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령산(雙嶺山, 502m)

 

산 행 일 : ‘23. 7. 1()

소 재 지 : 경기도 용인시(처인구) 원삼면 및 안성시 양성면 일원

산행코스 : 중촌마을빌리지주능선430.6쌍령산407.9임도문수봉분기점애덕고개미리내성지중촌마을(소요시간 : 9.85km/ 4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용인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으로 용인 남부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산이 품고 있는 기세만큼은 어디에 내놔다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자 순교자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쌍령산 자락인 미리내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유적지를 낀데다 교통편까지 좋아(서울에서 60 정도) 부담 없는 당일 산행지로 추천할 만하다

 

 산행들머리는 중촌마을(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평택·제천고속도로 서안성 IC를 나와 45번 국도를 타고 용인방면으로 가다 난실교차로(안성시 양성면 난실리)에서 안성맞춤대로로 바꿔 탄다. 이어서 노곡리 회전교차로에서 미리내성지로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중촌마을에 이르게 된다. 버스정류장(미산2)에서 골목으로 들어오면 마을회관이 나온다. 참고로 우리는 잠실역에서 5600번 광역버스를 타고 용인버스터미널까지 온 다음, 일행의 차량을 이용해 중촌마을로 왔다.

 지도(붉은 선)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했다. 임도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붉은 선이 아닌 오른쪽 점선을 따라 주능선(쌍령산과 쌍영산의 중간지점)으로 올라섰다. 하산도 애덕고개에서 미리내 성지로 내려온 다음 도로를 따라 중촌마을로 돌아왔다.

 쌍령산 방향으로 나있는 골목(중촌안길)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참고로 중촌마을은 미산리(美山里)’ 3개 자연부락(상촌·중촌·약산) 중 하나로, 중촌(中村)이란 지명은 마을의 위치에서 유래했다. 윗말과 아랫말로 불리다가 1914(행정구역 개편) 마을이 셋으로 나뉘면서 아랫말에서 중촌(또는 중말)으로 바뀐 것이다.

 골목길을 걷다보면 오세영(1955~2016) 작가의 생전 작업실도 만날 수 있다. 만화가의 사회적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작가로 1993년 한겨레신문이 선정한 우리 시대의 만화가 10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1999년 대한민국출판 만화대상, 2009년 고바우 만화상 등을 통해 작가로서의 면모를 인정받았다. 이밖에도 김수현 작가, 변승훈 화가, 배우 노주현 등 여러 예술인들이 이 마을에 산다는데, 시간에 쫓겨 일일이 들러볼 수는 없었다.

 문이 닫힌 탓에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안내판으로 대신해본다. 만화가 오세영은 낮은 시선에서 바라본 민초들의 삶을 만화 컷 속으로 옮겨 온 작가다. 우리네 얼굴과 표정, 말본새, 체취, 삶의 풍경 등을 생생하고 구수하게 담아내며 일가를 이뤘다. 대표작으로 땅꾼 형제의 꿈’, ‘만화 세계역사’. ‘월북작가 순례기’, ‘만화 토지 등이 있다.

 10분쯤 걷자 왼쪽 산자락에 안성 휴()빌리지라는 아파트처럼 생긴 건물이 얼굴을 내민다. 노인들을 위한 프리미엄 실버타운이 아닐까 싶다.(진입로는 다른 방향으로 나있다)

 중촌안길의 끝, 요런 주택이 들어서있어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마침맞게 집 앞에서 산자락을 향해 임도가 나있다.

 하지만 그 길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100m쯤 올라간 지점에 금줄을 쳐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야 없는 노릇. 오른쪽으로 내려가 작은 개울을 건너니 임도가 나온다. 방향만 보고 진행했는데 운이 좋았다고 보겠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후부턴 웃자란 잡초와 잡목들을 헤치며 길을 만들어가는 수준의 산행이 이루어진다. 방향만 보고 찾아가는 개척 산행이라고나 할까?

 우리 말고도 이 코스를 이용한 사람이 있었다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되어준다.

