대신 아름다운 대청호의 풍광을 눈에 담는 행운도 누렸다.

▼ 호반에 기대어 쉬고 있는 나룻배 한 척이 한가롭기 짝이 없다. 여름철 긴 장마는 대청호를 만수위까지 끌어올렸다. 대청호의 얼굴마담인 호숫가 모래사장은 물속에 잠겨버렸고, 저 배는 무심한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 하릴없이 낮잠만 잔다.

▼ 묘역을 지나면서 길 찾기가 만만찮아진다. ‘태봉골’로 들어서자 길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니 사라져버린 것까지는 아니고 희미해졌다. 꼼꼼히 살펴보지 않으면 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얘기다. 더 큰 문제는 시그널까지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리본을 촘촘히 매달아놓은 게 오백리길의 특징일진데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 문득 ‘길에서 길을 묻다’는 화두를 던진 어느 선승이 떠오른다. 바람직한 삶의 실마리를 찾아보라는 물음표를 나는 왜 산속에서 떠올렸을까? ‘길이 분명하겠건만 길은 보이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 앞에서 얘기한 ‘화두 선’을 꼭 닮았기 때문이다.

▼ 노익장을 자랑하는 ‘뚜벅이’님이 갑자기 분주해지셨다. 현재의 상황을 동영상으로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일 것이다. 하긴 20분 이상이나 길을 찾으며 고생하다 처음으로 오백리길 팻말을 만났으니 얼마나 반갑겠는가. 그런 삶을 롤 모델로 삼고 싶은 난 그런 모습을 가슴에 담는다. 팔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주말마다 산을 찾는 것만 해도 대단한데, 자신의 궤적을 동영상에 담아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게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 길은 갈수록 험해졌다. ‘원시의 숲’에 가까운 울창한 숲이 계속되는데, 웃자란 잡초와 넝쿨식물들까지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걸음을 붙잡는 것이다. 할퀴고 찔리는 건 기본, 자칫 한눈이라도 팔다간 싸대기를 맞을 수도 있다.

▼ 대신 좋은 점도 있었다. 심심찮게 나타나는 밤나무가 소일거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살림꾼인 집사람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부지런히 손발을 놀리더니 거의 한 되박이나 되는 밤을 줍는 게 아닌가.

▼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으름’이었다. 산 속에서 자생하는 어름나무가 지천으로 널렸는데, 넝쿨마다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4,5월에 꽃을 피운 으름나무는 추석을 전후로 열매가 익는다. 이때 표피가 갈라지는데, 맛은 바나나처럼 달콤하면서 고유의 향기가 난다. ‘코리아 바나나’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다.

▼ 5m까지 자라는 ‘으름나무’는 계곡이나 산기슭의 물이 많고 비옥한 토양에서 다른 나무를 감아 오르며 자란다. 한방에서는 뿌리와 줄기 말린 것을 목통(木通)이라 해 이뇨와 통경 등의 약재로 사용하고 민간에서도 열매의 껍질을 말린 후 차로 이용하는데 숙취해소에 좋다고 한다.

▼ 어쩌다 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리본이 눈에 띄기도 했다. 앱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길을 찾기 힘들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이때 저런 리본이라도 하나 눈에 띄면 구세주나 다름없다.

▼ 오솔길로 들어선지 30분. 거짓말처럼 시야가 툭 트이더니 과수원(사유지이므로 주인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이 나타났다. 대추와 호두, 감나무 등이 혼재된 과수원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횡단하는데, 거짓말 좀 보태서 간난아이 주먹만큼이나 커다란 알밤을 가득 매달은 밤나무도 보인다.

▼ 호수를 향해 배를 툭 내민 언덕 위에는 앙증맞은 집 하나가 걸터앉았다. 그게 호수와 어우러지며 조화를 일으킨다. 옛날 달력에서나 봤을 법한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 잠시 후 오백리길은 대추나무단지로 들어선다. 분지형의 골짜기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대추나무뿐이다. 그것도 과일삼아 먹어도 충분할 만큼 큰 대추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참고로 대추는 보은군 농업의 기둥이다. 생산농가가 1500호나 된다니 명실공히 최고의 지역특산물이라 하겠다. 해마다 대추축제까지 열린다고 한다.

▼ 널디너른 과수원 한가운데를 지나다 만난 아주머니의 표정은 썩 편치 않아 보였다. 주렁주렁 매달린 대추에 손이라도 댈까하는 노파심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땅에 떨어져 있는 열매 하나에도 손을 댈 수 없었다. 아무튼 대추나무단지를 빠져나온 오백리길은 다시 ‘회남로’를 향해 올라간다.

▼ 도로(회남로)에 올라서면 소가 춤추는 듯한 형국이라는 ‘우무동(牛舞洞, 법수2리)’. 법정 동리인 ‘법수리(法水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행정구역만 보은군이지 사실 대전시와 성황당 고개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경계마을이다. 4백 년 전 광산김씨가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 생겼다는 등 마을의 역사를 주렁주렁 매달은 빗돌이 도로가에 세워져 있었다.

▼ 오백리길은 도로(회남로)로 올라오자마자 다시 내려간다. 보은군의 랜드마크(land mark), ‘정이품송’이 그려진 버스정류장에서 호수(왼쪽) 방향으로 내려간다.

▼ 포장길을 따라 법수리로 향한다. 곡선의 아름다움을 품은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 가끔 길이 나뉘고 있었다. 아래 사진처럼 사거리도 만난다. 하지만 이정표는 세워놓지 않았다. 그 흔한 리본마저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앱(gpx track)의 도움 없이는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로, 6코스(대추나무 길)의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특징이라 하겠다.

▼ 고개를 넘으니 이국적으로 지어놓은 목조주택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개 짖는 소리가 너무 요란스럽다. 호기심에 이끌리더라도 다가오지는 말라는 모양이다. 아서라~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신념으로 수십 개 나라를 돌아다닌 내 기억 속에는 너희 집보다도 훨씬 더 멋진 집들이 수북이 쌓여있단다.

▼ 임도로 내려선지(우무동에서) 20분, 앗뿔사! 길이 끊겨버리는 최악의 상황과 맞닥뜨렸다. 만수위까지 차오른 대청호의 물이 ‘법수리 선착장’으로 연결되는 길을 삼켜버린 것이다. 물 따라 대청호반의 아름다움까지 사라졌다. 물이 찼다 빠지기를 반복하면서 만들어놓은 층층의 곡선과 함께, 그 위로 난 오솔길을 호젓이 걸어보는 낭만까지도 없애버렸다.

▼ 한달음이면 충분할 거리에 선착장이 놓였건만, 길을 삼켜버린 호수에는 말라비틀어진 나무들만 수북하다.

▼ 그렇다고 우무동까지 되돌아갈 수야 없는 노릇. 산비탈을 살펴보다 어느 산악회에서 매달아놓은 리본 하나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구세주를 만난 심정으로 산속으로 파고들었다.

▼ 그렇다고 길이 나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길의 개척은 오롯이 우리 부부의 몫이 됐다. 산짐승이나 다녔을 법한 흔적을 찾아가며 벼랑에 가까운 산비탈을 해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리다시피 해가며...

▼ 산속으로 파고든지 10분. 악전고투 끝에 데크로드를 두른 자그마한 연못에 내려섰다. 오백리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집사람이 걷고 있는 방향)으로 간다. 하지만 난 반대편으로 향했다. 이왕에 왔으니 ‘법수리선착장’을 곁눈질로라도 봐야하지 않겠는가.

▼ 하지만 4분쯤 되는 지점에서 길이 끊겨 있었다. 만수위에 가까운 대청호가 길을 삼켜버린 것이다.

▼ 선착장의 주차장으로 여겨지는 공터에서 왼편으로 난 길을 발견했다. 호수 너머로 아까 길을 찾아 헤매던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보통 때라면 1~2분이면 족했을 거리를 물이 차오른 탓에 15분이나 걸려 도착할 수 있었다.

▼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저 물체는 대체 뭘까? 물속으로 사라져버린 ‘법수리 선착장’의 시설물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법수리는 보은군(회남면)에 속한 산골마을이다. 하지만 대전시 경계에 놓인 지리적 여건 덕분에 근교농업을 주로 한단다. 또한 대청호에 물에 차면서 어촌마을로 변해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도 꽤 된단다.

▼ 집을 잃은 배들은 잡초 속에서 낮잠을 잔다. 고기잡이 나가는 주인이 찾아와주길 기다리며...

▼ 예로부터 효는 만행의 근본이라 했다. 그러니 법수리라고 해서 효부나 효자 하나 없었겠는가. 선착장에서 올라오다 ‘경주김씨’라는 효부의 기적비각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효행을 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위해(危害)하는 ‘희생효’가 우리나라 효의 대부분인데 글쎄다.

