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38코스
여행일 : ‘20. 5. 25(월)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과 장현동·노암동·명주동·성남동·입암동·남항진동 일원
여행코스 : 오독떼기전수관(2.3㎞)→구정면사무소(1.2㎞)→장현저수지(6.2㎞)→모산봉→강릉도호부(1.9㎞)→강릉 중앙시장→월화정(6.7㎞)→남대천변→솔바람다리(소요시간 : 18.3㎞/ 4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학산마을 오독떼기전수관에서 시작해서 남항진해변에서 종료되는 해파랑길 38코스는 강릉바우길 6구간과 대부분 일치한다. 바우길이 강릉시내에서 ‘강릉대도호부 관아’라는 유적지를 하나 더 둘러보게 한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 구간은 ‘해파랑길’이라는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해안길이 아닌 내륙을 걷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때문에 18.5km나 되는 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가슴에 담을만한 볼거리가 없다. 강릉시가지부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기존 경로와는 조금 다르게 걸어봤다. 강릉 시내에서는 바우길을 따라 ‘대도호부 관아’에 들렀고, 강릉시내에서 남항진까지는 ‘남대천’을 따라 조성해놓은 탐방로를 따랐다. 덕분에 우린 꽃으로 단장된 고수부지를 걸으며 철새도래지와 체육공원, 갈대밭 등 아름다운 풍광들을 두루두루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 들머리는 학산마을 ‘오독떼기 전수관(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628)’
동해고속도로(속초-삼척) 남강릉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우회전하여 백두대간 쪽으로 들어오다 고속도로 바로 앞 사거리(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880-28)에서 우회전하여 ‘어단천(於丹川)’을 따라 내려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학산(鶴山) 마을에 이르게 된다. 트레킹 출발지인 ‘오독떼기 전수관’은 강릉 일대의 민초들이 김을 매면서 불러오던 ‘오독떼기’라는 농요(農謠)를 전승(傳承)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수관(傳受館)이다.
▼ 동해바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강릉바우길 6구간’을 거꾸로 출발한다고 보면 되겠다. 화장실 옆에 설치된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을 지나면 굴산사지 당간지주 갈림길인 '굴산교'가 나온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다리를 건넌 다음 어단천(於丹川)의 우안을 따라 걷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랐다. 도로변에 있다는 ‘조순’ 선생의 생가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 100m남짓 더 걸었을까 '토종벌 마을'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 뒤편으로 조순(趙淳, 1928~) 선생의 생가가 나타난다. 한국 현대경제학의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서는 국회의원(15대)과 서울시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서울대 상대와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캠퍼스, 박사)에서 수학한 그는 1968년부터 1988년까지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케인즈 학파의 일원으로 많은 학문적 업적과 제자를 남겨 경제학계에서 ‘조순 학파’라고 회자되는 인맥을 구축했다. 그의 저서인 '경제학 원론'은 한때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제학 교과서였다. 나 또한 고시 준비를 하면서 서너 번이나 완독했던 기억이 있다.
▼ 생가 앞에 조성해 놓은 작은 공원에는 커다란 빗돌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빗돌에는 ‘준도행기 봉천수명(遵道行己 奉天受命)’이라는 여덟 글자가 적혀있다. ‘도를 따라서 몸을 행하고, 하늘을 받들어 명을 받노라’는 의미이니 나 같은 공직자들에게는 평생의 좌표로 삼을만한 좋은 문구라 하겠다. 그런데 빗돌에 적힌 거짓말 같은 얘기가 실소를 짓게 만든다. 2002년 태풍 ‘루사’ 때 농경지 복구에 필요한 흙을 조순의 임야에서 채취하는 과정에서 이 빗돌이 출토되었는데, 다음 날 바위를 정돈하려고 가보니 긴 바위가 톱으로 자른 듯 반으로 쪼개져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선생이 친필 경구를 새겨 집 앞에 세웠다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생가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어단천 건너에 ‘조철현 가옥(曺喆鉉 家屋, 강원도 문화재 제87호)’이 보인다. 중부지방의 가옥이 대개 ‘ㅁ’자 형태인데 반해 저 집은 대문간이 없는 ‘ㄷ’자로 되어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단다. 6.25 전쟁 때 폭격을 받아 무너졌던 것을 1953년에 중창했다고 한다.
