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의길 9코스(율곡습지공원 – 리비교 거점센터)

 

여행일 : ‘25. 3. 15()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일원

여행코스 율곡습지공원두포교차로파평면사무소금파교리비교거점센타(거리/시간 : 8.5km, 실제는 7.15km를 1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청마산악회

 

특징 드디어 코리아둘레길의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은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그리고 2024년 9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 들머리는 율곡습지공원(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수원·문산고속도로 월롱 IC에서 내려와 통일로(국도 1호선문산방면, ‘여우고개사거리에서 율곡로(국고 37호선)로 옮겨 연천방면율곡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곧장 율곡습지공원으로 연결된다평화의길 안내판(인증 QR코드)은 평화누리길(9코스)의 아치형 대문 옆에 설치되어 있다.

 율곡습지공원에서 리비교까지 임진강 언저리를 따라 북진하는 길이 8.5km의 여정. ‘두포천 눌노천을 건넌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얘깃거리나 볼거리가 없다.

 출발지 근처 학자의 숲 안내판. 1548,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한 율곡이 이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을 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린다나? 하단에는 그가 주장했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적었다.

 09 : 00. 실제 출발은 두포교차로에서. 9코스(8.5km) 10코스(9.6km)는 둘을 합쳐도 20km가 채 되지 않는다. 둘 모두를 한꺼번에 진행시키면서 내놓은 산악회의 구실이다. 하지만 집사람 체력으로는 다소 부담스러운 거리라서 집사람은 파평면사무소, 그리고 나는 집사람이 기다려야 할 시간을 감안 두포교차로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길을 나서기 전, 잠시지만 평화의길을 역방향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율곡로(국도 37호선) 아래 굴다리를 지나면 전진교 두포천이라는 볼거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참고로 전진교는 민통선 내에 군사용으로 만든 폭이 좁은 다리이다. 관할 부대의 명칭이 전진부대여서 전진교로 불리고 있으며 통일대교처럼 군사 시설물이다.

 이정표가 평화의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곳 두포교차로 9코스의 주요 기점 중 하나다. 그러니 거리 정도는 적어 넣는 게 여행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09 : 02. 250m쯤 진행하면 두포교에 이른다. 두포천(斗浦川)을 가로지르는 다리(두포교)에 잇대어 탐방로를 내놓았다.

 법원읍 금곡리에서 발원한 두포천(斗浦川)은 북서방향으로 흐르다 저곳에서 임진강으로 흡수된다. 하나 더. 혹자는 저곳 어디쯤엔가 몽구정(夢鷗亭)’ 터가 있다고 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성담수(成聃壽, 1436~?)가 지었다는 정자로, 성담수는 단종 폐위에 불복하여 세조가 내린 벼슬을 사양하고 두문리(옛 지명) 외진 곳에서 자연 속에 파묻혀 지내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한 인물이다.

 임진강 너머는 민간인통제지역이다. 때문에 임진강 쪽은 카메라 들이대기조차 무서울 정도로 통제가 심하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에게는 삶의 현장일 따름인가 보다. 강가에 기댄 농경지는 벌써 쟁기질을 끝내고 파종을 기다린다.

 되돌아 나오는 길. ‘전진교 남단의 검문소가 눈에 들어온다. 민통선 안에 있는 농경지로 가려는 차량 등으로 인해 항상 붐빈다는 곳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금단의 영역이다. 통행은커녕 사진촬영조차 금지하고 있었다.

 두포나루터라는 입간판이 눈에 띈다. 근처 음식점에서 세워놓은 것이겠지만 이 근처 어딘가에 두포나루터가 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09 : 06. 교차로로 되돌아와 평화의길을 순방향으로 탄다. 두포3(장포동) 표석 오른쪽, 그러니까 율곡로의 오른쪽 가장자리를 따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두포리(斗浦里)는 임진강을 끼고 있어, 강변을 따라 소규모로 발달된 농경지가 주민들의 일터다. 간뎃말·건넌말·노적굴·두문리·방학동·새텟굴·아랫말·아랫장깨·윗장깨·장깨·장담동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고 했으나 어디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진진교는 통행량이 많다고 했다. 두포교차로 부근에 들어선 여러 음식점과 카페들이 그 증거가 아닐까?

 탐방로는 율곡로와 나란히 간다. 오른쪽 가장자리를 따라 도보&자전거 길을 따로 내놓았다.

 09 : 12. 두포삼거리. 탐방로는 이곳에서 율곡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청송로를 따라간다. 파평면 두포삼거리와 적성면의 적성교차로를 잇는 지방도인데, 중간쯤에 있는 파산서원(坡山書院)’에서 파생된 이름이지 싶다. 서원에서 배향하고 있는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의 호가 청송(聽松)이니 말이다.

