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 얼음 트레킹’ 2구간(고석정에서 순담계곡까지)

 

산행일 : ‘18. 1. 30(화)

소재지 : 경기도 철원군 동송읍과 갈말읍 일원

산행코스 : 고석정부교순담계곡(소요시간 : 50)

 

함께한 산악회 : 갤러리산악회

 

특징 : 한탄강은 북한의 평강에서 발원한 수계(水系)가 철원, 포천, 연천을 거쳐 임진강에 다다르는 전장 110km의 큰 강이다. 이 강은 27만 년 전 신생대(新生代) 때 북한 평강 서쪽 5km 지점에 위치한 오리산(452.2m)에서 분출한 용암이 흘러 생성된 국내 유일의 화산강(火山江)’이다. U자형 계곡으로 거센 물결과 바람이 만든 현무암 협곡과 30~50m의 수직절벽으로 이뤄졌다. 덕분에 송대소의 주상절리와 직탕폭포 고석정, 순담계곡 등 곳곳에 수많은 명소들을 만들어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을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고석정에서 순담계곡까지 이어지는 계곡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길은 물살이 세고 깊은 탓에 여름철에도 통행이 불가능한 금단(禁斷)의 길이었다. 그 길이 이번 겨울에 처음으로 열렸다. ‘한탄강 얼음트레킹축제를 위해 물길에다 부교(浮橋)를 가설(假設)한 것이다. 덕분에 여름철 래프팅을 즐기며 스치거나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던, 억겁의 시간이 빚은 자연 예술을 이번 겨울에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석정으로 들어선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한탄강 물길의 위로 섶다리가 하나 놓여있다. ‘섶다리는 경북 청송 땅에 살던 청송 심씨문중에서 1428(세종 10)에 최초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청송 심씨시조묘(始祖墓)가 덕리(청송읍)의 보광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장마로 인해 불어난 용전천 강물 때문에 혹시라도 제사(祭祀)를 지내려고 온 자손들이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을 걱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섶나무(잎나무와 풋나무 등)를 엮어 만들었다는 이 다리는 한때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1996년에 청송군에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복원하면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바 있다. 아무튼 이 복원사업은 꽤나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았고, 이를 본 전국의 지자체들이 너도나도 섶다리를 놓았다. 이곳 철원군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다리에 올라서면 강 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고석(孤石) 바위와 건너편 언덕에 걸터앉은 고석정 정자(亭子)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그렇다. 그동안 사진에서 보아오던 고석정의 풍경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섶다리는 바로 이런 풍경들을 놓치지 말라고 놓았던 모양이다. 참고로 고석정(孤石亭)은 철원팔경 중 하나이며 철원 제일의 명승지로 꼽힌다. 한탄강 한복판에 치솟은 10여 미터 높이의 거대한 기암(奇巖)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양쪽으로는 한탄강물이 휘돌아 흐른다. 여기에 신라 진평왕 때 축조된 정자(亭子)와 고석바위 주변의 계곡을 통틀어 고석정이라 한다. 하지만 고석정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조선시대 명종 때 임꺽정(林巨正, ?-1562)의 배경지로 알려지면서부터이다.



맞은편 언덕에 정자(亭子) 하나가 마치 제비집처럼 걸터앉아 있다. 그동안 드라마나 다큐, 또는 사진에서 자주 접하던 고석정(孤石亭)이다.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과 고려 충숙왕(재위 12941339)이 찾아와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그 외에 고려 승려 무외(無畏)의 고석정기와 김량경의 시() 등에서도 고석정이 나타난다. 정자는 고석바위를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난간에 기대어서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다보면 누구라도 시 한수는 절로 읊게 될 것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직접 올라가보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다. 작년에 이미 흥얼거려 보았었기 때문이다. 원할 경우엔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되지 않겠는가. 참고로 지금의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71년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것이다. 19711216일 강원도의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