▼ 가로수로 심어놓은 자두나무를 벗 삼아 걷다보니 ‘학산교’ 다리가 나온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 만이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도로를 벗어나 왼편으로 향한다. 몇 걸음 더 걸으니 ‘오가닉스토어’라는 생소한 상호가 눈길을 끈다. 오가닉(organic). 유기농 식품을 판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학산마을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먹거리 장터라고 한다. 마침 배도 출출하기에 막걸리로 목이라도 축여볼까 해서 기웃거려 봤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이번에는 ‘학산인풍(鶴山仁風)’이라고 적힌 커다란 빗돌이 발길을 붙잡는다. ‘학산의 어진 풍습’, 조순선생의 친필이란다.
▼ 100m쯤 더 걷다가 왼편으로 난 시멘트포장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단아한 모양새의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정의윤 가옥’으로도 불리는 ‘만성 고택(晩惺 古宅,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3호)’이다. 이 가옥은 영동지방의 전형적인 ‘ㅁ’자형 주택으로, 대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사랑채, 왼쪽에는 부속채 그리고 맞은편에는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지금 소유주의 할아버지가 1894년에 안채를 그리고 1915년에 사랑채를 지었는데, 목재를 다듬은 솜씨가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당시 집을 지은 목수 최매직·장덕소의 이름도 전해지고 있다. 참! 대문을 들어서니 안채로 통하는 사랑채의 문이 열려있었으나 들어가 보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그네들의 조용한 삶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서이다.
▼ 정의윤 고택을 나서서 건너편 '강릉 고시원' 방향으로 진행한다. 고시원 앞에서 좌측 입도로 들어서 누렇게 익은 보리밭을 통과하자 야트막한 고개가 나온다. 길이 세 갈래로 나뉘기 때문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해파랑길 38코스는 이런 갈림길이 유난히도 많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때문에 길 찾기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지레 걱정부터 할 필요는 없다. 이정표와 해파랑길 표식, 거기에 ‘강릉바우길’의 표식까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길이 헷갈릴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다면 앱을 사용하면 된다. 핸드폰을 꺼내 카카오 앱에서 ‘해파랑길 38코스’을 검색한 다음 화면에 뜨는 데로 찾아가면 된다.
▼ 고갯마루에서 우리 부부는 별미를 맛볼 수 있었다. 잘 익은 산딸기가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이다. 이곳뿐만 아니라 강릉 시가지로 들어가기 전까지 곳곳에서 이런 군락지를 만날 수 있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지루해지기 딱 좋은 코스인데 새콤달콤한 간식거리가 그나마 위안거리가 되어 주었다.
▼ 숲길을 빠져나오자 ‘섬석천(剡石川)’이 나온다. 그런데 탐방로가 ‘물막이 보’의 위로 나있는 게 아닌가. 마침 건조기라서 다행이지 여름철에는 신발을 벗어들고 건너야 하는 불편이 있을 것 같다. 아니 장마철에는 아예 건너기조차 못할 게 분명하다. 참고로 섬석천은 구정면과 왕산면 경계의 칠성대(953.6m)를 최고봉으로 하는 일련의 산줄기로부터 북사면으로 흐르는 작은 계곡의 물들이 칠성 저수지와 동막 저수지에 저장되고, 이 저수지로부터 흘러나온 물들이 구정면 장현저수지의 물과 합해져 동해로 흘러나가는 지방하천이다.
