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델피(Delphi) 유적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파르나소스 산(2,457m)의 남서쪽 산자락에 위치한 도시 유적. 고대 그리스의 최고 신탁이던 델포이의 신탁이 이루어진 곳이자, 땅의 배꼽 옴파로스(Omphals)’가 놓여있던 장소이다. 신화에 따르면 아폴론이 이를 지키던 괴물 여신 피톤을 죽였고 이후 델포이는 아폴론을 숭배하는 주요 성소가 되었다. 도시국가의 왕들은 신탁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사자를 보냈고, 델피는 상업·무역이 매우 활발한 곳이 되었다. 하나 더, 이 성역은 기원전 586년부터 4 ()그리스 경기 중 하나인 피티아 경기가 4년마다 열리기도 했다. 경기의 승자는, 템피 계곡의 월계수로 만든 월계관을 쓰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고 한다.

 

 아테네를 출발한 버스는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델피에 도착했다. 유적지 앞에 들어선 마을부터 들른 이유이다. ! 델피로 오는 도중 태양의 후예 촬영지 아라호바를 스치듯 지나오기도 했다. 덕분에 우린 송중기와 송혜교가 키스를 하던 종탑을 곁눈질로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델피는 메테오라로 가는 도중에 들른다. 델피와 테르모필레를 둘러본 다음 메테오라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델피마을에서 바라본 풍경. 거대한 협곡을 낀 드넓은 저 평원은 옛날 아폴론의 신성한 땅으로 불렸다고 한다. 사진에서 길처럼 나타나는 부분은 프레이스토스 강이란다. 우기인 겨울철에만 물이 흐르기 때문에 평소에는 저렇게 하얗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단다.

 투어는 입장권을 사면서 시작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던 도시 델피’, 그런 믿음은 현대까지 이어졌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보호받고 있다.(개방시간 : 08:30-15:30)

 델피성역의 추정 조감도. 입구라 할 수 있는 로만 아고라를 시작으로 리산데르의 기념물, 트로이 목마, 아테네 마라톤 기념물, 코르키라(코르푸 섬)의 청동 황소, 아르카디아 기념물, 헬레니스틱 스토아, 아르고스 왕의 엑시드라, 시프노스 보물창고, 테베 보물창고, 보이오티아 보물창고, 아테네 보물창고, 메가라 보물창고, 코린토스 보물창고, 낙소스 스핑크스, 다각형 옹벽, 아테네 스토아, 플라타이아이 삼발이 의자, 로도스의 전차, 아폴론 신전제단, 아폴론 시탈카스(Sitalcas·곡식의 수호자) 청동상, 아폴론 신전, 극장, 서쪽 스토아가 줄줄이 이어진다. 사진에는 없지만 맨 위에 경기장인 스타디온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델파이의 무덤(the cemeteries of Delphi)’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관람객을 맞는다. 대 위에 놓인 석관(石棺)을 이르는 모양이다.

 델피 유적은 땅속에 묻혀있던 옛 도시를 발굴해 놓은 현장이다. 그러니 유물의 파편들이 사방에 널려있을 건 당연. 참고로 델피는 신탁의 유명세에 힘입어 주변 도시국가들이 신전관리와 제례유지를 위해 결성한 인보동맹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390년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이교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델피의 역사도 막을 내린다. 이후 폐허 위에 카스트리 마을이 세워져 아폴론의 성역마저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발굴에 착수하면서 델피라 명명했다.

 첫 만남은 로만 아고라(Roman agora)’. 전형적인 스토아 형식으로, 성역으로 들어가는 동쪽 출입문의 담벼락에 바싹 붙어있다. 로마시대 상업과 만남의 장소였고 신전에 바칠 제물 등을 팔던 시장터이다.

 아고라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토의와 그에 대한 투표가 이루어지던 곳이기도 하다.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도시의 일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늘 아고라에 모여 정치나 철학, 과학,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아고라가 민주주의를 열어 가는 중요한 장소였다는 얘기다. 여자와 노예들에게는 그런 권리를 주지 않았다는 게 아쉽지만...

 돌기둥을 받히던 기단. 그런데 중앙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곳 그리스는 지진이 빈번한 나라, 그러니 기둥을 고정시키기 위해 그 무엇인가를 저 구멍에 꽂았을지도 모르겠다.

 이후부터는 신성한 길(sacred way)’을 따른다. 델피 성역의 입구에서 아폴론 신전에 이르는 길로, 이 길의 좌우에는 각양각색의 보물창고와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보물창고는 도시국가들이 자신들의 보물을 저장해두던 금고다. 각지에서 모인 도시국가들은 신탁을 먼저 받기 위해, 신탁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보물 창고(Treasury)를 지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델포이 박물관에 있다.

 시키니온과 시프니안의 보물창고(the treasury of the sikyonians and siphnians)’라고 한다. 자유여행으로 다녀온 산토리니가 속한 키클라데스 제도의 작은 섬나라 시프노스(Siphnos)에서도 자신들의 번영을 유지할 방도를 구하며 봉헌했던 모양이다. 역사는 그 신탁을 잘못 해석해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전하지만... 하나 더, 시키온은 코린토스 서쪽에 위치한 고대 도시다.

 아르고스왕의 엑세드라(Exedra of the Kings of Argos). 아르고스(Argos)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미케네와 인접한 작은 도시국가였다. 왕이나 고위직 관료가 델피를 방문했을 때 머물 수 있는 엑세드라(Exedra, 반원형의 휴식 공간)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보이오티아인의 보물창고(The treasury of the Boeotians). 보이오티아(Boeotia)는 코린토스 만에 접한 도시국가들의 연합체라고 했다. 그런데 보이오티아 동맹의 맹주였던 테베의 보물창고를 따로 지어놓은 이유는 뭘까?

 메가라 코린토스 등 다른 도시국가의 보물창고도 여럿 눈에 띈다. 하긴 그리스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심지어 이집트까지 신탁을 받고자 하는 도시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신에게 봉헌했다니 어련하겠는가. 심지어는 신탁을 받으려고 델피에서 1년 넘게 머물기도 했단다.

 문자로 가득한 축대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우리가 배우고 익히는 역사는 저런 기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금줄 안에 모셔진 저 돌은 옴팔로스(Omphalos)’라고 한다. 옴팔로스는 배꼽을 뜻하는 라틴어다. 그리스인들은 신체의 중앙을 배꼽으로 보듯 이곳을 땅의 중심으로 보고,  배꼽 돌을 놓아두었다고 한다(저건 모조품이고 진품은 고고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가 세계의 중심을 향해서 동쪽과 서쪽으로 두 마리의 독수리를 날려 보냈더니, 두 독수리가 델포이에서 서로 만나더란다. 그 장소가 바로 세계의 배꼽이라고 하는 옴파로스.

 아테네의 보고는 델피 유적지에서 온전한 형태로 서있는 유일한 건물이라고 한다. 마라톤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인들이 아폴론에게 바친 봉헌물을 보관하던 보물창고(寶庫), 2개의 도리아 양식 기둥이 받드는 매우 단출한 건물 형태를 보인다. 건물의 메토프에는 신화 속 영웅들의 무용담도 부조되어 있다. 1904-1906년 아테네 시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는데,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완벽하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단다.

 아테네 보고의 맞은 편 언덕에 자리한 가이아 여신의 성소는 아폴론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에 왕뱀 피톤이 신탁을 내리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근처에 놓인 회색 바위는 당시 델피의 여사제 시빌레가 그 위에서 신탁을 내렸다고 해서 시빌레 바위라고 불린다.(사진은 내가 찍은 게 흐려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아테네인의 열주랑(Stoa of Athenians :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승리를 축하하고 아폴론신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헌정) 뒤에 있는 아폴론신전의 다각형 돌 축대(Polygonal wall)’. 쌓아올린 다각형 바위들이 서로 견고하게 맞물려 있다. 접촉면이 많은데다 틈새까지 보이지 않아 페루 여행 때 쿠스코에서 신기해했던 ‘12각의 돌(La Piedra de Los Doce Anguios)’을 떠올렸을 정도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진의 피해를 막기 위한 지혜가 아니었을까 싶다.

 저 건물의 용도는 대체 뭘까? 궁금증을 못 참고 다가가보니 ‘Do not touch please’란다.

 아폴론 신전으로 오르는 길, 길가에 늘어서 있던 화려한 건축물들은 이제 이야기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기단부만 남아 표지석이나 안내판이 없을 경우 정체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라고나 할까?’

 신성한 길(sacred way)’은 델피 유적의 구심점인 아폴론 신전(Temple of Apollo)’으로 인도한다. 아폴론을 모시는 신전으로 이곳에서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델포이의 신탁이 이루어졌다. 아폴론은 신이었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여 사제 피티아(Pythia)를 통해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델포이 신탁소에는 왕은 물론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철학자들도 찾아와 무녀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숭배 금지령을 내리면서 델포이는 역사의 페이지를 마감했다.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원래의 신전은 길이 60m에 폭이 23m이었다. 38개의 도리스식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는데, 현재는 암갈색 돌기둥 6개와 여기저기 깨진 제단만 어지럽게 남아있어 얼핏 폐허처럼 보인다.

 현재의 아폴론 신전은 기원전 4세기 이곳을 강타한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알크메오니드 신전을 대신하여 새로 지은 것이다. 신전의 네 면을 한 줄의 원기둥으로 빙 둘러친 건축구조였다고 한다.

 신화에 의하면, 아버지인 제우스는 쌍둥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탄생을 기뻐하며 아폴론에게 예언을 관장하는 능력을 주었다고 한다. 아폴론이 태어난 지 나흘이 지나자, 제우스는 그에게 황금 왕관과 현악기 리라, 백조가 끄는 마차를 주며, 피톤(델포이)으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곳에서 헤라의 명령으로 어머니 레토가 임신한 동안, 이들을 줄곧 괴롭혔던 큰 뱀 피톤을 아폴론은 화살로 쏘아 퇴치했다. 이후 아폴론은 피톤이 지키던 가이아의 신전을 차지하고, 지명도 피톤에서 델포이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렇게 델포이의 신전은 아폴론의 신전으로 바뀌고, 신전의 피티아를 통해 사람들에게 신탁을 내리게 하였다. 그 후로 인간은 가이아의 뜻이 아닌, 제우스의 뜻을 알리는 아폴론의 신탁에 의하여 미래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위키백과 참조)

 아폴론 신전의 맞은편, 안내판은 ‘The altar of Chiots area’로 적고 있었다. ‘치오츠 제단 지역이라는데, ‘Chiots’는 대체 뭘 말하는 걸까? 아무튼 이 지역에는 치오츠 제단(The altar of Chiots)’ 플라타이아인의 삼각대(The tripod of the Plataeans)’,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동상의 받침대(he pedestal of the statue of Aemilius Paulus)’. 그리고 아탈로스 1세의 스토아(The stoa of King Attalus)’를 포함한다고 했다.

 플라타이아인의 삼각대는 저 청동 기둥을 말하는가 보다.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 전쟁 중 그리스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시아군으로부터 노획한 청동무기를 녹여 만들었다는 승리의 기념비이다. 원래 빙빙 꼬여 올라가는 3마리 뱀의 머리위에 피티아의 상징인 삼발이 솥을 올려놓은 형태였는데, 지금은 청동 기둥만 남았다(머리 부분은 1204년 이스탄불에 입성한 십자군에 의해 절단되어 무기로 만들어지거나 현금으로 바뀌었단다). 아무튼 저 기둥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약탈당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히포드럼 광장)에 세워졌다. 따라서 진품은 현재 이스탄불에 있고 이곳 델포이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동상(The statue of Aemilius Paulus)’은 받침대(pedestal)만 남아있었다. 아밀리우스 파울루스 (로마)장군이 피드나 전투(로마가 그리스 본토를 지배하고 지중해의 패자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힌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군대를 격파한 승전기념비로, 전투장면을 부조(상단에) 4각의 빗돌 위에 동상을 올려놓은 형태였으나. 이 또한 동상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폴론 신전에서 조금 더 위로 오르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극장(Tea Theatre)을 만난다. BC 4세기에 건설된 델포이 극장은 2, 35단의 관람석이 있어 5000명이 동시에 음악이나 연극 등을 관람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원형극장으로 현재의 모습은 로마시대에 개축된 것이다. 비교적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어 지금도 여름이면 연극이나 콘서트가 공연되기도 한단다. 하나 더, 관람석 위로 오르면 델피 유적지뿐 아니라 광활한 올리브 숲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원형극장의 뒤로도 길이 널찍하니 나있었다. 방향표시석은 이 길을 따르면 ‘Stadium’에 이르게 됨을 알려준다. 그러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어진 시간에 쫓겨 달리듯이 다녀올 수밖에 없었지만...

 원형극장의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델피는 산 사면을 깎아 도시를 건설했다. 제일 위에 원형경기장, 그 밑에 원형극장, 그 밑에 신전, 그리고 가장 아래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들어앉혔다. 그리스의 도시들에서 신전과 극장, 원형경기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고 한다. 신전은 신과 통하는 장소였고, 극장은 연극이나 노래 등 예술을 통해 정신을 정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했다. 또한 원형경기장에서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건강하게 단련시켰을 것이다.

 숨이 턱에 찰 즈음 도착한 꼭대기에는 고대 그리스의 경기장인 스타디온(Stadion)’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에 건축된 경기장은 길이 178m에 폭이 26m, 수용 인원이 6,000명인데, 아폴론이 피톤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피티아 제전(Pythia games)’이 이곳에서 열렸다. 계단과 운동장 모두 매몰되었던 것을 2세기경 그리스의 대부호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가 자비를 들여 발굴·재건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8세기부터 시와 음악에 관한 행사를 중심으로 8년마다 개최되던 제전은 육상과 말타기 기술, 마차경주 등이 더해지면서 4년마다 열렸고, 그리스 4대 제전(올림피아 제전, 네메아 제전, 이스트미아 제전, 피티아 제전)의 하나가 되었다. 피티아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월계관이 씌어졌다. 하나 더, 이 제전의 특징은 다른 제전과는 달리 음악 경연이 함께 벌어졌다는 점이다. 음악의 신인 아폴론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나?

 마지막으로 들른 건 고고학박물관(규모는 작지만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중 하나로 아폴론의 성역과 마르마리아에서 발굴된 조각품, 봉납물, 비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신탁을 행할 때 무녀가 앉는 자리로 썼다는 삼발 솥단지가 방문객들을 맞는다. ‘피티아라 불리던 무녀는 신경이 약간 마비된 상태에서 유황 성분의 연기(환각을 일으키는 성분이 함유된 가스)까지 맡아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신탁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하나 더, 아폴론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가 적혀있다고 한다. 절차를 거쳐 받아간 신탁을 해석하는 것은 신탁을 받아간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문구라나?

 낙소스의 스핑크스’. 기원전 6세기에 만든 12m 높이의 원주(圓柱) 위에 얹혀 있던 조각상으로, 에게 해의 섬 낙소스 인들이 봉헌한 보물창고 앞을 지키고 있었단다. 이밖에도 아폴론 성역의 보물창고들 외부에는 많은 조각상들이 건조되어 있었다고 한다.

 도시국가 아르고스에서 봉헌했다는 쌍둥이 형제상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니가 효자 아들들에게 가장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신에게 빌었더니 둘이 함께 죽어 신의 곁으로 가더란다. 당시는 신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자신 곁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나? 그러니 아르카익 시대(BC8~5C)에 만들었다는 조각상이 웃을 수밖에...

 벽에는 황금머리 황소(The Silver Statue of a Bull)’가 걸려있었다. 기원전 6세기(아르카이크 시대) 이오니아에서 만든 작품으로 은박을 입힌 구리판 세 조각을 연결해 제작했다. 참고로 황소는 현신한 제우스를 상징한단다.

 아폴론과 그의 자매 아르테미스, 그리고 이들의 어머니인 레토의 신상이라고 한다. 금과 상아로 아름답게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왕으로 이름났던 크로이소스 왕이 봉헌했을 것으로 추정한단다. 그들이 치장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관과 귀거리, 팔찌 등 황금으로 만든 치장물들을 함께 전시해 화려함을 잔뜩 자랑하고 있었다.

 대접처럼 생긴 저 도자기에는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추구하던 비례·대칭의 조화가 집약되어 있다고 했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 헌주를 쏟고 있는 아폴론을 묘사한 단순한 그림에 아폴론을 상징하는 까마귀와의 이야기, 적색기법의 도자기가 발달하면서 추가된 흰색과 1.618의 황금 비율이 가미되어 있단다.

 소크라테스로 여겨지는 조각상도 있었다.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게 기른 석상은 진지한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댄서의 원주(The Column of the Dancers)’라는 작품이다. 아칸서스(Acanthus) 잎 조각 위로 아름다운 세 여인이 머리에 옴파로스(Omphalos, 대지의 배꼽)를 이고 있는 모양새라고 한다. 그 앞에 따로 놓아둔 돌(옴파로스)을 얘기하는지도 모르겠다.

 안내판은 안티노우스(Antinoos)’로 적고 있었다. 로마의 다섯 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 황제의 총애를 받던 미소년이다. 황제를 수행하여 이집트를 순행하던 중 나일 강에 빠져 익사했는데, 그가 로마에 공헌한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의 조각상을 델포이 성역에 봉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델피 박물관의 유물 중 최고로 꼽히는 이니오호스(전차를 모는 전사) 청동상이라고 한다. BC373년 지진 때 땅에 묻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청동상으로는 드물게 오닉스(줄무늬가 있는 대리석)로 된 눈까지 남아있다. BC478 혹은 474년에 있었던 피티안 경기의 전차 경주에서 승리한 시실리의 군주 폴리잘로스에 의해 델피에 헌납된 것으로, 옷이 날리지 않게 잡아매어 놓는다거나 굳게 다문 입술, 고삐를 잡은 팔에 보이는 힘줄 등 전차경기에서 승리하고 싶다는 마음가짐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밖에도 기원전으로 시대를 돌리는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1896년에 발굴된 청동상과 작은 도상들, ‘아르카이크 시대에서 로마 시대까지 시대별로 그리스의 발전사를 살펴볼 수 있다.

 메테오라로 가는 도중 테르모필레(Thermophylae)’에 들렀다. ‘테르모 뜨거운’, 그리고 필레 입구라는 뜻으로 이 지역의 유황온천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그래선지 여행사는 이곳 노천온천에서의 족욕(足浴)을 그리스 여행 최고의 보너스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면 헛웃음부터 나온다. 우리네 동네 뒷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작은 개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화장실 등 탐방객들을 위한 편의시설 역시 눈에 띄지 않는다.

 물은 따뜻한데다 유황냄새까지 나는 걸로 보아 온천임은 분명하다. 물을 맞을 수 있도록 인공폭포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런 명당자리가 비어있을 리는 만무, 먼저 온 유럽의 젊은이들이 삼각팬티 하나만 걸친 채로 선점하고 있었다. 그리스인들 보다는 오가는 외국 나그네들이 더 많이 이용하는 편이란다.

 그런 외설스러움이 익숙하지 않는 우리네 아낙네들은 하류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좋다면서 희희낙락 했지만... 하나 더, 아낙네들은 족탕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온천을 하며 이끼를 떼서 몸에 바르는 그리스의 민간요법을 귀띔조차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인 노천 온천탕에서 자유롭게 온천욕을 한다. 온도가 40도쯤 되는 해수 온천이라는데, 기록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이 저 온천수로 상처를 치료했다고 전한다. 그래서일까? 여행에 지쳐가던 집사람이 손까지 흔들어가며 활기찬 반응을 보인다.

 온천 지역에는 스파 리조트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걸 좋아하지 않는 탓인지 운영을 중단했다. 그리고 지금은 난민 캠프로 이용되고 있었다.

 테르모필레는 그리스 북부에서 남부 지역으로 이동할 때 반드시 거쳐야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3차 페르시아전쟁 때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간 벌어진 전투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 전적지에 레오니다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창을 겨눈 레오니다스 왕이 적군을 향해 포효하는가 하면, 그 아래 기단에서는 300명의 스파르타 특공대가 용전분투하고 있다. 좌우로 보이는 조형물은 스파르타의 전사 상이지 싶다.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특공대는 이곳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에서 수십만 명의 페르시아 군에 맞서 마지막 한 명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싸우다 전멸했다. 적군을 막는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스파르타군의 임전무퇴 정신은 페르시아군에 공포를 심어주었고, 그리스 군에게는 자유를 향한 투혼을 일깨워 페르시아 군을 몰아내는 동력으로 작용하게 했다. 이 전투가 그리스 역사에서 영원한 전설이 되고, 스파르타 군에게는 불멸의 영예를 안겨준 이유일 것이다.

 또 다른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승리를 의미하는 날개가 한쪽만 달려있다. <스파르타 전사들이 전멸하는 패배를 당했지만 이들의 용맹스런 정신은 승리를 거둔 것 이상>임을 상징한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실감이 난다.

 3차 페르시아전쟁 당시 이곳은 서쪽에 경사가 70도에 달하는 험준한 산들이 벽처럼 서있었고 동쪽은 바다였다. 산과 바다 사이 평지는 100m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스파르타군 300명을 필두로 한 그리스 연합군 약 5000명은 이곳에서 페르시아군(역사가 헤로도토스는 100만 명이 쳐들어왔다고 적는다)을 막았다. 그런 불리함속에서도 첫날과 둘째 날의 전투는 페르시아군의 참패로 끝났다. 하지만 그리스인 중 배신자가 나타나면서 페르시아의 정예부대 1만이 샛길(산을 넘는)로 쳐들어왔고, 레오니다스는 자신과 스파르타 특공대 300명은 남아서 협로를 지키고 나머지 그리스군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후퇴시킨다. 그렇게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고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특공대는 모두 죽는다. 그 영웅적인 이야기는 영화 ‘300’으로 만들어졌고, 그들의 무용담은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다.

 에필로그(epilogue), 델피에는 아폴론 성역만 있는 게 아니다. 피티아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훈련장소로 사용되었던 김나시온(Gymnasion)’과 아테나 여신을 모시던 아테나 프로나이아(Athena Pronaia, 델피의 주신 아폴론 신전 앞에 있는 신전이라는 의미)’인데, 아폴론 성역에서 걸어서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하지만 난 탐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1시간으로는 아폴론성역(꼭대기에 있는 스타디온은 달리듯이 다녀왔는데도)과 고고학박물관을 둘러보기에도 빠듯했으니 어쩌겠는가. 평생 한번 다녀오기도 힘든 그리스인데, 보고 싶은 것을 못 보고 돌아서며 아쉬움 넘치는 원망을 여행사로 돌리며 델피를 떠난다.

진안고원길 4구간(섬진강 물길)

 

여행일 : ‘24. 2. 17()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성수면 일원

여행코스 : 성수면사무소반용재반용마을포동마을성수체련공원양화마을오암마을(거리/시간 : 12.8km, 실제는 12.98km 3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성수면사무소(진안군 성수면 외궁리)

순천·완주고속도로 상관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임실 방면으로 11km쯤 내려오다 병암삼거리(관촌면 덕천리)’에서 49번 지방도로 옮겨 8km쯤 들어오면 성수면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4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뜨락에 세워져 있다.

 이름(섬진강 물길)처럼 섬진강의 물길을 눈요깃거리 삼아 걷는 12.4km짜리 구간. 초반의 반용재와 중반의 가장골을 빼면 섬진강 본류와 지류(달길천)를 따라 걷게 된다. 난이도는 보통’. 코스의 길이가 짧지만 반용재의 가파른 오르막 구간을 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0 : 23. 남서쪽 방향의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관촌으로 이어지는 49번 지방도(관진로)이다.

 10 : 24. 80m쯤 걷다 성수파출소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농로를 겸한 임도를 따라 반용재골로 들어간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 섬진강변의 용포리 주민들이 성수면소재지인 외궁리로 갈 때 넘나들던 고갯마루이다. 그렇다고 왕래가 잦던 길은 아니었다고 한다. 용포리가 성수면보다 강 건너 임실군 관촌면에 속한 생활권이었기 때문이다.

 반용재로 올라가는 길. 용포리(반용·포동·산막) 주민들이 이용하던 숲길은 신작로가 뚫리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다 고원길을 내면서 골짜기를 에돌아 올라가는 숲길을 조성했다. 가파른 구간에는 통나무계단도 깔았다. 그런데 이게 길고 가팔라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덕분에 나그네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올라간다.

 그런 오르막이 10분이면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다음부터는 평탄한 숲길이 이어진다.

 10 : 36. 트레킹을 시작한지 14. 군도 1호선(가외반로)으로 올라선다. 핸드폰의 앱이 해발 335m를 찍고 있으니 10분여 동안 고도(高度) 75m나 높인 셈이다. 참고로 이 도로(郡道)는 반용마을과 포동마을을 거쳐 745번 지방도(관마로)로 연결된다.

 이정표(오암 12.0km/ 성수면사무소 0.8km)는 이곳이 인증 지점임을 알려준다. 그러니 자신의 얼굴과 이정표가 겹치게 사진을 찍어두도록 하자.

 이후 고원길은 도로를 따라 반용재(해발 348m)’를 넘는다. 성수면 외궁리(안평마을)와 용포리(반용마을)를 잇는 거리 1.2km, 높이 348m의 고개이다. 남북으로 흐르는 능선을 동서로 가르는데, 북쪽에는 성수면의 이름 유래가 된 성수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병풍바위를 지나 방미산에 이른다.

 반용재의 왼편(서쪽) 바로 아래로는 섬진강이 흐른다.

 세월은 결혼 상대마저도 변화시키는가 보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라때 시절. 배우자감은 이웃마을 처자 말고는 없었다. 그게 글로벌 시대를 맞아 동남아 여성으로 폭을 넓혔는가 싶었는데, 언제부턴가 북한여성으로 바뀌어 있다.

 이 구간도 역시 산자락이 온통 복분자 넝쿨로 가득 차 있었다. 오뉴월에 찾아와야 제격이겠다는 얘기다.

 10 : 43. 요것조것 기웃거리며 600m쯤 걷다보면 이정표가 이제 그만 오솔길로 들어가란다. ‘진안고원 길의 참맛을 다시 느껴보라는 모양이다.

 고원길 이정표는 다양한 정보를 전해준다. 구간 정보(오압 11.4km/ 성수면사무소 1.4km)를 기본에 깔고, 근처 주요 포인트에 대한 정보(포동마을 2.5km/ 원외궁마을 2.3km)를 보탰다. ‘야생동물 주의 안내는 팁이다.

▼ 탐방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가장자리 잡목을 깔끔이 제거해 임도처럼 널찍하게 만들어 놓았다거기다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내리막길이다.

 산자락을 빠져나오니 잘 지어진 고택 한 채가 얼굴을 내민다. 뜨락도 정성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했다. 이곳 반용마을은 성수산을 병풍삼은 것으로도 모자라 섬진강까지 앞마당에 두었다. 그러니 돈 많은 이들이 찾아들 만도 하겠다.

 10 : 51. 몇 걸음 더 걸어 도로(가외반로)로 올라선다. 고원길의 뭉툭한 방향표지판은 오른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십중팔구(十中八九)는 왼쪽으로 가고 있었다. 30m만 가면 반용교(고원길이 지난다)’가 나오는데 굳이 600m나 에돌아갈 필요가 없다면서.

 10 : 53. 도로를 따라 150m쯤 올라가다 마을표지석 앞에서 반용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용포리(龍浦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반용·포동·송촌) 중 하나로 진안군과 임실군 사이의 협곡에 기다란 형태로 놓여있다. 성수산을 베개 삼고, 섬돌 아래 섬진강을 둔 지형이다.

 탐방로는 마을을 관통한다. 예쁜 돌담길을 낀 고샅길이 가슴까지 설레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너무 호들갑떨지는 말자. ‘둘레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지역 주민이 낯선 나그네에게 그런 길을 열어주었고, 우린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생활리듬을 깨뜨리는 소음까지 발생시켜서야 되겠는가.

 소박한 골목길은 강변으로 이어진다. 강변으로 나오니 구중심처(九重深處)에서나 볼 법한 예쁜 고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아까 봤던 한옥이 양반집이었다면 소슬지붕까지 얹은 이건 사대부 가문에서나 지을 법한 형식이다.

 강변의 정자(盤龍亭)’. 주위를 야외박물관으로 꾸몄다고 한다. 빗돌까지 세워가며 자랑하지만 막상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설마 요 장승이 전부는 아니겠지? 아무튼 반용마을은 귀농귀촌 우수마을이라고 했다. 배산임수의 수려한 경관에다 마을을 가꾸려는 노력들이 더해져 그런 결과가 만들어졌지 않나 싶다. 원주민과 이주민의 화합이 높아 정월 대보름날에는 달집태우기 행사까지 성대하게 열린다고 했다.