정자의 앞, 강의 한가운데에는 20m 높이로 우뚝 솟은 화강암 봉우리가 그 빼어난 자태를 한껏 자랑하고 있다. 거대한 화강암이 층층이 쌓인 바위와 그 틈에서 자라는 소나무 군락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고고하다. 이곳 고석정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고석바위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의적 임꺽정이 저 기암(奇巖)의 큰 구멍 안에 숨어 지냈다고 하는데, 고석바위의 정상에는 성지(聖地)와 도력(道力)이라는 글자, 그리고 구멍 안의 벽면에는 유명대(有名坮)와 본읍금만(本邑金萬)이라는 글자가 음각(陰刻)되어 있다고 한다. 건너편 벼랑에는 임꺽정이 웅거(雄據)했다는 석성(石城)의 흔적도 남아있단다.



고석정 부근은 임꺽정이 활동했던 무대로 알려져 있다. 임꺽정은 황해 봉산에서 갈대를 꺾어 고리를 만드는 고리백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황해 일원에는 왕실과 명문거족들 소유의 토지가 많았는데 조선 중기부터 대대적인 개간사업이 진행되었다. 개간에 동원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음은 당연했을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도 황해도 개간사업에 대한 백성들의 고통과 불만이 상세하게 묘사되니 참조한다. 아무튼 임꺽정은 생계 터전인 갈대밭이 개간되어 더 이상 고리백정 노릇조차 할 수 없게 되자 그 참담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황해도와 경기도 경계에 있는 재약산 청석골로 들어가 화적패가 된다.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열어 약탈물들을 인근 백성들에게 나눠주면서 민심(民心)을 얻은 임꺽정은 점차 세력을 키워 반란군(叛亂軍)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역사학자들이 이 사태를 임꺽정의 난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끝내는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던 남치근 장군이 지휘하는 정예 부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측근이었던 서림의 밀고로 체포되어 참수(斬首)가 되었지만, 민초(民草)들의 가슴에는 영웅으로 남아있다. 영웅에 대한 민초들의 기대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모양이다.



젊은 연인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드나들었을 나루터는 현재 텅 비어있다. 고석정의 명물인 통통배가 부지런히 드나들었으련만 강물이 얼어붙었으니 배가 움직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고석바위 앞에도 얼음폭포가 만들어져 있다. 역시 강 건너 산자락이다. ’메인 행사장에서 보았던 것보다 높이는 다소 낮아졌지만 단()을 둘로 나눔으로써 조형미(造形美)를 더했다. 한결 더 아름다워졌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게다. 그 누가 이렇게 뛰어난 포토죤(photo zone)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강가에 만들어놓은 부교(浮橋)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저런 부교는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길어봤자 50m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곳 고석정에서 순담계곡으로 이어지는 강가에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것이다. 부교의 공식 명칭은 한탄강 물윗길’, ‘한탄강의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부교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하긴 강물이 꽁꽁 얼어붙으면서 얼음길을 내놓았으니 걷기에 불편한 부교를 일부러 이용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원군청 관계자들에게는 고마움을 전해본다.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고석정에서 순담계곡까지의 트레킹 구간이 올해부터 새로이 열렸기 때문이다.



순담계곡(蓴潭溪谷)으로 향한다. 이 구간은 올해 새로 얼음트레킹 코스에 포함됐다. 물살이 빠르고 경관이 수려해 래프팅 명소로 꼽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물살에 닳은 웅장한 화강암 바위들이 계곡 양편으로 포진하고 있어 상류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꽁꽁 얼어붙은 강물 위를 걸으며 겨울 정취 속으로, 자연의 시간으로 천천히 빠져든다. 참고로 순담계곡(蓴潭溪谷)은 작게는 한탄강펜션이 있는 군탄리 일원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고석정(孤石亭)까지의 구간을 통칭하기도 하는데, 한탄강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알려져 있다.



고석정 일대는 양 옆이 천 길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바위 협곡(峽谷)이다.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白堊紀, Cretaceous Period)에 암석을 뚫고 들어온 마그마(magma)에 의해 만들어진 화강암이 고석 주변의 기반암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이 부근은 용암대지 형성 이전의 원지형(原地形)을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지형·지질 유산이란다.