▼ 조금 더 걸어 ‘연꽃마을’에 닿았다. 연꽃마을은 법수리 일대에 조성된 연꽃단지 및 녹색농촌체험마을을 일컫는 이름이다. 2010년, 기존 6,600㎡ 규모 연꽃단지를 확장하고, 옛 회남초등학교 법수분교를 매입, 연 관련 체험장 및 식품제조 작업실로 리모델링하여 연잎차·연잎가루·연근 등 연(蓮)관련 농산품을 생산·판매하고 있다.

▼ 연꽃마을은 펜션과 캠핑장, 연꽃단지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각종 식용연과 수련, 수생식물들을 식재한 연못은 연꽃마을의 자랑거리로 꼽힌다. 데크 산책로를 곁들인 생태학습장으로 꾸몄는데, 이게 입소문을 타 연꽃이 만개하는 여름철이면 인생샷을 찍으려는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작품사진을 찍으려는 사진동호회원들까지 몰려들 정도로 붐빈다고 한다.

▼ 막상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보잘 것이 없었다. 연꽃은커녕 철 지난 잎줄기마저 누렇게 말라비틀어져가고 있다. 집사람도 그게 아쉬웠나보다. 조형물삼아 놓아둔 마차에 오르더니 연꽃 대신 사진배경으로 넣어주란다.

▼ 오백리길은 ‘회남로(571번 지방도)’쪽으로 올라간다. 그러다가 도로를 코앞에 둔 지점(우정횟집 앞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꺾는다. 이정표(어부동 날망 : 산수리 0.7㎞/ 대청호반 0.8㎞)’의 지시를 따르면 된다.

▼ 그러나 우리부부는 ‘회남로’를 따르기로 했다. 연꽃마을에서 만난 둘레길 도반의 조언(단축코스를 놓아두고 왜 돌아가느냐는)이 그럴 듯했기 때문이다. 다른 산악회에서 산행대장까지 한 경력의 소유자이니 어찌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튼 그 결정에 대한 반대급부는 오롯이 내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부동 날망’이나 산수리(山水里) 일대에서 만나게 된다는 전원 풍경을 모두 놓쳐버렸으니 말이다.

▼ 그렇게 올라선 도로에는 ‘어부동 종점’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어부동 마을의 한쪽 귀퉁이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이후부터는 도로(오백리길은 아니다)를 따라 ‘회남대교’로 간다. 참! 법수1리(어부동 날망)의 역사를 적은 비석이 도로변에 세워져 있으니 곁눈질로라도 읽어보자. 그래야 법수리(法水里)가 옛날 뒷산에 법수사(法水寺)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 4분쯤 더 걷자 또 다른 버스정류장, 이번에는 ‘어부동’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민가가 몰려있을 뿐만 아니라, 어부동지역 아동센터까지 들어선 걸로 보아 어부동의 중심마을이지 싶다.

▼ 어부동(漁父洞)은 어부들이 모여 산다는 의미를 지녔다. 대청댐이 건설되기 전 금강에서 어업을 생계로 하던 어부들이 이 마을(현재의 사음리 강변)에서 어울려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법수리를 중심으로 사음리, 산수리 일대를 다함께 아우르는 별칭이 되었는데. 아직도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많단다.

▼ 이정표(회남대교 1㎞/ 마름골 1㎞)가 가리키는 ‘마름골’로 향했다. 지름길로 오느라 놓쳐버린 산수리 일대의 풍경을 보고 싶어서다. 아무튼 작은 고개 하나를 넘자 ‘대추나무단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우무동의 것보다도 더 너른 대추나무 과수원이 능선 좌우로 길게 들어서있는 것이다. ‘날망’이란 ‘산등성이’의 충북지역 방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먼저 다녀간 이들이 거론하던 ‘어부동 날망’은 저곳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 호안까지 가보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매의 눈으로 째려보고 있는 집사람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호숫가를 걸어왔으면서 무얼 더 보겠느냐는 것이다. 그 아쉬움을 발아래까지 파고든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으로 달래며 발길을 돌린다.

▼ 어부동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도로(회남로)를 따른다. 아직도 가로수는 벚나무 차지다. 하지만 길의 폭이 좁은 2차선인데다 인도도 따로 없어 오가는 차량을 살펴가며 걸어야만 한다. 곁을 지나가면서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스칠 듯 위협까지 하는 운전자까지 있었다. 여기서 팁 하나! 앞에서 차가 올 경우 바깥쪽으로 바짝 붙어야하므로 좌측통행할 것을 추천한다.

▼ 이때 왼편 가로수 사이로 ‘인공 섬(수초재배 섬)’이 내다보인다. 인근 마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정화시키기 위한 ‘부유습지’로, 미나리 꽃창포 등 섬에서 재배되는 수생식물이 부영양화의 원인 물질인 질소와 인을 흡수해 대청호의 수질을 개선시킨다.

▼ 10분 남짓 더 걸어 ‘회남대교’에 닿았다. 지도를 보면 6구간 지형은 대전에서 한 줄기 산자락이 뻗어 나와 대청호 깊숙한 곳에 이른다. 반도와 같은 지형으로, 6구간의 시작점에서 보면 땅끝(土末)이라 할 수 있겠다. 해남의 ‘땅끝마을’처럼 이곳에도 정자까지 갖춘 작은 쉼터를 만들어놓았다. 반대편에는 전망 좋은 카페도 들어섰다.

▼ 오백리길은 이곳에서 대청호를 횡단한다. 땅끝인 이곳 ‘사음리’에서 또 다른 육지인 ‘신곡리’를 길이 450m의 다리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대전(보은군이지만 대전과 근접해 있어 그런 표현을 썼다) 땅과 보은 땅이 가장 가까이서 만난다고나 할까?

▼ 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일품이었다. 곡선의 미를 한껏 자랑하는 리아스식 호안으로도 모자라 금린(전망 좋은 식당·카페로 소문났다)에 귀여운 선착장까지 보탰다. 하긴 회남면이장협의회에서 제작한 달력에 이 부근이 표지모델로 등장했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 이제 구간 여정의 막바지다. 계속해서 회남로를 따르지만 그렇다고 삭막하지는 않다. 걷는 내내 대청호반을 옆구리에 매다는 덕분이다.

▼ 이때 대청호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나는 풍경이 펼쳐진다. 대청호의 특징 중 하나는 호숫가가 ‘리아스식’이라는 점이다. 후기 간빙기(間氷期)의 해수면 상승으로 산봉우리와 산등성이가 섬이나 곶으로 변한 현상인데, 인공이긴 하지만 이곳 대청호도 물에 잠기면서 그런 모양새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멋진 곳에 터를 잡은 이는 대체 누굴까? 한적한 전원생활을 꿈꾸는 나로서는 부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양중지(신곡리에 속한 자연부락)에는 쉼터가 들어서 있었다. 음식상(솔밭횟집)을 기다릴 여유야 없었지만, 그렇다고 잠시 쉬어갈 짬까지 내지 못하겠는가. 구멍가게에서 산 캔맥주를 마시며 망중한을 즐겼다. 집사람의 손에는 물론 아이스크림이 들렸다. 참고로 ‘양중지’란 지명은 옛날 승지 벼슬한 사람이 많이 났다는 데서 유래됐단다.

▼ 조금 더 걸어 만나는 ‘양지공원가든’. 식당의 커다란 규모도 규모지만, 배불뚝이 화상과 거북이 등 커다란 돌 조형물이 더 눈길을 끈다. 식당에서 바라보는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도 빼놓을 수 없다.

▼ 길을 걸으며 만나는 대청호의 풍광은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대청호에는 앙증맞은 섬 하나가 떠있고, 그 너머의 산들, 그 위로 떠가는 구름, 이게 한데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 대청호를 건넌지 12분. ‘신곡공원’에 이른다. 대청호반의 언덕에 비좁지만 작은 터를 닦고, 정자와 벤치 등을 배치해 공원을 만들었다.

▼ 신곡마을 앞에도 쉼터가 들어서 있었다. 카페를 겸한 음식점(판장횟집)이 인기가 있는지 꽤 많은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 옛 영화가 그리워서였을까? 신곡마을 앞은 데크로드를 놓고 꽃길을 조성하는 등 단장이 잘 되어 있었다. 참고로 대청댐이 준공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 신곡리는 회남면의 소재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1980년 대청호에 물이 차면서 마을 대부분이 물속에 잠겨버렸고, 면사무소와 초등학교 등 관공서는 거교리로 옮겨졌단다.

▼ 강태공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1인용 조각배에 올라앉아 낚시 삼매경인 그들의 여유가 부럽다. 하지만 배가 뒤집히는 사고도 일어난다니 조심할 일이다.

▼ 8분쯤 더 걸으면 이번에는 ‘정문공원(旌門公園)’이다. 이곳도 역시 호숫가 비탈진 언덕에 걸터앉았다. 공원의 이름은 이곳에 있던 효자 양달해와 그의 처 효열부 안동김씨의 정문(旌門)에서 따왔다.

