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고원길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

 

여행일 : ‘24. 3. 2()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성수면·마령면·부귀면 일원

여행코스 : 오암마을황소마재(인증)장재동추동가래울재신동내동재내동판치재서촌전옥례 묘(인증)외판치서판교장승삼거리(5구간 종점)장승마을메타세쿼이아길(거리/시간 : 12.3km+3km, 실제는 장재동 마을부터 12.47km 3시간 1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오암마을(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순천·완주고속도로 상관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임실 방면으로 11km쯤 내려온다. ‘병암교차로(임실군 관촌면 관촌리)’에서 745번 지방도로 옮겨 10km쯤 달리다가 양화3(성수면 좌포리)’에서 좌회전, 중길로를 따라 2km쯤 들어오면 오암마을에 이르게 된다. 5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마을 앞 정자에 문패처럼 세워놓았다.

 고만고만한 높이의 고갯마루 넷을 오르내린다. 골짜기마다 자리한 마을과 저수지를 만나고, 멀리 마이산을 시야에 두다 보면 어느새 종점(부귀면 장승삼거리)에 닿는다. 난이도는 보통’. 코스 길이(12.3km)는 짧지만 고개를 네 개나 넘는다는 게 반영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중 하나(황소마재)를 생략하고 장재동마을에서 출발했다. ‘메타세쿼이아 길까지 연장해 걷겠다는 산악회의 결정 때문이다. 집사람의 체력으로는 15km를 걷는다는 게 무리이니 어쩌겠는가.

 10 : 29. 실제 출발지인 장재동마을 어귀. 차도는 장재동마을을 지나 추동마을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넓이가 들쭉날쭉한 도로사정을 감안해 이쯤해서 차를 돌리기로 했다. 자칫 길이 좁아지기라도 하면 장축의 산악회버스를 돌릴 수조차 없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재동마을로 이어지는 추장길을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만덕산 줄기의 골짜기, 남동쪽으로 트인 곳에 장재동과 추동 마을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추장(추동+장재동)’이란 도로명이 이를 증명해준다.

 10 : 32. 잠시 후 도착한 장재동 마을은 천주교 신자촌으로 보면 되겠다. 구한말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로 어은동(魚隱洞, 1888년에 공소가 설립된 진안의 유서 깊은 천주교 신자촌)과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하천(추동천)의 최상류, 오지에 위치하고 있어 관군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고, 남쪽으로는 성수면 중길리와 접하고 있어 유사시 피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초기 이주자들은 생업으로 옹기를 굽고 살았다 한다.

 삼노운동을 하자는 팻말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부연설명을 보며 실없는 미소로 마무리 짓는다. 버리지도 태우지도 묻지도 말자는 운동의 자 대신 (NO)’자를 넣은 것이다. 하긴 요즘은 글로벌이 대세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을회관 앞에서 고원길(고개너머 마령길)을 만났다. ‘황소마재를 넘어온 고원길이 마을회관 앞(덕천2)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다리(덕천2) 옆 이정표가 반갑다 눈인사를 보내온다. 방향표지판의 노란색과 붉은색은 진안의 특산물인 인삼과 홍삼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노란색은 순방향, 붉은 색은 역방향이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진안고원길을 한 바퀴 돌게 되어 있다.

 10 : 36. 몇 걸음 더 걸으면 천주교 장재동공소. 진안지역의 공소(公所, 본당보다 작아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공동체)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설립됐다. 1883년에 인근의 가래올(추동)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고, 1890년도에는 장재동에도 신자들이 이주해 와 공소가 설립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4년 본래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추동마을로 간다. 마을로 들어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따로 나있지만, 고원길은 추동천의 둑길을 따라 간다. 참고로 만덕산(765.5m)’의 북서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은 덕천저수지에 모였다가 추동마을 앞으로 흘러간다. 추동천 또는 덕천천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추동마을 어귀(동남향)에는 엄청나게 굵은 노거수 네 그루가 흡사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방수나 방풍보다는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조성한 비보(裨補林) 숲이 아닐까 싶다. 마을의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10 : 45. 마을 숲을 지났다싶으면 이내 추동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덕천리(德川里)를 구성하는 10개 자연부락(신덕·대동·신동·대동·신동·장재동·추동·안방리·판치·안골) 중 하나로, 마을 형성시기에 주위에 가래나무()가 많다고 해서 가래울 또는 가래골로 불리다가 한자화 되는 과정에서 추동으로 변했단다. 하나 더. 추동마을도 역시 천주교 신자촌이라고 한다. 진안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유박해(1801) 무렵이란다. 고산(완주군) 지방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데, 추동마을은 1883년경 형성됐다고 한다.