화산암이 빚어놓은 특이한 문양(文樣)이 눈에 띈다. 여수 앞바다에 위치한 사도(沙島)‘에서 보았던 용미암(龍尾岩)‘을 떠올리게 만드는 문양이다. 문양의 생김새가 용()의 꼬리와 흡사하다는 그 바위 말이다. 용미암이 있던 곳은 용암(熔岩, lava)이 바다로 흘러내리다 급격하게 식으면서 형성된 지형이라고 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 고석정 일대도 역시 화산암지대이다. 사도와 같은 지형인 것이다. 그래서 같은 문양이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강의 양 옆이 수직의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일대는 철원용암대지의 일부로서 추가령열곡(楸哥嶺裂谷)을 따라 분출한 용암이 평평한 대지를 만들었다.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이 그 용암대지를 침식(侵蝕)하며 흐른다. 이 용암대지는 신생대 말에 해당하는 제4기에 평강에서 남서쪽으로 3km에 위치한 오리산(454m)을 중심으로 분출한 현무암이 구조선을 따라 분출되어 이른바 철원ㆍ평강 용암대지를 형성하였으며, 이 용암은 열곡을 따라 북쪽으로는 남대천을 따라 북한의 강원도 고산군 북부일대까지, 남쪽으로는 한탄강과 임진강을 따라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일대까지 흘러내렸다. 이후 침식력이 작용하면서 용암대지를 수직으로 계곡을 형성하며 깎아내렸기 때문에 한탄강은 깊이 40m에 이르는 협곡을 형성하는 곳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부근의 좁은 골짜기를 미국의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 구간에도 역시 농업기반시설인 양수장(揚水場)이 보인다. 하지만 벽화(壁畫)가 그려져 있던 아까의 것들과는 천양지차의 외관(外觀)이다.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어야할 그림들은 보이지 않고, 그저 볼썽사나운 건물 하나만이 덩그러니 서있는 것이다. 전편에서 얘기했던 리모델링(remodeling) 사업에 포함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강을 건너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비록 임시로 만들었지만 철재(鐵材)로 단단하게 만들어 튼튼하기 그지없다.




강변의 바위 위에 수백, 아니 수천 개도 넘을 것 같은 돌탑(石塔)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작은 돌들을 쌓아올렸는데, 작은 것은 두세 개, 개중에는 십여 개나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도 보인다. 얼마나 소망이 간절했으면 저리도 많이 쌓았을까. 그 간절함이 전이(轉移)라도 되었는지 내 마음 또한 숙연해진다. 그리고 나 또한 두어 개의 돌을 쌓아 올려본다. 내 작은 소망을 담아서 말이다.




조금 묘하게 생긴 돌들도 보인다. 제주도에서나 볼법한 구멍이 숭숭 뚫린 새까만 현무암(玄武岩, basalt)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이다. 현무암은 화산과 마그마(magma)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화성암(火成巖)에 속한다. 검은색 또는 회색으로 알갱이의 크기가 매우 작으며 표면이 매우 거칠거칠하다. 또한 겉 표면에는 크고 작은 구멍이 송송 뚫려있다. 화산이 분출할 때 가스 성분이 빠져나간 자리이다. 가스가 빠져나간 자리를 다른 마그마가 메우기도 전에 굳어 버리기 때문에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아무튼 이곳 한탄강 일대는 화산활동이 있었던 곳이라 돌하루방을 만드는 제주도의 화산석이 강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하지만 제주도의 현무암이 화산재인 것과 달리 이곳 철원은 용암이 바로 굳은 것이라 훨씬 무겁고, 철 성분이 포함되어 불그스름한 빛깔을 띤다는 것을 참조한다.



