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연(頭陀淵) 평화누리길 트레킹

 

여행일 : ‘19. 6. 23()

소재지 : 강원 양구군 방산면 고방산리

여행코스 : 주차장양구 전투위령비조각공원두타정평화누리길금강산 가는 길입구징검다리 회귀출렁다리지뢰체험장두타연주차장(소요시간 : 4시간)

 

 

특징 : 두타연(강원도 양구)의 금강산 가는 길목에 위치한 평화누리길은 청정한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생태 누리길이다. ‘민간인 통제구역(DMZ)’이라서 6.25전쟁 이후 50년이나 출입이 통제되어 오다가 2004년에야 개방된 덕분에 원시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목정 안내소에서 비득 안내소까지 이어지는 12km 코스로 두 안내소에서 모두 출입 신청을 하고 출발할 수 있다. 안내소에서 민통선 출입신고를 하고 허가가 나면 GPS가 내장된 출입증을 목에 걸고 군부대 초소를 들어가게 되므로, 출입신고를 위해 신분증을 준비해야 한다. 요즘은 더욱 편해졌다. 버스로 두타연주차장까지 들어간 다음 생태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된다. 참고로 두타연 입장은 하절기(3~10)엔 오전 9~오후 5, 동절기엔 오전 9~오후 4시까지 가능하다. 매주 월요일과 11, 설날엔 문을 닫는다. 입장료는 대인 3,000, 소인(7~12) 1,500원이다.

 

들머리는 두타연 안내소주차장(양구군 방산면 고방산리 825-1)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춘천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와 46번 국도를 연이어 타고 양구까지 온다. 이어서 31번 국도를 이용해 북쪽으로 올라가다 도사삼거리(양구군 양구읍 도사리 516-5)에서 왼편 460번 지방도로 바꿔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고방산교차로(양구군 방산면 고방산리 227-5)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잠시 후 이목정이 나오는데, 이곳에 설치된 두타연 안내소에 들러 민간인통제구역으로 들어가기 위한 제반 절차를 밟아야 한다. 참고로 두타연(頭陀淵)민간인통제구역(民間人統制區域)’ 안에 들어있다. 비무장지대(DMZ)남방한계선(南方限界線)’으로부터 520밖에 설정해놓은 민간인 통제선(民統線 : Civilian Control Line)’에서 남방한계선까지의 지역을 말하는데, 이 지역은 휴전협정에 의해 설정된 비무장지대(DMZ)’와는 달리 군 작전과 보안유지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민간인의 영농을 위한 토지 이용이 허가되고 있다. 다만 지역 내의 출입과 행동, 경작권을 제외한 토지 소유권의 행사 등 일부 개인의 자유와 국민의 기본권이 통제된다.

 

 

두타연 일대를 둘러보며 기념사진까지 찍는 데 한 시간 남짓,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느긋하게 즐겨도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걷기 여행자라면 두타연 평화누리길을 따라 금강산 가는 길입구까지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 두타연에서 3.6km쯤 되는 지점으로, 금강산으로 연결되는 31번 국도는 이곳에서 끊긴다. 종점 아닌 종점인 셈인데 이곳까지 다녀오려면 2시간 정도를 더 할애해야만 한다.

 

 

두타연 생태탐방로로 들어가려면 이목정안내소또는 비득안내소에서 출입신청서와 서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런데 비득안내소 코스는 양구군 식수전용 저수지 신설사업으로 2020228일까지 운영하지 않고 있어 이목정안내소에서만 출발이 가능하다. 신청서를 제출하면 태그(위치추적목걸이)를 나누어주는데 이를 패용해야만 민간인통제구역(民間人統制區域)’으로의 출입이 가능하다. 양구문화관광과 홈페이지에서 사전예약을 하면 절차를 단축할 수 있다.

