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30코스(점암선착장-수포마을회관)

 

여행일 : ‘23. 6. 24()

소재지 : 전남 신안군 지도읍 및 무안군 해제면 일원

여행코스 : 점암선착장소금출저수지취동마을서동마을참도선착장내양마을임치마을수포마을(거리/시간 : 17.2km/ 소금출저수지부터 14,29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0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일곱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대부분이 농로와 마을안길을 따라 걷는 평지로 되어 있으며, 참도 선착장부터 박동산 입구까지는 방조제를 따라 걷게 된다. ‘1004의 섬으로 대변되는 신안의 수많은 섬들을 눈과 가슴에 담아보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들머리는 점암선착장(신안군 지도읍 감정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로 들어온다. 계속해서 24번을 타고 임자도 들어가다 점암교차로에서 내려오면 곧이어 점암선착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신안 30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여객선터미널 옆에 설치되어 있다.

 지도와 해제반도(일부)의 북쪽 해안을 따라 걷는 코스다. 구간 길이는 17.2km, 하지만 3km를 줄여 소금출저수지(자그맣게 회색 칠해진 곳)’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서동마을에서 출발한 집사람이 지루해 할 수밖에 없는 시간. 즉 뒤따라오는 나를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내 작은 배려이다.

▼ 선착장 위로는 임자대교가 지나간다지도(감정리)와 임자도(진리)를 잇는 4.99km짜리 연도교(連島橋)아니 정확히는 지도와 임자도 사이 수도라는 꼬맹이 섬을 잇는다(때문에 임자1로도 불린다). 길이는 750m, 수도와 임자도는 1,135m짜리 임자2로 연결된다두 다리의 길이를 합치면 1,885m, 여기에 수도를 지나는 구간과 임자대교를 연결하기 위해 확장된 도로 구간까지 합치면 4.99km가 된다.

▼ 선착장은 텅 비었다여객선은커녕 자그만 고깃배 까지도 자취를 감췄다여객선터미널도 아예 문을 닫아걸었다. 2021년 3월 임자대교가 개통되고 두 섬을 오가던 뱃길이 끊기면서 나타난 서글픈 현실이다뱃길과 관련된 부대시설들도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것이다그래서일까지중해풍으로 지어놓은 화장실이 더욱 애틋하게 보이는 건.

▼ 그런데도 주변은 제법 번화한 풍경이다너른 주차장과 버스매표소(대합실), 두엇의 횟집민박집매점이 아직까지 남아있다하지만 주차장은 텅 비었고 횟집에도 손님이 없다연륙교의 편리함이 만들어낸 서글픈 한 단면이랄까?

 실제 출발지는 소금출 저수지 부근 도로변으로 삼았다(‘두순재 뒷산의 아랫도리쯤으로 보면 되겠다). 30코스의 시점인 점암선착장에서 3km쯤 떨어진 지점으로, 한시라도 서방님과 떨어지지 않겠다며 따라나선 집사람에 대한 내 작은 배려이다. 혼자 걷는 게 서툰 집사람을 어찌 장시간 방치할 수 있겠는가.

 2차선 도로인 봉리길 아래로 소금출저수지가 보인다. 이곳 신안의 들녘은 대부분 간척사업으로 태어났다. 때문에 소금기로 찌든 땅은 항상 목이 탄다. 그러니 저런 저수지를 곳곳에 만들 수밖에 없었고, 저 저수지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되겠다.

 잠시 후 시야가 열리면서 푸름으로 뒤덮인 불취들이 내려다보인다. 취동마을 앞 제방의 축조와 함께 생겨난 들녘으로, 제방 너머로는 신안의 자랑거리인 갯벌이 그 광활한 자태를 드러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0. 바닷가에 위치한 취동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봉리(鳳里)를 구성하는 9개 자연부락(봉동·심동·서동·황금·취동·죽곡·칠이지·참동·원동) 중 하나로 마을 북쪽이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막힘없이 바람이 마을로 불어온다 하여 불 취()’자를 넣어 지명을 만들었다.

 마을을 지나 방조제로 올라선다. 300m쯤 되는 구간인데, 이때 ‘1004의 섬 신안의 진면모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임자도를 비롯해 어의도, 만지도, 작도 등 신안의 수많은 섬들이 조망된다.

