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길 6코스 트레킹
여행일 : ‘20. 6. 27(토)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산행코스 : 소래비고개→능선→매봉산→머재고개→모란 추모공원→달뫼고개→삼각점봉→금남산→임도→답내초교 입구(거리 및 소요시간 : 11㎞ / 4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다산길‘은 남양주시의 올레길이다. 남양주는 총면적의 70%가 산림이다. 그러나 산만 높은 게 아니다. 물길도 있다. 북한강이 남양주를 따라 흘러와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만나 마침내 한강이 된다. 이처럼 남양주는 서울 도심에서 지척이지만 산과 강이 어울려 특별한 걷기를 즐길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조선말의 위대한 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실학정신이 깃들어 있어 역사의 향기도 높다. 정약용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곳이 바로 두물머리(남양주시 조안면)이기 때문이다. 총 13개 코스(169.3㎞)로 이루어진 다산길은 남양주 전역에 걸쳐 있다. 이 가운데 6코스인 ’머재고개길‘은 피아노폭포에서 시작해 금남산과 모란공원 등을 지나 소래비고개에 이르는 길이 6.5㎞의 코스이다. 이 구간은 중간에 ’모란미술관‘과 ’민주화 묘역‘을 만나는 것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가슴 시릴만한 조망도 보여주지 못한다. 길이까지도 짧다. 그래서 우리는 금남산에서 피아노폭포로 가지 않고 금남저수지로 내려감으로써 총 길이를 10㎞로 늘려보았다.
▼ 트레킹 들머리는 소래비고개(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리)
2주 전부터 계획해왔던 두류산(강원도 화천군)의 인근에 많은 양의 소나기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어, 이른 새벽에 부랴부랴 최군에게 전화를 걸어 집 근처에 위치한 ’다산길 6코스‘로 산행지를 바꿨다. ’다산길 6코스‘의 기점인 소래비고개로 가기 위해서는 알단 경춘선 마석역으로 와야 한다. 소래비고개로 가는 시내버스(8-9, 30-29)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버스의 배차 간격이 너무 멀다고 생각될 때 이용하게 되는 택시도 이곳에서 타는 게 유리하다.
▼ 마석역 앞에는 ’조지훈‘ 시인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었다. 조지훈은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로 시작되는 ’승무(僧舞)‘를 지은 시인이다. 그는 1940년대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우리나라 서정시를 대표하는 청록파 시인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마석역 뒤편 송라산 기슭에 시인의 만년유택이 자리 잡은 인연으로 세워진 이 비석에는 1956년에 발표된 ’풀잎 단장(斷章)‘이 새겨져 있었다. 참고로 그의 시비는 영양 주실마을(빛을 찾아 가는 길)과 남산 시비(파초우), 고려대학교 시비(승무)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 택시는 우릴 ’소래비 고개‘에다 내려놓는다. 같은 남양주시지만 화도읍과 수동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이다. ’수동면‘과 ’축령산자연휴양림‘ 표지판이 세워진 고갯마루 조금 못미처의 오른편에 공터가 보이는데 이곳이 ’다산길 6코스‘의 들머리다.
▼ 공터의 끄트머리에 이르니 ’다산길 6코스‘의 운영을 2018년 10월부터 종료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래선지 5년 전 송라산에서 내려오면서 눈여겨보았던 ’다산길 안내도’도 보이지 않는다. 이후로도 이정표 등 다산길과 관련된 시설물들은 일절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 운영을 종료하면서 제반 시설물까지 모두 철거해버린 모양이다. 그 덕분에 우린 여러 곳에서 알바를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 현수막 앞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널찍한 임도는 곧장 가라지만 우리는 능선으로 향하는 비탈진 오솔길을 택했다. 그렇게 4분쯤 치고 오른 능선에는 길이 곱게 나있었다. 보드라운 흙길이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거기다 산길의 흔적까지 또렷하니 헷갈릴 일도 없다. 참고로 오늘 걷게 되는 구간을 ‘한북천마송라단맥’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전문 산악인들에게나 필요한 용어이겠지만 지면을 빌어 잠깐 옮겨본다. ‘한북정맥’의 수원산에서 분기한 ‘한북천마지맥’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까지 이어진다. 이 지맥의 천마선(남양주시 마석)에서 동쪽으로 분기한 잔맥이 ‘한북천마송라단맥’인데, 너구내고개에서 송라산을 일구고 소래비고개로 자지러들었다가 46번 경춘국도 머재고개와 모란공원묘지가 있는 390봉을 넘은 다음 북한강변 샛터유원지에서 그 숨을 다한다는 것이다.