 강변의 느티나무 거목 두 그루가 옛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옛날 저곳에는 사람만 건너다니던 낮은 다리(잠수교)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저 느티나무는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을 게고. 하지만 2000년 새 다리가 놓이면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작은 쉼터를 조성했다. 한때 나룻배(1970년대 잠수교가 놓이기 전까지는 나룻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까지 놓아두었으나 그것마저도 지금은 옛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11 : 00. 마을을 빠져나와 반용교로 섬진강을 건넌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를 마을을 에둘러오느라 10분이나 걸렸다.

 다리를 건너다 바라본 상류 쪽 풍경. 섬진강을 품은 반용마을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임을 알려준다. 아름다운 풍광만큼이나 주민들 간의 정 또한 돈독한 살기 좋은 마을이란다.

 반용교 아래에는 보()가 설치되어 있었다. 덕분에 반용마을 앞 강물은 일정한 수량을 유지한다. 하나 더. 저 보를 지난 섬진강 물길은 90도로 방향을 튼다. 앙칼진 산릉이 섬진강을 남쪽에서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다리 건너. 안내판은 반용(盤龍)’이란 지명의 유래를 적고 있었다. 풍수상 마을이 초중반사(草中盤蛇)의 낙원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초중반사란 야초·인삼·약초가 우거진 속에 뱀이 소반처럼 사리고 있는 형국을 이른다나? 초중반사의 명당에 뱀이 사리고 있으면 반룡(蟠龍)’이 된다. 이게 언제부턴가 반룡(盤龍)으로 변했나보다. ! 그 옆에는 섬진강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 두었다.

 11 : 05. ‘명산휴게실을 지나자마자 지방도를 벗어나 강변 둑길로 내려선다.

 고원길은 이제 섬진강 둑길을 따라간다. 강 건너에서는 감입곡류의 물줄기가 만들어놓은 깎아지른 기암절벽이 나그네와 함께 간다. ‘섬진강 물길이라는 이름값을 한다고나 할까? 아무튼 데미샘을 출발한 물줄기는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과 만나 수량을 늘린다. 백운면을 적시며 흐르던 강물은 마령면과 성수면을 지날 때까지 섬진강 최상류를 이룬다. 그러다 진안군 남부지역 산골오지를 지나 임실 땅으로 흘러가면서 어느 정도 강의 면모를 갖춘다.

 ! 봄이닷! 봄이 유독 늦게 찾아온다는 진안 땅이다. 그런데도 다른 곳에서는 구경조차 못해본 푸른 초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하긴 요 며칠, 언론은 남녘의 꽃소식을 연일 전해주고 있었다.

 포동마을로 가는 강변길 안쪽에는 경작을 기다리는 논이 자리한다. 그 속에 임마누엘 냉천수양관이 있다. 노인복지센터와 요양원까지 갖춘 큼지막한 시설이지만, 수양관 근처로 도로가 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부지를 사는가 하면, 선교비 마련을 위해 하느님이 장사를 시켰다는 등 받아들이기가 썩 편지 않는 종교시설이다.

 강 건너 비탈진 산자락에도 민가가 들어섰다. 맞다. 사람들은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아왔다. 그게 한집 또 한집 늘어나면서 마을을 이루었고, 그렇게 조상대대로 살아왔다. 그러니 강가 사람들에게 섬진강은 어머니 같은 존재다. 강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고,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거나 물놀이를 즐겼다.

 11 : 24. 그렇게 걷다보면 포동2에 이른다. 메인 도로나 마을을 잇는 우리가 익히 아는 교량이라기보다는, 강 건너 산자락에 만들어놓은 다랑이 논·밭에 일하러 다닐 때나 이용하는 것 같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가파른 절벽과 평평한 농경지가 대조를 이룬다. 강변 둑길은 계속해서 그 사이를 가른다. 그리고는 큰 원을 그리면서 포동교로 간다. 참고로 포동교는 성수면 용포리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흘러내려온 회초천이 섬진강에 합류되는 두물머리에 있다. 회초천을 보탠 섬진강은 포동교 아래서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임실군 관촌면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고원길 이정표(오암 8.3km/ 성수면사무소 4.5km)은 이제 그만 섬진강과 헤어지란다. 그러면서 포동마을로 인도한다. 동북쪽 좌포리에서 흘러온 섬진강은 반룡마을 앞에서 동쪽으로 휘감아 돌면서 꽤 넓은 충적지 들판을 만들어냈다. 포동마을은 그 들판의 안쪽 가장자리에 있다.

 11 : 27. 250m쯤 더 걸어 군도(1호선, 용포로)로 올라선다. 이어서 포동마을을 향해 왼쪽으로 간다. 참고로 이 길은 745번 지방도를 만난 다음 관촌면(임실군)으로 간다. 관촌(館村)’은 삼례·전주를 지나온 통영대로 옛길이 통과하는 길목으로 출장관원 등이 묵을 수 있는 관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1 : 29. 잠시 후 도착한 포동마을(이정표 : 오암 7.7km/ 성수면사무소 5.1km)’. 용포리(龍浦里)에 속한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큰 물가에 위치한 탓에 예전에는 나룻배로 건너다녀야만 했던 오지이다. 그래서 나루터라는 뜻을 가진 포동(浦洞)’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안내판은 그런 사연을 적었다. 면소재지와 멀리 떨어진데다 강과 산으로 가로막혀 교통이 매우 불편했단다. 반면에 강변으로 이어진 임실군 관촌면은 다니기가 수월했다나? 그래서 주민들은 학교도 관촌으로 갔고, 시장을 보기위해서도 관촌으로 갔다.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관촌이 생활권인 셈이다.

 마을회관 앞 광장. 포동마을은 그 역사만큼이나 큼지막했다. 맞다. 포동마을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 근처 유물산포지에서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발굴된바 있다.

 정자는 풍류정(風遊亭)’이란 현판을 달았다. 바람 솔솔 불어오는 섬진강변에서 풍치 있고 멋스럽게 놀아보라는 모양이다. 아무튼 난 이곳에서 15분을 머물다 갔다. 산악회 회장님의 실수로 버스에서 잘못 내려, 아직까지도 길을 헤매고 있는 집사람을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마을에는 카페와 식당까지 들어서 있었다. 샤워장까지 갖춘 물놀이장도 보인다. 맞다. 이 마을은 녹색농촌체험마을이라고 했다. ‘바람도 쉬어간다는 수식어까지 달았다. 그러니 저 정도의 부대시설쯤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을 주민의 시가 적힌 카페 외벽이 눈길을 끈다. <바람 따라 돌고 돌아 한참을 돌다가/ 바람도 쉬어가는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봄이면 강에는 물안개 피고... -이하 생략-> 읽는 것만으로도 마을 풍경이 그려지는 멋진 표현력이다.

 고원길은 고샅길을 누비다가 마을 뒤편으로 빠져나간다. 아까 반용마을에서도 얘기했듯이 주민들의 생활리듬을 깨뜨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이 뭣꼬? ‘기러기 조형물을 문설주에 매달아놓았다. 기러기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한 새다. 짝짓기를 한 암수는 한쪽이 죽어도 다른 기러기와 짝짓기를 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고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전통혼례 때 신랑이 기러기 인형을 주는 풍습이 있다. 이로보아 기러기가 쌍으로 걸린 저 집은 부부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외기러기가 걸린 옆집에서는 홀아비나 홀어미가 살고 있을 것이고...

 11 : 51. 마을 뒤. 포장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임도로 올라가려는데,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던 주민이 오른쪽으로 나있는 샛길(비닐하우스를 오른편에 끼고 도는 모양새이다)로 가라고 알려주신다. 길이 나뉘는 지점이지만 방향표지판이 없기에 응당 직진이겠거니 했다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11 : 52. 몇 걸음 더 걸어 농로(용포로)로 내려선다. 이어서 나지막한 고개 하나를 넘는다.

 길가 사과나무는 가지치기를 이미 끝냈다. 맞다. 이틀 후면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雨水).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나무는 꽃망울을 활짝 터뜨릴 것이다.

 11 : 59. 잠시 후 만난 삼거리(이정표 : 오암 7.1km/ 성수면사무소 5.7km). 성벽이라도 되는 양 곤포사일리지가 앞을 턱 가로막는다. 그리고는 방향을 틀어 왼쪽으로 가란다.

 12 : 03. 이후부터는 임도를 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기장골에 있는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난다. 이때 진안고원 길의 참모습이 느껴지는 풍경이 펼쳐진다. 둥글고 한가로운 길, 그래서 고원길에서는 경쟁이나 도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길을 걸으며 만나는 풍경을 오롯이 즐기기만 하면 된다.

 기장골 이정표(오암 6.6km/ 성수면사무소 6.2km)는 이곳이 두 번째 인증지점임을 알려준다.

 임도는 기장골 고갯마루를 향해 오름짓을 한다. 이때 잘 생긴 노송 한 그루가 힘내라며 격려의 손짓을 보내온다.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를 외치며...

 고개 너머. 고원길 이정표가 왼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집사람은 지름길이라며 오른쪽으로 간다. 다른 둘레길 도반들도 오른쪽으로 갔다면서 말이다. 고랭지채소밭의 밭두렁 끝에서 두 길이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밭두렁 끝에서 길이 사라지면서 숲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가시나무 넝쿨이 우거진 원시림을 헤쳐 나가며 찔리고 할퀴는 것으로도 모자라 따귀까지 맞아가며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규 탐방로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고원길은 이제 침목계단이 깔린 숲길을 따라 또 다른 임도로 간다.

 12 : 13. 임도를 따라 이번에는 이차선 도로인 용포로를 만나러 간다.

 12 : 20. ‘용포로(이정표 : 오암 5.6km/ 성수면사무소 7.2km)’로 내려선 다음 도로를 따라 북진한다. 이 길은 양산교차로에서 745번 지방도(관마로)와 만난다. 참고로 용포로 745번 지방도 포동교차로(성수면 용포리)에서 시작해 포동마을과 반용마을(강 건너)을 거친 다음 양산교차로(성수면 좌포리)에서 745번 지방도와 다시 만나는 2차선 도로이다.

 건너편에는 성수산(492.5m)이 있다. 그리고 성수산과 용포로 사이로 섬진강이 흐른다. 다시 만난 섬진강은 아까 지나온 반용마을과 포동마을 방향으로 흘러간다. 섬진강이 포동마을 뒷산을 가운데 두고 180도 휘돌아가는 모양새이다. 고원길로 풀어보면,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포동마을에서 고개를 넘어 (반용교에서 800m쯤 떨어진) 섬진강의 상류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섬진강변 아랫삼막들에서는 물놀이가 가능하다고 했다. 깊지 않은 곳에서는 물고기와 다슬기도 잡을 수 있단다. 매운탕에 소주를 곁들인 다음 날. 다슬기 해장국으로 속을 풀 수 있다니 이 아니 좋을 손가.

 왼쪽 산자락에는 마이산 풍혈냉천 캠핑장이 들어서 있었다. 데크 사이트로 조성된 오토캠핑장 36면과 글램핑 시설 5동이 들어서있는데, 공간이 넓은데다 소나무 사이마다 사이트가 배치되어 있어 그늘에서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단다.

 12 : 29. 벚나무 가로수의 호위를 받으며 걷다보면 어느덧 널따란 둔치에 이른다. 섬진강 물줄기가 휘돌면서 만들어놓은 충적지인데, 연습구장 2면과 덕 아웃, 백넷, 내외야 그물망과 펜스 등을 갖춘 전용야구장을 조성해놓았다. 지금 그곳에서는 젊은 동호인들이 훈련에 한창이다. 덕분에 우린 산골의 적막을 깨뜨리는 그들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12 : 32. ‘산막교로 섬진강을 건넌다. 초입의 이정표(오암 4.8km/ 성수면사무소 8.0km)가 양화마을까지 2.2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다리 아래로는 섬진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강의 최상류라 수량이 많지 않고 강폭도 넓지 않다. 이곳을 지난 섬진강은 수많은 산과 들, 그리고 마을을 돌고 돌면서 남해로 흘러간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이곳 진안을 시작으로 임실과 순창을 지나 전라남도 곡성과 구례 땅을 거친 다음, 경상남도 하동과 전라남도 광양을 가르면서 흐르다가 광양만에 닿는다.

 상류 쪽 풍경. 강 오른쪽 둔치로 탐방로가 나있다. 길가에는 둔치 특유의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었다. 지대가 낮으니 태풍이나 집중호우 때는 차량을 옮기라고 적었다. 물이 깊은데다 유속의 변동까지 심하니 물놀이도 삼가주란다.

 강 건너 산비탈은 기암절벽을 이뤘다. 산태극수태극을 이루며 흐르던 물줄기가 산줄기를 휘돌아나가면서 깎아 만든 절경이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감입곡류의 섬진강은 곳곳에 크고 작은 충적지 들판을 만들어놓았다. 그중 하나에 성수체련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1만평쯤 되는 부지에 잔디운동장과 족구·배구·농구·인라인스케이트장 등 야외시설과 샤워실·취수대·스트레칭 장소 등 부대시설을 갖추었다. 매년 개최되는 면민의 날을 비롯한 각종 대회가 이곳에서 열리는데, 작년에는 진안홍삼배 유소년축구대회로 열기가 달아오르기도 했단다.

 12 : 43. 체련공원의 끝(이정표 : 오암마을 4.1km/ 성수면사무소 8.7km). 고원길은 야외화장실 뒤로 간다. 그리고는 745번 지방도(관마로) ‘양산교의 교각 아래를 지난다. 참고로 관마로는 양산교 건너에서 관촌면을 향해 터널로 들어간다. 터널이 뚫리기 전 양화마을 사람들이 관촌에 가기위해서는 말궁구리재라는 고개를 넘어야만 했단다. 말이 고개를 넘다가 구르는 일이 하도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나? 이 지역이 그만큼 오지였다는 얘기가 되겠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둔치를 따른다. 745번 지방도의 왼쪽 아래로 길이 나있다. 그런 인연으로 집중호우 때는 지방도가 고원길이 되어준다.

 12 : 52. 지방도의 교각 아래를 다시 한 번 지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잠수교(이정표 : 오암 3.2km/ 성수면사무소 9.6km)가 놓여있다.

 잠수교는 장마철마다 물속에 잠겨버리는 반쪽짜리 다리다. 하지만 이게 풍경화로 변하면 온전한 다리보다도 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거기에 철 지난 갈대라도 강물과 어울릴라치면 그 경관을 훨씬 더 고와진다.

 사람들은 이 일대의 물줄기를 오원천(五院川)’이라 부른다. 섬진강 상류인 제룡강이 서천·신정천과 합류하여 성수면 좌포리와 용포리를 지나는 구간을 일컫는다. 섬진강은 이렇게 구간에 따라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오원이란 지명은 관촌면 철도역 근처에 있던 조선시대의 교통로를 관할하던 오원역(五院驛)에서 비롯됐다. 삼례도찰방(三禮道察訪)이 관할하던 호남평야의 12개 역들 가운데 하나이다.

 다리 건너에서 만난 또 다른 이정표(양화마을 350m/ 풍혈냉천 600m/ 포동마을 4.8km)가 짬을 좀 내면 진안의 또 다른 볼거리인 풍혈냉천을 볼 수 있다며 유혹한다. 하지만 다녀오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앞서 걷던 도반이 풍혈의 문이 닫혀있더라는 상황을 전화로 알려왔기 때문이다.

 들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그분이 보내준 사진으로 달래본다. 양화마을의 풍천도 밀양 얼음골처럼 냉장고 같은 찬바람이 솔솔 나온다고 했다. 풍혈(風穴)은 바깥 공기가 틈새 많은 돌 틈 사이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순간 단열 팽창하면서 급격히 열기를 빼앗겨 찬바람이 나오는 현상이다. 도반은 찬바람이 나오는 동굴이 사유지라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문을 닫아버린 것은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닐까 싶다.

 섭씨 3의 석간수가 솟아나는 냉천(冷泉)은 구경할 수 있었다나?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피서를 겸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12 : 56. 고원길은 745번 지방도를 횡단해 양화마을로 들어간다. 법정동리인 좌포리(佐浦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원좌·봉좌·내좌·산수동·양화·증자) 중 하나로, 섬진강을 뜨락에 두고 달길천을 늘상 옆구리에 끼고 살아가는 강촌마을이다. 강변 사람들은 섬진강과 함께 살아간다.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섬진강을 바라보며 기쁨을 나누고 슬픔을 달랜다. 강변 느티나무 아래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삶의 여유를 누리기도 한다.

 달길천의 둑길에는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보림(裨補林)이 분명해 보인다. 풍수지리상 길지 또는 명당의 조건에 부족할 경우 숲과 나무를 심어 좋은 마을을 만들고자 했던 조상들의 유산이다.

 수령이 210년이나 된다는 느티나무 보호수’. 매년 정월 초사흘에 당산제까지 지내주는 고목이다. 그래선지 나이만큼이나 품도 넓어 보인다. 그늘에 정자는 물론이고 마을회관까지 품었다.

 안내판은 예로부터 볕이 잘 들어 눈이 잘 녹는다고 해서 양화(陽化)’라는 지명을 얻었다는 마을의 유래를 적고 있었다. 마을의 자랑거리인 풍혈냉천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준다.

 양화마을(이정표 : 오암 2.7km/ 성수면사무소 10.1km)부터는 둑길을 따라 달길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섬진강 본류를 벗어나 지류로 들어선 셈이다. 참고로 달길천은 성수면 중길리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흐르다가 양화마을 앞에서 섬진강에 합류되는 7km 길이의 하천이다.

 아름다운 순례길 이정표는 이 근처에 대산종사의 탄생지가 있음을 알려준다. ‘대산은 원불교 세 번째 종법사(宗法師, 원불교 교단의 최고 지도자)인 김대거(金大擧, 1914-1998)의 법호이다. 2대인 정산종사에게서 바톤을 받아 교조인 소태산대종사의 법통을 이은 인물인데, 이곳 좌포리에서 태어나 11살 때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출가했다. 하나 더. 대산종사는 내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니 그가 남긴 게송에 반해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

 지류이어선지 강폭이 많이 좁아졌다. 수량도 뚝 줄어들었다. 하지만 강변이 보여주는 풍광은 여전히 고왔다.

 달길천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넓지 않은 농경지가 길게 펼쳐진다. 하천가에 자리한 농경지는 낮은 산들로 감싸여있다. 가는 길에 그런 풍경 속에 들어앉은 중길교(오암 1.5km/ 성수면사무소 11.3km)를 지나기도 한다.

 13 : 36. 4구간의 종점인 오암마을에 도착했다. 두 개의 하천(만덕산 오두재에서 흘러내린 중길천과 이 마재골에서 발원한 물줄기)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자리한 작고 소박한 자연부락이다. 고원길(5구간) 조형물은 마을 앞, 두물머리에 놓인 다리에 세워져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이 12.98km를 찍고 있으니 시간당 4km를 걸은 셈이다. 반용재라는 결코 쉽지 않은 고개를 넘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여행지 : 산토리니(Santorini), 피라(Fira) 마을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 여행의 단골 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고 너무도 많이 소개가 된 곳이라 다시 거론하기 새삼스러울 정도지만 그래도 그리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바다, 그리고 하늘의 색깔을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어느 곳, 어떤 시간에서도 경험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풍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산토리니는 대략 울릉도 크기만 한 본섬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그 섬 안에 피라와 이아, 카마리 등 여러 마을들이 산재해 있다.

 

 산토리니 여행 셋째 날은 피라(Fira) 마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하늘길로 오든, 바닷길로 오든 모든 산토리니 여행은 섬의 수도 피라(Fira) 마을에서 시작된다. 본섬의 서쪽, 화산섬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경치 좋은 이 마을에 산토리니 인구의 대다수가 살고 있다. 피라는 행정적으로 산토리니의 수도 역할을 한다. 하지만 크기는 별로, 해안선을 따라 절벽 위에 길게 형성된 마을은 걷는 길이가 1.3km밖에 되지 않는다.

 피라마을 투어도 단순한 편이다. 칼데라의 바위절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마을의 메인 골목을 따라 걸어보면 된다. 선사·고고학 박물관 등 이곳저곳 빠짐없이 둘러보다가, 시간이 남을 경우 절벽 아래에 있는 올드 포트까지 내려갔다 오면 된다.

 투어는 테토코풀루 광장(Theotokopoulos Main Square)’에서 시작된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상점 및 음식점들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네댓 시간 동안 마을 곳곳을 둘러본 다음 이곳으로 되돌아와 주차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광장에는 산토리니를 상징하는 당나귀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저 당나귀들은 아직도 산토리니의 중요한 일꾼 역할을 수행한단다. 믿기지 않겠지만, 가파른 절벽에 지그재그로 만들어진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는 저만한 교통수단이 없단다.

 옛 항구(Old Port)부터 가보기로 했다. 절벽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조금 힘들지만 어쩌겠는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니 한번쯤 둘러봐야 하지 않겠는가. 가는 길은 간단했다. 메인골목의 담벼락에 붙어있는 ’Old Port‘ 방향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시야가 툭 트이면서 비취빛 지중해가 펼쳐진다. 칼데라의 바위절벽 가장자리(경사진 부분)에 마을이 들어선 산토리니의 전형적인 풍경이라 하겠다.

 피라마을도 산토리니의 전형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절벽의 경사면에 기대어 계단식으로 지어진 집들은 하나같이 하얀색으로 빛나고, 그 맞은편에는 에게 해의 드넓은 바다가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색깔로 펼쳐진다. 단순한 색체들이 어울려서 만들어내는 경치는 담백하지만 그 앙상블은 여느 조합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다.

 발아래는 에게 해가 펼쳐진다. 화산폭발로 이곳 산토리니에서 갈려나갔다는 섬들과 함께. 오른쪽이 티라시아(Thirasia)’이고, 왼쪽은 분화구가 있는 니아 카르메니(Nea Kameni)’이다.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맨 왼쪽에 팔리아 카르메니(Palia Kameni)’가 있다. 꼼꼼히 살펴보면 꼬맹이 섬인 아스프로니시(Aspronisi)’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계단이 놓인 경사로를 따라 몇 걸음 더 걸으면 길고 긴 계단(Karavolades Stairs)이 시작된다. 계단의 연속이라서 무릎이 시원찮은 노약자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구간이다. 그래선지 입구에 당나귀를 타고 내려갈 수 있다는 안내판을 붙여놓았다. 편도에 ‘10유로란다.

 당나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당나귀는 항구와 절벽 위의 마을을 잇는 주요 이동수단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케이블카가 들어서면서 이젠 관광용으로 쓰임새가 바뀌었고, ‘동키 택시(donkey taxi)’로 불리는 산토리니의 명물이 됐다. 그렇다면 저곳은 ‘donkey station’쯤으로 부르면 되겠다. 상부의 택시 승강장?

 (Donkey Way To Fira)은 아찔한 바위절벽을 헤집으며 나있다. 가장자리로 다가가보면 발아래로 비취빛 지중해가 아스라이 펼쳐진다. 무섭다는 얘기다. 절벽 쪽으로 난간을 둘렀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계단을 놓았으나 가파르기는 매한가지. 벼랑은 이마저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일정한 간격으로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면서 겨우겨우 아래로 내려간다. ! 항구를 살펴본 다음 마을로 되돌아올 때 절대 걷지 말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당나귀들이 싸 놓은 똥들이 풍기는 지독한 냄새를 감수할 요량이 아니라면. 아무튼 지금까지 맡아 본 동물의 배설물 냄새 중 가장 심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숨결 속에 그 냄새가 들어있다고 생각해보라.

 오르내리는 여행객들의 버거움을 산토리니 당국도 알았나보다. 중간에 저런 쉼터를 만들어 두었다. 나무도 심어놓아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까지 만들어 주겠다.

 물품보관 창고로 여겨지는 건물도 눈에 띈다. 턱이 진 계단 길, 바닥은 돌과 회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 파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 누군가는 보수를 해야 할 것이고, 그 때마다 자재를 운반해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길의 보수는 동키 택시의 기사들이 하고 있는 모양이다. 택시를 옆에 세워둔 채 모르타르(mortar)를 만드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길을 걷는 내내 올드 포트(old port)’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였다. 아티니오스에 신항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중요한 상업 항구였지만 현재는 관광용 항구 역할만 수행한다.

 내려가는데도 땀이 줄줄 흐른다. 3월 하순이니 이른 봄이라 할 수 있겠건만 지중해의 날씨는 벌써 여름을 재촉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얼마를 내려갔을까 또 다른 동키 스테이션이 보인다. 600여 개나 된다는 계단길이 끝나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땀을 한바가지나 쏟고 나서야 도착한 항구, 이왕에 내려왔으니 가슴 가슴마다 산토리니의 추억을 담뿍 담아가란다. 저렴한 가격에 모시겠다나?

 낚시 투어도 진행되는 모양이다. 수년 전, 다른 여행지에 갔다가 참치 낚싯배를 탄 일이 있었다. 초장에 양주까지 넉넉히 준비해 갔지만 결과는 전무, 만일을 대비해 가져갔던 햄버거로 허기를 채우며 툴툴댔던 추억이 솔솔...

 작은 고깃배 대여섯 척이 전부인 포구는 한가롭기 그지없다. 수심이 얕아 큼지막한 배는 접근조차 할 수 없겠다. 관광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새로운 항구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wine shop은 문이 닫혀있다. 열렸다고 해도 살 생각은 없었지만...

 항구 주변은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항구를 감싸는 바위벼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데, 그 난간에 걸터앉은 건물 몇 채가 빈틈까지 메워준다. 하지만 기능을 잃어버린 항구처럼 자신의 몫을 다 했다는 듯 빈 건물로 남아있다. 하나 더, 저런 경관도 찬찬히 살펴볼 수가 없었다. 그늘진 곳은 모두 레스토랑이 차지했고, 거기다 호객을 하는 종업원들 때문에 오가는 것조차도 자유롭지 못했다.

 바다에는 크루즈 선박들이 정박해 있었다. 맞다. 산토리니는 최근 전 세계인들이 떠나고 싶은 유럽 여름휴양지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바 있다. 스페인의 이비사섬과 스페인 카나리아 섬 테네리페가 그 뒤를 잇는다. 조사기관인 CV빌라는 황금 일몰, 따뜻한 기온, 놀라운 풍경으로 유명한 산토리니가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명소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평까지 덧붙였었다.

 크루즈에서 내린 여행객들로 늘 붐비는 만큼, 항구 주변에 카페, 레스토랑, 상점 등이 늘어서 있다. 에게 해 푸른 바다나 칼데라 절벽을 눈에 담으며 맥주 한잔 하거나, 지중해식 음식 한 상을 즐겨보는 것도 좋을 듯.

 요트를 타고 화산 섬인 네아 카메니(Nea Kameni)와 팔레아 카메니(Palea Kameni) 등 인근 화산섬들을 돌아볼 수도 있다.

 절벽 위(마을)로 올라갈 때는 케이블카를 이용했다. 과거에는 카라볼라데스 계단(Karavolades Stairs)이 절벽 위로 올라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2년 케이블카가 놓이면서 선택에 자유가 주어졌다. 다만 6유로의 탑승료(편도)는 내야한다.

 대합실(Lower Station). 관광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분들의 정체는 대체 뭘까?

 케이블카는 단체로 움직이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캐빈에 타고 있는데도 우리가 마지막 캐빈에 오를 때까지 멈춘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다본 세상. 네아 카메니, 팔레아 카메니 섬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인다. 그게 또 크루즈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참고로 저 섬들은 산토리니의 화산지형을 고스란히 담아낸 곳으로 알려진다. 네아 카메니는 분화구까지 트레킹이 가능하고, 팔레아 카메니는 유황온천에서 헤엄을 칠 수도 있단다.

 눈앞에 펼쳐지는 피라마을은 이아(Oia) 마을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사실 여행자들에게 피라(Fira)는 낯선 편이다. 머릿속에 산토리니가 곧 이아(Oia)’라고 기억시켜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벼랑에 걸터앉은 하얀 마을, 좁은 골목 등 이아마을과 별간 다르지가 않다.

