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547)





산은 구름을 탓하지 않는다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는 발걸음으로 걸어가라.
닥치는 모든 일에 대해 어느 것 하나라도 마다 하지 않고
긍정하는 대장부(大丈夫)가 되어라.

무엇을 구(求)한다, 버린다 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는 인연 막지 않고 가는 인연 붙잡지 않는
대수용(大收容)의 대장부가 되어라.

일체(一切)의 경계에 물들거나
집착(執着)하지 않는 대장부가 되어라.





놓아 버린 자는 살고 붙든 자는 죽는다
놓으면 자유(自由)요, 집착함은 노예(奴隸)다.

왜 노예로 살려는가?
살아가면서 때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고
설상가상(雪上加霜)인 경우도 있다.
그런다고 흔들린다면 끝내는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데 무엇에 집착할 것인가?

짐을 내려놓고 쉬어라
쉼이 곧 수행(修行)이요. 대장부다운 살림살이이다.

짐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수고로움을 면할 수 없다.
먼 길을 가기도 어렵고 홀가분하게 나아가기도 어렵다.
자유를 맛 볼 수도 없다.





쉼은 곧 삶의 활력소(活力素)이다.
쉼을 통해 우리는 삶의 에너지를 충전(充塡)한다.

쉼이 없는 삶이란
불가능할 뿐더러 비정상적(非正常的)이다.

비정상적인 것은 지속(持續)될 수 없다.
아무리 붙잡고 애를 써도
쉬지 않고서 등짐을 진채로는 살 수 없다.





거문고 줄을 늘 팽팽한 상태로 조여 놓으면
마침내는 늘어져서 제 소리를 잃게 되듯이

쉼을 거부한 삶도
마침내는 실패(失敗)로 끝나게 된다.

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삶의 정지가 아니라 삶의 훌륭한 일부분이다.





쉼이 없는 삶을 가정(假定)해 보라.
그것은 삶이 아니라 고역(苦役)일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선율(旋律)이라도
거기서 쉼표를 없애버린다면
그건 소음(騷音)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쉼은 그 자체가
멜로디의 한 부분이지 별개(別個)의 것이 아니다.
저 그릇을 보라.
그릇은 가운데 빈 공간(空間)이 있음으로써
그릇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단지 덩어리에 불과하다.





우리가 지친 몸을 쉬는 방(房)도
빈 공간을 이용하는 것이지 벽을 이용하는게 아니다.

고로 텅 빈 것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유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삶의 빈 공간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쉼은 더욱 소중하다.

붙잡고 있으면 짐 진 자요.
내려놓으면 해방된 사람이다.
내려놓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유와 해방을 쫓아내는 사람이요.
스스로 노예(奴隸)이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하필이면 노예로 살 건 뭔가?




"산은 날보고 산 같이 살라하고
물은 날보고 말없이 물처럼 살라하네."하는 말이 있다.

산은 거기 우뚝 서 있으면서도 쉰다.
물은 부지런히 흐르고 있으면서도 쉰다.
뚜벅뚜벅 걸어가면서도 마음으로 놓고
가는 이는 쉬는 사람이다.

그는 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살찌게 한다.
그는 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한다.
풍요(豊饒)와 자유를 함께 누린다.





쉼이란 놓음이다.
마음이 대상(對象)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마음으로 짓고 마음으로 되받는
관념(觀念)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몸이 벗어나는 게 아니고 몸이 쉬는 게 아니다.
마음으로 지어 놓고
그 지어놓은 것에 얽매여 옴치고
뛰지 못하는 마음의 쇠고랑을 끊는 것,
마음으로 벗어나고 마음이 쉬는 것이다.





고로 쉼에는 어떤 대상이 없다.
고정된 생각이 없고 고정된 모양이 없다.

다만 흐름이 있을 뿐이다.
대상과 하나 되는 흐름,저 물 같은 흐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쉼은 대긍정(大肯定)이다
오는 인연(因緣) 막지 않는 긍정이요
가는 인연 잡지 않는 긍정이다.

산이 구름을 탓하지 않고
물이 굴곡을 탓하지 않는 것과 같은 그것이 곧 긍정이다.





시비(是非)가 끊어진 자리
마음으로 탓할 게 없고 마음으로 낯을 가릴 게 없는
그런 자리의 쉼이다.