 이정표는 5구간 시점인 오암마을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3.7km로 적고 있다. 반면에 내 앱은 1.15km를 찍는다. 그러니 집사람과 함께 걷는다는 핑계로 2.5km쯤 단축해서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안내판은 이곳이 십승지지(十勝之地)에 버금가는 피난처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진안 사람들 사이에 동비서추(東飛西楸)’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큰 난리가 나면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동쪽의 비사랑마을(백운면)과 함께 이곳 추동마을이 꼽힌다는 것이다.

 마을을 지나 두 번째 고개(첫 번째 고개인 황소마재는 생략했다) 가래울재로 간다. 고개가 높지 않은데다 큰 커브를 그려가며 올라가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올라설 수 있다.

 10 : 59. 컨테이너가 반기는 가래울재(해발 370m)’에 올라선다. 고원길은 움푹 파인 능선의 안부를 꿰뚫듯 지난다. ! 왼쪽 개활지를 향해서도 길이 나있었다. 하지만 벌목과 경제림 조성을 위해 내놓은 임도이니 헷갈리지 말 일이다.

 이정표(장승삼거리 7.7km/ 오암 4.6km)가 이곳이 가래울재임을 알려준다. 진안고원길은 이렇듯 주요 지점마다 이름표가 달린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산길은 인생과 같다고 했다. 그러니 오르막길 다음에는 내리막길이 나타날 수밖에... 하지만 실제의 상황은 인생과는 딴판이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하는 내리막길 삶과는 달리 산길에서의 내리막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진행 방향 저 아래에 신동저수지와 신동마을이 놓여있다. 그 뒤로 보이는 고개가 잠시 후 넘어야 할 내동재이다.

 저수지 위 골짜기에는 엄청나게 넓은 묘목원이 들어서 있었다. 육묘의 수종도 국·공립 수목원에 못지않게 다양했다.

 길가 두어 곳에 쉼터용 정자를 지어놓았다. 묘목원에서 세운 모양인데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도 아낌없이 자리를 내어준다.

 신동저수지. 구글지도는 소류지로 적고 있었다. 경작지에 공급할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둑을 쌓았지만 그 규모가 작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 15. 신동마을에 내려선다. 덕천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옛 이름은 놋점이었다고 한다. 예전 이 마을에서 놋그릇을 만들어 전주 등지로 반출했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놋점터 또는 유기점리로 불리다가 놋점이 없어진 후 1800년경부터 나뭇골이라는 뜻의 신동으로 불린다고 한다.

 신동은 산골마을 치고는 규모가 꽤 컸다. 그래선지 들어선 교회도 선교 수양관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고 신자가 늘어나면서 사라졌단다.

 신동마을의 벽화는 풍물놀이를 담았다. 하지만 깃발은 농자천하지대본 대신 마을의 특산품을 적었다. ‘명품 고사리가 생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마을을 지나 비스듬히 내동재를 넘는다. 작은 고개라서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다. 거기다 숲까지 깊으니 뒷짐이라도 지고 사색하며 걸어보면 어떨까?

 고개너머 마령길은 고개를 하나 넘고, 휘어지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뒤돌아보면 또 다른 풍경이 오롯이 떠오른다. 내가 걸어온 길이다.

 11 : 25. 내동재에 올라섰다. 신동마을과 (내동·판치)마을 주민들이 왕래하던 고개로 마을 간의 왕래와 논밭에 가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하나 더. 내동재에서 북서쪽 능선을 따라가면 부귀면 방각마을로 이어지는 방각이재·깃대봉·장구목재 등을 거쳐 만덕산에 이른다. 남쪽은 덕천리 중심 산지를 이루다가 안방마을 앞 갈모봉(354m)에서 정리된다.