 티리시아(Nisos Thirasia)’ 섬도 눈에 들어온다. 본래는 산토리니 본 섬과 한몸이었는데, 수천 년 전 화산폭발로 갈라졌다고 전해진다. 그 오른쪽, 절벽에 매달려 있는 듯한 마을은 피로스테파니(Firostefani)’가 아닐까 싶다. 뷰포인트로 소문난 세 개의 종 교회(Three Bells of Fira iconic viewpoint)’를 옆에 끼고 있다는...

 상부 승강장(Upper Station)에서 내려 마을 투어에 들어간다. 메인 골목을 따라 끄트머리까지 간다. 클럽으로 흥청거리는 에리트루 스타부르 거리, 보석가게들이 즐비한 골드 스트리트, 고대 그리스의 공예품들을 판매하는 이파판티스 거리 등이 이방인의 발길을 유혹한다.(지명은 여행칼럼니스트인 서진님의 글에서 빌려왔다)

 피라마을도 교회가 참 많았다. 1990년대 말. 보고 일정에 쫓길 때마다 새벽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스름을 헤치며 차를 몰다가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십자가 불빛을 보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 교회를 믿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이곳 산토리니는 거짓말 좀 보태 열 집 건너 한 집이 교회라고 할 정도다. 그리스 국민의 95% 이상이 기독교인이라는 통계가 실감이 난다.

 산토리니의 골목길을 비좁다. 도로도 비슷한 형편이다. 아니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 대부분이 마찬가지라고 보면 되겠다. 애초에 자동차가 아닌 마차나 사람의 통행을 고려해 설계됐기 때문이다. 아무튼 굳이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그 골목들을 헤매는 게 피라마을 여행의 묘미다. 절벽에 빼곡히 늘어선 집과 그 골목사이를 걷다가, 흰 담벼락의 계단에 서서 아름다운 블루와 화이트의 조화를 감상한다.

 얼마쯤 걸었을까 길이 많이 넓어졌다. 오른쪽으로는 시야까지 열린다. 사진 찍기 딱 좋은 장소다. 끊임없이 눌러대는 카메라 셔터를 타고 산토리니의 다양한 풍경들이 프레임 속에 담긴다.

 산토리니의 일상. 엄마야 조급하건 말건 아이는 마냥 즐겁다. 저런 소소한 일상들이 모여 산토리니와 사랑에 빠지게 하지 않나 싶다. 거기에 신이 빚어낸 환상의 풍경이 더해지면서...

 아틀란티스 호텔. 아틀란티스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는 대륙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산토리니가 바로 그 사라진 대륙이라고 믿는다. 호텔의 이름을 아틀란티스로 삼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피라 마을은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는 새하얀 집이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에게 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바(Bar)나 카페, 레스토랑, 호텔이 들어섰다.

 그런데 테라스를 라운지 삼은 게 특이하다. 맞다. 어느 여행 작가는 그리스식 레스토랑인 타베르나도 절벽 사이에 테이블을 갖춰야 명당으로 꼽힌다고 했었다.

 피라의 가장 큰 특징은 집들이 하나같이 벼랑에 기대여 지어졌다는 점이다. 흰 테라스를 품은 집들이 벼랑 아래 계단을 따라 자리를 채운다. 어렵사리 담과 담을 비집고 골목도 생겨났다. 벽을 흰색으로 칠하고 창틀은 바다를 닮은 코발트색으로 칠했다. 그게 입소문을 타면서 이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 되었다.

 푸른 대문의 집들 사이로 미로처럼 나 있는 좁은 골목 길. ‘피라에서는 아랫집 지붕은 윗집 테라스가 된다. 사람들은 그 테라스에 누워 에게 해의 바람을 맞으며 일광욕을 즐긴다.

 마을을 벗어난 북쪽 끝, 집들은 없고 봉우리에 원통형 바위만 뽈록하니 솟아올랐다. 산토리니 최고의 전망대로 알려지는 스카로스 바위(Skaros Rock)’ 18세기까지 베네치안 귀족들이 거주하는 산토리니의 수도였다고 한다.

 큰길가에 박물관이 있다기에 찾아보기로 했다. 절벽의 가장자리를 벗어나자 길을 따라 전통식당인 타베르나(taverna)와 가게들이 몰려 있었다.

 박물관 앞의 큰길, 산토리니의 여유로움은 읽혀지지 않았다. 대형 슈퍼마켓과 버스·택시 터미널, 행정관서와 박물관 등 핵심시설들이 들어서 있는 길가 풍경은 산토리니라기 보다는 아테네의 변두리 어디쯤에 더 가까워 보였다. 덕분에 슬로시티를 연상해온 내 상념은 확 날아가 버렸다.

 큰길가에 선사 박물관(The Museum of Prehistoric)과 고고학 박물관(Archeological Museum)이 있었다. 선사 시대와 고대를 일부러 나누어서 박물관을 운영할 만큼 관련 유물과 자료가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대 화산폭발로 파괴된 청동기 시대의 도시인 아크로티리(Akrotiri)’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단다. 박물관 1층에는 주로 기원전 17세기의 도자기, 오브제 등이, 지하에는 아크로티리의 건물을 장식했던 벽화(프레스코화)를 전시하고 있다.

 초기 키클라데스 시대(BC 2700-2400)의 대리석 조각상들

 기원전 17세기 탁자

 초기 키클라데스 시대(BC 2700-2400) 청동 단검

 후기 키클라데스 시대(BC 17세기 초) 도자기 물병, 주전자 등

 황금으로 만든 염소. 아크로티리에서 발견된 유일한 황금 조각상이란다. 이로보아 화산 폭발 때 주민들이 고가품들을 들고 대피했을 것이라나?

 아크로티리 벽화.

 아크로티리 유적지 조감도. ‘아크로티리 유적 BC1650~1500년 사이에 일어난 화산 폭발로 인해 화산재와 진흙에 묻혔던 청동기시대 미노아문명의 유적이다. 1967년부터 발굴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유적을 통해 당시 산토리니 섬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크레타와 교류했고 2~3층의 건물에서 생활했다. 놀랍게도 상하수도 시설을 갖춘 도시였으며 수세식 변기가 있는 집도 발견됐다.

 점심은 큰길가에서 했다. 벼랑 위에 지어진 테라스 형 카페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경관이야 실컷 봤으니 오롯이 식사나 즐기자는 집사람의 주장을 따랐다. 대신 집사람의 입맛에 딱 맞는 연어스테이크에 해산물스파게티를 먹었다. 빈산토(Vinsanto)와 동키 맥주를 반주로 곁들였음은 물론이다.

여행지 : 산토리니(Santorini), 이아(Oia) 마을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 여행의 단골 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고 너무도 많이 소개가 된 곳이라 다시 거론하기 새삼스러울 정도지만 그래도 그리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바다, 그리고 하늘의 색깔을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어느 곳, 어떤 시간에서도 경험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풍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산토리니는 대략 울릉도 크기만 한 본섬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그 섬 안에 피라와 이아, 카마리 등 여러 마을들이 산재해 있다.

 

 섬 최북단에 있는 이아(Oia) 마을은 산토리니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로 피라(산토리니의 수도)와 더불어 산토리니를 대표하는 마을이다. 하얀 집과 파란 지붕,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산토리니의 풍경을 간직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둘째 날 오후는 이아마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세계 3대 일몰이라는 굴라스 성채에서의 해넘이까지 지켜본 다음, 셔틀버스를 이용해 숙소로 돌아오면 된다.

 마을을 둘러보는 방법은 단순하다. 칼데라의 비탈에 기댄 마을을 종단하는 메인 골목(차량이 다닐 수 있는 구간도 있다)을 따라 걷다가 심심찮게 나뉘는 골목들을 기웃거리면 된다. 마을이 크지 않기 때문에 한나절이면 속속들이 둘러볼 수 있다.

 이아마을도 역시 셔틀버스로 이동했다. 차에서 내리니 당나귀가 반긴다. 산토리니의 교통수단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귀하신 몸이다. 마을 골목들이 하나같이 좁은데다 계단으로 이루어진 탓에, 자동차의 통행이 불가능해서 불편하지만 당나귀로 짐을 운반할 수밖에 없단다.

 마을 중심광장은 산토리니에서는 보기 드물게 넓었다. 그래선지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을 만남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었다. 하나 더, 광장의 랜드 마크는 파나기아 플라차니 교회(Church of Panagia Akathistos Hymn)’라고 했다. 파란색 돔과 아치형 창문이 특징이며,  6개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모양의 종탑이 이 교회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교회 전면의 저 이콘(icon)은 뭘 의미하는 걸까. 요한계시록의 주 하나님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가 떠오르는데...

 일단은 인증사진부터. 비취빛으로 물든 지중해는 하늘을 쏙 빼다 닮았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바다인지 도무지 구분되지 않는다.

 이아마을은 산토리니 여행의 진수를 보여준다. 에게해의 멋진 조망과 산토리니를 상징하는 흰색 건물들, 누군가는 저런 풍경을 일러 로맨스의 대명사라고 했다. 신혼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나 프러포즈나 서약을 원하는 커플들이 가장 원하는 풍경이라면서 말이다.

 저 멀리, 칼데라에 걸터앉은 또 다른 마을은 피라마을일 것이다.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다는 느낌이다.

 계단식의 하얀 집과 풍차가 있는 절벽마을 이아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산토리니와 동의어가 되었다. 흰색 건물, 조약돌 거리, 마을 곳곳에 있는 파란색 돔, 건축은 종종 아치형의 곡선미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키클라데스와 베네치아의 영향이 혼합된 산토리니의 독특한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먼저 메인 골목을 따라 왼쪽으로 간다. 칼데라가 만들어놓은 절벽의 난간을 따라 길이 나있는 모양새인데, 에게해 쪽 비탈진 벼랑에는 흡사 제비집이라도 되는 양 집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그리스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경치가 오른쪽으로 펼쳐진다. 푸른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그리스 국기처럼 푸른 바다와 흰색 건물이 상징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잠시 후 작은 공원을 만났다. 아니 교회의 종탑이 세워져있는 거나 둥그런 돔에 ‘holy place’이니 ‘climb on the church’라는 경고문이 적혀있는 걸 보면 교회의 옥상일지도 모르겠다.

 화환이 받쳐져 있는가 하면, 그리스 젊은이들이 기도를 드리고 가는 저 빗돌은 대체 뭘 기념하고 있을까? 그나저나 이아마을에서도 국기가 자주 눈에 띄었다. 펄럭이는 그리스 국기마저도 하얀색 파란색으로 매우 산토리니스럽다.

 아랫도리를 하얀색 옷으로 갈아입은 저 소나무도 극히 산토리니스러운 풍경이라 하겠다.

 이아마을은 볼거리로 넘친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작품을 판매하는 갤러리가 많고 아기자기한 기념품과 산토리니의 특산품, 옷가지, 액세서리 등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골목의 좁은 길을 따라 자리 잡았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어느 하나 환상적이지 않는 게 없다. 하얀 집들이 예쁘고 곳곳에 피어있는 꽃들도 아름답고 파아란 하늘도 멋지다.

 저 집은 이제 막 페인트칠을 끝냈나 보다. 이곳 산토리니는 벽을 더럽혀진 채로 방치해 두면 꽤 비싼 벌금을 부과하고 있단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감에도 불구하고 일 년 내내 새하얀 벽을 유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아마을에서는 앉으면 앉은 대로, 그곳이 바로 포토죤으로 변하고 또 핫 플레이스가 된다.

 빼어난 주변 풍광에 푹 빠져 얼마를 걸었을까 그리스정교회가 쌍으로 들어선 광장에 이른다. 하얀색 벽과 파란색 돔은 산토리니의 상징이라서 사진이나 그림엽서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거기에 에게해의 조망까지 더한 탓인지 카메라를 든 젊은이들이 꽤 여럿 눈에 띈다.

 그중 하나가 19세기 초에 지어진 성 지오르지오교회(Saint Georgios Ola Holy Orthodox Church)’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산토리니의 교회는 보통 작고 단순하며 하나의 네이브와 종탑이 있다. 내부는 성경과 성도들의 삶을 묘사한 프레스코화와 아이콘으로 장식되어 있다.

 교회 앞, 저 동상은 대체 누구일까? 그리스를 여행하다보면 심심찮게 동상을 만난다. 하지만 하나같이 영어 병기를 해놓지 않아 주인공의 정체는 알아낼 수 없었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문득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는 참아왔던 감탄사를 터뜨린다. 나 역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것도 잊은 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빠져들었다. 세상 모든 사랑이 모여 섬이 된다면 이런 모습일까?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다.

 눈에 띄는 저 수영장은 어느 호텔의 소유일 것이다. 이아마을에 있는 대부분의 호텔은 길고 긴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벼랑에 기대어 지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수영장도 따로 만들지 않고 건물에 포함되어 있는 게 보편적이다.

 산토리니답지 않은 풍경도 만났다. 캠핑카는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고, 모터보트와 자동차는 주인이 돌아올 날만 하염없이 기다린다.

 중심광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간다. 길은 아까보다 많이 좁아졌다. 거기다 산토리니의 마을답게 계단도 나온다.

 길은 숫제 미로(迷路). 난해하기 짝이 없는 골목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바닥에 돌들을 깔아놓고 틈새를 석회로 칠해 걷기에도 딱 좋다. 담은 희고 노랗고 때로는 푸르다. '그림 같다'는 말은 최소한 이아에서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산토리니에서는 녹슨 화포까지도 멋진 조형물이 된다.

 이아마을은 하얀색 벽과 평평한 지붕, 파란색 돔형 지붕으로 대변된다. 집들은 무리를 지어 구불구불한 거리와 골목으로 연결된다.

 깎아내린 절벽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골목을 누빈다.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 하나라도 더 보겠다는 일념인데 어딘들 못 기웃거리겠는가. 그렇게 다리품을 판 덕분에 이아마을 최고의 핫 플레이스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산토리니의 상징인 블루 돔 교회(Blue domed church Santorini)’이다.

 쨍한 푸른빛의 돔이 인상적인 블루 돔 교회 성 아나스타시교회 성 스피리돈교회를 아우른다. 산토리니를 방문한 여행객이라면 칼데라 경사면에 나란히 서있는 이 교회들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남기는 것은 필수다.

 하얀 집과 파란 돔, 에게 해의 푸른 물빛이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르게 만든다. 지붕이 파란 곳은 그리스 정교회의 돔 지붕뿐이다. 그런 교회 수십 개가 푸른빛으로 포인트를 만든다.

 이아마을의 핫 플레이스 중 하나인 아틀란티스 서점은 텅 비어 있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단다. 영국인 부부에 의해 설립된 저 서점은 동화 같은 내부 인테리어가 볼거리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서점을 찾은 여행객들이 기증하고 갔다는 각국 언어로 된 책들이 빼곡한 것도 저곳만의 매력이라고 했다. 운이라도 좋으면 쉽게 구할 수 없는 서적을 득템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선명한 흰색과 블루로 치장한 건물들이 하늘과 바다의 색감과 어우러져 아름답다.

 일몰을 대비에 굴라스(Gulas) 성채의 위치를 미리 알아두기로 했다. 집사람을 카페에 남겨두고 나 홀로 길을 나선다. 하지만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벽에 그려진 방향표시를 믿고 찾아갔으나 허사. 지역 주민에게 물어봤으나 굴라스 성채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는 눈치다.

 이때 구원의 천사가 나타났다. 싱가포르에서 왔다는 젊은 여성이 주민과 나누는 얘기를 들었다며 자신을 따라오라는 것이다. 자기는 앱으로 찾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아래 사진에서 바위 벼랑 위에 있는 거무튀튀한 건축물들이 굴라스 성채이다.

 줌으로 당겨본 성채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옛날에는 귀족들의 거주지와 여러 교회, 창고 등이 모여 있었으나, 1956년의 지진으로 인해 저런 모습으로 변했단다.

 돌을 쌓아올린 게 엉성하지만 성곽의 형태는 갖췄다. ‘성 니콜라스의 성으로도 불리는 이 요새는 15세기 베네치아가 점령했을 당시 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어졌다. 1956년 지진 때 대부분의 건축물이 무너졌고, 성의 망루만이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랑의 열쇠’. 연인들은 자물쇠를 난간에 걸고 두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 기도하듯 주문을 외운다. 우리 사랑 영원하게 해주소서. 열쇠는 힘차게 던져 바닷물 깊이 빠뜨린다. 열쇠가 없으니 자물쇠는 영원히 봉인될 것이고 우리 둘의 사랑도 끝이 없겠지. 파리의 센강에 놓인 퐁네프(Pont Neuf) 다리는 자물쇠로 유명해진 세계적 명소, 우리나라도 서울 남산 타워에 가면 퐁네프 못지않은 자물쇠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성채는 이아마을 최고의 전망대이기도 하다. 시야를 막는 게 없어 일망무제의 조망을 허락한다. 참고로 저 하얀색 건물들은 외세에 대한 저항을 담았다고 했다. 그리스가 외세에 점령당했을 때 국기 좌상단의 십자가 색을 따 외벽을 하얗게 칠했고 파랑 바탕색으로 창틀을 장식했다는 것이다.

 풍차가 멋진 오른쪽 풍경도 눈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선명한 쪽빛 바다와 햇볕 쨍하게 내려쬐는 하늘 그리고 이와 대비를 이루는 하얀색 건물과 파란 지붕들. 저런 풍경이 있었기에 포카리스웨트 CF가 성공을 거두었지 않나 싶다. 저런 청량한 풍경에다 청량감을 퐁퐁 풍기던 손예진, 사람들은 당연히 해당 음료에서 청량함을 느꼈을 것이다.

 저 아래, 그러니까 260여 개나 된다는 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옛 항구인 아무디 베이(Ammoudi Bay)’가 나온다. 생선·바다가재·새우·홍합 등 신선한 해산물로 맛있는 요리를 해준다는 선셋이란 유명 맛집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려가는 게 쉽지도 않고 눈요깃거리도 없다는 가이드의 귀띔에 넘어가주기로 했다. 어제 저녁에 먹은 해산물 믹스그릴의 비싼 가격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옛 방앗간인 풍차 역시 이아마을을 대표하는 사진 명소이다. 풍차를 배경으로 삼으면 인생샷 하나쯤은 거뜬하게 건질 수 있단다.

 그림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 같은 저 풍차는 현재 숙박시설로 제공되고 있단다. 내부에 침실과 욕실은 물론이고 작은 부엌까지 구비하고 있다나? 하지만 하도 인기가 많아 8개월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하룻밤 묵어갈 수 있다니 참조한다.

 이아마을은 현재 진행형이다.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고공 크레인이 분주히 움직인다.

 다시 돌아온 굴라스 성채’. 일몰이 가까워지자 여행객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희고 푸른 이아마을과 이와 대비되는 붉은 노을을 360도로 돌려가며 감상한다. 그게 산토리니 여행의 백미로 꼽힌다나?

 해질 무렵이 되자 성채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도 없어진다.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피부의 사람들, 인종 전시장이라고나 할까? 동일한 특징도 보인다. 나라에 관계없이 커플이 주류를 이룬다.

 마을 너머 작은 섬 위로 해가 지고 붉은빛은 바다를 검게 물들인 뒤 하얀 마을 위에 내린다.

 이아마을의 자랑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석양이다. 바다가 보이는 절벽이라면 어디서든 일몰을 감상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곳 굴라스 성채가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절벽 위의 집들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마을 전체는 고요에 휩싸인다.

 메인광장으로 되돌아오는 길, 골목은 황홀하게 반짝이는 보석 진열대로 변해있었다. 지중해의 보석이라는 산토리니가 진짜 보석으로 환생이라도 한 듯이...

진안고원길 3구간(내동산 도는 길)

 

여행일 : ‘24. 2. 3()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백운면 및 성수면 일원

여행코스 : 백운면사무소산림환경연구소구신치원구신마을염북마을염북재쉼터점촌마을원외궁마을성수면사무소(거리/시간 : 18.5km, 실제는 산림환경연구소부터 16.18km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백운면사무소(진안군 백운면 동창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장수) 진안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를 타고 임실·남원 방면으로 10km쯤 내려오다 백운3교차로에서 1시 방향의 임진로로 들어오면 곧이어 백운면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이름(내동산 도는 길)처럼 내동산을 가운데 놓고 반 바퀴쯤 돌아가는 18.5km짜리 구간이다. 덕분에 내동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여러 마을을 지나고, 주민들이 소통했던 고개도 여럿 넘는다. 난이도는 중간’. 하지만 난 12km를 목표로 걷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산림환경연구소부터 걸었다.

 3구간의 출발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앞 화단에 세워져 있다.

 10 : 25. 실제 출발지인 전북산림환경연구소. 임업에 관한 연구와 기술보급, 우량종묘 생산, (산림박물관·수목원·휴양림)운영관리 등을 위해 설치된 전북특별자치도청 소속기관이다. 특히 지역 적응력이 뛰어난 신품종을 개발하는데, 이곳에서 육종 개발한 왕방울은행나무는 상표등록까지 되어있으며, 무궁화 신품종도 국립종자원에 품종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연구소는 내동산(887.9m)의 허리쯤에 들어앉았다. 덕분에 지대가 높아 시야가 툭 트이는데, 이를 놓치지 않고 청사 앞 잔디밭을 전망대 삼아 조망도까지 설치해 놓았다. 백운면의 들녘너머로 지나가는 금남호남정맥을 사진과 대조해가며 감상해보라는 모양이다.

 1천 미터를 훌쩍 넘기는 고봉들이 파노라마를 이루며 좌우로 펼쳐진다. 가운데서 우뚝 솟아오른 게 선인무수(仙人舞袖)와 장군대좌의 천하명당을 숨기고 있다는 선각산(仙角山·1,142m)이다. 왼쪽은 덕태산(1,113m), 그리고 오른쪽 저 멀리로 보이는 게 팔공산(1,151m)이다.

 이곳은 고원화목원’. 그럴듯한 이름에 이끌려 단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청사 근처에서 한국 전통정원을 만났다. 하지만 손바닥만 한 연못과 정자가 전부인 풍경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겨울철이니 야외 식물원은 더 초라할 게 분명하다. 나머지 구역의 구경을 포기해버린 이유다.

 정원의 뒤. 산림욕장으로 오르는 나무계단 앞에서 진안고원길 이정표(성수면사무소 16km/ 백운면사무소 2.5km)를 만났다.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다보니 2.5km를 단축한 셈이 됐다.

 2017년 문을 연 고원화목원은 식물연구소로 우리나라 식물 종 다양성 확보와 보전을 위한 곳이다. 전문 원() 23개와 아열대식물원, 자연학습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1,150종류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고원지역에서 볼 수 있는 구름국화·한라구절초·구상나무 등 우리나라 특산종도 보호되고 있단다.

 반달곰 가족이 손님을 맞는 아열대식물원은 피라미드형으로 지어졌다. 오전 9 30분부터 오후 5 30분까지 문을 여는데, 동절기(10-2)에는 이보다 30분 늦게 문을 열고, 30분 먼저 문을 닫는다.

 온실 내부엔 260여 종 7,000여 본의 열대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1 365일 언제든 활짝 피운 다채로운 꽃을 만나볼 수 있다.

 겨울에 보는 꽃은 호사(豪奢). 웰빙을 넘어선 힐링이다.

 고원화목원은 내동산(萊東山)의 품에 안겨있는 모양새다. 참고로 내동산은 백마산으로도 불린다. ‘원구신(성수면 구신리)’ 마을의 노적바위가 갈라지면서 백마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 백마가 거닐어 백마산이 됐다고 한다. 내동산의 명칭은 선인이 노닐었다고 해서 중국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蓬萊)에서 ()’자를 따왔다고 한다. 고지도인 해동지도 광여도에는 내동산(內東山)으로, ‘여지도서에는 내동산(萊東山)으로 표기 돼 있다고 했다.

 10 : 44. 단지를 빠져나와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선다. 이정표(성수면사무소 15.1km/ 백운면사무소 3.1km) 고원화목원을 통과하는 구간이 900m임을 알려준다. 내 앱은 1km를 찍고 있다. 볼거리가 없다며 투어를 생략했지만 탐방로를 벗어나 두어 곳을 기웃거렸더니 어느새 그만큼의 거리를 걸었던 모양이다.

 10 : 46. ‘상서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덕현리(德峴里)’ 5개 행정부락(원덕·상서·윤기·동산·내봉) 중 하나이다. 그런데 마을 앞 이정표는 상덕현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행정 단위인 상서마을도 2개의 자연부락(상덕현·서촌)으로 나뉘는데, 그중 상덕현 마을이란 얘기일 것이다.

 탐방로는 이제 원덕(또는 원덕현)’ 마을로 간다. 예전 마을 어귀에 장승이 세워져 있었다고 해서 장승백이로도 불리는 덕현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이다.

 이때 백운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흘러가는 반송리·동창리·운교리 일대는 300-500m의 넓은 충적지가 발달되어, 다른 곳에 비해 평야지대가 넓은 편이다.

 10 : 49. 원덕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마을 뒤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구신치로 간다. 초입의 이정표가 다음 들르게 될 원구신 마을까지 1.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구신치로 올라가는 길. 버거울 정도는 아니지만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논두렁에는 세 떼를 쫓던 허수아비가 올 가을 찾아올 새로운 풍요를 기다리며 다랑논을 지키고 있었다.

 가슴 아픈 현장도 눈에 띈다. 규모가 제법 큰 축사지만 안은 텅 비어있었다. 가축을 기를 수 없는 뭔가의 이유가 생겼을 것이고, 이를 헤쳐 나가지 못한 농부는 눈물을 머금고 축사의 문을 닫아야만 했을 것이다.

 고원지대의 가장 큰 특징은 겨울 한파가 매섭다는 점이다. 바람도 거셀 게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주택의 외벽을 두껍게 돌로 쌓았다. 저 정도면 그 어떤 추위도 무서울 게 없겠다.

 11 : 02. 낙엽송 숲속에 들어앉은 구신치를 넘는다. 백운면의 덕현리와 성수면의 구신리를 잇는 고개로 덕고개라고도 불린다. 예전 백운면 사람들이 임실장이나 관촌장을 오갈 때 넘나들던 고개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오랜 세월 발길에 닳고 닳은 고갯마루는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움푹 파여 있었다.

 고갯마루의 이정표(성수면사무소 13.8km/ 백운면사무소 4.7km)는 이곳이 3구간의 인증 장소임을 알려준다. 참고로 진안고원길은 각 구간마다 두 곳의 인증지점이 있다.

 고개 너머에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침목으로 바닥을 깔고 그 위에 통나무 의자를 배치했다. 구신리 쪽의 시야까지 툭 트이지만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원구신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한시라도 빨리 따라잡아야하기 때문이다.

 원구신마을로 내려가는 길. 잠시지만 전형적인 산길을 걷는다. 맞다. 진안고원길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을 되살려냈다고 했다.

 길을 걷는 여행자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둘레길은 지역 주민의 생활 터전을 지나기 때문에 농작물을 따거나 논밭에 함부로 들어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 주인 있는 임산물 채취도 마찬가지다. 지역 주민에게 농작물이나 임산물은 소중한 재산이자 자식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11 : 07. ‘742번 지방도로 내려선다. 임실군에서 들어와 진안군 성수면과 백운면을 거친 다음 장수군으로 넘어가는 지방도이다.

 도로를 80m쯤 걷다가 마을표지석 앞에서 농로로 접어들어 원구신 마을로 간다. 법정 동리인 구신리(求臣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원구신·염북·장성·시동) 중 하나로 원구신(元求臣)’이란 지명은 구신리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다.

 11 : 11. 잠시 후 도착한 원구신 마을. ‘구신리라는 지명은 고려 말 이성계가 운봉에서 왜구를 격퇴한 후 개성으로 돌아가다 이곳의 지형을 보고 신하를 구하는 형국이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사진은 마을회관 앞 정자이다. 공동 우물 위에 정자를 올린 게 특이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마을 어귀. 길을 가운데 두고 왼쪽은 동뫼라는 나지막한 동산(저 위까지 올라가본 둘레길 도반은 꼭대기에 묘가 있더라고 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모정(茅亭)이 들어앉았다.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지점이다. 이 일대의 지명을 낳게 한 기념물이 바로 저곳에 있기 때문이다.

 마을 안내판은 모정 옆에 노적바위가 있다고 적었다. 모정보다도 더 커다란 저 바위를 이르지 않나 싶다.

 저 바위가 벼락을 맞아 갈라지면서 백마가 나왔다고 한다. 그 백마가 거닐어 백마산(지금의 내동산)이 됐으며, 백마가 산에서 내려와 마령면의 마령이 됐단다.