▼ 개천을 건너면 ‘여찬리(余贊里)’이다. 개오동나무가 많아 봉황이 날아와 놀았다 하여 봉양리(鳳陽里)라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여찬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은 여찬리·학산리·금광리·어단리·덕현리·구정리·제비리 등 7개리(행정리 기준 12개리)로 이루어진 구정면(邱井面)의 소재지이다. 참고로 구정면의 ‘구정’은 마을에 거북이가 나온 우물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옛날 이 마을에 효자가 살았는데 아버지가 병환으로 누워 있었다. 병이 깊은 아버지는 고기를 먹고 싶어 했으나, 때가 겨울이라 고기를 구할 수가 없었다. 효자가 집 앞에 있는 우물에 나와서 하늘에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하니 우물에서 거북이가 나오므로 그 거북이를 잡아 아버지께 삶아 드려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하였다. 그래서 거북이가 나온 우물이라 하여 ‘구정(龜井)’이라 했다는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이 지났다.
▼ 구정면사무소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KTX 강릉선' 아래를 통과하면 ‘오동교’ 다리가 나온다. 버스가 다니는 도로(범일로)는 이곳에서 좌우로 흐른다. 하지만 탐방로는 직진이니 주의가 필요하다. 아니 다리 앞에 해파랑길 이정표(모산봉↑ 4.9㎞/ 구정면사무소↓ 0.8㎞)가 세워져 있으니 이를 참조하면 될 일이다. 그건 그렇고 이번 구간의 이정표들은 하나같이 ‘강릉바우길’의 몫까지 겸하고 있었다. 해파랑길 38코스와 강릉바우길 6구간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강릉 바우길‘은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맥과 바다를 함께 걷는 총연장 150km, 10개의 구간으로 이어진 길이다. 바우는 강원도 말로 바위를 뜻한다. 강원도와 강원도 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 감자바우라고 부르듯 강릉 바우길 역시 강원도의 산천답게 자연적이며 인간친화적인 트레킹 구간이다.
▼ 탐방로는 이제 오른편에 ’섬석천‘을 끼고 이어진다. 걷는 도중 ’사랑제일교회‘와 ’여찬교‘ 다리를 만나는 것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딱딱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걷는 구간이다.
▼ 그렇게 10분 남짓 걷자 ’장현저수지(長峴貯水池)‘가 나온다. 인근에서 산불이라도 날라치면 헬리콥터가 방화용 물을 길어갈 정도로 커다란 저수지이나 탐방로 등의 편의시설은 일절 갖추고 있지 않다. 얼마 전 ’장현지구 그린타워공원 조성사업‘에 관한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아직은 시작조차 않은 모양이다. 그 기사는 한국농어촌공사의 계획안을 빌어 총 21만여㎡에 어드벤처존과 레저존, 지역분화공간 구역 및 슬리핑존 등을 조성한다고 했다. 또한 이들 시설에는 파크골프와 번지점프, 열기구체험장 조성을 비롯해 오토캠핑, 캐빈하우스, 야영장 등이 들어선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적한 저수지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저 세월을 낚는 강태공 몇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 장현저수지를 경계로 탐방로는 이제 장현동(長峴洞)으로 들어선다. 내곡동과 노암동 사이에 있는 고갯마루인 진재등(長峴)에서 넘어오는 ‘긴 재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란다. 장현동에서의 첫 만남은 성불사였다. 절간이라기보다는 잘 사는 여염집을 닮은 외형이 부담스러워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사양했다. 아니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지었는지 내력도 모르고 들어가 봤자 얻어 낼 내용이 뻔해보였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른다. ‘한국 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로 연결되는 길인데 해파랑길 표식도 이 길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산으로 가라며 자꾸만 경고를 보낸다. 아까 장현저수지를 벗어나자마자 만났던 ’진재골 추어탕‘에서부터 왼편으로 진행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멈출 내가 아니다. 얼마 후면 두 길이 합쳐진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자 탐방로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정표는 이곳이 모산(母山) 등산로의 입구임을 알려주고 있다. 산길은 초반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통나무계단이 놓여있어서 조금만 속도를 떨어뜨리면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거기다 그 오르막 구간은 짧기까지 하다. 참고로 모산봉(母山峰)은 강릉의 안산으로 불리는 명산이다. 이름 그대로 산의 생김새가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밥그릇을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겨 ‘밥봉’이라고도 하고, 볏짚을 쌓아 놓은 것 같다는 뜻의 ‘노적봉’으로도 불린다. 또 인재가 많이 배출된다 하여 ‘문필봉’으로도 불린다.
