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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31코스(수포마을회관-매곡마을 삼강공원)

 

여행일 : ‘23. 7. 8()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해제면 일원

여행코스 : 수포마을석산마을감정마을송전마을백학마을백학산 임도백림사대사리입구슬산마을사야마을내분마을매곡마을(거리/시간 : 13.1km/ 실제는 13,27km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1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여덟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백학산 임도를 빼고는 대부분 마을과 마을을 잇는 농로로 이어진다. 주요 볼거리로는 백학산 임도에서 바라보는 바닷가 풍경과 감정마을 곰솔, 매곡마을 삼강공원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수포마을회관(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방면으로 들어오다 수암교차로(무안군 해제면 유월리)에서 77번 국도(영광방면)로 바꿔 탄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학천교차로(해제면 용학리)에서 805번 지방도(해제·지도방면)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수포마을(臨水里의 자연부락)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신안 31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마을회관에 기대듯 설치해놓았다.

 서해랑길 중 가장 짧은 코스 중 하나(13.1km). 거기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농로를 따르는 여정이라서 걷는데 부담도 없다. ‘백학산 임도(2km)’도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데다, 꼬맹이 섬들로 가득 찬 서해바다나 길가 야생화 등 주변이 온통 아름다운 풍광들로 치장되어 있어 오히려 눈이 호사를 누리는 구간으로 변해버린다.

 버스정류장 맞은편으로 난 마을안길로 들어서면서 트래킹이 시작된다. 참고로 옛날 이곳은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수포(水浦)’라는 지명이 붙게 된 이유이다. 또한 조답이라는 방죽이 있었는데 두렛물이랄 정도로 수량이 많아 인근 간척지의 농업용수로까지 사용했단다. 덕분에 인근에서 가장 부촌으로 소문났었다나?

 5분쯤 걸어 마을 뒤 구릉지를 넘자 민대들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어서 805번 지방도(봉대로)로 내려선다.

 석포마을(돌과 바위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을 지나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종점 11.2/ 시점 0.9)에서 도로를 벗어난다. 서쪽 바닷가를 향해 널찍하니 쭉 뻗어나간 농로를 따르면 된다.

 이 일대는 민대들이라 불리는 넓은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석산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조씨 문중의 민대라는 홀로 된 여자가 마을의 부족한 농토를 보충하기 위해 막은 간척지라고 한다. 19세기 말 무안의 동학군들이 훈련을 받던 연병장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염해에 강한 목화를 기르기도 했단다.

 저 들녘 너머에는 아시래라는 염전이 있다고 했다. 본동(석산마을)에서 볼 때 아스라이 보인다고 해서 붙은 지명인데,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들어서 있단다. 하지만 옛날 저곳에는 화렴(火鹽, 불꽃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여럿 있었다고 전해진다.

 석산마을로 들어가기 전 애송재(愛松齋)라는 제각을 만났다. 석산마을의 터줏대감인 해주최씨 문중의 사당이라는데, 근래(1985)에 지어져서인지 사당이라기보다는 여염집에 더 가까운 모양새이다.

 아시래 잔등으로 여겨지는 곳(무안향토사연구소에서 얘기한)에는 정자와 당산나무가 서 있었다. 원래의 아름드리 당산나무는 태풍에 쓰러져 죽고, 새로 돋아난 나무가 대신 그 자리를 지키는데도 신기(神氣)는 여전한 모양이다. 아직도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니 말이다. 봄철, 당산나무의 잎이 어떻게 피는가를 보고 그 해의 농사를 점치던 풍속을 지켜가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몇 걸음 더 걸어 석산마을로 들어선다. 법정 동리인 석룡리(石龍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석산·용흥·감정) 중 하나로 석산(石山)’이란 지명은 동네 어귀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마을 앞 방정각(芳井閣)’이란 정자는 주민들의 식수원이던 방정샘에서 빌려왔다. 지금은 지하수 개발로 그 기능을 잃었으나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주민들의 식수원이었단다. 동학군들이 마셨다고 해서 동학샘으로도 불린다.

 방정각은 천객만래(千客萬來)’라는 편액도 달았다. 기웃거리던 나는 문득 천상운집(千祥雲集)’을 덧대본다. 온갖 좋은 기운이 구름처럼 모이고 수많은 귀한손님이 이 마을을 찾아온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마을 앞에는 해주최씨 삼의사 숭모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삼의사란 농학혁명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처형당한 민제 최장현(崔璋鉉)과 청파 최선현(崔善鉉), 춘암 최기현(崔寄鉉)을 말한다. 이 마을에 살던 삼형제는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인근 장정들을 모아 봉기했고, 마을 앞 들녘에서 동학군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추모비는 삼의사의 생애와 동학혁명 당시 활동내용을 후세에 전해준다.

 마을회관에 이르니 돌뫼동이란 시비가 눈에 띈다. 마을의 유래와 지세 등을 시로 읊었다. 부정과 외세에 맞선 동학혁명의 역사도 빠졌을 리가 없다.

 7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감정마을이다. 석룡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감정(甘井)이란 마을 앞 샘물을 마신 인근 원갑사의 노승이 물맛이 참 좋다고 한데서 유래됐다. 하긴 물이 귀한 바닷가를 지나다 한 모금 얻어 마셨으니 얼마나 달고 시원했겠는가. 지금이야 민대들이라는 너른 들녘을 끼고 있지만 옛날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락거렸다니 말이다. 동구 밖 어림인 개어덕도 바닷가와 관련된 지명이란다.

 마을 앞에는 전라남도 지정 기념물(175) 곰솔이 있다. 입향 시조가 전염병을 예방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심었다는데, 수형이 제대로 잡혀 무안의 기념물 중 가장 잘 생겼다고 한다.

 수령이 400년이나 되다보니 영험해졌나보다.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준단다. 감정마을의 신목(神木, 매년 2월 초하룻날 당제를 지낸다)이 된 이유다. 하지만 썩 편치 않은 경고판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외지인들은 이 나무에 치성을 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좋은 것은 서로 나누는 게 배달민족의 미풍양속이 아니었던가?

 이 마을에는 담양전씨 삼강비라는 빗돌이 있었다. 병인양요 때 순국한 전준엽(田俊燁, 1806-1882)과 그의 처인 연안차씨의 열행(烈行) 그리고 전성기(田聖淇, 1865-1950)의 효행을 기리는 비이다.

 마을 앞에는 석룡저수지가 있다. ‘민대들의 넓디넓은 들녘은 간척사업에 의해 태어났다. 소금기로 찌든 간척지는 항상 목이 탄다. 그러니 저런 저수지를 곳곳에 만들 수밖에 없었고, 석룡저수지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되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0. 감정마을을 빠져나와 805번 지방도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도로를 걷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대전 찍고 부산이라던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도로로 올라서자마자 다시 내려와 버린다.(전신주에 서해랑길 방향표식이 붙어있다)

 서해랑길은 이제 구릉지로 올라선다. 상품성 떨어지는 양파가 길가에 나뒹구는 구간이다. 맞다. 이 부근은 알아주는 조생양파 생산지라고 한다. 사질양토와 해양성 기후 등 지역적 특성 덕분에 양파의 맛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단단하고 아삭하며 즙이 풍부하단다. 그게 소문이라도 났는지 이삭을 줍는 둘레길 나그네들이 두엇 보였다.

 5분쯤 소요되는 구릉지를 넘자 송전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9.3km)이 얼굴을 내민다. 법정 동리인 학송리(鶴松里)를 구성하는 2개의 자연부락(송전·학암) 중 하나로 송전(松田)이란 지명은 울창한 소나무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는 데서 유래됐다. 주민들은 봉대산 기슭에 소쿠리처럼 들어앉은 마을이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명당이라고 했다. 이때 물은 옛날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락거렸다는 데서 찾고 있었다. 또한 열부가 많음을 이 마을의 자랑거리로 꼽고 있었다. 토지가 비옥해 먹고사는 게 풍부한데다, 주민들이 서로를 아껴주기 때문에 혼자된 여자가 재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서해랑길은 이제 이름값을 해보려는 모양이다. 학송리 앞 서해바다를 향해 길을 재촉한다. 하지만 고대하던 일은 쉽게 이루지지는 않는 법, 엊그제 시작된 장맛비가 길을 방죽으로 만들어버렸다. 덕분에 둘레길 나그네들은 수로에서 평균대 놀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학송리 앞 들녘, 그 너머로 서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백학마을로 가는 도중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다.

