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암산((金岩山, 321m)-이성산(二聖山, 209.8m)
산행일 : ‘17. 11. 19(일)
소재지 : 경기도 하남시 일원(광암동·춘궁동·초이동·강이동·항동)
산행코스 : 이성산성 입구→하늘스크린교회→이성산성→이성산→향여고개→금암산→성불사 갈림길→성불사→마천동(남한산성입구) 버스종점(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품고 있는 남한산(552m)은 여러 개의 산줄기들을 갖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검단지맥(黔丹枝脈)’으로 남서쪽 방향에서 검단산과 망덕산 등을 일구며 올라온 산줄기가 동쪽방향에 있는 은고개를 거쳐 하남 검단산으로 연결된다. 남동쪽으로는 약수산과 약사산, 노적산을 끼고 있는 산줄기가 있다. 북쪽으로도 두 개의 산줄기가 뻗어나간다. 연주옹성에서 시작해 금암산과 이성산을 일구며 정북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능선과, 벌봉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나가며 망바위와 객산을 일구는 능선이다. 하남시에서는 이 북쪽 방향의 두 능선을 ‘위례 둘레길’이란 이름으로 조성해 놓았다. 그러니 오늘은 이 둘레길의 일부를 걷게 되는 셈이다. 아무튼 두 산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남한산의 특징이라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금암산만은 예외이다. 제대로 된 바위 하나 구경하기 힘든 남한산 권역에서 유일하게 암봉으로 이루어졌지 않나 싶다. 덕분에 하남과 서울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빼어난 조망(眺望)을 보여준다.
▼ 산행들머리는 ’이성산성 입구‘ 버스정류장(하남시 춘궁동)
이번에도 역시 대중교통을 이용한 근교산행이다. 산행들머리인 ’이성산성 입구‘로 가려면 지하철 2·8호선 잠실역 8번 출구에서 30-5번 버스를 타면 된다. 버스는 올림픽공원과 둔촌동을 지나 하남의 광암동에서 향교고개(향여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으면 낚시터로 유명한 저수지가 있고 다음 정류장이 ’이성산성 입구‘이다. 버스정류장 옆에 오늘 걷게 될 ‘하남 위례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길을 나서기 전에 한번쯤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길 찾기에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다.
▼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골목길로 들어선다. 골목길이라고는 하지만 차량 둘이 비켜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다는 것에 유념한다. 그리고 골목 입구의 가로등 기둥에 ‘이성산성 입구’라는 표지판이 매달려 있다는 것도 참조한다. 잠시 후 ‘하늘스크린 교회’가 보였다싶으면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코너에 ‘이성산성’으로 가는 방향과 거리(300m)를 표시해 놓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잘 지어진 전원주택을 지나면서 등산로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곳에도 이성산성으로 가는 방향을 표시해놓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갈림길(이정표 : 위례둘레길(덕풍골) 3.0Km, 위례역사길(동문지) 0.4Km/ 위례둘레길(남한산성) 6.2Km/ 위례역사길(동사지) 1.4Km, 광주향교 1.3Km) 하나를 만난다. 이정표에는 ‘하남 위례길’ 중 ‘둘레길’과 ‘역사길’이 함께 나타나지만 아직은 ‘역사길’ 임을 참조한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덕풍골 방향으로 진행한다.
▼ ’둘레길‘은 신경 써서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갈림길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고, 그 사이 사이에는 ’둘레길‘ 특유의 리본을 매달아 놓았다. 길 찾기에 신경 쓰지 말고 산행을 즐기라는 배려일 것이다.