 동뫼 아래에는 열부 경주김씨의 기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전태익의 처라는 것 말고는 다른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에서 흘러내려온 물길은 제법 너른 들녘을 만들어냈다. 탐방로는 그 물길을 따라 간다. 하나 더. 안내판은 또 원구신 사람은 송장도 무겁다는 말도 있다고 했다. 그만큼 물이 풍부한 마을이란다. 덕분에 농작물의 수확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품질도 뛰어나다나?

 이즈음 집사람을 만났다. 출발지인 원구신마을에서 5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나는 3km쯤 걸어왔다). ‘혼자가 아닌 함께를 추구하는 그녀답게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11 : 23. 탐방로는 구신천(求臣川)’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간다. 그렇게 10분쯤 걷다가 다리(이정표 : 하염북마을 1.6km/ 원구신마을 550m)를 건넌다. 이후부터는 구신천을 왼쪽으로 바꿔 차고 간다. 참고로 구신천은 구신리의 내동산 남쪽에서 시작되어 관촌면 방현리 부근에서 섬진강으로 합류되는 길이 11km의 하천이다. 이게 운수·신기리를 지나면서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지류들을 보태 몸집을 부풀린 다음 좌산리에 이르면 좌산천(佐山川)’으로 이름을 바꾼다.

 11 : 27. ‘구신천(求臣川)’을 경계로 진안군과 임실군이 나뉜다. 때문에 임실군(관촌면)의 산골마을로 들어가는 구암교(이정표 : 하염북마을 950m/ 원구신마을 1.1km)’를 만나기도 한다. 그 너머 산골짜기에는 거북이를 닮은 바위가 있다는 구암마을(운수리)’이 들어앉았다.

 구신천은 공존의 현장이라고 하겠다. ()에 물길(魚道)을 따로 만들어 물고기의 이동을 자유롭게 했다. 덕분에 하천에서 서식하는 회유성(回遊性) 어류가 인공구조물로 막힌 공간을 쉽게 오르내린다.

 11 : 35. 또 다시 742번 지방도(성백로)로 올라선다. 이어서 도로를 따라 100m쯤 걷는다. 짧은 거리지만 보행로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니 오가는 차량을 조심해가며 걸어야 한다. 도로를 횡단할 때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하염북마을 앞을 지나는 이 도로는 옛날 고창에서 장수까지 등짐으로 소금을 나르던 행상 길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이곳 하염북에 주막이 3개나 있었단다.

 11 : 37. ‘하염북마을 앞 삼거리에서 관촌으로 향하는 742번 지방도(성백로)를 버리고, 성수 방면으로 가는 오른쪽 염상로로 옮긴다. 단풍나무와 철쭉을 가로수 삼은 멋진 구간이다. 하지만 이 구간도 역시 보행로가 따로 나있지 않으니 오가는 차량을 피해가며 걸어야 한다.

 인삼 재배단지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진안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인삼이 재배됐다. 기록상으로도 370년쯤 전, 지금의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하나 더. 진안은 인삼과 사과가 주요 소득원이다.

 11 : 46. 이정표(‘하염북마을에서 650m)가 이제 그만 상염북마을로 들어가란다. ‘구신리(求臣里)’를 구성하는 또 다른 자연부락(행정단위)으로 아까 지나온 하염북과 이곳 상염북을 합쳐 염북(念北)’이라 하는데, 마을 앞에서 수문장을 자처하고 있는 충성스런 느티나무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자나 깨나 임금이 계시는 북쪽만을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마을 앞은 10여 그루의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370년이나 묵었다는 느티나무(진안군 보호수)가 눈길을 끈다. 국난을 맞아 군왕을 생각하여 쓰러졌다가 소생했다는 나무다. 임진왜란이 나고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자 나무가 스스로 북쪽으로 엎드려 꽃을 피우지 않다가 선조가 환궁하자 스스로 일어나 꽃을 피웠는가 하면, 1910년 경술국치 때도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쓰러졌다가 3년 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후 주민들은 이 나무를 충목(忠木)’이라 불렀고, 그늘에 충목정(忠木亭)’이란 정자를 지어 그 충정을 기려오고 있다고 했다.

 마을 담벼락은 벽화로 채워 넣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을 암시하는 풍물놀이와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몸짓에서 산골마을의 이상향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농로가 나그네의 발길을 인도한다. ‘염북터널로 이어지는 좁은 골짜기에 손바닥만 한 다랑논들이 오밀조밀 들어앉았다.

 이런 골짜기에서의 둠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조상들은 논·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를 파고 물을 저장했다. 이 웅덩이가 바로 둠벙이다.

 11 : 57. 농로는 2차선 도로인 염상로와 연결되고 있었다. 하지만 탐방로는 100m쯤 전방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임도를 따른다. 초입의 이정표(성수면사무소 9.6km/ 백운면사무소 8.9km) 3구간의 절반 조금 넘게 걸었음을 알려준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구신리(백운면) 염북마을과 도통리(성수면) 중평마을을 잇는 6.42km 길이의 임도로 중간에 해발이 543m나 되는 염북재를 넘어야 한다.

 안내판은 차량통행 때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나열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폭이 넓은데다 정비까지 잘 되어있어 안심하고 다녀도 되겠다. 차량통행이 빈번한 탓인지 길도 반질반질하게 나 있었다.

 진안고원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이정표나 리본, 화살표(페인트) 등이 촘촘히 설치되어 있어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저런 안내판은 옥의 티라 하겠다. 진안고원길의 산악구간을 재구성한 풍경이라는데 얼룩이 져서 애초에 그림이 있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임도는 완만한 편이다. 가끔 가파른 구간도 나오지만 대부분은 이처럼 평탄하게 이어진다. 임도 초입에서 염북재까지의 거리는 3km. 반면에 높여야 할 고도는 200m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서둘러 고도를 높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산이 깊으니 야생동물이 많을 것은 당연. 멧돼지를 주의하라는 안내판까지 세워둔 이유일 것이다. 멧돼지를 만났을 때의 대처요령을 적어두는 배려가 돋보인다.

 야생동물 포획 틀도 눈에 띈다. 하나 더. 누군가는 인적이 드문 진안고원길은 사람보다 동물을 더 많이 만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갑자기 풀숲에서 날아오르는 꿩을 보고 놀란 게 전부였다.

 잠시 쉬었다가라는 듯 벤치도 놓아두었다.

 외길이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런데도 시·종점까지의 거리가 적힌 이정표를 곳곳에 세워놓았다. 덕분에 얼마를 왔고, 또 얼마가 남았는지를 감안해가며 걷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 좋았다.

 가끔은 요런 경사로가 나오기도 한다. 아무튼 길은 굽이굽이 잘도 휘돌아간다. 이래서 내동산 도는 길이라는 3구간의 브랜드가 생겨났지 않나 싶다.

 겨울철 트레킹의 가장 큰 단점은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빈 가지만 남은 길가 나무들이 심심찮게 시야를 열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 45.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염북재 쉼터에 이른다. 조망이 툭 터지는 곳에 데크로 대를 쌓고 그 위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조성했다. 참고로 이곳은 임도구간에서 해발이 가장 높은 지점이다. 핸드폰의 앱은 548m를 찍고 있었다.

 이정표(성수면사무소 6.4km/ 백운면사무소 12.1km)가 이곳이 인증 지점임을 알려준다. 3구간의 두 번째 인증지점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니 완주를 인증받기 위해서는 이정표와 본인의 얼굴이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두어야 한다.

 쉼터에서의 조망은 화려했다.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손바닥만 한 농경지. 그에 기대어 살아가는 마을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 뒤로는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저래서 이곳 (··)지역을 첩첩산중이라고들 하는 모양이다.

 잠시 후 능선의 한 지점을 넘는다. 생김새로 봐서는 염북재이지 싶다. 하지만 해발은 쉼터보다 약간 낮은 536m를 찍는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벌목이 끝난 개활지를 눈에 담아가며 걷는 구간이기도 하다.

 12 : 58. 두 번째로 만난 임도 안내판. 이정표(성수면사무소 5.5km/ 백운면사무소 13.0,km)가 종점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준다.

 산이 이렇게 깊은데 심마니가 없겠는가. 산자락을 누비고 있는 심마니들을 만났고, 또 그들이 캤다는 더덕과 도라지도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약초에 문외한 나에게는 더덕이나 도라지 보다 길가에 널리다시피 한 복분자가 더 관심을 끈다. 이곳뿐만 아니라 임도를 걷다보면 곳곳에서 복분자 숲을 만난다. 그러니 진안고원길 3구간은 오뉴월에 찾아야 제격이겠다.

 13 : 27. 첫 삼거리를 만나 오른편으로 간다. 같은 임도(중평-염북)이지만 중평안길이란 고유의 이름까지 갖고 있는 구간이다. 이정표는 이제 3.4km만 더 걸으면 종점인 성수면사무소에 이른다고 알려준다.

 13 : 28. 100m쯤 더 걷다가 왼쪽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든다. 초입에 방향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도보 여행자의 약속을 되뇌어본다. 먼저 길을 허락해주신 마을과 숲속 생명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 이렇듯 사유지까지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신 주민들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는가.

 오솔길은 꽤 가파르게 이어진다. 하지만 폭신폭신한 흙길이라서 내려서는데 부담은 없다.

 13 : 34. 잠시 후 도착한 점촌마을(이정표 : 백운면사무소 3.0km). 법정 동리인 외궁리(外弓里)’를 구성하는 3개 행정부락(원외궁·안평·신고) 중 하나인 신고마을. 이게 또 신리와 고미동, 점촌으로 나뉜다. ‘점촌(店村)’이란 지명은 이 마을에 있었다는 도요지(陶窯址)로부터 유래되었지 않나 싶다. 고려 때 청자를 생산했었고, 120년쯤 전에는 옹기(甕器) 가마가 들어섰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마을을 스치듯 지나 건너편 산자락으로 향한다. 이때 귀여운 소품들로 치장된 민가를 지나기도 한다.

 이후부터는 전형적인 산길을 걷는다.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을 되살려냈다는 진안고원길이다. 하지만 이 구간을 걸으며 묵은 길이란 표현이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게 나만의 오해일까? ‘진안고원길이란 브랜드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억지로 땔감이나 약초를 구하러 다니던 산길로 코스를 돌려놓은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높이 326m의 능선을 가로지른 다음에는 가파르게 내려선다. 통나무계단이 끝 간 데 없이 놓여있는 구간이다.

 13 : 53. 신리저수지 제방으로 내려선다.

 13 : 54. 건너편 관진로(이정표 : 성수면사무소 2.1km)로 올라서서, 종계장(種鷄場)으로 여겨지는 시설물을 전면에 두고 걷는다.

 14 : 04. 그렇게 10분쯤 걷다가 만난 삼거리(이정표 : 성수면사무소 1.6km)에서는 오른편으로 간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원외궁마을이 놓여있다. 고개를 넘어가면 한 마을이 나오고, 또 산자락 모퉁이를 돌아서면 다른 한 마을이 나오는 게 진안고원길의 특징이다. 추억 속의 내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14 : 12. ‘원외궁(元外弓) 마을에 이른다. 외궁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외궁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활등성이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렇게 생긴 이름이 활목’, 마을의 위치가 그 활목의 바깥쪽이라고 해서 외궁(外弓)’이 되었다. 여기에 으뜸 원()’자를 보탰으니 외궁리에서 가장 먼저 형성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동구 밖에는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원외궁 마을이 풍수적으로 배의 형국이라서 배가 떠나가지 않도록 마을에 샘을 파지 못하게 했고, 재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수구막이 역할을 해줄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2차선 도로인 가외반로를 따라 안평마을(성수면소재지)’로 간다.

 14 : 21. 외궁초등학교를 오른편에 끼고 직각으로 방향을 튼다. 1934년에 문을 열었다는 학교는 현재 20명의 학생이 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건물은 도회지 학교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날이 갈수록 주민이 줄어들고 있는 농촌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 하겠다.

 종점인 성수면사무소로 가는 길. 중간에 서바이벌 훈련장을 연상시키는 놀이터가 들어서있었고, 화장실도 눈에 띈다. 하지만 문이 잠겨있어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쯤에서 팁 하나. 화장실을 찾아 면사무소 문을 두드렸는데, 당직자로 보이는 여직원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맞다. 현대는 공공 업무도 서비스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14 : 26. 조금 더 걸어 성수면사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이 16.18Km을 찍고 있다. 절반 이상이 임도나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마주보지 말고 같은 방향을 보자는 집사람. 그런 그녀가 함께 해주었기에 오늘도 행복한 여정이 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집사람을 만나 결혼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서해랑길 45코스(곰소항 회타운  모항 해수욕장)

 

여 행 일 : ‘24. 1. 27()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진서면 및 변산면 일원

여행코스 : 곰소항 회타운작도마을관선마을왕포마을작당마을변산자연휴양림모항해수욕장(거리/시간 : 14.7km, 실제는 15.81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5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다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생태계의 보고인 곰소만의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서해바다로 나가는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곰소 나룻산공원 및 모항 광맥계를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곰소항 회타운(고창군 진서면 곰소리)

서해안고속도로 줄포 IC에서 내려와 710번 지방도를 타고 줄포로 온다. 줄포사거리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부안방면으로 2km, 영전사거리(부안군 보안면)에서 30번 국도로 옮겨 격포방면으로 7km쯤 달리면 격포항에 이르게 된다. 곰소복지회관 앞에서 왼쪽으로 들어오면 수산물판매센터가 나온다. 서해랑길(부안45코스) 안내도는 센터의 뒤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두 번째 여정.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온 곰소만의 해안선을 따라 서해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길이는 14.7km, 작은 오르내림이 있는 산자락을 헤집기도 하지만 거리가 짧은 탓에 난이도는 별이 2(5개 중)로 분류된다.

 10 : 35. ‘곰소항길을 따라 서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 양옆으로 젓갈상점과 건어물상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곰소항으로 들어오는 수산물이 그만큼 풍부하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맞다. 곰소항은 하루 130여척의 어선들이 드나들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다고 했다. 그로 인해 국내 최대의 젓갈시장을 비롯해 수산시장과 건어물시장 등이 조성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고 한다.

 갈치의 새끼인 풀치라고 했다. ‘갈치의 원말은 칼치. 칼 모양을 닮은 고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갈치의 새끼는 풀치가 되었단다. 작고 기다란 게 풀잎을 닮아서라나? 그러니 이 자라 이 되는 셈이다.

 10 : 41. ‘곰소항은 전북특별자치도에서 군산항 다음으로 큰 어항이다. 바다를 지키는 가장 오래된 수군의 중심 진영(검모포)이기도 했다. 일제 때는 인근에서 수탈한 각종 농산물과 군수물자가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해방 후에는 칠산어장의 조기잡이 배를 비롯한 주변의 고기잡이배들이 몰리던 수산물 집산지였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포구는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싯구를 떠올리게 만든다. 꼬맹이 어선 20여 척이 물이 차오르기만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10 : 44  10. 49. 잠시 후 나룻산 공원에 이른다. 서해랑길은 공원을 우회해 간다. 하지만 일단은 나룻산으로 올라가 보자. 서해바다에 덧댄 곰소만에 대한 조망이 일품이라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공원 앞 조형물은 을 형상화했다. ‘곰소라는 지명을 모티브로 삼았을 것이다. 포구(옛날엔 섬이었다) 앞에 있었다는 깊은 소()에서 곰소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니 말이다. 이 소를 여울개라고도 하는데 칠산바다의 수호신인 개양할머니가 이곳을 건너 다 무릎까지 빠졌다는 전설도 있다.

 정상에는 워털루 평원 사자의 언덕( Butte du Lion)’을 연상시키는 원뿔형의 봉우리를 쌓아놓았다. 규모야 엄청나게 차이가 있었지만... 아니 사자 대신 조명등을 꼭대기에 앉힌 것과 오름길을 계단 대신 무장애 길로 만든 것도 다른 점이었다.

 바위절벽에는 범선을 걸쳐놓았다. 바다를 향하고 있는 게 저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려는 부안 군민들의 진취적인 기상을 담았을지도 모르겠다.

 뱃머리에 서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곰소항의 전체적인 풍경은 물론이고, 저 멀리 곰소만의 터줏대감 죽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거기다 작은 고깃배들이 하얀 물살을 가르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완성시킨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10 : 53. 입구까지 되돌아 올 필요는 없다. 중간쯤에서 오른쪽으로 나있는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오면 곰소항 젓갈단지로 연결된다. 이쯤에서 팁 하나. 젓갈단지에 들르면 천일염으로 곰삭힌 맛깔스런 곰소젓갈을 맛볼 수 있다. 맛이 있으면 두어 통 사와도 될 일이고 말이다. 나야 지난번 44코스 때 한보따리 사갔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지만... 참고로 곰소는 강경, 광천, 소래포구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젓갈 생산지다.

 젓갈단지를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바닷가. 이번에는 벚꽃나무 가로수 길을 따른다. 나른한 봄날 마파람에 꽃비라도 날릴라치면 장관을 이루겠다.

 10 : 58. 30번 국도(청자로)로 올라서 격포항 방면으로 간다. (진서리·유천리·용계리·반암리) 도요지 등 이곳 부안지역이 우리나라 청자(초기) 생산의 메카였던 사실이 도로 이름에까지 나타난다.

 잠시 후 청자로는 길이가 300m쯤 되는 방조제를 건넌다. 이 방조제 덕분에 오른편에 커다란 인공호수가 만들어졌다. 주변에 대하양식장이 들어서있는 걸로 보아 바닷물을 가두어두고 있는 모양이다.

 왼쪽으로는 곰소만이 드넓게 펼쳐진다. 영광굴비로 잘 알려진 칠산바다의 한 자락이 내륙 깊숙이 들어온 천혜의 입지조건으로 한때는 최대의 조기잡이 어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곰소나 줄포 외에도 사포, 후포 등 여러 포구가 발달했었다.

 11 : 04. 방조제를 건너면 작도마을’. 법정 동리인 진서리(鎭西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구진·연동·진동·진서·백포·작도) 중 하나로 진서리의 서쪽 끝에 위치한다. ‘작도(作陶)’,  그릇을 만드는 마을이라는 이름대로 고려시대 때 이 마을에서 고려청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40개소의 가마가 있었다는 진서리 요지(鎭西里窯址)’는 현재 사적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11: 08. 곰소초등학교에 이어 나타나는 작도마을 경로당’. 서해랑길은 경로당 건물을 왼쪽에 끼고 90도로 방향을 튼다. 초입에 이정표(종점 12.7km/ 시점 2km) 말고도 부안마실길의 이정표(모항 갯벌체험장 10.4km/ 곰소염전 2.3km)를 따로 세웠다. 두 길이 함께 쓰는 구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우리는 지금 부안마실길의 7코스인 곰소 소금밭길(왕포곰소염전, 12)’을 걷는 중이기도 하다.

 이후부터는 곰소만과 어깨를 맞대고 걷는다. 진행방향에 놓인 죽도를 바라보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 내가 잘못 보았나? 인삼을 산삼의 사촌쯤으로 여겨왔기에 산자락이나 구릉지에서 기르겠거니 했었다. 실제 인삼의 주산지도 진안이나 금산, 풍기 등 내륙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바다에서 10m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인삼을 기르고 있으니 어찌 생소하지 않겠는가.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다른 방조제들과는 달리 이곳(‘석포방조제라고 했다)은 한없이 구불대는 감입곡류의 하천을 닮았다. 대자본에 의한 계획적인 간척사업이 아니라 주민들이 손수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 똥섬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들을 제쳐두고 하필이면 똥섬이 되었을까? 저렇게 예쁜 섬을 두고 말이다.

 이번에는 바다를 향해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파고 들어갔다. 한 평이라도 더 넓히고 싶은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낸 풍경이지 싶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곰소만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서해바다를 향해 뻗어나가는 바다에는 죽도가 두둥실 떠오른다. 곰소만 안쪽에 들어있다고 해서 내죽도(고창 앞바다의 외죽도와 대비된다)’라고도 불리는데, 사리 때는 갯벌을 걸어서 들어갈 수도 있단다.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어 지금은 곰소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트레킹을 시작했던 곰소항이 실루엣 처리되어 고개를 내민다.

 물 빠진 바다에는 고깃배가 낮잠을 잔다. 물이 들면 부지런을 떨어야겠지만, 썰물 때면 하릴없어진 고깃배에 휴식의 여유가 주어진다. 그 한가로운 풍경에 반한 우리 같은 나그네들은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기 바쁘고.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드넓은 들녘 너머에서는 내변산의 험상궂은 능선이 일렁인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관음봉(424m). 그 아래에 천년고찰 래소사가 고즈넉이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11 : 35. 방조제를 잘 따르던 탐방로가 느닷없이 내륙으로 방향을 튼다. ‘마실길 이정표(왕표/ 곰소)도 오른편을 가리킨다. 방조제 끝에서 길이 끊긴 탓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썰물일 때는 바닷가를 따라 관선마을로 갈 수도 있다. 관선마을 위 국도에서 서해랑길과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실제, 모험심이 강한 일행 몇 명은 길이 아닌 그 길로 가로질러 오기도 했다.

 이즈음에서 코스를 단축한 집사람을 만났다. 석포마을에 있는 무하리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했더니 가까운 서해랑길 접점까지 나와 있었다.

 11 : 38. 석포마을 방향으로 300m쯤 걸었을까, 길가에 둘레길 나그네들을 위한 쉼터용 정자를 지어놓았다.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30번 국도로 올라간다.

 오르막길.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간척사업이 만들어 낸 석포리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인간이 지닌 무궁무진한 능력에 감탄하며 조금 전 걸어온 궤적을 눈으로 그려본다. 그러자 부지런히 걸어오고 있는 후미그룹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11 : 42. 서해랑길은 도로로 올라서마자 다시 헤어지란다. 이정표(종점까지 9.7km)도 왼쪽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를 무시한 채로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정표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관선헌(觀仙軒)’이란 저 빗돌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초입에는 관선마을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런 안내판은 둘레길이 지나는 마을마다 설치되어 있었는데, 45코스의 특징 중 하나로 꼽을 수도 있겠다.

 11 : 44.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시 국도. 곧은길을 놓아두고 굳이 에둘러 돌아오도록 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다고 관선헌(觀仙軒)’의 정체를 알려준 것도 아니고.

 왼쪽 발아래에는 관선마을이 있다. 법정 동리인 운호리(雲湖里)를 구성하는 7개 행정부락(마동·중마동·작당·왕포·소운호·운호·관선) 중 하나로 안내판은 풍수지리에서 지명의 유래를 찾고 있었다. 마을 뒷산에 장삼바위와 시루봉이 있는가 하면, 목탁바위·바리바위·북바위·목탁채바위 등 지형이 스님이 불공드리는 형상이라서 관선이라 불리었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가는 설명이겠지만, 옛 지명인 관선불(觀仙佛)’로 대비해보면 고개가 끄덕거려 질 것이다.

 이 뭣꼬? 산비탈에 대를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그런데 이게 전철 역사를 연상시키는 기괴한 모양새이다. 이름은 아예 읽을 수도 없게 만들어버렸다. 공사가 한창이어서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곰소만에 대한 뷰가 뛰어난 곳이니 카페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도로변의 명품 소나무에다 곰소만의 뷰까지 더해진다면 부안의 핫 플레이스로 등장할 게 틀림없다.

 11 : 50. 탐방로는 또 다시 국도와의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운호방조제로 내려간다. 그 초입, ‘마실버스 운행시간표까지 매단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관선마을과 왕포마을을 이어주는 운호방조제’. 길이가 600m나 되는 이 방조제가 운호마을의 드넓은 앞들을 만들어냈다.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검은 갯벌을 드넓게 펼쳐낸다. 석포에서 관선을 거쳐 왕포에 이르는 저 갯벌은 관선불갯벌로도 불리는데, 예로부터 갯살림이 풍성하기로 유명했단다. 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관선불의 어전(漁箭,어살) 어업이 등장한다나? 지금 저 갯벌에는 굴이 잔뜩 널려있단다. 그런데 이게 바위에 붙지 않고 펄 속에 박혀 자라는 탓에, 바위에 붙어 자라는 굴보다 대여섯 배나 크고, 맛과 영양 면에서 월등하단다. 썰물 때 햇볕을 많이 쬐는 데다 주변 갯벌이 기름지기 때문이란다.

 오른편은 운호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드넓은 들녘이다. 그 뒤로는 내변산의 아름다운 능선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그 중심에 놓인 건 아마 신선봉(488m)일 것이다.

 만조 때의 곰소만은 하얀 안개 가득하다고 했다. 이게 어선들을 안아주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낸단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온통 시커먼 배를 드러내놓고 있다. 그런데도 바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12 : 00. 운호방조제의 끝. 이정표(종점까지 8.4km)가 언덕으로 올라가란다.

 언덕으로 오르면 바다전망대 펜션’. 탐방로는 펜션의 뒷마당을 지난다. 이어서 감나무 과수원의 사잇길을 지나 왕포마을로 간다.

 12 : 08. 탐방로는 왕포마을을 횡단한다. 예쁜 벽화로 치장된 고샅을 빠져나오면 마을 어귀에 널따란 광장(이정표 : 7.8km)이 조성되어 있다. 깔끔한 화장실에다 정자가 두 개나 들어서있는 게 둘레길 나그네들의 쉼터로 안성맞춤이겠다.

 마을 앞은 포구가 들어섰다. 접안되어 있는 배들의 숫자나 크기도 시골마을 치고는 제법 크다. 맞다. 1970년대만 해도 이곳 왕포항은 가장 잘나가는 어촌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는 수백 척의 어선들이 모여서 풍어성시를 이루었다. 그래서 포구 이름도 인근 바다에서 고기잡이로는 으뜸이라는 뜻에서 왕포(王浦)’가 되었다고 했다. 용왕님도 (그 풍요로움에) 쉬어가는 마을이라나?

 채널A’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 시즌 5’가 왕포항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값비싼 감성돔과 국민횟감인 대광어(넙치)가 깜짝 잡히기도 했지만 낚시의 대상 어종은 칠산바다의 특산물인 조기였다. 그런 조기 조형물이 포구로 나가는 초입에 설치되어 있었다.

 작은 부두를 오른편에 끼고 트레킹을 이어나간다. 선착장 왼쪽의 조그마한 다리 아래를 통과해 들어온 배들이 정박해있다. 그러니 그 하나하나가 손바닥만 할 수밖에...

 12 : 18. 다시 국도(청자로)로 올라왔다. 다음에 닿게 될 작당마을이 코앞이지만 바닷가에 길을 낼 수 없었음이리라.

 12 : 22. 작당마을로 내려가는 길 초입에는 마을표지석과 함께 부안마실길 입간판을 세워놓았다. 마을까지는 400m쯤 더 걸어야 한단다. 하나 더. 조금 전 지나온 왕포마을에서 시작된 마실길 6코스 이정표(왕포마을에서 0.75km)는 종점인 갯벌체험장까지 5.4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12 : 27. 작당마을에 이른다. 운호리에 속한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작당(鵲堂)‘이란 지명은 마을 지형이 까치집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곳은 한때 조기잡이 활황으로 북적거리는 선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약 스무 가구 정도만 살아가고 있는 조촐한 마을이 되었다.

 작당마을 포구는 수로와 연결된 갯길을 활용하고 있었다.

 마을 앞 갯벌은 2018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극중 학수와 용대가 갯벌에서 싸우는 장면이 저곳에서 촬영됐다. 하지만 안내판 하나 없으니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을 극히 드물 것이다. 옛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갯벌에는 김 양식시설로 여겨지는 지주만 늘어서 있을 따름이었다.

 12 : 32. 작당마을 고샅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또 다시 국도로 올라선다. 이때 ‘600’이란 숫자로 디자인 된 (작당)버스정류장이 눈길을 끈다. 1416년 둘(부령현과 보안현)로 나뉘어있던 지역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부안현으로 탄생되었음을 자축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다. 주민들은 또 부안에 오시면 오복이 가득하다는 슬로건 부래만복(扶來滿福)’을 외치고 있었다.

 추억을 나누며라는 카페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차도 마시Go, 그릇도 사GO, 추억도 나누GO’라는 홍보문구로 유혹하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카페이니 커피는 기본. 거기에 더해 정성들여 다린 28년 전통의 대추차를 팔고 있단다.

 12 : 36. 잠시 후 도로에서 내려서서 짧은 방조제를 걷는다. 칠산바다 말고는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는 없다.