 선두를 맡은 최군이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다. 코를 땅에 대고 올라야할 만큼 가파른 산비탈은 그냥 오르기만도 벅찬데, 잡목들까지 가득 찼으니 길을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산행을 시작한지 30. 무덤 몇 기가 있는 지능선(支稜線)에 올라섰다.

 그렇다고 길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거친데다 가파르기까지 한 산길은 변할 줄 모른다. 뿐만 아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까지 발목을 잡는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땀으로 인해 온몸은 이미 흠뻑 젖어버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쉬엄쉬엄 오르다가, 그마저도 힘들면 잠깐씩 쉬어가며 오른다.

 그렇게 30(지능에 올라선 뒤) 정도의 악전고투를 치르고 나서야 주능선에 올라설 수 있었다.(정규 탐방로로 올라오지 않은 탓인지 이정표는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튼 오른편은 쌍영산(이곳에서 150m쯤 떨어진 지점), 우리가 오르려는 쌍령산은 왼쪽으로 가면 된다.

 쌍영산(정상석은 없지만 삼각점이 있다) 사진은 최군이 촬영해 온 것(뒤로 쳐진 나를 기다리다가 다녀왔단다)을 올려본다. 쌍령산에서 1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봉우리인데 누가 이름(‘ 으로 살짝 바꿨다)을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지도(일부이지만)에까지 등재되어 있다.

 조금은 편안해진 산길을 따라 13분쯤 오르면 430.6m, ‘맨발이라는 아호를 쓰는 분이 팻말을 매달아 놓았다.

 쌍령지맥(雙嶺枝脈)’이란 한남정맥의 문수봉 서쪽 1.6m 지점의 봉우리(380m)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쌍령산(502m)·천덕산(322.3m)·백련봉(235.2m)·덕암산(164m) 등을 일구고 동고리(평택시 고덕면) 진위천과 안성천의 합수점에서 그 숨을 다하는 도상거리 43.6km의 산줄기이다(신산경표 참조).

 고사목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땅에서 태어난 나무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원시의 숲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라 하겠다. 지맥 종주를 하는 이들을 빼고는 찾는 이가 거의 없다는 얘기도 될 것이고...

 정상에 가까워지자 바위 무리가 자신들도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그래 500m를 겨우 넘기는 수준이지만 산은 산이다. 그것도 정상석까지 갖춘 의젓한 산이다.

 저건 송악이겠지? 하늘로 쑥쑥 뻗어나가는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땅 위를 이리저리 기어 다니거나 다른 나무나 절벽에 빌붙어 살아야 하는 슬픈 운명을 타고난 넝쿨 식물 말이다.

 주능선이라고 해서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다. 이렇게 가파른 구간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 숨이 턱에 걸릴 즈음에야 헬기장으로 이루어진 쌍령산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2.37km이니 무척 더디게 올라온 셈이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얘기도 된다.

 헬기장의 남단에서 조망이 열린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천천히 담아가라는 듯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정상석은 헬기장의 한쪽 귀퉁이에 세워져 있었다. 벤치 등의 편의시설도 그쪽에 몰려있다. 이왕에 올라왔으니 산의 내력이나 알아보자. 쌍령산(雙嶺山)이란 이름은 산자락에 있던 동명의 절(쌍령사)에서 따왔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쌍령사(雙嶺寺)는 성륜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절은 현재 찾아볼 수 없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지리서나 고지도에도 나오지 않는단다. 다만 쌍령산 남쪽, 고려 때 백운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쌍운암(雙雲庵) 터가 쌍령사가 있던 자리로 추측될 뿐이란다.(네이버백과 발췌·정리)

 하나 더, 쌍령산의 옛 이름은 성륜산(聖輪山)’이라고 한다. ‘성륜이란 성스러운 바퀴 , 불교에서의 법륜(法輪)을 뜻한다. 법륜은 부처의 교법을 이르는 말로 전륜왕의 금륜(金輪)이 산과 바위를 부수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에 비유된다. 따라서 성륜산은 마야산(摩耶山)이나 반야산(般若山), 문수산(文殊山)처럼 불교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정상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평상 용도의 보도블럭도 깔아 놓았다. 금계국을 심은 꽃밭도 눈에 띈다. 덕분에 우린 점심상을 펴고 느긋하게 쉬다 갈 수 있었다.