▼ 잠시 후 등산로에서 왼편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파놓은 직사각형의 연못이 보인다. ‘이성산성’에 있었던 두 개의 ‘저수지’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안내판에는 성벽에 대한 설명도 해놓았다. 남아 있는 ‘성돌’이 마치 옥수수 알 모양으로 아름답게 다듬어져 있다고 한다. 이렇게 다듬은 돌들을 70여도 각도로 비스듬히 쌓았던 성의 특징도 보여 준단다. 비스듬히 쌓았다면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고, ‘옥수수 알’처럼 모서리를 둥글게 깎았다면 쉽게 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성산성을 축성(築城)했던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에 대한 경계심을 얼마나 강하게 갖고 있었을지 능히 짐작이 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저수지를 꽉 메운 갈대 무리에 가려버린 모양이다.
▼ 저수지 뒤에 작은 건물이 보이기에 다가가보니 ‘이성산성 약수’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하지만 먹는 물로는 이용할 수가 없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하긴 서울 근교의 산에 있는 약수터 가운데 음용(飮用)이 가능한 샘물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 다시 길을 나서면 잠시 후 길이 둘로 나뉜다. 왼편은 ‘장방형 건물지’와 ‘12각 건물지’, 그리고 오른편은 ‘장방형 건물지’와 ‘8·9각 건물지’로 가는 길이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하는 게 옳다. 그래야 두 건물지를 모두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서둘지는 말자. 이곳에 이성산성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산성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과 함께 산성의 지도에다 건물의 위치를 표시해 놓았다. 이성산성(二聖山城)은 삼국시대에 지어진 오래된 성(城)임에도 불구하고 귀에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옛사람들의 글에서는 심심찮게 나온다. 옛 광주(광주, 하남, 남한산성, 성남)지역의 역사지리를 정리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헌종 때 홍경모 선생 저술) 잉적(賸蹟)조에 이성산성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그는 ’온조 초에 대화산 남쪽에 도읍을 정하려고 성터를 둘러봤는데 지금 도척면이 그곳‘이라면서. 이성(二聖)이란 이름이 붙게 된 근원을 온조로 보았다. 아무튼 이성산성은 그 나라의 수도에 두는 게 상례였던 천단(天壇)과 사직단(社稷壇)을 두었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점했었다. 그런 특징 때문이었는지 성벽 또한 견고하게 쌓았다. ’옥수수 알‘ 모양으로 다듬은 돌들을 70여도 각도로 비스듬하게 쌓았다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에서, 아니 세계에서도 유일하단다.
▼ 천천히 15분 정도를 올랐을까 ‘동문지(東門址)’라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하지만 건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구릉(丘陵)처럼 밋밋한 언덕에 목책을 둘러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을 따름이다. 이곳 동문지에 터로 남아있는 성을 근저로 해서 성벽을 복원해 놓았다고 했는데 저 언덕 아래 부분이 아닐까 싶다.
▼ 대신 조망(眺望) 하나는 끝내준다. 하남시 일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뒤에 검단산과 용마산이 버티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왼편에는 예빈산과 예봉산, 백봉산, 천마산 등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말이다. 아무튼 강 건너에서 넘어 올 적군을 언제라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이다.
▼ 동문지는 ‘하남 위례길’ 가운데 ‘위례 둘레길’과 ‘위례 역사길’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다. 능선에 세워진 이정표(위례둘레길(이성산)← 0.3Km/ 위례둘레길(덕풍골)→ 2.6Km/ 위례역사길(남문지)↓ 0.4Km)가 이를 알려주고 있다. 참고로 ‘위례 둘레길’이란 ‘하남 위례길’의 4코스(39.7㎞)로 덕풍골에서 시작해 이성산과 금암산, 벌봉, 객산, 샘재를 거쳐 하남시청에 이르고, 3코스인 ‘위례 역사길(5.8㎞)’은 광주향교에서 시작해 이성산성과 동사지를 거쳐 선법사에 이르는 구간이다. 참고로 ‘하남 위례길’의 나머지 두 코스는 1코스(5㎞)인 ‘위례 사랑길’과 2코스(13.5㎞)인 ‘위례 강변길’이다.
