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일본 간사이 지역 여행

 

여행일 : ‘17. 3. 15()-17()

여행지 : 오사카(오사카 성, 도톰보리),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천룡사, 노노미야신사), 나라(동대사)

 

 

일 정 :

 3.15() : 오사카(도톰보리)

○ 3.16() :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노노미야신사)

○ 3.17() : 오사카(오사카 성), 나라(동대사)

 

여행 둘째 날 : 교토의 청수사(清水寺 , 기요미즈데라)

 

특징 :  교토(京都) : 산업도시 오사카(大阪)에서 북동쪽으로 47, 문화도시인 나라(奈良)의 북쪽으로도 비슷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긴키(近幾)지방의 중심도시이다. 우리나라에 천년 고도 경주가 있다면 일본에는 교토가 있다. 교토는 794년 간무 천황이 도읍지로 정한 이래, 1868년 무사정권이 가마쿠라로 수도를 옮긴 200년을 제외하고는 일본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도시 전체가 유물로 가득 차 있는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유구한 세월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가 많다. 17(사찰 13개소, 신사 3개소,  1개소)이나 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그 증거라 하겠다. 교토 탐방의 장점은 길 찾기가 수월하다는 것이다. 중국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모방해 건설한 탓에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고 돌아다니는 관광객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런 여행객들의 트렌드(trend)도 요즘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역사 탐방만을 위해 교토를 방문하였으나 최근에는 일본 전통 공예·음식 등 다양한 일본 문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도 많이 찾는단다.

 

 청수사(清水寺, 기요미즈데라) : ‘물이 맑은 절이라는 뜻의 청수사는 교토가 도읍이 되기 이전인 778년 세워진 사원이다. 교토 시내의 동쪽에 있는 오토와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청수사라는 명칭은 이곳에 있는 오토와 폭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 몇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에도시대 초기인 1633 도쿠가와 이에미스(徳川家光)’의 명령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으며, 199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도 교토의 문화재 가운데 일부이다. 이곳에서 꼭 찾아봐야 할 곳으로는 십일면 천수관음상을 모시고 있는 본당과 절벽 위에 거대한 목조 구조물로 지어진 기요미즈의 무대이다. 참고로 13에 달하는 기요미즈테라는 원래 기타카논지(北觀音寺)라고 했다가 오토와야마(音羽山)에서 내려오는 물이 맑아 기요미즈테라(淸水寺, 물 맑은 사원)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법상종(法相宗)의 총본산으로 말사(末寺)나 단가(檀家)도 갖지 않은 기요미즈테라는 일종일산일사(一宗一山一寺)의 대본산이다. 본당이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으며 경내 유물 15건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주차장에서 내리면 엄청나게 많은 상점들과 마주한다. 사람들 또한 인산인해(人山人海). 수많은 중국의 유커(游客)들과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고 아장아장 걷고 있는 일본 여자들 사이에서 한국어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만큼 입소문을 많이 탄 관광지라는 얘기일 것이다.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15분 정도 올라가니 청수사를 상징하는 니오몬(仁王門)’ 산쥬노토(三重塔)’가 얼굴을 내민다. 니오몬은 서문(西門, 니시몬)’과 함께 청수사로 들어가는 두 개의 문 가운데 하나이다. 니오몬 기둥에 귀를 기울이면 멀리 떨어진 기둥 근처에서 하는 이야기도 들린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기둥을 쓰다듬으면 귀가 좋아지고, 좋은 소리만 듣는다는 전설이 있다. 참고로 인왕문(仁王門)은 사찰의 정문격인 건축물이다. 인왕은 불교에서 사찰과 불탑을 수호하는 수문신장으로 불법 외호선신의 하나다. 사찰 내부를 지키는 경계의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되겠다.

 

 

 청수사(기요미즈데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2007년에 발표된 세계 신 7대 불가사의의 후보로까지 거론되었을 만큼 일본 유산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창건 설화 하나쯤 갖고 있는 건 당연하다 하겠다. 778년 나라(奈良)에서 온 승려 현심(賢心)이 꿈에서 계시를 받고 오토와야마(音羽山)에 도착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는 수백 년에 걸쳐 수행을 계속해오던 교우에이(行叡)라는 이름의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엔친(延鎭, 현심의 바뀐 이름)에게 자신은 지금부터 동쪽 나라로 여행을 떠나니 뒤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엔친은 암자를 짓고 수행에 열중했는데 어느 날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라는 무사가 방문했단다. 임신한 부인 미요시 다카코의 병을 치료하는데 사슴의 생피가 좋다는 말을 듣고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엔친은 살생을 금하고 부인의 순산을 기원했다. 덕분에 무사히 자식을 얻은 다무라마로는 엔친에게 깊이 귀의하여 기요미즈테라를 건립하고 십일면관음입상(十一面觀音立像)과 협사인지장보살, 비사문천상을 안치했단다. 이런 창건설화 덕분인지 기요미즈테라에는 여인들의 참배로 붐비는 것 같았다.