▼ 공원에서는 대청호(이곳은 금강이 아니라 회남천이라고 한다)의 시원한 풍광을 마음껏 즐겨 볼 수 있다. 호수 너머의 데크로드는 6구간이 종료되는 남대문공원의 시설물일 것이다.

▼ 날머리는 ‘남대문공원’(보은군 회남면 남대문리)

571번 도로와 문의에서 넘어온 ‘염티길(509번 지방도)’이 만나는 삼거리를 지나 ‘남대문교’를 건넌다. 그러자 널따란 주차장에 화장실까지 갖춘 ‘남대문 공원’이 길손을 맞는다. ‘유래비’는 ‘남대문’이란 지명의 내력을 적고 있었다. 둘레가 2.722m쯤 되는 호점산성(虎岾山城)의 남문 밖에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산성의 역사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13.32km를 걷는데 4시간10분이나 걸렸다. 길에서 길을 찾느라 헤맨 탓일 것이다.

▼ 공원에는 ‘녹색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도농교류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토·일요일 열린다는데 밴드까지 동원돼 흥을 돋운다. 저 행사는 주민들이 직접 기른 농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판다는 슬로건을 내건다. 하지만 우리 동네 할인마트보다 조금 더 비쌌다. 장터에 외지 손님들 대신 주민들만 오락가락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백골산성 낭만길)

 

여행일 : ‘22. 9. 17(토)

소재지 : 대전광역시 동구 신상동·신하동·신촌동·사성동 및 충북 옥천군 군북면 일원

여행코스 : 신상교→흥진마을(전망대)→바깥아감→강살봉→백골산성→신절골→구절골→방축골→카페 팡시온→신촌동→사성리→와정삼거리(거리/시간 : 13km/ 실제는 사성리까지 12.03km를 4시간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는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과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리’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을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다섯 번째 구간인 ‘백골산성 낭만길(13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호숫가를 걸으며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3km나 되는 산길(백골산)과 차도(마지막 3km 구간은 인도가 따로 없다)를 걸어야만 하는 단점도 있다.

 

▼ 들머리는 ‘신상교’(대전시 동구 신상동)

경부고속도로 대전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좌회전, 비래서로와 신상로를 잇따라 타고 대청호까지 오면 ‘신상교(新上橋)’가 반긴다. 신상교 건너 지역농산물 간이판매장 근처에 대형버스 주차공간이 있다.

▼ 이름 값 못하는 구간. ‘대청호 오백미(五白眉)’ 가운데서도 으뜸인 ‘벚꽃길’을 놓아두고도, ‘백골산성 낭만길’이란 구간 브랜드로 인해 가파른 산길을 3.3km나 걸어야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볼거리인 백골산성에서의 조망은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며 겪어야 하는 고생에 비해 가성비가 너무 낮다.

▼ 신상교 근처에서 호숫가로 내려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트레커들을 위한 배려인지 초입에 ‘대전 시티투어’ 승강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오백리길 안내도 옆에 세워놓은 ‘자살예방’ 푯말도 눈길을 끈다. <안아줄게요, 들어줄게요, 함께할게요.>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身體髮膚)이니 자신의 생명을 아끼는 것 또한 효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 몇 걸음 걷지 않아 만난 삼거리. 명찰(신상교)까지 단 이정표(5구간 갈대밭추억길/ 4구간 신선바위)는 이곳이 4·5구간의 경계지점임을 알려준다.

▼ ‘흥진마을의 갈대’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대청호의 수변을 끼고 도는 오백리길 5구간 초반부(3.1km)를 소개하고 있는데, 길 양옆으로 억새와 갈대가 풍성하게 자라나 있어 무릉도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준다고 한다.

▼ 300m쯤 더 걸어 ‘흥진마을’에 도착했다. 조금 전에 만났던 안내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민초들이 찾아 헤매는 ‘이상향’쯤 되겠다. 억새와 갈대로 인해 이 부근이 무릉도원으로 변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 마을 앞 주차장에는 ‘대청호 오백리길 대전 권역’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6개 구간(1~5, 21)을 지도와 도표로 소개한 다음, 접근 방법과 이용 가능한 맛집을 추가로 적었다. 해당 구간(5구간)에 대한 소개를 따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 안내판의 예고대로 이 구간의 특징은 갈대다. 오백리길 대전구간에서 가장 멋진 갈대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무성한 갈대밭 S라인의 아름다운 길을 이 구간의 포인트로 꼽고 있었다. 길을 걷다보면 타원형을 이룬 백사장도 눈에 띈다고 했다. 이때 물속이 훤히 내다보일 정도로 한없이 맑은 물도 만난단다. 하지만 대청호의 물이 가득 차올라 그런 풍광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 길은 트레커만의 전용은 아닌가 보다. 속도감에 취한 듯 페달을 밟아대는 라이더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 갈대밭 너머 ‘신상교’는 여전히 물에 잠겨있다. 아니 찰랑거리는 물을 피해 신상교를 건너며,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2주 전보다도 오히려 물이 더 차올라 있었다.

▼ 대청호반길의 ‘갈대밭 추억길’을 겸하는 이 구간은 대청호의 호반을 끼고 흥진마을 갈대와 억새숲길을 돌아보는 약 3.1km의 산책로이기도 하다. 파란 호숫물과 진초록 갈대, 거기다 주변 숲까지 더하면 자연은 아름다운 앙상블을 연출한다.

▼ 시야가 트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벤치를 놓아두었다. 시간의 흐름을 잊은 양, 한 쌍의 남녀는 망중한을 즐긴다. 저래서 5구간에 ‘낭만’이란 단어를 덧댔나보다. 저리도 아름다운 경관에 연인들의 사랑까지 더해지니 어찌 낭만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벤치에라도 앉으면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대청호오백리길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아름다운 경관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레킹마니아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1980년 대청댐 건설 이후, 주변이 각종 개발규제지역에 포함돼 자연경관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로 양호하게 보존되어왔기 때문이다.

▼ 중간 지점에서 만난 정자는 자리를 잘못 잡았다. 시야가 트이지 않으니 전망대로는 실격, 그저 쉼터의 기능만 수행할 따름이다.

▼ 호수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의 끝을 반환점 삼은 둘레길은 이제 반대편 호숫가를 따른다. 갈대밭에 울창한 숲이 더해진 구간이라 하겠다.

▼ 호숫가 소박한 숲길을 걷다보면 가을꽃들이 길손을 맞이한다. 갈대밭만으로는 주민들의 양에 차지 않았나보다. 길가에 코스모스와 무궁화, 나리 등 다양한 꽃들을 심어 가을의 풍치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켰다.

▼ 갈대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 구간은 대청호에 물이 비었을 때 마사토 위를 맨발로 걸어야 제격이라고 했다. 특히 은빛 갈대가 가득할 때의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란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행운은 없나보다. 대청호에는 물이 가득했고, 꽃대만 내민 갈대는 은빛으로 만개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 길을 나선지 40분, ‘조선’이라는 오리구이 전문식당에 이른다. 오백리길 안내판에까지 올랐으니 맛이야 보증된 셈. 하지만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인지라 잠시 둘러보기만 했는데, 허브와 수크렁 등으로 한껏 멋을 부린 정원이 눈길을 끈다. 1993년 열린 대전엑스포의 마스코트인 ‘꿈돌이’도 한몫 거들고 있었다.

▼ 대청호반을 따라 한 바퀴 빙 돌아 바깥아감 마을에 도착했다. 아감마을의 바깥에 있다고 해서 바깥아감이다. 아감이란 이름은 이 마을 아가미산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마을 앞, 바람개비로 한껏 멋을 부린 ‘벚꽃한터주차장’은 넓기까지 했다. 하긴 ‘갈대밭 추억길’로도 모자라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니 찾아오는 이들이 오죽이나 많겠는가.

▼ 오백리길은 ‘바깥아감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회남로(571변 지방도)를 가로지른다. 이어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초입에 오백리길에서 내건 이정표(백골산성 2.6㎞)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이곳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백골산성을 경유하는 정규 탐방로는 물론 도로를 가로지른다. 하지만 난 회남로를 따를 것을 추천하고 싶다. 볼거리도 없는 가파른 산길을 3km나 헤매는 것보다는, 벚꽃나무로 뒤덮인 데크로드를 따르는 게 바람직할 것 같아서다.