 방조제 끝에서 산으로 올라간다. 이어서 무장공비가 출현하던 시절 해안초소에서 사용하던 참호를 따라 진행한다.

 당시 사용하던 벙커도 눈에 띈다. 사용을 안 한지 오래됐지만 개·보수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요즘처럼 남북이 으르렁대는 하 수상한 시기에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누가 알겠는가.

 전북 천리길 스탬프함이 자신도 좀 봐달란다. 옆의 이정표는 부안마실길에서 세웠다. 서해랑길의 변산반도 구간은 이렇듯 여러 종류의 둘레길과 사이좋게 나눠쓴다.

 12 : 43. 이번에는 마동방조제를 걷는다. 이처럼 곳곳에서 방조제를 걷는다는 것 또한 45코스의 특징 중 하나이다. 하나 더. 마실길 안내판은 마동(馬洞)’ 마을의 유래를 옛날 선비가 이곳을 유람하던 중 유유동의 말재(말등모양)를 넘어 마동을 지나다 말이 쉬기에 알맞다고 했다는 데서 찾고 있었다.

 이즈음 최근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노을경관쉼터가 눈에 들어온다. 국도 30호선 쌍계재에 지어놓은 쉼터용의 3층짜리 전망대이다. 발아래에 있는 변산자연휴양림과 곰소만에 더해 서해바다까지 조망된다는 곳인데, 특히 해질 무렵이면 환상의 서해바다 일몰이 펼쳐진단다.

 오른쪽. 방조제가 만들어 낸 간척지는 대하양식장으로 가득했다. 수량이 제법 풍부한 마동천이 흐르니 농경지로 손색이 없겠건만. 자본주의의 생리는 돈이 더 되는 대하양식장을 만들어냈나 보다.

 ! 게 닷!’ 집사람이 호들갑을 떤다. 그녀의 가리키는 손가락의 끝. 검은 점으로 나타나던 것들이 뭔가에 놀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맞다. 바닷물이 먼 바다로 빠져나간 곰소 갯벌은 지금 치열한 삶의 현장이 됐다. 진흙에서 고개를 내민 갯것과 그 갯것들을 잡으려는 또 다른 것들의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살아보려는 희발농게의 종종걸음과 먹잇감을 노리는 바닷새의 저공비행이 교차하는 삶의 현장.

▼ 방조제 끝에는 쌍계재 아홉구비 길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45코스의 또 다른 이름이고여기서 말하는 쌍계재는 전망대가 지어져 있는 저 위의 고갯마루를 이른다.

 12 : 53. 방조제 끝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다. 마실길은 왼쪽 해안(시멘트포장까지 되어 있다)을 따르라는데 서해랑길 표식(리본)은 산비탈에 매달려있는 것이다. 일단은 이정표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고나서야 두 길이 다시 만난다는 걸 알았다. 하나 더. 만조(滿潮) 때 바닷물에 길이 잠기기 때문에 길을 에둘러 내놓았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또 다른 방조제(무척 짧다)를 지나자 안내판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부안 마실길 6코스(쌍계재아홉구비길)의 쌍계재 아래에 2.2km의 새로운 코스를 조성해놓았다는 것이다. 기존노선에 추가하면 순환코스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순환이 필요가 없는 나는 기존 코스를 따르기로 했다. 그러자 신우대 숲이 길손을 맞는다. 눈에 들어오는 신우대는 우람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크고 굵었다. 그게 하도 울창하다보니 길은 터널처럼 나있다. 이런 길을 걷는다는 것은 행복 그 자체이다. 그러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신우대 숲길은 굽이굽이 휘돌아가며 앞으로 나아간다. 때문에 조금만 떨어져도 앞사람을 놓치기 십상이다. 이쯤해서 팁 하나. 사람 키를 넘는 대나무는 신우대이고 키가 무릎 근처에 오는 대나무는 조릿대다. 신우대는 옛날에 화살을 만드는 데 썼다. 산죽(山竹)이라 부르는 조릿대로는 소쿠리를 만들었다. 지방에 따라서는 조릿대와 신우대를 병용하여 쓰기도 한단다.

 이즈음에서 만난 마동 해안경비초소는 아예 눈요깃거리로 만들어놓았다. 6.25전쟁 이후 1970년대 해안선을 통해 무장공비가 침투함에 따라 이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마동초소는 변산 내륙지역으로의 침투를 방호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내무반을 중심으로 상황실 등이 설치된 장병들의 휴식공간이기도 했다.

 이후부터는 전형적인 산길이 이어진다. 바닥 곳곳에 바위가 돌출되어있어 걷는 게 썩 편하지 않은 구간이다. 하나 더. 진서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이 이즈음에서 변산면에 바톤을 넘겨준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변산 자연휴양림이 고개를 내민다. 지난 2016년 이틀 밤을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숲과 바다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는 입소문을 믿고 찾아왔었고, ‘부안 마실길’ 4~6구간을 걸어보기도 했었다.

 숙소인 산림문화휴양관과 수영장, 생태습지관찰원 등의 시설을 갖춘 변산 자연휴양림은 바다와 가장 가까운 휴양림이다. 덕분에 모든 객실에서 아름다운 서해를 바라볼 수 있다. 날이 어둑해지면 맞은편 고창 심원면의 불빛이 오징어 어선의 집어등처럼 황홀경을 연출해주기도 한다. 가벼운 산책도 가능하다. 휴양림 뒤편으로 솔향기와 피톤치드가 가득한 솔바람 숲길 3km가 조성돼 있다.

 휴양림 앞을 지나서 또 다시 숲속으로 든다. 아까와는 달리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된다. 하나 더. 휴양림에 세워놓은 모실길 이정표는 시점인 갯벌체험장까지 1.8km가 남았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서해랑길 종점은 갯벌체험장에서도 2km가까이 더 가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곰소만은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이다. 굽이가 큰 만()은 방조제를 쌓아 농경지를 조성했고, 경제적 가치가 적은 저런 꼬맹이 만들은 자연 그대로 놓아두었다. 덕분에 우린 경관 좋은 해변을 걸어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방호용 철조망은 그대로 놓아두었다. 때문에 탐방로는 저런 개구멍을 통과할 수도 있다. 철조망 너머 군 초소가 눈에 띄기도 한다. 단장이 되어있지 않아 흉물스러운 몰골이다. 철조망에는 군 작전지역이므로 승인되지 않은 접근을 금지한다.’는 경고푯말까지 붙어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겁준다.

 해안초소의 안내판은 초소 주변을 정비한 후 보존해오고 있다 했다. 그렇다면 가리비 껍데기로 치장된 저 철도망도 그 일환일지 모르겠다. 아니면 마실길을 아끼는 어느 독자지가가 만들어놓은 예술성 깊은 작품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13 : 38. 규모가 제법 큰 해변도 만나게 된다. 양 옆이 해식애로 이루어져 경관까지 빼어나다. 탐방로가 아닌데도 해변으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가장자리는 모래가 아닌 각양각색의 조개껍질 부스러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걸 본 집사람의 방심이 동했나보다. 영화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 제니라도 되는 양 하얀 조개껍질을 공중에 흩뿌린다. 맞다. 나에게 그녀는 영원한 제니. ‘알리 맥그로우보다도 더 예쁜...

 13 : 48. 저 멀리 내변산의 울퉁불퉁한 암릉들이 눈에 들어오는가 싶으면 마실길은 금강가족타운이란 펜션에 이른다. 탐방로는 펜션의 앞마당을 가로지르며 이어진다.

 객실이 많음은 물론이고, 널따란 야외수영장과 족구장, 씨름장까지 갖추고 있는 펜션이다.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으니 갯벌체험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일 것이다. 하지만 인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 그러고 보니 그 넓던 야외수영장도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산길을 탄다. 하지만 큰 오르내림이 없어 힘들지는 않다. 길이 또렷한데다 곳곳에 마실길 표식이 설치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었다면 잃은 사람이 더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장락무극(長樂無極, 즐거움이 오래 계속해서 끝이 없다)’ 같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명심보감용 판자들을 읽어가며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만 2016년도 때보다 그 숫자가 확 줄어든 게 아쉽기는 했지만. 그게 아쉬워 당시 끄적거렸던 글을 소환해본다. ‘당신을 기다릴 것 같아요’, ‘결코 안 갈 것 같던 시간도 가고, 절대 안 올 것 같던 시간도 온다. 시간은 글쎄도 설마도 없다.’는 등 판자의 뒷면에 적혀있는 글들이 눈길을 끈다. 특히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먹지라는 술타령은 실소까지 짓게 만들고 있다.

 13 : 58. 산자락 오솔길을 지나면 작은 방조제가 나온다. 둑을 따라 걷다보면 왼편에는 모항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고 오른편에서는 갑남산의 산줄기가 나타난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능선이 나름대로 빼어난 산세를 자랑하고 있다. ! 둑에는 데커레이션(decoration)용인지 폐 선박이 놓여있었다. 덕분에 난 철판이 아닌 플라스틱으로도 배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14 : 02. 또 다시 국도(30호선)로 올라선다. 언제부턴가 도로 이름이 청자로에서 변산로로 바뀌어 있다. 변산반도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길가 2개나 되는 변산마실길 안내판은 하나같이 마실길이 부안의 지질명소들을 지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세계지질공원이라는 부연설명까지 한다. 여기에 모항 광맥계가 포함되어 있음도 알려준다. 하지만 모항의 최고 볼거리인 해골바위에 대한 안내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갑남산 아래는 김해 김씨 문중의 제각이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지난 44코스 때 고창 땅에서 만났던 빗돌처럼 세장산(世葬山)’ 대신 세천(世阡)’을 새겨 넣었다. ‘뫼 산()’ 대신 두렁 천()’자를 썼으니 선산을 산이 아닌 밭의 가장자리에 썼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우리네 선조들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땅에 터를 잡고 세거(世居)하면서 앞들에서 농사짓고 뒷산에 장사(葬事)하며 살아왔다.

 14 : 06. 잠시 후 국도와 헤어져 왼편 바닷가로 향한다. 서해랑길 이정표는 종점까지 1.4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같은 장소인데도 모항해수욕장까지는 1km가 남았단다. 서해랑길이 해안을 따라 에둘러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닷가를 따라 몇 걸음 더 걸으면 3층으로 지어진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일정한 돈을 내고 갯벌을 체험할 수 있는 모항갯벌체험장이란다. 펜션과 식당에다 체력단련장과 야외공연장, 인공폭포 등의 부대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갯벌체험을 하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텅 비어있기는 매한가지이다. 겨울철이라서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음이리라.

 갯벌체험장 앞 갯벌. 영역을 표시라도 하는 것처럼 빙 둘러 돌담을 쌓아놓았다. 아니 독살 체험을 위한 시설일지도 모르겠다. 밀물 때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어망이다. 사람들은 퍼덕이는 물고기를 그저 주워들기만 하면 되고...

 진행방향 저만큼에 모항이 보인다. 이름(실제는  자를 쓴다)처럼 어머니의 품같이 아늑한 어촌마을이다. 1999 12 31 새천년을 잇는 영원의 불씨를 채화했던 곳이라고 한다. 자 그럼 모항으로 들어가 보자. 시인 안도현은 말대로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체험장에서 조금 더 걸으면 바다의 위에다 만들어 놓은 전망데크가 나온다. 모항 앞바다의 갯벌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하지만 시설노후로 안전사고 위험이 있다며 입구를 막아버렸다. 예산 낭비의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이왕에 혈세를 들여 지어놓았으면 제대로 관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탐방로는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을 제켜두고 해안을 따라간다. 이때 만나게 되는 모항경로당에는 엄마품 건강센터라는 부속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엄마 품처럼 따스하고 정겨운 마음으로 누군가를 돌본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14 : 21. 모항(茅項) 포구는 그냥 지나친다. 크지도 그렇다고 빼어난 볼거리도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하나 더.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게 노을밖에 없네’. 한 무명 래퍼가 고향인 변산으로 내려가 겪는 우여곡절을 그린 영화 변산에 등장하는 대화다. 영화 속에서 모항은 두 주인공이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 한잔을 기울이던 공간으로 나온다. 그게 저 어디쯤일지도 모르겠다.

 포구를 스치듯 지나온 탐방로는 이제 모항 해나루 가족호텔의 뒤 해안선을 따라간다. 바닷가를 장식하고 있는 거대한 해식애를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바닷가는 거대한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안이 자랑하는 지질명소로 모항 광맥계로 불리는 곳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생선뼈 화석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진짜 생선뼈 화석은 아니다. 후기 백악기, 부안에서는 굉장히 큰 화산 폭발이 있었는데 당시 마그마와 함께 분출된 화산재들이 사면을 따라 흐르면서 빠르게 퇴적되고 굳었다. 화산재들이 다져지는 과정에서 심부에서는 균열을 따라 열수가 흐르고 광물을 성장시켜 지금과 같은 석영맥이 형성되었다.(전북서해안 국가지질공원 지질명소 홈피에서 발췌·정리)

 누군가는 채석강에서 이어진 해안절벽을 모항 주변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생각하는 바위(또는 해골바위)’로 가족호텔 근처 바닷가로 내려가면 만난다. 하지만 난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해버렸다. 그런 바위가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사전 준비 없이 방문한 내 잘못이니 어쩌겠는가.(사진은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렸다)

 전망 좋은 곳에는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서해에 대한 조망을 즐기라며 망원경까지 배치했다.

 정자에 오르자 칠산바다가 성큼 다가온다. 저 바다는 한때 황금어장이었다. 황금갑옷 입은 장수처럼 산란기를 앞둔 노란 조기들이 모여들었다. 지금은 조기잡이 안강망 배들은 더 이상 칠산바다를 찾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 칠산바다가 텅 빈 것은 아니다. 많은 뱃사람들은 여전히 칠산바다에 의지해 살아간다.

 14 : 31. ‘모항해수욕장에 이른다. 방풍림으로 조성된 듯한 오래 묵은 해송들이 지금은 피서객들의 편안한 쉼터로 변해있는 해수욕장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안도현 시인의 모항 가는 길이 유명세를 타면서 변산반도의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안 시인은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반도를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라고 표현했다. 아무튼 보드랍기 짝이 없는 모래사장과 멋진 노송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경관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임에 틀림없다. 참고로 이 해수욕장은 국토해양부에서 최우수 청정 해수욕장으로 선정(2010)한바 있다.

 이 해송 숲은 모항해수욕장의 랜드마크(landmark)이기도 하지만 전국 사진작가들의 일몰 포인트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14 : 37. 해수욕장 입구의 모항 갯벌체험장 조형물에 이별을 고하고 주차장으로 간다. 이어서 모항갯벌해수욕장 관리사무소 앞에 세워놓은 서해랑길(부안 46코스) 안내판을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이 15.81km를 찍고 있으니 조금 더디게 걸은 셈이다. 산길 구간이 썩 편치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오늘도 사랑하는 집사람과 함께 걸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 걷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은 믿지 말라고 단언했고,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또한 약보보다 식보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가 낫다고 주장했다. 이로보아 걷는 게 좋다는 것은 동서양을 불문한가 보다. 그러니 어찌 걷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거기다 사랑하는 사람까지 곁에 있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진안고원길 2구간(들녘길)

 

여행일 : ‘24. 1. 20()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마령면 및 백운면 일원

여행코스 : 마령면사무소원평지마을계남마을방화마을백마교평장마을영모정신전마을상백마을중백마을백운면사무소(거리/시간 : 14.7km, 실제는 원평지마을부터 12.21km 3시간 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마령면사무소(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장수) 진안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를 타고 임실·남원 방면으로 9km쯤 내려오면 마령사거리에 이른다. 좌회전해 200m쯤 들어오면 마령면사무소이다. 2구간(들녘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앞에 세워져 있다.

 진안에서 가장 넓다는 마령 들녘과 그 들녘에 기대어 살아가는 마을들을 지나고, 주민들이 소통했던 고개를 넘는 14.7km짜리 구간이다. 운치 있는 계곡에 자리한 옛 정자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톡톡하다. 난이도는 보통’. 하지만 난 12km를 목표로 걷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원평지 마을에서 걷기 시작했다.

 10 : 28. 실제 출발지인 원평지마을’. 마령면 청사 소재지인 평지리(平地里)를 구성하는 5개 행정 부락(사곡·석교·송내·원평지·평산) 중 하나로 면사무소(평산마을 소재)에서 동남쪽으로 1.6km쯤 떨어진 들녘에 위치한다.

 첫 만남은 의사둔암오기열기적비(義士遯菴吳基烈紀蹟碑)’. 소중한 현충(顯忠) 시설이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자신을 희생해가며 나라를 지킨 저런 이들이 아니었다면, 웰빙·힐링을 외쳐가며 전국의 산하를 누비고 있는 우리 또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둔암(遯菴) 오기열(吳基烈) 선생은 진안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한 달 후인 4 6일 전영상·김구영·황해수 등과 함께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독려하는 격문을 작성·게시하였으며, 장날에 다시 시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8·15 해방 후 제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때 북한군에 체포되어 전주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커다란 은행나무 그늘에는 영풍정(迎豊亭)’이란 정자가 들어앉았다. ‘풍년을 맞이한다는 이름대로 발아래로 펼쳐지는 너른 들녘에서 해마다 풍년이 이루어지길 기원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10 : 32. 마을 앞 도로변(국도 30호선)에는 효자 오성복(吳成福, 1795~?)의 정려(旌閭)가 있었다. 오성복은 1871(고종 8) 정려를 받았다. 정려는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오성복 지려(孝子 贈 童蒙敎官朝奉大夫吳成福之閭)’라 새겨져 있다. 그의 조상인 오빈(吳玭)의 정려도 눈에 띈다.

 진안군사(鎭安郡史)’ 친상(親喪)에 여묘(廬墓)했기에 마령면 평지리에 7세조 오빈과 함께 정려했다고 적었다. 참고로 오빈(吳玭, 1547~1593)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1590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일하다 고경명(高敬命)의 휘하로 들어가 싸웠고, 1593년 고종후(高從厚)와 함께 의병을 모아 진주성으로 들어가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절간의 일주문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대문도 눈길을 끈다. 어느 대갓집(마을 앞 너른 들녘에 걸맞는)에서 위세삼아 짓지 않았을까 싶다.

 10 : 35. 마을 앞 원평지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운계로를 따라간다. ‘진안고원길은 영풍정에서 농로를 이용해 섬진강변으로 가지만, 정자까지 다시 돌아가는 게 싫어 곧장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이때 마령면의 너른 들녘이 좌우로 펼쳐진다. 이곳 평지리는 평지를 이루는 넓은 분지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름대로 평지리는 농경지가 산지보다 많은 군내 유일한 지역이다. 섬진강 상류 지역으로 강 주변에 높이 300m의 충적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10 : 42. ‘계남교를 건너기 직전. 둑길을 타고 온 진안고원 길을 다시 만났다.

 진안고원 길의 뭉툭한 화살표가 다리를 건너란다. 노란색은 순방향, 분홍색은 역방향을 가리킨다. 하나 더. 이정표는 마령면사무소(2구간 시점)에서 이곳까지를 3km로 적고 있다. 내 핸드폰의 앱은 1km를 찍는다. 그러니 14.7km에서 2km를 단축해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다리 아래로는 섬진강의 본류가 흘러간다. 백운면 신암리 대미셈에서 발원해 백암리에서 백운동천’, 운교리에서 상표천 마치천을 합쳐 몸집을 불린 다음 이곳으로 왔다. 그래선지 상류인데도 강폭이 넓고 수량도 풍부했다.

 천변에는 길이가 140m쯤 되는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마을에서 보이는 마이산의 광대봉이 화산 형국이라 이를 가리기 위해 조성했다는데, 강줄기를 따라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도 톡톡히 수행한단다.

 불교는 민간신앙과 불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부분에서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태고종은 특히 더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사천왕상 대신 장승이 대문을 지키고 있는 광명사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었다.

 마을 앞에는 전행권(全幸權)의 처 동래 정씨의 효열비와 김상섭의 처 열녀 김해 김씨의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네들의 행적도 적혀있었지만 읽어보지는 않고 그냥 지나친다.

 10 : 49. 탐방로를 겸한 도로(운계로)는 강변과 헤어져 내동산쪽으로 방향을 튼다. 잠수 후 만나는 정자(‘望雲亭이란 편액을 달고 있었다) 앞에서는 계남마을로 들어간다. 하지만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볼 것을 권한다. 진안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로 알려진 계남정미소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로변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계남정미소는 녹슨 함석지붕에 허름한 벽체가 예전 정미소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쌀 대신 추억을 찧는다며 공동체 박물관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옛날 정미소가 마을의 사랑방 구실을 했듯 이곳이 마을의 기억을 보존하고 나누는 공간이 되기를 원해서라나? 이름 그대로 농촌마을에서 대부분 사라져가는 오래된 정미소를 새롭게 복원해 문화체험과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마을 주민들의 묵은 앨범에서 꺼낸 빛바랜 사진과 집안 깊숙이 처박혀 있던 오래된 물건들을 모아 전시해놓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계남정미소는 전주에 사는 사진작가 김지연씨의 개인 소유라고 한다. 2005년 다 쓰러져가는 작은 정미소를 사들여 수리한 다음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김씨는 구식 이발관, 정미소, 새마을운동의 유산인 근대화상회(구멍가게) 등 사라져 가는 것들을 카메라로 기록해 온 사람이란다.

 10 : 52. 정자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마을로 들어간다. 첫 만남은 농업인건강관리실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계남마을 경로당. 법정 동리인 계서리(溪西里) 4개 행정 부락(방화·계남·오동·서비산) 중 하나인 계남마을의 원래 이름은 스님이 암자를 짓고 불도를 닦았다고 해서 신앙골이었다. 그러다 큰 시냇물이 남쪽으로 흐른다는 이유로 계남(溪南)’으로 바꿨다고 전해진다.

 마을 고샅을 횡단한 탐방로는 내동산 방향으로 오름짓을 한다.

 10 : 55- 10 : 59. 잠시 후 도착한 또 다른 자연부락(계남마을의 윗뜸 정도로 치부해두자). 작은 저수지를 발아래 두고 예닐곱 채의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탐방로는 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간다. 하지만 몇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어떨까? ‘래산사라는 또 하나의 현충시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래산사(萊山祠)’는 수당(修堂) 정종엽(鄭鐘燁.1885-1940) 선생을 모시는 사당이다. 항일의병결사인 임자밀맹단에서 활동한 일제강점기 유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유림회가 지난 1957년에 세웠다. 시설로 사위동, 서원동, 수당선생 유적비, 관리사, 도장각(강당), 외삼문 등을 두고 있다.

 앙지문(仰止門, 시경에 나오는 문구로 큰 산을 우러르며 큰 뜻을 따르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다)을 들어서면 사당(萊山祠)이 나온다. 참고로 수당 정종엽은 이석용 의병장과 항일의병 활동에 동참했다. ‘임자동밀맹단(임자년인 1912년 겨울에 만들어진 비밀단체)’에 가담,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할 것을 결의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경에 체포됐다. 그 후 창씨개명 반대 및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 1940년 사망하였다. 2003년 건국포장에 추서됐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도장각(道長閣)’이 있다. 선생이 근방의 학동들을 모아 가르치던 강당으로 1932년에 건립했다.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유형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당 앞에는 애국지사수당정선생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10 : 59. 사당을 빠져나와 다시 길을 나선다. ‘방화마을까지는 농로를 따른다.

 11 : 01. 잠시 후 울창한 소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최근에 지은 듯 시쳇말로 잉크도 안 마른 정자도 잠시 쉬었다가라며 손짓한다. 방화마을에서 내동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들머리이다.

 이곳은 마이산으로 대변되는 진안 땅. 그래선지 마이산의 핫 플레이스인 탑사에서나 볼 법한 돌탑을 쌓아놓았다.

 이왕에 왔으니 내동산 등산로 안내판도 한번쯤 살펴보자. 내동산은 백마산으로도 불린다. 성수면 구신리 원구신마을의 노적바위가 갈라지면서 백마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 백마가 거닐어 백마산이 됐으며, 백마가 산에서 내려와 마령면의 마령(馬靈)’이 됐다고 전해진다.

 13 : 03. ‘방화마을에 이른다. 계서리를 구성하는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옛 이름은 방아다리였다. ‘교리(橋里)’라고도 불리었는데 침교(砧橋)’라는 택지가 있다고 해서다. 그러다 한자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방아다리 방아가 방화(訪花)가 되었단다.

 이 마을에도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첨부된 지도에 표기된 수많은 정자 중 하나다. 이렇듯 2구간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정자를 만나게 된다. ‘쌍계정·만취정·영모정·미룡정처럼 강가 풍치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들어섰고, 마을에도 주민들의 쉼터를 겸한 정자를 어김없이 지어놓았다.

 마을 담벼락은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쯤에서 아쉬운 점 하나. 이곳 방화마을은 1구간에서 만났던 마이산 부부공원의 주인공, 즉 부부의 생년월일이 같은 시인인 담락당 하립 삼의당 김씨 부부가 살던 곳이다. 그러니 저 담벼락은 부부의 시와 관련된 벽화로 채워 넣었어야 하지 않을까?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진안고원 길이란 이름에 걸맞게 내동산의 산자락을 헤집으며 길이 나있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걸어온 길과 마령의 풍성한 벌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11 : 17. 호젓한 산길을 걷다보면 삼거리(이정표 : 백운면사무소 9.9km/ 마령면사무소 4.8km). 탐방로는 임도를 버려두고 들녘을 향해 방향을 튼다. 이어서 2차선 도로(운계로)를 건넌 다음(11 : 23) 널찍한 들녘을 가로지른다.

 11 : 27. 들녘의 끝에서 섬진강(데미샘에서 흘러내려오는 본류다)을 만났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멋진 바위벼랑을 가슴에 담는다. ‘진안·무주 국가지질공원의 지질 명소인 운교리 삼각주퇴적층이다. 1억 년쯤 전, 자갈·모래·진흙 등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암이라는데, 절벽의 줄무늬(층리)가 한쪽 방향으로 경사진 것이 눈에 띈다. 진안 분지에 퇴적물을 공급한 환경과 역사를 알려주는 소중한 지질자원이다.

 그 절벽에 처마의 제비집처럼 쌍계정(雙溪亭)’이 매달려 있었다. 1886년 오도한(吳道漢), 이우우(李友禹) 등이 발의해 세운 누정으로 쌍계동 천현계(雙磎洞天賢稧)의 계원들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naver 지식백과는 쌍계정이란 이름의 유래를 백운천과 남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는 데서 찾고 있었다. 하지만 합수지점은 이곳에서 800m쯤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 이해를 돕기 위해 인터넷에서 얻어 온 '쌍계정' 사진.

 탐방로는 이제 삼계석문천변길을 따라 백마교로 간다. 강변 너른 모래톱에서는 무성한 갈대의 누렇게 바랜 잎새와 갈꽃이 비바람에 출렁인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삼각주 퇴적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망대를 만난다.

 지질공원의 안내도와 함께 운교리 삼각주 퇴적층에 대한 설명판도 세워놓았다. 덕분에 강 너머의 거대한 바위절벽을 이룬 삼각주 퇴적층을 설명판과 비교해가며 관찰할 수 있다. 참고로 진안무주 국가지질공원에는 진안의 마이산·운일암반일암·구봉산·천반산·운교리삼각주퇴적층 등 5, 무주의 외구천동·적상산천일폭포·오산리구상화강편마암·용추폭포·금강벼룻길 등 5곳이 포함되어 있다.

 절벽에 걸터앉은 정자 한 채가 보인다. ‘만취정(晩翠亭)’이다. ‘송객정(送客亭)’으로도 불리는데, ‘진양 하씨의 오형제인 하호(河灝하선(河璿하욱(河昱하식(河湜하봉(河鳳)이 순조 연간에 방화 마을로 이사 온 뒤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1970년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나그네를 환송한다는 의미의 송객정은 다섯 형제의 선조인 하연(河演, 1376~1453)이 놓아주었다는 다섯 마리 잉어에서 유래했단다. 조선 초기 영의정을 지낸 문신인데, 전라도관찰사 때 지방순시를 하다가 황룡 꿈을 꾸었고, 다음 날 하인이 잡아 온 다섯 마리의 잉어를 놓아주었다는 설화이다. 하연은 이 다섯 마리 잉어가 용으로 변신해 승천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황룡오리출상원도(黃龍五鯉出象源圖)’라는 그림으로 남겼다.

▼ 이해를 돕기 위해 인터넷에서 얻어 온 '만취정' 사진.