▼ 능선은 온통 참나무 세상이다. 참나무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이다. 너무 흔한 탓인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나무의 숨은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도토리 열매가 예로부터 구황식물의 첫 번째 자리로 꼽혀왔는가 하면, 시대가 변하면서 요즘은 여름철 산책로에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특히 이 나무는 고사목이 된 뒤에 진가를 발휘한다. 약용버섯(영지)과 식용버섯(능이, 느타리, 표고, 뽕나무)의 보고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사진과 같이 눈요기로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버섯들도 셀 수 없이 많다. 참고로 참나무는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로 나뉜다.
▼ 섣부른 자만은 길을 놓치는 우(愚)를 자초하게 만들었다. 능선을 따라 4분쯤 걸으면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일어났는데, 다산길은 오른편인데도 우린 왼편으로 진행해버린 것이다. 길이 워낙 또렷했기에 오른편으로 길이 나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우린 엉뚱한 곳을 20분 이상이나 헤매야만 했다.
▼ 참나무 천국이던 산길의 주인이 갑자기 잣나무로 바뀌었다. 가평 옆 동네답다는 농담을 던지며 산행을 이어가는데, 느닷없 밭일을 하면서나 주고받을 법한 대화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마을 근처까지 내려와 버렸다는 얘기다. 이런 때 안내산악회의 산행대장 출신인 최군의 진가가 발휘된다. 내가 건네준 지도(산행지를 변경한 내가 출력해왔다) 위에 나침판을 올려놓더니 무조건 되돌아가잔다. 지금은 비록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하지만 ‘썩어도 준치’라는 속담을 증명해주는 순간이었다.
▼ 우여곡절 끝에 되돌아온 삼거리.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그런데 잘못 들어섰던 조금 전의 길보다 훨씬 더 널찍하고 또렷한 게 아닌가. 상황이 이런데도 왜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일까? 어쩌면 선두를 담당하던 집사람이 산나물에 정신을 쏟느라 길을 놓쳤던 게 아닐까 싶다. 잠시 후 임도를 만났다.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헤어졌던 임도일 것이다. 내 예측이 옳다면 옛날 이곳에는 ‘다산길 이정표(6코스 시점, 피아노화장실5.9km/ 6코스 종점, 소래비고개 0.6km)’가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 임도에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옛 ‘다산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정표는 없어졌지만 다산길로 운영할 당시 만들어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통나무 벤치가 두어 개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 이후부터 산길은 아예 임도 수준으로 변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정성들여 가꾸어 놓은 문중 묘역도 지난다. 임도처럼 잘 닦인 산길은 모두 이 묘역 덕분이 아닐까 싶다.
▼ 묘역 근처에서 시야가 열린다. 월산리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한껏 부풀린 몸집을 자랑하는가 하면 북한강변 너머의 산릉들도 눈에 들어온다. 뾰루봉과 화야산, 고동산일 것이다.
