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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웠던 오월이 가버렸습니다.


앞만 보며 달리다 보니
지천이던 개나리와 벚꽃이 어느새 지고
이미 붉은 장미넝쿨이 울창한 울타리를 이루는 줄도 몰랐습니다.


가끔 살아가는 일이 힘겹게 느껴지면
아니 꼭 힘들지만은 않더라도 어딘가 떠나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들이든 산이든, 아니면 바다든 간에...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 무엇 하나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이지요.


바다를 찾았다면 넘실 춤추는 파도가 반겼겠지만
이곳 칠보산은 산인지라 상큼한 산들바람이 마중하여주는군요.
그러나 오늘은 비온다는 날... 반기는 산에 고맙다고만 하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그저 시골 완행버스에서 보았던 스티커가 생각날 따름입니다.


눈보다 마음을 여는 것이 더 중요해서일까요?
천년 만년 세월을 버텨온 산중에 드는 산길에선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그리 높지 않고 그리 험하지도 않은 산인지라 호흡한번 헐떡임 없이 올라봅니다.


그래도 속리산 언저리라 가끔은 가파른 암벽이 앞을 막는군요.
모처럼 챙겨온 리지화도 자랑할 겸 부리나케 암벽에 붙어봅니다.
앞서가는 사람의 뒷 모습을 금방 놓치고
행여나 미끄러질까 두려움에 떠는 난 아직은 아마추어랍니다.


오르고 내리고... 그러다 매달려도 보고...
로프 앞에 줄서기 싫어 암벽에 붙어 봅니다.
무서운데... 뒤따라오는 여자분의 여유로움에 질려 티도 못냅니다.
명색이 난 남아대장부이니까요.(비록 무늬만 이지만 ㅎㅎㅎ)


칠보산엔 소나무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기둥은 물론 솔가지 하나 반듯하게 펴진 것이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휘어진 소나무가 모두 한쪽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군요.
아마 바람에 날려올 때 못다 떨친 인연 그쪽에 남아있나 봅니다.


지천에 깔린 솔잎 날카로움에 다쳤을까요?
솔향 듬뿍 안은 바람에선 가냘픈 흐느낌이 실려오는데,
쪽빛 허공에 흘러가는 저 흰구름 한점 어디로 가는지가 궁금한건
몸이야 어디있든 난 중생이기에 사소한 집착하나 선뜻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이 비어있어야 새것을 잡을 수 있고 앞을 보아야 갈 수 있듯이
내가 붙잡고 있는 지난날의 나를 놓아야만 진정한 날 맞이할 수 있을텐데도요.


솔숲에 비록 벤치는 없지만
서너명 족히 쉬어갈 바위가 지천인데 풍진속 기물이 무슨 필요겠습니까.
식혀주는 더위에다 가슴속에 켜켜이 쌓인 속진의 때까지도 씻어 줄텐데요.
저 바위 위 내 한몸 누이고 더도 덜도말고 한 이틀 푹 쉬었으면 좋겠군요
일상의 번잡함 모두 잊은 채로 말입니다.


바위를 피해 이리저리 휘어진 오솔길을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허파를 씻어주는 맑은 공기...
이런 숲에선 사람도 모든 숨구멍을 열어놓나봅니다.


느릿하게 땅의 촉감을 느끼며 걷다
또 바위난간에 묶인 밧줄에 아무생각 없이 매달리다 보면
진초록으로 덮여가는 숲의 기운은 어느새 이슬처럼 가슴에 내려앉습니다.


여름에 접어든 유월.
세상은 열기로 가득하고 머리는 무겁습니다.
맑은 물과 푸른 숲이 그리워 칠보산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사에 닳고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요즘의 절은 아름답습니다.
풍경소리도 염불소리도 신록으로 스며들어 아득하기만 합니다.
연록에서 진록으로 변해가는 참으로 좋은 계절에 부처는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난 산속에 들었습니다. 꼭 부처님을 찾아간 것은 아니지만요.
산사의 숲길 걷다보면, 내 가진 번뇌 잠시라도 날려보낼 수 있을지 누가 아나요?


이름 모를 새소리에 눈을 뜹니다.
어제 밤늦게까지 마신 술의 후유증... 골이 지끈거립니다.
물론 속도 쓰리지만 조이님께는 내색할 수가 없습니다. 금주령 내릴지도 모르니까요.
수건만 달랑 들고 냇가로 내려갑니다. 이리도 맑은 물, 어찌 비눗물로 흐릴 수 있나요?.