 11 : 36. 백마교(白馬橋)로 섬진강(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8.6km)을 건넌다. 다리 이름은 내동산의 별칭인 백마산에서 따왔지 않나 싶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내동산의 산줄기가 요 어디쯤에서 섬진강 물속으로 잠긴다니 말이다. 하나 더. 백마교를 경계로 마령면에서 백운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섬진강 너른 모래톱에는 비바람에 출렁이는 갈대만 무성했다. 하지만 가을철 갈꽃이 만발할 무렵이면 또 하나의 눈요깃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탐방로는 잠시 2차선 도로(운계로)로 올라선다. 아니 가장자리를 따라 따로 길이 나있다. 하나 더. 그 사이 공간에는 전영태라는 옛 면장을 기리는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전영태씨는 백운면장 말고도 매사냥으로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 20호로 지정된 분이다. 백운에서 시작된 물줄기와 노촌에서 영모정을 거쳐 오는 물이 합수되는 곳에 모운정(慕雲亭)’이라는 정자를 짓기도 했다.

 11 : 40. 2차선 도로인 운계로 원운1를 건넌다. 하지만 탐방로는 다리를 건너기 직전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즈음 정면(동쪽)으로 우뚝우뚝 서있는 1m가 넘는 산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하지만 때 아닌 비바람이 눈에 들어올 만한 것을 모두 삼켜버린다.

 이후부터는 마치천(馬峙川)’의 둑길을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백운면의 북쪽에 있는 성수산에서 발원한 마치천(상류의 천변에 있던 마치라는 마을의 이름을 빌렸다나?)은 노촌리·평장리 들녘을 적신 뒤, 운교리 부근에서 섬진강으로 합류된다.

 11 : 43. 3분쯤 더 걸어서 만난 다리(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8.1km).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진안고원 길의 정체성에 부합시킨다며 최근 코스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옛 코스는 이곳에서 다리를 건너 원운마을로 간다. 하지만 새로운 코스는 계속해서 마치천의 강둑을 따른다. 덕분에 코스는 12.9km에서 14.7km로 늘어났다.

 11 : 54. 마치천을 건너(11 : 46), 이번에는 널디너른 평장리 들녘을 가로지른다. 이어서 30번 국도를 건너면 잠시 후 하평장(또는 평가)’ 마을(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7.1 km)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평장리(平章里)를 구성하는 3개 행정부락(상동·정동·평가) 중 하나로, ‘평장이란 지명은 고려 시대 평장사를 지낸 이거(李据)와 그의 증손인 이행전(李行典) 두 사람이 태어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마치천과 세동천이 만들어놓은 충적평야가 저리도 넓으니 그만한 인물이 능히 태어날 만도 하겠다.

 탐방로는 마을을 횡단한다. 요즘에야 누리기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우리네 선조들은 자연 속에 집을 지었다. 정자나무가 길손을 맞고, 실개천을 따라 올라가 집으로 들어가는 고샅에는 작은 꽃들이 대문 앞까지 안내해주었다. 실개천이나 꽃들은 없지만 구불구불 휘어지며 이어지는 고샅길을 걸으며 옛 풍치를 소환해 본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2차선 도로인 평노길이 길손을 맞는다. 탐방로는 이 길을 따라 동진한다.

 지난 1992년 문을 닫은 옛 평장초등학교 건물은 2018 진안고원학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새로운 시도를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소규모학교 시설을 지어 드론체험관(드론교육, 드론체험, 드론스포츠)을 만든단다. 잘 보존되어 있는 소나무 숲을 활용해 자연 숲 놀이공간도 조성한다나?

 12 : 04. ‘상평장(또는 상동)’ 마을에는 보건진료소가 들어서 있었다. 그만큼 큰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12 : 05. 보건진료소 바로 위에서 도로를 벗어나 오른편 소로(상평장길)으로 들어간다. 노촌리의 하미마을로 들어가는 샛길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그 중간어림에서 영모정이라는 고풍스런 정자를 만날 수 있고...

 영모정으로 가는 길. 낙락장송 몇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이어서 울창한 숲길이 우리를 영모정으로 안내한다. 이 숲은 2008 9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누리상(네티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길 아래로는 섬진강의 제1지류인 상표천(또는 미재천)’이 흐른다. 백운면 노촌리 덕태산 줄기에서 발원한 상표천 물줄기는 노촌호에서 머물렀다가 평장리와 운교리를 거쳐 당산마을 앞에서 섬진강에 합류된다.

 12 : 12. 숲길은 신의련(愼義連, 1546-1606)’의 유적지로 길손을 인도한다. 신의련은 임진왜란 때 병든 아버지를 왜적의 손에서 지켜낸 효자로 유명하다. ‘거창 신씨를 중심으로 원노촌(元蘆村) 마을 사람들이 홍수를 방지할 목적으로 조성한 숲속에 정려를 모시는 효자각(孝子閣), 추모비를 비롯한 비석군(碑石群). 영모정(永慕亭) 등이 들어서 있다.

 1801(순조 1)에 세운 효자각(孝子閣)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주위에 담장을 둘렀다. 안에는 비석은 보이지 않고 대신 현판이 걸려 있었다. 효자각 내 현판은 증수의부위 효자 신의련지려(贈修義副尉 孝子愼義連之閭)’라고 쓴 다음 신의련의 사적을 자세히 서술했다. 당시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글을 지었으며, 전 사헌부 지평 황기천(黃基天)이 글을 썼다.

 신의련은 임진왜란 때 자신의 집에까지 쳐들어 온 왜적들의 손에서 병든 아버지를 지켜냈다고 한다. 아버지 대신 자기를 죽여 달라는 신의련의 효성에 감동한 왜장이 이곳은 효자가 사는 곳이다(孝子所居之地)’라는 방을 동구 밖에 써 붙이고 부하들에게 절대 침범하지 말라고 명하고는 물러갔단다. 덕분에 1만여 명이 무사히 난을 피할 수 있었고, 정유재란 때는 그 수가 5만에 이르렀다나? 이로 인해 난을 피한 사람들의 수를 따 동네 이름이 만인동(萬人洞)’을 거쳐 오만동(五萬洞)이 됐고, 들녘은 면화평(免禍坪), 앞산은 덕태산(德泰山)으로 불리었다고 전해진다.

 효자각에서 내다보는 계곡은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그런 미재천의 천변, 계류를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영모정(永慕亭)이 들어섰다. 미계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69(고종 6)에 세운 정자로 1984년 전북 문화재자료(15)로 지정됐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아담한 누정은 지붕이 특징이다. 일반기와를 쓰지 않고 이 지역에서 나는 너새(돌기와)를 얹었다.

 영모정 근처에서 길이 갈라진다. 들판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길은 원노·신기·마치, 천 따라 물길 거슬러 나아가는 길은 하미·비사 등의 부락으로 연결되다.

 12 : 17. 하미마을 쪽 숲길을 따라 200m 남짓 더 올라가면 미재천의 천변에 자리한 미룡정(美龍亭)’을 만난다. 미계 신의련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또 다른 정자이다. 정자에 오르면 미재천이 내려다보이고, 느티나무 숲의 운치도 즐길 수 있다.

 정자 주변에는 미계덕산고(美溪德山高)와 미계장구지소(美溪杖屨之所) 등 신의련을 칭송하는 선돌 서너 개가 세워져 있었다. 신의련의 영모비(永慕碑)와 마을의 화재막이 역할을 하는 돌탑도 눈에 띈다.

 미룡정 앞 미재천은 개울 수준의 작은 계곡이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바위들과 울창한 숲이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진안고원 길(2구간)’의 완주를 인증해 줄 이정표는 미룡정으로 내려가기 직전에 만날 수 있다. 매 구간마다 이런 이정표를 2개씩 설치했는데, 2구간의 첫 번째 인증용 이정표는 남악제의 둑에 세워져 있다.

 탐방로는 미룡정 뒤로 난 농로를 따른다. ‘간짓대 걸쳐놓고 턱걸이하기 딱 좋다는 농담을 떠올리게 만드는 좁은 산골짜기. 손바닥만 한 논밭도 버려두기 아깝다는 듯, 길을 그것도 시멘트포장까지 해놓았다.

 12 : 24. 농로를 버리고 숲길(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5.2km)로 들어선다. 산길은 통나무계단을 놓아야 했을 정도로 가파르게 시작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평평하게 변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두 번의 계단 구간을 올라 임도로 들어선다. 이후는 휘파람이 저절로 나오는 걷기 딱 좋은 길이 계속된다. 오르내림이 없는데다 보드라운 흙길에는 낙엽까지 수북해 폭신폭신하기까지 하다.

 산길의 동반자는 리본이 되어준다. 목의 나무 가지마다 노란 색과 붉은 색의 리본이 매달려 고원길을 안내한다.

 나그네들을 위한 배려도 돋보인다.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12 : 40. 덕태산의 동북쪽 능선 끄트머리 안부인 닥실고개에 올라선다. 2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앱은 444m를 찍는다)으로 백운면의 운교리와 노촌리를 연결하는 고갯마루다. 북쪽 노촌리에 하마치마을과 원노촌마을이 있고, 남쪽은 운교리 신전마을이 있다. 하나 더. 이곳은 그간 묵어 있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신작로가 뚫리면서 인적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진안고원길이 조성되면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 온전한 고개의 기능을 되찾고 있다.

 이정표(백운면사무소 4.3km/ 마령면사무소 10.4km)가 이곳이 닥실고개임을 알려준다. ‘닥실이란 지명은 고개 서쪽에 있는 양계봉(493.7m)’에서 얻어왔다고 한다. 고개 양쪽 골짜기의 이름도 닥실골이란다.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신전 방향은 정상까지 고랭지채소밭으로 활용하고 있어 농로가 개설되어 있다. 산중이라서 경작지에 멧돼지 등의 접근을 막기 위해 쳐놓은 전기선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하지만 길은 엉망이었다. 이틀을 연이어 내린 겨울 장마로 인해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우스갯소리가 떠오를 정도로...

 12 : 50. 고랭지채소밭 사이로 난 길을 10분쯤 걸으면 신전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운교리(雲橋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원운·원산·주천·신전) 중 하나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마을이다. 조금 전 넘어온 닥실고개와 잠시 후 넘게 되는 배고개를 통해서만 다른 세상과 마날 수 있는 벽지이기도 하다.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진 별천지라고나 할까?

 안내판은 신진마을의 옛 이름이 가루손이였음을 알려준다. 마을 지형이 소가 가로로 누운 와우혈이기 때문이란다. 볼거리로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비보풍수림 송림원을 내세운다. 하지만 어떤 걸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주민이 눈에 띄지 않아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정자가 있는 동구 밖, 당산나무는 수령이 30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당산제를 지내기도 한단다. 진안군에서 보호수로 지정해 놓았다.

 다음 행선지인 상백운 마을로 나가는 길은 구불구불 곡선으로 이어진다. 거기다 오르막이다. 하긴 알을 깨고 나가는 일이 어디 그리 수월하겠는가. 아니 바깥세상과 연결해주는 또 다른 통로인 닥실고개에 비하면 숫제 고속도로나 마찬가지다. 자동차까지 다닐 수 있으니 말이다.

 13 : 09. 별천지를 떠나는 아쉬움을 보듬고 배고개(383m)’를 넘는다. 신전마을과 상백암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이다. 명찰(배고개)까지 단 이정표가 2.9km만 더 걸으면 종점인 백운면사무소에 닿는다며 힘을 내란다.

 상백암마을로 가는 길가도 역시 농경지가 펼쳐진다. 그 사이에 비닐망이 튼튼하게 쳐져있다.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아보려는 힘겨운 투쟁의 한 산물이다.

 수문장처럼 길목을 지키고 있는 저 조형물은 대체 뭘까? 이 근처에 사슴목장이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길가의 모정(茅亭)은 농부들의 쉼터이다. 하지만 진안고원길이 지나가면서부터는 걷기 여행자들이 더 많이 찾는다. 준비해간 간식을 나누는 참새방앗간으로 사용하기 딱 좋은 곳이다.

 13 : 12. ‘상백암 마을은 스치듯 지나간다. 법정 동리인 백암리(白岩里)’를 구성하는 5개 행정부락(원촌·번암·중백·상백·백운동) 중 하나로 백암이란 지명은 마을 주변에 차돌바위(흰 바위)가 많은데서 유래했다. 그 백암마을의 맨 위에 위치한 부락쯤으로 보면 되겠다.

 13 : 19. ‘백운동로로 내려선다. 상백암마을 주민들은 변화가 필요했던가 보다. 논이었음직한 들녘이 온통 사과나무로 가득하다. 최근에 심은 듯한 어린 사과나무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 사이로 난 길(상백암길)을 따라 잠시 내려오면 2차선 도로인 백운동로를 만난다.

 도로 아래로는 백운계곡이 흐른다. 백암리를 감싸고 있는 선각산(1,105m)과 덕태산(1,113m)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인데, 이게 제법 빼어난 풍경을 만들어낸다. 여름철이면 피서객들로 붐빌 수도 있겠다.

 13 : 26. 이후부터는 내동산을 전면에 놓고 걷는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백암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중백암마을에 이른다.

 13 : 32. 중백암마을 정자에서 트레킹을 끝내기로 했다. 백운면사무소까지는 아직 400m쯤 더 가야하지만 산악회버스가 점심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데 어쩌겠는가. 특히 겨울비까지 주룩주룩 오는 데야 고민해 볼 필요조차도 없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5분을 걸었다. 앱은 12.21km를 찍는다. 비바람이 몰아치는가 하면, 일부 구간에서 푹푹 빠지는 진흙탕과의 싸움까지 치렀던 점을 감안하면 나름 빨리 걸은 셈이다.

서해랑길 44코스(사포마을 버스정류장-곰소항 회타운)

 

여 행 일 : ‘24. 1. 13()

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흥덕면 및 부안군 줄포면·보안면·진서면 일원

여행코스 : 사포버스정류장후포마을시아농장줄포만 갯벌생태공원구진마을곰소항 회센터(거리/시간 : 14km, 실제는 15.76km 3시간 35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4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줄포만의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해제반도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줄포만 갯벌생태공원, 곰소염전 등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사포마을 버스정류장(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TG를 빠져나와 23번 국도를 타고 줄포·부안 방면으로 5km쯤 달리다가 신기삼거리(흥덕면 사포리)에서 좌회전, ‘후포로 2km 남짓 들어오면 사포마을 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부안44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첫 번째 여정. 드넓은 줄포만의 남·동쪽 해안선을 따라 고창에서 부안 땅으로 넘어간다. 길이는 14km, 거리가 짧은데다 평지로 이루어져 난이도는 별이 2(5개 중)로 분류된다.

 10 : 22. 2차선의 찻길인 후포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 길은 동학농민혁명군의 진격로이기도 하다. 1894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을 축출하고 백산 등지에서 머물렀으나 후임 군수의 설득으로 3월 초에 해산했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3 20일경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재봉기를 선언한다. 이게 동학혁명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니 당시 목숨을 걸고 내달렸을 선현들의 뜻을 떠올리며 걸어보면 어떨까?

 10 : 26. 잠시 후 후포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후포리(後浦里) 4개 자연부락(대촌·용머리·후서·후포) 중 하나로 마을 앞에 개가 있다고 해서 뒷개 또는 후포(後浦)라 하였다. 그래선지 북쪽 갯가에는 예전 소금을 굽던 염판도 있다고 했다. 아무튼 이정표(종점 13.7km/ 시점 0.3km)는 버스정류장(후포) 조금 못미처에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란다.

 마을 앞. 파도가 넘실거렸을 바다는 이제 들녘으로 변했다. 만선의 기쁨을 안고 드나들었을 돛단배도 지금은 없다. 대신 맹추위에 할 일을 잃어버린 트랙터가 낮잠을 잔다. 기지개를 펼 봄날을 기다리며.

 그 갯벌이 그리운 이도 있었나 보다. 마을 앞에 대하양식장을 지어 옛 향수를 소환시켰다. 이왕이면 당 할머니에게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며 지냈다는 해신제까지 복원시켰더라면 하는 바람은 나 혼자만의 푸념일까?

 10 : 28. 옛날, 돛단배가 드나들었을 갯고랑은 배수갑문이 떡하니 가로막았다. 참고로 줄포만 깊숙이 들어앉은 후포마을은 예로부터 조운활동이 활발한 포구였다. 내륙에서 산출되는 물산을 집결시킨 후, 선박을 이용해 개성이나 한양으로 운송하던 물류의 전진기지(海倉)였다. 운송되어 온 물자도 후포를 통해 내륙으로 옮겨질 정도로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수로를 건너 후포리에서 신덕리(新德里)’로 들어간다. 이어서 방조제를 쌓아 만든 자그만 들녘을 가로지른다.

 10 : 40. 대단위 목장지대를 지난다. 수북이 쌓여있는 곤포 사일리지로 보아 소를 기르는 게 분명하다. kakaomap 시아농장이라고 적고 있으나 이에 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소떼가 머물렀을 축사는 텅 비어있었다. 소가 없으니 이를 관리할 사람들도 필요 없었나보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적이 가져갈 물건 하나 없겠는가. 사람이 오갈 때마나 사납게 짖어대는 저 개가 증거다.

 길은 이제 나지막한 산릉으로 올라간다. 산이라 해봐야 해발이 50m도 못되고, 대개는 밭으로 개간한 낮은 구릉지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린다. 구름처럼 뭉실뭉실한 지형이다.

 이후부터는 구릉지 위를 걷는다. 그리고는 한동안 낮고 완만한 언덕을 쉼 없이 타고 넘는다.

 눈을 들면 사방이 온통 황토색이다. 대량의 양분을 함유한 황토는 농사에 유리하다고 알려진다. 황토로 재배한 작물은 수분이 많고 당도가 높아 맛이 더 좋다는 것이다. 고구마나 양파·감자 등의 뿌리작물이 특히 잘 자란다는데, 그래선지 양파 밭이 꽤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땅 반에 하늘이 반인 구릉지는 지금 보리가 주인이다. 소한·대한의 맹추위가 아직 물러가지도 않았는데 무럭무럭 잘도 자란다. 그리고 4-월에는 푸릇한 청보리가 6월이면 황금빛으로 익어갈 것이다.

 부지런한 농부는 일 년 농사 준비로 분주하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저 농부의 올 농사는 틀림없이 풍년일 것이다.

 흔히 보아오던 세장산(世葬山)’이 아니라 세천(世阡)’이란다. ‘뫼 산()’ 대신 두렁 천()’자를 썼으니 선산을 산이 아닌 밭의 가장자리에 썼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우리네 선조들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땅에 터를 잡고 세거(世居)하면서 앞들에서 농사짓고 뒷산에 장사(葬事)하며 살아왔다.

 길은 경사가 20도를 넘는 구릉지를 넘기도 한다. 붉은 빛으로 뒤덮인 저 황토지대는 고창 사람들의 농가 소득을 증대시키는 원천이다. 지금은 양파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이제 구릉지를 내려서서 목우(牧牛)’마을로 간다. 법정동리인 신덕리(新德里)를 구성하는 7개 자연부락(목우·상연·하연·언안·연장·용소·원덕) 중 하나인데, 탐방로는 마을을 먼발치에 두고 들녘으로 방향을 튼다.

 이때 줄포만과 바다 건너 변산반도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우뚝 선 산릉이 길게 바다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이렇듯 고창의 북쪽해안은 갯벌과 더불어 변산반도의 웅장한 산세를 볼 수 있어 좋다. 첩첩이 쌓인 산들이 거리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 거리가 멀수록 더 옅은 빛깔을 띠고 있어 입체감이 살아난다.

 목우마을 앞 들녘. 탐방로는 농경지 사이로 난 농로를 따른다. 그리고 농로의 끝자락에서 고창을 벗어나 부안 땅으로 들어간다.

 11 : 00. 작은 개울을 건너면 부안(줄포면 우포리) 땅이다. 탐방로는 둑길을 따라 바닷가로 간다. 울창한 갈대숲을 옆구리에 낀 멋진 구간이다.

 갈대가 키 높이로 자라 은근한 낭만 풍경이 연출된다. 하지만 갈대숲의 백미는 낮이 긴 여름철이다. 서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는 노을과 실바람에 흔들리는 잎새가 매혹하기 때문이다.

 그 안쪽 들녘에서는 철새가 난다.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습지와 갈대숲, 농경지가 더해지면서 철새들의 쉼터가 되었나보다.

 농경지를 지나 구릉지로 올라간다. 붉은 색에 가깝던 고창과는 달리 누런 황갈색으로 변했다.

 11 : 09. 구릉지에는 선양저수지가 있었다. 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간척지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소중한 수원이다.

 11 : 15. 농로를 겸한 임도를 벗어나 2차선 도로인 생태공원로(이정표 : 종점까지 9.3km)’로 올라선다.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쯤으로 보면 되겠다.

 이때 줄포지역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발아래에는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이 들어앉았다.

 11 : 21. 잠시 후 만난 삼거리.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직진, 하지만 부안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인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을 둘러보려면 오른편으로 가야한다. 하나 더. 서해랑길을 따르더라도 생태공원에 이르기는 매한가지다. 정문 대신 후문으로 들어간다는 게 다를 뿐이다.

 이정표(종점 8.8km/ 줄포만 생태공원 0.4km/ 시점 5.2km)는 줄포만 생태공원에 잠시 들렀다가란다.

 11 : 25. 하지만 난 서해랑길을 따르기로 했다. 이어서 조금 더 걸어 바닷가에 이른다. 곧게 뻗은 방조제를 중심으로 왼편에는 줄포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지고, 오른쪽의 습지에는 갯벌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줄포만 위에 다리 형태로 놓인 생태관찰로는 갯벌 생물을 관찰하기 딱 좋은 곳이다. 계단이 놓여있어 갯벌로 내려가 직접 관찰해 볼 수도 있다.

 부안도 역시 갯벌의 고장이다.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휘어진 활처럼 거대한 해안선(대략 178)을 그리는데, 그 대부분에 넓고 진득한 갯벌이 발달했다. 특히 변산반도 남단의 줄포만은 해양수산부로부터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받았다. 2010년에는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기도 했다. 칠면초와 나문재·갈대 같은 염생식물을 비롯해 100종이 넘는 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다.

 물 빠진 바다에는 갯고랑이 나타난다. 바다와 마을을 이어주는 실핏줄로 바닷물이 밀려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썰물 때 끊어질 듯 가느다란 생명줄로 다시 태어나는 길이다. 한때 저 길은 돛단배의 나들이 길이도 했다. 토사가 쌓이면서 이제는 뱃길이 끊겨버렸지만...

 11 : 30. 이제 갯벌생태공원을 둘러볼 차례이다. 한동안 쓸모없는 땅처럼 여겨졌던 갯벌 저류지를 친환경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공원이다. 갯벌의 퇴적작용으로 줄포는 상습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제방을 쌓은 것이 시민의 쉼터로 자리 잡았다. 제방을 쌓은 이후 안쪽의 20만평 저류지는 갈대와 염생식물이 군락을 이루면서 자연스레 생태늪지로 발전했다. 이걸 친자연환경적인 생태공원으로 가꿔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다양한 체험거리와 체육시설, 캠핑장, 산책로는 물론이고, 숙박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가족, 연인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 준다.

 안으로 들어가면 10만평에 달하는 갈대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지그재그 나무데크, ‘S’자 나무데크 등 다양한 길을 따라 갈대 사이를 거닐 수 있다. 하지만 이 부근에 있었다는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촬영 세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국적인 풍치를 물씬 풍긴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줄포에 왔으니 사진 한 장쯤은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내 마을을 알아차렸는지 갈대밭에 글자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공원 안 수로에서는 물놀이 체험도 가능하다. 바닷물과 민물이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물길인데, 이 수로를 보트를 타고 돌아볼 수 있다.

 바둑 테마공원이란다. 부안이 고향인 한국 현대바둑의 아버지 조남철 국수를 기리기 위해 조성했다. 문득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바닷가, ‘불바르 공원(Bulvar Park)’에서 만났던 체스 판이 생각난다. 저와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사람들이 직접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입체화시킨 게 눈길을 끌었었다. 우리도 한번쯤은 시도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공원은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했다. 의자 하나까지도 돌을 쪼아가며 예술성을 가미했다. 하지만 뜬금없이 나타난 코끼리 조형물이 혼란을 주기도 한다. 공원의 2개 연못과 3개의 동산에는 20여종의 자생화초류 염생식물과 6종의 민물고기, 야생화 등이 터를 잡고 산다고 했다. 운이 좋으면 오소리나 재두루미, 백로, 바다오리 등의 야생동물도 볼 수 있단다. 그렇다면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다는 그 야생동물을 조형물로 만들어놓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11 : 50. 다시 바닷가로 돌아와 이번에는 둑길을 따른다. 줄포의 침수를 대비하기 위해 1996년에서 1999년까지 연장 975m의 방조제를 쌓았다.

 왼쪽은 줄포만. 추위 탓인지 갯벌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니 시심(詩心) 하나 불러올만한 풍경도 잡히지 않는다. 밀물에 쫒긴 아낙들이 바지락이 가득 든 플라스틱 통을 들거나 머리에 이고 갯고랑을 따라 한 줄로 걷는 모습이 한 편의 서사시이자 한 폭의 풍경화라는데도 말이다.

 11 : 52. 방조제는 전망대 기능까지 수행하도록 했다. 도로변에 흙을 도톰하니 쌓아올려 대를 만들었다. 갯벌생태공원의 전모를 한꺼번에 살펴보라는 모양이다.

 관광객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부안이라는 문자 조형물을 세워 사진 찍기 딱 좋도록 했다.

 언덕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발아래 놓인 습지는 물론이고 저 멀리 줄포시가지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곰소만 깊숙한 곳에 들어앉은 줄포는 한때 서해안 어업의 중심지였다. 조기의 3대 어장 중 하나인 위도가 가까이 있어 만선이라도 되면 줄포 또한 성황을 이루었단다. 그러나 갯벌의 퇴적으로 수심이 얕아지는 바람에 1938년 항구의 기능을 가까운 곰소항에 넘겨줬고, 90년대의 폐항을 거쳐 지금은 완전히 내륙의 땅이 되어버렸다.

 이즈음 마실길 팻말이 눈에 띈다. 명품 산책로로 꼽히는 부안 마실길은 새만금전시관에서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에 이르는 부안 땅을 둘로 가른다. 8개 코스(66km) 변산 마실길 6개 코스(97km) 내륙 마실길로 나뉘는데, 코스마다 붙여진 이름만으로도 탐방을 대신한다. 이중 8코스인 청자골 자연생태길은 이곳 갯벌생태공원에서 곰소염전에 이르는 11km 구간이다. 참고로 마실은 마을을 뜻하는 방언이지만 마실간다는 말로도 자주 쓰인다. 이때 마실은 이웃집으로 놀러가거나 가까운 곳으로 바람 쐬러 간다는 뜻으로 쓴다. 그러니 가벼운 마음으로 마실 다니듯이 걸어보자.

 11 : 58. 방조제 끝, 공터는 작은 공원으로 꾸몄다. 쉼터용 정자를 지어놓았는가 하면, 눈요깃거리 삼아 등대도 세워두었다.

 이후부터는 최근(2023 10) 개설된 신작로가 길을 안내한다. ‘분탕골로라는데 부안군환경센터의 오른쪽으로 지나간다.

 12 : 09. 잠시 후 방조제로 올라선다. 이어서 둑길을 따라 보안면(유천리)으로 들어간다. 둑 아래로는 2차선 도로인 분탕골로가 함께 간다.

 드넓은 신창들녘을 적시며 흘러온 신창천(버드내·줄내·남포천)은 하천이라기보다는 저수지에 가깝다. 방조제에 가로막힌 물을 두 개의 배수갑문을 통해 줄포만으로 흘려보내는데, 일정량을 항시 가두어두고 있는 모양이다.

 바닷가 간척지나 담수호는 빼놓을 수 없는 겨울철새 도래지다. 신창천 저류지에서도 철새가 떼를 지어 노닐고 있었다. 참고로 국립생물자원관의 2021~22년 겨울철 조류 센서스 결과에 의하면 부안군은 계화조류지, 동진강, 고부천 일원을 중심으로 황새, 흰꼬리수리 등 53 155,264여 마리의 철새가 겨울을 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매년 시행해오고 있다는 겨울철새 먹이주기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철새 무리는 하늘에서도 관찰할 수 있었다. 철새 도래지의 장관은 해가 뜨고 질 무렵 노을진 오렌지빛 하늘을 무대 삼아 펼치는 철새 떼의 현란한 군무라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직접 눈에 담을 수는 없었다.