 이정표는 3개 주능선 중 2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미리내 성지 방향의 북서쪽 능선(420고지와 바사리고개를 거쳐 문수봉·어은산으로 이어진다)과 고삼농협 방향의 남쪽능선(우리가 올라온 능선으로 쌍영산을 거쳐 봉황산으로 이어진다)인데,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쌍령산은 동남쪽 능선(경수산으로 이어진다)도 거느린다.

 이곳도 역시 라이더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진입 방지 볼라드(bollard)’는 보이지 않지만 출입을 금지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하지만 우리가 쉬고 있는 중에 라이더들이 여럿 지나가고 있었다. 저런 현수막 정도로는 그들의 출입을 막지 못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거북이 닷! 거북이를 쏙 빼다 닮은 바위를 본 최군이 거북이를 생포하겠다며 냉큼 올라타고 본다.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知天命)에 들어섰는데도, 산에만 들어서면 아직도 소년이다. 그런 최군의 모습을 바라보는 난 마냥 즐겁고...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미리내(성지) 방향이다. 용인시(오른쪽)와 안성시(왼쪽)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인데, 능선을 따라 난 길은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초반에 딱 한번 요런 바위구간을 지나기도 한다.

 20분쯤 걸어 첫 번째 갈림길(이정표 : 석포숲기념공원 3.61km/ 미리내성지 1.44km/ 쌍령산 0.80km)을 만났다. 왼쪽은 미리내성지로 내려가는 단축 코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능선을 타기로 했다. ‘애덕고개를 거쳐 미리내 성지로 내려가기 위해서다.

 5분쯤 더 걸어 만난 이정표(미리내고개 3.1km/ 쌍령산 0.9km) 용인시경계둘레길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민간 주도로 조성된 길이 240km의 둘레길로 시 경계를 따라 용인시를 한 바퀴 돌게 된다.

 의시시한 송전탑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위험시설로 분류되지만(특히 비오는 날에는), 오늘처럼 맑은 날에는 시야를 열어주는 고마운 시설이 된다.

 길은 여전히 곱다. 조금이라고 가파르다 싶으면 침목계단을 깔고, 그것도 모자라 밧줄난간까지 매어놓았다. 행여 들어올세라 쳐놓은 금줄이야 보기 좋은 풍경이 아니었지만.

 임산물의 종류를 적어놓지 않은 걸 보면, 산나물 채취 자체를 금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길이 고와선지 내딛는 발걸음들이 하나같이 경쾌하다.

 하산을 시작한지 50. 이정표(미리내 성지 2.3km/ 고초골 공소 2.3km/ 쌍령산 1.6km)가 이름표를 성지순례길로 바꿔달았다. 김대건 신부님을 따라 걷는 순례길 중 골초골로 가는 코스가 이곳에서 갈린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산길이라고 해서 마냥 내려가는 것만은 아니다. 아래 사진처럼 제법 가파른 구간을 올라가기도 한다. 하지만 침목계단에 밧줄난간까지 갖춰 오르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하면 ‘407.7m에 올라선다. 능선 상에 두루뭉술하게 솟아오른 그저 그렇고 그런 봉우리이다. 하지만 쌍령산 정상에도 없던 삼각점(안성 446)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자체에서도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벤치와 식탁까지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국제신문 근교산행 팀의 산행대장을 역임한 최남준씨도 그런 점을 의식했던 모양이다. 해발고도를 적은 표지판을 나무에 매달아 자신이 지나갔음을 알린다.

 또 다른 이는 상원봉(408m)’이라고 적힌 코팅지를 매달아놓았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도 검색되지 않는 지명이니 문제다. 요 아래 어디쯤에 상원마을이라도 있을지 모르겠다.