 

 

 니시몬은 일본에서 보기 드물게 단청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문은 서쪽으로 향하고 있어 오후에 햇빛을 받으면 그 붉은 빛이 더욱 강렬해진다고 한다. 화려한 색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이 바로 그 때가 아닐까 싶다. 햇빛뿐만이 아니다. 대문 앞 홍매화가 피워낸 진홍빛 꽃송이들이 니시몬의 화려함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나머지 하나는 서문(西門, 사이몬)이다. 에도 초기에 재건되었는데 화려한 장식에 붉은색의 단청이 인상적이다. 서문은 우리나라 사찰의 천왕문(天王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건축물로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 중 동방의 지국천왕과 남방의 증장천왕을 모신다. 인왕문과 마찬가지로 악한 자들을 쫓아내고, 죄 지은 자에게 벌을 내린다.

 

 

 니시몬 뒤 탑()처럼 생긴 건물은 삼중탑(三重塔, 산쥬노토)’이다. 삼층탑 형태의 불전(佛殿)으로 각 층마다 석가, 미륵, 다보를 모셨다고 한다. 때문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위로 올라가더라도 폭이 좁아지지 않고 동일한 크기를 유지한단다.

 

 

 산쥬노토(三重塔)’을 지나면 수구전(隨求殿, 즈이구도)'이 나온다. 아래 사진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랄 수 있는 보문각(普門閣)‘을 가운데에 놓고 왼편에 자리하고 있다. 수구전은 앞서 본 두 건물과는 달리 검은색 지붕에 흰색 벽으로 이루어진 일본 전통가옥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게 눈길을 끈다. 즈이구도는 소원을 들어주는 부처인 수구보살을 모시는 법당이다. 태반체험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별도의 대금을 지불해야 한다기에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본당으로 가는 길목은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짙푸른 녹음과 새빨간 단풍 등 교토의 아름다운 사계를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명소라고 한다.

 

 

 

 아래 사진은 1633년 재건된 광문(轟門)이다. 본당의 중문으로 정면 처마 밑 중앙에 월주스님이 썼다는 보문각(普門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전각의 좌우 양쪽에 지국천왕상과 광목천왕상이 있고, 배면에는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장인 아교우(阿形)와 입을 다물고 있는 사자상인 응교우(吽形)의 석상이 안치되어 있다. 또한 문 앞에는 올빼미 쵸우즈바찌(신사나 절에 참배 전에 손과 얼굴을 씻는 곳)’가 봉납되어 있다.

 

 

 중문을 지나면 일본의 국보(國寶)로 지정되어 있는 본당(本堂)이 나온다. 본당의 마루는 무대(舞台)’라는 별도의 이름이 붙어 있다. 예전에 십일면천수관음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단다. 이 둘은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기부에 의해 칸에이 10(1633)에 재건되었는데 정면 36m에 측면 30m, 무대높이 18m로 매우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지붕은 우진각 구조, 노송나무 껍질로 이은 지붕, 정면(남쪽) 좌우에 팔작지붕의 익랑(翼廊)이 튀어나오도록 외관에 변화를 주었다. 건물의 앞부분은 산의 경사면에 앞으로 내밀듯이 지어져 있다. 크고 긴 수많은 기둥(139개라고 한다)을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세워 상단을 지탱하는 구조하고 한다. 하지만 공사 중이라서 실제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일본의 유명한 속담 중에 청수사에서 뛰어내릴 각오로 하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청수의 무대에서 뛰어내릴 각오로 하면 세상에 못 이룰 일이 없다는 표현이란다. 이런 속담 때문인지는 몰라도 청수의 무대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속설이 전해졌고, 이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그렇지 목숨까지 건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일이 아닐까 싶다. 생존확률이 85.4%였다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지금은 난간을 둘러놓아 뛰어내리는 것을 막아놓았다.