 그렇게 10분쯤 걷자 또 하나의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백학마을이란다. 법정동리인 대사리(大士里)를 구성하는 2개 자연부락(신사·백학) 중 하나인데, 농토가 협소한 탓에 마을이 3개로 나누어져 있다더니 그중 하나인 모양이다. 참고로 백학(白鶴)이란 지명은 뒷산인 백학산에서 따왔다. 하나 더, 이 마을은 해제의 8명당(花蟹弄珠, 捶馬渡江, 天馬施風 , 梅花落池, 玉女彈琴, 白鶴歸巢, 將軍大座, 九龍爭珠)  백학귀소의 명당 터로 꼽히고 있었다. 백학귀소는 백학이 집으로 돌아오는 형국을 뜻한다.

 마을을 지나자 탐방로는 백학산 자락의 아랫도리를 따라 이어진다. 왼편은 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들녘, 하지만 웃자란 갈대가 시야를 차단해버렸다.

 바닷가에 가까워지자 소담스런 방죽들이 줄을 잇는다. 널브러져 있는 시설들로 보아 양식장이었던 걸로 보이는데, 왜 문을 닫았을까?

 트레킹을 시작한지 55분 만에 첫 대면한 바닷가. 감정마을(시점에서 3km쯤 되는 지점)에서 출발한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만난 바닷가가 경치까지 하도 곱다보니 인생샷이라도 하나 건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곳에는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30년쯤 전까지만 해도 앞바다에 황금어장이 형성되었었다는 백학포구일지도 모르겠다. ‘구래포구로도 불리었는데 당시는 철마다 칠산 바다의 낙월군도 사람들이 찾아와 땔감이며 식량 등을 준비해갔으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흥청거렸다고 한다. 주막이 4곳이나 되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선착장 끄트머리에는 다드락섬이라는 앙증맞은 섬 하나가 놓여있다. 섬으로 연결되는 저 노두길은 날마다 모세의 기적을 연출한다나? 썰물 때 물이 차오르면 물속에 길이 잠겨버리기 때문이다.

 선착장(이정표 : 종점까지 7.5km)을 지난 서해랑길이 이번에는 백학산(126.3m) 자락으로 파고든다. 주민들 말로는 서해낙조와 칠산 앞바다 등의 자연경관을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내놓은 일주도로라고 했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면 그에 합당한 유인책이 필요한 법. 무안군은 그 첫째로 서해낙조와 칠산 앞바다 등 자연경관을 꼽았다. 2% 부족한 것은 흐드러지게 피는 동백꽃으로 채우고 싶었나 보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굵직한 동백나무가 줄지어 길손을 맞는다.

 ! 사과 닷!’ 호들갑을 떠는 집사람의 말마따나 동백나무에 꽃 사과를 쏙 빼닮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옛날 우리네 조상들은 저 열매로 기름을 짰었다. 그 기름을 머리에 바른 아낙네들은 참빗으로 곱게 빗은 다음 쪽을 지어 비녀를 꽂았었다.

 빼어난 풍광의 다도해를 뜨락 삼은 언덕, 그곳에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예쁜 집이 들어앉았다. 그게 부러웠던 내 입에선 홍천의 농장을 팔아 이곳으로 이사오자가 서슴없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집사람의 표정은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다.

 백학산 자락을 에두르는 임도는 관광자원화가 주된 임무다. 그러니 벤치 하나 놓아두지 않았겠는가. 하나 더,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낙조가 국내 제일이라는 주장이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진도의 세방낙조보다도 한수 위라는 것이다.

 ·소 각시도와 상·하 낙월도, 임병도 등 크고 작은 섬들로 가득 찬 칠산 앞바다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완전한 게 어디 있겠는가. 바다는 그 부족분을 김 양식장의 지주로 메꾸고 있었다. 물결모양으로 겹겹이 늘어선 지주들이 조물주가 그린 풍경화에 방점을 찍는다.

 오늘도 반가운 이들이 남긴 흔적을 만났다. 서해랑길을 함께 시작했는데, 어느덧 한참이나 앞서가고 있다.

 길섶에는 원추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예덕나무 꽃도 심심찮게 보인다. ! ‘쑥부쟁이 꽃을 눈에 담는 행운도 누렸다. 가을에나 만날 수 있는데...

 엉겅퀴도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임도를 빠져나오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칠산 앞바다가 또 다른 모습으로 손님을 맞는다. 이후부터는 둘레길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으면 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0. 임도를 빠져나온 발걸음은 자연스레 백림사(대한불교조계종)’로 향한다. 해수관음상이 칠산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경내를 오가는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한적한 산사치고는 제법 붐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여염집 느낌이 강한 전각들로 보아 최근에 지어진 사찰일 게 분명하다.

 백림사 부근에서 바라본 함해만(또는 함평만)과 칠산대교, 이 또한 흔치않게 아름다운 풍광이다.

 8분쯤 더 걸어 대사길로 내려선다. 805번 지방도와 대사선착장을 잇는 도로로 최근 2차선으로 확·포장됐다. 도로변 이정표는 종점까지 4.6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선착장으로 가는 옛 도로를 잠시 따르다가 이번에는 도로를 횡단한다. 이어서 구릉지로 오른다. 이렇듯 이 일대는 높은 산지가 없고 고만고만한 언덕들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그 너른 땅이 농지로 잘 활용되고 있다는 점도 이곳 무안의 특징이라 하겠다.

 구릉지 오른편은 신사마을이다. 대사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데 서해랑길은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구릉지를 넘으면 대사리 방조제(이정표 : 종점까지 3.4km). 신사마을 부촌으로 만들어준 일등공신이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둑길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둑 아래로 난 농로를 따른다. 덕분에 난 아름답기로 소문난 함평만(함해만) 풍경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부지런한 농부는 오뉴월 삼복더위도 두렵지 않나보다.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한낮, 그것도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인데도 밭일이 한창이다. 수확을 끝낸 양파 밭에서 저 농부는 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중일까?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0. 서해랑길은 또 다시 805번 지방도와 만난다. 신사마을의 입구(표지석은 대사리로 적고 있었다)라서인지 삼거리에 버스정류장(신사)이 설치되어 있었다.

 100m쯤 도로를 따르다가 왼편으로 갈려나가는 농로로 들어선다.

 이번에도 길은 구릉지로 연결된다. 아니 숲이 우거진 게 영락없는 산이다.

 고갯마루의 숲속 터널을 지나면 슬산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덕산리(德山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슬산·내분·사야) 중 하나로, ‘슬산(瑟山)’이란 지명은 마을의 주산인 옥녀봉(봉대산의 맥을 잇는다)에서 유래됐다. 마을이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지형이라는 것이다. 해제면의 8명당 중 하나인 옥녀탄금의 명당으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을 입구에는 이홍복(李弘福)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함평 이씨의 선조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인근 쥐머리산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받기도 했단다.

 함평이씨와 함께 마을의 세거 씨족인 함평노씨(고려 문하시중 노목을 시조로 모신다) 한림공파 슬산종가의 서당이란다. 옥녀탄금형의 명당에 장춘오헌을 짓고 때론 북벌을 상소하고 때론 서당을 열어 계몽에 앞장서 온 가문이란다. 하지만 서당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라고나 할까?