 

 

안내소에서 출입절차를 마치면 21사단 위병소를 통과해야 한다. ‘민간인통제선을 넘어야만 두타연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총을 멘 군인과 이중 삼중으로 놓인 철책 앞에 서면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되고, 우리나라가 아직 휴전국가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어서 비포장도로를 약 3.7km를 올라가면 두타연 주차장이 나온다. 관광안내소와 매점이 들어선 이곳은 전면을 도배하고 있는 사진들이 눈길을 끈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두타연의 사계를 담았다. 열목어를 닮은 우체통도 시선을 끌기에 손색이 없다. ‘내 인생의 여정 속, DMZ 두타연의 추억이라는 글귀가 누군가에게 엽서 한 장 띄워볼까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차에서 내리자 문화해설사가 맞는다. 그리고는 두타연 관광인내도앞에다 모아놓고 두타연의 내력과 생태계는 물론이고 사방에 널려있는 볼거리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는 방법 등을 설명해준다. 해박한 지식에 유머까지 섞어가며 진행하는 것이 쉽게 만날 수 없는 고수였다.

 

 

관광안내도곁에는 소지섭 길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양구군에서 두타연과 파로호를 중심으로 한 비무장지대(DMZ)에 내놓은 길이 51트레킹 로드로 모두 6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소지섭 갤러리로 리모델링된 옛 백석전투기념관에서 시작하는 1코스(십년장생 길)가 이곳 두타연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지섭 길은 소지섭이 2010DMZ일대를 여행하면서 쓴 '소지섭의 길'이라는 포토에세이집에서 발단되었다고 한다. 소지섭이 철원, 양구, 인제, 고성 등 DMZ을 비롯한 강원도 일대를 여행하면서 느낀 감상을 담은 책이다. ‘51’이란 거리는 소지섭이 평소에 좋아하는 숫자란다.

 

 

두타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열목어(熱目魚)’를 머리에 인 두타연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역사와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곳이라는 부제를 살았다. 맞다. 이곳 두타연은 열목어의 국내 최대서식지라고 한다. ‘졸티또는 고드라치라고도 불리는 연어과의 이 물고기는 물이 아주 맑고 수온이 낮은 상류지역에서 작은 물고기나 곤충의 유충 등을 먹고 산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식지 두 곳을 천연기념물(73호 및 74)로 지정하고 있고, 환경부 야생동식물로도 보호되고 있다.

 

 

하지만 우린 안내판이 지시하는 ‘1코스부터 걷기로 했다. 1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투타연 기본코스를 안내판에 적힌 숫자(1~10) 대로 걸어볼 것을 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길은 오래전 금강산, 정확히는 북한 지역 속사리와 현리, 그리고 내금강의 장안사로 향하던 길이었다. 공식 명칭은 국도 31. 부산에서 출발해 울산~청송~영양~태백~평창~인제를 거쳐 양구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길은 이따가 들르게 될 하야교 삼거리에서 끊겨있다. 남북분단의 현장인 셈이다.

 

 

자갈길을 따라 잠시 걷자 사거리가 나온다. 직진은 평화누리길, 가장 먼저 찾아보고자 하는 양구전투 위령비는 왼편에 위치하고 있다. 오른편 방향은 조각공원으로 연결된다.

 

 

이 일대는 피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백석산지구 전투’, ‘도솔산지구 전투’, ‘도솔봉지구 전투등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으로 시작되는 비목(碑木 : 한명희가 지었다)의 구절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불타는 젊음을 초개와 같이 던졌다. 민족상잔의 비극은 끝났고 세월도 많이 흘렀다. 하지만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에 백두산 부대 장병들이 1994년 이 위령비를 세웠다고 한다. ! ‘길 가소서라는 추모시(追慕詩)’를 적은 패널도 함께 세워 보는 이의 가슴을 얼얼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거리에서 이번에는 오른편 조각공원으로 향한다. 코스 안내도도 역시 조각공원을 향하고 있다. 이어서 만나는 널따란 잔디광장에는 전쟁과 평화를 담은 수많은 조각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2013년에 열린 ‘DMZ를 말하다전시회 때 출품된 작품들이란다. ! 누군가는 이곳을 산양의 보금자리라고도 했다. 잔디광장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어먹고, 커다란 조형물인 소원이 이뤄지는 항아리를 요새삼아 낮잠을 자기도 한단다.