 고갯마루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내동재 이정표(장승삼거리 5.7km/ 오암 6.6km). 앱은 해발 362m를 찍는다. 내동마을의 해발이 310m이었으니 고도를 50m 밖에 올리지 않은 셈이다. 그만큼 수월하게 올라왔다는 얘기다.

 이제 내동마을로 내려갈 차례다. 익산·포항고속도로를 정면에 놓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저 멀리 마이산이 조망된다. 크게 보이는 암마이산 뒤에서 숫마이산이 삐쭉이 고개를 내민다.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의 모양새라고나 할까?

 11 : 35. 그렇게 걷다보면 어느새 내동마을이다. 큰 마을인 판치마을의 안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안골이라 부르다가 한자화 되면서 내동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은 집이 5채가 채 되지 않았다.

 내동마을 이정표(장승삼거리 5.0km/ 오암 7.3km)도 이름표를 달았다.

 고원길은 이제 판치마을로 간다. 아니 판치마을까지는 가지 않고 판치저수지 아래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판치재로 올라간다.

 부지런한 집사람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던 모양이다. 잠시만 시간을 달라더니 손놀림이 바빠진다. 그렇게 채취한 봄나물은 다음 날 아침상에 냉이된장국이 되어 올라왔고, 나머지는 친지들에까지 나누어줄 수 있었다.

 11 : 53. 내동과 판치 마을 사이에는 판치저수지가 있다. 덕천리 일대의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제법 큰 저수지(담수량이 24만 톤이나 된다고 했다)이다.

 고원지대에서 저수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러니 강우량의 변화가 농업용수의 확보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할 수밖에 없다.  간이 기상대가 그 증거라 하겠다.

 11 : 58. 저수지 아래서 만난 삼거리. 직진하면 판치마을이 나온다. 하지만 고원길은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참고로 널티로도 불리는 판치마을은 마을 입구에 동서로 길게 조성된 숲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때 베었다가 생사람이 죽는 등 변고가 많이 생기자 다시 조성했다고 한다.

 12 : 02. 잠시 후 고원길은 익산·포항고속도로 아래(이정표 : 장승삼거리 3.4km/ 오암 8.9km)를 지난다. 높고 긴 교량이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구간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판치재의 높이는 357m. 조금 전 지나왔던 판치마을 갈림길의 표고가 288m이었으니 1.2km를 걸어가면서 70m의 고도를 높이는 셈이다.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평탄한 길이 계속되는 이유일 것이다. 하나 더. 임도는 차량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찍했다. 바닥에 바퀴자국이 또렷한 것이 차량통행이 제법 많은 모양이다.

 12 : 14.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는 판치재(또는 널재)에 올라선다. 과거 백운이나 마령 사람들이 전주로 나갈 때 넘던 고개이다. ‘널재라는 지명은 널재마을의 뒷산이 널빤지처럼 판판하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널재  으로도 해석되는데, 이는 넓은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단다.

 느티나무 그늘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이정표(장승삼거리 2.5km/ 오암 9.8km) 아름다운 순례길의 팻말도 눈에 띈다. 그런데 저 달팽이는 뭘 의미하는 걸까? 어쩌면 느림의 미학을 음미하며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걸어보라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 태양광발전소의 썩 편치 않은 풍경을 눈에 담으며 트레킹을 이어간다판치재는 마령면과 부귀면의 경계에 해당한다북쪽 신정리(부귀면방향으로 들어선 고원길은 서촌마을·외판치마을·장승마을을 연이어 들른다.

▼ 12 : 20.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작은 분지에 들어앉은 서촌’ 마을이다소박한 규모만큼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마을로 서학(천주교신자들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마을 어귀에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숲이 조성되어 있으며정월 열나흘 날 저녁에는 거리제도 지낸단다.

 마을 뒤로 올라가면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노거수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서촌마을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게 마을 당산목으로 삼아도 충분하겠다. 맞다. 그늘에 놓여있는 저 의자가 그 증거일 수도 있겠다.

 서촌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살짝 거칠어진다. 왕래하는 사람들이 적은 탓인지 잡초로 무성한데다 질척거리기까지 한다.

 11 : 29. 그렇게 잠시 걸어 전옥례 묘역에 닿았다. 아니 묘역에 들어가기 전, 이정표(장승삼거리 1.6km/ 오암 10.7km)가 먼저 길손을 맞는다.