 동구 밖(이정표 : 종점까지 2.3km) ‘해당화도 마을의 자랑거리로 꼽을 만 했다. 때를 못 맞춘 탓에 연분홍빛 꽃무리는 보지 못했지만 윤기가 자르르 한 황적색 열매가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또 다시 805번 지방도. 이곳에서 의외의 풍경을 만났다. 오가는 차량이 하나도 없는 벽지 도로에 교통신호등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신호는 점멸’, 저게 제대로 된 신호를 보낼 때도 있을까?

 마을입구(신호등 사거리) 안내도는 소풍(笑豊)의 명소란 부제를 달았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아는 소풍(消風, 학생들이 좋아하는)’이 아니다. ‘웃을  풍성할 자를 썼다. 웃음이 넘치는 마을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그것도 가슴이 확 트일 정도로...

 서해랑길은 도로를 따르거나 횡단하지 않는다. 도로에 발을 걸치자마자 다시 내려와 슬산저수지의 둑길을 걷는다.

 둑길 끝에는 나주정씨절효비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후기를 쓰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무안문화원의 자료에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둑길 끄트머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민가 두어 채가 전부인 작은 마을(분재와 묘목을 기르는 농원이 볼만하다) 뒤 고개를 넘는다. 그러자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평탄한 구릉지의 초록 밭들과 녹음 짙은 산자락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데, 그 너머로는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40. 구릉지를 넘어 사야마을에 이른다. 원래 이름은 샛들’, 슬산과 내분마을 사이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잇들이란 의미인데 이게 음차되면서 사야(沙野)’로 변했다. 다른 해석도 있다.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그 바닷물에 유난히도 많은 모래()가 밀려왔다는 것이다.

 사야마을과 내분마을 사이 구릉지, 거대한 팽나무(당산제를 지낸다는 신목일지도 모르겠다) 한 그루가 내분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늘에 평상까지 만들어놓은 걸 보면 내분마을 주민들의 참새사랑방 노릇까지 톡톡히 수행하는 모양이다.

 사야마을에서 5분쯤 거리에 내분마을이 있다. ‘내분(內盆)’이란 지명은 마을의 생김새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지형이 소쿠리형으로 멀리서 보면 항아리처럼 생겼는데, 그 안에 마을이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 일대를 지칭하던 분매동을 위치에 따라 외분·내분·매곡으로 나눠부른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하자.

 고삭을 지나는데 금줄을 쳐놓은 이 눈에 띈다. 주민들이 샘거리제를 지낸다는 그 영험한 샘일지도 모르겠다. 샘을 메우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상사가 마을에 자주 일어났고, 이에 놀란 주민들이 다시 복원하고 제사를 지내주었더니 그치더란다.

 내분마을의 마을회관(이정표 : 종점 0.4km)을 지나자 드넓은 평야지대가 나타난다. 양매제방(내분제방이라고도 함)을 쌓아 만든 들녘인데, 탐방로는 이 들녘의 상부 어림을 가로지른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양매마을’. 법정 동리인 양매리(兩梅里) 5개 자연부락(매곡·토치·외분·양간양간2) 중 하나로 원래 이름은 분매동(盆梅洞)이었다, 마을 지형이 와우형인데 매화까지 많았다나? 그러다가 양대 씨족 중 하나인 광산김씨 측에서 파평윤씨가 주로 살던 분매동과 구분하기 위해 매곡(梅谷, 입향조의 아들인 김득남을 모시는 사당이 매곡사이다)’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날머리는 삼강공원(무안군 해제면 양매리)

매곡마을 앞에는 삼강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삼강(三綱)이란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 즉 임금과 신하(君爲臣綱), 부모와 자식(父爲子綱), 남편과 아내(夫爲婦綱)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그러니 매곡마을에 이를 몸소 실천한 조상들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광산김씨 충렬문(光山金氏 忠烈門)’ 광산김씨 7효열각(光山金氏 七孝烈閣)’이 그 증거다. 정려편액(旌閭扁額) 2점이 걸려있는 충렬문(정려각)은 충의공 득남(병자호란 때 순국)과 부인인 밀양김씨를 그리고 효열각에서는 문중에서 배출한 5효자 2열부의 숭고한 정신을 기린다. 이들의 충효열(忠孝烈)을 기리기 위한 삼강비(三綱碑)는 충열문과 칠효열각 사이에 있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주인공인 빗돌은 어딘가로 떠나가고 빈 전각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분매동의 역사를 적은 유래비도 눈에 띈다. 첫발을 디딘 광산김씨 가문의 얘기가 주를 이룬 가운데, 나중에 들어온 파평윤씨 가문을 살짝 끼워 넣었다.

 삼강공원은 광산김씨 가문의 얘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분매동에는 파평윤씨가 또 하나의 축을 이룬다. 그러니 그들이라고 해서 가만히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겠는가.

 서해랑길 안내도(무안 32코스 이정표는 삼강공원 앞, 팽나무 그늘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3.27km,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평지에 가까운 길이 그만큼 수월했다는 얘기도 될 것이고... ! 사진은 시점(수포마을)의 안내도(무안 31코스)를 게시했다.

서해랑길 17코스(세한대학교-목포지방해양수산청)

 

여행일 : ‘23. 5. 27()

소재지 : 전남 영암군 삼호읍과 목포시 옥암동 일원

여행코스 : 세한대학교대불방조제산호양수장농업테마공원농업박물관영산강하구언목포지방해양수산청(거리/시간 : 11km/ 12.14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5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해남·영암 구간의 열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그동안 임시 구간(2개 코스)으로 운영해오다 2022 12 솔라시도 대교가 개통되면서 3개 코스로 새롭게 포장해 개통했다. 17코스의 특징은 영산호와 함께한다는 점이다. 처음에서 끝까지 영산호의 하구언(河口堰)과 둑길 등을 따라 걷는다. 주요 볼거리로는 영산호의 아름다운 풍광과 농업박물관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목포지방해양수산청(목포시 옥암동 1101)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IC에서 내려와 영산로’, 석현삼거리에서 녹색로로 바꿔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목포지방해양수산청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지방해양수산청은 해양수산부 소속으로, 부산·인천·여수 등 해안지역에 설치되어 각 지역의 항만 운용과 개발, 해양환경 보전·관리 따위의 사무를 맡아본다.

 새롭게 단장된 3개 코스 중 마지막으로 구간 전체가 영산호와 함께 한다고 보면 되겠다. 영산호의 둑길과 하구언 등 코스 전체가 평지인데다 코스 길이(11km)도 짧아 난이도는 최하이다. ! 17코스의 시점은 세한대학교이다. 하지만 우린 산악회 사정으로 인해 종점인 목포지방해양수산청에서 출발 세한대학교까지 거꾸로 걸었다.

 통일대로를 따라 전남도청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목포지방해양수산청의 담벼락을 오른쪽에 끼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25호 광장 교차로에는 인공폭포가 조성되어 있었다. 도로를 새로 내면서 생긴 절개지 경사면을 활용해 높이 30m(너비 10m)의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인터넷과 우편을 통한 명칭공모를 통해 만남의 폭포라는 이름도 얻었다.

 통일대로와 교차되는 녹색로는 예쁘장하게 생긴 육교로 건넌다. 6차선 도로(녹색로)의 교통 흐름을 막지 않으려는 목적이겠지만, ‘만남의 폭포라는 볼거리를 한눈에 쏙 담을 수 있는 전망대 역할도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다.

 만남의 폭포 반대편. 영산강 하구언(河口堰)을 향해 뻗어나가는 녹색로가 시원스럽다.

 육교에서 내려와 녹색로를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이때 낭만 항구 목포의 여러 풍광을 만날 수 있다. ‘갓바위 근대역사관 같은 목포를 대표하는 경관들을 사진에 담아 도로변에 게시했다.

 잠시 후 만난 영산강 하구언(河口堰), 둑으로 올라가기 전 왼쪽으로 자전거길이 갈려나가고 있었다. ‘영산강 수계지도를 그려 넣은 것으로 보아 영산강 발원지인 가마골 용소(전남 담양군)’까지 자전거길이 나있지 않나 싶다.