 17분쯤 더 걸어 임도(이정표 : 애덕고개 1.1km/ 쌍령산 2.3km)에 내려선다. 탐방로는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오른다. 왼쪽으로 가도 미리내성지에 이르지만(이정표가 애덕고개로 갈 수 있다고 하니까) 우리는 그냥 능선을 타기로 했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능선은 계속해서 곱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코스다.

 300m쯤 진행했을까 또 하나의 갈림길(이정표 : 애덕고개 0.8km/ 문수봉 3.1km/쌍령산 2.6km)이 나타난다. 오른편은 문수봉길(김대건 신부님을 따라 걷는 도보순례길 중)’로 문수봉을 거쳐 은이성지에 이르게 된다. ! 이곳에서 문수봉으로 가는 쌍령지맥과 헤어진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아까의 임도에서 20. 탐방로는 또 다른 임도로 내려선다. 이정표(애덕고개 0.3km)는 임도(왼쪽)에도 애덕고개를 적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길은 삼봉산-시궁산-바래기산을 잇는 20km 길이의 임도일 것이다. 석포숲공원으로 연결되는 임도를 타더라도 애덕고개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고.

 이번에도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선다. 애덕고개로 연결되는 이 구간은 대부분 내리막이다. 두어 곳에서는 침목계단을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르기까지 하다.

 8분쯤 지나면(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15) ‘애덕고개(이정표 : 미리내성지 0.5km/ 은이성지 9.8km/ 시궁산 2.34km/ 는 쌍령산 대신 고초골공소가 적혀있다)’. 용인시(처인구 이동읍)의 묵리와 안성시(양성면)의 미산리를 잇는 고갯마루이다. 하나 더, 얼마 전에 올랐던 시궁산의 주요 들머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애덕고개는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 순례길인 청년 김대건 길(은이성지미리내성지)’에 있는 3개의 고개 중 마지막 고개이다. 박해를 피하던 천주교 신자들이 삼덕(신덕·망덕·애덕)을 기리며 넘나들던 고갯마루로 알려진다. 그래선지 천주교 관련 기념물들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그중 김대건 신부님에 관련된 안내판이 가장 눈에 띈다. 1846 9 16, 그의 나이 26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를 믿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한강의 새남터에서 8번째 칼에 김대건 신부의 머리는 땅으로 떨어졌다. 순교 후 미리내 교우촌에서 살던 17세 이민식(빈첸시오)이 신부님의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미리내 성지에 안장했다고 한다.

 반대편의 안내판 중 하나도 소개해 본다. 이민식(빈첸시오, 1828~1921)이 새남터에서 순교한 신부님의 시신을 이곳까지 모셔왔는데 날이 밝더란다. 하는 수 없이 산비탈 콩밭 이랑에 시신을 숨기고 솔가지로 덮어놓았는데, 콩밭 임자가 인부들을 데리고 와 가을걷이를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이때 나온 게 묵주신공’, ‘제 목숨을 대신 드려도 좋으니 우리 착한 목자 김신부님 장례나 잘 치르게 해 주십시오였다. 그러자 천둥번개가 치면서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는 게 아닌가. 콩밭 임자가 인부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이 개면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더란다. 이런 게 바로 기적이 아니겠는가.

 청년 김대건 길은 지난 2020년 용인시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둘레길이다. 김대건 신부가 생전 사목활동을 하던 길이자, 순교 후 유체가 이동한 경로이기도 하다. 처인구 양지면 은이성지에서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에 이르는 10.3km의 숲길이다.

 미리내 성지는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의 묘역, 어찌 그를 기리는 시비 하나쯤 없겠는가.

 미리내 성지로 내려가는 길, 잠시지만 청년 김대건 길을 걸었다. 이 구간은 17세의 청년 이민식이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옮긴 길이기도 하다. 신부님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10 26일 그는 새남터 백사장에서 포졸들의 눈을 피해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시신을 안고 산길로 150여 리 길을 밤에만 걸어서 닷새째 되는 날인 10 30일 미리내에 도착했다. 그가 걸은 길 중 일부가 바로 이 길인 것이다.