 전옥례 묘소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 2개 인증지점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우리 부부가 생략한 구간에 있는 황소마재에 세워져 있다). 자신의 얼굴과 이정표가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두어야 하는 이유이다.

 전옥례 묘역은 사유지이다. 그래선지 울타리를 둘러놓았다. 하지만 고맙게도 둘레길 나그네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작은 문을 내놓았다. 글을 빌어서나마 묘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후손들에게 감사를 드려본다.

 전옥례(全玉禮)’ 할머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장녀라고 한다. 갑오동학농민혁명으로 부모를 잃은 그녀는 천애고아로 유랑하다 마이산 금당사에 들어가 김옥련으로 이름을 바꾸고 공양주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23세에 이찬영씨와 결혼해 52녀를 두었다. 우여곡절 끝에 진안군 부귀면 희망목장으로 왔을 때 전봉준장군의 딸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숨어살던 때라 숨기고 지냈지만, 어느 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야기가 실린 것을 보고 이제는 자신이 전봉준의 딸인 것을 알려도 되겠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출생내력을 밝혔단다.

 묘역에는 묘비 말고도 전옥례 할머니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1970년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란다. 이후 정읍동학농민혁명사 등 각종 서적과 논문에 이런 사실이 실리면서 세상에 전해졌다.

 묘역에서 내려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거기에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자칫 엉덩방아라도 찧을 수 있으니 조심해서 내려갈 일이다.

 12 : 34. ‘서촌재길로 내려선다. 서촌마을로 이어지는 진입로 겸 농로로, 고원길은 이 길을 따라 서판마을로 간다.

 12 : 38. 서판마을(이정표 : 장승삼거리 1.1km/ 오암 11.2km). 법정 동리인 신정리(新亭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가정·신리·서판·승각) 중 하나이다. 신정천변 들판의 자연부락 판치이기도 하다.

 12 : 49. ‘서판교로 세동천(신정리 앞을 흐를 때는 신정천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을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2차선 도로인 모래재로’. 고원길은 200m쯤 이 도로를 따른다.

 12 : 52. 세동천의 둑길로 내려서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세동천이 휘돌아가면서 만들어놓은 자그만 들녘을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렇듯 진안고원길은 기계음으로 찌든 속세의 길보다는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아 연결시킨다.

 4분쯤 걸어 만난 작은 개울. 앞이 막힌 고원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장승삼거리가 얼굴을 내민다.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이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다.

 12 : 58. 장승삼거리에 이른다. ‘진안고원길 5구간의 종점이자 한국고갯길 TOUR in 진안’ 23일 코스(78일 종주팀, 34일 하프팀도 있다)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한국고갯길(KHT : Korea Hills Trail)은 한국형 하이킹·백패킹 문화를 통해 지역을 살리는 공정여행 시스템으로 국내의 다양한 트레일(trail)을 걷는 투어(TOUR)를 이어오고 있다. 먹고 싶은 곳에서 먹고, 구경하고 싶은 곳을 구경하면서 나만의 걷기 여행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나?

 장승삼거리는 버스정류장을 겸한다. 작은 슈퍼마켓도 하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한적한 풍경을 보여준다. 6구간(전주가는 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은 버스정류장 앞에 세워져 있다.

 2차선 도로인 모래재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6구간(전주가는 길)을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산악회의 결정이지만). 거리가 먼데다 높은 산까지 올라야하는 다음 구간의 힘든 여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한 결단이다.

 13 : 04. ‘장승2를 건너자 세동천의 둑길로 내려선다. 최근에 정비를 끝냈는지 둑 위로 난 시멘트포장길 양 가장자리에 야자매트까지 깔아놓았다.

 오른편에 세동천을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부귀면 세동리에서 발원한 세동천은 신정리를 거쳐 연장리(하평마을)에서 정곡천과 합친 다음 강정리(월운마을)에서 제룡강(섬진강 상류)에 합류되는 섬진강의 지류이다. 상류인 세동천에 이어 신정천, 연장천 등 지나는 지역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기도 한다.

 둑길을 걷다보면 물길이 깎아 만든 바위절벽도 만난다.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기묘하지도 않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13 : 11. ‘장승마을 앞에서 또 다시 모래재로를 만났다.