 

 

 

오른편에는 한국전쟁 때 양구에서 벌어진 9개 전투를 소개하는 팻말과 함께 전차, 미사일 등 군사무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조각공원 한켠에 깨어진 백자 사발 2개를 겹쳐서 엎어 놓은 듯한 작은 건물 크기의 조형물이 보인다. 굽과 손잡이까지 달린 이 백자사발은 소원이 이루어지는 항아리로 불린다. 이성계가 조선왕조 개국의 염원을 담아 금강산 월출봉에 묻었다는 방산 백토로 만든 발원 사리구에서 모티브를 삼았지 않나 싶다.

 

 

내부에는 뻥 뚫린 하늘을 향해 올라가려는 나무들이 뿌리를 내렸고. 절 처마 끝에 매다는 풍경들이 원을 그리며 달려 있다. 뭘 의미하는 걸까?

 

 

공원에는 탐방객들을 위한 시설도 여럿 만들어 놓았다. 두타연 폭포를 그려 넣은 트릭아트도 그중 하나이다. 이곳이 두타사(頭陀寺)’가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안내판도 보인다. 금강산 송라암에서 수행·정진하던 회정선사(1678~1738, 호는 설봉)’와 두타연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는데, 내가 아는 두타사의 창건연대와 맞지 않아 소개는 생략하겠다. 내가 알기로는 1530년에 편찬한 관찬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두타사가 등재돼 있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가 조선 중기의 학자 이만부(1664~1732)가 방문했던 1723년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난 탐방로는 이제 두타정으로 향한다. 이곳 두타연의 탐방로는 한마디로 잘 닦여 있다.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데크 로드는 기본. 어떤 곳은 판석을 깔아놓기도 했다. 위험한 곳에 밧줄난간이나 지뢰철조망을 치는가 하면, 시야가 트이는 곳에는 전망대도 설치했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자연은 최대한 살렸다. 생태탐방로라는 이름에 걸맞다 하겠다.

 

 

가는 도중 길 하나가 왼편으로 나뉜다. ‘두타사 옛터라는 명찰을 단 입구에는 두타에 대한 의미와 함께 두타사의 보덕굴이 우리나라 4대 관음성지의 하나라고 적어 넣었다. ‘전설 속으로 가는 길이라면서 말이다. 두타연과 보덕굴의 풍경 속에 영험한 힘을 불어넣는 그 전설은 대강 이러하다. 금강산 송라암에서 수행하며 천일관음기도를 드리던 회정선사는 관세음보살을 직접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천일기도를 하루 앞둔 날, 그의 꿈에는 한 여인이 나타나 관세음보살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친히 일러주었다. 양구의 방산 건솔리에 사는 몰골옹이라는 노인을 찾아가 해명방이라는 어른의 행방을 물으면 관세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급히 길을 떠난 회정은 보름 후 양구에 도착해 몰골옹을 만났고, 그가 일러준 곳으로 가서 다시 해명방을 만났다. 해명방은 회정에게 자신의 딸인 보덕과 부부의 연을 맺으라고 권유했는데, 관세음보살을 보기 위해 일심으로 기도하던 회정은 그의 말을 따라 보덕과 부부로 3년 넘게 살며 숯을 팔아 생활했다. 그런데 아무리 믿고 기다려도 관세음보살의 현신을 마주하지 못해 낙담한 그는 어느 날, 부녀에게 이별을 전하고 몰골옹을 찾아가 자신의 답답함을 토로했다. 몰골옹은 지긋이 웃으며 그 부녀가 바로 보현보살과 관세음보살이라고 전하며, 자신은 문수보살의 화신임을 일깨웠다. 이 말을 들은 회정이 급히 돌아가 봤지만 함께 살던 집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회정이 실망하고 자책하며 다시 몰골옹을 찾았지만 그 집도 연기처럼 사라진 후였다. 회정은 자신의 우매함과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하늘을 보며 관세음보살을 목놓아 부르자, 관세음보살이 허공에 나타나 산 중턱으로 그를 이끌었다. 회정은 쫓아갔지만 관세음보살의 형상은 멀리 사라지고, 그곳엔 두건이 벗겨진 관세음보살의 형상을 한 바위가 서 있을 따름이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한 회정은 송라암으로 갔다가, 다시 양구로 돌아와서 두타연 바위굴에서 7일 낮과 밤 동안 계족정신으로 두타행을 실천했다. 고행을 하던 그의 앞에는 어느 순간 바위굴이 커다란 거울이 돼 나타났고, 맑은 거울엔 보덕과 자신의 모습이 뚜렷이 비춰졌다. 회정선사는 이 바위굴 맞은편에 터를 잡고 사찰을 세웠으니 그 이름을 두타사라고 하였다.

