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이산(月伊山, 551.4m)
산행일 : ‘11. 8. 21(일)
소재지 :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과 옥천군 이원면의 경계
산행코스 : 주차장→옥계폭포→월이산→투구봉→서봉→옥계폭포(원점회귀, 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새싹산악회
특징 : 순수한 우리말로 ‘달이산’이라고도 불리는 월이산은 이름 그대로 ‘달이 떠오르는 산’이다. 달(月)이라는 단어가 여성스러운 느낌을 주듯이 산세(山勢) 또한 그러하다. 전체적으로 산세가 부드럽고 단아하며 산행을 하면서 금강의 절경(絶景)을 굽어보는 호사(豪奢)까지 누릴 수 있다. 산행코스도 길지 않으므로 ‘가족 산행지’로 권할만하다.
▼ 산행들머리는 영동군 심천면 옥계폭포 주차장
경부고속도로 옥천 I.C를 빠져나와 4번국도(國道/ 김천, 영동 방향)를 따라 달리다가 심천면 고당리에서 오른편으로 들어서면 옥계폭포 주차장이 나온다. 4번국도의 도로변에 옥계폭포를 알리는 커다란 광고판이 보이니 참고하면 된다. 산행은 옥계폭포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천국사의 바로 앞에 있는 주차장은 최신식 화장실과 쉼터가 잘 갖춰져 있다. 잠깐 짬을 내어 들러본 천국사는 우선 낯선 느낌부터 든다. 건물 외관도 특이할뿐더러, 주요사업이 사찰(寺刹)의 본업인 포교(布敎)사업이 아니고, 소득창출을 위한 장례(葬禮)사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천국사 : 현(現) 주지인 해정스님이 최근(最近)에 창건한 사찰로서 아직까지 불사(佛事)가 진행 중이다. 1층은 생노병사(生老病死)를 의미하는 사각(四角), 팔정도(八正道 :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의 길)를 의미하는 팔각(八角)의 2층, 그리고 법당 외부의 상층부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구조로, 특이한 외양(外樣)을 지니고 있다. 미얀마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천국사를 둘러보고 옥계폭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긴다. 옥계폭포까지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林道)는 깔끔하게 정비가 잘 되어있다. 아마 영동군에서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모양이다. ‘우렁이 된장 쌈밥’이 맛있다고 소문난 폭포가든을 지나면 옥계저수지이다. 높다란 보(洑)를 가진 옥계저수지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과 어울려 호젓한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다.
▼ 저수지를 벗어나 조금 더 오르면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轟音)이 들려온다. 바로 옥계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이다. 옥계폭포의 앞 광장에는 관모(冠帽)를 쓴 박연 선생이 대금을 불고 있다. 박연선생은 '국악의 고장 영동'이라는 말이 탄생되게 한 장본인이다. 동상(銅像)이 우리들을 반기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 또한 이곳 옥계폭포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 난계 박연(1378~1458)은 이곳 고당리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영동군이 국내에서 손꼽히는 국악(國樂)의 고장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박연은 악곡(樂曲)을 정리한 인물로서 우륵, 왕산악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으로 꼽힌다. 또한 벼슬이 대제학과 이조판서까지 오른 큰선비이기도 했다.
▼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절경(絶景), 저런 절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옥계폭포는 수천 년 동안을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을 것이다. 그러면서 조금 조금씩 절벽을 깎아나갔을 것이다. 이곳의 아름다움에 빠진 박연선생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을 찾았을 것이고, 이곳 바위틈에서 발견한 난초에 반해 자신의 호를 난계(蘭溪)라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요즘 같은 장마철의 폭포들은 가히 ‘물 만난 고기’이다. 폭포는 뭐니 뭐니 해도 물이 많아야 제격이기 때문이다. 마침 찾아온 시점이 장마 뒤끝이어선지 비단결처럼 가지런히 쏟아지는 폭포수의 위세가 대단하다. 옥에 티 하나, 영동군에서 전망대 등 인공구조물들을 세워서 폭포를 구경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멋이 많이 훼손된 것 같아서 아쉽다.