▼ 이정표와 리본 외에 또 다른 표시도 보인다. 이곳이 ’하남 위례길‘의 제4코스인 ’위례둘레길‘임을 알려주는 팻말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 이성산으로 향한다. 산책로처럼 잘 다듬어진 길가에 이곳이 ‘사적 제422호’인 ‘이성산성(二城山城)’임을 알려주는 빗돌(碑石)이 세워져 있다. 이성산성은 이성산 정상과 남동쪽 골짜기를 감싸 안은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총 둘레 1천665m로 삼국시대 성곽 중에서는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특히 성 내부의 경사가 대부분 완만하고 평탄한 땅에 조성돼 있어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이 매우 넓었다. 병사들의 이동 경로도 다른 성곽에 비해 편의성이 돋보인다. 성벽 안쪽에 5m 가량의 회곽도를 두었고 성이 급격하게 굽어지는 부분에는 별도의 치(雉 :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해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를 설치했는데, 너비가 12.5m에 달할 만큼 넓게 축조했다. 이성산성은 최소 15개소 이상의 대형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다른 산성에는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다. 그 중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과 사직단(社稷壇)으로 추정되는 건물도 있어 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이성산성이 옛 도시의 중심지였던 읍치성으로 축성됐을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성의 주인은 점차 신라로 굳어져 가는 추세이다. 한강 유역에 위치한 산성인 만큼 백제와 고구려, 신라 중 누가 주인일 것이냐를 두고 학계에서 설왕설래했지만, 6세기 중엽 축성돼 9세기 중엽까지 사용된 신라성이라는 게 다수설로 자리 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몇 걸음 더 걷자 건물터(이정표 : 이성산↑ 0.2Km/ 먹거리촌← 1.2Km/ 동사지→ 1.8Km/ 동문지↓ 0.1Km)가 나타난다. ‘9각 건물터’라는데 하늘에 제사(祭祀) 지내던 천단(天壇)으로 추정된다는 건물터이다. 그 옆에는 장방형의 건물터도 보인다. 산성을 방위하는 이들의 생활공간이나 저장 공간, 혹은 강당(講堂) 등으로 쓰였을 것이다. 참고로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에서는 홀수를 양수(陽數), 짝수를 음수(陰數)로 구분한다. 이때 9는 양수 중에서 가장 높은 극양수(極陽數)이다. 하늘로 해석하는 이유이다. 그와 같은 이유로 8은 음수 중에서 가장 크니 땅을 상징하는 게 자명한 일일 것이다.
▼ 천단(天壇) 터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는 ‘8각 건물터’가 있다. 땅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이다. 제천의식(祭天儀式)을 위한 장소를 수도 경주 외에 둔 것은 그만큼 이 지역에 대한 중요성을 감안한 것이 아닐까 싶다.
▼ 잠시 후 이성산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만이다.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높다란 산불감시초소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성산성이 세워진 원인을 조망이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강 인근의 아차산 일대 보루군과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 여러 성들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별로이다. 웃자란 주변의 잡목(雜木)들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성산은 조선 후기(18세기)의 지도첩인 ‘해동지도(海東地圖)’에서 나타난다. ‘북쪽 가일주막 아래’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9세기 초에 제작된 ‘광여도(廣輿圖)’에는 광주 고읍기(古邑基) 향교 북쪽에 이성산이 표현되어 있다. 동 시대에 제작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이성산은 금암산 북쪽에 있으며, 백제 온조왕의 성지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광주군 서부면 초이동에 이성산(理聖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예쁘장하게 생긴 정상표지석은 그 옆에다 세워놓았다. 정상석 옆에 이성산(二聖山)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도 보인다. 백제의 왕자 두 사람이 거주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남위례성 즉 백제도읍지와 관련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산이란다. 아무튼 전설의 두 왕자는 '비류'와 '온조'라는 설이 유력하니 참조한다.