 바다 건너에는 임자도(荏子島)’가 있다(섬이 낮아 여러 개로 보일 수도 있으나 하나의 섬이다). 꽃피는 춘사월이면 섬 전체가 튤립으로 뒤덮인다는 아름다운 섬이다. 하지만 나 같은 중생들에게는 전장포(사진의 한가운데 푹 꺼진 곳일 듯)’라는 지명이 더 익숙하다. 우리나라 새우젓의 60~70%가 생산된다니 어찌 귀가 솔깃하지 않겠는가. 새우를 숙성시키던 토굴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체험 및 볼거리로 제공된다나?

 거북이 닷!’ 갯바위가 갯벌을 헤집으며 솟아오르는 거북이를 쏙 빼다 닮았다. 그 뒤의 섬은 어의도(於義島)’이다. 섬의 지형이 늘어진 형상이라고 해서 느리섬이나 느리로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어의도가 됐다. 저 섬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등장한다. 충무공은 왜구들과 싸울 때 어의도를 전략적인 기지로 이용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된 조선 수군을 이 해역에서 재건한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방조제가 끝나는 지점, 조망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마치기라도 했다는 듯, 서해랑길은 둑 아래로 내려가 내륙으로 파고든다.

 취동마을에서 16분쯤 걸으면 서해랑길은 다시 봉리길로 올라선다. 그곳에서 봉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서동마을을 만났다. 옛날 이곳에 한학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다고 해서 서당골이라 부르다가 한자로 고치면서 서동(書洞)’으로 변했다.

 신안군의 버스정류장 부스는 뭘 형상화하고 있는 걸까. 설마 홍어는 아니겠지? 신안을 대표하는 경관이나 특산물을 이미지에 담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서해랑길은 서동마을을 관통한다. 마을표지판 앞에서 골목으로 들어서서 황톳빛으로 물든 작은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자연부락, 이곳 역시 서동마을이란다. 황톳빛 구릉지를 사이에 두고 양쪽 비탈에 대칭을 이루며 민가가 들어선 모양새이다.

 특이한 마을 구조는 정자까지도 사이좋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두 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에서 주민들의 참새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 같은 나그네들도 생수 한 모금 나눠 마시며 쉬어갈 수 있었다.

 서동마을을 빠져나오면 기다란 둑이 기다린다.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방조제는 분명 아닐 터, 어쩌면 저 멀리 보이는 방조제가 새로 놓이면서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한 옛 방조제가 아닐까 싶다. 아니면 서동저수지를 축조하면서 생긴 둑일지도 모르겠고...

 서동 들녘의 목마른 대지를 적셔주기 위해 축조된 서동저수지는 물 반에 갈대가 반이다. 겨울철이면 남녘으로 날아가던 철새들이 잠시 들렀다 갈 수도 있겠다.

 오른편으로는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생겨난 농경지(봉리간척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하긴 서동마을을 비롯해 원동·본동·참도 마을 주민들이 저 들녘과 발을 붙이며 살아가고 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300m쯤 되는 둑길이 끝나자. 서해랑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꺾어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서동마을(버스정류장)에서 16. 서해랑길은 또 다시 2차선 도로(아까와는 달리 참도길이다)로 올라선다. 그곳에는 참도(站鳥)’마을이 있었다. 어의도와 포작도 주민들이 쉬어가던 곳(지명에  자를 쓰는 이유다)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참동으로 불리기도 한다니 기억해두자.

 갈림길로 빠져나와 구릉지로 올라선다. 이때 참도선착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조물주가 아니면 그 누가 저렇게 잘 그려낼 수 있을까.

 뒤돌아보면 봉리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지도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섬이 크다보니 산은 필수(호남정맥의 줄기인 봉대지맥이 흐른다). 그 사이사이에 논과 밭이 적절한 비율로 어울리고 있다.

 이후부터는 구릉지 위를 걷는다. 눈을 들면 사방이 온통 황토색이다. 대량의 양분을 함유한 황토는 농사에 유리하다고 알려진다. 황토로 재배한 작물은 수분이 많고 당도가 높아 맛이 더 좋다는 것이다. 고구마나 양파·감자 등의 뿌리작물이 특히 잘 자란다는데, 그래선지 밭이랑에는 상품성이 떨어지는 양파가 내버려져 있었고, 그런 양파를 이삭 삼아 줍는 나그네들도 몇 보였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55. ‘참도선착장에 닿았다. 인근 섬들의 관문 역할을 하는 포구로 참도라는 지명처럼 어의도와 포작도 같은 섬 주민들의 참새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단다. ! ‘참도는 원래 섬이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초기 지도와 연결되면서 육지가 됐단다.

 포구에는 식당도 들어서 있었다. 둘레길 나그네들이 식사할 요량으로 곁눈질 하는 곳이다. 하지만 오래 전에 폐업했는지 건물이 통째로 비어있었다.