 

 

 

 기요미즈 무대에 사람들이 몰려있기에 다가가보니 쇠막대 두 개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쇠로 만든 나막신 한 켤레가 놓여있다. 철장(鐵杖) 가운데 하나는 무게가 무려 90가 넘고 작은 것도 14나 된다고 한다. 그러니 작은 것은 여자들도 들 수 있겠지만 큰 것은 건장한 남성들에게도 불가능에 가깝다. 사진에서 보듯이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작은 것에 도전하고 있는 게 그 증거일 것이다. 굽이 높은 나막신의 무게도 12나 된다니 참조한다.

 

 

 본당(本堂)의 수미단(須彌壇)은 텅 비어 있었다. 중앙의 궤에는 본존의 천수관음(千手觀音) 입상, 오른쪽의 궤에는 비사문천(毘沙門天) 입상, 왼쪽의 궤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입상을 각각 안치하는데 평소에는 공개를 하지 않는단다. 지난 2000년에 마지막으로 공개를 했고 다음에는 2033년에 공개를 할 예정이라니 33년에 한 번씩 얼굴을 내미는 셈이다.

 

 

 대신 요상하게 생긴 보살상 하나가 한켠에 모셔져 있다. 소원 성취의 신인 출세대흑천(出世大黑天)’이라는데 까만 머리에 어깨에 보물자루를 메고 오른손엔 요술방망이를 들었다. 그리곤 쌀가마니를 딛고 선 형상이다.

 

 

 

 본당의 건너편에는 옥원(奥院, 오쿠노인)’이 버티고 있다. 본당에서 복도로 이어지는데 촘촘한 나무로 지탱된 본당의 전경과 교토 시내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최고의 포토 스팟(photo spot)’이다. 이 건물은 본당 무대와 같은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붕도 본당과 같은 삼나무 껍질의 우진각 구조로 되어있다. 모시는 부처도 역시 본당과 같다고 한다.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 잡은 고야스노토(子安塔)‘가 눈에 들어온다. ’칸무 천황의 후궁인 사카노우에노 하루코(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의 딸)‘가 황태자 카도이 친왕 탄생을 축하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청수사 인왕문 아래에 있었지만, 메이지 시대에 태산사가 폐지되면서 청수사 안의 남쪽으로 이축되었다고 한다.

 

 

 청수의 무대 아래에는 청수사의 또 다른 상징인 오토와 폭포(音羽, 오토와노타키)’가 있다. 오토와야마(音羽山)에서 내려온 물이 세 갈래로 흐르는데 예로부터 황금수’, ‘연명수라고 불리며 일본 십육 명수의 하나로 꼽혔을 정도로 유명한 물이다. 청수사라는 이름도 이 맑고 깨끗한 청수가 오토와의 산중에서 1000년 이상 계속 솟고 있다는데서 유래하고 있다. 세 줄기로 떨어지는 낙수가 특징이며 각각의 낙수는 왼쪽부터 학문과 연애, 장수를 의미한단다. 이 가운데 두 개만 골라 마시는 것이 예의로 여러 개를 마시면 어느 소원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전해져 오는데, 이는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함이란다.

 

 

 

 물을 받아 마시려고 길게 늘어선 줄이 장난이 아니었다. 기다란 손잡이가 달린 바가지로 물을 받아 마시는데 물이 세 줄기로 떨어지고 있으므로 세 명씩 번갈아가며 마시는 셈이다. 그런데도 줄은 도무지 줄어들 줄을 모르는 것이다. 하긴 이 물을 받아 마시면 건강·학업·연애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니 어느 누가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본당 옆 산자락에는 지주신사(地主神社)‘가 자리 잡았다. 연인들의 사랑을 이루어주는 곳으로 젊은 여성과 연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청수사를 수호하는 신사 역할을 해왔으며 메이지시대의 신불분리정책 이전에는 청수사에 포함된 시설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록 두 시설이 분리되어 있지만 아직도 입구를 같이 쓰고 있는 등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지주신사는 일본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인 스사노오(素戔嗚命)’의 후손인 제신 오오쿠니누시노 미코토 (大国主命, 오오쿠니)’를 모시는 신사이다. 오오쿠니는 연분을 맺어주는 신이란다. 때문에 인연의 신사’, ‘사랑의 신사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여중·여고생들에게 최고의 수학여행 코스로 꼽히고 있단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일본인의 종교관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불교(佛敎)와 신도(神道)는 분명히 다른 종교이다. 심지어 기독교와 천주교처럼 뿌리가 같은 종교도 아니다. 불교가 대륙을 통해 건너온 종교인데 반해, 신도는 일본 전통의 민간 정령신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모든 사물에 신이 있다고 믿으며 종교에 대한 개방이 큰 편이라고 한다. 때문에 종교 간의 분쟁이 매우 적고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는 국가란다. 이곳 청수사와 지주신사처럼 두 종교가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와는 반대로 신사의 안에 절이 있는 경우도 있다니 참조한다. 이는 서로를 일본인의 문화에 녹아있는 종교로 인정함과 동시에 두 종교의 영역이 서로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총문(総門)이라는 중요문화재도 보였으나 특이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노노미야 신사에서 보았던 연애 샘물‘, 즉 물위에 띄워놓은 종이에 적힌 사연의 글자가 모두 사라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그런 종류의 물통이 놓여있는 게 눈길을 끄는 정도였다.