 영산호 주변은 금계국(金鷄菊)이 만개해 있었다. 요즘은 전국 곳곳에서 저런 군락지들을 만나게 된다. 외래종인줄로만 알아 온 내 앎이 잘못된 것일까?

 하구언(河口堰)에 올라선다. 목포시 옥암동과 영암군(삼호읍) 나불리 사이의 영산강 하구를 가로막아 만든 4,351m 길이의 제방으로, 이 둑으로 인해 영산강과 황해가 분리되면서 영산호라는 인공호수가 생겨났다.

 둑길을 걷다보면 남악신도시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전남도청의 청사가 무안군(삼향읍)으로 옮겨오면서 생겨난 일종의 복합 행정타운이다.

 하구언이라는 게 본디 바다와 강의 경계, 그래선지 심심찮게 해당화가 눈에 띈다. 옛 사람들은 해당화를 여인으로 심심찮게 둔갑시킨다. 그게 여염집 여인이 아니라 요염한 기생이었지만. 하지만 난 함께 걷고 있는 집사람을 해당화에 비유하고 싶다. 내 눈에 비친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예쁘니까. 꽃 중의 꽃이라고나 할까?

 둑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희미해져 무엇을 그렸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혈세까지 들여가며 꾸며 놓았다면, 때맞춰 보수를 해나가는 게 옳지 않을까?

 목포와 영암의 경계지점 빗돌에는 명심보감용 글귀가 적혀있었다. ‘모든 권리는 의무의 이행에서’, 봉사단체인 국제와이즈멘의 지역 클럽에서 세웠지 않나 싶다.

 이곳이 영산호(榮山湖)’임을 알리는 빗돌도 눈에 띈다. 영산강지구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목포시(삼향동)와 영암군(삼호면 나불리) 사이에 길이 4,351m(높이 20m)의 하굿둑이 건설됨으로써 생겨난 담수호(34.6)이다. 매년 반복되는 홍수와 염해의 피해를 막기 위해 1981년 쌓았다.

 조금 더 걸어 배수갑문(排水閘門)을 만난다. 집중호우를 대비해 증설했다는데, 비상하는 새의 모습을 형상화했단다. 새롭게 도약하는 영산강 하굿둑의 비전을 상징하고 있다나?

 다음은 농어촌공사(영산강사업단) 사옥이다. 옆에는 기존 배수갑문과 신규 배수갑문의 화합을 상징한다는 58m 높이의 타워를 세워 랜드 마크로 삼았다. 꼭대기에 만들어놓은 전망대에 오르면 서해바다와 영산강에 대한 조망이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진단다. 홍보전시관은 물론이고 주변에 잔디광장이나 포토존 같은 편의시설도 만들어 놓았다니 한번쯤 들러볼 만도 하겠다.

 농어촌공사의 사옥이 들어선 곳은 섬이었었나 보다. 인공 섬이라 부르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은데, 그곳에 금계국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그 너머 영산호의 수면을 영산철교가 가로지른다. 대불공단의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불선 철도인데, 제 기능을 못해 2010년에 운영이 중단됐다고 한다.

 둑길은 이제 서호대교로 인계된다. 오른편에는 기존의 배수갑문 8개가 들어서있다. 참고로 배수갑문은 방조제로 인해 갇힌 내수를 바다로 내보내는 시설물로, 밀물 때 바닷물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역할도 한다.

 영산강 하구언을 지나 영암 땅으로 들어선다. 하구언 둑길을 걷는 데는 30분 정도가 소요됐다. 앱은 2.4km를 찍는다. 자료는 길이를 4,351m로 적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일까?

 서해랑길의 특징 중 하나로 꼽아도 좋을 만큼 자주 만나게 되는 멀구슬나무를 오늘도 만났다. 그게 오늘은 꽃까지 활짝 피워 올렸다. 맞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농가의 늦봄(田家晩春)’에서 멀구슬나무 꽃바람 멎고 나니 해가 처음 길어지네라고 읊지 않았던가. 하지가 다음 달 21일이니 멀구슬나무도 지금쯤 라일락처럼 향기를 내뿜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암 땅에 들어서니 무화과 조형물이 반긴다. 무화과는 영암의 얼굴마담으로 꼽히는 특산품, 우리나라 무화과의 90%가 생산될 정도이니 어찌 조형물 하나 없겠는가. 하지만 중생에 불과한 난 나뭇잎 치마를 두른 아담과 이브의 모습부터 떠올린다. 선악과를 따먹고 수치심을 느끼게 된 그네들이 무화과의 잎을 엮어 알몸을 가렸다고 했으니까.

 기암괴석과 금계국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띄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한국가스공사는 사무소의 사옥보다 부대시설이 더 시선을 끈다.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예술작품에 가까울 정도로 예쁜 외형을 갖고 있지만 용도는 모르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50. 17코스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전라남도 농업박물관에 도착했다. 농업박물관은 말 그대로 농업에 대한 박물관이다. 지난 1993년 농업과 농경문화를 전시하는 농업 전문박물관으로 개관했다. 현대화 물결 속에 점차 사라져가는 전통 농경문화 유산을 연구·수집·보존·전시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옛 모습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 박물관의 정문안내소가 매표소로 오해받기 딱 좋게 생겼으나 입장료를 따로 받지 않으니 부담 없이 들어가면 된다.

 농업박물관은 크게 남도 생활민속관과 농경 문화관, 쌀 문화관 그리고 농경문화 체험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대시설로는 전통 초가, 야외전시장, 작은 동물원, 농업테마공원 등이 있다.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 일단은 인증사진부터 찍고 보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고양이 모양의 귀여운 포토죤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

 마당 한가운데 서있는 느티나무가 눈길을 끈다. 얼마나 오래된 나무를 옮겨왔으면 아직까지 밧줄에 의지하고 있을까. 참고로 이 박물관은 1993 9 24일 개관했다.

 첫 만남은 부대시설 중 하나인 작은 동물원이다.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공간으로 토끼··오리·염소·진돗개 등 가축들을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옆에는 야외전시장이 있었다. (물레·물통·연자·디딜)방아와 수차, 뒤주, 모정 등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시설들을 복원해 놓았다.

 전시물 중 하나인 물레방아.

 마을 공동체 신앙물인 산신당·성황당·장승·솟대 등도 전시되어 있다.

 세 번째 만남은 농경문화체험관이다. 조상들이 사용해오던 민속 생활용품 및 재래 농경도구 등을 관람객들이 직접 만져보거나 사용해 볼 수 있도록 꾸몄다. 추억을 남기기 위한 기념촬영은 기본, 투호나 윷놀이 등의 전통 놀이도 집접 해 볼 수 있다.

 

 전시되어 있는 물건들로 놀이를 해볼 수 있으며, 진열된 옷은 착용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의 전통놀이나 생활방식을 알려줄 수 있으니 어린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남도 생활민속관이다. 남도민의 전통 생활상과 민속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남도의 주거생활과 의식주, 공예, 문화 등이 소개되어 있다.

 가옥의생활식생활공예민속신앙의 순서로 둘러보는 게 바람직한 동선이지 싶다.

 안으로 들자 초가 일색인 농촌마을이 맞는다. 순천의 낙안읍성이 아닐까 싶다. 한 해의 1/4 정도를 국내외 여행으로 소일하는 나로서도 낯선 풍경이라서 세 번이나 다녀왔고, 그 풍경은 내 뇌리 속에 생생히 저장되어 있다.

 남도의 전통가옥을 세트장으로 만들고, 그 안에 밀랍인형을 배치해 그네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의생활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찌 먹는 문제가 빠질 수 있겠는가.

 다섯 번째 만남은 농경문화관이다. 하지만 건물의 현판은 농업박물관으로 적혀있었다. 이 건물이 전라남도농업박물관의 메인 전시장, 즉 본관이 아닐까 싶다.

 안으로 들어서자 촌부들의 일상을 담은 조형물이 맞는다.

 농경문화관은 1, 2층으로 나뉜다. 하지만 전통혼례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층에 전시되어 있다.