▼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내놓은 모산 등산로는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도 거의 없다. 그러니 내딛는 걸음이 여유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선지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서 짙은 솔향이 느껴진다. 덕분에 심신이 한껏 맑아진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진행했을까 삼거리(이정표 : 장현저수시↑/ 모산봉←/ 진재등↓)가 나온다. 길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장현저수지를 다녀오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곧장 모산봉으로 향했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만났던 장현저수지의 풍경이 또 다시 찾아볼만한 매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 걷기 딱 좋은 소나무 숲길을 8분 정도 더 걷자 탐방로가 도로로 내려선다. 이어서 버스정류장(모산초등학교) 뒤편으로 몇 걸음 더 걷게 만들더니 또 다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곳에도 모산봉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 같다.
▼ 도심에 가까운 지리적 여건 때문인지 산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갈림길마다 이정표를 세워두었음은 물론이고 곳곳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두어 곳에는 체력단련용 운동기구도 배치했다. 산책을 나온 시민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도심공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강릉으로 들어오는 재앙을 막아주고 정신적 위안을 주는 강릉의 안산이라는데 이를 말이겠는가.
▼ 모산으로 들어선지 38분 만에 정상에 올라섰다. 정상은 두 개의 전망데크만 설치되어 있을 뿐 정상석은 따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흙을 쌓아올려 옛 높이로 복원했다는 ‘모산봉 복원비’를 세웠다. ‘임영지(臨瀛誌)’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중종 때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강릉 지역에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것을 막고자 하여 이 지역 명산인 모산봉의 봉두를 인위적으로 낮추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에 근거해 옛 정기를 되찾고자 지역 주민들이 복원운동을 벌인 것이다. 주민들이 쌓아올린 높이는 ‘석자 세치(약 1m)’. 그렇게 해서 높아진 해발이 105m라고 한다. 참고로 모산봉(母山峰)은 강릉을 떠받치고 있는 4개의 기둥산인 ’사주산(四柱山)‘ 가운데 하나이다. 나머지 셋은 월대산(月帶山)와 시루봉, 땅재봉 등이다. 옛 선현들은 이 산봉우리들이 강릉을 중심에 두고 외곽에 마름모꼴로 버티어 강릉의 터를 단단히 다져 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또한 이들 4주산이 있었기 때문에 강릉이 오랜 세월 동안 명맥을 유지해 왔다고 믿었단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이다. 사방이 울창한 숲으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그저 잘 생긴 금강송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남쪽으로 시야가 조금 열릴 따름이다. 그런데도 정상 근처에 세워놓은 안내판에는 ‘매년 1월1일 모산봉 정상에서 해돋이 행사가 열린다’고 적어 넣었다. 또한 이곳 모산봉을 해넘이와 해돋이를 함께 할 수 있는 전국단위의 명소로 소개한 언론도 있었다. 내 눈에는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은데도 말이다.
▼ 이젠 산을 내려갈 차례이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정상으로 올라왔던데 반해 하산 길은 많이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무릎이 약한 사람들에겐 지옥의 구간일 수도 있겠다. 거리가 짧은 게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말이다.
▼ 이정표(모산봉 정상 291m)가 세워진 등산로 입구로 내려와 ’7번 국도‘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잘 이어진 건물 몇 동이 보인다. 작은 마을인데도 ’양지뜰 요양원‘과 ’좋은 요양원‘ 등 요양원이 셋이나 들어서있다. 우리나라도 이젠 노령국가로 들어섰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잠시 후 2차선 도로인 ’모산로‘로 올라서자 ’강릉전축박물관‘이 나타난다. 가설 건축물 형태인데 간판에는 음악과 추억이 있는 곳... 강릉 전축박물관 정원에서 수다를...이라고 적혀있다. 출입문에 커피 잔이 그려진 걸 보면 카페를 겸하고 있는 모양인데 문은 굳게 닫혀있다. 아니 마당의 잡초가 웃자란 걸 보면 오래 전에 문을 닫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덕분에 안에 전시되어 있다는 옛 전축과 다양한 전자제품은 구경할 수 없었다. 주인장의 비법으로 빚어낸 ’오감 쉐이크‘를 마시며 전시된 제품에 맞는 가수들의 노래를 감상하는 재미가 나름대로 쏠쏠하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전축박물관의 조금 위에서 만나게 되는 ‘삼흥사’ 앞 삼거리에서는 오른편으로 향한다. 탐방로는 이제 강릉시내로 들어선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여느 중소 도시와 다름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이어서 경포중·고등학교와 노암초등학교의 사잇길을 지나는가 싶더니 ‘강릉교육지원청’ 앞에 이른다.