 

 

탐방로의 끄트머리에 이르자 두타정(頭陀亭)’이 지어져 있다. 두타연의 바위벼랑에 걸터앉아 수입천(水入川)의 물줄기가 만들어놓은 두타라는 이름의 폭포와 소를 오롯이 내려다보고 있는 정자(亭子)이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을 구성하고 있는 총석정이나 월송정처럼 역사를 품지는 않았지만 바라보이는 풍경만큼은 전국의 어느 정자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정자의 앞. 20m 높이의 암벽 위에는 전망데크를 만들었다. 폭포와 소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게 하려는 배려이다.

 

 

전망대에 오르자 우렁찬 물소리와 함께 바위 사이로 끊임없이 떨어져가는 물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던 물줄기는 암벽에 막혀 이리저리 용틀임하다 10m 아래 검푸른 웅덩이로 쏟아져 내려간다. 누군가는 저 물줄기에서 한반도를 찾아냈다고 했다. 암반 위를 흐르는 계곡물이 한반도 모양새를 만들어내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런 모양새가 만들어지지 않으니 문제다. 조선 초기 승려인 무학대사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라고 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육십이 넘도록 닦아온 내 수양은 아직도 멀었나 보다.

 

 

물줄기는 여러 단의 폭포가 되어 아래로 떨어지면서 매우 깊은 못(深淵)’을 만들어낸다. 못은 둘레가 50m는 족히 넘어 보인다. ‘두타연(頭陀淵)’은 금강산에서 내려온 물이 빚어놓은 두타폭포와 그 아래의 소()를 아우른다. 폭포의 높이는 10m. 하지만 그 폭포가 빚은 두타소의 수심은 무려 12m에 이른다고 한다. ‘두타라는 고유명사 뒤에 못 연()’자를 붙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두타정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이제 수입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곧이어 나타나는 삼거리에서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정표가 징검다리로 표기한 오른편 방향은 평화누리길 탐방을 마친 다음 출렁다리로 내려갈 때 이용하게 되니 기억해 두자. 참고로 두타연 탐방로는 십년장생 길의 첫 번째 길이며 소지섭길혹은 산소(O2)이라고도 불린다. 다양한 애칭들만큼이나 두타연 탐방로가 가진 매력은 언제, 무엇을 위해 찾는가에 따라 다르다.

 

 

 

통나무계단을 따라 잠시 오르자 이번에는 널찍한 도로(이정표 : 두타연 주차장0.35/ 두타연·생태탐사로0.178)가 나온다. 아까 양구 전투위령비앞에서 헤어졌던 양구 평화누리길이다. 금강산 가는 길목인 이곳은 6,25전쟁 이후 50여 년간이나 출입이 통제되어 왔다. 그러다가 지난 2004년에 민간에 개방되어 원시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DMZ 생태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이곳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평화누리길이 아닌 양구만의 평화누리길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DMZ 접경지역이라는 점은 같지만 전자는 김포시와 고양시, 파주시, 연천군 등 경기도 관내 4개의 시·군만을 잇고 있다.

 

 

평화누리길을 따라 잠시 걷자 예술과 사색의 길의 입구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길손을 맞는다. ‘숲속 1이라는 부제까지 달았다. 탐방로로 들어서자 길 양옆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다. ‘지뢰(mine)’라고 적힌 빨간색 삼각 팻말도 매달아 놓았다. 아까 이목정의 21사단 검문소에서 우리를 검색하던 군인들이 절대 넘어가지 말라고 누차 강조하던 금단의 구역이다.