이제 길은 강의 가장자리를 따라 나있다. 강폭이 좁아지면서 물살이 빨라지자 맹추위에도 불구하고 강물이 얼어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어떠한 추위에도 얼지 않은 곳인지도 모르겠다. 화천군청에서 강물 쪽으로의 접근을 막기 위해 애초부터 ()을 쳐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강가의 바위들이 눈요기로 삼아도 좋을 만큼 예뻐지기 시작한다. 화산이 만들어낸 화강암(花崗岩, granite)들이다. 간간이 눈에 띄던 현무암들은 언제부턴가 사라졌고 이젠 화강암 천지가 되어버렸다. 화강암과 현무암 모두 화산활동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암석이니 특이할 게 뭐가 있겠는가마는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다른 모양이다. 검은 표면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있는 현무암과는 달리 화강암은 대체로 밝은 색깔이며 표면이 매끈한 편이다. 그러다보니 기괴한 모양의 바위들을 많이 만들어낸다. 이곳 순담계곡 주변을 절경으로 꼽는 이유일 것이다.




가장자리로도 길을 낼 수 없는 곳에는 부교(浮橋)를 설치해 놓았다. 양안(兩岸)이 모두 날카로운 절벽으로 이루어졌다. 강폭이 좁고 깊은 협곡을 이루니 물의 낙차가 크며 물살이 셀게 분명하다. 그러니 소()와 연(), ()이 곳곳에 널려있을 것이다. 이곳 순담계곡은 여름철에도 트레킹을 할 수가 없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다. 이렇게 발붙일 곳도 없는 곳을 어떻게 지나다닐 수 있겠는가.






얼어붙은 강물의 위를 걷게 되는 곳도 가끔 나온다. 이곳도 역시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다. 하지만 절벽이나 바위에 가까운 곳, 물살이 센 곳, 숨구멍 주변은 얼음 두께가 얇은 경우가 많다. 그런 곳은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행여 그런 곳이 나올라치면 철원군에서 금줄을 쳐놓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결빙 상태를 못 믿겠다면 한 사람씩 천천히 지나가는 것이 원칙이다. 가능하면 여러 사람들이 다닌 흔적을 찾아 발을 디디도록 한다.




한탄강은 오래전 화산 분출로 인해 만들어진 독특한 지형이다. 골짜기를 메우며 흐른 용암이 세월이 지나면서 강물에 침식되어 기묘한 풍광을 만들어냈다. 수직 절벽으로 이루어진 협곡 속에 갇힌 강줄기의 속에는 화강암과 현무암이 속살을 드러내며 숨어 있다. 트레킹 길은 그 속살 사이를 헤집으며 나있다. 평소 가까이하기 힘든 절묘한 강변 풍광을 바로 앞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길을 내놓은 것이다. 한탄강 얼음트레킹이 드러내놓고 자랑해도 괜찮을 매력이 아닐까 싶다.




강가 암반(巖盤) 위에 한탄강댐 No 603’이라고 쓰인 지표석이 세워져 있다. ‘한탄강 댐은 임진강 하류지역의 수해방지를 위해 쌓아올린 길이 705m에 높이가 85m인 홍수조절용 댐(dam)이다. 한탄강의 양안(兩岸)인 연천군 연천읍 고문리와 포천시 창수면 신흥리를 둑을 쌓아 연결시켰다. 댐이 만수위(滿水位)를 보여도 이곳까지는 물길이 미치지 못하는데도 왜 이곳에다 세워놓았을까. 근처 어딘가에 물높이 등 강물의 상황을 측정할 수 있는 시설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기묘묘한 모양새의 바위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상류와 같이 주상절리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암석이 뒤섞여 침식된 절벽의 모습이 장관이다. 강물이 깎아낸 다양한 형상의 바위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바위구경에 시간을 빼앗기다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순담계곡(蓴潭溪谷)이 나타난다. 좁은 의미의 순담계곡인데, 한탄강 물줄기가 이룬 계곡 중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곳이다. 기기묘묘한 바위와 깎아내린 듯한 벼랑, 맑은 물의 소()와 담(), 천연의 하얀 모래밭이 어우러져 경치가 뛰어나다. ‘순담(蓴潭)’이란 조선 정조 때 김관주가 거문고 모양의 연못을 파고서 제천 의림지에서 구해온 순이라는 약초(蓴藥草 : 순채蓴菜)’를 이 연못에서 길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트레킹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한탄강펜션이 보인다. 웬만한 절벽보다도 더 높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다 3층짜리 건물을 얹어놓았다.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지며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의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건물의 옆에는 몽골텐트 몇 동이 지어져 있다. ‘글램핑(glamping)’ 시설이 아닐까 싶다. 글램핑이란 화려하다(glamorous)와 캠핑(camping)의 합성어로, 고가의 장비나 서비스가 포함된 캠핑을 뜻하는 신조어이다. 전통적인 캠핑과는 달리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편의시설과 서비스를 즐길 수 있다고 보면 되겠다. 경관이 뛰어난 바닷가나 숲 등에 텐트를 설치하고 야영객들에게 대여하는데, 순담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다 텐트를 쳐놓은 모양이다.