 

 

 에마(絵馬)’도 눈에 띈다. 신사(神社)나 사원(寺院)에 기원(祈願)했던 것이 이루어졌을 때 그 사례로 봉납하는 그림이 그려진 작은 나무판이다. 말 등의 그림이 그려지고 나머지 여백이나 이면에다 기원의 내용이나 이름 등을 쓰는 것이 보통인데, 판자는 신사나 사원에서 판매하고 있다. 나라시대에는 신이 탈 것으로 말(神馬 : 신사에 봉납한 말)을 봉납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은 고가(高價)라서 자주 헌납할 수가 없었고, 또한 신사나 사원들도 헌납된 말들을 돌보는 것이 어려운지라 다른 대용품을 찾게 되었는가 보다. 그 대용으로 나온 것이 나무나 종이, 흙으로 만든 말의 상이었고, 헤이안 시대부터는 나무판에 그린 말의 그림으로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래 사진은 연점석(戀占, 사랑을 점치는 돌)’이라고 한다. 무릎 높이 정도의 검은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머리 부분에는 새끼줄을 두른 채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며 청춘남녀의 영원한 사랑 고백을 증명해주고 있다. 10m를 간격으로 또 다른 돌이 있는데, 첫 번째 돌에서 눈을 감고 똑바로 걸어서 두 번째 돌까지 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참고로 이 돌은 원자물리학자 보스트 박사의 과학적인 연대측정 결과 기원 3000년 전인 조우몽시대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이는 지주신사의 창건이 고사기 등에 나오는 신화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탐방객의 대부분은 여자이다. 그 가운데서도 앳되게 보이는 여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두 손을 잡고 있는 젊은 연인들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입구에 주련처럼 붙어 있던 양년기원(良緣祈願)’의 네 마디 속에 이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지 않나 싶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또 연애 운을 열어주는 사랑의 신사라니 어느 누군들 찾아오지 않고 배기겠는가.

 

 

 

 지주신사(地主神社)도 별도의 쵸즈야(手水舎)를 갖고 있었다. 비록 잠시지만 걸어오면서 더럽혀졌을지도 모를 속세의 때를 깨끗이 씻고 들어가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탐방을 끝내고 절을 빠져나오는데 십일중석탑(十一重石塔)이 보인다. 사각의 받침 석주 위에 10개의 옥개석(屋蓋石)을 올린 석탑이다. 근처의 경관도 아름다워 카메라에 담아봤다.

 

 

 

 

 되돌아 나오는 길, 주어진 시간에 여유가 있어 느긋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거리는 온통 기념품가게와 전통 공방, 찻집, 주전부리 가게, 전통 식당 등으로 가득 차있다. 청수사의 참배객들을 위해 음식이나 물건을 파는 점포와 상인들의 주거지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보면 되겠다. ‘사하촌(寺下村)’이라고나 할까? ‘사하촌이란 조관희의 교토, 천 년의 시간을 걷다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절이나 신사 주변에 형성된 기념품상가를 나타낸다. 김정한은 동명의 단편소설에서 사찰 소유의 논밭을 빌어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소작농들의 삶의 터전을 그렇게 불렀었다. 이곳 분위기에는 조관희의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거리는 온통 사람들로 가득하다. 서울의 인사동 거리를 뺨칠 정도라 하겠다. 하긴 청수사(기요미즈데라)를 방문하는 관광객의 숫자가 연간 400만 명 이상이라니 이를 말이겠는가. 교토를 들르는 관광객 4800만 명 가운데 10퍼센트 정도가 이곳 청수사를 찾는다고 한다.