 농경의 역사(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농경문화 발달사), 농경의 사계(농촌의 옛 풍경과 농경생활 모습), 공동체문화(농경과 관련된 놀이, 신앙공동체) 등을 실물과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준다.

 선사시대의 농기구부터 각종 농경 유물들이 보존 전시되어 있다. 농악을 위한 유물들도 눈에 띈다.

 전시장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가상공간도 만들어 놓았다.

 맨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쌀 문화관’. 말 그대로 쌀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곳이다. 우리가 평소 너무나 쉽게 먹고 있는 쌀이 어떻게 자라고 어떤 품종이 있고, 또 과거에는 쌀을 어떻게 수확하고 가공했는지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전시실은 우리 겨레와 함께 해온 쌀 농업의 중요성과 가치를 일깨우려는데 방점을 찍었다. 쌀을 주제로 쌀의 역사, 쌀의 일생, 쌀의 문화를 알려준다.

 방앗간, 쌀집 등 갖가지 쌀과 관련된 생활상을 밀랍인형으로 꾸며놓은 덕분에 둘러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생명의 땅 전남의 쌀 제품 홍보도 하고 있었다.

 박물관 투어(둘러보는데 35분이 걸렸다)를 마치고 쌀 문화관 옆 후문으로 나오면 서해랑길과 다시 만난다. 이어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보초를 서고 있는 농업박물관 마실길로 올라선다.

 영산호관광지의 관광자원 및 생태자원을 활용해 만든 산책로로 농업박물관과 농업테마공원을 오솔길로 연결시켰다. 농업박물관을 찾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농업테마공원으로 유도하려는 의도로 보면 되겠다.

 탐방로는 입구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꽃길을 따른다. 나지막한 산봉우리를 왼쪽으로 우회하는 오솔길인데, 꽃무릇·맥문동·영산홍·백철쭉 등 꽃나무들을 많이 심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지 않았나 싶다.

 작은 숲속 키 작은 나무 사이로 난 길을 200m쯤 걷다가 오른편 산봉우리로 오르니 꼭대기에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반대편으로 넘어가니 이번에는 전망대(마실길 안내도에 표기되어 있던 트리하우스가 아닐까 싶다)가 반긴다. 농업테마공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2층 높이의 대를 올렸다. 전망대는 의자를 배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농업테마공원은 물론이고 그 너머의 영산호와 남악신도시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뒤돌아 본 전망대, ‘취사금지 및 야영금지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는데도 주변 원두막들은 하나같이 고기 굽는 냄새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17코스 시점(6km를 남겨놓았단다)을 향해 쉼 없이 진행해버린 이유이다.

 점심때가 넘었는지라 간식을 먹을 만한 장소를 찾아봤지만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온 나들이객들이 주변 원두막을 빠짐없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해랑길은 농업테마공원을 가로지른다. 이 공원은 농업을 주제로 한 체험공간이다. 138,612의 부지에 농업광장·생태연못·친환경농업 관찰학습장 등의 시설이 들어있다. ‘선농단이란 시설도 눈길을 끈다. 왕이 몸소 밭을 갈며 신농(神農)에게 제사하고 후직(后稷)을 배향했다는 곳이다.

 벼한살이 체험장에서는 밀(또는 보리)을 심었던가 보다. 널따란 들녘이 온통 타작을 마친 밀대로 뒤덮여 있다.

 공원의 끄트머리에는 영산재(榮山齋)’라는 고급 한옥호텔이 들어섰다. 안과 밖이 통하고, 몸과 영혼이 엮이는 게 한옥의 특징이라고 한다. 영산재는 그런 옛 것의 장점을 살리고, 현대적인 시설을 접목시킨 전혀 새로운 개념의 호텔이란다.

 농업테마공원을 벗어나 둑길(이정표 : 17코스 시점까지 5.6km)로 올라선다. 영산강이 하구언으로 막히고 인공호수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제방이다. 이 둑이 쌓이면서 나불도 일대에 엄청나게 너른 들녘이 조성됐다.

 이때 영산호의 선상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동력수상레저면허를 취득하려는 사람들이 찾는 곳인데, 1층은 연수 및 시험장이고 2층이 카페로 운영되고 있단다. 흔들리는 선상에서 커피 한 잔으로 즐기는 낭만?

 나불도의 들녘, 저 곤포사일리지 안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보리까지 수확을 끝마친 시기에 설마 볏짚이 들어있지는 않겠지? 참고로 이곳 나불도(羅佛島)는 영암군에 딸린 6(나불도·외도·문도·구와도·고마도·서도)의 유인도 중 하나(가장 큰)였다. 하지만 영산강이 하구언으로 막힌 지금은 저렇게 너른 농경지로 변해있다.

 왼편으로는 영산호가 펼쳐진다. 제방과 강 사이에는 습지가 형성됐다. 과거에는 영산강 하구의 갯벌이었으나 하굿둑이 축조되면서 자연스레 생겨났다고 한다.

 인동초(忍冬草) 군락지가 눈길을 끌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문득 고 김대중대통령이 곧잘 인동초에 비유됐었고, 그의 고향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신안군이었다는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곳이 영산강종주 자전거길임을 알리는 말뚝도 눈에 띈다. 담양댐에서 영산강하구언에 이르는 길이 133km의 자전거길인데, 그게 이 둑을 지나가는 모양이다. 그럼 아까 하구언의 목포 쪽 입구에서 만났던 그 자전거길 안내도와는 어떻게 다를까?

 나불도 들녘과 영산호를 양쪽 옆구리에 낀 둑길은 꽤 오래 이어진다. 3.5km나 되다보니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영산호의 아름다운 풍광으로도 부족해 호남 제일 기경으로 소문난 월출산을 앞에 두고 걷다보면 지루하기는커녕 한눈 팔 잠깐의 틈도 허락되지 않는다.

 옛말에 곡식은 부지런한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야 모내기를 하고 있는 저 농부는 어떨까? 부지런한 농부가 심은 벼들은 이미 무릎 높이까지 자랐는데...

 둑길로 올라선지 30, ‘산호양수장(이정표 : 17코스 시점까지 3.4km)’에 이르자 길이 둘로 나뉜다. 이제껏 걸어오던 길(차량통행이 가능한)이 제방 아래로 내려가는데도 자전거길은 계속해서 둑길을 고집하는 것이다. 서해랑길 나그네들이야 물론 자전거길을 따른다.

 10분쯤 더 걷자 자전거길이 제방 아래로 내려가면서 아까 헤어졌던 길과 합류된다. 제방 위는 흙길로 변하면서 걷는 게 조금 불편해졌다. 하지만 조망을 위해 그냥 둑길을 걷기로 했다.

 이즈음 영산호를 가로지르는 무영대교가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국내 최초로 5개 주탑이 연속으로 연결된 엑스트라 도즈교(Extradsed Bridge : 사장교와 거더교의 장점을 접목시킨 교량)’이다. 그 뒤는 영암의 또 다른 명산인 은적산일 것이다.

 길이 거칠지만 예전에는 사람의 왕래가 제법 빈번했던 모양이다. 제방에 기댄 둔치에 쌈지공원까지 만들어 놓았다. 인적이 끊긴 지금은 잡초 속에 묻혀버렸지만...

 서해랑길은 이제 영산호와 영암호를 잇는 물길 대불 수로의 오른쪽을 걷는다. 중간에 만나게 되는 다리(수로교) 부근을 빼면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지극히 밋밋한 구간이다. 하지만 도로변의 뽕나무에서 오디를 따먹는 재미는 나름대로 쏠쏠했다.

 두 번째 다리를 지나면서 대불수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른편에는 세한대학교의 교정이 펼쳐진다. 교사는 물론이고 축구장·야구장·골프연습장 등 다양한 시설들을 지녔다. 하지만 주말이라선지 시설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불수로의 둔치에도 쌈지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금계국이 활짝 핀 공원은 아예 꽃밭으로 둔갑했을 정도, 하지만 사람은 흔적조차 없다. 주말을 맞은 대학생들이 집에라도 다니러 간 모양이다.