▼ 단오공원 앞에서 이정표(단오문화관← 0.1㎞/ 노암초등학교↓ 0.7㎞, 학산마을 9.7㎞)가 가리키고 있는 단오문화관 쪽으로 향한다. 이어서 ‘강릉단오제 전수교육관’ 앞에서 굴다리 아래를 통과하면 남대천의 널따란 고수부지가 나온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강릉바우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향하지만 해파랑길은 반대편인 오른편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도 이정표(중앙시장→ 0.8㎞/ 강릉바우길 6구간←)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토록 하자. 참고로 강릉단오제는 단옷날을 전후하여 펼쳐지는 강릉 지방의 향토 제례 의식으로,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200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축제에는 산신령과 남녀 수호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관령 국사성황 모시기’를 포함한 강릉 단오굿이 열린다. 그리고 전통 음악과 민요 오독떼기, 관노가면극(官奴假面劇), 시 낭송 및 다양한 민속놀이가 개최된다.
▼ 우리 부부는 이곳부터 ‘바우길’을 따르기로 했다. 왼편으로 방향을 트니 남대천에 ‘창포다리’가 놓여있다. 명주동의 대도호부 관아와 단오문화회관을 연결시키기 위해 놓은 108m 길이의 보행자 전용 다리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다리는 ‘강릉단오제’ 행사의 주요 이동로로써의 기능도 수행한단다. 그래선지 '강릉 관노가면극' 등장 인물상이 다리 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참고로 강릉 관노가면극(江陵官奴假面劇)은 강릉단오제 때 펼쳐지는 탈놀이로 춤과 동작을 위주로 한 국내 유일의 무언(無言) 가면극이다. 관노(官奴)라는 특수한 신분에 의해 이루어진 놀이로, 등장인물은 양반광대, 소매각시, 장자마리 2명, 시시딱딱이 2명이다. 우리나라 다른 가면극에서 볼 수 있는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나 저항의식보다는 단오제라는 제의를 중심으로 서낭제 가면 놀이의 전통을 충실히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 창포다리를 건너자 탐방로는 벽화 등으로 예쁘장하게 단장된 골목으로 연결된다. 이 골목에는 작은 카페들도 여럿 들어서 있는데, 초입의 건물이 특히 눈길을 끈다. 옛 가옥에 약간의 인테리어만 더함으로서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현수막에 적힌 상호는 ‘씨앗 책방, 소소 밀밀’. 요즘 뜨고 있다는 책방 카페를 열 계획인 모양이다. 참고로 ’소소 밀밀’은 글작가 소소아줌마와 그림작가 밀밀아저씨가 운영하는 그림책 서점이다. ‘소소밀밀'은 성긴 곳은 더욱 성기게 빽빽한 곳은 더욱 빽빽하게 하라는 뜻이란다. 아람출판사의 그림책과 선별한 단행본 그림책, 단행본 아동문고가 있는 책장으로 구성되며 그림책 만들기 수업과 드로잉 수업도 진행한다.