* 옥계폭포 : 충청도에 있는 폭포(瀑布)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다고 알려져 있다. 높이가 20여m로 그리 높지 않은 폭포인데도, 폭포 양쪽으로 깎아지른 암벽(巖壁)이 우뚝 솟아있어서 실제보다 훨씬 높게 보인다. 박연이 낙향한 뒤 자주 찾아와 피리를 불던 곳이라 해서 ‘박연폭포’라고도 불리고 있다.
▼ 옥계폭포 앞 팔각정의 오른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폭포의 왼편 절벽(絶壁) 위로 올라가는 등산로는 갈지(之)자를 그리면서 심한 가파름과 한판 싸움을 벌이고 있다. 길가에는 굵은 파이프가 가파른 등산로와 함께 호흡을 맞추면서 힘들게 올라가고 있다. 이 파이프는 저 아래 보이는 옥계저수지에서 물을 끌어 올릴 때 사용하는 파이프이다. 갈수기(渴水期)에도 결코 옥계폭포의 물이 끊어지지 않고 떨어지는 이유이다. 영동군청의 이러한 지극한 보살핌이 있기에 옥계폭포가 폭포가 많기로 소문난 충청도에서도 제일로 손꼽히게 된 이유일 것이다.
▼ 절벽의 위로 올라서면 곧바로 협곡(峽谷)이 나타난다. 협곡을 가로지르는 시멘트다리를 건너 2분쯤 가면 갈림길이다. 두 길 모두 정상으로 가게 되지만, 오른편 능선으로 올랐다가 정상과 투구봉을 밟은 후, 천화원으로 앞으로 내려와 이곳에 닿게되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능선으로 오르는 오름길은 초입부터 경사 심하다. 지그재그로 경사(傾斜)를 죽이면서 오르면 엉성하게 쌓은 돌탑 몇 기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449봉이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에 몇 곳의 전망대를 만나게 되나 특별한 볼거리는 제공하지 못한다. 등산로 주변은 순수한 소나무군락지, 가파른 오르막길을 숨 가쁘게 오르는 힘듬을 솔향을 따라 흐르는 피톤치드가 다소나마 덜어주고 있다.
▼ 449봉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고와지기 시작한다. 고저(高低)가 심하지 않은 길은 걷기에 편하기만 한데, 거기다 흙길에는 낙엽들이 두텁게 쌓여 있어 여간 폭신폭신한 것이 아니다. 앞뒤에 이어지던 일행들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쉬고 있는 모양이다. 조용해진 숲길에는 신갈나무, 떡갈나무, 상수리, 갈참, 굴참나무 등 참나무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산꾼 하나 보이지 않는 늦여름 숲길을 느긋하게 걸어본다. 주어진 하산시간이 여유롭기 때문이다.
▼ 능선의 전망대에 서면 유유히 흐르는 금강 본류의 물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 월이산에는 이정표가 없다. 그러나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주 등산로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449봉을 지나서 한참을 더 걸으면 448봉이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과 원동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두 곳 모두 길이 뚜렷하기 때문에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고민은 잠깐으로 끝난다. 다행이 어느 산꾼이 만들어 놓은 이정표가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이정표가 조금 조잡하면 어떠랴? 그의 정성어린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다.
▼ 봉우리 몇 개를 넘다보면 저만큼에 월이산 정상이 보인다. 경사가 심하지 않은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정상 바로 아래에서 초본식물(草本植物 : 풀)로 뒤덮인 분지를 만날 수 있다. ‘닭의장풀’ 등 습지(濕地)에서 자생(自生)하는 풀들로 뒤덮인 것을 보면 보존할 가치가 있는 천연습지(天然濕地)중의 하나가 아닐까? 짙게 우거진 일년생 초목(草木) 아래를 뚫고 나가면 월이산 정상이다.