 청송로가 오름짓을 시작한다. ‘파평산의 지능선을 넘어가면서 만들어내는 가냘픈 몸짓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도로 건너편에 파평면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은 파평면의 대표 볼거리인 화석정이 아닐까 싶다.

 09 : 15. ‘단양 우씨 망향제단 입구에 이른 탐방로가 청송로마저도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능선을 넘어가기 위해 북쪽으로 나있는 임도를 따라간다.

 안정공(安靖公派)과 충정공(忠靖公)을 모시는 망제단(望祭壇)’이란다. 여말선초의 문신 우홍강(禹洪康, 1357-1423)과 그의 아버지 우현보(禹玄寶, 1333-1400)의 시호(諡號)인데, 이들의 묘가 북녘 땅에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후손들의 소원이 통일이 되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청송로를 따르기로 했다. 면사무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집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지나다니는 차량과의 충돌이 염려될 정도로 갓길은 좁았고, 거기다 씽씽 달려대며 내지르는 굉음은 사람의 정신을 쏙 뽑아버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9시를 겨우 넘긴 이른 시간인데도 문을 연 식당이 있었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고 했다. ‘부지런한 새는 먹이를 더 얻는다고도 했다. 남들이 쉴 때 가게 문을 여는 저 주인장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덤프트럭이 지나갈 때는 더 소름이 끼쳤다. 심심찮게 마주치는데 그럴 때마다 지반까지 흔들렸기 때문이다.

 09 : 24. 가슴조리며 올라선 고갯마루. ‘장마루라고 적힌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장마루 장파리의 또 다른 이름이다. 파주시에서는 장파리, 금파리, 늘노리에 속한 자연마을들을 묶어 장마루권역이란 이름으로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중 하나인 금파리로 들어선다는 얘기일 것이다.

 고갯마루 부근에서 평화의길을 다시 만났다. 이정표는 이곳을 박석고개로 적고 있었다. 뒤로 보이는 고갯마루를 이르는 지명인가 보다.

 이후부터는 다시 평화의길을 타기로 했다. 집사람도 목숨까지 위협 받아가며 빨리 오는 걸 원치는 않을 것이다.

 널찍한 길은 도로에 못지않게 고왔다. 아니 보드라운 흙길이라서 도로보다 한결 더 걷기가 좋다.

 길은 심심찮게 나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정표로도 모자라 시선이 머물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가이드리본이 매달려 있다.

 이즈음 금파산업단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영상·음향, 통신, 전기·전자기기 등 다양한 업종을 유치하고 있다나?

 09 : 35. ‘금파리(金坡里)’로 내려선다. 임진강의 지류인 눌노천 언저리에 분포되어 있는 마을로, 파평면의 행정타운이 들어서 있다.

 친절한 이정표. 열린 화장실까지 안내해준다.

 탐방로는 행정타운의 안마당을 통과한다. 농산물 저온유통시설과 북파주농협, 파평도서관, 소방서, 행정복지센터 등을 차례로 지난다.

 파평면행정복지센터. 파평(坡平)의 역사는 고구려의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게 신라로 넘어오면서 파평현(坡平縣)이 되었다고 한다. 금파리·눌노리·덕천리·두포리·마산리·율곡리·장파리 등 7개의 법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복지센터 앞의 송덕비(頌德碑). 하나같이 이씨(李氏)들이다. 금파1리 금곡동마을 뒤 산자락에 세종의 아들 담양군(潭陽君) 이거(李璖, 1439-1450)의 묘가 있다고 했는데, 이곳 금파리가 그들의 세거지일지도 모르겠다.

 09 : 39. 행정타운을 빠져나와 청송로를 따라간다. 내가 도착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집사람과 다시 만났음은 물론이다.

 09 : 42. 대전차방호벽. 평화를 갈망하는 염원들이 모여 전쟁을 대비한 시설까지도 멋진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놓았다.

 전통의상 패션쇼?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별칭까지 얻어낸 고을에 걸맞는 그림이라 하겠다. 이곳 파주는 이율곡과 성혼 등이 중심이 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산실이다. 그뿐 아니다. 고려 때 여진을 정벌한 윤관 장군과 조선시대 대표 재상 황희, 조선 초 예악제도를 정비한 허조, 경국대전 편찬을 지휘한 노사신, 파산학을 태동시킨 백인걸, 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인물들이 파주에서 나고 자랐으며 묻혔다.

 반대편에는 화석정(花石亭)을 그려 넣었다. 율곡 선생이 여덟 살에 지었다는 시도 적혀있었음은 물론이다.