▼ 동구(대전시)는 관내 ‘대청호오백리길’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곳을 백미(白眉)로 지칭, 총 5개 코스(벚꽃길 코스·촬영지코스·추동 생태코스·냉천골 사진코스·황새코스)를 선정했다. 그 첫째가 이곳 바깥아감에서부터 충북 옥천군 회남면까지 이어지는 벚꽃길인데, 길이가 무려 26.6Km나 돼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 하지만 난 백골산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백골산성’을 5구간의 브랜드(백골산성 낭만길)‘로 내놓았으니, 트레킹의 궤적을 기록으로 남겨가는 나로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난 무지막지한 고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갈 지(之)’자를 쓰지 않고서는 고도를 높일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되는 반면,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가 전혀 없는 산길은 걷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 10분쯤 죽을 고생을 하고나서야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섰다. 그런데 더 높은 봉우리 하나가 어서 오라는 게 아닌가. 하지만 내 행복감을 만족시켜줄 ‘강살봉’은 저곳도 아니었다. ‘산너머 저쪽에 행복이 있다기에 사람들과 함께 찾아갔다가 울면서 돌아왔다’는 ‘칼 부세’의 경고가 떠오르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 벤치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고생한 다리품을 잠시라도 풀고 가라는 듯 두어 곳에 벤치를 놓아두었다.

▼ 얼마나 터가 좋았으면 이런 산중, 그것도 이렇게 놓은 곳에까지 묘를 썼을까?

▼ 가파른 오르막길은 가고 또 가도 끝날 줄 몰랐다. 사나운 기세도 수그러들지를 몰랐다.

▼ 산길로 들어선지 40분. 그 고생을 해서 올라선 ‘강살봉(335m)’은 텅 비어 있었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나 선답자의 리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게 못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누군가 매직으로 나무기둥에 ‘강살봉’이라 적어놓았다. 그나저나 요즘은 고사성어도 통하지 않는가 보다. 고진(苦盡)이 끝났건만 감래(甘來)가 찾아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 강살봉을 지나면서 산길이 고와졌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지는데, 경사까지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만하다. 거기다 소나무와 참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룬 산길은 산뜻하고 안온했다.

▼ 7분쯤 지나 도착한 두 번째 봉우리 ‘꾀꼬리봉(324m)’은 낙서까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이 대청호오백리길임을 알리는 팻말이 전부였다.

▼ 잠시 후 삼거리를 만났다. 그런데 이정표(백골산성 0.5㎞/ 요골 1.3㎞/ 강살봉 0.4㎞)에 나타난 요골은 대체 어디를 지칭하는 것일까?

▼ 가파른 오르막길이 또 다시 시작된다. 아니 버겁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아무튼 이 구간도 ‘갈 지(之)’자를 쓰고 나서야 고도를 높일 수 있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0분(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 드디어 ‘백골산(346m)’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정상석이 없기는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두 개나 되는 이정표(#1 : 한식마을 1㎞/ 시·도경계 1.3㎞/ 강살봉 0.9㎞, #2 : 태봉정 1.4㎞/ 구절골 1.1㎞)도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그저 누군가가 매달아놓은 정상표지판이 이 모든 것들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보잘 것이 없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조그맣게나마 숲이 열리는 정상표지판의 뒤가 전부라고나 할까? 하지만 작아도 작은 것이 아니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눈에 들어오는 리아스식 호안의 아름다운 곡선은 만만치가 않았다.

▼ 이곳에는 백골산성((白骨山城, 대전시기념물 제22호)이 있었다고 한다. 백골산 정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400m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가파른 지형에 쌓여진 까닭에 완전히 무너져 내려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니 정상 부근에서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 불완전한 조망의 아쉬움은 100m쯤 떨어진 다른 봉우리(묘지가 있었다)에서 달랠 수 있었다. 대청호의 물길이 시원스럽게 들어오는 게 백골산성의 장대(將臺) 자리로 이만한 곳이 없겠다. 백골산성이 백제가 신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는 초소 역할을 했다니 말이다. 지금은 대청호가 삼켜버렸지만, 산성이 축조될 당시만 해도 신라를 마주보고 금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백골산성은 육로와 수로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 소나무 아래로 다가가자 대청호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호수는 수많은 산봉우리들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수면을 드러내었다 숨겼다 한다. 산자락과 만난 호반이 올록볼록한 리아스식 해안을 쏙 빼다 닮았는데, 그 중앙에 잠시 후에 들르게 될 ‘방축골’이 놓여있다.

▼ 이제 산을 내려갈 일만 남았다. 하산 지점인 한식마을까지는 1km. 경사가 조금 심하지만 내려가는 길이니 큰 부담은 없다. 하지만 나에겐 지옥의 구간이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티눈 때문에 오른발이 부담스러운데, 새로 산 신발에 시달린 왼발에 물집까지 생겨버린 것이다. 둘레길 도반인 ‘즐산’님이 건네준 밴드(Bandage)가 아니었으면 오도가도 못 할 뻔했다.

▼ 정상에서 내려선지 20분. 안부에서 삼거리(이정표 : 전망좋은 곳 0.05㎞/ 한식마을 0.53㎞/ 백골산성 0.47㎞)를 만났다. 둘 모두 한식마을로 연결되지만, 오른쪽 길이 조금 편하다고 보면 되겠다.

▼ 그런데 맞은편 능선을 올라가라는 게 아닌가. 두 방향 모두 한식마을로 연결되나, 오른편으로는 가지 말란다. 다리가 위험해서 통행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 50m쯤 올라간 산봉우리에는 ‘태봉정’이란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산봉우리의 이름이 ‘태봉’이란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전망좋은 곳’이라 적혀있던 이정표가 무색하게 전망은 제로였다. 이정표의 표기를 바꿔야 할 듯.

▼ ‘태봉정’부터는 침목계단의 연속이다. 길고 긴 계단이 끝났다싶으면 또 다른 긴 계단이 나타나는 모양새이니, 집사람처럼 무릎이 성치 않은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구간이 될 수도 있겠다.

▼ 그렇게 15분쯤 진행하자 아까 헤어졌던 두 길이 합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정표(태봉정 0.4㎞/ 백골산성 1.0㎞) 및 등산안내도가 조금 낯설다. 이제껏 보아오던 오백리길의 시설물이 아니고, 오롯이 백골산성을 찾는 이들을 위한 정보를 적었다.

▼ 몇 걸음 더 걸어 591번 지방도(이정표 : 와정삼거리 5.7㎞, 구절골 0.5㎞)로 내려섰다. 이정표에 적혀있던 ‘한식마을’이다. 하지만 버스정류장은 ‘신절골’로 적고 있었다. 대청호가 생기면서 수몰된 주민들이 새롭게 정착한 터가 이 부근에 있다더니 이곳을 두고 한 말이었던가 보다. 아무튼 이후 ‘구절골’까지는 벚꽃길의 데크로드를 따르게 된다.

▼ 코스를 단축한 집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었던 ‘SONG CAFE’를 지나자마자 ‘팡시온’ 입간판이 잠시 들렀다 가란다. 다른 이들의 글에서 곁눈질한바 있는 ‘꽃님이 식당’의 간판이 바뀌었나 보다. 아무튼 코너에 세워놓은 이정표가 ‘방축골’로 들어서라니 이를 따르면 되겠다.

▼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구절골’로 들어선다. 대청댐 건설로 수몰된 절골마을 중에서 남은 가구들로 이뤄진 마을이다. 참고로 1500년 전 백제와 신라가 패권을 다툴 때 지금의 대청호는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그때 한 스님이 죽은 병사들을 위해 이곳에 절을 세우고 이들의 넋을 위로했다고 해서 ‘절골’이란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 마을 앞에는 ‘신하 한터’가 들어앉았다. ‘한터’가 넓은 빈자리를 의미하는 순수 우리말이니 ‘신하동(新下洞)’에 위치한 널따란 주차장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 오백리길은 이제 ‘꽃님이 반도(방축골의 또 다른 이름)’를 향해 고개를 넘어간다. 대청호 호반을 따라 걸으며 만나는 그림 같은 풍경으로 유명한 곳인데, 이곳에 있던 한 식당(지금은 팡시온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의 이름이 좋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 고개를 넘으면 대청호 가운데로 돌출된 지형이 나온다. 삼면이 호수로 둘러싸인 풍경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다. 고개를 넘다가 길에서 잠시 벗어나니 대청호가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 드문드문 떠있는 작은 섬으로 인해 보는 재미를 더해주는 풍경이 펼쳐진다.

▼ 브런치 카페인 ‘라크블루’를 지나자 ‘경치좋은 마을’이란 찬사까지 덧붙인 ‘방축골’의 표지석이 길손을 맞는다. 삼거리인 이곳에서 왼편은 대청호수질관리소, 오백리길은 오른편에 있는 ‘팡시온’을 향해 간다.

▼ 수질관리소 쪽으로 나가자 다시 한 번 대청호가 펼쳐진다. 잔잔한 호수와 불쑥불쑥 솟은 봉우리들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호수와 만나는 호반의 곡선미는 부드럽고 포근하다.