▼ ‘정상을 무덤에게 빼앗긴 불쌍한 산’이라고 불러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말 그대로 월이산 정상은 무덤이다. 무덤의 아래에 헬리포트가 조성되어있고, 정상표지석은 동쪽 한 귀퉁이에 버려진 듯 무심히 서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덤 뒤 제일 높은 지점만은 삼각점(이원21 1983재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정상에 서면 옥천시가지(市街地)가 발아래 내려다보이고, 서대산과 장용산, 대성산, 갈기산, 국사봉과 천태산, 백화산의 능선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 하산은 올라선 지점의 반대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진행한다. 커다란 바위덩어리들이 길을 막고 있다. 얼핏 바위봉우리로 오해할 수도 있을 만큼 바위들은 우람하다. 바위를 왼편으로 돌아 안부로 내려서는 길은 급경사(急傾斜)이다. 월이산 정상으로 올랐던 길은 경사가 완만(緩慢)한데 반해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그러나 별로 위험하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가파른 바윗길에 매어 놓은 로프를 사용하지 않고도 쉽게 아래로 내려설 수 있기 때문이다.
▼ 정상에서 내려서면 얼마 안 있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곧바로 천화원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투구봉으로 가려면 맞은편 능선을 따라 곧바로 진행해야 한다. 이곳 삼거리에도 누가 만들었는지 조그만 판자로 이정표를 만들어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았다. 그러나 이번 것은 별로 달갑지 않다. 이정표에 적힌 지명(地名)들이 생소하기 때문이다. ‘국사봉’ ‘슬목재’ ‘마니산’ 지도에도 없는 지명들이 나열되어 있다. 어느 종교집단(宗敎集團)에서 매달아 놓은 모양인데, 자기들만이 아는 지명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공(公共)의 장소에 매달아 놓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혼동(混同)을 줄 필요가 있었을까? 하긴 종교는 곧 아집(我執)이려니...
▼ 천화원으로 내려가는 길과 헤어진 후, 얼마간 더 걸으면 등산로의 분위기가 갑자기 변한다. 보드라운 진흙길로 이어지던 산길이 갑자기 바윗길로 변하기 때문이다. 바윗길 초입(初入)에 세워진 안내판 하나, 지금 오르고 있는 산의 이름이 천모산(天母山)이란다. 곧 이 봉우리가 단군할아버지의 어머니인 웅녀할머니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도에 表記된 지명을 무시하는 행위야 좋은 방향으로 이해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들의 주장을 따르라는 강요는 옳지 않다. 행정청인 영동군에 바라고 싶다. 그른 것은 옳게 바로잡아 주라고...
▼ 안내판 뒤는 로프가 설치된 암벽구간이다. 하지만 그다지 위험하지 않기 때문에 큰 무리 없이 오를 수 있다. 암벽구간을 통과하면 왼편에 너른 암반(巖盤)이 펼쳐지고 있다. 바로 투구봉이다. 천화원쪽에서 바라보면 투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투구봉의 남쪽 끄트머리는 수십 길 까마득한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벼랑에 서면 천화원쪽의 서재마을이 자리 잡은 분지(盆地)가 발아래 펼쳐지고 있다. 산중임에도 불구하고 분지는 예상 밖으로 널따랗다.
▼ 투구봉에서 서봉까지는 10분이면 닿을 수 있다. 서봉 정상의 갈림길에서는 손바닥 크기의 판자에 쓰여 있는 ‘국사봉 술목재 마니산’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왼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소나무 숲이 울창한 산길을 따라 3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연못까지 갖춘 멋진 독립가옥 앞에 닿게 된다. 집 앞의 노거수(老巨樹)는 보호수로 지정해도 좋을 만큼 오래 묵었고, 뜰 앞의 연못 수면 위에는 고추잠자리들이 만들어내는 물결이 둥그렇게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 독립가옥을 벗어나면 시멘트포장 임도(林道)가 이어진다. 인적이 끊긴 한가한 길, 주어진 하산시간이 넉넉하니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가 없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주저앉아 얼린 막걸리로 목을 축인다. 마음이 여유로워졌음일까? 문득 주위 풍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길가에는 어느새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비닐하우스에는 수세미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고, 길가 도로변에는 제철을 만난 들국화들이 이미 서늘해진 가을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 혹시 길을 걷다가 갈림길이라도 나올 경우에는 '일지명상센터'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내려서면 된다.