 09 : 44. 파평삼거리. 청송로와 장마루로가 나뉘는 삼거리이다. 평화의길은 왼쪽 장마루로를 따라간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청송로는 감악산으로 유명한 적성면으로 간다. 가는 도중 눌노리에서 천연 연못인 파평 용연(坡平 龍淵)’을 눈에 담을 수도 있다. 필자의 시조가 탄강(誕降)한 곳인데 간략하게 소개해본다.

 용연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인 윤신달(尹莘達, 893-973)이 탄강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용연에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리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렸고, 사흘째 되는 날 윤온(尹媼)이라는 할머니가 연못 한가운데 금으로 만든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건져서 열어보니 한 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체 속에 누워있더란다. 금궤 속에서 나온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할머니가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손바닥에 윤자 모양이 있어 윤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탐방로는 이제 장마루로를 따라간다. 금파리의 널찍한 들녘을 헤집으며 길이 나있다. ‘눌노천이 휘돌아 굽이치면서 몰고 온 퇴적물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충적평야다.

 09 : 53. ‘금파교를 건넌다. 금파리는 이 다리를 경계로 삼아 1리와 2리로 행정 단위가 나뉜다.

 눌노천은 법원읍 직천리에서 발원, 북쪽과 서쪽으로 연이어 흐르다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21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상류는 전형적인 산지하천의 형태를 보이나, 중하류지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다리를 건너면 금파2리 아래장마을 표석이 반긴다. 2리에는 초당골로 불리는 마을도 있다고 했다. 마을 뒷산에 눌노천과 임진강이 바라보이는 초당이 있었는데, 선비들이 학문을 갈고 닦던 곳이라 하여 붙은 지명이란다.

 09 : 54. 금파교 북단에 이른 탐방로가 이번에는 눌노천의 둑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반대편은 눌노리(訥老里)’로 연결된다. 조선 중기 율곡 이이와 함께 대학자로 이름을 떨친 성혼(成渾, 1535-1598)의 학문적 근거지가 된 곳이다. 성혼의 호 우계(牛溪)는 자신의 집 앞을 흐르는 소개울(현재 눌노천)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즈음 파평산(坡平山, 496m)’이 눈에 들어온다. 파주의 진산이지만 군사시설에 정상을 빼앗긴 서글픈 산이다. 대신 개성시가지와 장풍군의 산마루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동봉에 정상석을 세워놓았다.

 눌노천도 곡류하천(曲流河川)으로 분류되는 모양이다. 휘휘 돌아가며 만들어내는 곡선이 여간 고운 것이 아니다.

 10 : 00. 평화의길은 눌노천의 끝까지 가지는 않는다. 율곡로(국도 37호선)로 접근하는가 싶더니 그 하부로 난 굴다리로 들어간다.

 이후부터는 율곡로를 오른쪽에 끼고 간다. 임진강과 국도 사이에 오솔길이 나있다고 보면 되겠다.

 임진강 쪽 분지는 잡초만 가득했다. 지역 언론인 파주민보 37번 국도와 임진강 사이에 금파리성지(金坡里城址),  궁예성터가 남아 있다고 했다. <후고구려 궁예왕이 철원에서 피신하여 이곳에 거주하면서 쌓은 토성이라는 전설이 있으며 길이 1,500m정도, 높이 6m정도 되었으나 현재는 모두 없어졌다>는 기록이 전해진단다. 임진강 언저리의 저 분지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0 : 06. 노거수가 멋진 풍광을 자아내는 또 다른 굴다리. 임진강에 어깨를 맞댄 공터에는 정체 모를 초소까지 지어져 있었다. 임진강 건너는 진동면 하포리로 민간인 통제지역이다. 그걸 알아차리라는 듯 철망 울타리까지 둘러놓았다.

 굴다리. 율곡로의 아포삼거리에서 내려와 금마루6을 타고 조금만 내려오면 이곳으로 연결된다.

 이정표(장남교 11.6km/ 율곡습지공원 6.9km)는 현재 위치를 적벽산책로로 적고 있었다. 임진강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임진강 적벽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중 하나인 금파리 또는 장파리 적벽이 부근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임진강의 적벽 주상절리는 신생대 시기 화산활동으로 인해 만들어졌다. 선조들이 임진강변에 형성된 주상절리가 붉은빛이나 자줏빛으로 보인다고 하여 적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평화의길은 계속해서 북진한다. 임진강과 율곡로를 좌우에 끼고 가는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주변 풍광은 확 달라졌다. 바닥을 우레탄으로 깔아놓는 등 도심의 공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닦아놓았다.

