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산(飛鳳山, 227.8m)
여행일 : ‘17. 2. 12(일)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가사동 등 몇 개 동과 보개면, 대덕면의 경계
산행코스 : 남파로오거리→약수사→남자약수터→비봉정→장수바위→비봉마루→박두진시인 묘→비봉나래→너리굴문화마을→샛죽바위산(거북바위)→굴암사(산행시간 : 2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지인들과 함께
특징 : 한마디로 아담하고 편한 산이다. 그리니 산행이라는 표현보다는 차라리 산책쯤으로 치부하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그래선지 이곳 지자체인 안성시에서도 산 전체를 아예 공원으로 가꾸어 놓았다. 널따랗게 산책로를 내고 약수터를 깔끔하게 단장하는 한편 곳곳에다 벤치와 운동기구들을 배치해 쉼터로 조성했다. 두어 곳의 정자는 보너스(bonus)로 보면 되겠다. 뿐만 아니라 배드민턴장과 체력단련장 등 본격적으로 몸을 만들 수 있는 공간도 만들었다. 숫제 도심(都心)의 공원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아니나 다를까 약수사 옆에 세워진 등산로 안내도에는 이곳을 ‘비봉공원’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곳 비봉산은 등산이라기보다는 산책코스로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짙은 소나무 숲속으로 난 보드라운 흙길을 산책삼아 걸으며 산정의 9부 능선에 축조했다는 토성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이다. 거기다 너리굴문화마을에라도 들러 전시작품들도 구경하고, 평소에 사용하는 다양한 물건들을 만들어 본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 산행들머리는 한주아파트 앞 남파로오거리(안성시 봉남동 354-2)
오랜만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근교산행이다. 강남에 있는 경부고속터미널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안성시까지 온다. 1시간 정도가 걸려 도착하게 되는 안성터미널에서는 택시를 이용해서 들머리까지 왔다. 일행이 네 명이나 되니 버스요금으로 택시를 타면 남은 돈으로 어묵 하나씩을 사먹어도 되니 이 얼마나 경제적인가. 거기다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까지도 단축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 한주아파트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왼편에 보면 굵은 소나무들까지 옮겨 심어 놓은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이 공원의 뒤편 산자락에 내놓은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곳이 비봉산 등산로 ’D코스‘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작은 꽃밭을 만난다. 앙증맞게 생긴 조형물들까지 배치해 놓은 것이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역력하다. 누군가 이곳 비봉산을 일러 도심공원(都心公園)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 산길은 경사(傾斜)가 거의 없다. 그런데도 가운데에다 이런 난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이 정도의 가파름에도 힘겨워할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래 위에서도 얘기 했듯이 이곳은 공원이다. 그러니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산길이 아니라 산책로라고 보면 될 일이다.
▼ 산행을 시작한지 7분쯤 되었을까 길이 둘(이정표 : 팔각정↑ 280m/ 약수사← 390m)로 나뉜다. 곧장 팔각정으로 가도 되지만 왼편에 있는 약수사를 들러보기로 한다. 예정된 산행거리가 짧으니 구태여 발길을 서두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약수사가 비봉산에 들어앉은 다섯 개의 사찰 중에서 가장 큰 절이라는 것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 산자락을 헤집으며 난 길을 따르다보면 왼편 숲이 잠시 열리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안성시가지가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 5분쯤 후 약수사(藥水寺)에 이른다. ’한국불교 금강선원‘ 소속의 사찰로 알고 있는데, 외관으로 보아 역사는 그다지 깊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절은 대웅전(大雄殿)을 한가운데에 두고 왼편에는 무량수전(無量壽殿)과 범종각(梵鍾閣)을 그리고 대웅전의 뒤에는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삼성각(三聖閣)을 배치했다. 그리고 입구에는 요사채(寮舍)를 갖추었으니 비록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작다고 할 수도 없는 절이다. 거기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화강암을 깎아 만든 대불(大佛)까지 조성해 놓았다. 절의 이름에 비추어 볼 때 약사여래(藥師如來)가 아닐까 싶다. 아차! 용왕각(龍王閣)을 빼먹을 뻔 했다. 요사채 옆의 동혈(洞穴) 안에 있는 약수터에다 제단(祭壇)을 만들고 용왕각이란 이름을 붙였다. 약수사라는 이 절의 이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 절을 빠져나오면 오거리이다. 정상과 남자약수터, 안성향교, 법계사 그리고 통일사로 연결되는 길이 나뉜다는데 방향을 구분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이곳에는 비봉공원등산로안내도와 ’119구호지점표시목(1-2)‘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정표가 더 눈길을 끈다. 약수터를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다. 목욕탕이나 화장실 등 은밀한 곳에만 남녀구분이 있는 줄로 알고 있었기에 가슴부터 두근거린다. 내 나이 육십을 훨씬 넘겼건만 아직도 난 젊은가 보다. 이 정도를 갖고 가슴까지 뛰는 걸 보면 말이다.