 날머리는 세한대학교 입구(영암군 삼호읍 산호리)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세한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대불교차로’. 그곳에 17코스의 시점인 세한대학교 영암캠퍼스 정문이 있다. 세한대학교(世翰大學校) 2개의 캠퍼스가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이곳 삼호읍의 호등산(虎嶝山, 126.8m) 자락 풍광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지방대학교의 학생 수가 감소되는 최근의 추세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서해랑길(영암 17코스)의 안내도는 세한대학교 정문 바로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2.14km를 찍고 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하지만 수치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17코스의 하이라이트인 농업박물관을 얼마만큼 꼼꼼히 둘러보느냐에 따라 소요시간이 결정될 테니까 말이다.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극찬에 이끌려 공도교 배수갑문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영산호와 영암호의 물 흐름을 조정해주는 갑문인데, 이에 대한 설명은 몽중루님의 글로 대신한다. <명품 갑문이 나온다. 공도교 1.2교와 겹치는 수직과 수평 형 두 개의 갑문이 그것이다. 이 중 서쪽에 있는 수평 갑문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수평 갑문이다. 반원 형(半圓形)의 수평을 이루는 갑문을 지탱하는 철 구조물이 인상 적이었다.>

서해랑길 30코스(점암선착장-수포마을회관)

 

여행일 : ‘23. 6. 24()

소재지 : 전남 신안군 지도읍 및 무안군 해제면 일원

여행코스 : 점암선착장소금출저수지취동마을서동마을참도선착장내양마을임치마을수포마을(거리/시간 : 17.2km/ 소금출저수지부터 14,29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0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일곱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대부분이 농로와 마을안길을 따라 걷는 평지로 되어 있으며, 참도 선착장부터 박동산 입구까지는 방조제를 따라 걷게 된다. ‘1004의 섬으로 대변되는 신안의 수많은 섬들을 눈과 가슴에 담아보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들머리는 점암선착장(신안군 지도읍 감정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로 들어온다. 계속해서 24번을 타고 임자도 들어가다 점암교차로에서 내려오면 곧이어 점암선착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신안 30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여객선터미널 옆에 설치되어 있다.

 지도와 해제반도(일부)의 북쪽 해안을 따라 걷는 코스다. 구간 길이는 17.2km, 하지만 3km를 줄여 소금출저수지(자그맣게 회색 칠해진 곳)’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서동마을에서 출발한 집사람이 지루해 할 수밖에 없는 시간. 즉 뒤따라오는 나를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내 작은 배려이다.

▼ 선착장 위로는 임자대교가 지나간다지도(감정리)와 임자도(진리)를 잇는 4.99km짜리 연도교(連島橋)아니 정확히는 지도와 임자도 사이 수도라는 꼬맹이 섬을 잇는다(때문에 임자1로도 불린다). 길이는 750m, 수도와 임자도는 1,135m짜리 임자2로 연결된다두 다리의 길이를 합치면 1,885m, 여기에 수도를 지나는 구간과 임자대교를 연결하기 위해 확장된 도로 구간까지 합치면 4.99km가 된다.

▼ 선착장은 텅 비었다여객선은커녕 자그만 고깃배 까지도 자취를 감췄다여객선터미널도 아예 문을 닫아걸었다. 2021년 3월 임자대교가 개통되고 두 섬을 오가던 뱃길이 끊기면서 나타난 서글픈 현실이다뱃길과 관련된 부대시설들도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것이다그래서일까지중해풍으로 지어놓은 화장실이 더욱 애틋하게 보이는 건.

▼ 그런데도 주변은 제법 번화한 풍경이다너른 주차장과 버스매표소(대합실), 두엇의 횟집민박집매점이 아직까지 남아있다하지만 주차장은 텅 비었고 횟집에도 손님이 없다연륙교의 편리함이 만들어낸 서글픈 한 단면이랄까?

 실제 출발지는 소금출 저수지 부근 도로변으로 삼았다(‘두순재 뒷산의 아랫도리쯤으로 보면 되겠다). 30코스의 시점인 점암선착장에서 3km쯤 떨어진 지점으로, 한시라도 서방님과 떨어지지 않겠다며 따라나선 집사람에 대한 내 작은 배려이다. 혼자 걷는 게 서툰 집사람을 어찌 장시간 방치할 수 있겠는가.

 2차선 도로인 봉리길 아래로 소금출저수지가 보인다. 이곳 신안의 들녘은 대부분 간척사업으로 태어났다. 때문에 소금기로 찌든 땅은 항상 목이 탄다. 그러니 저런 저수지를 곳곳에 만들 수밖에 없었고, 저 저수지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되겠다.

 잠시 후 시야가 열리면서 푸름으로 뒤덮인 불취들이 내려다보인다. 취동마을 앞 제방의 축조와 함께 생겨난 들녘으로, 제방 너머로는 신안의 자랑거리인 갯벌이 그 광활한 자태를 드러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0. 바닷가에 위치한 취동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봉리(鳳里)를 구성하는 9개 자연부락(봉동·심동·서동·황금·취동·죽곡·칠이지·참동·원동) 중 하나로 마을 북쪽이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막힘없이 바람이 마을로 불어온다 하여 불 취()’자를 넣어 지명을 만들었다.

 마을을 지나 방조제로 올라선다. 300m쯤 되는 구간인데, 이때 ‘1004의 섬 신안의 진면모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임자도를 비롯해 어의도, 만지도, 작도 등 신안의 수많은 섬들이 조망된다.

 바다 건너에는 임자도(荏子島)’가 있다(섬이 낮아 여러 개로 보일 수도 있으나 하나의 섬이다). 꽃피는 춘사월이면 섬 전체가 튤립으로 뒤덮인다는 아름다운 섬이다. 하지만 나 같은 중생들에게는 전장포(사진의 한가운데 푹 꺼진 곳일 듯)’라는 지명이 더 익숙하다. 우리나라 새우젓의 60~70%가 생산된다니 어찌 귀가 솔깃하지 않겠는가. 새우를 숙성시키던 토굴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체험 및 볼거리로 제공된다나?

 거북이 닷!’ 갯바위가 갯벌을 헤집으며 솟아오르는 거북이를 쏙 빼다 닮았다. 그 뒤의 섬은 어의도(於義島)’이다. 섬의 지형이 늘어진 형상이라고 해서 느리섬이나 느리로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어의도가 됐다. 저 섬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등장한다. 충무공은 왜구들과 싸울 때 어의도를 전략적인 기지로 이용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된 조선 수군을 이 해역에서 재건한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방조제가 끝나는 지점, 조망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마치기라도 했다는 듯, 서해랑길은 둑 아래로 내려가 내륙으로 파고든다.

 취동마을에서 16분쯤 걸으면 서해랑길은 다시 봉리길로 올라선다. 그곳에서 봉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서동마을을 만났다. 옛날 이곳에 한학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다고 해서 서당골이라 부르다가 한자로 고치면서 서동(書洞)’으로 변했다.

 신안군의 버스정류장 부스는 뭘 형상화하고 있는 걸까. 설마 홍어는 아니겠지? 신안을 대표하는 경관이나 특산물을 이미지에 담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서해랑길은 서동마을을 관통한다. 마을표지판 앞에서 골목으로 들어서서 황톳빛으로 물든 작은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자연부락, 이곳 역시 서동마을이란다. 황톳빛 구릉지를 사이에 두고 양쪽 비탈에 대칭을 이루며 민가가 들어선 모양새이다.

 특이한 마을 구조는 정자까지도 사이좋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두 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에서 주민들의 참새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 같은 나그네들도 생수 한 모금 나눠 마시며 쉬어갈 수 있었다.

 서동마을을 빠져나오면 기다란 둑이 기다린다.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방조제는 분명 아닐 터, 어쩌면 저 멀리 보이는 방조제가 새로 놓이면서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한 옛 방조제가 아닐까 싶다. 아니면 서동저수지를 축조하면서 생긴 둑일지도 모르겠고...