 쉼터에 이르니 선두대장이 막걸리 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의 권유로 금주를 시작하지 벌써 4개월인데 그걸 몰랐던 모양이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하지 않았던가. 고맙다는 인사만 남긴 채 바람같이 지나쳐버릴 수밖에 없었다.

 잡초더미에 묻힌 저 초소의 정체는 대체 뭘까? 군의 시설로 보이기는 한데.

 탐방로는 임진강에 기대듯이 나있다. 덕분에 나뭇가지 사이로나마 임진강을 눈에 담으며 걸을 수 있다.

 가끔은 시야가 툭 트이기도 한다. 임진강 건너는 진동면 하포리이다. 저 어디쯤에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정곤수(鄭崑壽, 1538-1602)의 묘가 있을 것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으로 유명한 의성(醫聖) 허준(許浚, 1539-1615)의 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민통선 너머에 있어 허가를 받아야만 구경할 수 있다.

 10 : 15. 금파취수장. 파주 시민 15만 명이 먹고살 수 있는 물을 공급하고 있단다.

 취수장 진입도로를 벗어난(이정표 : 장남교 10.6km/ 율곡습지공원 7.7km) 평화의길은 다시 강변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임진강과 어깨를 맞대고 북진한다. 임진강을 발아래 두고 걷는다고 볼 수도 있겠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민통선 너머를 은밀한 속살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리고 민간인통제지역에서도 농사를 짓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긴 1970년대 만들어진 대성동과 통일촌 말고도 2000년대에는 해마루촌까지 조성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이즈음 리비교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잠시 후 만난 또 다른 쉼터. 여간 정성을 들여 만든 게 아니다. 정자에 벤치는 물론이고 운동기구들까지 갖췄다.

 10 : 24. ‘리비교 문화공원에 이른다. ‘리비교 1951년 휴전협정 이후 보급로가 필요했던 미군이 건설한 다리다. 1950 7 20일 대전전투 당시 자신을 희생해 사단 병력을 철수시키는 데 공헌한 미 제24사단 전투 공병대대 소속 조지 리비(George D. Libby)’ 중사의 이름을 브랜드로 삼았다.

 리비교 1953년 미군에 의해 임진강에 건설된 다리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다리로 한국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지역주민의 삶을 이어주던 다리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적 교훈과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다리 주변에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공원안내도. 추가로 조성하겠다는 부지(10)에서 이곳을 관광명소로 개발하려는 파주시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공원은 철조망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민통선 이남인데 꼭 그래야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튼 안에는 철제 빔(beam)이 놓여있었다. 리비교를 재 가설하면서 철거한 기존 다리 상판이 아닐까 싶다.

 중간에 공원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내부는 여느 공원과 다름없었다. 산책로와 쉼터는 기본, 임진강변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건너편 민간인통제구역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오버 브릿지는 저걸 이르는 모양이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길 위에 선반을 걸치듯 가로놓여 있다.

 저것은 뭘 의미하는 조형물일까?

 리비교는 파평면 장파리와 진동면 용산리를 잇는 총연장 328m( 11.9m)의 콘크리트 다리다. 1951 7월 휴전협정을 시작할 당시, 전선은 정리돼 있었으나 계속된 보급로가 필요했던 미군은 임진강 하류인 파주에서 상류인 연천까지 자유의 다리를 포함해 모두 11개 교량을 설치했다. 하지만 홍수에 유실되는 등 사고가 잦자 1952 9월 반영구적인 교량으로 바꾼다. 8군 공병대가 리비교의 설계 및 건설을 위한 연구를, 2 건설공병대가 설계를, 그리고 임진강의 정복자 로 불리던 미 84 건설공병대대가 건설을 맡았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통로. 대전차방호벽이 설치되어 있다. 도강해온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선착장은 텅 비어 있었다.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낡은 꼬맹이 배 두 척이 한가롭게 낮잠을 자고 있을 따름이다.

 리비교 남단에는 검문소가 있었다. 때문에 다리 방향은 사진촬영이 금지된다. 하나 더. ‘리비교는 통일대교, 전진교와 함께 민통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주요 통로이다. 하지만 2016년 안전진단에서 ‘D 등급을 받아 폐쇄되었다가 전면 재가설 공사를 거쳐 7년만인 2023 11 7일 통행이 재개됐다. 이 시기 민통선을 넘나들며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전진교까지 20km를 우회해야 하는 큰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리비교 진입로. 진입 차단시설이 남북 분단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사진조차 함부로 찍을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인 것이다.

 10 : 32. ‘리비사거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 안내판(인증 QR코드 부탁)은 리비교 남단과 리비사거리의 중간쯤(아래 사진에서 태극기 아래)에 세워져 있다.

 9코스는 7.15km 1시간 40분에 걸었다.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특별히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없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