▼ 그러니 약수터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결과는 어처구니없다는 헛웃음뿐이다. 탁 터진 것이 여느 약수터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가 비밀스러운 게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깨진 것은 서운했지만 물맛만은 괜찮았다. 이곳까지 내려온 본전은 찾은 셈이다. 아무튼 이곳 비봉산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山城)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산성에 머물던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 세 곳이 있었는데 그중 둘이 남탕과 여탕이라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본성(本城) 동쪽(외성의 안쪽)에 있었다니 참조한다.
▼ 약수터의 옆에는 ’체력단련장‘이 있다. 이 또한 비봉산의 자랑이다. 비봉산이 안성시민들의 건강지킴이 노릇을 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체력단련장에는 웬만한 헬스클럽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수많은 운동기구들을 갖춰 놓았다. 이런 시설들을 갖추고 있는 안성시민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 남자약수터 위에는 배드민턴 코트가 있다. 그리고 여자약수터는 그 위에 자리 잡았다. 약수터로 내려가 보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 실체를 알고 난 지금은 궁금할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 약수터를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돌탑 두 기가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는 능선삼거리(이정표 : 청소년수련원← 2830m/ 비봉정→ 240m/ 약수사↓ 290m)에 올라선다. 하지만 이들보다는 10m쯤 떨어진 곳에 세워진 또 다른 탑이 더 눈길을 끈다. 젊어서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한다는 ’소불근학 노후회(少不勤學 老後悔)‘와 재산을 아껴 쓰지 않을 경우 늙어서 후회한다는 ’부불검용 빈후회(富不儉用 貧後悔)‘ 등의 마음에 새겨 둘만한 글귀들을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 오른편으로 향한다. 비봉정을 다녀오기 위해서이다. 비봉산의 정상이 왼편에 있으니 비봉정을 둘러본 뒤에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야 함은 물론이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널따란 공터가 나타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농구코트가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텅 비어있다. 그래 산꼭대기까지 올라와 농구를 할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 잠시 후 ’비봉정(飛鳳亭)‘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만이다. 널따란 공터에는 팔각으로 된 정자(亭子)를 이층으로 지어 놓았다. 뛰어난 조망을 실컷 즐겨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정상이 아닐 뿐만 아니라 길 또한 나뉘지 않으니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대신 정자의 앞에다 삼각점(경기 302)을 설치해 놓았다. 그만큼 지리적으로는 중요한 위치라는 얘기일 것이다.
▼ 정자에 오르면 한경대학교는 물론이고 아파트단지 등, 안성 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반대편으로 눈을 돌리면 이번에는 드넓은 들녘이 펼쳐진다. 그 뒤에는 수많은 산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무이산과 칠현산, 칠장산, 도덕산 등을 품고 있는 한남정맥일 것이다.
▼ 공터의 한쪽 귀퉁이에 네모지게 돌을 쌓아 놓았다. 그 생김새가 영락없는 제단(祭壇)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나가던 이곳 주민께서 옛날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알려주신다. 이곳 비봉산이 안성의 주산(主山)이었다니 기우제(祈雨祭) 등의 의식을 치렀지 않나 싶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소나무길 300m‘이라고 적힌 이정표 하나가 보인다. 하지만 개의치 말고 지나칠 일이다. 이름에 어울릴만한 소나무들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어린 소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을 따름인데, 그것마저도 버팀목을 대어 놓은 것이 이식한지도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지나야만 이름에 걸맞는 숲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잠시 후 커다란 바위 몇 개가 모여 있는 구릉(丘陵) 위에 선다. 비봉산의 명물이라는 ’장수바위(將軍巖)‘이다. 옛날 어느 장군이 앉았던 자국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는데, 그보다는 ’굴기(屈起)‘, 봉비천인(鳳飛千仞)’ 등 바위의 표면에 적어놓은 글귀들이 더 눈길을 끈다. ‘벌떡 일어나라’, ‘봉황같이 날아라’,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이 외에도 많은 글귀들이 적혀있으나 일일이 판독해 보려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저 바위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고 그 갈증을 해소해 볼 따름이다. 참! 안내판에는 이곳 비봉산성에 대한 설명과 함께 지도(地圖)도 그려 넣었다. 신석기시대에 쌓아서 고려시대까지 사용했다니 역사 상식도 늘려볼 겸해서 한번쯤 살펴보고 갈 일이다.