▼ 적산가옥(敵産家屋)을 활용한 카페들이 눈길을 끄는 골목의 담벼락은 온통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런데 단오 행사의 중심이 되는 곳이어선지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보아오던 벽화들과는 많이 다르다. 옛 풍속화들로 도배를 해놓은 것이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사진으로 바꿔 넣기도 했다. 참! 이 골목에는 복합 문화공간인 ‘작은 공연장 단(端)’도 들어서 있었다. 옛 교회 건물을 개조해 다양한 장르의 공연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참고로 이곳의 지명은 ‘명주동’이다. 강릉은 삼국시대에 하슬라, 통일신라 때는 명주라 불렸다. 그러니 명주동은 도시의 옛 지명이 동네 이름이다. 그에 걸맞게 고려에서 조선까지 이어진 강릉대도호부 관아(사적 388호)와 강릉부의 행정 읍성인 강릉읍성, 일제강점기 적산 가옥 등이 자리한다. 강릉시청도 2001년까지 명주동에 있었으니 약 1000년 동안 강릉의 중심지 기능을 했다.
▼ 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우린 ‘칠사당(七事堂,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을 만났다. 조선 시대 지방 수령의 주요 업무인 칠사(七事 : 호구·농사·병무·교육·세금·재판·비리 단속)를 집무하던 곳이니 동헌(東軒)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보면 되겠다. 칠사당 오른편에는 ‘강릉대도호부 관아(江陵大都護府 官衙)’가 있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객사(客舍) 터(사적 제388호)’이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처음 세워진 객사는 원래 83칸의 크기를 자랑했으나 현재는 ‘객사문(客舍門. 국보 제51호)’만 남아있을 뿐이고 동헌(東軒)과 아문(衙門)의 운루, 객사 등 나머지 건물들은 2006년 이후에 복원된 것들이다. 이 지역을 아우르는 용어도 이때 임영관에서 '강릉대도호부 관아'로 고쳐졌다.
▼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것도 관동지방 제일의 도시다. 그래선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의 규모도 남다른 편이다. 자 이젠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이층 누각형식으로 지어진 큼지막한 관아 정문을 들어서자 조선시대 지방관들이 정무를 집행하던 동헌(東軒)이 복원(2012년)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조금 전에 만났던 칠사당과의 관계가 묘해진 것이다. 칠사당 또한 강릉부사가 업무를 보던 시사청(視事廳)으로 동헌의 또 다른 표현이니 말이다. 답은 전문가의 몫으로 남겨놓고 주위를 살펴보니 왼편 언덕에 의운루(倚雲樓)라는 정자가 지어져 있고, 그 아래에는 작은 도서관이 터를 잡았다.
▼ 동헌의 뒤로 나가니 ‘임영관 삼문(臨瀛館三門, 국보 제51호)’이 마중 나온다. 고려 말에 지어진 임영관(臨瀛館)이라는 객사의 정문으로 도호부 관아에서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문 위에 걸린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란다. 안으로 들어서면 중대청(中大廳)을 필두로 전대청(殿大廳)과 서헌(西軒), 좌우 익사(翼舍) 등이 줄줄이 나온다. 모두 2006년에 복원된 것들이다. 참고로 객사문의 백미(白眉)는 '배흘림기둥'으로 알려져 있다. 중간은 불뚝하고 아래위는 좁은 완벽한 배흘림 수법을 자랑하는 객사 기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은 목조 기둥이라고 하다. 강릉의 옛 할머니들이 다리를 훤히 내놓고 다니는 처녀들을 보고 ‘객사 기둥 같은 다리를 다 내놓고 다닌다’며 혀를 찼다는 그 기둥이다.
▼ 10분 정도 둘러보다가 동편 출입문으로 빠져나오니 ‘객사문 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남대천 방향으로 진행하다 강릉관광호텔 앞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영어 간판이 즐비한 번화가가 나온다. 강릉의 새로운 핫 플레이스(hot place)로 떠오른 ‘금성로’로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참관하기 위해 찾아온 외국인들을 위해 조성한 사후면세점 거리이다
▼ 면세거리의 끝은 ’중앙성남 전통시장‘이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강릉지역을 대표하는 상설시장으로 자리를 굳혔으며 영동 지방 어류와 농작물의 집산지로 통한다. 상가는 지하 1층에 지상 2층의 현대식 건물로 이루어져 있지만 강릉 사람들은 이 건물을 중심으로 한 주변 상가 일대를 모두 중앙시장이라고 일컫는다. 참! 알아두면 좋을 정보가 하나 있다. 중앙시장을 둘러보고 난 다음 남대천으로 빠져나갈 때 무턱대고 남대천 방향으로 나가지 말고, 동쪽 방향으로 조금 더 진행해서 월화거리로 들어서라는 것이다. 고속철도의 도심구간이 지하화가 되면서 생긴 폐철도 부지에 조성한 거리공원으로 풍물상점 등 볼거리가 제법 많기 때문이다.