▼ 조금 더 걸으니 ‘레이크 뷰’에 이어 ‘팡시온’이 나온다. ‘꽃님이 반도’에는 이렇듯 풍광이 좋은 카페들이 많다. 아픈 다리도 달랠 겸 찾아보면 좋으련만 갈 길 바쁜 나그네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요즘은 ‘느림의 미학’이 대세라던데 이 무슨 난센스란 말인가.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실 여유도 없다니.

▼ 지금은 추억의 이름이 된 ‘꽃님이 식당’. 그곳의 야외 테이블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압권이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은 ‘팡시온’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건물 외벽을 모두 통유리로 넣어 실내에서도 대청호의 아름다운 경관을 가감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카페는 이를 기대하고 찾아온 손님들로 바글거리고...

▼ ‘팡시온’ 주차요원의 도움을 받아 반도의 끝으로 나가봤다. 이곳 방축골은 대청호반의 오랜 명소 가운데 하나다. 대청호의 경관이야 어디에서나 빠지는 곳이 없지만 방축골은 그중에서도 손꼽힌다. 시간이 멈춘 듯한 한적함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 시골길의 추억이 떠오르는 호숫가를 따라 급할 것 없이 걷다보면 한적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5분쯤 더 걷자 반도의 끝에 다다른다. 하지만 호수로 뻗어나간 모래톱에는 버드나무숲이 호수 위에 반영을 만들고 있을 뿐, 백골산 정상에서 바라보던 그 절경은 아니었다. 물이 빠져나간 모래톱을 걸으며 바라봤더라면 한결 업그레이드되었을 텐데 아쉽다.

▼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방축골 표지석’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쪽으로 향한다. 곧이어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밤실마을 애향탑 1.0㎞)에서도 왼쪽이다.

▼ 이어서 꽃님이반도의 왼쪽 호안을 따른다. 이때 대청호의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하지만 다른 곳에 비해 한참이나 격이 떨어진다.

▼ 지방도로 연결되는 이 구간은 제법 높은 고개를 넘기도 한다. 보통 때야 뛰다시피 넘을 수도 있겠지만, 두 발이 모두 불편한 나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의 진행은 불가능할 것 같다.

▼ 방축골의 반도를 둘러보는 데는 50분이나 소요됐다. 앱에 찍힌 거리가 3.1km이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571번 지방도로 내려선 오백리길은 이제 도로를 따라간다. 지방도지만 오가는 차량은 무척 많았다. 하지만 벚꽃나무 아래로 데크로드를 만들어놓았으니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 이때 신촌동(新村洞, 이정표는 ‘밤실마을’로 적고 있었다) 너머에서 대청호가 얼굴을 내민다. 신촌리를 포함한 수많은 마을들을 삼켜버린 호수이건만, 나는 길에서 만난 그 풍경이 너무 예뻐 셔터를 눌러댈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주변 풍경이 대청호의 움직임을 멈춘 수면에 그림처럼 반영으로 머문다.

▼ 오백리길은 이제 ‘벚꽃 길’을 따른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왕벚나무가 자라 꽃길로 승화된 아름다운 길로, 대청호반을 따라 길이가 무려 26.6㎞에 달한다. 회인선이라고도 부르는 지방도 571호선 구간이 포함돼 과거에는 ‘회인선 벚꽃길’이라고 했지만, 최근에는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로 부르고 있다.

▼ 도로로 내려선지 10분, ‘신촌리 애향탑’을 만났다. 고향을 떠나야했던 신촌리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세운 탑이다. 탑은 마을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대청호에 수몰된 이후 겪어야만 했던 망향의 그리움을 담았다. 그래서일까? 애향탑 앞에서 바라본 대청호는 푸르고 애잔해 보였다.

▼ 4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신촌 한터’가 반긴다.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것으로 보아 오롯이 벚꽃길 방문객들을 위한 시설인가 보다.

▼ 주차장에는 ‘행복누리길’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행복누리길이란 신상동 바깥아감마을 삼거리에서 사성동애향탑까지 이어지는 벚꽃길을 말한다. 대청호반과 벚꽃길이 겹치는 이 구간에 보행데크와 쉼터 등 각종 편의시설을 설치하여 시민들의 행복한 휴식공간으로 꾸몄다.

▼ 주차장 한켠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전망대에 오르자 아까 거닐었던 꽃님이반도가 호수 건너에서 나타난다. 병풍처럼 펼쳐진 산과 호수를 향해 뻗어나간 반도, 그리고 아름다운 집들이 대청호에 그대로 투영되면서 한 폭의 풍경화로 그려진다.

▼ 몇 걸음 더 걸어 만나는 ‘신촌2전망대’. 1전망대에서 만났던 풍경과 똑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 사성동(沙城洞)으로 향하는 도중 또 다시 대청호를 엿볼 수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은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기다란 하늘색 깁(명주실로 조금 거칠게 짠 비단)을 펼쳐놓은 듯 호수는 한없이 푸르고, 잔잔한 수면 위에 동동 떠있는 자그만 섬은 조금도 외롭지 않아 보인다.

▼ 신촌동애향탑에서 20분, ‘모래재’ 버스정류장 도착했다. 날머리인 ‘와정삼거리’는 아직도 3km쯤 더 걸어야만 한다. 하지만 고장나버린 내 발은 그만 걸으라며 아우성이다. 그러나 어디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히치하이킹’에 도전해봤지만 멈춰주는 차가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다니러 온 듯한 현지인께 부탁해 트럭을 얻어 탈 수 있었다. 넉넉한 인심으로 소문난 충청도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 날머리는 ‘와정삼거리(방아실)’(옥천군 군북면 대정리)

날머리(방아실)에 도착한 다음에도 넉넉한 인심은 수그러들지 몰랐다. 산악회 버스를 찾고 있는데, 우리를 내려준 트럭이 후진을 해오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300m나 떨어 진 지점에 버스가 있었다며, 절뚝거리며 걷는 나를 그곳까지 태워다준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배려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이들이 있기에 ‘충청도 인심’이라는 기분 좋은 ‘브랜드’가 생겨났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은 4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이 12.03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3km의 산길로도 모자라 절뚝거리기까지 했던 악조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호반낭만길)

 

여행일 : ‘22. 9. 3(토)

소재지 :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추동·주산동·신상동 일원

여행코스 : 윗말뫼→명상정원(슬픈연가 찰영지)→가래울→자연수변공원→황새바위→연꽃마을→금성마을 입구→엉고개→신상교(거리/시간 : 12.5km/ 실제는 13.17km를 3시간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는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과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리’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을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네 번째 구간인 ‘호반낭만길(12.5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호수와 습지·억새밭·숲·오솔길을 함께 즐길 수 있다.‘호반 낭만’이란 이름대로 대청호의 리아스식 호안을 따라 걷다보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풍광들을 숱하게 만난다.

 

▼ 들머리는 ‘윗말뫼 주차장’(대전시 동구 직동)

경부고속도로 대전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좌회전, 비래서로와 신상로를 잇따라 타고 대청호까지 온다. 이어서 대청호수로를 타고 댐 쪽으로 2km남짓 올라가면 ‘마산동 마을’이다. 마을 앞 버스정류장(원마산)에서 냉천로(오른쪽)로 옮겨 들어가면 잠시 후 ‘위말뫼 주차장(주차장 입구의 은진서씨 동파공 제실인 ’동파제‘를 참조하면 되겠다)’에 이른다. 참고로 네이버지도‘는 4구간’의 출발지를 ‘마산동 마을’로 적고 있었다. 최근 호숫가를 따라 길을 새로 내면서 들·날머리가 바뀐 모양이다.

▼ 대청호오백리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알려진다. 동구(대전시)에서 정한 ‘다섯 백미(五白眉)’, 즉 5곳의 빼어난 경관 중 3곳이 이 구간에 있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특히 호수를 향해 툭 튀어나간 아름다운 곶(串)들은 이 구간의 자랑거리. ‘슬픈 연가’와 ‘창궐’ 등 수많은 영화·드라마의 촬영지가 되었을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 호숫가로 내려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난간을 세웠는가 하면 바닥에는 야자매트를 깔아 질퍽거릴 염려까지 없애버렸다. ‘윗말뫼 주차장’을 만들면서 도로를 따르던 옛길 대신 새로 낸 모양이다.

▼ 대청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호숫가가 ‘리아스식’이라는 점이다. 후기 간빙기(間氷期)의 해수면 상승으로 산봉우리와 산등성이가 섬이나 곶으로 변한 현상인데, 인공이긴 하지만 이곳 대청호도 물에 잠기면서 그런 모양새로 변한 것이다. 그런 호기를 지자체가 놓칠 리가 있겠는가. 바다를 향해 나간 곶(串)에 벤치를 놓아 탐방로의 품격을 한층 업그레이드시켰다. 호반+낭만이란 구간 브랜드에 걸맞도록 꾸몄다고나 할까?