 서동 들녘의 목마른 대지를 적셔주기 위해 축조된 서동저수지는 물 반에 갈대가 반이다. 겨울철이면 남녘으로 날아가던 철새들이 잠시 들렀다 갈 수도 있겠다.

 오른편으로는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생겨난 농경지(봉리간척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하긴 서동마을을 비롯해 원동·본동·참도 마을 주민들이 저 들녘과 발을 붙이며 살아가고 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300m쯤 되는 둑길이 끝나자. 서해랑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꺾어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서동마을(버스정류장)에서 16. 서해랑길은 또 다시 2차선 도로(아까와는 달리 참도길이다)로 올라선다. 그곳에는 참도(站鳥)’마을이 있었다. 어의도와 포작도 주민들이 쉬어가던 곳(지명에  자를 쓰는 이유다)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참동으로 불리기도 한다니 기억해두자.

 갈림길로 빠져나와 구릉지로 올라선다. 이때 참도선착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조물주가 아니면 그 누가 저렇게 잘 그려낼 수 있을까.

 뒤돌아보면 봉리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지도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섬이 크다보니 산은 필수(호남정맥의 줄기인 봉대지맥이 흐른다). 그 사이사이에 논과 밭이 적절한 비율로 어울리고 있다.

 이후부터는 구릉지 위를 걷는다. 눈을 들면 사방이 온통 황토색이다. 대량의 양분을 함유한 황토는 농사에 유리하다고 알려진다. 황토로 재배한 작물은 수분이 많고 당도가 높아 맛이 더 좋다는 것이다. 고구마나 양파·감자 등의 뿌리작물이 특히 잘 자란다는데, 그래선지 밭이랑에는 상품성이 떨어지는 양파가 내버려져 있었고, 그런 양파를 이삭 삼아 줍는 나그네들도 몇 보였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55. ‘참도선착장에 닿았다. 인근 섬들의 관문 역할을 하는 포구로 참도라는 지명처럼 어의도와 포작도 같은 섬 주민들의 참새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단다. ! ‘참도는 원래 섬이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초기 지도와 연결되면서 육지가 됐단다.

 포구에는 식당도 들어서 있었다. 둘레길 나그네들이 식사할 요량으로 곁눈질 하는 곳이다. 하지만 오래 전에 폐업했는지 건물이 통째로 비어있었다.

 선착장에는 섬사랑 3가 함께 갈 손님들을 목 빠지게 기다린다. 차도선인 저 배는 60명의 손님을 태우고 포작도와 어의도를 오간다. 이밖에도 점암선착장과 목섬, 재원도 등 북부권 작은 섬들을 하루 두 차례 오간다고 했다.

 참도의 또 다른 선착장에는 여러 척의 어선이 정박되어 있었다. 건너편 포작도와의 사이 해협에서는 더 많은 배들이 물이 더 차오르기만 기다린다. 그래야 고기잡이를 떠날 수 있을 테니까...

 선착장을 빠져나온 서해랑길은 이제 방조제 위로 올라선다. 거꾸로 된 자 모양의 이 방조제는 길이가 무려 1km에 이른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거리이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하나같이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방조제 오른쪽에는 염전이 들어섰다. 증도에서 만났던 태양염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엄청나게 큰 규모이다. 하지만 구릿빛 어깨에 구슬땀이 흘러내리고 있어야 할 염부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 배출로 세상이 시끄러운 요즘, 미리 청정 소금을 사두겠다는 민심 때문에 소금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줌이라도 더 많이 생산해야 할 텐데 어찌된 일일까?

 나머지 공간에는 대하양식장이 들어섰다. 1997년 우루과이라운드 발효를 계기로 산업자원부는 폐 염전정책을 시행한다. 수입소금이 들어오면서 서해안에 산재하던 천일염 생산지도 급격히 줄게 돼 신안·영광 등 일부 서남해안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당시 염전을 그만둔 사업자들이 새롭게 시작한 것이 대하양식장이다. 정부는 그런 이들에게 시설자금을 지원했었고...

 참도선착장에서 500m 정도 떨어진 대포작도는 나지막하면서도 펑퍼짐한 것이 여간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해산물을 보자기에 싸는 모양으로 생겼다는 뜻의 보작도’, ‘포작도(包作島)’라는 지명이 붙여진 이유일 것이다. 하나 더, 나란히 서있는 2개 섬의 형태가 포알처럼 뾰족뾰족 나와 있어 그 중 큰 섬을 대포작도’, 작은 섬을 소포작도라 했다는 설도 있으니 기억해 두자.

 대포작도와의 사이에는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보릿고개를 넘기 어려웠던 시절 섬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던 것은 갯벌뿐이었다고 한다. 갯벌을 막아서 농사를 지었고, 또 갯벌에서 소금을 얻으면서 삶을 영위했단다. 그 갯벌이 지금은 칠면초로 뒤덮였다. 해마다 7번씩 옷을 갈아입는다는 염초식물이다. 그런데 생뚱맞게도 가을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붉은 빛을 띠고 있다. 미리 찾아온 오뉴월 삼복더위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해협에 떠있는 꼬맹이 어선들도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저 바다는 새우와 민어가 주로 잡힌다고 했다. 인근에 위치한 전장포가 새우잡이로 유명했듯, 어의도 또한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사이 새우잡이 어선의 파시가 형성됐다고 한다.

 둑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아니 간척사업으로 생겨난 제방이 아니니 해안길이라고 부르는 게 더 옳겠다.

 참도마을(봉리)과 가정마을(내양리) 사이의 자그만 들녘인 여끝들을 지나자 작은 선착장이 나타난다. 가정마을(산자락에 가려진 탓인지 마을은 눈에 띄지는 않았다) 앞에 있으니 가정선착장으로 부르면 되겠다. 참고로 가정마을은 법정 동리인 내양리(內楊里)의 자연부락 중 하나다. 마을 지형이 가재모양이라고 해서 가재라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가정(佳亭)’이 됐다.

 갯벌에 꽂혀있는 저 지주와 어망은 독살의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돌이나 장대를 이용해 갯가에 안팎을 경계 짓는 담장을 두르고 간조와 만조의 물때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전통 어로방식 말이다. 어부는 밀물에 멋모르고 독살 안으로 들어왔다가 썰물에 빠져나가지 못한 생선을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

 어부들의 쉼터는 서해랑길 나그네들에게도 자리를 내주었다.

 또 다시 나타나는 길고 긴 제방. ‘내양리에 놓인 둑이니 내양리방조제 쯤으로 기억해두자. 600m쯤 되는 이 구간에서 우린 대·소 포작도와 앞·밖 갈우도를 조망해 볼 수 있다.

 오른쪽, 널디너른 간척지는 태양광 패널로 한 가득이다. ‘농자천하지대본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나 보다. ‘식량 안보가 남의 나라 얘기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멀쩡한 농경지에 저런 시설이라니... 이익을 찾아 투자하는 게 자본주의의 기본이라지만 내가 가장 싫어하는 풍경이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개운치 못했던 뒤끝이 말끔히 사라져버린다. 칠면초가 만들어내는 붉은 빛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아름답다. 그 감동에 눈물 한 방울 똑 떨어뜨린다.

 방조제를 지난 서해랑길이 느닷없이 산속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차량 통행이 가능한 임도가 나있으니 말이다. 경사까지도 완만해서 걷는데 부담도 없다. 숲으로 인해 생기는 그늘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다고나 할까?

 임도를 따라 박동산(59.2m) 능선을 넘자 내양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법정 동리인 내양리(內楊里)를 구성하는 7개 자연부락(내양·외양·묘두·가정·적동·송항·둔곡) 중 하나로 강산나루 안에 있다고 해서 안나루구지로 불리다가 한자로 변환하면서 내양(內楊)’으로 바뀌었다.