▼ 이성산 정상에서 남쪽 금암산, 남한산성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위례 둘레길‘ 4코스를 본격적으로 탄다고 보면 되겠다. 200m쯤 내려왔을까 ’남문지 갈림길‘(이정표 : 이정표(남한산성↑ 5.6Km/ 남문지← 0.6Km/ 동문지→ 0.6Km/ 이성산↓ 0.2Km)이 나오고, 이어서 100m쯤 더 걸으면 이번엔 ’동사지 갈림길‘(이정표 : 남한산성↑ 5.5Km/ 동사지← 1.2Km/ 이성산성↓ 0.1Km)을 만난다.
▼ 그렇게 20분 정도를 내려서면 향여고개가 나온다. 금암산와 이성산을 잇는 능선안부이며 춘궁동과 광암동을 오가는 고갯마루이다. 이 근처에 향교가 있다고 해서 ’향교고개‘라 불이어 오다가 언제부턴가 ’향여고개‘로 바꿔 부르게 되었단다. 옛날에는 이곳에 성황당이 있어 오가는 길손들의 쉼터의 역할까지 톡톡히 수행했으나 도로가 확장되면서 없어졌단다.
▼ 도로를 내면서 끊어졌던 능선은 동물의 이동통로를 만들면서 다시 연결되었다. 그 양쪽 끝에는 두 개의 아치형 문을 만들었다. ’여기서부터는 남한산성 가는 길입니다‘과 ’여기서부터는 이성산성 가는 길입니다‘라는 문패까지 달아놓은 걸로 보아 남한산성과 이성산성의 경계지점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 향여고개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옛날 도로를 만들면서 생겨난 절개지(切開地)인 모양인데 그 경사를 배겨낼 수 없었던지 나무계단을 길게 놓았다. 언젠가 ’하남 위래길‘을 조성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이때 만들어진 시설들이 아닐까 싶다. 당시 기사에서는 탐방객들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판과 이정표를 설치하고, 안전사고 방지와 편의제공을 위해 안전로프와 계단. 의자 등을 설치한다고 했다.
▼ 계단을 올라서면 시야(視野)가 툭 트인다. 광암동 일원과 서울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이다. 하지만 오래 머무를 필요는 없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또 다른 조망처가 나오기 때문이다. 아니 더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고도(高度)가 높아진 만큼 시야 또한 더 넓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 이어지는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느낄 수가 없을 정도로 완만하기 때문이다. 흙산이 갖고 있는 전형적인 특징일 것이다. 대신 눈요깃거리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되겠다. 조망 또한 없다. 이 또한 흙산의 특징일 것이다. 그저 길가에 세워놓은 안내판들을 읽어가며 진행하는 게 전부인 구간으로 보면 되겠다.
▼ 그렇게 8분쯤 진행하면 ’광암동정수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금암산↑ 1.9Km, 남한산성 4.8Km/ 광암정수장→ 0.3Km/ 이성산성↓ 0.8Km)가 나오고, 이어서 7분 정도를 더 걸으면 옛무덤을 만난다. 적석분(積石墳)인 ’금암산 고분’이라고 한다. 이미 발굴을 끝냈는지, 아니면 도굴 때문인지는 몰라도 돌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안내문에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사이의 무덤이라고 적혀있는데, 약 29기가 주변에 분포되어 있단다. 참고로 광암동이란 지명은 광암동 일대에 고인돌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이 고인돌이 넓적하게 생겼다는 것을 한자로 풀어쓴 것이란다. 도로확장 공사를 하며 발견된 고인돌은 지금 하남시청 앞마당으로 이전되어 있다고 한다.
▼ 누렇게 단풍이 든 능선은 추색(秋色)이 완연하다. 아니 나뭇잎이 절반 이상이나 떨어져나간 걸로 보아 이미 겨울에 들어섰나 보다. 그러고 보니 수은주가 영하로 내려갔다는 뉴스가 나온 지 이미 오래되었다.