트레킹이 끝나는 순담계곡은 바위 사이를 급하게 흐르던 물살이 강이 넓어지며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뽀얗게 닳은 바위가 주위를 감싸고 있어 풍광이 넓고도 아늑하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이 천렵을 즐기거나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런 점이 부담되었던지 건너편 강가에다 물높이를 재는 막대를 세워놓았다. 사람들이 많이 찾다보니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었을 게다.



트레킹을 끝내고 한탄강을 벗어나려면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한탄강이 지표면(地表面) 아래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평지에서 갑자기 수직으로 툭 내려앉았기 때문에 지표면에서 20~30m쯤 내려서야 물줄기와 만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제방(堤防)이 없으니 다리를 지날 때가 아니면 가까이서도 강이 있으리라 짐작하기 어려운 지형이다. 이곳 철원평야가 화산활동이 만들어낸 특이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한탄강은 오리산의 화산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굳어진 현무암 사이로 물이 스며들면서 틈이 커지고, 거기에 물이 굽이쳐 흐르면서 만들어진 강이다. 빠른 물살에 바위가 깎이고 파여 좁고 깊은 협곡과 수직의 절벽이 형성됐다.



트레킹의 마무리는 순담계곡 주차장

길에 올라서니 한탄강 글램핑이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다양한 편의시설과 서비스를 갖춘 고급스러운 캠핑을 뜻하는 말이다. 올라오는 도중에는 래프팅연합회간판을 걸고 있는 건물도 보였었다. 그만큼 래프팅(rafting)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숙박시설과 간이음식점, 주차장 등의 편의시설도 함께 늘었을 것이다. 오지(奧地)를 이미 벗어나 유원지로 변해있을 거라는 얘기이다. 아무튼 도로를 따라 잠시 걷다가 길가에 보이는 계단을 올라서면 화장실이 따린 널따란 순담계곡 주차장을 만나게 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트레킹을 마무리 지으면서 한탄강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짚어본다. 한탄강은 '크다넓다높다'는 뜻의 '()''여울'의 뜻인 '()'이 조합된 순수한 우리말이며, 이를 한자로 음차(音叉)한 것이다. 625 전쟁 중 다리가 끊겨 후퇴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탄하며 죽었다'고 해서 불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냥 흘려 넘겨버려도 괜찮다는 얘기이다.



한탄강 얼음트레킹을 마치고 난 뒤에는 구철원에 있는 노동당사로 이동했다. ‘소이산에 올라갔다 오라는 것이다. 서울에서 가깝다보니 시간이 남아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노동당사 주변을 둘러보는 것에 만족하기로 한다. 작년에 이미 소이산을 올라봤기 때문이다. 참골 이곳 노동당사를 기점으로 해서 북쪽방향으로 철원경찰서, 도립병원, 철원군청, 철원공립보통학교, 철원역에 이르는 3km의 거리는 일제강점기 철원의 중심가였다. 경원선 기찻길이 생기고 금강산 전기철도가 건설되면서 철원군은 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되었고 각종 농수산물의 집산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6.25전쟁은 인구 2만의 철원읍 시가지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조차 모두 떠나게 만들어 버렸다.