 내양마을은 녹색 농촌체험마을이다. 꽃피는 춘사월이면 마을 앞 너른 들녘이 온통 노란 유채꽃밭으로 변한단다. 노란색으로 물든 들녘을 걸어보는 건 기본. 농작물 수확이나 메주·흑두부 만들기도 가능하단다. 갯벌에서는 전통 고기잡이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제철이 아니어선지 삭막하기 짝이 없는 풍경만 펼쳐진다. 아니 푸름으로 물들고 있어야 할 들녘이 온통 태양광 패널로 뒤덮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0. 내양마을 앞 도로(805번 지방도)에 내려선다. 담장처럼 쌓아올린 양파 망이 눈길을 끄는 구간이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도로를 따르지는 않는다. 10m쯤 걷다가 건너편 태양광발전 단지로 들어선다.

 태양광발전단지를 지나면 간척사업으로 만들어낸 들녘. 길 양옆으로 모내기를 기다리는 모판이 줄지어 늘어섰다. 부지런한 농부의 논에서는 벼가 이미 무릎 높이까지 자랐는데도...

 잠시 후 도로 느낌의 둑으로 올라선다. 지도와 해제반도 사이 해협을 가로지르는 방조제이다. 아니 바다 쪽으로 더 나가면 또 하나의 방조제가 나오니 그저 둑길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하나 더, 이 둑은 무안과 신안의 군계(郡界)이다. 신안군이 끝나고 이제 무안 땅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둑의 양옆 옛 해협은 담수호로 변해있다. 지도와 해제반도 사이의 저 해협은 진도의 울돌목만은 못하지만 2의 울돌목이라 불릴 정도로 물살이 거셌다고 하다. 하지만 몇 곳에 둑이 쌓이면서 지금은 저런 담수호로 남아있다.

 서해랑길은 또 다시 둑길을 탄다. 지도를 육지화(陸地化)하면서 간척지와 물길을 구분하기 위해 쌓은 둑이다.

 양옆으로 펼쳐지는 들녘은 끝 간 데 없이 넓다. 저 들녘은 1975년 지도(신안군) 연륙사업의 결과로 생겨났다. 지도와 해제반도 사이 해협의 양옆에 물막이 제방을 쌓고 국도 24호선과 지방도 805호선을 냈다. 더불어 주변 갯벌을 매립함으로써 237(지도읍 820·해제면 1217)의 농경지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1km쯤 걷자 배수갑문이 나온다. 지도를 연륙화하기 위해 쌓은 북쪽 제방의 부속시설이다.

 배수갑문과 그 옆의 방조제 위로는 2차선 도로(805번 지방도)가 나있다. 아까 내양마을 앞에서 계속해서 도로를 탔다면 이곳으로 나왔을 것이다. 이 경우 서해랑길 30코스는 1km 남짓 단축된다.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 단축코스를 권하고 싶다.

 도로를 횡단한다. 이어서 바닷가를 따라 난 농로를 따른다. 오른쪽에는 전남 3갑사 중 하나인 원갑사가 자리를 튼 강산(129.6m)이 있다. 길은 강산의 산자락과 서해바다를 양옆에 끼고 나있다.

 길가 농경지에서는 단호박 수확이 한창이다. 설탕이나 시럽의 첨가 없이도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내는 식재료로 우리 집 식탁에도 가끔씩 올라오는 채소다. 그런데 작업자가 외국인 일색 아니겠는가. 일손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농·어촌 현실, 그 대안으로 외국인 계절노동자를 들여온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고추도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가 그끄저께였으니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시절이 하도 하 수상하다 보니, 때 이른 무더위에 농작물이 헷갈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후, 서해랑길은 또 다른 방조제 위로 올라선다. 임치들녘을 만들기 위해 쌓아올린 방조제일 것이다.

 왼쪽은 서해바다, 바다가 항아리라도 되는 양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었다. 그나저나 평평하게만 보이는 갯벌에도 높낮이는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 갯고랑(전남 지역에서는 개웅이라 한다)이다. 어부들은 그 고랑을 용케도 찾아내고, 이제는 길이 된 고랑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

 오른쪽은 방조제로 인해 생겨난 습지다. 습지는 갈대로 한 가득이다. 갈대가 꽃을 피우는 가을철이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게 분명하다. 거기에 철새들의 군무까지 더해진다면 더없이 환성적일 텐데...

 길이가 400m쯤 되는 방조제의 끝에 이르면, 서해랑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내륙으로 파고든다. 그곳에서 임치마을을 만났다. 법정 동리인 임수리(臨水里)’를 구성하는 3(임치·수포·석포) 자연부락 중 하나로 임치(臨淄)’라는 지명은 마을의 생김새에 따왔다고 했다. ‘()’처럼 생겼다나? ‘삼 수()’변에 꿩 치()’이니 꿩을 닮았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마을 진입로는 꽃으로 단장됐다. 지도를 대표하는 유채꽃은 아니었지만... 참고로 ‘1004섬 신안은 꽃으로 대변된다. 압해도의 애기동백부터 선도의 수선화, 임자도의 튤립, 지도의 유채꽃, 도초도의 수국, 홍도의 원추리, 병풍도의 맨드라미, 안좌·박지도의 라벤더까지, 사계절 내내 형형색색의 꽃으로 섬이 물든다.

 그중 마음에 드는 꽃 한 송이를 담아봤다. ‘수레국화인데 가을하늘( 雅號)을 닮은 파랑색(프러시안 블루)이 너무 좋아서다. 꽃말은 행복감’, 아내와 함께 걸으며 느끼는 내 심정을 어찌 그리 잘 표현해주고 있을까.

 하지만 마을회관은 문이 닫혀 있었다. 행여 말동무라도 만날세라 전동 휠체어에 의지해 마실 나왔다는 할머니는 나그네와 나누는 말 한마디가 무척 반가운 모양이다. 노인들만 남았다는 농촌 현실은 이미 흘러간 옛 얘기란다. 그 노인들이 이제 마을회관에 나올만한 기력까지 없어져 버렸단다.

 마을에는 임치진성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전라우도(全羅右道)의 도만호진(都萬戶鎭)으로 목포진·다경포진·법성포진·검모포진·군산포만호진을 관할하는 주진이었으며, 군선도 중선 8척에 별선이 12, 군사도 1,055명이나 배치되었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단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다녀갔다는 기록도 있다. 난중일기에 병신년(1596) 98일 임치진성에 들러 첨사인 홍견(洪堅)에게 방비책을 물었다고 적혀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둘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100m쯤 들어갔어도 성벽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50m쯤 떨어진 지점에서 1685년부터 1873년 사이 세웠다는 역대 첨사들의 선정비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서해랑길은 동령재를 넘는다. 고개 너머의 작은 취락도 임치마을(‘동령재마을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이라고 한다. 이쯤에서 여담 하나. ‘임치(臨淄)’는 제나라의 수도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뿌리인 동이족의 근거지였던 산동성, 그곳에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제() 나라가 있었다.

 임치마을을 빠져나와 수포마을로 간다. 수포들녘의 한가운데를 꿰뚫는 농로를 따른다. 참고로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바닷물이 깊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바닷가 마을을 물이 많다는 의미로 수포(水浦)’라 불렀다.

 들녘 너머에서 작은 마을 몇이 고개를 내민다. 임수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석포마을과 석룡리의 자연부락인 석산마을이 아닐까 싶다.

 날머리는 수포마을회관(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그렇게 10분쯤(임치마을에서) 걷자 수포마을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14,29km가 찍혀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무더운 날씨였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르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난이도 낮았다는 얘기도 된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부부를 일심동체라고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방향을 향해 서로 도우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때 사랑 한 술은 필수겠지요. 부부 싸움은 물론 안 됩니다. 승자가 누가 되든 남은 반쪽은 패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현자들은 이런 싸움을 피루스의 승리라고 합니다. 그리스 북부 피루스왕이 다스리던 강대한 나라가 로마와의 전쟁에는 이겼으나 이 전쟁에서 막대한 국력을 소비한 탓에 쇄락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