 모래재로를 따라가면 코스를 꽤 단축할 수 있다. 메타세쿼이아길 입구에서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실제 그렇게 걷는 이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고원길은 신정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장승마을로 들어선다. 해발 300m를 훌쩍 넘기는 산간지방을 고원길은 혼자 즐기며 걷기에는 산이 깊거나 한적하다. 그래도 잃어가는 우리 농촌의 삶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추억에 남을 길이다. 하지만 길 따라 걷기만 한다면 진안고원 마실길의 제맛을 모른다. 뜨문뜨문 마을이 나타나면 둘러보고, 말 한마디 건네고 또 한마디 답해야 마실길의 맛이다.

 마을 담벼락은 예쁜 벽화 대신 속 깊은 글귀를 담았다. ‘나눌 수 있는 봄 향기. 당신이 있어 나는 늘봄이다’. 문득 영춘(永春)’이란 예쁜 이름을 지어주신 할아버지의 당부가 떠오른다. 네 이름이 늘봄이니. 봄 향기 사위에 퍼져나가 듯. 아름다운 마음을 세상과 공유하라는...

 13 : 14. ‘곰티로를 따라 방각마을(같은 신정리)쪽으로 가다보면 장승초등학교가 나온다. 1946년에 문을 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초등학교이다. 1954년 장승국민학교로 승격했고, 1982년에는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다. 2010년 학생 수가 13명으로 줄어들면서 폐교위기에 몰렸으나, 인근 지역(전주)에서 학생을 유치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으로 2021년 학생이 57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학교를 중심으로 지역사회가 살아난 대표 사례로 꼽힌다나?

 교정에는 장승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이 아니 장승초등학교와 병설유치원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하나 더. 고원길은 초등학교 교정을 통과한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으로 지나가도록 하자. 특히 평일에는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정숙보행이 요구된다.

 고사리손으로 가꾸어가는 텃밭. 학교는 전주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했다. 인구 65만의 대도시에서 살아온 어린이들로서는 새로운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맞다.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에서 자연과 벗하며 자라는 아이들에게서 길러지는 감성,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서로를 살리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 필요한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초등학교를 지난 고원길은 개울로 몸을 움츠린 세동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13 : 21. 그러다 우정천과의 합수지점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우정천을 거슬러 오른다. 개울을 건널 수 있는 다리를 찾아서이다. 덕분에 나그네들은 250m쯤 에돌아갈 수밖에 없다.

 12 : 26. ‘U’자 형으로 커브를 돌아온 길은 세동천과 다시 만난다. 하지만 다리(우정교)를 건너지 않고 세동천의 왼쪽 둑길을 따라 간다.

 우정교에는 우정마을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법정 동리인 세동리(細洞里) 6개 행정마을(신덕·적천·큰터골·원세동·우정·부암) 중 하나로 풍수상 소가 물을 마시는 지형이라고 해서 우정(牛井)’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피난처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던 오지마을이다.

 세동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 오른쪽 산자락에 원세동마을이 들어앉았다. 보건진료소까지 들어서있는 규모가 제법 큰 마을이다.

 13 : 35.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부귀면의 자랑이자 진안군 명물 중 하나인 메타세쿼이아길을 만나게 된다. 우람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길게 뻗어나가는 풍경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참고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세동리(부귀면) 원세동마을에서 큰터골마을까지 1.5km구간에 곧게 뻗은 긴 다리를 외투 자락으로 살짝 가린 팔등신 미인들처럼 나란히 도열해 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유명하기로는 담양이 으뜸이다. 모래재 가로수 길은 나무의 굵기나 가로수 구간의 길이가 짧아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쭉 뻗은 길이 살짝 여유 있게 돌아가는 등 비교를 거부할 만큼 묘한 매력을 자랑한다.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13 : 42. 트레킹은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에서 끝난다(사진은 5구간 출발지점의 조형물을 담았다). 이랑마을 입구에서 100m 남짓 더 나아간 지점이다. 오늘은 3시간 15분을 걸었다. 앱은 12.47km를 찍는다. 고만고만한 고개를 3개나 넘은데다, 걷는 도중 냉이까지 채취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