자유(自由)와 해방(解放)
누구나 내 것이기를 바라고 원하는 것
그 길은 쉼에 있다 물들지 않고 매달리지 않는 쉼에 있다.
출처 : 대덕산대덕사
글쓴이 : 해각 원글보기
메모 :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을 보려면  (0) 2004.04.02
주여, 나로 하여금  (0) 2004.04.02
꿈을 위한 변명  (0) 2004.04.01
커피 한 잔 생각날 때  (0) 2004.04.01
삶이 나를 불렀다  (0) 2004.04.01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이 곧 분수령이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백두대간은
동과 서를 크게 갈라놓은 산줄기임과 동시에
동해안, 서해안으로 흘러드는 강을 양분하는 역할을 합니다.


태초에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들은
저마다 대간의 저력 을 닮은 모습으로 한반도 구석구석 가지를 쳤고,
그렇게 해서 대간(大幹), 정간(正幹), 13개의 정맥(正脈)을 일구어 냈습니다.
기둥 줄기인 대간을 중심으로, 10대 강을 경계 짓는 정맥들이 국토의 뼈대가 되고 있습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은 1625여km에 이릅니다.
이중에 남쪽에 있는 지리산에서 미시령까지만 우리가 갈 수 있습니다.
남한의 백두대간은 지도상으로는 640여㎞ 이지만 실제거리는 1천2백여㎞에 이릅니다.
그것도 험한 산길로만 다녀야 하는 대간 종주는 산행에만 꼬박 50일이 걸린답니다.
설악산, 태백산, 속리산, 덕유산, 조령산 등 우리나라의 높은 산은 거의 다 지나간답니다.


산을 타는 이들은 백두대간 종주를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여름엔 뜨거운 태양과 싸워야 하고 겨울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를 견뎌야 하며,
며칠을 가도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할 때도 있는 백두대간 종주...
그야말로 자기자신과의 싸움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백두대간을 시작한지 어언 3년, 난 함백산의 턱 밑에 도착해 있습니다.
참으로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그만 두어버릴까 생각한 것만도 여러번이었지요.
그러나 하늘길 밟기에 미친 난 또 하나의 고행길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찾아낸게 13정맥중의 하나인 한북정맥...
북한의 추가령에서 시작하여 임진강의 강구에 이르는 한강 북쪽의 산줄기입니다.
백암산-적근산-대성산-수피령-광덕산-백운산-국망봉-강씨봉-청계산-운악산-수원산을 거쳐
국사봉-죽엽산-불곡산-도봉산-노고산-현달산-고봉산을 지나 장명산에서 끝을 맺습니다.


한북정맥을 시작한지도 벌써 일년이 지났습니다.
다음달에 도봉산에 도착하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답니다.
임진강변 장명산까지의 나머지구간은 도시화되어 산맥으로서의 큰 의미를 잃어버렸거든요.


지난 주말에는 한북정맥을 다녀왔습니다.
한북정맥은 백두대간보다는 길이 험하지 않지만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백두대간과는 달리, 처녀지 같은 한북엔 길이 잘 보이지 않지요.
특히 여름에는 수풀이 우거져 아예 길이 보이지 않는 곳도 많답니다.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 선답자의 산행기만 들고 산행을 나서며 빌어봅니다.
산행기의 올바른 기록을요. 달랑 독도법에만 매달리기에는 어딘가 부족해서입니다.
그 기도가 부족했을까요? 엉뚱한 봉우리를 넘어갔다 다시 넘어오는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그것도 로프에 매달려야만 산을 오르고 내릴 수 있는 험한 바위산을요.

 

그렇게 두시간 동안 엉뚱한 곳을 헤매고, 가시덩굴을 헤치며 걷기를 열한시간...
지금 제 얼굴과 팔다리는 온통 상처투성이입니다. 가시밭을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 고생을 하고도 난 한북정맥을 마친 후의 산행, 또 다른 고행을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아마 난 산에 미쳤나봅니다"


가슴 설레이는 여름입니다.
모두가 떠나는 꿈을 꾸지요.
그냥 집에 눌러앉아 있기는 너무 아까운 계절이니까요.


연인이나 친구들과 함께
땀 뻘뻘 흘리며 높은 산을 오르거나, 드넓은 바다에서의 해수욕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깊은 산속 삼림욕이라도 한번쯤 시도해 볼만 할거고요.