▼ 둘레길 곳곳에는 수많은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다. 주변에 보이는 수목(樹木)에 대한 설명은 물론이고,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나 지명의 유래 등을 적어 이야깃거리가 있는 ’둘레길‘을 만들었다. 읽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는 얘기이다.
▼ 지금 걷고 있는 ’위례 둘레길‘은 ’하남 위례길‘ 중 제4코스로 하남시청을 시작점으로 샘재와 남한산성(벌봉), 금암산, 이성산성을 거쳐 덕풍골에 이르는 39.7㎞의 구간이다. ‘하남 위례성’ 궁(宮)의 내부 지역을 둘러싼 산을 걷는 코스라고 보면 되겠다. 오늘은 이중 일부를 걷는 셈인데, 금암산과 이성산을 지나면서 하남시와 서울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요즘은 서울의 랜드 마크(landmark)라 할 수 있는 ‘롯데월드 타워’를 눈에 담으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 15분쯤 걸었을까 이번에는 커다랗고 둥그런 바위 하나를 만난다. 바위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큰바위 얼굴’이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모양새가 만들어지지 않으니 문제이다. 조선 개국초기의 승려인 무학대사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는 말을 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난 멀었나보다. 하긴 하찮은 중생인 내가 어찌 부처의 마음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 몇 걸음 더 걷자 가림막이 쳐져 있는 곳이 나타난다. 가림막의 안은 말끔하게 벌목(伐木)이 되어있다. 문화재조사라도 준비하고 있는가보다 하고 다가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띠지에 ‘하남 역사박물관 문화재조사’라고 적혀있다. 어느 글에선가 하남지역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사방에 널려 있는 유적들이 어느 시대에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는지가 정확하게 밝혀진 게 거의 없다는 얘기이다.
▼ 잠시 후 고갯길인 ‘덜미재’에 내려선다. 옛날 춘궁동에서 감북동으로 넘어 다니던 민초들의 고갯길이었다. 안내판에는 이곳에서 감북동 방향, 그러니까 오른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약수터가 나오는데 그 주변에 약간의 석축이 남아 있다고 적혀있다. 조금 전에 보았던 ‘문화재조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고갯마루에 세워진 이정표(금암산↑ 0.8Km/ 덜미재약수터→ 0.1Km/ 황골← 1.2Km/ 이성산성↓ 1.0Km)를 보면 황골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곡식이 영글어가는 경작지에 아침 햇살이 비치면 경사면이 온통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덜미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이어서 봉우리 하나를 넘어 작은 안부까지 떨어지더니 이번에는 엄청나게 가팔라져버린다.
▼ 금암산 정상 바로 아래, 그러니까 급경사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 가운데 곧장 능선을 타는 길은 쉽게 도전할 일이 아니다. 특히 애인이나 아내, 아이들과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삼갈 일이다. 얼마나 가파른지 네발로 올라가거나 안전로프에 몸을 맡겨야만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르기 때문이다. 조금 편하게 오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오른편으로 난 우회로(迂廻路)를 택하면 된다.
▼ 위험구간이 끝나면 ‘엄마새와 아기새 바위’라고 적힌 안내판이 나타난다. 눈에 담을 만한 특징이 없는 평범한 바위 앞에다 세워 놓았는데 도대체 어떤 바위를 지칭하는지 모르겠다.
▼ 그 옆에는 ‘범바위’라고 적힌 또 다른 안내판도 보인다. 안내판 뒤로 조금 더 내려가니 바위절벽이 나타난다. 이 바위절벽 아래에 굴이 있는데 옛날 이 굴에서 호랑이가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 범바위는 하남시 일원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이다.