 

 

'예술과 사색의 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길가에는 박수근 화백을 위시한 여러 작가들의 그림과 서예, 시 등 다양한 예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갇혀있는 미술관이 아니고 예술작품이 자연 속으로 찾아든 셈이다. 아무튼 이 구간은 호젓한 길을 한가롭게 걸으며 작품에 담겨있는 의미를 찾아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또한 작품들을 감상하며 자연 속에서 사색의 향기에 잠겨보는 호사도 누릴 수 있었다.

 

 

사색이 끝나자 길은 또 다시 속세로 인도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쉼터로 데려다놓는다. 쉼터이니 정자는 기본, ‘평화누리길 준공 기념비도 이곳에 세워놓았다. 두 손으로 뭔가를 감싸려는 듯한 은빛 조형물도 보인다.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을 저렇게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두타연은 이름부터 속삭임을 품고 있는 곳이다. 탐방로를 걷는 내내 폭포의 물소리는 속삭임이 되어 귓가를 감싸 안는다. 탐방로 곳곳에는 벤치와 평상을 놓아두었다. 벤치에 앉아 쉬다 다시 걷는다. 평상 위에 슬며시 걱정과 욕심을 놓아둔 채 와도 챙겨가라며 재촉하는 이는 누구도 없다. 두고 온 무게만큼 여행에서 돌아온 뒤의 걸음은 가벼워져 있을 것이다.

 

 

군사도로로 쓰이던 거친 비포장 길 중간에는 나무로 난간을 장식한 두타1두타2라는 멋들어진 다리도 놓아두었다. 똑 같이 생긴 이 쌍둥이 다리는 계곡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트레킹하는 사람들의 쉼터 노릇도 톡톡히 수행한다.

 

 

다리의 중간은 폭을 넓혀 포토죤의 역할을 겸하도록 했다. 다리 주변의 풍경을 배경삼아 인생샷을 건지려는 사람들로 늘 분주한 곳이다. 또한 바닥에 강화유리를 대 스카이워크의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꾸미기도 했다. 소름끼치는 스릴까지는 아니더라도 긴장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하겠다.

 

 

이 구간은 힐링 숲길(숲속2)’로도 불린다. 울창한 숲속을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산림욕을 하는 효과를 얻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 숲길을 걷다보면 눈동자모양의 조형물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힐링과의 관계가 모호해서 생뚱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타2교를 건너자 탐방로는 또 다시 평화누리길과 합쳐진다. 날머리에 이정표(월운저수지9.7/ 두타연2.4/ 숲속2)를 세워 우리가 숲속2길을 지나왔음을 알려준다. 참고로 평화누리길은 양구군의 또 다른 둘레길인 ‘10년 장생 길의 첫 번째 구간인 나를 정화하는 1년 길이기도 하다. ‘소지섭 길처럼 소지섭 갤러리에서 출발하나 두타연에서 끝나지 않고, ‘금강산 가는 길입구, 비득고개를 거쳐 월운저수지까지 연장시킨다. 국토정중앙에 위치한 양구는 한반도의 배꼽이라 할 수 있다. 배꼽은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고 인간의 오장육부를 형성하는 태()와 연결된 곳이다. 그러니 10년 장생 길은 한반도의 거대한 배꼽인 양구에서 음양오행이라는 거대한 기운을 탯줄로 이어받아 이 길을 걷는 모든 이의 오장육부를 튼튼히 하고, 건강하게 꿈을 갖고 사는 장생(長生)의 삶을 누리게 하는 길로 보면 되겠다. 특히 두타연소지섭갤러리가 있는 1년길은 음양오행의 기운 중 수()의 기운이 강한 곳이라고 한다. ()는 인간의 오장육부 중 신장을 튼튼히 하는 힘이 있어서, 1년 길을 걸으면 건강한 신장을 갖게 된단다.

 

 

얼마쯤 더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하야교가 손짓한다. 금강산에서 흘러온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하나가 아니고 두 개다. 기존의 도로 말고도 탐방객들을 위한 보도용 다리 하나를 더 놓은 것이다. 이 다리 아래에서 금강산에서 흘러 온 물이 남쪽의 물길과 자연스레 합류한다. ‘남북통일이라고나 할까?