봄의 계곡은 온유하고, 흐르는 물도 거칠지 않고 물가 풀잎은 보드랍습니다.
앗 차거~ 손가락 끄트머리, 돌 틈에 고인 초록빛 물속엔 묵색 조약돌이 옹기종기....
어~ 송사리 몇 마리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을 떠드는 걸 보니 동네 경사라도 있나봅니다.


아침식사 후 느긋하게 산행을 나섭니다.
발걸음이 왜이리 경쾌하냐구요? 저의 팔에 그녀가 매달려있거든요.
산의 초입... 꽃보다 고운 연둣빛 잎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입니다.
킁~킁~ 연둣빛 잎들의 싱그러운 비린내가 온 산에 가득하다 못해 산머리를 넘어섭니다.
새봄의 연둣빛 잎들은 조금씩 짙은 초록을 품어갑니다. 아마 여름을 예비하는 모양입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녀린 잎들이 부대낌이 간지럽다 애교를 부립니다. 사르르~사르르~


산허리쯤에서 왼편에 편백나무 숲을 만났습니다.
수백 그루가 어디 하나 뒤틀린 곳 없이 하늘로 쭉쭉 뻗었습니다.
오른편엔 활엽수인 팽나무·굴참나무·떡갈나무들이 새 잎을 틔워 연둣빛 터널을 만드네요
양 숲의 머리끝에 짊어진 푸른 잎은 하늘에 맞닿았습니다. 열린 하늘가로 구름 한점 둥둥...


‘대·소변을 미련없이 버리듯, 번뇌·망상도 미련없이 버리자.’
언젠가 들렀던 선암사 뒤깐에 붙어있던 종이쪽지가 새삼스럽게 떠오름은 왜일까요.
어쩜 오늘이 초파일이라서? 조그만 인연까지도 떨쳐버리지 못하는 중생이랍니다.
늦은 봄 숲길 걷다보면 모든 번뇌를 잠시라도, 잊을 수 있을까요? 그 조차도 허망한 욕심...


숲의 넘치는 산소와 석가탄신일의 의미, 조그만 깨달음이 함께 해준 여행...
"하루를 잘 보내면 달콤한 잠을 이루고, 인생을 잘 보낸 이는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어디선가 읽어본 글귀대로 오늘 저녁엔 달콤한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귓가에 맴도는 창불(唱佛) 소리에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봄산을 보고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드시지 않나요?
소나무의 '진 초록’과 활엽수의 색‘연 초록’두 가지 초록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습니다.
진초록의 산에 점점이 박힌 연초록...마치 폭죽을 터뜨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야흐로 ‘신록의 계절’입니다.
신록의 산은 날씨에 관계없이 아름답습니다.
맑으면 눈이 부시고, 비가 오면 머금은 물기가 반짝입니다.
어쩌다 옅은 안개라도 낀다면, 그야말로 수채화를 보는 듯 하겠지요.

 

신록에는 땅에서 솟구치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충만한 에너지가 있습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눈이 맑아지고 머리가 개운해지는 청정의 에너지입니다.
그 기운을 제대로 받기 위해 전 또 산을 찾았습니다. 숲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요.

 

주말이지만 도래기재는 텅 비어 있습니다.
지난달 서너대의 관광버스가 지키던 곳도, 얼굴 씻으며 깔깔대던 동굴도 비어있습니다.
2시30분 출발선상에 섭니다. 헤드랜턴에 비추이는 얼굴 표정들이 다들 밝군요.
비가 안 온다는 안도감에서 나오는 은근한 미소일 것입니다. 깊은 행복감에서 우러나오는...

 

구룡산을 향합니다. 초반부터 속도들을 내는군요.
헉헉대는 숨결이 턱에 차 오릅니다. 오로지 앞사람의 발뒤축만 보며 달립니다.
하기사 별빛 한점 없는 어두운 밤에 다른 것이 보일리도 없지만 볼 여유도 없습니다.
바람에 휘둘리는 짙은 안개가 발목어림에서 바람결 따라 물결무늬를 연출해 냅니다.
제법 조도가 높은 랜턴의 불빛까지도 흐리게 만들어 갈길 바쁜 산나그네의 발목을 잡는군요

 

두시간쯤 걸었나요? 쉬지도 않고 내빼는 선두가 어딧냐고 외치는 이가 보입니다.
아서라~ 앞선 사람도 뒷선 사람도 힘들기는 매 한가지인걸요.
바람결에 후두둑 떨어지는, 나뭇잎 위에서 잠자던 시원한 빗방울이 그나마 작은 위로입니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숨결들을 안고 도착한 구룡산, 조그만 입석이 지키고 있습니다.
어둠에 쌓인 정상은 볼품이 없습니다. 잠깐의 휴식도 없이 곧바로 출발입니다.

