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슬바람을 앞세워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열기와 습기가 밴 여름의 바람과 달리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소매깃을 파고듭니다.
이 바람은 곧 푸르렀던 여름을 울긋불긋한 가을로 바꿔놓을 것입니다.
코스모스 한들거리던 자리에, 꽃이 지고 나면 어느새 억새가 하얗게 피어나겠지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려 지루했던
여름날의 기억도 지워버릴 겸, 남보다 일찍 가을의 향기를 느끼고 싶어 산을 찾습니다.
주말마다 나서는 산행이지만 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월출산 산행을 포기하고
선자령을 찾은 건 지난번 지리산 산행기의 여운에서 못 벗어남이 아닐런지요.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던 선배님의 안내에 따라 향하는 삼양목장 가는 길...
올 여름 수해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길옆 냇가에 단풍이 예쁘게 물들었습니다.
목장이 가까워질수록 단풍의 무더기들이 점점 커지고... 또 붉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워메~ 산불 나부렀네, 산불~!"
그래~ 거기엔 온통 타오르는 산만이 존재의 의미를 부여...약간의 과장일까요?.
모든 이들의 눈길이 시내 방향 따라 오른쪽, 왼쪽 바쁘게들 움직이고 있군요
황량하게 비인 축사를 지나자 차는 능선의 등허리가 힘들다고 용트림을 합니다.
언덕에 널린 저 인파는 가을동화의 은서나무 아래서 기념사진이라도 찍으려나봅니다.
줄줄이 늘어선 짚들의 숲을 해치고 전망대에 올라섭니다.
눈앞에 드넓은 삼양목장이 펼쳐집니다. 600여 만평, 서울 여의도의 7.5배...
이 엄청난 삼양목장은 하늘을 가리던 참나무 숲이 한 평 두 평 초지로 바뀌는데 10여 년,
그러고 우사를 짓고 목부들이 머물 아파트가 지어질 때까지 몇 년, 85년에 완성되었다나요?
기념사진 한컷, 선배님의 인도로 산행을 시작합니다.
한낮의 햇살도 매섭지 않은 것이 어느새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는 모양입니다.
가파르지 않은 능선을 따라 올라서니 야트막한 산자락에 보라색 벌개미취가 한창이군요.
오른쪽에 황병산 능선을 이고,
왼쪽으로 눈돌리면 광활한 강릉바다가 가물거리는 능선 백두대간 제25구간이랍니다.
그 앞에 수줍은 듯 웅크리고 있는 강릉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대관령 준령이 강릉 쪽으로 뻗어 내리는 힘찬 기세와 옹기종기 모인 강릉시가지의 풍경...
"동해에 오징어 뒤 다리가 보인다..." 아~ 갑자기 오징어 물회가 먹고 싶어집니다.
1시간쯤 걸었을까? 야트막한 봉우리에 선 이정표... 높이가 1,157m인 선자령입니다.
이곳 계곡이 아름다워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놀다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선자령이라 불린다나?
대관령에 새로운 길이 나기 전까지 많은 길손들이 이곳으로 넘나들었다고 하는군요.
선자령 주위 드문드문 억새가 가을이 왔다며 우릴 반깁니다.
이름 모를 봉우리에서 패러글라이딩 구경하는걸 끝으로, 하산을 시작합니다
길 양편에 늘어선 나무들... 서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비바람에 낮게, 그리고 등져있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타협할 수밖에 없는 인생사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만 같군요.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옵니다.
굳이 대간 종주처럼 능선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 마음 편하게 걷는 하산길이 편합니다.
이윽고 도착한 대관령 정상은 을씨년스럽기 짝이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의 행렬이 있었는데 이젠 비인 휴게소 건물만...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어 내려서던 백두대간 길, 그것도 이젠 다 추억 일뿐입니다.
아흔 아홉 굽이 대관령,
비록 보고싶었던 순백 설원과 소나무 가지가 휘어지게 수북히 쌓인 눈은 없었지만,
초록의 능선과 파란 하늘이 그려내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위안을 삼으며 산행을 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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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도 내게 있어 변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는
익숙한 일상으로부터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 늘 가슴 설렘으로
다가옵니다.
그 설렘이 새벽까지 퍼마신 술의 피로도 잊은 채 또 다시 산을 오르게 만듭니다.
부지런한 이들의 부스럭거림에 눈을 뜨니 벌써 이화령입니다.
더 이상 잠을 청하기 뭐해 차를 나서봅니다.
어~ 추워!
霜降이라 서리라도 내렸나요? 옷깃을 고추세우게 만드는군요.
앗! 이번 구간은 처음부터 급경사입니다.
고개를 들 필요도 없이 밤하늘이 눈 위에 떠 있군요.