▼ 탐방로는 한마디로 잘 다듬어져 있다. 호숫가를 따라 널찍하게 길은 내었는가하면 물이 차있는 곳에는 다리처럼 ‘데크 로드’를 놓았다.

▼ 4구간(호반낭만길)은 대청호의 서안(西岸)을 따라 이어진다. 때문에 걷는 내내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다.

▼ 야자매트를 깐 고속도로 수준의 길을 걷는다. ‘무장애 탐방로’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게다.

▼ 길을 나선지 17분, 주차장에 화장실까지 갖춘 ‘마산동 쉼터’에 이른다. 호반낭만길의 하이라이트랄 수 있는 ‘명상정원’과 ‘슬픈 연가 촬영지’의 실질적인 들머리이다. 카페는 물론이고 식당도 셋이나 들어서있어. 쉬어가기에도 딱 좋은 지점이다.

▼ 쉼터에는 액자처럼 생긴 ‘포토죤’이 만들어져 있었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액자 프레임을 소품삼아 냉큼 포즈부터 취하고 본다. 호반낭만길은 곳곳에 이런 포토죤을 만들어 놓았다. 덕분에 우린 걷기를 떠나 풍경에 흠뻑 빠져보는 기회가 되었고...

▼ 이후부터는 다시 데크로드를 따른다. 흙길을 낼 수 없는 호숫가를 따라 다리 모양으로 길을 냈는데, 나무 등 기존의 지형지물을 손대지 않으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중간 두어 곳에 쉼터를 만들어 두는 센스도 발휘했다.

▼ 5분쯤 걸었을까 길이 둘로 나뉘면서 탐방객의 선택을 강요한다. 이정표(명상정원↖ 600m/ 명상정원↗ 300m)가 양쪽 모두에 ‘명상정원’을 적고 있는 것이다. 내 선택은 왼쪽이었다. 340m 지점에 전망대가 있다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아까도 얘기했듯이 대청호는 리아스식 호반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호수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저 곶(串)도 그중 하나. 지자체는 맨 끄트머리(명상정원에서 300m 지점)에 전망데크를 만들어 대청호의 풍광을 맘껏 눈에 담을 수 있도록 했다. 그 경관을 소품과 함께 담아갈 수 있도록 액자형 포토죤을 만들어두었음은 물론이다.

▼ 난간에 서면 대청호가 발아래로 깔린다. 국내에서 3번째로 큰 대청호는 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생겨났다. 이때 대덕과 옥천의 많은 마을이 수몰되는 아픔도 있었지만 댐 건설로 인해 경제 산업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고, 대청호가 만들어낸 풍경은 또 다른 관광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 또 다른 곶에는 정자를 지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참! 데크 전망대부터는 흙길을 걷게 된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 정자에 이르면 잠시 후 들르게 될 또 다른 곶이 눈앞에 펼쳐진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곡선의 물가 모래밭이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대청호의 수위가 만들어놓은 예술작품이다. 물이 조금씩 빠져나갈 때마다 호수의 파장이 층층의 예쁜 무늬를 만들어놓았다

▼ 탐방객의 눈을 현혹시키던 장소에 이르자 구불구불한 호수선이 한 폭의 그림이다. 경사가 완만한 주변은 황토색 띠를 허리에 찬 풍경을 선사한다. 이곳도 포토죤으로 손색이 없었다. ‘대청호오백리길’ 조형물과 대청호반을 한꺼번에 넣는다면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도 있겠다.

▼ 다음은 명상정원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이때는 호숫가를 직접 걸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대청호의 물이 찼다 빠지기를 반복하면서 만들어놓은 층층의 곡선 위에 오솔길이 나있다. 이 길은 올 가을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하는 ‘가을 비대면 관광지 100선’에 꼽히기도 했다. 그러니 천천히 음미하며 걸어볼 일이다.

▼ 잠시 후 도착한 ‘명상정원’은 쉼터로 꾸며져 있었다. 벤치는 지붕을 씌웠고, 식탁형의 의자는 아예 돌로 만들었다. 차분히 앉아 명상에 잠겨보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대청호 물속에 잠겨버린 옛 마을 주민들의 심정이 되어...

▼ 명상정원의 끝자락, 휑한 공간은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무대가 된다. 이국적이라고도 평가받는 공간에는 ‘창궐’의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얼굴을 넣으면 극중 출연자로 변하는 기교까지 부렸다.

▼ 수몰민이 떠난 자리는 이제 오리 떼의 놀이터가 됐다. 실향민은 통일되면 고향땅을 밟는다는 희망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하지만 수몰민은 그런 희망조차 품을 수 없단다. 물 뺄 일이 없는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볼 수야 없는 노릇. 주민들은 하나둘 떠나갔고, 그 빈자리를 저 오리들이 채워나갔을 것이다.

▼ 호수와 맞닿은 언덕의 끝, 그 건너편에는 하얀 모래로 둘러싸인 섬 하나가 외롭게 떠 있다. 갈수기에만 길이 생긴다는 뜬섬, ‘홀로섬’이다. 물이 빠져나가면 해변을 연상시키는 모래사장과 섬 한가운데 서 있는 나무가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고 한다.

▼ 이곳은 일망무제의 조망으로도 유명하다. 코앞으로 다가온 ‘홀로섬’은 물론이고, 멀리 보이는 첩첩이 쌓인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그 위를 뭉실뭉실 떠가는 구름, 어느 유명화가가 저런 풍광을 화폭에 담아낼 수 있을까.

▼ 몇 걸음 더 걸으면 ‘슬픈 연가(권상우·김희선 주연)’ 촬영지다. 엇갈린 운명 속에 서로를 사랑하게 된 네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MBC에서 ‘공전의 히트’라는 사고를 쳤었다. 그밖에도 <나의 절친 악당들> <7년의 밤> 같은 현대물과 <창궐> <역린> 같은 시대물 등 수많은 작품들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던 모양이다. 길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안내판들이 그 증거다.

▼ 세트(두 주인공이 어린 시절 추억을 쌓던 오두막집)는 철거된 지 이미 오래, 서너 곳에 세워놓은 푯말만이 이곳이 드라마 촬영지였음을 알려준다. 지자체는 그 빈자리를 액자형의 포토죤으로 채워 넣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으로도 모자라, 권상우와 김희선의 잔영까지 넣어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촬영지 부근, 대나무에 둘러싸인 담장과 장독대가 눈에 띈다. 대청호에 수몰된 옛 풍경을 복원해 놓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터를 잘못 잡았다는 생각은 나만의 편견일까?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물속마을 정원’이 제 자리일 것 같기에 넋두리를 늘어놔봤다.

▼ 시원한 호수바람을 맞으며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몰민의 옛 추억을 어루만지는 ‘물속마을 정원’을 만난다. 지난 1980년 대청호 건설로 수몰된 86개 지역 중 한 곳으로, 물에 잠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고 한다. 저녁이면 밥 짓는 냄새 가득하던 마을도, 친구들과 뛰어놀던 앞산과 뒷산도, 모두 물속에 잠겨 이제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단다.

▼ 이곳에 살던 사람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래선지 정원은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미로를 연상시키는 정원은 자그마했고, 그 주변에 이층의 정자와 물속마을 정원에 대한 안내판, 그리고 벤치 몇 개가 놓여있을 따름이다. 수몰의 기억보다는 그저 ‘관광 상품’으로 존재한다고나 할까? 참고로 1981년에 완공된 대청댐은 4075가구 2만6178명의 이주민을 만들어냈다.

▼ 몇 걸음 더 걸어 만나게 되는 삼거리는 헷갈리기 딱 좋은 곳이다. 오백리길 이정표(전망대 0.1㎞/ 물속마을정원 0.1㎞)는 100m 전방에 있는 전망대를 가리키는데, 또 다른 이정표(추동소한터 900m/ 명상정원 400m)가 이를 무시하고 곧장 ‘추동 소한터’로 가라는 것이다.

▼ 우리 부부는 오백리길 이정표를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100m쯤 떨어진 곳에서 데크 전망대를 만날 수 있었다.

▼ 전망대에 서면 반도처럼 호수 가운데로 길쭉이 나아간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방금 전까지 내 눈을 즐겁게 해주던 ‘명상정원’과 ‘슬픈연가 촬영지’다. 사람들은 대청호를 ‘내륙의 바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 바다는 도시의 시끌벅적한 해수욕장보다는 외딴 섬의 고요한 해변 같다.

▼ 전망대를 빠져나와 반대편 호안을 따른다. 100m쯤 더 걸으면 아까 갈려나갔던 지름길이 다시 합류되는 삼거리. 이후부터 탐방로는 습지를 헤집으며 나아간다. 다리모양 데크로드를 놓아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했음은 물론이다.

▼ 습지는 초봄과 가을이 제격으로 알려진다. 초봄이면 연두색 갈대와 야생초가 지표면을 뒤덮고, 가을에는 하얀 억새와 갈대들이 하늘거리며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게 그림처럼 아름답기에,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 인기가 높다. 낭만 여행지라고나 할까?