여름은 장마의 계절이니 언제 빗방울이 거세질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방구석에서 뒹굴며 주말을 보내자니 왠지 억울하고….
비와 어울리는 나드리... 비안개 서린 산사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숲길을 가득 덮는 빗소리, 몸을 부풀린 계곡물,
그리고 은은한 독경소리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맑게 해주지 않을까요?
한 주일 켜켜이 쌓인 속진 그산 한 귀퉁이 가만히 내려 놓고파 산을 찾았습니다.
마침 숲 우거지고 물 맑은... 거기다 삼학사란 고찰까지 낀 두타산을 찾았답니다.


얼굴이라도 보고싶다 대전서 올라온 아우님과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산 대신 룸사롱이나 가자는 유혹에도 내가 산을 선택함은 그만큼 산이 좋기 때문입니다.
산이 좋고, 사람이 좋으니... 이밖에 그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나의 해방구...


술에 폭삭 젖어 옆자리 아가씨의 미모도 눈에 들지 않습니다.
채 꿈틀거려보지도 못하다 눈을 뜨니 벌써 댓재에 도착했는 모양입니다.
어두운 하늘에 별자릴 찾을 순 없지만 그래도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으~ 추워... 산중 추위에 떨면서도 두리번거림은 비가 반갑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소망이 하늘에 닿았을까요?
산행 때마다 비를 몰고 다니는 분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으니까요.


밤길 랜턴 불빛 하나에 매달려 걷고 또 걸을 수 밖에 없습니다.
목통령 지나 두타산... 박달령 지나 청옥산...
그리고 연칠성령에서 그 긴 능선길을 접고 지루한 하산길로 접어듭니다.


두타산 못미쳐 부지런한 산새가 안내하는 아침도 맞고...
청옥산 밑 칠십줄 할아버지께 오십이라 우김은 산이 주는 풍요가 전이되었음이 아닐까요?
거기다 더하여 어느 분이 주신 오리알이 배낭에 가득하고 또 양귀비 잎이 기다리고 있는데요.


계곡길은 울울창창 숲으로 덮여 있습니다.
수령이 수백년은 됨직한 소나무와 참나무는 서로 키재기를 하며 가지를 치켜들었고
제법 거센 물살이 휘도는 계곡 가장자리엔 수십번 홍수를 이겨냈을 법한 고목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한여름 땡볕이 아무리 기세등등해도
이런 고목이 드리우는 그늘에 들어서면 금방 서늘하게 풀이 죽습니다.
땡볕 가려준 구름에 산행내내 고마워했는데 갑자기 미워짐은 나 또한 평범한 인간이니까요.
고목 그늘이 있는 계곡에선 아무래도 땡볕이 제격 아닐까요?


앞쪽의 벼랑은 날카롭지만 산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습니다.
타박타박 걷기 좋은 코스. 계곡 옆 길이 시종 물길을 곁에 두고 걷게 하는군요.
그러나 그 코스와 궁합 안 맞는 등산화를 신은 난 미끄러움에 죽는 줄 알았습니다.


큰 나무와 작은 숲은 울창해 원시림을 연상시키고, 산아래 벼랑과 벼랑 사이로
맑은 계곡이 흐르고, 눈을 들면 숲과 숲 사이로 푸른 하늘이 떠있습니다.
무릉계곡에서 바라본 세상은 이처럼 푸르디 푸릅니다


이름 모를 새 노랫소리 울려퍼지는 숲 그늘에서
파아란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은 비록 없지만 초여름의 한가함을 즐기고 싶습니다.
등줄기 서늘한 암반에 가만히 누워봅니다. 그리고 가만히 두눈을 감습니다.


그 고요의 명상은(낮잠?) 발랄한 세 아가씨의 깔깔거림에 끝나버립니다.
그래도 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음은
뼈속까지 시린 물속에 온몸 내 던진 그녀들의 싱그러움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린 두타산...  맑은 계루에 두 발 담그고
하루쯤 원시의 숲 드리워진 자연에 온 몸을 맡기면 바로 그곳이 유토피가 아닐까요?


그래서 이곳이 무릉도원에서 따온 무릉개라 불린답니다.


그 곳 한켠에 喜·怒·哀·樂·愛·惡·欲 내 七情을 가만히 내려놓고 돌아왔답니다.
무릉도원의 신선께 깨끗이 씻어 돌려달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