▼ 산길은 이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고도를 높여간다. 그러고는 이내 매봉산(243m) 정상에다 올려놓는다. 매봉산은 이성계가 함흥에 있다가 귀환하는 도중에 매사냥을 한 산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경희대 사학과의 신용철(국사편찬위원) 교수는 ‘여덟배미와 태조 이성계’에서 '이태조가 사냥꾼을 따라 내려오다가 여덟 밤을 머무른 곳은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이며, 매사냥을 한 산은 인근 포천군 내촌면 음현리 매화동 뒤의 매봉산(梅峯山)'이라 적고 있다. 사실 팔야리에서 이곳까지는 거리가 먼데다 중간에 철마산과 천마산, 축령산, 송라산 등 커다란 산들이 가로막고 있어 이태조의 매사냥과 연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겠다. 그래선지 요즘은 매봉산의 유래를 순수 우리말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산의 옛 이름인 ‘뫼’가 '매산, '매봉', '매봉산'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머재, 달뫼산, 맷돌모루(마석우리 磨石隅里) 등 순수한 우리말로 지어진 인근 지명들을 근거로 들면서 말이다. 그건 그렇고 서너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돌탑이 주인이다. 네모반듯한 정상석은 그 위에 고이 모셔져 있다. 누군가 꽂아놓은 태극기 두 개도 함께 섬기고 있는 모양새이다. 참! 돌탑의 바로 뒤에는 지적삼각점(경기 118)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매봉산까지 오는 데는 무려 38분이냐 걸렸다. 핸드폰의 앱은 1.55㎞를 표시하고 있다. 선답자가 20분(0.6km) 만에 도착했다고 적은 것을 보면 알바를 꽤 길게 했던 모양이다.
▼ 매봉산을 지나니 또 다시 시야가 열린다. 이번에는 고층아파트들이 성냥갑처럼 늘어선 화도읍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 뒤를 천마산과 매봉산, 갑산이 마치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 잠시 후 길이 나뉘는 곳에서 우린 또 다시 실수를 했다. 길의 상태는 두 방향 모두 비슷했지만 마석 시가지가 바라보이는 오른편 방향으로 진행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길을 잘못 들어선 줄도 모른 채 30분 가까이나 진행해버렸다.
▼ 그렇게 내려선 곳은 ‘마석우리(磨石隅里)’의 자연부락인 ‘산성마을’이다. 화도읍의 주축을 이루는 ‘마석우리’는 맷돌이 많이 생산되는데다 부락의 길이 돌아서 생겼다 하여 ‘맷돌머루’라 불리다가 한자로 변환시키면서 ‘마석우리’가 되었다. 또한 ‘산성마을’은 마을 중앙이 깊숙하고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것이 흡사 성(城)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마을에는 ‘만덕사(萬德寺)’란 절이 들어서 있었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석조 전각과 3층 석탑, 약사여래불이 전부인 자그만 사찰이다. 소속 종단은 ‘관음종(觀音宗)’. 한국불교 27개 종단의 하나로 법화경을 중심으로 ‘대중 불교’ 운동을 지향하는 종단이다. 그래선지 사원을 시중에 설치하고 건물양식도 현대화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만덕사가 마을 중심에 들어선 이유가 아닐까 싶다. 거기다 전각까지 현대식이니 관음종의 정체성과 부합한다고 보겠다.
▼ 몇 걸음 더 걸으니 마석역에서 소래비고개로 올라가는 2차선 도로가 나온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이곳에서 우린 발길을 되돌렸다. 그렇다고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 마을길을 거슬러 올라가다 건너편 산자락으로 파고들었다.
▼ 과수원과 채소밭 때문에 길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으려고 그물망을 쳐놓은 탓에 밭두렁을 이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머뭇거릴 최군이겠는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민가의 앞마당과 과수원 사이의 빈 틈새를 이용해 건너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그리곤 길을 내가며 산비탈을 치고 오르자 본래의 ‘다산길’이 그 모습을 나타난다. 이곳에서 길을 찾느라 소비한 시간은 10분(0.5㎞)이다. 매봉 정상을 출발한지는 40분 가까이나 되었다.
▼ 나지막한 봉우리 하나를 넘으니 능선 오른편에 철망 울타리를 쳐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선답자의 후기에서 보았던 낯익은 풍경이다. 철망이 끝나갈 무렵 이번에는 능선 왼편에다 철조망을 쳤다. 이번에는 아예 ‘위험, 접근금지’라는 경고문까지 떡하니 붙여놓았다.