▼ 다시 길을 떠난다. 잠시 후 또 다른 바위지대를 만난다. 아까 같이 이름이 있는 바위는 아니지만 대신 이곳에는 수많은 길손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다. 바위 위에 그네들이 쌓아올린 돌탑들이 그 증거이다. 염원을 담은 하나하나의 돌들이 쌓여 수많은 돌탑들을 만들어 냈다. 그 소원들 모두가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지기를 빌어본다.
▼ 길가에 ‘시민들이 행복한 맞춤도시, 안성’이라고 적힌 널빤지가 보인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글귀대로 모든 시민들의 행복해 하는 도시를 만들어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게 바로 유토피아(Utopia)일 테니까 말이다.
▼ 산길은 일단 순한다. 보드랍기 짝이 없는 황톳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둘이 나란히 서서 걸어도 좋을 만큼 길이 넓기까지 하다. 산책코스로는 최상이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 소나무 숲길까지 갖췄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 얼마쯤 진행했을까 왼편 능선 위에 통신시설이 보인다. 정규 등산로에서 벗어나있지만 일단 올라서고 본다. 하지만 그 결과는 후회막급(後悔莫及)이었다. 웃자란 잡목들 속에 이동통신사의 중계시설이 들어앉아 있을 뿐 다른 볼거리는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길이 나있지 않아 잡목을 헤치며 나아가다 싸대기 두어 대를 얻어맞고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 비봉정을 출발한지 30분쯤 되어 비봉마루에 올라선다. 십여 평의 공터에 육각의 정자(亭子)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곳이 비봉산의 정상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모양새 또한 정상으로 보긴 힘들다. 밋밋하게 생긴 것이 그저 능선상의 한 지점에 가깝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곳이 정상이라는 표시는 있다. 이곳 지자체인 안성시청에서 ‘여기는 비봉마루입니다’라고 적은 안내도를 세워놓았는데, ‘마루란 하늘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이라는 설명과 함께 ‘비봉마루는 산에서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는 비봉산의 꼭대기, 정상입니다.’라고 적어 놓았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정상은 정자 외에도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거기다 운동기구까지 갖추었으니 몸이라도 풀면서 쉬어가라는 모양이다.
▼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올라온 반대방향이다. 산길은 여전히 순하다. 보드라운 흙길이 오르내림이 거의 없이 평탄하게 이어진다. 아무튼 산길은 참 곱다. 산길이 편하다보니 마음까지 편해졌나 보다. 짙은 솔향이 코끝을 간질이는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문득 피톤치드(Phytoncide)의 통속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바로 소나무이니까.
▼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또 다른 쉼터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청록파 시인인 박두진(朴斗鎭)의 시판(詩板)을 세워 놓았다. 오늘 산행에서 유일하게 만나게 되는 시판인데 왜 하필이면 그의 작품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향연’이란 시(詩)를 적어 놓았다.
▼ 잠시 후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들머리에 ‘박두진 시인의 묘’로 연결된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조금 전에 만났던 박두진 시인의 시판을 세운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아무튼 안내판에는 그의 약력(略歷)과 함께 ‘하늘’이라는 그의 시를 적어 넣었다. 이왕에 온 김에 묘역을 찾아보기로 한다.
▼ 100m 조금 못되게 내려가면 박두진(朴斗鎭 : 1916~1998) 시인의 묘역(墓域)이 나온다. 박두진의 아호(雅號)는 혜산(兮山), 경기도 안성시 봉남동 360번지에서 태어났다. 8세가 되던 해에 안성시 보개면 동신리로 옮겼다가 17세 되던 1933년에는 서울 창전동으로 이사를 했다. 1939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에 시 <향현>, <묘지송>, <낙엽송>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으며, 1946년에는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청록집>이라는 공동시집을 펴냈다. 이후 <바다로>, <햇볕살 따실 때> 등을 발표하고 1949년 개인시집으로는 첫 번째인 <해>를 펴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박두진의 시는 새롭게 변하는데, 시집 <오도>, <거미와 성좌>, <인간밀림>에 이르러 인간의 자유와 절대자에 대한 갈망을 반복되는 관념적 언어로 읊었다. 그 뒤 4.19혁명을 겪으면서 <우리는 아직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등을 발표했다. 이후에도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격정을 보여준 시세계는 계속 이어졌다. 연세대학교, 한양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추계예술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상훈은 아시아자유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동북아기독문화상, 인촌상 등을 받았다.