▼ 호반낭만길은 꽤나 멋을 부렸다. 탐방로 바닥에 판석(板石)을 깔아놓았을 정도로...

▼ 어느덧 4구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스 중 하나라는 ‘갈대밭’으로 들어선다. 키 큰 갈대들이 한들거리며 군무를 추고, 그 사이로 난 오솔길은 S자로 굽이굽이 흐른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10분(명상정원에서는 25분), 탐방로는 대청호수로의 도로변에 있는 ‘추동 소한터’에 이른다. ‘한터’가 넓은 빈자리를 뜻하는 순 우리말이니 작은 공터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듯 ‘호수낭만길’을 걷다보면 ‘한터’란 지명을 여러 번 만나게 된다.

▼ 탐방로는 도로(이정표 : 자연생태관 3.5㎞/ 마산동 삼거리 3.5㎞)로 올라서자마자 이별부터 고한다. 그리고 오솔길을 이용해 산속으로 파고든다. 큼지막한 무덤, 아니 강화도에 있는 고려 왕릉보다도 더 커다란 무덤이 눈길을 끄는 구간이다.

▼ 산속으로 들어선지 8분, 자그마한 고개를 넘자 이정표(슬픈연가 촬영지 2.6㎞/ 대청호 자연생태관 1.4㎞) 하나가 툭 튀어나온다. 아니 쌍으로 나타나면서 보는 이를 고민에 빠뜨려버린다. 왼편으로 가면 ‘전망 좋은 곳’이 나온다며 꼬드기는 것이다.

▼ ‘가지 않았으면’하는 집사람의 눈초리를 무시한 채 전망 좋다는 곳으로 향했다. 덕분에 두어 번의 오르내림은 달리다시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집사람이 눈꼬리를 치켜뜬 채로 기다리는데, 어찌 한가하게 걸어갈 수 있겠는가.

▼ 그렇게 5분쯤 진행했을까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벤치 하나가 놓여있는데, 이곳이 ‘전망좋은 곳’이란다. 벤치에 앉자 물가로 길게 뻗어내려 간 아름다운 능선이 쫙 펼쳐진다. 그 끄트머리 툭 튀어나온 부분은 사진작가들이 ‘바람의 언덕’이라 부르는 사진촬영의 명소다. 하지만 가보지는 못했다.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집사람이 머릿속을 맴도는데 ‘언감생심’ 아니겠는가.

▼ 오른편에는 미나리 꽃창포 등이 식재된 ‘인공 섬(수초재배 섬)’이 아름답게 떠 있다. 마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정화시키기 위한 ‘부유습지’다. 그건 그렇고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대청호의 풍광은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대청호와 그 너머의 산들, 그 위로 떠가는 구름, 이게 한데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대청호자연생태관’쪽으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추동습지’에 이른다. 습지란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기능도 있지만 다양한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서식지를 제공한다. 철새도래지로 알져진 저 습지에는 수달·원앙·말똥가리·맹꽁이 등 다양한 생물들이 함께 살아간단다. ‘대전시 아름다운 자연생태 7선’에 포함된 이유일 것이다.

▼ 습지에는 활처럼 휜 데크길과 2곳의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억새·갈대 군락과 버드나무·야생초 등이 서로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광을 조금 더 편하게 살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시판(詩板)과 안내판 등의 시설이 낡아 글씨를 알아볼 수 없다는 흠도 보였다.

▼ 습지를 지나면 ‘가래울마을(추동)’이다. 가래나무가 많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데, 원래의 오백리길은 저 골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대청호자연생태관을 거쳐 ‘자연수변공원’으로 나온다. 하지만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는 마을로 들어가지 말란다. 코스가 변경되었으니 그냥 ‘대청호수로’를 따라 수변공원으로 가라는 것이다.

▼ 덕분에 우린 1.3km 정도를 단축할 수 있었다. 걷다가 만난 전망대에서는 또 다른 멋의 대청호를 내다보는 기회도 가졌다. 대청호오백리길이 ‘아시아 도시경관상’을 받았다는 안내판과 함께. 대신 대청호자연생태관에서의 보다 많은 앎은 물론이고, 풍차와 미로공원 등 수변공원 안쪽에서 만날 수 있다는 예쁜 풍경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200m쯤 걷자 ‘대청호 자연수변공원’이 얼굴을 내민다. 추동마을을 에둘러 돌아온 원래의 탐방로와 다시 만나는 지점으로, 1만 3360㎡의 부지에 생태습지와 연못, 화원 등을 조성하고, 수변산책로와 풍차 그리고 4만여 본의 수목과 잔디를 식재해 시민휴식공간으로 개장했다. 특히 동구팔경을 미니어처로 배치한 미로공원이 입소문을 타면서 최근에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와 가족 나들이 장소로 각광을 받는단다.

▼ 공원은 생태습지와 연못, 화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습지를 중심으로 정자를 짓고 벤치를 놓았는가 하면, 연못에서는 황금 잉어와 각종 민물고기가 유영을 한다. 하지만 새로운 볼거리로 뜨고 있다는 ‘동구팔경 미로정원’은 가보지를 못했다. 동구의 팔경을 미니어처로 감상할 수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런 명소가 있는지조차 몰랐으니 어쩌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대전시 상수원 취수시설인 ‘추동취수탑’을 스치듯 지난다. 105만 톤/일의 취수량을 자랑하는 취수구 주변에는 조류차단막과 수초섬이 설치되어 있었다. 오염물질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시설일 것이다. 대전 시민의 건강을 위해서...

▼ 대청호가 유명세를 탄 데는 ‘대청호수로’의 역할도 컸다. 동구팔경에 포함될 정도로 유명한 ‘벚꽃길’은 물론이고, 은행나무로 가로수 삼은 이 구간의 경관도 결코 그에 뒤지지 않을 것 같다. 저 나무들이 진노랑으로 옷을 갈아입었다고 상상해보라.

▼ 초콜릿 만들기 체험을 해볼 수 있다는 ‘초콜릿정원’ 입구에서 50m쯤 더 걸으면, 모퉁이를 돌아가기 직전 왼편으로 샛길이 하나 나뉜다. 탐방로는 도로를 벗어나 이 길로 들어선다. 이정표(신상교 5㎞/ 대청호자연수변공원 0.5㎞)를 포함한 오백리길의 푯말들이 방향을 알려주고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이 구간은 들길과 산길로도 모자라 호숫가까지 번갈아가며 지난다. 갈림길도 심심찮게 만난다. 하지만 이정표와 푯말, 리본 등 오백리길의 표식들이 빼곡히 매달려있어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 호수에는 인공섬(식물재배 섬)이 떠있었다. 물을 정화시키는 기능뿐만 아니라 어류·조류·곤충류들이 쉴 수 있는 공간까지 되어주는 곳이다. 호수 위에 떠있는 조그만 식물원이라 여기면 되겠다.

▼ ‘가사낭골’을 지나 작은 언덕으로 올라서니, 길섶의 작은 돌비석에 ‘호미고개’라 적혀있다. 대청호에 물이 차기 전 강촌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마루였던 모양이다. 참! 이 구간에서 만나게 된다는 ‘공룡 알’처럼 생긴 바위는 눈에 띄지 않았다. 만수위에 가까운 대청호의 물이 어미라도 되는 양 알을 품어버린 모양이다. 오백리길의 풍광은 이렇듯 대청호의 수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이쯤에서 팁 하나! 대청호의 풍광은 물이 8부쯤 차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게 정설이다.

▼ 길을 나선지 2시간(초콜릿정원 근처 샛길로 들어서서는 21분), 작은 마을(이정표 : 신상교 3.5㎞/ 추동취수탑 1.5㎞)을 만났다. 하지만 지명은 알 수 없었다. 양봉협동조합은 머리말로 ‘가마봉’을 붙였는데, 근처 식당의 간판은 ‘샘골’을 고집한다. 아무튼 탐방로는 마을 앞에서 차단봉(차량출입 방지용)으로 가로막힌 샛길로 들어선다.

▼ 몇 걸음 더 걷자 ‘황새바위 전망대’다. 호수를 향해 툭 튀어나간 지점에 전망데크를 만들어놓았다. 정자를 짓고 벤치를 놓아 쉼터의 기능을 겸하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참! 대전지역의 박석신 화가는 황새바위의 전설을 거북바위가 알을 낳기 위해 강 아래 모래톱을 오르는데 산불이 나서 아우성치는 황새바위를 발견했고 온 힘을 다해 불을 끄지만 끝내 목숨을 잃는다는 조금은 슬픈 동화로 풀어내고 있었다.