 옛 사람들은 저 바다를 웅연조대(雄淵釣臺)’라며 변산팔경(邊山八景)’의 첫 번째로 꼽았다. 줄포만에 떠있는 어선에서 밝히는 불빛이 물에 어리는 풍경과 어부들이 낚싯대를 둘러메고 뱃노래를 부르는 광경이 장관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알려주는 안내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부안의 바닷가를 걸으며 느낀 첫인상은 돈을 쏟아 붓듯이 치장했다는 점이다. 그런 예산을 조금 할애해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안내판 두어 개쯤 만들어두었으면 어땠을까? 보는 재미에 읽는 재미까지 더해진다면 찾는 이들도 그만큼 더 늘어날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갯벌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둑을 쌓아 양식장을 만들었다. 대하양식장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바닷물고기를 기르는 듯한 양식장도 눈에 띈다.

 신창들녘 너머는 유천마을일 것이다. 마을 뒤 구릉지에 세계적인 고려 상감청자를 구워 낸 사적 제69 유천리 도요지(扶安柳川里陶窯址)’가 있다.

 12 : 21  12 : 40. ‘분탕골로는 방조제 끝에서 유천·호암로로 바뀐다. 이어서 호암마을(유천리)을 스치듯 지나간다. 도로 전체를 공원으로 꾸며놓은 멋진 구간이다. 덕분에 준비해간 간식을 나눠먹으며 푹 쉬어갈 수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도 많은 배수갑문을 만난다. 부안의 들녘 대부분이 간척사업에 의해 생겨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간척(干拓)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이루어지던 당시는 작은 갯고랑이나 해변을 막는 정도였다. 대단위의 역사는 민간자본이 형성된 일제강점기부터라고 보면 되겠다.

 13 : 02. 배수갑문이 가둬놓은 물길(다리가 놓였다)을 건너면 신복리(新福里) 땅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사장교 형식의 신활교로 만화천(萬花川)을 건넌다. 무언가를 감싸고 있는 듯한 버팀기둥의 생김새가 눈길을 끄는데, 그게 한쪽뿐이라서 공사를 하다 만 느낌을 준다. ‘미완성 아닌 미완성이 주는 헷갈림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탐방로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갯고랑을 따라 바다로 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방조제로 둘러싸인 들녘을 가로지른다. kakaomap은 이 구간을 구진길로 적고 있었다.

 이 구간에서도 갈대밭을 만날 수 있었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줄포만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나부끼는 갈대꽃은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이 뭣꼬!’ 스님들의 화두만큼이나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보리밭으로 보이는 들녘에서 수백 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철새들로부터 보리밭을 지키기 위한 농민들의 몸부림이라고 했다. 철새들이 보리의 잎은 물론이고 뿌리까지 다 먹어치우고 있지만, 철새보호구역에다 멸종위기의 철새들이라 포획할 수도 없어 깃발로 쫓아볼 따름이란다. 효과는 없었지만...

 13 : 20. 시쳇말로 호적초본에 잉크도 안 마른 신작로를 건너 구진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진서리(鎭西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구진·연동·진동·진서·백포·작도) 중 하나로, 천마산을 머리로 하고 남향으로 자리한 바닷가 마을이다. 구진(舊鎭)이란 이름 그대로 옛날 이곳에는 수군(水軍) 진이 있었다고 한다. 거무진이나 검모포(黔毛浦), 또는 검모포진(黔毛浦鎭)으로도 불리는 이유다.

 마을의 오랜 역사는 마을 뒷산의 느티나무가 전해준다. 수령이 800년에 가깝다니 그동안 민초들의 겪었던 고난을 지켜봤을 터다. 거기다 나무는 영험하기까지 하단다. 나뭇가지라도 함부로 꺾으면 마을에 동토가 났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마을 당산제의 대상이 될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안내판은 마을의 역사를 전하고 있었다. 고려 말 여원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역할을 했던 곳이 구진 마을이란다. 원나라는 일본 원정을 결정하고 고려로 하여금 전함과 수송선, 식량 등 모든 군사물자를 준비케 했다. 그 결과 이곳 검모포와 천관산(전남 장흥)에서 전국의 3 5백여 명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크고 작은 전함 900척을 불과 넉 달 만에 건조했단다. 하나 더. 옆의 빗돌이 전하는 줄포만 탐방로는 대체 뭘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 비슷한 시설도 보지 못했는데...

 13 : 32. 탐방로는 30번 국도인 청자로로 올라선다. ‘청자라는 도로명은 진서리에 있는 도요지(陶窯址, 사적 제70)로부터 얻어온 지명일 것이다. 11세기 후반에서 13세기까지 고려청자를 구워내던 다수의 가마가 이 부근 구릉지에 있었다니 말이다. 변산 재목창의 땔감과 질 좋은 자토(瓷土), 거기에 줄포항이란 조운로까지 갖췄으니 도자기 생산지로 이만한 곳도 없었겠다.

 도로 건너 곰소염전 7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부안의 유일한 염전이다. 곰소만의 주력 항구이던 줄포항이 토사로 메워져 입출항이 어려워지자, 1936-1938년 진서리(연동마을) 앞에 있던 범섬과 웅연도을 구진마을과 작도리로 연결하여 곰소항을 조성하면서, 그 내부 연동리 쪽으로 곰소염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946년의 일인데 당시만 해도 소금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전매품이었다.

 겨울철 염전은 길고 깊은 잠을 잔다. 때문에 염전 본연의 풍경, 즉 뜨거운 태양 아래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소금가루가 입가에 하얗게 말라붙은 염부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지는 해의 노을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그네들의 구릿빛 피부는 언감생심이라 하겠다.

 안내판은 단짠단짠 곰소염전 방문기라며 곰소염전의 단맛이 나는 소금을 소개하고 있었다. 허영만의 만화를 영화화한 식객의 무대가 되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안내판도 보인다. 한편 tvN 예능프로그램 일로 만난 사이에서도 소개됐다. 2019년 유재석과 임원희, 지창욱이 함께 곰소염전에서 일을 했다. 소금 모으기·나르기·포장하기 등 힘든 노동을 치르면서 단짠 케미를 보여주는데, 유재석은 당시 단짠단짠의 조화로 식혜와 낙지젓갈을 함께 먹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해안생태·문화탐방로는 귀여운 장승을 마스코트로 삼았다. 변산반도는 산세가 빼어나고 해안 경치도 아름다운 곳. 반도 전체가 국립공원이다. 그래선지 서해랑길 등 다양한 걷기 코스가 마련돼 도보여행에 맛들인 이들이 몰려든다. 해안생태·문화탐방로도 그중 하나이다.

 맞은편에 있는 슬지제빵소는 이색 찐빵을 판매하는 핫플레이스다. 지역에서 나는 팥으로 만든 찐빵과 소금커피가 입소문을 탔다. 이쯤해서 의문점 하나. ‘찐빵과 커피의 조화가 상상되시나요?’ 우선 찐빵은 팥을 직접 만들기 때문에 많이 달지 않고 건강한 맛이란다. 또한 시그니처 커피인 곰소 소금커피는 아이스라테 커피에 흑당과 발효소금 시럽을 섞어 단짠단짠한 맛이 일품이란다. 그게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나?

 곰소로 가는 해안도로 주변은 양식장이 수도 없이 많다. 그 대부분은 대하 양식장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근에는 왕새우 직판장도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부안에서 가장 친근한 해산물은 바지락이다. 새만금방조제 사업 이후 종적을 감춘 백합과 달리, 바지락은 지금도 부안 갯벌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다. 인삼을 곁들인 바지락죽, 갖은 야채와 고춧가루 양념으로 버무린 회무침 등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13 : 45. ‘곰소에 이른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진서리 앞바다의 곰섬을 중심으로 동쪽의 범섬과 연동, 서쪽의 까치섬과 작도리를 잇는 제방을 쌓아 육지로 만들면서 곰소항 일대가 축조되었다. ‘곰소(熊淵)’란 지명은 곰처럼 생긴 두 개의 섬 앞에 깊은 소()가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과거 소금을 곰소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웅연(熊淵), 웅소(熊沼), 웅연도(熊淵嶋) 등으로도 불렸다. 2009 1 1일 진서면 진서리에서 면소재지가 있는 곰소리가 독립된 법정리로 분리·설치되었다.

 이정표(종점까지 1.4km)는 번거로운 시가지를 피해 바닷가로 우회시킨다. ‘서해랑길다운 발상이라 하겠다.

 거대한 팽나무 고목이 바닷가 공터에서 자라고 있었다. 44코스를 걸어오는 동안 꽤 많은 당산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저 나무도 어딘가에서 자라던 당산나무를 범섬공원 근처로 옮겨왔을지도 모르겠다.

 곰소만(곰소에 왔으니 이제 줄포만에서 벗어나야겠지?)에 어깨를 맞댄 부지는 널따란 광장을 중심으로 공연장과 회센터, 젓갈센터 등 여러 시설들을 들어앉혔다. 전라북도에서 군산항 다음으로 큰 어항의 위세를 이어가기 위한 야심찬 시도라 할 수 있겠다. ‘젓갈 발효축제 알주꾸미 축제 등의 축제도 이곳에서 열린다.

 바닷가로 나가면 곰소만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다. 한국의 갯벌은 모두 일곱 군데가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어 있다. 서해 북쪽부터 송도, 대부도, 서천, 고창·부안, 무안, 증도, 순천만·보성 갯벌 등이다. 이중 고창·부안 갯벌의 면적이 45.5로 가장 넓다.

 축제가 잦으니 찾는 이들이 많을 것은 당연. 이들을 위한 포토죤을 만들어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중 하나가 곰소역이다. 열차가 다닌 일도 없었거니와 앞으로도 다닐 일이 없는 곳에 철로를 깔고 역사를 지었다. 뜬금없는 발상이지만 사진 찍기에는 딱 좋았다.

 철로의 매력 포인트는 선로 위로 올라가 중심을 잡아보는 맛이 아니겠는가.

 탐방로는 바닷가를 따라 곰소항으로 간다. 이때 다양한 조형물들을 만난다. 바닷가답게 돌고래나 소라 같은 바다 생물들을 조형물로 제작해 전시했다.

 잘못된 표기라고 지적했던 글자 조형물이다. ‘C’가 아니라 ‘G’가 되어야 한다며 혀를 차는데, ‘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 이석암 선생이 낚시꾼을 포함시키면 ‘G’자가 된다고 알려주신다. 작가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왕새우는 곰소항의 또 다른 특산물이다. 오늘도 수많은 대하양식장을 만났었다.

 곰소항은 하루 130여척의 어선이 드나들 정도로 활기를 띤단다. 최근에는 젓갈로도 유명해졌다. 곰소항의 풍부한 수산물에 미네랄 풍부한 곰소염전의 소금이 더해져 맛좋은 젓갈이 생산된단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오징어젓갈에 가리비젓갈까지 각단지게 챙겨본다.

 곰소항에 가까워지자 죽도(竹島)’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곰소는 예전에 섬이었다고 한다. 1938년 작도와 웅도를 잇는 제방을 쌓으면서 육지가 됐다. 덕분에 과거 선인들이 묘사하던 웅연도(態淵島 : 곰섬) 앞바다 풍경은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곰소항은 빼어난 일출과 일몰의 풍경을 자랑하며 장관을 이룬다.

 14 : 10. 곰소항 조금 못미처에 있는 회센터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서해랑길(부안 45코스) 안내도는 회센터 뒤 바닷가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35분을 걸었다. 앱이 15.76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여행지 : 산토리니(Santorini), 피르고스(Pirgos) 마을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 여행의 단골 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고 너무도 많이 소개가 된 곳이라 다시 거론하기 새삼스러울 정도지만 그래도 그리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바다, 그리고 하늘의 색깔을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어느 곳, 어떤 시간에서도 경험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풍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산토리니는 대략 울릉도 크기만 한 본섬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그 섬 안에 피라와 이아, 카마리 등 여러 마을들이 산재해 있다.

 

 두 번째 방문지는 피르고스 칼리스티스 (Pirgos Kallistis)’. 줄여서 피르고스라 부르는데, 이아나 파라 마을은 항상 붐비는데 비해 피르고스는 덜 알려져 여유로운 관광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인기가 높다. 19세기 초까지 산토리니의 수도였던 곳이라서 고전 건축물과 웅장한 교회 건물들을 둘러보는 재미도 있다. 산토리니 제일의 조망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초승달처럼 생긴 산토리니는 푸른 바다, 하얀 벽, 파란 지붕, 그리고 절벽 가옥과 아찔한 골목으로 여행자의 심장을 쿵쿵 두드려주는 세기의 여행지다. 서쪽은 깎아지른 바위절벽, 반면에 오른쪽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해안선을 끼고 있다.

 주차장에 내려 본격적인 투어에 들어간다. 피르고스는 산토리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그러니 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야함은 물론이다. 나중에는 숨이 찰 정도로 가팔라지기도 하지만.

 골목길 바닥은 돌을 깔았다. 아니 바닥에 돌을 깔아놓고 그 틈새를 석회로 채웠다. 콘크리트를 타설하면서 자갈 대신 돌멩이를 넣었다고 여기면 될 듯. 그런 골목길을 잠시 오르자 커다란 교회가 고개를 내민다. ‘크리스토스 교회(Church Christos)’로 팔각 종탑이 눈길을 끈다. 이게 또 5층 높이라서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저런 팔각 큐폴라(cupola)는 산토리니(유일하다)뿐만 아니라 그리스에서도 드물기 때문에 건축학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단다.

 관광객들이 모여드니 기념품 가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리스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컵과 미니어처, 색체가 강렬한 그릇까지 어느 하나 욕심나지 않는 게 없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의 초반, 끓어오르는 구매욕을 꾸역꾸역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짐의 무게가 늘어날수록 여행이 힘들어지니까.

 산토리니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마저도 신비롭다. 옛 유적을 본뜬 외관으로 관광객들의 시선을 이끈다. 아니 잔존 유적을 활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카페나 레스토랑이라고 빠지겠는가. ‘Cava alta’, 지중해 요리로 유명한 곳인데, 예약이 필수란다. 입구에 붙어있는 ‘Crazy donkey’ 팻말은 산토리니에 생산되는 맥주를 곁들이면 분위기 된다는 얘기일까? 하나 더, 카페 입구에는 들어올 때는 낯선 사람이지만 나갈 때는 친구이다라는 글귀가 낯선 사람에 대한 친절을 의미하는 ‘philoxenia’라는 단어와 함께 적혀 있었다.

 산토리니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다는 마을은 우리네의 옛 달동네처럼 집들이 산비탈에 기대어 지어졌다. 그래선지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하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것 같다. 오르막길을 고집하면 옛 성터이자 정상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 부부는 길을 잃고 말았다. 성채로 오르는 문을 놓쳐버린 탓에 성곽(비잔틴양식이라고 했다) 아래를 한참이나 헤매고 다녔다. 참고로 그리스어로 피르고스(Pirgos) ‘Tower’를 의미한다. 중세 때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비탈에 지어졌는데, 처음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기지였던 셈이다. 그러다 해적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성벽 바깥에도 마을이 형성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단다.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성곽을 반 바퀴나 돌았다. 인적이 뚝 끊긴 길은 오랫동안 방치된 성채의 아래로 위태롭게 나있다. 하지만 그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나 할까? 정규 탐방로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특이한 풍경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리조리 헤매다보면 암굴처럼 생긴 공간을 지나기도 한다. 주택의 아래로 난 통로가 영락없는 굴다리.

 벼랑에 기대듯, 아니 계단을 쌓아올리듯 지어놓은 주택은 하나같이 텅 비어있다. 기웃거려보니 텅 빈 공간에 틀만 남은 창문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오래 전에 폐허가 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탁 트인 전망도 이 구간의 볼거리다. 산토리니의 북서쪽 끝자락에 들어앉은 이아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왼편에 있는 섬은 티라시아일 것이다.

 들녘으로 이루어진 동쪽 해안도 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의 섬은 ‘Anafi’일 것이다.

 한참을 헤매다가 반대편으로 내려오니 관광객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쫓아 성채로 올라갔다.

 옛 냄새를 폴폴 풍기는 건물이 눈에 띈다. 맞다. 안내책자는 피르고스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마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묵은 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저 건물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성 니콜라오스 성당(Agios Nikolaos)’이라고 한다. 1660년에 지어진 지붕이 돔형인 바실리카이며, 성당 입구의 빗돌은 산토리니 섬의 전쟁 기념비라고 했다. 그건 그렇고 이 성당은 길 찾기에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성당 부근에 성채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기 때문이다.

 피르고스의 성채는 15세기에 세워진 산토리니의 다섯 성채 중 하나이다. 이 문은 성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데, 외부의 침입이 있을 경우 문을 닫아 주민들을 보호했다.

 피르고스는 산토리니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였고, 1980년까지는 산토리니의 행정 수도였다. 그래선지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은 하나같이 낡았다. 아니 정상 어림은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 듯 텅텅 비어있었다. 덕분에 골목을 걷다보면 중세시대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을 꼭대기에는 카스텔리 성(Kasteli castle)’이 있다. 아니 그 터만 덩그러니 남았다. 성은 15세기 후반 베네치아인들이 당시 지중해에 만연했던 해적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그 필요성이 소멸됐고, 이제는 폐허로 남아 관광객들의 눈요깃감이 되어준다.

 정상의 높이는 기껏해야 350m쯤 된다고 했다. 하지만 산토리니에서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란다. 덕분에 산토리니의 모든 방향을 파노라마처럼 둘러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사진부터 찍고 보자. 여행이란 게 본디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가 아니겠는가.

 툭 트인 조망은 산토리니의 칼데라(caldera)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 난간에 피라마을이 걸터앉았다. 남쪽 맨 끄트머리에는 아크로티리마을이 있다. 땅 속에 파묻혀있던 유적지가 인근에서 발견됐고, 이를 유료 박물관으로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시선을 오른쪽, 즉 산토리니의 서북단 끄트머리로 옮기면. 선셋으로 유명한 이아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반대편, 동쪽해안은 광활하지는 않지만 평야지대다. 그래선지 공항이 들어서있고, 꽈리 튼 포도나무를 심어놓은 들녘도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세인트 조지 성당(Saint George Church)’이 있었다. 1680년에 지어진 아치형 바실리카로 예언자 엘리아스(Elias)의 수도원에 소속된 성당이라고 한다. 하나 더, 교회 입구에는 ‘Collection of icons and ecclesiastical objects of Pyrgos’라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성당 내부에 이콘 및 성물 컬렉션이 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기척이 없어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 아쉬움은 입구의 예수님을 안은 성모상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정상의 광장은 카페 보르타고(Botargo)’가 야외 홀로 이용하고 있었다.

 피르고스도 눈만 들면 교회다. 이 마을에는 48개의 교회가 있다고 했다. 그것도 모두가 정교회란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내부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족교회이기 때문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니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피르고스를 중심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하이킹코스가 개설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리스 와인은 신화에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깊다. 특히 이곳 산토리니의 와인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그러니 어찌 와이너리 하나쯤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산토리니의 포도재배 역사는 기원전 약 12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착 품종인 아시리티코(Assyritiko) 백포도가 재배되는데, 이로부터 얻어지는 와인은 강한 시트러스 향을 특징으로 한다.

 산토리니의 와이너리들은 대부분 시음을 포함한 투어를 진행하므로, 제조 과정과 함께 신선한 와인을 맛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찾은 곳이 쿠초얀노풀로스 와이너리’. 4대에 걸쳐 와인을 제조하고 있는 쿠초얀노풀로스 가문의 와이너리로, 산토리니의 유명 와이너리답게 이곳도 역시 부설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와인생산에 사용되는 각종 기자재들을 전시해 놓았다. 덩치가 크다보니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모양이다.

 박물관으로 안내해주는 저 조형물은 대체 누구를 형상화한 것일까?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여야 맞을 것 같은데, 하반신은 말이고 상반신만 인간인 켄타우로스를 닮았다. 신화 속 켄타우로스는 포도주를 마셨을 경우 엄청나게 취하는 것으로 나오던데...

 박물관은 와인을 저장하던 지하 8m 아래 동굴에 만들어 놓았다. 1660년부터 1970년까지 300년간 와인 저장고로 사용하던 동굴에 포도주 제조과정의 단계와 기계류들을 연대순으로 전시했다.

 미로처럼 얽힌 동굴을 걸으며 산토리니 와인에 대해 알아간다. 산토리니 와인의 역사와 재배업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도록 각종 전시물을 배치했다.

 산토리니 와인을 대표하는 빈산토(Vinsanto)’를 담았던 통인가 보다. 산토리니 주민들은 수천 년 전부터 만들어왔던 전통방식을 재현해냈다. 화이트와인을 만드는 아씨리티코(Assyrtiko)’ 품종의 포도를 바로 수확하지 않고 2주 정도 햇볕에 더 노출시켰다가 당도가 훨씬 높아졌을 때 수확한단다. 참고로 빈산토는 섬의 이름인 산토(Santo)와 와인이란 뜻의 이탈리아어 (Vin)’이 합성됐다. 산토리니에서 생산된 와인이 세계적 명성을 떨칠 때 원산지를 표시하기 위해 포장지에 적었는데, 이게 와인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농원의 쟁기질, 포도나무 가지치기, 과실 수확, 포도 밟기 등 제조과정을 24개의 과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한국어를 포함한 14개의 언어로 자동음성 안내를 해주는 번역기도 제공된다.

 와이너리는 포도를 재배하고, 그 수확물로 와인을 만드는 곳이다. 그 와인은 마트나 카페로 판매된다. 하나의 기업인 셈이다. 그러니 이에 대한 기록은 필수, 박물관은 이때 생긴 기록물들까지 전시하고 있었다.

 이곳은 정교회의 나라. 와이너리를 이끌어온 조상들의 사진과 함께 성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

 박물관 투어가 끝나면 20여 종류의 와인이 진열된 시음장으로 안내된다. 하지만 시음은 4가지 종류만 제공된다.

 매장에서의 와인 구매로 투어의 마지막을 장식함은 물론이다. 참고로 산토리니 와인은 한때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도 했었다. 지금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밀려 지역 특산품쯤으로 취급되지만, 수천 년 전부터 빚어왔다는 전통 와인에 대한 산토리니 주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고 했다.

 밖으로 나오면 포도밭, 이곳에서 우린 산토리니 특유의 포도나무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제껏 보아온 선입견은 떨쳐버려야 한다. 포도나무의 높이가 무릎에도 차지 않을 정도인데, 그게 또 위나 옆으로 자라는 게 아니라 큰 새의 둥지처럼 원형으로 말아놓았기 때문이다. 이는 거친 바람과 강한 햇빛으로부터의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만들어낸 독특한 가지치기 방식(‘Koulara’ 재배법)으로 인해 생긴 형상이라고 한다.

 와이너리를 빠져나오다 만난 꽃이 하도 예뻐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진안고원길 1구간(마이산길)

 

여행일 : ‘24. 1. 6()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진안읍 및 마령면 일원

여행코스 : 진안 만남쉼터마이돈 테마파크연인의길통천문은수사탑사화전삼거리원동촌마을마령면사무소(거리/시간 : 12.9km, 실제는 14.51km 4시간 2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진안 만남쉼터’(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장수) 진안 TG를 빠져나와 30번 국도(진무로)를 타고 진안으로 온다. 진안로터리에서 오른쪽으로 100m쯤 들어가면 월랑체육공원’, 그 입구에 진안 만남쉼터가 있다. 참고로 월랑체육공원은 성묘산 일대에 조성해놓은 근린공원이었으나 공설운동장·문예체육회관·테니스장·게이트볼장 등 각종 체육시설을 갖추면서 2010년 체육공원이 되었다. 하나 더. 월랑(月浪)은 백제 때 이곳에 있었다는 난진아현(難珍阿縣)’이란 고을의 별칭이다(三國史記  高麗史). 마이산 자락을 비추는 달빛이 물결을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카메라 조작 실수로 사진이 잘못 나와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려왔다)

 고샅길·논둑길·밭둑길·숲길·물길·고갯길 등으로 이루어진 진안고원 길은 길목마다 자연의 속살이 숨어 있다. 14개 구간(총 길이 209km) 모두를 이으면 둥근 원 모양이 되는데, 길은 평균 고도 300m 100개 마을 그리고 40개의 고개를 지난다.

 1구간인 마이산 길은 읍내에 위치한 진안만남쉼터에서 출발, 암마이산과 수마이산의 한가운데를 넘고, 은수사와 탑사를 지나며 마이산을 둘러보는 길이다. 산을 직접적으로 오르지 않아 부담은 적으면서도 마이산의 핵심 지역을 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하지만 최근 진안고원 길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며 코스를 변경했다. 마이산 초입에서 능선으로 올라 금남·호남정맥을 따르다가 탑재를 거쳐 마령면사무소까지 간다.

 길을 나서기 전 ‘6.25참전호국영웅기념탑에 묵념부터 드려본다. 우리가 웰빙·힐링을 외치며 전국의 산하를 누빌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저 분들이 목숨을 바쳐 이 땅을 지켜주신 덕분이 아니겠는가. 하나 더. 이곳 진안과 인연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 옆의 진안사랑가도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10 : 19. ‘진안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도로(진무로)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자용 길을 내놓았다.

 10 : 22. 잠시 후 내려선 사양천의 둑길. 이곳에서 만나는 성산수풀은 수백 년 전부터 숲이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하도 숲이 짙다보니 마을 이름까지도 수풀이 되었다나? 이곳은 진안시가지가 진안천의 물길을 마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홍수 때 물길이 진안 읍내로 직류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제림(防災林)’으로 보면 되겠다.

 10. 26. 진안 읍내를 스쳐가는 초반. ‘근하교차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길이 자로 휘기도 한다. 자칫 길이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붙들어 매도 되겠다. 주요 포인트마다 진안고원 길의 뭉툭한 화살표가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노란색은 순방향, 분홍색은 역방향을 가리킨다.

 10 : 30. 또 다시 만난 하천. 아까보다 많이 가늘어졌다. 이름도 진안천에서 사양천으로 바뀌었다. 보여주는 풍광도 180도로 바뀐다. 밋밋한 시가지 대신 진안의 얼굴마담인 마이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걷는다. 진안에서는 월랑팔경(月浪八景)’ 가운데 으뜸으로 마이귀운(馬耳歸雲)’을 꼽는다. 구름이 감도는 마이산의 자태가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마이산이 오늘은 구름 대신 안개에 갇혀버렸다. 그렇다고 마이귀운까지 내팽개칠 필요야 있겠는가. ‘꿩 대신 닭이라고, 구름을 허리에 두른 마이산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산속으로 파고든다. 참고로 월랑팔경(또는 진안팔경)’의 나머지 일곱은 羌嶺牧笛(강령목적, 강령 목동들의 피리소리), 富貴落照(부귀낙조, 부귀산 저녁노을), 古林暮鐘(고림모종, 고림사 저녁종소리), 鶴川魚艇(학천어정, 학천 고기잡이 배), 牛蹄細雨(우제세우, 가랑비 내리는 우제들 풍경), 南樓曉角(남루효각, 남루의 새벽 고동소리), 羽化齊月(우화제월, 우화산에 둥실 솟은 밝은 달)’로 하나같이 진안읍의 아름다운 풍경을 강조한다.

 탐방로는 사양천을 끼고 올라간다. 탐방로 곳곳에는 파고라나 벤치를 설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읍민들을 위한 체육공원도 눈에 띈다. 참고로 마이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은 사양저수지에 모인 다음, 사양천이 되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진안천에 합류된다.

 탐방로 바닥은 홍보의 장으로 활용했다. 홍삼과 고추 등 진안의 특산물들을 그 효능과 함께 소개한다. 구입할 수 있는 시기까지 덧붙였음은 물론이다.

 10 : 40. 새만금·포항고속도로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이때 길가 마이산 태극길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트레킹을 마칠 때까지 같은 이름의 이정표를 심심찮게 만났지만 그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태극무늬를 그리며 마이산을 넘도록 길을 내놓지 않았나 하고 추측해볼 따름이다.

 10 : 45. 잠시 후 내사양마을에 이른다. 원래 이름은 사양골’. 골짜기가 많은 곳, 즉 심심산골의 오지마을이라는 뜻일 게다. 그러다 해도 명산인 마이산을 비켜간다고 해서 비킬 사()’ 볕 양()’자를 써 사양동이 되었다고 한다. 해질 무렵 서산에 걸친 해가 이 마을을 비추는 사양낙조(斜陽落照)의 아름다움에서 유래를 찾는 이들도 있다.