▼ 다시 능선으로 향한다. 구태여 아까 내려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묘역의 오른편으로도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시인 가문의 다른 묘역들 사이를 지나면 능선 위에 있는 본래의 등산로를 다시 만나게 된다. 능선에서는 비봉나래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정표는 없지만 오른편 방향이다. 그리고 쉼터를 겸하고 있는 ‘금석동 갈림길’(이정표 : 비봉나래(송신탑)↑ 0.2Km/ 금석동 돌산길← 0.8Km/ 비봉마루(사격장)↓ 1.13Km)을 지났다 싶으면 곧이어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비봉나래에 올라선다.
▼ 비봉마루를 출발한지 30분 만에 비봉나래에 올라선다. 헬기장 용도로 만들었지 않나 싶을 정도로 널따란 정상에는 삼각점(경기 287)과 태양열을 이용한 전광판, 그리고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세운 여기까지 오는데 소모되는 칼로리의 양을 걷는 방법에 따라 구분해 놓은 안내판이 보인다. 혹자는 이곳을 정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정표(너리굴문화마을 0.1Km/ 약수사 3.3Km)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119의 국가지점번호표시목(다바 8020-9319)을 증거로 들면서 말이다. 하지만 난 아까의 비봉마루에다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아무래도 ‘119’ 보다는 이곳 지자체인 ‘안성시청’에 더 신뢰가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이곳을 비봉(飛鳳), 즉 날아가는 봉황의 날개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여기고 싶다. 나래란 날개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경우 봉황의 머리에 해당되는 비봉마루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 비봉나래에서의 조망(眺望)도 뛰어난 편이다. 비록 한쪽 면으로만 시야가 열리지만 보개면의 들녘과 함께 무이산과 칠현산, 칠장산, 도덕산 등이 늘어서 있는 한남정맥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 샛죽바위산으로 향한다. 이동통신사의 중계시설이 세워져 있는 방향이다. 그런데 송신탑의 앞에서 기괴하게 생긴 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외모로 보아 말라 죽은 게 분명한데도 줄기의 곳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고 있는 것이다. 끈질긴 생명력이 아닐 수 없다. 조그만 역경에도 쉽게 좌절해버리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본보기가 될 수도 있겠다.
▼ 잠시 후 오른편으로 오솔길(이정표 : 굴암사/ 너리굴문화마을) 하나가 나뉜다. 너리굴문화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오른편으로 내려간다. 사유(私有)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시설물(이정표)에까지 나타나 있다는 점이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가니 주택모양의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단시설지구가 나온다. ‘너리굴 문화마을’이란다. 너리굴문화마을에서 '너리굴' 이란 안성 토박이 말로, 백두산 천지부터 시작된 산맥이 차령산맥의 끝부분인 비봉산 자락에서 넓은 골짜기가 되었는데 그것을 '너리굴'이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곳에 마을을 만들었는데 자연과 예술이 한데 어울려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산책로를 따라 잠시 걷다가 마을로 직접 들어가는 것은 생략하기로 하고 전망대로 향한다. 그렇게 속속들이 마을을 알아야 할 필요까지는 못 느꼈기 때문이다.
▼ 전망대에 오르면 문화마을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외형만 보아서는 외국에라도 온 느낌이다. 해외에서나 봄직한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문화마을이라는 콘셉트(concept)에 맞춰 지은 모양이다. 이곳은 현대적인 양식의 세련된 절제미 속에 고아한 아취를 담고 있는 미술전시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개관 이래 작가 권용자의 <누드 크로키 전>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신진 중견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해왔다고 한다. 미술관 외에도 동물농장과 입사박물관, 야외공연장, 조각공원 등 여러 가지 볼거리가 많다니 나들이 삼아서 한번쯤 들러볼 만도 하겠다. 특히 금속공방, 조소공방, 조각공방, 도자기공방을 운영하고 있다니 가족들과 함께 들러 우리네 생활에 사용되는 다양한 물건들을 직접 만들어 보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 되돌아 나올 때는 굳이 아까 내려왔던 길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전망대 뒤편으로 산책로로 활용하고 있는 듯한 오솔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10분 가까이 되어 능선에 오르면 이정표(굴암사, 명덕초교 2.35Km)가 세워져 있는 삼거리를 만난다. 또 다른 이정표(너리굴/ 엄마목장/ 시청,향교)도 보인다. 이로 보아 ‘너리굴문화마을’에서 산책로로 활용하고 있지 않나 싶다.