▼ 정자 근처의 던져지듯 놓여있는 바위가 이곳의 지명을 낳게 한 ‘황새바위’다. 바위의 생김새가 새의 날개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아무리 뜯어봐도 새의 근처에도 못 갔다. 집에 돌아와 알아보니, 황새가 날개로 알을 품은 모양새라며 사진에 나오는 둥그런 바위가 알에 해당된다고 한다. 황새의 날개를 닮았다는 바위는 숲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 바위 자체야 크게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지만,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대청호 풍경은 시원함 그 자체였다. 시선을 조금만 들면 대청호를 아담하게 둘러싼 백골산도 볼 수 있다.

▼ 10분쯤 더 걸으면 ‘연꽃마을’이다. 호수에 안겨 있는 한적한 마을로 들어서니 솟을대문의 ‘한국사진예술원’이 반긴다. 최고경영자(CEO 및 다양한 전문직종사자)들을 위한 사진예술 교육기관인데 이곳에 분원을 두었나보다. 연꽃마을 주변의 대청호반이 그만큼 아름답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긴 서양화가 송영호의 화실과 정덕천 시인의 집 ‘글사랑 놋다리집’까지 들어선 마을이니 어련하겠는가.

▼ 하지만 지명까지 만들어낸 ‘연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을의 자랑거리라는 어라연·가시연·홍련·백련·빅토리아연은 다 어디가고, 엉뚱한 ‘오백미 황새코스’ 홍보판이 얼굴을 내민단 말인가. 아무튼 이곳은 동구(대전시)에서 정한 오백미(오白眉) 중 하나인 황새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이 분명하다. ‘대청호오백리길’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곳을 백미(白眉)로 지칭, 총 5개 코스(벚꽃길 코스·촬영지코스·추동 생태코스·냉천골 사진코스·황새코스)를 선정했는데, 그중 하나가 ‘황새바위’ 일대인 것이다.

▼ 마을 근처 길섶에는 시판(詩板)들이 늘어서 있었다. 연꽃마을에 살고 있다는 정덕천 시인의 작품(손수건, 수련)이 주를 이루는데, 그밖에도 정인득(매화꽃 연정), 서정주(국화 옆에서), 조병화(인생은) 등 귀에 익숙한 시인들의 작품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 이정표(신상교 3.0㎞/ 황새바위 0.7㎞)가 가리키는 신상교를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 탐방로는 숫제 고속도로 수준. 야자매트로 바닥을 깔았는가 하면, 습지에는 큼직한 돌다리를 놓았다. 그것도 오가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2차선으로 만들었다.

▼ 지자체의 부지런함도 엿볼 수 있었다. 4구간 전체를 한가위 벌초하듯 깔끔하게 풀을 깎아놓았다.

▼ 그렇게 10분 남짓 걸었을까 또 하나의 곶을 만났다. 호수를 향해 뻗어나가다 폭이 조금 좁아지는 짤록한 곳. 이 언덕 부분에 말갈기처럼 생긴 갈대가 숲을 이룬다. 이곳 역시 사진촬영의 명소로 꼽힌다.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참나무와 하늘거리는 갈대를 올려다보며 찍어도 좋고, 줄을 서서 언덕을 걸어가는 사람들 모습을 풍경과 함께 담아도 좋은 그림이 나온다고 한다.

▼ 이후부터는 녹음 짙은 여름빛으로 찰랑거리는 호숫가를 쉬엄쉬엄 걷는다. 데크가 아닌 흙을 밟으며 만나는 대청호는 자연을 닮았고 평화로웠다.

▼ 만수기인 지금이야 물이 가득 차있지만, 물이 빠지기라도 할라치면 저곳은 모래톱이 백사장처럼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옛 마을 빨래터와 우물터도 그대로 드러날 게 분명하다.

▼ 산자락에는 다양한 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엊그제까지 내린 비가 자양분이 되었나보다. ‘우후죽순’이 아니라 ‘우후버섯’이 되었다고나 할까?

▼ 15분쯤 더 걸으면 ‘주산동 전망대’다. 주산동(상촌마을) 앞 도로(대청호수호)변에 전망데크를 만들어놓았다. 정자와 벤치는 물론이고 주차장까지 갖추었다. 참고로 대전은 송시열과 송준길의 발자취가 많은 곳이다. 이곳 주산동쉼터는 그들의 후손인 은진송씨 종중에서 동구에 희사한 부지에 조성했다고 한다.

▼ 난간으로 나가면 ‘전망대’라는 명칭에 걸맞는 풍광이 펼쳐진다. 아무렇게나 말라서 고사목이 되어버린 굵은 나무들이 물속에 잠겨있는 것이다. 이 길이 호수가 아니었을 때 정정하던 나무는 댐을 막아 물을 가두면서 수장되었고 또 숨을 다했다. 그게 고사목으로 변해 이제 탐방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 2.2km전방에 있다는 ‘신상교’를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 탐방로는 습지를 헤집으며 나아간다. 버드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곳으로, 물에 잠긴 버드나무 사이로 물안개라도 피어오를라치면 몽환적 풍경을 연출한다고 알려진다. 참! 주산동에선 조선 중기 문신인 송기수의 사당을 둘러보고, 대전시 기념물 32호인 비룡동 신선봉 유적도 감상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에 쫒기는 나로서는 언감생심이었다.

▼ 보행매트와 데크로드를 번갈아 지난다. 그러다가 제법 높은 고개 하나를 넘기도 한다. 아니 코스 안내도에 나오는 ‘원주산’은 이곳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연꽃마을에서 0.6km쯤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적고 있으니 말이다.

▼ 고개를 넘으면 ‘금성마을’로 연결(오른쪽 방향)되는 도로다. 탐방로는 3분쯤 이 길을 따른다. 벚꽃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것이 봄철에는 또 하나의 멋진 경관이 될 수도 있겠다.

▼ 이정표(신상교 1.4㎞/ 연꽃마을 1.7㎞)가 가리키는 신상교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7분쯤 되는 지점에서 ‘안내판’ 하나를 만났다. 만수위로 인해 통행이 불가하니 우회하라는 당부를 적었다. 제방길이 물에 잠겼다는 얘기일 것이다.

▼ 우회로는 오솔길 수준이었다. 다듬지 않은 원시의 숲길이라고나 할까? 비상시에 임시로 사용하는 길이라서 일 것이다.

▼ 이때 신상교와 인근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저 물속 어디쯤에 원래의 탐방로인 ‘제방길’이 있을 것이다. 호반을 가로질러 신상교 아래로 쭉 뻗어나간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불어난 물이 이를 삼켜버렸고, 우리는 이렇게 호숫가를 에둘러 간다. 걸어보지 못한 제방길의 풍경은 다른 이의 글로 대신해본다. <길게 펼쳐진 제방을 따라 걸으면 가장 낭만적인 풍광이 펼쳐진다. 제방은 대청호가 머금고 있는 푸른 물을 따라 일직선으로 이어지고, 제방이 끝나면 반짝이는 모랫길을 따라 걷는다. 그리고 그 길은 곧장 갈대숲으로 연결된다.>

▼ 그렇게 10분쯤 진행하자 ‘신상동 인공습지’가 나온다. 대청호의 수질개선을 위한 시설의 하나로, 비룡마을 및 廢고속도로 등 광범위한 배출경로에서 빗물에 섞여 유입되는 비점오염원을 5개의 인공습지에서 여과 후 대청호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한다. 또한 노랑꽃창포 등 9종의 수생식물을 재배해 환경보전 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생태학습장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한단다.

▼ ‘신상로’로 올라서니 지역특산물을 파는 간이상점이 눈에 띈다. 음료까지 판다기에 캔맥주 서너 개와 아이스크림까지 챙겨들었으니 오늘도 공정여행을 한 셈이다. 공정여행이란 게 여행자들이 쓰는 돈이 지역과 공동체 사람들에게 직접 전달되는 착한 여행을 의미한다니 말이다. 참고로 공정무역(fair trade)과 일맥상통하는 공정여행은 ‘여행하는 이와 여행자를 맞는 현지 주민들이 서로 문화를 존중하고 경험하며 성장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 길은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린다. 그 끄트머리에 ‘신상교’라는 악마의 구간이 있었다. 4차선에 중앙분리대까지 갖춘 걸로 보아 ‘자동차 전용도로’가 분명한데도 다리를 건너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차량이 무서운데, ‘왜 이런 곳을 걷느냐’는 듯 스치듯 지나가는 차량도 심심찮게 보였다. 대부분은 속도를 떨어뜨린 채로 지나갔지만 말이다. 아무튼 두 번 다시 걷고 싶지 않은 구간이었다.

▼ 날머리는 신상교(대전시 동구 신상동)

다리를 건너자 도로 양편에 주차가 가능한 갓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에 주차되어 있는 산악회 버스를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40분을 걸었다. 산길샘(앱)이 13.17km를 찍고 있으니 꽤나 더디게 걸은 셈이다. 눈이 아니라 가슴에까지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