 

 

 

 주차장에 다다를 즈음 오른편으로 작은 골목길 하나가 나뉜다. 들머리에 세워진 이정표는 산네이자카(産寧坂)’ 니넨자카(二年坂)’로 연결되는 지점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 길은 산넨자카(三年坂)’라고고 불리는데 청수사(기요미즈데라)를 구경하고 내려오는 관광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들렀다 가는 아름답고도 재미있는 길이다. ‘산네이자카(産寧坂)’라는 지명의 유래도 재밌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부인인 고다이인(高台院)은 젊을 때 네네(ねね)라고만 불렸다.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히데요시를 계승할 후사가 없자 네네가 다이안지(泰産寺)’를 오가며 출산을 기원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일반인들도 출산을 기원할 때 이 길을 오른다고 해서 산()자와 녕()자를 썼는데, 나중에 발음에 따라 산넨자카라고 변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일본의 유명한 거리의 이름에는 자카(ざか)’라는 발음이 뒤에 따라붙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자카란 언덕()을 일컫는다. 언덕은 오르기 힘들지만 반면에 지대가 높아 전망이 좋은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그 조망이 힘들다는 단점을 완전히 극복하면서 명품거리로 탈바꿈해버린 것이다.

 

 

 46개라는 돌계단을 밟고 내려가면서 산넨자카(三年坂)’가 시작된다. 산넨자카란 다이도 3(808)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이곳에서 넘어지면 3년 안에 죽는다는 믿거나말거나 이야기인데 이를 액땜하기 위한 호리병박을 파는 가게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도 기념품으로 호리병박을 판단다. 아무튼 이곳은 광고와 포스터에도 자주 등장하는 돌 바닥길로 유명한 촬영 스팟(spot)이다.

 

 

 완만한 경사의 언덕과 계단은 납작한 돌로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다. 전통 건축물 보존지구로 지정된 지역답게 예스러운 목조주택이 늘어선 고즈넉한 풍경이 눈길을 끄는가 하면, 길가에는 아기자기한 기념품점과 도자기 가게, 전통요릿집 등이 모여 있어 산책하는 기분으로 돌아보기에 딱 좋다.

 

 

 

 전통 가옥에 기념품 가게와 카페 등이 들어서 있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한다. 전통 과자를 맛볼 수 있는가 하면 벚꽃을 주제로 한 다양한 기념품도 구입할 수 있어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 가운데는 교토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한번쯤 관심을 가지게 되는 선물로 요지야의 기름종이를 빼놓을 수 없다. 새초롬한 여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으며 다양한 미용용품을 판매하고 있다. 벚꽃이 곱게 그려져 있는 다양한 모양의 부채도 훌륭한 선물이 되기에 충분하다.

 

 

 100년 이상씩 된 흑갈색의 목조건물들이 비좁은 언덕길 사이로 삐뚤빼뚤 자리 잡은 광경은 한없는 미로의 장난감처럼 예쁘다. 사이사이에는 찻집이나 군것질 거리를 파는 집도 있어서 올라가는 길도 내려오는 길도 힘들지 않다.

 

 

 기모노를 입고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이 의외로 많아 보인다. 거리를 배경으로 셀피(Selfie, 셀카)를 찍느라 바쁜데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함께 사진을 찍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심심찮게 눈에 뜬다. 디자인이 거의 비슷한 것으로 보아 다들 빌려 입었을 게 분명하다. 한복을 빌려 입고 경복궁이나 북촌을 걷는 것이 일종의 문화로 자리 잡았는데, 이곳 교토도 역시 마찬가지인가 보다.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잘 꾸며진 정원도 만날 수 있었다.

 

 

 

 산넨자카 아래에는 니넨자카(二年坂)라는 길이 이어진다. 산넨자카의 초입이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는 말도 있고, 한편으로는 평지 마을로부터 키요미즈테라까지 오르는 힘겨운 언덕길을 격려하기 위해 여기서 멈추면 2년 안에 죽는다라는 풍문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재밌다. 하긴 산넨자카와 니넨자카를 오르는 재미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청수사를 찾는다는 얘기까지 전해지지 않는가.

 

 

 

 에필로그(epilogue), 교토는 도시 전체가 관광지라 할 수 있을 만큼 볼 것이 무척 많은 도시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볼거리를 꼽자면 전각을 금각으로 입힌 교토의 상징 킨카쿠지, 아름다운 자연과 좋은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기요미즈데라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의 상징인 니조 성(二條城)을 들 수 있다. 거기다 하나를 더 꼽으라면 아라시야마라 하겠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기요미즈데라 아라시야마만 둘러볼 수 있었다. 딱 절반만 둘러본 셈이다. 아쉽지만 패키지여행을 따라왔으니 어쩌겠는가. 이로보아 이곳 교토는 자유여행에 적합한 여행지로 여겨진다. 사방에 널려있는 볼거리들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