 

 

수려한 산세에 둘러싸인 하야교도 아름다움을 뽐내는 곳이다. 암반 위를 흘러가는 물길은 바닥이 투명하게 다 비칠 정도로 맑다. 이미 수질검사까지 마친 곳이라 바로 떠 마셔도 된단다.

 

 

상류 쪽의 풍경은 하류만은 못하다. 하지만 금강산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이라는 데서 의미를 갖는다. 저 물줄기처럼 도 금강산까지 연결되었으면 좋겠다. 루쉰(魯迅)은 자신의 단편소설 고향에서 땅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될 따름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니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발원을 모아보면 어떨까? 그러면 통일이라는 길이 보일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하야교를 지나자마자 삼거리가 나온다. 두타연에서 한 시간(3.6km)쯤 되는 곳으로 옛 국도 31호선의 종점 아닌 종점이다. 이곳에서 곧장 직진하면 비득 안내소에 이르게 되지만, 왼편 취수장 옆으로 금강산 가는 길이 열린다. 그러나 지금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다. 대신 그곳에 소망을 전할 수 있도록 희망의 메시지 전화기를 설치해 놓았다. 참고로 금강산으로 가는 이 길은 32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에 개통된 금강산 전기철도가 놓이기 천 수백 년 전부터 서쪽에 살던 사람들이 금강산으로 가던 옛길이다. 양구읍에서 5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금강산 장안사로 가는 길은 한양에서 내금강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현재 막혀 있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이라도 걸어갈 수 있을 듯 아련하다. ‘금강산으로 가는 옛길, 문을 활짝 열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삼거리 오른편은 포토존으로 조성되어 있다. 비교적 널찍한 광장의 초입에는 나라꽃인 무궁화을 형상화시킨 듯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하얀 조형물을 바라보며 하루 빨리 무궁화를 국화로 사용하는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곱씹어 본다.

 

 

금강산 가는 길에서 발길을 되돌린다. 그리고는 아까 얘기했던 징검다리로 되돌아 나온다. 징검다리 주변은 아름다운 경관에 더해 깨끗함까지 자랑하고 있었다. 사실 관광지에 가면 사람들이 제 멋대로 남기고 간 흔적에 눈살을 찌푸리기 일쑤다. 그런데 이곳엔 계곡의 돌 사이나 숲속 등 어디에서도 쓰레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동안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이 자연을 따뜻하게 배려해준 덕분이 아닐까 싶다.

 

 

출렁다리로 가는 도중에도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었다. 두타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겠거니 하는 기대를 갖게 만드는 위치이다. 하지만 주변의 울창한 숲은 그런 기대를 무참히도 짓밟아버린다. 두타연과 폭포는 푸른 숲속으로 몸을 사려버렸고, 물길 건너에 지어놓은 두타정과 전망데크만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짙은 숲은 이마저도 못마땅했던지 정자의 형태를 겨우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조금 더 걸으면 두타교라는 출렁다리가 나온다. 케이블에서 줄을 늘어뜨리고 그 줄이 다리상판을 잡아주는 현수교(懸垂橋)이지만, 건널 때마다 출렁출렁 거린다고 해서 보통 '출렁다리'라고 부른다. ! 오는 도중에 징검다리도 놓여있었으나 출렁다리를 이용하기 위해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출렁다리라 불리는지는 다리에 오르자마자 알아차리게 된다. 행여나 떨어질세라 살금살금 걷는데도 다리가 흔들대는 것이다. 이걸 기회로 여기고 중간쯤에서 다리를 구르는 사람들도 있다. 고객은 물론 여성들,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가 차라리 신음에 가깝다. 하지만 나무라는 이는 눈에 띄지 않는다. 골리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들 모두가 즐겁기 때문일 것이다.