▼ 이제부터는 그냥 앞만 보고 걷는 산행이 이어진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이 구간은 일단 편하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솔가리들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거의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느낌으로 보면 되겠다. 대신 볼거리는 일절 없다. 흙산의 특징대로 눈에 담아 둘만한 지형지물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좌우가 숲으로 가로막혀 있어 조망도 별로이다. 그저 중간에 두어 번 시야가 트인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산길은 능선만을 고집한다. 덕분에 능선이 휘는 곳에서도 길 찾기에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저 능선의 모서리를 이어간다고 생각하고 진행하면 되기 때문이다. 중간에 나타나는 음식점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뭔가에 홀리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 그렇게 25분쯤 걷다보면 굴암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굴암사 0.67Km)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몇 걸음만 더 떼면 샛죽바위산의 정상이다. 이곳도 역시 정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산봉우리라기보다는 능선의 한 부분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정상표지석 등 이곳이 샛죽바위산의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 또한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정상을 독차자하고 있는 커다란 거북바위를 보고 이곳이 정상이려니 해볼 따름이다. 바위의 생김새가 거북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일행은 ‘샛죽바위’가 옳은 지명이란다. 바위가 세 개로 나뉘어져 있어 ‘세쪽바위’로 불리다가 언제부턴가 ‘샛죽바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 이제는 하산만 남았다. 거의 경사가 없다시피 한 산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대덕면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 한가운데에는 주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고층의 아파트가 들어앉아 있다. ‘아파트공화국’이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별명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지 않나 싶다. 도시 뿐만 아니라 이런 시골에까지 아파트가 들어와 있는 현실 말이다.
▼ 산행날머리는 굴암사(안성시 대덕면 신현리)
그렇게 17분 정도를 내려서면 굴암사(窟岩寺)이다. ‘바위굴 속에 들어앉은 절’이라는 이름이 걸맞게 요사채를 제외한 나머지 전각(殿閣)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거대한 바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있는 특이한 사찰이다. 조금만 더 가꾸면 멋진 명소로 태어나겠건만 시주가 적은 탓인지 불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파괴된 채로 방치되고 있는 등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모습이다. 설마 부처님의 영험함이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50분이 걸렸다. 하지만 중간에 간식을 먹느라 1시간 이상을 쉬었으니 실제로 걸은 시간을 2시간 40분쯤 된다고 보면 되겠다.
▼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인 이곳 굴암사는 2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향토유적 제 11호인 ‘굴암사 마애여래좌상(窟岩寺磨崖如來坐像)’이다. 거대한 화강암의 암벽에 양각된 이 마애여래좌상은 큼직한 원형(圓形)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추고 있으나, 약 30년 전에 지은 보호 건물로 인하여 그 일부가 가려져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육계(肉髻)가 있으며 상호(相好)는 원만하고 눈. 코. 입이 정제되었고 양 귀는 어깨 위까지 크게 늘어져 있다. 목에는 3도(三道)가 있고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의문(衣紋)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두어 수인(手印)은 엄지와 검지로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지었으며 왼손은 무릎에서 약간 들고 있다. 양 무릎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으며 의문은 양팔과 무릎에서 흘리고 있다. 마애불의 전면에 백색 칠을 해 놓았고, 현 좌상고(坐像高)는 354cm, 두광경(頭光經)은 200cm이다.
▼ 다른 하나는 향토유적 제12호인 ‘굴암사 마애선각좌불상(窟岩寺磨崖線刻坐佛像)’이다.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의 바로 옆 암벽(巖壁) 전면에 걸쳐 선각(線刻)으로 거대하게 조각하였으며 부분적으로 마멸된 흔적이 보이나 원형(原形)을 살피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다. 윗부분은 마멸이 심한 상태지만 머리 위에 육계(肉髻)가 있고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상호(相好)는 원만하고 양 귀는 어깨 위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목에는 3도(三道)가 있으며 법의(法衣)는 통견으로 의문(衣紋)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아랫부분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는데, 그 위에 법의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수인(手印)은 마멸되어 확실하지 않다. 불상(佛像)의 실측치는 전체 높이 417cm, 견폭 284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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