▼ 시장은 사람들로 붐빈다. 요즘 방송에서 재난지원금 덕분에 경기가 풀린다는 기사가 계속해서 뜨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일단은 시장통으로 들어서고 본다. 어깨를 부대끼며 느껴보는 인정이 있으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그런 다음에는 이층 식당가로 올라가 강릉의 ‘맛’도 느껴보기로 했다. 집사람은 ‘삼숙이 탕’ 나는 ‘알탕‘. 공중파 3사의 TV카메라가 모두 훑어갔다는 이 집에서 내놓는 메뉴는 이게 전부이다. 음식은 일단 맛있었다. 하지만 서비스는 제로, 할머니 둘과 할아버지 한 분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웃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친절과는 거리가 먼 투박한 사투리도 귀에 거슬렸다.
▼ 길을 잘못 들어선 우리 부부는 월화거리를 들르지 못하고 곧장 남대천(南大川)으로 빠져나왔다. 천변에 이르러 왼편으로 방향을 트니 다리 하나가 나온다. 위에서 얘기했던 ’월화거리‘의 연장선으로 옛 철도교를 개조해 보행자 전용 다리를 만들었다. 8개 구간으로 나누어진 월화거리공원 가운데 ‘철도보도 육교’ 구간이다.
▼ 명색이 공원인데 포토죤 하나쯤은 필수가 아니겠는가. 빈 커피 잔을 든 소녀가 따뜻한 햇살과 신선한 바람에 취한 채로 남대천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 옆으로 냉큼 다가간 집사람, 어쩌면 그녀의 곁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느껴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 다리는 스릴까지 가미했다. 바닥에 통유리를 대 남대천 물길을 발아래로 내다볼 수 있게 했다. 다리에서의 조망도 뛰어난 편이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해 동해로 흘러드는 길이 51.3㎞의 남대천(南大川) 물길은 물론이고 그 시발점인 백두대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강릉성결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니 기억해 두자. ‘강릉교’를 건너온 해파랑길이 저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고, 이어서 한 블럭 더 간 다음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삭막한 시가지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 다리를 건너면 ‘월호정(月花亭)’이란 정자가 황금 잉어상과 함께 길손을 맞는다. ‘월화’라는 정자의 이름은 강릉 지역의 고유 설화이자 애틋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인 ‘무월랑(無月郞)’과 ‘연화부인(蓮花夫人)’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왔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의 ‘악지’에 소개된 ‘명주가(溟州歌)’의 배경 설화인데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때 무월랑 김유정(金惟靖)이 화랑도 사관으로 명주(현 강릉)에서 재임할 때 연화봉 아래 별연사지 부근에 있는 연못에서 잉어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지방 토호의 딸인 연화 낭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 무월랑이 임기를 마치고 서라벌로 떠나면서 백년가약을 언약하였으나 그 후 연락이 끊겼고, 낭자의 부모는 딸을 다른 데로 시집을 보내려고 했다. 이에 연화 낭자가 그리움과 현 상황을 비단에 써서 고기에게 먹이를 주며 하소연을 했는데 황금빛 잉어가 편지를 물고 사라졌다. 그 후 무월랑은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장에 들러 잉어 한 마리를 사 오게 되고, 잉어의 배를 가르니 편지가 나오는데 바로 연화의 편지였다. 이러한 사연을 알게 된 임금이 무월랑과 연화부인이 천생연분이라 하여 혼인을 시켰으니 그들이 바로 강릉 김씨의 시조인 명주 군왕 김주원의 부모이다.