 

 

다리에 오르면 수입천(水入川)의 지류라는 사태천(沙汰川)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상류에는 징검다리 하나가 앙증맞게 물길을 건너고 있다. 하지만 폭포와 소는 숲속에 꼭꼭 숨어버렸다. 하류에 있다는 선녀탕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래도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자 호젓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오솔길이 다시 나타난다. 이제 막 여름의 문턱에 들어섰는데도 숲길은 벌써 녹음이 짙다. 철조망 사이사이에 숨은 듯 피어난 야생화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원초적인 아름다움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렇게 걸어가는 숲길에는 양구 10년 장생길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 ‘1년 장생길을 걸으면 신장이 튼튼해진단다.

 

 

안내판은 또 ‘DMZ에 묻힌 박수근 그림 항아리라는 이야기를 적어 넣어 방문자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양구가 낳은 민초들의 화가, 박수근의 초기 작품 수백 점을 부인 김복순 씨가 피난 중 항아리에 담아 중동부 DMZ 일대 어딘가에 묻었다는 것이다. 최근 호당 수억 원을 호가하는 박수근의 그림 가격을 고려할 때 만약 그 항아리가 온전히 묻혀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항아리가 될 것 같다. 안내판에는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염원도 빠뜨리지 않고 적었다. 비록 박수근의 그림 항아리를 찾기 위해서라는 인간의 욕념을 전제로 삼았지만 말이다.

 

 

근처에는 지뢰 체험장이 들어서 있었다. 각종 지뢰의 파괴력을 설명하는 안내문과 함께 요란한 폭발음을 담은 음향 장치와 사람이 직접 올라타고 폭발의 진동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이처럼 안전하게 이곳을 둘러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이곳을 뒤덮고 있던 지뢰를 모두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시설을 만들어 놓은 것은 지뢰라는 흉악한 무기 자체를 체험하는 것을 통해 그것이 매설되고 다시 걷어진 이 땅의 역사와 아픔을 오래오래 기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한 이를 미래 세대에게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주차장으로 나가다 보면 또 하나의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두타연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전망대에 올라 두타연을 조망한다. 그리고 꽃을 받아들고 향기를 맡듯 깊이 숨을 들이 마신다. 몸 안에 새로운 힘이 고인다. 두타연은 두타연만이 아닌 주변의 모든 것과 어울려 완전한 풍경임을 깨닫는다. 일상 속에서도 그런 풍경을 기대하게 만드는 힘을 두타연은 가지고 있었다.

 

 

숲길을 대표하는 풍경의 주인은 두타연이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만든 3단폭포와 그 밑의 널찍한 물웅덩이를 일컫는데, 오래전 주민들은 드렛소(드래소) 또는 용소라 불렀다. 이곳의 예전 지명인 건솔리 드렛골에서 따온 이름이다. 현재 이름은 소 위쪽에 있었던 절집 두타사에서 비롯됐다.

 

 

징검다리로 내려가자 두타연(頭陀淵)’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두타연에서의 두타(頭陀)’는 속세의 번뇌, 망상, 탐욕을 버리고 불도를 닦는 수행을 일컫는다. 원래 이 말은 버리다, 씻다, 닦다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dhuta’의 음역어인데, 부처의 으뜸 제자들 중 한 명인 마가가섭(摩訶迦葉)’을 수식하는 두타제일(頭陀第一)이란 말로 널리 알려졌다. 이 말은 이후 음차한 한자의 의미가 더해져 머리를 흔들며 번뇌를 떨쳐 내고 청정하게 정진한다는 불가의 두타행(頭陀行)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엄격히 의식주를 절제하는 두타의 수행법 12가지는 십이두타행으로 불리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재아난야처(在阿蘭若處)’, 즉 마을과 떨어진 조용한 산림 속에서 사는 것이다.

 

 

 

두타연 오른쪽의 넓은 입구를 가진 움푹한 천연동굴은 보덕굴로 불린다. 입구 지름이 10m, 길이는 20m쯤 되는 저 동굴은 동쪽의 낙산사 홍련암, 서쪽의 강화도 보문사, 남쪽의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예로부터 ‘4대 관음성지로 북쪽의 이름난 도량터라고 한다. 두타사의 창건 설화는 두타연이라는 이름의 연원뿐만 아니라, 그토록 만나고 싶던 관세음보살의 현신과 부부가 되어 함께 살았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한 어느 수도승의 이야기에서 그 자체로 불도의 깨달음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