 선착장에는 섬사랑 3가 함께 갈 손님들을 목 빠지게 기다린다. 차도선인 저 배는 60명의 손님을 태우고 포작도와 어의도를 오간다. 이밖에도 점암선착장과 목섬, 재원도 등 북부권 작은 섬들을 하루 두 차례 오간다고 했다.

 참도의 또 다른 선착장에는 여러 척의 어선이 정박되어 있었다. 건너편 포작도와의 사이 해협에서는 더 많은 배들이 물이 더 차오르기만 기다린다. 그래야 고기잡이를 떠날 수 있을 테니까...

 선착장을 빠져나온 서해랑길은 이제 방조제 위로 올라선다. 거꾸로 된 자 모양의 이 방조제는 길이가 무려 1km에 이른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거리이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하나같이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방조제 오른쪽에는 염전이 들어섰다. 증도에서 만났던 태양염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엄청나게 큰 규모이다. 하지만 구릿빛 어깨에 구슬땀이 흘러내리고 있어야 할 염부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 배출로 세상이 시끄러운 요즘, 미리 청정 소금을 사두겠다는 민심 때문에 소금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줌이라도 더 많이 생산해야 할 텐데 어찌된 일일까?

 나머지 공간에는 대하양식장이 들어섰다. 1997년 우루과이라운드 발효를 계기로 산업자원부는 폐 염전정책을 시행한다. 수입소금이 들어오면서 서해안에 산재하던 천일염 생산지도 급격히 줄게 돼 신안·영광 등 일부 서남해안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당시 염전을 그만둔 사업자들이 새롭게 시작한 것이 대하양식장이다. 정부는 그런 이들에게 시설자금을 지원했었고...

 참도선착장에서 500m 정도 떨어진 대포작도는 나지막하면서도 펑퍼짐한 것이 여간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해산물을 보자기에 싸는 모양으로 생겼다는 뜻의 보작도’, ‘포작도(包作島)’라는 지명이 붙여진 이유일 것이다. 하나 더, 나란히 서있는 2개 섬의 형태가 포알처럼 뾰족뾰족 나와 있어 그 중 큰 섬을 대포작도’, 작은 섬을 소포작도라 했다는 설도 있으니 기억해 두자.

 대포작도와의 사이에는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보릿고개를 넘기 어려웠던 시절 섬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던 것은 갯벌뿐이었다고 한다. 갯벌을 막아서 농사를 지었고, 또 갯벌에서 소금을 얻으면서 삶을 영위했단다. 그 갯벌이 지금은 칠면초로 뒤덮였다. 해마다 7번씩 옷을 갈아입는다는 염초식물이다. 그런데 생뚱맞게도 가을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붉은 빛을 띠고 있다. 미리 찾아온 오뉴월 삼복더위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해협에 떠있는 꼬맹이 어선들도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저 바다는 새우와 민어가 주로 잡힌다고 했다. 인근에 위치한 전장포가 새우잡이로 유명했듯, 어의도 또한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사이 새우잡이 어선의 파시가 형성됐다고 한다.

 둑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아니 간척사업으로 생겨난 제방이 아니니 해안길이라고 부르는 게 더 옳겠다.

 참도마을(봉리)과 가정마을(내양리) 사이의 자그만 들녘인 여끝들을 지나자 작은 선착장이 나타난다. 가정마을(산자락에 가려진 탓인지 마을은 눈에 띄지는 않았다) 앞에 있으니 가정선착장으로 부르면 되겠다. 참고로 가정마을은 법정 동리인 내양리(內楊里)의 자연부락 중 하나다. 마을 지형이 가재모양이라고 해서 가재라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가정(佳亭)’이 됐다.

 갯벌에 꽂혀있는 저 지주와 어망은 독살의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돌이나 장대를 이용해 갯가에 안팎을 경계 짓는 담장을 두르고 간조와 만조의 물때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전통 어로방식 말이다. 어부는 밀물에 멋모르고 독살 안으로 들어왔다가 썰물에 빠져나가지 못한 생선을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

 어부들의 쉼터는 서해랑길 나그네들에게도 자리를 내주었다.

 또 다시 나타나는 길고 긴 제방. ‘내양리에 놓인 둑이니 내양리방조제 쯤으로 기억해두자. 600m쯤 되는 이 구간에서 우린 대·소 포작도와 앞·밖 갈우도를 조망해 볼 수 있다.