▼ 시장을 나선지 25분 만에 위에서 얘기하던 강남성결교회에 도착했다.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해파랑길과 헤어지기로 했다. 삭막한 도심을 걷기보다는 남대천에 내놓은 천변산책로를 따르는 게 나아보였기 때문이다.
▼ 예상대로 남대천 둔치는 잘 가꾸어져 있었다. 깔끔하게 단장된 산책로는 기본, 생태습지를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유채 꽃밭이나 갈대밭을 조성하는 등 경관 좋은 휴식공간으로 꾸미려는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벤치를 놓아둔 쉼터도 심심찮게 보인다. 길이 4.4㎞의 이 탐방로는 강릉교에서 공항대교까지 이어진다.
▼ 천변도로를 따르기를 35분 여, 둔치에서 게이트볼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니 필드가 널찍한 것이 게이트볼과 골프를 합쳤다는 ‘우드볼(Woodball)’일지도 모르겠다. 이어서 인라인스케이트장을 지나니 축구장, 공놀이 삼매경에 빠진 소녀들이 몇 보인다. 강릉 시민들은 이 일대를 ‘남대천체육공원’이라 부른다. 2000년대 초반 야구동호회의 활성화를 위해 남대천 둔치에 만든 ‘간이야구장’이 계기가 되었는데 야구장 조성 이후 시민들의 이용이 급증한데다 다른 운동 종목들의 공간 확보까지 필요해지자 유휴 부지에 축구장과 야외 인라인스케이트장 등 다른 종목의 운동장들까지 함께 조성했다.
▼ 동해바다에 가까워지자 남대천의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다. 그러다보니 한강의 ‘밤섬’처럼 강의 한가운데에 널찍한 섬도 생겨났다.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게 생김새까지 밤섬과 같다. 밤섬처럼 철새도래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 아니나 다를까 체육공원에서 조금 더 걸으니 ‘조류 관찰대’가 나온다. 남대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시설인데 천연기념물 330호인 수달을 비롯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와 매, 물수리, 고니, 노랑부리저어새 등 남대천에서 서식하는 철새들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관찰대에는 망원경까지 설치해 놓았으니 잠깐 짬을 내어 들여다 볼 일이다. 운이라도 좋아 희귀·멸종위기 겨울 철새인 ‘흰꼬리수리’라도 눈에 담을지 누가 알겠는가. 아니 그런 운이 없더라도 말똥가리나 물수리, 물닭, 댕기물떼새 등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탐방로는 조류관찰대에서 도로 위로 올라가도록 나있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천변을 따라봤다. 그래봤자 공항대교 아래에서 길이 뚝 끊겨있었지만 말이다. 조류관찰대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공항대교를 건넌다. 계속해서 둔치를 따르다가 남항진교를 건너 남항진 해변으로 가고 싶었지만 횡단보도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복 6차선의 도로를 어떻게 무단 횡단할 수 있겠는가.
▼ 공항대교를 건너면 탐방로는 또 다시 남대천의 ‘둑방’을 따른다. 우레탄이 깔려있어 걷기가 편한데다 주변 경관도 아름다워 휘파람이 절로 나오는 구간이다.
▼ 날머리는 남항진 해변(강릉시 공항길127번길 67)
그렇게 15분 남짓 걷다보면 솔바람다리가 나온다. 해파랑길 38코스의 종점인 남항진 해변은 다리 건너이고,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안목’으로 더 널리 알려진 ‘강릉항’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항이나 해변보단 거피 거리로 통한다. 그게 다 모방송사 프로그램 덕에 유명세를 탔기 때문인데. 가만히 들여다본다면 여기라고 예외가 있을 리 없다. 사람 많은 곳이라면 어김없이 들어서는 대형 체인 커피전문점이 여기저기 들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개의치 않은 사람들도 많나보다. 산행대장과 그 일행들이 커피를 맛보겠다며 안목으로 가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총 5시간30분이 걸렸다. 점심식사를 하느라 중간에 50분을 쉬었으니 4시간 40분을 걸은 셈이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8.3㎞,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남항진해변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솔바람다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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