 마을로 들어가기 전, 왼쪽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힐링하기 딱 좋은 공원이 걸터앉았다. 마이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니 한번쯤 꼭 올라가보자.(산악회의 배려로 귀경길에 들렀기에 일정이나 소요시간에서 제외시켰다)

 미로공원 돌담공원으로 나누었는가 하면, 곳곳에 억새와 핑크뮬리 등을 심어 한껏 멋을 부렸다. 하지만 그보다는 마이산에 대한 조망으로 더 유명하다. ‘·수 마이루 정자에 오르면 마이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이산(馬耳山)은 조선 태종이 이 지역을 지나다가 산의 모양새가 말의 귀와 같다고 한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신라시대에는 서대산, 고려 때는 용출산,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속금산으로 불렸다. 계절마다 이름도 달라진다. 봄에는 안개를 뚫고 나온 두 봉우리가 쌍돛대를 닮아 돛대봉’, 여름에 수목이 울창해지면 용의 뿔 같다 해서 용각봉(龍角峰)’, 가을은 단풍 든 모습이 말의 귀 같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 해서 문필봉(文筆峰)’이 된다.

 마이산이 멀게 보인다는 것은 흠. 하지만 흐드러지게 핀 억새꽃을 가슴에 담다보면 그 아쉬움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하나 더. ‘단단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차분하게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등 위로를 주는 표지판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이산 북부에 위치한 내사양 마을은 관광예술단지로 조성되어 있었다. 상가를 포함해 식당(대부분 진안의 명물 흑돼지를 판다)과 숙박업소가 주를 이룬다.

 집사람은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집단시설지구는 우리 부부처럼 다른 장소에서 각각 출발한 일행들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기 딱 좋은 곳이다.

 10 : 54. 집단 시설지구를 빠져나오면 마이돈 테마파크’. 이름대로 돼지를 주제로 한 공원으로 곳곳에 개성 있는 돼지 조형물들이 있어 사진 찍기 딱 좋다. 돼지체험관에라도 들르면 소시지 만들기, 불고기피자 만들기, 홍삼 아이스크림 만들기 등의 체험도 해볼 수 있단다. 탐방로는 이 공원을 횡단한다.

 공원 입구. 흑돼지 가족이 길손은 맞는다. 진안군은 깜도야라는 브랜드까지 만들었을 정도로 자신들이 기르는 흑돼지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고원지대의 맑은 물과 낮과 밤의 일교차로 사육되기 때문에 육질의 맛과 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20년쯤 전인가? 진안 흑돼지를 자랑하겠다는 이 고장 인사의 초대를 받았었고, 운장산 산행을 마친 후 회사 직원들과 함께 가마솥에서 통째로 끓인 흑돼지를 맛볼 수 있었다. 아무튼 그때의 기억만 떠올려도 침이 자르르 흐른다면 짐작이 갈지도 모르겠다.

 활짝 웃는 황금 돼지도 눈에 띈다. ‘웃으면 복 돼지라나? 그래 오늘 저녁에는 저 돼지를 꼭 끌어안고 잠들어보자. 돼지 자체만으로도 복덩어린데, 황금까지 뒤집어썼으니 로또’ 1등의 번호라도 알려줄지 누가 알겠는가.

 천사금척지향(天賜金尺之鄕)이라는 빗돌이 눈길을 끈다. ‘하늘이 금으로 된 자를 내려주신 고장 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꿈속에서 선인(仙人)으로부터 받았다는 금척(金尺)이 마이산을 뜻한다는 말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내용은 조선 개국 후 궁중무용 1호인 금척무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11 : 03. 공원 상부는 사양저수지‘. 1957년에 착공해 1962년에 준공한 시쳇말로 손바닥만 한 저수지이다. ‘사양(斜陽)’ '햇빛이 비켜간다'는 뜻. 북쪽으로 트인 골짜기라서 빛 드는 시간이 짧았나 보다. 그 방죽은 지금 데크 산책로가 수면을 수놓고 있다. 하지만 난 바람개비가 팽팽 도는 둑길을 걷는다.

 저수지는 생각보다 작았고, 수면은 명경처럼 잔잔했다. 이런 특징 덕분에 사양저수지는 마이산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그나저나 두 귀를 쫑긋 세운 마이산이 물속에 잠기면서 커다란 꽃으로 변했다. 그것도 꽃봉오리를 활짝 열면서... ! 누군가는 저 모양을 보고 수풀 속에 몸을 반쯤 감추고 날개를 펼친 한 마리의 나비와도 같다고 했다.

 제방의 끝. ‘포룡대(鉋龍臺)’라는 빗돌이 눈길을 끈다. 이 저수지에서 지낸다는 용왕제(龍王祭)’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일 년에 두 번 음력 정월과 7월 백중날에, 제방에 오방기를 세우고 4개의 호롱불을 켜고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정오에 제를 올렸다니 말이다.

 11 : 08. 저수지에서 100m쯤 내려오면(마이산의 반대 방향) ‘연인의 길이 시작되는 만남의 광장을 만난다. 과거 마이산 구 도로로 불리던 길이 1.5km의 이 길은 2002년 경 연인의 길로 리모델링되었고, 마이산의 북부 진입로로 변했다. 또한 차를 타고 마이산 중턱까지 올라 다니던 길은 지금 오롯이 산책용으로만 이용되고 있다.

 길 아래는 진안역사박물관이 들어섰다. 구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진안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용담댐 건설로 사라진 마을들과 이주민, 실향민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이밖에도 관광예술단지에는 진안홍삼스파, 산약초타운, 가위박물관 등 진안의 대표 관광시설이 밀집해 있다.

 150m쯤 더 걸으면 연인이라는 간판을 내건 잘 지어진 이층집이 얼굴을 내민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진안고원길(1구간)’ 코스가 최근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코스는 이곳에서 연인의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간다. 100만 관광지이자 입장료가 있는 탑사를 경유하는 것보다, 숲길이 좋은 마이산옛길로 변경하는 게 진안고원길의 정체성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하나 더. 거리도 12.9km에서 13.2km로 늘어났다.

 연인의 길은 마이산을 모티브로 삼았다. 수마이봉과 암마이봉이 동·서로 솟아오른 마이산은 마치 부부가 나란히 서있는 모양새라고 한다. 세계 유일의 부부 봉이라는 애칭을 얻게 된 연유이다. 그런 부부 봉의 모습을 착안해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리모델링했다.

 탐방로 곳곳에 만들어놓은 연인을 테마로 한 다양한 조형물이 설렘과 재미를 선사한다. ‘만남의 광장에는 연인의 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조형물(하트트리, 핑거하트)이 세워졌고, 잠시 후 만나는 스마일 Zone’에서는 처음 만났을 때의 환한 미소가 펼쳐진다. 이후로도 연인의 발전단계를 형상화한 조형물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다음은 포옹 Zone’이다. 연인으로 만난 두 남녀, 서로 사귀기로 했으니 포옹쯤이야 허용되지 않겠는가.

 뽀뽀 Zone’을 지나면 키스 Zone’이 기다린다. 남녀 간의 사랑도 애교 수준의 뽀뽀를 넘어 이제 진한 애정 표현으로 변한다.

 도중에 마이산 북부전망대로 오르는 길이 나뉘기도 했다. 하지만 왕복 460m라는 거리, 특히 눈앞에 나타난 가파른 나무계단이 부담스러워 다녀오지는 않았다. 게시된 사진은 마이귀운(馬耳歸雲)’의 풍경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지만...

 11 : 35. ‘하트 Zone(하나 된 마음으로 사랑을 약속하는 형상)’을 지나자 마이 열차(만남의 광장에서 이곳까지 왕복하는 전기차로 편도 3천원, 왕복 5천원의 탑승료를 받는다)’의 종점(상부 승강장)이다. 탑승시설 말고도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사랑이 결실을 맺는 사랑마당 프로포즈 Zone’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꽃다발을 주며 미래를 약속하는 프로포즈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이성계와의 인연은 조형물로 전한다. 마이산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신선이 나타나 금척을 주며 삼한의 영토를 잘 다스려보라고 했다는 전설이 깃든 산이다. 조선시대 왕의 의자 뒤에 있던 일월오봉도도 마이산을 남쪽에서 보고 그렸다고 전해진다.

 마이산 story’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조선 태조 이성계와의 인연, ‘연인의 길 안내, 등 다양한 정보를 담았는데, 그중에서도 돼지를 닮은 마이산 등산로가 눈길을 끈다.

 이후부터는 비포장 산책로를 따른다. 이어서 100m 남짓 더 걸으면 사양저수지에서 계단을 따라 곧장 올라오는 사람들을 만난다.

 탐방로는 이제 210개쯤 되는 나무계단을 오른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사이 협곡을 향해 길고 긴 오름길이 펼쳐진다.

 11 : 42.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천왕문이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을 가로지르는 이곳은 은수사와 탑사로 통하는 관문이라 건물이 없어도 천왕문이라 불린다. ‘산태극수태극의 명당으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금남·호남정맥의 주능선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섬진강 두 물줄기가 마이산을 중심으로 태극을 이루기 때문이다.

 숫마이봉과는 달리 암마이봉은 정상까지 다녀올 수 있다. 하지만 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안전사고를 예방한다며 입구를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매년 11월 초부터 다음 해 3월 초까지 출입을 금지한단다.

 반대편에 있는 화엄굴 역시 문이 닫혀있었다. 숫마이봉의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석간수라도 한 모금 마셔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반대방향(남쪽)으로 내려간다. 이 구간 역시 길고 긴 나무계단이 펼쳐진다. 누군가는 계단의 수가 508개나 된다고 했다.

 11 : 53 - 12 : 02. 계단을 내려서면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은수사(銀水寺)’가 반긴다. 조선 초기 상원사라 했는데 숙종 무렵 터만 남아 있다가 누군가에 의해 정명암(正明庵)’이 지어졌다. 하지만 이마저도 없어졌다가 1920년 사양동(진안읍 단양리)에 살던 이규헌(李圭憲)이 다시 지었는데, 이때 은수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은수사란 이름은 이성계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물이 은같이 맑다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

 천연기념물 제386호인 청배실나무는 은수사의 자랑거리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데, 지형의 특성상 산 밑에서 위로 바람이 불면 청실배나무의 잎이 흔들리며 서로 마찰하여 형용하기 어려운 소리가 난다고 한다. 또한 겨울철 청실배나무 밑동 옆에 물을 담아두면 가지 끝을 향해 역() 고드름이 생기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단다. 하나 더. 은수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제380호인 줄사철나무 군락도 있다.

 마이산(암마이봉) 절벽을 보면 곳곳에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타포니(taffoni : 풍화혈)라고 불리는 이 구멍들은 역암에서 자갈 사이를 메우고 있는 물질인 매트릭스가 자갈보다 빨리 풍화되는 차별침식으로 자갈이 빠져나가면서 생겼다. 타포니는 벌집 모양의 자연동굴을 지칭하는 프랑스 코르시카 섬의 방언으로 세계적으로 진귀한 지질 현상이다.

 이제 돌탑으로 유명한 탑사로 갈 차례이다. 은수사가 탑사 보다 가파른 위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아래로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12 : 09  12 : 28. 잠시 후 이갑용(李甲用, 1860~1957)이 세웠다는 탑사(塔寺)’에 이른다. 1885년 마이산에 들어온 그는 솔잎을 생식하면서 탑을 쌓았다고 한다. 1920년대 초반 초가에 돌미륵불을 안치하고 불공을 드리다가, 1935년 목조함석지붕의 인법당과 산신각을 지으면서 정식으로 부처님을 모셨다. 이갑용이 98세의 나이로 죽은 뒤, 손자 이왕선이 한국불교태고종에 사찰등록을 하면서 정식으로 탑사라는 이름을 쓰게 됐단다. 1986년 인법당을 대웅전으로 고쳐 짓고, 1996년 나한전(현재의 영신각)을 지었으며, 1997년 종각과 요사채를 지어 오늘에 이른다.

 탑사는 이갑용 처사가 쌓은 돌탑으로 유명하다. 돌탑들의 형태는 일자형과 원뿔형이 대부분이고 크기는 다양하다. 이 돌탑들은 1800년대 후반 이갑용 처사가 혼자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 모두 108기의 탑을 만들었다는데, 100여 년이 지난 현재도 80여 기에 달하는 탑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나 더. 탑사의 석탑은 섬세하게 가공된 돌들로 쌓은 여느 탑들과는 달리 가공되지 않은 천연석을 그대로 이용했다. '막돌허튼식'이라는 조형 양식으로 음양의 이치와 팔진도법이 적용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거센 강풍이 불어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그래선지 미국 CNN에서는 마이산 탑사를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사찰 33에 포함시켰다.

 암굴에 모셔놓은 이갑용 처사 상(). 복전(福田)과 촛불 공양을 드릴 수 있도록 해놓았다. ‘내 마음이 미혹하면 중생이고, 깨우치면 부처라고 했다. 그러니 이갑용 처사를 공양을 받을 만한 법력이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참고로 이갑룡은 25세 되던 해에 유··선 삼교에 바탕을 둔 용화세계 실현을 꿈꾸며 이곳에 들어왔다. 이어 사람들의 죄를 빌고 창생(蒼生)을 구할 목적으로 30년을 한결같이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탑을 쌓았다고 한다.

 섬진강의 발원지는 진안군(백운면 신암리) 원신암마을 상추막이골에 위치한 데미샘이다. 이 데미샘이 있는 봉우리를 천상데미라 부르는데, ‘섬진강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봉우리란 뜻이다. 그런데 마이산의 탑사에 있는 용궁도 섬진강의 발원지 중 하나로 꼽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이 물은 탑영제에서 잠시 머물다가 은천을 이루며, 데미샘에서 흘러 온 물과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에서 만나 옥정호로 흘러간단다.

 108개 탑은 하나같이 백팔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한다. 대웅전 뒤, 가장 높은 곳에는 천지탑(天地塔, 전라북도 문화재 제35)’이 있었다. 이갑룡처사가 만 3년의 고행 끝에 완성(1917)시켰는데, 기공법과 축지법에 가장 많은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부부탑(왼쪽이 음이고 오른쪽이 양)으로, 타원형으로 돌아 올라가면서 축조했다. 천지탑 주변 일자형의 33개 탑은 신장탑으로 천지를 감싸고 우주의 33천 세계를 의미한다나?

 탑의 보존에 대한 무한의 의지를 담았다. 탑을 만지지도 말 것이며, 탑신에 돌을 올리지도 말라며 읍소를 한다. 소원을 올리려다가 자칫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 앞에는 오방탑(五方塔)’이 있다. 사각모성에 서있는 5기의 일자형 신장탑으로 오행과 오방을 상징한단다. 이밖에도 약사탑, 월광탑, 일광탑, 중앙탑(흔들탑)과 이 탑들을 보호하는 주변의 신장탑들이 제각기 이름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절간을 빠져나오는데 허호석의 마이산이란 시비가 눈에 띈다. 참고로 1억 년 전, 진안고원은 호수였다. 호수로 쓸려온 모래와 자갈 따위가 물속에서 쌓여 2m 두께의 역암층이 됐고 7천만 년 전쯤이 됐을 때 땅이 크게 흔들려 역암층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것이 마이산이다. 두 봉우리 중 풍만한 쪽이 암마이봉(해발 686m), 뾰족한 쪽이 수마이봉(680m)이다.

 마이산은 역암층이다. () 자갈 역자다. 지각변동으로 자갈, 모래, 퇴적층이 뒤섞여 바위로 굳어지고 풍화로 자갈이 빠져나가면서 큰 구멍이 생겼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석탑을 쌓아올렸다. 저리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을까?

 마이산과의 첫 만남인 집사람. 덕분에 마이산을 3번이나 답사한바 있는 나까지 진안고원 길을 내팽개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겠다며 세계 일주까지 이어오고 있는 마당에 그녀를 위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탑사 아래는 작은 사하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불교용품 판매점은 물론이고 식당까지 들어섰다.

 12 : 28. 탑사는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지나야 한다는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가람 수호를 하는 천왕문(天王門)이나 불국토로 들어간다는 불이문(不二門)도 눈에 띄지 않는다. 사찰 3문이 통째로 없는 것이다. 환영의 문구를 담고 있는 저 입석 두 개가 그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탑사를 빠져나오면 길이 둘로 나뉜다. 아스팔트 포장도로 말고도 데크길이 숲속을 헤집는데 이용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튼 탐방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곳곳에 쉼터용 벤치가 놓여있는가 하면, 마이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안내판도 세웠다.

 12 : 38.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마이산 부부공원에 이른다. 조선 중기 한마을에서 한날한시에 태어나 부부가 되었다는 조선시대 유일의 부부 시인 담락당(湛樂堂) 하립(1769~1830) 260여 편의 시를 남겨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꼽히는 삼의당(三宜堂) 김씨(1769~1823)를 기리는 공원이다. 남원 서봉방(捿鳳坊)에서 태어나고 생활하던 부부가 이곳 진안(마령)에서도 오래 살았다고 한다.

 공원에는 부부의 시비가 여럿 세워져 있었다. 몰락한 양반가 집안의 부부가 과거를 포기하고 진안 산골에서 자영농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집에 돌아가면 청계천 헌책방이라도 한번 들러봐야겠다. 그들의 시집이라도 찾아낼지 누가 알겠는가.

 초입에는 부부의 영정을 모신 명려각(明麗閣)이 들어섰다. ()은 낮과 밤의 음양. 즉 부부를 의미하고 려()는 삼의당 시인의 시문이 너무나 미려(美麗)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옆에는 부부의 시비(詩碑)도 세워놓았다. 참고로 김삼의당과 하립은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둘은 18세 되던 해 백년가약을 맺었다. 하립은 과거를 위해 한양으로 떠나 오랜 시간 공부에만 매진했고(급제는 못했지만), 김삼의당은 그런 남편을 위해 남원에 머물며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를 조선의 전형적인 여성상으로 추켜세우는 이들도 있다.

 돌탑을 쌓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덕분에 동심으로 돌아가 돌멩이 하나 살짝 올려볼 수 있었다.

 12 : 49. 공원을 벗어나면 탑영제(塔影堤)가 길손을 맞는다. 암마이산과 수마이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서천으로 유입되기 전 잠시 머물다 가는 인공호수로 오리배를 탈 수 있는 유원지로 개발되어 있다. 수채화 같은 아름다움이 몽환적이기까지 한 호수에는 가장자리의 물 위로 떠 있는 데크길도 내놓았다.

 이후부터는 벚꽃 길을 따른다. 전국에서 가장 늦게 피는 벚꽃으로도 유명한 마이산 벚꽃은 이산묘와 탑사를 잇는 2.5km 구간에 식재되어 있다. 진안고원의 독특한 기후로 인해 수천 그루의 벚꽃이 일시에 개화하여 그 화려함은 전국 최고의 명성을 자랑한다. 수령 20~30년의 마이산 벚꽃은 재래종 산벚꽃으로 깨끗하면서 환상적인 꽃 색깔로 유명하다.

 탑영제 둑에서 바라본 풍광. 앞산이 암마이봉이고 뒤쪽에 상부만 보이는 봉우리가 수마이봉이다. 암수 한 쌍의 봉우리가 솟아있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탑영지는 탑 그림자가 드리우는 곳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대로 마이산 봉우리가 호수에 거울처럼 비추는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곳은 2012 KBS-2TV에서 방영된 내 딸 서영이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주인공 서영이의 부모 고향이 진안군으로 설정되어, 진안의 다양한 명소가 촬영 장소로 활용되었다. 안내판은 MBC-TV의 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적고 있었다.

 날씨가 포근한 탓에 역 고드름 현상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참고로 마이산은 신비스러운 곳으로 알려진다. 그 신비 중 하나가 역 고드름 현상이다. 겨울철 탑사와 은수사 주변에 물을 그릇에 담아 놓아두면 물이 하늘을 향해 자라면서 기둥이 되어 언다는 것이다.

 그 아쉬움을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으로 달래본다. 보라! 신기하지 않는가.

 13 : 05. ‘금당사(金塘寺)’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금당사(金堂寺)라고도 하는데, 650년 고구려에서 건너온 승려 보덕(普德)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무상(無上)이 자신의 제자 금취(金趣)와 함께 세운 것으로 알려진다. ‘고금당(古金塘)’이라는 원래의 터는 이곳에서 1.5km쯤 떨어져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를 겪은 후 16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했다. 하나 더. 814년 중국에서 온 혜감(慧鑑)이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문화재로 금당사 괘불탱(보물 제1266)와 목불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을 갖고 있다.

 13 : 10 - 13 : 45. 탐방로는 주차장에 닿기 전 집단시설지구부터 들른다. 등갈비를 숯불로 직접 굽는 모습으로도 부족해 코로는 그 냄새까지 솔솔 들어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반주삼아 소주 한 병을 냉큼 비우고 일어서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마이산의 또 다른 명물인 대왕꽈배기. 페이스트리로 되어 있어서 고소한 맛이 일품이라는데 이 또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꽈배기에 도너츠, 거기다 인삼튀김까지 두둑하게 챙기니 보는 즐거움에 먹는 즐거움까지 더해진다. 이런 맛에 트래킹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집단시설지구를 벗어나자 탐방로는 도로를 따라간다. 왕복 2차선의 도로는 통행량이 많은 편.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자 전용의 탐방로를 따로 내놓았다. 쉼터를 겸한 소공원을 여럿 만들었는가 하면, 마이산의 볼거리를 자랑하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했다.

 14 : 00  14 : 10. 남부주차장에서 조금 더 걸으면 이산묘(駬山廟, 전라북도 기념물 제120)’가 나온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제자들이 친친계(親親契, 송병선 제자)와 현현계(賢賢契, 최익현 제자)를 구성하여 스승의 뜻을 기리고자 1925 이산정사(駬山精舍)’를 건립했다. 1900년대 의병활동 근거지였던 곳이다. 후에 단군과 조선의 태조·세종·고종을 비롯해 을사년 이후 순국한 애국선열, 조선의 명현들을 포함한 79위를 배향하면서 이산묘가 됐다.

 이산묘에는 단군과 조선의 태조·세종·고종을 모시는 회덕전(懷德殿), 을사늑약 이후의 순국선열 34위를 모신 영광사(永光祠), 조선시대 명현 40위를 모신 영모사(永慕祠)가 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김구, 신익희 등의 친필 휘호를 새긴 비석과 편액, 암각서 등이 있다.

 이산묘 입구, 거대한 바위절벽(용바위)은 암각서군(巖刻書群,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6)으로 불린다. 용암(龍岩), 주필대(駐蹕臺), 마이동천(馬耳洞天), 비례물동(非禮勿動), 청구일월 대한건곤(靑丘日月 大韓乾坤)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들로 평가받는다.

 마이동천(馬耳洞天)과 주필대(駐蹕臺). 주필(駐蹕)은 임금이 거둥할 때 잠시 머물거나 묵고 간다는 뜻으로 이성계가 왔다 간 것을 기념해 새긴 것이다.

 구한말 항일지사인 송병선과 그 문인들의 이름도 찾아볼 수 있다. 연재 송병선의 제자가 이산정사 설립을 발의한 후에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 더. 이곳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새겨진 청구일월 대한건곤(靑丘日月 大韓乾坤)은 해방 후 백범 김구선생이 쓴 글로 대한민국이 해와 달처럼 오래오래 밝게 빛나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절벽 앞에는 호남의병창의동맹단결성지(湖南義兵倡義同盟團結成址)’란 빗돌도 세워져 있었다. 1907년 이석용 의병장이 이곳에서 항일 의병을 결성하면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란 단을 쌓고 고천제(告天祭)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정재 이석용을 중심으로 진안·임실·순창·장수·남원 등에서 일어난 1000명 호남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기 위한 빗돌로 보면 되겠다. 참고로 이석용은 동지들과 진안, 영광, 고창 등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지만 일경에 체포돼 1914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4 : 10  14 : 14, 이산묘 맞은편 충혼의 다리 너머에는 독립유공자추모탑이 세워져 있었다.

 독립유공자추모탑 뒤편에서도 암각된 글자를 찾아볼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비례물동(非禮勿動)’, 고종이 호남 유림에 내린 글씨로,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뜻이란다.

 하지만 고종이 의병 창의를 독려한 의미로도 해석된다.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자본을 되찾는 일이 곧 예의이니, 이천만 동포는 분연히 일어나 빼앗긴 조국을 되찾자는 뜻이란다.

 탐방로는 마이산남로를 따라간다. 아니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자 전용의 길을 따로 내놓았다.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배려도 돋보인다. 곳곳에 쉼터와 소공원을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마이산 타포니’, ‘마이산 백악기 역암’, 호남의병창의동맹단 터인 용암 등 마이산과 관련된 풍물들을 소개하는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14 : 24. 엄청나게 넓은 주차장도 만난다. 남부주차장에서 이곳까지는 1km. 마이산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거리다. 어쩌면 벚꽃 구경을 온 상춘객들을 위한 시설일지도 모르겠다.

 14 : 34. ‘화전교를 건너면 화전삼거리이다. ‘마이산도립공원의 입구이기도 한데, 아까 연인의 길 초입에서 헤어졌던 진안고원 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새로이 개설한 코스가 한남·금남정맥과 탑재를 넘고, 은천마을을 거친 다음 은천을 따라 이곳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후부터는 은천천을 따라 조성된 자전거도로를 따른다. 강둑 위로 시멘트포장길이 나있다.

 오른쪽으로는 맑은 은천(隱川)’이 흐른다. 진안읍 가림리에서 발원하여 마령면 강정리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10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원래 이름은 음천(陰川)’, 냇물이 그늘진 곳으로 흐른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조선 말엽에 은천으로 바뀌었다. 아무튼 수량이 풍부한데다 타포니 현상의 벼랑까지 자주 만나 아름다운 풍광을 곳곳에서 연출해준다.

 마이산의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에 발달한 역암이다. 내부 팽창에 의한 차별침식으로 바위 표면에 움푹 파인 부분이 많다. ‘타포니 현상이다. 그런데 저 바위는 움푹움푹 파인 것으로도 모자라 칼로 내리치기라도 한 듯이 반듯하게 잘려나갔다.

 14 : 42. ‘중동촌교 다리를 건너면 길은 잠시 은천의 천변을 떠난다. 그리고는 사행천이 만들어놓은 자그마한 들녘의 가장자리를 따라 원동촌마을로 간다.

 14 : 49. ‘원동촌마을’. 법정 동리인 동촌리(東村里)’를 구성하는 3개의 행정마을(원동촌·서촌·화금) 중 하나로 마을의 역사는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경덕왕 때 화전동(花田東)’으로 불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1413년 진안감무(鎭安監務)가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촌으로 바꿨다고 한다. 하나 더. 마을 앞에는 마을의 오랜 역사를 자랑이라도 하듯 굵직한 나무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마을 숲으로 불리는 방풍림이 아닐까 싶다. 아니 마을의 약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한 비보림(裨補林)일지도 모르겠다.

 마을은 어딘가 먼 곳에서 꿈꿔오던 풍경을 보여준다. 담벼락은 마을 이야기와 문화를 담은 민화로 가득했고, 이끼가 가득 올라온 노거수들은 신령스러움까지 전해준다. 정월 초사흘에 찾아오면 당산제도 구경할 수 있단다.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숨은 명소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동촌 양곡정미소이다. 마을 단위치고는 제법 큰 규모이지만 현재 가동을 멈춘 상태다. 그런데 그게 더 이색적으로 다가온다. 소음 하나 없는 교요함이 시간이 멈춘 듯한 평화로움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르겠다.

 14 : 54. 마을 앞 동촌교 다리를 건너 30번 국도(진무로)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진안고원 길이 국도를 따르지는 않는다. 또 다시 은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국도를 따라가기로 했다. 주어진 시간보다 10분이라도 먼저 도착하려면 은천의 둑길로 에돌아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산악회 운영진으로부터 어디쯤 오고 있느냐는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았지만...주어진 시간보다 15분 정도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12 : 14. 날머리인 마령면사무소는 들러볼 수 없었다. 산악회버스가 면소재지 입구인 마령사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도착했다지만 식사까지 마친 회원들이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한가하게 면사무소까지 다녀올 수 있겠는가. 하는 수 없이 사진은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려왔다. 아무튼 오늘은 4시간 25분을 걸었다. 앱이 14.51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