 오른쪽, 널디너른 간척지는 태양광 패널로 한 가득이다. ‘농자천하지대본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나 보다. ‘식량 안보가 남의 나라 얘기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멀쩡한 농경지에 저런 시설이라니... 이익을 찾아 투자하는 게 자본주의의 기본이라지만 내가 가장 싫어하는 풍경이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개운치 못했던 뒤끝이 말끔히 사라져버린다. 칠면초가 만들어내는 붉은 빛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아름답다. 그 감동에 눈물 한 방울 똑 떨어뜨린다.

 방조제를 지난 서해랑길이 느닷없이 산속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차량 통행이 가능한 임도가 나있으니 말이다. 경사까지도 완만해서 걷는데 부담도 없다. 숲으로 인해 생기는 그늘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다고나 할까?

 임도를 따라 박동산(59.2m) 능선을 넘자 내양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법정 동리인 내양리(內楊里)를 구성하는 7개 자연부락(내양·외양·묘두·가정·적동·송항·둔곡) 중 하나로 강산나루 안에 있다고 해서 안나루구지로 불리다가 한자로 변환하면서 내양(內楊)’으로 바뀌었다.

 내양마을은 녹색 농촌체험마을이다. 꽃피는 춘사월이면 마을 앞 너른 들녘이 온통 노란 유채꽃밭으로 변한단다. 노란색으로 물든 들녘을 걸어보는 건 기본. 농작물 수확이나 메주·흑두부 만들기도 가능하단다. 갯벌에서는 전통 고기잡이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제철이 아니어선지 삭막하기 짝이 없는 풍경만 펼쳐진다. 아니 푸름으로 물들고 있어야 할 들녘이 온통 태양광 패널로 뒤덮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0. 내양마을 앞 도로(805번 지방도)에 내려선다. 담장처럼 쌓아올린 양파 망이 눈길을 끄는 구간이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도로를 따르지는 않는다. 10m쯤 걷다가 건너편 태양광발전 단지로 들어선다.

 태양광발전단지를 지나면 간척사업으로 만들어낸 들녘. 길 양옆으로 모내기를 기다리는 모판이 줄지어 늘어섰다. 부지런한 농부의 논에서는 벼가 이미 무릎 높이까지 자랐는데도...

 잠시 후 도로 느낌의 둑으로 올라선다. 지도와 해제반도 사이 해협을 가로지르는 방조제이다. 아니 바다 쪽으로 더 나가면 또 하나의 방조제가 나오니 그저 둑길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하나 더, 이 둑은 무안과 신안의 군계(郡界)이다. 신안군이 끝나고 이제 무안 땅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둑의 양옆 옛 해협은 담수호로 변해있다. 지도와 해제반도 사이의 저 해협은 진도의 울돌목만은 못하지만 2의 울돌목이라 불릴 정도로 물살이 거셌다고 하다. 하지만 몇 곳에 둑이 쌓이면서 지금은 저런 담수호로 남아있다.

 서해랑길은 또 다시 둑길을 탄다. 지도를 육지화(陸地化)하면서 간척지와 물길을 구분하기 위해 쌓은 둑이다.

 양옆으로 펼쳐지는 들녘은 끝 간 데 없이 넓다. 저 들녘은 1975년 지도(신안군) 연륙사업의 결과로 생겨났다. 지도와 해제반도 사이 해협의 양옆에 물막이 제방을 쌓고 국도 24호선과 지방도 805호선을 냈다. 더불어 주변 갯벌을 매립함으로써 237(지도읍 820·해제면 1217)의 농경지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1km쯤 걷자 배수갑문이 나온다. 지도를 연륙화하기 위해 쌓은 북쪽 제방의 부속시설이다.

 배수갑문과 그 옆의 방조제 위로는 2차선 도로(805번 지방도)가 나있다. 아까 내양마을 앞에서 계속해서 도로를 탔다면 이곳으로 나왔을 것이다. 이 경우 서해랑길 30코스는 1km 남짓 단축된다.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 단축코스를 권하고 싶다.

 도로를 횡단한다. 이어서 바닷가를 따라 난 농로를 따른다. 오른쪽에는 전남 3갑사 중 하나인 원갑사가 자리를 튼 강산(129.6m)이 있다. 길은 강산의 산자락과 서해바다를 양옆에 끼고 나있다.

 길가 농경지에서는 단호박 수확이 한창이다. 설탕이나 시럽의 첨가 없이도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내는 식재료로 우리 집 식탁에도 가끔씩 올라오는 채소다. 그런데 작업자가 외국인 일색 아니겠는가. 일손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농·어촌 현실, 그 대안으로 외국인 계절노동자를 들여온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고추도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가 그끄저께였으니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시절이 하도 하 수상하다 보니, 때 이른 무더위에 농작물이 헷갈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후, 서해랑길은 또 다른 방조제 위로 올라선다. 임치들녘을 만들기 위해 쌓아올린 방조제일 것이다.