▼ 봉우리 하나를 더 넘자 경춘로(구 46번 국도)가 지나는 ‘머재고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0분 만인데 핸드폰 앱은 4.17㎞를 찍고 있다. 선답자는 이곳까지의 거리를 1.3km(45분 소요)로 적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린 알바를 하느라 2.8㎞나 더 걸은 셈이다. 시간도 1시간 가까이나 더 써가면서 말이다. 참고로 ‘머재’도 역시 ‘마석우리’에 속하며 아까 길을 잘못 들어선 덕분에 억지춘양으로 들렀던 ‘산성마을’의 외곽에 위치한다. 성같이 생긴 산성마을 외곽의 문(門)과 같은 고개라고 해서 ‘머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4차선 도로인 경춘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모란공원’의 입구, 그 왼편은 ‘모란미술관(木蘭美術館)’이다. 1990년 ‘21세기를 향한 조각의 새 표현 전’을 개최하면서 현대조각전문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전문 장르가 조각인 만큼 이곳의 백미는 야외 조각공원이다. 8,600평의 잔디밭에 '모란 국제조각 심포지엄'에 출품했던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조각 작품 11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서는 길에 만나는 파란색 대문도 페루 출신 조각가 알베르토 구즈만의 작품인 ‘문’이란다.
▼ 미술관을 지나면 모란공원이 시작된다. 그 시작은 ‘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부터 시작된다. 1970년 11월 18일 전태일 열사의 유해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인 모란공원에 안장되면서 민족민주열사묘역의 역사는 시작됐다. 이후 1971년 5월 노동조합 활동 중 살해된 김진수 열사, 1973년 10월 안기부의 고문으로 사망한 최종길 열사가 이어서 안장됐다. 그러나 모란공원이 본격적으로 열사들의 안식처가 된 것은 1986년 4월 박영진 열사의 장례 투쟁부터이다. 열사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막으려던 정권과의 투쟁 끝에 이곳에 안장되면서 노동운동, 학생운동, 의문사, 산업재해 등으로 희생된 이들이 묻히는 민족민주열사모역이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스러져 간 모든 분들의 삶에 고개를 숙이며 요즘 세태를 살짝 꼬집어볼까 한다. 독립운동이건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이건 우리나라의 형성과 발전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하지만 그들이 살았던 삶이나 그 가족들의 삶은 결코 녹녹치가 않다. 그들이 추구했을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고 살려나가는 것이 ‘진정한 나라’일 텐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엔 이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의외로 많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집단을 일러 ‘보수’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다르게 생각한다. 나라를 생각하는데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보수’를 빙자한 정치세력, 그 가운데서도 극단적인 일부 세력이 아니고서야 어찌 진실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 민주열사묘역과 대문 하나로 연결된 ‘모란공원’에 들어서자 ‘박영효’의 묘 입구임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그는 태극기를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이다. 표석에 태극기를 그려 넣은 이유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박영효(朴泳孝, 1861~1939)는 영광과 오욕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그대로 비운의 대한제국 말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나라를 문명개화로 이끌려는 개화파의 주역 박영효와 조선을 병탄한 일본의 후작이자 중추원고문 박영효, 이 같은 아이러니가 역사에서 연출된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에게서 울분과 자괴감은 느낀다. 거기다 더해 침을 뱉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를 통해 근대한국사에서 반성의 자료를 찾아 역사의 거울로 삼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 1966년에 조성을 시작한 모란공원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설 공동묘지다. 17,000여 기의 묘소가 들어서있다는데, 아래 사진처럼 묘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지형지물을 이용해 널찍하게 들어선 묘들도 많이 보였다. 그러다보니 ‘공원묘지’라기보다는 차라리 문중 묘역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관리비 꽤나 내야할 것 같다’는 최군의 말마따나 그동안 보아온 공원묘지 가운데 가장 호화스러운 유택(幽宅)이었다.