 17분쯤 내려오면 미리내 성지’. 첫 만남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 성당 및 묘역이다. 이 성당의 주보성인은 순교자들의 모후라고 한다. 그래선지 입구에 피에타(Pieta) 상이 세워져 있었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안고 비탄해 하는 형상인데, 두 분 모두에 한복을 입혀드린 게 눈길을 끈다.

 1921년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 첫 사제이자 순교자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 건립을 결정한다. 당시 미리내 본당의 초대 주임신부이던 강도영(마르코) 신부는 불과 몇 시간 동안 계시다가 치명하신 새남터보다는 긴 세월 묻히고 살이 썩은 미리내에 세워져야 한다. 특히 김신부님의 유해를 모셔온 미리내 교우들의 열성을 생각해서라도...’라고 주장했다. 결국 1927년 미리내에 기념관 건립이 결정됐고, 1928년 봄 공사를 시작 그해 7월에 완공되었다. 기념성당의 제대 아래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아래턱뼈와 척추뼈가 모셔져 있고, 시신이 담겨져 있던 목관 조각 일부도 전시되어 있단다.

 1925 7 5,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비오 11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김신부님의 묘는 시복에 맞춰 지어진 고딕 양식의 저 성당 앞에 모셔져 있다. 그 옆에는 김대건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미리내본당 초대 주임이자 한국 교회의 세 번째 사제 강도영 신부, 그리고 미리내본당 3대 주임 최문식 신부의 묘소도 함께 있다. 묘역 위쪽에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의 묘소와 이민식(빈첸시오)의 묘소도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후부터는 미리내 성지의 경내를 걷는다. 성지 입구 쪽으로 가다보면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이 조성돼 있어 순례의 마음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 참고로 미리내성지의 미리내는 은하수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이게 신유박해(1801)와 기해박해(1839) 때 신자들이 숨어들어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궈 살던 마을의 이름이 됐다. 밤이면 그네들의 집에서 새어나온 호롱불빛이 깊은 밤중에 은하수처럼 보인다고 해서다.

 나 같은 천주교 신자들이라면 십자가의 길 14(본시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무덤에 묻히기까지 그리스도 수난의 마지막 사건들을 묘사한 14장면의 연속 그림 또는 조각)를 지나며 해당 기도를 드려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그렇게 잠시 내려가면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김대건 신부님의 유해 중 종아리뼈가 제대 아래에 모셔져 있단다)’이 얼굴을 내민다. 1991년에 세웠다고 하는데 외관이 참 특이하다. 성당은 피라미드를 닮았고, 종탑으로 여겨지는 옆 건물도 영락없는 오벨리스크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홍해를 건넜는데. 이와 관련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무튼 개방시간을 못 맞춘 탓에 고딕양식의 천정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치장되어 있다는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다.

 성지를 빠져나가는 도중에는 묵주기도의 길을 만났다. 환희와 빛, 고통, 영광의 신비가 나타나는데, 기도를 드릴만한 시간이 없어 성호만 그은 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구원의 기도 등등 만만찮은 시간이 소요되니 어쩌겠는가.

 묵주기도의 길  환희의 신비 3.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하는 곳이다.

 미리내 성지의 입구에도 조형물들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그중 한국 최초의 사제이자 유네스코 세계인물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이 묻혀 계신, 박해시대의 교우촌이라는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하단에는 신부님이 순교하면서 남기신 유언을 적어 넣었다.

 아래 사진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성 요샙 미리내성당은 들러보지 못했다. 1906년에 건립된 유서 깊은 성당이라는데도 말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저 성당이 있는 줄도 모르고 찾아왔었으니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그건 그렇고 오늘은 4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9.85km(성지 정문에서 산행출발지인 중촌마을회관까지의 도로 1.5km 포함),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무덥고 습기 찬 날씨 탓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