노동당사는 1946년 공산치하에서 지역주민들의 강제 동원과 모금에 의하여 완공된 지상 3층의 철근이 들어가지 않은 콘크리트건축물이다. 1946년 연건평 580평으로 건축되었는데, 성금이란 명목으로 하나의 리()마다 백미 200가마씩의 자금과 인력 또는 장비를 동원시켰다고 한다. 당시 이곳은 러시아의 영향을 받는 북한정권의 관할 아래 있어서 많은 건축물들이 러시아의 기술적 지원과 러시아가 추구하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realism) 건축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노동당사 역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건축적 특징과 시대성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언덕을 이용한 기단의 설정과 대칭적 평면, 비례가 정돈된 입면의 사용으로 공산당사로서의 권위를 표현하고 있다. 전쟁 중 내부 벽체가 대부분 파괴 되었으나 외부의 형태가 남아 있어 원래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 일부 구조체에서 철근 콘크리트의 사용과 벽식 구조의 혼용, 화강석과 콘크리트, 벽돌 및 목재의 혼용은 당시 건축의 일면을 엿보게 하고 있다. 현재 이 건물은 근대건축문화재 제22호로 등록되어 있다. 분단의 비극과 전쟁의 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건물 외벽의 포탄과 총탄 자국이 한국전쟁과 민족 분단의 현실을 떠오르게 한다.




노동당사를 둘러보고 난 뒤에도 시간이 남기에 도로로 나가본다. 길가에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해발 362m의 소이산은 노동당사 맞은편에 있는 아담한 산이다. 지뢰밭과 민통선으로 60년 가까이 방치되다가 2012년에야 일반에게 개방됐다. 이때 만들어진 게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이다. 지뢰꽃길(1.3km)과 생태숲길(2.7km) 그리고 봉수대오름길(0.8km)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정상에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가히 일품이다. 철원평야가 시원스레 펼쳐지기 때문이다. 문득 작년에 느꼈던 감흥이 떠올라 그때 적었던 글을 잠시 옮겨본다. <철원평야는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과 그의 아들 세종, 손자 문종이 자주 찾던 사냥터였다. 사냥이 끝나면 신하들과 인근지방 관료들을 임진강가의 정자 고석정(孤石亭)에 초대하여 잡은 동물과 술을 베풀며 위무했다고 전한다. 저 멀리로는 평강고원도 조망된다. 그리고 비무장지대 내의 삼자매봉과 그 뒤로 백마고지가 보인다. 산명호(山明湖) 뒤로는 피의능선이 나타나고 더 멀리로는 김일성고지(고암산)와 낙타고지 등이 희미하게 조망되고 있다.>



또 다른 안내판도 보인다. 옆에 세워져있는 네모난 돌기둥, 구 철원군 도로원표를 설명하고 있는데, 도로원표(道路元標)란 도로의 기점(起點)과 종점(終點) 또는 경과지(經過地)를 표시한 것이다. 당시 이곳 철원이 어느 정도로 번화했던 곳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는 시설물이지 않을까 싶다. 도로원표가 도청·시청·군청 등 행정의 중심지나 교통의 중심지 또는 역사·문화적 중심지에 설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맞다. 옛날 이곳은 농축산물이 모이고 경원선을 통하여 금강산 관광객이 북적대던 곳이었다. ‘철원군지(鐵原郡誌)’에 실려 있는 1930년에 찍은 사진을 보면 그 당시 소이산 주변으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을 볼 수 있다. 해방 때만 해도 철원읍의 인구는 8만 명이나 되었고, 은행 2개소와 도립병원까지 있었단다. 농산물 검역소 등 과거의 추억들은 근대문화유적으로 남았다. 하지만 농가와 논밭의 상당수는 습지와 숲으로 바뀌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고려 삼은(三隱) 중의 한 사람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의 싯귀(詩句)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그건 그렇고 도로원표에는 평강 16.8Km, 김화 28.5Km, 원산 181.6Km, 평양 215.1Km, 이천 51.4Km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포천은 총탄 자국으로 인해 숫자 파악이 불가능하다. 남북분단이 만들어낸 한국전쟁의 아픈 추억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