 

곰넘이재를 내려올 즈음해서 여명이 찾아옵니다.
배가 고파 미치겠는데 아직은 이르다지만, 슬그머니 술을 내놓습니다. 안주? 전입니다.
뭔가 들어가니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깁니다. 5시30분, 벌써 세시간을 걸었습니다.
부지런한 산새들의 합창... 누군가 도심의 새소리보다 맑고 밝게 느껴진다고 말하는군요.
또 다른 누군가는 맑은 공기 때문에 음이 잘 전달되어서 그렇다합니다.
날이 밝자 길가의 들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보드라운 들풀에 얼굴 대보고 싶네요.

 

6시20분, 30여분의 힘든 오르막길 끝에 신선봉 정상입니다.
기진맥진한 우리를 경주 손씨들의 묘가 반깁니다. 성묘? 어떻게 할까요? 잡초만 무성합니다.
깃대배기봉, 벌써 8시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 더 이상은 못 참습니다.
펑퍼짐하게 주저앉아 아침상을 차립니다. 뒤에서 서성이는 몇몇은 오는 길에 해치웠을까요?
또다시 두어병의 소줄 내놓습니다. 푸짐한 안주거리에 술이 술술 잘도 넘어갑니다.
추위에 떨던 얼굴들이 소주한잔에 발그레해집니다. "술은 에너지다" 제 주장이랍니다.

 

9시40분, 부소봉을 지날즈음 저멀리 천제단이 보입니다.
납작한 활엽수들로 우거진 능선에 듬성듬성 고사목들이 나도 있다 자태를 뽐냅니다.
밑에 보이는 건 하단? 천왕단, 장군단은 정상부위에 있는데 밑에 있다고 하단인 모양입니다.
그 옆엔 밀양 박씨의 묘가 있군요. 태백산이 영산이어서 일까요? 묘가 꽤 많습니다.
등산복 차림의 행락객일까요? 묘 옆엔 무지하게 많은 음식을 펼쳐 놓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10시, 드디어 천제단에 도착합니다.
저멀리 함백산이 한눈에 들어오는군요. 그리고 다른 이름 모를 군봉들도...
산허리에 운해가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능선에 지천으로 널린 철쭉의 군락...
화사하지 않은 태백산의 철쭉은 기후변화가 무쌍한 탓인지 꽃 색깔이 연분홍에 가깝습니다.
고산 철쭉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셈이지요.
다음주에 열리는 철쭉제에 맞추느라 이제 막 꽃몽오리를 열고 있습니다.

 

천제단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오렌지 한 알, 찹쌀떡 네 개, 그리고 오이와 방울토마토, 그리고 소주 한 병...
우선 고시래... 절도 해야겠지요? 우쒸~ 절 받는 곳에 웬 도인이 앉아 있습니다.
음복으로 한잔 쭈욱~ 문득 소원을 빌지 않았음을 생각해냅니다.
오랫동안  믿어온 하느님외의 다른 신에 익숙하지 않았나 봅니다.
차라리 같이하는 선남선녀들 시집장가나 빨리 가게 해달라 빌어줄걸 그랬나요?

 

부지런한 몇몇 "이제 내려가죠?"
“뭘 그렇게 서둘러요? 자주 올 수 있는 곳도 아닌데...”
다시 주저앉아 과일 안주에 소주 몇잔 곁들입니다. 철쭉 꽃향 실은 바람이 볼을 건드립니다.
쨍쨍 햇살아래서도 연초록 신록의 미소들이 피어납니다. 이마엔 땀방울 하나 열려있습니다.

 

꽃과 제대로 눈맞춤도 못하고, 가슴 깊숙이 계절의 향기조차 들이켜지 못했는데...
봄꽃의 끝물이며, 여름을 여는 철쭉이 우리를 반기는데 벌써 내려가자니요.
산 정상에 한데 모인 철쭉이 일제히 꽃몽오리를 여는 모습은 하늘을 떠받치는 향로같습니다.
천제단의 향로처럼 신성하기까지 합니다

 

태백산 철쭉제!
이달 하순이면 철쭉은 한꺼번에 꽃잎을 열고 꽃잔치를 벌일 것입니다.
또 얼마나 많은 인파가 태백산을 찾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생물들이 수난을 겪을까요.
길가에 죽어있는 이식한 주목의 시체들과, 골다공증에 걸린 늙은 주목들에 가슴 저려옵니다.

사람을 포함은 모든 생물들, 삶과 죽음은 백지장 한장 차이... 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