▼ 명상센터 방향으로 내려가는 임도(林道)는 자동차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널따랗다. 실제로 명상(冥想)센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차량을 이용해 들어올 경우에는 이 길을 이용해야만 센터로 들어갈 수가 있다. 명상센터인 ‘천화원’은 꽤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단식을 통해 몸과 마음(心身)을 수련을 하는 곳이라는데 뭔가 깨우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아니면 벗겨 내버리고 싶은 세속(世俗)의 때들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고...
* 천화원 : 단(丹) 월드 사범 및 단 마스터의 교육을 위한 연수원. 단식과 명상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는 곳으로, 기운이 강한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과 기를 다스린단다. 홍익(弘益)정신을 실천하는 단학(丹學)정신을 주장하면서 단군의 동상까지 세워 놓았다. 주장하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 일반인들에게는 혼란스러울 정도이나 연간 4만 명이나 되는 많은 명상(冥想)여행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단다.
▼ 천화원 앞을 지나서 오른편에 있는 작은 폭포를 구경하면서 걷다보면, 이내 산행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갈림길과 만나게 된다. 아침에 지나왔던 협곡의 다리를 건너기 전에 계곡으로 내려선다. 그리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조금 전에 보았던 폭포(瀑布)를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싶기 때문이다. 계곡을 가로질러야 하기 때문에 오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보기 드문 절경(絶景)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아름다움과 함께하는 일은 언제나 행복하다. 아름다운 경치를 아름다운 여성과 함께 바라보는 즐거움이라니...
▼ 월이산이 습기가 많은 탓일까? 월이산을 걷다보면 유난히도 바위손이 자주 보인다. 바위를 온통 둘러싸다시피 하고 있는 바위손들은, 티 한 점 없는 싱싱한 젊음을 자랑하고 있다.
▼ 다리로 돌아온 후, 이번에는 계곡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본다. 50m쯤 걸어 내려가 벼랑에 서면 폭포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 폭포 위에서 내려다보는 산 아래 풍경은 한가롭다. 폭포의 상단에는 ‘예저수 못’이 자리잡고 있다. 먼 옛날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폭포의 머리 부분이다.
* 예저수 못 : 이 연못은 아무리 큰 장마가 져도 흙으로 메워지는 일이 없었으며, 어찌나 깊은 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고 한다. 못의 깊이를 재보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명주실에 돌을 달아 집어넣어 보았지만 실 한꾸러미가 다 들어가도 끝이 나타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못의 구멍이 북쪽 옥천군 이원면으로 뚫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단다.
▼ 폭포의 물줄기가 바람을 따라 폭포의 위에까지 흩날리고 있다. 바람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은 바람까지도 서늘하게 만들어준다.
▼ 산행을 마치고 옥계폭포 앞의 팔각정을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접어든다. 그리고는 시원한 알탕과 함께 산행을 마무리한다. 산행을 마무리하면서 적어보는 옛얘기는 월이산에 대한 전설 한 토막이다.
* 옛날에 이 동네에 월이라는 거구에다 힘이 장사인 총각이 살았단다. 동네사람들은 행여 행패나 당하지 않을까하여 월이를 피했었나보다. 그러다가 같은 마을에 사는 일향 처녀가 개울가에서 노는 총각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의 순박하고 믿음직한 모습에 반해버렸단다. 당연히 그 둘은 남의 눈을 피해가며 사랑을 꽃피워갔을 것이고...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이 사실을 전해들은 처녀 부모가 바깥출입을 금지하자 처녀는 집안에 갇힌 채 눈물과 한숨으로 지내다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말았단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총각도 당연히 따라 죽었을 것이고... 그래서 인근에서는 이 산을 월이산 또는 일향산이라고 부르고 있단다.
'산이야기(충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주호반과 월악산을 잘 볼수 있는 등곡산과 월형산('12.2.11) (0) | 2012.02.15 |
---|---|
기암괴석들의 전시장, 막장봉-장성봉('11.9.3) (0) | 2011.09.06 |
기암괴석과 노송들이 그려내는 동양화, 낙영산과 도명산('11.8.15) (0) | 2011.08.18 |
암릉과 호반의 절묘한 만남, 제비봉('11.7.30) (0) | 2011.08.01 |
특별한 볼거리는 없어도 호젓해서 좋은, 백운산('11.5.22) (0) | 2011.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