▼ 도로를 따르면 ‘제1주차장’, ‘마음 담긴 父母 공경, 내 子女가 따라 한다.’라는 팻말을 매단 빨강색 정자가 눈길을 끈다. ‘관리사무소’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서는 곧장 직진(왼편)한다. 이어서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니 삼거리에 ‘달뫼고개’라고 적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는 ‘추모관’ 방향(왼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참! 풍운의 구한말(舊韓末)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흥선대원군’의 묘역을 둘러보고 싶다면 관리사무소 앞 삼거리에서 오른편(관리사무소 방향)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 ‘추모관(追慕館)’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널따란 공터가 만들어져 있다. 차선은 그려놓지 않았지만 ‘소주차장’이란다. 이곳에는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추모관의 찾아온 사람들을 위한 배려인 모양이다. 참! 주차장 한켠에는 ‘민족민주열사·희생자묘역도’가 세워져 있었다. 아까 입구에서 보았던 ‘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는 터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당신이 간절히 염원했던 세상을 위해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겠습니다.’라는 부언대로 그런 세상이 꼭 이루어지기를 빌어본다.
▼ 정자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월산리 일대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더 멀리로는 송라산과 천마산 등 남양주의 명산들이 즐비하게 펼쳐진다. 혹자는 축령산과 오독산, 운두산, 두리봉까지 보인다고 했지만 시야가 흐려서인지 분간은 되지 않았다.
▼ 소주차장에서부터가 문제였다. ‘다산길’ 이정표가 모두 철거되어 버린 데다 길 찾기에 참고할만한 지형지물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그저 방향만 보고 진행할 수밖에 없다. 주차장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하다 돌계단을 이용해 축대 위로 올랐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산자락으로 향했다. 선두는 물론 나침판을 손에 든 최군이 맡았다. ‘머재고개’에서 이곳까지는 30분이 걸렸다.
▼ 그렇게 이른 금남산 자락에는 등산로가 또렷했다.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도 ‘다산길’과 관련된 시설들을 모두 철거해버린 지자체의 처사가 못내 아쉽다. ‘다산길’의 흔적을 꼭 지울 수밖에 없었다면 대신 다른 이정표라도 세워놓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공무원의 진정한 가치는 국민에 대한 ‘봉사’이다. 봉사하는 자세로 일 처리를 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발생하기 않았을 것 같기에 넋두리를 늘어놔봤다.
▼ 짙은 숲 그늘에서 호사를 즐기며 걷는다. 그렇게 30분쯤 걷자 산불감시초소가 나온다. 하지만 녹이 잔뜩 슬은 채로 방치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설치한 목적을 이미 마쳤나 보다.
▼ 조금 더 걸으면 한전의 송전철탑이 나온다. 시원스럽지는 않지만 유일하게 조망이 터지는 구간이다.
▼ 송전탑을 지나면서 길은 거의 임도 수준으로 변한다. 송전탑을 설치하면서 자재 운반용으로 내놓은 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암도는 오른편으로 갈려나간다. 등산로는 물론 계속해서 능선을 따른다.
▼ 그렇게 조금 더 걸으면 대여섯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삼각점봉’에 이른다. 산불감시탑에서 20분 거리이다. ‘삼각점(양수 441)’이 터를 잡은 정상에는 삼각점에 대한 안내판도 함께 세워놓았다. 봉우리의 높이인 ‘387.9봉’을 제키고 ‘삼각점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이다.
▼ 이어지는 산길은 무척 곱다. 널찍한 것은 기본, 경사가 없는 데다 황톳길은 마치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여간 폭신한 게 아니다. 거기다 울창한 숲은 오뉴월 햇볕까지도 완벽하게 차단해준다. 이런 곳에서는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더디게 걷는 대신 호흡의 양은 최대한으로 늘린다. 이런 걸 보고 웰빙, 아니 힐링 산행이라고 할 것이다.
▼ 숲에 동화되어 걷다보면 ‘화도 물재생센터’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우린 처음으로 이정표(금남리↑/ 환경사업소→/ 월산리↓)를 만났다.선답자의 후기에 ‘다산길 이정표(시점, 2.10㎞)’가 세워져 있다는 지점이다. 다산길은 이곳에서 오른편(환경사업소 방향)으로 향한다. 금남산의 정상은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 만날 수 있다.