눈앞에 다가온 밤하늘엔
총총히 박힌 별이 조각달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눈 속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려올 듯 별빛이 총총한데도 다들 조용한
것은
아마 시작부터 반기는 급경사 오름 길에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조령산을 지나자 동이 터 오는지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어 오네요.
산행 초입에 본 하늘의 별빛이 총총했으니 오늘은 틀림없이
일출을 볼 수 있습니다.
무당의 찢어진 빤스는 빌려 입지 않아도 경험으로 일출을 볼 수 있는지 않은지는
어느 정도 맞출 수 있거든요.
일출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징조는 전날 오후 갑자기 비라도 한차례 퍼부을 듯
하늘이 잔뜩 흐려지는 것입니다. 소낙비를
한차례 뿌리는 것도 괜찮지요.
그렇지 않으면 밤에 오줌 누러 일어났다 하늘을 봤을 때 별빛이 금방이라도 눈
속으로 쏟아져 내릴 듯
총총한 게 흔들려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밤하늘 별빛이 흔들려 보인다는 것은 심하게 바람이 분다는 것이고, 바람이 분다는
것은 아침
기상이 좋지 않다는 징조이거든요.
일출의 장관에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아직 갈길이 멀거든요.
부지런히 배낭챙겨 풀숲과 나뭇가지 매달린 아침 이슬을
톡톡 떨구며 조령으로 향합니다.
우리나라 산에는 참으로 바위가 많은가 봅니다.
능선은 병풍을 두르듯 즐비하게 늘어선 기암괴석의 연속입니다.
저 멀리 이름
없는 산들이 병풍처럼 늘어선 모습도 장엄하기 이를데 없네요.
로프에 매달려도 보고, 바위 틈새를 잡고 용트림도 해보고...
앗뿔사 잠깐의 방심이 끝내 위험지역에서 미끄러지게
만드는군요.
더 미끄러졌으면 낭떠러진데 다행히 바위틈을 잡고 멈춥니다.
다 평소에 착하게 살아온 탓일 것입니다(^-^)
조그만한 부상은 있었지만 큰 사고없이 조령3관문에 도착해 아침상을 폅니다.
사십대들끼리 둘러앉은 아침상... 역시 사십대는
풍요로운 세대가 맞은가 봅니다.
넉넉한 밥에 가지가지 반찬... 거기다 금술에 마가목주, 복분자술 참 다양하게 나오는군요.
후미가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길을 나섭니다.
다시 잇는 산길은 마폐봉 오르는 길만 급경사지 나머진 평탄의
연속입니다.
순탄한 산길에 마음까지 여유로와 주위 경관과 하늘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군요
하늘이 점점 비취빛으로 변해갑니다.
도심의 가을이야 잿빛 하늘이 걷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높고 신령스런
산봉우리들 사이로 솜덩이 같은 구름을 흘려보내는 가을의 쪽빛 창공은
눈과 마음의 때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넉넉합니다.
눈과 마음의 때 말끔히 씻어낼 즈음 난 하늘재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오겹살 구워 한잔 쭈욱~
또다시 찾아온
사십대의 풍요로움에 취할 즈음 꼬옥 필요한 그 무엇이 떨어져버립니다.
한숨으로 산행을 마감하려는데 누군가 불쑥 내미는 소주 한병... 이뻐
죽겠습니다.
20㎞ 조금 넘는 산길을 11시간에 주파했으니 과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적당한 산행에
천m 안팎의 능선 나무들은 이미 앙상한
갈비뼈를 들어냈지만 덕택에 조망은 훌륭하더군요.
이번 산행은 참 마음에 든 산행이었습니다.
일단 날씨가 좋아서 마음에 들었고, 능선이 너무나 시원하고 멋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기암절벽이 마음에 들었고, 특히 능선에서의 조망이 마음에 쏘~옥 들었습니다.
이 맛에 틈날 때마다 백두대간을 찾고 있는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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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벼락같이 만들어낸 이틀간의 휴가...
어디로 갈까?
절정의 여름 뙤약볕이 독수리의 부리만큼이나 맵고 날카롭습니다.
말복이 어제인데 어디 불볕더위를 시원스럽게
씻어버릴 만한 곳을 찾아야겠습니다.
인파로 넘치는 피서지는 싫습니다.
몇시간째 움직이지 않고 앞차 꼬리만 물고 있는 여행이 지겨워서이지요.
자리를 잡은
뒤에도 노심초사하며 남들의 침범을 감시해야 하는 그런 여행은 피곤하니까요.
인적이 없는 산길에서 만나는 건강하게 쭉 뻗은 나무와 풀, 바위들...
그 속에서 산이 되고 물이 되어 살아가길 꿈꾸는
사람들이 그리워 산행을 결심합니다.