▼ 바위에 오르면 겹겹이 쌓인 산릉들이 빠짐없이 시야에 잡힌다. 벌봉에서 객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이 맨 앞에 섰고, 그 뒤에는 용마산에서 검단산으로 연결되는 검단지맥, 그리고 그 왼편에는 예빈산에서 예봉산, 백봉산을 거쳐 천마산으로 이어지는 천마지맥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 조금 더 오르자 금암산(金岩山) 정상이다. 이성산에서 1시간 30분, 산행을 시작한지는 2시간 10분이 지났다. 분지(盆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널따란 정상에는 고상하게 생긴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옆에는 금암산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산에 바위가 많고, 그 바위가 비단빛깔을 띤다고 해서 금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바위가 얼기설기 얹혀 있는 듯해 ‘얼거산’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단다.
▼ 금암산 정상은 ‘죽인다’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을 정도로 조망이 장쾌하다. 청계산과 관악산이 남쪽으로 장벽을 이루고, 잠실 너머 한강은 도시 속의 호수처럼 바라보인다. 그 오른쪽에는 북한산과 도봉산의 암릉에 이은 수락산이 기운찬 산릉을 이어나가고 있다. 특히 최근 서울의 랜드마크(landmark)로 자리 잡은 ‘롯데월드 타워’의 자태는 한마디로 장관이다.
▼ 금암산은 육산(肉山)이라기보다는 골산(骨山)에 가깝다. 전형적인 육산의 형태를 띠고 있는 남한산의 줄기임을 감안할 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 덕분에 볼거리가 널려있다. 동서로 터지는 조망은 물론이고, 곰의 머리처럼 생긴 바위와 거북이를 닮은 바위 등 기기묘묘(奇奇妙妙)하게 생긴 바위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편이다. 그래선지 정상에는 여러 곳에 벤치를 놓아두었다. 서서히 즐기다 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 다시 길을 나선다. 남한산성 방향으로 10분 남짓 더 걷자 ‘참샘골 갈림길’(이정표 : 남한산성 서문↑ 2.2Km/ 참샘골→ 1.0Km/ 금암산↓ 0.4Km)이 나온다.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참샘골’이 나오는데 골짜기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를 마을 주민과 등산객들이 애용하면서 ‘찬샘골’이라고 불렸는데 언제부턴가 참샘골로 바뀌었단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널문이고개’(이정표 : 남한산성 2.0Km/ 항동 1.0Km/ 금암산 0.3Km)에 내려선다. ‘널문이’는 캐슬렉스골프장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 입구의 참나무 아래에 성황당이 있었으며 그곳에 큰 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 큰문을 가리키던 ‘넓은 문’이 ‘넓은문이→넓문이→널문이’로 변했다는 것이다. 또한 항동(項洞)이란 고골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길목(項)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길가에 ’연리목(蓮理木)‘이라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연리목이란 뿌리가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기둥을 사이좋게 합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리목을 ’사랑나무‘ 혹은 ’부부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나무 앞에서 서로 손을 잡고 기도하면 부부의 금슬이 좋아지고, 남녀 간에는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 널문이고개에서 10분쯤 더 오르자 ’골프장갈림길‘(이정표 : 남한산성↑ 1.6Km/ 골프장→. 쌍바위약수 1.8Km/ 이성산성↓ 4.0Km)이 나오고, 이어서 15분 후에는 ’성불사 갈림길‘(이정표 : 서문↓ 0.7Km/ 성불사→ 1.8Km/ 이성산성↓ 4.9Km)에 이른다. 이곳에서 오른편 성불사 방향으로 내려서면서 줄곧 함께 해온 ‘위례둘레길’과는 이별을 고한다. 이후부터는 검단산·망덕산 산행 때(‘17.4.9) 이용했던 하산로와 겹친다. 자세한 기술을 생략하는 이유이다.
▼ 산행날머리는 송파구 마천동(남한산성 입구) 버스종점
잠시 후 연주봉 옹성이 바라보이는 봉우리를 넘었다싶으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데크계단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40분 정도를 내려가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1976년에 창건되었다는 성불사가 나타나고, 골목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오면 마천동 버스종점에 이르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5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이 걸린 셈이다. 하지만 시간에 의미를 둘 일은 아닌 것 같다.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걷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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