▼ 산길은 아주 조금씩 고도를 높여간다. 그리고는 잠시 후 금남산(琴南山, 412m) 정상에 올려놓는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이 산은 지명에 대한 유래도 전해지지 않는다. 산자락에 있는 금남리 마을에서 이름을 따왔지 않나 싶다. 머재에서 이곳까지는 2시간이 걸렸다.
▼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 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아름드리 소나무에 매달아놓은 정상판(금남산 정상)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남양주 월산초등학교’에서 설치한 모양인데 ‘해발 412m’라고 적힌 또 다른 표지판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하산길은 아까 올라왔던 상황과는 반대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낮추어간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의 상태는 여전히 곱다.
▼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느닷없이 능선이 막혀있다. 동국선원에서 내 땅이니 비켜 지나가라며 금줄을 쳐놓은 것이다. 불가(佛家)의 최대 덕목이 ‘보시(布施, dana)’인데도 자기 땅을 지나가는 것조차 막아버린 절간 인심이 참 고약하다. 김삿갓이 ‘문전걸식’을 하며 지었다는 시(詩) 한 편이 떠오르는 것은 나 또한 고약한 중생의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면기둥 붉게타/ 석양행객 시장타/ 네절인심 고약타/ 지옥가기 꼭좋타>
▼ 능선을 벗어난 길은 이제 산비탈을 따를 수밖에 없다. 엄청나게 가팔라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걸 감안했던지 안전용 밧줄을 매어 놓았지만 그렇다고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자칫 빗길에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 상당히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구간이다.
▼ 밧줄에 의지해 내려오다 보니 능선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살짝 보인다. 그 길의 끄트머리에는 약사여래(藥師如來)의 입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방정유리세계(東方淨留璃世界)라는 정토에 계시면서 모든 중생의 몸과 마음의 병을 다스리고, 재앙을 소멸시키는 부처님이니 말이다.
▼ 약사여래상에서는 월산리와 답내리 일대가 조망된다.
▼ 정규 등산로로 되돌아올까 하다가 월산리 방향의 임도를 따르기로 했다. 새로운 루트를 개발해 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개설하다 그만 둔 임도라서 길이 엄청나게 거칠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가시나무로 가득 찬 구간도 있어 등산로로는 최악의 상태였다. 그런 길에서 30분 가까이를 소모했으니 엄청난 낭비가 아니겠는가.
▼ 거친 임도가 끝나면 과수단지가 나오는데 부근에는 몇 동의 물류창고도 지어져 있다. 그 덕분에 임도는 포장도로로 바뀌어 있다.
▼ 이어서 ‘화도(월산) 푸른물센터’가 나온다. 푸른물센터는 기존 ‘하수종말처리장(下水終末處理場)’에 대한 주민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낸 새로운 명칭이다. 최근에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주민친화형으로 시설을 바꾸어가는 중이다. 하루 1만7천 톤을 처리할 수 있는 이곳 월산푸른물센터도 축구장과 배드민턴장, 생태연못, 수변산책로, 전망대 등의 시설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 산행날머리는 답내초교 입구(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223-2)
푸른물센터에서 지나 ‘46번 국도’의 교각 아래를 통과하면 경춘로(옛 46번 국도)가 나오면서 오늘 트레킹이 막을 내린다. 마석역으로 나가는 시내버스는 ‘답내교’ 옆의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미니스톱 남양주답내점 앞(답내초교입구 정류장)에서 타면 된다. 일반버스는 물론이고 광역버스까지 정차하는 정류장이니 입맛대로 골라 타면 되겠다. 그나저나 오늘은 총 11㎞를 4시간 40분에 걸쳐 걸었다. 꽤나 더디게 걸었다고 봐야 하겠다. 보통 속도도 낼 수 없을 만큼 습하고 더웠던 날씨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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