 왼쪽은 서해바다, 바다가 항아리라도 되는 양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었다. 그나저나 평평하게만 보이는 갯벌에도 높낮이는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 갯고랑(전남 지역에서는 개웅이라 한다)이다. 어부들은 그 고랑을 용케도 찾아내고, 이제는 길이 된 고랑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

 오른쪽은 방조제로 인해 생겨난 습지다. 습지는 갈대로 한 가득이다. 갈대가 꽃을 피우는 가을철이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게 분명하다. 거기에 철새들의 군무까지 더해진다면 더없이 환성적일 텐데...

 길이가 400m쯤 되는 방조제의 끝에 이르면, 서해랑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내륙으로 파고든다. 그곳에서 임치마을을 만났다. 법정 동리인 임수리(臨水里)’를 구성하는 3(임치·수포·석포) 자연부락 중 하나로 임치(臨淄)’라는 지명은 마을의 생김새에 따왔다고 했다. ‘()’처럼 생겼다나? ‘삼 수()’변에 꿩 치()’이니 꿩을 닮았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마을 진입로는 꽃으로 단장됐다. 지도를 대표하는 유채꽃은 아니었지만... 참고로 ‘1004섬 신안은 꽃으로 대변된다. 압해도의 애기동백부터 선도의 수선화, 임자도의 튤립, 지도의 유채꽃, 도초도의 수국, 홍도의 원추리, 병풍도의 맨드라미, 안좌·박지도의 라벤더까지, 사계절 내내 형형색색의 꽃으로 섬이 물든다.

 그중 마음에 드는 꽃 한 송이를 담아봤다. ‘수레국화인데 가을하늘( 雅號)을 닮은 파랑색(프러시안 블루)이 너무 좋아서다. 꽃말은 행복감’, 아내와 함께 걸으며 느끼는 내 심정을 어찌 그리 잘 표현해주고 있을까.

 하지만 마을회관은 문이 닫혀 있었다. 행여 말동무라도 만날세라 전동 휠체어에 의지해 마실 나왔다는 할머니는 나그네와 나누는 말 한마디가 무척 반가운 모양이다. 노인들만 남았다는 농촌 현실은 이미 흘러간 옛 얘기란다. 그 노인들이 이제 마을회관에 나올만한 기력까지 없어져 버렸단다.

 마을에는 임치진성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전라우도(全羅右道)의 도만호진(都萬戶鎭)으로 목포진·다경포진·법성포진·검모포진·군산포만호진을 관할하는 주진이었으며, 군선도 중선 8척에 별선이 12, 군사도 1,055명이나 배치되었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단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다녀갔다는 기록도 있다. 난중일기에 병신년(1596) 98일 임치진성에 들러 첨사인 홍견(洪堅)에게 방비책을 물었다고 적혀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둘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100m쯤 들어갔어도 성벽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50m쯤 떨어진 지점에서 1685년부터 1873년 사이 세웠다는 역대 첨사들의 선정비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서해랑길은 동령재를 넘는다. 고개 너머의 작은 취락도 임치마을(‘동령재마을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이라고 한다. 이쯤에서 여담 하나. ‘임치(臨淄)’는 제나라의 수도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뿌리인 동이족의 근거지였던 산동성, 그곳에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제() 나라가 있었다.

 임치마을을 빠져나와 수포마을로 간다. 수포들녘의 한가운데를 꿰뚫는 농로를 따른다. 참고로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바닷물이 깊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바닷가 마을을 물이 많다는 의미로 수포(水浦)’라 불렀다.

 들녘 너머에서 작은 마을 몇이 고개를 내민다. 임수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석포마을과 석룡리의 자연부락인 석산마을이 아닐까 싶다.

 날머리는 수포마을회관(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그렇게 10분쯤(임치마을에서) 걷자 수포마을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14,29km가 찍혀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무더운 날씨였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르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난이도 낮았다는 얘기도 된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부부를 일심동체라고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방향을 향해 서로 도우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때 사랑 한 술은 필수겠지요. 부부 싸움은 물론 안 됩니다. 승자가 누가 되든 남은 반쪽은 패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현자들은 이런 싸움을 피루스의 승리라고 합니다. 그리스 북부 피루스왕이 다스리던 강대한 나라가 로마와의 전쟁에는 이겼으나 이 전쟁에서 막대한 국력을 소비한 탓에 쇄락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