공자님의‘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라는 말을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찾아내고 싱겁게 웃으며 “나도 어진 사람이로소이다”
속리산, 관악산, 대모산과 구룡산... 그 끝에 백두대간이 내 휴가가 반갑다 손 흔들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모신 모처럼의 外食까지도 산행 일정을 핑계삼아 일찍 끝낼 수 밖에 없습니다.
힘들게 찾은 교대역엔 내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그리운 얼굴들이 날 반기는군요.
오늘은 새내기들보다는 백두로 낮익은 얼굴들이 더 많아 기쁨도 더 큰 것 같습니다.
소리 잘하는
분의 춘향가를 음미하다 슬며시 단잠속으로 빠져듭니다.
두런거리는 소음에 눈을 뜹니다.
두시반에 산행을 시작한다고 했으니 서서히 준비를 해야겠군요
하늘에 별은 없으나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소슬함에 가을을 연상시키는 버리미기재의 밤...
낯선 이방인들을 맞이한 것은 어스름하게 보이는 신작로뿐입니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미명의 순간, 작지만 세상을 비추는데 모자람이 없는 랜턴에
몸을 맡긴 사람들은 앞사람의 발쿰치만 바라보며 걷는데
분주합니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급한 오르막의 연속입니다.
아무래도 오늘 산행이 힘들다는 안내가 아닐까요? 희양산까지 통과한다니 분명할
것입니다.
악휘봉 못미쳐 부지런한 산새의 문안인사를 뒤따라 서서히 여명이 찾아옵니다
그리도 아름답다는 악휘봉 구경은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후미 때문에 지체되어 그냥 통과해야 한다는군요. 그저 먼발치에서
입맛만 다셔봅니다.
25분이면 다녀올 수 있다는데... 뛰어갔다 와도 안될까? 궁시렁 궁시렁....
산길옆으로 우거진 숲은 원시림을 방불케합니다.
날렵하게 뻗은 낙엽송과 힘차게 뒤틀고 서있는 우람한 적송들이 한데
어우러져있습니다.
첩첩산중. 좌우로 산과 산이 서로 겹쳐지면서 잇닿아 펼쳐지고 능선과 봉우리가 끝간데 없습니다.
가끔 숲사이로 다람쥐가 눈을 맞추다가 재빨리 길을 건너는군요..
주치봉을 지날 즈음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가늘었다 굵어졌다...
대간의 봉우리들은 온통 안개와 구름에 휘감겨
있습니다.
언뜻 언뜻 봉우리들이 안개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가는 곧 사라지는군요.
장쾌하게 가지를 뻗어낸 소나무 둥치에 귀를 대보면
‘맥박이 뛰는 소리’가 들릴 듯 싶습니다.
사람들의 손길이 거의 닿지않은 건강한 산의 원초적인 모습이란 이런것이 아닐까요?
새로운
풍경들과 만나고 산과 나무와 물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 산을 찾는 이유일 것입니다.
구왕봉에서 내 특기를 살려 길도 잃어보면서.... 운명의 장소인 지름티재에 도착합니다.
산행중에 비와 만나는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장거리 산행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그런데 오늘은 오히려 줄기차게 내리는 비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그 무서운 봉암사
스님들의 모습이 안 보이는 건 다 비 때문일 터이니까요.
다시 한번 비에 고마워하고 또 비의 삼총사에게도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우쒸~ 깔딱고개는 20분 정도라고 했잔여?”
“1시간 20분인데 아마 1시간을 생략했을걸요?”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는
오르막길...그 끝엔 나무 뿌리를 잡고 올라야하는 낭떠러지가 기다립니다.
정상을 향해 오를수록 안개와 구름의 밀도가 높아집니다.
안개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고사목들. 아름드리 나무둥치가 쓰러져 길을
막네요.
어느분이 가르키는 손가락 끝에 자리잡은 봉암사는 자욱한 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습니다.
일행의 정상주 제의에 재빨리 자릴
잡습니다. 그래야 한잔이라도 더 마시니까요.
산행을 끝내고 하산하는 길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예정된 산행을 무사히 마친 성취감에 더하여 우릴 기다리는 푸짐한 먹거리가
있거든요.
계곡 하산길 너럭바위 사이로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립니다.
예로부터 삼복에 산에서 떨어져내리는 물을 맞으면,
땀띠도 쑥 들어가고 일년 내내 부스럼도 안 나는데다 감기도 들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탁족하는 길에 머리까지 감았으니 이 또한 세시풍속중의 하나인 물맞이 행사라 봐도 되겠죠?
계곡에 발 담그고 크게 심호흡을 해봅니다.
새소리 물소리와 더불어 숲속 나무들이 발하는 짙은 향기가 가슴 한가득
밀려들어옵니다.
대관령 (0) | 2005.1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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